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폴리티쿠스(homo-politicus)
어느 날 #공자 가 제(齊)나라로 가는 도중 #태산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은 즉 억울하고 슬픈 사연이 있는 듯한데 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공자가 제자에게 일렀다.
제자가 그 여인에게 물었다.
“어찌 이렇게 들판에 혼자 앉아 서럽게 우시오?”
그 여인이 풀어놓은 사연이 이랬다.
“우리 시아버지가 범에 물려 돌아가시고 제 남편도 범에 물려 죽고 오늘은 제 자식마저 범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런 참혹한 일을 겪고도 어찌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단 말이오?”
“이 고을에는 나쁜 수령(首領)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여인의 대답이었다.
#나쁜_정치, #나쁜_정치가 가 #범 보다도 더 무서웠던 것이다.
좋은 정치와 좋은 정치가, 나쁜 정치와 나쁜 정치가를 가리는 것이 투표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넌 잃을 게 없다고 말하지만, 너의 여자친구와 늙은 집사가 있지 않나.
넌 이 세계를 몰라. 이해할 수 없는 건 두려운 법이지.”
우리의 세계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식과 경험,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며,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간다.
이를 인지거리라 한다.
인지거리란 내가 유의미하게 경험하는 인식의 거리이자, 내가 실제로 삶에서 신경 쓰는 세상의 전부다. 우리 뇌는 고성능 필터를 가지고 있어서 중요한 것과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세상을 분류하는데, 덕분에 내 세계의 한계가 정해지게 된다.
이때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상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디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지구 반대편에서 강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집을 잃었다는 뉴스를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겠지만, 그 슬픔이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보다는 손톱 옆에 갈라진 살이 더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복지나 인권, 성소수자, 사형제도, 최저임금,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중요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인식 범위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인지하는 세상이 더 넓다면? 고려하는 범주가 멀리까지 늘어난다.
즉, 진보주의자가 된다.
반대로 세상의 크기가 좁으면?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가 늘어난다.
즉, 보수주의자가 된다.
따라서 정치란, 선천적으로 다른 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보수와 진보가 환경적 요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인지거리는 후천적으로도 좁아지거나 넓어질 수 있지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어느 정도까지 타고난 ‘무의식적인 인지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자기만의 인지거리에 걸맞은 삶을 살면서, 그에 어울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인지거리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보수와 진보가 왜 다른 세계관과 신념을 가지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끌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인식체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프레임에 따라 정보를 재해석해 받아들이는 걸 '동기화된 추론'이라고 하는데, 보수와 진보의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는 원인이 된다.
인지거리에 따라 정치 성향이 달라진다
인지거리가 긴 진보주의자는? 사회 전체, 특히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 신경 쓰는 보수가 이상하게 보인다.
반대로 인지거리가 짧은 보수는 나와 내 주변까지만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 너머에 있는 인권이나 평등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기 이익을 양보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진보가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회 운동을 하는 모습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 강남 좌파 같은 말을 만들어 낸다. 사실 본인들이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니(인지적 당연함 때문에), 남들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지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은 어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에 기반한 진보의 정치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현실적인 욕망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를 이기주의자라고 욕하는 오류를 범한다.
인지거리가 달라지면 보는 세상도 달라진다
보수주의자는 대개 인지거리 영역 밖의 요인들이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이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걸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 귀인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개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인식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 맞춰져 있으니,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런 거고, 안 되면 남 탓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인지거리가 짧으면, 그 범위 내의 대상들에 대해 더 공감하고, 더 애정을 가지게 된다. 이를 바꿔 생각해 보면, 인지거리 내의 대상에 더 집착하거나 맹신한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투입할 수 있는 감정과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범위가 좁아지면 인지거리 내 대상에 대한 공감과 인식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더 세진다. 보수주의자들이 남의 자식에는 냉정해도 자기 자식에는 죽고 못 살거나, 경쟁 국가에는 적대적인 동시에 애국심이 넘치는 것도 좁은 인지거리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의 이타심이 '우리 대 그들'의 지역주의적 성격을 띠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의 주인공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정치적 동물’이라는 용어부터 다시 따져보겠습니다.
‘정치적 동물’은 사실 그리 좋은 번역어가 아닙니다.
차라리
‘폴리스적인 동물’이라고 옮기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그리스 본문의 뜻에 더 잘 맞습니다.
폴리스적인 동물?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지역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있었죠.
옆 동네에는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와 같은 대제국도 있긴 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가 더 완전한
국가 형태라고 자부했습니다. 페르시아와 같은 제국은 한 명의 왕이 다수의 신민을 통치하는 반면,
도시국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때문에 도시국가가 더 우월한 정치 형태라고 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지역에 퍼져있던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죠?
인간이 본성적으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정치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학』을 한국어로 번역한 천병희 님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흔한 번역을 따르지 않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왜 정치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얘기한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존 때문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꼭 필요합니다.
“맨 먼저 생겨난 것이
가정이다. (…)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렇듯 가정인데, 그 구성원을 카른다스는
‘식탁의 동료들’이라고 부르고, 크레테의 에피메니데스는 ‘식구’라고 부른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는 한 가정에서 아들들과 손자들이 분가해 나가는
것이다.
(…)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완전한 자급자족이라는 최고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이고, 어떤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 밖에도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정치학』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가정과 마을을 이루는 이유를 ‘날마나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필요’는 비로소 국가를 통해서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국가라고 불릴 정도의 공동체가 되면 이제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국가보다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는 (당연하게도 개인 혼자서는)
자급자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의 힘을 충족하려면 반드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국가의
목적이 자급자족에 있다는 말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국가, 가령 페르시아와 같은 대제국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크기가 크지 않은 폴리스가 국가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인간이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볼까요?
국가는 단지 (자급자족을 하기 위한) 필요의 산물만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통해 비로소 개인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급자족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라고 비난한다.
본성이
그러한 자는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다.
이로써 인간이 벌이나 그 밖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
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생성되는 것이다.” (『정치학』중에서)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언어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로 번역된 ‘로고스logos’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프로네시스phronsis’를 의미합니다.
프로네시스는 우리말로는 ‘실천적 지혜’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많은 고대 사상가가 그런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본질을 이성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천적 지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실천적 지혜야말로 (다른
동물은 갖지 못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실천적 지혜는 폴리스 안에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언어와 의사소통,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즉,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먹거리가 풍부한 정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죠.
생존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완전한 인간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와 사회계약설은 개인의 욕망
충족이 공동체 성립의 유일한 이유인양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면, 성공의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공동체가 없다면 그리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우린 우리의 이성과 윤리적 능력을 전혀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탁월한 삶은 골방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모인 광장에서 가능한 것이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 프로네시스(phrŏnēsis) φρόνησις, εως, ἡ
Pronunciation [ phrŏnēsis ]
Etymology / 5426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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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하는 법, 눅1:17.
-
2. 이해, 깨달음, 통찰력, 지능, 엡1:8.
-
관련 성경 / 슬기(눅 1:17), 총명(엡 1:8).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는 이유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다.”는 말이 세상을 풍미했었다. 지방자치가 부활하고 선출직 단체장, 지방의원들의 자리가 생기면서 권력의 분산이 일어나기 전, 우리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특권의 상당 부분을 내려놓게 하기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사실일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 국회의원 등 공직을 두루 경험했다는 정치 9단으로 불리는 한 정치인은 “보람 있는 건 대통령 비서실장, 매력은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지역에서 유지 대접을 받는 자산가가 국회의원에 도전하다가 전 재산을 탕진하는 일, 기업인, 예술인, 교수, 판사, 의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명성을 잃고 체면까지 상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그럼 왜 다들 국회의원이 되려고 할까. 좀 더 나가서 왜 다들 정치인이 되려고 할까. 여기서는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은 정치인은 제외하겠다. 어차피 찾기도 쉽지 않으니까.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오랜 군주정, 신분제의 잔상이 남아있는 거 같다. 대통령은 왕이고, 그 아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벼슬아치이자 귀족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가려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군주정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대에, 직업은 사실상 과거를 통해 진출할 수 있었던 관리 하나뿐이었다. 보수라는 걸 지급받는 것도 국가의 녹봉을 받는 관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민간에 속해 있는 의사, 화가, 통역사, 요리사, 과학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오른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나랏일을 하고 나랏밥을 먹는 거였다. 실제로 신분에 가로막혀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관리를 꿈꿨다. 양반은 누구나 유생이 되어 문과나 무과를 준비했고, 중인은 잡과를 준비했다. 나머지 농업, 공업, 상업에의 종사는 먹고살기 위한 생업이었지 직업이라 할 수 없었다. 만석꾼 집안의 머슴이나 포구 여각의 일꾼들은 노동의 대가로 새경을 받았지만 역시 생업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관리가 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과의 경우 전국의 수험생이 수만 명인데 3년에 한 번씩 33명만 뽑았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관직의 수는 문관 1779개, 무관 3826개로 총 5605개였다. 거기서 더 좁혀진다. 관직에는 정직(正職)과 체아직(遞兒職)이 있었는데, 정직은 정상적으로 녹봉을 받는 정규직이고 체아직은 일정 기간 근무하다가 교체되는 비정규직이다. 체 아직은 하나의 자리에 여럿이 교대로 근무하는 순환보직으로 녹봉은 근무하는 동안에만 지급됐다. 모자라는 관직을 여러 명에게 나눠 주기 위해 생긴 제도였다. 문관의 경우 체 아직 105개와 녹봉이 지급되지 않는 무록관(無祿官) 95개를 제외하면 정직은 1579개뿐이었다. 또한 중앙에 근무하는 경관직(京官職)과 지방에 근무하는 외관직(外官職)으로도 나뉘었는데, 결과적으로 문관 정규직이면서 중앙에서 근무하는 경관직 541개가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이 541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관리는
모든 백성들의 궁극적 지향점이었고, 특히 문관이 된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개인은 물론이고, 집안, 지역에 대한 모든
평가가 과거 합격자를 얼마나 배출했는지, 어떤 관리들을 배출했는지에 집중됐다.
