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호세아


9월 23일(화) 호세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I will betroth you in faithfulness, and you will acknowledge the LORD.

호세아서의 주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2장에서는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3장에서는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 묵상 할 주제는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안다는 히브리 단어는 "야다"라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안다고 말할 대 겉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란 서로 이웃끼리 지내며 알고 지내는 관계라고 한다면 속 사람이란 결혼 후에 동거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하나님을 알게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와 같은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마치 창녀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사 54:5-8).

진실함(530. 에무나) 
-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불변하는 성실, 충성을 뜻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견고함을 나타내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성공을 보증하는 여호와의 신실성이다(J.Given).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3045. 야다) 
- '알다'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객관적인 인식 이상의 것으로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이해, 또한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의 참다운 깨달음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뜻을 포함한다(M. Henry). 
또한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를 인정하고, 여호와께 충성과 복종의 태도를 보일 것을 시사한다(Chrisholm). 
결국 이 새로운 지식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케 하고(벧후 1:3-7) 그와의 거룩한 사귐에 있게 할 것이다(요일 1:1-4).


내가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14~3:5)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다루시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언제나 기꺼이 받아주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사랑을 음란한 아내를 맞이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죄악으로 가득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2장 14절부터 23절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Valley of Achor)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5). 
아골은 히브리어로 “아카르”(עָכַר)라는 단어에서 나온 “아코르”(עָכוֹר)인데, 아카르는 괴롭히다(to trouble), 혼란하게 하다(to disturb)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근심의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쳐서 승리한 후에 아간이 불순종하여 아이 성 침공에 처참하게 실패한 후에 아간의 죄를 드러나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장소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의 골짜기가 오히려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듯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다시 구원하여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2:15).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데(2:19, 20),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바알을 비롯한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6, 17). 
이 땅에 있는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과도 언약을 맺겠다고 하시는데(2:18), 더 이상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전쟁에서도 자유롭게 되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2:1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9).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옳다”, “바르다”는 의미의 “체데크”(צֶדֶק)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베체데크”(בְּצֶ֣דֶק)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고, 정의(正義, Justice)는 히브리어로 “우베미쉬파트”(וּבְמִשְׁפָּ֔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미쉬파트”(מִשְׁפָט)에서 나온 단어로 미쉬파트는 “법률에 의해 판단되는 옳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恩寵, Lovingkindness)은 “우베헤세드”(וּבְחֶ֖סֶד)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헤세드”(חֶסֶד)로 은혜, 사랑, 긍휼, 자비 등 한국어 성경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긍휼(矜恤, Mercy)은 히브리어로 “우베라하밈”(וּֽבְרַחֲמִֽים)인데, 이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이나 사람의 내장을 의미하는 “라함”(רַחַם)에서 나온 단어로 속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면서도 은총과 긍휼을 잊지 않고 균형을 잡으시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곳에 모여 성취되는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이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곳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0). 2장 20절의 “네가 알리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웨야다앗트”(וְיָדַ֖עַתְּ)인데, 이 단어의 원형은 “야다”(יָדַע)로서 “알다”, “이해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이 단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넘어서서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신부(新婦)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는 은혜가 주어졌음이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2:21, 22),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지 못했던 자들[로루하마(לֹא רֻחָמָה)]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루하마(רֻחָמָה)]들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로암미(לֹא עַמִּי)]들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암미(עַמִּי)]이라고 불리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2:23).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엘로하이(אֱלֹהָֽי)]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2:23).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호세아 3장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인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섬기며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호세아에게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아내를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3:1). 

건포도 과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에 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간 그 음란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고 말씀합니다(3:2). 한 호멜(Homer)은 약 230ℓ이니 한 호멜 반이면 345ℓ이고, 무게로 환산하면 180kg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노예의 몸값이 은 30세겔(Shekel)이었는데,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은 대략 은 30세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노예를 사고파는 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음란한 아내가 집을 나가서 불륜을 저질렀으니 오히려 돌에 맞아 죽게 하도록 해도 되는데,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당하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모두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다시 데려온 아내에게 더 이상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겠고 말씀하십니다(3:3).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었습니다(3:4).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릴 수 없었고, 그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주상(柱像, Sacred pillar)도 없었습니다. 주상은 히브리어로 “맛세바”(מַצֵּבָ֑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기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마 우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입는 예복(禮服)인 에봇(Ephod)도 없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명한 절기와 제사들을 주관할 제사장들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드라빔(Teraphim)은 한 집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기는 작은 크기의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번듯한 지도자도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제대로 된 제사나 섬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계보(系譜)를 잇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3:5).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시 구원하셔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남편을 배신하고 불륜을 행하며 음란하게 살았던 고멜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음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신부라고 할 때 신랑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벌을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벌은 무엇을 위한 벌인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내가 그를 타이르겠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 하겠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렸을 때 그리고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하도록 만들겠다고 까지 하셨는데, 과거 출애굽의 역사처럼 지금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된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전에는 하나님이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끌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파괴되었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게 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다스려야 했지만, 죄는 이 관계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런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데, 율법의 정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또한 사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전쟁의 역사였다면 하나님 사랑의 회복은 그런 전쟁의 역사도 그치고 평안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해 다시금 말하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신으로 하여금 남편을 삼았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한번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너를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록 네가 잘못한 일이 있지만 그 잘못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 잘못을 지워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음행한 사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되’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아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잘못함으로 인해 한번 그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게 하실 때는 또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완성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빌1:6). 물론 그 과정 가운데 호세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 한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끝나면 좋겠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도 기웃거리고 저기에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십니다. 490번이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영원히 살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하심에 대하여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는 방식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절에 보면 공의와 정의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은총과 긍휼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진실함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하여, 그런 다음 은총과 긍휼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진실함 혹은 성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4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타이르되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겁니다. 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가? 호세아 2장 6절로 말하자면 왜 가시를 주시는가?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에 대하여 그냥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를 주십니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고, 잘못에 대한 징계를 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공의와 정의입니다. 쉽게 말해 죄에 대한 벌 혹은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징계와 벌을 주신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의 징계와 벌은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 징계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범죄를 계산하지 않고 원죄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너희와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되, 거기에 은총과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공의와 정의는 은총과 긍휼에 기초한 공의와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택자 편에서는 그들이 받아야 할 벌만큼 주시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택자가 받아야 할 벌을 충분하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데, 그 공의와 정의를 택자에게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택자의 모든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그에게 내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있는 겁니다.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할 때 죄책이 제거된 것이지, 부패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부패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자범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여전히 공의와 정의와 함께 자신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은총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서 공의와 정의 없는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총과 긍휼만으로는 저들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내리시되 필요한 만큼의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진실함이 추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실함이란 신실함 혹은 성실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행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혹은 두 번, 세 번 정도만 행하시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속해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20절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와 정의로 일하시며, 또한 은총과 긍휼로 일하시되, 진실함 성실함으로 일하실 때 너희는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란 단순히 일반계시의 차원이 아님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리셨지만 구원의 지식과 관련해서는 특별계시로만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너희가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외적 증거로써의 말씀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삶에 있어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고,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시지만, 앞서 그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징계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나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의로 행하시되, 은총과 함께 신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효력이 있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내적 증거로써의 성령의 일하심이 함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총과 긍휼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함, 성실함도 있습니다. 책망과 벌이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총이 있는 것이고, 그 일을 성실하게 실행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시작하신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무조건 사랑만 외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도 있지만 책망도 있습니다. 왜 책망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상의 교회가 말씀으로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으로 권징을 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책망이 있고 권징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할 때 말씀과 성례와 더불어 권징이 들어가는 겁니다. 권징 없는 교회, 책망 없는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알게 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응답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있는 22절은 앞선 말씀 20절의 내용 없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하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충분히 먹고 마실 때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시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로 삼을 때 참된 복이 시작된다고 알립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지상의 축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납되고 우리와 거룩한 혼인이 맺어지고 또한 그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존하시며 우리가 그의 보호와 방어 아래 안전하고 평안하게 된다는 약속을 받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지상의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될 때는 다시금 지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겠다고 하시는데, 지난주 살핀 15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우선 응답한다는 것은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공급된다고 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심으로 실제로는 바알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 누가 공급하시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누가 주체인지 알게 하셨고, 누가 주체인지 알게 되자 주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공급하시는지 순서를 따라 말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뒤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을 얻는 것은 땅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럼 땅만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해가 있어야 하고, 비가 있어야 하고, 그 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늘로부터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럼 하늘은 그 자체로 땅에 필요한 것은 공급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지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주체를 빼 버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땅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또한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아 제공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그 영광을 돌립니다. 이방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22절 마지막에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스르엘입니까? 이미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인데,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바알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도 사실 내가 너희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가 알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때부터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공급해 주신 주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여 알리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인 것을 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얻는다고 해서 땅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는다고 해서 하늘을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다.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해로부터 빛을 주시고, 또한 구름을 통해 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땅을 적십니다. 그 결과 땅으로부터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를 위해 인간의 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열매를 맺어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들에게 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되고, 반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됩니다. 당연히 알미니안주의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체이신데,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 해도 변함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시라는 겁니다. 항상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에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데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의미입니다. 출발만 하느냐? 과정도 하나님이 주체로 있는 것이고, 마지막도 결국 하나님의 주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은 사실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다시금 돌려드리는 내용도 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공로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상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결코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공로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일 뿐입니다. 때문에 상급을 받을만한 무엇을 내놓았다면 여러분으로부터 출발한 게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했다고 해서 교만하다는 것은 공로주의의 결과이지 결코 성도의 합당한 열매가 아닙니다.

더불어 23절로 오시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백성의 수 또한 많아질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이사야 10장 22절의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때문에 혈통으로만 볼 때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회복의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은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육적 이스라엘 자손으로만 보면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씨처럼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도록, 셀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남은 자가 씨가 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ㄱ 버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에 심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호세아 2장 1절에서 말씀하시던 방식과 같이 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루하마요 암미입니다. 본래는 로루하마요, 로암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내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체이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고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은 없습니다. 찾아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연이 이때도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 본문 23절 맨 처음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기적일 것 같으면 굳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택한 자기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택자 역시 동일한 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하신 바를 결코 변경함 없이 실행하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들을 돌이키게 만든 후에 다시금 긍휼을 베풀겠다,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때서야 비로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말씀처럼 남은 자를 통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고, 그 수를 많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말씀하시고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만큼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즉 하나님을 위한 것이 사실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으로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즉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이라는 말 자체는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내를 말할 때 내 쪽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내해야 한다고 권면할 때 여러분이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분명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확신을 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약 사람이 주체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단 1%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100%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철저히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인 줄 알고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마음(성품)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은 인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곧 당신의 마음과 성품을 주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당신의 종(사역자)으로 삼으셨을 뿐이었습니다(히 1:14).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영원한 우리의 남편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거절하고 떠나버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사 인간들의 죄를 위해독생자를 대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 대한 자기의 변함이 없으신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셨습니다. (롬 5:8)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는 자기 아들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짝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입고 사는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고전 1:2)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가 실제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리새인들 처럼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떤 지식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신앙의 실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실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도 실제입니다.
예수님도 실제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도 실제입니다. 
그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실제입니다.

성령님도 실제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 내주해 계심도 실제입니다.
주님의 피로 성도된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도 실제입니다.
천국도 실제입니다. 마귀도 실제요, 그의 종들인 귀신들도 실제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 동화나 지어낸 설화나 우화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생을 마친다면, 내안에 영으로 내주해 계신 주님을, 내 눈으로 직접 뵈올 것도 실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것에서)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일이 우리가 돈을 버는 것처럼 내 삶에 실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을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나를 위한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좋아하시고, 진실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당신의 연인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고 정말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가 자기 아들 예수를 미칠 것만큼 사랑하는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하고, 예수만 사모하고, 예수만 갈망하고, 예수만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예수만 사랑하는 예수님의 연인이 맞습니까?


호세아 2:1-23

호세아 2장은 1장 10절과 11절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사실 1장 6절에서 호세아와 고멜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지 않다” 였습니다. 또 1 장 9절에서는 호세아와 고멜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즉, “나의 백성이 아니다” 였습니다.

그러나 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형제를 암미 즉 “나의 백성”이라 부르시고 그 자매들을 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다”라고 부르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하나님을 떠나 바알숭배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미래에 있지만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현재에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은 현재 자기 자신의 상황과 형편이 좋지 않으면 앞날을 내다보며 소망을 가지기가 참 힘듭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로는 결코 암미나 루하마가 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대접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 역시 로암미와 로루하마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려주십니다. 그러기에 신약성경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증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즉 우리가 로암미와 로루하마 였을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 죄목은 간음입니다. 호세아와 고멜과의 결혼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정한 아내와 같은 이스라엘은 어리석고 생각이 없으며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러기에 심지어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도 마치 바알이 준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릴 때 단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3절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해 결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으로 이끄십니다. 14절과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때와 애굽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아내된 이스라엘이 처음과 같이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내적인 변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도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복된 이스라엘은 예전의 나쁜 모습을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내 바알이라고 번역된 "바알리"라는 단어는 "내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상 바알과 이름이 같기에 다시는 이렇게 부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편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부분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러한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20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힌 전인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도 없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복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라 불러주실 때 우리 역시 23절의 마지막 구절처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로암미와 로루하마 같은 우리를 먼저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경험하여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암미와 루하마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외간 남자와 놀아난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그 마음은 크고 넓고 높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좋아하며 즐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나에게는 영적 간음을 즐기던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은 없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의 헌신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무엇을 의미하는가?

    1, 2. 이사야 2:3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무슨 초대가 있으며, 누가 초대됩니까?

    마지막 날에 관한 이사야의 감동적인 예언은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초대를 발합니다. 그 초대는 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라.]”a이사야 2:3.

    2 이 예언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교훈의 근원으로 인도되어, 참 하나님을 알게 되도록 도움을 받을 것임을 알려 줍니다. 어떤 진리를 그들이 배움으로써 참다운 평화의 결속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까?

    3. 성서의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이 어떻게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졌습니까?

    3 성서의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이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벗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누가 물어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대개는, 원수지간이라야 너무 싫은 나머지 상대방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조차 하지 않으므로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관계—그로 인하여 그들은 이름으로 그분을 알았음—가 고대 시편 필자에 의해서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가?

