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측량단위 (규빗, 척, 뼘, 장대, 손바닥, 손가락)
by news222 2025. 3. 10.
에스겔 성전 척량에 사용된 단위 자세히 알아보기
에스겔 40:3-5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5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1. 규빗 cubit
- '암마'
- 45.6cm
- 여섯 손바닥
- 가장 많이 사용된 단위
- 노아방주 ( 창세기 6:15-16)
- 성막 (출애굽기 25:10,17, 23)
- 스룹바벨 성전 (에스라 6:3)
2. 척 long cubit
- 암마'
- 53.2cm
- 큰 규빗
- 7 손바닥
- 1척 = 1규빗 + 1손바닥
- 에스겔 성전을 측량하는 기본 단위 (에스겔 40:5, 43:13)
3. 뼘 span
- '제레트'
- 22.8cm
- 1/2규빗
- 3손바닥
- 엄지 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최대한 펼친 길이 (출애굽기 28:16, 39:9, 사무엘상 17:4)
- 에스겔 성전에서는 한 뼘이 1/2척 (26.6cm) (에스겔 43:13)
4. 손바닥 handbreadth
- 토파흐
- 7.6cm
- 1/6규빗
- 4손가락
- 출애굽기 26:25, 열왕기상 7:26, 역대하 4:5, 시편 39:5, 에스겔 40:5, 43, 43:13
5. 손가락 finger
- 에츠바
- 1.9cm
- 1/24규빗
- 1/4손바닥
- (예레미야 52:21) "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6. 장대 rod
- 카네
- 3.192m
- 6척
- 6 long cubit
- 에스겔 40:3, 5
- '갈대'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네'
- 주로 직선거리를 재기 위해 사용
- 칠십인경에서 '칼라모스'(갈대)로 번역
성전(聖殿) 솨케드(שקד)

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곧 그 성읍이 온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인 것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성읍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명칭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한편 에스겔의 사역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그 날 후로는(*, 미욤) -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의 날인 동시에 본서에 기술된 모든 예언과 규정과 지침들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원전상 본서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란 뜻의 '여호와 삼마'(*)라는 단어로 종결되는 바,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전사역을 함축하는 본서의 총괄적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목격한 여호와의 영광의 떠나심(10:18-22;11:22-24)과 다시 돌아오심(43:4)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새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리라 하신 약속으로 귀결되며(43:7) 결과적으로 그 모든 사역이 이 '여호와 삼마'로 종결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삼마'는 원어상 '저기에', '거기에'라는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바, 혹자는 여호와의 처소가 이 성읍이 아니라 그 지역과 엄밀하게 구분되는 성전이라는 점에서 이를 '저기에'로 해석한다(Havernick, Schroder). 그러나 이 성읍이 12지파, 곧 전이스라엘의 공동 소유란 점에서, 단순하게 여호와의 처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새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거기에'라는 해석이 더 적절하다(Delitzsch).
성전(聖殿)이란 무엇인가?
성전은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다.
세상에서 말씀하는 성전의 의미는, 구약시대 때 있었던 성막(회막)으로부터 지작 되었다.(레 1:1~9)
레위기 1장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성막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옮겨 다니며 설치하였다.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다.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해 들어갔다.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목재와 튼튼한 재료로 아름답게 건축하였으며, 옮길 수 없는 성전이 되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성전은 허물어지고, 예수가 성전 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예수를 성전 되게 하신 것이다.
이는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이 예수를 [구세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를 [구세주]로 삼으시고, 예수를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게 하셨다. 또 예수를 중심으로 사역한 선지자와 사도들은 성전의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성전의 기초 위에,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이 성전 되어가게 하신 것이다.(계 21:22~24)
에베소서 2장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린도전서 3장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처럼 성전의 형태는 변천하였다.
옮겨 다니던 회막(천막)에서 고정된 건축물로, 고정된 건축물에서 사람의 몸으로 변천한 것이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에도 성전이 필요할까?
하늘나라에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하늘나라 자체가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를 성전으로 비유하였다.
요한계시록 21장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세상에 성전이 있었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에는, 하나님이 성전의 역할을 하신다.
그런데 어린양 예수를 성전이라 말씀하는 것은, 여호와(יהוה)께서 그의 아들 예수에게 성전의 역할을 하도록 모든 권세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는 예수가 받은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돌려드린다.(고전 15:24)
고린도전서 15장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사사건건 간섭하셨을까?
모세를 불러 성막을 짓게 하시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성전 되게 하셨을까?
사람들의 영혼은, 본래 천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사가 타락하여 하늘나라를 떠났기에, 타락 천사들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타락 천사의 생기를 사람의 육체에 불어넣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셨다.(창 2:7~8, 에녹 3서)
창세기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에녹 3서]
9. 종말과 재생
-중략-
천사의 영혼을 지닌 지식의 짐승들, 그것이 내가 새로이 창조하려는 인간의 모습이니라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의 천사들도 세상에 보내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선지자와 사도들이다.(롬 8:3, 에녹 3서)
로마서 8장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에녹 3서]
11. 인류 탄생
-중략-
그러자 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물론 지금 지옥(땅)에 있는 타락 천사들은 죄를 짓고 인간이 될 운명에 처해 있지만 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다시 한번 천사가 될 기회를 주려 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내가 선택하여 지옥(땅)으로 내려보내노라.
윤회의 틀을 돌고 돌아 인간으로 태어나면 너희들은 나의 말을 듣고 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본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인자(사람의 아들) 되셨는지, 그 비밀을 다음과 같이 밝히었다.(히 1:4~5, 13)
히브리서 1장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중략-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예수께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계 22:16)
요한계시록 22장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새벽별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미혹에 넘어간 타락 천사들을 땅으로 쫓으셨다. 땅으로 쫓겨난 저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고자 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땅을 황폐하게 하여, 공허한 폐허로 만드셨다.(에녹 3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새벽 별들)과 함께 폐허가 된 지구를 새롭게 창설하셨다. 에덴동산을 새롭게 창설하실 때, 타락 천사들을 사람으로 지으시면서 기뻐 소리치셨다.(욥 38:47, 창 1:26~27)
욥기 38장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창세기 1장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말씀을 정리하면,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가 지으신 타락 천사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천사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죄 없는 천사들도 죄 있는 육신을 입고 태어나 선지자와 사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선지자와 사도들 중 예수를 맏아들로 삼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롬 8:29~30)
로마서 8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를 맏아들로 삼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첫째 아들 사타나엘이 그의 품을 떠났기 때문이다.(에녹 3서)
[에녹 3서]
7장 짐승의 지식.
-중략-
천국에 하나뿐인 대 천사장 사타나엘.
너는 내 명령을 어기고 천국 밖으로 나가
금지된 세계와 금단의 지식을 맛보았다.
나는 너를 용서치 않기에
너의 모든 것을 파멸로 돌이킬 수 있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노라.
너는 대 천사장의 지위에서 박탈되어
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을 불러 성전을 짓게 하였고, 거기에 계셨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맏아들 예수를 보내어 [구세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יהוה)의 사자들은 성전의 모퉁잇돌과 기초석의 역할을 하게 하였고, 타락 천사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아서 하늘나라의 백성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하늘나라의 성전을, 그의 아들들 스스로가 이루어 가도록 맡기신 것이다.
맡기시되 그냥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입고 사역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사도들은 홍해를 가르고 죽을 자를 살리며,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으로 다스렸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어, 뿔뿔이 흩어진 타락 천사들을 다시 모으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성전이시듯, 너희도 성전이 되라는 말씀이셨다.(벧전 1:15~16)
베드로전서 1장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성전이 다 이루어지는 그날,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푸신다.
맏아들 예수를 신랑으로 비유하였고, 선지자와 사도들은 신부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비유하였다.(계 19:1~10)
혼주는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이 되신다.
성경 속 '성전', 그 깊은 의미를 찾아서
'성전'(聖殿). 성경을 읽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웅장한 건물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도 성전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의 의미는 단순히 건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고 풍성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은 성경 전체를 통해 '성전'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고, 그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며 심화되었는지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성전의 참된 의미를 알아가는 여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시작 :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성막
성전 이야기의 시작은 광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실 특별한 장소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聖幕)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애굽기 25:8)
성막은 이동이 가능한 텐트 형태였습니다. 이는 광야를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막의 구조와 기물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백성과의 만남,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한 제사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셨습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가시적으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생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 발전 : 견고한 하나님의 집,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왕정 시대가 열리면서, 다윗 왕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에 성전 건축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 뜻을 이어받아 마침내 예루살렘에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성막의 기본 구조를 따르면서도 훨씬 크고 견고하게 지어졌습니다.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동원되었고, 그 화려함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이 성전은 이제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영원한 언약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내가 이미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열왕기상 9:3)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성전에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성전을 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3. 재건과 변질 :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세워진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이전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 성전은 포로 귀환 공동체에게 신앙의 중심이자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라고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학개 2:9).
시간이 흘러 예수님 시대에는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이를 '헤롯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외형적으로는 매우 웅장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성전은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형식주의로 인해 본래의 의미를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며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예수님은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위선이 가득한 곳으로 변질된 것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헤롯 성전 역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마태복음 24:2),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4. 전환점 : 예수 그리스도, 참된 성전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성경은 이미 새로운 성전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참된 성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예수님께서는 헤롯 성전을 헐면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건물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특정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자, 하나님의 임재가 온전히 거하는 참된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5. 확장 : 성령의 전, 우리 몸과 교회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 강림 사건은 성전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이 말씀은 놀라운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 각자의 몸이 바로 '성령의 전',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특별한 건물이나 장소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자신이 바로 움직이는 성전, 살아있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우리의 삶을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2)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개개인의 성도들이 성령의 전이듯, 이들이 함께 모여 이루는 교회 공동체 역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연결되고 함께 세워져 가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이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6. 완성 :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자신이 성전
성전 이야기의 마지막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됩니다. 놀랍게도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성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1:22)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어떤 건물이나 매개체로서의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그분 자신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완전하고 직접적인 교제, 그 어떤 가림막도 없는 온전한 임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성막에서 시작된 성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환점을 맞고, 성령 안에서 우리 몸과 교회로 확장되었다가, 마침내 하나님 자신과의 온전한 연합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론 : 오늘, 우리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성경에서 '성전'의 의미는 이처럼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심화되어 왔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유형의 건물(성막, 솔로몬 성전 등)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는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성전은 더 이상 특정 장소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각자의 몸과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동시에 거룩한 책임감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몸과 삶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기뻐 거하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과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참된 성전으로 굳건히 서 가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신 예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됐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의 성전 청결은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예수께서 성전 청결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짓겠다- 은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구약의 성전 :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 하나님은 장막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장막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함을 받았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단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성전 청결
복음서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 청결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청결이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돼 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질된다. 외뜰이 파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이러한 예수의 성전 청결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청결한 예수의 행위가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 청결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메시아 의식
유대인들은 예수의 성전 청결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 성전 청결은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청결을 시도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청결은 선지자적 표적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구약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헐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김세윤, “예수와 성전.” 『예수와 바울』, 참말, 1993, 119-165 ).
신약의 성전 :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하신 것이다.
헤롯 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 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 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신령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청결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성도의 몸인 성전
역사적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잘 기록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로서 “변호사/조력자/ 원조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솔로몬의 성전도 헤롯의 성전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 이후 40년 만인 주후 70년,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종말론적 현실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도 필요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종교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옛 예루살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성령을 보내어 주신 이래(以來)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이 우리를 아신 것 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계시록 21장에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성경 속 성전
성경 속 성전의 역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전은 시대별로 다른 모습과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시대와 특징은 학자마다 견해가 있으니 대략적인 내용들은 거의 일치합니다.
목차: 성경 속 성전의 역사
- 모세의 성막 (광야 시대, 약 B.C. 1446~1400)
- 솔로몬의 성전 (통일왕국 시대, 약 B.C. 960~586)
- 스룹바벨의 성전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약 B.C. 516~20)
- 헤롯 성전 (신약 시대, 약 B.C. 20~A.D. 70)
- 영적 성전 (성령 강림 이후, A.D. 1세기 이후)
- 천상 성전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미래의 완성)
성경속 성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
먼저 성경 속에서 어떤 성전이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먼저는 광야에서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막이 있습니다. 성막을 천과 가죽으로 임시 텐트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성막'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후 솔로몬이 정신적으로 돌과 나무로 성전을 만듭니다. 이후의 모든 성전은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세워집니다.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후에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축 됩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성전은 솔로몬 성전의 터에 완전히 새롭게 건축되기 때문에 솔로문 성전과는 무관합니다. 이후에 헤롯이 유대를 지배하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은 화려하게 증축하는데 이것을 '헤롯 성전'이라 부릅니다. 헤롯성전은 기원후 70년경 디토 장군에 의해 유대가 다시 정복되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이후 회복되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전은 이전의 헤롯 성전의 벽 일 부분입니다.
- 모세의 광야 성막
- 솔로몬의 성전
- 스룹바벨의 성전
- -헤롯 성전(증축)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에스겔이나 예루살렘 나오는 성전은 상징와 상상 속의 성전입니다.
1. 모세의 성막 (광야 시대)
- 시대: 출애굽 후 광야 생활 (~기원전 1400년경)
특징
-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신 이동식 성전(출애굽기 25-27장).
-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되었으며, 법궤를 보관하는 거룩한 장소로 사용됨.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던 장소.
- 의미: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
2. 솔로몬의 성전 (통일왕국 시대)
- 시대: 솔로몬 왕 통치기 (~기원전 960년경)
-
특징:
- 다윗이 설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이스라엘 최초의 고정된 성전(열왕기상 6장).
- 성전은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
- 지성소에 법궤를 두었고, 제사와 예배가 중심이 됨.
- 파괴: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6년경에 완전히 파괴됨.
- 의미: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과 하나님께 드리는 중심 예배의 상징.
3. 스룹바벨의 성전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 시대: 포로 귀환 이후 (~기원전 516년경)
특징
-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재건한 성전(에스라 3-6장).
-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규모와 화려함이 감소.
-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로 복원되었으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상징성은 감소.
- 의미: 포로 생활에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믿음과 헌신.
4. 헤롯 성전 (신약 시대)
- 시대: 헤롯 대왕 치세 (~기원전 20년경 건축 시작)
특징
- 스룹바벨의 성전을 대규모로 확장하고 아름답게 재건.
-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었으며, 유대인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역할.
- 예수님은 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상인들을 내쫓으며 정결케 하심(마태복음 21:12-13).
- 파괴: 로마에 의해 기원후 70년에 완전히 파괴됨.
- 의미: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되며, 성전의 의미가 점차 영적인 차원으로 변화됨.
5. 영적 성전 (신약 교회와 성도)
- 시대: 성령 강림 이후 (사도행전 시대)
특징
- 예수님의 희생으로 물리적 성전의 역할이 끝나고,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성전이 됨(고린도전서 3:16-17, 에베소서 2:19-22).
- 성령이 거하는 장소로서의 교회와 성도의 삶 강조.
-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물리적 건물에서 벗어나 믿음과 성령의 임재로 전환.
6. 천상 성전 (종말론적 성전)
- 시대: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특징
-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 역할을 함(요한계시록 21:22).
-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교제하는 상태.
-
의미: 성전의 궁극적 완성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
결론
성전의 역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시대마다 형태와 기능은 다르지만,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심과 그들에게 예배와 교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성도는 성령의 거처로서 영적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며, 종말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6:19)
바울 사도의 편지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구절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입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담긴 깊고 놀라운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첫째,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성령님의 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당시 고린도 사회에 만연했던 잘못된 성 관념과 방탕한 생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몸을 그저 쾌락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몸이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거룩하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성전은 예로부터 하나님이 특별하게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를 의미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었으며,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바울은 놀랍게도 우리의 몸이 바로 그 성전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은 건물이나 특정한 장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몸을 단순히 '나'를 담는 그릇이나, 혹은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님의 거룩한 처소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성전이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귀한 곳인 것처럼, 우리의 몸 또한 존중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생각하는 것까지,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것은 성령님의 전으로서 합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더럽히거나 훼손하는 모든 행위는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정결하게 보존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울은 이어서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소유하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망과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에너지, 심지어 우리의 몸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짐을 우리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의 깊이
고린도전서 6장 19절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인 삶에 대한 권면을 넘어,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 놀라운 구원 역사의 증거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습니다.
- 나는 나의 몸을 성령님의 전으로서 존중하고 있는가?
- 나는 나의 몸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19절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깊이를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몸은 단순한 육체의 덩어리가 아니라, 거룩하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진 소유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기억하며, 우리의 몸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의 의미
내 안에 깃든 고요한 숨결
성령의 빛으로 채워진 공간
나 홀로 존재하는 듯 했으나
주님의 거처, 거룩한 성전이었네
내 뜻대로 움직이던 발걸음
나만을 위해 쓰여진 시간들
이제는 주님 향한 예배의 길로
주님의 영광 드러내는 도구로
나의 것이라 여겼던 이 몸
주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작품
더 이상 나만의 소유가 아닌
영원한 생명 담는 존귀한 성전
서론: 우리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세상은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값으로 산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 우리는 어떻게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
1️⃣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으로서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2️⃣ 우리는 값으로 산 존재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우리는 구원받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3️⃣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깨끗한 삶을 유지하세요.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세요.
✅ 우리의 몸을 주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세요.
결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자
고린도전서 6:19-20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존재이다.
✅ 우리의 몸과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혹시 지금 나의 몸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 "주님, 저의 몸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토비아(Tobias)와 토비트(Tobit)
구약성서 외경의《토비트서(Book of Tobit)》중의 인물. 토비트(Tobit)는 B.C. 8세기경 납탈리 지파의 히브리인으로 아시리아인들의 임금 살만에세르 시대에 니네베로 유배되었다. 이곳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귀양을 오는 곳이다.
성서에 토비트는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었으며, 이국으로 추방당해서도 신앙을 지킨 인물로 묘사되었다. 토비트는 지나가는 뜨거운 참새의 똥에 눈을 맞아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는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린다. 기도에 대한 답으로 하느님은 대천사 라파엘을 지상에 보낸다.
토비트는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고, 아들 토비아(Tobias)를 불러 예전에 메디아의 라게스(Ragae)에 사는 친척, 가브리의 아들 가바엘에게 맡겨 두었던 돈을 받아오도록 시킨다. 늙은 토비트는 아들의 여행길에 동행할 사람을 구해오도록 한다. 토비아는 대천사 라파엘을 만나는데, 라파엘은 자신이 천사임을 숨긴다. 토비트와 안나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둘은 길을 떠난다.
길을 가던 두 사람은 첫날밤 티그리스 강에서 야영을 하다가 토비트의 발을 삼키려고 하는 이상한 물고기를 만나게 된다. 라파엘은 그 물고기를 잡아 쓸개와 염통과 간을 빼내어 잘 간수하도록 한다. 이후 이 장기들은 악마를 퇴치하고 눈병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메디아에 들어선 이들은 토비트의 먼 친척인 라구엘(Raguel)의 집에 묵는다. 라구엘의 딸 사라(Sara)는 일곱 번 결혼 했지만, 결혼 첫날 밤 매번 악마가 남편을 죽였다. 라파엘은 토비아에게 사라와 결혼하라고 말한다. 토비아는 일말의 공포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라파엘이 시키는 대로 결혼한다. 결혼 첫날밤, 그가 물고기의 염통과 간을 태우자 신부를 괴롭히던 악마는 달아난다.
토비아와 사라는 니네베로 돌아오고, 토비아는 물고기에서 꺼낸 쓸개즙으로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시킨다. 토비트의 이야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한 자에게 하느님의 복이 내린다는 지혜 문학 전통을 본받은 대중적 설화이다.
서양미술에서는 토비아와 토비트의 이별, 토비아와 라파엘의 여행, 토비아의 결혼, 토비아의 귀환 등의 장면이 묘사되며, 그중에서도 개를 데리고 야외를 대천사 라파엘과 같이 걷는 여행 장면이 많이 그려졌다. 폴라이우올로의 《토비아와 라파엘》(1465)에서는 여장의 토비아가 손에 물고기를 들고, 라파엘의 손에 이끌려서 걸어간다. 또한 렘브란트는 친밀한 정서가 담긴 이야기를 좋아해, 생애에 6점의 토비트 그림을 제작했는데 그중에서도《토비트와 처 안나와 염소》(1626), 《아들 토비아에 치료받는 눈 먼 토비트》(1636), 라파엘이 최후에 모습을 나타내서 토비아의 곁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그린《토비트와 안나 곁에서 날아가는 천사 라파엘》(1637)이 유명하다.
토비아와 물고기, 4세기경, 유리, 코닝 유리박물관, 뉴욕
토비아와 천사, 1220, 석조, 샤르트르 대성당 북측문
Rembrandt (1606~1669), 눈먼 토비트 (detail), 1651, 에칭화
Rembrandt (1606~1669), 토비트와 처 안나와 염소, 1626,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토비아와 천사, 1465, 목판, 187 x 118 cm
페루지노, 대천사 라파엘과 어린 토비아, 1499, 목판에 유채, 126 x 58 cm
조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 토비아와 천사, 1615
Jan Steen(1625~1679), 사라와 토비아의 결혼, 1668-70
쿠에틴 마사이스, 아버지를 치료하는 토비아, 1550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아버지를 치료하는 토비아, 1635
Rembrandt (1606~1669), 토비아의 가족을 떠나는 대천사, 1637, 68 x 52 cm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맹인이 된 토비트
1. 에살하똔왕 때에 나는 집으로 돌아 와 내 아내 안나와 아들 토비아를 되찾게 되었다. 과우러절로부터 칠 주간 후에 거룩하게 지키는 우리의 명절 즉 오순절에 나를 위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져 나는 그 자리에 가 앉았다.
2. 내 앞에 있는 식탁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즐비하게 놓여져 았었다. 그 때에 나는 아들 토비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니느웨에 잡혀 온 우리 동포 중에 신심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가서 찾아 내어 이리로 데려 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와 함께 이 음식을 나누도록 하겠다. 네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마."
3. 토비아는 이 말을 듣고 우리 동포 중에 가난한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가 황급히 돌아 와서 "아버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아버지, 우리 동포 한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
4. 이 말을 듣고 나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벌떡 일어나 뛰쳐 나갔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 그 시체를 들어다 어떤 헛간에 감추어 두었다. 해가 진 후에 그 시체를 매장할 생각이었다.
5. 이렇게 시체를 감추어 둔 다음 집에 돌아 와서 몸을 깨끗이 씻고 슬픔에 싸인 채 음식을 먹었다.
6. 나는 예언자 아모스의 말이 생각나서 울었다. 일찌기 아모스는 베델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너희의 잔치는 변하여 울음바다가 되고
너희의 모든 노래는 변하여 통곡이 될 것이다."
7. 해가 진 후에 나는 나가서 무덤을 파고 그 시체를 묻었다.
8. 이웃 사람들은 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지난번에도 이런 일 때문에 사형감으로 수배되어 도망을 갔었는데 이제 또다시 죽은 사람을 묻어 주다니, 겁이고 뭐고 다 없어진 모양이지?"
9. 그 날 밤 나는 몸을 깨끗이 씻고 뜰 안으로 들어 가 담 옆에 누워서 잠을 잤다. 너무나도 더워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10. 내 옆에 있는 담 위에 참새들이 있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 때에 뜨거운 참새 똥이 바로 내 눈에 떨어져서 내 양쪽 눈에는 흰막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의사를 찾아 가 치료를 해 보았지만 약을 아무리 발라도 소용이 없었고 내 눈은 그 흰막 때문에 점점 시력이 약해져서 마침내는 시력을 왕전히 잃고 말았다. 이렇게 눈이 먼 채 사 년을 지냈다. 내 모든 친족이 나 때문에 슬퍼하였고 아히칼은 자기가 엘리마이스로 갈 때까지 이 년 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다.
11. 그 때에 내 아내 안나는 여자들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품을 팔았다.
12. 내 아내는 자기가 일하여 만든 ㅁ루건을 주인들에게 갖다 주고 삯을 받곤 하였다. 디스트로스월 즉 삼월 칠일 내 아내는 자기가 짠 베를 끊어 가지고 그 주인에게 갖다 주었다. 그랬더니 주인은 삯을 다 지불할 뿐 아니라 자기 염소 중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주면서 잡아 먹으라고 하였다.
13. 내 아내가 집으로 돌아 올 떄 그 새끼 염소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이 새끼염소는 어디서 난 거요? 혹 훔친 것은 아니오? 어서 그놈을 주인에게 돌려 주시오. 우리에게는 남의 것을 훔쳐먹을 권리가 조금도 없소."
14. 그러나 내 아내는 "이것은 품삭에다 덤으로 얹어 받은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나는 아내를 믿지 못하여 그 염소 새끼를 돌려 주라고 재촉하며 이 일로 인해서 아내를 향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내 아내는 "당신이 베푼 사선으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쌓은 덕행으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금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외경인 토비트 2장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토비트라는 사람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욕을 하고, 얼굴을 덮지 않고 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들이 담 위로 날아가다가 뜨거운 똥을 토비트의 눈에 누고 가버려서, 토비트가 양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토비트는 그런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이방 민족의 음식을 먹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런 음식을 거절했던 사람, 즉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절개를 지키고, 자기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신을
두려워하며 부유하게 살던 유대인 토비트가 동포의 장례를 도운 죄로 몰락한 후, 실명까지 당해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는 아내 안나가 어렵게 꾸려가는 중이었다.
나중에 토비트는 친구에게 빌려준 돈의 차용증을 찾게 되어, 아들인 토비아에게 이를
받아오도록 한다.
토비아는 이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파견한 대천사 라파엘의 도움으로 돈도 돌려받고, 아버지의 실명을 치유할
약도 얻게 되는데다, 악마에게 시달리던 여인을 구해내어 부유한 집안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결국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않고, 정직하게 살던 토비트는 자신의 재산을 회복하고, 다시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렘브란트가 정경도 아니고, 특히 네덜란드에서 믿는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는 토비트의 이야기를 기초로 왜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것도 오랫동안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가 있겠지만, 자료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토비트의 이야기를 많이 그렸다.
맨 위의 그림은 가난해진 토비트가 집에서 들려오는 양의 매에헤하는 소리에, 혹시 아내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양을 훔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는 장면이다. 실명을 하였기에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새끼양은 생계에 도움을 받기 위해 아내 안나가 맡아서 키우고 있던 것으로, 아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새끼양을 들고, 남편의 의심에 항의를 하고 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독립하여 자신의 공방을 연지 얼마되지 않는 1626년에 그른 그림이다. 20세의 파릇파릇한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으로, 당시대로 과정되어 보일 정도로 감정이 과하게 보이지만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냈다.
아래 두 그림은 가난해진 상황에서 집안에 차분히 앉아있는 토비트와 아내 안나를 그린 그림이다. 아래 세번째 그림은 명상중인 철학자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우지만, 오른쪽 아래 구석에 그려진 노파의 모습을 안나라고 생각하면 토비트의 그림이 된다.
맨 아래 그림은 아들이 아버지가 빌려준 돈을 받아오는 과정에서 안내인으로 변신해 아들을 도왔던 대천사 라파엘이 임무를 끝낸 후, 다시 천사로 변신하여 토비트의 가족을 떠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토비트와 아들 토비아는 놀라, 떠나는 대천사를 경배하고 있다. 시어머니 안나 곁에는 이번 퀘스트를 통해 새로 얻게된 토비아의 아내 사라도 함께 손을 모으고 있다. 이 그림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이 되어 있는데, 그래서인지 상징주의의 대가 오딜롱 르동이 젊은 시절, 이 그림 중 천사가 날고 있는 부분을 모사한 그림이 남아 있다 (이 그림은 현재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찌보면 네 점의 그림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처럼 스타일과 디테일이 다른 것은 대가인 렘브란트도 여러차례의 스타일 변화를 겪었음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세트의 그림들이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왕의 진미대신 채소만 먹고서도, 그 나라의 고기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몸을 유지했던 기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란,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목욕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죄와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켰던 정몽주나, 한 임금을 섬기기 위해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과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열녀나 충신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부제목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음 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터도, 곧 사람에 의해 닦여진 사상이나 업적에 의한 그 어떤 것들도, 참다운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소련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건설한 공산국가라고 했지요? 한 때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레닌의 동상은 이제 거의 모두 철거되어, 공원 한구석에 거적으로 덮여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제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나라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제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때가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은 자들은, 장차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며, 그 자신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그 어떤 다른 기초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리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만 세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요, 그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있는 돌로 지은 성전 한 곳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자신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거룩한 곳이어서, 이방인들은 일정한 한계를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제한적으로만 성전 접근을 허락하던 이방인들에게, 성전의 출입을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이 성전 그 자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전파하고 다니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절대로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흥분하며 티끌을 날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슨 근거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순간 성령께서 각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누구십니까?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시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도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것과 같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성도나 교회를 구약의 성전에 비유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에 비유한 것은, 교인들이 나뉘어 분쟁하는 것이 교회를 부패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중대한 죄악임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거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거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신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율법에 지시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성소를 더럽혔던 나납과 아비후를 즉시 불로 심판하셨으며,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했던 사울 왕과 웃시야 왕을 심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돌로 지어진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게조차, 엄중한 형벌을 내리도록 규정하신 하나님께서, 영적 성전인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을 멸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분쟁을 그치고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것이 곧 사도 바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간혹 자기의 이기적인 탐심을 위해, 교회를 나누고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도 자신을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각자는 스스로 죄와 불의를 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 가운데 두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중 첫 번째는 ‘순결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너무도 혼란한 이 시대에, 순수 복음 신앙을 간직한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성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에, 육체적으로도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정한 표어입니다.
벌써 수십 년 전에 현시대를 가리켜 3S 시대라고 했습니다. Science, Sports, Sex, 이 세 가지는 확실히 현대인의 우상이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문화와 성을 찬미하는, 소위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의 종교라고도 했습니다. 이 성의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패인’ 제단에서, 유명한 교육자들을 통하여 영화를 연구케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1500편의 영화를 검열한 후, 대부분의 영화 주제가 성문제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미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와 같은 음란한 영상물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잡지와 T. V의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화면, 컴퓨터의 사이버 포르노 등, 도처에서 성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엘톤 트루불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문명의 부패는 잘못된 성 모럴의 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시대 한 문화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성모랄 성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언제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음행이라는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와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사를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 문화와 오염된 섹스 문화는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썩고 부패한 성문화까지 정복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그들의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강대국은 부패한 성도덕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공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타락성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의 성적 타락상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향해 혼전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로 들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의 한 여대생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녀성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국내에서만도 하루 평균 500개씩의 음란 사이트가 생성되고 있다고 하며, 이 사이트들을 통해 배포되는 국내외 음란 동영상은, 하루에 1,000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음풍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청소년 문제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T. V 드라마는 불륜을 소재로 하여 안방을 침투하고, 간음을 조장하여 이 사회를 온통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불륜으로 깨어지고,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세태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러움을 간직해야 할 처녀들까지도, 야한 모습이나 옷차림을 즐기며 섹시하다면서, 옛날 같으면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전국의 모든 경치 좋은 곳에는 러브호텔이 즐비하고, 도시에도 모텔들이 교회당보다 더 많아 보이는 현실인가 하면, 사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남여가 합의해서 하는 성행위는 죄가 아니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폰팅이니 채팅이니 원조 교제니 해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치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새들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이 남편에서 저 남편으로 이 아내에게서 저 아내에게로 옮겨 다닙니다.
급기야는 ‘스와핑 클럽’이라는 것까지 생겨나서, 회원들은 모임이 있을 때 부부가 꼭 동반해서 가는데, 거기에 가서 남편과 아내를 바꾸어 쾌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온통 타락한 성문화의 범람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미 인류는 핵전쟁, 자원 고갈, 혹은 공해 같은 문제로 멸망 직전에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타락한 성도덕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듯 악한 시대에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실로 소중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도의 몸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을 모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불평으로 오염시키고,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고,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 하나가 곧 간음입니다. 성도덕이 참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 성 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 예술과 문학이 아무리 성을 예찬하고 미화시킬지라도, 인본주의자들이 아무리 간통죄의 폐지를 주장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간음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의 대부분이 은밀한 중에 행하여지기 때문에, 혹 사람의 정죄는 받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욥 31:11에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했고, 잠 6:27-29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고전 6: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고, 레 20: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간음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은 말하기를 “순간적인 쾌락을 얻고, 영원한 고통을 대신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교회와,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간직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의 몸(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사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그러나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는이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다른 이에게서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경 말씀 요약
서론
여러분, 오늘은 고린도전서 6:12-20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할 책임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 도시는 당시 문화적으로 혼돈과 부도덕이 만연한 곳이었으나, 사도 바울은 이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신앙 공동체로서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규범을 넘어,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1.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로워졌지만, 그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라는 표현은 당시 고린도 교회 일각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명목으로 방종과 음행을 허용하는 잘못된 신념을 지적한 것입니다.
자유는 책임과 절제를 수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건강을 위해 적절한 운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지나쳐 몸을 혹사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익은 신앙의 성숙과 영적 성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2. 음식과 배, 그리고 음란과 몸의 관계 (고린도전서 6:13)
13절에서 바울은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사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음식 섭취와 같은 육신의 행위들이 일시적인 것임을 상기시키며, 그것들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바울은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덧붙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저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사용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몸을 올바르게 돌보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몸 (고린도전서 6:14)
바울은 14절에서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중요한 근거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그의 부활에 참여하며, 이는 우리 몸이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몸이 일회용이 아닌, 하나님께서 영원한 계획 안에서 사용하실 중요한 도구임을 상기시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생활을 통해 의미를 얻게 됩니다.
4.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우리의 몸 (고린도전서 6:15-17)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서 17절까지, 바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는이라.’ 이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되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 몸이 창기의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경고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닌, 우리의 몸이 신성한 목적을 위한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우리의 입이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5.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바울은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다른 이에게서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음행의 죄가 다른 죄와 달리 우리의 몸 자체를 훼손하고,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심각한 죄임을 강조합니다.
음행을 피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음란물을 피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형태의 음행을 피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6:12-20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될 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자유와 유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인식하며, 우리의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기도문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사용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지만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유익을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몸을 음란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거룩하게 주를 위하여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몸이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몸을 돌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신 우리의 몸을 귀하게 여기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 에스겔 성전 (40장~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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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성전 (40장~48장)
40장. 앞으로 세워질 성전
1-4 새 성전 환상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찌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찌어다 하더라
1월 10일 - 출애굽한 날,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진 날, 이스라엘 무너진 후 에스겔 성전 환상을 보여준 날
극히 높은 산 - 하나님의 성산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 - 에스겔 성전
놋 같이 빛난 사람 - 놋(율법,여호와의 말씀,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말씀)로 믿음을 측량하는 하나님의 사자
삼줄 - 삼을 꼬아 만든 측량줄, 주로 긴 거리를 측량하는데 사용
척량하는 장대 - 길이를 재는데 사용하는 장대
< 에스겔 성전 >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몸 된 교회를 상징
2) 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지어져 가야 하는가
3) 교회인 우리가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5-16 장대의 길이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장이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담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척량하는 장대의 길이 = 6척
< 바깥 뜰 >
1) 7층 계단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
2)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3) 문지기 방
4) 마지막 때 마흔 두달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 - 교회가 양육되는 기간 -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그리스도인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1:1-2)
6-16 바깥 동향한 문
그가 동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통을 척량하니 장이 한 장대요 그 문 안통의 장도 한 장대며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장이 한 장대요 광이 한 장대요 매방 사이 벽이 오척이며 안 문통의 장이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 문이 있으며 그가 또 안 문의 현관을 척량하니 한 장대며 안 문의 현관을 또 척량하니 팔척이요 그 문벽은 이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좌편에 셋이 있고 우편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한 척수요 그 좌우편 벽도 다 한척수며 또 그 문통을 척량하니 광이 십척이요 장이 십 삼척이며 방 앞에 퇴가 있는데 이편 퇴도 일척이요 저편 퇴도 일척이며 그 방은 이편도 육척이요 저편도 육척이며 그가 그 문간을 척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광이 이십 오척인데 방 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그가 또 현관을 척량하니 광이 이십척이요 현관 사면에 뜰이 있으며 바깥 문통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오십척이며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고 그 창은 안 좌우편으로 벌여 있으며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17-19 박석 깔린 땅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 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삼십이며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광이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 뜰 바깥 문간 앞까지 척량하니 그 광이 일백척이며 동편과 북편이 일반이더라
박석 깔린 땅 위에 30개의 방
문간의 넓이 = 25척 길이 = 50척
문간 앞에서 안 뜰 바깥 문간 앞까지 거리 = 100척
세로 길이 500척 = 북문간 50척 + 문간거리 100척 + 안 북문간 50척 + 뜰 100척 + 안 남문간 50척 + 문간거리 100척 + 남문간 50척
가로 길이 500척 = 성전 300척 + 안 동문간 50척 + 문간거리 100척 + 동문간 50척
20-23 바깥 북향한 문간
그가 바깥 뜰 북향한 문간의 장광을 척량하니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문지기 방이 이편에도 셋이요 저편에도 셋이요 그 벽과 그 현관도 먼저 척량한 문간과 같으며 그 창과 현관의 장, 광과 종려나무가 다 동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안 뜰에도 북편 문간과 동편 문간과 마주 대한 문간들이 있는데 그가 이 문간에서 맞은편 문간까지 척량하니 일백척이더라
24-27 바깥 남향한 문간
그가 또 나를 이끌고 남으로 간즉 남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 벽과 현관을 척량하니 먼저 척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현관 좌우에 있는 창도 먼저 말한 창과 같더라 그 문간의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편, 저편 문 벽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안 뜰에도 남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가 남향한 그 문간에서 맞은편 문간까지 척량하니 일백척이더라
< 안 뜰 >
1) 8층 계단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완전히 거듭난 심령이 되었을 때 올라갈 수 있는 계단
2) 온전한 믿음이 아직 부족한 육적인 그리스도인
3) 제사장 방
28-47 안 뜰 남문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남문으로 말미암아 안 뜰에 들어가서 그 남문간을 척량하니 척수는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도 먼저 척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그 사면 현관의 장은 이십 오척이요 광은 오척이며 현관이 바깥 뜰로 향하였고 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2-34 안 뜰 동문
그가 나를 데리고 안 뜰 동편으로 가서 그 문간을 척량하니 척수는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먼저 척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그 현관이 바깥 뜰로 향하였고 그 이편, 저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5-37 안 뜰 북문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에 이르러 척량하니 척수는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다 그러하여 그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그 현관이 바깥 뜰로 향하였고 그 이편, 저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8-43 북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
그 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 그 문의 현관 이편에 상 둘이 있고 저편에 상 둘이 있으니 그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을 잡게 한 것이며 그 북문 바깥 곧 입구로 올라가는 곳 이편에 상 둘이 있고 문의 현관 저편에 상 둘이 있으니 문 곁 이편에 상이 넷이 있고 저편에 상이 넷이 있어 합이 여덟 상이라 그 위에서 희생을 잡는 소용이며 또 다듬은 돌로 만들어서 번제에 쓰는 상 넷이 있는데 각 장이 일척 반이요 광이 일척 반이요 고가 일척이라 번제의 희생을 잡을 때에 쓰는 기구가 그 위에 놓였으며 현관 안에는 길이가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면에 박혔으며 상들에는 희생의 고기가 있더라
번제물을 씻는 방 - 성령으로 씻기어 짐
손바닥 넓이 만한 갈고리가 사면에 박혔으며 - 십자가를 상징
44-47 안 뜰에 있는 방
안 문안 안 뜰에는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으로 향하였더라 그가 내게 이르되 남향한 이 방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쓸 것이요 북향한 방은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 하고 그가 또 그 뜰을 척량하니 장이 일백척이요 광이 일백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전 앞에 있더라
남향한 방 - 성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방
북향한 방 -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방
성전 안 뜰 장 = 100척, 광 = 100척
48-49 성전 현관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척량하니 광이 이편도 오척이요 저편도 오척이며 두께가 문 이편도 삼척이요 문 저편도 삼척이며 그 현관의 광은 이십척이요 장은 십 일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편에 있고 하나는 저편에 있더라
문 좌우 벽 - 광 5척, 두께 3척
성전 현관 - 광 20척, 장 11척
솔로몬 성전의 야긴과 보아스 기둥 처럼 에스겔 성전에도 기둥 두 개가 있다.
