2025 빌립보서




윤효배 목사

■ 빌립보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Φιλιππησιους(프로스 필립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빌립보인들에게’란 뜻이다. 한글성경 ‘빌립보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는 바울이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내증에 의해 확실시된다. 본서 1:1의 표현은 본서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본서에 나타난 어휘와 문체, 회신 이후의 자신의 변화된 삶에 대한 바울의 간증(3:4-9) 등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그것과 일치된다.

 

② 수신자

수신자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감독, 집사들(1:1)이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적 특성과 함께 바울과 어떻게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빌립보에 대하여

빌립보 도시는 B.C.350년 마게도냐 대왕 빌립 2세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로서 원래의 이름은 ‘작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크레니데스’였으나 빌립에 도시를 확장, 증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칭하였다. 그 후 이곳은 로마에 정복당해 바울 당시에는 마게도냐라는 로마 속주의 한 식민지 성읍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금과 은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며, 강기츠 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지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로마의 군사적 전초기지였으며 전략상 마게도냐 지방에서 제일로 꼽히는 성이었다(행 16:12).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

빕립보에는 소수의 유대인 거주자는 있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은 없었고 단지 기도처가 강가에 있었다(행 16:13). 바울과 실라는 2차 전도여행 중에 성령에 인도하심에 따라 메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기도처를 찾다가 거기에서 여인들을 발견했고, 그중에 한 명이 자색 옷감 장사로서 루디아이며,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변에도 영향을 끼쳐 감옥에도 갔으나 감옥의 간수에게 전도한 이후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2) 기록장소/연대

본서의 기록시기는 저작 장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 수감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1:7, 13, 17). 그렇다고 한다면 이 감옥은 전통적인 의견으로 볼 때 여기는 로마 감옥인 것으로 본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시위대에 대한 언급(1:13)과 가이사 집 사람(4:22)에 대한 언급을 이어나간다. 여기서 시위대는 왕을 호위하는 고관이나 사령관을 보호하는 무리들을 말하는데, 신약성경에서 시위대라를 뜻하는 ‘프라이토리온’(πραιτώριον)은 호마 황제 근위대를 의미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가이사의 집사람에 대한 언급도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다는 이야기를 지지해준다. 가이사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라는 로마 황제의 칭호를 말한다. 이 율리우스 이후의 모든 칭호를 말한다. 가이사의 집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바로 로마 통치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마지막으로, 수감 기간의 활동이 보여주는 느슨한 제재(행 28:16, 30-31)를 봤을 때 이곳이 로마라는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도행전은 자신이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머물게 해주었고, 맞이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볼때, 다른 옥중서신과 마찬가지로 빌립보서 또한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AD 62-63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1. 기록 동기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진고 있었으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에게 보내어 바울을 도왔다(2:25). 이렇게 하여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만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으로 인해 큰 기쁨을 얻었으며 또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 머물며 바울을 돕던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들어 중태에 빠졌고(2:26, 30), 이 일은 바울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보낸 빌립보 교인들을 근심케 하였다(2:26). 그러나 다행히도 피차 근심하던 중,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었다(2:27). 이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그간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며 자신의 투옥으로 근심하여 염려하는 저들을 안심시키고 도리어 격려하고자 본 서신을 쓰게 되었다(1:3-30, 4:10-20).

 

 

  1.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상황

1) 바울의 상황

바울은 현재 매여 있는 상태(1:7, 13, 14 17)인데, 어떻게 보면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할 정도이지만(1:20-24, 4:14), 에베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3:17-18), 빌립보 상황을 빨리 앎으로 안위를 받고자 하였다(2:19, 28),

아울러 바울은 바울이 매여 있는 것으로 인하여 형제 중 다수가 겁 없이 복음을 전한 것뿐만 아니라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기뻐할 뿐만 아니라(1:18), 빌립보 성도들이 구원의 합당한 바른 믿음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죽을지라도 기쁘다고 말하며(2:17-18, 4:1), 이러한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다(4:4).

 

2) 빌립보 교회의 상황

① 빌립보 교회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을 정도로 튼튼한 조직을 가졌으나(1:1), 구원에 완전히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며 구원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드러나지 않았다(1:27-29, 2:12, 3:12-14)).

② 뿐만 아니라 바울을 시기하던 자들이 있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하여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으며(1:15, 17), 몸을 상해 하면서 행악을 일삼고(3:2, 4),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의 영향을 받아,(2:15-16)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③ 아울러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갈들이 발생하며 교회 내부적 갈등과 분열의 조짐(2:1-4, 4:2)이 보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육체를 신뢰하는 이들이 생겨(3:1-9) 십자가와 복음의 원수가 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3:18-19).

 

 

  1. 주제

1) 신앙의 성장 : 구원에 합당한 모습에까지 성장하라!

① 바울의 기도에서(1:6, 9-11)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② 바울의 갇힌 상황 속에서(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③ 바울의 권면에서(2:12, 3:12-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 성도 간의 교제와 연합의 중요성 : 참된 교제 가운데 나아가라!

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2:3-4)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② 기쁘신 뜻 가운데 행하라(2:13-14)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③ 갈등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4:2-3)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기쁨과 감사의 중요성 : 주안에서 기뻐하라!

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과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1:18),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는 것(2:17, 4;1)

②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3:20-21)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③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이 됨(4:15-18)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 구조

① 도입(인사) : 1:1-2

② 바울의 기도 : 1:3-10

② 바울의 상황 : 1:12-26

③ 바울의 권면 : 1:27-4:9

④ 바울의 감사 : 4:10-20

⑤ 종결(끝인사) : 4:21-23



2025 에베소서



μελετάω Storng number3191

1. 조심하다.  2. 연습하다.  3. 생각하다  
Pronunciation [ mĕlĕta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ἐμελέτησα, 3199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조심하다, 힘쓰다.
  • 2.  연습하다, 개발하다, 연마하다, 양성하다, 애쓰다, 힘쓰다, 딤전4:15.
  • 3. 생각하다, 꾀하다, 묵상하다, 행4:25.
  • 4.  근심하다, 막13:11.
  • 관련 성경  / 염려하다(막13:11), 경영하다(행4:25), 전심전력하다(딤전4:15).


θεωρία, ας, ἡ Storng number 2335
1. 구경거리.  2. 광경.  3.눅 23:48.
Pronunciation [ thĕōria ]
Etymology
2334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구경거리, 광경, 눅23:48.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구경(눅23:48).



묵상(默想, 영어: contemplation)은 특정 대상을 깊게 생각하는 행위이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묵상은 기도명상을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묵상은 플라톤 철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플라톤은 묵상을 통해 영혼이 좋은 형태 나 다른 신성한 형태의 지식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Plotinus as a (neo) Platonic 철학자는 또한 henosis에 도달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숙고를 표현했다. 
플롯 티 누스 (Plotinus)에게 하나님, 모나드 또는 하나라는 비전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묵상이었다. Plotinus는 Enneads의 작품에서이 묵상의 경험을 묘사한다. 그의 학생 반암 (Porphyry)에 따르면 플롯 티 누스 (Plotinus)는 그가 4 번이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Plotinus는 Enneads 6.9.xx에서 자신의 묵상에 대한 경험을 썼다.

묵상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에서 파생된다. 
그것의 뿌리는 또한 라틴어 단어 templum, 후원의 받음을 위해 봉헌 된 땅 조각, 또는 예배를위한 건물, Proto-Indo-European 기초 가 되었고 유럽에서 기초 -"스트레칭 "- 따라서 제단 앞의 정리 된 공간을 가리킨다.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는 그리스어 θεωρία (theòría)를 묵상의 의미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 묵상이란 살아있는 현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향한 내용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면에서 동양 종교에서 기도를 하는 행위인 사마 디 (samadhi)라고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한편 서양 교회에서 수세기 동안 묵상은 이그나 티아 운동이나 개종자와 같이 성서적 장면을 시각화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활발한 수행과정으로 연습을 언급했다. 정신 분야 전문가는 "성경의 내용을 듣고 "마음의 귀"는 마치 그 또는 그녀가 하나님과 대화하고있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은 토론 할 주제를 제안하고 계신다.라고 묵상의 목표를 제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묵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묵상의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한 독일인 기독교 철학자 조셉 피퍼(Josef Pieper)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인간 사회의 한가운데에 보존되어있는 진실성은 한 번에 동시에 쓸모 없으며 모든 가능한 사용에 대한 척도가 된다. 따라서 진실을 유지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말씀 묵상 목적과 방법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영적 성장은 신자들의 기독교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살아나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위의 것을 찾는다’(골 3:1)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성장이 당연히 기대되는 일인데, 그 이유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32, 45, 48, 6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지식을 계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읽기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하고 있고, 묵상 습관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때 기독교의 핵심 훈련의 한 분야로 간주 되고, ‘기도 활동에 극히 필수적 예비단계이자 보조 업무’로 간주 되었던 묵상(默想, meditation)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비성경적인 뉴에이지(New Age) 영성과 결탁이 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우리는 당연히 초월(超越) 명상과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과 같은 다른 수련에 종사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왜냐면 이런 수련은 불교나 힌두교(Hinduism)와 같은 거짓 종교에 연루되어 있고, 성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명상은 마음을 비워 세상과 격리시키고 소위 우주정신에 합일(合一)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께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적극 반응을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조용한 반성과 묵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한때 기독교 교회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가까이하는 데 초점을 둔 성경적 묵상에 깊이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청교도 시대에 수많은 목회자가 묵상 방법에 대해 설교하고 글을 썼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청교도의 묵상 관습을 살펴보면서 ‘묵상 본질과 의무’, ‘방식과 주제’, ‘유익과 장애물’, ‘자기 검토’에 대해 확인해 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교도들을 스승으로 삼으면 우리 시대에 합당한 성경적 묵상 관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1. 묵상의 정의, 본질, 종류

(1) 묵상의 정의

‘묵상하다’(meditate) 또는 ‘명상하다’(muse)는 말은 ‘깊이 생각하다’ 또는 ‘반성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불이 붙으니”(시 39:3)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muse)는 말은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입으로 소리를 내다.’는 뜻이다. 곧 이 말은 ‘우리가 혼자 말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쓰는 말이다. 이런 식의 묵상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기 위해 낮은 소리로 홀로 낭송하는 것을 가리켰다.

성경은 종종 ‘묵상’에 대해 언급한다. 창세기 24:63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라고 말한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을 지휘해야 하는 힘든 업무를 맡고 있음에도,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고 명하셨다. 그러나 ‘묵상’이라는 말은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그 횟수가 다른 모든 성경 속에 나오는 것을 합친 것보다 많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편 63:6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meditating) 것에 대해 말한다. 시편 119:148은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meditate)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말한다.(참고, 시 4:4, 77:10-12, 104:34, 119:16,48.59,78,97-99) 

(2) 묵상의 본질

생각하는 것, 반성하는 것이나 명상하는 것은 묵상 주제를 전제로 한다. 공식적 묵상은 중요한 주제를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면 철학자들은 물질과 우주와 같은 개념들을 묵상하고, 신학자들은 하나님, 영원한 작정, 인간의 의지 등에 대해 묵상한다.

청교도는 성경적 묵상은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함한다고 말하기를 결코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청교도는 묵상 대상을 살아 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고정시킴으로 행함을 무시하고 명상만 강조하며, 성경 내용을 무시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몰두하는 거짓 영성이나 신비주의와 같은 부류와는 거리를 두었다. 청교도는 묵상을 통해 지성과 마음(감정)을 함께 단련시켰다. 묵상하는 자는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갖고 주제에 접근한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 the Puritan preacher and author)은 묵상을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이 진리를 진지하게 상고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지성의 거룩한 실천이다.”라고 정의했다.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묵상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그 진리에 따라 변화되게 하며, 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묵상을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 곧 지성의 문, 마음과 감정의 문, 실천적 삶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그대는 하나님이 걷는 것처럼 걷기 위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매일 이행해야 할 의무로서 청교도가 말하는 기독교적 삶의 다른 모든 의무를 더 잘 이행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계에 윤활유를 치는 것 같이 묵상도 은혜의 수단들(성경 읽기, 설교 듣기, 기도 등)을 부지런히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54), 은혜의 표지(회개. 신앙. 겸손)를 더 깊이 있게 하며,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를 강화시켜준다.

(3) 묵상의 종류

청교도는 두 종류의 묵상 곧 ‘임시적 묵상’과 ‘계획적 묵상’에 대해 말했다. 칼라미는 “하늘의 일들에 대한 돌발적인 ‘임시적인 묵상’이 있고, 엄숙하며 정해져 있고 ‘계획적 묵상’이 있다.”라고 말했다.

⓵ 임시적 묵상

임시적 묵상은 감각을 통해 관찰한 것으로 자신 생각을 하늘에 대한 묵상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을 ‘천국에 오르는 사닥다리’로 이용한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달과 별들을 보고 말한 것, 솔로몬이 잠언 6장에서 개미들을 보고 말한 것,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을 보고 말한 것이 바로 임시적 묵상이다.    

토머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모형과 의식들을 통해 구약교회를 훈련을 시키셨는데 이것은 그들로 일상적인 대상을 통해 영적 사고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은 세상사를 위해 모든 직업과 일터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통상적인 기능과 직무들에서 취한 비유와 비사를 통해 우리가 일하는 장소가 가게이든 공장이든 들판이든지 계속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해 생각하도록 천국 정신을 가르치셨다.”

‘임시적 묵상’이나 ‘즉흥적 묵상’은 실천하기가 비교적 쉽다. 왜냐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사람들 속에서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성향의 사람은 자연물을 영적 진리로 삼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그의 욕구는 영적인 것까지도 육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육적 성향의 사람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맨톤이 말한 것처럼 “은혜를 받은 마음은 증류기(蒸溜器) 같아서 접하는 모든 것 속에서 유용한 묵상 자료를 증류해 낼 수 있다. 은혜를 받은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묵상에 대한 거의 모든 청교도 작품이 임시적 묵상을 언급하고 있다. 월리엄 스퍼스토(William Spurstowe, Spurstow, 1605-1666), 토머스 테일러 (Thomas Taylor, 1576-1632), 에드워드 버리(Edward Bury, 1616-1700), 헨리 루킨(Henry Lukin, 1628-1719) 같은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만을 다룬 책을 썼다. 그러나 임시적 묵상은 위험성도 있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주교는 이런 묵상은 억제하지 않고 방치하면 쉽게 말씀에서 이탈해서 로마가톨릭 영성의 경우처럼 미신적인 것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즉 사람의 상상력은 거룩한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각기 의견이 달랐다.        

‘천로역정과 청교도 묵상의 전통’(The Pilgrim’s Progress and Traditions in Puritan Meditation)에서 카우프만(Milo Franklin Kauffman, 1898-1988)은 청교도의 묵상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카우프만은 “교회 정치 분야에서는 아니나 신학 분야에서는 온건한 청교도인 조지프 홀은 1606년에 처음 출판된 ‘신적 묵상의 방법’(Art of Divine Meditation)이라는 책을 통해 청교도 속에서 묵상 문학이 발전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말했다.

조셉 홀은 묵상 내용을 말씀으로 한정시킴으로 묵상할 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홀의 생각은 165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604-1664)와 1586년 7월 5일,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대 후에 활동했던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에게 크게 영향을 미했다.

카우프만은 말하기를 로마가톨릭 저술가들과 달리 대다수 청교도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보다는 성경 교리나 특수한 명제들에 대해 묵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와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 성례와 천국에 대한 묵상을 추천했다. 특히 십스는 영혼은 제약 없는 상상력으로 크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나 또한 “그로 인해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천국을 잔치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혼인(婚姻)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하늘의 일들을 땅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허다한 영적 유익을 얻으면서 (중략) 걸어가는 넓은 들판을 제공했다.”라고 십스는 말했다. 카우프만은 백스터가 감각 대상과 신앙 대상을 비교함으로써 상상력을 강조할 때 십스의 ‘영혼의 갈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을 했다. 또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천로역정’을 쓸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신자의 영적 순례에 결정적인 아주 광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카우프만의 평가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청교도가 성경을 벗어나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청교도는 안셀무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다른 로마가톨릭 학자들이 지나치게 복음서 이야기-특히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과 고난과 부활-를 시각화해서 오감을 통한 상상력에 문을 열어 놓은 것을 당연히 경계했다. 나아가 홀과 람브로스에 대한 카우프만의 부정적 평가는 두 저술가가 성경적 상상력과 감각 활용에 대해 얼마나 괄목할 만한 자유를 부여했는지를 고려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홀의 묵상’(Contemplations)과 암브로스의 ‘예수를 바라보라’는 성경의 경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묵상에 전념했다. 이 균형은 청교도 전통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청교도는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을 해야 하는지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다.

⓶ 계획적 묵상

가장 중요한 묵상 종류는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계획적 묵상’이다. 칼라미는 “계획적 묵상은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중략) 어떤 시간에 은밀한 골방에서나 또는 홀로 걸으면서 갖는’ 묵상으로 이때 묵상하는 자는 엄숙하게 그리고 숙고(熟考)하며 하늘의 일들에 대해 묵상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숙고는 ‘벌이 꽃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꿀을 몽땅 빨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 위에 머물러 있다. 또 이런 묵상은 영혼의 반성 행위로서 이 행위를 통해 영혼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원인과 결과와 속성들을 비롯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깊이 성찰(省察)한다.

토마스 화이트(Thomas White, ?-1762)는 “계획적 묵상은 네 가지 원천 곧 성경, 기독교의 실천적 친리, 섭리적 사건(경험), 설교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특히 설교는 화이트가 “단지 한편의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것이 두 편의 설교를 듣고 전혀 묵상하지 않는 것보다 났다.”라고 말한 것처럼 묵상을 위한 비옥한 땅이다.

어떤 청교도는 ‘계획적 묵상’을 두 부분으로 나눴다. 즉 ‘직접적 묵상’ 곧 묵상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과 ‘반성적(또는 반사적) 묵상’ 곧 묵상하고 있는 자신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이다.      

‘직접적 묵상’은 사고(思考)하는 지성의 행위이나 ‘반성적 묵상’은 양심의 행위다. ‘직접적 묵상’은 지식으로 지성을 계몽하나 ‘반성적 묵상’은 마음을 선(善)으로 가득 채운다. ‘계획적 묵상’은 말씀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교리적일 수 있고 또는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실천적일 수 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5-1681)는 ‘계획적 묵상’의 다양한 국면을 종합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시(定時)의 계획적 묵상은 진지하게 지성을 영적 주제나 천상의 주제에 적용(適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결국에는 마음이 따스해지고 감정은 되살아나고 결심은 더욱 굳건해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죄는 더욱 미워하는 일 등이 일어나게 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또 “‘정시 계획적 묵상’은 ‘임시적 즉흥적 묵상’과는 크게 다른데 그것은 정시(定時) 기도가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임의로 간구하는 기도와 다른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묵상은 모두 성도의 경건에 필수적이다. 이 두 묵상은 머리의 지성(知性)과 가슴 감성(感性)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가슴의 뜨거운 적용이 없으면 묵상은 연구와 다르지 않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연구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성경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즉 전자는 금맥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금을 캐내는 것이다. 연구는 따스함과 영향력이 거의 없는 겨울의 태양과 같다. 반면에 묵상은 (중략)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녹이고 마음이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2. 묵상의 의무와 필요성

청교도들은 묵상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하라고 명하신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청교도는 묵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성경 본문(신 6:7, 32:46, 시 19:14, 49:3, 63:3, 94:19, 119:11,15,23.28,93,99, 143:5, 사 1:3,  눅 2:19, 요 4:24, 엡 1:18, 딤전 4:13, 히 3:1 등)과 성경적 사례(멜기세덱. 이삭. 모세. 여호수아. 다윗. 마리아. 바울, 디모데 등)를 인용한다.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씀을 성급하게 대충 흝어보는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고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신 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뜻을 묵상해야 한다.”

이런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다윗이 말한 것과 같다.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48)

셋째,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약속에 대한 묵상을 지속적(持續的)으로 먹지(계속하지) 않으면 신앙은 비쩍 말라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다윗이 시편 119:92에서 말한 것과 같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또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훈련(訓練)받지 못한 비무장(非武裝)의 군인과 같고 연장 없이 일하려는 기술자(技術者)와 같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곧 마음은 강퍅해지고 기억은 쇠잔할 것이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넷째, 묵상 없으면 선포된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스쿠더는 “말씀 묵상이 없으면 성경 읽기도 ‘날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말에 리처드 백스터는 “그러나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제대로 소화 시킬 수 없다.”고 덧붙였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묵상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마치 촛불과 태양 빛의 차이와 같다. 태양 빛이 비취는 정원에 등불이나 촛불을 놓아보라.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식물을 자라게 하고 풀을 무성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묵상이 없는 지식도 지성 속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처럼 별로 아니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식은 사람을 더나은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묵상은 태양 빛과 같다. 묵상은 감정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더 거룩하게 한다. 묵상은 진리 속에 생명을 낳는다.”

다섯째, 묵상 없는 기도는 그 효력이 감소하게 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말씀과 기도 사이에서 의무의 매개체로서 양자를 관련시킨다. 말씀은 묵상에 힘을 주고 묵상은 기도를 힘 있게 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이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후에는 우리 신앙이 열매 없는 신앙은 아닌지 묵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의무는 항상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을 읽고 들은 후에는 묵상을 하고 묵상을 한 후에는 기도해야 한다.”

여섯째, 묵상 없이는 진리를 변증할 수 없다. 

묵상 없는 신앙은 척추(脊椎) 없는 사람과 같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이 생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생소하다.” 토마스 왓슨은 또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건 말씀 묵상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우셔(James Ussher, 1581-1656)는 “우리는 묵상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천국에 가고 싶다면 이 의무 실천을 결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곱째, 묵상은 설교 준비의 필수적 한 부분이다.

묵상이 없으면 설교는 깊이 있는 지성, 풍부한 감정, 명확한 적용이 결여(缺如) 될 것이다. 뱅겔이 헬라어 신약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준 지침은 이런 묵상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본문 전체를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라.”    

3. 말씀 묵상 방법

청교도 저술가들에 따르면, 묵상에는 필수 조건과 규칙들이 있었다. 그들이 묵상 빈도와 시간, 묵상을 위한 준비, 목상 지침 등에 대해 쓴 것을 고찰해 보자.

(1) 묵상 빈도와 시간

첫째, 경건한 묵상은 자주 해야 한다.

시간과 의무감이 허락된다면 하루에 두 번이 이상적이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해야 한다. 빈틈없는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자주 묵상할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고 아울러 묵상도 그만큼 더 쉬워질 것이다. 묵상과 묵상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면 묵상의 열매를 잘 맺지 못할 것이다. 월리엄 베이츠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새가 오랫동안 둥지를 떠나 있으면 알은 차가워지고 부화(孵化)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되지만 계속 품고 있으면 부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래 신앙의 의무를 떠나 있으면 감정은 차가워지며 거룩함을 낳고 영혼을 위로하는 데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둘째, 묵상 시간을 정해 놓고 엄수하라.

이렇게 하면 ‘빼먹고 싶은 허다한 유혹’을 이기게 될 것이라고 백스터는 말했다. 가장 정신이 맑고 다른 의무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새벽 시간이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 시간의 목상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의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출 23:19, 욥 1:5, 시 119:147, 잠 6:22, 막 1:35)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저녁이 묵상에 더 유익할 수도 있다.(창 24:63, 시 4:4)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고 달콤한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할 준비를 하게 된다.(시| 16:7)

완벽한 묵상 시간을 가지려면 주일을 활용하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 작성자들은 예배 모범에서 “회중의 엄숙한 공적 모임 사이나 후에 비어 있는 시간에 성경 읽기와 묵상과 설교를 반추(反芻)해 보는 게 좋다.”고 권면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9-1681)는 “그대가 이 경건한 묵상의 의무가 주는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다면 특히 주일에는 잡담이나 한가한 담화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백스터는 “우리 주님이 땅에서 일어나 사망과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고 우리를 위해 천국을 취하신 날보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기에 합당한 날이 언제겠는가?”라고 물었다. 또 특별한 경우의 시간을 묵상에 활용하라. 청교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하나님이 우리 영에 특별한 부흥과 능력을 주실 때,

‣ 고난이나 두려움이나 염려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적 혼란에 빠져 있을 때,

‣ 하나님의 사자들이 죽음에 대해 환기(喚起)를 시킬 때 곧 노년에 이르러서든 육체가 노쇠해서든 아니면 모종의 죽음의 징후에 의해서든 떠날 때가 그리 밀지 않았다고 말해줄 때,

‣ 설교나 성례를 통해 감동하거나 하나님 섭리의 어떤 심판이나 자비나 한 행위를 확인했을 때, 철은 빨갛게 달궈졌을 때가 단련하기 가장 좋은 때이다.(시 119:23)

‣ 성찬과 회개의 시간과 주일과 같이 엄숙한 의무를 시행하기 전이다.

셋째, 영혼의 유익을 발견할 때까지 통상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베이츠는 “묵상은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때 끝까지 참는 자가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묵상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소량의 연기와 작은 불꽃 정도밖에 일으키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거룩한 감정의 불길이 치솟아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베이츠는 ‘불길이 그렇게 올라갈 때까지’ 인내하며 묵상하라고 말했다.    

불길이 올라가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막연히 계속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에 빠지거나 영적인 따분함에 빌미를 주지 마라. 마귀는 이 두 가지 태도에 있어 여러분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힘을 소진(燒盡)해서 여러분의 영이 혼란 속에 있을 때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것이다.”

대다수 청교도는 묵상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 어셔는 최소한 한 주에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머스 화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묵상에는 준비, 성찰, 감정, 결단 등 여러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 가운데 어느 것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면 감정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불길이 타오를 정도가 되려면 입문자들은 적어도 하루 30분 정도고 묵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가 적합하다.

(2) 묵상을 위한 준비

청교도 저술가들은 효과적인 묵상을 위한 몇 가지 준비 단계를 제시했는데 모두가 마음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것들이다.

첫째,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서 분리를 시켜라.

곧 세상일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세상과 관련된 내적 고뇌 및 동요 등에서 벗어나라.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 친구뿐만 아니라 내부의 친구 즉 무익하고 세속적이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생각들도 차단(遮斷)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둘째, 죄책과 오염에서 마음을 깨끗게 하고 영적인 것에 열렬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라.

 성경 본문과 영적 진리의 보물을 축적하라. 시편 119:11의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에 따라 살기 위해 은혜를 구하라.

셋째, 가장 진지한 마음으로 묵상에 임하라.

묵상의 중요성과 탁월성과 잠재력을 유념하라. 묵상에 성공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다시 한번 이 땅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58) 어셔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대 마음의 생각이어야 한다. 곧 나는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고스란히 드러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 생각이 탈선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사람은 다른 일로 분주해진 마음을 갖고 가장 위대한 임금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눈이 그 마음 위에 있고, 그러하기에 그대의 주관 심사는 마음의 방향키를 굳게 지키는 데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넷째, 묵상이 방해받지 않을 조용하고 자유로운 장소로 하라.

조지프 홀은 “사람이 없고, 소음이 없고, 움직임이 없는 내밀함과 조용함과 쉼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일단 적합한 장소를 찾으면 그 장소를 계속 고수하라. 어떤 청교도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피하도록 방을 어둡게 하거나 눈을 감는 방법을 권장했다. 다른 청교도는 자연 속을 산책하거나 앉아서 묵상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름대로 좋은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묵상의 몸가짐에도 유의하라.

않았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전능자 앞에 마음은 물로 경건한 몸가짐을 유지하라. 묵상하는 동안 몸은 영혼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영혼의 감정을 따라야 한다. 묵상 목표는 영혼과 지성과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3) 묵상을 위한 지침

청교도는 묵상 실천을 위한 지침도 제시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할 때 마음을 조절해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나는 여러분이 ‘지성을 조명’하고 ‘경건을 소생’시키고 ‘감정을 뜨겁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하여 그 시간이 여러분에게 복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경건의 일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더욱 거룩해지고, 여러분의 욕심은 더욱 죽고 은혜는 더욱 증가 되며, 세상과 세상의 허영에 대해서는 죽고 천국과 천국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고조되기를 바란다.”

묵상할 본문이나 주제를 선택한다.

이어서 청교도는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할 성경 구절이나 교리를 선택하라고 했다. 청교도는 처음에는 묵상하기에 비교적 쉬운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보다는 하나님 속성에 대한 주제에서 시작해 보라.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주제를 묵상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여러분의 현재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고 여러분 영혼에 가장 유익이 될 주제를 선택하라. 예를 들어 보자. 만일 여러분이 영적으로 낙심한 상태 속에 있다면 불쌍한 죄인들을 용납하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자상한 마음에 대해 묵상하라. 양심이 너무 괴롭다면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라. 경제적 어려움에 있다면 곤궁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묵상하라.

묵상한 주제나 구절을 암기하라.

이후에는 선택한 구절이나 주제 내용을 암기해 둠으로써 묵상을 자극하고 신앙을 강화시키며 하나님 인도의 수단으로 삼으라.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생각을 성경이나 주제에 고정시키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마라. 여러분의 기억을 활용해서 성경이 여러분이 택한 주제에 대해 말씀하는 것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라.

과거에 들은 설교들과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참고하라.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의 다양한 측면들 곧 제목과 원인 특징과 결과와 영향 등을 생각할 때 ‘양심이라는 책’,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을 활용하라. 마리아처럼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숙고하라. 예증과 비유와 반대 사실 등을 생각함으로써 여러분의 지성을 조명하고 여러분의 감정을 불타오르게 하라.  

여러분이 묵상하고 있는 것의 가치를 평가하라.

칼라미가 보여 주는 실례가 여기 있다. 만일 여러분이 죄에 대한 주제를 묵상하려고 한다면 “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고, 이어서 최의 파급에 대해 다루고, 원죄와 죄의 원인, 죄의 저주스러운 결과와 영향, 일반적으로 죄의 성격 및 속성과 특수적으로 개인적인 죄의 성격 및 속성, 죄의 반대 사실인 은혜, 죄에 대한 은유, 죄에 붙여진 명칭, 싱경이 죄에 대해 말씀하는 모든 사실을 묵상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 경고가 순서대로 나온다.

첫째, 맨톤이 말한 것처럼 방법의 규칙성 때문에 자유로운 영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신앙이지 논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규칙과 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생각이 좁아져 샘에서 나오는 물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둘째, 여러분의 마음이 산만해지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서를 위해 짧은 기도를 드리고, 힘을 달라고 간구하며, 합당한 성경 본문을 찾아 다시 읽어 보고 묵상하도록 하라. ‘성경 읽기’, ‘묵상’, ‘기도’는 동반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느 한 부분이 약해지면 다른 부분에서 대책을 찾으라. 인내하라. 이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사탄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사랑과 욕구와 소망과 용기와 감사와 열심과 기쁨과 같은 감정을 분발시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라.

자신의 무능력과 단점으로 야기된 불평은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적인 갈망을 토설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실 걸 믿으라. 폴 베인(Paul Bayne, 1573-1617)은 묵상을 은혜의 개인적 수단으로 설명하면서 묵상을 첫째는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시각 능력으로 비유하고, 둘째는 잉태 및 탄생 과정으로 비유했다.    

“임신하면 출산 고통과 때가 이를 때 아기가 탄생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생각을 통해 임신하게 되면 감정은 즉시 즐겁고 흥분 상태가 된다. 왜냐면 불쏘시게처럼 불꽃이 튀기면 불이 붙는 것처럼 생각에 따라 감정은 불길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움직이면 의지는 자극을 받고 분발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분의 기억과 판단과 감정이 환기되면 여러분의 영혼을 의무와 위로로 이끌고 죄를 멀리하도록 묵상 내용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라.”

윌리엄 페너(William Fenner, 1600-1640)가 다음과 같이 쓴 것처럼 하라. “그대 자신의 영혼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 자신의 마음을 예상해 보고 대책을 세우라. 그대의 마음을 약속, 경고, 자비, 심판, 계명으로 채우라. 묵상을 통해 그대의 마음을 살피라.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라.” 은혜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검토하라. 과거를 반성해 보고 “내가 어떻게 했지?”라고 물으라. 미래를 전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무엇을 하기로 할까?”라고 물으라.

율법적으로 질문하지 말고 거룩한 열정과 성령이 역사하는 은혜 안에서 자라갈 기회를 얻기 위한 마음으로 질문하라. 율법 업무는 우리의 일이지만 묵상 업무는 달콤한 일이다.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대로 하라. “만일 묵상을 실천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구체적인 적용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또 그리스도를 묵상하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또 천국에 대해 묵상하되 천국을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묵상한 대로 실천할 것을 결심하라.

여러분이 묵상한 대로 살라.(수 1:8) 묵상과 실천은 두 자매처럼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한다. 실천 없는 묵상은 다만 여러분의 죄악을 더하게 할 뿐이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적용이 결심과 함께 이루어지도록 하라. 화이트는 “여러분의 결심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결연한 목표나 결정으로서 굳건하고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결심을 죄에 대한 유혹과 맞서 싸우는 의지로 삼으라. 여러분의 결심을 기록해 두라.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일들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라.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과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걸 즐거운 체념(滯念)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내려놓으라.

기도와 감사와 시편 찬송으로 묵상을 끝내라.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은 “묵상은 가장 좋은 기도의 시작이며, 기도는 가장 좋은 묵상의 끝이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한 내용에 대해 기도하라. 기도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기도가 없으면 묵상은 단지 부정(否定)한 것일 뿐이다. 기도는 영혼을 묵상에 고정시킨다. 기도는 묵상이 탈선하지 않도록 묵상의 끝에 매듭을 계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성에 영원히 경건한 묵상을 거하게 하고 묵상의 맛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시도록 기도하라.”

묵상할 때 도와주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42-1594)이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다음 묵상을 할 때 고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편 찬송은 묵상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시편의 운율 형식은 기억하기에 좋게 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서 시편은 묵상에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 칼빈의 말처럼 시편은 ‘영혼에 대한 완벽한 해부학’으로서 묵상에 풍성한 자료와 지침을 제공한다. 기도문으로서(시 72:20), 감사의 시로서(시 118:1) 시편은 묵상의 적절한 수단이자 묵상을 끝내는 적절한 방법이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을 마칠 때 나의 마음과 음성을 하나님께 바쳐 다윗 시편의 한두 구절 – 우리 기질과 우리의 묵상 주제에 어울리는 구절 – 을 노래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았다. 이렇게 하면 마음은 큰 달콤함과 만족을 누리게 된다.”

존 라이트봇(John Lightbot, 1602-167)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묵상할 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이다. 이런 찬송은 찬송한 내용을 마음이 가장 오래 기억하게 한다. 기도와 설교를 듣는 것은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빠르다. 그러나 찬송은 그 내용을 오래 고수하게 한다.”라고 했다.    

묵상 후 즉시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묵상을 마친 다음에 너무 빠르게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토머스 구지가 권면한 것처럼 “그래야 묵상할 때 그대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 놓았던 영적인 마음이 갑자기 꺼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이런 묵상이 천 편의 설교를 듣고 마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명심하라. 어셔 주교는 “묵상은 말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영예롭게 한다.”라고 말했다.

4. 묵상 주제

청교도는 다양한 묵상 주제와 대상과 자료를 제시했다. 각 주제 뒤에 붙어 있는 숫자는 그 주제에 대한 묵상을 요청한 청교도 저술가들로서 내가 찾아낸 사람들의 수를 표시한다. 이 목록은 개혁파조직신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1) 서 론

‣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3)
‣ 기독교에 대한 변증(1)

(2) 신 론

‣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7)
‣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7)
‣ 인간의 제일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4)
‣ 하나님의 엄위(3)
‣ 하나님의 자비(3)
‣ 창조주이신 하나님(2)        

(3) 인간론

‣ 죄의 죄악성과 우리의 개인적인 죄(9)
‣ 마음의 부패함과 기만성(5)
‣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4)
‣ 인간의 헛됨(4)
‣ 영혼의 가치와 불멸성(3)
‣ 육체의 연약함(2)
‣ 세상이 주는 위로의 불확실성(1)
‣ 탐심의 죄(2)
‣ 하나님과 인간 간의 대조(1)

(4) 기독론

‣ 그리스도의 성육신
‣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8)
‣ 그리스도의 사랑(5)
‣ 그리스도의 인격(4)
‣ 복음의 신비와 경이(4)
‣ 그리스도의 본성(2)
‣ 그리스도의 직분(2)
‣ 그리스도의 생애 (2)
‣ 그리스도의 지위(1)

(5)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 하나님의 약속(7)
‣ 은혜의 경험적 증거에 대한 자기 검토(5)
‣ 성도의 풍성한 특권(3)
‣ 성령의 은혜와 인격(3)
‣ 신앙의 유익(2)
‣ 성화(2)
‣ 기도(2)
‣ 하나님의 계명(2)
‣ 하나님의 권면과 경고(2)
‣ 배교의 위험성(1)
‣ 구원받은 자 수가 적음(1)
‣ 영적 위험들(1)
‣ 사랑과 기쁨과 소망(1)
‣ 안식일(1)
‣ 자기 부인(1)

(6) 교회론

‣ 하나님의 규례(5)
‣ 성찬(4)
‣ 세례(2)
‣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2)
‣ 교회의 기쁨과 슬픔(2)

(7) 종말론

‣ 천국(10
‣ 죽음(8)
‣ 심판(7)
‣ 지옥(7)
‣ 영원(5)

청교도는 이 주제들을 명백하고 강력하고 유용한 하나님의 진리로 불렸다. 조지프 홀과 같은 일부 청교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세한 목록을 제시했다. 홀은 묵상해야 할 87가지의 주제를 열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각각의 주제마다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위대함, 무지, 타락, 거룩한 삶, 잡담, 악한 친구, 하나님의 약속, 세상을 사랑함, 만족, 위선, 행복, 세상을 사랑함, 친구, 하늘과 땅, 일과 수고, 재산, 천국과 지옥, 죽음, 고통, 선한 싸움, 죄, 성공, 은혜 안에서 자라감, 교만, 죄를 미워함, 편견, 탐심, 기도, 사랑, 불경, 고결함, 기도, 시험, 수단의 사용, 예배, 행복, 순종, 회개, 야망, 자만심, 짧은 인생, 자기 검토, 역경, 고통, 신앙과 철학, 쾌락, 죄, 신실한 친구, 분열과 진리, 근심과 걱정, 두려움,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눈의 빛, 지성과 마음, 진심 어린 신앙, 스스로 받는 상처, 마음과 혀, 시간 사용, 염려, 섭리, 사랑, 불쾌, 우정, 싼 물건 찾아다니기, 책망, 시기, 세속적 쾌락, 훌륭한 본보기를 따름, 시간, 향유, 선행, 열매 맺음, 어리석음, 선을 행함, 은둔 생활, 행복한 삶, 하늘의 징계, 영적 갈망, 회개, 영적 싸움, 시련 속에서 얻는 힘, 천국을 향한 마음, 겸손, 죽음, 삶의 목적, 악이 주는 유익, 광기, 묵상 자체의 실천

분명히 말하면 청교도는 이 가운데 어떤 주제는 다른 것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곧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자신 생각과 묵상에 따라 은혜의 성장과 쇠퇴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청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묵상 주제는 천국 곧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알고 가장 크게 경배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곳, 그리스도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곳, 성도들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며 즐거워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묵상은 대다수 다른 의무들의 생명이고 천국을 보는 게 묵상의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천국은 이런 이유로 묵상할 때 최상의 주제다.

‣ 그리스도는 지금 천국에 계시고, 우리의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시다. 천국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는 그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즉 우리가 진실로 천국을 향한 마음을 갖고 천국의 관점에 따라 이 땅과 이 시대를 바라봐야만 오늘날처럼 악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다.

‣ 천국은 우리 순례의 목적지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위해 천국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순례자이다.

청교도는 천국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묵상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우선권을 갖는다고 가르쳤다.

첫째, 예배 특히 설교는 특별 묵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설교를 듣기를 원하시고 또 들은 설교를 묵상하기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가 말한 것처럼 모든 설교는 묵상을 위한 준비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는 우리 지성(知性)에 건전한 교리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는 설교다. 훌륭한 설교는 우리 의지(意志)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묵상은 지성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도록 합으로써 감정을 넓히고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때 설교에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토록 많은 설교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신앙 고백자들은 온갖 다양한 설교를 듣거나 읽는 데도 영혼은 쇠잔하고 굶주리게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그들의 묵상에 대한 무지와 이해할 수 없는 게으름 말고 더 참되고 더 큰 다른 원인은 모르겠다.” 그는 또 “어떤 청중은 식욕도 없고 소화력도 없어 영적 식욕 부진에 빠져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청중은 영적 폭식증에 걸려 식욕은 있으나 소화력이 없다.”고 했다.

신실한 청교도는 묵상을 위해 설교를 받아 적었다. 우리 교회 나이가 많은 한 여성도가 이런 습관을 갖고 늘 설교를 적는다. 그리고 매 주일 저녁에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씩 그날 받아 적은 설교 내용으로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녀는 주일의 시간 가운데 이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고백했다.                

