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자료





미국에서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그리고 어버이날을 기념하기

미국에서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어버이날은 부모와 보호자를 기리며
감사하는 특별한 날입니다.

어머니의 날 (Mother's Day)

어머니의 날은 매년 5월의 두 번째 일요일에
미국에서 기념됩니다.
이 특별한 날은 1914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 의해
국경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들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그들을 기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축하합니다.

꽃 선물 :
어머니의 날에 꽃을 선물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물로 주는 것은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카드 :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담은 카드를 통해
어머니에게 느낌을 전합니다.
손으로 쓴 친필 서신이나
디자인된 카드는 어머니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선물 :
어머니의 취향에 맞는 선물을
고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방 용품, 보석, 옷 등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려해 보세요.

아버지의 날 (Father's Day)

아버지의 날은 미국에서는
 6월의 세 번째 주 일요일에 기념됩니다.
이 날은 1910년에 소노라 스마트 도드라는 여성이
자신과 형제자매들을 한부모로 키운 아버지를
기리고 싶어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1972년에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이를 법적으로
승인했습니다.

가족 시간 :
아버지의 날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활동을 선택하고
그간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카드와 선물 :
어머니의 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날에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카드와 선물을 준비합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취미나
관심사에 관련된 선물을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어버이날 (Parents' Day)

어버이날은 미국에서는
7월의 네 번째 주 일요일에 기념됩니다.
이 특별한 날은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보완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님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부모님 감사 표현 :
어버이날은 부모님에게 제공하는
사랑, 보살핌, 지도를 기리는 행사입니다.
이 날에는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특별한 활동 :
가족들은 어버이날에 특별한
활동을 즐기기도 합니다.
가족 피크닉, 야외 활동,
혹은 가족 모임을 통해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마무리

미국의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어버이날은 부모와 보호자를 기리며 감사하는 중요한 날들입니다. 이러한 날들은 우리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고, 그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니 이런 특별한 날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주변의 모든 부모님과 보호자들에게 변함없는 지지와 지도에 감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보호자를 기리는 날들은 가족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사랑과 감사의 미소를 전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반드시 행한 대로 되돌아온다

아이작 뉴턴의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제1 법칙 (관성의 법칙)
제2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
제3 법칙 (상호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이 중에서
'상호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적용하면
다른 물체도 똑같은 힘으로
반응하는 법칙입니다.

'상호작용과 반작용' 법칙을
쉽게 설명하면
책상을 힘차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이
그 원리입니다.

신기하게도 이는
삶 속에서도 적용됩니다.
내가 선하게 행동하면
선한 영향이
악하게 행동하면
악한 영향이
온다는 것입니다.

지하철 계단에서
노인의 짐을 들어주거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등
간혹 내가 한 선한 행동의 반작용이
당장 반응하거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어느새 반작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선한 행동이 선한 행동을,
악한 행동이 악한 행동으로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나의 삶에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말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대변할 것이다.
– 존 플래쳐


슈바이처 박사는 자녀 교육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도 본보기요, 둘째도 본보기요,
셋째도 본보기다."

자녀는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산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가정 교육과 마찬가지로 학교 교육도 중요합니다.
라틴어로 학교 교육을 'In loco parentis'라고 하는데
'부모 대신에'라는 의미입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또한 아이들에게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이사야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금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삶의 변화가 없는 형식적인 금식
금식을 통하여 삶의 변화을 일으킬 수 없는 금식은 자기 육체에 대한 학대가 될 뿐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금식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은 금식

셋째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금식
몇 일을 금식하였다고 자기 자랑과 의를 먼저 드러내는 금식

넷째는 종교적인 제도의 틀에 맞추기 위한 금식
예를 들면 사순절 및 고난주간을 맞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는 금식


사랑을 미루지 말라!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여행 중 한 여인숙에 들렀을 때 일입니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여인숙을 나오려 할 때
병중에 있던 여인숙집의 6살 난 어린 딸이
톨스토이가 들고 있던 빨간 가방이 갖고 싶다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눈물까지 흘리며
조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톨스토이는 가방 안에 짐이 있으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주겠다고
아이에게 약속했습니다.

며칠 후 톨스토이는 여인숙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죽어 공동묘지에 묻힌 뒤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무덤을 찾아가
가져온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만약 그때 여인숙 어린 딸에게
선뜻 가방을 내주었더라면 그 어린 딸은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 생명의 끈을
조금 더 붙잡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비석에
‘사랑은 미루지 말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망설이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한다.

- 레프 톨스토이


심덕승명(心德勝命)

채근담에 "심덕승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의 덕을 쌓으면 운명도 바꿀 수가 있다"라는
고사성어 입니다.

덕을 베풀지 않고 어찌 좋은 사람들이 인연을 맺으려 할 것이며,
행운이 찾아들 것이며 福(복)과 運(운)이 찾아올 것인가?

"자장율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관세음보살을 꼭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백일기도를 하고 있었다.
​99일째 되는 날, 얼굴이 사납게 생기고 곰보에 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이 거지같은 꼴을 하고 도량에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장 너 있느냐?" 얼른 나와 봐라 라며 큰소리를 지르자
이에 상좌들과 불목하니들이 말리느라 애를 먹는다.

​"큰스님께서는 지금 기도중이시니 내일 오십시오."

사정을 하고 달래느라 조용하던 도량이 순식간에
야단법석 난리가 났다.

이때 기도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가던 자장율사가 점잖게 말한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내일 다시 오시오"하며 자신의 방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 거지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네 이놈 자장아, 교만하고 건방진 중놈아, 네놈이 나를 보자고 백일
동안 청해놓고 내 몰골이 이렇다고 나를 피해? 네가 이러고도 중질을
한다고?"라며 큰 소리로 비웃으며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자장율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으며
나를 찾아온 보살을 외모만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젖어든 교만하고 편협한 선입견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잣대질 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바랑 하나만 메고 스스로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수호천사와
보살을 못 알아보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있다.

​이 사람은 이런 것을 시켜도 되겠지.
이 사람은 이 정도는 이해하겠지,
이 사람은 이 정도는 서운하지 않겠지,
이 사람은 이 정도는 놀려도 되겠지,
이 사람은 이 정도는 빼앗아도 되겠지,
이 사람은 이 정도는 없어져도 모르겠지,
이 사람은 이 정도 해도 모르겠지..

세상에서 나보다 못난 사람은 없으며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인정해주고 보듬어주는 보살을, 수호천사를
이딴 짓으로 버려서는 안 된다.

"나보다 아랫사람은 없다"라는 下心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야 좋은 運(운)이 찾아온다.

​그것을 德(덕)이라고 부르고, '겸손함'이라고 부른다.

​얻으려고만 하지 마라, 기대려고만 하지 마라,
기만하고 속이려고 하지 마라, 횡재나 요행을 바라지 마라,

​하늘에 뭔가를 간구하고 갈망할 때는 나는 이웃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무엇을 주려고 노력하였는가?

​나는 누군가의 뜨거운 감동 이었는가?를 먼저 생각해라.

통장 속에 잔고는 쓰면 쓸수록 비어져 가지만, 德(덕)과 運(운)은
나누면 나눌수록 베풀면 베풀수록 커지고 쌓여간다.

이것이 잘 사는 방법이고, 도리이고, 인류애가 아닐까 생각한다.

​좋은 친구는 곁에만 있어도 향기가 나고
좋은 말 한마디에 하루가 빛이 납니다.


삶의 德目(덕목)과 人格(인격).

​不滿은 위(上)를 보고 아래
(下)를 보지 못한 탓이요

傲慢(오만)은 아래(下)를 보고 위(上)를 보지 못한 탓이니

​곧 비우지 못한<慾心(욕심)>과 낮추지 못한<驕慢(교만)> 으로 부터 自我(자아)를 다스리는 <슬기로움>이 부족한 탓 입니다.

​智慧(지혜)로운 者는 남보다 <내 허물>을 먼저 볼 것이며.

<어진 자>는 헐뜯기 보다 <칭찬>을 즐길 것이며.

​賢明(현명)한 자는 <소리>와 <소음>을 <가릴줄> 알것이로되.

반듯한 마음과 옳은 생각으로 <곧은 길> <바른 길>을 걷는다면.

​뉘라서 謙遜(겸손)의 <美德>을 쌓지 못하며.

德行의<삶>을 이루지 못하리오

​마음의 平和는 <비움이 주는> 축복이요,

영혼의 香氣는 <낮춤이 주는> 선물입니다.

​人格(인격)

​<사람됨>이란 마음의 良識 (양식)에 달렸습니다.

​말(言)이 <번듯>하다고

곧 행동이 <반듯>한 것은 아니며.

​얼굴이 곱다고

곧 마음씨가 고운 것도 아닙니다.

​學文이 높다고

반드시 人格이 높은 것은 아니며.

​富(부)를 쌓았 다고

반드시 德(덕)을 쌓은 것도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은 말로써 말하지 아니하고,

<정직한 사람>은 每事(매사)에 곧음이 보입니다.

​<있어도>인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없어도> 후반에서 사람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謙遜(겸손)>은

진정한 知識人의 美德입니다.

​어진 사람은 그 度量(도량)이 큰 나무와 같아

제 그늘로 쉼터를 제공합니다.

​또한 善한 사람은 그 性品이 꽃처럼 아름다워

제 香氣로 나비를 부릅니다.

​그러나 <거짓>을 일삼은 사람은

세치의 혀(舌)로 불신을 낳고,

​術數(술수)에 능한 사람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팝니다.

     - 좋은 글 -


예수 그리스도의 네 가지 보혈

(寶자는 ‘보배’나 ‘보물’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寶자는 宀(집 면)자와 玉(옥 옥)자, 缶(장군 부)자, 貝(조개 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寶자의 갑골문을 보면 宀자와 玉자, 貝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집안에 보석이나 돈이 많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항아리를 뜻하는 缶자가 더해지게 되었는데, 이는 항아리에 재물이 가득 담겨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寶자는 이렇게 집안에 재물이 가득한 모습으로 그려져 ‘보배’나 ‘보물’, ‘진귀한’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寶자는 ‘보배’나 ‘보물’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寶자는 宀(집 면)자와 玉(옥 옥)자, 缶(장군 부)자, 貝(조개 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寶자의 갑골문을 보면 宀자와 玉자, 貝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집안에 보석이나 돈이 많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항아리를 뜻하는 缶자가 더해지게 되었는데, 이는 항아리에 재물이 가득 담겨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寶자는 이렇게 집안에 재물이 가득한 모습으로 그려져 ‘보배’나 ‘보물’, ‘진귀한’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게 하소서
성 어거스틴의 기도

오 하나님,
이제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참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지배하에 거하고자 합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소서.
그러나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치료하여 열어주소서.
주님의 손짓을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치료하여 뜨게 하소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바로 식별할 수 있도록
나에게서 망상을 쫓아내주소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말씀해주소서.
주님이 명하시는 모든 것을 나는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창조 / 바라(무에서 유를 창조), 야차르(있는 것을 더 세밀하게 창조), 바나(계획을 갖고 순차대로 창조), 아사(유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성경은 네 개의 단어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개의 단어는 "바라" "바나" "야차르" "아사" 라고 합니다.

바라(무에서 유를 창조)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때 천(天)은 하늘이란 의미이지만 복수형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말씀합니다.


야차르(있는 것을 더 세밀하게 창조)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을 지으시고 이때 지으시고는 1장 1절에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땅(흙)이란 재료를 갖고 아주 섬세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야차르)

이사야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우상을 만든다고 할 때 우상이란 이미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사용하여 다른 섬김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바나(계획을 갖고 순차대로 창조)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을 먼저 만드셨습니다(야차르. 사람)
그리고 그 아담의 갈빗대를 사용하요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바나).


아사(유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은 1절에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천지에서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을 중심으로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구분하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조(創造) 바라(
bârâʼ)

바라(창세기 1:1, 27) -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바라 창조는 아무 것도 없음에서 무엇인가를 있게하는 있음의 창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채워주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없는 것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습니까?


바라(bârâʼ) בָּרָא   

בָּרָא 스트롱번호 1254

1. 새기다. 2. 창조하다
발음 [ bârâʼ ]
구약 성경 / 48회 사용
☞창조하다(창 1:1, 시 89:12, 렘 31:22), 만들다(사 4:5), 짓다(말 2:10, 사 45:7, 57:19), 행하다(출 34:10), 지음을 받다(시 148:5, 겔21:30, 28:13), 창조되다(창 5:2, 사 48:7), 개척하다(수 17:15,18), 죽이다(겔 23:47), 나오다(겔 21:19), 살지게 하다(삼상 2:29).

* 바라(창조하다)의 동사의 주체는 구약 성경에서 48번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8번의 경우 주어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만 "바라"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바라"의 창조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신 것을 의미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사(ʽâsâh)   עָשָׂה 

아사(창세기 1:7) - 만드사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절에서 "천지"를 만드셨다고 하셨을 때 "천(하늘, 우주)"은 복수형으로 단순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궁창을 만드셨다는 것은 이미 1절에서 하늘을 만들어 놓으신 것을 갖고(재료) 궁창 즉 대기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사" 라는 창조는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무엇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16 - 만드시고(아사)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עָשָׂה 스트롱번호 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짓다(창 1:31, 출 28:3, 왕상 7:7), 창조하다 (창 5:1, 출 31:17), 준행하다(창6:22, 레26:3),행하다(창8:21, 민14:11, 대하7:21), 모으다(창12:5), 쌓다(창13:4, 전2:8), 싸우다(창14:2, 수11:18, 대하25:8), 차려놓다(창18:8), 베풀다(창19:19, 출18:9), 정하다(창2:14, 왕상12:33), 주다(창27:17, 민5:7), 이루다(창28:15, 삼상14:45), 빼앗다(창31:1, 왕상14:26), 악하다(창38:10), 대접하다(창47:29, 삿8:1), 준비하다(출12:39, 렘46:19), 지키다(출12:48, 신7:12), 만들다(출20:11, 왕상15:13, 대하4:1), 싸다(출25:11), 달다(출26:10), 짜다(출36:35), 마치다(출39:42), 범하다(레4:2, 삼하12:12), 드리다(레14:30, 민6:11), 뿌리다(레16:15), 조각하다(신4:23), 얻다(신8:17, 사15:7), 에워싸다(신20:12), 베다(신21:12), 실행하다(신23:23), 받다(신26:19), 대우하다(창34:31, 수2:14), 헐다(삿2:2), 선대하다(삿1:24, 룻1:8), 보이다(삿6:17, 시86:17), 후대하다(삿8:35), 내리다(삼상6:9), 시키다(삼상8:16, 왕상18:13), 어찌하다(삼하3:24), 상심하다(삼하12:18), 허락하다(삼하14:22), 해하다(삼하18:13), 세우다(왕상2:24, 왕하21:7), 지음을 받다(시139:15), 경외하다(왕상8:43), 듣다(왕상8:45), 제조하다(왕상22:48, 대하2:7),맺다(왕하19:30, 렘11:17), 건축하다(대상22:8, 대하2:12, 겔16:31), 넘기다(대하24:24), 장사하다(대하32:33), 순종하다(느9:34), 위하다(느13:7), 따르다(에1:15), 서다(에7:9), 시행하다(에9:12), 변호하다(시9:4), 갚다(시103:10, 겔25:17), 기억하다(시111:4), 입히다(아3:10), 맹약하다(사28:15), 헛되다(사40:23), 내다(렘10:13), 삼다(삼상12:22, 렘37:15),파다(렘41:9), 허탄하다(렘48:30), 생기다(렘51:16), 없어지다(렘48:36), 굽다(겔4:15),내리다(겔5:8), 벌하다(겔16:41), 막다(겔18:11), 학대하다(겔22:7), 흘리다(겔22:9), 보응하다(겔22:14), 부패하다(겔23:10), 일으키다(겔30:14), 많게 하다(겔31:9), 치다(단11:7), 취하다(단11:39, 삼상14:32), 임하다(암3:6), 범죄하다(미7:9), 못하다(창34:14), 아니하다(창44:7), 가져오다(출36:3), 보내다(신34:11), 새기다(삿17:3), 나누어 주다(느8:12), 갖추다(느13:7, 겔45:23), 처치하다(에1:15), 품다(에7:5), 여기다(시109:16), 허무하다(잠23:5), 더하다(사30:1), 먹다(사7:22),어루만지다(겔23:10), 당하다(겔23:30), 선하다(시109 :21), 성취하다(잠20:18), 두르다(렘6:26), 처분하다(단1:13), 잔치하다(창29:22), 시행하다(출21:11), 다듬다(출20:25), 물리다(출28:11), 땋다(출28:14), 같다(민8:3), 예비하다(민15:6,12), 면제하다(신15:1), 꾸미다(수9:4), 말씀하다(삼상3:17), 건지다(삼상14:48), 분향하다(왕상12:33), 택하다(왕하17:32), 고안하다(대하26:15), 참가하다(대하34:32), 반포되다(에1:20), 찌다(욥15:27),파종하다(시107:37), 심판하다(시119:84), 맺히다(사5:2, 호8:7), 성취하다(전11:5), 퍼지다(겔17:6), 본받다(겔23:48), 저축하다(겔28:4), 따르다(겔35:6), 행동하다(민24:18),정의를 행하다(신10:18), 부지런하다(왕상11:28), 능하다(왕하24:16, 대하26:13), 형통하다(시37:7), 놀리다(잠10:4), 꾀하다(나1:9), 깔리다(겔40:17), 설비되다(겔46:23), 넣다(레2:11), 굽다(레6:21), 처리하다(민4:26).[명] 소산(민6:4), 제조(겔15:5), 희생(출10:25), 행사(삼상8:8), 일(삼상12:17), 행위(왕상8:32, 욥21:31), 행적(왕상22:39), 사적(왕하1:18, 14:15), 능력(시78:4), 덕행(잠31:29), 악행(렘44:22), 먹을 것(합3:17), 버릇(민22:30),결실(렘17:8), 소출(창41:47), 자원제물(레22:23), 노동(레23:7, 민28:26), 범사(창39:3),용사(왕상12:21, 대하11:1), 일꾼(왕하12:15), 역사(느6:3), 사무(에9:3), 사역자(시104:4),삯(잠11:18), 품꾼(사19: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야차르(창세기 2:7) - 지으시고
* 만든 것을 섬세하게 구성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야차르(yâtsar) יָצַר   


יָצַר 스트롱번호 3335

1. 형성하다.  2. 창 2:7.  3. 사 44:9
발음 [ yâtsar ]
구약 성경 / 40회 사용
☞짓다(창2:8, 시95:5), 정하다(왕하19:25, 사37:26), 이루다(시74:17), 만들다(사44:10),경영하다(사46:10), 꾸미다(시94:20), 일을 하다(사44:12), 창조하다(사43:1), 지어내다(사44:2), 나오다(사49:5), 내리다(렘18:11), 지음을 받다(사43:10), 제조되다(사54:17).[명] 질그릇(삼하17:28, 시2:9), 옹기장이(대상4:23), 토기장이(사29:16, 애4:2), 조성자(렘10:16, 51:19).

이사야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나(bânâh)   בָּנָה

          


바나(창세기 2:22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 계획을 갖고 순차대로 만드는 것


בָּנָה 스트롱번호1129
1.

짓다

2.

왕상6:15

3.

~위해 집을 짓다] 렘24:6

발음 [ bânâh ]
구약 성경
373회 사용
☞쌓다(창11:5, 신27:5, 애3:5), 건축하다(민32:37, 대하6:2, 느2:18), 만들다(신20:20, 겔27:5, 창2:22), 세우다(룻4:11, 왕상11:38, 렘45:4), 증축하다(대하27:3), 짓다(욥27:18,전2:4, 렘35:9), 건설하다(시122:3, 사25:2), 건축되다(겔36:33, 잠24:3, 슥1:16), 번성하다(말3:15), 얻다(창16:2, 30:3), 복구시키다(사44:26). [명] 건축(왕상6:9), 건축자(왕상5:18, 스3:10).

























요한일서(04 /29 / 2024 - )







05-18-2024(토) 요한일서 5:13-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망에 이르는 죄(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05-17-2024(금) 요한일서 5:9-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증거(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We accept man's testimony, but God's testimony is greater because it is the testimony of God, which he has given about his Son.
















05-16-2024(목) 요한일서 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이기는 자(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Who is it that overcomes the world? Only h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05-15-2024(수) 요한일서 5: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명들을 지키는 것(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This is love for God: to obey his commands. And his commands are not burdensome,














05-14-2024(화) 요한일서 4:17-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사랑(18절)
















05-14-2024(화) 요한일서 4:17-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사랑(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05-13-2024(월) 요한일서 4:7-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본성(The Nature of God)과 하나님의 속성들(The attributes of God)

하나님의 본성(本性)이란 무엇인가? 

'본성(nature)'은 '하나님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을 말합니다.
영과 사랑과 빛입니다.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고(요일 4:8), 빛이시다(요일 1:5). 

1.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ㅡ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ㅡ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
3.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ㅡ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표현들은 은유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서술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영과 사랑과 빛이시다. 영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을 나타내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의 본질을 나타내며,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을 나타낸다. 사랑과 빛은 모두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있는데, 그 생명은 그 영에 속한 것이다(롬 8:2). 하나님, 영, 생명은 사실상 하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은 생명이다. 그러한 생명 안에 사랑과 빛이 있다. 이 신성한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것은 은혜가 되며 이 신성한 빛이 우리에게 비췰 때 그것은 진리가 된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속성(attribute)'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특성을 말합니다.
좀더 말하면 38가지 이상의 특별하고 다양한 특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감 팔렛트 아시죠?
기본 색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속성(attribute)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네 가지ㅡ 빛, 의, 거룩, 사랑

1. 빛 ㅡ 하나님의 표현
2. 의 ㅡ 하나님의 외적인 행동이나 방법
3. 거룩 ㅡ 하나님께로 분별됨과 하나님 자신으로 적셔짐
4. 사랑 ㅡ 하나님의 본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 

속성(屬性) - 단어의 의미

1. 속(屬) 의 의미 : '하나님의 속성' 할 때 '속'은 '하나님께 속한 다양한 특징들'을 말한다. 
여기 '속'은 '무리 속, 속할 속'자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다양한 특성들을 총합하여 말한 것'이다.  

屬 무리 속, 이을 촉  : 
1.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2.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3. 벼슬아치 
4. 혈족(血族) 
5. 붙다 
6. 부착하다(附着ㆍ付着--) 
7. 거느리다 
8. 복종하다(服從--)
9. 수행하다(遂行--)

2. '속성(attribute)'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특성을 말합니다.
좀더 말하면 38가지 이상의 특별하고 다양한 특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감 팔렛트 아시죠? 기본 색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속성 attribute입니다.  하나님께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이것은 신성하고 풍성하다. 신성하고 풍성한 속성들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3. 신성한 속성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네 가지 '사랑, 빛, 거룩함, 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와 같은 그분의 풍성하고 다양한 속성들에 있어서 넘치신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사람 예수님을 통해 살아 나타났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사람 예수님의 미덕들이 되었다.

4.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 - 38 가지 속성

⓵ 생명(엡 4:18, 창 2:8-9, 행 11:18, 요 3:16, 요 1:4, 10:10, 11:35, 14:16, 요일 1:2, 5:12) 조에 zoe
⓶ 사랑(요 3:16, 딤전 1:15, 요일 4:10, 엡 2:4) 아가페 agape
⓷ 빛(계 21:23, 사 30:26, 계 22:5, 계 21:11, 18, 요일 1:5-7)
⓸ 풍성(롬 2:4, 엡 2:4, 1:7, 2:7, 3:16, 롬 9:23, 롬 11:33)
⑤ 충만(골 1:19, 골 2:9, 엡 3:19, 엡 1:23, 요 1:16)
⑥ 거룩(계 4:8, 사 6:3, 히 12:10, 벧전 1:15, 16, 히 12:9-10, 계 21:2, 10)
⑦ 의(義, 계 15:13, 롬 1:16-17, 요일 1:9-10, 행 10:43, 롬 3:21, 시 89:14)
⑧ 지혜(롬 16:27, 엠 3:10, 고전 1:30)
⑨ 총명(엡 1:8)
⑩ 신실하심(고전 1:9, 요일 1:9, 고전 10:13, 살전 5:23-24)
⑪ 진실하심(롬 3:7, 15:8)
⑫ 단순하심(고후 1:12, 고후 11:3)
⑬ 성실하심(고후 1:12)
⑭ 선하심(눅 18:18)
⑮ 긍휼(롬 9:15-16, 롬 11:32, 눅 15:20-24, 히 4:16, 엡 2:4) 엘레오스 eleos
⑯ 불쌍히 여기심(연민, 롬 9:15, 고후 1:3) 오이크티르모르스 oiktirmos
⑰ 은혜(엡 2:7, 8, 요 1:16-17, 고후 12:9, 벧전 4:10, 5:10)
⑱ 평강(롬 16:20, 빌 4:7, 요 16:33, 살전 5:23, 엡 1:2)
⑲ 기쁨(롬 15:13)
⑳ 소망(롬 15:13) 
㉑ 위로(안위, 롬 15:5, 고후 1:3, 4)
㉒ 인자하심(롬 2:4, 롬 11:22, 엠 2:7, 딛 3:4-5)
㉓ 용납하심(관용, 롬 2:4)
㉔ 오래 참으심(롬 2:4)
㉕ 오래 견딤(롬 15:5)
㉖ 질투(고후 11:2)
㉗ 엄위하심(롬 11:22)
㉘ 공평하심(행 10:34, 롬 2:11, 엡 6:9)
㉙ 죽지 아니함, 불멸, 아타나시아 athanasia(딤전 6:16)
㉚ 불변하심(약 1:17, 히 6:17)
㉛ 영광(행 7:2, 55, 창 12:1, 4, 벧전 1:3, 5:10, 딤후 2:10, 롬 8:21, 히 2:10, 요 1:1, 14, 롬 3:23, 고전 2:7, 살전 2:12, 히 2:10, 롬 8:17, 30, 롬 9:23, 계 21:11)
㉜ 존귀(계 4:9, 5:13)
㉝ 위엄(유 25)
㉞ 주권(롬 9:20, 21, 19, 딤후 2:20-21, 롬 9:22-24)
㉟ 권위(유 25, 눅 12:5)
㊱ 능력(고전 1:24, 엡 1:19, 행 2:24, 엠 1:20-21) 
㊲ 힘(엡 1:19, 계 5:12), 이스쿠오스 ischuos 
㊳ 강력(엡 1:19, 계 1:6, 5:13, 유 25, 딤전 6:16) 크라토스 kroto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단일성, 무한성, 영성, 영원성, 불변성, 주권성, 전지성, 전능성, 편재성, 사랑 등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속성과 도저히 고유할 수 없는 속성으로 분류합니다.
사랑이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속성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심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 13:4-8a ).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 4:8), 이 서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두루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장 8절은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그분의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분의 위격과 성품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분의 진노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 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요 1:12; 요일 3:1, 23-24).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신을 연구하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 신자이고, 참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첫 번째로 태어나는 것이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거듭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수록 부모를 점점 닮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을수록 성품이 변하고, 사랑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맛은 직접 경험해 보아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의한 짓을 하던 사람이 하지 않게 되고,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던 사람이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났다는 증거, 진짜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지고, 영안이 밝아지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밝은 빛으로 인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행하시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장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시고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서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 도대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만물을 다 만들어 주셨는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잠언 3장 11~1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시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 밖의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맛이 좋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이 독약이고, 고통을 몇 배로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악가 파바로티와 함께 3대 테너 가수 중 한 사람이었던 호세 카레라스는 41세 때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다가 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병원에 가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시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호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처럼 병이 나아서 1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과거와 달랐고, 그의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중들 앞에서 “질병도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 다.’라는 것과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입 전부를 바쳐서 백혈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과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모든 계명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2~1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 높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이 넘칠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칠 때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사랑이 넘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지만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계명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없어서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실제로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돌봐야 열매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행함이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굶고 있어도 ‘아이고, 안됐다, 안됐다, 사랑하는 아무개가 굶고 있구나.’ 하고만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라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행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며 받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게 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하니까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성도들이 함께 모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누구도 자기 재산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 나누어주고 함께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내 것이라고 싸우는데 예루살렘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도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 嗤?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눈병이 있었다고도 하고, 간질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다 보니 온 몸이 형편없게 된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믿음이 어린 사람이 보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거지 같고 중환자 같고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업신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이 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서울 강북에 수유리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목회를 아주 잘하셔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열심히 목회를 하시던 중에 쓰러지셨는데, 5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중에 시험에 들어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정말 사랑하니까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전 교인이 기도하며 목사님을 극진히 간호하자,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여서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다시 하시니 교회가 더 부흥되었고, 몇 년 전에는 성전을 크게 지어 하나님 앞에 헌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합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몸이 약해서 새벽기도에도 잘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정재훈 장로님이라는 분은 새벽 4시만 되면 다른 장로님들을 불러서 함께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목사님이 중풍에 걸려 은퇴하시고, 다른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정재훈 장로님은 일주일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가지고 주일 아침에 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아침 식사를 수년간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큰 회사의 사장이 되게 하셨고, 또한 이 분이 우주선을 발사할 때 폭발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치를 개발하게 하셔서 미국 대통령과 비밀회의를 하고, 전 세계에서 이 장치를 주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벽마다 기도하고,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로 통해 나타나신 사랑
사랑의 생각, 말, 행동 실천해야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마다 사랑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샘물이 있으면 바깥으로 그 샘이 흘러 넘쳐 나오듯이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불리우던 테레사 수녀는 1910년 건축업자이며 시의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나 18세에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캘거타로 건너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나중에 그 고등학교 교장 선생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리야 산에서 요양을 한후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일생을 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돈으로 5루피를 들고 인도 캘거타의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가 돌보았습니다.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수상축하연을 열지 않고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쓴다는 조건으로 수상식에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그녀가 실천한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신지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는 1875년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목사로 대학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바하 음악에 심취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9살 때 그는 우연히 기숙사 책상위에 놓인 잡지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마음이 극히 아팠습니다. “우리는 구라파에서 이렇게 문명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불공평하기 짝이없다. 내가 가서 도와 주겠다”라고 고백하며 사명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후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에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기로 유명한 랑바레네라는 곳에 병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했습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그를 찾와서 “저는 정말 이해할수 없어요. 훌륭한 의사요, 위대한 학자인 당신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저는 말로써 감동시킬 만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에 와서 의술을 통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므로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52년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많은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하여 그가 탄 기차에 올랐습니다. 특등실에 가서 보니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1등칸과  2등칸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해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탄다는 3등칸에 갔더니 슈바이처 박사가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청진기를 대고 진찰과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기자들이 놀라서 “박사님! 상을 받으러 가는 이때에 가시면서까지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이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천민들이 타는 기차칸에서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볼수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머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 인생들을 돌보시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역사하는 그곳에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모습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와 더러움, 병, 저주, 죽음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해 나타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더러움을 몸소 짊어지시고 병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당하시고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매달린 형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서 강물처럼 넘침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의 모든 죄의 부채를 청산하시고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리게 한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함을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씁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키발드 디 하트는 용서란 나를 해친 사람에게 내가 원수 갚을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그를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갚는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그 끝없는 사랑에 우리는 감격하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원수가 잘못되는 것과, 원수가 심판 받기를 원하며, 원수가 불행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용서받고 남을 용서 안한다면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생애 속에 효과를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용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믿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햇빛을 받으면 반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사 안하는 거울은 거울이 아닙니다. 그처럼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를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 용서하라고 오늘날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마음 속에 받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요한일서 4장 11절로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오시면 사랑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사하여 주시는 속성이 있습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미워하는 사람은 자꾸 발가벗기고 다투고 논쟁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물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을 보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을 못살게 굴고 이웃의 약점을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내면서도 본인에게는 “나는 잘믿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을 감싸고 사랑하고 덮어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대경을 하나 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확대경은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멀리 적게 보이게 하는 것과 아주 가까이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과 단점은 멀리 보십니다. 장점은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쏟아부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확대경을 들고서 내 장점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장점을 보시고 사랑 해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묶여 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병에 묶여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가난과 저주에 묶여서 종살이 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은 심신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름은 야훼 라파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그의 사역의 3분의 2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유언으로 남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치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출신의 호세 까레라스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전세계가 알아주는 삼대 성악가 중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은빛 테너라고 불리우는 그는 한때 불치의 병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악가로서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그의 나이 41살 되던 해에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한참 연습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에 실려가서 조사해 보니까 치명적인 백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살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성경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동안 성경은 읽지도 아니하고 그저 의무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고통가운데 처하게 되니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의사들이 포기하고 이제는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나는 너의 의사’라고 말하니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찬송하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골수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도 믿음으로 잘 견뎌내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백혈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까레라스는 자신이 다시 살게 된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감사하고 전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까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워서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지에도 지사를 두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치료의 은총을 베푸는 선한일을 했습니다. 비로소 까레라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된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 나보다 남을 생각할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신을 치료하실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성은 또한 용기와 희망과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한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이시며, 복이시고, 하나님은 은혜이신데 하나님께 나가서 복을 안받으면 누구에게 복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당당히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복을 받을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용기요, 희망이요,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영생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시간 저 건너편 영혼으로 이 제한된 공간 저 건너편 무한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살다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바울선생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가 비로소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있고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미움은 마귀의 속성이기 때문에 미움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미움이 가져오는 파괴의 행동이란 얼마나 무섭습니까? 미움은 마귀의 형상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안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이상 미움은 물러가고 사랑이 들어온 것을 감사합니다. 미움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사랑의 태양이 떠오른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생각을 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사랑 안에서 참 평안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05-11-2024(토) 요한일서 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과 미혹의 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과 미혹의 영(the Spirit of falsehood)
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카이 토 프뉴마 테스 플라네스
το πνευμα της αληθειας και το πνευμα της πλανης

