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다니엘


9월 20일 다니엘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은총(9: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Just as it is written in the Law of Moses, all this disaster has come upon us, yet we have not sought the favor of the LORD our God by turning from our sins and giving attention to your truth.


여호와의 은총(the favor of the LORD)

다니엘서 9장에서 여호와의 은총에 대한 이해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
둘째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






9월 19일 다니엘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럴찌라도(5: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찌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Then Daniel answered the king, "You may keep your gifts for yourself and give your rewards to someone else. Nevertheless, I will read the writing for the king and tell him what it means. 

그럴찌라도(Nevertheless) even so

그리아니하실찌라도(even if he does not) even if you don't

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But even if he does not, we want you to know, O king, that we will not serve your gods or worship the image of gold you have set up.

 
다니엘서를 일다보면 두 가지 접속사 즉 "그리아니하실지라도"(3:18)와 "그럴찌라도"(5:17)가 눈에 아른 거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대다수의 성도들은 내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는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절망적인 사건 앞에서도 당당한 신앙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럴찌라도(nevertheless. even so)'라는 접속사는 다니엘에게 많은 상급이 내려질지라도 나는 그와 같은 상급에 좌우되는 신앙이 아니므로 나를 위하여 예비된 상급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오직 나는 벨사살 왕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아니하실찌라도(even if he does not)'라는 접속사는 절망적인 사건이 닥쳐왔을 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건 가운데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을 믿지만 만일 내가 원하는 것대로 이루어주시지 않을지라도 내 믿음은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다니엘과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고백했을까?
솔직하고 냉정하게 나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과 연관짓던 지난 날의 믿음을 성경적으로 확립해야 할 대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좌파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동의하면 범죄자일지라도 그에게 높은 지위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좌파 정부가 계획하는 것이 부정한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쓴소리를 뱉으면 그 사람에게는 불이익 처분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ㄴ입니다.

22대 국회의원 300명 중에 87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87명은 대략 29%가 비율입니다.
29%의 국회의원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이 맡은 자리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면 자유대한민국은 절대로 죄편향으로 기울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대한민국은 지금 거의 좌편향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삼권분립이라는 정치 구조가 이미 무너졌습니다.
범법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을 갖도록 손뼉치며 동조한 세력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의 분포가 25%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 중에 1/4 즉 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좌편향 정부로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지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편향 정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와 가톨릭 등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인은 법과 질서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 가치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유능한 남 유다 왕국의 20, 30세대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여전히 왕국에서 제공하는 각종 산해진미과 고급 포도주를 제공받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얼마든지 자기를 위하여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이런 지위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힌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두 가지 접속사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아니하실찌라도"
평소보다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 더녀 넣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을 믿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왕의 정책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다른 어떤 사람들도 알려주지 않을 때 다니엘을 통하여 그 비밀을 알려주시므로 그에 따른 보상과 상급과 지위와 명예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나는 오직 왕과 나라를 위하여 그 비밀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 땅에도 이러한 일군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일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멸망의 큰 잔치(종말론)

우리의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설교요약
1.고고학으로 밝혀진 성경의 권위
2.위기에서 하나님을 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벨사살
3.인간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은 하나님 이시다.
4.성경 연구는 삶의 변화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5.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개역 단 5:1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4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 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8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 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9 그러므로 벨사살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10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13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14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15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16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찌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30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본문 1절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벨사살 왕> 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이 벨사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논쟁의 발단은 일반(세속) 역사 책을 뒤져 보면 바벨론 역사 가운데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도대체 벨사살 왕은 누구인가?”

다시 확증된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이 벨사살 왕이 역사 속에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다니엘서 전체를 역사적 정확성이 결여된 책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혹은 성경의 명백한 교리를 뒤집는 불경건한 신학자들의 노름이 역사 속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선언이 신학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1854년 영국의 J.G. 테일러라는 사람이 고고학자 팀을 이끌고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고고학 탐사를 하는 가운데 고대 바벨론어로 새겨진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다. 그런데 그것은 나보니도스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기도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세 명의 왕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첫번째 왕은 메로다크 왕으로서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었습니다. 메로다크는 2년 정도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의 사위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가족끼리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이후 두번째 통치자는 네글리사 왕입니다. 이 사람은 4년쯤 통치를 하다가 물러났으며 네리글리사의 아들인 라바쉬말드크가 이어서 왕위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9개월밖에는 왕위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네번째  통치자, 그러니까 곧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가 바로 나보니도스였습니다. 이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끼리 복잡하게 얽힌 것이지요. 나보니도스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은, 자기도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벨사살이 바로 나보니도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1854년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서 비로소 증명되었습니다. 비록, 왕위에 오른 일이 없는 벨사살에게 어떻게 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가 있느냐는 문제가 남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니도스의 통치 시기는 주전 556년부터 539년까지입니다. 주전 539년은 바로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해입니다. 나보니도스는 전쟁을 많이 한 왕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많이 하게 되니까 자연히 해외 원정을 많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외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도대체 누구에게 통치권을 위임했겠습니까? 아들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즉, 나보니도스 왕이 해외에 출정 가 있는 동안 실제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던 사람은 그의 아들 벨사살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북한에,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이 두 사람이 통치자로 있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통치자가 둘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된 바벨론 제국의 멸망 직전에도 나보니도스 왕은 새롭게 일어나던 메대 바사 제국과 북아랍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패전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보리시파라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이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증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메대 바사의 마지막 도전이 드디어 바벨론 제국에 임하여 왕궁에까지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니엘서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을 뒤집고 나아가 성경이 얼마나 권위 있는 책인가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우상을 찬양하는 잔치가 한창이던 순간을 기록한 5, 6절을 먼저 보십시오.“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 벌벌 떨던 왕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7절). 이 <셋째 치리자>라는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세번째 통치자를 삼겠다”왜 하필이면 세번째 치리자일까요? 그것은 나보니도스와 그의 아들인 벨사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셋째 치리자란 왕의 바로 아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16절을 보십시오.“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셋째 치리자를 삼겠다>는 말이 또 한번 나옵니다. 결국 세속 역사가가 벨사살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이미 성경이 정확하게 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증언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세속 역사에 벨사살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고 성경의 위대한 권위와 정확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539년10월, 바벨론 최후의 날에 흥겨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메대  바사의 다리오의 군대는 바벨론 궁중을 포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5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1절). 적군이 쳐들어오면 전쟁 준비를 해야지 왜 잔치를 벌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왕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벨사살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벨사살은 자기 나라를 수호하는 신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바벨론 궁중의 성벽은 굉장히 견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에게는 <설마 누가 성벽을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셋째,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제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까딱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벨사살은 그날밤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고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殿)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器皿)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하필이면 유다가 망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기구들을 잔칫상에 대령하게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3,4절). 벨사살은 바벨론의 우상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5절). 자기 나라의 최후를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신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벨사살 왕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의 분벽에 홀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벨사살 왕의 범죄

물론 1-4절에서 벨사살 왕의 범죄가 드러났긴 하지만 다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죄를 조목조목 정리하여 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22,23절). 이것이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지적해 준 범죄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의도적 범죄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18-21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 후에 즉시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알고도... ”(22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아들>에서 <그>는 느부갓네살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몇 대 위의 선조라도 전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벨사살은 조상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가 징계를 받아 왕에서 쫓겨난 후 짐승처럼 울부짖는 정신병자가 되어 7년 동안 고생했던 일을 알고도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상의 실수가, 선배의 실수가 계속하여 답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니엘서를 지배하는 가장 중심되는 사상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니엘서 2장21절을 보십시오.“그는(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며 한 민족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쇠하게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실세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5장21절에서도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똑같은 사실을 다시 선포합니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 이것이 다니엘서의 위대한 역사 철학입니다. 이 사실을 느부갓네살 왕은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면서 뼈아프게 배웠습니까? 7년간 미치광이처럼 들판을 기어다니는, 하나님의 참담한 심판과 징계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고도 범한 죄이기 때문에 심판이 더욱 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22절).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공부의 목적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 삶을 바꾸는 데 두어야 하며 단순한 지식을 위한 성경 연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식만 늘려 가는 성경공부 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알고도 행치 않는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21절). 실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문자 그대로 폐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갈릴리 근처의 고라신과 벳새다 등지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도, 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의도적인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책망의 대상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둘째/교만의 범죄 : 교만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범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많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에는 이 표현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다니엘은 하나님 홀로 진실로 높으신 분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22,23절). 자기 신격화,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자기 조상이었던 느부갓네살과 똑같은 교만을 답습한 벨사살의 범죄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우상 숭배의 범죄 :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벨사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그릇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을 모독했던 행위의 배후에는 자기 조상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우리 조상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해서 야훼에게 굴복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만은, 아무도 나의 능력과 나의 영광을 초월할 수 없다” 자기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까지도 자기를 높이려는 이 뿌리 깊은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벨사살의 모습을 보십시오.

벨사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찬양하던 바로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5절).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그분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있던 벨사살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무엇을 썼습니까? 그 내용이 2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24,25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전조(前兆)인 것 같은데 글자의 뜻을 통 알 수 없어서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다니엘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다니엘은 세월이 상당히 흘러서 80세는 족히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5장을 연구하면서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순수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던 다니엘의 모습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글자를 해석하여 달라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합니다. 우선  세번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뇌물을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이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17절). 다니엘은 황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권세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따름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일념으로 80년을 살아온 이 순수한 청년. 그는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해석을 합니다.“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메네』는 “숫자를 세다”를, 『데겔』은 “저울로 달아 본다”를  그리고 『우바르신』은 “나누다”를 뜻합니다.

26절 이하를 보십시오.“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26절).“당신이 얼마 동안 통치할 것이며 얼마 동안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와 문명의 연한(年限)을 정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27절).“저울에 달아보니 당신은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표준으로 보았을 때 당신은 도저히 더 이상 왕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이것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베레스>의 복수형이 “우바르신”입니다. 즉, 이것은 바벨론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메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동안에 벨사살 왕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최후를 보시기 바랍니다.“그 날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절). 이것이 메대 바사가 일어나고 바벨론이 넘어지던 순간입니다. 벨사살이 열었던 잔치는 문자 그대로 멸망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이 교만한 왕에게 멸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순간에 다가옵니다. 잠언서 기자의 증언처럼 “악인에게는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합니다”(잠 6:15).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은 눈깜짝할 새에 무(無)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래로 바벨론 제국의 최후는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최후의 모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바벨론 제국의 패망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1절 이하를  보십시오.“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1,2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은 진정 바벨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3절).“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 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9,10절). 한순간에 무너지는 인류의 바벨탑의 운명을 묘사한 극적인 장면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두가지

첫째로,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이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를 세우고 나를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벨사살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누가 당신의 호흡을 주장합니까? 이 순간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는 내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자꾸만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은 벨사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을 죄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호흡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 하시며 나로 인생의 작정된 길을 걷게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란, 삶의 중심에 나를 놓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놓느냐 하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부패성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어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내 삶의 초점이 되고 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전쟁터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로 호흡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자 애써야 합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고 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그들의 잔치는 멸망을 부를 잔치가 되었습니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바울은 같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멸망의 큰 잔치 이렇게 종말을 대비하라”“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29절)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합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정치도 하고 장사도 해야 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욕심을 낼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 “마지막 잔치”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제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을  당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언제나 당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하나이다”








9월 18일 다니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뜻을 정하여(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But Daniel resolved not to defile himself with the royal food and wine, and he asked the chief official for permission not to defile himself this way.

다니엘은 왕족들과 귀족들과 더불어 바벨론 1차 포로가 될 때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은 그 나라의 법과 제도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의 뜻은 왕실에서 제공하는 각종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포로의 몸으로 좋은 음식과 좋은 음료를 제공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포로가 특별 대우를 받을지라도 특별 대우를 따르지 않으려는 것은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생각과 믿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다니엘 1:8-16)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기도하는 손처럼 긴 손은 없습니다. 
기도는 일평생 동안 배워야 합니다. 
다니엘이 기도의 손을 들었을 때 그 손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기도의 손을 들면 하늘의 보좌가 움직였고, 하나님이 명하신 천사들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해 주셨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사자 굴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기도 응답을 가지고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의 기도 응답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 미가엘을 보내셔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아니, 기도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사자 굴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단 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기도는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일평생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자세가 그의 성품과 인격을 보여 줍니다. 그는 감사며 기도했습니다. 죽을 것을 알고도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고, 그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창조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위기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위기에서 뜻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도는 위기를 초월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초월해서 비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은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위인이란 위기를 수없이 극복하고 승리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니엘은 위기를 수없이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체가 그가 직면했던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에서 바벨론의 재상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독수리는 태풍이 오면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 높이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분은 다니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을 비상하게 만드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의 인물 연구는 다니엘에게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다니엘을 다니엘이 되도록 도와주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왜 하나님이 다니엘을 그토록 사랑하셨고, 큰 은총을 베푸셨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니엘의 삶의 비밀을 압축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그리고 기도 충만입니다. 그 핵심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도 훌륭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니엘과 세 친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모든 어려운 상황을 초월한 인물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비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깁니다. 고난의 능선을 넘어 넘습니다. 수많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비밀이 성령 충만에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았지만 그가 섬겼던 왕들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니엘이 성령 충만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의 말씀들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다니엘 안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거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4:18절,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둘째, 벨사살 왕의 왕비가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거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5:11-12절,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셋째, 벨사살 왕이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5:14절,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이처럼 다니엘이 소유했던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바로 신들의 영이신 성령님께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공부하면서 그 삶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에서 바벨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으며,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수많은 포로 가운데 다니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비밀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에게도 위기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위기에서 뜻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도는 위기를 초월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다니엘의 삶의 비밀을 압축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그리고 기도 충만입니다. 그 핵심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도 훌륭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니엘과 세 친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성령충만은 느브갓네살 왕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벨사살 왕의 왕비가 알고 있었으며, 벨사살 왕도 다니엘의 성령충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공부하면서 그 삶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에서 바벨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으며,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수많은 포로 가운데 다니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비밀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십니다.

다니엘 1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눈에 띄는 다니엘의 삶의 비밀은 뜻을 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 제공해 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이루어 갔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면 그가 뜻을 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청년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유다의 멸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단1:1-2절을 볼까요?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다니엘이 청년을 성장할 당시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세계를 재패하고 강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을 시킵니다. 또한 성전에 있는 그릇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둡니다. 바벨론은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우상 신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창고에 두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인 바벨론은 침략한 나라의 우상을 보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성전에 있는 그릇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둔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정복한 다음에 청년들 가운데 인재들을 포로로 데려 갑니다. 
그는 인재의 소중함을 알았던 왕입니다. 
왕족이나 귀족 가운데 인재가 될 만한 인물을 포로로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서 그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3-5절을 읽어볼까요?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이방 왕이지만 인재를 귀히 여겼던 사람입니다.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인재를 키우는데 자원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3년 동안 교육을 시킨 다음 그들 가운데서 인재를 골라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바벨론 은 앗수르와 다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은 민족 혈통 혼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망하자 새로운 제국 바벨론은 패망한 앗수르가 실행했던 정책과는 다른 정책을 선택합니다.

바벨론의 정책은 정복한 각 나라에서 뛰어난 청년들을 데려다가 먼저 바벨론식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으로 교화시킨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정복지로 돌려보내 바벨론 제국의 2등 민족화를 이끌 지도자로 세우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모든 속국들을 영원히 바벨론 제국 아래 두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성경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청년들 가운데 네 명의 청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들에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 중심적인 이름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관이시다.” 하나냐는 “야훼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사랴는 “야훼는 돕는 자시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바벨론 말로 개명한 것입니다. 개명한 이름 속에는 바벨론의우상 신들의 이름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의 이름을 벨드사살로 고쳤는데, 그 뜻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입니다. 벨은 바벨론 신의 봉사자와 예배자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냐는 사드락, 즉 ‘바벨론의 신 아쿠의 명령’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미사엘은 메삭으로 바뀌었는데, ‘바벨론의 땅의 여신 아쿠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뀌었고, ‘바벨론의 신 느고의 종이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왕의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개명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다니엘은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해서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왜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왕이 제공해 주는음식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삼갔습니다. 특별히 돼지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고리도 전서를 보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가 심각한 이슈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부정하다고 말씀하신 고기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별된 것을 먹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생명나무 대신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가 읽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떤 책을 가까이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만들어 간다면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의 정신을 만듭니다. 우리가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비록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도주를 삼갔을 까요? 포도주가 그들을 무디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에 탐닉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훨씬 더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4:11절은 말씀합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잠언20:1절에서는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탁월했습니다. 그는 숱한 지혜를 흐리게 만들고, 총기를 무디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 않는 대신에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성령님의 생수를 포도주 대신 마심으로써 성별된 삶을 산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이 내려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의 왕보다 더 위대하신 왕을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 왕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이 숭배하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삶은 모험입니다. 또한 자신들뿐만 아니라 환관장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다니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도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서 전체를 읽으면서 그들이 뜻을 정한 후 그 뜻을 끝까지 지켰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다니엘3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우고, 그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기로 작정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 주십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던 느부갓네살이 그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3:28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다니엘 6장에서 다리오 왕은 그를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 놀라운 말은 다니엘의 신앙을 대변해 주는 말입니다.

단6: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하룻밤이 지난 후에 다리오 왕이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찾아와서 소리 질러 그에게 묻습니다. 6:2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다니엘의 신앙은 초지일관의 신앙입니다. 초지일관이란 처음에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항상 섬기고 의지했습니다.

셋째, 기도하며 살기로 정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세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단2:17-18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다니엘은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반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일고나성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에 뜻을 정한 다음에 그 뜻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니엘에게서 거룩한 습관을 배웁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다시 단6:1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기도하면 죽임을 당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다니엘은 전에 행하던 대로 세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과 더불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뜻을 정하는 것은 뜻을 세우고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한 방향을 선택하고 다른 방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집중하고 지속하는 목표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난 것은 상황에 따라 살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뜻을 정하지 않은 채 살고 있습니다. 뜻을 정하지 않고 삶은 표류하는 삶입니다. 방황하는 삶입니다. 방황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뜻을 정한 인생은 방향이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풍성한 열매는 집중과 지속의 결과입니다.” 뜻을 정하십시오. 우리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뜻을 정한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끌고 다닐 것입니다. 존 애킨슨은 “당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정해 준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뜻을 정할 때 우리 마음대로 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뜻을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뜻을 정한 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뜻을 정해 주시거나 결단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원해서 주도적으로 뜻을 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존 애킨슨의 말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위험한 말입니다.

다니엘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마귀가 주인 행세를 하려 들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풍성한 삶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거나 상황에 따라 살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살면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십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고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채식을 먹기로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얼굴을 다른 소년들보다 윤택하게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16절을 다시 볼까요?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우리는 위기에 처하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선택할 때 그 결과를 당장 예측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풀무불에 던져지고,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뜻을 정한대로 산다는 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정한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37:5-6절을 볼까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상황이 힘들어 보인다고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무엇인가 시도하면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는 길을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향해 거어 들어 갈 때 길이열립니다.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거나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만 지나갑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뜻을 정하지 않고 미루는 것도 어떤 면에서 뜻을 정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만, 길을 선택하고 뜻을 정하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들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주어 시험해 보라고 부탁했습니다. 모험하고 시도할 때,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새롭게 뜻을 정하십시오. 새로운 일을 시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를 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책을 읽으십시오.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찾아가서 구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실패입니다.


다니엘의 뜻을 정한 신앙(단 1:8-21)

르호봇
8~11분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끌려 와서 이름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름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며 서러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다 백성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 끌려오게 하셔서 신앙을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단단한 신앙으로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여호와의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기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신앙의 정조를 지키려고 자신들을 시험에 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와 노예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제약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억압을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쉽지 않은 행동이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의 신앙의 절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8절 바야셈 다니엘 알 리보 아쎄르 로 이트가알 비파트바그 하멜렉크 우베예인 미쉐타이브 바예바케쉬 미사르 하사리심 아쎄르 로 이트가알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이것이 정한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 부정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먹는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정한 신앙의 절개입니다.

‘뜻을’이라는 단어는 (레브 3820) 마음, 심중, 정신, 의지,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은 마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은혜를 알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미 다니엘의 정신 속에 주를 섬기는 마음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께 영광 돌리는 마음이 다니엘은 있었던 것입니다.

‘정하여’라는 단어는 (숨 7760 CW.VQI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정하다, 임명하다, 확립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즉시로 자신의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확실히 정립하여 바벨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는다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절대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과 신앙이 이렇게 마음에 확실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더럽히지’라는 단어는 (가알 1351 VTIMZS 동사 히트파엘(강조재귀)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더럽다, 더럽히다, 부정하게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럽히지 않으려고 산해진미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음식을 좋아하여 먹음으로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포도주도 먹지 않고 기름진 고기도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미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많은 신전이 있고 우상의 제단이 많았던 곳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지는 음식들을 자신은 먹을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음식만 먹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절개입니다.