성리학적 세계관 안에서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 그 군자의 현신(現身)이랄 수 있는 관리가 되고자 하는 건 모든 양반의 의무인데, 자리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대안으로 운영했던 게 소과(小科)였다.
합격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됐고 지역사회에서 유학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체아직을 만들고 소과를 운영해야 할 만큼 누구나 갖고자 하는 자리, 그게 벼슬이었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최고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라는 인식의 뿌리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여 일가를 이룬
이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정치에 발을 들이고자 한다.
공천을 받으려 하고 장관이 되려고 한다.
그건 자본주의의 총아인 돈의
문제도 아니다.
모든 걸 다 이룬 이들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도박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다
무너뜨릴 위험 부담을 감내하면서까지 도전하게 만드는 강렬한 유혹이다.
그리고 “정치는 마약과 같다.”는 말도 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빼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인에 대한 지향성은 유별나다.
그토록 갖고 싶은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가지려는 자는 넘쳐나다 보니 경쟁은 불가피하다.
처음에 제외했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은 정치가를 다시 모셔오고,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쥐고 싶은 정치꾼도 불러서 전자를 정의, 후자를 불의라 해보자.
싸움이 일어나면 정의는 원칙을 고수한다.
정도를 지키면서 싸운다.
그러나 불의에게 원칙이나 정도 따위는 없다.
어떻게든 쟁취해야 할 목표만 있을 뿐이다.
홀로 주먹을
고수하는 진정한 건달은 칼을 쓰며 때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조선시대 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를 치르고 정계에 나갔으나, 오직 권력에 몰두하여 칼을
휘두르고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정적을 만나면 사화에 목숨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거나, 낙향하여 학문을 하고 후학을
기르거나, 그도 안 되면 음풍농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반칙을
쓰는 적을 이길 수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정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을 만큼 뿌리가 깊고 단단한, “정치는 몇
개 되지 않는 극히 희소한 권력의 자리에 내가 앉는 일이다.
그 권좌만 차지할 수 있으면 재물도 명예도, 다른 것들은 줄줄이
딸려온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지막으로 꼭 한번 가져보고 싶다.”는 정치에 대한 그 불의한 인식 말이다.
오늘의 정치가 더 이상은 먼 옛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왕이나 고관대작들의 권좌가 돼서는 안 된다.
심지어 그때도 권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만 사용하던 왕과 관리들이 있었고 말이다.
정치에서
목적이 되어야 할 국가와 국민은 사라져 버리고 수단일 뿐인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정치는 거래의 대상이 됐다.
사고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매관매직이다. 또한 무겁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해야 할 정치가 거래의 대상이 되다 보니 가벼워지다 못해
땅바닥에 떨어졌다. 온갖 흥정과 상술이 활개치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난무하는 정치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권력은 더 이상 정치의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롯이 수단이어야만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기 위한 수단.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에서, 국회의원은 봉사하는 자리다. 심지어 지방의원은 무보수다. 그들은 순수하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선다. 자신의 시간과 전문성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이고, 유일한 대가는 스스로의 성취와 보람이다. 마치 평생을 아껴서 모은 재산의 일부를 익명으로 기부하는 이들과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그 자리는 자신의 인생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거나 자랑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또한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은 지극히 실질적이고 소박하다. 권력이라 할 수도 없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없다.
이제는 우리도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가 다만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는 이용되지 않도록,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수단으로만 쓰이도록 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봉사하려는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그런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한두 번이고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왜 정치를 하는가? '정치의 본질과 이유'
정치는 사회적 질서를 조직화하고 관리하는 활동으로 정의된다. 이는 권력의 분배, 의사결정의 과정, 규칙과 제도의 수립, 그리고 사회적 가치 및 이해관계의 형성 등을 포괄한다. 정치는 개인과 집단 간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조정하며,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활동으로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정치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 내에서는 의견의 다양성과 이해관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정치는 이러한 의사결정의 과정을 체계화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한다.
또한, 권력은 사회에서 불가피한 존재이며, 정치는 권력을 조절하고 분배하는 과정이다.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권력의 효과적인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는 규칙, 제도, 그리고 감시와 균형의 체계를 구축한다.
정치는 또한 가치와 이해관계의 충돌을 해결하고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익을 고려하며 균형을 유지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발전을 촉진한다.
결론적으로, 정치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질서를 조절하며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다.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고려할 때, 정치는 필연적인 존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IMF 구제금융 사태로 수많은 가정이 파산하고 죽어갔어도 그들은 호의호식하고 있다.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간첩을 조작하고 정상적인 수사를 방해해도 무죄 방면되는 나라, 도대체 이런 사태를 꼽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정치혐오와 정치 무관심이 벌어지는 것이 지극히 정상일 수밖에 없다.
제정신으로 정치를 바라보면 정신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분열된 사회와 불의한 정치를 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를 비웃고, 대충 자기 이익을 위해 머리 조아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조선시대 노비로 살지 않으려 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숨은 의도와 원인을 알아야 한다.
책임을 묻고, 따지고 처벌해야한다.
여의도 정치가 아닌 생활정치, 우리들의 삶에 관계되는 올바른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정치란 전문 직업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 모두 정치이기에 우리 모두는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란 말의 어원이 바로 공동체의 일, 도시국가인 “polis”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끼리 나눠먹기 위해 시민들의 관심을 꺼버리기 위한 공작일 뿐이다.
철저히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계몽된 시민으로써 정치를 감시하고 학습하면서 고발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바보가 되고 현대판 노비가 되어 욕이나 하면서 자위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서 소외되고 왜곡되는 존재가 될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익히면서, 필요한 실천과 정치참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백성에서 벗어나 계몽된 시민이 되는 길이다.
대선공약 파기도 끝까지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은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럴 때 삶은 철저히 소외되고 우리는 현대판 노비로 살아갈 것이다.
모욕 받지 않으려면 알고 따지고 물어야 한다.
빌라도
이름의 뜻
- 라틴어로 ‘창을 가진 자’란 뜻
직위
총독 파견 배경
- 로마와 유대의 헤롯 가문이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유대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자치권을 행사했다.
- 유대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하나의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
- 헤롯대왕이 죽은 후, 유대는 그의 세 아들인 아켈라오, 안디바, 빌립이 분봉왕으로서 분할 통치를 하였다.
-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아켈라오가 추방된 후,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 로마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총독이 빌라도였다.
- A.D. 26~36년에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 지역을 관할한 로마 총독(행정장관)이다.
총독의 권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과정
- 예수님을 끌고 온 유대인들에게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함(요 18:28~32).
- 관정에 끌려온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함(마 27:11, 막 15:1~2, 눅 23:1~3, 요 18:33~37).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신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자 기이히 여김(마 27:12~14, 막 15:3~5).
-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함(요 18:38).
-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함(눅 23:4, 눅 23:14~15, 요 18:39).
-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임을 듣고 그 지역을 관할하는 헤롯에게 보냄(눅 23:5~7).
- 헤롯이 예수님을 도로 보내자, 예수님을 때려서 놓아주려고 함(눅 23:13~16).
-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구를 놓아줄지 유대인들에게 물어봄(마 27:15~17, 막 15:6~9, 요 18:39).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고소한 것을 알고 있었음(마 27:18, 막 15:10).
