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사랑(愛國心)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책임과 윤리, 그리고 이웃 사랑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나라 사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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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대한 책임 : 내가 속한 나라의 질서, 정의, 평화를 지키는 데 참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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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희생에 대한 존중 : 이전 세대의 수고와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 :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사회에서 살도록 가꾸는 마음
2. 성경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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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 추구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예레미야 29:7)
→ 하나님 백성은 자신이 사는 땅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
질서와 책임 존중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1)
→ 무비판적 복종이 아니라, 정의와 선을 지향하는 책임 있는 시민성을 전제합니다.
3. 균형 있는 나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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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민족주의 ≠ 건강한 애국심
나라 사랑은 다른 민족이나 약자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
비판적 충성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는 용기도 나라 사랑의 일부입니다. 이웃 사랑의 확장
개인 → 가정 → 지역 → 나라 →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4. 오늘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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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납세, 법 준수, 투표와 시민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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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과 실천에 관심 갖기
분열보다 화해와 공존을 선택하는 언어와 태도
요약하면, 나라 사랑은 “내 나라가 잘되기만”이 아니라 “이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더 인간답게 살도록” 힘쓰는 사랑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속 애국 신앙
1. 3·1운동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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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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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회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교육·계몽·조직의 중심지 역할을 함 -
신앙적 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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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 민족도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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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억압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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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나라를 우상화”한 것이 아니라
정의·자유·존엄이라는 성경적 가치를 민족 현실에 적용한 것
2.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적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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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로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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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와 신자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라는 신앙 고백으로 거부
대표 인물 : 주기철 목사, 신앙 양심과 민족 존엄을 지키다 순교
애국 신앙은 권력에 순응하는 애국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 저항
3. 교육과 계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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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운 학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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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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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퇴치, 여성 교육, 근대 시민 의식 형성
👉 “나라 사랑 = 사람을 세우는 일”이라는 인식
무장 투쟁보다 사람을 키우는 장기적 애국
현대 사회에서의 구체적 실천 사례
1. 민주화 과정 속 교회의 역할
1970–80년대 : 인권, 노동,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신앙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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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체제 전복이 목적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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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본래의 정의를 회복하도록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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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은 “조용한 순종”만이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책임이 될 수 있음
2. 재난과 위기 속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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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코로나19, 산불·수해 등
모범적 사례 : 무료 급식, 헌혈, 공간 개방, 의료·돌봄 지원
문제적 사례도 있었기에, 교회 내부에서 자성· 개혁의 목소리가 나온 것 자체가 의미 있음
👉 나라 사랑은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실제 고통을 나누는 것
3.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
신앙인의 일상적 애국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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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키우는 언어 대신 사실· 존중· 절제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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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공론 참여, 지역 사회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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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이주민, 장애인, 노인)에 대한 관심
→ 나라의 품격은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남 “내 편”이 아니라 공동선을 기준으로 판단
정리 한 문장
한국 교회 역사 속 애국 신앙은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라의 정의를 묻는 신앙’이었다.
12월 23일(화) 고린도전서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께서 임하시느니라(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ει τις ου φιλει τον κυριον ιησουν χριστον ητω αναθεμα μαραν αθα
주께서 임하시느니라(Come, O Lord)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마란 아다(μαραν αθα)" 라고 번역합니다.
'마란 아다'를 일반적으로 '마라나타' 이렇게 발음합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아람어 표현으로, 보통 이렇게 이해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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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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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문맥에 따라 “주님께서 오신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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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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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믿음을 담아 사용했습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아람어 표현으로, 매우 깊은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어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아람어
Marana tha / Maran atha
에서 온 말로, 두 가지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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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 -
“우리 주께서 오셨다”
→ 예수님의 성육신과 구원을 선포하는 신앙 고백
초기 교회에서는 보통 첫 번째 의미(재림을 기다리는 기도)로 이해되었습니다.
2. 성경 속 마라나타
📖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이 구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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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는 절박한 기도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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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세상의 불의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최종적 정의를 기다리는 신앙 고백입니다.
3.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
초대 기독교인들은 박해와 순교의 현실 속에서
**“마라나타”**를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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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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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성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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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놓지 않는 고백으로
👉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4. 오늘날 신앙적 의미
오늘 우리에게 마라나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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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피적 종말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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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 있는 기다림 ⭕
즉,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정의· 사랑· 거룩함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5. 한 문장으로 요약
마라나타란
“주님, 이 깨어진 세상 가운데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러 속히 오소서” 라는 소망의 기도이자 결단의 고백입니다.
1. 종말론 관점에서의 마라나타
마라나타 = “주여, 오시옵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배경: 초기 교회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이들은 현재 세상의 불의와 고통 속에서 “주님, 속히 오소서”라는 절박한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학적 의미:
소망 : 하나님이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믿는 신앙.
각성 : 재림의 날을 대비하여 삶을 점검하고, 회개와 거룩함을 실천.
격려 :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공동체적 다짐.
결론 : 종말론적 마라나타는 단순한 종말 예언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재정비하게 하는 실천적 소망입니다.
2. 예배·찬양 속 사용
초대교회: 성찬식이나 모임에서 “마라나타”를 외치며 재림을 기다리는 기도와 고백으로 사용.
현대 예배·찬양:
찬송가·예배 도입
“주여 오시옵소서”를 반복하며 회중이 공동체적 기대와 소망을 경험.
기도문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통치 확립을 구하며 현재 세상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도록 다짐.
찬양 가사 속 반복
반복적인 “마라나타”는 종말적 소망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도록 돕습니다.
포인트: 예배 중 “마라나타”를 외칠 때,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현재 삶과 재림 소망을 연결하는 영적 체험이 됩니다.
3. 한국 교회 설교 적용
설교 주제: “마라나타와 기다림의 신앙”
핵심 메시지:
오늘을 준비하는 신앙
재림을 기다리며 현재 삶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
절박한 소망의 표현
교회 공동체와 개인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삶.
사회적 적용
종말적 소망이 단순한 내세적 기대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책임 있는 행동으로 연결됨.
예시 설교 포인트: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 우리의 기도는 세상을 향한 정의와 사랑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님의 재림은 나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신앙적 도전임을 강조.
💡 정리
종말론적 관점: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소망
예배·찬양 속: 공동체적 체험과 영적 각성
설교 적용: 신앙적 책임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적 메시지
1. 주가 오셨다. 2. 주여 오시옵소서. 3. 고전16:22.
Etymology / 아람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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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가 오셨다, 주여 오시옵소서, 고전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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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마라나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다'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마라나타 뜻 :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아람어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아람어로,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의 성경적 배경, 신앙적 의미, 현대적 적용까지 자세히 알아봅니다.
마라나타란 무엇인가?
마라나타의 어원과 의미
- 마라나타(Maranatha)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 단어는 신약 성경(고린도전서 16:22)에서 등장하며,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 일부 학자들은 마라나타를 "마라 나타"(우리 주님이 오셨다) 또는 "마란 아타"(주님이 오시옵소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 속 마라나타
- 마라나타는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표현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태도를 나타냅니다.
- 요한계시록 22:20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기도가 등장하며, 이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초대 교회에서는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마라나타와 기독교 신앙
- 마라나타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 이는 신자들이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소망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 현대 기독교에서도 마라나타는 재림 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기도와 찬양, 설교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마라나타의 현대적 의미
교회에서의 활용
- 많은 기독교 교단에서는 마라나타를 주제 삼아 설교하거나 찬송가의 가사로 사용합니다.
- 일부 교회에서는 예배 후 신자들끼리 인사할 때 "마라나타!"라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고 신앙을 다지는 의미로 활용합니다.
- 기독교 운동이나 선교 단체에서도 마라나타를 중요한 신앙적 표현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의 적용
- 마라나타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경건한 삶을 유지하는 동기가 됩니다.
-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신앙적으로 더욱 성실히 살아가게 합니다.
- 마라나타 신앙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마라나타
-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마라나타 신앙의 핵심입니다.
-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마라나타를 기억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소망과 평안을 줍니다.
-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위기와 도전이 있지만, 마라나타 신앙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 마라나타는 단순한 종교 용어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신앙적 고백입니다.
- 성경과 초대 교회에서 사용된 마라나타는 현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신앙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표현입니다.
-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마라나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람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람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마라나타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12-20)
남편 김씨는 매우 비상한 사람입니다.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도 항상 말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고, 어떤 주제건 대화에 막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처세술과 탁월한 화술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모이고 웃음이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아내 송씨는 무척 둔한 사람입니다.
한참이나 대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이유를 모릅니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줄 모르고, 우스개 소리를 해도 알아듣지 못해 때 맞춰 웃질 못합니다.
자기 성격대로 사는 사람이라 말을 골라 할 줄도 모르고, 또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줄도 모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간도 빼주지만, 한 번 싫은 사람은 죽어도 싫습니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성격의 김씨와 송씨는 결혼 3년만에 협상을 보았습니다.
각자의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때문에 늘 문제가 됩니다.
해야 하는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선생님들께 태도가 불손하고,
참다 참다 안 되서 한 마디 하면, 죽어버리겠다며 나가버립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들의 문제가 아내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막무가내로 말하는 아내의 버릇이 아들을 말썽꾸러기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아들을 문젯덩어리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학기말 성적표가 도착했습니다.
그날 저녁 세 식구가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남편은 전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던 아내는 아들에게 튈 불똥을 남편을 향해 쏟아 붓습니다.
“당신 어쩜 그렇게 무책임해요? 당신 애 아빠 맞아요? 아들의 성적표가 왔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아녜요? 이 상황에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요?
내 팔자에 남자라곤 도통 둘 밖에 없는데. 어쩜 하나같이 저 모양인지...
제대로 된 남자 하나 없으니...”
김씨는 기가 막혔습니다.
우선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성적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앞질러 가서 사람을 묵사발 만드는 아내가 너무 밉고 싫습니다.
“야, 너 말 다했어?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거야. 넌 그런 상식도 없냐?
넌 말이야,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여자야.
뭐? 이 집에 제대로 된 남자가 없다고? 그래? 너 오늘 제대로 된 남자 맛 좀 봐라.”
* 자료출처 / 도은미, 사연으로 움직이는 가정, p. 12~18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하니 더 힘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 너를 소송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이건 순교의 각오가 없인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순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경 로마 황제 도미티안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하던 상황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책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신앙 때문에 밧모섬에서 유배생활하던 중이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순교하던 상황,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부터 순교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 주셔서 순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 직장, 사업-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식 하나 키우는 것도 우리가 감당하기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셔야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순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속히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의인은 영원한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내가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의 마지막도 주님께서 때가 되면 불러가실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인생살이도 예수님께서 책임지고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 한 가지만은 기억하십시오.
“나는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소방훈련하던 굴곡차는 와이어가 끊어질 수 있어도, 예수님의 손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엄청난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높은 곳에 올려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실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여러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14절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누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영생을 누릴 사람입니까?
누가 영원한 나라의 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두루마기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은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피에 우리의 몸을 씻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영생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의 흘린 피 / 날 희게 하오니 / 귀하고 귀하다 /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런 복을 받은 우리는 17절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말씀을 듣는 자는 “오라” 고 불신자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초대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먼저 영생을 누린 여러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신자들을 초대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윈 루처(Erwin W. Lutzer)가 쓴 <영원한 상급>이란 책을 보면, 천국에서도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천국과 눈물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할른지 모릅니다. 그 눈물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살았음을 슬퍼하는 눈물, 후회와 부끄러움의 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닦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영영히 눈물을 그치지 못할 것입니다(계21:4). (어윈 루처, 영원한 상급, 7~8)
반면에,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상을 갖고 오십니다. 일한대로, 수고한대로 상을 주십니다.
우방놀이동산을 가보니까,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입장은 무료지만, 놀이기구를 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예비하신 상을 받으려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고후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 모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전구라고 다 같은 밝기가 아니듯이, 천국에 들어가도 다 다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얼마나 일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다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수많은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운명은 수많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선택과 행동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주석가 메튜 헨리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면서 오늘을 살라” 고 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비문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생 살아온 삶에 대하여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불로 시험할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같이 다 타버려서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온 인생은 불에 타버리지 않을 인생, 상 받을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만 아니라,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시간, 재능, 건강, 지식 등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바로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폭염이 쏟아지는 사막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목이 타 죽을 지경이 된 그는 펌프가 달린 우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펌프 옆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펌프에 부을 마중물을 사용할 것. 우물이 깊어서 목을 축이고 물통을 채울 수 있음. 다음 여행자를 위해 병에 물을 채워둘 것.”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물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물에 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작은 물병의 물을 마셔버릴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만큼의 물을 길어올리기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물을 펌프에 부을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의 가진 값진 것들을 주님께 부을 수 있겠습니까?
“마라나타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 곧 오십니다. 그날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운 성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상급, 넘치는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날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라나타| 뜻과 의미, 그리고 그 깊은 울림 | 기독교 용어, 성경, 예수 그리스도
"마라나타"라는 말, 어딘가 익숙하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하셨던 적 있으신가요?
오늘은 성경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단어의 의미와 울림을 함께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고리를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마라나타가 가진 특별한 의미와 함께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라나타 :
뜻과 의미, 그리고 그 깊은 울림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문구를 넘어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마라나타"의
뜻과 의미를 살펴보고, 그 깊은 울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 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외쳤던 뜨거운 기도이자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오시옵소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2. "마라나타"와 성경 속 예언:
"마라나타"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예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약속합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성경적 예언을 믿고 기대하는 신앙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3. "마라나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마라나타"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구원,
평화,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4. "마라나타"의 울림과 현대 사회:
오늘날 "마라나타"는 단순히 과거의 신앙 고백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깊은 울림을 가집니다. 세상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마라나타"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원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5. "마라나타"의 실천: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나타" 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섬김, 용서,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실천하는 것이
"마라나타"를 진정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나눔, 봉사,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마라나타"의 핵심 가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결론: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는 깊이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은 희망과 위로를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마라나타, 희망과 기대를 담은 외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깊은 신앙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주님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올 구원과 완전한 승리를 향한 기대와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그 자체로 희망과 기대를 상징합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기대합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처럼,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불어넣습니다. *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로,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 역사 속의 '마라나타': 역사적으로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 현대 사회에서의 '마라나타': 현대 사회에서도 마라나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향한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현실 속 어려움에 흔들릴 때,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희망을 향한 끊임없는 외침이며, 우리 삶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신앙의 메시지입니다.
주님, 오십시오! 마라나타의 본질: 신앙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기도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의미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는 고대 아람어로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을 지니며, 초대 교회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간절히 외쳐온 믿음의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뜨거운 소망과 기대,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며,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는지 보여줍니다. 마치 마라나타를 외치는 듯, 그들은 세상의 고통과 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했습니다. 마라나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를 넘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마라나타는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언젠가 모든 것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에 공의와 평화가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 믿음의 승리: 마라나타는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 기도와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마치 기도와 같은 형식으로,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칩니다. 마라나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마라나타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그분의 통치를 향한 소망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분의 사랑을 전하며, 그분의 통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마라나타는 우리의 기도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믿음의 고백이며, 희망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마라나타를 외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마라나타:
주님, 오시옵소서! 그 깊은 울림의 의미를 찾아서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몇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신앙의 열정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성경 속에서 마라나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염원을 드러내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님의 도래를 바라는 소망을
넘어, 압제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대한 구원과 해방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두 곳에서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2장 20절에서는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더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는 마라나타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는 신앙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2. 마라나타: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세상의 고통과 압제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 즉 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기대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라는 표현을 통해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라나타는 그들에게
힘이 되는 울림이었으며, 삶의 희망을 지켜주는 빛이었습니다.
3. 오늘날 마라나타의 의미
오늘날에도 마라나타는 그 깊은 울림을 유지하며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있습니다. 세상이 혼란 속에 빠져있고, 고통과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삶 속에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빛이며,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4. 마라나타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우리는 죄악과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문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결론
마라나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강력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도전이 됩니다. 마라나타! 주님,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실천적인 의미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익숙한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도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과 계시록 22장 20절에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닌, 적극적으로 그날을 맞이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둘째, 마라나타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희망을 주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줍니다.
