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
개역개정,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절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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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9월 13일(토) 에스겔 33-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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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금) 에스겔 29-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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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목) 에스겔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노의 책벌(25:17)
Then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take vengeance on them.
분노의 책벌(베토케호트 헤마) בְּתֹוכְחֹות חֵמָה
2534. 분노(헤마. )
따뜻함
분노
독
-
발음 [ chêmâʼ ]
- 어원
- 3179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
1.명사, 여성 따뜻함, 온기, 흥분, 격정, 호7:5
-
2.명사, 여성 분노, 진노, 격노, 성이 남, 창27:44, 렘6:11, 25:15, 사51:17.
-
3.명사, 여성 독, 신32:24, 시58:5(4).
참고 정보
- 문법설명
-
연계형 חֲטַת
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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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연계형 חֲטַת관련 성경☞노(창27:44, 시37:8, 렘23:19), 진노(레26:28, 대하34:21, 잠16:14), 격분(신29:23,28), 분(잠15:18, 렘42:18), 뜨거움(호7:5), 독(신32:24,33), 노함(사27:4), 분노(겔13:13, 슥8:2), 진노(대하28:9, 시59:13), 분노함(욥36:18), 분냄(시90:7).
8433. 책벌
주장하는 행위
복수형 논의들
설복시킴
-
발음 [ tôwkêchâh ]
- 어원
- 3198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명사, 여성 주장하는 행위, 권리를 유지함, 삿16:6.
-
a.명사, 여성 [주]복수형 논의들, 욥23:4.
-
-
2.명사, 여성 설복시킴, 반박, 부인, 시38:15(14), 잠29:1.
-
3.명사, 여성 책망[말로 받는], 징계, 잠1:23,25,30,3:11, 5:12, 27:5, 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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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명사, 여성 [주]복수형:잠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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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사, 여성 불평[하나님께 대하여], 합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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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사, 여성 형벌, 단련, 시73:14.
-
a.명사, 여성 [주]복수형: 시39:12(11), 겔5:15,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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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정보
- 문법설명
-
어미활용 תּוֹכַחְתִּי, 복수 תּוכָחוֹת
연관 단어
-
문법설명어미활용 תּוֹכַחְתִּי, 복수 תּוכָחוֹת관련 성경☞변론(욥13:6), 징벌(시73:14), 책망(잠1:23, 겔5:15), 징계(잠3:11, 15:5), 꾸지람(잠5:12,29:15), 경계(잠13:18), 견책(잠15:10,32), 책벌(사37:3), 벌(시149:7), 벌함(호5:9), 변론할 말(욥23:4), 반박할 말(시38:14).
17. 하나님께서
아벨의 자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원수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보복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의로운 심판자임을 강조하며,
그분의 공의로 인해 악한 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며,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원수를 갚으신다는 확실한 약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원수 - 14절과 같은 유형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격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표현되었다.
내가...여호와인줄 알리라 -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은 단순히 그들에 대해 처벌을 가함으로써 고통과 파멸만을 당하도록 하는 목적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 공의로우심을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결과가 수반되어짐을 엿보게 한다.
에스겔 25장 본문의 구조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결론
에스겔 25장은 이스라엘 주변 이방 민족들인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했으며,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암몬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기뻐했고, 모압은 유다가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블레셋 역시 유다를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하나님은 암몬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한 죄를 지적하십니다.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자 그것을 조롱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방인들에게 넘기시고,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암몬의 수도 랍바는 폐허가 될 것이며, 그들은 더 이상 강한 민족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죄로 인해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것을 조롱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그들이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였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압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들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으며,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에돔은 형제국인 이스라엘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 공격하며 그들을 잔인하게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돔의 이러한 행동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완전히 멸망할 것이며,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되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됨을 의미합니다.
블레셋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과 대립하며 그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들은 유다가 약해졌을 때 기회를 틈타 공격하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폭력과 증오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철저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로 남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25장은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기뻐하고 조롱하는 민족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조롱하거나 경멸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며, 모든 민족과 개인에게 동일한 기준이 적용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그의 때에 그의
방식으로 공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9월 10일(수) 에스겔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문권(23:24b)
- 선지자들의 배역(25절), 제사장의 율법 거역(26절), 거짓 예언(28절)
- 오홀라(사마리아), 오홀리바(예루살렘)
I will turn you over to them for punishment, and they will punish you according to their standards.
ㅈ
에스겔 9: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ㅊ
열왕기하 25:6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신문하고.
심문권(審問權)
그들이...너를 에워쌀지라
- 바벨론 군대들은 B.C. 605년 제1차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다니엘과 같은 일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왕하 24:1, 2, 7;단 1:1-6).
그리고 이들은 B.C. 588년에 제3차로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3년 동안 에워싸다가 함락시켜 유다 왕국을 멸망케 했다(왕하 25:1-7).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 '심문권'(미쉐파트)은 '법적인 판결' 또는 '공식적인 선고'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유다를 재판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왕국을 심판하시기 위해 이방 나라 바벨론을 당신의 일시적인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렘 27:6;43:10).
상징과 의미
- 오홀라와 오홀리바: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민족의 관습을 따라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 음행의 비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저버린 것을 사람의 불륜 및 음행에 비유하여, 영적 배신과 배타적 충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 심판의 선언: 반복된 타락 후에 마침내 임박한 심판이 언급되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 없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문학적 특징
에스겔 23장은 다른 예언서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죄악의 본질과 그 심각성을 강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관용구와 상징, 인물의 대조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본문은 경고합니다.
- 나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우상숭배적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심판의 잔"
서론 | 심판을 부르는 잊음
사람은 누구나 잘 잊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약속을 잊을 때도 있고, 기념일이나 소중한 사람의 말을 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기억력이 부족해서 잊는 것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해서 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누군가를 잊었다는 말에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를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에스겔 23장의 본문은 “잊음”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두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단순히 순간적으로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한 대적의 손에 넘겨졌고, 스스로 붙잡았던 대상에게 심판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권세를 의지했던 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로 돌아와 그들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또 무엇인가를 잊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다른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힘일 수도 있고, 눈앞의 성공과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은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그 공백은 반드시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고, 그것이 심판의 도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귀와 코가 잘리며, 자녀들이 칼과 불에 사라집니다. 이는 단순히 잔혹한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철저하게 심판받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감추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은밀히 행했던 음행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잊음의 대가는 반드시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현실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자주 잊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고,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등 뒤로 밀어낸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힘을 붙잡는 삶인가? 하나님을 잊은 순간, 우리는 이미 심판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은혜와 구원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본론ㅣ잊은 자에게 임하는 심판
1. 심판의 도구가 되는 세상의 권세와 힘 (22–24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실체를 고발하시며, 심판의 도구가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바벨론과 앗수르의 힘과 화려함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 세련된 문화, 부와 영광은 예루살렘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의지하면 자신들도 안전할 것이라는 헛된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맹은 예루살렘을 짓누르는 짐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바벨론과 앗수르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예루살렘을 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국제 정치적 사건을 설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대상이 심판의 도구로 바뀐다는 원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라는 말씀은 인간사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힘을 돌려 세워 심판의 몽둥이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붙잡는 것이 하나님이 아닐 때, 그것은 반드시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바벨론의 화려함은 결국 포위와 파괴의 병거로 돌아왔고, 앗수르의 위세는 무너뜨림의 창과 방패로 변했습니다.
본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24절)고 하십니다. 이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보호받던 신분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언약의 보호에서 내어버리십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언약의 법이 아니라, 이방의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순간, 백성은 더 이상 특별한 보호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질서와 가치 속에서 무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세와 힘을 붙잡을 때, 바로 그것이 심판의 도구로 바뀔 수 있습니다. 돈을 붙잡으면 돈이 우리를 얽매는 채찍이 되고, 권력을 붙잡으면 권력이 무너짐의 원인이 되며, 인간의 관계를 붙잡으면 그 관계가 심판의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이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작동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그분을 등 뒤에 버릴 때, 우리가 붙잡은 것들은 곧 우리를 벌거벗기고 조롱하는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잡는가, 아니면 세상의 힘과 지위를 붙잡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붙잡았기에 결국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따라갈 때, 그것이 결국 우리를 재판하는 법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법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세상의 법에 따라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붙잡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언약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세상의 심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삶만이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보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손에 무엇이 쥐어져 있습니까? 예루살렘처럼 세상의 힘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붙잡은 것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됩니다. 세상을 붙잡으면 세상이 심판의 도구로 변해 우리를 무너뜨릴 것이고,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만을 굳게 붙잡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 벌거벗김과 수치로 드러나는 죄의 결과 (25–30절)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심판하실 때, 단순히 전쟁의 패배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질투는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드러납니다. 본문 25절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질투와 다릅니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에서 나오는 거룩한 열심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배신의 고통과 분노를 떠올리면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로 불림받았지만, 이방을 사랑하고 우상을 좇는 배반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약의 남편으로서 반드시 그 배반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의 모습은 끔찍합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잘라내고, 자녀들을 칼로 엎드러뜨리며, 남은 자들을 불에 사릅니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파괴가 아니라, 존엄과 정체성의 완전한 상실을 상징합니다. 얼굴의 코와 귀는 존재의 표징인데, 그것이 잘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이 칼과 불에 사라지는 장면은 공동체의 미래 자체가 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현재와 미래, 존엄과 생명이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어 26절은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라고 선포합니다. 옷과 장식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입혀주신 존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옷과 장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쓰지 않고, 오히려 음행과 우상 숭배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시며,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한 자는 결국 그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27절은 더욱 뿌리 깊은 문제를 건드립니다. 하나님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죄는 단순히 최근의 타락이 아니라, 애굽에서부터 배워온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그 뿌리 깊은 음행을 단절시키십니다.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과거의 미련과 죄의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심판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죄의 근원을 끊어내는 하나님의 철저한 손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28절에서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은 한때 사랑했던 바벨론을 미워하게 되었고, 부담스러워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 심판을 집행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붙잡았던 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29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치욕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을 드러내리라.” 하나님을 잊고 세상에 바친 모든 수고는 결국 빼앗기고, 숨기고 싶던 음행과 부끄러움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떠난 수고는 헛수고가 되고, 죄는 반드시 폭로됩니다.
마지막으로 30절은 심판의 원인을 분명히 밝힙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모든 심판은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백성을 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길의 결말을 그대로 돌려주신 것입니다. 이방을 따르고 우상을 붙잡은 것이 바로 자신들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은 죄는 반드시 벌거벗김으로 드러나고, 감추려 했던 수치는 만천하에 폭로됩니다. 죄는 결코 은밀히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수고를 헛되게 하시고, 그 부끄러움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붙잡을 때, 그것은 결국 우리를 심판하는 도구로 바뀌어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붙잡을 때, 우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모든 흔적은 결국 벌거벗김으로 드러나고, 우리의 수고는 빼앗기며, 미래는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두려움만을 주지 않습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죄의 뿌리를 끊으시고,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죄의 대가, 심판의 잔 (31–35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걸어간 길의 본질을 ‘네 형의 길을 따랐다’는 말로 요약하십니다(31절). 예루살렘은 북이스라엘 사마리아가 걸었던 동일한 죄의 길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그 멸망의 이유는 우상 숭배와 언약 배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멸망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불순종으로 나아가 결국 사마리아가 마신 심판의 잔을 그대로 손에 쥐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잔을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으로 묘사하십니다(32절). 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잔은 단순한 음료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와 공의를 담는 그릇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을 마시며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패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 철저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을 뜻합니다. 한때 화려함과 권세를 자랑하던 도시가 이제는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33절은 더욱 충격적인 선언을 담습니다.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은 곧 “놀람과 패망의 잔”입니다. 놀람은 예상치 못한 충격과 두려움을 뜻하고, 패망은 완전한 붕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이 의지하던 세력에게 배신당하고, 스스로의 수고가 무너지는 놀람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회복 불가능한 패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것이 얼마나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는 철저한 파멸입니다.
34절은 심판의 철저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잔을 다 기울여 마셔야 할 뿐 아니라, 그 깨어진 조각까지 씹어야 합니다. 이는 심판을 부분적으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철저하게 겪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죄의 결과는 잠시 맛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표현은 수치와 모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는 결국 존엄을 잃고 가장 깊은 수치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마지막 35절은 이 모든 심판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밝힙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죄의 뿌리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이나 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기에 애굽을 그리워했고, 앗수르를 동경했으며, 바벨론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는 반드시 심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신앙에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잊는 것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이 세상에 빼앗길 때,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을 붙잡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삶은 결국 심판의 잔을 마시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합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심판의 잔을 마셔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으나, 결국 순종으로 그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철저한 심판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심으로, 우리는 이제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절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경고와 동시에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하지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우리는 구원의 잔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고 심판의 잔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잔을 들 것인가? 선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이 곧 생명이며, 그 기억이 심판을 넘어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결론 | 하나님을 기억함이 구원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무겁고 두려운 심판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한 대적에게 넘겨졌고, 결국 그들의 손에 의해 벌거벗김을 당하며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한때 매혹되었던 바벨론, 앗수르, 애굽은 심판의 도구로 돌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그대로 심판의 결과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것들이 결국 자신들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유는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요약됩니다. 죄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을 잊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채 세상의 힘과 가치를 붙잡고 있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는 수치와 멸망, 그리고 심판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잔이 아니라, 구원의 잔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대신 드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결국 순종으로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야 했던 그 심판의 잔을 주님이 대신 마심으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116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로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심판의 잔을 들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구원의 잔을 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한 두려움의 메시지가 아니라, 선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관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그분의 말씀과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의 수고는 빼앗기지 않고, 우리의 삶은 벌거벗김이 아닌 존귀로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무엇을 기억하겠습니까? 세상의 불안과 욕망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은 대가로 심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 구원의 잔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심판의 잔은 마셔졌고, 우리에게는 감사와 구원의 잔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합시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세상의 화려함과 두려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붙잡기로. 그때 우리의 삶은 심판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23장 22절-35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 곧 오홀리바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앞선 1–21절에서는 두 여인,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의 영적 음행과 배신이 병렬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와 관계를 맺다가 멸망했고, 오홀리바는 언니의 타락을 목격하고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한 음행에 빠져 바벨론과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이제 22절 이하의 말씀은 예루살렘이 불가피하게 당하게 될 구체적 심판을 선언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택과 결과를 어떻게 돌려주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매우 생생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된 바벨론과 그 동맹자들에게 포위당하고, 그들로부터 철저히 짓밟히게 됩니다. 특히 묘사되는 형벌은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과 정체성이 완전히 무너지는 수치의 언어들입니다. “코와 귀를 자른다”는 형벌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반역자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처벌로,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사회적 수치와 영구적인 낙인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자녀를 빼앗기고 불태운다는 표현은, 단순히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미래 세대와 공동체의 희망이 송두리째 파괴됨을 상징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벌거벗겨져 그동안 감추었던 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자신이 택한 길의 결과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 곧 자신이 매혹되어 동맹을 맺었던 대상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바벨론이 스스로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관점에서 보면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 아래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했던 대상이 결국 자신들의 파멸을 가져오는 심판자로 변모하게 하시는 역설적 상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중반부(31–34절)는 심판을 ‘잔’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은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잔’은 흔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시편 75편 8절에서는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이 거품치며 속에 섞인 것이 가득하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쏟아 내시되 지상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이사야 51장 17절에서도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셨다”라고 묘사됩니다. 따라서 ‘잔’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돌려주신다는 엄중한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심판의 잔을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을 끝까지 마셔야 한다는 선언은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철저히 갚아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결론부(35절)는 심판의 근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예루살렘의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우상숭배나 외교적 실패가 아닙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을 잊은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이방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기에 세상의 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멸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개요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의 불순종이 어떤 구체적인 심판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길을 답습했고, 결국 동일한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죄는 가장 치명적인 배신이며, 언약을 버린 대가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루살렘이 마신 심판의 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마셔주셨기에, 오늘 우리는 다시금 구원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역사적 배경
본문은 예루살렘이 걸어간 역사적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이 선포된 시기는 대략 주전 591년경, 즉 시드기야 왕의 통치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두 차례 포로로 끌려간 경험이 있었고(597년, 605년), 에스겔 자신도 그 포로 무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은 멸망하기 전이었으며, 마지막 기회를 붙잡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듯 남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음행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먼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사마리아가 함락되면서 이미 멸망했습니다. 이는 남유다에게 분명한 경고가 되어야 했습니다. 오홀라(사마리아)의 멸망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열강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사건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언니의 길을 따라갔다”는 본문 말씀처럼, 북왕국의 죄를 반복하며 더 깊은 불순종에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시드기야 왕의 시대는 남유다 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는 원래 바벨론의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정치적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했지만,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는 바벨론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반복해서 경고하셨던 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하고 그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렘 27:12–17), 예루살렘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정치적 술수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이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바벨론 제국을 구성한 다양한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제국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속국과 동맹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히 군사적 다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세력이 곧 그들을 짓밟는 연합 군대로 변모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588–586년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살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약 2년간의 긴 포위를 거쳐 결국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은 불타고, 백성들은 칼에 쓰러지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상황을 영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형벌 묘사—코와 귀를 자르고, 자녀를 빼앗고, 옷과 장식을 빼앗는 장면—은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 반역자나 패배한 왕에게 가해지던 처벌을 반영합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종종 반란을 일으킨 속국의 왕이나 지도자들의 코나 귀를 잘라 치욕을 안겼고, 그들의 자녀를 포로로 삼아 인질로 데려갔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청중이 너무나 잘 알던 역사적 현실과 직결된 표현입니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애굽입니다. 본문 27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영적 은유가 아니라, 남유다가 애굽과 정치적·군사적 동맹을 맺으려 했던 실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거슬러 애굽을 의지하려 했지만, 애굽은 결국 예루살렘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동맹은 바벨론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고,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내몬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 반복된 불순종과 잘못된 선택을 영적으로 해석한 말씀입니다. 사마리아가 이미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배경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현실과 맞물려 있습니다. 남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흔들리며 하나님 대신 열강을 의지했고, 그 결과 자신이 의지하던 바로 그 열강에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간의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한 역사적 결과이자,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성취였습니다.
❖ 문화적 배경
에스겔 23장 22–35절은 단순히 영적인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여러 은유와 상징들은 당시 청중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코드였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들이 익히 아는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음행”과 “간음”의 은유는 고대 사회에서 정치적 동맹과 외교적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던 언어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개인의 사적인 관계를 넘어, 두 집단이나 국가가 언약을 맺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유다가 바벨론이나 애굽과 맺은 동맹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남편”을 맞이한 배신으로 비유될 수 있었습니다. 청중은 이 표현을 단순한 외설적 수사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벗어난 영적 간음을 뜻했으며, 신실해야 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이와 몸을 섞는 극단적인 배신의 모습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본문 23절에서는 바벨론과 갈대아의 무리뿐 아니라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함께 앗수르 사람들까지 언급됩니다. 이 묘사는 단순히 지리적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다민족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루살렘이 얼마나 다양한 열강의 매혹에 끌려갔는지를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을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고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말과 병거를 소유한 자는 곧 군사적 권력과 화려한 지위를 상징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그들의 외모적 매력이나 권세의 상징에 매혹되어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과 영적 허영이 결합된 타락을 드러내는 문화적 장치였습니다.
또한 본문 25–26절에서 묘사되는 수치의 장면은 고대 사회에서 반역자나 죄인에게 가해지던 실제 관습을 반영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은 단순한 고문이 아니라,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남기는 수치의 형벌이었습니다. 귀와 코는 인간의 외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과 존엄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이 더 이상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릴 수 없고, 열방 앞에서 완전히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강렬한 문화적 이미지였습니다.
본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벌거벗김”의 장면 역시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왕과 제사장은 화려한 옷과 장식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옷을 벗겨지고 장식품을 빼앗기는 것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한 사람 혹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권위를 완전히 빼앗기는 수치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영광의 옷을 버리고 이방의 장식품을 탐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수치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2절 이하에서 사용된 “잔”의 이미지는 문화적 배경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잔은 단순히 음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종교적·상징적 의미를 가진 도구였습니다. 연회에서 잔은 기쁨과 축복을 나누는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신들의 진노나 저주를 상징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잔’은 자주 심판의 은유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25장 15–16절에서 하나님은 “내 손에서 분노의 잔을 받아 마시게 하라”고 하시며, 열국이 그 잔을 마시고 비틀거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잔’은 바로 이 전통을 이어받아,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심판의 잔을 끝까지 마시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은 심판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고, 철저하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묘사는 당시 사람들이 가진 술잔의 문화적 경험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잔을 비운 후 그 바닥에 남은 찌꺼기까지 마시는 행위를 최후의 만족 혹은 최후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긍정적 의미가 아니라, 철저히 심판을 끝까지 경험해야 하는 처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이 단순히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잔의 파편처럼 아픔과 고통이 몸을 찌르고 남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강렬한 은유입니다.
문화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유방을 꼬집는다”는 표현입니다(34절). 이는 단순히 외설적인 언어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음녀나 죄인의 수치를 드러내는 가장 노골적인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여인의 가슴은 생명과 양육의 상징이었으나, 그것이 조롱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생명 자체가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상황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예루살렘이 맞게 될 멸망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22–35절의 문화적 배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시기 위해 당대 사람들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회적·문화적 상징들을 사용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과 음행, 벌거벗김과 장식의 박탈, 잔과 조롱, 그리고 신체 훼손과 수치의 이미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시 청중의 피부에 와 닿는 실감나는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을 좇을 때, 그 끝은 화려함과 영광이 아니라 수치와 멸망뿐임을 이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선명히 드러내셨습니다.
❖ 신학적 배경
오늘 본문의 신학적 배경은 크게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언약의 파기, 하나님의 질투와 공의, 심판의 불가피성과 보편성,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로운 언약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정치적 실패나 역사적 멸망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이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적 원리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첫째, 언약의 파기와 영적 간음의 문제입니다. 에스겔서는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죄를 “음행”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히 성적인 문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고 이방 신들과 열강을 의지한 영적 배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으셨고(호 2:19–20), 언약을 통해 그들과 결혼 관계와 같은 친밀하고 배타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애굽을 남편 삼고, 그들의 힘과 화려함을 동경했습니다. 이 행위는 언약의 신실성을 저버린 중대한 반역이었고, 신학적으로 볼 때 단순한 정치적 실수나 외교적 판단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 죄”라는 본질적 문제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질투와 거룩하신 성품입니다. 본문 2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질투”(qinaʾ, 히브리어)는 단순히 감정적 분노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이방 권세를 의지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편을 맞이하는 불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기에 배신에 분노하시고, 사랑하기에 음행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거룩과 언약적 신실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셋째, 심판의 불가피성과 보편성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걸었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31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형의 길”은 북왕국 사마리아가 걸었던 우상 숭배와 이방 의존의 길을 가리킵니다. 북왕국은 앗수르와의 동맹 속에서 멸망을 자초했고, 남왕국은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하다가 동일한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죄의 결과로 심판이 따른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롬 6:23). 따라서 심판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심판은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언약을 깨뜨리면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특정 민족이나 개인의 특권을 넘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넷째, 하나님을 잊은 죄의 본질입니다. 본문 35절은 심판의 이유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다른 신을 찾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기억하라”(신 8:18)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 기억은 곧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언약에 신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잊을 때 언약을 배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신앙적 결과였습니다.
다섯째, 잔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등장하는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성경에서 “잔”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시편 75편 8절, 이사야 51장 17절, 예레미야 25장 15절 등에서 하나님은 열방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이 잔은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끝까지 마셔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은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잔과 동일하지만, 더 깊고 더 가득한 잔입니다. 이는 죄의 반복이 죄의 심화를 낳고, 더 큰 심판을 불러온다는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눈감아주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여섯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입니다. 본문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로 이끕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반하며,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마셔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대신 드심으로, 이제 우리는 심판의 잔이 아니라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시 116:13). 따라서 에스겔 23장의 심판 언어는 단순한 과거의 경고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안에서 성취될 구속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 중요한 신학적 경고를 던집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 권세와 화려함을 좇는 것은 곧 영적 간음입니다. 교회가 세상적 성공과 정치적 힘을 의지할 때, 예루살렘과 동일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언약의 신실함을 지켜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속의 은혜를 붙잡으라는 초대입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22–24절 | 오홀리바를 치러 오는 열강의 군대
하나님은 예루살렘(오홀리바)이 의지하고 사랑하다가 결국 싫어하게 된 자들, 곧 바벨론과 갈대아 무리,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더불어 앗수르 사람들까지 충동하셔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젊고 준수한 자들이며, 고관과 귀인, 명망 있는 자들로서 말과 병거, 무기와 방패, 수레를 거느린 강대한 군대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포위할 것이며, 하나님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기셔서 그들의 법대로 예루살렘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매혹되어 따라갔던 열강들이 결국 자신을 멸망시키는 도구가 되는 역설적 장면입니다.