    4, 5.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의문이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인도해 내시겠다고 설명하시자, 모세는 이처럼 논리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 = 야훼 또는 13세기 이후로,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3, 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5 이 이름은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그것은 “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הוה 즉 h·w·h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히브리어 문법에 의하면 사역형 즉 히필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본 의미는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물이 존재하게 또는 발생하게 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히 그분의 목적과 관련해서 독특한 면으로 참됩니다. 택하신 백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기로 목적하셨을 때, 그분은 그 일이 그렇게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세력도 그분이 천명하신 의사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약속의 성취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점은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시려는 목적에 있어서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땅에 낙원 상태를 가져오실 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보증이 됩니다.—이사야 41:21-24; 43:10-13; 46:9, 10.

    6-9.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금하시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 금지가 언제 어떻게 유대교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6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계명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대 백과 사전」의 이러한 설명에 유의해 봅시다. “YHWH라는 이름의 발음을 기피하는 현상은 ·⁠·⁠· 셋째 계명(출애굽 20:7; 신명 5:11)의 의미를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로 오해함으로써 생겼다. 하지만 참 의미는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5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 즉 발음하는 것을 이 성구가 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을 의미한다 해도, 쾰러와 바움가르트너의 공저인 히브리어 고어 사전에서는 “헛되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용어(라슈샤우)를 “이유 없이 이름을 부르다 ·⁠·⁠· 이름을 오용하다”6로 설명한다는 점에 유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이 아니라 그 오용입니다.

    7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하다”는 주장은 어떠합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사람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것으로 보셨다면, 처음부터 아예 계시하시지도 않았어야 이치적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어 성경 원본에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6800번도 넘게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 주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그 이름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 행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제한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백성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또 알릴 것을 반복해서 격려하시고 심지어는 명령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의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시 91:14) 예언자 이사야는 이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이사야 12:4. 또한 참조 미가 4:5; 말라기 3:16; 시 79:6; 105:1; 잠언 18:10.

    8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셨다면 미리 명백히 그것을 금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 어디에서도 그분의 이름의 합당한 사용이나 발음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서 시대의 충실한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하였습니다. (창세 12:8; 룻 2:4; 4:11, 14)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자들을 반복적으로 정죄하셨습니다.—예레미야 23:26, 27; 시 44:20, 21.

    9 이러한 금지 사항은 성서의 일부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 어떻게 유대인 사상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랍비이자 「만인의 탈무드」(Everyman’s Talmud)의 저자인 A. 코헨 박사의 설명을 보면 이 전통이 여러 세기에 걸쳐 점차적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헨 박사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성서 시대에는 일상 대화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개인들의 이름에 또는 야후를 붙이는 일이 유대인들 간에, 심지어 바벨론 유배 이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이 네 글자 이름의 사용이 금지 사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랍비 시대에 와서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성전 봉사로만 제한되었다.” 이 시대에 더 진전된 일에 대해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그 이름은 JHVH 대신 회당 예배에서 아도나이(내 주)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원래의 발음은 현인들에 의하여 그 제자들에게 주기적으로—7년마다 한두 번씩—전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키두신 71) 그 관습조차도 잠시 후에는 사라져서, 그 이름의 발음법을 이제는 확실히 모른다.”7 바로 그것이 “사람의 계명”의 결과였습니다.—이사야 29:13; 신명 4:2; 참조 9면 15, 16항.

    이름을 지닌 자들에 대한 요구 조건

    10-14.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지닐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의 순결이 요구됩니까? (ㄷ) 어떤 외부의 이교 영향이 유대교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까?

    10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거나 사용하기까지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참 숭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는 것은 독특한 특권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처럼 선포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 (예레미야 15:16) 그러나 이 웅대한 특권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나라의 왕들에게 이처럼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리라.]” (예레미야 25:29)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석방시키시기 전에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 백성에게 이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이사야 52:11) 오늘날 참 숭배자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로서 정결케 하는 데는 즉 순결을 유지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11 확실히, 숭배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행실, 특히 하나님 자신이 세워 놓으신 도덕 표준에 관한 행실에 있어서 순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방임적 표준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거짓말, 도둑질, 음행, 간음, 동성애, 살인 및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표현함에 있어서 해석상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출애굽 20:12-16; 23:1, 2; 레위 5:1; 19:35, 36; 20:13) 성경은 나쁜 행동 자체만 아니라 나쁜 행위로 인도하는 나쁜 생각까지도 정죄합니다.—출애굽 20:17; 레위 19:17; 시 14:1-5; 욥 31:1, 9-11.

    12 도덕적 순결에 더하여 종교적 순결도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에게는 분명히 요구될 것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이웃 나라들의 종교적 사상과 행위 그리고 관습으로부터 영향받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사실상, 바로 이 조건—그들이 열국의 거짓 숭배를 모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레위 18:24-30; 신명 12:29-31) 우상 숭배가 분명히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점성술, 영매술, 점, 마법 그리고 죽은 자에게 기도하거나 죽은 자에게 묻는 일과 같은 온갖 형태의 미신과 미신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출애굽 20:3-5; 22:18; 레위 20:27; 신명 18:9-13; 이사야 8:19, 20; 47:13; 예레미야 10:2.

    13 종교적 순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는 교리적 순결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도덕과 숭배를 모방하지 말라는 경고는, 단지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그 땅을 차지할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종교적 진리를 자신의 백성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만이 참 하나님 여호와를 숭배하였습니다. (출애굽 19:5, 6; 신명 4:32-37; 시 147:19, 20) 그들만이 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고, 그분의 증인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에 관해 가르칠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43:9-12; 시 105:1) 이와는 반대로, 다른 나라들의 종교 관습과 행위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없음이 드러났습니다.—이사야 60:2.

    14 그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반복적으로 외부 종교 사상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사사 2:11-13; 열왕 상 18:21; 예레미야 2:11-13; 에스겔 8:14-18) 가나안 문화와 바벨론 문화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한편, 유대교가 직면한 전무후무한 큰 도전은 그리스 제국에 의한 헬레니즘 문화 시대에 닥쳐 왔습니다.b 기원전 4세기로부터 통용 기원 수세기까지에 이르는 그리스 문화의 장기간의 영향을 요약해서, 유대인 저술가 막스 디몬트는 이와 같이 평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및 유클리드의 과학으로 견문을 넓힌 유대인 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토라 연구에 착수하였다. ·⁠·⁠· 그들은 결국 그리스의 이성을 유대인의 계시에 부가하였다.”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15-17. (ㄱ) 성서는 사망과 영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칩니까? (참조 22면 네모) (ㄴ) 성서는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을 제시합니까?

    15 유대교의 교리와 신앙도 이 시기에 영향을 받았습니까? 「유대 백과 사전」은 이처럼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영혼불멸 교리가 유대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마 그리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8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이 이 땅에서 완전한 건강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셨음을 간단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참조 11-12면, 2항부터 4항) 창세기 2:7을 보면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신세」]이 된지라.” 이 성구에서는 사람이 영혼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영혼이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반역하였기 때문에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한 인간 영혼으로서 죽었습니다. 그의 어떤 부분도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영혼 개념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c 성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간명하게 말합니다.—에스겔 18:4.

    16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하여 성경에서 알려 주는 내용은 영혼이 죽는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 조화합니다. 전도서 9장 5절과 10절을 보면 이러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스올, 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비교 시 146:3, 4) 사망은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창세 2:17) 그것은 생명의 반대이지, 다른 형태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서도 지옥불(게 힌놈)에서 불에 타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과 이교 교리에서 흡수된 개념입니다. 환생에 대한 유대인의 신화적 신앙에 관하여 「신 표준 유대 백과 사전」(The New Standard Jewish Encyclopedia)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 관념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 같다. ·⁠·⁠· 카발라[유대교의 신화 책들]에서는 「바히르」라는 책에 처음 나타나고, 다음 조하르부터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하시드파의 신앙과 문헌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9

    17 사망은 생명의 반대이고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닌데,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메시야 왕의 개입에 의해서 지상 인류에게 낙원 상태가 회복된 다음에 죽은 자들 대부분이 생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가리켜 종종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될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충실히 섬겼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분에 관하여 배우고 진리로 섬길 기회가 충분히 없었던 수많은, 아니 수십억이나 되는 사람들도 포함될 것입니다.—다니엘 12:2, 13; 이사야 26:19; 욥 14:14, 15.

    18, 19. 우리는 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 하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8 땅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된다는 이러한 성서의 희망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찾아 알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사야 2:2, 3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교훈의 참 근원은 어디입니까? 누가 사람들을 여호와의 길로 교훈하여 “그 길로 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성서 지식에 비추에 볼 때,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국이 그러한 교훈을 베풀 수 있습니까?

    19 예언에 따르면, 순결한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한 집단의 사람들, 참으로 그분의 증인인 동시에 나라들에게 영적 빛의 근원 역할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이사야 60:2, 3.

    [각주]

    a 이 예언을 무심코 읽어 보면 마지막 날에 유대교로 대대적인 개종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맥 자체로 보거나 현재 사건들로 볼 때 그것은 정확한 견해가 아니다. 이 부분과 다음 부분에 나오는 설명은 이렇게 결론 내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b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기(기원전 336-323년)로부터,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철학, 문화 및 언어를 그리스 제국의 영역 모든 나라에 확산시키고자 힘을 모았다.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화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여타 문화를 예속시키려는 그러한 노력은 로마 제국 아래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였지만 그리스의 문화와 철학에는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영향의 사조에 저항해 보려고 표면상 열심히 투쟁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 철학의 사상, 논법 및 주의(主義)를 받아들인 증거는 역력하다.

    c “영혼”으로 번역된 단어는 성서 히브리어로 네페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종종 히브리어 단어 네샤마를 사후에 계속 존재하는 사람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을 면밀히 연구해 보면 네샤마라는 단어는 결코 그러한 의미를 전달한 적이 없음이 밝혀진다. 그 단어는 단지 호흡 과정 또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호흡하는 피조물을 가리킬 뿐이다.—창세 7:22; 신명 20:16; 여호수아 10:39, 40; 11:11; 이사야 2:22.

    [20, 21면 네모]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d이사야 12: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시 105:1.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라.]”—스바냐 3:9,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시 79:6,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사람들이 말한 것

    “사람은 친구에게 인사할 때 그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베라코트 9:5.

    “이와 같이 그[속죄일의 대제사장]는 말하였다. ‘오 JHVH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당신 앞에 죄악을 범하고, 범과하고,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께 JHVH의 이름으로 간청하나이다. ·⁠·⁠·’ 그러면 성전 뜰에 서 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대제사장의 입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그 거룩하고 존귀한 이름을 들을 때,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그분의 거룩하고 지존하신 이름을 영영히 송축하리로다.’”—요마 6:2.

    “성소에서는 그 이름을 기록된 대로 발음하였다. 그러나 그 경계 밖에서는 대치된 이름을 사용하였다.”—소타 7:6.

    “처음에는 대제사장이 그 이름을 큰소리로 포고하곤 하였다. 그러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지자 낮은 소리로 포고하였다.”—「예루살렘 탈무드」, 요마 40.

    “그 이름을 글자 그대로 발음하는 자[는 장차 올 세상에서 제외된 자들 가운데 속한다.]”—산헤드린 10:1.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 죄에 해당한다.”—페식타 148.

    [각주]

    d “그 이름을 부르[라]”(히브리어, קראו בשמו)는 구절은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비교 「신 영어 성서」) 같은 히브리어 구문이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고 번역된 창세기 12:8에도 나온다.

    [22면 네모]

    사망과 영혼—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네페슈]이 된지라.” (창세 2:7,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사람이 영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첫 사람 아담에게 사망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서만 언급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 3:19.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네샤마]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라.]”—신명 20:16.

    “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진멸[하였더라.]”—여호수아 10:37.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네샤마]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여호수아 11:11.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슈]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5, 10.

    랍비들이 말한 것:

    “제7하늘 아라보트에는 창조를 기다리는 영들과 영혼들이 간직되어 있다.”—하기가 12ㄴ, 탈무드.

    “안식일 전야에는 영혼이 하나 더 사람에게 주어졌다가, 안식일 종료 시에 그에게서 나간다.”—타아니트 27, 탈무드.

    “[사후] 만 12개월 동안 몸은 계속 존재하며, 영혼은 오르내린다.”—샤바트 152, 탈무드.

    “죽은 자에게 벌레가 고통스럽기는 산 자의 육체에 바늘이 꽂힌 것과 같다.”—샤바트 13, 탈무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현세에서 무엇을 말하면, 그 사람의 입술이 무덤에서 움직인다.”—산헤드린 90, 탈무드.

    “유대교는 ‘몸의 사망 후 영혼의 불멸을 보장하는 종교’이다.”—쿠자리 1:103, 유다 할레비, 12세기 랍비.

    [23면 삽화]

    이스라엘, 디베랴(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고대 회당 바닥은 그리스 사상과 문화가 유대교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황도 12궁이 보이고 그 이름들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가운데 있는 그림은 태양신 헬리오스다



  •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글 앞쪽에서는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You can see and trust as much as you know.

    신명기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your God is God; he is the faithful God [NIV] <Deuteronomy 7:9>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인간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 이상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Men will trust in God no further than they know Him) 

  • 똑같은 것을 보아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고, 더 아는 만큼 더 깊게 보게 되는 법이지요. 
    참된 신앙도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거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영혼의 변화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남’이나 ‘새로운 피조물’ ‘새 것’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님 육신의 동생인 유다는 이를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인 것이 ‘그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연구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지요. 
    때로는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고, 그분을 더욱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마태복음 16:15-17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ἀπο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601

    1. 드러내다.  2. 폭로하다.  3. ἀ
    발음 [ apŏkalüptō ]

    어원 / 미래 ἀποκαλύψω, 제1부정과거 ἀ- πεκάλυψ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πε- καλύφ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αλυφ- θήσομαι, 575와 257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드러나다(마 10:26, 눅 12:2), 나타내다(마11:25, 고전3:13, 갈1:16), 나타나다(눅17:30, 롬1:17, 살후2:6), 드러내다(눅2:35), 계시를 받다(눅10:22), 알게 하다(마16:17), 보이다 (고전2:10), 계시되다(갈3:23).