셋째, 마라나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인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마라나타는 준비
끊임없이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다섯째, 성장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 친구가 그의 다정한 친구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 했습니다.
화기 애애하게 식사를 마친후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더군"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그것을 휴거라고 하지...................
그때 어떤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중심에 구세주로 온전히 믿고 영접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내주 하심으로 거듭난자가 된다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식이 마음 가운데 깊숙히 뿌린 박힌 죄와악의 쓴뿌리 곧 비진리를 뽑아내고 파내어
진리로 마음을 영으로 온전히 일구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온전히 할례를 이루고
주님 보시기에 흠도 점도 티도 없는 마음을 가짐으로
신부단장을 잘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소리를 듣고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순간보다24분1의 빠른속도)변화되어
공중에서 그렇게 학수 고대하고 그리던 주님을 맞이하여 공중혼인잔치에 참여하지!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않고
교회를 다녀도 변화되지 않아 하나님 마음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산 쭉정이 신자들은
휴거 되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 7년간 먹고 살기 위해 666이란
짐승의 표를 오른손과 이마에 받고 무서운 환난을 댱한다네!
그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지!
나는 이 사실을 믿거든!
자네는 무신론자이니 믿지 않겠지?
그래서 말인데 예수님 오시면
"그때 자네가 나의 전 재산을 다 가지게!"
"이 집도, 내 땅도, 저 T.V도 내차도 금반지도 전부 자네가 그냥 가져!"
"각서를 써 달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주지!"
그리고 무신론자 친구에게 각서를 써 주었다
친구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횡재를 한 친구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그 날밤 좋아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각서 까지 받아놓았으니
빨리 예수님이란 분이 왔으면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 좋던 마음은 사라지고
친구가 자기의 모든것을 한점 아쉬움도 없이 선뜻 포기 할 만큼
그 천국이란 곳이 좋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땅에 남아서 무시 무시한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처럼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날을 고민한 친구 부부는 드디어 전화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이보게 친구.............
나에게 전 재산을 주지말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어떻게 살면 휴거 될수
있는 길을 알려 주게!
우리 부부도 꼭 휴거되어 천국가고 싶네!...
오주님!
이 종은 주님 오실때 동전 한픈
호주머니에
없이살다가 휴거의 표적되어 사라지는것입니다
이것이 내 평생에 소원입니다
아멘
12월 22일(월) 고린도전서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더욱 큰 은사(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사도 바울은 분쟁이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더욱 큰 은사(the greater gifts)"를 사모하라고 깨우쳤을까요?
12:4-11에서는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합니다(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역)
12:12-27에서는 몸의 비유를 통하여 모든 은사가 동일하에 중요한 공동체안에서 필요한 역활이라고 강조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 등 특정한 은사를 과도하게 높이고 다른 은사들을 멸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큰 은사 즉 사랑으로 화합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1. 초과. 2. 과도. 3. 비범한 성품
Pronunciation [ hüpĕrbŏlē ]
Etymology / 5235에서 유래
-
1. 초과, 과도, 비범한 성품, 성격, 고후4:7. [주] καθ᾿ ὑ- περ βολήν: 엄청나게, 대단히, 한량없이, 극도로, 고후1:8, 갈1:13.
-
관련 성경 / 가장 좋음(고전 12:31), 심히 큼(고후 4:17, 12:7), 심함(롬 7:13, 고후 4:7).
1. 지나치다. 2. 능가 하다. 3. ~보다 뛰어나다
Pronunciation [ hüpĕrballō ]
Etymology / 5228과 906에서 유래
-
1. 지나치다, 능가 하다, ~보다 뛰어나다. [주] 분사 ὑπερ βάλλων, ουσα, ον: 탁월한, 비상한, 뛰어난, 고후3:10, 9:14, 엡1:19, 3:19.
-
관련 성경 / 더 크다(고후 3:10), 지극하다(고후 9:14), 지극히 크다(엡 1:19), 지극히 (풍성하다)(엡 2:7).
성경에서 성도들이 더 뛰어나고 탁월한 은사를 사모하라는 권면
- 더 뛰어난 은사를 사모하라 : 교회에 유익한, 더 탁월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 가장 좋은 길(사랑)을 보이라 : 그 은사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랑'이라는 방법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며,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강조합니다.
- 은사의 조화와 유익 : 은사 자체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각 은사가 교회 공동체에 덕을 세우고(건축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데 쓰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성령의 인도 :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유의지와 인격을 보존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통해 성품까지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욱 큰 은사(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恩賜章)” 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사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 것은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장에 해당하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전서 4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은사(恩賜)와 은혜(恩惠)를 구분해야 합니다.
은사와 은혜는 나무에 비유하면 한 나무의 뿌리에서 자라난 여러 개의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이란 헬라어는 "카라(chara, χαρά. 5479 : joy, delight)" 라고 합니다.
카라에서 은혜라는 "카리스(charis, χάρις. 5485 : grace, kindness)"가 파생합니다.
카리스에서 은사라는 "카리스마(charisma. χάρισμα, 5486 : a gift of grace, a free gift)"가 파생합니다.
따라서 은혜와 은사는 기쁨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란 "사랑"을 말합니다.
이때 사랑을 "아가패(agapé. ἀγάπη. 26 : love, goodwill)"라고 합니다.
아가패
사랑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시고 그물이
가득찬 물고기를 잡은 후에 아침으로 그 물고기를 먹으며 처음으로 질문하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 사랑이 아가패라따라서
아가패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아가패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희생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에로스의 사랑이란 욕망에 이끌려 자기 보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소개합니다.
왜 사랑의 은사가 최고라고 하였을까요?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많은 교회이었지만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서로 분쟁하는 교회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은사가 최고의 은사라고 자랑하므로 분쟁의 골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사랑(아가페)의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라고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은사라는 초대교회를 부흥케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은사는 주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중요한 원리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은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분쟁하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은사는 아가페적인 자기헌신적인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깨우칩니다.
요한복음 21:15∼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질문)
1.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
2. 세 번씩 반복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을까?
3.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가?
(적용)
1. 주를 믿기 전의 내 모습
2. 직분을 받기 전의 내 모습
1. 모른다고 부인한 것에 대한 검증
베드로가 바깥뜰에 있을 때 한 여종이 다가와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말했을 때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아갔을 때 다른 여종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라고 말하므로
“맹세하고 부인하여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라고 말할 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둘째, 아가페 사랑을 요구하셨으나 필레오라고 대답했기 때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패라는 단어로 물어보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 번째는 필레오라고 질문하셨고 필레오라고 대답하였다.
셋째,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 자기 용서에 대한 확신
내 어린 양을 먹이라(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라!)
- 어린 양(τὰ ἀρνία) / 아르니온(arnion. ἀρνίον) a lamb
- 먹이라(Βόσκε, boske) / 보스코( βόσκω, boskó) to feed
양을 치라(사도직을 수행하라!)
- 양(τὰ πρόβατά) / 프로바톤(probaton. πρόβατον) a sheep
- 치라(Ποίμαινε, Poimaine) /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 Poimaine) Shepherd
- 양(τὰ πρόβατά)
- 먹이라((Βόσκε, boske) / 보스코( βόσκω, boskó) to feed
성경에서 은사(선물)로 얻는 것 두 가지를 찾는다면
첫째는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2:31, 13:13)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둘째는 믿음입니다(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사로 주신 사랑을 회복하고 실천하려면 먼저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를 용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죄를 짓지 않는 것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완전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따라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후에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주신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이었습니다.
어부이었던 베드로를 부르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 곁에서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말 전인격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므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가 누군줄 아느냐?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그러나 내가 네게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시나이다(οἶδα) - 에이도(eidó: be aware, behold, consider, perceive)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믿음을 고백하기 전에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실패한 자리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부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시간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주를 믿도라고 하면서도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과 더불어 주를 향한 믿음을 정비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4)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을 깨우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했던 지난 날의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고 이제부터 소금과 빛의 사람으로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오래 전에 저희 처가집 작은 아버님께서 작은 아들이 기독교교육과를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작은 아버님께서 교회에 상처를 받아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받은 이유는 집 근처에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이사오셨는데 톱을 빌려갔다고 합니다.
며칠이 지나도 톱을 가져오지 않아 그 목사님댁으로 톱을 찾으러 갔더니 톱이 마당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며칠 동안 비가내렸기 때문에 마당에 있던 톱이 녹이 슬었다고 합니다.
그때 목사가 저 모양이니! 교회갈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출석하던 교회에서 대학원 입학했다고 등록금도 도와주지 않아 상실한 마음에 더 크게 실망하셨겠지요.
제가 이런 사정을 듣고 작은 아들 대학원 등록금을 준비하여 작은 아버지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앞으로 아들이 신대원을 졸업 후 목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 부임할 때 반드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은 어느 교회에 출석하시나요?
그때 목사가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예,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할텐데 그러면 그 교회에서 받아줄까요?
그러자 잘 알겠다며 그 다음 주일부터 즉시 교회에 출석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가페 사랑이란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희생이 동기가 되어 믿음을 상실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사랑이 동기가 되어 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것은 아가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너희도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모두 이런 사랑으로 믿음의 현장을 아가페 사랑으로 잘 관리하고 지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프리카 임은미 선교사의 이야기
어느 택시 운전기사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개소주를 만들던 집사님이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다.
그때 대략 손해본 것이 5만원, 택시 요금 1만 2천원 요금으로 1만 5천원을 지불하며 거스름돈은 가시다가 커피 한 잔 맛 있게 드시고
5만원 손해 본 것은 제가 대신 드릴테니 앞으로 교회에 나가세요 하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설교 요약]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으로 주어지는 무한한 특권임과 동시에 명령 입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크리스챤들이 관심가지고 사모하는 ‘영적 은사들’ (the spiritual gifts)보다 더 큰은사가 있다고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사모하라고 도전 합니다.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는 것 입니다. 바로 ‘사랑’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볼것은, “왜 사랑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하는 점 입니다.
첫째, ‘사랑은 은사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사랑이 과연 은사일까요? 하나님은 교회의 몇몇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로 사랑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크리스챤의 가장 우선되는 명령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 22:37,39).
둘째,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greater than the spiritual gifts): 본문 <31절>의 ‘더욱 큰 은사’라는 표현에서 또 한가지 이해할수 있는 점은 사랑이 그 어떤 영적 은사보다 크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바울은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13장>에서 어떤 은사들보다 우월한 사랑의 힘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랑은 영원토록 함께 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forever for us):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라고 사도요한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영원한 것은 그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나오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여러분이 ‘더욱 큰 은사’ 곧 사랑을 간절히 구함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충만하게 임하여 주의 몸된 교회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의 사람이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삶을 지탱해 주며, 삶을 살아갈수 있게 이끌어 주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만약 누가 저에게 ‘우리 인간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것 입니다. 더욱이 이 사랑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감상적인 것 이상을 뜻 합니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한한 특권임과 동시에 의무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랑하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아포슬 교회 가족들은 서로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 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능력이자 선물인 사랑을 통해 개인의 삶과 가족과 교회와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충만한 사랑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사랑장’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고전. 13장>에서 사도바울은 사랑의 놀라운 속성과 능력에 대해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고전. 13:4) 라는 고귀한 사랑의 선언은 심지어 믿지 않는 청년 남녀들 조차도 그들의 연애편지를 쓰는데 단골로 사용되는 문장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바울의 위대한 사랑의 찬가라고 불리는 <고전. 13장>을 시작하기 위한 서론격의 말씀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고전. 12장>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12장>의 주제는 ‘성령의 은사와 몸과 지체의 관계’ 입니다.여기서 사도바울은 ‘은사는 무엇이고 왜 은사를 주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이 은사를 주신 이유를 <우리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몸의 지체로서 서로 연결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 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선물로 허락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서로 연결되고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할수 있게 하기 위한 것 입니다. 따라서 만약 내가 가진 은사가 내 자랑이 되어 서로를 비판하고 헐뜯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 선물로 주신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심히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타깝고 잘못된 모습이 영적 은사를 많이 가졌다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상호간에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가라졌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잘못된 모습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v.31a)고 주장한 이유 입니다. 그리고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b)고 말한 것처럼 <고전.13장>과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제일 좋은 길, 곧 ‘사랑으로 행하는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그의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마루리하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격려하고 도전 합니다. “너희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4)라고. 바로 믿음의 공동체와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반드시 사랑의 동기로서 행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관계의 원리가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 볼것은 이것 입니다. 사도바울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31)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는 “왜 사랑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Why is love so important for our Christians?)하는 점 입니다.
첫째, ‘사랑은 은사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not the spiritual gifts): (고전.12:27-31) 왜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바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 했드시 오늘 본문은 ‘사랑’에 대한 서론에 해당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곧 이어질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이 왜 우리 크리스챤에게 가장 중요한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고린도성도들에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 사도바울은 사랑을 ‘더욱 큰 은사’ (the greater gifts)라고 표현 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성도들은 은사에 매우 관심이 많았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드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신 은사는 더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없이 모두 서로를 돕고 공동체를 함께 세워주는 일에 사용되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관심가지는 은사에서 부터 자신의 논리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 입니다. ‘너희가 그토록 사모하는 은사’보다 더 큰것이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그들의 관심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은 이것 입니다. 바울이 지금 ‘더욱 큰 은사’라고 소개하는 ‘사랑이 과연 은사인가?’하는 것 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하드시, 사랑은 은사가 아님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성경 어디에도 사랑을 은사, 즉 ‘영적 선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고전.12장>에서 사도바울이 상세하게 설명한 영적 은사를 가진 자들은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거나 비판 할것이 아니라,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며 각자의 은사를 활용하라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랑은 언제나 추구하고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명령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몇몇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로 사랑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39) 라고 우리 주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명하심을 이렇게 요약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은사가 아닌 것 입니다.
둘째,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greater than the spiritual gifts): (그 예와 이유; 1-3,4-7) 오늘 본문 <31절>의 ‘더욱 큰 은사’라는 사도바울의 표현에서 또 한가지 이해할수 있는 점은 ‘더욱 크다’는 것 입니다. 사랑이 그 어떤 영적 은사보다 크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사랑이 은사보다 더 큰가?’를 이어지는 <13장>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표현데로 “ ~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b)는 것 입니다. 사랑의 우월성을 설명해 주겠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어떻게 은사보다 더욱 크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습니까? 비록 사람이 천사의 말과 같은 방언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 밖에 않되며 (13:1), 사람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예언하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졌다 할찌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 입니다 (13:2). 그는 지금 구체적으로 대표적인 영적 은사 예언과 지식과 방언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비록 이런 은사를 놀랍게 행한다고 할찌라도 만약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 입니다. 왜 그렇까요?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 때문 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아름답고도 힘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3:4~7/ 현대인의 성경)라고. 사랑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이전에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 입니다. 사랑은 누가 더 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것을 견디는 것 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속에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내가 의롭지 못하고, 잘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발하고 있는 것 입니다. 어떤 영적 은사로도 감당할수 없는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믿고, 끝까지 바라는 이 놀라운 삶을 사랑만이 가능하게 하는 것 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은사보다 우월한 것 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이기 때문 입니다.
셋째, ‘사랑은 영원토록 함께 하기 때문’ 입니다 (Because love is forever for us): (8-12/ 천국가면 오직 사랑…) 사랑이 위대한 것은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고 사도바울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8) 고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언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여질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다할찌라도 언젠가 주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왕노릇하며, 그분과 함께 영광스러운 것을 받게 될때 (롬.8:17) 일것 입니다. 그때 지금 바울이 말한것 처럼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고 충만하게 통치하게 될것 입니다. 모든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사랑’만은 영원토록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할것 입니다.
