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요나



복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복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에서 복에 대해 읽지만, 복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일이 잘되고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복일까요? 
번영과 건강, 부, 기타 등등일까요? 
하나님의 은총일까요? 
복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우리는 그것이 매우 긍정적인 것이라는 데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복의 개념을 정의하고 고정하려고 할 때 그것은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미끄러워 보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항상 복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가능성이 있을까요?

우리가 성경에서 복을 처음 접하는 것은 바로 첫 번째 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놀라운 신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래서 이것은 번영의 개념, 즉 번성과 번식에 부합합니다. 
그런 다음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복을 주신 다음 아담과 이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복은 조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복에는 번성과 번식이 있지만,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허가와 권한도 있습니다. 
창조 과정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창조하십니다. 
유대인의 성경에서도 이것은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1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복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그렇다면 이제 이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번식하고 열매를 맺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패턴을 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는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그것은 창조 사역 후에 안식에 이르신 그분의 특별한 휴식의 날입니다.

복의 정의

훌륭한 성경 교사인 필립 리틀은 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본질적으로 복은 하나님이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그들이 하도록 계획되거나 의도된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은 땅을 채우고 번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 즉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도 수적으로 번식해야 했지만, 나머지 창조물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관해서, 하나님은 안식일이 본래 의도된 모든 것이 되도록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연결된 거룩한 휴식의 날이 되도록 말입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하시고 우리가 하도록 의도하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할 때는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모든 유대인의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바룩 앗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렉 하올람 - 우리 하나님 여호와 우주의 왕 당신은 송축 받으소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모든 복의 정당하고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가 모두 그의 권능을 인함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보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의도에 따라 성공하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 없이는 이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원함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고 우리를 위해 설계한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고, 그의 복은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권능입니다.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고, 그런 다음 그 명령에 순종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는 오직 그분뿐입니다.

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신명기 8장에서 이러한 명령과 축복의 패턴을 매우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과 축복을 주시고,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열매를 맺고 성공할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도록 한 것은 우리 자신의 노고나 좋은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곱셈의 개념이 몇 번 더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축복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항상 자라고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족, 양 떼, 가축, 소유물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봅니다. 축복에는 관계적 측면이 있지만 경제적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 전체를 축복하는 것에 대한 강조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점입니다. 우리의 복은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송축해야 합니다. 둘째 그의 권능이 우리를 가능하게 하여 그의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복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늘 의도하셨던 대로 메시아를 낳음으로써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왔습니다. 그 대가로 하나님은 나머지 세상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되돌려주는 복이 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무엇되도록 하나님은 의도하셨을까요?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한 훨씬 더 큰 부요함입니다!(롬 11:12)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데 동참하게 되어 우리는 매우 기쁩니다!












10월 2일(목) 요나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연고(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Pick me up and throw me into the sea, he replied, and it will become calm. I know that it is my fault that this great storm has come upon you. 

풍랑의 원인에는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원인은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는 원인이라고 하게겠습니다.

내적 원인은 사람의 잘못에 의해서 일어난 풍랑으로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출발하지 않거 다시스로 도망할 때 풍랑으로 인하여 요나의 방향을 돌려놓으신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외적 원인은 


내적 원인은 선지자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 닥쳐온 것을 말합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은 바다로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원과 승객들은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외적 원인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바울과 함께 알렉산드리아호에 승선했던 선원들과 죄수들에게 닥쳐온 풍랑이었습니다.

내적 원인에 의한 풍랑은 선지자 요나를 돌이키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외적 원인에 의한 풍랑은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동행하는 모든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이 만난 풍랑은 범죄자를 대통령 후보로 세우고 그 사람을 선택한 국민들에게 무엇이 잘못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절대적 가치와 신앙의 자유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경각심을 고취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엇엇의 이엇엇엇엇이 받앗앗던 서누언들과햇배에 
성경 속 인물인 '요나'를 지칭하며, 특히 성경 구절에서 요나가 "이 폭풍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하는 부분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연고(緣故)'는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 '책임'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한 것은 **"이 폭풍이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내가 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상황과 의미

배경 :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도망치다가 폭풍우를 만납니다. 

선원들의 질문 :
  • 배에 탔던 선원들은 이 폭풍의 원인을 찾기 위해 요나에게 묻습니다. 

  • 요나의 대답 :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친 결과로 폭풍이 일어난 것이며,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임을 깨닫고 말합니다. 

  • 결과 :
    요나의 고백을 듣고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그 결과 폭풍이 멈추게 됩니다


  • 사도행전 27: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

    사도행전 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이유

    풍랑은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한다
    사도행전 27:9-26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
    이 법칙은 ‘비서처럼 하라’라는 책을 쓰신 조관일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법칙입니다.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은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의 양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기에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고통은 다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고통의 정량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젊어서 어려움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만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젊어서 별다른 고생 없이 살아온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부자들은 인생의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감당해야 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이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인생은 그 고통을 결국 감당해내야 합니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은 육교를 통해 건너가게 됩니다. 
    육교로 가면 올라갈 때 힘들지만, 내려갈 때는 힘이 들지 않습니다. 
    육교가 아닌 지하도를 선택하면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내리막이라 쉽게 갈 수 있지만, 나중에는 오르막이라 힘이 듭니다. 
    결국 육교로 가든 지하도로 가든 길을 건너는 데 필요한 고통의 총량은 동일합니다.

    물론 육교와 지하도를 선택하지 않고 무단 횡단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무단 횡단을 가감 없이 감행하십니다. 무단 횡단을 하면 별 어려움 없이 길을 건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단 횡단을 하다 교통경찰한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무단 횡단을 하다 달려오는 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 이렇게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인생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오르막을 오를 때 너무 좋아하고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 해서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갔으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항해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배가 항해를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리면 배는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배의 방향을 잡는 것은 바로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에는 해와 달을 보고 방향을 잡기도 했습니다.
    배가 바른 방향을 잡아서 항해를 한다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이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만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면 어떠한 태도를 보입니까? 
    풍랑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생각지 못한 풍랑을 만났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랑을 만났을 때, 생각을 좀 달리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다면,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풍랑 앞에서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다

    바울이 타고 가는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 광풍으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살 소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게 가고 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향해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고 있다면, 풍랑을 안 만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평탄하게 순항하도록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주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생을 항해하는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려는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한다 해서, 꼭 시간상으로 빨리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풍랑을 감당해내야 합니다.

    나폴레옹에게 가난은 풍랑이었다

    코르시카 귀족이었던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을 귀족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곳 학생들은 가난한 나폴레옹을 조롱하며 놀림거리로 삼았습니다.

    참다 못한 나폴레옹은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만,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돈은 없지만 너는 반드시 그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의 단호함 앞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 후로 나폴레옹은 5년의 시간을 참고 버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나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간 나폴레옹은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있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홀로 도서관을 지키며 자신과 싸웠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스스로 그리던 미래를 준비하고 자신의 재능을 온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금세 상관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훈련장을 책임지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다른 성과를 올리며 새로운 기회를 얻었고, 권력을 잡을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자 예전에 그를 멸시하고 조롱했던 자들이 모두 몰려와 다시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나폴레옹이 인생의 큰 성공을 맛볼 수 있었던 계기는 그의 불우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은 그의 인생에 풍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철없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더 뛰어난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약점을 극복해 끝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가난이라는 풍랑 때문에 자신의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총리가 된 요셉

    요셉이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은 요셉의 인생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풍랑입니다. 
    이 풍랑으로 인해, 요셉의 인생의 배는 자초하는 것 같았습니다.
    요셉은 한 순간에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으로 그 인생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노예 생활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인해, 보디발 장군의 가정 총무가 됩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30살의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30세 젊은이가 애굽이라는 대제국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상상되십니까? 
    그것도 자국민이 아닌 히브리 민족의 종 출신이요,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혔던 죄수가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요셉은 17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와 10년간 노예생활을 하고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뭄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가족들뿐 아니라 애굽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구원해 냅니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 형들에게 시기를 받고 애굽으로 팔려가는 풍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30세 나이에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런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려운 우환이 있을 때는 살지만, 생활이 안락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역경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노력하게 하지만, 지나치게 편안한 환경은 의지가 꺾이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안락함과 평안함 누리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찬송가 373장 2절 가사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시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이 곡 작사자는 큰 물결이 일어나는 풍랑으로 인해 힘들고 때로 쉬지 못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풍랑으로 인해 빨리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만날 때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

    어렸을 때 연을 만들어서 날려 본 적이 있습니다. 
    연을 언제 날려야 높이 날아오릅니까? 바람이 불 때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아무리 연줄을 잡고 힘껏 달려가도 잠시 올라가는가 싶다가 추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날은 연줄을 잡고 달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을 잘 이용해서 연줄을 잘 조절하기만 하면, 연은 높이 높이 날아갑니다. 
    연은 바람을 만날 때 더 높이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새는 ‘알바트로스’입니다.
     ‘알바트로스’는 ‘바보새’라 불리우는 새입니다. 
    날개가 너무 크고 움직임이 둔해서, ‘바보새’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날이면 알바트로스는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새로 변합니다. 
    그 이유는 큰 날개를 펼치고 그 폭풍우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알바트로스가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는 것은 폭풍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신 분이 계십니까? 
    그 풍랑으로 인해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우십니까? 하지만 더 풍랑으로 인해 우리의 목적지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나면,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났다고, 그 풍랑이 모든 사람들을 목적지로 빨리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풍랑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한다

    첫째,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

    바울이 탄 배가 만난 ‘유라굴라’라는 광풍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광풍 앞에서, 배에 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광풍이 하루 이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 도 별 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광풍이 얼마나 심했는지, 여러 날이 지나도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어둠만 계속됐다고 말씀합니다. 
    배에 탄 사람은 아예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이 풍랑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서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이런 응답을 받은 바울이 이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풍랑가운데 어떻게 구원하실지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광풍 앞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심한지,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심한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경험을 하였기에,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그 풍랑가운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풍랑가운데 은혜를 주셨습니다. 
    믿음을 더 견고케 하셨습니다. 
    그 풍랑으로 인하여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해 주셨습니다.

    풍랑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라비안 교도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도중, 웨슬리가 타고 있는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돛이 산산 조각나고, 배에 물이 들어와 웨슬레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배 한 켠에서 모리비안 교도 25명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안한 것을 웨슬레는 보았습니다. 
    평안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라웠고,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아니요 참으로 감사할 일이죠.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인들과 어린애들은 무서울 게 아니겠습니까?”
    “천만에요. 비록 아녀자라도 죽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죽으면 천국 가게 될 것인데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웨슬레는 이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풍랑을 맞이하지만, 그 풍랑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만 하고 있는 사람은 그 풍랑 때문에 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고통 가운데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풍랑 앞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랑은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하게 한다

    둘째, 풍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기 때문 

    풍랑이 깊어질수록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나자 사공들이 어떻게 합니까? 짐을 바다에 풀어버립니다. 풍랑이 점점 더 심해지니까 이제는 배의 기구들을 내버립니다. 나중에는 먹어야 할 밀까지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풍랑이 더 거세어질 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무엇보다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공들이 자기들만 도망가려고 구명선을 내려놓을 때,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을 설득해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공들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백부장과 군사들은 바울의 말대로 구명선의 줄을 끓어버립니다.

    우리는 풍랑이 오기 전까지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옆에 있을 줄 알았던 가족을 잃어버리고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아내가 감상선 수술을 해서, 제가 아내의 빈자리를 메꾼 적이 있습니다.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했습니다. 아내의 빈자리를 지키면서 아내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자리는 당연한 자리가 아니라, 나의 삶에 너무나도 귀한 자리였습니다. 또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고 나서야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풍랑으로 인해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풍랑을 만났을 때 육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함을 깨달아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입니다.

    1845년 영국의 한 탐험대가 북극해를 건너는 바닷길을 발견하기 위해 대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철저한 훈련으로 준비된 탐험 대원들은 필요한 물품을 배에 가득 싣고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광활한 북극해에 도달했을 때, 대원들은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원들이 배의 창고를 확인해 보니 그 안에는 연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의 물건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1,200여권의 장서와 사기로 된 접시, 크리스탈 컵과 장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은식기 등 온갖 사치품들만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지휘하던 프랭클린이라는 장교가 새 항로를 개척해 다른 나라에 도착하면 사절품으로 사용하려고 가져온 사치품이었습니다.

    탐험대원들은 연료가 바닥난 배가 곧 가라앉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썰매를 이용해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교는 썰매 위에 은식기를 하나라도 더 실으려고 몸부림치다, 결국 은식기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영생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육신의 생명은 어떤 귀한 것보다 소중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지만 육신의 생명하고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영생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다 누리고 살았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가장 귀한 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할지라도 영생을 얻었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풍랑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목적지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일을 줄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며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하는 일마다 틀어지게 한다. 이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잘못을 해야 고칠 수 있으며 마음속에 고민과 걱정이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맹자도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 일을 줄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수고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해 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풍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생을,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 풍랑이 오는가?(마태복음 8:23-27)

    갈릴리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큰 광풍이 휘몰아쳐 올 때가 많답니다. 
    이유는 바다가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0미터 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헬몬산에서 요르단 계곡 쪽으로 이상 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이 바람이 광풍으로 변한답니다.

    성경에는 바다를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길을 '인생항로'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 바다에도 역시 큰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풍랑이 있습니다. 이 민족 위에도 6.25의 풍랑이 있었습니다. 기근과 재난의 풍랑이 있었습니다. 5-6십 년대에는 수없이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습니다. 질병의 풍랑이 있고, 파산의 풍랑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여러 가지 풍랑이 지나가고 또 휘몰아 쳐옵니다.

    성경 속에 많은 인물들이 어려운 풍랑을 만난 기록이 있습니다. 욥의 가정이 뜻하지 않은 큰 풍랑이 찾아왔습니다. 열 자식이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했고,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약탈당했고, 건강한 몸에 악 창이 생겨 잿더미 속에서 신음하게 된 사건입니다.
    요셉의 일생에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 없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죄 없이 감옥에 갔습니다. 다윗 역시 뜻하지 않게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죽음을 당할 뻔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풍랑을 만나본 사람들은 풍파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본 사람, 건강의 귀중함을 압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 큰 풍랑을 겪으며 온갖 처절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귀한지 압니다. 가정에 안정, 사업의 안정, 경제적인 안정, 나아가서 정치적인 안정, 세계적인 안정을 바라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렇게 평안할 곳이 못됩니다. 모세는 시90편에서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칼봇제라는 시인은 '저 산 넘어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임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바다에 풍랑이 그칠 날이 없는 것같이 이 세상에도 환난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참다운 평안을 누릴 수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요14:27절에서 우리 주님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공급자이십니다. /할/
    본문은 막4:35-45에서도 기록된 사건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몰려온 군중들을 피하여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쉬시고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시는 중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타신 배는 오늘날과 같은 요트나 유람선이 아니라 겨우 열댓 명 정도 탈 수 있는 고기 잡는 작은 어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뱃노래를 부르면서 기분 좋게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더니 물결이 높이 치솟아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인 제자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해서 그 풍랑과 싸워봤지만 더 이상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배가 물 속에 가라앉은 절대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된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급히 깨웠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구원하소서!' 이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즉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바다에도 풍랑이 일어나면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여기서 배는 교회를 상징한 것이고, 그 배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오늘 이 자리가 주님이 계시는 자리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교회는 물 속에 좌초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이 그 큰 풍랑을 만났으나 우리 주님이 살려주셨습니다.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 당시 제자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겉만 보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니 멋있습니다.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고 예수님 앞에서 귀신들이 거품을 물고 떠났습니다. 병자들이 일순간에 낫습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한꺼번에 먹이십니다.
    이분만 왕으로 삼으면 정치, 경제, 사회가 해결될 것으로 굳게 믿고,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십자가를 지러왔다.'고 하시자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는 분이심을 믿으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신분과 체면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인줄 알면서도 따르지를 안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남도, 천국도, 영생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속으로만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 위에 일했던 부류들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장사된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입니다.
    그 무덤은 자기가 죽으면 묻히려고 사 놓은 새 무덤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무덤까지도 내어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기의 신분이 노출되기를 꺼려 예수님을 직접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12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고생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 가롯유다는 자기 스승을 은30냥에 팔아 십자가에 넘겨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처음부터 완전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십자가 처형 때 모두 도망을 갔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인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결국에는 순교하면서까지 끝까지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제자들이 바로 12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12제자들 같이 끝까지 주님을 따라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본문에서는 '큰 놀이 일어났다.'고 했고, 막4:37절에는 '큰 광풍'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광풍은 일명 '돌개바람'이라고 하며, 행27장에 나오는 유라굴로 태풍과 맞먹는 그런 풍랑입니다.

    ▶성경에는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요나가 만난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일부러 니느웨 성으로 가서 저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라고 하였으나,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풍랑은 요나 자신이 '나로 인한 풍랑'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사실(욘1:12)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만난 풍랑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도 이런 풍랑을 종종 만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반역의 길로 행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이유 있는 풍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불순종하거나 반역의 길로 행할 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풍랑을 일으켜 흔들어놓아서 결국 회개시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만난 풍랑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 심한 풍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행27장에 보면, 14일간이나 풍랑에 휘말려 바다 위에 떠돌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이 거의 다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어 살 소망이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랑을 만난 이유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믿고 가다가 만난 풍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의 말보다 세상 말을 더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다 백성이 만난 풍랑도 있습니다.

    겔13:13-14절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뜨리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선민 유다가 세상으로, 죄악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당한 풍랑입니다.

    본문에서는 왜 이런 풍랑이 일어났는가?

    막4:3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주님이 가지고 명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건너가다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요나 같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건너편으로 함께 가자'는 말씀에 따랐는데 시련이 왔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 인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데 시련이 오고, 실패가 옵니까? 왜 고통과 슬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불교는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원인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고난과 시련은 묵묵히 감대하고 참노라면 먼 훗날 다시 환생할 때 보다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대답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대답합니다. 시련과 고통, 실패의 쓰라림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니, 숙명이니 팔자소관으로 받아드리고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과 실패와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을 발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기도로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왜 시련이 오고 풍랑이 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각 개인의 형편과 믿음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메튜헨리는 '하나님의 전통에는 여러 가지 화살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깨닫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그릇된 길을 막아 주시기 위해, 때로는 잘못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신앙이 자라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나타내십니다.


    그 뜻을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신앙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119:67절을 보세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고,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욥42:5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그 배 안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가고 있었는데도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순종했는데 풍랑을 만난 것보다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는데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입니다.
    주님이 멀리 계셨다면 별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그것도 조그마한 공간 안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이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셨다.'는 단순한 행동자체 보다는 '어떻게 모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신앙자체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방안에 누워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고, 같은 버스 같은 좌석에 앉아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서울에 있고,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어도 그리워 견딜 수가 없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고, 상사병이 나고 하루에도 두 번씩 편지를 쓰고 그래도 모자라서 국제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쪽이 참된 만남의 관계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남에는 피상적인 만남이 있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피상적인 만남은 서로 인사 정도 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10년을 만나도 감정도 정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만남은 주고 싶고, 보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늘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이런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져야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생명까지도 십자가 위해서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위해 주어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정성도, 뜻도 드려야 합니다. 이런 모심이 진정한 모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 안에 모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았기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대문 밖에 모실 수도 있고, 현관에 모실 수도 있고, 안방에 모셔 놓고 푸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심은 제자들과 같이 풍랑을 만날 수밖에 없는 모심입니다. /믿/ 그러나 제일 좋은 자리는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마7:21절을 보세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할/

    풍랑 중에도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막4:38절을 보면 이 풍랑 중에서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풍랑 속에도 천하태평이십니다. 평화롭게 잠을 자고 계십니다. 이런 평안이 어디서 옵니까? 주님 자신이 평안의 안식처입니다. 이 평안은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며 친히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너희는 근심도 말고 두려워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가정적으로, 사업적으로, 세상 적으로, 풍랑을 만나 절망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조용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안식처요 피난처가 되십니다. /아멘!/

    ▶우리는 본문의 갈릴리 바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①향해하는 인생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치 갈릴리 바다와 같고, 모든 인생은 일엽편주와 같은 배를 타고 고해와 같은 세상을 행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항해에도 순풍에 돛을 달 때도 있지만 때로는 풍랑을 만나는 때도 있습니다. 인생을 향해하고 갈 때는 기뻐 희희낙락할 때도 있으나 한숨과 눈물과 슬픔이 앞을 가릴 때도 많습니다.
    ②풍랑을 만나도 이길 수 있는 항해를 배워야 합니다. 가정도 풍랑이 올 때가 있고, 교회도 풍랑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할/
    ③풍랑은 누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줄 압니다. 잔잔한 인생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다 옵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 삶 속에 풍랑이 올 때는 사정없이 옵니다.
    시10:1절에서 다윗도 이렇게 절규를 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또 시44:22절에서도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잊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셨나이까?'
    인생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때로 풍랑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풍랑이란 만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풍랑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풍랑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 이것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성숙하느냐? 이것을 내가 어떤 방식으로 대항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풍랑이 내게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인생살이입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풍랑이 자기 인생에게 있음을 압니다. 대신 그 풍랑을 '어떻게 극복할까? 이 풍랑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줄까?'를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풍랑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 풍랑이 올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절망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니면 인생을 저주하겠습니까?
    '벤쟈민 프랭크린'은 '고통은 교훈을 준다'고 했습니다. 풍랑 속에 교훈이 있고 풍랑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풍랑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풍랑과 고통 가운데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할/
    신32: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아멘!/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애굽의 궁궐이 아닙니다. 풍랑과 광풍이 몰아치는 광야였습니다. 모세는 40이 될 때까지 애굽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문과 리더십을 터득했습니다.
    행7:22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더라'고 증거 합니다. 그는 명성을 떨쳤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올 때마다 그의 이름은 애굽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탁월하고 유능할 때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광야 40년 동안 고난과 고통의 길, 풍랑의 길을 걷게 하신 후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광야와 풍랑을 지난 후 모세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기적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기도로 아말렉을 무찌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나타난 축복입니다. /믿/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편안함보다 성장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십니다. 고난은 반듯이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어느 권사님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건달들이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권사님을 놀려주려고 보자기에 떡을 싸서 집안에 던졌습니다. 기도하다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마당에 무슨 보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보니까 속에 떡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권사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떡보자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기하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밖에서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달들이 권사님 앞에 나타나서 '그 떡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던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마들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도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섭리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만선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고 불행하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마저 잃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배가 파선되어 삼부자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뱃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때 갑자기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커져서 불기둥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그들은 불기둥이 보이는 곳이 바로 육지라는 판단 아래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울먹이며 집이 몽땅 불타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이들 삼부자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육지를 찾지 못해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이 왜 감사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성장을 위해 슬픔이 필요할 때 기쁨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눈물이 필요할 때 환희를 보내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 필요할 때 편안함이 아니라 고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산이 높을 수록 골짜기는 깊습니다. 여러분들이 큰 축복의 산에 오르도록 하나님의 깊은 골짜기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을 때입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려는데 원주민들이 큰돌을 선교사님 가슴에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기도 하고 가슴에 안기도 하면서 강을 건넜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무거운 돌을 안고 강 중간쯤에 왔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있었습니다. 
    만약 큰돌이 무게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벼운 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편안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가 무거운 짐이 있고, 고통스러운 풍랑을 만나고, 눈물을 골짜기를 지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고통과 풍랑 가운데에서 여러분을 성숙시키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풍랑이 몰아닥칠 때 두려워 말고 더욱 소망 중에 주님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같음 배경을 다룬 막4:3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입니다. 노를 짓는 일도 아주 배트랑 급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가 그다지 겁나는 곳이 아닌 자들입니다. 그런데 풍랑은 만났습니다. 저들이 주름잡고 저들이 지배하던 바다 앞에 결국 풍랑을 만나 그들의 모든 수단, 방법, 경험을 살려보았지만 별 볼일이 없습니다. 결국 두 손 바짝 들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도 자기 수단, 방법, 경험을 믿고 내세우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도 그리 믿을 것이 못됩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할/ 여기서 주님을 깨웠다는 것은 그들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풍랑이 심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죽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종교적 제일 본능입니다.

    제자들의 기도는 생명을 내어 건 기도입니다. 어떤 기도가 위력이 있고, 어떤 기도가 역사가 나타납니까? 하나님께 생명 걸고 하는 기도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생명 걸고 기도하다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았고 모세가 하나님께 생명 걸고 기도했더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됐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기도는 땀을 짜며, 눈물을 짜며, 또 피를 짜며 생명을 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 앞에, 풍랑 앞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어떤 문제라도 믿음으로 담대히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구하고 맡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하나는 문제 앞에 기도는커녕 낙심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믿음이 역사가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그 바닷물 속에 원수들이 수장되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상황 판단을 잘할 것 같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이 절박한 외침 앞에 예수님이 깨어나셨습니다. 깨어나셔서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첫 번째 주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폭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환경에 대하여 전혀 문제를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의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잠을 깨웠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무서워한다는 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지금 주님의 책망은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날 때 믿음이 없으면 환경이 두려워지고 사람이 무서워집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이웃에서든지 초조하고 쫓기고 불안하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제자들은 폭풍이 두려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다의 풍랑이 아닙니다. 오직 제자들의 믿음만이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음을 보시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없고,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없다.'는 뜻은 '네가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예수님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주 그분이 배 안에 계신 것은 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은 '바다와 폭풍을 꾸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의 능력으로 꾸짖은 것입니다. 아무나 꾸짖을 수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그분만이 자연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실 때 바다와 풍랑이 어떻게 됐습니까?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믿/
    주님이 우리 문제를 꾸짖으시면 해결될 줄 믿습니다. 문제는 반듯이 해결됩니다. 폭풍도 지나가고 파도도 지나갑니다. /할/ 주님은 궁극적으로 반듯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는 풍랑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⑴환난은 주님이 계셔도 찾아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에게 환난이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시34: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할/
    ⑵자신을 바로 알고 겸손하라는 교훈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제자들도 풍랑쯤이야 자신들의 힘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감당을 못하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환란을 통하여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⑶환난은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은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부르짖는 마지막 기대였습니다. 환난을 만난 제자들에게 기도야말로 풍랑을 이기고 승리하는 절대적 무기였습니다. 시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아멘!/
    ⑷환난은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것은 곧 기도의 결과입니다. 기도의 응답입니다.
    ⑸환난은 신앙을 검증하는 통로입니다. 요셉은 17세의 청소년 때에, 형들의 시기질투로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하여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큰 시험이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축복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으며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성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감옥에서도 형통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약5:13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할/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이는 '깨어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귀한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7절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제자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기이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도, 바다도, 순종하는 고' 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연만물을 초월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길의 풍랑도 잔잔케 하는 비결은 예수님을 우리 배에 모셔야 합니다. 배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⑴예배가 하나님을 모시는 현장입니다.
    ⑵기도가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개입시키는 통로입니다.
    ⑶순종이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방편입니다.
    ⑷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믿음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 꾸짖는다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꾸짖으실 때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으셨는데 그 단어가 귀신을 향하여 꾸짖으셨을 때 사용한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명하십시오, '내 가정아! 고요하고 잠잠할 지어다. 내 사업아 고요하고 잠잠할 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 속에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주님의 명령 한마디로 잠잠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세상 바다에도 잠잠해지고, 고요해지고 평안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은 주님께 생명을 걸고 기도하므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 받고 기이하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로에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들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문제, 그 환경 앞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성도들의 문제들을 향하여 '잔잔 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의심의 풍랑, 불안의 파도, 걱정의 공포, 또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가 다 고요하고 잠잠해져서 기이한 체험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이깁시다. 
    어떤 조건도 환경도 이깁시다. 
    그 비결은 오직 믿음입니다. 요일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025 오바댜



    에돔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내용개요
    오바다서는 구약의 선지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다. 
    하나님은 본서를 통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에돔은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는 사실상 형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일 산을 거점으로 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왔다. 
    그런데 그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자신들의 강력한 군사적, 경제적인 힘만을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1-9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이스라엘을 더욱 핍박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략 당할 때는 그것을 기뻐하고 같이 노략질까지 일삼았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시기 로 한 것이다(10-16절). 
    그러나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민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에돔의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7-21절).


    강해
    오바다 선지자는 유다에 행한 에돔의 잔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징벌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유다를 대적한 에돔의 심판 예언은 곧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유다가 대적 에돔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에돔의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본서의 내응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로우심을 증거하여 주며 핍박받는 의인에게 승리의 소망이 됩니다.  

    1 . 심판받을 에돔

    1) 스스로의 교만으로 속은 에돔
    여호와께서는 에돔을 미약하게 만드시어 크게 멸시를 받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교만하여 중심의 교만으로 스스로 속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교만한 죄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에돔의 교만을 꺾어 낮추심으로써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용납지 아니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죄가 모든 죄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어 주권적인 뜻에 따라 높이시기도 하고 낮추시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인 것입니다. 
    에돔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였듯이 이스라엘도 교만함으로 심판을 받아야 했고 모든 인간의 범죄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교만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a. 교만하여 악을 행함(대하 26:16)
    b. 교만하면 낮아짐(잠 29:23)
    c. 마음의 교만이 속임(렘 49:16)

    2) 에돔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나라에게서 수탈한 보물을 다시 다른 나라 백성에게 수탐당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그들과 약조한 자들과 그들의 식물을 먹는 자들을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허망한 것임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앗수르와 애굽과 약조를 맺었지만 결국엔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a. 가까운 친우가 배반함(시 55:12-13)
    b. 가까운 친구가 잊어버림(욥 19:13)
    c. 형제마다 속임(렘 9:4)

    2. 에돔의 죄악

    1) 이스라엘에 행한 에돔의 포학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구체적인 이유는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에 동참하였음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수욕을 입게 하고 영원히 멸절시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국으로서 이방국들이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 방관하거나 이스라엘의 패망을 기뻐하지 말아야 했으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악이 단순한 이스라엘에 대한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도전적 행위였던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택된 백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행한 에돔의 포학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보응하신 것입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비히 행하여야 했지만 어리석은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a.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함(시 83:5-6)
    b.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에 기뻐함(시 137:7)
    c. 유다를 쳐서 원수를 갚음(겔 25:12)

    2)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열국을 심판하실 날이 가까웠음을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되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모든 자에게 그 행위에 상당하는 보응을 내리십니다. 
    악인에게는 그 죄 값을 치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인 것입니다. 
    열국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목은 우상 숭배와 이스라엘에 대한 포학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의 형상으로 바꾸어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심판하실 때에 에돔도 심판을 받게 되어 그 들이 이스라엘을 침과 같이 다른 민족에게 침을 당하게 하시어 에돔이 본래 없었던 것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자들의 말로는 소멸당하여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의 흥왕함을 허용하시지만 결국에는 악인을 소멸시키심으로써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a. 행한 대로 갚으심(시 137:8)
    b. 황무케 하심(겔 35:15)
    c. 유다를 쳐서 원수를 갚으심(욜 3:7)

    3.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

    1)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는 날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승리하며 회복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 심판을 받아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멸망당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바다 선지자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이스라엘은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a. 시온이 공평으로 구속됨(사 1:27)
    b. 백성이 다 의롭게 됨(사 60:21)
    c. 다윗의 무너진 천착이 회복됨(암 9:11)

    2)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도들이 승리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중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고 나라가 여호와께 속한다 는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주로 오시어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방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은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에게 핍박을 받으며 언제나 실패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승리하여 악한 세력을 멸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세워질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a. 유다가 영원히 서게 됨(욜 3:20)
    b. 거룩하다 칭함을 얻음(사 4:3)
    c.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구원(욜 2:32)

    결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적인 승리와 회복을 체험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모든 것의 완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날의 승리를 고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인내로써 극복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단어해설]

    3절. 중심의 교만. /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의 힘을 믿은 에돔의 교만을 가리킨다.

    6절. 수탐. / 사람의 행위를 면밀히 조사하는 것뿐 아니라 약탈하기 위해 집을 샅샅이 수색하는 것을 나타낸다.

    10절. 수욕. / 기대와 어긋남으로 인해 겪게 되는 당황과 곤혹 뿐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당한 결과로 얻어지는 불명예를 의미한다.


    [신학주제] 에돔의 멸망 원인. 

    에돔은 근원상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본장에서는 바로 에돔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이다. 
    선지자는 에돔의 죄를 지적하면서 먼저 그들의 교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당시 에돔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을 믿고 하나님을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형제인 이스라엘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하고 같이 핍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며 공의에 벗어나는 불의한 행동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본 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측면의 삶의 기준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구성원간에 실현해야 할 사랑과 공존의 수평적 관계이다. 
    이 두 가지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성도들의 삶의 기준인 것이다.


    [영적교훈]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남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서로 무관심한 관계가 되어 버렸고 익명의 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 않게 사람들끼리의 사랑과 공존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도움을, 소외된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월 1일(수) 오바댜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1:21)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Deliverers will go up on Mount Zion to govern the mountains of Esau. And the kingdom will be the LORD's.

    * 속하리라(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hâyâh ]  
    구약 성경 /  3549회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 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 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오바댜서 1장 21절에 나오는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에돔의 멸망과 함께 시온 산에서 구원을 얻어,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구절은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후, 구원받은 성도들이 시온 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미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바댜서의 배경
    • 오바댜 선지자 :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을 때 활동한 선지자로, 그가 받은 계시는 주 하나님이 에돔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말씀의 의미
    이 말씀은 모든 나라와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며, 그분만이 궁극적인 통치자이심을 강조합니다. 
    에돔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드러나고, 이후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많은 성경 해석가들은 이 구절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복음으로 세워질 교회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봅니다

  • 에돔의 심판 :
  • 유다 멸망 당시 유다를 대적하고 조롱했던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 교만과 포학이 멸망의 이유입니다. 

  • 구원자들의 등장 :
    에돔이 멸망한 후, 시온 산에 구원받은 자들이 올라와 에돔을 심판하며, 그들이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주권 :

  • 이 말씀은 모든 나라와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며, 그분만이 궁극적인 통치자이심을 강조합니다. 
    에돔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드러나고, 이후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많은 성경 해석가들은 이 구절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복음으로 세워질 교회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봅니다.

  • 구원과 심판의 완성
     :  론적으로, 구원과 심판의 완성은 악을 심판하고 의를 회복하며, 모든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사역의 최종적인 성취를 가리킵니다. 
    '구원과 심판의 완성'은 신학적으로 세상 끝날, 즉 종말에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악한 세력을 멸하고,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완성하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총체적인 과정을 포함합니다. 
    구원의 과정과 심판의 의미
    • 구원: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 보호, 영생, 그리고 성화의 전 과정을 의미하며, 칭의(의롭게 여겨짐)와 현재적 삶을 거쳐 미래에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얻는 전 과정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완성이라는 개념의 의미
    • 종말론적 완성:
      '구원과 심판의 완성'은 세계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궁극적인 결론을 나타냅니다. 













  •  


    앞 구절(19,20절)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내용을 요약한다. 
    즉, '에서와 산'이라는 단어로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쉬임'(*)은 '예솨'(*)에서 온 말로 전쟁에서 얻은 승리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합 1:2;  3:13, 18).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고, '예수'도 이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 본 구절의 '나라'는 직접적으로 '에돔'을 의미하지만, 세상 나라 전체를 가리킨다. 
    즉, 모든 세상적인 나라가 타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리라는 점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사탄의 세력을 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을 당신의 나라로 불러들이신 사역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the Kingdom will be the LORD's)

    구원자들이 시온산에서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면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구원자들이란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말합니다.
    에서의 산이란 에서의 후손 즉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이 세웠던 나라를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약에서 예언된 구세주 즉 메시야를 믿고 구원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구원자가 되어 이 세상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 위에 우뚝 일어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영적인 특징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영적 기갈)(아모스 8:11) 
    둘째는 불법이 성행(사랑의 고갈)(마태복음 24:12)
    셋째는 냉랭(冷冷)한 믿음(소극적 믿음)(누가복음 18:8)

    냉랭하다(冷冷)
     
    1. 태도가 정답지 않고 매우 차다.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열정(熱情)은 감정 중 하나로, 어떤 일에 대해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특정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강하고 다루기 힘들거나 간신히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나 성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열정은 아이디어, 제안 또는 명분에 대한 간절한 관심이나 찬사에서 그 범위가 다양할 수 있다. 관심이나 활동을 열정적으로 즐기는 것, 사람에 대한 강한 매력, 흥분 또는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정욕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것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감정을 암시하며 종종 황홀경 및 고통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로맨스 또는 성적 욕망의 맥락에서 사용된다. 


    유의어뜻이 서로 비슷한 말

    • 열의
      어떤 일에 대한 강한 의욕이나 관심
    • 정열
      강한 감정이나 열망
    • 열정적
      강한 열의나 감정을 가진 상태
    • 흥미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한 관심이나 매력
    • 몰입
      어떤 일에 깊이 빠져드는 상태
    • 열망
      강한 소망이나 바람

    반의어뜻이 서로 반대되는 말

    • 무관심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 관심이 없는 상태
    • 냉담
      감정이 없거나 차가운 상태
    • 무기력
      활력이 없고 힘이 없는 상태
    • 소극적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
    • 우울
      기분이 처지고 우울한 상태
    • 지루함
      흥미가 없어 따분한 상태



    열정이란 무엇인가 한자어의 유래와 의미


    열정(熱情)이란 단어는 한자로 '열(熱)'과 '정(情)'이 결합된 형태로, 각각의 한자가 지닌 의미를 통해 이 단어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열(熱)'은 뜨겁거나 열렬한 상태를 나타내며, '정(情)'은 감정이나 정서를 의미한다

    즉, 열정은 뜨거운 감정, 강한 열의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일이나 목표를 향해 불타는 마음가짐을 표현한다 열정은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단순히 감정의 차원을 넘어, 목표 달성을 위한 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열정은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열정은 때때로 부정적인 측면도 지닌다 지나치게 열정적일 경우, 일에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거나,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열정이란 무엇인가 한자어의 유래와 의미

    따라서 열정은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자아의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열정을 잘 조절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열정은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예술가나 운동선수는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기 위해 열정을 쏟는다 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통해 창의성을 발휘하거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 이러한 사례는 열정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열정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목표를 향한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감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열정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며, 그 열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열정은 우리에게 삶의 활력을 주는 요소이며, 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Enthusiasm (열정) : 긍정적이고 활기찬 감정. 어떤 활동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강한 흥미와 긍정적인 에너지 포함한다.

    Passion (열정) : 주로 개인적인 가치나 믿음에 근거한 높은 흥미. 감정적으로 깊게 연결된 강한 욕구나 애정을 의미.

    Fervor (열정) : 강렬하고 격렬한 감정. 일반적으로 열정적인 상태가 더 강조된 상황에서 사용되며, 감정이 뜨거움을 강조한다.

    Ardor (열정) : 고무적이고 뜨거운 감정을 나타내며, 종종 로맨틱한 느낌을 갖는다. 사랑, 열정, 혹은 애정에 대한 감정을 강조할 때 사용.

    이 단어들은 유사하지만 각각의 미묘한 차이로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열정과 관련된 단어들은 감정의 강도나 성격에 따라 선택되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절은 앞 구절(19,20절)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내용을 요약한다. 
    즉, '에서와 산'이라는 단어로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쉬임'(*)은 '예솨'(*)에서 온 말로 전쟁에서 얻은 승리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합 1:2; 3:13,18).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고, '예수'도 이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 본 구절의 '나라'는 직접적으로 '에돔'을 의미하지만, 세상 나라 전체를 가리킨다. 
    즉, 모든 세상적인 나라가 타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리라는 점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사탄의 세력을 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을 당신의 나라로 불러들이신 사역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소선지서 중에는 그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오바댜는 자신을 "여호와의 종"이라고만 밝혔을 뿐 그가 언제 살았던 사람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사 시대에 오바댜라고 불린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오바댜서를 기록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는 오바댜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13명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왕상 18:3, 대상 3:21, 27:19, 대하 17:7, 스  8:9,  느 10:5, 12:25 참조). 
    또한 오바댜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엘리사 시대에 나타난 오바야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타납니다.  

    2.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바댜 서의 기록 연대는 주전 850년부터 주전 400년 사이로만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전 850년은 님이 언급하신 여호람의 통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400년은 말라기가 활동했던 구약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오바댜의 연대는 이 450년(주전 850-400년)기간 중에 활동했다고 알 수 있을 뿐, 그때가 언제인지는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3. 오바댜서에 대한 연대에 대해서 가장 설득력을 가진 견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람의 통치시기(주전 848-841년)로 보는 견해
    둘째는 유다가 포로된 직후인 주전 578년경으로 보는 견해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바댜를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여자 아달랴와 결혼했습니다(왕상 22:44, 대하 18:1, 21:6, 22:3, 4, 10). 
    * 여호람 + 아달랴

    여호람은 자기의 보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런 일은 사악한 아달랴에게 영향력을 입어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대하 21:4). 
    그리고 후에 아달랴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손자들을 죽였습니다(대하 22:10). 
    첫 번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바댜가 바로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예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때에 하나님께서 오바댜를 불러서 남쪽의 에돔 족속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바댜가 이스라엘에 대해 교만하게 행한 에돔의 멸망을 예고했다고 주장합니다(옵 11-14).

    3. 두 번째 견해는 에돔의 멸망을 선포하는 오바댜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쓰여진 다른 선지자들 역시 에돔이 바벨론과 공모를 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렘 49:7-22, 겔 25:12-14, 35:5-6. 애가 4:21-22, 시 137:7).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시기에 쓰여졌는데, 오바댜의 내용은 이 선지자들의 글과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렘 49장을 보면 오바댜서와 내용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렘 49장과 오바댜서가 공통된 자료를 인용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오바댜서에는 유다가 포로된 후에 등장하는 소망의 메시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참고해서 일부 학자들은 오바댜가 활동한 시기를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직후인 주전 578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이 시기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활동했던 때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견해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첫 번째 견해의 장점은 성경상의 위치에 있습니다. 
    학자들은 소선지서 중에서 앞에 나온 호-욜-암-옵-욘-미가가 유다가 바벨론의포로가 되기 전에 쓰여졌고, 
    뒤에 나오는 나-합-습-학-슥-말라기는 그 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앞에 나오는 오바댜서의 연대가 제 9세기인 여호람 시대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견해의 장점은 내용에 있습니다. 
    오바댜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상황과 메시지는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직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내용 역시 오바댜서가 포로 직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연대 문제는 아직도 미확정적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오바댜서가 구체적으로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와 자신이 오바댜서를 기록한 연대를 밝히고 있지 않은 만큼, 이 문제는 누구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대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참고하고,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분명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충분히 생각해보고 나서, 자기 자신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바댜서(Obadiah)

     

    구약의 예언서 가운데 가장 짧은 책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앞으로 당할 불행한 운명과 심판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능력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오바댜서는 기록된 모든 예언서 메시지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바댜는 그의 짧은 메시지를 통해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믿음 없는 이방 족속 위에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믿음을 지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작은 책은 큰 죄에 해당하는 자만과 오만함에 대한 위험, 즉 다른 사람들을 착취함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우월 감정에 대한 위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바댜는 잠언의 진리를 도표로 그리듯이 입증하고 있다(욥 1:3-4).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저자 : 
    오바댜라는 이름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오바댜서의 저자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록 연대 :
    오바댜서 자체가 저자의 출신 지역이나 시기, 또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 등과 같은 배경에 대해서 아무런 사실도 제공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크게 보면 여호사밧 왕의 아들인 여호람의 통치기간 동안이라는 주장과, 아하스 왕의 통치기간이라는 주장, 그리고 BC 586년에 있었던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 사건 바로 직후인 BC 586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오바댜 1:11의 내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 내용 자체가 선지자가 목격한 과거의 사건인지 아니면 순수한 예언인지에 따라 큰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것이 선지자가 경험한 내용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던 사건(BC 586)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반면에 이 내용이 순수한 예언이라면 이 책이 기록된 시기는 아마도 여호람 왕 시대에 블레셋과 구스와 아라비아 사람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략함으로써 궁중의 모든 재물이 약탈되고 아내들과 아들들이 탈취되었을 때(대하 21:8-10; 왕하 8:20-22 참고)일 것이다.

    소수의 학자들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바댜서의 기록 연대를 BC 6세기로 보고 있다. 
    이 연대를 가장 뒷받침해 주는 것이 유다의 멸망 때 에돔이 유다를 침공한 것에 대한 언급이다(옵 11-16; 애 4:21-22).

    오바댜서의 특징 : 
    오바댜서는 전체 분량이 21절밖에 안되는, 예언서 가운데 분량이 가장 적은 책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는 다른 예언서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신학적 토대들이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공의로써 심판하신다. 
    특별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의 아브라함 언약이 오바댜에서는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5)는 말씀으로 나타났다.

    오바댜에서 보여 주는 야곱과 에서, 그리고 이스라엘과 에돔간의 계속적인 갈등은 신약에서 절정을 이룬다. 
    즉 이두매인이자 에돔의 후손인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이다(마 2:16).

    전체 개관 : 
    오바댜서는 에돔의 죄악들을 들어 심판을 선언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하고 있다. 
    에돔의 죄악에 대한 목록(옵 10-14)은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 준다. 
    에돔에 대한 심판은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열방들도 포함된다. 
    이러한 넓은 범위는 오바댜 15-16에 나타나며(애 1:21 참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될 지를 보여 준다(옵 21).

    1. 에돔에 대한 멸망(1-9)

    2. 에돔의 죄악들(10-14)

    3. 이스라엘 적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15-16)

    4.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17-21)

    핵심 메시지 : 
    오바댜의 주된 내용은 에돔의 영원한 멸망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선포이다. 
    이때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인 이방들을 대표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마침내 심판을 받게 되고 그 나라들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준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이다.


    오바댜는 어떤 책인가?

    오바댜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 또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남유다의 선지자로 활동 하였습니다.

    오바댜는 B.C.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국가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시련과 좌절에 직면해 있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특히 포로 생활 중에도 결코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바댜는 남유다의 멸망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에돔의 멸망에 대해,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 오바댜서의 배경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되는 예루살렘을 향해 에돔사람들은 바벨론을 격려하며 “무너뜨리라... 무너뜨리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입니다(창 2:21-26).

    • 오바댜서의 내용

    1.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1-16절)
    예레미야는 49장 7-22절에서 이미 에돔의 운명을 말하였습니다. 
    오바댜서에는 이 예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죄는 무엇입니까?

     *교만(3-4절)
    - 에돔은 작은 나라였으나 그 업적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에돔은 바위를 뚫고 성을 세웠는데, 그들은 “바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3절). 에돔의 으뜸가는 도시 페트라는 산의 등성이를 파서 된 것이며, 그 요새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졌습니다(사 14:12-15 비교). 그래서 누구도 자신들을 공격할 수 없다고 여기며 교만하였습니다.

     *동맹(7절)
    - 이스라엘에 사는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지기는 커녕 주위의 나라들과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적대하였습니다.

     *폭력(10절)
    -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성이 무너지는 것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즐거워함(12절)
    - 에돔은 그의 형제의 재난에 대하여 울어야 했으나 반대로 즐거워하며 조롱하고 있었습니다(잠 24:17-18).

     *약탈(13절)
    - 이들은 유대인들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 성에서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피난하는 자들을 방해함(14절)
    -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피난하여 가족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는데, 에돔사람들은 그 길을 막았습니다. 이들은 피난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돌려 보내는 일을 도왔습니다.

     *술의 축제(16절)
    - 에돔 사람들은 포도주를 공급받게 되어 큰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유대인을 취급한 그대로 그들을 취급하실 것입니다(시 137:8-9 절). 이들은 연맹군에게 배반을 당하였습니다(11절). 이들은 약탈하였는데 후에는 자신의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5-6절). 에돔은 폭력을 휘둘렀는데, 결국은 완전히 끊겨지게 되며(9-10절), 에돔은 유대인들이 멸망되기를 원하였으므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10, 18절). 에돔은 그들이 뿌린 것을 거둘 것입니다(사 34:5-15/겔 25:12-41/겔 35:1-15/암 1:11-12 참조)!

    2. 야곱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17-21절)

    17절의 “오직“이라는 작은 단어가 전환점이 됩니다.

    하나님은 시온의 구원과 죄씻음을 약속하십니다. 
    성전은 그들의 죄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집“을 정화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고 왕국은 여호와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의 집(에돔)은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 오바댜의 개요

    오바댜서 개관도표

    • 오바댜가 전하는 메시지

    리브가는 쌍둥이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동생 야곱을 택하였습니다. 
    그가 형 에서를 제치고 장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구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맹세를 하십니다.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되리라." 하지만 육신적으로 장자였던 에서에게는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9:13 
    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녀를 대표하며, 
    그들이 비록 때때로 죄를 범하고 실망시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유업을 얻을 은혜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선택의 교리는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야곱은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을 나타냅니다(갈 5:16-26). 
    에서는 성도의 육(죄성)을 상징합니다. 
    에서는 매력이 있고, 능력이 많지만, 교만하고, 탐욕적이고, 반역적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기는 편에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육신에는 심판을 선언하셨으며 어느 날 심판이 번개처럼 임할 것입니다. 
    에돔은 교만하고 반역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하자 조롱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5년 후에 에돔 역시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에돔은 어느 나라인가? 
    이 세상은 육신을 자랑하며 육신이 성취한 일과 육신이 얼마나 강한가를 자랑한다. 
    그러나 모든 육신은 그리스도의 승리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계 19:11-21 참조). 
    특히 육신이란 말이 반복하여 언급되는 17-18절을 눈여겨 보자.

    또 에서는 육(죄성, 옛사람)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에서와 야곱, 즉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을 상징합니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가리치는 교훈입니다.

    •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은 에돔사람이었습니다. 
    헤롯 집안의 한 왕은 그리스도를 파멸시키려는 시도로 많은 유대 아기들을 죽였고(마 2:16-18), 또다른 왕은 세례(침례)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한 왕은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를 죽였습니다(행 12장).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투쟁은 창세기 25장 21-26절에서 시작된 똑같은 전쟁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대 영, 교만대 복종, 인간의 길 대 하나님의 길 등, 투쟁은 그리스도가 돌아오셔서 그의 왕국을 세우실 때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누구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참고 : 예정과 선택교리

    예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절대적 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미리 자질을 헤아리고 그 ‘예지’에 따라서 작정했다는 주장은 자체로 모순된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영원 전에 구속주로 작정되시고,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체로 선택되었다.
    이는 우리의 자질을 불문하고 택하심이니 택자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택하신 분의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를 자신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로 삼고자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신다고 함은(롬 11:2, 행 2:33)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실 언약의 자녀들을 미리 마음에 두셨다는 의미이다
    주님은 택한 자들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 ‘아버지의 것’이라고 부르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있다

    선택은 ‘믿음의 어머니’이며, 믿음은 선택에 대한 ‘보증’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를 주신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중에서)


    에서와 야곱 – 두 국민은 어느 족속을 말하는가?


    창세기 25:23에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이는 에서와 야곱이 각각 두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1. 에서 → 에돔 족속

    • 에서는 장자였지만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겼고, 결국 세일산 지역(오늘날 요르단 남부)에서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됨(창 36:1-9).

    • ‘에돔’은 히브리어로 ‘붉다’는 뜻인데, 이는 에서의 붉은 피부색과 붉은 죽 사건(창 25:30)과 관련됨.

    • 에돔 족속은 후에 이스라엘과 종종 대립하는 관계가 됨(민 20:14-21, 시 137:7).

    2. 야곱 → 이스라엘 족속

    •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후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경됨(창 32:28).

    • 야곱의 12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고, 이는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함.

    •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언약을 이루셨고,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됨.

    3. 두 민족의 관계

    •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 민족이지만, 성경에서 계속 충돌하는 모습을 보임.

    • 출애굽 당시, 모세가 에돔 땅을 지나가려 했지만 에돔 왕이 거부(민 20:14-21).

    • 다윗 시대,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복하고 통치함(삼하 8:13-14).

    • 바벨론 포로기, 에돔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멸망을 기뻐함(시 137:7, 오바댜 1:10-14).

    • 신약 시대, 에돔 후손 중 ‘헤롯 왕조’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림(마태복음 2:1).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됨.




    창세기 25장,야곱과 에서, 하나님은 왜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25장

    아브라함이 별세한 후 이삭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에서, 작은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쌍둥이면서도 외모와 성격 모두 완전 다른 이란성입니다.

    큰 아들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기질이 호탕하고, 성격이 급하며, 사냥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사나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집안에 있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세밀하며 말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저보고 둘 중 누구와 친구가 되려는가 묻는다면 당연히 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며 기분파이기 때문에 잘만 비위를 맞춰주면 덕볼 일이 많고, 또 의리파입니다. 자기가 손해볼지언정 배신하지는 않는 그런 성격이죠. 물론 단점도 있긴해도 친구가 손해볼 단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산적이기 때문에 쉽게 손해를 보질 않습니다. 친구를 잘 믿어주지도 않고, 뒤끝이 있습니다. 속을 알 수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뒤통수 얻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는 몸이 붉다는 뜻이고, 야곱은 남의 뒷다리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좋아하십니다. 심지어 에서를 버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은 에피소드에서 그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팥죽 사건이죠.

    사냥을 좋아하는 에서가 집에 돌아오니 야곱이 시간을 맞춰 붉은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적갈색의 콩에다 파와 각종 양념을 넣어 끓인 수프가 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의 스프를 우리식으로 팥죽으로 번역한 것이지만 우리의 팥죽은 아닙니다. 원어에는 붉은을 두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이 죽을 보았을 때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가 그 마음이 죽 이름에 담겨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을 보면 야곱은 의도적으로 에서가 돌아올 때를 맞춰 이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에서는 야곱에게 죽 좀 달라했지만 야곱은 매정하게 거절하고는 형의 장자의 권리와 죽을 바꾸자고 합니다. 에서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덜렁 이것을 바꾸고 맙니다.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 권리가 뭐 소용 있냐는 것이죠. 그리고 장자의 권리는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재산을 나눌 때나 좀 덕을 보지만 그건 나중일이고 지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성경은 이런 에서의 생각을 장자의 권리를 경홀히 여겼다고 합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장자의 권리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와 집안의 대를 이어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런 에서를 버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제임스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년 1월 11일, 뉴욕주 뉴욕 ~ 1910년 8월 26일, 뉴햄프셔주 탬워스)는 미국철학자, 심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졌다. 
    철학
    ·종교학·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55년에서 1860년까지 유럽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문물을 만났다. 1861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화학을 전공했다. 1864년에 학부 졸업 후 하버드 메디컬 스쿨로 진학했고, 1869년에 의학박사(M.D.) 학위를 얻었다. 1873년에 하버드 메디컬 스쿨의 해부학, 생리학 강사로 일했고, 1875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는 기능주의 심리학에 큰 업적을 세웠다. 한편 제임스는 하버드 대학교에 심리학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첫째는 살아있는 선택과 죽은 선택
    둘째는 피할 수 있는 선택과 피할 수 없는 선택, 
    셋째는 중요한 선택과 사소한 선택입니다. 

    죽은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지만 
    살아있는 선택은 사람의 선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머지는 설명 안해도 아시겠죠. 
    에서는 자신의 삶의 순간에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선택을 거부하였고, 중요한 것 대신에 사소한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서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엘리제사장을 꾸짖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 존중받고 싶다면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최고로 여길 때 하나님은 역시 당신을 최고로 여겨주신답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이삭의 나이가 육십 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160세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고,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후에도 15년을 더 살며 손자들의 재롱과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순서로 따지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죽음 이전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저자는 마치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미 죽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앞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제부터 새로운 세대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삭의 생애가 기록될 것 같았는데, 그런 예상과는 달리 막상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이삭보다는 야곱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과 그의 첫째 아들 에서 보다 둘째 아들 야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26장에서 짧게 다루어지고, 그 후로 독립된 이삭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의 가정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삭보다는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사건이고, 둘째 부분은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는 사건입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20). 특별히 저자는 리브가를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족속인 라반의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인 라반을 찾아 갈 일을 염두에 두고 미리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해서 어머니인 사라가 죽은 후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 이삭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랜 시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러했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그러합니다. 훗날 야곱의 아내들도 그러한 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일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이 성취될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비록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약속의 상속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다음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이 이삭의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

    이삭의 기도가 응답되어 결혼하고 20년 만에 리브가가 임신합니다. 그런데 임신으로 기뻐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리브가에게 근심이 생깁니다. 자신의 뱃속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심한 요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정작 리브가는 영문도 모른 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후 처음으로, 그것도 어렵게 경험하고 있는 임신입니다. 요즘처럼 초음파로 검사해서 태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리브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자신의 뱃속에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22절에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싸우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짓누르다, 으깨다, 산산조각 내다, 학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만큼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어난 후에 싸워도 충분히 싸울 날이 많은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아이들로 인해 그녀의 뱃속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가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둘 사이에 있을 갈등과 다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은 가족 간의 갈등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재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었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다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속고 속이는 갈등을 겪게 되고, 뿐만 아니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도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이런 일은 단순히 성경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오는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이 싸우는 걸까요? 가장 친밀한 부부사이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갈등이 만날 때 “어떻게” 와 “”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러냐?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겁니다. “5-3=2” 어떤 오해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가정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 협력하여서 한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와 “”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해야 돼’, 이런 면에서 우리의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어떻게’를 달성하기 위해 때로 부딪히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의견 차이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뭔가를 할 때 어떻게 보다 ‘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하는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여러 부서가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어떻게’ 더 좋은 행사를 만들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이것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만 생각한다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만 몰두한 나머지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어떻게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물론, 성경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한 번 더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자신의 뱃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길이 없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3)

    리브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응답은 네 마디의 간략한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녀의 뱃속에 함께 할 수 없는 두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가 요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두 민족이 그 힘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강한 민족이 형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그래서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합니다.

    어찌되었든 때가 되어 리브가는 두 아이를 출산합니다. 첫째 아이는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아서 에서라 이름 지었고, 둘째 아이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당시 문화에서 이름 짓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름을 지을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거나 출생에 관련된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을 읽다보면 이름 짓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이름 짓는 게 장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털이 많아서 에서이고, 발꿈치를 잡아서 야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좀 황당한 이름들이지만, 당시의 문화 안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삭과 리브가는 특이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하나는 붉고 털 많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성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달랐던 두 아들은 자라면서 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 되어서 주로 들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인데 정말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아들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다른 점으로 인해서 부모의 사랑이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이삭과는 달리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빠는 형을 사랑하고, 엄마는 동생을 사랑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모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랑은 가정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가 자신과 더 잘 맞는 자녀를 사랑하고, 다른 자녀를 덜 사랑하는 정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문제이기보다 부부의 문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축복을 얻기 위해 속이고 속는 일이 전개되는 27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녀 양육의 최선은 건강한 부부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면 그 안 좋은 영향이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만큼, 서로에 대해서 나의 남편에게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삭의 가정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집니다. 27절에 에서를 가리켜 익숙한 사냥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단어의 표현 그대로 말하면 사냥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사냥을 잘 아는 능숙한 사냥꾼인 에서가 사냥에 실패했는지 심히 피곤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사냥꾼이었던 에서는 사냥에 실패하고, 오히려 에서가 야곱의 사냥감이 되어서 야곱의 미끼를 덥석 무는 것입니다.

    마침 야곱은 죽을 쑤고 있었고 에서는 그 죽을 먹기 원했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30) 에서는 팥죽을 가리켜 ‘그 붉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야곱은 형에게 말이 안 되는 거래를 요구합니다. 죽을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해서 에서는 맹세까지 하며 장자의 명분은 야곱에게 팝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이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권리, 그 가치를 알고 자신의 세속적인 형으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경솔하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는 피곤하여 지쳤고, 굶주려 있었고, 장자의 명문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은 34절에 그의 행동을 말해주는 연속되는 동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감으로써 자신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서는 들에 사는 야생 동물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일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능숙한 사냥꾼이기보다 형편없는 미끼에 넘어가 붙잡힌 짐승 같습니다.