진리(225) 알레데이아(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1. 진실성.   2. 진실.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alēthĕia ]
어원  / 227에서 유래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 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미혹(4106) 플라내(planē)  πλά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4106

1. 4108의 여성형 : 배회.  2. 잘못.  3. 미혹
발음 [ planē ]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 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 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오늘날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내에도 미혹의 영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라는 것은 악한 영,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특별히 미혹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과 더불어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미혹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4).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마지막 때에 사단은 뉴에이지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영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단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입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합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경배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 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뉴에이지 스포츠라고 하여 요가를 통한 심신 단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 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참 평안으로 이끌어준다는 명목하게 이러한 운동을 적극 장려하며 심지어 교회 프로그램으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진리의 영은 오직 하나뿐 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거룩한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짓된 가르침과 길에서 벗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그렇기 때문에 이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전에 찾아보면 뉴에이지 운동은 “1970년 80년대에 주로 신비주의 이단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단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많은 연관이 되어있는 뉴에이지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우리가 접하는 문화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문화에 빠지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게 합니다.
현재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뉴에이지에 감염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유명한 목사의 영성훈련에 다녀온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성훈련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명상만 하라고 했다.’
잘못된 전형적인 뉴에이지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일부 CCM 노래들은 그냥 들으면 가요인지 찬양인지 분간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뉴에이지 스포츠가 있습니다.
요가가 그렇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합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어떤 미국교회는 요가가 아예 교회의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경의 말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윤리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지지하면 상대적으로 교회도 그것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용납하게 됩니다.
왜냐면 교회는 모든 이념을 다 수용해서 평화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좌파(사회주의)의 이념은 유물론에 입각한 반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고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또한 마지막 때에 동성애나 혼합주의와 같은 배도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니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 2:3)

교회가 사회주의를 용납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고, WCC와 같은 혼합주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단이 ‘New Age’ 즉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에 뉴에이지의 영을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침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New World Order(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고 모든 인류가 사단 루시퍼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New World Order(새 세계질서)’라는 단어가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사단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지 ‘새 세계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도, 동성애와 WCC도 루시퍼를 섬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단은 뿔달린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온순한 양과 같이 때로는 평화의 사자같이 우리를 미혹하고 교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는 뉴에이지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4-15)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단의 일군들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가 가짜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가운데 깨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동성애자들도 혼합주의자들도 모두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뉴에이지영, 즉 사단의 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은 오직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안에 있을 때만 참 사랑과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있어야지만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뉴에이지영)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하인츠 프레히터>라고 하는 독일계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접시닦이 출신으로서 억만장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전기와 수도도 없는 독일의 시골벽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를 개업했는데, 그 때에 자동차 천장에 여닫을 수 있는 ‘선 루프’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36개나 되는 회사를 소유하는 거부가 된 것입니다.
그는 22개의 언론사도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호텔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섬 하나를 통째로 사서 초호화 저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처럼, 부러울 것이 하나 없는 그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된다 할지라도,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아무리 좋은 집에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으며, 또한 아무리 많은 쾌락을 즐기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으로 체울 수 있는 마음의 공허는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인츠 프레히터>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겨놓고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세상에서 웰빙의 삶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이 세상과 이별한다는 것이지요/

사도 요한이 지금 이 서신을 쓴 목적이 1:4절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 기쁨은 진정한 웰빙,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진정한 웰빙의 삶 즉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삶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빛 가운데 거하는 삶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특징은 빛 가운데 거하는 깨끗한 삶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이런 증거가 없다면 자신의 신앙의 삶을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우리를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하지 아니했는지,
나의 신앙의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요1서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의 특징 즉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을 말하려고 하면서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까?
1. 사도 요한은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까?(1절)
신앙생활과 또는 목회에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가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1: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게 잘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7절 이하 말씀에서 보듯이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즉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 면이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이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는 진리와 전통을 강조하다 보니 사랑의 실천이 약합니다.
사도 요한이 2:18절에서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가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바로 세우고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고 합니다.
이것은 에베소 지역 교회가
사도 요한의 경계에 따라 이단의 침투를 막다 보니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계2:2-4절에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에베소 교회가 이단들의 침투를 막은 것은 잘한 일인데
그러나 보니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그 반대로 사랑을 강조하기 전에 <3>
거짓 영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먼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사랑과 진리가 균형을 이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우리가 영들을 시험하느냐? 하면
2.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2절)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먼저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확신합니까?
무엇으로?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증거가 뭡니까?
2절에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즉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믿는 자는
바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고
가현설 - 즉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영체이지 육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사실을 인정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거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들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존재에 있어서,
있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존재하신 분이라면
그 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곧 하나님으로 존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리는 설자리가 없어지며
우리의 구원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영, 사탄의 역사는
이같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극력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의 교리는 이 비진리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4>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럼 우리를 미혹하는 영을 어떻게 시험해 볼 수 있는가?
3.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첫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3절)
3절 [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아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 받고 나면 우리는 자칫 영적 주관화 경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다 믿으려고 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그렇지 않는지도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잘못된 신앙적 모습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영적인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항상 말씀이 세운 기준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적인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일을 눈을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을 시인함으로 일어나는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결코 영적 감상주의에 빠져서 기적이나 신비를
모든 영적인 기준으로 삼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들도 영적인 일을 말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행하는 것인지를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민감합니다만
생활 속에 파고들어오는 마귀의 유혹은 잘 물리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잘못되어지면 신앙의 삶이 삐뚤어지지만
삶이 잘못되어도 교리가 변질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여집사가 쇼핑하러 갔다가 멋진 옷을 보았는데 가격이 엄청나게 비쌉니다.<5>
사고 싶은 욕망을 도저히 꺾을 수 없어서
카드로 그 드레스를 사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저녁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그 멋진 드레스를 보여 주었습니다. 남편은 드레스 값이 얼마라는 것을 듣고는 질려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 당신, 도데체 이렇게 비싼 옷을 어떻게 살 수 있냐? ]
[ 마귀가 나를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
[ 그러면 당신이 그처럼 열심히 읽는 성경 말씀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는 하지? ]
[ 내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더니
내 뒤에서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요?
'뒤에서 보아도 그 옷을 입고 있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소!' ]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또는 성경을 놓고는 아멘!도 잘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뒤에서 들려오는 마귀의 말에 더 솔깃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그리고 하나님 말씀마저 자기에게 맞추어 버립니다.

사단이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을 죄짓게 만들 때,
예수 믿는 사람을 유혹할 때에 쓰는 방법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로 다윗 이미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다윗 왕을 봐라,
그렇게 범죄했지만 회개한 다음에 훌륭한 왕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지금 죄 짓다가 때가 되면 회개하면 된다고 유혹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모세의 이미지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혈기가 있었다.
모세를 보아라,
그는 사람을 쳐 죽이기도 했고, 십계명을 깨뜨리기도 했고,
사람들 앞에서 반석을 땅땅 내리치기도 했던 혈기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위대한 사람이었지 않느냐,
네가 혈기 좀 부렸기로서니 그것 가지고 뭘, 괜찮다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세째는, 베드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베드로를 보아라,
그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만 잤다,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 받은 다음에 큰 일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을 잘 때이니 푹 쉬어라.
나중에 기도해서 성령받으면 된다- 이래가면서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울 이미지입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어보라, <6>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행위는 상관이 없다, 마음대로 살아라, 이미 구원을 받아놓은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로 이미 예정된 사람이니까
거꾸로 가건 말건 천당 가기로 정해졌다. 걱정 말아라 -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이런 유혹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지고 자기변명으로 미혹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은 하지만 삶에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의 말씀도 없는 교인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아니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는 것 꼭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실천적 무신론자로 몰고 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미혹의 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께 속한 자의 신앙의 승리는 어디로부터 옵니까?(4절)
하나님께 속한 영적 성도의 특징은
그들의 삶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이깁니다.
4절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주님을 의지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다 크신 분 - 어떤 분이십니까?
공중 권세를 잡고 세상을 좌우하는 사탄의 권세를 깨뜨려 놓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 부귀와 명예보다 크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귀담아 들어시기 바랍니다.
[ 마귀는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데
돈보다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그 성능 이 얼마나 뛰어난지 사람들 앞에 이것을 흔들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다 통하는 전천후의 무기라서
한 번도 손질을 하거나 개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무서 운 독약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
우리가 언제 신앙생활에 철이 들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마귀가 무기로 내 세우는 돈 보다 더 크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7>
눈이 뜨여질 때입니다.
여기에 눈이 뜨여지지 못하면 마귀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거짓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을 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에 속한 바른 믿음의 성도가 되기 위하여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 행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14: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니
멜기세덱 왕이 나와서 영접할 때에
아브라함이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며 하는 말이
[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라 ] 합니다.
다윗이 성전건축 준비를 다 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대상29:11-12절에
[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게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다.
부과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
모든 것이 주에 손에 있을 만큼 크신 분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요 나의 주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의지하여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에 있는 이(마귀) 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승리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사탄이 등장한 후로 미혹의 영이 나타났습니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난 후,  이들은 인간이 거주하는 이 세상에 그들의 있을 자리를 펴고 인간을 대상으로 미혹하는 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미혹의 첫 대상은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 후 미혹의 영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인간들을 미혹해 왔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미혹의 영은 사탄의 영으로 이 영을 유혹의 영, 혹은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혹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미혹이란 말은 그럴듯하게 속여서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그것을 믿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진리의 영 인양 자기 존재를 위장합니다. 혹은 천사 인양 외모로 가장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미혹의 영의 역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
1)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약해지면 마귀가 그 틈을 타는 것입니다. 마13장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잠 잘 때 악한 자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하셨습니다.
잠잔다는 말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 할 수 있는 방법을 6절에서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 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고 합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우리의 말을 듣는다'는 말은 당시 교회에 보낸 사도들이 서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나아가 교회의 법을 말합니다.
근래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기도하는 종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종들에게 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신비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로 이들의 결국을 살펴보면 이단으로 흐르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어 결국 자기 영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8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고 경고했습니다.

몇 해 전 이탈리아 한 수녀가 카메라로 예수님을 찍어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안나 알리라는 수녀가 자기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내가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모습을 보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이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한 것을 쥐어 주기 위해 예수님이 실물과 다름없는 사진을 찍어 증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안나 알리 수녀는 무려 예수님을 이백 회 정도 만나 뵈옵고 또한 그때마다 예수님이 친히 주신 말씀을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성스러운 호소>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친히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내 말은 인쇄되어지고 읽혀질 것이며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나는 ‘특별한 은총’을 내리겠다. ]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 라고 감히 이 책이 선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특별한 은총’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성경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저들의 신비체험이나 기적체험을 성경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은 성경이 우선이고 나아가 교회의 법도가 우선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교회의 질서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혹의 영에 미혹되면 성경 말씀도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아니하고 독선적인 신앙적 아집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6절에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말을 듣고 ]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지도를 받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성경 말씀과 교회의 법도를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화) 조선인 '거지 대장'과 결혼한 日관료 딸…목포 울린 위대한 사랑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일제 강점기였다.
버려진 고아들을 보살피는 조선인 ‘거지 대장’과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결혼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답이 전남 목포의 공생원(共生園)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최로 지난달 22~24일 전남 일대의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답사를 갔다.
전남 영광과 신안, 목포를 거쳐 순천과 여수를 찾아가는 순례였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목포의 공생원이었다.
거기에는 계급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었다.

거지 대장과 총독부 관료의 외동딸

윤치호(1909~?)는 14세에 소년가장이 됐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마쳤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이듬해였다.
길을 가던 그는 고아들을 보았다.
다리 밑에서 기거하며 굶주리는 떠돌이 고아들 일곱 명이었다.
19세의 윤치호는 고아들을 데리고 유달산 자락으로 갔다.
유달산은 돌산이라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날부터 윤치호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시작했다.
식량이 없을 때는 직접 동냥까지 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고아들이 늘었다.
윤치호는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공생원’을 세웠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지 대장”이라고 불렀다.
공생원의 고아는 100명까지 늘었다.
아이들에게는 교육과 선생이 필요했다.

마침 목포 정명여고의 일본인 음악 선생이 공생원에 와서 도와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우치 지즈코(윤학자).
기독교인이었다.
함께 일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고아들의 대부이자 ‘거지 대장’이었고, 여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누가 봐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결혼 의사를 밝히자 지즈코의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하늘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이지.” 그렇게 둘은 결혼했다.

한교총 이철(감리교 감독) 공동대표회장은 “지금도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밖에 안 된다.
당시에는 더 적었다.
지즈코 여사의 가문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남편 윤치호와 고아들을 향한 숭고한 열정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고아들, 인민재판에서 아버지 구해

1945년 8월 해방이 됐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리는 봉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우치 지즈코는 조선에 남았다.
윤치호와 지즈코는 2남 2녀를 두었다.
공생원의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였다.

5년 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모 잃은 전쟁고아가 급증했다.
공생원의 고아는 5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목포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군인ㆍ경찰 가족과 목사ㆍ전도사는 마을 공터에서 인민재판을 받았다.
윤치호 전도사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500명의 고아가 찾아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을 사람들도 한목소리였다.

인민군은 그를 살려주었다.
대신 그 지역의 인민위원장을 강제로 맡겼다.
몇 달 뒤에 국군이 들어왔다.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윤치호는 ‘빨갱이’로 몰렸다.
옥고를 치르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밑거름

1951년 윤치호는 공생원 고아들에게 줄 식량을 구하려고 전남 도청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남편이 실종됐지만 지즈코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생원 고아들을 자식처럼 계속 돌보았다.

1960년이었다.
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지즈코 여사는 15년 만에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모녀의 극적인 상봉을 방영했다.
그 방송을 보고서 일본에 여러 후원회가 생겼다.
덕분에 공생원은 남녀 고아들을 중고등학교에도 보낼 수 있었다.
60년대에는 공생원 바깥에서도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1968년 다우치 지즈코 여사가 소천하자 목포시는 첫 시민장으로 치렀다.
당시 목포시 인구는 17만 명, 그중 3만 명이 목포역에 마련된 영결식장을 찾았다.

다우치 지즈코 여사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병석의 무의식 상태에서 일본어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NHK에서 2000년에 방영됐다.
이걸 본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직접 공생원에 전화해 “너무 고맙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들르겠다”며 매실나무 20그루를 보냈다.

공생원 이연 상임부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때 한일관계를 회복하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했다.
김 대통령도 목포 공생원을 무척 아꼈고, 오부치 총리는 매실나무까지 보냈다.
두 정상 간 만남에서도 공생원이 주된 대화 소재였다”고 설명했다.

총신대 허은철 교수(역사교육과)는 “지금껏 공생원을 거쳐 간 고아가 3000명이 넘는다.
거지 대장 윤치호와 지즈코 여사가 함께 일군 공생원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한다”며 “여기에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인류애가 있다”고 강조했다.

▣ 행함과 진실로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맙시다.

▣ 행위 있는 믿음(누가복음10: 30-37)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야고보서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함이라.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너희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불교와 같이 산 속에서 명상하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내 감정의 의식구조, 행동 등 내 전체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불교의 승려가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승려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있는 부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행위의 종교입니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 기도: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만이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사오니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 행함이 없는 믿음(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은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

경상도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던 한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의 초대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다.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설교는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예배가 끝날 때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 축도를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설교맨치로 살라꼬 다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항상 함께 하실찌어다.”

웃음으로만 넘기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축도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말씀이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함이 문제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많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화려함과 요란함은 있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했다.

▣ 더 좋은 아내가 되어야죠

어느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남편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한 사실을 안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남편이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쎄요, 저는 남편을 위해 더 좋은 음식을 만들고, 남편이 불평할 때 면 마루를 더 깨끗이 닦고,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하면 더욱더 부드럽게 대답하지요.
선교사님, 저는 제가 크리스천이 된 후로 더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방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여종이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여종의 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종의 어떤 행실을 보고 진실된 신앙인임을 아십니까?"

이 말을 듣고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가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진실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 4:2, 벧전 1:15, 2:12)

▣ 그리스도인 사공의 노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한 사람은 선한 행위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서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조용히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 사공이 그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노를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노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내 왼손에 쥐고 있는 노를 '행함'이라고 합시다.

신사분들, 잘 지켜보십시오.
나는 믿음의 노만을 젓습니다.
보십시오! 이 배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지요.
이번에는 행함이라는 노만 저어 보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잘 보십시오! 두 노를 함께 젓겠습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아가 몇 분 후면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행함이 없는 믿음, 또 믿음이 없는 행함.
그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변변찮은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영원한 안식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매달리기 전에 꽃이 피는 것처럼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다.
믿음은 행함의 아버지고, 자녀인 행함은 그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시계의 내부 부속이 제아무리 잘 조립되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숫자판과 바늘만 있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내부 부속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행함은 손의 움직임을 단속해야 한다.

▣ 행함이 없는 한국교회

지난 한주간 필자는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나오는 보드만여사의 이야기 때문에 깊은 감동에 젖어서 지냈다.
35년간 다섯 명의 한국인 자녀를 입양하여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중의 하나는 심장병을 앓는 아이였고 또 하나는 뇌성마비에 간질의 장애를 가진 소녀여서 2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을 돌보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의 사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를 마지막 제사장 나라라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가정에 뇌성마비소녀를 입양해 달라고 공문을 보낸다면 과연 몇 가정에서 그것에 동의할 것인가?
가수가 무대 위에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벙긋 하는 것을 립싱크(lip sync)라고 한다.
주로 격렬한 춤을 추는 댄스그룹가수들이 립싱크를 사용하는데 외국에서 립싱크는 관객을 우롱하는 용서받지 못할 사기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 컴퓨터 녹음기술로 잘된 부분만 짜집기를 하고 음색과 음정까지도 다듬어서 완성해 낸 한 개의 테이프를 공연 때마다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불공정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대국의 압제와 전쟁의 고난을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에 와서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하는 립싱크의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시대의 제사장 나라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 행함이 있는 믿음

아테네의 한 극장에서 국경일을 기념하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좀 늦게 극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초만원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노인을 본 아테네인들은 "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여기저기서 수군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외국인석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타인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이때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테네인도 선(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은 그 선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의 행동을 보면, 그 아이의 품성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아무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하고 외쳐도, 정작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믿음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 아는 것과 행하는 것(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인간이 많은 것을 발명했지만 땅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땅을 창조하셨으며 더 이상의 땅은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오직 분배와 사용방법의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2002년 세상을 떠난 대천덕 신부의 말입니다.
돌아가신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 신부가 만든 영성 공동체 예수원과 함께 대 신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는 자기가 한 말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한 대 신부는 성공회신학대의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을 설립합니다.
이후에 영적인 공동체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강원도 태백시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100% 공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그는 선교에 전혀 후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 신부의 코이노니아 신학에 영향 받아서 이후부터 믿는 사람들의 성향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개인생활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며 한 지체로서 인정하고 행동하는 차원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70이 넘는 나이에도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기도와 일을 번갈아 가며 하고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예배를 드렸던 대 신부는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본을 보이던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였습니다.

‘사상과 말이 일치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야말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는 행동으로 주님을 전하십시오.

주님! 말보다 행실로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묵상 : 하루에 한 가지씩 선행을 정하고 실행하십시오.

▣ 바늘 없는 시계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서 큰 벽시계를 구경했다.
삼 대째 내려오는 가보라면서 친구는 그 시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조부께서 75년간 그 시계 소리를 들으면서 주무시고 일어나셨으며, 부친께서 75년을 더 사용했고 자신도 그 시계를 보고 학교에 다녔다면서 정확해서 믿을 만한 시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벽시계에는 바늘이 빠지고 없었다.
태엽을 감아주니 똑딱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바늘이 없으니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다.
금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래 되었으면 어떻고 과거에 잘 맞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 몇 시인가를 알려주지 못하는 벽시계!

바늘 없는 벽시계는 믿음 없는 그리스도인과 비슷하다.
똑딱거리기는 하면서 시간은 못 알리는 벽시계는 주장만 하고 믿음을 못 보여주는 사람과 흡사하다.
아무리 가문이 수대에 걸쳐 예수를 믿었어도 보여줄 수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멋있는지가 중요치 않다.
믿음이 내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게 중요하다.

▣ 행함을 통해 받는 축복

부산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서 급식소를 운영했습니다.
구걸하러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진탕 술을 마시고 교회에 와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걸인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러 끌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끌려 나가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하는 이야기가 "교회에 와서 도와 달라는 사람을 경찰을 불러 끌어내다니, 이게 교회냐?"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후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돕기로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오면 밥을 해 주고, 약이 없어서 오면 약을 사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매일 200명이 넘는 사람이 급식소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교인 수만큼의 걸인이 매일 아침밥을 먹으러 교회 마당을 밟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 후 교회가 복을 받기 시작했고, 성도들이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IMF 시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주변에 필요한 땅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재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히 생각하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급식소에서 밥을 먹고 나가는 사람들마다 연방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바로 그 말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다고 나는 믿습니다.
교회가 베푼 대접에 갚을 능력이 없는 그들이 품은 감사를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고 받는 축복입니다.

▣ 행함, 실천에 관한 성경 말씀

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0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

0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

0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0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0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0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시 37:3)

0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잠 20:7)

▣ 행함, 실천에 관한 금언

0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자는 그 실행에서는 가장 충실하다.

0 자기 인생의 의미를 알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의 맹목이 부자연스럽다면 신을 사랑하면서도 제멋대로 나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맹목은 한층 더 무서운 것이다.(파스칼)

0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0 너도 행하고 나도 행하고 우리도 다 행하자(안창호)

0 많은 일을 성취하는 비결은 우선 즉시 한 가지 일에 착수하는 것이다.(리차드 세실)

0 사람은 일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명상하고 느끼고 또 꿈만 꾸기 위한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인생은 짧은 날이다. 그러나 일하는 날이다.(모아)

0 정복에 필요한 것은 첫째도 단행, 둘째도 단행, 셋째도 단행뿐이다.(돌튼)

0 기독교는 먼저 입증되고, 다음에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병행해야 한다.(일링워드)

0 우리에게 말은 필요치 않다. 국가의 건설은 결코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실천을 하는 것뿐이다.(벤구리온)

0 1파운드의 원리보다는 비록 1온스일지라도 실행이 낫다<말보다 실천>(영,미 속담)

0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독일 격언) 0 실행은 교훈보다 낫다(영, 미 속담)

0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행동을 말한다.(스펄전)


05-10-2024(금) 요한일서 3:1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함과 진실함으로(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행함(2041) 에르곤( ĕrgŏn)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 2041

1. 행위.   2. 히 4:3, 4, 10.  3. 표시. 
발음 [ ĕrgŏn ]

행실(마 5:16, 딤전5:10, 벧후2:8), 행위(마11:2, 요3:19, 롬2:15), 일(마26:10, 눅24:19, 롬13:12), 사무(막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1:4), 지음(히1:10), 행함(롬2:6).

진실함(225) 알래데이아(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1. 진실성.  2. 진실.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alēthĕia ]
어원 / 227에서 유래
참(마22:16), 사실(막5:33), 진리(요1:14, 4:24, 롬2:2), 실상(요16:7), 과연(행4:27), 참 됨(행26:25), 진실하심(롬15:8), [동] 진실 하다(롬15:8), 참되다(롬3:7).

▣ 그리스도인 사공의 노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한 사람은 선한 행위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서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조용히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 사공이 그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노를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노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내 왼손에 쥐고 있는 노를 '행함'이라고 합시다.

신사분들, 잘 지켜보십시오.
나는 믿음의 노만을 젓습니다.
보십시오! 이 배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지요.
이번에는 행함이라는 노만 저어 보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잘 보십시오! 두 노를 함께 젓겠습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아가 몇 분 후면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행함이 없는 믿음, 또 믿음이 없는 행함.
그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변변찮은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영원한 안식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매달리기 전에 꽃이 피는 것처럼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다.
믿음은 행함의 아버지고, 자녀인 행함은 그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시계의 내부 부속이 제아무리 잘 조립되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숫자판과 바늘만 있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내부 부속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행함은 손의 움직임을 단속해야 한다.

행함과 진실함이란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로는 물질을 사용하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를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1:19).


둘째는 사랑은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셋째는 사랑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핵가족 시대에서 이제는 독립세대 즉 나 홀로 세대로 급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은 오직 나 혼자만 즐겁고 편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보살펴야 한다고 외칩니다.

굶주린 육체는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굶주린 사랑은 먹을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말과 행실과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오늘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살피는 일에 보람을 찾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래 전에 한 주일에 1불 절약 운동을 시작하고 그 돈을 모아 이웃 사랑의 현장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그것마저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여 무너진 사랑의 현장탑을 다시 쌓아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1. 주의 계명이 무엇인가?(23)

1)“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십계명의 중심도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어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믿어 새롭게 된 자로서 주의 사랑으로 주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2)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먼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하였다. 자신이 가진 부가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형제를 외면한다면 진정 사랑이 그 마음에 없다.

3)오히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말로만 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한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다. 사도 바울은 원수라도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였다. 하물며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를 어찌 외면하겠는가? 가장 미천한 자라도 주의 형제를 도와주면 주를 도우는 것이 된다. 행할 때라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진실함을 담아야 한다. 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2.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가?

1)주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19-21) 진정 주 앞에 담대함을 얻을 자가 누구인가? 우리 마음도 우리 안에 죄를 알고 책망할 것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죄를 씻어 주셨기에 우리는 주를 의지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주를 사랑함이 주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마지막 날 주의 백 보좌 심판 앞에서도 우리는 주의 의의 옷을 입고 주 앞에 나아가니 두려움이 없이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2)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얻게 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앞에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사랑하여 그가 구하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한 예수님이 이제 우리가 주의 계명에 순종할 때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아들이 구하는 것을 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으신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게 된다. 이런 큰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 계명을 실재로 행할 때 우리 마음에 깊이 깨닫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된 것을 알게 된다3)


우리의 삶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거두게 하십니다. 농부가 봄에 벼를 심으면 가을에 벼이삭을 추수하여 열매를 얻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심은 것에 대하여 그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 중에 누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까요? 당연히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베푼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과 존경을 받고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이 많은 가정과 다툼이 많은 가정 중에 어느 가정이 더욱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릴까요? 여러분이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많은 가정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와 냉담한 교회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교회가 더욱 기쁨이 넘치는 교회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여러분은 당연히 사랑이 많은 교회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가족이 행복하며 교회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1. 사랑은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19-20).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1:19).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사랑하면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랑하지 않는자는 사망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3:19).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형제를 남들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을 통하여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가족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 안에서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주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굳세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곤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 3:20).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행실까지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선한 양심이 우리를 책망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도록 인도합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일깨워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진리에 속한 줄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구원의 확신으로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지만, 그때 우리의 선한 양심이 일깨울 때에 회개하고 다시 형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는 “...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불의에서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우리가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었지만 우리가 순종하여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게 되고 담대함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담대함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응답받게 하는 은혜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순종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비결은 우리의 순종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열쇠는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분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얻게 하는 비결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하여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로서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행하는 것의 반대는 말하는 것이고, 진실함의 반대는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5-16)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필요를 보고도 말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기도해 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말 이상으로 희생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혀로 사랑하는 것은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혀로 사랑하는 것은 신실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그 분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행함과 진실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3.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주님의 계명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인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우리의 바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바른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주님은 포도 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구원받은 자는 주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포도 나무와 가지가 하나이듯이, 주님과 우리는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지고 포도 나무에 붙어 있으면 이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 가지는 말라지고 농부가 불에 던져 사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주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비결은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줄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내적으로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과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서로 미워하면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하거나 다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05-09-2024(목) 요한일서 3: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that is what we are! The reason the world does not know us is that it did not know him.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주셔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녀는 주를 향한 소망을 갖습니다(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를 향한 소망은 죄를 떠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선을 행하라(신명기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외면적으로는 죄를 멀리하는 생활이며 내면적으로는 거룩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이름을 믿으라(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씨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의 가르침은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셨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증거를 받으라(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예수를 알고 따르던 제자 베드로는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할 때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다짐하였으나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한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부른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이란 하루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오직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 [호세아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3.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5. [요한복음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6.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7. [로마서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 [로마서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요한1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10. [요한1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11. [요한1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요한1서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풍족함이 문제이다

호주는 사계절 모두가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름(12월~2월)에는
우리나라 초여름 정도 되며
겨울(6월~8월)의 경우도
우리나라의 가을 정도여서
사계절 모두
꽃이 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창기 호주를
처음 밟은 유럽인들은
호주 땅을
양봉으로 성공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라 믿고
벌통을 유럽으로부터
 옮겨 왔다고 합니다.