사랑이 위대하고 우리 모든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바 일것 입니다. 이 사랑의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가지 않아 함께 자멸할수 밖에 없음을 신앙을 떠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이 사랑을 실천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 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한한 특권임과 동시에 명령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신 사랑의 명령인 것 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사랑의 사도, 사도요한은 이렇게 고백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자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때, 나는 나자신도, 그리고 이웃도 참되게 사랑할수 없는 것 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이기적으로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사랑을 사모할때, 간절히 구할때 하나님은 그의 영 성령을 통해 그의 사랑을 구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실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 사랑이 영원하기에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고 열매맺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의 사람 입니까? 여러분을 통해 사랑이 흘러 넘치는 사랑이 충만한 사람 입니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과 제가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심히 기뻐하시고 소원 하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 입니다 (요일. 4:8).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v.31)고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적 은사보다 더욱 크고 위대한 사랑을 사모하라고, 간절히 구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 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 구하는 자녀의 소원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음을 믿기 때문 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어떤 영적 은사, 어떤 큰 영적 경험을 하든지 관계없이, ‘더욱 큰 은사’ 곧 사랑을 간절히 주께 간구함으로 넘치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충만하게 임하여 주의 몸된 교회와 이웃에게 그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는 사랑의 사람이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더 큰 은사"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철학적 또는 개인적인 성장의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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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의미: 기독교에서는 "은사"란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이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인내, 지혜, 신앙 등은 하나님의 은사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더 큰 은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은사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 큰 사랑을 베풀거나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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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성장: "더 큰 은사"는 누군가가 자신의 잠재력을 더 잘 발휘하는 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나은 의사소통 능력, 더 큰 창의성, 더 깊은 공감 능력 등도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 큰 은사"는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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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직업적 은사: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특정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뛰어난 리더십, 문제 해결 능력, 사람들을 동기부여하는 능력 등도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더 큰 은사"는 사회나 직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결국 "더 큰 은사"란 주어진 능력이나 축복이 더 넓은 범위에서,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어요. 당신에게 "더 큰 은사"란 무엇인가요?
성령의 은사 종류 : 롬 12장, 고전 12장, 사 11장에 언급된 은사들
성령의 은사(영적 선물)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신 특별한 능력과 기능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령 은사가 언급되어 있으며, 주로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그 목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개인적 영광이 아닌 공동체의 건덕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모든 신자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은사를 받았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목록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세 가지 주요 목록이 있으며, 각각은 다른 측면과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목록들을 살펴보면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그 목적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의 은사들
로마서 12:6-8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은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 예언: "즉석에서 말을 꺼내다" 또는 "하나님의 목적을 해석하기 위해 거룩한 뜻을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 섬기는 일(봉사): 헬라어 '디아코니안'에서 유래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은사입니다.
- 가르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선포하며, 의미와 맥락을 설명하고 적용점을 알려주는 은사입니다.
- 위로(권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따르도록 권면하며, 약해진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는 은사입니다.
- 구제(나눔): 자신의 재정, 물질, 시간 등을 다른 사람들과 기쁘게 나누는 은사입니다.
- 다스림(지도력):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은사로, 배를 조종하는 사람과 같은 개념을 내포합니다.
- 긍휼(자비):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들
고린도전서 12:4-11과 12:28에서는 더 많은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 지혜의 말씀: 삶의 상황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지식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는 통찰력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입니다.
- 믿음: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약속에 대한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은사입니다.
- 병 고치는 은사: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은사입니다.
- 능력 행함(기적):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사입니다.
- 예언: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 영들 분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에게서 온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 방언: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 방언 통역: 방언으로 말해진 메시지를 일상어로 해석하는 은사입니다.
- 사도: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은사입니다.
- 돕는 것(서로 돕는 것): 다른 사람들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은사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성령의 일곱 은사
이사야 11:2-3에서는 메시아(그리스도)에게 부어질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가 언급되며, 특히 가톨릭 전통에서 중요시됩니다:
- 슬기(지혜):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 통달(깨달음): 신앙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은사로, 성경과 교리의 숨은 뜻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 의견(일깨움): 신앙인이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올바로 판단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 굳셈(용기): 신앙생활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은사입니다.
- 지식: 피조물의 공허함을 깨닫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 효경(공경):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사랑과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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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함(경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게 하고 절제의 덕을 실천하도록 돕는 은사입니다.
성령 은사의 특성과 분류
성령의 은사들은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여러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은사의 성격에 따른 분류
- 말씀 관련 은사: 예언, 가르침, 권면 등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전달하고 설명하는 은사들입니다.
- 봉사 관련 은사: 섬김, 돕는 것, 구제 등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공동체를 섬기는 은사들입니다.
- 초자연적 은사: 방언, 병 고침, 기적 등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은사들입니다.
- 지식 관련 은사: 지혜, 지식, 분별 등 영적 통찰력과 이해를 제공하는 은사들입니다.
관계에 따른 성령의 열매 분류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도 관계에 따라 분류합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사랑, 기쁨, 평화.
-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인내, 친절, 착함.
- 자신 안에서 맺는 열매: 믿음(신뢰), 온유, 절제.
성령 은사의 목적과 의미
공동체를 위한 은사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영광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2:7에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출처는 한 분 성령이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모든 신자를 위한 은사
성령은 모든 신자에게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태양빛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와 사역의 연결
에베소서 4:11-13에서는 사역자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은사가 단순히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 기능하는 사역적 역할임을 보여줍니다.
결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은사 목록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은사가 같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공동체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는 말씀처럼 더 큰 유익을 위한 은사를 추구하되, 모든 은사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열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성장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은사의 여러 가지 종류와 정의
A. 은사들의 종류
<고전 12:8-10>에 기록되어 있는 '영적인 은사'들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지는 사역에 필요한 그분의 능력이 초이성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있는 '은사들'은 크게 4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성경적 맥락에서 헬라어의 용어에 따라 분류해 본다.
1. "파네로시스" (Phanerosis)/ '성령의 나타남'(고전 12:8-10)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등.
2. "디아코니아" (Diakonia)/ '성령의 사역' (고전 12:28)
:사도, 선지자, 교사, 기적, 치유, 서로 돕는 일, 행정, 방언.
3. "카리스마타" (Charismata)/ '은혜대로 받은 은사' (롬 12:3-8)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4 ."도마타" (Domata)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자들' (엡 4:8-14)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5. 기타: 독신 (고전 7:7,8), 자선 (고전 3:3), 손님을 대접하는 일 (벧전 4:9) 등
B.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피터 와그너 박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 예언 /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 섬기는 일 /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 권면 /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 헌금 /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 긍휼 /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 지혜 /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령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 지식 /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 믿음 /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 신유 /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 기적 /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 영 분별 /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 방언 통역 /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 사도 /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 서로 돕는 일 /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 행정 /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 복음 전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 목사 /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 독신 /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 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 순교 /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 대접하는 일 /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 선교사 /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 남을 위한 기도 /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 귀신을 쫓아내는 일 /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 C.Peter Wagner교수가 분류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예언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섬기는 일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권면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헌금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긍휼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지혜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력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지식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믿음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신유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기적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영 분별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방언 통역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사도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서로 돕는 일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행정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복음 전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목사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독신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순교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대접하는 일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선교사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남을 위한 기도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귀신을 쫓아내는 일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은사의 정의와 목적, 성경에 나타난 은사
1. 은사의 정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특히 신약의 바울서신에 주로 사용된 언어로서 구원받은 백성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자체의 일원에게 섬김을 위한 특별한 재능의 거룩한 증여라고 정의할수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김의장 옮김. (서울: 엠마오, 1985), 16쪽.
이렇게 정의한 근거는 성경에 은사로 표현된 단어가 두 가지 어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은사’로 번역된 단어가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여기에서 신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은사의 어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곧 은사는 ‘영적인 것’으로서 신령함이 그 근원이라는 말이다. 두 번째 ‘은사’로 번역된 단어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에 카리스마(χαρισμα)인데 그 요소에 있어서 영적 은사는 재능을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영적 은사는 재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7쪽.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은사가 있다’ 롬 12:6
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어떤 면에서건 그들이 탁월하게 머리가 좋다거나 일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주목할 만한 덕을 세우셨고, 그 일이 하나님이 동일한 사역을 다시 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보증이 된다는 뜻이다. J. I. Packer,『성령을 아는지식』, 117쪽.
즉 우리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은사이다. 성도가 하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분명하게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해내는 우리의 역량을 영적인 은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은사의 목적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박형용,『교회와 성령』, 148쪽.
이는 성도 각자에게 한 가지 이상씩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이 이미 증거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된 바울 서신들은 신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교회를 위해서 기록된 서신들이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설명하는 서신으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연결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엡 4:13)하게 될 때까지 세워져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들을 필요에 따라 주신 것이다.
로마서(12:4-8)에서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된 구절들은 성도들의 활동과 삶을 설명하는 부분중 몸과 지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다른 직분을 바로 실행함으로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이다.
고린도 전서는 은사 및 다른 문제들로 혼란에 빠진 고린도 교회를 바로 지도하기 위해 쓴 서신으로 은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을 구하라”(고전 12:7, 14:12)고 하였다. 이 사실은 각 지체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2:12-26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각 지체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몸의 각 지체들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각 지체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 존재하며 다른 지체를 경쟁관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각 지체 간에 시기와 분쟁이 있을수 없고 서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도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신자됨의 믿음을 먼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영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은 성도에게 있어서 누구에게나 필수적이요 종말론적이다.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한몸이 되었다는 것이다(고전12:13) 성령의 은사와 활용에 앞서 성령과의 인격적 관계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은사의 목적을 좀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보편적이다.
3. 성경에 나타난 은사
a.신약성경에 나타난 은사
사도바울에 의하여 거의 전문적으로 사용되어 온 이 은사는 죄인을 용서하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생을 지칭한 말이다. 롬 6:23
이 말은 은혜와는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고 이 은혜는 성령의 역사와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Gehard Kittel,(ed),trans,Geoffery W.Bromiley,『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Vol.Ⅸ(Grand Papids Eerdmans,1974), p. 403.
신약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포괄적인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있다. 성령의 은사라는 개념이 신약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나타나 있다. 사실 은사는 그 직무가 평범한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나는 직무의 일종이다. 바울이 은사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사용할때는 이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과 유죄 판결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했으며 이같은 주장이 로마서에 자주 나타난다. William Barklay,『New Testament Words』,(London : S.C.M, 1971),pp.62-63.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본래적으로 타고난 재주를 은사라고 고린도전서 7:7을 들어 말한 윌리암 바클레이의 주장 William Barklay,『New Testament Words』, p 63.
에 대하여 윌리암 매크래는 재능 역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가의 여부에 있어서 재능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9쪽.
즉 성령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재주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봉사함에 있어서 직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중생한 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논술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물로서 교회 봉사에 필수 불가결한 요인이며 이 은사는 사람에게 의해서는 결코 베풀어질수 없고, 예수의 신령한 몸인 교회를 위한 선물이므로 예수께로부터 받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 교회의 구조적인 조직을 인체 조직에 비교하며 은사의 다양성과 그리고 사역의 다양성을 진술했다. 롬 12:4, 고전 12:12-27
은사가 각각 다른 것은 몸의 각 부분이 다른 것처럼 믿음의 공동체 전부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한 성령, 한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이다.(고전12:4-13) Mack B. stockes,『성령과 크리스챤의 체험』,박선균옮김(서울:성광문화사,1984),58쪽.
신약에서 은사에 관하여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12장, 에베소서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은사들이 잘못 사용되게 되면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질 위험에 따르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다양하게 주어지지만 모든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통일성을 지녀야 된다고 본다.
b. 구약성경에 나타난 은사
구약에서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표현들은 “여호와의 영의 강림”이나 “현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대백과사전 제4권,(서울: 기독지혜사,1977), 98 쪽.
.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길게 혹은 짧게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 재능의 은사, 지혜의 은사를 주어 일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4.은사와 재능
은사에 대한 정의와 그 구체적인 표현에 비추어 보면 영적 은사와 선천적 재능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지어진다. 재능을 “어떤 개인의 일정한 소질적, 정신적 능력, 또는 훈련에 의해서 얻는 정신 실현의 능력” 국어사전편찬위원회,『국어대사전』,(서울: 삼성문화사,1988),1397쪽.
이라고 볼 때 재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노력을 통하여 발전시킬수 있으며, 인생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는데 큰 유익을 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은사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능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임에 반하여, 은사는 성도들에게만 있고, 재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사는 중생과 더불어서만 주어지는 것이며, 재능이 인간의 육체를 위하여 악의 도구로 사용될수 있는 반면에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덕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 재능과 다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무엇은 재능이며, 무엇은 은사에 속한 것인가를 구별하기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은사와 재능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퇴폐적인 대중가요 가수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가 그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여 이번에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디까지이며, 어디까지가 은사에 속하는가? 이러한 경우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하나님께서 어떤 재능을 택하셔서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바꾼후 영적인 은사로 사용한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의미 있는 판단이기는 하지만, 은사란 선천적 재능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수는 없다는 데에 문제가 된다. 박창환 교수는 “재능은 하나님의 제 일차 창조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고 은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세계에서, 즉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사회에서 작용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기능과 역량과 재능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창환,『성령의 은사와 신앙생활』,(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1987),24쪽.
고 정의 한다.
윌리엄 매크래는 다음과 같이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분류하고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9쪽.
결과적으로 은사와 재능을 구별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적인 기준을 통한 원칙을 갖는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즉 어떤 이의 재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관련될 것일 때 그것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은사인 것이며, 아무리 탁월하고 커다란 유익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재능에 속한 것이다. 즉 관찰할 때 어떤 은사들은 초자연적인 측면이 표면에 나타나고 어떤 은사들은 자연적이요 일상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인간의 재능을 실천하는 것에 불과하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면 성령의 은사라고 부를수 있다. 오성춘,『영성과 목회』(서울: 장신대 출판부,1989),160쪽.
5.은사의 종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8,10, 28-30, 에베소서 4:11에서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1에서 은사의 다양한 종류들을 언급하고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44쪽.
이중에서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개혁주의 주장과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은사 몇가지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a.예언의 은사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계시의 진리를 받아서 말하는 역량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46쪽.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공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고영민,『성서원어대사전』,제9권(서울: 기독교문화사,1973),440쪽.
“예언”이라는 말의 의미는 “말을 토해 낸다” 혹은 “미리 예고하고 경고하다”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 고영민,『성서원어대사전』,252쪽.
는 것으로, 미래의 사건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한다는 뜻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4쪽.
즉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며,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인간이나 그가 속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어 폭로하며 현재의
각성을 호소하고 미래의 새 일을 선포하며 그 사회속의 실망자에는 위로와 소망을 주고, 무지하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교육을
담당하며, 우매하고 흔들리는 자에게는 권면과 권고를 주는 사람이다.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의 특징들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머릿속에 직접 계시해 주시는 생각이며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생각을 알수 없으며
둘째. 예언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지시를 포함할때도 많으며 셋째. 예언을 할때는 구약성경에서 계시를
받을때처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인칭 ‘나’를 사용해야 적절하다. 넷째. 예언은 사도시대 교회의 표적
은사였지만 중세교부시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치유 등 다른 표적 은사들과 함께 교회에서 정지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5쪽.
이에 대하여 패커 교수는 예언하는 일은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활동이며, 사도시대에만 예언이 있었다든지 예언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5쪽.
또한 그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선지자들이 때때로 감동을 받아 미래에 대해 말한적이 있지만 마24:15, 행11:28, 21:10, 벧전1:10-12, 계1:3, 22:18
예언사역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을 분명히 전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예언은 성경시대에는 새로운 계시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고 말한다. 단지 사람들에게 이미 계시된 진리를 적용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23쪽.
b.방언의 은사
성령강림의 결과로 방언을 말한 것은 신약성경의 네곳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는 오순절에 행2:4,11
고넬료의 집에서 행19:6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던 에베소에 사는 제자들에게 행19:6
그리고 고린도에 있는 교회 고전12, 14장
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넬료의 집과 에베소에서 제자들이 한 방언들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들과 성격상 일치한다. 싱클레어퍼거슨,『성령』김재성 옮김(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243쪽.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에 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오순절날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은 모두다 통역과 해석이 요구되어지는 외국어로 보고 있으며 싱클레어퍼거슨,『성령』, 245쪽.