  •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  
  • 9월 24일(수) 호세아 5-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but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13:7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restoration
    미국∙영국[ˌrestəˈreɪʃn]
    • 1. (낡은 건물·그림 등의) 복원[복구] 
      2. (이전의 제도·법률 등의) 부활 
      3. (제자리·원 상태로의) 회복, (본래 주인에게로의) 반환
    1. 회심(悔心)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2. 관계(關係) 여호수아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예배(禮拜)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 순종(順從) 사무엘상 15:22

    사무엘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שׁוּב 스트롱번호 7725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어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좋지 않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싫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저를 무척 좋아했지만 저는 그가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멀리 했습니다.
    작년 4월, 좀더 벌어 보자는 욕심 때문에 육지에 나가게 되었는데 진주에서 김천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100% 잘못한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사고가 난 후 며칠 동안은 사경을 헤매다가 얼마 후 깨어난 저는 양쪽 다리의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믿고 며칠을 지냈는데 며칠 후 조금 고개를 들 수 있어서 제 다리를 보게 되었는데 왼쪽 다리는 절단된 상태이고 
    오른쪽 다리는 발목 부분이 뼈만 남아 덜렁거렸습니다.
    저는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자살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병원 진단 결과는 간 파열, 신장 파열, 좌 대퇴부 절단, 우 경골 및 비골 개방성 골절, 좌 비구 골절, 우족 관절이개, 우 하퇴부 다발성 연부조직 손상 등으로 크게 다쳤는데, 병원에서는 간과 신장만 살리고 남은 다리와 골반은 우리나라에서는 수술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병원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오른쪽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후 약 3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해 집에 내려와 있었지만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밤에는 불타는 지옥의 악몽에 시달렸고 낮에는 그 악몽 때문에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던 어느 날, 여동생으로부터 아는 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신앙심도 깊고 또 저의 병원비까지 빌려주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다음 날 제주 남문 교회의 두 형제님을 차례로 만나면서 주님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분들을 만난 후부터 악몽이 사라지고 성경 말씀을 듣고 난 후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참뜻을 몰랐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놀라운 성경 말씀을 듣고서야 진정 구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직 저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였고 지금의 저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온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를 거듭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선포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의 무절제한 죄를 지적하며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에는 3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거리의 개념 

    예배는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인생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요즘같은 비대면 예배라도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나 중심, 내 편의 위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며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주님께 더 가까이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시간의 개념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안 들리십니까?

    설교 말씀이 더 이상 은혜가 안되십니까?

    감사보다는 불평으로.. 사랑과 용서보다는 미움과 비난으로 남을 정죄하십니까? 

    술과 도박, 쾌락에 빠져 세상을 주인삼고 하나님과 멀어지셨나요?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주님께로 돌아가십시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아주실것입니다

    셋째, 관계의 개념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간다면 그 어떤 길도 지루하지 않고 즐겁고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빨리 갈것입니다.
    그렇듯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고난과 힘든 길도 즐겁게 잘 감당할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들, 부부사이의 관계, 부모와 자식사이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물에서 멀어지면 마르듯이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것도 할수 없고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가 믿음이 회복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선봉장이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제 어디서든 어느 상황과 환경에서도 주님께 돌아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임마누엘의 복에 감사하며 마음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신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너무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어 
    무너진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1~3

    늘날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풍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풍요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자족하는 비결을 깨닫지 못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다 차원높은 부와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부(富)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하심 가운데서 날로 더욱 풍성한 부와 권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은 이기적입니다. 심지어는 퇴폐적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도덕적인 선을 추구함도 없습니다. 무작정 많이 소유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정신세계는 얼마나 공허한지 모릅니다. 도덕적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인륜이 짓밟히고 있고, 추악한 모습으로 세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기류에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도, 교회도 편승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기를 추구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무한 지경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는 가운데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성도를 향해서,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에 부와 권력은 단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권력을 탐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 세상의 것은 잃어도, 가난하고, 궁핍하며, 세상에서 아무런 권세는 없어도, 하나님께는 부요하며, 영적으로는 풍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비록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고, 영적 풍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도, 그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따라 망하는 가운데 있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풍요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던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북조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국제정세를 밝히 볼 수 있었고, 나라의 힘을 키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많은 물질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보시면서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만족하며, 왕이 정치를 잘한다고 칭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를 보시면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무일푼의 노숙자와 같이 영적인 빈곤함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영적으로 빈곤하다면 비극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부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너희의 실상은 가난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빈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물질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을 박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이 풍요롭지 못한 사람의 결국은 이럴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 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하나님의 진노 속에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요로움에 영적인 눈이 멀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외면하며 살던 자리에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영적현상을 바라보면서 지금이 바로 호세아 시대와 같이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에 붕괴와 파멸이 찾아왔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멀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돌이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세상을 향해, 세상의 풍요만은 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돌이키다는 말은 원문성경에서 슈브(bWv)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되돌아 가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떠나왔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믿고 섬기기로 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적인 축복의 의미를 상실하고 세상의 물질과 풍요에 눈이 멀고 마음이 빼앗기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죄악된 자리에서 돌이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회복하다.” “회개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고,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것,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못하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나아오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도 회개하는 자가 될 때에 가능합니다. 죄악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에 풍요롭기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해야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만 우리의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을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주와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찢으셨고, 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인식하고 못하고, 은혜를 구하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만을 얻기 위해서 눈을 벌겋게 해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그곳에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치셨고, 온갖 재난을 통해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실존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잠시는 큰 부요를 누리는 것같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부요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의 전조일 뿐입니다. 영적으로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크게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의 공격 앞에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구하며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을 그들을 치십니다. 그들을 갈갈이 찢어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 헌신하지 못한 채, 세상의 것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려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금 치료와 위로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찢으셨으나 낫게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회개하는 자가 되어지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더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그 모든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짓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신세가 되어서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탕자를 외면하거나 박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었지만, 그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의 모든 허물을 아버지는 감싸주었습니다. 그의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새 옷으로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이 세상에 미쳐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금 놀라우신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회개하면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문제가 사라지고, 슬픔 중에 위로를 받을 수 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담이 허물어지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못했거나, 은혜를 사모함에 게으르고 세상만을 추구하던 우리의 모습을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전 생애와 삶의 방향을 되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치료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왜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때에 회복하시고, 싸매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이틀 후에 살리시고, 제 삼일에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기적같은 능력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신속하게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2절에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영생의 축복으로 더하여 주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싸구려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조건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함을 얻는다고 하니, 구원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자체의 가치를 값싼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댓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또 어떤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고, 풍성한 영적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구원이 싸구려고, 천국이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지불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천하를 두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부귀나 영화를 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놀라운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세상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은혜에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세아 6:3)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치료하심과 위로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초보의 신앙, 유치한 은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에 더욱 풍성한 가운데 있기를 위해서는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이키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에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d'y)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객관적인 사건이나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야다는 부부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 친밀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속성을 갖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하는 것 등등을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서로를 사랑함과 신뢰함으로 두터운 인격적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동방의 장부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회의에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을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긴밀한 인격적 교제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인격적 친밀관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나님의 친구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함으로 모든 것을 숨기지 않는 사람,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매우 친숙한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증언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우리를 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힘써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친밀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성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향한 헌신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가 되어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되시고, 크신 복으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예배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품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힘써 동역자가 되어 헌신함으로 주님과 친밀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새벽빛같이 일정하신 하나님, 땅을 적시는 비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시고,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가던 우리의 옛 사람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이켜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이제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기꺼이 동역자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새벽빛 같이 일정하시고,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의 삶에 은혜로 충만케 하실 주님께서 빈곤한 영혼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 온 교회 위에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return to GOD)

    연가시를 아는가? 

    수중에서 사는 기생충의 일종인데 이것이 1차 숙주인 모기나 하루살이, 또는 잠자리가 그 알을 먹으면 알이 속에서 숙주의 몸 속에서 부화하고 자란다. 
    그러다가 여치나 사마귀, 바퀴벌레가 그 1차 숙주를 잡아먹으면 이 연가시는 제 2숙주 속에서 양분을 다 가로채 먹으면서 대부분 10~15cm의 정도까지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성충이 되고 숙주의 몸속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면 이 연가시 기생충은 생활하고 알은 낳는 곳이 물속이기 때문에 2차 숙주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시켜 물가로 가도록 해서 물에 빠져 죽게 한다. 
    그런 다음 연가시는 그 숙주의 몸 밖으로 나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런 연가시의 특성을 변형시켜 만든 영화 <연가시>가 2012년 7월 상영되어 약 4백 5십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많은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 내용 중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의 행태를 보면 연가시가 영양분과 수분을 다 먹고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어 계속 먹는데 큰 양푼에 가득한 밥을 먹기도 하고 밥통째로 먹고도 계속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큰 생수통의 물을 통째로 먹는가 하면 변기에 고여있는 물을 마시기도 하고 급기야는 바다나 강에 빠져 죽는다. 

    오늘 이 세대가, 이 사회가, 바로 내가 영적 변종연가시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지나 않는가?

    만약 이런 영화 속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고 그것도 너무나 편만해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부의 주요 직분을 맡을 후보자들을 청문회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격과 능력을 검증한다. 그런데 청문회를 통해 많은 분들의 생활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비난 받을 일들이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후보자는 그 도가 지나쳐 임명을 취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부 허물이 있어도 임명을 강행해 정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버닝썬 사태에서 시작된 일부 연예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재벌가문에서 자행되는 마약복용 등 끝이 없는 쾌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일부 드러나고 있다. 이 사회는 그렇다고 치고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또한 이 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대형교회의 세습문제, 도덕성 문제, 사이비 종파들의 이단적 가르침에 의해 생기는 불미스러운 사건 들로 인해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형편이 없다.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가 발표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시민의 기독교신뢰도는 20.2%에 불과했다. 그런데 비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10.7%에 불과했다. 비그리스도인 10명중 9명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5,5%인 불교를 누르고 개신교 인구가 19.7%로 한국최대의 종교가 됐다. 그런데 사회는 어떤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섬기며 봉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숫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왜 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더 이기적이 되고, 각종 각종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가? 전체 인구의 80%가 비기독교인들인데 왜 그들의 기독교 신뢰도는 10%밖에 되지 않는가?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는 여러분과 제게 있는 것이 아닌가?

    본론

    성경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 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호 4:1,2)

    사도 바울은 좀 더 직접적이고 자세하게 이 세상 끝의 사회적 현상을 설명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 3:1-5) (참조: 롬 1:28-31)

    오늘날의 사회상을 잘 설명하고 있나? 어떻게 2천년 전에 이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하나님 없는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북방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다. 
    선지자 호세아가 봉사한 기간은 대략 기원전 755년 부터 725년 까지 약 30년이었고 여로보암 2세는 기원전 793년 부터 753년까지 약 41년동안 왕으로서 통지하였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 동안 북방이스라엘은 외형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번성하였고 성공적인 나라였다. 

    북방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왕을 살해하여 왕위를 찬탈함으로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고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 통치를 하였으니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당시의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때와 비슷해졌다. 경제상황도 많이 나아졌고 다른 나라가 침략도 하지 않아 번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번영이 오히려 여로보암 2세와 북방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했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부정직과 불신과 기만이 팽배했다. 
    온갖 사치가 조성되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불의한 재판이 성행했다. 
    음행이 종교에 도입되었고 신성모독과 회의주의가 편만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퇴폐하고 부패해졌다. 

    호세아 4:7에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숨어계시지도, 방임하시지도 아니하였다.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상기시키고 순종하도록 호소했으며 계속해서 반역적인 삶을 살 때 그 결국은 멸망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세속적 번영과 쾌락에 취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별과 호소를 외면했다. 호 8: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라고 한탄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 없는 번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오는 성공은 행복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마침내 파멸로,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잊지 말라!

    영적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은 재물을 아무리 모아도 만족함이 없다.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끊임없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몰두한다. 계속해서 성공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권력에 대한 탐욕, 쾌락을 추구하는 만족 없는 욕구들이 가득한 것이 오늘날 이 사회가 아닌가?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속 가득 찬 영적 연가시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게는 본성적으로 옆으로 걷는다. 아무리 바로 걸으려 해도 걸을 수 없다. 영적연가시 같은 탐욕과 교만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없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죗된 본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심지어 사랑과 겸손의 마음조차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영적 연가시를 몰아낼 방법은, 치료할 특효약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호 6: 1,3절에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영적 연가시에 감염되어 끊임없는 탐욕과 만족되지 못한 욕심에 빠져있는 죗된 영혼의 치료책은

    첫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환자는 불편함을 느끼고 이상함을 느끼면 병원에 간다. 자신이 진단하고 처방하지 않는다. 병원에 가서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 하면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거나 수술하여 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해지고, 기도가 등한시 되어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거나, 이기심이나 교만함이 생겨나면 영적 이상 징후이다. 즉시 큰 의원이신 여호와께 나아가야 한다. 시51:17에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요일 1:9)

    둘째는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이 안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문(디아트 - 야다에서 유래)의 의미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부닥쳐서 알고, 보아서 알고, 만져서 아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식적, 피상적,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의 치료자 임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어렸을 때 양계장을 했다. 하루는 달걀 1개를 몰래 꺼내가지고 동네 만화방에 갔다. 만화방 주인에게 계란을 주면 만화책 몇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켰다.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았다. 무척 아팠고 멍이 들었다. 그 날 저녁에 어머님이 무슨 연고를 가지고 와서 많이 아팠지? 라는 한 말씀만 하신 채 다른 말씀 없이 상처 위에 발라주시고 마사지를 해 주셨다. 그 마사지 하시는 어머니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시는 계란을 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동정과 연민과 사랑만이 우리가 가진 영적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연가시 같은 죄를 없애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결론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앞둔 북방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던 이 호소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호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일어나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동화작가 권정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 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그 열차 안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의성에 있는 시골교회 집사인데 십년 전 어느 날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고 한다. 
    정신 없이 일에 몰두하던 아주머니는 귀찮은 생각에 거지를 내쫓았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퍼서 달려 나가 보았으나 거지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 예”.