첫 1년간
이주해 온 벌들은
유럽에서 거둘 수 있는
몇 배의 벌꿀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웬일인지 벌들이
꿀을 따러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보다는
벌 통속에서 놀기만 할 뿐
벌꿀의 생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1년 내내 피어 있는
꽃이 널려 있는데
굳이 힘써가며
꿀 수집을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풍족할 때
게으름을 피우다가
부족할 때 힘겨워하는
어리석음은 경계해야 합니다.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의 성과에 만족하고
미루고 있는 일들이
훗날 우리에게
위험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 논어 선진 편





예수 그리스도의 적(요일 2:18-29)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혹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대처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 우리와 성도 사이의 교제는 자연히 단절되고 성도 사이에는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고 있는 요한일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신앙의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자녀들, 아이들, 청년들, 혹은 아비들이란 말로 나누어 표현했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아이들아”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는 세상과의 문제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자마자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첫 번째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올바른 신앙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 위에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4절 말씀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요동하기 쉽고, 잘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꼬임에 넘어가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유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애들은 낯선 사람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좋아하는 것을 주면 그 사람에게 끌립니다. 어른이 되면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대하면 오히려 경계하게 되고 상식 밖에 지나친 행동을 하면 아예 멀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유혹을 당하기 쉽고, 마음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들이 요동하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 기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 아직도 내 신앙이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여 내 신앙을 진리의 터전 위에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1장과 2장에 세 가지 대조가 나오는데 1장 1절에서 2장 6절까지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어두운 데 거하지 말고 빛 가운데 행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2장 7절에서 17절까지는 사랑과 미움을 대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요한일서 2장 18-29절에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잘못된 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고, 진리 가운데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질문 앞에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과 사랑으로만 끝나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진리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빛, 사랑만을 강조하는 신앙은 자칫하면 신앙이 아닌 거짓된 인본주의로 인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은 감상적인 도덕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빛과 사랑은 진리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간호사가 정성과 사랑으로 간호해 드린다고 합시다. 환자는 간호사의 치밀한 간호와 돌봄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극약을 의약으로 잘못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갖다 환자에게 드렸습니다. 환자는 간호사가 가져온 약을 정성스럽게 받아 먹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진리에 서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공격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목회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름에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 길이 거칠고 험하고 위험합니다.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습니다. 그런데 힘들지만 목자를 따라 고지를 향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상을 차려 놓은 것처럼 공해 없는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고지를 올라오느라고 피곤하던 것이 가시고 시원한 바람에 흐르던 땀이 식게 됩니다. 양들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 아름다운 풀밭에는 일찍이 보지 못한 아름다운 꽃이 피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풀이 여기저기 있어서 양들의 시선을 끕니다. 그런데, 목자는 양들이 가까이 가기 전에 그 먹음직스러운 풀들을 다 뽑아 버립니다. 이유를 모르는 양들은 투덜거립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그렇게 하는 뜻이 있습니다. 양들이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풀을 먹으면 온몸이 스름스름 마비가 되어 결국 죽고 맙니다. 보기에 먹음직하고 꽃이 아름답지만 그 풀은 독초입니다. 목자는 독초를 알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늘도 여기저기 있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적그리스도의 역사를 막아 하나님의 양무리인 성도들을 독초에서 건져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장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 말씀에 두 가지 개념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라는 말과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부터 마지막 때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긴 시간 같지만 영원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여 오셨던 그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 찾아오신 그때부터 역사는 완성기를 향하여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이 마지막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지금은 마지막 중에도 마지막, 그래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마지막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그때를 말씀하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의식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재촉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때 성도들에게 재림의 때를 솔직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가령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얘들아, 1998년 몇월 몇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때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비밀로 붙여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인 긴장을 가지고 살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마지막 때임을 강조하면서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역사를 통해서 태초부터 활동해 왔지만 가장 맹렬한 활동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진짜가 있으면 반드시 가짜가 생깁니다. 수많은 가짜 종말론과 재림의 예언과 심지어 재림의 날짜들을 예언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의 영광스런 종말론이 많이 격하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종말론을 포기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가짜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에 관한 굳은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짜가 많습니까? 가짜가 많기 때문에 진짜가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가짜가 많은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분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모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어두움은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적그리스도라는 말의 “적”이란 말은 영어로 “anti”인데, 이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대신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온 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으로서, 한마디로 사단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종말에 관한 많은 책자들이 나도는데 거기에 보면 한 명의 적그리스도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말세에 등장할 한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로서 그 적그리스도가 유럽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건전한 해석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은 유일한 적그리스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적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단에 의해서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진리를 왜곡하는 수많은 거짓 교사들을 총괄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가 누구며, 어디 있으며, 몇 년도에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특정한 시대에 성경을 뜯어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삼가야 할 뿐더러 사실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오류를 저질러 왔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핍박하던 네로 황제를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66이란 숫자를 뜯어 맞추기 위해서 광분했습니다.
중세에는 교황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뜯어 맞추다가 부합되면 그 교황을 가리켜서 적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교회를 박해할 때 히틀러를 666이란 숫자에 맞추어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666이란 숫자를 가지고 그러한 실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 하나가 생기면 그것으로 해석을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이 적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적그리스도가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의견이 분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그 특색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의 교제를 거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19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 파고들어 올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만히 들어왔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은연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된 신학, 잘못된 사상, 잘못된 교리의 영향력을 확산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가운데 끼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중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고,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저희와 우리를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근본 진리의 문제가 아닌 이상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성경적인 연합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계속 깨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려고 하는지 그 사실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적그리스도는 참된 성경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본문 20-25절을 같이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성경 교리 중에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히 말한 어떤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든 교리가 똑같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영감되었기 때문에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근본 교리에 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독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그리스도는 누구신지에 관해서 대답을 달리 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속한 적그리스도의 영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삼는 교리는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론”과 “신론”입니다.
본문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데 이의가 없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체험적인 종교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 이전에 계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체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체험이 곧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 위에서, 말씀이 허락한 범주 안에서, 말씀이 승인하는 체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적합한 체험으로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리에 대해서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뼈가 있기 때문입니다. 뼈가 없으면 몸은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리는 우리 몸의 뼈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부흥사 중에 죠지 휫필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떤 교인을 만나서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교인이 “저는 교회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 교회는 제가 믿는 것을 믿지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휫필드는 “그러면 당신은 둘 다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정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강력하게 부인하던 이단인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원론에 입각해서 영혼과 육체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영혼과 육체는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인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인 기독론을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2장 20절과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했는데, ‘기름 붓는다’는 말은 그 당시에 방을 밝히는 등잔에 기름을 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 안에 기름을 넣고 불을 붙이면 환하게 비칩니다. 이 빛 앞에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진리를 조명합니다. 성령이 누구를 조명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으신 바가 되면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확실해집니다. 주님을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셋째로, 적그리스도는 성도를 미혹합니다.
이단이 누구를 찾아다닙니까? 모든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역사하는 공통된 특성 중의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찾고 성도를 미혹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누가 찾아와서 신앙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면 떠나라고 말하세요. 그 시간을 아껴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도전하세요.
적그리스도의 영은 불신자들보다 성도를 미혹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요한은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특색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미혹하는 영”이라는 말은 바른 진리에 있던 사람을 탈선시키는 영이란 말입니다. 신앙의 궤도를 걷고 있는데 이 신앙의 궤도에서 탈선시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사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아니하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우선 성령의 가르침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에게 빠지는 사람을 보면 대개 인간의 가르침에 너무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신기한 소리 때문에 망합니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최대의 교사는 성령님 자신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은사를 주어서 어떤 직임을 가진 사람을 세우신비다. 신앙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마지막 부분에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 안에, 그리고 진리의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 안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인격과 삶을 지녀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우리를 유혹하려 하다가도 우리의 삶을 보고 할 말이 없도록,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만족하고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이 없고 답답함을 해결할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을 적그리스도가 유혹합니다. 신앙 생활에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만족과 행복이 없는 사람이 여기에, 아니면 저기에 행복이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유혹의 손길이 미치게 되면 그만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안에 항상 거하는 생활을 해서, 원수들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하는 이 혼돈된 상황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05-08-2024(수) 요한일서 2:18-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 안에 거하라(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As for you, the anointing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in you, and you do not need anyone to teach you. Bu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about all things and as that anointing is real, not counterfeit--just as it has taught you, remain in him.

오늘의 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 즉 죽음입니다.
둘째는 역사의 종말 즉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 라고 하며 동시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시대는 "영지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은 거룩고 육은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사람들을 자극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지주의 시대에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빛의 자녀로 서로 사랑하며 믿음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특징은 거짓말과 교활함과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려면 항상 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첫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것을 아는 만큼 의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되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미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 안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영접할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오늘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 거하자!
성령 안에 거하자!
주님 안에 거하자!

내 주여 뜻대로


5월 8일 어버이 날에

엄마는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1970년 1월,
당뇨병을 앓고 있던
17세의 '에드워다 오바라(Edwarda O'Bara)'는
감기를 앓던 중에 먹은
당뇨병 치료 약이 혈류에
녹아들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에드워다는
즉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병원 침대에 누워
점점 의식을 잃어갔습니다.
신장 기능이 상실되고
심장박동도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뇌에 손상을 입어
안타깝게도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올 불행을 의식했는지
에드워다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속에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엄마, 정말 떠나지 않을 거지?"

"그럼, 엄마는 네 곁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그것이 모녀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의사는 에드워다가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엄마는 종기나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두 시간마다
딸의 몸을 뒤집어 주었습니다.
네 시간마다
딸의 혈액을 채취해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을 주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12번에 걸쳐
음식을 튜브로 주입해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야 했으며
한 번에 2시간 이상 잠들지 못하고
쪽잠을 자며 딸을 돌봤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된 딸을
그렇게 돌보며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너무도 무정했습니다.
에드워다를 38년 동안 쉬지 않고
지키던 엄마는
몸이 늙어 쇠약해졌고,
2008년 팔순을 넘긴 엄마는
딸 곁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에드워다의 여동생 콜린에게
언니를 부탁한 후 숨을 거뒀습니다.

영원히 네 곁에 있겠다는
엄마의 약속은
이렇게 동생 콜린에게 이어졌습니다.

콜린은 직업을 그만두고
엄마의 약속을 이어받아
언니를 지극 정성으로 돌봤고,
에드워다는 그 후 4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얇게 입어도 춥지 않으며,
잠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습니다.
엄마니까요......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 어느 것보다
가장 완전하며, 가히 희생적이고
영원하고 숭고합니다.

* 오늘의 명언
신은 곳곳에 가 있을 수 없으므로
어머니들을 만들었다.
– 탈무드



말세 성도의 신앙

1.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들
2. 너희는 기름부음을 받았다
3. 주 안에 거하라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가 사도 요한이다.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도 사도 요한이다.
종말의 계시를 종합적으로 받았던 제자도 사도 요한이다.
요한복음, 요한 1, 2, 3,서 ,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분이다.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이 서신에고 종말의 경고가 많이 기록돼 있다.

1.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들

이 사도 요한이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라 했다. 또 지나가는 것과 주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주님만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제 말세지말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분명히 전재되어야 할 사건이다. 그것도 재림 바로 직전에 있을 사건이다. 그럼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함은 바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요즘 밤 시간에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함께 연구하고 있다. 상세한 것은 밤 시간에 말씀을 드리겠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속성만을 살펴보겠다.

19절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적그리스도의 속성

첫째로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적그리스도는 특별하게 별나서 오는 게 아니다. 다 우리에게서 출발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문선명 집단인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엘리야 제단 등등... 이런 이단의 무리들이 다 많은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처음에는 우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에게 속한 자는 아니었다. 19절을 자세히 보면 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처음에는 우리들과 함께 있기는 있었으나 우리들에게 속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예수와 또 제자들과 한 Member 였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장 본인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하도 묘하게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가려내기 어렵다.

요일 1: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6절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아야 하겠다. 그리고 나도 남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 남들도 나를 믿어주는 그런 사람 또 주님께서 인정해 주는 성도가 되자!

2. 너희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

20절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는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함은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말을 줄여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시는 분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0절 하반절에 성령의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고 했다. 성령의 사람은 영분별의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사람은 또 진리를 안다고 했다. 진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21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아니함이라" 우리 모두는 한 서령으로 한 진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옆 사람을 돌아보시라. 그리고 교회 전체를 둘러보시라. 느껴지는가? 나와 한 영의 사람임을 나와 한 사랑의 사람임을 나와 한 지리의 사람임을 나와 한 몸임을 느껴지는가? 만약에 이것이 느껴지지 못한다면 어느 편엔가 하자가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상대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지리를 아는 사람이다. 성경의 참 지식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를 미혹하는 무리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실패의 길을 가게 만드는 자들이다.

정말 여러분들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교인들이 교회는 왔다 갔다 하는 역사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 세상의 학식이나 상식이나 경험 같은 것이 남들보다 뒤처지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하면서도 신기하고 이상한 것은 성경을 남들만큼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책을 못 느끼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고도 정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씀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모태신앙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닌 지 20년 30년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아는 일이다.

말씀 깊숙이 파묻혀 사는 길이 중요한 것이다.

3. 주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주 간단 명료하게 고백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둘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넷째는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따라서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해야 합니다.

둘째는 빛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려면 어두움이 없어야 합니다.
어두움을 대표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안에 거하려면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생명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안에 거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먼저 기름 부음을 받으라고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들과 싸워 이기려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고 또 말씀이 되시는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24절이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며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처음에 들은 말씀 안에 거하는 일이다. 처음에 들은 말씀 위에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와서 속삭이는 것은 거의 거짓이기 쉽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기 쉽다. 처음에 붙잡은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처음에 들은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때가 바로 마지막 때이다.
많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날뛰고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케 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비고 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다.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미혹케 하는 자들이다.
교활한 자들이다.

창세기 3:1, 2절에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이름이 나하쉬인데 그 뜻은 교활하다는 뜻이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첫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함이라 했다(25)
둘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것을 아는 만큼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의를 행하는 자는 주안에 거하는 증거라고 하셨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온전히 실행된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미워할 사람이 없다.
일하는 사람 안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곧 오실 때가 다 되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영접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할 수 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생활에서 자신이 있는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말씀 안에 거하자!
성령 안에 거하자!
주님 안에 거하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에서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아비들, 청년들, 어린아이들” 세 분류로 나누었습니다. 교인이라도 영적인 성숙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아비입니까? 청년입니까? 어린 아이입니까? 다른 사람의 믿음도 지켜줄 만한 사람이면 아비일 것이고, 자기 믿음 하나 지킬 정도면 청년일 것이고, 자신의 믿음 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흔들흔들하면 어린 아이일 것입니다. 자녀들 믿음보다 못한 부모도 있습니다. 그저 부끄러워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 목회 여정 중 마음 아픈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교육목사로 섬길 때, 대학부의 회장을 지냈던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형제는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생각할수록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또 한 형제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그 형제는 장로 아들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형제입니다. 참 착실했던 형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제가 부산에 부임한 지 얼마 후, 그가 대학가에 유행하던 모 신흥종교에 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구원받은 것은 당연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느냐 하는 단계라고만 여겼지, 복음에 분명이 서 있는지, 아닌지 확인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 회개했습니다. 그 청년에게 미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이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말씀했습니다. 미혹은 영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더욱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학원복음화협의회 헌신예배 후, 한 대학교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기도와 말씀훈련을 잘 시켜서 보내세요. 대학이 영적으로 무서운 곳입니다.”대학만 보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청년이 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새가족에게 일대일 말씀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겪은 어려움 중에 핍박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미혹이었습니다.

요일 2:18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를 혼란케 하다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큰 상처를 주고 떠났습니다.

19절 그들이 우리에게서 갔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22절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인인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지만 여전히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교회를 깨뜨리려고 침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역사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만 다니는 신앙생활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1992년 10월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일 때, 믿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주님의 계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후 종말론에 대하여 정말 많이 공부하였습니다.

종말론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배우면 안됩니다.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 정확히 고백할 수 없는 사람, 전할 수 없는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음학교도 추천해 드립니다.

다른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복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한번은 대학생인 한 자매를 상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한때 대학 캠퍼스에서 대단한 세력을 확장시키던 JMS(정명석) 이단집단에 속했던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너무나 안타까왔던 것은 이무리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쳐도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이단의 메시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녀 안에 악한 자가 들어 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자매가 복음을 먼저 알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영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른 채 이단을 받았기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입니다. 누가 먼저 그 마음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입으로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만으로 분별하려고 하면 오판하게 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면서 삶으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부산에서 청년 연합집회 강사를 선정할 때, 세 분을 추천받았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이요 주님이요 왕이라는 말인데 어떻게 불법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삶으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욕심을 부리고 거짓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요일 2:11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 교회에서 분열시키고 나간 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분열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처럼 미혹하는 영을 조심해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가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에겐 어떤 마귀의 미혹이 있을지라도 능히 이길 힘이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과 우리 안에 임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바른 지식을 갖게 해 주십니다.

20절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7절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가 기름 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속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맏은 사람은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는 독불장군, 외고집장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진리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혼자만 남은 때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도 있고 목회자도 성도들도 함께 있지만, 혼자 남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경우와 같습니다. 불신 직장인들 사이에 홀로 주님과 동행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단들이 미혹들이 횡행할 때도 있습니다.

다 미혹에 빠질 때, 그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전히 마음에 주님이 계시니, 주님이 친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절)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판단으로 알 수 없었지만 성령님께서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바른 지식만 알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예수님 그리마옵소서.’ 하고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하시는 예수님의 엄청난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바른 지식을 가졌지만 아직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결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람 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 허점, 알기는 하지만 실제 살지 못하는 모순을 파고 들어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안에 거하는 삶,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하여 마귀의 미혹 앞에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반복하여 권합니다.

27절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28절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다는 말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며 친밀히 동행하며,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은 압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두바이 한인교회 신철범목사님께서 집회 중에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 눈동자에 비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목하는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눈동자에는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주님이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바이 한인교회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의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무슬림 나라인 중동에서 선교사로 성도로 사는 이들, 그들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의 성도들의 주님을 향한 갈망은 더욱 클 것입니다. 예배 한번 마음껏 드릴 수 있어도 기도 한번 큰 소리로 드릴 수 있어도 소원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이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성찬식은 가장 거룩한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주님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사람이며, 어떤 미혹이 와도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28절 ...그렇게 해야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경인 마카비2서에 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황제의 박해 때, 일곱 형제 순교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로마 관리들이 마지막 남은 막내 아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보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 아들에게“이 학살자를 두려워 말아라.
그리고 네 형들의 기개를 보여 줘라.
내가 하나님의 자비로 너를 네 형들과 함께 되찾을 수 있도록 죽음을 받아 들이라.”고 말함으로 어머니와 막내 아들 마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어떻게 이런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마음의 주요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거한다(abide. meno)는 것의 의미(요한복음 15:1-8)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mĕnō ]

머물다(마 10:11, 요 1:32, 행 21:8, 딤후 4:20), 유하다(막 6:10, 눅 24:29), 거하다(눅 8:27, 요 8:35, 요일 2:27), 계시다(요 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첫째, 이 설교는 고별 설교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포도농장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 임종을 앞둔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비장하면서도 슬프면서도 감사한 분위기다.

둘째,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사야의 말씀과 엮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다음과 같음 말씀을 선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이사야 5:1-2)

예수님이 본인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했을 때,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뜻한다.
‘극상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알레씨노스’는 ‘신뢰할 만한’, ‘온전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극상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종류의 포도’를 일컫는 말로, ‘매우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 포도나무다. 이 두 가지, 참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이고, 이사야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사건 이후,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은 가까운 지역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유사성도 한 몫 했다.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도 그렇다. 포도재배가 주요 농업이 아닌 지역에 사는 자들은 포도재배의 중요성을 별로 알지 못한다. 포도재배가 정말 중요했던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포도재배가 얼마나 지중해 지역 주민들의 삶에 중요하면, 포도재배를 주관하는 신이 있었겠는가. 그 신의 이름은 디오니소스 또는 바쿠스로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비극은 포도주 재배를 마치고 국가적 수준에서 포도재배를 관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에서 상연했던 연극이다. 국가 최고의 축제인 이 축제를 비극(연극)으로 빛낸 이는 그 당시 최고의 영예를 안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포도 재배와 깊은 연관을 지녔다. 오죽하면,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제국이 점령한 나라는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나라’에 국한되었을까. 그 당시 땅끝은 단순히 어떤 지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땅은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극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라니! 이건 아주 귀가 쫑긋한 비유다.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삶의 풍요와 기쁨과 연결된다. 극상품의 포도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고,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매우 고가에 팔린다. 이처럼, 극상품의 포도는 풍요와 기쁨을 상징한다.


사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풍요와 기쁨이다. 가난과 절망을 바라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풍요와 기쁨보다 가난과 절망이 많다. 훨씬 많다. 풍요와 기쁨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극도의 물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생득적으로 안다. 물질적 풍요와 기쁨은 참 좋은 것이지만, 풍요와 기쁨은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풍요와 기쁨은 매우 총체적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미국의 어느 기관에서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연봉 7만 5천불 이상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니까, 연봉 7만 5천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20만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100만불 버는 사람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만족도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고 그에 비례해서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적당히 벌면 된다. 하지만, 7만 5천불 이하를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도에서 그 이상을 버는 사람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 풍요가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비즈니스에 뛰어는 것도 그렇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또는 독신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자식을 낳는 것도 그렇고, 또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도 그렇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그렇고, 또는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도둑질도 풍요와 기쁨을 지향한다. 그런데, 삶의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난과 절망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인간 현실을 응시하면서 본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결국 가난과 절망을 경험하고 마는 인간들의 불쌍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도 표현했다. “목자 없는 양.” 양도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양은 푸른 초장을 찾고 쉴 만한 물가를 찾는다. 그런데, 양은 눈이 어두워 푸른 초장을 찾기 힘들고, 쉴 만한 물가를 찾기 쉽지 않다. 목자가 데려다 주어야만 한다. 혹, 목자가 이끄는 양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갈라치면, 이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우리를 인도하겠다는 삯꾼 목자들은 우리 더러 이렇게 다그친다. 풍요와 기쁨을 꿈꾸면,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교회를 찾아서, 54쪽).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에 빠져, 이것이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길인 양, 우리는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간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이미 시간을 다 쓰고, 이미 인생을 다 쓰고 나서 깨닫는다. 그 길의 끝에는 풍요와 기쁨이 없었다는 것을!

아무리 남의 등을 쳐먹고 살던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풍요와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러면 그들 중에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여기,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 우리 인간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제 2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싶는가?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이는 우리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그 많은 일들을 통해서 풍요와 기쁨을 얻지 못하고, 가난과 절망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그 헛된 일들을 전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헛된 일들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죽음을 앞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귀에 들린다면, 풍요와 기쁨을 얻고 싶거든,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에 마음이 요동쳐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안에’ 거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참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극상품의 포도를 재배하려면 참포도나무가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의 가지는 극상품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하면, 가지인 우리는 극상품을 얻는다. 극상품 포도,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 같은 포도여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 거해서 얻는 포도와, 그냥 포도나무에서 얻는 포도는 그 질이 다르다. 같은 돈을 벌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기에 거하며 버는 돈과, 그냥 버는 돈은 그 질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포도열매를 얻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삶에 얻고 있는 포도열매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거해서 얻는 포도열매인가, 아니면, 그냥 포도열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것이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참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야 할 것은 교회론이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교회론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력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영향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복음이 아니라 자본(돈)에 휩쓸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는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 고립된 개인이 바로 노동자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소비력을 동시에 갖춘 근대인,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게 교회론의 약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노동력과 소비력을 갖춘 고립된 개인은 교회를 고립된 개인의 연합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고립된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교회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헤쳐 모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교회를 개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하나의 회사 같은 조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러한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유기체적으로 이어져 있다. 팔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몸에 붙어 있기 싫다고 스스로 떼고 나가지 않는다. 심장도, 다리도 마찬가지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인 우리가 ‘거한다’라는 것은 반드시 교회론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한다’라는 말을 심리적인 것으로만 조그맣게 생각하고 만다. ‘거한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심리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가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매우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한다’는 뜻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이다.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레이첼 에반스의 저서 <교회를 찾아서 Searching for Sunday>에서 도움을 얻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교회의 성사(sacraments / 성례전)에 맞춰 쓰인 책이다.
그 이유는 레이첼 에반스가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성사(성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였다.
그래서 레이첼은 성사(성례전)을 다음과 같이 아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한다(세례).
교회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한다(고백/고해성사).
교회는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성품/직분).
교회는 우리를 먹인다(성찬).
교회는 우리를 환대한다(견진/confirmation).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름을 붓는다(도유).
교회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혼인).
(교회를 찾아서, 26-27쪽)

특별히, 세례와 성찬 이외의 성례전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례전’이라고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곱가지의 성례전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직분을 받는다. 우리는 성찬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정체성)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아픈 이들을 심방한다. 우리는 결혼(사랑)을 한다. 이러한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ㅡ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한다. (세례).

ㅡ 우리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 받는다. (고백/고해성사).

ㅡ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성품/직분).

ㅡ 우리는 먹여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늘 배부르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주님께 맡겨 놓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다. (성찬).

ㅡ 우리는 환대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대한다. 누구든. (견진/confirmation).

ㅡ 우리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이들을 돌본다. (도유).

ㅡ 우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배려하며 아껴주고 사랑하며 산다. (혼인).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이 풍요와 기쁨을 주는지 알지 못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한다. 여기,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주는 길이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거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에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풍요와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교회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교회는 우리의 풍요와 기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한다”라는 말은 “살다”,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살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로마서 8:1; 고린도후서 5:16), 영원한 관계에 굳게 붙들려 있다고 묘사됩니다(요한복음 10:28-29).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별한 차원의 기독교적 경험이라기보다는 모든 참 신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과 거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와 같습니다.

요한일서 2:5-6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동일시됩니다(2절과 3절).
2장 뒷부분에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영생의 약속을 받은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24절과 25절).

성경에서 “안에 거함,” “안에 머무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는 말은 피상적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4-7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와 연합한 가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만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구원이 주는 그리스도와의 생명 있는 연합이 없다면 생명도 풍성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몸과 머리의 관계에 비유합니다(골로새서 1:18). 또 다른 필수적인 연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15:6의 경고(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는 버려지고 불살라질 것)를 크리스천들이 언제나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아도 “거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 우리는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거함”이 구원과 개별적인 개념일 때만 성립됩니다. 마치 “거함”이 우리가 구원 이후에 반드시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상태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주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은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갈라디아서 3:2-3). 또한 가지가 어쩌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면, 즉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하면, 다른 분명한 성경 구절의 내용은 모순이 됩니다(요한복음 10:27-30 참고).

참 포도나무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편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 안에 “거하는” 가지들은 참된 구원을 받고 구원자와 참되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누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시든 가지들은 구원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척 하지만 나무에서 아무런 생명도 얻지 못하는 위선자들입니다. 결국 위선자들은 예수님께 제대로 접붙여진 게 아니라 그냥 걸쳐져 있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도 잠시 동안은 그리스도 곁에서 서로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결국 베드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었고,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시든 가지의 원리를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그들[당시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이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구원의 증거 중 하나는 인내, 즉 그리스도 안에 계속해서 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계속해서 동행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6 참고). 즉,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거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그들 안에서 이루실 것이며(빌립보서 1:6)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5:5). 떨어져 나가는 자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 그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구원받는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 중 하나는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증거들(구원받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 중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요한복음 15:10; 요한일서 3:24);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요한일서 2:6); 습관적 죄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요한일서 3:6);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요한일서 4:13).









05-07-2024(화)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좇아 온 것(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요한일서에서는 "세상" 이란 단어가 20회 사용됩니다.
구절 수로는 17구절입니다.

이때 세상이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대적하는 곳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을 기독교 경건주의의 대헌장(Magna Carta)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랑은 세 가지,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모든 인간을 사로잡은 세 가지 근본적인 욕심들, 즉 '성'(sex)과 '돈'(money)과 '권력'(power)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정욕(성)과 안목의 정욕(돈)과 이생의 자랑(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제 10권 후반부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情慾)을 시각의 유혹(誘惑)

사람의 감각(感覺)은 시각(視覺)과 촉각(觸覺)과 미각(味覺), 후각(嗅覺), 청각(聽覺)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 것을 접촉하고 만지기 좋아합니다.
촉감의 유혹이지요.

그 다음에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얻는 미각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도 먹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성욕은 단 번에 끊을 수 있지만 미각은 끊을 수 없습니다.
음식 먹는 길을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적당량의
음식물만 섭취하면 되는데 문제는 그 식탐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뷔페 식당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냥 생명과 건강만 유지하자고 한다면 적당량만
먹으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식탐이 건강을 위한다는 생각을 앞서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거스틴은 만일 어떤 사람이 식탐을 버리고 자기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한계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어거스틴 같은 성자가 그 정도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후각의 유혹은 아마 5각 중에서 가장 미약한 유혹일 것입니다.
꽃향기나 향수의 유혹을 우리는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꽃향기나 향수 냄새를 맞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의 유혹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어떤 노랫소리에 빨려 들어가면 때로 정신을 잃습니다.
서울서 부산 가는 고속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는 서너 시간 동안
차안에 유행가를 내내 틀어 놓을 경우, 그 가사와 멜로디가
우리 기억 속에 녹음이 되어서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붙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갈 때도 있기에 청각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마 가장 강렬한 유혹은 시각에서부터 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야한 장면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음란 만화나 동영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의 마음을 쉽게 교란시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의 시신경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동인천같이 조용한 곳에서 살다가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품 저런 상품, 이렇게 생긴 사람, 저렇게 생긴 사람, 우리의 시신경을
빼앗는 것이 수천 수만 가지이니 우리의 마음도 더불어 복잡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의 즐거움을 위하여 수 없는 물건들과 영화와 예술품들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외모를 꾸미는 일에도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 생활에 정말 필요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고,
더더군다나 경건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거리, 시각의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둘째, 안목(眼目)의 정욕을 호기심(好奇心)의 유혹

육신의 정욕이 우리 육체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육체가 감각을 통하여 어떤 경험을 얻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학문과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끝없이 유혹하는 호기심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냄새 좋고, 맛 좋고, 부드러워 만지기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호기심은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고 합니다.
호기심은 주로 눈을 통해서 얻어지므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호기심과 관련해서 어거스틴은 시체를 예로 듭니다.
만신창이가 된 시체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소름 끼치는
시체를 보고 쾌감을 느낄 사람은 정신병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집요한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괴로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그 시체를 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다 호기심 때문입니다.
아무개 연예인이 결혼했더라, 이혼했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인터넷을
뒤지고 TV를 쳐다보고 하는 것이 다 그 호기심의 유혹 때문입니다.

길을 지나다가 누가 다투기라도 하면 그냥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새 내 신경과 마음은 호기심 때문에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아, 호기심이란 얼마나 이겨내기 어려운 안목의 정욕인지요!

셋째, 이생의 자랑을 교만(驕慢)의 유혹과 칭찬(稱讚)의 유혹

이생의 자랑은 마음이 부풀어올라 자꾸만 뻐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교만의 유혹입니다.
깊은 성찰 없이 우리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으로 부풀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아무도 뿌리칠 수 없는 최고의 유혹입니다.
칭찬은 돌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이 "잘했다, 잘했다!"하고 칭찬해주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육체의 쾌락, 즉 육신의 정욕과, 호기심, 즉 안목의 정욕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데, 이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진리 위에 서지도 못한 채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서 비난을 받는 것이 거짓과 불의 속에 살면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웃에게도 선익이 되고 내 양심도 즐거워하는 칭찬일 때에는
그 이웃의 칭찬이 양약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 경우의 칭찬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아첨이요 독일뿐입니다.

당신의 사랑의 무게는?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영원히 시들지 않지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금방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옳습니다.
육신의 정욕, 촉각과 미각과 후각과 청각과 시각의
유혹에서 생기는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안목의 정욕, 호기심의 유혹도 알고 나면 별 것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명예와 권력으로 자랑하는 교만도 오래 못 갑니다.
남들에게 듣는 수없이 많은 칭찬도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이지요.

어거스틴은 사랑은 무게라고 했습니다.
물체는 자기의 무게 때문에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돌을 던지면 밑으로, 불은 위를 향하여, 물 속에 부은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부은 물은 기름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모두 다 제 무게로 인해 제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이 제 자리를 이탈하면 불안정해지고 제 자리에 다시 돌아가면 안정을 찾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무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간에 사랑의 무게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아니면 이생의 자랑?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에 사랑의 무게를 두지 맙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큰사랑의 무게를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무게 중심이 자연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집니다.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05-06-2024(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흉악한 자를 이기는 믿음(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the word of God lives in you, and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예로부터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을 신앙 성장의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Augustinus).

아이들의 신앙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활동에 의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기노스코)는 동사는 철저한 경험에 의해서 체험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청년들의 신앙은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강하게 활동하여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흉악한 자(포네로스)


아비들의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 흉악한 자(포네로스) πονη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4190

1. 허약한.  2. 아픈.  3. 나쁜
발음 [ pŏnērŏs ]
어원 / 4192의 파생어에서 유래

󰃨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 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 행 4;12; 10:43; 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 3:12; 5:18, 19; 요 17;15; 엡 6:16; 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 골 2:15; 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육체가 자라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영적 생명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면 모순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성장해야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영적 성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가운데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엡 4:15~16).
“도리어 우리 주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해 가십시오.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벧후 3:18).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자라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성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길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편안한 삶, 더 안락한 삶, 더 쉬운 삶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하는 것은 새가 나는 훈련을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연단하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영적 성장의 지표

영적 성장은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영성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성장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이 익숙해졌다고 그것이 곧 영적 성장에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활동이 많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지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적 성장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그것이 지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계속 이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강조 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시제의 변화가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은 현재 시제입니다.
반면에 14절은 과거 시제입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할 때 방금 전에 사용한 것을 과거형으로 바꿈으로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알았음이요, 이기었음이라는 과거형을 사용함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성도가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

세 가지 호칭이 나옵니다.
12절에 자녀들, 13절에 아버지와 청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호칭은 육체적인 나이와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호칭을 자녀의 신앙 수준, 아버지의 신앙수준, 청년의 신앙수준으로 영적 성장의 단계로 해석했습니다.
이 호칭은 모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여’라는 호칭이 특정 단계에 있는 성도들만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일컬을 때 ‘자녀들이여’ 라는 했습니다.
노년의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자녀들처럼 여겼습니다.
자녀들이 나오고, 아버지들이 나오고, 청년들이 나오는 순서는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내가 모든 사람 위에 내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요엘 2:28).

