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하박국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 목사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을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기뻐하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인수는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돌아와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교훈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우리 모두는 치료받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信) = 사람 인(亻) + 말씀 언(言)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위에 자기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유다서 1: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But you, dear friends, build yourselves up in your most holy faith and pray in the Holy Spirit.
Keep yourselves in God's love as you wait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o bring you to eternal life.

우리 인생을 든든히 세우는 비결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내적으로 나 자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전도하고 봉사하고 섬기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면서 둘 다 잘 이루어져야 아름다운 신앙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와 선교에 힘쓰면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도 힘썼습니다. 
자기를 만들지 못하면서 남에게만 말씀을 가르치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봐 두렵다고 했습니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이 말은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건축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세우고 나의 인생을 건축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남이 세워줄 수 없습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을 지을 때도 건성으로 대충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 세상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다면 그가 쌓아 놓은 많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건축하는 방법을 살피겠습니다.

1.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20절에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집을 짓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 신앙의 기초는 거룩한 믿음입니다.

첫째, 터를 잘 닦아야 합니다. 집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터를 잘 닦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기초도 예수님이고 신앙의 기초도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한 터요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거룩한 터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둘째. 좋은 재료를 선택해야 합니다. 터를 잘 닦은 다음에는 어떠한 재료를 써야 할지 신중히 고려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2에 재료는 6가지가 있습니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입니다. 이 중에서 금 은 보석은 불에 타지 않는 재료이고 나무 풀 짚은 불에 타는 재료들입니다. 금 은 보석이 좋은 재료입니다. 건축을 다 마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시험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3-15에 보면 시험하는 방법은 불로 태워본다고 했습니다. 불로 태워서 그 공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공적이 불에 타버리면 해를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기는 받으나 불 가운데서 나온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a) 성경 말씀대로 신앙생활하고 성경 말씀 위에 자기 인생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가장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음 생활하는 것은 가장 좋은 재료를 써서 신앙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러면 불로 심판할 때 타지 않고 공력이 남아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힐 때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과 영광을 받게 됩니다. 

b)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이기주의나 욕심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종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믿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남을 섬기고 봉사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금 은 보석으로 자기를 건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칭찬을 바라고 하는 것은 나무와 풀과 짚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이익이 안 되면 그만둡니다. 그것은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므로 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자기를 건축하는 자들입니다. 좋은 터에다가 좋은 재료로 잘 건축해야 합니다.

2. 성령으로 기도하며

자기를 건축하는 일은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자기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8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첫째,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로마서 8:27에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둘째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자기를 만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죄를 찾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치고 바꾸는 일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던 것을 순종하고,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을 사랑하고, 끊지 못하던 죄를 끊어버리면서, 성격도 고치고, 말도 고치고, 행실도 고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합니다.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자기 고집과 옛사람을 죽이고 자기를 만들어 가게 됩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한 만큼 거룩해지고, 기도한 만큼 온유 겸손해지고, 기도한 만큼 믿음이 좋아집니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우리는 자기를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자기를 잘 세워도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모두 잃게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굉장한 힘을 가졌지만 자기를 지키지 못함으로 다 잃었습니다. 사울은 왕도 자기를 지키지 못하다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잘 지키고 다스려서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자기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9:25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세상을 보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신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을 합니다. 사는 길을 버리고 죽는 길로 갑니다. 생명 길을 버리고 사망 길로 갑니다. 하나님 없이 산다면 스스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잃어버리는데 돈이 많으면 뭐하고 권세가 있으면 뭐합니까?

둘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곧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사는 동안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5:17에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이에 스스로 돌이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지낼 때는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제 정신없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참 생명을 찾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아가서 5:6에 술람이 여인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후 “그때 내 혼이 나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 잃어버리고 세상에 취해서 살아갈 때가 바로 자신을 잃어버린 순간입니다. 나 자신을 지키려면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 자는 힘만 들고 고생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이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4.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 긍휼히 여길 줄 모르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진실이 한이 없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가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 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을 네 개의 동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우며, 기도하며, 지키며, 기다리라’



10월 7일(화) 하박국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나라 국(國) = 창 과(戈) +  작은 입 구(口) +  한 일(一) 영토 + 큰 입 구(口)
  • 1. 나라.  2. 도읍.  3. 고향.  4. 지방.  5. 나라를 세우다
한 사람이 창을 들고 땅을 지키면 나라가 세워진다. 




구원의 세가지 진리 (칭의, 성화, 영화)


성경은 <구원>에 대한 세가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믿음의 첫발걸음을 내딛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하고, 영접 이후에 주님과 동행하며 죄로부터 떠나는 모든 과정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성화>라고 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죄의 존재로 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주님과 같이 거룩한 형체로 순식간에 변화되는 과정을 <영화>라고 합니다.  이것을 <구원의 3양상>이라고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표로 정리하고 이 세가지 진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 구원의 3양상

양상

말씀

의미

방법

태도

결과

이해

1.칭의

엡2:8-9

롬3:24

구원을 얻었다

(과거)

믿음

(영접)

감사

죄의 <형벌>

로부터 해방

주님을

모심

2.성화

빌2:12

벧전2:2

구원을 이루라

(현재)

믿음

(순종)

겸손

죄의 <권세>

로부터 해방

주님을

닮아감

3.영화

롬13:11

고전15:

51-52

구원이 가깝다

(미래)

믿음

(재림)

순결

죄의 <존재>

로부터 해방

주님과

하나됨

1. 칭의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칭의(Justification)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불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방향전환(회개와 영접)을 함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의로운 존재가 아닌데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우리의 어떠한 행위나 의지나 선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의 출발점>이 되며 마치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가 한 가정의 양자가 되듯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하늘의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접의 의미는 단순히 복음을 머리로 가볍게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을 찢는 애통함과 나의 죄로 인한 아픔, 지옥불에 떨어질 정도로 심각했던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영접은 진정한 칭의라고 볼 수 없으며 천국과 영생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접의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단번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빨리 걸리든 오래 걸리든 반드시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진정한 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 복음을 이해하고 형식적으로 영접기도 드리는 것은 진정한 칭의가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복음으로는 거세게 사망으로 흘러가는 죄된 옛 생활의 흐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쪽으로 방향전환을 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그동안 내가 지은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짓게 될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용서받습니다. 단지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내가 저지른 죄악들이 전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공로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회개와 영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2. 성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 

죄로부터 확실하게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모셔들인 사람에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권세와 통치, 영생, 죄사함, 구원의 여러가지 축복들이 단번에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갓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많은 경우에 영접하자마자 갑자기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주님과 대화해 본 적도 없으며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맺어져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자주 대화하며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주님과의 관계가 발전되고, 주님의 성품과 약속과 주님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누려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깊이 맺어지면서 주님을 향한 갈망과 주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나도 싫어하게 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나도 기뻐하며 즐거이 순종하게 됩니다.

성화(Sanctification)란 이미 칭의를 통해 얻은 완전한 구원의 선물가방의 지퍼를 열고 다양한 구원의 축복들을 하나씩 꺼내어가면서 누려가는 즐거운 과정입니다. 죄사함, 거듭남, 천국시민권, 영생, 의롭게 됨, 기도의 특권, 주님보좌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무한 통행권 등... 셀수 없는 수많은 구원의 축복들을 누리며 열매맺는 과정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뜻과 상반되는 이전에 누리던 옛사람의 잔재들을 하나하나 포기하고 버려가는 아픔이 수반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칭의의 과정에서 진실하게 마음을 찢고 회개함으로 영접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 때문에 기꺼이 그 아픔을 감수하며 옛사람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속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단계의 초기에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성장통의 과정을 겪지만, 그 단계를 지난 후에는 이제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내가 받은 구원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이제 내 중심의 시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마음아파하며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으로 전도하고 양육하며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붙들어주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화단계의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갈2:20)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이미 칭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진리입니다. 단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결국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Nothing임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가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진리를 깨닫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가능하다면 칭의의 과정에서 이 진리를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현재 처음 믿음을 갖는 자들에게 믿음의 첫단추를 (갈2:20)로 끼워주려고 노력하는데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네요.^^;

성화는 서서히 죄의 권세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의 권세와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정말 경이로운 과정입니다. 성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3. 영화 (죄의 '존재'로부터 해방)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롬13:1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15:51-52)

영화(Glorification)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홀연히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순식간에 믿는 자들이 다 변화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 일어나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되고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도 이어서 변화된다고 합니다. 이 날은 (살전4:16-17)에 나오는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영원토록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휴거일)이 될 것입니다.

영화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딤후4:7-8).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죄와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스스로 믿음을 버린 자들, 믿음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배교하는 자들, 양심이 굳어져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영화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벗어버리고 주님과 같은 썩지 아니할 완전한 몸을 입게 되는 과정이기에 죄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순간이 바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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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20여년간 예수님을 믿고 생활하면서 배우고 누린 구원의 개념을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구원을 스스로 확증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를 부모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자 부모님께서도 당연히 원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교만하게 구원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반박할 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맺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아주 무식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고후13:5)말씀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확증하라고 하셨고,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버리운 자라고까지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거두절미하고, 많은 크리스찬들이 고민하고 헥깔려하는 구원의 확신문제에 대해 제가 지금껏 사랑하고 섬겨온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경험한 진리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종지부를 찍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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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원인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로 압축됩니다.

한마디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데 연약해서 자꾸 넘어지고 죄의 유혹에 빠져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납하지 못하시고 내가 자꾸 죄를 지으면 구원을 취소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십자가로는 내 죄를 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없는 참람한 고백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부터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고백이 진짜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지속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되었고, 원수되었을 때에도 목숨버려 사랑해 주신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단지 머리로가 아닌, 가슴과 삶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연약함과 넘어짐 속에서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반석위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고 나아가 자백하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단 한가지 근거도 역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주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압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도 세세하게 다 압니다. 주님과 친하니까... 주님을 못견디게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주님의 눈빛과 제스처만 봐도 그분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평생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살아왔는데 천국문턱에서 갑자기 주님이 정색을 하시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말씀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일매일 주님과 손잡고 동행하며 에녹처럼 살아가다가 그 모습 그대로 천국문턱을 넘어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여유있게 걸어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이 얼마나 온유하시고 선함이 가득하시며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에 자신이 지금 당장 죽더라도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것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이제 더이상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 세월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행복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깊이깊이 맺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24시간 내내 종일 손을 벌리며 우리가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실시간 대기상태에 있기 대문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바로 지금 내 모든 상황들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님께 아뢰며 마음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사탄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제 그 본색을 드러내며 대놓고 진리를 짓밟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며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미혹하여 넘어뜨릴 것이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그 가증한 일들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탄이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오실 모든 준비를 마치시고 이제 구름을 타고 계시는 듯 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무척 어둡고 수심에 가득차 계십니다. 이제 더이상 스스로의 구원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영적인 갓난아이 수준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푹 빠져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와 일군, 그리스도의 군사,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사탄이 주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어두운 세상속에 푹 빠져서 살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7-8)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가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날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었던 내가, 주님을 이토록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먼저' 내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하루에도 수십번 넘어지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저를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 알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조차도 제게서 난 것이 아니요, 절 위해 죽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사랑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저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편히 쉬며 영원한 안식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몹시 사모가 되지만, 이 땅에서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을 몰라 영원한 사망으로 가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 제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제가 진리를 외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지옥 불못으로 침몰해갈 것입니다.

주님, 이 글을 읽고 있는 수많은 믿지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소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확실한 회개를 통해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하소서.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속으로 뛰어들게 하소서. 주님 다시오실 그날까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주님의 신부들이 많이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옵소서. 한사람이라도 더 주님 품으로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얼굴 하루라도 빨리 뵙고 싶지만 조금만 더 지체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준비가 안된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 맞이할 기름을 채울 수 있도록 조금만 더 기다려주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열방의 택함받은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기쁨으로 찬양하며 들어갈 수 있는 후회없는 믿음의 삶을 우리 모두가 다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박국 2:4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한글]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義人)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한문]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개정]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개정4판]
2:4 보아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 영혼은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바른성경]
2:4 보아라, 그의 마음은 驕慢하며, 그의 속 靈魂은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바른성경 한문역]
2: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표준새번역]
2: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새번역]
2:4 보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그 안에 정직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글KJV]
2:4 보라, 위로 높여진 자의 혼은 그 사람 속에서 곧바르지 아니하나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 [한글흠정역]
2:4 보아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우리말성경]
2:4 이 사실을 깨달아라. ㄱ) 악한 사람들은 제멋대로 허풍을 떨다가 멸망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가 있다. (ㄱ. `그(저 갈대아 사람)의 마음은(교만으로 가득 차서) 부풀어 있고 그 속에 성실함이 없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의 진실함으로써 살 수가 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현대어성경]
2:4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2:4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외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공동번역]
2: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카톨릭성경]






惟义人因信得生(유인인신득)

  • 1. 생각하다.  2. 꾀하다.  3. 벌이다.  4. 마땅하다.  5. 오직
사람 인
  • 1. 사람.  2. 백성(百姓).  3. 남.  4. 어떤 사람.  5. 인간(人間)

  • 1. 인하다.  2. 말미암다.  3. 의지하다.  4. 유래하다.  5. 잇닿다

  • 1. 믿다.  2. 펴다.  3. 늘어남.  4. 신표.  5. 소식

  • 1. 얻다.  2. 만족하다.  3. 깨닫다.  4. 맞다.  5. 득

哈巴谷书 2 [简体]

  • 1. 물고기가 많은 모양
  • 2. 마시다
  • 3. 입을 대고 훌쩍 마심
  • 4. 물고기가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
  • 5. 속어로 웃음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획수 9획 부수 口(입구, 3획) 난이도 읽기 특급Ⅱ
  • 1. 땅 이름
  • 2. 파조(巴調)의 약칭
  • 3. 구렁이의 한 가지
  • 4. 아비
  • 5.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땅의 이름
획수 4획 부수 己(몸기, 3획) 난이도 읽기 1급, 쓰기 특급
  • 1. 골
  • 2. 흉노(匈奴)의 임금
  • 3. 골짜기
  • 4. 계곡
  • 5. 우묵한 골짜기
획수 7획 부수 谷(골곡, 7획) 난이도 읽기 3급Ⅱ, 쓰기 2급
  • 1. 용렬하다
  • 2. 몸
  • 3. 못생김
  • 4. 體의 속자(俗字)
  • 5. 거칠다
획수 7획 부수 亻(사람인변, 2획)

迦勒底人自高自大,心不正直。惟义人因信得生。



  • 1. 부처 이름
  • 2. 만나다
  • 3. 막다
  • 4. 범어 kya의 차음자(借音字)
  • 5. 차단(遮斷)함
획수 9획 부수 辶(책받침, 4획) 난이도 읽기 2급, 쓰기 특급Ⅱ
  • 1. 굴레
  • 2. 억누르다
  • 3. 억지로 하다
  • 4. 다스리다
  • 5. 새기다
획수 11획 부수 力(힘력, 2획) 난이도 읽기 1급, 쓰기 특급
  • 1. 밑
  • 2. 이르다
  • 3. 바닥
  • 4. 멈추다
  • 5. 막히다
획수 8획 부수 广(엄호, 3획) 난이도 읽기 4급, 쓰기 3급
  • 1. 사람
  • 2. 백성(百姓)
  • 3. 남
  • 4. 어떤 사람
  • 5. 인간(人間)
획수 2획 부수 人(사람인, 2획) 난이도 읽기 8급, 쓰기 6급Ⅱ
  • 1. 스스로
  • 2. 저절로
  • 3. 좇다
  • 4. 쓰다
  • 5. 출처(出處)
획수 6획 부수 自(스스로자, 6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높다
  • 2. 높이
  • 3. 높낮이
  • 4. 높이다
  • 5. 높게 하다
획수 10획 부수 高(높을고, 10획) 난이도 읽기 6급Ⅱ, 쓰기 5급Ⅱ
  • 1. 크다
  • 2. 거대함
  • 3. 많다
  • 4. 고귀하다
  • 5. 훌륭하다
획수 3획 부수 大(큰대, 3획) 난이도 읽기 8급, 쓰기 6급Ⅱ
  • 1. 마음
  • 2. 염통
  • 3. 가슴
  • 4. 한가운데
  • 5. 도(道)의 본원(本原)
획수 4획 부수 心(마음심, 4획) 난이도 읽기 7급, 쓰기 6급
  • 1. 아닌가
  • 2. 크다
  • 3. 새 이름
  • 4. 의문사
  • 5. 오디새
획수 4획 부수 一(한일, 1획)
  • 1. 바르다
  • 2. 정월
  • 3. 바르게 하다
  • 4. 예기(豫期)하다
  • 5. 듣다
획수 5획 부수 止(그칠지, 4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곧다
  • 2. 값
  • 3. 품삯
  • 4. 바른 길
  • 5. 바루다
획수 8획 부수 目(눈목, 5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생각하다
  • 2. 꾀하다
  • 3. 벌이다
  • 4. 마땅하다
  • 5. 오직
획수 11획 부수 忄(심방변, 3획) 난이도 읽기 3급, 쓰기 2급
  • 1. 인하다
  • 2. 말미암다
  • 3. 의지하다
  • 4. 유래하다
  • 5. 잇닿다
획수 6획 부수 囗(큰입구, 3획) 난이도 읽기 5급, 쓰기 4급
  • 1. 믿다
  • 2. 펴다
  • 3. 늘어남
  • 4. 신표
  • 5. 소식
획수 9획 부수 亻(사람인변, 2획) 난이도 읽기 6급Ⅱ, 쓰기 5급Ⅱ
  • 1. 얻다
  • 2. 만족하다
  • 3. 깨닫다
  • 4. 맞다
  • 5. 득


하박국 (Habakkuk)

이름공간

문서 행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하박국은 구약성경의 35번째 책으로 소선지서 12권 중 하나입니다.