    에서가 정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분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형이 동생을 섬길 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두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쉽게 장자권을 내어주었고, 야곱은 필사적으로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자기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에서가 장자가 될 만한 자격이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6)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의 세속적인 성품과 행동을 통해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를 위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것,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에 대한 교훈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망령된 자가 되지 않도록,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잠깐의 만족을 위해,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한 것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 정말 귀중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달콤함을 얻기 위해 더 유익한 것을 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과 바꾸지 마십시오. 반대로 일시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보고 제대로 구별하며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에서는 훗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지만 기회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때 날아가 버린 기회는, 그 소중한 가치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바댜 전체 강해, 오바댜 내용과 주요사상, 내용분해, 교훈

    *이름의 뜻을 통한 주제 / 하나님의 종

    *오바댜 주제 / 이 세상의 왕국을 다 취하신 하나님(1:21)

    *오바댜 주제 절 /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1:21).

    Ⅰ. 예언자 오바댜

       오바댜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바댜에 대해서 다른 참고자료를 얻을 수가 없다. 아모스를 제외한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그의 가문과 출신이 전혀 소개되지 않음으로 그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바댜라는 이름은 히브리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상18:3, 대상3:21, 7:3, 8:38, 9:16, 12:9, 대하17:7, 34:12, 스8:9, 느10:5 등 참조).

    오바댜의 연대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많으나 예레미야 전후의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대체적입니다. 렘49:14 - 16과 본서 1:1 - 3은 에돔이 받을 심판에 대하여 아주 비슷한 낱말들과 내용들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Ⅱ. 내용과 주요 사상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별칭으로(창25:25~26, 36:1, 19. 43) 그 후손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이기도 합니다(민20:23, 21:4, 34:3). 그들은 이스라엘과 혈연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암1:11). 이와 같은 에돔에 대한 심판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되었습니다(사34:5~15, 렘49:7~22, 겔25:12~14, 35:1~15, 암1:11~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돕지 않고 괴롭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본서의 내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서는 다른 민족을 멸시하며 저주하고 오직 자기 민족만 높이 들릴 것을 희망하고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편협한 배타주의 민족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서가 가르치는 중심 내용은 이웃나라(이스라엘)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자기의 이익을 얻는 좋은 기회로 삼는 잔인한 무관심과 부도덕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나라는 이웃 나라와 꼭 같은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후손이요. 에돔 민족은 바로 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간교는 형제 사이에 다툼을 가져왔는데 그 후손들도 화목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려고 에돔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에돔은 그것을 거절했으며(민20:14~21), 가나안 정착 후에도 두 나라는 서로 무역 경쟁자의 입장에 있게 되어 이해가 상반되는 대립 관계가 있었습니다. 도리어 에돔은 유다왕국의 멸망을 바라고 기뻐하는 처지였다(11 - 14절, 애4:21).

    Ⅲ. 내용 분해

     1. 에돔의 심판과 그 이유 1 : 1 - 14

       1) 에돔의 멸망에 대한 경고 1 : 1 - 4

       2) 에돔의 완전한 멸망 1 : 5 - 9

       3) 에돔의 심판 이유 1 : 10 - 14

     2. 여호와의 날 1 : 15 - 21

       1) 만국의 심판 1 : 15 - 16

       2) 이스라엘의 회복 1 : 17 - 21

    Ⅳ. 오바댜서의 교훈

    선지서는 기록을 남긴 선지자를 기록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말씀과 사역을 통하여 선지자 노릇을 했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들을 기록 전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예로 들자면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엘리야 엘리사가 등장하기 이전에 사역했던 선지자들도 다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엘리사 이후부터는 기록 선지자가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록 선지자들은 장차 올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했던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다윗 즉 다윗의 자손 메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바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바댜가 언제 이 예언을 기록했는지 본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이 침략을 받았을 때 에돔이 했던 악한 짓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국의 침략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는 것이 오바댜의 기록 연대를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침략을 받은 사건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주전 926년 르호보암 때 애굽 왕 시삭이 침략해서 약탈한 적이 있습니다(왕상 14:25-26). 
    그리고는 주전 848-841에 여호람 치세 중에 블레셋과 아랍인들이 침략한 적이 있습니다(대하 21:16,17). 
    그래서 왕자들과 왕비들과 왕궁의 재물을 약탈하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전 790년 아마샤 치세 중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침략한 적이 있습니다(왕하14:13-14). 
    또 주전 605-586년 사이에 바벨론의 연속적인 침략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오바댜서는 여호람 치세 중에 있었던 블레셋과 아랍인들의 침략을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바댜서는 주전 84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 선지자로서는 가장 일찍이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도 믿는 자가 잘못되는 것을 보고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에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돔은 침략자가 예루살렘을 늑탈하며 좋은 물품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았는데 그들과 한 패가 되어 뒤따라가며 똑같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11). 
    에돔은 예루살렘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방관하며 기뻐하며(12) 
    아마도 크게 입을 벌리고 웃으면서 좋아라고 했던 것입니다. 

    같이 성에 들어가서 재물을 약탈하며 도망하는 자를 막고 또 잡아서 대적에게 넘겨주는 짓을 했던 것입니다(13-14). 이것이 에돔이 본성이요 세상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선택자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적개심은 세상이 가진 본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에돔을 위하여 하나님은 심판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15절에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희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에돔도 마찬가지로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돔의 심판은 세상 심판의 한 예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던 에돔의 멸망은 세상 심판의 한 징조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에돔의 심판은 이 세상이 심판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하여 그 피와 제물의 피를 섞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이 심판이 바로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당할 심판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 죽지만 그것은 예루살렘의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심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13:1-5).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있느냐 하는 것 따위는 성경의 관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싫어하는 세상은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사고를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심판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을 보거든 세상이 망하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보거든 죄악의 몸 즉 죽을 몸이 마침내 죽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은 또한 죄악의 세상이 죽을 것을 보여 주는 징조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 즉 계시를 받은 자가 하나 다른 것은 시온산이 망하지 않음을 앎니다. 17절에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라고 합니다. 시온산은 하나님에 의해서 남겨지는 자들로 채워지며 이들이 불이 되어 에돔을 불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심판의 원리입니다.

    오바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두 가지

    1. 은혜를 모르는 세상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세상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대하여서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징조는 지금도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신자의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난 즉 교회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은 심판 될 것입니다. 
    교회의 고난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이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므로 이 보복 심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시온은 망하지 않으며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망하지 않으며 구원됩니다. 
    구원자가 시온에 올라오는 것이 구원의 징표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 심판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온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고 죄악은 망하게 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역사철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세상이 아무리 세력이 승하고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은 패할 것이라는 점이요 또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약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할 것이요 따라서 교회가 죄악 투성이라고 해도 교회는 결국 죽음을 통하여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패하지만 교회는 영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좌절하지 말고 살도록 하십시다. 
    또 세상의 우리 삶이 망해버린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있는 것으로 망하지 않음을 믿고 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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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강원대학교 정외과 명예교수 최동희

    인류가 고안해낸 삶의 질서 중에서 가장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근접한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자유민주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 내용을 지닌 것이기에 사사무애법계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유민주주의 의미를 일층 더 선명하게 하려면 그와 대칭되는 인민민주주의와 비교 분석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수 세기에 걸친 자유의 질적 확대과정과 자유를 누리는 주체의 확대과정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소련, 동유럽 등의 공산국가에 확립되었던 질서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다음 다섯 가지 수준에서 비교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1. 결정방식
    2. 정치체제
    3. 경제체제
    4. 사회체제
    5. 문화 체제
     

    결정방식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결정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최대한의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그중에서 다수가 좋다고 해서 내린 결정이 좋은 결정이라고 본다. 이러한 결정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능력은 큰 차이가 없다. 평등한 사람들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다수가 좋다는 것이 된다. 다수결 원칙은 이러한 인간 평등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는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소수에 의한 결정이 좋은 결정이라고 본다. 이것은 인간은 본래 불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무지한 다수보다는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의 합리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 좋은 결정이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엘리트주의적 결정이 있을 수 있다. 고도의 기밀을 요 하는 외교, 안보문제는 다수의 의견보다 소수의 합리적 판단으로 결정될 수 있다. 전문성이 높은 문제는 소수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하여 결정을 내린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경우는 다수의 참여로 결정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결정방식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다수가 결정에 영향을 줄 경우가 있다. 이른바 대중노선과 같은 것이다.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의 대중노선이나 인민재판이 좋은 예이다. 대중노선은, 인간 평등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소수가 다수 의견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이다.

    이상의 결정방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준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국민 모두의 정치참여가 중시되지만,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 독재가 강조된다. 자유민주주의 경제 질서에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중심이 되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경제를 주도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자유롭게 사회집단이 결성되어 집단을 통해 이익을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공산당 지배 구조 속에 사회집단이 존재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기초로 국민 모두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 보장되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문화는 공산당 또는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이 된다.

    정치체제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당제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복수정당제를 택하고 있다. 복수정당제는 다수의 정당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을 하는 정당제이다. 정당은 정강 정책을 통해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다.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은 훌륭한 후보를 내세워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행정부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집권하게 된다. 선거 결과 국민 지지가 여러 정당으로 분산되면 다수정당제가 되고 두 개의 큰 정당으로 국민 지지가 양분되면 양당제의 정당제가 되게 된다. 복수정당제에서 각 정당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민 각계각층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정당의 정책으로 제시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한 정당은 입법이나 정책의 실현으로 계속 국민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다.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선거를 통해 정권이 다른 정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민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독재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다수이기 때문에 다수의 독재는 민주주의가 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당 독재이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무지해서 공산당의 지휘 감독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인민민주주의는 공산당(노동당) 일당 독재체제가 된다.

    공산당 이외에 우당(友黨)이 있을 수 있으나 우당은 공산당과 정권을 경쟁할 수 없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선거는 공산당과 다른 정당이 정치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행사가 아니라 공산당의 지배를 확인하는 의례적 행사에 불과하다. 공산당은 국민 지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민 여론이 공산당 집권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이 당의 지시와 지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복수정당제의 장점은, 국민 각계각층의 원하고 바라는 바가 여러 정당의 정강 정책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국민을 위한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단점은 다양한 국민의 이해관계를 쉽게 정책화할 수 없고, 또 정당의 정책이 실현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는 점이다.

    일당 독재의 장점은 정책의 신속한 실현에 있다. 다양한 국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지배자의 합리적 판단으로 정책이 정해지고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점은 국민 다수의 이익보다 소수 지배층 중심의 정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국민은 정치의 객체로서 당의 지시와 지배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또는 시장경제체제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개인의 사유재산이 보호되고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된다.

    수요와 공급이 시장기구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오르든가 공급이 늘게 된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하락하고 공급이 줄게 된다. 수요와 공급이 시장의 가격기구에 의해 균형을 잡게 된다.

    시장경제의 장점은 경제의 활력과 창의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이윤 추구가 보장되기 때문에 경제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의 활력과 창의력을 키운다.

    단점은 노력과 능력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평등 속에서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10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이 5시간 일한 사람의 보상보다 배가 되는 것은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만을 보면 5를 받은 사람과 10을 받은 사람은 소득에서 불평등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신품종을 개발한 사람은 재래식 방식대로 한 사람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평등한 것이다. 이 경우도 결과에서는 불평등이 되게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사람의 노력과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권력의 불필요한 규제 통제는 최소화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결과적으로 조성되는 불평등은 복지정책으로 완화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이 경제의 효율을 저해하지 말아야 한다. 10시간 일한 사람과 5시간 일한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에 따라 같은 보수를 준다면, 이것은 인간의 자생력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불공정이 될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경제는 계획경제체제이다. 생산수단은 공공 소유 또는 국가 소유이고 개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정부의 합리적 판단으로 국가 전체의 모든 수요를 예측한다. 예측된 수요를 각 생산업체에 배분하고 모든 생산 자제가 공급된다. 생산된 물자는 전국에 필요한 지역에 배분된다.

    계획경제체제에도 장점, 단점이 있을 수 있다.

    장점은 자원의 합리적 배분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이 전국의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공급(생산)을 하면 수요와 공급이 정확하게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가정에 불과하고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단점은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수요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매년 필요한 물자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고 또 그 종류도 대단히 많다. 그 모든 수요를 예측한다는 것은 신(神)의 작업이다. 잘못 예측된 수요에 따른 생산은 전국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가져와 경제 운영이 어렵게 된다. 작년에 과잉 생산된 물자가 산적해 있는데, 전년도와 같은 생산 지침이 시행된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현상이 장기화 되면서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경제의 활력을 잃고 대부분 폐망하였다.

    둘째, 계획경제에서는 인간의 창의성이 온전히 발휘될 수 없고 또 경제의 활력도 기대할 수 없다. 소수 지배층을 제외하고 국민 다수는 경제의 객체에 불과하다. 인간의 창의성은 주체적 활동에서 나온다. 국민은 정부 지침에 수동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국민의 창의성이나 경제의 활력을 기대할 수 없다.

    결과적 평등을 인위적으로 잘못 추구하면 사람들의 의존성을 키워 인간의 자생 능력을 떨어트린다. 경제생활에서의 인간의 객체화는 경제의 활력과 창의성을 크게 저하시킨다.

    사회체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다. 모든 사람은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사회집단 또는 이익집단을 결성하여 집단의 힘으로 공동으로 이익 추구를 하게 된다. 기능별로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정부나 정당에 압력 활동을 전개한다. 각 정당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익집단들의 요구를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국민 다수가 원하고 바라는 사안들이 정부 또는 정당의 정책으로 반영 되게 된다.

    이러한 사회체제의 장점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가 현실화된다는 점이다. 국민 대부분은 기능별, 지역별, 영역별의 다양한 사회집단이나 이익집단에 참여한다. 개인은 사회집단을 통해 이익 추구와 이익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사회집단은 국민 다수를 정치참여의 길로 이끌어 준다.

    단점은 자본과 조직력이 강한 사회집단이 정책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국민 전체가 사회집단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조직되지 않은 국민이 다수일 경우도 있다. 그러할 경우는 많은 사람의 권익이 정책으로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적극적인 정당 활동이 존재하면 조직되지 않은 국민의 권익도 보호될 수 있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도 다양한 사회집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집단은 이익집단 또는 압력단체의 기능을 갖지 못하고, 공산당(노동당)의 지시를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고 구성원들을 규제 통제하는 기능만을 갖는다.

    장점은 당의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신속하게 국민 전체에 전달할 수 있다, 는 점일 것이다.

    단점은 국민의 다양한 요구나 욕구가 표현되고 충족될 수 없다, 는 점이다. 위로부터의 대규모 군중 집회가 자주 개최되는 것은 군중의 욕구 불만을 집단적으로 발산케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문화 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문화생활은 표현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소질에 따라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장점은 수만 가지 주의 주장이 꽃피울 수 있다는 점이다. 남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지 않는 한 모든 생각이나 사상은 표현될 수 있고 또 존중된다.

    단점은 문화 예술의 세속화 현상일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문화 예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에 따른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문화 예술은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당 이념에 충실하여야 한다, 는 지침이다.

    문화 예술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지침을 따르면, 문화 예술의 획일화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서로 상반 된, 종합적인 삶의 질서이다. 서로 다른 총체적인 삶의 질서는 한 울타리에서 공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의 연방제는 현실성이 없다. 남과 북의 공존은 서로 다른 국가에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종합적인 삶의 질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질서인 사사무애법계에 근접해 있다. 사사무애법계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기의 빛을 발하면서도 전체로서는 서로 걸림 없고 대립 갈등이 없는 완벽한 공존의 질서이다. 자유민주주의 질서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국민 대다수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사사무애법계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강원대학교 정외과 명예교수 최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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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를까?

    오늘날 세계 정치 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보편적인 가치처럼 사용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체제들이 공존한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본질적인 성격은 극명하게 다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핵심 가치로 삼고 다원주의적 질서를 제도화한 체제이며, 인민민주주의는 특정 계급과 집단을 주권자로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일당 독재를 합리화하는 체제이다. 두 체제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학적 논쟁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자유와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이 글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헌법적 개념, 역사적 기원, 현대적 사례, 그리고 이념적 차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심층 분석하여 정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학문적 통찰과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헌법적 개념의 대비: 자유와 권리 vs 집단과 당

      헌법은 정치 체제의 성격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기본 문서이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은 개인의 권리를 국가 권력보다 우위에 두며,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제한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명시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때 ‘국민’은 집단적 추상 개념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개별 시민들을 의미한다. 반면 인민민주주의 헌법은 ‘인민’ 또는 ‘노동자·농민’을 주권자로 규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정당이 이들을 대리한다는 형식을 취한다. 북한 헌법 제11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는 조항은 인민의 이름으로 당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따라서 헌법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권력 분립과 기본권 보장을 제도화하지만, 인민민주주의는 당 중심 권력 집중을 정당화한다.

    역사적 기원: 시민혁명과 개인 권리 vs 사회주의 혁명과 집단 권리

      자유민주주의는 근대 유럽의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탄생했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은 의회 주권과 법치주의를 확립했고, 미국 독립혁명(1776)은 개인의 생명·자유·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규정했다. 이어진 프랑스 대혁명(1789)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원칙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존 로크, 몽테스키외, 토크빌 같은 사상가들의 이론적 토대를 거쳐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로 이어졌다. 반대로 인민민주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기원한다. 레닌은 기존의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일당 독재와 계급 독재를 제도화한 것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개인 권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반면, 인민민주주의는 집단 권리와 계급 중심 논리에서 출발했다.

    현대적 사례: 다당제와 정권 교체 vs 일당제와 권력 집중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미국, 독일, 대한민국, 일본 등을 대표 사례로 들 수 있다. 미국은 권력 분립과 다당제 경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며, 독일은 기본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하여 헌법재판소가 이를 수호한다. 대한민국 역시 헌법 전문과 제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반면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이 있다. 이들 국가는 헌법상 인민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이 모든 정치 활동을 독점한다. 중국 헌법은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명시하며, 북한 헌법은 조선로동당의 영도를 최고 원리로 선언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권력이 순환하며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 반면,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권력이 특정 세력에 집중되어 권위주의적 성격을 띤다.

    이념적 초점: 자유+민주 vs 인민+민주

      이념적 차원에서도 두 체제는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설정한다. 따라서 다수결 원리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당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자 장치이다. 반면 인민민주주의는 집단적 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개념은 모호하며, 실제로는 공산당이 인민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그 결과 인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와 당의 이익에 따라 제한되며, 민주주의는 집단적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전제로 한 민주주의이고, 인민민주주의는 집단을 전제로 한 권력 독점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둘러싼 본질적 차이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그 내용은 극명하게 다르다. 자유민주주의는 헌법적 차원에서 권력 분립과 기본권 보장을 제도화하고, 역사적으로 시민혁명과 개인 권리 사상에서 기원했으며, 현대적으로는 다당제와 정권 교체를 통해 권력 남용을 억제한다. 반면 인민민주주의는 헌법적으로 당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고,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 투쟁 논리에서 출발했으며, 현대적으로는 일당제와 권위주의적 통치를 통해 민주주의의 외형만을 유지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듯 보이지만, 그 실제 운영 원리를 살펴보면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지만, 인민민주주의는 집단의 이름으로 권력을 독점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다. 따라서 두 체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정치학적 학문 탐구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와 권력의 균형에 대한 실천적 과제로 연결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고 '인민'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투표 통해 정권을 만들고 교체하는 선거 민주주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삭제되고 대신 “민주주의”가 삽입됐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알레르기적 반감이 작용한 듯한데,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 생겨난 무익하고 부조리한 논란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화자(話者)의 의도, 정치적 목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혼용되어온 다의적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중·고생 교과서에 정확하고 구체적인 개념 대신 불명료하고 애매한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삭제하자는 주장은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삭제하고 “민주주의공화국”만 쓰자는 주장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개인의 기본권, 정부의 권력분립, 대의제 민주주의의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정교한 이론 체계이다. 
    자유주의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입헌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고도 불리는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물론 국가 간섭을 최소화한 자유방임주의 국가까지도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는 참정권을 부여받은 국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또 그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채택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성립될 때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만큼이나 명확한 팩트(fact)다. 중국현대사를 기술할 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삭제할 수 없듯,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술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절대로 삭제될 수 없는 용어다. 중·고교 교과서라면 더더욱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교과서는 위헌적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이 ‘인민의 적’에게 독재하는 체제...자유민주주의와 양립 불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상극(相克)의 체제다.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는 글에서 세 가지 민주주의를 논했다. 
    그는 구미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는 자산계급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혹평했다. 
    반면 구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미 발달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주주의라고 극찬했지만, 당시 중국이 일본과 국민당이 분할 점령하고 있는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공화국이 바로 성립될 순 없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제3의 길로서 노동자, 농민, 좌파 지식인, 및 소자산자의 계급적 연대에 기초한 “신(新)민주주의”를 제창했다. 
    1940년대 10년 동안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은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청사진이 되었다.

    1940년 당시 마오쩌둥은 앞으로 건립할 사회주의 공화국의 이름을 “중화민주공화국”이라 했다. 9년 후 중화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중국공산당은 새 나라의 국명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공화국 속에 이미 민주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당시 마오쩌둥이 이미 “인민민주독재”의 이론을 정립했다.


    <1949년 7월 1일, 인민일보 제1면에 게재된 마오쩌둥의 “인민민주전정을 논함”>

    마오쩌둥에 따르면, “인민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서 “인민” 계급이 “인민의 적”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전제적 시스템이다. “인민민주독재” 아래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지난 70여년 간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요지부동의 기본 전제로 삼아왔다. 시진핑 역시 집권 초기부터 중국의 인민을 향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가령 2019년 3월 시진핑은 중공중앙의 기관지 <구시(求是)>지에 실린 글에서 “서구식 헌정(憲政), 삼권분립, 사법독립”의 길을 갈 수는 없음을 강조했다. 중국식 “인민민주주의”가 구미식 “자유민주주의”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29세 전기공 웨이징성, 선거 민주주의 담은 대자보 내걸고 15년형 받아

    1978년 12월 5일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 웨이징성(魏京生, 1950-)은 베이징 시단(西單) 민주장(民主墻,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 민주와 그 외”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웨이징성이 말한 “제5의 현대화”란 다름 아닌 “민주화”를 의미했다. 196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네 분야에서 이른바 “4대 현대화”를 내걸어왔다. 이에 맞서 웨이징성은 “민주화”야 말로 현대화의 급선무라 주장했다.

    지난 주 살펴 봤듯, 웨이징성은 18년의 세월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서 정치범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베이징시 제1중급 인민법원”은 왜 왜 일개 전기공에 불과한 스물아홉 살 청년이 기껏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반혁명죄”를 걸어 15년 형을 언도해야 했을까? 바로 웨이징성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를 부르짖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료하고 강력한 문장으로 인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구미식 선거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이 그러한 “과격한”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리 만무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각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중국 통일의 주체였다. 중국공산당이 막강한 군사력을 견지하고 있는 한, 그 어떤 조직도 정권교체를 꿈꿀 수 없다. 1949년 중화대륙을 통일한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의 이념을 통해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의 길을 완벽하게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1979
    <1979년 추정, 법정 진술하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시진핑이 말하는 민주란? 독재권력의 대민 지배를 전제...민주의 주체는 중국공산당

    놀랍게도 35년 지난 2013년 이래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제5의 현대화”라는 과거 웨이징성이 외쳤던 구호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고 있다. 웨이징성에게 “제5의 현대화”는 “민주화”였지만, 시진핑이 부르짖는 “제5의 현대화”는 “국가 치리(治理) 체계와 치리 능력의 현대화”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흔히 거버넌스(governance)라 번역되는 치리의 본뜻은 “다스리다,” “질서를 바로 잡다” 정도의 의미다. 최고권력자가 “정치범”의 표현을 표절하면서 “제5의 현대화”의 원의를 “민주”에서 “압제”로 바꿔치기 했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보면, 그 함의가 어렵잖게 파악된다. 바로 QR코드, 바이오 메트릭스, 홍채인식,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최첨단의 디지털 감시체제를 이용한 대민(對民) 통제의 강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진핑도 틈만 나면 “민주(民主)”를 강조한다. 시진핑 정권에서 강조해온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 중에서 “민주”는 “부강(富强)”에 이어 제2의 가치이다. 과연 어떻게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 중국의 최고권력자가 “민주”를 외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독재자치고 “민주” 팔이를 안 한 사례가 별로 없다. 레닌,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좌우파 독재자는 모두 “민주”를 강력한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페리(Elizabeth J. Perry)의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에서 “민주”는 흔히 “인민주의적(populist)”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진핑 집권 초기 중국의 사회의식 조사를 보면, 85%의 중국인들은 “민주”가 “정부의 지도자들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의 “민주”란 유권자가 직접, 비밀, 보통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창출하고 교체하는 근대 구미 사회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계몽주의 이후 입헌 민주주의는 경쟁적 선거, 다수결주의, 국가권력 제한을 명시한 자유주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는 21세기 현대 민주주주의 국가의 “선거 민주주의”와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독재 권력의 하향적 대민(對民) 지배를 전제하지만, 후자는 국민 참여에 따른 상향적 민주 권력의 창출과 교체를 핵심으로 삼는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부르짖는 “민주”란 “백성을 어엿비 여기고 백성을 위하는” 전통시대 군주의 위민(爲民) 통치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의 주체는 중국 인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인들이 “인민주의적 민주” 개념에 포박당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15%의 중국인들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국가 지도자의 선출”을 “민주”의 본뜻이라 생각하고 있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이 선거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61%는 부정적 답변을 했다. 적어도 39%는 미국식 “선거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언제든 제2의 웨이징성이 다시 나와서 민주적 직선제를 통한 정권 교체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1978-1979
    <1978-1979, 베이징의 민주장(民主墻) 운동. 사진/공공부문>

    톈안먼 민주 운동과 구소련 붕괴로 이어진 웨이징성의 민주장 운동

    1979년 3월 덩샤오핑을 정조준해서 “민주”의 직격탄을 쏜 웨이징성과 <<탐색>>지 동인들의 결정은 기름통을 들고 불길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 웨이징성은 그날 자신이 써붙였던 “민주냐, 새로운 독재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예상대로 우리들이 모두 체포되자 커다란 풍파가 일어났다. 덩샤오핑은 부득불 잠시 민주화 체포를 잠시 정지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민주장은 1년 간 더 지속됐다. 우리들의 체포가 변곡점이 되어 민주장에선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민간 간행물 편집위원 류칭(劉靑, 1946?- )과 저명한 시인 베이다오(北島, 1949- )를 위시한 운동가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내 각급의 개혁적 간부들이 덩샤오핑의 정치적 탄압을 비판했다. 그 결과 당내에는 덩샤오핑 독재를 비판하는 반대파가 결집되었다.

    웨이징성은 베이징 민주장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1979년 민주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밖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새롭게 일어났다. 타이완, 파리, 프라하, 바르샤바, 모스크바 등지로 민주의 열풍이 번져갔다.”

    1979년 12월 10일 타이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다. 웨이징성의 지적대로 “베이징의 봄”은 타이완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타이완 민주진보당 전 주석 스밍더(施明德, 1941- )는 스스로 베이징 민주장운동에 자극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덩샤오핑의 강경 진압으로 민주장운동은 중단되었지만, 민주를 향한 중국 인민의 열망을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1986년 봄 다시 민주의 싹이 돋아나 그해 말 대학가에선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3년 후엔 1989년 4-6월 톈안먼 민주운동으로 만개했다. 톈안먼 민주운동은 비록 탱크 부대에 짓밟혀 무지몽매한 대학살극이 벌어졌지만, 베이징의 봄은 결국 구소련과 동구 공산당 체제를 붕괴를 예고했다. 웨이징성은 말하듯, “베이징 민주운동은 전 지구적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위대한 공헌을 했다.” <계속>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 근본적인 개념 이해 ⚖️🌐 완벽 분석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언뜻 보면 비슷하거나 같은 개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엄연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가치와 지향하는 바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를 뜻하는 민주주의와, 여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가치를 더한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이 글에서는 두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점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깊이 있게 다룹니다. 민주주의의 다양한 얼굴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논의에 참여해 보세요. 🧠✨

    🌟 1. 민주주의(Democracy)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어 'demos (국민)'와 'kratos (지배)'에서 유래한 말로, '국민의 지배'를 뜻합니다. 🏛️

    1.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

    • 국민 주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입니다. 국민이 직접 또는 대표를 통해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합니다. 🙋‍♀️🙋‍♂️
    • 다수결의 원칙: 의사를 결정할 때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이는 가장 효율적인 의사 결정 방식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
    • 대의 민주주의: 현대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도록 하는 대의 민주주의(간접 민주주의) 형태가 일반적입니다. 🗳️

    2.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 🌐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정치 체제라기보다는, 다양한 이념과 결합하여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 직접 민주주의: 국민이 직접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방식 (고대 아테네, 현대의 국민투표 등).
    • 대의 민주주의: 국민이 선출한 대표를 통해 통치하는 방식 (대부분의 현대 국가).
    • 인민 민주주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용했던 용어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의 지배를 강조하며,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름에 '민주주의'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국민이 다스리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그 방식과 결과는 어떤 이념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 2.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란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단순히 국민이 주인이 되는 것을 넘어,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인권)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이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

    1.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개념 ✨

    •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 다수결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의견이나 개인의 기본권(언론, 집회, 사상, 신체 등)은 다수의 결정으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원칙을 포함합니다.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 권력 분립: 국가 권력(입법, 행정, 사법)을 여러 기관으로 나누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합니다. 🏛️⚖️
    • 법치주의: 모든 국민과 정부 기관이 법에 따라 행동하며,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원칙입니다.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
    • 복수 정당제 및 자유로운 선거: 여러 정당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국민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
    • 사유 재산권 보장 및 시장 경제: 개인의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고, 시장 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

    2.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 📖

    자유민주주의는 17~18세기 계몽주의 사상과 시민 혁명(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을 통해 발전했습니다. 절대 군주제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 권력 제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 초기 자유주의: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 현대 자유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보장과 함께 사회적 평등, 복지 등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본 위에 '자유'라는 안전장치를 더한 것입니다. 다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죠." 💡

    ---

    ⚖️ 3.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핵심 차이점 비교

    두 개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분명한 강조점의 차이를 가집니다.

    1. 주요 차이점 요약 📊

    구분 민주주의 (일반적 개념)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핵심 가치 국민 주권, 다수결의 원칙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 권력 분립, 법치주의
    초점 누가 통치하는가? (국민) 어떻게 통치하는가? (자유와 법에 근거)
    다수결의 원칙 다수의 결정이 중요 다수결이지만 소수 의견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
    적용 범위 정치 체제 일반 (광범위) 특정 이념(자유주의)이 결합된 정치 체제 (더 구체적)
    위험성 다수의 횡포 가능성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한 공동체 약화 가능성
    예시 고대 아테네 민주정,
    인민 민주주의 (북한)
    대한민국, 미국, 유럽 대부분의 민주 국가

    2. 민주주의의 '명사'와 '형용사' 🧐

    쉽게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는 '명사'와 같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다"라고 말할 때,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반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라는 의미입니다.

    💡 대한민국 헌법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제4조 등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를 넘어, 개인의 기본권이 존중되고 권력 분립과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형태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을 명확히 합니다. 이는 북한의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둔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마무리하며: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 🌐✨

    현대 국가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대부분 개인의 자유와 권리, 법치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는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다수결 원칙이 아닌, 다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소수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중요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 주권과 개인의 자유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며, 이는 현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논의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참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북한 체제 어떻게 다른가

    취재기자
    10~12분

    남북한 체제 어떻게 다른가
    - 자유와 평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람직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pbpm@hanmail.net

    2017. 11. 28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 가치 두 가지를 뽑는다면 자유와 평등일 것이다. 이 가운데 남한이 추구해온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를 더 중시하고, 북한이 지향해온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평등을 더 중시한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은 서로 보완적이면서도 상충적이다.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면 사회적 평등은 축소되고, 사회적 평등이 확장되면 개인의 자유는 위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남북의 이념이나 체제를 비교하면서 남한은 민주주의인데 북한은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부적절한 비교다. 민주주의는 정치 이념이나 체제를 가리키고,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경제 이념이나 체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남쪽의 정치적 자유를 내세우고 싶으면 남한은 민주주의인데 북한은 독재주의라고 말하든지, 남쪽의 경제적 풍요를 자랑하고 싶으면 남한은 자본주의인데 북한은 사회주의/공산주의라고 말하는 게 옳다.

    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으며, 사회주의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고 독재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다. 대개 민주주의 정치는 자본주의 경제와 짝을 이루고, 사회주의 경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를 거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그리고 사회주의와 독재주의를 같거나 비슷한 개념으로 쓰는 경향이 크다. 이것 역시 잘못이다.

    1.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정치학 용어다.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2017년 현재 지구상의 약 200개 나라 가운데 스스로 민주주의가 아니라 규정하는 국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남북한부터 그렇다.

    남한은 1948년 정부수립 때부터 지금까지 단 1년이라도 민주주의가 아닌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 때문이다. 이승만의 12년 독재정치에도 민주공화국이라 했고, 박정희의 18년 군사독재 때도 민주공화국이라 우겼다.

      북한은 남한보다 민주주의를 더 강조해왔다. 남한은 헌법 제1조에서 민주공화국을 내세웠지만, 북녘은 나라 이름에서부터 민주공화국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3대에 걸쳐 세습 통치를 해도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변함없다.

      민주주의에는 종류가 많다.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1950년대에 주창했던 교도민주주의와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에 독재정치를 강화하며 이름 붙였던 ‘한국적 민주주의’까지..... 이 가운데 이념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널리 자리잡아온 대표적 민주주의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미국과 남한 등이 지향해온 자유민주주의, 중국과 북한 등이 추구해온 인민민주주의,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이 실시해온 사회민주주의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정치 이념이다. 17-18 세기 유럽에서 발전된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법적 평등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자유는 각 개인이 권리를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제한을 받으며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상태요, 평등은 개인이 타고난 본질적 가치가 동등하며 세습적 특권이 거부되는 상태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 등을 중시하므로 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결합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말 앞에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키기 마련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남한이 지향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등이 반공을 바탕으로 한 국가보안법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으니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인민민주주의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에서 인민의 평등을 목표로 채택해온 정치이념이다.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 계급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민의 대표기관인 의회 등을 도입해 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동’들을 제거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거쳐야 한다. 이에 따라 북한에도 인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가 존재하고 기능한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가 수령의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없는데도 인민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셋째,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이념이다. 노동자 계급에 의한 폭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이룬다는 취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스탈린 독재주의가 공산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쓰이게 되자,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에 의해서만 실현되며, 민주주의도 사회주의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민주사회주의운동이 영국과 서독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사회복지정책이 가장 잘 발달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민주주의다.

        2. 남한의 다당제와 북한의 1당제
    남한은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통해 양당제 같은 1.5당제를 유지했다. 거대한 여당과 왜소한 야당이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정당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며 양당제를 거쳐 다당제로 발전하고 있다. 북한은 2017년 현재까지 수령독재 또는 1당독재를 실시해오고 있다. 남한에서는 북한을 비난하기 위해 부정적인 의미로 1당독재라는 말을 쓰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정당화하며 미화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는 여러 계급이나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다당제를 취하기 쉽다. 각 계층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정당도 필요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정당도 필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도 만들어지고 보수주의자들을 대변하기 위한 정당도 만들어진다. 환경보호를 위한 정당도 나오고 종교의 확장을 위한 정당도 나온다.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는 (자본가) 계급이 없어지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사회의 획일성을 중시하고 일당제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계급계층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이 많이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을 대변하며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정당인 공산당이나 노동당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을 위한 정당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이른바 1당독재를 긍정적으로 선전하거나 정당화하는 배경이다.

      북한에는 정당이 3개가 있다. 남한에 잘 알려져 있는 <조선로동당> 말고 과거 남한의 <민주노동당>과 자매결연하고 교류했던 <조선사회민주당>도 있으며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된 <천도교청우당>도 있다. <조선로동당>은 1945년 10월, <조선사회민주당>은 1945년 11월, <천도교청우당>은 1946년 2월 만들어졌다. 이렇듯 정당이 세 개나 있는데도 1당제라고 일컫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당이란 사전적 의미로 정치적 이념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다. 명실상부한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집권(執權) 경험이나 수권(受權)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정권을 잡아본 경험이 있거나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진정한 정당인 것이다. 북한엔 이러한 정당이 <조선로동당> 하나뿐이기 때문에 1당제라고 한다. 미국에서 대통령선거 때가 되면 전국적으로 100개 안팎의 정당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정권을 잡아보고 앞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은 민주당과 공화당 2개 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정당제도를 다당제라 하지 않고 양당제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을 잡지 못한 정당을 야당이라고 하지만 인민민주주의에서는 정권을 잡지 못한 정당을 우당(友黨)이라고 부른다. 경쟁하거나 반대하는 정당이 아니라 협력하거나 보조하는 정당이란 뜻이다. 북한에서 <조선사회민주당>이나 <천도교청우당>은 <조선로동당>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게 아니라 보조하는 우당이다.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국가나 정부보다 당이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더 크고 많은 권력을 행사한다. 당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체제다.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정부와 국가는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조직이나 기구지만 공산당은 영원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 헌법 제1장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이 당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3.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본(재산)’을 중시하는 경제 이념이다. 사유재산권이 핵심 가치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시작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발전해왔다. 시장경제와 결합되는 순수자본주의, 즉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경제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부터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역할이 커져 왔다. 이것이 수정자본주의다. 시장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정부의 개입이라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요소를 섞었다고 해서 혼합경제체제 (mixed economic syste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미국에서든 남한에서든, 순수한 자본주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는 수정되면서 발전해온 것이다.

    요즘은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생략한 채 시장경제라고 강조하거나 ‘시장민주주의(market democracy)’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본주의 하면 빈익빈부익부 또는 황금만능 등의 부정적 개념이 먼저 떠오르지만, 시장이란 말은 수요와 공급에 의한 자유로운 소통을 먼저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다. 대개 둘을 같은 것으로 쓰고 있지만, 공산주의가 목표나 결과라면 사회주의는 과정이나 수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마지막 단계 또는 종착점이요,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작 단계 또는 출발점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세상에 공산주의 국가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북한을 포함해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이 다소 있었을 뿐이다.

    북한은 헌법 서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고 선언하고, 제1장 제1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라의 이념이나 사상 또는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그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말 그대로 사회의 조화와 평등을 강조하는 이념이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단점이나 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에 따른 부의 편중이나 사회적 불평등 또는 모순 등을 극복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발전되어온 사상이기 때문에,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이고 큰 차이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 금지하느냐는 점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재산의 대상이 생산수단에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하는 재물, 또는 쉽게 말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인 음식, 옷, 가구, TV와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 등은 물론 값비싼 자동차도 개인이 가질 수 있다. 북한에도 관용차 말고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만들어낼 때 노동의 대상이나 도구가 되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가질 수 없다. 식량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토지나 지하자원 그리고 옷이나 가구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원료나 기계 등은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가장 대표적인 생산수단은 농장과 공장인데 이런 것들은 국가나 공공기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헌법 제2장 제20-22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 국가소유는 전체인민의 소유이다. 국가소유권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 철도, 항공, 운수, 체신기관과 중요 공장, 기업소, 항만, 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 국가는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가소유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장성시킨다. 사회협동단체 소유는 해당 단체에 들어있는 근로자들의 집단적 소유이다. 토지, 농기계, 배, 중소 공장, 기업소 같은 것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할 수 있다. 국가는 사회협동단체 소유를 보호한다.”

    거듭 강조하자면, 소비재는 자동차처럼 아무리 비싸고 큰 것이라도 개인이 가질 수 있되, 생산수단은 땅이 손바닥만 하고 공장이 아무리 조그만 해도 개인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은 지속적인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크게 받아들여 오고 있는데, 생산수단 가운데 공장이나 기업은 개인이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땅은 한 평도 가질 수 없다. 농지에 대한 경작권은 가질 수 있어도 소유권은 가질 수 없으며, 공장을 세워 그 건물은 사고 팔 수 있어도 공장이 들어선 땅은 사고 팔 수 없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에서 생산수단을 개인이 갖지 못하게 하는 배경이나 이유는 노동력 착취를 막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농장이나 공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신은 직접 일을 하지 않고도 일꾼들의 노동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농장이나 공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생산한 것을 자신이 직접 갖지 못하고 지주나 공장주로부터 노동의 대가 또는 임금을 받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농장이나 공장 등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빼앗게 되는데,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국유화 또는 공유화한다는 것이다. 농장과 공장 그리고 기업 등이 소수 개인의 이윤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사회의 필요를 위해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마르크시즘(Marxism)이라 불리는 과학적 공산주의 또는 현대공산주의는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내놓으면서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사상이다.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크스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일하다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서 생활할 때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기계와 공장의 등장으로 경제가 크고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농업사회가 공업사회로 바뀌어갔다. 이런 공업화 과정에서 그는 노동자들이 한낱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한편 공장주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산주의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 모든 인류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이상적 사회를 목표로 한다. 공산주의가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으로 3가지가 없어져야 된다. 첫째, 부의 편중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불러오는 사유재산이 사라져야 한다. 사회주의의 기본원칙으로 공산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인민의 자유로운 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정부가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무소유(無所有), 무계급(無階級), 무정부(無政府)의 3무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공산주의의 배경과 목표는 참 훌륭하고 바람직하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해 하나가 되어 아무런 간섭이나 통제 없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데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첫째, 개인이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게 되면 자본가들의 노동력 착취가 없어지고, 양극화나 빈익빈부익부 현상 같은 부의 편중이나 사회적 불평등이 일어나기 어렵겠지만, 생산성이 크게 떨어져 경제 성장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경영자나 관리자 처지에서는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주인정신이 약해 소홀하기 쉽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근로의욕을 높이는 유인책(인센티브)이 적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기업 또는 민영기업보다 공기업이나 국영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요, 자본주의국가보다 사회주의국가의 생산성이 뒤처지는 배경이다.

     

    둘째,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계급을 없애는 과정에서 폭력을 부추기거나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급이란 군대나 경찰 등의 조직에서 신분이나 직위가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단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하고 대립하며 투쟁하는 집단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고대의 귀족과 노예, 중세의 영주와 농노, 근대의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각 계급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마다 상반되는 집단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인류가 발전해왔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공산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이 없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자본가들이 스스로 사유재산을 내놓고 노동자 계급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축적된 부를 통해서 온갖 정보 및 통제나 회유 수단을 가지며, 권력과 결탁하거나 아예 권력을 잡기까지 하는 마당에, 노동자들이 무슨 수로 자본가들을 타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에 마르크스는 모든 노동계급이 단결하여 혁명을 통해 지배 계급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폭력혁명’이다. 계급을 없애는 것은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인데, 폭력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심각한 문제다.

      셋째, 노동자혁명을 통해 자본가 계급이 타도된다 할지라도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는 독재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도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금지하고 계급을 폐지하더라도 모든 인민이 한결같이 당과 국가의 방침이나 정책을 지지하거나 따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이나 국가의 결정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인민민주주의를 실시하지만, 그 결정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불순분자 또는 반동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독재를 시행하게 된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요약하자면 공산주의가 태어난 배경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훌륭하고 이상적이지만,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나 수단은 폭력적이고 독재적이라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4. 남북한 통일을 지향하며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각각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남한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념을 발전시키되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는 북한 체제의 장점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다. 바꿔 말해 복지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북한은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는 이념을 발전시키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남한 체제의 장점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게 좋다. 쉽게 말해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그러면 남북이 이제까진 70년 안팎 헤어져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아래서 살아왔어도, 앞으로는 자유와 평등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복지 사회를 지향하며 통일을 추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이 글은 2017년 11월 3일 경기평화교육센터에서 “남북한 체제 비교”를 주제로 실시한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主義, 러시아어: Народной демократии, 영어: people's democracy) 또는 민중민주주의(民衆民主主義)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상 개념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비에트 연방 과학 아카데미 사회과학원은 각 약소국의 혁명 모델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인민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에 근거하여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 공산당에 산업프롤레타리아·농민·지식인·소부르주아의 연립 정권을 구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종전 후 갑작스러운 공산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수월하게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계급을 하나의 혁명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할 정치적 여유를 벌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동유럽과 아시아 일대의 경제혁 생산력은 상당히 낮았기에 자본주의가 들어선 적이 없다는 평가에 기초하여, 해당 사회를 반봉건사회(半封建社會)라 규정하고, 민주주의 혁명을 선차적으로 도모하려는 의도이다.[1]

    본래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한 이론적 개념은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12월 테제’에서 등장하나[2],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에서 만들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은 식민지 국가, 약소국과 특히 중국의 혁명을 연구하였다. 연구 결과 기존 서구의 부르주아와 달리 약소국의 부르주아는 민족 독립을 중시하는 동시에 진보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춘 부르주아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중국의 부르주아 지식인은 서구의 불충분한 부르주아 혁명을 비판적으로 흡수했기에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초기에서 드러났던 일련의 비민주적인 양상도 또한 성찰할 수 있었다. 동시에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활동가와 민족 부르주아 지식인이라는 두 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사회과학원은 이러한 현상이 모든 약소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한 후 이들의 혁명 흐름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정의하였다.[3]

    중요한 것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성립되는 사회구성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반봉건사회라는 것이다. 반봉건사회는 완전한 봉건사회도,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도 아닌 중간 상태를 의미하며, 제국주의 침탈을 위한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가 협소적으로 진행된 상태의 구(舊)식민지 또는 신(新)식민지 상태와 겹친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르면 제국주의 시대에서 약소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재분할 감행에 의해 온전하게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할 수 없으며, 자본가가 혁명을 주도할 수도 없다. 이 시기 혁명은 노동자·농민·소상공인·민족자본가·지식인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혁명은 반봉건적 사회구성체를 파괴하여 참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성격을 갖추게 된다.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세계의 생산 관계의 일정 정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부르주아의 계급 독재(이것은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린다) 아래에서 시민에 의거하는 통치를 주창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 정치의 정체성이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군중(群衆, Массы)에 몰려져 있다. 여기서 군중이란 계급 의식이 없거나 희미한 개체를 뜻하는 말로, 인민(人民, Народ)과 차별적으로 쓰인다. 낡은 생산 관계를 유지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개체가 유적 존재(독일어: Gattungswesen)로서 사람인, ‘인민’이 되는 것을 막고 오로지 군중으로서, ‘군중에 의거한 통치’를 형식적인 표어로 삼고 있다. 그러나 군중은 계급 의식이 없거나 희박하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 하기에, 그들 스스로가 유적 존재가 되지 않는 한 전근대와 차별화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통치 원리로서 구현할 수 없다. 한편,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소유 구조에서 스스로의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법적 장치를 ‘법치’와 ‘인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씩 도입한다. 군중은 부르주아의 이러한 정치적 행동에 때때로는 찬동하며, 동시에 반대하기도 한다. 이들은 스스로의 진정한 권리를 찾는 거시적인 방법을 모르며, 특정 정치인, 특정 담론에 얽매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러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부르주아적 자유’는 이러한 상태를 부추길 뿐, 그 어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레닌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인민과 프롤레타리아에게 전혀 필요없는 것이며, 인민의 이해와 대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5]

    이러한 의미에서 군중은 인민과 다르다. 여기서 인민은 무산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대적 모순 그 자체인 계급 모순을 체화하는 주체이다. ‘계급 투쟁이라는 본질을 가진 적대적 모순’ 그것 자체의 현상으로 주요 모순이 되었을 때,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주요 모순에 참가하는 계급 투쟁의 최일선에 있는 계급이다. 반면 인민은 이러한 적대적 모순이 제국주의 단계에서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해 여러 양태로 화(化)하였을 때, 그러한 변환된 모순을 인식하는 개체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인민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아닌 지식인, 소부르주아 계층에서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도 자본이 근로자를 탄압하기 위한 기관, 자본이 정치권력의 도구, 부르주아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또 될 수도 없었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공화국은 다수자에게 권력을 약속하고 그것을 선언했으나 토지와 그 밖의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결코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 부르주아적 민주공화국에서는 ‘자유’란 실제로는 부자를 위한 자유였다.

    — 블라디미르 레닌, 『미국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18년 8월 20일)[6]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자인 로이 메드베데프(Рой Медве́дев)는 자신이 저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논하였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논할 때, 그것을 불안전한 환상적인, 기만적인, 책략적인 효과를 노린 것 등으로 멸시하는 것이, 습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편파적이요, 잘못된 것이다.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아주 제한된 민주주의며, 따라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 빈자와 부자에 대하여 기회가 평등치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쉬운 일이다.

    — 로이 메드베데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하여』(1975년)[7]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자연법 사상과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함의’ 둘 사이를 연결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보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갖는 외형적 형식을 갖추기 위하여 ‘실증성에 기초한 법치로서 법치주의’를 주창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수사(국민 주권, 사회계약에 기초한 헌법 원리 등)를 부여하면서도 놓지 않는 것이며, 모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 단계의 지각적 지반을 통해서는 민주주의의 성격과 그 정당성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 실례(實例)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이었으나, 실제로 이러한 대사건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근거로 프랑스는 1789년 기준으로 약 150년이 지나서야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노동조합 활동의 보장은 140년이 지나서야 보장된 것이다. 1783년 미국 혁명 시점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보장된 시점은 1920년이다. 영국의 경우도 1912년이 되어서야 보장이 되었지만 그 조건은 완전히 동등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것 자체로 진보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적 통치 원리 보장성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 한다. 반면 러시아 10월 혁명은 곧바로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수많은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경우도 양성의 동등한 참정권 및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권리를 상당 부분 보장하였다.

    군중 집단은 계급의식이 없는 것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내포한 모순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비본질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군중 집단의 저항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가 모든 생산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중이 직접적인 행동에 기반한 정치 캠페인을 통해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망상이다. 이러한 운동은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운동으로 표현된다.[8]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부르주아가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도입하며, 이러한 장치를 고수하기 위한 다층적 폭력을 실시하는 데에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모순, 사회적 문제, 빈곤의 문제는 이러한 것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구조는 상당히 입체적이다. 그러나, 소외된 군중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할 수 없으며, 계속하여 특정한 담론과 미시적인 정책,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 선전이 잘 된 인물에 대한 광신적인 숭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문제점을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길로 가게 된다.[9]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군중이 부르주아를 넘어서지 못 하였으며, 부르주아의 정치적 패턴을 분석하는 데 실패했지만, 부르주아는 군중의 정치적 패턴을 대부분 이해하였다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중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반동성을 되려 유지하는 행동 방식을 문화적 차원에서 강화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 패권’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그람시는 이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특징을, ‘인간의 정치적 본성과 괴리된 법률에 대한 숭배’(부르주아 법치주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 한 상태에서 행동하는 군중의 정치적 권리’(부르주아 인권), ‘사물에 대한 수동적이고도 기계적인 반응과 그 과정을 자유로 착각할 자유’(부르주아 자유)라는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하였다.

    인민민주주의는 계급 의식에 기초한 사람에 기반하는 민주주의이다. 이는 정확하게 말하여,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에서 시발(始發)하여 생성된 수많은 주요 모순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 존재에 의거하는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인민민주주의는 사회주의 단계라고 취급할 수 없으나, 이 정체(政體)에서 대부분의 공민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계급 투쟁 의식을 항상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러시아 제국이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이기 때문에 과거 서유럽의 전통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경로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레닌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계급과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의 연합으로서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은 위 두 세력이 이중 권력 체계로 이끄는 민주주의를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고 칭하였다. 이 개념은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하나,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정책은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정책과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기간이다. 따라서 경제 운영에 있어서 전면적인 국유화가 아닌 국유화와 집체소유(混合所有)의 혼합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정당 정치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유화는 경제 운영 골격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목표로 되는 사회구성체는 봉건적 소생산 체계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혼재된 상태이며,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이 반봉건 체제를 타파하는 데에 그 목적성이 있다. 특히 소생산 경제 주체의 수는 상당히 많기에 이들을 한꺼번에 국유 조직에 흡수하기 힘들다. 따라서 봉건적 소생산 구조는 소멸하고, 대신에 소생산자(중소 및 영세자영업자 등)는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편입되어 자기 노동에 기초한 수익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집체소유법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유지된다.

    토지 개혁은 토지 소유권을 일체 소멸하는 전면적인 토지 국유화가 아닌, 토지 분배의 성격을 강화한다. 따라서 농민은 토지 소유의 주체로서 법적 효력을 가지며, 소작제 폐지, 몇 가지 징세 제도와 소유 가능 토지 면적 제한 등을 통하여 반(半)봉건적 토지 소유 구조의 부활을 막는다.

    불로소득자 및 임대업자는 공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거에 소멸하기 힘들기에, 사회주의 공업화의 객관적 조건이 성립될 때까지 표준임대료제를 통하여 임대료의 폭증을 막는 동시에 임대료를 대폭 낮춘다. 중국과 베트남 인민혁명 과정에서 실제 적용된 감소폭은 최소 30%에서 최대 50% 수준이었다. 불로소득에 기생하는 지주는 소멸하게 되며, 임대업자는 추가적인 노동을 하지 않을 경우 제한된 소득만을 얻게 된다. 단, 이 과정은 각국마다 그 조건에 따라 상이하게 달랐으며,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임대업자는 곧바로 소멸되었다. 사회주의 토대가 확립되었을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임대-임차 관계가 청산된다. 이러한 혁명 과정이 진행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는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춘 공장업은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통하여 사회주의 형성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게 한다. 인민민주주의 경제 구조에서 공장의 프롤레타리아는 인민민주주의의 강화와 더불어, 사회주의로의 진보를 추동하는 핵심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전(全) 사회적인 것으로 될 때, 인민정부는 토지 국유화를 점진적으로 수행하고, 소농 및 영세농이라는 소생산자의 성격을 갖고 있는 농민을 협동농장의 일원으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소생산자 성격이 사라지며 농업 프롤레타리아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직접 투표에 기초한 보통선거제, 여성 참정권 완전 보장, 여성 인권 증진, 노예제도 폐지, 국내 외국인이 가질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한다. 그러나 인민정부는 인민민주독재(人民民主獨裁) 권력이기에 불로소득 기생자·매판지주·매판자본가·기타 착취자 등에 대해서는 폭력을 수반하는 독재를 실시한다.

    행정 조치에서 ‘법률우위의 원칙’이 폐지되고, 개별 사안에서 기만적인 ‘법리’(法理)보다는 인민의 의사를 중점에 놓고 판단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유로운 공화국인 부르주아 공화국이 기존의 자연법사상을 망각하고, 스스로의 반인민적 지배를 위해 현상적 차원에서 규정된 개법(個法)을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권위를 부여한 후 법률을 부르주아 독재의 수단으로 여길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것은 민주주의 발전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참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 이유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민에 의한 정치는 법률적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각 지역에 조직된 문화·생산 조합과 인민위원회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10]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 법률은 미시적 차원에서 인민민주독재가 작용되는 범위를 대략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인민민주독재가 개별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이 없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 민사상의 법률 문제는 관련 법률을 적용한다.[10]

    법률 성격, 법률이 적용되어야 하는 범위의 확립 및 제한점을 기준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은 사회주의 성립 이후에도 유지·발전된다.

    복지라는 개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반봉건국가나, 최소한 수준의 복지만 갖추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달리, 인민정부는 교육·노동·식량·의료·주거 차원에서 전향적인 복지가 이루어진다. 인민정부가 실시하는 복지는 국가주도의 복지로, 민간사회복지업체·민간자선사업체에 의한 자본주의적 복지랑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복지 시설의 대대적인 국유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후 대부분의 주거와 일정 식량 및 생필품은 무상으로 분배되며, 무상 교육, 무상 의료가 실시된다. 노동권은 직장배정제(職場配定制)를 통하여 보장된다. 특히 주거 지대와 작업장 지대 내 국립탁아소 건립 및 주요 직종 할당제 실시를 통한 여성 복지 강화는 인민정부 주도 민주주의 시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러한 복지 체계는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유지·발전된다.

    소생산자 및 중소기업에 대한 재정 지원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제도의 실질은 점진적인 국유화 및 집체소유화와 병행하며 이루어진다.

    인민민주주의 정당 정치는 형식적으로 다당제(多黨制)에 기초하고 있으나,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으로 향하기 위한 혁명을 지도하는 중심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이 실질적으로 정치를 주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력은 정당 정치라는 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 주도의 사회 변혁 과정(형식적 정당 정치가 아닌 영역)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 정치는 형식적으로 다양한 계급·계층 조직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이 갖는 실질적인 권력으로 인해 다양한 계급·계층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에 따라 인민정부는 다양한 계급·계층 조직의 연립체인 통일전선체(統一戰線體)를 조직하여야 한다.

    경제 조직의 사회주의화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량을 확보하게 할 것이고, 정당 정치에서 다양한 계급 이해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 사이의 괴리는 점점 좁혀질 것이다. 사회주의로의 단계가 완성될 때 정당 정치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정당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三權分立) 또는 이권분립(二權分立)은 사라지거나, 형식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제기능을 하지 못 하는, 사실상의 폐지 상태로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이론에서 권력 분립의 이데올로기와 법적 토대는 자유주의 성립 초기 부르주아들과 봉건영주 사이의 타협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블라디미르 레닌, 체 게바라 등은 삼권분립 또는 이권분립이 자유주의자들이 혁명기 과정에 봉건영주 세력과 타협한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봉건 세력과의 타협에 기초한 불완전한 민주주의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참된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못 하는 하나의 증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성숙하게 될 경우, 삼권분립과 이권분립이 인민의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정치 권력 행사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였다.[10]

    반봉건적 생산 관계를 일체 철폐함으로써 부당한 징세 제도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징세 제도는 재정 운영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인민정부는 사회주의 구조로의 진입 조건이 생성될 때까지 소생산자(농민, 기타 자영업자 등), 중소기업에 대해선 징세를 펼친다. 따라서 토지세, 법인세, 일부 소득세, 공과금 제도는 당분간 유지된다. 경제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때 소생산자의 수는 적어질 것이며, 대다수의 농민은 협동농장으로 나아가 농업 프롤레타리아로서 기능하고, 기업의 국유화는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이에 따라 인민정부를 징세 제도의 단계적인 폐지를 실시한다. 사회주의 국가가 된 상태에서 징세 제도는 극히 일부의 공과금 제도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종전 급증하였다. 1960년대 이후 몇몇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헌법을 개정하여 자국이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섰음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보통 인민민주주의 단계를 완수하고,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서면 국호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섰음에도 ‘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도 일부 존재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을 인민민주독재(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사회주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뜻이 아닌, 인민민주주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라오스를 제외한 나머지 베트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쿠바 등은 헌법에서 자국이 엄연히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 자세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2025 아모스


    정보화 / Informatization
    글로발화 / Globalization
    디지탈화 / Digitalization


    현대화, 그 변화의 물결 -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의미

    “현대화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묻고, 또 고민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점이 많죠. 그런데 이 ‘다름’이 바로 ‘현대화’의 흔적입니다. 현대화는 단순히 기술이 발전하고, 도시가 커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한번 되돌아보는 것도 좋겠죠.

    과거와의 단절, 그리고 그 시작

    현대화는 단순히 ‘산업화’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는 18세기 산업 혁명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전 세계를 뒤흔들며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었죠. 물론 그 시절 사람들은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미래’를 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미래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순간,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바로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릅니다.

    산업화라는 파도가 덮친 후, 농업 중심 사회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도 큰 전환을 맞이했어요.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현대’라 부르는 이 시대는, 사실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차근차근 걸어온 길이라는 거죠.