여기서도 아들과 딸들이 나오고, 늙은이가 나오고, 젊은이가 나옵니다.
아들과 딸들은 자녀들이고, 늙은이들은 연세가 많은 분이고, 그 다음이 청년들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는 모습을 호칭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이 호칭이 구약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호칭의 변화에는 분명 영적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죄 사함을 경험하는 단계가 있고, 아버지를 깊이 알아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성장해야 될 세 가지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역을 연령별, 호칭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

우리가 영적 성장을 이뤄야 할 세 가지 영역이 무엇일까요. 첫째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2절과 14절 초반부를 읽겠습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됐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12, 14절).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영적 성숙을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가장 큰 축복은 죄 사함입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부모의 품입니다. 때로 자녀들은 잘못을 해도 부모 앞에서 당당합니다. 그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용서에 대한 기대에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들의 죄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 사함의 교리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얻는 지식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영적 성숙이 멈춥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그때부터 의인이라고 가르치는 구원파의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의롭게 된 것이지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닙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를 용서받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지를 측정해보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영적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

둘째,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중간부를 읽겠습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3~14절).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은 육체의 나이와 믿음의 나이를 병행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영적 수준이 어린이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젊지만 영적 아버지로 성장한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더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되어 있는데 스펄전 목사는 그것을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온 내용을 직역하면 ‘원로들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원로(장로)는 ‘자켄’인데 자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형용사적인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사를 씁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정의의 아들’이라고 쓰면 그것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명사로 형용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로들의 아들’이라는 것은 ‘원로 같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지혜와 성숙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아들은 베냐민입니다. 요셉이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라서 더 사랑했다면 요셉보다 베냐민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녀였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은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자신도 기뻐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을 품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녀들이 아비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선생들은 많은데 아비는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은데 한 영혼을 사랑과 인내로 양육하는 영적 아비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부족합니다. 아비가 많은 시대의 교회는 한 영혼을 책임지고, 양육하기 때문에 사생아가 없습니다. 버려진 자녀가 없습니다. 모두가 돌봄을 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선생이 많고 아비가 없는 곳에는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영혼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십니다.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안다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영적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 

셋째,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후반부를 읽겠습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3~14절).
청년들은 힘이 세고 강합니다. 육체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육체의 강함은 오히려 죄를 범하기 쉽니다. 넘치는 에너지가 과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실수가 많고, 잘못 행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삼손의 강함입니다. 삼손은 힘이 세고, 근육이 많고, 에너지가 많았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함은 은혜 안에서의 강함입니다. 약함 속에서의 강함입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환경의 열악함 속에서,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강함입니다. 육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강함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뚝이 같다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쓰러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은혜가 회복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강함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강함이 아닙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순종하는 강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할 때 악한 자를 이깁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위기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상시에 말씀의 지배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화된 말씀이 위기 순간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할 때 악한 자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을 받는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의 역사하심과 섭리, 계획과 뜻을 깨닫는 아버지로 성숙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악한 자를 능히 이기는 청년으로 성장하십시오. 영적인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죄를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는 영적 성장을 이루십시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승리(精神勝利) Spiritual Victory. Mental Gymnastics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왜곡하여 정신적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로, 실상은 자신의 망상으로만 이기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자기합리화가 있으며 정신승리는 일종의 은어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아큐정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큐는 성격이 거의 찌질이에 가까운 인물인데, 길을 가다가 무뢰배를 만나 그들에게 폭행을 당해도 "저 녀석들은 내 아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들에게 찍힌 것뿐이다" 라며 정신적 승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 역시도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사람 또는 비구니 등을 때리고 비웃는 전형적인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서는 패배자처럼 살아가면서도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하며 마치 자기 자신을 승화시키는 생각으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고지론이란 말이 등장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자가 되고, 세상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것도 같습니다. 기독교 연예인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비와이라는 가수가 요즘 아주 독보적입니다. 시상식에서 요한복음을 암송하고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가 클럽에서 공영한 영상이 유튜브나 이런데 올라오면 그 밑에 댓글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클럽을 기도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가수라는 댓글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참 많이 올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 열두명의 대통령 중에 3명이 교회 장로님들입니다. 또, 13명 중 7명이 개신교인 4명이거나 천주교인 3명입니다. 13명 중 7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에 장로를 위시하여 대통령님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은 감옥에 계시죠. 원래도 전과가 많으신 분이신데 대통령 자리에 계시면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교회 장로라는 걸 전면에 내세웠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을 청와대 요직에 앉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일으키니 교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사건 사고를 치면 교회 장로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들도 뉴스에 자주 오르내려서 도리어 사고치고 유명해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냥 대충 기억나는 것만 봐도 우리 교단에서 총무까지하셨던 분은 가스총을 들지 않나 칼부림을 하질 않나. 또, 초대형교회들은 세습을 하면서 유명해집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 교단인데 모교회는 제자훈련을 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짓거릴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 왠지 작아지고 패배감에 젖어듭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왠지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제 정신승리를 마치 확정이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한 번 다같이 12-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세 그룹 중에 청년들에게 주는 말씀에 가장 강조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이 계속 마지막에 나오고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에서 앞의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당당하게 악한 자와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때 당시 상황이 그랬을까요? 요한일서는 대강 1세기 후반에 써졌을 텐데 그때 로마는 무너져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1%나 됐을까요? 소수자들이 이겼다고 하는 꼴이 앞서 제가 말한 정신승리가 아닐까요?

그렇지만 조금 인내심을 갖고 요한의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일서 1장 1-4절을 보면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계속해서 요한이 강조하는 사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사귈 수 있는 것이죠. 그 아들과의 사귐을 통해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옵니다. 과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합니다. 태초부터 일하신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삼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의 악한 자의 지배를 깨뜨리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했다면 요한은 말씀 안에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과 사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면 우리 역시도 승리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믿으십니까? 교회사에서 내려오는 큰 가르침이 있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로마의 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교회를 배교했던 사람을 로마의 주교로 세웁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이 있었거든요. 당연히 순교의 거룩한 행위가 절대적으로 강조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가 이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인간이 순교라는 위대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룩함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 게 바로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순교를 통해 흐르던 기존의 신학 흐름을 완전히 뒤바군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몰지각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이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통해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나는 지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은 목사와 장로, 집사나 성도들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게나 혹 이단에게 세례를 받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 권위를 두는 게 아니라 그 고백. 그러니깐 삼위일체 하나님께 한 그 고백에 권위를 둡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하나도 흠집낼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연약함에 이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셨던 것과 일하심에 집중합시다. 우리도 그분의 이름을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에 집중하십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교회가 이제 큰 분기점을 맞아 급격히 내리막길을 가더라도 우리가 집중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거기에 집중을 합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이 담대한 선언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 자녀들아(5040) 테크니온(tĕkniŏn)  τεκνί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40

1. 5043의 단축형 : 작은 아이.  2. 어린 아이. 3. 요 13:33.  4. 요일 2:12. 28. 3:7
발음 [ tĕkniŏn ]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작은 자(요 13:33), 자녀(갈 4:19, 요일 2:1, 4:4).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아비들아(3962) 파테르(patēr) πατήρ, πατρός, ὁ 스트롱번호 3962

1. 아버지.  2. 조상
발음 [ patēr ]
아버지(마 2:22, 눅 1:59, 요 5:17, 행 16:3, 살전 1:1), 조상(마 3:9, 눅 1:32, 고전 10:1), 열조 (히 3:9, 8:9), 부모(히 11:23).


* 청년들아(3495) 네아니코스( nĕaniskŏs) νεανίσκος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청년(네아니스코스.  nĕaniskŏs) νεανίσκ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495

1. 청년.  2. 종
발음 [ nĕaniskŏs ]
어원 / 3493와 동일어에서 유래

1. 청년, 젊은이, 마 19:20, 막 14:51, 눅 7:14, 행 2:17.
2.  종, 행 5:10.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청년(마 19:20, 막 14:51, 요일 2:13), 젊은이 (행 2:17).





율법, 율례, 규례, 법도, 계명의 차이

정확한 정의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준을 정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계명(誡命, commandments) : 기초가 되는 율법
율례(律例, statutes) : 율법의 세부 사항
규례(規例, ordinances) : 심판이 포함된 율례



율법(律法, law)

출애굽기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Come up to me on the mountain and stay here, and I will give you the tablets of stone, with the law and commands I have written for their instruction."

율례(律例, statutes)

출애굽기 21: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laws you are to set before them:
KJV. Now these are the judgments which thou shalt set before them.

규례(規例, ordinances)
출애굽기 13:10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You must keep this ordinance at the appointed time year after year.

법도(法道, laws)
민수기 15:6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 한 규례니라.
The same laws and regulations will apply both to you and to the alien living among you.'


계명(誡命, commandments)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but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계명, 율례, 법도, 규례의 차이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law)과 율례(statutes)와 규례(ordinances)에 관해 자주 말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율례들이 보충한다.
이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례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계명 : 기초가 되는 율법 - 도덕법(道德法) / 하라, 하지말라
율례 : 율법의 세부 사항 - 종교법(宗敎法) / 제사법
규례 : 심판이 포함된 율례 - 사회법(社會法) / 법도. 사람이 서로 지켜야 할 관계법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로,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민 15:16; 시 19:8). 또 헬라어 ‘노모스’는 ‘분배...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율법, 정의 ,규례, 율례, 명령, 계명, 길, 법도 개념들


공의, 정의 : 미쉬팟 Mishphat -

 םשףט'ם      복수mishphatim םשפט 

심판, 정의의 판단, 재판, 사법정의, 정의의 심판

Judgment, Justice,  사사기는 이 샤팥(재판하다)에서 나온 쇼파팀 (재판관들)의 번역임

홐 Hok,복수 Hukimחק'ם חק        

   Statutes, Ordinances 규례, 율례, 응식

하나님이 처방해준 처방전, 하나님이 주신 그 처방대로 준행한 사람에게 당연히 돌아가는 응식(레 8:29, 10:13, 15 등에서 종전 개역한글에서는 응식으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소득, 몫 등으로 번역)

레위기 6장 11, 15절 또한 응식으로 번역됨이 더 정확하다고 분별됩니다. 즉 레위자손들은 성막 봉사로 당연히 그 받을 응식을 갖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응식을 당연히 공급하신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צדק 의 체뎈 Righteousness (Justice – 창 18:19) 

 멜기세덱은 원래 멜렉키체덱을 그리스어 표기법으로 쓴 것임

이 의는 죄에 대한 개념으로 죄를 사함받았을 때, 속죄되었을 때 의가 나타나므로 대개 속죄, 대속과 관련되고 노아의 경우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말에서도 사용됨(창 6:9)

םצוות   םצוה  계명, 명령, 미츠바 ( 한글 성경 미스바) 복수 : 미츠보트

명령하다는 뜻의 차바에서 나온 명사형이므로 명령 혹은 계명으로 번역되는 것이 순리로 보임.

דרק 길

출애급기 18장20절

그들에게 율례(후킴)와 법도(토라)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데렉)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 개역개정)

신명기 26장 17절

네가 오늘 여호와가 네 하나님이라고 선언(보증)하였나니, 그분의 길들로 행하며 그분의 규례(율례= 훜킴)들과 그분의 계명들(미츠봇트)과 그분의 의의 판단들(미쉬파팀)을 지키며 그분의 음성(콜)을 청종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명령과 의의 판단들을 좇는 삶은 레일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데 기차가 그 레일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그 기차를 기중기로 들어올려 다시 레일 위에 올려 놓아야 달릴 수 있습니다. 이일은 오직 성령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 (토라) = תורה    : 율법, 법도

1)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합쳐서 말할 때 토라, 율법이라 말함

2)  신약적으로는 로마서 8장 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지, 어떤 법칙이나 무슨 법을 말할 때도 이 토라를 의미한 것임

3)  토라는 크게 네가지로 나뉘어진다고 분별합니다.

가)성전제사법 – 동물희생과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에 관한 법 :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벽하게 완성되고 대체되었으며 각 신자들은 십자가 희생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를 매일 행하고 있습니다.

나)의식법 – 옷을 어떻게 입으라, 음식은 무엇을 먹지 말라, 몸을 깨끗이 목욕하라 뿐만아니라 성전시대에 관련된 법들, 할례, 안식일을 여기에 포함하여 지켜야 할지는 해석상의 차이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안식후 첫날 예배를 보여주는 한편(행 20:7, 고전 16:2),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존귀하신 태양의 날에 모이도록 강요된 (서기 321년 3월7일부터) 역사적 배경도 있으며 이 둘이 겹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의식법은 성전제사가 대체 폐해졌으므로, 그에 수반되는 법으로서 폐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롬 14:1-5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 형사법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 이러한 형사법들은 그리스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에 그대로 수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라)도덕법

탐내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 이 모든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안에 수용, 포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성경이 율법이 폐해졌다고 가르친다면 그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플레로), 성취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5, 갈 5:4, 2:16 절, 롬 13:9 등은 많이 오해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 중에서 동물희생들은 십자가로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율법 이상의 명령들을 준행합니다.성령을 좇아 행하면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롬 13:9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지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 계명을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등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율법은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휘들의 공부를 마치기 전에 꼭 살펴볼 말씀이 신약에 있습니다.

마태 12장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의의 심판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하리니     ( 정의가 승리에 이르도록 인도하기까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미쉬파팀임은 분명합니다. 즉 정의의 심판이 승리로 종결되어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실현되고, 사탄 마귀와 그 추종자들이 심판을 받으며, 의의 사역자들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상받는 정의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시고 자기 목숨을 바쳐 인생들의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과 상한 갈대를꺾지 아니하시고 인생들을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단어들이 갖는 어의를 중심으로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시간이 많이 허락될 때 좀 더 정리하여 각 개념과 내용들을 분석하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아래 몇구절 킹제임스 성경 구절들을 뽑아서 예로 들어봅니다.

창세기 18장 19절

19 왜냐하면 나는 그가 그의 자손과 그 이후의 그의 집을 명하여 여호와의 길을 지키도록 하여 정의(=의, 츠다카)와 의의 판단(정의, 사법정의, 미쉬팟트)을 행하여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에게 가져다 주도록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Lv 6:11, 15 Gn 47:22 레위기 6:11, 15, 창 47:22

응식의 예들, 제사장들이 마땅히 받을 응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창 47:22에서는 이집트의 태양신 제사장들도 마땅히 공급되는 응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규례-후킴), and his commandments(계명 = 미츠보트), and his judgments( 사법정의 정의의 판단=미쉬파팀),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음성=콜)

Leviticus 25:18
Wherefore ye shall do my statutes(율례), and keep my judgments(의의 판단들), and do them; and ye shall dwell in the land in safety.

Deuteronomy 5:31
But as for thee, stand thou here by me, and I will speak unto thee all the commandments, and the statutes(규례), and the judgments(정의 심판), which thou shalt teach them, that they may do them in the land which I give them to possess it

Deuteronomy 26:16
This day the LORD thy God hath commanded thee to do these statutes(규례) and judgments(의의 판단): thou shalt therefore keep and do them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Deuteronomy 26:15-17 (in Context) Deuteronomy 26 (Whole Chapter)

Deuteronomy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 and his commandments, and his judgments,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

Deuteronomy 30:16
In that I command thee this day to love the LORD thy Go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commandments and his statutes and his judgments, that thou mayest live and multiply: and the LORD thy God shall bless thee in the land whither thou goest to possess it.

Deuteronomy 32:4
He is the Rock, his work is perfect: for all his ways are judgment: a God of truth and without iniquity, just and right is he.


새 계명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이서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옛 계명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옛 계명의 근거는 죄를 지었을 경우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의 근거는 죄를 지었을 경우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물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간접적인 속죄 방법에서 직접적인 속죄 방법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단번에" 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ἐφάπαξ 스트롱번호 2178

1. 한번에. 2. 한번에 다
발음 [ ĕphapax ]
어원  / 1909와 530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한번에, 단번에, 고전 15:6(일시에).
2. 한번에 다, 롬 6:10, 히 7:27, 9:12, 10: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단번에(롬 6:10, 히 7:27, 10:10), 일시에(고전 15:6).


히브리서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6.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7.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ἅπαξ 스트롱번호530
1.

한 번

2.

히9:7.

3.

ἔτι ἄ.: 한 번 더

발음 [ hapax ]
어원
537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뜻풀이부

  • 1.
    한 번[실제적인 수개념으로 쓰이는 경우], 고후11:25, 히9:26,27,28.
    • a.
      [소유격이 수반되는 경우] 히9:7.
    • b.
      ἔτι ἄ.: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히12:26,27.
    • c.
      ἅ. καὶ δίς: 반복하여, 되풀이하여.
  • 2.
    한꺼번에, 단번에, 히10:2, 유1:3, 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한 번(고후11:25, 살전2:18, 히6:4), 일(히9:7), 단번(히9:26, 벧전3:18, 유1:3).




8.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9. [히브리서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경에서 유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인 "법도" "율례" "율법" "계명"들 사이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어떤 차이 때문에 문맥에 따라 각각 다르게 번역이 되어 쓰이는 것일까?

창세기 26:5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because Abraham obeyed me and kept my requirements, my commands, my decrees and my laws.

원어로 보더라도 법과 준수사항, 규칙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들은 다양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대략 아래 네 가지 정도라고 밝혔다.

법과 준수사항, 규칙 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미츠바, 미쉬파트, 후카(호크), 토라 등 다양하다.
특히 "율례와 법도"라는 표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떤 차이를 지닌 법 용어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들의 의미론적 범주를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정확한 개념적 구분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이 단어들이 다르면서도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이 그냥 동의어로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사례들이 숱하게 많다.

영어 번역어로 옮길 때도 전혀 합의된 규칙 자체가 없다.
실제로 "세 단어가 각각 문맥에 따라 commandment, rule, statute, law, regulation, decree, ordinance, code, act, 등등 너무나 다양하게 번역된다.

법을 가리키는 이 영 단어들이 영어권에서 특정 범주의 법을 가리키기 위해 특화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경계선들은 정확하지 않다"며 "영어 원주민들도 헷갈려한다."

그러면서 "히브리어 단어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렇다.
베스터만과는 약간 다른 견해다.
하지만 역시 정확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1. 호크(후크) / 율례 : 사회적, 제도적 규범(전통과 관행이 제도화된 것)
2. 미쉬파트 / 법도 : 법률적 규범(법정에서의 판결과 판결 기준)
3. 미츠바 / 계명 : 지도자나 권위자에 의한 법령, 명령
4. 토라 / 율법 : 위의 모든 법령과 가르침, 교훈을 총괄하는 단어

미츠바(계명)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를 뜻하는 동사 차바에서 온 단어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십계명은 대부분의 경우 미츠바(복수 미츠보트)로 지칭된다.
그러나 다른 여러 율법들도 역시 매우 빈번하게 미츠바로 지칭되며, 그 외에 율법들은 후카(호크), 미슈파트 등으로도 지칭된다.

보통 호크, 미쉬파트, 미츠바가 세 단어가 나란히 등장하거나 혹은 두 단어가 병행되어 등장하는데(율례와 법도, 계명), 대부분 별다른 이유는 없이 문학적 의도로 중복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율례들이 보충한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레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우리나라 법 체계에서 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과 같은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에 대하여]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법체계와 성경의 법체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95685&cid=50762&categoryId=51387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05-04-2024(토)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과 옛 계명(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2537


1125


옛 계명(헤 엔톨레 헤 팔라리아)

3588

1785

3588

3820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새 계명과 옛 계명(new command and old one)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셨던 계명을 말합니다.
새 계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옛 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가 들었던 것으로 강조하려고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서 다른 관점에서 그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하려고 "다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하나님의 속성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둘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따라서 계명을 지키려면 먼저 영이 되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빛 가운데 머물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가장 가까운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출박합니다.

오늘도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ㅋ크게



②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③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1:5)(요 1:5; 엡 5:8): 옛 계명은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빛이 비침.





옛 계명은 들은 바 말씀
새 계명은 참 빛이 비추인 것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숙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명에 대해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계명의 의미와 존재 이유에 대해 무지한 채로 계명을 실천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이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여 지켜낼 수 있는 약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는 계명의 의미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함이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흔히 지금을 은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시대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 시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다만 신약에는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확증하셨고 구약에는 다만 은혜의 예표가 주어진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신앙을 보면 교리는 은혜이면서도 실제 삶은 계명에 매어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즉 은혜로 시작한 신앙이 결국 실천, 행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함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자기 신앙에 안심을 하지만 행함에 게을렀던 사람은 결국 낙심하기도 하고 자기 신앙에 대해 큰 의심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라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같은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우리가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해서 새벽 기도가 만들어 졌고, 40일 금식 기도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기도라는 겉 행위를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뜻입니까?

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쓰고 있는 계명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미 예전에 들었던 계명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면 굳이 새 계명, 옛 계명으로 구분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계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7절과는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7절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옛 계명이지만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계명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본질상 뭔가 새롭기 때문에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시간에 중요한 것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옛 계명과 다른 새 계명입니까?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소위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 대해 친절을 베풀고 조금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른 점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명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내가 살아있는데 그런 나의 모습으로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인 됨과 악함과 불순종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보여지는 열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6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신자가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후螁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절감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킬 수 있는 자를 향해서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때문임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이 달라진 것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란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진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말합니다. 행함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행함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은 기껏해야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사랑을 행한 대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가슴 깊이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은혜를 받았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십시오. 십자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된 새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

새 계명'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요한 사도가 사용하고 있다.(요한복음 1회, 요한일서 2회, 요한이서 1회)
새 계명이라고 하면 그냥 생각해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새 계명이 이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7-8)

사실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서 하신 말씀에 처음 나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요한 사도는 새 계명은 예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하는 것인가?

언뜻 위의 두 말씀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다고 하고,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 요한 사도는 새 계명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같은 말씀이다.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이 새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은 이전부터 전해온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 안에서 새롭게 보이고 그 말씀의 의미가 전혀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달력의 시간, 곧 객관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개념 안에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옛 계명이고,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 이후를 새 계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간편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계명, 곧 새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그 때부터 있는 하나님의 의가 한 사람 안에서 전혀 새로운 말씀과 계명이 되었을 때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열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옛 계명이고 그 이후에 주신 말씀은 새 계명이라고 하거나, 구약은 옛 계명이고 신약은 새 계명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예 계명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몸으로 오셔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주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표현하고 계시하신 것을 완전하게 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안에 열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새로운 계명이 된다는 것을 요한 사도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②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새 계명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다시”: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할 때 사용하는 말

이 옛 계명은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깊이와 넓이가 한층 더 깊고 넓어져 승화된 의미)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②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③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1:5)(요 1:5; 엡 5:8): 옛 계명은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빛이 비침.










대언자(代言者)란 대신 말하여 주는 사람이란 한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을 위하여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시편 43: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항상 우리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영이신 하나님은 육체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게 하신다.
요한복음 15:26



요한복음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출애굽 때 하나님은 모세의 대언자로 아론을 세워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출애굽기 7:1-2

초림 때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곧 보혜사이셨다
요한일서 2:1

예수님은 재림 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곧 다른 보혜사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14:16

요한복음 14:26

요한복음 15:26

요한계시록 22:16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 여기서 신(*, 엘로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바로에 대한 모세의 우월성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비록 땅에서의 바로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하늘에 속한 권세를 소유한 모세는 오히려 그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바로를 가볍게 압도하며 호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일 배후에는 모세를 강하게 하시고, 모세를 그 어떤 권위보다 탁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이다(3:14).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요 10:35).

󰃨 대언자 (*, 나비) - '영감에 의해 말하다'란 뜻의 '나바'에서 온 말로 '예언자'를 가리킨다(KJV, RSV, prophet). 여기서는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고 그 뜻을 풀어 설명해 주는 '대변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공동번역, 대변자; Living Bible, spokesman). 출애굽은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인간의 협력이 결코 무시되지는 않았다.

נָבִיא 스트롱번호 5030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선지자(창 20:7, 신 18:22, 왕상 18:4), 대언자(출 7:1), 예언자(렘 28:9), 예언(단 9:24), 예언하는 자(겔 13:2,3)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대언자’란 “대신 말하여 주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며,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으나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말하여 주심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지막으로 대언자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란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요 15:16).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자'(summoned, called to one's side, especially called to one's aid)를 의미하며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보혜사)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 15:26; 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16)

*영어성경에서는, 대변자, 중재자, 변호사를 뜻하는 'advocate'로 번역한 역사가 많다(간혹 Counselor나 friend로 번역하기도 했다).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Jesus, the Messiah, one who is righteous.

• 예수님과 성령의 중보사역의 차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

• 예수님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자격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실 수 있다.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δίκαιος)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δίκαιος)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오늘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셔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로마서 3:26)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 보혜사 성령님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 하셨다(요 14:17).


소문자와 복수 prophet(s) 단어, 여성명사 합쳐서 450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자 Prophet 단어는 단 4구절, 대문자 Seer 단어는 단 1구절, 소문자와 복수 seer(s) 단어는 26 구절이 있습니다.
prophet 이라는 단어가 쓰인, 450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대언자(代言者) : 대신 말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 : 미리 아는 사람
선견자(先見者) : 미리 보는 사람
예언자(豫言者) : 미리 말하는 사람


모세

예수님

1

유대인

유대인

2

모세를 세우기 전까지 400년 정도의 노예 생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400년 정도의 침묵 기간

3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할 때,

사탄의 시험(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음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이 있으셨음

4

아기때 또래 아이들의 떼죽음이 있었음

아기때 또래 아이들의 떼죽음이 있었음

5

이적을 일으킴

이적을 일으키심

6

유월절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림

유월절에 직접 어린양이 되셔서 피흘려 죽으심

7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후 얼굴이 환하게 변함

부활 하시어 완전한 몸으로 변하심, 빛이 나심

8

이집트 왕가의 삶을 내려 놓음

하늘의 왕좌를 내려 놓으심

9

맛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심

10

율법을 받아서 알려줌

성령님을 보내 주심

11

율법의 시작

율법의 마침

12

가나안땅 정탐을 위해 12명을 보냄

12명의 제자를 세상에 보내심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05-03-2024(금)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代言者)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래토스" 라고 합니다.
'파라클래토스'를 "보혜사(요 14:16, 26, 16:7)" 또는 "대언자(요일 2:1)"라고 합니다.

대언자는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받기 전에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변호하는 변호사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을 때 대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을 위하여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이란 헬라어 '하마르테'는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시상입니다.
부정과거시상이란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말합니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요 14:16, 26. 15:26. 16:7).
그러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 라고 하여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오늘도 대언자가 되신 보혜사의 도움을 받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성공하기를 다짐합시다.
그리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조용히 대언자의 음성을 들으며 새 날을 꿈꾸는 소망의 삶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2:1. 3. 요14:16,26
발음 [ paraklētŏs ]
어원  /  3870에서 유래

* 3870. παρακαλέω 스트롱번호3870
1. ~곁에서 부르다.  2. 행 28:20.  3. 청하다
발음 [ parakalĕō ]

위로받다(마 2:18, 5:4, 고후 13:11), 간구하다(마 8:5, 눅 8:31, 몬 1:10), 빌다(마 18:32), 구하다(마 26:53, 막 5:10, 눅 7:4), 권하다(눅 3:18, 행 11:23, 빌 4:2), 청하다(행 8:31, 13:42, 28:14), 간청하다(행 9:38), 권면하다(행 15:32, 고전 4:13, 살전 2:11), 위로하다(행 16:40, 고후 7:6, 엡 6:22), 여쭈다(행 24:4), 원하다(히 13:19), 위로하다(롬 12:8), 위안받다(골 2:2).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保惠師, parakletos. παράκλητος)
라틴어 파라클래투스(paracletus)
영어 파라클래테(paraclete)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이며,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의 한자 의역(어)로 번역되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가 또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며 처음 등장했다.

성경 번역판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글성경의 개역한글판표준새번역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판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성경판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문성경의 킹제임스판YLT에서는 Comforter ("위로자")로, NIVRSV에서는 Counselor ("상담자" 또는 "고문")로, NRSV에서는 Advocate ("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 ("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보통명사이기에 성경에서 약속하신 보혜사(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의 사명을 하는 존재를 이와 같이 부를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은 초림 당시,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로 16절에 "다른 보혜사"라는 낱말이 나오며 17절에서 이를 "진리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 두 가지는 "다른 보혜사"를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초림 당시의 보혜사는 육신이 있는(사람) 예수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과 예수님의 기도로 오게되는 다른 보혜사는 "영"이라는 사실이다.

초림 당시 예수가 보혜사라는 점은 〈요한1서〉 2장 1절에서 사도요한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남긴 말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예수를 대언자,곧 보혜사라고도 하였다. (개역한글판 난하주 참고)

요한복음 14장18절(하)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다시 돌아온다고(I will come to you)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이 성령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26절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But the Comforter, which is the Holy Ghost)이란 표현을 보아도 보혜사는 곧 "성령"(the Comforter, the Holy Ghost)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7절과 8절에서 "내(그리스도)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는데"라는 표현이 있는데 곧 그리스도가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 즉 보혜사로 다시 오는 성령은 요한복음 20장22절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최종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주로 이단의 교주들이 본인을 보혜사라고 칭하곤 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 (아래의 판본들은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개역한글 (1961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공동번역 (1977년, 신약은 1971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1993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개역개정 (1998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가톨릭성경 (2005년)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 화목제물(힐라스모스. hilasmŏs) ἱλα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2434

1. 속죄. 2. 속죄를 위한 제물
발음 [ hilasmŏs ]

화목제물(요일 2:2, 4:10).


죄(하마르티아. hamartia)  ἁμαρτία, ίας, ἡ 스트롱번호 266

1. 죄.  2. 고후 11:7.  3. 요 9:41
발음 [ hamartia ]
어원 / 264에서 유래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나의 자녀들아” (테크니아 무)!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이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향해 얼마나 사랑과 애착이 큰지를 보여주는 진실한 표현입니다.

저도 제 손주를 보면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이 어떤 감정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없이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니, 이런 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표현이 다른 여러 곳에도 있고 요한일서에도 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께서 (테크니아)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사용하시는데 이는 이런 깊은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

33 작은 자들아 (테크니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0-31, 34-35)

자기 생명을 이제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바치실 텐데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기에 이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자기 피 값으로 사신 제자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아기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엄마는 자기 아기가 병에 들어 죽을 고비를 지나게 되면 진심으로 그 아기 대신에 죽더라도 아기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그런 마음을 이미 갖고 계시니 자기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제자들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부르십니다.

“작은 자들아!”