[ 나훔 <-- 하박국 --> 스바냐 ]

하박국은 선지자와 하나님의 대화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세상에 악이 성행하는데 왜 침묵하시는지 질문하고, 하나님은 약인은 결국 망하고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답을 들은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배풀 것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책은 맺습니다.

  •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개관과 구조

  • 책 이름 약자: 합[1] , Hab.[2]

구조와 특징

하박국은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1장)
  • 하나님의 응답 (2장)
  • 하박국의 기도 (3장)

특징

  • 선지자 하박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 어떤 나라에 대한 예언이 아닌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1장)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포로로 고통받는 것을 허락받은 이유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하박국 1:1-4). 주님은 하박국에게 본질적으로 "내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답변을 주십니다(하박국 1:5-11). 이어서 하박국은 "좋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하박국 1:17-2:1).[3]

  •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선지자의 부르짖음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외쳤지만 하늘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악은 억제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무시합니다(하박국 1:3).[4]
  •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하나님은 사람들이나 사탄의 자유의지와 사악한 정욕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며, 그래서 자신의 백성을 대적하도록 허락하신 자들을 "일으켰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섭리가 허락하신 사건들은 그들의 의도에 유리하며, 그들을 막는 것은 그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탐욕이나 교만함의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높입니다. 하지만 더 높은 차원의 것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로 그분의 의를 성취하도록 그들의 행동을 명령하십니다.[5] 갈대아는 바벨론입니다.
  •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악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시편 5:5, 6).[6] 하나님의 거룩함은 악을 처다보시지도 못하고, 그의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을 간과하시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을 괴롭히도록 허락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당혹감이며, 그는 그것을 주님 앞에 놓았습니다.[7]

하나님의 응답 (2장)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대답하시며 더 많은 정보를 주시며, 땅이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하박국 2:2~20).

  • (2:3)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종말은 적의 멸망과 믿는이의 위로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급한 감정에 따라 이것을 실행하지 않으시더라도, 그 둘의 결과는 그의 정해진 때에 확실합니다.[8]
  •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율법의 전체 원칙과 모든 참된 신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 유명한 문장은 사도 바울이 그의 위대한 주장의 기초로 사용한 것입니다(로마서 1:17;[9]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 비교). 문자적이고 문맥적 적용은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고 갈대아인들의 손에 닥쳐올 환난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이는 멸망하고 충실한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용은 그 상황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은 갈대아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적 미래를 넘어 영원한 구원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기에서 선언된 원리를 자연스럽게 적용했습니다.[7]
  •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참 하나님 여호와는 우상들과 같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그 거룩한 성전인 천국에 거하시며 거기에서 만물을 보시고 다스리시며 그 백성에게 존재와 생명과 권능과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와 지배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순종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10]

하박국의 기도 (3장)

하박국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표현하는 기도를 썼습니다(하박국 3:1~19).

  •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과 갈대아에 대한 심판이며,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것을 빨리 그리고 이스라엘이 살아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의 동포들에게 일시적인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재건하고, 구원으로 왕관을 씌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알리기 때문입니다. 브릭스 박사는 “주님, 저는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주님, 당신의 역사를 두려워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를(이스라엘) 소생시키소서."라고 번역합니다.[11] 그는 주의 “일”이 신현 (Theophany)으로 그의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심판, 특히 16절에서처럼 하박국 선지자에게 두려움의 원인입니다.[7]
  •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7절에 예언된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합니다. 로마서 8:37에서[12] 사도 바울이 확신을 표현한 것을 떠올립니다.[1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8, 로마서 1:17)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의 문을 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히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한 마디로 ‘ad fontes’라고 표현합니다. 라틴어로 본질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중세시대는 인간의 본질보다 자연이나 신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는 사람의 원래 모습보다 요란한 의상이 더 돋보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되면서 그림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봄’이란 그림을 보면 사람들의 나상을 그렸습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종교개혁을 ‘ad biblia’라고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보다 교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말이 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되자 성경의 진리를 되찾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해방과 거대한 변혁의 물결은 1,200년의 중세를 몰락하게 한 것입니다.

   16세기의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본산지였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세속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남발하여 팔았습니다. 이 때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마르틴 루터는 극심한 영혼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이 눈에 띠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하여 영혼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517년 그는 비텐베르크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초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로 어려움을 당하여 피신하고 변장하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그의 이런 기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각성 기간과 같았고,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난 기간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루터는 파문되어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파문이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에는 ‘세 분수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이 참수 당한 곳으로 알려진 기념교회입니다. 거기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돌을 팔레스타인에서 가져와서 지었다고 합니다. 28계단으로 대리석로 만든 계단입니다. 이 신성한 계단의 돌이 닳는다고 하여 나무로 덮어두었습니다. 그 곳에는 전통적으로 순례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올라가는 곳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와서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확신으로 다가와 그냥 걸어서 내려왔다는 계단입니다.

   독일 에르푸르트에 가면 루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에는 시편 118편 17절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루터의 삶과 어울리는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살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위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세태를 보면서 “왜 악인이 잘 됩니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의인이 고통을 당하되 왜 악인이 의인을 핍박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해답을 얻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해답은 구약의 하박국과 신약의 바울 그리고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개혁자 루터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를 통해 신앙인의 위대한 해답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20새기 신학의 거장입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어느 한 학생이 바르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박사님,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압니다.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해답을 분명히 아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악인이 성하고, 진리가 왜곡되고,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도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해답으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인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합니다.

4절 상반절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적 자세입니다. 부정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입니다. 교만과 부정직은 다 같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그 자체가 부정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겸손한 것이 인간의 정직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를 보세요. 역대하 26:16에는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고 합니다. 교만은 곧 악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6:2에는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며’란 말의 히브리어는 ‘우펠라’입니다. 이 말은 ‘부풀어 오름’을 의미합니다.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냅니다. 교만한 자라는 말은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런 심적 상태가 왜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세를 보세요.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자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회개가 없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주역(周易)에는 용(龍)을 빗대어 지도자의 성장과 소명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잠룡(潛龍)입니다. 물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용으로 지도자가 준비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둘째는 현룡(見龍)입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물 밖으로 나타난 용입니다. 셋째는 비룡(飛龍)입니다. 하늘을 오르는 용으로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시기입니다. 넷째는 항룡(亢龍)입니다. 비룡이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교만하고 자만하고 추락하여 아무도 그를 추앙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용이 눈물을 흘립니다. ‘용의 눈물’입니다. 누구나 너무 높이 올라가 자만하게 되면 이렇게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들은 자랑삼아 높이 날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른 나머지 매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에는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 교만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악은 자랑하며 교만하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랑과 교만은 결코 자신과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들의 공통분모는 정직이었습니다. 겸손과 정직은 지도자의 필수 요건입니다. 정직은 리더십의 모퉁잇돌입니다. 야곱은 그의 자식들이 애굽에서 잘못 가져온 돈을 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정직은 부단히 시험을 당했고 그 것을 잘 견디었습니다. 정직을 포기하는 것보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잠19:1).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잠21:3). 정직은 그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교만 그 자체가 부정직입니다. 겸손하면 정직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됩니까? 내가 아는 게 뭐 있습니까? 내가 높아도 얼마나 높습니까? 겸손은 정직입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를 재미있게 읽는 법이 있습니다. 왕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는 것을 크게 둘로 구분해 보세요. 한 쪽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합니다. 선한 왕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한 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악한 왕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정직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부정직은 곧 악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정직함을 원하십니다. 악에 대항하는 방법은 겸손과 정직입니다. 겸손과 정직으로 악한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4절 하반절에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악인의 교만과 악인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듯한 것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됩니다.

   ‘믿음’은 히브리어로 ‘에무나토’입니다. 이 말은 공평, 견고, 확실, 영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공평하게 살고, 견고하게 살고, 확실하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과 루터에 의하여 이 말씀이 해석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학적인 대립을 가졌던 펠라기우스 학파는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인 율법에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을 만큼 행위가 온전한 자가 있습니까?

   욥기 22:3에는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인간 가운데는 행위가 온전한 자가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위가 온전한들 그 온전히 인간의 기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7번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치며 고쳐달라고 하던 맹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한센 환자 가운데 고침 받은 후에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나은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많이 베풀어도, 위대한 행동을 해도 구원은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라는 침몰하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내리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이 말이 64회나 나타납니다. 이 말은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방주 밖은 죽음이지만 방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삽니다. 믿음은 세상의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방주입니다.

   요한복음 6:47에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합니다.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믿다’라는 용어는 성경에 272번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모태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모태신앙을 자랑합니다. 물론 모태에서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전수한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재적 신앙입니다. 어머니의 신앙이 아니라 나의 신앙입니다. 과거의 신앙 아니라 현재의 신앙입니다.

   사도신경의 “내가 믿습니다”(Credo)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믿음(belief)은 내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신앙(faith)은 외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신앙은 현재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현재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은 믿음이 지금, 현재라는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과거나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적 실상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믿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위를 받쳐줘야 합니다. 신앙과 행위의 일치가 진정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행함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도, 행함이 없는 믿음도 다 헛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블롱델은 “어떤 사람이 믿는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의 행위를 가진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과 행위가 일치된 자입니다.

   남북 전쟁이 막바지일 때 남군의 리(Lee)장군이 아포마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전 남부 사령관 헨리 와이즈의 아들은 신생 미합중국에 충성을 맹세하였다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헨리 와이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우리 가문에 오점을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남부 연합군의 지휘관이기도 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리 장군이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였어요”. 이 말을 들은 와이즈는 1분도 안되어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다르구나. 리 장군이라면 어떤 조언이라도 옳지”. 

리 장군에 대한 신임을 의미합니다. 와이즈 장군은 리 장군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나의 어떤 말이라도 사람들이 긍정하고, 나를 옳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나의 믿음이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삶을 살아야 의인다운 삶입니다.

결론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믿음을 저버리는 최악의 변질은 그 믿음이 단순히 문화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인답게 살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가 폄훼되고 믿음이 훼손되는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누가복음 18:8에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게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믿음이 보입니까? 믿는 자가 보입니까? 의인이 살아 있습니까?

   의인이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믿음을 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진리가 폄훼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삶의 지혜가 되고, 악을 능가할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운 때에 믿음으로 넉넉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로마서 1:16-17, 갈라디아서 3장, 히브리서 10:3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강포하고

분쟁과 패역이 가득하여 제 멋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면, 자신들이 할 바를

다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죄악 속에 있는 남 유다를 보고 여기 하박국 선지자는 합1:2-3 보면

내가 (그렇게)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주여,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원망 섞인 어조로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시대에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꼴을 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시편37: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말이지요

이러는 하박국 선지자를 보면 꼭 적국 니느웨를 향해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그 반대편으로 도망갔다가 바다에 제물로 받쳐져

큰 물고기 안에 사흘 동안 있으면서,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결국 사흘 동안

걸어서 니느웨로 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요나 선지자가 떠오릅니다.

반면 이런 백성들을 보고 돌이키기를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종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철저히 진멸하시고 끝내 70년간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17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지금의

이란지역에서 일어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 이례적으로 기름을 부으셔(사45장) 구원해 주실 것까지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진정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전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진대,

당시의 이스라엘은 노아의 방주 때처럼 부패와 타락으로 하박국1:4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나서셔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잠잠하시나이까?' 라는 하박국이 호소에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이방 바벨론을 세워서라도 유대를 심판하겠노라고 경고를 하시지요.

왕궁은 불타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며 아주 철저히 땅은 황폐화되지만,

실상 70년 동안 그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역대하36:18-21)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1장13-17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어찌(하필이면) 포악한 바벨론을 들어 의인인 이스라엘을 징벌할 수

있습니까?

주변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고요.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불의, 우상숭배와 거짓스승 등

너희 죽은 율법과 위선에 가득 찬 제사는 도무지 생기가 없어.

의롭지 못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야! 내가 바벨론을 들어 너희를 응징하고 난 다음에 그 바벨론도 이방인이지만 고레스를 나의 종으로 세워서 너희들을

해방시킬거야...그러니 너는

이 묵시를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2:2)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서)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니, 비록 더딜지라도 (너희는)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고레스 왕은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갈라디아서 3:22-24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함이라.

이같이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묵시라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그러자 비로소 하박국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게 됩니다.(합3장)

이 말씀은 신약성경 3곳에서 인용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서1:16-17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이방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KJV역)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보고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였으며,

18C 영국의 성공회 ​출신 존 웨슬리 선교사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아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진정 성령님의 도움으로 나의 뜨거운 가슴에 믿음의 열매가 삶 속에 드러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22-23절에 성령의 열매로 충성이 있지만, 헬라어 원의미로는

믿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믿음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닫고 맺어야 할

하나님의 의요 은혜입니다.​ 믿음이 내 뼈속까지 베어 있어야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순종도 충성도 뒤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을 하박국 선지자는 찬양 합니다.​

​​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주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 졌도다.(3:4) (마치 예수님의 등장을 예견하듯 하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사61:10)고

고백합니다.

여기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하박국은 정한 때에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뻐하며,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지요.(3:19)

성경엔 16명 정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게 한 의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의인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고,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 주실 것이라는 걸 믿었습니다.(히11:6)

또한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요,

이제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더 사모하였습니다.(히11:13-16)

아벨은 양의 첫 열매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으며,

에녹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올라갔으며,

노아는 산꼭대기에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시키시는 대로 1,2년도 아니고 100년을 뚝딱뚝딱 3층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아브라함은 어땠나요?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며 장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으며,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는바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산한 사라와 합방하여 이삭을 낳았고,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번제물로 받치라고 명하시자

일언방구도 없이 사흘을 걸어 모리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드립니다.(창22:1-14, 약2:21)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함께 하신다.

어둔 밤에도 주위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모세와 다윗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특히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열 자녀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의 육신에 욕창이 와 만신창이가 되어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며 하박국과는 달리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날 때부터 알몸이었고, 지금까지 누린 과거의 삶에 감사하며,

지금 나에게 이러한 고난과 불행을 주시는 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고 의문을 갖지만,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결국에는) 잠깐 사이에 스올(지옥)에

내려갈지라.(욥21:7-14) 라고 자신합니다.

지금 세월호 침몰과 신출귀몰한 유병언 일가를 보면서 이 세상도 이처럼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우리는 혹 푸념하고 있지 않나요?

요나나 하박국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처럼 나의 인생이란 굴곡에서도 하나님의 의는 길게

보아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야 합니다.

비록 현실에 있어서는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정녕

마지막 심판 날에는 나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질 것이다...그러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공평한 저울과 추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확신이 듭니다.(사5:16, 11:4-5, 시9:8, 41:10, 48:10)

그러면서 욥이 놀라운 말을 하지요~!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5-26)

​이게 무슨 뜻인가요?

마치 장차 올 예수님을 나의 대속자로 알고,

부활하여(또는 나의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라.(욥20:5)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다.(욥23:10)라고

자신합니다. 저는 욥기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어찌 저리 의연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또한 욥은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구나하고 느껴지지요.

마15:22-28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좇을 때에

그 모진 수모와 멸시에도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8장 5-13절을 보면,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하인을 고치기

위해 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예수님은 간구하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놀랍게 여겨 “네 믿은 대로

될지니라.”하시죠. 믿음대로가 아니고 네가 믿은 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눅7:1-10, 요4:43-54)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지 죽어 있는

믿음인지, 행위가 따른 믿음인지 행위 없는 믿음뿐인지 살펴보세요!

여기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에서 보듯 행동하는 믿음까지 요구합니다.(약2:14-26)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확신하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7, 갈3장, 히10:38)

라는 바울 서신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 같으나, 전혀 아닙니다.

