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서는 어떤 책인가?
구약성경의 마지막 세 선지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의 역사를 살펴봐야 합니다.주전 536년에 에스라는 약 50,000명의 유대인들을 데리고 거룩한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제단을 다시 세우고 제사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주전 535년에는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혀 사역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백성이 그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주전 520년의 일이었고, 515년에 드디어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즉,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 그리고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였습니다(스 5:1. 스 6:14 참조).
학개서의 메시지
학개가 이룬 사역의 전체적인 목적은 게으른 백성들을 일깨우며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거룩한 땅에 처음 도착하여 일을 시작하기는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헌신적이고 열성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반대의 몇 달이 지나자 일은 지연되고 마침내는 멈추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보다도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학개는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하나님의 일에 다시 헌신하도록 독려하고 격려하기 위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학개서의 개요
학개서의 내용
학개서에는 네 편의 설교가 있는데, 이들 각각에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이 메시지들을 통하여 학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특별한 죄를 지적합니다.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에 두는 일
학개
선지자는 주전 520년 9월 1일 첫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때는 성전에 기초가 놓인채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16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지도자 스룹바벨(정치 지도자)과 여호수아(종교 지도자)에게 보냈습니다.
“내 성전은 황폐한 채로 있는데 너희는 호화 주택에 살고 있느냐?"(학개 1:4)
백성들은 자신의 집들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사치스러운 “판벽한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붙들어 두시므로(10절)
농작물은 소출이 없었습니다(11절).
결국,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땅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신 28장).
그러나 이들은 축복을 잃었습니다.
메시지는 참된 깨우침으로 받아들여졌으며(12-15절),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어났으며 여호와를 그들의 삶의 첫자리에 두었습니다!(빌 1:21/빌 2:21 참조).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돌아봄
장막절의 마지막 날인 10월 21일에 학개가 두번째 설교를 할 때는 일곱 주간 쯤 일을 했을 때였습니다.
이 날은 기쁨과 찬양의 큰 날이 되어야 마땅한데 반대로 실망과 불평의 하루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바라보았던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16년 전에 기초를 놓았을 때 나이 많은 이들은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생각하고는 울었습니다(스 3:13).
이제 백성들 중의 어떤 이들은 새로운 성전이 광채도, 영광도 없는 것들로 인하여 실망하였습니다.
물론 백성의 재앙은 그들의 죄에 마땅한 것이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다 볼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강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나님은 용기를 잃은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흔들어 놓을 것이며 어느 날 하나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히 12:26-29).
하나님은 나중 집(천년왕국기간의 성전)의 영광이 전의 집(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거기 평화가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성전 일을 시작한 바로 그 날에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14일이 되어서도 일들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학개는 하나님이 왜 아직 이들을 축복하지 않으시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정결케 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거룩함과 건강함을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으나, 부정함과 병을 줄 수 있다“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도 부정하였다(학개 2:14).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깨끗한 손과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만 합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주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큰장애물 중의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번째 멧세지와 같은 날 설교된 이 마지막 메시지는 총독 개인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일을 지도해 나갈 때에 그에게 특별한 격려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영적인 지도자들을 공격합니다.
스룹바벨은 주위에 있는 큰 제국들을 보고 유대인의 작은 그루터기의 미래에 대해 염려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환경은 우리를 실의에 빠지게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믿음을 격려하셨습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훔쳐 갑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며 여러 나라의 왕위를 뒤엎고 그 권력을 무너뜨리며 전차와 그 전차병을 엎어 버리겠다. 말과 기병들이 서로서로 친 칼날에 쓰러질 것이다."(학개 2:21-22)
스룹바벨과 예수 그리스도
스룹바벨은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명으로서,
그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실려 있습니다(마 1:12. 눅 3:27).
사실상,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형이며 예표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도장,
그의 귀중한 인(印)으로 나타납니다.
도장은 권위와 명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성전을 완성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고 그의 성전인 교회를 세우도록 권위를 주셨습니다(요 17:1-3).
학개서의 도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부르신 일은 무엇인가요?
그 일을 시작해 놓고 끝을 못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혹시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들을 제거하십시오.
자신을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 앞을 보는 대신 뒤를 보는 것,
고백하지 않은 죄, 불신앙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놀라운 약속들을 기억하십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1:13)
두려워 말라(2:5)
내가 너를 축복하고(2:19)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2:23)
10월 9일(목) 학개 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건축하라(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Go up into the mountains and bring down timber and
build the house, so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be honored," says
the LORD.
하나님은 백성들이 성전 건축보다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우선시하며 번영을 기대했지만, 그들의 노력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주고 계셨으며,
성전 건축을 통해 기쁨과 영광을 얻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 배경 :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으나,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였고, 성전 건축보다는 자신들의 집 짓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성전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셨고,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했으나 거둔 것이 적었던 것은 성전 건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 학개의 역할 :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도록 독려하셨습니다.
- "산을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 이는 단순히 건축 자재를 가져오라는 명령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락한 삶에서 벗어나 영적인 우선순위를 회복하고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 하나님은 백성들이 순종하여 성전을 재건할 때, 그 건축을 통해 기쁨을 얻고 영광을 받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학개 1:1-15)
지난 3월 21일 자 조선일보에 「"교회 100개 짓는 그 날까지" 꿈 이뤄가는 '꿈같은 인생'」 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주인공은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대의그룹 채의숭(68) 회장었습니다.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고향에서 교회
재건축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부터 3대째 신앙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보령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다시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몇 년에 걸쳐 돌 하나, 벽돌 한 장씩 모아서 지었답니다. 이것을 지켜본 어린 마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자 보람
있는 일이 교회 짓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앞으로 자라 '교회 100개 건축'의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그 꿈과 더불어 학창 시절 두 가지 꿈을 더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박사가 돼 대학교수가 되는 것과 큰 회사
사장되는 것'이었답니다. 가난한 농촌 가정의 6남매 중 장남으로서 쉽지 않은 목표였지만 1984년 경제학박사가 되고 그 해
대우아메리카의 사장에 오르고 2001년엔 겸임교수가 됨으로써 첫 번째, 두 번째 꿈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꿈인 '교회
100개 건축' 실현은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85년 창업한 후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스리랑카에 교회 짓기를
주도했답니다. 무려 5번이나 현지 주민들이 철거하는 반대 속에 1992년 완공된 교회가 모태가 돼 지금은 현지에 15개 교회로
확산되었답니다. 화양감리교회 장로인 채 장로님은 "그 후 17년 동안 설과 추석연휴를 국내에서 보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건물이 필요한 해외 현지를 답사하거나 완공된 교회의 봉헌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연휴를 반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내외에
45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때로는 수해와 화재로 공장이 폐허가 되기도 했고, 납품하던 대우그룹의 부도로 휘청할 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97년엔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사업이 완전히 망할 위기에서도 적금을 깨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바치며" "매번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교회건축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 귀한 꿈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시는 장로님 같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꿈을 가진 성도님이 계시실 소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 세계 선교에 대한 소원, 굶주린 어린 아이들을 돕기 위한 소원, 핍박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소원,
교회 건축에 대한 소원 등 좀더 큰 소원들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어떤 목표, 어떤 꿈,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삶의 질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유대인에게는 한 가지 동일한 꿈이 있었다면 고국에 돌아가 하나님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막 중심, 성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벨론과 전쟁에서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2세에 의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는 망하고 인재들을 포로로 잡혀 가 버렸습니다. 포로 생활하면서 자나 깨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날을 고대했습니다. 7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포로 생활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독립 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유다인들을 70년 만에 해방시킨 것입니다.
먼저 5만명 정도가 돌아 왔습니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잃었던 자신들의 고국에 돌아 왔습니다. 일가
친척을 만납니다. 잃었던 땅을 찾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성전 예배를 회복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해방되어 돌아오자 마자 처음 한 것이 무너진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입니다.
신정국가를 이루었던 사람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구속사 통로 역할을 감당했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복원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드리기 위해 서둘러 성전 터를 닦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터만 겨우 닦아 놓고 16년 동안 성전 짓는 것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1. 성전 건축 지연에 이유(1-6)
왜 그들은 그렇게도 소원했던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습니까?
첫째 이유는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2).
2절 보세요. 당시 황폐화된 고국에 돌아 왔는데 지속적인 고난과 경제적 궁핍으로 계속됨으로 경제적 형편을 볼 때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70년 후면 포로에서 해방된다고 말씀하였는데 만약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B.C.586년부터 포로 기간을
계산한다면 학개가 예언할 당시는 66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바벨론이 유다 거민들을 포로로 잡아간
B.C.605년부터 포로기간을 산출한다면 학개 당시는 이미 70년이 지난 상태였습니다. 귀환한 유다 거민들은 포로 기간을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주변의 정치적 여건을 볼 때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해석하면
돈도 좀 벌고 우리 집도 먼저 복구하고 그리고 자식 딸 장가도 보내고 여유 있는 삶이 보장된 후 하자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할 일 다 해 놓고 여유 자금이 있을 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농번기이니까 잠시 멈추었다 한가한 때 하자는 말일 수 도
있습니다. 불경기에 무슨 성전 건축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지금 예배당도 차고 넘치지 않는데 시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유는 단지 성전을 짓기 싫은 것에 대한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성전 건축에 대한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 집 짓는데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입니다(9).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그 힘과 돈, 시간으로 무엇을 합니까? 1장 9절 보십시오. 자기집 짓기에 빨랐습니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폐합니다.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와서 터를 닦다 보니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성전은 나중에 짓고
우리 집부터 짓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열정이 살아졌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자신은
100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결혼한 자식이 지하 셋방을 살고 있으면 그것을 보고만 있을 부모가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식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 방치해 놓으면 다
그렇게 현실적이게 됩니다.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 2의 법칙입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하나님이
책망의 어조로 물어 봅니다. 내백성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이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2). 4절에 보십시오. 그저 거주하는
집이 아닙니다. 판벽한 집입니다. 호화스러운 집을 짓기에 바쁘게 지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것은 결코 경제적 궁핍이나 때가
아직 되지 않은 것, 혹은 주변의 정치적 여건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어 황무하게 되었으나
자신들의 집은 호화롭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판벽한'은 지붕이 덮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며 호화스러운 사치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집들은 호화롭게 치장하면서도 보기 흉할 정도로 훼파된 성전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누가 더 큰 집에서 사느냐? 누가 더 고급 인테리어를 해 놓고 사느냐? 누가 더 쌓아 놓고 누가 더 많은 유산을 남겨 놓을
것인가에 관심이 온통 쏠려 있었습니다. 집 다섯 체 여섯 체 가지고 있습니다. 빌딩이 있고 요소 요소에 땅이 있습니다. 노후를
준비하며 아들 딸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물려 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짓다 만 성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 위해 살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자선을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평생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먹고 살다 갑니다. 어떤 삶이 가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접해 있는 사마리아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총독이나 그 밖의 집권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방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스라4:3-4) 이방인과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짓는 것을 시기(에스라 4:1-10)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방해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가 교회 짓는데 가장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사탄일 것입니다. 세상에
필요한 건물들이 많이 있지만 세 가지 가장 가치있는 건물을 들라면 아마 대부분 학교, 병원, 교회를 들것입니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입니다. 병원을 질병을 났게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고치는 곳입니다. 전인격을 치유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구속사를 이루는데
중심적 사역을 감당하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매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감당하는 곳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이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듣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곳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는 곳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건너간 청교들은 자기 집을 짓기 전에 교회를
지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미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단이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성전 건축 지연의 결과(6, 10-11)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 왔습니다.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치적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면 꼭 성전 예배를 회복할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 와 보니 현실은 달랐습니다. 내
살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집 짓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성전 짓는 것은 외면하고 자기 잘살기 경쟁을 했는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첫째는 노력한 만큼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삶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부가 쌓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도 소득이 적었으며 먹고 마셔도 만족함을 누릴 수 없었고 집에 도둑이 들어온 것처럼 재물을 모으려 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면 사고로 모은 돈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열심히 일하여 살만한 것 같은데 질병으로
쓰러집니다. 돈은 쌓여 있는 것 같은데 집에 들어오면 만족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자연 질서를 통제하시는
하나님이 자연 질서를 통해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 소득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삶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부가
쌓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빙과 기업이 아무리 빙과를 많이 만들어 놓아도 여름 날이 가을 날씨처럼 되어 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과 역사와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부어 주어야 진정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시편127:1-5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노력을 하나 그 노력이 열매를 맺는 데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는 일을 보십시오(1).