“아,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바울도 그러한 심정을 갖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부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 4:19).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의 자녀들”은 내 생명을 다 주어서라도 바르게 세워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런 자녀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을 향해 이러한 사랑을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아들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심지어 요한일서의 마무리도 이 표현으로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아무튼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며 깊은 사랑 가운데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 편지를 너희에게 쓴 이유는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요한은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고 말합니다. 즉,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이유와 또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일서는 요한이 거의 죽음에 가까운 때에 쓴 것입니다.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기 전에 보낸 서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인류의 역사를 담은 웅장한 서신이라면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의 유언과도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 유언과 같은 사도 요한의 글이 목적한 바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이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 품고 명심해야 하는 말씀 중 하나는 “아, 어떻게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구나.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요한의 가르침을 꼭 붙들어야겠다”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우리의 본문 바로 앞에서 신자라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8-10)

즉, 우리는 죄성을 지닌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범죄한 후에 죄책이 들 때마다 죄를 자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에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셔서 다시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쓴 것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지만, 그러나 죄를 범하게 되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새언약의 대제사장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는 않지만 당장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면 우리는 곧바로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 하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이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한 죄 사함 및 죄 씻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양심 때문에 자책 및 우울증에 빠져 어둠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양심의 고함소리를 묵살하면서 위선자의 삶을 살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양심이 화인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신자라도 죄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떨어지는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면서 그럴 경우 어떻게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다시 나올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와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회개와 믿음 그 자체가 나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죄와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책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해 죄 씻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여기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진실로 의로우신 예수님께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우리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는 달리 우리 주 예수님은 평생 주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실제로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나님께 인정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우니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7-8).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고 평생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가 범한 죄 문제가 해결되고 신속히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게 되면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개역개정이 ‘대언자’라고 번역한 원어는 (파라클레톤)입니다.
원형으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헬라 원어의 뜻은 “나를 돕기 위해 곁에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법적으로 증거를 가지고 나를 변호하는 분, 옹호하는 분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인 의미로는 상담자, 돕는 자, 보호하는 자,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이 동일한 단어를 성령께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이신데 원어로 (알론 파라클레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도 보혜사이신데,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너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편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대언자’로 번역된 ‘보혜사’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보내셨으니 그 영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지금 ‘대언자’는 우리가 범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에서 언급된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자기의 생명으로 치른 영원한 속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실 것을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보혜사 또는 대언자 역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사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역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따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이렇게 말씀하신 주 예수께서는 지금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한없이 끝까지 용서해 주십니다. 자신의 속죄를 근거로 주의 죄사함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죄악을 아들의 속죄를 근거로 하여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흘러나와서 우리의 죄를 한량없이 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원칙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마련해 주신 복음의 원칙을 의지하여 우리가 행여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당장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사귐을 다시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기계적, 또는 악용하는 자세로 복음의 원칙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치 못할 것입니다. 즉, “아, 많은 죄를 짓고도 보혜사되시는 대제사장에게 나아가면 죄사함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더욱 많은 죄를 짓자”라는 논리를 펴는 악한 심보는 복음의 은혜를 더럽히는 간교한 사탄적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논리와 자세를 가진 자들이 바울에게도 도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우리는 이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죄악에 대해 나의 죄성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신자라면 지은 죄로 인해 너무 오래 낙심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지은 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거나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아파하며 자신을 환멸하되, 하나님의 새언약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심지어 주의 징계를 받는 상태라도 계속 회개하며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2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그분의 화목 제물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을 원어로 보면 (톤 하마루티온)이라 하여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니라 ‘죄악들’로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즉, 우리 신자들이 짓는 죄악들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또는 대언자로서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는데 그 근거는 자기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신 희생양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원어로 (힐라스모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효력은 대언자의 역할과 함께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얼마든지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그런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한한 화목의 효력을 가진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통일 시키는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신자가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가면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영원한 희생제물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자의 범죄가 완전하게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안의 있는 옛사람에게 져서 비록 범죄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서먹해지더라도 내 안의 옛사람이 주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내가 지은 죄악들에 대해 철저하게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범죄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에게서 나는 향기는 하나님께 더러운 죄의 냄새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악의 냄새가 제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우리의 제사장 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가서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오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살아있는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오직 그 제물과 제사장의 역할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만족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하였더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 다시 사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를 누가 하셨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많은 죄악을 범하고 자신을 혐오하는 가운데 빨리 새롭게 일어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차게 달리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화목제물이시며 영원한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께 나아가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속량을 치르신 화목제물이며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환상 가운데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9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계 5:6-10)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슬픔 가운데 있더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도리어 죄 사함과 죄 씻음으로 인한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신자들이여! 당장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평강의 반석이십니다.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그리고 무한하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자들은 그들이 어떤 죄악을 범하였더라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중보 기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버림 받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3-35, 37-39)

이와 같은 화목 제물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3절부터 6절은, 이러한 참 사랑이 보장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서 하늘 아버지와 사귐을 갖게 되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평강하며 감사와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으로써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편지를 쓴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너희도 주의 사랑 안에서 주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한편, 3절의 말씀을 원어로 보면 “그를 안다”라는 말이 완료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를 알아온 상태로서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고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미 과거에 예수님과 언약을 맺은 소위 하나님의 참된 자녀요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 속의 깊은 의도를 알려주는 표현법으로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1절부터 보면 우리는 비록 죄인들이라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럴 경우 참 신자들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범죄를 합법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온 사람은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모든 계명들을 항상 지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참 신자라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실에 대해 아파하면서 회개하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께 나아와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후 다시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나아간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한, 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있는 한, 그는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서는 신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 있기에, 만일 그리스도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선포합니다.

한편, 4-5절에서는 거짓말하는 가짜 신자를 드러내고 진짜 신자를 구별해 냅니다. 다같이 4-5절을 읽겠습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보면 그를 “아노라”고 할 때 원어는 (에그노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알아왔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는 뜻입니다. 이에 NLT 성경은 완료형으로 된 “아노라”를 “belong to”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뜻입니다. 즉, 가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 신자를 분간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인데 원어로 (테레온)이라고 하여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계명들을 늘 지키지 않는 자라는 뜻이고, 주의 계명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며, 그 계명들을 진지하게 지킬 의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신 명령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실 그리스도를 감사하지 않는 자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 및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 바른 인식과 감사와 충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마음이 가 있는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가짜 신자입니다.

하지만 참 신자들은 비록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해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은 죄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을 치르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더욱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상태에서 다시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계명들을 하나씩 더 많이 더 오래 지켜나가는 성장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 것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연합함으로 더욱 주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의도처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진행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주와 연합한 상태에서 주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니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사랑이 계속 무르익으면서 사랑의 결실들을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6절을 통해 참 신자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 사람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번역의 원어를 보면 (텔레이오우)라는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은 “완성되다, 성취되다, 실행하다. 성공적으로 마치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다, 완성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완전하며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현재든, 과거든, 미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주를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이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우리 안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지키는 깊이와 시간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더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러한 주의 사랑의 성취가 우리에게 나타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과 세상과 역사에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열매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열매는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에 추수로 따 먹을 수 있는 열매라기보다 다만 분명하게 성장하며 변화하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복음과 관련해서 “자라게 하는지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머리를 붙드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6-28).

히브리서 6장 7-9절은 우리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라나면서 보여주는 열매들이 그 사람의 정체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에게서 자라나는 열매에 의해 그가 주 예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 자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인생의 세월을 보내면서 계속 죄악과 관련하여 악화되면서 결국 쓴 열매를 맺는 신자라면,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룟 유다와 같은 가짜 신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처음에는 여러 죄악이 드러나며 엉성하고 투박한 성품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선한 열매가 자라나고 결국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그 사람은 참 신자인 것입니다.

[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7-9)

이러한 변화는 우리 주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진행형입니다)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주의 사랑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 5:8-10)

그러므로 남은 삶은 더욱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계속 변화하여 자라나기 바랍니다.

[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1-14)

그리고 주의 추수 때에 우리가 맺어 놓은 열매의 풍성함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즉, 내 안의 성품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는지, 또한 세상을 향해 얼마나 선한 영향을 끼치고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는지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짓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그들이 지은 죄악의 분량에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살후 1:7-10)

그러므로 주 하나님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면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살아계신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죄사함을 받고 죄씻음을 받으면서 새롭게 일어나서 또 달려갈 것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0-11).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행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행여 마음에 가책이 생기는 실수나 범죄나 사건들이 있으면 신속히 하늘에 계신 우리의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영원한 속량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 우리 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나아와 죄사함과 죄씼음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귐을 갖는 상태를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더욱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온 마음을 다하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의 성취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즉, 범죄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의 성취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 귀한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더욱 세월이 지날수록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까지 자라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는 참된 신자의 삶이 이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悔改) : 뉘우칠 회. 고칠 개

1.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

2.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들어가는 데 필요(必要)한 요건(要件)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自覺)하여 죄인(罪人)임을 반성(反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生活)로 들어가는 일을 이른다

뉘우칠 회
1. 뉘우치다 2. 스스로 꾸짖다 3. 한이 맺히다
부수 忄  (심방변, 3획)
총획 10획

고칠 개
1. 고치다 2. 고쳐지다 3. 바꾸다
부수 攵  (등글월문2, 4획)
총획 7획

회개(悔改)

1.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
2.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들어가는 데 필요(必要)한 요건(要件)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自覺)하여 죄인(罪人)임을 반성(反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生活)로 들어
    가는 일을 이른다.

회개지심(悔改之心)

1. 회개(悔改)하려는 마음.

종불회개(終不悔改)

1. 끝내 회개(悔改)하지 않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은 어두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너무나 밝은 완전한 빛이 되시는데 그 빛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다 들어내어 놓고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즉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진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0절 말씀에도 반복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진리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을 보고 시커멓게 죄로 물든 사람들을 보고 빛 가운데로 나오라고 하고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귀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지저분한 모습으로 빛 가운데로 챙피해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어떻게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있습니까
모든 죄악을 보실 수 있는 밝은 빛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귀시면서 동행하시면서 사실 자신이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 9절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 말씀을 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빛 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을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특하신 치료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하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는 죄를 자백하면 큰일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꼼짝없이 정죄함을 받고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잡혀 가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국법을 어기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숨기고 사는 것보다는 자백을 하고 벌을 받는 것이 평생을 숨어서 고생하는 것 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죄를 짓고 도망 다니면 참으로 더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자백하면 거기에 대해서 문책을 하시거나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용서를 해 주시기 위해서 자백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얼른 자백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용서도 받고 떳떳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백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어합니다.
속에서는 그 죄가 곪아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깨끗한척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료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최대한의 관용의 조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네가 네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은 빼고 설교를 듣습니다.
아 저건 김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아 저건 이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라고 생각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거기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남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성경말씀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도 남에게만 적용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기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서신을 기록한 사도 요한같은 사람은 우리들에게 비하면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사람이고 특별한 은혜도 많이 받은 사람이고 신앙에 관해서라면 큰소리를 칠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을 하기를 너희들 너희 죄를 고백해라 그러면 용서 받는다라고 하지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다 깨끗하게 용서를 하신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서 있는 목사를 비롯해서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죄를 자백할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자백을 해야 합니다.

자백을 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죄를 짓고도 뭐가 죄인지 내가 그 죄를 짓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엇을 자백하겠습니까

겉모습만 가지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만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가 더 나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가 없어 떳떳해라고 생각을 해 버리면 죄를 자백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자기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추한 죄인인가를 깨달을 때까지 자기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직 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예수님도 신앙도 모르는 왕초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자백을 하기 위해서 죄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그렇게 인정을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정말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먼저 댑니다.
죄를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거나 사실은 더 잘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이 핑계를 대지 않고 자인을 했다고 하면 용서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을 때 얼른 아이쿠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놈의 욕심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한번만 용서를 해 달라고 빌었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짓고도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가 주는 바람에 그만 먹었습니다.
왜 여자를 만들어서 먹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핑계를 대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아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주일날 교회에 못 왔습니다.
잠을 못자서 피곤해 가지고 교회를 못 왔습니다.
어째서 뭐는 못합니다 
싫어서 안 합니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들어보면 다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이유들을 대고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는 한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실컷 하고도 그런 핑계들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하고 상을 받지 못하면 억울합니다.

또 자백을 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완전하지 못한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로 통회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육체를 붙잡고 안타까워하면 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를 핑계대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애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깨끗하게 완전히 사하여 주시고 더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2.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본문 9절 말씀에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해 놓고 다 자백하면 야 이놈아 네거 그렇게 흉악한 놈인 줄 몰랐다 어느 정도라야 용서를 하지 그렇게 큰 죄를 지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또 어떤 조건을 붙여서 좋다 용서를 해 줄 터이니 앞으로 내 말 잘 듣고 내 시킨 대로만 해라 만약 내가 하는 말 잘 안 들으면 그 때는 죄를 묻겠다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죄를 시인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해 놓고서 그것 약점으로 잡고 별별 것 다 요구하고 결국 더 나쁘게 해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절대 나만 알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천지에 다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시인하고 자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 앞에서 자백을 해야 용서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악한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한 그것을 빌미로 잡고 공갈협박을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죄를 자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말씀을 드리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지만 우리가 인정하는가를 보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리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시거나 약속을 어기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우리 나라 말에서 "믿음성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도 이 말은 믿을 만 하고, 충실하고, 신실하고, 의지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믿을 만 하신 분이십니다.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이 믿을 만 한 진실된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의롭다"라는 말은 정확하다 공의롭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뭘 하다가도 어 잘못됐네 그러면 그만입니다.
내가 착각을 했어 그게 아니야 미안해 그러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정확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몇 일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상식들 중에 잘못 된 것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을 보면 눈이 나빠진다고 다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텔레비전 본다고 눈 나빠지는 것 아니라고 합니다.
유전이나 영양관계로 나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약속을 하시고 실행을 하시는 일은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됐다 미안해 다시 하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쁘고 의로우신 그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 모든 죄들을 안심하고 자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3.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은 탕감하여 준다는 말입니다.
죄지은 것이나 빚진 것을 탕감해 주고 허물을 제거해 주고 책임을 해제시켜 주신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모든 허물들을 제거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죄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용서를 해 주시는 것 보니까 죄라는 것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는가 보구나 라고 생각을 하십니다.

또 간단하게 용서를 받을 길이 있다고 하니까 쉽게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죄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아주 지독한 것입니다.
쉽게 용서를 받게 해 주신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쉽게 받지만 용서를 해 주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쉽게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대신 죽게 해 주시면서 우리의 죄값 치르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참된 기쁨의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05-02-2024(목) 요한일서 1:8-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를 자백하면(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죄를 자백하면(If we confess our sins)

호모로게오( 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스트롱번호 3670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hŏmŏlŏgĕō ]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말하다(마 7:23, 요 9:22), 시인하다(마 10:32, 딛 1:16, 요일 4:2), 고백하다(행 24:14), 증언하다(딤전 6:12, 히 11:13, 13:15), 자백하다(요일 1:9), 드러나게 말하다(요 12:42), 약속하다(마 14:7).

시인하라 - 나는 죄인입니다.

(예) 독사가 겨울 잠을 자고 나온 후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을 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독사가 아니다.
       독을 내 뿜지 않아도 독사로 존재하므로 독사가 분명한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 태어난 죄인이므로 갓난 아기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 |

말하라 - 나는 죄를 지었다

(예) 죄를 지은 후에 입을 다물고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이다.


* 3674

ὁμοῦ 스트롱번호3674

1. 함께. 2. 동시에
발음 [ hŏmŏu ]


* 3056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미쁘시고(4103)

πιστ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03
1. 믿을 만한.  2. 마 25:21. 3. 고 전1:9
발음 [ pistŏs ]
어원 / 3082에서 유래

충성된(마 24:45, 딤전 1:12, 계 1:5), 충성하는(마 25:21, 계 2:10), 진실한(눅 12:42, 엡 6:21), 미쁜(행 13:34, 고후 1:18, 살후 3:3), 믿는(행 16:1, 고후 6:15, 딤전 4:3), 신실한(엡 1:1, 골 1:9, 히 3:2, 벧전 5:12, 계 22:6). [명] 충신(계 19:11), 충성(고전 4:2), 믿음(요 20:27, 딤전4:12), 신자(행 10:45).

의로우사(1342)  δίκαιος, αία, ον 스트롱번호 1342

1. 올바른.  2. 법대로 사는. 3. 눅 1:6
발음 [ dikaiŏs ]
어원 / 1349에서 유래

의로운(마 1:19), 옳은(마 23:28, 27:19), 무죄한(마 27:24), 마땅한(빌 1:7), 공의로운(살후 1:5), [명] 의로운 자(마 5:45), 의인(마 9:13, 10:41, 벧전 3:12), 공의(요 7:24), 의(골 4:1).



자백한다는 헬라어 동사 호모레고는 "같은(호모)" "말을 한다(레고)"는 두 단어거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같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가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분명하게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범죄자가 검사 앞에서 자기가 말한 것을 번복하여 재판정에서 자기가 한 말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를 아뢸 때에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잊어버렸던 죄들과 더불어 생각나는 모든 죄를 말하는 것을 자백한다(호모레고)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용서의 은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면 거룩하신 주님은 모든 죄를 깨끗하에 용서하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는 변화와 갱신의 은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기폭제가 된 것은 회개였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은혜를 받았을 때 마음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지난 날 지었던 모든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죄의 용서를 구하고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 주었습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난 다음 날은 평양 시내가 더욱 분주해졌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2,10-11)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인정하셨던 믿음의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구약의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다윗, 그러나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죄의 유혹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홀로 궁에서 지내고 있을 때 다윗의 눈에 아리따운 여인의 아름다운 몸이 들어 왔습니다.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 본 다윗은 욕정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드렸습니다. 다윗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7계명과 제10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늘 죄의 유혹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죄의 유혹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기도방을 지나가던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계속 똑 같은 기도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어거스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행위의 범죄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범죄를 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돈과 여자라는 말씀을 하신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하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장 큰 시험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해보니까 그 두 가지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시험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훌륭한 신앙의 사람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더군다나 죄가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더욱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충복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 몰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든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고 살인하며 쾌락의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저는 사울왕의 죄와 다윗왕의 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전히 다윗왕의 죄가 더욱 크다고 여겨집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행위로서 계명을 명백히 어긴 죄가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울을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오히려 더 명백한 죄를 지은 다윗은 용서하시고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느냐 아니면 죄를 부인하고 회개치 아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죄를 지적하시며 사무엘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므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00)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서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00)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00)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람을 위하여 있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를 보내서 죄와 사망에서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과 피를 흘리심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님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또한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죄를 시인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예화의 말씀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 길에 오는 남루한 거지가 아들인 것을 아시고 달려가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미 우리가 지은 모든 죄까지도 용서하시기로 결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이 필요하며 죄인임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백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좋았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심한 책망과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도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자백하지 못하고 감추고 깊은 고뇌와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자백하는 것,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이 도우시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감동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역사가 회개였다면 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한 힘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들이 은혜 가운데 성령을 받고 감동되었을 때 자기들의 죄가 생각났고 아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추었던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내주하시고 감동하시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어두운 죄의 마음속에 밝은 빛으로 임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죄를 자백하고 난 후에는 엄청난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는 한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은혜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받습니다.

다윗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다윗이 죄를 시인하고 자백함으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사울이 용서받지 못한 이유는 그 죄가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받은 자의 기쁨을 아십니까? 용서받은 자의 기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용서입니다. 무한한 용서는 그를 감동과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2.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은혜는 치유와 회복

마가3장에는 손 마른 자를 치유해주시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고백합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나를 아들이라 생각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써주시옵소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금가락지를 그 손에 끼워주셨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 함께 즐거워하자고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귀한 아들의 자리에 앉게 해주었습니다. 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3.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은혜는 변화와 갱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정도의 회개라면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회개가 갱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는 변화이어야 하고 갱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바람, 새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놀라운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회개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회개가 갱신의 삶으로 변화되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갱신의 삶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변화하였습니다. 이타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모두를 위한 것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갱신은 자기를 넘어서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한사람도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19장에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특히 남의 물건을 토색하며 갈취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데 힘썼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보고 형제도 배반하며 민족도 배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눈물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4배나 값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착취하므로 축적했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게오입니다.

해비타트운동이라 불리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 있습니다.
밀러드 풀러는 이 운동을 전세계적으로 이끌고 있는 국제 해비타트 설립자입니다. 그가 20대 백만장자에서 30대 자원봉사자로 일생일대의 변신을 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돈만을 최고로 아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결별선언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새로운 삶의 비전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하며 무주택자와 극빈자를 위해 집을 짓는 봉사활동에 뛰어듭니다. 지금까지 의약^교육^식량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인력 등의 부담으로 집을 짓는 활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운동으로 600여개 도시에서 집을 지었으며 밀러드 풀러는 최근 국내에 발간된 `망치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집짓기까지의 역사와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돈만 알았던 수전노에서 사회봉사자로의 변화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갱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회개는 기적을 시작하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삶의 변화와 갱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새로운 삶으로 이러져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 갱신의 삶이 실현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자백해야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자백할 때 우리 죄가 씻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씻는 능력은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지, 자백한다고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요한일서 1장 9절만 읽지 말고 7절을 읽어야 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9절의 자백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죄 안 지었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속죄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그 원칙이 레위기 4장의 속죄제사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레 4:27~28)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죄를 지어야 하고, 다음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속죄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한 것은 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속죄제사를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 지은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죄인이 아니라면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옵니다.
그리고 염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안수하면 죄가 염소에게 건너갑니다.
그 뒤에 염소를 죽여서 제사장이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번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이유는, 거기에 우리 죄가 기록되어 있다고 예레미야 17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성경에는 피를 발라서 죄의 기록을 지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죄악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17)


이처럼 우리가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하고,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예수님의 피’가 씻습니다.
만일 자백함으로 죄가 씻어진다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자백이라는 것은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사해지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자백한 뒤 그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면 그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자백은 죄 사함 받을 자격을 갖추는, 죄 사함 받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나의 어떤 노력으로 죄를 씻지 못합니다.
우리 노력으로 죄를 씻는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죄를 사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계시다가 마지막에 세상 죄를 지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의 말대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못 씻은 피를 믿지 말고 우리 죄를 씻으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15가지 놀라운 속성: 그 의미와 중요성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와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분에 대해 참된 것입니다. 제한된 존재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전히 이해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시며, 말씀과 창조물을 통해 자신에 관해 계시하신 내용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경이로운 창조주께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

하나님은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나 그 누구와도 다릅니다. 그는 독특하고 독특하며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말로 그분을 묘사하는 것조차도 그분이 누구신지 포착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말로는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알 수 있는 속성을 갖고 계시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15가지 속성 목록을 따랐습니다. 일부는 신학자들이 “비공유적”(하나님만이 소유하신 특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일부는 “전달 가능”(하나님과 우리 모두가 소유하지만 오직 그분만이 완벽하게 소유하시는 특성)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15가지 속성과 그 의미 및 중요성입니다.

1.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 그분은 기원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로새서 1:17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풍부하시도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 시편 147:5

하나님이 자존하신다는 사실, 즉 그분은 아무것도 없이 창조되었으며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셨다는 사실은 아마도 신자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본성을 붙잡는 것은 강물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토저는 하나님의 무한성의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 너머에 계시는 분, 우리의 모든 범주 밖에 존재하는 분, 이름 때문에 무시되지 않으실 분, 우리 이성의 한계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분, 우리의 호기심 많은 질문에 굴복하지 않으실 분을 인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많은 겸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거나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각함으로써 체면을 세웁니다.”

Christian.com에 실린 기사에서 에이드리언 로저스 박사는 하느님의 자존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서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약 6800번이나 사용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개인적인 언약의 이름이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주 하나님(Lord God)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어원은 '자존함', 즉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나 항상 존재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바로가 나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는 바로 나다(I AM THAT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또는 야훼 는 유대인 서기관들에게 가장 신성한 이름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이름을 사용합니다.”


2.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나 주는 변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 3:6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속성은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합니다. 그의 성격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그의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놀라운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샘 스톰즈(Sam Storms)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본성에 대한 좋은 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이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확고한 신뢰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변하지 않으실 것이며 실제로 변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은 난공불락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므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우리를 사랑에서 끊을 수 없 느니라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천사나 귀신이나 현재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세상에서 갈라놓을 수 없느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5-39 )!”


3. 하나님은 자급자족하십니다 – no needs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 – 요한복음 5:26

제한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엄청난 욕구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죽음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팀 템플(Tim Temple)이  것처럼 , “하나님은 그 자신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완전하십니다.”

Reformation21.org의 블로그 게시물에서 스콧 스웨인은 하나님의 자급자족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무한한 부와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7:1; 요한  복음 5:26 ;  엡) 3:16 ).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이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소유하셨기 때문에(마 11:25-27; 요한 17:24-26 ), 하나님은 "복이 있으신" 혹은 "행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딤전 1:11). ; 6:15).” 

하나님은 자급자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분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끝없는 선하심과 평화 와 긍휼과 은혜의 샘이 마르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에베소서 3:20 )


4.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almight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입의 기운으로 별들의 군대가 이루었느니라.” – 시편 33:6

“당신은 하나님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습니까? 전능자의 한계를 조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보다 높으니 네가 무엇을 하리요? 그것은 아래 깊은 것보다 더 깊으니 네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그 크기는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와서 여러분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열면 누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는 속이는 자들을 아신다. 그가 악을 보아도 깨닫지 아니하느냐?” – 욥기 11:7-11

전능함(omnipotent)은 무한한 힘을 갖는다는 뜻입니다(옴니 = 모든 것, 유력 = 강력함). 하나님은 자신의 노력 없이도 자신이 뜻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과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어떤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진술에서 “그분의 뜻은 무엇이든”이라는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6장 18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론 무어(Ron Moore)는 그의 신앙 서적  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은 하나님이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무엇인가를 계획하시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목적하시면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분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려고 손을 펴시면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전능함은 두 개의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옴니(Omni)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포텐스(potens)는 "강력하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항상 그분의 성품과 일치하며, 그분은 자신이 결정하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 성경은 하나님이 강하고 능하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시편 24:8 ). 그분이 성취하시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창 18:14 ; 예레미야 32:17 , 27; 누가복음 1:37 ). 종종 하나님은 모든 능력과 권위를 소유하신 분으로 묘사하면서 "전능자"라고 불립니다  고린도후서 6:18 ; 요한계시록 1:8 ). 사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에베소서 3:20 )라고 말합니다.  

“그런 능력이 무섭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그분의 무한한 능력에 따라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그분 자신과 일치하는 일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죄를 용납하실 수도 없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실 수도 없습니다.” – 존 맥아더


5.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이전 일, 오래 전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나는 종말을 처음부터, 옛적부터, 앞으로 있을 일을 알게 하느니라. 내가 이르노니 내 뜻이 설 것이라 내가 나의 뜻을 다 이루리라” - 이사야 46:9-10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이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데비 맥다니엘(Debbie McDaniel)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그분은 동시에 어디에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자거나 졸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길을 아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지구상에서 그분이 보시고 아시지 않는 곳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Tozer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을 완벽하게 아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자 저자이시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것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든 우주 어디에나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관한 모든 가능한 지식 항목을 포함하는 충만한 완전함으로 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모든 일과 내일 겪게 될 모든 일을 그분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묵상할 때, 특히 그분의 다른 속성인 선함과 사랑 에 비추어 묵상할 때 , 매우 심각한 일부터 어리석고 평범한 일까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6. 신은 편재한다 - 그는 항상 어디에나 있다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의 면전에서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늘 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내가 음부(히브리어: Sheol)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에는 주께서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어서 나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하늘과 땅을 채우지 아니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예레미야 23:23-24

편재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에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Ligonier.org 웹사이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는 물질적인 물질과 전혀 다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 “그는 오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차원과 완전히 구별되는 차원에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충만한 임재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까요? 아니면 내가 당신 앞에서 어디로 도망해야 합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아침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기자는 시편 137편 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선포합니다 .

이는 외로움과 깊은 슬픔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위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고 토저는 썼습니다.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지식은 우리 삶의 험난한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를 말해줍니다.”


7.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 그분은 완전하고 변함없는 지혜로 가득하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측량할 수 없도다!” – 로마서 11:33

지혜는 단순한 머리 지식과 지능 그 이상입니다.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실을 이해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기술과 능력과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만큼 지혜롭게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한결같이 지혜로우시며, 완벽하게 지혜로우십니다. Tozer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혜는 완벽한 목적을 고안하고 가장 완벽한 수단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입니다. 처음부터 끝이 보이기 때문에 추측하거나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는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각각이 모든 것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고, 따라서 예정된 목표를 향해 흠잡을 데 없는 정확성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지혜를 볼 때, 우리의 제한되고 유한한 지혜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한한 지혜와 얼마나 비교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람이 깊이 생각하는 데 얼마나 위안이 되고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이보다 더 지혜로우실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이 항상 우리 삶에서 가장 지혜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위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어떤 계획도 그분이 이미 세우시고 우리를 위해 실행하고 계신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8.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진실하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느니라” - 신명기 7:9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13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분리되고 고립된 특성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존재 전체의 상호 연결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불변성, 즉 그분이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므로 항상 신실하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속성들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신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W Pink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당신의 백성과의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사람은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분을 헛되이 신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진리가 성경의 거의 모든 곳에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은 신실함이 신성한 성품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고 변함없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은 그분이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시며, 하기로 작정한 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며, 결코 마음을 바꾸시거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계획이 얼마나 신실한지 항상 이해하거나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과 유한한 생각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죽도록 허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순간에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기억함으로써 위로 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고 선하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혜로우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느니라. 이제 나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온전히 알려졌던 것처럼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9. 하나님은 선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친절하시며 선의가 가득하신 분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 시편 34:8

토저(Tozer)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을 친절하고 온화하며 자비로우며 사람들을 향하여 선한 뜻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마음이 부드럽고 동정심이 빠르며, 모든 도덕적 존재에 대한 그분의 확고한 태도는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우호적입니다. 그분은 본성상 축복을 베푸시는 경향이 있으시며 그분의 백성의 행복을 거룩한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불변성과 무한한 본성 안에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변함없이 항상 선하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그분의 선하심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선하심에서 우리는 그분이 그분의 백성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선하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Ligonier.com ).

하나님의 다른 완전한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잘 진행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증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삶이 급락할 때, 그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시편 기자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시편 34편 )라고 썼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Desiring God의 작가인 앤드류 윌슨(Andrew Wilson)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주제에 관한 자신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단언합니다. 19절에서 그는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주목할 만한 선언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선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핵심은 다음 문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원하시느니라.” 악한 일이 일어나도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34:22).


10.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 그분은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무한히, 불변적으로 옳고 완전하시다


"반석이시여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길이 다 의로우시도다 신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 듀엣 32:4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단순히 공정한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분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의롭고 선한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라도, 그분이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선고하시는 것 역시 옳고 선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은,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우리 각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토저는 우리가 기독교의 칭의와 구원 교리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이에 답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공의는 침해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실 때 만족됩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인 선하심, 자비, 사랑 , 은혜에 비추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처벌하기에는 너무 친절하다고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무한하고 변함없는 정의의 현실을 무디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정의를 내리시거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진노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수많은 인류 중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 중 일부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무엇을 얻나요? 그들은 정의를 얻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비를 받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정의를 얻습니다. 누구도 불의를 당하지 않습니다.” - RC Sproul


11.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자비로우시며 친절하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느니라.” 그러므로 원하는 사람이나 실행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 로마서 9:15-16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공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무한히, 변함없이, 변함없이 자비로우십니다. 즉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친절하십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정심이 많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에게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Spurgeon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실로 모든 참된 자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과분한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한 자비는 단지 정의를 잘못 부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자비를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반역자가 즉시 영원한 불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졌다면, 그는 마땅히 그 운명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오직 주권적인 사랑 만이 원인을 찾았을 것입니다. 죄인 자신에게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 그러나 자비 때문에 우리는 마땅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심판은 도덕적 불평등에 맞서는 하나님의 정의인 것처럼, 자비는 인간의 고통과 죄책에 맞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고, 고통과 눈물이 없다면,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창조된 우주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비를 찬양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비참함과 죄입니다.”


12.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 하나님은 무한히 죄인을 용서하시는 경향이 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 시편 145:8

자비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저주)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은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과 죄악에 맞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듯이, 은혜는 인간의 빚과 허물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공로를 부여하시고 이전에 있었던 곳에는 빚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그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가 얻거나 잃지 않는 것입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 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 그분의 은혜는 또한 주권적입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고”( 출 33:19 ).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신학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구별합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작가 패트릭 마비로그(Patrick Mabilog)는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분의 일반은총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든 사람이 생명과 공급, 풍요의 축복을 누리는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은 '그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느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류가 일반은총의 혜택을 받는 반면, 그리스도를 믿고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13.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무한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 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한일서 4:7-8

사랑. RC Sproul은 자신의 저서 God's Love 에서 “현실을 설명하기 전에 비틀거리는”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에 비추어 볼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주권적이며 불변하고 무한합니다.

Tozer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기이함은 그분이 자신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인간과 동일시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급자족하시므로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며 그것을 얻으실 때까지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유롭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영원히 묶어 두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활동적이어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십니다.
그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는 어떤 막연한 의미에서 인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당신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14.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완전하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이시로다” – 요한계시록 4:8

거룩하다는 말은 신성하다, 구별되다, 존경받다,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우리 하나님의 경이로운 거룩함을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거룩함은 그분을 가장 독특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그분의 다른 모든 속성의 요약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그분의 분리됨, 그분의 다름, 그분이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완전하고 무한한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거룩함은 다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끝없이, 항상 완전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준도 완벽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8
 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요구하는 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우주의 도덕적 건강, 즉 거룩함이므로, 이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그분의 영원한 불쾌하심 아래 있습니다.
그분의 창조물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모든 것을 파괴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죄악을 진압하고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붕괴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실 때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세계 역사상 모든 진노의 심판은 보존을 위한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진노 , 피조물의 건강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타락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쏟아지는 것을 결코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값이 지불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함을 보십니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눈부시게 순결하고 완전하며 거룩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랄 수 있는 이유입니다.