    현대화의 다양한 얼굴들

    현대화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 변화의 중심에는 기술, 교육, 그리고 사람들의 이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도시화 현상은, 현대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자주 떠올리는 고층 빌딩들, 복잡한 교차로들, 그리고 늘 분주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도시화의 산물입니다. 이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럼, 이 변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 산업화 : 경제의 중심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바뀌었어요. 이를 통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죠.

    • 도시화 :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서울처럼 거대한 도시들이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사회적 문제도 불러왔죠.

    • 기술 발전 :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스마트폰, 인터넷, 그리고 자동화 기술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죠.

    • 교육의 확산 : 교육이 중요해졌습니다. 단순히 지식 습득을 넘어서, 전 세계가 연결되는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 되었죠.

    • 문화의 세속화 : 전통적인 가치관이 변화하고, 개인의 자유와 합리적인 사고가 더욱 강조되었어요. 이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사회와 현대화의 흐름

    한국은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한 현대화를 경험했어요. 특히 196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한 결과,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또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까요? 우린 이 과정을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배웠을까요?

    • 경제 성장: 현대화가 가져온 빠른 경제 성장 덕분에, 한국은 이제 세계 경제 강국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도시화와 인구 집중: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여러 사회적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주택 문제, 교통 체증, 그리고 환경 문제 등...

    • 문화적 변화: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구조와 가치관에 큰 변화가 있었고, 이는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 교육의 확대: 한국은 교육에 대한 투자와 중요성을 점차 확산시켰습니다. 덕분에 ‘고학력 사회’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교육의 질이 높아졌죠.

    디지털화와 미래 사회를 향해

    오늘날 현대화는 더 이상 단순한 산업화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화, 정보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될 만큼, 기술 혁신은 이제 우리가 사는 방식을 더 빠르고, 더 스마트하게 바꿔놓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이런 변화가 끝일까요? 
    아니죠, 현대화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까요?
    물론, 그 과정에서의 사회적 불평등, 환경 문제 등은 여전히 큰 고민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현대화는 더욱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겠죠.

    결론 :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현대화는 단지 ‘경제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이 현대화를 겪으며 많은 교훈을 얻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점은, 현대화가 계속될수록 ‘지속 가능성’과 ‘포용성’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일 것입니다.

    급변하는 시대, 현대사회의 특징과 과제

    현대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기술의 발전, 경제 구조의 변화,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현대사회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사회의 주요 특징과 그로 인한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기술의 혁신과 디지털 기술의 확산입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정보에 접근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몇 초만의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셜 미디어와 같은 플랫폼은 개인이 전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다양한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원격 근무와 전자 상거래의 발전은 경제 활동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며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스타트업이나 소규모 기업은 전통적인 물리적 인프라 없이도 세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혜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디지털 접근성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정보와 자원에 대한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 격차(digital divide)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또한, 개인 정보 보호와 사이버 보안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또한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특징을 보입니다. 국경을 초월한 경제, 문화, 사회적 교류는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 세계의 상품과 문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맛보거나 해외에서 생산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글로벌화는 기술적 혁신과 더불어 국가 간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화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약화할 위험성이 있으며, 특히 소수 민족의 문화와 언어는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네스코에 따르면 전 세계 언어의 약 40%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는 소수 언어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화는 또한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이 소수의 국가와 지역에 부를 집중시키면서 저개발 지역의 경제적 종속성을 강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경제 구조의 변화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과거의 제조업 중심 경제는 점차 서비스업과 지식 기반 경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을 창출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자동화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기존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공장 생산 라인의 자동화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하며, 많은 사람이 기존의 직업을 잃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재교육과 평생 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 또한 변화하는 노동 시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경제 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숙련 노동자와 저숙련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확대되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는 현대사회의 가장 시급한 도전 과제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지구의 평균 온도가 상승하고 기상이변이 빈번해지면서 환경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원의 과도한 사용과 환경 오염은 생태계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협정은 지구 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억제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공동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많은 국가와 기업이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와 친환경 기술을 도입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는 화석 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기차와 같은 친환경 기술은 대기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자원 절약, 재활용, 그리고 에너지 효율적인 생활 방식을 실천하는 노력이 장려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개인화와 디지털 사회적 관계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개인의 목표와 행복을 우선시하며, 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들 간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실제 인간관계는 점차 약화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온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외로움을 느끼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디지털 사회에서의 연결이 종종 표면적이며, 깊은 인간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균형을 맞추고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역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거나 자발적인 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사회는 기술, 경제,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와 책임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현대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변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적은 노력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요즘 시대의 특징 6가지

    1) 요즘 시대 _ 리더십과 조직문화에 영향을 주는 시대적 특징 6가지

    2) 리더십 _ 리더의 역할 재정의와 리더의 시간 사용의 변화 5가지

    3) 조직문화 _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야 할 행동과 일하는 방식의 변화 5가지

    그 중 이번주 뉴스레터에서는 요즘 시대의 특징 6가지를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정말 편하게 읽어보시며 우리 회사와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 ‘정답이 없고, 지도가 없는 시대’

    ① 퇴사하지 못하는 엘더

    ‘엘더(elder·연장자)’라는 명칭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50대가 넘어선 선배들 중에 임원이나 팀장이라는 리더십 타이틀을 갖지 못한 직원을 일컫는 말이죠. 수년 전만 해도 은퇴 전 많은 선배들이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었는데 요즘 회사 밖에서의 생존이 위험하다고 느끼며 조금 더 조직에서 머무르려는 직원들이 많아 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용어입니다.

    저 또한 많은 대기업들과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기에 이 메시지의 무게와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밖에는 없더라고요.

    A팀장님은 팀원 7명 중에 3명이 과거 자신의 팀장이었던 분이고, 팀에서 가장 연봉이 높았던 25년차 부장님이 영수증 정리를 하고 있었고 대리/ 과장들이 중요한 기획서를 작성하고 있는 B팀장님의 고민도 참 해결하기 어려웠었습니다. 또 어떤 부서는 고참 임원과 고참 팀원들로만 구성된 팀을 만들어 어려운 과업보다 익숙하고 해결하기 쉬운 과업을 부여하기도 하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엘더의 연봉이 팀장보다 더 많은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죠. 이를 지켜보는 요즘 세대들은 ‘왜 연봉을 많이 받는 선배보다 연봉이 낮은 내가 더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엘더와 팀장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과거 엘더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었습니다. 그들의 경험이 일하는 방식이 되었고, 그 방식으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엘더의 지식과 경험이 더 이상 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더라고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을 조금 이해해 볼 수 있다면 조직의 방향성과 구성원 개개인의 성과와 성장 방정식을 조금은 다르게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② 요즘 시대의 특징 하나, ‘정보의 공유‘

    Knowledge Doubling Speed, 벅크민스터 풀러 박사가 공유해준 지식 배가 곡선의 메시지 입니다. 너무 빠르게 지식이 쌓이고, 새로워 지고 있다는 의미이죠.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팀에서 연장자가 가장 많은 지식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죠. 팀장도 비슷합니다.

    이로 인해 한 회사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찾고 공유하고 있죠.

    1) 모든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외부 커뮤니티에 참석하고, 매달 팀 모임에서 그 내용을 공유합니다. 우리가 몰랐던 지식과 경험을 외부로 부터 학습하고 동료에게 공유하는 것이죠.

    2) 이보다 더 강력한 지식 인풋의 방법으로 ‘외부 경력직을 지속해서 채용‘합니다. 이때 채용의 핵심은 ‘우리 회사가 가지지 못한 지식과 경험을 가졌는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 경력직이 입사를 함과 동시에 기존 구성원들은 외부 경력자와의 원온원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학습'하고 자신들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더라고요.

    3) 주간회의 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팀도 있습니다. ‘동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한다‘ 라는 목적에 따라 모든 구성원들은 매주 1명씩 20분 동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발표합니다. 전 직장에서의 프로젝트 경험, 자신이 했던 스터디에서 얻은 인사이트, 외부 멘토와 코치로 부터 얻은 지식 등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죠.

    이 세가지 행동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지식을 우리의 업무에 적용하자.’는 것이죠.

    ③ 요즘 시대의 특징 둘, ‘지식의 역전‘

    과거에는 팀장이 가장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팀장보다 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팀원들이 많이 알게 되더라고요. 팀장은 임원과 팀원들 사이에서 너무 바빠 외부 활동이나 학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팀원들 중 성장과 성공에 관심이 있는 직원들은 외부 커뮤니티, 대학원, 독서 클럽 및 사이드 프로젝트, 외부 멘토와 코치 등을 통해 회사가 가진 지식과 경험 이외에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익히게 되었죠.

    팀장과 엘더가 가지고 있는 과거 지식이 더 이상 지금 시대에 통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바로 ‘선배가 모르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외부에서 수혈’ 받은 팀원들입니다.

    이들은 팀장과 선배의 조언과 티칭을 ‘꼰대와 라떼‘라며 옛날 지식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특히, GPT와 다양한 IT 도구들, 유투브와 다양한 디지털 도구들은 회사 내 선배가 꼭 필요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죠.

    ④ 요즘 시대의 특징 셋, ‘지식 생산자‘

    임플로이언서 (Employee + Influencer’ 직원들 중에 SNS와 방송 등을 통해 영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즘 개인 SNS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죠. 저 또한 페이스북, 링크드인,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2018년 7월 1일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매일 쓰기 시작했으니 벌써 2200일이 넘었더라고요.

    유투브에서 ‘백종화‘ 라는 이름을 치면 외부 강연을 했었던 영상들을 찾을 수 있고 5,800여명이 구독해 주시는 뉴스레터와 책도 7권이 출간을 했네요. 직장을 다닐 때 어느 순간 ‘B사를 다니는 백종화‘가 아니라 ‘백종화가 다니는 B사‘ 라고 불러 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후배 중에 ‘제가 다니는 회사를 입사하고 싶다'며 이력서를 낸 친구들도 있었고요.

    저는 글이라는 매개로 매일 콘텐츠를 만들어 냅니다. 탁월한 지식은 아니지만, 내 경험과 생각이 필요한 누군가에게는 가장 적합한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콘텐츠를 생산하는 활동을 오래하다 보니 여기저기에 제 생각과 경험들이 많아 졌고요.

    지금 시대는 누구나 지식을 만들 수 있는 시대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식은 ‘연구기관, 성공한 기업과 경영자, 학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초등학생도 자신의 지식을 만들고 공급할 수 있고, 그 누구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이죠. 반면 IT에 능숙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주저하는 선배들에게는 ‘알겠어. 알겠는데 못하겠어.’ 라는 좌절을 주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⑤ 요즘 시대의 특징 넷, ‘기업 내부 지식 생산 / 공유‘

    빠른 기업들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성공과 실패 경험을 회사 내 인트라넷에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현대 제철의 ‘기술 지식 공유 플랫폼‘. SK 하이닉스의 노하우를 협력사에 공유하는 ‘DBL 스퀘어‘, 수험생의 질문에 교수 / 서포터즈가 1대 1로 답변을 하는 에듀윌의 ‘에지인‘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 첫번째 직장도 비슷한 플랫폼이 있었습니다. 저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던 2004년,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내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를 정리해서 LUTI 라는 플랫폼에 업로드 했어야 합니다. LUTI 점수가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면 승진의 기회가 박탈 되었죠. 내 지식을 업로드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후배가 업로드한 지식들을 읽고 적용하기도 해야 했습니다. LUTI 는 내 지식을 업로드한 숫자와 다른 누군가가 내 지식을 보고 어떻게 적용했었는지를 점수로 환산해서 티칭 점수를 나에게 주었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학습하고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보며 학습 점수를 주었거든요. 두 점수가 합산되어서 내가 얼마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학습했는지로 평가 받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문화가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며 성공도, 실패도 기록하고 공유할 수 밖에 없는 회사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기업 내부보다 외부에서 지식을 더 많이 찾게 된다는 것이죠. 외부에서 얻는 지식의 양과 질이 내부에서 얻는 것보다 더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⑥ 요즘 시대의 특징 다섯, ‘조용한 소속감‘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2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바로 희미해지는 소속감입니다. 1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평생 직장‘ 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내 지식과 경험을 내 선배들로 부터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회사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든 직장인들이 알아가기 시작했죠.

    대퇴사의 시대, 대이직의 시대, 조용한 퇴사, 대해고의 시대라는 신조어가 생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한번 입사하면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가 아닌, 회사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는 불확실한 비즈니스 환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똘똘한 직장인들은 평생 직장이 아닌, ‘평생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성공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과 조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⑦ 요즘 시대의 특징 여섯, ‘공존의 시대‘

    또 다른 변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평생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업에서 주도권을 가져간 직장인 외에 ‘편안하게 일을 하며 은퇴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배짱이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승진도 관심이 없고, 연봉 인상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조금 더 편안하게 일하고, 저녁 시간과 주말 시간을 나와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직장인들입니다. 극단적인 개미와 배짱이가 우리 조직에 함께 존재하는 시간이 바로 요즘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회사와 동료를 선택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조직과 개개인이 내릴 수 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편안함을 추구한다면 그런 조직을 선택해야 하고, 내가 빠른 성장과 성공을 원한다면 ‘지식과 경험을 확장하며 나의 성장과 성공에 관심 가져주는 조직과 리더'를 만나야 하는 것이죠.


    요즘 시대는 ‘정답이 없는 시대, 지도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만의 목표‘가 될 수 밖에는 없죠. 
    그 답을 스스로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 여러 패널께서 상황에 따른 다른 리더십이 필요함을 말씀해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업에서 리더십 진단을 하거나 리더십에 대한 평가를 하려면 일관된 도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공정성/타당성 등을 위해서라도요.) 
    실제로 컨설팅하시거나 현업을 경험하시면서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리더십 진단 방법 혹은 도구가 있을까요?

    A (100coach) 생각 (정답이 아닌, 백코치의 관점입니다.)

    리더십 다면평가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면 평가에서 다면 피드백으로 말이죠. 이제 리더십은 정답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도전을 좋아하는 리더, 편안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 학습과 피드백이 중요한 리더, 관계가 중요한 리더, 개척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것을 잘하는 리더와 안정적인 운영을 잘하는 리더 등 다양한 리더십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죠.

    리더십을 평가하게 된다면 회사가 정한 리더십의 모습에 맞게 리더십을 갈아 끼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없는 시대거든요. N가지의 다양한 리더십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조직의 문제를 풀고 목표를 달성해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공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모든 구성원들의 말을 다 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고요. 도전적인 리더와 피드백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를 싫어하고 나쁘게 평가하는 팀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조직에 필요한 리더일까요? 기준은 이제 조직과 구성원의 상황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평가가 아닌, 피드백의 관점으로 리더십 다면 진단을 바라봐 주시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리더십 다면 진단의 결과를 가지고 리더와 리더의 상사 그리고 HR이 모여 토론하며 더 나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피드백하고 코칭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죠.

    다면 평가가 아닌, 성장을 위한 다면 피드백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지금 하고 계신 고민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정보 홍수의 시대라고 합니다.
    각종 정보가 유투브, 에스엔에스라는 매체로 세계적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게시합니다.
    그런데 홍수가 넘쳐나도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아모스 선지자는 말씀의 기갈이라고 탄식합니다.


    말씀의 기갈이 오는 이유

    1. 강팍함(스가랴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돌처럼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 말씀이 어떤 감동적인 말씀이라 할지라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으려면 깨끗한 마음이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은 은총의 말씀 앞에 자신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은총의 말씀이 좋은 마음과 착한 마음에 심어져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으로 생각하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2. 교만(누가복음 10: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십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마음의 영혼들에게, 겸손한 영혼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양약으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3. 하나님의 진노(사무엘상 3:1)

    아이 사무엘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당시에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이상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회개할 일이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27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혹시라도 내가 변화될까 두려워서 귀를 막고 눈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4. 마귀의 역사(마태복음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은혜를 담는다면 여러분은 마귀에게 그 마음의 땅을 빼앗기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은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는데 무엇으로 이곳에서 나를 건질 수 있을까요?

    다니엘서 9장 13절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말씀에 흥미와 관심이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의 기갈은 곧 하나님 백성의 실패입니다. 오직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우리를 붙드실 수 있습니다. 주의 발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기쁨으로 받길 간구하시고 사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계 기아와 영양실조에 관한 7가지 사실

    풍요로 가득한 2024년에도 기아는 여전히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전 세계 기아와 영양실조에 대해 알아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1. 전 세계 인구 11명 중 1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7억 5,700만 명

    이 기아를 겪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11명 중 1명이 기본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이 한참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2. 수단은 세계 최악의 기아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수단은 재앙 수준의 기아를 겪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분쟁으로 광범위한 강제 이주민이 발생하여 2023년에는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위기 수준의 식량 부족에 직면했습니다. 2024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현재 수단의 일부 지역은 기근에 직면해 있습니다.

    2024 세계 위기국가 1위 수단 위기 더 자세히 알아보기

    3. 기아와 영양실조는 똑같지 않습니다

    기아는 음식 부족으로 인한 신체 상태를 말하며, 영양실조는 단백질이나 에너지 부족과 같은 영양 결핍을 의미합니다. 닮은 듯 다른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전 세계적인 기아 위기는 영양실조 위기이기도 합니다.

    4. 어린이 사망의 거의 절반이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아 관련 건강 문제는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며, 어린이 사망의 거의 절반이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양실조에서 살아남은 어린이의 경우에도 신체 및 인지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등 심각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5. 영양실조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4,500만 명의 5세 미만 어린이가 급성 영양실조를 경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 매년 200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인해 사망하고 있습니다.

    급성 영양실조를 치료할 수 있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검증된 치료법이 있지만, 필요한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더 간단한 접근 방식을 통해 상황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6. 전 세계적으로 기아 퇴치를 향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기아는 감소했습니다

    . 오늘날에는 11명 중 1명(9%)이 굶주리고 있지만, 1970년에는 4명 중 1명(또는 24%)으로 훨씬 더 높았습니다.  기아는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기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심화되는 분쟁, 기후변화, 극심한 빈곤은 점점 더 소수의 국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받는 지역과 국가의 사람들은 한꺼번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기아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7. 기후변화와 분쟁은 기아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지구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있으며, 가뭄과 홍수 등 기후 관련 재해로 인해 농지가 파괴되고 식량 불안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전 세계 식량 가격은 2050년까지 20% 상승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후변화는 농지의 50%

    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분쟁은 세계 기아의 또 다른 주요 요인입니다. 기아를 겪는 85% 이상의 사람들이 분쟁에 영향을 받는 지역

    에 살고 있습니다. 일례로 수단은 계속되는 폭력 분쟁으로 식량 가격이 급등하고 기존 문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인간이 만든 식량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기아 위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영양실조 치료 격차 해소

    영양실조에 대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영양실조에 대한 접근 방식을 간소화하여 이러한 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간소화된 치료법은 92%의 회복률과 21%의 비용 절감 및 접근성 향상을 달성했습니다.

    혁신적인 간소화된 치료법 더 알아보기

    국제구조위원회와 함께해 주세요

    국제구조위원회는 분쟁과 재난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의 생존과 복구, 재건을 돕습니다. 1933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설립되어 현재 40개 이상의 위기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간소화된 영양실조 치료법으로 기아 종식을 위해 함께해 주세요.


    7억 3천만명 굶는데 하루 10억 끼니 버려…온실가스 10% 차지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은 2022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10억톤 넘게 쓰레기로 버려졌다고 27일(현지시각) 밝혔다. 
    음식물쓰레기지수 보고서 이미지 갈무리

    전 세계적으로 7억3천만명이 굶주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루에 10억 끼니 이상의 먹을 것을 내다 버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은 27일(현지시각) ‘음식물쓰레기지수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보고서를 보면, 2022년 한 해 동안 음식 및 식품, 식량 등 먹을 것이 10억톤 넘게 쓰레기로 버려졌으며, 이는 한 사람당 132㎏꼴로 전체 먹을 것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비용으로 따지면 1조달러(1340조원)에 이른다. 반면 전 세계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도 7억3천만명에 달한다.

    먹을 것이 가장 많이 버려지는 건 가정이었다. 매년 버려지는 10억톤 분량의 음식물 쓰레기 중 60%가 가정에서 나왔으며, 28%는 음식점 등 요식업소, 12%는 소매 판매처에서 나왔다. 유엔환경계획 잉에르 안데르센 사무총장은 “먹을 것을 버리는 건 비극”이라며 “한쪽에서 수억명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음식물이 버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음식물쓰레기는 부자 나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득 수준이 비슷한 나라라도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는 한 사람당 7㎏까지 차이가 났다. 대체로 더운 나라들이 더 많이 버렸는데, 이는 더운 날씨에 신선한 식품이나 음식물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음식물 투기 및 손실은 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구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8~10%가 먹을 것을 내다 버려서 나온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항공분야의 온실가스 배출보다 거의 5배 많은 규모다. 영국의 환경단체 ‘쓰레기와 자원 행동프로그램’(WRAP)의 해리엇 람 최고경영자(CEO)는 “음식물쓰레기가 야기하는 엄청난 환경비용, 사회 및 경제 비용을 고려할 때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더 협력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라별로는 음식물쓰레기 줄이기에 성공한 주목할 만한 사례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몇몇 나라에서는 2007년부터 시작한 음식물 낭비와 온실가스 배출 모범 사례 등을 공유하고 행동하는 ‘공공-민간 파트너십(PPP)’을 통한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운동이 성과를 보였다. 특히 일본은 거의 3분의 1이 줄었고, 영국은 18%가 줄었다.


    세계 인구 8억명 굶주리는데…매일 음식물 10억만톤 버려져

    전 세계에서 8억명이 굶주림을 겪고 있지만, 매일 10억 5000만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27일(현지시간)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이 발표한 최신 음식물 쓰레기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인구 중 8억명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매일 10억끼 분량의 음식물이 버려진다. 이는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농산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며, 금액으로 환산하면 1조 달러(약 135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이는 81억명이 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매일 한 끼 이상의 식사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며, 전 세계에서 생산된 음식의 19%를 차지한다. 1인으로 환산할 경우 132㎏에 달한다고 UNEP는 설명했다.

    또한 "매일 10억끼씩 버려진다는 수치는 매우 보수적인 추정치이며 실제 폐기량은 더 많을 수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음식물이 가장 많이 버려지는 곳은 가정으로 전체의 60%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호텔·식당 등 서비스업소 28%, 정육점·식료품점 등 소매업소 12% 등 순이었다. 가정에서 식사량보다 더 많은 식자재를 구입해 낭비하는 경우가 생기고, 개발도상국 등에서는 냉장 시설 부족이나 운송 중 손상 등으로 음식물이 상하면서 폐기된다는 것.

    또한 이런 식량 낭비가 "도덕적으로도 문제지만, 환경적인 실패"라고 꼬집었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로 발생하는 온실가스는 전체 배출량의 8~10% 수준으로, 항공 산업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의 5배에 이른다. 국가 배출량으로 따지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의 양이다.

    보고서는 "농업용지 조성이 자연생태계 내 서식지 손실의 주요 원인이며 음식물 쓰레기는 전 세계 농경지 30%를 유지하는 규모와 맞먹는다"면서 "온실가스 배출량 가운데 최대 10%를 차지하는 것도 음식물 쓰레기"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를 공동 집필한 비영리단체 WRAP의 리처드 스와넬은 "현재 전 세계에서 굶주리는 8억 명에게 매년 버려지는 음식으로 하루 한 끼만 먹여도 (모두) 먹일 수 있다"며 "우리가 이미 구매하고 있는 음식을 더 잘 활용한다면 탄소 발자국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비용을 절약할 기회가 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에 대해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 25억 6천만,종교인들 중 가장 많아… 남반구 큰 증가폭

    전세계에서 기독교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남반구에서 기독교 인구 증가폭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든콘웰신학대학교 글로벌기독교연구센터가 매년 발표하고 있는 세계 기독교 현황(Status of Global Christianity, 2022)에 따르면, 올해 중반 기준 기독교 인구는 전체 79억 5300만 명 가운데 3명에 1명꼴인 25억 6000만 명으로 전 세계 종교 가운데 가장 많았다. 
    2025년에는 약 26억 3700만 명, 2050년에는 33억3400만 명으로 앞으로도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을 것으로 전망됐다.

    기독교 인구 통계자료는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도 포함되어 있는데, 가톨릭은 12억 명, 정교회는 약 3억 명을 차지했다.

    기독교 인구 중에는 오순절 계열과 복음주의 계열의 약진이 눈에 띈다. 오순절 계열은 1.88%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 약 6억7000만 명, 복음주의 계열은 1.8% 추세에 약 4억 명, 프로테스탄트 계열 역시 1.54%에 약 6억 명으로 강한 상승세를 나타냈다. 특히 오순절 계열은 2020년 4억4000만 명에서 약 20년만에 2억3000만 명이 증가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브라질 등 남미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가 급감하고 있으며, 오순절 교회로 개종이 늘고 있다”면서 “대중을 끌어안고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오순절 교회에 사람들이 관심을 더 갖고 있으며, 특별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복음주의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지친 사람들을 위로한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독교인 다음으로 많은 종교 인구는 무슬림 19억 6000만 명, 힌두교인 10억 7000만 명, 불교도 5억 4000명 순이었다.

    또한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Agnostics)는 0.59% 증가하며 약 7억 5000만 명,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Atheists)는 0.18% 1억 4700만 명에 그쳤다. 1970년 이후 불가지론자는 소폭 증가하고 있지만, 무신론자의 비율은 꾸준히 감소했다. 발표 자료에서는 2025년에는 1억 4300만 명, 2050년에는 1억 4200만 명으로 무신론자는 오히려 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자료에서 주목해볼만한 것은, 선진국들이 몰려 있는 북반구에 비해 저개발국과 도발개상국이 많은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다.

    북반구에서는 기독교인이 0.13% 증가한 약 8억 4000만 명이었으며,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아시아 일부 국가가 포함되어 있는 남반구는 1.79% 증가한 17억 2000만 명이었다.

    대륙별로 보면 유럽 기독교인이 0.06% 증가세 중 5억 7000만 명, 북미 0.27%에 2억 7000만 명이었다. 반면 아프리카는 무려 2.77% 증가한 6억 9000만 명이었고, 남미 1.09% 증가한 6억 1000만 명, 오세아니아 0.73% 증가한 약 3000만 명이었다.

    2000년 당시 통계와 비교해 보면 북반구는 8억 1000만 명에서 소폭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남반구는 11억 7000만 명에서 17억 20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2018년 발표된 조사자료와 비교해보면 아프리카 기독교 인구는 6억 명으로 불과 4년 사이에 9000만 명의 기독교 인구가 늘었다.

    한편, 타문화권에서 사역중인 선교사는 43만 5000명, 파송 선교단체는 5700개로 추정됐다. 또 지난 10년간 순교자수는 90만 명으로 20여년전인 2000년의 160만 명에 비해서 줄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복음을 모르는 인구는 22억 2300만명으로 이는 전 세계 인구의 28%에 해당한다.







    9월 30일(화) 아모스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갈(飢渴)(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The days are coming," declares the Sovereign LORD, "when I will send a famine through the land-- not a famine of food or a thirst for water, but a famine of hearing the words of the LORD.

    보라 날이 이를지라 

    - '이를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임'(*)은 '들어오다'는 의미를 가진 '보'(*)의 분사형으로 역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시 74:9; 애 2:9; 겔 7:26; 호 5:6).


    기갈(飢渴) : 주릴 기, 목마를 갈
    a thirst for water

    기갈이란 한글사전의 정의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a thirst for water(NIV)" 

    갈함(6772) 차마( tsâmâʼ ) צָמָא

    1. 갈증.   2. 목마름.  3. 겔 19:13. 
    발음 [ tsâmâʼ ]
    어원 /   
    구약 성경 /  
    • 1. 명사, 남성  갈증, 목마름, 겔 19:13.
    • 관련 성경 / 목마름(출 17:3, 시 69:21, 사 50:2, 신 28:48, 대하 32:11, 애 4:4), (해)갈(시104:11), 메마른데(렘 48:18, 겔 19:13), 
      갈증(사 41:17).




    주림(7458) 라아브(  )  רָעָב

    1. 배고픔.  2. 굶주림.  3. 기근
    발음 [ râʽâb 
    어원 /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 1. 명사, 남성 배고픔, 굶주림, 기근, 창12:10, 14:30, 애5:10.
    • 관련 성경
      ☞기근(창12:10, 대하6:28, 사14:30), 흉년(창26:1, 왕하4:38, 느5:3). [형] 주린(출16:3, 왕하6:25, 느9:15).


    육신적으로 너무 풍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갈급한 시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많은 설교자들의 동영상에 의한 설교가 넘쳐나고 있지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텅빈 공간에서 메아리만 울려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기갈의 시대가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 언급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게 될 영적 기근을 의미합니다.
    양식이나 물이 부족한 육체적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분의 뜻에서 멀어진 상태를 지칭합니다.
    이 환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음을 알리시며,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1884년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조선 땅에 급성장한 교회가 이제는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141년만의 기적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 100년 만에 급성장하였으나 이제는 급하게 감소되는 현상은 교회안에 젊은층이 전멸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2025년 한국에서 각 교단의 총회를 마치면서 발표한 교세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래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년령층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입장입니다.
    그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선지자 아모스는 "영적 기갈"이 그 원인이라고 외칩니다.

    핵심 내용

    • 환상의 의미 :
      아모스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여름 과일 한 광주리 환상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 영적 기갈 :
    이는 단순히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 하나님의 심판 :
    이 기갈은 이스라엘의 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이며, 하나님의 인내가 다하여 그들을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 이스라엘의 태도 :
    북이스라엘은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 미래 :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의 기쁨은 애곡으로 변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잃어버린 채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 진정한 위기는 '말씀의 기갈'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

    교회에서 몇 개월에 걸쳐 아모스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가졌던 아모스에 대한 선입견도 깰 수 있었고, 그 말씀의 깊이와 넓이에 감격하며 깊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힘은 그 말씀이 오늘 날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매주 깊은 울림을 만듭니다.

    위에 언급한 아모스의 한 구절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아모스 전체 중의 백미라고 여기는 부분입니다. 이는 5장 24절의 말씀과 극적인 호응을 이루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잘 알려진 대로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과 '하수'는 생명의 근원, 생명수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물'과 '강'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에서는 주로 그렇게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생명의 근원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을 향한 최후통첩이자 살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지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그러나 아모스 8장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용서를 베풀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생명수를 이제는 마셔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그 생명수가 공급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심각하게 타락한 것은 그들 가운데 바른 진리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그들의 타락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짐으로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와 민족과 국가가 모두 분열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선택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특수성이 완전히 상실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큰 저주가 이스라엘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지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심각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신자 됨’이란 무엇인가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를 던져 줍니다. 곧, ‘신자 됨’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과연 무엇으로 ‘신자 됨’을  증명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적 측면들, 선행이나 도덕, 양심의 발현 등으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처럼 일반계시 영역 안에 존재하는 사항들로는 특이성 자체를 찾을 수 없고, 더욱이 선행의 문제에 있어서 결코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의 사람들 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독특한 종교적 경험으로 우리의 신자 됨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라고 하는 일들이 이단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종교들 속에서 우리보다 더 활발히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이스라엘인 교회와 신자 역시도, '신자 됨'과 '교회 됨'을 찾을 근거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생명으로 공급받고 그것으로 존재를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유일한 '신자 됨'의 증거이겠지요.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와 신자가 염려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할 상황은 맑은 생명수가 사라지고 썩은 물이 흐르는 일일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 우리 가운데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애통해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걱정'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 속에서는 이러한 '염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걱정'에 앞장 서는 분들일수록 '더 크고', '더 많은' '목회'와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라 더 안타깝습니다.

    진리가 기갈 된 시대…우리의 눈물마저 말라버린 시대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합니다. 곧, 진리에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전하고 붙드는 일이 우리의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썩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 물이 마치 생수인양 벌컥벌컥 마셔대고 있는데도 뒷짐 지고 다른 일에만 열을 내고 있다면 그것 이상 심각한 직무유기가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을 향해 애통해하며 흘릴 눈물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야 어차피 세상의 방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단지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돕는 것까지가 교회와 신자의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진정 흘릴 눈물은 우리 가운데에 이미 벌어지고 있는 말씀의 기갈을 향한 눈물이어야 하겠지요.

    시국을 걱정하시는 많은 분들을 보고 문득 씁쓸한 마음이 들어 몇 자 적어봤습니다.

    홍수가 닥치면 주위 사방에 물이 많지만 마실 물은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아이러니(irony) 뜻, 종류, 유래, 어원

    아이러니(irony)는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를 의미하는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게 표현될 수도 있다.

    아이러니(irony) 뜻

    아이러니(irony)는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게 표현될 수도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 방법이다. 아이러니를 사용하면 독자나 청중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

    아이러니(irony) 종류

    1. 언어적 아이러니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미워하는 경우이다.

    2. 상황적 아이러니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기대했는데, 시험에 떨어지는 경우이다.

    3. 구조적 아이러니

    작품의 구조 자체가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행복한 결말을 기대했는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는 경우이다.

    아이러니는 문학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품의 주제를 더욱 강조하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아이러니는 문학에서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독자나 청중의 기대를 뒤집을 수 있고,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다.

    아이러니(irony) 유래, 어원

    아이러니(irony)는 모순, 역설, 이율배반, 부조화 등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위장(僞裝)'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위장이라고 하면 무엇을 은폐하여 드러나지 않게 하는 실제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아이러니는 좀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뜻을 내포한다.

    아이러니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가장한 채 논쟁의 상대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칭 지자(知者)라고 자부하는 상대방의 내적 모순을 폭로하고 스스로 무지함을 자각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를 가리켜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 불렀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지적(知的)인 날카로움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지(wit)와 통하고,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풍자(satire)와 통하며, 은유의 방법을 쓴다는 점에서 유머(humor)와 통한다. 이는 상대방의 생각을 자극하고 진실을 깨닫도록 돕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아이러니는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활용되었다. 특히 희곡에서 아이러니는 등장인물의 행동과 운명의 역설성을 강조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햄릿은 삼촌에게 살해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척 미쳤다고 행동하는데, 이는 상황적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아이러니는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뉴스 기사, 정치적 발언, 심지어 개인적인 대화에서도 아이러니를 찾아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상황의 유머러스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활용한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옛날 속담이 있습니다. 
    홍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홍수로 인해서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물은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로움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도 오늘날처럼 물질이 풍요로운 때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가들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기세등등했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향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때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고,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조명해 보면 어떨까요?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있고,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동네마다, 골목마다 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TV와 라디오, 인터넷에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인 수가 더 늘어나야 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늘어나기보다는 오히려 교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는, 영적 둔감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심판 때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지막 때에 영적 기갈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영적 기갈의 원인 / 무감각(無感覺), 무관심(無關心), 불만족(不滿足) 


    무감각
    없을 무
    느낄 감
    깨달을 각
    장단음
    무-감각 
    • 1.
      아무 감각(感覺)이 없음.
    • 2.
      주변(周邊) 상황(狀況)이나 사람에 대하여 관심(關心)이 없음.
    • 1.

      명사 insensibility, senselessness, numbness to emotion

    • 2.

      명사 insensibility, apathy


    감각의 종류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감 외에도 다양한 감각이 있습니다:

    • 시각: 빛과 색을 인식하는 감각입니다.
    • 청각: 소리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후각: 냄새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미각: 맛을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촉각: 접촉, 압력, 온도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평형감각: 신체의 균형과 위치를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 고유감각: 신체 부위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감각의 과정

    감각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 자극 수용: 감각 기관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입니다.
    • 변환: 자극이 신경 신호로 변환됩니다.
    • 전달: 신경 신호가 뇌로 전달됩니다.
    • 해석: 뇌가 신호를 해석하여 의미 있는 정보로 만듭니다.

    감각의 특성

    감각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적응성: 지속적인 자극에 대해 감각의 강도가 감소합니다.
    • 역치: 감각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자극 강도가 있습니다.
    • 선택성: 특정 자극에만 반응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 개인차: 같은 자극에 대해 개인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감각의 중요성

    감각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환경 인식: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 안전: 위험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학습: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 즐거움: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삶의 질을 높입니다.

    감각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각 감각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통합되어 우리의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감각의 정확성과 민감성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나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각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중요합니다.

    인식(認識)


    인식(認識)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한국어로는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고 분별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식은 단순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포함하는 복잡한 정신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의 경험, 지식,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대상이라도 개인마다 다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큰 개를 보고 위협을 느끼는 반면, 다른 사람은 같은 개를 보고 친근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식의 다양한 의미

    인식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 철학적 인식: 인간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 심리학적 인식: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는 정신 과정을 연구합니다.
    • 사회학적 인식: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분석합니다.
    • 인지과학적 인식: 인간의 지각, 학습, 기억, 추론 과정을 연구합니다.

    인식의 과정

    인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 감각: 외부 자극을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 지각: 감각 정보를 조직화하고 해석합니다.
    • 인지: 지각된 정보를 기존 지식과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합니다.
    • 판단: 인지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인식의 특성

    인식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주관성: 개인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선택성: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에 따라 인식이 달라집니다.
    • 능동성: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합니다.
    • 가변성: 새로운 정보나 경험에 의해 변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중요성

    인식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의사결정: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달라집니다.
    • 행동: 인식은 우리의 행동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 관계: 타인에 대한 인식은 대인 관계의 질을 결정합니다.
    • 학습: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학습 효과가 달라집니다.

    인식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올바른 인식은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의 기초가 되며,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인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감(直感)


    직감(直感)은 ‘이성적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한국어로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이나 판단’으로 해석됩니다. 직감은 의식적인 추론 없이도 무언가를 곧바로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험 많은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보고 즉시 진단을 내리는 경우나, 숙련된 운전자가 위험한 상황을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대처하는 경우가 직감의 예시입니다.

    직감의 특성

    직감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집니다:

    • 즉시성: 의식적인 사고 과정 없이 즉각적으로 판단이 이루어집니다.
    • 직접성: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입니다.
    • 통합성: 다양한 정보를 순간적으로 종합하여 판단합니다.
    • 개인차: 경험과 지식에 따라 개인마다 다른 직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감의 역할

    직감은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의사결정: 복잡한 상황에서 빠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창의성: 새로운 아이디어나 해결책을 떠올리는 데 기여합니다.
    • 위험 감지: 잠재적 위험을 빠르게 인식하고 대응하게 합니다.
    • 대인관계: 타인의 감정이나 의도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직감의 과학적 근거

    최근 연구들은 직감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 신체 표지자 가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이론으로, 직감이 신체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과 관련있다고 봅니다.
    • 패턴 인식: 뇌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패턴을 빠르게 인식하는 능력이 직감의 기초라고 봅니다.
    • 무의식적 처리: 많은 정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처리되어 직감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직감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전문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직감만을 맹신하기보다는 논리적 사고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감을 발달시키고 활용하는 능력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향상될 수 있으며, 이는 더 나은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감(五感)


    오감(五感)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을 의미하는 한자어입니다. 한국어로는 ‘다섯 가지 감각’으로 해석됩니다. 오감은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의 경험과 인지 과정의 기초가 되며,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시각으로 음식의 모양과 색을 보고, 후각으로 향기를 맡으며, 미각으로 맛을 느끼고, 촉각으로 질감을 느끼며, 청각으로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감의 종류

    오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 시각 : 빛과 색을 인식하는 감각으로, 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 청각 : 소리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후각 : 냄새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미각 : 맛을 감지하는 감각으로, 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촉각 : 접촉, 압력, 온도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피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감의 기능

    각 감각은 다음과 같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 시각 : 물체의 형태, 색상, 움직임, 거리 등을 파악합니다.
    • 청각 : 소리의 높낮이, 크기, 방향 등을 인식합니다.
    • 후각 : 다양한 냄새를 구별하고 인식합니다.
    • 미각 :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을 감지합니다.
    • 촉각 : 물체의 질감, 온도, 압력 등을 감지합니다.

    오감의 중요성

    오감은 우리 삶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환경 인식 :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 안전 : 위험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학습 :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 즐거움 :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삶의 질을 높입니다.

    오감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각 감각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통합되어 우리의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오감의 정확성과 민감성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나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감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중요합니다.

    Q : 감각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A : 감각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감각은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우리의 경험과 인지 과정의 기초가 됩니다.

    Q : 인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A: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포함하는 복잡한 정신 과정입니다. 인식은 개인의 경험, 지식,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직감의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직감은 ‘이성적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이는 의식적인 추론 없이도 무언가를 곧바로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직감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Q: 오감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나요?

    A: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감은 우리의 경험과 인지 과정의 기초가 되며,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무관심
    없을 무
    관계할 관
    마음 심
    장단음
    무-관심 
    • 1.

      관심(關心)이나 흥미(興味)가 없음.

    1.
    [명사] indifference, unconcern, apathy, [형용사] indifferent (to), unconcerned, uninterested (in), apathetic, careless (of)



    관점 - 관심의 의미

    사전적 - 주의와 마음이 향한 상태

    심리학적 - 동기와 주의를 유도하는 감정적 에너지

    철학적 - 존재에 대한 태도와 자각

    사회적 - 관계 형성과 배려의 핵심

    교육적 - 성장과 정서 안정을 위한 자극

    종교적 - 사랑과 자비의 시작

    문화적 - 표현 방식과 해석이 다양한 행위






    불만족
    아닐 불
    滿
    찰 만
    발 족
    장단음
    불-만족 
    • 1.
      마음에 흡족(洽足)하지 않음.
    dissatisfaction (↔만족)

    만족(滿足)의 어원과 한자 의미

    '만족(滿足)'이라는 단어는 한자로 '가득 찰 만(滿)'과 '발 족(足)'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직역하면 "그릇이 가득 차고 발이 충분하다"는 의미로, 무언가가 충분히 채워져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 '만(滿)' : 가득 차다, 넘치다, 충만하다
    • '족(足)' : 발, 충분하다, 넉넉하다

    한자의 구성 자체가 매우 상징적입니다. '만(滿)'은 물(水)이 가득 찬 상태를 나타내고, '족(足)'은 기본적인 이동 수단인 발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상태, 즉 생활의 필수 요소가 채워진 상태를 암시합니다.

    만족의 심리학적 의미

    심리학에서 만족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상태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사랑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 등 다양한 단계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될 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흥미로운 점은 만족이 단순히 '많이 가진 상태'가 아니라 '충분하다고 느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는 만족이 객관적인 조건보다는 주관적인 인식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와 만족의 역설

    현대 사회는 역설적으로 '만족'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고, 소셜 미디어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킵니다.

    뉴스와 광고는 우리에게 "아직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합니다. 더 나은 집, 더 좋은 차, 더 높은 연봉, 더 멋진 여행... 이러한 끊임없는 '더 많이'의 추구는 정작 현재의 '충분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옛말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知足不辱)"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함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욕심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뜻합니다.

    만족의 다양한 형태

    만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몇 가지 주요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질적 만족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만족으로,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될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배고픔을 해소하는 식사,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따뜻한 집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2. 정서적 만족

    관계와 소속감에서 오는 만족으로, 사랑받고 존중받는 느낌, 의미 있는 관계에서 오는 충족감 등이 포함됩니다. 가족, 친구, 동료와의 깊은 유대감은 정서적 만족의 중요한 원천입니다.

    3. 성취적 만족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 자신의 기술과 지식이 성장했음을 느낄 때의 만족감이 여기에 속합니다.

    4. 존재적 만족

    자신의 존재 자체, 삶의 의미와 목적에서 오는 만족감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 자신의 삶이 의미 있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은 깊은 존재적 만족을 가져옵니다.

    동양 철학에서의 만족

    동양 철학, 특히 도가와 불교에서는 만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노자는 "족함을 아는 것이 부유함이다(知足之足, 常足矣)"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만족을 아는 사람은 항상 풍요롭다는 의미로, 참된 부(富)는 외부적 조건이 아닌 내면의 상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불교에서는 '만족'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합니다. 욕망(갈애)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는 불교에서,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태도는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중요한 실천입니다.

    서양 철학에서의 만족

    서양 철학에서도 만족은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이란 단순한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고통의 부재와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욕망을 제한하고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에 만족하는 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외부 환경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네카는 "자연에 따라 사는 자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며,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삶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인의 만족을 위한 실천적 제안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기 위한 몇 가지 실천적 방법을 제안합니다:

    1. 감사 습관 기르기

    매일 감사일기를 쓰거나 감사할 일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 것은 현재의 풍요로움에 주목하게 해줍니다. 이는 '아직 부족한 것'보다 '이미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2. 비교 습관 줄이기

    소셜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고, 타인과의 비교보다는 자신의 내적 기준에 따라 만족감을 판단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는 만족의 도둑"이라는 말이 있듯이, 끊임없는 비교는 만족감을 앗아갑니다.

    3. 최소주의(미니멀리즘) 실천하기

    물질적 소유를 줄이고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생활 방식은 만족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덜 소유할수록 오히려 더 많은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4. 경험에 투자하기

    물질적 소유보다 의미 있는 경험에 투자하는 것이 더 지속적인 만족감을 가져옵니다. 여행, 배움, 관계에 투자하는 것은 장기적인 만족과 행복에 기여합니다.

    5. 자신의 '충분함'의 기준 정립하기

    스스로에게 "얼마나 있으면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세요. 자신만의 '충분함'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은 끝없는 욕망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만족과 성장의 균형 찾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에 안주하거나 발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현재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건강한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균형 있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오늘의 나에게 만족하되, 내일의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태도는 현재에 대한 감사와 미래를 향한 건강한 열망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결핍의 시대, 만족이라는 혁명

    우리는 역사상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만족감은 더 낮아진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족'이라는 개념을 재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은 일종의 조용한 혁명이 될 수 있습니다.

    만족은 단순히 현실에 안주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선택입니다.

    '만족'의 한자 '만족(滿足)'이 말해주듯, 진정한 만족은 그릇이 가득 차고 발이 충분한 상태, 즉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외부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상태입니다.

    오늘, 당신은 무엇에 만족하시나요?

    그리고 그 만족은 진정 당신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함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1. 죄에 대한 무감각

    2. 말씀에 대한 무관심

    3. 육신에 대한 만족 

     

    1. 영적 기갈이 다가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기 때문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다면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외쳤습니다. 
    아모스는 특별히 경제 정의를 외쳤는데, 그가 활동하던 때에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내용이 본문 4-6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를 괄시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부정과 불의는 지배자들의 재판과정에서만 자행된 것이(5:7-13) 아니라 시장 등 사회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월 첫날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그것을 월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누가 보아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없습니다. 인색한 마음으로 아까워하면서 지켰습니다.

    몸은 예배에 왔지만 마음은 ‘언제 예배 시간이 끝날까?’ 마음은 딴 곳에 가있습니다.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아 빨리 곡식을 팔아야 하는데 이놈의 월삭은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 빨리 밀을 팔아야 하는데 왜 안식일을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 귀찮아 죽겠네. 안 지키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고 지키자니 시간이 아깝고.’ 이런 말입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마귀는 예배 시간을 제일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배를 방해하려고 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마귀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예배를 잃어버리자 그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거짓과 속임수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에바’는 곡식을 담아 파는 그릇이었는데 이것은 작게 만들고 돈을 받을 때 쓰는 단위인 ‘세겔’은 크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거래의 부정행위, 사기 치는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가중되었습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신발 한 켤레 값에 사람을 종으로 팔아먹어버리는 인신매매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찌꺼기 밀을 팔자.” 이것은 가진 자들이 자기들은 먹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찌꺼기 밀을 판 것을 말합니다. 권력과 결탁한 힘 있는 자들의 부정부패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데서 극심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의 개념과 감각이 없었습니다. 아모스의 책망이 있었지만 저희들은 여전히 죄를 밥 먹듯 저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을 듣고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치 전범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끝까지 잡아 학살하던 악명 높은 아이히만이라는 한 독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악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생명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파리 목숨처럼 앗아갔습니다.

    아이히만은 전쟁 후 오랜 세월 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도망 다니다가 결국에 붙잡히게 되었고, 1961년에 유대인에 대한, 인류에 대한, 전쟁에 대한 범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악마와 같은 모습, 눈에 핏발이 서고 증오와 살기로 가득한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50대 중반의 한 가장의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을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아이히만의 변론이었습니다. 그는 잘못했다든지 용서해 달라든지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사람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어떻게 되는 지 보여주었습니다.

    영적 기갈의 징조는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마음에 새긴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어도 사람이 죄를 알 수 있는 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양심이 있어서입니다.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인간,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머지않아 영적인 기갈이 다가옵니다. 이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 속에서 이기적으로, 내 멋대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아모스 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왜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잔소리로 여겨질 만큼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의 대부분이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에 귀를 닫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싸우고 아옹다옹 할 때는 그래도 애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정이 식으면 말하기도 싫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을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실 때는 그래도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자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지도 않고 이상으로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실제로 포로 귀환 후 말라기를 끝으로 400여 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동일한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영향으로 유일신과 절대 구원을 주장하는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면 성도들도 영향을 받아 영적 수준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보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외면하고, 성경에 먼지가 쌓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마지막 시대에 다가오는 말씀의 기근은 성경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있고, 교회가 많은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몰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하나님 이름만 나와도 귀를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기갈이 생깁니다.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생명의 떡으로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생수의 강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리고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도 되고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며 생수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3. 영적 기갈이 다가오는 것은 육신의 것에만 몰두하기 때문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여기서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는 인간이 육신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강할 때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왜 다 쓰러지는 것일까요? 
    육신적으로 최고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고 영적인 기갈이 다가오면 아름답고 젊음이 충만하던 젊은 남녀도 맥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인간이 육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솔로몬은 우상숭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것에 몰두하면 자연적으로 영적인 것은 관심 밖이 됩니다.

    말년에 하나님께로 돌아온 솔로몬은 육신의 것에 몰두했던 지난 삶에 회고하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옛날이나 지금이나 청춘 남녀들이 하나님 말씀 없이 세상을 방황하다 넘어지고 자빠지기가 부지기수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지만 젊은이들이 육신의 것에 몰두하면 술과 마약을 하며 온갖 음란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것에 몰두하면 또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깁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놓고 복을 달라고 빕니다.

    이사야 4: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우리가 볼 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은 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44: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우상숭배는 영적으로 무지하여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육신의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상숭배는 육신의 탐욕이 드러난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욕은 모든 우상숭배의 뿌리입니다.

    우상숭배의 한 형태는 자연숭배입니다. 
    자연을 신성시하고 숭배함으로써 육신적 안전과 복락을 기대합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요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때 가장 먼저 나일 강을 피로 만들며 그들의 신을 심판하셨습니다(출 7:20, 12:12).

    인도의 힌두교인들도 갠지스 강을 성스러운 강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일생에 꼭 한 번은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게 소원이고, 죽어서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되는 것이 최대의 소원입니다.그래서 인도의 갠지스 강물에는 강변의 화장터에서 뿌려진 유골과 시신을 태운 부산물이 둥둥 떠다닙니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은 그 갠지스 강변에 몸을 담그고 강물을 성수(聖水)라며 감동하며 마십니다.

    우상숭배의 폐해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이 우상숭배로 인해 일상이 온통 더러움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오염되면 병원균에 감염되어 병이 나고 죽게 되듯 우상에 전염되면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엎드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모든 문제의 핵심은 결국 영혼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육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적 기갈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그리고 육신의 것에만 몰두하면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기갈이 찾아와서 영혼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풍요롭던 때가 아득한 옛 시절 같습니까? 
    그렇다면 인정하기 싫어도 영적 기갈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 기갈이 다가오지 않도록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먹는 것으로 유혹할 때 
    신명기 8:3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면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9월 29일(월) 아모스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Therefore this is what I will do to you,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to you,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12-13)

    예비하라(3559) 쿤(kûwn)  כּוּן

    1. 똑바로서다. 2. 세우다.  3. 필렐형  כּוֹנֵן
    발음 [ kûwn ]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예비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쿤(kûwn)' 이라고 합니다.
    '쿤'이란 "똑바로 서다" 또는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똑바로 서야만 합니다.

    똑바로 선다는 것은 올바른 삶을 말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뒤숭숭한 이유는 똑바로 서야 할 사람들이 바르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똑바로 서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하였습니다.
    정의는 사람마다 자기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가의 본분은 정치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농사군의 본분은 때에 따라 씨를 뿌리고 가꾸어 풍성한 수확을 얻는 것입니다.
    군인은 나라의 영토와 국민들을 잘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상인은 장사를 잘하여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사역하던 시기는 B.C. 793~753년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의 사마리아는 태평성대의 시대였으며 무려 4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수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과 길갈에 황금송아지와 바알의 우상 신상을 세웠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8월 15일을 절일로 정하고 임의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도덕이 타락합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몰두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숲은 음란과 쾌락의 유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통탄하셨습니다(호 2:8).

    이스라엘 온 천지가 풍성한 물질이 썩는 것과 함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이 썩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동일하게 외치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아 여호와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 사회 질서가 확립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 법질서가 바르게 실행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정상화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와 질서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 묻어나는 공의와 질서가 없이는 세상을 새롭게 세워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입맛에 따라 세상을 주물럭거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를 통하여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도록 엄하게 다스릴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려면 먼저 공의로운 하나님 만기를 예비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인간들은 어떤 일이든 미리미리 준비해 놓습니다.  
    만약을 위하여 예비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미래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장래를 위한 준비입니다. 
    죽어서 들어갈 묘지를 미리 예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들은 많은 예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 보다 가장 중요하게 예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그때에 예수를 믿었던 자는 천국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산들을 지으시고 바람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심판주입니다. 
    그 만남을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으로서는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계시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큰 봉사를 해도, 아무리 큰 헌금을 드려도, 아무리 중요한 직분을 받아도 예배에 등한한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둘째, 회개할 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자를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속에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죄를 없앨 수 있습니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회개는 수술과 같습니다. 죄는 회개해야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습니다. 불의가 죄입니다. 의롭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불법이 죄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을 피하는 길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된 자들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내 죄를 회개하는 자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음 받아 깨끗하게 용서함 받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아모스는 12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이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나 성과가 있을 때는 주인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기다려지지만 잘못된 행동을 한 후 주인이 보자고 하면 그것은 두렵고 가기 싫은 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건들로 경고하셨는데 결국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겠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13절입니다.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그 앞에서는 온 만물이 벌벌 떨며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든 세 번 무릎을 꿇고 그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해야 합니다. 황제가 거하는 자금성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할 때마다 이런 예식을 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 앞에서도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더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매우 심각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그래서 영원이라는 바다에 비하면 한줌의 모래만도 못하것 같지만, 그러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내가 이 짧은 인생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는 정말 두려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계시면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홀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11절에 무어라 말씀합니까?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한참 불이 붙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온통 그을리고 탄 불쌍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이런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생활 속에서 무엇보다 이 세대의 정신과 가치관과 풍습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열납하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12~13)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의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만나는 복스러운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만남은 만나면 안 될 사람이 만나고, 만나면 안 될 환경을 만나는 악연의 만남도 있습니다. 
    또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만남도 있고, 또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만남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 9:27).

    인생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죽음과 심판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사역하던 B.C. 793~753년,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의 사마리아는 태평성대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드물게 여로보암 2세가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수리아와의 일전에서 승리함으로,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과 길갈에 황금송아지와 바알의 우상 신상을 세우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8월 15일을 절일로 정하고 임의로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도덕이 타락합니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몰두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숲은 음란과 쾌락의 유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통탄하셨습니다(호 2:8).

    이스라엘 온 천지가 풍성한 물질이 썩는 것과 함께 윤리와 도덕과 신앙이 썩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네 하나님 마나기를 예비하라”고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가복음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누가복음 3:4 /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3 /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야 하는가?

    1. 종말(개인의 종말, 세상의 종말)(창세기 3:19, 로마서 5:12, 베드로후서 3:10)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는 끊임없이 생명의 한계에 도전해왔고, 어떤 부분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의 벽이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창 3:19).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롬 5:12).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벧후 3:10).

    성경은 여러 곳에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4절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는 죽음 후에 하나님 만날 일을 준비해야합니다.

    2. 죄 때문(로마서 3:10)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 3:10). 
    아담의 타락 이래 온 인류가 범죄 했으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 3:17).

    성경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엡 1:7).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요일 1:7).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 1:19).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3. 잃어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누가복음 19:10)  

    예수님께서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눅 19:10).

    “잃어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다고 가장 큰 손실이 아닙니다.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다고 가장 큰 손실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손실은 사람이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하셨습니다(요 14:2).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 곳에 갈수 없습니다.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

    1. 이웃을 사랑하는 것(마태복음 22:37-39)

    율법사가 시험하여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7~39).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늘 관심을 가지시는 이웃은, 작은 자! 곧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였습니다.

    2.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것()


    본문 4절에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벧엘과 길갈은 어떤 곳인가?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종교혼합주의 죄악에서 돌이켜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유형무형의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 제일주의 순수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기 때문() 

    본문에는 “그런데 너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이 6절, 7절, 9절, 10절, 11절에 계속하여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이스라엘을 가진 방법을 동원하여 부르셨지만 그들은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 4:7)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 지금 바로 이시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잠시 후에 그 문은 닫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패와 패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큰 근심거리 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을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사야서에서 한탄하신 것이나 아모스에서 한탄 하시는 내용이 다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잠자는 이스라엘을 깨워 돌아오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지만 이 백성들은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양식를 떨어지게 하여 보시기도 하시고, 비를 멈추게 하시기도 하시고, 메뚜기를 동원하여 곡식을 다 먹어치우게도 하시고, 전염병으로 치시고, 이방의 군대로 침략을 하여 청년들을 죽게하시기도 하였으나 이 목이 곧은 이스라엘은 전혀 돌아설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섬기지만 동시에 악을 행하기에 익숙한 청개구리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29장에 백성들에대한 하나님의 평이 나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도 어느덧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을 닮아갑니다. 입으로는 다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실상은 겉모습만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세상이 기이하게 돌아갑니다. 
    틀린 것 같은 정책과 법들이 버젓이 통과되고 시행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는 때 입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을 하십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뜻을 택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말씀속에 이미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바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날, 지혜자의 지혜가 살아나고 명철자의 총명이 회복될 것 입니다.


    9월 27일(토) 아모스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기의 비밀(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Surely the Sovereign LORD does nothing without revealing his plan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자기의 비밀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비밀(God's secret)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본절이 앞절과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 부분과 논리적인 연결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T. E. McComiskey).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히브리어 '키'를 '그러나'(but)로 번역하고(Harper), 
    어떤 역본들은 '확실히'(surely)로 번역하였다(KJV, JB). 
    그렇지만 8절에 나오는 '사자'와 '두려움'의 개념이 4절의 '사자'와 6절의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보면, 
    7절만을 따로 생각할 수도 없다. 

    한편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 '은밀한 협의'(SECRET COUNSEL)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밀접한 관계에 기초한 적극적인 의논(잠 15:22)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관계성을 통해 미리 알려주는 계획(plan)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으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렘 23:18, 22).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에 앞서 항상 경고가 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도 그러했고(창 6:13-2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미리 경고되었다(창 18:17-21;19:12,13).

