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에서(로마서 8:1-2)
1. 이 말씀에 대한 오해
[롬 8:1-롬 8: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킹제임스 성경)-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봐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다. 죽을 때 잠깐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분명히 킹제임스 성경에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성령으로 살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2.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많이 썼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이 신약성경의 성구들을 컴퓨터에 입력시켜 밝혀낸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 주안에” “그 안에”라는 표현이 바울 서신 가운데 164차례나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 12:1-고후 12:2]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분명 사도바울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도 바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평범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사도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롬마서 16장 1-16절에 보면 27명이나 되는 로마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유심히 보아야할 것은 그가 즐겨 썼던 명칭이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였습니다.
[롬 16:3-롬 16:3]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 16:7-롬 16:7]
(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롬 16:9-롬 16:10]
(9)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사도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광야 신학교에서 3년 동안 예수님의 계시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3.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안에”라는 전치사의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집안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로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의미를 충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5:1-요 15:5]
(1)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에서 ‘내 안에 거하라’는 의미를 다음 구절에 예수님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안에”라는 정확한 의미는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붙어 있습니다.
“안에”라는 의미는 연합이요, 하나님 됨입니다.
[고전 6:17-고전 6:17]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포도나무에서 수액을 가지에 보냅니다.
수액이 가지를 통해서 흘러가서 포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익어가는 것입니다.
가지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지 스스로 절대로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지가 할 일은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만약에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곧바로 죽습니다.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내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내 의로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움으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예수님을 죽인 것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이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의 열매”는 생명과 멀어지고 그리스도와 멀어집니다.
[롬 10:1-롬 10:3]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자의 의를 세우려고 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의와 멀어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자기의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너희의 아비가 마귀라고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의의 뿌리는 마귀입니다.
단순히 범죄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단순히 범죄하는 것은 쉽게 깨닫고 회개를 하지만 자기의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깨닫고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무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요 14:20-요 14:20]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은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그때에 사도들과 성도들 약120명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과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가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을 하면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말씀을 믿는 순간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성령으로 믿는 것입니다.
넓게 로마서 6장 전체 말씀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롬 6:6-롬 6:7]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갈 2:20-갈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6:11-롬 6:11]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4-롬 6:14]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22-롬 6:22]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이 말씀이 성령으로 믿어지게 되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 되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이 죽고 영의 사람이 되어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마음껏 사역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말씀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개역 개정)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공동 번역)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게 '신(하나님)의 존재'다.
그러나 믿음의 은혜가 주어지면,
아무리 안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는 게 신의 존재요 그가 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이시다.
이렇듯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또한 '예수의 영'이라고도 불린다.
그분이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위격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갈라디아서 3:26-28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둔
믿음으로 새 정체성을 얻은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죄된 옛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삶을 완전히 수용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우리가 성령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시키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경의 여러 구절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14; 빌립보서 1:1; 로마서 8:1). 골로새서
3:3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못 본 체 하시거나 그냥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건 공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죗값은 치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품으신 모든 분노가 자신의 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합당한 벌을 대신 받아 고통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요한복음
19:30).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지상에서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흘 후에 증명하셨듯, 지상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8:7; 마가복음 16:6; 고린도전서 15: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타락한 세상을 대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실 때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반역 행위의 죗값을 성공적으로
치르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 자신의 죄의 속전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전과 기록은
우리가 품었던 모든 죄된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아무리 정결하게 해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분과의 관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12). 성경은 우리의 원래 죄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우리와 위치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죄
목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는 예수님의 완전한 행위와 뒤바꾸십니다 (고린도후서 5:21). 십자가 발치에서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된 옛 본성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이 교환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불완전함
대신에 자신의 아들의 의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13; 히브리서 8:12).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우리의 죄의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며, 우리의 영생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18; 20:31).
1. 지식. 2. 지성
Pronunciation [ daʽath ]
Etymology / 304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9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 4:1, 6:6(다앗 엘로힘)
-
2. 명사, 여성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Pronunciation [ yâdaʽ ]
Old Testament / 940회 사용
해로동혈(偕老同穴)
- 함께 해(偕), 늙을 노(老), 한가지 동(同), 구멍 혈(穴)
-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으로, 생사(生死)를 같이하자는 부부(夫婦)의 굳은 맹세(盟誓)를 이르는 말.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의
고사성어입니다.
부부란 서로 믿고
의지할 때
진정한 가족과 가정의 안녕을 기할 수 있는 겁니다.
젊을 때는 아내가 남편에 기대어 살고,
나이가 들면
남편이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하여 여보, 당신 이라고 부릅니다.
여보(如寶) 라는 말은
"보배와 같다"는 말이고,
당신(堂身)은
"내 몸과 같다" 라는 말이랍니다.
마누라는
"마주 보고 누워라"의 준말이고,
여편네는
"옆에 있네" 에서 왔다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귀한 보배요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세월이 가면 어릴 적 친구도,
이웃들도, 친척들도 다 곁을 떠나지만...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은
아내요, 남편이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며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지
바라보는 배필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마법" 이랍니다.
남자(男子)는 불량품(不良品)이 많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같다.
흔히들 그런 얘길 한다.
"여자가 男子(남자)보다 훨씬 더
高尙(고상)한 作品(작품)이라고..."
男子(남자)는 혼자 살지 못한다.
신(神)이 남자를 만들어 놓고 보니
혼자있는 것이
정말 보기에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도와주는 配匹(배필)로
女子(여자)를 만들었단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남자를 도와준다.
밥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 주고,
잠도 자게 해주고, 때로는 엄마 같고,
때로는 딸 같고, 또 때론 아내 같다.