25–27절 | 치욕과 수탈을 당하는 예루살렘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 예루살렘은 열강의 분노를 직면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잘라내어 수치를 안기고, 자녀들을 칼로 죽이며, 남은 자들은 불에 사릅니다. 또한 그들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아, 더 이상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애굽 땅에서부터 이어온 오홀리바의 음행을 끊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애굽을 다시는 그리워하거나 바라볼 수 없게 되며, 오래된 정욕의 습관이 단절됩니다.
28–30절 |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그녀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들의 손에 넘기십니다. 그들은 미움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대하며, 모든 수고의 열매를 빼앗고, 벌거벗겨 그 음행을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온 세상 앞에 폭로되며, 이는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니라 영적 간음의 결과임이 강조됩니다. 그들이 이러한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곧 이방을 따르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우상에 자신을 내어준 죄가 그대로 되돌아와 심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31–34절 | 사마리아의 잔을 마시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갔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을 그녀의 손에 주시며, 예루살렘이 그것을 끝까지 마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잔은 놀람과 패망의 잔으로, 마시는 자는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근심과 취함으로 무너집니다. 예루살렘은 잔을 다 비울 뿐 아니라, 그 깨어진 조각까지 씹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유방이 꼬집히는 치욕을 당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35절 | 하나님을 잊은 죄의 결론
하나님은 심판의 근본 이유를 밝히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잊고 다른 신들과 이방을 붙잡은 것이 모든 죄의 뿌리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자신의 음란과 음행의 죄를 담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종적이며, 백성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의 결론을 드러냅니다.
❖ 내용 요약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오홀리바)이 걸어간 불순종의 길이 어떤 최종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구체적이고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던 바벨론과 그 동맹 세력들을 도구 삼아 그녀를 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바벨론의 화려한 군사력과 젊고 준수한 귀인들의 모습을 동경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배신과 변심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대상들을 다시 불러내셔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단순한 국제 정세의 변화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판을 맡기셨기에, 예루살렘은 그들의 법과 관습에 따라 가차 없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열강의 분노로具현化됩니다. 예루살렘은 코와 귀가 잘리는 수치와 함께, 자녀를 빼앗겨 칼에 쓰러지고 불에 태워지는 참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 피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과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또한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옷과 장식품은 모조리 빼앗기고, 결국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애굽에서부터 이어온 음행의 습관을 철저히 끊어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어린 시절부터 애굽의 정욕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유혹을 반복적으로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애굽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시고, 과거에 집착했던 음행의 근원을 잘라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미워하고 싫어하던 자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이는 심판의 아이러니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다가 싫어하게 된 대상, 한때 의지했으나 결국 멀리하려 했던 열강이 이제는 미움으로 가득 차 예루살렘을 짓밟습니다. 그들은 모든 수고와 열매를 빼앗고, 예루살렘을 벌거벗겨 온 세상 앞에 수치를 드러냅니다. 음행의 흔적과 부끄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좇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다”(30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본질은 세상과 우상에 몸을 내어준 영적 간음이었습니다.
이어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음을 지적하시며, 동일한 심판의 잔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십니다. 이 잔은 “깊고 크고 가득한 잔”으로, 단순히 한 모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을 마시고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취하여 비틀거리고 근심 속에 무너집니다. 더욱이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이 일회성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잔해조차 삼켜야 하는 철저하고 끝까지 따라오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유방을 꼬집는다”는 표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수치의 상징으로, 생명과 양육의 상징이 조롱과 학대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배신한 언약 백성이 맞게 될 가장 치욕적인 결말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죄의 근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3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세상과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니 다른 것에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고대 예루살렘의 비극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은 것이 곧 심판의 도구로 변모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동경하다가 바벨론에게 짓밟혔듯, 오늘날 우리의 우상도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신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소망을 열어줍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의 잔을 마셔야 했지만,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신 진노의 잔 덕분에 구원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의 잔을 끝까지 비우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에 신실할 때, 심판이 아닌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회개로 나아가게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참된 위로와 소망을 붙잡게 만듭니다.
📖 붙잡는 말씀
3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오늘 본문의 전체 맥락을 응축하는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타락을 단 하나의 근원적인 문제로 요약하십니다. 그것은 곧 “나를 잊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동경하고, 애굽을 사모하며, 이방의 우상들을 좇은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언약은 희미해지고, 신앙은 형식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다른 주인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잊는 것은 단순한 무지나 망각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반이자 신앙의 근본적 파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대상을 찾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화려함에 매혹되어 열강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신앙을 잃은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극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죄악 목록—음행, 우상숭배, 배교, 언약 파기—는 표면적 현상일 뿐, 그 뿌리는 “하나님을 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은 죄의 근본 구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잊는 순간 모든 죄의 사슬에 묶여 결국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를 담당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쁜 일상과 치열한 경쟁, 빠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잊고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눈앞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지혜와 돈의 힘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삶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뒷자리에 밀려나고,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우리의 선택을 지배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본질을 잃고 껍데기만 남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위험을 고발합니다.
“나를 잊었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선택이며, 의도적 배신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대신 열강을 선택했고, 그 대가를 철저히 치러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으면 예루살렘과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매일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하고,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한 절망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반드시 자기 죄를 책임져야 함을 분명히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 죄를 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그 무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잔을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릴 것인가, 아니면 앞에 모실 것인가. 결국 신앙의 길은 기억과 망각의 길목에서 갈라집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삶의 작은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와 소망을 동시에 줍니다. 경고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죄의 대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며 구원의 은혜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부르심이자, “다시는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 단어 연구
❖ 잔 (כּוֹס / 코스)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כּוֹס (kos, 코스)는 기본적으로 ‘잔, 컵’을 의미합니다. 물이나 포도주를 담아 마시는 그릇을 지칭하는 일상적인 단어지만, 성경에서는 단순한 그릇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잔은 축복과 환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시 23:5,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담은 잔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시 75:8, 렘 25:15). 따라서 이 단어는 ‘마시는 행위’를 통해 은혜나 심판을 경험하게 하는 상징적 도구로 쓰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몫, 혹은 인간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운명을 가리키는 깊은 함의를 담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31–34절에서 “잔”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심판의 도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오홀리바(예루살렘)에게 언니 사마리아가 이미 마셨던 잔을 그대로 주십니다. 이 잔은 단순히 포도주가 담긴 잔이 아니라, 놀람과 패망과 수치가 가득 담긴 심판의 잔입니다. 더구나 그 잔은 “깊고 크고 가득하다”고 묘사되며, 부분적으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언니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일한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심지어 잔을 다 비우고 난 후에는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고 표현됩니다. 이는 심판이 단순한 일시적 고통이 아니라, 잔해와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끝없는 고통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묘사는 수치와 모욕의 극치를 드러내며, 그 잔을 마시는 것이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존엄 자체가 파괴되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잔은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반한 자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결과이자, 사마리아의 전철을 밟은 예루살렘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몫을 상징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잔”은 인간이 선택한 죄의 결과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경 전반에서 잔은 하나님의 분노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사 51:17, 렘 25:15). 그러나 동시에 시편에서는 축복과 구원의 잔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시 116:13). 에스겔 23장의 잔은 전적으로 심판의 잔으로,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좇은 언약 백성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형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가면 이 심판의 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신 잔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비우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심판의 잔을 면하고, 대신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잔은 경고와 동시에 은혜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심판의 잔을 마시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높이 들 수 있는 새로운 은혜가 주어집니다.
❖ 질투 (קִנְאָה / 킨아)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קִנְאָה (qin’āh, 킨아)은 기본적으로 ‘질투, 열심, 뜨거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소유욕적인 질투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신 4:24)이라고 말씀하실 때의 질투는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지키시는 성품을 나타내며, 우상 숭배와 언약 배반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qin’āh는 단순히 감정적 질투가 아니라, 언약의 신실성과 거룩을 수호하려는 하나님의 불타는 열심을 나타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언약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반응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로 부름받았으나,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같은 이방 나라들을 남편 삼아 음행을 반복했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가장 치명적이고 불타는 감정이 바로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배신 앞에서 그저 무관심하시거나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시고, 질투로 응답하십니다. 이는 곧 언약을 파괴한 자에게 임할 불가피한 심판의 동기가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구체적인 징벌로 나타납니다. 열강이 분노하여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자르고, 자녀를 빼앗으며, 옷과 장식품을 탈취하게 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질투로 인한 심판입니다. 즉, 질투는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심판으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타락을 보고 질투하심으로, 마치 불타는 불길처럼 죄를 태워 없애고, 음행을 끊어내시는 공의로운 행동을 하십니다. 따라서 본문 속 질투는 단순한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언약적 불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반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질투”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거룩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관심한 신이 아니십니다. 언약을 맺은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시며, 질투하시기에 심판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소유욕적 질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거룩을 지키기 위한 열심이며, 사랑의 증거입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질투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멸망을 경험했지만, 그 심판조차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이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이 질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질투하시고, 그 질투를 십자가의 심판으로 쏟으셨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새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세상의 권세와 우상을 붙잡는 것은 영적 음행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옵니다. 따라서 질투는 단순히 두려운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부르심을 담고 있습니다.
❖ 벌거벗김 (עָרוֹם / 아롬)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עָרוֹם (ʿārôm, 아롬)은 기본적으로 ‘벌거벗은, 옷을 벗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수치, 연약함, 무방비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한 사건에서처럼, ‘벌거벗음’은 죄로 인해 드러난 인간의 수치와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이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며, 권위와 존귀가 철저히 무너진 상황을 드러내는 강력한 언어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6절과 29절에서 예루살렘이 벌거벗겨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 세력은 예루살렘의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아 그녀를 벌거벗은 몸으로 만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재산을 빼앗기는 사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정체성과 존귀함이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언약 백성으로 입히시고, 존귀의 옷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옷을 스스로 더럽혔고,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며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벌거벗김’은 영적 간음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음행의 은밀한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 듯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은 모든 죄를 드러내십니다. 벌거벗겨진다는 것은 곧 그동안 숨기려 했던 음행과 수치가 온 세상 앞에 폭로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왕은 왕의 옷으로, 제사장은 제사장의 옷으로 그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권위와 지위, 정체성을 모두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신부로서 존귀함을 유지할 수 없었고, 온 세상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문은 벌거벗김을 통해 예루살렘의 음행이 결코 은밀히 끝날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며,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빛 가운데 끌어내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자신이 의지했던 바벨론에게 배신당하고, 그들 손에서 옷을 빼앗기며 벌거벗겨진 채 수치를 당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잊은 백성이 세상에 의지할 때 맞이하게 되는 최후의 결말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벌거벗김’은 죄의 결과로 드러나는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설 수 없게 만드는 본질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에스겔 23장의 벌거벗김 역시 동일한 신학적 원리 위에 있습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붙잡자, 하나님은 그들을 벌거벗겨 죄와 수치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벌거벗김은 심판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회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숨긴 채 두지 않으시고, 드러내어 심판하심으로써 백성에게 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벗겨내고 진정한 회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짊어지셨기에, 우리는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계 19:8).
따라서 ‘벌거벗김’은 두 가지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좇는 모든 자는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둘째, 그 수치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단순히 심판의 이미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회복된 복음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신학적 상징입니다.
❖ 음란/음행 (זְנוּת / 즈누트)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זְנוּת (zenût, 즈누트)은 ‘음란, 음행, 매춘, 간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으로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단순히 성적 부도덕을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이나 이방 나라를 따르는 영적 배반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우상 숭배와 성적 문란이 종종 함께 나타났기 때문에, ‘음란’은 종교적·사회적 타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zenût는 성경에서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반하는 태도를 폭로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2–3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반복해서 “음란”과 “음행”으로 규정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신실해야 했지만, 대신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같은 이방 열강을 의지하며 동맹을 맺고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본문 30절은 명확히 말합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음란’은 단순히 도덕적 문란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의 권세와 우상에게 마음을 준 영적 간음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음행은 은밀히 감춰진 것이 아니라,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는 죄였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한 자들, 즉 바벨론과 그 동맹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예루살렘의 음행을 폭로합니다. 벌거벗김, 장식품의 탈취, 수치와 조롱은 바로 이 음행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남편으로서, 언약을 깨뜨린 아내의 음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사마리아가 걸었던 동일한 길을 걸으며, 사마리아의 잔을 똑같이 마셔야 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음란/음행’은 예루살렘의 모든 죄악의 총칭입니다. 경제적 착취, 정치적 동맹, 군사적 숭배, 종교적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잊은 데서 비롯된 영적 음행으로 규정됩니다. 본문은 ‘음행’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루살렘의 죄가 단순히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언약의 근본을 무너뜨린 반역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음란/음행’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신부로 비유하시고,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로 설명하십니다(호 2:19–20, 겔 16장). 따라서 음행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언약적 배신이며 영적 불륜입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두고도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깊은 모독이며, 결국 심판을 불러옵니다.
또한 ‘음행’은 인간의 반복되는 죄성을 보여줍니다. 북왕국 사마리아가 음행으로 멸망했음에도 남왕국 예루살렘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죄를 되풀이하는 본성을 잘 드러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음행은 단순한 한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하나님을 잊을 때마다 반복하는 근본적 죄의 패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음행’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 빛나게 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연약하고 종종 영적 간음에 빠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피 흘려 정결케 하십니다(엡 5:25–27). 그러므로 음행은 심판을 불러오는 단어이자, 동시에 복음을 통해 정결하게 회복되는 은혜를 갈망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 잊다 (שָׁכַח / 샤카흐)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שָׁכַח (šāḵaḥ, 샤카흐)은 ‘잊다, 기억하지 못하다, 망각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일상적으로는 단순히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훨씬 더 깊은 영적 함의를 지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잊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의 소홀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다른 신이나 세상의 가치로 대체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라”(신 6:12, 8:11)고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 곧 언약을 파기하는 심각한 죄임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샤카흐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버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35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여기서 ‘잊다’라는 표현은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입니다. 예루살렘이 범한 수많은 죄(바벨론을 의지한 것, 애굽을 그리워한 것, 앗수르와 동맹한 것, 우상을 섬긴 것)는 결국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은 언약에 신실함을 유지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잊는 순간 인간은 다른 대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눈앞에 보이는 열강의 힘과 화려함을 붙잡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의 소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배반이자 의도적인 무관심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대신 세상의 권세와 쾌락을 삶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정체성은 무너지고, 벌거벗김과 조롱,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하는 결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잊다”라는 말은 곧 언약적 신실성을 상실한 상태를 표현합니다. 마치 남편을 배반한 아내가 더 이상 남편을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자신을 남편 삼으신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잊다”는 인간의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잊은 자들은 음부로 돌아가리라”(시 9:17)고 말하며, 하나님을 잊는 것이 곧 멸망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반대로 신앙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에서 출발합니다. 출애굽 사건, 율법, 성전 예배는 “기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잊음”은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다른 것을 붙잡는 선택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는 이 문제가 더 깊이 다루어집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자기 욕망과 세상의 신들을 더 쉽게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망각의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나를 기억하라”(눅 22:19)고 말씀하시며,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은혜의 표징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잊다”라는 단어는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곧 죄와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언약 안에서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본질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와 약속을 잊지 않는 데 있습니다.
📖 절별 주해
22절 | 하나님이 충동하신 대적의 부름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방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바벨론과 그 동맹국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과 화려한 문화를 매혹적으로 바라보았고, 스스로도 그들과 같은 위세를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맹이 오래가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리자, 예루살렘은 곧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반역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존심과 독립을 내세운 행동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채 세상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예루살렘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된 세력들을 충동하여 공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충동하다”라는 말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자극하여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개입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국제 정치의 변화나 동맹 관계의 파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는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의지했던 대상이 파괴의 도구로 변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된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붙잡을 때, 그것은 결국 심판의 도구로 바뀌게 됩니다. 돈, 권력, 인간 관계, 세상의 성공—all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치는 채찍으로 변모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다가, 또 언제 그것을 미워하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 대신 붙잡은 그 무언가가 언젠가 심판의 도구로 바뀌지 않을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서지 않으면, 예루살렘과 같은 비극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23절 | 심판에 동원된 열강의 세력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양한 세력을 불러 모으십니다. 바벨론과 갈대아뿐 아니라,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함께 앗수르 사람들까지 동원됩니다. 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다민족 제국의 힘과 무서운 군사적 연합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앗수르 사람들의 언급은 아이러니합니다. 예루살렘은 과거 앗수르의 세력을 동경하고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들이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들을 “준수한 청년, 고관, 감독, 귀인, 유명한 자, 말 타는 자들”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모의 매력을 넘어, 사회적 위세와 정치적 영향력을 갖춘 자들을 뜻합니다. 또한 말을 소유했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이들의 매력에 매혹되어 자신들의 안전을 그들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매혹은 심판의 도구로 바뀌었고, 예루살렘을 짓밟을 세력으로 돌변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사람의 눈에는 부러움과 매혹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을 떠난 순간 오히려 파괴와 수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은 결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그 대상을 심판의 도구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24절 | 이방 법정에 맡겨진 재판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심판의 구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대적들은 무기와 병거, 수레와 방패로 철저히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포위합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묘사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권세에 기대었기에, 이제는 그 권세에 둘러싸여 도망할 길조차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직접 집행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방 세력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충격적인 점은 예루살렘이 더 이상 언약 백성의 기준에 따라 재판받지 않고, 이방인의 법과 질서에 따라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버린 자에게는 언약의 보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은 이제 세상의 법정 앞에 서서 그들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심각한 경고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순응한다면, 결국 그 질서 속에서 무너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린 자는 세상의 법에 붙잡혀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정체성을 붙들라는 경고이자,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로서 심판을 집행하신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25절 | 하나님의 질투와 치욕의 심판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질투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한 감정의 분노가 아니라,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을 뜻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질투처럼,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향해 질투하십니다. 이 질투는 단순히 감정적 반응으로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이고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은 대적들의 손에 넘어가 코와 귀가 잘리는 모욕을 당합니다. 코와 귀는 얼굴의 중심적인 기관으로, 인간의 존엄과 외형을 대표합니다. 이를 잘라낸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 존재의 수치와 존엄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칼로 엎드러지고 남은 자들이 불에 사라지는 장면은, 공동체의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철저한 심판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현재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끊어내시는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질투의 결과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존엄의 상실과 공동체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죄가 개인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가정과 자녀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후대의 생명과 정체성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세상과 타협하며 우상을 붙잡을 때, 그 결과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다음 세대에까지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신실성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공의로운 질투로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후대의 생명과 공동체 전체를 책임지는 언약적 결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6절 | 옷과 장식의 탈취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예루살렘의 옷과 장식품이 벗겨지고 빼앗기는 장면은 단순한 물질적 손실이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고, 장식품은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때 예루살렘에게 존귀의 옷을 입히시고,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우상 숭배와 음행에 사용하였으므로, 이제 그것들이 모두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옷을 벗기고 장식을 빼앗는 것은 단순한 전쟁의 약탈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과 존귀가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벌거벗은 상태로 세상 앞에 드러나는 수치는 하나님을 잊은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옷과 장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데 소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은혜를 배반한 자들에게 더 이상 그 축복이 남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내 욕망과 세상의 우상에 사용한다면, 그 은혜는 결국 심판의 날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옷은 거룩을 위해 입혀진 옷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수치와 벌거벗김이 아닌 존귀와 영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7절 | 애굽의 음행을 끊으시는 하나님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의 뿌리를 정면으로 다루시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의 음행은 단순히 최근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애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그들의 우상과 풍습에 익숙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애굽의 정욕과 우상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의 정욕을 끊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도 반복적으로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에도 유다는 바벨론에 맞서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에서 그 뿌리를 단호히 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고,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더 이상 애굽을 의지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차단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죄의 근원을 제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을 향한 끊을 수 없는 미련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그 유혹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십니다. 이는 고통스럽고 파괴적인 과정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으로 이끄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애굽과 같은 뿌리 깊은 죄의 습관이 존재합니다. 과거로부터 붙잡아 온 죄의 습관과 세속적 욕망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강력한 심판과 징계를 통해 그 뿌리를 제거하십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옛 습관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진정한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28절 |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이 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아이러니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바벨론을 사랑하고 동경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압제와 간섭이 싫어졌고, 그래서 애굽과 새로운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워하는 자, 싫어하는 자”의 손에 예루살렘을 넘겨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외부의 우연한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역사임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정치적 배신과 동맹의 붕괴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붙잡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고 의지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미워하는 존재가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는 도구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는 사랑할 대상도, 의지할 대상도, 끝내 지켜줄 대상도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붙잡았던 것이 심판의 도구로 돌변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과 사람을 더 의지할 때, 결국 그 대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시며, 그 외의 모든 의지는 결국 심판과 멸망으로 이어짐을 이 말씀을 통해 경고하십니다.
29절 | 미움의 행위와 수치의 폭로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행음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이 구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치욕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대적들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접근하여, 그동안 예루살렘이 애써 쌓아 올린 모든 수고를 빼앗아 갑니다. 경제적 풍요, 정치적 성취, 문화적 영광—all 이 모든 것이 단숨에 무너집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 앞에 내던져집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약탈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감추고 싶었던 음행의 실체가 드러나고 만천하에 수치가 공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은 몸”은 단순히 옷이 벗겨진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영적 음행이 철저히 폭로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을 따라가며 자신들의 힘과 지위를 과시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버린 결과 그 모든 영광은 빼앗기고 수치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어, 숨을 곳 없는 심판의 현장으로 몰아가십니다.
또한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는다”는 표현은, 하나님 없이 세운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고 헛된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을 배제한 수고는 결국 헛수고가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운 왕궁, 쌓은 재물, 추구한 권력—all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심판의 이유가 되고, 그 결과로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교훈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세운 모든 수고는 결국 빼앗깁니다. 화려함과 성취로 자신을 감추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잊은 수고는 수치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며 쌓은 수고는 영원한 열매가 됩니다.
30절 | 음란의 결과로 맞이한 심판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이 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한 모든 수치와 파괴의 근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심판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스스로 선택한 음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이방을 따르고, 그들의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죄와 결과 사이의 인과 관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눈에 보이는 열강의 힘과 우상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영적 배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따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불공정한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의 공의로운 결과였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대상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보다 더 크고 강한 대상을 찾아 붙잡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럽히고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죄의 달콤함은 잠시뿐이고, 그 끝은 반드시 심판과 수치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권세, 돈, 인간관계, 쾌락—all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럽히고 심판으로 이끌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밝히시고, 그 결과를 스스로 담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죄의 본질을 직시하고, 하나님만을 기억하며 그분께 신실하게 서야 합니다.
31절 |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간 예루살렘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한마디로 요약하십니다. “네 형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은 예루살렘이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이 걸었던 동일한 죄의 길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우상 숭배와 열강 의존으로 인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멸망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과로 예루살렘의 손에 “그의 잔”을 주십니다. 잔은 단순한 음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심판과 운명을 상징합니다. 즉, 사마리아가 마신 심판의 잔을 이제 예루살렘이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죄에 동일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공의의 원리를 드러냅니다. 백성의 출신이나 지역,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반복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무서운 교훈을 줍니다. 앞선 세대의 죄와 그 결과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길을 따라간다면 결국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개인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반복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외면한다면,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간 예루살렘처럼 우리 역시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나는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의 멸망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더욱 큰 심판을 불러옵니다.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갔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길을 따라간다면 동일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32절 | 깊고 큰 심판의 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십니다. 그 잔은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입니다. 이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깊고 크다는 표현은 심판의 강도와 범위가 매우 크다는 것을 나타내며, 가득히 담겼다는 말은 심판이 피할 길 없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뜻합니다.