단지 야고보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열매로 실제적인 행함을 더욱 강조한 것이지요. 즉, 1장에 믿음으로 시작하여 2장에서는 그에 따른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지침서인 셈이지요.

특히 여기 행함이란 그 무엇보다도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1:27, 2:8, 13-16, 3:17-18)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3:6-7)

결국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믿음으로써, 우리 삶의 기반이 되고 기준이 되며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이 하나님이라면, 우리 삶의 현상은

그 믿음으로 살아지고 그 믿음에서 의당 선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나요?

이를테면 '하나님은 내 안에 살아 계시고 하늘나라는 실제 존재 한다'는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내 주를 본 적은 없으나

다시 오실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진정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은 그 모두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나 자신은 물론, 내 가정, 내 일터와 국가가 모두 서로간의 믿음이 없으면

하루하루를 꾸려가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부부지간에 신뢰가 무너지면, 사소한 것부터 모든 것에 불신이 쌓여

​삐걱대고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편 37편 3절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조금 더 볼 까요! 전 아주 37이라는 숫자를 좋아 합니다.

워낙 성경에서 제3일, 제7번 째 등등 숫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있지만,

제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부터 은연중에 저의 아이디도 ‘열린37’로 만들고,

제가 10을 벌면 7은 남을 위해, 3은 내 가정을 위해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기 시편 37편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 37편은 내 주변이 궁핍할 때, 특히 내 믿음이 곤궁할 때, 내 마음이

한없이 아프고 초라할 때 묵상하면

제 마음에 물밀듯, 제 배안에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 믿음 역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님의 은사이기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은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 보다 낫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믿음의 은혜가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하심은

그를 의지한 깨닭이로다.(4-40절)

로마서 3장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디모데후서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으셨습니까?

모진 산고의 고통 끝에 한 생명이 태어나듯이

나 하나 죽어 한 알의 밀알이 된다면,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고 또 자라

많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로 내 마음 안에 작은 성전을 지어 간다면,

이 세상에 두렵고 무서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마라나타~~~!!! 이미 내 속에 예수님은 와 계십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그 믿음 굳건히 붙잡고 하루하루 삶 속에서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의 본질을 압축해 선포한다. 그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하며,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를 밝힌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지만, 죄로부터 자유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죄인에게는 심판과 저주로 다가온다. 그러나 복음 안에는 전혀 다른 길, 곧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구속의 사건이며,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다.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믿음이 또 다른 믿음으로 이어지며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흘러간다는 의미다. 주께서 베푸신 사랑을 받아들이는 믿음에서, 다시 그 믿음을 나누고 전하는 믿음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 결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이 가능하다. 의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살아난다.

이 말씀은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이 되었고, 오늘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 어떤 행위나 공로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 설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생명을 누리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와도 같다. 주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을 가감없이 받아들일 때, 그 안에 구원의 능력이 드러난다.

바울이 전한 이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도전이 된다. 세상의 눈에는 약하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복음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믿음으로 사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약속이 여기에 담겨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쳤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외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행위와 공로에 의지하는가, 아니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 은혜를 붙잡고 있는가?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며, 구원의 길이다.


믿음으로 살리라(갈라디아서 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근래에 들어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정치 개혁, 경제 개혁, 사회 개혁, 나아가서는 의식 개혁…… 그러나 우리는 종종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 개혁 없는 개혁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개혁이 없는 사람들이 개혁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떠듭니다. 이제는 개혁하자고 외치는 얘기조차도 굉장히 가소롭고, 때로는 역겹게 들리게 쯤 되었습니다. 자기 개혁 없는 개혁,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웃기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이론도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개혁'은 영어로 'reformation' 're-for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순수성으로 돌아간다, 본래성으로 돌아간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보면 가끔 30년 전의 결혼사진을 벽에다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낡아서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그 사진을 붙여놓은 의도를 알 것 같아요. 간간이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저런 때도 있었는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입니다.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근본 관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회도 아니고,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관심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애당초 본래의 관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였습니다. 이 관계가 바로될 때에 엄청난 역사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된다면 그것은 허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 책임을 묻고, 자기 개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니만큼 의미가 큰 것입니다 마는 어쨌든 서로 싸우고,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 양쪽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양쪽이 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전쟁을 합니다. 또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7년으로 길어져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링컨은 대답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신 지 안 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그것뿐이네." 종교 개혁자의 마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었는가, 이것을 묻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죄 많게 느껴져서 '내 죄, 내 죄……'하며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해결되는 바로 그 때에 개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의의 문제요, 죄의 문제요, 의롭다 함을 얻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문제로, 은혜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핵심은 죄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수많은 문제들이 있으나 우리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소홀히하고 있었습니다. 번영을 생각했고, 생산을 생각했고, 분배를 생각했고, 평등을 생각했고, 자유를 생각했습니다마는 의와 정직함을 잊어버렸습니다.

보세요. 의의 문제가 없는 번영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성실이 없는 건설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제 와서 사건이 벌어졌느니 안 벌어졌느니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얘기가 아닙니까? 불성실했으면 부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부러졌느냐고 물을 것 없어요. 아무 때에라도 불성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드러나고야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됐으면 잘못된 것이지 거저 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성실하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잘못된 마음이지요. 또한 교육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귀가 따갑도록 '착한 사람이 되어라' 했습니다. 무엇을 잘하면 착하다고 칭찬했어요. 그러나 요새는 공부해라, 일이나 해라, 일류대학에 가라, 돈벌어라……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 외에는 한마디도 없어요. 정직하라, 성실하라는 말은 들어볼 수가 없어요. 이런 교육이 나중에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의 교육이라는 것은 오로지 생산수단이요,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돈버는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관심이 여기로 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개혁이 와야 합니다.

저는 어제도 결혼 주례를 섰습니다. 신랑 신부가 아주 예뻤어요.

가끔 어떤 분들이 "목사님, 결혼 주례서는 것이 참 피곤하지요?"라고 묻습니다마는 사실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뒷모습만 보는 것이지마는 나는 그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있으니 참 재미있어요. 어쨌든 저는 이런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저 남편보고 너무 출세하라고 그러지 마세요. 요새 부끄러움 당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장가를 잘못간 사람들입니다. 아내가 자꾸 돈벌어라, 출세하라, 밑바닥에서 사니까 창피하다, 하니까 억지로 출세하고, 억지로 돈벌려다가 그 모양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얼마를 벌어오든 '우리, 그저 정직하게 삽시다, 화목하게 삽시다'하는 아내가 되세요." 다시 말합니다. 그저 정직하고 성실하게--이것이 소원이요, 이것이 모토(motto)가 되어야지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뭐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하지 않습니까? 이제 더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부정과 불성실, 그 위에 세워진 번영과 건설은 아무 것도 아니요, 그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개혁자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얼마를 내놓고, 또 얼마를 사회에 환원하고…… 한심한 소리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이 충격으로 인해서 도둑맞은 집의 부모는 죽었고, 아이들은 고아가 됐습니다. 그야말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입니다. 그 도둑이 나중에 돈벌어 갚겠다 한들 보상이 되는 것입니까? 무슨 소리하는 것입니까? 구제한다고 해서 되는 것입니까? 그 몇백만 배를 준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속죄란 없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을 자기가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것입니까? 요새 걸핏하면 누가 죽었다, 그 다음에 보상한다 하는데 처음부터 보상이란 없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의 것을 누가 받습니까? 받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죄는 우리 스스로도, 그 누구도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죄문제를, 이미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법으로 몇 가지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에 호소해서 금식을 하고, 규율을 엄하게 지키고, 심지어는 자학행위를 하면서까지 고행을 합니다.

일평생 고행을 해서 속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고행을 해도 죄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또 감각에 호소해서 성례에 참례하고, 명상하고, 입신하고, 신비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죄가 사해지던가요? 또 의지에 호소해서 구제하고, 봉사하고, 선행하고, 업적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서 굉장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뼈아픈 상처가, 그 죽은 사람이 되살아납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나 양심 앞에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며, 해결한다고 하는 속죄에 관한 얘기는 지위일 뿐이요, 거짓말입니다. 스스로 속는 것이요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롭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로 돌아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율법의 길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율법에는 고발성이 있습니다. 죄를 고발합니다. 이것이 죄다, 저것이 죄다, 합니다. 요새도 보면 고발과 비판이 해결의 길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는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하지만 아무리 쑤셔봐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듣고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만 황폐해질 뿐입니다. 세상에 어디 고발하는 것으로 치료되는 것 봤습니까? 아이들 가르칠 때에도 이게 잘못이다, 저게 잘못이다 하고 자꾸 지적하면 아이들이 집을 나가버립니다. 더 나빠집니다. 그래서 똑똑한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속을 줄 아니?'하며 전부 쓰시는데 끝도 없어요. 이게 됩니까? 고발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위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율법에 감금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죄를 짓고 나면 감옥에 갇히는 마음이 됩니다. 꼼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뭘 좀 하려고 하면 '너 같은 놈이, 너 같은 죄인이, 네 과거가 이랬지 않느냐'하게 되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종교개혁자는 말합니다.

전적 타락을 시인하라---total depravity를,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이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으로는 다윗이 제일 많이 나오는데 그 횟수가 무려 팔백 번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의인은 아닙니다. 무서운 죄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정직함 때문입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할 때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인정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지은 죄인데, 공모한 것인데, 그 여자가 잘못했는데……'하는 핑계도 없고, 환경이 어떻다는 말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은 다 포기해버립니다.

의롭고자 하는 노력마저 불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강물에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구조대원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대꾸도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합니다. 그제야 구조대원이 물에 뛰어들어가서 그를 건져냅니다. 사람들은 구조대원에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오?" 구조대원은 말합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에 물에 들어가면 저가 나를 꽉 붙듭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손을 들어야 구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다음에야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버둥버둥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스스로 의롭게 해보겠다며 자기 노력과 자기 의지로 백 번을 맹세하고 손을 자르고 해본들 될 일이 아니예요. 그런다고 뭐가 됩니까? 혈서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니예요. 종교개혁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 노력까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이것이 믿음의 길이요, 의의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하는 것은 self-righteousness---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의를 수용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수용합니다. 그 거룩한 능력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샴마이라고 하는 랍비가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에는 365가지의 금지사항과 248가지의 명령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이것을 11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이사야 33장 14, 15절에서 5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미가는 미가 6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3가지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기도 합니다마는 하박국 2장 4절에서는 오직 한마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요약합니다. 신학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또 중요한 문제를 가진 요절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라고 해석되기도 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전자는 교리 문제요, 후자는 윤리 문제가 됩니다. 이 신학적 논단을 이 시간에 구구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살고, 내 능력, 내 지혜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의 근본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그런고로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봅니다. 믿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믿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믿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믿습니다. 또한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받아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저는 성경에서 제일 뻔뻔스러운 사람이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준다 해서 떡하니 잔치상을 받아먹는 그 아들을 좀 보세요.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형이 투덜거릴만도 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영접해주니까 그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염치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영원히 죽을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것,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은혜요, '오직 은혜로'는 오직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H. A.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쓴 책「In the heavener」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 이런 얘기 한 가지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나와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순간에 죄인은 "조건이 있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왕은 깊이 생각하고는 그를 석방했습니다.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영국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합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여종은 없었다---석방된 이 죄인은 여왕의 종으로 일평생을 살았는데 더없이 성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조건 사함 받는 은총을 받았어요. 오직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제 이 믿음을 가지고 살 때에 그는 조건 있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총, 이 조건으로 인해서 남은 생은 은총적 절대조건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아무 것도 바랄 것도 없습니다. 더는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자를 내가 용서 못해도 안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에 내가 용서하고, 남이야 뭐라고 비판했든 나는 용서받은 자로 삽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삽니다. '오직 총으로'---이것이 자기 개혁의 근본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 은총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은총으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자기개혁도 있고, 사회개혁도 있고, 창조적 역사도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MY RIGHTEOUS ONE SHALL LIVE BY FAITH; AND IF HE SHRINKS BACK, MY SOUL HAS NO PLEASURE IN HIM.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1-4).

기다림의 의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기다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폭력적으로 치닫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더 이상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아이들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전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별한 돌봄 속에 성장합니다. 여간해서는 배고픔이라든가 더러움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워지고, 그만큼 여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풍요로워지고 여유로워진 만큼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급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고, 능력과 소유를 사용해 가급적 기다림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갑질이 만연하고, 인간관계는 그만큼 파괴되고, 쾌락은 있지만 행복이 없는 삶 속으로 속수무책 현대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기다리기 싫어하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즉석에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간편한 휴대용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의 삶 속에서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문제 목사들과 교회들 때문에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더 이상 현대인들이 기다림을 배우지 않고, 기다림 자체를 무능력과 동일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이 무엇인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복원에 앞장서야 합니다.

영적인 기다림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일 뿐 아니라 믿음의 시금석이며 참된 믿음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영적 성숙의 과정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의인의 의인됨은 우리가 신학에서 말하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이전에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시가 되고 꽃이 됩니다. 그것이 마침내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영광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합니다.

구조와 배경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서에는 선지자 자신과 그의 시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1:6을 보면 갈대아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하박국서의 연대는 바벨론이 아시리아를 와해시키고(주전 612년)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은 주전 600년대 초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3에서 왕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전 598년의 첫 번째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아직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경, 즉 나훔(주전 650) 이후,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보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구절은 로마서와 히브리서에도 기록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서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613개의 계명을 주었다. 다윗은 그것을 11개(시15편)로 줄였고, 미가는 3개(6:8)로 이사야는 2개(56:1)로 줄였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것을 단 하나로 요약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분의 뜻이 확실한 때나 의심스러울 때나 언제든지 신실하게 그분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유다)의 불의를 벌하지 않으시고 방관하시는 것에 대한 선지자 하박국의 탄원으로 시작합니다(합 1:2-4).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 유다의 불의를 심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십니다(합 1:5-11). 이에 대해 하박국의 두 번째 탄원이 이어집니다(합 1:12-17). 하박국은 "악인이 의인을 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를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자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담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박국의 통보 (1절)

1절은 하박국의 통보로서 선지자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지금 그는 좋은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소식을 알리는 자입니다. 성 앞에 적국이나 지원군이 나타나면 이를 곧바로 성 안의 지휘부에 알리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을 그런 파수꾼으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유다를 구하러 나타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굴의 믿음과 의지를 갖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다리지만 않고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질문이란 단어는 "항의, 비난, 논쟁"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휘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며 대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선지자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한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바라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통해 어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치실 수 있느냐는 비난조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성벽 위에 세워진 망대나 요새를 가리킵니다.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높은 자리로서 전략적인 위치입니다. 이곳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거기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하나님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분이 나타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불굴의 의지야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의 증표입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인간은 늘 즉각적인 변화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가시적 성취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너머를 향하도록 인간을 이끌어갑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가시적인 성취가 없어도, 자기의 뜻이 반영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망대로 올라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2-3절)

하박국은 마침내 하나님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질문에만 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보여 주시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당신이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준비입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말씀의 전달 범위를 넓혀 주며, 영향력 또한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이 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외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것을 똑똑히 읽을 수 있도록 판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의 사역은 문서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 판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전 경내에 붙여질 것이며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정한 때라는 말은 여인이 잉태한 후 아이를 낳을 시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비록 하나님의 계시가 지시하고 약속한 시간이 너무 길고 때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때가 되면 당연히 아이를 낳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한 때 역시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 쓰인 묵시는 후대의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선택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후대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쓰인 묵시, 혹은 종말이라는 단어는 아주 근접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한 때와 종말이라는 말은 갈대아 사람으로 인한 곤경이 머지않아 종식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한 때나 종말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이곳에서 선포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이 몇 마디 말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동시에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가능한 뒤로 미루는 인간들의 궁여지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섭리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격려 (4)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4절의 "그"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도 당연히 바벨론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관심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벨론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인 유다입니다. 그래서 4절의 핵심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인내, 성실, 진실, 신실 등을 포함해 광범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에무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박국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어떤 관계의 요구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실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의 가르침과 약속을 굳게 붙잡는 사람이며,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시험과 심판의 때에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기서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올 것입니다. 비록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벌할 때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 권력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세속적 권력에 반드시 종말이 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의 외압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력이 오만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꺾으실 날이 가까이 오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의와 무질서, 고통과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일편단심으로 성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박국의 모든 질문들은 이 말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모두 풀렸습니다. 그것은 한 단계를 더 거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그 단계는 바로 침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신뢰 관계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침묵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를 지나 진리의 근처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주치는 인간 지성의 한계이며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비단 신앙의 삶 속에서만 경험하는 인간의 한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도 만나게 되는 깊은 세계로의 관문입니다. 아인슈타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측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현현하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런 앎과 느낌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나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은 인격화된 근대의 신을 옹호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오해와 착각에 빠져 있으며, 진리를 망각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끈은 과학자 포퍼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장자(莊子) 역시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자만에서 비롯됩니다. 장자의 말대로 인간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 합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그 침묵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비록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결핍들을 오히려 은혜로 받아 기쁨의 찬양을 부르기에 이릅니다. 기다림이 낳은 찬양입니다. 기다림이 맺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비록'의 신앙,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 침묵이라는 신비의 관문을 지나 마침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1-14)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이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세 부분에서 인용됩니다.