‘환관장에게 구하니’에서 ‘구하니’라는 단어는 (바카쉬 1245 CW.VPIMZ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찾다, 요구하다, 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환관장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절대 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로 다니엘은 행동에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음식을 먹어도 자신은 절대 먹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술과 담배 같은 이런 것을 먹고 피우므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육신적으로는 건강에 좋은 것을 골라먹으면서 내 영혼이 살찌우는 이런 복음의 말씀은 먹지 않습니다. 부정한 비 복음을 먹음으로 죽게 됩니다. 이제 나는 결단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음식을 영육으로 먹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9절 바이텐 하엘로힘 에트 다니엘 레헤세드 우레다하밈 리페네 사르 하사리심

 

10절 바요메르 사르 하사리심 레다니엘 야레 아니 에트 아도니 하멜렉크 아쎄르 미나 에트 마아칼르켐 베에트 미쉐테켐 아쎄르 라마 이르에 에트 페네켐 조아핌 민 하옐라딤 아쎄르 케길르켐 베히야브템 에트 로쉬 라멜렉크

(단 1:9-10)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을 아시고 환관장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다니엘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환관장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의 절개를 보시고 환관장에게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다니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먼저 주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서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먹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주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환관장은 느부갓네살의 왕의 명령을 어겨야 하는 상황입니다. 잘못하면 환관장이 죽을 수도 있는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의 말을 허락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죽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지정하셨거늘’이라는 단어는 (마나 4487 VPAMZS 동사 피엘(강조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계산하다, 지정하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처형에 처할 정도로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환관장과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환관장은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돌려놓으시고 다니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을 지키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11절 바요메르 다니엘 엘 하멜르차르 아쎄르 미나 사르 하사리심 알 다니엘 하나느야 미솨엘 바아자르야

 

12절 나스 나 에트 아바데이카 야밈 아사라 베이트누 라누 민 하제로임 베노켈라 우마임

13절 베예라우 레파네이카 마르에누 우마르에 하옐라딤 하오켈림 에트 파트바그 하멜렉크 베카아쎄르 티르에 아세 임 아바데이카

(단 1:11-13)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다니엘은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절대 왕 앞에 가서도 초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확신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절대 얼굴이 초췌해지지 않고 더 좋아진다는 것을 다니엘은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열흘 동안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험하여’라는 단어는 (나사 5254 VPMMYS 동사 피엘(강조능동)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환관장에게 명령하여 말합니다. 우리를 시험하여 보라고 그것도 확실히 채식만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을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세상의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뜻을 정하여 주님의 뜻대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이런 믿음과 정절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먹게 하고’라는 단어는 (아칼 398 VQICXP.Ch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공성 1인칭 복수. 연장형) 먹다, 삼키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우리에게 채소만 먹게 하여 열흘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왜 열흘을 지켜보라고 했을까요? 10의 의미는 질서의 완전, 책임, 증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책임져 주실 것을 생각했으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을 증거 하기 위한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하나님의 격려하는 것을 믿었고 친구들을 격려했으며 자신 스스로 권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이 지난 다음에 왕의 음식을 먹은 자들과 채소만 먹은 우리들을 비교하여 보시고 그다음에 환관장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당당함 속에 환관장도 허락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 믿으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바이쉐마 라헴 라다바르 하제 바예나셈 야밈 아사라


15절 우미케차트 야밈 아사라 니르아 마르에헴 토브 우베리에 바사르 민 콜 하옐라딤 하오켈림 에트 파트바그 하멜렉크


16절 바예히 하멜르차르 노세 에트 파트바감 베예인 미쉐테헴 베노텐 라헴 제르오님

(단 1:14-16)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시험하더니’라는 단어는 (나사 5254 CW.VPIMZS.MZP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복수)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을 감독하는 자가 즉시로 열흘 동안 채소만 먹게 하기 위해 시험에 들어갑니다. 이 시험은 다른 음식은 절대 들어가지 않고 오직 채소만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만 먹어도 정말 산해진미를 먹은 자들보다 더 좋아지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입니다. 만약에 채소만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렸다면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뜻을 정한 믿음의 사람을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했습니다. 절대 부정한 왕의 음식을 주시지 말고 오직 채소만 달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험이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아 보인지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NAMZS 동사 니팔(수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열흘 동안 시험하고 나서 다니엘과 친구들을 보니 왕의 음식을 먹었던 자들보다 더 아름답고 얼굴이 윤택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친구들의 모든 근본적인 모습들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100% 만지신 것입니다. 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믿음을 가지고 채소만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얼굴과 몸은 더 좋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이 시험이 끝나고 나서 절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먹는 것으로 사탄은 부정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뜻을 정한 믿음을 통해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면 끝이 난 것처럼 생각했지만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믿음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17절 베하옐라딤 하엘레 아르바에탐 나탄 라헴 하엘로힘 마다 베하세켈 베콜 세페르 베호크마 베다니엘 헤빈 베콜 하존 바할로모트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과 친구들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학문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지혜를 주셨으니’라는 단어는 (사칼 7919 VHNA 동사 히필(사역능동) 부정사절대형) 지혜롭다, 총명하다, 지혜롭게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다니엘의 삶에 개입하셔서 계속 함께 하시겠다는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믿음을 지키기로 뜻을 정하여 사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더라’라는 단어는 (빈 995 VHA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식별하다, 분별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니엘은 환상과 꿈을 깨닫고 분별하며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도 듣지 않고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완전하게 함께하셔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니엘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8절 우레미케차트 하야밈 아쎄르 아마르 하멜렉크 라하비암 바예비엠 사르 하시리심 리페네 네부카드네차르


19절 바예다베르 이탐 하멜렉크 베로 니므차 미쿨람 케다니엘 하나느야 미솨엘 바아자르야 바야아메두 리페네 하멜렉크 

 

20절 베콜 데바르 호크마트 빈나 아쎄르 비케쉬 메헴 하멜렉크 바이므차엠 에세르 야도트 알 콜 하하르투밈 하아솨핌 아쎄르 베콜 말쿠토

21절 바예히 다니엘 아드 쉐나트 아하트 레코레쉬 하멜렉크

(단 1:18-21)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이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앞에 나가게 됩니다. 이제 다니엘과 친구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세상의 왕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준비가 되어 세상에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나가니 세상의 많은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능력이 나타났으며 인정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바벨론에서부터 페르시아 왕 고레스까지 쓰임 받게 되는 아주 긴 수명을 살면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직분을 맡아 세상 나라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다니엘은 세상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신앙과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뜻을 정하여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거부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한 음식만 먹겠다고 다짐했으며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며 나가려고 할 때에 많은 육체적 고통과 조롱이 따라오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지혜와 명철을 주시는데 열 배나 주셨습니다. 세상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나는 어떠한 뜻을 정했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까? 더 이상 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정했습니까?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 뜻을 정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한 발씩 들여놓고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을 버리고 이제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해 나의 뜻을 정하여 나가야 할 때입니다. 사탄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나태하게 하여 열정을 무너트리고 영성을 죽이고 있습니다. 환경 속에서 신앙을 잘하지 못하도록 달콤한 것들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육체적인 달콤함 속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꿀 속에 빠진 벌레를 상상해 보십시오. 꿀의 달콤함에 정신없이 먹다가 결국은 꿀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육신적 쾌락에 빠져 살다가 내 영혼이 죽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백성들은 이제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 음식을 먹기로 뜻을 정할 때에 주님도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주님께 뜻을 정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 1장 1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정하다 / 단 1:1-9

다니엘서는 포로시대의 신앙 영웅인 다니엘의 생애의 주요 사건과 그가 받은 주요 묵시에 관해 기록한 책입니다. 좀 더 부연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야기된 포로시대(B.C. 586-538)를 전후하여 포로 출신이라는 정치적 한계와 다신교 사상의 이방 제국의 황실이라는 종교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고, 바벨론, 메대-바사, 바사 등 이방 재제국의 몰락과 발흥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관한 다니엘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역동적 사건들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다니엘이 직간접적으로 받은 대제국의 흥망사를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인 묵시들이 소개됩니다.

다니엘서 강해는 한홍 목사님의 책을 인용해서 작성했습니다.

유다의 멸망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1절)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아들로 주전 609년에 남왕궁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기울어진 때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동의 패권을 장악해온 애굽과 신흥 강국 바벨론이 차례로 유린한 탓에 당시 유다 왕국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여호야김의 형제인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애굽 왕에 의해 폐위되고, 대신 여호야김이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여호야김에게 바벨론과 유화정책을 펴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워준 애굽에 충성을 맹세했고,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 결과로 그가 왕이 된 지 3년 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앗수르와 드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애굽까지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 전체를 장악한 대제국 바벨론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군사적 영웅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유다 왕국을 점령함으로써 애굽을 정복하고, 유다 왕국을 세계 제국을 향한 자신의 야망의 디딤돌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이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판도를 읽지 못하고 나라의 패망을 자초했습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2절)

유다는 성전(聖殿)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바벨론 군대는 그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자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둠으로써 유다 백성과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의 승패가 도시 국가가 섬기던 신들의 승패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다의 하나님을 굴복시켰다고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치까지 감내하시면서 패역한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가다

느부갓네살 왕은 점령한 각 속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 지역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 몇 명을 선출해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3, 4절)

그들은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에서도 까다로운 선발 기준으로 뽑은 인재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다니엘과 친구들은 어떤 학문을 가르쳐주면 금방 깨우칠 정도로 지혜롭고 총명했습니다. 또한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학문에 익숙해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소화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런 인재들을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바벨론제국이 제3세계의 인재들을 데려와서 교육시킨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 제3세계의 차세대 지도자들의 실력을 최대한 뽑아내서 바벨론제국을 만들어갈 핵심 두뇌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둘째, 바벨론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을 훗날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 다스리게 함으로써, 점령지마다 친(親)바벨론 정치 세력을 심어놓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5절)

또한 왕은 왕궁에서 선별된 음식과 포도주를 각국의 영재들에게 날마다 공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3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후에 바벨론 왕 앞에 세워져 나랏일을 했습니다. 인재 확보와 육성은 강대국을 만드는 핵심 전략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 정도의 정성으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도자들을 쉽게 세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드디어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6절)

유다왕국은 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한 다니엘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바벨론은 힘으로 유다를 무너뜨렸지만 다니엘을 통해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영적 권위에는 바벨론의 최고 권력자인 느부갓네살 왕도 무릎을 꿇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섭리를 봐야 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각국의 인재들에게는 바벨론 식의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7절)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 나를 판단할 자이시다’란 뜻입니다. 그의 친구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아사랴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좋은 뜻의 이름들을 바벨론 왕실에서는 순식간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유다의 이름들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듯이 바벨론의 이름들 또한 그들의 신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준 ‘벨드사살’이란 이름은 바벨론이 섬기는 신(神)인 벨을 찬양하는 이름으로서 ‘벨이여,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란 뜻입니다. 나머지 세 친구들에게 주어진 이름들도 비슷합니다.

신앙의 마지노선

그러나 세상 속의 크리스천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신앙의 마지노선을 분명히 그어야 할 시점이 반드시 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8절)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피가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던 음식과 포도주는 단지 좋은 음식이 아니고, 모두 바벨론의 신에게 바친 뒤에 내려지는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그 우상을 섬기는 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벨론의 왕은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자기와 바벨론의 지도층들이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건강과 전쟁의 승리와 축복을 보장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그 음식을 먹게 되면 자신의 인생을 바벨론 왕과 그 우상 신들이 결정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배가 항해 중일 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바벨론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 식의 이름을 받는 것까지는 배가 물 위에 있는 것이지만, 우상의 음식을 먹는 것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으면 어두운 권세와 그 하수인인 우상들의 영향력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십니다.

다니엘은 단호하게 그 유혹을 떨쳐버렸습니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 끝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아님을 안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영혼까지 팔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바벨론이 휘두르는 대로 끌려가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뜻을 정한 자를 도우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한 인생에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의 디딤돌은 왕궁 살림을 총괄하던 환관장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용감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기도하며 모색한 다음, 마침내 환관장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사실 환관장에게 있어서 다니엘의 요청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포로로 끌려온 소년의 신앙 양심을 지켜주자고 예외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뇌물을 준 것도 바벨론의 명문가 자제도 아니기 때문에 환관장에게는 이익이 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니엘의 말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9절)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이 생겼습니다. 쉽게 말해 괜히 좋은 마음,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관장에게 그런 마음이 우러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환관장은 온갖 추악한 권력의 암투가 가득한 바벨론 왕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셈이 빠르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

다니엘의 결심은 포로로 끌려간 노예로서 절대 권력자인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이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나이는 겨우 15세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에 불과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국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고, 결국 나라가 망했는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는 그를 영적으로 인도해줄 사람들이나 교회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어린 소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위한 뜻을 정할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가요?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인가, 아니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의 길을 가기로 뜻을 정한 인생인가요?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니엘처럼 확실한 영적 마지노선을 긋고 살아야 합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 각자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대로 하기로 결심합시다.

<묵상과 나눔>

1. 내 인생의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2. 나의 신앙의 마지노선은 무엇입니까?

3. 나는 무엇에 뜻을 정했나요?



뜻을 정하여 (다니엘 1:8-21)

다니엘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잘생기고 인물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서 1 장 3~4 절을 읽어보면, 다니엘이 왕족 또는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머리도 똑똑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게다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약속된 미래, 보장된 성공, 그리고 행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의 인생 전체를 바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바벨론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가진 바벨론은 이스라엘 전역을 폐허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쟁의 결과, 다니엘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집과 고향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부모, 형제와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고아처럼 지내야 했고,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다니엘이 전쟁포로이며,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다니엘을 자신들의 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판에 인물이 좋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국이 망하고 평생 노예로 살게 되었는데 남들보다 머리가 조금 더 똑똑한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불행이 그에게 일어났을 때 다니엘의 나이는 십대 청소년 즈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니엘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것과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8 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단 1:8)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왜 다니엘은 산해진미로 가득한 왕의 음식을 먹기를 거절했습니까? 다니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바벨론 사람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다니엘을 자기 나라로 끌고 간 후에, 그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본래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에게 “벨드사살”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벨티스가 왕을 지키다”는 뜻입니다. ‘벨티스’는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이처럼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 그가 가진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태도와 사고 방식을 버리고, 바벨론 신과 왕을 섬기도록 종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의 참 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비록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그들의 거짓 신에게 봉사하도록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다니엘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섬길 것을 결심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최상의 음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왕이 먹는 최고 수준의 와인과 등급 좋은 고기들을 그에게 준 것이죠. 노예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온 다니엘은 고기도 먹고 싶을 터이고, 배가 무척 고팠을 것입니다. 그도 왕의 진미를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본 것처럼, 다니엘은 이 모든 왕의 진미를 먹고 마시기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당시 바벨론에서 왕들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다니엘에게 준 것이죠. 따라서 다니엘이 볼 때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과 동일 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니엘은 그 질 좋고 맛있는 왕의 음식들을 모조리 다 거부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다짐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음식일 뿐이잖아? 고기 하나 먹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에게 이것은 더 이상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이 사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고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임으로 그는 왕이 하사한 산해진미를 모두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선택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뜻을 정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풍성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죄악으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눈 여겨 보시고,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인도하여 푸른 초원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다니엘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에게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17 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지혜를 얻었고 모든 환상과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 다니엘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대학도 가지 않았고, 박사학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20 절을 보면 다니엘은 바빌론의 모든 박사들보다 열 배 더 지혜로웠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힘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풍성하게 다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다니엘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바로 차세대 다니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노예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바벨론 제국을 다스리는 자 중 왕 다음 가는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끌려 온 한 노예 소년이 온 제국을 다스리는 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을까요? 다니엘이 머리가 좋고 영리했기 때문입니까?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바빌론의 두 번째 통치자의 자리까지 올라 갔을까요? 아니면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이 놀랍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유는 그가 어디 있었는지 또는 그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언제나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날 ‘세상’이라고도 불리는 ‘또 다른 바벨론’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려고 끊임없이 시도할 것입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 교묘한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의 삶에 왕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참된 왕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선한 분이시고 여러분은 놀랍도록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합시다(다니엘 1:8-16)

다니엘은 어린 시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을 당시에 포로로 끌려온 왕족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다니엘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의 임금이었던 느부갓네살은 세계 각국에서 똑똑한 소년들을 모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궁중학교에 입학시켜 3년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켰습니다. 거기다 자기가 먹는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온갖 특혜를 다 부여한 것입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을 훈련시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기에게 충성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상 적으로 보면 그들은 출셋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낯설고 물 설은 타국 땅에 와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왕이 주는 그 기름진 음식들이 바로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조차도 싫어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든 말든 출세하고 돈만 벌면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먹겠습니까? 아니면 출세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리고 내 신앙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결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부귀와 안일함과 모든 명예를 분토와 같이 여겨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보다도 물질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했던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더 놀라운 은혜를 주심으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바뀌고, 왕이 바뀌어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환경과 여건을 만나든지 그 상황과 환경에 굴복하지 말고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여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사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해 볼 것은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8절 말씀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이 위대한 삶은 바로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만일 다니엘에게 단1:8이 없었다면, 그 이후 그의 삶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일생 동안에 받았던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다면 길도 없습니다.

오늘도 예배시간에 늦게 오신 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예배시간은 꼭 지키리라. 지각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뜻을 정하고서 노력을 해야지 예배시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늦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면 늘 지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창5:21,21) 그의 나이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제일 오래 산 사람입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서 키워보니까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늘 아버지의 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잔소리 하는 것이 싫다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 나가서 한 번 마음껏 살아 보겠다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 나가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이 탕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니 자유가 아니라 슬픔이 오고 부요가 아니라 빈곤이 오고 허랑방탕히 오고 말았습니다. 그 삶이 너무나 비참하였습니다.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탕자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잘못했구나. 아버지에게 불효막심한 죄를 지었구나!" 그는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내 잘못을 고하면서 용서를 구해야지!"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고,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모든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리라!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였을지만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믿음의 순결을 지키리라!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포기할 것은 깨끗하게 포기하리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실행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뜻을 정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책임지시고 그를 도와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을 책임지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2. 둘째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뜻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확고하고도 바르게 뜻을 정했다 할지라도, 작심삼일이 되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떠한 형편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줄 압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은 먹지 아니하리라 하고 뜻을 정한 후에 자기의 뜻을 환관장에게 말했습니다. 만일에 환관장이 자기의 말을 들어 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 때문에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는데 너 책임지겠느냐?”하며 안 된다고 하는데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해도 안 되는걸 어떻게 해!”그랬습니까? 그가 이렇게 쉽게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아니했습니다. 감독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설득했습니다. 사정을 했습니다. 열흘만이라도 시험적으로 한 번 해보자고 졸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을 세우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감독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상제물인 왕의 진미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여도 되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인 다니엘이 왕의 사랑을 받고 총리로 발탁이 되고 재주가 탁월하니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을 숙청하려고 온갖 궤계를 다 꾸밉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다니엘을 해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에 시기하는 사람들은 왕을 부추겨서 이상한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을 해치기 위해서 만든 악법이었습니다. 왕도 이 사실을 모르고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악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다 해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사자 굴에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여 주심으로 다니엘의 몸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여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단3: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무한합니다. 잠시잠깐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믿음의 순결을 꺾어버리고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다니엘처럼 말씀대로 살려고 뜻을 정하신 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끝으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이 받은 은혜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의 몸을 우상의 제물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뜻을 정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얻게 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했을 때에 하나님은 감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름진 우상의 제물을 먹은 사람들 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15절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진미와 포도주보다도 채식과 물이 건강식품이어서 그렇습니까?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서 그렇습니까? 다이어트 식품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또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또 17절 말씀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3년의 교육기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학문은 다른 소년들보다도 뛰어났습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렇게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다니엘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걸음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오늘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쪼록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상이 들끓는 바벨론 시대의 문화와 같은 시대입니다. 죄악의 물결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굳게 서서 온갖 죄악의 유혹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한가위 중추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 부득이하게 제사 문제 때문에 핍박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잠깐이지만 받을 영광은 무한합니다. 부디 다니엘의 결단이 우리의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와 긍휼을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다니엘 1:8~16)

미국의 풍자 문학가인 마크 트레인이 쓴 소설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런던의 어느 가정에 두 아이가 태아 납니다. 한 아이는 아주 허름한 빈민의 집에 태어납니다. 톰 캔디라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자라서 소매치기가 되고 거지가 됩니다. 한 아이는 그 당시 영국왕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들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됩니다. 이 거지인 톰이 소매치기를 하고 도망간다는 것이 왕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숨을 곳을 찾다가 왕자 에드워드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걸인 소년과 왕자는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걸인 소년은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번 실 컷 먹어봤으면 좋겠어! 좀 좋은 침대에서 자봤으면 좋겠어.”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거지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너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닐 수 있잖아. 나는 왕궁에 갇혀서 가고 싶은데도 갈수도 없다.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서로 옷을 바꾸어 입기로 했습니다. 왕자는 거지행세를 하고 거지는 왕자 행세를 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옷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 옷을 입은 거지는 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 신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누가 더 힘들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 거지가 된 왕자가 더 힘들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왕자가 된 거지가 힘들거야.”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문제는 왕자가 된 거지입니다.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생활을 했는데 손을 씻어야 됩니다.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시간대로 규칙적으로 생활을 해야 됩니다.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똑 같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신분적으로 거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자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왕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과거의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술집 앞을 지날 때면 목이 칼칼한 것입니다. 옛날 먹던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과거의 언어,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왕자가 된 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생활의 적응해야 되는데 적응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왕자의 삶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과거의 본능이나 하고 싶은 데로 살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으로 결정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삽니다. 누가 치마를 미니 스커트를 입으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 커트를 하면 롱 커트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나도 해야지 하며, 유행과 세속주의를 따라 갑니다. 또 한 부류는 집단의식에 끌려갑니다. 사람을 나눌 때 내편을 나눕니다. 네 가 아군이냐 적이냐를 나누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내 그룹에 속하면 아무리 틀려도 옳은 것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편이 아니면 틀린 것입니다. 꼭 정치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그룹의식, 갱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어디 출신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를 묻습니다. 이것도 저속한 문화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을 자신의 이익에 둡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이익을 따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런 것” 딱 잡아뗍니다. 가려서 합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물질에 대해서 아주 사리가 밝습니다. 때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따라 갈 때가 많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들은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선이고 정의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입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불이는 것 이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악과 싸웁니다. 동족 간에 남북이 전쟁을 하더라도 선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좀 더 발전된  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기준할 때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되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내 모든 가족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 혼자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물어야 합니다. 누가 의견을 이야기 하느냐? 누가 주장하느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로 결정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살았던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7C 에 남 왕국 유다 출신입니다. 그 당시 남 왕국 유다는 18대 여호야김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친 애굽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바벨론과 애굽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바벨론이 승리했습니다. 애굽을 후원하던 유다가 미움을 샀습니다. 바벨론은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던 왕족들과 귀족들, 성경에 보니 흠 없고 잘생기고 똑똑한 소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똑똑한 사람들을 다 데려가서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에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니까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신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유대인들을 바벨론화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여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그의 앞에 다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하다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끌려 왔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바꾸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이고, 왕이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변질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의 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벨드사살에 벨드는 바벨론의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을 회유시키는 하나의 전략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무엇일까요? 고난과 핍박일까요? 그런데 그럴 때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무장해서 더 잘 이겨내고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그런데 잘 해주고 회유하고 친절하게 해주고 늘어지게 잠자게 해주면 하나같이 신앙이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다 세속주의에 물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다니엘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진미는 우상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은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엷은 포도주는 마셔도 독주는 마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니엘의 갈등이 주어집니다. 바벨론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왕과 나라가 계속 바뀌었지만 그는 계속 총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만큼 훌륭하고 총명하고 인격이 뛰어났던 것입니다.

포로 생활 중에 다니엘이 총리가 되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인생의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첫째는 그가 뜻을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어떤 뜻을 정했습니까?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서처럼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인생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분명한 뜻을 정해야 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면 뜻을 정한 곳에 길이 있습니다. 포로 소년에게 이런 특혜와 환대가 주어지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우상 제물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정한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독립운동을 하려고 뜻을 정하는 분이 있고, 나라를 위해서 뜻을 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갈림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분명한 비전과 목적이 없다면 그는 방황하게 됩니다.