- 빌라도의 아내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함(마 27:19).
-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함(마 27:20~23, 막 15:11~14, 눅 23:18~21, 요 18:40).
- 예수님에게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그를 때려서 놓아주겠다고 말함(눅 23:22).
-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유대인들로 알게 하려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으신 예수님을 데리고 나옴(요 19:4~5).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자,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함(요 19:6).
- 자신이 예수님을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함(요 19:9~10).
-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도 위에서 주신 것이므로 자신을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심(요 19:11).
- 유대인들이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소리 지르자,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함(요 19:12~14).
- 유대인들에게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라고 물음(요 19:15).
-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십자가형을 요구하므로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 함(마 27:24).
-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며 손을 씻음(마 27:24~25).
-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줌(마 27:26, 눅 23:24~25, 요 19:16).
- 유대인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넘겨줌(막 15:15).
- 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써서 붙이니 대제사장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함(요 19:21~22).
-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그 시체를 가져가도록 허락함(요 19:38).
- 인자이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게 함(마 20:18~19, 막 10:33~34, 눅 18:32~33).
-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함(행 4:27~28).
바라바(Barabbâs)
마태복음에서는 27:16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죄수(δέσμιος) - ‘갇히다’ ‘포로 되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살인자입니다.
마가복음 15: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누가복음에서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과 흡사하게 소개됩니다.
누가복음 23: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마지막 요한복음의 설명을 봅시다. 요한복음에서는 ‘강도’라고 말합니다.
강도(λῃστής)
요한복음 18: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그런데 강도라는 레스테스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21:13에서 성전청결을 하시면서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 몇 번에 걸쳐 등장하는데 중요한 부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옆에 두 강도가 같이 못박히는데 바로 그 강도들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27: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레스테스라는 강도라는 단어가 가장 명확하게 소개되는 곳은 누가복음 10:30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바로 그 강도가 레스테스라는 단업니다.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그러니까 바라바가 누구나 한 마디로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는 비겁하고 악랄한 도둑이며 강도인 것입니다.
바라바는 아마도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였기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바라바와 예수를 선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생각에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은 빗나갔고,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 지르는 유대인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뒤집어 씌운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현재 유대인에게 왕은 없습니다.
예전에 헤롯왕이 있었지만 퇴위되고 로마관원인 빌라도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의 왕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황제가 우리의 왕인데 예수라는 자가 자신이 유대인인의 왕이라고 했으니 반역자가 아니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만약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 빌라도는 황제를 거역하는 자가 된다. 라고 협박하기에 이릅니다.
빌라도는 거역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게 됩니다.
바라바는 자신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풀려난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자세히 설명을 해줄 리는 없었을 겁니다.
바라바가 살아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 때가 정확히 유월절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로마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명절 중에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풀어주었습니다.
대부분 이 때 풀려나는 죄수들은 정치범들이었습니다.
유대민족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키고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즉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죄수를 풀어 주어야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절묘한 시기에 바라바는 선택을 당해 어부지리(漁父之利)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우연처럼, 뜻하지 않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바라바는 풀려 난 후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을 대신해 죽은 예수를 생각하며 고마워하며 십자기의 길을 따라갔을까요?
아니면 또 붙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멀리 도망을 갔을까요?
성경은 바라바의 이후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스웨딘 출신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리스트라는 사람이 쓴 <바라바>라는 책에서 바라바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지만 진정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기에 신뢰할만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접근입니다.
우리는 바라바가 이후에 어떤 선택을 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바라바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것인지, 다시 옛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사람을 죽이는 강도로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11월 5일(목) 마가복음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Wanting to satisfy the crowd, Pilate released Barabbas to them. He had Jesus flogged, and handed him over to be crucified.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는 정치
진리를 실현하려는 정치
빌라도(Pilate)라는 이름의 뜻은 라틴어로 "창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군인으로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눅 3:1).
총독의 권한은 첫째는 사형 집행권(요 18:31)
둘째는 산헤드린공회 등 지방법원이 내린 판결을 고칠 수 있는 권한
대제사장 임명권
종교 사법 군사등을 주관하는 절대적 권력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버려진 예수
본디오 빌라도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다. 그는 팔레스탄 지역을 다시리는 통치권자로서 예수를 사형 판결한 사람이다. 예수를 사형 판결할 때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무리들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라고”(막15:15) 판결을 내렸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 못했다.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재판을 끝냈다. 단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죄가 없지만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과정에 참여한 무리들이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한다.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치도록 선동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체 큰 소리로 외쳤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늦은 밤과 아침 사이에 7번이나 왔다갔다하며 재판을 했다. 여기에는 정의도, 양심의 가책도, 진리의 호소도 없다. 변호도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다.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어진 고난인 것이다. 오직 만족을 주기 위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던져 버린 것이다.
대중들의 만족을 위해서 던져진 결정이 얼마나 무모한 가를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신앙생활, 자기만족인가 진리 추구인가
무너지는 자기만족형 신앙의 특징
우리 삶의 흔적, 가장 가까운 이들이 안다
오늘날의 빌라도와 무리들
고난주간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며 다시 정리하는 시간들이다.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이라는 체면에 걸리면 더 이상 양심도 인격도 신앙의 성숙도 없다.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한 헌금, 찬양, 봉사, 기도생활은 유익이 없다.
신앙생활하다가 자기만족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분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만족이 떨어지면 헌금도, 봉사도, 기도도, 기본적인 예배생활도 다 포기한다. 자기만족은 거품이다. 거품은 언젠가는 꺼져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까운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자녀들은 더 잘 안다. 부부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어떤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한다. 또한 무리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된다.
○사도신경 속 영원히 기록된 이름
본디오 빌라도란 이름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인물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예배 때 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가 그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지구가 존재하는 한,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불리워질 것이다. 만약에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재판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총독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충동질로 인해서 예수를 채찔질하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도 없이 외쳤다. 그 피흘림의 외침을 역사의 흐름속에서 자손 대대로 받았다.
○한국 사회 속 이념의 외침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이다
교묘하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
한국의 이념전쟁은 양쪽 진영으로 나눠진 싸움판이다. 정의도 진리도 균형도 없다. 오직 내편이냐 네 편이냐의 싸움만이 독버섯처럼 퍼져가고 있다. 이것에 편승해서 먹고 사는 인생들이 참 많다. 좌우를 분별하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많아 균형을 잡아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법적인 상식을 벗어난 좌우 대립은 결국에는 국가만 망가지고 국민들의 삶만 고달퍼진다.
신앙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자기만족은 늘 자기가 기준이다. 기분 좋을 때는 한없이 잘하는데, 기분이 상하거나 여건이 힘들어지게 되면 포기한다. 신앙은 내 기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말씀에 비취어 보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고,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말씀에 뿌리가 없고, 자기 기분이나 만족을 위해서 교회생활하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사단은 아주 교묘하게 나를 파고 들어와서 나를 넘어뜨린다. 사단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이 약한지를 잘 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이 사단이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을 치고 들어오고, 성에 약한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치고 들어오고, 입이 방정맞은 사람은 입술로 찾아오고,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치고 들어와서 넘어뜨린다.
빌라도는 사단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인물로 역사의 기록 속에 영원히 남겨진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말씀 앞에서의 자기 점검
신앙생활할 때 우리는 늘 말씀과 십자가앞에 자신을 비추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기만족인지, 자기 기분인지, 자기 생각인지를 수시로 본질을 점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당이 높은 사람은 살기위해서 당 수치를 늘 체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늘 신앙의 동기가 병들었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함정에 잘 빠지는 경우가 있다. 자기 기분과 자기감정과 자기만족의 체면에 걸리면 실패한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기준이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자기가 기준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행동한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사도요한은 신앙의 성숙도를 말하는데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이 있다고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권면한다. 인격이 자라고, 성품이 자라고, 생각이 자리고, 비전이 자라고, 사명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야 한다. 성장하면 자기만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생각을 말하지 말라. 자기 기분에 집중하지 말라. 자기만족에 빠지지 말라. 오직 예수의 말씀과 정신에 마음과 생각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란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빌라도와 같은 약삭빠른 정치적 결정, 무리들과 같은 맹목적인 외침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가를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또한 자신의 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의 덧에서 벗어나는 성숙함을 기대해본다.
유대인들의
공회는 예수님을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로 믿지 않으면서도 로마 법정에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기소한다. 그들은
자기모순을 범했을 뿐 아니라,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기소하는 죄도 저질렀다.