여자는 혼자서도 잘 산다.
남자보다 훨씬 高級(고급)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材料(재료)부터 다르다.
남자는 흙이요 여자는 뼈다.
그러니까 ㅡ여자가 훨씬 더 고급품 (高級品) 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아기도 여자에게 생기고 여자가 낳는다.
불량품인 남자에게 맡겨 놨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構造(구조)가 훨씬
고 단계임을 알 수 있다.
남자 혼자 살면 곧 廢人(폐인)이 되지만,
여자 혼자서는 짱짱하게 잘도 산다.
아무리 봐도 남자는 불량품(不良品),
여자는 고급품(高級品)임이 맞는 것 같다.
부부(夫婦)가 나이가 들어서 늙어가면
으례 남자(男子)가 먼저 죽어야 한다.
남자가 혼자 남아 있으면
돌보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 혼자 살아 있으면
그것만큼 비참(悲慘)한 건 없다.
살아 있을 때
아내와 시장(市場)도 자주 가고
가능(可能)하면 손도 잡고 같이 다니고
무거운 건 남자가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힘만 센 불량품(不良品)이니까....
허허... 늙은 남자 혼자
구부정하게 터벅터벅 걸어 가는 뒷 모습~
그것만큼 쓸쓸하고
처량(凄凉)해 보이는 건 없다.
남자는 살아 있는 동안 남자를 돌봐주는 아내에게
잘하면서 살아야 한다.
평생(平生)을 밥 해주고 나를 돌봐 준 여자(아내)는
이 세상(世上)에 무엇과도
비교(比較)할 수 없는 고마운 존재(存在)다.
어제 저녁에
아내와 시장(市場)을 다녀오면서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여보, 항상(恒常)
나하고 같이 다녀야 돼!
남자는 혼자서 다니면
참 쓸쓸해 보이고 안돼 보여...
여자는 혼자 다녀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남자는 불량품인 것 같아."
소소한 일로 다투고 돌아 누웠으면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고 잡아줘라.
그게 불량품 남자가
할 수 있는 역할(役割)이다.
그나저나 건강(健康)해야
영원한 불량품을 면할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親舊)분들의
건강(健康)을 응원(應援)합니다.
12월 27일(토) 고린도후서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 자기 시험: 단순히 '착한 신자'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철저히 검토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 "확증하라": 시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그 증거를 찾아 확신하라는 뜻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예수님이 너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가짜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 일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이 성경적이고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자신의 믿음이 진정한지, 삶으로 증명하고 확신하라는 강력한 영적 도전의 메시지입니다.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
1. 원문 의미 (헬라어 관점)
-
시험하라 : πειράζετε (페이라제테)
→ 진위를 가려보는 시험, 검증 -
확증하라 : δοκιμάζετε (도키마제테)
→ 불순물을 제거한 금속처럼 검증을 통과한 상태를 확인하다
👉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성과 실제 상태를 점검하라는 강한 권면입니다.
2. 말씀의 문맥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
바울의 사도권을 시험하고
-
외적인 기준과 인간적 판단으로 신앙을 평가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시험하기 전에, 너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먼저 확인하라.”
즉, 신앙의 기준은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가’ 입니다.
3. “확증하라”는 말의 핵심
이 말씀은 “구원을 늘 의심하라” “완벽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가
믿음이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는가
회개와 순종의 방향성이 있는가를 점검하라는 뜻입니다.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
-
나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는가?
-
내 믿음은 고백에만 있는가, 아니면 삶으로 드러나는가?
-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건강한 자기 확증의 열매
-
교만 → 겸손
-
형식 → 진실
자기의 → 은혜 의존
5. 복음적 균형
중요한 점은,
확증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말씀이 아니라, 참된 믿음 위에 서게 하는 은혜의 초대입니다.
확증할 수 있는가?
결국 확증되는 것은 우리의 약함
바울의 진짜 목적
결론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시험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제테”= ‘되돌아보다’. ‘자세히 조사하다, 살펴보다’라는 뜻.
‘노력하다, 분투하다, 책임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 말씀대로, 그 믿음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혹시, 나태하지는 않았나, 혹시, 게을러지지는 않았나,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나,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시험하고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후10: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그 사람은 주님과 동해하고 있는가?’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사람을 볼 때 얼마나 외모를 보나요? 가진 것 보고, 배운 것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을 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를 시험하고 뒤돌아보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시험을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눈을 돌리면 내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고후13장 5절을 읽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는가?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실패, 실격,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나의 눈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살피고 점검했다면 이제는 “나는 믿음이 있는가,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고 여러달 후에 한 분을
담임목사로 청빈 위원회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이런 흠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청빙을 해도 될까요?”
첫째, 이 분은 중년이 되엇는데도 결혼을 못했습니다. 둘째, 이 분은 목회를 하면서 가끔 사업도 하는 분입니다.
셋째, 이 분은 외모가 너무 못생겼습니다. 넷째, 이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다섯째, 이분은 말이 너무 어눌해서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여섯째, 이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개척하면서 옮겨 다니십니다.
일곱째, 이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누굴까요?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진 것 배운 것 일생 쌓아놓은 것일까요? 지위와 명예, 직분인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까?
세상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낙제자 불합격자입니다.
내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성공자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진단하고 바르게 검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내 영이 사는 길이요. 내 믿음이 바로 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참 신앙인과 신앙인답게 보이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참 신앙인은,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신앙의 불합격자이냐? 낙제생이냐? 실패자이냐?