사람들이 집을 세우려고 노력을 하나 노력만 한다고 다 집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집을 세우려는 노력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이 모자라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 하늘까지 쌓으려던 그들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습니다(창11:1-9).
성을 지키는 일(1)을 보십시오. 파수군이 밤새워 경성하는 노력으로만 성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셔야 밤새워
지키는 파수군의 노력이 열매를 맺게된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에 파수군이 없어 망한 것이 아닙니다.
돈버는 일(2)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문제(3-5)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과 노력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북한과 남한을 보십시오. 북한이 이렇게 못사는 것이 게을러서 그렇습니까? 그들은 천리마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원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남한 보다 더 풍부한 자원이 있습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남한 보다 더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휴전선 하나 사이
놓고 남쪽은 모든 곡식이 풍년이 들어 남아 돌아가 아우성이고 북은 굶주려 아우성입니다. 남미와 북미를 보십시오. 남미 사람들 금
찾아 떠난 사람들입니다. 북미 사람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떠나 자기 집도 짓기 전에 교회부터 짓고 신앙 생활한 사람들입니다.
200여년의 역사가 흘렀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제가 어릴 때 다니던 시골 교회에서 멀리 않은 곳에 신앙생활하시던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당시 시골 예배당은 흙벽돌로 지었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교회들도 개량을 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 교회를 지었습니다. 이제 시골에서 자식들과 함께 살수가 없습니다. 돈 밭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서울에 이사와서
셋방살이하며 장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어 물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여 다시
상도동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망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 목사가 되었고 둘째는 의사로 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셋째 딸
사위는 서울대학 의대 교수로, 장로로 한 교회를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보편적
하나님의 법칙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6)”라는 것입니다.
3. 성전 건축을 재개 명령(7-11)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기 위해 성전 건축을 재개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손해를 주고 그들에게 염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첫째가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말씀합니다(5,7).
지금까지 행한 것, 겪은 것, 그들의 계획, 그리고 그 결과를 마음에 두고 분석하고 반성해 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자신을 정직하게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왜 성전 짓기를 중단했는지 정직하게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진정 돈이 없어서인지, 경제 환경이 나빠서인지, 방해가 많아서인지 정직하게 진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은혜는 물에 세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습니다. 가나안 땅 제비뽑기해서 받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사사들과 선지자를 보내어 계속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것으로 결국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해방되었는데 그 과거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8).
첫 번째 지은 솔로몬 성전처럼 값진 레바논 산의 백향목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근교 산에 올라가
목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들어 포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영광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많은 제물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4. 성전 건축 재개(12-15)
첫째 성전 재건에 대한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12).
그들은 이제 반대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보라는 내부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환경과 조건을 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였습니다. 학개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고 주의 깊게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순종하고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들여 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학개가 자신도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의 권위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나 받는
자나 하나님의 음성이 모든 것보다 더 크게 들려올 때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누군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크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름이 있기에 아름다운 꽃이
필수 있고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크고 작은 교회들이 잘 지어진 것을 봅니다. 그 교회가 건축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엇보다 크게 들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북 지역에서 기독교적 정신으로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전주 예수병원이 생기기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잉골드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한 생활 버리고 1897년 7월 고향을 떠나 조선 땅에 와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질병으로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1898년 11월 3일 진료소를 개원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병원이 된 세브란스는 한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지배인이던 헌신적인 기독교 사업가 세브란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만 달러의 헌금 드림으로 세워졌습니다.
저 유명한 템플 교회와 템플 대학교, 선한 사마리아 병원이 생긴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57센트의 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오래 전 미국 필라델피아 시의 외진 곳에 조그만 한 교회가 세워져 어른 중심으로 주일 예배가 드려졌답니다. 아이들은 좁은
예배실로 인해 번호표를 주어 "자리가 비면 순서대로 부르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교회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소녀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질병으로 죽고 말았답니다. 죽은 아이의 베개 밑에는 목사님께 쓴 편지 한 장과 57센트의 돈이
있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가고 싶었으나 예배실이 너무 좁아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 사
먹지 않고 모은 돈을 드리니 이 돈으로 큰 예배당을 지어 모든 어린이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이 편지를
장례식에 모인 모든 교인 앞에서 눈물로 읽었답니다. 이 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 어린 아이의 편지가 자신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 꼭꼭 감춰둔 그들의 돈주머니를 열기 시작했답니다. 그 후 큰
교회와 멋진 교육관을 지어 입당예배를 드렸답니다. 57센트의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답니다. 가난으로 치료받지 못해 죽은
소녀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 병원'이 세워져, 그 병원은 주위 극빈자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줬답니다. 죽음 앞에서 친구들을
기억하며 쓴 한 장의 진실된 편지와 57센트의 헌금은 큰 기적의 역사를 이뤄 저 유명한 템플 교회의 초석이 되었으며 템플 대학교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답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을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는 말입니다. 환경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완악해 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무감각해지거나 강퍅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보다 귀중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어떻게 됩니까(시25:12-14)
그 택한 길을 저에게 가르치십니다.(12b) 영혼이 평안합니다(13).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13) 여호와의 친밀함이 있습니다(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시34:7-10)가 어떻게 됩니까? 보호해 줍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으로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우리의 앞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지도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말씀에 감동되어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임하지 불과
23일입니다. 16년 간 중단된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자 마자 신속하게 각자의 할 일을 찾아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성전 공사를 착공한 이 때는(6월 24일) 서둘러서 추수를 끝내야 하는 일년 중 가장 바쁜 주간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다 일어나서 성전 건축을 과감하게 착공합니다. 외적이 무섭지 않습니다. 1:13절을 보십시오.
2장 4절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돌변했습니까? 14절 말씀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흥분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
마음은 정확히 번역하면 영입니다. “흥분시킨다는 말은 각성시키다. 일깨우다. 일으키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령에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마음이 깬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이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동을 받습니다.(에스라1:5참조) 감동받는 것도 복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쉽게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대외적으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과 정치적 협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경제적인 불황과 생활의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믿으면 믿을수록 자신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없다고 말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산에 가면 나무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꼭 물질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 기도, 말, 노동의 봉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각자
주어진 달란트로 은사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서울역 맞은편 대우회사 본부 뒷편에 있는 남대문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머릿돌
속에는 한 할아버지의 모시 적삼 한 벌이 기념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를 지을 때 바칠 헌금이 없어 자기가 아껴온
모시 적삼 한 벌을 드렸는데 그것을 교회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화점계의 거성 J.C. Penny는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소유물을 소유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나를 소유하기를 원하신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10주년이 지나고 11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부지에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가 지어지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세계를 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번 주부터
마가복음 강해를 잠시 중단하고 4주간에 걸쳐 학개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학개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집중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개라는 말은 “여호와의 축제”라는 뜻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축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대구 서현 교회를 짖는데 온 힘을 기울인 정규만 장로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33세의 나이에 장로장립을 받아 너무 감사해서 장로장립을 기념하여 대구 서현 교회 성전부지 1842평을 헌납하였다고 합니다. 1957년 8월 19일 성전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연건평 1960평 당시 동양 최대의 석조 예배당이었답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 시작되자 마자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장로님은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였답니다. "하나님 정규만의 생명을 한 번만 살려 주옵소서 이 생명을 한번만 살려주시면 이 한 목숨 다하여 또한 종의 전 재산을 다 바쳐 성전 건축에 헌신을 다하겠습니다." 온 교회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적적으로 병에서 살아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대구 경북 지역에 악질전염병이 만연하였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되지 않는데 유독 정규만 장로님의 한약방만 와서 약을 지어서 먹으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아침부터 마당에 줄을 섰습니다. 건축비를 모두 감당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공사비를 다 빗 한번 지지 않고 감당한 것입니다. 건축되자 교회는 부흥되었고 1000명이 넘는 교인들은 빨리 헌당하기를 원했답니다. 그러자 정 장로님은 자기가 죽으면 헌당식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답니다. 혹이나 정장로님을 칭찬하여 천국 상급이 삭감될까봐서입니다. 성도들이 하려고 하니까 어서 빨리 천국에 대려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1969년 정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때서야 교회는 헌당식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고인이 되어서야 고인의 이름으로 표창장과 공로패를 받았고 온 교회는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대구가 생긴 이래 가장 긴 승용차 행렬이 이어졌고 가장 많은 조문객이 모였다고 합니다.
삶의 우선 순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어떤 중국인과 미국 청년이 대화하는 중에 중국인이 물었습니다.
"당신네 미국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수염 깎고 세수를 합니다."
그러자 중국인은 "그래요? 우리 중국 사람은 제일 먼저 옷을 입는데요" 하면서 서로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하루의 생활에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우선순위를 바로 택하는 것은 그날의 성패를 크게 좌우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일생의 우선순위를 어디다 두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실로 누구에게나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돈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듯하고, 어떤 이들은 권력을, 어떤 이들은 지식을, 어떤 이들은 명예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들 자체가 인간의 삶의 최고 목표가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돈이나 지식, 지위나 명예 등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삶의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최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 보훈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문제에 목표를 두지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공의, 긍휼, 사랑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더 앞서야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선 순위를 세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보다 하늘나라일과 영적인 것을 우선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에도 어느 쪽이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선택하여야 바르고 후회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신30:19, 왕상 18:21)
삶의 최우선 순위
어느 교회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질문지를 돌렸습니다.