    아모스 3장 7절의 "자기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심판이나 섭리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선지자들을 통해 이 비밀을 미리 알리신 후에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재앙을 내리시거나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종종 그 뜻을 선지자들에게 계시해주시고 그들에게 전달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 :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에 대한 설교(아모스 3:1-15)

    3~6장까지는 설교 형태로 예언을 합니다. 
    그 중 3장은 현재, 4장은 과거, 5-6장은 미래의 틀에서 예언을 합니다. 
    3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을 2장에 비해 좀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1-8절), 
    이스라엘의 범죄 지적(9-10절),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양상(11-15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 (1-8절)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게 일렀습니다(1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모두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백성으로 삼았음을 증명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거룩한 제사장나라로 세우기 위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원해낸 것입니다(출 19:6).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민족 가운데 그들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그들만 알았으니 하나님이 모든 죄악을 그들에게 보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2절). 
    이는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ידע)는 지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으로서 관계성을 기초한 지식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만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애정을 쏟았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다른 민족에게 주지 않은 특별한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그들에게만 자신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에게만 자신의 뜻을 알 수 있는 율법을 주었고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성전과 제사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만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은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나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19:6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름을 두시고 그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19:5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그에 합당한 징벌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에 대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했습니다(3절).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고는 같은 방향으로 같이 걸아갈 수 없습니다. 
    쟁기를 가는 소도, 행진을 하는 군사도, 여행을 하는 친구도, 사업을 하는 동업자도, 가정생활을 하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처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뜻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지킨데 반해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과 죄악으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4절). 사자는 먹이를 사냥하여 잡았을 때 포효하며 먹이를 굴에 가져가 새끼들에게 먹이기 위해 새끼들을 부를 때 소리를 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심각한 죄악을 보았기 때문에 심판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고 했습니다 (5절). 덫은 얇은 판이나 그물 등으로 장치한 기구 안에 새 모이를 넣어두고 새가 모이를 먹기 위해 들어왔다가 장치를 건드리면 판이나 그물이 덮쳐서 새를 잡는 형태의 기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려는 것은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만한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드러났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는 연이어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고 했습니다 (6절). 성읍에서 파수꾼이 나팔이 부는 것은 적군이 쳐들어올 때 부는 것입니다. 그 경고의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려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7절).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기 전에 먼저 선지자에게 알려서 그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한 다음에 그래도 돌이키지 않을 때 심판을 내립니다. 노아 때 세상이 홍수로 멸망당할 때도 그러했고 아브라함 때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창6:13-21, 18:17-21, 19:12-13). 본절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종말의 날짜를 예언하면서 그 근거로 자주 활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절의 내용은 날짜 개념이 아니라 사건 개념의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려할 때도 아모스에게 미리 그 계획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아모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심판을 경고하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심판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어서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8절).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경고하면 그 심판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영광받으려는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다른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님의 구속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성경말씀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배와 교제와 사역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성도답게 사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범죄 지적 (9-10절)

    9.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스돗 궁궐들과 애굽 땅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산들이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고 하라 했습니다 (9절). ‘아스돗’(Ashdod)은 블레셋의 5대 성읍중 하나로서 블레셋을 가리켜 한 말로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자주 침입하여 괴롭힌 나라였습니다. ‘애굽’(Egypt)은 이스라엘이 그곳에 살 때 학대하여 괴롭힌 나라였습니다. 그처럼 이방국가로서 대적국가였던 나라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보게 한 것입니다. ‘사마리아’(Samaria)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방국가에게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요란함’에 해당하는 ‘메호마’(מהומה)는 혼란, 소동, 괴롭힘 등의 뜻이 있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괴롬힘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블레셋과 애굽은 그 나라의 왕궁과 성읍들에서 괴롭힘과 학대가 심하게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성읍들에 괴롭힘과 학대함을 있는지 보라는 것은 이스라엘 왕궁과 성읍에 괴롭힘과 학대함이 블레셋과 애굽에 못지않게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언약국가가 이방국가에 못지않은 죄를 지으므로 이방국가가 그들을 보고 놀랄 정도라는 것입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 모른다고 하라 했습니다 (10절). 권세자들이 궁궐에 살면서 포학과 겁탈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가진 자들이 권세를 이용하여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심하게 억압하고 착취한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고 했습니다. 권세자들은 큰 궁궐을 짓고 살았습니다. 궁궐을 겨울 궁과 여름 궁이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냉난방 시설이 없는 때였으므로 겨울에는 벽을 두껍게 하고 문과 문틀을 튼튼하게 단 따뜻한 집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벽이나 창을 거의 없는 시원한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내들의 거처로 별채를 따로 두기도 했는데 상아(코끼리 이)로 장식을 해서 상아궁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 침상과 의자의 방석이 언급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침대와 쇼파를 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인데 그런 것들을 갖추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요한 생활이 9절에서 언급한대로 학대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것을 탈취한 것들로 누리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권세를 가진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주고 빚을 못 갚으면 경작지와 집 등을 빼앗은 것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자연히 사마리아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요구합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때에는 종도 풀어주고 땅도 되돌려주고 빚도 탕감해 주게 했습니다 (레25:13-55). 추수 때 곡식 한 뭇을 잊어버리고 왔으면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포도도 다 따지 말고 얼마를 남겨두고 감람나무도 한 번 떤 후에 다시 가서 살피지 말라고 했습니다 (레19:10, 신24:19-21). 그것은 가난한 자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사회는 그런 정신을 무시하고 오히려 자기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국가는 제도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살 수 있도록 해야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세금을 충분히 거두어 국방과 교육에 사용하는 동시에 복지에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인이나 극빈자들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부자들은 자발적으로 기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사회 지도층이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하는 도덕적 의무 혹은 책임을 강조하는 프랑스어입니다. 당시 귀족들이 노동자들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자신들과 사회 전체가 잘된다는 생각을 가진 데서 나온 말입니다. 교회적으로는 교우들 가운데 극빈자들을 돕도록 해야 합니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양상 (11-15절)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이스라엘의 힘을 쇠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궁궐을 약탈하리라고 했습니다(11절). 
    사면에 대적이 있어 힘을 약화시키고 궁궐을 약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앗수르(Assyria) 제국의 디글랏 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가 B.C. 733년에 북이스라엘에 속한 길르앗과 갈릴리를 침략하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Ⅴ)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도 건져냄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12절). 
    당시 목자가 양을 치는 중에 맹수가 양을 잡아먹게 되었을 때 목자가 양의 다리나 귀 조각 등을 주인에게 가지고 가면 그것이 목자가 양을 지키려 했다는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잃어버린 양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자가 맹수에게서 양의 다리나 귀 조각을 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적을 통해 멸망시킬 때에 그들을 멸망시키는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의 여지를 남겨두겠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서 전체의 의미를 볼 때는 두 번째 의미일 것 같으나 본문 자체만을 볼 때는 본문이 심판을 강조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 의미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아스돗)과 애굽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야곱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했습니다(13절). 
    이방민족이 증언을 할 정도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이 심각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을 꺾어 땅에 떨어뜨릴 것이라고 하라 했습니다(14절). 
    ‘벧엘’(Bethel)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배도에 대한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여로보암1세(JeroboamⅠ)는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왕상12:28-33). 
    ‘제단의 뿔’은 제단의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입니다. 
    속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권위와 능력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우상숭배의 장소를 완전히 파괴하되 가장 핵심적인 것까지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도 타락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이 타락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범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데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쳐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라 했습니다(15절). 
    왕을 비롯한 권세자들은 겨울에 거할 곳과 여름에 거할 곳을 따로 두고 그 집을 상아로 장식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것을 착취한 것으로 풍요를 누렸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언약국가로서 이방국가의 모습으로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심판을 경고했던 이방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심판을 증언하라고 한 것입니다. 
    13절에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이방민족이 증언을 할 정도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이 심각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적인 단체와 다를 바 없고 성도들이 세속적인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가 바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7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하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골로새서 1:24-27)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비밀은 감추어진 것이지만 꼭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공개된 것이지요. 
    이것이 비밀의 양면성입니다. 

    비밀의 헬라어는 ‘뮈스테리온’입니다. 
    ‘입을 다물다라’는 단어 ‘뮈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알리지 말아야 할 말이나 일을 의미하지요. 
    신약에서 그 의미는 신령한 계시 외에는 밝혀질 수 없는 진리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비밀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왔으며 하나님의 종들에게 공개된 것입니다(단2:19,28,29). 물론 성경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을 가져야 할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비밀이 열려있고, 믿음을 갖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여전히 비밀에 붙여진 책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이 우리에게 오픈된 하나님의 편지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에게 성경이 공개되지 않는 비밀의 책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것이 가장 큰 복 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성경이 나에게 공개된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비가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지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아무에게나 공개해도 상관없는 일이라면 굳이 비밀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밀은 꼭 알아야 할 사람만 알아야 합니다. 지켜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밀을 맡겨주십니다. 만일 비밀을 지켜주지 못할 사람이라면 비밀을 어떻게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나에게 비밀이 공개된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신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주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그만큼 나를 믿어준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사람과의 관계도 신의가 있어야 비밀을 맡겨둡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기에 맡겨주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줄 그릇이 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고 믿고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당신의 비밀을 맡겨두신다는 말이지요. 비록 나는 전혀 그럴만한 그릇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그만큼의 수준으로 인정해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비밀을 맡겨두신 것이니까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비밀이 들려지고 보여지고 믿어지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 사도 안에 하나님의 풍성한 비밀이 가득하다는 말이지요. 과연 내 안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맡겨놓으셨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나 어떤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맡겨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어떤 종교도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원하시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일꾼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만 알 수 있고, 비밀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이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공개하시면서 다른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알려주십니다(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러므로 나에게 당신의 비밀을 공개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심에 감사하십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모든 비밀을 우리가 다 알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만큼 알려주십니다. 성령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믿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믿어주시는데 과연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내 마음 판에 새기지 못하고 그 비밀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믿음의 비밀을 잘 새기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믿고 비밀을 알려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비록 어떤 위험이나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비밀은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밀의 생명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비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누설한다할지라도 예수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비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 때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풀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본다고 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밀을 깨닫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당신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비밀이지만 그중에 최고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입니다(27, 2:2).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디 계실까요? 내 안에 계십니다(27절).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이보다 더 큰 비밀이 어디 있겠습니까?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비밀을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령은 우리 안에서 내 영으로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적용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질서가 분명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다르십니다.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설계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모든 일을 맡아서 성취하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 안에서 깨닫게 하시고 적용케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롬 8:16). 하지만 구속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을 갖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밀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시고 우리 가운데 친히 오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의 완전체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비밀이 풀리는 거예요.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밀을 몰라요.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로 작정된 자들만 알 수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13장에 보면, 전도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들이 전한 복음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정된 자들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로 작정된 자들만 복음을 받아드린 것이지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드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좇아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은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으로 설명되어질 것이 아니요, 세상의 철학이나 종교로 믿어질 것이 아니며,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비밀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려면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에요.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비밀이지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령잉태가 하나님의 비밀이요, 성육신이 비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비밀이요, 부활이 비밀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심이 비밀이고, 다시 오시는 주님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에 쌓여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무엇보다 그 예수님이 내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계심이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아무나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 안에 의심없이 믿어지는 것이 신령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이 비밀이 풀린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전혀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감히 누가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시대마다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주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말만 토해냅니다.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합니다. 그들은 영혼을 미혹시키는 영적사기꾼들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을 풀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자들이 있다면 경계하십시오. 대부분 그런 자들은 음녀와 같이 달콤한 말로 성경을 해석하고 풀어갑니다.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할 것입니다. 말세에는 그런 자들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도록 보안장치를 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종교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새 언약의 중보자로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이지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런데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내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아무나 믿어지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비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죄를 탕감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11-12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그 주님이 다시 왕권을 가지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영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28절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것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성전 삼고 내안에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몸이 되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른바 새 언약의 복음이지요. 요한복음 10장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천국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지고 믿어지는 것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비밀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이 깨달아지십니까?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음의 비밀은 반드시 율법을 통과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복음은 비밀 중에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율법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보아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율법이라는 수건이 벗어져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옷을 벗어야 복음의 비밀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수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이 비밀이 완전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복음의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복음을 믿지 못함이요, 복음을 믿지 못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십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결국 복음을 만나게 하심입니다. 이른바 율법을 통과하여 복음을 만나게 하려하심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통과하지 못하고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버스를 타고 어디로 이동할 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것입니다. 
    정류장은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정류장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류장은 지정된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장소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복음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한시적인 법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법이지요.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거지요. 
    아파트를 분양하는 시공사가 아파트 분양을 위해 모델하우스를 짓습니다. 
    그 모델하우스는 구입할 아파트의 그림자입니다. 
    아무도 그 모델하우스에서 살지 않습니다.

    그 모델하우스는 실물 아파트 분양이 끝나면 전부 철거가 됩니다. 
    아무도 모델하우스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율법도 그런 원리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복음의 실체이신 주님이 오시면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복음의 실체이신 주님이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른바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지요(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ver all creation.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자가 복된 사람이지요.

    이 비밀을 알려면 반드시 율법의 수건이 벗겨져야 합니다. 율법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율법의 때가 벗겨져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지요. 그러면 율법 안에 감취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주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비밀을 다 갖고 계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옷을 벗으면 죽을 것 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허다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안달 부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뭔가 자기 눈에 보이는 종교적인 열심이나 공력이 추가되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율법의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 눈에서 율법의 비늘이 벗어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반드시 율법의 옷을 벗어야 복음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옷으로 단장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아무리 당신이 율법으로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사도 바울처럼 율법으로 흠이 없고 완전하십니까? 그런 사도 바울도 율법의 더러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복음의 옷을 입었습니다. 구원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주안에 나타났습니다. 당신의 종교적인 고집으로 당신의 영혼을 망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주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갈1:9). 그런데도 율법을 고집하시렵니까? 당신은 율법을 버렸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지금 당신의 생각을 붙들고 있는 종교적인 모든 것들이 당신 안에 있는 율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복음은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당신을 압도하는 모든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을 포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가 복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죄의 값을 알게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은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모르고, 죄를 모르면 사망을 모르며, 사망을 모르면 영생도 모릅니다. 그런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12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율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복음을 만나지 못합니다. 복음을 만나지 못하면 비참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복음의 비밀이 우리 안에 깨달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그 복음의 비밀이 사도들을 통해서 공개되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율법 안에서 감추어있던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시대적으로만 구분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있고,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지금도 구약시대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른바 아직 율법의 탈을 벗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구약시대를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복음을 만나서 복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복음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시간적으로 신구약을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율법의 잔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골자는 이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경계는 시간이 아니요, 장소가 아닙니다. 혹은 세대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각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젊은이가 늙은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비록 나이는 늙었지만 젊은 청춘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은혜의 시대, 복음시대를 살아가지만 여전히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율법의 옷을 입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아직도 주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반드시 복음을 믿고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즉, 예수를 구주삼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에 참예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을 기쁨으로 누리고 자유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The mystery of God) 골로새서 1:25-27

    25. 내가 교회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에게 자신이 교회의 일군이 된것은 하나님의 경륜, 곧 그분의 명령을 따라 된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명령’ (mission) 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 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영원전 부터 모든 세대 가운데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고 말합니다. 

    이 비밀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약에 약속된 다윗의 씨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목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인것 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우리 모든 성도의 ‘영광의 소망’ (the hope of glory) 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말씀을 통해, 단순히 머리로만, 성경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내 인격적인 고백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비밀되시며, 나의 영광의 소망되심을 고백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기대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사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비록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다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 물으면 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가게 됩니다!!” 모두 맞는 말 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게 된다는 구원의 확신을 언급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전부라면 많이 부족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다면, 영원전 부터 모든 세대에 감추어졌던 비밀이요, 이제 성도들에게 ‘드러난 비밀’ (the revealed mystery) 이 되신다면 <예수님 믿으면 죄 사함받고, 천국간다> 가 예수님에 대한 전부가 되어서는 문제가 많음을 우리는 깨닫아야만 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2000여년전에 팔레스타인 나사렛동네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고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죽게 하고자 보내신 그의 독생자 예수는 누구 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성경에 나타난 것을 통해 차례대로 살펴 보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그의 미션을 이루셨나?’

    첫째그분의 ‘의로우신 피’로서 그 미션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죄없으신 선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그의 '값진 생명' (=의로우신 피) 를 대신 주실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 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자격)

    둘째, 십자기 위에서 하나님의 화목제물되심으로 그 미션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션을 이룰 자격이 있을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그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 이 되셔서 말 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순종)

     큰그림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mission)은?’ 

    1. 하나님과 화해’ (For reconciliation with God)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롬. 3:25) 이것을 줄여서 ‘칭의’ (justification)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죄가 씻음바 되고, 의롭다고 불리어지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지는 시작인 것 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통해 화목해 가는 것 입니다.
    2.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 (For being people who eager to do what is good) 되게 하시고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이것을 줄여서 성화’ (sanctification) 라고 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에는 관심과 믿음이 집중되어 있지만, 거듭난 이후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열심도 없다는 사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드러내시고자 하는 비밀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성숙된 자녀가 되기 원하신다는 사실 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For reigning with Christ) 하게 하시고자: (“ ~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살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디모데후서 2:11,12) 이것을 줄여서 ‘영화’ (glorification) 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삶은 현재의 삶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될때 영화롭게 변화되어질 삶인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수 있을찌를 살펴 보겠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비밀> 예수님을 알아갈까?’
    1.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 복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2): 예수님을 알아나간다는 것은 그분과 점점 더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나간다는 뜻 입니다. 그분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첫출발이 되어야 할까요? 이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라면, 이제 다음 단계는  그분의 마음과 뜻을 이해해 나가는 것 입니다. 그분의 마음과 뜻을 어떻게 알아갈까요? 바로 성경말씀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그분의 뜻과 계획하심이 성경에 매우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다’ 고 말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당신이 말씀을 읽고, 그분의 뜻을 찾기에 무관심하고 게으른 까닭 입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은 감추어져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깊은 속까지도 ‘드러내신 비밀’ (the revealed mystery) 인 것 입니다. 내가 여전히 말씀을 즐거워 하지 않고, 하루동안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기를 게을리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의 비밀인 주님을 알아갈수 없습니다.
    2. 그의 말씀을 ‘지켜나감’으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해 나가는 것이 그분을 알아 나가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출발점이라면, 그분의 말씀 즉, 그의 계명 (=명령) 을 지켜나가는 것은 반드시 함께 이어져나가야 할 다음 단계일 것 입니다. 이말은 ‘주님은 말씀은 열심히 보는데, 그의 말씀데로 살지 않는다’ 라는 엉터리 신앙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뜻 입니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 말씀의 뜻을 쫓아 지켜 나가야만 한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 (. 14:21) (“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0b) 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읍니다. 그분의 계명 (the commandment) 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13:34) 는 것 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토록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다음 이렇게 그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줄 알리라” (. 13:35) 는 것 입니다. 말로가 아니다는 것 입니다. ‘서로사랑할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랑을 연습하고 있습니까?
    3. 성령을 통해 그분 안에 거함’으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안에, 내가 안에 있으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 (. 15:5)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나간다는 것은 결국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지는 인격적인 연합을 뜻함을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말씀 하십니다. 포도나무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바로 ‘포도나무 원둥치’ 에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가지는 어떤 열매도 맺을수 없고, 말라죽게 됩니다. 그 나무로 부터 ‘수액과 영양분’ 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간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그분안에 거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하는것이 그분안에 거하는 것인가?” 일것 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15:10) 고. 이 말씀은 다시 두번째 조건으로 돌아 갑니다. 즉, 주님을 계명을 지킨다는 뜻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킬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될뿐 아니라, 그분안에 또한 거하게 되는 것 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성령’을 말씀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성령이 아니고는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누구도 지켜 나갈수 없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성령께 순종함으로 사랑의 명령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영원전 부터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놀라운 비밀을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밝히 드러내기를 심히 기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천국백성 되게 하여 주실뿐 아니라, 그분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여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지게 하심을 성령을 통해 그의 사도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땅아래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비밀의 계획은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발견되어지고, 누려지는 것 입니다. 마치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 와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비밀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은 평생, 날마다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사랑’ 의 계명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실천해 감을 통해 더욱 더 깨닫아 나가고, 깨닫은 만큼 하나님을 온 힘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그분만을 경외하는 자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밀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자기 백성과 체결하신 언약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점진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최종 성취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언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언약을 통해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골 1:26-27, 2:2-3).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었던 만나”(계 2:17), “감추인 보배”(잠 2:4, 참고-고후 4:6-7, 벧전 2:4-8), “감추인 보화”(마 13:44, 골 2:2-3)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고, 그 언약의 최종 성취는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가운데 언약이 체결되고 완전히 성취되는 과정을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본론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밀

    성육신(Incarnation)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심’입니다(빌 2:6-8). 성육신은 성자 하나님께서 신인(神人) 즉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것으로, 그의 신성(神性)에 인성(人性)이 부감 됨을 의미합니다(요 1:14).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방편은,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마 1:18, 20)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골 1:26-27, 2:2). 그래서 디모데전서 3:16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3:16).

    2.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백성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요 1:11, 6:41-42, 고전 2:6-9).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에 최후 순간에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내려다 보시고 소리 내어 우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눅 19:41-42). 여기서 “숨기웠도다”는 헬라어로 ‘크륍토’(κρύπτω)인데, 이것은 ‘감추다, 숨기다, 비밀로 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비밀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눅 4:22).

    요한복음 6:42에서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여기 “아는데”는 헬라어 ‘에이도’(ϵίδϖ)의 1인칭 복수형으로, 그냥 얼핏 아는 것이 아니라 ‘사귐과 확신을 통하여 자세히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모님을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보다도 자신들이 아는 경험과 지식에 착념하다가 영생에서 낙오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3. 감추었던 만나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2:17에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감추었던” 역시 ‘크륍토’(κρύπτω)의 완료수동분사형으로, ‘감추어져 있는’ 만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이 만나를 주십니다. “이기는”의 헬라어는 ‘니카오’(νικἀω)의 현재분사형으로, ‘계속적으로 이기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을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계 2:7).



    하나님은 왜 ‘비밀’을 보이시는가? 
    아모스 3장 7절과 성경 속 하나님의 계시 원리

    서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아모스 3장 7절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그분의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아모스 3장 7절은 "그 비밀을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그의 종들에게 미리 알리신다는 놀라운 원칙을 밝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그분의 백성을 향한 친밀한 교제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오늘은 이 구절의 깊은 의미를 파헤치고, 성경 전체에서 이와 유사한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구절들을 함께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본문 분석: 아모스 3장 7절의 깊은 의미

    아모스 3장 7절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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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비밀을 보이지 아니하고는"

    여기서 '비밀'(סוֹד, 소드)은 단순히 숨겨진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과 계획, 섭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작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이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 33편 11절은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독단적으로 행하시기보다, 먼저 그 뜻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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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그 계획을 당신의 종들에게 계시하신다는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작정 심판하시거나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경고하시고, 준비시키시며, 당신의 뜻을 알리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사랑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심판에 앞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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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 종 선지자들에게는"

    아모스 3장 7절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비밀'을 누구에게 보이시는지를 명확히 밝힙니다: "자기의 종 선지자들에게는 그 비밀을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분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계획을 깨닫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분의 뜻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은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목적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 구절들

    아모스 3장 7절의 원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신실한 성품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창세기 18장 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 구절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계획을 알리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친구로 여기셨고,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 시편 25편 14절: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즉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계획과 약속)을 보이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그분의 뜻을 아는 열쇠임을 보여줍니다.

    •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크고 놀라운 일, 곧 그분의 계획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 요한복음 15장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함은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닌 친구라고 부르시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뜻을 그들에게 다 알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이사야 46장 9-10절: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와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노라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아시며,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알리시고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결론: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삶

    아모스 3장 7절과 그와 유사한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친구로 여기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 말씀에 대한 경외: 하나님의 계시는 주로 성경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기도: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셨듯이,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종들, 곧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보이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방식(아모스 3:7)

    1. 하나님의 계시와 선지자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류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분의 백성이 준비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이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며, 그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2.선지자들의 역할

    선지자의 역할 "그 종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은 선지자들의 특별한 위치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직접적으로 모든 이에게 알리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선지자들은 중재자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서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미리 알고 그 일들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달합니다.

    3. 뜻을 땅의 사람들과 함께 이루심

    이 구절은 또한 하나님이 혼자서 일하시지 않으며, 땅의 보낸 선지자와 함께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분의 종들에게 미리 그분의 계획을 알려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며, 사람들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4. 선지자들의 사명

    이 구절은 또한 선지자들의 사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선지자들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그분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촉구합니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때로는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어려운 사명을 감당합니다.

    ​아모스는 그러한 선지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부패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외쳤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를 주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하고,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My purpose is that they may be encouraged in heart and united in love, so that they may have the full riches of complete understanding, in order that they may know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비밀의 정원(시크릿 가든) 아모스 3:7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거나 감추어진 속내’라는 뜻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비밀’이라는 단어가 37번 나오는데, 대부분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종합을 해보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합니다(골 2:2).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My purpose is that they may be encouraged in heart and united in love, so that they may have the full riches of complete understanding, in order that they may know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

    하나님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거나 감추어져 있기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는 그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2에 의하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비밀’,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목회자 이전에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밀을 분명하게 보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 
    확실하게 보여주면 흔들리지 않을 터인데 종종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일까?” 하는 ‘하나님의 부재’를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2010년 아이티에서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그곳 현지인들이 “하나님, 정말 당신은 살아계신 건가요?” 
    절규하는 모습을 외신을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국교이기에 국민의 80%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쓰나미로 폐허가 되자 그들은 ‘신의 부재’를 심각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신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몰지각한 이들은 이런 재앙을 향해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는 투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런 식의 해석은 성경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한다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거짓 선지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으니, 비밀입니다.

    본문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그런데 그럼에도 왜 이리되었습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해지고자 하는 무한소비와 무한욕구를 부채질하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늘 힘없고 약한 이들이 더 큰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경고를 하나님은 수도 없이 보여주고 계시지만, 선지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참 선지자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밀을 보는 사람들, 그것을 보았기에 전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붙들려 사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그는 어떤 선지자였습니까?

    유다왕 웃시야 시대에 드고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밀을 듣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너희가 죄를 돌이키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상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의 죄악상까지 고발합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너무 직설적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그 죄악상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지키는 절기를 미워하고 성회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제사를 드려도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구역질 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하라’(암 5:12-24)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로 넘어오면 하나님의 비밀은 특별한 이들에게만 보여집니다.

    마가복음 4장 11절에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하십니다. 이것도 하나의 비밀인데, 누가복음 8:10절에 의하면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로 넘어가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는 사도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비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사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도 하나님과 사랑, 이웃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빌은 더 이상은 비밀이 아니게 됩니다.

    골로새서 1:26절에 말씀에 의하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비밀이 공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만 사도만 혹은 목사만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 나오는 ‘비밀’이라는 단어를 따라가며 저는 시크릿 가든(비밀의 정원)을 떠올린 것입니다. 교회 뒤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잘 활용하면 아주 좋은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만, 교회 땅이 아니므로 조심스럽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어떤 식물이 잘 자랄 것인지 살피는 중입니다. 거기에 토지주가 거부감을 갖지 않을 정도로 휴식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남교회는 언덕 위에 있어서 올라다니기 쉽지 않지만, 이만한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교회도 드뭅니다. 언덕길을 위시해서 우리의 공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마치 ‘비밀의 정원’과도 같습니다. 이 비밀의 정원이 잘 가꿔지면, 많은 이들이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육간의 휴식, 이것이 가능한 한남교회가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오시면, 교회에 작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 그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에 민감한 사람, 그것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비밀을 본다고, 안다고 다 기쁜 것이 아닙니다. 때론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뜻과 달라서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드러내는 일,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남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이들을 파파라치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런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비밀을 제대로 보고 폭로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는 고난도 당합니다. 아니, 대체로 고난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을 내게 보여주셨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 행복 때문에 아프기도 하지만, 나는 그 비밀을 선포하고 내 삶의 영역에서 삶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분들답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산,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비밀의 정원입니다.*


  • 선지자를 통한 계시 :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아무에게나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종 선지자들에게 먼저 알리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심판의 선포 :
    이 비밀은 주로 이스라엘이 받을 심판과 재앙에 대한 경고와 관련됩니다. 사마리아에 임할 심판이 예고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선지자들에게 그 계획을 알리시고, 선지자들은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 재앙의 필연성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이는 선지자를 통한 경고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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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log.naver.com/jhunkim319/221474863393

    구약의 선지자들(선지자 연구)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12:6)

     


    * 선지자(先知者)의 출현

      사무엘 이전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은 자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지자로 불린 아브라함,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창20:7 중)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였던 모세,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사사 겸 선지자로 활동했던 드보라 등입니다.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4:4) 그러나 본격적인 선지자들의 등장은 사무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 선견자와 선지자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로 일컬었더라)”(삼상9:9)

    구 분

    원어의 의미

    차이점

    공통점

    선지자

    히브리어 ‘나비’로

    ‘말하는 자’(spokesman),

    ‘예언자’(prophet)라는 뜻

    ① 선견자는 계시를 받고 선지자는 계시를 선포함

    ② 선견자는 선지자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되던 용어(삼상9:9)

    ① ‘호제’와 ‘로에’는 선지자를 지칭하기도 함(사30:9~10)

    ② 양자는 결국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임(삼하24:11)

    선견자

    히브리어 ‘호제’ 또는 ‘로에’

    모두 ‘보는 자’(seer)라는 뜻


    * 다윗 역시 선지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소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29~30)

      다윗 역시도 사도 베드로에 의해 선지자로 증거를 받고 있는데(행2:30), 실제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였던 헤만’(대상25:5)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와 환상을 받아서 75편 가량의 시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궁정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중 일부는 궁중에 기거하거나, 또는 통치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예컨대 사무엘, 나단, 갓은 다윗 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정치적 영향력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제도권의 선지자들을 일반적으로 ‘궁정 선지자’로 일컫습니다.

     

    * 문서 선지자

      선지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타인에 의해 예언 내용이나 사상만이 전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보통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전 8~6세기에 활발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보통 붓과 두루마리를 들고 설교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구약의 대, 소선지서 기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大)선지서와 소(小)선지서

    이 구분은 해당 선지자의 활동기간이나 역량이 아닌, 그들이 남긴 선지서의 분량에 따른 구분입니다.

    구 분

    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5권)

    소선지서

    호세야,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2권)


    *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여기서 ‘나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1차적으로는 모세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날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키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모세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이며(출24:6~8) 왕이며(신33:5) 선지자(신24:10)였던 것처럼, 온 인류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왕이시고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3:22,23) /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행7:37)

     

    * 하나님의 비전: 만인(萬人)선지자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다 선지자 되길 원하셨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율법적 분리를 상징하던 휘장이 찢어진 이래,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게 됨으로써, 또한 보혜사 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임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2:28,29) / “이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구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6~18)

     

     

    <구약의 선지자들 1>

    초기의

    선지자들

    • 아브라함(창20:7)

    • 모세(신34:10)

    • 미리암(모세의 누이 / 출15:20)

    • 드보라(사사 겸 여선지자 / 삿4:4)

     

    통일왕국

    시 대

    • 사무엘(마지막 사사, 제사장 겸직)

    • 다윗(시편 75편을 저작 / 행2:30)

    • 선견자 헤만(찬양대장 / 대상25:5)

    • 나단(삼하7:2~17, 12:1~25)

    • 갓(선견자 / 삼상22:5)

    • 아히야(실로 사람 /왕국 분열을 예언)

    분열왕국

    시 대

    • 스마야(왕상12:22~24)

    왕국 분열 직후의 남북 전쟁을 막음

    • 아사랴(대하15:1~7)

    오뎃의 아들, 아사의 개혁 촉구

    • 선견자 하나니(아사에 의해 투옥됨)

    • 선견자 예후(대하19:2,3)

    하나니의 아들 / 여호사밧을 규탄함

    • 야하시엘(레위인 / 대하20:14~17)

    • 마레사 사람 엘리에셀(대하20:37)

    아하시아와 교제하는 여호사밧 규탄

    • 디셉 사람 엘리야(대하21:12~15)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24:20~22)

    요아스를 규탄하다가 순교를 당함

    • 브두엘의 아들, 요엘(욜1장~3장)

    유다인들의 회개를 촉구함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사1~66장)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 미가(미1~7장)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 엘고스 사람, 나훔(나1~3장)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 하박국(합1~3장)

    요시아 왕의 재위 말기 예언 활동

    • 여선지자 훌다(왕하22:14~20)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 스바냐(습1~3장)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촉구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렘1~52장)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함

    •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렘26:20~23)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 아히야(왕상14:1~18)

    실로 사람 / 여로보암의 멸문 예언,

    • 무명의 선지자(왕상13:1~32)

    유다 출신 / 벧엘 제단 규탄

    • 예후(왕상16:7)

    하나니의 아들 / 바아사를 책망함

    • 디셉 사람 엘리야(왕상17장~왕하2장)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 미가야(왕상22:13~28)

    이믈라의 아들 / 아합의 죽음 예언함

    • 엘리사(왕상19:16~왕하13:21)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함

    • 브에리의 아들, 호세야(호1~14장)

    고멜과 혼인, 북이스라엘의 회개 촉구함

    •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암1~9장)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 예언, 회개촉구

    • 아밋대의 아들, 요나(욘1~4장, 왕하14:25)

    니느웨의 회개 촉구, 이스라엘 영토회복 에언

    • 오뎃(대하28:9~11)

    사마리아군인들에게 유다 포로의 석방 촉구

     

     

     

     

     

     

     

     

     

    바 벨 론

    포로시대

    • 제사장 출신, 에스겔(겔1~48장)

    바벨론 포로민들을 향한 예언 사역

    • 오바댜(옵1장)

    유다 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 예언

    • 예레미야(렘40~44장)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 예언활동

    • 다니엘(단1~12장)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활발한 활동, 예언

    포로귀환

    이후시대

    • 학개(학1~2장, 스5:1,2)

    백성들의 각성, 성전의 재건 촉구

    • 스가랴(슥1~14장, 스5:1,2)

    잇도의 손자, 선지자 학개와 동역함

    • 말라기(말1~4장)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사역, 백성들의 각성 촉구

    (분열왕국시대의 남북 선지자의 분류는 출신지역이 아니라 활동 지역이 기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2> (편의상 사무엘부터 기술)

    선지자

    활동시기

    (주전)

    부친이름

    (고향)

    특징 및 주요활동

    주요 본문

    사무엘

    1075~1017

    엘가나의 아들

    (라마)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뜻

    최후의 사사, 최초의 선지자

    사사시대와 통일왕국 과도기에 활동

    미스바 신앙부흥운동을 주도함

    사울, 다윗 두 사람에게 기름 부음

    다윗의 행적을 기록함(사무엘의 글)

    삼상1:1~25:1

    대상29:29

    나단

    1010~930

     

    ‘선물’ 또는 ‘주는 자’라는 뜻

    다윗 왕조 때의 궁정선지자, 고문

    아사리아와 사붓의 아버지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게 회개 촉구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행적을 기록함 솔로몬에게 기름 부음

    삼하7:2~17; 12:1~25

    헤만

    1003~945

    요엘의 아들

    ‘충실, 신실’이라는 뜻

    다윗, 솔로몬 시대의 충실한 성가대장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로 명성 떨침

    왕의 선견자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기도 함, 예배찬양의 규범 제작

    대상6:33

    15:16~19

    16:41~42

    1010~970

     

    ‘행운’이란 뜻

    다윗 왕 때의 선견자, 다윗이 도망 중일 때 이방 땅에 머물지 말고 유다로 들어가라고 함, 다윗의 통치 말기에 인구조사를 행함으로 범죄하자,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전했음. 다윗의 행적 기록

    삼상22:5; 24:11~19

    아히야

    10세기 초

    (실로)

    ‘여호와의 형제’라는 뜻

    왕국 분열 및 여로보암의 등극 예언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을 선포함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함

    왕상11:29~40; 14:1~18

    스마야

    930~913

     

    ‘여호와께서 응답하심’이란 뜻

    왕국분열 직후의 남북전쟁을 막음

    르호보암 왕의 행적을 기록함

    대하11:2~4; 12:5~8

    잇도

    970~910

     

    ‘찬양하는’이란 뜻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의 행적 기록함(묵시책과 주석책 등)

    대하9:29; 12:15: 13:22

    아사랴

    910~

    오뎃의 아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라는 뜻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온 아사에게 종교개혁을 촉구함.

    대하15:1~7

    하나니

    874~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이라는 뜻

    이 단어는 ‘하나냐’의 단축형임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람과 연합한 아사를 책망하다가 투옥됨

    대하16:7~10

    예후

    909~886

    하나니의 아들

    ‘그는 여호와’라는 뜻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바아사를 꾸짖고 그 멸망을 예언함

    여호사밧이 악인을 도운 행위를 질책

    대하19:2,3

    왕상16:7,12

    엘리야

    875~850

    (디셉)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북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

    갈멜 산에서 바알선지자 850명 처단

    여호와야말로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

    선지자 엘리사의 스승

    유다왕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병거 타고 승천한 불의 선지자

    왕상17~왕하2장

    대하21:12~15

    미가야

    869~850

    이믈라의 아들

    ‘누가 여호와 같으랴’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 연합군의 패배와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죽을 것을 예언

    왕상22:13~28

    야하시엘

     

    레위 사람

    스가랴의 아들

    모압,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둔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을 독려함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선포함

    대하20:14~17

    엘리사

    9세기 후반경

    사밧의 아들

    (아벨므홀라)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의 제자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

    선지학교를 세워 생도들을 육성함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킴

    왕상19:16 ~

    왕하13:21

    엘리에셀

    853년경

    도다아후의 아들

    (마레사)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

    유다 여호사밧 왕 때의 선지자

    여호사밧이 악한 아하시아와 교제함을 규탄, 그의 배가 파선될 것 예언

    대하20:37

    스가랴

    835~796

    여호야다의 아들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이라는 뜻

    요아스 왕을 즉위시킨 제사장 여호야다와 공주 여호사브앗의 아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들의 배교행위를 질책하고 심판을 선포함. 요아스의 의해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에 맞아 순교함

    대하24:20~22

    호세야

    793~710

    브에리의 아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

    고멜과 혼인하여 세 자녀를 둠

    북이스라엘의 출신으로 여로보암 2세 때 활동, 북이스라엘의 회개촉구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끝없는 사랑을 선포함

    성경기록(호세야)

    호1~14장

    아모스

    793~753

    (드고아)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뜻

    목자출신, 북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

    주변 7개국에 대해 차례로 예언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과 회개를 촉구함

    백성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촉구함

    ‘선지자의 아버지’로 일컬어짐

    성경기록(아모스)

    암1~9장

    요나

    798~752

    아밋대의 아들

    (가드헤벨)

    ‘비둘기’라는 뜻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지내기도 함.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기록함

    이스라엘의 영토회복 예언하기도 함

    성경기록(요나)

    욘1~4장

    왕하14:25

    오뎃

    740~732

     

    ‘부흥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와 싸워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올 때 그들을 유다로 돌려보내게 함.

    대하28:9~11

    요엘

    835~796

    브두엘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함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주로 활동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선포하면서 유다백성들의 회개 촉구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회개하고 성령을 경험할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요엘)

    욜1~3장

    이사야

    739~680

    아모스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

    여선지자인 아내와 두 아들 ‘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둠

    유다귀족출신, 주로 예루살렘에서 사역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므낫세 왕에게 순교를 당함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회개와 고난을 통한 소망을 강조함

    히스기야의 행적을 기록(사36~39장)

    성경기록(이사야)

    사1~66장

    대하32:32

    미가

    728~697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

    유다 출신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겸손, 자비, 정의에 대해 호소함

    메시야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

    성경기록(미가)

    미1~7장

    나훔

    612년경

    (엘고스)

    ‘위로자’라는 뜻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선포함

    성경기록(나훔)

    나1~3장

    하박국

    612~605

     

    ‘껴안은 자’라는 뜻

    요시야 왕의 재위 말기에 예언 활동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

    성경기록(하박국)

    합1~3장

    훌다

    622

    살룸의 아내

    (예루살렘)

    여선지자, 예루살렘 둘째 구역 거주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책에 대해 예언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왕하22:14~20

    대하34:22~28

    스바냐

    630년경

    구시의 아들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이라는 뜻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에 젖어 있는 유다의 각성촉구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경고함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겸손한 자들의 소망을 강조함

    성경기록(스바냐)

    습1~3장

    우리야

     

    스마야의 아들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렘26:20~23

    예레미야

    627~586

    힐기야의 아들

    (아나돗)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요시야를 위해 애가를 지음

    유다의 멸망과 회복 예언, 독신생활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의 활동, 순교

    애굽에서 우상숭배하는 동족들을 꾸짖다가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됨

    새 언약의 약속을 예언함.

    성경기록(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렘1~52장

    대하35:25

    에스겔

    593~570

    부시의 아들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포로시대의 제사장이며 선지자

    포로민들을 중심으로 한 예언 사역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향한 미래 소망

    성경기록(에스겔)

    겔1~48장

    오바댜

    586년경

     

    ‘주의 종, 주의 경배자’라는 뜻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 당한 직후에, 유다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을 예언함.

    성경기록(오바댜)

    옵1장

    다니엘

    605~536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

    유다 지파의 왕족 출신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바벨론포로지에서 활발한 활동, 예언

    구약의 계시록으로 평가되는 ‘다니엘서’를 기록함

    단1~12장

    학개

    520~515

     

    ‘축제, 즐거움’이라는 뜻

    포로생활 중 제사장 가문에서 출생

    1차 포로귀환 때 함께 돌아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공사가 16년이나 중단되자,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성전의 재건을 촉구함

    하나님의 집을 우선할 것을 강조함

    성경기록(학개)

    학1~2장

    스5:1,2

    스가랴

    520~470

    잇도의 손자

    베가랴의 아들

    ‘여호와를 기억함’이라는 뜻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음.

    학개와 마찬가지로 성전 재건 독려

    8가지 상징적 환상을 보고 기록함.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를 강조

    성경기록(스가랴)

    슥1~14장

    스5:1,2

    말라기

    433~432

     

    ‘나의 천사, 나의 사자’라는 뜻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가 가나안 땅을 떠나 있던 시기에 해이해진 백성들을 향해 각성을 촉구함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분의 의를 기다릴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말라기)

    말1~4장

     

    <4대 선지서 비교>

    구 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사역연대 (주전)

    739~680

    (60년간)

    627~586

    (41년간)

    593~570

    (23년간)

    605~536

    (70년간)

    소 명 장

    사 6장

    렘 1장

    겔 1~3장

     

    출신지, 사역지

    예루살렘

    아나돗, 예루살렘

    바벨론 그발강변

    예루살렘, 바벨론

    예 언 대 상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과

    남은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

    이방나라 왕들과 포로된 유다인

    중 심 내 용

    하나님께서 남은 자에게 영광스런 미래를 약속하심

    예루살렘의 죄, 운명, 미래의 영광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영광스러운 미래

    4개 왕국과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

    역사적 배경

    왕하 15~20장

    대하 26~30장

    왕하 24~25장

    단 1~6장

    단 1~6장

    정치적 상황

    시리아, 이스라엘의 위협

    앗수르의 위협

    북이스라엘 멸망

    애굽과 앗수르

    2강의 각축전

    앗수르의 멸망 바벨론의 등장

    1차 바벨론포로

    애굽과 바벨론 2강의 각축전

    백성 중 일부가 포로됨(2차)

    예루살렘의 함락

    유대인들의 3차 바벨론 포로

    종교적 상황

    우상숭배 성행

    외식적 예배 만연

    히스기야의 개혁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 사후

    다시 과거로 회귀

    거짓선지자 만연

    전민족의 불순종

    불신, 반역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 그러나 소수의 남은 자

    메시야에 대한

    비유적 표현

    싹, 나의 종

    의로운 가지

    여호와 우리의 의

    백향목의 연한 가지

    돌, 인자,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언의 강조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가르침

    바벨론 포로의 당위성, 이를 회개의 기회로 삼아 더 큰 구원을 사모할 것 촉구

    범죄 결과에 대한 단체적, 개인적 책임, 언약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등을 가르침

    열국의 우상보다 뛰어난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장소, 상황에 구애 받지 않음을 보여줌

    구 성

    66장

    52장

    48장

    12장

    표현상의 특징

    선포와 경고

    상징적 행위

    비유와 묵시

    역사와 묵시

    중심단어

    구원은

    여호와의 것

    유다의 멸망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비 고

    복음의 선지자

    메시야의 선지자

    눈물의 선지자

    심판의 선지자

    희망의 선지자

    환상의 선지자

    포로기의 선지자

    이방 시대의 선지자

     

        













    선지서와 선지자


    선지자 엘리야 하늘로 올라가다 (왕하 2장)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라 정의합니다.

    • (민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성경(구약)은 선지자들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들에서 뿐 아니라 선지서라 분류된 책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그 자료들을 모아 요약합니다.

    선지서 분류

    분열 왕국 시대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

    구약의 선지자들은 솔로몬 왕 이후 남 유다 북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네명의 대선지자와 열두명의 소선지자로 구분할 수 있다. 대와 소의 구분은 그들의 사역이나 업적의 구분이 아닌 선지서 책의 분량으로 나눕니다.

    대선지서

    에스겔의 환상에서 본 마른 뼈들이 살아남 (겔 37장)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애가, 에스겔서, 다니엘서

    소선지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Micah), 나훔, 하박국, 스바냐 (Zephaniah)학개, 스가랴 (Zechariah), 말라기

    시대별 분류

    선지자 사역 당시 시대 배경

    • (BC 930) 남유다 (르호보암 왕)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분열과 부패 시작 --> 분열 왕국 시대
    • (734-732) 앗수르의 공격 --> 아람 (시리아), 블리셋,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의 일부 앗수르에 조공 받침
    • (722-721) 앗수르 사마리아 점령, 북이스라엘 망함 (북이스라엘왕 호세아 왕) --> 남유다 잔존 왕국 시대
    • (701) 유다 앗수르에 반란했지만 실패 --> 예루살렘은 해를 입지 않음 (히스기야 왕)
    • (586) 바벨론 (느부갓네살 (Nebuchadnezzar)에 의해 남 유다 망함 (시드기야 왕) --> 포로 시대
    • 포로 생활 70년 후 귀환 시작

    분열 왕국 시대

    핀 숯을 가진 천사와 이사야 (사6:6)
    • 요엘 (835-796): 여호와의 날, 성령의 강림, 통치자: 요아스
    • 요나 (793-753, 니느웨):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이스라엘의 부흥, 여로보암 2세
    • 엘리야 (북이스라엘): 아합가의 멸망
    • 미가야 (764-724, 북이스라엘): 아합의 죽음
    • 호세아 (764-723),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함락,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에 의존하는 이스라엘 책망, 여로보암 2세
    • 엘리사 (760-785, 북이스라엘): 아합가의 멸망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 (왕하 4장)

    남유다 잔존 왕국

    고뇌하는 예레미야

    바벨론 포로 시대

    포로 귀환 이후

    관련 자료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는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관련 문서

    검색: 선지자
    

    나단 (Nathan), 나훔 (Nahum), 다니엘 (인물), 말라기 (Malachi), 미가 (Micah), 미가야 (Micaiah), 선지서와 선지자, 선지자 표, 스가랴 (Zechariah), 스바냐 (Zephaniah), 스바냐 (인물), 아모스 (Amos), 에스겔 (인물), 엘리사 (Elisha), 엘리야 (Elijah), 엘리에셀 (Eliezer), 예레미야 (인물), 오뎃 (Oded), 오바댜 (Obadiah), 요나 (Jonah), 요엘 (Joel), 이사야 (Isaiah) - 인물, 하나니 (Hanani), 하박국 (Habakkuk), 학개 (Haggai), 호세아 (Hosea)

    참고한 자료

    • 구약성경개론 (Survey of the Old Testament - 폴 N. 벤웨어)


    구약 선지자들의 연대기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현재 기록이 전해지는 16명의 선지자들은 BC 800년경부터 400년까지 4세기 동안 활동했다. 그들 대부분은 봉사 기간을 최소한 대략적으로라도 확정지을 수 있도록 연대 자료를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요엘과 오바댜)의 경우 사역 시기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매우 다르다.

    첨부된 도표를 통해 독자는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 선지자들을 연구할 수 있다. 많은 예언과 기별은 선지자들이 봉사했던 시기의 상황과 대비시키고 그들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에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 특별히 후기 왕들의 시대를 비교적 매우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16명의 선지자들이 봉사했던 시기에 다스렸던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이 본 주석에서 채용한 잠정적인 연대기에 따라 이 도표에 편입됐다(참조 제3권, 107; 제4권, 54, 76, 99, 100, 322). 이 시기에 다스렸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왕들의 비교적 잘 정립된 연대도 다른 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왕들 대부분은 성경의 예언서나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다. 또 한 난에는 이 기간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의 목록이 나와 있는데, 일부는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국들에서 일어난 국외 사건에 관한 것이고 일부는 국내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 도표에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으며 예언적 기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만 나와 있다.
    다음의 간략한 요약에는 여러 선지자들이 도표에서 각각 해당 연대에 표시된 것에 관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이사야는 성경 기자들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이 사실은 여러 신약 기자가 인정하는 바, 그들은 이사야서를 90회 이상 인용했다. 이사야는 남방 왕국의 선지자로,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에 살았다. 그는 두 번의 결정적인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 아하스 치세 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던 시기(사 7~11장),
    (2) 히스기야 치세 때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위했던 시기(36, 37장).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통해 히스기야와 백성을 독려한 그는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의 초기 봉사는 웃시야 왕 통치 말기와 일치하는 것 같지만(참조 이사야 서론), 공식적인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은 웃시야 왕의 마지막 해인 BC 740/739년에 있었다(6:1). 이어지는 세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치세 아래서 신실하게 봉사했던(1:1) 그는 히스기야의 악한 아들 므낫세에게 극도로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므낫세는 BC 686년경 그의 아버지의 사망 직후 단독 통치자로 보좌에 등극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그 신실한 선견자를 제거하였다(선지자와 왕, 382).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당하여 죽었다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37절이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웃시야부터 므낫세까지 이사야의 전 봉사 기간은 반세기 넘게 지속됐음에 틀림없다(선지자와 왕 310, 382,).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일대기는 다른 선지자에 비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나돗이 고향이었던 제사장의 가문에 속했다. 예레미야는 출생 전부터 하나님에게 택함 받아 직무를 맡았고(렘 1:5) 어린 나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1:6, 7). 선지자가 자신을 가리켜 말한 “청년” 혹은 “아이”(1:6)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아르(na‘ar)는 예레미야가 정확히 몇 살에 부름을 받았는지 드러내 주지는 않지만, 이 단어가 들어있는 구절의 문맥이 적어도 20세 미만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이 부르심은 BC 627/626년 요시야 왕 제13년(1:2; 25:3)에 있었다. 그 당시 요시야는 불과 21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왕이었다.
    예레미야는 조국이 위기를 겪던 시기에 살면서 동포에게 책망의 기별과 앞으로 닥쳐올 파멸에 대한 엄중한 예언을 많이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여호야김 치세 때는 담대한 기별로 인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36:26).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치세 때는 바벨론인들에게 항복하라고 권고했다는 이유로 배반자로 여겨져 투옥됐다(37:11~16).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후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가 유다에 남게 된 동포와 지내도 좋다고 허락했다(40:1~6). 유다의 새 총독 그다랴의 피살 후 미스바의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와 그의 서기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갔다(43:6).
    애굽에서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행하던 우상숭배를 강하게 질타했다(43, 44장). 그는 나일강 지역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유대인의 전설 가운데는 그가 동포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적인 후기(後記)인 52장을 예레미야가 기록했다면 그는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Evil-Merodach)이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방면했던(참조 52:31) BC 561년까지 살았음에 틀림없다. 이럴 경우 그는 80대였을 것이다. 52장이 예레미야의 서기나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영감받아 기록한 후기로서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약 20년 앞선 BC 580년경에 죽었다고 믿는다. 도표에는 두 의견을 다 반영하여 실재했을지 모를 BC 560년 이전 20년의 봉사 기간을 점선으로 표시했다.

    에스겔
    선지자 겸 제사장인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압송됐던 BC 59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로 잡아갔던 유다인 10,00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호야긴이 포로 된 지 제5년인 BC 593/592에 에스겔은 바벨론 남부 닙푸르(Nippur)라는 유명한 도성 인근의 한 운하였던 “그발강”가에서 첫 번째 계시를 보았다(겔 1:1~3). 포로 된 지 제5년을 그가 “제삼십년”이라고 언급한 것은 수수께끼이다. 선지자가 자신의 나이를 그렇게 지칭했거나 아니면 그 해가 요시야 왕이 개혁을 일으킨 지 제30년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에스겔의 여러 기별은 정확한 연대를 매길 수 있으며 연대가 매겨진 예언 기별 중 마지막은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제27년(29:17)인 BC 571/570년에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BC 593/592년부터 BC 571/570년까지 적어도 22년의 봉사를 한 셈이 된다. 그러나 연대가 매겨지지 않은 일부 예언이 그 이후에도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BC 571/570년을 굳이 그의 봉사의 마지막 해로 구분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인 BC 605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참조 단 1:1 주석). 하지만 젊은 다니엘이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최초의 증거를 보여 준 사건은 느부갓네살 제2년 곧 그가 포로 된 지 제3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1:5, 17; 2:1, 19). 따라서 BC 603년을 다니엘이 선지자로 봉사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한동안 그는 느부갓네살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고(2:48) 그 위대한 왕에게 신임받는 모사가 됐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들의 치세 때는 다니엘의 조력이 요청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벨론이 멸망하던 밤, 벽에 기록된 신비스런 글자의 해석자로서 다시 한 번 역할을 담당한다(5장). 이 사건 직후 그는 새롭게 형성된 페르시아 제국에서 또다시 명예롭고 책임이 막중한 고위관직에 오르게 되었다(6장).
    7~12장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다니엘이 말년에 받은 것인데, 첫 번째 계시(7장)는 벨사살 원년(BC 552년 혹은 그 후)에, 마지막 계시(10~12장)는 고레스 제3년인 BC 536/535년에 주어졌다. 그가 책을 마무리짓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가 이 시기였을 것이며, 이때 다니엘은 거의 90세였을 것이다(12:4, 13). 이런 이유로 다니엘의 광범위한 선지자 봉사 기간은 대략 BC 603년에서 535년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의 시민이었는데, 당시는 그가 “우리 왕”(호 1:1; 7:5)이라고 부른 여로보암 II세가 통치하던 때였다. 호세아의 예언 일부와 아모스의 예언을 비교해 보면 호세아가 동시대의 아모스보다 젊었다는 점이 드러난다(참조 호 4:3과 암 8:8; 호 4:15과 암 5:5; 호 8:14과 암 2:5).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호 1:1)에 봉사를 시작한 호세아는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계속 활동했다(1:1). 그러나 그의 모든 기별은 북방 왕국에게 보낸 것이었다.
    호세아서에는 BC 723/722년에 일어난 사마리아의 함락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선지자의 마지막 기별은 사마리아의 멸망 전에 주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봉사는 약 BC 755년(혹은 그전)부터 BC 725년경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요엘
    선지자 요엘에 관해서는 브두엘의 아들(욜 1:1)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저작은 능란한 말솜씨와 균형 잡힌 구문과 생동감 있고 인상적인 시(詩)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책에는 선지자가 살았던 시기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선지자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며 다가올 심판날의 두려움과 비교하는 파괴적인 황충 재앙의 시대를 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요엘이 봉사했던 시기에 관해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전 세대의 학자들은 그를 BC 9세기 사람으로 보는 반면, 현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의 시기를 요시야 왕 시대나 바벨론 유수 이후로 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의 세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를 여기에 제시한다.
    1. 9세기 견해
    대제국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 선지자의 시계(視界) 안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그는 앗수르가 팔레스타인 정세에 어떤 역할을 하기 이전 시대에 일했던 것 같다. 이방 민족들이 유다에게 자행한 적대 행위들(3:4 이하)은 열왕기하 8장 20~22절과 역대하 21장 8~10절에 기록된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반면 왕하 12:17, 18과 대하 24:23, 24에 기록된 하사엘의 침공을 지적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요엘이 이 두 사건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별을 전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린 왕 요아스를 위해 섭정하던 시절(왕하 11:17~12:2)에 봉사했다고 여겨지는데, 이 사실은 요엘서 어느 곳에도 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한편 그 당시에는 성전봉사가 잘 이뤄지고 있었다.
    2. 7세기 견해
    이 견해는 요엘의 봉사가 요시야 초기, 곧 앗수르 세력이 거의 끝나고 바벨론이 아직 약한 왕국이었던 시기에 들어맞는 것 같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두 왕국에 관한 언급을 이 선지자가 전혀 안 했던 것이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보좌에 올랐기 때문에 섭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요엘이 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에 대한 설명이 된다. 더욱이 두로와 시돈 백성이 유다 역사의 마지막 수십 년이 돼서야 적대국으로 등장하는 반면, 요엘이 그들을 유다의 원수로 언급한 사실은 이 선지자의 봉사가 늦은 연대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기에 헬라에 관한 언급(욜 3:6)을 덧 붙일 수 있는데, 헬라는 BC 7세기 이전에는 근동 역사에서 활약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확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지라도 본 주석에서는 7세기를 요엘서의 연대로 채택했다.
    3. 바벨론 유수 후 견해
    유다 왕이나 앗수르 혹은 바벨론에 관한 언급이 없으나, 두로와 시돈의 적개심과 헬라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을 일부 주석가들은 요엘서가 포로 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대한 언급, 즉 그렇게 늦은 연대에 기록됐다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요소도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로 인해 이런 늦은 연대를 지지하는 논거는 약해진다.

    아모스
    아모스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목자” 그리고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암 1:1; 7:14)로 제시한다. 책 서두에서 그는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II세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밝힌다. 두 왕만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아모스는 두 왕이 각자의 나라에서 단독 통치자로 있던 시대에 예언했던 것 같다. 웃시야는 유다에서 BC 767년부터 750년까지,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에서 BC 782년부터 753년까지 단독으로 통치한 왕이었다. 첫 번째 기별이 “지진 전 이년”(1:1)에 임했다는 언급이 있는데도 더 정확한 연대 추정이 불가능한 이유는 지진의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진은 매우 강력했음에 틀림없는데, 이는 스가랴 14장 5절을 보면 그 지진에 대한 기억이 250년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다의 국민이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에도 기별을 전했다. 그의 기별 중 일부는 여러 이방 민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성소가 있는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에 닥칠 운명과 경고와 견책의 예언들을 전했다.

    오바댜
    21절로만 구성된 짧은 책 오바댜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으며 연대적 배경도 불확실하다. 에돔에 대한 경고인 오바댜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최근에 일어났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오바댜가 BC 9세기 여호람 왕 시대에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사실(왕하 8:20~22; 대하 21:8~10, 16, 17)을 언급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일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가 사용한 단어 일부가 예레미야(옵 1:1, 3, 4절; 참조 렘 49:14, 16)와 요엘(옵 1:15, 17절; 참조 욜 1:15; 2:1, 32)에도 나온다는 점이 늦은 연대인지 이른 연대인지 밝히는 증거로 사용되기 힘들다. 본 주석에서는 이른 연대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늦은 연대를 채택하고 있다.

    요나
    선지자 요나는 가드헤벨 출신의 갈릴리 사람이었다. 그의 책에는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시기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요나가 여로보암 II세가 성취할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에 관한 예언을 선포했다고 나와 있다. 이 예언은 여로보암이 즉위하기 전(약 BC 793년)이나 그의 통치 초기에 선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요나는 여기서 논의하는 선지자들 중 가장 초기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나의 봉사 시기를 BC 790년경으로 이른 연대로 잡는 것은 앗수르의 역사와 잘 부합한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사명과 그 결과가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간은 아닷-니라리 III세(Adad-nirari III, BC 810~782) 치세이다. 그의 통치 중 짧은 시기 동안 앗수르는 다신교 신앙에서 단일신 나부(Nabu) 숭배 신앙으로 돌아섰다(참조 제3권, 82).

