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갈라디아서



요한복음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 비블리온(βιβλίον)과 그라페(γραφή)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그라페와 로고스로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 
구약은 그라페이고, 예수의 말씀은 로고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가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한 권으로 붙어 있고 사건이 연속되지만 그 둘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그라페와 로고스 혹은 그라페와 비블리온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라페는 선지자들의 말씀이고, 비블리온은 아들의 말씀이다. 
그라페는 모세의 율법과 모세의 장막에서 들은 말씀이고, 비블리온은 하늘 지성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담고 있는 말씀만을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라고 분명히 구분한다. 
구약성경은 그라페(γραφή)라고 한다. 
구약을 로고스나 비블리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블리온(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과 그것을 증거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는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20:30, 21:25), 
모두 예수에 관해 기록한 요한복음만을 비블리온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어야 비블리온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비블리온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나고, 영적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라져야 하지만, 신약은 모두가 들어야 할 이의 말씀이요, 지극히 크신 위엄의 책이기 때문이다.

​비블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라페는 예수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모두 사라져야 할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글이다. 
그라페가 영생을 얻게 하고 예수를 알게 하는 가치는 있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태양이 빛을 잃듯이 빛을 잃는 게 그라페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βιβλίο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한복음 21:24-25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태양도 빛을 잃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왜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문장을 후반부에 둔 것일까? 
하나는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를 만진 후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는 복음의 말씀에 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자들의 공적 인정 문구와 자신의 평가 구절을 넣은 것일까? 
내용적으로 이미 인증을 받는 비블리온일 텐데,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로 끝맺은 것일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을 끝 부분에 둔 것일까? 
요한이 자기 책의 권위를 위해 막판에 첨부한 것일까?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면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요한은 왜 제자들이 참이라고 인정했다는 구절을 넣은 것일까? 
또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 것일까? 
게다가 25절은 “아노라”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4절은 요한이 훌륭한 복음서를 쓴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투하여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강요해서 쓴 것일까?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정도의 위엄이 있는 책인데, 굳이 제자들의 인정이 있었다는 말이 필요했을까? 
이 두 구절(24절과 25절)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일까. 
오해가 생기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구절 때문에 더 빛이 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엔 이런 구절이 없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이 구절이 있어서 빛이 난다. 
누가복음은 이런 구절이 첫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끝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난다.

​24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라는 주의 11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완성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100세 정도 되었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죽은 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썼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은 천주교와 관련된 “불확실한” 전승으로 인해 매우 혼탁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는 비블리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돌봤다는 것이다. 
에베소에 가면 그런 전승을 이용한 유적이 있으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나와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100세 가까이 살면서 노년에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성경에 없으면 해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주교는 교부 등의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카톨릭의 전승을 성경에 근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요한복음을 해석하기에 혼탁하다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을 따른다는 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90-110년 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요한복음 21:24-25을 인정하지 않는 자료다. 
그들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에 동조한다. 
성경에 추가하는 이런 방자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는가?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게 하는 주 예수의 비블리온에 “임의 추가”라는 불경스런 일을 자행했다고 믿는가?

​주의 사명자들이 신학교에 가서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후세대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동등한 권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이후의 사람들의 어록은 천주교적인 게 많은데도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승으로 전해진다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권위로 대접받고 있다. 
교부 중에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기에 주의 사명자들이 “불신자”처럼 되어 신학교 문을 나오게 된다. 
성경 이후 인물들의 어록이 신약개론 등에 정경을 결정하는 근거자료로 소개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논한 글을 보면 어느 하나도 21:24-25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경책도 없이 체험만 갖고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의 복음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니까 하늘로 들림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 예수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때 배운 가르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도행전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을 40일간 집중과정을 거쳐 나온 게 복음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선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있고, 전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복음 1:1-2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하여 준 것이 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저술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가 40일간 계시면서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설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한 것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할 정도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에 “임의 추가”를 했겠는가? 
임의 추가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재에선 대부분이 그런 기록은 단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조각조각 나서 파편처럼 떠돌았을 뿐, 복음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태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요한자료 등 자료로만 있어서 복음서마다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은 요한복음의 명칭이 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인지를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는 헬라어로 κατὰ(카타)인데, 그것은 요한이 저자란 말이 아니다. 
누구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written by라고 해야 한다. 
그 성경의 저자는 주 예수시고 요한은 전하여 준 그대로 정리한 자이기에 κατὰ를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신 말씀을 녹취했다가 정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부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일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κατὰ(카타) 복음서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하였다. 
요한의 글에 질투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글을 볼 때 주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참되다(ἀληθὴς, 알레데스)고 승인한 것이다. 
알레데스는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다.

​요한 또한 자신의 작업이 40일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25절의 말을 남긴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서가 4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낱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씩”이란 말이다. 
부활하신 당일에도 열 시간 넘게 제자들을 만나 가르치셨는데, 40일간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얼마나 많았겠는가? 
도마 앞에서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표적을 적었다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것을 기록한다면 요한복음 6장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책이 되게 할 수 있었다. 
나눠 주는 제자들의 시각으로 책을 낼 수도 있고, 그 떡과 고기를 가져온 소년의 입장에서도 책을 낼 수 있고, 받아먹는 무리의 입장에서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6장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이 되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으니, 그 남겨진 것과 관련된 것을 책으로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셨으니, 그것을 기록했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나왔겠는가? 
그들이 떡을 먹은 때가 저물었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두껍고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떡을 먹고 흩어진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40일 간의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0일 간 행하신 표적도 다 기록한다면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하였는데, 3년 간 공생애 때 사역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좀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 수 있다. 
헬라어 원문 뒤에 나오는 영어 본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Young) 문자역”이다.

​Ἔστιν δὲ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ὃσ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ἅτινα ἐὰν γράφηται καθ' ἕν οὐδὲ αὐτὸν οἶμαι τὸν κόσμον χωρῆσαι τὰ γραφόμενα βιβλία ἀμήν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 as many as Jesus did -- which, if they may be written one by one, not even the world itself I think to have place for the books written. Amen.(Young's Literal Translation)

​예수의 사역이 더 많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첫째 암시는 25절의 여섯 번째 단어인 ὃσα(호사)이다. 
이 단어는 “-하는 것은 얼마든지”(as many as)이다. 
따라서 이런 원 뜻을 살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 이 외에도 많은데”이다. 
서방사본은 ὃσα(호사) 대신에 ἅ(하)라는 관계대명사를 사용하므로 그 뜻을 약화시켰다. 
ἅ(하)를 택하면 which나 that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대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뒤의 문장과 연결하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예수가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아’가 된다. 
그러나 ὃσα(호사)는 상호관계대명사로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이”라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확실히 풍성해진다. 
한글개역성경은 상호관계대명사로 된 사본을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대명사로 된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마지막 구절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단순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영어성경 중에서는 위에 있는 YTL이 동방사본을 따랐기에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 
“많다”는 πολλὰ(폴라)를 번역한 many와 함께 ὃσα(호사)를 번역한 as many as를 살려,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번역가와 주석가들이 이 단어 외에 “하나씩”이라는 καθ' ἕν(카트 헨)에도 주목하여 그 문장을 번역하고 주석했다면 요한복음의 풍성함은 마지막 구절에서 더 빛났을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추정처럼 4개의 복음서 외에 추가로 복음서가 나왔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21:25의 이런 언급은 예수의 3년의 삶이 얼마나 매 순간 순간이 충실했던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루만 기록했어도 수천 권의 복음서가 됐다는 것을 이 구절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로 인해 네 개의 복음서는 수천 억 권의 복음서의 대표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주관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24절의 제자들의 “안다”는 말과 같이 “안다”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생각한다(think)”, “추정한다(suppose)”, “예상한다(expect)”, “상상한다(imagine)”, “-같다(seem)”와 같이 다른 말이다. 정확한 뜻은 추정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용어를 쓴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표현을 한 것일까? 
더군다나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객관성을 위해 “우리”라는 제자들의 검증이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가 “참되다”는 최고 평가를 내렸는데 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인 “(나는) 아노라”(추정하노라)를 말한 것일까?