    권선생은 이야기 끝에 여태껏 들은 설교 중에 진짜 설교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잘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여호와를 알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 여러분과 저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구체적인 방법 : 

    1.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돌아가기(悔心) : 

    요엘서 2:12
     “이제라도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돌아와라, 나에게로! 너희 마음을 다해, 금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 금식하고 울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신속히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2. 하나님을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關係 恢復)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깊이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친밀함을 쌓아야 합니다. 

    3.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섬기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은혜와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행위이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로운 소망을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본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1.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권면으로 보는 견해(Keil). 
    2. 회개의 날에 백성들 서로가 뉘우치며 권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Lange, Wood, Chrisholm). 

    이상의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태도를 독백과 대화체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미래에 있을 백성들의 회개에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Harper, Ewald, Cheyne).

    우리를 찢으셨으나 
    - '찢다'의 히브리어 '타라프'(*)는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심판이 가혹함을 암시한다(5:14; 시 50:22).

    낫게 하실 것이요 
    - 5:14에서 예언된 멸망과 형벌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있을 경우 심판의 자리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임이 선언된다. 
    이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여호와의 사랑과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신 32:39). 
    한편 이것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된 회개를 전제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let us return to the LORD)


    7725. 돌아가다(슈브. shûwb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찢고 상처 입히셨지만, 다시 살리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며, 그분께로 돌아와 자신을 알자고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한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기회를 주시며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시지만, 백성은 진실한 회개 대신 형식적인 제물만 드리는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의 주요 내용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1-3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호소로 시작합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으셨으나 다시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며, 이틀 후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돌아가면 구원과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 진실하지 않은 백성들의 회개 (11절, 13절)
    • 백성들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 지적합니다. 

  • 형식적인 희생 제사만 드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식과 자비로운 행동은 부족했음을 비판합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3절, 6절)
    • “우리가 주님을 알자”고 외치며, 진정한 예배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 "내가 기뻐하는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6절의 말씀은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1-3절, 6절)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주권자 되심이 드러납니다. 

  • 12 <너희 마음을 바꾸어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3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4 주께서 그 마음을 바꾸시며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너희가 여호와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쉬운성경)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세아 6:1-3)

    호세아가 활동할 당시 북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5-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할 당시에 북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는데(호 1:1) 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그 영토가 가장 넓게 뻗어 나갔습니다. 
    그 말은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이 그 어느 왕이 다스릴 때보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보다 더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영적인 상태와 세상의 축복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4장에서는 그런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비록 겉으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번성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곪아 터진 이 모습이 바로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의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며, 실제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지(B.C. 753) 31년 후(B.C. 722) 호세아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는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그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이 북 이스라엘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모든 면에 번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나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라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상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던 북 이스라엘처럼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 우리의 겉모습이 아무 문제가 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이 고작 31년 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렇게 초고속으로 번성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초고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더라도 속으로 북 이스라엘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북 이스라엘처럼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혹시라도 북 이스라엘처럼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씀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이 일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즉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의 속사람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든 면에 강건하게, 튼튼하게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겉과 속이 함께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면 갈수록 모든 면에 더욱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호세아서 4: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1-13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절대로 섬겨서는 안 되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가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거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우상숭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만큼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지식을 원어로 “다트”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다트”라는 단어는 “야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설교에 자주 인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로만,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야다”라는 단어는 그 사람을,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야다”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자녀를 알고 자녀가 아버지를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야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의 “지식”이라는 단어 “다트”“야다”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결과가 멸망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3절 上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애가 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만 하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동족들의 모습이 너무 애가 타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할 때는 “힘써”라는 말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추적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화 같은 데서 경찰이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을 볼 때 쉬엄쉬엄 추적하는 경찰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찰은 없습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어서 범인을 추적해서 결국 범인을 체포하고야 맙니다.

    호세아는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자기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과 시간과 땀과 수고를 다 쏟아 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아가기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나님께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어떻게 합니까?

    그 방법은 어떻게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입니다. 전화를 사용하든지, 메일을 사용하든지, 문자를 사용하든지, SNS를 사용하든지, 직접 만나서 밥을 사주든지,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든지, 취미생활을 같이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줍니다. 거기에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땀이 투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알고 나면 우리는 절대로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는 우리를 그 어떤 것도 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비록 겉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속으로 곪아터져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자기 동족들에게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똑같은 호소를 하시고 계십니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겉으로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하는 호세아의 호소를 우리에게 하는 호소로 받아들이고 지금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예배에 참석하든지, 신앙서적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전도를 하든지, 교회 봉사를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계속해서 친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며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우상숭배 죄와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부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관계적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멸망이 아니라 살아나고 일으켜지는 회복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원한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9월 25일(목) 호세아 10-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Sow for yourselves righteousness, reap the fruit of unfailing love, and 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for it is time to seek the LORD, until he comes and showers righteousness on you.

    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묵은 땅(5215) 니이르(nîyr) /   נִיר

    1. 개간된 땅.  2. 새로 일군밭.  3. 잠 13:23
    발음 [ nîyr ] 
    어원 / 5214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개간된 땅, 새로 일군밭, 잠13:23, 렘4:3, 호10:12.
    • 관련 성경 /  경작지, 밭을 경작함(잠 13:23), 묵은 땅(렘 4:3).

    5214. נִיר

    1. 땅을 갈아 엎다.  2. מָנוֹר
    발음 [ nîyr ] 
    어원 /  521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듯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땅을[쟁기로] 갈아 엎다, 렘4:3, 호10:12.
      •  a. 동사 [주]מָנוֹר, 멍에, 농기구[쟁기].
    • 관련 성경  / 갈다(렘 4:3), 기경(起耕)하다(호 10:12).


    호세아 10장 12-15절

    묵은 땅을 기경하라

     

    가. 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14절,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며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선지가 호세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국은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의 말씀을 가벼이 보면 안 된다. 여기서 “살만이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초토화)와 “어머니가 자식이 함께 부셔졌도다”라는 말은 심판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는 모범적인 사례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 15절에서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벧아벨’과 ‘벧엘’ 그리고 ‘새벽’은 단순히 교인이 아니라 참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 문제는 교만이다.

    13절,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이유를 말하고 있다. 물론 심판의 직접적 이유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간접적인 이유는 교만인데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는 말씀을 통해 교만이 죄의 원인임을 밝히신다.

    * 사람이 자신의 길을 의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자신의 길(데레크, 삶의 방식)을 의뢰하는(바타흐, 확신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법궤를 앞세우고 그것의 뒤를 따르라고 하셨다(수3:3참조).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그때는 결국 암흑시대가 되었다(삿17:6참조). 사탄의 타락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한 것에 있었음을 참조하라(사14:12-14참조).

     

    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12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 교만은 죄를 가져오고, 죄는 심판을 불러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의를 심어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 여기서“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땅을 갈아엎으라”라는 것이다. ‘기경하다’(니르)는 ‘땅을 쟁기로 갈아엎다’라는 뜻이다.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 잡초의 뿌리가 죽는다.

    * 묵은 땅(니루)은 단순히 ‘오래 묵은 땅’이나 ‘길가와 같이 딱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마13:19 참조). 

    묵은 땅은 ‘기경한 땅’이지만 지금까지 계속하여 악을 심고 죄를 거두어들이던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묵은 땅은 악을 심고 죄를 거두는 일에 만성이 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 죄를 짓는 일에 만성이 되면 결국은 감각을 잃는다. 
    바로가 강퍅하게 되는 단계는 첫째 ‘고집하다’(하자크 칼형)이고, 
    둘째는 ‘둔감해지다’(카베드 히필형)이며, 
    셋째는 ‘강퍅하게 하다’(하자크 피엘형)이다. 
    즉 고집부리다 보면 둔감해지고 결국 강퍅하게 되므로 계속 갈아엎어야 한다.






    אֶרֶץ 776 [’erets]

  • 1. 명사
  • 2. 명사 나라, , 출3:8, 13:5, 창21:32, 룻 1:7.
  • 3. 명사 [주] 복수 אֲרָצוֹת의 뜻은 ‘토지’[창26:3,4]로서 보통 정관사와 함께 쓰인다. 특히 후기 히브리어에서는

  • אֲדָמָה 127 [’ădâmâh]
    • 1. 여성형 명사
    • 2. 여성형 명사 흙[통곡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먼지를 뿌릴 때 사용됨], 삼상4:12.
    • 3. 여성형 명사 들판[경작되는 곳], 창47:19, 시105:35, 사28:24.




    너희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義(의)를 심고 矜恤(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起耕(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臨(임)하사 義(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8:7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경에서 땅 또는 밭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성서와 땅 / 땅의 기본적 의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창 2:8)

    땅은 구약 이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이다. 인간 자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이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이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이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이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지칭한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다마’와 ‘에레츠’ 두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흙은 뭔가를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뭔가를 심으면 그것을 열심히 키워주고 성장시킨다. 
    물이 오면 그 물길을 만들어주고 땅속으로 스며들게 해준다. 
    태양이 비치면 따뜻하게 품어주고 눈이 오면 땅을 덮도록 놔둔다. 
    욕심이 없다. 
    자연의 흙은 그렇다.

    사람의 흙을 관할하는 토기운은 어떨까. 적당하면 무난하게 중도를 지키지만, 과다하면 <천하태평, 과유불급, 욕구불만, 자기위안>의 특징들이 드러난다. 
    토기운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넓으면 어떨까. 땅이 너무 넓으면 무엇을 심을지 좀 막막하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자니 왠지 힘들 것 같고, 경작을 안하자니 땅이 아깝고......그러다가 결국엔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천하태평이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땅을 너무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로도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굳이 뭔가를 심거나 힘들게 경작하지 않아도 <내 땅인데 어디 가겠어?>라며 배만 두드리고 세월을 보낸다. 
    너무 많아도 탈이다. 
    자신이 능력껏 일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크기의 땅을 가지면 열을 다해서 농사를 지을텐데, 너무 넓으면 오히려 손놓고 땅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한다. 
    그게 내 땅인데 하는 마음으로 에헴~ 하고 수염만 쓰다듬는다.

    땅은 속이지 않는다.  
    심는대로 키우고 나는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土氣運)은 믿음이다. 
    자신을 믿는 것이다. 
    토기운이 적당하면 자신감도 좋고 남들에게도 너그러이 잘 퍼주는 장점으로 작용하는데.....토기운이 너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변질된다. 남에게도 잘 퍼주지만, 퍼주는 것 이상으로 더 받으려고 한다. 사람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이 과다하면 모든 것에서 욕심도 많아진다. 
    만족을 모른다. 
    욕구불만이 항상 따라다닌다. 
    만족할 정도로 뭔가 들어와도 욕심이 또 커진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그 불만족으로 불행하게 살아간다. 
    아주 크고 넓은 땅을 타고났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 넓은 땅을 짊어지고 살아가게되는.......무거운 삶을 자처하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릴때도 잘 안풀릴때도 있다. 
    잘 안풀릴때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실수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 탓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토기운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그렇게 돌아볼 반성을 묻어버린다. 
    <뭘 그 정도갖고 내가 나를 탓해! 다음에 다시 하면 되잖아! 쫀쫀하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태평한 마음으로 자기를 너무 믿는 자기위안과 자가당착에 빠진다. 
    다음에 또다시 같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또 마찬가지로 속편하게 마음먹어 버린다. 
    마음을 먹어버린다. 
    넓은 땅에 묻어버린다.

    마음이란 이렇게 여러가지로 변할 수 있고 여러가지로 얼굴을 바꾼다. 
    토기운이 과다하면 그렇게 마음이 뻔뻔해지고 자기방식대로 속편한대로 생각하고 마음먹는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는 커녕, 자기방식대로 자기마음대로 생각하기에 <나는 그게 솔직한거야>라는 착각에 빠질수도 있다.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게 더 큰 문제일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다 같은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그리 정직한게 아니다. 
    마음을 믿을수도 없고, 안 믿을수도 없다. 
    자기 마음의 크기와 넓이를 아는게 먼저다. 
    땅은 너무 좁아도 너무 넓어도 문제다.
    욕심이 많은게 꼭 나쁜건 아니다.
     그 욕심 때문에 큰 일, 좋은 일,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낼수 있다.
    욕심을 버려라? 
    사람이 욕심없이 살수 있을까?
    다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심인가를 봐야 할 것이다.
    욕심이 많다면 그 욕심만큼 남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그 욕심만큼 살지 못하니 그것이 불만이 되고, 하다가 팽개치는게 아닌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누가복음 8:15)

    좋은 땅은 길 가나 바위나 가시떨기가 없는 땅을 말합니다. 좋은 땅은 길 가와 같이 굳은 마음, 얇게 깔린 흙 밑에 깔린 바위와 같은 마음, 염려, 재물, 향락과 같은 말씀의 영양분을 빼앗아가는 가시떨기의 마음이 없는 마음 밭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 수용성이 있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15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예수님은 씨앗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in an honest and good heart( KJV, ESV, NASB95, RSV)로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투명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외식하거나 자기를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는 척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온갖 악행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듣는다”는 것은 복음의 수용성을 말합니다. 
    좋은 흙은 깊고 부드러우며 기름지고 깨끗합니다. 
    씨앗은 땅 속으로 잘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씨앗은 영양분을 얻어, 자라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지킨다”는 말은 hold it fast(ESV; NASB95; NRSV; RSV)로 ‘굳건히 붙잡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katechō로 ‘소유하다, 붙잡다’는 뜻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듣고 지키어

    “듣고 지키어”라는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행 17:1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은혜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믿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과 이성을 주셨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체계화시키면서 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견고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마음”은 제자들처럼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질문함으로 알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씨앗 비유 뿐만 아니라 다른 비유에 대해서도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문답식 교육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코 불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괜히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려고 딴지를 거는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음껏 의문을 던지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질문을 하면 교만하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너그럽고 온유하시며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과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영적 소원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견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습니다. “지킨다”는 말은 ‘굳게 붙잡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잘 알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할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말씀의 종으로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이 말씀을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영접합니다. 이렇게 유연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역사합니다(살전 2:13).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아주 평범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들 마음에 비추십니다(고후 4:6).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떡을 기대하고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더이상 떡을 만드는 기적을 베풀지 않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그들은 “영생의 말씀”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요 6:68).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영생의 말씀”으로 영접했습니다(요 1:14). 