    미가
    미가는 아마도 유다 남서부 텔 엣-주데이데(Tell ej-Judeideh)로 보이는 가드모레셋(미 1:1, 14) 출신의 선지자였다. 미가를 아합 시대(BC 9세기)에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초기 주석가들은 이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려고 했는데, 이는 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미 1:2; 참조 왕상 22:28). 그러나 미가가 제시한 연대적 자료는 이렇게 보는 것과 부합하지 않으며, 두 사람 사이에 한 세기 이상의 시차가 있음을 보여 준다. 미가는 자기의 봉사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미 1:1) 시대에 해당한다고 언급한다. 요담의 단독 통치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죽던 BC 740/739년 후에 시작됐기 때문에, 미가의 선지자 봉사의 시작 연대도 웃시야의 사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보다 조금 어린 동시대 사람인데, 그의 예언은 어휘와 용어 면에서 이사야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난다(미 4:1; 참조 사 2:2~4). 예레미야(렘 26:18)도 미가서(미 3:12)를 인용하며 미가가 히스기야 시대에 봉사했음을 증언한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춰볼 때 미가는 약 BC 740년부터 700년경까지 예언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훔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 불린다(나 1:1). 엘고스라는 지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석가들은 이곳이 갈릴리 북부에 있는 엘케시(Elkesi), 모술(Mosul) 인근의 알쿠쉬(Alkush), 유다의 엘류쎄로폴리스(Eleutheropolis) 인근 마을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남방 왕국에서 살고 일했으며, 그의 주요 예언이 전반적으로는 앗수르를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니느웨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나오지 않지만 선지자는 노(No)의 멸망을 과거사로 말하고 있다(3:8). 헬라식 명칭인 테베(Thebes)로 더 잘 알려진 상(上)애굽의 이 수도는 BC 663년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에게 멸망당했는데, 이 해는 나훔이 예언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의 상한선이 된다. 반면 니느웨의 멸망은 장래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다(3:7).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가 멸망당했고, 따라서 이 해는 나훔이 예언한 시기의 하한선이 될 수 있다. 테베에 임한 파멸에 관한 선지자의 생생한 묘사는 그 사건이 백성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앗수르는 세력이 기울고는 있었지만 아직 파국에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서 테베의 멸망과 니느웨의 멸망 연대의 중간쯤 되는 BC 640년이 나훔의 예언적 봉사에 합당한 추측 연대일 것 같다.

    하박국
    하박국에 관해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하박국 3장이 “영장”에게 바치기 위해 “내 수금에 맞춘 것”(합 3:19)이라는 기록을 보면 그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하박국서에 나오지 않지만 하박국의 예언 시기를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언급들이 일부 있다. 성전이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2:20) 하박국서는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기록됐음이 드러난다. 더군다나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나 서방을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1:5~7). 이 상황은, BC 626/625년에 통치를 시작하여 메대와 함께 앗수르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 치하의 갈대아 제국이 일어나기 전 시기에 가장 잘 맞는다. 갈대아 사람들이 주요 세력이 되기 전인 BC 630년경이 하박국의 예언 활동 시기로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Hezekiah)로 보이는 히즈키야(Hizkiah, 두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같음)라는 중요 인물에 이르기 까지 자기 계보를 소급한다. 그는 BC 640년에서 609년까지 다스렸던 요시야 왕(습 1:1)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진술한다. BC 612년에 일어난 니느웨의 멸망이 미래의 사건으로 언급된 점은 스바냐의 사역이 이 연대보다 앞서 진행됐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유다의 죄악이 당대에 엄청났다고 반복하여 언급한 것(참조 1:4~6, 8, 9, 12; 3:1~3, 7)은 BC 622/621년에 시작된 요시야의 개혁 이전 시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스바냐는 아마도 BC 630년경 요시야의 통치 초기 곧 하박국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개
    한동안 중단됐던 성전 재건(스 4:24; 5:1)은 학개의 담대한 봉사를 통해 다리오 I세 때 재개되었다. 학개서에는 연설 네 개가 들어 있는데, 각각에는 다리오의 정확한 통치 연월일이 나와 있다. 학개서의 이어지는 순서를 통해, 기록된 그의 봉사 기간은 BC 520년 8월 29일에 시작하여(학 1:1) 마지막 두 편의 연설(2:10, 20)을 했던 BC 520년 12월 18일까지 전부 3개월 반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학개의 사역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연대를 매길 수 있는 다른 선지자는 없다.

    스가랴
    스가랴는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것 같다(슥 1:1; 참조 느 12:12, 16). 소명은 BC 520년 10/11월 어느 날 그에게 이르러 왔는데, 같은 해에 학개도 처음 등장한다(슥 1:1). 여러 예언이 두세 달 후에 연이어 임했다(1:7~6:15). 그런 뒤 그의 활동은 거의 2년 동안 잠잠했다가, BC 518년 12월 6일(7:17장과 8장에 기록된 또 다른 거룩한 기별을 받았다. 9~14장에 나오는 나머지 기별과 예언에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스가랴의 활동기간을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BC 520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BC 518년까지 계속했음은 알려져 있는 반면, 선지자 봉사의 끝은 정하지 않은 상태로 유보해야만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봉사의 마지막을, 잠정적으로 BC 510년이라고 정한다. 9~14장 부분이 훨씬 후에 주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좀 더 오래 일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라기
    말라기라는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말라기가 저자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익명의 저자에 대한 호칭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그의 책은 구약의 선지서 가운데 유일한 익명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말라기를 왜 고유명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
    말라기서는 선지서들의 배열에서 마지막 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저술된 마지막 예언서이기도 하다. 그 책의 기별은 유다 왕국 시대가 끝나고 총독이 나라를 치리하던 시대(말 1:8)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그때가 페르시야 시대임을 가리킨다. 성전은 분명히 재건됐고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사가 정규적으로 드려졌다(1:7~10). 말라기가 꾸짖었던 여러 악습은 느헤미야가 두 번째 총독 임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했던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말 3:8, 9; 참조 느 13:10~12; 말 2:11~16; 참조 느 13:23~27).
    불행하게도 느헤미야의 두 번째 총독 임기의 연대를 추정할 수 없기에 말라기의 연대를 정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는 BC 444년부터 432년까지 이어졌다가, 이후에 페르시아로 소환됐다. 거기서 그는 얼마간인지 알 수 없는 여러 해를 보낸 뒤 유대로 돌아왔을 때 느헤미야 13장에 기록된 악습들을 보게 된다. 이런 악습들은 총독의 단호한 조치로 시정되었다. 이를 통해 말라기의 사역은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에 뒤이어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시기 이전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BC 42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선지자들의 활동 장소와 시기를 시대순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지와 그 때의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들과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엘리야 (Elijah):

    왕: 아합 왕 (Ahab)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선지자 중 하나로,
    우상 숭배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특히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주도한 바알 숭배에 반대하여 유명한 갈멜산 대결을 벌였습니다.

    (2) 엘리사 (Elisha):

    왕들: 여로보암 2세, 여호아하스, 여호람 등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을 외적의 침략에서 보호하는 예언을 하고, 사회적 정의를 외쳤습니다.

    (3) 호세아 (Hosea):

    왕: 여로보암 2세 등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직전에 활동한 선지자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배신을 고발하고, 그 결과로 다가올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대한 경고로 유명합니다.

    (4) 아모스 (Amos):

    왕: ** ** 여로보암 2세
    아모스는 원래 남유다 출신이었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모스는 주로 사회적 불의, 부패, 그리고 종교적 위선을 강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네 명의 선지자들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으며,
    각기 다른 시기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초기와 중기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후기, 즉 멸망 직전에 활동한 선지자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지와 그 떄의 왕은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주요 선지자들과 그들이 활동한 시기의 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사야 (Isaiah):

    왕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이사야는 남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 하에서 활동한 선지자로,
    주로 히스기야 왕 때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죄악을 경고하고,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2) 예레미야 (Jeremiah):

    왕들: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 직전에 활동했으며,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했고,
    실제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3) 에스겔 (Ezekiel):

    왕들: 여호야긴 (유다의 마지막 왕 중 한 명, 바벨론으로 끌려갔음)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기 동안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유다의 멸망을 설명하고, 포로된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미래의 회복과 새 성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4) 미가 (Micah):

    왕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주로 사회적 불의와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5) 스바냐 (Zephaniah):

    왕: 요시야
    스바냐는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이전에 활동하며,
    유다의 죄악과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이 개혁을 단행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6) 하박국 (Habakkuk):

    왕: 여호야김
    하박국은 유다의 죄악과 바벨론의 압박 사이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하나님께 질문하며 답을 받는 형태의 예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신실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믿음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7) 요엘 (Joel):

    왕들: 정확한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여호사밧 왕 또는 요아스 왕 시기로 추정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회개와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8) 아모스 (Amos) (또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지만, 유다에 대한 예언도 포함):

    왕: 웃시야
    아모스는 주로 북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활동했지만,
    유다에 대한 예언도 했습니다. 그는 부패와 불의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활동하며,
    유다 왕국의 왕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들은 유다의 종교적 타락과 사회적 부패를 비판하고, 회개와 구원을 촉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용 : 다른 자료에서 발췌... 중복되기도 함

    선지자들의 활동 시기와 장소를 시대순으로 정리

    (1) 오바댜 (Obadiah)

    활동 시기: 주전 9세기 (정확한 시기는 불명)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2) 요엘 (Joel)

    활동 시기: 주전 9세기 (정확한 시기는 불명)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요엘은 메뚜기 재앙과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합니다.

    (3) 아모스 (Amos) *이스라엘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60-750년)
    활동 장소: 북이스라엘 왕국
    특징: 아모스는 주로 사회 정의와 도덕적 타락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4) 호세아 (Hosea) *이스라엘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50-722년)
    활동 장소: 북이스라엘 왕국
    특징: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5) 이사야 (Isaiah) *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40-700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예루살렘
    특징: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 활동하였으며,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많이 남겼습니다.

    (6) 미가 (Micah) *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40-700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미가는 주로 유다의 사회적 부패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7) 요나 (Jonah)

    활동 시기: 주전 8세기 (약 주전 780-750년)
    활동 장소: 아시리아 니느웨 (아시리아의 수도)
    특징: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아시리아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8) 나훔 (Nahum)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약 주전 660-620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아시리아 니느웨의 멸망 예언.

    (9) 스바냐 (Zephaniah)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약 주전 640-609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유다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

    (10) 예레미야 (Jeremiah)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말~6세기 초 (약 주전 626-586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예루살렘
    특징: 유바벨론 포로기 직전에 활동하였으며, 유다의 멸망과 포로됨을 예언했습니다.

    (11) 하박국 (Habakkuk) *

    활동 시기: 주전 7세기 말 (약 주전 612-589년)
    활동 장소: 유다 왕국
    특징: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과 바벨론의 침공 예언.

    (12) 에스겔 (Ezekiel)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593-571년)
    활동 장소: 바벨론 유배지
    특징: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들에게 예언을 전했습니다.

    (13) 다니엘 (Daniel)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605-536년)
    활동 장소: 바벨론 제국
    특징: 꿈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활동하며, 꿈 해석과 관련된 예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4) 학개 (Haggai) **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520년)
    활동 장소: 예루살렘
    특징: 학개는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예언을 했습니다.

    (15) 스가랴 (Zechariah) **

    활동 시기: 주전 6세기 (약 주전 520-518년)
    활동 장소: 예루살렘
    특징: 스가랴는 성전 재건과 메시아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16) 말라기 (Malachi) **

    활동 시기: 주전 5세기 (약 주전 430년)
    활동 장소: 예루살렘
    특징: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과 메시아의 오심 예언.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적 의미의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선지자란?

    '선지자(Prophet)'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비(נָבִיא)'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예언적 환상과 신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으며, 때로는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신앙적·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신탁을 전하는 전형적인 선지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다양한 영적 지도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들 또한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했으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 특정한 사명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특정 사건의 개입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와 희망을 전하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삶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선지자의 유형과 대표적 인물들

    1. 원시적 영적 지도자

    노아: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받고 방주를 준비하며 의를 전파했습니다(창 6-9장).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는 그를 '의의 전파자'로 칭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를 건축하며, 당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어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심판과 동시에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함: 하나님께 언약을 받아(창 12:1-3)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며,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전하는 중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 예정되었을 때 하나님께 중재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나타냈습니다(창 18장). 또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언약의 순종과 신실함의 본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믿음과 순종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보기가 됩니다. 그는 또한 각기 다른 시험과 도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확립하며,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언약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모세: 신명기 18장에서는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큰 선지자'로 제시됩니다. 그는 출애굽을 이끌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한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광야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민 14장). 모세는 여러 차례 백성의 불평과 반항에 직면했으나, 하나님께 끊임없이 중보하며 백성을 위해 희생하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전인적 역할을 포함했습니다.

    2. 왕이면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한 지도자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삼상 13:14) 메시아적 왕국의 모형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시편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남겼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에 대한 깊은 신앙적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다윗은 범죄 후에도 진심으로 회개하며(시 51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용서의 본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영원한 언약을 확립하실 것을 예고받았으며, 그의 후손이 장차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메시아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신앙과 리더십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중심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시대적 구분

    1. 신 앗수르 시대의 선지자들 (주전 9~7세기)

    • 이 시대의 주요 선지자 목록: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앗수르 제국이 점차 강성해지던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들로,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회적·종교적 타락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강조하면서도, 회복과 구원의 소망을 함께 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요나: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망쳤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닌웨에 도달해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요나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민족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닌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전적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극률에 대해 분노했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용서를 상징하는 강력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모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며, 이스라엘의 불의한 사회 구조와 위선적인 종교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부유층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행태를 규탄하며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고 선포했습니다. 아모스는 단순히 윤리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와 사회정의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 관계에서의 공정성과 배려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했습니다.

    호세아: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 배신을 표현하기 위해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의 사랑을 결혼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약속을 강조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할 때마다 그들이 겪을 심판과 고통을 경고했지만,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주어질 은혜를 역설했습니다.

    미가: 미가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해 불법과 우상숭배를 경고하며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미 4:3)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장차 올 평화로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가는 또한 "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 6:8)라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적 삶의 본질을 강조했습니다.

    이사야: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임마누엘 예언(사 7:14)을 통해 장차 올 메시아를 예고하며,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로움이 온 땅에 드러나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올 백성들을 위로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선포했습니다(사 65:17). 이사야는 또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고난받는 종의 예언(사 53장)을 통해 구속적 희생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2. 신 바벨론 시대의 선지자들 (주전 7~6세기)

    • 이 시대의 주요 선지자 목록: 예레미야, 하박국, 스바냐, 나훔, 에스겔, 다니엘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바벨론 제국의 침략과 유다 멸망이라는 역사적 위기 속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예고하며, 동시에 장차 회복될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포로기 동안 신앙을 지키며 새로운 희망을 품도록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과 멸망을 예언하며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으로의 포로 생활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했으며,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실 것을 약속했습니다(렘 31:33). 백성의 반발과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렘 29:11)라는 말씀을 통해 회복과 희망을 전했습니다.

    하박국: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지 질문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깊이 묻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그는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신앙적 원칙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박국은 마지막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라는 고백으로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스바냐: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과 구원을 예고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겸손하게 의를 구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심판 속에서도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나훔: 나훔은 닌웨의 멸망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앗수르의 잔혹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을 보여줍니다. 나훔은 또한 "여호와는 질투하며 보복하시는 하나님"(나 1:2)이라는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냈습니다.

    에스겔: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다양한 환상과 상징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을 전했습니다. 마른 뼈의 환상(겔 3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과 하나님의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는 성전 회복과 미래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을 선포했습니다. 에스겔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떠나는 장면을 통해 죄의 결과를 경고했습니다.

    다니엘: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왕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꿈과 환상을 통해 장차 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했습니다. 그의 사자굴 사건은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다니엘은 또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심"(단 7:13)이라는 예언을 통해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했습니다.

    3. 페르시아 시대의 선지자들 (주전 6~5세기)

    • 이 시대의 주요 선지자 목록: 학개, 스가랴, 말라기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가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용한 후, 선지자들은 성전 재건과 신앙 회복을 독려하며 언약의 성취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귀환 공동체가 새로운 신앙적 기초 위에 서도록 인도했습니다.

    학개: 학개는 성전 재건의 중요성을 외치며, 백성들이 개인적 안녕에만 몰두하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그는 성전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질 것임을 약속했습니다(학 2:9). 학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과 재정을 통해 영적 우선순위를 정하실 것을 촉구했습니다.

    스가랴: 스가랴는 여덟 가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메시아 왕의 도래와 새 시대의 회복을 강조하며,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홀로 왕이 되실 것이라"(슥 14:9)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냈습니다.

    말라기: 말라기는 타락한 제사장들과 백성을 향해 경고하며, 참된 경건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엘리야 같은 자'가 올 것을 예고하며(말 4:5-6),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말라기는 또한 십일조와 예배에 관한 문제를 다루며,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경배를 드릴 것을 강조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선지자가 갖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과 삼중직 개념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선지자로 묘사됩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선지자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고 그것을 직접 실현시키신 분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의 선지자직은 삼중직(선지자, 제사장, 왕) 중 하나로 이해되며, 각 직분은 예수님의 사역 전반을 설명합니다.

    1. 선지자직 (Prophet)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곧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임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5-7장)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가르침을 선포하시며,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대한 예언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마 24장)과 마지막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대한 소망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지자직은 단순한 예언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회복을 몸소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2. 제사장직 (Priest)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였으나, 예수님은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단번에 속량하셨습니다(히 9:12).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3. 왕직 (King)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영원한 왕국을 다스릴 왕으로 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6절은 그분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왕직은 단순히 정치적 통치가 아닌, 영적 왕국의 통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 왕권을 확증하셨으며, 최종적으로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주권 아래에 들어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지자적 역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강조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자 “거룩한 나라”로 부르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선포하는 사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삶 속에서 그 말씀을 구현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1. 복음 전파

    예수님은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로써 제자들과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선포자로서 선지자적 사명을 이어받았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이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각자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마 5:13-16). 이 사명은 단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공동체 내에서의 선지자적 역할

    초대 교회에서는 선지자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절은 선지자적 은사를 통해 성도를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선지자적 역할이 공동체 내에서 영적 성장을 돕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목회자, 성경 교사,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선지자적 역할을 맡아 성도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전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할은 특정 직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3. 사회적 정의와 예언적 목소리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불의와 죄악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패한 지도자들과 불의한 사회 구조를 책망하며 정의와 공의를 외쳤듯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정의를 대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을 위로하시고, 종교적 위선과 부패를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마 23장).

    오늘날에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령과 선지자적 사명

    신약에서 성령은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장)을 통해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능력을 받았으며, 각종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서 성령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을 인도하고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언급하며, 그 중에서도 예언의 은사를 중요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그는 "예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한다"(고전 14:3)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은사는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시며, 그분이 장차 일어날 일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약 시대의 선지자는 단순히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셨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고, 공동체를 세우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될 것입니다.




    선지작들의 사역

    구약에 소개되는 중요한 선지자들의 사역들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선지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자들이며, 어떤 선지자는 왕적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을 통치하기도 합니다. 

    1. 모세 (Moses)

    • 이름: 모세
    • 생애:
      • 배경: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주요 사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 40년 동안 광야에서 백성을 이끔
      • 성경 구절: 출애굽기 3:10 -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2. 사무엘 (Samuel)

    • 이름: 사무엘
    • 생애:
      • 배경: 사무엘상, 사무엘하
      • 주요 사건: 마지막 사사이자 첫 번째 선지자,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음
      • 성경 구절: 사무엘상 3:19 -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3. 엘리야 (Elijah)

    • 이름: 엘리야
    • 생애:
      • 배경: 열왕기상, 열왕기하
      • 주요 사건: 바알 선지자들과의 갈멜산 대결, 하늘로 올라감
      • 성경 구절: 열왕기상 18:21 -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4. 엘리사 (Elisha)

    • 이름: 엘리사
    • 생애:
      • 배경: 열왕기하
      • 주요 사건: 엘리야의 후계자로 많은 기적을 행함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 사르밧 과부의 기름병 등)
      • 성경 구절: 열왕기하 2:9 -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하여 줄꼬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거늘"

    5. 이사야 (Isaiah)

    • 이름: 이사야
    • 생애:
      • 배경: 이사야서
      • 주요 사건: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 메시아 예언
      • 성경 구절: 이사야 6:8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6. 예레미야 (Jeremiah)

    • 이름: 예레미야
    • 생애:
      • 배경: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
      • 주요 사건: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 '눈물의 선지자'
      • 성경 구절: 예레미야 1:5 -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7. 에스겔 (Ezekiel)

    • 이름: 에스겔
    • 생애:
      • 배경: 에스겔서
      • 주요 사건: 바벨론 포로 생활 중 활동,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성전 환상
      • 성경 구절: 에스겔 2:3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노라 그들은 내게 패역한 자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8. 다니엘 (Daniel)

    • 이름: 다니엘
    • 생애:
      • 배경: 다니엘서
      • 주요 사건: 바벨론에서의 고위 관리, 여러 환상과 예언
      • 성경 구절: 다니엘 6:10 -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9. 호세아 (Hosea)

    • 이름: 호세아
    • 생애:
      • 배경: 호세아서
      • 주요 사건: 이스라엘의 배교와 회복을 예언, 상징적인 결혼 생활
      • 성경 구절: 호세아 1:2 -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하시니"

    10. 요엘 (Joel)

    • 이름: 요엘
    • 생애:
      • 배경: 요엘서
      • 주요 사건: 메뚜기 재앙과 회복, 성령 강림 예언
      • 성경 구절: 요엘 2:28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11. 아모스 (Amos)

    • 이름: 아모스
    • 생애:
      • 배경: 아모스서
      • 주요 사건: 남유다 출신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 정의와 공의의 예언
      • 성경 구절: 아모스 5:24 -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12. 오바댜 (Obadiah)

    • 이름: 오바댜
    • 생애:
      • 배경: 오바댜서
      • 주요 사건: 에돔의 멸망 예언
      • 성경 구절: 오바댜 1:15 -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13. 요나 (Jonah)

    • 이름: 요나
    • 생애:
      • 배경: 요나서
      • 주요 사건: 니느웨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 후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 전파
      • 성경 구절: 요나 1:17 -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14. 미가 (Micah)

    • 이름: 미가
    • 생애:
      • 배경: 미가서
      • 주요 사건: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예언,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 예언
      • 성경 구절: 미가 5: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15. 나훔 (Nahum)

    • 이름: 나훔
    • 생애:
      • 배경: 나훔서
      • 주요 사건: 니느웨의 멸망 예언
      • 성경 구절: 나훔 1:7 -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6. 하박국 (Habakkuk)

    • 이름: 하박국
    • 생애:
      • 배경: 하박국서
      • 주요 사건: 하나님께 질문하고 답을 받음, 칼데아인을 통한 심판 예언
      • 성경 구절: 하박국 2:4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7. 스바냐 (Zephaniah)

    • 이름: 스바냐
    • 생애:
      • 배경: 스바냐서
      • 주요 사건: 유다와 열방의 심판과 회복 예언
      • 성경 구절: 스바냐 3:17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학개 (Haggai)

    • 이름: 학개
    • 생애:
      • 배경: 학개서
      • 주요 사건: 성전 재건 독려
      • 성경 구절: 학개 1:8 -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9. 스가랴 (Zechariah)

    • 이름: 스가랴
    • 생애:
      • 배경: 스가랴서
      • 주요 사건: 성전 재건 독려, 메시아와 종말에 대한 환상
      • 성경 구절: 스가랴 9:9 - "시온에 따라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에 따라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20. 말라기 (Malachi)

    • 이름: 말라기
    • 생애:
      • 배경: 말라기서
      • 주요 사건: 백성의 죄와 회개 촉구, 메시아와 엘리야의 오심 예언
      • 성경 구절: 말라기 3:1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구약의 선지자들(선지자 연구)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 12:6)

     


    * 선지자(先知者)의 출현

      사무엘 이전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은 자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지자로 불린 아브라함,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창20:7 중)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였던 모세,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34:10) 사사 겸 선지자로 활동했던 드보라 등입니다.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4:4) 그러나 본격적인 선지자들의 등장은 사무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 선견자와 선지자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로 일컬었더라)”(삼상9:9)

    구 분

    원어의 의미

    차이점

    공통점

    선지자

    히브리어 ‘나비’로

    ‘말하는 자’(spokesman),

    ‘예언자’(prophet)라는 뜻

    ① 선견자는 계시를 받고 선지자는 계시를 선포함

    ② 선견자는 선지자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되던 용어(삼상9:9)

    ① ‘호제’와 ‘로에’는 선지자를 지칭하기도 함(사30:9~10)

    ② 양자는 결국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임(삼하24:11)

    선견자

    히브리어 ‘호제’ 또는 ‘로에’

    모두 ‘보는 자’(seer)라는 뜻


    * 다윗 역시 선지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소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29~30)

      다윗 역시도 사도 베드로에 의해 선지자로 증거를 받고 있는데(행2:30), 실제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였던 헤만’(대상25:5)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와 환상을 받아서 75편 가량의 시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궁정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중 일부는 궁중에 기거하거나, 또는 통치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예컨대 사무엘, 나단, 갓은 다윗 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정치적 영향력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제도권의 선지자들을 일반적으로 ‘궁정 선지자’로 일컫습니다.

     

    * 문서 선지자

      선지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타인에 의해 예언 내용이나 사상만이 전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보통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전 8~6세기에 활발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보통 붓과 두루마리를 들고 설교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구약의 대, 소선지서 기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大)선지서와 소(小)선지서

    이 구분은 해당 선지자의 활동기간이나 역량이 아닌, 그들이 남긴 선지서의 분량에 따른 구분입니다.

    구 분

    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5권)

    소선지서

    호세야,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2권)


    *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여기서 ‘나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1차적으로는 모세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날 모든 선지자들을 가리키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모세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이며(출24:6~8) 왕이며(신33:5) 선지자(신24:10)였던 것처럼, 온 인류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왕이시고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3:22,23) /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행7:37)

     

    * 하나님의 비전: 만인(萬人)선지자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다 선지자 되길 원하셨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율법적 분리를 상징하던 휘장이 찢어진 이래,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게 됨으로써, 또한 보혜사 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임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2:28,29) / “이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구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6~18)

     

     

    <구약의 선지자들 1>

    초기의

    선지자들

    • 아브라함(창20:7)

    • 모세(신34:10)

    • 미리암(모세의 누이 / 출15:20)

    • 드보라(사사 겸 여선지자 / 삿4:4)

     

    통일왕국

    시 대

    • 사무엘(마지막 사사, 제사장 겸직)

    • 다윗(시편 75편을 저작 / 행2:30)

    • 선견자 헤만(찬양대장 / 대상25:5)

    • 나단(삼하7:2~17, 12:1~25)

    • 갓(선견자 / 삼상22:5)

    • 아히야(실로 사람 /왕국 분열을 예언)

    분열왕국

    시 대

    • 스마야(왕상12:22~24)

    왕국 분열 직후의 남북 전쟁을 막음

    • 아사랴(대하15:1~7)

    오뎃의 아들, 아사의 개혁 촉구

    • 선견자 하나니(아사에 의해 투옥됨)

    • 선견자 예후(대하19:2,3)

    하나니의 아들 / 여호사밧을 규탄함

    • 야하시엘(레위인 / 대하20:14~17)

    • 마레사 사람 엘리에셀(대하20:37)

    아하시아와 교제하는 여호사밧 규탄

    • 디셉 사람 엘리야(대하21:12~15)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24:20~22)

    요아스를 규탄하다가 순교를 당함

    • 브두엘의 아들, 요엘(욜1장~3장)

    유다인들의 회개를 촉구함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사1~66장)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 미가(미1~7장)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 엘고스 사람, 나훔(나1~3장)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 하박국(합1~3장)

    요시아 왕의 재위 말기 예언 활동

    • 여선지자 훌다(왕하22:14~20)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 스바냐(습1~3장)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촉구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렘1~52장)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함

    •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렘26:20~23)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 아히야(왕상14:1~18)

    실로 사람 / 여로보암의 멸문 예언,

    • 무명의 선지자(왕상13:1~32)

    유다 출신 / 벧엘 제단 규탄

    • 예후(왕상16:7)

    하나니의 아들 / 바아사를 책망함

    • 디셉 사람 엘리야(왕상17장~왕하2장)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 미가야(왕상22:13~28)

    이믈라의 아들 / 아합의 죽음 예언함

    • 엘리사(왕상19:16~왕하13:21)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함

    • 브에리의 아들, 호세야(호1~14장)

    고멜과 혼인, 북이스라엘의 회개 촉구함

    •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암1~9장)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 예언, 회개촉구

    • 아밋대의 아들, 요나(욘1~4장, 왕하14:25)

    니느웨의 회개 촉구, 이스라엘 영토회복 에언

    • 오뎃(대하28:9~11)

    사마리아군인들에게 유다 포로의 석방 촉구

     

     

     

     

     

     

     

     

     

    바 벨 론

    포로시대

    • 제사장 출신, 에스겔(겔1~48장)

    바벨론 포로민들을 향한 예언 사역

    • 오바댜(옵1장)

    유다 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 예언

    • 예레미야(렘40~44장)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 예언활동

    • 다니엘(단1~12장)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활발한 활동, 예언

    포로귀환

    이후시대

    • 학개(학1~2장, 스5:1,2)

    백성들의 각성, 성전의 재건 촉구

    • 스가랴(슥1~14장, 스5:1,2)

    잇도의 손자, 선지자 학개와 동역함

    • 말라기(말1~4장)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사역, 백성들의 각성 촉구

    (분열왕국시대의 남북 선지자의 분류는 출신지역이 아니라 활동 지역이 기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2> (편의상 사무엘부터 기술)

    선지자

    활동시기

    (주전)

    부친이름

    (고향)

    특징 및 주요활동

    주요 본문

    사무엘

    1075~1017

    엘가나의 아들

    (라마)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뜻

    최후의 사사, 최초의 선지자

    사사시대와 통일왕국 과도기에 활동

    미스바 신앙부흥운동을 주도함

    사울, 다윗 두 사람에게 기름 부음

    다윗의 행적을 기록함(사무엘의 글)

    삼상1:1~25:1

    대상29:29

    나단

    1010~930

     

    ‘선물’ 또는 ‘주는 자’라는 뜻

    다윗 왕조 때의 궁정선지자, 고문

    아사리아와 사붓의 아버지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게 회개 촉구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행적을 기록함 솔로몬에게 기름 부음

    삼하7:2~17; 12:1~25

    헤만

    1003~945

    요엘의 아들

    ‘충실, 신실’이라는 뜻

    다윗, 솔로몬 시대의 충실한 성가대장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로 명성 떨침

    왕의 선견자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기도 함, 예배찬양의 규범 제작

    대상6:33

    15:16~19

    16:41~42

    1010~970

     

    ‘행운’이란 뜻

    다윗 왕 때의 선견자, 다윗이 도망 중일 때 이방 땅에 머물지 말고 유다로 들어가라고 함, 다윗의 통치 말기에 인구조사를 행함으로 범죄하자,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전했음. 다윗의 행적 기록

    삼상22:5; 24:11~19

    아히야

    10세기 초

    (실로)

    ‘여호와의 형제’라는 뜻

    왕국 분열 및 여로보암의 등극 예언

    여로보암 가문의 멸망을 선포함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함

    왕상11:29~40; 14:1~18

    스마야

    930~913

     

    ‘여호와께서 응답하심’이란 뜻

    왕국분열 직후의 남북전쟁을 막음

    르호보암 왕의 행적을 기록함

    대하11:2~4; 12:5~8

    잇도

    970~910

     

    ‘찬양하는’이란 뜻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의 행적 기록함(묵시책과 주석책 등)

    대하9:29; 12:15: 13:22

    아사랴

    910~

    오뎃의 아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라는 뜻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온 아사에게 종교개혁을 촉구함.

    대하15:1~7

    하나니

    874~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이라는 뜻

    이 단어는 ‘하나냐’의 단축형임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람과 연합한 아사를 책망하다가 투옥됨

    대하16:7~10

    예후

    909~886

    하나니의 아들

    ‘그는 여호와’라는 뜻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바아사를 꾸짖고 그 멸망을 예언함

    여호사밧이 악인을 도운 행위를 질책

    대하19:2,3

    왕상16:7,12

    엘리야

    875~850

    (디셉)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우상(바알) 종교와 맞서 싸움

    북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

    갈멜 산에서 바알선지자 850명 처단

    여호와야말로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

    선지자 엘리사의 스승

    유다왕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 책망함

    병거 타고 승천한 불의 선지자

    왕상17~왕하2장

    대하21:12~15

    미가야

    869~850

    이믈라의 아들

    ‘누가 여호와 같으랴’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 연합군의 패배와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죽을 것을 예언

    왕상22:13~28

    야하시엘

     

    레위 사람

    스가랴의 아들

    모압,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둔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을 독려함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선포함

    대하20:14~17

    엘리사

    9세기 후반경

    사밧의 아들

    (아벨므홀라)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의 제자

    엘리야의 뒤를 이어 우상종교에 대항

    선지학교를 세워 생도들을 육성함

    기적적인 능력으로 조국을 지킴

    왕상19:16 ~

    왕하13:21

    엘리에셀

    853년경

    도다아후의 아들

    (마레사)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

    유다 여호사밧 왕 때의 선지자

    여호사밧이 악한 아하시아와 교제함을 규탄, 그의 배가 파선될 것 예언

    대하20:37

    스가랴

    835~796

    여호야다의 아들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이라는 뜻

    요아스 왕을 즉위시킨 제사장 여호야다와 공주 여호사브앗의 아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들의 배교행위를 질책하고 심판을 선포함. 요아스의 의해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에 맞아 순교함

    대하24:20~22

    호세야

    793~710

    브에리의 아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

    고멜과 혼인하여 세 자녀를 둠

    북이스라엘의 출신으로 여로보암 2세 때 활동, 북이스라엘의 회개촉구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끝없는 사랑을 선포함

    성경기록(호세야)

    호1~14장

    아모스

    793~753

    (드고아)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뜻

    목자출신, 북이스라엘에서 주로 활동

    주변 7개국에 대해 차례로 예언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북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과 회개를 촉구함

    백성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촉구함

    ‘선지자의 아버지’로 일컬어짐

    성경기록(아모스)

    암1~9장

    요나

    798~752

    아밋대의 아들

    (가드헤벨)

    ‘비둘기’라는 뜻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친 선지자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지내기도 함.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기록함

    이스라엘의 영토회복 예언하기도 함

    성경기록(요나)

    욘1~4장

    왕하14:25

    오뎃

    740~732

     

    ‘부흥자’라는 뜻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와 싸워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올 때 그들을 유다로 돌려보내게 함.

    대하28:9~11

    요엘

    835~796

    브두엘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함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주로 활동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선포하면서 유다백성들의 회개 촉구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회개하고 성령을 경험할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요엘)

    욜1~3장

    이사야

    739~680

    아모스의 아들

    (예루살렘)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

    여선지자인 아내와 두 아들 ‘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둠

    유다귀족출신, 주로 예루살렘에서 사역

    유다 백성들의 경성과 회개 촉구

    므낫세 왕에게 순교를 당함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회개와 고난을 통한 소망을 강조함

    히스기야의 행적을 기록(사36~39장)

    성경기록(이사야)

    사1~66장

    대하32:32

    미가

    728~697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

    유다 출신의 선지자

    이스라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 예언

    겸손, 자비, 정의에 대해 호소함

    메시야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

    성경기록(미가)

    미1~7장

    나훔

    612년경

    (엘고스)

    ‘위로자’라는 뜻

    니느웨(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함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선포함

    성경기록(나훔)

    나1~3장

    하박국

    612~605

     

    ‘껴안은 자’라는 뜻

    요시야 왕의 재위 말기에 예언 활동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

    성경기록(하박국)

    합1~3장

    훌다

    622

    살룸의 아내

    (예루살렘)

    여선지자, 예루살렘 둘째 구역 거주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책에 대해 예언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왕하22:14~20

    대하34:22~28

    스바냐

    630년경

    구시의 아들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이라는 뜻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에 젖어 있는 유다의 각성촉구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경고함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을 촉발함

    겸손한 자들의 소망을 강조함

    성경기록(스바냐)

    습1~3장

    우리야

     

    스마야의 아들

    유다멸망 예언

    여호야김에 의해 순교

    렘26:20~23

    예레미야

    627~586

    힐기야의 아들

    (아나돗)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눈물로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

    요시야를 위해 애가를 지음

    유다의 멸망과 회복 예언, 독신생활

    정복당한 유다와 애굽에서의 활동, 순교

    애굽에서 우상숭배하는 동족들을 꾸짖다가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됨

    새 언약의 약속을 예언함.

    성경기록(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렘1~52장

    대하35:25

    에스겔

    593~570

    부시의 아들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뜻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포로시대의 제사장이며 선지자

    포로민들을 중심으로 한 예언 사역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향한 미래 소망

    성경기록(에스겔)

    겔1~48장

    오바댜

    586년경

     

    ‘주의 종, 주의 경배자’라는 뜻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 당한 직후에, 유다침략에 앞장 선 에돔의 멸망을 예언함.

    성경기록(오바댜)

    옵1장

    다니엘

    605~536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

    유다 지파의 왕족 출신

    바벨론 1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감

    신앙 절개를 지킨 포로 선지자

    바벨론포로지에서 활발한 활동, 예언

    구약의 계시록으로 평가되는 ‘다니엘서’를 기록함

    단1~12장

    학개

    520~515

     

    ‘축제, 즐거움’이라는 뜻

    포로생활 중 제사장 가문에서 출생

    1차 포로귀환 때 함께 돌아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공사가 16년이나 중단되자,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성전의 재건을 촉구함

    하나님의 집을 우선할 것을 강조함

    성경기록(학개)

    학1~2장

    스5:1,2

    스가랴

    520~470

    잇도의 손자

    베가랴의 아들

    ‘여호와를 기억함’이라는 뜻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음.

    학개와 마찬가지로 성전 재건 독려

    8가지 상징적 환상을 보고 기록함.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를 강조

    성경기록(스가랴)

    슥1~14장

    스5:1,2

    말라기

    433~432

     

    ‘나의 천사, 나의 사자’라는 뜻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느헤미야가 가나안 땅을 떠나 있던 시기에 해이해진 백성들을 향해 각성을 촉구함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분의 의를 기다릴 것을 촉구함, 성경기록(말라기)

    말1~4장

     

    <4대 선지서 비교>

    구 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사역연대 (주전)

    739~680

    (60년간)

    627~586

    (41년간)

    593~570

    (23년간)

    605~536

    (70년간)

    소 명 장

    사 6장

    렘 1장

    겔 1~3장

     

    출신지, 사역지

    예루살렘

    아나돗, 예루살렘

    바벨론 그발강변

    예루살렘, 바벨론

    예 언 대 상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과

    남은 유다인

    포로된 유다인

    이방나라 왕들과 포로된 유다인

    중 심 내 용

    하나님께서 남은 자에게 영광스런 미래를 약속하심

    예루살렘의 죄, 운명, 미래의 영광

    예루살렘의 멸망과 회복

    영광스러운 미래

    4개 왕국과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

    역사적 배경

    왕하 15~20장

    대하 26~30장

    왕하 24~25장

    단 1~6장

    단 1~6장

    정치적 상황

    시리아, 이스라엘의 위협

    앗수르의 위협

    북이스라엘 멸망

    애굽과 앗수르

    2강의 각축전

    앗수르의 멸망 바벨론의 등장

    1차 바벨론포로

    애굽과 바벨론 2강의 각축전

    백성 중 일부가 포로됨(2차)

    예루살렘의 함락

    유대인들의 3차 바벨론 포로

    종교적 상황

    우상숭배 성행

    외식적 예배 만연

    히스기야의 개혁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 사후

    다시 과거로 회귀

    거짓선지자 만연

    전민족의 불순종

    불신, 반역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 그러나 소수의 남은 자

    메시야에 대한

    비유적 표현

    싹, 나의 종

    의로운 가지

    여호와 우리의 의

    백향목의 연한 가지

    돌, 인자,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언의 강조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가르침

    바벨론 포로의 당위성, 이를 회개의 기회로 삼아 더 큰 구원을 사모할 것 촉구

    범죄 결과에 대한 단체적, 개인적 책임, 언약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등을 가르침

    열국의 우상보다 뛰어난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장소, 상황에 구애 받지 않음을 보여줌

    구 성

    66장

    52장

    48장

    12장

    표현상의 특징

    선포와 경고

    상징적 행위

    비유와 묵시

    역사와 묵시

    중심단어

    구원은

    여호와의 것

    유다의 멸망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비 고

    복음의 선지자

    메시야의 선지자

    눈물의 선지자

    심판의 선지자

    희망의 선지자

    환상의 선지자

    포로기의 선지자

    이방 시대의 선지자

     

        






    구약의 선지자들 이름과 활동시기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이름과 활동 시기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각 선지자의 이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왕국시기 이전의 선지자들 / 모세, 미리암, 발람, 사무엘 
    통일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 나단, 갓, 아히야 
    분열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  오바댜(848-841),  요엘(835-796),  아모스(782-739),  호세아(755-715),  미가(740-690),  이사야(740-680)남왕국시대 /  나훔(661-612),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바벨론 포로 시기 / 다니엘,  에스겔
    귀환 시기의 선지자들 / 학개,  스가랴,  말라기



    왕국시기 이전의 선지자들 / 모세, 미리암, 발람, 사무엘 

    모세

    모세 이전에도 선지자의 역할을 족장들이 감당하기는 했지만 정식적인 선지자는 모세입니다. 

    미리암

    모세의 누나로 선지자도 활동했지만 강조 되지는 않습니다.

    발람

    이방 선지자로 이스라엘의 선지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무엘

    사사이자 선지자도 활동한 사무엘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를 연 인물이었습니다.

    통일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나단

    다윗과 동시대 인물이며, 다윗이 죽은 후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을 왕 위에 앉힌 주도적인 인물입니다.

    다윗과 동시대 인으로 다윗의 개인 선지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던 선지자입니다.

    아히야

    솔로몬 말기에 솔로몬의 범지를 폭로하고 이스라엘의 분열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분열왕국 시기의 선지자들


    오바댜(848-841)
    요엘(835-796)
    아모스(782-739)
    호세아(755-715)
    미가(740-690)
    이사야(740-680)


    남왕국시대

    나훔(661-612)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바벨론 포로 시기


    다니엘
    에스겔


    귀환 시기의 선지자들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족장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었던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는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고난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의 북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된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말년에 행하였던 악행, 즉 이방 신들을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하여 결국에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던 영향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단(Dan)과 베델(Bethel)에 금송아지를 섬기는 산당을 지어 백성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숭배하도록 하였고, 남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 성전산 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남 유다에서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왕들이 나타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북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왕들이 많이 나타나서 나라를 부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성전의 문을 폐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왕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하나님의 앞에 악행을 자행하므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면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들은 각 시대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잘못된 모습을 경고하기도 하고, 어떤 선지자는 자신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도 있었으며, 곧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회복의 예언들을 전하였던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는 북이스라엘을 위하여 활동하였던 선지자가 있었으며, 남 유다를 위한 선지자, 그리고 이방 사람들을 위한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 : 호세아, 아모스, 미가.

    남 유다를 위한 선지자 : 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야, 학개, 요엘, 스가랴, 스바냐, 에스겔, 말라기.

    이방 민족을 위한 선지자 : 요나, 나훔, 하박국, 오바댜.

    그리고 그 선지자들의 활동하였던 시기적으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BC 9세기 : 요엘, 오바댜

    BC 8세기 :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요나, 미가

    BC 7 세기 :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포로 시대 : 다니엘 , 에스겔.

    귀환 시대 : 학개, 스가랴,   말라기.




    https://blog.naver.com/byunsdd/221522143360

    Hebrew bible 

    http://blog.naver.com/supax/220591274623

    포로 귀환 시대  / 유대민족,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오바댜

    오바댜 선지자가 활동하였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남 유다의 선한 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왕이 된 여호람은 북이스라엘의 악명 높았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던  아달랴와 결혼함으로써 남 유다 왕국에 많은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여호람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형제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 땅에서 그의 아내가 가지고 들어 왔던 바알숭배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에돔은 남 유다의 속국이었는데 여호람 시대에 독립하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과 아랍 사람들이 왕궁을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까지도 일어났었으며 이때 왕자까지도 납치하여 갔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선지자 오바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며,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요엘

    선지자 요엘이 활동하였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은, 선지자 오바댜의 역사적 배경 직후인 것 같습니다.  여호람 왕이 죽자 그의 아내였던 아달랴는 왕자와 손자들을 죽기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학살을 당하였던 그의 손자 가운데 요아스만이 여호시바에 의해 구출되어 살아남아 있다가 여호시바와 결혼한 대 제사장인 여호야다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추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을 받아 요아스 왕은 우상 숭배를 금지시키고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제사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선지자 요엘은 남 유다를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남 유다의 웃시야 왕, 요담 왕,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에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부터 시작하여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할 때까지 약 40년간 사역을 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이때에 남 유다에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는 물질적으로 나라를 부흥 시켰으나 나라에는 도적이 들끓었고 종교적으로도 부패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음행이 창궐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뒤 왕위 쟁탈전과 정치적 음모가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백성들은 더욱 탐욕과 착취로 타락하게 되었다가 결국 BC 722년에 앗시리아(앗수르)에게 점령당하여 되었으며 호세아는 앗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아모스는 남 유다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하였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사역하였던 시기는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다만 아모스는 호세야보다 먼저 선지자로 사역하였습니다.

    요나

    선지자 요나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던 니느웨는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앗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앗시리아에서는 정치적으로 후계자 선정 문제를 놓고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는데 아스루단 3세가 앗시리아의 왕으로 오르는 후에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있을 때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열병이 유행병으로 돌고 있었으며 때마침 일어난 일식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민심이 흉흉하였을 때였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북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시기적으로는 허세아가 사역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때에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는 약 60년 동안 남 유다 왕국에서 선지자 사역을 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30년을 더 남 유다에서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웃시야 왕 시대에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인하여 번창하게 되어 요담 왕 시대에는 암몬으로부터 3년간 조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아하스가 왕이 되어 통치하게 된 후부터는 여호와의 길을 떠났으며, 친앗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전 문을 폐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악행을 저질렀던 아하스 다음으로 왕이 된 히스기야 왕은 폐쇄되었던 성전의 문을 다시 열었으며  다시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 유다 왕국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할 기세를 보이다가 히스키야가 죽은 후 다음으로 왕이 된 므낫세 왕 시대에는 또 다시 우상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때에 수없이 많은 무죄한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므낫세 세력에 반대하다가 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 미가는 남 유다의 요담 왕,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의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이며 미가는 이사야 보다는 더 젊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미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앗시리아가 세력을 얻고 자기의 군대를 몰아 세계정복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위의 모든 나라들은 앗시리아의 위협 때문에 떨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이 이미 앗시리아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 후로부터 10년 뒤에는 북이스라엘이 마침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던 때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선지자 미가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여 동시에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는 선지자들 가운데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동시에 하나님의 경고 메지지를 전파하였던 유일한 선지자였습니다.

    나훔

    선지자 나훔이 기록한 “나훔서”를 요나서의 속편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나서와 나훔서, 이 두 책들은 같은 윤리적 맥락에서 니느웨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으며,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를 기록했다면,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남 유다의 요시아 왕 때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기록한 스바냐서는 요시아 왕이 남 유다를 종교적으로 개혁하기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요시아 왕에 의해 이미 폐지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선지지로 부름을 받기 이전에 살던 시대는 나훔이 살던 시대와 같은 시대로 히스기야 왕 이후의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고 있었을 시대였습니다.  므낫세 왕의 통치는 경건한 부왕 히스기야를 따르지 않고 그의 조부인 아하스의 길을 따라 악을 자행하였습니다. 성전 안에 바알 제단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힘놈 골짜기에서 그의 자녀들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그의 아들로서 왕이 된 아몬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계속해서 악을 자행해 왔지만 2년 만에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하박국이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시기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언제까지 부패한 정치가 계속되어 무죄한 백성들을 착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통스럽게 질문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김 시대(BC 608~600년경)로 보고 있습니다.

    요시야왕은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무리하여 자신의 죽음을 빨리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둘째아들 여호아하스가 남 유다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이집트의 왕 느고에 의해서 폐위되고 이집트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곧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 여호야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엘리야긴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여호아하스의 두 살 위의 형이었으며 25세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통치에 있어서도 무능력하였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예언서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 유다 왕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3년째가 되던 BC 627년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갈 때까지 사역하였습니다.

    여호야김 4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시기를 요시아의 날로부터 그때까지 그에게 나타낸 모든 예언을 두루마리를 취하여 기록하라고 하신 명령에 의하여 예언서를 기록하였는데 그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술을 받아 적은 기록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박국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였던 선지자로써 남 유다 왕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활동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남 유다 왕국이 신흥제국인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함으로써 유다의 왕들과 수많은 지식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이때에 바벨론으로 왕과 그리고 지식인들과 함께 끌려갔었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예언자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 했을 때 그 자신과 세 친구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라기보다는 예언자로써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갈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명령에 의해서 유대 땅으로 돌아 올 때까지 약 70년을 사역하였습니다.

    다니엘은 3개의 큰 제국의 시대를 지내면서 예언자로 사역 하였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들은 메데 파사, 희랍(그리스), 로마의 흥망성쇠와 그 후의 세상열국,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예언자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제사장 출신의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과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예언활동을 펼친 반면,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이런 사건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이와 같은 일들을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과 관련시켜서 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유다 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었는데 이때가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약 11년 전 쯤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던 유다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을 때 활동하였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 학개, 스가랴와 말라기입니다.

    학개

    유다 백성이 세 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것처럼 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로 귀환 할 때도 세 번에 걸쳐 귀환하였습니다.

    첫 번째 귀환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한 직후에, 스룹바벨에 의해 인도 되어졌고, 두 번째 귀환은 이보다 80년이 흐른 뒤 아닥사스왕 7년인 BC 458년에 에스라에 의해 인도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귀환은 두 번째 귀환이 있은 후 13년이 지난 뒤인 아닥사스왕 20년, 즉 BC 445년에 느헤미야의 인도를 받으면서 귀환하였습니다.

    귀환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로 알았고, 곧 재건사업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은 귀환 첫해 7월에 시작되었는데 기초공사는 빠르게 잘 진행되어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도 성전 재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지만 유다 사람들은 반대하였는데 이와 같은 갈등에 의하여 성전재건은 더 이상 진해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초 작업만을 마친 채 16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다리오 왕 2년이 되던 해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학개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학개서입니다.

    스가랴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가입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네 번에 걸쳐서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 계시는 BC 520년 다리오 왕 2년 8월에 임했으며,  두 번째 계시는 첫 번째 계시가 있었던 때보다 3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시는 2년이 지난 BC 518년 다리오 왕 4년, 9월에 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계시는 BC 480년 이후에 임하였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로, 하나님께서 중단된 성전 건축에 대한 촉구하심을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BC 515년 3월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말라기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의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 말라기서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유다 땅으로 귀환한 후에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이때에는 이미 재건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형편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와 비슷하였습니다.

    말라기서의 내용면으로 보게 되면 종교적, 사회적 타락과 퇴보,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생활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포로 생활을 하다가 유다 땅으로 돌아와 살기 시작한 직후에 볼 수 있었던 시대상에서 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처와 기대를 양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이 재건되면 메시야왕국이 실현 되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게 되지 못하자 실망하여 냉소주의와 불신앙이 온 유대 땅에 팽배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절망에 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각성 시키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모스 개론

    1. 표제

    소선지서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아모스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아모스라는 이름은(히, Amos) “짐을 지다”, “(짐을) 운반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아마스(히,‘amas)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그 이름의 뜻은 “짐을 진 자”인데, 
    이것은 아모스가 부름을 받고 전달하였던 엄숙하고도 무게가 있는 기별들과 잘 어울린다. 
    이 이름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2. 저자

    전통적으로 아모스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유다의 광야 지역인 드고아 출신이었다. 
    그는 이사야처럼 왕궁에 속한 선지자도 아니었고 예레미야처럼 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는 양떼를 치고 뽕나무를 재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떼를 돌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모스 7:14, 15에서 소개되는 아모스의 자서전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목자요, 경시받던 뽕나무 배양자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가 가난하였지만 독립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사실은 그가 잠시 그의 양떼를 떠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교육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에서 선교를 위하여 훈련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아모스의 경우에서처럼, 비교적 배우지 못하고 유리한 점들도 별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사업을 위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고후 4:7)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에 사람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아모스는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아마도 왕의 여름 궁전이 있고 제일의 송아지 신전이 위치해 있는 벧엘에서 그의 주된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송아지 숭배에 대하여 고발을 하였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아모스는 우상을 숭배하는 대제사장 아마시야의 반대에 직면하였는데, 이 사람은 아모스를 위험한 음모자라고 왕앞에 고소하였다(암 7:10-13 참조). 우리는 아모스의 말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아모스는 그의 단순하면서도 꾸밈없는 변론과 그의 사상의 생동감과 고귀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선지자들의 대열에 들어야 한다. 
    물질 세계와 도덕 세계의 바탕을 파악하기 위하여 더욱 깊이 꿰뚫어 보거나 하나님의 거룩성, 지혜, 능력에 대하여 더 큰 통찰력을 나타낸 선지자들이 많지 않다.

    3. 역사적 배경 

    아모스는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이 번영하던 때에 부르심을 받아 그의 사명을 성취하였다. 
    여로보암 Ⅱ세 아래의 이스라엘은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호 2:8 참조). 
    여로보암은 시리아를 정복하여 통일 왕국 시대의 북방 변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영토는 북단의 하맛에서부터 사해까지 이르렀다(왕하 14:25, 28). 
    유다에서는 웃시야 왕이 에돔과 블레셋을 정복하고, 암몬을 굴복시키고 농업과 평화의 목적을 위한 가내(家內)기술을 장려하였고, 크고 힘있는 군대를 양성하여 예루살렘을 철통같이 방비하였다(대하 26:1-15 참조).

    외관상으로는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고 내면적으로 튼튼하였기에, 이스라엘은 위험이나 멸망을 조금도 예기치 않고 있었다. 
    사실, 앗시리아가 그 상승 세력으로 주의를 끌고 있었지만, 그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성 싶지 않았다. 번영으로 인한 공통된 열매들­자부심, 사치, 이기심, 압박­이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에 마음껏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던 여로보암 Ⅰ세가 도입한 송아지 숭배(왕상 12:25-33)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아모스와 호세아가 부름을 받고 그들의 예언들을 특별히 북방 왕국을 향하여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송아지 숭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웃시야는 B.C. 767-750년까지의 유다의 유일한 왕이었고, 여로보암 Ⅱ세는 B.C. 782-753년까지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었으므로, 아모스의 봉사는 B.C. 767-753년 사이의 어떤 때인 것같다. 아모스의 실제적 예언 봉사가 얼마동안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책 속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진 전 이년”(암 1:1)이라는 진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언제 이 지진이 일어났는지를 확증할 만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사람이면서 더 나이를 먹었던 것같다.

    기록연대


    <암 1:1>의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2년"은 아모스서의 기록 연대를 가늠케 한다. 그는 남방의 이사야와 미가보다는 훨씬 빠른 시대의 인물이며, 호세아와는 동시대 인물이다. 여기 여로보암(Jeroboam)은 여로보암 2세를 말한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이때의 지진이 주전 763년 6월 15일에 일어났다고 계산한다. 이렇게 보면 아모스의 활동 시기는 대략 주전 760년경으로 확정된다. 왕하14:25에 의하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했다고 한다. 이는 통일 왕국의 전성 시대인 솔로몬 왕 당시와 같은 것이다(왕상8:65). 또한 이것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약속했던 이스라엘의 전영역이었다(<신 32:36>). 그러나 나라의 부강과 더불어 국민의 사치와 죄악은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암 6:4>은 그들의 사치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에 반하여 <암 2:6,7>은 빈부의 격차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암 4:1>은 여성의 타락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이 시대는 부요함과 더불어 죄악이 관영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4. 주제

    아모스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가능하다면 그들로 회개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덴의 도시가 우상 숭배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의 마음이 격동되었던 것처럼, 아모스도 그가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죄들과 사치를 보고 격동되었을 것이다. 그는 물질적 번영으로부터 생겨난 죄악들, 부자들의 사치, 주연, 방탕등을 탄핵했는데, 그들은 가난한 자를 압박하고 뇌물과 강요를 통하여 재판을 굽게 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자행할 수 있었다. 아모스는 호세아보다 죄악들이 저질러진 환경과 그 죄상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백성들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죄악들을 곳곳에 생생하게 파헤치고 있다. 죄된 어떤 행위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고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만일 그들이 계속 죄짓는 일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틀림없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일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가 죄를 이기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묘사로써 그의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5. 개요

    Ⅰ. 표제 1:1

    Ⅱ. 주변 국가들 유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들 1:2-2:16
         1. 다메섹 1:2-5
         2. 가사 1:6-8
         3. 두로 1:9, 10
         4. 에돔 1:11, 12
         5. 암몬 1:13-15
         6. 모압 2:1-3
         7. 유다 2:4, 5
         8. 이스라엘 2:6-16

    Ⅲ.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적 기별 3:1-6:14
         1. 예언적 기별들의 확실성 3:1-8
         2.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 3:9-4:13
         3.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슬픔 5:1-27
         4. 여호와의 날을 뒤로 미루는 자들에게 임할 화 6:1-14

    Ⅳ.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이상 7:1-9:10
         1. 황충에 대한 이상 7:1-3
         2. 불에 대한 이상 7:4-6
         3. 다림줄에 대한 이상 7:7-9
         4. 아모스에 대한 아마샤의 반대 7:10-17
         5.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과 익은 열매에 대한 이상 8:1-14
         6. 죄인들의 심판에 대한 이상 9:1-10

    Ⅴ. 회복과 축복에 대한 약속들 9:11-15


    내용 요약
     
    1장 아모스의 묵시(1-2); 다메섹에 대한 예언(3-5); 가사에 대한 예언(6-8); 두로에 대한 예언 (9-10); 에돔에 대한 예언(11-12); 암몬에 대한 예언(13-15)
    아모스가 받은 묵시로(1) 여호와가 음성을 발하신다(2).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악은 이스라엘에 행한 잔악성이니(3) 하사엘의 집과 벤하닷 궁궐에 불을 보내시며(4) 아웬골짜기에서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의 홀잡은 자를 끊으신다(5). 가사의 서너 가지 죄악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에돔에 팔아넘김이니(6) 블레셋의 성읍들은-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가드)(7-8) 멸망당한다. 두로의 서너 가지 죄악은 형제의 계약을 기억지 않았으니(9) 두로 성에 불을 보낸다(10). 에돔의 서너 가지 죄악은 형제를 긍휼히 여기지 않은 것이니(11) 데만에 불을 보내고 보스라의 궁궐을 사른다(12).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악은 영토를 확장하려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으니(13) 랍바 성과 궁궐을 사르고(14) 방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한다(15).
     
    2장 모압에 대한 예언(1-3); 유다에 대한 예언(4-5);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6-16)
    모압의 서너 가지 죄악은 에돔 왕의 뼈를 불사른 것이니(1) 그리욧 궁궐을 사르며(2) 재판장과 방백을 멸하신다(3). 유다의 서너 가지 죄악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고 거짓 것에 미혹됨이니(4) 불을 보내어 멸하신다(5).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악은 가난한 자에 대해 불의를 행하고(6) 무시하였고, (바알의 성녀와) 행음하며(7) 갖은 악을 행한다(8). 하나님은 아모리 사람을 멸하게 하였고(9) 저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었으며(10), 영적으로 축복하여(11) 성결하게 하셨다(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니) 수레가 누름같이(13) 아무도 피할 수 없고(14-15) 망하게 된다(16).
     