찰스 하지 역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5쪽.
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방언 모두를 이해할수 없는 소리로 보았다. 그러나 한가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의 경우 바울은 방언의
사용을 공적인 용도로 말하고 있으며,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도로서의
방언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8쪽.
또한 패커 교수는 방언에 대한 관련 구절을 다룰 때 최악의 실수는 자기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게 명료하거나 확실하다고 직간접적으로 주장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5쪽.
여하튼
방언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의 임재를 훈련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의 영향력 앞에 열어 드리는데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일수 있다고 패커 교수는 지적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18쪽.
또한 그는 설령 오늘날의 방언사용자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고린도교회에서 쓰던 방언과 다르다 해도 아무도 그들의 방언을 금해서는 안될 것 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25쪽.
c.방언통역의 은사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말할때에 그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통역함이 필요했고, 이것도 은사에 속한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 주신 특수한 능력으로서 방언을 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일방적인 말로 알려주는 역량이다.
즉 이 은사는 결코 배우지 않은 외국의 언어를 자기 나라의 말로 통역하거나 해석할수 있는 능력의 은사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91쪽.
고린도전서 14:13에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어째든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이 번역이 가능한 의미를 전달하는 듯이 말한다. 고전14:9-13
패커 교수는 바울이 기록한 통역의 은사가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위험하기 그지없다라고 평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2쪽.
증거가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
Pronunciation [ charisma ]
- Etymology
- 5483에서 유래
-
1.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11:29, 고전1:7, 딤전4:14, 벧전4:10.
-
관련 성경 / 은사(롬1:11, 고전7:7, 딤전4:14), 선물(롬5:16)
우아함
은총
은혜로운 행위
-
Pronunciation [ charis ]
- Etymology
- 5463에서 유래
-
1.우아함, 매력, 끄는 힘, 눅4:22, 골4:6.
-
2.은총, 총애, 덕택, 호의, 은사, 선의, 눅2:40, 롬4:4, 히4:16, 계22:21.
-
3.은혜로운 행위, 선행, 선물, 자선, 기특한 행동, 행24:27, 고후1:15, 벧전5:10, 유1:4.
-
4.감사, 눅17:9, 딤전1:12, 히12:28.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 은혜(눅1:30, 행4:33, 몬1:3), 칭찬(눅6:32, 34), 칭송(행2:47), 은총(행7:10), 호의(행25: 3), 은사(고후9:15), 기쁨(몬1:7), 아름다움 (벧전2:19,20), 사랑스러움(눅2:52), 감사 (눅17:9, 롬6:17, 고후8:16, 골3:16).
기쁨
고후2:3
기쁨을 주는 사람
-
Pronunciation [ chara ]
- Etymology
- 5463에서 유래
-
I.기쁨, 즐거움.
-
1.[문자적으로] 고후2:3, 갈5:22, 히12:11.
-
2.[환유적으로]
-
a.기쁨을 주는 사람, 또는 사물, 기쁨의 대상, 눅2:10, 빌4:1, 살전2:19,20.
-
b.기쁨의 상태, 마25:21,23, 히12:2.
-
c.즐거운 잔치, 마25:21,23, 요17:13.
-
-
-
관련 성경 / 기쁨(마13:20, 요15:11, 고후7:13), 즐거움 (마25:21, 히12:2, 벧전1:8), 희락(롬14:17, 갈5:22).
본을 보였노니(고전 4:6)
1. 모양을 변경하다. 2. 변장하다
Etymology / 미래형μετασχηματίσω, 제1부정과거 μετεσχη μάτισα, 3326과 497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모양을 변경하다, 변화하다, 변형하다, 변하다, 빌3:21.
-
2. [중간태] 변장하다, 가장하다, 꾸미다, 고전4:6, 고후11:13,14,15.
-
관련 성경 / 본을 보이다(고전 4:6), 가장하다(고후 11:13, 14,15), 변하게 하다(빌 3:21).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ὑποτύπωσις, εως, ἡ 5296 [hüpŏtupō- sis]
-
모형, 견본, 모본, 원형, 딤전1:16, 표준, 딤후1:13.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보기, 실례, 모본, 유1:7.
-
2.
증거.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12월 20일(토) 고린도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음을 위하여(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복음을 위하여(for the sake of the gospel)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 구원이라는 복음의 사명에 동참하는 삶을 뜻합니다.
- 자기희생과 헌신 :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 재산, 가족(집, 형제, 부모, 자식 등)까지도 기꺼이 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0:29-31).
- 복음 전파의 사명 :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입니다 (로마서 1:16).
- { 바울의 삶 :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했으며, 이는 복음의 참된 참여자가 되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19-27).
- { 가치관의 전환 : 세상의 가치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최우선으로 두는 신앙적 결단을 나타냅니다.
- { 결과 :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는 현세에서 배나 많은 보상을 받고 박해를 감수하며,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된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 일상생활 : 나의 시간, 재능, 물질을 복음 증거와 이웃 사랑에 사용하는 것.
- 신앙생활 :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을 갖는 것.
- 선교/전도 : 세상 어디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영혼을 사랑한 바울의 본(本)
본문을 설명드리기 앞서 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총 16장 중 1~6장까지는 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이,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8~10장은 우상의 제물과 관련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라(고린도전서 9:14-27)
첫 사람 아담은 과일 먹을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깨고 그 속에서 누렸던 모든 복을 버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하고 그분께 속한 영원한 생명과 신령한 복을 얻게 하는데,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복음을 자랑하는 이들은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아담과 같은 시험을 시시때때로 당한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계속해서 포기함으로 복음이 약속한 모든 복에 참여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본을 보인 삶이 바로 이것이다. 바울의 삶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우선순위가 있었다. 복음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절제하고 자기 권리를 포기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고 그렇게 “복음에 참여하고자” 했다(23절).
바울만 이런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바울 자신도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했다(27절).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 자,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는 복음에 참여할 자격 미달이다. 받은 구원을 빼앗긴다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음이 중심에 확실히 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성도가 복음의 부르심을 첫째 자리에 두게 하시고, 복음보다 자랑하는 모든 것을 버리게 해 주셔서, 진정으로 복음에 참여하는 자임을 확신하게 해달라’라고 매일 간구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하고 복음만을 자랑하는 교회로 함께 서자.
복음만이 우리의 자랑이다(15-18)
바울은 앞서 자신과 바나바가 포기한 여러 가지 권리를 나열했다(4-6절). 고린도 성도의 일부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원래부터 권리가 없었던 게 아니다(7-14절). 다만 복음에 어떤 장애도 생기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15절; 살전 2:9; 살후 3:8).
바울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성도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바울의 말을 자기 권리를 챙겨달라는 말로 알아듣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15절).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단했다(15절). 돈이나 다른 어떤 무언가가 섞이면 자신의 자랑이 공허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직 자랑하길 원했던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가 전하는 복음이다(16절). 아하!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면 후에 보상이 떨어지니까, 이생의 권리를 많이 내려놓고 내세의 상급 얻기를 추구하며 자랑하겠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바울은 곧이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절). 그러니까 바울은 복음을 말과 삶으로 힘써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하나 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오히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왜 그런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가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만일 그랬다면 상을 바라고 얻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17절). 하지만 복음 전하는 일은 바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사명에 의한 일이었다: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절). 하나님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그를 구별하셨고(갈 1:15), 그가 복음을 미워하고 비방하던 중에 만나시고 구원하셨다(행 9장).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다(행 26:19). 그때부터 바울의 고백은 한결같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명을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얻을 무언가가 아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그 자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힘주어 말한 것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18절).
바울이 돈을 바라지 않고 복음을 값없이 전할 때, 바울이 바라는 상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오직 복음 그 자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바울이 오직 복음을 위하여 그에게 있는 모든 권리를 쓰지 않고 포기할 때, 오직 복음이 그 모든 권리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유일한 자랑이라는 것이 확실히 입증됐다. 신자는 오직 복음만을 자랑하고 전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바울과 같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복음위해 권리를 포기한다(19-23)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나?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웠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19절). ‘사람을 얻는다’는 말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이다(22절). 바울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구원한다. 바울은 그 복음을 전달하는 사명에 충성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았다. 신분적으로는 노예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는데(22절), 구체적으로 유대인,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각각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 섬겼다(“얻고자 함이요”4, 20-22절). 가령 바울은 할례로 구원을 확신하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갈 5:2),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1-3). 성전에서 나실인 서원한 자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한 비용을 지불했다(행 21:17-26). 그는 분명 율법 아래 매여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매인 자들이 복음을 수용하는 데 장애가 없게 하려고 스스로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이다. 율법 없는 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없도록 수고했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 3:8).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될까 봐 식사 한 끼도 거저 얻어먹지 않았다. 바울이 말한 약한 자들은 8-10장의 문맥 안에서 우상의 제물을 함부로 먹지 못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단했다(8:13). 후에 그는 불신자 중에서 누가 청하면 차려 놓은 것을 묻지 말고 먹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면 초대한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명했다(10:27-31). 먹든지 먹지 않든지 자기 자유나 권리 행사가 아니라 약한 자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종이 되었다.
오해하지 말라. 바울이 영혼을 얻으려고 수시로 율법을 어겼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21절). 전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의 법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간과하지 않고 철저히 기쁨으로 순종하셨다. 하지만 당시 법처럼 여겨진 장로의 유전과 전통 등을 과감히 어김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방과 위협을 받으셨는데, 이는 오직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마 20:28; 눅 19:10).
한 마디로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다. 그것이 자신이 권리를 쓰거나 쓰지 않는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가리켜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했다(23절). 이것을 주목하라. 복음이 약속한 모든 복에 참여하는 자의 마땅한 삶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삶. 복음이 당신의 믿는/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전달되게 하려면 당신은 그들의 종처럼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복음이 당신의 유일한 자랑이고 맡겨진 사명이기에 기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복음향해 철저히 경주하라(24-27)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신 분명한 목적, 영혼을 얻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전심전력했다.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정했고, 이를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다. 그리고 복음을 자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그와 같이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급진적으로 요구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절).
고린도 도시엔 2년에 한 번씩 대규모 체전이 열렸는데, 그때 주종목 중 달리기와 권투가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마도 이스트미아라는 이 경기가 열렸을 것이다. 바울은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단 한 사람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뛰는 모습을 비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상을 받기 위해 그렇게 달음질 하라고 명령했다. 대충, 나약하고 미지근하게 복음을 말하고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누리고 싶은 권리를 다 누리면서 승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월계수와 같이 썩을 것으로 관을 씌우는 달리기, 물론 명예와 부가 주어지겠지만, 그것도 금세 잊혀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서 먹는 것과 자는 것과 행동하는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까지 치열하게 다툰다면, 썩지 아니할 것 즉 “의의 면류관”, 그 영원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절제하고 노력해야 하겠는가?(딤후 4:8).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급진적인 절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삶의 분명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26절).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삶의 분명한 목적(방향)이 있다. 우리 모두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롬 14: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전 10:31). 주가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다(벧후 3:9).
이어서 바울은 권투의 비유를 드는데,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한다(26절).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권투가 아니라 대상을 향하여 정확하게 주먹을 날리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자신이 치는 대상을 “내 몸”이라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27절). 실제 권투에서는 자기 몸을 때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복음을 전달할 때, 우리가 자기 몸을 때려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내 자존심을 때려눕히고, 내 권리를 굴복시키고, 내 자유를 제한하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 복음으로 싸워 이기는 비법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분명한 방향으로 달음질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를 밝혔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버림을 당한다’는 말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의 자격 미달을 의미한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수고하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바울,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 그가 미달되지 않도록 분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투쟁해야겠는가?
물론 우리는 투쟁으로 구원을 취득하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그 은혜가 너무 귀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헌신한다. 자기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하늘 보좌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기 때문이다. 찬양받을 권리를 쓰지 않고 멸시를 받으셨고, 스스로 많은 자유를 제한하여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악을 악으로 갚을 권리를 내려놓고 선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살 권리를 포기하여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복음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우리에게 오직 은혜로 선물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에 참여한다. 바울이 우리 앞에서 그 본을 직접 보여주었다.
조금 넓은 의미로 복음을 전하는 일의 목적은 불신자를 신자로 거듭나게 하는 일뿐만 아니라 신자가 더욱 복음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복음을 위한 것이다. 당신의 말과 태도와 반복되는 행동은 당신의 믿지 않는 자녀, 배우자, 또는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를 복음으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멀어지게 하는가? 당신의 자존심, 자유, 권리는 복음이 그들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이 전달되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되고 포기되고 있는가? 아니면 팔팔하게 살아서 복음의 장애물과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당신의 절제와 복종은 당신이 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승리의 관을 기대해도 좋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반대로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자세는 당신이 복음의 방향을 거스르고 있으며 버림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
개혁주의 핵심 요약
Ⅰ. 서론 – 개혁주의, 왜 다시 주목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는 번영신학, 자기계발식 복음, 실용주의적 목회 방법론 등으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는 위기를 겪고 있다. 보이스와 라이큰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 곧 은혜 중심의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개혁주의 핵심》은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뼈대를 역사적·신학적·실천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독자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고,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촉구한다.
Ⅱ.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 인간의 무능력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단순히 일부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의지·감정·양심 모두가 죄의 영향 아래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한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 역사로만 가능하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인간 중심적 신앙이나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이 복음을 훼손한다고 비판한다.
Ⅲ.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
하나님은 세상 기초를 놓기 전에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다. 그 선택은 인간의 행위, 공로, 심지어 미래의 믿음조차도 근거가 되지 않는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자유에 따른 것이다.
선택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고, 버림받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놓인다.
저자들은 이 교리를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위로의 교리로 제시한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장한다.
Ⅳ.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Particular Redemption) – 속죄의 실제적 효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반적 가능성이 아니라, 택자에게 주어진 실제적 구속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차별적 ‘보편 구속’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선택된 자를 확실히 구원하는 실효성 있는 속죄다.
이는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효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반드시 열매 맺는다는 사실은 신자에게 큰 확신을 준다.
Ⅴ.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 은혜의 강권적 역사
하나님은 택한 자를 반드시 구원으로 이끄신다. 성령의 부르심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죽은 의지를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하는 은혜다.
은혜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새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다.
성령의 내적 역사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찾고 따르게 된다.
이 교리는 복음 전도의 확신과 연결된다. 우리의 전도가 성공 여부를 결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택한 자들을 불러내신다는 확신 속에 전도를 감당할 수 있다.
Ⅵ.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 구원의 확실성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참된 신자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에 이른다.
이는 인간의 의지나 결심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때문이다.
신자가 넘어지고 실패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은 은혜로 다시 세우시고 결국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 이 교리는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과 인내의 동기를 준다.
Ⅶ. 역사 속의 칼빈주의 영향
보이스와 라이큰은 개혁주의 신앙이 역사를 통해 남긴 열매들을 정리한다.
칼빈의 제네바 : 말씀과 법이 일치하는 경건한 공동체 모델.
청교도 운동 :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태도 확산.
대각성 운동 : 은혜 중심 전도를 통한 영적 각성.
아브라함 카이퍼 : 칼빈주의를 정치·문화·학문 전반에 적용한 세계관으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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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례는 개혁주의가 단순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 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12월 20일(토) 고린도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월 19일(금) 고린도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와 합하는 자(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But he who unites himself with the Lord is one with him in spirit.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를 깨우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2:14)
육에 속한 사람은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세상 만족만을 찾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3:1)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미숙한 신앙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찾지만 세상의 온갖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2:15)
신령한 사람은 주와 합하는 영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와 합한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합하다(콜라오. kŏllaō) κολλάω Storng number 2853
Pronunciation [ kŏlla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ολλήθην, 미래 수동태 κολληθήσομαι, κόλλα ‘아교’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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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밀착시키다, 연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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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동] 굳게 결합하다, 합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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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동] 달라붙다, 눅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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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닿다, 미치다, 계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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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붙다, 함께 하다, 연합하다, 행5:13, 8:29, 9:26, 10:28, 17:34, 고전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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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매달리다, 집착하다, 롬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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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묻다(눅 10:11), 붙이다(눅 15:15), 상종하다(행 5:13), 사귀다(행 9:26), 교제하다(행 10:28), 가까이하다(행 17:34),
속하다(롬 12: 9), 합하다(고전 6:1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주제는 '몸의 연합'에서 '영의 연합'으로 옮겨진다.