​이 요한복음을 거룩한 성경책으로 검증한 “우리”라는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시각이나 요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말로 인해 검증이 더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요한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공감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 비블리온이 참이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그 감동을 요한은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단어로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런 감동과 감격과 감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수천억 권이 될 만한 주 예수의 사역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한이 한 권으로 압축해야 할 때 다른 내용을 삭제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아쉬워했을까? 
제자들은 요한의 마음 잘 알고 있었다. 
요한도 제자들이 그런 마음인 것을 알고 마지막에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서로가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그들은 요한복음을 참되다고 동의하는 만큼 요한 기자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이 땅에 둘 수 없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아쉬워하며 감동했을까? 
요한처럼 그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21장의 24절을 썼고, 요한은 그들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25절을 쓴 것이다.

​요한복음 21:24-25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런 마무리 멘트는 요한복음을 완성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감격스러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느낀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무리하면서 매우 감격했을 것이다.

​요한은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도 모자랄 복음서를 한 권으로 정리했을 때 얼마나 그러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 예수의 사역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는데도 다 펴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아멘을 썼을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사본을 택한 서방사본 옹호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 것이다. 
동방사본 대부분은 왜 아멘이란 말을 지키려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아멘으로 마무리 할 때에도 큰 감동이었을 것인데, 요한복음도 그렇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복음서를 마감하면서도 큰 감동으로 “아멘”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왜 “아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맞는가.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 하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볼 때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영감이란 성경 말씀을 수천억 배로 확대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는 기존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 
전해 내려온 것 이상으로 상상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상상하지 않고, “어느 사본에는 없음”이나 “추가 사본”이라는 설명에 기대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그런 자와 달리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요한복음을 풍성한 영감으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 
독생자의 영광이 풍성하게 비춰져야 한다. 
글자 하나가 우주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수천억 배 확대되어 우리 심비, 곧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의 행적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영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블리온의 말씀은 그렇게 풍성한 말씀이다.

​영생의 부활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영혼의 속죄는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도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내 영혼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도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비블리온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라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피를 뿌리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상고하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의 피 뿌린 옷을 입을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말씀이 영생인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비블리온의 말씀을 읽자. 
주 예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자.

​내 영혼아, 너는 주 예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는 아버지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βίβλος, ου, ἡ

1. 책.   2. ‘성경’.  3. 생명의 책  
Pronunciation [ biblŏs ]  
Etymology  /  본래 의미는 파피루스 식물의 내부 ‘껍질’[즉, 종이 또는 책의 두루마리를 가리킴]
  • 1.  책.
  • 2. ‘성경’, 마1:1, 막12:26, 눅3:4, 20:42, 행1:20, 7:42.
  • 3. 생명의 책, 빌4:3, 계3:5, 13:8, 20:15.

βιβλίον, ου, τό Storng number 975

1. 책.  2. 율법의 두루마리.  3. 예언의 두루마리 
Pronunciation [ bibliŏn ] 
  •  1. 책, 두루마리, 계 6:14.
    •  a. 율법의 두루마리, 갈 3:10.
    •  b. 예언의 두루마리, 눅 4:17,20, 요한의 복음, 요 20:30.
    •  c. [특별히] 계시의 책, 계1:11, 5:1,2, 10:8, 22:7,9,10,18,19.
    •  d. 생명의 책, 계13:8, 17:8, 20:12, 21:27. [기타] 딤후4:13.
  •  2. 문서, 기록, 마19:7, 막10:4.
Grammar Explanation  / 976의 파생어
  • 문법설명 /  976의 파생어
  • 관련 성경  /  증서(마19:7, 막10:4), 글(눅4:17), 책(눅4: 20, 갈3:10, 딤후4:13), 두루마리(계6:14).

관련 성경
계보(마 1:1), 책(막 12:26, 행 7:42, 계 20:15), 시편(눅20:42, 행1:20).

γραφή, ῆς, ἡ Storng number 1124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Pronunciation [ graphĕ ]
Etymology / 1125에서 유래
  • I.  기록된 것. 신약성경에서는 절대적인 신성한 의미로서 성경을 말함.
    • 1.  ἡ γ. 개개의 성경구절, 막12:10, 15:28, 눅4:21, 요13:18, 19:24,36,37, 행1:16, 8:35, 롬11:2, 딤후3:16, 약2:8,23.
    • 2.  성경전체.
      • a.  [복수로] αἱ γραφαί: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집합적으로 말함: 성경전서, 마21:42, 22:29, 26:54, 막12:24, 14:49, 눅24:27, 32,45, 요5:39, 행17:2,11, 18:24,28, 롬15:4, 벧후3:16, γ. ἅγιαι, 롬1:2, προφητικαί, 롬16:26.
      • b. [단수로] 성경전체를 가리킴, 요20:9, 행8:32, 벧후1:20, εἶπεν ἡ γ., 요7:38,42, λέγει, 롬4:3, 9:17, 10:11, 갈4:30, 딤전5:18, 약4:5, περιέχει ἐν γ., 벧전2:6. πεπλήρωται, ἐπληρώ- θη ἡ γ., 요17:12, πιστεύειν, υῇ γ., 요2:22, οὐ δύναται λυθῆναι ἡ γ.: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요10:35. [기타] 갈3:8,22.
  • 관련 성경  / 성경(마21:42, 요2:22, 고전15:3, 약2:8, 벧전2:6, 벧후1:20), 글(마26:56, 행8:35, 롬16:26), 말씀(약4:5).  


구약과 신약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라페와 로고스, 그라페와 비블리온의 차이를 알아야 신약의 가치가 보인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그라페와 로고스로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 
구약은 그라페이고, 예수의 말씀은 로고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가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한 권으로 붙어 있고 사건이 연속되지만 그 둘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그라페와 로고스 혹은 그라페와 비블리온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라페선지자들의 말씀이고, 비블리온아들의 말씀이다. 
그라페모세의 율법모세의 장막에서 들은 말씀이고, 비블리온하늘 지성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담고 있는 말씀만을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라고 분명히 구분한다. 
이와 달리 구약성경은 그라페(γραφή)라고 한다. 
구약을 로고스나 비블리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블리온(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과 그것을 증거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는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예수에 관해 기록한 요한복음만을 비블리온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어야 비블리온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20:30, 21:24-25)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비블리온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나고, 영적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라져야 하지만, 신약은 모두가 들어야 할 이의 말씀이요, 지극히 크신 위엄의 책이기 때문이다.

​비블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라페는 예수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모두 사라져야 할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글이다. 
그라페가 영생을 얻게 하고 예수를 알게 하는 가치는 있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태양이 빛을 잃듯이 빛을 잃는 게 그라페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βιβλίο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요 20:30)

○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4-25)

태양도 빛을 잃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왜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문장을 후반부에 둔 것일까? 
하나는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를 만진 후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는 복음의 말씀에 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자들의 공적 인정 문구와 자신의 평가 구절을 넣은 것일까? 
내용적으로 이미 인증을 받는 비블리온일 텐데,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로 끝맺은 것일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을 끝 부분에 둔 것일까? 
요한이 자기 책의 권위를 위해 막판에 첨부한 것일까?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면 그런 용어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요한은 왜 제자들이 참이라고 인정했다는 구절을 넣은 것일까? 
또한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 것일까? 
게다가 25절은 “아노라”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4절은 요한이 훌륭한 복음서를 쓴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투하여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강요해서 쓴 것일까?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정도의 위엄이 있는 책인데, 굳이 제자들의 인정이 있었다는 말이 필요했을까? 이 두 구절(24절과 25절)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일까. 오해가 생기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구절 때문에 더 빛이 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엔 이런 구절이 없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이 구절이 있어서 빛이 난다. 
누가복음은 이런 구절이 첫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끝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난다.

​24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라는 주의 11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완성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100세 정도 되었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죽은 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썼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은 천주교와 관련된 “불확실한” 전승으로 인해 매우 혼탁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는 비블리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돌봤다는 것이다. 에베소에 가면 그런 전승을 이용한 유적이 있으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나와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100세 가까이 살면서 노년에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성경에 없으면 해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주교는 교부 등의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카톨릭의 전승을 성경에 근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학자나 목회자들도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가르치고 설교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해석하기가 매우 어지럽고 혼탁하다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을 따른다는 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90-110년 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요한복음 21:24-25을 인정하지 않는 자료라는 것이다. 
그들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에 동조하며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 없는 것을 추가하는, 못되고 방자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는가?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게 하는 주 예수의 비블리온에 “임의 추가”라는 불경스런 일을 자행했다고 믿는가? 아닐 것이다.