질문지에는 직업, 배우자, 자녀, 친구, 가족, 교육, 교회, 여가, 자아실현 등 결혼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예들이 적혀있었고 이 예들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로 든 것 중에는 한 가지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목록에 하나님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와 하나님을 동일시해서 적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삶의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목록에서 아예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
당신은 주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삶의 우선 순위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베벌리 셰아(Beverly Shea)라는 한 월급쟁이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그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회사문제로 인해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셰아는 건반 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것은 어머니 레아 밀러(Rhea Miller)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놓은 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하게 정하길 원했습니다. 셰아는 이 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입니다. 어머니의 지혜와 사랑이 한 젊은이의 방황을 멈추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교통순경입니다.
삶의 우선순위
이런 속담이 있다.
“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결코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력이 분산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목표를 설정해도 목표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 크게 부풀려져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 지도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초심에서 빗나가버린 삶 때문이다. 부부가 불행한 것은 초심에서 크게 벗어나버린 애정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토저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인생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못견디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용암처럼 치솟는 열정의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한다. 하나의 시계를 주시하라. 두 개의 시계는 불확실하다.
공장복구의 우선순위
김형남 박사가 전남방직공사의 관리인으로 있을 때이다. 6.25의 발발로 부산으로 철수했다가 광주에 돌아와 보니 공장은 90%가 파괴되었고 건물의 80%가 소실되어 누구나 전남방직은 이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김형남은 간부들에게 돌아가서 공장을 복구하자고 격려했다. 세밀한 방직기계를 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숙련된 기술자일수록 안 된다고 만류했다. 결국 김형남의 고집으로 기술자 100여명이 광주로 출발했다. 김형남은 공장에 돌아가 맨 먼저 공장 안의 교회를 청소하고 예배를 드렸다. 또한 공장 안에 철공소를 만들어 휘어진 철조각을 펴고, 손상된 부속들을 재생하였다. 고철이 된 기계나 부속들은 그 원형에 대한 설계도를 작성하여 시내의 철공소까지 일일이 찾아가 쇠를 깎았다. 세계의 문헌에도 없는 공장의 복구였다. 그들은 밤과 낮이 따로 없었으며, 주인과 종업원의 구별이 따로 없었다. 결국 재생작업 10개월만에 기적적으로 식당에 6,000추의 방추를 설치하게 되었다.
아내보다 먼저 주님을
데이벳 리빙스턴이 선교사업에 자원할 때까지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결혼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가족들에 의해 생기는 걱정거리가 없다면, 선교사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메리 모페트를 만나게 되자, 그는 그녀에게 구혼을 하게 되었고 둘은 결혼을 하였다.
메리는 곧 그의 남편이 하나님을 삶의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녀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리빙스턴은 아내인 메리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주의 은총이 그대에게 내리기를! 당신의 애정을 나에게보다 주 예수님께 더욱 깊숙이 쏟으십시오. 우리들 서로가 아무리 깊은 사랑을 느끼더라도 항상 예수님을 모두의 친구와 안내자로 생각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모든 악으로부터 자신의 영원한 품안에서 당신을 지켜 줄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삶이 주는 축복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우선순위의 삶'을 살면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1. 염려에서의 해방
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으로서, 에너지를 줘도 모자란 판국에 에너지를 빼는 것입니다. 염려가 생기는 이유는 어려운 환경 때문이 아니라 집중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선순위의 삶을 살면 좋은 일에 대한 집중력이 생겨서 염려를 쉽게 물리치게 됩니다.
2. 믿음의 장성함
우선순위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두 마리 물새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그 대화 중에 한 마리 물새가 말합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너무 염려가 많지?" 그러니까 다른 새가 맞장구칩니다. "맞아! 인간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 같아!" 이런 부끄러운 피조물의 조롱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복된 열매의 수확
참된 믿음은 타인에게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축복된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인생의 첫 번째 채권자로 알고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려고 할 때, 어느 날 우리는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더욱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시간관리를 잘하는 것보다 인생방향을 잘 잡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속의 나침반을 잘 따르고 있다면 시계에는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바쁜 일'로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바쁘게 살기보다 하나님 우선적인 삶을 통해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어 가십시오.
먼저 크리스천이 되어라.
산부인과 의사 '강주심' 선생의 대문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었고 창문마다 성경말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고 그분은 말했습니다. 가끔 불고기나 닭고기를 먹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 백성들에게 이런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그 책임이 너희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고 책임의식을 확인시켜주곤 한다고 했습니다. 또 좋은 집에 살게 하는 것도 같은 목적이라고 일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벌거나 혹은 과학자가 되더 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교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무슨 말을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줍니까? 무엇인가 강조하고 보여주는 것이 자녀들의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만종을 그린 '밀레'가 파리에 공부하러 갈 때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든지 믿음이 없어진다든지 하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화가가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크리스천이 되어라. 그릇된 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림을 그리려거든 영원을 위해서 그릴 것이며 늘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을 생각하고 살아라." 얼마나 귀한 교훈입니까! 진실로 하나님 제일주의 정신이 아닙니까? 참으로 천국 지향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런 교훈을 자녀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아마 영어를 배운 사람은 다 알겠지만 하나님을 영어로 'GOD'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글자의 순서를 뒤집어 보라. 'DOG'가 된다. 무슨 의미인가 ?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피조물을 더 경배하여 순서가 바뀌어지면 결국은 개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 기도: 나의 유일하신 주님, 내가 주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을 소망하면서 세상적인 성공이나 안락함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소서. 내 생각과 삶의 우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우선 순위
어떤 목사님이 교회가 점점 부흥되어 가니까 몹시 바빴다. 그 분은 자기만의 기도실, 은밀한 곳이 있었다. 과거 교회가 작았을 때는 열심히 이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는데, 일이 바쁘고, 밤 열두시에 들어오게 되는 날이 많아지면서 피곤하니까 이내 잠자리에 들곤 하는 일을 몇 달 동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 전에 나가는 일에 내가 너무 등한히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날은 기도실에 들어갔다. 거기 좀 들어가 있었더니 쿵쾅거리는 딸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목사님이 문을 여니까 문 밖에 와서 멈추어 섰던 딸아이가 화들짝 놀래면서, "아빠! 아무 것도 아니어요!" 하고는 되돌아 급히 내려가려 했다. 목사님은 딸아이를 붙잡고, "왜, 무슨 일이니?" 하고 물었다.
"엄마가 아빠가 기도하시기 위해 이 방에 들어가시면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전 너무 아빠가 보고 싶어서 엄마 말씀을 어기고 그냥 올라온 거예요. 요 근래에 통 아빠를 못 뵈었거든요."
목사님은 딸아이를 붙잡고 꼭 껴안아 준 다음 볼에 입맞추고 내려보내면서,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어떤 시간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나야 하는 시간에 내 정성을 더 쏟았어야 했습니다. 나의 생활 따위에 시간을 다 빼앗기고 말았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제게 부족한 것이 이것입니다." 라고 울면서 회개했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리 엄청난 사업을 벌이고 이룩한다 하여도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는 없다.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과 사랑이 드려지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여된 어떤 프로그램이나 어떤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가치하다. 나의 생활보다 먼저 즐겨야 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신랑감 고르기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 서로 앞다투어 '좋아한다', '사랑한다'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처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다. 그들이 모두 뛰기 시작했는데, 한 청년이 그 여자를 거의 따라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한 움큼 쥐어 그가 오는 길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보고는 처녀를 쫓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줍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처녀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녀를 가까이 쫓을 때 마찬가지로 돈을 떨어뜨렸다. 역시 이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처녀를 그만 놓쳐 버렸다. 그들이 계속 달리는 동안에 세 번째 청년이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따라갔다. 이때 처녀는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몽땅 뿌렸다. 그러나 이 구혼자는 돈으로 인하여 처녀를 단념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가 무엇보다도 제일 바라는 상을 위하여 뛰어갔다.
너희는 먼저
성경: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영국의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1857경, 런던의 하이드팍 공원에서 였습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하여 한 사람씩 올아 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한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간신이 서 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뜨린 채로 뒤로 돌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뒤로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진정한 여왕은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주면서 사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폐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 라도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찬 훈장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폐하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과 내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는가?
오늘도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먼저 구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의 우선순위
우리는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큰 일과 작은 일,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정말로 중요한 일은 하찮게 여기고 중요하지도 않은 하찮은 일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정말로 나는 내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중요한 일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고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나의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구두로 돈을 엄청나게 벌은 브라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구두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 성공의 비결은 우선순위가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매사에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그리고 셋째는 구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우선순위
사랑의 대상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부부사랑이 최우선이다. 건강한 부부사랑이 있을 때 위에 계신 부모 공경과 태어난 자녀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장인 장모가 존경스럽고 아내 닮아 태어난 자녀들도 사랑스럽다. 또한 남편이 좋으면 시부모 공경이 저절로 되고 남편 닮아 태어난 자녀들이 사랑스럽다. 그렇지 못할 때 부부간의 사랑이 깨지고 만다. 부부사랑이 아름답게 꽃피는 집의 자녀들은 결혼을 사모한다.
부부애가 깨진 집의 자녀들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나 먼저 아내를 사랑하라. 시부모 공경은 신바람으로 이어진다. 남편에게 순복해 보라. 남편이 친정 부모를 돌보는 일도 즐겁게 여긴다. 그래서 부부사랑은 부모 공경보다 우선이고 자녀사랑보다 우선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줌과 같이 하고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하라(엡 5:22∼25).
나침반 없는 항해
오래 전 친구 여덟 명과 함께 배를 타고 포트 로더데일에서 바하마 군도로 향하면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배가 플로리다 해안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전파 방향 지시기가 고장이 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
우리는 멕시코 만류의 세기를 과소평가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북쪽까지 밀려가게 됐다. 일단 섬이 보이면 남으로 방향을 틀어 바하마의 수도인 나소(Nassau)로 향하기로 했었지만, 배가 북으로 너무 멀리 밀려간 나머지 섬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9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36시간이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배의 위치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 위에 떠 있으면서 나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우선,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는 곧장 항해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도에 항적을 그려 보면 지그재그 형태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고 속도를 낼 수 있게 돛을 조절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느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계획과 자기 사명서 없이 살아가는 것은 망망대해를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면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둬 다시 조정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긴다. 이 기준을 놓치지 말라.
김집사의 출세
섬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어린 소녀가 안해본 일 없이 다하며 피눈물나는 고생을 했다.
그리고 착한 남자 만나 삼남매를 두고 식당을 경영했다.
주일은 쉬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음식은 한정판매했다.
인간답게 여유를 갖고 살며, 종업원도 그렇게 살도록 해주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란 말씀으로 살았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이 1000여명 되는 교회에서 일류 대학과 모든 인격 갖춘 사람들과 경쟁에서 당당하게 초등학교 졸업한 김 집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참으로 감사해 눈물이 나왔다.