그 잔을 마신 결과 예루살렘은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패배의 아픔을 넘어, 세상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한때 화려함과 영광을 자랑하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의지했던 세상 권세가 이제는 그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수치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가 얼마나 철저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줍니다. 심판은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명예와 존귀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스스로 버린 자들이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결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할 때, 그 영광은 반드시 조롱으로 변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힘과 화려함을 의지한다면, 결국 세상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의 근원이심을 기억하고, 그분께만 신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33절 | 놀람과 패망의 잔에 취함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이 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그 잔은 단순히苦味를 가진 잔이 아니라, 놀람과 패망의 잔입니다. “놀람”은 갑작스러운 충격과 두려움을 뜻하고, “패망”은 완전한 몰락을 의미합니다. 즉 예루살렘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잔은 또한 “넘치게 취하고 근심”을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주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 심판에 압도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고 이방과의 동맹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판의 잔을 마셔 완전히 무너지고, 깊은 근심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잔”이라는 표현은 북왕국의 멸망을 거울로 삼아야 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음행과 우상숭배의 결과로 멸망했으며,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의 무서움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길을 걸어가 결국 같은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죄에는 동일한 심판을 내리시며, 역사적 전례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경고가 됩니다. 과거의 실패와 심판을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역사, 교회의 역사, 개인의 과거에서 이미 드러난 죄의 결과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놀람과 패망의 잔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과거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34절 | 잔의 조각까지 씹는 철저한 심판
“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히 잔을 마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 기울여 마시고”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심판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부분적 형벌이나 일시적 징계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전면적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단순히 쓰라린 심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잔해와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고통을 뜻합니다. 이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뼈아픈지, 끝까지 피할 수 없는지를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표현은 당시 문화에서 여인의 모욕과 수치를 상징하는 강렬한 언어입니다. 예루살렘이 겪는 심판은 단순한 멸망이 아니라, 존엄과 명예를 완전히 상실하는 치욕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이러한 심판은 인간의 우연이나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불가피한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결코 부분적이지 않고, 끝까지 치러야 하는 무거운 대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의 철저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잔을 대신 마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잔해까지 씹는 심판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는 동일한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35절 | 하나님을 잊은 자가 담당할 죄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종결짓는 핵심 이유를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이 당해야 할 모든 치욕과 멸망, 심판의 잔을 마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히 우상을 섬기거나 이방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외면한 데 있습니다.
여기서 “잊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의 결핍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그분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적극적인 배반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등 뒤에 버렸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취급하며, 완전히 외면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가장 심각한 언약적 모독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잊고 다른 자를 따르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나님을 잊은 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은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지는 형벌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음란과 음행의 죄를 지었다면, 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변명이나 회피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각자가 자기 죄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는 결국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힘과 욕망을 붙잡게 되고, 그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로 변합니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구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죄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절은 복음의 필요성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잊고 자기 욕망을 따르기에, 결국 스스로 죄를 담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멸망이 아닌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버렸다”라는 고발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를 기억한다”라는 은혜의 선언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오직 그분만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묵상
에스겔 23장 22–35절의 본문은 마치 충격적인 재판정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죄의 뿌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던 대상에게서, 이제는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져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이 동경했던 바벨론과 앗수르, 그리고 의지하려 했던 애굽. 이 모든 세력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수치가 폭로되며, 심판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야 했습니다.
본문을 묵상할 때 가장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모든 죄의 근원을 “나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죄는 결국 기억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됩니다. 기억의 공백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 뒤에 밀어낸 자리는 곧 세상의 권세, 욕망, 쾌락이 채웁니다. 예루살렘이 애굽과 앗수르, 바벨론을 바라본 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직장에서의 성과, 가정의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같은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점령하면, 하나님은 어느새 우리의 등 뒤로 밀려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눈에 보이는 힘과 매혹적인 대상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치는 도구로 돌아옵니다.
심판의 잔을 “조각까지 씹으며” 마셔야 한다는 표현은 너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죄의 결과가 철저하고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죄는 언제나 끝까지 값을 치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기고,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우리의 수고를 빼앗고, 수치를 드러내며, 끝내는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분명히 보여주심으로써,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본문 속에서도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스스로 죄를 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심판의 잔을 마시셨고, 벌거벗김을 당하셨으며,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심판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절망 가운데 머무르지 않고,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고 세상의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 같았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치는 심판의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며,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작은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올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죄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을 때 심판이 임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은혜와 구원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안전이자 소망입니다.
상징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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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홀라와 오홀리바 :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민족의 관습을 따라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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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의 비유 :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저버린 것을 사람의 불륜 및 음행에 비유하여, 영적 배신과 배타적 충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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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선언 :
반복된 타락 후에 마침내 임박한 심판이 언급되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 없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문학적 특징
에스겔
23장은 다른 예언서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죄악의 본질과 그 심각성을
강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관용구와 상징, 인물의 대조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본문은 경고합니다.
- 나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우상숭배적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타락과 심판
본문 요약
에스겔 23장은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비유로 들어 사마리아(북이스라엘)와 예루살렘(남유다)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자매가 어린 시절부터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으며, 이방 나라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으며 영적 간음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홀라(사마리아)는 앗수르와 연합하여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오홀리바(예루살렘) 역시 바벨론과 이집트에 기대면서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의지하던 나라들에 의해 멸망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이방 나라들의 문화와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그들 손에 멸망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조
- 두 자매의 음행과 배교 (1~21절)
- 오홀리바의 더 큰 타락과 심판 (22~35절)
-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36~49절)
두 자매의 음행과 배교 (1~21절)
하나님께서는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를 한 어머니에게서 난 두 자매로 묘사하십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정한 행동을 일삼으며, 이방 나라들과 혼합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를 사랑하며 그들의 신들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결국 앗수르에게 의지하다가 멸망당합니다. 하지만 오홀리바는 오히려 더 심하게 타락하여, 바벨론과 애굽을 따르며 그들의 풍습을 본받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과 권력을 따라갔음을 의미합니다.
오홀리바의 더 큰 타락과 심판 (22~35절)
하나님께서는 오홀리바(예루살렘)가 오홀라보다 더 악한 행위를 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녀는 바벨론을 의지하고, 그들과 동맹을 맺으며 더욱 깊은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결국 그녀를 배신하고 예루살렘을 침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로 인해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의지했던 나라들이 오히려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할 때 결국 그 세상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36~49절)
하나님께서는 두 자매가 행한 모든 죄를 열거하시며, 그들의 피 흘림과 우상 숭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우상들에게 희생하며,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그들이 당할 형벌이 다른 나라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죄로 인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23장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의지하며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따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지만, 동시에 그의 목적은 회개와 회복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신뢰를 두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월 9일(화) 에스겔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슬피 탄식하라(21:6)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Therefore groan, son of man! Groan before them with broken heart and bitter grief.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찌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방백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붙인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찌어다.
Cry out and wail, son of man, for it is against my
people; it is against all the princes of Israel. They are thrown to the
sword along with my people. Therefore beat your breast.
탄식하다(584) 아니흐(’ânach) אָנַח 스트롱번호 584
발음 [ ’ânach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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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원형 니팔형 : 한숨짓다, 신음하다, 한탄하다, 출2: 23, 욜1:18.
-
b.원형 [עַל과 함께 쓰여 신음의 원인을 나타내는 경우], 겔21:12(7).
-
c. 원형 [מִן과 함께 쓰여 신음의 원인을 나타내는 경우], 출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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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탄식하다(사 24:7, 겔 21:6, 욜 1:8).
[명] 탄식(애 1:21).
슬피하다(4814) מְרִירוּת 메리루트(merîyrûwth) 스트롱번호 4814
발음 [ merîyrûwt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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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슬픔, 괴로움, 비애, 비탄, 불행, 겔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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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부] 슬피(겔 21:6).
허리(4975) 모템( môthen) מֹתֶן
스트롱번호 4975
구약 성경 / 5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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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느다란, 날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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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주]쌍수로만 쓰임: מָתְנַיִם 허리, 창37:34, 왕하4:29, 9:1, 사20:2, 시66:11, 렘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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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허리(창 37:34, 왕상 20:31, 사 20:2), 요통(사 21:3).
[동] 차다(겔 9:3).
끊어지다(7670) 쉬브로운( shibrôwn) שִׁבְרוֹן
어원 / 766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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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깨뜨림, 겔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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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남성 멸망, 렘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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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멸망(렘 17:18), 끊어짐(겔 21:6).
슬피 탄식하라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슬피 탄식해야 할까요?
에스겔서 21장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선포하시며, 바벨론의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칼'이라는 이미지(심상)를 사용하여 임박한 재앙과 파멸의 위중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1-7절 : 하나님의 칼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슬퍼하며 경고하는 에스겔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 8-17절 : 날카로운 칼, 갈고 닦은 칼에 대한 비유로 심판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알립니다.
- 18-27절 : 바벨론 왕이 갈림길에서 점을 치고, 결국 예루살렘을 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 28-32절 : 암몬 족속을 향한 별도의 심판 예언이 이어지며,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강조합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메시지
에스겔서 21장이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불가피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칼, 즉 심판이 내려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는
개인적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 겪으며 슬퍼함을 표현합니다.
이는 심판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정의,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보여줍니다.
묵상포인트
-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삶의 방향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성을 돌아봅니다.
- 에스겔처럼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의 아픔에 함께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이 함께 있음을 기억하며,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함을 묵상합니다.
오늘날
나의 삶에도 때때로 '하나님의 칼'과 같은 경고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 마음과 행실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변의 아픔과 불의를 외면하지 말고, 에스겔처럼 함께 슬퍼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에스겔 21장 : 왜 하나님의 칼은 모두를 향했는가?
에스겔서
전반에 흐르는 긴장감 넘치는 심판의 예언은 21장에 이르러 '여호와의 칼'이라는 섬뜩하고도 역동적인 이미지로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멸망의 선고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현현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지자가
겪어야 하는 깊은 고뇌와 백성들의 처절한 애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 심지어 이방 민족인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칼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모든 불의가 청산된 후 도래할
진정한 통치에 대한 희미한 소망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불가피한 심판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스겔 21장의 예언이 선포될 당시,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 제국의 압제 하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 대한 반역을 꾀했지만, 이는 오히려 바벨론의 더욱 가혹한 침공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내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도성이 설마 망하겠느냐"는 안일한 낙관론과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위로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돌아보기보다는 현실의 고통만을 원망하거나, 혹은 헛된 기적을 바라며 현실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무감각과 임박한 파국 앞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칼'이 이미
뽑혔으며, 그 칼날이 예루살렘을 향해 무섭게 다가오고 있음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 예언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 이미 시작된
심판의 집행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는 남아있는 고국과 성전에 대한 마지막
희망마저 꺾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처절한 심판의 메시지는,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정화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과 공동체의 죄악이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역사를 통해 실현되는지를 목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위기와
심판의 징조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을 발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에스겔 21장은 여러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는 바로 '여호와의 칼'입니다.
이 칼은 다양한 대상과 상황을 향해 휘둘러지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임할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땅을 향하여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칼을 칼집에서 빼어 네 가운데에서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끊어 버릴 것이다."(겔 21:3, 우리말성경) 라는 선언은 심판의 무차별성과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이 끔찍한 소식에 에스겔은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탄식하라"(겔 21:6)는 명령을 받는데, 이는 선지자가 백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체감하며 깊이 애통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둘째, 칼의 노래 (8-17절) :
이 부분은 칼 자체를 의인화하여 그 예리함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노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겔 21:9-10, 새번역) 와 같은 구절들은 칼의 위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에스겔은 손뼉을
치며 칼의 임함을 재촉하고, 그 칼이 세 번 거듭 사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일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는 심판의 강도와 반복성을
암시합니다.
셋째, 바벨론 왕의 칼 (18-27절)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 길, 즉
암몬의 수도 랍바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점을 치는 모습을 묘사하게 하십니다.
그는 화살을 흔들어 점괘를
얻고, 드라빔(우상)에게 물으며, 짐승의 간을 살펴봅니다.
결국 점괘는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고,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악하고 더러운 군주"(시드기야 왕을 지칭)의 마지막 날이 이르렀음이 선포됩니다.
그의 왕관과 관모는
벗겨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며 높은 자가 낮아지는 전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기존
질서의 완전한 파괴와 함께 장차 임할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넷째, 암몬 족속을 향한 칼 (28-32절) :
마지막으로 칼은 암몬 족속을 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지만, 그들 역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이 선포됩니다.
그들의 칼은 다시 칼집에
꽂히지 못하고, 그들이 지음 받은 곳, 그들의 본토에서 심판받아 불에 삼켜질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칼'의 행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의 대상과 특징 (겔 21장) | 주요 내용 및 의미 |
---|---|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소, 땅) (1-7절) | 의인과 악인 모두를 끊는 무차별적 심판. 선지자의 깊은 탄식 동반. |
칼의 노래 (8-17절) | 날카롭고 빛나는 칼, 살육과 파괴를 위해 준비됨. 심판의 강도와 반복성. |
바벨론 왕의 도구로서의 칼 (18-27절) | 점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함. 시드기야 왕의 폐위, 기존 질서의 전복, 장차 올 '마땅히 얻을 자' 암시. |
암몬 족속 (28-32절) | 이스라엘 멸망을 기뻐한 죄에 대한 심판. 철저한 멸망 예고. |
에스겔 21장의 '여호와의 칼'은 단순한 전쟁 무기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 심판의 불가피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존재론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칼'이 가진 심판의 보편성과 무차별성
신정론(Theodicy), 즉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신의 정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칼이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끊어
버릴 것"이라는 선언은, 공동체적 심판 앞에서 개인의 의로움이 때로는 무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받는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야기하며, 거대한 악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책임과 판단이
어떻게 마비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 역시 개인의 행위를 넘어선 공동체적 죄악의 결과로 임할 때, 그
범위는 개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무서운 공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심판의 불가해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둘째, 에스겔에게 명령된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탄식"
고통에 대한 공감과 예언자적 중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심판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미리 체감하고
그들을 위해 애통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강조한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한한 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에스겔의 탄식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고통받는 타자(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연대와 책임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대변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심판의 메시지 속에는 역설적으로 사랑과 연민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시드기야 왕의 폐위와 함께 선포된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부패하고 불의한 통치의 종말은 필연적이며, 그 자리에는
진정으로 '마땅히 얻을 자', 즉 공의롭고 참된 통치자가 와야 한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혁명과
개혁의 열망,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기대를 반영합니다.
철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역사의 필연적 발전을 이야기했다면, 에스겔은 신적 개입을 통해 도래할 궁극적인 정의의 왕국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마땅히 얻을 자'에 대한 기대는 훗날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신학적 씨앗이 됩니다.
에스겔 21장의 '여호와의 칼' 이야기는 섬뜩하고 충격적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과 성찰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고대 예언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요?
첫째, 우리 시대의 '여호와의 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물리적인
재앙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구조적인 악, 만연한 불의, 걷잡을 수 없는 환경 파괴, 인간성 상실과 같은
보이지 않는 위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칼날' 앞에서 "설마 나에게까지 미치겠어?"라는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겔의 예언은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임박한 위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가장 큰 죄악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이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와 같다." - (익명의 격언 재구성)
둘째, "의인과 악인을 함께 끊는" 심판 앞에서 우리는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개인의 경건함과 선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적 죄악의 물결 앞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나의 작은 선행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기보다,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 에스겔의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탄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세상의
고통과 불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깊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있습니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무감각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탄식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연민의 감정을 회복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울고 기도하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차가운 이성이 아닌, 뜨거운
가슴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넷재, "마땅히 얻을 자"에 대한 소망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게 하는 동력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 질서가
영원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평화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에게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마땅히 얻을 자'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에스겔 21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심판의 칼날'을 감지하고 있는가?
- 불의와 고통 앞에서 나는 침묵하고 있는가, 아니면 탄식하며 행동하고 있는가?
- 나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인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에스겔 21장은 '여호와의 칼'이라는 강력하고도 무서운 상징을 통해 임박한 심판의 필연성과 그 범위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 칼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향하며,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백성들의 고통을 예감하는 깊은 탄식을 요구합니다.
또한 바벨론 왕을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 왕 시드기야의 패역한 통치를 종식시키고, 기존의 모든 질서를 전복시킨 후 '마땅히 얻을 자'를 통해 새로운 통치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했던 이방 민족 암몬에게까지 심판의 칼날이 미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국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결국 에스겔 21장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이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그리고 그 절망적인 파괴 속에서도 어떻게 새로운 질서와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이 고대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안일함에서 벗어나 시대의 위기를 직시하고, 정의를 향한 열망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1:1~12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냉혹한 형벌이 아니라, 죄로 인해 무너져가는 백성들의 회복이었다.
심판 가운데서도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에스겔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고”, “슬피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바울도 십자가를 거부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큰 근심과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동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바울은 저주를 받아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유다 민족들을 사랑했기 때문인데, 이 또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자신의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다.
하나님의 사람은 타인의 죄를 보고 비웃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할 줄 알고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인들과 연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죄인들과 약자의 친구가 되는 자다.
말보다 눈물로, 비난보다 중보로 서는 자가 곧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어줄 사람을 찾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찾으신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에스겔 21:6 (개역개정 / NASB)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As for you, son of man, groan with breaking heart and bitter grief, groan in their sight.
선지자 에스겔을 찾아온 유다 장로들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탁을 단지 비유 정도로 가볍게 여겼습니다(20:49). 이에 에스겔은 칼의 심판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절규하며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반부인 1절-7절은 칼의 비유, 그리고 후반부인 8절-17절은 칼의 노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남에서 북까지, 곧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3-5절). 에스겔은 이 같은 상황에서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칼이 준비되어 있다고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9-11절). 이 심판에는 의인과 악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칼은 한 번만 쓰이는 게 아니라 두세 번 거듭 쓰일 것이라고 거듭 경고합니다(14절). 확실한 심판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칼은 분노가 다 풀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16-17절).
에스겔을 통해 전해지는 오늘 본문은 두려운 칼의 심판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까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는 구절이 더 그랬습니다.
선지서를 묵상하는 것은 제게 신앙을 각성시켜주는 용광로요 풀무 역할을 하는 말할 수 없이 귀한 말씀 경험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말씀 해석도 어렵지만 계속 긴장하게 하는 그것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해줍니다. 특히 이 묵상 말씀을 저만 적용 대상으로 하면 그래도 괜찮겠는 데, 이것을 다른 분들과 나눌 때 괴롭습니다. 이왕이면 밝고 힘이 되는 말씀, 미래를 예수 제자로 잘 사는 말씀을 나누면 좋을 텐 데 이런 경고와 심판에 관한 말씀을 나눠야 하니 제 마음도 답답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차마 못할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 에스겔서를 묵상합니다. 더구나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깊이 마음에 다가왔던 구절인 예레미야 1:7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 지어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늘도 질책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허리가 부서질 정도로 괴롭고 통렬하게 탄식하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 탄식을 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절박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위해 이처럼 슬퍼하며 기도했는지, 나아가 이처럼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특히 목사 안수를 받고나서 지난 2년 4개월 동안 여기저기서 전한 말씀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히 우리 사회도, 교회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건 지난 몇 주 동안 에스겔서를 나누면서 여러 번 지적했던 사항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축복만 얘기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분명히 잘못 되었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유다가 범했던 죄인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불의를 행한 죄들은 바로 우리의 죄악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특히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위해 눈물을 쏟으며, 목숨을 바치는 마음과 자세로 그리해야합니다. 그것도 ‘그들의 목전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심판 재앙 소식을 전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에스겔을 비유나 늘어놓는 자가 아니냐면서 조롱했습니다(20:49). 그들은 에스겔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나 하는 자라고 멸시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듣기 거북한 심판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환영받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조롱과 핍박과 마주쳐야 하는 일입니다. 사실 저도 육신이 다한 후 심판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뺀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며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인기가 없더라도 교인들 앞에서 탄식하며 말씀을 전하고 또 가르치는 목사,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의 믿음을 아십니다. 저의 행위를 다 알고 계십니다. 아직도 우상과 불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심한 허리 통증이나 긴급한 상황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허리를 삐끗한 것 이상으로, 디스크 탈출, 척추관협착증, 골절, 감염 등 심각한 질환이나 신경 손상이 동반될 수 있는 응급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증상이 있다면 즉시 전문의의 진단을 받아야 하며, 특히 다음과 같은 증상이 동반될 때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
다리 마비 또는 감각 이상 :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감각이 둔해지는 경우.
9월 8일(월) 에스겔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For every living soul belongs to me, the father as well as the son--both alike belong to me. The soul who sins is the one who will die.
남한은 안 먹어서 탈
북한은 못 먹어서 탈
현대의 경제 정치 문화의 구조는 80년 차이
남한은 사회는 발전이 빠르고 사람이 따라가는 것이 바쁘다.
북한은 사회는 침체되고 사람은 배가 고파 오직 먹을 것만 생각한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 덕분
남을 탓하는 것과 관련한 우리 속담이 많다.‘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내 탓 네 탓 수염 탓’
‘못살면 터 탓’
‘소경이 넘어지면 막대 탓’ 등이 있다.
남을 탓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을 나타낼 때 쓰인다.
반면 좋은 일에는 ‘덕분(德分)’이 쓰인다.
“선배님 덕분에 맡은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그렇다면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에서 ‘잘되면 제 탓’은 부정적 의미와 어울리는 ‘탓’의
용법상 맞지 않는다.
좋은 일은 ‘덕분(덕)’과 어울려야 하므로 ‘잘되면 제 덕분(덕) 못되면 조상 탓’이 돼야 한다.
둘 다
‘탓’으로 처리한 것은 아마도 대구법(對句法) 또는 반복법으로 리듬감을 살리기 위함이거나 ‘탓’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말로 ‘때문’이 있다.
‘때문’은 긍정이나 부정적 현상을 가리지 않고 쓰인다는 점에서
‘탓’ ‘덕분’과 구별된다.
따라서 “잘되면 제 탓(→덕분) 못되면 조상 탓”은 “잘되면 저 때문 못되면 조상 때문’으로 바꿔
써도 의미상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속담을 문제삼았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The fathers eat sour grapes, and the children's teeth are set on edge'’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이 속담은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죄때문에 심판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 속담은 하나님이 개인 책임을 무시하고 사람들 공동체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사람을 공동체적으로 대하며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의 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때문에도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대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동체로 살고 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자 이런 생각으로 개인적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에스겔 18:3-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며 이스라엘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겠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합니다.
모든 영혼은 다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 앞에 인격적이고 책임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로 처벌받지 않고 오직 자기 죄로만 처벌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심판받지 않고 오직 자기 죄로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영혼은 자기 죄로만 죽는다 하며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에스겔 18:5-9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의를 행하면 그는 의인으로 반드시 살게 됩니다.
의인인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의를 행치 않으면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자기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에스겔 18:10-13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의인의 아들이 악을 행하면 그는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자기 죄로 죽으며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자기책임 원칙은 손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의인의 아들이 악을 행하면 자기 죄로 주지만 그 악인의 아들이 의를 행하면 다시 자기의 의로 인해 삽니다.
에스겔 18:14-18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의인의 아들이었던 악인의 아들이 다시 의를 행하면, 그는 아버지의 죄로 죽지 않고 자기 의로 삽니다.
하나님은 자기 책임의 원칙을 여러 예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하는 유다백성에게 그것이 틀렸다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개인 책임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이유는 자기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취급하지만 개인 책임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와 삶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자기 의와 죄에 달렸으며 조상들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은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깊이 인정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하나님을 우리를 구원하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하고 공동체로 생활하게 하십니다.
공동체를 모르고 개인에 머물러 있는 자는 미성숙한 성도들이며 그러므로 성도들은 반드시 공동체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받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을 면제시켜 주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개인적 책임을 지는 존재들입니다.
에스겔은 책임을 강조합니다.
에스겔 3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고 파수꾼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에스겔 14장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해도 그들은 자기 자녀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을 지는 존재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었고 이 자유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들이 됐으며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이 시대의 목자요 성경선생이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책임성있는 존재들이요, 하나님이 형상을 가진 자들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책임성있는 삶을 사라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회개하며 주체성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며 이 자유로 서로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을 탓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며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도 바로 우리의 책임성 안에 포함디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몸을 통해서 몸울 위하여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며 교회를 세우고 돌봅니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 우리가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최후의 심판의 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죄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잊지 않고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저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상처를 준 사람들이나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과거에 매여 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양식을 준비하며 하나님은 나를 자유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무엇보다 용서할 자유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그리고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자유를 주셨고 제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를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하십니다.
제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유로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유를 누리고,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며 책임성 있는 삶, 목자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하루를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기도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 에스겔 18장이 선포하는 공의와 자비
에스겔
17장에서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유다 왕국의 정치적 배신과 그로 인한 심판, 그리고 메시아적 희망을 제시한 후,
에스겔 18장은 이제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중요성이라는 근본적인 신학적 주제로 초점을 옮깁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는 속담이 유행했는데, 이는 조상의 죄 때문에 후손이
고통받는다는 숙명론적이고 책임 전가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속담을 단호히 부정하시며,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각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거나 자기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더 나아가, 악인이라도 돌이켜 회개하면 살 것이요, 의인이라도 범죄하면 죽을 것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십니다. 에스겔 18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며, 절망 속에서도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8장의 배경은 여전히 바벨론 포로라는 국가적 재앙의 고통이 극심했던 시기입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했거나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조상들의 죄악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은 바로 이러한 책임 전가와 숙명론적인 절망감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고통이 자신들의 직접적인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변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통념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각 개인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이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시며, 각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이며,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원리를 분명히
하십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 역시 삶의 어려움이나 실패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는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과거의 실수나 타인의
잘못에 얽매이기보다 현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8장은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속담을 반박하며,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원리를 다양한 예시와 반복적인 선언을 통해 강조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가 시지 않으리라" – 속담 반박과 개인 책임의 원리 (1-4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나 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는 원칙을 천명하십니다.