예수님에 대한 기소는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자기들의
왕을 체포해 제국의 법정에 기소하는 비겁한 매국노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무죄이며, 예수님을 기소한 대제사장의 주요 동기는
시기심이었음을 로마 총독마저 알았다.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청한 무리는 바라바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바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그들은 바라바의 석방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선동을
받았더라도(11절) 무죄한 사람을 처형하라고 요구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들에게 무장투쟁의 길을 거부한 예수님은 죽여도 되는
인물이었고, 무장투쟁을 일으킨 바라바는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인물이었던가? 그들에게는 무죄한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한 죄책이
있다. 무리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재판장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는 여론에 따른 판결은 죄수나 피고를
사면하는 데서 그치고, 피고에 대한 유죄 판결은 법과 사실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리의 요구에 따라 법률과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판결을 했다. 이 불의한 정치 재판에 대한 책임을 재판장 빌라도는 면할 수 없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을
기소한 대제사장 같은 검사, 바라바의 지지자들 같은 시민, 빌라도 같은 판사가 생겨날 수 있다. 우리도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滿足(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으예수는 채찍질하고 十字架(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Am I now trying to win the approval of men, or of
God? Or am I trying to please men? If I were still trying to please men,
I would not be a servant of Christ.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For God will bring every deed into judgment, including every hidden thing, whether it is good or evil.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씁니다.
그러다보니 인심을 얻기위해 또는 좋은 평판을 위해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정으로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심지어 마태복음에서는 빌라도의 아내까지도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라도 또한 종교지도자들이 이 예수님을 시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11월 5일(수) 마가복음 12-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멸망의 가증한 것(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When you see 'the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standing where it does not belong--let the
reader understand--then let those who are in Judea flee to the
mountains.
그 멸망의 그 가증한 것
토 브델뤼그마 테스 에레모세오스
το βδελυγμα της ερημωσεως
멸망의(2050) ἐρήμω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2050
Pronunciation [ ĕrēmōsis ]
Etymology /
-
1. 유린, 황폐, 파괴, 마24:15, 막13:14, 눅21:20.
-
관련 성경 / 파멸, 멸망(마 24:15, 막 13:14, 눅 21:20).
가증한 것(946) βδέλυγμα, ατος, τό
Etymology / 948에서 유래
-
1. 혐오하는 것, 몹시 싫은 것.
-
a.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 눅16:15.
-
b. 구약에 나타나는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 계17:4, 5, 21:27.
-
c. τὸ β. τῆς ἐρημώσεως: 거룩한 곳을 황폐하게 하는 혐오할 만한 것, 마24:15, 막13:14.
-
-
관련 성경 / 가증한 것(마 24:15, 막 13:14, 계 17:4), 미움을 받는 것(눅 16: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가복음 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ㅠ滅亡(멸망)의 可憎(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으읽는 者(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者(자)들은 山(산)으로 逃亡(도망)할지어다.
ㅠ
다니엘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으
다니엘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다니엘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가증한 것 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을 가리켰다.
멸망의 가증한 것 이란 표현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 너무 가증하여 성전을 버리게 하고 황폐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
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뢰아
요단강을 건너 산으로 도망하라는 신호이다.
요세프스는 A. D. 67 - 68년에 유대 열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가증한 것 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장래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될 우기인
겨울철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에도 해당되지만 거기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을 넘어서 재림에 앞서 있을 마지막 대환란 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롐 성전이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시 유대인들과 또 제자들의 망상을 깨트리시며
"돌이 돌 위에 하나도 남기우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고 하셨다. [23:38]
그렇다면 그 날은 언제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년대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구원을 받도록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곳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성 안에 남아있지 말고 성밖 산으로(피난할 만한 곳으로) 도망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가 승천하신 후 한 세대가 조금 더 지난 주후 70년에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가를 보려면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가 기록으로 남긴 유대 전쟁사 제 3권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는 본래 유대 반란군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로마제국 네로 황제 시절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을때 갈릴리 전투에서 유대군을 이끌다가 포로로 잡혀 후에는 친로마 인사가 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당시 로마군을 이끌고 유대로 진격해온 로마군 사령관은 베스파니안 이었고 그의 아들은 티투스 였는데 욥바 전투 이후 포로가 된 요셉푸스는 베스파니안 앞으로 잡혀갔을 때 그는 신통방통하게도 베스파니안이 장차 로마 황제가 된다고 예언을 해주고 베스파니안의 아들 티투스의 호감을 받아 살아난다.
그리고 실제로 후에 네로 황제가 피살뎐 후 베스파니안과 티투스는 대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다
베스파니안과 티투스는 요셉푸스를 신임하기에 이르러 그늘 매우 극진히 대접하고 높여주었는데 이는 또한 그를 이용하여 유대의 반란 가담자들을 회유코자 함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전쟁 이외에도 유다의 각 지방 성에서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될 때 마다 요셉푸스는 중재자로 나서 유대인들에게 투항을 권하지만 , 8ㅑㅓ 2ㅂㅁ열심당원들(책에서는 강도 뗴들)에 의해 저항은 계속된다.
결국 유대의 반란군들은 계속 밀려서 예루살렘까지 들어와 성을 장악하고 최후 방어망을 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열심당원들이 같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가한 약탈과 행퍠가 너무 심하여 유대인들 중에는 스스로 로마 군에 투항하는 자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반란군을 멸하기 위하여 성 주변에 토성을 쌓게 되는데 이로써 성 안에는 양식이 동이 나고 기근이 심하여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악취가 진동함으로 시체들을 성밖으로 내던지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문에 불을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유대 반란군들과 싸우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그들의 군단기를 앞세우고 들어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 동문 안으로까지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 이 군단기를 세우게 된다.
로마군대는 자신들의 군단기 자체를 신성시 했는데 그들에게는 군 단기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우상이었다.
이들은 이 군단기 앞에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는 바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곧 주전 4세기의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그대로 주후 169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에 들어가 그 거룩한 곳에 자신들의 우상을 세우고 돼지의 피로 제사를 드린 것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재현된 것이니 예수님의 경고처럼 "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된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주후 70년에 발발한 유대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태워지며 무너진 것이 주전 587년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불태워지고 무너뜨려진 날과 똑 같은 아빔월 14일 이어서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금식일로 지킨다고 한다.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불태워지고 함락되면서 유대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 때 죽은 사람들의 수효가 약 백이십만명(1,200,000)인데 하필이면 유월절기를 맞아 수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올라왔다가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면서 희생자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켜주실 것임으로 성전으로 들어가면 산다고 생각하여 성전으로 몰려들었는데 또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성을 사수하는 열심당원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짓 예언으로 성전으로 들어오면 산다고 말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신 예수님과 정 반대의 예언을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제 한절 묵상의 글을 내리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의 원근법을 사용하시어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하나의 모형으로 삼으셔서 장차 세상 끝날에 있게 될 일들을 예고해 주신 것인데 그 때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로써[계 13장] 성도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일상의 삶에 미련을 두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상징된 피난처로 피해야 할 것을 암시받게 된다.
그렇다면 산으로 상징된 그 피난처는 어디인가?
"여호와는...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시편 144: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도 않으시리로다[시121:1-4]
그 때(적그리스도의 날에)는 세상 재물이나 일상적 삶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특별 조치를 따라야할 때이다
창세기 19장에서 소돔 고모라에 남겨둔 재산과 삶이 그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이야기는(눅 17:32)
지금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경종이 된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멸망의 가증한 것 (14절) :
이 구절은 다니엘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록합니다.
다니엘 11:31
그의 군대가 성전의 요새지역을 더럽힐 것이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신약과 구약 사이 시대에 그리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성전의 더럽힘이 예언되었습니다.
학자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끔찍한 방법으로 더럽혔다.
실제로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가증하게' 더럽힌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사건은 당시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자는 바울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 사건을 연결시킵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새번역, 살후 2:3-4)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많은 주석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이 파괴된 AD 70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는 예수님이 그 이후에 영광으로 재림하신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뜻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의미합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14절)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도 말라!" 명령하십니다.
그
사건이 이미 이루어진 것인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경고하십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라!
예수님은 다니엘서의 이중적인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단 9:27, 11:31, 12:11).
ㅠ滅亡(멸망)의 可憎(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으읽는 者(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者(자)들은 山(산)으로 逃亡(도망)할지어다.
ㅠ
다니엘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다니엘서에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이방의 왕들과 장군들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의 예언대로 주전(BC) 168년경에 셀레우쿠스(Seleucus)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안티우쿠스 4세에게 ‘에피파네스’라는 ‘미친 자’를 뜻하는 별명이 붙은 것은 교활하고 사악했기 때문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안식일에 유대를 침공해서 무방비 상태였던 유대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악했던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과 제사장을 죽였고, 유대인들이 중요시했던 매일의 제사를 폐하고, 대신 부정한 짐승이었던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했고, 또한 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제단에 세웠습니다.