41장. 성소의 내부
< 성소 >
1) 솔로몬 성전과 달리 금향단, 떡상, 금촛대가 없음
2) 6척의 벽 - 가증한 것을 구별하는 벽, 예수 그리스도의 장막
3)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영적 그리스도인
4) 환란과 시련 속에서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낸 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7:14)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5)
< 지성소 >
1) 솔로몬 성전과 달리 언약궤가 없음
2)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7척의 벽
1-11 성소와 지성소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 그 문벽을 척량하니 이편 두께도 육척이요 저편 두께도 육척이라 두께가 이와 같으며 그 문통의 광이 십척이요 문통 이편 벽의 광이 오척이요 저편 벽의 광이 오척이며 그가 성소를 척량하니 그 장이 사십척이요 그 광이 이십척이며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통의 벽을 척량하니 두께가 이척이요 문통이 육척이요 문통의 벽의 광이 각기 칠척이며 그가 내전을 척량하니 장이 이십척이요 광이 이십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전의 벽을 척량하니 두께가 육척이며 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광이 각기 사척이며 골방은 삼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삼십이라 그 삼면 골방이 전 벽 밖으로 그 벽에 의지하였고 전 벽 속은 범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두루 있는 골방이 그 층이 높아갈수록 넓으므로 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갈수록 전에 가까와졌으나 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랫층에서 중층으로 윗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 내가 보니 전 삼면의 지대 곧 모든 골방 밑 지대의 고가 한 장대 곧 큰 자로 육척인데 전을 의지한 그 골방 바깥 벽 두께는 오척이요 그 외에 빈 터가 남았으며 전 골방 삼면에 광이 이십척 되는 뜰이 둘려 있으며 그 골방 문은 다 빈 터로 향하였는데 한 문은 북으로 향하였고 한 문은 남으로 향하였으며 그 둘려 있는 빈터의 광은 오척이더라
현관 - 장 11척, 광 20척
문통 - 광 10척
문통 양 쪽 문벽 - 두께 6척, 광 10척
성소 - 장 40척, 광 20척
지성소 - 장 20척, 광 20척
12-17 성전의 크기와 내부 장식
서편 뜰 뒤에 건물이 있는데 광이 칠십척이요 장이 구십척이며 그 사면 벽의 두께가 오척이더라 그가 전을 척량하니 장이 일백척이요 또 서편 뜰과 그 건물과 그 벽을 합하여 장이 일백척이요 전 전면의 광이 일백척이요 그 앞 동향한 뜰의 광도 그러하며 그가 뒷뜰 뒤에 있는 건물을 척량하니 그 좌우편 다락까지 일백척이더라 내전과 외전과 그 뜰의 현관과 문통 벽과 닫힌 창과 삼면에 둘려 있는 다락은 문통 안편에서부터 땅에서 창까지 널판으로 가리웠고 (창은 이미 닫히었더라) 문통 위와 내전과 외전의 사면 벽도 다 그러하니 곧 척량한 대소대로며
서편 뜰 뒤 건물 - 광 70척, 장 90척, 벽 두께 5척 - 가로 80척, 세로 100척
18-20 두 그룹과 종려나무
널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하나가 있으며 매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라 이편 종려나무를 향하였고 하나는 어린 사자의 얼굴이라 저편 종려나무를 향하였으며 온 전 사면이 다 그러하여 땅에서부터 문통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두 그룹 - 여호와의 거룩하심
종려나무 하나 - 의와 승리, 예수 그리스도
그룹에 두 얼굴 1)사람 - 지혜 2)어린 사자 - 용기, 사자이신 예수님의 권세를 입은 어린 사자
< 사람과 사자의 두 얼굴을 가진 두 그룹 사이의 종려나무 하나 >
1)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로 의와 승리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2) 두 그룹 사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냄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두 천사
4) 하나님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성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2:13)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4)
21-26 나무 제단
외전 문설주는 네모졌고 내전 전면에 있는 식양은 이러하니 곧 나무 제단의 고가 삼척이요 장이 이척이며 그 모퉁이와 옆과 면을 다 나무로 만들었더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앞의 상이라 하더라
나무 제단(여호와의 앞의 상) - 고 3척, 장 2척
< 나무 제단 - 향단,촛대,떡상>
1) 하나님 앞에 있는 십자가를 상징 - 중보하시는 예수님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2) 향단(기도) - 중보하시는 예수님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8)
3) 금촛대(하나님의 빛) - 빛이신 예수님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스가랴 4:12,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요한계시록 11:3-4)
4) 떡상(진설병) -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23-26 내전과 외전의 문
내전과 외전에 각기 문이 있는데 문마다 각기 두 문짝 곧 접치는 두 문짝이 있어 이 문에 두 짝이요 저 문에 두 짝이며 이 성전 문에 그룹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벽에 있는 것과 같고 현관 앞에는 나무 디딤판이 있으며 현관 좌우편에는 닫힌 창도 있고 종려나무도 새겼고 전의 골방과 디딤판도 그러하더라
내전과 외전(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문
42장. 성전 곁의 건물들
< 제사장 >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그리스도인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2) 거룩한 방에서 지성물(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3-54)
3) 안뜰에서 입을 수 있는 세마포 -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빛 가운데 행하는 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한계시록 3:18)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로새서 3:12)
4) 회개할 때 입는 굵은 베옷 -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영적인 눈을 가진 시대를 분별하는 예언자적인 거룩한 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요한계시록 11:3)
1-14 북편 거룩한 방들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편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그 두 방의 하나는 골방 앞 뜰을 향하였고 하나는 북편 건물을 향하였는데 그 방들의 자리의 장이 일백척이요 광이 오십척이며 그 문은 북을 향하였고 그 방 삼층에 툇마루들이 있는데 한 방의 툇마루는 이십척 되는 안 뜰과 마주 대하였고 한 방의 툇마루는 바깥 뜰 박석 깔린 곳과 마주 대하였으며 그 두 방 사이에 통한 길이 있어 광이 십척이요 장이 일백척이며 그 문들은 북을 향하였으며 그 상층의 방은 제일 좁으니 이는 툇마루들을 인하여 하층과 중층보다 상층이 더 줄어짐이라 그 방이 삼층이라도 뜰의 기둥 같은 기둥이 없으므로 그 상층이 하층과 중층보다 더욱 좁아짐이더라 그 한 방의 바깥 담 곧 뜰의 담과 마주 대한 담의 장이 오십척이니 바깥 뜰로 향한 방의 장이 오십척임이며 성전 앞을 향한 방은 일백척이며 이 방들 아래에 동편에서 들어가는 통행구가 있으니 곧 바깥 뜰에서 들어가는 통행구더라
10-12 남편 거룩한 방들
남편 골방 뜰 맞은편과 남편 건물 맞은편에도 방 둘이 있는데 그 두 방 사이에 길이 있고 그 방들의 모양은 북편 방 같고 그 장광도 같으며 그 출입구와 문도 그와 같으며 이 남편 방에 출입하는 문이 있는데 담 동편 길머리에 있더라
13-14 거룩한 방과 거룩한 예식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남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 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지성물 먹는 곳, 거룩한 음식을 저장하는 곳, 성소에서 수종드는 의복을 두는 곳
15-20 성전의 바깥 담
그가 안에 있는 전 척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향한 문 길로 나가서 사면 담을 척량하는데 그가 척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그 장대로 북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그 장대로 남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서편으로 돌이켜 그 장대로 척량하니 오백척이라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성전 장 = 500척, 광 = 500척
< 거룩한 방 >
1) 바깥 뜰 - 겉사람, 안 뜰 - 속사람
2) 두개의 방 - 북편 방, 남편 방
3) 옷을 갈아입고(정결함) 지성물(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방 - 성도의 마음과 생각
43장.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다
1-5 되돌아온 하나님의 영광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6-12 여호와의 영원히 거하실 처소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한 담 - 우리의 죄악
10-12 전의 법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인자야 너는 이 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 전의 법 >
1) 에스겔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라 -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 부끄러워하게 하심
2) 회개하거든 전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3)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다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13-17 제단과 번제단
제단의 척수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고가 일척이요 그 사면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며 그 가으로 둘린 턱의 광이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랫층의 고가 이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며 이 아랫층 면에서 이층의 고가 사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며 그 번제단 윗층의 고가 사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의 장이 십 이척이요 광이 십 이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아랫층의 장이 십 사척이요 광이 십 사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광이 반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을 향하게 할찌니라
제단 밑받침 : 고 - 1척, 가장자리 광 - 1척, 광 - 아랫층 16척 + 가장자리 2척 = 18척, 둘린 턱 - 1뼘
아랫층 : 고 - 2척, 가장자리 광 - 1척, 광 - 이층 14척 + 가장자리 양쪽 광 2척=16척
이층 : 고 - 4척, 가장자리 광 - 1척, 광 - 14척, 둘린 턱 - 반척
번제단 윗층 : 고 - 4척, 바닥 광 - 12척,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예수님의 십자가)
18-27 제단 봉헌의 규례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네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랫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 그 속죄 제물의 수송아지를 취하여 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찌며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수염소 하나로 속죄 제물을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케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케 함과 같이 하고 정결케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양 하나를 드리되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칠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 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하나와 떼 가운데서 수양 하나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이와 같이 칠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케 하며 봉헌할 것이요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 팔일에와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더라
제단을 만드는 날 제단과 제사장을 위한 정결의식(피 뿌리는 규례)을 행한다
제단 만드는 날 - 어린 수송아지 속죄제, 흠 없는 수염소 속죄제, 흠 없는 수송아지 번제, 흠 없는 수양 번제
7일간 - 염소 속죄제, 어린 수송아지 속죄제, 흠 없는 수양 속죄제
제 8일 - 백성들을 위한 번제와 감사제
< 제사 -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의식 >
1) 제단의 네 뿔과 모통이와 가장자리에 피를 발라 속죄 -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드러나는 산 제물
2) 소금 - 하나님의 소금 언약 - 변하지 않는 언약을 믿을 때 의의 병기가 될 수 있음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 4:6)
3) 7일간의 속죄제 - 완전수 7, 완전하게 자신을 내어드리는 진정한 속죄
4) 제8일 감사제 - 진정한 속죄를 통해 구원받았을 때 구속의 진정한 감사를 느낄 수 있다
44장. 성전 출입에 관한 규례
1-3 닫혀진 동편 출입문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 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하나님만이 출입하시는 그 동편 문은 단혀지고 왕만 안 쪽 현관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 동문 >
1) 동문 = 양문 = 희생제물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
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문이 동문,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며 예수님이 들어가신 이후 그 문은 닫힌다
3)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만 우리가 죄사함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의 아무런 희생 없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동문이 아닌 옆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7-9)
4-9 마음과 몸의 할례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고 너는 패역한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이방인의 할례 >
1) 그리스도의 할례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로새서 2:11-12)
2)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영적 부활, 거듭남을 의미한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에베소서 5:5)
10-14 축소된 레위인들의 직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수종들어 전문을 맡을 것이며 전에서 수종들어 백성의 번제의 희생과 및 다른 희생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15-27 사독계 제사장의 금기사항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 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 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케 할까 함이니라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아무 제사장이든지 안 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 들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족속의 처녀나 혹시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케 하며 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 가지 아니한 자매를 위하여는 더럽힐 수 있으며 이런 자는 스스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낼 것이요 성소에 수종들려하여 안 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속죄제를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양털 옷 - 제사장 직분을 나타내는 옷, 세상에서는 양털 옷
가는 베옷 - 거룩한 의의 옷, 세마포 옷, 성전 안뜰에서는 가는 베옷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7-8)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28-31 제사장들의 기업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나는 그 산업이 됨이니라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찌니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하여 드리는 물건을 다 그들에게 돌리며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45장. 하나님의 땅
1-8 거룩한 땅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장이 오백척이요 광이 오백척이니 네모 반듯하며 그 외에 사면 오십척으로 뜰이 되게 하되 이 척량한 중에서 장 이만 오천척과 광 일만척을 척량하고 그 가운데 성소를 둘찌니 지극히 거룩한 곳이요 그 땅의 거룩한 구역이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서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에게 돌려 그 집을 위하여 있는 곳이 되게 하며 성소를 위하여 있는 거룩한 곳이 되게 하고 또 장 이만 오천척과 광 일만척을 척량하여 전에서 수종드는 레위 사람에게 돌려 그들의 산업을 삼아 촌 이십을 세우게 하고 구별한 거룩한 구역 옆에 광 오천척과 장 이만 오천척을 척량하여 성읍의 기지를 삼아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돌리고 드린바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바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편으로 향하여 서편 국경까지와 동편으로 향하여 동편 국경까지니 그 장이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찌니라 이 땅으로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중에 기업을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나눠 줄찌니라
거룩한 땅 : 장 25,000척, 광 10,000척
성소 : 장 500척, 광 500척
뜰 : 성소 사면 50척
성읍의 기지 : 광 5,000척, 장 25,000척
왕의 땅을 주어 백성들을 압제하지 못하게 한다
< 거룩한 땅 >
1) 거룩한 곳, 거룩한 구역, 예물로 드려진 땅, 예수 그리스도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예물로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3) 세상과 구별된 땅, 성소가 세워지는 땅, 우리가 거룩한 땅이며 그 위에 성소가 세워질 때 우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
4) 거룩한 땅으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 -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2)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8-39)
9-12 이스라엘 치리자들의 법도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찌니 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히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호멜 십분지 일을 담게 하고 에바도 호멜 십분지 일을 담게 할 것이며 세겔은 이십 게라니 이십 세겔과 이십 오 세겔과 십 오 세겔로 너희 마네가 되게 하라
공평과 공의로 백성들을 다스려라
13-17 예물과 제사
너희의 마땅히 드릴 예물이 이러하니 밀 한 호멜에서는 에바 육분지 일을 드리고 보리 한 호멜에서도 에바 육분지 일을 드리며 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밧 십분지 일을 드릴찌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또 이스라엘 윤택한 초장의 떼 이백 마리에서는 한 어린 양을 드릴 것이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것들로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삼을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로 이스라엘 왕에게 드리고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찌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찌니라
18-25 절기들에 관한 규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랫층 네 모퉁이와 안 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그릇 범죄한 자와 부지중 범죄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전을 속죄할찌니라 정월 십 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그 날에 왕은 자기와 이 땅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또 절기 칠일 동안에는 그가 나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를 갖추되 곧 칠일 동안에 매일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이며 또 매일 수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칠월 십 오일 절기 칠일 동안에도 이대로 행하여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찌니라
46장. 안식일과 월삭
1-10 안식일과 월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 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육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에도 열고 왕은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과 흠 없는 수양 하나라 그 소제는 수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니라 월삭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 양 여섯과 수양 하나를 드리되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할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에도 밀가루 한 에바며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요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왕이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찌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찌며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찌니라
사람의 출입이 안되는 동문이 안식일과 월삭에는 열리고, 하나님, 왕(예수 그리스도), 백성(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백성은 북문으로 들어오면 남문으로, 남문으로 들어오면 북문으로 하여 앞으로 향한대로 나가게 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38-39)
11-15 기타 제사에 관한 규례
절기와 성회 때에 그 소제는 수송아지 하나에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만일 왕이 자원하여 번제를 갖추거나 혹 자원하여 감사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그를 위하여 동향한 문을 열고 그가 번제와 감사제를 안식일에 드림 같이 드리고 밖으로 나갈찌며 나간 후에 문을 닫을찌니라 아침마다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또 아침마다 그것과 함께 드릴 소제를 갖추되 곧 밀가루 에바 육분지 일과 기름 힌 삼분지 일을 섞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규례를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릴 소제라 이와 같이 아침마다 그 어린 양과 밀가루와 기름을 갖추어 항상 드리는 번제를 삼을찌니라
16-18 왕의 기업에 관한 규례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왕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왕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니라 왕은 백성의 기업을 취하여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찌니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백성으로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19-24 희생물을 삶는 부엌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곁 통행구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북향한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편에 한 처소가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 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나를 데리고 바깥 뜰로 나가서 나로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뜰 네 구석에 있는 그 뜰에 담이 둘렸으니 뜰의 장이 사십척이요 광이 삼십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한 척수며 그 작은 네 뜰 사면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면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전에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47장.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
1-2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성령을 의미한다
3-5 점점 깊어지는 성전 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1천척 - 발목 높이의 강
2천척 - 무릎 높이의 강
3천척 - 허리 높이의 강
4천척 -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
하나님께서 계신 동편을 향하여 나아가면 처음 발목 높이 정도의 성령으로 채워지다가 점점 높아져서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건너지 못할 만큼의 높이의 강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 또한 성령 하나님의 충만함이 발목 높이 만큼 얕아서 우리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건너지 못할 강 만큼 차 올라 우리의 뜻이 아닌 충만한 성령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6-12 생명을 소성케하는 성전 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13-20 새 땅의 지계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 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내가 옛적에 맹세하여 이 땅으로 너희 열조에게 주마 하였었나니 너희는 피차 없이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이 땅 지계는 이러하니라 북방은 대해에서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스닷 어귀까지니 곧 하맛과 브로다며 다메섹 지계와 하맛 지계 사이에 있는 시브라임과 하우란 지계 곁에 있는 하셀핫디곤이라 그 지계가 바닷가에서부터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요 그 지계가 또 극북방에 있는 하맛 지계에 미쳤나니 이는 그 북방이요 동방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강이니 북편 지계에서부터 동해까지 척량하라 이는 그 동방이요 남방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봇 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는 그 남방이요 서방은 대해라 남편 지계에서부터 맞은편 하맛 어귀까지 이르나니 이는 그 서방이니라
21-23 이방인에게도 기업
그런즉 너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대로 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라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곧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찌니 너희는 그 외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외인이 우거하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48장. 일곱 지파의 땅 분배
1-12 북쪽 땅의 분배
모든 지파의 이름대로 이 같을찌니라 극북에서부터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으로 하맛 지계에 미치는 땅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단의 분깃이요 단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아셀의 분깃이요 아셀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납달리의 분깃이요 납달리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므낫세의 분깃이요 므낫세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에브라임의 분깃이요 에브라임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르우벤의 분깃이요 르우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유다의 분깃이요 8-12 거룩한 땅(제사장의 땅)
유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광이 이만 오천척이요 장은 다른 분깃의 동편에서 서편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찌니 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이라 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북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서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동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남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이 땅으로 사독의 자손 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찌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 때에 레위 사람의 그릇한 것처럼 그릇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온 땅 중에서 예물로 드리는 땅 곧 레위 지계와 연접한 땅을 그들이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길찌니라
13-14 레위의 땅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레위 사람의 분깃을 주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으로 할찌니 이 구역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각기 일만척이라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나 여호와에게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니라
15-20 속된 땅(성읍의 기지)
이 이만 오천척 다음으로 광 오천척은 속된 땅으로 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하는 곳과 들을 삼되 성이 그 중앙에 있게 할찌니 그 척수는 북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남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동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며 그 성의 들은 북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남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동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서으로 이백 오십척이며 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장이 동으로 일만척이요 서으로 일만척이라 곧 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그 땅의 소산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찌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그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는 그 땅을 기경할찌니라 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도합은 장도 이만 오천척이요 광도 이만 오천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 반듯할 것이니라
21-22 왕의 땅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왕에게 돌릴찌니 곧 거룩히 구별할 땅의 동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과 서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이라 다른 분깃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왕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히 구별할 땅과 전의 성소가 그 중간에 있으리라 그런즉 왕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찌니라
23-29 남쪽 땅의 분배
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베냐민의 분깃이요 베냐민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시므온의 분깃이요 시므온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잇사갈의 분깃이요 잇사갈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스불론의 분깃이요 스불론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갓의 분깃이며 갓 지계 다음으로 남편 지계는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분깃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30-35 성읍의 출입구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라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삼마 -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 어느 때나 그곳에 함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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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
개역개정,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절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The distance all around will be 18,000 cubits. "And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Jehovah Samma)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 에스겔 48: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 (Jehovah-shammah)
에스겔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에스겔은 두 가지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헛된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에게 졌다는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에스겔서는 기록되었습니다.
헛된 소망을 버려라
먼저는 칠십 년이 차기까지는 절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이방신과 싸워서 진 것이 아니라 '너희 죄로 인해 징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온 이곳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여호와 삼마'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공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시며 그들을 안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삼마의 절정은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이니다.
성육신의 의미가 '장막을 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σκηνόω
스트롱번호 4637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
1. 살다, 거주하다, 계 13:6, 21:3, 요 1:14.
-
관련 성경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1. 몸. 2. 신체. 3. 시체
- 어원 / 4982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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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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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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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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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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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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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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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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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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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18:13).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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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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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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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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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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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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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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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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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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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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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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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우리는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공의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공의와 사랑은 양날선 검과 같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입니다.
여호와 삼마 (Jehovah Shammah)
- 여호와 삼마 뜻 :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 성경 말씀 : (에스겔 48: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기반 이야기 :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하나님의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 성전은 완전한 평화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고, 에스겔은 이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했습니다.
신앙적 교훈 :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
여호와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뒤에 나오는 삼마(Shammah)는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이 말이 나왔는지 매우 궁금하실 겁니다.
여호와 삼마의 출전을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서 48장 35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 에스겔서 48장 35절 -
딱 요 부분만 놓고 보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추측하기가 어렵지요.
먼저, 에스겔서는 구약성경의 3대 예언서 중에 하나로 예언자 에스겔의 예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네 가지의 환상을 보게 되고, 그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48장 부분은 4가지 중에서 마지막 예언이자, 마지막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로의 포로로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땅을 잃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포로로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에 하나님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잊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가톨릭으로는 에제키엘)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보내게 되지요.
그리고 그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데요. 48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을 회복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된 그곳의 명칭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의미의 여호와삼마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들에게 이 말씀은 매우 큰 위로가 됩니다.
잊고 살았던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고,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반성과 다시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겁니다.
세상에서 참 많은 시험을 당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외면하는 것 같기도 하지요.
에스겔서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은 늘 거기에 계신다고요.
이 메시지를 온전히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지만 성경은 늘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며
오늘은 하나님의 또 다른 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삼마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여호와 삼마 : 히브리어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
여호와 삼마는 히브리어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으로, 성경 에스겔서 48장 35절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원한 동행을 상징하며, 믿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제공합니다.여호와 삼마의 뜻과 배경
히브리어 어원과 의미
- "여호와 삼마"는 히브리어 יְהוָה שָׁמָּה(YHWH Shammah)에서 유래했습니다.
- 이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와 "그곳에 있다"는 의미의 "삼마"를 결합한 표현입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며, 신의 거룩함이 특정 장소에 머무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서의 맥락
- 에스겔서 48장 35절에서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으로 여호와 삼마가 선언됩니다.
-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재하시는 약속의 표시로 이해됩니다.
-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동행과 회복의 약속을 전달합니다.
현대적 적용
- 여호와 삼마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 이는 믿는 자의 삶과 공동체, 교회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 이 개념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가까움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 삼마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동행
-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 이는 인간의 외로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 어려움 속에서도 신의 사랑과 보살핌을 확신하게 합니다.
성막과 성전의 상징
- 구약 성경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 여호와 삼마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거룩함과 임재를 확증합니다.
-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음을 예표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적 의미
-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게 합니다.
-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합니다.
- 이는 신앙인들에게 위로와 힘을 제공합니다.
여호와 삼마와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의 상징
- 여호와 삼마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언급되며, 이는 이상적인 도시를 상징합니다.
- 이 도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평화가 충만한 장소로 묘사됩니다.
- 모든 고난과 슬픔이 끝나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합니다.
종말론적 의미
- 새 예루살렘과 함께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을 강조합니다.
- 이는 믿는 이들에게 궁극적인 희망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희망
- 여호와 삼마는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기대하도록 돕습니다.
- 이는 교회와 믿는 이들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명을 상기시킵니다.
-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여호와 삼마와 우리의 삶
삶 속에서 임재 체험하기
-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이 모든 순간에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 믿는 이는 기도와 예배, 봉사 등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이는 삶의 방향을 바로잡고, 신앙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고난 속의 소망
- 여호와 삼마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역경을 이겨낼 힘을 줍니다.
- 이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돕습니다.
공동체에서의 실천
- 신앙 공동체는 여호와 삼마의 의미를 중심으로 화합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공동체 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이는 교회와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결론
여호와 삼마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약속을 상징하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 개념은 개인과 공동체, 세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희망을 부여합니다.
믿는 이들은 여호와 삼마의
의미를 삶에 적용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 -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35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 주는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등, ‘여호와’라는 이름에 다른 단어를 붙여서 만든 이러한 합성어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여호와 삼마’는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백성들과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목격한 예루살렘성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가 되었듯이 성도님들의 모든 거처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 ‘여호와 삼마’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1. 여호와 삼마--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나타내는 축복의 말씀
‘여호와 삼마’라 할 때, ‘삼마’라는 말은 히브리어 ‘샴’에서 유래한 말로, ‘거기에, 그곳으로, 그때에’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별칭으로 사용된 ‘임마누엘’과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둘 다 성도들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유수로 인해 절망과 비탄으로 암흑의 나날을 보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선포함으로써 소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는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이방 땅에서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침략과 망국의 아픔을 씻어 주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세계와 역사의 창조주로, 통치자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말씀--그것이 바로 ‘여호와 삼마’였던 것입니다.
역사는 가고 오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늘 함께해 주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2. 여호와 삼마--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 존재의 명칭
‘여호와 삼마’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항상 구원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존재, 영원한 존재를 드러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노아 때 홍수 심판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으로 노아와 그 식구들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방주를 짓고, 방주 안에서 홍수 심판의 기간을 보낼 때도 ‘그곳에’ 하나님은 늘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 멸망하는 소돔, 고모라에서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신 것도 ‘여호와 삼마’의 역사였습니다. 멸망 당하는 여리고성의 함락에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정이 체험한 구원의 은총도 ‘여호와 삼마’의 축복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의 다른 모든 사람은 성이 이스라엘에게 함락당하여 죽임을 당하는데, 기생 라합은 ‘그곳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존재로 인해 유일하게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침노에서 다윗이 승리하였던 것도 여호와 삼마의 은혜였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나서는 골리앗에게 다윗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맞섰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믿음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해 주시는 것으로 보응하셨습니다. 바로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 불 속에서 체험한 것도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로 인해 그들을 집어넣은 병사들이 타죽을 정도로 뜨거운 풀무 불 속에서도 그들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풀무 불 속에서까지 그들과 함께해 주셨던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단 3:24-27).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뜨거운 풀무 불 속--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천국은 원치 않고 하나님이 계시는 지옥이라도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어느 목사님의 신앙고백처럼, 아무리 지옥 같은 풀무 불이라도 하나님께서 거하실 때 그곳이 바로 천국이요,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앞에 섰을 때,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앞에서 백성을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진 뒤로 옮겨갈 때 구름기둥도 함께하여, 밤새도록 애굽의 군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해주고 있는 현장--그곳에서도 하나님은 백성과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출 14:15-20).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요, 애굽의 군대가 있는 곳에는 캄캄한 흑암만 있었다는 것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거하는 곳에 함께하셔서 그들을 지켜 보호해 주고 계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여호와
삼마’의 축복은,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과 나라를 통해서도 역사하지만, 한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 개인의 건강과 형통도 여호와 삼마의 축복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사람이 어찌 건강할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국가적으로뿐만 아니라 성도 개개인 한 사람마다 ‘늘 계시고 한번 말씀하시면 변치
아니하는 영원불변하신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온전히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육 간에 형통의 복을
받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헬라어 성경 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둘은 종종 혼용해서 사용하는 어휘로 그 사이에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σώμα(소마)는 영혼 정신 등과 대비되는 신체를 일컬을 때 사용하며
σaρξ(사르크스)는 신체에서 뼈, 살, 피 등을 이야기할 때 ‘살’을 가리킵니
성경에서 몸을 지칭하는 단어는 '소마, 사륵스'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헬라어 '소마'(Soma)는 육체적 몸뿐만 아니라 인격적 구성체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사륵스'(Sarx)는 육체적 연약성, 영과 대립하는 죄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몸, 육체, 육신’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로 혼용되면서 몸을 지칭하는 ‘소마와 사륵스’의 각각 다른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느 날 주일, '소마'(Soma)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성경구절인 로마서 12장 1절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로마서 12장 1절에서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고 하는 '몸'은 우리의 영, 혼, 육을 모두 다 포함한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하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나의 모든 것이 몸 안에 들어있고, 몸으로 존재하며 소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표현할 때에도 몸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몸은 나의 육체, 육신, 껍데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나, 그 자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을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역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Soma)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몸이 악하고 정신, 혼, 영 보다 못한 것이라면 어찌 감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몸 역시 우리의 영혼육을 모두 포함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말한 것일테다.
나의 관심사와 시간, 나의 애정과, 나의 생각까지,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육체, 껍데기, 썩어 없어질 것, 정신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그렇게 경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직접 피조물을 만드셨고 보기에 좋다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물질들을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그것들을 감각하고 누리며 더욱 충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태초에 지으신 의미에서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로 되돌려야할 것이다(예술과 영혼 중).
하나님이 지으신 몸에 대한 원래의 선한 의미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비하할 수는 없다. 몸은 논의하기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대상이다.
9월 16일(화) 에스겔 40-4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척량하는 장대(40:3, 5)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He took me there, and I saw a man whose appearance was like bronze; he was standing in the gateway with a linen cord and a measuring rod in his hand.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장이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담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이 장대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새 성전을 측량하는 데 사용됩니다.
- 측량 도구 :척량하는 장대는 성경에서 사용된 측량 장대를 가리키며, 바벨론 포로 시기에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의 구조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상징적 의미 :
구조 및 흐름
- 40:1-4: 에스겔이 환상 중 성전으로 인도받아 측량에 참여함
- 40:5-16: 성전 외벽과 동쪽 문에 대한 상세한 치수
- 40:17-27: 바깥 뜰과 북쪽, 남쪽 문에 대한 설명
- 40:28-47: 안뜰의 남쪽, 동쪽, 북쪽 문과 주위 방들의 소개
- 40:48-49: 성전 현관에 대한 측량
전체적으로 성전의 구조와 방, 문, 뜰 등이 구체적으로 측량되고 소개되고 있으며, 질서와 거룩함이 강조됩니다.
상징적 의미
에스겔이 본 성전 환상은 단순한 건축 양식의 소개를 넘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된 관계,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새로운 질서와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이 환상적 묘사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백성들이 올바른 예배와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묵상포인트
-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세밀하게 측량하시고 질서 있게 세우시는 분임을 생각해 봅니다.
- 회복의 약속이 때로는 구체적인 현실, 구조, 질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나의 삶과 신앙이 어떠한 구조와 질서를 갖고 있는지 묵상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나 자신과 내 신앙생활,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점검해 보고, 부족하거나 무너진 부분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질서 안에서 신앙생활을 살아가고 있는지, 내 일상과 예배를 돌아봅니다.
(1) 이환상을 본 시기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다. 그때는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간지 25년째 되는 해였다. 어떤이들은 이때가 처음 포로로 잡혀간지 33년째라고 계산하고 있으나 본문에는 '성이 함락된후 십사년' 되는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땅으로 가시되. 선지자는 멸망당해 황폐해지고 버려진 예루살렘으로 이끌려갔다. 이것은 선지자에게 매우 비참하게 보였을 것이다.
(2)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상중에' 이스라엘땅으로 이끌려갔다(2절). 이번에는 예루살렘의 영광에 즐거운 광경을 보기위하여 간 것이다. 그는 '극히 높은 산위에' 세워졌다. 이는 흡사 모세가 비스가산 정상에 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두번째의 '약속의 땅'이 된 그땅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산꼭대기에서 그는 '성읍의 형상같은 것'을 보았는데 그성읍은 그대로 하나의 성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한 성읍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한 성전이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들과 같이 거하시며 하늘의 교회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때문이다.
(3) '모양이 놋같이 빛난사람 하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성읍의 자세한 부분은 보여주신다(3절). 그리스도를 통해야만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전의 온갖 유익과 특권을 누릴수 있게되는 것이다. '놋같이 빛나는' 그의 외모는 그가 광채되시는 것과 강한 분이시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4) 이성읍 혹은 성전의 규모는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 혹은 막대기로 척량되어졌다(3절).
(5) 선지자는 여호와께로부터 이계시를 받아 교회에 완전하고 완벽하게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는다(4절).
Ⅱ. 성전의 환상〔2〕 40:5-26
척량하는 자의 손에 들려있는 '척량하는 장대'에 대해서는 3절에 이미 언급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장대의 정확한 길이를 알게된다(5절). 그길이는 여섯척(규빗)이었는데 여기서 사용된 척은 보통척이 아니고 성전을 재는 척으로, 보통척보다 '손바닥 넓이'(약 4인치)가 더 긴 척이었다. 보통척은 18인치였는데 여기 쓰이는 척은 22인치였던 것이다(참조. 겔 43:13). 어떤학자들은 이장대가 여섯 보통척에다가 전체길이에 한손바닥 넓이만 더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전자가 더타당해 보인다. 이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1) 집바깥 사면에 담이 있었다. 그담은 온집에 빙둘러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 교회의 분리를 의미한다.
(2) 방이 붙어있는 여러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척량자는 '동향한 문'에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전의 가장 낮은 끝으로 들어갈때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문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성소는 서쪽끝에 있었다. 이제 이문에 대한 설명중 다음사항들을 주목하도록 하자.
① 그는 '층계를 올라갔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려 할때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4:1절의 부름에서도 이와같은 말씀을 하셨다.
② 그문에 붙어있는 방들은 가로 세로가 각6척씩 되는 작은 방들이었다(7절). 이방들은 그 전에서 제사드리는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거하는 방이었다.
③ 이방들은 네모반듯하고 한쪽변의 길이가 각각 한장대씩으로, 이는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사이에 평등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④ 이방들은 매우 많았다. 이는 '내아버지 집에 거할곳이 많도다'(요 14:2)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집과 땅위에 있는 집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떤이들은 이 작은방들이, 거대한 교회 곧 전우주적인 교회의 일부분을 이루는, 성도들의 특별한 모임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⑤ 그는 현관을 척량하였다(14절).
⑥ 이현관은 60척이었다. 어떤이들은 고레스왕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에서 전의 높이를 60척, 즉 약30야드 남짓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을때 이것이 문자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스 6:3).
⑦ 작은방들과 문과 현관에는 창이 있었고(즉 아래에 있는 회랑을 향한 창문이었다) 그둘레에는 창이 있었다(16절).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빛이 교회를 환히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그 작은방에도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었다. 그러나 그창문들은 좁은 창문이었다. 지상의 교회가 발견하는 사실들은 나중에 다음세상에서 볼수 있는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좁은것에 불과하다.
⑧ 여러뜰에 대하여 설명되었다. 가장 외곽의 것으로부터 그안쪽의 뜰과 오로지 제사장만이 드나들수 있는 가장 안쪽의 뜰까지 설명되었다. 이 뜰들은 각기 현관 혹은 둘레에 회랑이 있었다. 이는 성전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바람이나 기타 나쁜 일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⑨ 문기둥 위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다(16절). 이는 하나님의 전 뜰에서 '의인이 종려나무같이 번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시 92:12). 이들은 마치 종려나무처럼, 고난의 짐에 눌리면 눌릴수록 더욱 단단하게 자랄 것이다.
⑩ 뜰안의 박석깔린 땅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17,18절). 이것은 반석으로 포장된 것을 의미하는데 그색깔은 불타는 석탄같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때 이세상의 가장 빛나는 영광이 우리 발밑에 깔리기 때문이다.
2) 북향한 문간(20절)과 남향한 문간(24절)은 '먼저 척량한 동향한 문'과 같았다(21절). 이성전에는 부와 지혜로 유명한 동방자손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동향한 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쪽과 남쪽을 향한 문들도 있었는데 이는 가난하고 덜 진보한 민족들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새예루살렘에는 열두문이 있어서 동서남북 각방향으로 세개씩 향하고 있다(계 21:13). 이는 '동서로부터 많은사람이 이르러' 그곳에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마8:11).
Ⅲ. 성전의 환상〔3〕 40:27-38
안뜰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다. 안뜰의 척량은 남쪽문에서부터 시작하여(27절) 동쪽문을 지나(32절), 북쪽문으로(37절) 진행되어 간다.
(1) 안뜰로 들어가는 이문들은 바깥뜰에 있는 문들과 꼭 같다. 초신자였던 사람이 성숙한 기독교인이 된다하더라도 은혜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다.
(2) 바깥뜰로 들어서는 각문간에는 일곱층계가 있었으나, 안뜰로 들어서는 각문간에는 여덟층계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점점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이세상과 그중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욱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점을 특별히 나타내 준다(31,34,37절). 바깥뜰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일곱층계를 더올라가야 하지만 안뜰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그들보다도 여덟층계를 더올라가야만 한다.
Ⅳ. 성전의 환상〔4〕 40:39-49
(1) 안뜰로 들어가는 문현관에 있는 상들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본문에는 '여덟상'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그위에서 희생을 잡는 소용'으로 쓰이는 것들이었다(41절). 그상들은 복음시대에 하나님의 전에 드려져야할 수많은 영적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상들은 제사에 쓰일 고기들을 잡는 곳이었으며(43절) 또한 번제의 희생을 씻는 곳이었다(38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가기전에 손과 마음 즉 영적 희생물들을 씻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미 언급된 작은방들의 용도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1) 그중 몇개는 노래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44절).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복음시대에 예배를 드릴때도 여전히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노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나머지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제사장이라함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들' 즉 성전을 깨끗이 하고 유지보존하는 임무를 띤 제사장들과(45절),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46절).
(3) 제사장들만 들어갈수 있는 안뜰은 가로와 세로가 각 백척씩이었다(47절). '절앞에 있는' 제단은 안뜰의 중앙에 놓여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시며 희생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때면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그 전에 있는 현관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현관은 우리에게, 하나님전에 나아갈때 성급하고 무모하게 서두르지 말것을 가르치고 있다. 오직 엄숙하고 장중하게 바깥뜰을 지나 안뜰을 통과한후 현관을 거쳐 나아가야만 한다.
# 핵심
40:1-49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전회복과 직결시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 묵상
선지자의 포로와 예루살렘 함락시기 ( 40:1 )
본문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사로잡힌지 25년이 경과했으며, 또한 예루살렘성읍이 함락된때로부터는 14년이 지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은지 20년이 경과한 때였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유다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그시기와 연대들을 첨부하는 것은, 자신의 소명이나 예언내용이 분명히 역사적 사실가운데서 이루어진 진실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 40:2 )
꿈이나 황홀경 등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신비한 것을 보는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에스겔 등 많은 선지자들이 이상을 통해서 민족의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수 있었습니다.
성전척량에 대한 이상 ( 40:5-14 )
에스겔은 이상중에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전을 척량하는 한사람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천사가 이상중에 성전을 척량한 것은, 에스겔에게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대신 지을 새성전의 크기를 알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환상은 결국 파괴된 성전의 복구를 암시하며, 나아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해줍니다.
성전의 각 문벽위에 새긴 종려나무 ( 40:16 )
종려나무는 신성함과 생명력 그리고 영광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성전조각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려나무(Palm tree)는 대추가 열리는 대추야자나무로 아라비아 사람들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무였고, 더욱이 용도가 다양했기때문에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나무는 일반적으로 번영(시92:12)과 아름다움(아7:7,`8)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유대사람들은 성전과 회당, 그리고 돌에 이 종려나무를 새겼던 것입니다. 또한 이나무는 승리의 상징으로써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때 사람들이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호산나를 외치기도 했습니다(요12:13).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층계 ( 40:31 )
이는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돌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외부에서 성전의 바깥뜰로 들어오는데 일곱계단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안뜰로 올라오는데 여덟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의 수를 합하면 15입니다. 이는 성전에 올라가는 시편의 숫자와 일치합니다(시120-134편). 그래서 층계마다 한편의 시를 노래하며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앞으로 나아가는 자의 모습은 이러해야 합니다. 실로 사람의 근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만을 즐겁게 해드리는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10:31).
속건제 ( 40:39 )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을 범하거나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을때 이를 용서받기 위한 것으로써,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외에 벌금을 물고 또 손해배상을 해야하며 제사장에게 배상액의 2할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속건제는 범죄한 것에 대해서 사함받기 위한 제사라는 점에서 속죄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몸을 드려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씻김받을 필요없는 순결한 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인해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새성전의 제사장의 자격 ( 40:46 )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사람으로는 레위의 후손중 사독의 자손들이 선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반역에 가담한 아비아달 대신에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삼은후부터(왕상1:8; 2:26,35) 마카비시대까지 사독의 후손이 성전을 관할하는 대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역시 사독후손을 유일한 정통제사장 가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오늘날의 성도는 각각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몸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고전3:16).
# 해설
새성전 척량 ( 40 )
에스겔 1장은 서론이며 2-32장은 범죄한 이스라엘과 이방의 멸망을, 33-39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40-48장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누리게될 거룩한 삶을 예언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40-48장 부분을 여는 첫장으로서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중심이 되는 성전의 크기와 의미를 척량이라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1. 바깥뜰과 문의 척량
1) 동문부터의 척량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때로부터 이십오년이 지난해 정월십일에 에스겔은 새성전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상가운데 천사가 새성전을 척량하였는데, 그천사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네 문가운데 동문부터 척량하였습니다. 동문은 태양이 뜨는곳에 위치한 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출입하는 거룩한 문입니다 (참조, 겔9:19;겔43:4). 또한 그문은 지성소로 곧장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는 성전 바깥문중 동문을 가장먼저 척량했습니다.
a.동문으로 나가심(겔10:19)
b.동문으로 들어오심(겔43:4)
2) 일곱계단
동문 척량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나머지 다른 세문인 북문, 남문, 서문을 척량할때에 그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이며 거룩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칠일동안 이세계를 창조하신 것에서 그수의 의미가 드러납니다(참조, 창2:1-3). 이렇게 볼때 이계단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자가 하나님앞에 거룩하고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해줍니다.
a.제칠일의 거룩성(출20:11)
b.일곱교회(계1:20)
3) 종려나무 장식
바깥뜰 문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세개씩의 방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이 있었습니다. 그현관 문벽위에는 종려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생명력과 풍요, 그리고 영광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이것으로 볼때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 이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자가 종려나무와 같이 자신의 모든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a.종려나무 형상(왕상6:29)
b.종려나무(요12:13)
2. 안뜰과 문의 척량
1) 여덟계단
바깥뜰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계단을 올라가야 했으나 안뜰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덟계단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것은 지성소에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에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자는 더욱더 거룩해지고 온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편 그 두계단을 합하면 15가 되는데, 성전에 올라가면서 읊는 시의 편수도 15입니다(참조,시120-시134). 이로 보건대 이계단은 그편수와 맞춘 것으로 보여지며,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줍니다.
a.온전하라(마5:48)
b.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2) 여덟제단 상
성전 안뜰문에 들어가면 여덟개의 제단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성전과 다른 형태입니다. 솔로몬성전에는 이처럼 많은 제단상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옛성전에 비해 새성전에 이처럼 많은 제단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제사가 많은것과 드려지는 영적제물도 많을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줍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나 하나님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릴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a.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4:24)
b.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음(히10:19)
3) 수직하는 자들의 방
성전안에는 성전을 수직하는 자들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장소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관리되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성도된 우리의 몸입니다(참조, 고전6:19). 따라서 우리는 우리몸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관리를 위해서는 항상 깨어 우리자신들이 죄의 길로 빠지지않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a.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림(롬12:1)
b.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고후6:16)
3. 새성전 척량의 목적
1) 거룩성 회복
하나님께서 새성전을 척량하는 형식으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목적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그가운데 첫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하여금 거룩성을 회복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전을 세밀히 보여주심으로 자기백성들이 그성전과 같이 거룩히 되기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a.진리로 거룩하게 하심(요17:19)
b.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엡1:4)
2) 제사회복
성전은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올바른관계를 유지하도록 하기위해 세워졌습니다. 옛성전에서는 그역할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성전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시는 것은 옛성전에서 이루지못한 그역할을 바로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바른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시려는 것입니다.
a.열납된 아벨의 제사(창4:4)
b.참으로 드리는 예배(요4:23)
3) 하나님의 백성됨의 회복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회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은 하나님되시고 백성들은 백성되게 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그중심 무대인 동시에 핵심 무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됨의 관계속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주는 것입니다.
a.아들됨(롬8:14)
b.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백성들(계21:3)
결론
에스겔 40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1. 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회복 계획을 신뢰하며 소망을 품고 있는가?