​주의 사명자들이 신학교에 가서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후세대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동등한 권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이후의 사람들의 어록은 천주교적인 게 많은데도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승으로 전해진다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권위로 대접받고 있다. 교부 중에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기에 주의 사명자들이 “불신자”처럼 되어 신학교 문을 나오게 된다. 성경 이후 인물들의 어록이 신약개론 등에 정경을 결정하는 근거자료로 소개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논한 글을 보면 어느 하나도 21:24-25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경책도 없이 체험만 갖고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의 복음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니까 하늘로 들림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 예수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때 배운 가르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을 40일간 집중과정을 거쳐 나온 게 복음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선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있고, 전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하여 준 것이 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저술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가 40일간 계시면서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설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한 것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할 정도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에 “임의 추가”를 했겠는가? 임의 추가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재에선 대부분이 그런 기록은 단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조각조각 나서 파편처럼 떠돌았을 뿐, 복음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태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요한자료 등 자료로만 있어서 복음서마다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은 요한복음의 명칭이 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인지를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는 헬라어로 κατὰ(카타)인데, 그것은 요한이 저자란 말이 아니다. 누구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written by라고 해야 한다. 그 성경의 저자는 주 예수시고 요한은 전하여 준 그대로 정리한 자이기에 κατὰ를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신 말씀을 녹취했다가 정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부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일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κατὰ(카타) 복음서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하였다. 요한의 글에 질투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글을 볼 때 주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참되다(ἀληθὴς, 알레데스)고 승인한 것이다. 알레데스는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다.

요한 또한 자신의 작업이 40일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25절의 말을 남긴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서가 4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낱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씩”이란 말이다. 부활하신 당일에도 열 시간 넘게 제자들을 만나 가르치셨는데, 40일간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얼마나 많았겠는가? 도마 앞에서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표적을 적었다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것을 기록한다면 요한복음 6장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책이 되게 할 수 있었다. 나눠 주는 제자들의 시각으로 책을 낼 수도 있고, 그 떡과 고기를 가져온 소년의 입장에서도 책을 낼 수 있고, 받아먹는 무리의 입장에서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6장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이 되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으니, 그 남겨진 것과 관련된 것을 책으로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셨으니, 그것을 기록했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나왔겠는가? 그들이 떡을 먹은 때가 저물었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두껍고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떡을 먹고 흩어진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40일 간의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0일 간 행하신 표적도 다 기록한다면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하였는데, 3년 간 공생애 때 사역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좀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 수 있다. 헬라어 원문 뒤에 나오는 영어 본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Young) 문자역”이다.

Ἔστιν δὲ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ὃσ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ἅτινα ἐὰν γράφηται καθ' ἕν οὐδὲ αὐτὸν οἶμαι τὸν κόσμον χωρῆσαι τὰ γραφόμενα βιβλία ἀμήν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 as many as Jesus did -- which, if they may be written one by one, not even the world itself I think to have place for the books written. Amen.(Young's Literal Translation)

예수의 사역이 더 많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첫째 암시는 25절의 여섯 번째 단어인 ὃσα(호사)이다. 이 단어는 “-하는 것은 얼마든지”(as many as)이다. 따라서 이런 원 뜻을 살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 이 외에도 많은데”이다. 서방사본은 ὃσα(호사) 대신에 ἅ(하)라는 관계대명사를 사용하므로 그 뜻을 약화시켰다. ἅ(하)를 택하면 which나 that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대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뒤의 문장과 연결하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예수가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아’가 된다.

그러나 ὃσα(호사)는 상호관계대명사로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이”라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확실히 풍성해진다. 한글개역성경은 상호관계대명사로 된 사본을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대명사로 된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마지막 구절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단순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영어성경 중에서는 위에 있는 YTL이 동방사본을 따랐기에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 “많다”는 πολλὰ(폴라)를 번역한 many와 함께 ὃσα(호사)를 번역한 as many as를 살려,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번역가와 주석가들이 이 단어 외에 “하나씩”이라는 καθ' ἕν(카트 헨)에도 주목하여 그 문장을 번역하고 주석했다면 요한복음의 풍성함은 마지막 구절에서 더 빛났을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추정처럼 4개의 복음서 외에 추가로 복음서가 나왔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21:25의 이런 언급은 예수의 3년의 삶이 얼마나 매 순간 순간이 충실했던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루만 기록했어도 수천 권의 복음서가 됐다는 것을 이 구절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로 인해 네 개의 복음서는 수천 억 권의 복음서의 대표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주관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24절의 제자들의 “안다”는 말과 같이 “안다”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생각한다(think)”, “추정한다(suppose)”, “예상한다(expect)”, “상상한다(imagine)”, “-같다(seem)”와 같이 다른 말이다. 정확한 뜻은 추정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용어를 쓴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표현을 한 것일까? 더군다나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객관성을 위해 “우리”라는 제자들의 검증이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가 “참되다”는 최고 평가를 내렸는데 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인 “(나는) 아노라”(추정하노라)를 말한 것일까?

이 요한복음을 거룩한 성경책으로 검증한 “우리”라는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시각이나 요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말로 인해 검증이 더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요한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공감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 비블리온이 참이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그 감동을 요한은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단어로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런 감동과 감격과 감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수천억 권이 될 만한 주 예수의 사역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한이 한 권으로 압축해야 할 때 다른 내용을 삭제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아쉬워했을까? 제자들은 요한의 마음 잘 알고 있었다. 요한도 제자들이 그런 마음인 것을 알고 마지막에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서로가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그들은 요한복음을 참되다고 동의하는 만큼 요한 기자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이 땅에 둘 수 없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아쉬워하며 감동했을까? 요한처럼 그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21장의 24절을 썼고, 요한은 그들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25절을 쓴 것이다.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 21:24)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런 마무리 멘트는 요한복음을 완성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감격스러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느낀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무리하면서 매우 감격했을 것이다.

요한은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도 모자랄 복음서를 한 권으로 정리했을 때 얼마나 그러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 예수의 사역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는데도 다 펴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아멘을 썼을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사본을 택한 서방사본 옹호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 것이다. 동방사본 대부분은 왜 아멘이란 말을 지키려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아멘으로 마무리 할 때에도 큰 감동이었을 것인데, 요한복음도 그렇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복음서를 마감하면서도 큰 감동으로 “아멘”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왜 “아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맞는가.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 하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볼 때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영감이란 성경 말씀을 수천억 배로 확대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는 기존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 전해 내려온 것 이상으로 상상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상상하지 않고, “어느 사본에는 없음”이나 “추가 사본”이라는 설명에 기대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그런 자와 달리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요한복음을 풍성한 영감으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 독생자의 영광이 풍성하게 비춰져야 한다. 글자 하나가 우주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수천억 배 확대되어 우리 심비, 곧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의 행적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영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블리온의 말씀은 그렇게 풍성한 말씀이다.

영생의 부활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영혼의 속죄는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도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내 영혼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도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비블리온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라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피를 뿌리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상고하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의 피 뿌린 옷을 입을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말씀이 영생인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비블리온의 말씀을 읽자. 주 예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자.

그라페(γραφὴ), 테오스의 감동(Θεόπνευστος)

그리스어 본문 딤후 3:16, 모든 그라페(γραφὴ 바이블)는 테오스의 영감(靈感 Θεό + πνευστος:  Theopneustos)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료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라페 Strong's 1124, 51회 발생)

"Θεός"(Theos)는 일반적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왕이자 천둥과 번개의 신인 제우스 신의 호칭이다.