15. 하나님은 영광스럽습니다 – 그분은 무한히 아름답고 위대하십니다


“그분의 광채는 햇빛과 같습니다. 그분의 손에는 광선이 비치고 그분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 하박국 3:4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다양한 완전성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위대함입니다. 무한한 아름다움, 그리고 나는 그분의 성품과 가치와 속성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완전함과 위대함은 보이는 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양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Ligonier.org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눈부신 빛의 이미지가 종종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밝게 빛나는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적절합니다 .”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다른 속성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변함없이 영광스럽습니다. 그의 광채와 아름다움은 그의 존재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옵니다. 이사야 43장 7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재와 목적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다른 것에서 영광을 찾으려 하거나, 자신을 영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에게 시선을 돌릴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

해리 할로(Harry Harlow)의 원숭이 애착 실험, 모성애 관련 연구, 모유 수유와 모아 애착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먹었다. 이러한 실험에서 보듯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는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팔 복중에 하나이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 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5월은 왜 ‘가정의 달’이 됐을까?

  • 5월,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가정의 달은 ‘세계 가정의 날’의 영향을 받아 제정됐다. 세계 가정의 날은 1989년 국제연합(UN)이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와 민간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날로, 지난 1994년을 ‘세계 가정의 해’로 설정하고 매년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했다.

    우리나라 또한 지난 2004년 2월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라 세계 가정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정부는 매년 이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진행하며,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가족실천운동본부를 비롯한 관련 민간단체도 공동으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영향력을 미치고,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곳으로 손꼽히는 ‘가정’.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답게, 5월은 특히나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기념일로 가득하다.


  • ◇ 5일 어린이날

    5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어린이날’일 것이다. 주인공인 어린이들은 물론, 달콤한 휴일을 맞은 성인들과 부모에게도 어린이날은 마음이 들뜨는 날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 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지정한 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인권 운동가 소파 방정환이 1922년 5월 제정했다.

    어린이날은 5월 중 가장 많은 행사와 축제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들 수 있는 축제가 한 달 내내 가득하다.


  • ◇ 8일 어버이날

    떠들썩한 어린이날을 보내자마자 다가오는 것, 바로 어버이날이다. 어버이날은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전통적 미덕을 기리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해 경로효친의 행사를 진행해왔다. 행사 과정에서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면서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됐다.

    어버이날에는 가정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전국 지자체에서는 경로주간 등 어버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지역의 어른들께 공경을 표하기도 한다.


  • ◇ 15일 스승의 날

    세계 가정의 날과 같은 날짜에 기념하는 스승의 날은 교권존중과 스승 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해 교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지정됐다, 1958년 5월 8일,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한 데서 시작됐으며, 이후 1963년 5월 24일 ‘은사의 날’과 1964년 5월 26일 ‘스승의 날’을 거쳐 왔다.

    5월 15일은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세종대왕은 즉위 34년간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특히, 한글을 창제하며 교육적으로 큰 업적을 세웠다. 이에 지난 1965년, 이러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기억하기 위해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변경했다.

    스승의 날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세종대왕처럼, 이 땅의 교사들이 훌륭한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 ◇ 21일 부부의 날

    부부의 날은 비교적 최근에 지정된 날이다. 지난 2003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제출한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결의되면서 200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기념하는 날인 부부의 날은 핵가족시대 가정의 핵심인 ‘부부’가 화목해야 청소년 문제, 고령화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아 매년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도입 이야기)

5월의 첫 날을 맞이하는 새벽에
독일이 낳은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진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가리켜 이성의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 합니다.
그 지혜 중에 가장 중요한 지혜는 새 출발의 지혜입니다.
시작이 가장 중요하듯이 첫발 짝을 내딛는 마음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노자는 "천리 길도 발 밑 한 발짝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길을 잘못 들면 아무리 잘 뛰어도 소용이 없다."는 격언도 있습니다.

하루 계획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고, 인생이 계획은 청소년 시절에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05-01-2024(수)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1. 빛.  2. 마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phōs ]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 11:14)

어둠(스코토스. skŏtŏs)  σκότ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4655

1. 어둠.  2.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나타냄.  3. 종교적 도덕적 암흑
발음 [ skŏtŏs ]
어원  / 4639의 어간에서 유래

흑암(마 4:16, 골 1:13, 유 1:13), 어둠(행 26:18, 벧후 2:17, 마 6:23, 고후 4:6, 요일 1:6).

* 4639.  σκιά, ᾶς, ἡ 스트롱번호 4639

1. 그림자.  2. 예표
발음 [ skia ]

1. 그림자, 그늘, 행 5:15.
2. 그림자, 예표, 전조, 히 8:5.

그늘(마 4:16, 막 4:32, 눅 1:79), 그림자(행 5:15, 골 2:17, 히 10:1).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분이 아니신지를 알려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부정확하기 마련입니다(욥 42:7).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말도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순화된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거짓 신들을 세우고, 쫓으며, 숭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출 20:3-5).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관하여 스스로 드러내기로 하신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혹은 특징 중 한 가지는 ‘빛’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사 60:19; 약 1:17).

이사야 60:19
다시는 가 네 이 되지 아니하며 도 네게 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지식을 계시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히 4:1).
창조, 성경 그리고 말씀이 되신 육신(예수 그리스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의 일부이며(창 1:1; 시 24:1),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보다 위에 있으며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창 1:26-28).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창 3:17-18; 롬 1:19-20). 하나님의 창조하심의 광대함, 복잡함, 아름다움 그리고 질서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몇 가지를 살펴보는 것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로힘 (Elohim) - 강한 자, 신성 한 자 (창 1:1)
아도나이 (Adonai) - 주(主),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을 가리킴 (출 4:10, 13)
엘 엘리온 (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자, 가장 강한 자 (창 14:20)
엘 로이 (El Roi) - 만물을 감찰하는 자 (창 16:13)
엘 샤다이 (El Shaddai) -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엘 올람 (El Olam) - 영원하신 하나님 (사 40:28)
야훼 (Yahweh) - 주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출 3:13, 14)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불멸하시며 무한하십니다(신 33:27; 시 90:2; 딤전 1:17).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말 3:6; 민 23:19; 시 102:26, 27). 하나님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과 그분의 존재에 있어 하나님과 대등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분은 완벽하십니다(삼하 7:22; 시 86:8; 사 40:25; 마 5:48). 하나님은 불가해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누군가가 그분에 대해 완전히 알아내거나 그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사 40:28; 시 145:3; 롬 11:33, 34).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신 32:4; 시 18:30).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분의 성품과 항상 일치합니다(계 19:6; 렘 32:17, 27). 하나님이 편재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이 곧 우주 만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시 139:7-13; 렘 23:23).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고 심지어 매 순간 우리가 하는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공정합니다(시 139:1-5; 잠 5:2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으며 그분만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와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신 6:4).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정의로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출 9:27; 마 27:45-46; 롬 3:21-26).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최고의 자리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힘을 합쳐도 그분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시 93:1; 95:3; 렘 23:20).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요 1:18; 4:24).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일체 속에 삼위(세 위격)이시고 삼위는 같은 본질이며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부패하시지 않으시며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시 117:2; 삼상 15:29).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인 부패에서 분리되셨으며 그것을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보시며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 묘사됩니다(사 6:3; 합 1:13; 출 3:2, 4-5; 히 12:29).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분의 은혜는 선하심, 친절하심, 인자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얼굴로부터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출 34:6; 시 31:19; 벧전 1:3; 요 3:16, 17:3).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질문에 충분히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해 계속 하나님을 찾기를 기원합니다(렘 29:13).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36:9; 119:130; 사 5:20; 미 7:8b;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8:12; 9:5;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8,10절; 2:4,6,9;눅16:8; 요 8:12;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시편 76:4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잠언 4장 18절에서는 의를 “돋는 햇살”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늘에서 빛나는 “순전하고 흠 없는” 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6)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씀은 어둠과 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룹니다.
빛이 의와 선을 말한다면, 어둠은 악과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들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 참조).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은 그 빛을 세상으로 반사하여 어둠에 갇혀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밝은 곳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행 26:18).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요한일서 1:6에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또 5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 참조).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예수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행 26:18).





나타내신바 된지라(1:2)
-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나타나게 하시고 보여주심으로 알게 하신다."

파네로오(phanĕrŏō) φανερόω 스트롱번호 5319

1. 나타나다.  2. 알게 하다. 3. 보여주다
발음 [ phanĕrŏō ]
어원 / 미래 φανε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φα- νέρωσα, 완료 πεφανέρωκα, 완료수동태 πε φανέρω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φανερώθην, 미래수동태 φανερωθή- σομαι, 5318에서 유래

롬 1:19, 고전 4:5, 고후 2:14, 엡 5:13, 딤전 3:16, 벧전 5:4.

로마서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에베소서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이니라.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을 얻으리라.


* 드러내다(막 4:22), 나타나다(막 16:12, 요 21:14, 엡 5:13), 나타내다(요 2:11, 고전 4:5, 요일 1:2), 보이다(롬 1:19, 계 3:18), 알려지다(고후 5:11).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3708), '증거하고'(3140), '전하노니'(518)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 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보았고'(3708) 호라오(hŏraō )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증거하고'(3140) 마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 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어원 / 미완료 ἐμαρτύρουν, 미래 μαρτυ- 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ύρησα, 완료 μεμαρτύρηκα, 수동태: 미완료 ἐμα- ρτυρούμην, 완료 μεμαρτύρη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υρήθην, 3144에서 유래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전하노니'(518) 아팡겔로(apanggĕllō)  ἀπαγγέλλω 스트롱번호 518

1. 보고하다.  2. 마 2:8.  3. 마28:11
발음 [ apanggĕllō ]
어원  / 미완료 ἀπήγγελλον, 미래 ἀπαγ- γελῶ, 제1부정과거 ἀπηγγέλην,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ήγγειλα, 575와 32의 어간에서 유래

고하다(마 2:8, 막 6:30, 행 23:16), 알게 하다(마 12:18, 28:8), 이르다(눅 8:36, 9:36, 요 20:18), 전하다(행 12:17, 15:27, 26:20, 요일 1:3), 전파하다(고전 14:25), 선포하다(히 2:12), 말하다(행 11:13), 할 말(행 23:16,17).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성공적인 삶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중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사는 길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04-30-2024(화)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요한일서는 1장부터 5장까지 구성된 매우 짧은 내용입니다(105궞ㄹ).
그렇지만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빠른 시간에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한번씩 요한일서 전체를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묵상을 위한 주제가 되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묵상을 위한 주제는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입니다.

들은바(191) 아쿠오(akŏuō)  ἀκούω 스트롱번호 191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듣다(마 2:3, 눅 4:28). 들리다(계 12:10).

'보았고'(3708) 호라오(hŏraō )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 보다(블래포.  blĕpō)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기본형] 미래 βλέψω, 제1부정과거 ἔβλεψω
관련 성경
보다(마 5:28, 눅 6:41, 요 1:29), 보게 되다 (마 12:22), 뵙다(마 18:10), 주의하다(마 24:4, 막 8:15, 눅 21:18), 삼가다(막 4:24, 눅 8:18), 보이다(막 8:23), 조심하다(막 13:9, 고전 8:9), 돌아보다(눅 9:62), (눈이)밝아지다(요 9:7).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라는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You are already clean because of the word I have spoken to you.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Come," he replied, "and you will see." So they went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spent that day with him. It was about the tenth hour.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가 된다(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Whoever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but whoever rejects the Son will not see life, for God's wrath remains on him.



* 자세히 보고(2300) 데아오마이( thĕaŏmai)  θεάομαι 스트롱번호 2300

1. 보다.  2. 마 11:7
발음 [ thĕaŏmai ]

보이다(마 6:1, 막 16:11), 보다(마 11:7, 눅 5 27, 요일 1:11), 쳐다보다(행 1:11).



* 만진바라(5584) 프셀라파오(psēlaphaō) ψηλαφάω 스트롱번호 5584

1. 만져보다.  2. 다치다. 3. 손을 대다
발음 [ psēlapha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ψηλάφησα, 5567의 어간에서 유래

만져보다, 다치다, 손을 대다, 더듬다, 눅 24:39, 행 17:27, 히 12:18.

만져보다(눅24:39), 더듬다(행17:27), 만지다(히12:18, 요일1:1).






'증거하고'(3140) 마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 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어원 / 미완료 ἐμαρτύρουν, 미래 μαρτυ- 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ύρησα, 완료 μεμαρτύρηκα, 수동태: 미완료 ἐμα- ρτυρούμην, 완료 μεμαρτύρη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υρήθην, 3144에서 유래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전하노니'(518) 아팡겔로(apanggĕllō)  ἀπαγγέλλω 스트롱번호 518

1. 보고하다.  2. 마 2:8.  3. 마28:11
발음 [ apanggĕllō ]
어원  / 미완료 ἀπήγγελλον, 미래 ἀπαγ- γελῶ, 제1부정과거 ἀπηγγέλην,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ήγγειλα, 575와 32의 어간에서 유래

고하다(마 2:8, 막 6:30, 행 23:16), 알게 하다(마 12:18, 28:8), 이르다(눅 8:36, 9:36, 요 20:18), 전하다(행 12:17, 15:27, 26:20, 요일 1:3), 전파하다(고전 14:25), 선포하다(히 2:12), 말하다(행 11:13), 할 말(행 23:16,17).



생명의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투 로구 테스 조에스(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라고 합니다.


로고스 /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조에 /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죽음(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은 만들어졌고 사람은 그 세상에서 내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만 세상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안에만 머물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므로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에 이디오피아 황제가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을 때 당시 대통령이 주관하는 영빈관 만찬회에 초청장을 가지고 온 관계자를 통하여 초청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청장의 내용에는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한 예복과 시간과 장소 그리고 앉아야 할 좌석 번호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의 대통령이 초청을 할 때도 이와 같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어떤 절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절차가 무엇일까요?
초청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청장은 그 나라의 주인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리를 위임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송된 초청장입니다.

우리들을 초청하신 그 분을 "생명의 말씀" 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1:2)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어떻게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을 갖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요한일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의 613개의 조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이러한 사랑의 시작을 요한일서에서는 먼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구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고 깨우치셨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확신하는 복된 하루 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04-29-2024(월)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우리 말에서 '태초(太初)"라는 단어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으로 "시간의 시작" 즉 "시초(始初)"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세 개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하늘(天)과 땅(地)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간(時間)을 만드셨습니다(太初, 始初).
하나님께서 공간(空間)을 만드셨습니다(天地).

둘째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 있기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는 영원(永遠)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자(永遠自)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셋째는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만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만드셨으며 그 말씀이 곧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신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들에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승혁목사는 1949년 10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나라는 존재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과 공간속에 살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시간과 공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만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서 머문 그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가 태어나서 죽는 시간까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신약 성경 요한일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의 말씀을 읽으시고 매일의 주제가 되는 묵상의 주제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존재하려는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태어난 후에 이 세상이 먼저 있었으며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 또는 신앙을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 또는 "영원성(永遠性. eternity)"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그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보다 먼저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합니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구약에서는 "말씀" 즉 "다바르(dâbâr. דָּבָר)" 라고 하며 신약에서는 "로고스( lŏgŏs. λόγος)"라고 합니다.

로고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 1:14).

"말씀이(로고스) 육신이(사르크스)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스케노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고스( lŏgŏs. λόγος)"는 우주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바르(dâbâr. דָּבָר)"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언어(창 11:1, 시 19:3, 잠 29:20), 말씀(창 15:1, 민 11:24), 일(창18:14, 출18:18), 말(창24:52, 출35:1, 신4:2), 명령(창44:2, 삼상15:11,13), 물건(출22:9), 대답(잠27:11), 사건(민25:18, 신19:15), 계명(신4:13), 규례(신15:2), 판결(신17:11), 뜻(신17:10), 직무(신24:5), 까닭(수5:4, 왕상9:15), 의견(삿20:7), 염려(삼상10:2),구변(삼상16:18), 이유(삼상17:29), 소식(삼하15:28), 식양(왕상6:38), 소문(왕상10:6),행위(왕상10:6, 16:20), 사적(事蹟)(왕상11:41,14:29), 행적(왕상14:19, 대하12:15), 지략(志略)(왕상14:29, 16:14), 독(왕하4:41), 불의(왕하17:9), 양(왕하25:30), 유언(대상23:27), 반(대상27:1), 글(대상29:29), 소행(느5:9), 생각(겔38:10), 한 마디(렘38:14), 조서(에1:19), 일기(에2:23), 소리(욥26:14, 시22:1), 용맹(욥41:12), 병(病)(시41:8), 목적(시64:5), 영광(시79:9), 표적(시105:27), 노래(시137:3),사물의 이치(전8:1), 불행(전8:5), 예언(렘28:6), 편지(렘29:1), 영(단9:25), 말미암다(창20:11, 신4:21), 조금(렘38:5), [동] 응하다 (겔12:23), 말씀하다(말1:1), 대하다(출8:12), 대답하다(민20:8, 삼하24:13), 이르다(창41:28, 왕상18:31), 상종하다(삿18:28), 상심하다(삼하13:33), 청하다(삼하14:15), 구하다(삼하14:22), 모의하다(왕상1:7), 허락하다(대하1:9), 무엇이든지(삿19:19), 구별하다(느12:47), 자세히(삼상3:18), 어찌(삼상11:12).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로고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 2:22, 행 20:35), 직고(벧전 4: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보다 먼저 선재하는 "말씀(로고스)"을 말합니다.


우리 말에서 ‘태초’(太初)라는 단어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이 시작하는 처음으로 시간적으로 처음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며 동시에 시작을 할 수 있는 "말씀" 즉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로고스의 영원성(永遠性)"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로고스,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존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후에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주만물도 우연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요한의 첫째 서간(천주교 성경), 요한 1서(표준새번역한글개역판)
첫 번째 요한서신이며, 네 번째 공동서신이다.
전통적으로 요한의 복음서와 나머지 요한 서신들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본 서신은 에페소에서 서기 95-110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
예수가 "육으로"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졌으며, 기독교인들이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방법으로 윤리, 성육신의 인정,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1]

내용

본 서신의 주제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동행하는 것이다.[2][3]
저자는 독자들이 하느님과의 친교가 참된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을 기술하며, 영적 거듭남의 증거가 삶속에서 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4]
또한 본 서는 악으로 가득차 사탄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세상"과,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하느님의 자녀"를 구분하고 있다.[5]

개괄

  • 1장 : 머리말 : 생명의 말씀, 빛 속에서 살아감 (2장으로 이어짐.)
  • 2장 : 빛 속에서 살아감, 사랑의 계명 준수, 그리스도인과 세상, 세상의 정의, 의로움의 실천 (3장으로 이어짐.)
  • 3장 : 의로움의 실천, 사랑의 실천
  • 4장 : 영의 식별, 사랑과 믿음
  • 5장 : 사랑의 뿌리인 믿음, 삼위일체의 정의, 영생의 정의와 구원의 영원한 보장 맺음말 : 영원한 생명

스타일

본 서신은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게, 서신서 서두부와 종결부가 포함되어있지 않다.[6]
또한 본 서신은 문장구조의 다양성 없이 아주 간단한 스타일로 작성되었으며,[6]
접속사를 자주 생략(asyndeton)하였다.[7]
생각이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바오로 서신과는 다르게, 요한의 생각은 고리모양으로 움직이며 천천히 전개된다.[5]
이는 히브리 시가와 비슷하나, 대구의 두 번째 구절이 첫번째와 같은 의미를 갖는 히브리 시가와는 달리 본 서신에서는 첫 번째 구절에 살을 붙여가며 여러번 반복하여 재현부를 구성해나간다.[8]
정리하자면, 본 서신은 종교적 권고(paraenetic)의 스타일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권고는 "개인적인 간청, 옳고 그른것/참과 거짓의 대조, 수사적 질문의 사용" 등으로 대표된다.[6]

일부 학자들은 본 서신이 전통적인 2행 연구(parallel couplets) 선집에 대한 요한의 주석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에른스트 폰 돕쉬츠(Ernst von Dobschütz)와 루돌프 불트만이 처음으로 주장한 이 이론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최소한, 본 서신에서 시적 구조나 논리 구조에서 저자의 것과 구분되는 구절들이 꽤 많이, 종종 이어져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9]

저작성

본 서신의 저작성은 전통적으로 노년기의 사도 요한에 의해 에페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10] 본 서신의 내용, 언어, 그리고 논리 전개 방식은 요한복음, 요한 2서, 요한 3서와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데, 세 서신을 동일한 저자가 작성했다는 증거가 된다.[1] 19세기 말의 성서학자 에른스트 드윗 버튼(Ernst DeWitt Burton)은 요한 1서와 요한복음이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을 수 없다고 기술했고,[11]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이에 더해 "초기 기독교 전통과 현대 학자들의 대다수가 이 저작들의 저자가, 비록 사도 요한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사람이라는데 동의해왔다"고 말했다.[2] 이와 같은 주류 시각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에 의해 대표되는데, 그는 "사랑을 받던" 사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요한 1서를 두고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칭했다.[12]

그러나 다른 현대 신학자들은 본 서신의 이와 같은 위치에 도전하고 있다. 비록 세 서신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하인리히 율리우스 홀츠만(Heinrich Julius Holtzmann)과 C. H. 다드와 같은 학자들은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2] 이와 같은 시각에는 최소 두가지 요지가 있다. 첫째는 본 서신에서 문장의 서두에서 종종 지시 대명사를 사용한 뒤, 접속사나 불변화사(particle) 후에 앞에서 사용한 지시대명사의 정의나 설명문을 배치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스킬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6] 둘째로는, 본 서신의 저자가 "복음으로 알려지지 않은것들에 대해서 다양한 수사적 표현으로 조건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13]

목적


네번째 복음서는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요한 공동체 외부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도전받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요한 1,2,3서는 "요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기술"하고 있다.[14]

저자는 본 서신을 청자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1:4)하고, "죄를 범하지 않"고(2:1), "서로 사랑해야" 하며(3:11),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음(5:13)을 알게 하기 위해 본 서신을 썼다. 따라서 우리는 본 서신을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일반적인 목적과, 저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험을 제공하는 특수한 목적으로 나눌 수 있다.[15] 저자는 그가 관리하는 교회에 영향을 미친 이단 교사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10] 이들은 한때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이단적 가르침을 전한 적그리스도(2:18-19)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 교사들은 예수가 육신 없이 영으로만(4:2) 이 땅에 왔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인류의 죄에 대한 진정한 속죄가 되지 못한다(1:7)는 가현설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10]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케린투스라고도 불리는 원시 영지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출처 필요]

저자의 목적(1:1-4)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청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됨의 의미로, (1) 그리스도에 대해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그의 속량하심(1:7-9; 2:2,25; 3:5; 4:9,10,14; 5:11-13,20)과 그의 변호를(2:1; 5:6,7) 받고, (2) 사람에 대해선 성스러움(1:6; 2:15,16,29; 3:10,12), 복종(2:3; 3:6,24; 5:2,3,18), 순결함(3:3,18), 믿음(3:23; 4:3; 5:5), 그리고 사랑(2:4,7,8; 3:11,14,16; 4:7,8,12,19-21; 5:1)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쓰여진 반면에, 본 서신은 신자(5:13)들에게 쓰여졌다.[15] 본 서신에서 구약성경과 유대적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자는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으로 보인다.[10] 본 서신은 아마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선교사를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며, 요한의 사도성과 장로됨을 고려했을 때 회중들에게 큰 소리로 읽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6]

요한의 콤마

4세기 라틴어 번역본에 첨가된 삼위일체에 대한 구절은, 중세시대를 거치며 본문에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는데, 이를 요한의 콤마라고 한다.[17]
15세기 이전의 어떠한 헬라어 사본에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그의 1522년 신약성서 판본에 본 구절을 첨가해 출판하였다.[18]
그의 판본을 번역한 성경들 중에는 킹 제임스 성경(1611)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첨가된 구절을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다.

7For there are three that beare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8And there are three that beare witnesse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8세기부터 본문비평에 의거해 만들어진 번역본들은 위 구절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각주로서 포함하고 있다.

  1. 각주


  2. Harris, Stephen L., Understanding the Bible (Palo Alto: Mayfield, 1985) "1 John," p. 355–356

  3. Wilder, p. 214

  4. Barbour, p. 346

  5. Barbour, p. 348

  6. Burton, Ernest DeWitt (1896). “The Epistles of John”. 《The Biblical World》 7 (5): 366–369. JSTOR 3140373.

  7. Wilder, Amos (1957). 〈Introduction to the First, Second, and Third Epistles of John〉. Harmon, Nolan. 《The Interpreter's Bible》 12. Abingdon Press. 211쪽.

  8. Barbour, J. H. (1896). “The Structure of the First Epistle of Saint John”. 《The Biblical World》 9 (5): 341–348. JSTOR 3140289.

  9. Barbour, p. 342

  10. Wilder, p. 212

  11. Burton, p. 367

  12. Burton, p. 366

  13. Johannes Oecolampadius, Sermons on the First Epistle of John (A Handbook for the Christian Life) (1523; ET 2017), p. 59.

  14. Dodd, C. H. (April 1937). “The first epistle of John and the Fourth Gospe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Library》 21 (1): 129–156. doi:10.7227/bjrl.21.1.5.

  15. 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Edited by Raymond E. Brown, S.S.,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NY, William J. Dalton, S. J.; Roland E. Murphy, O. Carm. (emeritus) The Divinity School, Duke University, Durham, NC; [The Johannine Epistles, Pheme Perkins], with a foreword by His Eminence Carlo Maria Cardinal Martini, S.J.; Prentice Hall, Englewood Cliffs, New Jersey, 1990

  16. Barbour, p. 341

  17. Wilder, p. 210

  18. Houghton, H. A. G. (2016). 《The Latin New Testament: a guide to its early history, texts, and manuscrip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78–179쪽. doi:10.1093/acprof:oso/9780198744733.001.0001. ISBN 978-0-19-874473-3.

  19. McDonald, Grantley (2017). 〈The Johannine Comma from Erasmus to Westminster〉. Dirk van Miert, Henk J. M. Nellen, Piet Steenbakkers, Jetze Touber (eds.). 《Scriptural authority and biblical criticism in the Dutch Golden Age: God's word questioned》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61–72쪽. doi:10.1093/oso/9780198806837.003.0003. ISBN 978-0-19-880683-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 중 ‘태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로고스의 신격을 논함에 있어서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ς και ο λογος ην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θεος ην ο λογος. en arche en ho Logos) 라고 말한다.

이 분절에서의 강조점은 로고스가 계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다는 데 있다.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영원성(永遠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태초’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초’(太初)라는 말은 우리말의 문자 그대로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이나, 결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칠십인 역본(LXX) 창1:1에서도 요한복음1:1의 arche 를 쓰고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지 않다. 즉 창1:1에서는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시기를 ‘태초’라고 하여 시간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데 대하여 요1:1에서는 천지창조 이전까지의 영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1:1의 arche (아르케, 태초)는 aion (아이온, 영원) 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사실 태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트만은 이것을 단순히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선사성’(Vorgeschitiliche) 즉 영어의 pre-historical existence 로 표현하나, 로고스의 존재성에서의 그 개념은 오히려 영어의 atemporal (無時性) 또는 nontemporal 또는 비시성(非時性)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있어서 그는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agnnetos = ingenerate), 그는 무시간적(無時間的, timeless)이며, 불가시적(不可視的, invisible)이며, 무형적(無形的, impalpable)이며, 무감각적(無感覺的, impassible)인 분이었으나 우리를 위하여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이고 감각적인 분이 되셨다.

요1:1의 ‘태초’에 대한 원어를 보면 창1:1의 히브리어 bereshith 나, 그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본의 두 arche 나 신약 요1:1의 arche 나 모두 문자적으로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처음에’를 뜻하는 점에 똑 같다. 그러나 그 어휘가 요1:1에서는 창1:1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해석적인 번역을 시도한 것이 몇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중국어역 성경 중 소위 ‘구어역’(1962년 홍콩성경공회 ‘神版’)에서는 창1:1의 ebreshith 를 요1:1의 ‘太初’와는 달리 ‘起初’ 로 하고 있다. 이것은 요1:1의 로고스의 영원성=무시간성(無時間性)과 항1:1의 창조 역사(役事)의 시간성을 구별하고자 한 시도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1:1의 ‘太初’에 ‘초’(初) 자가 있는 한 창1:1의 ‘起初’와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성을 나타내지 못 한다. 중국어역 성경 문리역본(1854년 역)에서는 요1:1과 요일1:1의 ‘태초’를 ‘元始’로 번역하고, 창1:1에서는 ‘太初’로 번역하고 있어, ‘元始’가 ‘太初’보다 이전임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 ‘元始’의 ‘始,’자에도 ‘始作’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으므로 로고스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데는 충분하지 못 하다. 또 ‘初’ 즉 ‘처음’이라는 말도 그 자체가 벌써 시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거기에 ‘太’(‘가장’ 또는 ‘아주 크게’라는 뜻)라는 한정사가 붙을지라도 그 개념을 변경시키지 못 한다. 왜냐하면 ‘처음’이나 ‘크다’라는 개념은 거기에 아무리 그 정도가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한성(有限性)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영어의 ‘in the beginning,’ 독일어의 ‘Am Anfang,’ Au commencement,’ 일어의 ‘はじめに’(한자 표기로는 ‘始’ 또는 ‘太初’) 등 모두에서 같다. 우리말 성경에서 요1:1을 보면, 개역(1938년), 새번역 신약전서(1967년), 표준새번역(1993년), 개역 개정판(1998년) 등에서는 다 ‘태초에’라 하고 있으나, 예수셩교젼셔(1887년, 로스 역 신약전서)에서는 ‘처음에,’ 공동번역(1971년)에서는 ‘한 처음에,’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경(1992년)에서는 ‘맨 처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쉬운 번역 또는 풀이역의 경향이 일어나,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번역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966년의 ‘Good News For Modern Man'(소위 Today's English Version; 후의 Good News Bible) 초판에서는 "From the very beginning" 로, 제2판에서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로 번역하였고, 독일어 번역 'Die Gute Nachricht'(1971년)에서는 “Am Anfang, bevor die Welt geschaffen”(처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으로 번역되어 있고, 香港聖經公會 발행의 現代中文譯本(1975년)에서는 ‘宇宙被造以前’으로, 當代聖經(1985년)에서는 ‘萬有之先’으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인의 성경(1985년)에서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등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역을 하고 있다.