둘째, 성찬 예식에 바르게 참여하기 위해 신자는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주 예수에 대한 묵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1672)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성찬을 준비할 때 거행할 때, 거행한 후에 감당해야 할 의무에 대해 묵상하라.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라. 특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하심과 그리스도 고난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를 얼마나 타당하게 만족시키셨는지를 숙고하라. 그리고 나아가 성찬의 효력과 본질과 용도에 대해서도 숙고하라.”

칼라미는 성찬에 참여하는 동안 묵상해야 할 주제로 12가지를 제시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주심에 나타나 있는 성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 자신을 내놓은 것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죄의 가증함, 성찬 예식의 효력,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 우리의 영적 기갈과 궁핍, 자격 없는 수찬자가 받게 되는 저주, 자격 있는 수찬자에게 주어지는 복, 성찬의 요소(떡과 포도주), 성찬에서의 행동(목사의 행동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상하는지), 성찬의 약속, 복음으로 주어지는 그러스도(성찬의 은사)”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67)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은 성찬에 임할 때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썼다. 존 오웬은 성찬 준비 방법으로 묵상, 자기 검토, 간구, 기대 등을 요구했다. 모든 신자는 이런 준비에 동참해야 한다.(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71,175)

셋째, 매 주일은 묵상에 특별히 좋은 시간이다.

주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 다가올 한 주간을 위해 그 양식을 비축해 놓는 날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주일을 ‘영혼의 장날’이라고 했다.  

넷째, 영적 성숙에 따라 묵상의 내용도 다르다. 

나다니엘 레이뉴(Nathaniel Ranew, 1602-1678) 같은 청교도는 묵상에 대한 글을 광범하게 썼는데 영적 성숙도에 따라 신자들이 다양하게 도움을 받도록 지침을 제시했다. 레이뉴는 각각 ‘갖 회심한 초신자를 위해’, ‘더 성숙하고 연륜이 있는 신자를 위해’, ‘노년 신자를 위해’ 장을 따로 구분해서 글을 썼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묵상을 당연히 기대하게 된다.

5. 묵상의 유익

청교도는 묵상의 유익, 장점, 효능, 이점, 활용 등에 대해 방대한 글을 썼다. 여기서 그들이 강조한 묵상의 유익을 열거해 보자.

‣ 묵상은 삼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줌으로 그 인격들에 따라 지성적, 영적, 심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요일 4:8) 이끈다.
‣ 묵상은 경건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증진 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묵상은 진리의 얼굴에서 수건을 제거한다.(잠 4:2) 묵상은 ‘지혜의 유모’  인데 그 이유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잠 1:7)
‣ 묵상은 우리의 온갖 영적 환난 속에서 약속의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외적 시련 속에서 섭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움을 줌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킨다.
‣ 묵상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토머스 왓슨은 묵상을 ‘감정의 고함 소리’라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어미 닭이 달걀 위에 앉아 병아리를 부화시키듯이 좋은 감정을 부화(孵化)시킨다. 우리는 이 묵상의 불로 감정을 점화시킨다.”(시 39:3)
‣ 묵상은 회개와 삶의 개혁을 일으킨다.(시 119:59, 겔 36:31)
‣ 묵상은 기억의 절친한 친구다.  
‣ 묵상은 예배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분야로 생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우리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더 좋아하게 한다.
‣ 묵상은 영혼의 천에 성경을 수놓는다.
‣ 묵상은 기도의 유익한 도구이다.(시 15:1)
‣ 묵상은 기도하기 전에 기도라는 악기를 조율한다.
‣ 묵상은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실제 유익을 얻도록 돕는다.
‣ 묵상은 말씀이 우리 영혼을 생명과 에너지로 채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월리엄 베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듣는 건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는 건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 것과 같다. 묵상을 통해 말씀을 소화하는 것은 따스한 감정, 강한 결심, 거룩한 행동을 낳는다.”
‣ 성례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 유익하게 하고 더 강하게 하는 데 유익을 준다.
‣ 묵상은 믿음, 소망, 사랑, 겸손 그리고 수많은 영적 위로가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자라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죄의 가증함을 강조한다.
‣ 묵상은 우리가 죄를 이기는데 필요한 모든 무기를 모으고 모든 논쟁    의 힘을 집약시키고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 준비하게 한다.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묵상은 타락의 침과 힘을 날카롭게 해서 영혼을 더 아프게 찌른다.”고 했다.
‣ 묵상은 죄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요 탐심에 대한 ‘치료약  이다.
‣ 묵상은 영혼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신앙적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한다.
‣ 묵상은 헛되고 사악한 생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렘 4:14, 마 2:35)
‣ 묵상은 오늘날 악한 시대에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일상적 삶에 대한 지침(잠 6:21,22)과 유용한 내적 자원들을 제공한다.(시 !77:10-12)
‣ 묵상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도록 도움을 준다. 월리암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는 묵상은 “우리가 외적, 세속적으로 즐기는 모든 것     속에서 향기롭고 영적인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준다.”고 했다.
‣ 묵상은 사탄과 시험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다.(시 119:11,15, 요일 2:14)
‣ 묵상은 고통 속에 있을 때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사 49:15-17, 히 12:5)
‣ 묵상은 영적 교제와 권면으로 다른 사람을 돕게 한다.(시 66:16, 77:12, 145:7)
‣ 묵상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온갖 복을 더욱 감사하게 한다.  
‣ 묵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 49:3)

정리하면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묵상은 여러분 영혼의 양식이다. 또 묵상은 영적 진리들을 소화하는 진정한 위(胃)이자 참된 열(熱)이다. 만일 사람이 심장이 뛰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묵상하지 않아도 자신이 읽거나 들은 것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자는 가장 잘 읽는 자가 아니라 가장 묵상을 잘하는 자다.”

6. 묵상의 장애물

청교도 지도자들은 묵상의 장애물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여기서 이런 장애물들과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들어보자.

(1) 불안정 혹은 무지

이런 사람들은 자신 생각을 하나의 대상에만 고정(固定)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가볍고 새의 깃털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답변 : 불안정하거나 무지하거나 또 생각이 요동한다고 해서 의무에 대한 면죄부(免罪符)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즉 여러분의 능력 상실이 하나님의 권리 상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가 선포됐을 때 여러분은 아마 묵상을 게을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토머스 맨톤은 “죄악 된 불안정한 기질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무를 무효화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종이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할 일을 면제받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성결한 지식을 충분히 비축하고 그 지식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렇게 하는 동안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라.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묵상이 더 수월하고 더 달콤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분주함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일에 너무 바빠 묵상의 의무를 철저하고 진지하게 실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답변 : 참된 신앙은 단순히 한가한 시간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쁠수록 더 묵상에 힘써야 한다. 바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묵상할 필요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3) 영적 무감각

이런 사람들은 선한 의도는 있으나 묵상할 때 영혼이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 마태복음 11:12에 천국은 ’침노하여 빼앗는 자‘가 받는 상이라고 말한다. 왜 여러분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얻는 상(유익)을 추구하는 데는 열심이면서 영원한 상(기업)인 영적 추구는 게을리하는가? 영적 잠자기를 즐기는 자는 낡은 옷을 입게 될 것이다.(잠 23:21) 맨톤이 한 말처럼 “부끄러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수고하는 것이 낫고, 어둠의 사슬에 묶이는 것보다는 의무의 줄에 묶이는 것이 낫다.”

(4) 세속적 쾌락과 친구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래서 헛된 즐거움과 친구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답변 : 이에 대해 메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쾌락은 우리 영혼을 불안하게 하고 우리 육체가 묵상 의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상태로 만든다. (중략) 이것을 기억하라. 곧 신앙의 즐거움은 감각적인 모든 쾌락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5) 마음의 거역

이런 사람들은 이처럼 힘든 의무의 멍에를 메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책(罪責)을 젊어지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답변 : 이에 대해 맨톤은 “그리스도의 피를 진지하게 적용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묵상을 비롯해 은혜의 수단들의 멍에를 메라!”고 권면했다.(시 19:14) 묵상을 빼먹은 결과는 심각하다고 칼라미는 경고했다. 그 결과 마음이 완고해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이 왜 우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까?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에 대해 우리가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감사하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섭리와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할까? 왜 우리가 말씀과 성례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왜 우리가 영원을 준비하는 데 그토록 빈약할까?

그것은 묵상하지 않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우리는 묵상 훈련을 해야 한다. 대다수 청교도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교도 시대에도 상대적으로 묵상 훈련을 자신의 의무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설교, 금식, 공적 및 사적 기도 등을 빼먹으면 혼란을 느끼나 묵상을 빼먹고는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한평생 지금까지 그렇다.”

결론

– 자기 성찰로서의 묵상 –

청교도에게 묵상은 은혜의 특별 수단 이상의 것이었다. 묵상은 청교도의 헌신을 위한 포괄적인 방법이었다. 곧 성경적, 교리적, 경험적, 실천적인 방법이었다. 묵상 신학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신학이었다. 묵상 주제는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 양심이라는 책에서 나왔다.

월리엄 브리지가 말한 것처럼 묵상은 영혼이 어떤 것을 열렬히 그리고 긴밀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묵상을 통해 사람의 지성을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유익과 이득을 위해 그 일에 거하고 고정되며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간다.

청교도는 전형적으로 자신들이 쓴 묵상에 대한 글에서 독자에게 자기 검토를 요청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기 검토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1) 시험

‣ 여러분의 묵상이 ‘살아 있는 신앙’을 행사하는 데서 연원(連原)하고 있는가? 참된 묵상은 신앙의 실천과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이다. 여러분은 새뮤얼 워드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처럼 묵상하는가?

“묵상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그대의 영혼을 각성시키라. 그대가 습관적으로 믿고 있는 약속과 권면들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보라. 곧 그대 영혼의 미각으로 달콤함을 느낄 때까지 그것들을 그대의 혀로 굴려 보고 그걸 씹으라.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라보라. 때로는 하나를 숙고하고 때로는 다른 하나를 더 깊이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배우자가 동산을 거닐면서 열매를 따 먹도록 부르는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내가 믿음을 사용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다.”

‣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영적 생각들이 그대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고 있는가? 하나님 생각이 싫증 난다는 건 귀신들처럼 된다는 것임을 명심하라.(약 2:19)

(2) 책망과 권면

‣ 불신자에게 :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성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을 이기적이고 죄를 범하는 데 사용하도록 의도했겠는가? 여러분의 모든 생각 속에 왜 하나님이 없는가? 이에 대해맨톤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원한 영광이 그대가 해 볼 최고의 생각으로 가치가 없는가? 그대는 다른 일들 – 속된 일, 아주 유치한 일 – 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시간을 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 신자에게 : 묵상을 게을리하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지 않고 죄악 된 일들을 생각한다는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아는가? 농부는 자신의 땅에 대해, 의사는 자신의 환자에 대해, 법률가는 자신이 맡은 소송사건에 대해, 가게 주인이 자신의 판매 상품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과 구주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청교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 묵상을 게을리하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곧 약화 되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불쾌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즐거운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죄에 대해 문을 열어 놓고 말 것이다.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시험과 유혹 앞에서 상처를 입고 무너지기 쉬울 것이다. 요약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레이뉴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경건의 의무도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가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토머스 왓슨의 권면을 주목해 보자. “여러분이 이전에 묵상을 게을리했다면 그 게으름을 슬퍼하고 이제부터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경건한 묵상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묶어두라.(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 산을 올라가라. 정상에 도달하면 여러분 앞에 멌진 광경 곧 그리스도와 천국이 보일 것이다.(*) 

글쓴 이 / 조엘 비키(Joel R. Beeke, 퓨리탄리폼드신학대학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학장, 조직신학 교수, 그랜드래피즈 네덜란드개혁교회(The Heritage Netherlands Reformed Congregation) 담임목사  출처,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지음 / 김귀탁 옮김,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7, pp. 1010-1031.






12월 31일(수) 에베소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속 사람(3:16)

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에베소서의 특징은 교회론에 관한 말씀이며 또한 옥중서신에 해당합니다.
옥중서신에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속사람(Inner Self)
둘째는 겉사람(Outer Self) 

속사람은  영혼, 정신, 마음, 인격의 중심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는 곳을 말합니다.
겉사람은 육체, 외모, 세상의 가치관 등 눈에 보이는 부분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지고 쇠약해집니다.
겉사람이 늙고 병들어도 속사람이 강건하면 낙심하지 않고, 세상의 환난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날마다 새로워지며, 사랑과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속사람(內的人)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첫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합니다.
둘째,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셋째,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넷째, 세상의 유행보다 영적인 성장에 집중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기대합시다.
먼저 가정에서 행복을, 교회에서 기쁨을, 세상에서 보람을 얻는 신령한 삶의 주인공이 됩시다.

2025년을 마감하고 2026년을 맞이하면서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영적 삶의 핵심 : 외적인 신앙생활보다 내면의 변화(마음)가 중요하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 세상 역경 극복 : 세상의 유혹, 고난,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 참된 변화 : 겉모습을 꾸미는 대신 속사람의 영성을 가꾸고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
  •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
  •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함.
  • 세상의 유행보다 영적인 성장에 집중함. 


속사람(內的人)이란?

성경과 신학에서 속사람

  • 겉모습이나 육체가 아닌

  • 마음, 영, 인격, 양심, 믿음의 중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 관련 성경 구절

  • 고린도후서 4:16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에베소서 3:1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의미 정리

  • 겉사람 : 육체, 외적 조건, 세상적 모습

  • 속사람 :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자아, 믿음과 성품

만약 다른 단어를 의도하신 거라면, 조금만 더 써 주세요.

속사람

속사람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속사람의 의미

속사람은 겉모습이나 육체(겉사람)가 아닌,
👉 마음·영·양심·인격·믿음의 중심, 곧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나를 뜻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전인격적 존재로 보며,
속사람은 그 중심을 가리킵니다. 

2️⃣ 성경 속 속사람

📖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에베소서 3:1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속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지는 영역입니다.  

3️⃣ 신앙적 의미

  • 신앙 성숙은 겉사람의 성공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로 측정됩니다.

  • 고난과 연약함 속에서도
    속사람은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4️⃣ 오늘의 적용

  • 나는 무엇을 더 가꾸고 있는가? 겉사람인가, 속사람인가

  • 말씀·기도·회개·순종은 속사람을 살찌우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 하루의 분주함 속에서도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사람과 속사람의 뜻과 차이점



들어가는 글

성경을 읽다 보면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강조되며,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겉사람과 속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본 글에서는 성경에서 사용된 겉사람과 속사람의 뜻을 살펴보고,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겉사람과 속사람의 성경적 의미

1) 겉사람의 의미

  • 겉사람(outer man)은 우리의 육체적, 물질적, 외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 이 말씀에서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쇠퇴하고 연약해지는 육체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2) 속사람의 의미

  • 속사람(inner man)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내면을 의미합니다.
  • 에베소서 3:16에서 바울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말하며, 속사람이 성령을 통해 강건해질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2.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1) 본질적인 차이

  • 겉사람: 육체, 감각, 외적인 삶과 관련됨
  • 속사람: 영혼, 믿음, 내적인 삶과 관련됨

2)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노화하고 쇠퇴합니다.
  • 속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건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삶의 방향성과 목적

  • 겉사람은 세상의 기준과 욕망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속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며, 영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3. 신앙생활에서의 적용

1) 겉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속사람을 성장시키기

  • 우리는 육체적인 건강과 외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의 성숙입니다.
  • 성경 묵상, 기도, 예배를 통해 속사람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성령을 통한 속사람의 강건함

  • 속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변화됩니다.
  • 갈라디아서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집니다.

4. 겉사람과 속사람의 조화로운 삶

1) 영적인 우선순위 세우기

  •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체적인 필요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성장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삶의 중심을 속사람에 두기

  •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겉모습만 신경 쓰는 신앙을 경계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7).

결론 정리

겉사람과 속사람의 개념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겉사람은 육체적이고 유한하지만, 속사람은 영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사람에 매이기보다, 속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며,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겉사람 (Outer Man) 재료 - 흙

겉사람은 우리의 육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고, 약해지고, 병들 수 있는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고난과 시련, 박해 등으로 인해 쇠퇴하고 소모되는 우리의 외적인 면모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처럼, 겉사람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고 손상될 수 있습니다.

속사람 (Inner Man) 재료 - 생기 

반면에 속사람은 우리의 영적인 존재,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속사람은 육신이 쇠퇴할수록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내면이 강건해지고, 믿음이 깊어지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로 인해 강해지는 내면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의미

고린도후서 4장 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육체적인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속사람의 새로워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외적인 환경이나 육체적인 상태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끊임없이 회복되고 성장하며 강해진다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고린도후서 4:16-18)

1. 겉사람의 한계: 우리는 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낄까요?

2030 세대에게 '갓생(God-생)'은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스펙, 외모, 경제력을 위해 치열하게 살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겉사람'**의 영역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나 자신이죠.

하지만 문제는 이 겉사람이 '유효기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기며 방향 감각을 잃었습니다. 겉은 화려해 보여도 속은 텅 빈 '번아웃' 상태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 말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로마서 7:5)

[실제 예화] 세계적인 팝스타나 성공한 기업가들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우울증과 공허함을 고백하는 뉴스를 자주 접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몰라 방황하는 모습은, 영혼(속사람)이 죽어 육체(겉사람)의 감각에만 의존하며 사는 인간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겉만 가꾸는 인생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습니다.


2. 속사람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엔진'

죽었던 우리 영혼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은 '수리'가 아니라 '교체'입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는 게 아니라 새 옷을 입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속사람'**을 선물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5-6)

[실제 예화] 스마트폰의 액정이 아무리 깨끗해도 내부 소프트웨어가 망가지면 벽돌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겉은 좀 낡았어도 최신 OS가 설치되어 있다면 강력한 기능을 수행하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성령'이라는 새로운 OS를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삶의 '네비게이션'이 켜지는 순간입니다.


3. 영적 전쟁: 매일 낡아지는 겉사람, 매일 새로워지는 속사람

예수를 믿어도 갈등은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싶은데, 내 몸은 자꾸 세상 유혹을 따라가려 하죠. 바울 사도조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했을 정도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매일 죽는 연습'**입니다.

성경 말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4)

[실제 예화] 매일 아침 우리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봅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사람의 욕망이 고개를 들 때마다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근육을 단련하듯, 우리도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의 '코어 근육'을 길러야 합니다. 겉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낡아지지만(Aging), 속사람은 성령 안에서 매일 더 힙하고 새롭게(Renewing) 성장할 수 있습니다.


💡 2030을 위한 핵심 메시지 3가지

  1.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스펙과 외모는 '잠시'뿐이지만, 여러분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낡아질 것에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히 새로워질 속사람에 투자하세요.
  2. 내면의 갈등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내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속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며 그분의 인도를 구하세요.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나'를 찾으세요. 세상이 정의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는 내 귀한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 정체성을 붙드세요. 그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오늘도 이 약속을 믿으며, 진짜 나를 깨우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속사람인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육신 즉 겉사람을 옷입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죄 값으로 영의 사람으로서의 속사람이 죽고 육신의 사람인 겉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1. 타락한 인간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인간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아담과 하와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고 이로인해 신령한 지식이나 체험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이 죽은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냄새 맡지 못하고 맛도 못보고 또한 촉감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것은 영이 없이 현실적인 감각과 본능에 의해서만 살게 되므로 영적인 세계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이 없는 동물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와 같기 때문에 육체의 일만을 지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교통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알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진리의 지식이 없으므로 성령님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내세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므로 하늘나라에 속한 영적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영이 소생되어야 영의 세계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이 죽으면 부패하여 썩게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게 되면 부패하고 썩어 악취를 내게 됩니다. 흐르지 않는 도랑물은 곧 썩어 온갖 더러운 벌레들이 살게 되듯이 영적으로 죽게 되면 부패함과 썩어짐을 통하여 온갖 귀신과 악령들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우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처럼 극악한 말과 행동을 하는가”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사람으로 얼굴을 갖고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귀신이 그 썩은 영혼에 들어와서 악마화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부패하고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이 죽어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죄악과 질병과 고통,그리고 사방이 죽음으로 둘러쌓이게 됩니다. 이런 겉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느 곳에 가나 죄악이 넘쳐나고 질병과 사망으로 둘러쌓여 있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4절로 6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부귀, 영화, 공명을 얻으면 기쁘고 즐겁고 이를 통해서 소망이 생길것으로 생각하지만 영이 죽은 상태에서는 온전한 기쁨의 샘은 말라버리게 됩니다.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속에 들어오실 때 기쁨의 샘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영혼속에 계셔야 우리의 삶은 진실한 기쁨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속에 기쁨의 샘이 없으므로 삶속에 늘 슬픔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낳지 않은 것이 행복인데 이미 낳았으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싱글턴 역시 “옳은 것도 없고 적당한 것도 없다.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 씨를 뿌리고 먼지 속에서 추수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겉사람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죄악과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겉사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염려, 근심, 낙심, 절망, 슬픔, 미움, 분노, 시기, 질투 등 온갖 마음의 억압으로 답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17장 7절에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그림자와 같으므로 삶에 희망이 없고 온 천지가 낙심천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겉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인간관계의 갈등, 억압, 소외, 대결 등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계층간, 지역간, 국가간에 분열이 있고 끝없는 갈등과 대결이 있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이러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전부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 욕심으로 사니 서로 부딪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결혼한 부부도 얼마 가지 아니하여 서로 부딪히고 원망하며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 원망, 불평,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겉사람으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11절로 12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겉사람이 행하는 일입니다. 겉사람은 자기 상실감을 가지고 희망없이 늙고 병들고 쓸쓸히 죽어 갑니다. 겉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을 쌓고 또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살지라도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기를 잃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쓸쓸히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겉사람의 운명입니다.

2. 예수님의 구원과 속사람의 부활

영이 죽어 겉사람의 삶을 사는 인생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습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온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33년을 사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빌라도의 뜰에서 말뚝에 묶여 등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죄를 지은적도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한 하나님의 아들이 무자비한 로마군인들의 채찍에 등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았던 것입니다.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주님은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다로 올라갈 때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6시간 동안 매달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대가를 치루는 것이지만 죄 지은적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열두 명이 더 되는 천사에게 명령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살려 일으키셨습니다. 완전히 죽어서 썩고 부패한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혈로 씻음받고 성령을 통하여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6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승천하여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새옷을 입었다고 새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집에 이사갔다고 새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나서 새것이 되고 새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겉을 아무리 변화시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사람, 곧 우리의 겉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속사람을 살려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그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인된 옛사람은 사라지고 용서받고 의로워진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의인으로 거듭나서 주님과 함께 교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 놓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죄의 담을 헐어 버리고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 주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모든 세속과 더러움이 사라지고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거룩하게 되고자 하여도 세상과 죄악으로 묶여 있는 한 거룩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세상과 죄악에 묶여 있는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보혈로 깨끗해진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믿고 순종하고 나아가면 주님은 그 멍에를 통하여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질병을 치료하시므로 우리에게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피땀을 흘리는 고통스런 삶이 십자가로 인해 변화되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면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영생복락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사망을 멸하시고 천국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된 것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육신의 사람밖에 몰랐지만 이제 거듭난 속사람이 육신의 사람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육신의 사람과 우리안에 있는 속사람은 분쟁과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키게 됩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을 충동질하고 유혹하므로 넘어 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겉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겉사람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온전한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민감한 겉사람은 감각적이고 체험적인 것만을 의지합니다. 또한 우리안에 속사람을 유혹하고 억압하므로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교회에 나가려 하는데 겉사람은 나가지 말라고 충동질 합니다. 또한 술 담배 할 것을 유혹하고 음란과 도둑질과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겉사람을 통해서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겉사람을 속사람을 통하여 투쟁하고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전에는 겉사람이 시키는대로 행하고 겉사람이 사는 방식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안에 다시 살아난 속사람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므로 겉사람과의 투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해서 속사람이 강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3.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또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겉사람의 삶을 살지 말고 속사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자아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우리의 속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자 거룩한 사람이 되고 또한 치료받고 축복받은 사람으로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속사람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나 겉사람을 대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겉사람의 공격을 물리치고 겉사람의 삶을 따라 가지 않음으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말씀으로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속사람은 육신이 주는 감각적인 정보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속사람이 사는 방식입니다. 겉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는 것, 만져 보는것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감각과 체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속사람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헛된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믿지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믿지 말라고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시기 전에 그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어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진동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속사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속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을 무덤에서 왜 끌어냅니까?”라고 말하므로 겉사람의 사는 방식으로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믿음은 속사람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겉사람은 감각에만 의지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람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겉사람이 저항을 하고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많이 읽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강해진 속사람으로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속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삽니다. 우리 속사람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을 우리안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속사람은 성령님이 도움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사람은 언제나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님은 우리의 가정교사이자 변호사로서 또한 안내인으로서 우리를 돕는 선생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사람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겉사람은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복음을 증거하고자 한다면 마귀는 겉사람을 통해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속사람에게 기도하지 말고 편안히 쉴 것을 권유하고 당장에 다른 급한 일들에 관심을 갖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사람을 통해서 마귀는 피곤함과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기도의 힘을 통해서 마귀에 대항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몇분만에 죽는 것처럼 영적인 호흡과도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속사람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으나 서나 기도하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쳐나도록 쉬지말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겉사람은 점점 노쇠해지고 무능력해집니다. 왜냐하면 겉사람이 후패하면 모든 것이 둔해지고 쇠패해지고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고 강성해지고 신령한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먹으므로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넘치고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성령님이 동행하는 가운데 천국이 우리안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안고 절망가운데 살아갑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슬픔과 탄식과 좌절을 안고 영원히 몸부림치며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살아난 사람은 낡은 겉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며 영광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아름다운 본향에 들어갈 때 한사람도 낙오되는 사람이 없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영혼이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같이 죄많은 인생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고 또한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믿고 속사람이 살아난 자녀들이 다시 겉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매일매일 속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겉 사람, 속 사람, 옛 사람, 새 사람 

1.겉 사람은 사람의 몸(육신)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4:1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롬6:6)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롬7:18)

 

 

2.속 사람(inner man)은 사람의 혼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4:16)

구원받은 사람만 속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혼(속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혼(속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만 속 사람이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속 사람을 혼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3.옛 사람은 겉 사람과 같이 사람의 몸(육신)을 말하며 새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그 행위와 함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골3:9)

 

 

4.새 사람은 거듭 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말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더라.』(요3:5-8)

자연인의 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면 사람의 영이 거듭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또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사람의 영이 죽어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영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해서 ‘반드시 죽으리라.’ 했던 그 죽음은 바로 사람의 영 안에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영에 주의 촛불이 꺼져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라. 뱃속에 있는 모든 깊은 부분들을 살피느니라.』(잠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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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ΕΦεσιος(프로스 에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에베소인들에게’(to Ephesians)란 뜻이다. ‘에베소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 서신은 바울이 기록하였다고 직접 증언하고 있고(1:1; 3:1), 언어나 문체, 중심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하고 있으며, 초대 교부들(Irenaeus, Polycarp, Eusebius, Origen) 역시도 전통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기록으로 보기 때문에 대부분이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한다.

 

② 수신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 및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1:1)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물론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서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지만 1차 독자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에베소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여, 소아시아 최대도시로 매우 번영했는데, 그 지방의 로마행정의 중심이었다. 이 에베소는 신전시(神殿市)로 불리웠다. 그것은 유명한 아르테미스(아데미르 역) 신전이 있는 데서, 그리고 후에는 황제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2, 3의 신전까지도 포함되어서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할 때에 아시아 전도를 계획하였으나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셔서(행 16:6), 유럽에 건너가 여러 교회를 세우고 다시 안디옥 모교회로 가는 동안 에베소에 잠깐 들렀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다(행 18:18-22, 26, 고전 16:19).

후에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할 때 윗 지방 갈라디아를 거쳐서 에베소에 와서(행 19:1),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 도를 비방하여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2년 동안 말씀을 전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이곳에 이 지방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된 교회를 세웠고 그 뒤에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이 교회에 머물며 사역을 했다. 이렇게 따라서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교회의 중심이 되고, 교회 역사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2) 기록연대

본 서신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럿 나타난다(3:1; 4:1; 6:20).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행 16:19-34), 가이사랴(행 24:27), 로마(행 28:16, 30) 등 모두 세 차례 감옥에 투옥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빌립보 감옥의 투옥 기간은 며칠(혹은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서신을 기록할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가이사랴 감옥을 본 서신의 기록 장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 서신의 필치가 매우 세련되고 신앙적 깊이와 원숙미가 넘친다는 측면에서 대분의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로마 감옥으로 본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2년 정도 투옥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함께 기록했을 것으로 보며, 에베소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실제로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은 디모데후서도 포함되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쓴 글은 아니고, 바울 사도가 다시 붙잡혀서 순교하기 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긴 글이며,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1. 기록 동기와 목적

본서중에는, 두기고가 다른 소식(통지)을 아시아에 전하기로 되어있다는 것(엡 6:21, 골 4:7) 이외에는, 이 편지가 기록된 특별한 이유 및 직접 목적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바울이 행하던 사역의 모습과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울은 기원 52년부터 54년까지 약 3년 동안 그의의 전도 사역지 중에서는 가장 오래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 자신은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권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행 20:31). 그러나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에베소 교회의 여러 소식들을 듣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알려 주기 원했다.

 

①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구원을 단순히 지상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얻었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②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또한 교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도들의 예배와 교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나그네나 외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③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울러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각각에 주어진 자리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와 영적으로 어떠한 제사로 임해야 하는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 주제

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해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예정을 입어(1:11), 그의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기 위하여(1:10)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印) 치시고 보증이 되셨음(1:13-14)을 자세히 알려준다.

또한 구원받은 자로서는 나의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2:5, 8)을 분명히 하여,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신 구원의 목적을 잘 깨달아(1:4), 그의 영광을 더욱 찬송해야 함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1:14).

 

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통치 능력으로 만물을 그 아래 복종하게 하셨는데(1:21-2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능력을 드러내어 만물을 그의 뜻으로 충만하게 하시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다(1:23). 그러는데 있어서 이방인(에베소인)과 유대인이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고 함께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야 함을 말한다(2:19-22).

아울러 이미 주의 부르심을 받아 주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4:1-3), 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에 따라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며(4:7-1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도록 권면한다(4:13).

 

3)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바울 사도는 구원을 받은 자답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으로, 빛의 자녀답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데(4:22-24, 5:18),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각 구성원으로서 또한 사회에서 상전과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5:22-5:9).

아울러 이 땅에서의 싸움은 영적인 것임을 잊지 말고(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6:13-18).

 

 

  1.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교회의 비밀이 담긴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분량이 그렇게 긴 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올 정도로 ‘교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유기적이며 생동적인 조직으로 설명하면서 교회가 지닌 비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서신이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일)하심의 존엄에 대하여 강조한다고 하면 에베소서 바울은 구속된 자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숭고함을 말하고 있는데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픙성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가르쳐주고 있다.

 

2) 복음 전체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에베소서에는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단히 간결하고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에베소서는 바울 신학의 요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칼빈은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the Crown of St. Paul’s Writings)이라고 불렀다. 에베소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바울 서신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3) 차분하고 논리적인 서신이다.

고린도전·후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갈라디아서가 복음과 율법 사이의 치열한 변증과 격정적인 어조로 다루고 있다면, 본 서신은 교회의 본질(교회론)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기독론)를 아주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게 가르치는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즉, 본서는 고요히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가장 깊은 비밀을 차분하고도 확실하게 계시한다.

 

4) 골로새서와의 유사한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유사한 주제들이 동일한 순서로 설명되는데, 때로는 어휘까지 동일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예를 들면, 첫째,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0; 골로새서 1:14-20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 ‘나는 너희 믿음에 대해 들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5; 골로새서 1:4에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에 대해 하나님께 늘 감사를 드린다’는 말은 엡 1:16과 골 1:3에 동일 하게 나와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모두를 비슷한 시기에 작성했고, 모두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는 아시아 지방에 보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엡 6:21, 골 4:7).

 

 

  1. 구조

1)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진술(1-3장)

(1) 도입(1:1-2)

(2) 구원에 대한 진술(1:3-3:21)

①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1:3-14)

② 구원을 위한 성도의 과거와 현재(2:1-22)

③ 구원을 위한 바울의 활동(3:1-13)

④ 바울의 기도(3:14-21)

 

2)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삶에 대한 권면(4~6장)

① 삶에 대한 권면(4:1-6:9)

② 종결(6:21-24)















2025 갈라디아서



요한복음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 비블리온(βιβλίον)과 그라페(γραφή)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그라페와 로고스로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 
구약은 그라페이고, 예수의 말씀은 로고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가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한 권으로 붙어 있고 사건이 연속되지만 그 둘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그라페와 로고스 혹은 그라페와 비블리온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라페는 선지자들의 말씀이고, 비블리온은 아들의 말씀이다. 
그라페는 모세의 율법과 모세의 장막에서 들은 말씀이고, 비블리온은 하늘 지성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담고 있는 말씀만을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라고 분명히 구분한다. 
구약성경은 그라페(γραφή)라고 한다. 
구약을 로고스나 비블리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블리온(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과 그것을 증거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는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20:30, 21:25), 
모두 예수에 관해 기록한 요한복음만을 비블리온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어야 비블리온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비블리온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나고, 영적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라져야 하지만, 신약은 모두가 들어야 할 이의 말씀이요, 지극히 크신 위엄의 책이기 때문이다.

​비블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라페는 예수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모두 사라져야 할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글이다. 
그라페가 영생을 얻게 하고 예수를 알게 하는 가치는 있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태양이 빛을 잃듯이 빛을 잃는 게 그라페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βιβλίο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한복음 21:24-25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태양도 빛을 잃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왜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문장을 후반부에 둔 것일까? 
하나는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를 만진 후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는 복음의 말씀에 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자들의 공적 인정 문구와 자신의 평가 구절을 넣은 것일까? 
내용적으로 이미 인증을 받는 비블리온일 텐데,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로 끝맺은 것일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을 끝 부분에 둔 것일까? 
요한이 자기 책의 권위를 위해 막판에 첨부한 것일까?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면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요한은 왜 제자들이 참이라고 인정했다는 구절을 넣은 것일까? 
또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 것일까? 
게다가 25절은 “아노라”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4절은 요한이 훌륭한 복음서를 쓴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투하여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강요해서 쓴 것일까?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정도의 위엄이 있는 책인데, 굳이 제자들의 인정이 있었다는 말이 필요했을까? 
이 두 구절(24절과 25절)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일까. 
오해가 생기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구절 때문에 더 빛이 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엔 이런 구절이 없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이 구절이 있어서 빛이 난다. 
누가복음은 이런 구절이 첫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끝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난다.

​24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라는 주의 11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완성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100세 정도 되었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죽은 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썼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은 천주교와 관련된 “불확실한” 전승으로 인해 매우 혼탁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는 비블리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돌봤다는 것이다. 
에베소에 가면 그런 전승을 이용한 유적이 있으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나와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100세 가까이 살면서 노년에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성경에 없으면 해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주교는 교부 등의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카톨릭의 전승을 성경에 근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요한복음을 해석하기에 혼탁하다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을 따른다는 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90-110년 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요한복음 21:24-25을 인정하지 않는 자료다. 
그들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에 동조한다. 
성경에 추가하는 이런 방자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는가?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게 하는 주 예수의 비블리온에 “임의 추가”라는 불경스런 일을 자행했다고 믿는가?

​주의 사명자들이 신학교에 가서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후세대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동등한 권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이후의 사람들의 어록은 천주교적인 게 많은데도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승으로 전해진다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권위로 대접받고 있다. 
교부 중에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기에 주의 사명자들이 “불신자”처럼 되어 신학교 문을 나오게 된다. 
성경 이후 인물들의 어록이 신약개론 등에 정경을 결정하는 근거자료로 소개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논한 글을 보면 어느 하나도 21:24-25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경책도 없이 체험만 갖고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의 복음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니까 하늘로 들림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 예수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때 배운 가르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도행전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을 40일간 집중과정을 거쳐 나온 게 복음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선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있고, 전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복음 1:1-2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하여 준 것이 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저술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가 40일간 계시면서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설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한 것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할 정도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에 “임의 추가”를 했겠는가? 
임의 추가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재에선 대부분이 그런 기록은 단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조각조각 나서 파편처럼 떠돌았을 뿐, 복음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태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요한자료 등 자료로만 있어서 복음서마다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은 요한복음의 명칭이 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인지를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는 헬라어로 κατὰ(카타)인데, 그것은 요한이 저자란 말이 아니다. 
누구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written by라고 해야 한다. 
그 성경의 저자는 주 예수시고 요한은 전하여 준 그대로 정리한 자이기에 κατὰ를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신 말씀을 녹취했다가 정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부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일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κατὰ(카타) 복음서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하였다. 
요한의 글에 질투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글을 볼 때 주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참되다(ἀληθὴς, 알레데스)고 승인한 것이다. 
알레데스는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다.

​요한 또한 자신의 작업이 40일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25절의 말을 남긴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서가 4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낱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씩”이란 말이다. 
부활하신 당일에도 열 시간 넘게 제자들을 만나 가르치셨는데, 40일간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얼마나 많았겠는가? 
도마 앞에서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표적을 적었다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것을 기록한다면 요한복음 6장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책이 되게 할 수 있었다. 
나눠 주는 제자들의 시각으로 책을 낼 수도 있고, 그 떡과 고기를 가져온 소년의 입장에서도 책을 낼 수 있고, 받아먹는 무리의 입장에서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6장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이 되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으니, 그 남겨진 것과 관련된 것을 책으로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셨으니, 그것을 기록했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나왔겠는가? 
그들이 떡을 먹은 때가 저물었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두껍고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떡을 먹고 흩어진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40일 간의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0일 간 행하신 표적도 다 기록한다면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하였는데, 3년 간 공생애 때 사역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좀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 수 있다. 
헬라어 원문 뒤에 나오는 영어 본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Young) 문자역”이다.

​Ἔστιν δὲ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ὃσ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ἅτινα ἐὰν γράφηται καθ' ἕν οὐδὲ αὐτὸν οἶμαι τὸν κόσμον χωρῆσαι τὰ γραφόμενα βιβλία ἀμήν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 as many as Jesus did -- which, if they may be written one by one, not even the world itself I think to have place for the books written. Amen.(Young's Literal Translation)

​예수의 사역이 더 많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첫째 암시는 25절의 여섯 번째 단어인 ὃσα(호사)이다. 
이 단어는 “-하는 것은 얼마든지”(as many as)이다. 
따라서 이런 원 뜻을 살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 이 외에도 많은데”이다. 
서방사본은 ὃσα(호사) 대신에 ἅ(하)라는 관계대명사를 사용하므로 그 뜻을 약화시켰다. 
ἅ(하)를 택하면 which나 that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대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뒤의 문장과 연결하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예수가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아’가 된다. 
그러나 ὃσα(호사)는 상호관계대명사로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이”라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확실히 풍성해진다. 
한글개역성경은 상호관계대명사로 된 사본을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대명사로 된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마지막 구절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단순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영어성경 중에서는 위에 있는 YTL이 동방사본을 따랐기에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 
“많다”는 πολλὰ(폴라)를 번역한 many와 함께 ὃσα(호사)를 번역한 as many as를 살려,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번역가와 주석가들이 이 단어 외에 “하나씩”이라는 καθ' ἕν(카트 헨)에도 주목하여 그 문장을 번역하고 주석했다면 요한복음의 풍성함은 마지막 구절에서 더 빛났을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추정처럼 4개의 복음서 외에 추가로 복음서가 나왔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21:25의 이런 언급은 예수의 3년의 삶이 얼마나 매 순간 순간이 충실했던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루만 기록했어도 수천 권의 복음서가 됐다는 것을 이 구절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로 인해 네 개의 복음서는 수천 억 권의 복음서의 대표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주관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24절의 제자들의 “안다”는 말과 같이 “안다”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생각한다(think)”, “추정한다(suppose)”, “예상한다(expect)”, “상상한다(imagine)”, “-같다(seem)”와 같이 다른 말이다. 정확한 뜻은 추정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용어를 쓴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표현을 한 것일까? 
더군다나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객관성을 위해 “우리”라는 제자들의 검증이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가 “참되다”는 최고 평가를 내렸는데 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인 “(나는) 아노라”(추정하노라)를 말한 것일까?

​이 요한복음을 거룩한 성경책으로 검증한 “우리”라는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시각이나 요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말로 인해 검증이 더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요한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공감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 비블리온이 참이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그 감동을 요한은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단어로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런 감동과 감격과 감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수천억 권이 될 만한 주 예수의 사역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한이 한 권으로 압축해야 할 때 다른 내용을 삭제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아쉬워했을까? 
제자들은 요한의 마음 잘 알고 있었다. 
요한도 제자들이 그런 마음인 것을 알고 마지막에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서로가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그들은 요한복음을 참되다고 동의하는 만큼 요한 기자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이 땅에 둘 수 없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아쉬워하며 감동했을까? 
요한처럼 그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21장의 24절을 썼고, 요한은 그들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25절을 쓴 것이다.