2. 내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공간이 되고 있는가?
3. 나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4.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에스겔 40장은 오랜 심판의 메시지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희망의 서곡으로,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새
성전의 외부 구조를 상세하게 측량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놋같이 빛나는 사람'의 인도를 따라 삼줄과 측량 장대로 정밀하게
측정되는 성전의 담, 문들, 뜰, 방들의 모습은 단순한 건축 설계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 회복과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계획을 보여줍니다.
이 '측량' 행위는 파괴된 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소유권 확증, 그리고 거룩한 공간의
창조를 상징하며, 절망에 빠진 포로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소망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성전
구조에 나타난 질서와 대칭, 그리고 거룩함의 단계들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분께 나아가는 길의 경외로움을 강조합니다.
결국 에스겔
40장의 새 성전 환상은 폐허 위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 중심의 회복을 꿈꾸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며 거룩하고 질서 있는 삶을 추구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 우리 삶의 '새 성전'을 세우다
에스겔 40장의 새 성전 환상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영감과 도전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폐허' 위에 어떤 '새 성전'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개인적인 실패와 좌절, 관계의
깨어짐, 혹은 공동체의 위기와 상실감 등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형태의 '폐허'를 경험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과 회복을 계획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꿈꾸고, 그 중심에
무엇을 두려 하느냐입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새
성전'은 물리적인 건물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측량'의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삶의 기준과 질서 회복 :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건강한 영적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내 삶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측량'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신뢰 :
때로는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획하고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새 성전의 정밀한 측량은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거룩함과 구별됨의 추구 :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전 담'을 세워 부정한 것들을 막아내야 합니다.
철학적 존재론적 상징 해석 : 측량 행위와 새 성전의 의미
에스겔 40장의 상세한 성전 측량은 단순한 건축 지침을 넘어, 깊은 신학적, 철학적,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측량'이라는 행위 자체의 상징성
고대 근동에서 측량은 종종 창조, 소유권
주장, 질서 부여, 회복과 재건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놋같이 빛나는 사람'이 삼줄과 장대로 성전을 측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공간을 당신의 소유로 확정하시고, 이전의 혼돈과 파괴를 넘어 새로운 질서와 거룩함을 부여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혼돈 가운데 질서를 창조하시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이 측량 행위는 포로 생활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하나님의 정확하고 변함없는
약속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측량은 무한하고 파악 불가능해 보이는 신적 영역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만남의 가능성을 여는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둘째, 새 성전의 구조가 강조하는 '거룩함과 구별됨'
성전은 외부 담으로 둘러싸여
세상과 구별되며, 바깥뜰과 안뜰, 그리고 지성소로 이어지는 다층적인 구조는 거룩함의 등급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문마다
있는 문지기 방들은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을 통제하고 부정한 것의 유입을 막는 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정결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이
종교의 본질을 '성(sacred)'과 '속(profane)'의 구별에서 찾았던 것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새 성전은 바로 이
'성스러움'이 회복된 공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특별히 임재하시는 장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셋째, 성전 건축에 나타난 '질서와 대칭'
동쪽, 북쪽, 남쪽 문들이 거의 동일한
구조와 크기를 가지며, 뜰의 크기가 정확하게 측정되는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내재된 질서와 조화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수학적
정밀함과 대칭성은 혼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졌던 이스라엘 사회에 새로운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과 통제 하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주(코스모스)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로고스(이성,
질서)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새 성전은 바로 이 신적 질서가 회복된 이상적인 공간을 상징합니다.
넷째, '놋같이 빛나는 사람'과 그의 역할
신비로운 존재는 천사 또는 특별한 신적
사자로 해석되며, 그의 빛나는 모습은 신적 영역에서 왔음을 암시합니다.
그가 에스겔을 인도하며 성전을 측량하고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고 이해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에스겔은 이 안내자를 통해 새
성전의 비전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 중재자를 통해 전달되는
방식을 보여주며, 그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에스겔 40장, 폐허 위에 새 성전이 열리다: 희망의 측량과 회복의 서곡
오랜 심판과 멸망의 예언 끝에, 에스겔서는 40장에 이르러 마침내 새로운 희망의 서광을 비춥니다. 이 장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파괴된 성전을 배경으로, 선지자 에스겔에게 계시된 장엄하고도 정교한 새 성전의 환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놋같이 빛나는 안내자와 삼나무 측정기를 통해 하나하나 측량되는 성전의 문들과 담, 그리고 각종 방들의 모습은 단순한 건축 설계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 회복과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에 대한 갈망과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시작의 환상 속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탐구해 보겠습니다.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40장의 새 성전 환상은 기원전 573년,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지 25년째 되는 해,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14년째 되는 해의 정월 초열흘날에 주어졌습니다. 오랜 포로 생활과 조국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서, 이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전 장들(1-39장)이 주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멸망의 불가피성을 다루었다면, 40장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부분(40-48장)은 회복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특히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새 성전의 환상은 단순한 건물 재건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언약의 갱신, 그리고 국가적·영적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포로민들은 모든 것을 잃고 이방 땅에서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새 성전의 비전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과 회복을 계획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된 회복은 외적인 조건의 변화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재건에서 비롯됨을 깨닫게 합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새 성전의 외부 구조 측량
에스겔 40장은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이스라엘 땅의 매우 높은 산 위에 이르러, 그곳에서 남쪽으로 성읍 형상 같은 것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겔 40:1-2). 그곳에서 그는 "모양이 놋 같이 빛나는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겔 40:3) 그를 만납니다. 이 신비로운 안내자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겔 40:4)라고 말하며, 앞으로 보게 될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이후 40장 전체는 이 '놋같이 빛나는 사람'이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며 새 성전의 외부 구조, 특히 동쪽, 북쪽, 남쪽을 향한 바깥뜰 문들과 안뜰 문들, 그리고 그 주변의 담과 방들을 매우 상세하게 측량하고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측량은 '장대' (한 장대는 여섯 큰 규빗, 한 큰 규빗은 보통 규빗에 한 손바닥 너비를 더한 것)와 '규빗'을 단위로 하여 매우 정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주요 측량 대상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문은 유사한 구조를 가짐):
-
성전 담 (5절): 성전 전체를 둘러싼 담의 두께와 높이를 측량합니다.
- 두께와 높이가 각각 한 장대 (여섯 규빗).
-
동쪽을 향한 바깥뜰 문 (6-16절):
- 문 통로, 문지기 방들 (양쪽에 각각 세 개씩), 현관, 문 벽 등이 상세히 측량됨.
- 문지기 방의 크기, 방 사이 벽의 두께, 문 통로의 너비와 길이, 현관의 크기 등이 기록됨.
- 문 벽에는 종려나무 조각이 새겨져 있음.
-
바깥뜰 (17-19절):
- 동문으로 들어가면 바깥뜰이 나오고, 박석 깔린 땅과 그 가장자리에 있는 방 서른 개가 묘사됨.
- 아래 문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 앞까지의 너비가 백 규빗임.
-
북쪽을 향한 바깥뜰 문 (20-23절):
- 동쪽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이 문에서 안뜰 문까지의 거리도 백 규빗임.
-
남쪽을 향한 바깥뜰 문 (24-27절):
- 동쪽, 북쪽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이 문에서 안뜰 문까지의 거리도 백 규빗임.
-
남쪽을 향한 안뜰 문 (28-31절):
- 바깥뜰 문들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며, 문지기 방, 벽, 현관 등이 측량됨.
- 이 문으로 들어가면 안뜰이 나옴.
-
동쪽을 향한 안뜰 문 (32-34절):
- 남쪽 안뜰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북쪽을 향한 안뜰 문 (35-37절):
- 남쪽, 동쪽 안뜰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제물 준비를 위한 방들과 상들 (38-43절):
- 안뜰 문 현관 곁에 번제물을 씻는 방과 번제물, 속죄제물, 속건제물을 잡는 상들이 있음.
- 상들의 재료(다듬은 돌)와 크기, 용도가 설명됨.
-
제사장들의 방들 (44-47절):
- 안뜰에 노래하는 제사장들의 방과 성전 직무를 맡은 제사장들의 방이 있음.
-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들로 언급됨.
- 안뜰의 크기가 길이와 너비 각각 백 규빗인 네모반듯한 모양이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음.
-
성전 현관 (48-49절):
- 마지막으로 성전 본체의 현관이 측량됨. 문 벽, 문의 너비, 현관의 너비와 길이가 기록됨.
- 현관으로 올라가는 층계와 문 곁의 기둥 둘이 언급됨.
이처럼 에스겔 40장은 매우 구체적이고 반복적인 측량 기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새 성전의 질서와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9월 15일(월) 에스겔 37-3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른 뼈들아(37:4)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se bones and say to them, 'Dry bones, hear the word of the LORD!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ㅗ이 모든 뼈에게 代言(대언)하여 이르기를 ㅛ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ㅗ
겔 6: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ㅛ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마른 뼈가 살아나려면(에스겔 37:1-10)
때는 기원전 600년경입니다.
유대나라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전의 보물들과 왕궁의 보물들은 죄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젊은이와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성전도 불태워지고 군대는 해산되고 모든 기술자와 쓸모있는 사람은 다 잡아가고 유대땅에는 아주 힘없는 이, 늙은이, 장애가 있는 이들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조국의 현실을 눈으로 목도하며 스물 다섯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제는 다 끝났다. 내 꿈도 사라지고 조국의 미래도 없다.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그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것일까?
그분은 과연 전능하신가? 그분은 우리가 바벨론에서 겪는 수치와 절망을 아실까?
정말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까? '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절망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엄청난 비젼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이 본 비젼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겔 37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이 절망의 밤에 본 비젼을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비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준 것을 통해서 말슴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시간 에스겔이 본 것을 중심으로 하나씩 살펴보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아 보겠습니다.
1.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있습니다.(1-2)
에스겔 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사람의 죽은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인도하여 뼈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골짜기 지면에 뼈들이 심히 많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뼈가 사방에 널려 있고 골짜기에 가득찼고 아주 말랐습니다.
이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에스겔 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스라엘은 죽었습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죽은 것입니다.
왕도 없고, 군대도 없고, 인물도 없고, 젊은이도 없고, 주권도 없고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이 보물들을 다 빠앗아가고 사람들은 잡아가고 가져가지 못할 것은 불태워버리고 농사지을 땅도 돌을 던져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나라의 운명이 끝났습니다.
마른 뼈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운명은 나라가 그렇게 멸망하기 훨씬 전에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왕과 지도자들과 백성이 하나같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고 부도덕하게 살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수없이 보내어 돌이키도록 경고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른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그들 마음대로 부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대 이미 그들은 죽어 썩어서 말라버린 뼈와같이 생명을 잃어버린 모습이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나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가정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마른 뼈와 흡사하지는 않습니까? 생명이 사라져 생동감있게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력이 없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져서 무감각하고 무기력하며 말라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자들이 온 세상에 심히 많고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아주 말라 있습니다. 죽은 상태로 날마다 말라가고 있습니다. 아무 소망도 되는대로 삽니다. 삶의 목적도 없이, 생명력을 상실한채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숨이 붙어 있어도 영적으로 마른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영생이 없기에 잠시 잠간 있다가 죽음앞에 무릎꿇고 마른 뼈가 되어 모두에게 다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말도 하고, 움직이고, 자식도 낳고 할 것 다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을 떠난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채 육적인 생명만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른 뼈 같은 존재들입니다. 마른 뼈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죽어 마른 뼈를 보여 주신 것은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시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마른 뼈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고 회복하시려는 놀라운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같이 소망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회복시키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뼈같이 생명이 없이 사라져가는 인생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불어 넣어 다시 살리시려고 하십니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하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마른 뼈들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3-5)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도무지 살 것 같지 않는 죽어서 오래 된 아주 메마른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질문하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못 삽니다. 하자니 믿음없는 것 같고 삽니다. 삽니다. 하자니 도무지 황당하고 불가능하게 여겨져서 애매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려고 하면 막막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해서 그 말을 알아듣고 믿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같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갈등이 있습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포기하고 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도 살리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살리십니까?
@ 하나님의 마른 뼈를 말씀으로 살립니다.(4)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나고 뼈가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그 뼈에 힘줄이 생겼습니다. 살이 차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위에 피부가 덮여집니다. 사람의 형태가 제대로 갖추어졌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죽어서 사흘이나 되어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 무덤 앞에 가서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 즉시 살아서 나왔습니다. 죽어서 메고 가는 관에다 손을 대고 청년아 일어 나라고 말씀하시자 죽어서 관에 메어 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즉시 살아 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습니다. 전혀 죽은 자처럼 듣지 못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슴으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말슴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말씀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오늘날도 절망중에 있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다시 살아납니다. 마귀같이 무서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저는 사실 이런 기적을 주일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날은 완전히 공동묘지에서 설교하는 느낌이 듭니다. 설교가 시작과 함께 졸기 시작하는 교인들이 여럿 눈에 들어옵니다. 죄송하지만 마른뼈를 앞에 놓고 설교하는 기분이예요. 그래도 사명이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니 전할 수 밖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 선포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숙인 머리가 들립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아옵니다.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하고 어떤 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입에서 아멘 하는 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집니다.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 올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걸어 나가며 제 손을 꼭 잡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걸음걸이에는 새 힘이 담겨 있습니다. 입술에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기적은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슴을 대언 즉 대신 선포하면 여러분도 그런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른 뼈처럼 보여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포하십시다. 도무지 알아 들을 것 같지 않게 느껴져도 내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영적으로 마른 뼈같이 무가치한 존재도 유익한 사람이 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3. 하나님은 마른 뼈를 성령으로 살립니다(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 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5하)
생기란 말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이 말은 영, 바람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생기가 들어가서라는 말씀은 성령이 들어가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히 마른 뼈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 가면 살아 납니다.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의 생기가 들어 갈 때 살아 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이 같이 할 때 역사가 일어 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살릴 뿐 아니라 성령으로 살리십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에 온갖 놀라운 능력이 역사합니다. 병든 자가 치유받습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 귀신이 떠나갑니다. 알콜 중독, 마약 중독, 게임 중독 온갖 악한 영의 역사가 다 떠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가 사망당한 자에게 불어 지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자들을 살리려면 사망에서 생기가 불어 오도록 기도하여야 하고 생기인 하나님의 성령께서 들어 가시기만 하면 살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난 달 침례를 받고 몇 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중에 한 자매가 새신자인데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40일 새벽기도를 작정을 했습니다. 새벽기도 시작한지 5일만에 혼자서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붙잡으시니까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감사가 충만해졌습니다.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같으면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부부간에 싸우고 원망했을텐데 이제는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되었습니다. 안믿는 형제들이 안타깝게 여겨져 구원받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새신자도 성령받으면 살아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혹 마른 뼈와 같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중에 마른 뼈와 같은 인생때문에 낙심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불어오는 성령님의 생기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마른 뼈가 큰 군대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 - 투데이바이블
에스겔 37장은 두 가지 주요 환상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1-14절)는 유명한 '마른 뼈의 골짜기' 환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뼈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15-28절)는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로 합치는 상징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통합을 예언합니다.
전체적으로 포로기 이스라엘에게 절망 속의 소망, 죽음 속의 생명, 분열 속의 연합을
약속하는 장입니다.
“마른 뼈를 살리시는 하나님”
에스겔 선지자는 B.C 597년 바벨론의 2차 침공 때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소명을 받고 포로 된 유다 백성을 향해 회복의 소망을 선포하며 용기와 위로를 주었습니다.
1. 마른 뼈를 보여주셨습니다(1-3).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한 골짜기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뼈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뼈들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마른 뼈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마른 뼈는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아주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갔습니다.
내일도 없고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에 두 번이나 침략을 당했습니다.
성전은 불에 타고 군대는 해산되었습니다.
성전의 보물들과 왕궁의 보물들은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와 귀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킬 젊은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술자와 쓸모있는 사람은 다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힘없는 노인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유대 나라의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이제는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 멸절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같으시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못 산다고 대답하자니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또 산다고 하자니 도무지 황당하고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 와서 지금은 마치 마른 뼈처럼 아무 소망이 없지만, 다시 그들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한국교회는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영적인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5절)을 보시면 “너희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그럼 어떻게 해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한국교회가(우리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2.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살아납니다(4).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대언할 때 마른 뼈들이 소리가 나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죽은 신앙이 다시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주로 프로그램을 갖고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신앙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소리가 나고 움직이고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게 됩니다.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43-44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걸어 나오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아무리 죽은 지 나흘이 돼서 냄새가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아주 마른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요?
창세기 1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울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너희가 살아나리라”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에스겔 37:5-6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아무리 마른 뼈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유명한 의사라고 해도 살릴 수 있는 것이 있고, 살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치인들이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을 다시 살릴 것을 믿습니다.
3. 생기가 들어가야 살아납니다(5)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아무리 마른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야 됩니다.
여기서 말씀한 생기는 ‘루하흐’라고 합니다.
‘루하흐’는 우리말로 하면 성령을 말합니다.
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라는 말씀에서 “영”이라는 말도 ‘루하르’라는 단어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전 8:1)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듣고, 기도하지 않으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언제나 성령님께서 함께 역사하셔야 합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7)을 보면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요한복음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은 언제 받습니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또 받아야 할까요?
이제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이 충만하면 어떠한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가 이제는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지금은 나라를 잃고 아무 소망도 없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그들이지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군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군대는 나라를 지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서 싸웁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정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우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어떤 어려움도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마른 뼈 환상과 하나님의 생기(에스겔 37:1 ~ 6)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이 환상은 에스겔서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죽은 자의 부활을 예시하는 그야말로 그날의 일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그런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이 말은 이 땅에서 심은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와 천국이 오늘 이 지점과 함께 연결되어 우리는 결국 영혼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 생명 안에 영원한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복 있는 믿음의 삶을 살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스펄 전 목사님이 성도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를 붙잡을 힘을 얻었습니다. "
그 편지가 스펄 전 목사님 마음에 얼마나 기쁨이 됐는지 "세상이 무엇보다도 이런 기쁨이 없을 것이다." 라고 그의 설교에 쓰면서 오늘 본문인 에스겔 37장의 말씀을 그 설교문에 쓰고 있습니다.
뼈들처럼 죽고 메마른 자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25살에 유배되어 5년간 지났지만 아무런 희망을 바랄 수 없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연약한 한 청년 에스겔은 에스겔서 1장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이 열리고 불의 전차를 동원해서 하늘의 보좌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그 하나님의 임재를 환상을 통해 에스겔을 불러 이 조국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게 하시는 내용이 바로 에스겔서의 내용이고 에스겔이 받은 소명입니다.
에스겔이 비전을 선포하는 내용은 절망감과 패배감에 찌들어 있는 이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신다. 고 하는 언약을 선포하고 상처받고 고통받아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겐 회복과 치유의 소망을 심어주고, 교회와 성도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고 하나님을 만난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였습니다.
본문 에스겔 37장은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비전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37장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절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의 영이 왜 에스겔을 마른 뼈 골짜기 사방을 두루두루 여기 저기 다 세세히 보도록 그곳으로 밀어 넣으셨을까요?
절망의 골짜기를 가로질러 가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을 알고 공감해야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발견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생명을 건지려면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구조 대원은 그 물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야 그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부활의 희망은 어디서부터 나타나느냐?
죽음의 한복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현장을 목도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결코 부활의 메시지를 공감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습니다.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가난은 그저 배고픈 일, 불편한 일 정도일 겁니다.
아픔과 상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저 암 병동 호스피스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현장의 절규는 그저 아련한 동정이나 애처로운 정도일 것입니다.
그 절망과 죽음의 현장에서만이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부활의 역사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 바로 부활의 소망이 일어남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힘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것이 보이시고서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이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만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반문이기도 하고,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 이루실 수 있습니다. 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와 자세로 규정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믿음을 가지고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가가는가의 태도와 자세의 문제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에스겔에게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심한 충격으로 에스겔은 실어증에 걸립니다.
에스겔서 3장에서부터 33장까지 에스겔의 말문이 막혀 혀가 입천장에 붙었습니다.
성전이 훼손되고 그 성이 무너지자 그리고 왕국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쇠사슬 결박에 묶여서 포로로 다 잡혀 끌려간 그 충격에 말문이 막힌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33장까지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낱낱이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니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드디어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제 마른 뼈에게 내 말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합니다.
마른 뼈들아 살아가라 생기야 들어가라 대언합니다.
여러분!!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권능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음을 믿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설교는 제가 하지만 저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저는 스피커일 뿐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뼈들아 살아나라 생기야 들어가라 명령하시면서 저들을 일으키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이 말씀을 통해 얻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말씀을 내가 받고 그 음성을 내가 듣고 그 말씀을 대언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바로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당장 눈 앞에 속히 내가 원하는 방향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만 하지 말고 간절히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그 일들을 미리 준비하고 꿈꿔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한국에 선교사가 파송돼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완전히 개조하고 일으켰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추적해 봤어요.
어디서부터 이 한국 선교가 시작됐을까 그랬더니 기원으로 기원으로 기원으로 올라갔는데 한 가지 굉장히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저 캐나다의 들판에 대학생 다섯 명이 들판에 나가 기도하는데 소나기가 쏟아지자 그 비를 피하려고 건초더미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가지고 아시아에 한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했던 기도가 한 대학생 집에, 한 학생의 집의 부엌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 기도가 그 마을에 이어졌습니다.
그 기도가 그 마을의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또 그 교회가 속한 교단으로 이어졌습니다.
5명의 캐나다 청년의 꿈들이 그 기도가 이루어지듯이 누군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부흥과 하나님 일하심의 역사를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오늘에 실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방법이 없다. 이제 끝났다. 참담한 것들이 있을 줄 압니다.
사업 때문에 가정의 문제로 건강의 문제로 물질의 문제로
관계의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자녀들 때문에 곳곳에 혹은 도대체 뭐가 뭔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는데 내 마음이 힘들어 죽겠기에
무너져버린 마음들...
그저 오늘 우리의 인생의 곳곳에 마른 뼈와 같은 골짜기를 오늘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고 내 삶이 아골 골짜기라고 호소하며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홍해 바다를 열어 길을
내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웨이 메이커가 되셔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저들을 보호하신 분은 우리의 영원한
공급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냐? 세상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고 부정적이고 냉소적일 것입니다. 주께서 하시나이다. 주님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할 때 사람들은 조롱과 야유를 퍼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 부활의 기적이 바로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부활은 이 세상에 부정적인 것과 조롱하는 것과 차가운 것과 냉소적인 것을 다 잠재우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이 민족이 다시 살 수 있겠니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겠니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이 나라가 선진 복지국가가 될 수 있겠니?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겠느냐 교회가 그 역할들을 등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우리 가정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어보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이미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고 복된 자녀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 꿈을 가지고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을 얻는 주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우리의 삶과 가정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9월 13일(토) 에스겔 33-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영과 새 마음(36:26-27)
새 영과 새 마음(에스겔 36:22-31)
해마다 부활절 휴가철이 되면 미국의 남부 Florida 해변에는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청춘을 즐긴다. 한 번은 그 중 여섯 명의 대학생이 동네를 너무 소란하게 했다는 죄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다음 날 즉결재판에 넘긴다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매우 겁이 났다. 그러자 그 중 한 학생이 경찰관에게 전화를 한 통 쓰고 싶다고 했다. 그가 전화를 하고 돌아오자 친구들은 조금 용기를 얻었다. 그가 자기 부모나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30분 후에 이 학생 앞으로 피자 두 판이 배달되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 긴장된 순간에 어떻게 배고픈 것을 먼저 해결할 생각을 했을까? 그의 마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잘못된 마음을 가진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잠언 23:7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나 전혀 내 마음이 아닌 행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의식중에라도 그런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사람의 마음에 품은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그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더럽고 악한 말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병을 제대로 고치기 위해서는 병의 증상만 고칠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바로잡아야 하듯이,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에스겔서는 하나님께 범죄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자의 아들로 성전에서 봉사하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반한 유다나라에 임할 심판과 주위 여러 나라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 예언한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회복될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인 37장에는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마른 뼈 같이 타락하고 힘을 잃고 죽은 것 같게 된 이스라엘이라도 다시 살리셔서 큰 군대를 만드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이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시기 전에 36장의 말씀을 먼저 해주셨다.
36장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35장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것을 말씀한다. 29절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4절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35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그런데 이 회복의 약속의 말씀 앞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온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회복보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시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주시기 전에 그들에게 새 영을 주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들에게서 굳은 마음을 없애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했다. 왜인가? 그래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7절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총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포로생활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고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기 전에 필요한 것은 새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에스겔 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셨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하셨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다.
그러면 새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새 마음이란 부드러운 마음이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서 ‘굳은 마음’이란 ‘돌 같은 마음’이란 뜻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이란 ‘고기 같은 마음’이다. 즉 얼린 고기가 아닌 생고기처럼, 또는 사람의 살갗이나 몸의 살처럼 부드러운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돌 같이 굳은 마음과 고기처럼 부드러운 마음은 어떤 특징과 차이가 있는가? 첫째로, 마음이 굳었다는 것은 아무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교만과 고집으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음이다. 그래서 어떤 자극이나 도전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나 느낌이 없다. 반대로 부드러운 마음이란 감각이 예민한 마음이다. 어떤 도전이나 자극에 대해서 분명한 깨달음이 있고 느낌이 있다.
둘째로, 굳은 마음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마음이다. 감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자극이나 도전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건드려도 그대로 가만히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은 감각이 예민하고 느낌이 있고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이나 도전에 대해서 즉시 반응한다.
셋째로, 굳은 마음은 꽉 닫혀 있는 마음이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은 활짝 열려 있는 마음이다.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서 교제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그래서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죄와 허물과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라는 경고에 반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잘 깨닫고 회개하라는 경고에 즉시 반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이 두 종류의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 중에서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으며 살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은총과 복을 회복시켜 주실까?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여러분은 마음의 상태는 지금 어떠한가?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돌처럼 굳어 있는 마음인가,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새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 후에 복과 은혜를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삶과 믿음이 새로워질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 깨끗케 하심을 받아야 한다. 24절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옛 조국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그들을 깨끗케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그런 후에 그들의 삶을 풍성케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맑은 물로 뿌려서 정결케 하는 것은 구약에서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는 방법이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물로 손과 발을 씻어야 했고(출애굽기 30:20), 부정한 것에 닿은 그릇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에 담가서 씻어야 했고(레위기 11:32), 죽은 시체를 만진 사람에게 물을 뿌리고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정결케 된다고 했다(민수기 19:19,20).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회복되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여호수아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우리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능력을 베푸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로 씻어 깨끗케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먼저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내 죄를 씻음 받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나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내 마음도 새로워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잘못된 생각과 더러운 생각과 옳지 않은 감정들을 다 내버려야 한다.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내 마음에 가득 찬 욕심과 정욕을 버려야 한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 정욕을 버리라.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원망과 불평, 시기와 질투,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고 잘못된 삶의 습관을 과감하게 끊고 버리고 돌아서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 나아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한 물을 뿌리셔서 나를 깨끗케 해주시기를 구하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몸과 마음과 육체와 삶을 정결하게 씻음 받고 새 마음을 받으라.
둘째,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라. 새 영과 새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다. 사람이 스스로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사람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사람이 왜 스스로 변화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 스스로는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내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다. 37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사야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께서 나의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쫓겨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삶과 믿음을 풍성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셋째, 새 마음보다 먼저 새 영을 주시기를 구하라. 새 마음보다 새 영을 먼저 구하는 것이 순서이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우리가 새 영을 받지 않으면 새 마음을 가져보아야 또 다시 더러워지고 굳어지게 될 것이다. 내 영이 먼저 변화되어야 마음도 삶도 달라진다.
새 영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을 말한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다. 27절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새번역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야 내 마음이 새롭게 될 수 있다. 성령께서 나의 굳은 마음을 녹여주셔야 나의 마음이 부드럽게 될 수 있다. 성령께서 굳은 나의 마음 밭을 부숴주시고 곱게 갈아주셔야 내 마음 밭이 부드러운 옥토가 될 수 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내 마음이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나의 말과 행동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먼저 새 영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하나님의 새 영을 주셔야 한다. 성령 충만을 받기를 구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힘쓰라. 그래서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바뀌고 새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 그래서 이제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주를 위해 사는 삶이 되라.
넷째, 하나님께 나를 맡기라. 오늘 말씀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시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겨났던 고국으로 데리고 돌아오시고, 하나님께서 맑은 물로 그들을 깨끗하게 씻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그들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마음이 굳어져서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다가 깨끗케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은총과 복을 회복시켜 주시는가? 그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셨다. 22절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하게 되자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고 비웃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주위의 모든 나라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포로 된 그들을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복과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돌이킬 수 없고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를 친히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라. 나는 그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은총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고 그 하나님께 나를 맡겨드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대로 만드시고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도록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라. 그러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신다.
지난 주간 모 신문에 두 가지에 전혀 다른 기사가 같은 면에 이어서 나왔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전국의 고위공무원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1억 원이 넘는 돈을 뜯어냈다가 잡혔다는 내용이다. 이 사람은 작년 1월부터 모 여관에 자리를 잡고 전국의 시장, 군수, 도지사를 포함한 전국의 단체장과 고위공무원 600여 명에게 수 천 번의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여자와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몰래 찍었다”고 하면서 돈을 보내지 않으면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중에 53명이 즉시 100-500만원을 보내왔고 그렇게 무려 1억 3000만원을 뜯어냈다고 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들의 마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는 다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하나의 기사는 경찰서에서 거짓진술을 한 아들을 다시 경찰서로 돌려보낸 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광주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 친구와 싸운 일 때문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친구를 때린 적이 없다고 말하고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엄마에게 사실은 경찰관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서 친구를 폭행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집에서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이틀 뒤에 아들을 경찰서로 다시 보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쥐어 보냈다. 이 편지에서 이 어머니는 “내 아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부모가 되어서 부끄럽다”고 하면서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도록 시켰으니 아들이 절름발이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썼다. 담당 경찰관은 “부모의 심정으로 자기 아들의 잘못을 감싸들려고 할 텐데, 거짓말을 한 아들을 꾸짖어서 경찰서로 돌려보낸 어머니의 결심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삶이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삶이 회복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다.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삶이 새로워진다. 하나님 앞에서 굳은 마음을 버리라. 닫힌 마음을 열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영과 새 마음을 받으라. 하나님께서 나를 정결케 하시고 내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라. 새 마음을 얻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라.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라. 그래서 성령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부드러워져서 잃어버린 복과 은혜가 회복되기 바란다.
◆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음은 그들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신 일이다.
그러나 은총을 받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하시는 이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자기 능력으로는 영원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백성의 복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우리가 예수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 때, 우리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따른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저것을 행한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신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명예에 신경을 써야 한다.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고,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다.
◆ 새 언약
25절부터 28절까지는 새 언약이다.
그리스도의 법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해주는 말씀이며 성도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모든 성도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①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25)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정결케 하셨다. 사도들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명확히 했다(딛 2:14, 요일 1:7). 우리는 완전한 죄 사함을 얻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계속 용서되고 있다.
②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26)
새 영과 새 마음은 변화된 성도를 가리키시는 말씀이다. 거듭난 성도의 변화는 놀랍다. 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그는 세계관, 가치관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격도 변한다.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겸손해진다. 이런 변화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것은 자기 의지나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다.
③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상당 부분이 갈망에서 비롯된다(갈 5:16-18). 말씀이 꿀처럼 달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며, 형제들을 사랑하게 된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이라는 찬송(새 542)이 이해된다.
그것이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의지가 약한 자도 놀라운 수준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제법 끈기와 인내를 가진다. 그런데 예수 믿고 그를 따르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된다!
율법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갈망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이것은 놀라운 세계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더는 자기 의를 자랑하거나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다(갈 5:18).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러한 성령의 갈망이 사라진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내 고집, 내 욕심으로 행하는 것이 많아지면서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내 의지로 행한 것은 결국 자기 의가 되고 내 자랑이 된다. 아무리 내 딴에는 귀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 자랑, 내 야망에 불과하다.
정결함, 새 영, 새 마음, 하나님의 영….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이 바로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러한 새 언약 백성이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1. 에스겔 36:26에서 말하는 '새 마음'과 '새 영'은 무엇인가요?
새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의 마음
새 영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변화된 영혼을 의미
2. 우리는 왜 굳은 마음을 가지게 되나요?
죄와 세상의 유혹, 상처와 아픔 등이 우리를 강팍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새 영을 받으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뀝니다.
4. 어떻게 하면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회개와 순종의 태도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굳은 마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려는 강팍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7-8)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2. 새 영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스겔 36:26)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주십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새 영을 받으면, 우리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이전에는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집니다.
- 삶의 목적이 바뀌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이 깊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예레미야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드릴 때, 하나님은 새 마음과 새 영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9월 12일(금) 에스겔 29-3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름의 날(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For the day is nea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a day of clouds, a time of doom for the nations.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구름의 날(a day of clouds)
열국의 때(a time of doom for the nations)
새한글 /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날은 구름의 날, 민족들이 망할 때가 될 것이다.
그 날이 가까왔도다 ㅏ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ㅑ구름의 날일 것이요 列國(렬국)의 때이리로다.
ㅏ여호와의 날
에스겔 7:7
이 땅 거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에스겔 7:12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요엘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나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ㅑ 구름의 날
에스겔 34: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5절까지 계속해서 2절에 나타난 통곡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가까왔도다
- 이 말의 반복적 사용은 실제적 시기의 급박한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지 심판의 엄중성과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 여겨진다.
여호와의 날
- 전제된 심판
선언에 이어 구체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 곧 형벌과 살육의 날(Kliefoth)을 가리킨다(사 13:6-9; 욜
1:15;옵 1:15; 습 1:7, 14).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여기서 '구름의 날'과 '열국의 때'는 모두
앞서 언급된 '여호와의 날'을 설명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음울하며 작은 위로의 빛도
비치지 않는 '구름의 날'과 같을 것이며(18절: 34:12; 욜 2:2; 습 1:15), '열국의 때'란 이방인들이 그들의 이단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그 세력이 궤멸되는 때를 가리킨다(22:3; 사 2:12; 13:22).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을 '구름의 날인 열국의 때'란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해 '구름의 날'이 직접적으로 '열국의 때'를 수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나(De Wette), 이는 성경의 용례상 '구름의 날'이 대부분 직접 '여호와의 날'을 수식하고 있다는 점과
'열국의 때'란 말이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애굽의 동맹국들을 지칭하는 말로 특별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Delitzsch).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심판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궤멸되는 궁극적인 하나님 심판의 날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마 25:13; 눅 17:30; 계
9:6).
이
구절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이 애굽(현재의 이집트)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합한 여러 민족들에게도 미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스(현재의 에티오피아), 붓(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룻, 굽 그리고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단지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하여 악을 행하거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도 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공평하게 다스리심과 그분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기시키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구름의 날'
문맥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재앙이나 심판의 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에스겔 30:3).
둘째, 9월 5일은 세계 구름 감상의 날(International Cloud Appreciation Day)
구름을 관찰하고 감상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에스겔 30장 3절에 "그 날이 가까웠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 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날짜 : 매년 9월 5일.
- 목적 : 전 세계 사람들이 하늘의 구름을 관찰하고 감상하며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공유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애굽과 그 동맹국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날이며, 바벨론 군대를 통해 애굽이 멸망하고 고통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름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의 심판 :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펼치시며 심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 에스겔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다고 선포하며, 그날이 '구름의 날'이자 '열국의 때'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구름의 날
얼마 전만 해도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으로 알고 그리고 신약의 주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알고 그렇게 규정짓는 신학자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강림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2. 주님의 강림
마태복음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호와의 날
- 전제된 심판 선언에 이어 구체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 곧 형벌과 살육의 날(Kliefoth)을 가리킨다(사 13:6-9; 욜 1:15;옵 1:15; 습 1:7, 14).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 여기서 '구름의 날'과 '열국의 때'는 모두 앞서 언급된 '여호와의 날'을 설명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음울하며 작은 위로의 빛도 비치지 않는 '구름의 날'과 같을 것이며(18절: 34:12; 욜 2:2; 습 1:15),
'열국의 때'란 이방인들이 그들의 이단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그 세력이 궤멸되는 때를 가리킨다(22:3; 사 2:12; 13:22).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을 '구름의 날인 열국의 때'란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해 '구름의 날'이 직접적으로 '열국의 때'를 수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나(De Wette), 이는 성경의 용례상 '구름의 날'이 대부분 직접 '여호와의 날'을 수식하고 있다는 점과 '열국의 때'란 말이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애굽의 동맹국들을 지칭하는 말로 특별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Delitzsch).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심판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궤멸되는 궁극적인 하나님 심판의 날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마 25:13; 눅 17:30; 계 9:6).
에스겔 30장 깊이 읽기 : 왜 애굽의 모든 자랑은 재앙으로 변해야 했나?
에스겔서에서 애굽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30장에 이르러 더욱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확장됩니다.이 장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애굽뿐만 아니라 그를 의지하던 동맹국들(구스, 붓, 룻, 모든 잡족, 굽 등)까지도 함께 멸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예고합니다.
바로의 팔이 꺾이고 바벨론 왕의 칼이 애굽 땅을 휩쓰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무서운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장은 인간 제국의 허망함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리고 죄악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이라는 주제를 강력하게 드러냅니다.
에스겔 30장의 예언은 29장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6세기 초, 바벨론 제국이 중근동의 패권을 장악해 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애굽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주변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특히 바벨론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축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많은 소국들은 강대국 애굽의 힘을 의지하여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러한 인간적인 동맹과 군사력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심판과 개입이 극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하는데, 에스겔 30장은 바로 이
'여호와의 날'이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게 임박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패배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그분의
주권이 만방에 드러나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이 예언은 당시 애굽의 힘을 믿고 의지했던 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역설적인 위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세운 어떤 제국이나 동맹도 영원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역사의 궁극적인 방향을 결정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한 자를 의지하는 대신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 애굽과 동맹국에 임할 '여호와의 날'
에스겔 30장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슬픈 외침으로 시작하여, 애굽과 그 주변 국가들이 겪게 될 파멸의 구체적인 양상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과 애굽의 슬픔 (1-9절) :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슬프다 이 날이여!"(겔 30:2)라고 부르짖으며 예언하라고 명령하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며, 이는 구름의 날이요 여러 나라의 때(심판의 때)가 될 것임.
칼이 애굽에 임하고 구스(에티오피아)에 큰 근심이 있을 것임. 애굽에서 죽임 당한 자들이 엎드러지고 그 무리가 끌려가며 그 기초가 헐릴 것임.
애굽의 동맹국들, 즉 구스와 붓(리비아)과 룻(리디아)과 모든 잡족(아라비아 용병 등)과 굽(아마도 애굽 내 외국인 용병)과 및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 다 애굽과 함께 칼에 엎드러질 것임.
애굽을 지탱하는 자들이 엎드러지고 그 교만한 권세가 그치며, 믹돌에서부터 수에네까지 백성들이 칼에 죽을 것임.
그 땅이 황무한 땅 같이 황무하게 되고 그 성읍들이 황폐한 성읍 같이 될 것임. 하나님께서 애굽에 불을 일으키시며 그 모든 돕는 자를 멸하실 때, 그들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임.
그날에 사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배를 타고 나아가 평안한 구스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며, 애굽의 재앙의 날과 같이 그들에게도 큰 근심이 이를 것임.
바벨론 왕에 의한 애굽 파괴 (10-19절) :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애굽의 무리(부와 권세)를 끊으실 것임.
느부갓네살과 그의 군대, 즉 여러 나라 중 강포한 자들이 와서 그 땅을 멸망시킬 때 칼을 빼어 애굽을 쳐서 죽임 당한 자로 땅에 채울 것임.
하나님께서 강들을 말리시고 그 땅을 악인의 손에 파시며, 타국 사람의 손으로 그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하실 것임.
하나님께서 애굽의 우상들을 부수고 신상들을 없애시며, 애굽 땅에서 다시는 통치자가 나지 않게 하시고 그 땅에 두려움이 있게 하실 것임.
바드로스를 황폐하게 하며 소안에 불을 놓고 노(테베)를 심판하실 것임. 애굽의 견고한 성읍 신(펠루시움)에 분노를 쏟고 노의 무리를 끊으실 것임.
애굽에 불을 일으키시면 신이 심히 근심할 것이며, 노는 찢겨 나누어지고 놉(멤피스)은 날마다 대적이 있을 것임. 아웬(헬리오폴리스)과 비베셋(부바스티스)의 장정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 성읍 주민들은 사로잡힐 것임.
하나님께서 드합느헤스에서 애굽의 멍에들을 꺾고 그 교만한 권세를 그치게 하실 때, 날이 어둡고 구름이 그 땅을 덮을 것이며 그 딸들은 사로잡힐 것임.
이같이 애굽을 심판하시면 그들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임.
바로의 꺾인 팔과 바벨론 왕의 강한 팔(20-26절) :
이 부분은 다른 시기(열한째 해 첫째 달 일곱째 날)에 주어진 예언임.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팔을 이미 꺾으셨는데, 그 팔을 싸매거나 약을 붙여 칼을 잡을 힘이 있게 하지 못하였음 (과거 애굽의 군사적 패배를 암시).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두 팔, 즉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다 꺾으시어 칼을 그의 손에서 떨어뜨리실 것임.
애굽 사람들을 여러 나라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로 헤치실 것임.
대대로 바벨론 왕의 팔은 견고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칼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어 애굽 땅을 치게 하실 것임.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시고 바로의 팔은 내려뜨리실 때, 그들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임. 애굽 땅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고 그가 칼로 그 땅을 치면, 애굽 사람들은 흩어질 것임.