둘째, 의로운 아버지, 악한 아들, 의로운 손자의 예시 (5-18절):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가상적인 사례가 제시됩니다.
- 의로운 아버지 (5-9절): 만일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우상에게 제물을 먹지 아니하고, 간음하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하면, 그는 반드시 살 것입니다.
- 포악한 아들 (10-13절): 그러나 그 의로운 아버지에게 포악하고 살인하며 위에 언급된 선한 일은 하나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아들이 있다면, 그는 아버지의 의로움과 상관없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 회개한 손자 (14-18절): 다시 그 악한 아들에게 아들이 태어나,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의롭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면, 그는 자기 아버지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죄악으로 죽지만, 그는 살게 됩니다.
셋째, 개인의 회개와 의로운 삶의 중요성 재확인 (19-29절): 백성들이 여전히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19)고 반문할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개인 책임의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 악인의 회개 (21-23절): 그러나 악인이라도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며, 그가 행한 모든 죄악이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라고 반문하시며, 악인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선언입니까!
- 의인의 타락 (24절): 반대로 의인이라도 만일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악을 행하면 살지 못할 것이며,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그가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공평하심 (25-29절): 백성들이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5, 29)고 불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며,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받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공평한 길임을 강조하십니다.
넷째, 회개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라는 최종 촉구 (30-32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다시 한번 선언하시면서,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고 촉구하십니다. 그들은 모든 죄악을 버리고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지어다"(겔 18:31)라고 명령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고 간절히 호소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에스겔 18장) |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
---|---|
속담 반박과 개인 책임 (1-4절) | "아비가 신 포도, 아들의 이가 시다" 속담 부정.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함.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
3대의 예시 (5-18절) | 의로운 아버지(삶) - 포악한 아들(죽음) - 회개한 손자(삶). 조상의 죄/의가 자동 전가되지 않음. 각 개인의 행위대로 심판. |
회개와 의로운 삶 재확인 (19-29절) | 개인 책임 원리 반복. 악인의 회개 시 삶과 용서 약속. 의인의 타락 시 죽음. 하나님의 공평하심 강조. |
회개와 새 영/마음 촉구 (30-32절) | 행한 대로 심판.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라. 하나님은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심.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8장은 인간의 자유의지, 책임, 정의,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다루며,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첫째,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단순한 환경이나 유전, 혹은 조상의 업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자유와 그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에스겔 18장 역시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선택이 생명 또는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더 이상 조상 탓이나 환경 탓을 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각자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둘째,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살고, 의인이라도 타락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 현재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이었던 사람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용서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반대로 과거에 의롭게 살았던 사람이라도 현재 죄악에 빠져 있다면 과거의 의로움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는 인간이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또는 퇴보)할 수 있는 역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격려합니다. 또한, 한 번의 구원이나 의로운 행위가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이 얼마나 역동적인 구원의 관점입니까!
셋째,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반문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이면에 있는 그분의 자비로우신 본성과 모든 영혼을 향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들이 멸망하기보다 돌이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한 복수나 징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죄로부터의 돌이킴과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단호함과 동시에 죄인을 향한 긍휼과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또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회복의 가능성을 믿으며 다가가야 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너희는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지어다"라는 명령은, 비록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의 능동적인 결단과 노력 또한 필요함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 있는 참여를 요구한다는 신학적인 긴장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반응하여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씨앗을 심는 것은 농부의 역할이지만, 그것이 자라나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8장의 개인 책임과 회개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에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내 탓이오' 정신의 회복입니다. 현대 사회는 종종 문제의 원인을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회가 문제다", "부모님 때문이다", "운이 없었다" 등등. 그러나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성숙한 자세를 요구합니다. 물론 환경적인 요인이나 타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 의식은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며, 진정한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나는 내 삶의 어려움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있습니까?
둘째,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얽매이지 않는 현재 중심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실수나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혹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여 현재의 노력을 게을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18장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무리 어두운 과거를 가졌더라도 지금 돌이키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며, 아무리 빛나는 과거를 가졌더라도 지금 타락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이다. 그래서 오늘을 '선물(present)'이라고 부른다." - 엘리너 루스벨트
우리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선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현재의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셋째,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입니다. 에스겔 18장의 가장 큰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가 돌이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거나 낙인찍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에게 회복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믿고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죄와 실패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나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의 결과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으로 책임지려 하는가, 아니면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고 있는가?
- 나는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품고 있는가, 아니면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가?
- 나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 장은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8장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당시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숙명론적 속담을 단호히 부정하며, 각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당신께 속하였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과 함께, 의로운 아버지와 악한 아들, 그리고 회개한 손자의 예시를 통해 조상의 죄나 의가 후손에게 자동으로 전가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장의 핵심은 악인이라도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반드시 살고 용서받을 것이며, 반대로 의인이라도 그의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면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스스로 돌이켜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결국 에스겔 18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며,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장로
(박정희대통령의 동기생으로 구미 상모교회 출석. 박정희 22세 때까지 상모교회 출석)목사의 책망을 듣고도 낚시를 갔는데 아주 큰 잉어를 잡은 후 교회에 가지 않았더니 아주 대어를 낚았다.
그 잉어를 요리하려고 각종 한약재를 넣어 끓이던 중 그 안에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
서현교회 / 설계는 미국에서, 대리석은 전라도 황간에서...
먼저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 나머지는 내가 감당하겠다.
건축헌금을 하도록 집집마다 돈 봉투를 던져 넣었다고 한다.
1. 대구의 약령시가 열리던 약전골목은 전국의 한약들이 판매되는 유명한 곳으로 역사가 350년이 넘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한약들이 판매되는 곳이었습니다.
이 약점 골목 한쪽 구석에는 맨바닥에 앉아서 풀을 파는 풀장수 정씨가 있었습니다.
50년 전에는 풀을 쑤어서 장에서 팔았습니다.
풀 한 덩어리 사다 벽도 바르고 창호지로 문도 발랐습니다.
당시에 정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돈만 생기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고 집에서 아내를 때리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대구 제일교회 성도였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마음이 편안하고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어 그 재미로 사는 성도였습니다.
어느날 대구 제일교회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하러 오셨습니다.
원래 김익두는 깡패였고 술주정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장에 갈 때마다 성황당에다가 돌을 던지면서 빌었습니다.
"오늘 제발 김익두를 만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김익두는 시장 입구에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다리밑으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다리 밑으로 안갈려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특히 풀장수 정씨의 아내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은혜 받고 저녁 늦게 집에 오는데 남편이 술에 취해서 아내가 들어오자 마자 뺨을 때렸습니다.
다른 때는 맞으면 대들었는데 뺨을 한 대 때리니까
“여보, 내가 늦게와서 당신의 마음이 상했다면 이쪽 뺨도 때리세요"
"그래?"
그리고 때리려고 하니까 마음이 이상하더랍니다.
다른 때와 달리 한 대를 맞고는 나 때문에 당신 마음이 상했다면 한 대 더 때리라고 하니까 놀라서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며 “우리 교회에 부흥회에 오신 분이 김익두 목사님이신데 원래는 술주정뱅이였고 깡패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목사님이 되었대요.
당신도 나하고 한 번만 교회에 가요”
남편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그 다음날 따라갔습니다.
3. 처음으로 교회에 갔는데 뭔가 가슴이 뭉클하고 이상했답니다.
그 다음날도 마지막 날도 갔는데 김익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여러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삽시다!
복을 받는 비결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주일을 잘 지키세요.
그러면 은혜받습니다.
두번째, 십일조 생활을 잘 하세요. 그러면 물질의 복을 받게 됩니다.
세번째, 새벽기도회 빠지지 마세요.
날마다 하나님이 형통의 길로 인도 하십니다.
네번째, 주의 종이 가르칠 때, 잘 듣고 생명 받쳐 그 말씀을 지키세요.
이렇게만 하면 나처럼 됩니다.
나는 원래 깡패이고 못난이고 사람들에게 늘 욕을 먹고, 저주 받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돌을 던지고 빌고 갔겠습니까?
그런 내가 그렇게 했더니 오늘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풀 장수 정씨가 들어보니까 과거의 생활이 자기하고 비슷했습니다.
술 주정뱅이에 깡패였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단 말인가?
목사, 깡패가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4. 풀장수 정씨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한 번 밑바닥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자.'
그 다음 주일부터 꼭 주일을 지켰습니다.
풀파는 통 옆에 조그마한 상자를 만들어 놓고 10원어치 팔면 1원을 넣고 그 날부터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주일날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도 그렇게 되겠다고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얼마 후 약전 골목에 술주정뱅이가 사람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약전골목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했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변할 수가 있냐고......
한약방을 하는 친구가 하루는 정씨에게 “야! 너 이제 풀장사 그만하고 사람되었으니까 약방을 한번 해봐라. 약장사를 해봐.”
“나는 돈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약국을 하겠냐?”
"너를 보니까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졌어. 그러니까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약장사를 해봐."
친구가 자기 집에 있는 약재료를 이것 저것 조금씩 주어서 약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가게에서 하는데 길바닥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5. 친구는 노트에 약의 효능과 처방하는 방법에 대해서 써주었습니다.
감기걸린 사람이 오면 이렇게 지어주고 열병이 있는 사람이 오면 지어줄 약초를 알려주고 보약을 찾는 사람들이 오면 감초넣고 다른 약초를 넣고 지어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씨는 가르쳐 주는 것을 노트에 꼼꼼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오면 노트에 써있는 내용을 보면서 약을 지어 주는데 이상한 것은 정씨에게서 약을 지어 먹으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자무식인데도 그에게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다 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골목에서 제일 잘되는 약국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대구서현교회를 시무하다가 천국에 가신 정규만 장로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규만 장로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대구 지방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정장로님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정장로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소문이 퍼졌습니다
당시에는 대를 이어야 한다며 여자들은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아들을 못낳으면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장로님이 약을 지어주면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정말 이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거에요?”
장로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먹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랬다고 합니다.
6. 또 대구에서 장티프스가 유행을 했는데 다른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안낫는데 정장로님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어떤 병도 나았습니다.
그래서 정장로님의 약방 앞에는 새벽부터 줄을 섰습니다.
장로님 약방에 약이 떨어지면 옆 집에서 빌려와서 지어주었는데 다른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안낫는데 정장로님이 빌려온 약으로 자기 약방에서 지어 먹으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약방 주인들이 정장로님 약방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약을 짓길래 우리 약을 먹으면 안낫고, 당신이 지은 약을 먹으면 낫습니까?"고 물었습니다.
"네, 특별한 재료가 하나 들어갑니다."
"그것이 뭡니까?"
"당신들이 쓰지 않는 재료가 우리 약에는 들어갑니다.
기도라는 재료가 들어 갑니다."
장로님은 약을 지을 때마다 한 봉지 한 봉지 지을 때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빌려다가 지어 주어도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복 받을 사람은 언제나 복 받을 짓을 합니다.
7. 교회를 새로 짓게 되었을 때 정규만 장로님이 건축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돌로 교회를 짓자고 결정이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돌이 전라북도 황등에서 나옵니다.
익산군 황등에서 기차를 대절하여 돌을 대구까지 싣고 가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시작되자마자 정규만 장로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살려주시면 목숨 다하여 종의 재산을 바쳐 성전건축에 헌신하겠습니다.” 하면서 산에서 기도하는데 어떤 짐승이 모르는 나무를 자꾸만 갉아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초로구나 하고 그것을 삶아 먹었더니 낫게 되었습니다.
병이 나은 후에 정장로님은 교회 건축 비용 절반이상을 약속대로 혼자 감당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헌금을 했습니다.
건축을 마치고 성도들은 헌당식을 하자고 하니까 장로님이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합시다.
8. 내가 살았을 때 헌당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받을까 두려우니까 나 죽으면 하세요.
그래서 헌당식을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장로님이 1969년 1월 초에 돌아가실 때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고 마지막 돌아가실 때 오른손을 들었답니다. 그러면서 천사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고 말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장로님이 돌아가시고 난 며칠 후인 1969년 1월 29일에 서현교회는 헌당식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하고도 우쭐하는데 정규만 장로님은 교회를 위해 거의 혼자 짓다시피 하고도 절대로 자기 생전에 헌당식을 못하게 하고 자기 죽은 다음에 헌당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대구에 가면 정규만 장로님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왜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붐도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의 후대가 복을 받습니다.
한국 현대사를 이끈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평가
1.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인가?
출생 :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본관: 고령 박씨
학력: 대구사범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군 경력: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 육군 참모총장 역임
정치 입문: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재임: 1963~1979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는 군인 출신 지도자로, 국가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방식은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권력 장악이었고,
이는 이후 한국 정치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 경제 개발과 산업화: 한강의 기적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 성장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 시작):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 체제 도입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 농업 중심 사회에서 제조업·수출 중심으로 전환
포항제철 설립(1973): 국내 철강산업 기반 조성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 수도권과 남부지역 연결, 국가 물류망 혁신
새마을운동(1970): 농촌 근대화, 생활 개선 캠페인
1960년대 초반 1인당 GDP 약 80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1979년 박정희 사망 당시 약 1,600달러까지 성장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급격한 경제 성장은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키워드다.
3. 정치 체제: 유신헌법과 권위주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사실상 장기 집권과 대통령 권한 강화 체제를 수립했다.
대통령 직선제 폐지, 통일주체국민회의 통한 간접선거제 도입
국회 해산권, 긴급조치권 부여 등 강력한 통치권 확보
이는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적 견제와 균형을 무력화시킨 권위주의적 체제로 비판받는다.
이 시기 언론 통제, 야당 탄압, 인권 탄압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으며,
1970년대 후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회적 반발도 커졌다.
4. 대외정책: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 국교 정상화
박정희 정권은 냉전 체제 하에서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추진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강화
베트남 전쟁 파병(1964): 미국과의 협력 강화, 경제 지원 확보
한·일 국교 정상화(1965): 8억 달러 경제 지원 및 수교 체결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국내에서 거센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체결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5. 박정희 시대의 긍정적 평가
고속 경제 성장: 세계 최빈국에서 중진국 진입
산업 기반 조성: 중화학공업·제조업 발전
국방력 강화: 자주국방 기반 마련
농촌 근대화: 새마을운동을 통한 생활 수준 향상
박정희는 국가 성장과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한 긍정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6.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평가
민주주의 후퇴: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권 남용
인권 탄압: 언론 통제, 야당 탄압, 시민 권리 제한
사회적 양극화: 급속한 성장 속 빈부 격차 심화
정치 폭력: 야당 지도자 구속, 민주 인사 탄압
박정희 정권의 부정적 측면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그 이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면서
박정희 시대는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죽음은 곧바로 정치적 혼란과 12·12 군사반란(신군부 등장)으로 이어졌지만,
장기적으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8. 새마을운동: 농촌 근대화의 상징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가 도시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화되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1970년 시작)**이다.
슬로건: 잘살아보세
목표: 농촌의 자조정신, 근면성, 협동심을 고취하여 자발적 발전 촉진
초기 사업: 초가집 개량, 농로 정비, 소득 증대 사업 추진
정부는 마을 단위로 지원금을 배분하고,
자율성과 경쟁을 강조하며 농촌 생활환경과 소득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 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
농가 소득 증가
농촌 전기 보급 확대
농로 및 교량 확충
교육과 보건 인프라 개선
새마을운동은 한국 농촌 사회의 근대화를 촉진했으며,
이후 개발도상국 모델로도 수출되는 등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9.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는 한국 경제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켰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균형과 노동 인권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산업화의 긍정적 측면
고도 경제 성장(연 8~10% 성장)
제조업 기반 확립(섬유, 조선, 철강, 전자 등)
수출 중심 경제로의 전환
일자리 창출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
재벌 중심 경제 구조 형성 → 경제력 집중 문제
노동자 권리 미약, 열악한 근로 조건
농촌과 도시 간 소득 격차 심화
환경 오염, 도시 슬럼화
박정희 정권은 급속한 성장을 위해
노동자 파업을 강경 진압하거나, 산업재해 문제를 간과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후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0.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전략
박정희는 한반도 안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 파병 이후 미국이 아시아 정책에서 발을 빼려 하자,
자주국방 체제 구축을 본격 추진하였다.
주요 성과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1970)
국산 무기 개발 착수: K1 전차, 자주포, 소총 등
예비군 창설(1968): 향토 방위 강화
방위산업 육성 정책: 국내 방산업체 육성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단순한 '미국 의존형 군사력'을 넘어,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1. 현대적 재평가: 박정희를 보는 다양한 시각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세대에 따라 크게 갈린다.
평가 항목 긍정적 시각 부정적 시각
경제 발전 | 한강의 기적, 중산층 형성 | 재벌경제, 빈부격차 심화 |
정치 체제 | 안보 강화, 국가 통합 | 권위주의, 민주 억압 |
농촌 정책 | 새마을운동 통한 생활 개선 | 농민 부담 증가, 과도한 경쟁 유발 |
국방 정책 | 자주국방 기반 마련 | 군사화 경향 심화 |
특히 2000년대 이후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은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는 중도적 평가로 이동하는 추세다.
즉, 경제 발전과 근대화의 업적을 인정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2. 박정희가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박정희는 오늘날 한국 경제, 사회, 정치, 안보 체계의
초석을 다진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다:
경제개발 계획 체계화
산업 기반 조성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
국방력 자주화 토대 마련
농촌 현대화 및 국민 생활수준 향상
반면,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 확산은 그가 남긴 과제였고,
이는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 사회가 꾸준히 발전시켜온 분야다.
박정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긴 강력한 흔적과 영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박정희의 지도 사상
1. 목표를 세우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지혜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차게 하려면 먼저 바라고 소원하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꿈을 잉태하지 않으면 창조와 생산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꿈을 그리면서 강력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강력을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30대 백만장자가 된 폴 마이어 박사가 있습니다. 그가 사원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고 거기에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원은 빈정대며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소원을 쓰면 누가 이루어 주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원들은 종이에 자기 소원을 썼습니다.
그는 사원들에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매일 눈으로 보면서 이것이 꼭 이루어진다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들은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몇 년 후 성취된 간증을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집을 갖기를 원했는데 좋은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학위를 갖기를 원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쓰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표가 없으니 달성된 것도 없을 뿐입니다. 마음 속에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면 어느 때인가 이루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구역 부흥이나 전도도 강력히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가든 그로브에 있는 드라이브인 처치의 로버트 슐러 박사에게 어느 분이 인사하면서 “당신이 그 많은 꿈이 생전에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하니까, 그 분의 대답이 “천만에요,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오!”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꿈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꿈이 성취되면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육신은 살았으나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꿈을 가져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꿈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2. 사람을 찾으라(용인술)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사람을 보는 법, 얻는 법, 기르는 법을 우리는 용인술이라고 한다.
사람을 쓰는 법, 용인술에 대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다루는 책 용인술!!!
저자 : 김성회 출판사 : 쌤앤파커스
“사람을 쓰는 법”이란 부제가 있는 이 책은 2500년 동안 동양사회의 정신적 리더인 공자에게서 배우는 ‘사람 보는 법’, ‘얻는 법’, ‘기르는 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공자는 춘추전국의 난세를 주유하며 리더의 도를 알리고, 3000명의 제자를 시대의 동량으로 키워낸 인재경영의 대가다.
이 책은 인재를 알아보고, 활용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법에 관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다룬다. '사람이 전부'라는 인재경영 마인드를 군주에게 설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재를 양성했던 공자의 용인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공자의 《논어》와 《공자가어》에 나타난 관련 이야기를 기본으로, 동서고금의 사례와 경영학 이론, 저자가 취재한 현장 이야기를 통해 '사람 쓰는 역량'을 키우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사람을 알아보고 평가하는 방법부터 인재육성, 동기부여, 충성심을 얻는 방법 등 사람을 뽑고 키우는 데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 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인재만사할 것인가, 인재망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 평가하는 방법, 그리고 인재를 엮는 법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2장은 “어떻게 인재를 육성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 키우는 법, 즉 인재육성에 대한 공자의 지혜를 담고 있다. 3장은 “어떻게 열정을 일으킬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을 움직이는 법, 즉 동기부여에 대한 공자의 조언을 다루고 있다. 4장은 “어떻게 충성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의 충성심을 얻는 법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인자(仁者)는 자기가 일어서기 원하면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고, 자기가 성공하고자 하면 먼저 남이 성공하도록 돕는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옹야편).”
공자의 리더십 에센스는 이 한 줄로 압축된다. ‘나뿐’인 성공은 나쁜 성공이다. 남과 함께 해야 가치가 있다. 남을 성장하게끔,
성공하게끔 하는 것이 리더십의 진수다. 남을 통해 일하고 남을 성장시키고 성과를 내게 하는 것이 리더의 할 일이다. -
<공자에게 ‘사람 쓰는 법’을 묻다> 중에서
많은 경영자들이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지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는 겸허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불리한 환경에서 출발했음에도 동종업계에서 앞서는 경우를 보면 승리의 마스터키가 인재관리인 경우가 많다. J사장은 손실이 누적되면 사업전략을 검토하기보다 회사의 각 분야를 맡을 유능한 인재부터 찾아 삼고초려로 영입했다고 말한다. - <당신이 인재난에 허덕이는 이유를 아는가?(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 『논어』 안연편)> 중에서
『여씨춘추』에서는 인재판별법으로 8관6험법을 추천한다.
8관, 즉 살펴야 할 8가지란 순조로울 때 어떤 사람을 존중하는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을 기용하는지, 부유할 때 어떤 사람과 접촉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는 지다. 또 한가할 때 무엇을 즐기는지, 친해진 뒤 말속에 드러나는 뜻을 본다. 아울러 좌절했을 때 지조를 보고, 가난할 때 무엇을 하지 않는지 본다.
6가지 실험법은 기쁘게 해서 천박하게 행동하지 않는지, 즐겁게 해서 본래의 취향을, 화를 돋워 통제능력이 있는지, 두렵게 만들어 견딜 수 있는지, 슬프게 만들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지, 힘들게 만들어 의지가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 <인재(人材)와 인재(人災 )를 구분할 수 있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 『논어』 위정편)> 중에서
약한 리더야말로 악한 리더다. 진정한 인재는 목적을 완수하겠다는 냉철한 의지를 가진다. 대세를 따라가느라, 인기에 영합하느라 기본을 어정쩡하게 만들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좀 더 강경하게 심지어는 우둔하게 원칙을 밀고 나가야 할 상황이 언제인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피하려는 갈등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지고 챙긴다. 목표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고, 조직의 원칙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사람을 찾아라. - <진품 인재와 사이비 인재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鄕愿 德之賊 - 『논어』 양화편)> 중에서
결국 인재를 바르게 평가하려면 ‘사실 뒤의 진실’은 물론 ‘호평과 혹평의 오류’를 가려낼 혜안이 필요하다.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매의 눈을 가지고 다시 살펴보라. 꺼진 불도 다시 보아야 하듯, 상하 모두에게 악평을 받는 인물도 꼼꼼히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재경영의 필살 내공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느냐보다 어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느냐를 살피는 것이다. 인재평가에서는 양의 법칙보다 질의 법칙이 중요하다. - <인재평가, 질의 법칙을 쓸 것인가, 양의 법칙을 쓸 것인가(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 『논어』 이인편)> 중에서
공자가 인재육성에 성공한 것은 상당 부분 눈높이 소통에 기인한다. 공자는 강제가 아닌 설득과 토론의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공자는 4가지를 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힌다. 즉 편견과 선입관, 독단, 완고성, 아집이 그것이다. 공자는 유연성, 포용성, 개방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청년들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제자들에게 의견을 묻고 들어주고 수평적으로 대해준 데 있다. 말 잘하는 것보다 잘 말하는 것이 인재육성의 비결이다. - <가르칠 것인가, 깨우칠 것인가(子曰 求也退故 進之 由也兼人故 退之 - 『논어』 선진편)> 중에서
이익만으로 뭉치면 ‘야합’이 되고, 그나마 없으면 ‘오합지졸’이다. 진정한 ‘단합’을 하려면 사명과 목적의식으로 뭉쳐야 한다. 리더는 조직의 ‘살아 있는 비전’이고 직원은 ‘조직을 살린 비전’이다. 리더로서 조직에 북두칠성처럼 빛나게 하는 구성원의 밝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가? 혹시 ‘바쁘다’를 연발하며 조각 퍼즐만 줍느라 부산하지 않는가? 정명의 빅피처(big picture)를 구성원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라. - <명분으로 움직이는가, 명령으로 움직이는가(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 - 『논어』 자로편)> 중에서
군자는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문을 구해 좋다고 수긍이 되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자신의 평판을 위해 어정쩡하게 듣는 시늉만 하고 병풍으로 이용만 한 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어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소인들의 방어심리만 자극해 결국 듣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용인을 잘하면 인재가 제 발로 찾아온다. - <약속할 것인가, 증명할 것인가(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 『논어』 이인편)> 중에서
3. 기간을 정하라
4. 시도하라
5%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작하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For by him all things were created: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rones or powers or rulers or authoritie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9월 6일(토) 에스겔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매(愚昧)한 선지자(13:3)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잘못된 예언을 고발함.