주전 169년에는 성전을 약탈해버렸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때 대제사장의 직분을 돈 주고 사게 했습니다.
그 악습이 신약에서도 이어져 신약성경에 ‘대제사장들’이라는 둘 이상의 복수를 쓴 것도 안티오쿠스 4세의 악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안티우쿠스 에피파네스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15절),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라”(16절)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17-18절에서, 물건이나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살고 싶으면 주저 말고 곧바로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엘서를 인용해서 성전의 멸망을 말씀하셨던 것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안티오쿠스 4세 때 우상으로 성전이 더럽혀진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뜻인지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이방인에게 더럽혀지고, 포위될 때가 오면 그날에 주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후(AD) 70년경 로마의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 성전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는다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안전한 성전으로 대피하라고 말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대피했으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처참하게 파괴했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말하길 유대인들이 무려 110만 명이나 죽었고, 10만 명 정도가 포로로 잡혀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학살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 저 멀리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모두 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 사람들은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산으로 도망가라는 예수님의 살리는 말씀과 예루살렘에 남아야 한다는 세상의 소리를 함께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목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인자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막 8:35, 개정)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아멘.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나를 죽여가며 순종할 때 나도 살고 죽어가는 영혼도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본문 20절에서,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 지역은 겨울이 비가 내리는 우기이기에 땅이 질퍽거리면 도망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1.8km 이상 걸을 수 없기에 율법을 지키려다가 모두 죽을까 봐 인자하신 예수님은 염려하시면서 안식일에 큰 화가 임하지 않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것이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엘서를 인용하신 것은 이중 예언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마지막 큰 환난의 때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큰 환난’이 이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마치 자기가 구세주 인양 세상을 거짓 평화로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간교한 적그리스도는 세계를 저항 없이 통치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습니다. 7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제사와 예물을 드릴 수 있지만, 적그리스도는 제한된 7년의 통치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머지 3년 반 동안 큰 환난으로 유대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단 9:27).
본문 22절에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아멘. 7년간 큰 환난를 당하면 누구도 견딜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큰 환난의 날을 줄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합 3:2).
마지막 환난의 때 일어나는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것을 주님이 예언했습니다(23절). 택하신 자들도 미혹 당하는 이유가 그들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기 때문에 미혹해도 믿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24절).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과 권위와 능력을 도용하여 자기 영광과 이익을 차지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우주적인 종말의 때 그리스도는 수도원 운동을 했던 경건한 에세네파처럼 광야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좁고 밀폐된 비밀스러운 골방에 거하며 자기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폐쇄적인 곳에서도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26절).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27절) 갑작스럽게 오실 것이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번개처럼 모든 사람에게 재림하는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죽게 되니까 미리 말씀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흔들리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2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현재 많은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는 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에서,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는 것처럼, 생명이 없는 시체를 먹는 독수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일어날 징조를 잘 분별하여 굳건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최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13:14~27/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가증한
것 = 미운 물건
성경에 기록된 "가증한 것" "가증한 일" "미운 물건"에 관한 모든 구절을 찾았습니다. 이유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 하신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의 정체는 다음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완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가증한 것"은 육체의 정결과 관련된 말씀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도덕적인 항목들과 제사 양식에 관한 규정으로 발전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말씀에서 이탈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간음과 종교 부패 양태로 대확장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께서는 아무리 교회가 제사 행위에 올바르고, 금식 잘하고, 환경운동과, 성적 순결, 마약 퇴치 운동 등의 도덕적 캠페인을 주도한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영적인 우상 곧 "종교 통합운동, 타 종교의 구원인정, 진리는 하나"라는 등의 모토로 연합되어나가는 것을 볼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가증한 일인지를 깨닫고 강하게 뿌리치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부터 시작된 "미운물건=가증한 것"에 대한 상고는 계시록 17장의 음녀의 정체에서 완전한 악으로 숙성되어, 밉고도 가증한 것의 결정체로 폭로되고 있습니다.
계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짐승을 타고, 금잔을 들고,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고, 또 18절에 기록되길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막강한 물권과, 치리권을 가진 가증하고 거대한 종교단체가 분명합니다. 이 땅의 모든 거짓 선지들을 길러낸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이 여자를 바로 볼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증한 것을 상고하는 우리의 목적입니다.
레위기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 그 희생의 고기가 제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레위기 11:10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可憎)하니라 13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14 매와 매 종류와11:15 까마귀 종류와 16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7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18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19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21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레위기 19:5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6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7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8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신명기 7:25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
신명기 17:1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23: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29: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16 (우리가 애굽 땅에 어떻게 거하였었는지 너희가 여러 나라를 어떻게 통과하여 왔었는지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열왕기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역대하 34: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을 치리하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 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太陽像)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5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6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7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역대하 34:21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24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25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를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6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27 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노소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잠언 26:24 "감정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26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4: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2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예레미야 7: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함을 인함이니라"
예레미야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예레미야 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에스겔 11: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14: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9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 이는 이스라엘 족속으로 다시는 미혹하여 나를 떠나지 않게 하며 다시는 모든 범죄함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않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 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20: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8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에스겔 20:23 "또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하였었나니 24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25 또 내가 그들에게 선치 못한 율례와 능히 살게 하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26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로 멸망케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열조가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격노케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를 부어 드린지라 29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30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좇아 행음하느냐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다니엘 9:26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가복음 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17:15)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슥 4:7=큰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애굽,앗수르,바벨론,메데 파사,헬라)은 망하였고 하나(로마)는 있고 다른 이(소련)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 저희(=열 뿔)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17:1)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열 뿔)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거대한 종교단체?)이라 하더라"
가증한 일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렘 6:14~15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8:11~12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신 말씀과 "여호와만이 참 신"임을 강하게 외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종교단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기독교에만 완전한 구원과 진리가 있음을 은근슬쩍 부정하며 인간의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 정치 단체는 멸망당할 가증한 세력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보고 현실 시사를 볼 때 세계는 하나님의 장 중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깨닫는 자들에게 복 있을진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교회 속으로 더 깊이 들어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5,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의 다니엘서의 일부를 암시하신 말씀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단 11:3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단 12:11)
성경학자들은 다니엘이 말한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은 B.C 167년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로 제사를 드린 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또한 A.D 70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 군대의 독수리 문양 휘장이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세워지고, 나중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에 그것에 세워짐으로 또 다시 성취되었다고 본다. 누가복음에는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0)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이 예언을 이미 성취된 과거의 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세상 마지막 날의 징조들을 설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앞으로 다시 성취되어질 종말적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대체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그리고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이 조금 다르게 표현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무엇일까?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교회의 배도, 활발한 이단운동
바울 사도가 재림에 대하여 혼동과 미혹에 빠져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대적인 배도와 그 가운데서 등장하는 인간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사도들의 글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임박하면 성경적 신앙에서 이탈하는 배도의 물결, 거짓 선생들과 이단들의 활동이 무르익을 것이라고 여러 성경들이 비슷하게 경고한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성경에 의하면 세상 마지막 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배도의 물결이다. 거짓복음이 세상의 많은 교회에 관영하게 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때를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은 분명히 교회들 속에서 일어나는 배도의 물결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시대의 징조가 되는 것으로 설명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틀림없이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섬기는 교회의 배도를 주도하는 어떤 인물이나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한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그리고 예수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추방하고 사탄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리는 배교운동이 교회에 도입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복음을 없애고 대신 모두를 영구히 멸망하게 할 사탄의 거짓복음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 정착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재림 전에 대대적인 교회의 배도현상이 일어나고, 또한 그것의 이끄는 '멸망의 아들',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일이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이 보이면 믿는 자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셨다.
천주교 중심의 일치운동이 '멸망의 가증한 것', 교황이 '멸망의 아들'??
천주교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종교일치 운동이 성경이 경고하는 마지막 시대의 배도현상, 즉 '멸망의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가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심에서 모든 종교들을 천주교 수하에 두고 아우르려고 시도하는 천주교의 교황이 적그리스도, 즉 바울이 경고한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바로 천주교의 거짓 복음으로부터 성경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들이 스스로 천주교의 품으로 들어가 교회이기를 그치는 배교이다. 이미 1999년에 루터교회와 천주교가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였고, 2006년에는 감리교회 천주교가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였고, 그리고 2013년에는 미국의 칼빈신학교를 운영하는 교단인 CRC(Christian Reformed Church)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4개 기독교 교단들이 천주교의 세례의 의미를 인정하고 공유한다는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을 체결했다.