성도가 언제 실패자가 되고, 언제 불합격자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예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기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찬송과 헌신과 봉사.... 이런 것은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대화하고 사랑하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항상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여러분 건물을 잘 점검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 보셨죠? 다리를 점검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셨죠?
건강진단도 잘못 점검되어 중병에 걸리는 분들... 자동차도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상태도 항상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지.. 내 봉사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지... 찬송 중에 소망이 있는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영적상태를 진단하고 체크하셔야 합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주님! 이 시간 주님의 말씀 듣고 제 마음을 엽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께 저를 맡깁니다.
저는 매일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도함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봉사와 헌신이 온전히 주님께 집중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2월 26일(금) 고린도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즐겨내는 자(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즐겨(2431) 내는 자(1395)
즐겨(2431) 히라로스(hilarŏs) ἱλαρός, ά, όν
Pronunciation [ hilarŏs ]
- Etymology / 2436의 동일어에서 유래
-
1. 유쾌한, 기쁜, 즐거운, 친절한, 은혜스러운, 고후 9:7.
-
관련 성경 / 즐거운(고 후9:7).
내는 자(1395) 도테스(dŏtēs) δότης, ου, ὁ
Pronunciation [ dŏtēs ]
Etymology / 1325의 어간에서 유래
-
1. 주는 사람, 고후 9:7.
-
관련 성경 / 내는 자(고후 9:7).
한글개역 성경에 연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13구절(구약 2, 신약 11)
대하 34:9, 14. 막 12:41, 43, 눅 21:1, 요 8:20, 고전 16:1, 2, 고후 8:2, 20, 9:5, 11, 13
헌금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2구절(눅 21:1, 4)
헌금과 연보의 차이
헌금의 사전적 정의는"돈을 바침. 또는 그 돈" 또는 "주일이나 축일에 하나님에게 돈을 바침. 또는 그 돈."을 말합니다.
Pronunciation [ gazŏphü- lakiŏn ]
Etymology / 1047과 5438에서 유래
-
1. [문자적으로]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금고, 보물실, 막12:41,43, 눅21:1, 요8:20.
관련 성경 / 헌금함(막 12:41, 눅 21:1, 요 8:20).
따라서 헌금(offering. gift)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돈)을 말합니다(고르반, 도라).
Pronunciation [ kŏrban ]
Etymology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
1. 고르반, 예물, 막 7:11.
-
관련 성경 /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1. 선물. 2. προσφέρειν δ. : 선물을 가져오다. 3. 히 11:4.
Pronunciation [ dōrŏn ]
-
I. [기본형] 선물, 선사품, 예물.
-
1. [일반적으로] [주] προσφέρειν δ.: 선물을 가져오다, 마2:11, 엡2:8, 계11:10.
-
2. [특히, 제물을 가리켜서] 히11:4.
-
a. [주]
-
b. εἰς τὰ δ. βάλλειν: 제물을 넣다, 드리다.
-
c. προσφέρειν τὸ δ.: 그의 제물을 가져오다, 마5:23,24, 8:4, 히5:1, 8: 3,4, 9:9.
-
d. ἀφιέναι τὸ δ.: ~의 제물을 남겨두다, 마5:24, 23:19, 막7:11.
-
-
-
관련 성경 / 예물(마 2:11, 히 5:1, 계 11:10), 헌금(눅 21:1, 4), 선물(엡 2:8). [동] 드리다.
연보(contribution. collection)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바치는 예물(돈)이라고 하겠습니다.
연보는 옆으로 향하는(이웃과 교회) 물질적 나눔이라고 하겠습니다.
뉴욕 파트리스교회의 헌금과 연보에 대한 신앙적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十一條)는 신앙의 의무
감사(感謝)는 신앙의 생활
선교(宣敎)와 구제는 신앙의 실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려면 필요한 물질이지만 그 물질을 나를 위하여 먼저 사용하지 않고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이웃과 다양한 기관들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믿음을 갖추는 것이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연보는 '내어 놓아 남을 돕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나 교회 간의 교제(코이노니아)를 위한 모금을 의미하며 성경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요약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연보는 '나누고 돕는 돈(구제금)'으로, 목적과 사용처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의미: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예물.
- 어원: 헬라어 '도라(dora)' 또는 '고르반(qorban)'.
- 특징: 예배 때 드리는 십일조, 감사헌금 등.
- 목적: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감사.
- 의미: 가난한 자를 돕거나, 성도 간의 교제(코이노니아)를 위해 '내어 놓아 나누는 돈'.
- 어원: 한자어 '捐(내어놓을 연)', '補(도울 보)'.
- 특징: 바울 서신(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등)에서 강조된 성도들의 구제 헌금 (예: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
- 목적: 이웃과 교회를 돕는 나눔과 섬김, 교제.
- 방향 : 헌금은 '위(하나님)'로, 연보는 '옆(이웃/교회)'으로 향하는 물질적 나눔.
- 용어 :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헌금'이 더 적합하며, 성경적 의미의 '나눔'을 강조할 때는 '연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9:1-15
고린도후서 9장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며,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의 원칙과 결과를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통해 풍성한 연보가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연보의 준비와 동기(9:1-5)
열심과 준비(9:1-2)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열심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작년부터 준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에게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준비의 중요성(9:3-5)
그러나 내가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물론이고 우리가 믿던 것까지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전에 약속한 너희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자발적 헌금의 원칙 (9: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 (9:8-11)
하나님이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사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나니,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하면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헌금의 결과(9:12-14)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많은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그들에게와 모든 사람에게 순종함으로 복종하며, 그들로부터 오는 기도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라.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께 감사(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해석 : 기쁨으로 드리는 연보
1. 연보의 준비와 동기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연보를 준비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열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연보가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열심과 준비 : 고린도 교회의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준비의 중요성 : 연보는 미리 준비하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헌금이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을 통해 헌금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자발적 헌금의 원칙 : 헌금은 인색함이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 :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와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연보(연보)(2129) 유로기아( ĕulŏgia) εὐλογία, ας, ἡ
Pronunciation [ ĕulŏgia ]
Etymology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1. 보고. 2.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3. 금고
Pronunciation [ gazŏphü- lakiŏn ]
Etymology / 1047과 5438에서 유래
-
1. [문자적으로]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헌금함, 금고, 보물실, 막12:41,43, 눅21:1, 요8:20.
