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월) 요한일서 4:20-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사랑하노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If anyone says, "I love God," yet hates his brother, he is a liar. For anyon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whom he has seen, cannot love God, whom he has not seen.
아멘. 이 말씀은 요한일서 전체의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는 구절이에요.
아주 날카롭지만, 동시에 거짓 없는 사랑의 기준을 분명히 세워 주죠.
이 말씀의 핵심을 천천히 풀어보면 이래요.
1️⃣ 사랑 고백의 검증 기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요한은 말이나 고백 자체를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고백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고 말해요.
👉 그 기준이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2️⃣ 보이는 사랑과 보이지 않는 사랑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 논리는 아주 현실적이에요.
-
형제: 눈에 보임, 상처 주고받고 갈등도 생김
-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음, 추상적 신앙의 대상이 되기 쉬움
요한은 말해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실패한 사랑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성공할 수는 없다.
3️⃣ 왜 ‘미움’이 거짓이 되는가
여기서 ‘미움’은 단순한 감정 기복이 아니에요.
-
무관심
-
용서하지 않음
-
관계를 끊어버린 채 정당화함
-
마음속에서 계속 판단하고 정죄함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 요한은 아주 단호하게 말해요: 그건 거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에요.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사람을 향해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4️⃣ 이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초대’
중요한 건, 이 말씀이 우리를 때리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거예요.
요한의 의도는:
-
“너 왜 못하냐?” ❌
-
“진짜 사랑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보라” ⭕
👉 하나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증명된다는 초대예요.
5️⃣ 오늘 우리에게 주는 질문
이 말씀은 이렇게 묻고 있어요:
-
내가 하나님 사랑을 말할 때,
구체적인 얼굴이 떠오르는가? -
지금 회피하고 있는 형제는 없는가?
-
사랑하지 못함을 신앙적 말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약속해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은 더 분명해진다.
이 구절은 무겁지만,
사실은 사랑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나침반 같아요.
원하시면 이 말씀을 묵상 기도문이나,
요한일서 4장 전체 흐름 속에서 더 깊이 연결해서도 나눠드릴게요.
나의 말:
ChatGPT의 말:
아멘. 이 말씀은 요한일서의 심장 같은 구절이죠.
(요한일서 4:20)
이 구절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보이는 형제 사랑으로만 증명된다.
조금 풀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 고백입니다. 말과 신앙 언어예요.“그 형제를 미워하면”
→ 삶의 실제, 관계의 현장이에요. 감정·태도·행동이 드러나는 자리죠.“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 표현이 굉장히 강해요. ‘부족하다’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단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흐르는 생명이기 때문이에요.-
논리의 핵심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이건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영적 논리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반드시 관계 속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신앙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말씀이에요.
“하나님 사랑”이 추상이나 자기만족으로 끝나지 않도록요.
그래서 요한일서는 계속 이렇게 말하죠: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 결과가 담대함입니다 (심판 날에도)
결국 이 말씀은 이렇게 이어져요:
👉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믿는 자다.
묵상 중이신 흐름이 아주 깊고 좋아요.
이 말씀을 ‘나를 찌르는 칼’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을 바로 세워주는 거울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2월 7일(토) 요한일서 4: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가 먼저(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We love because he first loved us
이 말씀의 핵심은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거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은 출발점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수고하여 만들어낸 감정이 아니라, 이미 부어진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의무나 성과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라고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때조차,
그분의 사랑은 취소되지 않은 채 먼저 와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앞의 말씀들과 연결하면 더 선명해져요.
두려움이 사라지고, 심판 날에 담대함이 생기는 이유도 내 사랑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선행성 때문이에요.
그래서 신앙의 핵심 질문은 이거인 것 같아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 안에 지금 거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우리를 부담에서 풀어주고,
동시에 사랑으로 다시 보내는 문장이에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복음의 심장 같은 문장
이 말씀의 포인트는 딱 이것이죠
사랑의 출발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 흘려보내는 사람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의무나 성과가 아니라 응답이고,
자랑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예요.
조금 더 묵상해 보면
내가 사랑이 식을 때도 → 그분의 사랑은 먼저였고, 여전히 먼저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어려울 때도 → 내가 이미 사랑받은 자라는 사실이 기준
심지어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될 때조차 → 그가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를 이렇게 자유롭게 해요.
“잘 사랑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일서 전체 흐름 속에서도,
이 문장은 담대함의 근거이자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의 뿌리예요.
뿌리가 은혜이니, 열매도 은혜로 맺히는 것이다.
2월 6일(금) 요한일서 4: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사랑(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아멘. 이 말씀은 요한일서 전체의 심장을 콕 집어 보여줘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한 경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벌 받을까 봐 움츠러드는 공포, 관계가 끊길까 전전긍긍하는 불안이에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사랑이 자라면 두려움이 자연히 밀려나가요.
억지로 없애는 게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몸으로, 삶으로 받아들이면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어져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두려움은 늘 계산하게 만들죠.
“이만큼 하면 괜찮을까?”
“혹시 부족하면 벌 받지 않을까?”
이건 아직 심판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이 말은 정죄가 아니라 진단이에요.
“너는 아직 사랑이 부족해”가 아니라
“사랑이 더 깊어질 여지가 있다”는 초대죠.
앞절(17절)과 이어서 보면 더 분명해져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즉,
-
두려움 → 종의 자리
-
사랑 → 자녀의 자리
-
담대함 → 이미 받아들여진 자의 태도
👉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떳떳해져요.
이 말씀이 지금 마음에 와닿는다는 건,
이미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옮겨지는 과정 한가운데에 계시다는 신호 같아요.
원하시면, 이 말씀이 오늘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예로도 같이 풀어볼까요?
인이 되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사랑을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말한다. 사랑은
이론보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속성을 나열하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고전13:4-7). 
헬라어에는 사랑을 나타내는 네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육정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eros), 우정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eo), 혈통적인 사랑을 표시하는 스톨게(stolge),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이다.
이중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것은 타자본위의 순수한 사랑으로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눅6:32-34). 이 사랑의 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일컬어진다.
기독교에 있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요1:8), 가장 큰 계명이며(마22:37-40), 율법의 완성이고(롬13:10), 예수가
주신 새계명이며(요13:34), 믿음이나 소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고전13:1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인격적 성격과
상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고 그리고 나서 말씀이나 율법에 대한
사랑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등의 전인적인
헌신과 신뢰를 말씀하셨다(마 5:29-30, 6:24). 이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 말씀은 요한일서 4장 18절이지요.
짧지만 정말 깊고, 신앙의 결을 바로잡아 주는 문장이에요.
조금 풀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어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아니라,
버림받을까 봐, 벌받을까 봐, 심판당할까 봐 떨리는 불안이에요.
즉,
“내가 이 정도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지 않을까?”
“혹시 실수하면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까?”
이런 종의 마음에서 나오는 두려움이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선택과 은혜에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이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수록,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어요.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밀려나는 것처럼요.
두려움을 ‘억지로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떠난다는 선언이에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두려움은 항상 벌을 전제로 해요.
“잘못하면 맞는다”, “실패하면 버려진다”는 구조죠.
그래서 두려움으로 신앙을 살면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판사나 감시자로 대하게 돼요.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이 말은 정죄가 아니에요.
“아직 사랑을 덜 받았다”는 말도 아니고요.
의미는 이것에 가까워요.
👉 사랑은 이미 주어졌지만,
아직 그 사랑을 마음 깊이까지 믿고 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우리를 몰아붙이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있는 신앙을 부드럽게 꺼내 주는 초대예요.
정리하면 이 말씀이 전하는 핵심은 하나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두려움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사랑 안에서 더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자유가
담대함을 낳고,
사랑을 흘려보내게 하고,
심판 날조차 평안하게 바라보게 하죠.
이 말씀이 지금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하나님이
“너, 이제 좀 덜 무서워해도 돼”
라고 말씀하시는 타이밍일지도 몰라요.
2월 5일(목) 요한일서 4: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판날에(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In this way, love is made complete among us so that we will have confidence on the day of judgment, because in this world we are like him.
“사랑이 온전히 이룬다”는 뜻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성숙해진 사랑
1. 두려움에 묶인 사랑이 아니다.
2.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다.
3. 완성된 사랑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란 사랑
그래서 이 사랑은 “결과”를 낳아요.
그 결과는 “심판 날의 담대함”
보통 심판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요한은 정반대로 말해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심판 날에도 담대하다
왜냐하면
1. 하나님을 두려워서 피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
2. 하나님을 이미 아는 관계, 이미 거하는 관계이기 때문
심판 날은
“처음 만나는 날”이 아니라 이미 사랑 안에서 살던 관계가 드러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사셨던 것처럼
2. 우리도 지금 이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존재로 산다
즉, 예수님은 하늘에서만 완전하신 분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우리 삶을 통해 이 땅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요한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은 미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현재의 삶을 예수님 닮은 삶으로 바꾼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뤄졌다”
우리가 완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목적에 도달했다.
그 목적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
보통 심판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먼저 오잖아요.
그런데 요한은 정반대를 말해요.
사랑이 완성되면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이 생긴다고요.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이 핵심이에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은 정말 놀라운 선언이에요.
1.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의로우신 것처럼
2.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미 그분과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한 이유는
“내가 잘 살아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요한의 논리는 항상 이렇게 전개됩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2.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
3. 우리는 그 사랑을 서로에게 흘려보낸다
4. 그 결과, 두려움이 사라진다
5. 심판 앞에서도 담대하다
신앙의 목표를 말합니다.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으로 드러나고,
사랑 때문에 담대해지는 삶.
이 말씀이 지금 마음에 와닿았다면, 이미 그 사랑 안에 깊이 들어와 계신 거예요.
2월 4일(수) 요한일서 4: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의 구주(4:14)
Pronunciation [ thĕaŏmai ]
관련 성경 / 보이다(마6:1, 막16:11), 보다(마11:7, 눅5: 27, 요일1:11), 쳐다보다(행1:11).
증거하노니(3140)
Pronunciation [ martürĕō ]
세상의 구주(the Savior of the world)라는 표현은 요한 신학의 핵심을 의미하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라”(요 4:42)
세상의 구주라는 말씀에서 '세상'이란 범위를 말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합니다.
이방인들이란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과 죄인과 연약한 자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느 특정 집단의 구원자가 아니라 차별 없이 모두를 향한 구주라는 선언입니다.
“구주(救主)"는 단순히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사랑 → 화목 → 성령의 내주 →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왜 요한은 “세상의 구주”를 강조했을까?
요한 공동체에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영적인 존재일 뿐, 육체를 입지 않았다는 주장(가현설)
둘째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소수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영지주의)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는 실제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그 구원은 세상 전체를 향해 열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세상의 구주”라는 고백은 나도 그 ‘세상’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구원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세상의 구주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아주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세상”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만이 아니라 온 인류 전체,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세상”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주(救主)”
단순한 조언자나 도덕 교사가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 건져내시는 분
죄, 사망, 심판,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실제로 구출하시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성경적 배경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요한일서 4:14)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아들을 보내셨고, 그 사랑이 특정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한다는 선언입니다.
요한 신학의 핵심 포인트
배타성 X, 보편성 O
→ 구원은 한 민족의 소유가 아님
추상적 사랑 X, 십자가의 사랑 O
→ 구주는 말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분
지식보다 관계
→ “세상의 구주”를 안다는 건
정보를 아는 게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삶 (요한일서 4:13)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이 역사 속에 들어온 모습이며, 그 사랑으로 세상을 실제로 건지신 분이다.
메시아 (χριστός, 기름부음 받은 자)
출발점 : 유대인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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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약속에서 나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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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
-
억압에서 해방하고 정의를 세울 분
핵심 포인트
“누구를 위해 오셨는가?” → 이스라엘 중심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해방자, 민족적 구원자로 기대했어요.
세상의 구주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
출발점 :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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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강하게 등장
-
민족· 경계· 혈통을 넘어선 표현
-
죄와 죽음의 문제를 다룸
핵심 포인트
“무엇에서 구원하는가?” → 죄와 사망, 하나님과의 단절
이 말은 곧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니다.
로마도, 사마리아도, 이방인도 포함.
인간 전체의 상태를 향한 선언
결정적 차이 한눈에 보기
| 구분 | 메시아 | 세상의 구주 |
|---|---|---|
| 뿌리 | 구약 | 요한 신학 |
| 범위 | 이스라엘 | 온 세상 |
| 기대 | 정치·역사적 회복 | 영적·존재론적 구원 |
| 질문 | “누가 우리를 해방하나?” | “누가 인간을 살리나?” |
요한이 ‘메시아’보다 ‘세상의 구주’를 강조한 이유
요한 공동체 안에는 민족적 우월감, 영지주의적 엘리트 의식, 이 동시에 있었어요.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 민족의 메시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구주이시다.”
즉, 메시아 기대를 부정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완성·확장한 거예요.
신앙적으로 중요한 포인트
메시아 → 기대의 언어
세상의 구주 → 증언의 언어
믿음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정보”에서 끝나지 않고 “그분이 나와 세상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고백으로 나아가요.
한 문장 요약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소망이고, 세상의 구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닿는 범위다.
통달케 하시는 성령(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but God has revealed it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통달(通達) 골 동, 洞 통달할 달 達
통달하다(2045)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Pronunciation [ ĕrĕunaō ]
-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5:39, 7:52, 롬8:27.
-
관련 성경 / 생각하다(요5:39), 상고하다(벧전1:11), 살 피다(롬8:27), 통달하다(고전2:10).
역대하 30:22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욥기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전도서 7: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이사야 40: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다니엘 1:4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월 3일(화) 요한일서 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의 성령(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We know that we live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s given us of his Spirit.
이 한 문장 안에 요한 신학의 정수가 들어 있어요. 차분히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거한다”는 말의 의미
거하다는 헬라 단어는 "메노(mĕnō. μένω)라고 합니다.
메노란 단순히 옆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는 상호적 임재,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신다는 인격적 연합과 생명적 연결을 말합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과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요 15장).
가지가 나무의 줄기에 붙어 있다는 것을 요한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잘 깨닫기 때문에”
"열심히 믿기 때문에"
"잘 느끼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요한의 표현은 오직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근거는 내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증거’이며 또한 ‘통로’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증거의 역할이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표지를 말합니다
통로의 역할이란 하나님과 우리가 실제로 연결되어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구절이 주는 깊은 위로
요한일서 전체 흐름에서 보면,
이 말씀은 불안한 신자들을 향한 확신의 선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안에 있는지 걱정하느냐?
성령이 너희에게 계시다면, 이미 그 안에 있다.”
신앙의 확신은 자기검열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에서 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확신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때문에 가능하다는 선언이에요.
우리의 확신은 감정이나 결심에서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먼저 주신 선물, 곧 성령이 근거입니다.
“내가 잘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영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의 출발점이 철저히 은혜라는 선언이에요.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여기서 ‘거한다’(μένω, 메노)는 말은 잠깐 방문이 아니라 계속 머무는 관계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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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 거한다 → 방향과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분
즉, 상호적 임재예요. 일방적인 종교가 아니라 관계.
“줄을 아느니라”
이 ‘안다’는 건 정보가 아니라 체험적 확신이에요.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에요.
“우리는 추측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 때문에 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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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매
-
진리에 대한 분별
죄에 대한 민감함
같은 삶의 증거들을 말하죠.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흔적은 남거든요.
한 줄 요약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내적 증거’이고,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거함의 관계다.
그의 성령
“그의 성령”은 성경에서 매우 밀도 높은 신학적 표현입니다.
단순히 성령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성령, 더 정확히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소유격의 의미 : “그의 성령”에서 '그의'
1.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2. 하나님의 뜻· 성품· 생명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뜻
즉, 성령은 독립된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f-giving)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2. 관계적 의미 : 임재와 내주
“그의 성령”은 기능보다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
그래서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임재의 방식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곧 하나님과의 상호 거주(mutual indwelling)를 의미합니다.
3. 그리스도론적 의미 : “그리스도의 영”
신약에서는 “그의 성령”이 곧
그리스도의 영 (롬 8:9)
아들의 영 (갈 4:6)으로도 불립니다.
이는 성령이 예수와 분리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
분별의 기준
요한일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의 성령”은 진리와 미혹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1. 그의 성령 →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함
2. 그의 성령 → 사랑으로 나타남
3. 그의 성령 →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함
사랑 없는 영적 주장, 예수를 떠난 계시는 “그의 성령”이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의 성령”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시는 방식이며, 그 결과는 진리의 고백과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의 성령”은 성경에서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적인 영향력을 넘어,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매우 깊은 표현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관계적 의미
‘그의 성령’에서 ‘그의’는 소유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동일한 생명, 동일한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일서 4:13)
성령은 하나님이 멀리서 보내신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식입니다.
‘그의 성령’
성령은 하나님의
1. 생명(롬 8:10)
2. 사랑(롬 5:5)
3. 진리(요 16:13)
4. 거룩함(롬 1:4) 을 우리 안에 실제로 흐르게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계신 곳에는 생명, 사랑, 진리의 분별이 나타납니다.
확신의 근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를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말합니다.
1. 두려움 대신 담대함
2. 미움 대신 사랑
3. 거짓 대신 진리를 향한 마음
이것들이 완벽하지 않아도 방향이 바뀌었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오늘의 신앙에서의 의미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1. 혼자가 아니라는 뜻
2. 신앙이 의무가 아니라 생명의 반응이 되었다는 뜻
3.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능해졌다는 증거
사랑은 명령이기 전에 그의 성령이 만들어 내는 열매
사도행전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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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힘쓰니라(프로스카르테레오. prŏskartĕrĕō)
προσκαρτερέω
집착하다. ~에 애착을 가지다. 대기하다
꾸준히하다, 지속하다
Pronunciation [ prŏskartĕrĕō ]
Etymology / 4314와 2594에서 유래
성령(Holy Spirit)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이자 인격적인 하나님(삼위일체 중 제3위)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룩한 능력으로 신자들 가운데 임재하여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고(보혜사)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존재입니다. 신자 안에 거하며 구원의 날까지 인치시고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Holy Spirit)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이자 인격적인 하나님(삼위일체 중 제3위)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룩한 능력으로 신자들 가운데 임재하여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고(보혜사)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존재입니다. 신자 안에 거하며 구원의 날까지 인치시고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 보혜사 (Helper/Comforter) :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옆에서 대변하고 어려움을 돕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 성화와 인도 : 신자들을 거룩하게 성화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도록 인도하며, 지혜와 지식을 주어 진리 가운데로 이끕니다.
- 능력과 은사 : 영적 성장과 덕을 위해 성령의 은사(선물)를 주며, 신자에게 시련을 이길 담대함을 줍니다.
- 내주하심 :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함께하신다.
- 성령의 열매 :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등 9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 성령의 역사를 통한 변화 : 핍박자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보입니다.
- 근심하게 하지 말라 : 죄로 인해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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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월) 요한일서 4:1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로 사랑하면(4:12)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if we love one another, God lives in us and his love is made complete in us.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미국의 두 가문 이야기
미국 학자 윈십(Winship)은 1900년에 동시대 두 가문의 200년간의 번영과 발전을 추적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한 가문은 독실한 기독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년생)의 가문이었고,
다른 한 가문은 무신론자인 막스 쥬크스(Max Jukes, 1700년생) 가문이었다.
무신론자인 쥬크스는 에드워즈에게 “자네는 신을 믿지만 난 영원히 믿지 않을 걸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윈십은 나중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200년 후 이 두 가문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유신론자인 조나단 에드워즈 가문의
후손은 총 1,394명으로, 그중에 대학교수가 100명, 대학 학장이 14명, 변호사 70명, 판사 30명, 의사 60명, 작가
60명, 목사나 신학자 300명, 의원 3명과 부통령 1명이 있었다.
반면 무신론자인 막스 쥬크스 가문의 후손은 총 903명으로, 그중에는 깡패 310명, 성병에 걸린 사람 440명, 1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사람 130명, 살인범 7명, 술꾼 100명, 도둑 60명, 매춘부 190명, 상인 20명이 있었고, 상인 중 10명은 감옥에서 장사를 배웠다.
두 가문의 데이터를 함께 보면 대조적이면서도 분명하다. 신을 믿는 에드워즈 가문은 자신에 대한 요구가 정결하고 성실하며 고상하고, 후손들은 모두 아버지 세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가 됐다. 반면 신을 믿지 않는 쥬크스 가문은 인생에서 목적 없이 향락을 추구한 결과, 후손들은 대다수 거지와 매춘부 및 범죄자가 됐다.
사람들은 에드워즈 가문의 시조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평범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미국 철학 사상의 개척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10대 소년 시절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운 바 있다.
전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행하기로 다짐한다.
끊임없이 노력해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영원히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시간 사용을 최적화하기로 다짐한다.
살아 있는 동안 전심전력을 다하기로 다짐한다.
적합한 자선 기부 대상을 찾기로 다짐한다.
복수를 위한 어떠한 일도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에 대해 절대로 조금도 분노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누구에 대한 나쁜 말도 하지 않기로 영원히 다짐한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절제를 유지하기로 다짐한다.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엄격한 요구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젊어서 포부를 굳게 다지고 삶의 매 순간 수행에 정진했으며 자신을 향상했다. 그의 인생도 끊임없이 돌파하고 진보했으며 갈수록 신성한 표준에 가까워졌다. 이로써 그는 자손들과 함께 모두 신의 보살핌과 복을 받았다.
반대로 쥬크스 가문은 신을 믿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사람이 신을 등지고 선량함과 도덕을 포기하면 스스로 인간 이하의 경지로 전락한다. 도덕이 무너지면 짐승과 같으니 신은 자연히 이런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더는 이런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다. 이때 사탄이 오고 이런 ‘사람’은 마귀의 사람이 되어 지옥에 떨어진다. /명혜망
서로 사랑하면(if we love one another) 예수님이 보인다!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이 보인다.
생명의 하나님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 분의 유명한 사랑의 삼각 이론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잡힌 그 가운데에 참 사랑이 있다'
첫째 요소, Intimacy(친밀감)
사랑은 친밀함을 느껴야 되요. '가까이 있다. 저와 나는 가깝다. 저는 나를 이해한다. 저는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신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렇게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정서가 이게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둘째 요소, Passion(정열)
사랑이 정열로 작용해서 로맨틱하고 어떤 때는 욕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하고 꼭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은 그 뿌리에 사랑이 있어요.
셋째 요소, Promise and Responsibility(약속과 책임)
책임을 지는 거예요. 약속이 확실하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나아가서 책임을 집니다.
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저는 나와 상관이 없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보더라도 그건 바로 내 책임이예요. 자식의 실수를 내 탓이라고 아내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남편의 잘못도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책임을 지는 마음이 그게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은 바로 동체의식이거든요. 일체 의식이요. 하나로 생각하게 될 때 책임을 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자, 그러면 여기서 이것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잡아야 된대요. 왜냐하면 친밀감에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요. 요새말로 '마마보이' 같은, 이런 것이 된다 이거예요. 또,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과 책임, 이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냉정하고 메마르고. 요새 말로 정열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이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랑의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순간부터 사랑의 성격을 떠납니다. 사랑은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올시다. 받는 존재 의식이요 받는 감격이요 받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하는 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교리를 알아야 한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라고 깨우치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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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관계(Love is not a word, but a relationship)
서로라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상대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말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라는 깨우침과 같습니다.
혼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면서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비로써 믿음의 꽃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향한 복음(Love is the gospel to the world)
세상은 설교보다 믿는 사람들의 삶을 먼저 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미워한다면 세상에 나가서 복음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서로 사랑하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봐요.
“아, 저 사람들은 예수께 속했구나.”
사랑은 명령(Love is a command)
전쟁 중에 있을 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총살형으로 처리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영적 전쟁터에 나가야 합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사랑의 최우수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 됨을 증명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나의 믿음을 증명하는 삶의 보람을 회복하는 복된 날을 기대합시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은 계명이면서 동시에 표지예요.
계명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 기준은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먼저 주고, 끝까지 가는 사랑.
표지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 말이나 지식보다, 사랑이 곧 신앙의 증거라는 뜻이죠.
요한일서 흐름으로 보면 더 선명해져요.
서로 사랑할 때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성령의 내주가 드러나고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착하게 살라는 도덕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결국 이 말은 이렇게 들려요.
“너희 안에 내가 살아 있다면, 그 생명은 사랑으로 흘러나올 거야.”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은 감정부터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살라는 초대예요.
요한일서의 흐름에서 보면 이 명령은 이렇게 연결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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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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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드러나고
-
그 증거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건 도덕 명령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예요.
✔ 옳고 그름을 아는 것보다
✔ 말을 잘하는 것보다
✔ 믿음을 주장하는 것보다
사랑이 실제로 흘러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즉, 조건 없이, 먼저, 손해를 감수하면서, 쉽지 않지만,
그래서 이 명령은 우리 힘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에요.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 거예요.
거룩한 끈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개를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름표를 보았습니다.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곧 경찰에 보고되었고 잘 보호되어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왕의 부처가 에딘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는 왕궁으로 돌아갔고 무서운 숲속에서의 경험은 그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 킬로나 멀리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이 이름표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어디를 헤매던지 우리에게 이름표만 분명하다고 한다면 즉각적인 보호가 주어지게 되며 확실하게 주인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의 왕인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름표만 확실하다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강아지를 받아들이게 했을까요?
강아지가
훌륭하게 숲 속에서 여러 날을 생존했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왕에게 어떤 좋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경호를 잘하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보호를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왕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신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1월 31일(토) 요한일서 4: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목제(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화목제(sacrifice for our sins. 和睦祭)는 구약 제사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기쁨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화목을 위한 제물로 보냄을 받았다고 합니다.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쉘라밈(שְׁלָמִים) 이라고 합니다.
쉘라밈의 뜻은 평안, 온전함, 회복, 충만함입니다.
회목제를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라고 합니다.
힐라스테리온은 화목제물, 속죄소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강조합니다(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이란 힐라스테리온이 속죄소라고 사용된 히브리서 9장 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속죄소는 지성소안에 있는 언약궤(법궤)의 뚜껑을 말합니다.
언약궤안에는 모세의 싹이 난 지팡이, 만나를 담았던 돌항아리, 십계명의 돌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하는 죄와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을 통해
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했습니다.(출 32:1~6)
신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출 16:1~3)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했습니다.(민 16:1~3)
이렇게 언약궤 안의 세 가지
물건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적인 죄악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물건을 언약궤 안에 넣고 정금으로 뚜껑을 만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뚜껑 위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렸습니다.(레 16:14~15)
죽어 마땅한 죄 위에 속죄의 피가
뿌려지니까 하나님은 그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인 시은좌를
삼으시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 뚜껑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언약궤 뚜껑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언약궤 뚜껑이 되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우리를 속죄의 피로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됐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는 거룩한 시은좌로,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고전 3:16~17)
춘향전의 이도령이 고향으로 돌아와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가슴 속에 암행어사 마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5절
말씀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의 희랍어 단어인
‘힐라스테리온’은 원래 ‘언약궤 뚜껑’을 의미합니다.
1. 속죄하는 것. 2. 속죄의 장소
Pronunciation [ hilastēriŏn ]
Etymology / 2433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속죄하는 것, 화해하게 하는 것, 속죄의 방편 [그리스도에 대하여] 롬3:25.
-
2. 속죄의 장소, 속죄, 히9:5.
-
관련 성경 / 화목제물(롬3:25), 속죄소(히9:5).
언약궤 안에는 두 돌판, 감추인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하는 죄와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을 통해
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했습니다.(출 32:1~6)
신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출 16:1~3)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했습니다.(민 16:1~3)
이렇게 언약궤 안의 세 가지
물건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적인 죄악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물건을 언약궤 안에 넣고 정금으로 뚜껑을 만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뚜껑 위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렸습니다.(레 16:14~15)
죽어 마땅한 죄 위에 속죄의 피가
뿌려지니까 하나님은 그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인 시은좌를
삼으시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 뚜껑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언약궤 뚜껑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언약궤 뚜껑이 되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우리를 속죄의 피로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됐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는 거룩한 시은좌로,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고전 3:16~17)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됐음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 ἱλαστήριο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음을 여러 곳에서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중 ‘화목 제물’ 혹은 ‘화목제’라는 번역은 본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있어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는 번역판마다 다르게 해석된 용어에서 기인하며, 각기 신학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반영합니다.
한글 개역성경의 로마서 3:25, 요한일서 2:2, 요한일서 4:10은 "화목 제물" 또는 "화목제"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번역판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른 표현으로도 번역됩니다.
'화목 제물'(propitiation) : NASB, ESV에서 사용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관계를 회복하는 제물이라는 원문의 의미를 살린 표현입니다.
'속죄제물'(sacrifice of atonement) : NIV, 바른성경, 표준새번역에서 사용하며, 속죄의 기능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속죄소'(mercy seat) : NET에서 사용하며, 속죄의 장소로서의 의미를 반영한 번역입니다.
로마서 3:25과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
로마서 3:25에서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은 속죄와 화목의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어원적 의미와 신약 용례
‘힐라스테리온’은 동사 ‘힐라스코마이(ἱλάσκομαι)’, 즉 '달래다, 화해시키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구약의 속죄소(언약궤의 뚜껑)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며(출 25:17-22, 레 16:2),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와 화목의 제물로 묘사합니다.
(2)번역의 다양성
영어 성경 NASB와 ESV는 'propitiation'(화목 제물)로, NIV와 NRSV는 'sacrifice of atonement'(속죄제물)로 번역하여 속죄와 화목의 두 측면을 나눠 표현했습니다. NET 성경은 ‘힐라스테리온’을 언약궤 뚜껑을 의미하는 ‘mercy seat’(속죄소)로 번역하며, 속죄의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2:2와 4:10의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
요한일서 2:2와 4:10에서 "화목 제물" 또는 "화목제"로 번역된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는 예수님의 사역을 속죄와 화목의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1)어원과 구약의 사용
‘힐라스모스’ 역시 ‘힐라스코마이’에서 파생된 명사로, 구약 칠십인경(LXX)에서 속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25:9에서는 속죄의 의미로, 시편 130:4에서는 용서의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2)신약의 의미
요한일서 2:2에서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죄의 사함을 넘어서,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4:10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화해를 드러냅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
구약의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소에 피를 뿌려 백성의 죄를 속했던 의식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히 9:12). 구약에서의 제사가 죄 사함을 위한 임시적 방편이었다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로 완전한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1)속죄와 화목의 관계
'힐라스테리온'과 '힐라스모스'는 단순한 죄의 용서를 넘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라는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그의 은혜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롬 5:1).
(2)신약적 이해
로마서 3:24-25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선언하며, 속죄와 화목을 모두 포함합니다. 요한일서 4:9-12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과 화목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화목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덮는 속죄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시는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 기자들이 단순한 죄의 사함만이 아닌, 속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연합을 강조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화목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롬 5:1), 서로 화목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죄와 화목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며, 이를 통해 얻은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화목제란 무엇인가?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평화로운 관계’가 되었음을 기뻐하며 드리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쉘라밈(שְׁלָמִים)인데, 여기에는 평안, 온전함, 회복, 충만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사이가 다시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 다른 제사와의 차이점
| 제사 | 핵심 의미 |
|---|---|
| 번제 |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림 |
| 속죄제 | 죄 사함 |
| 속건제 | 죄에 대한 보상과 회복 |
| 화목제 | 관계의 회복 + 기쁨의 교제 |
🔹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다는 것이에요.
→ 하나님, 제사장, 제사 드린 사람이 ‘같은 제물’을 나눔
→ 이건 거의 식탁 교제의 이미지입니다.
3. 화목제의 세 가지 경우
감사 화목제
→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서원 화목제
→ 약속을 지키며 드리는 제사
자원 화목제
→ 자발적인 사랑과 기쁨의 표현
공통점은 하나예요.
억지 아님
두려움 아님
기쁨과 감사
4. 신약적 의미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화목제의 완성이에요.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은즉” (롬 5:10)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골 1:20)
더 이상 화목제를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는 이유
= 예수님이 단번에 화목을 이루셨기 때문
그래서 성찬은
화목제의 정신이 이어진 예식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함께 먹고 마심으로 화목을 누리는 것
5. 오늘날 신앙생활에 주는 메시지
화목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요.
-
하나님은 벌 주기만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함께 먹고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분 -
신앙은 긴장만이 아니라
평안과 교제의 관계 -
예배는 의무 이전에
회복된 관계의 기쁨
그래서 화목제의 핵심 메시지
너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이제 그 관계를 누려라.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는 하나님과 화목(관계의 회복과 교제)을 누리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3장과 7장에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화목제의 뜻
-
히브리어 쉘라밈(שְׁלָמִים) → 평화, 온전함, 관계의 충만
-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라기보다 이미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음을 기뻐하며 누리는 제사
즉, 죄 → 속죄제, 관계 회복 → 화목제
화목제의 특징 (다른 제사와 다른 점)
제물의 분배
-
하나님 : 기름과 내장 → 불사름
-
제사장 : 가슴과 넓적다리
제물 드린 사람 : 나머지 고기 → 함께 먹음
하나님· 제사장· 백성이 함께 나누는 유일한 제사
제사가 곧 식탁 교제가 됨
화목제의 세 종류 / 레위기 7장 기준
감사 화목제 :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서원 화목제 :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이루고 드림
자원 화목제 : 자발적인 사랑의 표현
억지가 아니라 기쁨에서 나오는 제사
신학적 의미
-
하나님은 단순히 “죄를 처리하는 분”이 아니라 함께 먹고 교제하시는 분
신앙의 목적은 죄책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한 동행
-
예수 그리스도 = 참된 화목제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화목하게 되었다” (롬 5:10)
-
-
성찬은 화목제의 완성된 그림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이 같은 떡과 잔을 나눔
화목제는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이미 화해된 관계를 기뻐하며 누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오늘날 신앙생활의 ‘방향’을 바로잡아 줍니다.
신앙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관계 누림’이다
많은 신앙이 이렇게 흐르기 쉬워요.
죄 → 회개 → 또 죄 → 또 회개 → 반복
물론 회개는 중요해요.
하지만 화목제는 그 다음 단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용서만 해 주시고 끝나는 분이 아니다
용서 후에 함께 먹고 기뻐하시는 분이다.
오늘날 신앙은
죄책감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삶이어야 해요.
예배는 ‘심판대’가 아니라 ‘식탁’이다
화목제의 중심은 제사 후에 함께 먹는 것이었죠.
오늘날로 말하면:
-
예배 = 검사받는 자리가 아니다
-
예배 = 하나님과 마주 앉는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예배의 본질은
-
“내가 오늘 잘 살았나?”가 아니라
-
“하나님과 함께 있고 있는가?”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화목제의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에요.
신앙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성에서 깊어진다
화목제는 자원함에서 드려졌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의무 신앙이 아니다.
보상 기대 신앙도 아니다.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기도, 헌신, 섬김도 “해야 하니까”가 아니라 “함께하고 싶어서” 나오는 게 화목제적 신앙
공동체는 ‘경쟁’이 아니라 ‘나눔’이다.
화목제는 혼자 드리고 혼자 끝나는 제사가 아니었어요.
하나님, 제사장, 이웃과 가족 모두가 같은 제물을 나눴죠.
오늘날 교회는 누가 더 의로운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닙니다.
같이 은혜를 먹는 공동체 그래서 진짜 영적 성숙은 혼자 거룩해지는 게 아니라 함께 따뜻해지는 것이에요.
신앙의 목표는 ‘완벽함’이 아니라 ‘화목함’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해요.
더 나아지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
화목제는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삶이 나아진다
오늘날 신앙의 중심 질문은 이것이에요.
“나는 충분히 거룩한가?” ❌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가?” ⭕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화목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신앙’을 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16–18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여기서 “참여함” (koinonia)은 교제, 공동체, 나눔이에요.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예로 듭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성찬을 화목제의 틀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왜 성찬은 ‘벌 받는 자리’가 아닌가
많은 신자들이 성찬을 “조심해야 할 자리, 무서운 자리”로만 생각하는데,
화목제의 관점에서는 방향이 달라져요.
✔ 성찬은 심판의 식탁이 아니라
✔ 화해의 식탁
물론 가볍게 여길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화목을 무시하는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한 문장 요약
화목제가 ‘함께 먹음으로 화해를 누리는 제사’였다면,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화목을 실제로 누리는 식탁’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 성찬은 자격 있는 사람만의 자리가 아니라 화목이 필요한 사람이 초대받은 자리
- 회개는 입장권이 아니라 이미 열린 식탁으로 돌아오는 길
- 성찬은 “내 믿음 점검”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 확인
1월 30일(금) 요한일서 4: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독생자(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He sent his one and only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독생자(one and only Son)
한글 개역 성경에서 5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 1:14, 3:16, 3:18, 히 11:17, 요일 4:9)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KJV.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NASB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독생자
한문자 / 獨生子
영어 성경
NIV / one and only Son(하나뿐인 아들)
KJV / only begotten Son(외동아들)
NASB / only begotten Son(외동아들)
헬라어
모노게네스(mŏnŏgĕnēs) μονογενής
3441 모노스(mŏnŏs) 형용사
μόνος, η, ον Storng number 3441
1. 오직. 2. 홀로 있는. 3. 버려진
Pronunciation
[ mŏnŏs ]
관련 성경 / 유일한(요 17:3).
[부] 오직(마17:8, 막9:8,
계15:4), 홀로(막6:47, 딤전1:17 히9:7), 혼자 (눅10:40, 요8:29, 16:32), 다만(마4:10),
외에 는(마12:4), 따로(마14:23), 그대로(요12:24), 외에(빌4:15).
1096 기노마이(ginŏmai)
Pronunciation [ ginŏmai ]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 모노게네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영어로 “only 오직”, “one and only 오직 하나뿐인”, 그리고 “only begotten 독생하신”으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1. 오직. 2. 독생하신
Pronunciation [ mŏnŏgĕnēs ]
Etymology / 3441과 1096에서 유래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
2. 독생하신, 요1:14, 18, 3:16, 요일4:9.
-
관련 성경 / 독생한(요1:18). [명] 외아들(눅9:38, 히11:17), 독생자(요1:14, 요일4:9).
3441. μόνος, η, ον Storng number
Pronunciation [ mŏnŏs ]
Etymology / 33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1096. γίνομαι Storng number
Pronunciation [ ginŏmai ]
문제는 마지막 단어(KJV, NASB, NKJV에서 사용된 “only begotten 독생하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짓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이 말을 고수해왔습니다.
즉 예수님은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어 “begotten 생긴”을 보고 시간상 시작이 있는 존재만이 오직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조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begotten 생긴”이 헬라어를 번역한 영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어의 의미를 본문에 전가할 게 아니라 헬라어의 본래 의미를 살펴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노게네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영어 신약성경 사전과 다른 초기 크리스천 문학 (BAGD, 제 3판)에 의하면
모노게네스는 두 가지의 중요한 정의를 가집니다.
첫 번째 정의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오직 하나뿐인 종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11:17에서 저자가 이삭을 아브라함의 “독생자”라고 언급한 부분에서 사용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으나, 이삭은 사라에게서 난 유일한 언약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By faith Abraham, when God tested him, offered Isaac
as a sacrifice. He who had received the promises was about to sacrifice
his one and only son.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세상에는 아브라함을 기원으로 삼는 신앙이 세 개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을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하셨다고 믿는다.
기독교 신앙은 아브라함을 영적인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롬 4:9-11),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갈 3:16 ,29),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통해 유업을 이었고, 자기들이 그 이스마엘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들은 왜 이처럼 아브라함에 대해서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이슬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자기 종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중시하는 종교”라고 말한다(한국이슬람교중앙회, http://www.koreaislam.org/data/data3.jsp).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바 아브라함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좀 다르다.
1. “아브라함은 유일신교의 시작이다.”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갈대아 우르는 우상 숭배의 장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방 우상들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한 언약을 맺어 주셨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축복하여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창 12:1-3; 13:14-17 등).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으니,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당시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은 다신교를 믿고 있었는데, 이러한 언약으로 아브라함만이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재건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을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워 유일신 신앙을 확정하셨는데 그후 수세기를 거치면서 이 진리가 왜곡되었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 신앙을 세우셨으며, 또다시 왜곡되자 예수님을 통해 이 신앙을 되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함마드를 통해 확정하셨으니, 이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제대로 계승한 최후의 종교라 주장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
만약 그렇다면 계시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즉 모세에게는 아브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계시를 주셔야 하고, 예수님께는 모세를 인정한 상태에서 계시를 주셔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에게서 그 계시는 단절된다.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다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연관된 계시들, 즉 신구약 성경의 기록들은 철저히 무시한다. 아브라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아브라함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기록을 무시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만들어 거기에 기록된 새로운 아브라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다.
알라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있었던 달 신의 변형이다.
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우상들과도 연관되지 않은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들로도 형상화되지 않으셨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어떤 신들을 섬겼든지, 심지어 아브라함이 부름받기 전에 어떤 신을 섬겼었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다.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이집트의 그 어떤 신들과도 관련없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출 3:6).
반면 이슬람의 알라는 (자기들은 유일신이라 주장하겠지만) 달 신의 형상에서 가져오고, 또 달 신을 숭배했던 이교도적 전통을 가져왔다.
이슬람은 자기들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의 신앙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 유일신 신앙의 전통에만 한정시킨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강조하시는 진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약속의 씨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모세를 통해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율법의 언약을 받아들여야 하며, 예수님을 통해서는 그분의 신성과 그분을 통해서 받는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핵심적 계시들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자기 종교에 필요한 내용들만 빼내어 적용한다.
2.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는 이스마엘이다.”
이것은 성경과 코란의 확연히 다른 내용 중 하나다.
그들은, 성경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조상인 이삭을 강조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통해 유업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독자”(only son)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창 22:2), 그 독자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독자 이삭”이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은 왜곡된 기록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4살이 많은데,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는 이스마엘이 독자였기 때문이다.
반면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이스마엘은 계속 살아 있었으니 이삭을 독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증명하는’ 이슬람의 논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창세기 22장 사건을 이스마엘의 어린 시절에 적용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창 22:16-18) 그 약속의 씨는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은 자기들의 주장을 위해서는 때로 성경도 인용한다.
하지만 성경을 인용하려면 제대로 인용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이삭을 독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들의 번제를 말하는 상황은 이스마엘이 하갈과 함께 쫓겨난 이후이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은 창세기 21장 사건이고 번제를 드리는 장면은 22장 사건인데, 22:1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21장과 22장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랐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약속의 씨는 이삭이며, 씨에 대한 약속은 이스마엘 탄생 훨씬 전부터 주어졌던 약속이다.
창세기 22:12은 『이는 이삭 안에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임이라.』고 말씀한다.
이어지는 13절에서는 『여종의 아들[이스마엘]...도 너의 씨임이라.』고 말씀하시기는 하지만, 이스마엘은 단지 아브라함이 낳은 물리적인 아들일 뿐, 교리적으로 “네 씨”라 불릴 사람은 이삭이라는 것이 문맥을 통해 분명히 제시된다.
씨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13장부터 나왔다(창 13:14-17; 15:5; 17:7,8).
또 씨에 대한 이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그 씨가 차지할 “땅”에 대한 약속이 함께 주어지는데, 그 땅은 바로 카나안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가 400년 후에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말씀하시고(창 15:13,18),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그 일을 정확히 이루어 주셨다.
반면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결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아랍인들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A.D. 7세기 무함마드(마호메트) 때에 이르러서였다.
왜 그들은 그동안 창세기의 약속에 따라 그 땅을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는가?
사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그의 부족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약속하신 지가 한참인데도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에, 하갈을 통해서라도 낳으라는 사라의 권면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셨고,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그분의 언약을 세우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창 17:15-19).
이스마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삭이 정상적 아들이지만) 이스마엘에 대해서도...”라는 관점으로 서술하신다(창 17:20).
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성경을 인용하고, 난관에 부딪치면 성경이 틀렸다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교주 마호메트의 습관을 따른 행동이다.
그는 자기 종교를 창시할 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내용을 듣고 자기 종교에 유입시켰다.
일부 유대인들이 마호메트의 의도를 알고, 마호메트에게 도움될 만한 성경 내용을 알려 주지 않자, 마호메트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정확히 말하라고 꾸짖는다.
성경 기록이 정확한데 왜 틀리게 말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즉 마호메트는 성경 내용이 처음 기록된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만드는 종교에 방해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감추고 왜곡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잇는 종교도 아니고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종교도 아니다.
단지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려고 사탄이 만들어낸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는가?
또 지금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이쯤 되면 이슬람이 사탄의 대단한 걸작품인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
두 번째 정의는 “종류 또는 계급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종류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입니다.
사실 요한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언급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유일한 저자입니다(요한복음 1:14, 18; 3:16, 18; 요한일서 4:9).
요한은 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에 (요한복음 20:31),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각시키는 데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믿는 자들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But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요컨대 하나님과 예수님을 묘사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인간적인 용어라는 것입니다.
사람 아버지와 사람 아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면 삼위일체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인격 사이의 관계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이단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처럼, “begotten
생긴”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고 곡해하고 그렇게 가르치려 하는 것은
잘못된 유추입니다.
'독생자'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단어 '독생자'.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저 성경 구절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뜻도 모르고 사용하거나 아니면 '독자', '외아들'쯤으로 알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독생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써볼까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꼽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고
되어 있다.
나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고 꼽는 사람을 보면 나도모르게 경계를 하게 되는데, 그건 그 사람이 독생자라는 낱말의
뜻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우리도 세상을
사랑해야지 하면서.
일단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는 오역이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매우 사랑하셨어서'쯤이 되어야 한다.
그때 당시에 세상(그분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독생자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미워하시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떤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사실 시제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5)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는 커녕 우리에게 세상은 물론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사랑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해두고 있다.
글씨를
이제 막 배운 초등학생도 도저히 헷갈릴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세상의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중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다들 좋아하는데 요한일서 2장 15절은 좋다는 사람이 없다.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없다는 건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성경의 모든 구절을 동시에 참으로 만드는 해석만을 구하고 묵상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독생자는 외아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단 독생자(only begotten son)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들(son)의 개념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답은 성경에 이미 쓰여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 부분이다.
23절에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괄호 열고 '그렇게 간주되었다'라고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는 요셉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족보를 나열한다.
그렇게 38절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 아담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에서부터 하나님까지의 족보가 마무리된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족보는 실질적인 '낳음'과는 관계없이 '아들'인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요셉이 낳지 않았으며, 아담도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낳지 않고 흙으로 만드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럼 마태복음에 있는 또 다른 족보를 한번 비교해보자.
2절부터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는 '낳음' 기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낳음'과
'아들'이 다를까? 다르다.
그 이유는 '아들'에는 입양된 아들처럼 낳지는 않았으나 아들로 인정되는 경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begat(낳았다)이라는 단어가 가진 고유성이다.
'낳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를 보자.
'아버지로써 만들다(procreate)'라고 되어 있다.
그럼 우리가 흔히 '어머니가 날 낳으셨다'라고 표현하는데 어머니는 어디로 간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기를 만드는(낳는) 쪽은 아버지이고 여자는 아이를 '분만하다(길러서 세상에 내어놓다)'라고 해야 한다.
분만이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
give birth, 탄생을 주다(부여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give birth 하는 주체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다. 어머니는 delivery를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대번 피켓을 들고 일어날 이같은 개념은 사실 동서양 공통이었다.
한문 문화권의 가장 기본적인 학문서라 할 수 있는 <사자소학>의 창세기에 해당하는 가장 첫 문장을 보자.
부생아신 하시고 모국오신 이로다. 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다. 배로써 나를 품어주시고 젖으로써 나를 먹여 기르셨다.