15장 : 포도나무의 심판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Woe to the foolish prophets who follow their own spirit and have seen nothing!
(새한글)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끝장났다, 우둔한 예언자들은! 이들은 자신들의 영을 뒤쫓아 가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본 것이 없이...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 여기에서 '본 것'이란 선지자로 소명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상, 즉 하나님이 부여주시는 초자연적인 진리 또는 그 진리의 현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받은 자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 spirit)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소명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심령에 따라 거짓되이 예언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다고 공언하면서 헛된 묵시로 거짓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언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빙자한 불의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헛된 비진리 가운데로 빠지게 하여 실족케 하는 죄를 범하였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 즉 당시에 유다의 임박한 멸망, 하나님의 급박한 심판을 전한 선지자들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악까지 범하였다(렘 28:1-16).
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시거나 멸망항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상에만 얽매여 있었던 같다.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어리석은 예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혜자와 우매자(전도서 7:6)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습니다.
불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이 깨끗하게 태워져야 합니다.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어질 때, 순수한 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방망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굳은 마음이 부셔져야 합니다.
묵은 땅이 기경되어야 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여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럽고 추한 마음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욱더 의미 있는 삶일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로,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통해, 우리의 부패를 정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잠언 6:23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책망의 소리는 “우매자들의 노래 소리” 만큼 듣기 좋지는 않으나, 보다 유익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공허함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며, 동시에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보다는 지혜자의 책망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와 같은 일시적 쾌락에, 사람이 그토록 쉽게 현혹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와 같이 덧없는 즐거움을, “솥 밑에 지펴놓은 가시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가시나무는 탈 때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고, 화염이 잠깐은 크게 일어나지만, 곧 꺼져 버리고, 그 재를 흩날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끓일 정도의 열을 얻어내는 데에는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열을 얻자면, 계속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시끄럽고 순간적이어서, 진정한 기쁨의 본보기는 아닙니다.
“이것도 헛되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하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고, “그 환락의 끝은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고,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매자들의 노래와 웃음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자의 책망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라고 말했으며,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말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된 행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In everything I did, I showed you that by this kind of
hard work we must help the weak, remembering the words the Lord Jesus
himself said: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어리석은 농부
인도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농부가 논을 개간했습니다.
논에 댄 물이 아주 많은 양분을 제공해 그의 논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농부는 이 기름진 논의 물이 이웃에 있는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흘러가는 것이 못마땅하고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자기 논의 물이
어디에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았습니다.
농부의 논에는 다음 해에도 역시 많은 양분을 제공해 주는 물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나갈 곳이 없어서 벼는 모두 썩어 쌀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욕심장이는
결국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돕고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더욱
풍성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어느
소년이 공자님께 나와서 하늘의 별이 모두 몇 개나 되냐고 물었다.
이때에 공자님의 말씀이 "하늘의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취미가 없어서 모른다"고 답변하였더니, 짖궂은 소년은 다시 묻기를, "그럼 가까이 있는 눈썹은 몇 개나 됩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님은 다시 대답하기를, "눈썹은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른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사실 별의 숫자나 눈썹의 숫자는 알아서 손해될 것도 없고 모른다고 문제될 것도 없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호의호식하면서도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살아간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가 나타나 있다.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했다. 농사일을 하여 부유하게 되기까지는 농사일을 거둘어 준 이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실 때에는 그 재물로 값진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인데 이 농부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는, 생의 목적을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 죽음이 닥치고 죽음 이후에 갈 곳이 어딘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부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많은 지식과 재산을 가지고 정치와 경제를 논하며 문화와 예술을 논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이웃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생의 목적과 죽음 이후에 돌아갈 곳이 어딘지를 모르고 산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인간의 어리석음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자력에 이용하는 핵원료인 라듐의 모체가 되는 우라늄에 대하여 1945년에 쓴 영어 사전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희고 무거운 금속"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우라늄이야 말로 원자핵 분열을 일으키는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원료이며 이 우라늄의 발견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발견이라고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요동시(遼東豕) / 멀 요(遙), 동녘 동(東), 돼지 시(豕)
'요동시(遼東豕)'라는 성어는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의미는 견문이 좁아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흔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는 꽤나 깊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시절, 천하(天下)는 전쟁의 상처로 평화를 되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어양(漁陽) 태수 팽총(彭寵)은 군량미 확보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주부(朱浮)의 군량 공급 제안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연왕(燕王)이라 칭하며 모반의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주부는 팽총의 행동을 비판하며, 요동에서 흰 돼지 새끼의 특이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요동 지역에서는 흰 돼지가 흔하다는 것을 알려, 팽총이 자신의 공을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요동시'라는 성어는, 견문이 좁아 흔한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한자풀이
요동시의 한자 각각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 遼: 멀 료(요) 멀다, 늦추다, 느슨하게 하다
- 東: 동녘 동 동쪽, 오른쪽
- 豕: 돼지 시 돼지
이러한 한자의 조합을 통해 '요동의 돼지'라는 의미로 '요동시(遼東豕)'라는 성어가 형성되었습니다
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말(전도서 10:12-20)
우매자는 자기의 말에 무너진다.
지혜자는 자기의 말에 탑을 쌓는다.
전도자는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롭다고
말합니다(12절).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에 그의 말과 태도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에는 큰
감화력이 있어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참된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 안에 말씀의 지혜를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배려와 사랑을 전하고 큰 은혜를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킨다고 말합니다(12절).
‘자기를 삼킨다’는 말은 입술의 주인이 아니라 입술의 종이
되어 스스로 지배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망가뜨리며, 나아가 인생을 망쳐 버립니다.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받지 않으면 우리 ‘인생 전체를 불사르는 지옥 불이 됨’(약 3:6)을 잊지 말고 날마다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조차 삼키는 우매자의 말의 특징에 대해 우매하게 시작하고 미친 것으로 끝마친다고 말합니다(13절). 본문에서 ‘미친’이라는 표현은 정신적인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혼돈과 사악함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우매자의 말은 어리석은 것으로 시작하고 점점 진행될수록 그 끝이 악한 정신과 영혼으로 나타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자의 헛된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에 휩쓸리게 되면 우리의 정신, 나아가 영혼까지 미혹을 받아 혼돈의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말을 많이 하지만 장래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14절). 우매자는 자기의 한계와 무지를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저 말을 많이 하는 허황되고 과장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말을 할 때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하며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마음으로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20절). 속으로 한 말도, 혼잣말도 모두 말입니다. 반드시 전해지게 되어 있고,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어디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로 인해 상처받는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혀가 내뱉는 말이지만 그 말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만약 우리의 말이 지혜를 담지 않고 우매함을 담아 흘러간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헛되고 허무한 삶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말이 은혜로운 지혜의 말이 되어 나의 생명도 살리고 다른 영혼도 살리는 의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증한 거짓 남녀 선지자와 심판
본장의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겔13:3)로 볼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본 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 13:1-16 / 거짓 선지자의 허위와
멸망에 대한 것
둘째 단락 13:17-23 / 거짓 여
선지자의 형벌에 대한 것
1. 거짓 선지자의 허위와 멸망 / 13:1-16
4절. 거짓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여우는
성을 견고히 하거나 전쟁을 방비하기 위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동물입니다.
무위도식한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뭔가 저희들이 백성들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한 것 처럼 떠들어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는 먼저 하나님이 하신 적도 없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며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심하라 걱정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니 겁내지 말라, 항복해선 아니된다!
애굽을 의지하여야 한다! 또 바벨론은 곧 물러나거나 패배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반대하고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 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선물을 받고 양식을 받아 챙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대로
된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벽을 나름 보수하는 일을 돕는다고 떠벌렸지만 고작 한 일은 성벽에
회 칠을 한 것이 전부라는 것이지요. 회 칠이 무슨 힘이 있나요? 벽돌을
고치거나 바꾸어야 하는데 그런 힘든 일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1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14.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2. 거짓 여 선지자의 형벌 / 13:17-23
17.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점치는 여자들 무당들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맸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수건들을 만들어서 자기도 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수건을 팔아먹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수건이 복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나 부적의 역할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적을 팔듯이 그 수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부를 축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술과 점치는 행위는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박근혜씨가 대통령 출마했을 때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점쟁이들을 기자들이 찾아가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물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자신있게 박근혜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배현 집사는 안철수가 될거라 하며 그를 밀기 위해서
부산에서 가서 협동해야 한다고 했구요, 저와 김동호 교수는 박근혜가 되기 전 일 년 전부터 박근혜가
될 것이라 했었지요.
저만도 못한 자들이 소위 점집을 차라고 돈을 받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당들은
거짓 선지자와 함께 참 선지자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그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결국 본 장에 나오는 무당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였고 복을 받기 위해 우상과 사술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영혼을 새 사냥하듯 지옥과 파멸에 이르도록 한 끔직한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위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뭐라 뭐라 기도하다가 길흉의 결과를 말해주고
헌금을 얼마를 받습니다.
기독교적 점쟁이의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행위는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은 그런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바벨론 군대에 붙여 살해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 군대가 붙인 죄목은 무엇이었을까요?
반동분자 반역 협조자의 죄였지요. 왜입니까?
바벨론에 대한 항복을 반대하고 반역하려는 파에 협조하고 동조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적 기사 보다는 진리(말씀)를 따라가야 하는 신앙입니다.
방언하고 병고친다 떠들어도 그 행실이 지저분하고 거짓과 무정함과 타락에 휘둘려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참 된 종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거짓 이단의 선지자들도 이적과 기사를 종종 행함으로 미혹을 하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모든 자들은 가증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들"입니다(1절).
이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18, 20절)입니다.
그것도 큰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19절)라 했습니다.
얼마 전에 다락방에 빠진 아주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엔 다락방의 교주처럼 말씀 바로 전하고 훌륭한 분을 마나 보지 못했으며 그만이 참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비롯해서 모든 교회의 수천 수만의 목사들이 다 거짓 말씀을 전한다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저도 그 교주가 얼마나 말씀을 잘 전하나 유튜브에서 보았어요.
먼저 인물부터 호감이 안가고 말씀
전하는 태도도 매력이 없고 내용도 그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교주 수준이나
성도 수준이 똑 같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교만의 영이 있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단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WCC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가증한 거짓 목자들은 평화를 외치며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말하며 온 종교가 다원주의로 하나가 되어서 일치되어야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창녀집단이지요.
불교니 이슬람교니 천주교니 다 하나가 되고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기름에 콩기름 올리브유 옥수수기름
등등 마구 섞어대면 참기름이 될 수 없습니다.
가짜 참기름이지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처럼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친" 사깃군들에게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9절)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거기서 죽거나 바벨론에 잡혀가서 죽임을 당한다는 거지요.
또 13절에서도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13절)하셨습니다.
열파=뜨거운 폭풍의 열로 파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뜨거움과 차가움과 휩쓸어버림으로 파괴해 버리신다는 것이지요.
종종 우리 친척 중에 무당이나 박수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까이하거나 긍휼히 여기지도 참 가족으로도 여겨선 아니 됩니다.
재앙과 화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와 그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다간 다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신명기에서 모세에게 거짓말로 예언과 꿈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3:1-5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만 따르면 축복과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오늘날 만연하는 거짓 예언과 말씀과 이적을 따르는 실수를 하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늘 경성하고 깨어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심판과 하나님의 참된 말씀
에스겔 13장은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 내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백성들에게 평안할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쌓아 올린 허약한 담이 폭풍과 홍수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그들의 거짓된 예언이 결국 헛된 것이었음을 밝히십니다.
또한 거짓된 예언으로 백성을 속이고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든 여성들을 향해서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부적과 마술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속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악한 일들을 기억하시며,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1~9절)
- 허약한 담의 비유와 심판의 경고 (10~16절)
- 거짓된 여성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1~9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거짓된 환상을 보고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은 참된 예언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며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며, 이스라엘 족보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린 자들에게 내려지는 강력한 심판입니다.
허약한 담의 비유와 심판의 경고 (10~16절)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백성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된 희망을 허약한 담에 비유하십니다.
거짓된 예언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하고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과 홍수를 보내어 이 담을 허물어버릴 것이며, 결국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도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 살면,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거짓된 평안은 오래가지 못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거짓된 여성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언을 행하는 여성들에게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이들은 부적과
마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들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악한 행위를 끝내실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의 거짓된 능력도 무력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더 이상 그들의
거짓된 예언에 속지 않도록 하실 것이며, 참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13장은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죄악을 범했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거짓된 메시지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평안을 약속하며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거짓된 희망은 무너질
것입니다.
거짓된 담처럼 보이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힘을 잃고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마술과 미신을 사용하여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며, 그의 백성들이 참된 하나님만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거짓된 가르침과 거짓된 희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참된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생각대로 예언하는 자들을 미워하시는가?
에스겔 12장에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완고한 백성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선지자의 상징 행위를 통해 절박하게 경고에스겔 13장은 그 백성들의 영적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그릇된 평안을 속삭였던 '거짓 선지자들'에게로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의 시선을 돌립니다.
이 장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며 본 것이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는 남자 선지자들과, 백성들의 영혼을 사냥하며 그릇된 위로를 전하는 여자 선지자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거짓 평화의 담은 결국 하나님의 폭풍 같은 심판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그들의 허망한 종말을 통해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을 선포합니다.
에스겔 13장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짓된 가르침과 위로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며,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3장의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침략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많은 백성은 여전히 임박한 재앙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메시지인 심판과 회개의 촉구 대신,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평안과 번영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 생각이나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포장하여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 같은 참된 선지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위기의 본질을 가리고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극도로 혐오하시며, 그들이야말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 중 하나로 간주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된
가르침과 지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달콤한 거짓
위로가 아닌 때로는 아프더라도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6절),
둘째,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7-23절) 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6절):
-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들"(겔 13:2-3, 우리말성경)에게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본 것이 없으면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며, 마치 "황무지에 있는 여우들"(겔 13:4)처럼 이스라엘의 무너진 성벽 틈에 올라가 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존재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헛된 환상을 보고 거짓된 점괘를 말하며,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화를 약속합니다(겔 13:6-7, 10).
-
회칠한 담의 비유 :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회칠한 담'에 비유하십니다. 백성들이 엉성하게 담을 쌓으면,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그 위에 회칠을 하여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폭우와 큰 우박 덩이, 그리고 폭풍이 몰아치면 그 담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회칠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겔 13:10-15). 이는 거짓된 평화의 메시지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 허구성이 드러날 것임을 상징합니다.
- 심판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을 당신의 백성의 공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 족속의 명단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9, 14)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7-23절):
-
여자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네 백성의 딸들"(겔 13:17, 우리말성경)에게도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목에 부적을 매어 주고 머리에 너울을 씌워 주며 점을 치고, 사소한 이익(보리 몇 움큼과 빵 몇 조각)을 위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을 죽이고 살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살린다고 거짓말하며 영혼들을 사냥한다고 고발당합니다(겔 13:18-19).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거짓된 위안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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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적과 너울을 찢어버리고, 그들에게 사냥당한 영혼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더 이상 그들이 거짓된 점괘나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21, 23)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 부류의 거짓 선지자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고 진리를 왜곡한 죄로 인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이 명확히 선포됩니다. 참으로 두려운 경고입니다!
에스겔 13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에스겔 13장) |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
---|---|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16절) | 자기 마음대로 예언, 본 것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거짓말. 황무지의 여우, 회칠한 담 비유. 거짓 평화 선포. 심판: 공회 참여 불가, 명단 제외, 이스라엘 땅 진입 불가. 목적: "내가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 |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 자기 마음대로 예언. 부적과 너울로 점치며 영혼 사냥. 사소한 이익 위해 거짓 예언. 심판: 부적과 너울 찢김, 사냥당한 영혼 구원, 더 이상 예언 못하게 함. 목적: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
철학적 / 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3장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고발은 단순한 종교적 비판을 넘어, 진리와 거짓, 언어의 힘과 책임, 그리고 인간의 자기기만이라는 보편적인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탐구합니다.
첫째,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행위는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 두려움, 혹은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는 마치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개인의 해석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에스겔서는 이러한 주관주의가 결국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리는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객관적인 실재로서 존재하며, 그것을 왜곡하거나 무시할 때
공동체는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본 것이 없이" 예언하는 것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며, 그들의 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둘째, '회칠한 담(whitewashed wall)'의 비유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본질적인 문제는 덮어버리는 위선과 자기기만의 실체를
강력하게 고발합니다.
담이 이미 부실하게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회칠을 하여 마치 견고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 일시적인 위안이나 피상적인 해결책에 만족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패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평화롭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는,
결국 더 큰 재앙 앞에서 그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폭풍'이 몰아칠 때, 그 어떤 화려한 회칠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안전은 문제를 직시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겉치레나 임시방편에 있지 않다는 통렬한 지적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회칠한 담'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까!
셋째, 여자 선지자들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아니할 영혼을 살리려 하는" 행위는 언어가 가진 엄청난 힘과 동시에 그릇된 언어가 초래할 수 있는 생사(生死)를 가르는 책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거짓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의로운 자에게 절망을 안겨주며 악한 자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말이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한 사람의 운명과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의 말은 그 영향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말의 무게와 책임을 깊이 인식해야 하며, 극도의 신중함과 정직함으로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된 위로나
정죄는 영혼을 '사냥'하는 것과 다름없는 악행이라는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엄중합니다.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3장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진리를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도록 도전합니다.
첫째, 우리 시대의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고대에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오늘날 거짓된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들은 더욱 다양하고 교묘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미디어를 통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 물질적 성공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자기계발 강사들, 혹은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현대판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며,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값싼 위로를 판매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된 목소리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저항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령의
조명을 통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나는 '회칠한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우리가 속한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평안한 척, 거룩한 척 위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면의 죄와 상처, 관계의
갈등, 구조적인 불의를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일시적인 위안이나 피상적인 활동으로 그것을 가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회칠한 담'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그 모든 위장을 꿰뚫어 보시며, 언젠가는 그 허술함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건강함은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고, 회개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지금 내가 쌓고 있는 담은 과연 폭풍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일상생활에서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헛된 희망을 주거나 절망에 빠뜨리지는 않습니까?
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자녀를 양육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면, 말의
책임은 더욱 커집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진실하고 사랑이 담긴 말,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말을 하도록 도전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21)
우리의 혀가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달콤한 거짓에 쉽게 미혹되는가?
- 나의 신앙과 삶은 진실된가, 아니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담'과 같은가?
- 나는 내 말의 영향력과 책임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나의 말은 사람들을 살리는가, 아니면 해치는가?
-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는 "본 것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인가, 아니면 진실되게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인가?
이 장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참된 진리 위에 굳건히 서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3장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안을 속삭이며 그들의 영적 혼란을 가중시켰던 남자와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며, 본 것이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고, 헛된 환상과 점괘로 백성을 미혹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특히 남자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는 '회칠한 담'에 비유되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폭풍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임이
예고됩니다.
여자 거짓 선지자들 또한 사소한 이익을 위해 영혼들을 사냥하고 거짓된 위로를 전한 죄로 인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참된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에스겔 13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짓된 가르침과 위로를 경계하고, 오직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분별하여 따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결국, 진리를 왜곡하고 백성을 미혹하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그 허구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라는
엄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9월 5일(금) 에스겔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치한 마음(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I will give them an undivided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them; I will remove from them their heart of stone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12장 :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에스겔이 포로처럼 짐을 싸고 떠나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합니다.
일치한 마음(an undivided heart )
새한글 / 19-20
19. 내가 그들에게 한가지 마음을 주고 새 영을 그들 가운데 주겠다. 돌같이 굳은 심장을 그들의 몸에서 없애 버리고 살같이 부드러운 심장을 주겠다.
20. 그래서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라 살아가게 하고 나의 법령들을 지키게 하겠다. 그것들을 따라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되고 나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같은 마음
빌립보서 2:2 - 한 마음(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립보서 4:2 - 같은 마음(주 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고린도전서 1:10 - 같은 마음(분쟁이 없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will give them one heart, and put a new spirit within them And I will take the heart of stone out of their flesh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새(2319) 하다쉬
חָדָשׁ
스트롱번호2319
1. 새로운. 2. 삼상 6:7. 3. 신 20:5.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אֶבֶן
스트롱번호 68
1. 돌. 2. 하나의 돌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신(7307) 루아흐 חָדָשׁ רוּחַ
רוּחַ
스트롱번호 7307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일치한 마음(레브 에하드)(3820)(259) 굳은 마음(레브 에벤)( ’eben)(68) אֶבֶן | ||
1. 돌. 2. 하나의 돌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부드러운 마음(레브 바솨르)()(1320) 일치한 마음(lêb ’echâd) ב אֶחָד לֵב לֵב אֶחָד 3820. 레브(lêb) / 마음 לֵב 발음
[ lêb ]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259. 일치한(에하드. ’echâd) אֶחָד 1. 똑같은. 2. 첫째의. 3. 어떤 사람.
구약 성경 / 699회 사용 내가 그들에게...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 |
에스겔 11:19-20 해설
1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냉담하고 완고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럽고 순종하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며, 회복과 변화의 상징으로 신앙 생활에서의 내부적 변화와 새로움을
강조합니다.
20.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고 지키게 하실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영적 갱신과 회복을 경험하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언약의 확증입니다.
이러한 관계 회복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시대와 신약의 성령 강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언약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전 593년 6월 5일에 에스겔은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에 대한 환상을 에스겔 8장에서부터 11장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성전 동문의 거짓말로 안전을 유포하는 25인을 대항하는
예언을 선포하도록 명하십니다.
25라는 숫자는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태양신 숭배 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숫자와 같았습니다.
태양신 숭배의식을 거행하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고 25인은 고관들로서 정치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모든 분야가 철저하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정치지도자들은 집을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말함으로 예루살렘의 안전을 주장하였습니다.
‘집을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란
말은 1,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서 신속한 회복을 기대하며 집도 짓지 아니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에 이루어질 일이므로 집을 짓고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을 가르친 예레미야의
권고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가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3절)은 단단한 가마가 고기를 보호하듯이 견고한 예루살렘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을 하였던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5절을 통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다 꿰뚤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그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생각이라고 해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을 품은 것 자체로 합당한 보응과 신원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우리가 품은 생각을 다 아신다는 것이 부담이거나 두려움이 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십니까?
우리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오해받고 미움을 당하더라도 악한 마음이 아닌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을 품고 있는 겉으로 선량해
보이도록 포장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꿰뚤어 보신다는 사실은 부담스럽고 깨름직한 일일 것입니다.
시편 말씀 66:18-19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 아시고 우리를 신원하시고 그 마음에 상응하는 보응을 주시는 분이신 줄을 믿으시는 사랑하는 모든 나눔과섬김의 성도님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25인의 고관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 라고 질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고관들의 도덕적인 악행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고관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포를 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실을 고발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유다 말기의 타락상을 염두에 둘 때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실제로 유다의 타락한 고관들은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고 재판 절차를 수행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학살하는 폭정이 자행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뜻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지배라는 징계를 통하여 타락한 유다를
연단하고 정결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복종할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거듭하여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의 고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대세의 뜻, 사람들의
염원과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애국심과 항거의 마음은 영웅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대로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세의 뜻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로인해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또 누군가는 절망과 탄식을 표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 시대와 세대와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과 조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손가락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뜻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대를 역행하고 대세를 역행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알고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진리의 방향을 가리키고 외칠 수 있는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같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새로
뽑힐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놓고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그 지도자는 사람의 뜻으로 뽑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뽑힐 것이라는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3장 1절 말씀과 같이 권세는 하나님의
뜻으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의 권세는 바로와 같이 악한 왕이든, 다윗과 같이 선한 왕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시대 가운데 필요한 지도자가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입니다.