    인내로 결실하는 자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종류의 땅인 돌밭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음으로 자라지 못하고 마르게 된 예를 드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인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러한가 상고하고 제자들처럼 질문을 던짐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그 결과 그 가치를 깨닫고 굳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시련이 닥쳐도 굳건히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내”는 원어로 ‘아래 머무르다’는 뜻으로 어떤 원칙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견디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또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련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성품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 압박하는 세력 너머에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잘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히 12:2).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는 인내로 결실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박해할수록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행 6:7).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예외 없이 엄청난 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에서는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고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씨 중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씨앗은 그 생명력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 씨앗은 예외 없이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100% 열매를 맺습니다. 뿌려진 씨앗은 씨앗 하나에 하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마 13:10-23; 막 4:13-20). 

    나중에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말씀의 씨앗이 좋은 마음 밭에 심기어질 때 어떻게 자라는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말씀의 생명력을 잘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새들의 쉼터가 될 만큼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씨앗 중 하나에서 그렇게 큰 나무가 나올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이 작은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큰 식물을 자라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편37편의 말씀 중 “온유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 한다는 말씀을 처음 접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동산을 많이 차지하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재테크에 강하고 탐욕스럽고 투기꾼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틀릴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편37편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시편37편은 40절까지로 되어 있는 긴 성경입니다. 암송한다는 것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을 포기할까 하다가 그래도 도전하였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가슴에 새기고, 또 다시 읽고 새기고 하는 중에 지금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시편37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대충 세어보니 9번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땅을 차지한다”, “땅을 물려받는다”, “땅에서 길이길이 산다”, “언제나 땅에서 산다”, “땅에서 끊어진다” 등 땅, 땅, 땅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아무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주님이 베푸신 복을 받은 사람, 악한 일 피하고 선한 일 힘쓰는 사람, 의인, 주님께서 높여주시는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그들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는 악한 생각들을 정복하고 마음의 청결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질투심이 없고, 분노가 없고, 자랑이 없고, 허영심이 없고, 교만이 없고, 탐욕이 없고, 정욕이 없고, 탐식이 없고, 게으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아 그런 악한 생각들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악한 생각들, 악덕들이 시편37장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악한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악인들, 악한 자들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일 수 있습니다. 옛 성인들은 우리 안에 악과 선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악이 득세할 때는 나도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힘을 얻을 때 나도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37장에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이 바로 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는 얼마나 허영심이 많이 있는지요. 믿는 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교만한 마음이 많이 있는지요.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탐욕이 많이 있는지요. 자기가 행한 선을 자랑하고, 교인 숫자 자랑하고,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몇 번째 큰 교회라고 자랑하고, 자기가 이룬 업적 자랑하고, 어느 목사를 지칭하면서 차세대 한국 교회 대표주자,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 남다른 설교의 대가, 능력의 종, 권능의 종, 이 시대 최고로 쓰임 받는 종 등으로 표현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어느 목사는 자기가 비행기를 탔는데 승객들을 향하여 ‘나 때문에 여러분은 다 안전합니다! ‘라고 선포하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허영심은 교만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나 교계에서 허영심과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허영심과 교만은 무서운 죄입니다. 땅, 즉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죄 말고 더 큰 죄가 있을까요? 허영과 교만 말고도 다른 모든 악덕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덕들을 주님의 은혜로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땅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 땅은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악덕을 극복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임하고 어떠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시련도 이기는 영적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한국 개신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악덕을 극복하는 영적전쟁을 배우고 훈련하였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바로 3박자 축복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회는 깊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를 작시 하신 분은 땅을 차지하는 경험을 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부의 마음

    가을이 찾아오면 농부의 마음을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농부의 마음이다. 농심은 천심이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고 말씀하셨다. 농부의 마음을 읽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농부는 하늘을 보고 산다. 농부는 위를 보고 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 농부는 혼자의 힘만으로 농작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위에서 비를 주시고, 태양 빛이 있어야만 곡식이 자란다는 사실을 농부는 잘 안다.

    농부의 마음은 무릎을 꿇는 겸손한 마음이다. 농부는 무릎을 꿇고 산다. 땅을 경작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땅에 심은 곡식을 돌보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농부의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겸손을 배운다. 농부를 보면 무릎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들은 모두 무릎을 꿇는 헌신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농부의 마음은 정직하다. 농부는 심은 것을 거두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안다. 농부의 마음은 기대하는 마음이다. 농부의 마음속에는 빛나는 설렘이 있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가슴속에는 출렁거리는 가을이 담겨있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심으면서 오곡백과가 넘치는 논밭을 본다. 그러므로 농부는 비전의 사람이다.

    농부의 마음은 풍부한 마음이다. 농부는 비록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지만 풍부의식속에 산다. 자연의 풍부함을 안다. 생명의 풍부함을 안다. 농부는 씨앗 속에 담긴 가능성을 알고, 무한한 잠재력을 안다. 작은 벼를 한 알 심으면서, 그 한 알의 씨앗을 통해 수많은 곡식을 추수할 것을 안다. 농부는 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곡식을 사랑한다.
    농부는 생명의 신비를 안다.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다. 또한 농부는 생명의 역설적인 능력을 안다. 생명이란 비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강해지며, 역경 속에서 더욱 순수하고 크게 자란다. 뜨거운 여름 태양빛 아래서 곡식은 알차게 여무는 것이다.

    농부의 마음은 가꾸는 마음이다. 가꾸는 마음은 아름답다. 가꾼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이다. 돌봄은 관심에서 시작하고 관심은 사랑에 있다. 결국 농부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땅을 가꾸고, 곡식을 가꾸는 농부에게서 우리는 정성을 배운다. 성실을 배운다. 성실처럼 고귀한 성품은 없다.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성실에는 황혼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보배로운 성품을 우리는 농부에게서 배운다.

    농부의 마음은 인내하는 마음이다. 기다리는 마음이다. 농부는 준비하며 기다리고, 가꾸며 기다리고, 추수 때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인내를 통해 성취되고 열매를 맺는다. 거듭 기억하라. 농심은 천심이다. 그래서 농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롭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이다.

    天 : 하늘 천(大/1)
    長 : 긴 장(長/0)
    地 : 땅 지(土/3)
    久 : 오랠 구(丿/2)

    (유의어)
    천양무궁(天壤無窮)

    출전 :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하늘만큼 길고 땅만큼 오래되다. 

    하늘과 땅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다. (애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이는 무사(無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이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노자(老子)' 제7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천장지구'는 성인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늘과 땅만큼 오래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유래한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詞中有誓兩心知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석 장생전(長生殿)에서

    夜半無人和語時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恨)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장한가'는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전단은 총 74구로,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양귀비가 죽은 후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창자가 끊기듯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그렸다.

    후단 46구는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도사가 선계로 가 선녀가 되어 있는 양귀비를 만나 그녀에게 들은, 현종을 그리워하는 양귀비의 마음과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되어 있다.

    위에 예를 든 부분은 선녀가 된 양귀비가 도사에게 이야기해 준, 천보(天寶) 10년(751) 칠월칠석에 현종과 양귀비가 화청궁(華淸宮)에 거동하여 노닐며 장생전에서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는 구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인 '천장지구'가 유래했다.

    '장한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윤색되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제재를 제공했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끝이 있을까. 하늘만큼 길고(天長) 땅만큼 오래(地久)라는 하늘과 땅이 처음 존재했던 때로부터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었다는 무한의 뜻이다. 이 말이 귀에 익은 사람들은 홍콩의 느와르 명작영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1990년 유덕화(劉德華), 오천련(吳倩蓮)의 애틋한 사랑은 속편까지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원제 천약유정(天若有情)도 당(唐)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시구에서 따왔다지만 우리나라서의 번역명은 더 잘 알려진 데서 나왔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실려 있고, 역시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백거이(白居易)의 사랑 표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도덕경의 제7장 도광(韜光)장을 먼저 보자.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능히 이런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가 태고 때부터 영원한 존재인 하늘과 땅이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은 이어지는 성인을 비유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은 자신을 위한 것을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고, 자신보다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성인뿐 아니라 천도의 무위자연을 본받아 사심 없이 대하면 누구나 훌륭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돌려 말한 노자에 비해 낙천(樂天)이란 자로 더 잘 알려진 백거이는 글자대로 하늘과 땅만큼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장한가는 전체 4장에 120구, 840자나 되는 장편으로 당(唐)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과 미인의 대명사 양귀비(楊貴妃)의 비련을 그렸다.

    마지막 장에 성어가 나오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관계를 말하는 비익연리(比翼連理) 구절부터 보자.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하늘에선 날개 붙은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가지 붙은 연리지 되길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도록 자기를 뒤로 하고 남을 앞세우는 훌륭한 사람이 본받을 일이다. 남을 위해 일을 하겠다는 지도층이 명심할 말이고 일반 사람들은 영원한 남녀의 사랑에 더 솔깃하다. 사랑하는 짝이 나타나면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며 상대에 진심을 알아 달라고 애탄다.

    사랑이 성공한 뒤에는 초기에 열렬한 만큼 쉬 식는 사람도 많다. 더 문제인 것은 적령기의 청춘들이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아예 사랑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비익연리가 되고 하늘처럼 땅처럼 영원한 사랑이 많아져야겠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통행본 장 7장

    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不以其无私與.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故能成其私.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 天長地久.
    '노자'는 여기에서 하늘과 땅의 장구함을 말함으로써 사람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자연을 독해하여 교훈을 얻는 것은 '노자'의 주요한 어법이다.

    왜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고 하였는가? 길다는 것은 모양이고, 오래간다는 것은 시간이다. 원래 하늘은 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모양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고, 땅은 모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간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다. 그 혐의를 벗기 위해서 거꾸로 이야기한 것이다. 재미있는 설명이다.

    소철은 하늘과 땅도 형체를 가졌으므로 장구함에는 한계가 있고, 진정으로 장구한 것은 천지의 시작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곧 천지의 시작 같은 형이상의 세계만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송대의 분위기다. 상식적 정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문제를 잡아내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주겸지는 이것이 원래 옛말인데, '노자'가 인용하여 풀이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 전체가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는 금언을 풀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생(自生)'이라는 말은 '자사(自私)'라는 말과 같다. 곧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겁지겁 자기만 배부르기를 도모하고 사사로이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자기에게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장생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면 사물(남)과 다투게 되고,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으면 사물과 함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자'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는 일의 폐해를 이야기한 바 있다. "백성들은 살고 또 살려고만 하니 몸을 움직여 사지로 가는 것이 또 십 분의 삼이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한다." "무릇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귀하게 잘 여기는 것이다." 지금 문장과 서로 참고하면서 보면 더 좋겠다.

    여기에서 '생(生)'자를 '태어난다' 또는 '태어나게 한다'는 뜻으로 푸는 경우도 있다. "죽지 않으면 태어남도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야 능히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生生)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마치 골짜기의 신(곡신)과 같다."

    이런 해설은 '열자' 천서의 다음 문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만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 할 수 있고, 변화하지 않는 것만이 변화하고 또 변화하게 할 수 있다. (…) 사물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고, 사물을 변화하게 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말에 대한 '열자'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멋들어지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을 택한다면 이 문장이 어떻게 뒤의 문장과 연결되는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앞의 문장을 부연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어떤 좋은 결과가 있는가를 설명한다.

    하상공에 따르면 "남을 먼저하고 나를 뒤로하면 천하가 그를 존경해서 먼저 어른으로 모신다. 자기를 박하게 하고 남을 후하게 하면 백성이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신명은 그를 어린아이처럼 보우해서 몸을 항상 보존하게 된다."

    각기 다른 해설이 있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는 말과도 서로 통한다.

    '도응훈'은 이 말을 공자 시대의 인물인 공의휴(公儀休)의 고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공의휴는 생선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그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좋은 생선을 갖다 바쳤으나 전부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제자가 까닭을 물었을 때 공의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직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다. 생선을 받아서 재상직에서 쫓겨나게 되면 비록 생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없을 것이고, 생선을 받지 않고 재상직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오랫동안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의휴는 생선을 좋아하면서도 그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선물로 들어오는 생선을 물리쳤으므로 자신을 뒤로 물린 것이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생선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앞에 있게 되었다

    이 고사는 '한시외전' 권3에도 인용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도 역시 '노자'의 지금 문장을 소개한다. 단지 '한시외전'은 '노자'를 소개한 후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시'의 정신도 이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고 첨언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공의휴의 고사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시'의 정신과 연결될 만한가? 철저한 도덕주의자가 본다면 공의휴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공리주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익에 대한 계산쯤은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닌가. 복을 바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노자'의 문장은 궁극적으로 사사로움이 없는 삶의 태도(無私)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과 연결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공의휴의 고사는 원래 '한비자 외저설우하'에 나온다. '도응훈'은 한비자를 보고 그 고사를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도응훈'의 '제자(弟子)'라는 말은 '외저설우하'에서는 '동생(弟)'으로 되어 있는데, '도응훈'이 고사를 가져올 때 약간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고사는 '안자춘추'에서 제나라의 현신 현장(弦章)의 일로 언급된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선물로 들어온 고기를 사양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현장은 안자를 이어 경공(景公)을 도운 인물이므로 역시 공의휴처럼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여기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주인공만 바뀌어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중국 고사 전설의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 不以其无私與. 故能成其私.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이 문장은 예로부터 약간의 혐의가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 때문이다. '사'는 '설문'에 '사(厶)'로 되어 있는데, 이 글자는 원래 간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개인을 가장 강조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개인주의 하고는 거리가 멀고, 전시대를 통틀어 보면 멸사봉공의 막강한 공사 관념이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에 혐의가 잔뜩 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가령 "사사로운 이익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일의 추세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마치 겸손히 있는데도 빛이 나고, 몸을 잊었는데도 장수를 누리는 것과 같다"는 식의 발명이 필요했다.