즉 창기와 합한 자는 창기와
한몸이지만 주님과 합한 자는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가된 자라는 것이다.
이는 성적 타락으로 더럽혀진 죄악의 상태와 성도의 거룩한
신분을 선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성도들의 참된 지향점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 바울은 주와 '합한다'는 것도 앞절과 같은 분사 '콜로메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영'의 연합을 몸의 연합과 같은 선명한 표현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성령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몸과 영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연합을 이룸으로써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을 닮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엡 4:13).
그리고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그리스도에게 흡수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영과 성도의 영이 혼합 내지는
융화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양자(兩者)의 영이 어느 하나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는 인격적 연합을 이룸을 의미한다(Lenski).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지키라(에베소서 4:1-6)
평안의 매 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씀은 성령이 우리를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교회에 매어준 평화의 띠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일치가
깨집니다.
이 말씀을 "성령의 안전 벨트를 풀지 말아라"라고 의역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면 안전 벨트를 매야합니다.
서양의 자동차들 가운데는 안전 벨트를
매지 않으면 시동이 안 걸리게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시동을 걸면 저절로 안전 벨트가 매이게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안전 벨트를 매지 않거나 풀면 위험한 것처럼 교회에서는 성령이 매어준 평화의 띠를 풀어서는 안됩니다.
안전 벨트가 처음 보급될 때 안전 벨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캠페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안전 벨트는 생명 벨트'라는 표어였습니다.
성령이 매어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 평안의 띠는 교회의 생명 벨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 받아야합니다.
첫째, 교회에서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는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4절과 5절, 그리고 6절의 앞부분은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일곱 가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 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몸이 아닙니다.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성도인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픕니다. 쌍둥
이의 경우 하나가 아프면 다른 아이도 아픈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부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경우가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다 아픕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아파하십니다.
둘, 성령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갈라지게 하
는 것은 악령이 하는 일이고 하나되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한 성령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방언으로 언어가
하나되게 한 일이었습니다. 언어는 바벨탑 사건 때, 사람들이 탑을 높이 쌓아
하나님과 같아지겠다고 교만한 마음을 먹었을 때 혼잡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
령의 강림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셋, 우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처지와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소망이 있습니다. 수능시험을 치고
대학에 원서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수험생들에게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
에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고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에게는 취업이 소망입니다.
저희에게는 본당 준공과 교회부흥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 소망들을 넘어서 공통된 소망, 최종의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입니
다. 우리는 이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넷, 주님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분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 동양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
같습니다. 남한의 성도들이 믿는 예수님,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믿는 예수
님, 같습니다.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는 '내가 재림주 예수다!" 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가짜입니다. 진짜는 하나입니다.
다섯, 믿음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다르고 교파가 다른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입
니다'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그러니까 힘을 합해 잘 해봅시다' 하는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어떤 분이 외국에 가서 기차여행을 합니다. 앞자리에 앉은 분이 책을 읽고 있는
데 글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 같아 보이더랍니다. '저 사람이 나와 같은 믿
음을 가진 크리스천인 것 같은데, 교제를 나누고 싶은데…' 이런 마음이 있어
서 영어로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더랍니다. '어떻
게 할까?' 하다가 지혜가 떠올라서 찬송가를 휘파람으로 불었다고 합니다. 그랬
더니 그 사람이 마주보더니 같은 찬송가를 휘파람으로 불더랍니다. 휘파람 이중
주가 끝난 다음에 둘은 악수를 나누었는데 아주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고 합
니다.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달랐지만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
다.
여섯, 세례도 하나입니다.
여기 세례를 받은 분들. 집례하신 목사님은 다르고 세례를 받은 때와 장소도 다
릅니다. 세례에 사용한 물도 수도권 사람들은 한강 물, 영남권에서는 낙동강 물,
호남권에서는 영산강 물, 다릅니다. 북한에서 자유롭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대동강 물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집례자, 장소, 물, 모두 다르지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성부와 성자와 성
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회사나 단체에서 이 부서에서 기안을 하고 저 부서에서 기안을 하지만 책임자
가 서명을 하면 모두 책임자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집행됩니다.
세례는 하나입니다.
일곱,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유일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은 한 분이다'
고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축복된 일입니다. 다른 나라의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4절과 5절, 6절의 앞부분은 일곱 가지의 하나를 말
하고 있는데 일곱은 완전한 숫자, 무한한 숫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의 신비 가운데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교회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연령층이 다릅니다. 지금 이 자리를 보세요. 10대에서 80대까지가 한 자리
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신지역, 학력, 체험, 취미, 성격, 직업, 다릅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이어서 그렇
지 않지만 외국에 가면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한 교회에 모여
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신비입니다.
에베소서 4장 4절, 5절, 6절은 그 비결을 알려줍니다. 몸과, 성령과, 소망과 주님
과, 믿음과, 세례와 하나님이 하나이며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치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본입니다. 젊은이들 '당연하다'
할 때 '당근이지!' 하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일
치는 당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교회는 자석과 같은 성격이 있어야합니다. 자석은 흩어져 있는 쇳가루들을 다
붙게 합니다.
여기 50대, 60대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장난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
석을 가지고 땅바닥을 끌면 흙 속에 있던 쇳가루들이 다 자석에 붙습니다. 그것
을 보고 신기해하고 재미 있어했었지요.
교회라는 자석은 참되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
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이 힘이 강한 교회가 성장합니다.
종이 위에 쇳조각을 놓고 종이 밑에서 자석을 대면 그 쇳조각들이 붙습니다. 교
회는 장애가 되는 것들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이 2절에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에베소서는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간곡한 마음으
로 일치를 이룰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절의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은 '이것은 내가
참으로 간절하게 하는 권고입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에베소교회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교회들은 이방
인과 유대인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첫째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겸손이란 말의 뜻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이고, 온유는 “자신의 감정을 부드럽게 절제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온유할 때 이웃을 향해 겸손한 자세로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겸손과 온유로 대한다는 말은 때로 분노가 야기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오히려 그를 섬기고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할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잘 알려진 중국 그리스도인 지도자 워치만 니의 저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형제가 중국 남부 한 농촌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느 아침 자기 논에 나가 보니까 논에 있던 물이 아래 논으로 다 빠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써 다시 원상 복귀를 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틑날 아침에 나가 보니까 다시 물이 빠져 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 씩 물을 도적맞은 그는 결국 자기 이웃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행동개시전에 다른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의논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뜻밖에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행동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올바른 일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을까요?”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와 “주님, 올바른 일 그 이상으로 내가 내 이웃에게 할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요?”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중에 주님의 감동을 느낀 그는 그날 저녁 자기 논에 나아가 아예 자기 논의 물을 아래 논으로 스스로 흘러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자기 논에 물이 빠져 나가는 일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겸손과 온유의 승리라고 할까요?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11:2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마땅히 심판하실 그분이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고 오셔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는 진실로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제자들입니다. 화평의 코이노니아를 열망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학습하십시오.
그냥 겸손이 아니라 모든 겸손이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모든 상황, 모든 곳, 모든 자리에서의 겸손과 온유의 태도야 말로 우리를 화평의 삶으로 인도 할 것입니다.
둘째는, 오래 참음과 용납함입니다.
우라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대하여 오래 참지 못하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오래 참고 있지만 우리 안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이웃들과 화평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을 거역한 아들을 오래 참으셨을 뿐 아니라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이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탕자는 비로소 새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화평의 사람이 되려면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을 가져다 준 상대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신자가 자기 교회 목사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며, “목사님 저는 인내가 부족합니다. 제가 인내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가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형제의 소원를 따라 기도하오니 환난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기도하고 있는 목사의 팔을 툭툭 치면서 “목사님, 환난이 아니라 인내입니다.”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형제여 환난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에서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나요”했다고 합니다. 진실로 인내 혹은 오래 참음은 환난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야 말로 무엇보다 인내를 학습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저와 여러분이 인내하는 품성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로 환난의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환난가운데도 가장 힘든 환난은 인간관계의 환난입니다. 인간관계가 어려워 질 때 정말 삶은 지옥처럼 숨막히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야 말로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신 주님의 인내를 묵상할 때입니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세상이 싫어질 때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인생들, 하나님을 원망하고 조롱하고 대적한 세상--그러나 이 모든 인생들의 죄악을 아시고 보시면서도 참으시고 사랑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든 당신이 하나님을 대하여 마음속으로 원망한 모든 일, 그의 기대를 져 버리고 그를 실망시켜 드린 낱낱의 행위들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주님이시라면 과연 당신이 용납하지 못할 이웃들이 존재할까요? 에베소서 4장의 마지막 권면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엡4:32)그러면 이제 그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당신을 섭섭하게 한 그 이웃들을 참고 용납하시겠습니까?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과연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까지 참고 양보 할 필요가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내이어야 합니까?” 사실 이어지는 에베소서 4장이하의 메시지는 거기에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유익이냐구요? 우리로 주님의 품성, 주님의 인격을 닮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나고 거친 우리의 인격은 이런 상황,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빚어지고 다듬어져 우리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를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엡4:13의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다시 4:15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우리는 모두 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도 하나이요, 몸도 하나이요, 소망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요, 우리가 갈 천국도 하나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길을 가서 결국은 한 곳에서 영원히 같이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버리고 갈 수 없고 모른 척 할 수도 없습니다. 영원히 같이 살아야 될 내 가족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훈련해서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내가 깨뜨림으로써 불행을 초래하지 않고,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이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즐겁고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월 18일(목) 고린도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3:23)
you are of Christ, and Christ is of God.
12절.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네게 속한 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약 2:5) 구원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요
10:36;17:18).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마 28:18).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한하나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 진다.
고전 3 :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 상 )
고전 3 :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1]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 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 구원 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
* 약 2: 5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 요 10: 36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 요 17: 18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
* 마 28: 18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히 하나 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진다.
온 세상도 교회의 것이요 생명도 죽음도 그러하다. 현재 있는 것들이 그러하고 장차 올 것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며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파당에 속하지 말고 전체에 속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 곧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물이다.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기에 확실히 교회의 일체성, 교회의 하나 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교회가 하나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지혜를 다 버리고 또 그런 지혜가 자신을 속이는 헛된 것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그의 지혜를 사모하며 또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그러므로 성도들은 요한계시록 21장 6-7절과 22 장 12, 14절의 축복을 받게 된다.
* 계 21: 6-7 -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1) 하나님의 선포 -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① 다 이루었도다.
'이루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난'(*)은 복수 동사로서 문자적으로 '이런 것들이 다 이루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제까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들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Mounce). 앞에서 언급되었던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까지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알파와 오메가 :
⒝ 처음과 나중 :
이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칭호이다.
* 계 1: 8 -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계 22: 13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사 44: 6 -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 사 48: 12 -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이 칭호 중에서 '알파와 처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며 '오메가와 나중'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셔서 온전히 새롭게 하실 분이심을 시사한다(Johnson, Ladd, Morris).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칭호를 밝히심으로 '이루었도다.'라는 선언을 보증하고 계신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에게 주고자 하시던 유업을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세에 끝까지 견디고 마귀 미혹을 이긴 성도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알파와 처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며 '오메가와 나중'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셔서 온전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붙잡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셨으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붙잡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셨고,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을 붙잡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끝으로 아담과 예수님과 새 예루살렘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아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끝이요 빛의 시작이었으며, 예수님은 율법 시대의 끝이요 은혜(교회) 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새 예루살렘은 교회(건물) 성전 시대의 끝이요 사람(육체) 성전 시대의 시작이다.
② 성도의 축복-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심
'목마름'의 비유는 성경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 시 42: 1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 시 63: 1 -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사 55: 1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은 구속하여 영생을 누리도록 하시는 샘물이다.
* 요 4: 10, 14 -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는 자기 백성의 필요와 갈급함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생명수' 즉 구원 혹은 영생을 수여하시는 분이다.(Johnson, Beasley-Murray, Hendriksen)
* 계 7: 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계 22: 1, 17 -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요 7: 37-39 -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가 대가를 바라거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과 호의로 베풀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 시 36: 8 -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 슥 14: 7-8 -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③ 축복의 원인
⒜ 이기는 자에게 유업으로 주신다.- 상속 :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 갈 3: 9 -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기는 자'는 계 2, 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를 상기시킨다. 일곱 교회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며 믿음을 지킨 자들, 곧 이긴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유업으로 상속되고 있다(2: 7, 11, 17, 26. 3: 5, 12, 21).
'이것들'은 앞에서 언급된 것으로 만물이 새롭게 변하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생명수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Beasley-Murray).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시 36: 8 -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 슥 14: 8 -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 요 4: 10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첫째 아담은 이기지 못하므로 죽었으나 둘째 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한 자들이 받게 된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이겼을 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 창 32: 24-28 –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새 예루살렘과 씨름을 하여 이긴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사는 축복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본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말한다. 그 아들에게 계 21: 1-6에 기록된 이것들을 유업으로 모두 주시겠다고 하셨다.
⒝ 저의 하나님이 되신다.
⒞ 그는 내 아들이 된다.
본문은 메시야에 관한 암시인 삼하 7: 14에서는 '아비'라고 되어 있으나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변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만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본 절의 이긴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긴 하나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부자(父子) 관계가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Beasley-Murray).
* 삼하 7: 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천사와 겨루어 이겼던 야곱은(창 32: 24-26)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고 그곳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얼굴이 되었다는 뜻이다(창 32: 28-30).
* 창 32: 24-30 -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계 22: 12, 14 -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2) 상급의 약속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는 7절의 반복이다.
이와 같이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별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연결된 재림은 사 40: 10의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 사 40: 10 -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이는 권능의 손을 휘둘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② 줄 상이 있다- 재림의 때.
* 마 16: 27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사 40: 10 -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③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준다.
⒜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을 가리킨다.
이처럼 행위에 근거한 판단이나 심판은 성경 전체에서 자주 나타난다.
* 계 2: 23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 잠 22: 12 -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 렘 17: 10 -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롬 2: 6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 벧전 1: 17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이것은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묘사할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 계 20: 13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본 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의로운 자에게 주어지는 '상'(*, 미스도스)은 많은 핍박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인내로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Ladd).
* 계 13: 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 계 14: 12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의로운 자에 대한 보상은 상대적으로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를 추종하고 따른 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나 짐승과 사단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만을 가져다준다.
이 말씀과 진리를 깨달은 종들이 죽도록 충성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그 일 한대로 상급을 받고 잘했다 칭찬받게 된다.
고전 3 :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 하 )
(3) 복 있는 자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① 두루마기를 빠는 자 -날마다 행위를 회개하여 자기를 정결케 하는 자.
* 요 13: 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② 생명나무에 나간다- 에덴동산의 회복.
* 창 3: 24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③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
본문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가지 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한 묘사이다(7절. 1: 3. 14: 13. 16: 15. 19: 9. 20: 6).
두루마기를 빠는 상징은 이미 7: 14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다.
특별히 7: 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십자가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함을 시사하지만, 본문의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 계 7: 14 -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 요 13: 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Morris, Ladd, Mounce).
* 요일 1: 7 -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믿는 자들이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에 씻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 갈 3: 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5)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롬 11: 14 -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계 7: 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상(上)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계 19: 13은 피 뿌린 옷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셨고, 계 22: 14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옷을 빨아 예수와 같이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들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말한다. 우리의 행위를 완전히 씻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장성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영생에의 참여를 나타내며 '성에 들어갈 권세'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충성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 즉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3] 인생의 터 : 박 조준 목사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요긴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이 닦는 터입니다.