그라페(γραφὴ & Βύβλος)

1. '그라페(γραφὴ)'는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쓴 것, 글, 서적을 뜻하는 용어가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수치심이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 및 문화 현상의 '포르노그래피'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포르노그라피아(πορνογραφία)'에서 유래했다. 포르노그라피아(음란물)는 '포르노스(πόρνος)' 즉 창녀나 매춘부, 남창, 남자 매춘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 from πέρνημι: 팔다, 판매하다, 수출하다, 노예로 팔다)와 '쓰기(γραφία: From γραφή)', 즉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에서 파생된 용어다.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창녀나 매춘부와 관련된 쓰기(write)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현대에는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된다. "그라페"는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쓴 것')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포르노그래피는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porne(πόρνη)'와 '글쓰기'를 의미하는 'gráfo(γράφω)'의 합성어가 '포르노그래피' 음란물이라는 뜻이다. 각 문화권마다 고유의 명칭이 있지만 요즈음에는 그냥 '포르노(Πορνό)'로 통칭하여 말한다. 그리고 영미권에서는 간단히 '포르노(Πορνό)'는 에로, 음란물, 외설물로 세계 인터넷 검색어 표준이다. 

2. 헬레니즘 사상의 그라페와 같은 바이블(Byblos)은 4 왕조 호루스의 현신 파라오 '스네페루(Sneferu 기원전 2600년)' 이집트 상형 문자 기록에는 18 왕조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4세까지의 편지에서는 "구블라(𒁺𒆷 )"로 나타난다. 페니키아와 포에니 비문에는 "게발(𐤂𐤁𐤋: 언덕)"로 표시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게발, 그발(גבל)"이라는 이름으로 에스겔서 27:9에 나온다. 바이블의 원래이름 "그발(Gebal)"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시돈(צידון)과 두로(티레צוֹר)와 함께 페니키아의 3대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바벨론 제국 때는 "구블라(Gubla)", 헬라 제국 때는 "비블로스(Byblos)"로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이 된 것이다.

테오스(제우스)의 영감(靈感 Θεό + πνευστος)

1. 디모데후서 3:16, 그리스어 '테오스(제우스)의 영감(靈感)'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훼 엘로힘의 '거룩한 기운(에너지, 힘, 능력)'이라고 한다. 'רוח הקודש(Ruach HaKodesh)'라고 한다. 성경(תַּנַ"ךְ)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며, 한글 변역 성령, 영혼, 또는 "영(靈)"과는 개념(concept) 자체가 완전 의미가 다르다.

2. 영감(spirit)을 직역하면 "영"은 '신령 령'이라는 한자어로, '신령(神靈)', '망령(妄靈)', '귀신' 등을 뜻한다. 巫(무당 무)와 음을 나타내는 霝(비올 령)이 합쳐진 형성자다. '무당(巫)이 기우제(雨)를 지내기 위해 동물의 머리 셋(口)을 바치고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귀신 들린 무당의 "영감"이라는 뜻이 된다.

3. 그리스어 "태오쁘네우스또스(Θεόπνευστος)"의 번역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바알, 천신)는 신들의 왕이며, 천국의 주인으로 그는 신들과 인간들을 지배하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베소서 2:2)로 번개와 천둥을 조종하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등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영감(Θεό + πνευστος)'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신의 영감으로 생긴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우스가 아이디어나 창조적인 업적을 위해 인간에게 영감(πνεύμα)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감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우스(Θεός)가 많은 인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를 "제우스의 영감(태오쁘네우스또스)"을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4. 그리고 고대 헬레니즘 제국에서는 신들의 왕 "제우스 현신"을 테오스 에피파네스(Θεὸς Ἐπιφανής)라고 하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인간들의 운명과 행운을 좌우하는 신으로서, 제우스의 호칭을 '테오스(Θεός)'라고 불렀다. 제우스는 신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가 부여되었다. 

그라페(γραφὴ) VS 타나크(תַּנַ"ךְ)

기독교는 헤브라이즘(עִבְרִית계약)의 고유한 성경(תַּנַ"ךְ, לשון הקודש)을 타나크(Tanakh)라고 한다. 
그러나 헬레니즘 신앙의 근간을 두고 있는 기독교의 바이블은 창녀나 매춘부와 관련된 단순한 쓰기(write)를 가리키는 용어, 현대에는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인 '그라페(γραφὴ)'를 Holy-Bible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양신 바알숭배 국가인 페니키아의 주신(主神) '바알과 아스타르테(예레미야 44:18)'를 숭배하는 도시의 이름인 '비블로스(Βύβλος)'를 성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רוּחַ אֱלֹהִים(Ruach Elohim)' 창조주 야훼 엘로힘의 '기운(힘)'을 '태오쁘네우스또스(Θεόπνευστος)' 제우스의 영감"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태양신 바알 제우스 숭배 신앙의 '헬레니즘(Έλλας)' 사상과 창조주 야훼를 숭배하는 '헤브라이즘(עִבְרִית)' 사상이 완전하게 정 반대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7:38 성경(그라패)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 초두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주격으로 올려 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함이 옳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강수처럼 풍성히 전달해 준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기억하게 한다. 
곧, 사 43:20, 44:3, 55:1,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 등이다. 
여기 이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 성령님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생수"는 성령님을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 6:63).

 

성경 디모데후서 3:15 그람마

네가 어려서부터 
- '어려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푸스'는 목회 서신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Sim-pson) '복중에 있는 아이'(눅 1:41,44)나 '젖먹이'(눅 2:12,16;18:15; 행 7:19; 벧전 2:2)를 가리킨다. 
한편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1. 그 방법, 원리,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대해 가르쳤다(창 18:19; 출 12:26,27; 신 6:7,9;11:19;시 119:15,16,99;사 38:19;엡 6:4). 
2. 그들의 교육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것'이다(잠 1:7;9:10). 
3. 부모의 훈계를 따르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훈했다(출 21:15-17;잠 1:8;6:20;엡 6:1-3).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양육하였으며(시 103:13) 자녀 스스로 선택, 결정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수 24:15). 
이렇게 어릴 때의 자녀 교육은 부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성장하면서는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특별 가정교사, 박사들 그리고 랍비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대상 27:32).

성경을 알았나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에라 그람마타'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문서'(Sacred Writings)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킨다(Hendriksen, Lock).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일반적 표현 '그라페'와는 다른 독특한 표현으로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Scott).
1. '히에라 그람마타'에서 '그람마'는 원래 '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디모데가 어릴 때 성경의 '문자'를 읽고 썼던 바로 그 기초적인 성경공부를 가리킨다(Lenski). 
2. 당시 에베소의 거짓교사들은 '에페시아 그람마타' 속된 문서를 사용하였다(행 19:19). 
바울은 이것과 대조를나타내기 위해서 '히에라 그람마타'를 사용한다(Lock). 
3. 디모데가 익숙했던 성경과 관련된 다른 기독교 문헌들을 가리킨다.

신약 성경주석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시 19:7; 롬 11:11; 빌 1:19).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방법으로 주장하는 율법 외에 다른 방법인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롬 3:21, 22).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는 '통하여'라는 의미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성경'을 조명(照明)하며 생명력을 부여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Scott).

파사 그라페 데오프뉴스토스 카이 오펠리모스 프로스 디다스칼리안 프로스 엘레그몬 프로스 에파노르도신 프로스 파이데이안 텐 엔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새번역,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 ㉡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모든 성경은 교훈과……'
우리말성경,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가톨릭성경,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영어NIV,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영어NASB,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profitable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영어MSG,16  Every part of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useful one way or another--showing us truth, exposing our rebellion, correcting our mistakes, training us to live God's way.
영어NRSV,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and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6 πασα γραφη θεοπνευστος και ωφελιμος προς διδασκαλιαν προς ελεγχον προς επανορθωσιν προς παιδειαν την εν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16 omnis scriptura divinitus inspirata et utilis ad docendum ad arguendum ad corrigendum ad erudiendum in iustitia
히브리어Modern,16 כי כל הכתוב נכתב ברוח אלהים גם מועיל להורת ולהוכיח ולישר וליסר בצדק׃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 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 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로마서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고린도전서 15:3-4
성 경 [고전15:3]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적 진리임. 
우리 본문에 "성경대로"란 말이 두번 나온다. 
세상 역사상(歷史上)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사실들도 많다. 
그러므로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음이 무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는가? 
사실들이 많은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 하실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인류(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가 부활함이 우주 만물의 고대(苦待)하는 바 목표이기 때문이다(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 26:19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 하였고, 단 12:2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하였다. 
또 이밖에 구약에 많은 장 절들이 부활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서 구약을 해석하신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다. 
곧,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부활 관계로 여기 있는 예수님의 구약 성경 취급을 보면, 구약 성경에 부활 장 절이 많이 있다. 다만 우리가 무식하여 모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다. 그가 마 22:31,32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 절을 그는 부활 관계의 장 절로 생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그는 여기서 부활 장 절 같이 보이지 않는 장 절을 부활 장 절로 취급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밝히 아시고 이렇게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기엔 구약이 전체적으로(직접 혹은 간접으로)부활을 가르친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은, 바울의 말로 보아도 확실하다. 
바울은 구약 성경의 목표가 부활을 가르치는데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행 24:15-16, 26:22-23). 
이렇게 구원사(救援史)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은, 주로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활이 우주(宇宙)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성을 띤 것이 저렇게 중점적(重點的)으로 예언되었으니, 우리는 믿기에 용이하다. 우리는 믿어야 된다. 우리가 부활을 못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부활한다면,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부활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문제성(問題性)을 느끼지 않는다.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없으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늘 있는 이유는, 인간된 저들의 죄악성(罪惡性) 때문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리를 전할 때에, 믿는 자들이 생기는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활 이외의 다른 교리를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긴다.