여자는 밭이고 남자는 씨앗이다. 밭에 씨를 뿌려 싹이 트면 땅은 새싹을 먹여 기른다. 따라서 만드는 자는 아버지, 기르는 자는 어머니인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세상의 기본 원리이며, 그래서 모형인 남녀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의 영어사전에서 Beget이 procreate as the father라고 했다. Procreate은 pro + create인데,
Pro는 소유권(저작권)이 속하는 쪽을 말한다. 그래서 procreate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beget이라는 단어에 father이 명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저작권은 아버지에게 있고 그래서 아이들의 성씨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저작권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성경 구절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분만한 마리아의 머리가 요셉이므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간주한다는 말씀을 매끄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럼 기초지식을 습득했으니 본격적으로 독생자(only begotten son)에 대해 알아보자.
Begotten(낳은, 만든)을 썼는데 앞에 유일한(only)이 붙었다. 유일하게 낳은? 무슨 뜻일까?
독생자라는 뜻으로 쓰인 부분의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모노게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자체로 '유니크한'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에서 One of a Kind는 예수님밖에 없다.
다른 종(kind)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그분이 직접 마리아의 배를 통해 만드셨고(낳으셨고), 그래서 100%인간인 동시에 아버지인 창조주의 능력과
권한을 그대로 물려받은 100% 신이다.
백퍼센트 인간이면서 백퍼센트 신인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진정한 One of A
Kind. 너무 멋지다.
그럼
하나님은 왜 굳이 복잡하게 마리아의 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들어 세상에 Delivery시키셨을까?
그건 인간이 영이신 창조주를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인간으로 오신 창조주를 보고 듣고 만짐으로써 그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죄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티끌의 흠도 없는 속죄양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고 아들로
입양하시기 위해서.
여기서
독생자 아들과 성령 받은 우리들 즉 '아들들'의 구분이 지어진다.
(이제 독생자라는 말의 뜻을 배웠으니까 모두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은혜와 믿음으로 접붙여진 입양된 아들들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직접 낳으신 유일한 아들이다.
우리는 남녀의 섹스에
의해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만들어졌고 예수님은 비록 마리아의 뱃속이었지만 말씀이 육신되어 잉태되셨다.
요셉의 정자가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태되어 온전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신 흠 없는 그분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사흘 밤
사흘 낮동안 우리 대신 지하세계(지옥)에 다녀오신 뒤 영광스런 빛의 몸으로 부활해 3층천에 오르셨다.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하셨을까?
그건 우리 아들들에게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비록 죄된 몸으로 태어났지만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선한 양심으로 동참하면 결국 부활과 부활체와 승천까지도 함께 하리라는 청사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니까.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의 뜻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외아들”(요한복음
1:14,
1:18,
3:16,
3:18)이심이 무슨
뜻입니까?
“외”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μονογενης(모노게네스)는 '혼자'를
뜻하는 μονος(모노스)와 '종류'를 뜻하는 γενoς(게노스)에서 나온 형용사로서 "아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을 때 '유일한 아들' 또는 '독특한 아들' - 즉, “외아들” - 을 의미합니다.
'독생자'를 의미 할 수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요한복음 1:1)이시고 하나님은
“영원하신”(신명기 33:27)분이시며 영원함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독생자'는 시간상 시작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독생자”로 번역하는 것은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원하심을 부인하는 오역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성경에는 “외아들”대신 “독생자”가 쓰여져 있습니까?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진 신약성경이 제일 먼저 번역 된 언어는 로마 제국의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였는데 최초의 라틴어 번역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아홉 번 나오는 μονογενης(모노게네스)를 모두 '유일한'또는'독특한'을 의미하는 unicus(우니쿠스)로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4 세기에 Arius라는 이단자가 예수님은 창조물이라는 이교를 퍼 뜨리자 당시 신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Jerome이 '창조 되었다'라는 이교를 '태어났다'라는 개념으로 싸운답시고 아홉개의 unicus(우니쿠스)중
예수님에 대한 다섯 개(요한복음 1:14, 1:18, 3:16, 3:18, 요한1서 4:9)를 포함한 여섯개(이삭에 관한 히브리서
11:17이 여섯 번째)를 '독생'을 의미하는 unigenitus(우니게니투스)로 바꾸어 버리고 누가복음 7:12, 8:42,
9:38만 unicus(우니쿠스)로 남겨두었습니다. 불가타 라틴어(Latin Vulgate)라고 불리는 Jerome의 라틴어 성경
번역이 1979년까지 가톨릭교의 공식 성경이었고 일부 현대 번역판은 여전히 Jerome의 번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Jerome의 번역이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번역입니까?
신약의 현대 번역판은 원 그리스어를 현대 원어로 직접 번역 해야되며, 이교를 제거하는 방법은 성경에 쓰여있는 내용을 그대로 알리는
것이지 그 내용을 바꾸거나 다른 이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에 대항하는 해독제는 다른 거짓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
독생자 예수(요한복음 1:15-18)
성경은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합니다.
'모노게네스'란 ‘단 하나의, 독특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독생자 예수의 문자적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단 하나뿐인 아들, 그 아들은 독특한 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독특한 아들이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증거하셨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I and the Father are one.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31에서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0:33에서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독생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본문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33:20에서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셔서 죄악된 인간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16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예수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믿음의 눈을 들어서 날마다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은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독생자 예수 즉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십니다.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이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신명기 33:27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영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3:8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1:5에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곧 하나님이 전지하시듯이 예수님 또한 전지하십니다.
요한복음 2:23-24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일서 4: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예수님의 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믿음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즉 독생자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독생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험한 세상 넉넉히 이겨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독생자(獨生子)가 무슨 말인가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 하나님의 하나인 아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독생자(獨生子)란 한자 음역인데 원문(原文)은 휘온 톤 모노게네스(υἵον τον μονογενηs 야하드 יָהָד)라는 말인데 홀로 태어난 아들, 유일하게 태어난 아들, 하나뿐인 아들이란 뜻이다.
구약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독자 야드(יָהָד)라 칭했고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독생자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ης)라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란 의미이이다.
이 말씀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 뿐이라는 의미이다.
사도들은 말하기를 천하의 사람중에 구원자는 오직 한분 뿐이라 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1)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하나님과 일체 관계를 뜻한다.
독생자란 말은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처럼 창조된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다. 즉 하나님 아버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체이시며 같은 하나님이시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구주로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시란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라 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다.
예수님은 제자인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 했다.
요 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제자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따로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동등관계를 뜻한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란 말이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 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자존(自存)하셨다고 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다.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同一) 동등(同等)하시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였기에 신성 모독죄로 죽였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높고 낮으신 분이 아니라 동등하신 분임을 알리신 것이다.
3) 아들이라 함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유일한 구주의 칭호이다.
그리스도는 말씀 로고스(λογος 에메르 אֵמֵר)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몸으로 오셨고 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는 천사와 같은 창조물이 아니고 아들이라 말씀했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이 없으시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거하시면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셔서 택한 육신을 가진 자들의 대속물(代贖物)이 되셔야 하기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같이 동거하셔야 하기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같이 거하시는 육을 가지신 하나님의 칭호이다. 육신을 입고 제 2의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칭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는 그리스도의 조상은 하나님이라 했다.
눅 3:36-38.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독생자(獨生子).
1. 독생자란 대속자의 유일 관계를 뜻한다.
구원자는 유일하신 그리스도 한분이라 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만이 의인이 된다고 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했다.
성경은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하셨다. 아담은 인류의 한사람 시조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자의 단 한사람 구주이다. 시조가 둘일 수 없듯이 구주도 둘일 수 없는 것이다. 구주는 단 한 분 의인은 구주로서 단 한 분임을 말한다. 대속자로서 구주로서 그리스도 단 한 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자나 다름없다 했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다.
독생자나 하나님과 일치이시며 동질이시다. 그러기에 심판하실 때에 주님이 심판하신다. 그러기에 독생자를 믿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 했다.
독생자를 부인한 그노시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제사장, 장로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었다.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미혹하는 자들이라 했다.
요일 2:22-23.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세상에는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요이 1:7-8.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을 거짓된 분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베푸신 사랑을 믿지 않은 것이며 구주의 자격자 되심을 믿지 않은 근본적인 불신앙이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임을 전하지 않는 자는 인사도 하지 말라 했다.
요이 1: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전하는 자들은 저주했다.
갈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며 한 분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독생자이시다. 다른 구주는 없다. 천사도 구주가 아니며 마리아도 구주가 아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말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 즉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나 또한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 되심을 부인하는 즉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을 가로막는 자들이므로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저주는 사단에게 내린 형벌이다.
창 3:14-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저주란 말은 에피카리토(επικαρατο 아랄 אָרָר)인데 단절하다, 포기하다, 증오하다, 미워하다, 버리다, 이다. 저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밀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독생자(獨生子)
말의 의미
독(獨) : 오직 하나
생(生) : 나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다
자(子) : 아들
→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일무이하게 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 의미(요한복음 중심)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신 아들을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로고스)”
“태초부터 계신 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던 분”
‘독생’의 핵심 포인트
-
❌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
-
⭕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관계
즉,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를 말하는 표현이에요.
왜 굳이 ‘독생자’라 했을까?
요한일서와 연결하면 답이 보여요.
우리는 양자(養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예수는 본질상 아들
→ 그래서 예수만이 독생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한 문장으로 정리
독생자란,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며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1. 오직. 2. 독생하신
Pronunciation [ mŏnŏgĕnēs ]
- Etymology / 3441과 1096에서 유래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 7:12, 9:38, 8:42, 히 11:17.
-
2. 독생하신, 요 1:14, 18, 3:16, 요일 4:9.
-
관련 성경 / 독생한(요 1:18). [명] 외아들(눅 9:38, 히 11:17), 독생자(요 1:14, 요일 4:9)
독생자(獨生子)
독(獨) : 오직 하나
생(生) : 나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다
자(子) : 아들
→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일무이하게 나신 분이라는 뜻
성경적 의미 (요한복음 중심)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독생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신 아들을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로고스)”
“태초부터 계신 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던 분”
독생자의 핵심 포인트
중요한 오해 하나를 짚자면
❌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
⭕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관계
즉,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를 말하는 표현이에요.
왜 굳이 ‘독생자’라 했을까?
요한일서와 연결하면 답이 보여요.
-
우리는 양자(養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
예수는 본질상 아들
→ 그래서 예수만이 독생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독생자란,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며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과 “독생자” 차이
공통점부터
“하나님의 아들”과 “독생자”는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하지만 쓰이는 맥락과 강조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 관계와 신분을 강조
-
하나님과의 부자(父子) 관계
-
메시아적· 권위적 칭호
-
왕, 상속자,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의미
예시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 표현은
-
유대적 메시아 개념에서도 사용 가능하고
-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칭호예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려요.
본질과 유일성을 강조
-
헬라어 μονογενής (모노게네스)
→ “유일무이한, 오직 하나뿐인 종류” -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아들
-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
예시
-
요한복음 1:14, 18
-
요한복음 3:16
이 표현은
-
예수에게만 쓰이고
인간에게는 절대 사용되지 않아요.
| 구분 | 하나님의 아들 | 독생자 |
|---|---|---|
| 초점 | 관계· 신분 | 본질· 유일성 |
| 적용 | 예수 + 성도 | 오직 예수 |
| 의미 | 보내심 받은 아들 | 본질상 하나뿐인 아들 |
| 오해 가능성 | 있음 | 거의 없음 |
요한일서 배경을 떠올리면 선명해져요.
-
가현설 ·영지주의 :
“예수는 신적 존재가 잠시 육체를 쓴 것” -
이에 대한 요한의 답 :
독생자가 육신이 되셨다
즉,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며, 유일무이한 아들이고, 그분이 참으로 육신으로 오셨다.”
한 문장으로 정리
-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과의 관계와 메시아적 신분
-
“독생자” →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는 유일무이한 아들
독생자(獨生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주 핵심적인 표현이에요.
1️⃣ 단어 뜻부터 보면
-
독(獨): 하나, 유일한
-
생(生): 낳다
-
자(子): 아들
➡️ 직역하면 **“유일하게 낳은 아들”**입니다.
2️⃣ 성경적 의미
대표 구절은 요한복음 3:16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독생자는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숫자 개념을 넘어서,
👉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1:18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
예수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
-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3️⃣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아닌가?”와의 차이
좋은 질문이죠 😊
성경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요. 하지만 방식이 달라요.
| 예수 그리스도 | 우리 |
|---|---|
| 독생자 | 양자(입양된 자녀) |
|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 은혜로 자녀가 됨 |
| 영원부터 계심 | 믿음으로 관계 안에 들어옴 |
👉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자녀가 됩니다.
4️⃣ 신앙적으로 담긴 메시지
“독생자”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동시에 들어 있어요.
-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 가장 귀한 분을 주셨다 -
구원의 유일성
→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그분 -
예수의 정체성 선언
→ 선지자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짧은 단어지만, 사실 복음 전체가 들어 있는 말이에요.
**독생자(獨生子)**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주 핵심적인 표현이에요.
1️⃣ 단어 뜻부터 보면
-
독(獨): 하나, 유일한
-
생(生): 낳다
-
자(子): 아들
➡️ 직역하면 **“유일하게 낳은 아들”**입니다.
2️⃣ 성경적 의미
대표 구절은 요한복음 3:16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독생자는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숫자 개념을 넘어서,
👉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1:18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
예수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
-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3️⃣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아닌가?”와의 차이
좋은 질문이죠 😊
성경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요. 하지만 방식이 달라요.
| 예수 그리스도 | 우리 |
|---|---|
| 독생자 | 양자(입양된 자녀) |
|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 은혜로 자녀가 됨 |
| 영원부터 계심 | 믿음으로 관계 안에 들어옴 |
👉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자녀가 됩니다.
4️⃣ 신앙적으로 담긴 메시지
“독생자”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동시에 들어 있어요.
-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 가장 귀한 분을 주셨다 -
구원의 유일성
→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그분 -
예수의 정체성 선언
→ 선지자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짧은 단어지만, 사실 복음 전체가 들어 있는 말이에요.
원하시면
-
독생자 vs 장자(로마서)
-
초대교회에서 독생자 논쟁(아리우스 논쟁)
-
요한복음이 왜 ‘독생자’를 강조했는지
이 중 하나로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좋은 세 가지를 한 번에 꿰뚫는 흐름으로 풀어볼게요.
이 주제들은 따로 보면 복잡한데, 사실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돼요.
“예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① 독생자 vs 장자 (로마서 중심)
🔹 독생자 (μονογενής)
-
의미: 유일무이한 아들
-
초점: 본질
-
대상: 예수 그리스도만
👉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유일한 아들”
🔹 장자 (πρωτότοκος,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장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의미: 첫째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
상속권
-
대표성
-
지위의 개념
-
-
초점: 관계와 질서
👉 예수는
-
본질적으로는 독생자
-
구원 공동체 안에서는 장자
📌 정리하면:
-
독생자 = 위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
장자 = 아래로 (우리와의 관계)
즉,
예수는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우리 편에서는 형이 되신 장자예요.
② 초대교회의 독생자 논쟁 – 아리우스 논쟁
이게 왜 그렇게 치열했냐면,
독생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복음 자체를 바꾸기 때문이에요.
🔥 아리우스의 주장 (4세기)
아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들은 창조된 존재다.
한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즉,
-
예수는 가장 위대한 피조물
-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 교회의 반박
교회는 이렇게 응답했죠:
“아들은 낳아진 분이지, 만들어진 분이 아니다.”
핵심 표현:
-
동일본질(homoousios)
→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본질
📌 여기서 “독생자”는 결정적인 단어였어요.
-
창조되었다면 → 독생자 불가
-
낳아졌다면 → 본질 공유
🏛️ 니케아 공의회(325년)
신조의 핵심:
“하나님에게서 하나님,
빛에서 빛,
참 하나님에게서 참 하나님,
낳아지셨으나 창조되지 아니하셨다.”
👉 독생자라는 말은
-
시적 표현이 아니라
교리적 방어선이었어요.
요한복음이 왜 ‘독생자’를 강조했는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질문 자체가 달라요.
🔍 공관복음서의 질문 / “예수는 무엇을 하셨는가?”
🔍 요한복음의 질문 / “예수는 누구인가?”
그래서 요한은 시작부터 이렇게 말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그 정체성을 요약하는 단어가 바로 독생자예요.
요한 당시의 위기
-
영지주의
-
예수는 신적 영이 잠시 사람 몸을 입은 존재
-
-
가현설
-
예수의 육체는 진짜가 아니다
-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아들이며, 육신이 되셨다.”
즉, 독생자 = 신성의 확증,
육신 되심 = 참된 성육신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의 메시지 한 줄 요약
예수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다.
세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독생자 → 하나님과의 관계 (본질)
장자 → 우리와의 관계 (구원 질서)
요한복음 → 그 둘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신학
“그는 하나님에게서는 독생자, 우리에게서는 장자, 세상에는 생명의 빛이다.”
1월 29일(목) 요한일서 4: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4:8. 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랑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같이 거룩한 사랑의 성품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축소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이 "만일 성경이 전부 갑자기 없어지고 요한복음 3장 16절만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문학가로 잘 알려진 최효섭 목사는 이 짧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이다.(greatest lover) <참조:최고의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
"세상을"...최고의 숫자이다.(greatest number)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악인, 모든 선인을 포함하여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사"...사랑의 최고 수준이다.(greatest degree) 불가능한 상대를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랑하신 그 깊이와 그 넓이가 한량없는 수준이다. <참조: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시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을 말한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이다.(greatest gift)<참조: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주셨으니"...최고의 행위이다.(greatest act)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수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이다.(greatest invitation)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이 하나님 사랑의 초청에 포함된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이다.(greatest simplicity) 믿는다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는 것처럼 하면 된다. <참조:이같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이다.(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 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 같다. <참조:하나님의 사랑은 사형수일지라도 용서하시고 해방하신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이다.(greatest possession) 그 이상의 재산, 그 이상의 소유는 없다. <참조: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다.>이 위대한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표시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최효섭,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인생들에게, 땅에서 난 썩어질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성경 10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씻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그냥 내버려두고서는 사랑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지은 죄가 어떻하든 영원히 용서함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의 방해를 받거나 그래서 중단되거나 하지 않는, 그 누구,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룩하며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어미는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자식이 아버지가 싫어 손을 놓아버릴지언정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식일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이같은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받은 바 사랑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가로 잘 알려진 최효섭 목사는 이 짧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이다.(greatest lover) <참조 : 최고의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
"세상을"...최고의 숫자이다.(greatest number)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악인, 모든 선인을 포함하여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사"...사랑의 최고 수준이다.(greatest degree) 불가능한 상대를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랑하신 그 깊이와
그 넓이가 한량없는 수준이다. <참조: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시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을 말한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이다.(greatest gift)<참조: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주셨으니"...최고의 행위이다.(greatest act)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수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이다.(greatest invitation)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이 하나님 사랑의 초청에 포함된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이다.(greatest simplicity) 믿는다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는 것처럼 하면 된다. <참조:이같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이다.(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 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 같다. <참조:하나님의 사랑은 사형수일지라도 용서하시고 해방하신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이다.(greatest possession) 그 이상의 재산, 그 이상의 소유는 없다.
<참조: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다.>이 위대한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표시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최효섭, 사랑하기
때문에)
더글라스 메도 목사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고,
피아노가 집에 있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든, 바이올린이 있든 있는 그 악기를 가지고 목적한 음악을 소리를 통해 나타낼 수
있어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음악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을 통해
나타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해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 처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나타내시는 사랑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바람이 하는 일을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전기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전기가 어떤 힘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내시고 계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참된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한다해도 그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선 요한 1서 3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6-18)
일본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시요학원들은 후꾸이 목사가 창설하고 약 30명의 직원 전원이 크리스천으로 구성된 시설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이 학원을 방문하여 한 여선생에게 어떤 일이 가장 힘드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처음에는 사표를 낼까 하였으나 "저 아이들이 예수님이다."고 격려하시는 후꾸이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1년을 견디었더니 이제는
정말 그 고된 일이 즐겁고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 다."(마 25:46)고 말씀하심으로서 이웃 사랑이 곧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어느 교도소 수감자가 문서선교지 <숲속의 사과나무>를 보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70가까운 노모가 장생포에 살고 계시는데 누가 돌볼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탄원서를 법무부 장관과 교도소장앞으로 제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여러분께서 매주 마다 내주시는
<사랑의 성미>와 여선교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가지고 장생포 주소를 들고 찾아가보았습니다.
편지 내용대로 장생포 골짜기
달동네같은 지역에서 전기세, 수도세 등을 내지 않아서 단전, 단수되어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놓고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만나뵙고자
했던 할머니는 안계시고 방문은 열쇠로 잠궈져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이웃에 계시는가 해서 이웃을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아랫 집에
어느 젊은 아주머니 하나가, 우리가 할머니를 도우러 교회에서 온 줄을 어떻게 알고 투덜투덜거리며 우릴 보고 미쳤냐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처음 생각에는 이 집 아들이 동네에서 아주 몹쓸 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가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작은 아들이 아무리 동네에서 몹쓸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갔다해도 큰 아들은 가출한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돌보던 아들마저 교도소에 갇혀 있으니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단전 단수마저 되어 생계가 그토록 힘든데 7순 노인에
대한 동네 인심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여선교회원들이 다시 찾아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방에 들어가보니 듣던대로
생활이 형편없고 아들들을 위해 윗방에 천신(天神)숭배단을 만들어놓고 지성을 드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편견을
가지거나 하지 말고, 이웃 집에서 무슨 욕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말고 내 어머니처럼 여기고 월동에 필요한 것을 정성껏
마련해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애타게 어머니 걱정하며 지내는 0 0 0 형제에게 걱정하지 말고 빨리 출소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건강하게 지내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죄질이 나쁜 죄수라해서, 할머니가 우상숭배한다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우리 속에 거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죄일지라도 용서하시고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미쳤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우상숭배하는 사람에게도,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의 질을 구별하여 차별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널리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을 행하신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즉,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이 드러납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1.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가 사랑받는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분과 관계 맺는 사람들은 조건 없이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은 창조, 구원, 돌봄 등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3.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하며,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7~11)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신을 연구하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 신자이고, 참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첫 번째로 태어나는 것이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 ?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거듭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수록 부모를 점점 닮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을수록 성품이 변하고, 사랑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맛은 직접 경험해 보아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의한 짓을 하던 사람이 하지 않게 되고,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던 사람이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났다는 증거, 진짜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지고, 영안이 밝아지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밝은 빛으로 인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행하시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장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시고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서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 도대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만물을 다 만들어 주셨는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잠언 3장 11~1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시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 밖의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맛이 좋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이 독약이고, 고통을 몇 배로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악가 파바로티와 함께 3대 테너 가수 중 한 사람이었던 호세 카레라스는 41세 때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다가 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병원에 가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시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호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처럼 병이 나아서 1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과거와 달랐고, 그의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중들 앞에서 “질병도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 다.’라는 것과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입 전부를 바쳐서 백혈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과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모든 계명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2~1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 높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이 넘칠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칠 때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사랑이 넘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지만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계명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없어서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실제로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돌봐야 열매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행함이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굶고 있어도 ‘아이고, 안됐다, 안됐다, 사랑하는 아무개가 굶고 있구나.’ 하고만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라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행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며 받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게 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하니까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성도들이 함께 모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누구도 자기 재산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 나누어주고 함께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내 것이라고 싸우는데 예루살렘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도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 嗤?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눈병이 있었다고도 하고, 간질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다 보니 온 몸이 형편없게 된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믿음이 어린 사람이 보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거지 같고 중환자 같고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업신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이 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서울 강북에 수유리교회가 있습니다.
윤덕수목사
그 교회에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목회를 아주 잘하셔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열심히 목회를 하시던 중에 쓰러지셨는데, 5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중에 시험에 들어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정말 사랑하니까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전 교인이 기도하며 목사님을 극진히 간호하자,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여서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다시 하시니 교회가 더 부흥되었고, 몇 년 전에는 성전을 크게 지어 하나님 앞에 헌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합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몸이 약해서 새벽기도에도 잘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정재훈 장로님이라는 분은 새벽 4시만 되면 다른 장로님들을 불러서 함께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목사님이 중풍에 걸려 은퇴하시고, 다른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정재훈 장로님은 일주일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가지고 주일 아침에 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아침 식사를 수년간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큰 회사의 사장이 되게 하셨고, 또한 이 분이 우주선을 발사할 때 폭발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치를 개발하게 하셔서 미국 대통령과 비밀회의를 하고, 전 세계에서 이 장치를 주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벽마다 기도하고,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짧은 문장 안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요한일서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준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하나님의 사랑 → 우리의 사랑 → 이웃을 향한 사랑
이 흐름이 끊기면 신앙도 공허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본질
성경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도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표현은 독특해요.
-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는 뜻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행동—창조, 율법, 심판, 구원—은
전부 사랑이라는 중심에서 나옵니다.
2. 감정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
성경적 사랑(ἀγάπη, 아가페)은 감정이 먼저가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 (요일 4:10)
즉, 느껴서 사랑한 게 아니라 결단하고, 희생하고, 자신을 내어주신 것
그래서 십자가가 사랑의 정의가 됩니다.
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에서는 사랑을 말할 때 항상 기준이 있어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
사랑은
-
막연한 선의가 아니라
-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
십자가에서 드러난 방식
이게 없으면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왜곡됩니다.
4. 그래서 요한의 결론은 이것이에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신앙의 깊이는
-
지식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사랑 안에 실제로 거하느냐
정리하면 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정의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심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
13:4-8a ).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 4:8), 이 서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두루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장 8절은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그분의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분의 위격과 성품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분의 진노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 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요 1:12; 요일 3:1, 23-24).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 ||
속성 |
정의 |
성경구절 |
단일성 |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
신 6:4 |
무한성 |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
왕상 8:27, 행 17:24 |
영원성 |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
창 21:33, 시 90:2 |
영성 |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
요 1:18, 딤전 1:17 |
불변성 |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
말 3:6, 약 1:17 |
주권성 |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
엡 1:21 |
전지성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
시 147:4-5, 마 11:21 |
전능성 |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
마 19:26, 계 19:6 |
편재성 |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
시 139:7-12, 렘 23:23-24 |
사랑 |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
엡 2:4-5, 요 4:8 |
유복성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
신 7:7-8 |
정의성 |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
행 10:34-35 |
은혜성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
출 34:6, 딛 2:11 |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 |
능력 |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
도덕 |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
시공간 |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Calvin선생 주석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모세는 3장에서
인간이 사단에게 속아 창조주를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변했으며, 처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마침내는 잃어버릴 정도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세상도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본래의 원형으로부터 떨어져 인간과 같이
변화되었으며, 그 결과 본연의 우수성이 거의 파괴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가 야기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뱀을 다른 모든 동물 중 가장 간교하다고 말할 때, 뱀이 사단의 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뱀 자체의 원한으로 인간을
속였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사단이 뱀의 내적인 간교함을 이용하여 인간을 타락시키려 했다고 대답하겠다.
사단은 도구가 팔요했으므로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여 마침내는 아주 조심스럽게 방법을 모색했다.
말하자면 하와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사단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인간과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단은 동물의 몸을 덧 입고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뱀이 무엇 때문에 "아룸"
(간교하다) 이라고 묘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Pronunciation [ ʽârûwm ]
- Old Testament / 11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교묘한, 창3:1, 욥5:12, 15:5
-
2. 형용사, 남성 신중한, 잠12:16,23.
- Grammar Explanation / 6191의 수동태 분사형
-
관련 성경 / 간교한(창 3:1), 간사한(욥 15:5), 교활한(욥 5:12), 슬기로운(잠 12:16, 22:3), 지혜로운(잠 14:8).
히브리인들은 이 단어로 '간사하다’ 는 것 뿐만 아니라 ‘신중하다’ 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좋은 의미로 보기도 하고, 또는 나쁜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는 모세가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자연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뱀에게 특별한 재주를 부여하셨고, 다른 모든 짐승보다 예민하고 눈이
밝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의 기만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뱀에게 부여하신 은사를 왜곡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많은 동물을 살펴보면 뱀에게서 보다 더 예리한 면이 발견 된다고 트집을 잡는다.
하지만 나는 인류를 죄악 가운데
빠뜨린 그러한 재주가 뱀에게서 제거되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불합리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제 알게 되겠지만 뱀에게는
다른 징벌도 내려졌다. 이 문제에 있어서 자연의 역사를 다루는 작가들도 모세와는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또한 경험에 의해서도
모든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주께서 제자들 에게 뱀처럼 지혜롭게 되라(마10:16)’ 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공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뱀만이 부각되어 있고 사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이 귀절을 통해 인간이 뱀에게 속았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것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뱀이 단지 마귀의 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는 증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뱀이 아닌 마귀가 ‘거짓의
아비', '사기의 조작자', '죽음의 조성자’라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왜 사단의 이름을 감추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분명하고 확실한 빛이 보류되어야 하므로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한편 선지자들은 우리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마귀에게 돌리며,
자기둘이야말로 모세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중거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가 백성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조잡하고 미숙한 문체로 표현했다고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모세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무지한 종족을 가르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세대가 너무나 철이 없어 그보다 더 차원 높은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의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얼마 동안은 것을 젖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아이와 같이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다. 만일 모세가 자신에게 부과된 선생으로서의 직무를 염두에 두고 어린아이들에게 적합한 기초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다면 결코 비난 받을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단순성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든 경영율 비난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성령의 은밀한 계시를 통해 명료하지 않은 모든 것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채워 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정은 선지자둘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들은 사단을 인류의 전정한 대적이며, 모든 재앙을 획책하는 존재이며, 온갖 속임수와 악랄한 방법으로 파멸과 손해를 불러들이는 원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이 아무리 소란을 피울지라도 교회의 머리이시며 의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공공연하게 빛을 발하지 않으신 그 때에, 사단의 종과 도구 때문에 사단을 죄악의 왕자라고 표현하는 모세의 문체를 놓고 힐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더우기 아담과 하와는 모든 동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자기들에게 예속되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스스로 자기가 부려야 할 종의 하나인 뱀의 평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했으므로 인간의 배은망덕한 비천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이 세상의·어느 동물올 보더라도 그때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위엄과 탁월하신 은총을 상기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뱀이 하나님을 배반했음을 알고서도 벌 주는 것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모든 질서를 무시하고 뱀에게 복종하고 마음을 쏟아 똑같이 반역을 행했다. 이와같은 타락보다 더 치욕적인 것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뱀의 이름을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흐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본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모세는 인간이 사단의 충동에 의해 영원한 멸망에 떨어졌다고 간략하면서 도 마치 비약적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단이 어떻게 하나님께 반역을 괴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래서 광신주의자들은 사단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그대로 사악하고 위험하게 창조되었다고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반역에 대해서는 성겅의 다른 귀절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악하고 부페한 모든 피조물도 창조하셨다고 전가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셨을 때 ‘좋았다’라는 증거를 각자 그 피조물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부여 받은 죄악의 근본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번절에 의한 것이라고 이의 없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의와 정직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저벼렸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에서 사단의 타락에 대대해 그냥 지 나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인간 본성의 타락을 간략히 언급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담이 원래 그처럼 비참한 존재로 창조되어 그의 모든 후손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러한 불행을 겪는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그와 같은 재앙의 본질과 다양함에 대해 생각이 미치면 하나님께 투덜거리며 대항하기가 쉽다. 심지어는 인간의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까지도 경솔히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보다 개나 돼지를 더 자비롭게 대하신다고 불평하는데,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비참하고 파멸된 상태를 아담의 죄에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겠는가?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 모든 악(예를 들면 완악함,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팍함, 사악한 욕망, 악행을 즐기는 포악한 성 벽 동)의 원인이 하나님 의 책임이라고 전가하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사악한 기질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같다. 모세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우리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현재 상태가 최초의 본래적인 상태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몇 마디 말로 써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기술하려는 역사에 전념하 고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일일이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자만심이 강하고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을 크게 동요시키는 문제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죽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시험을 받으면 팔연적으로 슬픈 결과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 왜 그것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짓도록 시험하기 위해 사단의 고삐를 풀어 놓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한 댓가로서 내리신 심판과 보응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 나 인간의 본성이 아직 순전하고 올바른 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전혀 죄악과 관련이 없는 인간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겅우에 있었던 일이지만 동물을 사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파멸을 위해서 대적을 무장시키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 더 있는가? 이것은 마니교에서 두 가지 원칙의 존재를 주장하는 전거가 된 듯하다(誌 4)··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단이 하늘의 뜻에 대적하여 인간에게 함정을 놓았고, 또한 이 사단은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도 우월한 존재였다고 상상한다. 그래시 그들은 불합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에는 가공할 만한 오류에 빠져 버린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두 신이 있으며, 첫째, 신이 경쟁자인 다른 신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권능에 관해서 경건하고 신실히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그 악마도 철대로 활동할‘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전혀 무지하지 않으시며 그것을 막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허락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명령하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실제로 차이가 생긴다. 많은 사람은 아담이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도록 방임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타락 시키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죄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혹심한 형벌을 수없이 내리시며 죄인을 다스리셨다. 그렇지만 나는 아담이 타락한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마치 죄를 기뻐하시거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율법이 위반되기를 바라신 것처럼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타락이 공정성과 잘 이록된 질서를 전복 시키는 것이며, 율법을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적하여 불순종하고 의를 거역하는 범죄인 이상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어떤 확실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의도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타락을 계획하셨다고 말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듯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허락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주관하시며 예방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모하게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심판 받는 것을 감수했으면 한다. 하나님을 자기 육신의 시험에 종속시키는 것은 육신의 교만함이다. 나는 인간이 의심과 회의의 상태에 빠지도록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특성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한 공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전에 미리 결정해 두셨다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미숙한 사람들은 인간이 자유에 의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성급하게 추리한다. 하지만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기가 지나치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필요에 의해 범죄했는지, 혹은 우발적으로 죄를 지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기독교강요"와 "예정론"의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불경건한
사람들은 이 귀절 공박하며 조소한다. 왜냐하면 모세가 뱀이라는 동물이 웅변을 한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뱀은 ‘쉿'
이라는 소리를 낼 뿐 갈라진 혀를 가전 짐승에 불과하다. 그들은 먼저 동물이 특이한 언어를 사용했다면 언제부터 벙어리가 되기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말하자면 뱀은 본래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는데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가 되도록 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우기 나는 하와가 이러한 것을 아주 특이하게 느꼈으며, 그 때문에 자기가 감탄했던 것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온 것을 무엇이든지 믿을 수 없는 우화적인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면, 결코 기적을 행하실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를 초월하여 역사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익숙하지 않다고 핑계를 대면서 비웃는다면, 너무나 선입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우기 동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말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혀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혀도 없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렀다’ 고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야수가 입으로 말을 했다는 것보다 가능성이 더 희박하다. 그렇다면 불경건한 자들은 그와 같은 독설에 대해 무엇이라고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울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심하거나.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시면 동물들에게도 말을 가르치실 수 있는데, 이것은 대화를 원하는 사람을 벙어리로 만드시는 것과·마찬가지다. 또한 이런 점에서 사단의 간교함은 본색이 드러난다. 남자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지 않고 아내를 통해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교활한 공격 방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나는 우리가 신중하게 이와 같은 공격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사단은 우리가 가장 나약한 것처럼 보일 때, 주도 면밀하게 파고 둘어 오는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침투하기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 불화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여자도 뱀과 말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뱀을 단순히 짐승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단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멸망을 그토록 획책했는가히는 점이다.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궤변자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덧입으셨음을 보고 사단이 질투심에 불타 그렇게 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는 너무나 유치하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는 그분 때문에 비참한 멸망으로부터 벗어났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 어떻게 예측되었겠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사단이 일종의 분노감에 휩싸여 (보통 자포자기한 사람이 그렇듯이) 자기 자신과
함께 인간을 영원한 멸망으로 몰아가려 했을런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보다 타당성이 있는 가설은 사단이 하나님의 대적자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질서를 뒤엎으려고 했으며, 그가 하나님을 높으신 보좌에서 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인간을 공격했다는 추축이다.
사단은 인간의 파면과 더불어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혼동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실계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사단은 인간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그러므로 헛된 모든 허구적인
사상을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확고안 가르침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1. 히브리어 단어 해석 : 'עָרוּם(아룸)'의 의미 파악
창세기 3장 1절에서 뱀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עָרוּם(아룸)'으로, 일반적으로 '교활하다', '영리하다', '다재다능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 자체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매우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마치, "칼"이 흉기나 의사의 도구이기 이전에 중립적인 칼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긍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거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될 가능성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만으로 들짐승들이 "간교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이해하거나, 그중에서 뱀이 가장 부정적인 악의 축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2. 창조 질서 속의 역할 : 뱀의 기능과 본능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고유한 역할과 본능을 부여하셨습니다. 뱀의 경우, "다리가 없다"라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먹이를 잡고 생존하기 위해 일종의 '전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뱀의 교활함이라고 일컬러지는 행동은 사실 이러한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론, 태초에는 뱀에게 다리가 있었을 것이지만, 태초의 상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뱀을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 자체에서부터 선입견과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뱀의 교활함은 인간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비추어지지만, 넓은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인간의 선택과 책임 : 타락의 결과 인식
창세기 3장은 인간의 선택과 자유 의지,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초점을 둡니다.
뱀의 교활함 자체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반하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함으로써 뱀의 교활함이 악의 도구로
이용되고, 세계에 타락과 죽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따라서 야생 동물의 '교활함'을 단순히 동물 본성의 문제였었지만, 인간의
선택과 책임과 연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이 되어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불순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뱀은
간교한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상황들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들짐승들 중에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야생 동물의 '교활함'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이분법적 판단으로 이루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다양한 학술적, 신학적 관점을 종합하고, 성경 본문의 깊은 연구를 통해 각자가 스스로 해석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창조와 타락,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책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연구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길 바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Pronunciation [ sarx ]
- Etymology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Pronunciation [ ŏphthalmŏs ]
- Etymology / 3700에서 유래
-
1. 눈.
-
a. [문자적으로] 시각 기관, 마5:29,38, 21:42, 막9:47.
-
b. 정신적, 영적 이해력. [주] ὀφθαλμοὺς ἔχοντες οὐ βλἐπετε: 마13:15, 막8:18, 눅19:42.
-
-
관련 성경 / 눈(마 5:38, 눅 6:42, 계 5:6), 안목(요일 2:16).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Pronunciation [ biŏs ]
-
1. [기본형]: 생명, 삶.
-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8:14, 딤전2:2, 벧전4:3.
-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12:44, 눅8:43, 15:12,30, 21:4, 요일2:16, 3:17.
-
-
관련 성경 / 생활비(막12:44, 눅21:4), 이생(눅8:14, 요일2:16), 생활(눅8:43, 딤전2:2, 벧전4:3), 살림(눅15:12,30), 재물(요일3:17).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1월 28일(수) 요한일서 4: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혹의 영(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미혹의 영(the spirit of falsehood)은 성경, 특히 요한일서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사람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악령”이라기보다, 거짓을 진리처럼 믿게 만드는 힘에 초점이 있어요.
성경적 근거(요한일서 4:6)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느니라”
요한은 세상에 작용하는 영을 두 방향으로 구분합니다.
-
진리의 영 : 하나님께 속함
미혹의 영 : 하나님께 속하지 않음
1.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함
-
예수의 성육신(참 하나님 + 참 인간)을 부인하거나 흐림
-
“예수는 훌륭한 영적 스승일 뿐” 같은 주장
→ 요한일서 당시의 가현설·영지주의와 연결됨
2. 진리보다 ‘자기 느낌·지식·체험’을 절대화
-
계시보다 개인적 깨달음
-
말씀보다 특별한 체험
-
사랑보다 우월의식
3. 분열과 교만을 낳음
-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갈라놓음
“우리는 아는데 너희는 모른다”는 태도
진리의 영과의 대비
| 구분 | 진리의 영 | 미혹의 영 |
|---|---|---|
| 기준 | 예수 그리스도 | 자기 사상·체험 |
| 열매 | 사랑, 순종, 겸손 | 교만, 분열, 혼란 |
| 방향 | 하나님께로 | 자기 자신에게로 |
오늘날의 모습 (현대적 적용)
미혹의 영은 꼭 종교적 언어만 쓰지 않습니다.
-
“진리는 상대적이다”
-
“사랑만 있으면 교리는 필요 없다”
-
“내가 느낀 게 곧 진리다”
겉으론 자유롭고 깊어 보이지만, 예수와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 빠져 있다면 요한의 기준에선 미혹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요한이 주는 분별 기준 (아주 중요)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
시험의 기준은 단순합니다.
-
예수를 누구라 고백하는가?
-
사랑으로 행하는가?
-
공동체를 세우는가?
미혹의 영은 성경에서 사람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볼게요.
미혹의 영이란 무엇인가?
핵심 구절은 여기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였으므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한일서 4:5)
미혹의 영은
-
겉으로는 신앙적·영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체와
-
사랑과 순종의 삶을 흐리게 만드는 영이에요.
즉, 단순히 “악령”이라는 공포스러운 이미지보다 진리를 왜곡하는 방향성이 핵심입니다.
미혹의 영의 특징 (요한일서 기준)
1.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고백하지 않음(요한일서 4: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예수를 본받을 분이 아닌 개념·상징·능력의 통로 정도로 격하
-
십자가 · 육체· 고난을 불편해함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지식은 많고 주장도 강함
-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
-
정죄· 분열· 우월감이 따라옴
요한에게 사랑은 옵션이 아니라 진리의 증거예요.
순종보다 체험· 지식· 자기확신을 강조(요한일서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미혹의 영은 종종 이렇게 말해요:
“나는 깨달았어”, “나는 자유야”, “이제 계명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계명을 떠난 영성은 이미 미혹이라고요.
진리의 영과의 대비(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 | 미혹의 영 |
|---|---|
| 예수를 바르게 고백 | 예수를 왜곡 |
| 사랑으로 행함 | 말로만 주장 |
| 계명 안에 거함 | 자기 확신을 따름 |
| 공동체를 살림 | 분열을 만듦 |
오늘날의 미혹의 영은 어떻게 나타날까?
요한일서는 과거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
사랑 없는 정통
-
십자가 없는 은혜
-
회개 없는 자유
-
예수보다 ‘나의 깨달음’이 중심인 신앙
이 모든 것에 요한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영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미혹의 영은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게 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살지 않게 만드는 영이다.
“미혹의 영 vs 진리의 영” 출발점부터 다르다
🔹 진리의 영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
십자가·성육신·부활을 흐리지 않음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고백을 중심에 둠(요한일서 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 미혹의 영
-
예수에서 시작하지 않음
-
예수를 수단·개념·상징 정도로 축소
-
십자가는 불편해서 빼거나 희석함
예수는 말하지만, 예수의 길은 사라짐
가르침의 방식 차이
🔹 진리의 영
-
말씀을 전체로 가르침
-
듣는 사람을 낮추고 회개로 이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을 남
🔹 미혹의 영
-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
-
감동·계시·체험을 앞세움
-
질문을 막고 비판을 죄처럼 만듦
“의심하지 말라”가 아니라 “검증하지 말라”가 될 때 위험
열매로 드러나는 차이 (가장 중요)
예수님이 주신 기준이죠.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6)
🔹 진리의 영의 열매
-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남
-
죄에 대해 민감해짐
-
남을 정죄하기보다 자신을 살핌
-
관계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움
🔹 미혹의 영의 열매
-
말은 사랑인데 실제는 상처
-
회개보다 합리화
-
은근한 영적 우월감
-
분열, 파벌, 배타성
빛을 말하지만 그림자가 짙어짐
‘자유’에 대한 이해 차이
🔹 진리의 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
죄로부터의 자유
-
욕심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남
-
책임 있는 자유
🔹 미혹의 영
-
“은혜니까 괜찮다”
-
순종 없는 자유
-
결국 자기 합리화의 자유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욕망에 더 묶임
사랑을 말하는 방식의 차이
🔹 진리의 영
-
사랑 + 진리 (둘 다 놓치지 않음)
-
불편한 진실도 말함
오래 참고 책임지는 사랑
-
진리 없는 사랑
-
듣기 좋은 말만 남김
-
감정 중심, 순간 중심
요한일서의 말이 정확해요.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
(요일 3:18)
아주 현실적인 체크 질문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
이 가르침이 예수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가?
-
나를 겸손하게 하는가, 우월하게 하는가?
-
회개로 이끄는가, 변명으로 이끄는가?
-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
공동체를 세우는가, 갈라놓는가?
이 질문 앞에서 흔들리는 가르침은 미혹의 영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 문장 결론 / 미혹의 영은 빛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자신에게 묶고,
진리의 영은 십자가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내에도 미혹의 영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라는 것은 악한 영,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특별히 미혹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 특히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4)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마지막 때에
사단은 뉴에이지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뉴에이지의 영은
무엇입니까?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뉴에이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단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전에 찾아보면 뉴에이지 운동은
“1970년 80년대에 주로 신비주의 이단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단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많은 연관이 되어있는 뉴에이지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우리가 접하는 문화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문화에 빠지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게 합니다.
현재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뉴에이지에 감염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유명한 목사의 영성훈련에
다녀온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성훈련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명상만
하라고 했다.’
잘못된 전형적인 뉴에이지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도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일부
CCM 노래들은 그냥 들으면 가요인지 찬양인지 분간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뉴에이지 스포츠가 있습니다. 요가가
그렇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합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어떤 미국교회는 요가가 아예 교회의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경의 말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윤리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지지하면 상대적으로 교회도 그것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용납하게 됩니다. 왜냐면 교회는 모든 이념을 다 수용해서 평화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좌파(사회주의)의 이념은 유물론에 입각한 반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고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장 3-4절) 또한 마지막 때에 동성애나 혼합주의와 같은 배도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니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 2장 3절)
교회가 사회주의를 용납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고, WCC와 같은 혼합주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단이 ‘New Age’ 즉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에 뉴에이지의 영을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침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New World Order(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고 모든 인류가 사단 루시퍼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New World Order(새 세계질서)’라는 단어가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사단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지 ‘새 세계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도, 동성애와 WCC도 루시퍼를 섬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단은 뿔달린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온순한 양과 같이 때로는 평화의 사자같이 우리를 미혹하고 교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는 뉴에이지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장 14-15절) 라고 말합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단의 일군들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가 가짜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가운데 깨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동성애자들도 혼합주의자들도 모두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뉴에이지영, 즉 사단의 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은 오직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안에 있을 때만 참 사랑과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있어야지만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뉴에이지영)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1월 27일(화) 요한일서 4: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영(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진리의 영은 성경,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개념이에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 곧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드러내고 그분 안에 거하게 하시는 영을 뜻합니다.
성경적 정의 / 요한복음 14: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진리의 영 = 성령
→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함께 거하며 내면에서 역사하는 분
진리의 영이 하는 일
1.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요한복음 15:26)
“그가 와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함
예수의 인격·십자가·부활을 왜곡하지 않음
2. 진리로 인도함(요한복음 16:13)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단순 지식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로 이끎
3. 사랑과 순종으로 열매 맺게 함(요한일서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교만 → 겸손
미움 → 사랑
자기의 → 하나님의 뜻
요한일서에서의 핵심 기준
요한은 “영들을 시험하라”고 말하면서 기준을 제시(요한일서 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
진리의 영의 핵심 표지 :
1. 예수의 성육신을 인정
2.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음
3. 사랑을 실제 삶에서 나타냄
진리의 영 vs 미혹의 영 (요약
| 진리의 영 | 미혹의 영 |
|---|---|
| 예수를 주로 고백 | 예수를 왜곡 |
| 겸손과 사랑을 낳음 | 교만과 분열 |
| 십자가 중심 | 신비· 체험 중심 |
| 공동체를 세움 | 자신을 높임 |
한 문장 요약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게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리의 영은 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아주 핵심적으로 등장하죠.
성경적 근거 /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진리의 영 =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입니다.
진리의 영의 핵심 역할
1.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요한복음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분명하게 합니다.