-
관련 성경 / 헌금함(막12:41, 눅21:1, 요8:20).
금
구약
헌금은 제물과 구별되며 구약에서부터 존재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민 31:5)
하나님께 드려서 간직한 후 공적으로 사용(수직적 수평적 의미)
내게 주신 것 중에서 이것은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봉헌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행위
대하 34:9, 34:14
신약
복음서
막 12:41, 43 눅 21:1,4, 요 8:20
연보
연보는 신약의 교회가 이웃이나
교회의 필요를 특정한 목적을 갖고 사용할 목적으로 준비 (수평적 의미)
롬 15:26,
고전 16:1,2
고후 8:2,20,
고후 9:5,11,13
차이점
1. 목적: 연보는 타인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며,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적 행위입니다.
2. 대상: 연보는 가난한 이웃이나 교회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표현으로 드려집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 교제)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후 9:13)
사람을 섬기는 연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됨
3. 의미: 연보는 이웃 사랑과 구제의 의미를 강조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을 나타냅니다.
헌금과 연보의 복음적 구분
1. 구약의 헌금 — 제사 제도의 일부
구약의 헌금(제물, 십일조 등)은 제사 제도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습니다.
이는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상징적 제사 행위였고,
성전 중심의 신앙 구조 안에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헌금과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히 10:10–14).
➤ 예수께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모든 제사를 끝내셨습니다.
2. 신약의 연보 — 사랑의 나눔
신약에서는 헌금(獻金)이라는 말보다 **연보(聯譜, ‘모아 보탠다’)**가 사용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연보를 “은혜의 일”이라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성도 간의 사랑과 섬김으로 복음의 열매를 나누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연보는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해(고후 8:4)
복음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빌 4:15–18)
시행되었습니다.
3. 헌금 개념의 오용
오늘날 교회는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돈”**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신약의 복음 이해에서 보면 율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은과 금이 다 내 것이라”(학 2:8) 하셨고,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헌금을 많이 드리면 복을 주신다는 식의 가르침은
거래적 신앙이며,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4. 복음적 헌금의 원리
신약에서 헌금(또는 연보)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의 반응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즉, 감사와 자발성, 그리고 복음 전파의 목적이 중심입니다.
예배 중 헌금은 예배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감사와 순종의 표현으로 포함될 수 있을 뿐,
예배의 본질은 아닙니다.
12월 25일(목) 고린도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라 지금은(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보라 지금은(Now is the time)
이두 눈(ιδου νυν)
ἰδού
Storng number 2400
Pronunciation [ idŏu ]
관련 성경 / 보라(마 1:23), 보다(계 6:5)
3568. 지금 νῦν( nün)
Pronunciation [ nün ]
관련 성경 / 지금(마 24:21, 눅 19:42, 살후 2:6), 방금(요 11:8), 현재(롬 8:18), 이때(요 4:23), 벌써(요 16:32), 금생(딤전 4:8).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사 49:8의 인용이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첫번째 질문은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두번째 질문은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인가?
세번째 질문은 각각의 일에 가장 합당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합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보라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때를 말합니다.
그 시간에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시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특징을 이렇게 강조합니다(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은 순리적 기능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순리적 기능을 오히려 뒤집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나라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경제적인 위기는 나라 빚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4,632조는 국민 1인당 8,963만원
이념적인 위기는 좌우 대립으로 인하여 팽팽한 대결구도를 형성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 비율은 4점 만점에 3.52(2024년 기준)
선진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랑하지만 금융권에서 겨우 40위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100대 은행 가운데 한국계열의 은행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모든 성도들에게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사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때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모두 마음과 뜻을 모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합시다.
이는 믿음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닥쳐올 때 은혜와 복음이 가장 중요한 무기이자 도구임을 상기시키며, 현재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요 의미
- 은혜의 시기 :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라는 점을 선포합니다.