애굽과 그 동맹국에 대한 심판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심판의 대상 / 주제 | 주요 내용 및 결과 |
|---|---|
| '여호와의 날' 임박 | 슬픔과 근심의 날, 구름의 날, 여러 나라 심판의 때. |
| 애굽과 동맹국 (구스, 붓, 룻 등) | 함께 칼에 엎드러짐, 황폐화, 돕는 자 멸망. |
| 바벨론 왕의 역할 | 하나님의 도구로서 애굽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함. |
| 애굽의 주요 도시들 (소안, 노, 신, 놉, 아웬, 비베셋, 드합느헤스) |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심판과 파괴가 선포됨. 우상과 신상 파괴. |
| 바로의 권세 | 이미 꺾였고, 남은 팔마저 꺾여 칼을 잡을 힘을 잃게 됨. |
| 심판의 목적 | 애굽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함. |
철학적 / 존재론적 상징 해석 : 여호와의 날과 꺾인 팔
에스겔 30장의 심판 예언은 인간 제국의 유한성,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인간의 의지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은 역사가 단순히 인간의 계획이나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날은 '구름의 날'로 묘사되어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여러 나라가 동시에 심판받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마치 고대 신화에서 신들의 전쟁이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기존의 국제 질서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힘을 가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파괴는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역사철학에서 논의되는 '역사의 종말'이나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같은 개념과도 비교해 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날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애굽의 동맹국들이 함께 멸망하는 모습은 '의지하던 것의 허망함'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구스, 붓, 룻 등 애굽을 의지하고 그 힘에 편승하려 했던 나라들은 결국 애굽과 함께 심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질 때 그 그늘에 의지하던 작은 풀포기들도 함께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강한 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생존 전략일 수 있지만, 그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일 경우, 그 몰락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이는 국제 관계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 조직, 이념
등이 무너질 때 우리는 함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참된 반석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바로의 '꺾인 팔'과 바벨론 왕의 '견고한 팔'의 대조는 인간 권력의 이동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의 팔은 이미 한 번 꺾였고(과거의 군사적 패배), 이제 남은 팔마저 꺾여 칼을 잡을
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시고 당신의 칼을 그의 손에 쥐여주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는 세상 권력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이는 인간의 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면 미약한 존재라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처럼,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가 움직인다는 신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우리 시대의 '여호와의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스겔 30장의 엄중한 심판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의지하는 대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 지구적인 팬데믹, 걷잡을 수 없는 기후 변화로 인한 대재앙, 경제 시스템의 붕괴, 혹은 예기치 않은 국제 분쟁과 전쟁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의 삶에서는 갑작스러운 질병, 관계의 파탄, 직장의 상실 등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날'이 닥쳤을 때, 우리가 그것을 단순한 불운이나 우연으로 치부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경고와 메시지를 읽어내려 노력할 것인지입니다. "슬프다 이 날이여!"라는 에스겔의 외침은 우리에게 안일함에서 깨어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탱하는 자'로 삼고 있으며, 그 '교만한 권세'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애굽은 자신의 군사력, 경제력, 오랜 역사와 문화를 의지했지만, 그것들은 '여호와의 날'에 모두 꺾이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높은 학력, 안정된 직업, 많은 재산, 사회적 지위, 혹은 특정 이념이나 정치 세력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일시적인 안정감을 줄 수는 있지만,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교만은 우리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진정한 안전은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바로의 꺾인 팔'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권력도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모든 계획과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할지라도, 예상치 못한 변수와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능력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꺾인 팔은 실패와 상실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겸손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30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에 임박한 위기의 징조들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가?
-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과연 '여호와의 날'에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
- 나의 힘과 지혜를 과신하며 교만하게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 궁극적인 심판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결론 요약
에스겔 30장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애굽과 그를 의지했던 동맹국들이 맞이할 처절한 파멸을 생생하게 예고합니다. 칼과 불, 그리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라는 하나님의 도구를 통해 애굽의 교만한 권세는 철저히 꺾이고, 그 땅은 황폐해지며 백성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애굽의 주요 도시들과 우상들은 파괴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영광을 누리지 못할 운명임이 선포됩니다. 바로의 팔이 꺾이고 바벨론 왕의 팔이 견고해지는 대조를 통해, 세상 권력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간적인 힘과 동맹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의지처가 되심을 일깨웁니다. 또한,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는 모든 세력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를 통해,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 적대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교훈
암몬 족속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적대적 민족으로, 그들의 역사는 갈등과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암몬 족속의 행동은 성경적 교훈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글에서는 암몬 족속의 기원, 역사,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암몬 족속의 기원과 역사
암몬 족속은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벤암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후 딸들과 동굴에서 거주하게 된 사건에서 암몬 족속의 기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원은 암몬 족속의 존재를 성경적 이야기의 중요한 일부로 만듭니다.
이들의
주요 거주지는 현재 요르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대 암몬의 수도 라빠 암몬은 오늘날 암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암몬 족속은
몰렉이라는 주신을 섬겼으며, 몰렉 숭배는 우상 숭배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몰렉 숭배는 인신공양과 같은 끔찍한 의식을 포함하여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암몬의 우상 숭배를 금지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과의 갈등
외에도 모압, 에돔, 아람 등 주변 민족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지역 내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들은 종종 이들 민족과 동맹을 맺거나 전쟁을 벌이며 역사적 갈등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성경에서 지역적 정치와 종교적 갈등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암몬과 이스라엘의 갈등
암몬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대부분 영토와 신앙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해 이동할 때, 암몬 족속은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명기와 민수기에서 언급되며,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의 초기 갈등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사사 입다 시대의 전쟁은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간의 충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건 중 하나입니다.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입다는 이에 대응하여 그들과 싸웠습니다. 입다는 암몬 족속의 주장에 대해 과거의 역사적 정당성을 들어 반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물리쳤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의 손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기록됩니다. 또한,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에서는 사울과 다윗 시대에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약탈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다윗 왕은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들의 위협을 잠재웠지만, 솔로몬 왕 시대에는 암몬 여인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와 우상을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의 신앙적 타락으로 이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암몬과 이스라엘 갈등에서 배우는 영적 교훈
암몬과의 갈등은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을 반복적으로 증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서 물리적인 능력이나 군사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도전과 싸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암몬 족속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겪을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몰렉 숭배와 같은 죄악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 경고는 우리에게 오늘날의 우상, 즉 물질주의나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멀리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암몬의 죄악을 심판하시면서도, 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 순종과 믿음의 삶으로 돌아올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잃었을 때 하나님의 정의뿐 아니라, 회복의 은혜도 기대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이 갈등의 이야기는 현대의 신앙 여정에서도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우리의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기억하며 죄악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점도 강조됩니다.
입다와 암몬의 전쟁
사사기 11장은 입다와 암몬 족속 간의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함과 인간의 책임을
조명합니다.
입다는 길르앗의 아들로, 그의 가족에게 쫓겨난 후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암몬 족속의 위협이 커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지도자로 선택했습니다.
입다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입다는 암몬
왕과의 협상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 암몬 족속의 영토 주장이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암몬 족속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영토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도자로서의
지혜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심으로, 그는 암몬 족속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전쟁 후 자신이 했던 서원으로 인해 딸을 희생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원의 중요성과 그에
따르는 책임, 그리고 인간의 약속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언자들의 암몬에 대한 경고
암몬 족속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들은 암몬 족속이 저지른 우상 숭배, 폭력,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질타하며, 그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 49장에서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탐욕스러운 행위를 질책하며, 그들이 결국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암몬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악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조롱하고 기뻐했던 죄를 지적하며, 그들의 교만과 악행이 심판을 초래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언은 모든 죄악은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나며,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를 것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암몬 족속의 멸망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경고는 단순히 암몬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경험하게 될 결과를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성취되며,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경고와 희망을 모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암몬 족속과 신약적 관점
신약에서는 암몬 족속이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신학적
메시지는 신약의 핵심 주제들과 연결됩니다.
구약에서 암몬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은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의 원리를 드러내며, 이
원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전한 화해로 확장됩니다.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를 상징합니다.
암몬 족속의 우상 숭배와 죄악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불러왔으며, 이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담당하셨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공의는 신약에서 은혜와 회복의 이야기로 완성됩니다.
암몬 족속과 같은 이방 민족의 심판 이야기는 신약에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됩니다.
복음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으며, 이는 구약에서 암시된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실현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과거 이방 민족이 겪었던 심판이 단지 끝이 아니라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합니다.
이는 에베소서 2장에서 “멀리 있는 자들을 가까이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설명됩니다.
암몬과의 갈등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죄악으로 인한 인간의 갈등과 분열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화해와 연합으로 변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적대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고 모든 민족을 하나로 묶는 화평의 복음을 제시합니다.
암몬 족속의 이야기는 또한 신약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암몬 족속이 심판을 받았던 주요 이유는 그들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거역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반복적으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처벌의 목적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고 은혜의 문을 여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신뢰해야 함을 일깨우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암몬과의 대립 속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아갔던 모습은 우리가 현대의 갈등과 도전 속에서 취해야 할
신앙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암몬 족속의 죄악은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상기시킵니다.
몰렉 숭배와 같은 우상 숭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탐욕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마주하는
물질주의나 이기심과도 연결되며, 이를 경계하고 회개와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경고로 작용합니다.
또한, 암몬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를 신뢰하며, 그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화해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화평을 이루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중국의 헌법 제1조
①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 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② 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북한의 헌법 제1조
제1조 우리 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주권은 인민이 최고 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주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근거로 하여 행사한다.
일본의 헌법 제1조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의 헌법 제1조
이 헌법에 의하여 부여되는 모든 입법 권한은 미합중국 의회에 속하며,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한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의회는 종교를 세우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9월 11일(목) 에스겔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노의 책벌(25:17)
모압 / 물, 종자, 아버지의 후손
블레셋 / 방황자의 땅, 나그네
Then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take vengeance on them.
분노의 책벌(베토케호트 헤마) בְּתֹוכְחֹות חֵמָה
2534. 분노(헤마. chêmâʼ) חֵמָה 스트롱번호2534
어원 / 317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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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따뜻함, 온기, 흥분, 격정, 호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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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여성 분노, 진노, 격노, 성이 남, 창27:44, 렘6:11, 25:15, 사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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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사, 여성 독, 신32:24, 시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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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노(창 27:44, 시37:8, 렘23:19), 진노(레26:28, 대하34:21, 잠16:14), 격분(신29:23,28), 분(잠15:18, 렘42:18),
뜨거움(호7:5), 독(신32:24,33), 노함(사27:4), 분노(겔13:13, 슥8:2), 진노(대하28:9, 시59:13), 분노함(욥36:18), 분냄(시90:7).
8433. 책벌(토우케하흐. tôwkêchâh) תּוֹכֵחָה
스트롱번호8433
구약 성경 / 4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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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주장하는 행위, 권리를 유지함, 삿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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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먕사, 여성 [주]복수형 논의들, 욥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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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여성 설복시킴, 반박, 부인, 시38:15(14), 잠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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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사, 여성 책망[말로 받는], 징계, 잠1:23,25,30,3:11, 5:12, 27:5, 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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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명사, 여성 [주]복수형:잠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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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사, 여성 불평[하나님께 대하여], 합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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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사, 여성 형벌, 단련, 시7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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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명사, 여성 [주]복수형: 시39:12(11), 겔5:15,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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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변론(욥13:6), 징벌(시73:14), 책망(잠1:23, 겔5:15), 징계(잠3:11, 15:5), 꾸지람(잠5:12,29:15), 경계(잠13:18), 견책(잠15:10,32), 책벌(사37:3), 벌(시149:7), 벌함(호5:9), 변론할 말(욥23:4), 반박할 말(시38:14).
17. 하나님께서
아벨의 자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원수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보복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의로운 심판자임을 강조하며,
그분의 공의로 인해 악한 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며,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원수를 갚으신다는 확실한 약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원수 - 14절과 같은 유형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격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표현되었다.
내가...여호와인줄 알리라 -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은 단순히 그들에 대해 처벌을 가함으로써 고통과 파멸만을 당하도록 하는 목적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 공의로우심을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결과가 수반되어짐을 엿보게 한다.
에스겔 25장 본문의 구조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결론
에스겔 25장은 이스라엘 주변 이방 민족들인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했으며,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암몬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기뻐했고, 모압은 유다가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블레셋 역시 유다를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하나님은 암몬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한 죄를 지적하십니다.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자 그것을 조롱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방인들에게 넘기시고,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암몬의 수도 랍바는 폐허가 될 것이며, 그들은 더 이상 강한 민족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죄로 인해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것을 조롱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그들이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였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압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들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으며,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에돔은 형제국인 이스라엘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 공격하며 그들을 잔인하게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돔의 이러한 행동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완전히 멸망할 것이며,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되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됨을 의미합니다.
블레셋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과 대립하며 그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들은 유다가
약해졌을 때 기회를 틈타 공격하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폭력과 증오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철저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로 남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25장은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기뻐하고 조롱하는 민족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조롱하거나 경멸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며, 모든 민족과 개인에게 동일한 기준이 적용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그의 때에 그의
방식으로 공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에 관한 성경 구절
성경에서 말하는 '분노'란 무엇인가?
1. 인간의 분노에 대한 경고
성경은 인간의 분노가 죄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야고보서 1:19-20은 "사람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말하며, 분노를 억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2. 의로운 분노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따른 의로운 분노를 인정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요한복음 2:13-17). 의로운 분노는 죄와 불의에 대한 반응입니다.
3. 분노의 통제
성경은 분노를 품지 않고 빠르게 해결할 것을 권합니다. 에베소서 4:26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분노가 오래 지속되면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4. 분노와 용서
성경은 분노 대신 용서를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성령의 열매와 분노 극복
갈라디아서 5:22-23은 성령의 열매 중에 온유와 절제가 있다고 가르치며, 성령을 의지할 때 분노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분노가 죄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며, 분노를 통제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극복하라고 가르칩니다. 분노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인간들의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주제별 성경구절 모음
창세기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출애굽기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민수기 22: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사탄 앞에서 몸을 땅에 엎드리니 발람이 크게 노하여 그 나귀를 막대기로 때리는지라.
민수기 25: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을 가까이 하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신명기 9:8
호렙산에서도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신명기 29:27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와 격분이 이 땅을 향하여 타올라 모든 저주가 기록된 대로 이 땅에 임하게 하셨느니라.
사무엘상 20:34
요나단이 크게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이튿날 초하루에 음식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열왕기상 21:4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아니하니.
열왕기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나는 생각하기를 그가 내게로 나와서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환처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17: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진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만 남았더라.
역대하 12:12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돌이키사.
느헤미야 4: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에스더 3: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크게 노하되.
욥기 5:2
분노가 우매한 자를 죽이고 질투가 어리석은 자를 죽이느니라.
욥기 18:4
네가 분을 내어 자신을 찢는구나. 너로 말미암아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편 76: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이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거니와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22: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전도서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한 날이 이르러서 경노와 분노로 땅을 황무지로 만들며.
예레미야 4:8
그러므로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며 애통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아직 우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예레미야애가 2:3
맹렬한 노를 발하시며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고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뒤로 거두셨으며.
에스겔 5: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 풀리고 내가 내 분을 그들에게 이루어 안식을 얻으리니.
다니엘 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그의 얼굴 모양이 변하고.
요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미가 5:15
내가 분노와 진노로 순종하지 아니한 나라에 원수를 갚으리라.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하박국 3:12
주께서 분노로 땅을 두르셨으며 노를 발하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마가복음 3:5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누가복음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사도행전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에베소서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골로새서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노와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투는 마음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요한계시록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분노의 책벌(Punish of wrath)”
에스겔 25장은 암몬(2∼7절)과 모압(8∼14절) 그리고 블레셋(15∼17절)에 관한 책벌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할 때 이웃 나라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핍박하거나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핍박한 나라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람”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바른 길을 찾게 하고 죄악 된 자리에서 떠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을 바로 세우려고 사용한 이웃 나라에 대해서 다른 나라를
통하여 징계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28)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칠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 삶을 돌이켜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내게 닥쳐왔던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때 세상이 그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한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이 그러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대적한다면 그 사회는 불의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오늘은 “하누카(Hanukkah. 히브리어: חנוכה)”라는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하누카”란
“봉헌”이란 뜻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마카베오 혁명”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에게 다시 봉헌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마카베오 혁명에 대해서는 “외경 마카베오 상, 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하였으며(10:22), “메노라”는
“하누카”를 지킬 때 사용하는 촛불이며 촛대는 “하누키야” 라고 합니다.
뉴욕에서 공립학교는 유대인의 명절은 마치
공휴일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교사들이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수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명절은 공휴일로
제정하지 않아도 공휴일처럼 지내게 됩니다. 유대인은 미국에서 소수민족입니다.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민족 명절을 철저하게 지키므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일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위하여 결단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삶을 힘들게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확신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때 그 길을 따라가는 주위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 단어 및 용어 정리
1. 랍바(5절) : 암몬의 수도(21:20 참조)
2. 벧여시몬(9절) : “황야의 집”이란 뜻.
3. 바알므온(9절) : 좋은 목초지로 모압과 국경 지대에 있던 아모리인들의 성읍.
4. 데만에서부터... 드단까지(13절) : 에돔의 전 국토.
5. 이스라엘 손을 빙자하여(14절) : 이 예언은 BC 164년경 유다의 마카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분노"와 관련된 책 소개
- 분노의 놀라운 목적
-
저자 마셜 B. 로젠버그
출판 한국NVC센터
발매 2017.08.21.
- 왜 분노하는가?
-
저자 조정민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 2018.09.18.
현대인의 대부분이 분노라는 병에
사로잡혔다. 스티븐 패덕이나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붙잡고 있는 분노가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질병을 앓게 됐을까? 다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 만약 우리 사회가 이 화를 다스리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이 화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분노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 각 개인과 집단은 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 그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 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 분노 컨트롤
-
저자 칩 잉그램, 베카 존슨
출판 디모데
발매 2011.06.03.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분노 해결법! 파괴적인 감정을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실제적 방법 '분노 컨트롤'. 분노를 단지 감정일 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감정 또는 기분이라고 정의 하는 이 책은 바른 방법으로 분노하여 건강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10년간의 상담과 사역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분노의 심리학적 측면과 성경적 원리를 함께 다루면서 분노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하나님께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분노를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해준다. 이 책을 통해 분노의 파괴적인 힘을 정복하며, 개인과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분노의 선한 영향력을 사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9월 10일(수) 에스겔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문권(23:24b)
- 선지자들의 배역(25절), 제사장의 율법 거역(26절), 거짓 예언(28절)
- 오홀라(사마리아), 오홀리바(예루살렘)
I will turn you over to them for punishment, and they will punish you according to their standards.
ㅈ
에스겔 9: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ㅊ
열왕기하 25:6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신문하고.
심문권(審問權)
그들이...너를 에워쌀지라
- 바벨론 군대들은 B.C. 605년 제1차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다니엘과 같은 일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왕하 24:1, 2, 7;단 1:1-6).
그리고 이들은 B.C. 588년에 제3차로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3년 동안 에워싸다가 함락시켜 유다 왕국을 멸망케 했다(왕하 25:1-7).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 '심문권'(미쉐파트)은 '법적인 판결' 또는 '공식적인 선고'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유다를 재판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왕국을 심판하시기 위해 이방 나라 바벨론을 당신의 일시적인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렘 27:6;43:10).
상징과 의미
- 오홀라와 오홀리바: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민족의 관습을 따라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 음행의 비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저버린 것을 사람의 불륜 및 음행에 비유하여, 영적 배신과 배타적 충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 심판의 선언: 반복된 타락 후에 마침내 임박한 심판이 언급되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 없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문학적 특징
에스겔 23장은 다른 예언서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죄악의 본질과 그 심각성을 강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관용구와 상징, 인물의 대조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본문은 경고합니다.
- 나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우상숭배적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심판의 잔"
서론 | 심판을 부르는 잊음
사람은 누구나 잘 잊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약속을 잊을 때도 있고, 기념일이나 소중한 사람의 말을 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기억력이 부족해서 잊는 것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해서 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누군가를 잊었다는 말에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를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에스겔 23장의 본문은 “잊음”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두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단순히 순간적으로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한 대적의 손에 넘겨졌고, 스스로 붙잡았던 대상에게 심판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권세를 의지했던 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로 돌아와 그들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또 무엇인가를 잊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다른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힘일 수도 있고, 눈앞의 성공과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은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그 공백은 반드시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고, 그것이 심판의 도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귀와 코가 잘리며, 자녀들이 칼과 불에 사라집니다. 이는 단순히 잔혹한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철저하게 심판받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감추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은밀히 행했던 음행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잊음의 대가는 반드시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현실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자주 잊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고,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등 뒤로 밀어낸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힘을 붙잡는 삶인가? 하나님을 잊은 순간, 우리는 이미 심판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은혜와 구원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본론ㅣ잊은 자에게 임하는 심판
1. 심판의 도구가 되는 세상의 권세와 힘 (22–24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실체를 고발하시며, 심판의 도구가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바벨론과 앗수르의 힘과 화려함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 세련된 문화, 부와 영광은 예루살렘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의지하면 자신들도 안전할 것이라는 헛된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맹은 예루살렘을 짓누르는 짐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바벨론과 앗수르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예루살렘을 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국제 정치적 사건을 설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대상이 심판의 도구로 바뀐다는 원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라는 말씀은 인간사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힘을 돌려 세워 심판의 몽둥이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붙잡는 것이 하나님이 아닐 때, 그것은 반드시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바벨론의 화려함은 결국 포위와 파괴의 병거로 돌아왔고, 앗수르의 위세는 무너뜨림의 창과 방패로 변했습니다.
본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24절)고 하십니다. 이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보호받던 신분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언약의 보호에서 내어버리십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언약의 법이 아니라, 이방의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순간, 백성은 더 이상 특별한 보호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질서와 가치 속에서 무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세와 힘을 붙잡을 때, 바로 그것이 심판의 도구로 바뀔 수 있습니다. 돈을 붙잡으면 돈이 우리를 얽매는 채찍이 되고, 권력을 붙잡으면 권력이 무너짐의 원인이 되며, 인간의 관계를 붙잡으면 그 관계가 심판의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이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작동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그분을 등 뒤에 버릴 때, 우리가 붙잡은 것들은 곧 우리를 벌거벗기고 조롱하는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잡는가, 아니면 세상의 힘과 지위를 붙잡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붙잡았기에 결국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따라갈 때, 그것이 결국 우리를 재판하는 법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법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세상의 법에 따라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붙잡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언약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세상의 심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삶만이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보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손에 무엇이 쥐어져 있습니까? 예루살렘처럼 세상의 힘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붙잡은 것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됩니다. 세상을 붙잡으면 세상이 심판의 도구로 변해 우리를 무너뜨릴 것이고,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만을 굳게 붙잡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 벌거벗김과 수치로 드러나는 죄의 결과 (25–30절)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심판하실 때, 단순히 전쟁의 패배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질투는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드러납니다. 본문 25절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질투와 다릅니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에서 나오는 거룩한 열심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배신의 고통과 분노를 떠올리면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로 불림받았지만, 이방을 사랑하고 우상을 좇는 배반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약의 남편으로서 반드시 그 배반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의 모습은 끔찍합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잘라내고, 자녀들을 칼로 엎드러뜨리며, 남은 자들을 불에 사릅니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파괴가 아니라, 존엄과 정체성의 완전한 상실을 상징합니다. 얼굴의 코와 귀는 존재의 표징인데, 그것이 잘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이 칼과 불에 사라지는 장면은 공동체의 미래 자체가 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현재와 미래, 존엄과 생명이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어 26절은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라고 선포합니다. 옷과 장식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입혀주신 존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옷과 장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쓰지 않고, 오히려 음행과 우상 숭배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시며,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한 자는 결국 그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27절은 더욱 뿌리 깊은 문제를 건드립니다. 하나님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죄는 단순히 최근의 타락이 아니라, 애굽에서부터 배워온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그 뿌리 깊은 음행을 단절시키십니다.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과거의 미련과 죄의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심판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죄의 근원을 끊어내는 하나님의 철저한 손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28절에서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은 한때 사랑했던 바벨론을 미워하게 되었고, 부담스러워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 심판을 집행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붙잡았던 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29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치욕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을 드러내리라.” 하나님을 잊고 세상에 바친 모든 수고는 결국 빼앗기고, 숨기고 싶던 음행과 부끄러움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떠난 수고는 헛수고가 되고, 죄는 반드시 폭로됩니다.
마지막으로 30절은 심판의 원인을 분명히 밝힙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모든 심판은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백성을 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길의 결말을 그대로 돌려주신 것입니다. 이방을 따르고 우상을 붙잡은 것이 바로 자신들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은 죄는 반드시 벌거벗김으로 드러나고, 감추려 했던 수치는 만천하에 폭로됩니다. 죄는 결코 은밀히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수고를 헛되게 하시고, 그 부끄러움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붙잡을 때, 그것은 결국 우리를 심판하는 도구로 바뀌어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붙잡을 때, 우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모든 흔적은 결국 벌거벗김으로 드러나고, 우리의 수고는 빼앗기며, 미래는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두려움만을 주지 않습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죄의 뿌리를 끊으시고,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죄의 대가, 심판의 잔 (31–35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걸어간 길의 본질을 ‘네 형의 길을 따랐다’는 말로 요약하십니다(31절). 예루살렘은 북이스라엘 사마리아가 걸었던 동일한 죄의 길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그 멸망의 이유는 우상 숭배와 언약 배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멸망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불순종으로 나아가 결국 사마리아가 마신 심판의 잔을 그대로 손에 쥐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잔을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으로 묘사하십니다(32절). 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잔은 단순한 음료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와 공의를 담는 그릇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을 마시며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패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 철저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을 뜻합니다. 한때 화려함과 권세를 자랑하던 도시가 이제는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33절은 더욱 충격적인 선언을 담습니다.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은 곧 “놀람과 패망의 잔”입니다. 놀람은 예상치 못한 충격과 두려움을 뜻하고, 패망은 완전한 붕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이 의지하던 세력에게 배신당하고, 스스로의 수고가 무너지는 놀람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회복 불가능한 패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것이 얼마나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는 철저한 파멸입니다.
34절은 심판의 철저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잔을 다 기울여 마셔야 할 뿐 아니라, 그 깨어진 조각까지 씹어야 합니다. 이는 심판을 부분적으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철저하게 겪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죄의 결과는 잠시 맛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표현은 수치와 모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는 결국 존엄을 잃고 가장 깊은 수치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마지막 35절은 이 모든 심판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밝힙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죄의 뿌리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이나 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기에 애굽을 그리워했고, 앗수르를 동경했으며, 바벨론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는 반드시 심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신앙에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잊는 것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이 세상에 빼앗길 때,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을 붙잡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삶은 결국 심판의 잔을 마시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합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심판의 잔을 마셔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으나, 결국 순종으로 그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철저한 심판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심으로, 우리는 이제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절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경고와 동시에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하지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우리는 구원의 잔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고 심판의 잔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잔을 들 것인가? 선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이 곧 생명이며, 그 기억이 심판을 넘어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결론 | 하나님을 기억함이 구원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무겁고 두려운 심판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한 대적에게 넘겨졌고, 결국 그들의 손에 의해 벌거벗김을 당하며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한때 매혹되었던 바벨론, 앗수르, 애굽은 심판의 도구로 돌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그대로 심판의 결과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것들이 결국 자신들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유는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요약됩니다. 죄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을 잊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채 세상의 힘과 가치를 붙잡고 있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는 수치와 멸망, 그리고 심판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잔이 아니라, 구원의 잔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대신 드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결국 순종으로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야 했던 그 심판의 잔을 주님이 대신 마심으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116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로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심판의 잔을 들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구원의 잔을 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한 두려움의 메시지가 아니라, 선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관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그분의 말씀과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의 수고는 빼앗기지 않고, 우리의 삶은 벌거벗김이 아닌 존귀로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무엇을 기억하겠습니까? 세상의 불안과 욕망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은 대가로 심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 구원의 잔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심판의 잔은 마셔졌고, 우리에게는 감사와 구원의 잔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합시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세상의 화려함과 두려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붙잡기로. 그때 우리의 삶은 심판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23장 22절-35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 곧 오홀리바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앞선 1–21절에서는 두 여인,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의 영적 음행과 배신이 병렬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와 관계를 맺다가 멸망했고, 오홀리바는 언니의 타락을 목격하고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한 음행에 빠져 바벨론과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이제 22절 이하의 말씀은 예루살렘이 불가피하게 당하게 될 구체적 심판을 선언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택과 결과를 어떻게 돌려주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매우 생생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된 바벨론과 그 동맹자들에게 포위당하고, 그들로부터 철저히 짓밟히게 됩니다. 특히 묘사되는 형벌은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과 정체성이 완전히 무너지는 수치의 언어들입니다. “코와 귀를 자른다”는 형벌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반역자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처벌로,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사회적 수치와 영구적인 낙인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자녀를 빼앗기고 불태운다는 표현은, 단순히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미래 세대와 공동체의 희망이 송두리째 파괴됨을 상징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벌거벗겨져 그동안 감추었던 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자신이 택한 길의 결과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 곧 자신이 매혹되어 동맹을 맺었던 대상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바벨론이 스스로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관점에서 보면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 아래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했던 대상이 결국 자신들의 파멸을 가져오는 심판자로 변모하게 하시는 역설적 상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중반부(31–34절)는 심판을 ‘잔’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은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잔’은 흔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시편 75편 8절에서는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이 거품치며 속에 섞인 것이 가득하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쏟아 내시되 지상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이사야 51장 17절에서도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셨다”라고 묘사됩니다. 따라서 ‘잔’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돌려주신다는 엄중한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심판의 잔을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을 끝까지 마셔야 한다는 선언은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철저히 갚아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결론부(35절)는 심판의 근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예루살렘의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우상숭배나 외교적 실패가 아닙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을 잊은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이방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기에 세상의 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멸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개요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의 불순종이 어떤 구체적인 심판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길을 답습했고, 결국 동일한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죄는 가장 치명적인 배신이며, 언약을 버린 대가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루살렘이 마신 심판의 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마셔주셨기에, 오늘 우리는 다시금 구원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역사적 배경
본문은 예루살렘이 걸어간 역사적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이 선포된 시기는 대략 주전 591년경, 즉 시드기야 왕의 통치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두 차례 포로로 끌려간 경험이 있었고(597년, 605년), 에스겔 자신도 그 포로 무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은 멸망하기 전이었으며, 마지막 기회를 붙잡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듯 남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음행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먼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사마리아가 함락되면서 이미 멸망했습니다. 이는 남유다에게 분명한 경고가 되어야 했습니다. 오홀라(사마리아)의 멸망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열강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사건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언니의 길을 따라갔다”는 본문 말씀처럼, 북왕국의 죄를 반복하며 더 깊은 불순종에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시드기야 왕의 시대는 남유다 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는 원래 바벨론의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정치적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했지만,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는 바벨론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반복해서 경고하셨던 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하고 그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렘 27:12–17), 예루살렘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정치적 술수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이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바벨론 제국을 구성한 다양한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제국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속국과 동맹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히 군사적 다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세력이 곧 그들을 짓밟는 연합 군대로 변모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588–586년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살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약 2년간의 긴 포위를 거쳐 결국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은 불타고, 백성들은 칼에 쓰러지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상황을 영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형벌 묘사—코와 귀를 자르고, 자녀를 빼앗고, 옷과 장식을 빼앗는 장면—은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 반역자나 패배한 왕에게 가해지던 처벌을 반영합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종종 반란을 일으킨 속국의 왕이나 지도자들의 코나 귀를 잘라 치욕을 안겼고, 그들의 자녀를 포로로 삼아 인질로 데려갔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청중이 너무나 잘 알던 역사적 현실과 직결된 표현입니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애굽입니다. 본문 27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영적 은유가 아니라, 남유다가 애굽과 정치적·군사적 동맹을 맺으려 했던 실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거슬러 애굽을 의지하려 했지만, 애굽은 결국 예루살렘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동맹은 바벨론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고,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내몬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 반복된 불순종과 잘못된 선택을 영적으로 해석한 말씀입니다. 사마리아가 이미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배경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현실과 맞물려 있습니다. 남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흔들리며 하나님 대신 열강을 의지했고, 그 결과 자신이 의지하던 바로 그 열강에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간의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한 역사적 결과이자,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성취였습니다.
❖ 문화적 배경
에스겔 23장 22–35절은 단순히 영적인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여러 은유와 상징들은 당시 청중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코드였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들이 익히 아는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음행”과 “간음”의 은유는 고대 사회에서 정치적 동맹과 외교적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던 언어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개인의 사적인 관계를 넘어, 두 집단이나 국가가 언약을 맺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유다가 바벨론이나 애굽과 맺은 동맹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남편”을 맞이한 배신으로 비유될 수 있었습니다. 청중은 이 표현을 단순한 외설적 수사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벗어난 영적 간음을 뜻했으며, 신실해야 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이와 몸을 섞는 극단적인 배신의 모습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본문 23절에서는 바벨론과 갈대아의 무리뿐 아니라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함께 앗수르 사람들까지 언급됩니다. 이 묘사는 단순히 지리적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다민족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루살렘이 얼마나 다양한 열강의 매혹에 끌려갔는지를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을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고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말과 병거를 소유한 자는 곧 군사적 권력과 화려한 지위를 상징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그들의 외모적 매력이나 권세의 상징에 매혹되어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과 영적 허영이 결합된 타락을 드러내는 문화적 장치였습니다.
또한 본문 25–26절에서 묘사되는 수치의 장면은 고대 사회에서 반역자나 죄인에게 가해지던 실제 관습을 반영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은 단순한 고문이 아니라,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남기는 수치의 형벌이었습니다. 귀와 코는 인간의 외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과 존엄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이 더 이상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릴 수 없고, 열방 앞에서 완전히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강렬한 문화적 이미지였습니다.
본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벌거벗김”의 장면 역시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왕과 제사장은 화려한 옷과 장식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옷을 벗겨지고 장식품을 빼앗기는 것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한 사람 혹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권위를 완전히 빼앗기는 수치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영광의 옷을 버리고 이방의 장식품을 탐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수치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2절 이하에서 사용된 “잔”의 이미지는 문화적 배경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잔은 단순히 음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종교적·상징적 의미를 가진 도구였습니다. 연회에서 잔은 기쁨과 축복을 나누는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신들의 진노나 저주를 상징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잔’은 자주 심판의 은유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25장 15–16절에서 하나님은 “내 손에서 분노의 잔을 받아 마시게 하라”고 하시며, 열국이 그 잔을 마시고 비틀거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잔’은 바로 이 전통을 이어받아,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심판의 잔을 끝까지 마시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은 심판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고, 철저하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묘사는 당시 사람들이 가진 술잔의 문화적 경험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잔을 비운 후 그 바닥에 남은 찌꺼기까지 마시는 행위를 최후의 만족 혹은 최후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긍정적 의미가 아니라, 철저히 심판을 끝까지 경험해야 하는 처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이 단순히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잔의 파편처럼 아픔과 고통이 몸을 찌르고 남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강렬한 은유입니다.
문화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유방을 꼬집는다”는 표현입니다(34절). 이는 단순히 외설적인 언어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음녀나 죄인의 수치를 드러내는 가장 노골적인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여인의 가슴은 생명과 양육의 상징이었으나, 그것이 조롱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생명 자체가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상황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예루살렘이 맞게 될 멸망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22–35절의 문화적 배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시기 위해 당대 사람들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회적·문화적 상징들을 사용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과 음행, 벌거벗김과 장식의 박탈, 잔과 조롱, 그리고 신체 훼손과 수치의 이미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시 청중의 피부에 와 닿는 실감나는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을 좇을 때, 그 끝은 화려함과 영광이 아니라 수치와 멸망뿐임을 이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선명히 드러내셨습니다.
❖ 신학적 배경
오늘 본문의 신학적 배경은 크게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언약의 파기, 하나님의 질투와 공의, 심판의 불가피성과 보편성,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로운 언약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정치적 실패나 역사적 멸망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이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적 원리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첫째, 언약의 파기와 영적 간음의 문제입니다. 에스겔서는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죄를 “음행”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히 성적인 문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고 이방 신들과 열강을 의지한 영적 배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으셨고(호 2:19–20), 언약을 통해 그들과 결혼 관계와 같은 친밀하고 배타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애굽을 남편 삼고, 그들의 힘과 화려함을 동경했습니다. 이 행위는 언약의 신실성을 저버린 중대한 반역이었고, 신학적으로 볼 때 단순한 정치적 실수나 외교적 판단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 죄”라는 본질적 문제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질투와 거룩하신 성품입니다. 본문 2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질투”(qinaʾ, 히브리어)는 단순히 감정적 분노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이방 권세를 의지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편을 맞이하는 불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기에 배신에 분노하시고, 사랑하기에 음행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거룩과 언약적 신실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셋째, 심판의 불가피성과 보편성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걸었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31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형의 길”은 북왕국 사마리아가 걸었던 우상 숭배와 이방 의존의 길을 가리킵니다. 북왕국은 앗수르와의 동맹 속에서 멸망을 자초했고, 남왕국은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하다가 동일한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죄의 결과로 심판이 따른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롬 6:23). 따라서 심판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심판은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언약을 깨뜨리면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특정 민족이나 개인의 특권을 넘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넷째, 하나님을 잊은 죄의 본질입니다. 본문 35절은 심판의 이유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다른 신을 찾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기억하라”(신 8:18)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 기억은 곧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언약에 신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잊을 때 언약을 배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신앙적 결과였습니다.
다섯째, 잔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등장하는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성경에서 “잔”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시편 75편 8절, 이사야 51장 17절, 예레미야 25장 15절 등에서 하나님은 열방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이 잔은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끝까지 마셔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은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잔과 동일하지만, 더 깊고 더 가득한 잔입니다. 이는 죄의 반복이 죄의 심화를 낳고, 더 큰 심판을 불러온다는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눈감아주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여섯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입니다. 본문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로 이끕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반하며,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마셔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대신 드심으로, 이제 우리는 심판의 잔이 아니라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시 116:13). 따라서 에스겔 23장의 심판 언어는 단순한 과거의 경고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안에서 성취될 구속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 중요한 신학적 경고를 던집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 권세와 화려함을 좇는 것은 곧 영적 간음입니다. 교회가 세상적 성공과 정치적 힘을 의지할 때, 예루살렘과 동일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언약의 신실함을 지켜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속의 은혜를 붙잡으라는 초대입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22–24절 | 오홀리바를 치러 오는 열강의 군대
하나님은 예루살렘(오홀리바)이 의지하고 사랑하다가 결국 싫어하게 된 자들, 곧 바벨론과 갈대아 무리,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더불어 앗수르 사람들까지 충동하셔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젊고 준수한 자들이며, 고관과 귀인, 명망 있는 자들로서 말과 병거, 무기와 방패, 수레를 거느린 강대한 군대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포위할 것이며, 하나님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기셔서 그들의 법대로 예루살렘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매혹되어 따라갔던 열강들이 결국 자신을 멸망시키는 도구가 되는 역설적 장면입니다.
25–27절 | 치욕과 수탈을 당하는 예루살렘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 예루살렘은 열강의 분노를 직면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잘라내어 수치를 안기고, 자녀들을 칼로 죽이며, 남은 자들은 불에 사릅니다. 또한 그들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아, 더 이상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애굽 땅에서부터 이어온 오홀리바의 음행을 끊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애굽을 다시는 그리워하거나 바라볼 수 없게 되며, 오래된 정욕의 습관이 단절됩니다.
28–30절 |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그녀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들의 손에 넘기십니다. 그들은 미움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대하며, 모든 수고의 열매를 빼앗고, 벌거벗겨 그 음행을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온 세상 앞에 폭로되며, 이는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니라 영적 간음의 결과임이 강조됩니다. 그들이 이러한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곧 이방을 따르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우상에 자신을 내어준 죄가 그대로 되돌아와 심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31–34절 | 사마리아의 잔을 마시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갔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을 그녀의 손에 주시며, 예루살렘이 그것을 끝까지 마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잔은 놀람과 패망의 잔으로, 마시는 자는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근심과 취함으로 무너집니다. 예루살렘은 잔을 다 비울 뿐 아니라, 그 깨어진 조각까지 씹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유방이 꼬집히는 치욕을 당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35절 | 하나님을 잊은 죄의 결론
하나님은 심판의 근본 이유를 밝히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잊고 다른 신들과 이방을 붙잡은 것이 모든 죄의 뿌리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자신의 음란과 음행의 죄를 담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종적이며, 백성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의 결론을 드러냅니다.
❖ 내용 요약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오홀리바)이 걸어간 불순종의 길이 어떤 최종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구체적이고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던 바벨론과 그 동맹 세력들을 도구 삼아 그녀를 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바벨론의 화려한 군사력과 젊고 준수한 귀인들의 모습을 동경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배신과 변심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대상들을 다시 불러내셔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단순한 국제 정세의 변화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판을 맡기셨기에, 예루살렘은 그들의 법과 관습에 따라 가차 없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열강의 분노로具현化됩니다. 예루살렘은 코와 귀가 잘리는 수치와 함께, 자녀를 빼앗겨 칼에 쓰러지고 불에 태워지는 참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 피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과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또한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옷과 장식품은 모조리 빼앗기고, 결국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애굽에서부터 이어온 음행의 습관을 철저히 끊어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어린 시절부터 애굽의 정욕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유혹을 반복적으로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애굽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시고, 과거에 집착했던 음행의 근원을 잘라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미워하고 싫어하던 자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이는 심판의 아이러니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다가 싫어하게 된 대상, 한때 의지했으나 결국 멀리하려 했던 열강이 이제는 미움으로 가득 차 예루살렘을 짓밟습니다. 그들은 모든 수고와 열매를 빼앗고, 예루살렘을 벌거벗겨 온 세상 앞에 수치를 드러냅니다. 음행의 흔적과 부끄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좇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다”(30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본질은 세상과 우상에 몸을 내어준 영적 간음이었습니다.