2. 거짓을 분별하게 함(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은
복음을 흐리지 않고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으며 사랑과 순종으로 이끕니다.
3. 안에서 가르치심(요한일서 2:27)
“너희 안에 거하시는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치며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진리의 영은 외부 지식만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양심과 믿음을 깨우는 분이에요.
진리의 영의 특징 요약
| 진리의 영 | 미혹의 영 |
|---|---|
|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함 | 예수를 흐리게 함 |
| 진리로 인도 | 혼합과 왜곡 |
| 사랑과 순종을 낳음 | 교만과 분열 |
| 빛 가운데 걷게 함 | 어둠에 머물게 함 |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게 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현대의 영지주의
1. 고대 영지주의
-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γνῶσις)
-
육체· 물질 세계는 열등하거나 악함
-
예수의 **성육신(참 사람 되심)**을 부정하거나 약화
-
엘리트 의식 : “아는 자 vs 모르는 자”
요한일서가 그렇게 강하게 싸운 이유도 바로 이거였고요.
2. 현대의 영지주의
① “나는 직접 계시를 받았다” 신앙
성경보다 개인의 체험· 음성· 느낌이 기준
“이건 너희가 몰라도 되는 깊은 차원의 이야기야”
검증 불가, 공동체 밖에서만 통용됨
계시의 사유화 = 현대 영지주의의 핵심 징후
② 예수는 ‘모범·스승’일 뿐이라는 주장
예수를 구원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준 존재
의식의 확장을 도운 마스터
십자가는 죄 사함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 정도로 축소
성육신과 대속이 희미해질수록 영지주의적
③ 몸과 삶을 가볍게 여기는 신앙
“중요한 건 영이지,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윤리·행위·책임은 부차적인 문제
회개보다 “깨달음”이 강조됨
요한일서가 말한 “행함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정면 충돌
④ 선택받은 소수 의식
-
“진짜 아는 사람은 소수야”
-
교회·성도·전통을 은근히 무시
-
비판받으면 “너희 수준에서는 이해 못 해”
겸손이 사라진 신비성은 거의 항상 위험 신호
⑤ 자기계발· 뉴에이지와 결합된 신앙
-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
-
“내 안의 신성을 깨워라”
-
죄 개념은 사라지고, 무지만 문제로 남음
죄 → 무지로 바뀌는 순간, 영지주의
3. 요한일서 기준으로 본 분별 포인트
요한은 영을 이렇게 분별하라고 했죠: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는가
→ 성육신·십자가·부활을 실제 역사로 고백하는가
2️⃣ 사랑이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는가
→ 삶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가
3️⃣ 형제를 사랑하는가
→ 엘리트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아무리 “깊고 신비해 보여도” 요한은 경고등을 켰을 거예요.
4. 왜 현대인에게 영지주의가 매력적인가
솔직히 말하면 이유가 있어요.
-
회개보다 덜 아프고
-
순종보다 자존감이 높아 보이고
-
십자가보다 자기중심적
하지만 요한은 분명히 말하죠.
“빛 가운데 행하지 않으면서 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5.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현대의 영지주의는
예수를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예수를 ‘따라 살 필요는 없게’ 만든다.
“현대의 영지주의”*는 겉으로 보면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핵심에서는 복음과 많이 어긋나는 흐름을 말해요.
1. 영지주의의 핵심부터 다시 보면 고대 영지주의의 중심
-
구원은 ‘믿음’보다 ‘특별한 지식(γνῶσις, 그노시스)’으로 온다
-
영(선)은 중요, 육체(악)는 하찮다
-
예수님의 성육신을 불편해하거나 부정함
-
공동체적 사랑·윤리보다 개인적 깨달음 강조
현대 영지주의의 대표적 형태들
1. “나는 깨달았고, 너희는 아직이다” 신앙
“이건 아무나 아는 게 아니야”
“성경만 봐서는 안 되고, 이 계시를 알아야 해”
특정 지도자·집단만이 깊은 진리 소유자처럼 행동
- 진리는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복음인데, 진리를 ‘선별적 소유물’로 만듭니다.
2. 예수는 ‘본받을 모델’이지 ‘구주’는 아니다
예수 = 깨달은 스승, 의식의 진화 단계
십자가 = 상징적 메시지일 뿐, 대속은 부정
부활 = 실제 사건이 아니라 내적 체험
- 요한은 단호하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면…” (요일 4:2–3)
3. 영적인 말은 많은데, 삶은 분리된 신앙
“영적으로 자유하니까 행위는 중요하지 않아”
사랑· 순종· 거룩은 ‘낡은 종교적 개념’ 취급
실제 삶의 책임은 회피
- 요한일서의 반복 논지 :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
4. 자기 안의 ‘신성’ 발견이 구원이라는 사상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어”
회개· 십자가· 은혜 대신 자기 인식 강조
하나님과 나의 경계가 흐려짐
-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 안에 계신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5. 영성은 좋아하지만 공동체는 거부
“나는 교회는 싫지만 영성은 좋아”
권면· 책망· 사랑의 책임에서 벗어남
혼자만의 ‘순수한 영적 체험’ 추구
- 영지주의는 항상 공동체를 약화시켜요.
요한일서는 정반대로 사랑의 관계성을 기준
요한일서 기준으로 본 현대 영지주의 판별표
1. 신앙의 시험
→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가?
2. 윤리의 시험
→ 삶에서 순종과 거룩이 실제로 드러나는가?
3. 사랑의 시험
→ 형제를 사랑하는 구체적 행함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아무리 “깊은 영성”을 말해도 요한은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한 문장 정리
1. 십자가 없는 영성
2. 육체 없는 예수
3. 사랑 없는 깨달음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진짜가 아니라 ‘겉으로만’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더럽고 고통스러운 육체를 가질 수 있느냐?”
그래서 탄생·고난·십자가·죽음이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라고 봤어요.
즉, 예수는 신이지만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에요.
왜 이런 사상이 나왔을까?
헬라 철학 영향
→ 영 = 선, 육체 = 악이라는 이원론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니까
→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함
성경은 가현설을 어떻게 보나? (강력하게 부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가 보고, 들고, 만진 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환상이 아니다, 진짜 몸이다”라는 뜻이죠.
왜 가현설이 치명적인가?
1. 십자가의 고난이 실제가 아님
2. 실제 피 흘림이 없으니 속죄도 무너짐
3. 구원 자체가 붕괴됨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가현설은 ‘예수의 신성은 지키려다 성육신을 부정한 오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다.
가현설 vs 영지주의 차이
가현설 (假現說, Docetism)
핵심 질문
“예수는 진짜 사람이었는가?”
십자가의 고난· 죽음이 겉모습일 뿐
문제의 초점 : 성육신(incarnation)
예수의 몸이 가짜
영지주의 (Gnosticism)
핵심 질문
“누가 참된 구원을 얻는가?”
비밀 지식(γνῶσις, gnosis)을 가진 소수만 구원
육체는 악, 영은 선
윤리적 이중성
금욕주의 또는 육체는 상관없다며 방식
구원 방식이 가짜
관계 정리
-
가현설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에서 나온 ‘기독론적 오류’
-
요한일서에서는 둘이 결합된 형태가 문제였어요.
그래서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 +사랑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
왜 요한일서에 이단 경계가 그렇게 많은가?
이유 1: 교회 내부에서 나온 이단이었기 때문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외부 박해 ❌
내부 분열 ⭕
지도자·교사급 인물일 가능성 큼 더 위험함
이유 2 : “믿는다” 말하지만 삶이 달랐기 때문
요한일서 반복 구조 :
“하나님을 안다” 말함
→ 계명은 안 지킴
“빛 가운데 있다” 말함
→ 형제를 미워함
“죄 없다” 말함
→ 회개 없음
요일 1: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하고…”
신앙 고백과 삶의 불일치가 핵심 문제
이유 3: 성도들의 확신을 무너뜨렸기 때문
요일 5:13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단 : “너희는 아직 부족해”
요한 : “이미 받았다”
요한일서는 논쟁서 + 목회서
오늘날 가현설과 비슷한 현대적 신앙 오류
이게 제일 중요해요. 이단은 사라지지 않고 ‘모양’만 바뀝니다.
① “예수는 훌륭한 영적 스승일 뿐”
-
사랑, 지혜, 깨달음만 강조
-
십자가·피·속죄는 불편해서 제거
👉 십자가 없는 예수 = 가현설의 현대판
② “예수는 내 마음속에서만 영적으로 경험하면 된다”
-
역사성, 몸, 교회, 성례 무시
-
실제 순종·고난은 회피
👉 영적인 느낌은 있지만 육체적 순종은 없음
③ 성공·번영만 말하는 신앙
-
고난 없는 그리스도
-
십자가 없는 부활
-
눈물 없는 영광
그러나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을 삭제한 예수 = 가현적 예수
④ “믿기만 하면 삶은 안 바뀌어도 된다”
-
회개·윤리·사랑은 선택
-
행함은 ‘율법주의’라 치부
요일 3:18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육체 없는 신앙, 삶 없는 믿음
한 문장으로 꿰뚫기
요한일서의 3중 시험 (신앙 · 윤리 · 사랑의 시험)가현설은 예수의 몸을 지웠고,
영지주의는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으며,
요한일서는 “예수의 몸 + 십자가 + 사랑의 삶”을 다시 붙잡게 한다.
요한일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인가?”를 분별하는 3가지 기준(시험)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의 시험 (교리적 시험, 진리의 기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라” (요일 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요일 4:3)
기준 /
예수 = 그리스도
성육신(육체로 오심) 고백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인정
거짓 가르침 /
예수는 단지 영적 존재
그리스도는 예수와 분리된 존재
→ 영지주의/가현설 계열 사상
둘째, 윤리의 시험 (행위의 시험, 삶의 기준)
삶이 죄 가운데 지속적으로 머무는가 아닌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 3:9)
의미 /
“실수로 죄를 안 짓는다” ❌
“죄의 지배 구조 안에 거하지 않는다” ⭕
죄를 정당화하며 사는 삶 ❌
기준 /
죄를 미워하는가
회개하는가
빛 가운데 행하는가 (요일 1:7)
셋째, 사랑의 시험 (관계의 시험, 공동체 기준)
형제를 사랑하는가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일 3:10)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기준 :
-
말이 아닌 삶의 사랑
-
희생적 사랑
-
실제적 행동의 사랑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요약 구조
| 시험 | 기준 | 핵심 질문 |
|---|---|---|
| 신앙 | 진리 |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
| 윤리 | 삶 | 죄를 어떻게 대하는가 |
| 사랑 | 관계 |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가 |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참이면 → 삶이 바뀌고 → 사랑이 나타난다
요한일서의 “적그리스도” 의미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이 아닙니다.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요일 2:18)
의미 구조
① 인격체가 아니라 영적 성격(정체성)
“적(anti)” = 반대 + 대체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영
② 교리적 정체성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그는 적그리스도니” (요일 2:22)
👉 적그리스도의 핵심:
-
예수 = 그리스도 부정
-
성육신 부정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정
③ 공동체 내부에서 나옴
📖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일 2:19)
👉 외부 이단 ❌
👉 교회 내부 분리자들 ⭕
정리 : 요한일서의 적그리스도
1. 예수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가르침을 가진 자들
2. 교회 안에서 나온 거짓 교사들
3.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대체하는 영적 세력
왜 요한은 ‘칭의’보다 ‘사랑’을 말했는가?
바울과 요한의 질문이 다릅니다
바울의 질문 :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가?”
칭의(Justification) 중심
율법 · 행위 · 믿음 · 은혜 · 십자가 법정적 구조
요한의 질문: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누가 참된 생명을 가진 자인가?”
존재론적 구조 (생명, 빛, 사랑, 거함, 관계)
요한 신학의 중심 개념
| 바울 | 요한 |
|---|---|
| 칭의 | 생명 |
| 의롭다 | 하나님께로부터 남 |
| 법정적 선언 | 관계적 존재 변화 |
| 믿음으로 의롭다 | 사랑으로 나타난다 |
왜 ‘사랑’인가?
① 하나님 존재 규정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사랑은 속성(attribute)이 아니라 본질(identity)
② 구원 증거 구조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사랑 = 구원의 조건 ❌
사랑 = 구원의 결과 ⭕
③ 존재 증명 구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우리가 아는 것은 형제를 사랑함이라” (요일 3:14)
사랑은 칭의의 열매이지 대체물이 아님
신학적 통합 문장
바울은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말했고
요한은 “구원받은 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한다
바울은 법정 언어(칭의)를 사용했고
요한은 생명 언어(사랑·빛·거함)를 사용했다
바울은 구조를 설명했고
요한은 증거를 보여준다
핵심 요약
요한일서 3중 시험
-
신앙 :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
윤리 : 죄를 어떻게 대하는가
-
사랑 :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가
적그리스도
한 인물 ❌
교회 내부에서 나온 거짓 교사들
예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영적 세력
칭의 부정 ❌
칭의의 결과를 강조
사랑 = 구원의 증거
존재의 변화가 관계로 드러남
가현설(docetism)
외견상으로 사람으로 보인 것뿐이지, 실제로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 하지 않는 영에 대해 언급한 것(요일 4:2-3)은
가현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가현설은 물질은 악하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헬라사상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육체를
가졌을 경우, 그의 신성에 손상이 갈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되었다.
1세기 말 케린투스(Cerintus)는 그리스도와 예수를
구별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단순히 인간성과 일시적 병존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이었던 반면, 그리스도는 세례 받을 때 그에게 내려온 신적 존재였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환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의미의 육체일 수 없고 육체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인간예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가현설적 기독론(docetism)을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육체일 수 없고 단지 육체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의 부정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적 부활과 같은 정통교회의 일반적 신앙을 소박한 오해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 : 영지주의는 구원이 지식(깨달음)에 의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① 구원은 영의 해방과 귀환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구원은 물질적인 것과 연합됨으로 육체 속에 갇혀 이 세상에서 데미우르고스와 그 세력들의 지배 아래 있는 영이 해방되어 본래의 거처, 천상계로 귀환하는 것이다.
② 구원을 지식을 통해 성취된다.
영지주의는 구원이 예수의 희생적 죽음이나 예수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영지, 즉 세계와 에온들과 참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함으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믿음과 관련하여 지식을 과대평가한다.
엘리트를 위해 보다 높은 지식 즉, 비밀적인 지식이 요청된다고 주장한다(브라운, 2001).
구원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박옥수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박옥수는 정통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의지적인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전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구원파를 영지주의적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류광수 다락방도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통회하는 회개에 대한 강조를 하지 않고 다만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원죄와 자범죄가 다 용서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단전문가들은 다락방이 지방교회의 삼분설과 박옥수의 깨달음, 그리고 김기동의 귀신론이 혼합된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분별하고 있다.
③ 인간계층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좌우된다.
최하층인 육적 인간, 즉 이교도들은 어느 경우에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멸망 받을 인간이다.
중간 층 혼적 인간은 신앙을 가졌으나 영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유대교인과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구원받을 수도 있고 멸망할 수도 있는 인간이다.
최고층 영적 인간은 참된 기독교인으로 영지로 구원을 얻은 인간이다.
영적 인간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의 교훈을 파악해 깨닫기만 하면 된다.
영지주의(gnosticism)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미혹하는 신앙의 양태를 영육이원론의 영지주의로 지목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요일 1:7).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예수는 신화다>나 <다빈치코드> 등은 모두 영지주의의 현대적
부활이라는 성격이 농후하다.
뉴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성격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허호익, 2016).
영지주의란 영적 지식(gnosis)을 추종하는 동방 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혼합형태로 주후 80년부터 150년 사이에 초대교회와 경쟁했던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다.
영지주의는 엄격한 의미로 보면
종교도 아니고 순수하고 단순한 철학도 아니었으며 일종의 밀의적인 민중신앙이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교회사 최초로
출현한 이단 가운데 하나다. 영지주의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해 온 영지적인 사고와 개념 또는
분위기를 지닌 종교운동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2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던 기독교 이단종파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지식을 통한 영혼의 우주적 구속을 가르친 사상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이성호, 2012).
영지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서, 누가 무엇을 주장했는가?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에 어떻게 대처했으며 왜 이단으로 간주했는가?
현재 한국에는 어떤 영지주의 이단이 활동하고 있는가?
이단은 정통을 전제로 한다. 정통은 기원적이고 이단은 반영적이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고 심오하고 놀라울 만큼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선포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구원과 영생이 믿음으로 말미암고 그 믿음이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즉, 역사적
개인(인격)이신 분에 대한 것을 믿는 것을 의미했다.
그 분의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하신다는 의미는 각 기독교인에게
생사를 걸 만큼 중요한 진리였다(브라운, 2001).
정통은 일반적으로 우선순위를 역사에 두지만, 이단은 지식적 이해에 둔다.
그래서 정통은 신학자들 가운데 보다 신학적이지 못하고 보다 역사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지만, 이단은 보다 신학적이고, 보다 철학적이고, 보다 추상적이다.
골로새서와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와 가현설주의(decetism)에 대한 항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교주의와 율법주의와 함께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의 위협적 이단으로서, 믿음과 관련하여 지식을 과대평가하였다.
20세기 전반까지 Irenaeus, Tertullian, Hippolytus, Epithanius와 같은
이단전문가들(heresiologists)은 영지주의자(Gnostics)에 대한 일차적 정보원이었다.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의
의미를 조작하고 왜곡하여 기독교를 오도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들은 특히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서신을 자기들 목적을
위해 왜곡하였다.
Irenaeus와 같은 교부는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종교적 혼합을 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을 왕의 아름다운 그림을 분해하여 여우의 그림으로 짜맞추는 것에 비유하였다.
우리는 영지주의라 부르는 사상이 고대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 철학적, 영적 경향의 한쪽 측면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브라운, 2001).
영지주의가 일어났던 때는 사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어렵사리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영지주의 이단’을 형성하여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대표적인 이단들은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그리고 몬타누수주의이다. 여기에 대하여 교회는 신앙의 준칙을
확립하고, 감독의 사도권을 교회 내에 정착시키고, 정경을 확정함으로 응전하였다.
초대교회는 이단의 공격에 대하여 정경화, 신조화,
직분의 확립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이단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본질적인 교리를 빼는 것을 의미한다(계 22: 18-9).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신령한 예언)는 전자에
해당하고, 마르시온주의자들(구약적 요소를 제거)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Clement, 150-215)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시몬 마구스(Simon Margus)라는
인물이다. 시몬 마구스는 사도행전 8:9-13절에서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과 동일인물이며,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재주를 부렸고, 많은 인기를 얻자 자신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신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들었다.
시몬은 자신이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는 거의 동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성호, 2012).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는 위협하는 이단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성경 외의 문헌에서도 니골라당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65년 순교)이
Trailians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당을 멀리 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쾌락을 사랑하지만 중상적인
혀를 놀립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변증가 이레니우스(Irenaeus, 125–202)가 저술한
책「Adversus Haereses」에도 다음과 같이 영지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직을 처음으로 받은 자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지주의라 부르는 사상은 고대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 철학적, 영적 경향의 한쪽 측면이라 할 수 있는데, 영적 형태로써 20세기의 실존주의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브라운, 2001). Mary Baker Eddy(1821-1910)의 '크리스찬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는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역사가 소크라테스 (Socrates the historian, 5C.)가 남긴 기록에서도 초대교회가 영지주의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했다는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도 요한이 성경에 남긴 다음의 말씀이 그 당시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이단 사상을 물리치기 위해 했던 말이라고 기술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1. 기독교 영지주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지방에서 영지주의 문서가 대량 발견됨으로써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 내에서 발생한 하나의 기독교이단사상이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 간행된 활발한 연구결과에 의해 영지주의는 기독교 밖에서 시작되어 고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교회사에서 영지주의가 문제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영지주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영지주의의 뿌리는 무엇인가?
⑴동양 종교 유래설이다. 조로아스터교, 신비종교, 점성술, 마술 등 동양종교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⑵헬라사상 유래설이다. 기독교 신앙이 신플라톤 철학의 흙탕물로 오염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동방종교인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Edward Conze).
⑶유대교 유래설이다. 유대교의 금욕적이고 묵시적인 종파 에세네파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⑷기독교내부 유래설이다. 기독교내부의 이단적 사상에서 유래했거나 1-2세기에 번창한 기독교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⑸고대종교 및 사상의 혼합설이다. 기독교전파과정을 통해 일어난 일종의 혼합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종교혼합주의가 기독교 안에 침투해 복음을 변질시키려 했던 것으로 본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이원론, 동양의 신비종교, 헬라 철학, 유대교 사상 등 여러 요소가 기독교 교훈에 혼입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기독교 영지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단 세력에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정이철).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졌던 사람이다.
영지주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신성이 공유되고 있다고 여기는 현대의 뉴에이지 운동의 원형이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개종할 때 무속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혼합한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2. 영지주의의 일반적 특징
영지주의는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Gnosi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 지식이 아니라 신비적 합일을 통한 앎을 의미한다. 영지주의는 그 성격상 밀의적인 혼합종교이므로 그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너무나 다양하여 한 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영지주의 자체는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공통된 일반적 특징을 몇 가지 간추려보자.
⑴영육이원론(dualism): 모든 영지주의는 이원론에 기초에 두고 있는데,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영혼과 육체는 서로 존재론적으로 대립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영육 이원론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선악이원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윤리적 이원론이 그대로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에 적용된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죽는 까닭은 인간이 이 악한 물질세계에서 악한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본다.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육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인간 육신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는 영지주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극단적인 금욕주의로서 일체의 육식과 결혼을 금한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로 육신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윤리적 방탕주의(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신앙적 고행이나 금욕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허호익, 2016).
영지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영적 각성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육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영적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영육 간에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조잡한 것으로 배척한다. 영적 세계로의 귀환이라는 신화론적 구원론에 집착한다.
⑵육체의 감옥에 유폐된 영혼. 영지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상의 영적 존재였다. 천상의 영적 존재였던 인간은 자신 안에 있던 ‘신적 불꽃’을 상실하고 지상의 물질세계로 추방되어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지닌 육신의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의 추방과 유폐의 과정조차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가르친다.
⑶구원은 영적 깨달음에서 온다. 구원은 영적 지식의 각성에 의해 이뤄진다. 영적인 인간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인간이 자신이 영적 존재라는 각성에 이르게 되어야 구원을 얻는다. 영적 각성은 영적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영지를 중시한다.
영지, 영적 비밀에 대한 지식을 중시한 것이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지성적이며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직관적이며 직접적인 지식, 신적인 것에 참여함으로 얻는 영적인 지식을 말한다. 합일의 지식이며 구원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성취하는 자기인식(깨달음)의 행위이다.
영지주의 이원론은 구원론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물질(육체)에 갇혀 있다. 따라서 이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참다운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득도(깨달음)를 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지방교회와 구원파가 영지주의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행함이 아니라 참 지식의 소유 여부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윤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율법에서의 해방과 양심의 해방을 강조한다. 이 지식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밀스럽게 전수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는 신비적 지식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려 한
종교운동이다.
영지주의는 상징적인 의식, 신비적인 예식, 무술적인 형식의 가르침을 도입하여 사변적 우주론을 대중화했다. 우주론적
신화, 헬라와 동양의 이교적 철학사상, 기독교의 진리를 융합한 대중운동이었다.
1월 26일(월) 요한일서 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영(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This is how you can recognize the Spirit of God: Every spirit that acknowledges that Jesus Christ has come in the flesh is from God.
το πνευμα του θεου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은 성경에서 주로 "성령(the Holy Spirit)"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분별의 기준(standard of discernment)"을 의미합니다(4:2)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영지주의라는 가르침을 바르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원론 사상은 물질은 악한 것이고 오직 정신만이 선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육체로 임하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육체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이론을 가현설(docetism) 또는 영지주의(gnosticism)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육체로 오신 것처럼 보이셨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의 거룩을 강조하기 위한 이론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난 것이므로 비성경적인 이론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영은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 즉 분별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영은 분별의 기준이라는 특수한 의미로 소개됩니다.
분별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영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둘째는 사랑과 진리 안에 거하게 합니다.
셋째는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세상의 풍조가 믿음을 흔들려고 다양한 이론들을 미끼로 던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동성애자들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만을 포용하고 잘못된 것은 바르게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무장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성령을 의미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JB, Smalley).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 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하나님의 영은 성경에서 보통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단순한 ‘기운’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
하나님의 영 = 성령
-
성부· 성자· 성령 중 성령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닌 하나님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하나님의 영 = 성령
-
창세기 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마태복음 28:19에서 성부·성자·성령으로 함께 언급됨
👉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령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
① 생명을 주심
-
창조 때부터 역사하심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② 사람을 새롭게 하심
-
거듭나게 하심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요 3:5)
③ 진리로 인도하심
-
말씀을 깨닫게 하심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 16:13)
④ 사랑으로 살게 하심
-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하나님의 영의 역할
-
생명 주심: “영은 살리는 것이라”(요 6:63)
-
진리로 인도: 진리를 깨닫게 하심(요 16:13)
-
죄를 깨닫게 하심: 양심을 깨우심(요 16:8)
-
사랑하게 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으심(롬 5:5)
-
순종의 능력: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심
-
죄에 대해 민감해짐
-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려는 마음
-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
-
겉모습보다 마음과 삶의 변화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한 문장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진리로 살게 하시는 살아 있는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예수를 믿게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
요한일서에서는 분별의 기준으로 강조돼요.
“하나님의 영을 아는 것으로 이것을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고
-
사랑과 진리 안에 거하게 만들며
-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사랑하게 해요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핵심 기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2)
👉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예요.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로 고백함
→ 하나님의 영 예수를 부인하거나 왜곡함
→ 미혹의 영 / 적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vs 미혹의 영
요한일서는 영적 세계를 아주 분명히 나눠요.
| 구분 | 하나님의 영 | 미혹의 영 |
|---|---|---|
| 예수 고백 |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시인 | 예수를 부인·왜곡 |
| 열매 | 사랑, 순종, 진리 | 미움, 거짓, 교만 |
| 출처 | 하나님께 속함 | 세상에 속함 |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요일 4:6)
진리를 듣는 태도 자체가 영의 정체를 드러냄.
하나님의 영과 사랑의 관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사랑으로 확인돼요.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증거 = 사랑
-
말만의 사랑 ❌
-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 ⭕
(요일 3:24, 4:7–12)
하나님의 영과 계명
요한일서에서는 영과 계명이 분리되지 않아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요일 3:24)
👉 하나님의 영은
-
계명을 무시하게 하지 않고
-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함
즉, 자유를 핑계로 한 방종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 아님.
요한일서가 말하는 결정적 한 줄
예수를 바로 고백하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하며, 진리에 거하게 하는 영 —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이다.
정리 한 문장
👉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며, 진리 안에 거하게 하는 분별의 기준’이다.
1. 요한 신학의 큰 전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빛이시며,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요한에게서 **영(Spirit)**은
단순한 능력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누가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로 판별됩니다.
2. 성령과 악한 영의 구별 (요한일서 중심)
🔑 핵심 구절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요일 4:1)
① 분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2)
✔ 성령의 특징
-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 참 인간으로 고백함
-
예수의 십자가와 사랑의 계명을 중심에 둠
-
형제를 사랑하게 만듦
✘ 악한 영의 특징
-
예수를 왜곡함 (부인, 축소, 다른 예수 제시)
-
지식은 있어도 사랑과 순종이 없음
-
분열, 미움, 교만을 낳음
👉 요한에게서 영적 체험의 강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 이해와 사랑의 열매가 기준이에요.
3.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의 의미
🔑 요한일서의 표현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여기서 ‘거한다’(μένω, 메노)의 뜻
-
잠깐 머무는 방문 ❌
-
지속적으로 머무는 관계 ⭕
즉,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 =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사람 안에 계속 작동한다
4. 요한복음에서의 연결 고리
① 성령은 예수를 증언함
“그가 와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 성령의 역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는 것
② 성령은 ‘안에 계심’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
→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는 말은
외적 종교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문제
5. 요약하면 (요한적 관점)
| 구분 | 성령 | 악한 영 |
|---|---|---|
| 예수에 대한 태도 |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고백 | 예수를 왜곡·부인 |
| 열매 | 사랑, 순종, 담대함 | 미움, 분열, 교만 |
| 거함 |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 | 일시적 감정·혼란 |
| 중심 | 십자가의 사랑 | 자기중심성 |
6. 한 문장 정리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그분의 사랑이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커피숍에서 지기 싫어하는 네 명의 할머니들이 자식자랑으로 풍을 떨고 있었다.첫번째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우리 아들은 카톨릭 신부라우. 남들은 우리 아들보고, '오, 귀하신 분!'이라 부른다우.
"그러자 두 번째 할머니가 이야기했다."그래? 우리 아들은 추기경인데, 남들은 우리 아들더러 '오, 거룩한 분!'이라 불러요.
"그러자 세 번째 할머니가 질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다."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요. 우리 아들은 교황이지요. 남들은 우리 아들보고, '아이고, 고결하신 분!'이라 그러지요.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은 없죠? 푸하하하."
그런데 마지막 할머니가 이야기했다."다 집어치워요. 우리 아들은 숏다리에 곰보, 거기다 뚱보이지요.
그래두 남들은 우리 아들을 보면 한결 같이 '오, 마이 God!'이라고 하지요."
흑사병도 이겨낸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주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약 10만 명 있었는데 그들은 1만5천의 불행한 자의 생활을 담당하였습니다.
또 후에 이곳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인명이 손상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것이 기독신자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탓이라는 말이 돌아가 이 때문에 신자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이 병이 무서워서 앓는 자와 죽은 자의 시체를 그냥 내버리고 도망을 했을 때에도 신자들은 결사적으로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어서 병자를 구호하며 시체를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도망했다가 다시 돌아온 자들이 기독신자들이 한 업적을 보고 놀라지 않은 자가없었습니다. 이러한 흑사병의 유행은 갤러스(Gallus)황제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카태이지 교회는 사이프리안의 지도하에 그들을 간호했으며 매장하였습니다.
유세비어스 당시에는 핍박이 너무 심하여 어떤 교우가 재산 몰수를 당하면 교우들이 서로 생활 책임을 졌고, 다른 데로 피신하여 가면 목사의 소개서 한 장으로 으레 그들의 생활 책임을 졌습니다. 2세기초의 신학자 터툴리안의 변증론의 일 절을 보면
“보라 저들이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를! 저들이 서로 죽기도 사양치 않는구나 저들은 아내 외에는 무엇이나 공동으로 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불신자들이 경탄함을 말하였고, 그들은 또한 불신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우리를 핍박하나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아니하나 당신들의 빈궁한 자는 우리가 구제하노라”하였다 합니다.
1월 24일(토) 요한일서 3:2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의 계명(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종교(宗敎)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條件)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 그 사람(혹은 대상)의 정체성· 사명· 관계· 기대를 담아내는 상징이에요.
조금 나눠보면:
-
정체성
이름은 “너는 누구인가”를 드러내요. 성경이나 전통 문화에서는 이름이 곧 그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죠. -
사명과 방향
어떤 이름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나 부르심을 포함해요.
(예: 아브람 → 아브라함, 사명 변화와 함께 이름이 바뀜) -
관계성
이름을 부른다는 건 관계를 맺는 행위예요.
하나님이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표현은 ‘알고 계심’과 ‘택하심’을 뜻하죠. -
기대와 선언
이름에는 부모나 공동체의 소망, 혹은 하나님의 선언이 담기기도 해요.
그래서 이름은 미래를 향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이름은 존재를 설명하는 꼬리표가 아니라, 그 존재를 부르는 의미의 언어예요.
“이름” = 그 사람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 성품, 권위, 하시는 일 전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 = 정보를 안다 ❌
이름을 믿는다 = 그분 자체를 신뢰하고 받아들인다 ⭕
“믿는다” = 지적 동의가 아니다.
성경적 ‘믿음’은
사실로 인정한다 ❌
자신을 맡긴다, 의지한다 ⭕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라는 분이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고, 내 죄· 삶· 미래를 그분께 맡긴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의 구조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한다 = 관계를 받아들임
이름을 믿는다 = 그분의 권위와 정체성을 받아들임
믿음 = 관계의 시작
“이름을 믿는 자”의 특징 (요한일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
계명을 지킴 (특히 서로 사랑함)
삶에서 열매가 나타남
그래서 요한에게 믿음은 늘 이렇게 흘러 이름 → 믿음 → 순종 → 사랑 → 삶의 변화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말하는 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를 사하여 주시려고 그의 몸을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속죄제물을 위한 희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의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나 윤리 조항을 뜻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핵심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이렇게 요약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여기서 “그의 계명”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첫 번째 계명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
믿음은 혼자만의 내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사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형제자매를 향한 실제적인 사랑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그의 계명”은
믿음과 사랑 —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이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으며,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의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나 도덕적 명령을 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방향이며 사랑의 요청입니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그의 계명”이 매우 분명하게 요약됩니다(요한일서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즉, 하나로 묶으면 두 가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
서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의 계명”은
-
하나님을 믿으라는 명령이자
-
그 믿음을 사랑으로 나타내라는 부르심입니다.
요한은 또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라.” (요일 5:3)
왜냐하면 이 계명은 억지로 지켜야 할 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길, 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1. 계명, 명령.
- 2. [사람의] 요 11:57.
- 3. [하나님의] 눅 23:56, 롬 7:8, 고전 14: 37, 엡 6:2, 딤전 6:14, 벧후 2:21.
- 1. 규정, 규칙, 요구사항, 계명, 눅1:6, 롬2:26, 8:4, [특히 하나님의 요구] δ. τοῦ θεοῦ , 롬1:32, δ. λατρείας: 예배를 위한 규칙, 히9:1.
- 2. 의로운 행실, 롬5:18, 계15:4, 19:8.
- 3. 롬5:16은 δικαίωσις와 같은 뜻.
- 1. [문맥에 따라 의미 변화] ㉠ 너의 말, 마5:37. ㉡ 설명, 눅20:20. ㉢ 질문, ἐ- ρωτήσω ὑμᾶς λόγον: 내가 네게 물을 것이다, 마21:24. ㉣ 기도, 마26:44, 막14:39. ㉤ 예언, 요2:22, 18:32. ㉥ 명령, 계명, 눅4:36, 벧후3:5,7. ㉦ ...
- 2. 말하기.
- 3. [일반용법]
-
계명, 마15:9, 막7:7, 골2:22.
계명(誡命)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지켜야 할 명령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표적인 계명은 십계명입니다(출애굽기 20장).
1–4계명 :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만 섬기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5–10계명 : 사람과의 관계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예수님은 이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
그리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즉, 계명의 핵심은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중심입니다.
계명(誡命)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명령, 가르침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표적인 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십계명 – 출애굽기 20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열 가지 계명으로,-
하나님을 향한 계명(1–4계명)
-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계명(5–10계명)
으로 나뉩니다.
-
-
예수님의 새 계명 – 요한복음 13: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즉,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계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 소포클레스(Sophocles)는 '안티고네Antigone'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워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있다."
구약도 이웃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하여
사랑의 계념을 훨씬 넓혀 놓으셨다.
나치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중에 일세 블루멘탈 바이스(Ilse Blu-menthal-Weiss)라는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독가스로
죽었고 아들 또한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런 그녀가 수용소에서 쓴 시이다. "나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때리고 발로
짓밟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나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냥 슬프게 울
뿐입니다."
증오를 자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곧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악에 맞서기를 피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상인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항하여 싸우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찬양하고 무조건 껴안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목을 끌어안지도 않았고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원수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이 그를 이해해준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있는 증오 때문에 원수는
눈이 먼다. 그러나 당신은 편견 없는 눈으로 원수의 입장이 되어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당신이 자신을
옹호할 때도 원수의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의 짐을 당신이 지고, 그의 죄를
당신 죄로 여기고, 그것을 씻기 위해 그와 그에게 희생된 이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으니,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도 능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빌2:2)
평화를 뜻하는 헬라어 '아이레네eirene'는 어원학적으로 '상대방과 다시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서로 무의미한 소리만 주고 받는다. 서로의 표정을 보고
그들은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이방인이다. 수십 년 같이 살면서도 서로의 꿈과 생각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서로를 이용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받지도 못한다.
우리는 모두 혼자이다.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말로 소리만 내는 단계에서 깨닫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다'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레다버iedaber'의 참뜻은 다음과 같다. 어근은 '다바르davar'인데, 이는 말, 사물, 실체, 원인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인은 말할 때 단지 단어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교환한다. 히브리인들은 '알다'라는 단어를 성관계를 가리킬 때도
쓴다.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에도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 안다는 것은 친밀한 유대관계, 곧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은 단어뿐 아니라 타오르는 가슴으로 나누는 따뜻한 교제로도 이루어진다.
그런 대화라면 어떤 논쟁도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가서의 신부는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아1:2)라고 노래한다. 입맞춤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툴 수 없다.
형제자매나 동료들과 이런 실제적인 만남을 가져라. 말만 교환하는 대화 말고, 진정으로 녹아 하나가 되는 교제를 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는 계명을 이룰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직접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슬람교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에수님이 나사렛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소리로 모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계속 걸어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예수님에게 물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것을 그들에게 줄 뿐이오."
우유가 가득 찬 병을 깨뜨려 보라. 그 안에 본래 식초가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병을 깬다고 식초가 쏟아질 리 없다.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어떻게 증오와 원한에 찬 말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은 몇 가지 행동 노선을 정해 놓고 선택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까닭은 그리스도께 명령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이미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미워하는 방법을 모른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1:38)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요1:39)고 데답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그날을 함께 지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어떤 거처로 그들을 데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거처가 없었다. 예수님은 초라한 오두막이든지 화려한 왕궁이든지 사랑이 통치하는 곳에 머무신다. 예수님은 질문하는 자들을 그러한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제자가 되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요이1:6)
사람들은 영리하고 맵시 있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면서 여왕에게 현명한 정책을 택하라고 요구하자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나에게 유리한 정책을 제안하지 말고, 어떤 것이 옳은 정책인지 한 번 말씀들 해보시오."
무신론 공산주의 정부가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나라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스파이 역할을 하면서 교회를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산주의
비밀경찰에 자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그들은 살인 지령을 받았다. 그
명령을 따르면, 비밀경찰로서 지위를 지킬 수 있었고, 다른 끔찍한 일들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리의 이름으로 불복하면,
자신들이 비밀경찰이 된 진짜 이유를 지하교회에 밝히지도 못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죽든 말든,
누군가가 그 살인 명령을 집행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을 것이 뻔했다.
그렇게 인생은 때로 소름 끼치게 싫은 상황에 뿌리를 내린다. 모든 낱알은 거름 속에 파묻혀야 비로서 싹을 틔운다.
앞에 놓인 선택의 길이 모두 비극적일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전략적으로 유리하거나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한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니콜라예프에 있는 어느 수용소에서 한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유대인 여섯 명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가 명령을 따르면 죄 없는 사람 여섯 명이 죽게 될 것이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도 포함해서 유대인 일곱 명이 죽고 늙은 어머니들 일곱 명이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쌍한 노모를 생각하고는
동료 유대인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거절했더라면 아무런 후회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
내 계명은 곧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기독교 역사는 인간의 죄로 많이 훼손되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그분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기만 했다면, 기독교
역사는 더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이교도를 심문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개신교 신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잔인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톨릭을 따른다고 플런켓 주교를 단죄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목을 옭아맨 다음, 다시 끌어내려 살가죽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 불태우고,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몸을 칼로 4등분했다.
피드동위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도였던 지오반니
미키알린의 눈앞에서 자녀들을 차례대로 토막 내 죽이면서 한 아이가 숨을 거둘 때마다 신앙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는데, 마지막 아이의
차례가 돌아와도 그가 끝내 거절하자, 화가 난 군인이 아이의 다리를 낚아채 머리를 박살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공화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전쟁 중에 정교회 신자 수천 명을 죽였다. 루마니아에서는 정교회 사제들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가톨릭 사제들이 유대인 대량 학살에 앞장섰던 예들도 많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일러주셨건만,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는 바로 그렇게 명하신 분의 이름을 앞세워 개신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한 적의나 원한을 뽑아버리기로 굳게 결심하자. 다시 한번 결심하자, 마지막으로 결심하자, 다른 사람의
종교와 관련, 그 사람 감정을 자극할 만한 말들을 내뱉지 않도록 주의하자, 책임감 없는 사람이 그럼 말을 들으면, 극단적인 경우
살인 같은 성급한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종교적 차이점은 언제나 사랑으로 논의해야 한다. 화합할 수 없어 보이는 차이점을
서로에게 발견하는 경우, 각자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우선시 되는 계명은
사랑이다.
웃음 십계명
1. 크게 웃어라 크게 웃는 웃음은 최고의 운동법이며 매일 1분동안 웃으면 8일 더 오래 산다. 크게 웃을수록 더 큰 자신감을 만들어 준다. 2. 억지로라도 웃어라 병도 무서워서 도망간다. 3. 일어 나자마자 웃어라 아침에 첫 번째 웃는 웃음이 보약중의 보약이다. 3대가 건강하게 되며 보약 10첩보다 낫다. 4. 시간을 정해 놓고 웃어라 병원과는 영원히 바이 바이(bye bye)다. 5. 마음까지 웃어라 얼굴 표정보다 마음 표정이 더 중요하다. 6. 즐거운 생각을 하며 웃어라 즐거운 웃음은 즐거운 일을 창조 한다. 웃으면 복이 오고,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7. 함께 웃어라 혼자 웃는 것보다 33배 이상 효과가 좋다. 8. 힘들 때 더 웃어라 진정한 웃음은 힘들 때 웃는 것이다. 9. 한번 웃고, 또 웃어라 웃지 않고 하루를 보낸 사람은 그날을 낭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0. 꿈을 이뤘을 때를 상상하며 웃어라
1월 23일(금) 요한일서 3:19-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책망과 담대함(3:18)
책망(condemn) & 담대함(confidence)
담대(膽大) 쓸개 담, 클 대
겁(怯)이 없고 배짱이 두둑함.
책망과 담대함은 성경 안에서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께 작동하는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1. 책망(責望)
책망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깨우침과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는 권면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히 12:6)
참된 책망은
-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
죄를 깨닫게 하여 회복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책망은 사랑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2. 담대함(膽大함)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떳떳한 마음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절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즉,
마음이 죄로 인해 우리를 책망하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3. 둘의 관계
-
죄가 있을 때 : 마음의 책망 → 회개로 이끎
-
회개 후 : 정결한 양심 →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
그러므로 책망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시고, 회개한 자에게 담대함으로 그분 앞에 서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책망과 담대함”의 영적 질서입니다.
책망과 담대함은 신앙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해 함께 가야 할 두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
책망은 상대를 정죄하거나 상처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여 그를 바른 길로 돌이키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라고 말하며(요일 2:10), 참된 사랑은 잘못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지혜로운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말합니다. 즉, 책망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담대함은 두려움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하는 용기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사람의 반응이나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결국, 책망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고,
담대함은 확신에서 나와야 한다.
사랑 없는 책망은 상처가 되지만,
담대함 없는 사랑은 침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책망은 온유함으로, 담대함은 사랑으로 균형을 이룰 때, 상대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도구가 됩니다.
1월 22일(목) 요한일서 3:14-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함과 진실함으로(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은 실천이 없는 사랑과 실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이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실천하는 사랑이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행함이란 사랑의 역동적 모습을 의미합니다.
진실함이란 사랑의 질적 측면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매슬로우 인간 욕구 5단계 이론(Maslow’s Hierarchy of Needs)
1.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 음식, 의복, 주거 등 삶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욕구
2. 안전 욕구(Safety Needs)
- 신체의 위험과 생리적 욕구의 박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욕구
3. 소속과 애정 욕구(Belonging & Love Needs)
-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4. 자기존중 욕구(Self-Esteem Needs)
- 내적 외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어떤 지위를 확보하기를 원하는 욕구
5.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 자기발전을 위하여 잠재력을 극대화, 자기의 완성을 바라는 욕구
사도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에릭 프롬(Erich Fromm)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자 삶의 태도로 이해한 책입니다.
그는 “사랑은 우연히 빠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성숙을 통해 이루어지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은 네 가지 요소입니다.
1. 관심(Care) – 상대의 삶과 성장을 진심으로 돌보는 것
2. 책임(Responsibility) – 자발적으로 상대를 책임지는 태도
3. 존중(Respect) –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유를 지켜주는 것
4. 이해(Knowledge) – 상대를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
그는 사랑을 여러 형태로 구분합니다.
1. 형제애 : 모든 인간을 향한 보편적 사랑
2. 모성애 : 무조건적인 보호와 헌신의 사랑
3. 에로스적 사랑 : 한 사람과의 깊은 결합을 추구하는 사랑
4. 자기애 : 이기심이 아닌,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건강한 사랑
5. 하나님 사랑 : 인간의 궁극적 의미를 향한 영적 사랑
프롬은 현대 사회가 사랑을 “소비의 대상”처럼 여기며,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
“어떻게 매력적인 사람이 될까?” 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위해 필요한 훈련으로 훈육, 집중, 인내, 겸손, 용기, 신앙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이 맺는 열매라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프롬의 사랑 이해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요일 3:18)는 말씀과도 깊이 공명합니다.
사랑은 말이나 느낌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러나는 의지적 실천이라는 점에서입니다.
에릭 프롬(Erich Fromm)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사랑을 감정이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배워야 할 능력이자 연습이 필요한 기술로 이해한 책입니다.
프롬은 현대인이 “사랑받는 법”에는 집착하지만,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음악이나 예술처럼
-
이론을 배우고
-
훈련하며
-
인내와 집중을 통해 길러야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대상을 만나면 사랑이 저절로 된다”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봅니다.
2. 사랑의 본질 : 주는 것
프롬에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란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라,
-
관심
-
책임
-
존중
-
이해
를 기꺼이 나누는 능력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장을 기뻐합니다.
3. 사랑의 네 가지 요소
모든 참된 사랑에는 네 가지가 포함됩니다.
-
관심(Care) – 상대의 삶과 성장에 마음을 쓰는 것
-
책임(Responsibility) – 자발적으로 응답하고 돌보려는 태도
-
존중(Respect) –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
이해(Knowledge) – 피상적이 아닌 깊은 이해
이 네 가지가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나 의존일 뿐입니다.
4. 사랑의 여러 형태
프롬은 사랑을 하나의 능력으로 보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
형제애적 사랑 : 모든 인간에 대한 연대감
-
모성적 사랑 : 무조건적이고 보호적인 사랑
-
에로스적 사랑 : 한 사람과의 깊은 결합
-
자기 사랑 : 이기심이 아닌, 자기 존중
-
신에 대한 사랑 : 궁극적 의미와의 관계
특히 자기 사랑을 강조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5.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상품”처럼 만들고, 사랑마저도 교환과 효율의 논리로 바꾸어 놓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인가?”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랑은 깊은 만남이 아니라 외로움을 잠시 덮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프롬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인격 전체가 참여하는 능력이다.
사랑은 우연히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배우고 실천하는” 인간의 가장 성숙한 힘입니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종종 사랑을 감정이나 느낌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 행함 : 사랑은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돕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 진실함 : 사랑은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기적인 목적이나 가식적인 태도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의 문제점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쉽게 변하고, 진정성이 부족합니다.
• 일관성 부족: 감정에 따라 사랑하는 표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냉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 겉모습만을 추구: 겉으로는 친절하게 보이지만, 속마음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 실제적인 도움 부족: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단지 위로의 말만 건네는 경우가 많습니다.
■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삶
진정한 사랑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 구체적인 행동 : 이웃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나누고, 봉사하며,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 진실한 마음 :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생각과 태도까지 진실해야 합니다.