먼저 로마서에서 인용됩니다.
[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5-17)

또한 갈라디아서에서 인용됩니다.
[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9-12)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됩니다.
[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5-39).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에서 하박국에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인용되는지 알기 위해 먼저 하박국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주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때는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이미 멸망한지 오래 되었고, 이제 얼마 후면 남유다 역시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될 것을 바라보는 때였습니다. 즉, 주전 7세기 정도에 쓰인 구약 성경입니다. 물론,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 사회에는 말할 수 없는 부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남유다 공동체는 지금 시대로 치면 기독교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유다는 종교국가였기 때문에 현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국가와도 간접적으로 연관됩니다.

하박국 1장 1절을 보면,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묵시, 곧 환상으로 받은 경고의 메시지라고 합니다.

1장을 보면, 남유다 사회의 상황이 보이는데, 그 사회에는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법이 뇌물과 권력에 의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정직하게 살려는 자들보다 훨씬 많았고, 돈의 힘이 사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 다툼과 미움과 분쟁과 살인이 많았고, 교만과 착취, 이혼, 음행, 불법과 우상이 창궐하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불의하고 악한 부자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나라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러한 부패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 가운데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박국은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주의 공동체인 이 나라 안에서 이러한 불의와 악행이 난무하는 것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가만히 계십니까? 왜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저희들이 이러한 죄악과 불의와 압제와 더러움이 주의 백성 가운데 계속 진행되는 것을 계속 보아야만 합니까?”

이미 남유다를 둘러싼 국제 분쟁도 복잡했습니다. 앗수르 제국과 애굽의 경쟁도 대단했고, 새롭게 등장하는 바벨론 세력도 비록 남 유다에게 강력하게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대국 사이에서 힘을 겨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및 참된 믿음의 자녀들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공의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현재 교회와 나라가 참으로 불법과 무법으로 향하며 주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고, 선량한 자들이 고통과 피해와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데, 주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은 맞습니까?”라고 기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느 날 주께서 하박국에게 묵시로 답변하십니다.
“그래, 나는 역사하고 있다. 내가 네가 살아있는 동안에 큰 일을 이루겠다. 그 일은 네가 지금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는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그러한 큰 일이며 끔찍한 일이다. 나는 바벨론 제국을 일으켜 온 세상을 삼키게 하겠다. 특히 바벨론 제국을 통해 남유다를 심판할 예정이다. 네가 알고 있듯이 바벨론 군사는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제 멋대로 행할 것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은 지독히 교만하며 자기들의 힘을 우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죄가 내 앞에서 클 것이다.”

하박국은 주 하나님의 첫 번째 답변을 듣자, 너무나 놀란 가운데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주 하나님! 우리 유대 민족을 바벨론 제국을 통해 쓸어버리시는 것이 주의 계획인지요? 결코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악한 무리들이 이 백성을 잡아 삼켜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됩니다. 우리보다 더 악한 그들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에 대해 가만히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주인이 없는 물고기 같은 존재입니까? 그물에 잡혀서 끌려가면 그들은 그 그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경배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주의 백성을 멸망시키고 자기 우상을 경배하는 것을 그냥 두실 수 있습니까?”

하박국의 첫 번째 기도에서는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이 백성 가운데 불의와 더러움이 창궐합니까? 이들은 주의 백성인데 왜 주께서는 그들이 더러운 상태에 있도록 그냥 두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즉, 주의 백성이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는 거룩하며 공의로우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정말 무섭게 타락하고 불의한 바벨론 제국을 도구 삼아서 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박국의 두 번째 기도는 “이 백성은 주의 이름을 지닌 백성인데, 이들보다 더 악한, 자기 힘을 믿고 그 힘을 우상으로 삼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려서 그 응답을 받아 기록한 것이 하박국 2장이며, 그 내용 중에 신약 성경 세 곳에서 인용한 그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 위대한 구절을 보면, 먼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하는데 그는 누구입니까?

먼저 1절부터 보겠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바벨론 제국을 들어서 주의 백성을 심판하시느냐고 질문한 후에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의 답변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서 주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자세입니다. 그 자세는 간절하게 주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1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셔서 하박국에서 환상으로 답변하십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글로 기록하여 그 내용을 판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판에 있는 메시지를 온 세상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2절을 원어로 보니 “그 환상을 글로 쓰고, 그 글을 판에 새겨서 모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들, 주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신속하게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장의 내용은 불의로 가득한 교회 및 복잡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 더 이상 묻지 말고 지금 하박국을 통해 알려주는 그 메시지를 하나님의 대답으로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답변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답변 내용은 환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당장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 속에서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딜지라도 반드시 그 환상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환상 내용은 의인과 불의한 자로 나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로서는 유다 공동체 내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고, 그래서 하박국의 가슴을 찢는 동료들이 있고, 또한 그들보다 더 불의한 바벨론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박국 2장 4절에서 “그의 마음”의 ‘그’는 사회 속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로서 의인과 반대 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한편,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타까워하는 자들입니다. 불의한 자의 대표로는 일단 바벨론 왕을 비롯한 침략자들이고, 그러면서도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불의한 자를 포함합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신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바벨론 군사들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환상으로 보여준 그 사건이 주전 586년, 곧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읍 및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려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으로 넘어간 사건과 그 이후에 발생한 사건인 것을 압니다. 특히 메대-바사 제국이 일어나서 메대 왕 다리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 왕 벨사살을 죽이고 바벨론 왕이 됨으로써 바벨론 제국은 막바지에 이르고, 그리고 주전 536년에는 고레스 왕이 모든 바벨론 제국을 삼키고 바사 제국을 장악함으로써 바사 제국의 제왕이 됩니다. 이때 고레스 왕은 그의 통치 원년에 남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세울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주의 답변을 통해 일차적으로 바벨론 제국이 유다 백성을 침략할 것을 환상으로 보고 알게 되었고, 비록 소수이지만 주의 의로운 백성들까지 불의한 지체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3장 끝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삽니다. 즉, 이 땅에서 발생하는 불의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 것인지 알고 오직 주의 때를 기다리며 주를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삽니다. 그것이 하박국서에서 말하는“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자는 누구입니까? 하박국서는 불의한 자의 특징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 때문에 신음하는 의로운 하박국은 그들과 대칭되고 있습니다. 사실 하박국은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신음하는 참된 주의 백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하박국에게 그들에게 신속하게 하나님의 답변을 판에 새겨서 알림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확신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자의 특징은 1장 2절에 보니 ‘강포’입니다. 폭행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갑의 위치에서 을을 향해 철저하게 압제하고 이용하고 묵살하는 행위와 마음 자세가 강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의로운 자는 강포하지 않습니다. 폭행하지 않습니다.

3절에 보니, 불의에 패역, 겁탈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변론과 분쟁이 포함됩니다. 변론과 분쟁은 자기 세력과 주장과 돈과 권력과 인기를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미워하며 다투는 모습입니다. 종종 변론과 분쟁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불의의 상태에서는 결코 양보나 평화의 모습이 있을 수 없습니다.

4절은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고, 악인이 의인보다 많은 사회를 고발합니다. 그래서 정의가 굽어집니다. 이는 불의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불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6절은 불의한 자로 불리는 바벨론 군사들의 특징인데, 사납고 성급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오직 인간의 힘, 무력, 권력을 신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이며 불의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2장 5절 이하를 보면, 불의한 자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며 교만합니다. 그들은 끊임 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한하게 넓혀가는 자들입니다. 돈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권력에 대해서도, 인기에 대해서도, 땅에 대해서도, 뭐든 한없이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을 그의 삶과 마음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들은 마치 죽음처럼 무엇이든지 끝없이 삼킵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는 남의 피를 흘리게 되어 있고, 남들로 하여금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는 하는 악한 일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을 어기는 일들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패역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남에게 술을 먹인 후에 정신 없게 만든 후 모든 것을 빼앗아 오는 일도 합니다. 따라서 불의한 자의 삶은 많은 원수들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삶 자체에 끊임없는 죄악이 점철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사 그들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만드시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수치에 떨어뜨려 멸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합 2:10-12)

특히 불의한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우상 때문에 그들은 불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으로 삼은 우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6-19).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불의에 대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는 불타서 헛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모든 삶은 허무함으로 마치며 피곤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에 가득함으로써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3-14).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하박국은 이러한 환상을 다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며 공의로운 분이신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이 땅의 모든 불의는 반드시 주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이며 주를 믿고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의 시작이 교만이며, 의로운 삶의 시작과 과정은 믿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사랑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믿음을 지닌 자들은 불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 마지막에서 하박국의 고백을 보면, 불의로 인하여 의로운 자가 많은 피해를 보고, 심지어 공동체 내의 불의한 지체들 때문에 더 악한 불의한 자들에 의해 공동체 자체가 멸망의 기로에 선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공평하게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그 와중에서도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고백은 행운이 없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또는 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 받음으로 비통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가난해지고 병들고 힘들더라도 고백하는 노래 내용입니다.
[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이는 이 세상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곳이며, 결국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영원히 실현될 것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그 어떠한 불의와 죄악의 상황에서도, 억울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지키며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힘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언약하여 주시고 의로운 생명을 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때, 주 여호와께서 나의 힘이 되시면서 그 어떠한 지저분하고 힘들고 악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그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거룩하고 청명하고 맑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박국의 고백은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과 구속을 이루심, 나아가 성령을 보내심으로 더욱 신자들에게 분명하여졌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박국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복음과 함께 사용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라고 전합니다. 복음은 구약에서 그림자처럼 가리켜왔던 그 모든 것의 실체로서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시고, 그분으로 하여금 십자가 상에서 구속을 이루신 후에 부활 승천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셔서 택한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온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며 하박국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와 관련합니다. 의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새 언약으로 인한 믿음과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여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시니 우리 안에는 의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의로운 새 생명으로 성령의 강건하게 하시는 도우심과 함께 넉넉히 죄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의 말씀과 로마서의 복음은 일치하게 됩니다. 이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바울은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에서도 하박국서의 이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부패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 의, 곧 완전한 의를 이루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요 교만의 극치입니다. 그들이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그들은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이미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연합하게 함으로 주의 의로움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는 그러한 은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중생을 통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로서, 주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갈 때에 의로운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말하는데, 그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아 행할 때 죄로부터, 율법의 정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세상의 정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사는 비결을 말합니다. 그 비결은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심기운 의로운 새 생명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남으로써 온전한 의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19-21).

그러므로 하박국서에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삶으로서 불의와 죄악과 더러움과 저주로부터 구별되어 하늘의 신령하고 복된 거룩한 참된 자유의 삶을 사는 것으로 승화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5-39).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고 사는 의인된 삶은 계속적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반드시 약속하신 것을 받아낸다고 말합니다. 이때 믿음은 인내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의 새언약을 저버리거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과 생각이 항상 새로운 생명 및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영혼 구원함에 있어서 거짓 믿음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으로써 반드시 구원함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박국서에서 말씀하신 주 여호와의 말씀에 가장 부합되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어두운 때에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삶은 다름 아닌 아버지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 5:7-10)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사는 삶, 곧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를 믿고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성도들에게 본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18-25)

오늘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다루었습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으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 교만이 가득하여, 계속 세상 것을 쌓기 위해 착취하는 자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는 사람 역시 도리어 지독히 종교적인 위선자로서 결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살아가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새출발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 우리 주님은 보혈의 공로로 새출발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보혈을 근거로 해서 이제부터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으며, 따라서 그분이 하신 말씀과 약속을 믿고, 그 말씀과 약속의 최고 핵심인 새언약, 곧 복음을 믿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믿고 성령의 도움과 생명력을 의지하여 내 힘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감으로써 넉넉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신앙 양심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칭찬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도를 만나 주께 칭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판정을 받아 영원한 면류관과 함께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영원한 지위 및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더욱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의롭고 주님 나라를 위해 힘쓰고 섬기는 지혜로운 그리고 진실한, 우리 주 하나님의 청지기들이 되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참된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1-14)


1. 하박국 선지자

(1)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BC609)

- 요시야는 하나님께서 그가 태어나기 약 350년 전에 예언해주신 왕이었다. 요시야가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제단을 훼파한다는 예언이었다. 그 예언대로 요시야 태어났고, 그는 왕이 되어 모든 산당을 헐며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율법부흥운동을 일으킨다. 그는 다윗 이후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었다. 요시야의 단 하나 잘못은 므깃도 전투에 끼어들어 전사한 것 밖에 없다.

- 요시야가 죽고 유다는 23년만에 멸망한다. 그렇다면 요시야가 행한 종교개혁과 부흥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은 냉소적이 되기 쉽다. 요시야의 부흥운동은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남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예레미야,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 나훔 오바댜... 모두 요시야 부흥운동의 열매들이다.

- 요시야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요하난은 일찍 죽고 여호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삼형제가 있었다.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바로느고에게 죽자 백성들은 차남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운다. 왜 장남 여호야김이 아닌 차남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을까? 여호야김은 포악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야김은 바로느고와 내통하여 동생 여호아하스를 잡아가게 하고 자신이 왕이 된다. 그는 애굽바로를 의지해서 왕위에 앉고 백성들을 억압한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하여 감옥에 가두고 그의 예언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칼로 찢어 불태운다(렘36장). 이게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상황이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알려진 바가 없다. 3장에서 시기오놋에 맞춰 부르고 셀라 음악기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 찬양하던 레위인으로 추정될 뿐이다.

(2)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 왜 하나님은 유다의 악행이 점점 증가하는데 그대로 두고만 보십니까? 유다 악인이 백성을 억압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의 악행을 멸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박국은 다시 질문한다. 하나님이 유다의 악행을 징벌하시는데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심이 옳습니까?(1장)

- 하나님의 대답은 바벨론 멸망 예언(2장)을 주시며 “그것은 정한 때가 있다.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치 않고 정녕 응하리라.”(2:3) 말씀하신다. 가깝게는 약 70년 후에 있을 바벨론 멸망이며(BC539) 멀게는 여호와의 날과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이 예언(2장)이 하박국서의 핵심주제이다.

- 합2:3-4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하박국은 유다를 징계하시는데 악인 바벨론을 사용하심이 어찜이신가 여쭙는다. 하나님의 대답은 악인 바벨론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살아가나, 의인 하나님의 백성(남은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대답하셨다.

- 악인은 죄의 본성을 따라 자기 힘으로 교만하게 살아가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악인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교만하고 악을 행하지만,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 백성(남은 자)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의인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셨다.

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 히브리서(히10:38) -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 의인은 누구인가? 바벨론 포로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회복 예언이 비록 더디다 할지라도 반드시 응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 10장은 그대로 인용하고 히브리서 11장은 성경인물들을 믿음으로 살아간 의인들의 실 예로 든다.

- 히10:37-39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히브리서 10장은 바벨론 멸망과 그리스도의 초림이 이마 다 지난 후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을 의미한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의 바벨론 멸망 예언은 약 70년 뒤에 성취되었다. 70년은 두 세대가 지나간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면 아주 작은 한 기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는 일생을 지나는 것이다.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까지 보게 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그 기간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 신앙은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고 우리는 거룩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새에덴의 회복과 완성을 이루고 새예루살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 새하늘과 새땅 새성전 새예루살렘은 무슨 뜻일까? 왜 하나님은 새성전을 건축하시고 그 성읍을 새예루살렘으로 말씀하시는가? 새성전은 솔로몬성전 같은 가시적 모형의 건물성전이 아니다. 에덴동산 전체가 성전이었듯 새예루살렘성 전체가 성전이며 그곳은 하나님 백성 누구나 언제든지 드나든다.