집에 돌아와 자기 방에 들어가 불끄고 이불 뒤집어쓰고 “하나님,섬 것이 예수 믿고 출세했습니다.
제가 오늘 여전도회 총회장이 되었습니다”며 흐느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대한 김 집사의 감격이다.
하나님의 일은 직위나 신앙연륜이나 배경으로 결코 할 수 없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고 맹수는 야성으로 생존하듯,그리스도인은 오직 감사와 감격의 영성으로 산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거의 모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다. 시간, 재화, 지식, 체력 등 우리는 유한한 것들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선 순위의 문제를 야기한다. 하고 싶은 것들은많은데, 해야할 것들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거나 재화 또는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우선적으로 한다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우리의 시간, 재화, 체력을 고갈시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곧 가치 없는 사소한 일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지금껏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에 대해 수많은 가르침들이 있었다.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먼저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성취할 경우 다른 모든 일을 쉽게 하거나 불필요하게 만드는 ‘단 한가지의 중요한 일(The One thing)’에 온전히 집중하라고 했다. 또한 세계적인 동기부여 강사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열 가지 중요한 일 리스트를 만들어 늘 품에 지니고 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이들의 말을 따라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던 적도 있었고 매주 열가지 목표 리스트를 종이에 적어서 주머니에 가지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 삶은 딱 한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특히 바쁜 직장 생활은 내가 딱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열 가지 목표 리스트를 가지고도 생활해 보았는데, 리스트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목표들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많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내게 큰 부담과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 다음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몇 가지에 집중해야 하는가?” 무슨 대답이 나올지 바로 예상되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삼의 법칙 대로 세 가지다.
우선순위를 세울 때 세 가지 기준
그런데 처음 내가 세 가지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할 때,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시점에서 내가 진짜하고 싶은일들이 당장에 해야하는 일의 베일 속에 가려지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회사에서 내가 추진하는 과제, 작가로서 쓰고있는 글, 두 아이의 육아를 위해서 해야하는 일 등등 이미 내가 하고있는 일 중에서 세 가지 우선순위를 잡았다. 이러한 일들은 당장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곧 완결 종료되기 일쑤였다. 나는 수시로 세 가지 우선순위 리스트를 재구성해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세 가지 우선순위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도 내 삶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순위를 세울 때 세 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첫번째 기준은 이틀 이상 충분히 고민되었는지의 여부다. 최소 이틀의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야, 현재의 바쁜 삶을 뛰어넘어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을 발굴해 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직장에서 내가 자주 경험했던 현상이었다. 만약 한두 시간 안에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 세가지를 발굴하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진행하고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 중에서 세 가지를 선택한다. 반면 그들에게 이틀이란 충분한 시간을 주면, 그들은 장기적으로 중요하지만 현재의 업무가 바빠서 소홀하고 있었던 일이나 본인이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것을 생각해낸다.
두번째 기준은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을 선정하는 것이다.『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브 코비 박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급한 일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으며, 긴급한 일을 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공하는 사람들,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과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세 가지 우선순위를 정할때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을 선정해야 한다. 그동안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평가를 받았다. 경험적으로 내가 확신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당장 중요하다는 일들 정말로 많이 했다. 회사 분위기상 나는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빠짐없이 처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연말 인사 고과 때가 되면 늘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이다. 당장 중요하다는 수많은 일들이 아닌 장기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상위 고과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누가 시키든 얼마나 급하든 결국 잡일은 잡일이다. 다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일들을 안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잡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편이다.그래야 남은 시간에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들, 결국 내 고과에 반영되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기준은 내가 도전하고 싶은 것을 선정하는 것이다. 철학자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산다고 말했다. 직장인이니까, 한 가정의 아비이니까 등의 이유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많이포기했던 것 같다. 포기하는 만큼 내가 가진 욕망의 총합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여긴 것 같다. 나는 회사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가족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여기며 오랫동안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리 기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는 없어도 한 두 가지 정도는 과감하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알 껍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보이지 않는 알은 매우 특이한데, 하나의 껍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껍질 속에 껍질이 있고 그 껍질 속에 또 다른 껍질이 있다. 최초의 껍질은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나는 양수막을 깨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위의 수많은 껍질들을 깨고 성장해 여기까지 왔다.
내게 도전이라는 것은 껍질을 깨는 것과 같다. 껍질을 깨야 새롭게 성장하듯, 도전을 해야 비로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는 세 가지 우선순위 리스트에는 가능한 내가 원하고 도전하고 싶은 것을 선정한다.
나는 세 가지 우선 순위를 정할 때 세 달 곧, 한 분기 동안 지속 가능한 일을 선정한다. 그 이유는 세 달이란 시간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롭게 교체되는데 걸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 달의 시간 동안 나 자신이 새롭게 변화되는 만큼, 나는 세 달이 지나면 우선순위 리스트를 새롭게 교체한다. 예를 들어 2021년 2분기 나의 세 가지 우선순위 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1. 왓이프 챌린지
2. 행복한 칼퇴 문화 만들기
3. 자녀들의 말에 “우와!”로 반응하기
왓이프 챌린지
왓이프 챌린지는 ‘만약 ~하면 어떨까?’라는 의미의 What if 질문을 자유롭게 던진 뒤 재미있겠다 싶은 질문에 무엇이든 도전하는 것이다. 왓이프 챌린지의 규칙은 딱 하나 있는데, 한 번에 단 하나에만 도전하는 것이고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21년 2분기 내가 도전한 왓이프 챌린지는 타자 속도 2배 만들기였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분당 2000타의 속도로 타이핑을 하는 우리나라 타이핑 속기 1등 ‘FishFast’의 영상을 보았다. 그 영상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고, 영상을 본 뒤, “나도 그렇게 글을 빨리 쓸 수 있다면, 작가 활동을 할 때나 회사에서 보고서를 쓸 때 매우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5월 11일부터 타자 속도 2배 만들기라는 왓이프 챌린지를 시작했다. 내 한글의 평균 타이핑 속도는 분당 350타 정도인데만약 내가 이 속도의 2배인 한글 700타 이상을 찍으면 이번 왓이프 챌린지가 성공이 되는 것이다.
나는 한글 타이핑을 연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한글 타자 속도를 측 정하기 위해서 'Taza'라는 무료 어플을 다운로드 받았다. 5/11부터 30~40 분 정도 시간을 내어 이 어플이 제공하는 정규 연습 프로그램 (자리연습, 단어연습, 짧은글연습, 긴글연습)을 따라 연습했다. 그리고 어플에 들어 있는 장문 타자 연습을 통해 측정된 평균 속도를 매일 모니터링 했다.
첫 10일 동안 짬짬이 타자 연습을 꾸준히 해온 덕에 하루마다 평균 10 타 정도의 속도가 붙었다. 그래서 한글의 경우 최고 470타까지 실력이 향상되었다. 그런데 현재의 방법을 고수해서는 절대로 분당 500타 속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심지어 컨디션이 좋을 때여도 짧은 글과 긴 글을 통틀어 500타 이상의 기록을 달성할 수 없었다. 나는 구글에서 ‘타자 빠르게 치기’ 관련 검색되는 모든 글들을 찾아 읽었고, 이를 통해 타자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비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두 가지 비법을 찾았다. 첫번째 비법은 타자를 칠 때, 음절을 단위로 순식간에 타자를 입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그대’ 를 친다고 했을 때, ‘사 라 ㅇ 하 느 ㄴ 그대’로 각 자음과 모음을 하나의 단위로 연결해서 치는 것이 아니라 ‘사- 랑-하-는-그-대’로 음절 단위로 연결해서 빠르게 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음절마다 정확한 타자의 위치가 머릿 속에 숙지되어 있어야 했고, 이것이 내 손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도록 꾸준히 손가락 연습을 해야 했다. 두번째 비법은 단어 사이를 연결하는 스페이스가 나올 때 이를 빠르게 치는 것이다. 유튜버 ‘FishFast’뿐만 아니라 많은 블로거들의 말에 따르면 스페이스 바 입력 속도가 타자 속도 향상 과정에서 가장 큰 병목 현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기존에 단어와 단어 사이의 스페이스를 별도의 문자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이제 앞 단어와 스페이스를 하나의 단어로 인식하여 타자를 치는 연습을 했다. 즉, ‘사랑하는 그대’를 칠 때, ‘사랑하는’ 치고 ‘스페이스’ 치고 ‘그대’를 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_’을 치고 바로 ‘그대’ 를 치는 것이다. 이틀 동안 나는 이 두가지 비법을 중점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5월 22일, 처음으로 한글 500타를 돌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 비법을 꾸준하게 적용하고 연습해서 매일 안정적으로 한글 500타 이상의 속도로 타이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글 500타를 기록한 뒤 일주일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600 타라는 벽을 깨기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타이핑 속도를 저하시키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이를 제거 하는 방향으로 훈련을 했다. 나는 장문의 글을 타이핑하면서 반복적으로 실수하거나 빨리 쳐지지 않는 것들을 점검 했다. 내가 발견한 가장 큰 딜레이 요인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이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가지고 0, 게, 계, [, ], “, ” 와 같은 문자를 쓸 때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 문자들 중에서 특히 ‘게’는 정말로 많이 쓰게 되는 문자이다. 기본 자리에서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게’를 치려고 하면 내 새끼손가락이 짧아 오른손을 약간 위쪽으로 비틀어야 했다. ‘게’를 친 다음에 바로 기본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잦은 실수와 딜레이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짧은 새끼손가락’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약지로 새끼손가락을 대신해보았다. 내 약지는 충분히 길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으로 치게 되는 모든 문자를 기본 자리 이탈 없이 칠 수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엄지, 검지, 중지, 약지만을 가지고 문자를 입력하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는 오른쪽 shift 키와 ?, / 문자만을 입력하는 결정을 했다. 첫 하루 동안은 좀 어색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기본자리 이탈 없이 문자를 입력하게 되어 전보다 더 편한느낌을받았다. 이틀 동안 열심히 이렇게 연습한 덕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서 처음으로 600타 기록을 넘겼다. 또한 매일 같이 550타 이상의 속도로 편하게 타이핑을 하는 것이 가능해질 정도로 타이핑 실력이 향상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연습했고 오랫동안 타이핑을 해도 피로감 없이 타이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습을 하면 할수록 오타 발생률이 점차 낮아졌고 나는 매일 600타 이상의 속도로 타이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조금씩 조금씩 타자 속도가 향상되었고 결국 챌린지시작 52일 만에(5/11일~7/2일) 처음으로 700타를 넘겼다. 이후 며칠 더 안 정적으로 700타 달성 여부를 확인한 뒤, 7/6일 “분당 700타 속도로 타이핑하기” 챌린지를 완수했다.