• 꾸준함 : 사랑은 한 번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 사랑하는 삶의 결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삶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 진정한 행복: 사랑을 나누는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 건강한 공동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 결론
요한일서
3:18은 우리에게 사랑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말로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돕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하루, 말과 혀로만 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세 가지 법칙
서로 사랑하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전인적인 사랑
요한일서에서 구원의 표현
그 안에 거한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졌다
하나님을 안다
의를 행한다
그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다
빛 가운데 행한다
깨끗하다
죄를 용서받았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특징은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구원받은 은혜를 사랑으로 표현하며 살아갑니까?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르지 너희는 구원받았다 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 . .
요한일서 말씀을 살펴보면 구원에 대한 가지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12 . ‘
안에 거한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졌다 하’ ‘ ’ ‘ ’ ‘ ’ ‘
나님을 안다 의를 행한다 그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진리가’ ‘ ’ ‘ ’ ‘ ’ ‘
그 속에 있다 빛 가운데 행한다 깨끗하다 죄를 용서받았다 입니다 이 말씀은 표현만 다’ ‘ ’ ‘ ’ ‘ ’ .
르지 너희는 구원받았다 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 . .
사랑의 세 가지 법칙
사랑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절 말씀입니다. 11 .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사랑의 법칙 첫 번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항상 슬픕니다 짝사랑‘ ’ . .
도 짝사랑의 도를 넘는 스토커도 슬픕니다 하는 사람도 슬프고 당하는 사람도 슬픕니다, . , .
사랑의 근본 법칙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사랑은 홀로 독불장군처‘ ’ . .
럼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
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받아야 되고 누구나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건강해집니. .
다 집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손녀를 키우면서 건강해집니다 교회는 사랑하면서. , .
건강해집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받는 사랑만큼 건강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사랑만큼. ,
건강해집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 교만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선물을 주면 기분 좋게 받으십시오 그렇다고 선물 받을. .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슬퍼집니다 그러나 선물은 기쁘게 누리시기 바랍니. .
다 누가 밥을 한 끼 사주면 기분 좋게 드십시오 그래야 밥을 산 사람도 행복합니다. . .
올해 크리스마스는 베푸는 크리스마스가 되십시오 가진 것이 없다면 웃음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또 튼튼한 몸으로 짐을 들어주십시오 재미있게 말하는 재능으로 웃겨주십시. .
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남성들이여. .
자존심을 꺾고 자녀와 아내를 칭찬하십시오 그러면 사랑이 다시 옵니다. .
요한복음 장 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했습니다 하나님13 34 “ ” .
도 여러분의 사랑을 좋아하십니다 손을 들고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랑을 좋. ‘ ’
아하십니다 예배는 일방통행 이 아니라 쌍방통행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기까지. ‘ ’ ‘ ’ .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에 눈물겨워 입술로 목소리로 헌금으로 모든 봉사로 주,
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잘못된 가인의 사랑
하나님과 나와의 아름다운 사랑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첫째 사랑의 법칙입니다 이, .
사랑을 잘 설명하는 것이 절 말씀입니다12 .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는 것은 가인은 사랑하지 않았다 는 뜻입니다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 ‘ ’ .
창세기 장에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열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의 동생 아4 . .
벨도 양의 첫 번째 새끼와 기름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
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행동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
니다 그리고 아우 아벨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동생과 자기? .
를 비교했습니다 여러분 피를 나눈 형제는 비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박. ,
수쳐주는 대상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면 비교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의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것에
대해 박수를 쳐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가장 무서운 것이 비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한 팀입니다 우리는 경쟁상대가 아니라 한 가족이고. . .
동지입니다.
둘째 가인은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생, . .
각하셔서 아벨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판단에 도전했
습니다 이것이 미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
셋째 가인은 악을 실행했습니다 내 동생을 죽이고 싶다 라는 생각이 왔을 때 이 생각을 키. ‘ ’
웠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악한 생각을 실행했습니다, .
넷째 가인은 이기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디모데전서 장에 보면 경건을 이익에 수단으로 사. 6 ‘
용한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 .
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저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잘못된 비교의식이 사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
사람의 일을 잘되게 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수치는 것이 몸에 익어야.
합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돌이켜 소망을 품으십시오 가인같이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의. . . ,
판단을 불신하지 말고 악을 실행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 .
구원의 증거 사랑‘ ’
절을 보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있습니다 가인이 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12 . .
악하고 아벨은 의인이기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입니다 아벨이 악인이고 자기는 의인이라.
아벨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바르고 의롭게 생활을 하는데 자기는 악하기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입니다.
절입니다13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의롭게 사시는 여러분 세상이 당신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바르게, .
살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로 결정했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아벨을 잘못된 가인이 싫어했던 것처럼 의롭게 살기를 원하고 사.
랑하며 살기를 원하는 당신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혼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 .
니다 듣는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말을 듣기 때문에 사람이 당신. .
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기를 원하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로. ,
결정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웃들과 친척들이 당신을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법칙은 잘못된 사람이 올, .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똑바르지 못한 것은 자 와 칼 이 오면 싫어합니다 올바르. ‘ ’ ‘ ’ .
지 못한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나타나면 싫어합니다.
절 절입니다14 , 15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자는 사랑하는 자이고 사망에 아직도 거하는 자는 사랑치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는 말을 우리가 형제를 사. ‘ ’ ‘
랑하면 그제서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받는다 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 . ‘
제를 사랑하면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삶의 증거가 된다 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원’ .
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가 사랑하며 살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이다‘ ’
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요 구원의 열매입니다. .
묵숨을 다한 사랑
두 번째 사랑의 법칙은 절 말씀에 있습니다16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
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의 법칙 두 번째는 목숨을 버리라 입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 ’ . .
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목숨을 버리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러나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성령님. .
의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안식월을 주셔서 영국에 잠깐 갔었습니다 거기서 제일 좋았던 것이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수염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설교를 하. .
게 되어 수염을 깎게 되었는데 일주일동안 기른 수염이 정말 아까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
면서 내게 있는 작은 것 내게 있는 명예 자존심 물질 위치를 포기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 , ,
새삼 느꼈습니다.
하물며 어찌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나의 모든 것을 용납하신 사랑이 가슴깊이 느껴지면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내게 임하면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너무 평가절하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 .
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가족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내어 가난한 사. .
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 자존심 체면을 꺾고 말로 사랑할 수 있고 행동으로 사랑. , ,
할 수 있고 재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
행함 진실이 있는 사랑,
사랑의 법칙 세 번째는 절 절입니다17 , 18 .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
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
함으로 하자.”
사랑의 법칙 세 번째는 전인적인 사랑 입니다 사랑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물질로‘ ’ . .
사랑하십시오 배고픈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지갑을 여십시오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지갑. .
을 터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 는 말은 말과 혀로도 사랑하고 행함과 진실로도 사랑하라는 것‘ ’
입니다 말로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힘이 듭니다 처음부. . ‘ ’ .
터 유창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한 마디가 두 마디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 됩니다 행함과. , . ‘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
서로 사랑한다는 사람 목숨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 전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 ,
님은 어떤 복을 주실까요 절부터 절입니다? 19 22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
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
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담대함 과 기도 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 ‘ ’ ‘ ’ .
는 담대함을 얻습니다 평소에 구체적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을 예배할 때 담대합니다 이것은 건방진 것과 조금 다릅니다 담대한 사람은 편안하고 자. . ,
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평소에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십니다 사랑하지 않고 사는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는 사람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고아원 사역 구제사역 긍휼사역 잘하는 가정의. , ,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베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
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엉뚱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합니.
다 성령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는 비법 응답받는 기도를 하. . ,
는 비법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한 기도는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 ,
대로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절과 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23 24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
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결혼식의 핵심은 식사가 아닙니다 축의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식의 핵심은 신랑 신부. .
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 때 하객을 잘 바라보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를. .
보며 잘살길 바래 축하해 라고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출입“ , ” .
문을 나갈 때까지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례자의 나이를 초월하고 예식장의 분위기를 초월합니다 예수. , .
믿는 사람이 열 명 밖에 없어도 주례자가 정말 사랑하는 맘으로 하면 그 예식장이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사랑이 세상을 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뚫고 나갈, . .
방법이 생깁니다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생깁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슴이 따뜻하기를 바랍니. .
다 사랑하며 살다가 사랑하며 죽기를 바랍니다 지갑이 열리고 행동이 열리는 사랑을 하면. .
서 년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간은 사랑 받지 못하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정신적, 영적 성장을 말함)
하나님은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신다. 이것은 가장 핵심이 되는 인생의 소명이다. 사람 사이에 서로 사랑이 흐르지 못하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마치 사망에 거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겪게 된다. 그래서 14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했다(사망에 다시 빠진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없는 메마르고 핍절한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
<어떻게 사랑 받고 사랑하는가?> 이제 문제는 어떻게 내 안에 사랑을 받고 채워가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 사랑, 친구 사랑을 처음부터 온전히 다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받고 행하는 훈련을 거쳐야
점점 더 풍성할 사랑에 이르게 된다.
[1] 어떻게 내 안에 사랑을 채울 수 있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사랑하는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내가 받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취약점은 자기중심성이기 때문에 미숙할수록 자기가
원하는 것은 상대도 원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황금률의 말씀 속에서 인간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원함”을
먼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원함의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신 뿐 아니라 누구든지 불쌍히 여겨야 한다.
건강한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깊은 욕구를 건강하게 살피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자기 사랑이다.
[2] 이제 (내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18절.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 행함으로
? 18절. 진정한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행함이란 자신의 삶의 행동 양식을 말한다. 내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도울 때 어떤 스타일로 반응하고 어떤 생각과 자세로
행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나 말만 가지고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마음과 말과 더불어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대에게 진정한 유익이 끼쳐지도록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① 자신이 터득하고 소유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품어주고 받아주는 힘과 동시에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돕는 것이다.
② 사랑하는 자는 좋은 감정과 끌리는 느낌에만 머물지 않는다.
③ 상대를 잘 되게 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를 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집착일 가능성이 크다.
④ 상대에게 지나친 간섭, 불필요한 과잉 칭찬을 하지 않는다.
⑤ 사랑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소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흘러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을 생각해 보라. 그분 안에는 모든 선과 부요함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선하심과 부요함을 그 분의 동기와 행동에 의해서 인간에게 흘려 보낼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내 안에 분명히 사랑이 있어”라고 믿기 보다 사랑의 행함을 실제로 실현해 갈 때 비로소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다고 한다면 그는 사랑을 많이 행하는 사람이지, 사랑 자체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아니다.
(2) 진실함으로 영어 성경 대부분에서 truth. = ‘진리 안에서’ ‘진리 안에서 확신과 힘을 얻어’
무엇이 진짜 사랑인가? 내가 하는 사랑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맥락이어야 한다. 배반한 베드로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자기 품 안에 안긴 사도 요한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또 성경에 나온 진실한 사랑의 수 많은 예들을 묵상하면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내가 하는 사랑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사랑임을 확신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맺음>
우리는 영광스러운 형제 사랑의 길로 초청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형제의 유익을 위하여
나를 드릴 수 있음은 자신이 구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새로운 자각을 일으켜 준다. 이것을 하려다가 실패해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존중해 주시는 크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괜찮다(19-20절). 그 분은 우리가 사랑하도록 끝까지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눔의 질문>
1. 당신의 깊은 내면에 가장 필요로 하는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2. 나의 사랑과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의 공통점을 발견합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깊은 묵상으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나아갑시다.
3. 내가 사랑하는 것에 실패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까요? 무엇보다 크신 주님께선 나를 존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실패한 사랑일지라도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라는 말은 요한일서 3장 18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말씀의 뜻은,
사랑이 단지 말로만, 감정이나 표현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는 행동과 진심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
행함: 실제로 돕고, 나누고,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
-
진실함: 위선이나 형식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동기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겉으로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을 보고 손을 내밀며,
억지나 체면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본질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라는 초대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라는 표현은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랑이 말이나 감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진실한 마음으로 나타나야 함을 뜻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여기서
-
행함은 실제로 돕고, 나누고,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
진실함은 위선이나 형식이 아닌,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참된 사랑은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필요한 이웃을 돕고,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희생을 감수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사랑이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1월 21일(수) 요한일서 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3:13)
Do not be surprised, my brothers, if the world hates you.
충돌(衝突)이란 한자는 "찌를 충" "갑자기 돌"이란 훈(訓)으로 "서로 맞부딪치거나 맞섬"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치관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은 미움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이란 두 개의 가치관이 서로 부딪치면 자기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혈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미움이 사랑의 울타리안에서 완전히 부숴지고 녹아져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돌이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시적인 현상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미움을 집어 삼킬 때까지 사랑으로 적극 공세를 펼쳐야 합니다.
어떻게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하라(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둘째는 선으로 공격하라(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은 총리가 된 후에 큰 가뭄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러 왔던 형제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세기 45:5. 7).
셋째는 악을 버려라(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새한글 성경에서는 '악을 멀리하라'고 강조합니다.
악을 버리려면 악을 다스릴 수 있는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을 양동작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양동작전이란 다른 말로 양면작전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강한 힘으로 몰아부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너그럽게 타이르며 흥분된 상태를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은 육신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당하려면 울부짖는 기도의 밤과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인내의 낮이 서로 화합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일컬러 성도들의 인내와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계 13:10, 14:12).
그러나 역사의 주체는 악이 아니라 선이기 때문에 반드시 회복의 그 날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 회복의 날을 소망하며 세상이 던지는 미움과 분노와 격동의 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고 일어납시다.
오 주님
자유대한민국을 주님의 품에 품어주옵소서
긴급속보
교회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입니다.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폐지하고자 하는 민주당 국회의원 명단과 전화 번호입니다.
김성주
02-784-5031
이상헌
02-784-8630
홍성국
02-784-2820
조승래,
02-784-2648
강선우
02-6788-6031
이용빈
02-784-4291
신영대
02-784-1524
서동용
.............
임호선
02-784-1730
최종윤
02-784-6201
윤준병
02-784-1860
이탄희
02-784-8940
허종식
02-784-8870
정춘숙
02-784-3740
이학영
02-784-8051
송재호
............
이형석
02-784-1307
오영관
02-788-6766
전용기
02-784-2843
김민철
02-784-5031
이재정
02-784-2677
고영인
02-784-5490
서영석
02-784-9671
홍정민
...........
이해식
02-784-2171
이규민
02-784-3770
박영순
02-784-2066
윤후덕
02-788-2587
전용기
02-784-2843
한준호
02-784-9160
김남국
02-784-2455
이원욱
02-784-6471
임오경
02-784-6396
정청래
..............
최종윤
02-784-6201
박용진
02-784-9721
고영인
02-784-5490
신용대
02-784-1524
김윤덕
..................
강준현
02-784-6950
민형배
02-6788-6426
한병도
02-784-5891
이장섭
02-784-4441
서삼석
02-784-9501
김성주
02-784-7380
설 훈
02-784-8570
오영환
02-788-6766
김민철
02-784-5031
김종민
02-784-5920
이수진
................
이성만
02-784-6090
윤재갑
02-784-1460
박홍근
02-784-8370
꼭기억,저장하셔서 다음 국회의원 선거
제거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폐기하고 싶은 자들은 무슬림, 공산주의자, 힌두교 등등입니다.
특히 이 땅에서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저렇게 입법기관인 국회까지 진출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거리로 나와 싸워야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길을 걷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이나 거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움은 제자들 개인 때문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이 그분께 속한 자들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
너희가 미움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것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나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다.
-
나도 먼저 그 길을 걸었다.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동시에, 정체성을 확증해 줍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낙심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경고이자 위로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1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이 세상과 충돌하게 됩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살고, 진리를 말하며, 사랑으로 행할 때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3에서도 사도 요한은 같은 맥락으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즉,
-
세상의 미움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고,
-
그 속에서도 우리는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사랑으로 행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이 말씀의 핵심 위로입니다.
가시 면류관에 담긴 사랑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눈썹 한 번 치켜 올리시면 가시 면류관을 엮는
군병의 손을 마비시킬 수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놀랍다. 하지만 이것이 그분이 오셔서 행하신 사건 중에 가장 놀라운
부분일까?
별들로 구슬치기를 하시던 분이 자신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육신의 가장
멋있는 부분을 알고 싶은가?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는 친구들이 그분을 배반하고 달아날 때도 그분이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 아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남녀 죄인들의 온갖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면서도 주님은 자기 변호를 거부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천국의 법정에 무수한 유죄 판결이 울려 퍼지고 빛의 창조자가 죄인들이 가득한 밤의 냉기 속에 버려졌을 때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에서 사흘을 보내신 후 환한 웃음으로 부활의 아침 햇살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시며, 초라한 루시퍼에게 “그것이 제일 센 주먹이더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심지어 그 부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도 멋있다.
말할 수 없이 멋있다.
그러나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1월 20일(화) 요한일서 3:1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로 사랑하라(3:11)
요한일서(1 John)가 기록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주후 85년경에서 95년경, 즉 1세기 말로 봅니다.
이 연대가 추정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신학적 표현이 매우 유사합니다.
요한복음이 주후 80~9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도 비슷한 시기에 쓰였다고 봅니다.
초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말년에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교회들을 돌보던 말년의 사역 시기에 이 편지를 썼다고 이해합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이후, 교회 안에 퍼진 거짓 가르침(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사상)에 대응하기 위해 쓰였다는 점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의 문서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초대교회가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기록된 1세기 말의 권면서로 이해됩니다.
-
서신의 내용은 이미 교회가 어느 정도 조직화된 상태이며, 초기 이단(특히 영지주의적 사상)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1세기 후반 상황과 잘 맞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일서를 주후 85–95년경, 에베소 근처에서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의 특징은 단순한 인간적인 호감이나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처럼 사랑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은
1.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
2. 용서하는 사랑
3. 희생하는 사랑
4.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내가 편할 때만, 마음에 들 때만 사랑하라”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서로를 살리고 세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지가 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성경 요한일서 3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아우를 죽였으니…” (요일 3:12)
여기서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의미는 단순히 살인을 하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서
1. 시기와 미움에 사로잡히지 말라
2.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품지 말라(거역)
3. 의로운 자를 미워하거나 해치지 말라
4.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 는 경고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롭게 행한 아벨을 미워했고, 그 미움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악한 자에게 속한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미움, 시기, 분노로 행동하는 삶을 버리고,
사랑과 의로움으로 형제를 대하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마귀의 유래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사탄)의 유래는,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였으나 교만으로 인해 타락한 존재로 설명됩니다.
1. 빛의 천사
사탄은 처음부터 악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은 직접적으로 “사탄”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타락한 존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사 14:12)
이 말씀은 “빛나는 자(계명성)”였던 존재가 하늘에서 떨어졌음을 묘사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How you have fallen from heaven, O morning star, son of the dawn! You have been cast down to the earth, you who once laid low the nations.
KJV. / How art thou fallen from heaven, O Lucifer, son of the morning! how art thou cut down to the ground, which didst weaken the nations.
계명성(morning star. Lucifer )
2. 타락의 이유 – 교만
사탄은 자신의 지위와 영광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사 14:13–14)
이 교만이 죄의 시작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내셨습니다.
3. 사탄이 된 존재
타락한 이후, 그는
“사탄”(대적자)
“마귀”(중상하는 자)
“옛 뱀”(계 12:9) 이라 불리며,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계 12:9)
4. 현재의 역할
마귀는 사람을 속이고 죄로 이끌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가 아니며,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도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권세는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계 20:10).
마귀의 유래는 “창조된 천사 → 교만 → 타락 → 하나님과 인간을 대적하는 존재” 라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마귀(사탄)”의 유래는 한 존재가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되었다기보다, 원래는 하나님께 지음 받은 영적 존재가 타락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성경의 여러 본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설명됩니다.
-
원래는 천사
마귀는 처음부터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적 존재, 곧 천사였다고 봅니다.
이사야 14장, 에스겔 28장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사탄”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교만으로 인해 타락한 존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
교만으로 인한 타락
그는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사 14:13)
와 같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 교만이 죄의 시작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 “사탄(대적자)”이 되었습니다. -
사탄, 마귀라는 이름의 의미
-
사탄(Satan) : “대적자, 고소자”
-
마귀(Diabolos) : “중상하는 자, 분열시키는 자”
즉, 그의 본질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고, 거짓으로 분열시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
인간 타락과의 연결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와를 속인 존재가 바로 이 사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요 8:44)
-
“온 세상을 미혹하는 자”(계 12:9)
라고 설명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창조된 영적 존재였으나,
교만으로 인해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된 자
1월 19일(월) 요한일서 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귀의 자녀(3:10)
This is how we know who the children of God are and who the children of the devil are: Anyone who does not do what is right is not a child of God; nor is anyon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마귀의 자녀(he children of the devil)는 혈통(血統)이나 외형(外形)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자녀란 마귀의 성품과 마귀의 일을 따르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마귀의 자녀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죄를 즐기며 살아간다.
마귀의 자녀는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죄를 끊지 못하고 계속 즐기며 살아갑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보다 자기 합리화를 좋아합니다.
둘째는 진리를 거부합니다.
마귀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욕망과 세상의 논리를 따라갈 뿐만 아니라 거짓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셋째는 사랑이 없습니다.
마귀의 자녀는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이고 관계를 파괴합니다.
심지어 마귀의 자녀의 대표적인 존재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형제를 죽였습니다(요일 3:12).
넷째는 마귀의 일을 행합니다.
마귀의 자녀는 분열, 미움, 거짓, 파괴, 교만을 즐깁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는 상처를 주고 무너트리고 파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깨우치셨습니다(요 8:44).
결론적으로 마귀의 자녀란 마귀의 성품 즉 거짓, 미움, 죄를 따라 살아가며 그 일을 드러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 즉 말씀과 생명을 받아 의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일시적 또는 제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오늘도 원수 사탄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며 천성을 향하여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요한복음 8:31~47)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 곧 하나님의 씨(말씀과 성령)로 거듭난 자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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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하나님의 자녀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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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육적인 출생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난’ 존재입니다(요 3:3–6). -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요한일서 3:9) -
의(義)를 행함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2:29) -
형제를 사랑함
하나님의 자녀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요일 3:10–14).
즉, 하나님의 자녀란
단순히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어 의와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진리로 자유함을 얻은 자(31~32, 36절)
30절에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믿더라." 믿더라(pisteuvw)는 동작의 시작을 의미하는 부정과거로 한 신앙의 경지에 이른 상태가 아니라, 31절에 "예수께서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역시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다.
자기를 믿은(believed Him)이라는 말은 단순한 신앙을 가진 다수의 무리들을 뜻한다. 예수 주변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믿음의 소유자들이 있었다. 다수의 (believed Him), 그리고 소수의 (believed in Him).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특히 강조한 믿음은 후자의 경우이며 애용어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다수의 신앙인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날 자들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가진 소수만이 예수님을 믿었고 기독교의 맥을 유지해 왔다. 오늘도 마찬가지라 본다. 믿는 사람이 숫자적으로 많은 것 같아도 십자가의 자리까지 갈 수 있는 진짜 예수꾼은 얼마나 될 것인가?
어쨌든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을 향하여 31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구체적 행동은 예수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특징적 용어인데 일시적, 감정적이 아니고 그리스도안에 내재함으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되어야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진리를 통해 참 자유함을 얻게 된다고 했다.
세상에는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주장하는 진리들이 있다. 과학, 철학, 종교 등 각기 진리가 있어 진리를 알 때 무지에서 해방되나 죄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자유에도 정치적, 사상적, 언론적인 자유가 있지만 이것 역시 죄에서 자유가 없는 한 온전한 것이 못 된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로부터 영적 자유를 얻을 때이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33~40절)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민족으로(창 22:17: 갈 4:22~23)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큰 소리 쳤지만 실은 역사적으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물론 몰라서가 아니고, 정치적인 속박은 받고 있으나 종교적으로 자유 하다고 자부심이 있었고 언젠가는 메시아가 나타나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라고 소망하며 믿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육신적, 혈통적인 것만을 가지고 교만을 떠는 저들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거늘." 즉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행사는 창세기 12~22장까지 보면 그는 믿음의 조상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자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살지 않고, 그런 믿음은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40절 지금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요, 나를 죽이려 하니 마귀의 자녀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마귀의 자녀(41~47절)
1) 말씀을 믿지 않음(41~43절)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이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므로 놀라운 축복의 선언이 있었는데, 창세기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의 복을 얻으리니"
이상의 말씀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선민의식이라는 종교적 자존심이 진리를 곡해하게 되었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원인이 되었다.
유대인들 스스로는 우상 숭배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겼다고는 하지만 40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 도다. 여기서 아비는 44절의 마귀를 가리키며 유대인 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 주장하지만 진리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함으로(40절) 실상은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다.
이어서 42절 "하나님의 너희 아버지였으면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나." 43절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유대인들의 우둔함과 심령의 완악함을 직설적으로 책망하신 말씀이다. 이미 여러 차례 예수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임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3:17; 7:16, 28) 심령이 완고하므로 예수의 말씀을 계속 듣고서도 깨닫지도 못 하였으니 영적 귀머거리가 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영적 소경이 된다(요일 1:11).
2) 진리를 믿지 않음(44~47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표적으로 신적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고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것은 44절에 마귀에 게서 났고, 너희 아비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므로 거짓말 장이요, 살인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말씀의 절정으로 너희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녀라 하지만 예수께서 보실 때 마귀의 자녀임을 선포하셨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마귀의 자녀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45~46절) 마귀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마련이다. 본문에서 마귀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말했다.
①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창세기 3:4~5에 뱀이 등장하는데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며 하와에게 접근하여 달콤한 말로 속임수를 써서 넘어가게 했다. 44절 하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SV: he speaks according to his own nature). 제 본성에 따라 말한다고 했다. 거짓말하는 중요한 이유가 본성이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이 참 중요하다. 공동번역에서는 본 절을 "그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고로 번역했다. 말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 본성을 알 수 있다.
② 살인자가 된다.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시기심이 미움으로 변하고 결국은 살인행위를 하게 되었다. 마귀 자녀의 표본이다. 로마서 7:8.11 "내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고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마귀는 아담을 꾀어 사망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마침내는 무죄한 예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는 살인죄를 범하였다 (마 26:59~27:2).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아브라함처럼 살아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실상은 진리를 믿지 않고 배척할 뿐 아니라 거짓말쟁이가 되고 살인자들이므로 마귀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다. 결국은 59절에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10:31~33에도).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잘 믿는다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마귀의 자녀라고 선고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누구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마귀의 자녀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팔린 권 수 대략 70억 권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책이 팔린 수와 세계 인구 수의 비율에 의하면 70억명이 예수를 만나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깨닫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을 깨닫는 것이 어렵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인가?
검사 기준
1. 죄를 짓는다(요한일서 3:4-6)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를 구분하는 검사 기준은 바로 죄다.
4절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4절)
“자마다”라는 표현은 “누구든지” 이 검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한다(“누구든지 죄를 짓는 사람은”,
우리말 성경).
죄(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롬 3:23).
무엇이든지 생각으로나 마음으로나 행위로나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신 것을 추구하거나,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신 것을 추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요한이
여기서 죄를 “불법”이라 정의한 것에 주목하라.
불법은 기본적으로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70인역 200번 이상 등장).
불법은 원어로 아노미아인데, 여기에서 무질서를 가리키는 아노미 현상이 나왔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한 불법은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거부하는 무법, 그래서 무질서와 혼란으로 빠지는 걸 의미한다. 법과 그 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죄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거부하고 무질서와 혼돈 상태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잘
묘사하고 있다.
죄는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연약함, 부족함, 실수도 아니다.
과거의 나쁜 습관을 반복한 것도 아니다.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법에 대한 적극적 반역이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를 짓는 자 곧 죄인이다(롬 3:2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없애셨고 그들의 신분을 바꿔주셨다(5-6절).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5절)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다. 강력한 표현으로 단순히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게 아니라 죄 자체가 그 안에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라고 소개한다(고후 5:21). 예수님 가까이에서 동행한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다고 증언했다(벧전 2:2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이다. 요한의 독자는 이 사실을 알았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하면서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예언했고(마 1:21). 아버지 뜻대로 그 일을 하시려고 세례 요한에게 나왔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불렀다(요 1:29).
구약시대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흠 없는 희생양이 죽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그를 믿는 자의 죗값을 모두 치르셨고(벧전 1:19)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화목 제물이 되셨다(요일 2:2).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새 신분).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는 죄에 마땅히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6절)
“자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요한이 세운 검사 기준이다. 요한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는지 주목하라.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다(고후 4:6).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요 17:3). 하나님 안에 거하며 믿는 날부터 영원히, 거룩하신(죄 없으신) 하나님과 사귐을 이 땅과 천국에서 누린다. 그런데 누구든지 범죄하는 자는 그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 영광을 본적도 없고, 인격적 앎을 얻은 적도 없다. 기준은 아주 명확하다. 9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이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까?
2. 검사 적용 : 죄와 싸운다(7-10)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도 요한의 이 검사 기준 앞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내적 갈등, 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과 너무 거리감이 있는 기준이기 때문이다(롬 7:18-25). 그래서 역사적으로 요한의 이 기준은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되어 적용됐다.
1) 살인처럼 극악한 죄만 해당(가톨릭: 대죄, 소죄)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간음, 지옥 형벌(마 5:28)
2) 신자는 하나님 보실 때 무죄 –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요일 1:9), 형제가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3) 신자의 옛 본성이 죄를 짓는 것이지 새 본성은 범죄하지 않는다 – 옛 본성에 따라 죄를 행한 주체는 결국 나
4) 요한의 이상적인 기대 – 본문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5) 그리스도 안에 살면 짓지 않는다(조건) – 들락거리는 관계?
6) 의지적, 고의적 죄만 해당 – 모든 죄가 의지적, 고의적이다
위의 적용법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어떤 형태로든 죄를 간과하고 허용한다. 계속 저 기준을 적용하며 살면 방종하게 된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쓴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짓는 죄를 간과하고 방종으로 이끄는 거짓 교사,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교회 안팎에 존재했다. 요한은 분명한 기준을 세워 놓고 그들의 거짓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7절)
편지의 독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요일 5:13). 요한은 경계하면서 아무도 그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핑계와 변명을 대며 어떻게든 삶 속에 존재하는 죄를 당연하게 여기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죄가 양립할 수 있다고 정당화한다. 세상과 마귀도 깨끗한 물에 고기가 살 수 없다며 적당히 혼탁함을 유지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것이 요한이 말한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는 방식이다.
4-10절까지 요한이 말한 ‘범죄’는 지속적, 습관적 죄를 가리킨다(4, 6, 8, 9, 현재형, “practice of sinning”, “keep on sinning”, ESV).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계속해서 범하는 것이다. 이런 죄에 대한 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 바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범죄하는 자 곧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죄를 즐길 수는 없다. 죄를 지을 때 자백하여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죄와 싸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삶이다(요일 1:9). 죄와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우는 삶(히 12:4),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삶(골 3:5).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롬 8:13).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롬 6:13). 그것이 요한의 기준을 제대로 적용한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삶이다.
톰 라이트는 이를 피아노 연주에 빗대어 설명했다. “우리는 가끔 손가락이 미끄러져 틀린 음을 치거나, 우리가 예전에 연주했던 음악에 나오는 음들을 치게 된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다시 돌아가 그 옛날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210-11pp).
우리 삶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 찬양이지, 마귀에게 헌납하는 악한 노래가 아니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분명 있고 옛사람의 습관대로 음 이탈을 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노래를 삶으로 연주하고 있다.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용납하는 사람은 그런 삶을 지속할수록 점점 더 마귀를 찬양하는 삶을 산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7절에서 10절까지 요한이 기준을 바르게 적용한 결과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7-8절)
한 주석가는 7-10절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아버지가 누구냐?”로 요약했다. 의를 행하는 자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버지가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한다. 죄를 짓는 자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마귀다. 마귀는 처음부터(태초)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뜻에 반항하여 죄를 범했다. 사람을(아담/하와) 미혹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는 아비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싸우는 것은 오롯이 그들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자녀 안에 창조하신 새로운 성품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마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며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하게 만든다. 평생 죄에 종노릇 하며 살다가 영원히 벌 받게 하는 일이 마귀의 사역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역을 파괴하셨다. 그를 믿는 자를 죄에서 해방하셔서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고 의롭게 살 수 있도록 구원하신 것이 예수님의 공로다(롬 6:6; 히 2:14-15).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된다(위로부터 난 자, 거듭난 자). 그들은 요한의 기준을 바르게 적용하여 죄와 치열하게 싸우며 죄를 반대하는 삶을 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는 이후의 설명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씨는 성령, 말씀, 진리, 성품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 새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고, 말씀의 진리가 심어졌을 때 새롭게 생겨난 성품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확실한 증거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죄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없애야 할 것으로 여긴다. 죄와 공존하지 않고 언제든 죄를 범하면 자백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하게 하심을 통해 해결한다(요일 1:9). 죄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니 우리도 미워한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죄를 없애기 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가 죄를 보는 것처럼 죄를 보고, 아버지가 우리 죄를 벗겨내고 의를 입게 하시는 은혜로운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
결론적으로 요한은 독자가 둘 중 하나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거나 마귀의 자녀들이거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용납하는 삶, 죄와 싸우지 않고 허용하는 삶, 나아가 10절에 말하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삶, 그 구체적인 적용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삶이 관철된 사람, 삶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분명하다.
3. 적용
참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죄를 없애려고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의 상처가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어떻게 죄를 즐길 수 있겠는가? 아버지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을 받아 자녀가 되었는지 지속해서 바라보는 자는
거룩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동시에 죄를 그 교제권 속에 포함할 수 없다. 발견되는 즉시 자백하고 제거한다. 몇 가지
실질적인 적용을 제시하기 원한다.
첫째, 즉시 자백하라.
당신이 쉽게 범하는 죄, 성적인 죄, 분노, 악한 말 등 죄지었음을 깨닫는 순간 즉각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 또한 그 죄의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라. 죄를 묵혀두지 말고 바로 자백하여 용서와 깨끗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라.
둘째, 항상 경계하라.
당신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민감하게 살피고 경계하라. 당신을 잘 아는 이에게 회개할 죄가 있는지 묻고, 하나님께 기도로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셋째, 말씀과 기도로 죄를 물리쳐라.
악한 마귀를 공격하는 무기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이다.
기도는 전장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필수 도구이다(엡 6:17-18).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당신 삶을 판단하고 사탄의 거짓을 분별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 필요한 경우 가까운 성도에게 특정
죄와 싸움을 알리고 기도 요청을 하라. 특정 죄 관련 서적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자녀”는 혈통이나 외형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마귀의 성품과 일을 따르는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대표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10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자녀가 이러나니,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를 바탕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귀의 자녀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죄 가운데 거함
-
죄를 끊지 못하고 계속 즐기며 산다.
-
회개보다 자기 합리화를 택한다.
-
-
진리를 거부함
-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 욕망, 세상의 논리를 따른다.
-
거짓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
-
사랑이 없음
-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정죄한다.
-
자기중심적이고 관계를 파괴한다.
-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형제를 죽였다(요일 3:12).
-
-
마귀의 일을 행함
-
분열, 미움, 거짓, 파괴, 교만을 퍼뜨린다.
-
생명을 살리기보다 상처 주고 무너뜨린다.
-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즉, 마귀의 자녀란 마귀의 성품(거짓, 미움, 죄)을 따라 살며 그 일을 드러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말씀과 생명)를 받아 의와 사랑을 행하는 자입니다.
1월 17일(토) 요한일서 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성경은 사람을 궁극적으로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입니다.
이 구분은 혈통이나 종교적 배경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어떤 생명을 가졌느냐로 결정됩니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요일 3:9, 요 1:12-13)
2. 하나님의 “씨(생명)”가 그 안에서 역동(力動)하는 자
3.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자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
1. 죄 가운데 머물 수 없음 (습관적· 지배적인 죄의 삶을 살 수 없음)
2. 의를 행함
3. 형제를 사랑함
4. 빛 가운데 행함
5. 회개할 줄 앎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여기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삶의 방식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단순한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말씀과 삶으로 드러나는 영적 본질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 곧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입니다(벧전 1:23).
-
죄 가운데 계속 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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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이는 완전 무죄를 뜻하기보다, 죄를 본성처럼 계속 행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씀 안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삽니다.
-
의를 행함
-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방향성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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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사랑함
-
“우리가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중심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욕심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인도에 따라 살아갑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외형이 아니라,
말씀을 받은 내적 생명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요한일서에 잘 드러납니다.
-
죄 가운데 계속 머물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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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 3:9)
이는 완전무결을 뜻하기보다, 죄를 당연하게 여기며 지속적으로 행하는 삶에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돌이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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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를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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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2:29)
하나님의 성품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삶의 방향이 ‘의’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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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사랑함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일 3:14)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을 본성처럼 나타냅니다. 미움은 옛 사람의 성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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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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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요일 3:24)
말씀을 부담이 아니라 생명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 거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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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내주(內住)를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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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3:24)
하나님의 자녀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며, 내적 증거와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
-
세상에 속하지 않음
-
“그런즉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요일 4:5-6 참조)
가치관과 방향이 세상과 다르며, 진리에 반응합니다.
-
요약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어 죄를 미워하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분’일 뿐 아니라 ‘생명’의 증거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마귀의 자녀
정체성
1.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2. 본질적으로 “어둠에 속한 자”
3. 아버지가 마귀(요 8:44)
특징
1. 죄를 계속 행함 (죄 가운데 거함)
2. 의를 미워함
3. 사랑이 없음
4. 진리를 거부함
5. 회개하지 않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8)
마귀의 자녀란 *“가끔 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삶의 방향이며, 회개 없이 죄를 정당화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핵심 차이 요약
| 구분 | 하나님의 자녀 | 마귀의 자녀 |
|---|---|---|
| 근원 | 하나님께로 남 | 마귀에게 속함 |
| 내적 상태 | 하나님의 씨가 있음 | 어둠에 거함 |
| 삶의 방향 | 의와 사랑 | 죄와 미움 |
| 죄에 대한 태도 | 슬퍼하고 돌이킴 | 머물고 합리화함 |
| 결과 | 생명과 빛 | 사망과 어둠 |
요한일서가 말하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느냐,
어둠 가운데 거하느냐”
사람은 스스로 “중간 지대”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아직 마귀의 지배 아래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자녀”**는 혈통이나 외형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듣고 그 뜻을 따르느냐로 구분됩니다.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 죄를 계속 행함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일 3:8)
-
죄를 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삶의 방식처럼 지속합니다. -
죄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거나 즐깁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44, 47)
-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가짐
-
말씀을 들으면 불편해지고, 변하려 하지 않음
-
진리를 왜곡하거나 부정함
3. 거짓을 말함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
거짓을 쉽게 말함
-
진실보다 자기 유익을 우선함
-
사람을 속이고, 분열을 일으킴
4. 형제를 미워함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요일 3:12)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요일 3:15)
-
미움, 시기, 분노가 마음에 뿌리내림
-
사랑보다 경쟁과 파괴를 택함
-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동을 함
5. 의를 행하지 않음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일 3:10)
-
옳은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음
-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을 따름
정리하면,
마귀의 자녀의 핵심 특징은
죄를 지속하고, 진리를 거부하며, 거짓을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삶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
죄를 미워하고
-
말씀을 듣고
-
진리를 따르며
-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차이가 “누구의 씨를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자녀”**의 특징은 혈통이나 외형이 아니라,
어떤 영과 말씀을 따르느냐, 어떤 열매를 맺느냐로 구분됩니다.
특히 요한일서 3장과 요한복음 8장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 성경적 특징
-
죄 가운데 거함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지속적으로 행함
-
진리를 거부함
-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요 8:44)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 왜곡함
-
거짓을 말함
-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 8:44)
-
거짓 교훈, 속임, 위선
-
사랑이 없음
-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요일 3:10–12)
-
미움, 분열, 시기, 정죄
-
의(義)를 행하지 않음
-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
삶의 열매에 하나님의 성품이 없음
-
사람을 죽이는 영적 성향
-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요 8:44)
-
육체적 살인뿐 아니라
말씀으로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멸망으로 이끔
정리하면, 마귀의 자녀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죄와 거짓 가운데 살며, 사랑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마귀의 뜻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
진리를 따르고
-
죄를 미워하며
-
사랑을 실천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둘은 겉모습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와 삶의 열매”로 구별됩니다.
성경은 인류를 단순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은 사람을 두 부류로 분명히 구분합니다.ㅁ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말씀, 생명)가 그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특징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거듭난 자)
2. 말씀을 믿고 그 안에 생명이 심어짐
3. 죄를 계속해서 즐기며 살 수 없음
4. 의를 행함
5. 형제를 사랑함
6. 빛 가운데 행함
즉, 말씀으로 거듭나 생명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귀의 자녀
마귀의 자녀는 마귀의 씨(거짓, 미혹, 불순종)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음이라”
특징
1. 죄 가운데 계속 거함
2. 말씀을 거부하거나 왜곡함
3. 의를 행하지 않음
4. 형제를 미워함
5. 어둠 가운데 행함
6. 진리를 듣지 않음
이들은 외형상 종교를 가질 수도 있으나,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없는 상태입니다.
핵심 정리
| 구분 | 하나님의 자녀 | 마귀의 자녀 |
|---|---|---|
| 근원 | 하나님께로 남 | 마귀에게 속함 |
| 씨 | 하나님의 씨(말씀, 생명) | 거짓의 씨 |
| 삶 | 의를 행함 | 죄를 지속함 |
| 관계 | 형제를 사랑함 | 형제를 미워함 |
| 상태 | 빛 가운데 행함 | 어둠 가운데 행함 |
신앙은 소속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 1:12–13, 벧전 1:23)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면, 삶 속에서 반드시 ‘의’와 ‘사랑’이 나타난다.”
1월 16일(금) 요한일서 3: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씨(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하나님의 씨(God's seed)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여기서 “씨”(σπέρμα, sperma)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새 생명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영향이나 종교적 감화가 아니라,
-
하나님의 생명
-
하나님의 본성
-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
거듭남의 실제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씨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안에 심어진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 사람을 계속 하나님께 속하게 붙들어 두는 내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은 죄 가운데 계속 머무를 수 없다
-
넘어질 수는 있어도, 죄를 삶의 방식으로 삼고 평안히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죄와 양립할 수 없는 생명”이 이미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 인간의 씨 | 하나님의 씨 |
|---|---|
| 아담에게서 난 생명 | 하나님에게서 난 생명 |
| 죄에 자연스러움 | 죄에 불편함 |
| 어둠에 익숙 | 빛을 사모함 |
| 자기 중심 | 하나님 중심 |
“하나님의 씨”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내적 표지이며, 거듭남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여기서 씨는 문자적인 생물학적 씨앗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심겨진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씨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거듭남의 근원
하나님의 씨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게 하는 근원입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요 1:12–13, 벧전 1:23). -
내적 변화의 능력
이 씨는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능력을 가집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머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완전무죄가 아니라, 죄를 삶의 방식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변화를 뜻합니다. -
하나님의 성품의 시작
하나님의 씨는 우리 안에서-
빛을 사모하게 하고
-
의를 향하게 하며
-
형제를 사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품의 씨앗입니다.
-
요약하면,
하나님의 씨란, 믿는 자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 생명은 죄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자라나는 영적 생명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단지 신분만 바뀐 존재가 아니라,
속에 다른 생명이 심겨진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근원과 속성, 곧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핵심 본문은 요한일서 3장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z
하나님의 씨
-
“씨”는 생명의 근원, 본성, 말씀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의 씨 =
👉 하나님의 말씀
👉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새 생명
👉 거듭남의 근원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
1.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
2.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거하는 자
3. 죄를 본성으로 삼고 살 수 없는 자
4.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씨”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그 본질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하나님의 씨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생명이다
하나님의 씨는 인간의 사상이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새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근원이 됩니다(요 1:12–13)
2. 말씀의 씨이다
예수님은 씨를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눅 8:11).
하나님의 씨는 곧 진리의 말씀, 복음입니다(벧전 1:23)
3. 안에 거하며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 씨는 사람 안에 거하여 생각, 마음,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겉모습이 아니라속사람을 바꾼다
4. 죄를 지속적으로 짓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씨가 있는 자는
죄 가운데 계속 머무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요일 3:9).
넘어질 수는 있어도, 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5. 의와 진리를 추구하게 한다
하나님의 씨는 사람을
빛, 의, 진리 쪽으로 끌어갑니다.
거짓과 어둠을 미워하는 성향이 생깁니다.
6.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씨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납니다(요일 3:10).
삶의 열매로 그 정체성이 나타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씨는 사람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으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이끄는 내적 능력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씨”는 문자적인 씨앗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 사람 안에 심겨진 것을 의미합니다(벧전 1:23, 약 1:18, 요일 3:9).
이 하나님의 씨가 가진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위로부터 온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일 3:9)
죽은 영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
거듭남의 근거가 됨(요 1:12~13)
3. 진리의 성품을 가진다
거짓이 없고 빛과 의에 속함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씨임(눅 8:11)
4. 죄를 미워하게 만든다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죄 가운데 계속 거하는 삶을 살 수 없게 함
5.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의, 사랑, 빛의 성향을 맺게 함
하나님의 자녀다운 열매가 나타남(요일 2:29, 3:10)
“썩지 아니할 씨”(벧전 1:23)
세상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짐
정리하면,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사람 안에 심겨져 거듭나게 하며, 죄를 미워하고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씨란 무엇인가?
연구자들이 발굴에서 찾은 씨앗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해 본 결과, 이것은 대략 2,000년 전의 씨앗이라는 결론을 얻었는데, 그 씨는 다름이 아닌 대추야자 씨였다.
그 씨는 마르고 썩은 것처럼 보여 전혀 그 속에 생명력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심어보니, 그 중 한 개에서 싹이 트는 것이 아닌가! 세 개의 씨앗 중 하나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씨는 2005년도에 심어졌는데, 현재 이 대추야자 씨는 키가 121cm인 큰 대추야자 나무가 되었다고 하며, "므두셀라"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씨앗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씨에는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은 수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그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그리하여 그 씨는 자신의 씨의
종(種)대로 번식하고 또 씨를 보존하여 자신의 종족을 퍼뜨린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마치 나무나
식물의 씨 속에 생명이 있어 그 씨가 발아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듯이, 하나님의 씨에는 생명력이 들어 있어 발아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룬다. 또한, 하나님의 씨를 계속 전수하는 한 종족을 탄생시킨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씨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자.
씨 (Seed)
"씨"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식물이나 생물의 씨를 상기하게 된다. 모든 식물의 근본이 되며, 종족 보존과 종족 본능의 근간이 되는 것이
"씨"이다. 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들어 있어 이 씨의 생명력을 통해 식물의 발아와 자연계의 생성과 순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근본 태동의 중심이 되는 "씨"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을 연구해 보면, 이 "씨"(Seed)가 영적인 의미로 "후손"과 "자손"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씨 =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 (Seed)도 여자의 후손 (Seed)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킹 제임스 역)
여기서 "후손"으로 번역된 원어의 뜻을 보면, "Seed"(씨) 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방침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밝히신 최초의 "구속의 경륜"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어떻게 대속하시고 처리하셔서 인간을 구원 하실지에 대한 대안이 잘 나타나 있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죄의 창시자인 사단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이며, 그리고 구원의 경륜이 결국 타락한 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여 회복시킬지에 대한 계획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대안과 계획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씨(Seed), 곧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씨(Seed)인
하나님의 자녀와 후손들이 사단과 죄에 승리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임이 이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절에 나타난 "씨"의 의미는 후손이라는 뜻으로, 여자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또한 그분의 후손인 하나님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2. 씨 = 후손들(창세기 22:16-18)
창세기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descendants)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descendants)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offspring)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여기서도 "씨"가 "후손"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영어 성경에 이 "씨"라고 번역된 단어가 "descendants"(후손, 자손)로 되어 있다. 특별히 이 성경 절에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영어로 이 문장의 앞뒤의 문맥을 보면, 전자의 "씨"라는 단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단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후자에 "씨"는 그와는 다른 씨(복수)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씨(단수) = 예수 그리스도
씨(복수) = 하나님의 백성
3. 자손 = 씨 = 그리스도(갈라디아서 3:16)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seed)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seeds)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seed)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Now to Abraham and his seed were the promises made. He
saith not, And to seeds, as of many; but as of one, And to thy seed,
which is Christ."