​요한복음 21:24-25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런 마무리 멘트는 요한복음을 완성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감격스러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느낀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무리하면서 매우 감격했을 것이다.

​요한은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도 모자랄 복음서를 한 권으로 정리했을 때 얼마나 그러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 예수의 사역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는데도 다 펴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아멘을 썼을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사본을 택한 서방사본 옹호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 것이다. 
동방사본 대부분은 왜 아멘이란 말을 지키려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아멘으로 마무리 할 때에도 큰 감동이었을 것인데, 요한복음도 그렇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복음서를 마감하면서도 큰 감동으로 “아멘”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왜 “아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맞는가.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 하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볼 때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영감이란 성경 말씀을 수천억 배로 확대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는 기존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 
전해 내려온 것 이상으로 상상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상상하지 않고, “어느 사본에는 없음”이나 “추가 사본”이라는 설명에 기대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그런 자와 달리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요한복음을 풍성한 영감으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 
독생자의 영광이 풍성하게 비춰져야 한다. 
글자 하나가 우주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수천억 배 확대되어 우리 심비, 곧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의 행적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영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블리온의 말씀은 그렇게 풍성한 말씀이다.

​영생의 부활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영혼의 속죄는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도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내 영혼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도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비블리온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라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피를 뿌리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상고하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의 피 뿌린 옷을 입을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말씀이 영생인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비블리온의 말씀을 읽자. 
주 예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자.

​내 영혼아, 너는 주 예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는 아버지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βίβλος, ου, ἡ

1. 책.   2. ‘성경’.  3. 생명의 책  
Pronunciation [ biblŏs ]  
Etymology  /  본래 의미는 파피루스 식물의 내부 ‘껍질’[즉, 종이 또는 책의 두루마리를 가리킴]
  • 1.  책.
  • 2. ‘성경’, 마1:1, 막12:26, 눅3:4, 20:42, 행1:20, 7:42.
  • 3. 생명의 책, 빌4:3, 계3:5, 13:8, 20:15.

βιβλίον, ου, τό Storng number 975

1. 책.  2. 율법의 두루마리.  3. 예언의 두루마리 
Pronunciation [ bibliŏn ] 
  •  1. 책, 두루마리, 계 6:14.
    •  a. 율법의 두루마리, 갈 3:10.
    •  b. 예언의 두루마리, 눅 4:17,20, 요한의 복음, 요 20:30.
    •  c. [특별히] 계시의 책, 계1:11, 5:1,2, 10:8, 22:7,9,10,18,19.
    •  d. 생명의 책, 계13:8, 17:8, 20:12, 21:27. [기타] 딤후4:13.
  •  2. 문서, 기록, 마19:7, 막10:4.
Grammar Explanation  / 976의 파생어
  • 문법설명 /  976의 파생어
  • 관련 성경  /  증서(마19:7, 막10:4), 글(눅4:17), 책(눅4: 20, 갈3:10, 딤후4:13), 두루마리(계6:14).

관련 성경
계보(마 1:1), 책(막 12:26, 행 7:42, 계 20:15), 시편(눅20:42, 행1:20).

γραφή, ῆς, ἡ Storng number 1124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Pronunciation [ graphĕ ]
Etymology / 1125에서 유래
  • I.  기록된 것. 신약성경에서는 절대적인 신성한 의미로서 성경을 말함.
    • 1.  ἡ γ. 개개의 성경구절, 막12:10, 15:28, 눅4:21, 요13:18, 19:24,36,37, 행1:16, 8:35, 롬11:2, 딤후3:16, 약2:8,23.
    • 2.  성경전체.
      • a.  [복수로] αἱ γραφαί: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집합적으로 말함: 성경전서, 마21:42, 22:29, 26:54, 막12:24, 14:49, 눅24:27, 32,45, 요5:39, 행17:2,11, 18:24,28, 롬15:4, 벧후3:16, γ. ἅγιαι, 롬1:2, προφητικαί, 롬16:26.
      • b. [단수로] 성경전체를 가리킴, 요20:9, 행8:32, 벧후1:20, εἶπεν ἡ γ., 요7:38,42, λέγει, 롬4:3, 9:17, 10:11, 갈4:30, 딤전5:18, 약4:5, περιέχει ἐν γ., 벧전2:6. πεπλήρωται, ἐπληρώ- θη ἡ γ., 요17:12, πιστεύειν, υῇ γ., 요2:22, οὐ δύναται λυθῆναι ἡ γ.: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요10:35. [기타] 갈3:8,22.
  • 관련 성경  / 성경(마21:42, 요2:22, 고전15:3, 약2:8, 벧전2:6, 벧후1:20), 글(마26:56, 행8:35, 롬16:26), 말씀(약4:5).  


구약과 신약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라페와 로고스, 그라페와 비블리온의 차이를 알아야 신약의 가치가 보인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그라페와 로고스로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 
구약은 그라페이고, 예수의 말씀은 로고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가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한 권으로 붙어 있고 사건이 연속되지만 그 둘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그라페와 로고스 혹은 그라페와 비블리온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라페선지자들의 말씀이고, 비블리온아들의 말씀이다. 
그라페모세의 율법모세의 장막에서 들은 말씀이고, 비블리온하늘 지성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담고 있는 말씀만을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라고 분명히 구분한다. 
이와 달리 구약성경은 그라페(γραφή)라고 한다. 
구약을 로고스나 비블리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블리온(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과 그것을 증거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는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예수에 관해 기록한 요한복음만을 비블리온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어야 비블리온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20:30, 21:24-25)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비블리온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나고, 영적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라져야 하지만, 신약은 모두가 들어야 할 이의 말씀이요, 지극히 크신 위엄의 책이기 때문이다.

​비블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라페는 예수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모두 사라져야 할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글이다. 
그라페가 영생을 얻게 하고 예수를 알게 하는 가치는 있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태양이 빛을 잃듯이 빛을 잃는 게 그라페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βιβλίο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요 20:30)

○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4-25)

태양도 빛을 잃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왜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문장을 후반부에 둔 것일까? 
하나는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를 만진 후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는 복음의 말씀에 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자들의 공적 인정 문구와 자신의 평가 구절을 넣은 것일까? 
내용적으로 이미 인증을 받는 비블리온일 텐데,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로 끝맺은 것일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을 끝 부분에 둔 것일까? 
요한이 자기 책의 권위를 위해 막판에 첨부한 것일까?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면 그런 용어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요한은 왜 제자들이 참이라고 인정했다는 구절을 넣은 것일까? 
또한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 것일까? 
게다가 25절은 “아노라”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4절은 요한이 훌륭한 복음서를 쓴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투하여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강요해서 쓴 것일까?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정도의 위엄이 있는 책인데, 굳이 제자들의 인정이 있었다는 말이 필요했을까? 이 두 구절(24절과 25절)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일까. 오해가 생기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구절 때문에 더 빛이 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엔 이런 구절이 없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이 구절이 있어서 빛이 난다. 
누가복음은 이런 구절이 첫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끝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난다.

​24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라는 주의 11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완성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100세 정도 되었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죽은 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썼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은 천주교와 관련된 “불확실한” 전승으로 인해 매우 혼탁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는 비블리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돌봤다는 것이다. 에베소에 가면 그런 전승을 이용한 유적이 있으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나와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100세 가까이 살면서 노년에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성경에 없으면 해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주교는 교부 등의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카톨릭의 전승을 성경에 근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학자나 목회자들도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가르치고 설교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해석하기가 매우 어지럽고 혼탁하다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을 따른다는 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90-110년 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요한복음 21:24-25을 인정하지 않는 자료라는 것이다. 
그들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에 동조하며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 없는 것을 추가하는, 못되고 방자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는가?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게 하는 주 예수의 비블리온에 “임의 추가”라는 불경스런 일을 자행했다고 믿는가? 아닐 것이다.

​주의 사명자들이 신학교에 가서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후세대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동등한 권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이후의 사람들의 어록은 천주교적인 게 많은데도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승으로 전해진다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권위로 대접받고 있다. 교부 중에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기에 주의 사명자들이 “불신자”처럼 되어 신학교 문을 나오게 된다. 성경 이후 인물들의 어록이 신약개론 등에 정경을 결정하는 근거자료로 소개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논한 글을 보면 어느 하나도 21:24-25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경책도 없이 체험만 갖고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의 복음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니까 하늘로 들림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 예수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때 배운 가르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을 40일간 집중과정을 거쳐 나온 게 복음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선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있고, 전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하여 준 것이 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저술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가 40일간 계시면서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설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한 것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할 정도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에 “임의 추가”를 했겠는가? 임의 추가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재에선 대부분이 그런 기록은 단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조각조각 나서 파편처럼 떠돌았을 뿐, 복음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태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요한자료 등 자료로만 있어서 복음서마다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은 요한복음의 명칭이 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인지를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는 헬라어로 κατὰ(카타)인데, 그것은 요한이 저자란 말이 아니다. 누구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written by라고 해야 한다. 그 성경의 저자는 주 예수시고 요한은 전하여 준 그대로 정리한 자이기에 κατὰ를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신 말씀을 녹취했다가 정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부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일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κατὰ(카타) 복음서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하였다. 요한의 글에 질투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글을 볼 때 주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참되다(ἀληθὴς, 알레데스)고 승인한 것이다. 알레데스는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다.

요한 또한 자신의 작업이 40일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25절의 말을 남긴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서가 4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낱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씩”이란 말이다. 부활하신 당일에도 열 시간 넘게 제자들을 만나 가르치셨는데, 40일간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얼마나 많았겠는가? 도마 앞에서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표적을 적었다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것을 기록한다면 요한복음 6장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책이 되게 할 수 있었다. 나눠 주는 제자들의 시각으로 책을 낼 수도 있고, 그 떡과 고기를 가져온 소년의 입장에서도 책을 낼 수 있고, 받아먹는 무리의 입장에서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6장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이 되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으니, 그 남겨진 것과 관련된 것을 책으로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셨으니, 그것을 기록했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나왔겠는가? 그들이 떡을 먹은 때가 저물었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두껍고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떡을 먹고 흩어진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40일 간의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0일 간 행하신 표적도 다 기록한다면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하였는데, 3년 간 공생애 때 사역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좀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 수 있다. 헬라어 원문 뒤에 나오는 영어 본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Young) 문자역”이다.

Ἔστιν δὲ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ὃσ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ἅτινα ἐὰν γράφηται καθ' ἕν οὐδὲ αὐτὸν οἶμαι τὸν κόσμον χωρῆσαι τὰ γραφόμενα βιβλία ἀμήν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 as many as Jesus did -- which, if they may be written one by one, not even the world itself I think to have place for the books written. Amen.(Young's Literal Translation)

예수의 사역이 더 많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첫째 암시는 25절의 여섯 번째 단어인 ὃσα(호사)이다. 이 단어는 “-하는 것은 얼마든지”(as many as)이다. 따라서 이런 원 뜻을 살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 이 외에도 많은데”이다. 서방사본은 ὃσα(호사) 대신에 ἅ(하)라는 관계대명사를 사용하므로 그 뜻을 약화시켰다. ἅ(하)를 택하면 which나 that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대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뒤의 문장과 연결하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예수가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아’가 된다.

그러나 ὃσα(호사)는 상호관계대명사로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이”라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확실히 풍성해진다. 한글개역성경은 상호관계대명사로 된 사본을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대명사로 된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마지막 구절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단순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영어성경 중에서는 위에 있는 YTL이 동방사본을 따랐기에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 “많다”는 πολλὰ(폴라)를 번역한 many와 함께 ὃσα(호사)를 번역한 as many as를 살려,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번역가와 주석가들이 이 단어 외에 “하나씩”이라는 καθ' ἕν(카트 헨)에도 주목하여 그 문장을 번역하고 주석했다면 요한복음의 풍성함은 마지막 구절에서 더 빛났을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추정처럼 4개의 복음서 외에 추가로 복음서가 나왔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21:25의 이런 언급은 예수의 3년의 삶이 얼마나 매 순간 순간이 충실했던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루만 기록했어도 수천 권의 복음서가 됐다는 것을 이 구절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로 인해 네 개의 복음서는 수천 억 권의 복음서의 대표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주관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24절의 제자들의 “안다”는 말과 같이 “안다”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생각한다(think)”, “추정한다(suppose)”, “예상한다(expect)”, “상상한다(imagine)”, “-같다(seem)”와 같이 다른 말이다. 정확한 뜻은 추정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용어를 쓴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표현을 한 것일까? 더군다나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객관성을 위해 “우리”라는 제자들의 검증이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가 “참되다”는 최고 평가를 내렸는데 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인 “(나는) 아노라”(추정하노라)를 말한 것일까?

이 요한복음을 거룩한 성경책으로 검증한 “우리”라는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시각이나 요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말로 인해 검증이 더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요한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공감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 비블리온이 참이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그 감동을 요한은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단어로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런 감동과 감격과 감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수천억 권이 될 만한 주 예수의 사역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한이 한 권으로 압축해야 할 때 다른 내용을 삭제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아쉬워했을까? 제자들은 요한의 마음 잘 알고 있었다. 요한도 제자들이 그런 마음인 것을 알고 마지막에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서로가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그들은 요한복음을 참되다고 동의하는 만큼 요한 기자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이 땅에 둘 수 없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아쉬워하며 감동했을까? 요한처럼 그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21장의 24절을 썼고, 요한은 그들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25절을 쓴 것이다.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 21:24)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런 마무리 멘트는 요한복음을 완성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감격스러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느낀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무리하면서 매우 감격했을 것이다.

요한은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도 모자랄 복음서를 한 권으로 정리했을 때 얼마나 그러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 예수의 사역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는데도 다 펴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아멘을 썼을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사본을 택한 서방사본 옹호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 것이다. 동방사본 대부분은 왜 아멘이란 말을 지키려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아멘으로 마무리 할 때에도 큰 감동이었을 것인데, 요한복음도 그렇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복음서를 마감하면서도 큰 감동으로 “아멘”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왜 “아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맞는가.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 하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볼 때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영감이란 성경 말씀을 수천억 배로 확대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는 기존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 전해 내려온 것 이상으로 상상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상상하지 않고, “어느 사본에는 없음”이나 “추가 사본”이라는 설명에 기대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그런 자와 달리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요한복음을 풍성한 영감으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 독생자의 영광이 풍성하게 비춰져야 한다. 글자 하나가 우주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수천억 배 확대되어 우리 심비, 곧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의 행적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영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블리온의 말씀은 그렇게 풍성한 말씀이다.

영생의 부활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영혼의 속죄는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도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내 영혼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도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비블리온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라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피를 뿌리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상고하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의 피 뿌린 옷을 입을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말씀이 영생인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비블리온의 말씀을 읽자. 주 예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자.

그라페(γραφὴ), 테오스의 감동(Θεόπνευστος)

그리스어 본문 딤후 3:16, 모든 그라페(γραφὴ 바이블)는 테오스의 영감(靈感 Θεό + πνευστος:  Theopneustos)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료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라페 Strong's 1124, 51회 발생)

"Θεός"(Theos)는 일반적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왕이자 천둥과 번개의 신인 제우스 신의 호칭이다.

그라페(γραφὴ & Βύβλος)

1. '그라페(γραφὴ)'는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쓴 것, 글, 서적을 뜻하는 용어가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수치심이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 및 문화 현상의 '포르노그래피'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포르노그라피아(πορνογραφία)'에서 유래했다. 포르노그라피아(음란물)는 '포르노스(πόρνος)' 즉 창녀나 매춘부, 남창, 남자 매춘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 from πέρνημι: 팔다, 판매하다, 수출하다, 노예로 팔다)와 '쓰기(γραφία: From γραφή)', 즉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에서 파생된 용어다.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창녀나 매춘부와 관련된 쓰기(write)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현대에는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된다. "그라페"는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쓴 것')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포르노그래피는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porne(πόρνη)'와 '글쓰기'를 의미하는 'gráfo(γράφω)'의 합성어가 '포르노그래피' 음란물이라는 뜻이다. 각 문화권마다 고유의 명칭이 있지만 요즈음에는 그냥 '포르노(Πορνό)'로 통칭하여 말한다. 그리고 영미권에서는 간단히 '포르노(Πορνό)'는 에로, 음란물, 외설물로 세계 인터넷 검색어 표준이다. 

2. 헬레니즘 사상의 그라페와 같은 바이블(Byblos)은 4 왕조 호루스의 현신 파라오 '스네페루(Sneferu 기원전 2600년)' 이집트 상형 문자 기록에는 18 왕조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4세까지의 편지에서는 "구블라(𒁺𒆷 )"로 나타난다. 페니키아와 포에니 비문에는 "게발(𐤂𐤁𐤋: 언덕)"로 표시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게발, 그발(גבל)"이라는 이름으로 에스겔서 27:9에 나온다. 바이블의 원래이름 "그발(Gebal)"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시돈(צידון)과 두로(티레צוֹר)와 함께 페니키아의 3대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바벨론 제국 때는 "구블라(Gubla)", 헬라 제국 때는 "비블로스(Byblos)"로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이 된 것이다.

테오스(제우스)의 영감(靈感 Θεό + πνευστος)

1. 디모데후서 3:16, 그리스어 '테오스(제우스)의 영감(靈感)'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훼 엘로힘의 '거룩한 기운(에너지, 힘, 능력)'이라고 한다. 'רוח הקודש(Ruach HaKodesh)'라고 한다. 성경(תַּנַ"ךְ)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며, 한글 변역 성령, 영혼, 또는 "영(靈)"과는 개념(concept) 자체가 완전 의미가 다르다.

2. 영감(spirit)을 직역하면 "영"은 '신령 령'이라는 한자어로, '신령(神靈)', '망령(妄靈)', '귀신' 등을 뜻한다. 巫(무당 무)와 음을 나타내는 霝(비올 령)이 합쳐진 형성자다. '무당(巫)이 기우제(雨)를 지내기 위해 동물의 머리 셋(口)을 바치고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귀신 들린 무당의 "영감"이라는 뜻이 된다.

3. 그리스어 "태오쁘네우스또스(Θεόπνευστος)"의 번역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바알, 천신)는 신들의 왕이며, 천국의 주인으로 그는 신들과 인간들을 지배하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베소서 2:2)로 번개와 천둥을 조종하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등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영감(Θεό + πνευστος)'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신의 영감으로 생긴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우스가 아이디어나 창조적인 업적을 위해 인간에게 영감(πνεύμα)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감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우스(Θεός)가 많은 인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를 "제우스의 영감(태오쁘네우스또스)"을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4. 그리고 고대 헬레니즘 제국에서는 신들의 왕 "제우스 현신"을 테오스 에피파네스(Θεὸς Ἐπιφανής)라고 하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인간들의 운명과 행운을 좌우하는 신으로서, 제우스의 호칭을 '테오스(Θεός)'라고 불렀다. 제우스는 신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가 부여되었다. 

그라페(γραφὴ) VS 타나크(תַּנַ"ךְ)

기독교는 헤브라이즘(עִבְרִית계약)의 고유한 성경(תַּנַ"ךְ, לשון הקודש)을 타나크(Tanakh)라고 한다. 
그러나 헬레니즘 신앙의 근간을 두고 있는 기독교의 바이블은 창녀나 매춘부와 관련된 단순한 쓰기(write)를 가리키는 용어, 현대에는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인 '그라페(γραφὴ)'를 Holy-Bible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양신 바알숭배 국가인 페니키아의 주신(主神) '바알과 아스타르테(예레미야 44:18)'를 숭배하는 도시의 이름인 '비블로스(Βύβλος)'를 성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רוּחַ אֱלֹהִים(Ruach Elohim)' 창조주 야훼 엘로힘의 '기운(힘)'을 '태오쁘네우스또스(Θεόπνευστος)' 제우스의 영감"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태양신 바알 제우스 숭배 신앙의 '헬레니즘(Έλλας)' 사상과 창조주 야훼를 숭배하는 '헤브라이즘(עִבְרִית)' 사상이 완전하게 정 반대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7:38 성경(그라패)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 초두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주격으로 올려 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함이 옳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강수처럼 풍성히 전달해 준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기억하게 한다. 
곧, 사 43:20, 44:3, 55:1,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 등이다. 
여기 이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 성령님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생수"는 성령님을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 6:63).

 

성경 디모데후서 3:15 그람마

네가 어려서부터 
- '어려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푸스'는 목회 서신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Sim-pson) '복중에 있는 아이'(눅 1:41,44)나 '젖먹이'(눅 2:12,16;18:15; 행 7:19; 벧전 2:2)를 가리킨다. 
한편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1. 그 방법, 원리,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대해 가르쳤다(창 18:19; 출 12:26,27; 신 6:7,9;11:19;시 119:15,16,99;사 38:19;엡 6:4). 
2. 그들의 교육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것'이다(잠 1:7;9:10). 
3. 부모의 훈계를 따르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훈했다(출 21:15-17;잠 1:8;6:20;엡 6:1-3).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양육하였으며(시 103:13) 자녀 스스로 선택, 결정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수 24:15). 
이렇게 어릴 때의 자녀 교육은 부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성장하면서는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특별 가정교사, 박사들 그리고 랍비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대상 27:32).

성경을 알았나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에라 그람마타'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문서'(Sacred Writings)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킨다(Hendriksen, Lock).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일반적 표현 '그라페'와는 다른 독특한 표현으로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Scott).
1. '히에라 그람마타'에서 '그람마'는 원래 '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디모데가 어릴 때 성경의 '문자'를 읽고 썼던 바로 그 기초적인 성경공부를 가리킨다(Lenski). 
2. 당시 에베소의 거짓교사들은 '에페시아 그람마타' 속된 문서를 사용하였다(행 19:19). 
바울은 이것과 대조를나타내기 위해서 '히에라 그람마타'를 사용한다(Lock). 
3. 디모데가 익숙했던 성경과 관련된 다른 기독교 문헌들을 가리킨다.

신약 성경주석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시 19:7; 롬 11:11; 빌 1:19).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방법으로 주장하는 율법 외에 다른 방법인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롬 3:21, 22).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는 '통하여'라는 의미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성경'을 조명(照明)하며 생명력을 부여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Scott).

파사 그라페 데오프뉴스토스 카이 오펠리모스 프로스 디다스칼리안 프로스 엘레그몬 프로스 에파노르도신 프로스 파이데이안 텐 엔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새번역,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 ㉡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모든 성경은 교훈과……'
우리말성경,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가톨릭성경,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영어NIV,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영어NASB,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profitable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영어MSG,16  Every part of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useful one way or another--showing us truth, exposing our rebellion, correcting our mistakes, training us to live God's way.
영어NRSV,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and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6 πασα γραφη θεοπνευστος και ωφελιμος προς διδασκαλιαν προς ελεγχον προς επανορθωσιν προς παιδειαν την εν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16 omnis scriptura divinitus inspirata et utilis ad docendum ad arguendum ad corrigendum ad erudiendum in iustitia
히브리어Modern,16 כי כל הכתוב נכתב ברוח אלהים גם מועיל להורת ולהוכיח ולישר וליסר בצדק׃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 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 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로마서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고린도전서 15:3-4
성 경 [고전15:3]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적 진리임. 
우리 본문에 "성경대로"란 말이 두번 나온다. 
세상 역사상(歷史上)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사실들도 많다. 
그러므로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음이 무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는가? 
사실들이 많은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 하실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인류(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가 부활함이 우주 만물의 고대(苦待)하는 바 목표이기 때문이다(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 26:19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 하였고, 단 12:2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하였다. 
또 이밖에 구약에 많은 장 절들이 부활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서 구약을 해석하신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다. 
곧,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부활 관계로 여기 있는 예수님의 구약 성경 취급을 보면, 구약 성경에 부활 장 절이 많이 있다. 다만 우리가 무식하여 모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다. 그가 마 22:31,32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 절을 그는 부활 관계의 장 절로 생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그는 여기서 부활 장 절 같이 보이지 않는 장 절을 부활 장 절로 취급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밝히 아시고 이렇게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기엔 구약이 전체적으로(직접 혹은 간접으로)부활을 가르친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은, 바울의 말로 보아도 확실하다. 
바울은 구약 성경의 목표가 부활을 가르치는데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행 24:15-16, 26:22-23). 
이렇게 구원사(救援史)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은, 주로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활이 우주(宇宙)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성을 띤 것이 저렇게 중점적(重點的)으로 예언되었으니, 우리는 믿기에 용이하다. 우리는 믿어야 된다. 우리가 부활을 못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부활한다면,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부활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문제성(問題性)을 느끼지 않는다.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없으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늘 있는 이유는, 인간된 저들의 죄악성(罪惡性) 때문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리를 전할 때에, 믿는 자들이 생기는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활 이외의 다른 교리를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긴다.















12월 30일(화) 갈라디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의 흔적(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

예수의 흔적은 타락한 인간에게 두 가지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양심(良心) / 어질 양, 마음 심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사도행전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한글개역성경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 28구절

둘째는 직관(直觀) 곧을 직, 볼 관     

  • 1. 철학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 2. 철학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 흔적(痕跡) 스티그마(stigmaστίγμα

    1. 표.  2. 흔적.  3. 낙인  
    Pronunciation [ stigma ]   
    Etymology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 1.  표, 흔적, 낙인, 갈6:17.
    • 관련 성경  /  흔적(갈 6:17).


    󰃨 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26:10;눅 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행 20:24).


    갈라디아서 6:17 – 예수님의 흔적(στίγματα 스티그마타)이 말하는 복음의 최종적 보증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이 말씀은, 복음을 수호하는 바울의 단호한 선언이자, 이 편지 전체의 권위를 보증하는 인장 같은 구절입니다.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서, 이 구절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의 흔적”(στίγματα 스티그마)의 의미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στίγματα (stigmata)는 원래 “찔린 자국”, “낙인”, “문신”, “상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 노예나 군인의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몸에 불로 지져 낙인을 찍음

    • 특정 신에게 헌신한 사람이 자신의 몸에 그 신의 상징을 문신으로 새김

    • 범죄인이나 도망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사회적 위치를 명백히 함

    이처럼 στίγματα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특정한 주인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στίγματα를 “예수의 흔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몸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2. 신약성경에서 στίγματα의 유일한 사용과 관련 구절

    흥미롭게도 στίγματα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 갈라디아서 6:17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개념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나타납니다:

    •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이 당한 고난과 핍박의 목록

    • 골로새서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빌립보서 3:10: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이처럼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몸에 지니거나, 그 고난에 참여함을 통해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은 오직 갈라디아서에서만 바울이 단호히 선언한 독특한 표현입니다.


    3. 왜 바울은 편지 마지막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는가?

    갈라디아서 전체는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적 할례 사상을 반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구원의 길임을 변증하는 편지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며,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1–12).

    ​그러나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의식(특히 할례)을 강조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후로는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선언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자기 몸을 증거로 내세웁니다. 이는 곧 :

    율법적 할례의 표식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선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했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의 흔적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표식이라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4. 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 – 예수님의 ‘인장’

    당시 사회에서 στίγματα 스티그마타는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오히려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행 9:16)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의 삶은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수많은 박해와 고난은, 갈라디아서 6:17의 “예수의 흔적”을 실제로 몸에 새긴 증거입니다.

    ​결국, 바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들은, 갈라디아서 전체가 단순히 바울 개인의 글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임을 증거하는 인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전한 이 복음은 내 말이 아닙니다. 내 몸에 새겨진 이 예수의 흔적들이야말로,

    이 말씀이 참된 복음의 진리임을 보증합니다.” 

    5. 오늘날의 교훈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의 흔적을 넘어서, 복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표식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했고, 결국 갈라디아서 전체의 메시지가 오직 예수님의 복음임을 최종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자로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속했음을 몸과 마음으로 드러내고 있습니까?

    진정한 복음의 순수성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과 고난의 흔적 안에서 드러납니다. 

    6. 맺음말

    갈라디아서 6:17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이 온 몸으로 새긴 고난의 흔적은,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성과 능력을 보증하는 인장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예수님의 흔적을 삶으로 드러내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몸에 새기는 일반적 의미의 표를 희랍어로 스티그마라 한다. 
    그 밖의 단어로는 ‘표시’라는 뜻의 세메이온
    ‘인(印)’이란 뜻의 스프라기스
    ‘표’란 뜻의 카라그마
    사도 요한이 짐승의 “표”라고 할 때 사용한 낱말은 카라그마
    하나님의 “인”이라고 할 때 사용한 낱말은 스프라기스
    그러나 대체로 위에 소개한 모든 낱말들은 얼마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낱말들이었다.64 (372.2)


    σημεῖον, ου, τό Storng number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Pronunciation [ sēmĕiŏn ]
    •  I. 표징, 표시, 이적.
      •  1. 표, 표시, 증거, 상징, 마24:3, 26:48, 막13:4, 눅2:12, 21:7, 살후3:17.
      •  2. 기적, 표징.
        •  a. 기적, 이적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기적], 막8:11, 눅 11:16, 요2:11,18,23, 3:2, 4:54, 6: 2,14,30, 7:31, 9:16, 10:41, 11:47, 요2:11, 4:48, 행2:43, 4:30, 5:12, 6:8, 7:36, 14:3, 15:12, 롬15:19, 히2:4, 고후12:12.
        •  b. [사탄이나 그의 대행자들이 행한] 기적, 마24:24, 막13:22, 계13:13, 16:14, 19:20.
        •  c.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전조, 징조, 눅 21:11,25, 행2:19, 계12:1,3, 15:1.
    Grammar Explanation  /  4592의 어간에서 파생된 중성

    • 관련 성경 /  표적(마12:38, 행2:22, 살후2:9), 징조(마24:3, 눅21:7, 행2:19), 군호(마26:48), 이적 (막13:22, 눅23:8), 표(롬4:11, 고후12:12).
    χάραγ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5480

    1. 표.  2. 형상 
    Pronunciation [ charagma ]
    Etymology  /  5482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표, 인, 계13:16, 14:9.
    • 2. 형상, 행17:29.
    • 관련 성경  /  표(계13:16, 16:2, 20:4), 새긴 것(행17:29).
    σφραγίς, ῖδος, ἡ Storng number 4973

    1. 인.  2.  인장.  3. 도장 
    Pronunciation [ sphragis ]
    • I.  인, 인장.
      • 1.  [문자적으로]
        • a.  인장, 봉인, 계5:1,2,5.
        • b.  도장, 계7:2.
        • c.  인장의 표, 인증하는 것, 롬4:11, 고전9:2.
      • 2. [상징적으로] 확신하다, 증명하다, 롬4:11, 고전9:2.
    Grammar Explanation  /  5420에서 유래된 강세형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인친 것(롬 4:11, 딤후 2:19), 인침(계 9:4), 인(계 5:1, 6:1, 8:1), 인봉(계 5:9).


    '예수의 흔적(痕跡)

    성경(갈라디아서 6:17)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지닌 고난과 핍박의 상처,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명하는 표식을 의미하며, 이는 복음 전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의 증거로 나타납니다. 
    이는 세상의 쾌락 대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 변화된 인격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표식이기도 합니다.
     
    의미 및 성경적 배경
    • 스티그마(στιγμα) : 헬라어 원어 '스티그마'는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나 소인(seal)을 의미하며, 바울은 자신이 받은 박해의 상처를 예수 그리스도의 '브랜드 표시'로 여겼습니다.

    • 고난과 핍박의 증표 : 복음을 전하다가 얻은 육체적 고통과 상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조롱과 핍박 자체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았음을 증명하는 흔적입니다.

    • 세상과의 단절 : 세상의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그로 인해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 속에서의 '예수의 흔적' 
    • 변화된 삶 : 겸손, 온순, 순종, 자기 부인 등 성령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는 인격의 변화.
    • 헌신과 희생 :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는 삶.
    • 증인된 삶 :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주님의 교회를 통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도록 삶으로 증거하는 삶. 
    요약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육체적 상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복음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나타나는 영적, 인격적 변화의 표식이며, 이는 곧 주님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삶의 증거가 됩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아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1️⃣ 역사적·문헌적 흔적

    🔹 신약성경 기록

    •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는 예수의 생애, 가르침,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기록한 가장 핵심적인 문헌입니다.

    • 1세기 말~2세기 초에 기록되었으며, 당시 공동체의 증언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비기독교 문헌 속 예수

    기독교 외부 기록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 타키투스(로마 역사가) :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록

    • 요세푸스(유대 역사가) : 예수를 지혜로운 인물로 언급
      → 이는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됩니다. 

    2️⃣ 고고학적·지리적 흔적

    🔹 예수가 활동했던 장소들

    • 나사렛 : 성장한 마을

    • 가버나움 : 공생애 중심지

    • 예루살렘 : 십자가 처형 장소

    이 지역들에서는 1세기 유대 사회의 흔적들이 발굴되어, 성경의 배경과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성물(聖物) 논쟁

    • 토리노의 수의 : 예수의 장례 수의로 전해지는 천

    • 십자가 조각, 못
      → 신앙적 의미는 크지만, 과학적·역사적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3️⃣ 신앙적·영적 흔적

    🔹 예수의 가르침

    • 사랑, 용서, 겸손, 이웃 사랑

    • “원수를 사랑하라” 같은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강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

    • 기독교의 탄생과 확산

    • 서양 윤리, 법, 예술, 교육에 지대한 영향

    •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가치관과 선택에 흔적으로 남아 있음

    👉 즉, 예수의 가장 분명한 흔적은 물질보다 ‘사람들의 삶과 역사 속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유물 하나로 남아 있다기보다, 문헌· 역사·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심(良心)(수네이데시스.  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Pronunciation  [ sünĕidēsis ]  
    Etymology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  1. 의식, 고전8:7, 히10:2, 벧전2:19.
    •  2. 양심, 도덕의식, 롬2:15, 고전10:29, 고후1:12.
    •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양심(아우토카타크리토스) 
    αὐτοκατάκριτος, ον Storng number 843

    1. 양심의 가책을 받는.  2. 스스로 정죄된.  3. 딛 3:11.  
    Pronunciation [ autŏkatakri- tŏs ]   
    Etymology  /  846과 263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양심의 가책을 받는, 스스로 정죄된, 딛3:11.
    • 관련 성경  /  스스로 정죄한(딛 3:11)

    아이스데시스(aisthēsis)  ἴσθη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144

    1. 직관.  2. 식별.  3. 통찰력  
    Pronunciation  [ aisthēsis ]  
    Etymology  /  143에서 유래
    •  1. 직관, 식별, 통찰력, 경험, 느낌, 지각, 빌1:9.
    • 관련 성경  /  총명(빌 1:9).

    143. αἰσθάνομαι Storng number 143

    1.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2. 깨닫다.  3. 이해하다  
    Pronunciation  [ aisthanŏmai ]   
    Etymology  /  제2부정과거 ᾐσθόμηνω, 가정법 α- ἴςθω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  a. 깨닫다, 지각 능력을 소유하다.
      •  b. 이해하다, 《반》ἀγνοέω, 눅9:45.
    • 관련 성경  /  깨닫다(눅 9:45)






    당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는 이유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선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 결정을 내릴 때마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지만, 종종 우리가 쉽게 무시하는 ‘직관(intuition)’이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직관은 오랜 경험과 무의식적인 패턴 인식을 통해 쌓이는 지혜의 축적입니다. 하지만 직관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신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직관을 믿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직관의 본질과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의사결정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직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도 함께 제시할 것입니다. 논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대인일수록 직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는 이유

    직관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정보가 무의식 속에서 융합되어 빠르게 내리는 결론입니다. 신경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직관적인 결정은 종종 논리적인 분석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복잡한 상황이나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직관이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적 지능과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이제 직관을 왜 신뢰해야 하는지, 그리고 직관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직관의 정의와 본질

    직관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 지식,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판단력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직관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무의식의 지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순간적인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머뭇거릴 시간 없이 빠르게 몸을 피하는 것도 직관의 한 예입니다. 이처럼 직관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쌓아온 경험을 활용해 결정을 내리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직관의 작용은 단순한 ‘느낌’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직관은 본능적인 반응과 다르게, 특정 경험과 학습의 산물입니다. 뇌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상황을 학습하고 패턴을 분석한 뒤,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결론을 도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관은 단순한 감정이나 우발적인 결정과는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관이 중요한 이유

    직관은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논리적 사고와 함께 우리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아래에서 직관이 중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 복잡한 문제 해결에 효과적
      논리적 사고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관은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종합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기업 경영자나 창업가들은 때로는 명확한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직관은 제한된 정보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합니다.
    • 시간 압박 속에서 신속한 판단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직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 중 선수들은 순간적인 판단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직관은 이처럼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순간에 유용합니다.
    • 창의성과 혁신을 자극
      직관은 우리가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은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제시하며, 특히 예술이나 과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직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그가 특정한 영감을 바탕으로 사고를 확장하면서 탄생한 결과입니다.

    직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상황

    직관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직관을 잘 활용하려면 직관이 빛을 발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관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합니다.

    • 경험이 풍부한 분야에서의 직관
      특정 분야에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사람일수록 그 분야에 대한 직관이 발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의 증상만 보고도 어떤 질병일 가능성이 높은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 정보가 불확실하거나 부족한 상황
      모든 정보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논리적 분석보다 직관이 더 좋은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직관이 기존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최적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 반복적인 패턴 인식이 중요한 상황
      직관은 반복되는 패턴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시장에서는 경험 많은 트레이더들이 직관적으로 시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빠르게 대응합니다. 이는 그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의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는 능력 덕분입니다.

    직관을 신뢰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

    직관은 단순히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경험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직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 경험과 지식의 축적
      직관은 오랜 시간 쌓은 경험과 지식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자기 인식과 감정 조절
      직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이 직관적인 결정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피드백을 통한 학습
      직관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직관을 점차 개선할 수 있습니다.
    • 마음 챙김과 명상
      마음 챙김과 명상은 직관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활동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무의식적인 지혜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결론

    직관은 논리적인 분석과 함께 우리의 의사결정을 돕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특히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나 시간 압박이 있는 환경에서는 직관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지식을 쌓고, 자기 인식을 높이며, 명상과 피드백을 통해 꾸준히 직관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결국, 직관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학습의 산물이므로 이를 믿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관은 우리가 마주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빠르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논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직관과 논리를 균형 있게 사용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도 강화될 것입니다.





    양심의 신비,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도덕적 직관으로의 실질적 탐험

    ■ 옮긴이의 말_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 (패트리샤 처칠랜드 지음, 박형빈 옮김, 씨아이알, 320쪽, 2024.01)

    인간의 양심과 도덕적 자각에 관한 탐구는 철학적 관점에서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되어왔다.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사상가들이 양심의 본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왔으며, 그중 일부는 이를 본능적이거나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고 다른 이들은 사회적이거나 문화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이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을 둘러싼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양심 :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도덕성의 기원과 발달에 대한 현대 과학의 최신 발견들을 통해 양심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한다. 이 책은 뇌신경과학,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의 분야를 통해 양심의 실체와 작동 원리를 탐구한다.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러한 과학적 발견들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이와 같은 독창적이며 다각적인 접근 방식은 우리의 양심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상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 양심에 대한 이해는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물리적 이해와 철학적 이해의 단절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인간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어떻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지, 왜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귀한 이상을 들먹이면서도 동시에 내부적 모순에 빠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또한 우리가 양심을 외치며 정의를 주장하는 현상 뒤에 숨겨진 심리적, 사회적 동기를 탐색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 책은 양심의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선보인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이 어떻게 뇌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진화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패트리샤 처칠랜드는 양심이라는 복잡한 주제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하여 접근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양심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하게 한다. 
    나아가 단순히 학문적 탐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성의 깊은 탐구를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조율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안내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양심과 분리된 선언을 발화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검토하게 한다. 
    특히 이 부분은 사이코패스와 도덕적 세심증에 대한 설명 그리고 설정점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도덕적 직관의 본질과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다 심오한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론이나 공리주의와 같은 기존 도덕철학의 관점에 대한 도전적이며 비판적인 시각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우리 각자가 양심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행동과 판단이 어떻게 도덕적 가치와 연결되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윤리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도덕적 직관의 복잡성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인류가 보다 도덕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학자, 학생, 일반 독자 모두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뿐만 아니라 때로 이러한 우리의 내면의 소리가 편향적이고 잘못된 기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도 지적한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신중한 탐색은 도덕철학, 신경과학의 분야에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해 더 깊이 천착하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또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도약하도록 도울 것이라 확신한다.

    박형빈 서울교대·윤리교육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이며,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와 가치윤리AI허브센터의 센터장이다. 
    미국 UCLA 교육학과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AI윤리, 뇌신경과학과 도덕교육, 인격교육 등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인공지능윤리와 도덕교육』, 『도덕지능 수업』, 『도덕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세종학술도서) 등이 있다. 
    역서로는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공역)(2019세종학술도서), 『윤리적 감수성』(공역), 『윤리적 판단력』(공역), 『윤리적 실천』(공역), 『윤리적 동기부여』(공역) 등이 있다.