이사야 49장에 보면 “내가 헛되어 수고 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힘만 낭비하게 됩니다. 가야 할 방향이 분명한 사람은 옆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목표만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의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 3장에 “형제들아 아직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삶입니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그곳에 온 마음과 정신과 시간과 물질을 맞추면 강력한 힘이 들어 납니다. 우리가 안경을 쓸 때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초점이 맞으면 잘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3장 36절을 보면 “다윗은 당시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다가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 7절에 보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분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말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입니다.”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 당시의 음식 문화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상을 차려주는 주인에게 내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바로가 주는 빵과 고기 덩어리를 떠날 때 그들이 독립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주는 그 고기와 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떠나고 돌아설 때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니엘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래서 바벨론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땅에서 나는 채소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밥 한끼를 먹고 먹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깊은 신앙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내 삶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일에 분주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약속된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물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의 하나를 드리는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열의 하나를 돌려드린다는 것은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생각하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을 지키는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뜻을 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다니엘이 이렇게 변화된 삶을 위해서는 직접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뜻만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워서 머릿속에서 고래 등 같은 집을 열채를 지었다 부수었다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채도 짓지를 못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진정 변화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 요단강은 그때가 추수철이었기에 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들이 요단강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물이 줄어들고 마른 땅같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그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을 믿고 행동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내년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생각들이 실천되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머무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오늘 다니엘은 자기가 믿는 대로 뜻을 새운 데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환관장에게 가서 “나는 이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행동했습니다. 신앙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수한 은행에서 아주 요직에 부장 한명을 특채했습니다. 부장을 특채해서 환영회를 하는 시간에 전무가 술을 한잔 따라서 부장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때 부장이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무가 화를 내면서 “옆에 있는 이 상무는 장로야. 장로는 술을 얼마나 잘 먹는데. 당신은 집사도 아닌 것이 술을 안 먹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나와는 상관없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총재가 “내가 주는 술은 거절하지 않겠지?” 다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부장이 “주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저는 양심상 이것만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부장 오래 일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재의 안색이 변하더니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자내가 진짜네. 나는 자네를 신뢰하겠어. 내가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을 받는데 당신이 진짜네.” 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 이 총재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 부장을 불러서 상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행에 중직에 오르고 총재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잘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숨기고 다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는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은 자기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에게 가서 요구합니다. “내가 환관장에게 요구를 했더니 왕이 보고 우리 얼굴이 초췌해 지면 자기가 위험할까봐 허락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감독관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열흘 동안만 저희가 채식을 하게 해주세요. 열흘 후에 우리 얼굴이 초췌하면 왕의 진미를 먹겠습니다. 그러나 저희 얼굴에 윤기가 흐르면 저희를 그냥 채식을 먹게 해주세요.”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실험을 했는데 어떤 결과가 있었나요.

성경 14절-1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여러분 보세요. 열흘 동안 채식만 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얼굴이 건강하고 윤기가 나고 아름다워 보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고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이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저지게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던저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비록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풀무불에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신앙의 진가가 있습니다. 그 후로 다니엘 총리를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모함해서 왕 외에 다른 누구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조서를 썼습니다. 다리오왕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지만은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 다음날 다니엘을 모함하던 무리들이 다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문 닫으면 장사 안 되는데?” 가게의 문을 닫고 주일날 봉사하는 사람들 보면 금요일 토요일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유 목사님 지금도 부족한데 십일조하면 우리 다 굶어 죽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진짜 굶어 죽는지. 그래도 망하게 되면 오세요. 돌려 드릴게요. 신앙은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시험해보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내게 들여서 내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쌓을 곳이 없도록 붙지 아니하나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라기 3장 8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신앙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는 진정한 다니엘의 충성스러운 신앙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 고등학생이 주일이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를 하니까 늘 집에 돌아가면 늦게 됩니다. 그런데 이아이가 고3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를 못합니다. 가끔 술을 먹으면 술에 취해서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우리 아이 잡아먹으려고 하십니까? 고3이 교회만 가서 살면 대학은 누가 붙여줍니까?”하고 말을 했습니다. 아이가 이 사실을 알고 왜 목사님께 전화 하냐고 반문을 합니다. 아버지가 “야 이놈아! 네가 우리 집 장남인데 대학도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아이가 기도를 하다가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버지 저하고 약속을 하십시다. 제가 주일날은 마음대로 교회에 봉사하고 예배하게 해주세요. 대신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두 달 동안만 시험해 보셔서 제가 성적이 떨어지면 제가 교회를 끊겠습니다. 만약 성적이 올라가면 저의 예배를 방해하지 마세요.” 이 아이가 주일날은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는 매일 시험을 보는데 월요일은 주일날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15등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화요일은 12등, 수요일은 10등, 목요일은 7등, 나중에 토요일은 1등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두 달 후에는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곱절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학문과 재주에 명철을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0절 말씀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보다 십배나 나으니라.”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는데 다른 박사들보다 10배나 총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내가 정결한 삶을 살겠다.” “믿는 자의 합당한 삶을 살겠다.” “내가 하나님과 약속한 예배시간을 지키겠다.” “내가 주일 성수를 하겠다.” “내가 온전히 십일조 생활을 하겠다.” 한번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뜻을 새우면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거지로 사시겠습니까? 왕자로 사시겠습니까? 여러분 거지의 신분을 벋어 버리세요. 하나님의 자녀의 왕자의 생각을 하세요. 왕자처럼 생각하시고, 왕자처럼 말하시고, 왕자처럼 걸어가시고, 왕자처럼 품위 있게 사세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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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바벨론 제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바벨론 제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바벨론 제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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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이를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레 18:24-25).

레위기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 자가 받는 공통적인 심판의 원리로써, 출애굽 때 가나안 거민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근본적인 두 가지 악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곧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욕으로’ 여길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렘 6:10).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상숭배하는 죄와 안식일‧안식년을 범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하심으로써, 우상숭배한 범죄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경고하셨다(렘 19:1-15, 참고-렘 7:30-34)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우쳐 회개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대하 36:14-16, 렘 7:25, 25:4, 26:5, 29:19, 35:15, 44:4),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하면서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렘 5:12-13).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렘 19:1, 10-13).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갖다놓고 섬김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렘 32:34, 겔 8:1-18, 2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

1) 안식일의 불순종
안식일 준수여부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기준이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분기점입니다(렘 17:19-27).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출 31:13, 겔 20:12, 20).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렘 1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2: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 안식년의 불순종
안식년의 규례는 ‘제 7년에 땅을 쉬게 하라’는 것과 ‘동족 히브리 사람 종을 7년째 자유케 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레 25:2-7, 신 15:12-18).

① 6년 동안 땅에 파종하고, 제 7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출 23:10-11, 레 25:1-7, 26:34-35)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는 7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땅에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레 25:2-4), 
스스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땅이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레 25:5).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면 제 6년에 3년 소출을 주심으로 제 7년 안식년 뿐만 아니라 제 8년과 제 9년 까지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 25:21, 렘 25:22). 
이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레 25:23).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욕심으로 인하여 제 7년에도 파종함으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땅이 안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레 26:43).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② 종이 동족 히브리 사람이면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는 자유케 하라(출 21:2-6, 신 15:12-18)
율법에는 히브리 종인 경우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반드시 놓아 자유하게 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1:2, 신 15:12).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종을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되며(신 15:13-14), 
노예의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21:2, 신 15:18).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안식년의 규례를 어기고 종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렘 34:8-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시어 그들도 자유를 빼앗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무수한 죄 때문에 피 흘린 성읍이 되었고, 두껍게 녹슬어 버린 가마같이 되고 말았습니다(겔 24: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노와 분을 쏟아서 유다의 죄악을 정결케 하셔야만 했습니다(렘 29:10-11, 겔 22:21-22, 24:12-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으나,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적 암흑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보내어 철저하게 회개케 하시어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이 포로로 흩어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렘 29:11-14). 
정복자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그 땅에서 적응하며 그 역경 속에서 회개하여 정결케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와 구속 경륜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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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시대의 연대

B.C

722. 북이스라엘 멸망(앗시리아)

605. 바벨론 1차 포로(다니엘, 귀족들)

597. 바벨론 2차 포로(여호야긴, 에스겔, 기술자)

586. 바벨론 3차 포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

539. 10월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538/7 1차 포로 귀환(세스바살, 스룹바벨): 에스라 1-6장

520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

515 제2성전 완공

492. 1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1세, 헬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300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사를 잃음)

490. 2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 1세,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중장병 밀집대전술에 패함)

480. 3차 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

465. 궁정 쿠데타로 크세르크세스 사망

465.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 집권(느헤미야가 술맡은 관원)

461.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기

458 2차 포로 귀환(에스라): 에스라 7-10장/ 1차 신앙운동

444/5 3차 포로 귀환(느혜미야): 느헤미야서/ 성벽재건 공사와 2차 신앙운동

바벨론의 유다 왕국 1차, 2차, 3차 침공 정리하기
 

각각의 침공은 유다 왕국의 상황과 바벨론 제국의 정책에 따라 다른 결과를 초래했으며,
궁극적으로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1) 1차 침공 (기원전 605년)

배경: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물리친 직후,
유다 왕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결과:

이때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유다 왕국을 바벨론 제국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귀족 청년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2) 2차 침공 (기원전 597년)

배경: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도 바벨론의 공격에 직면하여 항복하게 되었고,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는 여호야긴과 함께 많은 유다의 귀족들, 군사 지도자들, 기술자들을 포함해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에스겔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여호야긴과 함께 많은 유다의 귀족들과 기술자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첫 번째 주요 바벨론 유수로 이어졌으며,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 참고(시작)
에스겔의 활동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후, 바벨론에서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예언 활동은 주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 거주하면서 에스겔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꾸짖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며, 나중에 회복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들은 후에 "에스겔서"로 집대성되었으며, 구약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참고(끝)

(3) 3차 침공 (기원전 586년)

배경: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자, 느부갓네살 2세는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포위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체포되어 그의 자식들이 처형된 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침공으로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이는 바벨론 유수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요약

1차 침공: 기원전 605년
2차 침공: 기원전 597년
3차 침공: 기원전 586년

이 세 차례의 침공을 통해 유다 왕국은 점차 바벨론 제국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정치체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른 자료 참고함

(2) 2차 바벨론 유다 침공 (기원전 597년)

2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기원전 597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배경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자주 이들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야김(Jehoiakim)은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만,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반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2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Jehoiachin)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은 바벨론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싸울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결과

느부갓네살 2세는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그와 함께 유다의 귀족들, 기술자들, 그리고 엘리트 계층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유다 왕국에서 일어난 첫 번째 주요 포로 이주 사건으로, 나중에 "바벨론 유수"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와 유배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와 함께 바벨론은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Zedekiah)를 유다 왕으로 세웠지만, 이는 바벨론의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은 유다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시켰으며,
이로 인해 유다 왕국은 점점 더 바벨론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침공은 이후 2차, 3차 바벨론 침공으로 이어져, 기원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3) 3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 (기원전 586년)

3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은 기원전 586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은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이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침공은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h)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배경

2차 바벨론 침공(기원전 597년) 이후, 바벨론은 유다 왕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여호야긴(Jehoiachin)을 폐위한 뒤 그의 삼촌 시드기야(Zedekiah)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왕으로서 즉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바벨론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집트의 지원을 믿고 바벨론에 대항했지만, 이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습니다.

시드기야의 반란에 대응하여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 왕국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포위전은 기원전 586년에 시작되어 18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기간 동안 극심한 기근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시드기야를 체포했습니다.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그의 아들들은 그의 눈앞에서 처형당하고 시드기야 자신은 눈이 멀게 되는 끔찍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특히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이 불타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유다 지역은 바벨론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이는 유대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바벨론 유수(Babylonian Exile)로 이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차 바벨론 침공은 유다 왕국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후 약 50년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의 정치적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참고자료:
https://blog.naver.com/samhoung/222069461208



​바벨론 포로 귀환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136년 후 B.C. 588년에 남유다가 멸망합니다.
남유다가 망한 연도는 B.C. 586년이 아니고, B.C. 588년임이 밝혀졌습니다.

​바벨론 포로는 B.C. 605년부터 B.C. 58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번째 포로는 유다왕 여호야김 왕 때 였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이 끌여갔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야김 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세웠습니다.

여호야긴 왕은 요시야 왕의 손자이자 여호야김 왕의 아들로,

B.C. 598년에 아버지가 죽은 후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고,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이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려 하면서,

유다는 다시 바벨론의 침략을 맞게 됩니다.

여호야긴 왕의 통치는 단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벨론 제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고,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습니다.

여호야긴 왕은 당시 바벨론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여호야긴 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유다 왕국의 첫 번째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은 유다 왕으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야긴 왕과 함께 끌려간 사람들은 유다의 귀족, 장인, 군사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는 유다 왕국이 사실상 바벨론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유다에는 여호야긴 왕의 삼촌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괴뢰 왕으로 세워지게 되지만,

그는 또한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결국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두 번째 포로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여호야긴 왕은 바벨론에서 약 37년 동안 포로로 지냈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바뀌면서 그의 처지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에윌므로닥이 바벨론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에게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고,

일정한 생활비를 받으며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25:27-30, 예레미야 52:31-34).

이는 당시 여호야긴이 비록 포로였지만,

유다의 왕족으로서 명예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사건은 여호야긴 왕의 왕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상징하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의 희망을 암시하는 요소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의 포로 생활 이후 운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그는 바벨론에서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B.C. 597년에 2번째 포로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유다의 귀족, 관리, 군인, 기술자 등 1만명이 끌여갔습니다.

B.C. 588년에 3번째 포로가 이루어집니다.

유다왕 시드기야 때 였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우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고,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 포로와 귀환로

바벨론 포로는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B.C. 538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는 B.C. 537년에 포로를 1차로 석방합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석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적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공사가 중단됩니다.(B.C. 534-B.C. 520 -- 16년간)

B.C. 458년 2차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였습니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석방됩니다.

에스라는 학사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 재건에 앞장섭니다.

B.C. 455년에 3차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느혜미아를 중심으로 석방됩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으로 귀환한 느혜미나와 백성들은 성벽 재건을 이루어냅니다.


‘유대인들의 70년 포로귀환과 성전 중건’

부제> ‘유대민족 엑서더스· 다니엘의 70이레’

다니엘 선지자 ‘예레미야’의 70년 예언 깨닫아

BC 606년 포로 ‘고레스 칙령’ BC 536년 귀환

‘이사야’ 태어나지도 않은 이방 왕, 고레스예언

중건은 여러번 ‘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시기

‘니산월’ 바벨론 포로 이후 히브리 월력의 첫달

유월절은 니산월에 ‘출애굽 기념하는’ 최대명절

다니엘 9장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21.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22.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23.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죄악이 용서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다니엘서 9장)

▲ 남유다 70년의 포로 기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인해 제1차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BC 606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로 귀환한 BC 53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 ‘70년 포로생활’ 구약성경 다니엘 9장

구약성경의 다니엘 9장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폭넓게 볼 때 역사서라 칭하기 보다는 미래 진행형의 대분수령을 이루는 핵심 축이라 할만하다. 단지 유대인을 향한 일획일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현미경적 예언뿐만 아니라 이들 민족을 둘러싼 고대제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현시점의 지구촌 인류에게도 섬뜩한 적색 경고음을 연신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다니엘 9장의 예언을 함축하면 다음과 같다. 예언서의 핵심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 이어 메시아의 탄생과 죽음, 성전파괴와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세계정부의 수립에 이어, 최종적으로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제국의 종결점으로 일대 파노라마를 형성한다.

다니엘서 9장의 서두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2절) 다니엘은 다리오(Darius) 왕 원년인 BC 538년에 70년 포로의 기간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 유대 포로귀환과 연이은 예루살렘성 중건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에스라 6장 14절)   

이어 다니엘이 기도할 때에 천사가 와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이 역사적 대사건인 다니엘의 70이레의 꿈은 BC 538년 메대족속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 다리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첫해에 본 환상이다.(21-27절)

여기에서 한 이레는 7년이다. 구약성경의 중요 사건들에는 1일은 1년으로 계산한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단적인 실례를 찾아본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40일 정탐하고 나서 돌아와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생활을 내리시는데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40일을 40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내리셨다.(민수기 14:34)

다니엘이 먼저 깨달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종식될 것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살펴본다.

다니엘은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아 25:11-12, 29:10)는 말씀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예레미아의 말씀은 ‘에스라’에서도 동시 확증된다.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에스라 1:12)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본토로 귀환하게 된 대사역은 언제 극적으로 성취되었을까?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고 ‘고레스(Cyrus)’가 BC 537년 집권하게 된다. 이 역사적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에스라 1:1-3)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서 백미는 바벨론 멸망(예레미야 25장, 29장)이었다. 그렇다면 이 고레스는 누구인가? BC 539년 고레스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던 밤에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다니엘 5:30) 바사 제국을 창건했다.

“고레스는 해방자로 자처하며, 바벨론에 남겨 두었던 신상들을 원래 있던 성읍에 되돌려 보냈고, 포로 된 사람들을 귀향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은 본토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역대하 36:22-23)


▲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본토로 귀환하게 된 대사역은 언제 극적으로 성취되었을까?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고 ‘고레스(Cyrus)’가 BC 537년 집권하게 된다. 유물은 고레스 칙령.    

●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최종 멸망

이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의 꿈을 통하여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약 1천년 제국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다. 생생한 실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를 거쳐 열국시대까지 정확하게 이미 역사에서 실현되었다.

▲ 이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의 꿈을 통하여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약 1천년 제국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다. 생생한 실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를 거쳐 열국시대까지 정확하게 이미 역사에서 실현되었다.

이들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게 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본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최종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는 바벨론의 단번의 침공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총 세 차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첫 번째 침공은 BC 606년이다.

이에 남유다 70년의 포로 기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인해 제1차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BC 606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로 귀환한 BC 53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최종 3차까지 귀환한다.

이에 이스라엘은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때는 BC 606년이니 70년 만에 귀환하게 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의 1차 침입이 시작된 BC 606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인한 1차 귀환 시점인 536년으로 계산한다.

▽ BC 536년 제1차 포로 귀환,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스룹바벨 등이 일차로 귀환(에스라 1-6장) ▽ BC 458년, 에스라의 제2차 귀환(에스라 7-10장) ▽ BC 445년, 제3차 귀환, 느헤미야의 주도(느헤미아 1-2장)


▲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가 BC 606년이라고 할 때, 다니엘이 예언서를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가 BC 606년이라고 할 때, 다니엘이 예언서를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아마도 포로생활 69년이 지나간 때인 듯하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민족의 귀환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불과 1년이 남은 시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도한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서로부터 약 200년 전을 소급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이방 왕,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다.

분명 “다니엘이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다니엘서 1장 21절)는 말씀처럼, 다니엘은 이사야서 44장을 고레스왕에게 보여주었을 것이고 자기 이름이 분명 예언된 내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 틀림없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이사야 44:28)

고레스 왕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하도록 허락한 중대한 사건이요, 유대 민족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 유대인 포로 3차례에 걸쳐 귀환

유대인들이 본토로 귀환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은 ‘70이레의 시간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성전중건의 예언의 시점을 다시 세밀히 규명하여 본다.

성전 중건에 대한 예언은 ‘에스라 느헤미아 예레미아 다니엘’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대두된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것이 언제인지는 크게 2가지이다. 그리고 유대 포로귀환과 연이은 예루살렘성 중건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 이스라엘은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때는 BC 606년이니 70년 만에 귀환하게 된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에스라 6장 14절)

이제부터는 유대인의 70년 포로 생활 종식에 이어, 예언의 중핵인 70이레에 대해 본격 규명해 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레스 칙령이 일대 분기점이 된 것이 너무 확실하다. 또 하나는 ‘아닥사스다왕’(Artaxerxes)때이다. 이 시점은 후에 상술하겠지만 다니엘 70이레의 대예언 중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 처형과 가장 일치한다.

▲ 성전 중건에 대한 예언은 ‘에스라 느헤미아 예레미아 다니엘’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대두된다.     

아닥사스다는 두 번째, 세 번째 유다인 귀환을 허락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했었다.(에스라 4:7-24) 두 번째 귀환은 아닥사스다왕 칠년에 일어났다. “아닥사스다왕 칠년에…예루살렘으로 올아올 때에”(에스라 7:7)

세 번째는 아닥사스다왕 20년 재위 때이다. 유대인의 세 번째 귀환 느헤미아의 기록이 집중조명 받는다. 유대인의 포로 귀환공동체를 인솔하여 난관에 봉착한 에스라의 개혁을 돕기위해 왕의 재가를 얻어 예루살렘을 찾아와 고락을 같이했다.

포로 잡혀갈 때 세 번에 나누어서 잡혀 갔는데 돌아올 때도 세 번에 나누어서 돌아오게 된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바벨론에서 출생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세 번째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다.


▲ 느헤미야는 선지자 에스라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바벨론에서 출생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세 번째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다.  

유대인의 세 번째 귀환인 BC 445년 아닥사스다왕 20년의 조서를 살펴본다. 아닥사스다왕은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은 느헤미야이다. 예루살렘 성문이 불에 탄 채로 남아 있고 성읍이 여전히 황폐되어 있다는 소식으로 근심에 빠져있는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중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내린다.(느헤미아 2:1-9)


▲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느헤미아 4:16-18)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이 때의 형편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느헤미아 4:16-18)


▲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니산 월이 매우 주목을 받는다. 여기에서 유월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월절의 절기와 다니엘서의 예언은 볼트와 너트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니산 월’(the month of Nisan)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이후, 사용된 히브리 월력의 첫 번째 달이다. 니산 월 14일은 유월절로 지켜졌다. 유월절은 유대의 최대 명절이다. 출애굽기가 기원이다.