‘의화교리 합의문’이나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은 실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천주교에서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수단은 세례(영세)이다. 사람이 믿음을 준비하면 교회가 세례를 시행하여 원죄를 제거하고 의롭게 만드는 은총을 주입한다고 한다. 천주교의 세례사상은 기독교를 빙자한 이교사상이다. 성경은 오직 개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칭의의 근거이고, 세례는 칭의를 이미 얻은 사람에게 추구 공적으로 표시하는 예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거나, 상호간의 세례의 의미를 인정한다는 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이기를 단념하는 심각한 배교이다. 그러나 이미 루터교, 감리교, 북미주개혁교회(CRC), 미국장로교회(PCUSA), 그리스도연합교회(UCC), 미국개혁교회(RCA)가 이러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의 궁색한 논리는 천주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레를 베푼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단 '구원파'와 '안식교'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과 의화교리 합의문이나 세례협정문을 체결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원파와 안식교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 등 같은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들이 실제로 믿고 가르치는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주교가 가르치는 내용들 속에는 구원파나 안식교보다 더 비성경적인 것들이 많다. 그런데 왜 천주교와는 의화교리 합의문, 세례협정문을 체결하고, 구원파와 안식교는 차별하는 것일까?
이것이 마지막 때에 일어난다고 예언된 교회의 배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나 사실적으로 사탄을 섬기는 거짓 교회로 전락하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대로 되어가는 어쩔 수 없는 불행이 벌어지고 있다.
천주교 측에서 운영하는 신문<카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등장한 “카톨릭과 세계개혁교회연맹 의화문제 합의”(2017년 7월 10일)라는 기사를 보았다. 천주교와 ‘세계개혁교회연맹’(WCRC)이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표현하는 교단들이 천주교와 다시 짝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다. 개혁교회의 선배들인 루터와 칼빈 등의 신앙을 짖밟고 다시 천주교의 거짓으로 돌아가는 행동이다.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교회 속으로 더 깊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교와 거짓복음의 물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참된 목회자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다. 훗날 거짓된 교회들과 신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단호하게 책망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성경이 예언하고 경고한 이 물결에 합류하여 춤추는 자들은 영원히 죽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참된 교회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24:15~16
본문의 말씀은 초림 때 예수님께서 재림 때의 징조(徵兆)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곧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요한계시록 성취 때에 등장하는 '시온산'입니다. (계14:1) 하지만, 아무때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섰을 때 도망을 가야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본문의 성구에서 말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니엘서'에 기록이 되어있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다니엘서에 기록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은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2:31~33
위 말씀은 다니엘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우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바벨론왕이 본 신상의 머리가 곧 '바벨론왕'이라 설명하였습니다. (단2:38) 바벨론은 구약시절 남유다(유다지파)를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아담 때부터 재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이스라엘)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이방민족을 들어서 선민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사10:5) 곧 '멸망의 가증한 것'은 범죄한 선민들을 멸망시키는 이방(異邦)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왕이 꿈에서 본 신상을 좀더 분석해 보면 아래의 사진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머리(1)+가슴(1)+팔(2)+배(1)+다리(2) = (7)등분'의 구조와 '발가락(10)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죠. 요한계시록에도 이와 비슷한 존재가 출현하게 되는데 곧 '일곱(7)머리와 열(10)뿔 가진 짐승'이 출현하게 됩니다. 곧 이들의 '우상(거짓 목자)의 조직체'이자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뜻이죠.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13:1~2
위 말씀에서 용(龍)은 '사단마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계20:2) 즉 사단이 '일곱 머리와 열뿔 가진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준 이유는 '범죄한 하나님의 선민(選民:택한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이 '일곱 머리와 열뿔 가진 짐승'이 주 재림 때 출현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다니엘서로 돌아가서 또 다른 예언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단7:2~7
위 말씀에서 다니엘이 이상(환상)으로 본 짐승은 첫째는 사자, 둘째는 곰, 셋째는 머리가 4개 달린 표범, 넷째는 10뿔이 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짐승의 머리의 수는 사자(1)+곰(1)+표범(4)+네째짐승(1) = '7머리'입니다. 또 네째 짐승에게는 10뿔이 있다하였으니 곧 '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다니엘과 요한이 환상을 통하여 본 짐승은 동일한 존재를 본 것이었습니다. 이 짐승을 사자,표범,곰 등의 맹수로 비유한 이유는 이들이 '양(羊)'같은 하나님의 선민들을 잡아먹거나 멸망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잠30:2~3) 곧 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짓 목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림 때를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사람의 미혹'이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24:4) 이 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사람)이 하나님의 선민들을 미혹시켜 죄(罪)를 짓게 만들기 때문이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23:2
구약시대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신18:5)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즉 위 말씀에서 '모세의 자리'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앉아서 치리해야 할 자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곧 이 사건이 초림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곧 초림 때 출현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죠. 이와 같이 주 재림 때에도 본문의 말씀과 같이 거짓 목자들(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는 사건이 예언대로 있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24:15~1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계13:6
위 말씀에서의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일곱머리 중의 우두머리:거짓목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훼방하는 '하늘'은 곧 하나님의 선민들이 있는 '거룩한 곳(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 하늘)'을 뜻하는 것입니다. (창37:9~11) 곧 이 사건이 바로 계시록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일'인 것입니다. 위 예언은 이미 이루어져 그 실체들이 출현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시온)산'으로 도망을 가야할 때인 것입니다. 산으로 도망을 가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의 참 뜻'을 체계적으로 배워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멸망의 가증 한 것’ 이란 무엇인가? (마태 24:15; 다니엘 9:27)
“멸망의 가증 한 것”이라는 구절은 마태복음 24:15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이 구절은 다니엘서 9:27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ies 라는 이름의 그리스 통치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번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돼지로 희생 제사를 바쳤습니다.
이 사건이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묘사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지 약 200년이 지난 후,
마태복음 24: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장래 언젠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예언 해석자들은 예수님은 적그리스도를 언급하시면서
그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행한 것과 매우 유사한 짓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사실은 다니엘서 9:27에서 다니엘이 예언한 내용 중에 일부가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 함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과 비슷한 일을 행함으로
그 조약을 깨뜨릴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 입니다.
장래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3:14은 그가 어떤 형상을 만든 후
모든 사람이 그 형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적그리스도를 위한 숭배의 장소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대환난 중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깨어 경성하는 가운데
이러한 사건이 대환란의 최악의 기간인 3 년 반의 시작이라는 것과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36).
멸망의 가증한 것(13:14)
'멸망의 가증 한 것' 이란 무엇인가?
멸망의 가증 한 것이란 구절은 마태복음 24:15, 마가복음 13:14에 나옵니다.
이 구절은 다니엘 9:27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ies 라는 이름의 그리스 통치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번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돼지로 희생 제사를 바쳤습니다.
이 사건이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묘사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지 약 200년이 지난 후, 마태복음 24: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장래 언젠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예언 해석자들은 예수님은 적그리스도를 언급하시면서 그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행한 것과 매우 유사한
짓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사실은 다니엘서 9:27에서 다니엘이 예언한 내용 중에 일부가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 함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과 비슷한 일을 행함으로 그
조약을 깨뜨릴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 입니다.