    이런 해설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 문장도 역시 앞에서 말한 '무위이무불위'의 말의 구조를 통해서 이해하면 쉽다.

    곧 앞의 사사로움과 뒤의 사사로움은 함의가 다르다. 뒤의 사사로움이라는 말은 "몸(身)을 두고 말한 것이지 공·사의 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보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노자'의 말의 구조는 좀더 복잡하다.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노자'의 본의에서 볼 때 무소불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아닌데도 결국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역시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시 그런 암시를 준다.

    경공이 안자에게 물었다. 
    "반듯한 정치를 해서 장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안자가 대답하였다. 
    "그 행함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안자춘추 내편 문하)

    ◼ 천장지구(天長地久)

    중국 영화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제목 중에 '天長地久'란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는 뜻인데요, 유덕화와 오천련이 주연으로 나온 이 영화는 '하늘과 땅처럼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 '천장지구'는 원래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천장지구의 원래 뜻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변치 않는 사랑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하늘과 땅은 장구합니다(天長地久). 천지가 저토록 장구 할 수 있는 이유는(天地所以能長且久者는) 억지로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以其不自生이라). 그래서 천지는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故로 能長生이라).

    이 구절에서 노자는 하늘과 땅이 수많은 세월동안 장구(長久)한 이유를 '부자생(不自生)'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생(自生)은 스스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부(不)'라는 부정어가 붙어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간섭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품안에서 자라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체일 뿐 강요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데요.

    천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풀 한포기 나무가 한그루마저도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는 어머님의 마음을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노자는 이런 자연의 불간섭 원리를 그의 철학에 적용하였습니다. 리더는 천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강요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을 통해 사람들을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자연(自然)의 결과를 내라는 것입니다. 일명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역설적인 리더십입니다.

    노자철학에 의하면 리더는 간섭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천지(天地)를 닮은 리더가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직원들이 스스로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강요하는 리더보다 오히려 장구(長久)하게 리더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뒤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後其身而身先). 
    한 발짝 밖으로 비켜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안에 있게 될 겁니다(外其身而身存)."

    내가 리더로서 남보다 낫고 그들을 다스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억지로 지도하려 할 때 오히려 그 자리를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리더십 철학입니다.

    억지로 간섭하지 않기에 오히려 장구할 수 있고, 군림하려 하지 않기에 결국은 위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노자의 이 기막힌 '역설의 리더십'을 저는 일명 '조용한 리더십'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행복한 동행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느 때는 그냥 두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관심'이라는 간섭 때문입니다. (...) 사랑이란 일으켜 세워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강요한다고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말없는 가르침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해 보십시오. 섬기는 리더가 오히려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노자의 아름다운 철학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에게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장지구', 우리 가슴 속에 늘 채우고 살아야 할 삶의 화두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물질적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줄거리

    이야기는 도시에 사는 언니와 시골에서 농부와 사는 동생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언니는 상인과 결혼해 자신의 호화로운 도시 생활을 자랑한다. 
    이에 동생은 도시 생활은 악마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으며, 농촌 생활이 훨씬 안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동생의 남편 ‘파홈’은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말한다.

    “우리 농부들은 어릴 때부터 땅을 벗 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다만 넓은 땅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원하는 만큼의 땅만 가질 수 있다면 악마도 무섭지 않을 텐데.”

    난로 뒤에서 이들의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던 악마는 파홈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악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내가 너에게 땅을 넉넉히 주겠다. 그리고 그 땅으로 널 홀리겠다.”

    첫 번째 땅을 소유한 파홈

    파홈이 사는 마을 근처에는 한 여성 지주가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소작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새로운 관리인이 들어오면서 관리인이 소작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여지주에게 땅을 자신에게 팔아달라 요청했고, 이때 파홈도 15정보(약 5만 평)의 땅을 사게 된다.

    그는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으며 점점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 농부들의 가축이 그의 땅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했고, 파홈은 이웃들과 다투게 되었다. 땅으로 인해 소송을 걸고, 벌금을 매기고,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더 넓은 땅을 찾아 떠난 파홈

    그러던 어느 날 파홈은 먼 지방에서 온 한 농부로부터 볼가강 너머의 기름진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곳의 농부들은 조합을 통해 땅을 배분받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자신이 가진 땅을 모두 정리한 후 가족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땅에서 그는 50정보(15만 평)의 땅을 분배 받았다. 땅이 넓어 만족스러운듯 했지만, 넓은 땅에 대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커져갔다. 그는 파산한 농부가 헐값에 내놓은 땅을 사기로 했다.

    땅값의 잔금을 준비하던 때, 파홈은 바시키르라는 마을에서 온 상인에게 솔깃한 정보를 듣게 된다. 바시키르족이 사는 마을에 가면 매우 싼 값에 땅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을 기회라 생각하고, 일꾼 한 명을 데리고 바스키르족이 있는 마을로 향한다.

    바스키르족과의 거래

    바스키르족은 친절했다. 바스키르의 촌장은 파홈에게 원하는만큼 땅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땅을 파는 방식은 매우 특이했다. 땅값으로 1000루블을 지불한 뒤, 갖고 싶은 만큼의 땅을 하루 안에 걸어 표시하면 그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날 밤, 파홈은 엄청난 땅을 얻을 생각에 설레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파홈은 잠결에 텐트 밖에서 나는 촌장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밖을 내다보니 촌장이 배를 움켜잡고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촌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바스키르를 소개해준 상인이었다. 상인에게 말을 걸려고 쳐다보자, 상인이 갑자기 악마로 변했다. 악마는 바닥에 쓰러진 한 남자를 보고 깔깔 웃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파홈 자신이었다.


    파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파홈은 불길한 꿈을 꾸어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서둘러 일꾼과 함께 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촌장은 여우털 모자를 어느 땅에 내려놓고 파홈에게 이곳에서부터 출발해 돌아오라고 말했다.

    파홈은 삽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비옥했다. 1km쯤 갔을 때, 그는 구덩이를 파서 잔디 조각을 놓아 자신의 땅이라고 표시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 펼쳐진 탐스러운 땅으로 인해 파홈의 걸음은 빨라졌다. 중간에 몇 번씩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아직 돌아가기는 이르고, 조금만 더 가면 더 넓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정오가 되어 그는 잠시 빵과 물로 끼니를 해결한 뒤 다시 한참을 들판을 걸어다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파홈은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멀리 와버린 탓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파홈의 숨이 가빠졌다.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출발 지점을 향해 뛰었다.

    출발 지점에 가까워졌을 때, 파홈은 언덕 위에서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덕 위에는 아직 해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언덕을 올랐다. 촌장은 옆구리를 움켜 잡고 웃고 있었다. 마침내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파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이 여우털 모자에 닿았다.

    촌장이 소리쳤다.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짜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일꾼이 달려가 쓰러진 파홈을 일으키려 했으나, 파홈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일꾼은 파홈을 누일 수 있을만큼의 구덩이를 파, 파홈을 그곳에 묻었다.

    파홈이 묻힌 땅은 약 2m 정도가 전부였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가 주는 교훈

    톨스토이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결국 죽어서 누울 작은 무덤의 크기뿐이라는 교훈을 전한다. 파홈은 처음에 작은 땅으로도 만족했지만, 욕심이 커질수록 더 많은 땅을 원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파홈의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소유하던 물질과 재산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파홈과 성경 속 어리석은 부자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새번역 누가복음 12:16~18)

    예수님의 비유에는 한 부자가 등장한다. 부자는 수확이 많아지자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앞으로 평안히 먹고 마시며 즐거이 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새번역 누가복음 12:19)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부자 역시 부를 축적해두고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2~24)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당장 오늘 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찾으시면 소용이 없으며, 더군다나 재산과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누가복음 12:15)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이야기 속 파홈 그리고 비유 속 부자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재산이 목표가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적인 풍요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교훈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솔로몬의 깨달음: 부와 권력을 가진 뒤에 깨달은 진정한 삶의 가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솔로몬 왕은 명예와 권력은 물론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린 왕이다. 솔로몬 시기, 주변국들은 솔로몬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고, 해마다 약 23톤의 금이 솔로몬 왕의 궁으로 들어왔다. 그의 궁전에서 사용하는 모든 잔과 그릇은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예루살렘에서 은은 돌처럼 흔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인생의 말년에 허무함을 이야기하며 전도서를 기록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2)

    이 삶에서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땅, 돈 같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새번역 전도서 12:7)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13)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영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세계는 바로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적인 부요를 누릴 수 있다. 앞서 살핀 말씀처럼 재산이나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기록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그래서 솔로몬은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부요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한 것이다. 영적인 준비 없이 세상의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은 결국 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땅을 얻기 위해 내달렸던 파홈처럼 말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육적인 삶만 바라보고 사는 이들이 차지할 땅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차지할 땅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은 무한한 영광과 풍요로 가득하다.

    유한한 세상에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살 것인가?

    무한한 천국을 얻기 위해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준비할 것인가?

    이제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찾겠다”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 하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러시아어: 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므노고 리 첼로베쿠 제믈리 누즈노[*])는 1886년 출판된 레프 톨스토이단편 소설로, 톨스토이는 본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심과 그로 인한 파멸을 경고하였다.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1]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2]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는 금액에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3]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만큼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바시키르인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는데, 그날 밤에 자신이 무리를 한 나머지 쓰러져 죽게 되고 악마가 그런 자신을 보며 비웃는 꿈을 꾼다.

    이튿날 아침, 파홈은 악몽을 꾼 것을 찜찜해하면서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출발한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기름진 토지들을 보게 되고, 이것들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에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하며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누가복음 8:15
    개역개정,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그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정직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3588) 좋은 땅(테 칼레 게) 호 칼로스(2570) 게(109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그 말씀을 듣고(191),
          지키어(2722), 인내로(5281) 결실하는 자(2592) 

    듣고(191) 아쿠오(akŏuōἀκούω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관련 성경  /  듣다(마2:3, 눅4:28). 들리다(계12:10).

    지키다(2722) 카테코(katĕchō)  κατέχω
    1. 제지하다.  2. 굳게 붙들다.  3. 차지하다
    발음 [ katĕch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ῖχον, 제2부정과거 κα- τέσχον, 2596과 219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만류하다(눅4:42), 지키다(눅8:15, 고전11:2, 15:2), 가다(눅14:9), 걸리다(요5:4), 들어가다(행27:40), 막다(롬1:18, 살후2:6), 얽매이다(롬7:6), 가지다(고후6:10), 취하다(살전5:21), 머물다(몬1:13), 잡다(히3:6,14, 10:23), 차지하다(마21:38).

  • 인내(5281) 후포모네(hüpŏmŏnē)  ὑπομονή, ῆς, ἡ     

    1. 인내.  2. 대망
    발음 [ hüpŏmŏnē ]

    어원  /  5278에서 유래
    • 1.  인내, 참음, 견딤, 견인불발, 눅21:19, 롬5:3.
    • 2.  대망, 기대, 계1:9.
    • 관련 성경  / 참음(롬2:7, 고후12:12), 견디는 것(고후6:4, 골1:11), 인내함(딛2:2), 인내(눅8:15, 살후3:5, 벧후1:6).


    결실하는 자(2592)  카르포포레오(karpŏphŏrĕō)  kαρποφορέω 스트롱번호 2592

    1. 열매를 맺다.  2. 막 4:28. 3. 마 13:23
    발음 [ karpŏphŏrĕō ]

    어원 / 미래 καρποφο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καρποφόρησα, 2593에서 유래
    • 1. 열매를 맺다, 수확을 내다.
      • a.  [문자적] 막4:28.
      • b.  [비유적: 내적 생활의 결실로서의 실천적 행동] 마13:23, 막4:20, 눅8:15. 
    • 관련 성경  /  결실하다(마13:23, 눅8:15), 열매맺다(막4:28, 롬7:5, 골1:10).



    󰃨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성서학자에 의하면 구약의 중심 주제가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땅은 구약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입니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에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입니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입니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말합니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습니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아다마’와 ‘에레츠’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묵은 땅"은 "니이르(nîyr)"라고 합니다.

    아다마와 에레츠는  

     두 단어를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라(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 에게 내리시리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고 쾌쾌한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절대, 문제를 안 일으킬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감에 따라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그는 정성스레 정원을 가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소박한 것이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작은 땅뙈기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당신의 마음 밭에는 어떤 새싹들이 자라고 있는지요? 악한 열매를 거둘 악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만, 거짓, 음란, 탐욕, 미움, 다툼, 시기, 우상숭배, 이기심, 험담, 판단 등이 당신의 마음 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은 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밭에 선한 씨를 파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 정원에 흙만 있는 화분 두 개가 있었습니다. 꽃씨를 사다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틈을 내지 못했는데 여름이 지날 무렵 두 개의 화분에서 모두 푸른 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한 화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다른 화분에는 어떻게 심겼는지 참외 줄기가 자라나 납작 납작한 잎이 나서 화분의 흙을 덮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줄기에 동그란 열매가 달리더니 아기 주먹만한 참외 세 개가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향긋한 내를 풍기기 시작하여 보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요. 똑같은 화분에 무엇이 심겨졌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받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 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마음에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11:18)
    영국의 성직자 칼렙 c. 콜턴은 말했습니다. "악을 뿌리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 덕을 심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잡초가 자랐던 억센 토양에 아무 것도 나지 않게 하는 데 드는 수고보다 훨씬 적은 수고로 밀이 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욥4:8, 9)
    마태복음 13:18-23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토양의 질을 알아내는 작업입니다. 또한 땅이 씨앗을 뿌리기에 적합한가를 알아내고 개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서 이를 심는 밭인 마음이 적합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밭인가를 바로 알아 개간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 길가 밭

    길가와 같은 굳은 땅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에 이런 땅에 씨가 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 땅에 가보면 밭이랑이 좁고, 길고, 밭과 밭 사이에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길에 서서 씨를 뿌리기도 하는데 씨가 길에 떨어져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씨뿌리는 법이 있는데 나귀 뒤에다 씨 자루를 싣고, 자루 모퉁이를 잘라 구멍을 내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뿌립니다. 그러니까 자연 길가에도 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길가에 뿌려지면 이어 새들이 와서 씨를 주워 먹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기독교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적대시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진리에 아주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 생활에 적응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생각 합니다. 물론 사람의 사는 것이 항상 쉽고 어떤 긴장이나 눈물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못할 경우, 다른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생명의 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브는 뱀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정도는 점점 더 사악해 지게 되고 시대가 지날수록 악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범죄들은 과거에 저질러져 왔던 것보다도 심한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묵은 땅이기 때문에 부패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팍하여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 일이 6천년 동안을 거듭해 온 까닭에 딱딱해져서 아무리 씨앗을 뿌리려 해도 심기워 지지 않습니다. 개간되지 않은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부려도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을 개간해야만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끝없이 마음을 개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행함이 나타나고, 행함 속에서 온유와 겸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은 교만을 좀 더 적극적이고 행함 있는 믿음을 통하여 개간해 가야 합니다.