12월 30일(화) 갈라디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의 흔적(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

예수의 흔적은 타락한 인간에게 두 가지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양심(良心) / 어질 양, 마음 심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사도행전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한글개역성경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 28구절

둘째는 직관(直觀) 곧을 직, 볼 관     

  • 1. 철학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 2. 철학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 흔적(痕跡) 스티그마(stigmaστίγμα

    1. 표.  2. 흔적.  3. 낙인  
    Pronunciation [ stigma ]   
    Etymology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 1.  표, 흔적, 낙인, 갈6:17.
    • 관련 성경  /  흔적(갈 6:17).


    󰃨 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26:10;눅 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행 20:24).


    갈라디아서 6:17 – 예수님의 흔적(στίγματα 스티그마타)이 말하는 복음의 최종적 보증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이 말씀은, 복음을 수호하는 바울의 단호한 선언이자, 이 편지 전체의 권위를 보증하는 인장 같은 구절입니다.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서, 이 구절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의 흔적”(στίγματα 스티그마)의 의미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στίγματα (stigmata)는 원래 “찔린 자국”, “낙인”, “문신”, “상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 노예나 군인의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몸에 불로 지져 낙인을 찍음

    • 특정 신에게 헌신한 사람이 자신의 몸에 그 신의 상징을 문신으로 새김

    • 범죄인이나 도망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사회적 위치를 명백히 함

    이처럼 στίγματα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특정한 주인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στίγματα를 “예수의 흔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몸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2. 신약성경에서 στίγματα의 유일한 사용과 관련 구절

    흥미롭게도 στίγματα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 갈라디아서 6:17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개념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나타납니다:

    •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이 당한 고난과 핍박의 목록

    • 골로새서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빌립보서 3:10: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이처럼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몸에 지니거나, 그 고난에 참여함을 통해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은 오직 갈라디아서에서만 바울이 단호히 선언한 독특한 표현입니다.


    3. 왜 바울은 편지 마지막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는가?

    갈라디아서 전체는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적 할례 사상을 반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구원의 길임을 변증하는 편지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며,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1–12).

    ​그러나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의식(특히 할례)을 강조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후로는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선언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자기 몸을 증거로 내세웁니다. 이는 곧 :

    율법적 할례의 표식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선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했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의 흔적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표식이라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4. 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 – 예수님의 ‘인장’

    당시 사회에서 στίγματα 스티그마타는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오히려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행 9:16)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의 삶은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수많은 박해와 고난은, 갈라디아서 6:17의 “예수의 흔적”을 실제로 몸에 새긴 증거입니다.

    ​결국, 바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들은, 갈라디아서 전체가 단순히 바울 개인의 글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임을 증거하는 인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전한 이 복음은 내 말이 아닙니다. 내 몸에 새겨진 이 예수의 흔적들이야말로,

    이 말씀이 참된 복음의 진리임을 보증합니다.” 

    5. 오늘날의 교훈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의 흔적을 넘어서, 복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표식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했고, 결국 갈라디아서 전체의 메시지가 오직 예수님의 복음임을 최종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자로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속했음을 몸과 마음으로 드러내고 있습니까?

    진정한 복음의 순수성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과 고난의 흔적 안에서 드러납니다. 

    6. 맺음말

    갈라디아서 6:17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이 온 몸으로 새긴 고난의 흔적은,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성과 능력을 보증하는 인장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예수님의 흔적을 삶으로 드러내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몸에 새기는 일반적 의미의 표를 희랍어로 스티그마라 한다. 
    그 밖의 단어로는 ‘표시’라는 뜻의 세메이온
    ‘인(印)’이란 뜻의 스프라기스
    ‘표’란 뜻의 카라그마
    사도 요한이 짐승의 “표”라고 할 때 사용한 낱말은 카라그마
    하나님의 “인”이라고 할 때 사용한 낱말은 스프라기스
    그러나 대체로 위에 소개한 모든 낱말들은 얼마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낱말들이었다.64 (372.2)


    σημεῖον, ου, τό Storng number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Pronunciation [ sēmĕiŏn ]
    •  I. 표징, 표시, 이적.
      •  1. 표, 표시, 증거, 상징, 마24:3, 26:48, 막13:4, 눅2:12, 21:7, 살후3:17.
      •  2. 기적, 표징.
        •  a. 기적, 이적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기적], 막8:11, 눅 11:16, 요2:11,18,23, 3:2, 4:54, 6: 2,14,30, 7:31, 9:16, 10:41, 11:47, 요2:11, 4:48, 행2:43, 4:30, 5:12, 6:8, 7:36, 14:3, 15:12, 롬15:19, 히2:4, 고후12:12.
        •  b. [사탄이나 그의 대행자들이 행한] 기적, 마24:24, 막13:22, 계13:13, 16:14, 19:20.
        •  c.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전조, 징조, 눅 21:11,25, 행2:19, 계12:1,3, 15:1.
    Grammar Explanation  /  4592의 어간에서 파생된 중성

    • 관련 성경 /  표적(마12:38, 행2:22, 살후2:9), 징조(마24:3, 눅21:7, 행2:19), 군호(마26:48), 이적 (막13:22, 눅23:8), 표(롬4:11, 고후12:12).
    χάραγ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5480

    1. 표.  2. 형상 
    Pronunciation [ charagma ]
    Etymology  /  5482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표, 인, 계13:16, 14:9.
    • 2. 형상, 행17:29.
    • 관련 성경  /  표(계13:16, 16:2, 20:4), 새긴 것(행17:29).
    σφραγίς, ῖδος, ἡ Storng number 4973

    1. 인.  2.  인장.  3. 도장 
    Pronunciation [ sphragis ]
    • I.  인, 인장.
      • 1.  [문자적으로]
        • a.  인장, 봉인, 계5:1,2,5.
        • b.  도장, 계7:2.
        • c.  인장의 표, 인증하는 것, 롬4:11, 고전9:2.
      • 2. [상징적으로] 확신하다, 증명하다, 롬4:11, 고전9:2.
    Grammar Explanation  /  5420에서 유래된 강세형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인친 것(롬 4:11, 딤후 2:19), 인침(계 9:4), 인(계 5:1, 6:1, 8:1), 인봉(계 5:9).


    '예수의 흔적(痕跡)

    성경(갈라디아서 6:17)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지닌 고난과 핍박의 상처,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명하는 표식을 의미하며, 이는 복음 전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의 증거로 나타납니다. 
    이는 세상의 쾌락 대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 변화된 인격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표식이기도 합니다.
     
    의미 및 성경적 배경
    • 스티그마(στιγμα) : 헬라어 원어 '스티그마'는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나 소인(seal)을 의미하며, 바울은 자신이 받은 박해의 상처를 예수 그리스도의 '브랜드 표시'로 여겼습니다.

    • 고난과 핍박의 증표 : 복음을 전하다가 얻은 육체적 고통과 상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조롱과 핍박 자체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았음을 증명하는 흔적입니다.