- 구원의 날 : 현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 지금에 집중 :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믿음과 은혜에 집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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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이사야 49:8: 이 구절의 인용 출처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누가복음 12:49-53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인생살이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고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좀 더 선량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사회구조적 악에 대해 신자들로 하여금 눈감고 체념하는 숙명론적 태도를 갖도록 그릇 인도함으로써 불의한 현실을 은폐하고 합리화해주는 역할을 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역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인식하여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결코 둘로 나뉠 수 없는 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신념 아래 복음을 선포하고 교인을 양육하며 힘닿는 대로 사회 참여도 하는 일부 깨인 교회를 제외하고, 대다수 한국교회는 아직도 구시대의 망령인 흑백 도식적 이분법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전혀 별개이거나 심지어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개인 구원, 그것도 개별적 신자들의 영혼 구원만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물론 이런 평가에 대해 소위 보수 신앙을 가진 목회자와 교인들은 거부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참된 그리스도적 구원은 개인 영혼의 구원이며 이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 건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와 신자들의 노골적인 정치 참여는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서의 전통에 비추어 용납될 수 없다. 개인 구원이 먼저이고 사회 구원은 나중이다"라고 응수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복음의 비정치적 선포와 복음의 정치적 선포가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30년 가까이 보수 교회와 진보 교회,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신앙생활을 해온 내 경험에 비추어, 교리와 신학을 놓고 보수가 옳으냐 진보가 옳으냐를 왈가왈부하기보다는,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의 태도를 기준점으로 해서 과연 어느 쪽이 예수의 입장에 더욱 근접하고 있느냐를 겸허한 자세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서 무엇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예수의 활동 영역이 세상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활동 공간은 폐쇄적이지 않다. 예수의 관심사는 세상, 세상 사람들, 인생살이의 온갖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현실에 집중된다. 예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 아래 다수의 힘없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힘겹게 이어가는 잘못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한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힘 있고 가진 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분노로 표출된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종교와 정치, 하나님나라 복음의 선포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해방, 불의한 권력의 몰락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 회복, 예루살렘과 갈릴리,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 기도와 행동, 기적과 사회에서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주체적 자의식의 회복,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시각과 전망과 분석 가운데서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눅 12:49)고 단언하는 예수.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 아느냐?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눅 12:51)고 거짓 평화의 세상을 향해 폭탄선언을 하는 예수.
보수 신앙의 교인이든 진보 신앙의 교인이든 우리 모두는 예수의 이 신념에 찬 믿음 앞에 자신을 겸손히 세우고 '내가 이 세상에 질러야 하는 불은 무엇이며, 내가 분열을 일으켜야 할 이 땅의 거짓 평화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12월 24일(수) 고린도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의 편지(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 합니다.
향기가 아니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불행을 퍼붓는 편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You are a letter from Christ)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편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의 행동과 변화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을 뜻하며, 21세기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됩니다.
- 우리가 곧 편지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우리가 너희에게 쓴 편지"이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 삶으로 증거하는 복음 :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격이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이며,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님을 읽고 알 수 있게 됩니다.
- 성령의 역사 : 이 편지는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되며, 행함이 있는 믿음과 삶의 변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 내용 : 한 독실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쓰게 했다고 전해지는 아홉 편의 편지 모음집.
- 주제 :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영적인 정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1-6)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여 편지라는 말을 두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지라는 것은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취하게 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 문화의 하나의 형식입니다.
흔히들 "그 문화 수준이란 그 사용하는 종이의 분량만큼 평가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문화인이요, 문화 국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종이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주로 휴지만 사용하는 터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휴지 외에도 여러 가지의 용도가 있겠습니다만은 그 가운데서도 편지를 많이 받고 많이 쓰고하는 것이 문화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라는 말을 써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편지란 서로의 소식이나 용건을 알리며, 그리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수필이나 소설, 시와는 달리 쓰는 사람이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받는 대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 속에는 보내는 사람의 인격과 구체적인 소원이며, 뜻이 숨김없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에는 그 대상과 목적 또는 방법에 따라 몇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공적으로 다른 단체에게 보내는 공동의 서한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수신자 외에는 절대로 뜯어 볼 수 없도록 사인이나 인장을 찍어 밀봉을 한 비밀 편지입니다. 이런 편지중 하나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보낸 요압 장군앞으로의 편지입니다. 만약 우리아가 자기를 죽게하라는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아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어인이 찍힌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고 그대로 갖다바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즈음도 밀봉된 편지는 비싸고 개봉된 편지는 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편지는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서 보내는 것임에도 아예 신문 같은 것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읽고 모든 사람이 평가해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후서 역시 공동 서한이면서 공개 서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글로서 표현되는 것이기에 몇가지 장단점의 특징을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단점으로서는, 첫째 얼굴과 얼굴을 볼 수 없는 가운데서 편지를 쓰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100퍼센트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라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하는 것 만큼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 만큼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단점은, 전해진 편지는 자기 나름대로 읽기 때문에 전해진 다음에 오해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편지로는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 충고나 감정적인 이야기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한 가운데 서로의 의견을 듣고 감정을 읽으면서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닌 피차 일방적인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편지가 갖는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계속 남아 보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결국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글로 쓰여진 편지는 계속 남아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 쓰여진 편지는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테이프 등 보다 종합적이고 편리한 매체들이 많이 있지만, 책은 자기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이므로 여전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편지는 반복해서 읽고 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칫 놓치고만 문장이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손치더라도 거듭 읽고 생각하므로 그 뜻을와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는 모든 사람이 볼 수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남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귀한 본문을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글로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오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글이라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해 주었으므로, 오늘 이 시간까지 성경을 읽을 수가 있으며 복음에 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글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글이 종이가 발달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어디에다 쓰여졌는가 할 때, 초기에는 주로 돌에 새겨졌으며 그 다음에는 나무에 그리고 제일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잘 손질하여 거기에 글을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진 것 중에는 성경책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특별히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파피루수(papyrus)라는 갈대의 껍질을 벗겨서 엇갈리게 붙여 평면을 만든 다음 거기에 글을 썼던 것인데, 그런 이후에 여러 가지 발달 단계를 거쳐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와 같은 좋은 종이에 글을 쓰며, 또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편지는 먹이나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며, 또한 돌비나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쓴 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비에 쓰는 아주 신비로운 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제 편지의 내용인 1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혹 너희에게 맡기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며 천거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쓰게된 것에는 그만한배경이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한 교회였습니다. 