    기독교의 주요 성경 번역본들 비교

    기독교에서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핵심적인 텍스트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각 번역본은 그 특성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으며, 그 목표나 대상 독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본 글에서는 기독교의 주요 성경 번역본들을 비교하여, 각 번역본의 특징, 번역 이론, 그리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은 성경 번역본의 선택에 있어 독자들이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성경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킹제임스 버전(KJV): 전통과 권위의 상징

    킹제임스 버전(KJV)은 1611년에 처음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영어권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번역본 중 하나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원래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명령으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성경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주로 직역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원문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의 단어와 문장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영어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킹제임스 버전은 언어적으로 매우 정확하고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당시의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영어 스타일을 따랐기 때문에 문학적 아름다움도 뛰어난 특징으로 꼽힙니다. 많은 교회에서 킹제임스 버전을 권위적인 성경으로 여겼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식 언어와 어려운 문법은 현대 독자에게는 읽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당시의 고전 영어가 사용되어, 오늘날의 영어와 문법이 달라서 읽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 단어나 표현이 현대 영어에서는 사용되지 않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2.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은 1978년에 처음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현대적인 언어와 이해도를 고려하여 번역된 성경입니다. NIV는 의역을 주로 사용하여, 원문의 의미를 보다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은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고 번역되었습니다.

    NIV는 다양한 번역 이론을 결합하여 문학적 아름다움보다는 의미 전달을 중요시한 번역본입니다. 예를 들어, 문장이 복잡하거나 구식 표현을 사용할 때, NIV는 이를 현대적인 어휘와 구문으로 바꿔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NIV는 모든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많이 선택되는 번역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NIV는 의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원문과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원문의 미세한 의미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NIV는 현대적인 번역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선택이지만, 원문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개역한글판(KRV): 한국적 전통을 지닌 번역

    개역한글판(KRV)은 1961년에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경 중 하나입니다. 개역한글판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문을 바탕으로 번역되었으며, 직역 방식으로 번역된 성경입니다. 이 번역본은 고전적인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개역한글판은 번역에 있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으며, 원문의 문법과 단어를 충실히 따르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이 번역본은 교회에서 예배와 설교 시에 자주 사용되며, 고전적이고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 전통을 중요시하며,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역한글판은 고전적인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번역에서의 어려운 표현이나 고어가 일부 독자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현대 한국어 성경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개역한글판이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4. 현대 한국어 성경: 이해도와 친숙함을 고려한 번역

    현대 한국어 성경은 2000년대 이후로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쉬운 한국어를 사용하여 원문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이 번역본들은 의역을 사용하여 복잡한 구문을 풀어쓰고, 현대적인 어휘와 문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새 번역이나 우리말 성경은 일상적인 한국어를 사용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대 한국어 성경은 기독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신앙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성경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은 현대 독자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편리함과 접근성을 제공합니다. 특히 청소년이나 신앙에 막 입문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 성경은 의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일부 독자에게는 원문의 세밀한 의미가 손실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합니다. 또한, 신학적 정확성이나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한 번역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디스크립션

    기독교 성경 번역본들은 각각의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KJV)은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권위를 자랑하는 전통적인 번역본이며,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은 현대적인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는 의역 중심의 번역본입니다. 개역한글판(KRV)은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환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번역본으로, 직역 방식을 채택하여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따르려 했습니다. 또한, 현대 한국어 성경은 쉬운 한국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된 책입니다. 각 번역본은 문학적 스타일, 언어의 정확성, 그리고 이해도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며, 독자들의 필요와 선호에 따라 적합한 번역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번역본의 특징을 이해하고 선택함으로써, 기독교의 신앙을 보다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국어 성경 번역본 비교

    번역본

    출간 연도

    특징

    추천 대상

    개역한글판

    1961

    고어체, 문어적이고 엄숙한 표현

    전통적 표현을 선호하는 성도, 장년층

    개역개정판

    1998 (개정 2005)

    고전미 유지 + 현대어 반영

    대부분의 교회에서 사용, 설교용

    표준새번역

    1993 (개정 2001)

    더 쉬운 현대어, 직역보단 의역 중심

    청소년, 초신자, 이해 위주 독자

    우리말 성경

    2004

    아주 쉬운 현대어, 읽기 편함

    어린이, 일반인 대상 읽기용

    새번역(바른성경)

    2001

    원문에 충실한 번역 + 읽기 쉬움

    성경 공부, 묵상용

    공동번역

    1977

    가톨릭/개신교 공동 작업, 직역보단 의역

    에큐메니칼 용도, 학문용








    그 성경이(헤 그라패,   η γραφη) 

    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Storng number 3588

    1.  이 사람
    2. τοῦ γὰρ καὶ γέ νος ἐσμέν: 왜냐하면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3. ὁ μὲν..
    Pronunciation [ hŏ ]

    1124.   γραφή, ῆς, ἡ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Pronunciation [ graphĕ ]   
    Etymology  /  112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성경(마 21:42, 요 2:22, 고전 15:3, 약 2:8, 벧전 2:6, 벧후 1:20), 글(마 26:56, 행 8:35, 롬16:26), 말씀(약 4:5).

  • 3551. 노모스(nŏmŏs) νόμος, ου, ὁ Storng number 3551

    1. 율법.  2. 롬 3:27.  3. 규칙  
    Pronunciation [ nŏmŏs ] 
    Etymology  /  기본형 νέμω ‘분배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율법(마5:18, 눅2:23, 롬2:14), 법(눅2:22, 요18:31, 행18:15).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그라페'(*)는 '율법'(*, 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Bruce,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보여준 뒤 본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는 중성으로 쓰였는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타락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적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될 자들의 옛 상태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12월 29일(월) 갈라디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聖經)(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But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so that what was promised, being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ose who believe.

    성경(聖經)이 모든 것을 죄(罪) 아래 가두었다.

    죄는 얄미운 놈이라고 하겠습니다.
    슬그머니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다시 숨어버립니다.
    잊을만하면 다시 일어나 고개를 들고 우쭐거립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도망가듯 하면서도 꼬리를 감추고
    언제 또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리는 고약한 놈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하게 드러나셨습니다(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며 그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값을 온전하게 치루셨습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율법이 죄를 다스렸습니다.
    율법은 죄를 완전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통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붙잡은 후에 더 이상 죄의 형벌을 주장할 수 없도록 다스림으로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은 율법을 강조하며 율법을 준수할 때에만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신약은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여 죄값을 온전하게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리(요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따라서 성경은 주의 영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의 내용은 율법(토라)과 선지서(느비임)와 성문서(케투빔)으로 구분하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주로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토라, 율법서, 모세오경).
    반면에  이방인 즉 유대인이 아닌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이성과 감정과 행동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어 그 시대의 문화와 배경으로 기록하게 하셨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에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제 먹었던 맛있는 음식은 어제를 위한 음식이었던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을 통하여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은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배경과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1. 배경 및 문맥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율법은 오히려 사람을 죄의식에 사로잡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참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의미

    이 구절에서 "성경"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즉, 율법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지, 얼마나 죄에 물들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율법 자체는 죄를 없애주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의 죄를 인지하도록 돕고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보여주고,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율법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역할도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그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율법 아래에서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어 있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면 죄의 사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율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율법은 약속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지만, 그 자체로는 약속을 이루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시대적 구분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도록 해줍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특별한 은혜였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입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은 율법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3. "죄 아래 가두었다"는 표현의 함의

    죄의 문제를 인지하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의 본질과 심각성을 보여주어 회개와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합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죄가 세상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이기시고 구원을 베푸셨는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화목케 하시고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며 회개와 화목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나니"

    히브리서 9장 1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사 영원한 구속을 이루시고 천적의 성소에 들어가시되 이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니"

    갈3:22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볼 수 있습니다.

    • 율법은 어떻게 죄를 드러냅니까?
    • 율법은 왜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까?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율법과 믿음은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 갈라디아서 3:22절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갈라디아서 3:22절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3:22절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에서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율법이 사람을 죄의식에 사로잡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와 용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의 일부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졌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표현은 죄가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 모두가 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의로움을 주시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보기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22-24 해설

    22이 구절은 율법의 역할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가두어져 있어 스스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약속된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만 참된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2에서 나오며, 이는 구약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인류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약속)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람을 죄의 노예 상태에 묶어두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요 의미
    • 율법의 역할 : 율법은 사람에게 의롭게 살도록 가르치지만, 결국 아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어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 죄의 보편성 : '모든 것(온 세상)'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며, 율법 아래 놓인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혔음을 선언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의 인도 : 율법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죄책감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 약속의 중요성 : 율법은 일시적인 역할을 할 뿐,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는 표현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 나오는 매우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22)

    아래에서 핵심 의미를 단계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의 뜻

    ‘가두었다’(헬라어 수네크레이센. συνέκλεισεν, synekleisen)는 사방을 막아 도망갈 수 없게 하다, 완전히 포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 인간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것

    •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를 숨길 수 없도록 폭로한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은 죄 아래에 가두셨는가?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리는 이것입니다:

    목적이 정죄가 아님 목적은 구원으로 이끄는 것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려 함이라”

    즉, 

    • 인간이 자기 의, 자기 노력, 율법 준수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략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거울입니다 (롬 3:20) 

    3. 바울의 논리 구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 율법이 주어짐

    2. 율법은 죄를 드러냄

    3.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확인

    4. 인간의 길이 막힘

    5.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 됨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갈 3:24) 

    4. 신앙적 적용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 나는 여전히 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고 있는가?

    • 아니면 죄 아래에 갇힌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만 붙들고 있는가?

    👉 “죄 아래에 갇혔다”는 인식은 절망이 아니라 복음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한 문장 요약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는 말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영어 성경(NIV)을 직역하면 ' 성경은 온 세상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을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새한글번역 /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하여 그 약속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나 성경은 온 세상이 죄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약속된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 /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 /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기 위하여 율법과 언약을 대조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마음이 요동하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안타까워하는 바울은 3장 1절에서는 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하며 그들이 진리 안에 다시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고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변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이자 율법주의자들도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이를 뜻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어제 본문은 바울의 다소 격양된 어조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였다면 오늘 본문은 책망의 이면에 진리로의 회복을 소망하는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15-18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1절과 대조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본심입니다. 
    책망을 통한 진리로의 회복입니다. 
    사람들이 책망을 듣지 않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하는 시기에 방역을 소홀히 하는 아이들에게 방역 수칙을 잘 지키라고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마음에 방역의 중요성이 깊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강하게 말할 때는 아이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약속’의 중요성을 사람의 약속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예대로 말하노니’에서 ‘예대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조차 사람 사이의 언약, 즉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누가 깰 수 있겠느냐입니다. 
    이신득의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왔기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16a.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약속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16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16b.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네 씨’는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자손’을 뜻하는데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라 자손 중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을 믿지 못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후에 제정된 율법’이 폐할 수 없음을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이라는 숫자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시기를 뜻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 생활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언약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았던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약이 나중에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유업’의 문자적 의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재산’을 뜻하지만,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뜻합니다. 
    ‘유업’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넣어 18절 상반절을 읽어 보면,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은 무의미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갑니다. 
    이 진리는 바울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다음 구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21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 구절은 율법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인간이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범법이란 ‘기준이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뜻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난 것이 범법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았더라면 율법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인간다운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죄악된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율법은 인간의 범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율법이 제정되기 전, 인간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윤리가 무너지고, 심지어 양심조차 무너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율법이 없다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의 중요한 기능 둘째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역할 수행입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절의 ‘천사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 있었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란 하나님께서 중보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 중보자 모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음 구절이 알려줍니다.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중보자 모세는 백성의 편만 들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의 편에만 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의 역할이 중립자로서 양자를 연결하는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보자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중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중재자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제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중재는 실패합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았습니다. 
    흔히 생각할 때 모세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고 하겠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을 상황에서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변호해야 했으며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20절 하반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곧 하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셨기에 중보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용한 것인가 또는 저속한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러한 우려를 다음 구절이 불식시켜줍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19절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율법은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하나님의 악속들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능히 살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즉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전부 행할 정도로 도덕적으로나 의지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과 영적 무능력함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제한적 역할입니다. 
    율법이 제한적 역할을 하기에 온전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온전한 것이 올 것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22절)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킵니다(헤 그라패). 
    그렇다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은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에 속박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전부 다 지킬 수 없었으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죄 아래 갇혀 있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죄의 속박에 있는 자신을 건져내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 지금도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어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숙고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약속의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귀한 통로로 살아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선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 않게 하시어 저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시고, 약속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약속의 말씀을 매일 숙고함으로 저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전해지는 통로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약속의 말씀이 고난 중에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 중 ‘네 씨’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4.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이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은 크게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모든 인류가 죄 아래 놓였다
    이것을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을 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죄 아래 놓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수저, 베개, 이불, 몸에 지니는 주머니 등에 한자로 복(福)자를 새겨 놓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또 죽은 조상들을 극진히 섬김으로 조상들에게 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깨달은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들이 아무리 이 땅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이 땅에 보내주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단지 죄에서의 구원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이며 목적
    22절은 ‘그러나’로 시작을 합니다. 
    앞 구절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연결해 보겠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제사장 직분이 필요 없고, 메시야가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자는 구원에 이르게 하면 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자는 죽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게 되는 것은 바울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성경’이란 단어 앞에 ‘그’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신명기 27:26에 기록 된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으로 보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모든 백성을 율법으로 인한 죄 아래 가두시고 아멘하게 하여 확답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인간을 율법으로 인해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한 것일까요? 
    죄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직시하게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맺어주신 언약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되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의 기본적인 요점은 인간을 향상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서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한 연후에 그들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하고 마침내는 복된 씨(즉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기도 제목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가슴에 깊이 새겨지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 속의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힘이 생겨나도록 기도합시다.
    내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오늘 하루도 성도로 살아내길 바랍니다.


    저주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구속받음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8절과 22절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큰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이다. 
    법에 의하여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정부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둔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즉시 그를 가둔다. 온 세상이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 3:23, 10)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었던 저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옥”(벧전 3:19, 20)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슥 9:12)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 102:19, 20)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 7).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죄인을 이야기 해보자.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날에는 의심과 망설임이 많았고 쉽사리 자기 변호를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을 확신시키려고 구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 곧 사면팔방의 벽으로 둘러 싸여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큰 바위 아래 생매장시키는 것같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마치 율법의 돌비가 우리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같이 느끼고 한장의 대리석이 우리의 심장을 터지게 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우리가 받도록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심의 성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이 약속을 붙잡을 때에 즉시 감옥문은 활짝 열릴 것이며 그러면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25 고린도후서



    그리스도 안에 에서(로마서 8:1-2)

    1. 이 말씀에 대한 오해

    [롬 8:1-롬 8: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킹제임스 성경)-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봐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다. 죽을 때 잠깐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분명히 킹제임스 성경에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성령으로 살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2.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많이 썼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이 신약성경의 성구들을 컴퓨터에 입력시켜 밝혀낸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 주안에” “그 안에”라는 표현이 바울 서신 가운데 164차례나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 12:1-고후 12:2]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분명 사도바울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도 바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평범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사도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롬마서 16장 1-16절에 보면 27명이나 되는 로마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유심히 보아야할 것은 그가 즐겨 썼던 명칭이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였습니다.

    [롬 16:3-롬 16:3]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 16:7-롬 16:7]

    (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롬 16:9-롬 16:10]

    (9)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사도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광야 신학교에서 3년 동안 예수님의 계시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3.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안에”라는 전치사의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집안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로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의미를 충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5:1-요 15:5]

    (1)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에서 ‘내 안에 거하라’는 의미를 다음 구절에 예수님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안에”라는 정확한 의미는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붙어 있습니다.

    “안에”라는 의미는 연합이요, 하나님 됨입니다.

    [고전 6:17-고전 6:17]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포도나무에서 수액을 가지에 보냅니다.

    수액이 가지를 통해서 흘러가서 포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익어가는 것입니다.

    가지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지 스스로 절대로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지가 할 일은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만약에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곧바로 죽습니다.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내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내 의로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움으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예수님을 죽인 것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이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의 열매”는 생명과 멀어지고 그리스도와 멀어집니다.

    [롬 10:1-롬 10:3]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자의 의를 세우려고 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의와 멀어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자기의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너희의 아비가 마귀라고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의의 뿌리는 마귀입니다.

    단순히 범죄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단순히 범죄하는 것은 쉽게 깨닫고 회개를 하지만 자기의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깨닫고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무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요 14:20-요 14:20]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은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그때에 사도들과  성도들 약120명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과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가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을 하면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말씀을 믿는 순간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성령으로 믿는 것입니다.

    넓게 로마서 6장 전체 말씀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롬 6:6-롬 6:7]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갈 2:20-갈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6:11-롬 6:11]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4-롬 6:14]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22-롬 6:22]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이 말씀이 성령으로 믿어지게 되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 되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이 죽고 영의 사람이 되어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마음껏 사역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말씀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개역 개정)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공동 번역)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게 '신(하나님)의 존재'다.
    그러나 믿음의 은혜가 주어지면,
    아무리 안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는 게 신의 존재요 그가 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이시다.

    이렇듯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또한 '예수의 영'이라고도 불린다.
    그분이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위격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갈라디아서 3:26-28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둔 믿음으로 새 정체성을 얻은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죄된 옛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삶을 완전히 수용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우리가 성령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시키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경의 여러 구절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14; 빌립보서 1:1; 로마서 8:1). 골로새서 3:3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못 본 체 하시거나 그냥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건 공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죗값은 치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품으신 모든 분노가 자신의 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합당한 벌을 대신 받아 고통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요한복음 19:30).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지상에서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흘 후에 증명하셨듯, 지상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8:7; 마가복음 16:6; 고린도전서 15: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타락한 세상을 대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실 때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반역 행위의 죗값을 성공적으로 치르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 자신의 죄의 속전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전과 기록은 우리가 품었던 모든 죄된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아무리 정결하게 해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분과의 관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12). 성경은 우리의 원래 죄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우리와 위치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죄 목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는 예수님의 완전한 행위와 뒤바꾸십니다 (고린도후서 5:21). 십자가 발치에서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된 옛 본성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이 교환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불완전함 대신에 자신의 아들의 의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13; 히브리서 8:12).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우리의 죄의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며, 우리의 영생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18; 20:31).





    דַּעַת Storng number 1847

    1. 지식.  2. 지성 
    Pronunciation  [ daʽath ] 
    Etymology /  304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9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 4:1, 6:6(다앗 엘로힘)
    •  2. 명사, 여성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야다(yâdaʽ) יָדַע Storng number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Pronunciation  [ yâdaʽ ]  
    Old Testament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4:1, 왕상1:4), 알다(창4:9, 신9:6), 가까이 하다(창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해로동혈(偕老同穴)
     
    - 함께 해(偕), 늙을 노(老), 한가지 동(同), 구멍 혈(穴)
     -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으로, 생사(生死)를 같이하자는 부부(夫婦)의 굳은 맹세(盟誓)를 이르는 말.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의
    고사성어입니다.

    부부란 서로 믿고
    의지할 때
    진정한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할 수 있는 겁니다.

    젊을 때는 아내가 남편에 기대어 살고, 
    나이가 들면
    남편이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하여 여보, 당신 이라고 부릅니다.

    여보(如寶) 라는 말은
    "보배와 같다"는 말이고,

    당신(堂身)은
    "내 몸과 같다"  라는 말이랍니다.

    마누라는 
    "마주 보고 누워라"의 준말이고,

    여편네는
     "옆에 있네" 에서 왔다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귀한 보배요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세월이 가면 어릴 적 친구도,
    이웃들도, 친척들도 다 곁을 떠나지만...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은 
    아내요, 남편이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며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지
    바라보는 배필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마법" 이랍니다.

    남자(男子)는  불량품(不良品)이 많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같다. 
     
    흔히들 그런 얘길 한다. 
    "여자가 男子(남자)보다 훨씬 더 
    高尙(고상)한 作品(작품)이라고..." 

    男子(남자)는 혼자 살지 못한다.  
    신(神)이 남자를 만들어 놓고 보니 
    혼자있는 것이 
    정말 보기에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도와주는 配匹(배필)로 
    女子(여자)를 만들었단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남자를 도와준다.  

    밥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 주고, 
    잠도 자게 해주고, 때로는 엄마 같고, 
    때로는 딸 같고, 또 때론 아내 같다. 

    여자는 혼자서도 잘 산다.  
    남자보다 훨씬 高級(고급)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材料(재료)부터 다르다. 
    남자는 흙이요 여자는 뼈다.  
    그러니까 ㅡ여자가 훨씬 더 고급품 (高級品) 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아기도 여자에게 생기고 여자가 낳는다.  
    불량품인 남자에게 맡겨 놨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構造(구조)가 훨씬 
    고 단계임을 알 수 있다.  

    남자 혼자 살면 곧 廢人(폐인)이 되지만, 
    여자 혼자서는 짱짱하게 잘도 산다. 

    아무리 봐도 남자는 불량품(不良品), 
    여자는 고급품(高級品)임이 맞는 것 같다. 

    부부(夫婦)가 나이가 들어서 늙어가면 
    으례 남자(男子)가 먼저 죽어야 한다.  
    남자가 혼자 남아 있으면 
    돌보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 혼자 살아 있으면  
    그것만큼 비참(悲慘)한 건 없다.  

    살아 있을 때 
    아내와 시장(市場)도 자주 가고 
    가능(可能)하면 손도 잡고 같이 다니고 
    무거운 건 남자가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힘만 센 불량품(不良品)이니까.... 

    허허... 늙은 남자 혼자 
    구부정하게 터벅터벅 걸어 가는 뒷 모습~ 
    그것만큼 쓸쓸하고 
    처량(凄凉)해 보이는 건 없다. 

    남자는  살아 있는 동안 남자를 돌봐주는 아내에게 
    잘하면서 살아야 한다. 

    평생(平生)을 밥 해주고 나를 돌봐 준 여자(아내)는 
    이 세상(世上)에 무엇과도 
    비교(比較)할 수 없는 고마운 존재(存在)다. 

    어제 저녁에 
    아내와 시장(市場)을 다녀오면서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여보, 항상(恒常) 
    나하고 같이 다녀야 돼! 
    남자는 혼자서 다니면 
    참 쓸쓸해 보이고 안돼 보여...  

    여자는 혼자 다녀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남자는 불량품인 것 같아." 

    소소한 일로 다투고 돌아 누웠으면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고 잡아줘라. 
    그게 불량품 남자가 
    할 수 있는 역할(役割)이다. 

    그나저나 건강(健康)해야 
    영원한 불량품을 면할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親舊)분들의 
    건강(健康)을 응원(應援)합니다.






    12월 27일(토) 고린도후서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성경 구절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이며, 자신의 믿음이 참된지 스스로 점검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깊이 성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신하며, 복음 안에서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해 보이도록 촉구하는 권면입니다. 
    핵심 의미:
    • 자기 시험: 단순히 '착한 신자'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철저히 검토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 "확증하라": 시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그 증거를 찾아 확신하라는 뜻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예수님이 너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가짜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적용:
    • 일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이 성경적이고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자신의 믿음이 진정한지, 삶으로 증명하고 확신하라는 강력한 영적 도전의 메시지입니다.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

    1. 원문 의미 (헬라어 관점)

    • 시험하라 : πειράζετε (페이라제테)
      → 진위를 가려보는 시험, 검증

    • 확증하라 : δοκιμάζετε (도키마제테)
      → 불순물을 제거한 금속처럼 검증을 통과한 상태를 확인하다

    👉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성과 실제 상태를 점검하라는 강한 권면입니다.

    2. 말씀의 문맥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 바울의 사도권을 시험하고

    • 외적인 기준과 인간적 판단으로 신앙을 평가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시험하기 전에, 너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먼저 확인하라.”

    즉, 신앙의 기준은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가’ 입니다. 

    3. “확증하라”는 말의 핵심

    이 말씀은  “구원을 늘 의심하라”  “완벽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가
    믿음이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는가
    회개와 순종의 방향성이 있는가를 점검하라는 뜻입니다.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

    • 나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는가?

    • 내 믿음은 고백에만 있는가, 아니면 삶으로 드러나는가?

    •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건강한 자기 확증의 열매

    • 교만 → 겸손

    • 형식 → 진실

    • 자기의 → 은혜 의존

    5. 복음적 균형

    중요한 점은,

    확증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말씀이 아니라, 참된 믿음 위에 서게 하는 은혜의 초대입니다.


    확증할 수 있는가?

    확증하라. 확실히 증명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말에서의 확증은 두가지의 의미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첫째 확실하다. 둘째, 증명하다. 확실하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증명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실인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확증하라는 것은 틀림없이 진실이라는 것을 밝혀낸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확증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NKRV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확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지금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이 틀림없이 진실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밝혀낼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입니까? 매주 반복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매일 반복하여 드리는 새벽제단입니까?
    바울은 우리더러 시험하라고 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여 보고, 그리고 그것이 틀림없는 진실인지를 밝혀 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행동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잘 드렸는지, 헌금은 잘 드렸는지, 기도는 얼마나 하였는지, 봉사는 얼마나 하였는지, 우리의 행위 외에는 별다른 증명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복음서의 이 이야기를 들려드려볼까 합니다. 부자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눅 18:20
    누가복음 18:20 NKRV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 부자 관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님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자는 이 말을 듣고 근심합니다.
    다시 여쭙습니다. 행동으로 우리가 믿음안에 거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신앙의 행동으로 나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준에서, 행동은 믿음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책망만을 남길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저와 여러분이 함께 생각해볼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 거함을 확증할 수 있는가?

    결국 확증되는 것은 우리의 약함

    고린도후서 13장의 중심부에서 바울은 시험할 것과 확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확실하게 드러내고 증명되어진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약함입니다. 가장 확실하게 증명되는 사실이 고후 13:4 에 등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3:4 NKRV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 실로 약하셔서 십자가에 박히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실로 아무런 능력이 없으셔서 조롱거리가 되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아니죠. 그리스도께서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약하심을 택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스스로를 희생하신 것이죠. 그때 나타나는 강함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스스로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함이 스스로 낮추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록한 편지, 빌립보서 2:8-9 이 무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2:8–9 (NKRV)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강함을 확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낮추셨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 우리의 믿음이 이러하다를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계속하여 시험하고 확증하려고 할 때 마다, 번번히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약함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떠나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실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제자리 걸음밖에 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그것 밖에는 확증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2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3:2 NKRV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대로 우리는 용서함을 받지 못할 진노의 자식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까?

    바울의 진짜 목적

    오늘 말씀 속에서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진짜 목적이 등장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3:7 NKRV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이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사실 그는 오히려 용서하고자 이 편지를 쓰고 있음을 7절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엄포를 놓으며 시험하여 보라 확증하여 보라 이야기하는 까닭은 결국에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그 일행은 이 일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3:9 NKRV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바울과 그의 일행이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하여 집니다. 굉장히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3:3–4 (NKRV)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스스로 낮추는 겸손과 희생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셔서 이제 우리 안에 강함으로 역사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바울 역시도 그리스도의 길을 쫓습니다. 그가 약함으로, 희생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할 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강하고 온전하여집니다.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의 진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결국에는 스스로에게 아무런 소망 없음을 일깨우며, 그래서 그리스도 외에는 어떠한 강함도 없다는 것을 일깨우고자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살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무엇을 확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음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결국에는 우리는 실족하여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강하게 역사하시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 또한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동산의 모든 가족들이 스스로의 약함을 확인하여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래서 내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강함을 누리는 복된 하루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시험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제테”= ‘되돌아보다’. ‘자세히 조사하다, 살펴보다’라는 뜻.

    ‘노력하다, 분투하다, 책임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 말씀대로, 그 믿음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혹시, 나태하지는 않았나, 혹시, 게을러지지는 않았나,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나,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시험하고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후10: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그 사람은 주님과 동해하고 있는가?’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사람을 볼 때 얼마나 외모를 보나요? 가진 것 보고, 배운 것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을 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를 시험하고 뒤돌아보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시험을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눈을 돌리면 내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고후13장 5절을 읽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는가?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실패, 실격,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나의 눈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살피고 점검했다면 이제는 “나는 믿음이 있는가,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고 여러달 후에 한 분을

    담임목사로 청빈 위원회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이런 흠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청빙을 해도 될까요?”

    첫째, 이 분은 중년이 되엇는데도 결혼을 못했습니다. 둘째, 이 분은 목회를 하면서 가끔 사업도 하는 분입니다.

    셋째, 이 분은 외모가 너무 못생겼습니다. 넷째, 이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다섯째, 이분은 말이 너무 어눌해서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여섯째, 이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개척하면서 옮겨 다니십니다.

    일곱째, 이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누굴까요?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진 것 배운 것 일생 쌓아놓은 것일까요? 지위와 명예, 직분인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까?

    세상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낙제자 불합격자입니다.

     

    내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성공자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진단하고 바르게 검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내 영이 사는 길이요. 내 믿음이 바로 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참 신앙인과 신앙인답게 보이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참 신앙인은,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신앙의 불합격자이냐? 낙제생이냐? 실패자이냐?

    성도가 언제 실패자가 되고, 언제 불합격자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예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기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찬송과 헌신과 봉사.... 이런 것은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대화하고 사랑하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항상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여러분 건물을 잘 점검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 보셨죠? 다리를 점검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셨죠?

    건강진단도 잘못 점검되어 중병에 걸리는 분들... 자동차도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상태도 항상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지.. 내 봉사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지... 찬송 중에 소망이 있는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영적상태를 진단하고 체크하셔야 합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주님! 이 시간 주님의 말씀 듣고 제 마음을 엽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께 저를 맡깁니다.

    저는 매일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도함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봉사와 헌신이 온전히 주님께 집중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2월 26일(금) 고린도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즐겨내는 자(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즐겨(2431) 내는 자(1395)

    즐겨(2431) 히라로스(
    hilarŏs)  ἱλαρός, ά, όν

    1. 유쾌한.  2. 기쁜.  3. 즐거운 
    Pronunciation [ hilarŏs ]

    Etymology / 2436의 동일어에서 유래
    • 1.  유쾌한, 기쁜, 즐거운, 친절한, 은혜스러운, 고후 9:7.
    • 관련 성경  / 즐거운(고 후9:7).

    내는 자(1395) 도테스(dŏtēs)  δότης, ου, ὁ

    1.  주는 사람.  2. 고후 9:7. 
    Pronunciation [ dŏtēs ]
    Etymology  /  1325의 어간에서 유래
    •  1. 주는 사람, 고후 9:7.
    • 관련 성경 / 내는 자(고후 9:7).


    한글개역 성경에 연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13구절(구약 2, 신약 11)
    대하 34:9, 14. 막 12:41, 43, 눅 21:1, 요 8:20, 고전 16:1, 2, 고후 8:2, 20, 9:5, 11, 13

    헌금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2구절(눅 21:1, 4) 

    헌금과 연보의 차이

    헌금(獻金)이란 한자의 뜻은 "드릴 헌" "쇠 금"이라고 합니다.
    헌금의 사전적 정의는"돈을 바침. 또는 그 돈" 또는 "주일이나 축일에 하나님에게 돈을 바침. 또는 그 돈."을 말합니다.

    γαζοφυλάκ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1049

    1. 보고.  2.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3. 금고 
    Pronunciation [ gazŏphü- lakiŏn ]
    Etymology / 1047과 5438에서 유래
    • 1.  [문자적으로]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금고, 보물실, 막12:41,43, 눅21:1, 요8:20.

    •   관련 성경  /  헌금함(막 12:41, 눅 21:1, 요 8:20). 

    연보(捐補)란 한자는 "버릴 연" "기울 보"라는 훈으로 사전적 정의는 "자기의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줌." 또는 "주일이나 축일에 하나님에게 돈을 바침. 또는 그 돈."을 말합니다.

    따라서 헌금(offering. gift)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돈)을 말합니다(고르반, 도라).

    κορβᾶν Storng number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Pronunciation [ kŏrban ]
    Etymology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 1. 고르반, 예물, 막 7:11.
    • 관련 성경  /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δῶρον, ου, τό Storng number1435

    1. 선물.  2. προσφέρειν δ. : 선물을 가져오다.  3. 히 11:4.  
    Pronunciation [ dōrŏn ]

    • I.  [기본형] 선물, 선사품, 예물.
      • 1.  [일반적으로] [주] προσφέρειν δ.: 선물을 가져오다, 마2:11, 엡2:8, 계11:10.
      • 2. [특히, 제물을 가리켜서] 히11:4.
        • a.  [주]
        • b. εἰς τὰ δ. βάλλειν: 제물을 넣다, 드리다.
        • c.  προσφέρειν τὸ δ.: 그의 제물을 가져오다, 마5:23,24, 8:4, 히5:1, 8: 3,4, 9:9.
        • d.  ἀφιέναι τὸ δ.: ~의 제물을 남겨두다, 마5:24, 23:19, 막7:11.
    • 관련 성경  /  예물(마 2:11, 히 5:1, 계 11:10), 헌금(눅 21:1, 4), 선물(엡 2:8). [동] 드리다.



    연보(contribution. collection)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바치는 예물(돈)이라고 하겠습니다.

    헌금은 위로 향하는(하나님) 물질적 나눔을 말합니다.
    연보는 옆으로 향하는(이웃과 교회) 물질적 나눔이라고 하겠습니다.

    뉴욕 파트리스교회의 헌금과 연보에 대한 신앙적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十一條)는 신앙의 의무
    감사(感謝)는 신앙의 생활
    선교(宣敎)와 구제는 신앙의 실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려면 필요한 물질이지만 그 물질을 나를 위하여 먼저 사용하지 않고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이웃과 다양한 기관들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믿음을 갖추는 것이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자체를 의미하며 '도라(dora)'나 '고르반(qorban)'이라고 합니다.
    연보는 '내어 놓아 남을 돕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나 교회 간의 교제(코이노니아)를 위한 모금을 의미하며 성경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요약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연보는 '나누고 돕는 돈(구제금)'으로, 목적과 사용처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헌금 (Offering/Gift)
    • 의미: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예물.
    • 어원: 헬라어 '도라(dora)' 또는 '고르반(qorban)'.
    • 특징: 예배 때 드리는 십일조, 감사헌금 등.
    • 목적: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감사. 
    연보 (Contribution/Collection)
    • 의미: 가난한 자를 돕거나, 성도 간의 교제(코이노니아)를 위해 '내어 놓아 나누는 돈'.
    • 어원: 한자어 '捐(내어놓을 연)', '補(도울 보)'.
    • 특징: 바울 서신(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등)에서 강조된 성도들의 구제 헌금 (예: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
    • 목적: 이웃과 교회를 돕는 나눔과 섬김, 교제. 

    핵심 차이
    • 방향 : 헌금은 '위(하나님)'로, 연보는 '옆(이웃/교회)'으로 향하는 물질적 나눔.
    • 용어 :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헌금'이 더 적합하며, 성경적 의미의 '나눔'을 강조할 때는 '연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 기쁨으로 드리는 연보
    고린도후서  9:1-15
     

    고린도후서 9장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며,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의 원칙과 결과를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통해 풍성한 연보가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연보의 준비와 동기(9:1-5)

    열심과 준비(9:1-2)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열심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작년부터 준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에게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준비의 중요성(9:3-5)

    그러나 내가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물론이고 우리가 믿던 것까지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전에 약속한 너희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자발적 헌금의 원칙 (9: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 (9:8-11)

    하나님이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사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나니,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하면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헌금의 결과(9:12-14)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많은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그들에게와 모든 사람에게 순종함으로 복종하며, 그들로부터 오는 기도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라.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께 감사(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해석 : 기쁨으로 드리는 연보

    1. 연보의 준비와 동기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연보를 준비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열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연보가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열심과 준비 : 고린도 교회의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준비의 중요성 : 연보는 미리 준비하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헌금이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을 통해 헌금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자발적 헌금의 원칙 : 헌금은 인색함이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 :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와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연보(연보)(2129) 유로기아( ĕulŏgia)  εὐλογία, ας, ἡ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Pronunciation [ ĕulŏgia ]  
    Etymology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축복(고전10:16, 히12:17), 아첨(롬16:18), 연보(고후9:5), 복(롬15:29, 갈3:14, 엡1:3, 벧전3:9), 찬송(계5:12,13, 7:12).


  • 헌금(1049) 가조푸라키온(gazŏphü- lakiŏn) γαζοφυλάκ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1049

    1. 보고.  2.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3. 금고 
    Pronunciation [ gazŏphü- lakiŏn ] 
    Etymology  /  1047과 5438에서 유래
    • 1. [문자적으로]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금고, 보물실, 막12:41,43, 눅21:1, 요8:20.
    • 관련 성경  /  헌금함(막12:41, 눅21:1, 요8:20).



    구약

    헌금은 제물과 구별되며 구약에서부터 존재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민 31:5)

    하나님께 드려서 간직한 후 공적으로 사용(수직적 수평적 의미)

    내게 주신 것 중에서 이것은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봉헌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행위

    대하 34:9, 34:14

    신약

    복음서 

    막 12:41, 43 눅 21:1,4, 요 8:20


    연보
    연보는 신약의 교회가 이웃이나

    교회의 필요를 특정한 목적을 갖고 사용할 목적으로 준비 (수평적 의미)

    롬 15:26,

    고전 16:1,2

    고후 8:2,20,

    고후 9:5,11,13


    차이점


    1. 목적: 연보는 타인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며,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적 행위입니다.

    2. 대상: 연보는 가난한 이웃이나 교회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표현으로 드려집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 교제)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후 9:13)

    사람을 섬기는 연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됨

    3. 의미: 연보는 이웃 사랑과 구제의 의미를 강조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을 나타냅니다.


    헌금과 연보의 복음적 구분

    1. 구약의 헌금 — 제사 제도의 일부

    • 구약의 헌금(제물, 십일조 등)은 제사 제도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습니다.

    • 이는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상징적 제사 행위였고,

    • 성전 중심의 신앙 구조 안에서 필요했습니다.

    • 그러나 이 모든 헌금과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히 10:10–14).

    • ➤ 예수께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모든 제사를 끝내셨습니다.


    2. 신약의 연보 — 사랑의 나눔

    • 신약에서는 헌금(獻金)이라는 말보다 **연보(聯譜, ‘모아 보탠다’)**가 사용됩니다.

    •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연보를 “은혜의 일”이라 부릅니다.

    •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 성도 간의 사랑과 섬김으로 복음의 열매를 나누는 일입니다.

    • 초대교회에서 연보는

    1.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해(고후 8:4)

    2. 복음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빌 4:15–18)

    3. 시행되었습니다.


    3. 헌금 개념의 오용

    • 오늘날 교회는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돈”**으로 표현하지만,

    • 이는 신약의 복음 이해에서 보면 율법적 표현입니다.

    • 하나님은 “은과 금이 다 내 것이라”(학 2:8) 하셨고,

    •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 헌금을 많이 드리면 복을 주신다는 식의 가르침은

    • 거래적 신앙이며,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4. 복음적 헌금의 원리

    • 신약에서 헌금(또는 연보)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의 반응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 즉, 감사와 자발성, 그리고 복음 전파의 목적이 중심입니다.

    • 예배 중 헌금은 예배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 감사와 순종의 표현으로 포함될 수 있을 뿐,

    • 예배의 본질은 아닙니다.








    12월 25일(목) 고린도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라 지금은(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보라 지금은(Now is the time) 

    이두 눈(ιδου νυν)
    ἰδού Storng number 2400

    1.  보라!.   2. 눅 22:10.  3. 마 1:20   
    Pronunciation [ idŏu ]
    관련 성경  / 보라(마 1:23), 보다(계 6:5)

    3568. 지금 νῦν( nün)

    1. 지금.  2. 눅 16:25.  3. ἔρχε- τ αι ὤρα καὶ ν  
    Pronunciation [ nün ]  
    관련 성경  / 지금(마 24:21, 눅 19:42, 살후 2:6), 방금(요 11:8), 현재(롬 8:18), 이때(요 4:23), 벌써(요 16:32), 금생(딤전 4:8).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사 49:8의 인용이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첫번째 질문은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두번째 질문은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인가?
    세번째 질문은 각각의 일에 가장 합당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합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보라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때를 말합니다.
    그 시간에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시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특징을 이렇게 강조합니다(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이러한 믿음을 역설적 신앙(Paradoxical faith)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순리적 기능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순리적 기능을 오히려 뒤집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나라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경제적인 위기는 나라 빚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4,632조는 국민 1인당 8,963만원

    이념적인 위기는 좌우 대립으로 인하여 팽팽한 대결구도를 형성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 비율은 4점 만점에 3.52(2024년 기준)
     
    선진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랑하지만 금융권에서 겨우 40위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100대 은행 가운데 한국계열의 은행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모든 성도들에게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사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때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모두 마음과 뜻을 모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합시다.