야훼는 이집트가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 아이(가축도 포함된다)들의 죽음이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면 밤에 야훼가 보낸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이 첫 유월절은 무교병(발효시키지 않은 빵)의 축제라고도 부르는데, 출애굽기 12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야 했으므로 신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발효된 빵이 아니라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만들라고 명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충실히 지켰다. 유월절 축제 기간은 7~8일 정도다. 이때 무교병을 먹는 게 전통이다


성경의 남북 분단 시대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약 208년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history)와 하나님의 역사(working)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사람과의 협력의 역사이다. 베데스다 못가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을(요 5:1-9) 생각하며, 38선에 의해 분단된 이 나라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된 지 70년, 이를 성경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일치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현 시점을 영적으로 바벨론 포로 종결로 보아야 할지, 시작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따라 관점의 차이는 크다

한국의 분단과 통일의 기간이 바벨론 포로기와 같이 70년과 동일한지, 애굽 430년 기간이 될지, 광야 생활 40년의 기간이 될지, 아직 바벨론 포로의 전 단계인지, 성경의 기준과 무관한 역사적 통일의 해가 전개될지 인간의 지혜로 판단할 수가 없다. 다만 한국의 역사나 분단과 유사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과 의미를 찾자는 것이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순종, 이를 대비한 준비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통합과 분열

사울 왕 이후에 다윗 시대(BC 1010~970)에도 통일 왕국을 유지해 왔으나, 40년 뒤인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분열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120년)은 사울(40년), 다윗(40년), 솔로몬(4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사울-다윗-솔로몬 시기의 통일 왕국에 이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BC 931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가 분열되어 분열 왕국 시대라 한다.

분열의 근원적인 원인은 솔로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솔로몬은 율법을 거역하고 이방 여인들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유혹으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죄를 범한 솔로몬에게 나라를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비 다윗을 생각하여 그 나라를 모두 빼앗지는 않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남겨 두고 그것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왕상 11:11, 12).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이방 신전을 짓고 이방신을 섬기자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켰으며 마지막에는 솔로몬의 심복 중 한 사람인 여로보암을 대적하게 하셨고 12지파 중 10지파와 많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주전 930년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국가가 되었다. 722년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군대에 의해 먼저 망할 때까지 208년 동안 북쪽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통치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남유다에도 겨우 6명뿐이었다. 남북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는 시대였지만, 내적으로는 각 지파들 간의 갈등의 심화와 솔로몬 때부터 쌓였던 세금과 부역 등으로 인한 수많은 불평들이 백성들 안에 잠재해 있었으며, 우상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진리를 떠난 죄악, 정치, 사회적, 종교적 타락으로 인한 결과로 민족 분열을 겪게 된다.

결국에는 남쪽에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유다왕국이 섰고, 북쪽에는 세겜을 중심으로 하여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왕이 된, 북이스라엘이 들어섰다(왕상 11, 12장).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였고, 솔로몬의 심복이었다. 그는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수할 때 그의 성실함이 솔로몬에게 인정되어 그의 심복이 된 것이다(왕상 11:26, 28).

하나님은 솔로몬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을 때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다윗 집에서 열 지파를 떼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은 120년 만인 BC 931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남북 왕조로 나뉘어 진행된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두 개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후에 레위 지파는 우상숭배에 반발하여 남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의 즉위로부터 바벨론에 패망할 때까지(BC 931~586) 약 345년간 존속하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앗수르에 의한 패망까지(BC931~722) 남북 분단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한다.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약 135년 후, 바벨론 포로로 간다. 그리고 70년 동안 그곳에서 포로 생활(BC 586~444)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추방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기와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엘리야, 미기야, 엘리사, 요나,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을 통해 회개하도록 선포한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유다가 망하기 전에는 나훔(BC 686~612), 스바냐(BC 640~621), 예레미야(BC 626~584), 훌다(BC 621), 하박국(BC 608~598), 에스겔(BC 593~571) 등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으나 반역을 행하고 불순종한다.

그 결과 강대국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거치게 된다. 이방 강대국가의 강점기를 거친다. 본토의 백성들, 외국에 포로 생활로 '남은 자'들로 백성들은 고통과 신음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70년, 하나님의 때가 차자 조국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된다. 성전이 재건되며 예배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된다. 새롭게 영적 이스라엘, 선민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민족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다(대하 36:21, 렘 34:8-16).

포로 후 바벨론에서까지도 선지자들, 다니엘(BC 586), 오바댜(BC 580), 요엘(BC 539~531), 학개(BC 520), 스가랴(BC 520~514),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BC 500~450)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것을 예언하게 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다니엘과 에스겔서는 하나님나라가 재건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인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멸망하게 하시고(50:3,9, 41-46, 51), 이스라엘 백성이 본토로 귀환하도록 하셨다. 바벨론 왕국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인 벨사살 때에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만다. 앗수르는 주전 612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다. 남북 왕국 모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바벨론은 메대, 바사 연합국(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다. BC 538년에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는 BC 515년에 성전을 건축하고, BC 445년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한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잡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의 왕가는 7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통치하게 된다. 메대 사람 다리우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나이가 많음으로 바사의 고레스에게 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처럼 70년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고레스를 택하시고 그에게 오늘 이스라엘을 돌려보내도록 하신 것이다.

70년 바벨론 포로기와 한국의 현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 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2015년은 광복-분단 70주년, 건국 67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70년은 완전수이며, 성수(聖數)인 7의 10배수인 70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기대할 의미 있는 숫자이다. 하나님의 카이로스, 포커스와 타이밍은 중요하다.

한민족은 676년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한 이후, 1945년 광복까지, 후삼국 35년을 제외한 1,000여 년 동안 단일민족을 형성해 왔다. 세계 역사상 드문 통일국가의 역사이며 통일은 한민족의 정체성이다.

세계사를 보면 이 70년은 의미가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공산주의가 70년 후인, 1987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 사건이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세계 질서와 구도가 변했듯이,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한반도에도 휴전선이 사라지길 소원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한국을 돌이켜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분단과 외세라는 바벨론 포로의 해방과 통일의 기쁨을 주시기를 간구한다. 평화적 민족 통일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죄악으로 왜곡된 분단의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복음화 통일의 가치 창조가 올바른 통일 운동이다.

바벨론 포로기는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교훈과 지혜를 제공해 준다. 조지 바나는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갈 영적 리더십이란, 첫째, 사람을 이끌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소명),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이끄는 자(성품), 셋째, 리더십을 위해 기능적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능력)라고 한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이를 실천하고 하나님나라 건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소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복음으로의 무장과 성령의 역사, 탁월한 실력과 안목도 겸비해야 이상적인 크리스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텍스트와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통해서 국가를 치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국제정치와 민족국가와 열강 간의 역학 관계, 경제·사회·역사적 문제까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지혜와 신앙의 원칙과 경험을 통해서 과거를 아는 지혜, 현재를 통찰하고 미래를 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사람이 해야 할 사명과 그 방향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할 때 자기 시대를 개혁하고, 자기 시대의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애굽의 430년간 노예 생활, 바벨론 70년간 포로 생활,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AD 70년에 멸망하고 약 2,000년에 이르는 유랑 생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알고 믿음으로 행했기에 오늘날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는 이사야가 예언한 '남은 자'(the remnant) 사상이 구현되었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파기와 불순종으로 인한 민족의 파국 상황에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베풀고, 소수의 '남은 자'를 구해 주시고, 이를 통해서 존속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파멸이 아닌 자기 백성의 구원이며, 정화와 회복을 통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백성들로 선택한 것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롬 9:27).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와 귀환 이후에도 이방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잠시 독립하였으나(마카비 시대), 다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이 안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영적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있다.

지상 국가의 한계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건물인 교회도 영원하지 않다. 복음만이 영원하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영적인 현실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구속사적 진행,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과 그 완성이 온전한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영토적 개념에 국한되기보다는 이보다 더 포괄적인 영적 개념임을 알 수가 있다. 재림 예수님의 지상 출현이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적 바벨론과 한국교회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는 바벨론 패망과 하나님나라 완성의 자세한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음녀 바벨론, 오늘날 타락한 도시 문명은 영혼들의 사냥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을 큰 음녀, 어미, 귀신의 처소, 가증한 것,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음녀와 연합한 땅의 임금들, '음행'과 '사치' 등으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정신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영적 타락상을 의미한 것이다. 계시록에서 말한 바벨론은 구약성경의 지상 국가인 바벨론과는 다른 차원의 영적 비밀이 있다. 계시록은 '문자+상징'을 융합해서 조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인간이 전부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먼저 어떤 영적 바벨론 포로에 잡혀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과 회개도 요구되어 진다. 교회의 맘몬이즘, 성경 말씀 훼손과 소멸, 헌금 강요와 빚으로 얼룩진 매머드 교회 건물, 교회의 영적 권위 상실과 교회 내 폭력과 하나님 경시 풍조, 교권주의와 분열, 교회의 정치권력화, 목회자들의 타락, 세속화의 포로, 그리고 통일을 가로막는 남북 갈등에 못지않은 동서 갈등, 정치적 패권주의와 죄악과 부패, 소수의 부의 집중과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죄악인 사치와 방종이나 타락 등이 한국교회와 국가와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영적인 바벨론 포로기일 수도 있다.

바벨론 포로 70년은 개인과 민족적 회개의 시기였다. 한국교회도 과거 일제시대 신사참배와 우상숭배, 교권 다툼과 자기 역할 상실 이후에 전쟁과 분단을 겪었다. 이러한 시대를 보고 성경적 교훈을 삼아야 한다. 개인과 집단, 한국교회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들로 현시대에도, 한반도의 통일 시대에도 귀하게 쓰임받길 소원한다.

다니엘은 조상들의 죄악을 회개했다. 동일시 회개인 것이다. 다니엘은 BC 605년 당시 강대국이었던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나라를 제1차 침공했을 당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나중에 바벨론의 국무총리가 된다. 다니엘서 9장에서 다니엘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 만에 해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오던 때에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한 말이 기억났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는 것과(렘 25:11,12), 하나님의 은혜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렘 29:10)을 예언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시간(Jeremiah's Time)이다.

"다리오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 9:2).

이렇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를 예언하였고, 동시에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귀환도 예언하여(단 25:12) 포로 된 백성들에게 그의 예언은 유일의 소망이 되었던 것이다(단 9:2).

다니엘에게 임한 기도 응답이 지금 한반도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도 응하기를 소망한다. 해방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올 해에 통일 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세계는 소통(communication)과 융합(convergence)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가고 있다. 사유 없는 지식, 통찰 없는 이성, 메마른 지성이나 향방 없는 신학적 지식과 교회는 통일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 전략적 민첩성도 요구되어진다. 급변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나 혼합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통일 운동은 영적 전투이다. 그래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 내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나 준비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서 교회, 국가와 시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교수인 클링턴은 "리더십이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끼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명한 목적은 선교의 명령이다. 2015년, 한국교회에 평화적 통일과 북한복음화 사명을 감당하는 결단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길 기대한다.

황준배 / 신학박사, <카리스마적 리더십> 저술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약속(성경다니엘서에약속),북한 동포에게 신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 한장으로 주님의 개입(은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

2018.4.29김에스겔 목사)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은 위대한 섭리의 멍에였다”<와우! 예레미야 70년> 펴낸 조병호 목사

박용미 기자승인 2016.04.01

“하나님 예비하신 징계·교육·안식의 시간” 재조명

▲ <와우! 예레미야 70년>을 출간한 조병호 목사.

<성경과 5대제국> <성경과 고대전쟁> <성경과 고대정치> 등으로 교계는 물론 일선 문화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조병호 목사(성경통독원 원장)가 또 다시 성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번엔 예레미야다. <와우! 예레미야 70년>(통독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징계, 교육, 안식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월 31일, 서울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조병호 목사는 기자들에게 대뜸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챕터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가장 먼저 나온 대답은 역시 레위기. 조 목사는 그 이유를 “스토리가 생략되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대답은 센스 있게(?) 예레미야였다. 그는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애매해서”라고 설명했다.

“예레미야서의 메시지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다윗, 이사야까지 성경에는 승자 이야기가 많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한다는 명확한 교훈을 주지만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레미야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세례요한, 엘리야와 함께 거론됐을 정도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각인된 존재였다. 대대적인 구국성회 중에 줄과 멍에를 들고 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퍼포먼스’가 당대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남유다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징계’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것을 깨닫는 ‘교육’을 뜻하기도 한다. 조 목사는 “포로 생활 70년은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 받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시민 재교육’을 거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은 쉽고 가벼운 나무 멍에를 메는 것이지만 저항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무겁고 힘든 쇠 멍에를 메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해석했다.

또 이 70년은 그동안 죄악으로 마치 녹슨 가마와 같이 되어 버렸던 예루살렘 땅을 ‘안식’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벨론 군인들이 부수고 불태웠던 그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어 땅은 완벽하게 휴식을 누린 것이다.

이쯤에서 조병호 목사는 예레미야에 대한 오해 한 가지를 꺼내들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는 점에서 그가 친바벨론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 목사는 “바벨론이 전쟁에 휩싸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알받이가 된다. 그것을 막은 사람이 예레미야”라며 “그는 제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시며 온 세계를 경영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해 주변 제국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와우! 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가슴 뛰는 이야기였는지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고, 우리 자녀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독자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하신것이하나님의약속(성경다니엘서에약속),북한 동포에게 회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한장으로 주님의개입하셨다는것을보여주셨다.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2018.4.29.김에스겔목사.)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과 역사이해

김성욱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1.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자면,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소명, 출애굽, 다윗왕조의 흥왕(興旺)과 몰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그 귀환 등이 될 것이다. 그 동안의 논의를 볼 때 많은 설교와 논의는 주로 앞부분에 관한 것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그 귀환의 역사적 의미는 그 중요성에 비하여 사뭇 간과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본 논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의미에 관하여 잘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이해와 성경이해 더 나아가 역사이해를 위해서 귀중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해나 평가가 단순치 않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관한 자료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확하게 70년으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수차례 언급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혹은 그것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70년으로 수용하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심도있게 다루면서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스라엘의 포로시기를 살펴보려면, 그 역사의 전후를 조사하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 후(B.C.722년)로부터 남왕조 유다가 멸망당할 즈음의 역사가 간단치 않으며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 외에도 여러 선지서자들의 글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와 함께 그 정황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앗수르의 바니팔(오스납발, B.C.668-632, 대하 33:11-13; 스 4:10) 왕이 죽은 이후, 앗수르에서는 온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가는 큰 혁명이 일어났다(B.C.627-624). 그리고 이 혁명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의 파멸을 초래하였으며 당시의 바벨론은 이러한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되찾았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무너진 지 110년이 지난 후 유브라데스 강변의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결국 메데제국을 몰락시키고 세계 정세에 있어서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바벨론은 B.C. 612년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키면서 결국 구약성경의 중심 배경이 되는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 지역은 애굽과 바벨론의 세력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즉 고대로부터 계속이어져 오던 근동지역의 패자인 애굽의 세력과 신흥 바벨론의 힘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당시 국제정세를 흔드는 두 축이 되었다.

비록 예전의 최고 강국이었던 앗수르가 신흥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으나(B.C.612), 아직도 앗수르 지역에는 앗수르의 잔류군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도 아직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 틈을 타서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강국인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회복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로 알아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을 치려하였다. 그러자 앗수르의 남은 백성들은 하란으로 모여서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애굽과 대항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거점을 확복하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항거하며 하란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 때 바벨론의 바포폴리살 왕은 이를 감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들을 쳤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마저 격퇴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패권(覇權)의 윤곽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서 남왕조 유다의 요시야 왕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갔다가 전사하고 만다(B.C.609). 이러한 상황은 B.C. 605년까지 계속이어 오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Carchemisch) 전쟁에서 애굽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가고 애굽의 하수까지 남하하였다(왕하 24:7). 따라서 이 전쟁을 계기로 바벨론은 명실공히 고대 근동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갈그미스 전쟁 중에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1차 포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B.C.605년). 성경에서는 분명히 유다가 완전한 멸망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징조들을 보이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B.C.605년의 제1차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고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이라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활동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의 세력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애굽왕 바로느고의 봉신이었던 여호야김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B.C. 601년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왕하 24;1), 이로 인하여 B.C. 598년 12월에 다시금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왔다. 그 결과 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죽고, 이어서 18세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계승한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B.C. 597년), 시드기야(B.C. 597-587년)를 왕으로 세운다. 시드기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하여 바벨론에 항거하였는데, 결국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온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각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 역사를 정리해보자면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바벨론은 유다를 치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를 잡아갔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상류층의 인사들이 함께 끌려간 것으로 보는데(단 1:1-6) 이것이 이스라엘의 제1차 바벨론포로가 된다. 제2차 바벨론포로는 B.C. 597년에 일어났는데, 이 당시에 끌려간 유대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에스겔 선지자를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말과 관계되는 제3차 바벨론 포로는 B.C. 586년에 이루어졌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짓밟히게 되고 또한 예루살렘성전은 시드기야 9년에 포위되어 결국 시드기야 11년(B.C. 586년 7월)에 완전히 함락되고 만다. 이 때 시드기야 왕은 몰래 도망을 치다가 잡혀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으며, 자신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을 뽑히고 또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400여년 전통을 이어온 솔로몬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때부터 디아스포라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한 기한이 차게 되어, 그들이 포로 잡혀간 지 약70년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허가를 받았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 세 차례(B.C.605, 597, 586)에 걸쳐 진행되었듯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의 귀환하는 것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제1차 귀환은 B.C.538년에 왕통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그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49,897명이 귀환하였다(1:5-2:70).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제2차 포로귀환은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B.C. 457년(아닥사스다왕 7년)에 일어났는데, 에스라의 인도 하에 1,754명이 귀환하였다(스 8:1-14). 그리고 제3차 귀환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하였다.

3.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그 귀환에 관하여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9:1-2에서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는 에스라서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1-2)

여기에 등장하는 고레스는 B.C.559-53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 B.C.538년에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포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B.C.605-538년이므로 67년이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제2차 혹은 제3차 바벨론 포로로부터 바벨론포로 기한을 규정한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란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간과하고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향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고 지나간다. 첫째, 실제로 67년이지만 마치 70년으로 생각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67년이나 70년 별 차이가 없고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작업인 듯이 보일지 몰라도, 이 부분을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과 풀리지 않는 다른 많은 문제들 속에 파묻혀 슬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벨론 포로의 70년이란 것은 상징적인 수로 인식하며 그 해석을 첨부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자면, 매 7년이면 안식년이고 또 이런 안식년의 10번(완전수)을 곱하는 것(7X10=70)으로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충분한 안식을 취한 후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 번째의 설명으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만큼 안식을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와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고 발전시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심판 중에 가장 혹독한 심판으로 철저한 징벌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서 뽑혀 이방의 땅으로 그리고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권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사상과 관계된다. 두 번째 입장은 이것에 더 나아가 대하 36:21에서처럼 ‘안식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생활 70년은 심판의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의 자리에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고 회복시키는 분명한 소망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 심판을 통하여 정화되고 정결케되어 새로운 시대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며 소망을 가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동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67년을 70년으로 주장하기에는 그 마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을 다음 단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4.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의 사명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학개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학개’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나 혹 그곳에서부터의 포로귀환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학개서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다만 제2성전건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성경을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먼저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포로이후의 역사에 관하여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B.C.539년에 고레스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였고, 그 이듬해에 모든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도록 선포하였다. 당시에 약 5만 가량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열정과 의욕을 가지고 황폐한 땅에 돌아와 정착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성읍들도 다 재건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만들고 또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먼저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렸고(에스라 3장) B.C.536년에 이르러서는 성전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의 기초만 공사하고(B.C.534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흘러 B.C.520년이 되었다. 다리오가 왕으로 등극한 그 다음 해인 당시까지도 제2성전 공사에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부호들은 안락한 대궐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하지만 성전은 돌보지 않았고(학 1:4), 일반 백성들은 또한 여러 재해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공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학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재난과 농사일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며(학 1:10-11) 이것이이 주의 성전 건축을 게을리 한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바빴다(학 1:9). 이 때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로 성전 건축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결국 학개와 스가랴의 권고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성전재건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며 결국 B.C.516년에 제2예루살렘 성전이 완공하게 된다. 새롭게 완성된 성전이 비록 예전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위용이나 웅장함이 없으나 더 영광스러울 것을 말씀하시며 이 부분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와 은혜와 감격의 말씀으로 부어주신다.

물론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이 B.C. 520년 이전이나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1-2)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권면하는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우리의 사고를 더 확대해보자.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이라고 하였으나, 그 년수가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너지고 성전이 재건되기까지의 기간을 따져보면 공교롭게도 70년이 된다(B.C.586-516). 만일 이 문제를 우연에 의한 70년으로 보지 않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전이 훼파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이 기간이 70년이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남은 자 사상”이기에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전 혹은 이후의 역사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혈연적 이스라엘이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역적으로 혹은 혈연적으로 한정되는 그룹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많은 본문을 볼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질과 관계된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한 범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선포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더 나아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등장하는 것을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나라의 백성으로 예배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이스라엘은 아니다. 물론 혈연과 지연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는 없지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70년이 가지는 의미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 문제가 이스라엘의 본질과도 밀접한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즉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그분의 간섭과 인도와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절망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간은 성전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영적인 방황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이 바로 70년이다.

이러한 성전의 문제는 구약으로 끝나지 않고 신약에서도 중요한 논쟁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되심을 말씀하는 것과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그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구약시대의 사고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며 또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 개념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회막을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진중에 있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회막은 평상시에는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사상) 또 그들을 다스리는 상징이기에,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회막은 이스라엘의 이동시에는 온 백성보다 앞장서서 나가기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아가는, 즉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통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학 1:5-7)

5.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교회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지 약 100여년 후에 바벨론의 침입이 있었고 또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는 견고하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훼파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며 거룩하고 장엄하고 찬란하게 여기던 성전,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온 천하가 다 무너져도 살아계신 이 하나님이 계신 이 성전은 결코 무너지거나 패함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하며,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치며 확신하며 보증하며 보장했던 그 성전(렘 7:1-10)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되던 그릇과 모든 것들은 이제 이방신들을 섬기는데 이용되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왕은 눈이 뽑히고 목배임을 당하였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 이스라엘과 왕족들은 또 노예처럼 이방 땅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사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며 이방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인식하며 대하였는데, 이제는 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힘든 포로 생활을 끝내고,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그 기간 역시 여전히 힘든 기간이며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어 그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이끌던 성전이 없어진 지 오래며 또 그 성전을 재건하자니 방해도 있고 또한 각자의 일들이 많아 그 일은 더욱 외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또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스가랴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의 회복 곧 성전의 재건을 무엇보다 먼저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학개의 등장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일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수차례 경고로 주신 어려움 가운데서 그 어려움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더욱 성전 건축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진척 또한 시키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시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 즉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곧 그들이 성전이 없이 지내야만 하는 70년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 성전재건의 일을 담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것을 일깨우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제2성전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결국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학개 2:9에서의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라는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일은 옛 조상 다윗이 많은 돈으로 준비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국가적인 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스스로를 자각하며 또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백향목이나 은금과 같은 호사스러운 재료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학 1:8a). 즉 그들이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즉시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외형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으로 은혜를 더하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 1:8b),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

이 성전의 재건이란 단순하게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무너진 옛 다윗 왕권의 회복이나 그 영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간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솔로몬 성전과 같거나 비슷한 재료로 짓도록 명령하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스가랴서나 신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에 대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시 세워진 성전 곧 회복된 시온과 예루살렘에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이 찾아오시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6. 적용: 한국교회사에서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교회사를 정리하다 보면 여러 사건에 대하여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포로는 아니지만, 이런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3세기 말부터 세속권력에 의하여 교황이 로마에 있지 못하고 프랑스에 체류한 ‘교황의 바벨론 유수’를 들 수 있겠다. 또 다른 유명한 예가 바로 루터에게서 발견된다. 루터는 1520년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와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편의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등장하는 제목이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카톨릭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세 가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문맥을 같이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자. 현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북한” 혹은 “북한교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은 첨예한 주제여서 논자가 감히 화두를 던지기가 쉽지 않으나, 역사를 전공하는 자로서 역사이해에 관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북한의 실정을 여러 통로를 통하여 듣고 또 북한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고통을 안다. 이런 상황도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는가?