    3장 정해진 심판(1-6); 하나님의 예언(7-8); 임할 심판(9-15).
    이스라엘아(1) 내가 너희만 알았으니 내가 너희의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2).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해야 동행하고(3), 사자는 잡은 것이 있어야 소리 지르고(4), 창애가 있어야 새가 잡히니(5), 여호와의 명령으로 성읍에 재앙이 돈다(6). 비밀을 종에게 보이시고(7) 여호와가 말씀하시니 예언을 하게 된다(8). 아스돗의 궁과 애굽 땅 궁들은(9) 포악과 겁탈을 인하여(10) 힘이 쇠하게 되고 궁궐은 약탈당한다(11). 그러나 사자 입에서 두 다리의 건져냄 같이 적은 수가 건져냄을 받는다(12). 야곱 족속에게 증거하여(13) 벧엘의 단과 뿔은 땅에 떨어지고(14) 겨울궁과 여름궁, 상아궁은 파멸된다(15).
     
    4장 포로(1-3); 우상 숭배(4-5); 돌아오지 않는 자들(6-11); 하나님의 심판(12-13).
    가난한 자를 학대, 압제한 바산의 암소들은(1) 낚시로 끌려가고(2) 성은 무너지고 하르몬에 던지운다(3). 벧엘과 길갈에서 범죄하고(4) 수은제와 낙헌제로 광포하였다(5). 양식이 떨어지나 돌아오지 않고, (6) 비가 없어 마르고(7) 두세 성읍이 비틀거리나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는다(8). 깜부기와 팟종이로(9), 염병과 노략과 악취가 코를 찔러도 돌아오지 않는다(10). 너희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붙는 가운데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돌아오지 않는다(11). 그러므로 내가 (심판을) 행하리니 하나님을 예비하라(12). 대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13).
     
    5장 이스라엘의 운명(1-3);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4-15); 심판(16-27).
    이스라엘의 애가이다(1). 이스라엘은 엎드려졌고(2) 많은 사람이 거하던 성읍은 적은 사람이 남게 된다(3). “여호와를 찾으면 살게 되고”(4), (형식적으로 섬기지 말라)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허무하게 되며(5) 요셉의 집은 멸망한다(6). 공법과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은(7)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8) 여호와를 찾으라. 패망이 임함은(9) 정직한 자를 싫어함이요(10) 너희가 지은 곳에 거하지 못함은(11) 너희 죄악의 중함을 인함이다(12). 이 때 지혜자도 잠잠하다(13).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14) 그리고 공의를 세우면 여호와께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15). 그러므로 광장에서 사람들이 애곡하며(16) 포도원에서 울 것은 여호와가 지나감(심판을 받음)을 인함이다(17). 여호와의 날은 어두움이요(18,19), 갑자기 만난 것 같다(19). 절기를 멸시하니(21) 번제나 소제를 받지 아니하고(22) 노래도 듣지 않는다(23). “오직 공법과 정의를 흘리고”(24) 광야에서 드린 제물과(25) 우상을 가짐으로 인해서(26) 너희는 포로로 잡혀 가게 된다(27).
     
    6장 포로의 예언(1-7). 완전한 파멸(8-11)과 사악한 자의 최후(12-14).
    화 있을진저 시온과 사마리아 산에 있는 자들아(1) 갈레와 대하맛같이 멸망당하고(2) 심판을 생각지 않고(3) 사치와(4) 타락과(5) 일락으로 태만한 자는(6) 사로잡혀 가게 하신다(7). 성읍의 모든 것을 대적에게 주어(8) 다 죽게 되고(9-10) 멸망한다(11). 공법과 정의를 변개하는 너희는(12) 허무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니(13) 한 나라를 일으켜 학대하리라(14).
     
    7장 1. 황충의 환상/ 심판 보류(1-3); 2. 불의 환상/심판 보류(4-6); 3. 다림줄의 환상/ 피할 수 없는 심판(7-9); 아마샤가 아모스를 핍박함(10-17) - 하나님의 심판은 정해짐.
    풀이 움돋을 때 황충을 지어(1) 다 먹게 하시니(2) 미약한 야곱을 위해 심판을 하지 않게 하시며(3),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4) 야곱이 미약하여(5) 이 심판의 뜻도 돌이키신다(6). 담 곁에 다림줄을 잡고 서시니(7) 백성을 다시 용서치 않고(8) 성소를 훼파하신다(9). 때에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고 하며(10) 아모스의 심판 (여로보암은 칼에 죽고 이스라엘은 포로로 간다)(11)을 듣고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가라”(12)고 하고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13)고 한다. 아모스는 뽕나무 배양하는 목자로(14)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여(15) 아마샤에게 이르기를(16) 심판은 정해진 것이며 정녕 포로로 잡혀간다고 한다(17).
     
    8장 4. 여름 실과 광주리 비유(1-3); 심판(4-10); 말씀의 기근(11-14).
    여름 광주리를 보이시며(8)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러(2) 애곡과 파괴가 있다고 하신다(3).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를 망케 하는 자들은(4) 거짓 저울로 속이고(5) 가난한 자를 착취하니(6), 여호와는 그들의 소위(所爲)를 잊지 아니하시니(7) 이로 인해 땅은 떨게 된다(8). 여호와의 심판 가운데 천지가 변하고(9) 애통으로 가득 찬다(10). 말씀의 기근을 가지고(11) 말씀을 구하나 얻지 못하고(12) 다 갈하여 피곤하며(13)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14).
     
    9장 5. 성전 비유(1-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5-6); 범죄한 나라의 심판과 긍휼(7-10): 회복(11-15)
    주께서 단 곁에 서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고 칼로 살륙하게 하시니(1)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고(2-3) 원수 앞에 사로 잡혀 살륙하게 하신다(4). 땅을 녹게, 바다를 높게, 강을 낮게 하시고(5) 전을 하늘에 세우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6). 이스라엘도 (선민이지만) 구스와 같고(7) 범죄한 나라를 멸하고(8) 그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신다(9). 그러나 화가 없다고 하는 자는 칼에 모두 죽는다(10). 그 날에(마지막 날에)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세우고(11), 에돔의 남은 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업을 얻고(12) 열매 맺게 하시며(13) 돌이키게 하셔서(14) 본토에 심으셔서 다시 뽑히지 않게 하신다(15).
     

    [배경]
    우리는 1:1과 7:10~13을 통해 아모스가 유다의 웃시야 왕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때에 활동한 선지자임을 알 수 있다. 유다 왕 웃시야는 B.C. 791~740까지 50여년간을 다스렸다. 웃시야는 유다의 적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튼튼하게 증축했다. 그의 치세 동안 유다는 번성했고 한때 선지자 아모스의 영향으로 영적으로 견고하기까지 했다.

    [특징]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다면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고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 혹은 정의로 파악하고 또한 이것을 인간도덕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 개인적인 죄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고 국가적인 죄는 국가적인 심판을 받는다. 새계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목적]
    아모스가 예언을 하고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스라엘에서 나타난 생활의 방종과 배교와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지만 북 왕국의 타락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한 농부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구조]
    아모스는 1~9:10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심판을 말하<고 9:11>~15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소망을 말한다. 전자에는 열방과 이스라엘의 심판을 가리키는 다섯 가지 환상이 나오고 후자에는 메시야의 약속이 나옵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 왕국의 드고아에서 양치는 목자에 불과하였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경건히 신앙 생활을 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이 주어졌다. 아모스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반영하여 부패한 권력자들이 일으키는 사회 문제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여호와의 말씀에 입각한 사회정의를 부르짖었다.

    [내용]
    사람은 손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이미 마음으로 율법을 범한다. 이것은 북쪽 왕국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아모스는 하나님께 책망받은 백성의 태도에 대해서 공박했다. 모든 생활이 아모스의 설교 내용에 비춰보면 다 수준 이하였다. 여기에는 아모스가 암소로 비유(<암 4:1>)한 사회적으로 출세를 노리는 야심가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질수록 아모스의 설교 내용도 더욱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집센 자들에 대한 희망도 남겨 놓았다.이는 우리를 위한 적극적인 축복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의 태도조차 바꾸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들의 협력도 요구하십니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번영하므로 물질만능주의가 된 북방 지파들에게 그들의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아모스는 배교와 방종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새롭게하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였다.
    * 교리적인 교훈: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의 소유인 백성을 향한 질투와 율법의 거룩성을 가르쳐 준다. 한편 본서에는 모세 율법에 대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2:7,8,12; <신 23:17; ><출 22:26, ><민 6:1>~21).
    * 기독론적인 교훈: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는 자(9:11)와 백성의 남편(9:13)으로 예표되어 있다.


    아모스 참고 사항
     
    l. 본문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참조)
    l-2장  “코 아마르 야웨(주께서 이떻게 말씀하시기를)”의 구조로 각 나라에 대하여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3-5장  "샤무우"(들어라)라는 구조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다.
    6장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특히 5:l8과 6장에는 "호이'(화 있을진저)로 시작하여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
    7-9장  그리고 아모스는"히르아니'(내게 보이신 것) 즉 하나님의 환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결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서론 1:1-2과 결론 9:11-16을 나눌 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내용적으로 볼 때도 l-2장의 각 나라의 심판을 8개국에 대한 심판이나 7개국(유다와 이스라엘을 같이)의 심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설교에 있어서도 세 가지 설교 혹은 다섯 가지의 설교로 나누는데 구조적으로는 세 가지의 설교와 두 가지의 큰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누어 진다.
     
    2. 본문의 내용은 어떠한가?
     
    1-2장  각 나라의 구체적인 죄악상
     
    l. 다메섹 (Syria)
    (1) l:3 에 나타난 다메섹의 죄악상은 무엇인가?(참 왕하 10:32,33)
       예후 시대 때 시리아의 하사엘이 길르앗과 바산까지 침공한 것을 가리킨다.
    (2) 1:4-5 다메섹의 심판의 예언은 무엇인가?(참고 왕하 l6:6-9)
       BC 732 앗수르(Assyria)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멸망하였다. 특히 이스라엘을 괴롭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을 대표적으로 심판하고(4절) 우상숭배지인 아웬골짜기와 벧에던을 심판 하신다.
     
    2. 가사(Gaza = Philistia) 블레셋
    (1) 1:6의 블레셋의 죄악 상은 무엇인가?(참 대하 2l:16,17)
        유다 사람을 포로로 에돔 백성에게 팔았던 사실을 말한다
    (2) 따라서 l:7-8에서 보여주던 그들이 살던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삼상6:16-17) 도시들은 불살라진다(왕하 l8:8 이스라엘의 승리).
     
    3. 두로(Tyre = Phoenicia)
    (l) 1:9 솔로몬시대에 두로왕 히람이 맺었던 계약(왕상 5:12) 즉, 노예 판매 금지 조항에 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2) 1:10절의 심판과 같이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으로 성취되었다
     
    4. 에돔(Edom)
    (l) 1:11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의 관계이나 칼로 무자비하게 한 것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
    (2) 결국 1:12말씀과 같이 기원전 732년에 틸그랏 빌레셋 3세 때 멸망당한다.
     
    5. 암몬(Ammon)
    (1) 1:13 암몬은 롯의 후손으로서(롯과 두 딸의 후손 중 작은 딸은 암몬이었다. 창 19:36-38) 아람과 동맹을 맺어 여인의 배를 갈랐다(왕하 8:l2)
    (2) 그 결과 l4, 15절의 말씀대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했다.
     
    6. 모압(Moab)
    (l) 2:l모압의 죄악은 성경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왕하 3장 26, 27을 비추어 보아 더    럽게 한 행위였다(왕하 23:l6)
    (2) 2:2,5 그 결과 모압은 티글렛 블레셋 3세에게 기원 전 734에 정복당하고 결국 느부갓네    살에게 멸망당했다.
     
    7. 유다(Judah)
      l) 2:4 유다의 죄악은 율법을 무시하고 거짓 것에 미혹 당하였다
      2) 그 결과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였다.
     
    8. 이스라엘(IsraeI)
    (l) 이스라엘의 죄악은 ①불의(2:6)한 재판, ②불의한 치부(7절 전), ③음행(바알 숭배 7절후), ④전당을 돌려주지 않음(8절 전 참 출 2, ⑤신행 분리 (8절 후), ⑥하나님의 구원의 역사(9-10절), ⑦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지 않음(1l-l2절)

    (2) 그 결과 이스라엘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며(2: 14-l5) 누름을 당하게 된다(13절)






































































    2025 요엘


    여호와의 날(욤 아도나이. yôwm  Yehôvâh)  יֹום יְהוָה

    욤(3117)

    יוֹם 스트롱번호3117
    1.

    2.

    יוֹם: 낮에

    3.

    날마다

    발음 [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91회 사용


    아도나이(3068)

    יְהֹוָה 스트롱번호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한글개역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란 용어가 13구절 소개됩니다.
    대한성서공회 검색 사이트 사용 결과(사 13:6, 13;9, 겔 13:5, 30:3, 욜 1;15, 2:1, 11, 3:14, 암 5:18, 20, 습 1:7, 14, 슥 14:1)

    1.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2.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3.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4.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5. [요엘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6.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7.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8.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9.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0.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11.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12.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3.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여호와의 날”은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 여호와의 날(사2:12,13:6, 9, 겔13:5, 30:3, 욜1:15, 2:1,11, 3:14, 슥14:1, 암5:18, 20, 습1:7,14).

    여호와의 날을 스바냐는“분노의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고 말했다(습1:15).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말4:5, 욜2:31).

    * 여호와의 보복의 날, 시온의 송사를 신원하시는 날(사34:8)

    * 여호와께서 징벌하시는 날(사10:3)

    * 괴로움과 슬픔이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이 되는 날(사13:8),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행2:20).

    * 큰 날, 심판의 날(유6, 계6:17, 16:14).

    * 주의 날(살전5:2, 살후2:2, 벧후3:10).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진노하게 하였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보복의 날이지만 여호와를 믿고 신뢰함으로 박해받고 그동안 고통받았던 자들에게는 주의 크고 영화운 날이며, 그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는 날이 될 것이다(암5:18).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면 하늘의 군대가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고 도와주며 옹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대언자들은 도리어 이 날을 참혹한 심판의 날로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스바냐 1:14–2:3)


    본문읽기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2 장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1:14–2:3 묵상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1. 서론 –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소망

    스바냐는 예언자 중에서도 유난히 “여호와의 날”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라는 경고는 단순히 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임박한 현실적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이 날은 분노와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여호와의 날의 무서운 심판 (1:14–18)
    2. 심판 앞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권면 (2:1–3)

    2. 본문 주해와 묵상

    2.1. 여호와의 큰 날의 임박성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기서 ‘가깝다’(קָרוֹב, qarov)는 단순한 시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스바냐는 반복적으로 ‘가깝다’고 강조하며, 심판의 날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그 날은 “용사도 심히 슬피 우는 날”입니다. 즉, 가장 강한 자들도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는 종종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날을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늘 긴장된 준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2. 여호와의 날의 성격 (1:15–16)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여섯 개의 병렬된 표현(환난, 고통, 황폐, 패망, 캄캄함, 어두움)은 이 날의 파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16절)이라는 표현은 군사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었던 성읍과 망대조차 무너지며,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안전장치가 무력화됩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 시대의 ‘견고한 성읍’은 무엇입니까?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 앞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은 무너집니다.


    2.3. 범죄의 결과와 인간의 무력함 (1:17)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날의 이유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고, 그 결과 “맹인 같이 행”하게 됩니다. 영적 시력을 잃은 채, 길을 몰라 헤매는 모습입니다.

    또한 “피는 티끌 같고, 살은 분토 같다”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무가치함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흙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적용: 죄는 인간을 맹인처럼 만듭니다. 방향 감각을 잃고, 결국 파멸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2.4. 은과 금의 무능력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부와 재물은 고대에도, 오늘날에도 인간이 붙드는 최후의 안전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돈이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질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빼앗는 모든 우상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적용: 돈과 성공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2.5. 심판 앞에서의 권면 (2:1–2)

    스바냐는 놀랍게도 심판을 선포한 직후, 회개와 모임을 촉구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서 ‘모이다’(קָשַׁשׁ, qāšash)는 ‘모아 쌓다’라는 뜻으로,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라는 초청입니다.

    또한 긴급성을 강조합니다.

    •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오늘의 적용: 회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기회는 짧고, 하나님의 날은 갑자기 임합니다.


    2.6.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는 단순히 “심판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 겸손(עֲנָוָה, anawah):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
    • 공의(מִשְׁפָּט, mishpat): 하나님의 정의로운 질서를 따라 사는 삶.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기서 ‘숨김’(סָתַר, sātar)은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즉,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가 있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의 적용: 신자는 심판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과 공의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입니다.


    3. 복음적 연결 – 심판에서 구원으로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무섭게 선포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 둡니다.

    • 여호와의 큰 날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연결됩니다.
    • 은과 금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 겸손과 공의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분노에서 우리를 숨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4. 오늘 교회를 위한 교훈

    1. 심판의 날은 가깝다 – 영적 긴장감을 잃지 말라.
    2. 하나님을 범죄한 죄를 직면하라 –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라.
    3. 돈과 권력은 구원하지 못한다 – 우리의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4. 회개는 지금이다 – 지체하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5. 겸손과 공의의 삶을 추구하라 – 이것이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길이다.

    5. 결론 – 숨김을 얻는 길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 심판의 무서운 날: 인간의 모든 안전과 자랑이 무너지는 날.
    • 그러나 동시에 숨김의 길: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보호하심을 얻는 길.

    여호와의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합니다.


    6.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경고 앞에서 저희의 무관심과 교만을 회개합니다. 은과 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피난처로 삼게 하옵소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숨김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선지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호라 그 날이여'(1:15) 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 또는 "구원의 날"이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심판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사야 13:9, 요엘 2:1-2) 
    둘째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요엘 2:32, 스바냐 3:17)
    셋째는 재림의 날(베드로후서 3:10, 데살로니가전서 5:2)

    선지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호라 그 날이여'(1:15),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이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사밧의 골짜기' 또는 '판결골짜기'에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개혁자 칼빈은 이 골짜기를 "타작 마당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 '추수의 날'이라는 것에서 유추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골짜기에는 "여호사밧 골짜기"(욜 3:2), "하은곡 골짜기"(겔 39:11), '아마겟돈 골짜기"(계 16:16)와 비교하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 

    구약시대 많은 예언자들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Day of Yahweh)의 도래를 경고했다. 
    예언자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스바냐 1:14)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로다.” (스바냐 1:15)

    그날은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는 날이다. 
    왜 하나님은 분노하시는가? 
    “이는 그들이(=유다 백성)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스바냐 1:17)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들을 징벌하기 위해 급히 오시는 것이다.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스바냐 1:18)

    여호와의 날은 진노하신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징벌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벌하셔서 울음소리가 예루살렘을 채우고, 모든 것이 황무하게 되는 날이다.

    그러면, 다가오는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 앞에서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이 스바냐서의 핵심이 된다. 유다 백성들에게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 (스바냐 2:2)

    시간이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빨리 다가오지만, 아직 시간이 있고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공의를 찾으라! 겸손을 찾으라!” (스바냐 2:3)

    스바냐는 ‘찾으라’는 동사를 세 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를 떠나, 찾지도 않고, 공의도 없고, 자만하고 자고(自高)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무섭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했다. 
    스바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멸절시키신다고 했다. (1:6) 유다 백성들이 살길은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둘째는 불의와 부정을 버리고 공의를 찾고,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고 했다. 인간의 오만과 자만(hubris)으로부터 돌이켜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이다. (잠언 15:33; 22:4) 
    이들 세 가지를 ‘찾는 것’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길이라고 스바냐는 선언한다.


    그날, 여호와의 날(요엘 1:15-20)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마지막 심판은 불로 심판된다 했습니다. 
    불로 심판된다는 말은 인간은 이미 불로써 포위되었다 이 말이죠. 우리 곁에 불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불 가운데서, 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맹렬한 심판의 불, 우리를 태우고 우리의 모든 의지하는 것들을 다 태워버리는 불속에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알게 돼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안에 담긴 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됩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되면 우리는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 우리가 하나의 탑승이 되어서 가게 되면 그 약속이라는 그 거울 앞에 나오는 앞 거울 앞에 비취는 모든 것은 불에 태워지는 광경들이 다 드러날 거예요.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아르헨티나의 그 넓은 팜파에서 나오는 그 목축도 나중에 불로 태워질 것이고, 호주라는 뉴질랜드에 있는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도 하나님께서 불로 다 태워질 것이고, 뉴욕에 있는 듀바이에 있는 상하이에 있는 그 높은 빌딩들도 불에 다 태워질 것이고, 그것이 약속 안에서, 예수 안에서 창을 통해서 바깥을 볼 때에 본래 이 세상은 불로 싸지름을 당하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운반체. 그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냥 구경만 하고 관람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비행물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위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이 불로 없어지는 세계, 그 세계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 놓여있는 우리는 비 진리가 되죠. 진리 안에 있는 비 진리를 그 진리에 합당하도록 결합시키는 작업이 비행접시 안에서 따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쉽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을 통해서 야곱과 에서를 쌍둥이로 낳았는데 같은 쌍둥이예요. 쌍둥이인데 야곱을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고 에서를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습니다. 에서는 운명이라는 게 없어요. 지가 지 인생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게 없는데 야곱은 운명을 느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시도하는 대로 거부를 당하고 자꾸 커트를 당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다루는 인생이 아니고 다른 쪽에서 나를 그쪽에 맞도록 다루어지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야곱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약속 안에서 언약 안에서 언약이란 비행물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야곱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와 뭣과 관련을 짓느냐 하면 그 차창 밖, 앞 유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로써 태워져야 될 그러한 아직도 다 태워지지 않고 남아있으면서 불 태워질 것을 알지 못하는 바깥 풍경과 연관 지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바깥쪽에 있는 그 멸망, 최후의 날, 심판의 날과 안쪽에 있는 자기 자신의 운명과 연결을 시키면서 언약이라는 그 비행물체를 타고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안쪽에 구원받은 사람의 운명은 바깥쪽과 어떻게 연관 되는가, 바깥쪽에서는 심판과 멸망인데 그럼 이 안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그걸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게 되면 여기에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돼 있어요. 이걸 중간 것을 다 생략하면 “아담은 죽었더라“ 아담은 결국 죽게 되더라. 아무리 자식을 낳고 요란한 업적과 성과를 이뤄도 결국은 죽더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죽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텐데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은 소위 그 사람이 죽은 날, 기일을 맞이해서 죽게 하신 주님은 찬양하지 않고 그 사람이 사적으로 벌였던 일에 대해서는 극구 그렇게 찬양을 해요. 안중근 의사 기념인, 심지어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 이런 사람들의 기일이 되면 아직도 팬들이 살아있어서 난리도 아닙니다. 그날이 되면, 김 현식 기념일, 내 사랑 내 곁에 다시 한 번 듣고 그리고 유명한 가수들 죽고 나면 또 하고, 어제 육상 경기 기념식 하는데 죽은 손기정 선수 기념상 앞에 방석하나 해놓고 꽃 하나 바치는 그런 의식을 행한다 이 말이죠.

    주께서 다 죽인 건데 ‘아유, 아깝다’는 거예요. 뭐가 아까운데. 아까우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전부 다 엉터리네. 그러면,ㅎ ‘차라리 죽이려면 주께서 잘 죽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진작 죽을 사람을 진짜 죽였나?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깝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비행물체 바깥을 볼 수 있는 불로 심판한다는 이것은 집단적으로 다 죽는 날을 생각 안 하고 그걸 염두에 안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휴, 잘만 하면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이래 생각하거든요.

    인간이란 존재는 언약과 결부 시켜서 자기 존재를 봐야 되는데 언약도 몰라 계시도 몰라 성령도 몰라 아무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니까 자기 죽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남 죽는 걸 되게 아까워하는 거예요. ‘그 다음 니 차례야. 니. 니 언제 죽을지 몰라.’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어머니는 오시다가 장소를 못 찾아서 집에 도로 가셨어요.ㅎ 사람이 연세 많고 하면 교회 나오는 것도 자기 집 찾아가는 것도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못 오고 안 오고하는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전에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왜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안 하면 안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멸망, 쉽게 말해서 노아홍수, 전체적으로 다 죽이는 사건, 심판의 홍수 이전에 먼저 구원받을 백성에 대해서는 그 비행물체 안에서 죽음이란 의미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일을 안팎으로 약속이란 이름으로 안팎 양쪽으로 다 실시를 하게 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요엘서 같은 경우에 그날이 온다 할 때 그날이 왔을 때 그것이 요엘만 아니고 전 세계의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 여호와의 날이 닥치기 전에 먼저 유다나라라는 혹은 이스라엘 나라라는 그 나라에 죽음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을 미리 앞당겨 맛보게 하는 혜택으로 오늘 본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읽었던 본문 기억하시잖아요. “멸망의 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멸망이다 이 말이죠. ‘아! 세상 더럽다. 확 부셔라.’ 이렇게 지가 원해서 멸망 온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기 당하고 난 뒤에 ‘에이고, 나만 죽나, 다 죽어라, 다 죽어.’ 이런다고 해서 갑자가 세상 당하는 게 아니에요. 그날은 자기 날이지 여호와의 날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인간도 마지막 날은 내 소원 풀어주는 내 날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면서 일방적으로 여호와께서 들이닥쳐서 일을 벌이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한테는 매일이 여호와의 날 이예요. 왜, 매일 자기 뜻대로 안 되는 날이기 때문에.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 미칠 지경 이예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루 종일이 아니고 삼백육십오일 내 뜻대로 되는 날이 없어요. 하여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말씀은 왜 그렇게 아버지께서 잘 지키시는지.ㅎ 아주 차질이 없어요. 빈틈이 없어요.

    요엘을 보게 되면 유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려고 뭘 의지 했는가가 나오죠. 여기 16절에 보면 “음식물(식물)이 우리 목전에서 끊어져버리고 기쁨과 즐거움도 성전에서 끊어지고”, 교회 나와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요. 복 받을 일이 없으니까. 17절, “씨가 흙덩이에서 썩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고 곡식은 시들고”

    성주군에 참외해서 1년에 3천 6백억 번다는 거예요. 
    대구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자기 아버지 말 듣고 때려 치고 성주에서 참외 키우는 기술 배웁니다. 
    우리나라 참외 70%가 성주군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연말 되면 목돈이 1억씩 된 답니다. 
    어떤 사람은 비닐하우스 25~30동을 지어서 하니 한 동에서 몇 천만 원 나오는데 25동이니 돈이 3억대, 5억대가 돼요.

    그런데 그 씨가 만약에 어느 날 정전된다든지 가뭄 들어서 참외밭이 망해버리면 그 사람들이 뭘 느끼겠습니까? 
    우주의 종말을 느끼고 그 다음에 자기의 종말을 느낄 거다 이 말이죠. 
    ‘야! 이러다가 정말 참외밭을 폭싹 쓸어버리면 정말 이 세상이 멸망의 날, 심판의 날이 아니가, 이러다가 우리 집안 뭐 먹고 사노.’라는 걱정을 하게 되죠. 
    결국은 이러한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참외가 안 돼서 참외가 썩어서 수입이 없을 때 걱정한다는 자체가 사람들이 자기 날을 기다렸지, 절대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 궁금해요. 난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찾아가 보고 싶어요. 
    그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목사들 외치는 것이 여호와의 날을 외치는지 아니면 추수 잘되는 목동 챙기는 그날을 챙기는지, 무슨 소리하는지 구경하고 싶어요. 
    구경하나 안하나 뻔하지. 
    그래서 성주에서는 그렇게 돈이 많아서 공공 단체도 그렇게 대우를 잘해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생축이 탄식하고” ‘우~~’ 하고 소가 운다는 거예요. 돼지가 울고, 소하고 돼지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매몰처리 하면서 얼마나 울었겠어요. 죽은 채로 하면 그것도 소의 인격을 높이는데 이건 산채로 죽이니까, 괜히 베트남에 가서 하나가 구제역 들어서 온 나라에 소, 돼지 다 잡고 또 지나면 닭도 다 잡고 또 바다의 전복도 태풍불면 다 죽을 판이고, 그러니까 평소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럼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여호와가 싫다는 거예요. 괜히 시어머니 옆에 얼쩡거리는 게 딱 귀찮아, 여호와를 싫어하면서 뭐라고 입을 벌려서 하는 말이 ‘여호와여, 영광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가관이라. 가관. 그렇게 여호와가 싫은데 평소에 자기 날만 좋아하면서 교회에 와서 여호와를 부르짖는 심보가 더럽잖아요.

    여기 “소떼가 민망해 하니 양떼도 피곤하고” 양 떼가 피곤해서 누워있고, 그게 누가 이렇게 하느냐, 그게 비행물체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이미 마지막의 모습을 비행물체 안에 있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도 이 일을 일으키는 겁니다. 너희가 평소에 여호와의 날을 진정 좋아했던 적이 있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기 위해서 의지했던 모든 것을 전부 다~ 거두고 치워버리고 없애버리고 그야말로 이 세상을 광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가 광주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애굽에서 광야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약의 절차라면 신약에서는 그 절차를 반대로 합니다. 애굽 먼저 있고 광야 만들고 그 다음에 천국 가는데,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이 엄연히 가나안 땅이라서 지명이 나와 있지만, 신약에서는 이 땅이 애굽이고 이 땅이 광야 되게 해놓고,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이 땅에는 없어요. 골로새서 3장 1~4절 “이미 이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감춰졌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신약에서는 하늘을 쳐다봐야 되지 땅의 것에서는 어떤 승부 걸만한 게 없어요. 그래서 땅의 것이 날아가더라도 ‘아! 이건 여호와의 날이 가깝구나.’ 하고 반기고 즐거워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애굽이고, 그 다음에 광야 되고,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없고 하늘나라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을 거칠 때 태웠거든요. 예수님이 이미 그 경과를 거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쳤던 그 경과를 그대로 밟으면 그 코스가 구원코스입니다. 다른 구원코스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숨어 나오고 죽어서 천국 갔다면 그 코스대로 성령께서 그 코스대로 가라고 인도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오늘 중요한 것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특히 신약이나 구약이나 광야를 만든다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 더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일부러 다 치워버려요. 소도 탄식하고 양도 피곤하다 하고 전부 다 나자빠지고 곡식도 다 썩어버리니까 뭐 답답하죠. 강제적으로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런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살다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구나.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아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죽어야지.’ 이런 게 아니고 그런 식이 아니라면 그건 믿음이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어 죽는 것은 그건 신앙이 있고 아니고 관계없이 다 주어지는 거니까, 특별한 게 없어요.

    그러나 아담에서 ‘~~죽었더라. ~~ 죽었더라.‘ 하는 것은 그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낯선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아이쿠, 이거 먹을 거 다 죽고 닭 죽고 소 죽고 할 수 없다. 하나님, 빨리 죽이세요. 죽어서 좋은데서 편히 쉬렵니다.‘ 이런 자기 편한 걸 생각하는 죽음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그냥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거 좀 생각해 볼게요. 창세기 5장 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죽음 이야기가 없어요.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여기 창세기 5장 22~25절에 보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냥 계속해서 처음부터 동행했고 끝까지 동행했고 그리고 그를 데려갔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죽음을 집어넣어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결과적으로 여러분,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죠?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동행했다고 돼 있고 히브리서에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다고 돼 있어요. 두 개 합치면 무슨 이야깁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믿는 자는 ‘죽음도 동행이지 죽음이 아니다’라고 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지금 매일같이 죽여줄 때 그걸 동행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 밥그릇을 치우고 젓가락을 치우더라도 그게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동행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집사가 매일같이 밥그릇을 치우시고 밥그릇을 깨고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얻어터지고 하다가 죽어버렸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방법인데 무슨 방법이냐, 평소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았던 동행 방식으로 우리는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그 안목을 두자로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죠?

    지금 내가 알고 있는데서 주의 일을 해석하지 말고 우리가 아는데 불가능 했었었는데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살았고‘라는 입장에서 다시 어떤 분이 어떤 집사가 어렵게 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란 말이죠. 그것이 오히려 그 아픔과 그들의 고통스런 가난을 부러워하란 말 이예요. 왜, 남들은 살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살려고 하는 건더기가 없어요. 하나님이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리고,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려요.

    미장원 하면 미장원 망하고 펀드 하면 펀드가 내려가고 주식하면 주식이 폭락하고 사면 샀다고 다 망하고 팔면 팔아서 망하고 여기 거치면 여기 일이 안 되고 만사가 되는 일이 없어요. 
    만사형통이 아니고 반대, 모든 게 불통, 형통이 안 될 때 그것은 바로 니가 땅에서 이미 죽었고 니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만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독특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되겠죠.

    동행이라 하는 것은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죽어야 될 분이 나와 함께 곁에서 같이 산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집에 죽어야 될 분이 또는 우리를 이 땅에서 데려 가실 분이 함께 사신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퀴벌레와 동행하신 적 있습니까? 
    죽이고 싶죠. 왜, 바퀴벌레가 나를 힘들게 하니까. 

    예수님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을 우리 쪽에서 보면 예수 믿기 힘든 게 아니고 불가능하고 짜증나요.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에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사도바울의 구원받은 자의 성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동행 안 했으면 참 큰일 날 뻔 했어요. 동행 안 했으면 돈 좀 벌었다고 과시할 것이고 자랑할 것이고 이 땅에서 조금 성공한 것도 부풀려서 큰 성공 한 것처럼 으스댈 것이고 사법고시 누구 아들 합격했다고 붙일 것이고 누구 하나 성공 했다고 할 것이고 27살 때 대학병원 병원장 했다고 알려질 것이고 누구는 의사도 증권도 잘 하고 의사도 잘하고 시골 의사인데 뭐 그리 똑똑한지, 그런 것들을 자랑할 때 그 사람이 죽을 맘이 나겠습니까? 더 살고 싶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일하게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나의 날, 내가 성공한 날, 내가 출세한 날, 내가 대우받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날은 이것은 우리가 싫든 좋든 엄연한 현실인 것을 우리에게만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수시로 그것을 이해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3. 종말론적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1.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월 26일(금) 요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날(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Alas for that day! Fo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it will come like destruction from the Almighty.


    여호와의 날(13구절)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요엘 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여호와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 중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주로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3. 종말론적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1.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

    이사야 26:4
    너희는 여호와를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사도행전 2:20-21 
    여호와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셨음이니라. 

    로마서 10:1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요한일서 5:5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아니냐?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니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요한계시록 1:7-8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실로 그러하리라. 아멘.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나중이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자라.

    여호와의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심판의 날
    구원의 날

    선지자들은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기록했고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이 오기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도 구원자, 예수도 구원자이신 것이고 여호와는 뿌리, 예수는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재림도 한 분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한 아들로 오시면서 예수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시고 영존하신 아버지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전능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누구시라는 것을 어떻게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대주재시고 심판주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만 하시고 아들에게 다 맡기신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친히 사람되어 오셔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날(요엘 2:1-11)

    왜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메뚜기 재앙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재앙으로 일상생활이 중단되고 예배생활이 중단되는 엄청난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런 엄청난 위기를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메뚜기 재앙을 몇 번 만났습니까? 
    네 번 만났습니다. 
    똑 같은 메뚜기 같지만 조금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르고 피해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왜 네 번이나 만났습니까? 
    한 번 재앙을 만났는데 그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재앙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재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이나 재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 재앙이 일어났던 것은 네 번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말씀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어떤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어떤 도구로 심판을 하시는지,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우리의 삶이 어떤 비극적인 삶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 여호와의 날은 결코 시시한 날이 아니며 엄청난 심판의 날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 (1-3)

    ● 욜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오늘 본문은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합니다. 또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지르라고 말씀합니다. 시온과 나의 거룩한 산은 같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요새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낮은 산이 시온인데, 여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어서 나의 거룩한 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교회 사람들을 향해 먼저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고의 말씀을 주변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부터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소리를 들어야 할 일차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에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가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나팔은 “쇼파르(양각나팔)”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 나팔은 종교적인 큰 모임이 있을 때, 새로운 왕이 세워질 때, 전쟁이 시작될 때 불었습니다. 지금은 왜 불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을 경고하기 위해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팔은 누가 불어야 합니까? 히브리어 원문은 2인칭 복수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앞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선지자는 특별한 때에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으로 깨우는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평소에 백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씀으로 도전하고 양육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평소에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전했던 그 말씀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강력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격렬하게 진동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경고의 말씀을 듣고 말씀 앞에 떠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 완악한 사람이 아닌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고 도전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임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은 요엘 선지자가 가장 먼저 했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여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날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항상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되며,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날인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겐 구원의 날, 소망의 날, 승리의 날이 될 것이며, 죄에 빠져 살아간 사람에겐 심판의 날, 절망의 날, 멸망의 날이 되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 같은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분명히 이 날은 하나님이 인류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했던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에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심판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되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을 때, 롯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바로 이런 날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죄에 빠져 살아간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 여호와의 날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 날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죄에 빠져 살면서도, 세상 쾌락에 젖어 살면서도 나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합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구원에 대한 자신감은 있는데 아무 근거가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신 좀 차려야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깨어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 앞에 벌벌 떠는 사람은 그 날에 떨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 앞에 떨지 않는 사람은 그 날에 심판 앞에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고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회개하면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욜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를 말씀합니다.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는 표현은 출 10:22에 애굽에 내린 9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에서 사용된 말씀입니다. 애굽 땅을 심판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새벽이 시작될 때 붉은 빛이 순식간에 산꼭대기에 덮여버리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모든 땅에 확 덮여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세상은 이처럼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암담한 현실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정말 빠르고 신속하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하시면 어디를 보아도 빛을 볼 수 없고, 아무리 보아도 소망이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날이 오게 될까요?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메뚜기 떼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4절 이하에 보시면 전쟁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엄청난 군대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초토화시키는 상황을 말씀한 것입니다.

    ● 욜 2: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니 그 땅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운다고 말씀합니다. 불이 한 쪽에만 붙은 것이 아니라, 앞에도 붙었고 뒤에도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는 엄청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지만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덴동산은 저주받지 않은 가장 복된 땅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땅이 에덴동산과 같았다는 말씀은 정말 완벽한 조건을 갖춘 땅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던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황폐한 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들이라는 말은 “광야,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절대 살 수 없는 사막과 같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까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풍성했던 땅이, 황폐한 사막처럼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창 13:10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기 전에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동산이라는 말은 에덴동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바다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그 자리입니다. 에덴동산과도 같았던 땅이 이제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에덴동산 같던 곳도 황폐한 땅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덴동산과 같은 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게 죄 때문에 깨어져 있다면 여기도 얼마든지 황폐한 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것을 피한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고,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피한 자가 없을까요? 사실은 피한 자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피한 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에도 롯의 가족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성전에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경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경고하여, 모든 주민들이 미리 깨닫고, 정신 차리고,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고, 그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말씀을 듣고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간다면, 그 날은 절대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니라 회복의 날, 구원의 날, 소망의 날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이 기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면 위기에서 벗어나 소망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영적 잠에서 깨어나면, 지금 은혜와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만났다면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경고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 때문에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고, 황폐하던 땅이 에덴동산과 같은 복된 땅으로 회복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여호와의 날의 심판 도구 (4-9)

    ● 욜 2:4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 욜 2:5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군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메뚜기 심판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침입할 이방나라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나라 군대가 침입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것이 무엇과도 같다는 표현입니다. 말과 같고, 달리는 기병 같고,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고,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두 이스라엘을 공격할 군대가 얼마나 강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군대인가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먼저 그의 모양은 말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말이라는 짐승이 나온 것은 메뚜기의 머리를 자세히 보면 말의 머리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리는 것은 기병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뚜기 떼가 기병들이 돌진하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힘 있게 달려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뛰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것은 껑충껑충 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올 때 기뻐서 춤을 출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병거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워낙 엄청난 군대가 한꺼번에 뛰니까 이 소리가 병거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 소리는 마른 장작 이 탈 때 탁탁 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메뚜기의 날개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워낙 많은 메뚜기의 날개소리가 한꺼번에 들리다보니 이게 마치 마른 장작들이 불에 탈 때 나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들리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줄을 벌이고 싸운다는 것은 잘 훈련된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한 줄로 서서 전진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군대는 절대 오합지졸이 아니라 잘 훈련된 최정예 부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욜 2:6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이런 군대를 보는 순간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다고 말씀합니다. 질린다는 말은 본래 몸을 비틀면서 비비꼰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이렇게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낯빛이 하얘졌다는 말씀은 본래 잿빛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낯빛이 어둡게 변해버렸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던 인간이라도,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처럼 겁에 질려버리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니엘 5장에 보시면 바벨론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의 얼굴빛이 변하고, 넓적다리가 녹는 듯 힘이 풀리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며 대적하던 인간도 여호와의 날이 되면 얼굴빛이 변하고 다리에 힘을 잃고 질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되면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습니다.

    ● 욜 2:7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 욜 2:8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이제 그 군대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사 같이 달리며” 힘들게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하게 돌진한다는 것입니다. “무사 같이 성을 기어오르며” 무사라는 말은 본래 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 머리가 깨어진다 해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깨어져 죽는다고 해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면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전투의 상황에도 전혀 흐트러지지도 않습니다. 한 명도 그 줄을 이탈하지 않고, 서로 부딪히는 일도 없고, 각기 자기의 길로 전진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무기는 던지는 무기나 화살을 의미합니다. 성을 기어오르면 방어하는 쪽에서도 절대 가만있지 않습니다. 고대전쟁 영화를 보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고, 창을 던지고, 심지어 끓는 기름을 쏟아 부으면서 강력하게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하게 저항해도 결국 그 성이 함락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을 돌파하고 나아갈 때입니다. 여기에 돌파한다는 뜻은 원문의 뜻은 “나팔(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져 죽는다는 뜻입니다. 성 안에서 날아오는 무기에 맞아 떨어져서 죽는 군인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들이 떨어져서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계속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오고, 돌이 떨어지고, 뜨거운 기름이 쏟아져도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동료들이 죽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성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막아도 끝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끊임없이 올라오는 적군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한 무기를 들고 막아도 절대 막을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욜 2: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이제 대적들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침입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뛰어 들어가며, 달리며, 기어오르며, 창문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중에서 뛰어 들어가고 있고, 성 위에도 있고, 집에도 기어오르고, 창으로도 넘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턴 더 이상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창문은 그나마 가장 구석진 곳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넘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소가 다 열려버린 것입니다. 대적들이 들어오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성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포위했다가 포기하고 돌아갔고, 바벨론 군대는 3년 동안 포위해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던 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이 뚫려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정말 견고한 성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 무시무시한 심판이며, 내 힘으로 절대 막을 수 없는 심판이며, 아무리 안전한 곳에 들어가 숨어 있어도 결국 모든 것이 다 뚫리고 무너져서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이 사용하실 심판의 도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메뚜기는 그렇게 강한 심판의 도구가 아닙니다. 메뚜기 한 마리가 달려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니까 정말 강력한 심판의 도구로 변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군대를 바벨론 군대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바벨론도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선택하시니까 갑자기 전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최고로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를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없는 곳은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 난공불락의 요새 예루살렘 성에 숨어 있어도,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하시면 대적들이 마음껏 들어와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울며, 금식하며, 부르짖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경고의 나팔을 불며 경고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습니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재앙 때문에 죽지 말고, 이 재앙을 피하고 살아나야 한다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런 위기를 만나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메뚜기 재앙이 몇 번 일어났습니까? 네 번 일어났습니다. 왜 네 번이나 일어났습니까? 한 번 재앙이 일어났는데 정신을 안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더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재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이나 재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안 듣는다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말씀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뚜기 재앙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위기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시련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위기는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기를 만났다면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회복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위기는 절대 위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위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난 이 코로나 시대도 분명히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면 이 위기는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여호와의 날의 심판 결과 (10-11)

    ● 욜 2: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이렇게 엄청난 군대가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떨고, 해와 달도 캄캄하고, 별들이 빛을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 군대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비유적인 해석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이처럼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리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런 급격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불지옥으로 변하면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우리의 삶은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벌벌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욜 2:11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여기서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변 강대국이 자기 스스로 침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이렇게 침입해 들어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이 없다면 어떤 대적들도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변에서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알아서 자기만의 생각으로 이렇게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죄도 없다면 나를 연단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고, 나에게 죄가 있다면 자를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시작된 시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대적하는 그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절대 나의 원수도 아니고, 나의 대적도 아니고, 내가 싸울 대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줘야 합니다. 그들은 진짜 대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대적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나의 대적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의 군대”와 “그의 진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침입하는 이방나라 군대는 더 이상 세상의 군대가 아니라 그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대적들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실까요? 그의 군대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과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싸우는 것은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원수는 진짜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갈 때 자기를 쫓아오며 저주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근거 없는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며 마음껏 저주하는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특히 아비새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가 가서 저 인간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사실 시므이는 일반 평민이었고 아비새는 전쟁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인간입니다. 보통 이렇게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잘 까붑니다.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지금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침착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침착함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잘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대적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축복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이 세상에 없다는 뜻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면 아무리 약했던 존재라도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와 정면충돌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고 말씀합니다. 1절에 나온 여호와의 날이 여기에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고, 신경도 안 쓰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더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더 죄에 빠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은 반드시 죄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더 깨끗하고, 더 거룩하고, 더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여호와의 날의 심판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고, 해와 달도 캄캄하고, 별들이 빛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 편이 되지 않고 대적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만난 시련이 아무리 심각해도 이 시련만 바라보지 말고 종말에 임할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심판은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받는 최후 심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때리시고 징계하고 계십니까? 왜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메뚜기 재앙을 만나게 하십니까? 이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완전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지금 그들을 때려서라도 그들을 바로잡고 회복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이 다음 1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무슨 뜻입니까?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울며, 금식하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얼마든지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시지만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시련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때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그때는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기회는 오직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미련하여 죄악 된 삶을 고집하다 지금 엄청난 시련을 만난 중에 있더라도,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더욱 간절한 기도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눈물이 회복되고, 기도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되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고 우리 때문에 이 진해 땅이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어나지 않으면 반드시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에덴동산 같던 땅이 황폐한 사막처럼 죽음의 땅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만났다면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군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얼마나 강한 존재로 변신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막아도 절대 막을 수 없고, 아무리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도 절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날의 심판 결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더욱 강한 여호와의 날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달라지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경고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황폐하던 땅이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회복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그땐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에덴동산과 같은 복된 삶을 회복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C. S. 루이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변증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는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하고 설명하는 책으로, 원래는 BBC에서 방송된 강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기독교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변호하며, 신앙이 합리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요 변증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도덕법을 통한 신 존재 증명

    루이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도덕법(Moral Law)**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 이 도덕법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개인적인 본능 이상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즉, 하나님)가 이를 부여했음을 의미합니다.

    • 따라서 우주에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2. 그리스도론 – 예수는 누구인가? (Liar, Lunatic, or Lord 논증)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유명한 **"삼중 논법(Trilemma)"**을 제시합니다.

    •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거짓말쟁이(Liar): 예수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였다.

      2. 미치광이(Lunatic): 예수가 자신을 신이라 착각한 정신병자였다.

      3. 주(Lord):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 예수가 거짓말쟁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 논증은 예수를 단순한 도덕 교사로 보는 관점을 배격하고, 그의 신성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합니다.


    3. 기독교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하지만 결코 피상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진리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본성과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4.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루이스는 왜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룹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으며, 이는 사랑과 도덕적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

    • 그러나 자유의지는 잘못 사용될 수도 있으며, 인간이 이를 남용할 때 악이 발생합니다.

    • 결국 악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불가피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합니다.


    5. 기독교 신앙과 성화 (Christian Life & Transformation)

    •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 기독교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의 합리성과 초월성

    **"순전한 기독교"**는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기독교가 논리적이며 실질적인 삶에 영향을 주는 신앙임을 변증하는 책입니다.

    • 루이스는 감성적인 접근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와 실생활의 경험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합니다.

    • 그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참된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신앙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변증이 됩니다.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신앙의 인물 7인

    서론: 회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

    기독교 역사 속에서 회심(回心)은 단순한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심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다. 여기서는 근현대 인물들 중에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7인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1931-2012) – 권력의 탐욕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기 직전, 친구를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강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교도소 사역에 헌신하여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을 설립하고, 전 세계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모했다.


    2. 이반 모이스예예프 (Ivan Moiseyev, 1952-1972) – 무신론 교육을 받았던 군인이 순교자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이반 모이스예예프는 강한 무신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강한 성령 체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끔찍한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는 순교했지만, 그의 신앙과 용기는 소련 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니 에릭슨 타다 (Joni Eareckson Tada, 1949-) –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다

    17세의 나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조니는 처음에는 극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빠졌다. 하지만 깊은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고,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4. 리 스트로벨 (Lee Strobel, 1952-) – 무신론에서 신앙의 변증가로

    리 스트로벨은 무신론자로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기자였다. 그의 아내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이후 『예수는 역사다(The Case for Christ)』 등의 책을 저술하며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다.


    5. 로시어 스프롤 (R.C. Sproul, 1939-2017) – 냉담한 종교에서 살아 있는 신앙으로

    R.C. 스프롤은 젊은 시절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대학 시절 밤늦게 도서관에서 강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회심했다. 그는 개혁신학을 연구하며 기독교 신앙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하여 전 세계 수많은 신자들에게 신학적 교육을 제공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6. 프랜시스 콜린스 (Francis Collins, 1950-) – 과학에서 신앙으로

    세계적인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의학을 공부하며 인간 유전자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면서 신의 존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며 회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앙과 과학이 조화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신앙을 지닌 과학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7. 안네 반 데르 비엘 (Anne van der Bijl, 1928-2022) – 무신앙에서 성경 밀반입자로

    네덜란드 출신인 안네 반 데르 비엘(브라더 앤드류, Brother Andrew)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없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군 복무 중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경험한 후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는 이후 ‘하나님의 밀수꾼’으로 불리며, 공산권 국가들에 몰래 성경을 배달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결론: 회심은 삶을 바꾸는 능력이다

    이들 모두는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만나고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어떤 이는 권력과 부를 쫓다가, 어떤 이는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학문을 탐구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단순한 감정적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고 있으며, 회심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신앙의 인물 7인

    서론 : 회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 기독교 역사 속에서 회심(回心)은 단순한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심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다. 
    여기서는 근현대 인물들 중에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7인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1931-2012) – 권력의 탐욕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기 직전, 친구를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강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교도소 사역에 헌신하여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을 설립하고, 전 세계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모했다. 

    2. 이반 모이스예예프 (Ivan Moiseyev, 1952-1972) – 무신론 교육을 받았던 군인이 순교자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이반 모이스예예프는 강한 무신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강한 성령 체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끔찍한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는 순교했지만, 그의 신앙과 용기는 소련 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니 에릭슨 타다 (Joni Eareckson Tada, 1949-) –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다 17세의 나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조니는 처음에는 극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빠졌다. 하지만 깊은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고,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신앙을 갖...






    요엘

    저자: 요엘서는 그 책의 저자가 선지자 요엘(욜 1:1)이라고 언급합니다.

    저작 연대: 요엘서는 주전 835-8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 목적: 이 책의 배경인 유다는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에 의해 황폐화됩니다. 메뚜기 떼의 침략은 곡물, 포도밭, 정원 및 나무 등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요엘은 메뚜기를 통해 행군하는 인간 군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 모든 파괴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요 사건을 조명하여 줍니다. 하나는 메뚜기의 침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이 책에 대한 초기의 성취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것처럼 오순절날에 발생한 사건과 연관됩니다.

    핵심 구절: 요엘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약: 메뚜기의 끔찍한 재앙 뒤에는 그 땅 전체에 임하는 심각한 기근이 뒤따릅니다. 요엘은 이러한 일들을 촉매제로 사용하여 유다에게 경고의 말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고 온전하게 회개하지 않는 한, 적군은 메뚜기처럼 땅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요엘은 모든 백성과 그 땅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금식하며 겸허해질 것을 호소합니다. 그들이 반응한다면, 그 나라에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새롭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열방이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와 비교할 때 끔찍한 메뚜기 떼들은 고작 하루살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인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노와 능력과 거룩의 속성을 계시하시는 날이며,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주의 날은 역사적으로 그 땅에 임하는 메뚜기의 재앙으로 체험됩니다. 2장 1-17절은 요엘이 메뚜기 재앙과 가뭄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여 회개에 대한 부름을 새롭게하는 과도기 장입니다. 2장 18절-3장 21절은 종말론적인 용어로 주의 날을 묘사하고, 회개에 대해서는 육체의 회복(2:21-27)과 영적인 회복(2:28-32), 그리고 국가적인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답변합니다(3:1-21).

    예표: 구약이 개인적인 죄이든 국가적인 죄이든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예표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를 했을지라도 그들의 회개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행함에 제한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전 제물은 십자가에 달려 단번에 영원히 바쳐질 궁극적인 희생의 그림자였습니다(히 10:10). 요엘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욜 2:11)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는 그런 순간을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심판 날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적용: 회개가 없다면 심판은 가혹하고 철저하며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뢰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연, 슬픔 또는 다른 일반적인 사건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확고한 계획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와 그분의 완전한 의를 교환해 주셨습니다(고후 5:21).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밤의 도적같이 신속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붙들어야 우리는 주의 날에 있을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요엘서는 구약 성경 39권 중 29번째 책으로 12권의 소선지서 중 하나입니다.

    [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요엘은 유다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유다에 닥친 메뚜기 때와 가뭄의 재앙을 여호와의 날의 전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며 마지막 때의 구원의 소망을 전합니다. 베드로오순절 설교(사도행전 2:17-21)에서 요엘서 2:28-32[1]을 인용합니다.

    •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개요와 구조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 1:4)

    • 저자: 선지자 요엘 [2];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 저작 시기: BC 830년 (명확치 않음)
    • 목적: 남유다에 닥칠 심판 경고, 회개 촉구, 그리고 소망
    • 주제: 주의 날
    • 지리적 배경: 유다
    • 책 이름 약자: 욜[3] , Joel[4]

    구조와 특징

    요엘서는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메뚜기떼의 공격 (1장)
    • 여호와의 날 (2장)
    • 유다의 영광스러운 미래 (3장)

    특징

    • 언제 쓰여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 저자 요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메뚜기떼의 공격 (1장)

    요엘 당시에 메뚜기 떼로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망친 사람들은 애곡 하였습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제사장들에게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소집하여 장로들과 모든 주민이 회개와 기도 할 것을 촉구합니다.

    • (1: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제사장들은 자신들부터 시작하여 국가적 굴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그들에게 중요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께 바칠 희생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5]
    • (1: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선지자는 요엘 1:13-14의 권고에 대한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는 현재의 재앙을 다가올 훨씬 더 심각한 재앙, 심지어 위대한 “여호와의 날” 자체의 전조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이 일으키는 경각심을 표현합니다.[6]

    여호와의 날 (2장)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으며 그의 군대는 크고 강하여 심히 두렵고 당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여기서 새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동사 Shachar에서 파생되었는데, 한 가지 의미는 “검게 되거나 검게 되다”이고, 두 번째 의미는 “빛으로 터져 나오다”입니다. 이 후자의 의미에서 아침을 의미하는 단어인 새벽이 파생되었고, 전자에서 “검은색”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 단어는 나일 강의 이름을 시호르(이사야 23:3)로 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를 검은색과 관련하여 받아들이고, 흘러서 산 꼭대기에 쌓인 두껍고 어두운 구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 맥락과 더 잘 맞는 듯합니다. 다음 설명은 자연적 메뚜기떼와 정치적 메뚜기떼를 모두 포괄합니다.[5]

    주께로 돌아올지어다 (2:12-17)

    •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2:18-27)

    그러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주셔서 땅을 회복시키시고 풍족케 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 관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2:28-32)

    그 후에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줄 것이고 여호와의 날에 이르러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 약속은 성령이 부어진 오순절 날 성취되기 시작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부여된 회개의 은혜와 기적적인 은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날의 심판보다 앞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 그분에 대한 믿음, 그분을 향한 열망, 그분에 대한 의존,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진실성의 증거로서 그분께 대한 양심적인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큰 날에 구원받을 자는 오직 죄에서 하나님께로, 자아에서 그리스도께로, 아래의 것에서 위의 것으로 효과적으로 부름받은 사람들뿐입니다.[7]

    유다의 영광스러운 미래 (3장)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의 구원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을 보았습니다. 이제 3장 전체는 그 약속에 대한 설명으로, 그 구원이 무엇이며, 교회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교회의 영원한 안식과 기쁨 속에서 어떻게 완전해질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그 후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 교회를 위해 행해진 구원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를 위해 행해진 위대한 구원과 우리의 영적 적들과 그들의 모든 대리인들의 멸망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을 가지고 있으며, 큰 날의 심판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이룰 것입니다.[7]

    여호와의 날에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것이나 그의 백성에게는 피난처, 산성이 되셔서 심판과 구속을 완성하시고 시온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시다 (3:1-13)

    • (3:12)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이들이 모이는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최종 결정이 내려질 장소를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했던 모든 나라들,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의 적대적인 나라들, 특히 더 가까운 이웃의 적대국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주된 대상입니다. 이 구절의 "일어나서(stir up: ESV)“라는 표현은 9절의 "격려하고(stir up)”에 상응합니다. “올라올지어다”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1) 여호사밧 골짜기에 도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2) 전진 또는 행진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을 "올라오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관으로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의 결정을 하십니다.[8]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다 (3:14-21)

    • (3:1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강한 폭풍 속에서 다가오시니, 하늘과 땅이 그분 앞에서 진동합니다. 그분의 심판은 오직 그분의 적들에게만 내리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은 요새와 방패가 되십니다.[6]

    관련 자료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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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 성경인물:: 요엘
    

    바이블프로젝트 요엘 개요

    참고한 자료

    각주

    1.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2. (욜 1: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3.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_shortword01.php
    4. https://www.logos.com/bible-book-abbreviations
    5. 이동: 5.0 5.1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
    6. 이동: 6.0 6.1 Cambridge Bible for Schools and Colleges
    7. 이동: 7.0 7.1 Matthew Henry’s Concise Commentary
    8. Pulpit Commentary







    요엘

    요엘서를 기록한 선지자는 브두엘의 아들 요엘입니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요엘에 대한 정보는 그 이상 없어 요엘서의 기록 시기도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①여호사밧왕(남 유다 4대 왕)이 에돔과 동맹군을 물리친 여호사밧 골짜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므로 여호사밧 시대 이후이거나 ②블레셋, 애굽, 에돔이 심판받을 적대국으로 나오고,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보아 요아스왕(남 유다 8대 왕) 때 기록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요엘서에 제사장에 대한 언급만 있고 왕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어린 요아스를 대신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했던 때 요엘서가 기록됐다고 봅니다.


    내용

    메뚜기가 곡식을 다 갉아 먹는 재앙이 이스라엘에 닥쳤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조차 없을 정도로 곡식이 없어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고통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닥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재앙을 거두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셔서 다시 풍요롭게 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구원의 약속도 전했습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서 회개와 회복의 부르심

    본문 요약

    요엘서는 메뚜기 떼로 인한 자연재해를 시작으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더 큰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서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며, 장차 임할 구원의 시대를 내다봅니다. 요엘서는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조

    1. 재앙과 회개의 촉구 (1:1~2:17)
    2. 회복과 성령 강림의 약속 (2:18~2:32)
    3. 열방 심판과 최종 회복의 선언 (3:1~3:21)

    재앙과 회개의 촉구 (1:1~2:17)

    요엘서는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시작됩니다. 메뚜기 떼가 모든 농작물을 삼켜버리고, 곡식과 포도주가 끊기며, 사람뿐만 아니라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로 보이지만, 요엘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봐야 하며, 장로들과 제사장은 이 사건을 후손에게 전하며 기억하게 하라고 명령받습니다. 경제와 종교, 일상과 예배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선지자는 금식과 슬픔을 명하고,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울며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호소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은 단지 물리적인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빛으로 변하며,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날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며, 그의 본심은 인애와 긍휼,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뜻을 돌이키시는 분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단호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회개는 공동체 전체의 일입니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신랑과 신부까지도 회개에 참여해야 하며,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가 단지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 온 마음과 삶을 동반한 진실한 변화여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 첫 번째 부분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일깨워줍니다.