    '보라 지금은'은 성경 구절, 특히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구절의 일부이며, 지금이 바로 하나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을 절호의 기회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는 믿음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닥쳐올 때 은혜와 복음이 가장 중요한 무기이자 도구임을 상기시키며, 현재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요 의미
    • 은혜의 시기 :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라는 점을 선포합니다.
    • 구원의 날 : 현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 지금에 집중 :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믿음과 은혜에 집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적 근거
    • 고린도후서 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이사야 49:8: 이 구절의 인용 출처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누가복음 12:49-53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인생살이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고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좀 더 선량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사회구조적 악에 대해 신자들로 하여금 눈감고 체념하는 숙명론적 태도를 갖도록 그릇 인도함으로써 불의한 현실을 은폐하고 합리화해주는 역할을 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역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인식하여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결코 둘로 나뉠 수 없는 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신념 아래 복음을 선포하고 교인을 양육하며 힘닿는 대로 사회 참여도 하는 일부 깨인 교회를 제외하고, 대다수 한국교회는 아직도 구시대의 망령인 흑백 도식적 이분법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전혀 별개이거나 심지어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개인 구원, 그것도 개별적 신자들의 영혼 구원만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물론 이런 평가에 대해 소위 보수 신앙을 가진 목회자와 교인들은 거부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참된 그리스도적 구원은 개인 영혼의 구원이며 이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 건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와 신자들의 노골적인 정치 참여는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서의 전통에 비추어 용납될 수 없다. 개인 구원이 먼저이고 사회 구원은 나중이다"라고 응수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복음의 비정치적 선포와 복음의 정치적 선포가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30년 가까이 보수 교회와 진보 교회,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신앙생활을 해온 내 경험에 비추어, 교리와 신학을 놓고 보수가 옳으냐 진보가 옳으냐를 왈가왈부하기보다는,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의 태도를 기준점으로 해서 과연 어느 쪽이 예수의 입장에 더욱 근접하고 있느냐를 겸허한 자세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서 무엇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예수의 활동 영역이 세상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활동 공간은 폐쇄적이지 않다. 예수의 관심사는 세상, 세상 사람들, 인생살이의 온갖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현실에 집중된다. 예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 아래 다수의 힘없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힘겹게 이어가는 잘못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한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힘 있고 가진 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분노로 표출된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종교와 정치, 하나님나라 복음의 선포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해방, 불의한 권력의 몰락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 회복, 예루살렘과 갈릴리,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 기도와 행동, 기적과 사회에서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주체적 자의식의 회복,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시각과 전망과 분석 가운데서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눅 12:49)고 단언하는 예수.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 아느냐?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눅 12:51)고 거짓 평화의 세상을 향해 폭탄선언을 하는 예수.

    보수 신앙의 교인이든 진보 신앙의 교인이든 우리 모두는 예수의 이 신념에 찬 믿음 앞에 자신을 겸손히 세우고 '내가 이 세상에 질러야 하는 불은 무엇이며, 내가 분열을 일으켜야 할 이 땅의 거짓 평화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12월 24일(수) 고린도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의 편지(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 합니다.
    향기가 아니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불행을 퍼붓는 편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You are a letter from Christ)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편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의 행동과 변화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을 뜻하며, 21세기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됩니다. 

    성경적 의미 (고린도후서 3:1-6)
    • 우리가 곧 편지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우리가 너희에게 쓴 편지"이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 삶으로 증거하는 복음 :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격이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이며,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님을 읽고 알 수 있게 됩니다.
    • 성령의 역사 : 이 편지는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되며, 행함이 있는 믿음과 삶의 변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
    • 내용 : 한 독실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쓰게 했다고 전해지는 아홉 편의 편지 모음집.
    • 주제 :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영적인 정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1-6)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여 편지라는 말을 두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지라는 것은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취하게 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 문화의 하나의 형식입니다. 
    흔히들 "그 문화 수준이란 그 사용하는 종이의 분량만큼 평가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문화인이요, 문화 국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종이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주로 휴지만 사용하는 터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휴지 외에도 여러 가지의 용도가 있겠습니다만은 그 가운데서도 편지를 많이 받고 많이 쓰고하는 것이 문화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라는 말을 써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편지란 서로의 소식이나 용건을 알리며, 그리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수필이나 소설, 시와는 달리 쓰는 사람이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받는 대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 속에는 보내는 사람의 인격과 구체적인 소원이며, 뜻이 숨김없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에는 그 대상과 목적 또는 방법에 따라 몇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공적으로 다른 단체에게 보내는 공동의 서한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수신자 외에는 절대로 뜯어 볼 수 없도록 사인이나 인장을 찍어 밀봉을 한 비밀 편지입니다. 이런 편지중 하나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보낸 요압 장군앞으로의 편지입니다. 만약 우리아가 자기를 죽게하라는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아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어인이 찍힌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고 그대로 갖다바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즈음도 밀봉된 편지는 비싸고 개봉된 편지는 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편지는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서 보내는 것임에도 아예 신문 같은 것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읽고 모든 사람이 평가해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후서 역시 공동 서한이면서 공개 서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글로서 표현되는 것이기에 몇가지 장단점의 특징을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단점으로서는, 첫째 얼굴과 얼굴을 볼 수 없는 가운데서 편지를 쓰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100퍼센트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라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하는 것 만큼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 만큼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단점은, 전해진 편지는 자기 나름대로 읽기 때문에 전해진 다음에 오해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편지로는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 충고나 감정적인 이야기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한 가운데 서로의 의견을 듣고 감정을 읽으면서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닌 피차 일방적인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편지가 갖는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계속 남아 보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결국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글로 쓰여진 편지는 계속 남아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 쓰여진 편지는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테이프 등 보다 종합적이고 편리한 매체들이 많이 있지만, 책은 자기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이므로 여전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편지는 반복해서 읽고 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칫 놓치고만 문장이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손치더라도 거듭 읽고 생각하므로 그 뜻을와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는 모든 사람이 볼 수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남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귀한 본문을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글로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오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글이라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해 주었으므로, 오늘 이 시간까지 성경을 읽을 수가 있으며 복음에 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글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글이 종이가 발달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어디에다 쓰여졌는가 할 때, 초기에는 주로 돌에 새겨졌으며 그 다음에는 나무에 그리고 제일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잘 손질하여 거기에 글을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진 것 중에는 성경책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특별히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파피루수(papyrus)라는 갈대의 껍질을 벗겨서 엇갈리게 붙여 평면을 만든 다음 거기에 글을 썼던 것인데, 그런 이후에 여러 가지 발달 단계를 거쳐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와 같은 좋은 종이에 글을 쓰며, 또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편지는 먹이나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며, 또한 돌비나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쓴 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비에 쓰는 아주 신비로운 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제 편지의 내용인 1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혹 너희에게 맡기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며 천거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쓰게된 것에는 그만한배경이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한 교회였습니다. 어렵게 세운 교회이지만 교회내에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고 보니, 분쟁이 일게되고그 분쟁은 장점은 덮어 놓은 채 단점을 보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가운데 마침내 사도 바울을 들추며 시비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사도 바울의 인격을 건드리고 소명을 건드리며, 심지어는 그의 사도권까지를 비판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도냐?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하나라도 된다는 말이냐?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사도란 말이냐?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며 죽이려던 자가아니냐며, 사도 바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내가 굳이 사도라는 천거서를 가지고 다녀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호의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가 공동 사인을 한 추천서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제 와서 새삼 추천서를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리고 나에 대한 추천서는 곧 너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있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부흥되어 왔으며 너희들이 예수를 믿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도 내가 전도하여된 것일진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내가 너희 앞에 사도라는 증명서를 보여 주어야 하겠느냐? 나에 대한 추천의 글이 따로 없다. 너희 자산이 바로 나에 대한 편지요, 사도라는 증명서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는 여기 한 어머니가 있다고 할 때에 내가 어머니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도 그 곁에 아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증명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면, 서양 사람들은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게되면 우선 손가락부터 보아서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프로포즈를 할 수가 없고, 만약 다행히 끼워져 있지 않으면 마음놓고 프로포즈를 하여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반지가 기혼자와 미혼자를 구분하는 표시가 되는 셈인데, 저는 그 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하나 낳아서 붙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보다 더 분명하고 좋은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의 이야기입니까? 너희가 있다는 것이 바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의 편지인 동시에 이미 모든 사람앞에 공개된 편지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를 두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바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나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디한 두 사람이냐는 것이며, 이미 많은 사람이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여서흡족해 하고 있는 터인데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나를 두고 저 사람이 사도이냐? 아니냐며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돌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를 보아서 열매를 알고 열매를 보아서 뿌리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사람됨과 사도됨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역을 보아서 압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그로 인해서 전파되는 복음, 곧 그 복음 안에서 구원받는 백성들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요, 바울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고린도 교회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말하는바에 의하면, 가정 방문을해보지 않아도 3개월 동안만 가르치면서 지켜보면 이 아이가 부유한 가정의 아이인지 아닌지,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 어머니의 성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고 나쁜 것, 동생 혹은 형이 있고 없고 등 그 아이가 어떤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바로 그 부모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인격이나 지식, 철학 등 바울의 그 무엇을 써서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썼으나 그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썼다고 하여 바울 자신의 경험이나 좌우명, 인생관을 쓴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이 쓴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편지를 읽는 자가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고 뜻과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새겼습니다. 보다 신학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케리그마(kerygma)적 신앙을 조각했다고 하겠습니다. 이 케리그마적 신앙이란 말뜻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오셨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죽으셨으며,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부활하시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케리그마적 메시지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 전해진 메시지이며, 오늘 여기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도 물고기를 잡겠다며 갈릴리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부문이 매우 언짢게 느껴지고는 하는데 성경은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 바에 의하면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만 같습니다. 즉 "예수님 제가 보이지 않거든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간 줄 아십시오. 그리고 찾지 마십시오. 저 같은 것을 제자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만 당하십니다. 어떻게 제가 다시 예수님의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믿을 인간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사양하겠습니다."하고서는 갈릴리로 갔던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신분을 사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올 때에도 손바닥만한 성경책 한 권 핸드백 속에 집어넣고 달랑 달랑 나오다가 누군가가 "어디가니?"하고 묻기라도 하면 "놀러 간다"하고 마니 이런 것이 다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상당히 겸손한사람이 있어서 "저런 것이 다 예수를 믿어"라고 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우선은 겸손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언제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도 하고 배지들도 많이 다는데 문제는 그 목걸이 그 배지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자동차 뒤에 '잌스투스' 라는 물고기 마크를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서 주면서 달라고 하여도 그것 달고는 아무데나 차를 댈 수 없지 않느냐며 싫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붙이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따라서 어디를 가나 편지인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보이며,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난 다음에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마리 있는 것입니다. 누구이든 한 번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군", "나도 예수 믿어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편지가 육의 심비에 쓰여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마음의 비석에다 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 깊이에 새겼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말씀은 영으로 받고 신령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성경 공부를 할 때에도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저것은 어느 책에 있는 내용인가? 혹은 무슨 신학인가 하며 잡다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화하사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지금 내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말씀이 내 마음의 비석에 깊이 깊이 새겨져 어느 사이에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심령이 변화되어 나의 생각, 나의 언어, 나의 행동, 나의 가치관 등 내 인격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마침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될 때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며 그 새겨진 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옥토에 떨어진 겨자씨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을 내고, 그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똑하게 쓰여진 편지, 순수하게 쓰여진 복음의 편지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생각할 것은 우리 개개인도 사도바울처럼 누구의 마음엔가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는 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에게든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야한다는 말입ㅡ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진 편지가 또 다른 편지를 쓰게 되고 읽혀질 수 있도록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2:2 말씀에 보면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는 큰 글자로 분명하게 써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새겨져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우리의 얼굴을 대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되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 합니다.
    향기가 아니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불행을 퍼붓는 편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便紙)

    오늘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편지에는 편지를 쓴 사람의 혼과 가슴의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에는 우리가 세상에 예수님을 홍보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님의 깊은 마음과 열정과 아름다움을 보이고 전해야 한다는 강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변화된 고린도교인들이 바로 사도들의 사역을 증명해 주는 추천서이며 사도들의 마음에 새겨진 편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거짓선지자나 사이비 이단들을 구별하기 위해 권위 있는 사도들의 추천서가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2절에는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 쓰고, 3절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도들의 편지가 성경이 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편지는 곧 예수님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분은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었고 그들의 메시지는 곧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씀합니다(엡 2:20). 따라서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85%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보여 져야 하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읽게 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1

    변화된 삶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변화된 삶은 뭇사람들이 보고 읽을 수 있는 살아서 움직이는 편지라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변화된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엄청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30여 년 전 구한 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선교사님들의 편지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음행과 도박과 술로 인한 방탕함이 진한 구름처럼 덮여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복음이 펼쳐지고 사회가 변화되고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술을 철저하게 억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오기 위해서 술을 먼저 끊어야 한다는 지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이지만, 남편들의 술과 도박과 음행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여성들이 아기를 업고 새벽기도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능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거룩한 부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2

    말씀으로 늘 새로워지는 마음

    고린도후서 3:3절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옛 언약은 인간들의 마음 밖에 있는 돌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다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속에 두며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지키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이 새 언약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새 언약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접하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우러나와야 합니다(inside out change). 연애편지를 읽듯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119:9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시편 119:11절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에베소서 5:26절은 교회가 말씀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3

    성령을 따르는 삶

    우리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언제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끌려 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하고, 6절은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에 쓴 율법조문은 우리가 그 기준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데 반해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새 언약은 우리를 살리는 역할,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을 4개의 키워드로 설명하면, 생각-순종-고난-기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영의 생각을 합니다.

    <순종>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그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순종합니다.

    <고난>

    로마서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기도>

    로마서 8:26-27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 각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으십니까? 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들의 생명을 매일 매일 연장 시켜주고 계신다고 믿으십니까?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들 스스로 만족스럽고 떳떳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이 가져야할 우리들의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며 일평생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딸이 되도록 특혜를 주신 바 있으나 오늘은 하나님의 딸과 아들들에게 그들이 맡은 일들을 하게 함으로 그로 인해 일평생 행복하도록 행복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 또 ‘새 언약의 일꾼’임을 분명히 밝혀주면서 우리들로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의 일꾼의 삶을 살므로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의 일꾼의 역할을 감당하시므로 일평생 행복하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그리스도의 편지(1-5) [2]새 언약의 일꾼(6)입니다.

    [1]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그리스도의 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충동에 휘말린 고린도 교인들 중에 사도 바울이 신임장이나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짜 사도이며, 자기 자랑을 일삼고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험한 비난을 받아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도 편에 보냈던 눈물의 편지를 통해 이젠 전세가 역전되어 사도 바울에게 거짓 사도라고 뒤집어 씌운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거짓 복음으로 판명되어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과 이들에게 놀아난 무리들을 징계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진리로 재무장하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현혹되었던 문제가 바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이었습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인 자기들은 추천서 즉 자격증을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의 어떤 추천서를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요 자칭 사도라는 것이었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그가 가르친 진리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어떤 선지자들이 와서 그럴듯한 자격증을 내 놓고 그렇게 교인들을 설득시키면 상당수의 교인들이 이에 현혹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몇몇 성도들이 거짓에 유혹되어 사도 바울을 향해 거세게 비난을 하고 도전하는 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여건이 되므로 사도 바울은 추천서를 갖고 있다는 그들이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이고 자신이 진짜 사도라고 강조하다보니 그 반대파들이 볼 때에는 자기 자랑이나 내 놓고 자신만이 옳고 남들은 옳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어 더욱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짓에 유혹을 당했던 무리들도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사도 바울로는 자신을 가지고 추천서가 없는 자신과 추천서가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여 진리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왜? 자기가 자신을 소개해야하는 그런 절차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말문을 열게 됩니다. 추천서와 이력서는 언제 필요한 것입니까? 처음 입사할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일을 하고 퇴직했는데 그 때에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한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는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도시에 주후 54년경에 가서 1년 6개월 동안 어려움을 무릅쓰고 우상과 부패의 대명사 고린도 도시에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는 성도가 태어나게 하므로 고린도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기적을 이룩했었는데 지금 고린도 후서를 쓰고 있는 시기는 주후 60년경인 것입니다. 전도한지 5-6년이 지난 그 때에 편지하기를 내가 왜? 이제 와서 무슨 추천서나 자격증을 고린도 교회에 내놓아야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추천서가 없는 사도 바울 자신과 추천서를 가지고 자랑한 거짓 선지자들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문서로 추천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가 자기를 사도로 세웠다고 한다면 어떤 문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직접 부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발행하시지 않은 사도증을 어디에서 얻어 가지고 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문서로 된 사도증을 가지고 다닌다면 그가 진짜 가짜 사도임을 증명하는 사도증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무슨 추천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이미 1년 6개월간 고린도 교회에서 개척전도를 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겪고 참으면서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 하나하나를 심히 사랑하며 사귄 나머지 고린도 교인들의 한분 한분이 지워지지 않을 사도 바울의 마음에 다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울어나는 사랑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또 이미 수년간 사도 바울의 신앙 지도를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드려 이미 구원받는 자리에 들어섰고 삶이 변화되어 변화된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완연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죽을 영혼이 구원받고 또 삶이 변화되게 한 그 사실이 지을 수 없고 살아있는 추천서인데 또 다른 무슨 추천서가 있어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다 되었으므로 그렇게 되도록 사역을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므로 사도 바울이 그것 말고 어떤 다른 추천서가 전연 불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랑거리로 휴대하고 다니는 추천서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추천서가 진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써온 추천서는 종이에 먹으로 쓴 것이나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추천서는 사람들의 마음 바탕에 영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행위로 구원받는 다고 가르치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것은 틀린 진리라고 가르친 것에 빗대어, 거짓 선지자들은 돌 비에 쓴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추천서는 영으로 육의 심비에 즉 사람들의 마음에 썼다고 설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 비와 하나님의 영’은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 판을 비유한 것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율법과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복음을 대조하기 위해 표현된 것입니다. 즉 추천서나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는커녕 멸망의 자식들이 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명히 밝혀주어 고린도 교인들이 다시는 거짓 선지자에게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판단력을 키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는 6절의 새 언약의 일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비교가 자세히 나오지만 옛 언약 즉 구약인 율법을 지켜 나가는 인간의 행위로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새 언약 즉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고린도 교회를 혼란케 한 거짓 교사들은 사람을 결과적으로 멸망케 한 율법을 소개한 율법의 일꾼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파 무리들이 사도 바울은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고 비난했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잘나서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된 것이며, 모든 확신과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에도 자기 소개서가 거창한 추천서가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자기 교파나 조직을 키워 사람의 명예를 높이며 사람수에 따라 자연히 늘어나는 재정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활용하는 일꾼들이 얼마든지 가능한 이 때에 추천서가 있는 거짓 일꾼들 중 복음에 어긋난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이 아니라는 판단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겠다는 교훈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나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므로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시고 가르친 모든 것을 실천하므로 이를 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배운 것을 일상 생활에서 적용하므로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2쳔년이 지난 지금에는 직접 볼 수 없으나 우리 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대략 보여줄 수 있는 작은 그리스도들이 다 되라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를 생각하며 기도로 얻은 응답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다른 길을 원하지만 그리스도라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을 것으로 믿어지면 바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삶은 고되고 손해보는 길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가라는 길을 간 사람은 그 마음이 행복하며 만족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의 삶에 복을 부어주시며 주님 오실 때에 눈물과 모든 고통을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새 언약의 일꾼들이 다 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오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며 성경이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 시대에 있었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지금에는 더욱 폭이 넓어져 있습니다. 많은 교파와 많은 지도자가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멧세지를 전하는 성실한 종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어떤 종들은 구원과 상돤없이 자기 몸만 실찌게 하는 종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많은 선택이 있습니다. 새 언약의 종이란 어떤 교파가 만든 교리나 어떤 학자가 만든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던지간에 보다 성서적인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하더라도 주님이 성경에 가라하신 길이 아니라면 그 길을 가는 것은 보장이 없는 길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 욕심을 위해 성서적인 길을 알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들을 현혹하는 교파도 교회도 많습니다. 그 중에 어떤 교회가 보다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인지를 분간하여 보다 성서적이며 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 생활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판단 기준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제일 안전하겠지? 하는 말도 들어 보았습니다. 많이 몰린 통일교나, 여호와의 중인이 올바른 교회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수가 많은 교파가 장로교이니 그 교파가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결론을 내리는 기준이 옳지 않습니다. 오직 기준은 어느 길이, 어느 교회가 보다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냐여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 새 언약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거짓 선생들의 비방에 대한 변호와 주장(10-12장)

    바울은 자신의 외적 모습(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음)에 대한 지적하는 것에(10:10-11) 대해 외모만 보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책망하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짝하며 비교할 수 없으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고(10:12, 17), 자신이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11:16). 바울은 교회를 위한 사랑과 염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11:23-30). 아울러 바울은 자신이 지극히 큰 환상과 계시를 보았음에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탄의 사자를 주셔서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을 강조한다(12:7-10). 그리고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12:11-13).

     

    5)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말함(12-13장)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교회에 가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재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인 것임을 강조하면서(12:14-21), 이번에는 약속이 변경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갈 수 있도록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뿐만 아니라(13:1), 이번에 가게 되면 전에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며(13:2),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확증하며, 너희가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온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밝힌다(13:5-10).

     

     

    1. 특징

    1) 솔직하고 자서전적 서신

    고린도전서가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하여 필요한 내용들을 순차적으로 대답함에 비해, 고린도후서는 바울 스스로가 포착한 문제들에 대해 공격적 어조로 변호하며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바울의 심정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 극과 극의 감정, 즉 자랑과 약함, 감사와 노여움, 엄격과 부드러움이 교차적으로 나타나 인간 바울의 풍부한 감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덕스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위대한 목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2) 복잡한 구조 속에 드러나는 복음의 진수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에 비해 구조가 복잡하다. 여러 학자들은 고린도전서에서 후서로 들어설 때는 마치 정연한 공원길에서 길도 없는 숲을 헤치며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 가운데 고린도후서만큼이나 번역자들과 해석자들을 난관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없다고 할만큼 복잡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나 자신의 사도권을 두서 없이 변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은 새 언약의 일꾼임을 밝히면서 돌판에 새겨진 외적인 율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해야 하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새 언약인 복음의 가르침에 더욱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3) 다양한 비유를 통한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강조

    본서에는 고린도전서의 부활장(15장)과 같은 독특한 신학사상을 강조한 내용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자신과 성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표현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향기(2:14-17), 그리스도의 편지(3:3), 보배를 담은 질그릇(4:7), 새로운 피조물(5:17-19), 그리스도의 사신(5:20), 하나님의 성전(6:14-18) 등의 표현 등 성도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1. 구조

    1) 인사말(1:1-11)

     

    2) 사도권에 대한 소극적 해명(1:12-7:16)

    ① 해명을 시작하는 말(1:12-14)

    ② 고린도 방문 계획의 변경에 대한 해명(1:15-2:13)

    ③ 사도직의 확실성과 그에 대한 바른 자세의 해명(2:14-5:10)

    ④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사도의 직무(5:11-7:16)

     

    3)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8:1-9:15)

    ①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연보의 모범(8:1-5)

    ② 구제 연보의 권면(8:6-15)

    ③ 구제 연보를 위한 위원 파견(8:16-9:5)

     

    4) 사도권에 대한 적극적 주장(10:1-13:10)

    ① 사도권에 근거한 권징의 의지(10:1-11)

    ② 사도권을 입증하는 구체적 증거들(10:12-12:10)

    ③ 사도권 주장에 대한 최종 변론(12:11-13)

    ④ 세 번째 고린도 방문 계획 예고와 결론(12:14-13:10)

     

    5) 끝인사(13:11-13)





































    2025 고린도전서



    나라 사랑(愛國心)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책임과 윤리, 그리고 이웃 사랑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나라 사랑의 의미

    • 공동체에 대한 책임 : 내가 속한 나라의 질서, 정의, 평화를 지키는 데 참여하는 것

    • 역사와 희생에 대한 존중 : 이전 세대의 수고와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

    •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 :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사회에서 살도록 가꾸는 마음

    2. 성경적 관점

    • 공동선 추구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예레미야 29:7)
      → 하나님 백성은 자신이 사는 땅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 질서와 책임 존중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1)
      → 무비판적 복종이 아니라, 정의와 선을 지향하는 책임 있는 시민성을 전제합니다. 

    3. 균형 있는 나라 사랑

    • 맹목적 민족주의 ≠ 건강한 애국심
      나라 사랑은 다른 민족이나 약자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 비판적 충성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는 용기도 나라 사랑의 일부입니다.

    • 이웃 사랑의 확장
      개인 → 가정 → 지역 → 나라 →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4. 오늘의 적용

    • 정직한 납세, 법 준수, 투표와 시민 참여

    •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과 실천에 관심 갖기

    • 분열보다 화해와 공존을 선택하는 언어와 태도 

    요약하면, 나라 사랑은 “내 나라가 잘되기만”이 아니라 “이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더 인간답게 살도록” 힘쓰는 사랑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속 애국 신앙

    1. 3·1운동과 교회

    •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

    • 당시 교회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교육·계몽·조직의 중심지 역할을 함

    • 신앙적 동기 :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 민족도 존엄

      • 불의한 억압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

      핵심은 “나라를 우상화”한 것이 아니라

    정의·자유·존엄이라는 성경적 가치
    를 민족 현실에 적용한 것 

    2.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적 저항

    •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로 강요

    • 많은 교회와 신자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라는 신앙 고백으로 거부

    • 대표 인물 :  주기철 목사, 신앙 양심과 민족 존엄을 지키다 순교

      애국 신앙은 권력에 순응하는 애국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 저항 

    3. 교육과 계몽 운동

    • 교회가 세운 학교들:

      •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교 등

    • 문맹 퇴치, 여성 교육, 근대 시민 의식 형성

    👉 “나라 사랑 = 사람을 세우는 일”이라는 인식
    무장 투쟁보다 사람을 키우는 장기적 애국 

    현대 사회에서의 구체적 실천 사례

    1. 민주화 과정 속 교회의 역할

    • 1970–80년대 : 인권, 노동,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신앙인들

    • 특징 :  체제 전복이 목적이 아니라

      • 국가가 본래의 정의를 회복하도록 요구

    👉 애국은 “조용한 순종”만이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책임이 될 수 있음 

    2. 재난과 위기 속의 교회

    • 세월호, 코로나19, 산불·수해 등

    • 모범적 사례 : 무료 급식, 헌혈, 공간 개방, 의료·돌봄 지원

    • 문제적 사례도 있었기에, 교회 내부에서 자성· 개혁의 목소리가 나온 것 자체가 의미 있음

    👉 나라 사랑은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실제 고통을 나누는 것  

    3.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

    신앙인의 일상적 애국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 분열을 키우는 언어 대신 사실· 존중· 절제된 말

    • 투표, 공론 참여, 지역 사회 봉사

    • 약자(이주민, 장애인, 노인)에 대한 관심
      → 나라의 품격은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남

    • “내 편”이 아니라 공동선을 기준으로 판단 

    정리 한 문장

    한국 교회 역사 속 애국 신앙은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라의 정의를 묻는 신앙’이었다.


    12월 23일(화) 고린도전서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께서 임하시느니라(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ει τις ου φιλει τον κυριον ιησουν χριστον ητω αναθεμα μαραν αθα

    주께서 임하시느니라(Come, O Lord)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마란 아다(μαραν αθα)" 라고 번역합니다.
    '마란 아다'를 일반적으로 '마라나타' 이렇게 발음합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아람어 표현으로, 보통 이렇게 이해돼요.

    • “주여 오시옵소서”

    • 또는 문맥에 따라 “주님께서 오신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말로,

    • 고린도전서 16장 22절

    •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믿음을 담아 사용했습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아람어 표현으로, 매우 깊은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어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아람어

    Marana tha / Maran atha
    에서 온 말로, 두 가지로 이해됩니다.

    1.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

    2. “우리 주께서 오셨다”
      → 예수님의 성육신과 구원을 선포하는 신앙 고백

    초기 교회에서는 보통 첫 번째 의미(재림을 기다리는 기도)로 이해되었습니다.


    2. 성경 속 마라나타

    📖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이 구절은

    •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는 절박한 기도이며

    • 동시에 세상의 불의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최종적 정의를 기다리는 신앙 고백입니다.


    3.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

    초대 기독교인들은 박해와 순교의 현실 속에서
    **“마라나타”**를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 인사말처럼

    • 예배와 성찬 중에

    •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놓지 않는 고백으로

    👉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4. 오늘날 신앙적 의미

    오늘 우리에게 마라나타는 

    • ✔ 도피적 종말론 ❌

    • ✔ 책임 있는 기다림 ⭕

    즉,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정의· 사랑· 거룩함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5. 한 문장으로 요약

    마라나타

    “주님, 이 깨어진 세상 가운데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러 속히 오소서” 라는 소망의 기도이자 결단의 고백입니다.



    1. 종말론 관점에서의 마라나타

    • 마라나타 = “주여, 오시옵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

    • 배경: 초기 교회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이들은 현재 세상의 불의와 고통 속에서 “주님, 속히 오소서”라는 절박한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 신학적 의미:

      1. 소망 : 하나님이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믿는 신앙.

      2. 각성 : 재림의 날을 대비하여 삶을 점검하고, 회개와 거룩함을 실천.

      3. 격려 :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공동체적 다짐.

    • 결론 : 종말론적 마라나타는 단순한 종말 예언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재정비하게 하는 실천적 소망입니다.


    2. 예배·찬양 속 사용

    • 초대교회: 성찬식이나 모임에서 “마라나타”를 외치며 재림을 기다리는 기도와 고백으로 사용.

    • 현대 예배·찬양:

      1. 찬송가·예배 도입

        • “주여 오시옵소서”를 반복하며 회중이 공동체적 기대와 소망을 경험.

      2. 기도문

        •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통치 확립을 구하며 현재 세상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도록 다짐.

      3. 찬양 가사 속 반복

        • 반복적인 “마라나타”는 종말적 소망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도록 돕습니다.

    • 포인트: 예배 중 “마라나타”를 외칠 때,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현재 삶과 재림 소망을 연결하는 영적 체험이 됩니다.


    3. 한국 교회 설교 적용

    • 설교 주제: “마라나타와 기다림의 신앙”

    • 핵심 메시지:

      1. 오늘을 준비하는 신앙

        • 재림을 기다리며 현재 삶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

      2. 절박한 소망의 표현

        • 교회 공동체와 개인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삶.

      3. 사회적 적용

        • 종말적 소망이 단순한 내세적 기대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책임 있는 행동으로 연결됨.

    • 예시 설교 포인트:

      •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 우리의 기도는 세상을 향한 정의와 사랑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 주님의 재림은 나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신앙적 도전임을 강조.


    💡 정리

    • 종말론적 관점: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소망

    • 예배·찬양 속: 공동체적 체험과 영적 각성

    • 설교 적용: 신앙적 책임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적 메시지


    μαράν ἀθά Storng number 3134

    1. 주가 오셨다.  2. 주여 오시옵소서.  3. 고전16:22.
    Pronunciation    [ maran atha ]  
    Etymology  /  아람어에서 유래
    •  1. 주가 오셨다, 주여 오시옵소서, 고전 16:22.
    • 관련 성경  /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마라나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다'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마라나타 뜻 :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아람어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아람어로,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의 성경적 배경, 신앙적 의미, 현대적 적용까지 자세히 알아봅니다.

    마라나타란 무엇인가?

    마라나타의 어원과 의미

    • 마라나타(Maranatha)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 단어는 신약 성경(고린도전서 16:22)에서 등장하며,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 일부 학자들은 마라나타를 "마라 나타"(우리 주님이 오셨다) 또는 "마란 아타"(주님이 오시옵소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 속 마라나타

    • 마라나타는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표현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태도를 나타냅니다.
    • 요한계시록 22:20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기도가 등장하며, 이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초대 교회에서는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마라나타와 기독교 신앙

    • 마라나타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 이는 신자들이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소망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 현대 기독교에서도 마라나타는 재림 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기도와 찬양, 설교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마라나타의 현대적 의미

    교회에서의 활용

    • 많은 기독교 교단에서는 마라나타를 주제 삼아 설교하거나 찬송가의 가사로 사용합니다.
    • 일부 교회에서는 예배 후 신자들끼리 인사할 때 "마라나타!"라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고 신앙을 다지는 의미로 활용합니다.
    • 기독교 운동이나 선교 단체에서도 마라나타를 중요한 신앙적 표현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의 적용

    • 마라나타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경건한 삶을 유지하는 동기가 됩니다.
    •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신앙적으로 더욱 성실히 살아가게 합니다.
    • 마라나타 신앙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마라나타

    •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마라나타 신앙의 핵심입니다.
    •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마라나타를 기억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소망과 평안을 줍니다.
    •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위기와 도전이 있지만, 마라나타 신앙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 마라나타는 단순한 종교 용어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신앙적 고백입니다.
    • 성경과 초대 교회에서 사용된 마라나타는 현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신앙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표현입니다.
    •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마라나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람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람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마라나타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12-20) 

    부부와 아들, 세 식구가 사는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 김씨는 매우 비상한 사람입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도 항상 말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고, 어떤 주제건 대화에 막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처세술과 탁월한 화술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모이고 웃음이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아내 송씨는 무척 둔한 사람입니다. 
    한참이나 대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이유를 모릅니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줄 모르고, 우스개 소리를 해도 알아듣지 못해 때 맞춰 웃질 못합니다. 
    자기 성격대로 사는 사람이라 말을 골라 할 줄도 모르고, 또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줄도 모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간도 빼주지만, 한 번 싫은 사람은 죽어도 싫습니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성격의 김씨와 송씨는 결혼 3년만에 협상을 보았습니다.
    각자의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때문에 늘 문제가 됩니다.
    해야 하는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선생님들께 태도가 불손하고,
    참다 참다 안 되서 한 마디 하면, 죽어버리겠다며 나가버립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들의 문제가 아내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막무가내로 말하는 아내의 버릇이 아들을 말썽꾸러기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아들을 문젯덩어리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학기말 성적표가 도착했습니다. 
    그날 저녁 세 식구가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남편은 전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던 아내는 아들에게 튈 불똥을 남편을 향해 쏟아 붓습니다.
    “당신 어쩜 그렇게 무책임해요? 당신 애 아빠 맞아요? 아들의 성적표가 왔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아녜요? 이 상황에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요?
    내 팔자에 남자라곤 도통 둘 밖에 없는데. 어쩜 하나같이 저 모양인지...
    제대로 된 남자 하나 없으니...”

    김씨는 기가 막혔습니다. 
    우선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성적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앞질러 가서 사람을 묵사발 만드는 아내가 너무 밉고 싫습니다.
    “야, 너 말 다했어?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거야. 넌 그런 상식도 없냐?
    넌 말이야,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여자야.
    뭐? 이 집에 제대로 된 남자가 없다고? 그래? 너 오늘 제대로 된 남자 맛 좀 봐라.”
    * 자료출처  / 도은미, 사연으로 움직이는 가정, p. 12~18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하니 더 힘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 너를 소송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이건 순교의 각오가 없인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순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경 로마 황제 도미티안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하던 상황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책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신앙 때문에 밧모섬에서 유배생활하던 중이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순교하던 상황,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부터 순교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 주셔서 순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 직장, 사업-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식 하나 키우는 것도 우리가 감당하기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셔야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순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속히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의인은 영원한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내가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의 마지막도 주님께서 때가 되면 불러가실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인생살이도 예수님께서 책임지고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 한 가지만은 기억하십시오.
    “나는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소방훈련하던 굴곡차는 와이어가 끊어질 수 있어도, 예수님의 손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엄청난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높은 곳에 올려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실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여러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14절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누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영생을 누릴 사람입니까?
    누가 영원한 나라의 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두루마기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은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피에 우리의 몸을 씻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영생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의 흘린 피 / 날 희게 하오니 / 귀하고 귀하다 /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런 복을 받은 우리는 17절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말씀을 듣는 자는 “오라” 고 불신자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초대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먼저 영생을 누린 여러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신자들을 초대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윈 루처(Erwin W. Lutzer)가 쓴 <영원한 상급>이란 책을 보면, 천국에서도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천국과 눈물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할른지 모릅니다. 그 눈물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살았음을 슬퍼하는 눈물, 후회와 부끄러움의 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닦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영영히 눈물을 그치지 못할 것입니다(계21:4). (어윈 루처, 영원한 상급, 7~8)

    반면에,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상을 갖고 오십니다. 일한대로, 수고한대로 상을 주십니다.

    우방놀이동산을 가보니까,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입장은 무료지만, 놀이기구를 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예비하신 상을 받으려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고후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 모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전구라고 다 같은 밝기가 아니듯이, 천국에 들어가도 다 다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얼마나 일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다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수많은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운명은 수많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선택과 행동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주석가 메튜 헨리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면서 오늘을 살라” 고 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비문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생 살아온 삶에 대하여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불로 시험할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같이 다 타버려서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온 인생은 불에 타버리지 않을 인생, 상 받을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만 아니라,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시간, 재능, 건강, 지식 등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바로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폭염이 쏟아지는 사막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목이 타 죽을 지경이 된 그는 펌프가 달린 우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펌프 옆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펌프에 부을 마중물을 사용할 것. 우물이 깊어서 목을 축이고 물통을 채울 수 있음. 다음 여행자를 위해 병에 물을 채워둘 것.”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물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물에 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작은 물병의 물을 마셔버릴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만큼의 물을 길어올리기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물을 펌프에 부을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의 가진 값진 것들을 주님께 부을 수 있겠습니까?

    “마라나타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 곧 오십니다. 그날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운 성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상급, 넘치는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날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라나타| 뜻과 의미, 그리고 그 깊은 울림 | 기독교 용어, 성경, 예수 그리스도

    "마라나타"라는 말, 어딘가 익숙하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하셨던 적 있으신가요? 
    오늘은 성경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단어의 의미와 울림을 함께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고리를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마라나타가 가진 특별한 의미와 함께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라나타 : 
    뜻과 의미, 그리고 그 깊은 울림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문구를 넘어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마라나타"의 뜻과 의미를 살펴보고, 그 깊은 울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 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외쳤던 뜨거운 기도이자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오시옵소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2. "마라나타"와 성경 속 예언: "마라나타"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예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약속합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성경적 예언을 믿고 기대하는 신앙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3. "마라나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마라나타"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구원, 평화,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4. "마라나타"의 울림과 현대 사회: 오늘날 "마라나타"는 단순히 과거의 신앙 고백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깊은 울림을 가집니다. 세상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마라나타"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원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5. "마라나타"의 실천: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나타" 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섬김, 용서,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실천하는 것이 "마라나타"를 진정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나눔, 봉사,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마라나타"의 핵심 가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결론: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는 깊이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은 희망과 위로를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마라나타, 희망과 기대를 담은 외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깊은 신앙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주님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올 구원과 완전한 승리를 향한 기대와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그 자체로 희망과 기대를 상징합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기대합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처럼,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불어넣습니다. *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로,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 역사 속의 '마라나타': 역사적으로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 현대 사회에서의 '마라나타': 현대 사회에서도 마라나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향한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현실 속 어려움에 흔들릴 때,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희망을 향한 끊임없는 외침이며, 우리 삶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신앙의 메시지입니다.

    주님, 오십시오! 마라나타의 본질: 신앙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기도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의미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는 고대 아람어로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을 지니며, 초대 교회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간절히 외쳐온 믿음의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뜨거운 소망과 기대,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며,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는지 보여줍니다. 마치 마라나타를 외치는 듯, 그들은 세상의 고통과 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했습니다. 마라나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를 넘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마라나타는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언젠가 모든 것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에 공의와 평화가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 믿음의 승리: 마라나타는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 기도와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마치 기도와 같은 형식으로,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칩니다. 마라나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마라나타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그분의 통치를 향한 소망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분의 사랑을 전하며, 그분의 통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마라나타는 우리의 기도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믿음의 고백이며, 희망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마라나타를 외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속 마라나타 고린도전서 16장 22절, 계시록 22장 20절 등에서 찾아보는 의미

    마라나타: 주님, 오시옵소서! 그 깊은 울림의 의미를 찾아서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몇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신앙의 열정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성경 속에서 마라나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염원을 드러내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님의 도래를 바라는 소망을 넘어, 압제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대한 구원과 해방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두 곳에서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2장 20절에서는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더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는 마라나타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는 신앙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2. 마라나타: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세상의 고통과 압제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 즉 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기대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라는 표현을 통해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라나타는 그들에게 힘이 되는 울림이었으며, 삶의 희망을 지켜주는 빛이었습니다. 

    3. 오늘날 마라나타의 의미 오늘날에도 마라나타는 그 깊은 울림을 유지하며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있습니다. 세상이 혼란 속에 빠져있고, 고통과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삶 속에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빛이며,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4. 마라나타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우리는 죄악과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문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결론 마라나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강력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도전이 됩니다. 마라나타! 주님,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실천적인 의미

    마라나타,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실천적인 의미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익숙한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도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과 계시록 22장 20절에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닌, 적극적으로 그날을 맞이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둘째, 마라나타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희망을 주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줍니다. 