어렵게 세운 교회이지만 교회내에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고 보니, 분쟁이 일게되고그 분쟁은 장점은 덮어 놓은 채 단점을 보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가운데 마침내 사도 바울을 들추며 시비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사도 바울의 인격을 건드리고 소명을 건드리며, 심지어는 그의 사도권까지를 비판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도냐?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하나라도 된다는 말이냐?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사도란 말이냐?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며 죽이려던 자가아니냐며, 사도 바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내가 굳이 사도라는 천거서를 가지고 다녀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호의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가 공동 사인을 한 추천서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제 와서 새삼 추천서를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리고 나에 대한 추천서는 곧 너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있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부흥되어 왔으며 너희들이 예수를 믿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도 내가 전도하여된 것일진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내가 너희 앞에 사도라는 증명서를 보여 주어야 하겠느냐? 나에 대한 추천의 글이 따로 없다. 너희 자산이 바로 나에 대한 편지요, 사도라는 증명서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는 여기 한 어머니가 있다고 할 때에 내가 어머니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도 그 곁에 아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증명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면, 서양 사람들은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게되면 우선 손가락부터 보아서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프로포즈를 할 수가 없고, 만약 다행히 끼워져 있지 않으면 마음놓고 프로포즈를 하여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반지가 기혼자와 미혼자를 구분하는 표시가 되는 셈인데, 저는 그 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하나 낳아서 붙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보다 더 분명하고 좋은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의 이야기입니까? 너희가 있다는 것이 바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의 편지인 동시에 이미 모든 사람앞에 공개된 편지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를 두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바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나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디한 두 사람이냐는 것이며, 이미 많은 사람이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여서흡족해 하고 있는 터인데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나를 두고 저 사람이 사도이냐? 아니냐며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돌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를 보아서 열매를 알고 열매를 보아서 뿌리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사람됨과 사도됨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역을 보아서 압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그로 인해서 전파되는 복음, 곧 그 복음 안에서 구원받는 백성들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요, 바울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고린도 교회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말하는바에 의하면, 가정 방문을해보지 않아도 3개월 동안만 가르치면서 지켜보면 이 아이가 부유한 가정의 아이인지 아닌지,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 어머니의 성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고 나쁜 것, 동생 혹은 형이 있고 없고 등 그 아이가 어떤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바로 그 부모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인격이나 지식, 철학 등 바울의 그 무엇을 써서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썼으나 그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썼다고 하여 바울 자신의 경험이나 좌우명, 인생관을 쓴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이 쓴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편지를 읽는 자가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고 뜻과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새겼습니다. 보다 신학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케리그마(kerygma)적 신앙을 조각했다고 하겠습니다. 이 케리그마적 신앙이란 말뜻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오셨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죽으셨으며,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부활하시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케리그마적 메시지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 전해진 메시지이며, 오늘 여기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도 물고기를 잡겠다며 갈릴리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부문이 매우 언짢게 느껴지고는 하는데 성경은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 바에 의하면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만 같습니다. 즉 "예수님 제가 보이지 않거든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간 줄 아십시오. 그리고 찾지 마십시오. 저 같은 것을 제자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만 당하십니다. 어떻게 제가 다시 예수님의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믿을 인간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사양하겠습니다."하고서는 갈릴리로 갔던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신분을 사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올 때에도 손바닥만한 성경책 한 권 핸드백 속에 집어넣고 달랑 달랑 나오다가 누군가가 "어디가니?"하고 묻기라도 하면 "놀러 간다"하고 마니 이런 것이 다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상당히 겸손한사람이 있어서 "저런 것이 다 예수를 믿어"라고 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우선은 겸손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언제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도 하고 배지들도 많이 다는데 문제는 그 목걸이 그 배지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자동차 뒤에 '잌스투스' 라는 물고기 마크를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서 주면서 달라고 하여도 그것 달고는 아무데나 차를 댈 수 없지 않느냐며 싫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붙이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따라서 어디를 가나 편지인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보이며,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난 다음에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마리 있는 것입니다. 누구이든 한 번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군", "나도 예수 믿어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편지가 육의 심비에 쓰여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마음의 비석에다 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 깊이에 새겼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말씀은 영으로 받고 신령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성경 공부를 할 때에도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저것은 어느 책에 있는 내용인가? 혹은 무슨 신학인가 하며 잡다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화하사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지금 내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말씀이 내 마음의 비석에 깊이 깊이 새겨져 어느 사이에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심령이 변화되어 나의 생각, 나의 언어, 나의 행동, 나의 가치관 등 내 인격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마침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될 때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며 그 새겨진 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옥토에 떨어진 겨자씨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을 내고, 그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똑하게 쓰여진 편지, 순수하게 쓰여진 복음의 편지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생각할 것은 우리 개개인도 사도바울처럼 누구의 마음엔가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는 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에게든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야한다는 말입ㅡ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진 편지가 또 다른 편지를 쓰게 되고 읽혀질 수 있도록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2:2 말씀에 보면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는 큰 글자로 분명하게 써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새겨져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우리의 얼굴을 대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되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 합니다.