장래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3:14은 그가 어떤 형상을 만든 후 모든 사람이 그 형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적그리스도를 위한 숭배의 장소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대환난 중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깨어 경성하는 가운데 이러한 사건이 대환란의 최악의 기간인 3 년 반의 시작이라는 것과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36).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15~28)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성경을 별명으로 율법이라고 하고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말해 주는 글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꼭 미래에 있을 이야기만을 기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말의 원어가 보여 주는 뜻은 "말한다"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이 곧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 동시에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줄 때 이를 예언이라 하고 이를 말해주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그 예언을 기록해 줄 때 이것을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서 설명하기도 하며 또한 끝(終末)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함으로서 오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희망적인 장래를 말하기에 앞서서 대체로 어두운 미래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 이전에 어두움, 영광 이전에 수치, 생명 이전에 죽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멸망만을 예언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심판이든지 어떤 멸망이든지 반드시 그 환난과 멸망이 먼저 예고되었고 예언되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이라고 봅니다. 멸망되는데 무슨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곧 멸망을 피하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니느웨성, 바벨론 포로 때의 유대나라 등에 언제나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15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끝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서의 인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그들의 우상인 쥬피타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역사 안에서 응하였다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언하신 것은 로마로 인하여 유대 나라가 망할 것을 직접적으로 예언하시는 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 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제사들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시며 도시에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증한 것이란 원문대로의 뜻을 살피면 밉살스러운 것 또는 아주 참을 수 없이 싫은 것을 말합니다. 즉 꼭 망해야 할 자가 흥하고 마땅히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가 영광을 얻고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자가 복을 누리고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있어지는 것, 또는 있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며, 차마 볼 수 없는 꼴불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란 직접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뜻으로서는 하나님의 위치 즉 신적(神的)인 위치와 신적인 예배, 경배를 받는 위치를 뜻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이 온줄로 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예표이며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가운데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신적인 대우를 받다가 망했습니다. 특히 "쿼바디스"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네로 황제라는 어이없는 폭군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세계 제일의 시인이요, 음악가라고 자처하며 친히 시를 읊고 또 곡을 붙여서 손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굉장한 시상을 위해서 로마성을 불을 지른 변태적인 성격의 왕이며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신하를 열 일곱 명이나 죽였다는 어이없는 폭군인데 이 속물(俗物)이 자기는 신(神)이다, 죽지 아니한다고 하며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으며 대로마제국의 망국사도 끝내는 황제 숭배의 종교의식이 강요되며 이를 거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면서 속물들이 신의 대우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역사에서 밝혀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도 일본의 천황도 하나의 속된 인간이거늘 그들이 권력을 가질 때 인간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도 이것이 부족하여 신의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끝이 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과 우리 네 사회 구조와 그리고 인격 안에서 소화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 있는 체하고 없고도 있는 체 죄인이면서 의인인 체 이것들도 가증한 것이요 볼 수 없는 것이며 꼴불견입니다. 특히 혼란 속에서 어쩌다 돈은 벌어서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돈만 가진 벼락부자! 이것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이면 다인 줄로 알고 허세를 부리며 안하무인격으로 자기를 높혀 놓고 가정부이건 자가용 운전사이건 아직도 옛날에 종을 부리듯 하는 꼴이야 차마 볼 수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되는 것은 거룩한 곳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는 있는 것이 사실이고 거짓도 부정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최선이란 이름의 거짓, 합리적인 이론을 바침하고 있는 정당화한 부정, 가치 현실화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적인 불가피한 죄악 같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길이 참아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짓은 용납된다해도 위선(僞善)은 안되며 위성(僞聖)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건을 도적한 자는 살았으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죄인이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으며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며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권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고 거짓된 자가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성자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물(俗物)이 부자가 되고 권력자도 되겠지만은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란 사람이 혁명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좋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폭력을 내두르며 호령하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인간의 선을 넘어서 종교적인 대상이 되고 신적인 존경과 경배를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끝이 온 것을 말해 줍니다.
가증한 것이 언제든지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곧 끝이 온다는 진리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안에 혹이나 가증한 것이 정당한 자의 위치에 엄연히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신적인 경배를 받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가증한 꼴을 노출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나 그 징조를 밝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돈은 힘이 있어서 권력도 지식도 때로는 인격까지 지배하며 또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종교적 경배의 위치에 오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돈이건 지위이건 지식이건 인격이건 무엇이던지 신적인 위치에 오르고 섬기는 위치에 오르며 예배의 대상이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섬기고 경배하면 곧 망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그 누구든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곧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마음 성전 안에 그 어떠한 가증한 것도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대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르드개는 이 뜻을 따르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쓰는 돈 안에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돈은 쓰되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의 귀한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끝의 징조를 보고 끝을 알았으면 이제는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만 의지하며 믿음만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라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유혹이 심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밝은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장 15~28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성경을 별명으로 율법이라고 하고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말해 주는 글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꼭 미래에 있을 이야기만을 기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말의 원어가 보여 주는 뜻은 "말한다"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이 곧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 동시에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줄 때 이를 예언이라 하고 이를 말해주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그 예언을 기록해 줄 때 이것을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서 설명하기도 하며 또한 끝(終末)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함으로서 오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희망적인 장래를 말하기에 앞서서 대체로 어두운 미래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 이전에 어두움, 영광 이전에 수치, 생명 이전에 죽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멸망만을 예언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심판이든지 어떤 멸망이든지 반드시 그 환난과 멸망이 먼저 예고되었고 예언되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이라고 봅니다. 멸망되는데 무슨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곧 멸망을 피하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니느웨성, 바벨론 포로 때의 유대나라 등에 언제나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15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끝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서의 인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그들의 우상인 쥬피타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역사 안에서 응하였다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언하신 것은 로마로 인하여 유대 나라가 망할 것을 직접적으로 예언하시는 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 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제사들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시며 도시에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증한 것이란 원문대로의 뜻을 살피면 밉살스러운 것 또는 아주 참을 수 없이 싫은 것을 말합니다. 즉 꼭 망해야 할 자가 흥하고 마땅히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가 영광을 얻고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자가 복을 누리고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있어지는 것, 또는 있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며, 차마 볼 수 없는 꼴불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란 직접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뜻으로서는 하나님의 위치 즉 신적(神的)인 위치와 신적인 예배, 경배를 받는 위치를 뜻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이 온줄로 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예표이며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가운데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신적인 대우를 받다가 망했습니다. 특히 "쿼바디스"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네로 황제라는 어이없는 폭군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세계 제일의 시인이요, 음악가라고 자처하며 친히 시를 읊고 또 곡을 붙여서 손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굉장한 시상을 위해서 로마성을 불을 지른 변태적인 성격의 왕이며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신하를 열 일곱 명이나 죽였다는 어이없는 폭군인데 이 속물(俗物)이 자기는 신(神)이다, 죽지 아니한다고 하며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으며 대로마제국의 망국사도 끝내는 황제 숭배의 종교의식이 강요되며 이를 거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면서 속물들이 신의 대우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역사에서 밝혀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도 일본의 천황도 하나의 속된 인간이거늘 그들이 권력을 가질 때 인간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도 이것이 부족하여 신의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끝이 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과 우리 네 사회 구조와 그리고 인격 안에서 소화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 있는 체하고 없고도 있는 체 죄인이면서 의인인 체 이것들도 가증한 것이요 볼 수 없는 것이며 꼴불견입니다. 특히 혼란 속에서 어쩌다 돈은 벌어서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돈만 가진 벼락부자! 이것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이면 다인 줄로 알고 허세를 부리며 안하무인격으로 자기를 높혀 놓고 가정부이건 자가용 운전사이건 아직도 옛날에 종을 부리듯 하는 꼴이야 차마 볼 수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되는 것은 거룩한 곳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는 있는 것이 사실이고 거짓도 부정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최선이란 이름의 거짓, 합리적인 이론을 바침하고 있는 정당화한 부정, 가치 현실화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적인 불가피한 죄악 같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길이 참아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짓은 용납된다해도 위선(僞善)은 안되며 위성(僞聖)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건을 도적한 자는 살았으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죄인이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으며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며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권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고 거짓된 자가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성자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물(俗物)이 부자가 되고 권력자도 되겠지만은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란 사람이 혁명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좋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폭력을 내두르며 호령하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인간의 선을 넘어서 종교적인 대상이 되고 신적인 존경과 경배를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끝이 온 것을 말해 줍니다.
가증한 것이 언제든지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곧 끝이 온다는 진리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안에 혹이나 가증한 것이 정당한 자의 위치에 엄연히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신적인 경배를 받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가증한 꼴을 노출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나 그 징조를 밝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돈은 힘이 있어서 권력도 지식도 때로는 인격까지 지배하며 또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종교적 경배의 위치에 오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돈이건 지위이건 지식이건 인격이건 무엇이던지 신적인 위치에 오르고 섬기는 위치에 오르며 예배의 대상이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섬기고 경배하면 곧 망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그 누구든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곧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마음 성전 안에 그 어떠한 가증한 것도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대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르드개는 이 뜻을 따르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쓰는 돈 안에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돈은 쓰되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의 귀한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끝의 징조를 보고 끝을 알았으면 이제는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만 의지하며 믿음만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라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유혹이 심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밝은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말세와 재림과 휴거이다.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단들의 수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를 모른다. 이단들이 퍼뜨리는 이단사설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말세와 재림과 휴거를 오해하는 이유는 비유로 덮여있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은 온통 비유로 덮여있다. 예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유대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여쭈었을 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 : 10-17>
예수께서는 멸망의 아들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고 성경도 재림과 말세와 휴거에 대해 비유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알지못하고 문자대로 해석하여 오해한 것이다. 살펴보자.
제자들은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아오리까"(마24:3) 라고 예수께 종용히 여쭈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 이다.
사람들은 말세나 종말을 까마득히 먼 미래라고 오해한다.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이후가 말세이다. 사도들은 오랫동안 구약 성경들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오신 때를 "마지막 날" "말세""종말"이라고 기록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2)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벧전1:5) "말세에 내 영을 부어주리니,,(행2:17)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고전10:11) "지금은 마지막 때라,(요일2:18)
예수께서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다.(마24:37) 즉 홍수로 심판 받기 전 말세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듯이 말세에 오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방주를 만드셨다.