    회복과 성령 강림의 약속 (2:18~2:32)

    백성의 진심 어린 회개 앞에서 하나님의 반응은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며, 북쪽에서 온 군대를 쫓아내실 것이라 하십니다. 메뚜기 떼로 상징된 군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징계였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물리치시고 땅을 회복시키십니다. 들판에는 푸른 초장이 회복되고, 나무는 열매를 맺으며, 백성은 다시 기뻐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한 백성을 어떻게 은혜로 다시 세우시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크신 일을 행하셨고, 그들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회복하십니다. 이는 단지 육적인 풍요의 회복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성은 이제 다시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다른 이가 없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회복은 단지 현실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시며,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십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요엘은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언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그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시며,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합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환상을 보게 되며,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성령이 부어지는 이 약속은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직접 인용하며 성취된 말씀으로 언급됩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시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이자 복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열방 심판과 최종 회복의 선언 (3:1~3:21)

    요엘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그리고 최종적인 회복에 대한 선언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흩뜨리고 고통을 준 열방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열방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행된다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열방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팔아 이방 땅으로 넘기고, 하나님의 기업을 욕되게 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기억하고 갚으시며,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높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내부의 회복만이 아니라 외부의 악에 대해서도 반드시 판단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무력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민족 위에 계신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시온 산에는 피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온에 거하시며,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이방인은 다시는 그리로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땅은 다시 풍요로워지고, 산에는 단 포도주가 흐르며, 시내는 물이 가득하며, 하나님의 성소에서는 샘이 흘러나와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는 영원한 왕으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며, 회개한 자들에게는 풍성한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결론

    요엘서는 짧지만 심오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재해와 민족적 위기를 통해 말씀하시고, 백성의 죄를 깨우쳐 회개로 이끄십니다. 심판은 두려운 것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는 진실한 회개를 원하시며, 그 회개 위에 회복과 성령의 부으심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자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메뚜기 떼 같은 위기와 흔들리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옷을 찢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돌이키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요엘서를 통해 우리는 회개의 능력, 하나님의 긍휼, 성령의 약속, 그리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온에 거하시며, 그분을 경외하는 자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자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호와의 날과 회개의 촉구

    요엘 1장

    메뚜기 재앙이 이스라엘을 덮쳐 땅이 황폐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이 재앙을 통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제사장과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요엘 2장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며, 이는 더욱 큰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회복의 약속을 주신다. 또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실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 선포된다.

    요엘 3장

    하나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그들을 괴롭혔던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축복을 누리게 되며,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이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결론

    요엘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회개하는 자들에게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신다.


    요엘 ―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2~3분

    요    엘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1. 인적 사항

      (1)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2) 예루살렘 출신으로 추정. 남유다 선지자.

      (3) 브두엘의 아들로서 12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욜1:1).

    2. 시대적 배경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 요엘은 유다의 유약한 제9대 왕 요아스의 재위 기간인 B.C.835-796년까지 사역한 선지자이다. 이 때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왕국 시대의 중반기로서, 국제적으로는 강대국간의 패권 다툼이 별로 없던 다소 평온한 시기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커다란 변혁의 회오리가 스치고 지나갔던 때였다. 남유다의 제7대 왕이 된 아합의 딸 아달랴를 몰아내고 7세밖에 안된 어린 요아스를 왕위에 옹립하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이 있었다(왕하 11:4-12).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섭정인으로서 아달랴의 바알 숭배로 인해 훼손된 성전을 수리하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에 대한 언약을 맺게 하는 등 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유다 왕 요아스는 심한 동요와 죄악에 빠져 이교의 우상 숭배를 허용하는 등 부패하게 되었다(대하 24:18). 이것은 비단 요아스 개인만의 부패가 아니었다. 이에 편승한 유다 백성들 역시 패역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이 때에 대 메뚜기 재앙이 닥치게 되어 백성들은 기근과 가난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선지자 요엘은 홀연히 일어서서 유다 백성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파한 것이다.

    3. 주요 생애

      소  명    이  후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회개의 촉구

      B.C.835-796

      요엘1,2장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약속 선포

      요엘 2:18-3:21

      요엘서 기록

      B.C.830년경

      요엘 1:1-3;21

      죽음


    4. 성품

      (1)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과 비교되는 인물로, 시대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품의 소유자.

      (2)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애끓는 심정으로 민족의 회개를 외친 것으로 보아 사랑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많은 선지자(욜 2:12-14).

    5. 구속사적 지위

      (1) 메뚜기 재앙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선지자(욜2;31,32).

      (2) 여호와의 날 심판 경고와 회개 촉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간의 화목을 도모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한 자(욜2:13). 이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 절대한 중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6. 평가 및 교훈

      (1) 유다 백성이 패역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인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시고 경고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종들을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한 메시지를 들을 때에 우리는 책망은 책망대로, 권면은 권면대로 순순히 받고 그것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해야할 것이다(욜2:12-17).

      (2) 요엘은 백성들을 향해 메뚜기의 재앙을 선포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욜2:32)이라고 전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능력의 주님의 이름을 우리는 얼마나 힘써 진실 되게 부르고 있는가?



    요엘 ( Joel )


    요엘(Joel)은 구약 성경의 소선지서 중 하나인 요엘서의 저자이자 예언자로, 그의 예언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그리고 성령의 강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엘은 예언서 중에서도 특별히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에 대한 메시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신학에서 그의 예언은 종말론적 사건과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요엘의 배경과 역사적 맥락

    요엘서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정보는 비교적 제한적입니다. 요엘서에서 특정한 왕이나 역사적 사건이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활동 시기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9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추정됩니다. 요엘은 주로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여겨지며, 그의 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엘서의 주요 배경은 심각한 메뚜기 재앙입니다. 메뚜기의 대규모 침략은 이스라엘의 농업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요엘은 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동시에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제시합니다.

    요엘의 메시지: 심판과 회개, 그리고 회복

    1. 메뚜기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이 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요엘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메뚜기 재앙은 "여호와의 날"의 전조로 간주되며, 다가올 더 큰 심판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메뚜기 재앙을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보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엘서 1:15에서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나니"라는 표현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2. 여호와의 날 (Day of the Lord)

    "여호와의 날"은 요엘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을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신약에서는 이 날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며, 의인과 악인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 베드로후서 3:10).

    3. 회개와 하나님의 자비

    요엘은 심판의 경고와 더불어 회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요엘 2:12-13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그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엘은 단순한 형식적 회개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상징합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엘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연결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예표합니다.

    4. 회복과 구원의 약속

    요엘은 심판과 회개에 이어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신 후,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풍성한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요엘 2:25에서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팟종이와 느치와 황충이 먹은 해 수를 너희에게 갚아주리니"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회복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구속사와 연결 지어 해석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며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 회복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 영적 회복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강림: 요엘서 2:28-29의 예언

    요엘서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 중 하나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엘 2:28-29에서 하나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 연결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16-21에서 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 바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의 부어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예언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보편적인 구원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요엘은 성령이 특정한 계층이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가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종말론적 의미

    요엘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입니다. 요엘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만국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 종말론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날로 이해되며,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으로 해석됩니다. 요엘은 그날이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임을 강조하며,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요엘서의 기독교적 의의

    회개의 중요성: 요엘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은 기독교 신앙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성령의 약속: 요엘의 성령 강림 예언은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요엘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사도행전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025 호세아


    9월 23일(화) 호세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I will betroth you in faithfulness, and you will acknowledge the LORD.

    호세아서의 주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2장에서는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3장에서는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 묵상 할 주제는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안다는 히브리 단어는 "야다"라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안다고 말할 대 겉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란 서로 이웃끼리 지내며 알고 지내는 관계라고 한다면 속 사람이란 결혼 후에 동거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하나님을 알게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와 같은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마치 창녀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사 54:5-8).

    진실함(530. 에무나) 
    -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불변하는 성실, 충성을 뜻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견고함을 나타내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성공을 보증하는 여호와의 신실성이다(J.Given).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3045. 야다) 
    - '알다'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객관적인 인식 이상의 것으로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이해, 또한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의 참다운 깨달음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뜻을 포함한다(M. Henry). 
    또한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를 인정하고, 여호와께 충성과 복종의 태도를 보일 것을 시사한다(Chrisholm). 
    결국 이 새로운 지식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케 하고(벧후 1:3-7) 그와의 거룩한 사귐에 있게 할 것이다(요일 1:1-4).


    내가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14~3:5)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다루시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언제나 기꺼이 받아주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사랑을 음란한 아내를 맞이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죄악으로 가득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2장 14절부터 23절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Valley of Achor)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5). 
    아골은 히브리어로 “아카르”(עָכַר)라는 단어에서 나온 “아코르”(עָכוֹר)인데, 아카르는 괴롭히다(to trouble), 혼란하게 하다(to disturb)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근심의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쳐서 승리한 후에 아간이 불순종하여 아이 성 침공에 처참하게 실패한 후에 아간의 죄를 드러나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장소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의 골짜기가 오히려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듯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다시 구원하여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2:15).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데(2:19, 20),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바알을 비롯한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6, 17). 
    이 땅에 있는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과도 언약을 맺겠다고 하시는데(2:18), 더 이상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전쟁에서도 자유롭게 되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2:1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9).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옳다”, “바르다”는 의미의 “체데크”(צֶדֶק)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베체데크”(בְּצֶ֣דֶק)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고, 정의(正義, Justice)는 히브리어로 “우베미쉬파트”(וּבְמִשְׁפָּ֔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미쉬파트”(מִשְׁפָט)에서 나온 단어로 미쉬파트는 “법률에 의해 판단되는 옳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恩寵, Lovingkindness)은 “우베헤세드”(וּבְחֶ֖סֶד)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헤세드”(חֶסֶד)로 은혜, 사랑, 긍휼, 자비 등 한국어 성경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긍휼(矜恤, Mercy)은 히브리어로 “우베라하밈”(וּֽבְרַחֲמִֽים)인데, 이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이나 사람의 내장을 의미하는 “라함”(רַחַם)에서 나온 단어로 속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면서도 은총과 긍휼을 잊지 않고 균형을 잡으시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곳에 모여 성취되는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이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곳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0). 2장 20절의 “네가 알리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웨야다앗트”(וְיָדַ֖עַתְּ)인데, 이 단어의 원형은 “야다”(יָדַע)로서 “알다”, “이해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이 단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넘어서서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신부(新婦)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는 은혜가 주어졌음이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2:21, 22),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지 못했던 자들[로루하마(לֹא רֻחָמָה)]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루하마(רֻחָמָה)]들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로암미(לֹא עַמִּי)]들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암미(עַמִּי)]이라고 불리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2:23).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엘로하이(אֱלֹהָֽי)]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2:23).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호세아 3장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인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섬기며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호세아에게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아내를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3:1). 

    건포도 과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에 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간 그 음란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고 말씀합니다(3:2). 한 호멜(Homer)은 약 230ℓ이니 한 호멜 반이면 345ℓ이고, 무게로 환산하면 180kg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노예의 몸값이 은 30세겔(Shekel)이었는데,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은 대략 은 30세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노예를 사고파는 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음란한 아내가 집을 나가서 불륜을 저질렀으니 오히려 돌에 맞아 죽게 하도록 해도 되는데,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당하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모두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다시 데려온 아내에게 더 이상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겠고 말씀하십니다(3:3).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었습니다(3:4).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릴 수 없었고, 그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주상(柱像, Sacred pillar)도 없었습니다. 주상은 히브리어로 “맛세바”(מַצֵּבָ֑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기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마 우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입는 예복(禮服)인 에봇(Ephod)도 없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명한 절기와 제사들을 주관할 제사장들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드라빔(Teraphim)은 한 집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기는 작은 크기의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번듯한 지도자도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제대로 된 제사나 섬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계보(系譜)를 잇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3:5).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시 구원하셔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남편을 배신하고 불륜을 행하며 음란하게 살았던 고멜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음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신부라고 할 때 신랑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벌을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벌은 무엇을 위한 벌인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내가 그를 타이르겠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 하겠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렸을 때 그리고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하도록 만들겠다고 까지 하셨는데, 과거 출애굽의 역사처럼 지금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된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전에는 하나님이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끌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파괴되었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게 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다스려야 했지만, 죄는 이 관계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런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데, 율법의 정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또한 사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전쟁의 역사였다면 하나님 사랑의 회복은 그런 전쟁의 역사도 그치고 평안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해 다시금 말하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신으로 하여금 남편을 삼았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한번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너를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록 네가 잘못한 일이 있지만 그 잘못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 잘못을 지워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음행한 사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되’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아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잘못함으로 인해 한번 그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게 하실 때는 또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완성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빌1:6). 물론 그 과정 가운데 호세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 한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끝나면 좋겠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도 기웃거리고 저기에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십니다. 490번이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영원히 살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하심에 대하여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는 방식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절에 보면 공의와 정의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은총과 긍휼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진실함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하여, 그런 다음 은총과 긍휼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진실함 혹은 성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4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타이르되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겁니다. 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가? 호세아 2장 6절로 말하자면 왜 가시를 주시는가?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에 대하여 그냥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를 주십니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고, 잘못에 대한 징계를 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공의와 정의입니다. 쉽게 말해 죄에 대한 벌 혹은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징계와 벌을 주신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의 징계와 벌은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 징계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범죄를 계산하지 않고 원죄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너희와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되, 거기에 은총과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공의와 정의는 은총과 긍휼에 기초한 공의와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택자 편에서는 그들이 받아야 할 벌만큼 주시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택자가 받아야 할 벌을 충분하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데, 그 공의와 정의를 택자에게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택자의 모든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그에게 내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있는 겁니다.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할 때 죄책이 제거된 것이지, 부패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부패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자범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여전히 공의와 정의와 함께 자신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은총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서 공의와 정의 없는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총과 긍휼만으로는 저들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내리시되 필요한 만큼의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진실함이 추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실함이란 신실함 혹은 성실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행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혹은 두 번, 세 번 정도만 행하시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속해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20절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와 정의로 일하시며, 또한 은총과 긍휼로 일하시되, 진실함 성실함으로 일하실 때 너희는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란 단순히 일반계시의 차원이 아님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리셨지만 구원의 지식과 관련해서는 특별계시로만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너희가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외적 증거로써의 말씀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삶에 있어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고,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시지만, 앞서 그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징계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나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의로 행하시되, 은총과 함께 신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효력이 있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내적 증거로써의 성령의 일하심이 함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총과 긍휼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함, 성실함도 있습니다. 책망과 벌이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총이 있는 것이고, 그 일을 성실하게 실행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시작하신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무조건 사랑만 외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도 있지만 책망도 있습니다. 왜 책망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상의 교회가 말씀으로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으로 권징을 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책망이 있고 권징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할 때 말씀과 성례와 더불어 권징이 들어가는 겁니다. 권징 없는 교회, 책망 없는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알게 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응답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있는 22절은 앞선 말씀 20절의 내용 없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하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충분히 먹고 마실 때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시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로 삼을 때 참된 복이 시작된다고 알립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지상의 축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납되고 우리와 거룩한 혼인이 맺어지고 또한 그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존하시며 우리가 그의 보호와 방어 아래 안전하고 평안하게 된다는 약속을 받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지상의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될 때는 다시금 지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겠다고 하시는데, 지난주 살핀 15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우선 응답한다는 것은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공급된다고 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심으로 실제로는 바알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 누가 공급하시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누가 주체인지 알게 하셨고, 누가 주체인지 알게 되자 주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공급하시는지 순서를 따라 말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뒤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을 얻는 것은 땅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럼 땅만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해가 있어야 하고, 비가 있어야 하고, 그 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늘로부터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럼 하늘은 그 자체로 땅에 필요한 것은 공급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지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주체를 빼 버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땅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또한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아 제공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그 영광을 돌립니다. 이방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22절 마지막에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스르엘입니까? 이미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인데,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바알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도 사실 내가 너희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가 알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때부터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공급해 주신 주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여 알리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인 것을 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얻는다고 해서 땅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는다고 해서 하늘을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다.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해로부터 빛을 주시고, 또한 구름을 통해 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땅을 적십니다. 그 결과 땅으로부터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를 위해 인간의 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열매를 맺어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들에게 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되고, 반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됩니다. 당연히 알미니안주의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체이신데,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 해도 변함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시라는 겁니다. 항상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에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데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의미입니다. 출발만 하느냐? 과정도 하나님이 주체로 있는 것이고, 마지막도 결국 하나님의 주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은 사실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다시금 돌려드리는 내용도 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공로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상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결코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공로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일 뿐입니다. 때문에 상급을 받을만한 무엇을 내놓았다면 여러분으로부터 출발한 게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했다고 해서 교만하다는 것은 공로주의의 결과이지 결코 성도의 합당한 열매가 아닙니다.

    더불어 23절로 오시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백성의 수 또한 많아질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이사야 10장 22절의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때문에 혈통으로만 볼 때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회복의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은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육적 이스라엘 자손으로만 보면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씨처럼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도록, 셀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남은 자가 씨가 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ㄱ 버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에 심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호세아 2장 1절에서 말씀하시던 방식과 같이 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루하마요 암미입니다. 본래는 로루하마요, 로암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내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체이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고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은 없습니다. 찾아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연이 이때도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 본문 23절 맨 처음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기적일 것 같으면 굳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택한 자기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택자 역시 동일한 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하신 바를 결코 변경함 없이 실행하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들을 돌이키게 만든 후에 다시금 긍휼을 베풀겠다,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때서야 비로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말씀처럼 남은 자를 통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고, 그 수를 많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말씀하시고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만큼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즉 하나님을 위한 것이 사실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으로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즉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이라는 말 자체는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내를 말할 때 내 쪽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내해야 한다고 권면할 때 여러분이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분명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확신을 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약 사람이 주체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단 1%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100%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철저히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인 줄 알고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마음(성품)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은 인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곧 당신의 마음과 성품을 주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당신의 종(사역자)으로 삼으셨을 뿐이었습니다(히 1:14).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영원한 우리의 남편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거절하고 떠나버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사 인간들의 죄를 위해독생자를 대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 대한 자기의 변함이 없으신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셨습니다. (롬 5:8)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는 자기 아들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짝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입고 사는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고전 1:2)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가 실제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리새인들 처럼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떤 지식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신앙의 실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실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도 실제입니다.
    예수님도 실제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도 실제입니다. 
    그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실제입니다.

    성령님도 실제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 내주해 계심도 실제입니다.
    주님의 피로 성도된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도 실제입니다.
    천국도 실제입니다. 마귀도 실제요, 그의 종들인 귀신들도 실제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 동화나 지어낸 설화나 우화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생을 마친다면, 내안에 영으로 내주해 계신 주님을, 내 눈으로 직접 뵈올 것도 실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것에서)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일이 우리가 돈을 버는 것처럼 내 삶에 실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을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나를 위한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좋아하시고, 진실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당신의 연인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고 정말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가 자기 아들 예수를 미칠 것만큼 사랑하는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하고, 예수만 사모하고, 예수만 갈망하고, 예수만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예수만 사랑하는 예수님의 연인이 맞습니까?


    호세아 2:1-23

    호세아 2장은 1장 10절과 11절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사실 1장 6절에서 호세아와 고멜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지 않다” 였습니다. 또 1 장 9절에서는 호세아와 고멜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즉, “나의 백성이 아니다” 였습니다.

    그러나 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형제를 암미 즉 “나의 백성”이라 부르시고 그 자매들을 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다”라고 부르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하나님을 떠나 바알숭배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미래에 있지만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현재에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은 현재 자기 자신의 상황과 형편이 좋지 않으면 앞날을 내다보며 소망을 가지기가 참 힘듭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로는 결코 암미나 루하마가 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대접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 역시 로암미와 로루하마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려주십니다. 그러기에 신약성경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증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즉 우리가 로암미와 로루하마 였을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 죄목은 간음입니다. 호세아와 고멜과의 결혼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정한 아내와 같은 이스라엘은 어리석고 생각이 없으며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러기에 심지어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도 마치 바알이 준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릴 때 단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3절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해 결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으로 이끄십니다. 14절과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때와 애굽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아내된 이스라엘이 처음과 같이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내적인 변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도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복된 이스라엘은 예전의 나쁜 모습을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내 바알이라고 번역된 "바알리"라는 단어는 "내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상 바알과 이름이 같기에 다시는 이렇게 부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편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부분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러한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20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힌 전인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도 없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복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라 불러주실 때 우리 역시 23절의 마지막 구절처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로암미와 로루하마 같은 우리를 먼저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경험하여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암미와 루하마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외간 남자와 놀아난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그 마음은 크고 넓고 높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좋아하며 즐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나에게는 영적 간음을 즐기던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은 없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의 헌신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무엇을 의미하는가?

    1, 2. 이사야 2:3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무슨 초대가 있으며, 누가 초대됩니까?

    마지막 날에 관한 이사야의 감동적인 예언은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초대를 발합니다. 그 초대는 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라.]”a이사야 2:3.

    2 이 예언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교훈의 근원으로 인도되어, 참 하나님을 알게 되도록 도움을 받을 것임을 알려 줍니다. 어떤 진리를 그들이 배움으로써 참다운 평화의 결속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까?

    3. 성서의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이 어떻게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졌습니까?

    3 성서의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이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벗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누가 물어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대개는, 원수지간이라야 너무 싫은 나머지 상대방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조차 하지 않으므로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관계—그로 인하여 그들은 이름으로 그분을 알았음—가 고대 시편 필자에 의해서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가?

    4, 5.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의문이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인도해 내시겠다고 설명하시자, 모세는 이처럼 논리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 = 야훼 또는 13세기 이후로,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3, 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5 이 이름은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그것은 “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הוה 즉 h·w·h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히브리어 문법에 의하면 사역형 즉 히필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본 의미는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물이 존재하게 또는 발생하게 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히 그분의 목적과 관련해서 독특한 면으로 참됩니다. 택하신 백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기로 목적하셨을 때, 그분은 그 일이 그렇게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세력도 그분이 천명하신 의사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약속의 성취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점은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시려는 목적에 있어서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땅에 낙원 상태를 가져오실 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보증이 됩니다.—이사야 41:21-24; 43:10-13; 46:9, 10.

    6-9.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금하시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 금지가 언제 어떻게 유대교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6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계명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대 백과 사전」의 이러한 설명에 유의해 봅시다. “YHWH라는 이름의 발음을 기피하는 현상은 ·⁠·⁠· 셋째 계명(출애굽 20:7; 신명 5:11)의 의미를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로 오해함으로써 생겼다. 하지만 참 의미는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5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 즉 발음하는 것을 이 성구가 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을 의미한다 해도, 쾰러와 바움가르트너의 공저인 히브리어 고어 사전에서는 “헛되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용어(라슈샤우)를 “이유 없이 이름을 부르다 ·⁠·⁠· 이름을 오용하다”6로 설명한다는 점에 유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이 아니라 그 오용입니다.

    7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하다”는 주장은 어떠합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사람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것으로 보셨다면, 처음부터 아예 계시하시지도 않았어야 이치적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어 성경 원본에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6800번도 넘게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 주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그 이름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 행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제한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백성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또 알릴 것을 반복해서 격려하시고 심지어는 명령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의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시 91:14) 예언자 이사야는 이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이사야 12:4. 또한 참조 미가 4:5; 말라기 3:16; 시 79:6; 105:1; 잠언 18:10.

    8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셨다면 미리 명백히 그것을 금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 어디에서도 그분의 이름의 합당한 사용이나 발음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서 시대의 충실한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하였습니다. (창세 12:8; 룻 2:4; 4:11, 14)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자들을 반복적으로 정죄하셨습니다.—예레미야 23:26, 27; 시 44:20, 21.

    9 이러한 금지 사항은 성서의 일부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 어떻게 유대인 사상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랍비이자 「만인의 탈무드」(Everyman’s Talmud)의 저자인 A. 코헨 박사의 설명을 보면 이 전통이 여러 세기에 걸쳐 점차적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헨 박사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성서 시대에는 일상 대화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개인들의 이름에 또는 야후를 붙이는 일이 유대인들 간에, 심지어 바벨론 유배 이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이 네 글자 이름의 사용이 금지 사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랍비 시대에 와서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성전 봉사로만 제한되었다.” 이 시대에 더 진전된 일에 대해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그 이름은 JHVH 대신 회당 예배에서 아도나이(내 주)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원래의 발음은 현인들에 의하여 그 제자들에게 주기적으로—7년마다 한두 번씩—전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키두신 71) 그 관습조차도 잠시 후에는 사라져서, 그 이름의 발음법을 이제는 확실히 모른다.”7 바로 그것이 “사람의 계명”의 결과였습니다.—이사야 29:13; 신명 4:2; 참조 9면 15, 16항.

    이름을 지닌 자들에 대한 요구 조건

    10-14.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지닐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의 순결이 요구됩니까? (ㄷ) 어떤 외부의 이교 영향이 유대교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까?

    10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거나 사용하기까지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참 숭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는 것은 독특한 특권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처럼 선포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 (예레미야 15:16) 그러나 이 웅대한 특권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나라의 왕들에게 이처럼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리라.]” (예레미야 25:29)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석방시키시기 전에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 백성에게 이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이사야 52:11) 오늘날 참 숭배자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로서 정결케 하는 데는 즉 순결을 유지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11 확실히, 숭배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행실, 특히 하나님 자신이 세워 놓으신 도덕 표준에 관한 행실에 있어서 순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방임적 표준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거짓말, 도둑질, 음행, 간음, 동성애, 살인 및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표현함에 있어서 해석상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출애굽 20:12-16; 23:1, 2; 레위 5:1; 19:35, 36; 20:13) 성경은 나쁜 행동 자체만 아니라 나쁜 행위로 인도하는 나쁜 생각까지도 정죄합니다.—출애굽 20:17; 레위 19:17; 시 14:1-5; 욥 31:1, 9-11.

    12 도덕적 순결에 더하여 종교적 순결도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에게는 분명히 요구될 것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이웃 나라들의 종교적 사상과 행위 그리고 관습으로부터 영향받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사실상, 바로 이 조건—그들이 열국의 거짓 숭배를 모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레위 18:24-30; 신명 12:29-31) 우상 숭배가 분명히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점성술, 영매술, 점, 마법 그리고 죽은 자에게 기도하거나 죽은 자에게 묻는 일과 같은 온갖 형태의 미신과 미신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출애굽 20:3-5; 22:18; 레위 20:27; 신명 18:9-13; 이사야 8:19, 20; 47:13; 예레미야 10:2.

    13 종교적 순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는 교리적 순결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도덕과 숭배를 모방하지 말라는 경고는, 단지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그 땅을 차지할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종교적 진리를 자신의 백성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만이 참 하나님 여호와를 숭배하였습니다. (출애굽 19:5, 6; 신명 4:32-37; 시 147:19, 20) 그들만이 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고, 그분의 증인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에 관해 가르칠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43:9-12; 시 105:1) 이와는 반대로, 다른 나라들의 종교 관습과 행위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없음이 드러났습니다.—이사야 60:2.

    14 그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반복적으로 외부 종교 사상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사사 2:11-13; 열왕 상 18:21; 예레미야 2:11-13; 에스겔 8:14-18) 가나안 문화와 바벨론 문화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한편, 유대교가 직면한 전무후무한 큰 도전은 그리스 제국에 의한 헬레니즘 문화 시대에 닥쳐 왔습니다.b 기원전 4세기로부터 통용 기원 수세기까지에 이르는 그리스 문화의 장기간의 영향을 요약해서, 유대인 저술가 막스 디몬트는 이와 같이 평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및 유클리드의 과학으로 견문을 넓힌 유대인 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토라 연구에 착수하였다. ·⁠·⁠· 그들은 결국 그리스의 이성을 유대인의 계시에 부가하였다.”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15-17. (ㄱ) 성서는 사망과 영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칩니까? (참조 22면 네모) (ㄴ) 성서는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을 제시합니까?

    15 유대교의 교리와 신앙도 이 시기에 영향을 받았습니까? 「유대 백과 사전」은 이처럼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영혼불멸 교리가 유대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마 그리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8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이 이 땅에서 완전한 건강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셨음을 간단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참조 11-12면, 2항부터 4항) 창세기 2:7을 보면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신세」]이 된지라.” 이 성구에서는 사람이 영혼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영혼이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반역하였기 때문에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한 인간 영혼으로서 죽었습니다. 그의 어떤 부분도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영혼 개념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c 성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간명하게 말합니다.—에스겔 18:4.

    16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하여 성경에서 알려 주는 내용은 영혼이 죽는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 조화합니다. 전도서 9장 5절과 10절을 보면 이러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스올, 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비교 시 146:3, 4) 사망은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창세 2:17) 그것은 생명의 반대이지, 다른 형태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서도 지옥불(게 힌놈)에서 불에 타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과 이교 교리에서 흡수된 개념입니다. 환생에 대한 유대인의 신화적 신앙에 관하여 「신 표준 유대 백과 사전」(The New Standard Jewish Encyclopedia)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 관념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 같다. ·⁠·⁠· 카발라[유대교의 신화 책들]에서는 「바히르」라는 책에 처음 나타나고, 다음 조하르부터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하시드파의 신앙과 문헌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9

    17 사망은 생명의 반대이고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닌데,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메시야 왕의 개입에 의해서 지상 인류에게 낙원 상태가 회복된 다음에 죽은 자들 대부분이 생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가리켜 종종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될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충실히 섬겼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분에 관하여 배우고 진리로 섬길 기회가 충분히 없었던 수많은, 아니 수십억이나 되는 사람들도 포함될 것입니다.—다니엘 12:2, 13; 이사야 26:19; 욥 14:14, 15.

    18, 19. 우리는 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 하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8 땅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된다는 이러한 성서의 희망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찾아 알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사야 2:2, 3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교훈의 참 근원은 어디입니까? 누가 사람들을 여호와의 길로 교훈하여 “그 길로 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성서 지식에 비추에 볼 때,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국이 그러한 교훈을 베풀 수 있습니까?

    19 예언에 따르면, 순결한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한 집단의 사람들, 참으로 그분의 증인인 동시에 나라들에게 영적 빛의 근원 역할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이사야 60:2, 3.

    [각주]

    a 이 예언을 무심코 읽어 보면 마지막 날에 유대교로 대대적인 개종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맥 자체로 보거나 현재 사건들로 볼 때 그것은 정확한 견해가 아니다. 이 부분과 다음 부분에 나오는 설명은 이렇게 결론 내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b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기(기원전 336-323년)로부터,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철학, 문화 및 언어를 그리스 제국의 영역 모든 나라에 확산시키고자 힘을 모았다.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화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여타 문화를 예속시키려는 그러한 노력은 로마 제국 아래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였지만 그리스의 문화와 철학에는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영향의 사조에 저항해 보려고 표면상 열심히 투쟁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 철학의 사상, 논법 및 주의(主義)를 받아들인 증거는 역력하다.

    c “영혼”으로 번역된 단어는 성서 히브리어로 네페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종종 히브리어 단어 네샤마를 사후에 계속 존재하는 사람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을 면밀히 연구해 보면 네샤마라는 단어는 결코 그러한 의미를 전달한 적이 없음이 밝혀진다. 그 단어는 단지 호흡 과정 또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호흡하는 피조물을 가리킬 뿐이다.—창세 7:22; 신명 20:16; 여호수아 10:39, 40; 11:11; 이사야 2:22.

    [20, 21면 네모]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d이사야 12: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시 105:1.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라.]”—스바냐 3:9,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시 79:6,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사람들이 말한 것

    “사람은 친구에게 인사할 때 그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베라코트 9:5.

    “이와 같이 그[속죄일의 대제사장]는 말하였다. ‘오 JHVH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당신 앞에 죄악을 범하고, 범과하고,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께 JHVH의 이름으로 간청하나이다. ·⁠·⁠·’ 그러면 성전 뜰에 서 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대제사장의 입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그 거룩하고 존귀한 이름을 들을 때,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그분의 거룩하고 지존하신 이름을 영영히 송축하리로다.’”—요마 6:2.

    “성소에서는 그 이름을 기록된 대로 발음하였다. 그러나 그 경계 밖에서는 대치된 이름을 사용하였다.”—소타 7:6.

    “처음에는 대제사장이 그 이름을 큰소리로 포고하곤 하였다. 그러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지자 낮은 소리로 포고하였다.”—「예루살렘 탈무드」, 요마 40.

    “그 이름을 글자 그대로 발음하는 자[는 장차 올 세상에서 제외된 자들 가운데 속한다.]”—산헤드린 10:1.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 죄에 해당한다.”—페식타 148.

    [각주]

    d “그 이름을 부르[라]”(히브리어, קראו בשמו)는 구절은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비교 「신 영어 성서」) 같은 히브리어 구문이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고 번역된 창세기 12:8에도 나온다.

    [22면 네모]

    사망과 영혼—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네페슈]이 된지라.” (창세 2:7,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사람이 영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첫 사람 아담에게 사망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서만 언급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 3:19.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네샤마]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라.]”—신명 20:16.

    “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진멸[하였더라.]”—여호수아 10:37.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네샤마]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여호수아 11:11.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슈]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5, 10.

    랍비들이 말한 것:

    “제7하늘 아라보트에는 창조를 기다리는 영들과 영혼들이 간직되어 있다.”—하기가 12ㄴ, 탈무드.

    “안식일 전야에는 영혼이 하나 더 사람에게 주어졌다가, 안식일 종료 시에 그에게서 나간다.”—타아니트 27, 탈무드.

    “[사후] 만 12개월 동안 몸은 계속 존재하며, 영혼은 오르내린다.”—샤바트 152, 탈무드.

    “죽은 자에게 벌레가 고통스럽기는 산 자의 육체에 바늘이 꽂힌 것과 같다.”—샤바트 13, 탈무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현세에서 무엇을 말하면, 그 사람의 입술이 무덤에서 움직인다.”—산헤드린 90, 탈무드.

    “유대교는 ‘몸의 사망 후 영혼의 불멸을 보장하는 종교’이다.”—쿠자리 1:103, 유다 할레비, 12세기 랍비.

    [23면 삽화]

    이스라엘, 디베랴(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고대 회당 바닥은 그리스 사상과 문화가 유대교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황도 12궁이 보이고 그 이름들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가운데 있는 그림은 태양신 헬리오스다



  •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글 앞쪽에서는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You can see and trust as much as you know.

    신명기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your God is God; he is the faithful God [NIV] <Deuteronomy 7:9>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인간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 이상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Men will trust in God no further than they know Him) 

  • 똑같은 것을 보아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고, 더 아는 만큼 더 깊게 보게 되는 법이지요. 
    참된 신앙도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거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영혼의 변화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남’이나 ‘새로운 피조물’ ‘새 것’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님 육신의 동생인 유다는 이를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인 것이 ‘그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연구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지요. 
    때로는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고, 그분을 더욱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마태복음 16:15-17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ἀπο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601

    1. 드러내다.  2. 폭로하다.  3. ἀ
    발음 [ apŏkalüptō ]

    어원 / 미래 ἀποκαλύψω, 제1부정과거 ἀ- πεκάλυψ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πε- καλύφ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αλυφ- θήσομαι, 575와 257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드러나다(마 10:26, 눅 12:2), 나타내다(마11:25, 고전3:13, 갈1:16), 나타나다(눅17:30, 롬1:17, 살후2:6), 드러내다(눅2:35), 계시를 받다(눅10:22), 알게 하다(마16:17), 보이다 (고전2:10), 계시되다(갈3:23).

  •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  
  • 9월 24일(수) 호세아 5-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but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13:7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restoration
    미국∙영국[ˌrestəˈreɪʃn]
    • 1. (낡은 건물·그림 등의) 복원[복구] 
      2. (이전의 제도·법률 등의) 부활 
      3. (제자리·원 상태로의) 회복, (본래 주인에게로의) 반환
    1. 회심(悔心)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2. 관계(關係) 여호수아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예배(禮拜)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 순종(順從) 사무엘상 15:22

    사무엘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שׁוּב 스트롱번호 7725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어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좋지 않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싫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저를 무척 좋아했지만 저는 그가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멀리 했습니다.
    작년 4월, 좀더 벌어 보자는 욕심 때문에 육지에 나가게 되었는데 진주에서 김천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100% 잘못한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사고가 난 후 며칠 동안은 사경을 헤매다가 얼마 후 깨어난 저는 양쪽 다리의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믿고 며칠을 지냈는데 며칠 후 조금 고개를 들 수 있어서 제 다리를 보게 되었는데 왼쪽 다리는 절단된 상태이고 
    오른쪽 다리는 발목 부분이 뼈만 남아 덜렁거렸습니다.
    저는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자살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병원 진단 결과는 간 파열, 신장 파열, 좌 대퇴부 절단, 우 경골 및 비골 개방성 골절, 좌 비구 골절, 우족 관절이개, 우 하퇴부 다발성 연부조직 손상 등으로 크게 다쳤는데, 병원에서는 간과 신장만 살리고 남은 다리와 골반은 우리나라에서는 수술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병원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오른쪽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후 약 3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해 집에 내려와 있었지만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밤에는 불타는 지옥의 악몽에 시달렸고 낮에는 그 악몽 때문에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던 어느 날, 여동생으로부터 아는 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신앙심도 깊고 또 저의 병원비까지 빌려주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다음 날 제주 남문 교회의 두 형제님을 차례로 만나면서 주님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분들을 만난 후부터 악몽이 사라지고 성경 말씀을 듣고 난 후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참뜻을 몰랐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놀라운 성경 말씀을 듣고서야 진정 구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직 저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였고 지금의 저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온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를 거듭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선포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의 무절제한 죄를 지적하며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에는 3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거리의 개념 

    예배는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인생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요즘같은 비대면 예배라도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나 중심, 내 편의 위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며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주님께 더 가까이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시간의 개념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안 들리십니까?

    설교 말씀이 더 이상 은혜가 안되십니까?

    감사보다는 불평으로.. 사랑과 용서보다는 미움과 비난으로 남을 정죄하십니까? 

    술과 도박, 쾌락에 빠져 세상을 주인삼고 하나님과 멀어지셨나요?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주님께로 돌아가십시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아주실것입니다

    셋째, 관계의 개념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간다면 그 어떤 길도 지루하지 않고 즐겁고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빨리 갈것입니다.
    그렇듯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고난과 힘든 길도 즐겁게 잘 감당할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들, 부부사이의 관계, 부모와 자식사이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물에서 멀어지면 마르듯이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것도 할수 없고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가 믿음이 회복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선봉장이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제 어디서든 어느 상황과 환경에서도 주님께 돌아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임마누엘의 복에 감사하며 마음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신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너무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어 
    무너진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1~3

    늘날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풍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풍요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자족하는 비결을 깨닫지 못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다 차원높은 부와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부(富)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하심 가운데서 날로 더욱 풍성한 부와 권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은 이기적입니다. 심지어는 퇴폐적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도덕적인 선을 추구함도 없습니다. 무작정 많이 소유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정신세계는 얼마나 공허한지 모릅니다. 도덕적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인륜이 짓밟히고 있고, 추악한 모습으로 세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기류에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도, 교회도 편승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기를 추구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무한 지경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는 가운데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성도를 향해서,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에 부와 권력은 단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권력을 탐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 세상의 것은 잃어도, 가난하고, 궁핍하며, 세상에서 아무런 권세는 없어도, 하나님께는 부요하며, 영적으로는 풍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비록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고, 영적 풍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도, 그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따라 망하는 가운데 있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풍요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던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북조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국제정세를 밝히 볼 수 있었고, 나라의 힘을 키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많은 물질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보시면서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만족하며, 왕이 정치를 잘한다고 칭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를 보시면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무일푼의 노숙자와 같이 영적인 빈곤함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영적으로 빈곤하다면 비극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부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너희의 실상은 가난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빈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물질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을 박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이 풍요롭지 못한 사람의 결국은 이럴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 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하나님의 진노 속에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요로움에 영적인 눈이 멀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외면하며 살던 자리에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영적현상을 바라보면서 지금이 바로 호세아 시대와 같이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에 붕괴와 파멸이 찾아왔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멀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돌이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세상을 향해, 세상의 풍요만은 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돌이키다는 말은 원문성경에서 슈브(bWv)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되돌아 가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떠나왔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믿고 섬기기로 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적인 축복의 의미를 상실하고 세상의 물질과 풍요에 눈이 멀고 마음이 빼앗기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죄악된 자리에서 돌이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회복하다.” “회개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고,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것,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못하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나아오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도 회개하는 자가 될 때에 가능합니다. 죄악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에 풍요롭기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해야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만 우리의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을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주와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찢으셨고, 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인식하고 못하고, 은혜를 구하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만을 얻기 위해서 눈을 벌겋게 해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그곳에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치셨고, 온갖 재난을 통해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실존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잠시는 큰 부요를 누리는 것같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부요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의 전조일 뿐입니다. 영적으로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크게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의 공격 앞에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구하며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을 그들을 치십니다. 그들을 갈갈이 찢어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 헌신하지 못한 채, 세상의 것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려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금 치료와 위로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찢으셨으나 낫게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회개하는 자가 되어지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더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그 모든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짓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신세가 되어서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탕자를 외면하거나 박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었지만, 그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의 모든 허물을 아버지는 감싸주었습니다. 그의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새 옷으로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이 세상에 미쳐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금 놀라우신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회개하면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문제가 사라지고, 슬픔 중에 위로를 받을 수 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담이 허물어지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못했거나, 은혜를 사모함에 게으르고 세상만을 추구하던 우리의 모습을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전 생애와 삶의 방향을 되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치료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왜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때에 회복하시고, 싸매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이틀 후에 살리시고, 제 삼일에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기적같은 능력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신속하게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2절에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영생의 축복으로 더하여 주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싸구려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조건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함을 얻는다고 하니, 구원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자체의 가치를 값싼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댓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또 어떤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고, 풍성한 영적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구원이 싸구려고, 천국이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지불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천하를 두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부귀나 영화를 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놀라운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세상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은혜에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세아 6:3)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치료하심과 위로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초보의 신앙, 유치한 은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에 더욱 풍성한 가운데 있기를 위해서는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이키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에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d'y)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객관적인 사건이나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야다는 부부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 친밀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속성을 갖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하는 것 등등을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서로를 사랑함과 신뢰함으로 두터운 인격적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동방의 장부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회의에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을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긴밀한 인격적 교제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인격적 친밀관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나님의 친구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함으로 모든 것을 숨기지 않는 사람,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매우 친숙한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증언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우리를 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힘써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친밀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성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향한 헌신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가 되어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되시고, 크신 복으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예배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품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힘써 동역자가 되어 헌신함으로 주님과 친밀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새벽빛같이 일정하신 하나님, 땅을 적시는 비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시고,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가던 우리의 옛 사람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이켜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이제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기꺼이 동역자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새벽빛 같이 일정하시고,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의 삶에 은혜로 충만케 하실 주님께서 빈곤한 영혼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 온 교회 위에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return to GOD)

    연가시를 아는가? 

    수중에서 사는 기생충의 일종인데 이것이 1차 숙주인 모기나 하루살이, 또는 잠자리가 그 알을 먹으면 알이 속에서 숙주의 몸 속에서 부화하고 자란다. 
    그러다가 여치나 사마귀, 바퀴벌레가 그 1차 숙주를 잡아먹으면 이 연가시는 제 2숙주 속에서 양분을 다 가로채 먹으면서 대부분 10~15cm의 정도까지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성충이 되고 숙주의 몸속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면 이 연가시 기생충은 생활하고 알은 낳는 곳이 물속이기 때문에 2차 숙주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시켜 물가로 가도록 해서 물에 빠져 죽게 한다. 
    그런 다음 연가시는 그 숙주의 몸 밖으로 나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런 연가시의 특성을 변형시켜 만든 영화 <연가시>가 2012년 7월 상영되어 약 4백 5십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많은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 내용 중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의 행태를 보면 연가시가 영양분과 수분을 다 먹고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어 계속 먹는데 큰 양푼에 가득한 밥을 먹기도 하고 밥통째로 먹고도 계속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큰 생수통의 물을 통째로 먹는가 하면 변기에 고여있는 물을 마시기도 하고 급기야는 바다나 강에 빠져 죽는다. 

    오늘 이 세대가, 이 사회가, 바로 내가 영적 변종연가시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지나 않는가?

    만약 이런 영화 속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고 그것도 너무나 편만해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부의 주요 직분을 맡을 후보자들을 청문회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격과 능력을 검증한다. 그런데 청문회를 통해 많은 분들의 생활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비난 받을 일들이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후보자는 그 도가 지나쳐 임명을 취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부 허물이 있어도 임명을 강행해 정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버닝썬 사태에서 시작된 일부 연예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재벌가문에서 자행되는 마약복용 등 끝이 없는 쾌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일부 드러나고 있다. 이 사회는 그렇다고 치고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또한 이 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대형교회의 세습문제, 도덕성 문제, 사이비 종파들의 이단적 가르침에 의해 생기는 불미스러운 사건 들로 인해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형편이 없다.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가 발표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시민의 기독교신뢰도는 20.2%에 불과했다. 그런데 비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10.7%에 불과했다. 비그리스도인 10명중 9명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5,5%인 불교를 누르고 개신교 인구가 19.7%로 한국최대의 종교가 됐다. 그런데 사회는 어떤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섬기며 봉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숫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왜 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더 이기적이 되고, 각종 각종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가? 전체 인구의 80%가 비기독교인들인데 왜 그들의 기독교 신뢰도는 10%밖에 되지 않는가?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는 여러분과 제게 있는 것이 아닌가?

    본론

    성경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 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호 4:1,2)

    사도 바울은 좀 더 직접적이고 자세하게 이 세상 끝의 사회적 현상을 설명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 3:1-5) (참조: 롬 1:28-31)

    오늘날의 사회상을 잘 설명하고 있나? 어떻게 2천년 전에 이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하나님 없는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북방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다. 
    선지자 호세아가 봉사한 기간은 대략 기원전 755년 부터 725년 까지 약 30년이었고 여로보암 2세는 기원전 793년 부터 753년까지 약 41년동안 왕으로서 통지하였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 동안 북방이스라엘은 외형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번성하였고 성공적인 나라였다. 

    북방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왕을 살해하여 왕위를 찬탈함으로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고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 통치를 하였으니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당시의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때와 비슷해졌다. 경제상황도 많이 나아졌고 다른 나라가 침략도 하지 않아 번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번영이 오히려 여로보암 2세와 북방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했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부정직과 불신과 기만이 팽배했다. 
    온갖 사치가 조성되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불의한 재판이 성행했다. 
    음행이 종교에 도입되었고 신성모독과 회의주의가 편만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퇴폐하고 부패해졌다. 

    호세아 4:7에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숨어계시지도, 방임하시지도 아니하였다.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상기시키고 순종하도록 호소했으며 계속해서 반역적인 삶을 살 때 그 결국은 멸망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세속적 번영과 쾌락에 취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별과 호소를 외면했다. 호 8: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라고 한탄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 없는 번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오는 성공은 행복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마침내 파멸로,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잊지 말라!

    영적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은 재물을 아무리 모아도 만족함이 없다.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끊임없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몰두한다. 계속해서 성공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권력에 대한 탐욕, 쾌락을 추구하는 만족 없는 욕구들이 가득한 것이 오늘날 이 사회가 아닌가?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속 가득 찬 영적 연가시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게는 본성적으로 옆으로 걷는다. 아무리 바로 걸으려 해도 걸을 수 없다. 영적연가시 같은 탐욕과 교만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없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죗된 본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심지어 사랑과 겸손의 마음조차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영적 연가시를 몰아낼 방법은, 치료할 특효약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호 6: 1,3절에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영적 연가시에 감염되어 끊임없는 탐욕과 만족되지 못한 욕심에 빠져있는 죗된 영혼의 치료책은

    첫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환자는 불편함을 느끼고 이상함을 느끼면 병원에 간다. 자신이 진단하고 처방하지 않는다. 병원에 가서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 하면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거나 수술하여 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해지고, 기도가 등한시 되어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거나, 이기심이나 교만함이 생겨나면 영적 이상 징후이다. 즉시 큰 의원이신 여호와께 나아가야 한다. 시51:17에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요일 1:9)

    둘째는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이 안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문(디아트 - 야다에서 유래)의 의미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부닥쳐서 알고, 보아서 알고, 만져서 아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식적, 피상적,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의 치료자 임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어렸을 때 양계장을 했다. 하루는 달걀 1개를 몰래 꺼내가지고 동네 만화방에 갔다. 만화방 주인에게 계란을 주면 만화책 몇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켰다.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았다. 무척 아팠고 멍이 들었다. 그 날 저녁에 어머님이 무슨 연고를 가지고 와서 많이 아팠지? 라는 한 말씀만 하신 채 다른 말씀 없이 상처 위에 발라주시고 마사지를 해 주셨다. 그 마사지 하시는 어머니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시는 계란을 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동정과 연민과 사랑만이 우리가 가진 영적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연가시 같은 죄를 없애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결론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앞둔 북방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던 이 호소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호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일어나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동화작가 권정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 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그 열차 안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의성에 있는 시골교회 집사인데 십년 전 어느 날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고 한다. 
    정신 없이 일에 몰두하던 아주머니는 귀찮은 생각에 거지를 내쫓았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퍼서 달려 나가 보았으나 거지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 예”.

    권선생은 이야기 끝에 여태껏 들은 설교 중에 진짜 설교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잘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여호와를 알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 여러분과 저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구체적인 방법 : 

    1.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돌아가기(悔心) : 

    요엘서 2:12
     “이제라도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돌아와라, 나에게로! 너희 마음을 다해, 금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 금식하고 울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신속히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2. 하나님을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關係 恢復)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깊이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친밀함을 쌓아야 합니다. 

    3.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섬기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은혜와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행위이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로운 소망을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본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1.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권면으로 보는 견해(Keil). 
    2. 회개의 날에 백성들 서로가 뉘우치며 권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Lange, Wood, Chrisholm). 

    이상의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태도를 독백과 대화체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미래에 있을 백성들의 회개에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Harper, Ewald, Cheyne).

    우리를 찢으셨으나 
    - '찢다'의 히브리어 '타라프'(*)는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심판이 가혹함을 암시한다(5:14; 시 50:22).

    낫게 하실 것이요 
    - 5:14에서 예언된 멸망과 형벌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있을 경우 심판의 자리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임이 선언된다. 
    이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여호와의 사랑과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신 32:39). 
    한편 이것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된 회개를 전제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let us return to the LORD)


    7725. 돌아가다(슈브. shûwb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찢고 상처 입히셨지만, 다시 살리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며, 그분께로 돌아와 자신을 알자고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한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기회를 주시며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시지만, 백성은 진실한 회개 대신 형식적인 제물만 드리는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의 주요 내용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1-3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호소로 시작합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으셨으나 다시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며, 이틀 후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돌아가면 구원과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 진실하지 않은 백성들의 회개 (11절, 13절)
    • 백성들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 지적합니다. 

  • 형식적인 희생 제사만 드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식과 자비로운 행동은 부족했음을 비판합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3절, 6절)
    • “우리가 주님을 알자”고 외치며, 진정한 예배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 "내가 기뻐하는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6절의 말씀은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1-3절, 6절)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주권자 되심이 드러납니다. 

  • 12 <너희 마음을 바꾸어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3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4 주께서 그 마음을 바꾸시며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너희가 여호와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쉬운성경)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세아 6:1-3)

    호세아가 활동할 당시 북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5-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할 당시에 북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는데(호 1:1) 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그 영토가 가장 넓게 뻗어 나갔습니다. 
    그 말은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이 그 어느 왕이 다스릴 때보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보다 더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영적인 상태와 세상의 축복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4장에서는 그런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비록 겉으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번성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곪아 터진 이 모습이 바로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의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며, 실제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지(B.C. 753) 31년 후(B.C. 722) 호세아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는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그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이 북 이스라엘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모든 면에 번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나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라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상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던 북 이스라엘처럼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 우리의 겉모습이 아무 문제가 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이 고작 31년 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렇게 초고속으로 번성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초고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더라도 속으로 북 이스라엘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북 이스라엘처럼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혹시라도 북 이스라엘처럼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씀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이 일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즉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의 속사람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든 면에 강건하게, 튼튼하게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겉과 속이 함께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면 갈수록 모든 면에 더욱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호세아서 4: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1-13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절대로 섬겨서는 안 되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가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거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우상숭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만큼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지식을 원어로 “다트”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다트”라는 단어는 “야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설교에 자주 인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로만,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야다”라는 단어는 그 사람을,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야다”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자녀를 알고 자녀가 아버지를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야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의 “지식”이라는 단어 “다트”“야다”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결과가 멸망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3절 上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애가 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만 하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동족들의 모습이 너무 애가 타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할 때는 “힘써”라는 말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추적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화 같은 데서 경찰이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을 볼 때 쉬엄쉬엄 추적하는 경찰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찰은 없습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어서 범인을 추적해서 결국 범인을 체포하고야 맙니다.

    호세아는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자기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과 시간과 땀과 수고를 다 쏟아 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아가기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나님께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어떻게 합니까?

    그 방법은 어떻게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입니다. 전화를 사용하든지, 메일을 사용하든지, 문자를 사용하든지, SNS를 사용하든지, 직접 만나서 밥을 사주든지,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든지, 취미생활을 같이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줍니다. 거기에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땀이 투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알고 나면 우리는 절대로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는 우리를 그 어떤 것도 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비록 겉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속으로 곪아터져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자기 동족들에게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똑같은 호소를 하시고 계십니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겉으로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하는 호세아의 호소를 우리에게 하는 호소로 받아들이고 지금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예배에 참석하든지, 신앙서적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전도를 하든지, 교회 봉사를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계속해서 친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며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우상숭배 죄와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부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관계적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멸망이 아니라 살아나고 일으켜지는 회복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원한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9월 25일(목) 호세아 10-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Sow for yourselves righteousness, reap the fruit of unfailing love, and 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for it is time to seek the LORD, until he comes and showers righteousness on you.

    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묵은 땅(5215) 니이르(nîyr) /   נִיר

    1. 개간된 땅.  2. 새로 일군밭.  3. 잠 13:23
    발음 [ nîyr ] 
    어원 / 5214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개간된 땅, 새로 일군밭, 잠13:23, 렘4:3, 호10:12.
    • 관련 성경 /  경작지, 밭을 경작함(잠 13:23), 묵은 땅(렘 4:3).

    5214. נִיר

    1. 땅을 갈아 엎다.  2. מָנוֹר
    발음 [ nîyr ] 
    어원 /  521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듯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땅을[쟁기로] 갈아 엎다, 렘4:3, 호10:12.
      •  a. 동사 [주]מָנוֹר, 멍에, 농기구[쟁기].
    • 관련 성경  / 갈다(렘 4:3), 기경(起耕)하다(호 10:12).


    호세아 10장 12-15절

    묵은 땅을 기경하라

     

    가. 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14절,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며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선지가 호세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국은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의 말씀을 가벼이 보면 안 된다. 여기서 “살만이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초토화)와 “어머니가 자식이 함께 부셔졌도다”라는 말은 심판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는 모범적인 사례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 15절에서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벧아벨’과 ‘벧엘’ 그리고 ‘새벽’은 단순히 교인이 아니라 참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 문제는 교만이다.

    13절,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이유를 말하고 있다. 물론 심판의 직접적 이유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간접적인 이유는 교만인데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는 말씀을 통해 교만이 죄의 원인임을 밝히신다.

    * 사람이 자신의 길을 의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자신의 길(데레크, 삶의 방식)을 의뢰하는(바타흐, 확신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법궤를 앞세우고 그것의 뒤를 따르라고 하셨다(수3:3참조).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그때는 결국 암흑시대가 되었다(삿17:6참조). 사탄의 타락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한 것에 있었음을 참조하라(사14:12-14참조).

     

    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12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 교만은 죄를 가져오고, 죄는 심판을 불러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의를 심어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 여기서“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땅을 갈아엎으라”라는 것이다. ‘기경하다’(니르)는 ‘땅을 쟁기로 갈아엎다’라는 뜻이다.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 잡초의 뿌리가 죽는다.

    * 묵은 땅(니루)은 단순히 ‘오래 묵은 땅’이나 ‘길가와 같이 딱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마13:19 참조). 

    묵은 땅은 ‘기경한 땅’이지만 지금까지 계속하여 악을 심고 죄를 거두어들이던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묵은 땅은 악을 심고 죄를 거두는 일에 만성이 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 죄를 짓는 일에 만성이 되면 결국은 감각을 잃는다. 
    바로가 강퍅하게 되는 단계는 첫째 ‘고집하다’(하자크 칼형)이고, 
    둘째는 ‘둔감해지다’(카베드 히필형)이며, 
    셋째는 ‘강퍅하게 하다’(하자크 피엘형)이다. 
    즉 고집부리다 보면 둔감해지고 결국 강퍅하게 되므로 계속 갈아엎어야 한다.






    אֶרֶץ 776 [’erets]

  • 1. 명사
  • 2. 명사 나라, , 출3:8, 13:5, 창21:32, 룻 1:7.
  • 3. 명사 [주] 복수 אֲרָצוֹת의 뜻은 ‘토지’[창26:3,4]로서 보통 정관사와 함께 쓰인다. 특히 후기 히브리어에서는

  • אֲדָמָה 127 [’ădâmâh]
    • 1. 여성형 명사
    • 2. 여성형 명사 흙[통곡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먼지를 뿌릴 때 사용됨], 삼상4:12.
    • 3. 여성형 명사 들판[경작되는 곳], 창47:19, 시105:35, 사28:24.




    너희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義(의)를 심고 矜恤(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起耕(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臨(임)하사 義(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8:7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경에서 땅 또는 밭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성서와 땅 / 땅의 기본적 의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창 2:8)

    땅은 구약 이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이다. 인간 자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이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이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이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이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지칭한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다마’와 ‘에레츠’ 두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흙은 뭔가를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뭔가를 심으면 그것을 열심히 키워주고 성장시킨다. 
    물이 오면 그 물길을 만들어주고 땅속으로 스며들게 해준다. 
    태양이 비치면 따뜻하게 품어주고 눈이 오면 땅을 덮도록 놔둔다. 
    욕심이 없다. 
    자연의 흙은 그렇다.

    사람의 흙을 관할하는 토기운은 어떨까. 적당하면 무난하게 중도를 지키지만, 과다하면 <천하태평, 과유불급, 욕구불만, 자기위안>의 특징들이 드러난다. 
    토기운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넓으면 어떨까. 땅이 너무 넓으면 무엇을 심을지 좀 막막하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자니 왠지 힘들 것 같고, 경작을 안하자니 땅이 아깝고......그러다가 결국엔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천하태평이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땅을 너무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로도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굳이 뭔가를 심거나 힘들게 경작하지 않아도 <내 땅인데 어디 가겠어?>라며 배만 두드리고 세월을 보낸다. 
    너무 많아도 탈이다. 
    자신이 능력껏 일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크기의 땅을 가지면 열을 다해서 농사를 지을텐데, 너무 넓으면 오히려 손놓고 땅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한다. 
    그게 내 땅인데 하는 마음으로 에헴~ 하고 수염만 쓰다듬는다.