이어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음을 지적하시며, 동일한 심판의 잔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십니다. 이 잔은 “깊고 크고 가득한 잔”으로, 단순히 한 모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을 마시고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취하여 비틀거리고 근심 속에 무너집니다. 더욱이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이 일회성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잔해조차 삼켜야 하는 철저하고 끝까지 따라오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유방을 꼬집는다”는 표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수치의 상징으로, 생명과 양육의 상징이 조롱과 학대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배신한 언약 백성이 맞게 될 가장 치욕적인 결말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죄의 근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3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세상과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니 다른 것에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고대 예루살렘의 비극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은 것이 곧 심판의 도구로 변모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동경하다가 바벨론에게 짓밟혔듯, 오늘날 우리의 우상도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신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소망을 열어줍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의 잔을 마셔야 했지만,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신 진노의 잔 덕분에 구원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의 잔을 끝까지 비우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에 신실할 때, 심판이 아닌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회개로 나아가게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참된 위로와 소망을 붙잡게 만듭니다.
📖 붙잡는 말씀
3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오늘 본문의 전체 맥락을 응축하는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타락을 단 하나의 근원적인 문제로 요약하십니다. 그것은 곧 “나를 잊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동경하고, 애굽을 사모하며, 이방의 우상들을 좇은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언약은 희미해지고, 신앙은 형식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다른 주인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잊는 것은 단순한 무지나 망각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반이자 신앙의 근본적 파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대상을 찾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화려함에 매혹되어 열강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신앙을 잃은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극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죄악 목록—음행, 우상숭배, 배교, 언약 파기—는 표면적 현상일 뿐, 그 뿌리는 “하나님을 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은 죄의 근본 구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잊는 순간 모든 죄의 사슬에 묶여 결국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를 담당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쁜 일상과 치열한 경쟁, 빠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잊고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눈앞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지혜와 돈의 힘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삶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뒷자리에 밀려나고,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우리의 선택을 지배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본질을 잃고 껍데기만 남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위험을 고발합니다.
“나를 잊었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선택이며, 의도적 배신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대신 열강을 선택했고, 그 대가를 철저히 치러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으면 예루살렘과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매일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하고,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한 절망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반드시 자기 죄를 책임져야 함을 분명히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 죄를 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그 무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잔을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릴 것인가, 아니면 앞에 모실 것인가. 결국 신앙의 길은 기억과 망각의 길목에서 갈라집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삶의 작은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와 소망을 동시에 줍니다. 경고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죄의 대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며 구원의 은혜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부르심이자, “다시는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 단어 연구
❖ 잔 (כּוֹס / 코스)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כּוֹס (kos, 코스)는 기본적으로 ‘잔, 컵’을 의미합니다. 물이나 포도주를 담아 마시는 그릇을 지칭하는 일상적인 단어지만, 성경에서는 단순한 그릇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잔은 축복과 환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시 23:5,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담은 잔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시 75:8, 렘 25:15). 따라서 이 단어는 ‘마시는 행위’를 통해 은혜나 심판을 경험하게 하는 상징적 도구로 쓰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몫, 혹은 인간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운명을 가리키는 깊은 함의를 담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31–34절에서 “잔”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심판의 도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오홀리바(예루살렘)에게 언니 사마리아가 이미 마셨던 잔을 그대로 주십니다. 이 잔은 단순히 포도주가 담긴 잔이 아니라, 놀람과 패망과 수치가 가득 담긴 심판의 잔입니다. 더구나 그 잔은 “깊고 크고 가득하다”고 묘사되며, 부분적으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언니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일한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심지어 잔을 다 비우고 난 후에는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고 표현됩니다. 이는 심판이 단순한 일시적 고통이 아니라, 잔해와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끝없는 고통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묘사는 수치와 모욕의 극치를 드러내며, 그 잔을 마시는 것이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존엄 자체가 파괴되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잔은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반한 자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결과이자, 사마리아의 전철을 밟은 예루살렘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몫을 상징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잔”은 인간이 선택한 죄의 결과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경 전반에서 잔은 하나님의 분노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사 51:17, 렘 25:15). 그러나 동시에 시편에서는 축복과 구원의 잔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시 116:13). 에스겔 23장의 잔은 전적으로 심판의 잔으로,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좇은 언약 백성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형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가면 이 심판의 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신 잔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비우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심판의 잔을 면하고, 대신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잔은 경고와 동시에 은혜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심판의 잔을 마시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높이 들 수 있는 새로운 은혜가 주어집니다.
❖ 질투 (קִנְאָה / 킨아)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קִנְאָה (qin’āh, 킨아)은 기본적으로 ‘질투, 열심, 뜨거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소유욕적인 질투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신 4:24)이라고 말씀하실 때의 질투는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지키시는 성품을 나타내며, 우상 숭배와 언약 배반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qin’āh는 단순히 감정적 질투가 아니라, 언약의 신실성과 거룩을 수호하려는 하나님의 불타는 열심을 나타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언약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반응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로 부름받았으나,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같은 이방 나라들을 남편 삼아 음행을 반복했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가장 치명적이고 불타는 감정이 바로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배신 앞에서 그저 무관심하시거나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시고, 질투로 응답하십니다. 이는 곧 언약을 파괴한 자에게 임할 불가피한 심판의 동기가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구체적인 징벌로 나타납니다. 열강이 분노하여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자르고, 자녀를 빼앗으며, 옷과 장식품을 탈취하게 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질투로 인한 심판입니다. 즉, 질투는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심판으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타락을 보고 질투하심으로, 마치 불타는 불길처럼 죄를 태워 없애고, 음행을 끊어내시는 공의로운 행동을 하십니다. 따라서 본문 속 질투는 단순한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언약적 불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반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질투”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거룩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관심한 신이 아니십니다. 언약을 맺은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시며, 질투하시기에 심판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소유욕적 질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거룩을 지키기 위한 열심이며, 사랑의 증거입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질투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멸망을 경험했지만, 그 심판조차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이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이 질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질투하시고, 그 질투를 십자가의 심판으로 쏟으셨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새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세상의 권세와 우상을 붙잡는 것은 영적 음행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옵니다. 따라서 질투는 단순히 두려운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부르심을 담고 있습니다.
❖ 벌거벗김 (עָרוֹם / 아롬)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עָרוֹם (ʿārôm, 아롬)은 기본적으로 ‘벌거벗은, 옷을 벗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수치, 연약함, 무방비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한 사건에서처럼, ‘벌거벗음’은 죄로 인해 드러난 인간의 수치와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이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며, 권위와 존귀가 철저히 무너진 상황을 드러내는 강력한 언어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6절과 29절에서 예루살렘이 벌거벗겨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 세력은 예루살렘의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아 그녀를 벌거벗은 몸으로 만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재산을 빼앗기는 사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정체성과 존귀함이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언약 백성으로 입히시고, 존귀의 옷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옷을 스스로 더럽혔고,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며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벌거벗김’은 영적 간음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음행의 은밀한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 듯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은 모든 죄를 드러내십니다. 벌거벗겨진다는 것은 곧 그동안 숨기려 했던 음행과 수치가 온 세상 앞에 폭로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왕은 왕의 옷으로, 제사장은 제사장의 옷으로 그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권위와 지위, 정체성을 모두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신부로서 존귀함을 유지할 수 없었고, 온 세상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문은 벌거벗김을 통해 예루살렘의 음행이 결코 은밀히 끝날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며,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빛 가운데 끌어내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자신이 의지했던 바벨론에게 배신당하고, 그들 손에서 옷을 빼앗기며 벌거벗겨진 채 수치를 당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잊은 백성이 세상에 의지할 때 맞이하게 되는 최후의 결말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벌거벗김’은 죄의 결과로 드러나는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설 수 없게 만드는 본질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에스겔 23장의 벌거벗김 역시 동일한 신학적 원리 위에 있습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붙잡자, 하나님은 그들을 벌거벗겨 죄와 수치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벌거벗김은 심판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회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숨긴 채 두지 않으시고, 드러내어 심판하심으로써 백성에게 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벗겨내고 진정한 회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짊어지셨기에, 우리는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계 19:8).
따라서 ‘벌거벗김’은 두 가지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좇는 모든 자는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둘째, 그 수치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단순히 심판의 이미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회복된 복음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신학적 상징입니다.
❖ 음란/음행 (זְנוּת / 즈누트)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זְנוּת (zenût, 즈누트)은 ‘음란, 음행, 매춘, 간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으로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단순히 성적 부도덕을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이나 이방 나라를 따르는 영적 배반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우상 숭배와 성적 문란이 종종 함께 나타났기 때문에, ‘음란’은 종교적·사회적 타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zenût는 성경에서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반하는 태도를 폭로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2–3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반복해서 “음란”과 “음행”으로 규정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신실해야 했지만, 대신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같은 이방 열강을 의지하며 동맹을 맺고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본문 30절은 명확히 말합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음란’은 단순히 도덕적 문란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의 권세와 우상에게 마음을 준 영적 간음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음행은 은밀히 감춰진 것이 아니라,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는 죄였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한 자들, 즉 바벨론과 그 동맹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예루살렘의 음행을 폭로합니다. 벌거벗김, 장식품의 탈취, 수치와 조롱은 바로 이 음행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남편으로서, 언약을 깨뜨린 아내의 음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사마리아가 걸었던 동일한 길을 걸으며, 사마리아의 잔을 똑같이 마셔야 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음란/음행’은 예루살렘의 모든 죄악의 총칭입니다. 경제적 착취, 정치적 동맹, 군사적 숭배, 종교적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잊은 데서 비롯된 영적 음행으로 규정됩니다. 본문은 ‘음행’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루살렘의 죄가 단순히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언약의 근본을 무너뜨린 반역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음란/음행’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신부로 비유하시고,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로 설명하십니다(호 2:19–20, 겔 16장). 따라서 음행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언약적 배신이며 영적 불륜입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두고도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깊은 모독이며, 결국 심판을 불러옵니다.
또한 ‘음행’은 인간의 반복되는 죄성을 보여줍니다. 북왕국 사마리아가 음행으로 멸망했음에도 남왕국 예루살렘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죄를 되풀이하는 본성을 잘 드러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음행은 단순한 한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하나님을 잊을 때마다 반복하는 근본적 죄의 패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음행’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 빛나게 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연약하고 종종 영적 간음에 빠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피 흘려 정결케 하십니다(엡 5:25–27). 그러므로 음행은 심판을 불러오는 단어이자, 동시에 복음을 통해 정결하게 회복되는 은혜를 갈망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 잊다 (שָׁכַח / 샤카흐)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שָׁכַח (šāḵaḥ, 샤카흐)은 ‘잊다, 기억하지 못하다, 망각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일상적으로는 단순히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훨씬 더 깊은 영적 함의를 지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잊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의 소홀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다른 신이나 세상의 가치로 대체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라”(신 6:12, 8:11)고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 곧 언약을 파기하는 심각한 죄임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샤카흐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버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35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여기서 ‘잊다’라는 표현은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입니다. 예루살렘이 범한 수많은 죄(바벨론을 의지한 것, 애굽을 그리워한 것, 앗수르와 동맹한 것, 우상을 섬긴 것)는 결국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은 언약에 신실함을 유지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잊는 순간 인간은 다른 대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눈앞에 보이는 열강의 힘과 화려함을 붙잡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의 소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배반이자 의도적인 무관심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대신 세상의 권세와 쾌락을 삶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정체성은 무너지고, 벌거벗김과 조롱,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하는 결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잊다”라는 말은 곧 언약적 신실성을 상실한 상태를 표현합니다. 마치 남편을 배반한 아내가 더 이상 남편을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자신을 남편 삼으신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잊다”는 인간의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잊은 자들은 음부로 돌아가리라”(시 9:17)고 말하며, 하나님을 잊는 것이 곧 멸망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반대로 신앙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에서 출발합니다. 출애굽 사건, 율법, 성전 예배는 “기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잊음”은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다른 것을 붙잡는 선택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는 이 문제가 더 깊이 다루어집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자기 욕망과 세상의 신들을 더 쉽게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망각의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나를 기억하라”(눅 22:19)고 말씀하시며,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은혜의 표징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잊다”라는 단어는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곧 죄와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언약 안에서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본질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와 약속을 잊지 않는 데 있습니다.
📖 절별 주해
22절 | 하나님이 충동하신 대적의 부름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방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바벨론과 그 동맹국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과 화려한 문화를 매혹적으로 바라보았고, 스스로도 그들과 같은 위세를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맹이 오래가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리자, 예루살렘은 곧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반역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존심과 독립을 내세운 행동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채 세상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예루살렘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된 세력들을 충동하여 공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충동하다”라는 말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자극하여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개입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국제 정치의 변화나 동맹 관계의 파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는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의지했던 대상이 파괴의 도구로 변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된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붙잡을 때, 그것은 결국 심판의 도구로 바뀌게 됩니다. 돈, 권력, 인간 관계, 세상의 성공—all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치는 채찍으로 변모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다가, 또 언제 그것을 미워하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 대신 붙잡은 그 무언가가 언젠가 심판의 도구로 바뀌지 않을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서지 않으면, 예루살렘과 같은 비극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23절 | 심판에 동원된 열강의 세력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양한 세력을 불러 모으십니다. 바벨론과 갈대아뿐 아니라,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함께 앗수르 사람들까지 동원됩니다. 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다민족 제국의 힘과 무서운 군사적 연합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앗수르 사람들의 언급은 아이러니합니다. 예루살렘은 과거 앗수르의 세력을 동경하고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들이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들을 “준수한 청년, 고관, 감독, 귀인, 유명한 자, 말 타는 자들”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모의 매력을 넘어, 사회적 위세와 정치적 영향력을 갖춘 자들을 뜻합니다. 또한 말을 소유했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이들의 매력에 매혹되어 자신들의 안전을 그들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매혹은 심판의 도구로 바뀌었고, 예루살렘을 짓밟을 세력으로 돌변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사람의 눈에는 부러움과 매혹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을 떠난 순간 오히려 파괴와 수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은 결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그 대상을 심판의 도구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24절 | 이방 법정에 맡겨진 재판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심판의 구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대적들은 무기와 병거, 수레와 방패로 철저히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포위합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묘사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권세에 기대었기에, 이제는 그 권세에 둘러싸여 도망할 길조차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직접 집행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방 세력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충격적인 점은 예루살렘이 더 이상 언약 백성의 기준에 따라 재판받지 않고, 이방인의 법과 질서에 따라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버린 자에게는 언약의 보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은 이제 세상의 법정 앞에 서서 그들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심각한 경고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순응한다면, 결국 그 질서 속에서 무너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린 자는 세상의 법에 붙잡혀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정체성을 붙들라는 경고이자,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로서 심판을 집행하신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25절 | 하나님의 질투와 치욕의 심판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질투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한 감정의 분노가 아니라,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을 뜻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질투처럼,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향해 질투하십니다. 이 질투는 단순히 감정적 반응으로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이고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은 대적들의 손에 넘어가 코와 귀가 잘리는 모욕을 당합니다. 코와 귀는 얼굴의 중심적인 기관으로, 인간의 존엄과 외형을 대표합니다. 이를 잘라낸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 존재의 수치와 존엄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칼로 엎드러지고 남은 자들이 불에 사라지는 장면은, 공동체의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철저한 심판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현재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끊어내시는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질투의 결과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존엄의 상실과 공동체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죄가 개인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가정과 자녀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후대의 생명과 정체성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세상과 타협하며 우상을 붙잡을 때, 그 결과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다음 세대에까지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신실성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공의로운 질투로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후대의 생명과 공동체 전체를 책임지는 언약적 결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6절 | 옷과 장식의 탈취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예루살렘의 옷과 장식품이 벗겨지고 빼앗기는 장면은 단순한 물질적 손실이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고, 장식품은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때 예루살렘에게 존귀의 옷을 입히시고,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우상 숭배와 음행에 사용하였으므로, 이제 그것들이 모두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옷을 벗기고 장식을 빼앗는 것은 단순한 전쟁의 약탈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과 존귀가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벌거벗은 상태로 세상 앞에 드러나는 수치는 하나님을 잊은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옷과 장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데 소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은혜를 배반한 자들에게 더 이상 그 축복이 남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내 욕망과 세상의 우상에 사용한다면, 그 은혜는 결국 심판의 날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옷은 거룩을 위해 입혀진 옷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수치와 벌거벗김이 아닌 존귀와 영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7절 | 애굽의 음행을 끊으시는 하나님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의 뿌리를 정면으로 다루시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의 음행은 단순히 최근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애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그들의 우상과 풍습에 익숙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애굽의 정욕과 우상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의 정욕을 끊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도 반복적으로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에도 유다는 바벨론에 맞서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에서 그 뿌리를 단호히 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고,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더 이상 애굽을 의지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차단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죄의 근원을 제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을 향한 끊을 수 없는 미련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그 유혹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십니다. 이는 고통스럽고 파괴적인 과정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으로 이끄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애굽과 같은 뿌리 깊은 죄의 습관이 존재합니다. 과거로부터 붙잡아 온 죄의 습관과 세속적 욕망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강력한 심판과 징계를 통해 그 뿌리를 제거하십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옛 습관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진정한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28절 |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이 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아이러니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바벨론을 사랑하고 동경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압제와 간섭이 싫어졌고, 그래서 애굽과 새로운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워하는 자, 싫어하는 자”의 손에 예루살렘을 넘겨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외부의 우연한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역사임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정치적 배신과 동맹의 붕괴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붙잡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고 의지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미워하는 존재가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는 도구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는 사랑할 대상도, 의지할 대상도, 끝내 지켜줄 대상도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붙잡았던 것이 심판의 도구로 돌변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과 사람을 더 의지할 때, 결국 그 대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시며, 그 외의 모든 의지는 결국 심판과 멸망으로 이어짐을 이 말씀을 통해 경고하십니다.
29절 | 미움의 행위와 수치의 폭로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행음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이 구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치욕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대적들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접근하여, 그동안 예루살렘이 애써 쌓아 올린 모든 수고를 빼앗아 갑니다. 경제적 풍요, 정치적 성취, 문화적 영광—all 이 모든 것이 단숨에 무너집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 앞에 내던져집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약탈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감추고 싶었던 음행의 실체가 드러나고 만천하에 수치가 공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은 몸”은 단순히 옷이 벗겨진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영적 음행이 철저히 폭로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을 따라가며 자신들의 힘과 지위를 과시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버린 결과 그 모든 영광은 빼앗기고 수치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어, 숨을 곳 없는 심판의 현장으로 몰아가십니다.
또한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는다”는 표현은, 하나님 없이 세운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고 헛된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을 배제한 수고는 결국 헛수고가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운 왕궁, 쌓은 재물, 추구한 권력—all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심판의 이유가 되고, 그 결과로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교훈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세운 모든 수고는 결국 빼앗깁니다. 화려함과 성취로 자신을 감추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잊은 수고는 수치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며 쌓은 수고는 영원한 열매가 됩니다.
30절 | 음란의 결과로 맞이한 심판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이 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한 모든 수치와 파괴의 근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심판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스스로 선택한 음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이방을 따르고, 그들의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죄와 결과 사이의 인과 관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눈에 보이는 열강의 힘과 우상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영적 배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따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불공정한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의 공의로운 결과였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대상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보다 더 크고 강한 대상을 찾아 붙잡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럽히고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죄의 달콤함은 잠시뿐이고, 그 끝은 반드시 심판과 수치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권세, 돈, 인간관계, 쾌락—all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럽히고 심판으로 이끌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밝히시고, 그 결과를 스스로 담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죄의 본질을 직시하고, 하나님만을 기억하며 그분께 신실하게 서야 합니다.
31절 |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간 예루살렘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한마디로 요약하십니다. “네 형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은 예루살렘이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이 걸었던 동일한 죄의 길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우상 숭배와 열강 의존으로 인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멸망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과로 예루살렘의 손에 “그의 잔”을 주십니다. 잔은 단순한 음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심판과 운명을 상징합니다. 즉, 사마리아가 마신 심판의 잔을 이제 예루살렘이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죄에 동일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공의의 원리를 드러냅니다. 백성의 출신이나 지역,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반복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무서운 교훈을 줍니다. 앞선 세대의 죄와 그 결과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길을 따라간다면 결국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개인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반복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외면한다면,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간 예루살렘처럼 우리 역시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나는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의 멸망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더욱 큰 심판을 불러옵니다.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갔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길을 따라간다면 동일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32절 | 깊고 큰 심판의 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십니다. 그 잔은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입니다. 이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깊고 크다는 표현은 심판의 강도와 범위가 매우 크다는 것을 나타내며, 가득히 담겼다는 말은 심판이 피할 길 없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뜻합니다.
그 잔을 마신 결과 예루살렘은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패배의 아픔을 넘어, 세상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한때 화려함과 영광을 자랑하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의지했던 세상 권세가 이제는 그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수치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가 얼마나 철저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줍니다. 심판은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명예와 존귀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스스로 버린 자들이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결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할 때, 그 영광은 반드시 조롱으로 변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힘과 화려함을 의지한다면, 결국 세상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의 근원이심을 기억하고, 그분께만 신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33절 | 놀람과 패망의 잔에 취함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이 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그 잔은 단순히苦味를 가진 잔이 아니라, 놀람과 패망의 잔입니다. “놀람”은 갑작스러운 충격과 두려움을 뜻하고, “패망”은 완전한 몰락을 의미합니다. 즉 예루살렘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잔은 또한 “넘치게 취하고 근심”을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주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 심판에 압도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고 이방과의 동맹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판의 잔을 마셔 완전히 무너지고, 깊은 근심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잔”이라는 표현은 북왕국의 멸망을 거울로 삼아야 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음행과 우상숭배의 결과로 멸망했으며,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의 무서움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길을 걸어가 결국 같은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죄에는 동일한 심판을 내리시며, 역사적 전례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경고가 됩니다. 과거의 실패와 심판을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역사, 교회의 역사, 개인의 과거에서 이미 드러난 죄의 결과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놀람과 패망의 잔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과거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34절 | 잔의 조각까지 씹는 철저한 심판
“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히 잔을 마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 기울여 마시고”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심판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부분적 형벌이나 일시적 징계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전면적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단순히 쓰라린 심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잔해와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고통을 뜻합니다. 이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뼈아픈지, 끝까지 피할 수 없는지를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표현은 당시 문화에서 여인의 모욕과 수치를 상징하는 강렬한 언어입니다. 예루살렘이 겪는 심판은 단순한 멸망이 아니라, 존엄과 명예를 완전히 상실하는 치욕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이러한 심판은 인간의 우연이나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불가피한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결코 부분적이지 않고, 끝까지 치러야 하는 무거운 대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의 철저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잔을 대신 마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잔해까지 씹는 심판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는 동일한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35절 | 하나님을 잊은 자가 담당할 죄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종결짓는 핵심 이유를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이 당해야 할 모든 치욕과 멸망, 심판의 잔을 마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히 우상을 섬기거나 이방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외면한 데 있습니다.
여기서 “잊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의 결핍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그분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적극적인 배반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등 뒤에 버렸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취급하며, 완전히 외면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가장 심각한 언약적 모독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잊고 다른 자를 따르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나님을 잊은 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은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지는 형벌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음란과 음행의 죄를 지었다면, 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변명이나 회피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각자가 자기 죄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는 결국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힘과 욕망을 붙잡게 되고, 그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로 변합니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구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죄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절은 복음의 필요성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잊고 자기 욕망을 따르기에, 결국 스스로 죄를 담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멸망이 아닌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버렸다”라는 고발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를 기억한다”라는 은혜의 선언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오직 그분만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묵상
에스겔 23장 22–35절의 본문은 마치 충격적인 재판정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죄의 뿌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던 대상에게서, 이제는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져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이 동경했던 바벨론과 앗수르, 그리고 의지하려 했던 애굽. 이 모든 세력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수치가 폭로되며, 심판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야 했습니다.
본문을 묵상할 때 가장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모든 죄의 근원을 “나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죄는 결국 기억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됩니다. 기억의 공백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 뒤에 밀어낸 자리는 곧 세상의 권세, 욕망, 쾌락이 채웁니다. 예루살렘이 애굽과 앗수르, 바벨론을 바라본 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직장에서의 성과, 가정의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같은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점령하면, 하나님은 어느새 우리의 등 뒤로 밀려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눈에 보이는 힘과 매혹적인 대상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치는 도구로 돌아옵니다.
심판의 잔을 “조각까지 씹으며” 마셔야 한다는 표현은 너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죄의 결과가 철저하고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죄는 언제나 끝까지 값을 치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기고,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우리의 수고를 빼앗고, 수치를 드러내며, 끝내는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분명히 보여주심으로써,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본문 속에서도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스스로 죄를 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심판의 잔을 마시셨고, 벌거벗김을 당하셨으며,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심판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절망 가운데 머무르지 않고,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고 세상의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 같았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치는 심판의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며,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작은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올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죄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을 때 심판이 임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은혜와 구원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안전이자 소망입니다.
상징과 의미
-
오홀라와 오홀리바 :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민족의 관습을 따라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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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의 비유 :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저버린 것을 사람의 불륜 및 음행에 비유하여, 영적 배신과 배타적 충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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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선언 :
반복된 타락 후에 마침내 임박한 심판이 언급되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 없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문학적 특징
에스겔
23장은 다른 예언서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죄악의 본질과 그 심각성을
강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관용구와 상징, 인물의 대조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본문은 경고합니다.
- 나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우상숭배적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타락과 심판
본문 요약
에스겔 23장은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비유로 들어 사마리아(북이스라엘)와 예루살렘(남유다)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자매가 어린 시절부터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으며, 이방 나라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으며 영적 간음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홀라(사마리아)는 앗수르와 연합하여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오홀리바(예루살렘) 역시 바벨론과 이집트에 기대면서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의지하던 나라들에 의해 멸망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이방 나라들의 문화와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그들 손에 멸망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조
- 두 자매의 음행과 배교 (1~21절)
- 오홀리바의 더 큰 타락과 심판 (22~35절)
-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36~49절)
두 자매의 음행과 배교 (1~21절)
하나님께서는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를 한 어머니에게서 난 두 자매로 묘사하십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정한 행동을 일삼으며, 이방 나라들과 혼합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를 사랑하며 그들의 신들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결국 앗수르에게 의지하다가 멸망당합니다. 하지만 오홀리바는 오히려 더 심하게 타락하여, 바벨론과 애굽을 따르며 그들의 풍습을 본받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과 권력을 따라갔음을 의미합니다.
오홀리바의 더 큰 타락과 심판 (22~35절)
하나님께서는 오홀리바(예루살렘)가 오홀라보다 더 악한 행위를 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녀는 바벨론을 의지하고, 그들과 동맹을 맺으며 더욱 깊은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결국 그녀를 배신하고 예루살렘을 침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로 인해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의지했던 나라들이 오히려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할 때 결국 그 세상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36~49절)
하나님께서는 두 자매가 행한 모든 죄를 열거하시며, 그들의 피 흘림과 우상 숭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우상들에게 희생하며,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그들이 당할 형벌이 다른 나라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죄로 인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23장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의지하며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따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지만, 동시에 그의 목적은 회개와 회복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신뢰를 두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월 9일(화) 에스겔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슬피 탄식하라(21:6)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Therefore groan, son of man! Groan before them with broken heart and bitter grief.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찌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방백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붙인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찌어다.
Cry out and wail, son of man, for it is against my
people; it is against all the princes of Israel. They are thrown to the
sword along with my people. Therefore beat your breast.
탄식하다(584) 아니흐(’ânach) אָנַח 스트롱번호 584
발음 [ ’ânach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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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원형 니팔형 : 한숨짓다, 신음하다, 한탄하다, 출2: 23, 욜1:18.
-
b.원형 [עַל과 함께 쓰여 신음의 원인을 나타내는 경우], 겔21:12(7).
-
c. 원형 [מִן과 함께 쓰여 신음의 원인을 나타내는 경우], 출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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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탄식하다(사 24:7, 겔 21:6, 욜 1:8).
[명] 탄식(애 1:21).
슬피하다(4814) מְרִירוּת 메리루트(merîyrûwth) 스트롱번호 4814
발음 [ merîyrûwt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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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슬픔, 괴로움, 비애, 비탄, 불행, 겔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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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부] 슬피(겔 21:6).
허리(4975) 모템( môthen) מֹתֶן
스트롱번호 4975
구약 성경 / 5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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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느다란, 날씬한.
-
a. [주]쌍수로만 쓰임: מָתְנַיִם 허리, 창37:34, 왕하4:29, 9:1, 사20:2, 시66:11, 렘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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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허리(창 37:34, 왕상 20:31, 사 20:2), 요통(사 21:3).
[동] 차다(겔 9:3).
끊어지다(7670) 쉬브로운( shibrôwn) שִׁבְרוֹן
어원 / 766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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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깨뜨림, 겔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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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남성 멸망, 렘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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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멸망(렘 17:18), 끊어짐(겔 21:6).
슬피 탄식하라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슬피 탄식해야 할까요?
에스겔서 21장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선포하시며, 바벨론의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칼'이라는 이미지(심상)를 사용하여 임박한 재앙과 파멸의 위중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1-7절 : 하나님의 칼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슬퍼하며 경고하는 에스겔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 8-17절 : 날카로운 칼, 갈고 닦은 칼에 대한 비유로 심판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알립니다.
- 18-27절 : 바벨론 왕이 갈림길에서 점을 치고, 결국 예루살렘을 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 28-32절 : 암몬 족속을 향한 별도의 심판 예언이 이어지며,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강조합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메시지
에스겔서 21장이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불가피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칼, 즉 심판이 내려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는
개인적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 겪으며 슬퍼함을 표현합니다.
이는 심판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정의,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보여줍니다.
묵상포인트
-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삶의 방향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성을 돌아봅니다.
- 에스겔처럼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의 아픔에 함께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이 함께 있음을 기억하며,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함을 묵상합니다.
오늘날
나의 삶에도 때때로 '하나님의 칼'과 같은 경고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 마음과 행실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변의 아픔과 불의를 외면하지 말고, 에스겔처럼 함께 슬퍼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에스겔 21장 : 왜 하나님의 칼은 모두를 향했는가?
에스겔서
전반에 흐르는 긴장감 넘치는 심판의 예언은 21장에 이르러 '여호와의 칼'이라는 섬뜩하고도 역동적인 이미지로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멸망의 선고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현현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지자가
겪어야 하는 깊은 고뇌와 백성들의 처절한 애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 심지어 이방 민족인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칼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모든 불의가 청산된 후 도래할
진정한 통치에 대한 희미한 소망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불가피한 심판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스겔 21장의 예언이 선포될 당시,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 제국의 압제 하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 대한 반역을 꾀했지만, 이는 오히려 바벨론의 더욱 가혹한 침공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내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도성이 설마 망하겠느냐"는 안일한 낙관론과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위로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돌아보기보다는 현실의 고통만을 원망하거나, 혹은 헛된 기적을 바라며 현실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무감각과 임박한 파국 앞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칼'이 이미
뽑혔으며, 그 칼날이 예루살렘을 향해 무섭게 다가오고 있음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 예언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 이미 시작된
심판의 집행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는 남아있는 고국과 성전에 대한 마지막
희망마저 꺾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처절한 심판의 메시지는,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정화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과 공동체의 죄악이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역사를 통해 실현되는지를 목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위기와
심판의 징조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을 발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에스겔 21장은 여러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는 바로 '여호와의 칼'입니다.
이 칼은 다양한 대상과 상황을 향해 휘둘러지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임할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땅을 향하여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칼을 칼집에서 빼어 네 가운데에서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끊어 버릴 것이다."(겔 21:3, 우리말성경) 라는 선언은 심판의 무차별성과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이 끔찍한 소식에 에스겔은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탄식하라"(겔 21:6)는 명령을 받는데, 이는 선지자가 백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체감하며 깊이 애통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둘째, 칼의 노래 (8-17절) :
이 부분은 칼 자체를 의인화하여 그 예리함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노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겔 21:9-10, 새번역) 와 같은 구절들은 칼의 위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에스겔은 손뼉을
치며 칼의 임함을 재촉하고, 그 칼이 세 번 거듭 사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일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는 심판의 강도와 반복성을
암시합니다.
셋째, 바벨론 왕의 칼 (18-27절)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 길, 즉
암몬의 수도 랍바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점을 치는 모습을 묘사하게 하십니다.
그는 화살을 흔들어 점괘를
얻고, 드라빔(우상)에게 물으며, 짐승의 간을 살펴봅니다.
결국 점괘는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고,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악하고 더러운 군주"(시드기야 왕을 지칭)의 마지막 날이 이르렀음이 선포됩니다.
그의 왕관과 관모는
벗겨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며 높은 자가 낮아지는 전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기존
질서의 완전한 파괴와 함께 장차 임할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넷째, 암몬 족속을 향한 칼 (28-32절) :
마지막으로 칼은 암몬 족속을 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지만, 그들 역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이 선포됩니다.
그들의 칼은 다시 칼집에
꽂히지 못하고, 그들이 지음 받은 곳, 그들의 본토에서 심판받아 불에 삼켜질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칼'의 행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여호와의 칼'의 대상과 특징 (겔 21장) | 주요 내용 및 의미 |
|---|---|
|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소, 땅) (1-7절) | 의인과 악인 모두를 끊는 무차별적 심판. 선지자의 깊은 탄식 동반. |
| 칼의 노래 (8-17절) | 날카롭고 빛나는 칼, 살육과 파괴를 위해 준비됨. 심판의 강도와 반복성. |
| 바벨론 왕의 도구로서의 칼 (18-27절) | 점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함. 시드기야 왕의 폐위, 기존 질서의 전복, 장차 올 '마땅히 얻을 자' 암시. |
| 암몬 족속 (28-32절) | 이스라엘 멸망을 기뻐한 죄에 대한 심판. 철저한 멸망 예고. |
에스겔 21장의 '여호와의 칼'은 단순한 전쟁 무기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 심판의 불가피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존재론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칼'이 가진 심판의 보편성과 무차별성
신정론(Theodicy), 즉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신의 정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칼이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끊어
버릴 것"이라는 선언은, 공동체적 심판 앞에서 개인의 의로움이 때로는 무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받는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야기하며, 거대한 악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책임과 판단이
어떻게 마비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 역시 개인의 행위를 넘어선 공동체적 죄악의 결과로 임할 때, 그
범위는 개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무서운 공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심판의 불가해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둘째, 에스겔에게 명령된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탄식"
고통에 대한 공감과 예언자적 중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심판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미리 체감하고
그들을 위해 애통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강조한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한한 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에스겔의 탄식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고통받는 타자(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연대와 책임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대변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심판의 메시지 속에는 역설적으로 사랑과 연민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시드기야 왕의 폐위와 함께 선포된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부패하고 불의한 통치의 종말은 필연적이며, 그 자리에는
진정으로 '마땅히 얻을 자', 즉 공의롭고 참된 통치자가 와야 한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혁명과
개혁의 열망,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기대를 반영합니다.
철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역사의 필연적 발전을 이야기했다면, 에스겔은 신적 개입을 통해 도래할 궁극적인 정의의 왕국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마땅히 얻을 자'에 대한 기대는 훗날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신학적 씨앗이 됩니다.
에스겔 21장의 '여호와의 칼' 이야기는 섬뜩하고 충격적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과 성찰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고대 예언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요?
첫째, 우리 시대의 '여호와의 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물리적인
재앙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구조적인 악, 만연한 불의, 걷잡을 수 없는 환경 파괴, 인간성 상실과 같은
보이지 않는 위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칼날' 앞에서 "설마 나에게까지 미치겠어?"라는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겔의 예언은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임박한 위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가장 큰 죄악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이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와 같다." - (익명의 격언 재구성)
둘째, "의인과 악인을 함께 끊는" 심판 앞에서 우리는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개인의 경건함과 선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적 죄악의 물결 앞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나의 작은 선행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기보다,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 에스겔의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탄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세상의
고통과 불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깊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있습니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무감각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탄식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연민의 감정을 회복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울고 기도하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차가운 이성이 아닌, 뜨거운
가슴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넷재, "마땅히 얻을 자"에 대한 소망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게 하는 동력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 질서가
영원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평화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에게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마땅히 얻을 자'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에스겔 21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심판의 칼날'을 감지하고 있는가?
- 불의와 고통 앞에서 나는 침묵하고 있는가, 아니면 탄식하며 행동하고 있는가?
- 나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인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에스겔 21장은 '여호와의 칼'이라는 강력하고도 무서운 상징을 통해 임박한 심판의 필연성과 그 범위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 칼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향하며,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백성들의 고통을 예감하는 깊은 탄식을 요구합니다.
또한 바벨론 왕을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 왕 시드기야의 패역한 통치를 종식시키고, 기존의 모든 질서를 전복시킨 후 '마땅히 얻을 자'를 통해 새로운 통치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했던 이방 민족 암몬에게까지 심판의 칼날이 미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국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결국 에스겔 21장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이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그리고 그 절망적인 파괴 속에서도 어떻게 새로운 질서와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이 고대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안일함에서 벗어나 시대의 위기를 직시하고, 정의를 향한 열망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1:1~12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냉혹한 형벌이 아니라, 죄로 인해 무너져가는 백성들의 회복이었다.
심판 가운데서도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에스겔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고”, “슬피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바울도 십자가를 거부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큰 근심과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동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바울은 저주를 받아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유다 민족들을 사랑했기 때문인데, 이 또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자신의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다.
하나님의 사람은 타인의 죄를 보고 비웃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할 줄 알고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인들과 연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죄인들과 약자의 친구가 되는 자다.
말보다 눈물로, 비난보다 중보로 서는 자가 곧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어줄 사람을 찾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찾으신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에스겔 21:6 (개역개정 / NASB)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As for you, son of man, groan with breaking heart and bitter grief, groan in their sight.
선지자 에스겔을 찾아온 유다 장로들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탁을 단지 비유 정도로 가볍게 여겼습니다(20:49). 이에 에스겔은 칼의 심판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절규하며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반부인 1절-7절은 칼의 비유, 그리고 후반부인 8절-17절은 칼의 노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남에서 북까지, 곧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3-5절). 에스겔은 이 같은 상황에서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칼이 준비되어 있다고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9-11절). 이 심판에는 의인과 악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칼은 한 번만 쓰이는 게 아니라 두세 번 거듭 쓰일 것이라고 거듭 경고합니다(14절). 확실한 심판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칼은 분노가 다 풀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16-17절).
에스겔을 통해 전해지는 오늘 본문은 두려운 칼의 심판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까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는 구절이 더 그랬습니다.
선지서를 묵상하는 것은 제게 신앙을 각성시켜주는 용광로요 풀무 역할을 하는 말할 수 없이 귀한 말씀 경험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말씀 해석도 어렵지만 계속 긴장하게 하는 그것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해줍니다. 특히 이 묵상 말씀을 저만 적용 대상으로 하면 그래도 괜찮겠는 데, 이것을 다른 분들과 나눌 때 괴롭습니다. 이왕이면 밝고 힘이 되는 말씀, 미래를 예수 제자로 잘 사는 말씀을 나누면 좋을 텐 데 이런 경고와 심판에 관한 말씀을 나눠야 하니 제 마음도 답답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차마 못할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 에스겔서를 묵상합니다. 더구나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깊이 마음에 다가왔던 구절인 예레미야 1:7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 지어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늘도 질책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허리가 부서질 정도로 괴롭고 통렬하게 탄식하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 탄식을 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절박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위해 이처럼 슬퍼하며 기도했는지, 나아가 이처럼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특히 목사 안수를 받고나서 지난 2년 4개월 동안 여기저기서 전한 말씀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히 우리 사회도, 교회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건 지난 몇 주 동안 에스겔서를 나누면서 여러 번 지적했던 사항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축복만 얘기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분명히 잘못 되었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유다가 범했던 죄인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불의를 행한 죄들은 바로 우리의 죄악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특히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위해 눈물을 쏟으며, 목숨을 바치는 마음과 자세로 그리해야합니다. 그것도 ‘그들의 목전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심판 재앙 소식을 전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에스겔을 비유나 늘어놓는 자가 아니냐면서 조롱했습니다(20:49). 그들은 에스겔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나 하는 자라고 멸시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듣기 거북한 심판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환영받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조롱과 핍박과 마주쳐야 하는 일입니다. 사실 저도 육신이 다한 후 심판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뺀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며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인기가 없더라도 교인들 앞에서 탄식하며 말씀을 전하고 또 가르치는 목사,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의 믿음을 아십니다. 저의 행위를 다 알고 계십니다. 아직도 우상과 불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심한 허리 통증이나 긴급한 상황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허리를 삐끗한 것 이상으로, 디스크 탈출, 척추관협착증, 골절, 감염 등 심각한 질환이나 신경 손상이 동반될 수 있는 응급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증상이 있다면 즉시 전문의의 진단을 받아야 하며, 특히 다음과 같은 증상이 동반될 때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
다리 마비 또는 감각 이상 :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감각이 둔해지는 경우.
9월 8일(월) 에스겔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For every living soul belongs to me, the father as well as the son--both alike belong to me. The soul who sins is the one who will die.
남한은 안 먹어서 탈
북한은 못 먹어서 탈
현대의 경제 정치 문화의 구조는 80년 차이
남한은 사회는 발전이 빠르고 사람이 따라가는 것이 바쁘다.
북한은 사회는 침체되고 사람은 배가 고파 오직 먹을 것만 생각한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 덕분
남을 탓하는 것과 관련한 우리 속담이 많다.‘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내 탓 네 탓 수염 탓’
‘못살면 터 탓’
‘소경이 넘어지면 막대 탓’ 등이 있다.
남을 탓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을 나타낼 때 쓰인다.
반면 좋은 일에는 ‘덕분(德分)’이 쓰인다.
“선배님 덕분에 맡은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그렇다면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에서 ‘잘되면 제 탓’은 부정적 의미와 어울리는 ‘탓’의
용법상 맞지 않는다.
좋은 일은 ‘덕분(덕)’과 어울려야 하므로 ‘잘되면 제 덕분(덕) 못되면 조상 탓’이 돼야 한다.
둘 다
‘탓’으로 처리한 것은 아마도 대구법(對句法) 또는 반복법으로 리듬감을 살리기 위함이거나 ‘탓’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말로 ‘때문’이 있다.