    2. 돌 밭

    흙이 얇은 돌밭 같은 땅입니다. 물론 이 땅은 모두가 돌은 아닙니다. 흙이 얇은 밭에 돌 이 깔려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땅이 대개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바위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씨를 발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땅이 얇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지 못해서 양분을 땅에서 흡수하지 못하므로 결국 해가 날 때 말라 버리고 죽고 맙니다. 무슨 일이고 시작하기가 끝내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어떤 유명한 전도자가 '1백 명 가운데 5명은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히 이끌고, 나머지 95명은 교회 안에서 성숙할 때까지 돌보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생활을 시작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개가 도중에 넘어집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도중에 실패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값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후의 환경, 즉 기독교인의 생활 내용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너무 쉽게만 생각하다가 당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일들에 관하여는 묻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안에 속하여 얼마나 충성을 하고 있는 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자랑을 하면서도 현재는 행치 않는 것을 봅니다. 돌밭은 주로 이러한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앞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고,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개조되지 않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되 영적인 믿음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영과 육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돌을 우리의 몸 안에서 빼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내가'라는 말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온 방안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며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비유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는 못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죄를 회개해야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여러분,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아십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깊은 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3. 가시 밭

    가시로 가득 찬 땅입니다.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퍽 게을러서 가시덩쿨을 윗 부분만 잘라서 불살라 버리기 때문에 얼핏 볼 때는 퍽 깨끗하게 보이지만 땅 밑에는 아직도 가시덩쿨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가시덩쿨이 다시 성해집니다. 그런데 가시덩쿨은 곡식의 씨보다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씨의 생명을 막아 버립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걱정의 넝쿨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육신에 의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는 듯 보이지만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앞서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경험, 내 지식으로 살아가서도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완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싹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하고, 마음대로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척 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들은 요나는 한참을 생각한 후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향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배에 넣으시고 그가 회개하자 그를 꺼내어 니느웨로 가게 하셨습니다. 왜 불순종했을까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려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하는데 자기 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이처럼 불순종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합니다.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물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물질이 없어 운영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없어 운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성령으로 마음을 개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편견은 금물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의 종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를 본 아론과 미리암이 책망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모세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밭을 개간하십시요.

    4. 좋은 땅

    열매 맺을 수 있는 좋고, 깊고, 깨끗한 땅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하나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 말씀을 들을 준비가 없는 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의견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없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몸은 현명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무엇이 스치고 지나갈 때 눈은 자동적으로 감깁니다. 그것을 반사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원치 않는 무엇인가가 들려질 때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은 닫혀지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이것은 어떤 때 맛없는 약이나 괴롭히는 치료법이라도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려 진리가 길가에 떨어지면 이것은 인간에게 비극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말씀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결실 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같이 아주 메마른 땅에 서 이런 결실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동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 횟수가 잦을수록 삶의 질은 좋아집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 좋은 글, 고전으로 자리잡은 모든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처럼 감동을 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은 한 사람의 일생을 감동으로 붙잡기에 넉넉한 극상의 예술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의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씨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저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가시처럼 쿡쿡 찌르는 모진 마음도 만났지만‘사람의 마음이 저렇게 선하고 비단결처럼 고울 수 있을까’하고 목사인 저까지도 부끄럽게 만드는 온유하고 품위 있는 마음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자면 향수처럼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서울 할머니라는 분이 홀로 사셨습니다. 그 옛날 서울서 공부하신 분이니 시골에서는 왕비처럼 귀해 보였습니다. 그 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분이 그 당시 전북도지사 부인이면서 이화여대 교수였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도지사 부인께서는 아들과 함께 그 집에 내려와 열흘씩 쉬어 가셨습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우리 동네에서 잘 산다는 집에서 도지사 부인을 청하여 점심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차린 밥상이겠습니까. 구경꾼이 마당 안에 가득 찼습니다. 마침내 도지사 부인께서 첫술을 뜨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짓궂은 변인지, 수저 위에 얹혀진 하얀 쌀밥 틈에 통통하게 삶아진 파리 한 마리가 툭 불거져 나왔습니다. 순간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오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얼른 밥술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셔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습니다. 그 부인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등에 부었던 나드향유 처럼 번져 갔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부끄러운 여인과 대화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여자는 남편이 있는데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연히 여자를 꾸짖어야 했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속이느냐?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도 누구 앞에서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느냐?”고 으름장을 놓을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끄러운 여인의 입장이 되셔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마음을 미리 삼켜주신 것입니다 남의 허물에서부터 나를 상하게 하는 역겨운 일에 이르기까지, 나의 거슬림을 이날까지 삼켜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삼켜야 합니다. 삼키는 일은 척박한 땅에 두엄을 묻어주는 일과 같습니다. 삼키는 일을 잘 해야 내 심령의 산성화를 막고 옥토가 되어, 남에게 감동을 주며 살아가는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마음의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은 땅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땅입니다. 해도, 비도, 이슬도 다 받으면서 아무런 보답이 없습니다. 묵은 땅은 옆 밭에 장애를 줍니다.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랫동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동안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뿐 아니고 점점 더 생깁니다. 그 습관의 뿌리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여러 가지 잡초가 그 마음 밭에 나기 시작합니다. 세상 생각,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한 마음, 비열한 마음 등의 모든 잡초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묵은 밭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빛도, 비도, 이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도덕적인 교훈을 들어도 그 마음이나 생활에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묵은 땅은 어떻게 하라고요? 묵은 땅을 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씨를 심기 전에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서 굳은 흙을 파고 뒤집어 잡초를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얕게 갈지 말고, 깊이 갈아 뿌리까지 뒤엎어야 합니다. 물론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갈아야 합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아파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을 갈기 전에 무슨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은 갈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면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복음 전파할 때 제일 먼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왜 우리가 교회에는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왜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던 분이 요사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땅이 되어 버려 그렇습니다. 묵은 밭에 씨뿌려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애써 씨를 뿌려도 소용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세요!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악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교만, 음란, 거짓, 탐욕, 시기, 미움, 분노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고 묵은 땅을 기경하여 좋은 열매 맺는 마음 밭으로 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장

    농촌에서 검소한 삶을 꾸려나가는 농부 파홈과 그의 아내는 도시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자매와 대화를 나눈다. 아내의 자매는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 지를 자랑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파홈의 아내는 농민의 삶을 찬양하고 상인의 삶을 비하하여 두 사람 간에 작은 말다툼이 일어난다. 대화를 듣던 파홈은 넓은 땅만 있다면 악마조차도 두렵지 않다고 주장했고 난로 뒤에서 이를 엿듣던 악마는 땅과 목숨을 건 내기를 준비한다.

    2장

    마을 근처에 위치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농지의 관리인은 작은 실수에도 벌금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파홈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농지의 지주가 농지를 매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농민들은 농지를 나누어 구매하기로 한다. 파홈도 이에 따라 농지를 구입했고,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농지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며 행복을 느낀다.


    85세의 갈렙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5 
    6.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1. 에서의 자손이었던 갈렙

    가나안 땅을 분배한 장소는 길갈이었고 가장 먼저 나아온 지파는 유다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항상 먼저 나아간 용감하고 담대한 지파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갈렙이 먼저 와서 헤브론 땅을 요청했다. 갈렙은 그니스(Kenizzite) 사람인데, 그니스(겐) 사람이란 창세기 36장에 기록된 바 에서의 자손 중 그나스 족장의 자손이다(11, 15절).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다 출애굽 때 함께 떠난 잡종이었다(출 12:48).

    이러한 족속 사람인 갈렙은 이스라엘에 귀화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하였고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유다 지파의 대표로 선발됐다. 출신이 이방이요 잡종인 사람이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유일하게 두 사람―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갖게 된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가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그 기업은 결정돼 있었다.

    2. 동년배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현재 그는 85세이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으로 파견됐을 때에는 40세 청년이었다. 여호수아와는 동년배이다. 출애굽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던 것이다. 그는 45년 전에 약속된 기업의 분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담대히 요청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 두 위대한 인물만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쓰러져 죽게 하신 것에서 경고와 배움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들만이 성공한다. 역대로 하나님은 동년배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예가 많이 있다. 루터와 칼빈은 12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웨슬레와 휫트필드도 동년배들이요, 같은 학교 출신들이다. 다비와 함께 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같은 년배로서 온전히 주님을 따른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도 갈렙처럼 온전히 주 하나님을 따르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갈렙은 우리에게 인생의 좋은 비전을 주고 있다. 그는 85세가 됐어도 젊었을 때의 좋았던 신앙을 회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젊었을 때 위대한 업적을 쌓고서 노년에 가서는, 아니 중년부터도 그가 젊었을 때 이룬 큰 일을 회상하며 그 꿈을 되새기는 맛으로 사는 것을 본다. 그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이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에나 늙었을 때에나 여전히 같은 영과 믿음을 소유했고 여전히 싸우며 전진하고자 했다. 그는 소위 은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더 보기로 하자! 가데스 바네아에서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치며 반역할 때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편에 섰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민 14:24). 그는 그 후로도 결코 반역적인 무리 속에 낀 적이 없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진한 사람이다.

    3.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온전히

    7절에서 그는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모세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70인 역에서는 ‘그의 마음에’로 번역했는데, ‘그의’란 ‘모세의’ 또는 ‘하나님의’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모세의 마음과 일치됐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참된 마음과 양심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마음이나 모세의 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위축되고 소심한 마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으로 보았기에 그의 본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열 정탐 중 혹 어떤 사람은 그들의 양심대로 보았다 하더라도 아우성치는 민중을 바라보면서 참되게 양심에 따라 보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참다운 사람의 양심도 아니다. 그것은 대세에 기울어진 약하고 간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갈렙은 ‘내 마음의 성실한 대로’ 보고했다. 갈렙이 승리자의 특징을 지닌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4장 14절에서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히(wholeheartedly) 좇았기 때문이라 했다. 14절 뿐만 아니라 이 ‘온전히’라는 말은 갈렙의 인생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7, 8, 9, 14절). ‘온전히’란 마음을 다한다는 말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이기도 하다. 이기는 자 곧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온 마음으로(with all heart) 섬기기를 배워야 한다. 온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면 이기는 자가 아니다.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면 이기는 자의 영이 아니다. 힘을 다하지 않는 것도 이기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이러한 이기는 자의 전형을 볼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한다.

    4. 갈렙의 단순한 성품

    여호수아서를 훌륭하게 강해한 레드파스나 몽고메리는 갈렙의 성품이 단순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이 동일하게 이러한 성품의 소유자들임을 지적했다. 몽고메리가 한 몇 마디 말을 인용해보겠다. “위대한 사람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사람들은 심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갈등과 동기들에 에워싸여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모두 함께 해결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까지 보았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에서 이 점을 보지만 그것을 달리 취하면 더 나아지리라는 것을 인정만 할 따름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은 교활하지 않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더라도 취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요인과 최선의 길을 보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몽고메리는 교부 시대의 위대한 인물인 아타나시우스와 루터, 링컨 등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그들의 소명을 지키고 나아가 결국은 승리를 거둔 인물들이다. 교회 역사는 그들에 의해 엄청난 도움을 얻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역사는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5.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그는 85세지만 여전히 싸울 것을 제의한다. 이 역시 이기는 자의 특징이다.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1절). 실상 가나안 전쟁은 이미 종료됐다(11:23). 그러니 갈렙이 꼭 현재 싸워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헤브론을 갈렙에게 줄 때 반드시 마지막 전투가 있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15:13-19). 그는 약속된 그 땅을 얻자, 거기 있던 아낙의 소생,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좇아내었고 드빌 거민을 쳤다. 드빌 곧 기럇세벨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취하자 갈렙이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주위에는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들은 같이 동역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들이 된다. 이는 교회사의 많은 사실들이 증명한다. 교회사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주위에 한두 명, 또 그 이상 매우 위대하고 귀한 조력자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다.

    6. 85세에도 전쟁을 치뤄야 하는 땅을 원하다

    그는 85세지만 쉬려 하거나 피동적이 아니었다. 그가 얻으려는 땅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땅을 갈렙은 원했던 것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절). 15절에 의하면 갈렙에게 할당된 땅은 헤브론이며 “기럇 아르바라 하였는데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고 한다.

    갈렙은 적극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했을 뿐 아니라, 그가 믿은 대로 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년에 가장 큰 아낙 사람들을 쫓아내는 위대한 일을 했다. 이기는 자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믿고 말하는 바를 행하며 그러한 길을 일생토록 곧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7. 그가 원했던 땅, 헤브론의 뜻

    그가 구한 곳은 헤브론이었는데, 헤브론은 ‘교통(fellowship)’이라는 뜻이다. 그는 최상의 상태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영적 체험으로 말하자면 세겜(능력)과 벧엘(하나님의 집)을 거쳐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장소이다. 믿음의 사람, 승리의 사람에게 주어진 최상의 기업은 하나님과의 간격 없는 교통이다. 이러 최상의 기업을 얻는 사람을 본보기로 보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갈렙과 같이 단일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한 자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 안에 들어갈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안다는 것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을 삶으로 인정하며 닮아가는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교제,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뢰,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

    1.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깊어지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방법

    a. 말씀의 묵상과 기도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생겨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삶의 생각, 말,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 b.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뇌로 인지하는 지식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직접적인 사귐을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 c. 삶의 주인으로 인정 
    지식적인 앎을 넘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d.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생각, 말, 행동이 점차 하나님과 같아지는 변화를 수반합니다. 