행복한 칼퇴 문화 만들기
2021년 1분기, 나는 회사에서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다. 메모리 신제품의 수율 목표를 달성한다는 일념으로 온 부서 사람들은 평균일 일근무시간에 두 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더 일을 했다. 나와 내 부서원들은 매일 저녁 8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가면 나는 마치 기름이 바닥난 자동차처럼 기진맥진한 채 침대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힘이 전혀 없었다. 나는 매일 같이 일어나 늦지않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 씻고 나서 바로 잠자고, 또 일찍 일어나고 다시 출근하는 반복적인 삶을 살았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중에는 아이 둘, 또는 셋을 키우면서도 일이 많기 때문에 나보다도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그리고 리더인 내가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눈치를 보며 늦게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팀원들에게 “직장 생활에서 행복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한 분이 이렇게 답을 했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칼퇴하는거죠!” 나는 이 대답을 기억해냈고 2분기 우선순위 목표로 행복한 칼퇴 문화 만들기를 정했다. 적어도 내 부서 안에서 말이다.
나는 나와 팀원들이 일찍 퇴근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 이유를 제거한다면 행복한 칼퇴가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많은 업무량이었다. 물론 상부에서 수명받은 업무는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부서의 R&R(Role and Responsibility, 역할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아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우리 부서가 떠맡고 있거나 다른 팀에 빨리 위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우리팀은 당시 추진되고 있는 모든 과제를 리스트업하였고 그 과제를 추진함에 있어 우리 부서의 R&R을명확하게 정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더 나아가 과제를 협업하는 유관부서의 R&R 또한 명확하게 정의한 뒤 우리가 해야할 업무와 그들이 해야할 업무, 그리고 다같이 협업해야 할 업무를 구분하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아침회의를 진행하는데 과제별 R&R이 정리될 때마다 공유하는 식으로 내부 교육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팀원들이 신속하게 유관 부서에 업무를 위임하기 시작했고 꼭 해야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최소한 우리부서의 업무량이 최소한 현재보다 더 많아지는 것은 방지할 수 있었다.
칼퇴를 막는 두번째 이유는 문서작업이었다. 나는 내 팀원들이 집에 가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를 관찰해 보았다. 거의 대부분 그들은 회의 자료를 작성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회의 자료 작성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있을지 고민했다. 고민 끝에 회의자료 마스터 템플릿을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와 팀원들은 주요 과제별 회의 때마다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표 양식을 만들었다. 이제 팀원들은 업무를 추진하면서 새롭게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 양식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과제별 자료 업데이트 담당자를 선정 했고 각 담당자가 매주 회의 하루 전, 주간 보고 하루 전까지 업데이트 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대표 양식을 활용해서 업무를 추진하니 팀원들은 문서 작성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PPT를 만들고 다듬고 고치는 긴 시간을 아껴 본인의 주요 실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늦게까지 남아서 자료를 작성해야 할 필요와 명분이 사라지니 (내 경우는 각 자료 취합 및 보고 준비로 주 2회 정도 늦게까지 일을 하긴 해야했다), 서서히 야근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칼퇴를 막는 세 번째 이유는 오래 일하면 일을 더 잘한다는 착각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사람들이 일을 오래하면 더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오래하면서 성과를 잘낸다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일을 오래 하는사람이 성과를 잘 내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하는 사람이 성과를 잘 낸다.” 나는 내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수명 업무들이 갑자기 생겨서 도전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가능한 저녁 6시 안으로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칼퇴에 도전해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6시를 넘긴다면 이것은 제가 일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한 그날부터 나는 진짜 6시 전에 칼퇴근을 했다. 이를 위해서 일과 시간에 정말로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해서 일을 했다. 이후 아침 회의 시간에 팀원들과 차 한잔 하면서 “저 오늘 5시30분까지 집중해 보겠습니다!”와 같은 우스갯소리들이 오갔고 각자 내뱉은 말들을 지키고자 진짜 집중해서 일을 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칼퇴를 시전했다. 팀원들이 칼퇴를 해도 내 부서는 개선 활동을 차질 없이 잘 운영했고 성과 또한 잘 나왔다. 그렇게 내 부서 안에 행복한 칼퇴 문화가 실행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연달아 임원 수명 핵심 과제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행복한 칼퇴 문화’를 한 달 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한달 동안 팀원들과 나는 참 여유롭고 균형 있게 회사생활을 했다.
자녀들의 말에 “우와” 하고 반응하기
2021년 5월 19일 방송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는 가수 씨엘의 아버지이자 물리학 교수인 이기진 교수가 출연했다. 방송에서 이기진 교수는 딸 씨엘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자퇴를 선언했던 일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학업과 연습생 생활을 병행하며 새벽 3~4시에 자는 생활을 했던 씨엘은 강변북로를 운전하고 있던 아빠에 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학교 그만두고 싶어!” 그러자 이기진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그 결정을 하려고 얼마나 오래 고민했겠냐? 좋아, 하고 싶은 대로 해!” 방송에서 인터뷰 영상으로 등장한 씨엘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절대로 ‘노’ 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도 아빠는 ‘안 돼!’라고 이야기하시지 않았어요.”
이 방송을 시청하면서 나는 두 자녀의 아빠로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알게 모르게 자녀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답하곤 했다.
“아빠, 이거 하고 있거든!”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줄래?” (그러고는 자주 까먹었다)
“안돼! 그거 위험한 것 같아!”
“아빠가 볼 때 좋지 않은 것 같아!”
“그것 이미 해봤잖아. 그때는 하기 싫어했잖아?”
나는 그동안 내 기준의 근거를 대며 자녀들의 많은 생각과 말을 자르고 거절했다. 나는 자녀들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이기진 교수의 양육법과 같이 자녀들의 말에 최대한 “우와!” 하며 긍정적으로 반응해보기로 했다. 내 기준에서 불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일단 자녀들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우와!”
“그렇구나!”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멋진 생각을 했니?”
“좋아! 너 말대로 해보자!”
2021년 5월부터 6월까지 60일 동안 “우와!” 하고 반응해보았다. 그 과정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크게 세 가지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아이들이 그만 해야하는데 더 하겠다고 떼를 쓸 때였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충분히 놀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안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기 시작할 때, 예전 같았으면 아이들을 혼내고 강제로 집에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 정말 많이 놀고 싶었구나! 그래, 10분만 더 놀다가 집에 가자!” 이렇게 반응해보았다. 나는 TV 육아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면 지킬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들었고 아이들에게 “너희들 몇 번 더 놀고 싶니? 두 번, 세 번, 네 번?” 이렇게 묻는 노하우까지 생겼다.
또 다른 예로, 첫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문제는 벽지나 가구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여러번 주의를 주고 혼을 냈지만 그래도 딸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 없이 내 책상에 물감칠을 했고 나는 이렇게 반응해보았다. “와우! 아빠 책상이 예술 작품이 되었구나! 예서야, 그림 정말 잘 그리네. 그런데 예서야, 아빠는 예서가 아빠 공책에 그림 그려주면 더 좋을 것 같아! 여기 아빠 공책들 있으니까 마음껏 그려줘!” 실제로 딸은 아빠 공책에 낙서를 했고 아빠 책상이나 아빠 책에 낙서하는 것을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은 또 다시 벽지에 그녀의 작품을 남겼다. 화가 났지만 화를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와, 멋진데. 예서 작품이 도화지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멋지다. 예서야, 아빠가 아예 벽에 커다란 보드를 붙여줄까? 마음껏 벽에 그림 그리게 말이야” 딸은 답했다. “응,좋아!” 일주일 뒤 딸의 키보다 훨씬 더 큰 화이트 보드가 도착했고 딸은 마음껏 보드에 낙서를 했다. 그 이후 딸은 더 이상 벽지에 낙서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고비는 해야 하는데 안 하겠다고 떼를 쓸 때였다. 처음에는 “응,그렇구나! 안하고 싶구나! 근데 안하면안되는데...”와 같은 식으로 반응했다. 화만 내지 않았지,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자기 전 칫솔을 계속 거부하는 아이에게 “응, 그래! 지금 안하고 싶지만 치카치카 안 하면 이빨 다 썩어서 치과 가야 할 걸? 그럼 엄청 아플 텐데... 아우 아프겠다!” 이렇게 나는 반응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와!”로 반응하기의 취지(긍정적인 반응)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쉽지 않지만 기다려주는 전략을 택했다. “예서와 예준이가 치카치카 정말 잘하는데 지금은 하고 싶지 않나보네. 자기 전에 준비되면 이야기해줘!” 나는 이렇게 말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들은 양치하고 싶다고 했다(매일 양치하기 때문에 양치하지 않으면 불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밥 먹을 시간이 다 되어도 안 먹고 버티고 있을 때 나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오케이, 알았어. 우리는 지금 밥 먹을거고, 예서 밥은 여기 준비해 두었어. 예서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을 때 먹어.” 결국 아이들은 배고파지니 밥을 먹었고, 아내와 나는 스트레스 받 지 않아서 좋았다(물론 유치원 버스를 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 준비하 는 것과 같이 딜레이를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은 예외였다).
세 번째 고비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방해 받았을 때였다. 평일 저녁 퇴근 후에는 직장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고자 잠시 내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좀 보내는 편이다. 그런데 내 두 아이들은 어떻게든 내 방에 들어와 놀아달라고 떼를 쓴다. “아빠 지금 좀 힘들어! 아빠 혼자 있고 싶어! 아빠 좀 예민하거든!” 이렇게 말해도 아이들은 듣지를 않고 계속 방해를 한다. 그러다 결국 내가 못 참고 화를 내며 아이들은 펑펑 우는 경우가 많았다. “우와!” 하고 반응하기를 하면서 나는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화를 내지 않고 잘 말할지 많이 고민했다. 내가 찾은 답은 “예서와 예준이가 아빠 많이 보고 싶었구나! 아빠가 지금 좀 혼자서 쉬어야 하는데 20분 동안 혼자 방에 있을게! 알람 소리가 들리면 방에 들어와줘! 같이 놀자!”였다. 나는 약속대로 알람을 맞추었고,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방해하지 않고 내 시간을 존중해 주었다. 나는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최대한 기분 전환을 하며 휴식할 수 있었다.
2개월 동안 자녀들에 “우와” 반응하면서, 나는 여러가지 배운 점들이 많았다. 첫째는 아이들이 표현력은 좀 부족하지만 나와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나와 같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싶고, 생각한 것을 존중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는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비로소 아이들 내면에 있는 긍정적인 동기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아이들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동기만을 보게 된다. 세 번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내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행복했다.
세 가지 우선순위는 마음의 평안을 준다
‘신뢰’라는 의미의 단어 Trust는 ‘평안’을 뜻하는 독일어 Trost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신뢰가 깨지면 마음의 평안도 깨진다. 이에 대해서는 국제 정치 뉴스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데, 양국가간 신뢰가 깨지는 경우 필연 잘 유지되어 온 평화도 깨져버린다.
세 가지 우선순위를 정할 때 중요한 것은 “내게 장기적으로 중요한 이 세 가지가 내 삶을 변화시켜준다”고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도전해나갈 때, 우리는 아무리 많은 일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인생에는 늘 등장하는 세 가지가 있다. 변화, 선택 그리고 원칙이다.