만약 이렇게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명명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그 원인 분석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쉽게 북한의 공산당을 큰 원인의 하나로 설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타당성을 가지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이 ‘교회(敎會)’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다시금 짚어보고자 한다.

오늘의 논지와 관련하여 논자는 1938년 9월9일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삼엄한 경비 곧 193명의 총대들 틈에서 약 100명의 경찰들이 그 총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가운데 각본대로 진행된 총회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으로 가결하고 말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일본의 핍박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 있다. 주기철 추모사업 등 여러 행사들이 있었음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에 대하여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물론 나중에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당의 억압과 핍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라는 영적인 단체를 고려한다면,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곧 교회의 교회됨을 스스로 무너뜨린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문밖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지 벌써 66년이 지나고 있다. 얼마 후면 70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문제 통일문제 등에 관하여 고려해야할 시기이며 또 여전히 북한을 위하여 여러 가지 물질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돕고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생각하면서 현재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를 넘어서 마치 학개서에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처럼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라”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모습과 과거사를 추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고, 먼저 한국교회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가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평양에 대하여 “동방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그 명성과 영화보다 더 큰 영광과 위로와 은혜로 한국교회 위에 부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기다린다.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약속(성경다니엘서 약속),북한 동포에게 회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 한장으로 주님의개입(은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2018.4.29)










다니엘 전체 해석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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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 믿음의 사람

본문 요약

다니엘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 청년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방 제국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나간 이야기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상의 나라들이 흥망하는 역사를 예언한 책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 앞에서도 진리를 저버리지 않은 신앙인의 삶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적 비전이 교차되며, 시대를 초월한 믿음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문의 구조

  1. 바벨론에서의 신앙과 기적 (1~6장)
  2. 이상과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 (7~12장)
  3. 종말과 구원의 확신 (전장 통합)

바벨론에서의 신앙과 기적 (1~6장)

다니엘과 세 친구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침략당한 후 포로로 끌려온 유다의 귀족 출신 청년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이름, 문화와 교육을 주입하며 정체성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하고 채식만 먹으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서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결단에 지혜와 명철을 더하시고, 다니엘에게는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주십니다. 이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는 통로가 됨을 보여줍니다.

2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함으로 다니엘의 지혜가 온 제국에 드러납니다. 아무도 꿈의 내용조차 알 수 없었지만,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금, 은, 동, 철, 그리고 흙과 철이 섞인 다섯 부분의 신상은 각각 제국들의 흥망을 나타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돌이 그 모든 나라를 쳐서 무너뜨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상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위에 있으며 반드시 완성된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3장에서는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고 살아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세상의 위협 사이에서 그들은 선택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 교만하여 짐승같은 형벌을 받게 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세상 통치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장에서는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성전 기구로 잔치를 벌이다가 손가락의 글씨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습니다. 다니엘은 그 글을 해석하며 왕의 나라가 끝났음을 선포하고, 그 밤에 벨사살은 죽고 바벨론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6장에서는 다리오 왕 아래에서도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는 기도하는 자였고, 권력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상과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 (7~12장)

7장부터는 다니엘이 본 환상과 그에 대한 해석이 중심이 됩니다. 첫 번째 환상은 네 짐승의 환상입니다. 각각의 짐승은 바벨론부터 시작해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들을 상징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때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셔서 영원한 권세를 받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메시아의 예표로 이해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해석됩니다.

8장에서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이 나옵니다. 이것은 메대와 바사, 헬라의 충돌과 그 과정 속에서 성전을 더럽히는 한 작은 뿔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이해되며, 신약적으로는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계시 앞에서 심히 기진하며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세상 끝에 있을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9장에서는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글을 읽고, 포로 기간이 70년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70이레의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함께 메시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종말에 있을 사건들을 함께 내다보는 복합적인 예언으로서, 구속사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0장부터 12장까지는 마지막 환상이 이어집니다. 다니엘은 또다시 금식과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미래의 많은 전쟁과 핍박, 그리고 종말의 날에 있을 일들을 듣게 됩니다. 북방왕과 남방왕의 싸움, 성도의 고난, 궁극적인 부활과 상급에 대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선언은 구약 속에서 부활의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까지 다니엘에게 네 길로 가라 하시며 그 끝에 상급이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종말과 구원의 확신 (전장 통합)

다니엘서 전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선언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국들이 번성하고 권세를 자랑하는 시대였지만, 그 모든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의 손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 흥하고 망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언제나 기도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는 권력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셨고, 모든 시대를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은 단지 시대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거룩한 자들이 영원히 누릴 나라입니다. 지금은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 끝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심판하시며 완전한 통치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이 다니엘서의 중심에 있습니다.

결론

다니엘서는 포로 시대라는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든 자가 어떻게 시대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권력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살아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예고하시고, 그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어쩌면 다니엘이 처했던 바벨론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그분의 나라는 여전히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결국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며, 그 끝에는 영원한 상급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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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장별 요약 정리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 다니엘

1장 – 뜻을 정한 다니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왕궁 교육을 받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들은 바벨론 박수들보다 열 배나 뛰어난 자로 인정받는다.

2장 –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에 대한 꿈을 꾸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 꿈을 밝히고,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예언한다. 왕은 다니엘을 높여 총리로 세운다.

3장 – 풀무불 속의 세 친구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세우고 절을 강요하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거부한다.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남고, 왕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높인다.

4장 –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낮아짐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짐승처럼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난 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왕위로 회복된다.

5장 – 벨사살 왕의 최후

벨사살 왕이 성전 기물로 잔치를 벌이다가 벽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를 본다. 다니엘이 글을 해석하며 왕의 몰락을 예언하고, 그날 밤 바벨론이 멸망한다.

6장 – 사자 굴 속의 다니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신임하자 관리들이 음모를 꾸며 기도 금지령을 만든다.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난다.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7장 – 네 짐승의 환상

다니엘이 네 짐승의 환상을 보며 세계 제국의 흥망과 마지막에 세워질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깨닫는다. 인자 같은 이가 권세를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8장 –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다니엘이 바사(페르시아)와 헬라(그리스)의 흥망성쇠를 예언하는 환상을 본다. 작은 뿔이 나와 성소를 더럽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회복된다.

9장 – 예레미야의 예언과 70이레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회개 기도를 드린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70이레에 대한 계시를 주며, 장차 메시아가 오고 속죄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다.

10장 – 하늘에서 온 사람의 환상

다니엘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로부터 온 천사가 나타나 앞으로 일어날 영적 전쟁과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다.

11장 –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예언

다니엘은 장차 일어날 강대국들의 대립과 이스라엘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을 듣는다. 세상 권세자들은 흥망성쇠하지만, 끝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12장 – 마지막 때와 부활의 약속

최후의 심판과 의인의 부활이 예언된다. 환난이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결론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보호와 지혜를 강조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다. 또한, 세상의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가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질 것임을 선포한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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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개론

제목 / 

본서의 명칭은 저자이며, 주인공인 '다니엘'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다. 
한편 본서는 헌신과 충성이 담긴 빛의 책으로 어두운 세력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빛된 자의 행실과 그 빛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책이다.

중심 인물의 이름을 따라 책명을 붙이는 구약의 관습은 여호수아, 사무엘, 에스더, 욥기등의 책들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책명이 반드시 그 책의 저자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니엘서의 경우처럼 저자가 그 책명 속에 포함될 수도 있다.

저자 /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본서 자체가 다니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9:2; 10:2). 
예수께서도 이 책의 저자를 다니엘이라고 인정하셨다. 
이 책은 B.C. 539년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이 함락된 직후인 B.C. 5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 견해는 다니엘서가 B.C. 6세기에 기록되었고, 이 책의 저자는 다니엘이라는 것이다. 이 전통적 견해가 옳다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1) 다니엘서의 주장.
 선지자 다니엘은 여러 구절들(단 8:1-7, 13-19, 27; 9:2-22; 10:2-5)에서 제 1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간수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개인적으로 받았다고 진술한다(단 12:4). 저자가 자신을 제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단 1:6-11, 17, 19, 21; 2:14-20)로 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의 저술들 가운데서 그러한 어법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스 7:28 참조).
 (2) 다니엘서의 저자는 역사를 잘 알고 있다.
 B.C. 6세기의 사람으로서 바벨론의 사건들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책속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B.C. 6세기 이후에는 잃어버린바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사실들이 그 시대 이후 고대의 다른 문헌 속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들로 인하여 이 사실들이 한번 더 밝혀지게 되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다니엘서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을 이 책의 저자로 언급하신다(마 24:15). 모든 그리스도인 신자에게 있어서 이 증언은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주 명백하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부분(단 1-6장)은 주로 역사이며 둘째 부분(단 7-12장)은 주로 예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적 구성 단위(literary unit)로 되어있다. 다음의 논리들은 그러한 통일성(unity)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열거될 수 있다.
 (1) 이 책의 여러 부분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성전 기명들이 벨사살의 잔치에 사용된 일은 그 기명들이 어떻게 바벨론에 옮겨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비춰 이해할 수 있다(단 1:1, 2; 5:3). 단 3장12절은 단 2장 49절에 처음으로 묘사된 느브갓네살의 정치적 조치를 언급하고 있다. 단 9장21절에는 앞서 받은 묵시가 언급되고 있다(단 8:15, 16).
 (2) 역사적 부분에는 이 책의 후반부(7-12장)에 나오는 예언들의 주제와 매우 밀접한 예언(2장)이 내포되어 있다. 제 7장에는 제 2장에서 제시된 주제가 더 발전된 형태로 나온다. 또한 역사적 요소와 예언적 요소 사이의 관계가 역력하다. 역사적 부분(1-6장)은 한 나라, 곧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과 그 나라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취할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져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바벨론과 같이 이 책의 예언 부분에 그림같이 묘사된 바벨론 이후 연이어 일어날 제국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거기에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각 제국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서 보인 충성으로 평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언 부분에 묘사된 나라들의 흥망성쇠는 바벨론의 사례에서와 같이 역사 부분에서 제시된 원칙들에 의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이 책의 두 부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놓으며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세계의 각 제국들로 말미암아 연출될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놓아 준다.
 (3) 이 책의 문학적 구성 단위가 매우 잘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학파의 대표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다. 구성, 곧 사고의 전반적인 방향과 두 가지 언어로써 사용된 표현법은 이 책 전반에 공통됨으로 이 책의 어떤 부분은 한 저술가가 쓰고 다른 부분은 다른 저술가가 썼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무색해진다.
제 1 쿰란(Qumran)굴에서 발견된 수백 사본 조각 가운데 세개는 다니엘서 사본 조각이다. 이것들은 바르텔레미(D. Barthelemy)와 밀리크(J.T. Milik)에 의하여 “유대 제1 사막 쿰란 제 1 동굴에서 발견물”(Oxford, 1955, 150-152)이라는 책에 발표되었다. 그 사본 조각들은 두 서기관들에 의하여 쓰여졌는데 그것은 따로따로 된 두 두루마리에 속하든지 아니면 제 1장과 제 2장은 한 서기관이 쓰고, 제 3장은 다른 서기관이 쓴 같은 두루마리에 속하든지 할 것이다. 그 사본 조각들은 다음에 나오는 22절들의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단 1:10-17; 2:2-6; 3:22-30. 이 절들과 마소라 사본과를 비교해 볼 때, 거기엔 16가지의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구절의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16가지 중 9가지는 철자상의 차이이고, 그 철자가 미치는 영향도 고작 한 문제에 불과하다. 아홉 중에서 둘은 철자의 오기인 것같고, 나머지 일곱은 마소라 사본에서까지도 여러가지로 철자되어 있다. 네 가지의 첨가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접사 “그리고”이며, 하나는 “만약”이라는 말 앞에 있는 “경우”라는 불변화사요, 나머지 두 단어에는 모음이 첨가되었다. 마소라 사본에 있는 모음 글자가 조각에는 없는 경우가 한번 있다. 두개의 동사 어미는 기록상의 잘못인 것같다. 마소라 사본과 사해 사본 조각들과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번역상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같다. 이것은 다니엘서의 히브리어 사본은 실질적으로 적어도 그리스도 당시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다니엘 2장의 사본 조각에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바뀌어지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단 2:4). 바로 그곳에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단어와 아람어의 처음 단어 사이에 공백이 남겨져 있어 두 언어 사이의 구별을 뚜렷이 해 놓았다. 이 사본 조각들은 위경서에 나오는 “세 아이들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소라 사본과 일치한다(단 3:23).

기록연대 / 
본서는 부분적으로 1인칭으로 기록된 것을 보아 기술된 당시의 사건과 동시대에 구성된 것이거나, 적어도 그 다음 세대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은 B.C.2세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천사가 다니엘에게 비밀을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단 12:9). 
본서가 B.C.2세기에 집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서에 기록되어진 예언 등은 이 책이 그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증거하여 준다. 
쿰란 교단에서 다니엘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약 기자들에게도 본서가 예언서로 받아들여졌으며, 얌니아의 랍비들에 의해서도 6세기의 저술로 받아들여졌다.