3장 10~15절에 보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서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터를 닦아 두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1절에 보면 고린도에 18개월, 사도행전 20장 31절에 보면 에베소에 3년 체류한 것이 제일 긴 기간이었고 데살로니가에는 한 달도 머물러 있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설교해야 할 고장은 많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작업을 순조롭게 잘 하려면 바울은 터만 닦아 놓고는 다음 고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매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1년 이상 3년이나 머물러 있은 곳이 있었다면 그것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뿐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렇게 복음의 전파가 긴급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디모데후서라고 합니다.
그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에 보아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히 정성을 다 쏟아 부으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얼마나 강력하게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했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말씀 전파는 긴급한 것입니다. 전파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똑같은 터를 닦았습니다. 그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터입니다. 기초입니다. 기초는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터가 움직이면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큰 집, 높은 집을 건축할 때 기초 공사를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기초가 약한 데 집을 지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얼마가지 않아서 금이 가고 기울어지고 종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니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세 반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 인생의 집의 기초가 반석입니까? 아니면 모래입니까? 우리의 집을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 위에 세우셨습니까? 그리스도 위에 세운 사람은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집을 세운 사람은 세상이 변하는 대로 달라집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대목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이 발견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6~11).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심판받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허물과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원수가 아니라 친구처럼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고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밉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던 것이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죄의 사함을 받을 때 유쾌하게 되는 날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현재에 베푸시는 능력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힘과 소망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죄악의 세력과 고전분투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을 보세요. 로마서 7장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고 했습니다.
바울이 육과 영의 싸움에서 얼마나 고민했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그는 얼마나 담대해졌습니까?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1~37).
빌립보서 4장 13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것이든 그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싸움터에서 싸우매 승리합니다.
3. 장래에 대한 희망을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래는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있다면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장래를 바라보기를 무서워하고 생각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세계, 하나님과 같이 일하는 가운데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계, 삶의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곧 종말이 아니라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서곡에 불과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집이 없으면 얼마나 초조하고 암담할까요? 인생의 밤은 다가오는데 가실 집이 마련되어 있으십니까?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고 훌륭한 저택을 쓰시고 계셔도 저 영원한 곳에 집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터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터를 그리스도로 삼기 바랍니다.
이제 이 터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 반석 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둡니다. 다른 터 위에 천국의 소망을 세우는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교리의 기본 교리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떠나면 모든 위로가 무너지고 죄인의 소망이 사라집니다.
죄 많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기초를 잡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믿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터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세웁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순수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며 예수 안에 있는 진리만을 잡으며 그것만을 전파합니다. 이것은 좋은 터 위에 잘 세운 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친 복음만을 가감 없이 순수하게 믿고 전해야만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기초 위에 집을 세운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떠나고 그리스도의 교리 대신에 그들의 생각이나 요구를 대치시켜서 집을 짓는데, 이것은 심판 때에 견디지 못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 집과도 같습니다. 볼 때는 굉장할는지 모르지만 심판 때에 다 타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터 위에 세운 것들이 밝히 드러날 때가 옵니다. 모든 사람의 공력이 밝혀질 것인데 자기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에 뭐랬어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날에는 모든 것이 나타납니다. 불은 금과 은과 불순물을 구분합니다. 금과 은과 보석은 불을 견디고 나무와 풀과 짚은 타버립니다.
불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불같은 시험이 우리에게 닥칠 때 어떤 사람은 그 시험을 견디고 좋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들은 좋은 터 위에 잘 세웠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잘 지은 집과 같습니다. 터나 건물이 하나가 됩니다. 기본 진리와 그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함께 가르침을 받습니다. 지금은 이것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완전히 드러납니다. 잘 짓는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받습니다. 그는 명예와 칭찬을 받고 영원한 상을 얻습니다.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을 전파하며 그들의 일이 올바르면 반드시 보답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 얼마나 넘치는 보답입니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세상 문헌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죽음은 절망이요, 슬픔이요 저주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요? 이 땅 위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니 그들의 공력이 불타 버릴 사람도 있습니다. 최후의 날은 모든 위장을 제거하고 사실을 밝힙니다. 공력이 타버리고 사람은 큰 손해를 당합니다. 좋은 터 위에 나무와 풀과 짚으로 세운 사람은 손해를 당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자기 사욕이 앞서고 잘못된 길로 행할 때 그 일이 아무리 굉장해 보여도 결국은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의 터를 잡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세우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은 그의 공력을 태워 버리는 불에서 구출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에서 끄집어내는 가지처럼 구원하나 그들의 공력은 태워 버리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이 잘못된 집을 지을까 염려한 것이 아니고 불충분한 집을 지을까 염려했습니다. 자기 기분에 맞는 것만을 강조하고 그 이외의 것은 무시하여 균형을 잃어버린 기독교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교리를 곡해하고 신조를 왜곡하여 어그러진 모습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불충분한 점을 우리 각자의 신앙을 각자의 편견이나 선입견에 비추어 보지 않고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점검해 볼 때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평론가 롱기너스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슨 글을 쓰든지 ‘호머나 데모스테네스라면 어떻게 쓸까?’라고 생각하라. 아니 그보다도 호머나 데모스테네스가 네 글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자문해 보라”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바로 옆에 앉아 계시면서 들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많은 잘못에서 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의 이 몸은 성전입니다. 성전은 구별된 집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몸이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성전에 거하셨습니다. 그 성전을 소유하시고 그 안에 거하셨으며, 영광스러운 구름은 임재의 표시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도 성령으로 모든 성도들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이 계시려면 더러운 것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입니다(갈 5:19~21). 이런 것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 몸이 성전이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을 더럽히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천직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고린도 교회를 집합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도 개개인도 거룩해야 하거니와 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빠지면 안 됩니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물 속에 빠지면 배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지 않도록 힘쓰십시다.
끝으로, 바울은 겸손을 요청합니다.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23절). 우리가 자신의 지혜를 과대 평가하는 것은 자기 기만을 낳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기 위하여 인간의 지혜를 버리는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선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9~21절).
그리스도의 터 위에 귀한 믿음의 집을 지으십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죄는 용서받고, 지금은 능력으로 살고, 장래는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전입니다. 주님이 계실 수 있는 전이 되도록 하십시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 세상을 어리석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다.
고린도전서 3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목회는 물을 주는 것과 같으며, 전도는 터를 닦는 것과 같고 목회는 그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전도자이든지 목회자이든지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 전해야 한다.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없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금, 은, 보석으로, 즉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 성경의 순수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과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 개인 속에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에 관련하여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특히 우리가 잘못된 이단사설을 용납하거나 파당을 만들고 분쟁하고 분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를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셋째,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 교회의 분쟁에 대하여
바울이 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파당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복음을 듣는 일과 세례받는 일에 있어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그리스도파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들어 그들의 행위를 바로 잡습니다.
1.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은 나누어진 경우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뉨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나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다양하고 다른 각각의 지체가 있으나, 그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유지하고 있음같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각각 다른 지체의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다양한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모든 지체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머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하나의 머리와 하나의 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언행은 삼가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몸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인하여 모든 분열과 분파를 막아야 합니다.
2.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이 말씀은 ‘바울 덕에 너희가 구속을 받았느냐?’는 반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부르느냐?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분파심은 사람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더 높여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며, 결국 우상숭배가 되며, 이단에 빠지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3.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냐?
바울은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못박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구원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교회의 내적 분열에는 편협한 동류의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고, ‘끼리끼리’라는 편파적인 성향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배경이나 사상적인 배경을 따라 교회에서 편협한 동류의식으로 분파를 일으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교회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고전 1:10-1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매우 세속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지식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하게 하시고, 은사를 넘쳐나게 하시고,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다만 그들은 받은바 은혜를 감당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받은바 풍성한 은혜에 걸맞은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래 전, 몇 주간 금식 기도하였던 때입니다. 제가 금식 기도한다는 것을 어떻게 들은 어느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 마자 대뜸 “아니, 왜 교회에 무슨 문제 있어요?”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다’고 대답을 했지만, 계속해서 무슨 문제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를 염려하여 묻는다지만 다른 어떤 호기심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제 말을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듯이, 문제가 없는데 왜 금식하느냐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하던 그 분의 얼굴이 잊히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전에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평소에 금식하고, 문제가 생기면 밥 먹고 힘을 얻어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분쟁’에 관한 내용을 설교하면 교회에 엄청난 싸움이 있어서 그런 설교를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쟁이 없기에 분쟁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리교회 창립기념주일을 맞으며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을 간절한 권면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권면입니다.
I. 권면
우리말에서 ‘권면’은 권할 권(勸)자에 힘쓸 면(勉)자를 써서 어떤 일에 힘을 쓰도록 권하는 것이 권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 왜,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까?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앞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원수같이 여겨서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권면하다[parakalevw/파라칼레오]’는 말은 ‘가까이서 부르다’는 뜻입니다. 가까이 불러서 부탁하고, 훈계하고, 위로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밀한 사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를 문제가 많은 교회의 대표 선수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교회였고,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형제들이었습니다.
1. 형제로써 권면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권면하려고 할 때, 또는 세상에 있는 다른 교회들의 잘못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할 때, 우리가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로 여기는 미움에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는 사랑에서 권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이기에 정말로 냉정하게 꾸짖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의 권면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여, 먼 고장으로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나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런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둘째가 집을 떠난 뒤에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첫째의 이야기입니다. 마침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종을 통하여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첫째의 말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동생을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말은 잘못된 동생을 맞아들인 아버지의 행동을 단단히 몰아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첫째야 말로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큰 아들에게 하였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눅 15:31)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말은 ‘얘[tevknon/테크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들아’(My son)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아버지를 몰아세우는 바로 그 아들을 향하여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돌아온 그 둘째가 바로 ‘네 동생’(눅 15:32)이라고 그에게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이 여전히 한 가족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모두 거룩한 모습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원수처럼 비난하는 것으로 교회를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교회만은 안 그렇다고 내세우는 것으로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또, 문제 있는 교회를 도려내는 것으로 잃어버린 교회의 신망을 되찾을 수도 없습니다. 결코, 저런 사람만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교회가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사람을 우리가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라는 하신 이들을 우리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형제로써 다만 사랑하여야 할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권면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으로 권면합니까?
다시,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diav/디아]’라는 말은 무엇을 ‘통하여’, 또는 무엇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권면하는 이유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권면하는 근거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권면할 수 있는 능력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권면하는 방법도 예수님이셨습니다.
2.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여기에 함께 모인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이 아니라면 전혀 관계없이 살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은 오로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적인 계획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 서로에게 형제와 자매들인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일 이유도, 목적도, 능력도 모두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님 때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로 자매로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II. 내용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써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당위성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랑하여야 할 줄을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가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1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0b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매우 단순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권면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표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내용의 권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의 내용은 모두 같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본래 ‘말하다[levgw/레고]’는 ‘앞에 놓다’는 뜻입니다. 말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역시 알 수가 없습니다. 말한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같은 모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같은 주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1. 같은 말을 하십시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앵무새같이 똑같은 소리를 짓거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소리의 화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도 서로 다른 것처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써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믿는 예수님과 저 사람이 믿는 예수님이 다른 분처럼 보이고, 이 교회가 믿는 예수님과 저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분처럼 드러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그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저는 제가 지금까지 목회해 온 교회를 돌아보면서 이런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보이지만 교회에서는 작은 다툼이라도 크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도무지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권면의 내용은 분쟁이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데 문제는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쟁이라고 합니다. ‘분쟁[scivsma/스키스마]’은 ‘틈’, 혹은 ‘간격’, ‘찢어진 곳’을 가리킵니다. 갈라진 틈이 보입니다.
찢어진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즉 베드로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분열된 모습입니다.
바울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바울이 보다 더 위대하게 보였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후에 아볼로를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아볼로가 바울보다 더 낫게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먼저 사역하였으니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파였고, 아볼로는 바울의 후임이었으니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은 신파였을 것입니다. 구파와 신파가 서로 다투는 것에 실증을 느끼고,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신앙의 ‘원조’를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게바파입니다. 그러나 아예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짜 원조’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런 모습에 사도 바울은 통분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13)라고 묻습니다. 자신을 따fms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15)고 합습니다. 결코 사람을 따르는 분열의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분쟁이 없이 하십시오.
인간은 매우 분열적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누가 더 잘 났느냐 하는 것으로 갈라집니다.
천안 병천은 순대로 유명합니다. 강원도 안흥은 찐빵으로 유명합니다. 여주 이포대교부근에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합니다. 춘천은 닭갈비로 유명합니다. 저마다 유명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유명하다는 곳에 가면 예외 없이 ‘원조’라는 이름이 붙은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집의 이름은 ‘진짜원조’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할매 원조’ 심지어는 ‘진짜진짜원조’도 있습니다. 모두 자신이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원조라는 것을 내세워야 장사되는 상술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 다고(:14)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을 따르고 어떤 사람을 내세우면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조금 잘하면 교만할 수 있고, 조금 못하면 좌절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두 패가 생기고, 세 사람이 모면 세 패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분쟁을 없이 하여야 합니다.
분쟁이 없이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세 번째 권면의 내용은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합하다[katartivzw/카탈티조]’는 말은 ‘수리하다’, ‘조정하다’, ‘회복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계의 부속품들을 조정하여 정상적으로 움직이다’는 것입니다.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는 것입니다. 죄악 된 인간이 분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복을 시도해야 합니다. 회복을 시도해도 저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또 다른 분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 안에서 온전히 합하여야 합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은 복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같은 뜻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는 같은 말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서는 예수님만이 온전히 드러나야 합니다.
3. 온전히 합하십시오.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교회가 가 가져야 할 같은 마음이자, 같은 뜻이며, 같은 말입니다. 십자가를 표현하는 다양한 표현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신들의 패거리를 내세우는 것이라면 반(反) 기독교적이며 반(反) 신앙적입니다.
미국의 종교 월간지 [무디] 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내용은 ‘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불평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등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더욱 집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래서 형제와 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때문에’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하기 위하여 분쟁이 없이 온전히 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악 된 본성을 거스른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길 때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음에 길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고백하십시오.
“형제님, 자매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뜻을 품고,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같은 성령님의 말을 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배경과 교회의 문제들
1. 고린도전서가 쓰이게 된 배경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회 개척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AD 49~52년)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8:1).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상업 중심지로, 무역과 문화가 활발했지만 동시에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행 18:11)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기독교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그는 예루살렘과 시리아 안디옥을 거쳐 제3차 전도여행(AD 53~57년)을 시작했고, 에베소에 장기간 머물며 사역하였습니다(행 19:1). 그 사이 고린도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 교회 안에 심각한 윤리적, 신학적, 공동체적 혼란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보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두 가지 경로로 파악했습니다. 첫째,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에 대해 알려왔습니다(고전 1:11). 둘째, 고린도 교회로부터 직접 편지를 받아 여러 실천적이고 신학적인 질문들을 전달받았습니다(고전 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는…”).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AD 55년경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성경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서신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반으로 교회의 정체성과 윤리, 예배와 공동체 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2.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교회의 문제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진단하고 이에 대해 성경적 지침을 제시하는 실천적인 사도적 권면의 서신입니다. 본서는 크게 교회 내의 분열과 도덕적 문제, 그리고 교회의 질문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답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교회의 분열과 리더십 숭배 (1~4장)
고린도 교회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며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고전 1:12). 이는 고대 헬라 철학자들의 추종자 문화를 닮은 것으로, 복음의 본질을 잊고 인간 지도자 중심의 사고로 변질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전 1:13)고 반문하며, 복음은 오직 십자가의 도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복음을 철학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으로 규정하고, 사도와 교역자는 주의 일꾼일 뿐이라는 점을 밝힙니다(고전 4:1). 이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하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2. 도덕적 타락과 윤리 문제 (5~6장)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근친상간의 사건(고전 5:1), 송사 문제(고전 6:1
11), 성적 부도덕(고전 6:12
20) 등 심각한 윤리적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5장에서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다”(고전 5:6)고 말하며 죄를 방치하는 교회의 책임을 경고합니다. 6장에서는 성도들 간의 법정 소송을 문제 삼으며, 교회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복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로 지적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점(고전 6:19)을 강조하며, 신체에 대한 경건한 태도와 성결한 삶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3. 결혼과 독신에 관한 문제 (7장)
고린도 교회는 결혼, 독신, 이혼, 재혼에 대해 여러 실천적 질문을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고전 7:17)며, 각자의 처지에 따른 신앙적 결단을 존중합니다.