  • e. 영생의 시작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에 따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합니다. 


  • 아는 것? 
    1. 신뢰와 순종
    2. 삶의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1 
    내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어떤 양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내가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를 아는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고, 그를 아는 자는 그가 명령하신 것을 행하며, 그를 아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1서 4:6-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시편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배려심 없고 이기적인 아이, 공감능력을 불어넣으려면?

    아이가 간식을 독점하려 하거나, 다른 아이의 부탁이나 도움을 들어주지 않는 행동은 보호자에게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의 이기적인 행동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기적인 행동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탐색하고 나눔의 개념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많은 어린이에게 흔히 나타나는 발달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지속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보호자가 아이들이 공감 능력을 키우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시카고대 신경과학자이자 아동 심리학자인 장 데세티 박사는 평생동안 공감, 도덕성, 친사회적 행동과 이기적인 행동의 근원을 찾아 연구해왔다. 
    그의 연구는 이기심, 공감, 이타적 행동의 신경 메커니즘을 탐구하여 어린이의 이러한 특성의 발달과 사회적 상호 작용 및 관계에 대한 잠재적 영향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은 데세티 박사가 제안하는 이기적인 성격의 아이들에게 이타심을 알게 하고, 공감을 배우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시카고대 아동 심리학자 장 데세티 박사

    공감과 관대함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배운다. 이타심을 가르치기 위해 부모와 보호자는 공감하고 관대한 행동을 일관되게 모델링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보여주고, 자원을 나누고, 자선 활동에 참여한다. 긍정적인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도 이러한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관점 잡기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공감 능력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다른 관점을 고려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이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경계와 결과 설정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명확한 경계와 결과를 설정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가르치는 데 중요하다. 아이가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면 차분하게 그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적절한 행동을 일깨워준다. 일관성이 핵심이므로 경계와 결과가 공정하고 균일하게 적용되도록 한다.

    나눔의 기술

    아이들이 이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나눔을 장려한다. 아이들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장난감이나 자원을 공유해야 하는 놀이 시간이나 그룹 활동을 준비한다. 칭찬과 인정을 통해 긍정적인 공유 행동을 강화하고 협력의 이점을 상기시켜 준다.

    감사의 중요성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친절에 감사를 표현하도록 가르치면 관대한 태도를 키울 수 있다.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거나 감사 노트를 쓰거나 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도록 격려한다.

    긍정적 강화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 때 이를 인정하고 칭찬한다. 긍정적 강화는 아이들이 공감과 관대함을 계속 발휘하도록 장려한다. 칭찬할 만한 특정 행동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강조하여 구체적으로 칭찬한다.

    친절한 행동 배우기

    자원 봉사, 이웃 돕기, 자선 단체 기부와 같은 친절한 행동에 자녀를 참여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타심이 기회 필요해

    이기적인 행동을 일관되게 다루고, 공감을 모델링하고, 이타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이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물론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인내와 끈기야말로 아이들이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장 데세티(Jean Decety) 박사 연구팀은 14개국 1,170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종교가 그들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타인에 대해 더 관대했고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조사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구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의 종교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더 관대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남을 더욱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는 외면하는 이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본과 말을 뒤집은 신앙생활은 일쑤 사람들을 위선으로 이끕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신 이 말씀이 참 신비합니다. '내가 고쳐줬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의 절실함이, 너의 큰 신뢰가, 너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작동하는 믿음과 작동하지 않는 믿음

    선진국에서 제작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한국에서는 고사를 지냅니다.
    만일 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기계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거나 인명 사고가 발생한다고 믿는 민간 신앙 때문에 반드시 그 기계를
    설치한 후에 고사를 지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동차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是認(시인)하나 行爲(행위)로는 否認(부인)하니 可憎(가증)한 者(자)요 服從(복종)치 아니하는 者(자)요 모든 善(선)한 일을 버리는 者(자)니라.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부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후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호세아 장별 요약

    호세아 1장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호세아 2장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3장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5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의 왕들이 멸망하고, 그들의 땅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 6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의롭게 만드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호세아 7장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8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9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하고, 그들의 땅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호세아 10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무성한 포도나무 같아 열마가 많은 많은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세아 11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아무 힘이 없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돌아오라 외치십니다.

    호세아 12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람과 동품을 먹듯 무의미한 애굽과 앗수르에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간사하고 불쌍한 야곱을 구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호세아 13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지파의 가장 강력한 지파였지만 바알을 섬기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아침 구름 같이 이슬같이 사라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세아 14장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고멜과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3차원 공간에서 살아가며, 길을 걷고, 집을 지으며, 물건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시간이라는 차원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4차원이란 개념을 알아보고, 시간을 넘어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1. 차원이란 무엇인가?

    "차원"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차원은 공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그리고 4차원은 차원의 다른 수준을 나타냅니다.
     
    1차원 : 선

    1차원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으로, 선 하나만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길이만을 나타내며, 방향은 없습니다.

     2차원 : 면

    2차원은 선이 두 번 겹치면 면이 됩니다. 
    이것은 길이와 너비를 가지며, 예를 들어 종이나 화면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차원 : 공간

    3차원은 면이 깊이를 가지면서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이며, 길이, 너비, 높이를 포함합니다.

    4차원 : 시간

    4차원은 시간을 추가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현재, 미래를 경험하는 데 필요한 차원입니다. 
    시간이 추가되면 사건들은 일어나는 순서대로 나열됩니다.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기

    우리가 4차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건들을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우주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하면 우주와 시간이 공간 내에서 곡선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성 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 시공간을 개념화한 중요한 이론 중 하나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며, 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왜곡됩니다.

    결론 :

    4차원은 시간을 포함한 공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우주와 우리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물리학, 천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차원이란 무엇인가? 1차원부터 4차원까지

    어떤 공간의 차원은 그 공간의 성분들 중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성분들을 최대한 모아 놓았을 때, 그런 성분의 개수가 몇 개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은 앞뒤, 좌우, 위아래의 3가지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3차원이다. 2차원 공간은 평면 위의 공간이다. 평면 위의 점을 생각해보면 점은 앞뒤, 좌우의 2가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평면은 2차원이다. 1차원 공간은 수직선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수직선 위에 있는 점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이 점은 수직선을 따라 좌우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1차원인 것이다. 1차원 공간은 간단하게 수직선 하나로만 표시할 수 있지만, 2차원 이상의 공간을 표시하려면 위치를 정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 좌표계 혹은 직교좌표계라는 것이다. 2차원 공간은 2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3차원 공간은 3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표시한다.

    1.일차원(One dimension)

    1차원은 기하학적으로 직선이나 곡선을 말한다.

    직선 위의 점의 위치는 그 위에 원점을 지정한 다음, 방향을 주고 단위의 길이를 지정하면, 직선 위의 점의 좌표인 하나의 실수로서 나타낼 수 있다. 또, 곡선 위의 점의 위치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수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직선과 곡선은 1차원 공간이다.

    2.이차원(Two dimension)

    2차원은 차원이 두 개인 것을 의미한다. 흔히 평면을 의미한다.

    2차원 평면에서 한 점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값(변수)이 필요하다. 2차원 좌표계로는 직교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와 극 좌표계(polar coordinate)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삼차원(Three dimension)

    삼차원은 세 개의 차원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물리적 공간을 지칭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삼차원 공간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물리적 공간은 좌우(가로), 전후(세로), 상하(높이)의 세 방향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의 한 점이 세 개의 좌표로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공간의 한 점의 좌표는 P = (x, y, z)로 표현할 수 있다. 좌표값을 표시한 방식으로 직교 좌표계, 원통 좌표계, 구면 좌표계가 있다.

    4. 사차원

    인간은 3차원 공간에 사는 생물이라서 4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다만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관계로부터 더 높은 차원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4차원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가 보질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의 경험이 3차원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차원이라고 해도 수학의 확실성과 엄밀성, 자연스러운 확장을 통해 우리는 고차원의 일부를 보고 느낄 수 있다.

    4차원은 수직선 4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며, 5차원은 수직선 5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공간들은 우리가 평면 위에 그릴 수 없고 단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존적 세계의 4가지 차원


    1. 물리적 차원의 자연세계
    2. 사회적 차원의 인간세계
    3. 심리적 차원의 자기세계
    4. 영적 차원의 초월세계

    인간이 살아간는 세상을 3차원의 세계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을 4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3차원과 4차원은 마치 숫자 하나의 차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3차원의 세계에서는 4차원의 세계를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서 버둥거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시겠다고 합니다.

    결혼이란 세속적인 의미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남자가 결혼한 후에 여자를 안다는 것과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 여자를 안다는 것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3차원에 머물고 있지만 하나님은 4차원의 세계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장가들지 않으면 인간은 동물과 흡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다'는 표현은 인간의 신부인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이 맺는 사랑과 헌신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으로, 특히 구약의 호세아서에 나타나는 주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를 '음란한 아내'에 비유하며, 자신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사랑하고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호세아를 통한 비유 

    •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과 구원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언약 관계 안으로 되돌려 그들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요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든다'는 표현은 인간(교회)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 그리고 언약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비유입니다. 

  • 호세아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한 아내'에 비유합니다.


  • 하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당신의 신부 삼아 사랑하시겠다는 의지를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나타내십니다.




  • 본문 호세아서에 보면 BC 760년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를 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70년 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뒤인 BC 690년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유다백성들의 남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이사야54:5절) 

    얼마나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든다. 또는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을까요?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결혼을 하지요. 결혼하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배려하고 아끼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서로 돌봐주어야지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상징적으로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 장가드신다.

     

    BC 760년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가들어 영원히 산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호세아2:19-20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장가든다는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2.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셨다.

     

    BC 760년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장가드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70년 후인 BC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또 BC 620년에는 영적으로 간음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녀(렘3:3)라는 표현까지 하시며 이혼증서(렘3:8)를 써주었다고 말씀하시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4절) 

     

      

     

    또 다시 BC 596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편 땅 앗수르에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며 나의 인도를 받을 것이며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너희는 대적의 땅에서 돌아 올 것이며 하나님께서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32절)

     

      

     

    3.예수님께서 신랑이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9장15절, 마가복음2장20절, 누가복음 5장33-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신랑이심을 비유로 암시를 하셨습니다. 찬송가 175장(통162)가사를 보면 마태복음 25장 6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됐느냐? 우리 신랑 예수 오실 때 밝은 등불 손에 들고 기쁨으로 주를 맞겠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시며 장가들며 남편이라고 표현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incarnation[ˌɪnkɑːˈneɪʃn](예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현현(顯現), 성육신(成肉身)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육신 하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는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신랑과 신부사이와 같습니다. 보아스와 룻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자요 총각인데 흠 있는 과부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흠 있는 죄인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신부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언젠가는 하나님만 아시는 때에 신부들인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텐데 우리 모두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다 참예 하시기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를 들며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또한 이사야 54장5-8절 말씀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를 지으신 이가(하나님) 네 남편이며 구속자며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다시 모으며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호세아 서론


    역사적 맥락 :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 역사의 격동기인 기원전 8세기경에 예언했습니다. 
    그는 아모스, 이사야,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과 동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왕국은 정치적 불안정, 우상 숭배, 도덕적 부패에 직면해 있었고, 호세아의 사역은 다가오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 : 

    호세아 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호세아는 심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불충실함을 생생한 은유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제 :

    호세아서의 주요 주제에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불성실의 결과, 회개, 회복이 포함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의 관계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복되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반영합니다. 

    호세아의 구조

    1~3장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징인 호세아의 결혼

     1장 :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불성실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멜은 우상 숭배를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을 상징합니다.
     2장 :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그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청을 반영합니다. 
             이는 심판과 미래의 희망을 대조합니다.
     3장 : 호세아는 고멜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되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고멜을 구속합니다.

    4~14장: 이스라엘의 죄, 심판, 회개에 대한 촉구

     4~7장 :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호세아는 지식의 부족, 불신앙, 우상 숭배 등 이스라엘의 죄를 비난합니다. 
     이 부분은 배신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강조합니다.
     
     8~10장: 반란의 결과
     이스라엘은 심판의 확실성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형벌의 도구로 예언되었다.
     
    11~14장 :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 약속

     11장 : 어조의 변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모의 사랑을 강조함

     12~13장 :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성찰.

     14장 :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회개와 회복의 약속을 촉구하는 마지막 요청입니다.

     주요 키워드 및 주제

    • 불성실함 :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영적 간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외국 동맹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불충실한 배우자로 묘사됩니다.

      언약 :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심판 : 
      불순종의 결과가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거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회개의 요청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움은 특히 11장에서 하나님을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 묘사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집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가능합니다.

      회개 : 
      회개에 대한 촉구는 호세아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청하며, 그들이 그 부르심에 귀를 기울인다면 회복이 약속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호세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는 그분에 대한 ** 친밀한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호세아 6:6 ).


    • 호세아서의 상징
      결혼에 대한 비유: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멜의 불충실함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상징하는 반면, 호세아의 끈질긴 사랑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헌신을 반영합니다.

      아이들의 이름: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예후의 집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Lo-Ruhamah ("사랑받지 못함"): 하나님의 자비를 거두심을 상징합니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합니다.

    • 핵심 구절
      호세아 2:19-20: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들어 정의와 공의와 사랑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고치시리라."

      호세아 11: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속에서 변하고 내 모든 긍휼이 불타오르나니."

    • 호세아의 메시지 요약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만성적인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지속되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 책은 판단과 희망, 분노와 연민 사이를 오갑니다. 
      궁극적으로 호세아는 임박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망은 자신의 백성이 그분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들을 위한 회복과 치유임을 강조합니다.

    • 빠른 참조를 위한 키워드
      불성실(우상 숭배, 영적 간음)
      심판(결과, 아시리아)
      언약(결혼, 서약 파기)
      회복 (희망, 구원)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긍휼)
      회개 (회개, 치유)
      하나님에 대한 지식(친밀함, 참 숭배)

      이러한 요소들이 호세아서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 책은 복잡성과 깊은 사랑, 끊임없는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