향기가 아니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불행을 퍼붓는 편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便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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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는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 쓰고, 3절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도들의 편지가 성경이 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편지는 곧 예수님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분은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었고 그들의 메시지는 곧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씀합니다(엡 2:20). 따라서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85%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보여 져야 하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읽게 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1 변화된 삶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변화된 삶은 뭇사람들이 보고 읽을 수 있는 살아서 움직이는 편지라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변화된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엄청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30여 년 전 구한 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선교사님들의 편지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음행과 도박과 술로 인한 방탕함이 진한 구름처럼 덮여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복음이 펼쳐지고 사회가 변화되고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술을 철저하게 억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오기 위해서 술을 먼저 끊어야 한다는 지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이지만, 남편들의 술과 도박과 음행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여성들이 아기를 업고 새벽기도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능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거룩한 부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2 말씀으로 늘 새로워지는 마음 고린도후서 3:3절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옛 언약은 인간들의 마음 밖에 있는 돌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다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속에 두며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지키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이 새 언약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새 언약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접하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우러나와야 합니다(inside out change). 연애편지를 읽듯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119:9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시편 119:11절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에베소서 5:26절은 교회가 말씀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3 성령을 따르는 삶 우리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언제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끌려 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하고, 6절은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에 쓴 율법조문은 우리가 그 기준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데 반해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새 언약은 우리를 살리는 역할,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을 4개의 키워드로 설명하면, 생각-순종-고난-기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영의 생각을 합니다. <순종>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그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순종합니다. <고난> 로마서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기도> 로마서 8:26-27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합니다. |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 각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으십니까? 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들의 생명을 매일 매일 연장 시켜주고 계신다고 믿으십니까?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들 스스로 만족스럽고 떳떳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이 가져야할 우리들의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며 일평생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딸이 되도록 특혜를 주신 바 있으나 오늘은 하나님의 딸과 아들들에게 그들이 맡은 일들을 하게 함으로 그로 인해 일평생 행복하도록 행복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 또 ‘새 언약의 일꾼’임을 분명히 밝혀주면서 우리들로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의 일꾼의 삶을 살므로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의 일꾼의 역할을 감당하시므로 일평생 행복하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그리스도의 편지(1-5) [2]새 언약의 일꾼(6)입니다.
[1]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그리스도의 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충동에 휘말린 고린도 교인들 중에 사도 바울이 신임장이나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짜 사도이며, 자기 자랑을 일삼고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험한 비난을 받아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도 편에 보냈던 눈물의 편지를 통해 이젠 전세가 역전되어 사도 바울에게 거짓 사도라고 뒤집어 씌운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거짓 복음으로 판명되어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과 이들에게 놀아난 무리들을 징계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진리로 재무장하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현혹되었던 문제가 바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이었습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인 자기들은 추천서 즉 자격증을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의 어떤 추천서를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요 자칭 사도라는 것이었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그가 가르친 진리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어떤 선지자들이 와서 그럴듯한 자격증을 내 놓고 그렇게 교인들을 설득시키면 상당수의 교인들이 이에 현혹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몇몇 성도들이 거짓에 유혹되어 사도 바울을 향해 거세게 비난을 하고 도전하는 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여건이 되므로 사도 바울은 추천서를 갖고 있다는 그들이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이고 자신이 진짜 사도라고 강조하다보니 그 반대파들이 볼 때에는 자기 자랑이나 내 놓고 자신만이 옳고 남들은 옳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어 더욱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짓에 유혹을 당했던 무리들도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사도 바울로는 자신을 가지고 추천서가 없는 자신과 추천서가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여 진리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왜? 자기가 자신을 소개해야하는 그런 절차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말문을 열게 됩니다. 추천서와 이력서는 언제 필요한 것입니까? 처음 입사할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일을 하고 퇴직했는데 그 때에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한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는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도시에 주후 54년경에 가서 1년 6개월 동안 어려움을 무릅쓰고 우상과 부패의 대명사 고린도 도시에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는 성도가 태어나게 하므로 고린도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기적을 이룩했었는데 지금 고린도 후서를 쓰고 있는 시기는 주후 60년경인 것입니다. 전도한지 5-6년이 지난 그 때에 편지하기를 내가 왜? 이제 와서 무슨 추천서나 자격증을 고린도 교회에 내놓아야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추천서가 없는 사도 바울 자신과 추천서를 가지고 자랑한 거짓 선지자들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문서로 추천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가 자기를 사도로 세웠다고 한다면 어떤 문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직접 부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발행하시지 않은 사도증을 어디에서 얻어 가지고 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문서로 된 사도증을 가지고 다닌다면 그가 진짜 가짜 사도임을 증명하는 사도증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무슨 추천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이미 1년 6개월간 고린도 교회에서 개척전도를 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겪고 참으면서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 하나하나를 심히 사랑하며 사귄 나머지 고린도 교인들의 한분 한분이 지워지지 않을 사도 바울의 마음에 다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울어나는 사랑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또 이미 수년간 사도 바울의 신앙 지도를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드려 이미 구원받는 자리에 들어섰고 삶이 변화되어 변화된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완연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죽을 영혼이 구원받고 또 삶이 변화되게 한 그 사실이 지을 수 없고 살아있는 추천서인데 또 다른 무슨 추천서가 있어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다 되었으므로 그렇게 되도록 사역을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므로 사도 바울이 그것 말고 어떤 다른 추천서가 전연 불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랑거리로 휴대하고 다니는 추천서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추천서가 진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써온 추천서는 종이에 먹으로 쓴 것이나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추천서는 사람들의 마음 바탕에 영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행위로 구원받는 다고 가르치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것은 틀린 진리라고 가르친 것에 빗대어, 거짓 선지자들은 돌 비에 쓴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추천서는 영으로 육의 심비에 즉 사람들의 마음에 썼다고 설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 비와 하나님의 영’은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 판을 비유한 것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율법과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복음을 대조하기 위해 표현된 것입니다. 