배경 /
B.C. 626년 앗수르 제국에 반기를 든 바벨론은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또한 B.C. 605년에는 애굽마저 정복함으로써 명실공히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바벨론 포로로 끌러간 다니엘은 줄곧 선지자와 정부의 관리로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이런 활약은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다니엘서는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 포로였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생애에서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록,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고 다니엘이 해석했던 예언적 꿈에 대한 기록과 다니엘 자신이 받았던 이상에 대한 기록을 함께 싣고 있다. 비록 다니엘서가 포로 기간 동안과 그 직후에 바벨론에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그 목적은 유대 민족의 포로 역사나 다니엘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정치가이자 예언자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경험 중 가장 중요한 점들을 말하고 있고,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편찬되었다.
 먼저 다니엘은 그가 왜 바벨론 왕의 공무에 임하게 되었는지의 사유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단 1장). 느부갓네살왕의 제1차 시리아 원정 때, 즉 B.C. 605년 제1차 포로로서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 왕족의 피를 받은 다니엘과 다른 귀공자들이 정부의 직무를 위하여 훈련받도록 선택되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체류한 첫 19년은 바벨론의 속국으로 있었을찌라도, 유다가 한 나라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해들이었다. 유다의 말년에 있었던 왕들의 빈번한 반바벨론 정책의 결과로써 재난들이 유다 국민에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덮쳤다.
 다니엘이 포로로 붙잡혀 갈 당시 유다를 통치했던 여호야김왕은 몇년 간은 바벨론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친이집트파의 정책에 동의하여 반역하였다. 그 결과로서 유다는 군대의 침략을 받았고, 그 백성들은 그들의 자유를 빼앗기고 포로로 붙잡혀 갔고, 왕은 그 생명을 잃어 버렸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겨우 석달의 짧은 통치 후, 그의 불충성으로 인하여 응징하러 온 바벨론 군대를 맞게 되었다. 그와 함께 수천명의 유다 상류 계급 사람들이 B.C. 597년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 여호야긴의 뒤를 이은 시드기야왕은 분명히 바벨론에 충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약성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애굽의 제안과 그의 주요 보좌관들의 반바벨론 감정을 오래 지탱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팔레스틴에서 계속적인 반역에 지친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였다. 2년 반 동안 바벨론의 군대는 유다를 약탈하고, 그 성전과 그 왕궁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포함한 도시들을 점령하고 파괴하고, B.C. 586년에 유다 주민들의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니엘은 이 다사다난한 때에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바벨론 군대가 그의 고국 땅을 치려고 몇번 출발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바벨론 군대의 승리의 개선과 포로된 유대인들의 도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 포로들 중에는 그의 가족을 동반한 젊은 여호야긴왕과(왕하 24:10-16), 나중에는 눈 먼 시드기야왕이(왕하 25:7)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다니엘은 포로된 유대인들 중에서 꾸며지고 있던 정치적 소동도 알았을 것이다. 이 소동의 결과로 느부갓네살은 그 주모자들 중 몇을 태워 죽였다. 바로 이 소동 때문에 예레미야는 포로된 그의 동포들에게 바벨론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렘 29장).
 이 모든 시기 동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관리로서, 그 나라의 신민으로서 잠잠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학문적 수련을 쌓은 후, 박사라고 불리는 상류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들은 왕의 고문으로 봉사하였다. 다니엘이 미래의 제국들에 대한 꿈을 느부갓네살왕에게 해석할 특별한 기회를 얻었던 때는 바로 이때였다(단 2장). 그 결과 다니엘은 수년간 재직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임명되었다. 이 지위는 다니엘에게 그와 그의 친구들이 섬기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권세를 왕에게 알릴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니엘이 얼마동안 이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B.C. 570년 전에 그 지위를 상실한 것같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당시의 느부갓네살 정부의 관직을 맡은 고관들의 이름을 기록한 설형문자(쐐기문자)로 기록된 현존하는 “왕궁 정부 연감”의 목록에 없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통치에 대한 이외의 왕궁 정부 연감은 현존하지 않는다.
 사실상, 다니엘의 이름이 현재로서는 성서 밖의 자료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에 다니엘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니엘이 얼마 동안 공직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통치 기간 중에 있은 사건들 중 네가지 중요한 사건들만이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중 세 사건에서 다니엘이 활약하고 있다. 그 네 사건들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을 포함한 그의 통치 첫 3년 동안의 유대 왕족들의 교육(1장), 왕의 치세 제2년에 있은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2장), 연대가 확실치 않은 어느 해에 두라 평지에 신상을 세운 일과 그 결과로 다니엘의 친구들이 당한 경험들(3장), 아마도 왕의 말년에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으로서, 왕이 7년간 미쳐서 쫓겨나 고생할 것을 선고하는 그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함(4장)등이다.
 느부갓네살이 실각되어 있는 시기 동안의 다니엘의 활동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권세와 왕위를 복권한 후에 다니엘이 무엇을 하였는지, 느부갓네살을 계승한 왕들­아멜마르둑(Amel-Marduk: 성경상의 에윌므로닥), 네르갈샤르우수르(Nergal-shar-usur), 라바쉬마르둑(Labashi-Marduk), 나보니더스(Nabonidus)­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그의 봉직이 요청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강대한 제국이 이전 왕들을 시살(弑殺)한 왕들의 통치하에서 도덕적으로 약하여지고 부패하는 것을 관찰하는 일이 허락되었다. 또한 그는 동방의 페르시아에서 고레스 왕이 혜성같이 나타나는 것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 고레스라는 이름이 예언 중에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사 44:28; 45:1). B.C. 553년(고레스가 메대 제국의 정복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 나보니더스는 아라비아의 테마(Tema)를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하면서, 바벨론을 그의 아들 벨사살이 다스리도록 임명하는 것을 다니엘은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니엘에게 큰 이상들이 주어지고(단 7, 8장), 지금까지는 단순히 꿈과 이상의 해석자로만 알려졌던 그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바로 벨사살의 통치 첫 3년 동안에 있었던 것이다.
 B.C. 539년 바벨론이 망하던 그 밤에 벨사살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던 홀의 벽에 손으로 쓰인 운명의 글을 읽고 해석하라고, 바벨론 사람들은 다니엘의 봉사를 한번 더 요청하였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바벨론과 그 제국을 정복한 다음, 새 통치자들은 전대(前代)의 노 정치가의 재능들과 경험을 이용하였다. 다니엘은 또 다시 왕궁의 고문관장이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들을 왕으로 알게 한 사람은 다니엘이었을 것이다. 그 예언들은 페르시아 왕이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을 끝나게 하고 그들의 성전과 그 땅을 회복하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다니엘의 이 후기의 공직 기간 동안,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종을 구원하셨다(6장). 다니엘의 생애의 말년에 중요한 이상들을 추가로 받았는데, 그 처음 것은 메대왕 다리우스 때에 받았고, 그 다음은 고레스 왕 때에 받았다(10-12장).
 (1) 다니엘서의 역사성
 다니엘서의 역사성에 대한 첫 주요 공격이 신플라톤 철학자 폴피리(Porphyry:A.D. 233-304?)에 의해 있었던 이후로, 이 책은 처음에는 간혹 있었으나 지난 2세기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비평의 불길에 휩싸여 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B.C.2세기의 마카비 반란 시대에 살았던 무명의 저자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학자들이 다니엘서의 연대를 그렇게 늦게 잡는 데는 두가지 주요 이유들을 들고 있다. 첫째, 그들의 주장대로 어떤 예언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175-163 B.C.?)를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개념에 따르면, 대부분의 예언들­적어도 정확히 성취되었다고 증명되어 온 예언들­은 묘사된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서의 연대는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저들의 논리에 의하면, 다니엘의 역사 부분은 입수할 수 있는 자료들에서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불일치점에 대하여는 그 저자가 실제적인 사건과 시간상, 공간상 너무 떨어져 있었으므로 B.C. 7세기와 6세기, 곧 4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하여 한정된 지식밖에 가질 수 없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최선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가지 논쟁들 중 첫번째의 것은 고대의 영감받은 선지자들이 역사의 진로에 대하여 실제로 정확한 예언을 하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두번째의 것은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서에는 역사적 부정확성, 시대 착오와 오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의 심각성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니엘서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간략한 논의를 다음에 제시한다.
다니엘서가 오늘날이라 할찌라도 입수할 수 있는 고대의 문헌적 자료들에 의하여 증명될 수 없는 몇몇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사건 중의 하나가 느부갓네살 왕이 미친 이야기인데, 현존하는 고대의 어떠한 기록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신바벨론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의 일시적 실각에 대한 입증할만한 자료가 없는 것은 왕실의 실록에는 오로지 칭송할 만한 것만 기록한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단 4:36). 또한 메대 왕 다리우스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데, 역사상 그의 참 위치가 성경 외의 믿을만한 자료들에 의하여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신분에 관한 암시가 헬라 저술가들의 저서 속에서, 그리고 설형 문자로 된 자료로부터 단편적 정보는 찾을 수 있다.
 다니엘서의 보수적 주석가들을 당혹하게 만든 그 외의 역사적 난점들은 근대에 고고학에 의한 역사적 지식의 증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지금은 해결된 문제들 중 중요한 몇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다니엘 1:1; 예레미야 25:1 사이의 상상적 연대 차이-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와 같이, 믿을만한 역사적 출처가 되는 예레미야는 유다 왕 여호야김 4년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원년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첫 예루살렘 정복의 해가 여호야김 제3년이라고 말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의 원년과 여호야김의 제3년과 같은 해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같다. 고대 왕들의 통치년을 산출하는 여러가지 제도에 대한 그 당시의 기록들을 발견하기 전에는 언듯 보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같은 이 문제를 주석가들은 설명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와의 동시 집권으로 추측함으로써,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다 제도를 따르고 다니엘은 바벨론의 제도를 따르는 서로 다른 계산법에 따라 사건들의 연대를 매겼다고 추정함으로써, 이 난제를 풀려고 애썼다. 두가지 설명은 다 오늘날 낡은 것이 되었다.
 모든 어려움들은 그 당시의 유대 왕들과 같이 바벨론의 왕들도 그들의 통치 연대를 “즉위년” 방식에 계산하였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바벨론 왕이 왕위에 오른 그 해는 왕의 공식적 첫 해로 계산하지 않고, 다만 그의 즉위년으로 계산했다. 그의 원년은 그가 처음 맞는 만 일년을 의미하며, 종교적 의식으로서 그가 바벨론의 신 벨(Bel)의 손을 잡는 때인 정월 초하루 이후에야 이 원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요세푸스가 인용한 대로(아피온에 반대하여 1권 19), 베로수스(Berosus)에게서 느부갓네살이 그의 군사 원정 중 애굽 국경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가 왕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2권 95, 96, 161; 3권 91). 그러므로 다니엘과 예레미야는 서로가 완전히 일치한다.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첫 통치년을 여호야김 제4년과 같은 해로 보고 있고, 반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즉위년에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 해를 여호야김 제 3년이라 하였다.
 ② 바벨론의 위대한 건축가 느부갓네살-헬라 역사가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고대 역사의 사건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결코 위대한 건축가로 또는 더 큰 바벨론의 건설가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영광이 바벨론의 역사상 탁월한 위치에 있었던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에게 돌려진다는 사실을 헬라의 고전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 백년에 걸쳐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그 당시의 설형 문자의 기록들은 고대 저술가들에 의한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설형 문자의 기록들은 “이 큰 바벨론”(단 4:30)의 건설을 느부갓네살에게 돌리는 다니엘서의 기사를 확증하였다. 이 일은 이제서야 발견된 사실인데, 설형 문자 비문에 삼무-라마트(Sammu-ramat)라 불리는 세미라미스는 앗시리아의 모후(queen mother)였고 그는 그의 어린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의 섭정이었고 고전 문헌이 주장하는 것같이 바벨론을 통치한 여왕이 아니었다. 바벨론에서 아무런 건축 활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반면 느부갓네살의 무수한 건물 비문은 그가 궁전들과 신전들과 도시의 신전탑을 재건하고, 새로운 건물들과 방어 성벽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신바벨론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바벨론 시대의 기자 외의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헬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다니엘서에 있음으로 해서 다니엘이 6세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믿는 비평 학자들이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의 난처한 입장을 말해 주는 전형적 실례가 다음에 나오는 하바드 대학의 파이퍼(R.H.Pfeiffer)의 말 중에 나온다: “예측컨대 우리는 우리 저자가 발굴이 증거한 대로, 신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건설한 줄 어떻게 알았는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구약 입문, 뉴욕, 1941, 758, 759 페이지).
 ③ 바벨론 왕 벨사살-나보니더스(Nabonidus)가 페르시야가 정복하기 전의 바벨론 마지막 왕으로 언제나 등장하는 것에 반해, 벨사살의 이름이 성경 외의 어떠한 고대의 저술들 중에도 없다는 사실은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논쟁들 중의 하나로 정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난 수 백년에 걸쳐 나온 발견물들은 이 점에 있어서의 다니엘에 대한 모든 비평들을 반박하였고, 그 예언자의 벨사살에 관한 역사적 진술에 신빙성이 있음을 아주 인상깊게 변호하였다.
 (2) 다니엘서의 언어들
 에스라서와 같이 다니엘서는 일부는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에스라서의 경우 두 가지의 언어가 사용된 것은 저자가 역사적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 아람어 문서를 택하여, 그 부분을 그의 책 속에 써 넣고, 그렇지 않은 때는 그의 백성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함으로써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람어 부분이 2장 4절에서 시작되어 7장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다니엘서의 경우엔 이러한 해석이 맞지 않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여러 설명들 가운데 일부인데,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이러한 설명들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말들이다.
 ① 저자가 역사 이야기는 아람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고, 예언은 히브리어를 말하는 학자들을 위하여 썼다(그러나 아람어로 된 2장, 7장은 모두 대 예언들이므로 이 견해가 틀렸음을 말해준다).
 ② 두 가지의 언어는 두 가지의 자료를 가리킨다(이 견해가 옳지 못한 것은 여러 과격한 비평가들까지도 시인한 사실로서 이 책은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③ 이 책이 원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지만, 그 부분들이 후에 번역되었다(이 견해는 왜 한 부분만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전체가 번역되지 않았느냐에 대한 의문을 답하지 못하고 있다).
 ④ 저자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는 히브리어로 하나는 아람어의 두 판으로 출판하였다. 마카비안의 박해 기간에 이 책의 부분들이 상실되어, 두 판에서 남은 부분들을 아무런 변경도 없이 연결했다(이 견해는 정확하다고 증명할 수 없으며, 너무나 많은 불확실한 점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⑤ 저자는 갈대아 사람들이 “갈대아 방언(Syriack: 정확히 말하면 아람어)으로 왕에게”(단 2:4)라는 이 부분에서 아람어로 기록하기 시작하여 그 당시 그가 기록하고 있는 동안은 이 언어로 계속하다가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때는 히브리어(단 8:1)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견해가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같다. 왜냐하면 이 책의 여러 부분이 같지 아니한 때에 기록된 것같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정부의 관리로서 다니엘은 여러 언어로 말하고 기록했다. 그가 어떤 역사적 사건들과 이상들은 히브리어로, 어떤 것은 아람어로 쓴 것같다. 이러한 가정에 기초하여 제 1장은 히브리어로 아마도 고레스 원년에 기록된 것같고, 제 3-6장의 이야기들은 아람어로 같지 않은 때에 기록된 것같다. 제 7장이 아람어로 기록된 것 외에는 대부분의 예언적 이상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미래의 왕국들에 대한 느부갓네살왕의 꿈 이야기는(2장) 갈대아인들의 말이 인용되는 데까지(2:4)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가 끝나는 데까지 아람어로 되어 있다.
 다니엘이 그의 말년에 그의 모든 저술들을 한 책으로 모았을 때, 그는 자기 독자들의 대부분이 두 나라 말에 통하는 것을 알고 - 다른 문헌들로 보아 명백한 사실이다- 이 책을 언어상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도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서에 두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책의 기원을 늦게 잡는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다니엘의 기원을 B.C. 2세기로 잡는 사람들은 왜 마카비 시대의 히브리 저자가 그 책의 일부는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철자법상 다니엘서 아람어의 특이점들은 3-4세기에 서부 아시아에서 쓰이던 아람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히브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서 언어의 현대화 때문인 것같다. 철자법이 기록 연대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은 마치 가장 최근의 영어 성경 개정판이 성경은 원래 20세기에 기록되었거나 번역되었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철자법상의 특징은 기껏해야 언제 철자의 최근 교정이 있었는지를 암시할 뿐이다.
 사해 사본 가운데는 B.C. 2세기의 다니엘서 사본 조각들이 여러개 있다. 그 가운데 적어도 두 개가 히브리에서 아람어로 바꾸어진 그 부분을 보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그 책에 두 가지 언어로 된 특징들이 있었음을 매우 명백히 보이고 있다.

주제
 다니엘서는 역사와 예언의 안내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장래를 말하는 예언은 역사를 미리 보는 것이 되며, 역사는 장래를 예고한 예언이 눈에 보이게 지나가는 것이다. 예언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시간의 일들을 영원한 빛에 비추어 볼 수 있게 하고, 적절한 때에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깨우치게 하고, 최후의 위기를 위하여 개인으로 준비하게 하고, 성취된 예언 위에 믿음의 굳건한 기초를 놓게 하는 요소가 있다.
 다니엘서의 예언의 네 중요 부문에는 세계 역사의 배후에 대하여, 다니엘 시대로부터 세상 끝날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들이 간략히 제시되어 있다. “장막이 걷히고 모든 인간의 흥미와 능력과 감정의 활동과 반동을 위와 뒤와 속으로 전능하신 분의 힘이 그분 자신의 계획들을 묵묵히 참을성 있게 실현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본다.” 네 분야의 예언은, “하늘의 하나님이”, “영원히 망하지…아니할” 한 나라를 세우실 때(단 2:44), “인자”가 “영원한 권세”(단 7:13, 14)를 받을 때, “만왕의 왕”에 대한 반역이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 깨어”질 때(단 8:25),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저들의 압제자들에게서 영원히 해방될(단 12:1)때에 각기 그 절정에 달한다. 이렇게 하여 다니엘의 예언들은, 위태로운 때와 영원히 끝없는 바닷가를 연결하는 다리, 곧 다니엘과 같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봉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현실 생활의 불확실과 곤혹에서 영원한 생활의 평화와 안정으로 건너가는 하나님께서 놓으신 한 다리를 준비한다.
 다니엘의 역사 부분은 가장 현저한 방법으로 참된 역사 철학을 드러낸다. 이 부분은 예언 부분의 서론에 위치한다. 한 나라, 곧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을 자세히 이야기 함으로써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의 예언 부분에 요약되어 있는 기타 나라들의 흥망성쇠의 의미들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포되어 있는 바벨론의 역할이 보여주는 역사 철학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서는 예언적 이상의 영사막 위에 나타난 바벨론을 뒤이어 일어난 다른 나라들의 역할도 충분히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이 책의 역사 부문에서 우리는 당대의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이 이방 세계의 천재 느부갓네살과 대면하여 왕에게 다니엘의 하나님, 곧 역사의 중재자를 알리고 협력할 기회를 얻게 한 것을 본다. 느부갓네살은 당대의 가장 위대한 나라의 군주이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고, 또한 정의와 공의에 대한 천부적인 판단력이 있었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특별한 역할을 위하여 권좌에 오른 “열국의 능한 자”(겔 31:11)요, 이방 세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6)라 하셨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 그들이 엄하나 잔인하지 않은 손아래 붙들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느부갓네살의 왕국에서의 다니엘의 사명은 왕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극적인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두 인물을 등장시키셨다.
 다니엘의 첫 네 장들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충성을 획득하시게 된 방편들을 진술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궁에서 하늘의 원칙들과 정책들을 대표할 만한 한 적절한 인물을 필요로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개인적 대사로서 다니엘을 선택하여서 느부갓네살에게로 보내셨다. 포로인 다니엘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호의를 사게 한 하나님의 방법, 느부갓네살로 먼저는 다니엘 그 다음에 다니엘의 하나님께 확신을 갖게 한 방법은 오늘날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예증한다.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칙의 사람이요 믿을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생애의 첫째 가는 일로 삼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된 모든 뜻과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하여 “뜻을 정하”(단 1:8)였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바벨론 관리들의 “은혜와 긍휼을 얻게”(9절)하셨다. 이것은 제 2단계, 곧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신체적 탁월성을 증거하는 일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12-15절). 그 다음에는 지적 우월성을 증거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17절) 결과로서 저들은 저들의 경쟁자들보다 “십배나 나은 줄”(20절)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인격에 있어서나, 육체와 지능에 있어서 그의 동료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느부갓네살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다니엘의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준비시켰다. 일련의 극적인 경험들-2장의 꿈, 3장의 풀무불로부터의 인상적인 구출, 4장의 꿈-은 다니엘의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와 지식을 왕이 만족하도록 증명하였다. 2장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인간의 지식의 열등성은 느부갓네살로 다니엘에게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시요 모든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고 시인하게 하였다(단 2:47). 그는 솔직하게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들의 추측된 지혜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금 우상과 불타는 풀무불의 사건들은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구원”(단 3:28)하셨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로 시인하게 만들었다.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로 보아, 그의 온 나라 안에서 아무나 히브리인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29절)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하나님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권세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과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분임을 시인하였다. 세번째의 경험-그의 자만했던 지혜와 권세가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던 7년간-은 “지극히 높으신 자”(단 4:32)는 지혜와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쓰신다는 사실을 왕에게 가르쳤다. 그분은 지혜와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느부갓네살의 이성이 되돌아 온 다음 그가 행한 최초의 행동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고 그가 오랫동안 했던 것같이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능히 낮추심”을 시인하게 된 사실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느부갓네살이 개인적으로 배운 교훈들은 그를 이어 바벨론의 왕위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그가 느부갓네살의 경험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2절), 하늘의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독하였다(단 5:23).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되게 일하는 대신, “바벨론은 … 교만하고 잔인한 압제자가 되었”고, 하늘의 원칙들을 거절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다. 그 나라는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게 되었고(단 5:25-28),세상 통치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 버렸다.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구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바벨론의 통치자들 앞에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들 앞에서 그의 권위와 권세를 증명하셨다(단 6:20-23). 메대 왕 다리우스의 조서는 “사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영원히 변치 않으실”것을 시인하였다(26절).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않는 규례”(8절)조차,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단 4:32)의 명령 앞에 굴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고레스는 사자굴로부터 다니엘을 구출함에 있어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의 증거로 말미암아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그가 행할 역할을 말한 예언들 역시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어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마지막으로 성취할 나라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권위가 행사될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바벨론을 높이셨다. 바벨론은 시험기를 거쳤으나, 결국 실패하고 그 영광은 쇠하고 그 권력은 떠나고 그 지위는 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점령되었다.
 다니엘서의 네 이상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까지 다니엘 때로부터 지상에 있을 선악의 세력들 사이의 투쟁과 관련이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지상의 세력들을 사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상들은 그 세력들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단은 이 세력들을 통하여 맹활약하고 있다.
 첫째 이상(2장)은 주로 정치적 변화를 다루고 있고, 이 이상의 주요 목적은 느부갓네살에게 바벨론 통치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나타내 주며, 그에게 “이 일후에 일어날 일”(29절)을 그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마치 첫째 이상을 보충하려는 듯, 둘째 이상(7장)은 첫 이상 중에 언급된 세력들의 통치 기간 동안의 하나님의 백성이 당할 경험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원수들 위에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14, 18, 26, 27절).
 셋째 이상(8-9장)은 둘째 이상을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백성과 종교를 없이하려는 사단의 시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넷째 이상(10-12장)은 앞의 이상들을 요약하면서, 그 앞의 어떤 이상들보다 더 세부적으로 망라하고 있다. 이것은 둘째와 셋째 이상의 주제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것의 강조의 촛점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과 “이 이상은 오랜 후의 일”(단 10:14)이라는 것, 그리고 “큰 전쟁에 관한 것”이다(1절). 11장 2-39절에 망라된 역사 이야기는 “말일”(단 10:14)과 “마지막 때”(단 11:40)에 일어날 사건들에까지 미친다.
 다니엘의 예언들은 계시록의 예언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체로 계시록은 다니엘과 동일한 범위를 다루고 있으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애매한 부분들은 종종 계시록과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마지막 때와 관련된 예언, 곧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다니엘이 받은 이 예언의 부분은, 부지런한 연구를 통하여 말세에 그 의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 것이다(단 12:4). “말세와 관련된 다니엘의 예언의 이 부분”이 인봉되었다 할찌라도(단 12:4), 요한은 “때가 가까우므로” 그의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계 22:10)는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그러므로 모호한 경향이 있는 다니엘서의 어떤 부분들을 보다 명확히 해석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위하여 계시록을 주의깊이 연구하여야 한다.

특징 / 
본서는 역사적 진술(1~6장)과 묵시문학적 자료(7~12장)로 구성되어 있다. 
후자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 주로 종말론적이며 상징적이고 환상적이고 예언적인 문학 작품을 가리킨다. 
묵시문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선지자들의 사역의 급선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킴으로써 낙심치 않게하는 것이다.

목적 / 
다니엘은 바벨론 궁정에서 거하면서 체험한 경험들과 그가 받은 환상과 계시들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목적은 이방 신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우월성과 유일성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징벌을 받아 이방의 포로가 되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세상 권세들은 사라질 것임을 예언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다니엘이 목격한 환상에 대한 기록은 장차 메시야가 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증거하려 했던 것이다.

구조 /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 부분(1~6장) - 역사적 사실
둘째 부분(7~12장) - 환상과 그 해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전반부는 주로 역사적인 것, 즉 여섯 가지 역사적 이야기들이 나오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예언들, 즉 네 가지 환상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서로 대조하면 전반부는 암흑의 역사이고 후반부는 광명의 역사이다. 
내용으로 볼 때 전반부는 다니엘이 다른 꿈들을 해석하고, 후반부는 천사가 다니엘의 꿈을 해석한다. 
여기서 전반부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후반부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다.


개요
Ⅰ. 역사 부분 1:1-6:28
     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교육 1:1-21
       (1) 유다에서 바벨론까지의 제1차 포로 이송 1:1, 2
       (2) 왕의 봉사를 위하여 훈련 받도록 선택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1:3-7
       (3) 다니엘이 자기 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을 얻음 1:8-16
       (4) 성공적 교육과 왕에게 봉사하도록 용납됨 1:17-21

     2. 큰 신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2:1-49
       (1) 느부갓네살이 꿈으로 인하여 번민함 2:1-11
       (2) 박사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과 취소 명령 2:12-16
       (3) 다니엘이 지식을 받고 감사함 2:17-23
       (4)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전함 2:24-35
       (5)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2:36-45
       (6)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시인함 2:46-49

     3. 다니엘의 친구들이 무서운 풀무불에서 구출됨 3:1-30
       (1)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우고 그것에 경배하기를 요구함 3:1-7
       (2) 신실한 히브리 사람들이 경배를 거절함 3:8-18
       (3) 하나님의 개입으로 풀무불에서 건짐을 받음 3:19-25
       (4) 느부갓네살의 고백과 조서, 히브리사람들의 승진 3:26-30

     4.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그의 겸비와 회복 4:1-37
       (1)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고백 4:1-9
       (2) 꿈에 대한 묘사 4:10-18
       (3) 다니엘의 꿈 해석 4:19-27
       (4) 느부갓네살의 쇠잔과 회복 4:28-36
       (5)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하나님을 칭송함 4:37

     5. 벨사살의 잔치와 나라의 상실 5:1-31
       (1) 벨사살이 성전 기명을 모독함 5:1-4
       (2) 분벽 위에 손으로 쓴 신비한 글씨 5:5-12
       (3) 다니엘의 해석 5:13-28
       (4) 다니엘이 영예를 얻음 바벨론의 멸망 5:29-31

     6. 사자굴에서 다니엘이 구출됨 16:1-28
       (1) 다니엘의 승진과 그의 동료들의 시기 6:1-5
       (2) 기도를 금지한 다리우스의 조서 6:6-9
       (3) 다니엘의 조서 위반과 그 정죄 6:10-17
       (4) 다니엘의 놓임과 고소자들의 처벌 6:18-24
       (5) 다니엘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공인 6:25-28

Ⅱ. 예언 부분 7:1-12:13
     1. 다니엘의 두번째 예언적 기별 7:1-28
       (1) 네 짐승과 작은 뿔 7:1-8
       (2) 인자의 심판과 영원한 통치 7:9-14
       (3) 한 천사의 이상 해석 7:15-27
       (4) 다니엘이 받은 이상 7:28

     2. 다니엘의 세번째 예언적 기별 8:1-9:27
       (1) 수양과 뿔들 8:1-8
       (2) 작은 뿔과 그의 간교성 8:9-12
       (3) 성소 정결에 관한 시간적 예언 8:13, 14
       (4) 가브리엘이 이상의 첫부분을 해석함 8:15-26
       (5) 이상을 본 결과로 다니엘이 앓음 8:27
       (6) 다니엘이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의 백성의 죄를 자복함 9:1-19
       (7) 가브리엘이 이상의 남은 부분을 해석함 9:20-27

     3. 다니엘의 네번째 예언적 기별 10:1-12:13
       (1) 다니엘의 금식 10:1-3
       (2) “한 사람”의 나타남과 다니엘에게 생긴 결과 10:4-10
       (3) 그 사람과 다니엘과의 예비적 대화 10:11-11:1
       (4) 장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이상 11:2-12:3
       (5) 기사가 계속되는 동안 다니엘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함 12:4-13


내용 / 
에스겔이 포로가 된 백성들을 성전에 대한 기대로써 격려하고 있었을 때,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가의 권세가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고 있었다. 
불신자들은 다니엘서의 네 개의 세계 제국 [바벨론, 바사, 헬라 및 로마]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많은 비평을 해 왔다. 
비록 이방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한때 지배했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실제로 지배하셨었으며 지금도 지배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세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 
본서의 예언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앞에 진실하게 설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교리적인 교훈 : 
본서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세상에 현존하는 권세자들을 정죄하고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왕국을 부수는 거대한 돌로(2:34, 45), 인자로(7:13), 옛적부터 계시는 자로(7:22), 기름부음 받은 자(9:26)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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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장별 요약

다니엘 역사와 개론

다니엘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마지막과 포로 시대의 인물이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남유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어 성전의 모든 기물이 바벨론에 옮겨 가게 됩니다.



다니엘 1장 요약

1-3절 여호야김 삼 년에 성전 기물을 가져와 시날 신전에 둠

포로는 3차에 의해 일어난다. 다니엘은 1차 포로 때이다. 이 때는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을 때이다.