    • 세상과의 단절 : 세상의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그로 인해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 속에서의 '예수의 흔적' 
    • 변화된 삶 : 겸손, 온순, 순종, 자기 부인 등 성령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는 인격의 변화.
    • 헌신과 희생 :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는 삶.
    • 증인된 삶 :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주님의 교회를 통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도록 삶으로 증거하는 삶. 
    요약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육체적 상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복음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나타나는 영적, 인격적 변화의 표식이며, 이는 곧 주님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삶의 증거가 됩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아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1️⃣ 역사적·문헌적 흔적

    🔹 신약성경 기록

    •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는 예수의 생애, 가르침,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기록한 가장 핵심적인 문헌입니다.

    • 1세기 말~2세기 초에 기록되었으며, 당시 공동체의 증언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비기독교 문헌 속 예수

    기독교 외부 기록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 타키투스(로마 역사가) :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록

    • 요세푸스(유대 역사가) : 예수를 지혜로운 인물로 언급
      → 이는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됩니다. 

    2️⃣ 고고학적·지리적 흔적

    🔹 예수가 활동했던 장소들

    • 나사렛 : 성장한 마을

    • 가버나움 : 공생애 중심지

    • 예루살렘 : 십자가 처형 장소

    이 지역들에서는 1세기 유대 사회의 흔적들이 발굴되어, 성경의 배경과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성물(聖物) 논쟁

    • 토리노의 수의 : 예수의 장례 수의로 전해지는 천

    • 십자가 조각, 못
      → 신앙적 의미는 크지만, 과학적·역사적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3️⃣ 신앙적·영적 흔적

    🔹 예수의 가르침

    • 사랑, 용서, 겸손, 이웃 사랑

    • “원수를 사랑하라” 같은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강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

    • 기독교의 탄생과 확산

    • 서양 윤리, 법, 예술, 교육에 지대한 영향

    •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가치관과 선택에 흔적으로 남아 있음

    👉 즉, 예수의 가장 분명한 흔적은 물질보다 ‘사람들의 삶과 역사 속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유물 하나로 남아 있다기보다, 문헌· 역사·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심(良心)(수네이데시스.  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Pronunciation  [ sünĕidēsis ]  
    Etymology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  1. 의식, 고전8:7, 히10:2, 벧전2:19.
    •  2. 양심, 도덕의식, 롬2:15, 고전10:29, 고후1:12.
    •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양심(아우토카타크리토스) 
    αὐτοκατάκριτος, ον Storng number 843

    1. 양심의 가책을 받는.  2. 스스로 정죄된.  3. 딛 3:11.  
    Pronunciation [ autŏkatakri- tŏs ]   
    Etymology  /  846과 263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양심의 가책을 받는, 스스로 정죄된, 딛3:11.
    • 관련 성경  /  스스로 정죄한(딛 3:11)

    아이스데시스(aisthēsis)  ἴσθη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144

    1. 직관.  2. 식별.  3. 통찰력  
    Pronunciation  [ aisthēsis ]  
    Etymology  /  143에서 유래
    •  1. 직관, 식별, 통찰력, 경험, 느낌, 지각, 빌1:9.
    • 관련 성경  /  총명(빌 1:9).

    143. αἰσθάνομαι Storng number 143

    1.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2. 깨닫다.  3. 이해하다  
    Pronunciation  [ aisthanŏmai ]   
    Etymology  /  제2부정과거 ᾐσθόμηνω, 가정법 α- ἴςθω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  a. 깨닫다, 지각 능력을 소유하다.
      •  b. 이해하다, 《반》ἀγνοέω, 눅9:45.
    • 관련 성경  /  깨닫다(눅 9:45)






    당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는 이유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선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 결정을 내릴 때마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지만, 종종 우리가 쉽게 무시하는 ‘직관(intuition)’이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직관은 오랜 경험과 무의식적인 패턴 인식을 통해 쌓이는 지혜의 축적입니다. 하지만 직관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신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직관을 믿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직관의 본질과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의사결정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직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도 함께 제시할 것입니다. 논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대인일수록 직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는 이유

    직관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정보가 무의식 속에서 융합되어 빠르게 내리는 결론입니다. 신경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직관적인 결정은 종종 논리적인 분석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복잡한 상황이나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직관이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적 지능과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이제 직관을 왜 신뢰해야 하는지, 그리고 직관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직관의 정의와 본질

    직관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 지식,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판단력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직관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무의식의 지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순간적인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머뭇거릴 시간 없이 빠르게 몸을 피하는 것도 직관의 한 예입니다. 이처럼 직관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쌓아온 경험을 활용해 결정을 내리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직관의 작용은 단순한 ‘느낌’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직관은 본능적인 반응과 다르게, 특정 경험과 학습의 산물입니다. 뇌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상황을 학습하고 패턴을 분석한 뒤,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결론을 도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관은 단순한 감정이나 우발적인 결정과는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관이 중요한 이유

    직관은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논리적 사고와 함께 우리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아래에서 직관이 중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 복잡한 문제 해결에 효과적
      논리적 사고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관은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종합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기업 경영자나 창업가들은 때로는 명확한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직관은 제한된 정보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합니다.
    • 시간 압박 속에서 신속한 판단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직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 중 선수들은 순간적인 판단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직관은 이처럼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순간에 유용합니다.
    • 창의성과 혁신을 자극
      직관은 우리가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은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제시하며, 특히 예술이나 과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직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그가 특정한 영감을 바탕으로 사고를 확장하면서 탄생한 결과입니다.

    직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상황

    직관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직관을 잘 활용하려면 직관이 빛을 발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관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합니다.

    • 경험이 풍부한 분야에서의 직관
      특정 분야에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사람일수록 그 분야에 대한 직관이 발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의 증상만 보고도 어떤 질병일 가능성이 높은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 정보가 불확실하거나 부족한 상황
      모든 정보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논리적 분석보다 직관이 더 좋은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직관이 기존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최적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 반복적인 패턴 인식이 중요한 상황
      직관은 반복되는 패턴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시장에서는 경험 많은 트레이더들이 직관적으로 시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빠르게 대응합니다. 이는 그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의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는 능력 덕분입니다.

    직관을 신뢰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

    직관은 단순히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경험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직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 경험과 지식의 축적
      직관은 오랜 시간 쌓은 경험과 지식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자기 인식과 감정 조절
      직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이 직관적인 결정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피드백을 통한 학습
      직관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직관을 점차 개선할 수 있습니다.
    • 마음 챙김과 명상
      마음 챙김과 명상은 직관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활동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무의식적인 지혜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결론

    직관은 논리적인 분석과 함께 우리의 의사결정을 돕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특히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나 시간 압박이 있는 환경에서는 직관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지식을 쌓고, 자기 인식을 높이며, 명상과 피드백을 통해 꾸준히 직관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결국, 직관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학습의 산물이므로 이를 믿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관은 우리가 마주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빠르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논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직관과 논리를 균형 있게 사용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도 강화될 것입니다.





    양심의 신비,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도덕적 직관으로의 실질적 탐험

    ■ 옮긴이의 말_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 (패트리샤 처칠랜드 지음, 박형빈 옮김, 씨아이알, 320쪽, 2024.01)

    인간의 양심과 도덕적 자각에 관한 탐구는 철학적 관점에서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되어왔다.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사상가들이 양심의 본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왔으며, 그중 일부는 이를 본능적이거나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고 다른 이들은 사회적이거나 문화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이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을 둘러싼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양심 :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도덕성의 기원과 발달에 대한 현대 과학의 최신 발견들을 통해 양심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한다. 이 책은 뇌신경과학,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의 분야를 통해 양심의 실체와 작동 원리를 탐구한다.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러한 과학적 발견들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이와 같은 독창적이며 다각적인 접근 방식은 우리의 양심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상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 양심에 대한 이해는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물리적 이해와 철학적 이해의 단절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인간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어떻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지, 왜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귀한 이상을 들먹이면서도 동시에 내부적 모순에 빠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또한 우리가 양심을 외치며 정의를 주장하는 현상 뒤에 숨겨진 심리적, 사회적 동기를 탐색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 책은 양심의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선보인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이 어떻게 뇌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진화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패트리샤 처칠랜드는 양심이라는 복잡한 주제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하여 접근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양심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하게 한다. 
    나아가 단순히 학문적 탐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성의 깊은 탐구를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조율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안내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양심과 분리된 선언을 발화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검토하게 한다. 
    특히 이 부분은 사이코패스와 도덕적 세심증에 대한 설명 그리고 설정점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도덕적 직관의 본질과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다 심오한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론이나 공리주의와 같은 기존 도덕철학의 관점에 대한 도전적이며 비판적인 시각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우리 각자가 양심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행동과 판단이 어떻게 도덕적 가치와 연결되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윤리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도덕적 직관의 복잡성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인류가 보다 도덕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학자, 학생, 일반 독자 모두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뿐만 아니라 때로 이러한 우리의 내면의 소리가 편향적이고 잘못된 기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도 지적한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신중한 탐색은 도덕철학, 신경과학의 분야에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해 더 깊이 천착하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또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도약하도록 도울 것이라 확신한다.