    땅은 속이지 않는다.  
    심는대로 키우고 나는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土氣運)은 믿음이다. 
    자신을 믿는 것이다. 
    토기운이 적당하면 자신감도 좋고 남들에게도 너그러이 잘 퍼주는 장점으로 작용하는데.....토기운이 너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변질된다. 남에게도 잘 퍼주지만, 퍼주는 것 이상으로 더 받으려고 한다. 사람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이 과다하면 모든 것에서 욕심도 많아진다. 
    만족을 모른다. 
    욕구불만이 항상 따라다닌다. 
    만족할 정도로 뭔가 들어와도 욕심이 또 커진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그 불만족으로 불행하게 살아간다. 
    아주 크고 넓은 땅을 타고났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 넓은 땅을 짊어지고 살아가게되는.......무거운 삶을 자처하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릴때도 잘 안풀릴때도 있다. 
    잘 안풀릴때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실수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 탓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토기운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그렇게 돌아볼 반성을 묻어버린다. 
    <뭘 그 정도갖고 내가 나를 탓해! 다음에 다시 하면 되잖아! 쫀쫀하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태평한 마음으로 자기를 너무 믿는 자기위안과 자가당착에 빠진다. 
    다음에 또다시 같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또 마찬가지로 속편하게 마음먹어 버린다. 
    마음을 먹어버린다. 
    넓은 땅에 묻어버린다.

    마음이란 이렇게 여러가지로 변할 수 있고 여러가지로 얼굴을 바꾼다. 
    토기운이 과다하면 그렇게 마음이 뻔뻔해지고 자기방식대로 속편한대로 생각하고 마음먹는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는 커녕, 자기방식대로 자기마음대로 생각하기에 <나는 그게 솔직한거야>라는 착각에 빠질수도 있다.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게 더 큰 문제일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다 같은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그리 정직한게 아니다. 
    마음을 믿을수도 없고, 안 믿을수도 없다. 
    자기 마음의 크기와 넓이를 아는게 먼저다. 
    땅은 너무 좁아도 너무 넓어도 문제다.
    욕심이 많은게 꼭 나쁜건 아니다.
     그 욕심 때문에 큰 일, 좋은 일,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낼수 있다.
    욕심을 버려라? 
    사람이 욕심없이 살수 있을까?
    다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심인가를 봐야 할 것이다.
    욕심이 많다면 그 욕심만큼 남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그 욕심만큼 살지 못하니 그것이 불만이 되고, 하다가 팽개치는게 아닌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누가복음 8:15)

    좋은 땅은 길 가나 바위나 가시떨기가 없는 땅을 말합니다. 좋은 땅은 길 가와 같이 굳은 마음, 얇게 깔린 흙 밑에 깔린 바위와 같은 마음, 염려, 재물, 향락과 같은 말씀의 영양분을 빼앗아가는 가시떨기의 마음이 없는 마음 밭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 수용성이 있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15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예수님은 씨앗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in an honest and good heart( KJV, ESV, NASB95, RSV)로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투명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외식하거나 자기를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는 척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온갖 악행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듣는다”는 것은 복음의 수용성을 말합니다. 
    좋은 흙은 깊고 부드러우며 기름지고 깨끗합니다. 
    씨앗은 땅 속으로 잘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씨앗은 영양분을 얻어, 자라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지킨다”는 말은 hold it fast(ESV; NASB95; NRSV; RSV)로 ‘굳건히 붙잡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katechō로 ‘소유하다, 붙잡다’는 뜻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듣고 지키어

    “듣고 지키어”라는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행 17:1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은혜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믿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과 이성을 주셨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체계화시키면서 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견고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마음”은 제자들처럼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질문함으로 알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씨앗 비유 뿐만 아니라 다른 비유에 대해서도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문답식 교육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코 불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괜히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려고 딴지를 거는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음껏 의문을 던지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질문을 하면 교만하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너그럽고 온유하시며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과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영적 소원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견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습니다. “지킨다”는 말은 ‘굳게 붙잡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잘 알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할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말씀의 종으로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이 말씀을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영접합니다. 이렇게 유연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역사합니다(살전 2:13).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아주 평범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들 마음에 비추십니다(고후 4:6).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떡을 기대하고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더이상 떡을 만드는 기적을 베풀지 않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그들은 “영생의 말씀”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요 6:68).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영생의 말씀”으로 영접했습니다(요 1:14). 

    인내로 결실하는 자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종류의 땅인 돌밭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음으로 자라지 못하고 마르게 된 예를 드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인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러한가 상고하고 제자들처럼 질문을 던짐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그 결과 그 가치를 깨닫고 굳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시련이 닥쳐도 굳건히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내”는 원어로 ‘아래 머무르다’는 뜻으로 어떤 원칙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견디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또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련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성품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 압박하는 세력 너머에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잘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히 12:2).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는 인내로 결실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박해할수록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행 6:7).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예외 없이 엄청난 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에서는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고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씨 중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씨앗은 그 생명력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 씨앗은 예외 없이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100% 열매를 맺습니다. 뿌려진 씨앗은 씨앗 하나에 하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마 13:10-23; 막 4:13-20). 

    나중에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말씀의 씨앗이 좋은 마음 밭에 심기어질 때 어떻게 자라는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말씀의 생명력을 잘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새들의 쉼터가 될 만큼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씨앗 중 하나에서 그렇게 큰 나무가 나올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이 작은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큰 식물을 자라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편37편의 말씀 중 “온유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 한다는 말씀을 처음 접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동산을 많이 차지하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재테크에 강하고 탐욕스럽고 투기꾼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틀릴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편37편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시편37편은 40절까지로 되어 있는 긴 성경입니다. 암송한다는 것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을 포기할까 하다가 그래도 도전하였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가슴에 새기고, 또 다시 읽고 새기고 하는 중에 지금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시편37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대충 세어보니 9번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땅을 차지한다”, “땅을 물려받는다”, “땅에서 길이길이 산다”, “언제나 땅에서 산다”, “땅에서 끊어진다” 등 땅, 땅, 땅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아무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주님이 베푸신 복을 받은 사람, 악한 일 피하고 선한 일 힘쓰는 사람, 의인, 주님께서 높여주시는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그들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는 악한 생각들을 정복하고 마음의 청결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질투심이 없고, 분노가 없고, 자랑이 없고, 허영심이 없고, 교만이 없고, 탐욕이 없고, 정욕이 없고, 탐식이 없고, 게으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아 그런 악한 생각들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악한 생각들, 악덕들이 시편37장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악한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악인들, 악한 자들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일 수 있습니다. 옛 성인들은 우리 안에 악과 선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악이 득세할 때는 나도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힘을 얻을 때 나도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37장에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이 바로 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는 얼마나 허영심이 많이 있는지요. 믿는 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교만한 마음이 많이 있는지요.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탐욕이 많이 있는지요. 자기가 행한 선을 자랑하고, 교인 숫자 자랑하고,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몇 번째 큰 교회라고 자랑하고, 자기가 이룬 업적 자랑하고, 어느 목사를 지칭하면서 차세대 한국 교회 대표주자,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 남다른 설교의 대가, 능력의 종, 권능의 종, 이 시대 최고로 쓰임 받는 종 등으로 표현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어느 목사는 자기가 비행기를 탔는데 승객들을 향하여 ‘나 때문에 여러분은 다 안전합니다! ‘라고 선포하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허영심은 교만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나 교계에서 허영심과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허영심과 교만은 무서운 죄입니다. 땅, 즉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죄 말고 더 큰 죄가 있을까요? 허영과 교만 말고도 다른 모든 악덕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덕들을 주님의 은혜로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땅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 땅은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악덕을 극복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임하고 어떠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시련도 이기는 영적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한국 개신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악덕을 극복하는 영적전쟁을 배우고 훈련하였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바로 3박자 축복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회는 깊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를 작시 하신 분은 땅을 차지하는 경험을 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부의 마음

    가을이 찾아오면 농부의 마음을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농부의 마음이다. 농심은 천심이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고 말씀하셨다. 농부의 마음을 읽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농부는 하늘을 보고 산다. 농부는 위를 보고 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 농부는 혼자의 힘만으로 농작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위에서 비를 주시고, 태양 빛이 있어야만 곡식이 자란다는 사실을 농부는 잘 안다.

    농부의 마음은 무릎을 꿇는 겸손한 마음이다. 농부는 무릎을 꿇고 산다. 땅을 경작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땅에 심은 곡식을 돌보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농부의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겸손을 배운다. 농부를 보면 무릎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들은 모두 무릎을 꿇는 헌신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농부의 마음은 정직하다. 농부는 심은 것을 거두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안다. 농부의 마음은 기대하는 마음이다. 농부의 마음속에는 빛나는 설렘이 있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가슴속에는 출렁거리는 가을이 담겨있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심으면서 오곡백과가 넘치는 논밭을 본다. 그러므로 농부는 비전의 사람이다.

    농부의 마음은 풍부한 마음이다. 농부는 비록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지만 풍부의식속에 산다. 자연의 풍부함을 안다. 생명의 풍부함을 안다. 농부는 씨앗 속에 담긴 가능성을 알고, 무한한 잠재력을 안다. 작은 벼를 한 알 심으면서, 그 한 알의 씨앗을 통해 수많은 곡식을 추수할 것을 안다. 농부는 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곡식을 사랑한다.
    농부는 생명의 신비를 안다.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다. 또한 농부는 생명의 역설적인 능력을 안다. 생명이란 비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강해지며, 역경 속에서 더욱 순수하고 크게 자란다. 뜨거운 여름 태양빛 아래서 곡식은 알차게 여무는 것이다.

    농부의 마음은 가꾸는 마음이다. 가꾸는 마음은 아름답다. 가꾼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이다. 돌봄은 관심에서 시작하고 관심은 사랑에 있다. 결국 농부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땅을 가꾸고, 곡식을 가꾸는 농부에게서 우리는 정성을 배운다. 성실을 배운다. 성실처럼 고귀한 성품은 없다.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성실에는 황혼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보배로운 성품을 우리는 농부에게서 배운다.

    농부의 마음은 인내하는 마음이다. 기다리는 마음이다. 농부는 준비하며 기다리고, 가꾸며 기다리고, 추수 때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인내를 통해 성취되고 열매를 맺는다. 거듭 기억하라. 농심은 천심이다. 그래서 농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롭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이다.

    天 : 하늘 천(大/1)
    長 : 긴 장(長/0)
    地 : 땅 지(土/3)
    久 : 오랠 구(丿/2)

    (유의어)
    천양무궁(天壤無窮)

    출전 :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하늘만큼 길고 땅만큼 오래되다. 

    하늘과 땅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다. (애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이는 무사(無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이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노자(老子)' 제7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천장지구'는 성인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늘과 땅만큼 오래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유래한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詞中有誓兩心知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석 장생전(長生殿)에서

    夜半無人和語時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恨)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장한가'는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전단은 총 74구로,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양귀비가 죽은 후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창자가 끊기듯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그렸다.

    후단 46구는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도사가 선계로 가 선녀가 되어 있는 양귀비를 만나 그녀에게 들은, 현종을 그리워하는 양귀비의 마음과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되어 있다.

    위에 예를 든 부분은 선녀가 된 양귀비가 도사에게 이야기해 준, 천보(天寶) 10년(751) 칠월칠석에 현종과 양귀비가 화청궁(華淸宮)에 거동하여 노닐며 장생전에서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는 구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인 '천장지구'가 유래했다.

    '장한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윤색되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제재를 제공했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끝이 있을까. 하늘만큼 길고(天長) 땅만큼 오래(地久)라는 하늘과 땅이 처음 존재했던 때로부터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었다는 무한의 뜻이다. 이 말이 귀에 익은 사람들은 홍콩의 느와르 명작영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1990년 유덕화(劉德華), 오천련(吳倩蓮)의 애틋한 사랑은 속편까지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원제 천약유정(天若有情)도 당(唐)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시구에서 따왔다지만 우리나라서의 번역명은 더 잘 알려진 데서 나왔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실려 있고, 역시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백거이(白居易)의 사랑 표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도덕경의 제7장 도광(韜光)장을 먼저 보자.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능히 이런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가 태고 때부터 영원한 존재인 하늘과 땅이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은 이어지는 성인을 비유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은 자신을 위한 것을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고, 자신보다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성인뿐 아니라 천도의 무위자연을 본받아 사심 없이 대하면 누구나 훌륭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돌려 말한 노자에 비해 낙천(樂天)이란 자로 더 잘 알려진 백거이는 글자대로 하늘과 땅만큼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장한가는 전체 4장에 120구, 840자나 되는 장편으로 당(唐)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과 미인의 대명사 양귀비(楊貴妃)의 비련을 그렸다.

    마지막 장에 성어가 나오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관계를 말하는 비익연리(比翼連理) 구절부터 보자.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하늘에선 날개 붙은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가지 붙은 연리지 되길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도록 자기를 뒤로 하고 남을 앞세우는 훌륭한 사람이 본받을 일이다. 남을 위해 일을 하겠다는 지도층이 명심할 말이고 일반 사람들은 영원한 남녀의 사랑에 더 솔깃하다. 사랑하는 짝이 나타나면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며 상대에 진심을 알아 달라고 애탄다.

    사랑이 성공한 뒤에는 초기에 열렬한 만큼 쉬 식는 사람도 많다. 더 문제인 것은 적령기의 청춘들이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아예 사랑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비익연리가 되고 하늘처럼 땅처럼 영원한 사랑이 많아져야겠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통행본 장 7장

    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不以其无私與.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故能成其私.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 天長地久.
    '노자'는 여기에서 하늘과 땅의 장구함을 말함으로써 사람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자연을 독해하여 교훈을 얻는 것은 '노자'의 주요한 어법이다.

    왜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고 하였는가? 길다는 것은 모양이고, 오래간다는 것은 시간이다. 원래 하늘은 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모양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고, 땅은 모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간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다. 그 혐의를 벗기 위해서 거꾸로 이야기한 것이다. 재미있는 설명이다.

    소철은 하늘과 땅도 형체를 가졌으므로 장구함에는 한계가 있고, 진정으로 장구한 것은 천지의 시작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곧 천지의 시작 같은 형이상의 세계만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송대의 분위기다. 상식적 정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문제를 잡아내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주겸지는 이것이 원래 옛말인데, '노자'가 인용하여 풀이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 전체가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는 금언을 풀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생(自生)'이라는 말은 '자사(自私)'라는 말과 같다. 곧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겁지겁 자기만 배부르기를 도모하고 사사로이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자기에게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장생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면 사물(남)과 다투게 되고,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으면 사물과 함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자'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는 일의 폐해를 이야기한 바 있다. "백성들은 살고 또 살려고만 하니 몸을 움직여 사지로 가는 것이 또 십 분의 삼이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한다." "무릇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귀하게 잘 여기는 것이다." 지금 문장과 서로 참고하면서 보면 더 좋겠다.

    여기에서 '생(生)'자를 '태어난다' 또는 '태어나게 한다'는 뜻으로 푸는 경우도 있다. "죽지 않으면 태어남도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야 능히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生生)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마치 골짜기의 신(곡신)과 같다."

    이런 해설은 '열자' 천서의 다음 문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만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 할 수 있고, 변화하지 않는 것만이 변화하고 또 변화하게 할 수 있다. (…) 사물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고, 사물을 변화하게 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말에 대한 '열자'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멋들어지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을 택한다면 이 문장이 어떻게 뒤의 문장과 연결되는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앞의 문장을 부연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어떤 좋은 결과가 있는가를 설명한다.

    하상공에 따르면 "남을 먼저하고 나를 뒤로하면 천하가 그를 존경해서 먼저 어른으로 모신다. 자기를 박하게 하고 남을 후하게 하면 백성이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신명은 그를 어린아이처럼 보우해서 몸을 항상 보존하게 된다."

    각기 다른 해설이 있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는 말과도 서로 통한다.

    '도응훈'은 이 말을 공자 시대의 인물인 공의휴(公儀休)의 고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공의휴는 생선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그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좋은 생선을 갖다 바쳤으나 전부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제자가 까닭을 물었을 때 공의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직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다. 생선을 받아서 재상직에서 쫓겨나게 되면 비록 생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없을 것이고, 생선을 받지 않고 재상직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오랫동안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의휴는 생선을 좋아하면서도 그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선물로 들어오는 생선을 물리쳤으므로 자신을 뒤로 물린 것이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생선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앞에 있게 되었다

    이 고사는 '한시외전' 권3에도 인용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도 역시 '노자'의 지금 문장을 소개한다. 단지 '한시외전'은 '노자'를 소개한 후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시'의 정신도 이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고 첨언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공의휴의 고사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시'의 정신과 연결될 만한가? 철저한 도덕주의자가 본다면 공의휴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공리주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익에 대한 계산쯤은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닌가. 복을 바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노자'의 문장은 궁극적으로 사사로움이 없는 삶의 태도(無私)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과 연결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공의휴의 고사는 원래 '한비자 외저설우하'에 나온다. '도응훈'은 한비자를 보고 그 고사를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도응훈'의 '제자(弟子)'라는 말은 '외저설우하'에서는 '동생(弟)'으로 되어 있는데, '도응훈'이 고사를 가져올 때 약간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고사는 '안자춘추'에서 제나라의 현신 현장(弦章)의 일로 언급된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선물로 들어온 고기를 사양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현장은 안자를 이어 경공(景公)을 도운 인물이므로 역시 공의휴처럼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여기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주인공만 바뀌어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중국 고사 전설의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 不以其无私與. 故能成其私.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이 문장은 예로부터 약간의 혐의가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 때문이다. '사'는 '설문'에 '사(厶)'로 되어 있는데, 이 글자는 원래 간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개인을 가장 강조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개인주의 하고는 거리가 멀고, 전시대를 통틀어 보면 멸사봉공의 막강한 공사 관념이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에 혐의가 잔뜩 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가령 "사사로운 이익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일의 추세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마치 겸손히 있는데도 빛이 나고, 몸을 잊었는데도 장수를 누리는 것과 같다"는 식의 발명이 필요했다.

    이런 해설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 문장도 역시 앞에서 말한 '무위이무불위'의 말의 구조를 통해서 이해하면 쉽다.

    곧 앞의 사사로움과 뒤의 사사로움은 함의가 다르다. 뒤의 사사로움이라는 말은 "몸(身)을 두고 말한 것이지 공·사의 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보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노자'의 말의 구조는 좀더 복잡하다.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노자'의 본의에서 볼 때 무소불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아닌데도 결국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역시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시 그런 암시를 준다.

    경공이 안자에게 물었다. 
    "반듯한 정치를 해서 장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안자가 대답하였다. 
    "그 행함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안자춘추 내편 문하)

    ◼ 천장지구(天長地久)

    중국 영화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제목 중에 '天長地久'란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는 뜻인데요, 유덕화와 오천련이 주연으로 나온 이 영화는 '하늘과 땅처럼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 '천장지구'는 원래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천장지구의 원래 뜻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변치 않는 사랑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하늘과 땅은 장구합니다(天長地久). 천지가 저토록 장구 할 수 있는 이유는(天地所以能長且久者는) 억지로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以其不自生이라). 그래서 천지는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故로 能長生이라).

    이 구절에서 노자는 하늘과 땅이 수많은 세월동안 장구(長久)한 이유를 '부자생(不自生)'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생(自生)은 스스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부(不)'라는 부정어가 붙어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간섭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품안에서 자라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체일 뿐 강요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데요.

    천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풀 한포기 나무가 한그루마저도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는 어머님의 마음을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노자는 이런 자연의 불간섭 원리를 그의 철학에 적용하였습니다. 리더는 천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강요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을 통해 사람들을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자연(自然)의 결과를 내라는 것입니다. 일명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역설적인 리더십입니다.

    노자철학에 의하면 리더는 간섭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천지(天地)를 닮은 리더가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직원들이 스스로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강요하는 리더보다 오히려 장구(長久)하게 리더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뒤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後其身而身先). 
    한 발짝 밖으로 비켜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안에 있게 될 겁니다(外其身而身存)."

    내가 리더로서 남보다 낫고 그들을 다스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억지로 지도하려 할 때 오히려 그 자리를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리더십 철학입니다.

    억지로 간섭하지 않기에 오히려 장구할 수 있고, 군림하려 하지 않기에 결국은 위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노자의 이 기막힌 '역설의 리더십'을 저는 일명 '조용한 리더십'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행복한 동행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느 때는 그냥 두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관심'이라는 간섭 때문입니다. (...) 사랑이란 일으켜 세워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강요한다고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말없는 가르침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해 보십시오. 섬기는 리더가 오히려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노자의 아름다운 철학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에게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장지구', 우리 가슴 속에 늘 채우고 살아야 할 삶의 화두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물질적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줄거리

    이야기는 도시에 사는 언니와 시골에서 농부와 사는 동생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언니는 상인과 결혼해 자신의 호화로운 도시 생활을 자랑한다. 
    이에 동생은 도시 생활은 악마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으며, 농촌 생활이 훨씬 안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동생의 남편 ‘파홈’은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말한다.

    “우리 농부들은 어릴 때부터 땅을 벗 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다만 넓은 땅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원하는 만큼의 땅만 가질 수 있다면 악마도 무섭지 않을 텐데.”

    난로 뒤에서 이들의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던 악마는 파홈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악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내가 너에게 땅을 넉넉히 주겠다. 그리고 그 땅으로 널 홀리겠다.”

    첫 번째 땅을 소유한 파홈

    파홈이 사는 마을 근처에는 한 여성 지주가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소작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새로운 관리인이 들어오면서 관리인이 소작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여지주에게 땅을 자신에게 팔아달라 요청했고, 이때 파홈도 15정보(약 5만 평)의 땅을 사게 된다.

    그는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으며 점점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 농부들의 가축이 그의 땅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했고, 파홈은 이웃들과 다투게 되었다. 땅으로 인해 소송을 걸고, 벌금을 매기고,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더 넓은 땅을 찾아 떠난 파홈

    그러던 어느 날 파홈은 먼 지방에서 온 한 농부로부터 볼가강 너머의 기름진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곳의 농부들은 조합을 통해 땅을 배분받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자신이 가진 땅을 모두 정리한 후 가족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땅에서 그는 50정보(15만 평)의 땅을 분배 받았다. 땅이 넓어 만족스러운듯 했지만, 넓은 땅에 대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커져갔다. 그는 파산한 농부가 헐값에 내놓은 땅을 사기로 했다.

    땅값의 잔금을 준비하던 때, 파홈은 바시키르라는 마을에서 온 상인에게 솔깃한 정보를 듣게 된다. 바시키르족이 사는 마을에 가면 매우 싼 값에 땅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을 기회라 생각하고, 일꾼 한 명을 데리고 바스키르족이 있는 마을로 향한다.

    바스키르족과의 거래

    바스키르족은 친절했다. 바스키르의 촌장은 파홈에게 원하는만큼 땅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땅을 파는 방식은 매우 특이했다. 땅값으로 1000루블을 지불한 뒤, 갖고 싶은 만큼의 땅을 하루 안에 걸어 표시하면 그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날 밤, 파홈은 엄청난 땅을 얻을 생각에 설레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파홈은 잠결에 텐트 밖에서 나는 촌장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밖을 내다보니 촌장이 배를 움켜잡고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촌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바스키르를 소개해준 상인이었다. 상인에게 말을 걸려고 쳐다보자, 상인이 갑자기 악마로 변했다. 악마는 바닥에 쓰러진 한 남자를 보고 깔깔 웃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파홈 자신이었다.


    파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파홈은 불길한 꿈을 꾸어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서둘러 일꾼과 함께 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촌장은 여우털 모자를 어느 땅에 내려놓고 파홈에게 이곳에서부터 출발해 돌아오라고 말했다.

    파홈은 삽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비옥했다. 1km쯤 갔을 때, 그는 구덩이를 파서 잔디 조각을 놓아 자신의 땅이라고 표시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 펼쳐진 탐스러운 땅으로 인해 파홈의 걸음은 빨라졌다. 중간에 몇 번씩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아직 돌아가기는 이르고, 조금만 더 가면 더 넓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정오가 되어 그는 잠시 빵과 물로 끼니를 해결한 뒤 다시 한참을 들판을 걸어다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파홈은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멀리 와버린 탓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파홈의 숨이 가빠졌다.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출발 지점을 향해 뛰었다.

    출발 지점에 가까워졌을 때, 파홈은 언덕 위에서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덕 위에는 아직 해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언덕을 올랐다. 촌장은 옆구리를 움켜 잡고 웃고 있었다. 마침내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파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이 여우털 모자에 닿았다.

    촌장이 소리쳤다.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짜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일꾼이 달려가 쓰러진 파홈을 일으키려 했으나, 파홈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일꾼은 파홈을 누일 수 있을만큼의 구덩이를 파, 파홈을 그곳에 묻었다.

    파홈이 묻힌 땅은 약 2m 정도가 전부였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가 주는 교훈

    톨스토이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결국 죽어서 누울 작은 무덤의 크기뿐이라는 교훈을 전한다. 파홈은 처음에 작은 땅으로도 만족했지만, 욕심이 커질수록 더 많은 땅을 원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파홈의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소유하던 물질과 재산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파홈과 성경 속 어리석은 부자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새번역 누가복음 12:16~18)

    예수님의 비유에는 한 부자가 등장한다. 부자는 수확이 많아지자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앞으로 평안히 먹고 마시며 즐거이 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새번역 누가복음 12:19)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부자 역시 부를 축적해두고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2~24)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당장 오늘 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찾으시면 소용이 없으며, 더군다나 재산과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누가복음 12:15)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이야기 속 파홈 그리고 비유 속 부자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재산이 목표가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적인 풍요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교훈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솔로몬의 깨달음: 부와 권력을 가진 뒤에 깨달은 진정한 삶의 가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솔로몬 왕은 명예와 권력은 물론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린 왕이다. 솔로몬 시기, 주변국들은 솔로몬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고, 해마다 약 23톤의 금이 솔로몬 왕의 궁으로 들어왔다. 그의 궁전에서 사용하는 모든 잔과 그릇은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예루살렘에서 은은 돌처럼 흔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인생의 말년에 허무함을 이야기하며 전도서를 기록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2)

    이 삶에서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땅, 돈 같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새번역 전도서 12:7)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13)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영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세계는 바로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적인 부요를 누릴 수 있다. 앞서 살핀 말씀처럼 재산이나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기록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그래서 솔로몬은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부요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한 것이다. 영적인 준비 없이 세상의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은 결국 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땅을 얻기 위해 내달렸던 파홈처럼 말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육적인 삶만 바라보고 사는 이들이 차지할 땅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차지할 땅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은 무한한 영광과 풍요로 가득하다.

    유한한 세상에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살 것인가?

    무한한 천국을 얻기 위해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준비할 것인가?

    이제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찾겠다”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 하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러시아어: 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므노고 리 첼로베쿠 제믈리 누즈노[*])는 1886년 출판된 레프 톨스토이단편 소설로, 톨스토이는 본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심과 그로 인한 파멸을 경고하였다.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1]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2]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는 금액에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3]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만큼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바시키르인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는데, 그날 밤에 자신이 무리를 한 나머지 쓰러져 죽게 되고 악마가 그런 자신을 보며 비웃는 꿈을 꾼다.

    이튿날 아침, 파홈은 악몽을 꾼 것을 찜찜해하면서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출발한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기름진 토지들을 보게 되고, 이것들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에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하며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누가복음 8:15
    개역개정,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그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정직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3588) 좋은 땅(테 칼레 게) 호 칼로스(2570) 게(109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그 말씀을 듣고(191),
          지키어(2722), 인내로(5281) 결실하는 자(2592) 

    듣고(191) 아쿠오(akŏuōἀκούω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관련 성경  /  듣다(마2:3, 눅4:28). 들리다(계12:10).

    지키다(2722) 카테코(katĕchō)  κατέχω
    1. 제지하다.  2. 굳게 붙들다.  3. 차지하다
    발음 [ katĕch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ῖχον, 제2부정과거 κα- τέσχον, 2596과 219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만류하다(눅4:42), 지키다(눅8:15, 고전11:2, 15:2), 가다(눅14:9), 걸리다(요5:4), 들어가다(행27:40), 막다(롬1:18, 살후2:6), 얽매이다(롬7:6), 가지다(고후6:10), 취하다(살전5:21), 머물다(몬1:13), 잡다(히3:6,14, 10:23), 차지하다(마21:38).

  • 인내(5281) 후포모네(hüpŏmŏnē)  ὑπομονή, ῆς, ἡ     

    1. 인내.  2. 대망
    발음 [ hüpŏmŏnē ]

    어원  /  5278에서 유래
    • 1.  인내, 참음, 견딤, 견인불발, 눅21:19, 롬5:3.
    • 2.  대망, 기대, 계1:9.
    • 관련 성경  / 참음(롬2:7, 고후12:12), 견디는 것(고후6:4, 골1:11), 인내함(딛2:2), 인내(눅8:15, 살후3:5, 벧후1:6).


    결실하는 자(2592)  카르포포레오(karpŏphŏrĕō)  kαρποφορέω 스트롱번호 2592

    1. 열매를 맺다.  2. 막 4:28. 3. 마 13:23
    발음 [ karpŏphŏrĕō ]

    어원 / 미래 καρποφο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καρποφόρησα, 2593에서 유래
    • 1. 열매를 맺다, 수확을 내다.
      • a.  [문자적] 막4:28.
      • b.  [비유적: 내적 생활의 결실로서의 실천적 행동] 마13:23, 막4:20, 눅8:15. 
    • 관련 성경  /  결실하다(마13:23, 눅8:15), 열매맺다(막4:28, 롬7:5, 골1:10).



    󰃨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성서학자에 의하면 구약의 중심 주제가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땅은 구약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입니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에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입니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입니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말합니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습니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아다마’와 ‘에레츠’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묵은 땅"은 "니이르(nîyr)"라고 합니다.

    아다마와 에레츠는  

     두 단어를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라(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 에게 내리시리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고 쾌쾌한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절대, 문제를 안 일으킬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감에 따라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그는 정성스레 정원을 가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소박한 것이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작은 땅뙈기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당신의 마음 밭에는 어떤 새싹들이 자라고 있는지요? 악한 열매를 거둘 악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만, 거짓, 음란, 탐욕, 미움, 다툼, 시기, 우상숭배, 이기심, 험담, 판단 등이 당신의 마음 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은 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밭에 선한 씨를 파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 정원에 흙만 있는 화분 두 개가 있었습니다. 꽃씨를 사다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틈을 내지 못했는데 여름이 지날 무렵 두 개의 화분에서 모두 푸른 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한 화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다른 화분에는 어떻게 심겼는지 참외 줄기가 자라나 납작 납작한 잎이 나서 화분의 흙을 덮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줄기에 동그란 열매가 달리더니 아기 주먹만한 참외 세 개가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향긋한 내를 풍기기 시작하여 보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요. 똑같은 화분에 무엇이 심겨졌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받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 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마음에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11:18)
    영국의 성직자 칼렙 c. 콜턴은 말했습니다. "악을 뿌리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 덕을 심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잡초가 자랐던 억센 토양에 아무 것도 나지 않게 하는 데 드는 수고보다 훨씬 적은 수고로 밀이 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욥4:8, 9)
    마태복음 13:18-23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토양의 질을 알아내는 작업입니다. 또한 땅이 씨앗을 뿌리기에 적합한가를 알아내고 개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서 이를 심는 밭인 마음이 적합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밭인가를 바로 알아 개간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 길가 밭

    길가와 같은 굳은 땅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에 이런 땅에 씨가 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 땅에 가보면 밭이랑이 좁고, 길고, 밭과 밭 사이에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길에 서서 씨를 뿌리기도 하는데 씨가 길에 떨어져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씨뿌리는 법이 있는데 나귀 뒤에다 씨 자루를 싣고, 자루 모퉁이를 잘라 구멍을 내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뿌립니다. 그러니까 자연 길가에도 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길가에 뿌려지면 이어 새들이 와서 씨를 주워 먹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기독교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적대시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진리에 아주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 생활에 적응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생각 합니다. 물론 사람의 사는 것이 항상 쉽고 어떤 긴장이나 눈물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못할 경우, 다른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생명의 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브는 뱀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정도는 점점 더 사악해 지게 되고 시대가 지날수록 악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범죄들은 과거에 저질러져 왔던 것보다도 심한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묵은 땅이기 때문에 부패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팍하여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 일이 6천년 동안을 거듭해 온 까닭에 딱딱해져서 아무리 씨앗을 뿌리려 해도 심기워 지지 않습니다. 개간되지 않은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부려도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을 개간해야만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끝없이 마음을 개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행함이 나타나고, 행함 속에서 온유와 겸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은 교만을 좀 더 적극적이고 행함 있는 믿음을 통하여 개간해 가야 합니다.

    2. 돌 밭

    흙이 얇은 돌밭 같은 땅입니다. 물론 이 땅은 모두가 돌은 아닙니다. 흙이 얇은 밭에 돌 이 깔려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땅이 대개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바위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씨를 발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땅이 얇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지 못해서 양분을 땅에서 흡수하지 못하므로 결국 해가 날 때 말라 버리고 죽고 맙니다. 무슨 일이고 시작하기가 끝내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어떤 유명한 전도자가 '1백 명 가운데 5명은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히 이끌고, 나머지 95명은 교회 안에서 성숙할 때까지 돌보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생활을 시작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개가 도중에 넘어집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도중에 실패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값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후의 환경, 즉 기독교인의 생활 내용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너무 쉽게만 생각하다가 당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일들에 관하여는 묻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안에 속하여 얼마나 충성을 하고 있는 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자랑을 하면서도 현재는 행치 않는 것을 봅니다. 돌밭은 주로 이러한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앞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고,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개조되지 않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되 영적인 믿음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영과 육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돌을 우리의 몸 안에서 빼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내가'라는 말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온 방안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며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비유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는 못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죄를 회개해야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여러분,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아십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깊은 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3. 가시 밭

    가시로 가득 찬 땅입니다.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퍽 게을러서 가시덩쿨을 윗 부분만 잘라서 불살라 버리기 때문에 얼핏 볼 때는 퍽 깨끗하게 보이지만 땅 밑에는 아직도 가시덩쿨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가시덩쿨이 다시 성해집니다. 그런데 가시덩쿨은 곡식의 씨보다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씨의 생명을 막아 버립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걱정의 넝쿨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육신에 의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는 듯 보이지만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앞서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경험, 내 지식으로 살아가서도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완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싹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하고, 마음대로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척 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들은 요나는 한참을 생각한 후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향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배에 넣으시고 그가 회개하자 그를 꺼내어 니느웨로 가게 하셨습니다. 왜 불순종했을까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려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하는데 자기 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이처럼 불순종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합니다.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물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물질이 없어 운영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없어 운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성령으로 마음을 개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편견은 금물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의 종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를 본 아론과 미리암이 책망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모세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밭을 개간하십시요.

    4. 좋은 땅

    열매 맺을 수 있는 좋고, 깊고, 깨끗한 땅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하나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 말씀을 들을 준비가 없는 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의견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없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몸은 현명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무엇이 스치고 지나갈 때 눈은 자동적으로 감깁니다. 그것을 반사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원치 않는 무엇인가가 들려질 때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은 닫혀지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이것은 어떤 때 맛없는 약이나 괴롭히는 치료법이라도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려 진리가 길가에 떨어지면 이것은 인간에게 비극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말씀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결실 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같이 아주 메마른 땅에 서 이런 결실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동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 횟수가 잦을수록 삶의 질은 좋아집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 좋은 글, 고전으로 자리잡은 모든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처럼 감동을 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은 한 사람의 일생을 감동으로 붙잡기에 넉넉한 극상의 예술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의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씨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저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가시처럼 쿡쿡 찌르는 모진 마음도 만났지만‘사람의 마음이 저렇게 선하고 비단결처럼 고울 수 있을까’하고 목사인 저까지도 부끄럽게 만드는 온유하고 품위 있는 마음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자면 향수처럼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서울 할머니라는 분이 홀로 사셨습니다. 그 옛날 서울서 공부하신 분이니 시골에서는 왕비처럼 귀해 보였습니다. 그 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분이 그 당시 전북도지사 부인이면서 이화여대 교수였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도지사 부인께서는 아들과 함께 그 집에 내려와 열흘씩 쉬어 가셨습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우리 동네에서 잘 산다는 집에서 도지사 부인을 청하여 점심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차린 밥상이겠습니까. 구경꾼이 마당 안에 가득 찼습니다. 마침내 도지사 부인께서 첫술을 뜨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짓궂은 변인지, 수저 위에 얹혀진 하얀 쌀밥 틈에 통통하게 삶아진 파리 한 마리가 툭 불거져 나왔습니다. 순간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오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얼른 밥술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셔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습니다. 그 부인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등에 부었던 나드향유 처럼 번져 갔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부끄러운 여인과 대화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여자는 남편이 있는데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연히 여자를 꾸짖어야 했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속이느냐?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도 누구 앞에서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느냐?”고 으름장을 놓을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끄러운 여인의 입장이 되셔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마음을 미리 삼켜주신 것입니다 남의 허물에서부터 나를 상하게 하는 역겨운 일에 이르기까지, 나의 거슬림을 이날까지 삼켜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삼켜야 합니다. 삼키는 일은 척박한 땅에 두엄을 묻어주는 일과 같습니다. 삼키는 일을 잘 해야 내 심령의 산성화를 막고 옥토가 되어, 남에게 감동을 주며 살아가는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마음의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은 땅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땅입니다. 해도, 비도, 이슬도 다 받으면서 아무런 보답이 없습니다. 묵은 땅은 옆 밭에 장애를 줍니다.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랫동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동안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뿐 아니고 점점 더 생깁니다. 그 습관의 뿌리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여러 가지 잡초가 그 마음 밭에 나기 시작합니다. 세상 생각,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한 마음, 비열한 마음 등의 모든 잡초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묵은 밭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빛도, 비도, 이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도덕적인 교훈을 들어도 그 마음이나 생활에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묵은 땅은 어떻게 하라고요? 묵은 땅을 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씨를 심기 전에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서 굳은 흙을 파고 뒤집어 잡초를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얕게 갈지 말고, 깊이 갈아 뿌리까지 뒤엎어야 합니다. 물론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갈아야 합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아파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을 갈기 전에 무슨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은 갈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면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복음 전파할 때 제일 먼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왜 우리가 교회에는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왜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던 분이 요사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땅이 되어 버려 그렇습니다. 묵은 밭에 씨뿌려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애써 씨를 뿌려도 소용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세요!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악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교만, 음란, 거짓, 탐욕, 시기, 미움, 분노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고 묵은 땅을 기경하여 좋은 열매 맺는 마음 밭으로 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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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농촌에서 검소한 삶을 꾸려나가는 농부 파홈과 그의 아내는 도시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자매와 대화를 나눈다. 아내의 자매는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 지를 자랑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파홈의 아내는 농민의 삶을 찬양하고 상인의 삶을 비하하여 두 사람 간에 작은 말다툼이 일어난다. 대화를 듣던 파홈은 넓은 땅만 있다면 악마조차도 두렵지 않다고 주장했고 난로 뒤에서 이를 엿듣던 악마는 땅과 목숨을 건 내기를 준비한다.

    2장

    마을 근처에 위치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농지의 관리인은 작은 실수에도 벌금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파홈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농지의 지주가 농지를 매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농민들은 농지를 나누어 구매하기로 한다. 파홈도 이에 따라 농지를 구입했고,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농지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며 행복을 느낀다.


    85세의 갈렙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5 
    6.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1. 에서의 자손이었던 갈렙

    가나안 땅을 분배한 장소는 길갈이었고 가장 먼저 나아온 지파는 유다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항상 먼저 나아간 용감하고 담대한 지파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갈렙이 먼저 와서 헤브론 땅을 요청했다. 갈렙은 그니스(Kenizzite) 사람인데, 그니스(겐) 사람이란 창세기 36장에 기록된 바 에서의 자손 중 그나스 족장의 자손이다(11, 15절).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다 출애굽 때 함께 떠난 잡종이었다(출 12:48).

    이러한 족속 사람인 갈렙은 이스라엘에 귀화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하였고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유다 지파의 대표로 선발됐다. 출신이 이방이요 잡종인 사람이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유일하게 두 사람―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갖게 된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가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그 기업은 결정돼 있었다.

    2. 동년배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현재 그는 85세이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으로 파견됐을 때에는 40세 청년이었다. 여호수아와는 동년배이다. 출애굽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던 것이다. 그는 45년 전에 약속된 기업의 분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담대히 요청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 두 위대한 인물만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쓰러져 죽게 하신 것에서 경고와 배움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들만이 성공한다. 역대로 하나님은 동년배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예가 많이 있다. 루터와 칼빈은 12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웨슬레와 휫트필드도 동년배들이요, 같은 학교 출신들이다. 다비와 함께 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같은 년배로서 온전히 주님을 따른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도 갈렙처럼 온전히 주 하나님을 따르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갈렙은 우리에게 인생의 좋은 비전을 주고 있다. 그는 85세가 됐어도 젊었을 때의 좋았던 신앙을 회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젊었을 때 위대한 업적을 쌓고서 노년에 가서는, 아니 중년부터도 그가 젊었을 때 이룬 큰 일을 회상하며 그 꿈을 되새기는 맛으로 사는 것을 본다. 그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이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에나 늙었을 때에나 여전히 같은 영과 믿음을 소유했고 여전히 싸우며 전진하고자 했다. 그는 소위 은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더 보기로 하자! 가데스 바네아에서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치며 반역할 때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편에 섰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민 14:24). 그는 그 후로도 결코 반역적인 무리 속에 낀 적이 없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진한 사람이다.

    3.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온전히

    7절에서 그는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모세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70인 역에서는 ‘그의 마음에’로 번역했는데, ‘그의’란 ‘모세의’ 또는 ‘하나님의’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모세의 마음과 일치됐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참된 마음과 양심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마음이나 모세의 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위축되고 소심한 마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으로 보았기에 그의 본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열 정탐 중 혹 어떤 사람은 그들의 양심대로 보았다 하더라도 아우성치는 민중을 바라보면서 참되게 양심에 따라 보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참다운 사람의 양심도 아니다. 그것은 대세에 기울어진 약하고 간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갈렙은 ‘내 마음의 성실한 대로’ 보고했다. 갈렙이 승리자의 특징을 지닌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4장 14절에서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히(wholeheartedly) 좇았기 때문이라 했다. 14절 뿐만 아니라 이 ‘온전히’라는 말은 갈렙의 인생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7, 8, 9, 14절). ‘온전히’란 마음을 다한다는 말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이기도 하다. 이기는 자 곧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온 마음으로(with all heart) 섬기기를 배워야 한다. 온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면 이기는 자가 아니다.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면 이기는 자의 영이 아니다. 힘을 다하지 않는 것도 이기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이러한 이기는 자의 전형을 볼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한다.

    4. 갈렙의 단순한 성품

    여호수아서를 훌륭하게 강해한 레드파스나 몽고메리는 갈렙의 성품이 단순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이 동일하게 이러한 성품의 소유자들임을 지적했다. 몽고메리가 한 몇 마디 말을 인용해보겠다. “위대한 사람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사람들은 심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갈등과 동기들에 에워싸여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모두 함께 해결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까지 보았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에서 이 점을 보지만 그것을 달리 취하면 더 나아지리라는 것을 인정만 할 따름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은 교활하지 않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더라도 취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요인과 최선의 길을 보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몽고메리는 교부 시대의 위대한 인물인 아타나시우스와 루터, 링컨 등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그들의 소명을 지키고 나아가 결국은 승리를 거둔 인물들이다. 교회 역사는 그들에 의해 엄청난 도움을 얻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역사는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5.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그는 85세지만 여전히 싸울 것을 제의한다. 이 역시 이기는 자의 특징이다.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1절). 실상 가나안 전쟁은 이미 종료됐다(11:23). 그러니 갈렙이 꼭 현재 싸워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헤브론을 갈렙에게 줄 때 반드시 마지막 전투가 있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15:13-19). 그는 약속된 그 땅을 얻자, 거기 있던 아낙의 소생,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좇아내었고 드빌 거민을 쳤다. 드빌 곧 기럇세벨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취하자 갈렙이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주위에는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들은 같이 동역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들이 된다. 이는 교회사의 많은 사실들이 증명한다. 교회사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주위에 한두 명, 또 그 이상 매우 위대하고 귀한 조력자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다.

    6. 85세에도 전쟁을 치뤄야 하는 땅을 원하다

    그는 85세지만 쉬려 하거나 피동적이 아니었다. 그가 얻으려는 땅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땅을 갈렙은 원했던 것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절). 15절에 의하면 갈렙에게 할당된 땅은 헤브론이며 “기럇 아르바라 하였는데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고 한다.

    갈렙은 적극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했을 뿐 아니라, 그가 믿은 대로 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년에 가장 큰 아낙 사람들을 쫓아내는 위대한 일을 했다. 이기는 자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믿고 말하는 바를 행하며 그러한 길을 일생토록 곧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7. 그가 원했던 땅, 헤브론의 뜻

    그가 구한 곳은 헤브론이었는데, 헤브론은 ‘교통(fellowship)’이라는 뜻이다. 그는 최상의 상태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영적 체험으로 말하자면 세겜(능력)과 벧엘(하나님의 집)을 거쳐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장소이다. 믿음의 사람, 승리의 사람에게 주어진 최상의 기업은 하나님과의 간격 없는 교통이다. 이러 최상의 기업을 얻는 사람을 본보기로 보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갈렙과 같이 단일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한 자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 안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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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안다는 것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을 삶으로 인정하며 닮아가는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교제,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뢰,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

    1.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깊어지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방법

    a. 말씀의 묵상과 기도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생겨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삶의 생각, 말,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 b.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뇌로 인지하는 지식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직접적인 사귐을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 c. 삶의 주인으로 인정 
    지식적인 앎을 넘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d.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생각, 말, 행동이 점차 하나님과 같아지는 변화를 수반합니다. 


  • e. 영생의 시작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에 따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합니다. 


  • 아는 것? 
    1. 신뢰와 순종
    2. 삶의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1 
    내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어떤 양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내가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를 아는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고, 그를 아는 자는 그가 명령하신 것을 행하며, 그를 아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1서 4:6-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시편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배려심 없고 이기적인 아이, 공감능력을 불어넣으려면?

    아이가 간식을 독점하려 하거나, 다른 아이의 부탁이나 도움을 들어주지 않는 행동은 보호자에게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의 이기적인 행동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기적인 행동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탐색하고 나눔의 개념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많은 어린이에게 흔히 나타나는 발달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지속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보호자가 아이들이 공감 능력을 키우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시카고대 신경과학자이자 아동 심리학자인 장 데세티 박사는 평생동안 공감, 도덕성, 친사회적 행동과 이기적인 행동의 근원을 찾아 연구해왔다. 
    그의 연구는 이기심, 공감, 이타적 행동의 신경 메커니즘을 탐구하여 어린이의 이러한 특성의 발달과 사회적 상호 작용 및 관계에 대한 잠재적 영향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은 데세티 박사가 제안하는 이기적인 성격의 아이들에게 이타심을 알게 하고, 공감을 배우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시카고대 아동 심리학자 장 데세티 박사

    공감과 관대함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배운다. 이타심을 가르치기 위해 부모와 보호자는 공감하고 관대한 행동을 일관되게 모델링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보여주고, 자원을 나누고, 자선 활동에 참여한다. 긍정적인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도 이러한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관점 잡기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공감 능력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다른 관점을 고려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이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경계와 결과 설정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명확한 경계와 결과를 설정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가르치는 데 중요하다. 아이가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면 차분하게 그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적절한 행동을 일깨워준다. 일관성이 핵심이므로 경계와 결과가 공정하고 균일하게 적용되도록 한다.

    나눔의 기술

    아이들이 이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나눔을 장려한다. 아이들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장난감이나 자원을 공유해야 하는 놀이 시간이나 그룹 활동을 준비한다. 칭찬과 인정을 통해 긍정적인 공유 행동을 강화하고 협력의 이점을 상기시켜 준다.

    감사의 중요성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친절에 감사를 표현하도록 가르치면 관대한 태도를 키울 수 있다.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거나 감사 노트를 쓰거나 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도록 격려한다.

    긍정적 강화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 때 이를 인정하고 칭찬한다. 긍정적 강화는 아이들이 공감과 관대함을 계속 발휘하도록 장려한다. 칭찬할 만한 특정 행동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강조하여 구체적으로 칭찬한다.

    친절한 행동 배우기

    자원 봉사, 이웃 돕기, 자선 단체 기부와 같은 친절한 행동에 자녀를 참여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타심이 기회 필요해

    이기적인 행동을 일관되게 다루고, 공감을 모델링하고, 이타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이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물론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인내와 끈기야말로 아이들이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장 데세티(Jean Decety) 박사 연구팀은 14개국 1,170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종교가 그들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타인에 대해 더 관대했고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조사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구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의 종교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더 관대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남을 더욱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는 외면하는 이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본과 말을 뒤집은 신앙생활은 일쑤 사람들을 위선으로 이끕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신 이 말씀이 참 신비합니다. '내가 고쳐줬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의 절실함이, 너의 큰 신뢰가, 너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작동하는 믿음과 작동하지 않는 믿음

    선진국에서 제작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한국에서는 고사를 지냅니다.
    만일 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기계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거나 인명 사고가 발생한다고 믿는 민간 신앙 때문에 반드시 그 기계를
    설치한 후에 고사를 지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동차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是認(시인)하나 行爲(행위)로는 否認(부인)하니 可憎(가증)한 者(자)요 服從(복종)치 아니하는 者(자)요 모든 善(선)한 일을 버리는 者(자)니라.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부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후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호세아 장별 요약

    호세아 1장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호세아 2장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3장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5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의 왕들이 멸망하고, 그들의 땅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 6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의롭게 만드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호세아 7장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8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9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하고, 그들의 땅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호세아 10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무성한 포도나무 같아 열마가 많은 많은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세아 11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아무 힘이 없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돌아오라 외치십니다.

    호세아 12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람과 동품을 먹듯 무의미한 애굽과 앗수르에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간사하고 불쌍한 야곱을 구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호세아 13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지파의 가장 강력한 지파였지만 바알을 섬기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아침 구름 같이 이슬같이 사라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세아 14장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고멜과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3차원 공간에서 살아가며, 길을 걷고, 집을 지으며, 물건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시간이라는 차원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4차원이란 개념을 알아보고, 시간을 넘어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1. 차원이란 무엇인가?

    "차원"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차원은 공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그리고 4차원은 차원의 다른 수준을 나타냅니다.
     
    1차원 : 선

    1차원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으로, 선 하나만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길이만을 나타내며, 방향은 없습니다.

     2차원 : 면

    2차원은 선이 두 번 겹치면 면이 됩니다. 
    이것은 길이와 너비를 가지며, 예를 들어 종이나 화면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차원 : 공간

    3차원은 면이 깊이를 가지면서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이며, 길이, 너비, 높이를 포함합니다.

    4차원 : 시간

    4차원은 시간을 추가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현재, 미래를 경험하는 데 필요한 차원입니다. 
    시간이 추가되면 사건들은 일어나는 순서대로 나열됩니다.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기

    우리가 4차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건들을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우주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하면 우주와 시간이 공간 내에서 곡선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성 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 시공간을 개념화한 중요한 이론 중 하나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며, 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왜곡됩니다.

    결론 :

    4차원은 시간을 포함한 공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우주와 우리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물리학, 천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차원이란 무엇인가? 1차원부터 4차원까지

    어떤 공간의 차원은 그 공간의 성분들 중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성분들을 최대한 모아 놓았을 때, 그런 성분의 개수가 몇 개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은 앞뒤, 좌우, 위아래의 3가지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3차원이다. 2차원 공간은 평면 위의 공간이다. 평면 위의 점을 생각해보면 점은 앞뒤, 좌우의 2가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평면은 2차원이다. 1차원 공간은 수직선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수직선 위에 있는 점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이 점은 수직선을 따라 좌우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1차원인 것이다. 1차원 공간은 간단하게 수직선 하나로만 표시할 수 있지만, 2차원 이상의 공간을 표시하려면 위치를 정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 좌표계 혹은 직교좌표계라는 것이다. 2차원 공간은 2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3차원 공간은 3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표시한다.

    1.일차원(One dimension)

    1차원은 기하학적으로 직선이나 곡선을 말한다.

    직선 위의 점의 위치는 그 위에 원점을 지정한 다음, 방향을 주고 단위의 길이를 지정하면, 직선 위의 점의 좌표인 하나의 실수로서 나타낼 수 있다. 또, 곡선 위의 점의 위치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수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직선과 곡선은 1차원 공간이다.

    2.이차원(Two dimension)

    2차원은 차원이 두 개인 것을 의미한다. 흔히 평면을 의미한다.

    2차원 평면에서 한 점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값(변수)이 필요하다. 2차원 좌표계로는 직교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와 극 좌표계(polar coordinate)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삼차원(Three dimension)

    삼차원은 세 개의 차원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물리적 공간을 지칭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삼차원 공간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물리적 공간은 좌우(가로), 전후(세로), 상하(높이)의 세 방향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의 한 점이 세 개의 좌표로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공간의 한 점의 좌표는 P = (x, y, z)로 표현할 수 있다. 좌표값을 표시한 방식으로 직교 좌표계, 원통 좌표계, 구면 좌표계가 있다.

    4. 사차원

    인간은 3차원 공간에 사는 생물이라서 4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다만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관계로부터 더 높은 차원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4차원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가 보질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의 경험이 3차원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차원이라고 해도 수학의 확실성과 엄밀성, 자연스러운 확장을 통해 우리는 고차원의 일부를 보고 느낄 수 있다.

    4차원은 수직선 4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며, 5차원은 수직선 5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공간들은 우리가 평면 위에 그릴 수 없고 단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존적 세계의 4가지 차원


    1. 물리적 차원의 자연세계
    2. 사회적 차원의 인간세계
    3. 심리적 차원의 자기세계
    4. 영적 차원의 초월세계

    인간이 살아간는 세상을 3차원의 세계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을 4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3차원과 4차원은 마치 숫자 하나의 차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3차원의 세계에서는 4차원의 세계를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서 버둥거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시겠다고 합니다.

    결혼이란 세속적인 의미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남자가 결혼한 후에 여자를 안다는 것과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 여자를 안다는 것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3차원에 머물고 있지만 하나님은 4차원의 세계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장가들지 않으면 인간은 동물과 흡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다'는 표현은 인간의 신부인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이 맺는 사랑과 헌신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으로, 특히 구약의 호세아서에 나타나는 주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를 '음란한 아내'에 비유하며, 자신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사랑하고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호세아를 통한 비유 

    •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과 구원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언약 관계 안으로 되돌려 그들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요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든다'는 표현은 인간(교회)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 그리고 언약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비유입니다. 

  • 호세아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한 아내'에 비유합니다.


  • 하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당신의 신부 삼아 사랑하시겠다는 의지를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나타내십니다.




  • 본문 호세아서에 보면 BC 760년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를 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70년 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뒤인 BC 690년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유다백성들의 남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이사야54:5절) 

    얼마나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든다. 또는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을까요?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결혼을 하지요. 결혼하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배려하고 아끼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서로 돌봐주어야지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상징적으로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 장가드신다.

     

    BC 760년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가들어 영원히 산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호세아2:19-20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장가든다는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2.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셨다.

     

    BC 760년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장가드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70년 후인 BC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또 BC 620년에는 영적으로 간음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녀(렘3:3)라는 표현까지 하시며 이혼증서(렘3:8)를 써주었다고 말씀하시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4절) 

     

      

     

    또 다시 BC 596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편 땅 앗수르에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며 나의 인도를 받을 것이며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너희는 대적의 땅에서 돌아 올 것이며 하나님께서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32절)

     

      

     

    3.예수님께서 신랑이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9장15절, 마가복음2장20절, 누가복음 5장33-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신랑이심을 비유로 암시를 하셨습니다. 찬송가 175장(통162)가사를 보면 마태복음 25장 6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됐느냐? 우리 신랑 예수 오실 때 밝은 등불 손에 들고 기쁨으로 주를 맞겠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시며 장가들며 남편이라고 표현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incarnation[ˌɪnkɑːˈneɪʃn](예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현현(顯現), 성육신(成肉身)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육신 하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는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신랑과 신부사이와 같습니다. 보아스와 룻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자요 총각인데 흠 있는 과부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흠 있는 죄인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신부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언젠가는 하나님만 아시는 때에 신부들인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텐데 우리 모두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다 참예 하시기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를 들며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또한 이사야 54장5-8절 말씀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를 지으신 이가(하나님) 네 남편이며 구속자며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다시 모으며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호세아 서론


    역사적 맥락 :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 역사의 격동기인 기원전 8세기경에 예언했습니다. 
    그는 아모스, 이사야,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과 동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왕국은 정치적 불안정, 우상 숭배, 도덕적 부패에 직면해 있었고, 호세아의 사역은 다가오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 : 

    호세아 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호세아는 심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불충실함을 생생한 은유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제 :

    호세아서의 주요 주제에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불성실의 결과, 회개, 회복이 포함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의 관계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복되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반영합니다. 

    호세아의 구조

    1~3장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징인 호세아의 결혼

     1장 :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불성실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멜은 우상 숭배를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을 상징합니다.
     2장 :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그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청을 반영합니다. 
             이는 심판과 미래의 희망을 대조합니다.
     3장 : 호세아는 고멜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되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고멜을 구속합니다.

    4~14장: 이스라엘의 죄, 심판, 회개에 대한 촉구

     4~7장 :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호세아는 지식의 부족, 불신앙, 우상 숭배 등 이스라엘의 죄를 비난합니다. 
     이 부분은 배신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강조합니다.
     
     8~10장: 반란의 결과
     이스라엘은 심판의 확실성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형벌의 도구로 예언되었다.
     
    11~14장 :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 약속

     11장 : 어조의 변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모의 사랑을 강조함

     12~13장 :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성찰.

     14장 :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회개와 회복의 약속을 촉구하는 마지막 요청입니다.

     주요 키워드 및 주제

    • 불성실함 :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영적 간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외국 동맹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불충실한 배우자로 묘사됩니다.

      언약 :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심판 : 
      불순종의 결과가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거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회개의 요청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움은 특히 11장에서 하나님을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 묘사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집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가능합니다.

      회개 : 
      회개에 대한 촉구는 호세아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청하며, 그들이 그 부르심에 귀를 기울인다면 회복이 약속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호세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는 그분에 대한 ** 친밀한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호세아 6:6 ).


    • 호세아서의 상징
      결혼에 대한 비유: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멜의 불충실함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상징하는 반면, 호세아의 끈질긴 사랑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헌신을 반영합니다.

      아이들의 이름: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예후의 집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Lo-Ruhamah ("사랑받지 못함"): 하나님의 자비를 거두심을 상징합니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합니다.

    • 핵심 구절
      호세아 2:19-20: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들어 정의와 공의와 사랑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고치시리라."

      호세아 11: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속에서 변하고 내 모든 긍휼이 불타오르나니."

    • 호세아의 메시지 요약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만성적인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지속되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 책은 판단과 희망, 분노와 연민 사이를 오갑니다. 
      궁극적으로 호세아는 임박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망은 자신의 백성이 그분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들을 위한 회복과 치유임을 강조합니다.

    • 빠른 참조를 위한 키워드
      불성실(우상 숭배, 영적 간음)
      심판(결과, 아시리아)
      언약(결혼, 서약 파기)
      회복 (희망, 구원)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긍휼)
      회개 (회개, 치유)
      하나님에 대한 지식(친밀함, 참 숭배)

      이러한 요소들이 호세아서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 책은 복잡성과 깊은 사랑, 끊임없는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