-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고, 새예루살렘에 에스겔의 새성전이 다시 지어진다. 옛언약은 인간의 범죄로 파기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새언약을 출범시키심이다. 이때 세상은 본래 에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경륜(계획,뜻)을 회복하고 완성된다. 그러므로 새하늘과 새땅, 새성전은 새에덴의 회복과 완성의 의미이다. 예루살렘 제3성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 교회와 성도는 이 땅에서 용(사탄)과 짐승(정치권력)과 거짓선지자(종교권력)의 위협 회유 핍박을 받으며 음녀 바벨론(세상나라)의 유혹 속에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성도는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 예언 당시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되어 하나님의 남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들(남은자,의인)에게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듯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 구약의 남은 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불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믿음으로 정결케 된 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포로귀환해서 스룹바벨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 회복을 기다리며 400년을 지낸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신약교회를 세우셨다. 구약의 남은 자는 신약교회로 성취된 것이다. 신약교회가 하나님이 예언하신 남은 자이다. 이외의 소수 특별집단을 말하면 그가 거짓선지자요 이단이다.

- 슥13:8-9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2) 로마서(롬1:17, 갈3:11) -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이다.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는 히브리어 문장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by his faith 가 the righteous 를 수식하여 live 를 생명구원으로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생명구원을 얻는다. 로마서는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둘째, by his faith 가 live 를 수식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히브리서는 이런 의미로 해석 한다 – 소선지서, 김희보 교수 -

-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에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한다.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주신 자이다. 이스라엘은 성전파괴 되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의인(남은자)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인 이스라엘 회복을 기다리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신다. 그들은 율법 지켜 의인됨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복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시고 계신다.

- 하나님은 구약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킨 완전한 자를 의인이라 부르지 않으셨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율법을 지켜 의인된 것 아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으로 불렸다. 하나님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르신다.

-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지켜 내 공로로 얻음이 아니다. 죄인은 결코 율법의 요구인 거룩함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을 통해 구원하신다. 죄인은 나의 공로 아닌 하나님 은혜로, 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나의 선행과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나의 믿음은 절대로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은혜가 구원의 동인이고, 믿음은 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에 내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얻는다.

- 믿음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리스도 구원진리에 대한 지식 동의 신뢰이다. 지식 없는 믿음은 맹신이며, 지식 없는 신뢰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지식과 동의, 그분께 전적인 신뢰(헌신) 행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죄로부터 돌이킴과 그리스도께 순종함을 요구한다.

<결론 및 적용>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어도 (3:17)

(1)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2절)

-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지금 압제하는 바벨론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찬양을 드린다(3장). 시기오놋(식가욘)은 어떤 음악용어로 보인다. 셀라는 잠깐 쉬며 목상 하라는 음악용어이다.

- 하박국이 활동했던 여호야김 시대에(BC605)이후 약 20년 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BC586). 하박국은 얼마 후 일어날 성전파괴와 바벨론 포로됨을 알고 두려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벨론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을 듣고 찬양한다.

(2) 바벨론 포로됨을 앞두고 두렵지만 이스라엘 회복 약속을 기뻐하며(17절)

- 합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서론: 우리는 종종 적어도 한 번쯤은 하박국처럼 질문을 던진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가?” “왜 의로운 사람은 고난을 당하고, 악한 사람은 번영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하박국의 시대에만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불의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며,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어느 가장은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가정을 지켰고, 주일마다 예배를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갑자기 해고 당하고, 나이 때문에 재취업도 쉽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항상 정직하게 살았고, 믿음을 지키며 살았는데, 결국 제게 남은 것은 실직과 경제적 어려움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또 다른 청년은 직장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며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요령껏 일을 하면서도 빠르게 승진합니다. 그가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그의 발전을 막았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정직과 원칙이 결국 내게 손해를 끼친다고 느껴요. 내가 이렇게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요?”

어느 어머니는 남편의 사업 실패와 자녀의 방황을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쉽게 응답되지 않았고, 고통은 계속 됐습니다. 지친 마음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왜 제 삶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걸까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맞는 길인가요?”

‘왜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신앙생활에 깊은 의심과 혼란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 부터 무려 2,600년 전에 하박국 선지자도 우리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과의 질의 응답식 대화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유다 왕국에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그의 1차 질문이 1장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5절 부터 1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인데 너희에게 말하여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 이로 인해 너희가 놀라고 놀라게 될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더 악한 바벨론 제국을 사용하여 유다 전체를 심판하시겠다는 답변을 주십니다.  00
- 이에 대해 하박국은 ‘어떻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집어 삼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십니까?’ 2차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악한 바벨론 국가가 계속 승승장구하며 번영을 누리게 하시는는가,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 그러자 하나님의 2차 응답이 2장 3절과 4절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면,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사용한 바벨론 제국 또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속히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란과 혼동, 불안과 두려움의 시대에 하나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하박국에게 주어진 답일 뿐만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는 능력의 말씀이고, 우리가 확실히 붙잡아야 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유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승리로 이어지는지를 밝혀주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왜 가장 확실한 길인지, 그리고 결국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승리로 이어지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교만 VS 믿음

하박국 2장 4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에 대조 되는 두 부류가 나옵니다. 교만한 자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교만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양 생각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타락한 죄의 본질에 비롯한 것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가장 지혜롭게 지음을 받은 사단은 교만해져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하나님과 겨누어 보려다가 하늘로 부터 내침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마귀의 꾐에 빠진 아담과 하와 또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그와 동일한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교만 죄에 빠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저주의 원인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올바르지 못한 자의 정형으로써 하박국 1장과 2장에서는 갈대아 사람들(바벨론 제국)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으로 다른 나라들을 거침없이 쳐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나라들을 파괴하는 잔혹한 민족입니다.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여 자신들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끝없는 욕심으로 땅을 차지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쌓습니다. 피로써 성을 건설하고, 다른 민족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쌓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며 물질적 번영과 권력의 추구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 즉 현실적인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 물질과 재산: 돈이 많으면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 성공과 명예: 사회적 지위와 업적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람과 관계: 가족, 친구,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어 삶의 안정감을 찾습니다.
• 자기 자신: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 과학과 이성: 논리와 증거를 바탕으로만 믿음을 결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습니다. 경제가 무너지거나, 관계가 깨지거나, 건강을 잃으면 삶의 기반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더욱 견고히 세우려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원하고, 더 높은 곳에 이르기를 추구합니다. 그만큼 불안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주어진 하나님의 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율법을 잘 지키거나 인간적인 도덕적 윤리적 규범을 잘 따르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올바르게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유, 지위, 배경, 능력, 경력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믿고 붙잡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 노아는 홍수가 오기 전, 하나님의 경고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방주를 지어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6:9, 히 11:7).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듣고서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났습니다(창 15:6, 롬 4:3).
  •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출 14:13-31).
  •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불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단 3:16-18).
  • 바울은 감옥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승리했습니다(고후 4:8-9).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믿음이 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며 영구히 형통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오히려 짐이 되고, 손해를 줍니다. 한없이 마음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그들의 때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37:1-1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결국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가 최종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그 결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에 악인은 신속히 사라져 그 흔적 조차 없을 것이고, 믿음으로 참고 기다린 자들이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구속사적 의미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한 중심에 서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로마서 4:19-22)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는 불임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하늘에 박힌 별들을 가리키시며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몇 날 며칠에 자식이 태어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별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별도 한 두 개 아니었습니다. 뭇 별. 수많은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은 아직 없고, 나이는 85세인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믿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놀랍게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모든 의심과 불신적인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이미 80 중반입니다. 그리고 아직 자식을 낳을 어떤 징조 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내게 자식을 주실 거야. 내가 알고 경험한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야.” “비록 지금은 자식이 태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가능성도 없어 보이지만 장차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실거야. 거짓말하실리 없는 그분의 약속이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기에 그분의 약속 또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지만, 장차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에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들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여긴다”는 의미는 그렇게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그렇게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그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믿음이 좋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나 요건을 갖추어서 의롭다함을 받았기에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우리처럼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며 믿음을 심어 주셨고, 17장에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흔들리고 있는 그의 믿음을 곧추세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의롭다할 만큼 특별히 선행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롬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롭다함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율법을 넘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이 열렸다는 메시지를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듣게 하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예언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구원

사도 바울은 하박국서 2:4절을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에 대해 명확히 밝혔습니다. 로마서 1:17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될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복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강조점은 우리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의 삶이란 한 마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
하박국 2:4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율법적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시대에도, 아브라함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들이 변하고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바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약속: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 하늘나라의 소망: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바라봅니다.
• 기도와 믿음: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고, 정직해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기도해도 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정말 가치가 있을까?”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십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 것입니다. 이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이 오직 믿음 뿐이라는 사실을 못 박는 듯 하박국서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되도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며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한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함으로도 이해한다.

믿음은 우러러 보는 것이며  우러러 보는 믿음으로 살게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5) 고 했다.

   구리 뱀은 장대 위에 세우신 예수님을 상징하며 십자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구리 뱀의 경우는 육신의 눈이 그것을 바라 볼 때에 구원을 얻었다. 십자가의 경우는 영혼이 그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의 3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믿음이 대상을 바라보는 지각(지성적인 요소) 바라 보려는 집중력(의지적 요소) 바라보므로 산다는 확신(감정적 요소)이 있는 것이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믿음은 받아 드리는 영접이며 영접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 하시고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40)라고 하시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께로 와야 함을 가르쳐 준다.

   가난으로 고생하는 한 부인에게 그 집을 찾아가서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 그 후에 다시 만나서 그 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아 선생님이었어요. 참 미안합니다. 나는 집주인이 집세 받으려 온 줄 알고 때 마침 돈이 없기에 대답을 꺼리고 있었지요"라고 하더란다. 문을 열지 아니하는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감옥에 들어간 청년이 특사를 거절하고 외친 말이 있다. "여러분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특사를 거절해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특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생명이요 거절하면 죽음이다.
받아드리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영접하는 것 곧 승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온전히 맡기는 것이며 맡기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눅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나이야가라 폭포의 외줄 타기 선수와 아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자신을 맡김과 같다.

   페튼(John G Paten) 이란 분이 신약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하면서 "믿는다"의 "믿음"이란 말을 자기 나라 말로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나라의 선생님이 오셨는데 먼 길을 와서 피로하셔서 의자 위에 자기 몸을 맡기면서 "나의 모든 무게를 여기에 맡기고 싶다"고 하셨다. 이 말은 페튼에게는 매우 필요한 말이었다. 믿음이란 인생의 모든 무게를 다 풀어놓고 쉬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헤추어(William E Hateher)  박사는 어릴 때 자기가 출석하는 마운트 허문 (Maunt Hermon) 교회에서 부흥 집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막연하기만 하였다. 다음 날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 친척이 다가와서 너 자신을 주님 보시기에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에 이 소년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고통하고 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다고 하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라고 격려했지만 어떻게 흘 줄을 몰랐다. 그 때 친척이 참 나무의 큰 가지를 가리키며 너가 저 위에 올라가 안자 있다가 뛰어 내리면 무섭겠느냐 하니 그렇다고 하자 내가 너를 받아 줄 테니 뛰어 내릴 수 있느냐고 하여 못하겠다고 했다. 왜냐고 하여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힘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만약 주님께서 그 나무아래 팔을 벌리고 너를 부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뛰어 내리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붙들어 주실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자 이것이 바로 믿음이란다. 라고 그 친척이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는 예배에 참석해서 내 자신을 예수님께 드려야지 하고 자신을 맡겼다 한다.

   무디 선생님이 잘 아는 친구 집에 가서 정원을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두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서 자네 아들들인가 물으니 하나는 아들이고 하나는 아니라고 하자 어느 아이가 자네 아들인가 물어 보니 자네가 맞춰 보라고 하나 알 수가 없어 모르겠다고 하니 두 아이를 오라고 부르더니 아이들을 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고 뛰어 내리라고 하니 한 아이는 뛰어 내리는데 한 아이는 뛰어 내리지 못하고 울고만 있자 친구는 이래도 모르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하니 친구는 처음 뛰어 내린 아이는 내 아들이고 울고 있는 아이는 이웃집의 아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이웃 아저씨를 믿지 못하는 아이는 뛰어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 울고 있으나 아버지를 믿는 아들은 비록 높은 나무 가지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품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어 맡기고 뛰어 내리는 이것이 곧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믿음은 먹고 마심이며 먹고 마시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믿음의 한 요소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으로 가르쳐 주셨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제자적 죽음의 효능으로 사람들의 영적 영원적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1)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6)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7)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도 이와 같이 떡과 물을 먹고 마시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영적으로 맛을 보며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음식물을 풍성히 장만해 놓고 냉장고에 잘 보존해 놓았다고 해서 나의 몸에 힘이 생기고 건강해 지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 음식을 입에 넣어서 씹어 먹어야 한다. 병든 사람이 약이 병을 고칠 것으로 믿는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그 약을 먹을 때 그 약의 효력이 나타나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고 하셨다.

   영적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물을 마시는 것으로 가르치셨다.

   오래 전 불란서와 영국간에 전쟁이 있었을 때에 불란서의 고래잡이배가 먼 항해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이 떨어져서 목이 말라 쇠약해졌다. 영국의 포구 앞을 지나면서 고통의 신호를 보냈더니 영국 쪽에서는 전쟁은 끝났으니 포구에 들어와서 원하는 대로 마음 놓고 물을 마시라고 했다. 이 신호를 받은 불란서 고래잡이배는 이 신호만으로 목마름이 해결  될까 아니다 이 말을 사실로 받아 들여 배를 포구에 대고 물을 마셔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이요 확신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을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게 되었다.(히 11:8) 

   믿음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는 결단을 촉구하며 외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조롱 할 수 있습니다. 무관심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반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접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겠습니까.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잘못했습니다. 고백 그것보다 더 한 것입니다. 내가 사는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내 죄에서 나는 돌아서겠습니다 함이요,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을 다 버리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주님 유일하신 그리스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이 100년 후의 위치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신뢰함이다

    요한 웨슬레는 몸무게가 50Kg 밖에 되지 않는 왜소한 분이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였다. 그는 아버지 위로 5대가 목사였고 어머니 위로도 5대가 목사인 신앙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그는 영국 최고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강의도 했다. 

1732년, 그는 인디언 선교사로 자원해 미국 조지아 주의 인디안 원주민들을 찾았다. 그때 그에게는 광대한 신대륙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웅대한 비전이 있었고, 당당한 실력이 있었다. 또한 불타는 사명감과 인디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처럼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큰 꿈과 이상과 사명과 열정까지 가진 사람이 실패하였다.

사람의 힘이나 능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슥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결국 선교사역에 실패하고, 폐결핵까지 걸린 웨슬레는 패잔병처럼 영국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귀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났다. 배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웨슬레도 두려움에 젖어 있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선창으로 가니 모라비안이라 불리는 경건파 성도 몇 명이 손잡고 찬송하고 있었다.

그때 웨슬레가 물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서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선생님도 예수를 믿어보세요.” 그 말은 목사였던 웨슬리의 신앙양심을 무섭게 때렸다. “내가 이러고도 선교사를 자처했나?” 귀향 후, 런던에서 투병하다가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우연히 모라비안 성도들의 작은 밤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한 청년이 오늘 본문을 낭독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평소에 잘 알던 말씀이었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이 그날따라 그의 가슴을 치며 뜨거운 믿음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 화재로 타죽기 일보 직전에 살아났다. 그래서 그는 ‘타다 남은 숯’이란 별명을 지녔다. 그 숯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그는 투병하면서 자기 묘비에 새길 기도문을 적었다. “하나님! 이 무익한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타다 남은 웨슬레가 여기 누웠습니다.” 그 마지막 기도문을 써 놓고 35세를 일기로 죽음을 기다리다가 그때 은혜를 체험했다. 그리고 몸도 치유되었다. 그 뒤 그는 88세까지 장수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말을 타고 지구를 열 두 바퀴 돌며 복음을 전했고, 일생 4만 2천 4백 번의 설교를 했고, 200권이 넘는 신앙서적을 남겼다.

   소련이 공산 국가가 되기 전의 이야기다. 한 무신론자가 성도를 비난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외쳤다. 한 번은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있다면 이 자리에 나타나 보이라 만일 나타내 보이기만 한다면 나는 이 주먹으로 맹렬히 공격하겠노라 고 핏대를 올려 허공을 지른다 그러나 신이신 하나님이 형상으로 나타 날리 만무하다. 그러자 그는 더욱 기고 만장하여 보시오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낮잠 자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군중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청중 가운데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 농사꾼 부인이 겸손한 태도로 강단 앞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만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철두철미한 무신론에 이론적으로 대답할 지식이 없으나 한 마디 묻겠습니다. 저는 수 십 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저를 구원하신 일을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의 의뢰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제가 죽게 될 때에 가령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구원은 없고 천국도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면... 저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을 사랑 할 것과 옳고 착한 일등 조금도 죄 짖지 말 것을 가르쳤고 또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몸소 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살아온 내가 생활의 무슨 손해가 있습니까 선생님의 지혜로 대답해 주십시오. 청중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 강사는 말이 떨리기 시작했고 아무 것도 손해나는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 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한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한 마디만 더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죽게 될 때에 운명하는 자리에서 만일 성경이 참 진리라는 것 분명히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조물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 대로 심판하여 선생님을 지옥으로 넣어 버린 다면 ...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선생님은 어떤 손해가 있겠습니까? 