‘때문’은 긍정이나 부정적 현상을 가리지 않고 쓰인다는 점에서
‘탓’ ‘덕분’과 구별된다.
따라서 “잘되면 제 탓(→덕분) 못되면 조상 탓”은 “잘되면 저 때문 못되면 조상 때문’으로 바꿔
써도 의미상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속담을 문제삼았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The fathers eat sour grapes, and the children's teeth are set on edge'’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이 속담은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죄때문에 심판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 속담은 하나님이 개인 책임을 무시하고 사람들 공동체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사람을 공동체적으로 대하며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의 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때문에도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대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동체로 살고 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자 이런 생각으로 개인적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에스겔 18:3-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며 이스라엘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겠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합니다.
모든 영혼은 다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 앞에 인격적이고 책임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로 처벌받지 않고 오직 자기 죄로만 처벌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심판받지 않고 오직 자기 죄로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영혼은 자기 죄로만 죽는다 하며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에스겔 18:5-9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의를 행하면 그는 의인으로 반드시 살게 됩니다.
의인인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의를 행치 않으면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자기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에스겔 18:10-13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의인의 아들이 악을 행하면 그는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자기 죄로 죽으며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자기책임 원칙은 손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의인의 아들이 악을 행하면 자기 죄로 주지만 그 악인의 아들이 의를 행하면 다시 자기의 의로 인해 삽니다.
에스겔 18:14-18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의인의 아들이었던 악인의 아들이 다시 의를 행하면, 그는 아버지의 죄로 죽지 않고 자기 의로 삽니다.
하나님은 자기 책임의 원칙을 여러 예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하는 유다백성에게 그것이 틀렸다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개인 책임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이유는 자기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취급하지만 개인 책임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와 삶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자기 의와 죄에 달렸으며 조상들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은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깊이 인정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하나님을 우리를 구원하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하고 공동체로 생활하게 하십니다.
공동체를 모르고 개인에 머물러 있는 자는 미성숙한 성도들이며 그러므로 성도들은 반드시 공동체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받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을 면제시켜 주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개인적 책임을 지는 존재들입니다.
에스겔은 책임을 강조합니다.
에스겔 3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고 파수꾼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에스겔 14장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해도 그들은 자기 자녀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을 지는 존재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었고 이 자유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들이 됐으며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이 시대의 목자요 성경선생이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책임성있는 존재들이요, 하나님이 형상을 가진 자들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책임성있는 삶을 사라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회개하며 주체성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며 이 자유로 서로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을 탓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며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도 바로 우리의 책임성 안에 포함디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몸을 통해서 몸울 위하여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며 교회를 세우고 돌봅니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 우리가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최후의 심판의 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죄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잊지 않고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저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상처를 준 사람들이나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과거에 매여 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양식을 준비하며 하나님은 나를 자유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무엇보다 용서할 자유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그리고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자유를 주셨고 제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를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하십니다.
제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유로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유를 누리고,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며 책임성 있는 삶, 목자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하루를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기도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 에스겔 18장이 선포하는 공의와 자비
에스겔
17장에서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유다 왕국의 정치적 배신과 그로 인한 심판, 그리고 메시아적 희망을 제시한 후,
에스겔 18장은 이제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중요성이라는 근본적인 신학적 주제로 초점을 옮깁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는 속담이 유행했는데, 이는 조상의 죄 때문에 후손이
고통받는다는 숙명론적이고 책임 전가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속담을 단호히 부정하시며,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각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거나 자기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더 나아가, 악인이라도 돌이켜 회개하면 살 것이요, 의인이라도 범죄하면 죽을 것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십니다. 에스겔 18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며, 절망 속에서도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8장의 배경은 여전히 바벨론 포로라는 국가적 재앙의 고통이 극심했던 시기입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했거나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조상들의 죄악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은 바로 이러한 책임 전가와 숙명론적인 절망감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고통이 자신들의 직접적인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변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통념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각 개인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이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시며, 각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이며,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원리를 분명히
하십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 역시 삶의 어려움이나 실패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는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과거의 실수나 타인의
잘못에 얽매이기보다 현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8장은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속담을 반박하며,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원리를 다양한 예시와 반복적인 선언을 통해 강조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가 시지 않으리라" – 속담 반박과 개인 책임의 원리 (1-4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나 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는 원칙을 천명하십니다.
둘째, 의로운 아버지, 악한 아들, 의로운 손자의 예시 (5-18절):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가상적인 사례가 제시됩니다.
- 의로운 아버지 (5-9절): 만일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우상에게 제물을 먹지 아니하고, 간음하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하면, 그는 반드시 살 것입니다.
- 포악한 아들 (10-13절): 그러나 그 의로운 아버지에게 포악하고 살인하며 위에 언급된 선한 일은 하나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아들이 있다면, 그는 아버지의 의로움과 상관없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 회개한 손자 (14-18절): 다시 그 악한 아들에게 아들이 태어나,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의롭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면, 그는 자기 아버지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죄악으로 죽지만, 그는 살게 됩니다.
셋째, 개인의 회개와 의로운 삶의 중요성 재확인 (19-29절): 백성들이 여전히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19)고 반문할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개인 책임의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 악인의 회개 (21-23절): 그러나 악인이라도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며, 그가 행한 모든 죄악이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라고 반문하시며, 악인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선언입니까!
- 의인의 타락 (24절): 반대로 의인이라도 만일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악을 행하면 살지 못할 것이며,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그가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공평하심 (25-29절): 백성들이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5, 29)고 불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며,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받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공평한 길임을 강조하십니다.
넷째, 회개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라는 최종 촉구 (30-32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다시 한번 선언하시면서,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고 촉구하십니다. 그들은 모든 죄악을 버리고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지어다"(겔 18:31)라고 명령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고 간절히 호소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 구분 (에스겔 18장) |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
|---|---|
| 속담 반박과 개인 책임 (1-4절) | "아비가 신 포도, 아들의 이가 시다" 속담 부정.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함.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
| 3대의 예시 (5-18절) | 의로운 아버지(삶) - 포악한 아들(죽음) - 회개한 손자(삶). 조상의 죄/의가 자동 전가되지 않음. 각 개인의 행위대로 심판. |
| 회개와 의로운 삶 재확인 (19-29절) | 개인 책임 원리 반복. 악인의 회개 시 삶과 용서 약속. 의인의 타락 시 죽음. 하나님의 공평하심 강조. |
| 회개와 새 영/마음 촉구 (30-32절) | 행한 대로 심판.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라. 하나님은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심.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8장은 인간의 자유의지, 책임, 정의,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다루며,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첫째,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단순한 환경이나 유전, 혹은 조상의 업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자유와 그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에스겔 18장 역시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선택이 생명 또는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더 이상 조상 탓이나 환경 탓을 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각자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둘째,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살고, 의인이라도 타락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 현재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이었던 사람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용서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반대로 과거에 의롭게 살았던 사람이라도 현재 죄악에 빠져 있다면 과거의 의로움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는 인간이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또는 퇴보)할 수 있는 역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격려합니다. 또한, 한 번의 구원이나 의로운 행위가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이 얼마나 역동적인 구원의 관점입니까!
셋째,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반문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이면에 있는 그분의 자비로우신 본성과 모든 영혼을 향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들이 멸망하기보다 돌이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한 복수나 징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죄로부터의 돌이킴과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단호함과 동시에 죄인을 향한 긍휼과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또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회복의 가능성을 믿으며 다가가야 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너희는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지어다"라는 명령은, 비록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의 능동적인 결단과 노력 또한 필요함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 있는 참여를 요구한다는 신학적인 긴장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반응하여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씨앗을 심는 것은 농부의 역할이지만, 그것이 자라나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8장의 개인 책임과 회개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에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내 탓이오' 정신의 회복입니다. 현대 사회는 종종 문제의 원인을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회가 문제다", "부모님 때문이다", "운이 없었다" 등등. 그러나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성숙한 자세를 요구합니다. 물론 환경적인 요인이나 타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 의식은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며, 진정한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나는 내 삶의 어려움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있습니까?
둘째,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얽매이지 않는 현재 중심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실수나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혹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여 현재의 노력을 게을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18장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무리 어두운 과거를 가졌더라도 지금 돌이키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며, 아무리 빛나는 과거를 가졌더라도 지금 타락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이다. 그래서 오늘을 '선물(present)'이라고 부른다." - 엘리너 루스벨트
우리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선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현재의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셋째,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입니다. 에스겔 18장의 가장 큰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가 돌이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거나 낙인찍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에게 회복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믿고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죄와 실패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나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의 결과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으로 책임지려 하는가, 아니면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고 있는가?
- 나는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품고 있는가, 아니면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가?
- 나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 장은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8장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당시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숙명론적 속담을 단호히 부정하며, 각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당신께 속하였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과 함께, 의로운 아버지와 악한 아들, 그리고 회개한 손자의 예시를 통해 조상의 죄나 의가 후손에게 자동으로 전가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장의 핵심은 악인이라도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반드시 살고 용서받을 것이며, 반대로 의인이라도 그의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면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스스로 돌이켜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결국 에스겔 18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며,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장로
(박정희대통령의 동기생으로 구미 상모교회 출석. 박정희 22세 때까지 상모교회 출석)목사의 책망을 듣고도 낚시를 갔는데 아주 큰 잉어를 잡은 후 교회에 가지 않았더니 아주 대어를 낚았다.
그 잉어를 요리하려고 각종 한약재를 넣어 끓이던 중 그 안에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
서현교회 / 설계는 미국에서, 대리석은 전라도 황간에서...
먼저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 나머지는 내가 감당하겠다.
건축헌금을 하도록 집집마다 돈 봉투를 던져 넣었다고 한다.
1. 대구의 약령시가 열리던 약전골목은 전국의 한약들이 판매되는 유명한 곳으로 역사가 350년이 넘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한약들이 판매되는 곳이었습니다.
이 약점 골목 한쪽 구석에는 맨바닥에 앉아서 풀을 파는 풀장수 정씨가 있었습니다.
50년 전에는 풀을 쑤어서 장에서 팔았습니다.
풀 한 덩어리 사다 벽도 바르고 창호지로 문도 발랐습니다.
당시에 정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돈만 생기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고 집에서 아내를 때리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대구 제일교회 성도였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마음이 편안하고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어 그 재미로 사는 성도였습니다.
어느날 대구 제일교회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하러 오셨습니다.
원래 김익두는 깡패였고 술주정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장에 갈 때마다 성황당에다가 돌을 던지면서 빌었습니다.
"오늘 제발 김익두를 만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김익두는 시장 입구에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다리밑으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다리 밑으로 안갈려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특히 풀장수 정씨의 아내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은혜 받고 저녁 늦게 집에 오는데 남편이 술에 취해서 아내가 들어오자 마자 뺨을 때렸습니다.
다른 때는 맞으면 대들었는데 뺨을 한 대 때리니까
“여보, 내가 늦게와서 당신의 마음이 상했다면 이쪽 뺨도 때리세요"
"그래?"
그리고 때리려고 하니까 마음이 이상하더랍니다.
다른 때와 달리 한 대를 맞고는 나 때문에 당신 마음이 상했다면 한 대 더 때리라고 하니까 놀라서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며 “우리 교회에 부흥회에 오신 분이 김익두 목사님이신데 원래는 술주정뱅이였고 깡패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목사님이 되었대요.
당신도 나하고 한 번만 교회에 가요”
남편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그 다음날 따라갔습니다.
3. 처음으로 교회에 갔는데 뭔가 가슴이 뭉클하고 이상했답니다.
그 다음날도 마지막 날도 갔는데 김익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여러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삽시다!
복을 받는 비결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주일을 잘 지키세요.
그러면 은혜받습니다.
두번째, 십일조 생활을 잘 하세요. 그러면 물질의 복을 받게 됩니다.
세번째, 새벽기도회 빠지지 마세요.
날마다 하나님이 형통의 길로 인도 하십니다.
네번째, 주의 종이 가르칠 때, 잘 듣고 생명 받쳐 그 말씀을 지키세요.
이렇게만 하면 나처럼 됩니다.
나는 원래 깡패이고 못난이고 사람들에게 늘 욕을 먹고, 저주 받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돌을 던지고 빌고 갔겠습니까?
그런 내가 그렇게 했더니 오늘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풀 장수 정씨가 들어보니까 과거의 생활이 자기하고 비슷했습니다.
술 주정뱅이에 깡패였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단 말인가?
목사, 깡패가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4. 풀장수 정씨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한 번 밑바닥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자.'
그 다음 주일부터 꼭 주일을 지켰습니다.
풀파는 통 옆에 조그마한 상자를 만들어 놓고 10원어치 팔면 1원을 넣고 그 날부터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주일날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도 그렇게 되겠다고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얼마 후 약전 골목에 술주정뱅이가 사람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약전골목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했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변할 수가 있냐고......
한약방을 하는 친구가 하루는 정씨에게 “야! 너 이제 풀장사 그만하고 사람되었으니까 약방을 한번 해봐라. 약장사를 해봐.”
“나는 돈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약국을 하겠냐?”
"너를 보니까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졌어. 그러니까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약장사를 해봐."
친구가 자기 집에 있는 약재료를 이것 저것 조금씩 주어서 약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가게에서 하는데 길바닥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5. 친구는 노트에 약의 효능과 처방하는 방법에 대해서 써주었습니다.
감기걸린 사람이 오면 이렇게 지어주고 열병이 있는 사람이 오면 지어줄 약초를 알려주고 보약을 찾는 사람들이 오면 감초넣고 다른 약초를 넣고 지어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씨는 가르쳐 주는 것을 노트에 꼼꼼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오면 노트에 써있는 내용을 보면서 약을 지어 주는데 이상한 것은 정씨에게서 약을 지어 먹으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자무식인데도 그에게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다 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골목에서 제일 잘되는 약국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대구서현교회를 시무하다가 천국에 가신 정규만 장로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규만 장로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대구 지방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정장로님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정장로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소문이 퍼졌습니다
당시에는 대를 이어야 한다며 여자들은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아들을 못낳으면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장로님이 약을 지어주면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정말 이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거에요?”
장로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먹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랬다고 합니다.
6. 또 대구에서 장티프스가 유행을 했는데 다른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안낫는데 정장로님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어떤 병도 나았습니다.
그래서 정장로님의 약방 앞에는 새벽부터 줄을 섰습니다.
장로님 약방에 약이 떨어지면 옆 집에서 빌려와서 지어주었는데 다른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안낫는데 정장로님이 빌려온 약으로 자기 약방에서 지어 먹으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약방 주인들이 정장로님 약방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약을 짓길래 우리 약을 먹으면 안낫고, 당신이 지은 약을 먹으면 낫습니까?"고 물었습니다.
"네, 특별한 재료가 하나 들어갑니다."
"그것이 뭡니까?"
"당신들이 쓰지 않는 재료가 우리 약에는 들어갑니다.
기도라는 재료가 들어 갑니다."
장로님은 약을 지을 때마다 한 봉지 한 봉지 지을 때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빌려다가 지어 주어도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복 받을 사람은 언제나 복 받을 짓을 합니다.
7. 교회를 새로 짓게 되었을 때 정규만 장로님이 건축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돌로 교회를 짓자고 결정이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돌이 전라북도 황등에서 나옵니다.
익산군 황등에서 기차를 대절하여 돌을 대구까지 싣고 가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시작되자마자 정규만 장로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살려주시면 목숨 다하여 종의 재산을 바쳐 성전건축에 헌신하겠습니다.” 하면서 산에서 기도하는데 어떤 짐승이 모르는 나무를 자꾸만 갉아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초로구나 하고 그것을 삶아 먹었더니 낫게 되었습니다.
병이 나은 후에 정장로님은 교회 건축 비용 절반이상을 약속대로 혼자 감당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헌금을 했습니다.
건축을 마치고 성도들은 헌당식을 하자고 하니까 장로님이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합시다.
8. 내가 살았을 때 헌당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받을까 두려우니까 나 죽으면 하세요.
그래서 헌당식을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장로님이 1969년 1월 초에 돌아가실 때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고 마지막 돌아가실 때 오른손을 들었답니다. 그러면서 천사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고 말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장로님이 돌아가시고 난 며칠 후인 1969년 1월 29일에 서현교회는 헌당식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하고도 우쭐하는데 정규만 장로님은 교회를 위해 거의 혼자 짓다시피 하고도 절대로 자기 생전에 헌당식을 못하게 하고 자기 죽은 다음에 헌당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대구에 가면 정규만 장로님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왜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붐도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의 후대가 복을 받습니다.
한국 현대사를 이끈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평가
1.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인가?
출생 :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본관: 고령 박씨
학력: 대구사범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군 경력: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 육군 참모총장 역임
정치 입문: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재임: 1963~1979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는 군인 출신 지도자로, 국가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방식은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권력 장악이었고,
이는 이후 한국 정치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 경제 개발과 산업화: 한강의 기적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 성장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 시작):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 체제 도입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 농업 중심 사회에서 제조업·수출 중심으로 전환
포항제철 설립(1973): 국내 철강산업 기반 조성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 수도권과 남부지역 연결, 국가 물류망 혁신
새마을운동(1970): 농촌 근대화, 생활 개선 캠페인
1960년대 초반 1인당 GDP 약 80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1979년 박정희 사망 당시 약 1,600달러까지 성장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급격한 경제 성장은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키워드다.
3. 정치 체제: 유신헌법과 권위주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사실상 장기 집권과 대통령 권한 강화 체제를 수립했다.
대통령 직선제 폐지, 통일주체국민회의 통한 간접선거제 도입
국회 해산권, 긴급조치권 부여 등 강력한 통치권 확보
이는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적 견제와 균형을 무력화시킨 권위주의적 체제로 비판받는다.
이 시기 언론 통제, 야당 탄압, 인권 탄압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으며,
1970년대 후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회적 반발도 커졌다.
4. 대외정책: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 국교 정상화
박정희 정권은 냉전 체제 하에서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추진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강화
베트남 전쟁 파병(1964): 미국과의 협력 강화, 경제 지원 확보
한·일 국교 정상화(1965): 8억 달러 경제 지원 및 수교 체결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국내에서 거센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체결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5. 박정희 시대의 긍정적 평가
고속 경제 성장: 세계 최빈국에서 중진국 진입
산업 기반 조성: 중화학공업·제조업 발전
국방력 강화: 자주국방 기반 마련
농촌 근대화: 새마을운동을 통한 생활 수준 향상
박정희는 국가 성장과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한 긍정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6.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평가
민주주의 후퇴: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권 남용
인권 탄압: 언론 통제, 야당 탄압, 시민 권리 제한
사회적 양극화: 급속한 성장 속 빈부 격차 심화
정치 폭력: 야당 지도자 구속, 민주 인사 탄압
박정희 정권의 부정적 측면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그 이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면서
박정희 시대는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죽음은 곧바로 정치적 혼란과 12·12 군사반란(신군부 등장)으로 이어졌지만,
장기적으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8. 새마을운동: 농촌 근대화의 상징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가 도시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화되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1970년 시작)**이다.
슬로건: 잘살아보세
목표: 농촌의 자조정신, 근면성, 협동심을 고취하여 자발적 발전 촉진
초기 사업: 초가집 개량, 농로 정비, 소득 증대 사업 추진
정부는 마을 단위로 지원금을 배분하고,
자율성과 경쟁을 강조하며 농촌 생활환경과 소득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 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
농가 소득 증가
농촌 전기 보급 확대
농로 및 교량 확충
교육과 보건 인프라 개선
새마을운동은 한국 농촌 사회의 근대화를 촉진했으며,
이후 개발도상국 모델로도 수출되는 등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9.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는 한국 경제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켰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균형과 노동 인권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산업화의 긍정적 측면
고도 경제 성장(연 8~10% 성장)
제조업 기반 확립(섬유, 조선, 철강, 전자 등)
수출 중심 경제로의 전환
일자리 창출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
재벌 중심 경제 구조 형성 → 경제력 집중 문제
노동자 권리 미약, 열악한 근로 조건
농촌과 도시 간 소득 격차 심화
환경 오염, 도시 슬럼화
박정희 정권은 급속한 성장을 위해
노동자 파업을 강경 진압하거나, 산업재해 문제를 간과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후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0.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전략
박정희는 한반도 안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 파병 이후 미국이 아시아 정책에서 발을 빼려 하자,
자주국방 체제 구축을 본격 추진하였다.
주요 성과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1970)
국산 무기 개발 착수: K1 전차, 자주포, 소총 등
예비군 창설(1968): 향토 방위 강화
방위산업 육성 정책: 국내 방산업체 육성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단순한 '미국 의존형 군사력'을 넘어,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1. 현대적 재평가: 박정희를 보는 다양한 시각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세대에 따라 크게 갈린다.
평가 항목 긍정적 시각 부정적 시각
| 경제 발전 | 한강의 기적, 중산층 형성 | 재벌경제, 빈부격차 심화 |
| 정치 체제 | 안보 강화, 국가 통합 | 권위주의, 민주 억압 |
| 농촌 정책 | 새마을운동 통한 생활 개선 | 농민 부담 증가, 과도한 경쟁 유발 |
| 국방 정책 | 자주국방 기반 마련 | 군사화 경향 심화 |
특히 2000년대 이후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은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는 중도적 평가로 이동하는 추세다.
즉, 경제 발전과 근대화의 업적을 인정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2. 박정희가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박정희는 오늘날 한국 경제, 사회, 정치, 안보 체계의
초석을 다진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다:
경제개발 계획 체계화
산업 기반 조성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
국방력 자주화 토대 마련
농촌 현대화 및 국민 생활수준 향상
반면,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 확산은 그가 남긴 과제였고,
이는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 사회가 꾸준히 발전시켜온 분야다.
박정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긴 강력한 흔적과 영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박정희의 지도 사상
1. 목표를 세우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지혜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차게 하려면 먼저 바라고 소원하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꿈을 잉태하지 않으면 창조와 생산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꿈을 그리면서 강력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강력을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30대 백만장자가 된 폴 마이어 박사가 있습니다. 그가 사원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고 거기에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원은 빈정대며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소원을 쓰면 누가 이루어 주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원들은 종이에 자기 소원을 썼습니다.
그는 사원들에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매일 눈으로 보면서 이것이 꼭 이루어진다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들은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몇 년 후 성취된 간증을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집을 갖기를 원했는데 좋은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학위를 갖기를 원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쓰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표가 없으니 달성된 것도 없을 뿐입니다. 마음 속에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면 어느 때인가 이루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구역 부흥이나 전도도 강력히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가든 그로브에 있는 드라이브인 처치의 로버트 슐러 박사에게 어느 분이 인사하면서 “당신이 그 많은 꿈이 생전에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하니까, 그 분의 대답이 “천만에요,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오!”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꿈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꿈이 성취되면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육신은 살았으나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꿈을 가져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꿈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2. 사람을 찾으라(용인술)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사람을 보는 법, 얻는 법, 기르는 법을 우리는 용인술이라고 한다.
사람을 쓰는 법, 용인술에 대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다루는 책 용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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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회 출판사 : 쌤앤파커스
“사람을 쓰는 법”이란 부제가 있는 이 책은 2500년 동안 동양사회의 정신적 리더인 공자에게서 배우는 ‘사람 보는 법’, ‘얻는 법’, ‘기르는 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공자는 춘추전국의 난세를 주유하며 리더의 도를 알리고, 3000명의 제자를 시대의 동량으로 키워낸 인재경영의 대가다.
이 책은 인재를 알아보고, 활용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법에 관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다룬다. '사람이 전부'라는 인재경영 마인드를 군주에게 설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재를 양성했던 공자의 용인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공자의 《논어》와 《공자가어》에 나타난 관련 이야기를 기본으로, 동서고금의 사례와 경영학 이론, 저자가 취재한 현장 이야기를 통해 '사람 쓰는 역량'을 키우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사람을 알아보고 평가하는 방법부터 인재육성, 동기부여, 충성심을 얻는 방법 등 사람을 뽑고 키우는 데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 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인재만사할 것인가, 인재망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 평가하는 방법, 그리고 인재를 엮는 법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2장은 “어떻게 인재를 육성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 키우는 법, 즉 인재육성에 대한 공자의 지혜를 담고 있다. 3장은 “어떻게 열정을 일으킬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을 움직이는 법, 즉 동기부여에 대한 공자의 조언을 다루고 있다. 4장은 “어떻게 충성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의 충성심을 얻는 법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인자(仁者)는 자기가 일어서기 원하면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고, 자기가 성공하고자 하면 먼저 남이 성공하도록 돕는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옹야편).”
공자의 리더십 에센스는 이 한 줄로 압축된다. ‘나뿐’인 성공은 나쁜 성공이다. 남과 함께 해야 가치가 있다. 남을 성장하게끔,
성공하게끔 하는 것이 리더십의 진수다. 남을 통해 일하고 남을 성장시키고 성과를 내게 하는 것이 리더의 할 일이다. -
<공자에게 ‘사람 쓰는 법’을 묻다> 중에서
많은 경영자들이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지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는 겸허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불리한 환경에서 출발했음에도 동종업계에서 앞서는 경우를 보면 승리의 마스터키가 인재관리인 경우가 많다. J사장은 손실이 누적되면 사업전략을 검토하기보다 회사의 각 분야를 맡을 유능한 인재부터 찾아 삼고초려로 영입했다고 말한다. - <당신이 인재난에 허덕이는 이유를 아는가?(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 『논어』 안연편)> 중에서
『여씨춘추』에서는 인재판별법으로 8관6험법을 추천한다.
8관, 즉 살펴야 할 8가지란 순조로울 때 어떤 사람을 존중하는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을 기용하는지, 부유할 때 어떤 사람과 접촉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는 지다. 또 한가할 때 무엇을 즐기는지, 친해진 뒤 말속에 드러나는 뜻을 본다. 아울러 좌절했을 때 지조를 보고, 가난할 때 무엇을 하지 않는지 본다.
6가지 실험법은 기쁘게 해서 천박하게 행동하지 않는지, 즐겁게 해서 본래의 취향을, 화를 돋워 통제능력이 있는지, 두렵게 만들어 견딜 수 있는지, 슬프게 만들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지, 힘들게 만들어 의지가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 <인재(人材)와 인재(人災 )를 구분할 수 있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 『논어』 위정편)> 중에서
약한 리더야말로 악한 리더다. 진정한 인재는 목적을 완수하겠다는 냉철한 의지를 가진다. 대세를 따라가느라, 인기에 영합하느라 기본을 어정쩡하게 만들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좀 더 강경하게 심지어는 우둔하게 원칙을 밀고 나가야 할 상황이 언제인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피하려는 갈등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지고 챙긴다. 목표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고, 조직의 원칙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사람을 찾아라. - <진품 인재와 사이비 인재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鄕愿 德之賊 - 『논어』 양화편)> 중에서
결국 인재를 바르게 평가하려면 ‘사실 뒤의 진실’은 물론 ‘호평과 혹평의 오류’를 가려낼 혜안이 필요하다.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매의 눈을 가지고 다시 살펴보라. 꺼진 불도 다시 보아야 하듯, 상하 모두에게 악평을 받는 인물도 꼼꼼히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재경영의 필살 내공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느냐보다 어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느냐를 살피는 것이다. 인재평가에서는 양의 법칙보다 질의 법칙이 중요하다. - <인재평가, 질의 법칙을 쓸 것인가, 양의 법칙을 쓸 것인가(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 『논어』 이인편)> 중에서
공자가 인재육성에 성공한 것은 상당 부분 눈높이 소통에 기인한다. 공자는 강제가 아닌 설득과 토론의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공자는 4가지를 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힌다. 즉 편견과 선입관, 독단, 완고성, 아집이 그것이다. 공자는 유연성, 포용성, 개방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청년들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제자들에게 의견을 묻고 들어주고 수평적으로 대해준 데 있다. 말 잘하는 것보다 잘 말하는 것이 인재육성의 비결이다. - <가르칠 것인가, 깨우칠 것인가(子曰 求也退故 進之 由也兼人故 退之 - 『논어』 선진편)> 중에서
이익만으로 뭉치면 ‘야합’이 되고, 그나마 없으면 ‘오합지졸’이다. 진정한 ‘단합’을 하려면 사명과 목적의식으로 뭉쳐야 한다. 리더는 조직의 ‘살아 있는 비전’이고 직원은 ‘조직을 살린 비전’이다. 리더로서 조직에 북두칠성처럼 빛나게 하는 구성원의 밝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가? 혹시 ‘바쁘다’를 연발하며 조각 퍼즐만 줍느라 부산하지 않는가? 정명의 빅피처(big picture)를 구성원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라. - <명분으로 움직이는가, 명령으로 움직이는가(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 - 『논어』 자로편)> 중에서
군자는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문을 구해 좋다고 수긍이 되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자신의 평판을 위해 어정쩡하게 듣는 시늉만 하고 병풍으로 이용만 한 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어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소인들의 방어심리만 자극해 결국 듣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용인을 잘하면 인재가 제 발로 찾아온다. - <약속할 것인가, 증명할 것인가(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 『논어』 이인편)> 중에서
3. 기간을 정하라
4. 시도하라
5%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작하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For by him all things were created: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rones or powers or rulers or authoritie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9월 6일(토) 에스겔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매(愚昧)한 선지자(13:3)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잘못된 예언을 고발함.
15장 : 포도나무의 심판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Woe to the foolish prophets who follow their own spirit and have seen nothing!
(새한글)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끝장났다, 우둔한 예언자들은! 이들은 자신들의 영을 뒤쫓아 가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본 것이 없이...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 여기에서 '본 것'이란 선지자로 소명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상, 즉 하나님이 부여주시는 초자연적인 진리 또는 그 진리의 현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받은 자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 spirit)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소명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심령에 따라 거짓되이 예언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다고 공언하면서 헛된 묵시로 거짓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언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빙자한 불의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헛된 비진리 가운데로 빠지게 하여 실족케 하는 죄를 범하였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 즉 당시에 유다의 임박한 멸망, 하나님의 급박한 심판을 전한 선지자들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악까지 범하였다(렘 28:1-16).
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시거나 멸망항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상에만 얽매여 있었던 같다.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어리석은 예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혜자와 우매자(전도서 7:6)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습니다.
불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이 깨끗하게 태워져야 합니다.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어질 때, 순수한 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방망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굳은 마음이 부셔져야 합니다.
묵은 땅이 기경되어야 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여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럽고 추한 마음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욱더 의미 있는 삶일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로,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통해, 우리의 부패를 정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잠언 6:23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책망의 소리는 “우매자들의 노래 소리” 만큼 듣기 좋지는 않으나, 보다 유익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공허함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며, 동시에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보다는 지혜자의 책망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와 같은 일시적 쾌락에, 사람이 그토록 쉽게 현혹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와 같이 덧없는 즐거움을, “솥 밑에 지펴놓은 가시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가시나무는 탈 때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고, 화염이 잠깐은 크게 일어나지만, 곧 꺼져 버리고, 그 재를 흩날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끓일 정도의 열을 얻어내는 데에는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열을 얻자면, 계속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시끄럽고 순간적이어서, 진정한 기쁨의 본보기는 아닙니다.
“이것도 헛되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하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고, “그 환락의 끝은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고,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매자들의 노래와 웃음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자의 책망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라고 말했으며,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말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된 행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In everything I did, I showed you that by this kind of
hard work we must help the weak, remembering the words the Lord Jesus
himself said: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어리석은 농부
인도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농부가 논을 개간했습니다.
논에 댄 물이 아주 많은 양분을 제공해 그의 논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농부는 이 기름진 논의 물이 이웃에 있는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흘러가는 것이 못마땅하고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자기 논의 물이
어디에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았습니다.
농부의 논에는 다음 해에도 역시 많은 양분을 제공해 주는 물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나갈 곳이 없어서 벼는 모두 썩어 쌀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욕심장이는
결국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돕고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더욱
풍성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어느
소년이 공자님께 나와서 하늘의 별이 모두 몇 개나 되냐고 물었다.
이때에 공자님의 말씀이 "하늘의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취미가 없어서 모른다"고 답변하였더니, 짖궂은 소년은 다시 묻기를, "그럼 가까이 있는 눈썹은 몇 개나 됩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님은 다시 대답하기를, "눈썹은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른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사실 별의 숫자나 눈썹의 숫자는 알아서 손해될 것도 없고 모른다고 문제될 것도 없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호의호식하면서도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살아간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가 나타나 있다.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했다. 농사일을 하여 부유하게 되기까지는 농사일을 거둘어 준 이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실 때에는 그 재물로 값진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인데 이 농부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는, 생의 목적을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 죽음이 닥치고 죽음 이후에 갈 곳이 어딘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부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많은 지식과 재산을 가지고 정치와 경제를 논하며 문화와 예술을 논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이웃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생의 목적과 죽음 이후에 돌아갈 곳이 어딘지를 모르고 산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인간의 어리석음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자력에 이용하는 핵원료인 라듐의 모체가 되는 우라늄에 대하여 1945년에 쓴 영어 사전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희고 무거운 금속"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우라늄이야 말로 원자핵 분열을 일으키는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원료이며 이 우라늄의 발견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발견이라고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요동시(遼東豕) / 멀 요(遙), 동녘 동(東), 돼지 시(豕)
'요동시(遼東豕)'라는 성어는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의미는 견문이 좁아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흔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는 꽤나 깊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시절, 천하(天下)는 전쟁의 상처로 평화를 되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어양(漁陽) 태수 팽총(彭寵)은 군량미 확보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주부(朱浮)의 군량 공급 제안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연왕(燕王)이라 칭하며 모반의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주부는 팽총의 행동을 비판하며, 요동에서 흰 돼지 새끼의 특이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요동 지역에서는 흰 돼지가 흔하다는 것을 알려, 팽총이 자신의 공을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요동시'라는 성어는, 견문이 좁아 흔한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한자풀이
요동시의 한자 각각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 遼: 멀 료(요) 멀다, 늦추다, 느슨하게 하다
- 東: 동녘 동 동쪽, 오른쪽
- 豕: 돼지 시 돼지
이러한 한자의 조합을 통해 '요동의 돼지'라는 의미로 '요동시(遼東豕)'라는 성어가 형성되었습니다
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말(전도서 10:12-20)
우매자는 자기의 말에 무너진다.
지혜자는 자기의 말에 탑을 쌓는다.
전도자는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롭다고
말합니다(12절).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에 그의 말과 태도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에는 큰
감화력이 있어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참된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 안에 말씀의 지혜를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배려와 사랑을 전하고 큰 은혜를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킨다고 말합니다(12절).
‘자기를 삼킨다’는 말은 입술의 주인이 아니라 입술의 종이
되어 스스로 지배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망가뜨리며, 나아가 인생을 망쳐 버립니다.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받지 않으면 우리 ‘인생 전체를 불사르는 지옥 불이 됨’(약 3:6)을 잊지 말고 날마다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조차 삼키는 우매자의 말의 특징에 대해 우매하게 시작하고 미친 것으로 끝마친다고 말합니다(13절). 본문에서 ‘미친’이라는 표현은 정신적인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혼돈과 사악함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우매자의 말은 어리석은 것으로 시작하고 점점 진행될수록 그 끝이 악한 정신과 영혼으로 나타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자의 헛된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에 휩쓸리게 되면 우리의 정신, 나아가 영혼까지 미혹을 받아 혼돈의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말을 많이 하지만 장래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14절). 우매자는 자기의 한계와 무지를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저 말을 많이 하는 허황되고 과장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말을 할 때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하며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마음으로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20절). 속으로 한 말도, 혼잣말도 모두 말입니다. 반드시 전해지게 되어 있고,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어디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로 인해 상처받는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혀가 내뱉는 말이지만 그 말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만약 우리의 말이 지혜를 담지 않고 우매함을 담아 흘러간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헛되고 허무한 삶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말이 은혜로운 지혜의 말이 되어 나의 생명도 살리고 다른 영혼도 살리는 의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증한 거짓 남녀 선지자와 심판
본장의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겔13:3)로 볼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본 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 13:1-16 / 거짓 선지자의 허위와
멸망에 대한 것
둘째 단락 13:17-23 / 거짓 여
선지자의 형벌에 대한 것
1. 거짓 선지자의 허위와 멸망 / 13:1-16
4절. 거짓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여우는
성을 견고히 하거나 전쟁을 방비하기 위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동물입니다.
무위도식한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뭔가 저희들이 백성들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한 것 처럼 떠들어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는 먼저 하나님이 하신 적도 없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며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심하라 걱정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니 겁내지 말라, 항복해선 아니된다!
애굽을 의지하여야 한다! 또 바벨론은 곧 물러나거나 패배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반대하고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 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선물을 받고 양식을 받아 챙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대로
된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벽을 나름 보수하는 일을 돕는다고 떠벌렸지만 고작 한 일은 성벽에
회 칠을 한 것이 전부라는 것이지요. 회 칠이 무슨 힘이 있나요? 벽돌을
고치거나 바꾸어야 하는데 그런 힘든 일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1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14.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2. 거짓 여 선지자의 형벌 / 13:17-23
17.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점치는 여자들 무당들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맸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수건들을 만들어서 자기도 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수건을 팔아먹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수건이 복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나 부적의 역할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적을 팔듯이 그 수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부를 축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술과 점치는 행위는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박근혜씨가 대통령 출마했을 때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점쟁이들을 기자들이 찾아가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물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자신있게 박근혜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배현 집사는 안철수가 될거라 하며 그를 밀기 위해서
부산에서 가서 협동해야 한다고 했구요, 저와 김동호 교수는 박근혜가 되기 전 일 년 전부터 박근혜가
될 것이라 했었지요.
저만도 못한 자들이 소위 점집을 차라고 돈을 받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당들은
거짓 선지자와 함께 참 선지자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그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결국 본 장에 나오는 무당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였고 복을 받기 위해 우상과 사술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영혼을 새 사냥하듯 지옥과 파멸에 이르도록 한 끔직한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위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뭐라 뭐라 기도하다가 길흉의 결과를 말해주고
헌금을 얼마를 받습니다.
기독교적 점쟁이의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행위는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은 그런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바벨론 군대에 붙여 살해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 군대가 붙인 죄목은 무엇이었을까요?
반동분자 반역 협조자의 죄였지요. 왜입니까?
바벨론에 대한 항복을 반대하고 반역하려는 파에 협조하고 동조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적 기사 보다는 진리(말씀)를 따라가야 하는 신앙입니다.
방언하고 병고친다 떠들어도 그 행실이 지저분하고 거짓과 무정함과 타락에 휘둘려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참 된 종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거짓 이단의 선지자들도 이적과 기사를 종종 행함으로 미혹을 하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모든 자들은 가증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들"입니다(1절).
이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18, 20절)입니다.
그것도 큰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19절)라 했습니다.
얼마 전에 다락방에 빠진 아주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엔 다락방의 교주처럼 말씀 바로 전하고 훌륭한 분을 마나 보지 못했으며 그만이 참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비롯해서 모든 교회의 수천 수만의 목사들이 다 거짓 말씀을 전한다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저도 그 교주가 얼마나 말씀을 잘 전하나 유튜브에서 보았어요.
먼저 인물부터 호감이 안가고 말씀
전하는 태도도 매력이 없고 내용도 그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교주 수준이나
성도 수준이 똑 같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교만의 영이 있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단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WCC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가증한 거짓 목자들은 평화를 외치며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말하며 온 종교가 다원주의로 하나가 되어서 일치되어야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창녀집단이지요.
불교니 이슬람교니 천주교니 다 하나가 되고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기름에 콩기름 올리브유 옥수수기름
등등 마구 섞어대면 참기름이 될 수 없습니다.
가짜 참기름이지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처럼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친" 사깃군들에게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9절)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거기서 죽거나 바벨론에 잡혀가서 죽임을 당한다는 거지요.
또 13절에서도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13절)하셨습니다.
열파=뜨거운 폭풍의 열로 파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뜨거움과 차가움과 휩쓸어버림으로 파괴해 버리신다는 것이지요.
종종 우리 친척 중에 무당이나 박수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까이하거나 긍휼히 여기지도 참 가족으로도 여겨선 아니 됩니다.
재앙과 화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와 그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다간 다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신명기에서 모세에게 거짓말로 예언과 꿈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3:1-5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만 따르면 축복과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오늘날 만연하는 거짓 예언과 말씀과 이적을 따르는 실수를 하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늘 경성하고 깨어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심판과 하나님의 참된 말씀
에스겔 13장은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 내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백성들에게 평안할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쌓아 올린 허약한 담이 폭풍과 홍수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그들의 거짓된 예언이 결국 헛된 것이었음을 밝히십니다.
또한 거짓된 예언으로 백성을 속이고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든 여성들을 향해서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부적과 마술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속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악한 일들을 기억하시며,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1~9절)
- 허약한 담의 비유와 심판의 경고 (10~16절)
- 거짓된 여성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1~9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거짓된 환상을 보고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은 참된 예언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며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며, 이스라엘 족보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린 자들에게 내려지는 강력한 심판입니다.
허약한 담의 비유와 심판의 경고 (10~16절)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백성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된 희망을 허약한 담에 비유하십니다.
거짓된 예언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하고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과 홍수를 보내어 이 담을 허물어버릴 것이며, 결국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도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 살면,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거짓된 평안은 오래가지 못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거짓된 여성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언을 행하는 여성들에게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이들은 부적과
마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들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악한 행위를 끝내실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의 거짓된 능력도 무력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더 이상 그들의
거짓된 예언에 속지 않도록 하실 것이며, 참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13장은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죄악을 범했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거짓된 메시지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평안을 약속하며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거짓된 희망은 무너질
것입니다.
거짓된 담처럼 보이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힘을 잃고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마술과 미신을 사용하여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며, 그의 백성들이 참된 하나님만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거짓된 가르침과 거짓된 희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참된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생각대로 예언하는 자들을 미워하시는가?
에스겔 12장에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완고한 백성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선지자의 상징 행위를 통해 절박하게 경고에스겔 13장은 그 백성들의 영적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그릇된 평안을 속삭였던 '거짓 선지자들'에게로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의 시선을 돌립니다.