    박형빈 서울교대·윤리교육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이며,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와 가치윤리AI허브센터의 센터장이다. 
    미국 UCLA 교육학과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AI윤리, 뇌신경과학과 도덕교육, 인격교육 등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인공지능윤리와 도덕교육』, 『도덕지능 수업』, 『도덕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세종학술도서) 등이 있다. 
    역서로는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공역)(2019세종학술도서), 『윤리적 감수성』(공역), 『윤리적 판단력』(공역), 『윤리적 실천』(공역), 『윤리적 동기부여』(공역) 등이 있다.



    기독교의 주요 성경 번역본들 비교

    기독교에서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핵심적인 텍스트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각 번역본은 그 특성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으며, 그 목표나 대상 독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본 글에서는 기독교의 주요 성경 번역본들을 비교하여, 각 번역본의 특징, 번역 이론, 그리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은 성경 번역본의 선택에 있어 독자들이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성경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킹제임스 버전(KJV): 전통과 권위의 상징

    킹제임스 버전(KJV)은 1611년에 처음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영어권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번역본 중 하나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원래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명령으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성경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주로 직역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원문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의 단어와 문장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영어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킹제임스 버전은 언어적으로 매우 정확하고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당시의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영어 스타일을 따랐기 때문에 문학적 아름다움도 뛰어난 특징으로 꼽힙니다. 많은 교회에서 킹제임스 버전을 권위적인 성경으로 여겼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식 언어와 어려운 문법은 현대 독자에게는 읽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당시의 고전 영어가 사용되어, 오늘날의 영어와 문법이 달라서 읽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 단어나 표현이 현대 영어에서는 사용되지 않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2.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은 1978년에 처음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현대적인 언어와 이해도를 고려하여 번역된 성경입니다. NIV는 의역을 주로 사용하여, 원문의 의미를 보다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은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고 번역되었습니다.

    NIV는 다양한 번역 이론을 결합하여 문학적 아름다움보다는 의미 전달을 중요시한 번역본입니다. 예를 들어, 문장이 복잡하거나 구식 표현을 사용할 때, NIV는 이를 현대적인 어휘와 구문으로 바꿔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NIV는 모든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많이 선택되는 번역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NIV는 의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원문과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원문의 미세한 의미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NIV는 현대적인 번역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선택이지만, 원문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개역한글판(KRV): 한국적 전통을 지닌 번역

    개역한글판(KRV)은 1961년에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경 중 하나입니다. 개역한글판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문을 바탕으로 번역되었으며, 직역 방식으로 번역된 성경입니다. 이 번역본은 고전적인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개역한글판은 번역에 있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으며, 원문의 문법과 단어를 충실히 따르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이 번역본은 교회에서 예배와 설교 시에 자주 사용되며, 고전적이고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 전통을 중요시하며,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역한글판은 고전적인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번역에서의 어려운 표현이나 고어가 일부 독자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현대 한국어 성경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개역한글판이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4. 현대 한국어 성경: 이해도와 친숙함을 고려한 번역

    현대 한국어 성경은 2000년대 이후로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쉬운 한국어를 사용하여 원문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이 번역본들은 의역을 사용하여 복잡한 구문을 풀어쓰고, 현대적인 어휘와 문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새 번역이나 우리말 성경은 일상적인 한국어를 사용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대 한국어 성경은 기독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신앙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성경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은 현대 독자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편리함과 접근성을 제공합니다. 특히 청소년이나 신앙에 막 입문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 성경은 의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일부 독자에게는 원문의 세밀한 의미가 손실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합니다. 또한, 신학적 정확성이나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한 번역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디스크립션

    기독교 성경 번역본들은 각각의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KJV)은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권위를 자랑하는 전통적인 번역본이며,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은 현대적인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는 의역 중심의 번역본입니다. 개역한글판(KRV)은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환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번역본으로, 직역 방식을 채택하여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따르려 했습니다. 또한, 현대 한국어 성경은 쉬운 한국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된 책입니다. 각 번역본은 문학적 스타일, 언어의 정확성, 그리고 이해도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며, 독자들의 필요와 선호에 따라 적합한 번역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번역본의 특징을 이해하고 선택함으로써, 기독교의 신앙을 보다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국어 성경 번역본 비교

    번역본

    출간 연도

    특징

    추천 대상

    개역한글판

    1961

    고어체, 문어적이고 엄숙한 표현

    전통적 표현을 선호하는 성도, 장년층

    개역개정판

    1998 (개정 2005)

    고전미 유지 + 현대어 반영

    대부분의 교회에서 사용, 설교용

    표준새번역

    1993 (개정 2001)

    더 쉬운 현대어, 직역보단 의역 중심

    청소년, 초신자, 이해 위주 독자

    우리말 성경

    2004

    아주 쉬운 현대어, 읽기 편함

    어린이, 일반인 대상 읽기용

    새번역(바른성경)

    2001

    원문에 충실한 번역 + 읽기 쉬움

    성경 공부, 묵상용

    공동번역

    1977

    가톨릭/개신교 공동 작업, 직역보단 의역

    에큐메니칼 용도, 학문용








    그 성경이(헤 그라패,   η γραφη) 

    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Storng number 3588

    1.  이 사람
    2. τοῦ γὰρ καὶ γέ νος ἐσμέν: 왜냐하면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3. ὁ μὲν..
    Pronunciation [ hŏ ]

    1124.   γραφή, ῆς, ἡ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Pronunciation [ graphĕ ]   
    Etymology  /  112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성경(마 21:42, 요 2:22, 고전 15:3, 약 2:8, 벧전 2:6, 벧후 1:20), 글(마 26:56, 행 8:35, 롬16:26), 말씀(약 4:5).

  • 3551. 노모스(nŏmŏs) νόμος, ου, ὁ Storng number 3551

    1. 율법.  2. 롬 3:27.  3. 규칙  
    Pronunciation [ nŏmŏs ] 
    Etymology  /  기본형 νέμω ‘분배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율법(마5:18, 눅2:23, 롬2:14), 법(눅2:22, 요18:31, 행18:15).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그라페'(*)는 '율법'(*, 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Bruce,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보여준 뒤 본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는 중성으로 쓰였는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타락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적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될 자들의 옛 상태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12월 29일(월) 갈라디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聖經)(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But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so that what was promised, being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ose who believe.

    성경(聖經)이 모든 것을 죄(罪) 아래 가두었다.