-스티븐코비-
아이작 유
<셋으로 된 모든 것은 완벽하다> 중에서
리더십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세계 정상의 인기 강사이면서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출가한 딸과의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딸은 출가해서 세 번째 아이를 낳아 기르는 중이었습니다.
딸이 어느 날 아버지 코비 박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저는 너무 너무 속상해요. 제가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도 아시지요? 그렇지만 이 아이는 제 모든 시간을 빼앗고 있어요. 저는 이 아이 때문에 아무 것도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답니다."
이때 아버지 코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딸아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려무나. 편안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그냥 즐겨.
아무도 너 만큼은 이 아이를 사랑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겠지."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 사람은 경영에 아주 탁월한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도자답지 않은 충고를 딸에게 이렇게 합니다.
"딸아, 시간 관리, 이런 것 다 잊어버려. 달력, 보지도 마라. 다만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 그리고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저 시계에는 얽매이지 말아라"
네 내면에 있는 나침반을 따르고 저 벽에 있는 시계는 보지도 말아라.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지만,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그러니까 코비 박사는 그의 딸에게 시간 관리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 그것은 인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매우 바쁘게 서둘러 하는 일들, 그러나 그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 대부분의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의미 있는 인생은 시간을 따라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우선 순위에 따르는 인생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가치 있는 인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인생은 바로 하나님께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인생이 이러한 우선 순위의 삶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 순위를 따라가는 삶을 살려면, 첫째로 중요한 것은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짤막한 본문에서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염려하지 말라, 염려를 그치라, 염려를 중단하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주 실제적인 이유인데, 염려한다고 해서 염려하는 문제가 전혀 해결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아주 파괴적인 것입니다. 염려는 전혀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2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한다고 키가 자라날 수 있느냐? 물론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열심히 자라날 겁니다. 그러나 우리 성인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염려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염려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염려는 전혀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본래 '염려'라는 단어는 희랍어에서 '나눈다'는 뜻과 '마음'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라는 이 단어가 쓰여졌을 때 주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게 되면 중요한 한 가지 결과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다 보면 어떤 일도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염려하다 보면 그 염려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런 인생은 생산적인 어떤 성취를 기대할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상황 속에 처했던 한 여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시지 않았습니까? 마리아는 너무 너무 기뻐하고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는데 마르다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할까? 그래서 밖에 나가서 이 일, 저 일을 합니다. 그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니, 나는 이렇게 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나? 마리아가 나를 왜 안 도와주나?" 생각하니까 화가 나고, 또 화가 나다 보니까 마음들이 마구 나누어지기 시작을 합니다. 전전긍긍하고 당황하고 있었던 마르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니 …" 여기에서 염려한다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의 염려한다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니, 즉 마음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밖에서 봉사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엔조이하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 저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어느 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열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네가 많은 일로 네 마음이 염려하고 근심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절에 보면 "네가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 가지도 족하다.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라." 그렇습니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염려 그 자체는 우리 인생에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먹는 일에
대한 필요, 입는 일에 대한 필요, 또 어디에서 사느냐, 의식주의 동일한 필요를 안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관해서 불신자들이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일한 염려의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 다음 절입니다. 3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살까, 부단히 의식주의 필요, 직장의 필요, 사업의 필요 등의 문제를 가지고 그들도 계속해서
염려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도 똑같이 염려하고 있다.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불신자와 꼭 마찬가지고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너희들이 이방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다른 것이 뭐가 있느냐? 신앙의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이 우리의 삶 속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차이를 가져 올 수가 없다면, 우리의 삶 속에 전혀 어떤 변화와 우리의 삶에
역동성과 어떤 희망을 줄 수가 전혀 없다면, 왜 믿으십니까?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왜 시간을 바치십니까? 이것은 분명히
시간 낭비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입니다. 뭔가 좀 달라야 할 것이 아니냐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도전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을 하는 이런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염려하십니까? 아직도 걱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예수 없이, 복음이 없이,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말입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무엇인가 좀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달라지십시다. 우선 염려를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염려를 그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염려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염려가 어떻게 극복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인생의 우선 순위를 어떻게 추구할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 중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염려 그 자체를 중단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인생의 우선 순위를 추구하려면 하나님을 견고하게 신뢰하셔야 합니다. 왜 염려하고 있습니까? 왜 염려할까요?
"이거 어떻게 되지? 이러다가 내 인생은 어떻게 되지? 내 직장은 어떻게 되지? 내 사업은 또 어떻게 되지?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여러분, 그러나 이러한 모든 염려의 밑바탕에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까? "하나님, 내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전능자이시며,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믿으십니까?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구요? 본문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더냐?"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만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가꾸시는 하나님,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에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선택된 나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을 믿느냐?' 이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나 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시는 안타까움을 주님께서 지적하시지 않습니까?
3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주님은 주님을 따라오는 제자들이 당신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래서 염려하고, 그래서 방황하고, 그래서 걱정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을
신뢰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베드로의 성격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아주 염려가 많습니다. 아주 격정적인 사나이이기 때문에 감정적입니다. 오늘은 그냥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다가도 그 다음 날에는 죽고 싶다고 인생을 비관합니다. 물 위를 걸으라고 하니까 물 위를 걷다가 이상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나 죽습니다'하고 허우적대던 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 중에 누군가가 나를 판다고 하셨을 때에 제일 걱정하는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누가 팝니까?" 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면서 그의 삶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성숙되어가면서 아마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중요성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그는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라. 주가 돌보신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에 나는 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찾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부지런히 영양을 찾고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아무 것도
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조용히 우리의 삶의 현장에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열어 주실 것입니다. 내 삶의 길을 여시고, 홍해 바다에 그 강을 마르게 하시고 나갈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만 염려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기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자주 했던 이야기 가운데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 보고 "야, 저 사람들 봐, 저 인간들…. 그냥 먹고 살려고 허둥대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고민하고 저
인생들을 보라." 그러니까 참새가 물새 보고 하는 이야기가 "맞아 맞어. 쟤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없는 모양이야."
그런 대화의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십니까? 믿음의 눈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십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십니까? 그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십시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일어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제 먼저 구할 것을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 순위를 분명히 확립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의 삶의 승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승리가 소극적으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거은 염려입니다. 염려를 하지 말아라. 염려를
묶어 두어라.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먼저 구할 것, 너희는 먼저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주께서 다스려 주시는 삶.
여러분, 염려할 일이 생겼을 때에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염려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고 계시는가? 그래서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내 인생의 진정한 우선 순위를 두면서 살고 있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가 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때에 제일 염려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그 일 자체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염려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인들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염려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염려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염려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염려하는 그 문제, 그 상황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맙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가 주인일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삶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그 염려가 끝이 없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염려는 무저갱이다." 성경에 보면 무저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저갱, 끝이 없다. 바닥이 없다. 염려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끝이 없는 염려 속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염려하다 보면 내일까지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 염려하다 보면 모레까지 염려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끌어다가 오늘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구절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34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염려하기 시작하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미리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까지 염려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십시오.
그대로 그냥 놔두십시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하십시오. 오늘의 우선 순위, 오늘 내가 집중해야 할 것, 정말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내 인생의 우선 순위가 그려져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염려가 극복이 됩니다. 정말
그럴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걱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난관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해야 될 일,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오늘 이 순간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업가였던 록펠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 사람이 33세가 되었을 때 최초로 백만불의 순이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43세에 미국에서 제일 큰 회사를 갖게 됩니다. 53세에 아마도 이 사람은 그 당시에 세계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억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는 아직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3세가 되었을 때 그는 성공한 사람, 부요한 사람이 되고도 아직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록펠러는 탈모증과 녹두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다 빠지는 겁니다. 눈썹도 빠지고, 몸이 초췌하게 말라 가는 그런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한 주에 백만불, 어떤 때는
하루에 백만불을 벌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이 먹는 식사는 밀크와 크랙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나
많은 사업의 경쟁자들과 이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든지 늘 주야로 보디가드를 동원하고 다니면서도 마음속에 안심이
안됩니다. 먹지도 못합니다. 어디를 마음 놓고 가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잠도 못 잡니다. 그리고 병은 점점 악화됩니다.
드디어 의사의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1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이 진단을 받던 날 밤, 록펠러는 깊은 고뇌 속에
빠졌습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입니다. 내가 죽으면 ….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때 아내가 그를 향해서 드러누워서
독백처럼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돈은 전부가 아니야."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돼!" "God is everything"
그는 고민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서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도 이 사람이 교회에는 왔다갔다했지만, 이제 그는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어서 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뉴욕에 가면 리버사이드 처치라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돈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과 소중한 일들을 위해서 쓰여지도록 록펠러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 결단을 내린 다음에
그가 잘 자기 시작합니다. 잘 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54세를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을 받았던 록펠러가 몇 살을 산지 아십니까? 98세를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에 우선 순위가 조정되자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유명한 크리스챤 부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합니다. 하이더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업하다가 부도를 맞습니다. 그리고 빚을 갖게 됩니다. 당시에 십만불의 빚은 적지 않은 빚이었습니다.
이 빚더미에 있을 때 그는 이 빚더미 속에서 고민하면서 이 사람도 자기 신앙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서의
고난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이더가 제일 먼저 결단한 것이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보자. 교회 생활도 제대로 하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도 합니다. 제대로 십일조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파산 나고 부도 나서 십일조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데리고 있었던 회사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람을 비판하기 시작을 했다고 합니다. "아니 빚더미에 앉아있으면서 이제 도대체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그것이 정당한
십일조입니까? 이건 진정한 헌금이 아니야."
그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도 진정한 헌금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드리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나의 첫 번째 채권자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 먼저 빚을 갚아야 하네"
자기의 삶이 혼란해 지고 무너져 가는 삶의 와중에서 그는 하나님은 나의 첫 번째 채권자이시다. 나는 먼저 그분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하네.
IMF를 당하면서 시작되었던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아직도 이 땅을 휩쓸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구조조정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전능하신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금년 안에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십시오.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신앙, 이 생활로는 주 앞에
드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좀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삶의 방향이 바로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모든 것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막(聖幕) 성인 성, 장막 막
성전(聖殿) 성인 성, 전각 전
예수(Jesus) 그리스도(Kristos)를 주(主)로 고백(告白)하고 따르는 신자(信者)들의 공동체(共同體). 또는 그 장소(場所).
예수(Jesus) 그리스도(Kristos)를 주(主)로 고백(告白)하고 따르는 신자(信者)들의 공동체(共同體). 또는 그 장소(場所).
성전에 대한 이해
1. 어원(語原)
[히] lk;yhe (heka:l) [그] iJJerovn(hieron) naov" (naos) [영] Temple
구약에서 '성전'(聖殿)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히브리어 명사 '헤-칼-'( lk;yhe, heka:l)인데, 이 말은 원래는 '굉장한 집'을 뜻하는 슈메르어 '에갈'(EGAL)에서 유래한 것으로, '궁전'(宮殿)을 의미하여 '성전'(聖殿,사6:1)또는 '전(殿,왕상7:21;대하3:7)으로 번역하고 있다.