이 장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며 본 것이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는 남자 선지자들과, 백성들의 영혼을 사냥하며 그릇된 위로를 전하는 여자 선지자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거짓 평화의 담은 결국 하나님의 폭풍 같은 심판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그들의 허망한 종말을 통해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을 선포합니다.
에스겔 13장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짓된 가르침과 위로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며,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3장의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침략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많은 백성은 여전히 임박한 재앙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메시지인 심판과 회개의 촉구 대신,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평안과 번영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 생각이나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포장하여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 같은 참된 선지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위기의 본질을 가리고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극도로 혐오하시며, 그들이야말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 중 하나로 간주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된
가르침과 지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달콤한 거짓
위로가 아닌 때로는 아프더라도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6절),
둘째,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7-23절) 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6절):
-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들"(겔 13:2-3, 우리말성경)에게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본 것이 없으면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며, 마치 "황무지에 있는 여우들"(겔 13:4)처럼 이스라엘의 무너진 성벽 틈에 올라가 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존재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헛된 환상을 보고 거짓된 점괘를 말하며,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화를 약속합니다(겔 13:6-7, 10).
-
회칠한 담의 비유 :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회칠한 담'에 비유하십니다. 백성들이 엉성하게 담을 쌓으면,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그 위에 회칠을 하여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폭우와 큰 우박 덩이, 그리고 폭풍이 몰아치면 그 담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회칠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겔 13:10-15). 이는 거짓된 평화의 메시지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 허구성이 드러날 것임을 상징합니다.
- 심판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을 당신의 백성의 공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 족속의 명단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9, 14)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7-23절):
-
여자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네 백성의 딸들"(겔 13:17, 우리말성경)에게도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목에 부적을 매어 주고 머리에 너울을 씌워 주며 점을 치고, 사소한 이익(보리 몇 움큼과 빵 몇 조각)을 위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을 죽이고 살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살린다고 거짓말하며 영혼들을 사냥한다고 고발당합니다(겔 13:18-19).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거짓된 위안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
심판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적과 너울을 찢어버리고, 그들에게 사냥당한 영혼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더 이상 그들이 거짓된 점괘나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21, 23)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 부류의 거짓 선지자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고 진리를 왜곡한 죄로 인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이 명확히 선포됩니다. 참으로 두려운 경고입니다!
에스겔 13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 구분 (에스겔 13장) |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
|---|---|
|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16절) | 자기 마음대로 예언, 본 것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거짓말. 황무지의 여우, 회칠한 담 비유. 거짓 평화 선포. 심판: 공회 참여 불가, 명단 제외, 이스라엘 땅 진입 불가. 목적: "내가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 |
|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 자기 마음대로 예언. 부적과 너울로 점치며 영혼 사냥. 사소한 이익 위해 거짓 예언. 심판: 부적과 너울 찢김, 사냥당한 영혼 구원, 더 이상 예언 못하게 함. 목적: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
철학적 / 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3장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고발은 단순한 종교적 비판을 넘어, 진리와 거짓, 언어의 힘과 책임, 그리고 인간의 자기기만이라는 보편적인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탐구합니다.
첫째,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행위는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 두려움, 혹은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는 마치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개인의 해석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에스겔서는 이러한 주관주의가 결국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리는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객관적인 실재로서 존재하며, 그것을 왜곡하거나 무시할 때
공동체는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본 것이 없이" 예언하는 것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며, 그들의 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둘째, '회칠한 담(whitewashed wall)'의 비유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본질적인 문제는 덮어버리는 위선과 자기기만의 실체를
강력하게 고발합니다.
담이 이미 부실하게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회칠을 하여 마치 견고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 일시적인 위안이나 피상적인 해결책에 만족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패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평화롭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는,
결국 더 큰 재앙 앞에서 그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폭풍'이 몰아칠 때, 그 어떤 화려한 회칠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안전은 문제를 직시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겉치레나 임시방편에 있지 않다는 통렬한 지적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회칠한 담'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까!
셋째, 여자 선지자들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아니할 영혼을 살리려 하는" 행위는 언어가 가진 엄청난 힘과 동시에 그릇된 언어가 초래할 수 있는 생사(生死)를 가르는 책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거짓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의로운 자에게 절망을 안겨주며 악한 자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말이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한 사람의 운명과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의 말은 그 영향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말의 무게와 책임을 깊이 인식해야 하며, 극도의 신중함과 정직함으로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된 위로나
정죄는 영혼을 '사냥'하는 것과 다름없는 악행이라는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엄중합니다.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3장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진리를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도록 도전합니다.
첫째, 우리 시대의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고대에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오늘날 거짓된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들은 더욱 다양하고 교묘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미디어를 통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 물질적 성공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자기계발 강사들, 혹은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현대판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며,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값싼 위로를 판매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된 목소리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저항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령의
조명을 통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나는 '회칠한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우리가 속한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평안한 척, 거룩한 척 위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면의 죄와 상처, 관계의
갈등, 구조적인 불의를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일시적인 위안이나 피상적인 활동으로 그것을 가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회칠한 담'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그 모든 위장을 꿰뚫어 보시며, 언젠가는 그 허술함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건강함은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고, 회개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지금 내가 쌓고 있는 담은 과연 폭풍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일상생활에서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헛된 희망을 주거나 절망에 빠뜨리지는 않습니까?
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자녀를 양육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면, 말의
책임은 더욱 커집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진실하고 사랑이 담긴 말,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말을 하도록 도전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21)
우리의 혀가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달콤한 거짓에 쉽게 미혹되는가?
- 나의 신앙과 삶은 진실된가, 아니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담'과 같은가?
- 나는 내 말의 영향력과 책임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나의 말은 사람들을 살리는가, 아니면 해치는가?
-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는 "본 것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인가, 아니면 진실되게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인가?
이 장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참된 진리 위에 굳건히 서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3장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안을 속삭이며 그들의 영적 혼란을 가중시켰던 남자와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며, 본 것이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고, 헛된 환상과 점괘로 백성을 미혹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특히 남자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는 '회칠한 담'에 비유되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폭풍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임이
예고됩니다.
여자 거짓 선지자들 또한 사소한 이익을 위해 영혼들을 사냥하고 거짓된 위로를 전한 죄로 인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참된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에스겔 13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짓된 가르침과 위로를 경계하고, 오직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분별하여 따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결국, 진리를 왜곡하고 백성을 미혹하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그 허구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라는
엄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9월 5일(금) 에스겔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치한 마음(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I will give them an undivided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them; I will remove from them their heart of stone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12장 :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에스겔이 포로처럼 짐을 싸고 떠나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합니다.
일치한 마음(an undivided heart )
새한글 / 19-20
19. 내가 그들에게 한가지 마음을 주고 새 영을 그들 가운데 주겠다. 돌같이 굳은 심장을 그들의 몸에서 없애 버리고 살같이 부드러운 심장을 주겠다.
20. 그래서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라 살아가게 하고 나의 법령들을 지키게 하겠다. 그것들을 따라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되고 나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같은 마음
빌립보서 2:2 - 한 마음(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립보서 4:2 - 같은 마음(주 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고린도전서 1:10 - 같은 마음(분쟁이 없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will give them one heart, and put a new spirit within them And I will take the heart of stone out of their flesh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새(2319) 하다쉬
חָדָשׁ
스트롱번호2319
1. 새로운. 2. 삼상 6:7. 3. 신 20:5.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אֶבֶן
스트롱번호 68
1. 돌. 2. 하나의 돌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신(7307) 루아흐 חָדָשׁ רוּחַ
רוּחַ
스트롱번호 7307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일치한 마음(레브 에하드)(3820)(259) 굳은 마음(레브 에벤)( ’eben)(68) אֶבֶן | ||
|
1. 돌. 2. 하나의 돌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부드러운 마음(레브 바솨르)()(1320) 일치한 마음(lêb ’echâd) ב אֶחָד לֵב לֵב אֶחָד 3820. 레브(lêb) / 마음 לֵב 발음
[ lêb ]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259. 일치한(에하드. ’echâd) אֶחָד 1. 똑같은. 2. 첫째의. 3. 어떤 사람.
구약 성경 / 699회 사용 내가 그들에게...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 |
에스겔 11:19-20 해설
1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냉담하고 완고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럽고 순종하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며, 회복과 변화의 상징으로 신앙 생활에서의 내부적 변화와 새로움을
강조합니다.
20.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고 지키게 하실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영적 갱신과 회복을 경험하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언약의 확증입니다.
이러한 관계 회복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시대와 신약의 성령 강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언약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전 593년 6월 5일에 에스겔은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에 대한 환상을 에스겔 8장에서부터 11장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성전 동문의 거짓말로 안전을 유포하는 25인을 대항하는
예언을 선포하도록 명하십니다.
25라는 숫자는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태양신 숭배 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숫자와 같았습니다.
태양신 숭배의식을 거행하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고 25인은 고관들로서 정치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모든 분야가 철저하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정치지도자들은 집을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말함으로 예루살렘의 안전을 주장하였습니다.
‘집을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란
말은 1,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서 신속한 회복을 기대하며 집도 짓지 아니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에 이루어질 일이므로 집을 짓고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을 가르친 예레미야의
권고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가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3절)은 단단한 가마가 고기를 보호하듯이 견고한 예루살렘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을 하였던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5절을 통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다 꿰뚤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그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생각이라고 해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을 품은 것 자체로 합당한 보응과 신원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우리가 품은 생각을 다 아신다는 것이 부담이거나 두려움이 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십니까?
우리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오해받고 미움을 당하더라도 악한 마음이 아닌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을 품고 있는 겉으로 선량해
보이도록 포장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꿰뚤어 보신다는 사실은 부담스럽고 깨름직한 일일 것입니다.
시편 말씀 66:18-19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 아시고 우리를 신원하시고 그 마음에 상응하는 보응을 주시는 분이신 줄을 믿으시는 사랑하는 모든 나눔과섬김의 성도님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25인의 고관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 라고 질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고관들의 도덕적인 악행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고관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포를 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실을 고발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유다 말기의 타락상을 염두에 둘 때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실제로 유다의 타락한 고관들은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고 재판 절차를 수행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학살하는 폭정이 자행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뜻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지배라는 징계를 통하여 타락한 유다를
연단하고 정결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복종할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거듭하여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의 고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대세의 뜻, 사람들의
염원과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애국심과 항거의 마음은 영웅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대로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세의 뜻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로인해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또 누군가는 절망과 탄식을 표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 시대와 세대와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과 조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손가락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뜻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대를 역행하고 대세를 역행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알고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진리의 방향을 가리키고 외칠 수 있는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같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새로
뽑힐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놓고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그 지도자는 사람의 뜻으로 뽑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뽑힐 것이라는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3장 1절 말씀과 같이 권세는 하나님의
뜻으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의 권세는 바로와 같이 악한 왕이든, 다윗과 같이 선한 왕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시대 가운데 필요한 지도자가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입니다.
우리를
싱가폴에 부르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에스겔은 다시 그가 본래 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벨론 텔아빕의 에스겔의 집에서 에스겔에게 임하여
환상중에 그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여지던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에서 떠나가시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게 하신 후에 다시 에스겔을 그 본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머물고 있었던 갈대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바로 포로의 자리입니다.
고통의 자리이고, 자유가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러한 자리를 싫어합니다.
싱가폴이 누군가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곳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는
속박과 고통과 답답함이 있는 곳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혹 고통이 가득하고 답답함이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서 있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자유가 없는 포로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고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갔습니다.
갈대아라는 곳에서 백성들이 억압당하고 암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곳의 그의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서있는 곳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게하시고 듣게 하시고 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명지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피하고 싶고 부담스럽고 꺼려지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주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사명지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는 그 때에 우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곳이 내 사명지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2.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3.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입니다.
함께 기도
1. 우리의 마음을 꿰뚫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코람데오의 삶을 살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3.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우리의 사명지임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공동체 사역과 책임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스겔 11:19-20)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마음은 가지각색입니다. 금방 금방 달라집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사람이 있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퍅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마음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해 있습니까?
전쟁 중에 한 여인이, 군인인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사막 끝까지 왔습니다. 남편은 그녀가 오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과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디언 마을 근처의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곳 생활은 생각한 것보다,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환경이 사막인지라, 온도가 40도를 오르는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바람은 쉴새 없이 불어, 모래가 쌓이곤 하였습니다. 또한 인디언들과 영어가 통하지 않았고, 근처에 이웃도 없어, 그녀에게 하루하루는 지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작전 명령을 받고, 2주 동안, 사막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짤막한 두 줄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땅을 보고, 다른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그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의 별을 보기로 했습니다. 인디언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옷감 짜는 법과 도자기 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해지기 시작했으며, 그들과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막은 더 이상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름답고, 기묘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선인장과 유카와 조수아 나무를 연구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의 태초 생태계에 관한 연구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변했습니까? 사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여인의 마음만이 바뀐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이 바뀌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니,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악한 마음을 품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여, 편리한 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보다 더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언 18:14절을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병이 생기기도 하고, 병이 낫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마음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을 당하기 전,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에게, 빨리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전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믿다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폐허가 된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 하고, 낯선 이국 땅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고된 노역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발 강가에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며,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 잡혀 끌려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의 선포는 참으로 소중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이 가져야할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주실까요?
첫째, 한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곳의 선교사들은 신앙이 투철할 뿐 아니라,
어학의 재능으로 봉사합니다.
남미나 아프리카의 소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곳에, 직접 언어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한 선교사가 마태복음을 번역하다 죽으면, 다른 선교사가 다시 그 곳에 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선교사가 누가복음을 번역합니다.
한번은 그 곳에 들어간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하다 “순종”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을 순종이라는 단어로 번역할까, 고민하던 중, 마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심부름을 꼭 해야 된다는 뜻으로, 한 가지 말을 계속 아들에게
강조합니다.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
심부름을 가는 아들의 뒤에서, 아버지는 계속 말합니다.
“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
그 모습을 보고, 선교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나누지 않는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한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로 뭉쳐진 마음입니다.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하나로 똘똘 뭉쳐진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마음이 되려면, 다른 이에게 맞추는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올바른 일군이 되려면, 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일치되지 못합니다.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한 마음, 일치하는 마음이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옛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의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가 되고, 일치한 마음이 이루어질 때,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4:12절을 보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3-47절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하나된 마음입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일치된 마음, 하나된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아질 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마음껏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사랑이 넘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힘쓰고, 애를 쓴다고 해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주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된 마음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 하나된 마음, 일치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새 영이 함께 하는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아멘.
“내가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새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전혀 기도에만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주의 약속은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법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 심령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새 영을 주시겠다고,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은 후의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전하되 담대히 전하였고, 그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삼천 명씩이나 회심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모든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약속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령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13절을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못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충만함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을 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부드러운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간디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시에서, 간디와
장로교 선교사 찰리가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갑자기 불량배가 나타나, 그들의 길을 가로 막습니다.
찰리 목사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이때 간디는 묻습니다.
“성경에 원수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찰리는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간디가 다시 말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용기를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리는 사람을 향해 기꺼이
한 대, 아니 여러 번이라도 얻어 맞을 용기 말입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인간 본연의 성품에서, 미움이 줄어들고, 대신
존경심을 키우는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신 것 같아요. 나도 그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보았습니다”
결국 영국은 간디의 온유함과 부드러움 앞에 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도덕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삶 속에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훗날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미국에 그대로 적용한 인물이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온유한 투쟁을 통해 간디는 인도의 땅을 돌려 받았고, 킹 목사와 흑인들은
미국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우리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돌 같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마치 대패질을 잘한 나무 표면과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딱딱한 길바닥처럼 굳은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농부는 그 밭을 갈아야 합니다.
굳은 땅을 갈아 엎어서, 고랑을 내고, 돌맹이는 골라서 밖으로 던져 내고, 굳은 땅, 뭉쳐진 흙은 잘게 잘게 부수어서, 부드럽게 갈아냅니다.
거름도 주고, 비료도 주고, 골고루 갈아서,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령도 굳은 것을 제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감싸줍니다. 부드러운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는 상대방을
찌르는 가시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따뜻한 용서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나와 다른 모습, 나와 다른 행동,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강압적으로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과 함께 멍에를 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고쳐야할 부분은, 제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51: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므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주시겠다는데, 못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7절을 보면, “예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능력의 주님, 권능의 주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못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받아 능력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순종하는 마음
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큰 충격을 받아, 두 눈의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이 말합니다.
“출혈이 심하여 수술은 하지만, 안구가 빠져 앞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일세”
이때 청년은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요. 수술하지 마시오. 이대로 죽을 것이요”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며칠 후 붕대를 풀면서,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축하하네. 실명은 했지만 자네를 위해 안구를 기증해 주신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네”
청년은 또 소리를 지릅니다.
“애꾸로 살기보다는 죽는 게 낫지”
의사 선생님이 청년을 크게 책망을 합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행동인가?”
의사 선생님이 청년의 붕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는 서 있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습니다. 청년은 자신을 위해, 안구를 빼어준 어머니의 사랑에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는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불평하는 마음으로 사십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십니까?
20절 말씀입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여기의 “따르며”와 “행하게 하리니”는 순종하는 마음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까닭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다시 자유를 허락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힘쓰고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빌려, 따라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베드로를 보시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더니,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애쓰고 힘쓰며,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을 내렸더니, 배에 고기가 가득 채워지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 학자 베이커의 고백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돌담을 뛰어 넘으라 하시면 나는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뛰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순종이 모세의 의무라면,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건강하고 희망 있는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순종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힘쓰고 노력한다고,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지식을 우리의 머리에 가득 채운다고, 우리의 마음이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나누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이, 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돌 같은 딱딱한 마음, 굳어버린 마음이, 살처럼, 피부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한 마음, 성령충만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소유함으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분리된 마음이, 하나되게 하시고, 나누어진 마음이 일치되게 하여 주옵소서.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하시고, 불순종의 마음이 순종의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11장 깊이 읽기: 절망 속에서 어떻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받는가?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진 후, 에스겔 11장은 그 영광이 성읍 동쪽 산에 머무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악한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 안의 고기인 양 헛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마솥 밖으로 끌어내어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위대한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에스겔 11장은 심판과 희망, 절망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장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1장의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군대는 이미 유다 땅을 유린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일부 지도자들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겔 11:3)고 말하며, 마치 예루살렘 성벽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려는 교만한 태도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악한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릇된 생각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가 절망 속에 있던 포로 공동체를 향해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실패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욱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거짓된 낙관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남은 자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이루어 가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3절), 둘째,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남 (22-25절) 입니다.
첫째,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3절):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여호와의 전 동문으로 데려가시는데, 그곳에는 백성의 고관 이십오 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아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와 같이 당시 백성들에게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로 불의를 꾀하고 성읍 중에서 악한 지혜를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이라는 거짓된 안도감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으며, 오히려 그들이 죽인 자들이 고기가 되고 이 성읍은 가마가 될 것이지만, 그들 자신은 그 가마 밖으로 끌려 나와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을 받고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예언이 선포되는 동안 블라댜가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놀란 에스겔은 "아하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시키려 하시나이까"(겔 11:13)라며 다시 한번 탄식하며 중보합니다.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심판의 즉각성과 확실성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둘째,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에스겔의 탄식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시선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받고 쫓겨난 포로 공동체에게로 돌리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포로들을 향해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겔 11:15)고 조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친히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열방 중에서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는 놀라운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증한 것과 미운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 행위대로 머리에 갚으실 것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남 (22-25절): 마지막으로,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바퀴들과 함께 움직이며,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인 채 성읍 가운데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릅니다. 이는 10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의 이동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어, 이제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떠났음을 보여주는 슬픈 장면입니다. 에스겔은 이 모든 환상을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에스겔 11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 구분 (에스겔 11장) |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
|---|---|
| 악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1-13절) | 예루살렘 고관 25명의 죄악(불의, 악한 지혜, 거짓된 안도감) 고발. "가마솥과 고기" 비유 반박. 이스라엘 변경에서 칼로 심판받을 것을 예고. 블라댜의 갑작스러운 죽음. |
| 포로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 쫓겨난 포로들을 하나님이 친히 '잠깐 성소'가 되어주심.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심, 돌 마음 제거, 부드러운 마음 주심. 율례와 규례 순종. "내 백성, 나는 그들의 하나님" (새 언약). |
|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떠남 (22-25절) | 그룹들과 바퀴들,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서 올라가 동쪽 산에 머무름.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심. |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1장은 인간의 자기기만, 절망 속의 희망, 그리고 내적 변혁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다루며,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깊이 탐구합니다.
첫째, "이 성읍은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그 안의 고기가 된다"는 지도자들의 거짓된 안도감은 인간이 위기 상황에서 현실을 왜곡하고 자기 합리화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임박한 위험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는 마치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인간의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가 고통을 야기한다고 본 것처럼, 비합리적인 낙관론이나 자기기만은 결국 더 큰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정한 안전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서 오는 것이지, 스스로 만든 환상 속에 안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마솥'은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기기만입니까!
둘째,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 선포되는 포로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 새 마음'의 약속은 인간의 실패와 죄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구원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 즉 성전도 파괴되고 백성들도 흩어진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십니다. 특히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내적 변혁을 통해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마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본래적 자기(authentic self)'로의 회복과 유사하게, 인간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의한 선물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나 동쪽 산에 머무는 장면은 신적 임재의 부재(不在)가 가져오는 존재론적 공허함과 동시에, 그 '떠나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거룩한 도성이 아니며,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영적인 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절대자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겪게 되는 깊은 소외감과 무의미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특정 장소(성전)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는 흩어진 포로 공동체 가운데 '잠깐 성소'로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신적 임재의 방식이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동쪽 산에 머무는 영광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미련과 함께, 장차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희미한 기대를 품게 합니다. 때로는 기존의 것이 완전히 파괴되고 사라져야만, 진정으로 새롭고 본질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는 법입니다. 상실은 새로운 얻음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1장의 극적인 반전과 심오한 약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첫째,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거짓된 '가마솥' 안에 안주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수많은 정보와 오락거리, 그리고 소비주의적인 유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피상적인 만족감에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개인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혹은 영적인 문제든, 우리는 종종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괜찮을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 숨으려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의 지도자들처럼, 이러한 태도는 결국 더 큰 위기를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필요한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안주하고 있는 '가마솥'이 실제로는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둘째, 절망 속에서도 '새 마음과 새 영'을 갈망하고 있는가?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때로 깊은 절망과 실패를 경험하며,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 그리고 굳어진 마음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은 바로 그러한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변화될 수 없는 '돌 같은 마음'을 그분께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변화와 회복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절망은 변화될 수 없다는 절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약속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약속이다." - 익명의 묵상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영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습니까, 아니면 살처럼 부드럽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임재는 어디에 있는가? '잠깐 성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흩어진 포로 공동체 가운데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 건물이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오히려 그분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고난받고 소외된 이웃들 가운데, 그리고 진실된 예배와 교제가 있는 작은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외적인 조건에 얽매이기보다, 어디에서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추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잠깐 성소'를 우리 삶 속에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머무실 수 있는 '성소'가 되고 있습니까?
에스겔 11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의 어려움 앞에서 정직하게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헛된 희망이나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가?
- 나는 나의 굳어진 마음과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가?
-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특정한 장소나 형식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아니면 내 삶의 모든 순간과 모든 관계 속에서 그분을 경험하려 하는가?
-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 관계가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결국 에스겔 11장은 심판의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을 보여주며, 진정한 회복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됨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1장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악한 지도자들의 거짓된 안도감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 안에 있다고 착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내어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위대한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을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게 하시겠다는 '새 언약'의 핵심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떠나 동쪽 산에 머무르며, 임박한 멸망의 슬픔을 더합니다. 에스겔 11장은 이처럼 심판과 희망, 절망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메시지는 거짓된 안도감을 버리고, 절망 속에서도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정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9월 4일(목) 에스겔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마에 표하라(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and said to him, "Go throughout the city of Jerusalem and put a mark on the foreheads of those who grieve and lament over all the detestable things that are done in it."
이마에 표하라(put a mark on the foreheads)
7장 / 끝이 가깝다.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경고와 심판의 날을 예고함.
8장 / 예루살렘의 죄.
에스겔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9장 / 예루살렘의 심판.
이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을 알리시고, 의인들을 구별하심.
- 이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를 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그 가증한 일을 애통해 하며 마음에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표를 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가증한 죄에 동참하지 않고 같은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애통해 하며 통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표' (타우)란 히브리어 알파벱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십자가와 같은 기호를 나타내는 낱말로도 사용되었는데 아마 이런 형태의 표가 영적으로 인친것을 뜻하는 듯하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인치시는 것은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표하신 것(창 4:15)
출애굽 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사자(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 멸망치 않도록 한 것(출 12:13, 21-29),
말세에 하나님께서 다신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므로 열방에서 구원하시는 것(계 7:1-8) 등과 유사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긍휼에 의해 보존된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엿보게 한다(6:8)
어원 / 842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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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표적, 겔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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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남성 신호, 기호, 서명, 욥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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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서명(욥 31:35), 표(겔 9:6). [동] 표를 그리다(겔 9:4).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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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사 8376과 동일 : 묘사하다, 윤곽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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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사 피엘형 : 삼상21: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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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동사 히필형 ׃ תִתְוָה תָו 묘사하다[עַל을 수반하여], 겔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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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그적거리다(삼상 21:13).
죄 때문에 통곡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표시하여 보호하신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사로잡혀와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을 환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8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우상숭배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9장은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루살렘 시민 중 이마에 표시를 받은 사람들은 멸망하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 진 가증한 일, 우상 숭배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통곡하며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도장을 찍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내려 주십니다. 성령님으로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주셨습니다.
다 함께 에스겔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죄 때문에 통곡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표시하여 보호하신다.
첫째, 죄 때문에 통곡하며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멸망하지 않습니다(1-7절)
둘째, 에스겔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8-11절)
셋째, 경건한 자는 성령님을 통해 보호해 주십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복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멸망당하지 않음(1-7)
1. 멸망시키는 천사들과 살려 주는 천사(1-2절)
여호와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관할하는 자는 형벌을 집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천사 6명이 나타났습니다.
성전 뜰 바깥의 북쪽문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환상을 통해 보인 것을 실제 실행하는 것은 바벨론 군대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바벨론 군대가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들의 “죽이는 무기”는 원래 “멸망시키는 무기”입니다. “멸망”은 노아 홍수 때 세상을 물로 멸망시킨 것에 쓴 단어입니다(창 6:13,17) .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데 쓴 말입니다(창 18:28-32). 이집트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재앙을 내렸습니다. 10번째 재앙을 내린 “멸하는 자” (출 12:23)에 쓴 말입니다.
그런데 무기를 손에 든 6명의 천사들 가운데서 또 다른 천사 일곱째 천사가 있었습니다. 희고 부드러운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과 같습니다. 허리에는 서기관의 먹그릇을 차고 있었습니다. 먹그릇은 뿔로 되었는데, 거기에 붓과 두 개의 먹통을 넣을 수 있게 했습니다.
7명의 천사들은 북문을 통해 들어 와서 성전 뜰에 섰습니다.
백성이 우상숭배하는 곳입니다.
2. 성전을 떠나가시는 여호와의 명령(3-7절)
1) 3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성전의 안쪽 지성소 언약궤에는 그룹 천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래 그 그룹 천사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곳으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지성소를 떠났습니다. 성전 밖으로 나와서 성전 문지방위에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바깥으로 나와 떠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너무나 큰 죄 때문에 백성을 떠나십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천사에게 외치셨습니다.
“너는 그 성읍 가운데, 예루살렘 가운데 지나가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들에 표를 그리라.” 이마에 X 를 그려 주라고 합니다.
가증한 일은 하나님께서 미워 하시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또 우상 숭배의 결과 백성들이 서로를 착취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는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과 제사장 장로들, 백성들이 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깨어지듯 탄식합니다. 또 이 가증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보내실 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죄 때문에 탄식하고 기도하고 있으면 참으로 복됩니다.
5, 6절에서 하나님은 무기를 든 6명의 천사에게 말하십니다.
5. 너희는 이마에 표시를 하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녀라.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죽이라.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여라.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노인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마에 표가 그려져 있는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죽이는 일을 하나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배교와 우상 숭배가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곳이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소 앞에 있는 늙은 사람부터 치기 시작했습니다.
“늙은 사람”은 장로라는 뜻도 됩니다.
8:10-12에 환상이 있었습니다.
장로 70명이 성전 안의 기구를 보관하는 방에 들어가서 각자가 우상에게 분향했습니다.
8:16절에 성전 안뜰에서 태양신을 향해 경배하던 25명도 먼저 죽임 당하는 장로들같습니다.
우상숭배로 더럽혀 진 성전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이미 더럽혔기 때문에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거룩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무기 가진 자들에게 시체를 성전 뜰에 채워서 성전을 더럽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 나가서 성읍을 치라고 하십니다.
6명의 천사들은 그 명령대로 했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은 구약 성도님을 본받읍시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경배합시다.
서로 사랑을 실천합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대로 교회와 우리 가정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의 죄를 볼 때 하나님께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읍시다.
우리 사회의 죄에 대해서도 슬퍼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피하도록 합시다.
둘째로, 에스겔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8-11절)
6명의 천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다니면서 치고 있을 때, 에스겔은 혼자 남았습니다.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8절입니다.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9절,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미 멸망한 북쪽 이스라엘, 이제 하나님이 심판할 남쪽 유다의 죄가 아주 아주 컵니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긴 가증한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죄가 아주 컵니다. 그 땅에 서로를 불법적으로 행하고 약한 사람을 약탈하며 피흘리는 죄가 가득찼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복을 약속하며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땅을 사람으로 가득 채우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사람을 죽인 피가 땅에 충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 차는 이 백성은 멸망시켜야 합니다.
이들의 또다른 죄는 하나님께 벌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니 계속 죄를 짓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반항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
하나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십니다.그 백성이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배반한 자를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에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그릇을 찬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백성의 죄악과 그들이 받을 심판 때문에 탄식하며 울던 사람들의 이마에 X 표시를 다 끝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도 죄를 회개하며 보이지 않는 표시를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참으로 경건한 자에게는 성령님을 통해 보호해 주십니다.
1.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마에 표가 있는 자
그런데 이 환상은 어떻게 실제로 이루어 졌을까요?
에스겔이 환상을 본 지 몇 년 후 바벨론이 예루살렘, 유다에 대한 3차 침공을 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였습니다.
사람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만 남겨 두었습니다(렘 39:1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시가 있는 사람은 살려 두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울던 사람들도 재난을 함께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표시한 사람은 어떤 점에서 멸망을 피했을까요?
영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영적 타락 때문에 탄식하고,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로 표시하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센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2.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마에 도장이 찍힌 사람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요한계시록은 우리 믿는 성도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 장면이 나옵니다(7:1-4).
네 명의 천사가 온 세계 사방에서 바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바람은 땅과 바다를 해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때 또 다른 천사 한 명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도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천사가 네 명의 천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마십시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것은 하나님의 소유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람의 해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이마에 도장이 찍힌 자의 수는 144,000명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상징적으로 144,000이라 합니다.
14절에서는, 이 사람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믿음으로 죄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린 양처럼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마에 하나님이 주신 표시가 있는 자들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란을 면제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불신자보다 더 많은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셨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그들에게는 고난이 그들을 멸망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에게 큰 환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라 가는 데 많은 방해들이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통해 많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인하여 통곡하며 우는 자는 복 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부족함을 인해 우는 자는 복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는 우리를 “너는 네 것이다.”고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3. 복음전하는 자를 하나님이 보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4-7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박해를 당할 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절은 말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
하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게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박해 당할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죽음 이후의 세계와 우리 영혼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경외합시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기억하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맙시다.
눅 12:11, 12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사람들 앞에 설 때에 대답할 말을 어떻게 할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하십니다.
4. 성령님이라는 도장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이라는 도장을 주셔서 영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에베소서 1:13은 말합니다. “그(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믿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도장을 찍듯이 마음에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라디아5:22,23은 말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착함,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을 금할 법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성령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 환란이 올 때 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성령이 도장 찍어 주셨으니 성령의 보호가 있으니 회개하는 삶을 계속 살아갑시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죄를 회개하며 성령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갑시다.
고난은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련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삽화 이야기 / 파가니니와 낡은 바이올린
파가니니의 일화
오래 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런던의 템스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 한 거지노인이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을 연주를 하며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거지노인이 벗어놓은 모자에 동전을 넣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낯선 외국인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지노인이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거지노인은 다 떨어진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떨어져서 너덜너덜했습니다.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해서 덥수룩 한 상태였습니다.
보기에도 처량해 보였습니다.
그 외국인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측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지금 제 수중에 준비된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잠시 몇 곡만 연주해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거지노인은 잠시 쉬기도 할 겸해서 그 낯선 외국인에게 낡은 바이올린을 건네주었습니다.
외국인은 그것을 손에 쥐고서 천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걸음을 멈추고는 외국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두 곡이 끝난 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거지노인은 자기가 벗어놓은 모자를 들고서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모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순식간에 돈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그것도 한 푼 두 푼 던져주는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돈의 단위가
높았습니다.
모두가 지폐를 꺼내서 모자에 넣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경찰관도 놀라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경찰관마저도 다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어 그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관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거지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이제 연주가 끝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그곳에 서 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사람은 파가니니다, 그 유명한 '파가니니!!"
* 이탈리아의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바이올린의 귀재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바이올린의 마술사'라고도 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명 연주가입니다.
그가
런던에 연주차 왔다가 호텔에 머물러 있으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템스 강변을 산책하기 위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쌍한
거지노인이 바이올린을 힘겹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대신 몇 곡을 연주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명연주자 파가니니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 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세상의 죄와 더러움에 동조하지 않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이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9장의 내용
- 환상 :에스겔은 환상 중에 성전에서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 심판의 시작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와 죄악 때문에 심판이 시작되며, 멸망시키는 천사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납니다.
- 표를 하라는 명령 :하나님께서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성읍 중에 순행하여 죄와 악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구원과 보호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되어 보호를 받게 됩니다.
- 세상의 죄악과 잘못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통곡하는 자들입니다.
- 사회 시스템이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문제를 삼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 믿음을 지키고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여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구원과 심판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 신앙인의 자세 :.세상의 죄악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9월 3일(수) 에스겔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인 줄 알리라(6: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I did not threaten in vain to bring this calamity on them.
새번역 /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겠다고 공연히 말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다.
4장 /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 받음.
5장 /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함.
6장 /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향한 심판의 예언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다국어성경 인터넷 판에서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씀을 검색한 결과 구약 전체에서 55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48구절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의 주요 특징이요 그 목적 중 하나다(7:4; 11:10, 12; 12:20; 13:9, 14, 21, 23; 14:8; 15:7; 16:62; 20:38, 42, 44; 22:16; 23:49; 24:24, Dyer).
'여호와'란 자존자(自存者), 즉 스스로 계시는 자라는 뜻이다(출 3:14, 15).
이 성호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로서(출 6:3)
창세기 4:26부터 사람에 의해 불리워졌으며 구약에서 가장 많이 쓰인 하나님의 이름이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하여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서로 간에 직함이나 계급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둘이 친숙하고 가까운 사이임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구원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극적인 사귐이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부르다’(카라)는
‘선포하다’, ‘크게 외치다’라는 뜻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멀리까지 알린 것을 뜻합니다.
에노스 시대에 참 예배가 확립되고 바르게
세워짐으로,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에노스(Enos)
에노스(Enos)는 창세기 5장에서 셋의 아들로 언급되는 인물로, 성경에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인간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상징하며, 그의 생애는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 에노스의 이름: 히브리어 의미와 풀이
에노스(Enos)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אֱנוֹשׁ' (에노시, Enosh)로 표기되며, 그 뜻은 '인간', '사람',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은 인류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상징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할 때 에노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아담'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을
에노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 15절에서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인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에노스'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이름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에노스의 생애
에노스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로, 그의 탄생은 창세기 4장 26절과 창세기 5장 6-11절에서 언급됩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의 생애는 그의 탄생 때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따르면, 에노스가 태어난 시점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생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습니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에노스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생애 동안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기 5:11).
3. 에노스 이야기의 교훈
에노스의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등장한 시점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돌아옴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태어난 시점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의 이름이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회개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예배의 시작
에노스가 태어난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시 교제하시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배와 기도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신앙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3)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4. 결론
에노스는 성경에서 셋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또한, 기도와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에노스의 생애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노스 이름 뜻 생애 교훈
에노스 / 남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가 처음으로 기록된 곳은 창세기 2:4이다.
그 후 창세기 2장에는 여호와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는 뜻으로 가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이미 에노스 이전부터 그렇게 기록되고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이 구절은 앞에 나온 증거들과 충돌된다.
그렇다면
이 뜻은 무엇인가?
창세기 4:26의 “비로소...불렀더라”는 히브리어(후할리크로)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부르기를 시작했다”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분명히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로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노스 이전에도 사람들이 이미 여호와를 불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그때
사람들이 여호와란 성호를 처음 불렀다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체계적인 공적 예배가 시작되었다,
둘째, 마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셋의 후예가 자신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셋째,
셋의 후예가 가인의 후예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넷째, 가인의 후예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구절은 이중 어느 하나의 의미보다는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건전한 이해이다.
먼저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종종 공적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은 그 사실을 그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창 12:8;
13:4; 21:23).
이외에도 성경은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예배임을 여러 곳에서 나타낸다.
예를 들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왕상 18:24)고 하였고, 요엘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욜 2:32)고 하였으며, 다윗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이방은 “주의 이름을 부리지 아니하는
열국”(시 79:6)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 창세기 4:26에서 사용된 이 구절의 의미도 그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웬함(Gorden N. Wenham)도 “창세기 4:26은 앞의 구절들이 육축, 음악, 기게 만드는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 구절도 정규적인 거룩한 예배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WBC, 1:116)고 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재림교회
성경주석(SDABC)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주석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셋의 후예들로부터 공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위에서 언급한 나머지 세 가지의 결과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당연히 셋의 후예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리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와 일치하게 데이크(Dake) 주석은 “일반적으로 이때에는 인류에게 두 부류가 있었다고 믿는다. 하나는 셋의 후예로서 신앙인의 계보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의 계보이다....그러므로 이 구절을 직역하면 ‘그 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 자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며, 혹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상의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가 된다”고 하였다. 엘렌 G 화잇도 이러한 이해에 동의하면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그러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두 계급 사이의 구별이 더욱 현저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함을 공공연히 고백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다”
그리고 특히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시며 그들에게서 경배를 받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출 3:13-15; 6:7; 7:5; 레 11:45; 22:32, 33).
본 구절도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이방 우상들과 같이 형상으로 만들어져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며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징계하시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심을 암시해준다.
한편 하나님의 이런 의도는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의 멍에에서 건져내신 사건을 통해서도 알려지기를 바라신 것이기도 하다(34:27; 37: 6, 13).
또한 이는 이스라엘 주위의 열국들도 알기를 바라신 것이었다(25:7, 11; 29:6).
알리라(알다. 야다. 3045) יָדַע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명] 총명한 자(단 2:21), 감각(잠 23:35), 지식(느 10:28), 지식인(전 9:11), 친구(왕하 10:11, 시 31:11), 친족(룻 2:1), 친우(시 55:13).
- '헛되지'(하남)란 문자적으로는 '은혜로운', '관대한'을 뜻하는 히브리어 '헨'(*)에서 유래된 말로 '값없이', '까닭없이' 등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아무런 대가없이 행해진 헛된 말씀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그분의 속성에 따라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임을 뜻한다(사 55:11).
보십시오. “8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9너희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10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은 죽임당할 뿐 아니라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가 있는데, 그들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여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할 때
또한 이스라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할 때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6장 11-14절을 보십시오.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12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13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 위에, 모든 산 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4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망할 때 먼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죽고, 남아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유다가 망하는 날 그들이 우상 앞에서 죽고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는 날, 그들이 우상 앞에서 멸망하는 날, 이스라엘이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죽는 날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됩니다. 그들이 이방에서 회개하고 애통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날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눈을 창조한 분으로 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귀를 창조한 분으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하는 일들을 다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듣고 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할 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는 하나님임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그들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분이기에 이스라엘은 심판의 날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심판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고 하나님은 심판 뿐 아니라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지만 그들이 먼 나라에 있을 때 그들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그들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며, 그는 살아계시고 역사하며,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아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징계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손바닥에 새겼으며 아비가 자녀를 긍휼이 여김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깁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본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이 여깁니다. 예레미야가 말했듯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두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됐는데, 새 언약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리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새 백성을 만드심으로 성취됐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심판은 고통스럽지만 이 고통스러운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과하고 회개하여 새로워지면 그들에게는 새 언약, 새 출애굽, 새 하늘과 새 땅, 새 피조세계, 새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립니다. 이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흘러 넘칩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심판이 아니란 말은 아닙니다. 심판은 심판이고, 고통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심판을 넘어 더 크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심판당하는 날, 회개하는 날 그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제가 하나님의 저를 향한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도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나를 인해 가슴이 아팠는가를 압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가슴아파하실까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서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여러 훈련을 주시고, 하나님은 저도 사랑하셔서 여러 훈련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제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시는 말씀을 붙들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부활한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살아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며 하나님의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도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경외함을 받게 하시고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되심을 체험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6장)
하나님의 말씀이 또다시 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한 외침이다.
에스겔은 무너진 땅, 황폐한 땅, 우상숭배로 오염된 땅을 향해 예언한다.
말씀이 임하는 대상은 더 이상 마음이 열린 백성이 아니다.
그들의 귀는 닫혔고, 그들의 눈은 멀었기에 이제 자연 자체가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산이 듣고, 골짜기가 응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그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다.
하나님은 그 땅 위에 칼을 두신다.
산당은 무너지고, 제단은 깨지고, 우상 앞에 무릎 꿇었던 자들은 그 우상 앞에서 엎드러져 죽는다.
얼마나 처절한가.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삶 전체가 붕괴된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버린 자는,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잃는다.
이스라엘의 재앙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며, 운명의 굴레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예배의 끝자락에서 예언된 필연이었다.
그들의 시체는 우상 앞에 던져지고, 해골은 제단 사방에 흩어진다.
마치 그들이 예배하던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마지막으로 증언하듯, 그들의 죽음조차 그 잘못된 숭배를 고발한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것은 단지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다.