기독교
혼인을 권장하면서도 독신의 유익을 말하며, 재혼의 경우에는 신중을 기할 것을 권면합니다. 특히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동거 문제에 대해서는 화목을 우선하되, 믿음으로 인한 분리는 용납함으로써 현실적이고 융통성 있는 신앙 지침을 제시합니다.
4. 우상제물과 자유의 절제 (8~10장)
고린도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논쟁 중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하며, 기독인의 자유에는 책임이 수반됨을 강조합니다.
우상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약한 양심을 가진 형제를 실족시키는 자유는 잘못된 것이라고 경고합니다(고전 8:9~13).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삶(고전 9장)을 모범으로 제시하며,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유의 절제를 요청합니다.
5. 예배와 질서 문제 (11~14장)
예배 중 여성의 복장 문제(두건 착용), 성만찬의 무질서, 은사의 혼란이 교회의 질서를 해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바울은 질서와 경건의 예배 회복을 요청합니다.
성만찬에 있어서는 부유한 자가 먼저 와서 자기 식사를 하고, 가난한 자는 굶주리는 불공평함을 지적합니다(고전 11:21). 그는 “주께서 받으신 바”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시키며,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히 경고합니다(고전 11:27).
12~14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혼란을 바로잡습니다. 은사의 다양성 속에서 몸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방언과 예언의 사용은 질서 있게, 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지침으로 줍니다. 특히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1)는 13장은 은사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6. 부활에 대한 신학적 혼란 (15장)
고린도 교회 안에는 죽은 자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며(고전 15:14),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핵심임을 선언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증인들을 통해 증명하고, 부활체의 영광과 최종적인 승리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는 외침은 부활의 승리를 확신하는 성도의 찬가입니다.
7. 연보와 사역자 문제 (16장)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위한 연보를 고린도 교회에 권면합니다. 그는 "각 사람이 마음에 정한 대로,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말하며 헌금의 원리를 제시합니다(참조: 고후 8~9장).
또한 바울의 방문 계획과 동역자 소개, 그리고 교회 일꾼에 대한 격려가 이어지며, 신실한 사역자들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깊은 애정이 드러납니다.
결론
고린도전서는 단순한 고대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문서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영적 진리와 삶의 원칙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인간적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도 위에 굳건히 서서, 사랑과 질서, 자유와 책임, 그리고 부활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는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중심 메시지를 요약하는 핵심 선언입니다.
같은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린도전서 1:10-17)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현상을 보거나 직접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한편,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한 분쟁을 겪고 있지 않다고 안심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분쟁의 기본적인 의미인 ‘갈라진 틈’, ‘균열’은 언제든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 가운데 생길 수 있으며,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큰 파벌과 분열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 소식을 듣고 그에 관한 답변을 1-6장까지 적었고, 그 중에서 4장까지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을 다뤘다. 고린도 교회 가운데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심각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고린도 교회 나타난 분쟁을 신중하게 해부하여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성경적인 처방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할때 성령께서 우리 교회의 틈과 벽을 발견하게 하시고, 더 큰 문제로 번지기 전에 예방하여,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원한다.
1. 분쟁의 현상(11-12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들은 뜬소문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성도가 전해준 사실이었다. 바울은 어느 정도 소식통의 정보를 알리는데, 글로에의 집 편(11절), 노골적으로 대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들은 소식이 신빙성 있는 증거에 근거한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분쟁이 나타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분쟁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2절).
먼저, 여기 언급된 이름은 모두 고린도 성도에게 잘 알려진 일꾼들이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인도했던 목회자였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한 목사(고전 4:15), 아볼로는 그 뒤를 이어 교회를 양육한 목사, 게바(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서 당시 모든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건, 분쟁은 일꾼 사이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끼리 경쟁이나 갈등은 없었다.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아볼로를 교회에 물을 준 일꾼으로 인정하고(3:6), 고린도 교회에 돌아갈 것을 많이 권했다(16:12). 불편한 관계에선 그렇게 하기 어렵다. 베드로는 편지에서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 또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벧후 3:15). 결국, 문제의 현상은 인도자가 아니라 성도들 간에 나타났다. 성도가 자신이 추종하는 인도자에 따라 편을 나눠 갈라선 것이다: “나는 OOO에게 속한 자라!”
일반적으로 교회의 분쟁은 일꾼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먼저 일꾼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과 시기심으로 균열이 생기면, 각각 추종하는 무리가 들러붙어 더 큰 분쟁으로 번진다. 반대로 성도의 심각한 분열이 아무 문제 없던 일꾼 사이를 갈라놓기도 한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경우 목회자 사이엔 아무런 분쟁이 없었다. 그러면 성도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편이 나눠진 걸까? 분쟁의 원인에 관하여 많은 추측과 시나리오가 있고, 그중엔 합리적인 추정도 있다. 가령, 아볼로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뛰어난 수사학, 웅변술 등을 익히는 대학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답게,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다(행 18:24). 그는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행 18:28). 성도 중에서는 그의 탁월한 언변과 지식에 감탄하며 매료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점점 그를 추종하면서 한 분파가 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인도자를 무시하거나 멀리하게 되었을 것이다(고후 10:10). 어쩌면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세상적 지혜를 책망하고(1:19), 말의 설득력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을지도 모른다(2:1-4).
일부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 같은 바울을 무례히 대하는 무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9장). 그래서 정이나 의리 때문에 또 다른 분파를 형성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똑같은 책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게바파는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고린도 교회 안에 비교적 소수로 존재한 유대인 성도로 같은 배경, 전통, 율법, 역사를 가진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를 추종하느라 생긴 분파(8, 12장), 그리스도파는 이도 저도 속하고 싶어 하지 않은, 그러나 어떤 면에서 모든 인도자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돌봄을 받고 있다고 교만하게 생각했던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 될 수 있지만, 정확한 분쟁의 원인을 다 알 순 없다. 표면적 원인은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바울이 내린 진단을 통해 분쟁의 본질적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2. 분쟁의 진단(13-17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절). 이 질문들이 기대하는 정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으셨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뉘신 것처럼 그 몸인 교회를 나누었고, 바울, 아볼로, 게바가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례를 그 일꾼들 이름으로 받은 것처럼 행했다. 14-17절까지는 생각보다 길게 세례에 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데, 이는 고린도 성도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가지고 그 인도자와의 특별한 관계를 입증하려고 애썼던 정황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보(회당장, 행 18:8), 가이오(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롬 16:23)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14절). 왜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이 되는가? 그 사실이 아무도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5절). 흥미롭게도 바울은 세례를 베푼 또 다른 성도들이 떠올랐다: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16절). 어쩌면 대필자 소스데네가 이 사실을 떠오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 외엔 세례를 베푼 자가 없다고 확언했다가 스데바나 집(16:15) 사람들이 떠올랐을 때, 그 외에도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가 바울에겐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 바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얼마나 세례를 베풀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했는지가 중요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17절a). 얼마나 해박한 지식과 대단한 설득력을 가진 언변을 가졌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달되는 것이 중요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b). 바울의 삶 그리고 사역은 온통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고린도 교회 성도가 왜 서로에게 벽을 세웠는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났다. 해박한 지식에 매료될 수도 있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강력한 웅변력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래서 어떤 설교자에게 애정이 생길 수도 있다. 자기 문화, 역사, 법, 전통, 민족성을 잘 이해해 주는 지도자에게 더 큰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처음부터 해산의 고통으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수고하며 길러준 아버지 같은 인도자에게 더 큰 정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사실상 우상숭배의 문제와 같다.
중심이 사람에게 옮겨지면, 설교자가 선포한 메시지가 그리스도를 증언했느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가 설교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싫어하는 설교자의 말씀은 비판적으로 튕겨낸다. 추종하는 설교자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고, 그 외의 설교자가 그러면 불필요하게 설교를 어렵게 한다고 충고한다. 좋아하는 인도자의 유머는 재치 있고 영리하다고 하고, 좋아하지 않는 인도자의 유머는 쓸데없고 헛되다고 한다. 똑같은 교회 운영이나 사역 활동도 어떤 사람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지고 반응도 달라진다.
분쟁의 문제가 더욱 교묘하고 심각한 이유는, 분쟁 가운데 있으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야’,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할걸’, ‘나는 지금 교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싸우는 거야.’ 이렇게 자기합리화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구하는 겸손과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분열이 있는 곳에는(가정, 교회) 항상 철저한 자기중심성이 있다. ‘내 생각’, ‘내 의견’, ‘내 판단’, ‘내 감정’, ‘내 평판’, ‘내 유익’을 가장 먼저 추구하려는 욕구가 분명히 나타난다. 자기중심성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의 본성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다(약 4:1). 자기중심성은 또한 마귀적이며 세속적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성도는 자기중심성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바꿔야 한다. 그럴 때 분쟁이 사라진다.
3. 분쟁의 처방(10절)
바울은 분쟁을 처방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 성도를 애정어린 표현으로 형제들아, 내 형제들아라고 부른다(10, 11절). 그리고 ‘곁으로 다가와 돕다’라는 뜻을 가진 “권하노니”라고 표현으로 친절하고도 단호하게 분쟁을 이렇게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분쟁과 반대되는 개념이 세 가지가 나온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이것은 교리, 태도, 가치관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성도는 본질적인 진리에 관하여 하나 되어야 하고, 성경적인 가치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합당한 태도를 함께 갖춰야 한다.. 이렇게 서로가 온전히 맞춰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 분쟁을 없애는 길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가 주라고 부르는 분이시고,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가르치셨는지가 성도가 가져야 하는 마음, 해야 하는 말, 품어야 할 뜻을 결정한다.
빌립보 교회도 분쟁의 문제가 있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신실한 복음의 동역자 자매들 간의 갈등이 교회 전반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바울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각 권하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빌 2:5). 우리 모두의 주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은 마음 곧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중심에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두기를 원하신다.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까지, 예수님께서 관정에서 끌려가 십자가에 달려 숨지시기 직전까지 그분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을 기록했다. 한 번은 자기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자들에게(“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8), 또 한 번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대항하는 모두를 바라보며(“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마지막으로는 함께 달린 강도 중 회심한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채찍에 심히 맞고 모욕적인 일들을 당했다. 십자가를 자기 스스로 질 수 없어서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에게 대신 들고 가게 해야 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숨질 때까지 치욕과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웃을 향한 사랑 중심적이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이 그런 분이시고,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모든 분쟁 가운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 안에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 분쟁의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초대 교부 클레멘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분쟁 문제를 다룬 뒤 약 40년 후에 고린도 교회에 또 편지를 써서 남아있는 분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다. 당신의 마음 중심에 자신을 두지 말고, 목사도 두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을 두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 안에 분쟁은 사라지고 온전히 합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분열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그리스도 안에서) 로마서 1:1-7
바울 사도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어로 이 부분은 to belo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들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아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의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어떤 공간 안에 있거나, 조직 안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당 안에 있다는 것이나,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또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의 범주에 속했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과는 ‘사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고양이는 ‘고양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사과(a apple)는 the Apple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믿는 기독교인을 a (little) christ라고 하고 예수님을 the Christ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세계 안에서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입니다. the Apple은 사과 실물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는 생명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과 동일한 과일, 즉 실존을 우리가 사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정체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정체성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속한 실존적인 개체,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또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집 앞에서 보는 사과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과는 전혀 다른 사과(a apple)지만 또 같은 사과(the Apple)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졌지만 또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그 이름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다양함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생명이 같다는 것,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과 정체성도 그리스도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모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육신의 삶의 풍성과 세상적인 성공과 복을 받는 것을 위하여 믿는 것이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주여! 주여!’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다 헛짓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 예수님의 운명과 같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같아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랬다면 자신도 이룰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나도 힘써 노력해 보자’라는 것은 흉내 곧 노릇은 할 수 있어도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그 유전자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은 그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정체성은 행위나 공로에 속한 것이 아니니 노력하는 신앙, 신념으로 버티듯 하는 신앙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공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고 아들이 되려는 모든 믿음은 자기 생각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신앙입니다. 기도 많이 한 것으로, 성경 많이 본 것으로, 신학을 공부했다는 것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정하거나 옷 입는다는 것은 모두 존재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유와 공로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신데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었을 때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의로움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로움으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남을 섬김으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는 그런 존재로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삶이라서 한 개의 사과를 보고 사람들이 ‘사과’라고 하듯이 그 삶이 예수님의 생명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거나 <힘쓰고 애쓰고 깨어 있자>고 신념을 동원하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달리 열매입니까? 그 생명 DNA만 있으면 다른 것을 맺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이 열매고 생명입니다. 그러니 성령이라는 생명이 자신의 DNA가 되기만 하면 아니 맺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열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을 안다면 노력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서 어떤 말씀이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미완이라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면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생명도 날 때 그 생명의 이름을 가지지 않고 살면서 노력으로 그 생명의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답게 살려고 하기는 해도 태어나 보니 아직 사람이 덜 되어서 노력해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채우는 이가 없습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그 자체로 온전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나 깨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과는 어떤 짓을 해도 사괍니다. 짓눌려 다 일그러져도 사과고, 반이 갈라져도 사과며, 맛이 없어도 사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생명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생명으로 났다면, 노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니 이것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그런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것은 동쪽 끝에 가도 여호와가 계시고, 서쪽 끝에 자리를 펴도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리스도며, 자기가 아무리 그리스도 아닌 것으로 살려고 해도 성경을 구구절절 지키고 살고 있는 생명인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에릭프럼 /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근본적인 태도인 “소유 모드”(Having Mode)와 “존재 모드”(Being Mode)의 차이를 탐구한 책입니다.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이 현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며, 존재 중심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 소유 모드 vs. 존재 모드
프롬은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소유 모드(Having Mode)
• 물질, 지식, 권력 등을 소유하려는 태도
• 경쟁과 소비 중심의 삶
•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공허함을 느낌
•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소유하려는 태도를 가짐 (예: 사랑을 상대를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
2. 존재 모드(Being Mode)
•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삶
•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유가 아니라 상호 작용을 중시
• 자아 실현과 깊은 내적 만족을 추구
• 삶 자체가 목적이며,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에 초점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존재 중심의 삶을 통해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 소유 중심의 사회와 인간 소외
(1) 현대 사회의 문제점
프롬은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소유 중심적인 문화를 조장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물질적 성공과 소비를 강요하며, 개인의 가치를 소유한 재산이나 지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 소유 중심의 교육: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여김
• 소유 중심의 인간관계: 사랑도 상대방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이해
• 소유 중심의 경제 시스템: 끝없는 소비와 경쟁을 부추김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만, 결국 더욱 공허해진다고 프롬은 설명합니다.
(2) 인간 소외와 불행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진정한 자아를 잃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허전함을 느낌
• 타인과의 관계가 수단적이 됨 (사람을 이용하고, 거래하듯 대함)
• 창의성과 자율성을 잃고, 기계적인 삶을 살게 됨
결국, 소유 중심의 태도는 사람을 외롭고 불행하게 만들고, 삶을 피상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3. 존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에서 “존재 중심의 삶”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제안합니다.
(1) 경험을 중시하는 삶
소유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 공부할 때, 단순히 정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배움 자체를 즐길 것
• 사랑할 때, 상대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 집중할 것
• 일을 할 때,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것
즉, 어떤 것을 갖고 있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 창의성과 자율성
프롬은 존재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삶을 기계적으로 살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
• 주어진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욕구와 가치를 따르는 태도
(3) 사랑과 연대
프롬은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존재 모드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태도
• 경쟁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가치
• 상대를 도구가 아니라 동반자로 대하는 태도
이러한 사랑과 연대를 통해, 우리는 더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프롬은 강조합니다.