신약에서 '히에론'(iJJerovn, hieron)는 성전 자체뿐 아니라 경내(境內)도 포함하고, '나오스' (naov", naos)는 성전 자체 및 그 중심인 성소(聖所)를 가리키고 있다.
2. 정의(定義)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3. 기본개념(基本槪念)
1) 구약시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성전의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님의 주거’(거처)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장소적 제약을 넘은 영적 존재로 생각되기에 이르러,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적 임재의 상징으로 되었다. 성전은 ‘여호와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48:35)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이 구현되는 장소이고, 하늘과 땅이 접하는 곳, 즉 야곱이 말하는 ‘하늘의 문’이었다(창28:17).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국민생활,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다.
2) 신약시대
구약시대의 성전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제사를 위한 직제는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단번에 완전히 성취하였으므로 유형적 성전은 없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거룩한 성전이며(요2:21) 하늘나라의 원형이다. 또한 예수님의 은혜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도들이다(요2:21;고전3:16).
4. 구약 시대의 성전
1) 성소(聖所, holy place)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현존을 계시하고 그의 백성이 예배하는 장소(출15:17,25:8;히9:1,12). 성전 및 그 이전의 형태인 성막 혹은 그중 일부를 가리킨다.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에 ‘성소’가 세워졌다(창28:18-22). 또 언약궤가 두어진 땅이 ‘성소’로 되었는데 세겜이 그 최초다. 솔로몬시대 이후 예루살렘이 ‘성소’로 되었다
2) 장막(帳幕, tent)
출애굽 광야시절에 하나님은 장막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장막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함을 받았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3) 예루살렘 성전
성경에서 성전은 거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세 성전이 있었다. 제1성전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 제2성전 '스룹바벨의 성전'(Zerubbable's Temple), 제3성전 '헤롯의 성전'(Herod's Temple)이다.
(1) 솔로몬 성전(Solomon's Temple).
'솔로몬의 성전'은 먼저 다윗이 건설을 하고자 했는데(삼하7장;왕상5:3-5,8:17;대상22:14), 하나님께서 다윗은 전쟁을 통하여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으로 허락치 않아, 솔로몬에 의해 세워졌다. 솔로몬 왕 5년(주전 959년)에 예루살렘의 모리아산(구릉) 위에서 성전 건축에 착공, 7년의 세월을 거쳐, 제11년에 준공을 보았다(왕상6:37,38, 952년 완성).
성전은 장방형의 구조로서, 현관, 성소, 지성소의 3부로 이룩되고, 넓이 10.5m, 길이 31.5m, 높이 15.8m로, 그 앞에 낭실이 있었다(왕상6:3,7:19, 21). 제1성전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함께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왕하25:13-17;렘52:13,17-23).
(2) 스룹바벨의 성전(Zerubbabel's Temple)
바사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할 때,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의 파괴된 성전 재축을 허락해 주었다(주전 538). 이 때 스룹바벨의 지휘 하에 재건된 성전으로 주전 515년 완성되었다. 제1성전에 비하면 규모가 적었으나 팔레스티나 및 디아스포라에 있어서의 전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이 되었다.
주전 169년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해 약탈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의해, 주전 63, 62년 지성소까지 유린되었다.
(3) 헤롯성전(Herod's Temple)
헤롯성전은 헤롯의 치세의 제 17, 또는 18년경 시작하여 1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솔로몬 성전의 복원으로서 성전 뜰의 넓이를 솔로몬시대의 2배로 확장했다.
헤롯시대 후는, 성전의 거의 외국 지배하에 놓여졌다. 로마군은 열심당(셀롯당)의 거점으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 70년 성전을 불살라 버렸다.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는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에 의해 로마식의 신전이 건설되고, 아라비아 시대(기원 7세기)이래, 이슬람의 사원인 '암석의 돔'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에스겔의 성전(Ezekiel's Temple).
겔 40-48장에는, 선지자 에스겔의 이상적인 성전의 청사진과 거기에 있어서의 제의가 그려져 있다. 오랫동안 성전을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평안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과, 그것에 따르는 제의적 행사를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극히 필요했을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5. 신약 시대의 성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 터로 변질돼 갔다(요2:14-16).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리키는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다(마24:1,2;막13:1,2;눅21:5,6).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는 말씀은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헐겠다는 것이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1) 성도의 몸으로 성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전6:19).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행17:24).
2)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계21:3).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6. 성전(聖殿)과 교회(敎會)의 차이
1) 성전은 손으로 지은 것이나(막14:58;마26:61),
교회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다(막14:58;요2:21).
2)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나(요2:20),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1:23;고전12:12;골1:24;마16:18).
3) 성전은 성도 개개인의 몸인 하나님의 처소를 말하나(고전3:16;고후6:16),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수여받은 성도의 유기체인 공동체이다(고전12:27;엡4:25,5:30).
7.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 예배당(禮拜堂)
교회(敎會, church) 성전인 성도들의 모임으로(마16:18;엡1:23),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성령에 의해 결합된 공동체를 일컫는 명칭이다(엡5:23). 구약에는 ‘집회’(총회,신9:10,18:16), ‘회중’(왕상8:14,65;대하1:5,7:8)으로 종교적 회중을 가리키고 있다. 신약에 있어서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원어 ‘에클레-시아’(마16:18,18:17)는 시민의 공적 목적으로 모이는 집회를 가리키고, ‘모임’으로도 번역되어 있다(행19:32,41).
신약 서신서의 서두에는 '교회'(갈1:2)라는 표현과 '성도들'(엡1:1;빌1:1;골1:2)이라는 표현을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며 전도하며 기타 주의 일을 할 때 그 성도들이 교회가 된다.
따라서 건물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교회당'이라 하면 참 성도 만의 모이는 건물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참 성도만이 예배하는 건물이 아니니 '예배당'이란 표현이 성경적이다.
8. 성전에 관련된 관용어(慣用語)
1) 성전 건축 : 고대 족장시대에는 단을 쌓았으며(삿6:24,기드온), 그 이후 성막이나 성전은 유형적인 성전이다.
2) 성전고 :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마27:6).
3) 성전 꼭대기 :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던 곳(마4:5;눅4:9).
4) 성전 맡은 자 : 성전 경호의 레위인의 한 대장(행5:24,26,4:1).
5) 성전 봉사자(temple servants) : 성전에서 궂은 일을 맡은 사람(스2:70,8;20;느10:28).
6) 성전세(聖殿稅, temple tax) : 성전 유지를 위해서 또는 건축을 할 때는 주로 자원하는 특별 헌금이나 헌물로 성전세는 성전을 위한 속전으로 20살 이상 된 성인 남자가 반 세겔을 드리도록 제정되었으며(출30:11-16), 거둬들인 성전세의 세목과 또 그 성전세가 성막 건축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출38;24-31;왕하22:4;느10:32).
7)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 시편120-13편의 제목. 년 3회 순례자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부른 노래로 여겨진다.
8) 성전의 일을 하는 이 : 성직의 생활 보증의 원칙(민18:18,19,31;신18:1-3)에 준하여, 전도자의 생활 권리의 정당성을 주장한데 인용하고 있다(고전9:13).
9) 하나님의 성전 :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 '거룩한 장소' 즉 '성소'(sanctuary)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른 것처럼(요 2:19-21),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6:19)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다. 바울은 '에이미(be) 동사의 복수형 '에스테'(너희는...이다)를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나오스 데우)은 단수형을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보았다.
성전건축 (학개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감동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흥분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는 “흥분”이라는 단어가 딱 한번 나옵니다. 학개 1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학 1:14). 표준새번역개정판에서는 “흥분”이 “감동”이란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흥분, 즉 감동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면, 성전건축에 흥분합니다. 제자들도 성령에 감동되자, 각 처로 나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전건축은 감동입니다. 성전건축은 거룩한 흥분이고,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운행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역사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의 영광과 방법에 대해 알아봄으로, 우리 모두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됩시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성전건축은 기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회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기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 복을 누릴 기회입니다. 아무나 이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건축의 기회를 잡으려고 해도 못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창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성전건축은 단 3번뿐입니다. 그것은 모세 때의 성막 건축, 솔로몬 왕 때의 성전 건축, 포로 귀환 이후 학개 선지자 때의 성전 재건축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누리지 못한 영광이 성전건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잡지 못했던 기회가 성전건축입니다. 이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에게도 성전건축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할 사람을 특별히 따로 택하십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해서 부르셨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도 하나님은 솔로몬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대상 28:10).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십니다(학 1:8). 하나님의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듭시다.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됩시다.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세우면 하나님께서 나를 세워주십니다.
둘째, 땀 흘려 참여하자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입니다(출 25:8).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역사입니다(대하 2:4). 하나님을 위한 일을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땀을 원하십니다(학 1:8). 하나님은 우리가 산에 올라가는 수고를 원하시고, 나무를 가져오는 헌신과 조심스럽게 나무를 다듬는 정성을 원하십니다. 또한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길 원하십니다(출 35:5).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시거나 가난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금도 하나님의 것이요, 은도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학 2:8).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우리의 땀과 기도와 물질을 드립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니 아깝지 않습니다. 성경은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책임지시니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내 모든 것을 드려 성전건축에 참여합시다.
셋째, 합심하여 건축하자
하나님은 학개 1장 8절에서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성전건축에 참여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학 1:14). 하나님으로 인해 총독의 마음도, 대제사장의 마음도, 남자의 마음도, 여자의 마음도, 어른의 마음도, 어린이의 마음도 흥분되었습니다. 그 결과,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이 재개되었습니다. 다시 시작한지 4년 만에 성전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되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합심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합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도 합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건축할 때 금과 은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실, 염소털, 가죽, 조각목, 등불, 관유도 드렸습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얼마나 많이 참여했는지, 나중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 성경은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 36:7)고 말씀합니다. 합심이 힘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안에서 합심합시다. 성전건축으로 합심합시다. 우리가 하나 되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넷째,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사 43:21; 골 1:16). 우리가 하나님 위해 살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됩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 1:8)고 말씀합니다. 성전을 세운다는 것은 그냥 건물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것들은 안개처럼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만은 영원합니다. 우리 모두 가장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 만방에 드러냅시다.
다섯째, 하나님의 상을 받는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존귀케 되었고, 대적으로부터 평안하게 되었고, 가문을 세울 수 있었고, 하나님과 자손대대로 부자 관계를 맺었고, 집과 나라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뭔가 큰 업적을 세워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성전건축을 소원했을 뿐입니다. 성전을 지은 것도 아니고, 소원만 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상을 주셨습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께 상 받는 지름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특권을 누립니다(학 2:7).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하고, 평강이 넘칩니다(학 2:9; 고후 3:17,18). 또한 물질의 상을 넘치게 받습니다. 학개 당시, 성전건축을 한 시기는 가장 바쁜 농번기였습니다. 추수와 파종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달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성전건축을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손의 자손에게 복이 임하는 상을 받습니다. 솔로몬과 유다 가문이 복을 받은 이유는 다윗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건축을 소원한 다윗에게 자손에게 임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2-14).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 성전건축에 동참하여 자손과 가문에 하나님의 복을 유산으로 물려줍시다.