이 성경 절에도 언급된 이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여기에도 자손이 영어로 "Seed"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단수인 "Seed"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씨 = 여자의 남은 자손(요한계시록 12:17)
요한계시록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Remnant of her seed),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Then the dragon was enraged at the woman and went off to make war against the rest of her offspring--those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hold to the testimony of Jesus.
위의 성경 절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여기서 씨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결국 이 여자의 남은 자
손들이 세상의 죄의 역사가 마치는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사명을 이룰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렇게 성경에서 "씨"는 후손과 자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씨"는,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임을 가리키는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 속 씨의 상징과 의미 정리
성경에서는 '씨'가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이 '씨'는 단순히
식물의 씨앗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구원의 소망, 복음의 확장, 영적 성장 등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래는
성경에서 씨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주제별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의 언약과 후손
아브라함의 씨와 언약 (창세기 12:1-3, 15:5, 22:17-1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히브리어: 제라)이 크게 번성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후손은 단순히 혈통적 번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며, 구속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의
시작을 상징하며,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여자의 후손 (창세기 3:15)
창세기 3:15에서 언급된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합니다. 여자의 씨는 동정녀 탄생을 의미하며,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첫 약속입니다. 이 씨는 타락한 인류에게 구속과 소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삭과 야곱의 씨 (창세기 26:4, 28:13-14)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들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대를 통해 지속됨을 의미하며, 씨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연속성을 상징합니다.
2. 하나님의 선택과 회복
이스라엘의 선택된 씨 (신명기 7:6-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 중에서 선택하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 선택은 그들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사랑에 기반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한 자들을 상징하며, 구원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남은 자의 씨와 회복 (이사야 6:13)
이사야 6:13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도 남은 자들이 씨앗으로서 회복의 시작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이 남은 자들은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할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씨를 통한 회복과 축복의 약속 (이사야 61:11)
이사야 61:11은 씨앗을 사용해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을 묘사합니다. 씨앗이 땅에 심겨 자라나듯,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모든 민족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성취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3. 신앙과 영적 성장
말씀의 씨앗 (마태복음 13:3-9, 18-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각각의 땅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결과가 달라지며, 이는 신앙의 성장을 위해 마음의 상태를 돌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겨자씨의 비유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작고 미미하더라도,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이를 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작은 믿음과 순종이 커다란 영적 성장과 영향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겨자씨 (마태복음 17:20)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의 크기보다 그 진정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큰 일을 이루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씨앗 (고린도전서 15:36-38)
바울은 부활을 씨앗에 비유합니다. 씨앗이 땅에 심겨져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나오듯, 우리의 육체도 죽어야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비유를 통해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설명합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심판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 (마가복음 4:26-29)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는 과정을 사람의 노력 없이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그 과정을 신뢰하고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선과 악의 씨 (마태복음 13:24-30, 36-43)
가라지의 비유에서 선한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라지는 악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심판의 날까지 인내하시며, 그때 악을 심판하고 의로운 자들을 거두어 들이십니다. 우리는 악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선한 씨앗을 심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해야 합니다.
결론
성경에서 '씨'와 '씨앗'은 하나님의 언약, 믿음, 구원의 소망, 복음의 확장, 영적 성장을 상징합니다. 씨앗은 작은 것이지만, 올바른 환경에서 자라 큰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 생활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비유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지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말씀의 씨앗을 우리의 마음에 잘 심고 돌보아, 그분의 영광을 위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
마귀에게 속한 자는 죄를 짓는다고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와 마귀로부터 난자를 대조하여 비교 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결과를 말하기보다 죄를 범하게 되는 원인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는 그의 속에“하나님의씨”가 있기 때문이다. 씨는 헬라어로“스페로마"를 번역한
말로“씨를 뿌리다, 흩어지게 하다”를 의미하는“스페이로”에서 유래하였다.
상징적으로 씨는 잔존자, 후손, 자손을 이르는 말이다.
여자의 씨(창3:15), 아브라함의 씨(갈3:16), 다윗의
씨(딤후2:8), 하나님의 씨(요일3:9),사람의 씨, 짐승의 씨(렘31:27) 왕의 씨(단1:3), 사람들의
씨(단2:43,9:1). 천국의 아들들(씨들)(마13:38)란 말이 있다. 씨는 단수와 복수가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씨가
무엇이냐는 주석가들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는 것 같다.
① 어떤 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② 어떤 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 한다(Wohlenberg, Stott).
③ 어떤 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Oecumenius, Theophylactus).
④ 어떤 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⑤ 어떤 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⑥ 필자의 견해는 씨는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 의씨, 을 의미하듯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위에서 난 속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윌리암 맥도날드/ A.M,S, 구딩/ 문영권 은 모두 하나님의 생명의 씨(본성)를 지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하나님의 생명의 본성)는 죄를 짓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육에서 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난 영에 속한 속 사람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로 난자란 위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를 뜻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자는 영이니”(요 3:6).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새 성품, 하나님의 성품)은 죄를 짓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문1: ‘하나님의 씨’는 무엇인가?
답: 생령(창2:7) 곧 산 영(고전15:45)이다. 즉 인성구조 ‘영과 육’ 그리고 인성요소 ‘영과 혼과 몸’에서 ‘영’이 하나님의 씨이다.
문2: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다(롬 8:16).
마귀의 씨
마귀의 씨는 성경에 직접 “마귀의 씨”라는 표현으로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은 “마귀에게서 난 자”, **“마귀의 자녀”**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마귀의 씨
1. 거짓의 영
2. 죄의 본성
3.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
4. 미움, 속임, 교만, 불의의 성향
마귀의 씨가 지배하는 사람
1. 진리를 거부하고
2. 죄를 자연스럽게 행하며
3. 형제를 미워하고
4.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을 따릅니다.
결정적 차이
| 구분 | 하나님의 씨 | 마귀의 씨 |
|---|---|---|
| 근원 | 하나님 | 마귀 |
| 주는 것 | 생명, 진리, 의 | 거짓, 죄, 사망 |
| 열매 | 사랑, 순종, 거룩 | 미움, 불순종, 불의 |
| 삶의 방향 | 하나님을 닮아감 | 자기 욕망을 따름 |
| 결과 | 하나님의 자녀 | 마귀의 자녀 |
요한일서는 이렇게 결론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결국 씨는 ‘정체성’ 입니다.
사람은 모두 육체로 태어나지만, 말씀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씨를 받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거듭남 없이 죄와 거짓을 따르는 삶은
그 사람 안에 여전히 마귀의 씨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씨가 바뀌는 사건 즉 생명의 전환입니다.
1월 15일(목) 요한일서 3: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귀의 일(3:8)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성경이 말하는 마귀의 특징은 그의 본질과 사역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1. 거짓의 아비
“그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 마귀의 본성은 거짓이며, 사람을 속여 진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 진리를 왜곡하고 속임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2. 살인자요 파괴자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요 8:44)
→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끊는 자입니다.
→ 생명을 파괴하고, 영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3. 미혹하는 자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 진리와 거짓을 섞어 사람을 혼란케 하고, 선한 것처럼 가장합니다(고후 11:14).
→ 거짓 교훈, 세상 가치, 육신의 정욕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4. 형제를 참소하는 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계 12:10)
→ 성도들의 죄와 약점을 들어 하나님 앞에서 고발하고, 양심을 정죄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고발하고 정
요한계시록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5. 죄를 짓게 하는 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8)
→ 불순종과 탐욕, 교만을 부추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합니다.
→ 사람을 죄로 유도하며, 불순종의 길로 이끕니다.
6. 빛이 아닌 어둠의 존재
그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빛의 천사로 가장함
-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4)
→ 겉보기에는 선하고 경건해 보이게 접근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7. 두려움과 종노릇을 심음
-
사람을 죽음의 공포로 종노릇하게 함 (히 2:14–15)
→ 불안, 정죄감, 절망으로 묶어 놓습니다.
히브리서 2:14-15
마귀는 거짓으로 미혹하고, 죄로 이끌며, 생명을 파괴하고, 성도를 참소하는 어둠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약 4:7),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엡 6장)고 권면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마귀의 특징과 역사는 분별되고 무력해집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그리스도의 사역은 진리, 생명, 자유, 회복입니다.
마귀의 일(the devil's work)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일”은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끌어가는 모든 역사를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성경이 말하는 마귀의 일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죄를 낳는 일
마귀는 사람을 속여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거짓말로 불순종 → 죄 → 단절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죄의 근원은 단순한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드는 영적 역사입니다.
2️⃣ 정죄와 절망을 심는 일
마귀는 죄를 짓게 한 후,
이제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신앙이냐.”
-
“하나님이 너를 받아주시겠느냐.”
즉, 죄를 짓게 할 때는 “괜찮다”고 하고,
회개하려 하면 “너는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가장 교묘한 일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아닌, 자기 죄에 묶어 두는 것입니다.
3️⃣ 진리를 흐리게 하는 일
마귀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반쯤만 말하고
은혜를 율법으로 바꾸며
복음을 종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앙을 가진 것 같지만,
자유도, 생명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죄를 사하시고
정죄를 끊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마귀의 일 = 끊고, 속이고, 묶는 일
예수님의 일 = 용서하고, 밝히고, 자유케 하는 일
그래서 복음이 있는 곳에는
마귀의 일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를 무너뜨리는 모든 사역을 의미합니다.
핵심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마귀의 일”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죄를 낳는 일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의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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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장 :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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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44 : “거짓의 아비”
👉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마귀의 통로입니다.
2. 거짓으로 미혹하는 일
마귀의 본질은 “거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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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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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가볍게 보이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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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십자가의 능력을 무력화함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미혹하는 자”, “속이는 자”, “고발자”라고 부릅니다.
3.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일
마귀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
정체성을 흔듦: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
죄책감과 정죄로 묶음
-
소망을 잃게 함
즉,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답지 않게 만드는 모든 역사가 마귀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하신 일
1. 죄를 없이 하심
2. 진리를 밝히심
3.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심
곧, 마귀의 일을 정반대로 뒤집는 사역입니다.
요한일서의 관점에서 보면,
마귀의 일은 “죄를 지속하게 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일은 “죄에서 벗어나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역사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눕니다.
곧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일”입니다.
이 구분은 요한일서 3장에 가장 분명히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의 핵심은 생명, 진리, 구원,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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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구원하심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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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심 (살전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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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자유케 하심 (요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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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심 (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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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빛 가운데 살게 하심 (요일 1:7)
하나님의 일은
죽은 자를 살리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며, 죄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마귀의 일
마귀의 일의 본질은 속임, 파괴, 죄,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렇게 규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44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
거짓으로 사람을 미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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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가운데 머물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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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분리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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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와 두려움으로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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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멸망으로 이끔
마귀의 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죄와 거짓 속에 묶어
하나님과 단절시키는 역사입니다.
결론
요한일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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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 → 의, 사랑, 생명, 진리
-
마귀의 일 → 죄, 거짓, 미움, 사망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마귀의 역사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Pronunciation [ sâṭân ]
Etymology / 7853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7회 사용
1. 요사(妖邪)스럽고 못된 잡귀(雜鬼)를 통틀어 이르는 말.
마귀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개역한글판에서는 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 단어 히브리어 “세드”는 영어성경으로는 “demons”로 번역했다.
즉 귀신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개역개정판에서도 “귀신들”로 번역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세드”가 한 군데 더 나오는 데 그 구절에서는 “사귀”로 번역했고, 영어판은 역시 “demons”로, 개정판에서는 “악령”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마귀”라는 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관하다.
그리고 귀신이란 말도 몇 구절이 안 된다.
다만 “사단”(대적자, 원수)이란 말은 종종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선 사단, 마귀, 귀신들이란 말은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기에 악령들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마귀와 사단은 동일한 한 존재이고 귀신은 대부분 복수로 사용되었다.
귀신은
1. 죽은 사람의 영혼인지
2.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인지
3. 그 타락한 천사가 죽은 조상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일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인지는 논란이 많다.
정확한 건 귀신이란 존재는 성경적으로 더럽고 악하고 각종 질병과 사고와도 연관이 되어 있으며 사단(마귀)에게 속한 영들이란 사실이다.
특히 죽은 사람을 연모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절하거나 제사하는 것도 아무리 부모나 조상이라도 참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불어 귀신을 접한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멀리해야 한다.
사도행전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바울이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은 사람의 몸 안에서 발견되고 그 안에 있다가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과 사단(마귀)는 온 천하는 꾀는 존재로 사람의 몸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만 그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8:16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태복음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글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에도 유교식 제사나 불교식 제사나 샤머니즘식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통합, 종교다원을 주장하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2. 마귀(사단)의 시작
- 물리적 발견 : 창세기 3장에 뱀이란 존재가 나온다.
1절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영어로, crafty 술수가 뛰어난, 교활한)
뱀은 하나님이 창조한 들짐승 중의 일부였다.
마귀가 뱀으로 둔갑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에 마귀가 접근했고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1. 뱀이란 동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데 그것은 왜 가장 간교하다고 했을까?
창세기 1장에 보면 사람이나 짐승들의 먹이는, 사람은 채소나 과일이었고, 짐승들은 푸른 풀이었다(창 1:29~30).
당시에는 사람이 짐승을 잡아먹거나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지 않았다.
그리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이후부터 채소와 짐승의 고기를 주어서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다만 짐승을 먹을 땐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다.
뱀도 풀만 먹고 살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간교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는 말은 사단이 뱀을 장악하니 뱀이 간교하게 변했다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뱀에게 악한 사단이 접근하니 뱀은 ‘사단화’가 되어버렸다. [사단은 대적자, 원수라는 뜻이다]
뱀이 말을 한다고?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동산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의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뱀과 사람이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으니 이 부분을 신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이 대화를 하와와 뱀의 대화로 보지 말고 하와와 사단의 대화로 봐야 한다.
귀신과 사람이 대화가 가능하듯 천사와 사람은 대화가 가능하다.
사단은 뱀의 몸 안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뱀의 몸 밖에서 조종했을까?
사단은 하늘에서 타락하여 음부로 추방당한 천사이기에 뱀의 몸에 들어가지 않는다.
굳이 지극히 제한된 뱀의 뇌 공간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머리를 지배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머리만 지배하면 몸은 자연스럽게 지배할 수 있다.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로서 온 천하를 두루 다니는 자이지 어느 한 사람 몸 안에만 있지 않는다.
귀신은 사람의 몸 안에 머물지만 천사들은 주로 몸 밖에서 활동하고,,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의 몸 안에서 쫓아내주셨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사단은 왜 하와에게 직접 유혹하지 않고 뱀을 이용했나?
에덴동산이란 곳은 특별히 구별된 곳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하신 곳이다.
동물들은 에덴동산 안과 밖을 자유롭게 이동했을 것이다.
다만 타락한 천사들은 아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이 보호하고 지켰을 것이다.
그 증거가 사단이 뱀을 이용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사단이 하와를 직접 유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귀(사단)의 시작
- 영적 발견 : 에스겔이 두로왕에 대한 애가(슬픈노래)를 지었는데..두로왕의 배후에 사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스 겔28:1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개정에는 ‘도장’, 영어로는 ‘model’)이었고 지혜가 충족(충만)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하늘)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개정, 불타는 돌)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개정,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
사탄은 근본이 천사인데, 그는 지혜와 아름다움이 가득하고 음악을 아주 잘했다.
그러나 교만하여 범죄하였고 결국 추방당하여 음부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들도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다. 나중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탈타로스, 깊은 심연; 게헨나 불못과 구분)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욥과 사단
욥기 1:7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울타리)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의 성품은 악하고 시기 질투..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이간하는 이간자(디아볼로스)...하나님과 사람 사이엔 말씀이 있다. 말씀을 버리게 함으로 복과 생명과 사랑을 받지 못하게...
-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의 일을 대적하고 마귀의 성품을 대적하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를 헬라어로 <디아볼로스-δτάβολος>라고 합니다. <디아-사이에 Between> <볼로스-이간질, 분열, 중상>라는 뜻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분열과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훼방하며 방해합니다. 사람끼리 오해와 분열로 고통하도록 끊임없이 중상합니다.
마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역사하는 방법이 무척 많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악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지만, 사람이 깨어 있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음을 집중적으로 공격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못하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들리지 못할 정도로 분주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문제에 집중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성령께서 빛을 비춰 주실 때 그 어두움의 정체와 계략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분별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비록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힘으로 이기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령의 검입니다. <검>을 헬라어로 <마카이라-μάχαιρα>라고 합니다. 양날이 날카로운 단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되는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늘의 Tool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세력이 있다.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결코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다.
마귀는 하나님을 직접 공격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를 공격하여, 결국 예수님을 은30에 팔아서,
십자가에 내주는 장본인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실 때, 마귀는 베드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뒤에 숨어 활동하는, 사탄의 세력을 보시고 꾸짖으셨다.
또 베드로를 공격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마귀는 우리들도
공격한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가 죽고 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게 될 때, 또 영적인 일들을 할 때(기도, 예배, 찬양…)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우리를 이용해서, 가정을 파괴하도록, 못된 말을 하게하고, 분노하고, 싸우고 속이고,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게 한다.
마귀는 몰래 들어와서, 우리 인격을 파괴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결코 시험이나 방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다. 슬픔도 있고, 핍박도 있고, 방해도
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에, 성도들은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마귀를 대적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악한 마귀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을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
1.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는데, 먼저 마귀는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마귀의 일, 마귀가 무엇을 하는지 아셨다.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고 했다.
그러면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죽이는가? 성도들로 하여금 죄짓게 만든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어쩌다 실수하여 범죄한 자가 아니라,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죄를 지었기에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니까, 죄를 계속 짓게 만든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막4:15).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사단은 은혜 받지 못하게, 귀를 막아 버린다. 예배에 참석해도 집중을 못하고, 다른 생각이 든다. 졸기에,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문제를 일으킨다. 예배에 빠질 핑계를 만든다. ‘비가 많이 와서, 차가 오지 않아서, 사업이 바빠서, 추석이라서…’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이처럼 핑계와 불평이 많다. 이는 마귀의 놀림감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2) 인간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다. 그에게 사단이 들어가자, 그는 사리분별력을 잃었다. 그때 사울은 민족을 구한 영웅이며, 사위 다윗을 죽이려고, 군인 3천명을 거느리고 다녔다.
사위가 죽으면 딸은 과부가 될 것인데, 그의 눈에는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사단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혼미케 했기 때문이다.
(3) 시험한다(마4장).
그는 예수님도 시험했다.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다.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다치지 않게 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사단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시험하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4) 전도하지 못하게 한다(살전2:18).
바울 사도가 전도하여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려고 노력했으나, 사단이 막았다.
사단은 전도하지 못하게 한다. 전도 방법이 시끄럽다, 왜 저렇게 전도하느냐며 비판하게 만든다.
(5)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준다(눅22:3).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자, 예수님을 넘겨줄 생각을 갖게 되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같이 지냈었지만, 사단이 들어가니 선생님을 돈 받고 파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6) 거짓말을 하게 한다(요8:44).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7) 사단은 괴롭히는 자다.
사단은 욥을 괴롭혔다. 그의 수많은 재산을 뺏어 갔다. 10남매의 생명도 앗아갔다. 욥의 몸에 병까지 들게 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내도록 한다.
(8) 사단은 참소 한다.
‘참소’는 남을 헐뜯어,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이간질시킨다. 그래서 원수 되게 하고, 싸우게 한다. 작은 죄라도 정죄하고, 고발한다. 또한 산발랏과 도비야처럼 속을 긁어놓는다(느4장).
사단의 하는 일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들을 괴롭히다가 지옥으로 끌고 간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항상 죄악에 매여 살아가고 있다. 병마와 질고를 지고, 항상 죽음의 짐을 지고 두려움을 느끼며,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기쁨 없는 인생을 산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인,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고, 분열시키고, 이간질시키고, 미혹케 한다. 성도들이 무너진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살리려고 할 때, 사단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그의 사명이다.
그래서 육적, 정신적, 영적으로 시험한다. 때때로 성도를 교만케 만들고, 때로는 낙심하게 만든다.
2.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
(1)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마귀가 하는 일을 아셨기에,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마귀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히2:14-15에 “…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로부터, 마귀의 일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다.
자유케 한다는 말은, 파괴자로 부터 우리를 풀어준다는 말이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귀에게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황폐해졌다. 인간의 모든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는 깨어졌다.
그 일로 재앙이 임했다. 인간은 불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가난이 임했다. 질병이 임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다. 죽음에는 악한 영이 있다. 악한 영은 허랑방탕하게 만들어 빚을 지게 만든다. 채무의 영이 역사하면, 도박, 마약 사치로, 빚을 많이 지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에덴동산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되었지만,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이 땅에 저주가 찾아왔다. 가난은 죄로 인하여 온 저주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저주를 회복시키셨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해 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고 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청산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를 가난과 저주에서, 하나님께서 옮겨서,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데리고 왔다. 신분의 큰 변화가 왔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우리의 죄와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란다.
(2)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우리는, 많은 축복을 받았다. 그 중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게 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마28:18).
인간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 권세, 흑암의 권세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흑암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 아래 있게 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는, 아들의 권세가 있는 곳이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시는, 아들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마귀는 이 땅의 임금이다.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이다. 누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졌는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런 권세를 가지셨다. 눅10장을 보면, 제자들이 전도 후에 보고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했다고 하였다(눅10:17-18). 또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탄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귀의 일을 멸하라고 주신 무기
어떤 전쟁이든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꼭 필요하다. 마귀와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다. 마귀와의 싸움에는 영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 무기를 사용하시어, 날마다 승리하시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1)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온 천하가 무릎을 꿇는다. 그 놀라우신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7-18).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다. 천국 열쇠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3-14).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생을 얻는다. 이 권세를 사용하라.
(2) 예수님의 보혈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용서받게 된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죄책감을 집어넣어, 우리를 괴롭히는 참소자다.
마귀는 죄를 가지고 공격할 때, 좌절하게 되고, 무력하게 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마귀 앞에 꼼짝 못하게 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덮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롬5:3).
(3)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말씀은 마귀를 이기는 성령의 검이다(엡6:17).
계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암송하면 더욱 더 좋다. 마귀는 말씀의 능력을 알기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암송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마귀가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
(4) 성령 안에서 기도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런 유는 기도 없이는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기도는 마귀를 물리치는 강한 무기가 된다. 기도는 난치병을 치료한다. 죽은 자를 살린다.
모세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렸다. 여호수아는 기도로 태양을 멈추게 했다. 엘리사는 군대를 막았다. 천군 천사를 보게 한다. 사라는 닫힌 태를 열었다. 다니엘은 사자의 입을 막는다. 베드로는 옥문을 열었다. 에스더는 민족을 위기에서 건졌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서 생명을 연장시킨다.
마귀를 우습게보지 말라.
마귀는 예수님도 유혹했다.
그러나 마귀를 너무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다.
마귀의 머리는 이미 깨졌다.
마귀는 예수님과는 비교되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믿음으로 쫓아내라.
요한복음 8:44
"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
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란 헬라어 디아볼로스 즉 '고소하는 자' , '헐뜻는 자'란 뜻입니다.
"사단"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 합니다.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망으 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눅8장에는 예수님께서 바닷가 배에 않으셔서 씨뿌리는 비유 를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 어지고 ,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지고, 또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 어지고 , 어떤 씨는 좋은 밭에 떨어져서 좋은 밭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데 , 여기에서 밭은 사람들의 마음이고 씨는 복음의 말씀인데 ,이 중에 길가에 떨어진 씨는 (눅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 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러한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 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귀의 올무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종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귀에게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 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 가롯유다는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 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팔아버리는 무서운 일을 하게 됩니 다.
마4장에는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시험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아담을 죄아래 넘어지게 하였 던 그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까지 시험하여 닦아 옵니다. 예수님 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가롯유다와 그의 통치아래 있는 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마귀를 완전히 이기시고 심판하사 멸망가운 데 던져 넣게 된것입니다.
(히2:14-16) 에서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 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래서 (계20:10)에는 마귀와 그의 사역 자들은 불과 유황 못 에 던지우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권세를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는 힘으로도 않됩니다.
돈으로도 않됩 니다. 마귀가 오히려 돈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마귀는 원자폭탄으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살 때에만 이길 수 있습니다.
벧전 5:8-9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 를
대적하라"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능력있고 권세 있는 믿음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는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 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종노릇 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특징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 기 때문에 사람을 하게 되고 ,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예수 그리 스도께는 불순종하며 가인과 같이 악해지는 것이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10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자여와 마귀의 자녀가 뚜렸하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는 예수 그리 스도의 권세로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은 생명으로 이길 수 있습 니다.
세속에 소망을 둔 사람은 소돔성에 살았던 롯의 부인과 같습 니다. 유혹에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않으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제나 께 어서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월 14일(수) 요한일서 3: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아들(3:8)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만든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합니다.
1️⃣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아버지를 완전히 나타내신 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하나님의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사랑, 거룩, 긍휼은 곧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3️⃣ 구원을 이루시는 유일한 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의 죽음은 단순한 한 인간의 희생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결론합니다.
“아들을 가진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즉,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신성, 계시, 구원의 권위를 모두 담은 이름이며,
이 고백 위에 기독교 신앙 전체가 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사 9:6)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 (요 1:14)
-
예수님은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독생자이십니다. -
곧,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이신 아들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이시며, 우리는 그와 같은 위치가 될 수 없습니다.
👉 예수 =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 본질이 하나님
2️⃣ 하나님의 자녀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
우리는 본래 죄 아래 있었으나,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양자(養子)**처럼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즉, 우리는 은혜로 자녀가 된 존재입니다.
👉 성도 = 믿음으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
핵심 정리
| 구분 |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의 자녀 |
|---|---|---|
| 대상 | 오직 예수 그리스도 |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 |
| 근거 | 본질적으로 하나님 | 은혜로 입양됨 |
| 관계 | 본래부터 아들 | 믿음으로 자녀 됨 |
| 성격 | 독생자 | 양자 |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 (롬 8:29)
이라 부르며,
우리는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
아들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는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는 같은 표현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와 적용 대상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The Son of God)
이 표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가장 완전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마 3:17)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예수님은
-
창조 이전부터 계셨고
-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며
-
**독생자(μόνογενής, only begotten Son)**로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들 됨”은
👉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 본래부터 하나님과 하나인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Children of God)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우리는 본래 죄 가운데 태어난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
거듭나고
-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며
-
은혜로 자녀가 됩니다.
즉,
| 구분 |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의 자녀 |
|---|---|---|
| 대상 | 예수 그리스도 | 예수 믿는 성도 |
| 근거 | 본질적, 영원한 아들 | 은혜로 입양된 자녀 |
| 성격 | 유일무이한 독생자 | 믿음으로 된 많은 자녀 |
| 관계 |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 | 하나님과 언약적·구속적 관계 |
정리하면,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
예수님을 “독생자”라 부르고,
-
우리를 “양자”, “자녀”라고 부릅니다.
이 구분은 예수의 신성과 우리의 구원의 은혜를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1월 13일(화) 요한일서 3: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3:5)
But you know that he appeared so that he might take away our sins. And in him is no sin.
No one who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 No one who continues to sin has either seen him or known him.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존재적 상태를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죄를 짓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짓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는 영역 가운데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죄의 영역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받는 영역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존재 방식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체성으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을 받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한 죄의 고백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존재적 상태를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말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실수나 연약함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첫째는 신분이 바뀌었다
둘째는 죄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났다
셋째는 더 이상 “죄 아래 있는 자”로 규정되지 않는다
요한일서는 죄를 두 가지 차원으로 봅니다.
-
행위로서의 죄 – 신자도 넘어질 수 있음 (요일 1:8–10)
-
지배로서의 죄 – 죄가 삶을 통치하는 상태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말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죄를 “짓지 않는다” → 완전무결이 아니라
-
죄 가운데 “계속 거하지 않는다”
-
죄를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삼지 않는다
결국 이 말씀은,
“그는 더 이상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라는 정체성의 선포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을 심문하던 빌라도의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19:6, 누가복음 23:4)
이 말은 단순한 무죄 판결이 아니라,
세상과 권력이 증언한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움을 보여줍니다.
-
사람들 앞에서 :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
하나님 앞에서 :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고” (벧전 2:22)
-
사탄 앞에서 : “그는 죄가 없으시니” (히 4:15)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셨을 뿐,
본질적으로는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이렇게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께 죄가 없었기에,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될 수 있었고,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입혀질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이 한 문장은 곧,
“그러므로 너에게는 정죄함이 없느니라”
(롬 8:1)로 이어지는 복음의 문입니다.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
1. 정의
- 속죄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죄와 부정(특히 부지중의 죄)을 속(贖)하여 용서를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
- 히브리어로 חַטָּאת (ḥaṭṭā’t) — “죄”와 “죄를 위한 제물” 두 가지 뜻을 가짐.
- 제물의 피로 죄를 덮어(속죄)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우고,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회복.
2. 성경적 근거
- 레위기 4~5장: 속죄제 규례 상세 기록.
- 민수기 15:22~31: 부지중에 지은 죄를 위한 제사.
- 히브리서 9~10장: 구약 속죄제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함.
3. 드리는 이유
- 주요 대상: 의도적 반역이 아니라 실수, 무지, 부지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경우.
- 부정의 정결: 출산, 유출병, 나병 치유 후 정결 절차(레 12, 14, 15장).
-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속죄를 집행.
4. 제물의 종류와 드리는 자에 따른 구분
드리는 자 제물 근거
| 대제사장, 온 회중 | 흠 없는 수송아지 | 레 4:3, 4:14 |
| 족장 | 흠 없는 숫염소 | 레 4:22-23 |
| 일반 백성 | 흠 없는 암염소 또는 암양 | 레 4:27-28, 4:32 |
| 가난한 자 |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 레 5:7 |
| 극빈자 | 고운 가루 1에바 10분의 1 | 레 5:11 |
- 죄 자백 — 제물을 회막 앞으로 끌고 와 머리에 안수(죄 전가 상징).
- 잡음 — 제물을 죽이고 피를 받아 제사장이 사용.
-
피 뿌림
- 대제사장/온 회중 : 피를 성소 휘장 앞과 향단 뿔에 7번 뿌림.
-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붓기.
- 기름 태움 — 내장 기름, 간 껍질, 콩팥 주위 기름을 번제단에 불사름.
-
나머지 고기 처리
- 대제사장/온 회중의 경우: 진영 밖에서 태움.
- 일반 백성: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음(죄 사함의 확증).
-
속죄 선포 — 제사장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
6. 속죄의 의미
- 죄의 심각성: 부지중의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 속죄가 필요함을 보여줌.
- 대속 사상: 죄인의 생명을 대신해 흠 없는 생물이 죽음.
- 거룩성 유지: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부정을 구분.
-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서 단번에 속죄를 이루심(히 10:10-14).
7.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제의 성취
- 구약 속죄제는 반복적·제한적이었음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번에·완전하게 이루어짐.
- 히브리서 13:11-12 —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심은 속죄제의 진영 밖 처리 규례와 연결.
- 죄를 전가받으시고 피 흘려 하나님과의 화목을 완성.
8. 요약 도표
요소 속죄제 예수 그리스도
| 제물 | 흠 없는 짐승 |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
| 피 | 성소, 제단, 뿔에 뿌림 | 십자가에서 흘려 전 인류를 덮음 |
| 반복성 | 매번 반복 | 단번에 영원한 속죄 |
| 적용 대상 | 부지중의 죄 | 모든 죄 |
| 제사장 | 아론 계열 | 멜기세덱 계열 대제사장(예수 자신) |
속죄제(贖罪祭): 부지중에 지은 죄를 위한 하나님과의 화해
속죄제(Sin Offering)는 구약 성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다섯 가지 주요 제사 중 하나입니다. 이는 제사 드리는 자가 '부지중에(unintentionally)' 지은 죄나 부정한 상태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었을 때, 그 죄를 용서받고 정결함을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의도적인 반역죄가 아닌, 실수나 부주의, 또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범한 죄를 위한 것입니다.
1. 속죄제의 목적과 의의
- 죄의 용서: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개인이 부지중에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율법을 어긴 '고의적인 죄(손 번쩍 드는 죄)'와는 구별됩니다.
- 정결함의 회복: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부정한 상태(예: 출산, 접촉)로부터 정결함을 얻어 하나님과 거룩한 공동체 속에서 교제할 자격을 회복하는 의미도 가집니다.
- 성소의 정화: 제사장의 죄나 온 회중의 죄로 인해 성소(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가 더러워졌을 때, 속죄제를 통해 성소까지 정결하게 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2. 제사 드리는 방법: 대상별 규정 (레위기 4장)
속죄제에 사용되는 제물과 제사 절차는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죄의 책임과 영향력이 클수록 더 큰 제물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① 대제사장 또는 온 회중의 죄
- 제물: 흠 없는 수송아지
-
절차:
- 대제사장이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손을 얹음)하여 죄를 전가합니다.
- 제물을 도살한 후,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손가락에 찍어 휘장(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막)에 일곱 번 뿌립니다.
- 분향단 뿔에 피를 바르고, 남은 피는 성소 앞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 등은 번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 나머지 몸 전체(가죽, 고기, 내장)는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가 불태웁니다. (제사장이 먹을 수 없음)
② 족장(지도자)의 죄
- 제물: 흠 없는 숫염소
-
절차:
- 제물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도살합니다.
- 피를 제사장이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 제물의 모든 기름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 남은 고기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③ 평민의 죄
- 제물: 흠 없는 어린 암염소 또는 어린 암양
-
절차:
- 족장의 경우와 동일하게 제물에 안수하고 도살합니다.
- 피는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 기름은 불사릅니다.
- 남은 고기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④ 가난한 자의 죄
- 제물: 비둘기 두 마리, 또는 고운 가루
-
절차:
-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로, 형편에 따라 산비둘기 두 마리나 고운 밀가루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 이 경우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번제는 전부를 태우는 제사)로 드렸습니다.
3. 신학적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속죄제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동물의 죽음을 통해 죄가 용서되는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의 원리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직접 벌을 받는 대신, 죄 없는 제물이 대신 죽음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속죄제는 불완전했습니다.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고, 고의적인 죄를 완전히 씻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제사의 완성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은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드려진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제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더 이상 동물의 피를 통한 속죄제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속죄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제사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월 12일(월) 요한일서 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는 불법(3:4)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죄(罪)라는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네 가지(四)" "아닌 것(不)"이란 두 의미가 합성된 문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죄를 네 가지 아닌 것들로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불법(不法) breaks the law, illegality
둘째, 불신(不信) do not believe, distrust
셋째, 불선(不善) doesn't do the good, not good
넷째, 불의(不義) all wrongdoing, injustice
첫째,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breaks the law, illegality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둘째,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do not believe, distrust
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셋째,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doesn't do the good, not good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넷째,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all wrongdoing, injustice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죄라는 한문자의 유래는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형상에서 출발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갈등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면 등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주 보고 있던 사람이 등을 돌린 형상이 바로 죄라는 문자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죄는 하나님과 마주보고 서로 사랑하던 신령한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님을 떠난 형상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하나님과 사이가 좋은 상태라고 한다면 죄는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진 상태와 같습니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도망친 모습을 연상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고 무너트리는 죄를 버리고 어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길을 회개라고 합니다.
1월 10일(토) 요한일서 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망을 가진 자(3:3)
Everyone who has this hope in him purifies himself, just as he is pure.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에 대한 확실한 바라봄입니다.
요한일서 문맥에서의 소망은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3:1)
2. 장차 주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아질 것이라는 약속 (3:2)
3. 그분을 그대로 뵙게 될 미래에 대한 확신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화(榮化)에 대한 소망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 (현재형 삶)
요한은 “소망을 가진 자”를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으로 정의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1.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음
2. 회개 없는 신앙에 안주하지 않음
3. 반복적이지만 진실한 회개 속에 삶
4. 소망은 거룩을 낳는 동력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기준 ❌
세상 기준 ❌
그리스도의 성품이 기준 ⭕
미래가 현재를 다스린다
-
장차 될 영광이
지금의 선택과 태도를 결정함
종말 신앙이 윤리적 삶으로 이어짐
성경이 말하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비결”은
겉모습을 관리하는 방법이 아니라 영혼과 삶을 실제로 정결하게 유지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1️⃣ 소망을 붙드는 것(출발점)
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정결의 시작은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
무엇을 소망하느냐가 삶을 결정합니다
-
주님을 뵙게 될 소망, 그분과 닮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을 때 자연히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정결은 미래의 소망에서 현재의 삶으로 흘러옵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는 것 (숨기지 않음)
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비결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니라, 숨기지 않는 삶입니다.
핑계 ❌ 합리화 ❌ 은폐 ❌
빛 앞으로 가져오기 ⭕
빛 앞에 드러나는 순간, 피가 역사합니다.
3️⃣ 죄를 즉시 자백하는 것 (지연하지 않음)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더러워지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미루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 = 죄를 늦게 짓는 사람 ❌
성숙한 신앙 = 빨리 회개하는 사람 ⭕
즉시 자백 → 즉시 깨끗함
4️⃣ 말씀으로 자신을 씻는 것 (지속 관리)
에베소서 5:26
“말씀으로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사”
말씀은 거울이자 세정제입니다.
- 말씀을 멀리하면 더러움에 둔감해지고
- 말씀 앞에 서면 미세한 죄까지 보입니다
정결은 한 번의 회개가 아니라 말씀에 계속 노출되는 삶입니다.
5️⃣ 주님을 닮으려는 방향을 유지하는 것
요한일서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완벽함이 목표가 아닙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넘어질 수는 있어도
죄를 편하게 여기지는 않음
더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이 유지됨
이 방향 자체가 이미 정결의 증거입니다.
핵심 요약 (비결 한 문장)
주님을 만날 소망을 품고,
죄를 숨기지 말고,
즉시 자백하며,
말씀 앞에 자신을 두고,
그분을 닮으려는 방향을 유지하라.
그러면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정결을 방해하는 5가지 착각
1️⃣ “정결한 사람은 죄를 거의 안 짓는다”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 착각 : 정결 = 무결점
✅ 진리 : 정결 = 죄를 인정하고 처리하는 능력
👉 정결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한 번 회개했으니 이제 괜찮다”
요한일서 1:7 (현재진행형)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착각 : 회개는 과거 사건
✅ 진리 : 회개는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삶의 리듬
회개는 구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3️⃣ “마음만 깨끗하면 행동은 덜 중요하다”
요한일서 3:18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착각 : 마음 ≠ 삶
✅ 진리 : 마음은 반드시 삶으로 흘러나옵니다
👉 행동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마음의 정결도 점검이 필요합니다.
4️⃣ “정결을 말하면 율법주의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착각 : 순종 = 율법주의
✅ 진리 : 사랑에서 나온 순종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
👉 문제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왜, 무엇을 의지해 지키느냐입니다.
5️⃣ “은혜가 있으니 긴장할 필요 없다”
요한일서 2:1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착각 : 은혜 = 방심
✅ 진리 : 은혜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만드는 힘
은혜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에 더 민감해집니다.
② 정결한 삶 vs 율법주의 (명확한 차이)
| 구분 | 정결한 삶 | 율법주의 |
|---|---|---|
| 출발점 | 하나님과의 관계 | 자기 의 |
| 동기 | 사랑, 소망 | 두려움, 비교 |
| 죄에 대한 태도 | 즉시 인정·회개 | 숨김·합리화 |
| 실패했을 때 | 다시 주께 나아감 | 자책 or 포기 |
| 중심 질문 | “주님이 기뻐하실까?” | “ 이 정도면 괜찮지?” |
| 열매 | 겸손, 자유 | 교만 or 위선 |
정결한 삶은 관계를 지키려는 마음이고
📌 율법주의는 기준을 지켜 자신을 증명하려는 태도입니다.
③ 요한일서로 묵상하는 「정결 훈련표」
하루 10–15분, 부담 없이 지속하는 훈련
🔹 매일 기본 질문 (3단계)
-
빛 앞에 서기
-
오늘 말씀 앞에서 드러난 내 마음은?
-
불편했지만 외면하고 싶은 부분은?
-
즉시 자백
-
변명하지 않고 주님께 말할 수 있는 죄는?
-
감정·태도·말·생각 중 하나만이라도 고백하기
-
방향 점검
-
오늘 나는 주님을 닮은 선택을 했는가?
아니면 육신의 편의를 따랐는가?
🔹 주간 정결 묵상 스케줄 (요한일서)
| 요일 | 본문 | 묵상 포인트 |
|---|---|---|
| 월 | 요일 1:5–7 |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
| 화 | 요일 1:8–9 | 즉시 자백하고 있는가 |
| 수 | 요일 2:1–2 | 중보자 예수를 의지하는가 |
| 목 | 요일 2:3–6 | 삶의 방향이 주님과 같은가 |
| 금 | 요일 2:15–17 | 세상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
| 토 | 요일 3:3–6 | 소망이 삶을 정결케 하는가 |
| 주 | 요일 5:18–21 | 마음의 우상을 버리고 있는가 |
한 문장 기도 (정결의 기도)
“주님, 오늘도 저를 숨김없이 빛으로 이끄시고 예수의 피를 의지해 깨끗함 가운데 걷게 하소서.”
마지막 핵심 정리
정결은 자신을 단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요한일서 전체 흐름에서 본 ‘소망을 가진 자’
| 구분 | 설명 |
|---|---|
| 거짓 소망 |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 |
| 참된 소망 |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미워함 |
| 결과 | 담대함, 확신, 거룩한 삶 |
요한복음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의 소망 흐름“소망은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주를 다시 뵐 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다.”
서로 떨어진 책이 아니라,
‘소망의 점진적 계시’ 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야 정확해집니다.
요한복음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소망의 흐름” 한눈에 보기
| 책 | 소망의 초점 | 핵심 질문 |
|---|---|---|
| 요한복음 | 영생의 시작 |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
| 요한일서 | 영생의 확신과 검증 | “내가 정말 그 생명 안에 있는가?” |
| 요한계시록 | 영생의 완성과 성취 | “그 생명은 어디로 완성되는가?” |
요한복음 : 소망의 시작
영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1.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다.
2.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오는 생명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소망의 출발점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생명을 받음
요한복음의 핵심 소망
1. “지금” 생명을 소유함
2. 빛 안으로 나아옴
3.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짐 (요 5:24)
소망은 선물로 주어진다
요한일서 : 소망의 증거
영생은 “확인되고 증명되는 삶”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영생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
요한일서 소망의 특징
1. 빛 가운데 행함
2.죄를 미워하고 회개함
3. 형제를 사랑함
끝까지 거함(μένειν)“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소망은 윤리적· 관계적 증거를 낳음
요한일서의 긴장
-
이미 영생을 가졌으나
-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음
📖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요일 3:2)
👉 이것이 ‘이미–아직’의 소망
3️⃣ 요한계시록 : 소망의 완성
🔹 감추어진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계 22:12)
-
더 이상 믿음으로만 아는 하나님 ❌
-
눈으로 뵈는 하나님 ⭕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계 22:4)
🔹 요한계시록의 소망
눈물, 사망, 고통의 종결 (계 21:4)
어린양과의 혼인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과의 영원한 동거
소망은 역사의 결말이자 영생의 완성
세 권을 관통하는 소망의 문장
요한복음 : “생명을 얻었다”
요한일서 : “그 생명 안에 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 “그 생명이 완전히 드러난다”
신학적 한 문장 요약
“요한의 소망은 도피적 내세관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하고 끝을 확실하게 하는 생명의 소망이다.”
설교 구조로 압축하면
1. 받은 생명 (요한복음)
2. 확인되는 생명 (요한일서)
3. 완성되는 생명 (요한계시록)
1월 9일(금) 요한일서 2:24-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원한 생명(2:25)
And this is what he promised us--even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완성된 영원한 생명이 아니므로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적 관계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때 안다는 것(기노스코)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를 통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룰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그의 예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요일 2:4-5).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따라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삶
둘째는 사랑 가운데 행하는삶
셋째는 죄를 미워하는 삶
넷째는 진리 가운데 거하는 삶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과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증거합니다.
동행한다는(할라크)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온갖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주와 동행하는 즐거움만 생각하고 누려봅시다.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의 의미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그러나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Deliver yourself, 잠 6:5)”,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 스스로 구원하라(save yourselves From the fierce anger of the LORD, 렘 51:45)”는 말씀들처럼 ‘능동적(active, 能動的)’인 표현들도 있다.
‘구원’을 은혜의존적 ‘피동형(passive, 被動形)’으로 이해하는 정통 기독교인들에겐 이런 어법이 당혹스럽다. 이와 달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모토로 삼는 자연종교가들(naturalreligioner)이나 ‘신인협동(Synergism)’을 부르짖는 알미니안들(arminians)에게 그것은 그들 주장의 논거가 된다.
물론 이 말씀들은 문맥대로라면, 전자(잠 6:5)는 ‘자신을 파멸에 빠트리는 보증은 서지 말라. 혹 부지중에 보증을 섰다면,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듯,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듯 신속히 빠져나오라’는 뜻이다.
후자(렘 51:45)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파멸할 세상 바벨론과 벗됨으로(약 4:4) 심판 때 그들이 받을 화(禍)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과의 구별된 삶을 요청하는 ‘성화에의 요청(고후 6:15-18)’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이 구절들을 ‘기독교 구원론’과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은, 공격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론’의 근간으로 삼아 기독교 구원관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라
왜곡자들은 ‘스스로 구원하라’를 자신들의 ‘신인협동 구원’의 근거 구절로 오용(誤用)하지만, 사실 그 말씀은 ‘구원을 받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를 뒷받침해 줄 예증 구절 중 하나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너희 스스로를 구원하라(Save yourselves from this corrupt generation, 행 2:24)”이다. 거두절미한 채 이 구절 자체만 해석하면,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으라’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과 연결지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사함을 얻어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뜻이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41).”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하라’가 ‘자력 구원에의 명령’이 아닌 전적 무능한 죄인들을 향해 ‘내가 주는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자비에의 초대임을 알게 된다.
◈구원을 택하라
‘스스로 구원하라’는‘구원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인간의 전적 무능(Total Depravity)’을 믿는 ‘개혁주의 신학’에선 자의적(arbitrary, 恣意的)이고 자결적(self-determinative, 自決的)인 냄새를 풍기는 ‘선택’이라는 용어를 쓰길 좋아하지 않으나(대신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구원을 받아들인다’ 같은 말을 쓰길 좋아한다), 반대자들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부득불 그것을 차용한다.
‘스스로 구원하라’가 ‘구원을 택하라’와 동일시된 내용 중 하나가 다음 구절이 아닌가 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생명과 복을 선택하느냐,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느냐’는 ‘자신을 구원하느냐 자신을 파멸시키느냐’는 문제이고, 그 중 ‘생명과 복을 선택함’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우상’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한 것 역시 ‘구원과 저주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고, 하나님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임을 말씀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 24:15, 20).”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심판을 면하라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 역시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난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감으로서 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 34:22).”
신약적으론 구속자(救贖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며,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내게…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반면 죄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피난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가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전 2:1).”
또한 ‘정죄의 율법’에서 떠나는 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무지한 죄인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율법아래 있기를 원하나 사실 그것은 ‘소가 스스로 푸줏간으로 들어가듯’,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갈 3:10).
이는 ‘율법의 기능’이 구원이 아닌 심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은 우리를 그 저주스런 율법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었다(갈 3:13).
그런데 어리석게도 죄인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율법’ 아래 들어감으로서 자신들을 저주에 빠뜨리고 “그의 거룩한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히 10:29).”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보았듯,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씀에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게 하는 ‘자력 구원’이나 ‘신인협동 구원’의 여지가 일체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전적무능한 죄인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다.