4-7절 포로 중에서 지혜로운 자를 가르치게 함

8-21절 다니엘과 세 친구가 환관장에게 구함

[이스라엘의 3차 포로 시간과 사람들]

  • 1차 포로 / 기원전 605년, 다니엘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
  • 2차 포로 / 기원전 597년 에스겔과 여호야긴의 온 집안 1만 여명이 포로 잡혀감
  • 3차 포로 / 기원전 588-4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3년 동안 포위하여 멸망 시킨다. 왕과 귀족, 부자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 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남게 된다.

다니엘 2장 요약

1-23절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위기

24-49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다니엘 3장 요약

1-7절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우고 절하게 함

8-18절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참소하여 절하게 하나 거절함

19-30절 그들을 풀무불에 던지나 죽지 않고 살아 나옴

다니엘 4장 요약

1-18절 느부갓네살 왕의 꿈

19-27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28-37절 꿈처럼 느부갓네살이 쫓겨나 떠돌게 됨

다니엘 5장 요약

1-9절 벨사살 왕이 성전 기물로 술을 마시자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씀

10-16절 벨사상 왕 앞에 다니엘이 불려 나옴

17-29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고 그대로 됨

30-31절 메대 사람 다리오가 바벨론을 정복함(바벨론이 망하고 메대-페르시아 왕국이 시작됨)

다니엘 6장 요약

1-9절 총리가 된 다니엘을 시기하여 함정을 만듦

10-15절 절하지 않는 다니엘을 고소함

16-28절 살아나온 다니엘과 고소한 자들의 죽음

다니엘 7장 요약

1-14절 다니엘이 네 짐승의 꿈을 꿈

15-28절 꿈의 해석

다니엘 8장 요약

1-14절 벨사살 왕 삼 년의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15-27절 환상의 해석

다니엘 9장 요약

1-2절 예레미야의 예언 70년을 알게 됨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하여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을 섬길 것이라 예언한다.(렘 25:12, 29:10)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책을 읽고 칠십 년 포로 생활이 끝날 것은 알게 된다.

3-19절 다니엘의 기도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과거를 회상하며 민족들의 죄를 자복한다.

20-27절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함

다니엘이 기도하자 환상 중에 가브리엘이 와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다니엘 10장 요약

1-9절 거대한 신상 대한 이상

고레스 제삼년에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된다. 거대한 신상에 대한 환상을 보고 다니엘은 죽은 것처럼 깊이 잠이 든다.

10-21절 미가엘이 찾아옴

전쟁의 천사인 미가엘이 다니엘에 오려했으나 이십일 동안 막혀 지체하나 와서 환상을 해석한다.

다니엘 11장 요약

1-45절 신상에 대한 해석

바사에서 세 왕이 일어난다. 그가 헬라 왕국을 칠 것이다. 한 왕이 큰 권세로 행할 것이다. 남방 왕은 강할 것이다. 얼마 후에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과 화친한다. 그러나 버림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공주에게서 난 한 사람이 북방을 쳐서 이긴다. 금과 보물들을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간다. 북방 왕과 남방 왕이 다시 싸우게 된다.

다니엘 12장 요약

1-13절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

마지막 때에 미가엘이 일어나고 환난이 있다.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을 얻는다.  많은 사람은 연단을 받고 성결하게 되나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질 것이다.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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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니엘서의 특징

*히브리 성경에서는 성문서로 분류

*구약의 묵시문학 (신약에는 요한계시록)

2. 다니엘서의 구조

3. 묵시문학의 특징

*이원론적인 시간이해: 현재의 때와 오는 때의 구분

*윤리적인 이원론: 악인과 의인의 구분

*다양한 상징과 비유: 숫자, 기호, 암호, 비유 등

*운명론적 역사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한 믿음

4. 다니엘서의 상징 이해

*형상 - 큰 신상, 뜨인 돌, 키가 하늘에 닿은 거대한 나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등

*숫자 - 이천 삼백 일, 칠십 이레,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90일, 1335일 등

*구체적(x) - 암시적, 직설적(x) - 비유적, 추상적

5. 메시아와 인자

*뜨인 돌(2) - 하나님의 최종승리,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 신약성경 (눅 20:9-18, 벧전 2:4-10)

*신들의 아들(3-6) - 세 친구와 함께 불속에 있던 존재, 사자굴에 함께 있던 천사

*인자(7-8) -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서 나옴, 왕적인 존재, 예수님의 자기계시

*세마포를 입은 사람(10-12) - 대제사장의 옷으로 메시아를 상징

6. 다니엘서를 읽을 때 주의할 점

*상징적인 표현과 숫자에 지나치게 풀이하면 안 된다.

*화이부동 낭중지추의 관점으로 읽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는다.

*기도의 자세를 배운다.








다니엘서 개론, 저자와 저작 연대

책의 명칭 

다니엘은 이 책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책의 예언들을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마 24:15; 막 13:14)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증거는 이 책의 명칭이 단순히 다니엘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예언들이 다니엘에 의해 선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의 저자를 에스겔서에(14:14, 20; 28:3) 노아와 욥과 함께 의인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다니엘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

이에 반하여 다니엘의 이러한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노아와 같이 고대 세계에 보편적인 전설상의 한 인물이다"(Montgo-mery, Ice, p. 2)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스겔서에 나오는 노아와 욥은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 성서 상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에스겔서에 나오는 다니엘을 다니엘서의 저자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저자와 저작연대 

몇몇 학자들이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묵시적 예언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J. E. H. Thomson저, Danie1 in Pulpit Commentary, p.93을 보라).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때때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E. G., Ro-bert H. Pfeiffer,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IIlent,p.775).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저자는 역사상의 문제에 있어서 과오를 범하고 있다.
2)다니엘서에 나타난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6세기 훨씬 이후의 형태들이다.
3)여기에 사용된 몇몇 용어들은 6세기의 유대인 저자로서는 알 수 없었던 바사어와 헬라어들이다.
4)이 책은 구약성경의 세번째 부분(성문서, W-ritings or Hagiographa)에 속해 있으므로 예언서가 끝난 후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5)다니엘서가 주후 2세기 이전에 존재했다는 외적 증거는 없다.
6)이 책의 신학사상이 6세기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보적이다.
7)서술된 내용이 환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비현실적이다.
8)다니엘서는 계시문학의 한 실례인데, 계시문학은 헬레니즘 시대가 거의 다 지나서야 나타났다(Montgomery,Icc,p.80).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현대 변증가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다니엘서의 증언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
2)다니엘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기독교시대 이전의 유대인들이 그 역사성을 믿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3)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포함하여 신약성서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다.
4)고대의 직접적인 외적 증거가 있다(겔 14:14, 20; 28:3; 마카비일서 2:59,60. 그리고 요세푸스의 몇몇 귀절들).
5) B.C.165년 이전에 다니엘서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가 있다.
6)다니엘서의 사상과 역사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는 특히 고고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반대들은 Charles Boutflower의 In and Around the book of Daniel과 R.H. Dougherty의 Nabonidus and Eel Shaz-zer에 의해 잠잠해졌다. 특히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Montgomery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문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Ice, p. 72, 2 nd full parsgraph).

역사적 배경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는 포로기에 쓰여졌는데, 이때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대인의 성전과 도성이 파괴되고 재산을 빼앗긴 후 유대인들이 잡혀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파괴는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번째 B.C. 605년,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있었다(단 1:1-6).

두번째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팔레스틴 원정 중에 유다왕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이 모종의 반역을 도모하여 처벌을 받게 되고,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만명의 포로들을 끌고갔는데, 그들 중에 여호야긴왕과 젊은 예언자 에스겔도 끼여있었다(겔 1:1-3: 참조, 대하 36:10; 왕하 24:8-20).

세번째 B.C. 587년,

오랜 포위 공격 후에 느부갓네살은 도성과 성전을 파괴하고 전 유대사회를 파괴하였다(왕하 25:1-7; 렘 34:1-7; 39:1-7; 52:2-11).


B.C.583년 바벨론의 정복자이며 메대 -

 바사제국의 새 왕인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귀환해도 좋다는 포고령을 내렸을 때 유대의 재건은 시작되었다(대하 36:22, 23; 스1:1-4).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포로생활의 기간은 불과 48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B.C. 587년에 파괴된 성전은 70년이 지난 B.C. 5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건되었다(스 6:15).

그러나 "70년"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며(렘 25:11), 이것은 유다 뿐만 아니라 그 인접 국가도 포함하는 말이다(B.C.605년에서 538년까지의 "70년"은 대략적인 수: 참조단 9:1,2절에는 B.C.539/538년으로 되어 있음).

포로생활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일어 난 문화적, 종교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

즉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에 회당에서 드리게 되었으며, 제 2의 언어인 아람어(또한 시리아어나 갈대아어라고도 불렸다)를 채택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아브라함이 사용한 언어가 원래 아람어였음을 밝혀준다.

성서의 난외주를 읽어 보면(신26:5; 창31:47)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조상들이 아람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들은(참조, 모암 비석, 라스 샴라 호판) 가나안 사람들이 히브리어와 거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바벨론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상업어로 사용했으며, 때로는 그것이 외교어가 되기도 했다(참조, 사 36:11, 12).

히브리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은 히브리어와 유사한 아람어를 사용했다(왕하 18:26).

그리고 얼마 동안은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다니엘서의 전반에 해당하는 처음 6장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사실 뒤에는 분명히 이러한 상황이 깔려 있다.

4. 계시의 해석 

계시를 해석하는 데에는 해석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시 문학을 다루기 위한 어떤 특별한 성서해석학적 규칙들이 아직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비성서적 계시문학의 해석에 적용되는 규칙들이 성서적 계시문학을 해석하는데 무비판적으로 도입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니엘서(내용분해)

1장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2장 /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과 그 해석
3장 /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
4장 / 느부갓네살의 큰 나무에 대한 꿈
5장 / 벨사살의 연회
6장 /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7장 / 네 짐승의 우상
8장 / 수소와 수염소의 이상
9장 / 70이레에 대한 이상
10장 / 다니엘의 마지막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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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1. 사로잡혀 감(1:)
사로잡혀 온 때 (1:1).


2. 선택됨(1:3-6)


3. 이름의 변경(1:7)


4. 다니엘의 결심과 시험(1:8-16)
1)다니엘의 뜻을 정함(1:8-11).
2)시험 기간(10일)(1:12-14).
3)시험의 결과(1:15,16)


5. 하나님의 축복과 저들의 지혜(1:17-21)

2장 /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과 그 해석(2:1-49).

6. 느부갓네살의 꿈(2:1-13)
1)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으나 잊어 버림 (2:1).
2)갈대마 술사들이 왕궁으로 불려 들어감(2:2).
3)느부갓네 살의 요구(2:4-9).
4)박사들의 무력 (2:10,11)
5)느부갓네살의 진노와 박사들의 운명 (2:12, 13).


7.다니엘의 해몽(2:14-45)
1)다니엘의 현명한 간원(2:14-18).
2)다니엘에게 그 잊혀진 꿈이 계시됨(2:19).
3)다니엘이 하나님을 찬양함(2:20-23).
4)다니엘이 왕께로 인도됨(2:24, 25).
5)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주신 목적을 말함(2:26-30).
6)다니엘이 왕의 꿈(큰 신상의 꿈)을 말함(2:31-35).
7)다니엘의 해몽(2:36-45).


8.왕이 다니엘을 존귀케 함(2:46-49)
1)왕이 다니엘에 절하고 하나님을 찬미함(2:46,47)
2)왕이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함(2:48, 49).

3장 /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4:3)

9.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금신상(3:1-6)
1)금신상을 만들어 세움(3:1)
2)금신상에게 경배하게 함(3:2-5).
3)금신상을 경배하지 않은 자에 대한 형벌(3:6).
4)모든 백성이 금신상에게 경배함(3:7).


10.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신상에 절하지 않음
1)다니엘의 세 친구를 고발함(3:8-12).
2)느부갓네살왕의 신문과 명령 (3:13-15).
3)다니엘의 세 친구의 거절(3:16-18)


11.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짐(3:19-27)
1)풀무불에 던져짐 (3:19-23).
2)천사의 보호(3:24, 25)
3)구출(3:26, 27).


12.느부갓네살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조서(3:28-4:3)
1)하나님께 찬양(3:28).
2)느부갓네살이 조서를 내림 (3:29, 30).
3)느부갓네살이 천하에 조서를 내림 (4:1-3)

4장 / 느부갓네살의 큰 나무에 대한 꿈(4:4-4:37)

13.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 해몽을 요구함(4:4-9)
1)느부갓네살이 큰 나무에 대한 꿈을 꾸다(4:4, 5).
2)느부갓네살이 해몽을 요구함(4:6-9).


14.꿈과 그해석(4:10-27)
1)왕과 꿈 이야기를 함(4:10-17).
2)다니엘에게 해몽을 부탁함(4:18)
3)다니엘이 해몽함(4:19-27).


15. 꿈의 성취와 왕의 회복(4:28-37)
1)왕의 정신이상(4:28-33).
2)왕이 하나님을 찬양함(4:34, 35).
3)왕의 회복과 고백(4:36, 37).

5장 / 벨사살의 연회(5:1-31)

16. 연회의 개최(5:1-4)
1)벨사살왕이 일천명의 귀인을 위한 연회를 개설함(5:1)
2)예루살렘 성전의 기명으로 술을 마심(5:2, 3).
3)우상(신들)을 찬양함(5:4).


17. 벽에 쓰여진 글(5:5-29)
1)손가락이 나타나서 분벽에 글을 씀(5:5).
2)왕이 큰 충격을 받음(5:6).
3)박사들이 해석을 못함(5:7-9).
4)여왕의 충고(5:10-12).
5)다니엘이 부름을 받음(5:13-16).
6)다니엘이 왕을 책망함(5:17-25).
7)다니엘이 그 글을 해석함(5:26-28).
8)왕이 다니엘에게 보상함(5:29)


18.글의 성취(5:30, 31)

6장 /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6:1-28)

19. 매대 - 바사에서의 다니엘의 형통(6:1-3)


20.다니엘의 시련(6:4-24)
1)총리와 방백들의 음모와 왕의 조서 (6:4-9).
2)다니엘의 확고부동함(6:10)
3)다니엘을 범법자로 고발함(6:11-13)
4)왕이 다니엘을 구하려고 노력함(6:14, 15).
5)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짐 (6:16, 17).
6)하나님이 다니엘을 구원하심 (6:18-22).
7)음모자들을 벌함(6:24).


21.다리오왕의 조서와 다니엘의 형통(6:25-28)
1)다리오가 하나님을 인정함(6:25-27).
2)다니엘의 형통(6:28).

7장 / 네 짐승의 우상(7:1-28)

22. 다니엘의 꿈(7:1-3)


23.다니엘이 본 이상(7:4-27)
1)다니엘이 본 네 짐승(7:4-8).
2)다니엘이 본 하늘의 모습(7:9-14).
3)다니엘의 번민(7:15, 16).
4)이상의 해석(7:17-28).

8장 / 수소와 수염소의 이상(8:1-27)

24.이상(8:1-14)
1)때(8:1,2)
2)수양(8:3, 4).
3)수염소(8:5).
4)수양과 수염소의 싸움(8:5-7).
5) 네 뿔(8:8).
6)작은 뿔(8:9-14).


25. 이상의 해석(8:15-27)
1)하늘의 해석자(8:15, 16).
2)성취의 때(8:17-19).
3)수양(8:20).
4)수염소(8:21)
5) 네 뿔(8:22).
6)작은 뿔, 한 왕(8:23).
7)이 왕의 권세와 성도들에 대한 도전(8:24).
8)이 왕의 높아짐과 메시야와 싸움(8:25).
9)이상의 때(8:26, 27).

9장 / 70이레에 대한 이상(9:1-27)

26. 이상을 볼 때까지
1)때(9:1,2)
2)다니엘의 기도(9:3-19).


27.이상(9:20-27)
1)가브리엘의 출현(9:20-23).
2)70주에 대한 설명(9:24-27).

10장 / 다니엘의 마지막 이상(10:1-12:13)

28.이상(10:1-21)
1)역사적 배경(10:1).
2)계시를 위한 준비(10:2-9)
3)천사와의 대화(10:10-21)


29. 이상의 해석(11:1-12:4)
1)바사와 희랍(11:1-4)
2)수리아와 애굽(11:5-20).
3)이스라엘을 박해한 수리아왕(11:20-35).
4)자기 뜻대로 행하는 왕에 대한 예언(11:36-45).


30. 대환란(12:1-4)


31.종말의 예언(12:5-13)

다니엘서(설교자료)

[1] 왕궁에서 일하는 자의 자격
[2] 다니엘과 요셉의 비슷한 경우
[3] 다니엘의 인격
[4] 크게 은총을 입은 다니엘
[5]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
[6]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이유
[7] 다니엘의 하나님
[8] 느부갓네살의 꿈
[9] 신상의 해석
[10]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
[11]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 하는 것
[12] 계시의 결과
[13] 낙성식에 모인 8가지 계층의 사람들
[14] 느부갓네살의 고백
[15] 다니엘의 4번째 예언
[1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것
[17] 권세와 권능
[18] 느부갓네살의 회복과 축복
[19] 다니엘에 대한 증거
[20] 벨사살왕의 죄
[21] 다리오왕의 명령
[22] 하나님에 대한 사실
[23] 적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사실
[24]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이상
[25]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3가지 보증
[26] 하나님에 대한 진리
[27] 다니엘의 간구
[28] 이스라엘의 죄
[29] 전쟁의 이상
[30] 메시야에 대한 8가지 묘사
[31] 다니엘에게 미칠 영향
[32] 다니엘 10-12장에 나타난 10가지 목적
[33] 적그리스도와 신들

[1] 왕궁에서 일하는 자의 자격

1.왕이 명한 8가지 자격(1:3, 4)
1)왕족이나 귀족이어야 함(3절).
2)소년이어야 함(4절).
3)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함(4절).
4)용모가 아름다와야 함(4절).
5)모든 재주를 통달해야 함(4절).
6)지식을 구비해야 함(4절).
7)학문에 익숙해야 함(4절).
8)왕궁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방언을 교육받아야 함(4절).

[2] 다니엘과 요셉의 비슷한 경우

2.자기 민족으로 인해 포로가 됨
창 37장.


3. 체포자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받음
창 39:21; 단 1:9.


4.꿈의 해석
창 37:5-11; 41:1-45; 단 1:17.


5.왕에 의해 높임을 받음
단 2:46-49, 5:29; 6:26; 창 41장.


6. 거룩한 생활
창 39:12; 단 1:8.

[3] 다니엘의 인격

7. 왕이 요구한 세가지 자격 요건
1)출생 - 왕족(단 1:3).
2)용모- 흠없고 아름다운 자(단1:4)
3)두뇌(지력)- 지혜와 지식을 겸비하고 학문에 익숙한 자(단 1:4).


8. 세가지 목적
1)하나님의 목적,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다(단 1:5)
2)악마의 목적, 그들의 마음과 입과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더럽게 하기 위함이다(단 1:1-10)
3)다니엘의 목적, 자기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함(단1:8)


9.다니엘 성격의 세가지 특성
1)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신념(단 1:8).
2)환관장에게 구하는 용기 (단1:8)
3)"당신의 종들을 시험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자들과 비교하소서"하고 말하는 그의 정중함(단 1:12, 13).

[4] 크게 은총을 입은 다니엘(단 1:1-8)


다니엘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심판주이시다" 라는 뜻이다.

10. 다니엘의 세가지 이름
1)히브리 이름- 다니엘,
2)갈대아 이름- 벨드사살(단 1:6, 7).
3)하늘의 이름- 크게 은총을 입은 자(단 9:23; 10:11-19).


11.다니엘의 세 영역의 생활
1)개인생활- 목적이 확고부동한 생활(단 1:8)
2)공적생활- 공무수행에 있어서 과실이 없는 생활(단 6:4).
3)기도생활- 열렬한 기도생활(단 9:3).


12. 다니엘의 세가지 탁월한 특성
1)성자와 같은 신실함(단 1장).
2)현자로서 두려움이 없는 대담무쌍함(단 2,4,5장).
3)정치 인으로서 흠잡을데가 없음(단 6장)

[5]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

13. 하나님을 찬송한 15가지 이유(단 2:20-23).
1)지혜가 그에게 있음(20절).
2)권능이 그에게 있음(20절).
3)때를 변하게 함(21절).
4)기한을 변하게 함(21절).
5)왕들을 폐함(21절).
6)왕들을 세움(21절).
7)지혜자에게 지혜를 줌(21절).
8)지식자에게 총명을 줌(21절).
9)깊은 일을 나타내심 (22절)
10)은밀한 일을 나타내심 (22절)
11)어두운데 있는 것을 앎(22절)
12)빛이 그와 함께 있음(22절, 딤전 6:16).
13)그는 나에게 지혜를 줌(23절).
14)그는 나에게 능력을 줌(23절).
15)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 곧 왕의 일을 보이심(23절).

[6]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이유

14.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12가지 이유(2:18-45)
1)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18,30절)
2)바벨론의 모든 박사나 술객들보다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심을 보이기 위해서 (27, 28절).
3)하나님이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보이기 위해서(18-23절).
4)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통치자임을 보이기 위해서(19-23, 39-45절).
5)하나님은 지금도 인생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19-23절)
6)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21-23절; 롬 11:33).
7)하나님이 예언의 주관자임을 보이기 위해서 (23-45절)
8)하나님만이 유일한 참된 신이심을 보이기 위해서(20-30절).
9)참된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해서 (23절)
10)계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기 위해서(29, 30, 45절)
11)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30절)
12)다니엘 시대부터 영원한 시대까지의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기 위해서(29-45절)

[7] 다니엘의 하나님(단 2:28).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

15. 다니엘의 하나님은
1)자기의 뜻을 은밀히 나타내시는 하나님 (단 2:28)
2)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단 2:28).
3)보응하시는 하나님 (단 5:23-26).
4)자신의 경륜을 통하여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단 6:22)
5)다니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단 6:23).

[8] 느부갓네살의 꿈

16. 느부갓네살이 신상에 관한 꿈을 꿈(2:31-35)
1)큰 신상.
2)광채가 특심함.
3)신상은 왕의 앞에 서있음.
4)그 모양이 심히 두려움(31절).
5)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임.
6)가슴과 팔들은 은임.
7)배와 넓적다리는 놋임 (32절).
8)종아리는 철임.
9)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임 (33절).
10)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림(34절)
11)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음(34절).
12)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함(35절)

[9] 신상의 해석(2:38)


왕이 꿈에서 본 5가지 물질로 만들어진 큰 신싱은 다섯 제국을 나타낸다. 이들은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로마이다(2:44, 45; 7:23, 24; 계 17:12-17).