4. 존재 중심의 삶을 위한 실천 방법
프롬은 단순히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 존재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법도 제안합니다.
1. 소비주의에서 벗어나기
•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할 것
• 물질적 풍요보다 내적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
2. 진정한 배움과 창조적인 활동
• 암기나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닌, 배움 자체를 즐기는 태도
• 창의적인 활동(예술, 글쓰기, 음악 등)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
3. 깨어있는 삶을 살기
• 자동화된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할 것
• 명상,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것
4. 타인과의 관계 개선
•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사랑을 실천할 것
•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연대와 공감을 실천할
5. 결론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소유 중심적인 삶을 강요하면서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우리가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
• “나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는 삶을 얼마나 깊이 경험하는가?”
프롬의
사상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소유 중심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고,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소유보다 존재를 중시하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더욱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그런데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공통된 위치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분쟁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공동사회(共同社會, Gemeinschaft 게마인샤프트[ɡəˈmaɪnʃaft][*], community)
이익사회(利益社會, Gesellschaft 게젤샤프트[ɡəˈzɛlʃaft][*], society)
독일의 사회학자인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가 주장한 이론이다.
공동사회는 가족, 친족, 민족, 마을처럼 형연이나 지연 등 애정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며, 비타산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반면 회사, 도시, 국가, 조합, 정당 등과 같이 계약이나 조약, 협정에 의해 인위적이고 타산적 이해에 얽혀 이루어진 집단을 이익사회라고 한다.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발전을 주장한 퇴니에스는 이익사회로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긍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피안에 개인원리에 입각한 공동사회가 부흥할 것을 예상하였다.
분석 방법은 얼핏 보아 형식주의이지만 홉스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회과학의 고전에 의거하여 확립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개념은 사회과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퇴니스에 따르면, 사회적 결속은 이분법적 관점에서 개별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역할, 가치와 함께 이러한 상호작용이 낳는 신념들인 게마인샤프트, 또는 간접적 상호작용, 비인격적 역할, 공적 가치와 함께 이러한 상호작용들이 낳는 신념인 게젤샤프트로 나뉠 수 있다. 특히 게젤샤프트는 현대 회사, 근대국가 및 학계 등과 같은 법인과 결부된다[1]. 퇴니스는 이 이항대립을 순수한 개념도구로 보았는데, 이는 막스 베버가 이 이항을 역사적 사회변화의 핵심 구성요소인 이념형으로서 보는 것과는 대조된다.
퇴니스는 책의 첫 문단에서부터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2].
| 게마인샤프트 | 게젤샤프트 |
|---|---|
| 실제적이며 유기적인 삶reales und organisches leben | 이념적이며 기계적 형성물ideelle und mechanische bildung |
| 지속적이고 진정한 공동생활das dauernde und echte zusammenleben | 임시적이며 가시적인 것vorübergehendes und scheinbares |
| 신뢰 가능하며, 편안하고, 독점적인 공동생활 Vertraute, heimliche, ausschließlichen zusammenleben |
공중, 세계die deffentlichfeit und die Welt |
| 농촌Das land | 도시문화Die Städtische Kurtur |
시카고학파는 퇴니에스가 커뮤니티와 일의 업무를 구분했을 뿐만이 아니라, 게마인샤프트를 여성의 것, 게젤샤프트를 남성의 것으로 돌리는 등 여러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3].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라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누구 편에 속하는가는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가 된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는 어느 교단인가 또는 누구를 세워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로 분쟁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분쟁할 때마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난의 칼을 휘두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우칩니다.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 dust in your br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티와 들보를 NIV 영어성경에서는 dust(먼지)와 plank(널판지)라고 번역합니다.
만일 널판지가 내 눈앞에 있다면 다른 것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눈에 먼지가 보인다는 것은 매우 신비한 사건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성품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은 종속된 관계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통치권자는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지적질 하는 것은 곧 주님의 것을 비난하는 것이므로 결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발견했다면 내게는 티보다 더 큰 널판지와 같은 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고린도전서 3:23 해석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매튜 헨리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통합된 상태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할 때, 우리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조화롭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앨버트 반스
성도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로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우리가 하는 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담 클락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명과 삶의 방향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권력을 체험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신학적 연결
고린도전서 3장 23절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 로마서 14: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 갈라디아서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고린도전서 6:19-20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 에베소서 1:22-23 - "모든 것의 머리로 교회를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 빌립보서 1:21 -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베드로전서 2:9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요한복음 15: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구절의 함의
본 구절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께 속하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더 읽을 거리
고린도전서 3장 23절은 여러 주제와 관련이 있으며, 이를 통해 성경 안에서 연결 및 해석의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신분임을 의미합니다.
의미 :
소속감 : 그리스도인(신자)은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듯,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결국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영적 신분 :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상속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맥락 :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벌을 나누고 육신에 속한 자처럼 행동할 때,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일깨워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선포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전 3:21-2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 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변화 가 있게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는 사단이 그 사람 속에 자리잡고 왕노릇함으로 본의 아니게 죄를 짓 게 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 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 성이 된 후에는 그 사람 속에 성령 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 을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연히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언 어가 달라지며, 행동하는 것이 달라 지고, 인격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 러분 중에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예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한 계시록 3:20절을 보면 [볼지어 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 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 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 심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런데 우리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되면 특별히 변화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치관의 변화입니 다.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 로 내가 벌어 힘써 모았다고 말합니 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 순절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아무도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 가 없었고,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 요를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교 회안에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 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가지 중에서 어느 부 류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재산 을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아니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 십니까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 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했고, 너희는 그 리스도의 것이라고 했으며, 그리스 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 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 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 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 과]만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 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 의 의지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 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 니다. 그 결과 아담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930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창 5:5). 그런데 아담이 천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혹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천지는 변해도 하나 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죄를 범하면 반드시 하나님 의 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 대한 징벌이 속히 오지 않으므 로 어리석은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 에 마음이 담대하다고 했습니다(전 8:11). 그런데 인류 역사를 살펴보 면, 징벌이 즉각 임하지 않았을 뿐 이지 악한 일에는 반드시 징벌이 있 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셔 서 누구나 죄를 범했다고 해서 즉각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의 길 에서 돌아서서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죄악의 분량이 차기까지 참 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고사성어 에도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지 않 습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 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5:13-16절을 보면, 하나님 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사백 년 후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이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 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분 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일지라도 아직은 타락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악의 분량 이 차기까지 심판을 유보하시는 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악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모으기도 합니 다. 또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 취하기도 하며, 명예를 돈으로 매수 하기도 합니다. 돈과 권세를 이용하 여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 래서 바르고 정직하게 법대로 사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오히려 편법과 불법으로 사는 사람은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 님께서 얼마동안 내버려두고 계시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 판이 임하기까지 계속해서 진노를 쌓고 있을 뿐입니다. 때가 차면 진 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 많은 재산이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줄로 생각하고, 자신의 권세와 명예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끝납니다. 돈도 날아가고 권력도 날 아갑니다. 예레미야 17:11절을 보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 새가 낳지 아니 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 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 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재 물이나 권세나 명예도 언젠가 다 없 어질 날이 있습니다. 지금 내 수중 에 있다고 해서 내 것이라고 안심해 서는 안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 지는 안개처럼 곧 없어질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지라도 자랑할 것 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 하면 그 돈이 그 사람의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 으면 다 놓고가게 되어 있습니다. 곧 남의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권력도 명예도 가졌다고 자랑할 것 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그리 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 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피로 우리의 죄 값 을 대신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 다.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 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고전 6:20). 시편 135: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 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 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출 19:5).
이사야 43:1-5절을 보면 [야곱아 너 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 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 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 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 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 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 랑하였은즉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 은 굉장한 축복인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 지 않고, 떠나지 않으며, 언제나 우 리와 함께 하십니다.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십니다. 그러므 로 이사야 41:10절에서 [두려워 말 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 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축복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 습니까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 습니다. 역대상 29:11-14절에서, 다윗은 백성 들 앞에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 능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 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 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 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 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 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 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4:8절과 고전 10:31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 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 의 것이로다], [그런즉 너희가 무엇 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위 해 봉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러나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여 많이 가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 니다. 가진 자에게는 책임이 있습니 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한 자를 위 해 봉사할 책임을 느끼며 살아야 합 니다. 물질이 넉넉한 자는 물질이 없는 자를,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또 권력을 가진 자는 힘없는 사람 을,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 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 는 사람을, 믿음이 큰 사람은 믿음 이 작은 자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 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 더불어 행 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를 보면, [양 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영광의 보 좌에 앉으셨을 때에 모든 민족을 주 님 앞에 모으고 양과 같은 사람을 오른 편에, 그리고 염소와 같은 사 람을 왼편에 두고 심판하신다고 했 습니다.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 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 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 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 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에 그들이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대접한 일 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러나 주님은 [너희가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마찬가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 에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 을 때에 돌아보지 않았다고 책망하 자 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 그네 된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 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되물었습 니다. 이에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 는,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 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 고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염소와 같이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이 양과 같이 남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진심으 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창세기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따 라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 게 됩니다. 여러분의 재산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어진다면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 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고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중생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음을 믿 게 되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 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 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고 주님 을 위해 사는 것을 기뻐합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이웃사람 에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중에도 이 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 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고 말하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기 때문 에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변화가 일 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 하여 말씀대로 살 힘이 없습니다. 경건하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이나 예 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권능과 기사와 이적 을 보았으면서도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자 예수님을 부인 하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예 수님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해 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말씀대 로 살기 시작했으며,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아야 신자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셔서 모 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 면서 일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구원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한 하나 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고린도전서는 ‘προς κορινθιους Α(프로스 코린디우스 알파)’로 불린다. 이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란 뜻이다. 한글성경 ‘고린도전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은 1:1, 16:21 등 본서의 내용 속에서 기록자가 스스로 자신을 바울로 밝히고 있는 것과 초대 교회 시대의 각종 문헌들이 본서의 기록자를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던 바울로 한결같이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 일단 기록자 문제에 관한 한 별다른 이견은 없다.
2) 기록연대 / 장소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시에 고린도 지역에 대략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사역하면서 복음이 전파 되게 되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떠난 것은 A.D.51년 경이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 일단 예루살렘에 잠시 들른 후 자신의 본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다(행 18:18-23). 그 후 A.D.53년 다시금 제3차 전도 여행을 개시하여 갈라디아와 마케도니아 지역 등은 대강 둘러보는 정도로 그치고 에베소에 오래 머물면서 사역하였다. 바로 이 기간 중에 고린도 교회 내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수행하던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로 급히 파송하기도 하였고(고전 4:17) 급기야는 본서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본서를 쓰면서 16:8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늦은 봄의 오순절을 보내고 고린도 교회로 가서 겨울을 함께 지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시 에베소에서 체류한 기간은 2년 6개월 이상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시기와 장소는 A.D.55년 초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3) 고린도 지역의 특성과 배경
고린도는 헬라 반도 아랫부분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무역이 성행하고 있는 만큼 무역을 하기 때문에 부유층이 많았고, 동시에 노예나 가난한 자들도 많았다. 아울러 여러 다른 민족들이 섞여 살았으며, 유대인들도 거기에 많이 거주했다. 그 도시에는 우상을 위한 신당들이 많이 있는데, 지식충에서 주로 신봉하던 철학적 종교들, 로마 군인이나 행정 관료들이 숭배하던 종교들 등 각종 우상 숭배가 가득 하였고,, 애굽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무역차 이 항구에 오는 배들이 많이 있어서 우상을 수입시킨데 있다. 그리고 신전에 1000명이나 되는 매춘부 들이 있는 등 성도덕이 문란하였다. 이러한 특징들이 주변에도 퍼지게 되어 음행하는 자를 가리켜 세칭 ‘고린도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기록 목적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린도인들은 혼합주의, 성적 문란, 무절제, 경박함 등의 당시 고린도 문화의 부정적 영향을 온전히 청산(淸算)하지는 못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3차 전도여행시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게 되었다. 고린도교회는 곧 각종 오류와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교회 내에서 파당이 형성되어 분열을 일삼게 되었고, 극심한 성범죄가 야기되어도 이를 방치하는가 하면, 성도 상호 간에도 소송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알게 된 바울은 디모데 등의 사역자를 고린도 교회로 급파하는 일면 마침내 사도 서한을 발송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오류를 시정토록 촉구하고자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아울러 고린도 교회에서 가져온 헌금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16:17).
- 특징
①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질의와 응답
고린도전서는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에 대하여 교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11),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바울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그것에 대한 답변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주제들은 결혼에 관한 질문(7:1), 둘째,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것(8:1), 신령한 것-다양한 은사(12:1), 성도를 위한 연보(16:1) 등이다.
② 문제 해결로서 신앙의 핵심을 강조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문제들, 즉 미성숙, 분열, 질투와 시기, 소송, 결혼, 성적 부도덕, 영적 은사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울러 중요한 두 가지를 더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13장)과 부활(15장)이다. 전자는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이 근거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혼란 속에 있던 그들에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원하게 밝힘으로 부활에 대한 심오한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③ 문제에 대한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지침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들은 현학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그때 당시에 다양한 문화와 계층간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에 대단히 실천적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이것은 그때 당시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믿음의 성장 과정을 거치는 중에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상황과 사고체계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분열, 소송, 성적 부도덕, 은사 등의 문제에 관하여 올바른 해결을 하도록 하는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 주제
1) 분열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1-4장)
고린도 교회는 분파적인 분열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특정 지도자나 교사를 따르는 것을 내세우며 서로를 비난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도자나 교사를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중요하다는 하나님의 뜻을 일깨운다.
2) 성과 관련 문제: 몸으로 드리는 예배(5-7장)
고린도 교회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상 숭배와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몸으로도 하나님께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3) 음식 관련 문제: 양심과 사랑에 기반한 판단(8-10장)
우상 제물에 드린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자, 바울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은혜 안에서 개인이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는 자유를 인정한다. 주변의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위대한 속죄의 은혜 안에서 양심의 자유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4) 예배 모임 관련 문제: 질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예배(11-14장)
강렬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태도로 예배 모임에 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배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공간이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며, 각 지체가 서로 협력하여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체의 각 부분이 자기 일을 하듯이, 각자가 자신의 은사를 드려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5) 부활과 미래의 소망: 영원한 삶의 약속(15장)
일부 신자들은 부활을 부정하며 죽음 이후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에게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 현재 삶의 능력의 근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약속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부활의 소망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 교훈과 적용
1) 교회는 일치(unity)와 하나됨(oneness)을 유지하여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예수님을 유일한 머리로,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여러 지체로 하는 하나의 몸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일치와 하나됨을 상실한 교회는 평화와 사랑을 상실하는 슬픔을 겪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와 사람 앞에 온전한 교회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
2) 교회는 예배(禮拜, Worship)를 경건히 시행하여야 한다.
예배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 그리고 간구와 서원을 올리며 경배하는 의식이다. 즉 예배는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인간과 여호와 사이의 교재의 모든 요소를 응축하여 의식화한 것으로서 여호와와 성도 사이의 가장 역동적인 교재의 장소이다. 따라서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의 의무인 동시에 은혜를 거듭 체험하며 새로이 공급받을 수 있는 위대한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그 예배의 대상자이신 여호와는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으로서 역사와 우주의 창조자시오, 주권자이시며, 절대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 의식은 경건하게 집전되어야 한다.
3)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성도의 소망의 근거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은 세상 끝날 우리를 부활시켜 천국 구원을 주시겠다는 예수님 복음의 약속의 절대적인 확증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얻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실로 성도만의 역동적 소망의 절대적 근거이다.
- 구조
1) 교회의 분열상(1-4장)
① 인사(1:1~9) ② 분쟁 원인(1:10~2:16)
③ 결과(3장) ④ 권면(4장)
2) 교회의 타락상(5-10장)
① 근친상간(5장) ② 송사와 음행(6장)
③ 독신(7장) ④ 우상제물(8~10장)
3) 교회의 제반 문제들(11-16장)
① 공예배(11~14장) ② 부활(15장) ③ 맺는말(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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