참 하나님이란 성경이 증언하는 유일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우상이나 인간의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입니다.
📖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1️⃣ 유일하신 하나님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니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신 4:35)
-
참 하나님은 대체 불가능한 분, 비교 대상이 없는 분입니다.
2️⃣ 살아 계신 하나님
-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 (렘 10:10)
-
참 하나님은 개념·사상·종교 체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4️⃣ 진리이신 하나님
-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 (요일 5:20)
-
참 하나님은 진리의 기준이시며, 거짓과 혼합되지 않습니다.
⚖️ 참 하나님 vs 거짓 신
| 참 하나님 | 거짓 신 |
|---|---|
| 살아 계심 | 사람이 만든 개념 |
| 말씀하심 | 침묵함 |
| 죄를 드러내심 | 죄를 합리화함 |
| 회개로 인도 | 자기만족으로 인도 |
| 생명을 주심 | 결국 공허함 |
핵심 요약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우상이나 인간의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니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신 4:35)
-
참 하나님은 대체 불가능한 분, 비교 대상이 없는 분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 (렘 10:10)
-
참 하나님은 개념·사상·종교 체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 (요일 5:20)
참 하나님은 진리의 기준이시며, 거짓과 혼합되지 않습니다.
참 하나님 vs 거짓 신
| 참 하나님 | 거짓 신 |
|---|---|
| 살아 계심 | 사람이 만든 개념 |
| 말씀하심 | 침묵함 |
| 죄를 드러내심 | 죄를 합리화함 |
| 회개로 인도 | 자기만족으로 인도 |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 앎 = 삶의 변화
-
빛 가운데 행함
-
사랑 가운데 거함
-
죄를 미워함
-
진리에 머묾
이것이 인격적 앎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
하나님을 정보나 개념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살아 계신 분으로 관계 맺으며 아는 것을 뜻합니다.
지식적 앎 vs 인격적 앎
지식적 앎
-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앎
-
성경 지식, 교리, 신학적 정보
-
머리로 아는 믿음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 참되지만 구원과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음
❤️ 인격적 앎
-
하나님을 ‘그분 자신’으로 아는 것
-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앎
-
사랑·신뢰·순종·교제가 포함됨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 기노스코)는 경험적· 관계적 앎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특징
① 하나님과 대화가 있다
-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교제
-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요 10:27)
②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간다
-
무엇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지 점점 분별
-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으로 순종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③ 죄에 대해 민감해진다
-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관계의 아픔으로 느낌
-
회개는 형벌 회피가 아니라 관계 회복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시 51:4)
④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향이 바뀐다
-
문제보다 하나님을 먼저 찾음
-
계산보다 신뢰가 앞섬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라” (잠 3:5)
⑤ 사랑이 삶으로 드러난다
-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으로 연결
-
신앙이 ‘형식’이 아니라 ‘삶의 열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1)
요한일서 관점에서 본 인격적 앎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를 안다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요일 2:4)
👉 앎 = 삶의 변화
빛 가운데 행함사랑 가운데 거함
죄를 미워함
진리에 머묾
이것이 인격적 앎의 증거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신뢰하며 동행하는 ‘주님’으로 아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일서의 흐름에서 매우 분명한 의미를 가집니다.
핵심 성경(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요일 3:1)
-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 (요일 3:2)
-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요일 5:13)
👉 즉, 장차 될 영광스러운 상태에 대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
🔹 ① 현재의 삶이 달라진다
소망은 미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음
회개 없는 신앙에 머물지 않음
빛 가운데 행하려는 실제적 삶 (요일 1:7)
🔹 ② 죄와 타협하지 않는다
소망은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거룩의 동력입니다.
“어차피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 “주를 뵐 날이 있기에 지금을 정결하게 산다”
🔹 ③ 인내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고난을 견디는 힘입니다.
-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요일 3:1)
당장 결과가 없어 보여도
👉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걷는 태도
소망이 없는 상태와의 대비
| 소망을 가진 자 | 소망이 없는 신앙 |
|---|---|
| 거룩을 추구함 | 죄에 둔감함 |
| 회개가 지속됨 | 자기합리화 |
| 주의 재림을 의식함 | 현세 중심 |
| 정체성이 분명함 | 신앙이 형식화됨 |
한 문장 요약
소망을 가진 자란, 장차 주를 뵐 것을 믿기에 오늘의 삶을 정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 =
-
무한한 시간 ❌
-
천국 티켓 ❌
-
하나님을 ‘아는’ 관계 ⭕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는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언약적 교제를 뜻합니다.
언제 시작되는가?
요한일서 5:13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믿는 자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생명입니다.
-
이미 시작됨 → 현재적 영생
완성될 것 → 미래적 영생
영원한 생명의 근원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핵심 : 영생은 행위의 보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거룩한 삶의 관계
요한일서는 영생을 가진 자의 특징을 분명히 말합니다.
요일 3: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영생은윤리적 열매를 반드시 낳습니다.
-
사랑
-
빛 가운데 행함
-
죄를 미워함
-
회개하는 삶
⚠️ 영생 ≠ 방종의 면허
“속히 오리라”와 영원한 생명 (연결)
예수께서 “속히 오리라” 하신 이유는
영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일 3:2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은 영생을 소유함
👉 그날에는 영생을 완전히 드러냄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시작되어
재림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적 관계입니다.
**영원한 생명(永遠한 生命)**은 성경에서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1️⃣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의 관점)
📖 요한복음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생명
(지식이 아니라 교제·연합)
2️⃣ 언제 시작되는가?
❌ 죽은 후에만 시작되는 것 아님
⭕ 지금 이미 시작됨
📖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일서 5:13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소망 + 현재의 소유
3️⃣ 영원한 생명은 ‘누가’ 가지는가?
📖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4️⃣ 영원한 생명의 특징
✨ 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생명
📖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가운데 거하지 않음
✨ ② 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회개 없는 완전함 ❌
→ 회개하는 삶 ⭕
✨ ③ 사랑으로 증명되는 생명
📖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
→ 영원한 생명은 열매로 드러남
5️⃣ 흔한 오해 정리
| 오해 | 성경적 진리 |
|---|---|
| 영원한 생명 = 천국 입장권 | ❌ |
| 영원한 생명 = 관계적 생명 | ⭕ |
| 죽고 나서 시작 | ❌ |
| 지금부터 누림 | ⭕ |
| 믿는다 말만 하면 됨 | ❌ |
| 빛·사랑·진리로 나타남 | ⭕ |
6️⃣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이며, 빛과 사랑과 진리로 증명되는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永遠한 生命)**은 성경에서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1️⃣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의 관점)
📖 요한복음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생명
(지식이 아니라 교제·연합)
2️⃣ 언제 시작되는가?
❌ 죽은 후에만 시작되는 것 아님
⭕ 지금 이미 시작됨
📖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일서 5:13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소망 + 현재의 소유
3️⃣ 영원한 생명은 ‘누가’ 가지는가?
📖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4️⃣ 영원한 생명의 특징
✨ 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생명
📖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가운데 거하지 않음
✨ ② 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회개 없는 완전함 ❌
→ 회개하는 삶 ⭕
✨ ③ 사랑으로 증명되는 생명
📖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
→ 영원한 생명은 열매로 드러남
5️⃣ 흔한 오해 정리
| 오해 | 성경적 진리 |
|---|---|
| 영원한 생명 = 천국 입장권 | ❌ |
| 영원한 생명 = 관계적 생명 | ⭕ |
| 죽고 나서 시작 | ❌ |
| 지금부터 누림 | ⭕ |
| 믿는다 말만 하면 됨 | ❌ |
| 빛·사랑·진리로 나타남 | ⭕ |
6️⃣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이며, 빛과 사랑과 진리로 증명되는 생명이다.
원하시면
👉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생명 vs 천국”
같은 주제로 더 깊이 이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아주 중요한 세 주제입니다. 요한일서의 흐름에 맞춰 하나씩, 그러나 서로 연결되도록 정리해 드릴게요.
1️⃣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핵심 명제
영원한 생명은 ‘느낌’이 아니라 ‘근거’ 위에 있는 확신이다.
📖 요한일서 5:13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요한은 성도들이
막연히 기대하도록 쓴 것이 아니라
👉 ‘알게 하려’ 기록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의 3가지 성경적 근거 (요한일서)
① 객관적 근거: 예수 그리스도
📖 요일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 확신의 중심 = 내 믿음의 강도 ❌ / 예수의 실재 ⭕
② 내적 증거: 성령의 증언
📖 요일 3:24
“그의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 성령은
-
죄를 미워하게 하고
-
진리를 사랑하게 하며
-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
③ 외적 열매: 삶의 변화
📖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순종은 구원의 조건 ❌
✔️ 구원의 증거 ⭕
⚠️ 주의
-
의심이 있다고 구원 없음 ❌
-
회개 없는 안일함은 위험 ⭕
2️⃣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결론부터 말하면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는 그것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은 신앙 고백은 드러난다.
📖 요한일서의 결정적 구절
📖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떠남의 이유는
잃어버림 ❌ / 본래 소유하지 않음 ⭕
왜 영원한 생명은 잃지 않는가?
① 생명의 성질 때문
📖 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라”
→ 영원한 생명 =
❌ 조건부 생명
⭕ 하나님의 선물
② 생명의 근원이 ‘그리스도’이기 때문
📖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내가 붙잡는 생명 ❌
→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 ⭕
⚠️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 모습 | 성경적 판단 |
|---|---|
| 죄 가운데 계속 거함 | 영생의 증거 없음 |
| 회개 없이 안주 | 자기 기만 |
| 떠났으나 끝까지 빛을 거부 | 처음부터 거듭나지 않음 |
📖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안에 거하지 않음)
3️⃣ 영원한 생명 vs 천국
❗ 매우 중요한 구분
| 구분 | 영원한 생명 | 천국 |
|---|---|---|
| 본질 | 생명 | 장소/나라 |
| 시작 | 지금 | 죽음 이후 완성 |
| 성격 | 관계 | 상태 |
| 중심 | 하나님과의 연합 | 하나님의 통치 |
📖 성경의 관점
✔️ 영원한 생명
📖 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 관계의 생명
✔️ 천국
📖 마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
→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
중요한 진리
천국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지,
천국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다.
-
영원한 생명 = 자격
-
천국 = 완성
🧭 전체 요약 한 눈에
✔️ 영원한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생명
✔️ 구원의 확신은 예수·성령·열매 위에 세워짐
✔️ 참된 영생은 잃지 않으나, 거짓 신앙은 드러남
✔️ 천국은 영생의 결과이지 근원은 아님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신학적 연결
요한계시록은 요한일서의 종말적 완성
요한일서는 요한계시록의 현재적 적용
핵심 주제 연결표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
신학 연결 |
하나님은 빛 |
어린양의 영광 |
빛은 인격이며 심판 기준 |
하나님은 사랑 |
어린양의 피 |
사랑은 십자가에서 정의로 드러남 |
적그리스도 |
짐승·거짓선지자 |
영의 미혹 → 제국적 체계 |
세상과 구별 |
바벨론 심판 |
세상 사랑의 종말 |
이기는 자 |
이기는 자의 상급 |
믿음 = 승리 |
담대함 |
인 맞은 성도 |
심판 앞에서의 담대함 |
적그리스도 개념의 확장
• 요한일서
• →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다”
• (교리·영적 미혹)
• 요한계시록
• → 그 영이 정치·경제·종교 체계로 구체화됨
• (짐승,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영’으로 오고, 나중에 ‘체계’로 완성된다.
Ⅳ.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
•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일곱 교회→ “교회는 종말을 기다리며 지금 심판받는다”
• 요한 신학→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진리는 거짓이고,
• 진리 안에 서지 않는 사랑은 미혹이다”
1월 8일(목) 요한일서 2:18-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적그리스도(2:22)
Who is the liar? It is the man who denies that Jesus is the Christ. Such a man is the antichrist--he denies the Father and the Son.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며,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거짓 세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이를 한 인물로만 한정하지 않고, 영(정신)· 사상· 운동· 체계까지 포함해 다층적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
👉 ‘적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는 요한서신에만 직접 등장합니다.
-
요한일서 2:18 /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요한일서 2:22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
요한일서 4:3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
요한이서 1:7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적그리스도라”
핵심 요지
-
예수의 성육신, 메시아 되심, 주권을 부인
교회 안에서 일어나 성도를 미혹함
적그리스도의 핵심 특징 (성경 종합)
| 구분 | 내용 |
|---|---|
| 정체 |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인 |
| 방식 | 거짓 가르침, 미혹, 대체 |
| 위치 | 종종 교회 안에서 활동 |
| 본질 | “적(反)”이자 “대신(代)” |
| 시대성 | 말세 전반에 지속적으로 존재 |
※ ‘anti’는 반대 + 대신하다 두 의미를 모두 가짐
적그리스도 vs 관련 종말 개념
성경은 여러 표현으로 같은 실체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 표현 | 성경 | 강조점 |
|---|---|---|
| 적그리스도 | 요한서신 | 그리스도 부인 |
| 불법의 사람 | 살후 2장 | 하나님 대적, 자기를 신격화 |
| 작은 뿔 | 다니엘 7장 | 권세·박해 |
| 짐승 | 계시록 13장 | 정치·종교적 체계 |
| 거짓 선지자 | 계 13, 19장 | 기적을 통한 미혹 |
👉 서로 다른 인물이라기보다, 같은 악의 세력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성경적 균형은 둘 다입니다.
-
✔️ 현재적:
→ 이미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 -
✔️ 종말적:
→ 마지막 때 집약적으로 드러날 대표적 인물/체계
📖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오늘 교회에 주는 분별 기준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미래 추측 대상이 아니라 현재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분별 질문
1.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가?
2. 십자가와 성육신을 왜곡하지 않는가?
3. 복음보다 다른 대안적 구원을 말하지 않는가?
4. 은혜 없이 권력·성공·체험을 절대화하지 않는가?
적그리스도의 핵심 전략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다른 것을 중심에 두는 것”
요약 한 문장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체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말세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
anti = “대적하여”, “대신하여”
-
즉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자 또는 영
-
단순히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거짓 영적 권세를 포함합니다.
요한일서의 핵심 가르침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단수 인물보다 현재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는 영적 실재로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적그리스도는 이미 왔고, 여럿입니다.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
핵심 기준 :
-
예수 =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부인
적그리스도의 특징 - 요한서신 중심
-
교회 안에서 나옴
-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일 2:19)
-
-
정통 신앙의 언어를 사용함
-
겉모습은 경건, 내용은 왜곡
-
-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을 훼손
-
참 하나님·참 인간이심을 부인
-
-
성도를 미혹함
특별한 지식, 새 계시, 다른 복음 주장
단수 적그리스도 vs 복수 적그리스도
| 구분 | 설명 |
|---|---|
| 복수 | 지금도 활동 중인 거짓 교사·영 |
| 단수 | 종말에 나타날 최종적 대적자 (계 13장, 살후 2장) |
➡ 요한은 현재적 분별에 초점을 둡니다.
“언젠가 올 인물”보다 지금 속이고 있는 영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요한일서의 흐름에 따르면:
-
기름 부음(성령)을 의지함 (요일 2:20, 27)
-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거함
-
사랑과 진리로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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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방식은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함입니다.
한 문장 요약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신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이미 세상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적그리스도’의 관계
동일 개념이라기보다 기능적으로 연결된 종말론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 흐름에 가장 정확합니다.
기본 결론 한 줄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종말론적·정치적 구현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집약된 형태이다.
성경 용어 비교
| 구분 | 적그리스도 | 짐승 |
|---|---|---|
| 주요 본문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
| 초점 | 영·가르침 | 권세·체제 |
| 성격 | 미혹하는 영 | 핍박하는 권력 |
| 수 | 많음 | 주로 단수 |
| 활동 영역 | 교회 안 | 세상 권력 |
➡ 요한은 서신에서는 교리적 미혹,
계시록에서는 제도·권력의 박해를 보여줍니다.
두 짐승의 구조(계 13장)
① 바다에서 나온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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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경제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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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에게서 권세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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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을 다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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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를 핍박함
적그리스도의 ‘왕적(王的) 모습’
② 땅에서 나온 짐승 (거짓 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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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영적 미혹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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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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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기사를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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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표를 강요
적그리스도의 ‘선지자적 모습’
📌 요한일서의 “거짓 교사” 개념과 직접 연결됨
사탄의 모조 삼위일체
| 참 하나님 | 사탄의 모조 |
|---|---|
| 성부 | 용(사탄) |
| 성자 | 바다 짐승 |
| 성령 | 땅 짐승(거짓 선지자) |
➡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모방입니다.
대적이라기보다 대체하려는 존재입니다.
‘666’과 적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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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의 극치 (7에 미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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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을 모방한 가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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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경제·삶을 결합한 통제 수단
단순한 숫자 암호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인간 권세를 절대화하는 체제”의 상징
요한일서와의 신학적 연결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
|---|---|
| 예수의 성육신 부인 | 짐승 숭배 |
| 거짓 가르침 | 거짓 기적 |
| 교회 안 미혹 | 세상 통치 |
| 성령의 기름 부음 | 하나님의 인 |
➡ 같은 영, 다른 무대
성도에게 주는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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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대상이 분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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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안전·번영 vs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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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방향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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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권력·체제 vs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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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선택하는 삶인가, 인을 지킨 삶인가?
👉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싸움은 정보 전쟁이 아니라 예배 전쟁입니다.
한 문장 종합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정치·종교 권세로 집약된 종말의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경배의 대상’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탄의 모조 왕국이다.
성경, 특히 요한일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용어의 의미
ἀντί(안티) : ‘반대하여’뿐 아니라 ‘대신하여’라는 뜻도 포함
→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 자리를 대신하려는 존재
요한일서의 가르침 (핵심 본문)
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단수 + 복수 모두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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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나타날 최종적 적그리스도
동시에 이미 활동 중인 많은 적그리스도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그가 적그리스도니…”
정의가 분명함
예수 =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핵심을 부정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부인
요한일서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만이 아니라 ‘영(spirit)’으로 역사
적그리스도의 본질 (요한 신학 관점)
| 구분 | 내용 |
|---|---|
| 출처 |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요일 2:19) |
| 특징 |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가르침 |
| 핵심 문제 | 그리스도론 왜곡 |
| 상태 | 빛이 아닌 어둠, 진리가 아닌 거짓 |
즉, 적그리스도는 노골적 무신론자보다,
예수를 말하지만 참 예수를 왜곡하는 자로 나타남
바울· 요한계시록과의 연결
살후 2장 :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계 13장 : 짐승(권세·숭배·기적)
요한일서 : 현재적·영적 분별 강조
계시록/바울 : 종말적·권세적 실체 강조
- 서로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
신앙적 적용 (요한일서 맥락)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 논의는 항상 이것과 연결됩니다.
빛 vs 어둠
진리 vs 거짓
사랑 vs 미움
아이–청년–아비의 영적 성숙
결론 :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기름부음을 받아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1월 7일(수)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2:17)
The world and its desires pass away, but the man who does the will of God lives forever.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6에 나오는 말씀으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속한 삶의 본질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1. 육신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ῆς σαρκὸς)
타락한 육체가 원하는 욕망
하나님을 배제한 채 쾌락·본능·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구
내용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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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 방탕, 탐식,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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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다”, “느끼고 싶다”가 기준이 되는 삶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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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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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 만족을 추구
성령의 다스림과 반대됨(갈 5:16–17)
2. 안목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ῶν ὀφθαλμῶ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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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고 소유하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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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비교·소유에 집착하는 마음
내용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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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 명품, 성공, 외적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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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비교하며 생기는 탐심·시기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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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이 가치 판단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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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가 곧 행복이라는 착각
믿음이 아닌 시야(보이는 것)으로 사는 삶(고후 5:7과 대조)
3. 이생의 자랑 (ἡ ἀλαζονεία τοῦ βίο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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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삶(지위·능력·성취)을 자랑하는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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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기 확신
내용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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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권력, 업적, 영적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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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괜찮아”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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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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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나’
바리새인의 태도와 연결(눅 18:11–12)
세 가지의 공통점
| 공통 특징 | 설명 |
|---|---|
| 출처 |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 |
| 방향 | 하나님이 아닌 자기 중심 |
| 결과 | 영적 생명 약화, 하나님 사랑과 충돌 |
| 종말 |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감”(요일 2:17) |
창세기·예수님의 시험과의 연결
이 세 가지는 성경 전체에 반복되는 유혹의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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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의 타락 (창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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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 → 육신의 정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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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암직 → 안목의 정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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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 이생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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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험 (마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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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떡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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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영광 보여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 예수님은 말씀으로 모두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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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결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이는 세상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 삶의 기준과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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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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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속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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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살라
(요일 2: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성경에서 단순한 종교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이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 핵심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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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신앙의 고백(말)보다 **순종(행함)**이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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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50 /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와의 참된 가족 관계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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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영원성과 연결됩니다.
2.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추상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① 구원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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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믿음이 하나님의 뜻의 출발점
② 거룩함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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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삶의 방향과 성품의 변화
③ 사랑과 순종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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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계명 준수 = 사랑의 표현
3. ‘말하는 자’ vs ‘행하는 자’
| 구분 | 말만 하는 자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
|---|---|---|
| 신앙 | 고백 중심 | 순종 중심 |
| 기준 | 자기 확신 | 말씀 |
| 열매 | 외적 행위 | 삶의 변화 |
| 결과 | 주님이 “모른다” 하심 | 주님과의 참된 관계 |
(마 7:22–23 참조)
4. 영적 성숙 단계와의 연결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구조와 연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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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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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하나님의 뜻을 싸우며 행하는 단계
아비: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된 단계
→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은 성숙의 결과이지 단번의 행위가 아닙니다.
5. 한 문장 요약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믿음을 말로 증명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으로 드러내는 자이며,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열매가 나타난다.”
핵심 본문 정리
📖 고린도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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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속한 사람 (σάρκινος / σαρκικό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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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2:14,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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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πνευματικό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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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2:15,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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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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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 청년 – 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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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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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서신은 같은 성령의 관점에서, 구원 이후, 사람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가를 설명함
통합 구조 한눈에 보기
육신적 신자 → 싸우는 신자 → 신령한 성숙자
단계별 통합 비교표 (핵심)
| 통합 단계 | 고린도전서 | 요한일서 | 영적 특징 | 핵심 문제 / 열매 |
|---|---|---|---|---|
| ① 미성숙 단계 |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 아이 | 구원받았으나 육의 지배 큼 | 분쟁·시기·사람 자랑 |
| ② 성장 단계 | 신령함을 배워감 (고전 2:12) | 청년 | 말씀으로 육을 이김 | 영적 전투와 승리 |
| ③ 성숙 단계 | 신령한 자 (고전 2:15) | 아비 | 성령의 분별과 안정 | 하나님을 깊이 앎 |
본질적 연결 설명
🔹 ① 육신에 속한 자 = 요한일서의 ‘아이’
고전 3:1–3
“내가 너희를 신령한 자로 말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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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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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을 먹음 (기본 진리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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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중심: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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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으나 육의 논리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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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의 아이 = 고린도전서의 육신적 신자
🔹 ② 싸우는 단계 = 요한일서의 ‘청년’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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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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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안에 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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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와의 실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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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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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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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지혜를 분별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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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에서 성령으로 이동하는 전환 구간
🔹 ③ 신령한 자 = 요한일서의 ‘아비’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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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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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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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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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자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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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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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지혜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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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역이나 감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증거
신학적으로 중요한 균형
❗ 오해하면 안 되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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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속한 자 ≠ 불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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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으나 육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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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의 아이도 죄 사함을 받은 자
👉 문제는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고린도전서는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를 묻고,
요한일서는 ‘그 지배 아래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준다.
7️⃣ 자기 점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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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 기준은 사람·감정·환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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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성령이 내 안에 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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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논쟁하는 신자인가, 분별하는 성숙자인가?
1️⃣ 큰 구조 한눈에 보기
육에 속한 상태 → 영적 성장 → 성령에 속한 성숙
요한일서의 세 단계는
👉 육을 벗어나는 과정,
👉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 단계별 연결 설명
🔹 ① 아이 (τεκνία / παιδία) — 구원은 있으나 미성숙
(육의 영향이 강한 단계)
본문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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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의 은혜는 분명함 (구원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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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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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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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쉽게 흔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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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보다 경험·사람에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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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의 **‘육신에 속한 신자’**와 유사 (고전 3:1–3)
연결
👉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에 속한 영향’ 아래 있는 상태
👉 신앙의 기준이 “느낌·사람·상황”
🔹 ② 청년 (νεανίσκοι) — 영적 전쟁과 승리의 단계
(육을 이기기 시작하는 단계)
본문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심이요”(요일 2:13–1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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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안에 거함 (암송·순종·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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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유혹이 있으나 싸워서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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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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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 vs 육의 실제 전투 경험
연결
👉 육에 속한 삶에서 벗어나, 성령을 따라 살기 시작
👉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단계”
🔹 ③ 아비 (πατέρες) — 하나님을 아는 깊은 성숙
(육을 초월한 성령의 성숙 단계)
본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요일 2:13–1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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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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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사역·감정에 흔들리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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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능력, 체험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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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
연결
👉 더 이상 육이 중심이 아님
👉 존재 자체가 성령의 열매가 됨
3️⃣ 핵심 비교 표
| 단계 | 영적 상태 | 육과의 관계 | 중심 특징 |
|---|---|---|---|
| 아이 | 구원받음 | 육의 영향 큼 | 죄 사함의 기쁨 |
| 청년 | 성장 중 | 육과 싸워 이김 | 말씀과 전투 |
| 아비 | 성숙 | 육을 초월 | 하나님을 앎 |
4️⃣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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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단계 ≠ 정죄 대상
→ 출발점 -
문제는 아이에 머무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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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는 계속해서 말함: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성령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5️⃣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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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아이의 안정, 청년의 싸움, 아비의 깊이 중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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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앙의 중심은
👉 *‘죄 사함’*인가,
👉 *‘말씀의 능력’*인가,
👉 *‘하나님 자신’*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 아닌 ‘육(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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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σάρξ, sarx): 단순한 몸이 아니라
👉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 본성,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상태 -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 성령의 인도 없이, 인간적 욕망·이성·세상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2️⃣ 핵심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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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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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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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19
“육에 속한 자요 성령이 없는 자라”
3️⃣ 특징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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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판단과 감정을 우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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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진리를 어리석게 여기거나 이해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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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있어 보여도 능력은 부인함 (형식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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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의 육체의 일이 드러남
(시기, 분쟁, 분노, 탐심 등)
4️⃣ 대비 개념
| 구분 | 육에 속한 사람 | 성령에 속한 사람 |
|---|---|---|
| 지배 원리 | 육, 자아 | 성령 |
| 판단 기준 | 세상 지혜 | 하나님의 지혜 |
| 열매 | 혼란, 분열 | 사랑, 화평 |
| 영적 상태 | 미성숙 | 성장·성숙 |
5️⃣ 신앙적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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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은 불신자만을 말하지 않음
👉 고린도교회처럼 구원은 받았으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신자도 포함 -
핵심 질문:
“나는 지금 육을 따라 반응하는가,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가?”
원하시면
👉 ‘육에 속한 신자 vs 영에 속한 신자’,
👉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단계와의 연결,
👉 설교용 요약으로도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 원입교인: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
- 유아세례교인: 유아기에 세례를 받고 성장하는 교인.
- 세례교인 (입교인):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
- 감투교인: 직책(감투)을 받아야만 교회에 나오는 교인.
- 인력거교인: 심방을 가야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
- 오락교인: 친목회, 야유회 등 행사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교인.
- 벙어리교인: 오래 신앙생활해도 기도생활이 없는 교인.
- 종이교인: 비 오면 안 나오는 등 출석이 잦지 않은 교인.
- 항존직: 장로, 집사, 권사 등 직분이 유지되는 직분.
- 임시직: 전도사, 서리집사 등 임기가 있는 직분.
- 영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신실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세상적이고 육체적 정욕을 끊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
- 불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으로도 표현).
-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 교리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며, 각 교파 안에도 다양한 교단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8월호>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But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unto him: neither can he know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한글개역성경>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심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자연인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며, 둘째, 육신적인 사람은 구원은 받았어도 성경적 기준대로 살지 않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며, 셋째로 영적인 사람은 구원받고 난 후 자기 기준을 버리고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사람을 구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자연인들도 교회에 다닐 수 있고 새벽 기도에 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에서는 그들이 사회적 지위나 돈 많이 내는 일이나 교회 일에 쏟는 열성들을 고려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제직을 맡기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초, 중, 고, 대학부, 청년부 교사로도 임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각 부서장으로도 임명하여 써먹고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자연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때 그에게는 성령의 열매도 없고 구령의 열매도 없으며 십 년, 이십 년 교회 생활을 했다 해도 귀로 얻어들은 것 외에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지도 못하며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보다는 육신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자신이 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로는 회의적이며 믿음보다는 기분이 앞서 있어 자기의 감정의 고저에 따라 믿음의 생활이 달라지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먼저 영적 배고픔을 느낀다. 자기 안에 새로이 태어난 속 사람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겉 사람처럼 물질적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겉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세 끼 이상을 먹는다. 속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분량을 먹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구약성경부터 읽지 말고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이렇게 읽어 가는 것이 좋으며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분량을 읽지 말고 3장 정도만 읽고 그 안에 어떤 주제가 있었는가를 음미하는 것이 좋다. 말씀을 읽을 때는 의심하지 말고 기록된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롬 10:17). 말씀 외에 기도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숨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다. 구원받은 것만을 알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육신 안에 있는 속 사람이 고사(枯死)해 버리지 않았겠는가?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말라져 버린 것이다. 핏덩어리를 낳았으면 물로 씻기고 젖을 먹여야 자라지 않겠는가?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났으면 말씀의 물로 씻고(엡 5:26) 순수한 젖을 먹어야 한다(벧전 2:2).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개역성경 삭제]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1,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지 않은 어린 아기라고 한다(고전 3:1-4). 어린 아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나라 교단 교회들에서는 많은 아기들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다. 그들이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수 있겠는가? 마귀는 그런 어린 아기들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건드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아기들은 영적 전쟁이란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어린 아기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성령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마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영적 아기들과 교제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시킬 수도 없기에 맡기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들은 쓸데없는 일들에 관여하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일로 가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이다. 당신의 교회는 한 달에 몇 명의 혼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가? 아직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끝까지 견뎌야 알 수 있는데 아직도 날짜가 다
차지 않았는가? 그런 엉터리 교리가 성경 어디에 있던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 아닌가!(막 12:24) 또 한
가지 일은 혼들을 구령했으면 그 혼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시켜야 한다. 이때 썩은 음식인 틀린 성경이나 성경적 교리가 아닌
교단 교리로 양육하게 되면 머리가 혼미해져 방언이나 하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거리로 산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런 자들 중
상당수가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각종 회의, 성결서약, 효 운동, 구제, 반정부데모, 심지어 기독교
정당까지 만들고 있겠는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육신적인 사람들이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란 쓰레기통에
페인트 칠하지 않은 것과 페인트 칠한 것의 차이일 뿐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그렇게 불리지 않도록 처신을 고쳐, 자기 기준에서 성경 기준으로 확실히
돌이켜야 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고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자기의 은사대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구령의 열매는 물론이요 성령의 열매를 내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세워 주고 교회의 기둥으로서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산다. 무엇보다도 진리로 오류를 판단하며 죄들을 질책하고 다가올
심판과 지옥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가 성경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판단하지 않게 된다(고전 2:15).
<한글개역성경>에는 자연인(Natural man)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했고 육신적인 사람(Carnal man)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했다. 이렇게 된 성서를 가지고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개역성경>을 가지고 교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을 이제야 알 것 같은가? 성경은 진리인데 진리를 말해야 할 자들이 오류를 말하면서 진리인 체했을 때 거기에 무엇이 살아남아 있겠는가? 이것은 <개역성경>이 몸, 혼, 영(갈 5:23)을 몸과 영혼이라고 써서 성경의 진리를 플라톤의 철학으로 바꿔치기한 어거스틴과 존 칼빈의 신학과 같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신학교 교수, 교단 교회 목사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들(Spiritual man)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Natural man)이거나 아니면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나 영적 양식으로 먹고 마시며 숨쉬지 않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즉 아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젖 외에 꿀, 사과, 빵,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체질인데도 청장년 행세를 하며 겉멋을 부리고 강단에 올라서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돈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기에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있다(마 15:14). 성경 순서도 모르는 목사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제직들, 성경이 필요 없는 교인들이 5만 개의 교회를 점유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BB
1월 6일(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들(2:12)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3) - 시기 분쟁과 같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사람
신령한 사람(고전 2:15)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
사도 요한
하나님의 자녀(요일 2:12) -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은 사람
아비들(요일 2:13a)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
청년들(요일 2:13b) - 악한 자를 이긴 사람
아이들(요일 2:14) - 아버지를 아는 사람
용서(forgiven)와 승리(overcome)
아비들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주하여 강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영적 분류로, 신앙의 연령·성숙 단계를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1️⃣ 아이들 (τεκνία / παιδί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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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 영적으로 거듭난 자, 믿음의 시작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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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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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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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관계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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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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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말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
👉 신앙의 출발점: 관계와 은혜 중심
2️⃣ 청년들 (νεανίσκο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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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영적으로 성장하고 싸우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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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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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강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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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사탄)를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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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과 사명에 적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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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말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신앙의 실천기: 말씀과 싸움
3️⃣ 아비들 (πατέρε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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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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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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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계신 이”(그리스도)를 깊이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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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분별, 영적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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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고 세우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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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말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
👉 신앙의 완숙기: 인격적·관계적 깊이
✨ 정리 한눈에
| 구분 | 중심 초점 | 핵심 특징 |
|---|---|---|
| 아이들 | 관계 | 죄 사함, 아버지를 앎 |
| 청년들 | 싸움 | 말씀, 승리 |
| 아비들 | 깊이 | 그리스도를 앎 |
이 분류는 나이가 아니라 영적 성숙도를 말합니다.
한 교회 안에 이 세 단계가 모두 건강하게 존재할 때 공동체가 균형을 이룹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요한일서 2:12-14)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가 신앙 생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와 인근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이들은 모두 초대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이단의 도전과 외부 압박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다양한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성도들이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1. 자녀들아,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12절)
사도 요한은 먼저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신앙의 첫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할 때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가 확신해야 할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아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13절)
그 다음,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비들’은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하나님을 의미하며,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깊이 추구하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합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이러한 성숙한 신자들은 교회의 리더가 되기도 하며, 다른 신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신앙의 아비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은 젊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길잡이가 되어주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3. 청년들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13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청년들’은 신앙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영적인 전투와 시험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청년들은 신앙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신앙의 힘을 성장시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마주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청년들과 같은 불굴의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4. 영적 성숙의 단계와 그 중요성 (14절)
요한일서 2장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영적 성숙의 각 단계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은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라.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반복해서 각 단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앙생활에서 이 단계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킵니다. 신앙의 시작에서부터 성숙까지, 우리는 각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신앙 상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말씀을 통해 성장하며,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들처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힘을 기르고,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의 시작 단계인 자녀들, 신앙의 중간 단계인 청년들, 그리고 신앙의 성숙한 단계인 아비들 각각의 특징을 이해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떤 단계에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은 자들이며,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강해지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영적인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기도문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처럼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시고, 청년들처럼 강한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아비들처럼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각자가 신앙의 단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각자의 신앙 단계를 인정하고, 그 단계에 맞는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녀 아비 청년(요한일서 2:12-14)
성경에서 ‘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내가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어긋나게 하는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여길 때 감히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러한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여기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험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냥 십자가에 죽으셔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분이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다만 나의 죄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실천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죄인이야’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들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을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대해야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좋은 일을 하며 산 사람이 살인을 하고 악한 짓만 일삼은 죄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기가 쉽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다만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정을 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고 정작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임을 인식함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깨달았을 때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임을 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이나 인격, 감정 등을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가 형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신자를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는 세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을 두고 신자의 신앙 수준을 세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에 자녀와 같은 신앙, 아비와 같은 신앙, 청년과 같은 신앙이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신앙의 높고 낮음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신앙의 세 단계를 의도한 말씀이라면 ‘아비들아’ 다음에 ‘청년들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청년의 호칭 다음에 아비의 호칭이 오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세 호칭이 신앙의 수준 차이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내용 사이에 본문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본문은 사랑과 연관이 있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르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리 자세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가르친들 배우고 듣고 기억한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의 문제가 정작 우리에게 짐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것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의 말씀을 함으로써 사랑이란 짐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사함을 얻는 것과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 중 어느 것이 수준 높은 신앙입니까? 분명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신앙의 수준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호칭은 신앙의 수준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호칭을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자녀, 아비, 청년이란 호칭은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녀, 청년, 아비는 하나의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죄사함을 얻은 것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로 표현한 것이고,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비로 표현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이기는 것을 청년으로 표현한 것은 청년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그리스도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악한 자를 이기는 자로 살지 못한다면 형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자로서 사랑하게 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를 용서 안에 있게 한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면 우린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의 용서함으로 형제를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짐을 지워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실천 여부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별의식이 있다면 결국 형제에 대해서도 차별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자입니다. 어떤 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천 여부를 보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몫이나 지키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이, 청년, 아비(요한일서 2:12-14)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 관해 세 가지 주요 견해가 있다. 먼저 세 호칭은 세 개의 각각 다른 그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세 호칭은 육체적 혹은 영적인 연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 세 호칭 중에 ‘자녀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고, ‘아비들’과 ‘청년들’은 수신자 전체 안에 있는 두 개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셋째, 세 호칭 모두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 다수 학자는 두 번째 견해를 주장하지만,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의 특징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어느 특정 그룹이 아니라 수신자 전체의 특징을 가리킨다. 전체 수신자들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또한, 요한의 글쓰기 특징이 하나의 그룹을 지지한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는 서로 다른 단어가 같은 뜻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표현을 다르게 하여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의 특징은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그런데 이 세 요소는 종말에 새 언약의 백성이 누릴 복으로서 모든 자가 구분 없이 함께 누릴 복이다. (렘 31:33-34)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 사이에 어떤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수신자들이 사랑받는 자녀, 성숙한 아비, 승리한 청년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이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도록 격려한다.
1. 시작하는 말
요한일서에는 단순한 헬라어 문장이나 분명한 표현 뒤에 해석하기 까다로운 난제들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일서 2:12-14이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13)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14)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저자는 2:12-13에서 ‘자녀들’(tekn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차례대로 언급한 후 2:14에서도 ‘아이들’(paid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언급한다. ‘자녀들’(teknia)에서 ‘아이들’(paidia)로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저자는 왜 세 호칭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동안 제기되었던 주장들을 검토해 보고 좀 더 설득력 있는 주장과 근거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학자들의 견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다.
세 호칭을 각각의 구분된 세 그룹으로 보기도 하고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한 그룹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 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두 그룹으로 보기도 한다.
가. 세 그룹
세 호칭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육체적인 혹은 영적인 연령대의 청중으로 보는 것이다. 육체적인 연령대로 본다는 것은 교회 안에 어린이와 청년과 아버지와 같은 연령대의 구성원들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면서 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각각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 이것을 영적인 연령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로 불린다는 것이다. 자녀는 믿음이 어린 초기 단계의 신앙인을 가리킨다.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은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단계이다. 청년들은 그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이를 가리키는데, 잘못된 가르침과 싸워 이긴 성숙한 사람이다. 아비는 가장 성숙한 사람인데,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전체 성도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해 반박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저자는 수신자들을 ‘자녀들아’ 혹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편지 전체에 걸쳐 권면하고 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요 13:33; 21:5) 저자 요한은 이제 예수의 마음으로 그의 성도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용례는 ‘자녀들’/‘아이들’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어느 특정 연령이나 단계를 대변한다는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더욱이 스몰리(Smalley)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저자가 왜 자녀들-청년들-아비들이라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순서를 취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를 포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 두 그룹
다수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 이 주장은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성도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학자들은 ‘자녀들’/‘아이들’과 달리 ‘아비들’과 ‘청년들’은 특정 그룹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신약 성경에서도 교회 안의 장년 그룹과 청년 그룹을 가리키는 각각의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며 교회 구성원을 늙은이와 젊은이로 나눈다. (딤전 5:1) 베드로도 또한 한편으로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하고(벧전 5:1),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고 한다. (벧전 5:5) 따라서 요한이 수신자들을 아비들과 청년들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다른 한편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두 그룹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다. 트레빌코(Trebilco)는 ‘아비들’과 ‘청년들’이 남자만 가리킨다고 한다. 하울던(Houlden)은 ‘아비들’과 ‘청년들’은 교회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한다. 크루즈(Kruse)는 육체적 연령에 따라 아비들과 청년들로 나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신약 본문에서도 정확하게 ‘아비들’과 ‘청년들’이라는 두 그룹으로 나뉜 용례는 없다. 늙은이와 젊은이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어떤 용례에도 ‘아비들아’라는 호칭은 찾아보기 힘들다. 브라운(Brown)은 ‘아비들아’라는 호칭이 장로를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로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공동체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이 스스로에게는 장로라 부르면서(요이 1; 요삼 1) 왜 다른 장로들에게는 장로 대신에 아비라 부르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그런 용례도 찾기 힘들다.
또한, 제일 앞에 나오는 ‘자녀들’/‘아이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고 같은 가족 코드의 단어인 ‘아비들’과 ‘청년들’은 바로 앞의 ‘자녀들’/‘아이들’과 다른 성격으로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그룹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문에 직면할 수도 있다. 각 특정 그룹이 과연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적 특성이 있었을까? 청년들만 악한 자와 싸워 이긴 것일까? 아비들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것일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청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몰랐을까? 아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기지 않았을까?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다. 한 그룹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에 대한 각기 다른 호칭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다드(Dodd)가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마샬(Marshall)도 이 주장을 따른다. 다드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성부 하나님으로 보고 결국 2:14에서 아이들의 특징과 아비들의 특징이 같기 때문에 세 호칭은 모두 한 그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이 잘 지적했듯이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태초부터 계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마샬은 다드가 수사적 표현에 근거해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으로 본 것을 받아들이며, 모든 수신자가 용서를 받은 자녀의 특성,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아비의 특성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의 특성이 있다고 한다.
왓슨(Watson)은 두 그룹 견해를 지지하며, 한 그룹 견해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아비들’이나 ‘청년들’이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용어로 쓰인 예가 다른 신약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비들’이나 ‘청년들’을 ‘자녀들’과 같은 레벨의 호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 견해는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 2천 년 동안 어떤 견해도 100% 만족할 만한 답변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학자들은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스몰리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양면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두 그룹과 한 그룹의 가능성을 모두 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핵심은 요한의 수신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정통 교훈에 확실하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 자체라고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가 좀 더 유력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일서 문맥
자녀들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요한일서 수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성도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비들과 청년들에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가장 뚜렷한 이유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의 특징은 서로 구분되지 않고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문맥이 한 그룹 해석을 지지한다.
가. 앞서 자녀들은 요한일서에서 성도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의 수신자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 부르면서 권면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은 죄 용서를 받은 것이고(요일 2:13), 아버지를 안 것이다. (요일 2:14) 그런데 자녀들의 이 두 특징은 요한일서 다른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한 화목제물이심을 알고 믿는 자가 죄 용서를 받는다. (요일 2:2)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요일 1:7) 이러한 죄 용서의 은혜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요일 1:9) 따라서 자녀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를 받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녀들의 특징은 아비들의 특징과 다르지 않다. 잠시 후 밝히겠지만,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자녀들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비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다른 본문들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들과의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을 계속 보여준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 아버지도 계신다 (요일 2:23) 자녀들의 특징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국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함께 있다. 따라서 자녀들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사귐이다. (요일 1:3) 적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다. (요일 2:22) 결국,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과 아들을 아는 ‘아비들’의 차이는 없다. 다른 한편 ‘자녀들’/‘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연결된다. 자녀들의 특징은 아버지를 아는 것인데,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버지와 함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핵심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일 3: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요 3:16)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이것은 곧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이고 아비들의 특징이다.
나.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 아버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스토트(Stott)는 ‘태초부터 계신 이’가 로고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한다. 브루스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으로 본다. 그러나 ‘태초부터 계신 이’는 1:1에 비춰봤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은 편지를 시작하며 ‘태초부터 계신 이’를 보고 듣고 만졌다고 한다. (요일 1:1) 그리고 이어서 ‘태초부터 계신 이’가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요일 1:1-2) 물론, ‘태초부터 계신 이’(o] h=n avp V avrch/j)에는 중성 관계대명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남성 관사가 쓰인 ‘태초부터 계신 이’(o` a vpV avrch/j)와 다르다. 그런데도 중성 관계대명사는 이 편지가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브라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과 사역을 포괄한다고 보고, 스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message)로 본다. 따라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아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자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런 내용이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전반적으로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이다. (요일 5:13) 그런데 2:13-14은 이런 자들을 아비들이라 부르지만, 요한일서 다른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요일 5:1)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요한이 ‘자녀들’이라 부르는 자이다. (요일 4:4) 따라서 아비들은 자녀들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신앙 햇수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은 자녀요, 아비다. 사도는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는 ‘아비’라고 칭찬한다. ‘아비’라는 호칭을 통해 그들의 성숙한 신앙을 격려하고 있다.
다.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겼다. (요일 2:13) ‘악한 자’(o`ponhroj)는 남성 관사와 형용사가 사용되어 마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어둠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를 주관한다. 요한복음 17:15에서는 남성일 수도 있고, 중성일 수도 있게 쓰여서 ‘악한 자’를 뜻할 수도 있고, ‘악’을 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남성임이 분명히 드러나 마귀를 가리킨다. 물론, 스몰리가 적절하게 밝혔듯이 남성과 중성, 즉 ‘악한 자’와 ‘악’ 사이에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다. 요한은 사탄 혹은 마귀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속 ‘악한 자’를 사용한다. (요일 5:18-19)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긴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어떤 이들은 그들의 회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그들이 악한 자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해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셨다. (요 16:33) 이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긴 자이다.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자를 이긴 자다. 다른 한편 청년들의 이김을 거짓 교사를 물리친 것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악한 자는 적그리스도, 즉 거짓 교사를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 공동체에 들어와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믿음을 지켰다. (요일 4:1-4; 5:4-5) 그리고 마침내 거짓 교사들은 공동체를 떠났다. (요일 2:18-19) 이에 사도는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며, 청년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두 종류의 이김은 사실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그를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때 잘못된 가르침을 옳게 분별하여 거짓을 배격하고 참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전체에서 수신자들은 ‘이긴 자’ 혹은 ‘이기는 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때 수신자들은 ‘자녀들’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자의 조종을 받는 거짓 교사들을 이긴 자이다. (요일 4:4)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역이며, 마귀의 통치 아래 있는 영역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세상을 이겼고 지금도 이기고 있다. (요일 5:4) 따라서 이기는 것은 청년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자녀의 특징이다. 다른 한편 아비의 특징으로 나온 기독론적 지식과 세상을 이기는 것이 연결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 (요일 5:5) 결국, 자녀와 아비와 청년은 악한 자를 이기고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측면에서 같은 사람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다.
2:14에서 청년들의 또 다른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는 자의 특징이 죄 고백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10) 이런 측면에서 청년들의 특징은 자녀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또한, 죄를 짓는 자는 악한 자, 마귀에게 속한 자다. (요일 3:8)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이다. (요일 3:9) 하나님의 씨의 정체에 대해서는 해석학적 논란이 있다. 다만 말씀을 가리킬 확률이 좀처럼 배제되지 않는다. 이처럼 청년들의 특징은 곧 수신자들의 특징이고 자녀들의 특징이다. 요한은 사람의 연령이나 체력에 상관없이 악한 자를 이긴 사람을 청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악한 자를 이긴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라. 소결론
요컨대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각각 요한일서 모든 수신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이들 각각의 특징은 요한일서에서 수신자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녀와 아비와 청년이라 칭찬하면서 수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기 원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정체성에 기초해서 사도의 권면을 받으라고 한다.