우리를
싱가폴에 부르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에스겔은 다시 그가 본래 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벨론 텔아빕의 에스겔의 집에서 에스겔에게 임하여
환상중에 그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여지던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에서 떠나가시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게 하신 후에 다시 에스겔을 그 본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머물고 있었던 갈대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바로 포로의 자리입니다.
고통의 자리이고, 자유가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러한 자리를 싫어합니다.
싱가폴이 누군가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곳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는
속박과 고통과 답답함이 있는 곳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혹 고통이 가득하고 답답함이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서 있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자유가 없는 포로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고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갔습니다.
갈대아라는 곳에서 백성들이 억압당하고 암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곳의 그의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서있는 곳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게하시고 듣게 하시고 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명지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피하고 싶고 부담스럽고 꺼려지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주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사명지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는 그 때에 우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곳이 내 사명지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2.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3.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입니다.
함께 기도
1. 우리의 마음을 꿰뚫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코람데오의 삶을 살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3.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우리의 사명지임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공동체 사역과 책임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스겔 11:19-20)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마음은 가지각색입니다. 금방 금방 달라집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사람이 있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퍅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마음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해 있습니까?
전쟁 중에 한 여인이, 군인인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사막 끝까지 왔습니다. 남편은 그녀가 오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과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디언 마을 근처의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곳 생활은 생각한 것보다,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환경이 사막인지라, 온도가 40도를 오르는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바람은 쉴새 없이 불어, 모래가 쌓이곤 하였습니다. 또한 인디언들과 영어가 통하지 않았고, 근처에 이웃도 없어, 그녀에게 하루하루는 지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작전 명령을 받고, 2주 동안, 사막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짤막한 두 줄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땅을 보고, 다른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그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의 별을 보기로 했습니다. 인디언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옷감 짜는 법과 도자기 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해지기 시작했으며, 그들과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막은 더 이상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름답고, 기묘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선인장과 유카와 조수아 나무를 연구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의 태초 생태계에 관한 연구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변했습니까? 사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여인의 마음만이 바뀐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이 바뀌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니,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악한 마음을 품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여, 편리한 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보다 더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언 18:14절을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병이 생기기도 하고, 병이 낫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마음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을 당하기 전,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에게, 빨리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전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믿다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폐허가 된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 하고, 낯선 이국 땅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고된 노역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발 강가에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며,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 잡혀 끌려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의 선포는 참으로 소중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이 가져야할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주실까요?
첫째, 한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곳의 선교사들은 신앙이 투철할 뿐 아니라,
어학의 재능으로 봉사합니다.
남미나 아프리카의 소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곳에, 직접 언어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한 선교사가 마태복음을 번역하다 죽으면, 다른 선교사가 다시 그 곳에 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선교사가 누가복음을 번역합니다.
한번은 그 곳에 들어간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하다 “순종”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을 순종이라는 단어로 번역할까, 고민하던 중, 마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심부름을 꼭 해야 된다는 뜻으로, 한 가지 말을 계속 아들에게
강조합니다.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
심부름을 가는 아들의 뒤에서, 아버지는 계속 말합니다.
“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
그 모습을 보고, 선교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나누지 않는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한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로 뭉쳐진 마음입니다.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하나로 똘똘 뭉쳐진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마음이 되려면, 다른 이에게 맞추는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올바른 일군이 되려면, 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일치되지 못합니다.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한 마음, 일치하는 마음이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옛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의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가 되고, 일치한 마음이 이루어질 때,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4:12절을 보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3-47절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하나된 마음입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일치된 마음, 하나된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아질 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마음껏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사랑이 넘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힘쓰고, 애를 쓴다고 해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주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된 마음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 하나된 마음, 일치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새 영이 함께 하는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아멘.
“내가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새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전혀 기도에만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주의 약속은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법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 심령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새 영을 주시겠다고,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은 후의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전하되 담대히 전하였고, 그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삼천 명씩이나 회심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모든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약속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령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13절을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못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충만함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을 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부드러운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간디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시에서, 간디와
장로교 선교사 찰리가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갑자기 불량배가 나타나, 그들의 길을 가로 막습니다.
찰리 목사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이때 간디는 묻습니다.
“성경에 원수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찰리는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간디가 다시 말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용기를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리는 사람을 향해 기꺼이
한 대, 아니 여러 번이라도 얻어 맞을 용기 말입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인간 본연의 성품에서, 미움이 줄어들고, 대신
존경심을 키우는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신 것 같아요. 나도 그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보았습니다”
결국 영국은 간디의 온유함과 부드러움 앞에 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도덕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삶 속에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훗날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미국에 그대로 적용한 인물이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온유한 투쟁을 통해 간디는 인도의 땅을 돌려 받았고, 킹 목사와 흑인들은
미국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우리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돌 같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마치 대패질을 잘한 나무 표면과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딱딱한 길바닥처럼 굳은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농부는 그 밭을 갈아야 합니다.
굳은 땅을 갈아 엎어서, 고랑을 내고, 돌맹이는 골라서 밖으로 던져 내고, 굳은 땅, 뭉쳐진 흙은 잘게 잘게 부수어서, 부드럽게 갈아냅니다.
거름도 주고, 비료도 주고, 골고루 갈아서,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령도 굳은 것을 제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감싸줍니다. 부드러운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는 상대방을
찌르는 가시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따뜻한 용서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나와 다른 모습, 나와 다른 행동,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강압적으로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과 함께 멍에를 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고쳐야할 부분은, 제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51: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므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주시겠다는데, 못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7절을 보면, “예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능력의 주님, 권능의 주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못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받아 능력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순종하는 마음
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큰 충격을 받아, 두 눈의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이 말합니다.
“출혈이 심하여 수술은 하지만, 안구가 빠져 앞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일세”
이때 청년은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요. 수술하지 마시오. 이대로 죽을 것이요”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며칠 후 붕대를 풀면서,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축하하네. 실명은 했지만 자네를 위해 안구를 기증해 주신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네”
청년은 또 소리를 지릅니다.
“애꾸로 살기보다는 죽는 게 낫지”
의사 선생님이 청년을 크게 책망을 합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행동인가?”
의사 선생님이 청년의 붕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는 서 있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습니다. 청년은 자신을 위해, 안구를 빼어준 어머니의 사랑에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는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불평하는 마음으로 사십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십니까?
20절 말씀입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여기의 “따르며”와 “행하게 하리니”는 순종하는 마음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까닭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다시 자유를 허락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힘쓰고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빌려, 따라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베드로를 보시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더니,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애쓰고 힘쓰며,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을 내렸더니, 배에 고기가 가득 채워지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 학자 베이커의 고백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돌담을 뛰어 넘으라 하시면 나는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뛰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순종이 모세의 의무라면,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건강하고 희망 있는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순종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힘쓰고 노력한다고,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지식을 우리의 머리에 가득 채운다고, 우리의 마음이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나누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이, 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돌 같은 딱딱한 마음, 굳어버린 마음이, 살처럼, 피부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한 마음, 성령충만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소유함으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분리된 마음이, 하나되게 하시고, 나누어진 마음이 일치되게 하여 주옵소서.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하시고, 불순종의 마음이 순종의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11장 깊이 읽기: 절망 속에서 어떻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받는가?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진 후, 에스겔 11장은 그 영광이 성읍 동쪽 산에 머무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악한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 안의 고기인 양 헛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마솥 밖으로 끌어내어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위대한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에스겔 11장은 심판과 희망, 절망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장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1장의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군대는 이미 유다 땅을 유린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일부 지도자들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겔 11:3)고 말하며, 마치 예루살렘 성벽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려는 교만한 태도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악한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릇된 생각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가 절망 속에 있던 포로 공동체를 향해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실패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욱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거짓된 낙관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남은 자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이루어 가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3절), 둘째,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남 (22-25절) 입니다.
첫째,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3절):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여호와의 전 동문으로 데려가시는데, 그곳에는 백성의 고관 이십오 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아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와 같이 당시 백성들에게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로 불의를 꾀하고 성읍 중에서 악한 지혜를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이라는 거짓된 안도감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으며, 오히려 그들이 죽인 자들이 고기가 되고 이 성읍은 가마가 될 것이지만, 그들 자신은 그 가마 밖으로 끌려 나와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을 받고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예언이 선포되는 동안 블라댜가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놀란 에스겔은 "아하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시키려 하시나이까"(겔 11:13)라며 다시 한번 탄식하며 중보합니다.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심판의 즉각성과 확실성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둘째,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에스겔의 탄식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시선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받고 쫓겨난 포로 공동체에게로 돌리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포로들을 향해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겔 11:15)고 조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친히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열방 중에서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는 놀라운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증한 것과 미운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 행위대로 머리에 갚으실 것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남 (22-25절): 마지막으로,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바퀴들과 함께 움직이며,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인 채 성읍 가운데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릅니다. 이는 10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의 이동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어, 이제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떠났음을 보여주는 슬픈 장면입니다. 에스겔은 이 모든 환상을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에스겔 11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에스겔 11장) |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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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1-13절) | 예루살렘 고관 25명의 죄악(불의, 악한 지혜, 거짓된 안도감) 고발. "가마솥과 고기" 비유 반박. 이스라엘 변경에서 칼로 심판받을 것을 예고. 블라댜의 갑작스러운 죽음. |
포로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 쫓겨난 포로들을 하나님이 친히 '잠깐 성소'가 되어주심.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심, 돌 마음 제거, 부드러운 마음 주심. 율례와 규례 순종. "내 백성, 나는 그들의 하나님" (새 언약). |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떠남 (22-25절) | 그룹들과 바퀴들,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서 올라가 동쪽 산에 머무름.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심. |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1장은 인간의 자기기만, 절망 속의 희망, 그리고 내적 변혁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다루며,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깊이 탐구합니다.
첫째, "이 성읍은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그 안의 고기가 된다"는 지도자들의 거짓된 안도감은 인간이 위기 상황에서 현실을 왜곡하고 자기 합리화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임박한 위험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는 마치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인간의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가 고통을 야기한다고 본 것처럼, 비합리적인 낙관론이나 자기기만은 결국 더 큰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정한 안전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서 오는 것이지, 스스로 만든 환상 속에 안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마솥'은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기기만입니까!
둘째,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 선포되는 포로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 새 마음'의 약속은 인간의 실패와 죄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구원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 즉 성전도 파괴되고 백성들도 흩어진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십니다. 특히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내적 변혁을 통해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마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본래적 자기(authentic self)'로의 회복과 유사하게, 인간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의한 선물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나 동쪽 산에 머무는 장면은 신적 임재의 부재(不在)가 가져오는 존재론적 공허함과 동시에, 그 '떠나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거룩한 도성이 아니며,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영적인 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절대자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겪게 되는 깊은 소외감과 무의미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특정 장소(성전)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는 흩어진 포로 공동체 가운데 '잠깐 성소'로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신적 임재의 방식이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동쪽 산에 머무는 영광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미련과 함께, 장차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희미한 기대를 품게 합니다. 때로는 기존의 것이 완전히 파괴되고 사라져야만, 진정으로 새롭고 본질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는 법입니다. 상실은 새로운 얻음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1장의 극적인 반전과 심오한 약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첫째,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거짓된 '가마솥' 안에 안주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수많은 정보와 오락거리, 그리고 소비주의적인 유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피상적인 만족감에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개인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혹은 영적인 문제든, 우리는 종종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괜찮을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 숨으려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의 지도자들처럼, 이러한 태도는 결국 더 큰 위기를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필요한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안주하고 있는 '가마솥'이 실제로는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둘째, 절망 속에서도 '새 마음과 새 영'을 갈망하고 있는가?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때로 깊은 절망과 실패를 경험하며,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 그리고 굳어진 마음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은 바로 그러한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변화될 수 없는 '돌 같은 마음'을 그분께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변화와 회복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절망은 변화될 수 없다는 절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약속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약속이다." - 익명의 묵상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영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습니까, 아니면 살처럼 부드럽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임재는 어디에 있는가? '잠깐 성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흩어진 포로 공동체 가운데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 건물이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오히려 그분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고난받고 소외된 이웃들 가운데, 그리고 진실된 예배와 교제가 있는 작은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외적인 조건에 얽매이기보다, 어디에서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추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잠깐 성소'를 우리 삶 속에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머무실 수 있는 '성소'가 되고 있습니까?
에스겔 11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의 어려움 앞에서 정직하게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헛된 희망이나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가?
- 나는 나의 굳어진 마음과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가?
-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특정한 장소나 형식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아니면 내 삶의 모든 순간과 모든 관계 속에서 그분을 경험하려 하는가?
-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 관계가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결국 에스겔 11장은 심판의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을 보여주며, 진정한 회복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됨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1장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악한 지도자들의 거짓된 안도감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 안에 있다고 착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내어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위대한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을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게 하시겠다는 '새 언약'의 핵심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떠나 동쪽 산에 머무르며, 임박한 멸망의 슬픔을 더합니다. 에스겔 11장은 이처럼 심판과 희망, 절망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메시지는 거짓된 안도감을 버리고, 절망 속에서도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정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9월 4일(목) 에스겔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마에 표하라(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and said to him, "Go throughout the city of Jerusalem and put a mark on the foreheads of those who grieve and lament over all the detestable things that are done in it."
이마에 표하라(put a mark on the foreheads)
7장 / 끝이 가깝다.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경고와 심판의 날을 예고함.
8장 / 예루살렘의 죄.
에스겔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9장 / 예루살렘의 심판.
이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을 알리시고, 의인들을 구별하심.
- 이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를 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그 가증한 일을 애통해 하며 마음에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표를 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가증한 죄에 동참하지 않고 같은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애통해 하며 통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표' (타우)란 히브리어 알파벱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십자가와 같은 기호를 나타내는 낱말로도 사용되었는데 아마 이런 형태의 표가 영적으로 인친것을 뜻하는 듯하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인치시는 것은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표하신 것(창 4:15)
출애굽 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사자(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 멸망치 않도록 한 것(출 12:13, 21-29),
말세에 하나님께서 다신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므로 열방에서 구원하시는 것(계 7:1-8) 등과 유사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긍휼에 의해 보존된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엿보게 한다(6:8)
어원 / 842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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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표적, 겔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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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남성 신호, 기호, 서명, 욥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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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서명(욥 31:35), 표(겔 9:6). [동] 표를 그리다(겔 9:4).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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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사 8376과 동일 : 묘사하다, 윤곽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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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사 피엘형 : 삼상21: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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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동사 히필형 ׃ תִתְוָה תָו 묘사하다[עַל을 수반하여], 겔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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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그적거리다(삼상 21:13).
죄 때문에 통곡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표시하여 보호하신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사로잡혀와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을 환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8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우상숭배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9장은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루살렘 시민 중 이마에 표시를 받은 사람들은 멸망하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 진 가증한 일, 우상 숭배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통곡하며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도장을 찍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내려 주십니다. 성령님으로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주셨습니다.
다 함께 에스겔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죄 때문에 통곡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표시하여 보호하신다.
첫째, 죄 때문에 통곡하며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멸망하지 않습니다(1-7절)
둘째, 에스겔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8-11절)
셋째, 경건한 자는 성령님을 통해 보호해 주십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복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멸망당하지 않음(1-7)
1. 멸망시키는 천사들과 살려 주는 천사(1-2절)
여호와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관할하는 자는 형벌을 집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천사 6명이 나타났습니다.
성전 뜰 바깥의 북쪽문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환상을 통해 보인 것을 실제 실행하는 것은 바벨론 군대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바벨론 군대가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들의 “죽이는 무기”는 원래 “멸망시키는 무기”입니다. “멸망”은 노아 홍수 때 세상을 물로 멸망시킨 것에 쓴 단어입니다(창 6:13,17) .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데 쓴 말입니다(창 18:28-32). 이집트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재앙을 내렸습니다. 10번째 재앙을 내린 “멸하는 자” (출 12:23)에 쓴 말입니다.
그런데 무기를 손에 든 6명의 천사들 가운데서 또 다른 천사 일곱째 천사가 있었습니다. 희고 부드러운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과 같습니다. 허리에는 서기관의 먹그릇을 차고 있었습니다. 먹그릇은 뿔로 되었는데, 거기에 붓과 두 개의 먹통을 넣을 수 있게 했습니다.
7명의 천사들은 북문을 통해 들어 와서 성전 뜰에 섰습니다.
백성이 우상숭배하는 곳입니다.
2. 성전을 떠나가시는 여호와의 명령(3-7절)
1) 3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성전의 안쪽 지성소 언약궤에는 그룹 천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래 그 그룹 천사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곳으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지성소를 떠났습니다. 성전 밖으로 나와서 성전 문지방위에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바깥으로 나와 떠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너무나 큰 죄 때문에 백성을 떠나십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천사에게 외치셨습니다.
“너는 그 성읍 가운데, 예루살렘 가운데 지나가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들에 표를 그리라.” 이마에 X 를 그려 주라고 합니다.
가증한 일은 하나님께서 미워 하시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또 우상 숭배의 결과 백성들이 서로를 착취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는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과 제사장 장로들, 백성들이 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깨어지듯 탄식합니다. 또 이 가증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보내실 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죄 때문에 탄식하고 기도하고 있으면 참으로 복됩니다.
5, 6절에서 하나님은 무기를 든 6명의 천사에게 말하십니다.
5. 너희는 이마에 표시를 하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녀라.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죽이라.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여라.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노인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마에 표가 그려져 있는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죽이는 일을 하나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배교와 우상 숭배가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곳이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소 앞에 있는 늙은 사람부터 치기 시작했습니다.
“늙은 사람”은 장로라는 뜻도 됩니다.
8:10-12에 환상이 있었습니다.
장로 70명이 성전 안의 기구를 보관하는 방에 들어가서 각자가 우상에게 분향했습니다.
8:16절에 성전 안뜰에서 태양신을 향해 경배하던 25명도 먼저 죽임 당하는 장로들같습니다.
우상숭배로 더럽혀 진 성전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이미 더럽혔기 때문에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거룩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무기 가진 자들에게 시체를 성전 뜰에 채워서 성전을 더럽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 나가서 성읍을 치라고 하십니다.
6명의 천사들은 그 명령대로 했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은 구약 성도님을 본받읍시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경배합시다.
서로 사랑을 실천합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대로 교회와 우리 가정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의 죄를 볼 때 하나님께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읍시다.
우리 사회의 죄에 대해서도 슬퍼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피하도록 합시다.
둘째로, 에스겔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8-11절)
6명의 천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다니면서 치고 있을 때, 에스겔은 혼자 남았습니다.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8절입니다.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9절,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미 멸망한 북쪽 이스라엘, 이제 하나님이 심판할 남쪽 유다의 죄가 아주 아주 컵니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긴 가증한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죄가 아주 컵니다. 그 땅에 서로를 불법적으로 행하고 약한 사람을 약탈하며 피흘리는 죄가 가득찼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복을 약속하며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땅을 사람으로 가득 채우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사람을 죽인 피가 땅에 충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 차는 이 백성은 멸망시켜야 합니다.
이들의 또다른 죄는 하나님께 벌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니 계속 죄를 짓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반항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
하나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십니다.그 백성이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배반한 자를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에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그릇을 찬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백성의 죄악과 그들이 받을 심판 때문에 탄식하며 울던 사람들의 이마에 X 표시를 다 끝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도 죄를 회개하며 보이지 않는 표시를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참으로 경건한 자에게는 성령님을 통해 보호해 주십니다.
1.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마에 표가 있는 자
그런데 이 환상은 어떻게 실제로 이루어 졌을까요?
에스겔이 환상을 본 지 몇 년 후 바벨론이 예루살렘, 유다에 대한 3차 침공을 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였습니다.
사람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만 남겨 두었습니다(렘 39:1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시가 있는 사람은 살려 두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울던 사람들도 재난을 함께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표시한 사람은 어떤 점에서 멸망을 피했을까요?
영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영적 타락 때문에 탄식하고,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로 표시하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센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2.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마에 도장이 찍힌 사람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요한계시록은 우리 믿는 성도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 장면이 나옵니다(7:1-4).
네 명의 천사가 온 세계 사방에서 바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바람은 땅과 바다를 해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때 또 다른 천사 한 명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도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천사가 네 명의 천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마십시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것은 하나님의 소유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람의 해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이마에 도장이 찍힌 자의 수는 144,000명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상징적으로 144,000이라 합니다.
14절에서는, 이 사람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믿음으로 죄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린 양처럼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마에 하나님이 주신 표시가 있는 자들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란을 면제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불신자보다 더 많은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셨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그들에게는 고난이 그들을 멸망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에게 큰 환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라 가는 데 많은 방해들이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통해 많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인하여 통곡하며 우는 자는 복 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부족함을 인해 우는 자는 복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는 우리를 “너는 네 것이다.”고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3. 복음전하는 자를 하나님이 보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4-7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박해를 당할 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절은 말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
하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게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박해 당할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죽음 이후의 세계와 우리 영혼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경외합시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기억하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맙시다.
눅 12:11, 12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사람들 앞에 설 때에 대답할 말을 어떻게 할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하십니다.
4. 성령님이라는 도장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이라는 도장을 주셔서 영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에베소서 1:13은 말합니다. “그(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믿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도장을 찍듯이 마음에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라디아5:22,23은 말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착함,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을 금할 법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성령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 환란이 올 때 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성령이 도장 찍어 주셨으니 성령의 보호가 있으니 회개하는 삶을 계속 살아갑시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죄를 회개하며 성령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갑시다.
고난은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련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삽화 이야기 / 파가니니와 낡은 바이올린
파가니니의 일화
오래 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런던의 템스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 한 거지노인이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을 연주를 하며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거지노인이 벗어놓은 모자에 동전을 넣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낯선 외국인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지노인이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거지노인은 다 떨어진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떨어져서 너덜너덜했습니다.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해서 덥수룩 한 상태였습니다.
보기에도 처량해 보였습니다.
그 외국인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측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지금 제 수중에 준비된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잠시 몇 곡만 연주해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거지노인은 잠시 쉬기도 할 겸해서 그 낯선 외국인에게 낡은 바이올린을 건네주었습니다.
외국인은 그것을 손에 쥐고서 천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걸음을 멈추고는 외국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두 곡이 끝난 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거지노인은 자기가 벗어놓은 모자를 들고서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모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순식간에 돈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그것도 한 푼 두 푼 던져주는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돈의 단위가
높았습니다.
모두가 지폐를 꺼내서 모자에 넣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경찰관도 놀라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경찰관마저도 다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어 그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관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거지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이제 연주가 끝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그곳에 서 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사람은 파가니니다, 그 유명한 '파가니니!!"
* 이탈리아의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바이올린의 귀재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바이올린의 마술사'라고도 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명 연주가입니다.
그가
런던에 연주차 왔다가 호텔에 머물러 있으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템스 강변을 산책하기 위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쌍한
거지노인이 바이올린을 힘겹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대신 몇 곡을 연주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명연주자 파가니니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 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세상의 죄와 더러움에 동조하지 않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이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9장의 내용
- 환상 :에스겔은 환상 중에 성전에서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 심판의 시작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와 죄악 때문에 심판이 시작되며, 멸망시키는 천사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납니다.
- 표를 하라는 명령 :하나님께서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성읍 중에 순행하여 죄와 악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구원과 보호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되어 보호를 받게 됩니다.
- 세상의 죄악과 잘못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통곡하는 자들입니다.
- 사회 시스템이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문제를 삼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 믿음을 지키고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여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구원과 심판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 신앙인의 자세 :.세상의 죄악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9월 3일(수) 에스겔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인 줄 알리라(6: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I did not threaten in vain to bring this calamity on them.
새번역 /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겠다고 공연히 말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다.
4장 /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 받음.
5장 /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함.
6장 /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향한 심판의 예언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다국어성경 인터넷 판에서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씀을 검색한 결과 구약 전체에서 55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48구절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의 주요 특징이요 그 목적 중 하나다(7:4; 11:10, 12; 12:20; 13:9, 14, 21, 23; 14:8; 15:7; 16:62; 20:38, 42, 44; 22:16; 23:49; 24:24, Dyer).
'여호와'란 자존자(自存者), 즉 스스로 계시는 자라는 뜻이다(출 3:14, 15).
이 성호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로서(출 6:3)
창세기 4:26부터 사람에 의해 불리워졌으며 구약에서 가장 많이 쓰인 하나님의 이름이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하여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서로 간에 직함이나 계급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둘이 친숙하고 가까운 사이임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구원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극적인 사귐이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부르다’(카라)는
‘선포하다’, ‘크게 외치다’라는 뜻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멀리까지 알린 것을 뜻합니다.