태초에(太初)


1.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잠언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3.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5.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6.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7. [히브리서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창 1:1 (Genesis 1:1)

[개역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영어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영어A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요 1:1 (John 1:1)

[개역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헬라원어]  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ς και ο λογος ην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θεος ην ο λογος
[영어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AS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일 I:1 (John 1:1)

[개역성경]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원어] ο ην απ αρχης ο ακηκοαμεν ο εωρακαμεν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ημων ο εθεασαμεθα και αι χειρες ημων εψηλαφησαν περι 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영어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영어 NI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 AS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창세기 1:1에 있는 “태초”라는 용어는 히브리 원어로 בְּרֵאשִׁית(베레쉬트)인데, 이것을 헬라어 ἐν ἁρχᾖ(엔 아르케)로 번역했고(LXX),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를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태초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ἐν ἁρχή)라는 말은 요한복음 저자의 서신인 요한일서에는 앞프 아르케(απ αρχης)'"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from the beginning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 “태초부터”입니다.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용어) 자체가 시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세기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목표와 그 접근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창세기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관한 것
요한복음의 목표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에 관한 것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어원학적인 접근(etymological approach)과 신학적인 접근(theological approach)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어원학적 접근 (Etymological Approach)

(1)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는 그 용어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과 달리 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모든 것들(시간, 장소, 질서, 계급 등)의 시작(beginning)과 첫째(the first), 우두머리(head), 주권(sovereignty), 권세(power), 원리(principle)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첫째, 처음 곧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본다면, “태초”는 모든 것 즉 만물(피조물)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태초에 관하여는 이견(異見)이 없이 “시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에 관하여는 시간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영원”과 관련시켜, 시간 이전, 영원의 아득한 어느 순간(momentum)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원어에 있어서 tyviareB(베레쉬트)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는 분명히 시간의 시작의 한 지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tyviareB(베레쉬트)는 전치사 eB(베, in)와 명사인 tyviare(레쉬트, beginning)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tyviare(레쉬트)는 영어 beginning(시초), former state(이전 상태), former times(전번), 그 종류의 첫째로서 시간에 관련해서는 first fruit(초실), first born(장자)의 뜻으로, 위계(dignity)에 관련해서는 the first(첫째), chief(우두머리)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헬라어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도 전치사 ἐν(엔, in)과 ἁρχή(아르케, beginning)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ἁρχή(아르케)는 a beginning(시초), origin(기원), first cause(제1의 원인)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영원”은 헬라어로 αἰών(아이온)으로, 신학적인 의미로 존재의 기간(period of existence)을 말할 때,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life(생명), life time(생명시간), life itself(생명자체)로 영원성(eternity)을 의미합니다. 질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는 영원의 어느 한 지점(a point of eternity)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영원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있지만, 영원이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본질상 시간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연속으로 보고 구속을 논하다가 결국 구원사학파(Heilgeschichte School)로 낙인찍혔습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생명”(life)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시간”(timelessness)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αἰών, 아이온)이란 시간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어원학적으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 시간의 시작점이지, 영원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인간에게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원은 하나님에게 관련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전 3:1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의 탈을 벗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2. 신학적 접근 (Theological Approach)

(1) 신학적으로 “태초”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시간의 시작점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도 시간의 시작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화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화육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던 예수님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라는 의미에서 로고스(λογός)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적 존재에, 그리고 레이마(ῥῆμα, rJhvmato" Cristou)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존재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현재적 실존뿐만 아니라, 시간 전, 즉 창세전에 선재하신 영원 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요한의 “태초”에 대한 목표(goal)와 접근방법(the method of approach)이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주)에, 요한은 구속(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물론, 출발점은 동일합니다. 곧 그 출발점이 “태초”인데, 이 태초의 의미는 모세(창세기)에게 있어서나 요한(요한복음)에게 있어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그 목표(goal)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요한은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출발점(starting point)에서 모세는 “천지창조”를 논하고, 요한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좀 더 신학적 논리로 말하자면, 모세는 “태초”에 관하여, 창조론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요한은 구속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의미로서의 출발점인 “태초”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모세는 그 지점(태초)에서 천지창조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진행하여 “창조역사”를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 지점(태초)에서 시작하여, 영원 전에도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유추하여 그 분이 바로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여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구속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태초로부터 영원 전에도 계시고, 육신이 되어 현재 우리 가운데에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 다시 말하면, 모세는 “태초”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 스스로 계신 분(I AM THAT I AM, 출 3:14)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yhila)께서 영원, 즉 창세전에 신의 회의(Divine Council)에서 내적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컨셉(concept)을 의논하시고, 이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시점이 바로 “태초”인데, 이 태초마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속한 것입니다. 이 “태초”가 창조세계와 구속세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요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시점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계셨다”(ἦν)는 단어는 미완료형(imperfect)의 부정과거로, 자존의 영구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원 전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태초라는 시간의 시점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태초가 창조되기 전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창조의 시점인 “태초” 바로 그 때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계시론적 차원에서 개진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씀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계시론적 차원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이 성경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나타내심, 즉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태초”라는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운동이 시작되었고, 구속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시간” (God's time)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시점, 즉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만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건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구속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이 하나님의 창조운동과 구속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며,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본질(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빌 2:6).

(6) 다음으로 요한일서의 태초도 역시 동일한 “창조의 시점”으로 생명의 말씀의 현존하신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계신 분으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계 1: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요 1:1~2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는데, 말씀이 계신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하셨고, 그 때가 곧 “태초”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셔서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이 곧 창세기의 태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재하신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시점이 태초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요 1:3).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일서 1장 1절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말씀은 창세전에 있던 생명의 말씀(선재하신 그리스도)이 창조 시, 즉 태초부터(창조하신 그리스도) 계셨고, 재창조시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성육하신 그리스도)로 이 모두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계 1:4, 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여기서 특히 창조 시인 태초부터, 즉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실,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ing Christ)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하셔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고 몸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결 론 (Conclusion)

(1) 창세기의 “태초”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 역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태초에”(έν ajrch)이거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pro; to;n kovsmon) 말씀이 계셨다거나 “창세전에”(pro; to;n kovsmon)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는 창조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태초에”(έν ajrch)와 “태초부터”(ajp! ajrch'")라고 언급한 것입니다.(cf. 요 17:5, 24; 엡 1:4; 마 13:35, 24:21, 25:34; 눅 11:50; 요 9:32; 롬 1:20; 엡 1:4; 벧전 1:20; 계 13:8).

(2) 창세기에서 모세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같은 “태초”라는 시점에서 삼위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을 바라보며, 그 근본으로부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요한일서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우리가 처음부터(구약과 신약시대) “들은 바요,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해서 성육하신 성자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창조론에,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같은 시점인 “태초”이지만, 모세는 그 태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요한은 그 태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세계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는 태초에서 창조세계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은 태초에서 말씀(λογός)이신 하나님(!yhila)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성육하신 구속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방향, 즉 양면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절대성의 태초”(Absolute Beginning)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태초와 요한의 태초는 동일한 것으로 전개방향과 목표가 다를 뿐입니다.

(4) 결론적으로, 모세가 사용한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이 사용한 요한복음의 태초는 같은 시점으로 “시간의 시작”(the beginning of time)입니다. 단지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goal)와 전개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모세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요한의 목표의 초점은 구속(redemption/salvation)에 있기 때문에, 접근방법과 진행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태초에 관한 도표해설

<태초>

[창세기]

(영원) 창세전 .................................... ⇢ 창조 .......................⇢ 창세후 역사 (종말)
창세전에 계신 하나님이 ................ ⇢ 태초에 창세에 계셔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종말)

[요한복음]

(영원) 창세전 ⇠그리스도(선재) .................... ⇢ 구속 그리스도(화육) ⇢ 예수 ............ ⇢ (종말)
창세전에 계신 그리스도가 ............... ⇢ 태초에
(창세에)도 계심 창세전 영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 ⇢ 말씀이 계속해서 존재해 오시며 바로
계시니라 창세, 즉 태초에 계셨다는 뜻
(선재의 X가 창조 시에도 계심)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
계셨으니 (창세전에) 께서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
(요 1:1)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1:14) (성육신) (신약시대)

<>[요한일서]

(영원) 창세전 ⇠ ................말씀/그리스도 구속 그리스도(화육)⇢ 예수 ⇢............ (종말)
창세전의 생명의 말씀 ............... ⇢ 태초부터
창세부터 ...........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성육하신 그리스도)




요한일서(ⅠJohn)

Ⅰ. 배경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다.
요한이 노인이 된 후 90∼91년경 에베소에서 기록 하였다.
이 서신에는 구약의 인용문이 한 곳도 없다.

Ⅱ. 내용과 주요 사상

이 때는 교회와 회당이 완전히 분리 되었고 믿음과 행위의 논쟁도 끝난 때이다.
그러나 이때 거짓 교훈들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상으로서 나중에는 “가현설”이란 이단으로 발전 되었다.
그리고 죽은 분은 인간인 예수 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고난에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서신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
둘째는 교회에 침투해 온 거짓 교회를 타파시키기 위한 것

이 서신에는 “빛”(1:7, 2:9, 10)과 “사랑”(2:5, 7, 10, 15. 3:1, 2, 10, 11, 14, 16, 17, 18, 21, 23. 4:1, 7, 8, 9, 10, 11, 12, 16, 17, 18, 19, 29, 21. 5:1, 2, 3) 이란 두 단어가 두드러진다.


Ⅲ. 개요

서론 1:1∼4

 1.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친분을 선언함 1:1∼3

 2. 편지를 쓰는 목적 1:3

 (1)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북돋우기 위하여 1:3 하단

 (2)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하여 1:4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귐을 위한 요구사항들 1:5∼10

 1. 빛 가운데 행하라 1:5∼7

 2. 죄를 자백하라 1:8∼10


무죄한 생애에 대한 권면 2:1∼28

 1. 대언자이시며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 2:1, 2

 2.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함 2:3∼6

 3. 새 계명 2:7∼11

 4. 영적 자녀들에 대한 개인적 호소 2:12∼28

  (1) 쓰는 이유 2:12∼14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2:15∼17

  (3) 적그리스도들과 그들의 이단을 경계하라 2:18∼26

  (4) 그의 오심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2:27, 28

 하나님의 아들들과 마귀의 자녀들과의 대조 2:29∼3:24

 1. 하나님의 아들들의 의 2:29∼3:7
 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8, 9 
 3.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10∼18
 4.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확증하심 3:19∼24

 진리와 사랑과 믿음은 사귐에 필수적임 4:1∼5:12

 1.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 4:1∼6
 2.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함 4:7∼21
 3. 믿음은 승리와 생명을 가져옴 5:1∼12


Ⅵ. 결론 5:13∼21

1. 목적의 재천명 5:13
2. 무죄에 대한 권고 5:14∼17
3.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라는 마지막 격려 5:18∼21 

요한일서는 2세기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그릇된 영지주의에 독자들이 직면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는 종교 철학으로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이원론의 영향으로 오직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주장). 이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결책은 “영지(gnosis)” 또는 “지식”인데, 사람은 이 지식을 통해 세속적인 자리에서 영적인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가현설(Docetism)인데 사람 예수는 단지 유령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케린투스설(Cerinthianism) 예수님은 두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신으로 활동한다는 이론입니다.

요한일서의 핵심 목적은 믿음의 내용에 경계를 정하고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핵심 구절 :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핵심 용어는 “지식”으로,
관련 어휘와 함께 요한일서에서 적어도 13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약 : 

거짓 영적 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큰 문제였습니다.
신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완성된 신약 성서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스스로 지도자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관한 부분을 바르게 알렸습니다.

요한 서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초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자입니까?
요한은 우리가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언제나 헐뜯고 싸운다면, 또는 이기적인 자세로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은 신앙이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죄책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결 : 

죄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요한일서 2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요한은 죄와 관련하여 성경 전체에서 가장 처음에 있었던 온 세상을 뒤흔드는 가장 끔찍한 유혹의 세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처음 죄는 창세기 3장 6절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세 가지 유혹에 의해 무너진 결과였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함), 안목의 정욕(보암직도 함), 그리고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입니다.

적용 : 

요한일서는 사랑과 기쁨의 책입니다.
이 서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및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를 설명합니다.
이 서신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행복과 진정한 기쁨을 구분 지으면서 어떻게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만일 우리가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을 취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갈망하는 참된 사랑, 헌신, 친교와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일서 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1
태초
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
들은 바요'(*,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 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 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일서 1장  / 생명의 말씀이 나타나시다

1.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보여 주셔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생명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을 널리 알리려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는 까닭은, 여러분이 우리와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입니다.
4.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완전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써 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들은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빛 속에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어 줍니다.
8. 만일 우리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꼭 지키시는 분이며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

1.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짓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이 죄를 짓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몸소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음을 압니다.
4.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안다.” 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옛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이미 들은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이 계명을 새 계명으로 써 보냅니다.
이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여러분의 삶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누구든지 빛 속에 산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10.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사람 속에는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1.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12.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13.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세상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젊은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14. 세상의 어린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된 여러분 내가 이 글을 여러분에게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셨던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굳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 그 악한 자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 줄 것들을 원하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17. 이 세상은 곧 사라집니다.
세상이 낳은 욕망도 세상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의 적을 따르지 마라

18.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여, 지금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대로 벌써 많은 그리스도의 적이 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19. 그리스도의 적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속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속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났다는 사실이,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 진리에서는 결코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아버지도 아들도 부인하는 자입니다.
23. 누구든지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버지 또한 모시는 사람입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배운 것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배운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 살고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서 살 것입니다.
2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 곧 영원한 삶입니다.
26. 내가 여러분을 속이려 하는 자들에 관해서 지금까지 썼습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니, 여러분에게는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모든 것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28.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우리가 자신을 갖게 되고, 다시 오시는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29.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면,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지킵니다.
4.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반항합니다.
죄는 곧 법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7.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습니다.
8.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오신 까닭은 악마의 일을 쳐부수려는 것이었습니다.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아무도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악마의 자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계명입니다.
12.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마에게 속했기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가 왜 동생을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한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15.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그 누구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17. 살림살이가 넉넉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가 어렵게 사는 형제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 그리고 우리가 비록 마음에 찔림을 받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찔림 받을 일이 없을 때 자신 있게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하나님의 계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1.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모두 믿지는 마십시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은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라고 고백하는 예언자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3. 그러나 예수께 대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는 예언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적의 영을 가진 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세상에 오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4.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이 거짓 예언자들을 이겨 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은 세상에 와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6.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리의 성령을 가졌는지 거짓의 영을 가졌는지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은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10. 이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3.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15.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사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삽니다.
16.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품으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사십니다.
17.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됩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날에 우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입니다.


요한일서 5장  /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기다

1. 누구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된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아버지의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 힘든 것이 아닙니다.
4.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5. 그러니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로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 사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6. 물과 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7. 예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이가 셋 있습니다.
8. 곧 성령과, 그분이 받으신 세례의 물과, 그분이 당하신 죽음의 피입니다.
이 셋의 증언이 한가지로 똑같습니다.
9. 우리는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증언은 훨씬 믿을 만한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해 주신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증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해 주신 증언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하신 증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청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청한 것은 이미 모두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6. 어떤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보거든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 형제의 지은 죄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 형제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17. 의롭지 못한 일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가 다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18.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은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니,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온 세상은 악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과, 우리로 하여금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그분이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나의 어린 자녀들이여, 거짓 신들을 멀리하십시오.

























































이다니엘 / 이화선


04-11-2024(목)

2008년 2 월달에  찾아온 스트록으로 인해 왼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와 있는 환자입니다.
미국의 제도와 복지가 잘되어 있어서 혜택을 받고 살게 되어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중년(52살)에  찾아온 장애로 인해 서서히 외부와의 움직임이 많이 줄었고 (특히 코로나시대때) 타인이 집에 방문하는것도 어려운 시절을 지내다 보니 가족 돌봄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요.

 집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가족의 케어를 받게 된  상태가 저에게는  꼭 필요한 지원임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가족돌봄의 프로그램은 저와 같은 중도 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에게는 꼭 필요한 제도라 생각 합니다.

오른쪽 손가락은 움직여서  한자한자 텃치해서 글을 쓰며 멜을 드립니다.
가족 돌봄의 혜택을 계속 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구글 번역 /

This patient is paralyzed in his left arm and leg due to a stroke that occurred in February 2008.
I always live with a grateful heart because I get to live in the United States and benefit from the good systems and welfare systems in the United States.
Due to a disability that came to me in middle age (52 years old), my movement with the outside world gradually decreased a lot and it was difficult for others to visit my home (especially during the COVID-19 era), so I am so fortunate and grateful to be able to enjoy the benefits of family care.
I would like to tell you that being able to receive care from my family in a natural way at home is the support I need.
I believe that the family care program is a necessary system not only for people with severe disabilities like me, but also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I move my right finger and touch each character to write a message.
Please ensure that they continue to receive the benefits of family care.


파파고 번역

This patient has been paralyzed in his left arm and leg due to Stroke, which came to him in February 2008.
The system and welfare of the United States are well established, so I am always grateful to live with benefits.

Due to the disability that came to middle age (52), my movement with the outside world gradually decreased (especially during the COVID-19 era), and I'm so fortunate and grateful that I can enjoy family care benefits because I had a difficult time for others to visit my home

I want to tell you that the state of being cared for by my family in a natural way at home is a necessary support for me.
I think the family care program is an essential system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as well as people with disabilities like me.

The right finger moves and gives you a mel while writing Chinese characters.
Please allow me to continue to benefit from family care.

찾아오다
  • 1.(방문하다) visit, look sb up, (informal) drop by[around], (informal) drop in (on)
  • 2.(맡기거나 잃어버린 것을) pick up
  • 3.(계절·시기·사건 등이) come, (주로 좋지 않은 시기가) set in
  • 1.(신체) arm
  • 2.(비유적)
이월[二月]
  • 1.February ((abb.) Feb.)
다리
  • 1.(사람·동물 등의) leg, (오징어·낙지 등의) tentacle(s)
  • 2.(가구·안경 등의) leg, (안경의) temple bow
  • 3.(비유적)
마비[痲痺·麻痺]
  • 1.(신체의) [명사] paralysis, numbness, [동사] be paralyzed; (추위 등으로) be[go, get] numb
  • 2.(교통·업무 등의) [명사] paralysis, [동사] be paralyzed
  • 3.(도덕성·판단력 등의) [명사] paralysis, [동사] be paralyzed
왼쪽
  • 1.the left, one's left
인하다[因―]
  • 1.be caused by, arise from, result from, be due to
되다
  • 1.(새로운 신분·지위 등을 갖다) be, become
  • 2.(다른 것으로 변하다) turn[change] (in)to, (발전하다) develop into
  • 3.(때·시기 등에 이르다) be, come, become; (나이가) reach, (formal) attain; (경과하다) pass
제도[制度]
  • 1.(조직적인) system, (관습적인) institution
오다
  • 1.(어떤 장소로) come; (나타나다) turn up, show up; (방문하다) visit
  • 2.(학교·군대·회사 등에)
  • 3.(소식·연락·편지 등이) come
미국[美國]
  • 1.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US, the USA, America, (S) the States
[八]
  • 1.(여덟)eight
혜택[惠澤]
  • 1.benefit
  • 1.always, all the time, the whole time
복지[福祉]
  • 1.welfare
있다
  • 1.(어떤 장소에) be; (건물 등이) stand, be located (in/at), be situated; (도시 등이) lie
  • 2.(시설·장치 등이) have; (시설이) be equipped with, be provided with
  • 3.(존재하다) be, exist; (발견되다) be found
다리
  • 1.(교량) bridge
  • 2.(비유적) bridge, go-between
제도[製圖]
  • 1.draft, drafting, drawing, draw
잘되다
  • 1.(일이 바라던 대로 되다) go well[right]; (좋은 결과가 나오다) come[turn, work] out well
  • 2.(장사·사업 등이 흥하다) prosper, thrive, flourish, go well[fine, smoothly]
  • 3.(성공하다) succeed, go well[fine, smoothly]




paralyze[pǽrəlàiz]
  • 1.마비시키다
  • 2.무력[무능]하게 만들다, 쓸모없게 만들다, 무효가 되게 하다
have미국∙영국[həv; əv 강형 hæv]
  • 1.(물적 소유[소지]의 뜻으로) 가지고 있다
  • 2.<…을>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
  • 3.<…을> (몸에 지녀) 가지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다 ((about, on, with, around))(cf. HAVE on)
  • 4.재산이 있다, 돈을 가지고 있다
  • 5.[pl.; 보통 the ~] 유산자(有産者), 가진 자; (자원·핵 등의) 보유국, 가진 나라
  • 6.[영·구어] 사기, 협잡; 놀리는 가벼운 농담
and미국∙영국[ənd; ən 또한 n 특히 /t/와 /d/ 다음에서 강형 ænd]
  • 1.[문법상 같은 성질의 어·구·절을 대등히 연결하여] …와 …, 및, 그리고
  • 2.[between … and …로] …와 …(와의 사이에)
  • 3.[both … and …로] (…도) …도
patient미국∙영국[ˈpeɪʃnt]
  • 1.인내심[참을성] 있는, 끈기 있는, 느긋한 ((with)); 참을 수 있는 ((of, with))
  • 2.끈기 있게 일하는, 근면한; <연구 등이> 지속적인
  • 3.환자, 병자
  • 4.어떤 행위를 당하는 것[사람], 수동자(受動者)(opp. agent)
left미국∙영국[left]
  • 1.왼쪽의, 왼편의
  • 2.[보통 L~]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좌익의, 좌파의
  • 3.왼쪽에, 왼편에, 좌측에
  • 4.[the ~, one’s ~] 좌(左), 좌측, 왼쪽, 왼편
  • 5.[보통 the L~] [정치] 좌익, 좌파 (세력), 좌파 정당 (의원), 혁신파, 급진당; 의장석 좌측의 의원들
arm미국∙영국[ɑ́ːrm]
  • 1.팔; (동물의) 앞발, 앞다리
  • 2.팔처럼 생긴 것; (나무의) 큰 가지, (옆으로 내민) 가로대; 닻가지, 지렛대; (옷의) 소매; (의자의) 팔걸이; (배의) 활대; (안경의) 테; (강의) 지류; (바다 등의) 만(灣)
  • 3.팔을 끼고 동반하다, <사람의> 팔을 잡아 데리고 가다
well미국∙영국[wél]
  • 1.만족스럽게, 잘, 훌륭하게, 더할 나위 없이; 바르게, 선량하게(opp. ill, badly)
  • 2.능숙하게, 솜씨 있게, 잘
  • 3.[P] 건강하여, 튼튼하여 ((이 의미로는 최상급을 쓰는 일이 드묾; ⇒ healthy [유의어/] ))
  • 4.[비교 없음] 건강한
  • 5.[놀람·의심·망설임 등을 나타내어] 이런, 저런, 어마, 뭐라고, 글쎄
  • 6.[안심·체념·양보 등을 나타내어] 아이고, 후유; 에라; 과연; 그래, 글쎄; 원 참
unite미국∙영국[juˈnaɪt]
  • 1.결합하다, 합치다, 통합하다, 일체가 되게 하다, 합병하다 ((to, with))
  • 2.결혼시키다, (정신적으로) 결합하다
  • 3.하나[일체]가 되다, 합일[합체]하다, 결합하다 ((with))
  • 4.<사람·국가 등이> (…에 대해) 동맹[연합]하다 ((against)); 제휴[일치]하다, 통합[단결]하다
the미국∙영국[ðə; ði 강형 ðiː]
  • 1.[앞서 나온 명사, 또는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 가리키는 것이 정해진 가산명사에 붙여]
  • 2.[앞서 나온 명사, 또는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 가리키는 것이 정해진 불가산명사에 붙여]
  • 3.[한정 어구가 따르는 가산 또는 불가산명사에 붙여]
  • 4.[형용사·부사의 비교급 앞에 붙여] 그만큼, 도리어 더
  • 5.[상관적으로 형용사·부사의 비교급 앞에 붙여 비례적 관계를 나타내어]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system미국∙영국[ˈsɪstəm]
  • 1.(통일된) 체계, 조직, 계(系); (통신·수송 등의) 조직망, 시스템; 통일성
  • 2.[the ~] (지배) 체제
  • 3.(학문·사상의) 체계, 학설, 가설
left미국∙영국[léft]
  • 1.LEAVE의 과거·과거분사
state미국∙영국[steɪt]
  • 1.[sing.] 상태, 형세, 형편, 사정
  • 2.[보통 a ~] (정신적인) 상태; [구어] 긴장[흥분] 상태, 신경과민 상태; [고어] (병의) 위기, 고비
  • 3.[법] (공식으로) 진술하다, 표명하다, (분명히) 말하다; 확언[언명]하다
  • 4.<문제·사실 등을> (문서로) 명확히 제시하다, …라는 것을 나타내다
  • 5.국가의, 국사에 관한; 정부의
  • 6.[S~] 주의, 주립의, 주가 관리하는
welfare[│welfer]
  • 1.복지, 복리, 번영, 행복
  • 2.복지 사업, 후생 사업[시설]; [미] 사회 복지, 생활 보호([영] social security); [the ~] [주로 영·구어] 정부 복지[후생] 기관
  • 3.복지 시설의, 복지 원조를 받는
arm미국∙영국[ɑ́ːrm]
  • 1.[보통 pl.] 무기, 병기, 화기 (=weapon)
  • 2.[pl.] 군사, 전쟁, 전투, 투쟁; 병역, 군인의 직
  • 3.전쟁 상태로 들어가다, 전투 준비를 하다 ((against)); 무장하다
  • 4.(…에) 태세를 갖추다 ((against))
  • 5.무장시키다, <배를> 장갑하다 ((with)); <호신용 무기 등을> 몸에 지니다
  • 6.<무기 등에 …을> 장비하다 ((with))
well미국∙영국[wél]
  • 1.우물, (유전 등의) 정(井)
  • 2.샘, 광천,[pl.] 광천[온천]지
  • 3.솟아 나오다, 내뿜다, 분출하다, 넘쳐 나오다 ((out, forth, up))
  • 4.솟아 나오게 하다, 분출하다
establish미국∙영국[ɪˈstæblɪʃ]
  • 1.<국가·학교·기업 등을> 설립하다, 개설[창립]하다; <관계 등을> 성립시키다, 수립하다 (=found)
  • 2.<제도·법률 등을> 제정하다
  • 3.<사람을> (장소·직위·직업에) 취임[종사]시키다, 앉히다(install), 자리 잡게 하다, 안정시키다 (→established)
unite미국∙영국[júːnait]
  • 1.[영국사] 유나이트 금화 ((James 1세·Charles 1세 시대에 발행된 금화, = 20 shillings))







02-26-2024(월)

다니엘의 생년월일은 1983년 9월 2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발육이 늦는다고 생각하였으나  늦어도 너무 늦는 것같아 서울에 올라가서 검진한 결과 갑상선 호르몬이 문제라고 하여 그 계통의 약을 복용하려고 시도하면 약을 모두 토해버려 약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서울 성모병원 진단).

취학 년령이 되어(8세) 입학통지서를 받았으나 도저히 정상 입학이 불가능하여 울구준 보건소에서 발급하는 취학을 1년 연장하고 계속 발육 상태를 지켜보았지요.

그러나 1년 후에도 정상이 아니라 서울 삼육재단에서 운영하는 삼육재활학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였는데 다니엘은 그 학교에 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하여 결국은 목회지를 울산에서(온산제일교회) 서울 숭실중고등학교내에 설립된 숭실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다니엘의 병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던 중 마침 세브란스병원에 뉴욕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긴 "고창준박사"를 만나서 진단한 결과 처음으로 다니엘의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쟈베트).

고창준박사의 소견으로는 선천적인 장애로 태어났기 때문에 뉴욕으로 가면 이러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신사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마침 일반국민학교에 장애인 학급이 운영되어 그 학교를 졸업하고 상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상신중학교에 입학한 후 중학교 내에 장애인 학급이 있기에 그 학급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뉴욕에 거주하는 어머님 김은신권사님으로부터 자녀초청을 받았는데 이주허가를 받아 전가족이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후에 다니엘이 다시 뇌파 검사를 받았는데 이때 담당 미국 의사의 진단은 "댄디 워커"라고 합니다(2001년).

다니엘이 이미 중학교를 마쳤기 때문에 뉴욕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언어 문제로 우리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려워 이주민 학생들을 위한 Language School을 찾아 맨하튼에 있는 Liberty High School에 입학을 하고 1년을 수학했습니다.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이유는 나이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할 나이가 되어 더 이상 고등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퀸즈 장애인 센터에서 장애인으로 등록하고 장애인 연금을 받으라고 제안하였으나 다니엘은 장애인 연금을 받지 않겠다고 본인이 사인을 하지 않아 결국에는 그 센터에서 진행하는 훈련 과정과 취업 알선 프로그램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기회를 찾기 위하여 브롱스에 위치한 직업 훈련학교를 찾아가 면접을 하던 날 마침 눈이 많이 내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그 직업훈련학교에는 유색 인종 학생들이 많아 다니엘이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 학교에 다니는 것도 어렵게 되었지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결국 이제는 40세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슨 원인인지를 알려고 2023년 뇌파검사 및 뇌 MRI 촬영을 마쳤습니다.
뇌신경외과 전문의사의 소견은 선천적 장애로 인하여 수술하는 것은 어렵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2024년에도 다시 중국인 뇌신경외과 전문의사로부터 동일한 진찰 및 과정을 거쳐 의학적인 방법은 없다고 하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다니엘은 더욱 힘들어 하며 뇌 수술을 받고 싶다고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2-21-2024(수)

이다니엘 가족 단톡방

커뮤니티 > CST 체험 > 뇌수종과 댄디 워커 증후군(Dandy-Walker) - http://www.cstkorea.com/bbs/board.php?bo_table=EXPERIENCE_BOARD&wr_id=318&page=9

뇌수종과 댄디 워커 증후군(Dandy-Walker)


댄디 워커(Dandy-Walker)증후군이라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질문드립니다.
댄디 워커 증후군일때에는 어떻게 치료를 하면 좋을까요?

답변⇒

댄디-워커 증후군이란
-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거나
- 소뇌의 이상 발육으로 인해 4뇌실의 배출구가 막혀서, 뇌수종이 발생되는 증후를 말합니다.
문제는 왜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고 소뇌의 조직 변성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뇌수종을 유발하는 조직의 변성은 대부분 팽창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쉽게 조직이 붓는다는 것입니다.
왜 조직이 붓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인체 조직은 열에 의한 자극을 받게 되면 붓거나 팽창하게 됩니다.
일 예로 고열 감기로 인해 편도가 붓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열에 의한 자극으로 인해 임파선이나 혈관이 팽창하게 되면 그 영향으로 인해 조직이 팽창되게 됩니다.
팽창하는 과정에서 물이 차는 조직은 낭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 4뇌실의 낭종도 역시 열에 의한 염증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죠..
소뇌나 기타 뇌조직의 변성도 열 자극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열 자극이 어느 쪽으로 작용했느냐에 따라서 수도관이 막히기도 하고 지주막에 낭종이나 종양이 발생되기도 하고 뇌실에 유두종이 발생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댄디-워커 증후군으로 인한 뇌수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자극에 대한 반응이 남아 있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대개 뇌에 가해지는 열은 인체 상부에서 발생되는 경우가 많고, 열감기나 감염 등에 의해서 주로 발생됩니다.
특히 겨울철 감기등은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열성 음식, 자극적인 음식, 약물 부작용, 심한 스트레스 등에 의해서도 열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열반응이 있다면 우선 열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열을 내려주기 위해서는 열발생의 원인을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치료 역시 허약한 상태의 개선위주로 조치하게 됩니다.
그 다음 열반응이 감소된 상태라면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입니다.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허약한 상태가 없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열자극을 받고 난 다음 정상적인 기혈의 흐름이 확보되고 있는가를 진단해야 합니다.

만성적인 상태라면, 열에 대한 자극을 제거하고 허약한 상태를 보강하면서 현재 막혀 있는 기혈의 흐름을 소통시켜 주면 뇌수종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수술 후에 합병증이 나타나고 있다면 어떠한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원인 치료에 주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뇌수종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댄디 워커(Dandy-Walker)증후군이라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질문드립니다.

댄디 워커 증후군일때에는 어떻게 치료를 하면 좋을까요?

 

답변⇒

댄디-워커 증후군이란

     -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거나 ,

    - 소뇌의 이상 발육으로 인해 4뇌실의 배출구가 막혀서 ,

뇌수종이 발생되는 증후를 말합니다.

 

문제는 왜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고 소뇌의 조직 변성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뇌수종을 유발하는 조직의 변성은 대부분 팽창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쉽게 조직이 붓는다는 것입니다.

 

왜 조직이 붓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인체 조직은 열에 의한 자극을 받게 되면 붓거나 팽창하게 됩니다.

일 예로 고열 감기로 인해 편도가 붓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열에 의한 자극으로 인해 임파선이나 혈관이 팽창하게 되면

그 영향으로 인해 조직이 팽창되게 됩니다.

팽창하는 과정에서 물이 차는 조직은 낭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 4뇌실의 낭종도 역시 열에 의한 염증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죠..

소뇌나 기타 뇌조직의 변성도 열 자극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열 자극이 어느 쪽으로 작용했느냐에 따라서 수도관이 막히기도 하고

지주막에 낭종이나 종양이 발생되기도 하고 뇌실에 유두종이 발생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댄디-워커 증후군으로 인한 뇌수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자극에 대한 반응이 남아 있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대개 뇌에 가해지는 열은 인체 상부에서 발생되는 경우가 많고,

열감기나 감염 등에 의해서 주로 발생됩니다.