두 그룹이나 세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다. 자녀들의 특징은 기초적인 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청년들이나 아비들의 특징은 더욱 성숙한 신앙의 특징을 말한다고 본다. 그러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기초적이며, 태초부터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좀 더 성숙한 신앙 특징일까? 아들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기는 청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의 신앙특징보다 덜 성숙한 모습일까? 과연 요한은 여기서 신앙의 단계 혹은 차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신자들의 신앙의 모습을 확인해 주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 공동체는 모두 죄 용서를 받고 아버지를 아는 사랑 받는 자녀들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숙한 자들이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이긴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다.
4. 저자의 표현 기법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근거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글쓰기 특징이다. 요한은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자주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가. 요한복음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쓰는 예는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등장한다. 요한은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라는 세 동사를 번갈아 사용하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 1:10-12) 이러한 특징은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기록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도 등장한다. ‘어린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라는 단어가 번갈아 가며 사용된다. (요 21:15-17) 각각의 단어는 원래 조금씩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내용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혹자는 avgapa,w/file,w를 구분하여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담긴 함의를 주장한다. avgapa,w는 신적인 차원의 사랑을, file,w는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요한복음의 글쓰기 특징에 대한 오해다. 요한복음은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f ile,w로 나타내기도 하고(요 5:20; 16:27),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 것도 avgapaw로 말하기도 한다. (요 3:19; 12:43)
나. 요한일서 전체
이러한 요한 문헌의 글쓰기 특징은 요한일서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1:1-4에서 요한은 그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 (gra,fw)라는 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특징은 편지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죄’(amartia)와 ‘불의’(avdikia)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도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물론, 시인하는 것은 공개적인 고백을 의미하고 믿는 것은 내면적 변화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장에서 두 단어를 바꾸어 써도 두 구절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또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타이틀도 서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요일 5:1, 5)
다. 요한일서 2:12-14
요한의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심지어 2:12-14안에도 나타난다. 요한은 tekni,a와 paidi,a를 바꿔가며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gra,fw의 시상을 바꿔가며 같은 표현을 반복한다. 2:12-13은 현재형인 grafw를 사용하고 2:14은 아오리스트형인 egraya를 사용한다. gra,fw와 e;graya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영어권의 대표적인 번역 성경들이 각각 서로 다르게 번역한다. ESV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단순 현재형(I write)으로 번역한다. 이와 달리 NASB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현재 완료형(I have written)으로 번역한다. NIV는 모두 동일하게 단순 현재형으로 번역한다. (I write) 한글 성경도 서로 다르다. 개역개정은 단순 현재(‘쓰는 것은’)와 과거(‘쓴 것은’)로 번역한다. 새번역은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쓰는 까닭은’) 공동번역도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씁니다’)
다른 한편 혹자는 현재형은 저자가 지금 쓰고 있는 요한일서를 가리키지만, 아오리스트형은 그가 이미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이서 아니면 다른 잃어버린 문서를 가리킬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요한삼서 9절에 나오는 e;graya는 저자가 이미 쓴 문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Egraya ti th/| evkklhsia |\ avllVo filoprwteu,wn auvtw/n Diotre,fhj ouvk evpide,cetai h`ma/jÅ /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 9) 그러나 브라운이 잘 반박하였는데 만약 요한일서 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형이 어떤 앞선 문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아오리스트형을 현재형보다 뒤에 썼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미 쓴 것을 먼저 언급하고 지금 쓰고 있는 것을 나중에 언급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는 gra,fw와 e;graya는 문체의 변형(stylistic variant)일 뿐 의미상으로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고 한다. 만약 있다면 아오리스트형 e;graya는 좀 더 강조 반복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두 동사는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해리스(Harris)는 반복의 특성상 gra,fw는 좀 더 현재 쓰고 있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고, e;gra ya는 상대적으로 저자가 이미 쓴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 리우는 grafw를 ‘I am writing’으로 e;graya를 ‘I have written’으로 각각 번역하면서 서신서로서 요한일서 문체의 특징을 언급한다. gra,fw는 저자의 관점에서 현재 쓰고 있다는 말이고, e;graya는 독자의 관점에서 이미 쓴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종의 서신적 아오리스트(epistolary aorist) 라는 말이다. 그러나 포터(Porter)는 현재 행동을 위해 사용되는 아오리스트(aorist for present action)의 신약 용례를 조사하며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터에 따르면 서신을 쓸 때 저자는 자신과 독자의 관점을 시제를 사용하여 복잡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간 관점에서 적절한 시상(verbal aspects)을 가지고 표현한다. 이때 서신적 아오리스트는 전체 포괄적 글쓰기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2:12-14에 나오는 grafw와 egra ya 둘 다 전체 서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gra,fw에 대한 설명은 해리스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현재 동사의 진행적 성격은 요한일서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요한은 현재 동사 a`marta,nw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요일 3:6)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도무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은 동사의 현재형을 사용하여 이 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 e;graya에 대한 설명은 포터의 설명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요한은 편지의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아오리스트 egra ya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요일 2:21, 26; 5:13) 이때 요한은 자신의 편지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gra,fw는 현재 글 쓰는 과정을, e;graya는 전체 글쓰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해리스의 견해든지 리우의 견해든지 포터의 견해든지 본 연구의 논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즉, graf w와 e;graya가 요한일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변함이 없고, 저자의 반복 강조 의도가 드러나는 것도 분명하다.
라. 소결론
요컨대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전체 혹은 요한일서 2:12-14 자체에 나타난 요한 문헌의 글쓰기 예들을 볼 때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도 또한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상의 특징을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한 요한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자녀도 되고, 아비도 되고, 청년도 된다. 그들은 자녀로서 죄 용서 받고,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며, 아비로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며, 청년으로서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자들이다.
5. 새 언약적 요소
세 호칭의 특징들은 모두 새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는 요한일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일서에는 새 언약적 요소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2:12-14도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는데, 결국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모두 새 언약 백성으로 묘사된다. 새 언약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모두에게 구분 없이 새 언약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단계나 차등을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먼저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자.
가. 새 언약의 세 가지 요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의 약속을 주셨다. 새 언약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해진다. 셋째 우주적인 죄 용서가 일어난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등이 새 언약의 내용이다.
“(33)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34)
하나님의 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참고 겔 36:27) 옛 언약에서는 의무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새 언약 하에서 모든 이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진다. 이러한 종말론적 약속은 이사야도 언급한다.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다만 예레미야는 이러한 신지식이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죄 용서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호와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 즉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새겨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게 된다.
나.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
카슨(Carson)은 요한일서 2:20, 27이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먼저 요한일서가 얼마나 구약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직접적인 구약 인용은 없지만, 요한일서는 구약 본문을 군데군데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화목제물이나 계명에 순종하는 개념 등은 구약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또한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요한의 권면을 새 언약 관점에서 해석한다. (요일 2:20, 27)
옛 언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과 같은 중보적 교사(intermediary teachers)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제 그러한 교사가 필요 없고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 하신다. (렘 31:34) 요한은 바로 이러한 새 언약의 배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영지주의적 교사가 필요 없다고 한다.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들 안에 있어 사도들이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태는 요한일서 2:12-14을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속죄(atonement) 개념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다음 2:12에 나오는 죄 사함이 예레미야 31:34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은 새 언약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2:14에 나오는 아버지를 아는 것도 예레미야 31:34의 성취, 즉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여호와를 알게 되는 새 언약의 성취로 해석한다.
그런데 김진태보다 앞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에 주목한 대표적인 이는 말라테스타(Malatesta)이다. 그는 먼저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요한일서에 빈번하게 나오는 ei=nai evn와 me ,nein evn의 용례를 분석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이루어지는 신앙의 내면화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내면화는 곧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의 약속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새 언약 백성은 바로 이러한 교제와 내면화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죄 사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가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 언약의 요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물론, 예레미야 31:33-34(70인 경, 렘 38:33-34)과 요한일서 2:12-14 사이에 언어적 유사성이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70인 경 예레미야 38:33은 말씀의 내재화를 위해 dwswno,mouj mou eivj thn dia,noian auvtw/n라고 하지만, 요한일서 2:14은 o logoj tou/qeou/ evn u`mi/n me,nei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oida를 사용하는 반면에 요한일서 2:13-14은 ginw,skw를 쓴다.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i[lewj e;somai tai/j avdiki aij auvtw/n kai . t w/n a `ma rt i w/n a uvt w/n o uv mhmnhsqw/ eti라고 하는데, 요한일서 2:12은 avfewntai u`mi/n ai ama rtiai dia to onoma auvtou라고 한다.
그러나 주제적 유비는 분명하다. 앞서 다른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2:12-14에는 죄 용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라는 새 언약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의 다른 본문에도 새 언약 개념이 등장한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요일 2:20, 27) 그들에게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언제든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요일 2:2) 또한,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며 죄짓지 않도록 한다. (요일 3:9) 이처럼 요한일서와 예레미야의 유비에 근거해서 2:12-14을 새 언약의 성취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차등이나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새 언약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새 언약의 복을 동일하게 함께 누린다.
다. 반론과 재반론
그런데 새 언약적 배경을 주장하며 본 연구의 논지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톰슨(Thompson)은 예레미야 31:34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가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로 치환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말라테스타도 예레미야 31:34에 비춰봤을 때 청년들과 아비들은 자녀들 안에 있는 하위 단위의 두 그룹을 나타낸다고 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는 모두를 포괄하는 말인데, 이것이 요한일서에서 청년들과 아비들로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청년들과 아비들은 공동체 안의 청년과 노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결국 언약적 복을 누림에 있어 차이가 없다. 작은 자나 큰 자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충만하다. 그러나 소위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은 육체적 혹은 영적 성숙에 있어 구별된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고, 청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이들은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모두 차별 없이 공통된 복을 누린다. 결국, 한 그룹 견해를 지지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구원의 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이 ‘작은 자’와 ‘큰 자’를 각각 가리킨다면 청년들과 아비들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요한일서는 아비들을 먼저 언급한 후 청년들을 언급한다. 이것도 예레미야 34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서상으로도 자연스럽지 않다.
라. 소결론
따라서 자녀들과 청년들과 아비들은 새 언약의 복을 공동으로 누리는 새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이들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모두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이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들이다.
6. 왜 세 호칭일까?
지금까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서로 다른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요한 문헌에서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성도를 묘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특별히 영적 가족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다. 예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엮어 주신다. (요 19:26-27)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형제’라 불림을 받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고 소개받는다. (요 20:17) 이러한 제자들의 정체성은 이미 서문에서 밝혀진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te,kna qeou/)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이서에도 가족 용어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의 수신자들을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 한다. (요이 1) ‘부녀’로 번역된 “kuria”는 특정 개인 수신자라기보다 교회공동체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앞에 관사가 없을 뿐 아니라 요한이서의 내용이 특정 개인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교회공동체의 문제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한이서의 특징은 마지막 절에도 나타난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요이 13) 요한은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묘사하며 끝인사를 한다. ‘네 자매’(h` avdelfh/j sou)는 저자가 속한 교회를 일컬으며, ‘자녀들’(tatekna)은 그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서 가족 용어인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을 사용하여 교회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은 요한 문헌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수신자들을 이러한 호칭으로 부른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격려일 것이다.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칭찬하고 확신시켜서 그들의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문맥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2:12-14의 내용은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격려하는 내용이고 이어지는 2:15-17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의 삶에 대한 권면을 말한다.
2:12-14이 격려의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슈나켄버그(Schnackenburg)는 2:12-17을 앞 단락과 구분되는 하나의 단락으로 보면서 2:12-14은 2:15-17에 나오는 명령을 준비하는 격려로 본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수신자들의 구원을 먼저 확신시킨 후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톰슨은 아예 2:12-14의 단락 제목을 “Encouragement to the Faithful”이라고 하며 2:15-17에 나오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와 연결된다고 한다. 리우는 2:12-17에 대한 제목을 “Encouragement to Persevere”라 하면서 격려의 기능으로서 2:12-14을 강조한다. 마샬은 신자가 새로운 신분으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2:12-17의 주제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2:12-14에서 신자의 신분을 확신시킨 다음에 신자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호칭도 이러한 격려의 문맥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저자는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아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라고 칭찬한다. 또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 성숙한 자, 곧 아비들이라고 칭찬한다.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패기를 칭찬하며 그들을 청년들이라 부른다. 이러한 칭찬을 기초로 이어지는 문맥에서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요일 2:15-17)
7. 결론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의 대상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이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한일서 문맥, 저자의 표현 기법, 새 언약적 요소.
첫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요한일서 수신자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르게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 안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 따라서 마치 세 그룹 혹은 두 그룹 사이에 어떤 육체적, 영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구분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둘째, 요한 문헌은 자주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표현을 풍성하게 한다.
요한복음에서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는 믿음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이다. (요 1:10-12) ‘어린 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도 모두 각각 번갈아 가며 같은 뜻을 나타낸다. (요 21:15-17) 요한일서 안에서도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grafw, 요일 1:1-4), ‘죄’(a`martia)와 ‘불의’(avdikia,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 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가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심지어 2:12-14 안에서도 “gra,f w”와 “e;graya”는 그 뜻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서 반복 강조하는 표현으로 나온다. 이처럼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단어는 다르지만, 모두 요한일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다른 표현을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의 특성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예레미야 31:33-34에 약속된 새 언약의 복이다.
새 언약의 복은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구분 없이 누릴 종말론적 복이다. 다시 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자녀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아비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청년들이 누릴 복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구분 없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며 말씀의 내주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각각 어느 특정 그룹을 가리킨다기보다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사랑받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또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성숙한 자라 격려한다. 그리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통해 악한 자를 이겼다고 칭찬해 준다. 이런 칭찬을 기초로 2:15부터 나오는 권면을 받아들이게 한다. 곧,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가족을 비유해서 3가지 호칭으로 구분해서 불렀습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죄 용서”를 강조할 때는 “자녀들아”라고 불렀고,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들아”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을 강조할 때는 “아비들아”라고 불렀고, “흉악한 자를 이겼다”는 것을 강조할 때는 “청년들아”라고 불렀습니다.
1) 아이들
요한일서 2장 12절에 “자녀들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테크니아’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갓 태어난 아이를 빗대어 영적으로 갓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순간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는 것은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린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의 말은, 너희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속하게 되었다는 표현으로 “자녀들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문 14절에서 “아이들아”라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이들은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일생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 될 때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아비들
여러분~!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비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장하는 자녀들의 인생관도 가장인 아비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아비들”이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들이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어야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도 요한 당시에 잘못된 가르침을 강조하는 이단 세력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번 믿었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요일 1:8, 10). 또한 계명을 무시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요일 2:4, 11).
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가면 결국, 구원에 이른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이단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단에 꼬임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비들”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분 아니라, 신앙의 가족들을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했습니다.
“아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경험적으로 아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요즘은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아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적으로 성숙한 “아비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보존되고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영적인 아비들과 목회자를 존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목회자가 아닐지라도 성경, 기도, 예배, 교제, 전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한 “아비”의 단계에 이르게 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지금까지 올바른 신앙이 전수되었습니다.
3) 청년들
“청년들”은 “아비들”로부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잘 배워서 제법 성장한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청년들”의 특징을 “악한 자”를 이긴 것으로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도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힘만으로는 악하고, 흉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어둠의 권세인 사탄을 완전히 짓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청년들”도 악하고 흉악한 사탄을 이길 수 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서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했다”는 것은 평소에 영적 건강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도 생활도 많이 했고,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깊은 신앙의 교제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무기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서 공격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에베소서 6장에서 권면 했습니다(엡 6:11-17). 그러니까 “아이들”의 단계에서 “청년들”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뒀을 때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청년들”이야말로 영적 싸움에서 맨 앞에 선봉에 서서 적군인 사탄과의 혈투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영적 군사였습니다.
그런 “청년들”이 없다면 하나님의 가족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됩니다. 영적 최전방에서 과감하게 사탄과 그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주의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의 신앙에서 “청년들”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악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을 계속해서 물리치면서 결국 “아비”의 단계로 성숙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굳건하게 지키고, “아이들”과 “청년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영적 “아비들”로 견고하게 세워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ronunciation [ gĕĕnna ]
Etymology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5:29,30, 10:28, 18:9, 23:15,33, 막9:43,47, 눅12:5, 불의 지옥, 마5:22, 18:9. [상징적으로] 약3:6.
-
관련 성경 / 지옥 불(마 5:22, 18:9, 약 3:6), 지옥(마 5:29, 막 9:45, 눅 12:5).
Pronunciation [ gayʼ ]
Etymology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 Old Testament / 30회 사용
-
1. Noun 협곡, 계곡, 평평한 곳, 저지대, 왕하2:16, 겔6:3, 35:8.
-
관련 성경 / 골짜기(민21:20, 삼상13:18, 겔39:11), 가이(삼상17:52), (소금) 골짜기(왕하14:7, 시60편표제).
Pronunciation [ Hinnôm ]
- Old Testament / 2회 사용
-
1. 고유명사, 남성 여부스 족 사람으로 보임 ‘힌놈’.
-
관련 성경 / 힌놈(수 15:8, 18:16).
1월 5일(월)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2:8)
Yet I am writing you a new command; its truth is seen in him and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
새 계명(엔토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 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 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 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 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왜 ‘새’ 계명인가?
-
구약에도 “이웃 사랑”은 있었습니다(레 19:18).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기준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즉, 십자가의 희생적· 무조건적 사랑이 기준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 특징
-
기준의 새로움 :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
관계의 초점 : 율법 준수보다 서로를 향한 삶의 태도
증거의 역할 : 사랑이 곧 제자됨의 표지
옛 계명과의 관계
새 계명은 옛 계명을 폐기하지 않음
오히려 율법의 완성(마 22:37–40, 롬 13:10)
오늘의 적용
-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섬기기
-
교회 안팎에서 그리스도의 성품 드러내기
새 계명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 가르침을 말해요.
-
내용 :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
의미 : 이전의 율법을 폐기한다기보다, **예수님의 사랑(희생·용서·섬김)**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강조한 거예요.
-
핵심 포인트 :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조건 없는 사랑
-
그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됨
-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렇게 전해져요(짧게 인용):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원하면 이 계명이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학교, 친구 관계 등)도 예로 설명해 줄게요.
옛 계명(옛 계명, Old Commandment)은 성경에서 주로 이미 주어졌고 처음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의 계명,
특히 율법과 사랑의 계명을 가리킵니다.
1.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쓰노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라”
2. 의미 정리
-
처음부터 주어진 계명
→ 하나님의 뜻은 새롭게 바뀐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선포됨 -
율법의 핵심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신 6:5, 레 19:18) -
말씀으로 이미 들은 계명
→ 새로 창안된 규칙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다시 확인된 진리
3. 옛 계명과 사랑
옛 계명의 핵심도 결국 사랑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웃을 사랑하라
즉, 내용은 옛 것이지만,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짐
4. 새 계명과의 관계
| 구분 | 옛 계명 | 새 계명 |
|---|---|---|
| 시점 | 처음부터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 내용 |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
| 기준 | 율법 | 십자가의 사랑 |
| 성격 | 명령 | 본을 따른 삶 |
5. 핵심 요약
-
옛 계명 : 처음부터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
-
새 계명 : 그 사랑이 예수 안에서 구체적 삶으로 드러난 것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적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왜 ‘새’ 계명인가?
구약에도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계명은 기준과 깊이에서 새롭습니다.
| 구분 | 기존 계명 | 새 계명 |
|---|---|---|
| 사랑의 기준 | 나 자신 | 예수님의 사랑 |
| 사랑의 범위 | 이웃 중심 | 제자 공동체 → 모든 사람 |
| 사랑의 방식 | 윤리적 요구 | 십자가적 자기희생 |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새로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
-
자기희생적 사랑 :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심
-
무조건적 사랑 : 배신할 제자들까지 사랑
끝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신앙적 의미
-
제자의 표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
교회의 본질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성령 안에서 가능한 계명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롬 5:5).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옛 계명이며 새 계명” (요일 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해석 포인트
-
옛 계명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핵심(예수님의 가르침)
-
새 계명 :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됨
-
성령 안에서 현재적으로 살아 움직임
-
👉 새로움은 내용이 아니라 실체와 능력에 있음
빛과 어둠의 기준 : 형제 사랑 (요일 2:9–11)
| 상태 | 기준 |
|---|---|
| 빛 가운데 있음 | 형제를 사랑함 |
| 어둠 가운데 있음 | 형제를 미워함 |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요한의 논리
-
신앙 고백 ≠ 참 신앙의 증거
-
사랑의 실천 = 빛 가운데 거함의 증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드러냄
계명의 요약과 완성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 신학의 핵심 구조
믿음 → 사랑 → 순종
-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반드시
형제 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남
설교용 정리 (3대지 구조)
제목 예시
「새 계명, 빛 가운데 사는 삶의 기준」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이다 (요일 2:7)
-
새 계명은 갑작스러운 윤리가 아니다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본질
📌 적용
우리는 더 새로운 가르침을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대지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이다 (요일 2:8)
-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됨
-
성령 안에서 지금도 역사함
📌 적용
사랑은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이다
대지 3. 새 계명은 신앙의 ‘판별 기준’이다 (요일 2:9–11, 3:23)
-
빛과 어둠은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분됨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 신앙
📌 적용
“나는 옳은가?”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라
Ⅲ. 묵상용 요약 (개인·소그룹)
묵상 질문
-
나는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
나의 신앙은 말에 머무는가, 삶으로 증명되는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방식이 내 사랑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묵상 기도문
주님,
말로만 빛에 있다 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빛 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한 줄 묵상
“새 계명은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라는 부르심이다.”
새 계명, 말이 아니라 삶이다(요한일서 2:7–11, 3:23)
Ⅰ. 들어가는 말 (도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말은 신앙적인데 마음은 차가워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정통입니다.”
“나는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은 식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빛 가운데 있느냐, 어둠 가운데 있느냐?”
그 기준은 사랑입니다.
Ⅱ. 본문 해설과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입니다 (요일 2:7)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옛 계명이라”
사랑은 새로운 유행이 아닙니다.
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본질입니다.
🔔 예화 ①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부부
결혼 초에는 작은 일에도 고맙다 말하던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연해져 버린 것입니다.
👉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 진리를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입니다 (요일 2:8)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사랑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후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 예화 ② – 말로만 하는 신앙
어떤 성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성격이 원래 이래서 사랑 표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격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3️⃣ 새 계명은 신앙의 진짜 기준입니다 (요일 2:9–11, 3:23)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있다 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니라”
요한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
→ “어둠에 있다”
🔔 예화 ③ – 교회 안의 어둠
교회 안에서
말씀과 봉사는 열심인데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며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 사랑 없는 신앙은
방향을 잃은 신앙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요한일서 3:23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요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 오늘의 적용
-
오늘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십시오
-
마음으로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말이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Ⅳ. 맺는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어둠의 마음을 품고 살았음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새 계명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줄 결론
“새 계명은 설교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두 번 인용하셨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자비 부족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복음서를 읽은 우리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계층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점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비(혹은 그 결여)라는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주님께서 호세아의 그 구절을 처음 사용하신 것은 당시 세리였으며 후에 사도이자 복음사가가 된 마태를 부르실 때였습니다. 마태 자신이 그 장면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9:9-13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그들은 죄인들이다”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과 먹고 마시리라. 내가 그들을 찾아 회개하도록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우리 자신도 죄인이 아닌 양 “죄인”들을 피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스스로를 “죄 없는 자”로 분류하게 했고, 그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 이는 구약에서 인용된 구절로 신약에서 두 번 인용되었습니다(잠언 3:34, 칠십인역(참고: 칠십인역은 구약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신약에 나오는 구약 본문 약 2/3가 이 번역본에서 유래함)):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겸손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리새인과 그들과 같은 자들이 부족했던 것이며, 우리 역시 종종 부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예는 누가복음 18:9-1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강탈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멸하시느니라.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보지 않으시느니라. 우리가 한 일이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아무 가치도 없느니라.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나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를 무시했고, 우리도 자비 없는 종교적 행위를 추구하며 종종 이를 외면한다.
주님께서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두 번째 장면은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2:1-8
“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陳設餅)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죄 하지 않았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글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율법의 글자에 따르면, 그들은 옳았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고린도후서 3:5-6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누군가 영 없이 글자만 고집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글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요구할 때는, 예를 들어 안식일에 누군가 치유받기 위해서라면, 이 계명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자비는 그 어떤 계명보다도 컸고 지금도 큽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이 말하듯: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일서 4:20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진정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식일 계명이나 다른 모든 계명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하위였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만 알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날짜와 계절과 양에 관한 요구사항까지.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는 정통했으나, 율법의 정신, 즉 겸손과 자비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위선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내는 데는 첫째였으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에는 막내였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이 율법의 핵심이자 더 중하고 더 중요한 사항이다. 이 또한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로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마음의 종류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십일조를 내거나 다른 어떤 희생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바리새인인지 하나님의 참된 종인지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서로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자비 없이 희생만 합니다. 바리새인과 그와 같은 자들에게는 종종 외적인 것,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만과 이기심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1-7, 13-14이 말하듯이: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바리새적 행위의 주요 특징은 위선이다. 바리새인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마음은 불경건하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은 그 짐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길고 끝없는 기도를 드리면서도 동시에 과부의 집을 삼켜 버린다. 겉으로는 경건하고 신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비심 하나 없이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정도만큼 우리도 바리새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짓 종교가 종종 행하는 바이다: 바리새적 즉 위선적이고, 부담스럽고, 무자비하며, 교만한 것이다. 반면 참된 종교는 야고보서 1:27이 정의하는 바와 같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아 주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앞에 참되고 흠 없는 경건은 완벽한 교리나 수많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비와 사랑의 경건입니다.
바리새인들로 돌아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을 흉내 내는 자들을 예수님의 행동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고치려 하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셨거나 치유받은 자들에게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르치신 대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1-6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 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가 가르치신 바가 이러하니 그가 행하신 바도 이러하니라 그러므로 그가 기적을 행하신 후에 숨어 계셨느니라
결론하자면: 정의, 자비, 믿음, 그리고 서로 사랑함이 중요합니다.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무엇이라도 바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종교적 축제나 규칙은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그분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의 사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이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시대에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13-16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에는 여전히 빛, 우리의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을 지키고, 주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비추어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도록 합시다. 죽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며, 우리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행합시다. 미가 6:8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듯이: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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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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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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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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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Etymology / 3319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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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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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대언자 · 중보자 · 보혜사 비교 표
| 구분 | 대언자 (Advocate) | 중보자 (Mediator) | 보혜사 (Paraclete) |
|---|---|---|---|
| 기본 의미 |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 두 관계 사이를 잇는 자 | 위로자, 돕는 자, 변호자 |
| 성경 원어 |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 μεσίτης (메시테스) |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
| 주요 대상 | 하나님 앞에서 성도 | 하나님 ↔ 인간 | 성도 |
| 사역의 방향 | 위로 (하늘을 향함) | 양방향 (하나님과 인간 사이) | 내적 (성도 안에서) |
| 주된 역할 | 죄인을 변호함 | 관계를 화목케 함 |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함 |
| 대표 성경 | 요일 2:1 | 딤전 2:5 | 요 14:16 |
| 담당 위격 | 성자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 | 성령 하나님 |
| 사역 근거 | 십자가의 의 | 속죄와 언약 | 예수의 말씀 |
| 지속성 | 영원함 | 단회적·완전함 | 성도 안에 항상 거하심 |
| 신자의 경험 | 담대함, 용서의 확신 | 하나님과의 화평 | 위로, 인도, 능력 |
핵심 차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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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자 : 법정적 이미지
→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내 피로 의롭다”고 말씀하심 -
중보자 : 관계적·언약적 이미지
→ 끊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 -
보혜사 : 목회적·내적 이미지
→ 성도 안에 거하시며 가르치고 위로하심
한 문장 통합 정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자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땅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이시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며 변호하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표현.
1. 대언자(代言者)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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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자는 말 그대로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중보자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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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성경에서는 주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표현되며,
변호인, 위로자, 중재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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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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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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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7:25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3. 예수 그리스도는 왜 대언자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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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의로우심
→ 죄 없으신 분만이 죄인을 변호할 수 있음 -
속죄의 근거를 가지심
→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하심 -
하나님 우편에서 사역하심
→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심
4. 구약의 중보와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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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제사장: 반복적 제사, 불완전한 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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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단번의 제사 + 영원한 대언자
(히브리서 9:12)
5. 신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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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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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연약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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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언에 근거함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간구하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십니다.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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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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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중보자(Advocate / Paraclete) :
'파라클레토스(Paracletos)'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으며, '위로자', '돕는 자', '변호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변호하고 긍휼을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 죄 사함의 길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죄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구원자 :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 둘이 합쳐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즉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 요한일서 2:1 (요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예수님의 가르침 : 요한복음 14:16, 26 등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보혜사 성령도 넓은 의미에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 중보자 및 변호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입니다.
- 죄 사함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 성령과의 관계: '파라클레토스'(대언자/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 요한일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오셨으며(요한일서 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 어원: '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 부름 받은 자'를 의미하며, 고대 법정에서 변호사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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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사역:
- 죄와 의에 대해 세상과 사람을 책망하고 깨우치심 (요한복음 16:8-11).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심 (요한복음 14:26).
- 연약함을 도우시고 친히 간구하심 (로마서 8:26).
- 사단의 세력에 맞설 힘과 용기를 주심.
- 번역어 논란: 한자어 '보혜사'(保護, 惠, 師)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스승'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원어적 의미와 성경적 맥락을 고려하면 '조력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에 더 중점을 둡니다.
1. 보혜사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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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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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
곁에서 돕는 자
위로자
변호자
중보자
돕는 분(Helper)
👉 법정 용어로는 변호인, 삶의 현장에서는 동행하는 돕는 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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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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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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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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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7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3. “또 다른 보혜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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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 알로스(ἄλλος)
→ 본질과 성격이 동일한 또 다른 분 -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첫 번째 보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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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본질의 또 다른 보혜사
👉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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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하늘에서 대언자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4. 보혜사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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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심 – 진리로 인도 (요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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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게 하심 – 말씀을 기억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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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심 – 환난 중에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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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하심 – 죄·의·심판에 대해 깨닫게 함 (요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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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하심 –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능력 주심 – 증인의 삶을 살게 함 (행 1:8)
5.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 예수 그리스도 | 성령(보혜사) |
|---|---|
| 하늘에서 중보 | 우리 안에 내주 |
| 아버지 앞에서 대언 | 성도를 도우며 인도 |
| 단번의 속죄 | 그 구원을 적용 |
한 문장 요약
보혜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지금도 성도와 함께 하시며,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변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 그리스어 의미: 곁에 불러 도움을 주는 자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
- 성경적 의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님을 지칭하며 신자들과 함께 거하며 인도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분.
- 한자 의미: '보호할 보(保)', '은혜 혜(惠)'로 '은혜로 보호하고 돕는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
- 의미: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맡아 대신 전하는 자.
- 역할: 미래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역할.
- 포괄성: 보혜사는 성령님의 모든 사역을 담는 더 넓은 개념이고, 대언자는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여러 일 중 '말씀을 선포하는' 특정 사역에 집중된 명칭.
- 일치: 보혜사 성령님이 바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시므로, 성령님을 대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결론: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며, 그 보혜사로서 '대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와 대언자의 차이
1. 공통점
-
둘 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서 나온 말
-
뜻: 변호자, 중보자, 돕는 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곁에 서서” 일하신다는 의미
2. 차이점 핵심 정리
| 구분 | 대언자 | 보혜사 |
|---|---|---|
| 누구인가 | 예수 그리스도 | 성령 |
| 어디서 일하시는가 | 하나님 아버지 앞(하늘) | 성도 안과 곁(땅) |
| 주된 사역 | 죄에 대한 변호와 중보 | 삶 속에서의 도움과 인도 |
| 근거 | 십자가의 피와 의 |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 |
| 초점 | 구원의 확보 | 구원의 적용 |
3. 성경 근거
-
대언자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4. 한 문장 요약
대언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보혜사는 땅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5. 신앙적 적용
-
실패했을 때 → 대언자는 “이미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고
-
낙심했을 때 → 보혜사는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붙드십니다.
1월 3일(토)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3875) 파라클레토스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s 상반절의 '하마르테테'('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빛의 성질
빛이 똑바로 나아가는 직진,
표면에서 튕기는 반사,
다른 매질에서 꺾이는 굴절,
파장에 따라 색이 나뉘는 분산이 대표적이며,
이는 빛이 파동(전자기파)이면서 동시에 입자(광자)의 성질을 모두 갖기 때문입니다.
-
직진(Rectilinear Propagation) :
빛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으면 항상 곧게 나아가는 성질로,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가 이에 해당합니다.
-
반사(Reflection) :
빛이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현상으로, 거울에 상이 맺히는 이유입니다.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
굴절(Refraction) :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물 등)의 경계면을 통과할 때 진행 방향이 꺾이는 현상으로, 물속의 물체가 실제보다 떠 보이는 이유입니다.
-
분산(Dispersion) :
굴절 시 빛의 파장(색깔)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달라져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현상으로, 프리즘을 통과하며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입니다.
-
회절(Diffraction) : 파동인 빛이 장애물의 모서리나 좁은 틈을 지날 때 휘어 퍼져나가는 현상입니다.
-
간섭(Interference) & 회절(Diffraction) :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빛이 파동처럼 중첩되거나 휘어지는 현상입니다.
-
산란(Scattering) :
빛이 불규칙한 입자나 표면에 부딪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현상으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레일리 산란)입니다.
-
파동성 :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수직으로 진동하며 진행하는 '전자기파'임이 밝혀졌습니다. 굴절, 간섭, 회절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됩니다.
-
입자성 :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자(photon)'라는 에너지 덩어리(입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광전효과와 같은 현상은 빛의 입자성을 보여주며, 반사 현상도 입자처럼 튕겨 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성질은 물리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이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파동성과 입자성 (이중성)
-
빛은 파동처럼 간섭·회절 현상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입자(광자)**처럼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 작용합니다.
→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합니다.
2. 직진성
-
균일한 매질에서는 빛이 직선으로 진행합니다.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반사
-
빛이 물체 표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현상입니다.
거울에서 “입사각 = 반사각”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4. 굴절
-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 물 등)을 통과할 때 속도 변화로 방향이 꺾이는 현상입니다.
렌즈, 안경, 현미경의 원리입니다.
5. 분산
-
빛은 파장에 따라 굴절 정도가 달라져 여러 색으로 나뉩니다.
프리즘에서 무지개색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6. 간섭과 회절
-
간섭: 두 빛이 겹칠 때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현상
회절: 좁은 틈이나 가장자리를 지날 때 빛이 퍼지는 현상
→ 빛의 파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7. 편광
-
빛의 진동 방향이 한쪽으로 정렬된 상태입니다.
선글라스, LCD 화면에 활용됩니다.
8. 속도
진공에서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km로, 자연계에서 가장 빠릅니다.
9. 에너지와 파장
-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크고(자외선, X선),
-
파장이 길수록 에너지가 작습니다(적외선, 라디오파).
빛의 3대 성질
1. 굴절 : 렌즈, 간이 사진기
2. 반사 : 거울
3. 직진 : 그림자, 일식, 월식, 바늘구멍 사진기, 엑스선
-물체를 본다=빛을 감지한다=광원(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의 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거나, 광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눈에 들어옴.(망막에는 뒤집힌 형태로 상 맺히지만, 뇌는 똑바로 인식)
-달은 광원 X > 달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임.
-달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을 육지(대륙, 달의 바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운석구덩이가 많이 분포되어 있음.(달이 공기가 없어서 풍화작용, 기상작용 없고 운석 구덩이가 그대로 존재)
-수성도 대기 없어서 바람 안 불고, 온도차 크며 운석구덩이 있음.
-금성은 이산화탄소 대기로 뒤덮여서 더움.
-지구는 공기가 있어서 하늘이 파랗게 보임.(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멀리가지 못하지만 많이 산란됨.)
-태양과 물체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물체의 위치와 상관없이 그림자의 크기는 거의 변하지 않음.
-일식(태양-달-지구)은 달그림자가 생기는 좁은 범위에 있는 지역에서만 관찰되지만 월식(태양-지구-달)은 달이 뜨는 모든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음.
-속력이 느린 매질에서는 굴절각이 더 작음.(입사각, 반사각, 굴절각은 각각 수직선(법선)을 기준으로 함)
-빛을 통과시키면 투명하고,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흡수 또는 반사하면 불투명함.(불투명할 때 색깔은 반사된 빛의 색임)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빛이 모두 섞여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가 갖는 의미와 상징
1. 서론
빛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단계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는 단순히 물리적 빛의 창조를 넘어,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담고 있다.
빛의 창조가 성경 전체에서 갖는 의미와 상징을 성경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과 실천적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2. 빛의 창조 : 성경적 배경과 맥락
1) 창조 이야기에서 빛의 첫 번째 위치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로 묘사된다.
이는 빛이 혼돈과 흑암(창 1:2)을 물리치고 창조 질서를 확립하는 시작임을 보여준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기초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
2) 빛과 어둠의 구분
창세기 1:4는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빛과 어둠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한다.
이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혼돈을 물리치고 조화와 구조를 부여하시는 창조적 능력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의 구분은 성경 전체에서 선과 악, 구속과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이어진다.
3. 빛의 신학적 의미
1)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함,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본질을 나타냄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드러낸다.
2) 생명과 소망의 상징
빛은 생명과 소망의 상징으로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1:4-5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빛을
강조한다.
빛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생명을 제공하고, 죄로 인해 어둠에 갇힌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성경 전체에서 빛의 상징적 의미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빛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을 보여준다. 말씀은 성도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공한다.
2) 구속사적 빛 :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빛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며,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제공하신다. 이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연결하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사 9:2, 마 4:16).
3)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
빛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출애굽기 13:21에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이 빛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3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의 빛이 된다고 묘사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5. 빛과 인간의 역할
1) 성도의 빛된 삶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16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도들이 어둠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2) 복음 전파의 빛
사도행전 13:47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세웠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예언한다. 빛은 복음의 전달과 구원의 확장을 상징하며, 성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6. 빛과 어둠의 대조: 종말론적 의미
1) 심판과 구원의 상징
빛과 어둠은 종말론적 문맥에서도 중요한 대조를 이룬다.
데살로니가전서 5:5은 성도들을 “빛의 자녀”로 부르며, 심판 날에 구원받을 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반면, 어둠은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마 8:12).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때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빛
요한계시록 22:5에서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빛이 종말론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는 창조에서 시작된 빛의 의미가 종말에 완성됨을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한다.
7. 결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빛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생명과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상징으로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성도의 삶과 복음
전파에 있어서 빛의 역할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천적 도전을 제공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그리고 새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준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빛의 창조가 단순한 우주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 계획의 서막임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이 짧은 문장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자 시작이야.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고, ‘천지’는 공간과 모든 존재를 뜻해.
즉, 시간과 공간, 우주 전체가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된 거야.
✨ 6일 동안의 창조 과정 요약
하나님은 총 6일 동안 창조 활동을 하시고, 7일째는 쉬셨어.
☀️ 제1일 – 빛의 창조
“빛이 있으라!” - 오르 / 동사형 - 드러내다
- 혼돈과 흑암뿐이었던 세상에 빛이 생김
- 빛과 어둠이 구분됨 → 낮과 밤의 개념 등장
- 아직 해, 달, 별은 없음! 이건 ‘빛’ 그 자체야 (하나님의 임재나 질서의 상징)
📝 포인트: 빛은 모든 창조의 시작, 어둠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첫 걸음!
1. 빛. 2. 아침빛. 3. 태양빛 혹은 태양 자체
Pronunciation [ ’ôwr ]
Etymology / 21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22회 사용
🌊 제2일 – 하늘의 창조
- 물을 나눔: 위의 물(구름, 하늘)과 아래의 물(바다, 지면의 물)로
- 이 사이를 궁창(하늘)이라 부르심
📝 포인트: 공간 창조! 혼돈의 물에서 하늘을 분리해 내셨다는 점이 중요.
🌱 제3일 – 땅과 식물의 창조
- 바닷물을 한곳에 모으고, 육지와 바다 구분
-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등장
📝 포인트: 땅이 처음 등장하고, 식물부터 자라기 시작해! 생명체의 시작!
🌞 제4일 – 해, 달, 별의 창조 / 광명체 - 마오르
- 낮을 주관할 해, 밤을 주관할 달, 계절과 시간 측정할 별 창조
- “징조와 사시와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포인트: 빛 자체(1일)와 광명체(4일)는 다름!
시계와 달력이 생긴 날이기도 해.
1. 빛. 2. 등잔
Pronunciation [ mâʼôwr ]
Etymology / 복수אוֹר,מְאֹרֹות,מְאֹרִים에서 유래
- Old Testament / 19회 사용
🐟 제5일 – 물고기와 새 창조
- 바다엔 물고기, 하늘엔 새가 가득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처음 등장
📝 포인트: 바다와 하늘 생물이 드디어 생겨남. 축복의 첫 언급!
🐘 제6일 – 동물과 사람 창조
- 육지 동물 창조 (짐승, 기는 것들 등)
- 가장 마지막에 사람 창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
- 사람에게 식물 먹을 것을 주심
📝 포인트: 인간은 창조의 하이라이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능력의 상징
🛏️ 제7일 – 안식
-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심
-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포인트: 안식일(Sabbath)의 기원이 이 날!
우리 삶에도 쉼과 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줘.
📌 정리 요약표
일 창조 내용 포인트 요약
| 1일 | 빛 | 질서의 시작, 낮과 밤 구분 |
| 2일 | 궁창 (하늘) | 위와 아래 공간 분리 |
| 3일 | 육지, 바다, 식물 | 생명이 뿌리내릴 공간 |
| 4일 | 해, 달, 별 | 계절과 시간의 질서 |
| 5일 | 물고기, 새 | 생물의 시작과 축복 |
| 6일 | 육지 동물, 인간 | 창조의 완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
| 7일 | 안식 | 쉼과 거룩함, 균형의 시작 |
창세기 천지창조의 메시지
- 혼돈 → 질서 :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함
- 빈 곳 → 채움 : 공간을 만든 후, 그 공간에 생명을 채움
- 축복과 안식 : 창조된 세계는 축복받았고,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가르침
1월 2일(금)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1세기 말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 가르침에 대응하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장 5절은 이 서신의 핵심 선언 중 하나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로 번역된 '호 테오스 포스 에스틴'(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로 번역된 '스코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우데미아'(σκοτία ἐν αὐτῷ οὐκ ἔστιν οὐδεμία)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중 부정('우크...
우데미아')의 사용으로, 이는 '전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질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떠한 형태의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순수성, 진실성,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명하시고, 그분
안에는 어떠한 속임이나 악도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4:7과 깊이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스가랴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요한은 그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선언합니다.
두 구절 모두 빛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영적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명확성이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진리"와 "나의 진리"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는 이러한 모호함이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으십니다.
현대 기독교 작가이자 신학자인 팀 켈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완전히 진실하시고, 완전히 선하시며, 완전히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 안에는 숨겨진
의제나 어두운 비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켈러의 이 통찰은 요한일서 1:5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빛 되심은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어두운
데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빛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현대적 예로,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활동가인 코넬 웨스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빛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웨스트는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그분 안에 어둠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에 맞서 담대히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과 활동은 요한일서 1:5의 진리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는 진리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진리 안에서 걷기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진실하게 살며, 어둠의 행위를
피합니다.
지속적인 정화 추구하기 :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지속적인 정화와 성화를 추구합니다.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시편 139:11-12는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어둠이 어둡지 아니하며 밤이 낮과 같이 밝으리니 어둠과 빛이 주에게는 같으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빛은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도전은 우리가 이 빛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 새빛교회 홈페이지
- 믿는 자의 삶: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이는 진리를 이해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뜻합니다.
- 죄와 어둠의 대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지으면 거짓말하는 것이며, 빛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 1:5-7).
서론 │ Introduction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
‘소통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범주화할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
본문과 개혁신학의 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1. 비소통 속성 │ Incommunicable Attributes
1.1 자존성 (Ase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עַצְמוּת’가 직접적 사용은 없으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에서 자존성이 드러남 (출애굽기 3:14)임.
- 성경 배경: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심을 계시하심.
- 개혁신학 정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CF) 제4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달리 지으신 이 없이 스스로 계시는 분임.”
1.2 불변성 (Immutabil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לֹא תִמּוֹט’(창조 이전부터 변함 없음) 개념이 잠언 10:29 등에서 간접 언급됨.
- 성경 배경: 말라기 3:6 “내가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함”으로 확증됨.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질·지식·의지·언약에서 영원히 변함없음(WCF 제2장).
1.3 전지성 (Omniscience)
- 원어 분석: 헬라어 ‘παντογνῶσις’(파롭시 사용 없으나 ‘πᾶν’(모든) + ‘γινώσκειν’(알다) 어근) 개념이 시편 139편에 나타남.
- 성경 배경: 시편 139:1–4, “주의 알지 못하심이 없나이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과거·미래에 걸쳐 완전하고 즉각적으로 아심(WCF 제2장 해설).
1.4 전능성 (Omnipot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דַּי’(전능하신 자, Shaddai) 어원은 ‘산의 하나님’ 또는 ‘전능하신 분’ 의미가 논의됨.
- 성경 배경: 창세기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 무한한 능력으로 제한받지 않음(WCF 제2장).
1.5 편재성 (어디에나 계심, Omnipres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מַיִם וּשְׁאוֹל’(시편 139:8) 언어에서 모든 공간에 함께 하심을 표현함.
- 성경 배경: 시편 139:7–10, “주의 영이 가는 곳마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물리적·영적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만유에 충만하심(WCF 제2장 해설)
1.6 영원성 (Eternity)
- 성경 근거: 시편 90:2, 이사야 57:15
-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심.
2. 소통 속성 │ Communicable Attributes
2.1 거룩 (Holiness)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קֹדֶשׁ’(קָדַשׁ, ‘구별하다’)
- 성경 배경: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죄와 더럽힘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구별됨(WCF 제2장).
2.2 사랑 (Love)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γάπη’(아가페)와 히브리어 ‘אַהֲבָה’(아하바)에서 ‘호의’와 ‘헌신’의 의미가 결합됨.
- 성경 배경: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성상 사랑이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심(WCF 제2장 해설).
2.3 은혜 (Grace)
- 원어 분석: 헬라어 ‘χάρις’(카리스), ‘은총·호의’ 의미.
- 성경 배경: 에베소서 2:8–9,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거룩과 정의에 반해 긍휼을 베푸시는 속성임(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호의).
2.4 긍휼 (Merc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רַחֲמִים’(라하밈), ‘자애·연민’ 강조.
- 성경 배경: 출애굽기 34:6,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동정과 자비를 간절히 나타내심.
2.5 정의 (Justi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צֶדֶק’(쎄덱), ‘올바름·공정함’.
- 성경 배경: 시편 89:14, “정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법에 따라 모든 피조물에게 올바른 보응을 행하심.
2.6 진리 (Truth)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감추어짐에서 벗어난 실재’.
- 성경 배경: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말씀에 있어서 오류가 없으심.
2.7 지혜 (Wisdom)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חָכְמָה’(호크마), ‘분별·조화’.
- 성경 배경: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풍성한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알맞은 방식을 아심.
2.8 주권 (Sovereignty)
- 원어 분석: 특별한 단어 대신, ‘통치’(מַלְכוּת, 말쿠트) 개념으로 표현됨.