음란한 눈, 음란한 마음.
하나님을 향하던 시선을 빼앗아 버린 정욕과 탐욕.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아픔은 백성의 고통 이전에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심판의 파도 속에도 은혜의 줄기는 남아 있다.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완전한 전멸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
그 살아남은 자들, 그 흩어진 자들, 그 수치 가운데 남겨진 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자신들이 떠났던 하나님을. 자신들이 거부했던 그 이름을.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벌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흔들림이었다.
스스로를 한탄하게 하는 은혜, 기억하게 하시는 사랑.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 절망의 땅에서 시작된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 구절은 에스겔 전반을 꿰뚫는 선언이다.
심판의 이유도, 은혜의 목적도, 회복의 끝도 결국은 이것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은 잊힌 이름이 되지 않으신다.
땅을 흔드시고, 역사를 흔드셔서라도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신다.
우리가 타락을 가벼이 여기고, 우상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소하게 여기는 시대에, 주님의 이 외침은 낯설고도 두렵게 다가온다.
에스겔은 무너진 제단과 죽은 시체들을 보며 예언한다.
그러나 그 예언은 죽음의 선언이 아니라,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우는 고발이다.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이지만, 그 손은 또한 살리시는 손이다.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이 말씀은 심판이지만 동시에 간섭이요, 주권의 표지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땅을 떠나지 않으신다.
오히려 가장 깊이 개입하신다.
황폐한 땅, 재앙의 중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난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황폐한 제단인가?
살아남은 자의 회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축복받을 때만이 아니라, 무너질 때도 선포된다.
그 이름 앞에서만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
모든 무너짐의 끝자락에서 들려오는 음성.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무너진 심령을 깨우고, 숨은 우상을 부수며, 다시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들리는 그 이름을. 심판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을.
그리고 다시 외쳐야 한다.
들을 귀를 가진 산과 골짜기처럼.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입술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노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97년경에 이스라엘의 남유다에 2차 침공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있으면서 선지자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왜
이스라엘의 남유다가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받고 무너지게 되는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인 6장 말씀의 중심내용은 1-7절까지는 우상숭배로 인한 심판에 대해, 8-10절까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함에 대해, 11-14절까지는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여호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로 인한 심판(1-7절)
(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사무엘 시대에는 산당이 부정적인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 왕(BC
930-909년)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산당을 지은 이후로 ‘산당’은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 즉 우상 숭배의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주로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산당’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높은 곳’ 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던 그들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높다고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높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통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철저하게
낮아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4)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는 ‘너희 제단들’, ‘분향 제단들’, ‘너희 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단을 쌓고, 건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분향 제단’ 이라는 단어는 ‘태양 기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제사를 드리는 건물’이나 ‘예배실’도 함께 포함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과 관계된 것은 제단이든 건물이든 모두 다 철저하게
부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들은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자신들의 ‘호의호식’만을 빌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을 이제 철저하게 벌하시고 그들이
‘호의호식’을 빌었던 제단 주변에서 죽도록 하여 우상 앞에 엎드러진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 평안은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이 아닌 결코 영원하지 않은 다른 무언가에 우리들의
인생을 맡기고, ‘호의호식’만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수 있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높아진 것을 얼마든지 낮추실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우리를 높여 주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우상에 아무리 집착하고
열심히 빌어도 결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8-10절)
(8) 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중에도 긍횰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살아 남은 자들의 특징은 악에 대하여 이제는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9) 너희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살아남은 그들은 예언되었던 모든 재앙을 겪었기 때문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스스로 한탄하게 됩니다. 남은 자들은 그제서야 하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끔찍한 징계를 당한 뒤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이러한 우를 범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여호와(11-14절)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탄식의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가증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 하십니다.
11절의 ‘가증한 악’에서 ‘가증하다’는 단어는 ‘역겹다, 혐오스럽다’에서 왔습니다. 즉 ‘가증한 악’은 ‘역겨운 죄악들’ 입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가 얼마나 역겹고 끔찍한 것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12)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대상은 참 광범위합니다. ‘먼 데 있는자, 가까운 데 있는 자,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 모두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14)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지역적으로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디블라’는 열왕기하 23장 33절에 나오는
‘리블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하맛에 있는 북쪽 지경의 도시’ 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라는 표현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남과 북의 순서만 바뀐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모든 지역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지역, 모든 자에게 임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세상의 여러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봐야 무엇이 옳은 길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늘 그들의 교만함과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애써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정도 쯤이야 하나님도
이해해주실거야!’,
‘이 정도 불순종 한다고 해서 바로 벌하는 하나님은 아니시지!’ 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용 할 때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무시한다면, 오늘 말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결국 끔찍한 파국을 맞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목적과 이유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친밀하심 속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때로는 우리가 교만하여 내 마음 속 은밀한 곳에 나만의 산당을 세우고 하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때 늦은 후회와 한탄을 하지 않도록 역겨운 죄악들을 멀리하기를 원합니다.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친밀하심 속에서 함께 지어져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은 산꼭대기에 있는 ‘산당’까지도 철저하게 징계를 하십니다.
당신 안에 교만함으로 높이 세운 ‘산당’과도 같은 우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2. 모든 재앙을 경험한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한탄 하였던 것처럼 당신도 때 늦은 후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3.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 속에는 ‘역겨운 죄악들’과 같은 ‘가증한 악’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4. 당신은 심판을 받기 전에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고 매일 매일 그렇게 고백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4천 500억 달러
미국에서 투자액 일시불 선납 요구액
* 자동차 관세 25% - 일본 15%, 미국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붕괴될 것
9월 2일(화) 에스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이 열리며(1:1)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에스겔 선지자는 2차 포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이 열리며 주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냐답게 살아가야 할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밀씀(3절)
둘째는 여호와의 권능(3절)
(전개 이야기) 오영석총장
작은 관심(關心) 오영석
전남 해남에서 머슴 집 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홍역을 심하게 앓자 그의 어머니는
‘얘가 제대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머슴인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로
가난한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너무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며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하나님,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세요.
그 길만 열린다면 제 생애를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
소년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가난한 집안 형편을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리곤 편지봉투 앞면엔 ‘하나님 전 상서’라고 쓰고, 뒷면엔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소년이 쓴 이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다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민하던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해남읍에 있는 한 교회 목사님께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 목사님은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이었는데,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고 그를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슈바이처(Schweitzer, 1875-1965) 박사와 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먼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향에서 목회를 하다가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를 가게 되었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는 모교인 한신대의 교수가 됩니다.
그 소년이 나중에 한신대학교 제3대 총장까지 역임한 오영석(吳永錫) 전 총장입니다.
간절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영석 총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목사님에게 전달해 준 우체부 아저씨를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분의 지혜가 있었기에 한 유명한 인재가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소년이 쓴 편지를 받아들고서 어디로 보내야할 지 모를 때,
‘뭐 이런 편지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고 휴지통에 버렸다면 오영석 총장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그 우편배달부는 어린 소년의 꿈과 간절함이 담긴 그 편지를 교회 목사님께 전달했고,
소년의 꿈이 이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따뜻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나에겐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 있고,
나에겐 별거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그 작은 정성과 관심이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인생에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 주변에서 일어난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관심을 가져 보십시다.
그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에겐 잊지 못한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전 상서' 쓴 뒤 대학총장 된 소년
편지라는 낭만적인 통신수단이
세상을 연결해주던 느슨했던 시대에 하나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꿈을 전달하려 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신이었다.
소년은 그 꿈을 이루었을까?
'하나님 전 상서'의 주인공 오영석목사(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해남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총장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써서 무작정 우체통에 넣었다구요?
말하자면
무대포 정신이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꿈을 꾸시고 이룩하셨는데 어떻게 어린 소년이 그런 용기를 내셨는지요?
"하하 무대포정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이판사판 뭐든 해보는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이 가난해 진학을 못했는데 너무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서 견딜 수 없었지요.
어느 날은 후배가
소개해 준 목포 유달원이라는 고아원을 버스비도 없어 운전수한테 욕을 먹어가며 찾아갔는데 '가족이 있으면 유달원에서 살 수 없다'고
해서 고하도에 있는 다른 시설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아 다음날 아침 목포로 나와 큰 상점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점원으로 쓰고 대신 야간 중학교를 임금 대신 보내주도록 호소를 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당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들려주십시오. 무대포정신이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 편지를 쓰신 거군요.
"고아원이라도
들어가 공부하려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전처럼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거나 논밭에서 어머님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마음은 항상 공부 생각 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지나고 2년째 여름방학이 되어 동네교회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광주에서 간호학교에 다니는 여선생님이 와서 성경을 가르쳤어요.
그 선생님은 설교와 위생교육 외에도
'장발장'같은 흥미진진한 동화를 많이 해주셨는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당시 나는 교회 종지기로 아침 저녁 종을 쳤는데 하루는 종이
비틀어져서 위에 올라가 바로잡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앞이 보이지 않더군요.
선생님 같은 여성도 배우면 저렇게 큰일을 하는데, 나는 왜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나 기가 막혀서였지요.
한참을 종각 위에서 울다가 땅으로 내려와서 종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희망하는 일이 이뤄지도록 자신이 믿은 신께 빌거나 기도를 하는데요.
"기도도
엄청 했지요.
낮에는 산과 들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저녁에도 잠이 깊이 들면 하나님이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할까 봐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때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어느날
우체통에서 편지들을 꺼내 분류하던 해남읍 우체국 직원들이 '하나님 전 상서'라는 낯선 편지를 보고 우체국장께 드렸는데 그
우체국장이 마침 해남읍교회의 신실한 신도였고, 결국 그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전해져 공부의 길이 열렸다고 하지요.
아무렇게나 써
넣은 '편지한 장'이 그토록 원했던 학업의 길을 열어준 현실로 나타났는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입니까.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렇게나 쓴 편지가
아닙니다.
그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생각하고 궁리하고 또 기도를 했겠습니까?
소년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담판하듯 편지를 보낸 것이지요.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린 나의 기도를 듣고 내 편지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김찬원이란 해남읍교회 장로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편지를 읽어본 이준묵 목사님께서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3월 6일인데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어 비를 맞으면서 사정교회 장로님께서 주신 비파나무 분재 한그루를 안고 버스에 올랐었지요.
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기적'이라고 하지요."
이준묵 목사님을 만나 그가 운영하시는 등대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도중에 진로를 바꾼 배경은 무엇입니까?
"의대를
택한 건 목사님 사모님의 추천이었지요.
1962년 2월 해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선배와 함께 전남의대에서 보낸 합격증을 첨부하여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차 안에서 선배가 이런 말을 하는거예요.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하여주는
슈바이처 박사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뜻을 바꿔 1962년 2월 20일 경에 한국신학대학에서 다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2월말에 이준묵목사님께서 등록금을 갖고
오셔서 등록을 하려는데 "오영석 학생이 일등을 하였으므로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하며 삼성모직에서 각 대학의 수석입학생들에게
준 양복 기지 선물까지 주었지요.
그 기지로 교복을 지어입고 한신대 교정에 들어서던 기억이 어제일 같군요."
해남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는 거의 성자로 알려지신 이준묵목사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목사님은
호남의 굴지의 기업가로 아시아 자동차 공장과 나주 비료공장을 창업한 이문환 회장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원래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거지 성자로 불린 이현필 선생님과 강순명 목사님과 함께 활동을 하셨죠.
어느 날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모든
수속을 밟고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형님에게 송별 인사를 갔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호적에서 삭제하겠다."는 엄포에 포기를
하고 김수덕사모님(당시 간호사)과 결혼하셨다고 해요.
김수덕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넓은 아량과 덕과 깊은 지혜를 지닌
분이셨지요.
당시 읍교회의 신자들은 20 명에
불과했는데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면서 교회는 점차로 부흥 발전해 36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실 때, 신자들의 숫자가 400명이
넘었어요.
6·25가 나자 전쟁고아들과 걸식아동들을 모아 돌보았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기 훨씬 전인 50년 후반부터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군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처음에 해남읍에 YMCA를 창설하신 분이죠.
나주 비료공장에서 일하던 독일 기술자
호만씨의 협조를 통하여 해남에 호만학교를 설립하시고, 가정형편 상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는 많은 학생들에게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신 교육자였습니다."
해남출신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한신대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총장님께서 추구하는 기독정신이랄까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제가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 그것도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바로 장공신학을 통해 기독교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공신학의 중심주제는 '현실과 변혁'이지요.
그분은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한다는 생활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도 힘을 썼지요.
그 분을 따르던 인물들, 장준하, 문익환, 강원룡, 안병무박사 등 민족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비마다 양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람들을 보면 참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 뒤에 도서관 입구에
써진 성경문구는 히랍어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이지요."
대학에서 은퇴를 하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한신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으로서 25년 남짓 재직하다가 2005년 8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있지요.
그의
신학사상은 20세기 초에 신학사상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의학 책이 워낙 방대하고
깊고 어려워서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13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참여해 많은 진전을 이뤘지요.
그 책이 모두 번역 출판돼 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읽고 공부를 한다면, 한국교회와 강단의 생명력은 훨씬 풍성해지고 활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부터 네 달 동안 고향 해남읍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하셨는데 아주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잠시 설교목사로 갔었는데 기회가 되면 고향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기름진 흙을 실컷 밟으면서 해남에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잠을 잘 때 꿈을 꾸는데 꿈의 대부분이 거의 고향에서 펼쳐집니다.
금강곡의 맑은 물소리와 풍경들,
중고등학교 때 땔감을 하러 갔던 우슬재, 해남군청 광장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시끌벅적한 고도리 장터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특별히 이준묵 목사님과 사모님의 큰 은혜와 해남읍교회에서 큰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빚진 죄인의 심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한신대 장공기념관 앞에서 뵙게 돼 매우 즐거웠습니다. "해남이 한국에서만 아니라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문화의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는 총장님의 기도가 꼭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 오영석 전 총장 연보 |
| · 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 1962 해남고등학교 · 1969 한신대학교(신학사, Th. B) · 1971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 Th. M.) · 1982 스위스 Basel University(신학박사, Th. D.) · 1972~1975 전남 해남 백야교회 목회 · 1975~1976 전남 해남 해남읍교회 목회 · 1984~2007 한신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신학과) · 1992. 3~ 7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교수 · 1997~1998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 1998~2000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장 · 1999~2002 칼 바르트 학회 회장 · 2001. 9~ 2005. 8 한신대학교 총장 · 2009~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마태 3:16).
스데반이 돌 맞아 순교할 때 외친 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가 하나님 우편에 서는 것을 본다'(행 7:56),
이사야 64:1에서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등이 있습니다.
신앙이
영적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환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하늘이 열리는
체험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 11:25, 26)는 말씀이 이런 영적 체험을 말합니다.
빛의 반대는 어둠입니다.
우리 인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죄와 죽음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빠지게 합니다. 죽음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나는 길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삼 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완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생명을 완성시키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에스겔"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남 유다 왕국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세 차례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1차 포로는 BC 605년 여호야김 왕 때(18대)
2차 포로는 BC 597년 여호야긴 왕 때(19대)
3차 포로는 BC 586년 시드기야 왕 때(20대)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던 때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때에 포로가 되었을까요?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5년 그달 5일이라."(2절)
선지자 에스겔은 2차 포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 그발강 가에 있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언제 하늘이 열렸다고 하셨습니까?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늘이 열렸습니다(눅 3:21).
두번째는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행 10:11).
세번째는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발강가에 머물고 있었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겔 1:1).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특별계시라고 하겠습니다.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과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의 소망은 한반도 땅에 자유통일의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1947)
작사 안석주/ 작곡 안병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여호와의 말씀(다바르 아도나이) 1697 3068 / 데발 아도나이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여호와의 권능(야드 아도나이) 3027 3068 / 야드 아도나이
1. 사람의 손. 2.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3. בְּיָדִי.㉠ 내 손에
발음
[ yâd ]
구약 성경 / 1617회 사용
여호와의 말씀이...특별히 임하고
- '에스겔'이란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하나님께서 단련시키시다'의 뜻이다.
이는 포로 기간 중에 유다의 죄악성과 심판, 예루살렘의 파괴 및 회복 등을 전한 그의 사역적 특성과 잘 어울린다.
한편 에스겔처럼 제사장 가문 출신이면서 선지자 사역을 감당한 자는 구약에서 사무엘(삼상 2:35; 3:20; 7:9; 16:2-13),
예레미야(렘 1:1), 스가랴(느 12:16; 슥 1:1; 7:3) 등이 있다.
또한 본 구절의 '특별히 임하고'의 히브리어 '하요 하야'(*)는 '하야'(*)의 반복적인 표현으로서 그 의미를 강조해준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 '권능'(*, 야드)이란 원어상 '손'(the hand, NASB)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나타내는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적인 표현이다(3:22; 8:1; 33:22; 37:1).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 擬人化, Anthropomorphism)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육체를 갖지 않으신 순수한 영이시다.
따라서 인간의 오관(五官)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딤전 6:15-16).
또한 하나님은 완전히 도덕적시시며 완전한 자성적, 주권적 속성을 갖고 계시는 점에서 인간과는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때가 많다.
이처럼 여호와를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거나 혹은 인간의 품성을 지닌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신인동성도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 한다.
이에 해당하는(anthropomorphism)는 ‘인간’(안드로포스)와 ‘형태’(모르페)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인간과 유사한 형태와 성격을 지님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다신 종교 뿐아니라 고대 다른 나라 종교에서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을 종종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한다.
따라서 이는 종교학과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고’(창 1:3),
‘보시며(창 1:4),
서늘할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창 3:8) 분으로 묘사된다.
또한 여호와의 형상(민 12:8),
여호와의 발(출 24:10),
여호와의 손(사 50:11) 등과 같은 표현으로 마치 사지(四肢)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육체적 특성 외에도
’질투하시며‘(출 2):5),
분노를 발하시고’(시 77:9),
‘자비롭고’(욘 4:9),
능력이 많으시고(시 147:5),
‘자비와 은혜가 넘치시고’(시 103:8),
후회 하시는(삼상 15:11),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또한 ‘목자’(시 23:1),
‘신랑’(사 23:1),
‘용사’(출 15:3), 출 15:3) 등과 같이 인간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를 여호와께 적용시키기도 하였다.
신약에서는 구약보다는 이러한 표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나 역시
‘말씀하시고’(히 1:1),
‘보내시고’(요 17:8),
‘택하시고’(엡 1:4),
‘예정하시고’(3:11),
‘노하시고’(롬 1:18),
‘판단하시고’(롬 2:2),
‘화목케 하시고’,(고후 5:18),
‘사랑하시는’(요 3:16), 분으로 묘사된다.
뿐만 아니라 손(요 10:29), 과 ‘품’(요 1:18), 얼굴(마 18:10)을 가지시며 아버지(마 6:9), 왕(계4:2) 등의 인간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신인 동성 동형론을 보다 세분하여 본다면 순수한 영이신 여호와를 육체를 가진 것처럼 묘사한 동형론과 여호와를 인간의 지, 정, 의와 인격에 비추어 묘사한 동성론으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1. 동형론
비물질적 존재인 여호와를 인간의 육체적 지능을 빌어 설명했다는 점에서 이는 순수한 은유(隱喩)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호와께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성(城)과 대(臺)를 보시려고 강림(降臨) 하셨다는 표현은 여호와가 높은 곳에 계시다가 위치를 낮추시어 이 땅에 내려오신 동작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창 11:5). 이는 순수한 의인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악한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자비를 보이신 지금까지의 태도를 변화시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이러한 동형론적인 표현은 주로 여호와의 의지에 강조점을 두고 해석 할 수 있다. 이는 여호와의 팔은 전능하신 의지적 능력을(출 6:6, 시 89:13), 코는 공의로우신 분노를(삼하 22:9, 시 18:8), 입은 절대 변개치 않는 말씀을(시 33:6), 눈은 모든 것을 살피시며 아시는 전지하심을(대하 16:9), 나타낸다는 사실로서도 이를 입증 할 수 있다.
2. 동성론
동형론이 여호와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여호와의 행위나 속성을 표현한 순수 은유라면 동성론은 무한한 여호와를 유한한 인간에 비유해 설명한 강조적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즉 여호와는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로서 도덕성과 추진성 및 생명성을 갖고 계신다. 여호와의 형상을 부여받아 창조된 인간 역시 이러한 속성을 갖고 있으나 무한하신 여호와에 비해 유한하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따라서 동성론적 표현은 제한적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하신 여호와의 품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홍수 후에 노아와의 언약에 있어서 무지개를 보고 인간과의 언약을 ‘기억하겠다’ 는 (창 9:16), 표현은 여호와가 인간처럼 건망증(健忘症)이 있어서 평소에 잊고 있었던 것을 무지개를 보고 불현듯 떠 올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언약을 언제나 기억하시고 성실히 수행하신다는 것을 무지개 표징으로 나타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원칙은 여호와의 근심 (창 6:6), 노함(출 22:24), 질투함(민 25:11), 맹세함(사 62:8), 이상히 여김(막 6:6) 등의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인 동성 동형론은 여호와를 인간적 행동이나 품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묘사하여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문학적 방편인 반면, 성육신은 여호와가 직접 인간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임하심을 가리킨다. 즉, 신인 동형 동성론은 범죄함으로 영안(靈眼)이 흐려진 인간이 잃어버렸던 여호와의 대한 정보를 다시 인간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나, 성육신은 직접 인간 가운데 여호와가 임하심으로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여호와를 게시된 여호와로 온전히 드러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자는 모두 여호와의 자기 계시이나 후자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자기계시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신인 동성 동형론은 무한하신 여호와를 유한한 인간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므로 항상 오해의 위험이 따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영적, 지적 파악력이 여호와에 대해 아는데는 미치지 못하며, 인간의 문자도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는데, 신인 동형 동성론이라는 ‘인간의 표현’은 또 다른 전달상의 문제를 지니므로 오해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인 동형 동성론 표현을 해석 할 때는 항상 여호와는 무한하신 반면 인간은 유한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동성론적 표현일 때는 인간의 지정의나 인격이 순수치 못하며 복합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여호와의 순수하신 품성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 1:24 에 나오는 여호와의 슬픔을 해석 할 때 인간의 슬픔이 내포하는 연약함, 상실감, 분노, 좌절 등을 여호와께 적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여호와의 슬픔은 부모가 자식을 징계 할 때 갖는 쓰라림과 같이,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심판하실 때에 그 같은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징계하심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가운데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들어 혹자는 이방 신화에서 발견되듯이 절대자 여호와에 대한 신관(神觀)의 미성숙 때문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이는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여호와를 보여 주기 위한 방편이란 것을 무시한 잘모된 견해이다. 이 표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계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연약한 인간에 대비하시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시므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원하시는 여호와의 사랑을 깨달으며 신인 동형 동성론적 사랑의 결정(結晶)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제한적 의미에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하늘이 열리며(에스겔 1:1-3)
사로 잡혀야 한다(1:1)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이 열리는 경우와 열리지 않는 경우는 전혀 양상이 달라 밤과 낮만큼 차이가 납니다.
즉 하늘이 열리는 그 사람과 하늘이
닫히는 사람과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또 하늘이 열리는 가정과 그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는 바로 그 가정, 즉
하늘이 닫힌 가정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 왕 때 너무 노여워서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
하늘을 닫아 버린 결과 그 나라가 말할 수 없는 도탄에 빠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나라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면 말로 다 형용키 어려운 곤경에 빠지는 겁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므로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와 행복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닫히고 열림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고 내용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이 열리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에스겔이라고 하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그 장면을 언제 체험을 했느냐 하게 되면 그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 포로로서 그발강가에서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는
그런 포로생활 중에서 선지자로 부름 받아 더욱 고생에 고생을 하던 때입니다.
이런 중에 그가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열린 하늘이 얼마나 복이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계시의 은혜 (1-2)
1절을 보게되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제30년 4월 5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이상을 보였다 하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완전한 모습을 사람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보여준다 하여도 사람이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또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을 우리가 보았다던가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던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환상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 중에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타날 때와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과 마귀가 나타나는 가정은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게 되면 에덴 동산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고 귀합니까?
그런데 마귀가 뱀으로 둔갑하여 찾아올 때 하와가 그 마귀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다음에는 죄를 짓고 얼마나 어려움에 빠집니까?
나중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 그
다음에는 천추만대에 우리에게까지 불행을 주는 결과를 낳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그 집에 들어오니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담아 하고 불렀으나 숨었습니다 왜 숨었느냐? 하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과 하와를
불러낸 다음에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말미암아 그 부끄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귀가
들어오더니 문제를 일으켰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결과는 문제를 풀어 주고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 하나님이
나타나는 사람은 참 복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에도 항상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신령한 은혜를 받게된 에스겔은 먼저 계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에는 성경 속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날마다 계시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 (3a)
3절을 보면 여호야 긴 왕의 사로 잡힌지 5년 그 달 5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라 하였습니다.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고 했으니 말씀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도 말씀이 임하지만 나에게 특별히 임했다 말입니다.
권능의 은혜 (3b)
3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취직하면 그 다음에 직장에서는 자리를 줍니다.
사람마다 취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세상에서 활동하는데 내가 앉을 자리, 설자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귀할 뿐만아니라 계장, 과장, 부장자리로 승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어진 높은 자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리를 감당할 능력입니다.
실력 없이 주어지는 그 자리는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그러기에 실력을 필요로 하는 세상, 실력이 인정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또 실력을 알아주는 세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분과 그 직책이 만들어 주는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를 감당할 영적 실력은 더욱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고린도 라고 하는 곳에 바울이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다 쫓아내 버렸습니다.
귀신들려 집나 갔던 아내가 돌아오고 아들이 돌아오고 딸이 돌아옵니다.
그 가정은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고 활기를 되찾게됩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7형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 쫓아내던 귀신을 일곱 명이 달려들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명했더니 귀신이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 웃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도대체 뭐냐고 대들었습니다.
형편없는 것이 까분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귀신들린 사람이 죽인다고 달려들어 억제하니 옷도 못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실을 보면 귀신이라는 놈이 우리들의 영적 실력을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문제, 영력이라는 문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혼자서 한 일을 일곱 명이 못
당했습니다.
여러분 세상 이치로 따지면 다수가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가문이 얼마나 좋은
가문입니까?
그렇다면 가문도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 또는
권세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계시의 은혜, 말씀의 은혜, 권능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4-25)
4절에서 25절까지인데 내용이 길기 까닭에 제가 한절 한절 읽으면서 설명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넷입니다. 사면을 향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개가 넷입니다. 또 날개 밑에는 손이 있어서 손이 넷이고 그 손 밑에는 바퀴가 있는데 역시 넷입니다. 그 다음에는 눈이 얼마나 큰지 전체가 눈이라 할 만큼 눈이 사면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분명히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도, 사람은 사람인데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하면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너희도 본받아서 이렇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천사와 똑같이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와 같은 사람을 본받아서 천사의 경지를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1. 봉사의 손
그러면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교훈의 내용이 뭐냐 하면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날개 밑에 있는 손입니다. 여러분 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일하는 손이요 봉사의 손입니다. 더구나 천사에게 손이 있다고 하게 되면 무엇을 말합니까? 천사는 하나님을 받들고 하나님이 시키심을 따라서 구원 얻은 성도를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천사의 손은 성도를 섬기는 손, 하나님을 섬기는 손, 즉 봉사의 손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봉사의 손을 가져야 됩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망했습니다. 폭격이 심했습니다. 예배당이 다 무너졌습니다. 교인들이 피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예배당 뜰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이 간 곳이 없었습니다. 찾아봤더니 어느 구석에 묻혀 있었는데 팔이 떨어져 없어졌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녹여서 다시 만들어 세우자 혹은 아니다 팔만 만들어서 갖다 붙이자고 하는가하면 팔이 없는 그대로 세우자고 옥신각신 하다가 그냥 세워 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팔 없는 예수님의 동상 그 밑에다 쓰기를 예수님의 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교인들이 각자가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인들의 손은, 성도들의 손은 바로 예수님의 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손은 봉사의 손이어야 합니다.
2. 믿음의 날개
본문은 분명히 천사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 날개가 없다면 제구실을 못합니다. 천사가 천사 구실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천사가 사람으로 나타나 성도의 모습으로 본을 보여줬다면 바로 우리 성도들은 날개와 같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천사가 천사 노릇 할 수 있는 것이 날개라면 우리 성도가 성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다면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가는 정치할 때 정치가요 장사꾼은 장사할 때 장사꾼이요 학생은 공부할 때 학생이요 믿는 사람은 믿을 때 믿는 사람입니다.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 믿는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날개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믿음은 날개와 같습니다.
3. 상징적인 얼굴
그 다음에는 생물에게는 네 얼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사람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전체로 보면 한사람인데 자세히 보면 얼굴이 넷입니다. 그런데 첫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가 돼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가졌을지라도 사실상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됩니다. 즉 인격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슨 얼굴이냐 하면 사자의 얼굴입니다. 사자는 산중의 왕이요 짐승의 왕입니다. 그 용기와 용맹은 천하가 못 당합니다. 사자는 조그마한 일에 낙심하지 않고 울지 않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자와 같은 용맹과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 울고 조그만 일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교회를 안 나오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신자는 이런 의미의 사자의 얼굴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들딸들이 조그마한 일에 울고 투정부리고 그 다음에는 낙심하고 부모를 원망한다면 그 꼴을 어떻게 봐주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일어나는 장한 아들 딸들이라면 그 용기와 용맹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얼굴의 모습은 용기와, 용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소의 얼굴입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소는 말하지 않고 하루종일 일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얼굴이 바로 이런 모습을 지녀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은 하지말고 소처럼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반대로 일을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불평이 많습니까. 그런데 봉사하는 소는 말이 없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지난번 내가 맥추절에 광고 드렸습니다.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금년 예산이 얼마인데 집사, 권사, 장로 목사는 알아서 하고 그 나머지 교인들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직 이상은 책임지고 할 일입니다 했더니 며칠 안 있으니까 교회 나오는지 얼마 안 되는 평신도라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헌금을 짜내려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집사가 아니지 않느냐, 집사가 아니면 당신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데 전화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분명히 집사이면서 평신도의 이름으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헌금을 안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할 때에는 미리 준비했다가, 그리고, 즐거움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힘껏 하며 정성껏 하고 인색 한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여도 되고 광성교회 김목사는 광성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하면 안 됩니까. 봉사 안 하는 사람이 무슨 일에든지 말이 많습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일밖에 모릅니다. 신자들은 일하는 소의 모습을 지니고 말은 하지 말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십시오 네 번째 얼굴은 독수리의 얼굴을 하였습니다. 신령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회사에 나가면 한 책상에 너와 내가 일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은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신령한 면에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는 신령한 면을 지니는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4. 순종의 바퀴
자동차를 타보고 운전해 보면 알겠지만 바퀴가 제 마음대로 갑니까.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음대로 가느냐 그 말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바퀴는 운전하는 사람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면 서고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오른쪽, 왼쪽으로 가게하면 외쪽, 오직 순종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니요"가 없어야 합니다. 오직 순종뿐이어야 합니다. 즉 "아멘" 뿐이어야 합니다.
5. 소망의 눈
사면에 눈이 가득 하였습니다. 눈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눈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장사꾼은 장사꾼의 눈을 가졌고 과학자는 과학자의 눈을 가졌고 정치가는 정치가의 눈을 가진 것처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저 사람 저런 고난 속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자살할 지경인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이겨내겠는가? 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성도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순교현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눈은 바로 소망의 눈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소망의 눈을 가지어서 남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보시고 항상 낙심하시지 마시고 소망 중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천사를 통해서 성도들은 많은 교훈을 받고 천사의 경지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III.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26-28)
1. 구원의 영광 (26- )
26절에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좌가 나타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분명히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람은 천사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사람으로 보였느냐 하면 이다음에 천하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준 겁니다. 똑같은 포로 시대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이벳느고 라는 믿음 좋은 청년들이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므로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7배나 뜨겁게 하고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던짐 받은 사람은 셋인데, 나중에 보니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데 신이요 신은 신인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보좌에 앉으셨는데 사람으로 보이신 그 분이 바로 풀무불 속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빨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왔더니 네 번째 사람은 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면 풀무불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런 도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 믿음 때문에 오히려 환난을 당할 적에 하나님은 손뼉을 치면서 잘한다 구경하고 관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현장에 뛰어들어서, 같은 처지와 입장이 되어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풀무불 속에서 세 청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통해서 구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2. 심판의 영광 (27- )
27절을 보게 되면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 해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허리 이상은 단쇠 같았습니다. 얼마나 그 쇠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는지 단쇠가 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위까지도 분명히 불과 같더라는 것입이다. 그리고 허리 이하를 보니 역시 불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상징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24년이지만 성경을 읽는 중에 내가 전 주간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진리를 또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큰 반역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에게 두고는 정말 기가 막히고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반역의 주모자가 고라입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입니다. 그러니까 사촌이 잘 되니까 배가 아파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모양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수가 큰 아파트를 샀거든 절대로 크게 잔치 벌이고 뽐내지 마십시오. 고라는 250명의 불평분자들을 모아놓고 모세를 향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갈라서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세를 나의 일꾼으로 세웠는데 네가 뭔데 대적하느냐는 것입니다. 갑자기 땅이 갈라지더니 불이 나와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모세처럼 봉사하고 있을 때 그러지 않아야 될 사람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속 썩이고 억울하게 한 일 있습니까? 그럴 적에 하나님은 전후 좌우를 전부 살피시고 시와 비를 가려 주시고 단 쇠와 같은 불로 철퇴를 내러 심판해 주십니다. 이 심판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됐고 모세에게는 승리가 되고 우리들에게는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같은 단쇠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3. 자비의 영광 (28- )
28절 보니까 "그 사면 광채 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내가 보고 곧 엎드려 그 말씀하시는 자의 그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계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니 꼭 무지개 같더라는 말씀에 큰 뜻이 있습니다. 무지개라 할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노아 홍수 때 심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과 사랑 속에 구원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 이제 너의 자손들에게 다시는 내가 이런 심판을 안 하겠다는 약속 끝에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노아의 가정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준, 축복의 표징으로 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의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지개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축복의 상징이요 언약의 상징이요 자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과 언약의 상징인, 축복의 무지개, 언약의 무지개, 자비의 무지개가 항상 나타나는 가정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늘이 열리며 에스겔은 굉장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해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다음에는
포로 생활의 어려운 중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삶이 여러분들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에스겔처럼 포로 생활과 같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열린 하늘을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 중에 에스겔은 열리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을 위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열린 하늘을 통해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 속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요시야의 네 아들
16대 요시야
→ 17대 여호아하스(요시야의 넷째아들인 살룸(렘22:11)
→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엘리야김)
→ 19대 여호야긴(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의 맏아들,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냐)
→ 20대 시드기야( 요시야의 셋째아들인 시드기야(맛다니야, 여호야긴의 숙부)이다.
대상3:14 “그 아들은 아몬이요 그 아들은 요시야며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①요하난과 둘째 ② 여호야김(18대)과 셋째 시드기야(20대)와 넷째 살룸(여호아하스,17대)이요/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
여호야긴(19대, 요시야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의 맏아들,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냐).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렘1:3).
2. 18대 여호야김
“18대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대상3:16).
여호야김은 ① 여고냐 ② 시드기야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여고냐(여호야긴)가 먼저 왕이 되어 통치하다가 끌려갔기 때문에 여호야김의 아들 시드기야(=고니야)가 왕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느부갓네살이 제멋대로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남(南)유다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렘22:24)는 시드기야지만 이는 남(南)유다왕이 된 시드기야와는 다른 인물이다.
① 여고냐(여호야긴) : 18대 여호야김 다음으로 남(南)유다 왕이 되는 19대 여고냐(여호야긴)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37년 만에 풀려나게 된다(왕하25:2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렘24:1).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여호야긴)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에스더 2:6).
② 시드기야 :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아(렘22:24).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 시드기야는 유다왕 시드기야가 아니다. 유다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아들이고 여호야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찌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렘22:24~27).
3. 19대 여호야긴
사로잡혀간 여고냐(여호야긴)의 아들은 ① 스알디엘 ② 말기람 ③ 브다야 ④ 세낫살 ⑤ 여가먀 ⑥ 호사마 ⑦ 느다뱌 이다(대상3:17~18).
이 여고냐(여호야긴)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는데(대상3:17~18) 고니야는 무자(無子) 즉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렘22:30). 렘22:24의 고니야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가 될 수 없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렘37:1).
**여호야긴의 아들 스알디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맏아들이다(대상 3:17). 유다의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의 아버지이며(스 3:2; 5:2; 마 1:12) 예수님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마 1:12; 눅 3:27). 다른 구절에서는 스룹바벨의 아버지를 ‘브다야’(대상 3:19)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스알디엘이 조카를 아들로 삼았거나 스알디엘이 죽은 후 동생 브다야가 스알디엘의 처와 결혼해서 스룹바벨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4. 마태복음 1장 예수님 족보는 요시야에서 여고냐를 거쳐 스알디엘, 스룹바벨로 이어진다.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여호야긴)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1:10~12).
에스겔
에스겔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로,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 에스겔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유다의 멸망과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과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그의 예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에스겔의 주요 주제
- 하나님의 영광: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장면과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죄로 인해 떠날 수 있지만, 회개와 순종을 통해 다시 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 회개와 회복: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로 인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회개를 통한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고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개인과 공동체가 회개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새로운 성전: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성전과 그에 따른 예배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상징하며,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의 영적 중심지를 나타냅니다. 이 주제는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에스겔이 오늘날 관련 있는 이유
에스겔서는 현대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또한, 에스겔의 예언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신뢰하며,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에스겔의 장
각 장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아래 링크를 탐험하세요:
- 에스겔 제 1 장: 에스겔의 환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는 장면이 묘사됨.
- 에스겔 제 2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를 전하라고 명령하심.
- 에스겔 제 3 장: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음.
- 에스겔 제 4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음.
- 에스겔 제 5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함.
- 에스겔 제 6 장: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향한 심판의 예언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에스겔 제 7 장: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경고와 심판의 날을 예고함.
- 에스겔 제 8 장: 에스겔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 에스겔 제 9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을 알리시고, 의인들을 구별하심.
- 에스겔 제 10 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함.
- 에스겔 제 11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게 하심.
- 에스겔 제 12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음.
- 에스겔 제 13 장: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잘못된 예언을 고발함.
- 에스겔 제 14 장: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함.
- 에스겔 제 15 장: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심판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 에스겔 제 16 장: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회복의 약속을 전함.
- 에스겔 제 17 장: 이스라엘의 두 왕국과 그들의 운명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회복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18 장: 개인의 책임과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19 장: 이스라엘의 왕들과 그들의 멸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함.
- 에스겔 제 20 장: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백성의 불순종을 회상함.
- 에스겔 제 21 장: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함을 알리며, 바벨론의 칼을 예언함.
- 에스겔 제 22 장: 이스라엘의 죄와 부패를 고발하며, 심판의 날을 예고함.
- 에스겔 제 23 장: 이스라엘의 두 자매를 통해 우상 숭배와 배신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 에스겔 제 24 장: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함.
- 에스겔 제 25 장: 주변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냄.
- 에스겔 제 26 장: 두로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그 도시의 멸망을 상세히 묘사함.
- 에스겔 제 27 장: 두로의 상업과 번영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그 멸망을 경고함.
- 에스겔 제 28 장: 두로의 왕에 대한 심판과 그의 교만을 고발함.
- 에스겔 제 29 장: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그들의 멸망과 회복을 다룸.
- 에스겔 제 30 장: 이집트의 멸망과 그로 인해 임할 고통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1 장: 이집트의 교만을 나무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2 장: 이집트의 멸망과 그로 인한 슬픔을 예언하며, 지옥에 대한 묘사를 포함함.
- 에스겔 제 33 장: 에스겔이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회개를 촉구함.
- 에스겔 제 34 장: 이스라엘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하나님이 세우실 참된 목자를 예언함.
- 에스겔 제 35 장: 세일 산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36 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며,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7 장: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함.
- 에스겔 제 38 장: 고 Gog과 마곡에 대한 예언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경고함.
- 에스겔 제 39 장: Gog과 그의 군대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함.
- 에스겔 제 40 장: 새로운 성전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장소를 묘사함.
- 에스겔 제 41 장: 새로운 성전의 내부 구조와 장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
- 에스겔 제 42 장: 성전의 외부 구조와 제사장들의 역할에 대한 설명.
- 에스겔 제 43 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회복의 약속을 전함.
- 에스겔 제 44 장: 제사장들의 규례와 성전에서의 봉사에 대한 지침을 제시함.
- 에스겔 제 45 장: 성전의 구역과 제사장들의 분배에 대한 규례를 설명함.
- 에스겔 제 46 장: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 규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함.
- 에스겔 제 47 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과 그 회복의 의미를 묘사함.
- 에스겔 제 48 장: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각 지파의 구역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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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명의 사용자들이 매일 영적 성장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연결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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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약속
- 1장: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
- 2장: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다
- 3장: 말씀을 받아먹고 경고하다
- 4장: 예루살렘의 포위에 대한 예언
- 5장: 예루살렘의 심판
- 6장: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 7장: 이스라엘의 끝이 다가오다
- 8장: 성전의 우상 숭배
- 9장: 멸망과 보호
- 10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다
- 11장: 회개와 새 영의 약속
- 12장: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 13장: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 14장: 우상 숭배자들의 심판
- 15장: 포도나무의 심판
- 16장: 예루살렘의 타락한 역사
- 17장: 두 독수리의 비유
- 18장: 개인의 책임
- 19장: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몰락
- 20장: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
- 21장: 바벨론의 칼
- 22장: 예루살렘의 죄악
- 23장: 두 음녀의 비유
- 24장: 끓는 가마 비유
- 25장: 주변 민족들의 심판
- 26~28장: 두로와 시돈의 심판
- 29~32장: 애굽의 심판
- 33장: 파수꾼의 책임
- 34장: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
- 35장: 에돔의 심판
- 36장: 새 마음과 새 영
- 37장: 마른 뼈 환상
- 38~39장: 곡과 마곡의 심판
- 40~48장: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
- 결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