장내는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무신론 강사의 청산유수 같은 말문은 막혀 버리고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저 뒤에서 옳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 하는 소리가 들리자.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저 무신론자를 쫓아내라 하는 외침이 높아졌다. 장내는 금방 아우성치듯 들끓었다. 쥐구멍을 찾아가듯 삽십 육계 줄행랑을 치는 무신론자였고 환희에 넘쳤으나 역시 조용히 서 있는 농사꾼의 부인의 얼굴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우러러 보는 믿음 영접하는 믿음맡기는 믿음 먹고 마시는 믿음 말씀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이러한  믿음으로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자.



1. 하나님의 의(義) 앞에 선 인간의 절망과 두려움

마틴 루터의 고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 앞에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자신의 행위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고, 심지어 그 의로움을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처절하게 깨달은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보여줍니다.

죄인의 보편적 반응: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이 느끼는 첫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는 성경의 여러 인물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 아담과 하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 이사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 베드로: 예수님의 신성을 목격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시작점: 이처럼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절망하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진리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루터는 반복적인 말씀 묵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행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심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근거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세 가지 의미: 이 구절은 오해를 낳기 쉽지만,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다음과 같이 일관되게 해석됩니다.

250615 Sunday Service Romans 117 Only the righteous shall live by faith 2 1 250615   117     2
  • 구원의 전 과정 (시작, 여정, 완성): 구원의 시작인 ‘칭의’, 과정인 ‘성화’, 완성인 ‘영화’의 모든 단계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즉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구원의 확장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구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유대인의 믿음’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인종, 계층, 성별을 넘어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믿음’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믿음의 성숙 (시작에서 성숙으로): 하나님이 주신 ‘첫 믿음’이 신앙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면서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나고 열매 맺게 됨을 의미합니다.

3. 믿음으로 ‘사는 것’의 의미

삶의 방식으로서의 믿음 : 
믿음은 천국행 티켓을 얻는 일회성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모든 과정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찬양하는 삶 :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옷 입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분의 공의와 심판까지도 기쁨으로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우리의 기쁨과 찬양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세상의 가치관(돈, 명예, 권력)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노래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Q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먼저 ‘두려움’을 느끼게 되나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빛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출 수 없는 죄 된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 있던 먼지가 밝은 빛 아래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사야,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 두려움과 절망감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되는 은혜의 시작점이 됩니다.

Q2. 구원이 100% 하나님의 은혜라면,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노력하고 애쓰는 것(기도, 예배, 순종 등)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우리의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나 ‘대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반응’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거룩한 삶(성화)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적 노력은 구원의 증거이자, 믿음이 자라가는 성숙의 과정입니다.

Q3.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오늘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삶 전체에 적용됩니다.

첫째, 나의 어떠한 선행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둘째, 일상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을 삶의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셋째, 신앙의 여정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죄로 인해 넘어질 때에도 절망하지 않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저의 죄 된 모습을 봅니다. 제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오니,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심판받아 마땅한 저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의를 값없이 선물로 주시니 그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는 그 의를 힘입어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으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을 제 삶의 방식으로 삼기 원합니다.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과 마지막 날까지, 오직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고난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옵소서.

저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 모든 온전하심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택한 자녀들에게 한가지를 분명하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올바른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1>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 11:1)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라는 것은 현재 보고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하여 미래에 보게 되고 실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통해 눈으로 보고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언제나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서는 ‘믿음’ (faith)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뜻함. 그것은 ‘구원’ (엡. 2:8) 혹은 ‘영생’ (요. 6:40)을 의미함. 그리고 믿음은 그 성도의 지성 (intellect) 감정 (emotion) 그리고 의지 (will) 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침]이라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게 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b)고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그 믿음을 통하여 살게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일까요? 우리가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를 확인해 나가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써,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첫째,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국립국어 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맹신’ (盲信/ blind faith)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모두 인정하듯이, 맹신은 인간의 건전한 상식과 판단을 마비시킴으로 올바른 믿음의 심각한 걸림돌이 되는 잘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추진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해 나가는 능력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는 식의 추진력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무엇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지?’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믿는 그의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이 한가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삶의 동기와 중심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따깝게도 자기 자신은 믿음생활을 잘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비뚫어지고 왜곡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크리스챤들도 적지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성도로 살아간다면, 구원받는 그 자체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스스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인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인정’ (acception)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말하자면, 수학의 기본개념에서 ‘2 더하기 2는 4’라는 명제라든지, 혹은 과학에서 어떠한 현상을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과학의 한 예로써 ‘물’ 이 ‘수소’ 와 ‘산소’의 분자의 결합을 통해 생성되었음을 증명할 때, 물 (H20)에서 수소분자 (H)와 산소분자 (0)를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학적 증명이나, 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그것이 올바른 증명이라고 판단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 (accept)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증명된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대신 ‘믿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정’하는 개념이지 ‘믿음’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과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가지 분명히 하기 원하는 것은 ‘믿음은 어떤 증명된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점이 믿음의 결코 쉽지 않은 점임을 저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그 누구도 결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인문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 11:1>에서 믿음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 11:1)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의는 현재 보고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보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눈으로 보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성구사전’에서는 ‘믿음’ (faith)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뜻함. 그것은 ‘구원’ (엡. 2:8) 혹은 ‘영생’ (요. 6:40)을 의미함. 그리고 믿음은 그 성도의 지성 (intellect) 감정 (emotion) 그리고 의지 (will) 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향한 성도의 신뢰와 순종이 믿음이고, 이 믿음은 ‘인격적인 모든 면’ 즉 ‘지.정.의’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인하여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삶 > 의미하는 것인데, 그럼으로 이 믿음은 그 사람의 전인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 그리고 이 말씀은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 <합. 2:4>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고민해 보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인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일까요?

이 주제를 시작함에 있어서 제가 취하는 방법의 하나는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설교참조) 제가 이것에 대해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둘째) 믿음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믿음은 ‘실천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해 나가는 능력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는 식의 추진력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3가지>가 마치 믿음인 것처럼 성도들이 오해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믿음>입니다. 저는 이 3가지 잘못된 믿음 가운데서 잘못된 믿음의 대표적인 ‘맹신’에 대해 좀더 깊이 살펴봄으로 우리 각자의 믿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먼저, 이러한 잘못된 믿음의 가장 눈에 띄는 ‘맹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맹신’ (盲信/ blind faith)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가리지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이 <맹신>이라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믿음’ (blind faith)이 맹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중요한 질문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믿음, 맹신에 빠지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맹신에 빠지게 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기질적으로 남의 말을 덮어 놓고 잘 믿는 스타일이라든지, 또 어떤 지식을 접했을 때 그것을 분석하거나 객관적으로 판단할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혹은 그와 같은 건전한 판단을 개발하고 훈련할 교육의 기회를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맹신이라는 매우 잘못된 형태의 믿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가 어떠하든지 이러한 ‘맹신’에 빠지게 되는 그 과정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한가지 단계가 있음을 저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뇌작업’입니다. 무엇이 ‘세뇌’ (洗腦)입니까? <세뇌>는 영어로는 “brainwash” 입니다. 말 그대로 ‘뇌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얼굴에 묻은 먼지를 씻어 내듯이, 우리의 뇌 속에 있는 기존의 지식과 판단능력을 물로 씻어 내듯이 다 씻어내고, 그 어떤 누군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방법과 방향대로 어떤 정보와 지식을 뇌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 누군가가 자신의 의도데로 상대방을 조정하고 컨트롤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방적인 지식과 가치를 주입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뇌’과정에 관련된 한가지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스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교리의 하나는 ‘삼위일체’ (Trinity) 교리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상 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자 고유한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 (in one Godhead)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증인’ 과 일부 기독교 교파 가운데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요. 14:28)는 구절을 그 근거로 재시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분과 본질상 하나가 아님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낮추셨고, 그 분의 뜻에 언제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분의 태도가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다는 뜻일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자신과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직접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고 선언하셨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라고 요한 복음을 시작하면서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곧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빌라도에 고소하여 사형에 처하게 했던 법적 근거로 든것이 바로 <신성모독> (blasphemy) 이었던 것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에 대한 용서’를 행했다는 점 (마. 9:2~3)과,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점 (요. 10:22~36; 19:7)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주장한 점 (마. 26:64~65) 등을 들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역설적으로 볼 때, 만약의 이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이 믿듯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요, 장차 마지막날 산자와 죽은 자의 의로운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을 결코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했기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일관된 베드로와 여러 주님의 제자들의 주장이 아닙니까?

제가 ‘삼위일체’ 교리의 관련되어 한가지 잘못된 성경이해에 대해 여러분과 확인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성경말씀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믿음의 근거를 훼손하고 왜곡된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이렇게 내 판단이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잘못된 결론이 내려지면 그 이후의 이어지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별 의심없이 비판 없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기준에서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어떤 의심이나 문제의식없이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성경지식이 없을 때 분별하기 힘든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엉터리 없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 드린대로 그 사람의 교육수준과 판단능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거짓된 주장에 쉽게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의와 함께 무엇이 믿음이 아닌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까지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믿음의 전부라면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믿음에 대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많은 궁금증과 막연함으로 인해 그 믿음을 바로 깨닫고 적용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분명하게 ‘과연 무엇이 믿음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롬.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말씀인 <롬. 1:17>에서 선언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의인’ 즉,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그는 누구인지’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샘플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시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설교제목의 두번째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본받을 믿음으로 확증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귀하고 소중한 만큼,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계속해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은 그것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하고도 중대한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평생의 삶이 이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축복된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갈라디아서 3:1-29)


그리스도의 복음(1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갈3장)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

주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자인데 성령님 안에 살아가자

오늘은 종려주일(Palm Lord’s Day)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팜트리(palm tree 손바닥 모양으로 생긴 열대지방 나무, 대추 야자 열매를 맺음) 잎사귀를 들고 메시야로 환영을 하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요 12:13).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 Passion Lord’s Day”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올리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 12:13, 계 7:9) 호산나(Hosanna)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Now save us!’ 또는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Please save us!”라는 공동기도입니다(시 118:25, 삼하 14:4, 시 20:9, 마 21:9, 막 11:9, 요 12: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부른 사건 때문에(요 12:12, 13)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종려나무(히브리어 ‘타마르’ = Date Palm, 데이트<대추 야자> 열매를 맺는 나무) 가지를 흔들며 종려주일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들은 오늘 예배 때 ‘팜 트리’를 나눠주고 예배 후 예배당을 한바퀴 돌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칩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갈라디아서 3장을 강해합니다. 복음의 본질인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 중 “살리라”는 실천을 강조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갈 3:1-14)

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님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3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님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4 너희가 그토록 많은 것들로 헛되이 고난을 당하였느냐? 과연 그 일이 헛되냐? 5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님을 제공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 6 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너희는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이교도들을 의롭게 하려 하심을 성경 기록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되, 네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에 속한 자들은 믿음이 충만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 11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12 또 율법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나니 오직,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14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행해야 의롭게 되고 완전케 된다는 주장입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신자의 신앙생활과 선행이나 봉사의 동기나 목적이 의와 도덕적 완전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배치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힘쓰고 선한 일을 힘쓰지만 그 동기와 목적이 다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의롭고 선한 삶을 힘쓰는 것입니다(롬 12:1-2). 바울은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해 일곱 가지 반론을 제시합니다.

1절. ‘진리’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도다’라고 책망하면서 율법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앞장 끝에서 말한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2절. ‘듣고 믿음으로’라는 원어(엑스 아코에스 피스튜스 ἐξ ἀκοῆς πίστεως ex akoes pisteos)는 ‘믿음의 들음으로’라는 뜻인데, 이것은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이나,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우리가 성령님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행 10:44은 베드로가 고넬로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성령님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증거합니다.

3절.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님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완전하다’는 “마치다”보다 나은 번역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노력으로는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에 대한 세 번째 반론입니다. 성령님으로 시작된 성도의 신앙생활은 육신의 노력으로 완전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갈 5:16에서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켜 온전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4절. “너희가 그토록 많은 것들로 헛되이 고난을 당하였느냐? 과연 그 일이 헛되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은혜의 복음을 포기하고 율법주의로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했던 많은 고난이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받을 가치가 있는 고난을 받았지, 헛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5절.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님을 제공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 ‘기적’이라는 원어(뒤나메이스 dynameis)는 ‘기적들’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네 번째 반론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님의 기적들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지, 율법을 행할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졌었습니다(행 3:12, 16). 그것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킬 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6-7절. 율법주의에 대한 다섯 번째 반론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창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 원리에 맞습니다.

8-9절. ‘의로 정하신다’는 원어(디카이오오 dikaiow)는 ‘의롭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너를 인하여’라는 원어(엔 소이 en soi)는 ‘네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다섯 번째 반론에 대한 보충적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네 안에서(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 하심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10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모든 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신 27:26). 이 세상에 율법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도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1-12절.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 율법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나니 오직,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 곧 영생을 가리킵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마지막 곧 일곱 번째 반론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말씀은 복음의 원리에 맞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습니다. 율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나(레 18:5),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이 부분의 핵심 요절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입니다(롬 10:4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의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립니다.

14절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보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분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자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참으로 큰 복입니다. 갈 3:1-14을 정리하면,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적어도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합니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②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신자들 속에 오심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전제합니다.

③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는 육신적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와 성경 자체가 증거하며(사 64:6; 렘 13:23; 17:9) 또 우리가 경험하는 바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님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신자들이 율법을 지킬 때가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입니다(행 3:12, 16).

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창 15:6). 

⑥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신 27:26).

⑦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합 2:4).

그래서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하며, 그분의 의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의안에서 날마다 기쁨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그분의 의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의 목적(갈 3:15-22)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들의 관례대로 말하노니 그것이 단지 사람의 언약이라도 일단 확정되면 아무도 취소하거나 거기에 더하지 못하느니라. 16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취소하지 못하며 또 그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하리라. 18 이는 만일 그 상속 유업이 율법에서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통해 주셨기 때문이라.

19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법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20 이제 중재자는 하나만의 중재자가 아니로되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기 때문이라. 22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

15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후에 주신 율법이 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사람의 언약도 한 번 맺으면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집이나 땅을 사기 위해 맺은 계약은 그대로 효력을 가지며, 아무나 그것을 임의로 폐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얼마나 더 확실하게 시행될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16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은 그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에 ‘네 씨[seed 자손=offspring]’라는 말은, 복수명사인 ‘네 씨들[자손들]’이 아니고 단수명사인 ‘네 씨[자손]’입니다. 즉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수적으로, 성경의 영감(靈感 inspiration)이 단어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감된 성경은 그 주된 내용뿐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는 단어들까지도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단어가 복수명사인가 단수 명사인가의 문제에도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까지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성경을 읽고 그 뜻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메시아 약속 곧 그의 육신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약속이었습니다. 약속된 복은 의와 영생입니다. 율법이 언약보다 430년 후에 세워졌다는 것은 야곱 때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 계산한 것입니다. 출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 아브라함 때로부터 계산하지 않고 야곱 때로부터 계산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창 26: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8:13-14,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사람의 계약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이 폐하거나 헛되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430년 전에 세워진 언약을 폐지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18절. 이 말씀은 율법이 언약을 무효케 할 수 없는 이유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은혜로 주신 ‘그 유업’이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13:15; 15:18; 17:8).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은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은혜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후에 주신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갈 3:19-22은 율법의 목적을 말씀합니다. 19절.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범죄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중보자’는 모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신 5:5, “그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셨습니다. 신 33:2에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거룩한 자들]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일만 성도’는 천사들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본절 외에도 몇 곳에서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음을 증거합니다. 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히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의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입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킵니다. 율법은 구약시대를 위한 것이었고 메시아가 오실 때 폐지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0절. 중보(a mediator)는 한편만 위하지 않고 양편을 위하여 중간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 양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는 말씀은 약속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율법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21절.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고 율법 제도가 일시적이라 하여,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왔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참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특히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기에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3. 율법과 믿음, 아들과 상속자(갈 3:23-29)

23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나중에 계시될 믿음에 이르기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24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 우리가 더 이상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었나니 27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세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23절.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기 전에,’ 즉 신약시대 이전을 가리킵니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어 구원얻는 진리를 계시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갇혔느니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 제도 아래 있었고 또 율법의 정죄 아래 있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신 27:26).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듯이,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의 형벌을 기다리는 자들과 같습니다. 물론 구약 백성도 의식법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렸다고 보지만, 율법의 엄격한 요구 조건 아래서 죄책과 공포를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의는 아직 미래의 것입니다.