    셋째, 마라나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인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마라나타는 준비 
    끊임없이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다섯째, 성장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 친구가 그의 다정한 친구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 했습니다.
    화기 애애하게 식사를 마친후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더군"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그것을 휴거라고 하지...................

    그때 어떤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중심에 구세주로 온전히 믿고 영접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내주 하심으로 거듭난자가 된다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식이  마음 가운데 깊숙히 뿌린 박힌 죄와악의 쓴뿌리 곧 비진리를 뽑아내고  파내어
    진리로 마음을 영으로 온전히 일구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온전히 할례를 이루고
    주님 보시기에  흠도 점도 티도 없는 마음을 가짐으로  
    신부단장을 잘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소리를 듣고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순간보다24분1의 빠른속도)변화되어 
    공중에서 그렇게 학수 고대하고 그리던 주님을 맞이하여 공중혼인잔치에 참여하지!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않고 
    교회를 다녀도 변화되지 않아 하나님 마음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산 쭉정이 신자들은
    휴거 되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 7년간  먹고 살기 위해 666이란 
    짐승의 표를 오른손과 이마에 받고 무서운 환난을 댱한다네!

    그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지!

    나는 이 사실을 믿거든!

    자네는 무신론자이니 믿지 않겠지?

    그래서 말인데  예수님 오시면

    "그때 자네가 나의 전 재산을 다 가지게!"

    "이 집도, 내 땅도, 저 T.V도 내차도 금반지도 전부 자네가 그냥 가져!"

    "각서를 써 달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주지!"

    그리고 무신론자 친구에게 각서를 써 주었다

    친구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횡재를 한 친구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그 날밤 좋아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각서 까지 받아놓았으니

    빨리 예수님이란 분이 왔으면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 좋던 마음은 사라지고

    친구가 자기의 모든것을 한점 아쉬움도 없이 선뜻 포기 할 만큼

    그 천국이란 곳이 좋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땅에 남아서 무시 무시한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처럼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날을 고민한 친구 부부는 드디어 전화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이보게 친구.............

    나에게 전 재산을 주지말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어떻게 살면 휴거 될수

    있는 길을 알려 주게!

    우리 부부도 꼭 휴거되어  천국가고 싶네!...

    오주님!

     이 종은 주님 오실때 동전  한픈

    호주머니에  

    없이살다가 휴거의 표적되어 사라지는것입니다

    이것이 내 평생에 소원입니다

    아멘

     




    12월 22일(월) 고린도전서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더욱 큰 은사(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사도 바울은 분쟁이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더욱 큰 은사(the greater gifts)"를 사모하라고 깨우쳤을까요?
    12:4-11에서는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합니다(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역)
    12:12-27에서는 몸의 비유를 통하여 모든 은사가 동일하에 중요한 공동체안에서 필요한 역활이라고 강조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 등 특정한 은사를 과도하게  높이고 다른 은사들을 멸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큰 은사 즉 사랑으로 화합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제일 좋은     

    ὑπερβολή, ῆς, ἡ Storng number 5236

    1. 초과.  2. 과도.  3. 비범한 성품   
    Pronunciation  [ hüpĕrbŏlē ]    
    Etymology  /  5235에서 유래
    •  1. 초과, 과도, 비범한 성품, 성격, 고후4:7. [주] καθ᾿ ὑ- περ βολήν: 엄청나게, 대단히, 한량없이, 극도로, 고후1:8, 갈1:13.
    • 관련 성경  /  가장 좋음(고전 12:31), 심히 큼(고후 4:17, 12:7), 심함(롬 7:13, 고후 4:7).

    * 5235  

    ὑπερβάλλω Storng number 5235

    1. 지나치다.   2. 능가 하다.  3. ~보다 뛰어나다  
    Pronunciation  [ hüpĕrballō ]   
    Etymology  / 5228과 906에서 유래
    •  1. 지나치다, 능가 하다, ~보다 뛰어나다. [주] 분사 ὑπερ βάλλων, ουσα, ον: 탁월한, 비상한, 뛰어난, 고후3:10, 9:14, 엡1:19, 3:19.
    • 관련 성경  /  더 크다(고후 3:10), 지극하다(고후 9:14), 지극히 크다(엡 1:19), 지극히 (풍성하다)(엡 2:7).



    성경에서 성도들이 더 뛰어나고 탁월한 은사를 사모하라는 권면

    주요 의미
    • 더 뛰어난 은사를 사모하라 : 교회에 유익한, 더 탁월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 가장 좋은 길(사랑)을 보이라 : 그 은사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랑'이라는 방법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며,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강조합니다.
    • 은사의 조화와 유익 : 은사 자체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각 은사가 교회 공동체에 덕을 세우고(건축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데 쓰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성령의 인도 :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유의지와 인격을 보존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통해 성품까지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더욱 큰 은사'는 특정 은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은사 위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섬기는 '최고의 방법'을 의미합니다



    더욱 큰 은사(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恩賜章)” 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사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 것은 로마서 12장에베소서 4장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장에 해당하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전서 4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은사(恩賜)와 은혜(恩惠)를 구분해야 합니다.

    은사와 은혜는 나무에 비유하면 한 나무의 뿌리에서 자라난 여러 개의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이란 헬라어는 "카라(chara, χαρά. 5479 : joy, delight)" 라고 합니다.
    카라에서 은혜라는 "카리스(charis,  χάρις. 5485 : grace, kindness)"가 파생합니다.
    카리스에서 은사라는 "카리스마(charisma. χάρισμα, 5486 : a gift of grace, a free gift)"가 파생합니다.
    따라서 은혜와 은사는 기쁨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란 "사랑"을 말합니다.
    이때 사랑을 "아가패(agapé. ἀγάπη. 26 : love, goodwill)"라고 합니다.
    아가패 사랑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시고 그물이 가득찬 물고기를 잡은 후에 아침으로 그 물고기를 먹으며 처음으로 질문하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 사랑이 아가패라따라서 아가패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아가패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희생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에로스의 사랑이란 욕망에 이끌려 자기 보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소개합니다.
    왜 사랑의 은사가 최고라고 하였을까요?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많은 교회이었지만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서로 분쟁하는 교회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은사가 최고의 은사라고 자랑하므로 분쟁의 골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사랑(아가페)의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라고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은사라는 초대교회를 부흥케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은사는 주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중요한 원리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은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분쟁하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은사는 아가페적인 자기헌신적인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깨우칩니다.

    요한복음 21:15∼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질문)
    1.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
    2. 세 번씩 반복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을까?
    3.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가?

    (적용)

    1. 주를 믿기 전의 내 모습
    2. 직분을 받기 전의 내 모습

    1. 모른다고 부인한 것에 대한 검증

    베드로가 바깥뜰에 있을 때 한 여종이 다가와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말했을 때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아갔을 때 다른 여종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라고 말하므로
    “맹세하고 부인하여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라고 말할 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둘째, 아가페 사랑을 요구하셨으나 필레오라고 대답했기 때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패라는 단어로 물어보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 번째는 필레오라고 질문하셨고 필레오라고 대답하였다.

    셋째,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 자기 용서에 대한 확신

    내 어린 양을 먹이라(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라!)
    - 어린 양(τὰ ἀρνία) / 아르니온(arnion.  ἀρνίον) a lamb
    - 먹이라(Βόσκε, boske) / 보스코( βόσκω, boskó) to feed

    양을 치라
    (사도직을 수행하라!)
    - 양(τὰ πρόβατά) / 프로바톤(probaton. πρόβατον) a sheep 
    -  치라(Ποίμαινε, Poimaine) /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 Poimaine) Shepherd

    내 양을 먹이라(주의 일을 이렇게 하라!)
    - 양(τὰ πρόβατά)
    - 먹이라((Βόσκε, boske) / 보스코( βόσκω, boskó) to feed

    성경에서 은사(선물)로 얻는 것 두 가지를 찾는다면

    첫째는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2:31, 13:13)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둘째는 믿음입니다(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사로 주신 사랑을 회복하고 실천하려면 먼저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죄를 짓지 않는 것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완전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따라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후에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주신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이었습니다.
    어부이었던 베드로를 부르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 곁에서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말 전인격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므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가 누군줄 아느냐?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그러나 내가 네게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시나이다(οἶδα) - 에이도(eidó: be aware, behold, consider, perceive)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믿음을 고백하기 전에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실패한 자리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부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시간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주를 믿도라고 하면서도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과 더불어 주를 향한 믿음을 정비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4)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을 깨우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했던 지난 날의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고 이제부터 소금과 빛의 사람으로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오래 전에 저희 처가집 작은 아버님께서 작은 아들이 기독교교육과를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작은 아버님께서 교회에 상처를 받아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받은 이유는 집 근처에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이사오셨는데 톱을 빌려갔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나도 톱을 가져오지 않아 그 목사님댁으로 톱을 찾으러 갔더니 톱이 마당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며칠 동안 비가내렸기 때문에 마당에 있던 톱이 녹이 슬었다고 합니다.
    그때 목사가 저 모양이니! 교회갈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출석하던 교회에서 대학원 입학했다고 등록금도 도와주지 않아 상실한 마음에 더  크게 실망하셨겠지요.
    제가 이런 사정을 듣고 작은 아들 대학원 등록금을 준비하여 작은 아버지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앞으로 아들이 신대원을 졸업 후 목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 부임할 때 반드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은 어느 교회에 출석하시나요?
    그때 목사가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예,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할텐데 그러면 그 교회에서 받아줄까요?
    그러자 잘 알겠다며 그 다음 주일부터 즉시 교회에 출석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가페 사랑이란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희생이 동기가 되어 믿음을 상실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사랑이 동기가 되어 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것은 아가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너희도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모두 이런 사랑으로 믿음의 현장을 아가페 사랑으로 잘 관리하고 지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프리카 임은미 선교사의 이야기

    어느 택시 운전기사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개소주를 만들던 집사님이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다.
    그때 대략 손해본 것이 5만원, 택시 요금 1만 2천원 요금으로 1만 5천원을 지불하며 거스름돈은 가시다가 커피 한 잔 맛 있게 드시고
    5만원 손해 본 것은 제가 대신 드릴테니 앞으로 교회에 나가세요 하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설교 요약]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으로 주어지는 무한한 특권임과 동시에 명령 입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크리스챤들이 관심가지고 사모하는 ‘영적 은사들’ (the spiritual gifts)보다 더 큰은사가 있다고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사모하라고 도전 합니다.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는 것 입니다. 바로 ‘사랑’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볼것은, 왜 사랑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하는 점 입니다.

    첫째, ‘사랑은 은사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사랑이 과연 은사일까요? 하나님은 교회의 몇몇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로 사랑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크리스챤의 가장 우선되는 명령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 22:37,39).

    둘째,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greater than the spiritual gifts): 본문 <31절>의 ‘더욱 큰 은사’라는 표현에서 또 한가지 이해할수 있는 점은 사랑이 그 어떤 영적 은사보다 크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바울은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13장>에서 어떤 은사들보다 우월한 사랑의 힘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랑은 영원토록 함께 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forever for us):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라고 사도요한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영원한 것은 그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나오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여러분이 ‘더욱 큰 은사’ 곧 사랑을 간절히 구함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충만하게 임하여 주의 몸된 교회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의 사람이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삶을 지탱해 주며, 삶을 살아갈수 있게 이끌어 주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만약 누가 저에게 ‘우리 인간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것 입니다. 더욱이 이 사랑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감상적인 것 이상을 뜻 합니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한한 특권임과 동시에 의무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랑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아포슬 교회 가족들은 서로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 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능력이자 선물인 사랑을 통해 개인의 삶과 가족과 교회와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충만한 사랑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사랑장’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고전. 13장>에서 사도바울은 사랑의 놀라운 속성과 능력에 대해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고전. 13:4) 라는 고귀한 사랑의 선언은 심지어 믿지 않는 청년 남녀들 조차도 그들의 연애편지를 쓰는데 단골로 사용되는 문장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바울의 위대한 사랑의 찬가라고 불리는 <고전. 13장>을 시작하기 위한 서론격의 말씀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고전. 12장>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12장>의 주제는 ‘성령의 은사와 몸과 지체의 관계’ 입니다.여기서 사도바울은 ‘은사는 무엇이고 왜 은사를 주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이 은사를 주신 이유를 <우리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몸의 지체로서 서로 연결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 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선물로 허락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서로 연결되고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할수 있게 하기 위한 것 입니다. 따라서 만약 내가 가진 은사가 내 자랑이 되어 서로를 비판하고 헐뜯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 선물로 주신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심히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타깝고 잘못된 모습이 영적 은사를 많이 가졌다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상호간에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가라졌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잘못된 모습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v.31a)고 주장한 이유 입니다. 그리고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b)고 말한 것처럼 <고전.13장>과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제일 좋은 길, 곧 ‘사랑으로 행하는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그의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마루리하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격려하고 도전 합니다. “너희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4)라고. 바로 믿음의 공동체와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반드시 사랑의 동기로서 행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관계의 원리가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 볼것은 이것 입니다. 사도바울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31)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는 왜 사랑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Why is love so important for our Christians?)하는 점 입니다.

    첫째, ‘사랑은 은사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not the spiritual gifts): (고전.12:27-31) 왜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바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 했드시 오늘 본문은 ‘사랑’에 대한 서론에 해당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곧 이어질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이 왜 우리 크리스챤에게 가장 중요한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고린도성도들에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 사도바울은 사랑을 ‘더욱 큰 은사’ (the greater gifts)라고 표현 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성도들은 은사에 매우 관심이 많았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드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신 은사는 더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없이 모두 서로를 돕고 공동체를 함께 세워주는 일에 사용되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관심가지는 은사에서 부터 자신의 논리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 입니다. ‘너희가 그토록 사모하는 은사’보다 더 큰것이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그들의 관심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은 이것 입니다. 바울이 지금 ‘더욱 큰 은사’라고 소개하는 ‘사랑이 과연 은사인가?’하는 것 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하드시, 사랑은 은사가 아님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성경 어디에도 사랑을 은사, 즉 ‘영적 선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고전.12장>에서 사도바울이 상세하게 설명한 영적 은사를 가진 자들은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거나 비판 할것이 아니라,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며 각자의 은사를 활용하라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랑은 언제나 추구하고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명령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몇몇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로 사랑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39) 라고 우리 주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명하심을 이렇게 요약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은사가 아닌 것 입니다.

    둘째,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greater than the spiritual gifts): (그 예와 이유; 1-3,4-7) 오늘 본문 <31절>의 ‘더욱 큰 은사’라는 사도바울의 표현에서 또 한가지 이해할수 있는 점은 ‘더욱 크다’는 것 입니다. 사랑이 그 어떤 영적 은사보다 크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사랑이 은사보다 더 큰가?’를 이어지는 <13장>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표현데로 “ ~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b)는 것 입니다. 사랑의 우월성을 설명해 주겠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어떻게 은사보다 더욱 크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습니까? 비록 사람이 천사의 말과 같은 방언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 밖에 않되며 (13:1), 사람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예언하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졌다 할찌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 입니다 (13:2). 그는 지금 구체적으로 대표적인 영적 은사 예언과 지식과 방언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비록 이런 은사를 놀랍게 행한다고 할찌라도 만약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 입니다. 왜 그렇까요?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 때문 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아름답고도 힘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3:4~7/ 현대인의 성경)라고. 사랑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이전에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 입니다. 사랑은 누가 더 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것을 견디는 것 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속에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내가 의롭지 못하고, 잘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발하고 있는 것 입니다. 어떤 영적 은사로도 감당할수 없는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믿고, 끝까지 바라는 이 놀라운 삶을 사랑만이 가능하게 하는 것 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은사보다 우월한 것 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이기 때문 입니다.

    셋째, ‘사랑은 영원토록 함께 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forever for us): (8-12/ 천국가면 오직 사랑…) 사랑이 위대한 것은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고 사도바울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8) 고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언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여질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다할찌라도 언젠가 주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왕노릇하며, 그분과 함께 영광스러운 것을 받게 될때 (롬.8:17) 일것 입니다. 그때 지금 바울이 말한것 처럼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고 충만하게 통치하게 될것 입니다. 모든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사랑’만은 영원토록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할것 입니다.

    사랑이 위대하고 우리 모든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바 일것 입니다. 이 사랑의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가지 않아 함께 자멸할수 밖에 없음을 신앙을 떠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이 사랑을 실천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 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한한 특권임과 동시에 명령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신 사랑의 명령인 것 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사랑의 사도, 사도요한은 이렇게 고백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자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때, 나는 나자신도, 그리고 이웃도 참되게 사랑할수 없는 것 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이기적으로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사랑을 사모할때, 간절히 구할때 하나님은 그의 영 성령을 통해 그의 사랑을 구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실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 사랑이 영원하기에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고 열매맺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의 사람 입니까? 여러분을 통해 사랑이 흘러 넘치는 사랑이 충만한 사람 입니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과 제가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심히 기뻐하시고 소원 하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 입니다 (요일. 4:8).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고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적 은사보다 더욱 크고 위대한 사랑을 사모하라고, 간절히 구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 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 구하는 자녀의 소원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음을 믿기 때문 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어떤 영적 은사, 어떤 큰 영적 경험을 하든지 관계없이, ‘더욱 큰 은사’ 곧 사랑을 간절히 주께 간구함으로 넘치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충만하게 임하여 주의 몸된 교회와 이웃에게 그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는 사랑의 사람이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더 큰 은사"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철학적 또는 개인적인 성장의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볼게요:

    1. 종교적 의미: 기독교에서는 "은사"란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이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인내, 지혜, 신앙 등은 하나님의 은사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더 큰 은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은사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 큰 사랑을 베풀거나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2. 개인적 성장: "더 큰 은사"는 누군가가 자신의 잠재력을 더 잘 발휘하는 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나은 의사소통 능력, 더 큰 창의성, 더 깊은 공감 능력 등도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 큰 은사"는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3. 사회적, 직업적 은사: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특정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뛰어난 리더십, 문제 해결 능력, 사람들을 동기부여하는 능력 등도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더 큰 은사"는 사회나 직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결국 "더 큰 은사"란 주어진 능력이나 축복이 더 넓은 범위에서,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어요. 당신에게 "더 큰 은사"란 무엇인가요?


    성령의 은사 종류 : 롬 12장, 고전 12장, 사 11장에 언급된 은사들

    성령의 은사(영적 선물)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신 특별한 능력과 기능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령 은사가 언급되어 있으며, 주로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그 목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개인적 영광이 아닌 공동체의 건덕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모든 신자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은사를 받았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목록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세 가지 주요 목록이 있으며, 각각은 다른 측면과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목록들을 살펴보면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그 목적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의 은사들

    로마서 12:6-8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은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예언: "즉석에서 말을 꺼내다" 또는 "하나님의 목적을 해석하기 위해 거룩한 뜻을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2. 섬기는 일(봉사): 헬라어 '디아코니안'에서 유래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은사입니다.
    3. 가르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선포하며, 의미와 맥락을 설명하고 적용점을 알려주는 은사입니다.
    4. 위로(권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따르도록 권면하며, 약해진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는 은사입니다.
    5. 구제(나눔): 자신의 재정, 물질, 시간 등을 다른 사람들과 기쁘게 나누는 은사입니다.
    6. 다스림(지도력):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은사로, 배를 조종하는 사람과 같은 개념을 내포합니다.
    7. 긍휼(자비):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들

    고린도전서 12:4-11과 12:28에서는 더 많은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지혜의 말씀: 삶의 상황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2. 지식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는 통찰력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입니다.
    3. 믿음: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약속에 대한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은사입니다.
    4. 병 고치는 은사: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은사입니다.
    5. 능력 행함(기적):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사입니다.
    6. 예언: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7. 영들 분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에게서 온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8. 방언: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9. 방언 통역: 방언으로 말해진 메시지를 일상어로 해석하는 은사입니다.
    10. 사도: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은사입니다.
    11. 돕는 것(서로 돕는 것): 다른 사람들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은사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성령의 일곱 은사

    이사야 11:2-3에서는 메시아(그리스도)에게 부어질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가 언급되며, 특히 가톨릭 전통에서 중요시됩니다:

    1. 슬기(지혜):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2. 통달(깨달음): 신앙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은사로, 성경과 교리의 숨은 뜻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3. 의견(일깨움): 신앙인이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올바로 판단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4. 굳셈(용기): 신앙생활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은사입니다.
    5. 지식: 피조물의 공허함을 깨닫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6. 효경(공경):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사랑과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입니다.
    7. 두려워함(경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게 하고 절제의 덕을 실천하도록 돕는 은사입니다.



    성령 은사의 특성과 분류

    성령의 은사들은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여러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은사의 성격에 따른 분류

    1. 말씀 관련 은사: 예언, 가르침, 권면 등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전달하고 설명하는 은사들입니다.
    2. 봉사 관련 은사: 섬김, 돕는 것, 구제 등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공동체를 섬기는 은사들입니다.
    3. 초자연적 은사: 방언, 병 고침, 기적 등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은사들입니다.
    4. 지식 관련 은사: 지혜, 지식, 분별 등 영적 통찰력과 이해를 제공하는 은사들입니다.

    관계에 따른 성령의 열매 분류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도 관계에 따라 분류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사랑, 기쁨, 평화.
    2.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인내, 친절, 착함.
    3. 자신 안에서 맺는 열매: 믿음(신뢰), 온유, 절제.

    성령 은사의 목적과 의미

    공동체를 위한 은사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영광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2:7에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출처는 한 분 성령이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모든 신자를 위한 은사

    성령은 모든 신자에게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태양빛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와 사역의 연결

    에베소서 4:11-13에서는 사역자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은사가 단순히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 기능하는 사역적 역할임을 보여줍니다.

    결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은사 목록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은사가 같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공동체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는 말씀처럼 더 큰 유익을 위한 은사를 추구하되, 모든 은사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열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성장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은사의 여러 가지 종류와 정의

    A. 은사들의 종류

    <고전 12:8-10>에 기록되어 있는 '영적인 은사'들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지는 사역에 필요한 그분의 능력이 초이성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있는 '은사들'은 크게 4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성경적 맥락에서 헬라어의 용어에 따라 분류해 본다.

    1. "파네로시스" (Phanerosis)/ '성령의 나타남'(고전 12:8-10)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등.

    2. "디아코니아" (Diakonia)/ '성령의 사역' (고전 12:28)

      :사도, 선지자, 교사, 기적, 치유, 서로 돕는 일, 행정, 방언.

    3. "카리스마타" (Charismata)/ '은혜대로 받은 은사' (롬 12:3-8)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4 ."도마타" (Domata)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자들' (엡 4:8-14)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5. 기타: 독신 (고전 7:7,8), 자선 (고전 3:3), 손님을 대접하는 일 (벧전 4:9) 등

    B.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피터 와그너 박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 예언 /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 섬기는 일 /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 권면 /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 헌금 /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 긍휼 /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 지혜 /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령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 지식 /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 믿음 /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 신유 /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 기적 /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 영 분별 /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 방언 통역 /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 사도 /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 서로 돕는 일 /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 행정 /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 복음 전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 목사 /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 독신 /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 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 순교 /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 대접하는 일 /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 선교사 /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 남을 위한 기도 /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 귀신을 쫓아내는 일 /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 C.Peter Wagner교수가 분류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예언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섬기는 일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권면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헌금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긍휼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지혜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력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지식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믿음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신유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기적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영 분별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방언 통역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사도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서로 돕는 일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행정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복음 전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목사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독신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순교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대접하는 일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선교사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남을 위한 기도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귀신을 쫓아내는 일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은사의 정의와 목적, 성경에 나타난 은사

    1. 은사의 정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특히 신약의 바울서신에 주로 사용된 언어로서 구원받은 백성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자체의 일원에게 섬김을 위한 특별한 재능의 거룩한 증여라고 정의할수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김의장 옮김. (서울: 엠마오, 1985), 16쪽. 

    이렇게 정의한 근거는 성경에 은사로 표현된 단어가 두 가지 어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은사’로 번역된 단어가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여기에서 신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은사의 어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곧 은사는 ‘영적인 것’으로서 신령함이 그 근원이라는 말이다. 두 번째 ‘은사’로 번역된 단어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에 카리스마(χαρισμα)인데 그 요소에 있어서 영적 은사는 재능을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영적 은사는 재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7쪽.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은사가 있다’ 롬 12:6 

    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어떤 면에서건 그들이 탁월하게 머리가 좋다거나 일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주목할 만한 덕을 세우셨고, 그 일이 하나님이 동일한 사역을 다시 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보증이 된다는 뜻이다. J. I. Packer,『성령을 아는지식』, 117쪽. 

    즉 우리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은사이다. 성도가 하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분명하게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해내는 우리의 역량을 영적인 은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은사의 목적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박형용,『교회와 성령』, 148쪽. 

    이는 성도 각자에게 한 가지 이상씩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이 이미 증거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된 바울 서신들은 신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교회를 위해서 기록된 서신들이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설명하는 서신으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연결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엡 4:13)하게 될 때까지 세워져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들을 필요에 따라 주신 것이다. 

    로마서(12:4-8)에서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된 구절들은 성도들의 활동과 삶을 설명하는 부분중 몸과 지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다른 직분을 바로 실행함으로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이다. 

    고린도 전서는 은사 및 다른 문제들로 혼란에 빠진 고린도 교회를 바로 지도하기 위해 쓴 서신으로 은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을 구하라”(고전 12:7, 14:12)고 하였다. 이 사실은 각 지체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2:12-26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각 지체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몸의 각 지체들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각 지체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 존재하며 다른 지체를 경쟁관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각 지체 간에 시기와 분쟁이 있을수 없고 서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도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신자됨의 믿음을 먼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영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은 성도에게 있어서 누구에게나 필수적이요 종말론적이다.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한몸이 되었다는 것이다(고전12:13) 성령의 은사와 활용에 앞서 성령과의 인격적 관계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은사의 목적을 좀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보편적이다. 

    3. 성경에 나타난 은사 

    a.신약성경에 나타난 은사 

    사도바울에 의하여 거의 전문적으로 사용되어 온 이 은사는 죄인을 용서하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생을 지칭한 말이다. 롬 6:23 

    이 말은 은혜와는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고 이 은혜는 성령의 역사와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Gehard Kittel,(ed),trans,Geoffery W.Bromiley,『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Vol.Ⅸ(Grand Papids Eerdmans,1974), p. 403. 

    신약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포괄적인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있다. 성령의 은사라는 개념이 신약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나타나 있다. 사실 은사는 그 직무가 평범한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나는 직무의 일종이다. 바울이 은사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사용할때는 이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과 유죄 판결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했으며 이같은 주장이 로마서에 자주 나타난다. William Barklay,『New Testament Words』,(London : S.C.M, 1971),pp.62-63.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본래적으로 타고난 재주를 은사라고 고린도전서 7:7을 들어 말한 윌리암 바클레이의 주장 William Barklay,『New Testament Words』, p 63. 

    에 대하여 윌리암 매크래는 재능 역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가의 여부에 있어서 재능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9쪽. 

    즉 성령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재주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봉사함에 있어서 직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중생한 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논술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물로서 교회 봉사에 필수 불가결한 요인이며 이 은사는 사람에게 의해서는 결코 베풀어질수 없고, 예수의 신령한 몸인 교회를 위한 선물이므로 예수께로부터 받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 교회의 구조적인 조직을 인체 조직에 비교하며 은사의 다양성과 그리고 사역의 다양성을 진술했다. 롬 12:4, 고전 12:12-27 

    은사가 각각 다른 것은 몸의 각 부분이 다른 것처럼 믿음의 공동체 전부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한 성령, 한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이다.(고전12:4-13) Mack B. stockes,『성령과 크리스챤의 체험』,박선균옮김(서울:성광문화사,1984),58쪽. 

    신약에서 은사에 관하여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12장, 에베소서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은사들이 잘못 사용되게 되면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질 위험에 따르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다양하게 주어지지만 모든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통일성을 지녀야 된다고 본다. 

    b. 구약성경에 나타난 은사 

    구약에서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표현들은 “여호와의 영의 강림”이나 “현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대백과사전 제4권,(서울: 기독지혜사,1977), 98 쪽. 

    .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길게 혹은 짧게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 재능의 은사, 지혜의 은사를 주어 일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4.은사와 재능 

    은사에 대한 정의와 그 구체적인 표현에 비추어 보면 영적 은사와 선천적 재능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지어진다. 재능을 “어떤 개인의 일정한 소질적, 정신적 능력, 또는 훈련에 의해서 얻는 정신 실현의 능력” 국어사전편찬위원회,『국어대사전』,(서울: 삼성문화사,1988),1397쪽. 

    이라고 볼 때 재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노력을 통하여 발전시킬수 있으며, 인생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는데 큰 유익을 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은사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능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임에 반하여, 은사는 성도들에게만 있고, 재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사는 중생과 더불어서만 주어지는 것이며, 재능이 인간의 육체를 위하여 악의 도구로 사용될수 있는 반면에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덕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 재능과 다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무엇은 재능이며, 무엇은 은사에 속한 것인가를 구별하기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은사와 재능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퇴폐적인 대중가요 가수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가 그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여 이번에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디까지이며, 어디까지가 은사에 속하는가? 이러한 경우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하나님께서 어떤 재능을 택하셔서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바꾼후 영적인 은사로 사용한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의미 있는 판단이기는 하지만, 은사란 선천적 재능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수는 없다는 데에 문제가 된다. 박창환 교수는 “재능은 하나님의 제 일차 창조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고 은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세계에서, 즉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사회에서 작용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기능과 역량과 재능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창환,『성령의 은사와 신앙생활』,(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1987),24쪽. 

    고 정의 한다. 

    윌리엄 매크래는 다음과 같이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분류하고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9쪽. 

    결과적으로 은사와 재능을 구별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적인 기준을 통한 원칙을 갖는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즉 어떤 이의 재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관련될 것일 때 그것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은사인 것이며, 아무리 탁월하고 커다란 유익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재능에 속한 것이다. 즉 관찰할 때 어떤 은사들은 초자연적인 측면이 표면에 나타나고 어떤 은사들은 자연적이요 일상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인간의 재능을 실천하는 것에 불과하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면 성령의 은사라고 부를수 있다. 오성춘,『영성과 목회』(서울: 장신대 출판부,1989),160쪽. 

    5.은사의 종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8,10, 28-30, 에베소서 4:11에서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1에서 은사의 다양한 종류들을 언급하고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44쪽. 

    이중에서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개혁주의 주장과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은사 몇가지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a.예언의 은사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계시의 진리를 받아서 말하는 역량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46쪽.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공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고영민,『성서원어대사전』,제9권(서울: 기독교문화사,1973),440쪽. 
    “예언”이라는 말의 의미는 “말을 토해 낸다” 혹은 “미리 예고하고 경고하다”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 고영민,『성서원어대사전』,252쪽. 
    는 것으로, 미래의 사건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한다는 뜻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4쪽. 
    즉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며,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인간이나 그가 속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어 폭로하며 현재의 각성을 호소하고 미래의 새 일을 선포하며 그 사회속의 실망자에는 위로와 소망을 주고, 무지하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교육을 담당하며, 우매하고 흔들리는 자에게는 권면과 권고를 주는 사람이다.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의 특징들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머릿속에 직접 계시해 주시는 생각이며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생각을 알수 없으며 둘째. 예언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지시를 포함할때도 많으며 셋째. 예언을 할때는 구약성경에서 계시를 받을때처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인칭 ‘나’를 사용해야 적절하다. 넷째. 예언은 사도시대 교회의 표적 은사였지만 중세교부시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치유 등 다른 표적 은사들과 함께 교회에서 정지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5쪽. 
    이에 대하여 패커 교수는 예언하는 일은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활동이며, 사도시대에만 예언이 있었다든지 예언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5쪽. 
    또한 그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선지자들이 때때로 감동을 받아 미래에 대해 말한적이 있지만 마24:15, 행11:28, 21:10, 벧전1:10-12, 계1:3, 22:18 
    예언사역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을 분명히 전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예언은 성경시대에는 새로운 계시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고 말한다. 단지 사람들에게 이미 계시된 진리를 적용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23쪽. 

    b.방언의 은사 
    성령강림의 결과로 방언을 말한 것은 신약성경의 네곳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는 오순절에 행2:4,11 
    고넬료의 집에서 행19:6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던 에베소에 사는 제자들에게 행19:6 
    그리고 고린도에 있는 교회 고전12, 14장 
    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넬료의 집과 에베소에서 제자들이 한 방언들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들과 성격상 일치한다. 싱클레어퍼거슨,『성령』김재성 옮김(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243쪽.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에 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오순절날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은 모두다 통역과 해석이 요구되어지는 외국어로 보고 있으며 싱클레어퍼거슨,『성령』, 245쪽. 
    찰스 하지 역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5쪽. 
    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방언 모두를 이해할수 없는 소리로 보았다. 그러나 한가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의 경우 바울은 방언의 사용을 공적인 용도로 말하고 있으며,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도로서의 방언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8쪽. 
    또한 패커 교수는 방언에 대한 관련 구절을 다룰 때 최악의 실수는 자기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게 명료하거나 확실하다고 직간접적으로 주장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5쪽. 
    여하튼 방언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의 임재를 훈련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의 영향력 앞에 열어 드리는데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일수 있다고 패커 교수는 지적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18쪽. 
    또한 그는 설령 오늘날의 방언사용자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고린도교회에서 쓰던 방언과 다르다 해도 아무도 그들의 방언을 금해서는 안될 것 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25쪽. 

    c.방언통역의 은사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말할때에 그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통역함이 필요했고, 이것도 은사에 속한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 주신 특수한 능력으로서 방언을 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일방적인 말로 알려주는 역량이다. 
    즉 이 은사는 결코 배우지 않은 외국의 언어를 자기 나라의 말로 통역하거나 해석할수 있는 능력의 은사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91쪽. 
    고린도전서 14:13에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어째든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이 번역이 가능한 의미를 전달하는 듯이 말한다. 고전14:9-13 
    패커 교수는 바울이 기록한 통역의 은사가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위험하기 그지없다라고 평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2쪽. 
    증거가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은사(恩賜)라는 헬라어는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5486
    1.

    선물

    2.

    은사

    3.

    부여된 은총

    Pronunciation [ charisma ]
    Etymology
    5483에서 유래
    • 1.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11:29, 고전1:7, 딤전4:14, 벧전4:10.
    • 관련 성경  / 은사(롬1:11, 고전7:7, 딤전4:14), 선물(롬5:16)


    은혜라는 헬라어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χάρις, ιτος, ἡ Storng number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Pronunciation [ charis ]
    Etymology
    5463에서 유래
    • 1.
      우아함, 매력, 끄는 힘, 눅4:22, 골4:6.
    • 2.
      은총, 총애, 덕택, 호의, 은사, 선의, 눅2:40, 롬4:4, 히4:16, 계22:21.
    • 3.
      은혜로운 행위, 선행, 선물, 자선, 기특한 행동, 행24:27, 고후1:15, 벧전5:10, 유1:4.
    • 4.
      감사, 눅17:9, 딤전1:12, 히12:28.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 은혜(눅1:30, 행4:33, 몬1:3), 칭찬(눅6:32, 34), 칭송(행2:47), 은총(행7:10), 호의(행25: 3), 은사(고후9:15), 기쁨(몬1:7), 아름다움 (벧전2:19,20), 사랑스러움(눅2:52), 감사 (눅17:9, 롬6:17, 고후8:16, 골3:16).


    기쁨이란 헬라어는 카라라고 합니다.

    χαρά, ᾶς, ἡ Storng number5479
    1.

    기쁨

    2.

    고후2:3

    3.

    기쁨을 주는 사람

    Pronunciation [ chara ]
    Etymology
    5463에서 유래
    • I.
      기쁨, 즐거움.
      • 1.
        [문자적으로] 고후2:3, 갈5:22, 히12:11.
      • 2.
        [환유적으로]
        • a.
          기쁨을 주는 사람, 또는 사물, 기쁨의 대상, 눅2:10, 빌4:1, 살전2:19,20.
        • b.
          기쁨의 상태, 마25:21,23, 히12:2.
        • c.
          즐거운 잔치, 마25:21,23, 요17:13.
    • 관련 성경  / 기쁨(마13:20, 요15:11, 고후7:13), 즐거움 (마25:21, 히12:2, 벧전1:8), 희락(롬14:17, 갈5:22).




















    본을 보였노니(고전 4:6)

    μετασχηματίζω Storng number3345

    1. 모양을 변경하다.  2. 변장하다
    Pronunciation [ mĕtaschēmati- zō ]   
    Etymology  /  미래형μετασχηματίσω, 제1부정과거 μετεσχη μάτισα, 3326과 497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모양을 변경하다, 변화하다, 변형하다, 변하다, 빌3:21.
    •  2. [중간태] 변장하다, 가장하다, 꾸미다, 고전4:6, 고후11:13,14,15.
    • 관련 성경  /  본을 보이다(고전 4:6), 가장하다(고후 11:13, 14,15), 변하게 하다(빌 3:21).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ὑποτύπωσις, εως, ἡ 5296 [hüpŏtupō- sis]

    • 모형, 견본, 모본, 원형, 딤전1:16, 표준, 딤후1:13.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보기, 실례, 모본, 유1:7.

    • 2.

      증거.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12월 20일(토) 고린도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음을 위하여(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복음을 위하여(for the sake of the gospel)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보상이 있음을 약속하고,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것을 강조하는 성경적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 구원이라는 복음의 사명에 동참하는 삶을 뜻합니다. 