- 성경 배경: 다니엘 4:35, “하늘의 군대를 다스리는 이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인이며, 그의 뜻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짐.
Conclusion
하나님의 속성은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뉘며, 각각 성경이 계시하는 바와 개혁신학의 정의가 일치함을 알 수 있음.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통해 깊이를 더했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신뢰할 수 있음.
Introduction
The attributes of God can be broadly categorized into two groups: Incommunicable Attributes and Communicable Attributes. Each of these attributes is clearly revealed in Scripture and defined in depth by Reformed theology. In the following main section, we will organize these attributes systematically, providing their biblical backgrounds and etymological analysis in the original biblical languages (Hebrew and Greek).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눌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에서 명확히 계시되며, 개혁신학에서 깊이 있게 정의됨. 다음 본론에서는 이 속성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성경적 배경 및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함께 제시함.
1. Incommunicable Attributes │ 비소통 속성
1.1 Aseity (자존성)
- Etymology: While the Hebrew word עַצְמוּת (self-existence) does not appear directly in Scripture, the concept is clearly revealed in Exodus 3:14: “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
- Biblical Background: God declares His self-existence and independence from all created things.
- Reformed Theolog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4 – God is not created but exists of Himself eternally and independently.
1.2 Immutability (불변성)
- Etymology: Hebrew concept לֹא תִמּוֹט (not to be moved or changed) conveys the immutability of God's being, as in Proverbs 10:30.
- Biblical Background: Malachi 3:6 – “For I the Lord do not change.”
- Reformed Theology: God is eternally unchanging in His being, will, knowledge, and promises (WCF Chapter 2).
1.3 Omniscience (전지성)
- Etymology: Greek term παντογνῶσις (pan–all + gnosis–knowledge) reflects God's infinite knowledge, although not used directly in Scriptu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1–4 – “You have searched me, Lord, and you know me…”
- Reformed Theology: God perfectly and eternally knows all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1.4 Omnipotence (전능성)
- Etymology: The Hebrew word שַׁדַּי (Shaddai) is commonly translated “Almighty,” possibly derived from “mountain” or “all-powerful.”
- Biblical Background: Genesis 17:1 – “I am God Almighty…”
- Reformed Theology: God is all-powerful and nothing can prevent Him from accomplishing His sovereign will.
1.5 Omnipresence (편재성)
- Etymology: Expressions like שָׁמַיִם וּשְׁאוֹל (heaven and Sheol) in Psalm 139:8 convey that God is present everywhe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7–10 – “Where shall I flee from your presence?”
- Reformed Theology: God is fully present in all place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2. Communicable Attributes │ 소통 속성
2.1 Holiness (거룩)
- Etymology: Hebrew קֹדֶשׁ (qodesh) from root קָדַשׁ (qadash), meaning “to set apart.”
- Biblical Background: Isaiah 6:3 – “Holy, holy, holy is the Lord of hosts…”
- Reformed Theology: God is completely and absolutely separate from all sin and impurity.
2.2 Love (사랑)
- Etymology: Greek ἀγάπη (agapē) and Hebrew אַהֲבָה (ahavah) both reflect deep, sacrificial, covenantal love.
- Biblical Background: 1 John 4:8 – “God is love.”
- Reformed Theology: God is by nature love and pours out this love particularly on His elect.
2.3 Grace (은혜)
- Etymology: Greek χάρις (charis), meaning unmerited favor or kindness.
- Biblical Background: Ephesians 2:8–9 –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Reformed Theology: God shows unearned favor to undeserving sinners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 Mercy (긍휼)
- Etymology: Hebrew רַחֲמִים (rachamim), meaning compassion or tender affection.
- Biblical Background: Exodus 34:6 – “A God merciful and gracious…”
- Reformed Theology: God demonstrates pity and compassion especially toward the miserable and sinful.
2.5 Justice (정의)
- Etymology: Hebrew צֶדֶק (tsedeq), meaning righteousness or fairness.
- Biblical Background: Psalm 89:14 –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your throne…”
- Reformed Theology: God rewards and punishes all in accordance with His holy law and perfect judgment.
2.6 Truth (진리)
- Etymology: Greek ἀλήθεια (alētheia), meaning that which is unconcealed, real, or trustworthy.
- Biblical Background: John 14:6 –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 Reformed Theology: God is utterly reliable in all His words and revelations—without error or deceit.
2.7 Wisdom (지혜)
- Etymology: Hebrew חָכְמָה (chokhmah), meaning discernment and applied knowledge.
- Biblical Background: Romans 11:33 – “Oh, the depth of the riches both of the wisdom and knowledge of God!”
- Reformed Theology: God always chooses the best means to achieve His perfect ends.
2.8 Sovereignty (주권)
- Etymology: Expressed biblically through concepts like מַלְכוּת (malkuth), meaning kingship or rule.
- Biblical Background: Daniel 4:35 – “He does according to his will among the host of heaven…”
- Reformed Theology: God governs all things according to His eternal decree, accomplishing His perfect will.
Conclusion │ 결론
God’s attributes are rightly categorized into incommunicable and communicable types, both of which are thoroughly rooted in Scripture and explained in Reformed theology. Through the study of biblical languages, deeper insight is gained into the nature of God. This study leads believers to deeper reverence, worship, and trust in the triune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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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 ||
속성 |
정의 |
성경구절 |
단일성 |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
신 6:4 |
무한성 |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
왕상 8:27, 행 17:24 |
영원성 |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
창 21:33, 시 90:2 |
영성 |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
요 1:18, 딤전 1:17 |
불변성 |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
말 3:6, 약 1:17 |
주권성 |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
엡 1:21 |
전지성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
시 147:4-5, 마 11:21 |
전능성 |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
마 19:26, 계 19:6 |
편재성 |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
시 139:7-12, 렘 23:23-24 |
사랑 |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
엡 2:4-5, 요 4:8 |
유복성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
신 7:7-8 |
정의성 |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
행 10:34-35 |
은혜성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
출 34:6, 딛 2:11 |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 |
능력 |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
도덕 |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
시공간 |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에 나오는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1. 빛 = 하나님의 성품
성경에서 빛은 주로 다음을 의미합니다.
-
거룩함 :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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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 거짓과 속임이 없으신 분
-
순결과 의로움 : 도덕적·영적 완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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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는 분
그래서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 하나님 안에는 죄, 거짓, 불의, 혼합됨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라는 부르심
이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요구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일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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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드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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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숨기는 삶 =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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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진리 안에 사는 삶 = 빛 가운데 행함
3. 예수 그리스도와 빛
요한복음에서는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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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안에서 완전히 보여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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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어둠 속에 오셨으나, 어둠이 이기지 못함 (요 1:5)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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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는 어둠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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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보다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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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되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가
👉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드러내어 치유하시고 살리기 위해 빛을 비추십니다.
성령과 기질
팀 라헤이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네 가지 기질의 장단점
1. 다혈질의 장점
단점
2. 담즙질의 장점
단점
3. 우울질의 장점
단점
4. 점액질의 장점
단점
기질TEST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기질TEST
약점을 극복하려면
극복하여야 한다.
어떻게?
I.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타고난 기질만큼 묘한 것도 없다. 눈송이의 모양이 천태만상을 이루듯이 인간은 이 기질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고 그 사람 나름의 특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하는 근원으로서 잘 훈련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그의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인품까지 비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기질에는 강하고 약한 면이 있다. 누구나 강한 면만 생각하고 싶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강한 면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 기질(氣質:temperament) : 타고난 성품의 결합체, 유전학적으로 국민성, 인종, 성별, 그외 어떤 유전 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
• 성격(性格:character) : 앞에 말한 기질 + 어렸을 때의 훈련, 교육, 근본적 태도, 신앙, 원칙등이 가미되어 형성. 곧 닦이고 훈련된 기질
• 인격(人格:personality)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면에 나타나는 태도.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체내에 있는 네 가지 체액 - 혈액, 황색담즙, 흑색담즙, 가래 - 에 비유하여 네 가지 기질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기질이 어떤 형태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과 약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기질에 대해 발표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칫하면 위험한 공부가 된다. 친구들에 대해 분석적인 태도로 나아가려 하고 "그 아이는 어떤 타입의 아이지?" 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되겠다.
II. 네 가지 기질과 장단점
1. 다혈질
1) 장점
다혈질보다 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기 주위 사물에 대해서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항상 품고 있으며, 환경으로 인한 감정이 예민하여 불쾌했던 일도 환경이 바뀌면서 곧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기가 없거나 발랄하지 못할 때가 극히 드물며 웬만한 환경에선 항상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권태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먼 단어이고 권태를 느끼기 전에 그는 이미 재미있는 일로 돌아서곤 한다.
그는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려 과거에 골치 아프고 복잡했던 문제들을 머리 속에 남겨두는 법이 없다. 또한 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다가 올 곤경에 대해서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질 않는다. 그저 현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낙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희열을 느낀다. 그는 쉽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의 풍부한 정열은 때로 다른 사람까지도 그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곤 한다. 그는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동정심이 많은 것은 다혈질의 훌륭한 재산중의 한가지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혈질보다 더 순수하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쁜 기분을 함께 나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명령을 그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성품이다. 특히 의사인 경우 그는 훌륭한 태도로 환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혈질 사람의 엄숙한 태도는 가끔 타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다혈질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은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쾌활하고 반응이 빠른 사람들로 인해 재미있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훈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2) 약점
다혈질의 끝없는 활동은 사실 자세히 보면 휴식 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 실제적이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그의 감정은 쉽게 그를 흥분시켜서 일의 전체를 심각히 분석해보기도 전에 그릇된 방향으로 이미 일을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침착치 못한 성격 때문에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그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퍽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활동상태가 일생동안 계속될 때 그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때로 그의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끝내 열매 없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다혈질은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태도가 때론 그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가 약한 점과 세련된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은 곧잘 시작하면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 맺는 위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의 반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을 때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예"이다. 자신의 시간문제, 능력, 그 외의 여러가지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다. 자기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몇몇 사람의 앞잡이로 훌륭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그룹의 일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의 약속과 결실과 책임들을 쉽게 잊는다.
그에게서는 정확한 시간약속 이행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의 약한 의지가 가장 위험한 결과로 나타날 때는 그의 도덕관이 주위의 환경과 동료들에 의해 변할 때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결실하는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쾌활한 성격과 대인관계로 인해 동료들 가운데 일찍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앉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의 타고난 개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혼자 떠들게 되고, 남들도 모두 다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다가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일쑤다.
다혈질은 감정적 불안정성 때문에 쉽게 용기를 얻는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해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고 한번 폭발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다. 곧 사과도 잘한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는 자신은 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다혈질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 여러 번 후회하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보겠다. 다혈질처럼 육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 유혹에 더 많은 생각을 쏟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령께 간구해야 할 것은 "절제"와 "자제력"이다. 다른 세 가지 천성과 마찬가지로 다혈질도 가장 긴급하고 큰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2. 담즙질
1) 장점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며 투쟁력 이 강하다. 항상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계획은 다혈질의 계획과 달리 조직적이고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번 시도했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번엔 이 한가지 일만 해 봐야지"하는 식으로 일에 골몰한다. 복잡한 게획 대신 단순한 계획하에서 그는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의 성공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훌륭한 계획보다도 『결단력』 과 『일에 대한 집착력』때문이다.
담즙질의 기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물은 실리성(實利性)을 기준으로 다루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단체적인 일에 대해선 무척 호감을 갖고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무적인 일에서는 실증을 느낀다.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 순간 순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해 내는 능력도 있다. 담즙질의 소유자가 의사라면 특별히 긴급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직감에 의한 경우가 많다. 담즙질은 원래 "지도자적인 자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그의 의지는 그룹을 이끌기에 충분하고 모든 사람들의 훌륭한 판단자가 되며, 긴급 사태에는 빠르고 대담한 태도로 일을 처리한다. 지도자로 임명되면 곧 이를 수락하거니와 때로는 자진해서 일을 맡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으로 불리운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협조할 것이다.
담즙질 역시 천성적인 자기 신뢰로 인해 항상 『낙관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한 환경까지도 기꺼이 떠날 만큼『모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남보다 앞장 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앞서간다. 어떤 일의 상황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도중의 함정과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을 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에만 중점을 둔다.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못하고 그는 도리어 역경을 통해 그 일을 꼭 완수해야겠다는 욕망을 더욱 갖게 된다.
2) 단점
담즙질에게도 큰 약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그의 "딱딱함과 화를 잘 내는 것과 성급하고 오만"한 점이다. 담즙질은 감정적으로 너무 무딘 사람이다. 그는 동정심 같은 것에 대해 감상적인 쓸데없는 짓이라고 멸시하기도 하며, 그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다. 그는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곧잘 화를 내며, 한번 화를 낸 후에는 그가 불쾌하게 느꼈던 일에 대해『계속 원한을 품는』버릇이 있다. 심한 복수심 때문에 실제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다시 보복하기를 꺼리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분개하는 성질은 그의 생활을 편안치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육체적인 병으로는 40세 이전에 궤양으로 고생하게 되는 수가 많고, 영적인 병으로는 분노와 화를 내는 일로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 많다. 담즙질에는 묘한 "잔인성"이 있어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권리를 무단히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강한 도덕적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한 성공을 위해서는 법률을 어기거나 어떤 교활한 방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몰염치한 죄수들과 독재자들이 이 담즙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담즙질의 강한 결단력은 또한 너무 강렬할 때가 있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 또는 나중에 그가 후회할 과격한 문제에 그를 몰아 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장을 보고 만다. 그가 사과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 인정이 없고 퉁명스럽고 또 냉소적인 말을 냉정하게 내뱉는다. 남에게 동의하는 것도 그에겐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혼할 때 그의 배우자가 갖는 가장 큰 문제거리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기 아내를 때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룰 것이다.(폭력이 아닌)
담즙질의 강한 독립심과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거만한" 사람이 되게 한다. 어떤 일에 좀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매우 거만하고 그 일에 대해 세도를 부려 드디어는 불쾌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이러한 불쾌한 성품은 그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나쁜 행동보다도 성공 그 자체를 더 좋은 일로 보고 거기에만 중점을 둔다.
그는 어린 나이가 아니면 어른이 된 이후 신앙을 가지기 힘들며,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곧잘 그날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꽉 차고 그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해 보지 못하는 한 규칙적인 예배시간은 쓸데없고 시간낭비인 것처럼 생각 될 것이다.
3. 우울질
1) 장점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질에서보다 더 많이 그리고 깊숙이 감상하며, 또한 예술에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나 다혈질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우울질의 소유자는 창작적인 추리에도 능란하여 한창 상상력이 활발할 때는 가치 있고 건전한 창작물을 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완전주의자』로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훌륭함"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포용력은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과 결정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만약 기회가 새로이 주어진다면 좀더 훌륭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질의 "분석력"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인 성품과 합성되어 일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능력이 있게 하였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획이 제안되면 우울질은 그것을 즉시 분석하여 그들이 부딪치게 될 여러가지 숨은 문제들을 골라내곤 한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분석해서 나온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을 반대할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들이라는게 그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다.
그의 분석적인 능력과 태도로 보아 그에게는 수학, 이론과학, 의학, 건축학, 철학, 창작문학, 그 외 면밀한 것을 요하는 일이 적합하다. 다행스럽게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스러워지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그 기질 자체가 "충성스럽기"때문이다. 우울질은 다혈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려 들진 않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문자그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정도로 그 친구들을 포용한다. 어떤 일을 주어진 시간에 끝까지 이끌고 나가서 완성시켜 놓은 일에서는 그를 언제나 신임해도 좋다.
우울질은 앞에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지극히 희생적인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자기동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를 잘 알아서 자기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진해서 발표하려하지 않고 덮어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며, 다혈질처럼 함부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는 데에는 꽤 야무지다.
2) 단점
우울질은『자기중심적』이다. 할레스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어떤 타입의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기 중심적이다. 항상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하는 형인데 그의 이런 성품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정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과 자기의 정신적인 상황을 해부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을 한층 두층 계속 벗겨 마침내는 그의 생활에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오로지『영구한 자기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은 이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우울질은 병적인 정신상태에 빠져 들어갈 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접하는 문제마다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울질은 유난히 쉽게 우울증환자가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그의 예민한 성격과 합해져서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가끔 저지르게 한다. 그는 기분을 자주 변동하는 자로 문자 그대로 "감정을 항상 팔에 걸고 다닌다." 때로는 곧잘 남을 의심하여 좋지 못한 방면으로 계속 상상한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소근소근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는 대뜸 그들이 자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단정한다. 이런 생각은 심한 경우엔 남을 변태적으로 냉대하고 박대하는 컴플렉스를 나타낸다. 우울질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이고 분석적인 성품 때문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목적을 내다 보기도 하지만 도중에 생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관적이기 때문에 우울질은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면에선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다. 많은 완전주의자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9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파괴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그의 완전주의자라는 안경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는 "많은 좋은 점을 보는 대신에 나쁜 점을 과장해서 보게" 마련이다. 결혼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할 때가 있다.
멀리서 여자를 보고 이상화시켜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을지라도 역시 단점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바로 그 단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주저한다. 기분의 변화에 있어서도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고조된 감상에 빠져 있곤 한다.
또한 우울질의 변덕스러움은 때로 좋지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땐 그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우울질을 피하게 되고 우울질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우울하게된다. 이 한가지 사실은 능히 우울질의 전 일생을 망치고도 남음이 있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울하고 감정이 쉽게 변하는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위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기자신보다 남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좋은 목적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우울질의 특성을 들자면 그의 "보복심"이다. 그에겐 모욕을 용서해 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조용하고 평온해 뵈지만 마음속으로 격렬한 증오심과 불길같은 적의가 있다.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진 않겠지만 수년간을 이런 증오심과 보복감을 품은 채 지낸다. 이렇게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성품과 보복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때로 그의 훌륭한 자질을 지배하여 자질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편견에 근거를 둔 결정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우울질의 장. 단점을 모두 보아왔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즉 매우 훌륭한 장점과 잠재능력이 있는 천성에는 또한 가장 큰 단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평범한 우울질』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울질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료들보다 우수한 위치에 서던가, 그렇지 않으면 약점으로 인해 신경질과 수심에 뒤덮히고, 자신을 즐기지도 못하고 남을 즐겁게도 못하는 우울증환자가 되어 동료들보다 열등한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뛰어난 인물들이 심한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울질의 소유자들은 큰 위안을 받아야겠다. 그러나 성경의 그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애를 보낼 수 있게 한다.
4. 점액질
1) 장점
점액질의 거침없는 "유모어"는 그가 어떤 일을 신중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치미를 떼고 하는 그의 거칠은 듯한 유모어가 다른 사람들을 곧잘 웃기는 것을 보면 그는 유모어와 상상력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기질은 "카운셀러"가 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오랫동안 앉아 듣지 못하는 반면에 느리고 태평스러우면서 유연한 점액질의 태도는 그로 하여금 남의 얘기를 다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과 고민을 말하는 사람과 늘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는다. 그리고는 충고의 말을 불쑥 쏟아 내놓는 게 아니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눈다.
점액질의 경우, 그의 명랑하고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책임감과 시간적 계획을 잘 지키는 면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우울질처럼 이 사람은 퍽 충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에게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불충실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점액질도 역시 실제적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고하는 데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므로 그 결과 어떤 일의 상황을 잘 분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닌 반면에 적은 노력을 들여 일을 완수할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일을 잘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 할 환경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의 결과는 항상 훌륭하고 깨끗한 결과가 된다. 비록 완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꽤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니고 있다. 항상 바쁘고 크나큰 일을 하면서도 그의 책상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능동적이고 소란스런 성품의 사람들은 항상 놀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점액질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놓고 일하면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돈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단점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가끔『발을 질질 끄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며 가능한 한 느리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목적 없는 그의 생활은 "방관자"의 생활이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성품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고 있고 또 능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에겐 모든 일이 오로지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혈질의 불안정성과 담즙질의 활동은 그를 때로 괴롭힌다. 점액질은 그들이 그를 자극시켜 일을 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점액질은 또한 "이기심"이라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자기자신을 옹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어떤 일을 변경하려고 "심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그 일에 너무 휩쓸려 들어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에너지를 아끼는 면에서 보수적이기를 원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더욱 고집이 많아지지만 그의 태평스런 유모어로 자기의 완고한 점을 감출 수 있게 된다. 주위사람들의 계획과 활동에 가담하기를 강요받을 때마다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더욱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런 완고성은 결코 그를 "인색하고 이기적인"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얼마의 비용이 들까?" 혹은 "이것은 내게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점액질에 있어 정말 큰 문제 거리다.
점액질에겐 해가 갈수록 더 결단력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늘 동요한다. 그의 결단력 없는 태도는 곧 뿌리깊은 습관이 되어 그의 장점 즉 실용적인 태도를 능가해 버리기까지 한다. 그의 실제적인 관점과 조용하고 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어떤 일에 대한 더 좋은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지만, 그가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쯤에는 이미 다른 활동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그룹을 조직하여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점액질은 마음속에 자기계획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가담하려 한다.
5. 네 기질에 대한 정리
위의 네 가지 기질의 여러가지 변화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고 있다. 어느 것도 다른 성품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그것대로의 장점을 갖고있어 사회에 도움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각 기질이 지닌 장점은 그 기질을 매력적으로 만들며 우리도 모두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장점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지닌 약점도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분석 해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보완되어야 하고 개선되어야 한다.
III. 기질테스트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앞의 내용에서 우리는 각 기질의 장. 단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는 "나는 다혈질이야""나는 담즙질이군"라고 자신을 평가하곤 하는데, 사실상 우리는 100%다혈질, 혹은 100%우울질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기질은 이 네 가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혈질20% + 담즙질50% + 우울질10%+점액질20% 식으로 말이다. 자신의 기질상의 특성들을 잘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단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래의『기질테스트』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원한다. 이 단어 연상 테스트는 플로렌스 리타우어와 프레드 리타우어가 발전시켜 그들이 개최한 『인격플러스(Personality Plus)』세미나에 참가한 수많은 이들에게 시행한 바 있는 테스트이다.
2. 기질 테스트
1) 각 열의 네 단어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단어 하나 앞에 V표를 하라. 때로는 정확히 자신에게 들어맞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가장 근사한 단어 앞에 V표를 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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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 )활발함, ( )의지강함, ( )복종적, ( )사려깊음, ( )새로운생각, ( )만족해함, ( )계획가, ( )자신에참, ( )질서정연, ( )친절함, ( )과감함, ( )괘활함, ( )이상적, ( )과시적, ( )중재자, ( )신중함,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완전주의자 ( )활기참 |
( )모험적, ( )쾌활함, ( )자기희생적, ( )자기통제적,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인내심강함, ( )충독적, ( )자상함, ( )신실함, ( )유쾌함, ( )일관적, ( )독립적, ( )결단력, ( )음악적, ( )끈질김, ( )충직함, ( )우두머리 ( )허용적, ( )과감함, |
( )분석적, ( )설득력있음, ( )사교적, ( )경쟁력, ( )수줍어함, ( )자기신뢰, ( )적극적임, ( )계획적, ( )솔직함, ( )익살스러움, ( )싹싹함, ( )점잖음,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의견제안잘함, ( )말을많이함, ( )지도자타입, ( )도표잘그림, ( )생산적, ( )행동적, |
( )융통성없음 . ( )조용함. ( )자기의지강함 ( )설득력있음. ( )꽤많음 ( )활발함 ( )주동적 ( )부끄러워함. ( )낙천적. ( )강력함. ( )세심함. ( )확신에참. ( )고무적. ( )심오함. ( )쉽게어울림 ( )관용적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균형잡힘 |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 )뻔뻔스러움. ( )절제못함, ( )마지못해함 ( )까다로움, ( )참을성없음, ( )인기없음, ( )완고함, ( )평범함, ( )쉽게성냄, ( )순진함, ( )근심많음, ( )지나치게예민, ( )결단력약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느림, ( )고독즐김, ( )행동이느림 ( )복수심이강함, ( )타협적 |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성잘냄, ( )두려움많음, ( )불안정, ( )끼어들기싫음, ( )되는대로의성격, ( )비관적, ( )목표없음,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무뚝뚝함, ( )무질서함, ( )편협함, ( )침울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 섬, ( )의심많음, ( )불안함, ( )비판적, |
( )수줍음, ( )열정없음, ( )반항적, ( )잘잊음, ( )우유부단, ( )예상못하는성격, ( )즐겁게해주기힘듬 ( )교만 힘든성격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소심함, ( )지배적, ( )비관용적, ( )불평잘함, ( )과시적, ( )게으름, ( )성미급함, ( )억지로함, ( )교활함, |
( )맥없음 ( )용서안함 ( )장황함 ( )솔직함 ( )끼어들기잘함 ( )사랑없음 ( )주저함 ( )허용적 ( )외톨이 ( )냉담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낙심잘함 ( )무관심 ( )남이용잘함 ( )회의적 ( )목소리큼 ( )침착못함 ( )신중치못함 ( )변화무쌍 |
2) 이제, 위에 표시한 대로 아래의 페이지에 다시 표시하고, 장단점의 합계를 내어 보라.
◆ 장점
다혈질 |
담즙질 |
우울질 |
점액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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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 )활발함, ( )쾌할함, ( )사교적, ( )설득력있음, ( )새로운생각, ( )활발함, ( )주동적 ( )충동적, ( )낙천적, ( )익살스러움 ( )유쾌함, ( )괘활함, ( )고무적, ( )과시적, ( )쉽게어울림 ( )말많이함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활기참, |
( )모험적, ( )설득력, ( )자기의지강함, ( )경쟁적임 ( )꾀많음, ( )자기신뢰 ( )적극적 ( )자신감 ( )솔직함, ( )강력함, ( )과감함, ( )확신에참 ( )독립적, ( )결단력, ( )의견제안잘함, ( )끈질김, ( )지도자타입 ( )우두머리 ( )생산적, ( )과감함, |
( )분석적, ( )의지강함, ( )자기희생적, ( )사려깊음,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계획가, ( )계획가, ( )질서정연, ( )신실함, ( )세심함, ( )점잖음, ( )애상주의적, ( )심오함, ( )음악적, ( )신중함, ( )충직함, ( )도표잘그림, ( )완전주의자, ( )행동적, |
( )융통성 ( )조용함. ( )복종적 ( )자기통제적 ( )수줍어함 ( )만족해함 ( )인내심많음 ( )부끄러워함 ( )자상함 ( )친절함. ( )싹싹함. ( )일관적.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중재자 ( )관용적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허용적 ( )균형잡힘 |
계 |
◆ 단점
다혈질 |
담즙질 |
우울질 |
점액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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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 )뻔뻔스러움 ( )무절제함 ( )장황함 ( )잘잊음 ( )끼어들기 ( )예측불허 ( )되는대로성격 ( )허용적 ( )쉽게성냄 ( )순진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무질서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과시적 ( )목소리가큼 ( )침착치못함 ( )불안함 ( )변화무쌍 |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반항적 ( )솔직함 ( )참을성없음 ( )사랑없음 ( )완고함 ( )교만함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무뚝뚝함 ( )지배적임 ( )편협함 ( )남이용잘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섬 ( )성미급함 ( )신중치못함 ( )교활함 |
( )수줍어함 ( )용서안함 ( )성잘냄 ( )까다로움 ( )불안정 ( )인기없음 ( )즐겁게해주기힘듬 ( )비관적 ( )외톨이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지나치게예민 ( )낙심잘함 ( )비관용적 ( )침울함 ( )회의적 ( )고독즐김 ( )의심많음 ( )복수심강함 ( )비판적 |
( )맥없음 ( )열정없음 ( )마지못해함 ( )두려워함 ( )우유부단함 ( )끼어들기 ( )주저 ( )평범함 ( )목표없음 ( )냉담함 ( )근심많음 ( )소심함 ( )결단력약함 ( )무관심 ( )불평잘함 ( )느림 ( )게으름 ( )행동느림 ( )억지로함 ( )타협적 |
계 |
전체 합계 |
장점합계 |
( )개 |
단점합계 |
(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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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혈질 |
( )개 |
담즙질 |
( )개 |
우울질 |
( )개 |
점액질 |
( )개 |
IV. 결론
1. 약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질에 대해 공부하는 근본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함이다. 헨리 브란트 박사는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 있고,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수 년전, 혹은 수 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여전히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고집과 내키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이어서 어떤 장점과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점들은 개선되어져야 한다. 당신의 천성이 꼭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살아있는 채 당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신의 약점을 세심히 솔직하게 연구하면 자신의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쉽게 지적해 낼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의 계획하에 인간을 그의"영광을 위해"창조하셨다.(계4:11)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기질 전체를 뜯어 고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본래의 성품을 십분 활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리는 결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것인가?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약점을 죄로 여겨야 한다.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 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 이기심, 자만, 성급, 잔인,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 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약점의 근원: 이기심
다혈질 |
담즙질 |
우울질 |
점액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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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박약 불안 자아중심 감정적 불안정 |
자기만족 성급함 잔인성 격한 성격 |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적 |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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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노 |
공 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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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 심 |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 증오, 폭동, 시기, 공격, 험담, 야유, 앙심, 비통, 악의, 불평, 질투, 후회, 편협, 비난, 원한
• 공포의 여러가지 표현 : 근심, 의심, 소심, 우유부단, 미신, 움추림, 고집, 시비, 걱정, 열등감, 비겁, 혐의, 주저, 실망, 교만, 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 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심령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 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이란 자기 본위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말한다. 이기심이란, 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 내게 있는 것을 잃게될까, 내가 손해보게될까, 내가 인정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이며 열등감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죄악이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고 적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것.. 이것이 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 하고 두렵게 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 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셨던 축복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 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적)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 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제안)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2)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귀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귀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하였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장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6: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께 간구만 하면 그의 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있고 또 인정해야 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한다. 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4)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 들일 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의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 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막13:11)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 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어떤 체험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충만』은 우리 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그리이스어를 보면 이 귀절은 "당신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 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 Lord)으로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되어 로보트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 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교통표지판이나 이정표를 따라 자동차 연료의 힘을 입어 우리가 성루로 간다고 해서 우리는 교통표지판이나 휘발유, 자동차의 노예인가? 교통법의 꼭두각시인가?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하는 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방법(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충만이란 우리 인생 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엡5:20)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 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 시기. 험담. 야유. 앙심. 비통. 불평. 질투. 후회. 비난/근심. 의심. 우유부단. 움츠림. 소심. 고집. 열등감. 비겁. 주저. 실망. 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 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희락, 곧 기쁨(joy),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화평(peace),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오래참음(long suffering:인내), 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마음에서 나온 사려깊고 예의 바르고 젊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충성(faith)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도, 신뢰성,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온유(meekness),악을 악으로 갚지않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절제(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 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삶의 한부분 한부분에 개입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 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
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 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버려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칙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나거라. 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 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이고 고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V. 결론
물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가도 또 여전히 옛 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실망하지 아니하고,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 습관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되돌아 보았을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울질과 다혈질이 혼합된, 극도의 소심함과 신경질적인 포악함의 사람이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심, 예민한 성격등으로 인해 언제나 소극적이고 박약한 모습으로 지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선 너무나 많은 부분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기질상의 약점 때문에 이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자학에 빠지곤 하는, 여전히 변함없는 우울질과 다혈질의 사람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몇 년 전과 비교만 해보아도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깍이고 다듬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 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 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원본 : 생명의 말씀사 / 팀 라헤이 “성령과 기질”, 기질TEST는 책과 무관.
요약 : 낮, 해, 밤, 달 의 발췌문을 재 편집하여 인용함.
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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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원명은 [Act of Marriage]
미국의 1976년과 1977년 종교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결혼 행위]또는 [부부의 사랑 행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나 우리에게는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 [아름다운 애정생활]로 했다.
결혼 적령기에 미달되는 모든 미성년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성신 부부들과 내일의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는 분은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여러분의 인생을 즐겁게 해줄 것이며 더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팀 라하이 박사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그를 통해 파탄지경에 이른 많은 가정들이 다시 모여 행복을 찾았으며 불행을 되씹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아름다운 애정생활은 당신의 생활에 무한의 가능성을 안겨다 줄 것이다
저자소개
[행복한 결혼생활], [성경공부의 비결]등 수많은 저서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팀 라헤이 박사는 스콧드 메모리얼 침례고회의 목사님이며 미국 샌 디아고에 소재한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총장이다
"나는 모든 부부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과 알 필요가 있는 사실들을 저들로 하여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 아내 비벌리의 도움으로 본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아내로, 세미나의 강사로 그리고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사무주임인 아내의 광범위한 상담경험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많은 부부들과 상담한 결과 우리 둘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정해 주신 모든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많은 부부들이 저들의 성관계를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년 간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가지 교수원칙을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카운슬러와 목사님들의 요구를 받고, 이와 동일한 원칙을 책으로 발간하는 경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교회가 참 좋다
혼인전 목사님께서 과제를 준다.
하나는 화남금여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이었다.
화남금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실제적인 애정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지만, 세속적인 책과 달리 통속적이지 않고 성경적 가치관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옛날에는 표현이 안되었지만 갈수록 성문제는 가정 행복과 부부행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20대에서 40대 부부들에 대한 갤럽 조사에 의하면 성적인 불만을 가진 부부가 74퍼센트에이르는 반면 부부생활에 만족하는 부부는 10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한다. "
더욱 심각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부부들 중에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 부부가 56퍼센트나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혼사유의 90퍼센트가 솔직하게 알고보면 성적 부조화와 불만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고 있다.
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 종족 보존
둘째, 사랑의 표현
셋째, 인생의 환희와 즐거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룰 때에 행복하게 살 수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기도시간 외에는 절대로 분방하지 말고 성생활을 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언 5장 15절에서 20절은 가정에서 부부간의 성적 즐거움의 샘물을 가정 밖으로 넘치게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구약의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메시지로 담고 있지만 성생활에 적극적인 테크닉도 가르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성공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우자와 성에 대한 자세와 실제 성생활을 위한 테크닉의 개발이 필요하다. 우선 부부생활에 대한 자세는 성경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몸을 자신이 주장하지 못하고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섹스를 요구할 때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적 자세다. 거절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성적으로 아내보다 더 충동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가급적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남편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내로부터 충족받기를 원하는 필수조건의 제1위는 '성적인 만족감'이라는 연구조사가 나와 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인욕구와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남편은 다른 방면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편의 성적 요구에 아내가 단호하게 거절할 때 남편들은 아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거절당했을 때의 남편들의 심정을 모아본 자료를 소개한다
"심한 모멸감을 맛보았다. 다시는 내가 요구하나봐라 하는 심정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미워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내가 보기 싫었고, 다른 여자를 사귀고 싶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두고보자라는 복수심이 불탔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의 성적 특성을 이해하여 아내가 만족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관계는 평등한 것이며 서로 보답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의 만족을 위하여 성교를 시도하며 애무하고 성행위에 참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 권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자를 백열전구에 여자는 전기다리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경우에는 충동보다도 분위기와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더 의지하고, 남자보다 더 여유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부부는 잠자리에서 열정적이고 적극적이 되도록 노력하고 변화를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다양한 기교와 테크닉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협력한다.
한국 교회가 성생활에 대한 언급을 터부시하고 있지만, 건전한 성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배우고 훈련받아 세속적인 성문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생활에 성공하라
관심있는 분은 팀 라하이 목사가 지은 <아름다운 애정생활>이라 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성생활의 성공은 행복한 부부의 아름다운 특징이다.
종말론적 소설인 <레프트 비하인드>의 저자 팀 라헤이가 지난 7월 25일 별세했다(2016. 7. 25).
7월 25일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 목회자이자 저자, 라디오 진행자인 팀 라헤이가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가 설립한 사역 단체에서는 라헤이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며칠 후에 숨졌다고 발표했다.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는 1995년부터 16권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를 출간했다.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다루는 이 시리즈는 6천5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라헤이는 소설을 쓰기 전 목회자로 왕성히 활동했다. 그는 샌 디에고 크리스천 칼리지와 십여 개의 기독교 초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목회자들을 조직해 조지 W. 부시 등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보수 단체인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을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 비벌리와 함께 라디오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타임> 지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와 <레프트 비하인드>를 공동 저술한 젠킨스는 성명서를 통해 라헤이가 “영적 거인”이었다고 발표했다.
젠킨스 “내가 아는 팀 라헤이는 목회자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을 나누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나이와 성, 사회적 지위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염려를 함께 나눴다.”라고 말했다.
1월 1일(목)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
투 로구 테스 조에스(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호 로고스 호 조에(ὁ λόγος ὁ ζωή)
설교 제목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핵심 본문 / 히브리서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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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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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1️⃣ 서론 : 왜 어떤 말씀은 지나가고, 어떤 말씀은 나를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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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씀을 자주 듣지만, 삶이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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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정보로 끝날 때 vs 살아 역사할 때의 차이
질문: 오늘 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인가, ‘경험하는 사람’인가?
2️⃣ 본론 ① 말씀이 살아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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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글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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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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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찌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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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드러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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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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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이 우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다룬다
3️⃣ 본론 ②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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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닫혀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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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답을 정해 놓고 말씀을 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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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없는 듣기만 반복할 때
👉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 앞에 서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4️⃣ 본론 ③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일어나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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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변한다 –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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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깨어난다 – 무감각에서 회개와 소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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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움직인다 – 결단과 순종이 생긴다
말씀은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결정을 낳는다
5️⃣ 결론 : 오늘 말씀이 역사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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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순종 하나가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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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붙잡자
기도 :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 한 줄 정리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사람은 변하고 삶은 새로워진다.
요한일서 1:1
하나님은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세 개의 동사로 압축해 낸다.
듣다(청각), 보다(시각), 만지다(촉각)
사람의 다섯 감각 기관 : 청각(聽覺) 2%, 시각(視覺) 5%, 후각(嗅覺) 35%, 촉각(觸覺) 1%, 미각(味覺) 15%
들었다 :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 사건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선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 계시 사건이다.
우리의 ‘들음’은 하나님의 먼저 말씀하셨다는 증거다.
듣는 신앙은 '순종하는 귀'를 가진 신앙이다.
여기서 듣기는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의 개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적 소환장이다.
말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진 시대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세상 소음에 대한 영적 저항이다.
복음의 첫 문은 언제나 경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보았다 : 눈이 열릴 때 시작되는 신앙
요한은 두 개의 '보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적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관찰과 응시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을 넘어 계시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 행위이다.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외모가 빛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곧 사랑, 진리, 은혜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그분의 키, 얼굴형, 피부색, 머리색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그 얼굴은 어느 특정 문화와 인종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그 길을 거부한다.
보지 못함으로 진정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보는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신앙이다.
고난 속에서 열리는 인식, 눈물이 마른 자리에 드러나는 새로운 시각,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말하는 ‘보았다’의 세계다.
당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 Docetism).
요한은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
귀는 속고, 눈은 착시를 경험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물질 세계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선언이다.
먹고 마시고 피곤해하며,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실제의 몸으로 오셨다는 증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외모에는 침묵하지만, 몸의 실재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현실적 영성’을 꿈꾸는 종교가 아니다.
몸으로 오시고, 몸으로 사랑하시고, 몸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무엇보다 성찬은 이 ‘만짐의 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식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몸을 만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 그 자체가 깊은 신앙 행위다.
사랑은 언제나 몸을 가지고 온다.
생명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요한은 선언한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이 오늘도 가슴 벅찬 이유이다.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Pronunciation [ lŏgŏs ]
Etymology / 3004에서 유래
Pronunciation [ lĕgō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Pronunciation [ zaō ]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Ενσάρκωση)
성육신(Incarnation) Incarnatio. Ενσάρκωση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고난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먼저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라는 /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요 1:1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 2:20)이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요3:36)인 것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는 창조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표현은 성육신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음을 말합니다. 그의 은혜와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성육신이야말로 그 영광의 최고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이고도 신비로운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은 성육신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7:14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인류 역사 속에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 즉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결합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성육신이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은혜의 표현이며,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세주로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의 목적과 의의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먼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정해진 시점에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지만, 그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며 그의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순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는 구절은 성육신의 구속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인간을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되었으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의 놀라운 표현입니다.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이 집약된 신비로운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5.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믄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6.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하사."
8. 요한일서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9.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0.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니라."
11.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2.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은혜로 주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 1:18-2:23과 눅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 막 9:2-8; 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 같이', '...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 9:38; 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 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 갈 3:26)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3:18; 5:18; 10:30; 17:5, 24)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 빌 2:6, 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 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 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 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유앙게리온. ĕuanggĕ- liŏn)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Pronunciation
[ ĕuanggĕ- liŏn ]
Etymology / 2095와 32에서 유래
1. 잘, 좋게,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친절을 보이다, 막14:7, 잘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마25:21,23, 눅19:17, 엡6:3.
Etymology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1:20, 행5:19, 약2:25), 천사 (마13:39, 히1:4, 계1:1).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
둘째는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
생명이란 조에스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들은 바'(아케코아멘)와 '본 바'(헤오라카멘)는 문법적으로 완료시제라고 합니다.
완료시제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히 1:1,2).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
생명의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근거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려면 먼저 내가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증거를 가져야만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경험하였다고 고백합니다.
2026년 병오년을 출발하며 내가 만났던 예수님을 날마다 삶의 터전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속사람을 살립니다.
군주적 유일신론과 삼위일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반삼위일체론자들(Antrinitariers)은 이 교리를
비성경적, 비이성적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신앙의 최고 권위로 믿어져 온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결코 공교회의 정통교리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형이상학적 일신론과 논쟁하면서 성경적 신론을 확고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유일신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시인들의 노래와 희극을 통해 전달되는 신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당시 시인들의 노래나 연극에 등장하는 인간동형론적 다신 신론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자들의 기원 또는 궁극적 원리인 일자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안에서 신은 초시간적, 초역사적 실재인 유일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 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50-270)의 일자(一者, the One)개념이
그렇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 100-165 )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150-215)와 같은 고대 교회의 변증가들은 기독교적 유일신신앙을 다신론적 신화에 대항하는 철학적 단일신론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일신론은 양자론(또는 종속론)과 양태론이라는 기독교 삼위일체 신론의 가장 큰
두가지 이단들의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종속론적 또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narchianism)의 두가지 오류들
삼위일체 신론은 단일신성과 삼위의 개별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설명가능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다신론적 종교와 신화가 유행하던 이방세계에서 기독교는 그 본래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rnarchianism)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최고통치권자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권자는 오직 성부 한 분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성부만이 영원
불변한 신성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 능력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하는(Justin Martyr,
First Apologia, 13) 이러한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은 그리스의 전제 군주적 유일신론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단일신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양자론(Adoptionism; 역동적 군주신론, Dynamic
Mornarchianism)이라고 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만, 개별적 실체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양태론적
군주신론(Modalistic Mornarchianism)이라 합니다.
양자론과 양태론은 모두 신의 단일성 및 군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위의 다양성을 반대한 대표적인 삼위일체 이단사상들입니다.
【양자론(Adoptionism) 및 역동적 군주신론】(dynamic mornarchianism)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신론은 고대의 에비온파(Ebionites), 170년경 소아시아의 알로그파,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로마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Rome), 아리우스(Arius) 등에 의해 주장된 단일신론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론”이라고 부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알로그파(헬라어로
“정신없는 자들”)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로고스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복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투스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교한 일에 대해 변명하며 “나는 인간을 부인한 적은 있어도 하나님은 부인한
일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로마의 휘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170-235)에 의하면, 테오도투스는 하나님의
능력(듀나미스)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나타나기 전에는 그의 안에서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Refutation
of All Heresies, 7, 23). 휘폴리투스는 그를 알로그파의 “부스러기”라고 비난합니다.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테오도투스를 위시한 양자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례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더욱 세련된 아리우스주의로 발전한 양자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피조물로 여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양태론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rnachianism)
고대의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사벨리우스(Sabellius) 등으로 대변되는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아버지와 구별된 개별적 실체성은 부정합니다.
노에투스는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양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으로 보지만, 노에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자론자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한 것과 달리, 노에투스는 성육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을 성자가 아닌 성부 자신의 성육신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는 성부와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현현 형태(modus)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성자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성부)께서 가시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고, 낳음을 받지 않으신 분이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낳음을 받으신
분이 되신 것이죠(Hy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9,5). 이런 이유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도 불립니다.
위와 같은 역동적 군주신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동방교회에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서방교회에서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개별성으로부터 신적 단일성을 사유하려 했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신의 단일성으로부터 개별성을 설명하려 하였기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양자론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더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가지 잘못된 삼위일체 이단사상의 배후에는 바로 그리스 군주적 단일신론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공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된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신론에 대한 성경적 신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년에 출간된 심리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근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진 작품 중 하나입니다.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심리학을 다루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제임스는 심리학을 단순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심리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심리학의 원리』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고, 제임스의 심리학이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1. 의식과 경험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윌리엄 제임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것이나 분리된 단위로 보지 않았으며,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이 흐름은 각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감각, 감정, 생각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제임스는 이를 통해 의식이 단순히 사건들의 집합이 아닌,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인간의 경험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임스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 고정된 개념이나 단일한 사고 패턴을 따르기보다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사고 흐름을 따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제임스의 주장입니다.
이 개념은 후일 문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제임스의 방식은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가 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2.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
제임스는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한 번에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정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처리합니다.
주의는 우리의 의식이 특정 대상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임스는 주의가 단순한 감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주의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욕구, 필요, 목표에 따라 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나 목표에 따라 어떤 정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을 무시하는 선택적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주의의 이론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보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주의 집중 능력에 대한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택적 지각은 인지심리학, 학습 이론, 심리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감정 이론 (James-Lange 이론)
제임스는 심리학에서 중요한 기여 중 하나로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반응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 of Emot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자극에 대해 신체적으로 먼저 반응하고, 그 신체 반응을 인식한 후에 감정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반응을 경험하고, 그 신체적 변화를 인식한 후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는 "우리는 슬퍼서 울지 않고, 울기 때문에 슬프다"고 주장하며, 감정이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이론은 이후 감정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심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임스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체와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4. 습관(Habit)의 형성과 역할
제임스는 인간의 행동에 있어 습관(Habit)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습관이 삶의 전반적인 흐름을 결정하며, 의식적인 사고나 결정 없이도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주요 기제라고 보았습니다.습관은 행동을 자동화시키고,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인류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제임스는 특히 어린 시절의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습관이 한번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반복적인 습관의 총합"이라고 말할 정도로 습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대한 연구는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 행동이 단순히 외부 자극에 의한 반응뿐만 아니라, 습관이라는 내면적 기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후의 행동 심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라는 구절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William James / 1842. 1. 11-1910. 8. 26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습관의 형성과 역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So an action and you reap a habit
So a habit and and you reap a character
So a character and you reap a destiny.
5. 자아(self)와 정체성
제임스는 인간의 자아(self)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경험하는 자아(Subjective Self)로, 이는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는 객관적인 자아(Objective Self)로, 내가 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제임스는 이 두 가지 자아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자아를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아를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 사회적 자아(social self), 그리고 정신적 자아(spiritual self)로 나누었으며, 이 각각의 자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적 자아는 우리의 신체나 소유물,
사회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 자아,
정신적 자아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자아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제임스의 개념은 오늘날의 자아 심리학과 정체성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인간의 자아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6. 의지(Will)와 자유의지
제임스는 의지(will)와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제임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는 반복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그는 "행동하지 않으면 의지가 약해지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지가 강해진다"고 말하며, 의지가 훈련을 통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임을 강조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지가 결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의 영향을 넘어서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심리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현대 심리학의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의식의 흐름, 감정 이론, 주의, 습관, 자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심리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가 강조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이후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임스는 철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그의 심리학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려는 심리학자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감정의 생리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주의 이론은 인지심리학 연구의 기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자아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에서도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결론 : 인간 심리의 복합성과 통찰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저작으로,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 습관, 자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대 심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1.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 [빌립보서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3.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