에노스 시대에 참 예배가 확립되고 바르게
세워짐으로,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에노스(Enos)
에노스(Enos)는 창세기 5장에서 셋의 아들로 언급되는 인물로, 성경에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인간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상징하며, 그의 생애는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 에노스의 이름: 히브리어 의미와 풀이
에노스(Enos)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אֱנוֹשׁ' (에노시, Enosh)로 표기되며, 그 뜻은 '인간', '사람',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은 인류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상징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할 때 에노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아담'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을
에노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 15절에서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인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에노스'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이름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에노스의 생애
에노스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로, 그의 탄생은 창세기 4장 26절과 창세기 5장 6-11절에서 언급됩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의 생애는 그의 탄생 때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따르면, 에노스가 태어난 시점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생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습니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에노스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생애 동안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기 5:11).
3. 에노스 이야기의 교훈
에노스의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등장한 시점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돌아옴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태어난 시점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의 이름이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회개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예배의 시작
에노스가 태어난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시 교제하시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배와 기도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신앙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3)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4. 결론
에노스는 성경에서 셋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또한, 기도와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에노스의 생애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노스 이름 뜻 생애 교훈
에노스 / 남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가 처음으로 기록된 곳은 창세기 2:4이다.
그 후 창세기 2장에는 여호와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는 뜻으로 가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이미 에노스 이전부터 그렇게 기록되고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이 구절은 앞에 나온 증거들과 충돌된다.
그렇다면
이 뜻은 무엇인가?
창세기 4:26의 “비로소...불렀더라”는 히브리어(후할리크로)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부르기를 시작했다”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분명히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로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노스 이전에도 사람들이 이미 여호와를 불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그때
사람들이 여호와란 성호를 처음 불렀다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체계적인 공적 예배가 시작되었다,
둘째, 마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셋의 후예가 자신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셋째,
셋의 후예가 가인의 후예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넷째, 가인의 후예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구절은 이중 어느 하나의 의미보다는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건전한 이해이다.
먼저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종종 공적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은 그 사실을 그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창 12:8;
13:4; 21:23).
이외에도 성경은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예배임을 여러 곳에서 나타낸다.
예를 들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왕상 18:24)고 하였고, 요엘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욜 2:32)고 하였으며, 다윗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이방은 “주의 이름을 부리지 아니하는
열국”(시 79:6)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 창세기 4:26에서 사용된 이 구절의 의미도 그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웬함(Gorden N. Wenham)도 “창세기 4:26은 앞의 구절들이 육축, 음악, 기게 만드는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 구절도 정규적인 거룩한 예배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WBC, 1:116)고 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재림교회
성경주석(SDABC)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주석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셋의 후예들로부터 공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위에서 언급한 나머지 세 가지의 결과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당연히 셋의 후예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리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와 일치하게 데이크(Dake) 주석은 “일반적으로 이때에는 인류에게 두 부류가 있었다고 믿는다. 하나는 셋의 후예로서 신앙인의 계보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의 계보이다....그러므로 이 구절을 직역하면 ‘그 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 자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며, 혹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상의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가 된다”고 하였다. 엘렌 G 화잇도 이러한 이해에 동의하면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그러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두 계급 사이의 구별이 더욱 현저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함을 공공연히 고백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다”
그리고 특히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시며 그들에게서 경배를 받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출 3:13-15; 6:7; 7:5; 레 11:45; 22:32, 33).
본 구절도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이방 우상들과 같이 형상으로 만들어져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며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징계하시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심을 암시해준다.
한편 하나님의 이런 의도는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의 멍에에서 건져내신 사건을 통해서도 알려지기를 바라신 것이기도 하다(34:27; 37: 6, 13).
또한 이는 이스라엘 주위의 열국들도 알기를 바라신 것이었다(25:7, 11; 29:6).
알리라(알다. 야다. 3045) יָדַע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명] 총명한 자(단 2:21), 감각(잠 23:35), 지식(느 10:28), 지식인(전 9:11), 친구(왕하 10:11, 시 31:11), 친족(룻 2:1), 친우(시 55:13).
- '헛되지'(하남)란 문자적으로는 '은혜로운', '관대한'을 뜻하는 히브리어 '헨'(*)에서 유래된 말로 '값없이', '까닭없이' 등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아무런 대가없이 행해진 헛된 말씀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그분의 속성에 따라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임을 뜻한다(사 55:11).
보십시오. “8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9너희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10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은 죽임당할 뿐 아니라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가 있는데, 그들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여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할 때
또한 이스라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할 때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6장 11-14절을 보십시오.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12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13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 위에, 모든 산 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4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망할 때 먼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죽고, 남아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유다가 망하는 날 그들이 우상 앞에서 죽고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는 날, 그들이 우상 앞에서 멸망하는 날, 이스라엘이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죽는 날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됩니다. 그들이 이방에서 회개하고 애통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날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눈을 창조한 분으로 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귀를 창조한 분으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하는 일들을 다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듣고 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할 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는 하나님임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그들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분이기에 이스라엘은 심판의 날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심판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고 하나님은 심판 뿐 아니라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지만 그들이 먼 나라에 있을 때 그들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그들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며, 그는 살아계시고 역사하며,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아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징계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손바닥에 새겼으며 아비가 자녀를 긍휼이 여김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깁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본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이 여깁니다. 예레미야가 말했듯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두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됐는데, 새 언약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리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새 백성을 만드심으로 성취됐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심판은 고통스럽지만 이 고통스러운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과하고 회개하여 새로워지면 그들에게는 새 언약, 새 출애굽, 새 하늘과 새 땅, 새 피조세계, 새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립니다. 이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흘러 넘칩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심판이 아니란 말은 아닙니다. 심판은 심판이고, 고통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심판을 넘어 더 크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심판당하는 날, 회개하는 날 그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제가 하나님의 저를 향한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도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나를 인해 가슴이 아팠는가를 압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가슴아파하실까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서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여러 훈련을 주시고, 하나님은 저도 사랑하셔서 여러 훈련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제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시는 말씀을 붙들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부활한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살아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며 하나님의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도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경외함을 받게 하시고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되심을 체험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6장)
하나님의 말씀이 또다시 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한 외침이다.
에스겔은 무너진 땅, 황폐한 땅, 우상숭배로 오염된 땅을 향해 예언한다.
말씀이 임하는 대상은 더 이상 마음이 열린 백성이 아니다.
그들의 귀는 닫혔고, 그들의 눈은 멀었기에 이제 자연 자체가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산이 듣고, 골짜기가 응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그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다.
하나님은 그 땅 위에 칼을 두신다.
산당은 무너지고, 제단은 깨지고, 우상 앞에 무릎 꿇었던 자들은 그 우상 앞에서 엎드러져 죽는다.
얼마나 처절한가.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삶 전체가 붕괴된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버린 자는,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잃는다.
이스라엘의 재앙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며, 운명의 굴레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예배의 끝자락에서 예언된 필연이었다.
그들의 시체는 우상 앞에 던져지고, 해골은 제단 사방에 흩어진다.
마치 그들이 예배하던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마지막으로 증언하듯, 그들의 죽음조차 그 잘못된 숭배를 고발한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것은 단지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다.
음란한 눈, 음란한 마음.
하나님을 향하던 시선을 빼앗아 버린 정욕과 탐욕.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아픔은 백성의 고통 이전에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심판의 파도 속에도 은혜의 줄기는 남아 있다.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완전한 전멸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
그 살아남은 자들, 그 흩어진 자들, 그 수치 가운데 남겨진 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자신들이 떠났던 하나님을. 자신들이 거부했던 그 이름을.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벌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흔들림이었다.
스스로를 한탄하게 하는 은혜, 기억하게 하시는 사랑.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 절망의 땅에서 시작된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 구절은 에스겔 전반을 꿰뚫는 선언이다.
심판의 이유도, 은혜의 목적도, 회복의 끝도 결국은 이것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은 잊힌 이름이 되지 않으신다.
땅을 흔드시고, 역사를 흔드셔서라도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신다.
우리가 타락을 가벼이 여기고, 우상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소하게 여기는 시대에, 주님의 이 외침은 낯설고도 두렵게 다가온다.
에스겔은 무너진 제단과 죽은 시체들을 보며 예언한다.
그러나 그 예언은 죽음의 선언이 아니라,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우는 고발이다.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이지만, 그 손은 또한 살리시는 손이다.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이 말씀은 심판이지만 동시에 간섭이요, 주권의 표지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땅을 떠나지 않으신다.
오히려 가장 깊이 개입하신다.
황폐한 땅, 재앙의 중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난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황폐한 제단인가?
살아남은 자의 회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축복받을 때만이 아니라, 무너질 때도 선포된다.
그 이름 앞에서만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
모든 무너짐의 끝자락에서 들려오는 음성.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무너진 심령을 깨우고, 숨은 우상을 부수며, 다시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들리는 그 이름을. 심판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을.
그리고 다시 외쳐야 한다.
들을 귀를 가진 산과 골짜기처럼.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입술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노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97년경에 이스라엘의 남유다에 2차 침공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있으면서 선지자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왜
이스라엘의 남유다가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받고 무너지게 되는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인 6장 말씀의 중심내용은 1-7절까지는 우상숭배로 인한 심판에 대해, 8-10절까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함에 대해, 11-14절까지는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여호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로 인한 심판(1-7절)
(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사무엘 시대에는 산당이 부정적인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 왕(BC
930-909년)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산당을 지은 이후로 ‘산당’은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 즉 우상 숭배의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주로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산당’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높은 곳’ 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던 그들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높다고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높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통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철저하게
낮아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4)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는 ‘너희 제단들’, ‘분향 제단들’, ‘너희 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단을 쌓고, 건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분향 제단’ 이라는 단어는 ‘태양 기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제사를 드리는 건물’이나 ‘예배실’도 함께 포함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과 관계된 것은 제단이든 건물이든 모두 다 철저하게
부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들은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자신들의 ‘호의호식’만을 빌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을 이제 철저하게 벌하시고 그들이
‘호의호식’을 빌었던 제단 주변에서 죽도록 하여 우상 앞에 엎드러진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 평안은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이 아닌 결코 영원하지 않은 다른 무언가에 우리들의
인생을 맡기고, ‘호의호식’만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수 있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높아진 것을 얼마든지 낮추실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우리를 높여 주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우상에 아무리 집착하고
열심히 빌어도 결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8-10절)
(8) 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중에도 긍횰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살아 남은 자들의 특징은 악에 대하여 이제는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9) 너희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살아남은 그들은 예언되었던 모든 재앙을 겪었기 때문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스스로 한탄하게 됩니다. 남은 자들은 그제서야 하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끔찍한 징계를 당한 뒤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이러한 우를 범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여호와(11-14절)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탄식의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가증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 하십니다.
11절의 ‘가증한 악’에서 ‘가증하다’는 단어는 ‘역겹다, 혐오스럽다’에서 왔습니다. 즉 ‘가증한 악’은 ‘역겨운 죄악들’ 입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가 얼마나 역겹고 끔찍한 것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12)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대상은 참 광범위합니다. ‘먼 데 있는자, 가까운 데 있는 자,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 모두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14)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지역적으로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디블라’는 열왕기하 23장 33절에 나오는
‘리블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하맛에 있는 북쪽 지경의 도시’ 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라는 표현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남과 북의 순서만 바뀐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모든 지역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지역, 모든 자에게 임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세상의 여러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봐야 무엇이 옳은 길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늘 그들의 교만함과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애써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정도 쯤이야 하나님도
이해해주실거야!’,
‘이 정도 불순종 한다고 해서 바로 벌하는 하나님은 아니시지!’ 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용 할 때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무시한다면, 오늘 말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결국 끔찍한 파국을 맞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목적과 이유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친밀하심 속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때로는 우리가 교만하여 내 마음 속 은밀한 곳에 나만의 산당을 세우고 하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때 늦은 후회와 한탄을 하지 않도록 역겨운 죄악들을 멀리하기를 원합니다.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친밀하심 속에서 함께 지어져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은 산꼭대기에 있는 ‘산당’까지도 철저하게 징계를 하십니다.
당신 안에 교만함으로 높이 세운 ‘산당’과도 같은 우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2. 모든 재앙을 경험한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한탄 하였던 것처럼 당신도 때 늦은 후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3.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 속에는 ‘역겨운 죄악들’과 같은 ‘가증한 악’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4. 당신은 심판을 받기 전에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고 매일 매일 그렇게 고백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4천 500억 달러
미국에서 투자액 일시불 선납 요구액
* 자동차 관세 25% - 일본 15%, 미국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붕괴될 것
9월 2일(화) 에스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이 열리며(1:1)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에스겔 선지자는 2차 포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이 열리며 주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냐답게 살아가야 할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밀씀(3절)
둘째는 여호와의 권능(3절)
(전개 이야기) 오영석총장
작은 관심(關心) 오영석
전남 해남에서 머슴 집 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홍역을 심하게 앓자 그의 어머니는
‘얘가 제대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머슴인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로
가난한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너무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며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하나님,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세요.
그 길만 열린다면 제 생애를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
소년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가난한 집안 형편을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리곤 편지봉투 앞면엔 ‘하나님 전 상서’라고 쓰고, 뒷면엔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소년이 쓴 이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다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민하던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해남읍에 있는 한 교회 목사님께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 목사님은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이었는데,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고 그를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슈바이처(Schweitzer, 1875-1965) 박사와 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먼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향에서 목회를 하다가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를 가게 되었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는 모교인 한신대의 교수가 됩니다.
그 소년이 나중에 한신대학교 제3대 총장까지 역임한 오영석(吳永錫) 전 총장입니다.
간절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영석 총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목사님에게 전달해 준 우체부 아저씨를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분의 지혜가 있었기에 한 유명한 인재가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소년이 쓴 편지를 받아들고서 어디로 보내야할 지 모를 때,
‘뭐 이런 편지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고 휴지통에 버렸다면 오영석 총장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그 우편배달부는 어린 소년의 꿈과 간절함이 담긴 그 편지를 교회 목사님께 전달했고,
소년의 꿈이 이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따뜻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나에겐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 있고,
나에겐 별거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그 작은 정성과 관심이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인생에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 주변에서 일어난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관심을 가져 보십시다.
그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에겐 잊지 못한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전 상서' 쓴 뒤 대학총장 된 소년
편지라는 낭만적인 통신수단이
세상을 연결해주던 느슨했던 시대에 하나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꿈을 전달하려 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신이었다.
소년은 그 꿈을 이루었을까?
'하나님 전 상서'의 주인공 오영석목사(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해남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총장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써서 무작정 우체통에 넣었다구요?
말하자면
무대포 정신이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꿈을 꾸시고 이룩하셨는데 어떻게 어린 소년이 그런 용기를 내셨는지요?
"하하 무대포정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이판사판 뭐든 해보는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이 가난해 진학을 못했는데 너무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서 견딜 수 없었지요.
어느 날은 후배가
소개해 준 목포 유달원이라는 고아원을 버스비도 없어 운전수한테 욕을 먹어가며 찾아갔는데 '가족이 있으면 유달원에서 살 수 없다'고
해서 고하도에 있는 다른 시설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아 다음날 아침 목포로 나와 큰 상점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점원으로 쓰고 대신 야간 중학교를 임금 대신 보내주도록 호소를 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당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들려주십시오. 무대포정신이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 편지를 쓰신 거군요.
"고아원이라도
들어가 공부하려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전처럼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거나 논밭에서 어머님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마음은 항상 공부 생각 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지나고 2년째 여름방학이 되어 동네교회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광주에서 간호학교에 다니는 여선생님이 와서 성경을 가르쳤어요.
그 선생님은 설교와 위생교육 외에도
'장발장'같은 흥미진진한 동화를 많이 해주셨는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당시 나는 교회 종지기로 아침 저녁 종을 쳤는데 하루는 종이
비틀어져서 위에 올라가 바로잡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앞이 보이지 않더군요.
선생님 같은 여성도 배우면 저렇게 큰일을 하는데, 나는 왜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나 기가 막혀서였지요.
한참을 종각 위에서 울다가 땅으로 내려와서 종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희망하는 일이 이뤄지도록 자신이 믿은 신께 빌거나 기도를 하는데요.
"기도도
엄청 했지요.
낮에는 산과 들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저녁에도 잠이 깊이 들면 하나님이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할까 봐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때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어느날
우체통에서 편지들을 꺼내 분류하던 해남읍 우체국 직원들이 '하나님 전 상서'라는 낯선 편지를 보고 우체국장께 드렸는데 그
우체국장이 마침 해남읍교회의 신실한 신도였고, 결국 그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전해져 공부의 길이 열렸다고 하지요.
아무렇게나 써
넣은 '편지한 장'이 그토록 원했던 학업의 길을 열어준 현실로 나타났는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입니까.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렇게나 쓴 편지가
아닙니다.
그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생각하고 궁리하고 또 기도를 했겠습니까?
소년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담판하듯 편지를 보낸 것이지요.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린 나의 기도를 듣고 내 편지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김찬원이란 해남읍교회 장로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편지를 읽어본 이준묵 목사님께서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3월 6일인데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어 비를 맞으면서 사정교회 장로님께서 주신 비파나무 분재 한그루를 안고 버스에 올랐었지요.
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기적'이라고 하지요."
이준묵 목사님을 만나 그가 운영하시는 등대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도중에 진로를 바꾼 배경은 무엇입니까?
"의대를
택한 건 목사님 사모님의 추천이었지요.
1962년 2월 해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선배와 함께 전남의대에서 보낸 합격증을 첨부하여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차 안에서 선배가 이런 말을 하는거예요.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하여주는
슈바이처 박사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뜻을 바꿔 1962년 2월 20일 경에 한국신학대학에서 다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2월말에 이준묵목사님께서 등록금을 갖고
오셔서 등록을 하려는데 "오영석 학생이 일등을 하였으므로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하며 삼성모직에서 각 대학의 수석입학생들에게
준 양복 기지 선물까지 주었지요.
그 기지로 교복을 지어입고 한신대 교정에 들어서던 기억이 어제일 같군요."
해남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는 거의 성자로 알려지신 이준묵목사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목사님은
호남의 굴지의 기업가로 아시아 자동차 공장과 나주 비료공장을 창업한 이문환 회장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원래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거지 성자로 불린 이현필 선생님과 강순명 목사님과 함께 활동을 하셨죠.
어느 날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모든
수속을 밟고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형님에게 송별 인사를 갔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호적에서 삭제하겠다."는 엄포에 포기를
하고 김수덕사모님(당시 간호사)과 결혼하셨다고 해요.
김수덕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넓은 아량과 덕과 깊은 지혜를 지닌
분이셨지요.
당시 읍교회의 신자들은 20 명에
불과했는데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면서 교회는 점차로 부흥 발전해 36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실 때, 신자들의 숫자가 400명이
넘었어요.
6·25가 나자 전쟁고아들과 걸식아동들을 모아 돌보았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기 훨씬 전인 50년 후반부터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군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처음에 해남읍에 YMCA를 창설하신 분이죠.
나주 비료공장에서 일하던 독일 기술자
호만씨의 협조를 통하여 해남에 호만학교를 설립하시고, 가정형편 상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는 많은 학생들에게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신 교육자였습니다."
해남출신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한신대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총장님께서 추구하는 기독정신이랄까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제가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 그것도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바로 장공신학을 통해 기독교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공신학의 중심주제는 '현실과 변혁'이지요.
그분은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한다는 생활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도 힘을 썼지요.
그 분을 따르던 인물들, 장준하, 문익환, 강원룡, 안병무박사 등 민족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비마다 양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람들을 보면 참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 뒤에 도서관 입구에
써진 성경문구는 히랍어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이지요."
대학에서 은퇴를 하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한신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으로서 25년 남짓 재직하다가 2005년 8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있지요.
그의
신학사상은 20세기 초에 신학사상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의학 책이 워낙 방대하고
깊고 어려워서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13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참여해 많은 진전을 이뤘지요.
그 책이 모두 번역 출판돼 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읽고 공부를 한다면, 한국교회와 강단의 생명력은 훨씬 풍성해지고 활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부터 네 달 동안 고향 해남읍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하셨는데 아주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잠시 설교목사로 갔었는데 기회가 되면 고향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기름진 흙을 실컷 밟으면서 해남에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잠을 잘 때 꿈을 꾸는데 꿈의 대부분이 거의 고향에서 펼쳐집니다.
금강곡의 맑은 물소리와 풍경들,
중고등학교 때 땔감을 하러 갔던 우슬재, 해남군청 광장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시끌벅적한 고도리 장터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특별히 이준묵 목사님과 사모님의 큰 은혜와 해남읍교회에서 큰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빚진 죄인의 심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한신대 장공기념관 앞에서 뵙게 돼 매우 즐거웠습니다. "해남이 한국에서만 아니라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문화의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는 총장님의 기도가 꼭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오영석 전 총장 연보 |
· 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 1962 해남고등학교 · 1969 한신대학교(신학사, Th. B) · 1971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 Th. M.) · 1982 스위스 Basel University(신학박사, Th. D.) · 1972~1975 전남 해남 백야교회 목회 · 1975~1976 전남 해남 해남읍교회 목회 · 1984~2007 한신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신학과) · 1992. 3~ 7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교수 · 1997~1998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 1998~2000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장 · 1999~2002 칼 바르트 학회 회장 · 2001. 9~ 2005. 8 한신대학교 총장 · 2009~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마태 3:16).
스데반이 돌 맞아 순교할 때 외친 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가 하나님 우편에 서는 것을 본다'(행 7:56),
이사야 64:1에서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등이 있습니다.
신앙이
영적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환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하늘이 열리는
체험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 11:25, 26)는 말씀이 이런 영적 체험을 말합니다.
빛의 반대는 어둠입니다.
우리 인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죄와 죽음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빠지게 합니다. 죽음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나는 길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삼 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완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생명을 완성시키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에스겔"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남 유다 왕국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세 차례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1차 포로는 BC 605년 여호야김 왕 때(18대)
2차 포로는 BC 597년 여호야긴 왕 때(19대)
3차 포로는 BC 586년 시드기야 왕 때(20대)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던 때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때에 포로가 되었을까요?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5년 그달 5일이라."(2절)
선지자 에스겔은 2차 포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 그발강 가에 있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언제 하늘이 열렸다고 하셨습니까?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늘이 열렸습니다(눅 3:21).
두번째는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행 10:11).
세번째는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발강가에 머물고 있었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겔 1:1).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특별계시라고 하겠습니다.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과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의 소망은 한반도 땅에 자유통일의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1947)
작사 안석주/ 작곡 안병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여호와의 말씀(다바르 아도나이) 1697 3068 / 데발 아도나이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여호와의 권능(야드 아도나이) 3027 3068 / 야드 아도나이
1. 사람의 손. 2.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3. בְּיָדִי.㉠ 내 손에
발음
[ yâd ]
구약 성경 / 1617회 사용
여호와의 말씀이...특별히 임하고
- '에스겔'이란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하나님께서 단련시키시다'의 뜻이다.
이는 포로 기간 중에 유다의 죄악성과 심판, 예루살렘의 파괴 및 회복 등을 전한 그의 사역적 특성과 잘 어울린다.
한편 에스겔처럼 제사장 가문 출신이면서 선지자 사역을 감당한 자는 구약에서 사무엘(삼상 2:35; 3:20; 7:9; 16:2-13),
예레미야(렘 1:1), 스가랴(느 12:16; 슥 1:1; 7:3) 등이 있다.
또한 본 구절의 '특별히 임하고'의 히브리어 '하요 하야'(*)는 '하야'(*)의 반복적인 표현으로서 그 의미를 강조해준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 '권능'(*, 야드)이란 원어상 '손'(the hand, NASB)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나타내는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적인 표현이다(3:22; 8:1; 33:22; 37:1).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 擬人化, Anthropomorphism)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육체를 갖지 않으신 순수한 영이시다.
따라서 인간의 오관(五官)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딤전 6:15-16).
또한 하나님은 완전히 도덕적시시며 완전한 자성적, 주권적 속성을 갖고 계시는 점에서 인간과는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때가 많다.
이처럼 여호와를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거나 혹은 인간의 품성을 지닌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신인동성도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 한다.
이에 해당하는(anthropomorphism)는 ‘인간’(안드로포스)와 ‘형태’(모르페)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인간과 유사한 형태와 성격을 지님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다신 종교 뿐아니라 고대 다른 나라 종교에서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을 종종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한다.
따라서 이는 종교학과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고’(창 1:3),
‘보시며(창 1:4),
서늘할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창 3:8) 분으로 묘사된다.