    • 자기희생과 헌신 :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 재산, 가족(집, 형제, 부모, 자식 등)까지도 기꺼이 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0:29-31).
    • 복음 전파의 사명 :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입니다 (로마서 1:16).
    • { 바울의 삶 :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했으며, 이는 복음의 참된 참여자가 되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19-27).
    • { 가치관의 전환 : 세상의 가치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최우선으로 두는 신앙적 결단을 나타냅니다.
    • { 결과 :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는 현세에서 배나 많은 보상을 받고 박해를 감수하며,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된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 일상생활 : 나의 시간, 재능, 물질을 복음 증거와 이웃 사랑에 사용하는 것.
    • 신앙생활 :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을 갖는 것.
    • 선교/전도 : 세상 어디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영혼을 사랑한 바울의 본(本)

    1 Corinthians 9:19–23 KRV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개요

    본문을 설명드리기 앞서 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는 A.D 55년 봄 쯤 기록된 서신서로 기자는 1:1, 16:21 등 내용 속에서 기자가 스스로 자신을 바울이라고 밝히고 있음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 지역에서 1년 6개월 간 복음을 전하며 세운 교회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이 고린도 지역에서 바울과 함께 장막 만드는 업을 하며 동역하였습니다.
    그런데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고 시간이 지난 후 다른지역을 방문하고 에베소에 머무는 시기에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은 안타깝게도 교회 내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 하였다는 소식 이였습니다.
    그 여러 문제는 왜 발생하게 되었을 까요? 고린도 지역의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현재도 있는 그리스의 코린토스가 바로 고인도 지역입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과 두 육지를 지나가는 해협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있습니다.
    즉 쉽게 말해 육로길과 바다길이 매우 잘 되어 있는 지역이였습니다.
    그러니 무역이 발달하고 많은 상권이 집중되고 그로인해 경제와 상업이 함께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그러서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상인과 사업과는 물론이고 다양한 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도 함께 가지고 와서 우상숭배도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이런한 지역적인 특징으로 인해 교회에 분열과 분쟁, 성적 타락, 우상의 제물 등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고 바울에게 질의를 담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러한 문제와 질의를 전해들은 사도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크게 2개의 부분으로 나뉩니다. 
    총 16장 중 1~6장까지는 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이,
    7~16장 까지는 교회의 질문에 대한 답변 즉 질의응답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필요에 따라 담임목사님께서 질의응답을 해주시죠? 같은 겁니다.
    본문에 대한 배경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8~10장은 우상의 제물과 관련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이다 보니 우상에게 드린 음식들도 많이 있었겠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8장은 우상 제물의 취식 문제가 제기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보다 지식이 약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거리낌을 갖고 있는
    형제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기 전에 절제와 양보를 통해 사랑의 덕을 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묵상해 볼 본문은 바울 자신의 생활을 자유의 절제의 산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한 궁극적인 목표는 한명, 한명의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영혼들을 건지고,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하며 모든 성도들의 자발적 동참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종이 된 것은...
    1 Corinthians 9:19 KRV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본문 말씀은 책갈피로 잡아 놓겠습니다.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즉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하고 섬기는 종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에 대해서 아니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을 안다면
    그의 마음에 얼마나 복음 전파를 위한 간절한 마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였고 바리새인이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유대인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사도행전 22:3 (KRV)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가말리엘 : 당대 최고의 랍비, 유명한 율법학자, 모든 백성의 존경
    더 나아가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완전한 자유인이였습니다.
    사도행전 16:37 (KRV)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지금 우리 시대로 하면 아주 유명한 선생님의 제자로 배움을 받았고 한국시민권 뿐 아니라 미국 시민권도 있는 2중 국적을 가진 어딜 가나 자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그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기로 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다른 사람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 지키는 것보다 우선시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철학이나 당시의 문화적인 관습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가복음 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리고 이 마음은 아래 20절~23절까지 어떠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신함으로써 하였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 이방인, 약한자 입니다.
    ○ 유대인에 대한 전략
    고린도전서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0절을 잘 읽어보면 유대인들과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얻고자 해서 그들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대인,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대상입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라고 표현 한 것은 당시 유대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은 구원받은 우리가 봤을 때,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이며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님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 본질적인 목적을 모르고 율법 자체에 집착하며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잣대와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였을까요? 바울은 율법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였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동족 중 여러 연갑자 보다 유대교를 지나 치게 믿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바울이 율법에 대한 열심과 지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 중 최고의 율법 주의자 였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신앙과 모든 가치관이 순식간에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마치 고삐풀린 망아지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다가 진정한 주인을 만나고 제대로 된 훈련을 통해 그 힘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명마가 되는 것 같이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고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용되어 질 때 구약성경을 복음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며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4장 6절에 나와 있는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수준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행하였을까요?
    바로 디모데의 할례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2–3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헬라인 아버지였기에 유대인의 할례 규례를 적용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려고 할 때 그 지역의 유대인을 인하여 할례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것은 할례 행위가 의롭다 함이나 신앙적인 행함이 아니라
    유대인을 인하여 즉 유대인 전도를 하는데 있어 이 할례를 하지 않은 행위가 추후 비방 거리가 되고 이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이라는 전략이였습니다.
    ○ 이방인에 대한 전략
    1 Corinthians 9:21 KRV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는 유대인 보기에 이방인을 말합니다.
    로마서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은 본성 즉 양심으로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만 한다면 분명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였지만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율법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이 의롭게 함을 얻는 즉 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죄에 사로잡혀 악용되고 남용되어 율법주의로 타락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법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할 많은 지침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야고보서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우리는 자유의 율법대로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해야하는 것처럼 지켜야할 말씀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본다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게바,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 할례자 유대인이 오매 두려워 떠나 물러 갔습니다. 이에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겸상하는 것 즉 식사하는 것은 관습상 위법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다르게 무엇은 먹고 무엇은 먹지 않는 규례가 복잡하게 있었습니다.
    지금 이슬람 사람들이 할랄음식을 먹는 율법과 같이 레위기(11장)에 나와 있는 정한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어 율법대로 지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도중 다른 유대인들이 왔을 때 겸상하는 것을 안보이려 그들의 눈치를 보고 피한 상황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보고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바울 사도는 비록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관습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교제도 하는 것이 더 유익 했기에 성도들을 세우는 길이 였기에 이와 같이 한것입니다.
    율법없는 자들에게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어 그들을 얻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 약한자에 대한 전략
    1 Corinthians 9:22–23 KRV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8장 9절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상의 제물 취식에 대한 논의의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인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얻기위해 바울 사도는 13절과 같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한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사람 중에 강한사람이였지만 약한 자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마음을 고려하며 행하는 진정한 겸손한 사람이였습니다. 이것은 아무쪼록(판토스), 완전히, 확실히, 의심없이, 전적으로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23절을 보면 바울이 왜 그러 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하여, 복음에 참예하고자 모든 것을 행한 것은 한명 한명의 영혼을 더 건지고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 우리에게 주는 교훈
    고전 9장 19절~23절 이 짧은 5개 절 가운데 우리는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고 건지고자 했던 그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씀이 있었죠
    얻고자 함이라, 얻고자 함이요, 얻고자 함이라
    바울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영혼이였습니다. 영혼의 구원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세상 가운데 많은 것들을 얻고자 합니다.
    특히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며 친해지는 것은 결국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만족감과 기쁨을 얻는 것이죠. 만약 그 관계 가운데 본인이 원하는 것이나 유익이 없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관계를 끊어 버리는게 세상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요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우리는요?
    이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 난게 우리 주님이 였습니다.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의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주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누가복음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는 세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사람을 사귀는 목적이 다른 겁니다. 나의 유익의 목적이 아닌 주님이 귀하게 여기신 영혼을 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건지는데 필요한 것들은 우리는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 시간, 재능, 물질 등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올바른 목적을 두고 사용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간절함을 생각하면 한가지 떠 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지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큰 이슈가 되었으며 우리 교회에도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바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입니다.
    당시 저는 군인이였고 점심식사를 하려고 식당에서 줄서 있었습니다.
    그 때 뉴스에 세월호에 대한 뉴스가 나왔고 사고가 났지만 전원 구출 되었다는 속보로 그냥 그렇게 끝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요. 시간이 지나고 그 속보는 오보로 판명되고... 결국 안타까운 299명의 사망자를 발생하면서 바다로 가라앉게 되는 참사입니다.
    그런데요 저는 그 사건도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 후 이야기를 들으며 영혼에 대한 간절함과 애절함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두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쓰러지고 침몰하는 가운데 탑승객들의 탈출을 신속하게 지휘해야하는 선장이...
    구조대가 오고 있다고 다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방송을 지시하고 본인만 탈출한 사람...
    그리고 세월호가 가라앉고 그 안에 혹 모를 생존자를 위해 수색했던 잠수부들입니다.
    가라 않고 있는 가운데 한명이라도 더 구출해야할 상황에서 본인만 팬티 바람으로 탈출한 선장을 보며 화도 나도 괘씸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나중에 시간을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서 지금 내 모습과 같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주변의 영혼들은 거듭나지 못하고 주님이 오시면 혹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어디 갈지를 뻔히 아는데 나는 혼자 구원 받았다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 자리에 그냥 있으라고 하는 선장과 같은 사람이구나.. 영혼에 대한 내 마음은 그 선장과 다를게 없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그런 선장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같아야 할까요? 자신의 육체적 수명을 버리며 한명 한명의 시신을 인양 하기 위해 반복되는 잠수로.. 일부 잠수사는 목숨을 잃기도 하고 몇몇 잠수사는 잠수사로서의 육체적 수명이 다해 그 후 취업이 안된다는 이야기, 잠수병으로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잠수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웠습니다.
    그 시신을 인양할 때 마음 한 구라도 더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자신을 버리며 인양한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세상에서도 이렇게 육신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선장인가요. 아니면 잠수사 인가요?
    내 주변에 있는 잃어진 영혼들을 보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사랑하고 간절한 마음을 두고 있나요?
    사도 바울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영혼을 그렇게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자신을 본받으라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우리가 품어야할 마음입니다.
    바울을 본 받아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한 마음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라(고린도전서 9:14-27)

    첫 사람 아담은 과일 먹을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깨고 그 속에서 누렸던 모든 복을 버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하고 그분께 속한 영원한 생명과 신령한 복을 얻게 하는데,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복음을 자랑하는 이들은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아담과 같은 시험을 시시때때로 당한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계속해서 포기함으로 복음이 약속한 모든 복에 참여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본을 보인 삶이 바로 이것이다. 바울의 삶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우선순위가 있었다. 복음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절제하고 자기 권리를 포기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고 그렇게 “복음에 참여하고자” 했다(23절).

    바울만 이런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바울 자신도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했다(27절).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 자,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는 복음에 참여할 자격 미달이다. 받은 구원을 빼앗긴다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음이 중심에 확실히 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성도가 복음의 부르심을 첫째 자리에 두게 하시고, 복음보다 자랑하는 모든 것을 버리게 해 주셔서, 진정으로 복음에 참여하는 자임을 확신하게 해달라’라고 매일 간구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하고 복음만을 자랑하는 교회로 함께 서자.

    복음만이 우리의 자랑이다(15-18)

    바울은 앞서 자신과 바나바가 포기한 여러 가지 권리를 나열했다(4-6절). 고린도 성도의 일부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원래부터 권리가 없었던 게 아니다(7-14절). 다만 복음에 어떤 장애도 생기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15절; 살전 2:9; 살후 3:8).

    바울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성도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바울의 말을 자기 권리를 챙겨달라는 말로 알아듣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15절).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단했다(15절). 돈이나 다른 어떤 무언가가 섞이면 자신의 자랑이 공허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직 자랑하길 원했던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가 하는 복음이다(16절). 아하!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면 후에 보상이 떨어지니까, 이생의 권리를 많이 내려놓고 내세의 상급 얻기를 추구하며 자랑하겠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바울은 곧이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절). 그러니까 바울은 복음을 말과 삶으로 힘써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하나 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오히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왜 그런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가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만일 그랬다면 상을 바라고 얻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17절). 하지만 복음 전하는 일은 바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사명에 의한 일이었다: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절). 하나님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그를 구별하셨고(갈 1:15), 그가 복음을 미워하고 비방하던 중에 만나시고 구원하셨다(행 9장).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다(행 26:19). 그때부터 바울의 고백은 한결같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명을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얻을 무언가가 아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그 자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힘주어 말한 것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18절).

    바울이 돈을 바라지 않고 복음을 값없이 전할 때, 바울이 바라는 상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오직 복음 그 자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바울이 오직 복음을 위하여 그에게 있는 모든 권리를 쓰지 않고 포기할 때, 오직 복음이 그 모든 권리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유일한 자랑이라는 것이 확실히 입증됐다. 신자는 오직 복음만을 자랑하고 전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바울과 같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복음위해 권리를 포기한다(19-23)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나?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웠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19절). ‘사람을 얻는다’는 말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이다(22절). 바울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구원한다. 바울은 그 복음을 전달하는 사명에 충성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았다. 신분적으로는 노예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는데(22절), 구체적으로 유대인,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각각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 섬겼다(“얻고자 함이요4, 20-22절). 가령 바울은 할례로 구원을 확신하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갈 5:2),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1-3). 성전에서 나실인 서원한 자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한 비용을 지불했다(행 21:17-26). 그는 분명 율법 아래 매여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매인 자들이 복음을 수용하는 데 장애가 없게 하려고 스스로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이다. 율법 없는 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없도록 수고했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 3:8).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될까 봐 식사 한 끼도 거저 얻어먹지 않았다. 바울이 말한 약한 자들은 8-10장의 문맥 안에서 우상의 제물을 함부로 먹지 못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단했다(8:13). 후에 그는 불신자 중에서 누가 청하면 차려 놓은 것을 묻지 말고 먹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면 초대한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명했다(10:27-31). 먹든지 먹지 않든지 자기 자유나 권리 행사가 아니라 약한 자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종이 되었다.

    오해하지 말라. 바울이 영혼을 얻으려고 수시로 율법을 어겼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21절). 전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의 법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간과하지 않고 철저히 기쁨으로 순종하셨다. 하지만 당시 법처럼 여겨진 장로의 유전과 전통 등을 과감히 어김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방과 위협을 받으셨는데, 이는 오직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마 20:28; 눅 19:10).

    한 마디로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다. 그것이 자신이 권리를 쓰거나 쓰지 않는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가리켜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했다(23절). 이것을 주목하라. 복음이 약속한 모든 복에 참여하는 자의 마땅한 삶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삶. 복음이 당신의 믿는/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전달되게 하려면 당신은 그들의 종처럼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복음이 당신의 유일한 자랑이고 맡겨진 사명이기에 기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복음향해 철저히 경주하라(24-27)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신 분명한 목적, 영혼을 얻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전심전력했다.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정했고, 이를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다. 그리고 복음을 자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그와 같이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급진적으로 요구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절).

    고린도 도시엔 2년에 한 번씩 대규모 체전이 열렸는데, 그때 주종목 중 달리기와 권투가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마도 이스트미아라는 이 경기가 열렸을 것이다. 바울은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단 한 사람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뛰는 모습을 비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상을 받기 위해 그렇게 달음질 하라고 명령했다. 대충, 나약하고 미지근하게 복음을 말하고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누리고 싶은 권리를 다 누리면서 승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월계수와 같이 썩을 것으로 관을 씌우는 달리기, 물론 명예와 부가 주어지겠지만, 그것도 금세 잊혀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서 먹는 것과 자는 것과 행동하는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까지 치열하게 다툰다면, 썩지 아니할 것 즉 “의의 면류관”, 그 영원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절제하고 노력해야 하겠는가?(딤후 4:8).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급진적인 절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삶의 분명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26절).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삶의 분명한 목적(방향)이 있다. 우리 모두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롬 14: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전 10:31). 주가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다(벧후 3:9). 

    이어서 바울은 권투의 비유를 드는데,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한다(26절).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권투가 아니라 대상을 향하여 정확하게 주먹을 날리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자신이 치는 대상을 “내 몸”이라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27절). 실제 권투에서는 자기 몸을 때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복음을 전달할 때, 우리가 자기 몸을 때려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내 자존심을 때려눕히고, 내 권리를 굴복시키고, 내 자유를 제한하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 복음으로 싸워 이기는 비법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분명한 방향으로 달음질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를 밝혔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버림을 당한다’는 말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의 자격 미달을 의미한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수고하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바울,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 그가 미달되지 않도록 분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투쟁해야겠는가? 

    물론 우리는 투쟁으로 구원을 취득하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그 은혜가 너무 귀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헌신한다. 자기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하늘 보좌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기 때문이다. 찬양받을 권리를 쓰지 않고 멸시를 받으셨고, 스스로 많은 자유를 제한하여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악을 악으로 갚을 권리를 내려놓고 선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살 권리를 포기하여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복음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우리에게 오직 은혜로 선물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에 참여한다. 바울이 우리 앞에서 그 본을 직접 보여주었다.

    조금 넓은 의미로 복음을 전하는 일의 목적은 불신자를 신자로 거듭나게 하는 일뿐만 아니라 신자가 더욱 복음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복음을 위한 것이다. 당신의 말과 태도와 반복되는 행동은 당신의 믿지 않는 자녀, 배우자, 또는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를 복음으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멀어지게 하는가? 당신의 자존심, 자유, 권리는 복음이 그들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이 전달되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되고 포기되고 있는가? 아니면 팔팔하게 살아서 복음의 장애물과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당신의 절제와 복종은 당신이 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승리의 관을 기대해도 좋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반대로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자세는 당신이 복음의 방향을 거스르고 있으며 버림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  




    개혁주의 핵심 요약

    Ⅰ. 서론 – 개혁주의, 왜 다시 주목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는 번영신학, 자기계발식 복음, 실용주의적 목회 방법론 등으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는 위기를 겪고 있다. 보이스와 라이큰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 곧 은혜 중심의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개혁주의 핵심》은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뼈대를 역사적·신학적·실천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독자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고,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촉구한다.

    Ⅱ.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 인간의 무능력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단순히 일부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의지·감정·양심 모두가 죄의 영향 아래 있다.

    •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한다.

    •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 역사로만 가능하다.

    • 저자들은 이를 통해, 인간 중심적 신앙이나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이 복음을 훼손한다고 비판한다. 

    Ⅲ.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

    하나님은 세상 기초를 놓기 전에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다. 그 선택은 인간의 행위, 공로, 심지어 미래의 믿음조차도 근거가 되지 않는다.

    •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자유에 따른 것이다.

    • 선택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고, 버림받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놓인다.

    • 저자들은 이 교리를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위로의 교리로 제시한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장한다. 

    Ⅳ.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Particular Redemption) – 속죄의 실제적 효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반적 가능성이 아니라, 택자에게 주어진 실제적 구속이다.

    •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차별적 ‘보편 구속’을 약속하지 않는다.

    • 대신 선택된 자를 확실히 구원하는 실효성 있는 속죄다.

    • 이는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효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반드시 열매 맺는다는 사실은 신자에게 큰 확신을 준다. 

    Ⅴ.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 은혜의 강권적 역사

    하나님은 택한 자를 반드시 구원으로 이끄신다. 성령의 부르심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죽은 의지를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하는 은혜다.

    • 은혜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새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다.

    • 성령의 내적 역사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찾고 따르게 된다.

    • 이 교리는 복음 전도의 확신과 연결된다. 우리의 전도가 성공 여부를 결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택한 자들을 불러내신다는 확신 속에 전도를 감당할 수 있다. 

    Ⅵ.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 구원의 확실성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 참된 신자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에 이른다.

    • 이는 인간의 의지나 결심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때문이다.

    • 신자가 넘어지고 실패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은 은혜로 다시 세우시고 결국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 이 교리는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과 인내의 동기를 준다. 

    Ⅶ. 역사 속의 칼빈주의 영향

    보이스와 라이큰은 개혁주의 신앙이 역사를 통해 남긴 열매들을 정리한다.

    • 칼빈의 제네바 : 말씀과 법이 일치하는 경건한 공동체 모델.

    • 청교도 운동 :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태도 확산.

    • 대각성 운동 : 은혜 중심 전도를 통한 영적 각성.

    • 아브라함 카이퍼 : 칼빈주의를 정치·문화·학문 전반에 적용한 세계관으로 확장.

    • 이러한 사례는 개혁주의가 단순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 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12월 20일(토) 고린도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월 19일(금) 고린도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와 합하는 자(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이니라.
    But he who unites himself with the Lord is one with him in spirit.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를 깨우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2:14)
    육에 속한 사람은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세상 만족만을 찾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3:1)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미숙한 신앙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찾지만 세상의 온갖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2:15)
    신령한 사람은 주와 합하는 영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와 합한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합하다(콜라오. kŏllaō) κολλάω Storng number 2853


    1. 밀착시키다.  2. 굳게 결합하다.  3. 달라붙다 
    Pronunciation [ kŏlla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ολλήθην, 미래 수동태 κολληθήσομαι, κόλλα ‘아교’에서 유래
    • I.  밀착시키다, 연합하다.
      • 1. [능동] 굳게 결합하다, 합하게 하다.
      • 2. [수동] 달라붙다, 눅10:11.
        • a. 닿다, 미치다, 계18:5.
        • b. 붙다, 함께 하다, 연합하다, 행5:13, 8:29, 9:26, 10:28, 17:34, 고전6:16.
        • c. 매달리다, 집착하다, 롬12:9.
    • 관련 성경  /  묻다(눅 10:11), 붙이다(눅 15:15), 상종하다(행 5:13), 사귀다(행 9:26), 교제하다(행 10:28), 가까이하다(행 17:34), 
      속하다(롬 12: 9), 합하다(고전 6:1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주제는 '몸의 연합'에서 '영의 연합'으로 옮겨진다. 
    즉 창기와 합한 자는 창기와 한몸이지만 주님과 합한 자는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가된 자라는 것이다. 
    이는 성적 타락으로 더럽혀진 죄악의 상태와 성도의 거룩한 신분을 선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성도들의 참된 지향점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 바울은 주와 '합한다'는 것도 앞절과 같은 분사 '콜로메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영'의 연합을 몸의 연합과 같은 선명한 표현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성령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몸과 영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연합을 이룸으로써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을 닮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엡 4:13). 
    그리고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그리스도에게 흡수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영과 성도의 영이 혼합 내지는 융화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양자(兩者)의 영이 어느 하나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는 인격적 연합을 이룸을 의미한다(Lenski).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지키라(에베소서 4:1-6)

    평안의 매 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씀은 성령이 우리를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교회에 매어준 평화의 띠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일치가 깨집니다. 
    이 말씀을 "성령의 안전 벨트를 풀지 말아라"라고 의역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면 안전 벨트를 매야합니다. 
    서양의 자동차들 가운데는 안전 벨트를 매지 않으면 시동이 안 걸리게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시동을 걸면 저절로 안전  벨트가 매이게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안전 벨트를 매지 않거나 풀면 위험한 것처럼 교회에서는 성령이 매어준 평화의 띠를 풀어서는 안됩니다.
    안전 벨트가 처음 보급될 때 안전 벨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캠페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안전 벨트는 생명 벨트'라는 표어였습니다.
    성령이 매어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 평안의 띠는 교회의 생명 벨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 받아야합니다.

    첫째, 교회에서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는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4절과 5절, 그리고 6절의 앞부분은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일곱 가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 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몸이 아닙니다.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성도인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픕니다. 쌍둥
    이의 경우 하나가 아프면 다른 아이도 아픈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부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경우가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다 아픕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아파하십니다.

    둘, 성령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갈라지게 하
    는 것은 악령이 하는 일이고 하나되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한 성령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방언으로 언어가
    하나되게 한 일이었습니다. 언어는 바벨탑 사건 때, 사람들이 탑을 높이 쌓아
    하나님과 같아지겠다고 교만한 마음을 먹었을 때 혼잡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
    령의 강림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셋, 우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처지와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소망이 있습니다. 수능시험을 치고
    대학에 원서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수험생들에게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
    에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고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에게는 취업이 소망입니다.
    저희에게는 본당 준공과 교회부흥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 소망들을 넘어서 공통된 소망, 최종의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입니
    다. 우리는 이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넷, 주님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분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 동양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
    같습니다. 남한의 성도들이 믿는 예수님,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믿는 예수
    님, 같습니다.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는 '내가 재림주 예수다!" 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가짜입니다. 진짜는 하나입니다.

    다섯, 믿음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다르고 교파가 다른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입
    니다'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그러니까 힘을 합해 잘 해봅시다' 하는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어떤 분이 외국에 가서 기차여행을 합니다. 앞자리에 앉은 분이 책을 읽고 있는
    데 글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 같아 보이더랍니다. '저 사람이 나와 같은 믿
    음을 가진 크리스천인 것 같은데, 교제를 나누고 싶은데…' 이런 마음이 있어
    서 영어로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더랍니다. '어떻
    게 할까?' 하다가 지혜가 떠올라서 찬송가를 휘파람으로 불었다고 합니다. 그랬
    더니 그 사람이 마주보더니 같은 찬송가를 휘파람으로 불더랍니다. 휘파람 이중
    주가 끝난 다음에 둘은 악수를 나누었는데 아주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고 합
    니다.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달랐지만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
    다.

    여섯, 세례도 하나입니다.
    여기 세례를 받은 분들. 집례하신 목사님은 다르고 세례를 받은 때와 장소도 다
    릅니다. 세례에 사용한 물도 수도권 사람들은 한강 물, 영남권에서는 낙동강 물,
    호남권에서는 영산강 물, 다릅니다. 북한에서 자유롭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대동강 물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집례자, 장소, 물, 모두 다르지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성부와 성자와 성
    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회사나 단체에서 이 부서에서 기안을 하고 저 부서에서 기안을 하지만 책임자
    가 서명을 하면 모두 책임자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집행됩니다.
    세례는 하나입니다.

    일곱,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유일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은 한 분이다'
    고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축복된 일입니다. 다른 나라의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4절과 5절, 6절의 앞부분은 일곱 가지의 하나를 말
    하고 있는데 일곱은 완전한 숫자, 무한한 숫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의 신비 가운데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교회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연령층이 다릅니다. 지금 이 자리를 보세요. 10대에서 80대까지가 한 자리
    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신지역, 학력, 체험, 취미, 성격, 직업, 다릅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어서 그렇
    지 않지만 외국에 가면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한 교회에 모여
    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신비입니다.
    에베소서 4장 4절, 5절, 6절은 그 비결을 알려줍니다. 몸과, 성령과, 소망과 주님
    과, 믿음과, 세례와 하나님이 하나이며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치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본입니다. 젊은이들 '당연하다'
    할 때 '당근이지!' 하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일
    치는 당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교회는 자석과 같은 성격이 있어야합니다. 자석은 흩어져 있는 쇳가루들을 다
    붙게 합니다.
    여기 50대, 60대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장난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
    석을 가지고 땅바닥을 끌면 흙 속에 있던 쇳가루들이 다 자석에 붙습니다. 그것
    을 보고 신기해하고 재미 있어했었지요.
    교회라는 자석은 참되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
    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이 힘이 강한 교회가 성장합니다.

    종이 위에 쇳조각을 놓고 종이 밑에서 자석을 대면 그 쇳조각들이 붙습니다. 교
    회는 장애가 되는 것들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이 2절에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에베소서는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간곡한 마음으
    로 일치를 이룰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절의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은 '이것은 내가
    참으로 간절하게 하는 권고입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에베소교회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교회들은 이방
    인과 유대인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첫째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겸손이란 말의 뜻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이고, 온유는 “자신의 감정을 부드럽게 절제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온유할 때 이웃을 향해 겸손한 자세로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겸손과 온유로 대한다는 말은 때로 분노가 야기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오히려 그를 섬기고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할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잘 알려진 중국 그리스도인 지도자 워치만 니의 저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형제가 중국 남부 한 농촌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느 아침 자기 논에 나가 보니까 논에 있던 물이 아래 논으로 다 빠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써 다시 원상 복귀를 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틑날 아침에 나가 보니까 다시 물이 빠져 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 씩 물을 도적맞은 그는 결국 자기 이웃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행동개시전에 다른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의논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뜻밖에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행동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올바른 일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을까요?”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와 “주님, 올바른 일 그 이상으로 내가 내 이웃에게 할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요?”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중에 주님의 감동을 느낀 그는 그날 저녁 자기 논에 나아가 아예 자기 논의 물을 아래 논으로 스스로 흘러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자기 논에 물이 빠져 나가는 일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겸손과 온유의 승리라고 할까요?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11:2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마땅히 심판하실 그분이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고 오셔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는 진실로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제자들입니다. 화평의 코이노니아를 열망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학습하십시오.

    그냥 겸손이 아니라 모든 겸손이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모든 상황, 모든 곳, 모든 자리에서의 겸손과 온유의 태도야 말로 우리를 화평의 삶으로 인도 할 것입니다.

    둘째는, 오래 참음과 용납함입니다.

    우라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대하여 오래 참지 못하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오래 참고 있지만 우리 안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이웃들과 화평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을 거역한 아들을 오래 참으셨을 뿐 아니라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이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탕자는 비로소 새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화평의 사람이 되려면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을 가져다 준 상대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신자가 자기 교회 목사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며, “목사님 저는 인내가 부족합니다. 제가 인내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가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형제의 소원를 따라 기도하오니 환난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기도하고 있는 목사의 팔을 툭툭 치면서 “목사님, 환난이 아니라 인내입니다.”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형제여 환난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에서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나요”했다고 합니다. 진실로 인내 혹은 오래 참음은 환난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야 말로 무엇보다 인내를 학습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저와 여러분이 인내하는 품성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로 환난의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환난가운데도 가장 힘든 환난은 인간관계의 환난입니다. 인간관계가 어려워 질 때 정말 삶은 지옥처럼 숨막히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야 말로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신 주님의 인내를 묵상할 때입니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세상이 싫어질 때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인생들, 하나님을 원망하고 조롱하고 대적한 세상--그러나 이 모든 인생들의 죄악을 아시고 보시면서도 참으시고 사랑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든 당신이 하나님을 대하여 마음속으로 원망한 모든 일, 그의 기대를 져 버리고 그를 실망시켜 드린 낱낱의 행위들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주님이시라면 과연 당신이 용납하지 못할 이웃들이 존재할까요? 에베소서 4장의 마지막 권면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엡4:32)그러면 이제 그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당신을 섭섭하게 한 그 이웃들을 참고 용납하시겠습니까?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과연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까지 참고 양보 할 필요가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내이어야 합니까?” 사실 이어지는 에베소서 4장이하의 메시지는 거기에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유익이냐구요? 우리로 주님의 품성, 주님의 인격을 닮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나고 거친 우리의 인격은 이런 상황,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빚어지고 다듬어져 우리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를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엡4:13의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다시 4:15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우리는 모두 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도 하나이요, 몸도 하나이요, 소망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요, 우리가 갈 천국도 하나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길을 가서 결국은 한 곳에서 영원히 같이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버리고 갈 수 없고 모른 척 할 수도 없습니다. 영원히 같이 살아야 될 내 가족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훈련해서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내가 깨뜨림으로써 불행을 초래하지 않고,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이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즐겁고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월 18일(목) 고린도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you are of Christ, and Christ is of God.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누구의 계열인가?
    12절.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네게 속한 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약 2:5) 구원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요 10:36;17:18).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마 28:18).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한하나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 진다.


    고전 3 :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 상 )

    고전 3 :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1]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 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 구원 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

    * 약 2: 5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 요 10: 36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 요 17: 18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

    * 마 28: 18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히 하나 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진다.

    온 세상도 교회의 것이요 생명도 죽음도 그러하다. 현재 있는 것들이 그러하고 장차 올 것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며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파당에 속하지 말고 전체에 속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 곧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물이다.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기에 확실히 교회의 일체성, 교회의 하나 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교회가 하나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지혜를 다 버리고 또 그런 지혜가 자신을 속이는 헛된 것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그의 지혜를 사모하며 또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그러므로 성도들은 요한계시록 21장 6-7절과 22 장 12, 14절의 축복을 받게 된다.

    * 계 21: 6-7 -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1) 하나님의 선포 -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다 이루었도다.

    '이루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난'(*)은 복수 동사로서 문자적으로 '이런 것들이 다 이루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제까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들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Mounce). 앞에서 언급되었던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까지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알파와 오메가 :

    ⒝ 처음과 나중 :

    이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칭호이다.

    * 계 1: 8 -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계 22: 13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사 44: 6 -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 사 48: 12 -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이 칭호 중에서 '알파와 처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며 '오메가와 나중'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셔서 온전히 새롭게 하실 분이심을 시사한다(Johnson, Ladd, Morris).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칭호를 밝히심으로 '이루었도다.'라는 선언을 보증하고 계신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에게 주고자 하시던 유업을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세에 끝까지 견디고 마귀 미혹을 이긴 성도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알파와 처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며 '오메가와 나중'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셔서 온전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붙잡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셨으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붙잡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셨고,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을 붙잡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끝으로 아담과 예수님과 새 예루살렘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아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끝이요 빛의 시작이었으며, 예수님은 율법 시대의 끝이요 은혜(교회) 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새 예루살렘은 교회(건물) 성전 시대의 끝이요 사람(육체) 성전 시대의 시작이다.

    성도의 축복-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심

    '목마름'의 비유는 성경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 시 42: 1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 시 63: 1 -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사 55: 1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은 구속하여 영생을 누리도록 하시는 샘물이다.

    * 요 4: 10, 14 -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는 자기 백성의 필요와 갈급함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생명수' 즉 구원 혹은 영생을 수여하시는 분이다.(Johnson, Beasley-Murray, Hendriksen)

    * 계 7: 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계 22: 1, 17 -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요 7: 37-39 -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가 대가를 바라거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과 호의로 베풀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 시 36: 8 -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 슥 14: 7-8 -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축복의 원인

    ⒜ 이기는 자에게 유업으로 주신다.- 상속 :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 갈 3: 9 -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기는 자'는 계 2, 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를 상기시킨다. 일곱 교회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며 믿음을 지킨 자들, 곧 이긴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유업으로 상속되고 있다(2: 7, 11, 17, 26. 3: 5, 12, 21).

    '이것들'은 앞에서 언급된 것으로 만물이 새롭게 변하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생명수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Beasley-Murray).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시 36: 8 -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 슥 14: 8 -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 요 4: 10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첫째 아담은 이기지 못하므로 죽었으나 둘째 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한 자들이 받게 된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이겼을 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 창 32: 24-28 –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새 예루살렘과 씨름을 하여 이긴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사는 축복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본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말한다. 그 아들에게 계 21: 1-6에 기록된 이것들을 유업으로 모두 주시겠다고 하셨다.

    ⒝ 저의 하나님이 되신다.

    ⒞ 그는 내 아들이 된다.

    본문은 메시야에 관한 암시인 삼하 7: 14에서는 '아비'라고 되어 있으나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변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만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본 절의 이긴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긴 하나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부자(父子) 관계가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Beasley-Murray).

    * 삼하 7: 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천사와 겨루어 이겼던 야곱은(창 32: 24-26)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고 그곳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얼굴이 되었다는 뜻이다(창 32: 28-30).

    * 창 32: 24-30 -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계 22: 12, 14 -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2) 상급의 약속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는 7절의 반복이다.

    이와 같이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별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연결된 재림은 사 40: 10의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 사 40: 10 -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이는 권능의 손을 휘둘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줄 상이 있다- 재림의 때.

    * 마 16: 27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사 40: 10 -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준다.

    ⒜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을 가리킨다.

    이처럼 행위에 근거한 판단이나 심판은 성경 전체에서 자주 나타난다.

    * 계 2: 23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 잠 22: 12 -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 렘 17: 10 -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롬 2: 6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 벧전 1: 17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이것은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묘사할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 계 20: 13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본 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의로운 자에게 주어지는 '상'(*, 미스도스)은 많은 핍박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인내로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Ladd).

    * 계 13: 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 계 14: 12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의로운 자에 대한 보상은 상대적으로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를 추종하고 따른 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나 짐승과 사단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만을 가져다준다.

    이 말씀과 진리를 깨달은 종들이 죽도록 충성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그 일 한대로 상급을 받고 잘했다 칭찬받게 된다.

    고전 3 :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 하 )

    (3) 복 있는 자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 -날마다 행위를 회개하여 자기를 정결케 하는 자.

    * 요 13: 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생명나무에 나간다- 에덴동산의 회복.

    * 창 3: 24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

    본문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가지 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한 묘사이다(7절. 1: 3. 14: 13. 16: 15. 19: 9. 20: 6).

    두루마기를 빠는 상징은 이미 7: 14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다.

    특별히 7: 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십자가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함을 시사하지만, 본문의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 계 7: 14 -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 요 13: 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Morris, Ladd, Mounce).

    * 요일 1: 7 -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믿는 자들이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에 씻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 갈 3: 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5)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롬 11: 14 -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계 7: 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상(上)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계 19: 13은 피 뿌린 옷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셨고, 계 22: 14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옷을 빨아 예수와 같이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들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말한다. 우리의 행위를 완전히 씻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장성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영생에의 참여를 나타내며 '성에 들어갈 권세'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충성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 즉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3] 인생의 터 : 박 조준 목사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요긴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이 닦는 터입니다.

    3장 10~15절에 보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서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터를 닦아 두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1절에 보면 고린도에 18개월, 사도행전 20장 31절에 보면 에베소에 3년 체류한 것이 제일 긴 기간이었고 데살로니가에는 한 달도 머물러 있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설교해야 할 고장은 많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작업을 순조롭게 잘 하려면 바울은 터만 닦아 놓고는 다음 고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매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1년 이상 3년이나 머물러 있은 곳이 있었다면 그것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뿐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렇게 복음의 전파가 긴급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디모데후서라고 합니다. 
    그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에 보아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히 정성을 다 쏟아 부으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얼마나 강력하게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했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말씀 전파는 긴급한 것입니다. 전파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똑같은 터를 닦았습니다. 그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터입니다. 기초입니다. 기초는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터가 움직이면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큰 집, 높은 집을 건축할 때 기초 공사를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기초가 약한 데 집을 지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얼마가지 않아서 금이 가고 기울어지고 종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니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세 반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 인생의 집의 기초가 반석입니까? 아니면 모래입니까? 우리의 집을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 위에 세우셨습니까? 그리스도 위에 세운 사람은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집을 세운 사람은 세상이 변하는 대로 달라집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대목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이 발견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6~11).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심판받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허물과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원수가 아니라 친구처럼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고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밉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던 것이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죄의 사함을 받을 때 유쾌하게 되는 날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현재에 베푸시는 능력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힘과 소망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죄악의 세력과 고전분투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을 보세요. 로마서 7장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고 했습니다.

    바울이 육과 영의 싸움에서 얼마나 고민했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그는 얼마나 담대해졌습니까?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1~37).

    빌립보서 4장 13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것이든 그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싸움터에서 싸우매 승리합니다.

    3. 장래에 대한 희망을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래는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있다면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장래를 바라보기를 무서워하고 생각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세계, 하나님과 같이 일하는 가운데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계, 삶의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곧 종말이 아니라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서곡에 불과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집이 없으면 얼마나 초조하고 암담할까요? 인생의 밤은 다가오는데 가실 집이 마련되어 있으십니까?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고 훌륭한 저택을 쓰시고 계셔도 저 영원한 곳에 집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터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터를 그리스도로 삼기 바랍니다.

    이제 이 터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 반석 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둡니다. 다른 터 위에 천국의 소망을 세우는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교리의 기본 교리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떠나면 모든 위로가 무너지고 죄인의 소망이 사라집니다.

    죄 많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기초를 잡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믿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터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세웁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순수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며 예수 안에 있는 진리만을 잡으며 그것만을 전파합니다. 이것은 좋은 터 위에 잘 세운 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친 복음만을 가감 없이 순수하게 믿고 전해야만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기초 위에 집을 세운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떠나고 그리스도의 교리 대신에 그들의 생각이나 요구를 대치시켜서 집을 짓는데, 이것은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 집과도 같습니다. 볼 때는 굉장할는지 모르지만 심판 때에 다 타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터 위에 세운 것들이 밝히 드러날 때가 옵니다. 모든 사람의 공력이 밝혀질 것인데 자기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에 뭐랬어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날에는 모든 것이 나타납니다. 불은 금과 은과 불순물을 구분합니다. 금과 은과 보석은 불을 견디고 나무와 풀과 짚은 타버립니다.

    불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불같은 시험이 우리에게 닥칠 때 어떤 사람은 그 시험을 견디고 좋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들은 좋은 터 위에 잘 세웠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잘 지은 집과 같습니다. 터나 건물이 하나가 됩니다. 기본 진리와 그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함께 가르침을 받습니다. 지금은 이것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완전히 드러납니다. 잘 짓는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받습니다. 그는 명예와 칭찬을 받고 영원한 상을 얻습니다.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을 전파하며 그들의 일이 올바르면 반드시 보답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 얼마나 넘치는 보답입니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세상 문헌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죽음은 절망이요, 슬픔이요 저주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요? 이 땅 위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니 그들의 공력이 불타 버릴 사람도 있습니다. 최후의 날은 모든 위장을 제거하고 사실을 밝힙니다. 공력이 타버리고 사람은 큰 손해를 당합니다. 좋은 터 위에 나무와 풀과 짚으로 세운 사람은 손해를 당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자기 사욕이 앞서고 잘못된 길로 행할 때 그 일이 아무리 굉장해 보여도 결국은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의 터를 잡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세우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은 그의 공력을 태워 버리는 불에서 구출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에서 끄집어내는 가지처럼 구원하나 그들의 공력은 태워 버리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이 잘못된 집을 지을까 염려한 것이 아니고 불충분한 집을 지을까 염려했습니다. 자기 기분에 맞는 것만을 강조하고 그 이외의 것은 무시하여 균형을 잃어버린 기독교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교리를 곡해하고 신조를 왜곡하여 어그러진 모습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불충분한 점을 우리 각자의 신앙을 각자의 편견이나 선입견에 비추어 보지 않고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점검해 볼 때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평론가 롱기너스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슨 글을 쓰든지 ‘호머나 데모스테네스라면 어떻게 쓸까?’라고 생각하라. 아니 그보다도 호머나 데모스테네스가 네 글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자문해 보라”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바로 옆에 앉아 계시면서 들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많은 잘못에서 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의 이 몸은 성전입니다. 성전은 구별된 집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몸이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성전에 거하셨습니다. 그 성전을 소유하시고 그 안에 거하셨으며, 영광스러운 구름은 임재의 표시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도 성령으로 모든 성도들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이 계시려면 더러운 것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입니다(갈 5:19~21). 이런 것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 몸이 성전이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을 더럽히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천직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고린도 교회를 집합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도 개개인도 거룩해야 하거니와 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빠지면 안 됩니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물 속에 빠지면 배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지 않도록 힘쓰십시다.

    끝으로, 바울은 겸손을 요청합니다.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23절). 우리가 자신의 지혜를 과대 평가하는 것은 자기 기만을 낳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기 위하여 인간의 지혜를 버리는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선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9~21절).

    그리스도의 터 위에 귀한 믿음의 집을 지으십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죄는 용서받고, 지금은 능력으로 살고, 장래는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전입니다. 주님이 계실 수 있는 전이 되도록 하십시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 세상을 어리석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다.

    고린도전서 3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목회는 물을 주는 것과 같으며, 전도는 터를 닦는 것과 같고 목회는 그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전도자이든지 목회자이든지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 전해야 한다.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없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금, 은, 보석으로, 즉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 성경의 순수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과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 개인 속에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에 관련하여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특히 우리가 잘못된 이단사설을 용납하거나 파당을 만들고 분쟁하고 분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를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셋째,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 교회의 분쟁에 대하여

    바울이 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파당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복음을 듣는 일과 세례받는 일에 있어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그리스도파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들어 그들의 행위를 바로 잡습니다.

    1.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은 나누어진 경우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뉨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나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다양하고 다른 각각의 지체가 있으나, 그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유지하고 있음같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각각 다른 지체의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다양한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모든 지체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머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하나의 머리와 하나의 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언행은 삼가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몸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인하여 모든 분열과 분파를 막아야 합니다.

    2.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이 말씀은 ‘바울 덕에 너희가 구속을 받았느냐?’는 반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부르느냐?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분파심은 사람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더 높여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며, 결국 우상숭배가 되며, 이단에 빠지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3.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냐?