17. 금으로 된 머리 (32, 35, 39절)
큰 신상의 금머리는 다섯 나라 중 첫번째 나라를 나타낸다- 바벨론 곧 느부갓네살의 나라(37, 38절; 렘 15:4, 24:9; 25:1-12; 29:18).
다섯 나라는 이스라엘을 벌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한 후에는 곧 다른 나라에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이 다섯 나라는 모두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까지만 존재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는 각각 다음 나라에 멸망되었다.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원년, 곧 기원전 616년 경에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70년 동안 계속 지배했다(9:2; 렘 25). 느부갓네살이 43년을 통치하고 그 후 에윌므로닥이 계승했다(왕하 25:27; 렘 52:31). 그리고 바빌론이 멸망될 때까지 함께 통치했던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이 그 뒤를 이었다(단 5장). 바벨론 제국은 70년 동안(기원전 616-546) 이스라엘을 지배했다(렘 25장).


18.은으로 된 가슴과 팔(32, 35, 39절)
신상의 이 부분은 메대 - 바사 제국을 상징하는데 이 나라는 70년 동안 유대인을 지배했던 바벨론을 계승했다. 이것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한 두번째 나라이다(2:39; 5:1-31, 8:20; 9:1; 10:1; 11:1; 대하36:22; 스1:1-3).
두 개의 팔은 두 개의 나라 곧 메데와 바사 이중 제국을 상징한다. 이 나라는 은으로 되었으므로 금으로 만들어진 바벨론 제국보다는 못하다. 이 나라가 바벨론을 정복했으므로 힘에 있어서는 열등하지 않으나, 정부의 형태, 부, 사치품, 그리고 영광의 면에서는 바벨론 보다 못하다(사 13:19). 바벨론에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단 5:19) 메데-바사의 법은 왕보다도 높아서 왕이라 하더라도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단 5:19). 마찬가지로 3번째와 4번째 나라도 정부의 형태, 부, 영광은 바벨론 보다 못하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갔고 메데 - 바사는 그들을 해방시켰다(사 44:28; 45:1-5; 스 1:1-4; 6:1-14).
메데-바사는 고대 헬라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 때까지 존속했다(기원전 334년).


19.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32, 35, 39절)
신상의 이 부분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세번째 나라인 알렉산더 대왕 치하의 헬라제국을 상징한다(2:39; 8:20, 21; 11:1-34). 이 세번째 제국은 처음 세 나라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다. 알렉산더는 헬라와 마케돈(Macedon)으로부터 시작해서 앞의 두 나라의 영토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일부까지도 정복했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의 죽음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해서 그의 방대한 영토는 우리가 다니엘 8장을 연구할 때 본 것처럼 네 나라로 나뉘었다.


20. 철로 든 다리 (33-35, 40절)
신상의 이 부분은 헬라 제국에 이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고대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이 나라는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네번째 나라이다(2:40; 7:23, 24; 9:26; 눅2:1; 20:20-24; 요11:48; 마24:1, 2; 행 16:21; 22:25-29). 이 나라는 철이 금, 은, 놋 보다 강하듯이 앞의 모든 나라보다도 더 강력했다. 비록 네번째 나라라 할지라도 이것이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위한 이방 세계의 마지막 나라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걱 그들의 메시야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을 지배할 두개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철로 만들어진 두 개의 다리는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1.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 (33-35, 44절)
신상의 이 부분은 미래의 새 로마제국(revised R-oman Empire), 곧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될 다섯번째 나라를 의미한다 (2:31-43; 7:23-25; 계 17:12-17). 신상의 마지막 부분인 이 부분은 하늘에서 뜨인 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새 로마제국은 발과 발가락이 철과 진흙의 두 물질로 만들어졌음을 볼때 일부분은 강하고, 일부분은 약한 제국으로 분리될 것이다. 진흙은 일반 백성에 의한 지배를 뜻하며, 철은 왕들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이러한 정부의 두 형태는 철과 진흙이 혼합되지 않듯이 공존할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철이 우세하여 승리할 것이다. 왕들이 다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할 것이다. 10개의 나라가 거기에 세워질 것이며, 10명의 왕들이 그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44, 45; 7:7, 8, 23, 24). 10개의 발가락으로 나타내는 10개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마지막 때까지 존재하나 그가 오실 때는 멸망될 것이다(계 17:8-17; 19:11-21). 이스라엘 사람들은 70번째 이레의 처음 삼년 반동안 10명의 왕들에 의해 통치받고 그 후 마지막 삼년 반 동안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받을 것이다(2:44, 45; 7:7-14; 7:17-25; 계 13:1-18; 17:8-17; 살후 2:1-12).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 10개의 나라가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7:12-17에 언급된 새 로마제국을 형성할 것이라고 한다.


22.신상을 부숴뜨린 돌
이것은 재림하여 이 세상 나라들을 멸망시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늘나라를 상징한다(35, 44, 45; 7:13-27; 마 24:29-31; 25:31-46; 슥14:1-21; 살후1:7-11; 2:4-8; 유 14; 계 11:15; 19:11-20:7).
그리스도 자신은 "돌"(stone)이라고 불리운다(시 118:22; 마21:44; 엡 2:19-22; 벧전2:6-8). "손으로 하지 아니 하고"(without hen-ds)라는 구절은 인간의 힘에 의하지 않고 전력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2:45, 8:25; 욥34:20; 애4:6). 바벨론이 세계제국의 세번째 나라이고, 메데-바사는 4번째, 헬라는 다섯번째, 로마는 여섯번째, 그리고 새 로마제국은 일곱번째 나라라는 것을 성서 본문의 윤곽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여덟 나라 중 세번째에서 일곱번째 나라까지라는 것이다. 두 제국, 즉 첫번째 나라인 애굽과 두번째 나라인 앗수르는 바벨론 이전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여덟번째 나라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이다(계 17:9-11). 이러한 다섯 나라가 다니엘서에서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나라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 17:8-11에서는 세 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 일곱번째 나라로 나타난다.

[10]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운 왕국(단 2:44).

23.하나님이 세우신 왕국
1)불멸성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2)궁극적인 확정성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3)우주적 우위성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4)영원성-"영원이 설것이요"

[11]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것

24.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
1)우리의 할례는 유대의 할례처럼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골 2:11).
2)우리의 신성한 하늘의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단 9:24).
3)우리에게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영원한 하늘의 집이 있다(고후 5:1).
4)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산에서 뜨인 돌이다(단 2:45).
5)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단 8:25).
("주님은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시리라") (살후 2:8).

[12] 계시의 결과

25.계시의 7가지 결과(2:46)
1)왕이 엎드려-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줌(46절).
2)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림 (47절).
3)다니엘을 높임 (48절).
4)다니엘에게 많은 선물을 줌(48절)
5)다니엘을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함(48절).
6)다니엘을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이 되게 함(48절).
7)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높임 (49절).

[13] 낙성식에 모인 8가지 계층의 사람들

26.방백
항상 왕에게 가까이 있었던 총독이나 개인 고문(3:2, 3, 27; 6:1-7).


27.수령
여러 도의 부총독, 총독대리, 귀족(2:48; 3:2-3,27; 6:7).


28. 도백, 파샤(문무고관의 존칭)
1)변경지역의 부총독(3:2, 3, 27; 6:7).
2)군대의 지도자(왕상 20:24; 렘 51 23, 28, 57; 겔23:6, 12, 23).


29. 재판관
왕을 보좌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사람(3:2).


30. 재무관
국고를 담당하는 사람(3:2, 3).


31.모사
법률관, 재판관(3:2, 3).


32.법률사
행정 장관(3:2, 3).


33. 각 도의 관원
문관과 여러 현인들(3:2, 3).

[14] 느부갓네살의 고백

34.느부갓네살왕이 고백한 5가지 사실(3:28)
1)하나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신다.
2)하나님은 그를 의지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3)하나님께서 왕의 명을 거역하게 하신다.
4)유대인들이(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몸을 버린다.
5)하나님 외에는 이와 같이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

[15] 다니엘의 4번째 예언(4:10-16; 성취됨).

35. 예언 나무의 이상
1)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다.
2)높이가 매우 높다(10절)
3)그 나무는 자란다.
4)그 나무는 견고하여진다.
5)나무의 높이는 하늘에 닿았다.
6)땅끝에서도 그 나무를 볼 수 있다(11절).
7)잎사귀는 아름답다.
8)열매가 매우 많다.
9)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된다.
10)들짐승이 나무의 그늘로 찾아든다.
11)공중의 새들이 나뭇가지에 깃든다(12절)
12)한 순찰자, 곧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13절).
13)그는 소리질러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무를 베라,
-가지를 찍어라.
-잎사귀를 떨어라.
-열매를 헤쳐라(열매를 따라).
-짐승들로 나무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은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14절).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라,
-하늘 이슬에 그 나무를 젖게하라.
-들짐승과 더불어 풀이나 뜯게 버려두어라(15절).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게하라.
-일곱 때를 지나리라(16절).
-이것은 순찰자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명령이다.
-이것은 거룩한 자들의 명령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신다(17절).

[1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것

3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20가지 사실
1)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4:37)
2)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4:37).
3)하나님의 일은 진실하다(4:37).
4)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다(4:37).
5)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신다(4:37)
6)하나님은 모든 왕의 주재이시다(2:47).
7)하나님은 일한 것을 나타내신다(2:47).
8)하나님은 그를 의뢰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사자들을 보내신다(3:28).
9)하나님은 왕의 명을 거역하게 할 수 있다(3:28).
10)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다른 신도 섬기지 않는다(3:16-18,28).
11)하나님 외에는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3:29).
12)어떤 신도 하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3:25-29; 4:3).
13)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4:3, 34).
14)하나님의 권병은 대대에 이른다(4:3).
15)하나님의 영은 인간 안에 거할 수 있다(4:8, 9, 18).
16)하나님은 땅위에서 지극히 높으시다(4:17, 34).
17)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신다(4:17, 32).
18)땅 위의 지혜자들(박수와 술객 등)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2-13; 4:4-8).
19)죄에는 댓가가 있다(4:27-33).
20)자만심은 몰락의 원인이다(4:28-37).

[17] 권세와 권능(단 4:25)


우주를 지배하는 네가지 큰 법칙.

37. 하나님의 주권
"왕중의 왕"
1)단 2:37.
2)단 4:25.


38. 사탄의 대항(대적)
1)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6:11)
2)세상의 임금(요 14:30).
3)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참소하는 자로서 모든 땅의 재판관 앞에 나타난다(욥 1:6, 2:1; 슥 3:1).


39. 천사의 활약
1)구원얻을 후사를 위하여 섬김 (히 1:14).
2)인간의 도덕적 상태를 분별함(단 4:16).
3)하늘의 합법적인 재판소를 형성함(단 4:17).


40. 하늘에 있는 사악한 영들의 반항(엡 6:12)
1)하늘의 사자를 -해하는 자들(단 10:12, 13).
2)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적하기 위해 모인 자들(단10:20)
3)땅위의 사건에 관여하는 자들(단 4:8).

[18] 느브갓네살의 회복의 축복

41. 느부갓네살의 7가지 회복의 축복(4:36)
1)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옴(34절).
2)그의 이성이 다시 돌아옴(36절):개역성서에는'총명'으로 번역됨.
3)그의 나라의 영광이 회복됨.
4)그의 위엄과 광명이 다시 돌아옴.
5)그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다시 그를 모심 (36절).
6)그가 그의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음.
7)지극한 위세가 그에게 더해짐.

[19] 다니엘에 대한 증거

42. 다니엘에 대한 7가지 증거(5:11,12)
1)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을 가지고 있음(11절)
2)그는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12절).
3)그는 지식이 많음(12절).
4)그는 매우 총명함(12절).
5)그는 꿈을 해석하는 재주가 있음(12절).
6)그는 은밀한 말을 밝힘(12절)
7)그는 모든 의문을 파할 수 있음(12절).

[20] 벨사살왕의 죄

43. 벨사살 왕의 죄(5:22, 23)
1)스스로 마음을 낮추지 아니함.
2)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느부갓네살)에게 행한 일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음(22절).
3)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함(23절).
4)하나님의 집에서 쓰던 성전 기구들을 더럽힘(23절).
5)신상들을 찬양함(23절).
6)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 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음(23절)

[21] 다리오왕의 명령

44. 다리오 왕의 7가지 명령(6:24)
1)모든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26절)
2)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26절).
3)그는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다(26절).
4)그의 나라는 영원하다(26절; 2:44, 45; 7:13-14,18,27; 계11:15; 22:4, 5).
5)그는 위험에서 건져 내신다(27절).
6)그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다(27절)
7)그는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다(27절, 히 11:33).

[22] 하나님에 대한 사실

45. 하나님에 대한 15가지 사실:심판(7:9)
1)심판 보좌가 놓임 (9절)
2)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임.
3)하나님은 왕좌 위에 앉아 계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것과 같이 몸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함(9절)
4)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옷을 입고 있음(9절).
5)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다(9절).
6)그는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음(9절)
7)그는 머리털을 가지고 있음(9절)
8)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이 희다(9절).
만약 그가 머리와 머리털을 가지고 있고 옷을 입었다면, 그는 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요 4:24를 참조하라).
9)그의 보좌는 불꽃 같음.
10)보좌의 바퀴는 붙는 불 같음(9절; 겔1:15-20, 25-28; 10:9-13).
11)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옴(10절).
12)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수종듬(10절).
13)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서 있음(10절).
14)심판을 베품(10절).
15)책들이 펴놓여 있음(10절).

[23] 적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사실(7:11)

46. 그는 큰 말을 할 것이다
1)8, 11, 20, 25절.
2)8:23-25.
3)11:36.
4)계 13:5.


47.그는 학살당할 것이다
단 1:11; 8:25; 11:45; 사11:4; 살후2:8; 계19:20.


48. 그의 몸이 상할 것이다
단7:11; 비교, 마10:28; 눅12:5.


49. 그의 몸이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다
단11절:계 19:20; 20:10.

[24]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이상

50. 다니엘의 35가지 이상-네 짐승(7:2-14)
1)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어옴(2절)
2)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름(3절).
3)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음(4절)
4)두번째 짐승은 곰과 같음(5절).
5)세번째 짐승은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과 같음(6절).
6)네째 짐승은 모습은 나타나지 않으나 무섭고 놀라우며 극히 강함(7절).
7)네째 짐승은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음(7절).
8)네째 짐승은 이전의 모든 짐승과 다름(7절).
9)네째 짐승은 10개의 뿔이 있음(7절).
10)또 다른 작은 불이 10개의 뿔 사이에서 자람(8절).
11)작은 뿔이 자람에 따라 10개의 뿔 가운데 3개가 뿌리채 뽑힘(8절).
12)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함(8절).
13)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해 있음(9절).
14)그의 옷은 희기가 눈같음(9절).
15)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털 같음(9절).
16)그의 보좌는 불꽃 같음(9절).
17)그 바퀴는 타는 불 같음(9절).
18)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옴(10절)
19)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중들고 또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심판받기 위하여 그 앞에 서 있음(10절).
20)심판을 베품(10절)
21)책들이 펴 놓여 있음(10절)
22)작은 뿔이 큰 소리로 말함(11절).
23)짐승이 마침내 죽임을 당함(11절).
24)짐승의 시체가 상한바 되어 타는 불에 던져짐(11절).
25)남은 모든 짐승들은 그 권세를 빼앗김 (12절).
26)이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목숨만은 얼마동안 부지함(12절).
27)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옴(13절).
28)인자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옴(13절).
29)인자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앞에 인도됨(13절).
30)인자에게 권세를 줌
31)인자에게 영광을 줌
32)인자에게 나라를 줌.
33)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그를 섬김
34)그의 권세는 영원함
35)그의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음(14절).

[25]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3가지 보증

51. 기도와 죄의 고백
단 9:3, 4-6, 17, 20.


52. 죄악을 떠남
단 9:13; 사55:7.


53. 진리에 대한 이해와 복종
단 9:4-10, 13. 요8:32-36; 롬1:16.

[26] 하나님에 대한 진리

54. 하나님에 대한 7가지 진리(9:4-9)
1)그는 크신 하나님이시다(4절).
2)그는 두려워할 하나님이시다.
3)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신다(4절).
4)그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신다(4절).
5)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7, 14, 16절).
6)그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7, 13, 14, 16절).
7)그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9절).

[27] 다니엘의 간구

55. 다니엘의 10가지 간구(9:16-19)
1)주의 분노를 예루살렘과 시온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16절).
2)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17, 18, 19절).
3)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17절)
4)주의 얼굴 빛을 주의 성소에 비추소서 (17절).
5)귀를 기울여 들으소서(18절).
6)당신의 눈을 뜨소서 (18절).
7)우리의 황폐된 상황을 보소서 (18절)
8)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9절).
9)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19절).
10)지체하지 마옵소서 (19절).

[28] 이스라엘의 죄

56. 이스라엘의 12가지 죄(9:5-14)
1)범죄함(5,11,15,16절).
2)패역함(5절).
3)행악함(5절)
4)주의 법도를 떠남(5절).
5)주의 규례를 떠남(5절).
6)주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음(6절)
7)주께 죄를 범함(7절).
8)주께 패역함(9절).
9)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0절).
10)주의 율법을 행치 아니함(10절).
11)주의 율법을 범함(11절)
12)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1, 14절).

[29] 전쟁의 이상(10장)

57. 가브리엘과, 그를 사로 잡아 그로 하여금 다니엘에게 이 전쟁의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게 한 사탄과 같은 바사 군주 사이의 전쟁
단 10:12, 13, 20.


58. 바사군(君)과 헬라군(君) 사이의 전쟁
단 1O:20, 21; 11:2,3; 8:20, 21.


59. 바벨론군과 메대-바사군 사이의 전쟁
단 11:1; 5:25-31.


60.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차지하려다가 그것을 4나라로 나눈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의 전쟁
단 1:4; 8:8, 22.


61.알렐산더제국의 4부분중 2부분인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전쟁
단11:5.


62.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두번째 전쟁
단 11:7-9.


63.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3번째 전쟁
단 11:10-12.


64.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4번째 전쟁
단 11:13-16.


65.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5번째 전쟁
단 11:17.


66. 수리아와 헬라 그리고 로마 사이의 전쟁
단 11:18, 19.


67.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첫번째 전쟁
단 11:20.


68.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두번째 전쟁
단 11:21-24.


69.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6번째 전쟁
단11:25-27


70.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3번째 전쟁
단 11:28.


71.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7번째 전쟁
단11:29-31


72.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4번째 전쟁
단 11:32-34.


73.수리아와 하나님 사이의 전쟁
단 11:36-39.


74.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8번째, 곧 마지막 전쟁
단 11:40-42.


75.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5번째 전쟁
단 11:41.


76. 수리아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전쟁
단 11:41.


77. 수리아와 리비아, 구스 사이의 전쟁
단 11:43.


78.수리아와 그에게 예속된 10나라, 러시아,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과 북쪽 나라들 사이의 전쟁
단 11:44.


79.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6번째, 곧 마지막 전쟁
단 11:45; 슥14:1-5, 14.


80. 수리아와 재림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
단11:45; 7:21, 22, 25-27; 8:23-25; 9:27


81. 미가엘로 그의 사자들과 사탄 및 그의 사자들 사이의 하늘의 전쟁
단 12:1; 계 12:7-12.

[30] 메시야에 대한 8가지 묘사(10:5)

82. 그의 옷은 빛나는 세마포임
단 1O:5; 12:6, 7; 비교; 계 1:13; 19:8; 출28:4-12.


83. 그의 허리에는 정금 띠를 두름
단 10:5; 비교 계 1:13.


84.그의 몸은 황옥 같음
단 10:6; 비교 계 4:3.


85.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음
단 10:6; 비교 1:16; 10:1.


86. 그의 눈은 횃불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9:12.


87. 그의 팔은 빛난 놋과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9;12.


88. 그의 발은 빛난 놋과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0:1.


89.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음
단 1O:6; 비교, 계 1:14, 8:5; 10:2-4; 11:15; 14:2; 16:17, 18; 19:6; 시 29편.

[31] 다니엘에게 미친 영향(10:8)

90. 10가지 영향
1)몸에 힘이 빠짐(8절).
2)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 함(8절)
3)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음(9절).
4)한 손이 나를 어루만져서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꿇고 일어남(10절).
5)나는 그 후 떨며 일어섬(11절).
6)나는 크게 두려워함(12절).
7)나는 다시 땅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 (15절)
8)나는 벙어리가 됨 (15절).
9)천사가 나의 입술을 만지니 나는 다시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음을 호소함(16, 17절).
10)나는 다시 강건하게 되어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됨(18절-12:13).

[32] 다니엘 10-12장에 나타난 10가지 목적

91.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기 위함
단10:14.


92. 적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올 것인지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11:2-45.


93.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이스라엘을 억압할 세계적인 이방 제국들 가운데서 다니엘서의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37-45; 7:17-27; 8:20-25.


94. 작은 뿔 혹은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기 위함
단11:36-12:7.


95. 적그리스도를 북방 왕과 동일시하기 위함
단11:36-45.


96. 새 로마 제국과 새 헬라 제국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40-43; 7:23, 24.


97.지리적으로 다니엘 2장과 7장의 10나라와 다니엘의 8장의 4나라로부터 이 나라들 중 하나인 수리아로 적그리스도의 도래지를 제한하기 위함
단 7:23, 24, 8:9-14, 20-25; 11:36-45.


98.적그리스도가 언제, 왜, 어떻게 올 것인지를 더욱 잘 설명하기 위함
단 7:23, 24; 8:9-14, 20-25; 9:27; 11:36-45.


99. 마지막 날의 전쟁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40-45; 7:23,24; 8:9-14, 20-25; 11:40-45.


100. 이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는 사탄의 능력을 보이기 위함
단 10:12-21; 11:1; 12:1.

[33] 적그리스도와 신들

101.적그리스도와 그의 신들에 대한 7가지 사실(단11:37)
단 10:12-21; 11:1; 12:1
1)그는 열조의 하나님, 곧 참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음(37절; 요5:43).
2)여자들이 사모하는 신들을 돌아보지 아니함(37절).
3)아무 신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함(37절)
4)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하며 심지어 참 하나님 보다도 높다고 함(36, 37절, 살후 2:4)
5)그의 열조가 알지 못하던 신을 공경함(38절).
6)세력의 신을 공경함(38절).
7)이방 신을 공경함(38, 3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