또한 여호와의 형상(민 12:8),
여호와의 발(출 24:10),
여호와의 손(사 50:11) 등과 같은 표현으로 마치 사지(四肢)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육체적 특성 외에도
’질투하시며‘(출 2):5),
분노를 발하시고’(시 77:9),
‘자비롭고’(욘 4:9),
능력이 많으시고(시 147:5),
‘자비와 은혜가 넘치시고’(시 103:8),
후회 하시는(삼상 15:11),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또한 ‘목자’(시 23:1),
‘신랑’(사 23:1),
‘용사’(출 15:3), 출 15:3) 등과 같이 인간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를 여호와께 적용시키기도 하였다.
신약에서는 구약보다는 이러한 표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나 역시
‘말씀하시고’(히 1:1),
‘보내시고’(요 17:8),
‘택하시고’(엡 1:4),
‘예정하시고’(3:11),
‘노하시고’(롬 1:18),
‘판단하시고’(롬 2:2),
‘화목케 하시고’,(고후 5:18),
‘사랑하시는’(요 3:16), 분으로 묘사된다.
뿐만 아니라 손(요 10:29), 과 ‘품’(요 1:18), 얼굴(마 18:10)을 가지시며 아버지(마 6:9), 왕(계4:2) 등의 인간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신인 동성 동형론을 보다 세분하여 본다면 순수한 영이신 여호와를 육체를 가진 것처럼 묘사한 동형론과 여호와를 인간의 지, 정, 의와 인격에 비추어 묘사한 동성론으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1. 동형론
비물질적 존재인 여호와를 인간의 육체적 지능을 빌어 설명했다는 점에서 이는 순수한 은유(隱喩)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호와께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성(城)과 대(臺)를 보시려고 강림(降臨) 하셨다는 표현은 여호와가 높은 곳에 계시다가 위치를 낮추시어 이 땅에 내려오신 동작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창 11:5). 이는 순수한 의인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악한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자비를 보이신 지금까지의 태도를 변화시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이러한 동형론적인 표현은 주로 여호와의 의지에 강조점을 두고 해석 할 수 있다. 이는 여호와의 팔은 전능하신 의지적 능력을(출 6:6, 시 89:13), 코는 공의로우신 분노를(삼하 22:9, 시 18:8), 입은 절대 변개치 않는 말씀을(시 33:6), 눈은 모든 것을 살피시며 아시는 전지하심을(대하 16:9), 나타낸다는 사실로서도 이를 입증 할 수 있다.
2. 동성론
동형론이 여호와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여호와의 행위나 속성을 표현한 순수 은유라면 동성론은 무한한 여호와를 유한한 인간에 비유해 설명한 강조적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즉 여호와는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로서 도덕성과 추진성 및 생명성을 갖고 계신다. 여호와의 형상을 부여받아 창조된 인간 역시 이러한 속성을 갖고 있으나 무한하신 여호와에 비해 유한하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따라서 동성론적 표현은 제한적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하신 여호와의 품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홍수 후에 노아와의 언약에 있어서 무지개를 보고 인간과의 언약을 ‘기억하겠다’ 는 (창 9:16), 표현은 여호와가 인간처럼 건망증(健忘症)이 있어서 평소에 잊고 있었던 것을 무지개를 보고 불현듯 떠 올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언약을 언제나 기억하시고 성실히 수행하신다는 것을 무지개 표징으로 나타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원칙은 여호와의 근심 (창 6:6), 노함(출 22:24), 질투함(민 25:11), 맹세함(사 62:8), 이상히 여김(막 6:6) 등의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인 동성 동형론은 여호와를 인간적 행동이나 품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묘사하여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문학적 방편인 반면, 성육신은 여호와가 직접 인간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임하심을 가리킨다. 즉, 신인 동형 동성론은 범죄함으로 영안(靈眼)이 흐려진 인간이 잃어버렸던 여호와의 대한 정보를 다시 인간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나, 성육신은 직접 인간 가운데 여호와가 임하심으로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여호와를 게시된 여호와로 온전히 드러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자는 모두 여호와의 자기 계시이나 후자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자기계시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신인 동성 동형론은 무한하신 여호와를 유한한 인간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므로 항상 오해의 위험이 따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영적, 지적 파악력이 여호와에 대해 아는데는 미치지 못하며, 인간의 문자도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는데, 신인 동형 동성론이라는 ‘인간의 표현’은 또 다른 전달상의 문제를 지니므로 오해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인 동형 동성론 표현을 해석 할 때는 항상 여호와는 무한하신 반면 인간은 유한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동성론적 표현일 때는 인간의 지정의나 인격이 순수치 못하며 복합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여호와의 순수하신 품성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 1:24 에 나오는 여호와의 슬픔을 해석 할 때 인간의 슬픔이 내포하는 연약함, 상실감, 분노, 좌절 등을 여호와께 적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여호와의 슬픔은 부모가 자식을 징계 할 때 갖는 쓰라림과 같이,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심판하실 때에 그 같은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징계하심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가운데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들어 혹자는 이방 신화에서 발견되듯이 절대자 여호와에 대한 신관(神觀)의 미성숙 때문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이는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여호와를 보여 주기 위한 방편이란 것을 무시한 잘모된 견해이다. 이 표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계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연약한 인간에 대비하시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시므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원하시는 여호와의 사랑을 깨달으며 신인 동형 동성론적 사랑의 결정(結晶)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제한적 의미에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하늘이 열리며(에스겔 1:1-3)
사로 잡혀야 한다(1:1)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이 열리는 경우와 열리지 않는 경우는 전혀 양상이 달라 밤과 낮만큼 차이가 납니다.
즉 하늘이 열리는 그 사람과 하늘이
닫히는 사람과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또 하늘이 열리는 가정과 그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는 바로 그 가정, 즉
하늘이 닫힌 가정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 왕 때 너무 노여워서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
하늘을 닫아 버린 결과 그 나라가 말할 수 없는 도탄에 빠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나라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면 말로 다 형용키 어려운 곤경에 빠지는 겁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므로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와 행복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닫히고 열림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고 내용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이 열리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에스겔이라고 하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그 장면을 언제 체험을 했느냐 하게 되면 그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 포로로서 그발강가에서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는
그런 포로생활 중에서 선지자로 부름 받아 더욱 고생에 고생을 하던 때입니다.
이런 중에 그가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열린 하늘이 얼마나 복이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계시의 은혜 (1-2)
1절을 보게되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제30년 4월 5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이상을 보였다 하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완전한 모습을 사람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보여준다 하여도 사람이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또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을 우리가 보았다던가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던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환상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 중에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타날 때와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과 마귀가 나타나는 가정은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게 되면 에덴 동산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고 귀합니까?
그런데 마귀가 뱀으로 둔갑하여 찾아올 때 하와가 그 마귀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다음에는 죄를 짓고 얼마나 어려움에 빠집니까?
나중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 그
다음에는 천추만대에 우리에게까지 불행을 주는 결과를 낳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그 집에 들어오니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담아 하고 불렀으나 숨었습니다 왜 숨었느냐? 하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과 하와를
불러낸 다음에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말미암아 그 부끄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귀가
들어오더니 문제를 일으켰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결과는 문제를 풀어 주고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 하나님이
나타나는 사람은 참 복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에도 항상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신령한 은혜를 받게된 에스겔은 먼저 계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에는 성경 속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날마다 계시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 (3a)
3절을 보면 여호야 긴 왕의 사로 잡힌지 5년 그 달 5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라 하였습니다.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고 했으니 말씀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도 말씀이 임하지만 나에게 특별히 임했다 말입니다.
권능의 은혜 (3b)
3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취직하면 그 다음에 직장에서는 자리를 줍니다.
사람마다 취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세상에서 활동하는데 내가 앉을 자리, 설자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귀할 뿐만아니라 계장, 과장, 부장자리로 승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어진 높은 자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리를 감당할 능력입니다.
실력 없이 주어지는 그 자리는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그러기에 실력을 필요로 하는 세상, 실력이 인정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또 실력을 알아주는 세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분과 그 직책이 만들어 주는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를 감당할 영적 실력은 더욱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고린도 라고 하는 곳에 바울이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다 쫓아내 버렸습니다.
귀신들려 집나 갔던 아내가 돌아오고 아들이 돌아오고 딸이 돌아옵니다.
그 가정은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고 활기를 되찾게됩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7형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 쫓아내던 귀신을 일곱 명이 달려들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명했더니 귀신이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 웃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도대체 뭐냐고 대들었습니다.
형편없는 것이 까분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귀신들린 사람이 죽인다고 달려들어 억제하니 옷도 못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실을 보면 귀신이라는 놈이 우리들의 영적 실력을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문제, 영력이라는 문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혼자서 한 일을 일곱 명이 못
당했습니다.
여러분 세상 이치로 따지면 다수가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가문이 얼마나 좋은
가문입니까?
그렇다면 가문도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 또는
권세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계시의 은혜, 말씀의 은혜, 권능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4-25)
4절에서 25절까지인데 내용이 길기 까닭에 제가 한절 한절 읽으면서 설명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넷입니다. 사면을 향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개가 넷입니다. 또 날개 밑에는 손이 있어서 손이 넷이고 그 손 밑에는 바퀴가 있는데 역시 넷입니다. 그 다음에는 눈이 얼마나 큰지 전체가 눈이라 할 만큼 눈이 사면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분명히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도, 사람은 사람인데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하면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너희도 본받아서 이렇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천사와 똑같이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와 같은 사람을 본받아서 천사의 경지를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1. 봉사의 손
그러면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교훈의 내용이 뭐냐 하면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날개 밑에 있는 손입니다. 여러분 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일하는 손이요 봉사의 손입니다. 더구나 천사에게 손이 있다고 하게 되면 무엇을 말합니까? 천사는 하나님을 받들고 하나님이 시키심을 따라서 구원 얻은 성도를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천사의 손은 성도를 섬기는 손, 하나님을 섬기는 손, 즉 봉사의 손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봉사의 손을 가져야 됩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망했습니다. 폭격이 심했습니다. 예배당이 다 무너졌습니다. 교인들이 피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예배당 뜰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이 간 곳이 없었습니다. 찾아봤더니 어느 구석에 묻혀 있었는데 팔이 떨어져 없어졌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녹여서 다시 만들어 세우자 혹은 아니다 팔만 만들어서 갖다 붙이자고 하는가하면 팔이 없는 그대로 세우자고 옥신각신 하다가 그냥 세워 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팔 없는 예수님의 동상 그 밑에다 쓰기를 예수님의 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교인들이 각자가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인들의 손은, 성도들의 손은 바로 예수님의 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손은 봉사의 손이어야 합니다.
2. 믿음의 날개
본문은 분명히 천사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 날개가 없다면 제구실을 못합니다. 천사가 천사 구실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천사가 사람으로 나타나 성도의 모습으로 본을 보여줬다면 바로 우리 성도들은 날개와 같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천사가 천사 노릇 할 수 있는 것이 날개라면 우리 성도가 성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다면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가는 정치할 때 정치가요 장사꾼은 장사할 때 장사꾼이요 학생은 공부할 때 학생이요 믿는 사람은 믿을 때 믿는 사람입니다.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 믿는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날개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믿음은 날개와 같습니다.
3. 상징적인 얼굴
그 다음에는 생물에게는 네 얼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사람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전체로 보면 한사람인데 자세히 보면 얼굴이 넷입니다. 그런데 첫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가 돼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가졌을지라도 사실상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됩니다. 즉 인격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슨 얼굴이냐 하면 사자의 얼굴입니다. 사자는 산중의 왕이요 짐승의 왕입니다. 그 용기와 용맹은 천하가 못 당합니다. 사자는 조그마한 일에 낙심하지 않고 울지 않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자와 같은 용맹과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 울고 조그만 일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교회를 안 나오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신자는 이런 의미의 사자의 얼굴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들딸들이 조그마한 일에 울고 투정부리고 그 다음에는 낙심하고 부모를 원망한다면 그 꼴을 어떻게 봐주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일어나는 장한 아들 딸들이라면 그 용기와 용맹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얼굴의 모습은 용기와, 용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소의 얼굴입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소는 말하지 않고 하루종일 일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얼굴이 바로 이런 모습을 지녀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은 하지말고 소처럼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반대로 일을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불평이 많습니까. 그런데 봉사하는 소는 말이 없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지난번 내가 맥추절에 광고 드렸습니다.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금년 예산이 얼마인데 집사, 권사, 장로 목사는 알아서 하고 그 나머지 교인들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직 이상은 책임지고 할 일입니다 했더니 며칠 안 있으니까 교회 나오는지 얼마 안 되는 평신도라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헌금을 짜내려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집사가 아니지 않느냐, 집사가 아니면 당신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데 전화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분명히 집사이면서 평신도의 이름으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헌금을 안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할 때에는 미리 준비했다가, 그리고, 즐거움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힘껏 하며 정성껏 하고 인색 한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여도 되고 광성교회 김목사는 광성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하면 안 됩니까. 봉사 안 하는 사람이 무슨 일에든지 말이 많습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일밖에 모릅니다. 신자들은 일하는 소의 모습을 지니고 말은 하지 말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십시오 네 번째 얼굴은 독수리의 얼굴을 하였습니다. 신령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회사에 나가면 한 책상에 너와 내가 일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은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신령한 면에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는 신령한 면을 지니는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4. 순종의 바퀴
자동차를 타보고 운전해 보면 알겠지만 바퀴가 제 마음대로 갑니까.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음대로 가느냐 그 말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바퀴는 운전하는 사람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면 서고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오른쪽, 왼쪽으로 가게하면 외쪽, 오직 순종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니요"가 없어야 합니다. 오직 순종뿐이어야 합니다. 즉 "아멘" 뿐이어야 합니다.
5. 소망의 눈
사면에 눈이 가득 하였습니다. 눈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눈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장사꾼은 장사꾼의 눈을 가졌고 과학자는 과학자의 눈을 가졌고 정치가는 정치가의 눈을 가진 것처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저 사람 저런 고난 속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자살할 지경인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이겨내겠는가? 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성도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순교현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눈은 바로 소망의 눈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소망의 눈을 가지어서 남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보시고 항상 낙심하시지 마시고 소망 중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천사를 통해서 성도들은 많은 교훈을 받고 천사의 경지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III.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26-28)
1. 구원의 영광 (26- )
26절에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좌가 나타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분명히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람은 천사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사람으로 보였느냐 하면 이다음에 천하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준 겁니다. 똑같은 포로 시대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이벳느고 라는 믿음 좋은 청년들이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므로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7배나 뜨겁게 하고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던짐 받은 사람은 셋인데, 나중에 보니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데 신이요 신은 신인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보좌에 앉으셨는데 사람으로 보이신 그 분이 바로 풀무불 속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빨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왔더니 네 번째 사람은 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면 풀무불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런 도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 믿음 때문에 오히려 환난을 당할 적에 하나님은 손뼉을 치면서 잘한다 구경하고 관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현장에 뛰어들어서, 같은 처지와 입장이 되어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풀무불 속에서 세 청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통해서 구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2. 심판의 영광 (27- )
27절을 보게 되면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 해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허리 이상은 단쇠 같았습니다. 얼마나 그 쇠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는지 단쇠가 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위까지도 분명히 불과 같더라는 것입이다. 그리고 허리 이하를 보니 역시 불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상징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24년이지만 성경을 읽는 중에 내가 전 주간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진리를 또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큰 반역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에게 두고는 정말 기가 막히고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반역의 주모자가 고라입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입니다. 그러니까 사촌이 잘 되니까 배가 아파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모양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수가 큰 아파트를 샀거든 절대로 크게 잔치 벌이고 뽐내지 마십시오. 고라는 250명의 불평분자들을 모아놓고 모세를 향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갈라서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세를 나의 일꾼으로 세웠는데 네가 뭔데 대적하느냐는 것입니다. 갑자기 땅이 갈라지더니 불이 나와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모세처럼 봉사하고 있을 때 그러지 않아야 될 사람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속 썩이고 억울하게 한 일 있습니까? 그럴 적에 하나님은 전후 좌우를 전부 살피시고 시와 비를 가려 주시고 단 쇠와 같은 불로 철퇴를 내러 심판해 주십니다. 이 심판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됐고 모세에게는 승리가 되고 우리들에게는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같은 단쇠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3. 자비의 영광 (28- )
28절 보니까 "그 사면 광채 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내가 보고 곧 엎드려 그 말씀하시는 자의 그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계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니 꼭 무지개 같더라는 말씀에 큰 뜻이 있습니다. 무지개라 할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노아 홍수 때 심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과 사랑 속에 구원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 이제 너의 자손들에게 다시는 내가 이런 심판을 안 하겠다는 약속 끝에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노아의 가정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준, 축복의 표징으로 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의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지개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축복의 상징이요 언약의 상징이요 자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과 언약의 상징인, 축복의 무지개, 언약의 무지개, 자비의 무지개가 항상 나타나는 가정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늘이 열리며 에스겔은 굉장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해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다음에는
포로 생활의 어려운 중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삶이 여러분들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에스겔처럼 포로 생활과 같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열린 하늘을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 중에 에스겔은 열리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을 위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열린 하늘을 통해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 속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요시야의 네 아들
16대 요시야
→ 17대 여호아하스(요시야의 넷째아들인 살룸(렘22:11)
→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엘리야김)
→ 19대 여호야긴(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의 맏아들,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냐)
→ 20대 시드기야( 요시야의 셋째아들인 시드기야(맛다니야, 여호야긴의 숙부)이다.
대상3:14 “그 아들은 아몬이요 그 아들은 요시야며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①요하난과 둘째 ② 여호야김(18대)과 셋째 시드기야(20대)와 넷째 살룸(여호아하스,17대)이요/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
여호야긴(19대, 요시야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의 맏아들,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냐).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렘1:3).
2. 18대 여호야김
“18대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대상3:16).
여호야김은 ① 여고냐 ② 시드기야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여고냐(여호야긴)가 먼저 왕이 되어 통치하다가 끌려갔기 때문에 여호야김의 아들 시드기야(=고니야)가 왕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느부갓네살이 제멋대로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남(南)유다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렘22:24)는 시드기야지만 이는 남(南)유다왕이 된 시드기야와는 다른 인물이다.
① 여고냐(여호야긴) : 18대 여호야김 다음으로 남(南)유다 왕이 되는 19대 여고냐(여호야긴)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37년 만에 풀려나게 된다(왕하25:2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렘24:1).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여호야긴)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에스더 2:6).
② 시드기야 :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아(렘22:24).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 시드기야는 유다왕 시드기야가 아니다. 유다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아들이고 여호야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찌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렘22:24~27).
3. 19대 여호야긴
사로잡혀간 여고냐(여호야긴)의 아들은 ① 스알디엘 ② 말기람 ③ 브다야 ④ 세낫살 ⑤ 여가먀 ⑥ 호사마 ⑦ 느다뱌 이다(대상3:17~18).
이 여고냐(여호야긴)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는데(대상3:17~18) 고니야는 무자(無子) 즉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렘22:30). 렘22:24의 고니야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가 될 수 없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렘37:1).
**여호야긴의 아들 스알디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맏아들이다(대상 3:17). 유다의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의 아버지이며(스 3:2; 5:2; 마 1:12) 예수님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마 1:12; 눅 3:27). 다른 구절에서는 스룹바벨의 아버지를 ‘브다야’(대상 3:19)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스알디엘이 조카를 아들로 삼았거나 스알디엘이 죽은 후 동생 브다야가 스알디엘의 처와 결혼해서 스룹바벨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4. 마태복음 1장 예수님 족보는 요시야에서 여고냐를 거쳐 스알디엘, 스룹바벨로 이어진다.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여호야긴)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1:10~12).
에스겔
에스겔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로,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 에스겔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유다의 멸망과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과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그의 예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에스겔의 주요 주제
- 하나님의 영광: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장면과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죄로 인해 떠날 수 있지만, 회개와 순종을 통해 다시 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 회개와 회복: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로 인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회개를 통한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고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개인과 공동체가 회개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새로운 성전: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성전과 그에 따른 예배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상징하며,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의 영적 중심지를 나타냅니다. 이 주제는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에스겔이 오늘날 관련 있는 이유
에스겔서는 현대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또한, 에스겔의 예언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신뢰하며,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에스겔의 장
각 장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아래 링크를 탐험하세요:
- 에스겔 제 1 장: 에스겔의 환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는 장면이 묘사됨.
- 에스겔 제 2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를 전하라고 명령하심.
- 에스겔 제 3 장: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음.
- 에스겔 제 4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음.
- 에스겔 제 5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함.
- 에스겔 제 6 장: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향한 심판의 예언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에스겔 제 7 장: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경고와 심판의 날을 예고함.
- 에스겔 제 8 장: 에스겔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 에스겔 제 9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을 알리시고, 의인들을 구별하심.
- 에스겔 제 10 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함.
- 에스겔 제 11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게 하심.
- 에스겔 제 12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음.
- 에스겔 제 13 장: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잘못된 예언을 고발함.
- 에스겔 제 14 장: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함.
- 에스겔 제 15 장: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심판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 에스겔 제 16 장: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회복의 약속을 전함.
- 에스겔 제 17 장: 이스라엘의 두 왕국과 그들의 운명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회복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18 장: 개인의 책임과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19 장: 이스라엘의 왕들과 그들의 멸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함.
- 에스겔 제 20 장: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백성의 불순종을 회상함.
- 에스겔 제 21 장: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함을 알리며, 바벨론의 칼을 예언함.
- 에스겔 제 22 장: 이스라엘의 죄와 부패를 고발하며, 심판의 날을 예고함.
- 에스겔 제 23 장: 이스라엘의 두 자매를 통해 우상 숭배와 배신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 에스겔 제 24 장: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함.
- 에스겔 제 25 장: 주변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냄.
- 에스겔 제 26 장: 두로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그 도시의 멸망을 상세히 묘사함.
- 에스겔 제 27 장: 두로의 상업과 번영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그 멸망을 경고함.
- 에스겔 제 28 장: 두로의 왕에 대한 심판과 그의 교만을 고발함.
- 에스겔 제 29 장: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그들의 멸망과 회복을 다룸.
- 에스겔 제 30 장: 이집트의 멸망과 그로 인해 임할 고통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1 장: 이집트의 교만을 나무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2 장: 이집트의 멸망과 그로 인한 슬픔을 예언하며, 지옥에 대한 묘사를 포함함.
- 에스겔 제 33 장: 에스겔이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회개를 촉구함.
- 에스겔 제 34 장: 이스라엘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하나님이 세우실 참된 목자를 예언함.
- 에스겔 제 35 장: 세일 산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36 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며,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7 장: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함.
- 에스겔 제 38 장: 고 Gog과 마곡에 대한 예언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경고함.
- 에스겔 제 39 장: Gog과 그의 군대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함.
- 에스겔 제 40 장: 새로운 성전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장소를 묘사함.
- 에스겔 제 41 장: 새로운 성전의 내부 구조와 장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
- 에스겔 제 42 장: 성전의 외부 구조와 제사장들의 역할에 대한 설명.
- 에스겔 제 43 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회복의 약속을 전함.
- 에스겔 제 44 장: 제사장들의 규례와 성전에서의 봉사에 대한 지침을 제시함.
- 에스겔 제 45 장: 성전의 구역과 제사장들의 분배에 대한 규례를 설명함.
- 에스겔 제 46 장: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 규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함.
- 에스겔 제 47 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과 그 회복의 의미를 묘사함.
- 에스겔 제 48 장: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각 지파의 구역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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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명의 사용자들이 매일 영적 성장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연결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약속
- 1장: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
- 2장: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다
- 3장: 말씀을 받아먹고 경고하다
- 4장: 예루살렘의 포위에 대한 예언
- 5장: 예루살렘의 심판
- 6장: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 7장: 이스라엘의 끝이 다가오다
- 8장: 성전의 우상 숭배
- 9장: 멸망과 보호
- 10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다
- 11장: 회개와 새 영의 약속
- 12장: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 13장: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 14장: 우상 숭배자들의 심판
- 15장: 포도나무의 심판
- 16장: 예루살렘의 타락한 역사
- 17장: 두 독수리의 비유
- 18장: 개인의 책임
- 19장: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몰락
- 20장: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
- 21장: 바벨론의 칼
- 22장: 예루살렘의 죄악
- 23장: 두 음녀의 비유
- 24장: 끓는 가마 비유
- 25장: 주변 민족들의 심판
- 26~28장: 두로와 시돈의 심판
- 29~32장: 애굽의 심판
- 33장: 파수꾼의 책임
- 34장: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
- 35장: 에돔의 심판
- 36장: 새 마음과 새 영
- 37장: 마른 뼈 환상
- 38~39장: 곡과 마곡의 심판
- 40~48장: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
-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