    바울은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못박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구원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교회의 내적 분열에는 편협한 동류의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고, ‘끼리끼리’라는 편파적인 성향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배경이나 사상적인 배경을 따라 교회에서 편협한 동류의식으로 분파를 일으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교회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고전 1:10-1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매우 세속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지식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하게 하시고, 은사를 넘쳐나게 하시고,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다만 그들은 받은바 은혜를 감당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받은바 풍성한 은혜에 걸맞은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래 전, 몇 주간 금식 기도하였던 때입니다. 제가 금식 기도한다는 것을 어떻게 들은 어느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 마자 대뜸 “아니, 왜 교회에 무슨 문제 있어요?”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다’고 대답을 했지만, 계속해서 무슨 문제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를 염려하여 묻는다지만 다른 어떤 호기심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제 말을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듯이, 문제가 없는데 왜 금식하느냐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하던 그 분의 얼굴이 잊히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전에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평소에 금식하고, 문제가 생기면 밥 먹고 힘을 얻어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분쟁’에 관한 내용을 설교하면 교회에 엄청난 싸움이 있어서 그런 설교를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쟁이 없기에 분쟁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리교회 창립기념주일을 맞으며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을 간절한 권면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권면입니다.  

    I. 권면  

    우리말에서 ‘권면’은 권할 권(勸)자에 힘쓸 면(勉)자를 써서 어떤 일에 힘을 쓰도록 권하는 것이 권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 왜,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까?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앞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원수같이 여겨서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권면하다[parakalevw/파라칼레오]’는 말은 ‘가까이서 부르다’는 뜻입니다. 가까이 불러서 부탁하고, 훈계하고, 위로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밀한 사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를 문제가 많은 교회의 대표 선수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교회였고,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형제들이었습니다.

    1. 형제로써 권면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권면하려고 할 때, 또는 세상에 있는 다른 교회들의 잘못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할 때, 우리가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로 여기는 미움에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는 사랑에서 권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이기에 정말로 냉정하게 꾸짖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의 권면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여, 먼 고장으로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나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런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둘째가 집을 떠난 뒤에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첫째의 이야기입니다. 마침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종을 통하여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첫째의 말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동생을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말은 잘못된 동생을 맞아들인 아버지의 행동을 단단히 몰아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첫째야 말로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큰 아들에게 하였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눅 15:31)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말은 ‘얘[tevknon/테크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들아’(My son)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아버지를 몰아세우는 바로 그 아들을 향하여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돌아온 그 둘째가 바로 ‘네 동생’(눅 15:32)이라고 그에게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이 여전히 한 가족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모두 거룩한 모습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원수처럼 비난하는 것으로 교회를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교회만은 안 그렇다고 내세우는 것으로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또, 문제 있는 교회를 도려내는 것으로 잃어버린 교회의 신망을 되찾을 수도 없습니다. 결코, 저런 사람만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교회가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사람을 우리가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라는 하신 이들을 우리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형제로써 다만 사랑하여야 할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권면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으로 권면합니까?

    다시,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diav/디아]’라는 말은 무엇을 ‘통하여’, 또는 무엇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권면하는 이유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권면하는 근거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권면할 수 있는 능력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권면하는 방법도 예수님이셨습니다. 

    2.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여기에 함께 모인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이 아니라면 전혀 관계없이 살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은 오로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적인 계획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 서로에게 형제와 자매들인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일 이유도, 목적도, 능력도 모두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님 때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로 자매로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II. 내용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써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당위성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랑하여야 할 줄을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가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1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0b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매우 단순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권면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표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내용의 권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의 내용은 모두 같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본래 ‘말하다[levgw/레고]’는 ‘앞에 놓다’는 뜻입니다. 말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역시 알 수가 없습니다. 말한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같은 모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같은 주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1. 같은 말을 하십시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앵무새같이 똑같은 소리를 짓거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소리의 화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도 서로 다른 것처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써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믿는 예수님과 저 사람이 믿는 예수님이 다른 분처럼 보이고, 이 교회가 믿는 예수님과 저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분처럼 드러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그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저는 제가 지금까지 목회해 온 교회를 돌아보면서 이런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보이지만 교회에서는 작은 다툼이라도 크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도무지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권면의 내용은 분쟁이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데 문제는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쟁이라고 합니다. ‘분쟁[scivsma/스키스마]’은 ‘틈’, 혹은 ‘간격’, ‘찢어진 곳’을 가리킵니다. 갈라진 틈이 보입니다.

    찢어진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즉 베드로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분열된 모습입니다.

    바울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바울이 보다 더 위대하게 보였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후에 아볼로를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아볼로가 바울보다 더 낫게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먼저 사역하였으니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파였고, 아볼로는 바울의 후임이었으니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은 신파였을 것입니다. 구파와 신파가 서로 다투는 것에 실증을 느끼고,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신앙의 ‘원조’를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게바파입니다. 그러나 아예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짜 원조’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런 모습에 사도 바울은 통분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13)라고 묻습니다. 자신을 따fms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15)고 합습니다. 결코 사람을 따르는 분열의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분쟁이 없이 하십시오.

    인간은 매우 분열적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누가 더 잘 났느냐 하는 것으로 갈라집니다.

    천안 병천은 순대로 유명합니다. 강원도 안흥은 찐빵으로 유명합니다. 여주 이포대교부근에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합니다. 춘천은 닭갈비로 유명합니다. 저마다 유명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유명하다는 곳에 가면 예외 없이 ‘원조’라는 이름이 붙은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집의 이름은 ‘진짜원조’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할매 원조’ 심지어는 ‘진짜진짜원조’도 있습니다. 모두 자신이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원조라는 것을 내세워야 장사되는 상술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 다고(:14)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을 따르고 어떤 사람을 내세우면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조금 잘하면 교만할 수 있고, 조금 못하면 좌절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두 패가 생기고, 세 사람이 모면 세 패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분쟁을 없이 하여야 합니다.

    분쟁이 없이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세 번째 권면의 내용은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합하다[katartivzw/카탈티조]’는 말은 ‘수리하다’, ‘조정하다’, ‘회복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계의 부속품들을 조정하여 정상적으로 움직이다’는 것입니다.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는 것입니다. 죄악 된 인간이 분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복을 시도해야 합니다. 회복을 시도해도 저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또 다른 분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 안에서 온전히 합하여야 합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은 복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같은 뜻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는 같은 말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서는 예수님만이 온전히 드러나야 합니다. 

    3. 온전히 합하십시오.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교회가 가 가져야 할 같은 마음이자, 같은 뜻이며, 같은 말입니다. 십자가를 표현하는 다양한 표현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신들의 패거리를 내세우는 것이라면 반(反) 기독교적이며 반(反) 신앙적입니다.

    미국의 종교 월간지 [무디] 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내용은 ‘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불평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등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더욱 집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래서 형제와 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때문에’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하기 위하여 분쟁이 없이 온전히 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악 된 본성을 거스른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길 때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음에 길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고백하십시오.

    “형제님, 자매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뜻을 품고,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같은 성령님의 말을 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배경과 교회의 문제들

    1. 고린도전서가 쓰이게 된 배경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회 개척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AD 49~52년)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8:1).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상업 중심지로, 무역과 문화가 활발했지만 동시에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행 18:11)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기독교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그는 예루살렘과 시리아 안디옥을 거쳐 제3차 전도여행(AD 53~57년)을 시작했고, 에베소에 장기간 머물며 사역하였습니다(행 19:1). 그 사이 고린도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 교회 안에 심각한 윤리적, 신학적, 공동체적 혼란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보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두 가지 경로로 파악했습니다. 첫째,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에 대해 알려왔습니다(고전 1:11). 둘째, 고린도 교회로부터 직접 편지를 받아 여러 실천적이고 신학적인 질문들을 전달받았습니다(고전 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는…”).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AD 55년경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성경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서신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반으로 교회의 정체성과 윤리, 예배와 공동체 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2.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교회의 문제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진단하고 이에 대해 성경적 지침을 제시하는 실천적인 사도적 권면의 서신입니다. 본서는 크게 교회 내의 분열과 도덕적 문제, 그리고 교회의 질문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답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교회의 분열과 리더십 숭배 (1~4장)

    고린도 교회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며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고전 1:12). 이는 고대 헬라 철학자들의 추종자 문화를 닮은 것으로, 복음의 본질을 잊고 인간 지도자 중심의 사고로 변질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전 1:13)고 반문하며, 복음은 오직 십자가의 도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복음을 철학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으로 규정하고, 사도와 교역자는 주의 일꾼일 뿐이라는 점을 밝힙니다(고전 4:1). 이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하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2. 도덕적 타락과 윤리 문제 (5~6장)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근친상간의 사건(고전 5:1), 송사 문제(고전 6:1

    11), 성적 부도덕(고전 6:12

    20) 등 심각한 윤리적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5장에서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다”(고전 5:6)고 말하며 죄를 방치하는 교회의 책임을 경고합니다. 6장에서는 성도들 간의 법정 소송을 문제 삼으며, 교회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복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로 지적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점(고전 6:19)을 강조하며, 신체에 대한 경건한 태도와 성결한 삶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3. 결혼과 독신에 관한 문제 (7장)

    고린도 교회는 결혼, 독신, 이혼, 재혼에 대해 여러 실천적 질문을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고전 7:17)며, 각자의 처지에 따른 신앙적 결단을 존중합니다.

    기독교

    혼인을 권장하면서도 독신의 유익을 말하며, 재혼의 경우에는 신중을 기할 것을 권면합니다. 특히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동거 문제에 대해서는 화목을 우선하되, 믿음으로 인한 분리는 용납함으로써 현실적이고 융통성 있는 신앙 지침을 제시합니다.

    4. 우상제물과 자유의 절제 (8~10장)

    고린도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논쟁 중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하며, 기독인의 자유에는 책임이 수반됨을 강조합니다.

    우상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약한 양심을 가진 형제를 실족시키는 자유는 잘못된 것이라고 경고합니다(고전 8:9~13).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삶(고전 9장)을 모범으로 제시하며,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유의 절제를 요청합니다.

    5. 예배와 질서 문제 (11~14장)

    예배 중 여성의 복장 문제(두건 착용), 성만찬의 무질서, 은사의 혼란이 교회의 질서를 해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바울은 질서와 경건의 예배 회복을 요청합니다.

    성만찬에 있어서는 부유한 자가 먼저 와서 자기 식사를 하고, 가난한 자는 굶주리는 불공평함을 지적합니다(고전 11:21). 그는 “주께서 받으신 바”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시키며,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히 경고합니다(고전 11:27).

    12~14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혼란을 바로잡습니다. 은사의 다양성 속에서 몸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방언과 예언의 사용은 질서 있게, 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지침으로 줍니다. 특히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1)는 13장은 은사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6. 부활에 대한 신학적 혼란 (15장)

    고린도 교회 안에는 죽은 자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며(고전 15:14),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핵심임을 선언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증인들을 통해 증명하고, 부활체의 영광과 최종적인 승리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는 외침은 부활의 승리를 확신하는 성도의 찬가입니다.

    7. 연보와 사역자 문제 (16장)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위한 연보를 고린도 교회에 권면합니다. 그는 "각 사람이 마음에 정한 대로,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말하며 헌금의 원리를 제시합니다(참조: 고후 8~9장).

    또한 바울의 방문 계획과 동역자 소개, 그리고 교회 일꾼에 대한 격려가 이어지며, 신실한 사역자들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깊은 애정이 드러납니다.


    결론

    고린도전서는 단순한 고대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문서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영적 진리와 삶의 원칙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인간적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도 위에 굳건히 서서, 사랑과 질서, 자유와 책임, 그리고 부활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는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중심 메시지를 요약하는 핵심 선언입니다.



    같은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린도전서 1:10-17)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현상을 보거나 직접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한편,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한 분쟁을 겪고 있지 않다고 안심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분쟁의 기본적인 의미인 ‘갈라진 틈’, ‘균열’은 언제든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 가운데 생길 수 있으며,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큰 파벌과 분열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 소식을 듣고 그에 관한 답변을 1-6장까지 적었고, 그 중에서 4장까지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을 다뤘다. 고린도 교회 가운데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심각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고린도 교회 나타난 분쟁을 신중하게 해부하여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성경적인 처방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할때 성령께서 우리 교회의 틈과 벽을 발견하게 하시고, 더 큰 문제로 번지기 전에 예방하여,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원한다.

    1. 분쟁의 현상(11-12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들은 뜬소문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성도가 전해준 사실이었다. 바울은 어느 정도 소식통의 정보를 알리는데, 글로에의 집 편(11절), 노골적으로 대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들은 소식이 신빙성 있는 증거에 근거한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분쟁이 나타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분쟁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2절).

    먼저, 여기 언급된 이름은 모두 고린도 성도에게 잘 알려진 일꾼들이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인도했던 목회자였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한 목사(고전 4:15), 아볼로는 그 뒤를 이어 교회를 양육한 목사, 게바(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서 당시 모든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건, 분쟁은 일꾼 사이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끼리 경쟁이나 갈등은 없었다.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아볼로를 교회에 물을 준 일꾼으로 인정하고(3:6), 고린도 교회에 돌아갈 것을 많이 권했다(16:12). 불편한 관계에선 그렇게 하기 어렵다. 베드로는 편지에서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 또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벧후 3:15). 결국, 문제의 현상은 인도자가 아니라 성도들 간에 나타났다. 성도가 자신이 추종하는 인도자에 따라 편을 나눠 갈라선 것이다: “나는 OOO에게 속한 자라!

    일반적으로 교회의 분쟁은 일꾼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먼저 일꾼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과 시기심으로 균열이 생기면, 각각 추종하는 무리가 들러붙어 더 큰 분쟁으로 번진다. 반대로 성도의  심각한 분열이 아무 문제 없던 일꾼 사이를 갈라놓기도 한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경우 목회자 사이엔 아무런 분쟁이 없었다. 그러면 성도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편이 나눠진 걸까? 분쟁의 원인에 관하여 많은 추측과 시나리오가 있고, 그중엔 합리적인 추정도 있다. 가령, 아볼로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뛰어난 수사학, 웅변술 등을 익히는 대학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답게,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다(행 18:24). 그는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행 18:28). 성도 중에서는 그의 탁월한 언변과 지식에 감탄하며 매료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점점 그를 추종하면서 한 분파가 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인도자를 무시하거나 멀리하게 되었을 것이다(고후 10:10). 어쩌면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세상적 지혜를 책망하고(1:19), 말의 설득력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을지도 모른다(2:1-4).

    일부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 같은 바울을 무례히 대하는 무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9장). 그래서 정이나 의리 때문에 또 다른 분파를 형성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똑같은 책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게바파는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고린도 교회 안에 비교적 소수로 존재한 유대인 성도로 같은 배경, 전통, 율법, 역사를 가진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를 추종하느라 생긴 분파(8, 12장), 그리스도파는 이도 저도 속하고 싶어 하지 않은, 그러나 어떤 면에서 모든 인도자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돌봄을 받고 있다고 교만하게 생각했던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 될 수 있지만, 정확한 분쟁의 원인을 다 알 순 없다. 표면적 원인은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바울이 내린 진단을 통해 분쟁의 본질적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2. 분쟁의 진단(13-17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절). 이 질문들이 기대하는 정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으셨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뉘신 것처럼 그 몸인 교회를 나누었고, 바울, 아볼로, 게바가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례를 그 일꾼들 이름으로 받은 것처럼 행했다. 14-17절까지는 생각보다 길게 세례에 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데, 이는 고린도 성도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가지고 그 인도자와의 특별한 관계를 입증하려고 애썼던 정황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보(회당장, 행 18:8), 가이오(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롬 16:23)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14절). 왜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이 되는가? 그 사실이 아무도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5절). 흥미롭게도 바울은 세례를 베푼 또 다른 성도들이 떠올랐다: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16절). 어쩌면 대필자 소스데네가 이 사실을 떠오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 외엔 세례를 베푼 자가 없다고 확언했다가 스데바나 집(16:15) 사람들이 떠올랐을 때, 그 외에도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가 바울에겐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 바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얼마나 세례를 베풀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했는지가 중요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17절a). 얼마나 해박한 지식과 대단한 설득력을 가진 언변을 가졌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달되는 것이 중요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b). 바울의 삶 그리고 사역은 온통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고린도 교회 성도가 왜 서로에게 벽을 세웠는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났다. 해박한 지식에 매료될 수도 있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강력한 웅변력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래서 어떤 설교자에게 애정이 생길 수도 있다. 자기 문화, 역사, 법, 전통, 민족성을 잘 이해해 주는 지도자에게 더 큰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처음부터 해산의 고통으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수고하며 길러준 아버지 같은 인도자에게 더 큰 정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사실상 우상숭배의 문제와 같다.

    중심이 사람에게 옮겨지면, 설교자가 선포한 메시지가 그리스도를 증언했느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가 설교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싫어하는 설교자의 말씀은 비판적으로 튕겨낸다. 추종하는 설교자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고, 그 외의 설교자가 그러면 불필요하게 설교를 어렵게 한다고 충고한다. 좋아하는 인도자의 유머는 재치 있고 영리하다고 하고, 좋아하지 않는 인도자의 유머는 쓸데없고 헛되다고 한다. 똑같은 교회 운영이나 사역 활동도 어떤 사람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지고 반응도 달라진다. 

    분쟁의 문제가 더욱 교묘하고 심각한 이유는, 분쟁 가운데 있으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야’,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할걸’, ‘나는 지금 교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싸우는 거야.’ 이렇게 자기합리화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구하는 겸손과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분열이 있는 곳에는(가정, 교회) 항상 철저한 자기중심성이 있다. ‘내 생각’, ‘내 의견’, ‘내 판단’, ‘내 감정’, ‘내 평판’, ‘내 유익’을 가장 먼저 추구하려는 욕구가 분명히 나타난다. 자기중심성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의 본성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다(약 4:1). 자기중심성은 또한 마귀적이며 세속적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성도는 자기중심성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바꿔야 한다. 그럴 때 분쟁이 사라진다.

    3. 분쟁의 처방(10절)

    바울은 분쟁을 처방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 성도를 애정어린 표현으로 형제들아, 내 형제들아라고 부른다(10, 11절). 그리고 ‘곁으로 다가와 돕다’라는 뜻을 가진 “권하노니”라고 표현으로 친절하고도 단호하게 분쟁을 이렇게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분쟁과 반대되는 개념이 세 가지가 나온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이것은 교리, 태도, 가치관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성도는 본질적인 진리에 관하여 하나 되어야 하고, 성경적인 가치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합당한 태도를 함께 갖춰야 한다.. 이렇게 서로가 온전히 맞춰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 분쟁을 없애는 길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가 라고 부르는 분이시고,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가르치셨는지가 성도가 가져야 하는 마음, 해야 하는 , 품어야 할 을 결정한다.

    빌립보 교회도 분쟁의 문제가 있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신실한 복음의 동역자 자매들 간의 갈등이 교회 전반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바울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각 권하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빌 2:5). 우리 모두의 주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은 마음 곧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중심에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두기를 원하신다.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까지, 예수님께서 관정에서 끌려가 십자가에 달려 숨지시기 직전까지 그분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을 기록했다. 한 번은 자기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자들에게(“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8), 또 한 번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대항하는 모두를 바라보며(“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마지막으로는 함께 달린 강도 중 회심한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채찍에 심히 맞고 모욕적인 일들을 당했다. 십자가를 자기 스스로 질 수 없어서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에게 대신 들고 가게 해야 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숨질 때까지 치욕과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웃을 향한 사랑 중심적이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이 그런 분이시고,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모든 분쟁 가운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 안에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 분쟁의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초대 교부 클레멘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분쟁 문제를 다룬 뒤 약 40년 후에 고린도 교회에 또 편지를 써서 남아있는 분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다. 당신의 마음 중심에 자신을 두지 말고, 목사도 두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을 두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 안에 분쟁은 사라지고 온전히 합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분열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그리스도 안에서) 로마서 1:1-7

    바울 사도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어로 이 부분은 to belo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들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아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의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어떤 공간 안에 있거나, 조직 안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당 안에 있다는 것이나,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또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의 범주에 속했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과는 ‘사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고양이는 ‘고양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사과(a apple)는 the Apple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믿는 기독교인을 a (little) christ라고 하고 예수님을 the Christ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세계 안에서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입니다. the Apple은 사과 실물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는 생명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과 동일한 과일, 즉 실존을 우리가 사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정체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정체성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속한 실존적인 개체,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또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집 앞에서 보는 사과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과는 전혀 다른 사과(a apple)지만 또 같은 사과(the Apple)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졌지만 또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그 이름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다양함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생명이 같다는 것,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과 정체성도 그리스도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모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육신의 삶의 풍성과 세상적인 성공과 복을 받는 것을 위하여 믿는 것이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주여! 주여!’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다 헛짓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 예수님의 운명과 같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같아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랬다면 자신도 이룰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나도 힘써 노력해 보자’라는 것은 흉내 곧 노릇은 할 수 있어도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그 유전자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은 그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정체성은 행위나 공로에 속한 것이 아니니 노력하는 신앙, 신념으로 버티듯 하는 신앙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공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고 아들이 되려는 모든 믿음은 자기 생각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신앙입니다. 기도 많이 한 것으로, 성경 많이 본 것으로, 신학을 공부했다는 것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정하거나 옷 입는다는 것은 모두 존재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유와 공로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신데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었을 때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의로움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로움으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남을 섬김으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는 그런 존재로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삶이라서 한 개의 사과를 보고 사람들이 ‘사과’라고 하듯이 그 삶이 예수님의 생명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거나 <힘쓰고 애쓰고 깨어 있자>고 신념을 동원하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달리 열매입니까? 그 생명 DNA만 있으면 다른 것을 맺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이 열매고 생명입니다. 그러니 성령이라는 생명이 자신의 DNA가 되기만 하면 아니 맺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열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을 안다면 노력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서 어떤 말씀이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미완이라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면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생명도 날 때 그 생명의 이름을 가지지 않고 살면서 노력으로 그 생명의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답게 살려고 하기는 해도 태어나 보니 아직 사람이 덜 되어서 노력해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채우는 이가 없습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그 자체로 온전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나 깨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과는 어떤 짓을 해도 사괍니다. 짓눌려 다 일그러져도 사과고, 반이 갈라져도 사과며, 맛이 없어도 사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생명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생명으로 났다면, 노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니 이것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그런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것은 동쪽 끝에 가도 여호와가 계시고, 서쪽 끝에 자리를 펴도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리스도며, 자기가 아무리 그리스도 아닌 것으로 살려고 해도 성경을 구구절절 지키고 살고 있는 생명인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에릭프럼 /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근본적인 태도인 “소유 모드”(Having Mode)와 “존재 모드”(Being Mode)의 차이를 탐구한 책입니다.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이 현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며, 존재 중심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 소유 모드 vs. 존재 모드

    프롬은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소유 모드(Having Mode)

    • 물질, 지식, 권력 등을 소유하려는 태도
    • 경쟁과 소비 중심의 삶
    •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공허함을 느낌
    •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소유하려는 태도를 가짐 (예: 사랑을 상대를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

    2. 존재 모드(Being Mode)

    •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삶
    •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유가 아니라 상호 작용을 중시
    • 자아 실현과 깊은 내적 만족을 추구
    • 삶 자체가 목적이며,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에 초점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존재 중심의 삶을 통해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 소유 중심의 사회와 인간 소외

    (1) 현대 사회의 문제점

    프롬은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소유 중심적인 문화를 조장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물질적 성공과 소비를 강요하며, 개인의 가치를 소유한 재산이나 지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 소유 중심의 교육: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여김
    • 소유 중심의 인간관계: 사랑도 상대방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이해
    • 소유 중심의 경제 시스템: 끝없는 소비와 경쟁을 부추김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만, 결국 더욱 공허해진다고 프롬은 설명합니다.

    (2) 인간 소외와 불행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진정한 자아를 잃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허전함을 느낌
    • 타인과의 관계가 수단적이 됨 (사람을 이용하고, 거래하듯 대함)
    • 창의성과 자율성을 잃고, 기계적인 삶을 살게 됨

    결국, 소유 중심의 태도는 사람을 외롭고 불행하게 만들고, 삶을 피상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3. 존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에서 “존재 중심의 삶”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제안합니다.

    (1) 경험을 중시하는 삶

    소유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 공부할 때, 단순히 정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배움 자체를 즐길 것
    • 사랑할 때, 상대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 집중할 것
    • 일을 할 때,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것

    즉, 어떤 것을 갖고 있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 창의성과 자율성

    프롬은 존재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삶을 기계적으로 살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
    • 주어진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욕구와 가치를 따르는 태도

    (3) 사랑과 연대

    프롬은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존재 모드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태도
    • 경쟁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가치
    • 상대를 도구가 아니라 동반자로 대하는 태도

    이러한 사랑과 연대를 통해, 우리는 더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프롬은 강조합니다.


    4. 존재 중심의 삶을 위한 실천 방법

    프롬은 단순히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 존재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법도 제안합니다.
    1. 소비주의에서 벗어나기
    •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할 것
    • 물질적 풍요보다 내적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
    2. 진정한 배움과 창조적인 활동
    • 암기나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닌, 배움 자체를 즐기는 태도
    • 창의적인 활동(예술, 글쓰기, 음악 등)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
    3. 깨어있는 삶을 살기
    • 자동화된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할 것
    • 명상,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것
    4. 타인과의 관계 개선
    •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사랑을 실천할 것
    •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연대와 공감을 실천할 

    5. 결론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소유 중심적인 삶을 강요하면서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우리가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
    • “나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는 삶을 얼마나 깊이 경험하는가?”

    프롬의 사상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소유 중심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고,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소유보다 존재를 중시하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더욱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나는 누구에게 속한 신앙인가? 라는 문제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그런데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공통된 위치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분쟁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공동사회(共同社會, Gemeinschaft 게마인샤프트[ɡəˈmaɪnʃaft][*], community) 
    이익사회(利益社會, Gesellschaft 게젤샤프트[ɡəˈzɛlʃaft][*], society)
    독일의 사회학자인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가 주장한 이론이다. 
    공동사회는 가족, 친족, 민족, 마을처럼 형연이나 지연 등 애정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며, 비타산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반면 회사, 도시, 국가, 조합, 정당 등과 같이 계약이나 조약, 협정에 의해 인위적이고 타산적 이해에 얽혀 이루어진 집단을 이익사회라고 한다.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발전을 주장한 퇴니에스는 이익사회로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긍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피안에 개인원리에 입각한 공동사회가 부흥할 것을 예상하였다. 
    분석 방법은 얼핏 보아 형식주의이지만 홉스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회과학의 고전에 의거하여 확립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개념은 사회과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퇴니스에 따르면, 사회적 결속은 이분법적 관점에서 개별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역할, 가치와 함께 이러한 상호작용이 낳는 신념들인 게마인샤프트, 또는 간접적 상호작용, 비인격적 역할, 공적 가치와 함께 이러한 상호작용들이 낳는 신념인 게젤샤프트로 나뉠 수 있다. 특히 게젤샤프트는 현대 회사, 근대국가 및 학계 등과 같은 법인과 결부된다[1]. 퇴니스는 이 이항대립을 순수한 개념도구로 보았는데, 이는 막스 베버가 이 이항을 역사적 사회변화의 핵심 구성요소인 이념형으로서 보는 것과는 대조된다.

    퇴니스는 책의 첫 문단에서부터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2].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
    실제적이며 유기적인 삶reales und organisches leben 이념적이며 기계적 형성물ideelle und mechanische bildung
    지속적이고 진정한 공동생활das dauernde und echte zusammenleben 임시적이며 가시적인 것vorübergehendes und scheinbares
    신뢰 가능하며, 편안하고, 독점적인 공동생활
    Vertraute, heimliche, ausschließlichen zusammenleben
    공중, 세계die deffentlichfeit und die Welt
    농촌Das land 도시문화Die Städtische Kurtur

    시카고학파는 퇴니에스가 커뮤니티와 일의 업무를 구분했을 뿐만이 아니라, 게마인샤프트를 여성의 것, 게젤샤프트를 남성의 것으로 돌리는 등 여러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3].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라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누구 편에 속하는가는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가 된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는 어느 교단인가 또는 누구를 세워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로 분쟁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분쟁할 때마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난의 칼을 휘두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우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3)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 dust in your br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티와 들보를 NIV 영어성경에서는 dust(먼지)와 plank(널판지)라고 번역합니다.
    만일 널판지가 내 눈앞에 있다면 다른 것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눈에 먼지가 보인다는 것은 매우 신비한 사건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성품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은 종속된 관계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통치권자는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지적질 하는 것은 곧 주님의 것을 비난하는 것이므로 결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발견했다면 내게는 티보다 더 큰 널판지와 같은 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고린도전서 3:23 해석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매튜 헨리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통합된 상태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할 때, 우리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조화롭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앨버트 반스 
    성도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로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우리가 하는 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담 클락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명과 삶의 방향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권력을 체험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신학적 연결

    고린도전서 3장 23절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 로마서 14: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 갈라디아서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고린도전서 6:19-20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 에베소서 1:22-23 - "모든 것의 머리로 교회를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 빌립보서 1:21 -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베드로전서 2:9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요한복음 15: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구절의 함의

    본 구절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하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더 읽을 거리

    고린도전서 3장 23절은 여러 주제와 관련이 있으며, 이를 통해 성경 안에서 연결 및 해석의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성경 구절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는 다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깊은 영적 연합소속감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신분임을 의미합니다.  

    의미 : 

    소속감 :
    그리스도인(신자)은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듯,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결국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영적 신분 :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상속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맥락 :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벌을 나누고 육신에 속한 자처럼 행동할 때,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일깨워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선포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요약 :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속한 귀한 존재임을 선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전 3:21-2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 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변화 가 있게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는 사단이 그 사람 속에 자리잡고 왕노릇함으로 본의 아니게 죄를 짓 게 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 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 성이 된 후에는 그 사람 속에 성령 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 을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연히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언 어가 달라지며, 행동하는 것이 달라 지고, 인격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 러분 중에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예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한 계시록 3:20절을 보면 [볼지어 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 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 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 심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런데 우리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되면 특별히 변화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치관의 변화입니 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 로 내가 벌어 힘써 모았다고 말합니 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 순절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아무도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 가 없었고,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 요를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교 회안에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 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가지 중에서 어느 부 류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재산 을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아니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 십니까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 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했고, 너희는 그 리스도의 것이라고 했으며, 그리스 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 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 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 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 과]만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 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 의 의지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 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 니다. 그 결과 아담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930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창 5:5). 그런데 아담이 천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혹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천지는 변해도 하나 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죄를 범하면 반드시 하나님 의 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오지 않으므 로 어리석은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 에 마음이 담대하다고 했습니다(전 8:11). 그런데 인류 역사를 살펴보 면, 징벌이 즉각 임하지 않았을 뿐 이지 악한 일에는 반드시 징벌이 있 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셔 서 누구나 죄를 범했다고 해서 즉각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의 길 에서 돌아서서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죄악의 분량이 차기까지 참 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고사성어 에도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지 않 습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 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5:13-16절을 보면, 하나님 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사백 년 후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이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 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분 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일지라도 아직은 타락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악의 분량 이 차기까지 심판을 유보하시는 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악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모으기도 합니 다. 또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 취하기도 하며, 명예를 돈으로 매수 하기도 합니다. 돈과 권세를 이용하 여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 래서 바르고 정직하게 법대로 사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오히려 편법과 불법으로 사는 사람은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 님께서 얼마동안 내버려두고 계시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 판이 임하기까지 계속해서 진노를 쌓고 있을 뿐입니다. 때가 차면 진 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 많은 재산이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줄로 생각하고, 자신의 권세와 명예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끝납니다. 돈도 날아가고 권력도 날 아갑니다. 예레미야 17:11절을 보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 새가 낳지 아니 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 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 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재 물이나 권세나 명예도 언젠가 다 없 어질 날이 있습니다. 지금 내 수중 에 있다고 해서 내 것이라고 안심해 서는 안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 지는 안개처럼 곧 없어질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지라도 자랑할 것 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 하면 그 돈이 그 사람의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 으면 다 놓고가게 되어 있습니다. 곧 남의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권력도 명예도 가졌다고 자랑할 것 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그리 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 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피로 우리의 죄 값 을 대신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 다.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 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고전 6:20). 시편 135: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 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 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출 19:5).

    이사야 43:1-5절을 보면 [야곱아 너 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 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 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 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 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 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 랑하였은즉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 은 굉장한 축복인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 지 않고, 떠나지 않으며, 언제나 우 리와 함께 하십니다.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십니다. 그러므 로 이사야 41:10절에서 [두려워 말 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 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축복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 습니까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 습니다. 역대상 29:11-14절에서, 다윗은 백성 들 앞에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 능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 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 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 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 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 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 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4:8절과 고전 10:31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 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 의 것이로다], [그런즉 너희가 무엇 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위 해 봉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러나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여 많이 가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 니다. 가진 자에게는 책임이 있습니 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한 자를 위 해 봉사할 책임을 느끼며 살아야 합 니다. 물질이 넉넉한 자는 물질이 없는 자를,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또 권력을 가진 자는 힘없는 사람 을,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 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 는 사람을, 믿음이 큰 사람은 믿음 이 작은 자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 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 더불어 행 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를 보면, [양 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영광의 보 좌에 앉으셨을 때에 모든 민족을 주 님 앞에 모으고 양과 같은 사람을 오른 편에, 그리고 염소와 같은 사 람을 왼편에 두고 심판하신다고 했 습니다.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 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 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 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 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에 그들이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대접한 일 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러나 주님은 [너희가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마찬가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 에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 을 때에 돌아보지 않았다고 책망하 자 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 그네 된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 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되물었습 니다. 이에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 는,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 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 고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염소와 같이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이 양과 같이 남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진심으 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창세기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따 라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 게 됩니다. 여러분의 재산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어진다면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 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고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중생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음을 믿 게 되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 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 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고 주님 을 위해 사는 것을 기뻐합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이웃사람 에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중에도 이 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 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고 말하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기 때문 에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변화가 일 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 하여 말씀대로 살 힘이 없습니다. 경건하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이나 예 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권능과 기사와 이적 을 보았으면서도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자 예수님을 부인 하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예 수님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해 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말씀대 로 살기 시작했으며,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아야 신자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셔서 모 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 면서 일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구원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한 하나 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고린도전서는 ‘προς κορινθιους Α(프로스 코린디우스 알파)’로 불린다. 이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란 뜻이다. 한글성경 ‘고린도전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은 1:1, 16:21 등 본서의 내용 속에서 기록자가 스스로 자신을 바울로 밝히고 있는 것과 초대 교회 시대의 각종 문헌들이 본서의 기록자를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던 바울로 한결같이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 일단 기록자 문제에 관한 한 별다른 이견은 없다.

     

    2) 기록연대 / 장소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시에 고린도 지역에 대략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사역하면서 복음이 전파 되게 되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떠난 것은 A.D.51년 경이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 일단 예루살렘에 잠시 들른 후 자신의 본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다(행 18:18-23). 그 후 A.D.53년 다시금 제3차 전도 여행을 개시하여 갈라디아와 마케도니아 지역 등은 대강 둘러보는 정도로 그치고 에베소에 오래 머물면서 사역하였다. 바로 이 기간 중에 고린도 교회 내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수행하던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로 급히 파송하기도 하였고(고전 4:17) 급기야는 본서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본서를 쓰면서 16:8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늦은 봄의 오순절을 보내고 고린도 교회로 가서 겨울을 함께 지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시 에베소에서 체류한 기간은 2년 6개월 이상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시기와 장소는 A.D.55년 초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3) 고린도 지역의 특성과 배경

    고린도는 헬라 반도 아랫부분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무역이 성행하고 있는 만큼 무역을 하기 때문에 부유층이 많았고, 동시에 노예나 가난한 자들도 많았다. 아울러 여러 다른 민족들이 섞여 살았으며, 유대인들도 거기에 많이 거주했다. 그 도시에는 우상을 위한 신당들이 많이 있는데, 지식충에서 주로 신봉하던 철학적 종교들, 로마 군인이나 행정 관료들이 숭배하던 종교들 등 각종 우상 숭배가 가득 하였고,, 애굽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무역차 이 항구에 오는 배들이 많이 있어서 우상을 수입시킨데 있다. 그리고 신전에 1000명이나 되는 매춘부 들이 있는 등 성도덕이 문란하였다. 이러한 특징들이 주변에도 퍼지게 되어 음행하는 자를 가리켜 세칭 ‘고린도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 기록 목적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린도인들은 혼합주의, 성적 문란, 무절제, 경박함 등의 당시 고린도 문화의 부정적 영향을 온전히 청산(淸算)하지는 못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3차 전도여행시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게 되었다. 고린도교회는 곧 각종 오류와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교회 내에서 파당이 형성되어 분열을 일삼게 되었고, 극심한 성범죄가 야기되어도 이를 방치하는가 하면, 성도 상호 간에도 소송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알게 된 바울은 디모데 등의 사역자를 고린도 교회로 급파하는 일면 마침내 사도 서한을 발송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오류를 시정토록 촉구하고자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아울러 고린도 교회에서 가져온 헌금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16:17).

     

     

    1. 특징

    ①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질의와 응답

    고린도전서는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에 대하여 교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11),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바울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그것에 대한 답변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주제들은 결혼에 관한 질문(7:1), 둘째,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것(8:1), 신령한 것-다양한 은사(12:1), 성도를 위한 연보(16:1) 등이다.

     

    ② 문제 해결로서 신앙의 핵심을 강조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문제들, 즉 미성숙, 분열, 질투와 시기, 소송, 결혼, 성적 부도덕, 영적 은사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울러 중요한 두 가지를 더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13장)과 부활(15장)이다. 전자는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이 근거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혼란 속에 있던 그들에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원하게 밝힘으로 부활에 대한 심오한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③ 문제에 대한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지침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들은 현학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그때 당시에 다양한 문화와 계층간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에 대단히 실천적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이것은 그때 당시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믿음의 성장 과정을 거치는 중에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상황과 사고체계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분열, 소송, 성적 부도덕, 은사 등의 문제에 관하여 올바른 해결을 하도록 하는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1. 주제

    1) 분열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1-4장)

    고린도 교회는 분파적인 분열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특정 지도자나 교사를 따르는 것을 내세우며 서로를 비난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도자나 교사를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중요하다는 하나님의 뜻을 일깨운다.

     

    2) 성과 관련 문제: 몸으로 드리는 예배(5-7장)

    고린도 교회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상 숭배와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몸으로도 하나님께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3) 음식 관련 문제: 양심과 사랑에 기반한 판단(8-10장)

    우상 제물에 드린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자, 바울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은혜 안에서 개인이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는 자유를 인정한다. 주변의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위대한 속죄의 은혜 안에서 양심의 자유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4) 예배 모임 관련 문제: 질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예배(11-14장)

    강렬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태도로 예배 모임에 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배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공간이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며, 각 지체가 서로 협력하여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체의 각 부분이 자기 일을 하듯이, 각자가 자신의 은사를 드려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5) 부활과 미래의 소망: 영원한 삶의 약속(15장)

    일부 신자들은 부활을 부정하며 죽음 이후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에게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 현재 삶의 능력의 근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약속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부활의 소망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1. 교훈과 적용

    1) 교회는 일치(unity)와 하나됨(oneness)을 유지하여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예수님을 유일한 머리로,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여러 지체로 하는 하나의 몸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일치와 하나됨을 상실한 교회는 평화와 사랑을 상실하는 슬픔을 겪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와 사람 앞에 온전한 교회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

     

    2) 교회는 예배(禮拜, Worship)를 경건히 시행하여야 한다.

    예배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 그리고 간구와 서원을 올리며 경배하는 의식이다. 즉 예배는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인간과 여호와 사이의 교재의 모든 요소를 응축하여 의식화한 것으로서 여호와와 성도 사이의 가장 역동적인 교재의 장소이다. 따라서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의 의무인 동시에 은혜를 거듭 체험하며 새로이 공급받을 수 있는 위대한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그 예배의 대상자이신 여호와는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으로서 역사와 우주의 창조자시오, 주권자이시며, 절대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 의식은 경건하게 집전되어야 한다.

     

    3)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성도의 소망의 근거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은 세상 끝날 우리를 부활시켜 천국 구원을 주시겠다는 예수님 복음의 약속의 절대적인 확증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얻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실로 성도만의 역동적 소망의 절대적 근거이다.

     

     

    1. 구조

    1) 교회의 분열상(1-4장)

    ① 인사(1:1~9) ② 분쟁 원인(1:10~2:16)

    ③ 결과(3장) ④ 권면(4장)

    2) 교회의 타락상(5-10장)

    ① 근친상간(5장) ② 송사와 음행(6장)

    ③ 독신(7장) ④ 우상제물(8~10장)

    3) 교회의 제반 문제들(11-16장)

    ① 공예배(11~14장) ② 부활(15장) ③ 맺는말(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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