    죄는 얄미운 놈이라고 하겠습니다.
    슬그머니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다시 숨어버립니다.
    잊을만하면 다시 일어나 고개를 들고 우쭐거립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도망가듯 하면서도 꼬리를 감추고
    언제 또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리는 고약한 놈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하게 드러나셨습니다(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며 그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값을 온전하게 치루셨습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율법이 죄를 다스렸습니다.
    율법은 죄를 완전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통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붙잡은 후에 더 이상 죄의 형벌을 주장할 수 없도록 다스림으로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은 율법을 강조하며 율법을 준수할 때에만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신약은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여 죄값을 온전하게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리(요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따라서 성경은 주의 영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의 내용은 율법(토라)과 선지서(느비임)와 성문서(케투빔)으로 구분하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주로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토라, 율법서, 모세오경).
    반면에  이방인 즉 유대인이 아닌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이성과 감정과 행동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어 그 시대의 문화와 배경으로 기록하게 하셨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에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제 먹었던 맛있는 음식은 어제를 위한 음식이었던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을 통하여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은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배경과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1. 배경 및 문맥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율법은 오히려 사람을 죄의식에 사로잡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참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의미

    이 구절에서 "성경"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즉, 율법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지, 얼마나 죄에 물들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율법 자체는 죄를 없애주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의 죄를 인지하도록 돕고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보여주고,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율법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역할도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그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율법 아래에서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어 있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면 죄의 사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율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율법은 약속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지만, 그 자체로는 약속을 이루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시대적 구분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도록 해줍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특별한 은혜였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입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은 율법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3. "죄 아래 가두었다"는 표현의 함의

    죄의 문제를 인지하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의 본질과 심각성을 보여주어 회개와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합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죄가 세상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이기시고 구원을 베푸셨는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화목케 하시고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며 회개와 화목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나니"

    히브리서 9장 1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사 영원한 구속을 이루시고 천적의 성소에 들어가시되 이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니"

    갈3:22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볼 수 있습니다.

    • 율법은 어떻게 죄를 드러냅니까?
    • 율법은 왜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까?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율법과 믿음은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 갈라디아서 3:22절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갈라디아서 3:22절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3:22절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에서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율법이 사람을 죄의식에 사로잡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와 용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의 일부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졌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표현은 죄가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 모두가 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의로움을 주시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보기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22-24 해설

    22이 구절은 율법의 역할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가두어져 있어 스스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약속된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만 참된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2에서 나오며, 이는 구약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인류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약속)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람을 죄의 노예 상태에 묶어두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요 의미
    • 율법의 역할 : 율법은 사람에게 의롭게 살도록 가르치지만, 결국 아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어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 죄의 보편성 : '모든 것(온 세상)'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며, 율법 아래 놓인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혔음을 선언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의 인도 : 율법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죄책감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 약속의 중요성 : 율법은 일시적인 역할을 할 뿐,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는 표현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 나오는 매우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22)

    아래에서 핵심 의미를 단계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의 뜻

    ‘가두었다’(헬라어 수네크레이센. συνέκλεισεν, synekleisen)는 사방을 막아 도망갈 수 없게 하다, 완전히 포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 인간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것

    •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를 숨길 수 없도록 폭로한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은 죄 아래에 가두셨는가?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리는 이것입니다:

    목적이 정죄가 아님 목적은 구원으로 이끄는 것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려 함이라”

    즉, 

    • 인간이 자기 의, 자기 노력, 율법 준수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략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거울입니다 (롬 3:20) 

    3. 바울의 논리 구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 율법이 주어짐

    2. 율법은 죄를 드러냄

    3.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확인

    4. 인간의 길이 막힘

    5.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 됨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갈 3:24) 

    4. 신앙적 적용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 나는 여전히 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고 있는가?

    • 아니면 죄 아래에 갇힌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만 붙들고 있는가?

    👉 “죄 아래에 갇혔다”는 인식은 절망이 아니라 복음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한 문장 요약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는 말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영어 성경(NIV)을 직역하면 ' 성경은 온 세상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을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새한글번역 /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하여 그 약속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나 성경은 온 세상이 죄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약속된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 /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 /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기 위하여 율법과 언약을 대조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마음이 요동하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안타까워하는 바울은 3장 1절에서는 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하며 그들이 진리 안에 다시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고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변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이자 율법주의자들도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이를 뜻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어제 본문은 바울의 다소 격양된 어조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였다면 오늘 본문은 책망의 이면에 진리로의 회복을 소망하는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15-18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1절과 대조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본심입니다. 
    책망을 통한 진리로의 회복입니다. 
    사람들이 책망을 듣지 않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하는 시기에 방역을 소홀히 하는 아이들에게 방역 수칙을 잘 지키라고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마음에 방역의 중요성이 깊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강하게 말할 때는 아이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약속’의 중요성을 사람의 약속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예대로 말하노니’에서 ‘예대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조차 사람 사이의 언약, 즉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누가 깰 수 있겠느냐입니다. 
    이신득의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왔기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16a.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약속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16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16b.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네 씨’는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자손’을 뜻하는데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라 자손 중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을 믿지 못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후에 제정된 율법’이 폐할 수 없음을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이라는 숫자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시기를 뜻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 생활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언약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았던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약이 나중에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유업’의 문자적 의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재산’을 뜻하지만,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뜻합니다. 
    ‘유업’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넣어 18절 상반절을 읽어 보면,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은 무의미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갑니다. 
    이 진리는 바울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다음 구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21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 구절은 율법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인간이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범법이란 ‘기준이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뜻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난 것이 범법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았더라면 율법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인간다운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죄악된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율법은 인간의 범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율법이 제정되기 전, 인간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윤리가 무너지고, 심지어 양심조차 무너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율법이 없다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의 중요한 기능 둘째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역할 수행입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절의 ‘천사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 있었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란 하나님께서 중보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 중보자 모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음 구절이 알려줍니다.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중보자 모세는 백성의 편만 들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의 편에만 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의 역할이 중립자로서 양자를 연결하는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보자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중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중재자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제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중재는 실패합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았습니다. 
    흔히 생각할 때 모세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고 하겠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을 상황에서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변호해야 했으며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20절 하반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곧 하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셨기에 중보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용한 것인가 또는 저속한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러한 우려를 다음 구절이 불식시켜줍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19절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율법은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하나님의 악속들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능히 살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즉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전부 행할 정도로 도덕적으로나 의지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과 영적 무능력함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제한적 역할입니다. 
    율법이 제한적 역할을 하기에 온전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온전한 것이 올 것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22절)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킵니다(헤 그라패). 
    그렇다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은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에 속박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전부 다 지킬 수 없었으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죄 아래 갇혀 있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죄의 속박에 있는 자신을 건져내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 지금도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어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숙고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약속의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귀한 통로로 살아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선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 않게 하시어 저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시고, 약속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약속의 말씀을 매일 숙고함으로 저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전해지는 통로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약속의 말씀이 고난 중에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 중 ‘네 씨’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4.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이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은 크게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모든 인류가 죄 아래 놓였다
    이것을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을 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죄 아래 놓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수저, 베개, 이불, 몸에 지니는 주머니 등에 한자로 복(福)자를 새겨 놓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또 죽은 조상들을 극진히 섬김으로 조상들에게 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깨달은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들이 아무리 이 땅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이 땅에 보내주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단지 죄에서의 구원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이며 목적
    22절은 ‘그러나’로 시작을 합니다. 
    앞 구절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연결해 보겠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제사장 직분이 필요 없고, 메시야가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자는 구원에 이르게 하면 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자는 죽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게 되는 것은 바울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성경’이란 단어 앞에 ‘그’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신명기 27:26에 기록 된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으로 보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모든 백성을 율법으로 인한 죄 아래 가두시고 아멘하게 하여 확답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인간을 율법으로 인해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한 것일까요? 
    죄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직시하게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맺어주신 언약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되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의 기본적인 요점은 인간을 향상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서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한 연후에 그들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하고 마침내는 복된 씨(즉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기도 제목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가슴에 깊이 새겨지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 속의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힘이 생겨나도록 기도합시다.
    내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오늘 하루도 성도로 살아내길 바랍니다.


    저주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구속받음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8절과 22절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큰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이다. 
    법에 의하여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정부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둔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즉시 그를 가둔다. 온 세상이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 3:23, 10)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었던 저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옥”(벧전 3:19, 20)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슥 9:12)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 102:19, 20)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 7).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죄인을 이야기 해보자.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날에는 의심과 망설임이 많았고 쉽사리 자기 변호를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을 확신시키려고 구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 곧 사면팔방의 벽으로 둘러 싸여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큰 바위 아래 생매장시키는 것같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마치 율법의 돌비가 우리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같이 느끼고 한장의 대리석이 우리의 심장을 터지게 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우리가 받도록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심의 성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이 약속을 붙잡을 때에 즉시 감옥문은 활짝 열릴 것이며 그러면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