즉 추천서나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는커녕 멸망의 자식들이 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명히 밝혀주어 고린도 교인들이 다시는 거짓 선지자에게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판단력을 키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는 6절의 새 언약의 일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비교가 자세히 나오지만 옛 언약 즉 구약인 율법을 지켜 나가는 인간의 행위로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새 언약 즉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고린도 교회를 혼란케 한 거짓 교사들은 사람을 결과적으로 멸망케 한 율법을 소개한 율법의 일꾼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파 무리들이 사도 바울은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고 비난했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잘나서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된 것이며, 모든 확신과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에도 자기 소개서가 거창한 추천서가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자기 교파나 조직을 키워 사람의 명예를 높이며 사람수에 따라 자연히 늘어나는 재정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활용하는 일꾼들이 얼마든지 가능한 이 때에 추천서가 있는 거짓 일꾼들 중 복음에 어긋난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이 아니라는 판단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겠다는 교훈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나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므로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시고
가르친 모든 것을 실천하므로 이를 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배운 것을 일상 생활에서 적용하므로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2쳔년이 지난 지금에는 직접 볼 수 없으나 우리 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대략 보여줄 수
있는 작은 그리스도들이 다 되라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를
생각하며 기도로 얻은 응답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다른 길을 원하지만 그리스도라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을 것으로 믿어지면 바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삶은 고되고 손해보는 길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가라는 길을 간 사람은 그 마음이 행복하며 만족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의 삶에 복을 부어주시며 주님 오실 때에 눈물과 모든 고통을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새 언약의 일꾼들이 다 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오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며 성경이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 시대에 있었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지금에는 더욱 폭이 넓어져 있습니다. 많은 교파와 많은 지도자가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멧세지를 전하는 성실한 종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어떤 종들은 구원과 상돤없이 자기 몸만 실찌게 하는 종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많은 선택이 있습니다. 새 언약의 종이란 어떤 교파가 만든 교리나 어떤 학자가 만든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던지간에 보다 성서적인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하더라도 주님이 성경에 가라하신 길이 아니라면 그 길을 가는 것은 보장이 없는 길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 욕심을 위해 성서적인 길을 알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들을 현혹하는 교파도 교회도 많습니다. 그 중에 어떤 교회가 보다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인지를 분간하여 보다 성서적이며 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 생활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판단 기준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제일 안전하겠지? 하는 말도 들어 보았습니다. 많이 몰린 통일교나, 여호와의 중인이 올바른 교회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수가 많은 교파가 장로교이니 그 교파가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결론을 내리는 기준이 옳지 않습니다. 오직 기준은 어느 길이, 어느 교회가 보다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냐여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 새 언약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거짓 선생들의 비방에 대한 변호와 주장(10-12장)
바울은 자신의 외적 모습(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음)에 대한 지적하는 것에(10:10-11) 대해 외모만 보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책망하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짝하며 비교할 수 없으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고(10:12, 17), 자신이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11:16). 바울은 교회를 위한 사랑과 염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11:23-30). 아울러 바울은 자신이 지극히 큰 환상과 계시를 보았음에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탄의 사자를 주셔서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을 강조한다(12:7-10). 그리고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12:11-13).
5)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말함(12-13장)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교회에 가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재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인 것임을 강조하면서(12:14-21), 이번에는 약속이 변경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갈 수 있도록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뿐만 아니라(13:1), 이번에 가게 되면 전에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며(13:2),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확증하며, 너희가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온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밝힌다(13:5-10).
- 특징
1) 솔직하고 자서전적 서신
고린도전서가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하여 필요한 내용들을 순차적으로 대답함에 비해, 고린도후서는 바울 스스로가 포착한 문제들에 대해 공격적 어조로 변호하며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바울의 심정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 극과 극의 감정, 즉 자랑과 약함, 감사와 노여움, 엄격과 부드러움이 교차적으로 나타나 인간 바울의 풍부한 감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덕스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위대한 목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2) 복잡한 구조 속에 드러나는 복음의 진수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에 비해 구조가 복잡하다. 여러 학자들은 고린도전서에서 후서로 들어설 때는 마치 정연한 공원길에서 길도 없는 숲을 헤치며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 가운데 고린도후서만큼이나 번역자들과 해석자들을 난관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없다고 할만큼 복잡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나 자신의 사도권을 두서 없이 변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은 새 언약의 일꾼임을 밝히면서 돌판에 새겨진 외적인 율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해야 하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새 언약인 복음의 가르침에 더욱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3) 다양한 비유를 통한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강조
본서에는 고린도전서의 부활장(15장)과 같은 독특한 신학사상을 강조한 내용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자신과 성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표현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향기(2:14-17), 그리스도의 편지(3:3), 보배를 담은 질그릇(4:7), 새로운 피조물(5:17-19), 그리스도의 사신(5:20), 하나님의 성전(6:14-18) 등의 표현 등 성도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 구조
1) 인사말(1:1-11)
2) 사도권에 대한 소극적 해명(1:12-7:16)
① 해명을 시작하는 말(1:12-14)
② 고린도 방문 계획의 변경에 대한 해명(1:15-2:13)
③ 사도직의 확실성과 그에 대한 바른 자세의 해명(2:14-5:10)
④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사도의 직무(5:11-7:16)
3)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8:1-9:15)
①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연보의 모범(8:1-5)
② 구제 연보의 권면(8:6-15)
③ 구제 연보를 위한 위원 파견(8:16-9:5)
4) 사도권에 대한 적극적 주장(10:1-13:10)
① 사도권에 근거한 권징의 의지(10:1-11)
② 사도권을 입증하는 구체적 증거들(10:12-12:10)
③ 사도권 주장에 대한 최종 변론(12:11-13)
④ 세 번째 고린도 방문 계획 예고와 결론(12:14-13:10)
5) 끝인사(1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