24절. ‘훈육 선생[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paidagogos)이라는 원어는 ‘주인의 어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또 데려오는 종’(street guard)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비유에서 구약 백성을 어린아이의 시절에 비유하고, 신약 백성을 훈육 선생이 필요치 않은 성장한 나이에 비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린아이 시절에 필요했던 제도였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자입니다. 그것은 정죄와 저주를 통해서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의가 없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거리가 먼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율법을 통한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람에게 두 가지의 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입니다. 행위의 길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또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불가능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25절. ‘믿음이 온 후’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즉 신약시대를 말하며,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비록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가 선포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고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최선의 삶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의 삶은 범죄와 실수와 불완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책과 불안과 공포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고 율법의 저주와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의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명령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막 제도 아래 있지 않고 제사들이나 절기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의를 완성하셨고 의식법들이 상징하는 바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약 아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안에 있고 그분의 대속 공로 안에 있습니다.

26-27절. “이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이니,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안으로 침례[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라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요 1:12의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이라는 훈육 선생 아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 것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침례[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즉 율법 제도와 그 속박 아래 있지 않습니다.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직역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없도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이니라”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복, 의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차별이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한 복을 받았고 다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립니다. 복음 안에서 누구나 동등합니다.(고전 14:34-38; 딤전 2:11-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기업을 상속받을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상속받을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으나, 그의 영적 자손인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입니다. 벧전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주님을 온전히 믿어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주신 복음으로 천국의 시민을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주님을 메시야로 환영한 것처럼 주님, 메시야로 오늘도 겟세마네 교회와 제 마음속에 영접합니다. 이번 주 고난 주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주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부활의 승리를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음으로 사는 법 – 인생 제1과: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3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그들이 멈추고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8:24-25.

오늘 너희 주(יהוה) 하나님(אלוהם)이 말씀하시되

믿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바꿉니다. 그것은 당신의 하루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찌푸린 얼굴을 없애줍니다. 그것은 내가 여기 너희 가운데 있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로 너희를 만든다.

믿음. 나의 의인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며, 나는 당신의 삶의 모든 측면과 삶의 모든 순간을 의미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고 너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원한다면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믿음 없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아들은 믿음을 찾고 있다. 믿음 없이 행한 모든 것은 죄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분의 고향에서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교만한 자는 그의 마음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내가 애굽에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내가 그들에게 주려는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희가 내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싶다면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 속에 살며 평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에서 벗어나 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러분에게 큰 통찰력과 이해, 많은 평화, 축복된 선에 대한 확신의 삶을 줄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시리즈? “믿음으로 사는 법.” 너희가 믿음으로 산다면 너희를 넘어뜨리거나 방해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내 말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내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부터 시작합시다. 인생수업 1번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것 없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아들이 제자들에게 물으실 때, 그리고 오늘날의 그분의 제자인 여러분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찾고있는 것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답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내 말씀, 특히 내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하고, 되고, 가지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내 말에는 모든 진리와 모든 답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으며 천국에 영원히 세워져 있다.
나는 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정의한다. 먼저 그것을 고려해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로써 옛 사람들이 좋은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1. 그 구절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으므로 그리스어로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데”인데 이것은 “그러나”, “그리고”, “지금”(연결 또는 부사 불사)을 의미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기 위해 바로 앞의 구절을 되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내 말씀에 대한 당신의 확신을 결코 버리지 말고 반대와 반대되는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가 내 뜻을 행한 후에는 약속된 것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약속한 것을 지체하는 것 같더라도 이루리라.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5-39.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왜 믿음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세상의 기준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성취한 사람들의 일련의 예를 들어 그 정의를 따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믿음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끝까지 같은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온전한 소망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6:11-12.

믿음의 정의에 대해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거짓 없는 믿음을 갖기 위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하고 두렵고 내가 내 약속을 이행할지 확신이 없다면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 아들은 그것을 믿음이 없다고 부른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아직도 믿음이 없습니까?” 마가복음 4:40.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을지라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말하는 믿음의 법을 지키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나무를 뽑을 수 있을 뿐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불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7:20; 누가복음 17: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십시오. "보증"으로 번역된 단어는 "아래"를 의미하는 "hypó"와 "서다"를 의미하는 "hístēmi"가 결합된 세계 "hypostasis"입니다. 소유권 증서”); (비유적으로) 약속이나 재산에 대한 "소유권", 즉 적법한 청구(문자 그대로 "법적 지위 아래"이기 때문에) – 특정 계약에 따라 보장되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자격을 부여합니다. 당신이 보여요? 당신이 내 말씀에서 약속을 찾을 때 당신은 예수 안에서 그것이 당신에게 "예"이고 이미 당신의 하늘 계정에 예치되어 있으므로 법적으로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그분의 피로 그것을 지불하셨습니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현재의 필요를 채우는 내 말씀에서 약속을 찾았을 때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것을 찾은 것이며 이제 당신은 그것이 내 아들의 완성된 일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신의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이미 법적으로 귀하의 소유인 것으로 무엇을 합니까? 당신은 그것을 구걸합니까? 당신은 그것을 간청합니까? 당신의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까? 아니요. 그냥 가져가세요. 그리고 너희가 얻은 것이 아니라 너희를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주신 선물인 내 약속을 너희가 취하는 방식은 기쁨에 찬 감사로 하는 것이다. 당신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것을 당신에게 주는 주인으로부터 그것을 가져가서 선물을 받습니다. 그것이 기부자가 당신이 그에게 감사할 때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왕국이 운영되는 방식이다.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들에게서 감사와 축하하는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할 것이며 그들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들을 존귀케 하리니 그들이 하찮은 일이 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0:19. 너희가 감사의 소리로 내 약속을 선포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시편 26:7.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을 기억하십니까? 적군의 세 군대가 그들을 멸하러 왔으나 내가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었더니 위협이 있을 때에 그들이 곧 감사와 찬송에 들어갔고 그들이 감사의 노래에 들어갈 때에 내가 그들을 위하여 싸웠고 기사가 일어났느니라.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비참한 패배였어야 할 것이 귀중한 전리품을 모을 수 있는 엄청난 승리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지 않고 보물을 모았습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무엇에 대한 믿음? 나, 그러나 특히 나의 말씀, 나의 약속 안에서.

믿음은 당신이 선언하기 때문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말씀에 있는 약속이 아니라면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법적 권리가 아닙니다.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 증서가 없으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즉 내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들고 유지하며 그것이 여전히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좋은 점은 당신이 믿음으로 내 말씀을 사용하면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정의를 마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증거"로 번역된 단어는 "elegchos"인데 증거, 내적 확신, 내적 설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약속에 대한 권리 증서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그것들이 아직 나타난 것으로 보지 않을 때에도 그러한 것에 대한 우리의 소유권을 확립하는 충분한 증거(증거)입니다. 치유가 나타날 때 증상이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증상이 있는 동안 고통이나 질병으로부터 치유됩니다. 그러나 기쁨의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이 하늘 계정에서 지상 영역으로 인출됩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예슈아의 샘들에서 물을 길을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답게 나를 본받아 믿음으로 살아라. 나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믿음으로 너희는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내 말씀으로 창조한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내 말, 심지어 네 입에도 능력과 창조력이 있다. 나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나의 말씀을 지켜본다. 내 말에는 내 믿음이 담겨 있고 너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

나에 대한 믿음. 그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람의 말과 그 말을 지키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그리고 당신을 향한 그들의 목적이 당신에게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보고 그 사람을 압니다.

내 말은 즐거운 말이라 송이송이에서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고 너희를 향한 좋은 계획과 좋은 일이 그 속에 가득하도다 그들은 치유, 사랑, 번영, 평화, 용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빛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말씀이 예수 안에서 너희 가운데 나타났으니 너희가 그를 보고 나를 보느니라 그가 너희를 섬기러 오셨고 너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너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고 그분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은 샬롬이요 악이 아니라 너희에게 나와 함께할 영원한 미래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모든 영광의 모든 장엄함 가운데 있는 나를 아직 보지 못하기 위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진실 그 자체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당신이 믿음의 법칙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나를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물러서면 내가 너희에게 미리 정한 약속을 너희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었으나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받지 못하고 평생 광야에서 방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이 약속의 땅의 모든 놀라운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기를 거절하였느니라. 그들은 내 말을 의심하고 내 말과 반대로 말하였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앙이며 악하고 악한 마음이라 했습니다. 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불신앙에 게으르고 믿음에 부지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영을 가지고 내 약속과 일치하게 말한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고 그들은 약속과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나의 모든 혜택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당신은 그것들을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 같이 내가 주의 말씀을 기뻐하나이다”라고 쓴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시편 119:162. 믿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한다면 내 말씀을 읽는 것이 당신의 모든 것을 찾는 보물 찾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말하면 그것이 당신의 것이라는 완전한 설득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입니다. 나는 당신이 용서받았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당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으며 그것을 즐기고 그 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므로 당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그것을 찬양하고 그 안에서 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고침을 받았으므로 병이 왔을 때에 너희가 비웃고 꾸짖으며 너희가 병이 있음을 틀림없이 안다. 어떻게 표시됩니까?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 추수 감사절. 내 아들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았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 왜? 그때 그분은 그들을 위해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놀라운 일을 그들이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정심이 컸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받지 아니하였을 때 그분을 실망시키셨습니다. 그분은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셨으며 그렇게 할 권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큰 일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나를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그러면 내가 창세 전부터 너희를 위하여 계획한 생명을 너희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믿음에는 큰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실천하면 할수록 더 커집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내가 처음 그에게 나타났을 때 바다를 가르는 믿음이 없었지만, 그가 나와 함께 걷기 시작하고 내 말에 순종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가 그의 지팡이를 들기 위해 내 지시에 준비될 때까지 일어났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를 가르고 큰 무리를 이끌고 황량한 사막을 건너 나라를 이루었다. 그리고 내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지시로 시작하여 예수를 따라 결국 하루에 삼천 명을 구원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데 이르니라 , 그리고 그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을 치유합니다.

이 시리즈가 계속됨에 따라 나는 믿음의 법이 어떻게 작용하여 내가 약속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넘칠 것입니다.

전리품처럼 내 안에서, 내 말 안에서 기뻐하라. 그러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믿음은 당신에 대한 내가 가진 사랑을 알고 믿고 확신을 가지고 그 진리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사랑해요. 믿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바꿉니다. 그것은 당신의 하루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찌푸린 얼굴을 없애줍니다. 그것은 내가 여기 너희 가운데 있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로 너희를 만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1:16-17)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이 증언을 한 시대에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음에도 라틴어보다 헬라어가 더 통용되었습니다.
즉 헬라의 철학과 전통이 여전히 지배라던 시대였습니다.
한편 로마제국은 철저하게 권력과 무력을 신봉해 힘의 철학이 병존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이 주장한 복음, 곧 갈릴리에 살고 있던 예수라는 목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부활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왜 복음이 자랑거리입니까?
바울은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히브리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 심판으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의인 외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인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없고, 성경을 이해할 수 없으며, 복음이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신칭의”를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부터 생각헤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나에게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의가 있습니까?

자신이 의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롬3:10절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범죄”와 “죄”를 구별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내가 법을 위반하여 그 결과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죄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법률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사람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질러야 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거꾸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즉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범죄가 드러난 죄인이고, 우리는 아직까지 범죄가 드러나지 않은 죄인입니다.

이것이 다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인 죄인이냐 비도덕적인 죄인이냐, 이 차이밖에 없습니다.

모두 죄인인데 어떤 사람은 더 죄를 지었고,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죄를 덜 죄를 지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정말 죄인이 아니라면, 자기 안에 증오나 추한 생각이나 음욕 등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성이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서는 순간에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시고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 됩니다.

왜 예수님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까?

왜 석가모니와 공자는 안 됩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을까요?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이해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 마1: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는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세주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죽는다.”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 의리, 우정 때문이 아닌 “죄 때문에 죽는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가 공자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오 인해 죽고자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29절을 보면, 요한 예수님의 나아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대속되도록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둘째, 요11:25-26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와 공자는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에게는 거대한 무덤이 남아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는 무덤이 없습니다.

화장해서 재가 되었거나 무덤 속에서 그 시체가 썩어버린 유한한 존재가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왜 중요합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오늘날까지 효력을 갖습니다.

약속한 사람이 죽으면 그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다시 몸으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셋째, 마16:1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여인의 몸에 잉태되어,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구유가 장식용으로 부잣집 거실에 놓이기도 하지만, 사실 구유는 더럽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 비천한 사람도 짐승의 거처에서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누가 위로하며 눈물을 닦아 줍니까?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시되 짐승의 구유에 처음 누우셨고, 가장 못사는 달동네 갈릴리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밑바닥에서 아픔과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30년간의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가운데 있다 해도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눅1:35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 육체를 통해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과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아십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께서 과부와 고아, 나그네의 친구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심령은 잘 이해하지시만 지위가 높은 사람은 이해하시지 못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대통령의 고민도 아시고, 책임자 격인 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도 아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아랫사람들에게 욕먹는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두를 수용하실 수 있습니다.

 

넷째, 마1:23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개의 새끼는 개입니다.

소의 새끼는 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속성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내 속마음과 모든 아픔을 이해하시는 참인간이십니다.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모든 삶의 문제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 도우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우심입니다.

또 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와서 인간으로 살다간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멧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소대언서 여덟 번째 책인 하박국서 1~2장을 강해하겠습니다.

그는 유다왕 요시아 왕의 전사(BC.609년) 전후에 활동한 대언자입니다. 스바냐와 예레미야보다 늦게 부름을 받고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박국 חֲבַקּוּק 하바꾹)의 바벨론어 이름 뜻은 “포옹 embrace” חבק)이며 칠십인역에서 ‘암바쿰’(Ἀμβακούμ)이라 불리며, 라틴역 불가타에서는 ‘Habacuc’, 영어성경에서는 ‘Habakkuk’, 그리고 중국어성경에서는 ‘哈巴谷’이라 불립니다.

이 대언자는 1:1와 3:1에서 이름 이외는 누구의 아들인지 어느 가문인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을 ‘대언자’[선지자]라고 소개한 책은 하박국, 학개(1:1), 스가랴(1:1) 세권뿐입니다.

​비록 성경은 아니지만 랍비 문헌에서는 엘리사에 의해 되살아난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는 전승이 전하며, 또한 다니엘서에 덧붙여진 위경 벨과 용에서도 언급되는데, 그 헬라어 사본 중에는 레위 지파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구조는 첫 부분(1:2~2:5)에서 대언자와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 구조는 선형구조입니다.

A 최초의 대화(1:2~11)

a 대언자의 불평(1:2~4)
b 주님의 응답(1:4~11)

B 두 번째 대화(1:12~2:5)

a 대언자의 불평(1:12~17)
b 주님의 응답(2:1~5)

C 압제자들에 대한 저주의 신탁(2:6~10)

a 노략자가 노략될 것임(2:6~8)
b 정복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9~11)
c 건축자가 헛됨(2:12~14)
d 수치가 없는 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15~18)
e 우상 숭배자들이 잠잠할 것임(2:19~20)

D 하박국의 순종의 시(3:1~19)

a 기도(3:2)
b 용사이신 하나님의 등장(3:3~15)
c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3:16~19)

반면 돌시는 나훔서, 스바니야서와 같이 7중 대칭구조(Chiasm키아즘)로 분석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핵심부분(D, 2:1~5 turning point)에서 '기다리라는 권고'가 나타납니다. ABCDC’B’A’

A 하박국의 첫 번째 불평(1:2~4)

B 여호와의 첫 번째 대답(1:5~11)

C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1;12~17)

D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됨(2:1~5)

C' 두 번째 불평에 대한 주님의 대답(2:6~20)

B' 여호와의 마지막 대답(3:1~5)

A' 여호와의 첫 번째 응답에 대한 깨달음(3:16~19)

하박국서는 문화장르로 수사적인 질문과 답변, 설화, 시, 예언, 기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 하박국의 불평 Habakkuk’s Complaint (합 1:2-4)​

(합1:1) 대언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The burden which Habakkuk the prophet did see.(2) 여호와여 제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제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제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제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4절. 하박국서의 첫 단어 ‘경고’란 히브리어 הַמַּשָּׂא‘하 맛사’의 뜻은 짐(burden), 예언(prophecy), 신탁(oracle)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박국이 대언자로 부름을 받아 활동한 시기는 요시아왕이 이집트 바로인 느고에 의해 전사(BC 609년)한 때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 때였습니다.