우리 모두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됩시다.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성전을 세울 때, 우리 인생이 세워집니다. 성전이 올라갈 때, 우리 신앙이 올라갑니다.
성전을 건축하라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개 1:1-11)가나안 성도
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릅니다. 교회 안 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그들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청어람 아카데미 대표인 양희송은 가나안 성도들과 기존 목회자들간에 심각한 시각차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떠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이들은 교회를 떠나면서 죄책감보다는 교회로부터 탈출했다는 해방감을
가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신앙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신앙적 이유로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70~80%는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 역시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진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머리 되심 그리고 그분의 통치가 사라진 것이므로,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그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진정한 제자도에 대한 개인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반드시 성령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대안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 복음이 말하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학개서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학개
학개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학개는 학개서 외에 에스라서에 두 절인 5:1과 6:14에서만 언급됩니다. 학개란 이름은
"명절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학개의 활동 연대는 정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 제2년"은 주전
520년으로, 학개는 주전 520년 8월에서 12월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학개서의 일관된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이 주거 환경 개선보다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학개서의 핵심 메시지는 "자신의 필요에만 몰입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본분(학개서에서는 성전 재건)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입니다.
배경
학개가
전한 말씀에는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모든 말씀은 학개가 바사와 다리오 1세 제2년에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전 539년에 바벨론(바빌로니아)은 바사(페르시아)에게 망합니다. 그 이듬해인 주전 538년에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고레스의 칙령입니다(스 1:2-3 참조 6:3-5).
유다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스 3:8-10). 하지만 공사는 유다 땅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과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중단되고 맙니다. 공사 중단 상태는 그 외의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학개가 등장하는 주전 52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스 4:23-24).
성전 재건은 주전 538년에 유다 백성을 귀환시킨 고레스가 내린 명령의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18년 동안 유명무실하다가, 주전 520년, 학개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망각하고 있던 성전 재건의 임무를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학개는 유다 땅에 머물렀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 백성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스룹바벨은 다윗 가문의 왕 여호야긴의 후손으로 바벨론에 잡혀갔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사닥의 아들로서 역대상 6:15에 따르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바벨론 왕에게 붙잡혀 리블라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레의 제사장 계통에 속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왕족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 가문입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정치와 행정을 책임지는 정치 지도자이고, 여호수아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직무를 책임지는 종교 지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는 학개와 달리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학개가 이들에게 선포한 이유는 이들이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이 성전 재건 독려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저항
그런데
학개의 외침은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백성들은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며 성전 재건을 언급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2절). 당시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총독과 대제사장은 지금이 성전 재건의 적기라고 말하는 예언자와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백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학개는 아직 성전 재건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1:4)
원문을 직역하면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너희를 위해서 이때에 판벽한 너희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입니다. 이것은 조롱조의 반문입니다. 폐허가 된 하나님의 성전에는 무관심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유다 백성들의 이기주의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황무한 하나님의 집"과 "판벽한 백성의 집"이 대조를 이룹니다. 황무란 황폐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판벽"이라는 히브리어 '세푸님'은 '호화로운' 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소박한 '덮개'라는 의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학개서의 정황으로 보면 소박한 덮개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학개는 "백성들의 지붕 덮인 집"과 "지붕 없이 폐허가 된 하나님의 집"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의 집을 지붕도 없는 폐허 상태로 내버려둔 채 지붕 덮인 집에서 편안히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옳은 태도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백성 대부분이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었습니다(6절). 백성들은 농작물 경작의 실패, 식량 부족,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낡고 헤진 의복, 물질 부족 등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헛수고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학개의 역설
여기서
우리는 학개의 역설과 만나게 됩니다.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이라는 임무를 저버리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을 먼저 짓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기대 만큼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9).
성전 재건의 무관심이 곤궁한 삶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학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시간도 노력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백성의 빗나간 열정과 이기적인 삶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빗나간 열정이 화를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빈궁과 곤고함이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여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성전을 건축하라
학개는 구체적으로 행동 지침을 내립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8).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에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를 사용하였습니다. 고급스러운 수입목이었습니다. 또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성전의 기초석으로 삼았습니다. 외국 기술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개는 뒷산의 나무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돌은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2:3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역시 결과는 시시했습니다. 예전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성전을 보고 울었습니다.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학개는 단순히 건물을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적 기능만을 되살리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베푸시려고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축복의 통로이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성전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거하시는 집으로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성전 재건의 임무
성전
재건의 임무는 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황무해졌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부침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당신의 교회를 다시 세울 사람들을 찾으시고 준비하십니다. 12세기
타락한 교회를 다시 세우고자 하나님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세운 다미안 성당은 보잘것없었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라는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황폐한 도시와 넘치는 빈민들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고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형제의 처소라는 브루더호프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리고 있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 가나안 성도님들도
주님의 음성을 꼭 듣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황무한 교회를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건축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유일한 예물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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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개론
1. 표제 이 책의 표제는 단순히 이 책을 기록한 선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히브리말로 학개(Chaggai)는 “축제의”, 혹은 “경축의” 뜻인데 아마도 그가 경축일에 태어난 것을 암시하는 것같다.
2. 저자
학개는
세명의 “포로 후 소선지자”중 첫번째 선지자이다. 학개에 관해서는 그의 책에 나타난 것과 에스라서가 그에 대해 언급한 것(스
5:1; 6:14)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학개가 그의 예언서를 기록할 당시 나이가 꽤 많았으므로 그는 이전
성전을 보았다고 믿는다(학 2:3). 그것의 사실 여부는 어떠하든지 학개는 옛 성전과 새 성전을 연결시키는 고리같은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3. 역사적 배경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539 B.C.) 그는 재빨리 바벨론의 종교와 화해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존경을 표하기까지 했다. 그의 제국 안에 있는 정복된 민족들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이 일반적 화해의 태도는 유대인들이
귀향해서 예루살렘에 유대인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그의 조서에서 알 수 있다(스 1:1-4). 이 조서 덕분으로 비교적 적은
수인 일단의 포로들이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혹은 세스바살, 스 1:8)의 인도아래 고향으로 돌아가서 얼마 후에 곧 둘째 성전의
기초를 놓게 된다(스 2:64; 3:1-10). 고레스와 그의 후계자 캄비세스(Cambyses)의 통치 기간동안 유대인의 대적들은
이 역사를 중지시키기 위한 왕의 조서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스 4:5).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어(단
10:12, 13) 대적들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이렇게 해서 귀향한 포로들이 주의 전을 재건하는 데 힘있게 정진할 수
있도록 준비된 길들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전도유망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둘째 성전의 역사는 주로 사마리아인들의
계속적인 반대와 방해 때문에 차츰 부진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중단되게 되었다(스 4:1-5). 실망한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토지를 경작하고 가옥들을 건축하는 일로 방향을 돌렸다. 둘째 성전의 기초가 놓였을 때 통곡한 사람들도(스
3:12)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전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주는 것인가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
캄비세스가
죽자 스메르디스(the False Smerdis)가 짧게 통치했는데 그 기간은 귀향한 포로들의 성전 건축에 큰 후퇴를 가져왔다.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는 사마리아인들은 다리오가 성전의 파괴자라고 부른 이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역사를 중지하라는 조서를 얻어
내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귀향한 백성들은 성전을 중건할 적당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학 1:12).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 역사를 중지하고 그들의 관심을 자기들의 주택과 토지에 쏟자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있게
하시고 그들의 계획이 좌절되도록 하셨다. 일년 이상이나 성전은 완전히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 그 동안에 스메르디스가
다리오(Darius)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가 즉위하자 스메르디스의 조서들은 폐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기력의
통탄할 만한 상태에 대처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일으키셨다. 그들의 경고와 책망, 격려와 권면의 기별들은 백성들을
일으켜 행동하도록 하고 마침내 다리오 제2년에 성전 중건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도록 하였다(학 1:14, 15). 여러 면에서
고레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애쓴 다리오왕이 성전 재건을 위한 또 다른 공식 조서를 내린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면서
실제적으로 다시 일을 시작한 그후였다. 이 조서는 고레스의 원래 조서를 확인하고 강화시켰다(스 5:3-6:13).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귀향한 백성들의 지도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영감적인 지도를 받아(스 5:1, 2; 6:14) 백성들은
힘과 열성을 다해 매진하였고 마침내 다리오왕 제6년에 성전 건축은 완성되었다(스 6:15). 즉시로 결과를 볼 수 있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학개는 가장 성공적인 선지자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4. 주제
학개서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의 기별들은 떨어진 백성들의 사기를 높혀서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할 뜻을 갖도록 그들을 고취시키고자
계획되었다. 학개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가시적(可視的) 장소인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에 충실하게 하고 율법에 순종하도록
붙들어 주는데 필요한 강력한 유대가 되는 성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있었다. 학개는 귀향한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 재건에
전력을 다 기울이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학개의 기별은 다른 어떤 선지자 보다도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서 신속하고도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예레미야의 기별이 전적으로 또 공공연히 배척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사실상 냉담에서
모멸로 또 핍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계속되는 반대를 당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선지자의 성공의 척도를 그의 기별이 즉각적인 호응을
얻는 여부로 측정한다면, 학개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에 해당한다. 그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고결한 모본은
오늘날에도 뚜렷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처럼 짧은 시간에 주의 전을 완성시킨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협력 정신이었다.
그와 동일한 정신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령한 전을 완성시키고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도록 인도할 것이다(벧전 2:5; 마
24:14). 만일 학개 시대에 유대 민족에게 나타났던 그 정신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면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허락된
영광스러운 약속들이 곧 성취되었을 것이고 메시야는 오셔서 돌아가시고 그의 영원한 통치를 시작하셨을 것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학개의 기별은 경고와 권면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격려가 된다.
5. 개요
Ⅰ. 학개의 첫째 기별 1:1-15
1. 무관심에 대한 책망 1:1-6
2. 가뭄의 원인 1:7-11
3. 학개의 기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1:12-15
Ⅱ. 학개의 둘째 기별 2:1-9
1. 이전 성전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음 2:1-5
2. 새 성전의 영광이 이전 성전의 영광을 능가할 것임 2:6-9
Ⅲ. 학개의 셋째 기별 2:10-19
1. 종교적 형식주의는 충분치 못함 2:10-14
2.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백성들은 순종해야 함 2:15-19
Ⅳ. 학개의 넷째 기별 2:20-23
1.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들의 멸망 2:20-22
2. 스룹바벨에 대한 개인적인 약속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