특히 겨울철 감기등은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열성 음식, 자극적인 음식, 약물 부작용, 심한 스트레스

등에 의해서도 열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열반응이 있다면 우선 열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열을 내려주기 위해서는 열발생의 원인을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치료 역시 허약한 상태의 개선위주로 조치하게 됩니다.

 

그 다음 열반응이 감소된 상태라면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입니다.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허약한 상태가 없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열자극을 받고 난 다음 정상적인 기혈의 흐름이 확보되고 있는가를

진단해야 합니다.

만성적인 상태라면, 열에 대한 자극을 제거하고 허약한 상태를 보강하면서

현재 막혀 있는 기혈의 흐름을 소통시켜 주면 뇌수종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수술 후에 합병증이 나타나고 있다면

어떠한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원인 치료에 주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뇌수종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뇌하수체종양클리닉 | 삼성서울병원 - http://www.samsunghospital.com/dept/medical/diseaseSub01.do?CONT_SRC_ID=09a4727a8000f20c&CONT_SRC=CMS&CONT_ID=3451&cPage=1&CONT_CLS_CD=001020001015&DP_CODE=PA&MENU_ID=003007&TAB=DIS_CATE&CONT_CLS_CD=001020001015


[유전성 질환] 댄디워커증후군

관련진료과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질환명 : [한글명] 댄디워커증후군 [영문명] Dandy-Walker syndrome

정의

댄디-워커 증후군은 제 4뇌실의 출구가 부분적 또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에 뇌척수액의 흐름이 차단되어 제4뇌실의 확장 및 소뇌 발달 부전을 보이는 선천적 기형 질환입니다. 또한 소뇌 발달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운동 능력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원인

유전적인 요인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나 아직 뚜렷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단일유전자 질환이나 상염색체 열성질환, 성염색체 우성질환 또는 염색체 이상과 관련이 있는데, 이중 가장 흔한 것이 삼염색체증(Trisomy)입니다. 태생기에 풍진, 거대세포바이러스, 톡소플라스마 감염과 같은 감염증, 쿠마딘, 비타민 A와 같은 약물, 알코올에 노출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증상

● 영아
수두증의 임상 증상과 비슷하며 후두부가 돌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수리 부분의 대천문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뇌압 상승 시 의식수준이 저하되고, 구토가 유발됩니다. 점진적으로 발생할 경우에는 지능장애나 성장 장애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운동발달 지연, 간질, 대두증(macrocephaly), 짜증, 구토, 안구진탕증(nystagmus) 등을 보이기도 하며 안면 기형, 중추신경계 기형 등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 어린이
수두증의 증상은 없을 수도 있으나 소뇌 기능 부전이 뚜렷합니다. 근육긴장저하, 운동실조증(ataxia)과 함께 정신지체를 보입니다.

진단/검사

임신 초기에는 태아 초음파 검사를 통해 소뇌 발달 여부, 뇌실 확장, 큰 머리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후에는 머리 엑스레이 촬영,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검사가 진단에 이용됩니다.

치료

댄디-워커 증후군의 치료는 나타나는 증상 위주로 치료하게 됩니다. 간질을 예방하기 위해 적절한 약물 치료나 자극원을 제거한 환경을 제공하여 줍니다. 수두증 치료를 위해서는 뇌실-복막 단락술이나 낭종-복막 단락술 등의 션트 수술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운동 장애, 근육 강직, 보행 장애 등을 예방하기 위해 물리치료나 작업치료와 같은 재활치료를 시행합니다.

경과/합병증

댄디-워커 증후군의 경과에 대해 정확히 규명된 보고는 없으나 산전 진단에 실패했을 때는 생후 1년 내에 80~85%에서 수두증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전체 사망률은 12~50%로 보고되어 있지만 산전 진단되어 시행된 치료적 유산을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치료 전에 신경학적 결손 증상이 뚜렷이 있었던 경우에는 예후가 좋지 않으나 신경학적 결손 증상이 적은 환자에서는 다른 발달 기형을 어느 정도 동반하고 있는지에 따라 예후가 달라집니다.


02-20-2024(화)
김인순권사

(이승혁 목사님의 가정기도)

1,사무엘을 위한 믿음으로 준비된 배우자,눈(익상편)의 치유
2,다니엘의 선천적 질고의 은혜 깨달음(선천적 장애로 인하여 모든 장기가 노후됨,특히 간 기능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음)
3,안화선 사모님의 건강(뇌졸증 휴유증으로 왼쪽 마비)
4,이승혁 목사님(온라인 목회현장 확장되도록)
5,김은심 권사님(95세,노후의 평강한 삶)
6,주거문제(한국 & 뉴욕 문제 ??)

~~2022/2/24,기도시작하며


02-19-2024(월)

다니엘이 가족 단톡방에 올린 내용

댄디-워커 증후군 수술 후 치료 : 네이버 블로그 - https://m.blog.naver.com/brain8275/221787381904
https://m.blog.naver.com/brain8275/221787381904

구은숙
 적절한 치료방법이 발견  되기를 기도합니다



물뇌증 - 코메디닷컴 - https://kormedi.com/1279104/%EB%AC%BC%EB%87%8C%EC%A6%9D-%EC%9E%90%EC%84%B8%ED%9E%88/

https://kormedi.com/1279104/%EB%AC%BC%EB%87%8C%EC%A6%9D-%EC%9E%90%EC%84%B8%ED%9E%88/

물뇌증 - 코메디닷컴

코메디닷컴 관리자
정의

물뇌증은 태아 500명당 1명꼴로발생합니다. 원인은 매우 다양하며, 발병 양상도 환자마다다릅니다. 물뇌증은 뇌척수액이 뇌 안에 있는 뇌실(뇌척수액을담는 그릇 같은 곳)에 이상 축적됨으로써 발생합니다. 치료는신경외과 의사가 시행하는 션트(단락술)라는 수술에 의해 대부분이뤄집니다.

션트는 뇌나 척수에서 뇌척수액을 다른 곳으로 흐를 수 있게 하는 물길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션트수술이 물뇌증을 완치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드문경우를 제외하곤 물뇌증은 평생질환이며, 이런 이유로 합병증은 언제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또한 합병증이 진단되지 않거나 치료되지 않으면 심각한 신경학적 손상,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에 합병증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하며 조그만 변화에도 주의 깊게살펴야 됩니다.

우리의 몸은 하루에 약 500ml의 뇌척수액을 생성해 지속적으로흡수된 양만큼 채워지게 됩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뇌척수액의 생성과 흡수에 균형이 이뤄져 있지만 물뇌증이있으면 이런 균형이 깨져서 나타납니다. 이런 균형을 깨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순환로의 폐쇄가가장 흔한 원인이 될 것입니다.

순환로의 막힘은 뇌종양, 물혹,상처 반흔, 감염 등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뇌척수액은계속해서 만들어지므로 이의 통로가 막힌다면 마치 강물이 댐의 윗부분에 고이는 것처럼 막힌 부분의 위에서 뇌척수액도 고여 있게 됩니다. 결국 고인 뇌척수액이 어느 정도의 양이 늘어나게 되면 뇌실이 커지게 되고 머리 안의 압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물뇌증이라고 합니다.

원인

여러 종류의 의학적 문제들이 물뇌증이란 병을 일으키게 합니다. 많은아이에게 있어 태어날 때의 문제로 이 병을 일으킵니다. 이를 선천성 물뇌증이라고 합니다. 거의 모든 선천성 물뇌증은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합니다.

물뇌증의 증상이 아주 늦게 어른이 되어서 나타난다고 해도 출생 시의 문제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선천성물뇌증이라고 봅니다. 이와는 달리 출생 후에 두부 손상이나 뇌막염, 뇌종양등에 의해 물뇌증이 생겼다면 이를 후천성 물뇌증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물뇌증 발생이나 예방을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 수도관 폐색(협착)

선천성 물뇌증의 가장 흔한 원인이 되는 질환이 수도관 폐색 또는 협착입니다 수도관은 제 3뇌실과 제4 뇌실을 연결하는 좁고 긴 통로입니다. 수도관 폐색은 선천적으로 좁거나 막혀 있든지 감염, 출혈, 종양에 의해 수도관이 좁아졌거나 막힘으로써 발생합니다. 뇌척수액의통로가 막힘으로써 상부에 뇌척수액이 고여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이분 척추

이분 척추는 열려진 척추란 의미로 척수와 주변 구조인 척추 뼈가 선천적으로 막히지 않아 앓은 병을 말합니다. 발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분 척추 환자가아놀드 키아리 2형 증후군으로 발전되며, 약 80%에서 물뇌증을 동반합니다. 그 원인은 아놀드 키아리 2형 증후군은 소뇌의 일부와 제4 뇌실이 머리뼈의 가장 아랫부분 구멍을통해 밑으로 빠지는 병변을 나타내기 때문에 제4 뇌실에서 뇌척수액의 통로가 막힘으로써 발생합니다. 이분 척추의 대표적인 질환은 척수 수막류입니다. 출생할 때부터 허리또는 등 부위에 돌출된 혹을 보이는 병입니다.

▪ 뇌실 내 출혈

뇌실 내 출혈은 미숙아에게 잘 발생하며, 후천성 물뇌증의 원인이됩니다. 이는 뇌실에 분포하는 작은 혈관이 터져서 발생합니다. 터져나온 혈액이 뇌척수액 통로를 막거나 상처를 남기고 뇌척수액이 흡수되는 지주막융모에 끼어들어 흡수를 하지 못하게 해 물뇌증을 발생하게 합니다. 드물게 뇌혈관 기형이나 뇌실 근처에 있는 뇌종양의 출혈에 의해서도 발생합니다.

▪ 뇌막염

뇌와 척수를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긴 것입니다. 박테리아감염에의해 주로 발생하며, 드물게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서도 발생합니다. 이런염증 반흔이 뇌척수액의 통로가 되는 섬세한 지주막하 공간에 생겨 뇌척수액의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게 되어 물뇌증이 생깁니다. 한국에서는 결핵성 뇌막염 후에 합병증으로 많이 발견됩니다.

▪ 머리 손상

머리 손상이 있으면 뇌 조직, 신경, 혈관 등을 다치게 됩니다. 혈관이 다쳐서 혈액이 유출돼 뇌척수액의통로에 끼어서 막거나 혈액의 염증세포들이 새어 나와 역시 통로에 반흔을 남기게 되면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뇌종양

소아 환자의 뇌종양은 주로 뇌의 아랫부분(후두덮개구멍 또는 소뇌)에 생깁니다. 종양이 자라면서 이 부위에 있는 제4 뇌실을 누르거나 이곳으로 자라나게 되면 뇌척수액의 순환을 막게 됩니다. 다른부위의 뇌종양도 마찬가지로 종양의 성장에 의해 뇌척수액의 순환로를 막음으로써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거미막낭종(물혹)

뇌의 어느 부위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선천성 물혹입니다. 소아환자에게서는 뇌종양과 비슷하게 뇌의 아랫부분(후두덮개구멍)과제3 뇌실 근처에 잘 생깁니다. 거미막낭종(지주막낭종)은 뇌척수액을 함유하며 지주막에 의해 싸여 있으며, 뇌실이나 지주막하 공간과도 통하기도 합니다. 이런 물혹이 뇌척수액순환로를 누르거나 막게 되면 역시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댄디워커 증후군(Dandy-Walker Syndrome)

댄디워커 증후군에서 제4 뇌실의 출구가 부분적 또는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에 제4 뇌실은 확장돼 있으며, 소뇌의 일부분도발달하지 않습니다. 또한 댄디워커 증후군은 뇌의 다른 일부의 발달도 잘 이뤄지지 않으며, 수도관의 폐색도 잘 발생합니다. 이런 이유로 물뇌증이 생기며, 측뇌실과 제4 뇌실에 각각 동시에 션트 수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증상

비정상적으로 아기의 머리 크기가 커집니다. 앞숫구멍(대천문)이 부풀어 오르거나 팽팽해지기도 하고, 두피는 얇아지고 반짝거리기도 합니다. 두피 정맥은 부자연스럽게 커져있기도 합니다. 증상은 구토, 졸음, 보채기, 아기 눈동자가 아래쪽으로 떨어져 있는 현상, 발작 등입니다. 걸음마 시기에도 봉합선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비정상적으로 큰 머리를 보입니다.

걸음마 시기 후기나 소년기에는 봉합선이 이미 닫혀 있기 때문에 머리 크기가 커지는 증상보다 뇌실이 커짐으로써발생하는 머리뼈안(두개강) 내압 항진 증세를 나타냅니다. 두통, 오심(구역질), 구토와 물체가 두 개로 보이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증상들입니다. 또균형을 잘 못 잡거나 걷거나 말하는 것이 늦는다거나 하는 발육 지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유아들과 마찬가지로 소년들도 정상에 비해 많이 보채고 쉽게 피곤해하는 증상과 발작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격 변화, 주의 집중력 저하, 기억력감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든 아이들은 쉽게 잠에서 깨지 못하거나 계속 자는 증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진단

▪ 초음파

고주파 음파를 이용해 머리 안 구조의 윤곽을 알 수 있는 의학적 기계입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고통 없이 간단히 검사할 수 있습니다. 유아의뼈가 없는 앞숫구멍에 이 기계를 대서 뇌실의 영상을 얻을 수 있어 물뇌증의 진단과 추적 관찰이 가능한 진단 장비입니다. 음파는 머리뼈를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앞숫구멍이 닫힌 어린이에게는 머리뼈의 결손이 없는 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컴퓨터단층촬영(CT)

CT는 안전하고 믿을만하며, 통증없이 물뇌증 진단과 치료에 도움을 주는 진단 장비입니다. 이 장비는 엑스레이(X-ray)가 몸을 뚫고 들어가 몸 내부의 구조를 컴퓨터에 의해 영상으로 보여 줍니다.

▪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CT와 마찬가지로 몸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는 진단 장비입니다. 그러나 CT와는 달리 엑스레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매우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몸 안의 여러 신호를 영상으로 나타내게 합니다. MRI 역시 통증은 없으며, 매우 안전합니다.

치료

오늘날 물뇌증 치료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수술적 치료는 환자의 뇌척수액 순환계에 션트라는 유연한 튜브를집어넣는 것입니다.
션트 튜브는 직경이 2mm 정도이고, 부드럽고 유연한 성질을 갖는 플라스틱(주로 실라스틱)으로 만들어지며, 우리 몸과 잘 융화됩니다.

일반적으로 션트 수술은 시간이 짧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수술이끝나면 다시 상처 부위를 소독한 후 회복실로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마취과 의사와 신경외과 의사가 완전히회복될 때까지 환자를 관찰합니다.
상처 부위가 붉게 보이거나 손대면 아파하고 약간 붓는 것은 수술 후일주일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수술 뒤 2~3일 동안 미열이 있는 것은 정상이지만 고열이 있으면원인을 찾아 교정해 줘야 합니다.
션트 수술은 대부분 그리 아프지 않습니다.
수술 후 별 이상이 없으면 환아는 1주일에서 10일 뒤에 퇴원합니다.
션트 수술을 하고 나면 환아의 뇌실 크기는줄어듭니다.
유아를 제외하고 션트튜브는 피부 밑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유아기 때 물뇌증 때문에 커진 머리는 자라면서 나이에 맞는 정상 크기로 돌아옵니다.

물뇌증이 대부분 션트 수술에 의해 잘 조절되지만 약 2-40%까지기능을 안 하는 때가 있습니다.
션트의 기능 부전은 뇌실에서 뇌척수액을 충분히 배액시키지 못하는 것을의미합니다.
션트가 막히는 것과 감염이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대부분의션트 기능 부전은 수술 후 6개월에서 1년 내에 재수술을필요로 합니다.

-------------- 안화선 응답

대니야~
영상 잘보았다네^^
어쩜 이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지 참잘했네  내가 이렇게 좋은데 아들은  이 영상을 찾은 순간 얼마나 좋았을까?
영상을 찾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네

물로 찬 뇌에 대니가 촛점이 맞혀진게 아닌가해서  처음 진단하신 고창준 뇌전문  박사님의 말을 바르게 전달할때인가 싶네
말씀인즉
쇠뇌형성이  조금 않되었는데  이유는 모른다고 소뇌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금 안만들어진상태이다.사진상으로 검게 되어져 찍혔으니 물로 된것인지~ 머리를 갸우뚱 하시기에

내가 그럼 어떻게 해야되냐고 했더니
의사로 할 수 있는것은 없다고   하시면서
물이라고 해도 그 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몸 에 스며들게 하시던지 의사로서는 형성된 뇌 상태에 대해서는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이날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 했던것이거든~
머리에,뇌 상태에 촛점을 맞추면 괴롭고 아프게,소리가 나는게 느껴질거네 대니가 듣는 기능이 아주 예민하기때문에 그 예민함을 내 몸 상태에 촛점 두지 말고  성경 말씀에 귀와 눈을 관심을 둔다면 아마 아픈것도 ,소리들리는것도,없어질것이라고 알게 된다네

오늘 하루 주안에서 화이팅 하자~💕



http://www.kimjongin.net/medi_info/medi_info_dis_v.asp?conts_num=703&type=0&index1=&index2=&page=16&sw=&code=0&MenuNumber=3&PageNumber=3&SubPageNumber=0


천안 김종인소아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2분


1. 정의

뇌와 척수를 감싸고 흐르는 뇌척수액이 선천성이나 후천성의 이유로 너무 많은 양이 있어서 정체되어 뇌실이 커지고 뇌압이 높아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2. 증상

두개골의 봉합선이 닫히기 전인 2세 이전의 소아에서는 머리둘레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봉합이 넓어지며 큰숨구멍(대천문)이 커지고 큰숨구멍 부분을 두드리면 깨진 항아리 소리가 납니다. 또한 머리 피부에 있는 정맥이 두드러지게 보이며, 이마는 얼굴보다 돌출되고 눈동자가 아래로 쳐진 모습을 보입니다. 뇌압이 높아서 뇌가 위축되어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운동정신발달이 늦어지기도 합니다. 진행이 빠르면 아이가 토하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자꾸 자려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2세 이후의 소아에서는 두통, 구토, 자꾸 자려는 증상 외에도 수두증을 일으킨 원인질환에 따라서 신경증상이 주로 나타납니다. 수두증으로 인하여 측뇌실이 커지면 다리가 뻣뻣해지기도 합니다.


3. 원인,병태 생리

수두증이 생기는 원인에 따라 분류해보면, 뇌속의 뇌실 안에서 막혀서 수두증이 생기는 경우(비교통성 수두증)와 뇌 바깥인 지주막하 공간에서 뇌척수액의 흡수가 안되어 생기는 경우(교통성 수두증), 그리고 뇌척수액 자체가 너무 많이 생겨서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교통성 수두증은 뇌속의 뇌척수액이 흐르는 길이 막히는 경우에 생기는 것으로 도수관 협착과 교세포 증식, 아놀드-키아리 이상, 댄디-워커 증후군, 갈렌씨 정맥 이상, 뇌척수액이 흐르는 길에 생긴 뇌종양에 의해서 생깁니다.
교통성 수두증은 지주막(뇌를 싸고 있는 막중의 하나)의 아래에 있는 공간인 지주막하 공간에서 뇌척수액이 제대로 흡수가 되지 않아서 생기는 것으로 두개 내 출혈, 세균성이나 육아종성 수막염(뇌를 싸고 있는 막의 염증)의 후유증으로 생깁니다.
뇌척수액이 과도하게 많이 생기는 경우는 맥락총유두종(뇌척수액을 만드는 맥락막총의 이상) 때문에 생기지만 아주 드뭅니다.


4. 진단

우선 의사의 신체검진을 받고 그 다음에 검사를 해서 진단하게 됩니다. 단순 두개골 X선 검사, 암실에서의 투광 시험, 때로는 초음파검사가 도움이 됩니다.
CT/MRI검사가 수두증 및 그 원인 질환에 대한 가장 정확한 검사입니다. 뇌척수액의 순환을 알기 위해서 때때로 특수한 약품을 이용한 검사를 할수도 있습니다.


5. 경과,예후

일반적으로 영아(생후 1개월에서 생후 1년)의 진행성 수두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1년 이내에 50%, 10년 이내에 75%가 사망하지만, 수술을 하는 경우에는 90%가 생존하며 생존자의 2/3이 정상 혹은 정상에 가까운 지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경우에서 지능 및 신경학적 예후는 수두증의 원인, 심한 정도, 동반된 기형 유무 등의 여러 조건에 의해 달라진다고 합니다.


6. 치료

종양이나 낭종에 의한 수두증인 경우는 가능한 수술로 뇌척수액이 흐르는 길을 확보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뇌척수액의 흐름을 우회 시키는 션트(SHUNT )수술을 하게 됩니다. 션트수술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제한적인 경우에 일시적 치료로 반복적인 척수 천자, 뇌척수액 생성을 억제하는 acetazolamide투여가 이용됩니다.


7. 이럴땐 의사에게

아이의 머리둘레가 과도하게 크거나 증상에서 언급한 것이 있으면 병원으로 오십시오.


02-17-2024(토)

목사님 다니엘 때문에 생각이 많으시죠.
좋은 글을 다니엘 형제에게 주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라 그냥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혹시 왜 검은질 잘 설명 해주고 그것을 이기게 하시면 다니엘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않을까요?
저에 오지랖 이었습니다.
제 조카도 아내도 앞에 보내면서 깨닫은 것이 알고 살면 더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겁니다.
아내가 3개월 판정 받았으나 1년 6개월을 더 살다 갔습니다.
모든 병에는 본인의 의지력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할 때 이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지랖은 여기까지 저녁 119 기도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름 : 이다니엘. 1983년 9월 2일. 별자리 : 처녀자리. 혈액형 : B형. 댄디워커 증후군
근데 의사는 이렇게 말한 다음 물이 찾는지 검께 변했는지 보호자 한데만 말해요 물론 나는 애기때라서 모른다치고  예로들어 위가 막힌 상대로 Mri 사진 찍으면 막힌 상대로 나와요 위는 막히면 골든타임 지나면 죽는데 뇌는 골든타임 지나면 안 죽는다 그래서 뇌는 수술 할수있다. 전쟁전에 태어난 사람은 질병은 결액 밖에는 없다 결액은 몸에서 일어나는 병이고 전쟁후에는 뇌에서 일어나는 병이다 옛날에는 트라우마가 있으면 뇌 수술 받을수 없게 할수있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왜 뇌수술 못밖에 하는 것인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본인보다 더 잘아시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며 모든걸  다 말씀  드리고  기도하며 인도하심을 기다립니다




세브란스 병원 고창준박사의 진찰 결과

다니엘의 병명을 그동안 갑상선 호르몬의 이상 질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창준박사는 선천적인 신드롬 즉 쟈베드 신드롬(Jarbet Syndrom)이라고 한다.
쟈베크 신드롬이란 태어날 때부터 작은 뇌의 일부가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사람마다 증세가 다르다고 한다.
다니엘의 경우 지능지수는 대략 45-55 수준이다.
이러한 지능지수는 보통 영리한 개의 지능지수가 45-55라고 하므로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글을 익힐 수 없다고 하였다.

가족(家族. 집 가, 겨레 족)이란 주로 부부(夫婦)를 중심(中心)으로 한, 친족(親族) 관계(關係)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集團).
또는 그 구성원(構成員). 혼인(婚姻), 혈연(血緣), 입양(入養) 등으로 이루어진다.

가족을 식구(食口. 밥 식, 입 구)라고 한다.
식구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또는 한 조직(組織)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따라서 가족이란 식사 때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언제부터인지 혼자사 음식을 자기 방에서 인터넷 방송을 보며 음식을 먹고 있다.
심지어 교회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도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음식을 먹는다.
이러한 모습에서 이미 가족으로부터 이탈된 느낌이다.
먼저 가족으로 식구로 함께 식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07-12-2024(월)
김화자목사님에게 보낸 카톡

뉴욕으로 이주할 때
다니엘의 선천적인 장애
"쟈베트 신드롬 증후군"
(작은 뇌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
예를 들면 언어, 보행, 인지 능력 등
그나마 이제까지 잘 따르던
다니엘이 갑자가
뇌 수술을 받고 싶다고 하여
한국인 뇌신경외과 의사
중극인 뇌신경외과 의사
두 사람에게 진료를 받았지요.
결과는 여전히 동일합니다.
다니엘이 어려서는
자신이 어려서 몰랐다고 하지만
2000년 이주 후 곧장 미국인 의사에게
검진 결과 한국과 동일한 결과를
받았기에 집중적으로
언어 능력과 인지 능력에 주력하여
이제는 혼자서도 마트에서
장을 볼 수 있고
목적지를 향하여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적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다니엘은 그것도 만족스럽제 않아
뇌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담당 의사들은 이러한 것은
뇌 수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 상태에서 바람직한 방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 결과를
이야기 하여도 듣지 않아
그러면 한국으로 나가겠느냐?
하고 물으면
한국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으므로
믿고 맡기고 기도하여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치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목회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다니엘을 사회구성원으로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지요.
지금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며
예전에 받았던 분명한 계시가
다니엘에게도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 평화가
세빛선교회 및
모든 입주자들에게
가득하게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목사님께서  미국에 가신것도 다니엘때문이었음을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몇년전부터 다니엘이 한국에 오기를 원한다고 하여 저도 이것 저것 기도하며 알아보았지만 마땅히 한국에 나와서 생활할때 미국보다 더욱 적합할까 하고 생각할때 그렇지 모쌀것이란 판단때문에 저도 적극적으로 권유할수 없었음이 확실하였읍니다. 실은 저희 세비짜매회서 컴퓨터나 아이티  문제등에 관한 직원이 필요하긴 하지만 아직은 기본적인 대책도 마련되진 못한 상황이라 제 의견을 피력하지 모한  상황이면서 늘 다니엘에 대한 생각만은 어떻게 진전되어 가는지 의문 상황이었읍니다. 결국 오늘 내용을 보니 한국에 나와서 의학적으로 수술을 받고싶은 뜻이 있었군요. 어찌되었던 지금은 생활하는데 많은 진전이 있고 학습능력도 터득하였다니 기쁩니다만 좀더 발전할수 있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거기에 적합한 의사를 소개받고 만날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차으로 힘든 일이지요. 이제 내용은 확실히 알았고 또한 현제의  그곳의  정리해 가는 형편까지 알았으니 저희들도 기도하며  기회닿는대로 알아보겠읍니다. 무엇보다 가정목회  그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자녀를 가진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시겠어요. 그 어려운 중에서도 많은 고난을 통과하며 여기까지  믿으으로 승리하며 살아오신 목사님을 존경하며  또한 존경합니다. 저희들도 계속 중보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기적을 기도하겠읍니다. 주님의  은혜 함께 하시옵소서. 아멘!!

02-08-2024(목)

다니엘아!
유투브 동영상을 보며
하루종일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시간이겠지
그러나
이제부터는 시간을 쪼개어
말씀위로 던지면 - 믿음
찬송위로 던지면 - 평화
예수님위로 던지면 - 기도
시간을 던져 보면 좋을텐데.....

하나님
머리가 어지럽고 흔들려요
잠을 편하게 잘 수 없어요
의사는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지요
아직 형성되지 않은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을
온전하게 만져주세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자랑하게 하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새번역 시편 37:5


02-05-2024(월)

이다니엘
뇌 수술 받아야 하는 이유. /

1.위가 막힌 상태로 몇십년 후에 사진 찍으면 나 뇌 사진과 똑같습니다
2. 물이 찾는지 검께 변했는지 몰라서 의심 스럽고
3. 눈동자도 힘들고

이다니엘

쟈패드 신드롬 영어는 댄디워커 증후군

근데 의사는 이렇게 말한 다음 물이 찾는지 검께 변했는지 보호자 한데만 말해요 물론 나는 애기때라서 모른다치고 누가 알까요.
예로들어 위가 막힌 상대로 Mri 사진 찍으면 나 처럼 똑같이 나와요.
전쟁후 몇십년 후에 태어나도 당연히 안좋게 나와요 수술은 꼭 필요해요.
옛날에는 전쟁 왜 했을까요. 본인만 좋을라고... 입장 바꿔서 생각 해봐요.

구은숙권사
보호자랑 같이  듣지 않아요? 성인 인데...

이다니엘
내가 애기때라서..

구은숙권사
지금은 아버지와같이 다니잖아요??

의사의 소견도 같이 듣지요?

의사의 소견 그 이상은 하나님 소관이랍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문의 합시다

안화선사모
아들의 고통의 소리를 문자화 시켜서 교회란에 올리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이 세분이심에 감사 합니다
함께 기도로 중보 하게 하심입니다.

황목사님께서는 몸으로  마음으로,말로기도하심을 알게 하시고(과자와부침해서 함께 먹으라고 가지고 오심에 놀랐고 다니엘을 보셨죠~)
이 목사님과 아빠 목사님은  말로 마음읋 기도하심을  알게하십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니 감사 감사 할 뿐입니다.

아들이 고통을 나눌 수 있도록 알리게 된것이 성장했고,성숙해 졌음이라 알기에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으로  또한 감사하고요

구원하시는 주를 바라보며
주께 몸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삶을소망합니다(로마서12:1~2)

이하루도 주님안에서  화이팅 하십시다~💕

이호승목사
힘내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십니다.
확신 할 수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다니엘이 힘내고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봅니다.

소중함을 잊지 말자

프랑스 작가이자
조종사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는
사막 한가운데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행성 B612호에 사는 어린 왕자를 만나
왕자가 살던 행성의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집필하기 전 소설 속 주인공과
비슷한 일화를 겪었습니다.

실제로 비행기 조종사였던 그는
1935년 비행 도중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했습니다.
당시에는 통신 장비가 열악했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한복판 조난사고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침이 마르고 숨쉬기가 버거운 데다
목구멍까지 쓰라린 사막에서
5일 만에 지나가던
베두인 상인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절대 요소들이
결핍된 사막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던
기자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당신을 살아남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을 생각하며 최악의 상황을
버텼습니다."

늘 곁에 있어서 쉽게 생각했지만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얼마나 가졌는지요?
너무 가까이에 있어 소중함을 모르고,
너무 사랑해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언제나 함께여서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지 않는가요?

* 오늘의 명언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 생텍쥐페리

02-07-2024(수)

다니엘아!
얼마나 힘들면
교회 단체방에
너의 마음을 글로 올렸을까?
아버지로서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왜냐하면
다니엘 때문에 미국을 선택했고
미국에서도 별다른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은
일반적인 질병이 아니라
선천적인 특수 장애라는 것이지
그 병명을
한국에서는 쟈베트 신드롬
미국에서는 댄디 워커
그런데 이런 병명이 수도 없이
다른 명칭으로 불려지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찾아낸 사람의 이름으로
병명을 부르기 때문이란다.
세상에서 사람도 의사도 과학도 수술도
할 수 없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지....
이제는 마음과 생각을 추스리고
정말 하나님께 전심으로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먼저 구체적으로 다니엘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가족들과 더불어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며
다니엘의 고통과 아픔을
사랑과 믿음으로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다니엘 힘을 내자!
다니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응답 받기를
기대하며..............

주님은 나의 고난을 돌아보시며
내 영혼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새번역 시편 31:7b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새변역 시편 31:9-10



인생의 주소

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만 줄을 선다.

아! 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인 것을...


어느 이른 아침,
커피 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내 앞에
남루한 옷을 입은
비쩍마른 한 여인이
커피 한 잔의
값을 치루기 위해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세고 있자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 가세요.”

여인이 잠시 멈칫하자,
직원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제가 사는 거에요.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 여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빵 하나를 들고 나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내가
그 남자 직원에게 말했다.

“생일 날 그 여인을 위해
빵을 사 주다니 멋집니다!
생일을 축하해요!”

계산대의 직원이
고맙다는 시늉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그 옆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직원이 말했다.

“가난한 사람이 오는 날은
언제든 이 친구의 생일이에요.
하하하“

그러면서
내가 말을 이을려고 하자
계산대의 직원이 말했다.

“저는 그저 그 분이
먹을 것을 살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는 커피를 들고 나오면서
잔돈은 필요 없다며 말했다.

“그것은 당신 거예요.“

“손님, 하지만
이건 너무 많은데요?"

그 때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우리 모두
매일매일이 생일인 것처럼,
넉넉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멋진 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인 만큼
길지 않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덕(德)을 쌓아 갑시다.

덕을 쌓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