내적으로는 부패하였으며, 신흥하는 신바벨론(느부갓네살)의 세력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시아왕의 전사 4년 후 일어난 고대 근동시대의 결정적인 갈그미스 전투(The Battle of Carchemish, BC 605)도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갈그미스 도성은 지중해 부근 알렙포(Aleppo)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늘날의 '제라불루스'(Jerablus)입니다. 유브라데 강의 도하 지점인 강의 상류를 지키는 도성으로, 메소보다미아와 소아시아를 연결시키는 주요 동서 고속도로의 북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BC 612년부터 앗수르 제국이 쇠퇴할 무렵 이집트의 군대가 BC 609년에 공격하여 정복하였습니다. 이 해에 이집트의 바로(Pharaoh) 느고가 유다왕 요시아의 군대를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역대하 35:20~27) 정복한 도시가 갈그미스입니다. ​

이스라엘의 운명은 요시아왕이 그릇된 판단하여 하나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참전하여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신바벨론 제국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앗수르 군대를 격파하고 이 성읍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수도 니느웨)의 시대는 물러가고 신바벨론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의 군대는 갈그미스까지 가서 신바벨론과 전투를 개시했으나 싸움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전하여 귀국하는 길에 하맛 땅 립나에서 자기에게 나온 유다왕 여호아하스(요시아의 장남)를 잡아 옥에 가두고 그 형제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여 왕으로 삼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혀가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애굽으로부터 잦은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는데 17대왕 여호아하스가 폐위되고 18대 여호야김이 등극하게 된 것도 애굽의 내정 간섭에 의해서입니다.

그후 여호야김 4년(BC 605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다시 갈그미스로 진격하였으나 갈그미스와 하맛에서 느부갓네살에게 패합니다. ​

1년후 느부갓네살은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아스글론을 정복하고 애굽 시내에 이릅니다(왕하 24:74). 그리하여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에서 잠시 누렸던 독립을 잃고 당분간 바벨론의 속국 상태로 남게 됩니다.

1:2-4절. 하박국 대언자는 이런 국제적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느끼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국제적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계시다고 항변합니다.

"여호와여 제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제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제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제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2-3절) 그는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는 원인이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여 정의가 굽게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항변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왜 불의와 강포를 보시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시나이까?의 울부짖음은 이전 1970년대 유신체제 때 민중들의 항변이기도 했습니다.

2. 여호와의 응답 The Lord’s Answer(1:5-11)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행13:41, 사29:9, 사29:14).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렘8:10)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렘4:13, 렘5:6).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왕하12:17) (10)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사10:9, 사14:16). (11)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5-11절.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생각대로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직접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5절).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몽둥이로 신바벨론 사람을 일으켰다고 하십니다(6절).

갈대아인들(신바벨론군대)는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습니다. ​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인데.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7-11절)고 설명해 주십니다.

3. 하박국이 다시 호소하다 Habakkuk’s Second Complaint (합 1:12-17)

(12) 대언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분이시여, 주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저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님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사10:5, 신28:50). (13) 주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 주님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7절. 이에 하박국은 다시 항변하기를 심판의 몽둥이로 왜 하필 악독한 갈대아인(신바벨론군)을 사용하시느냐고 합니다.(12-13절)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님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4-17절)​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정의와 긍휼이 넘치시는 분께서 악한 도구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에 이해가 되지 않아 꼬치꼬치 묻고 있습니다. 정직한 태도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교만하고 불순한 대언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The Righteous Shall Live by His Faith(합 2:1-5)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분께서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나로 어떻게 대답하게 하실는지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롬15:4, 요16:25, 요16:29, 고전14:19).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히10:37).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2:1-5. 이렇게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항변한 하박국은 적군을 파수하는 곳인 성루(the watch tower)에 서서 이제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1절). 드디어 하나님의 답변이 오기를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절).

묵시(vision)란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말하는데 묵시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 이제는 실현할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차질없이 100% 다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면 반드시 응합니다.

4절에 보니 하나님의 묵시를 무시하거나 관심이 없는 자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는 답변이 하박국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시간을 깨닫지 못하고 항변하고 있는 자신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함을 지적당하자 그는 믿음이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모든 해답을 찾았습니다.

​의인의 반대인 악인은 5절에 있는대로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읍니다.”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는 자는 죄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롬 14:23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And he that doubteth is damned if he eat, because he eateth not of faith: for whatsoever is not of faith is sin.”

대언자 하박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나아가서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습니다. 결국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며,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합 2:4의 말씀으로 그는 머리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하박국은 내적인 부패로 썩어 있었으며 새롭게 부각하는 바빌론의 세력이 곧 성전과 도성을 멸망시킬 운명에 있는, 역사적 마지막 시기의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지만, 대언자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이중의 악이 힁행하는 가운데 주님은 활동하시며 다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議 Justification by faith)는 기독교 신앙의 모토(Motto)가 됩니다.

바울서신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세 마디가 그의 신학의 요약이 됩니다. 의인=로마서의 주제(1:16-17), 믿음으로=히브리서 주제(10:38, 11장), 살리라=갈라디서 주제(3:11, 3:24, 5:22-2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칭함 받았습니다(창 15:6). 이 요절의 말씀이 하박국의 이름의 뜻인 “하나님의 포옹 Embrace of God”입니다. 정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하박국 대언자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5. 갈대아인들을 향한 저주 Woe to the Chaldeans (합 2:6-20)

(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사33:1, 렘27:7).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눅19:40).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미3:10, 나3:1)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잠16:29, 암2:12) (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17)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슥11:1).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6-20절. 하박국이 하나님의 속마음을 깨닫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인본주의(인간이 보는 관점)에서 신본주의(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으로 달라집니다.

6절부터 나오는 “그”는 5절에 나오는 갈대아인들(즉 신바벨론 제국론자들)을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조롱하며 풍자합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6-13절)고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시는 신본주의 입장에서 인본주의의 모든 행위를 꾸짖고 저주를 합니다.

신본주의의 심판과 통치에 대해 14절에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한 복음송가를 함께 부릅시다.

15-19절 이하에서 계속하여 이런 갈대아인들에 대한 저주를 선언합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우상숭배의 허구성, 모든 우상은 거짓 스승, 우상 숭배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선언하고는 20절에서 신본주의적 관점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But 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let all the earth keep silence before him.”

시편기자도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악인들의 결국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시 73:17).

6. 하박국의 기도 Habakkuk’s Prayer (3:1-16)

(1) 시기오놋에 맞춘 대언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셀라).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분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 그분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분의 손에서 나오니 그분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5) 역병이 그분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분의 발밑에서 나오는도다. (6) 그분께서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분께서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흩어지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분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신32:8, 사40:12, 시135:10).

(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 여호와여, 주님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 주님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셀라)(시7:12, 시78:16).

(10) 산들이 주님을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 날아가는 주님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님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수10:12-14). (12) 주님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13)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

(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님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 주님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시77:19, 출15:8)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욥30:17).

1-16절. 하박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난 후 기도를 드립니다.

시기오놋(Shigionoth)이란 식가욘(shiggaion, 시 7 표제에 나오는 식가욘)의 여성 복수형입니다. 이 현악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번역되지 않은 채 악기 이름만 밝히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기도문은 모범 기도로 (1) 하나님의 이름 부름(기원) (2) 송영 (4) 영적 전쟁의 승리 찬양 (5) 구원의 완성 찬양을 담고 있습니다.

2절에서 “여호와여”라고 주님의 칭호를 부르면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듣고 놀라면서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하며 송영을 드리고 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라비아 사막의 데만(Teman)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미디안 광야 바란(Paran) 산에서부터 오심에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분으로 기도드립니다.

3절 중간에 “셀라 Selah”라는 악상기호를 표시합니다. 셀라는 “반석” “바위”라는 뜻인데 악상기호로 사용될 때는 “분위기를 바꿔라(단조에서 장조로)” 혹은 끝음을 올려 읽으라는 뜻이나 정확한 뜻은 모릅니다. 성경에 74회가 나오는데 시편에서 71회, 하박국에서 3회가 나옵니다(3:3, 3:9, 3:13). 3절 후반에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분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고 송영을 드립니다.

4-16절에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히 5절(“역병이 그분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분의 발밑에서 나오는도다.”)에 역병(the pestilence), 불덩이(burning coals)는 에브라(Ebla 문서, 북아람에서 1964년부터 출토된 고대도시에 1975-76년 사이 왕궁 도서실에서 토판문서 17,000개가 발굴. BC 2000년 전후 성경시대 문화에 대해 많은 정보제공) 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당시 고대근동지역에서 섬겼던 우상의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6-7절에 하나님께서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분께서 보신즉 여러 나라가 흩어지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작은 산이 엎드러지며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립니다고 관찰합니다.

8절에 “여호와여, 주님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고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면서 9절에 “주님께서 활을 꺼내시고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셀라).

10절에 산들이 주님을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드는데 11절에 날아가는 주님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님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고 고백합니다.

12-16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회고합니다.

12-13절에 주님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시고,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습니다(셀라).

14-16절에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대언자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님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습니다. 대언자가 들었으므로 그의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대언자의 입술이 떨렸는데,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대언자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대언자 뼈에 들어왔으며 대언자 몸은 그의 처소에서 떨린다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문은 매우 구체적이며 회화적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구원의 사건들을 섭리사관으로 관찰하며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7. 하박국이 주님안에서 기뻐하다 Habakkuk Rejoices in the Lord(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17-19절. 악이 선을 이기며, 악한 나라를 심판의 몽둥이로 사용하신다고 불평하며 항변한 하박국 대언자가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겨 행복지수가 높아가니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립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 폭염, 가장 긴 열대아, 긴 장마, 폭우피해, 여러 화재들, 사고들 등 아무리 어려운 장마와 폭우 등 힘든 한해를 지난다 해도 여호와를 로이(나의 목자)로 삼고 유일한 구원자로 계시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감사가 넘쳐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박국의 믿음을 본받아 올해 추석에도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민족의 명절 추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 드리게 하시며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고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박국처럼 주님의 뜻과 때와 계획을 몰랐을 때는 인본주의적 생각으로 불평과 원망과 항변을 했지만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메시지를 받고 변화했듯이 저희들도 생각과 관점에 변화를 주시어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길가의 장미도 감사, 장미의 가시도 감사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하박국의 뜻은? (1:1)
2. 하박국이 첫 번째 불평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1:2-4)
3.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의 요지는? (1:5-11)
4.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한 내용은? (1:13)
5. 하나님의 최종 답변은? (2:4)
6.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잠잠하라 뜻은?(2:20)
7. 3:17-18과 3:19을 비교하여 읽어보자. 느낀 점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1:1-4, 2:1-4)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1장 1-4절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하박국 2장 1-4절

  하박국 선지자는 앗수르가 점점 약해지고 갈대아의 신흥세력인 바벨론이 강성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유다에서 활약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예언 활동은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만 남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고전분투하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당시 유대왕 요시야왕이 므깃도 전쟁에서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가 잠깐 왕위에 있다가 애굽으로 끌려가고 그 자리는 여호야김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여호야김은 애굽에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백성들에게는 중한 세금과 노동력의 착취(왕하 23:34~37), 인권유린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치하여 궁전을 크게 지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더욱 짜내고 착취하여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왕하 24:4).

  하박국은 이러한 분위기에 발을 맞추듯이 오늘 본문 3, 4절을 통하여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 풍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하박국 1:3, 4입니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온갖 불의가 횡행했으며, 겁탈과 강포와 변론과 분쟁이 가득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해이하고 공의는 시행되지 못하여서 악한 자가 득세하고 약하고 정직한 자는 고통받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변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본 하박국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질문을 시작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공의와 성실을 따르는 자가 복을 받고 잘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현실은 오히려 성실한 사람이 못사는 사회가 되고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강제로라도 빼앗는 자가 더욱 형통하고 큰소리치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불의를 보고 당돌하게 도전하는 하박국 선지자를 보고 오늘 본문 2:4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박국서 전체 주제를 함축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의 주님의 복음에 핵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롬 1:17과 갈 3:11에서 적절하게 설명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사상이 기독교의 사상이 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이 진리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가 2,600여 년 전에 하나님께 던진 도전적인 질문은 어찌 하박국만의 질문이 되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나는 선하고 착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데도 하는 일마다 꼬이고 어렵게 시련만 계속되는가? 왜 나는 항상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왜 다른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도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려나가는데 나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주님을 봉사하고자 애쓰는 나를 왜 조금만 잘못해도 매로 치는가 하는 의문과 항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자, 그렇다고 하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 받으셔서 만고불변의 진리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응답을 받는 사람(1절)

  의인이 믿어야 하는 것은,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응답받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자리를 지키는 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 2: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기 위하여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사명을 성실히 완수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갈대아의 세력이 왕성해지고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같은 왕들은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며 선지자들을 무시하였으나 하박국은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각자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원을 응답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목자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할 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가의 시조가 되었고(삼상 16:11~13) 사무엘은 성전 봉사자의 역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삼상 3장). 성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그 기도에 응답을 받는 최고의 방법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1: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와 ‘외치다’는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속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돈을 요구할 곳은 부모이며 백성이 도움을 요구할 곳은 국가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성도가 구원과 소원을 요구해야 할 곳은 오직 능력과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 선지자의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상황은 비록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마인드가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우상이나 술객들에게 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마음에 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친히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탕이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되 그냥 기다리지 않고 성취될 것을 그리며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바라보며’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고’의 의미는 ‘지켜보다’, ‘응시하다’, ‘망을 보다’이고 ‘바라보며’는 ‘숙고하다’. ‘분별하다’, ‘경험하다’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응답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듣겠다는 선지자의 의중이 담겨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나 특히 그를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는 자에게 말씀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시편 42:1, 2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둘째,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2절)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도전적인 의문에 대하여 간구한 후에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전 단락에서 응답받는 사람을 소개해 드리면서 ‘간절히 기다리는 자’가 그중에 하나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도 응답받지만 ‘간절히 기다리는 자’도 반드시 응답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일 수인 반면에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며 바라보며 보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기다리는 자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하박국의 기다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박국에게 당신께서 주시는 묵시를 판에 기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할 이유에 대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응답으로 주신 묵시에 대한 말씀은 본문 4~20절을 통하여 선민으로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게 앞으로 일어날 묵시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판에 기록해야 하는 이유를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혁개정판 성경의 번역으로만 보면 이 말씀은 달리는 자도 말슴을 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새겨 넣으라는 의미인 것으로만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의미로 번역이 가능한 문장으로 ‘읽는 자로 달려가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 가능합니다. 영역본 NIV는 ‘선포자가 그것을 가지고 달릴 수 있도록(so that a herald may run with it)’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번역을 받아들인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 내용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전하기 위해 달리게 될 것이며 달리게 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후자의 의미에 비추어 영적 교훈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묵시를 읽는 자가 달리게 하라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묵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읽는 사람은 마치 전령이 왕명을 받는 것처럼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자신이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전하기 위해 성안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유일하고 복된 구원의 계시를 통해 깨달은 뒤에 온 세상을 향해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며 쉼 없이 그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묵시, 특별히 선민을 유린할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묵시를 읽은 사람도 그 묵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그들이 읽을 묵시를 하박국으로 하여금 판에 명백하게 기록할 것을 요구하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요 응답이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기록하라고 명하시며 그것을 많은 사람이 읽거나 듣도록 전하라고 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벨론에게 유린을 당할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이 자행자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유다 백성들에게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습니까? 이 말씀은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구원의 말씀, 회복의 소망을 누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읽고 알기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만 세대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말씀을 읽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은 바른 인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안에서만 사람은 참된 구원의 길을 계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 디모데후서 3:15~17 말씀입니다.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 얻는 지혜가 그 안에 있습니다.

셋째, 정한 때가 있다(3절)

3절은 하나님의 묵시 곧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 절을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이 성취되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무 계획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계획에 따라 행하시며 계획 없이 행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도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태초에 인류 구속 계획을 세우셨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작정의 때가 이르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류 구속 사역을 완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박국에게 주신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은 하박국 시대로부터(BC. 610년 전후) 약 70년가량이 경과 한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킴으로 이루어졌습니다(BC. 539).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주신 당신의 묵시를 이루기로 정하신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성취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라느니, 지체된다느니 하고 말합니다. 
아마도 하박국을 통하여 하나님의 묵시를 들은 유다 백성들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그와 같이 생각하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묵시는 성취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오래도록 성취되지 않아 거짓처럼 보이고 지체되는 것처럼 보여 많은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떠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신약 성도들은 마지막 남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도무지 성취될 기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의 재림에 대해 사람들이 그처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처럼 오랫동안 무수한 성도들이 고대하고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헛된 약속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상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징후들이 날이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각성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동안 하나도 남김없이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며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며 믿고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박국은 선민의 타락상이 방치되는 듯한 현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묵시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묵시의 성취는 정한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오늘도 실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