지금 시대는 멸망하지 않으려면 속히 방주로 올라야할 마지막 때이며 종말이며 말세인 것이다. 또한 종말은 먼 훗날이 아니라 내 육신이 죽는 날이기도 하다.육신의 죽음 후에는 다시는 기회가 없고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말세의 모든 징조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 일어날 일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인 (마태 24장, 마가 13장. 누가, 21장)은 참으로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세의 징조들을 육적 유대인들에 나타날 말세의 징조들과 온 세상에 나타날 말세의 징조들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음을 알면 혼란스럽지 않다.
즉, 예수께서는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여 말세의 징조들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적 유대인들은 머지않아 곧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나타날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35)고 하셨으나 유대인들에게 닥칠 멸망의 징조에 대해서는 "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막13:30 눅21:32) 고 하시며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먼저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 이루리라"의 "이 세대" 가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날 멸망의 징조들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15절 에서 시작하여 34절까지 말씀하시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고 하셨다. "이 세대"란 누구일까?
"이 세대"란 예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짖으신 유대인들이다.(마12:39 마16:4)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실 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따랐으나 정작 복음을 자세히 전하시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버렸다.(요6:26-66)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만을 따랐을 뿐 복음은 배척한 것이다. 복음을 듣기 싫어한 유대인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자들이다.(마27:21-25, 눅23:18-21)
이것을 미리 아신 예수께서는 모든 저주가 "이 세대에게 다 돌아가리라"고 저주하셨다.(마23:36 ) 즉, "이 세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당시 유대인 세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닥칠 멸망의 징조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섰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셨다(마24:15 막13:14) 그때에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24:15 막13:14 )
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수많은 설들과 추측들이 난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 나오는 "멸망의 아들"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멸망의 아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멸망의 아들(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보이며 미혹한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살후2:9)
즉, "멸망의 아들"(살후2:3)은 말세의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날 사단의 불법의 아들이며 거짓 기적과 표적과 능력으로 미혹할 자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은 멸망받을 이 세대들에게 나타날 미운 물건이기에 서로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나타날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면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마24:15-34)
유대인들이 볼 때 가장 미운 물건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은 누구일까?
더 말할 필요 없이 예수이시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예수는 유대교를 뒤엎고 멸망시키려는 "가증하고 미운 물건"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감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하나님을 참칭하는가 하면, 거룩하게 지켜야할 안식일에 병을 고치며 안식일을 범하고 또 존경받는 선생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있을찐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한걸음 더 나가 유대인들이 매일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마26:61 막14:58)고 저주하는 예수야말로 유대교를 멸망케할 가증하고 미운 물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율법으로 구원 받으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 네 손과 발을 찍어내고 눈을 빼어 내버리라(마18:8-9)고 꾸짖으셨다. 이러한 예수는 유대인들이 볼 때 매우 잔포(잔인하고 포악한)(단9:27) 한 미운 물건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전을 무너뜨리려는(마26:61 막14:58) 가증하고 미운 물건인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멸망시켜버렸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은 예수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마24:15) 라고 하시며 읽는 자는 반드시 깨달으라고 강조하신다. 왜 "읽는 자"는 깨달아야 할까? 자신들이 십자가에 매단 "멸망의 가증한 것"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으면 구원받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니엘의 말한 바"를 읽어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자.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위 구절 중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9:27)의 날개가 무엇인지 알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살펴보자.
성경에 나오는 날개는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암탉의 날개"(마23:37) 독수리 날개 (출19:4) "새가 날개치며 새끼를 보호함 같이 구원하리라" (사31:5)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로다(시91:4)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 오르셨도다.(시18:10)
이처럼 "날개"가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날개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에 의지하여 일어섰다는 것은 곧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성령 날개를 의지하여 다시 서신(단9:27) 것을 살펴보자.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잔포하여 미운 물건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린 유대인들은 "사흘 후에 살아나리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건의하여 파숫군들과 함께 무덤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다.(마27:62-66)
즉, 사흘동안 굳게 지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지고 무덤이 빈 것을 보았다. 무덤이 빈 것을 본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했고, 이에 당황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고 말하라며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다. (마28:11-15)
자신들이 굳게 지킨 무덤이 비고 예수가 살아난 것을 본 유대인들은 이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알아야 했다, 즉,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났다는 것은 곧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명확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인 그리스도의 자리에 선 것을 본 것이다(막13:14)
그래서 예수께서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라고 하시며 "산으로 도망할찌어다"라고 하신 것이다.(마24:15-16)
즉, "잔포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단9:27)" 서지 못할 곳에 섰다 라는 뜻은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뜻하는 것이다.(눅24:26)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9:27)
이미 정한 종말은 유대인들의 멸망이 정해진 것을 뜻한다. 또한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는 진노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황폐하게 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쏟아질 환난과 멸망을 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니엘의 말한 바" 다니엘서 12장 11-13절을 살펴보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리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고 폐했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제물로 죽으심으로 짐승이나 예물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했다는 뜻이다.(히9:12 히10:9) 즉, 구약에는 짐승과 예물로 매일 제사를 드리며 속죄를 해야 했으나 이것은 그림자였다.짐승이나 예물로 드리던 그림자의 실체인 예수께서 오셔서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속죄가 완성되었기에 이제는 제사는 금지되고 폐해진 것이다.
결론
다니엘서는 봉해진 성경이다.(단12:9) 그러나 악한 자에게는 봉해졌으나 지혜있는 자는 깨닫는다고 하신다.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
지혜있는 자란 누구일까?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사11:1) 성령님과 함께하는 자가 지혜있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난해한 성경이나 비유를 알고자 하거든 사람의 가르침을 좇지 말고 성령님께 기도하시기 바란다.
끝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수많은 온갖 설들이 난무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를 기록한 책(요5:39)임을 아시고 읽으시기를 권면드린다. 사도바울도 구원과 상관 없는 쓸데없는 지식은 오히려 구원을 혼란케하여 구원을 방해하는 배설물일 뿐이라고 말했다.(빌3:7-8)
멸망의 가증한 것과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마가복음 13:14)
마가복음 13장은 종말의 징조와 재림의 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 중심에서 14절은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 구절은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보호, 그리고 구원의 진행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적 심판 가운데에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 역사와 상징이 겹쳐진 계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9장, 11장, 12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종말적 상징입니다. 다니엘은 장차 거룩한 곳, 곧 성소가 모독당하고, 하나님의 예배가 더럽혀질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167년경,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가증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충격이었고, 훗날 마카비 혁명을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도, 그것이 장차 다시 일어날 사건을 예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로마 군대가 성소에 들어서고, 성전 예배가 중단된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의 현실적 성취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는 성전 파괴의 예언이며,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더 이상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시대 전환의 표지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는 옛 언약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 곧 참된 성전이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성전의 종말은 단지 건물의 붕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되는 계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전환의 시점을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강조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문자적 사건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시대의 흐름을 영적으로 분별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 구절을 두고 “역사는 반복되나, 그 의미는 점점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집중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 도피인가, 믿음의 결단인가
예수님은 이어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매우 구체적이며,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중심 신앙 체계 안에 있던 자들에게 실질적인 생존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는 AD 70년 성전 파괴 전후로 ‘펠라’라는 요단강 동쪽 산악 지역으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종했고, 그로 인해 로마군의 참혹한 학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단순한 물리적 피신을 넘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시편과 예언서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로, 하나님께 피신하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시편 11편 1절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가”라고 노래합니다. 즉, 산은 단순히 높은 지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백성은 자기 고정된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쪽으로 결단해야 한다는 영적 명령입니다. 이 말은 종말의 시간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위기 앞에서도 유효합니다. 물질적 기반, 종교적 형식, 세속적 안정감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로 ‘도망가는’ 결단을 할 수 있는가가 신자의 진짜 신앙을 드러내는 기준입니다.
개혁자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며, “산으로 도망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무서운 미래를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으로 자신을 피신시키라는 영적 호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위기에서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입니다.
시대적 환란과 그리스도의 통치
마가복음 13장은 점점 더 환란의 강도를 묘사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강조합니다. 14절의 전환 이후로 본문은 전 세계적 혼란과 박해, 배교의 증가를 언급합니다. 이는 단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진행될 보편적 구속사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단지 과거 역사나 먼 미래의 종말적 징조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세우는 모든 시도들 속에서 반복됩니다. 우상, 권력, 인간 중심의 종교, 이념—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것은 다시금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도망하라, 그리고 나에게로 오라."
하느님 관련 서적
그러므로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은 오늘날에도 깊은 영적 적용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떤 신뢰의 기반 위에 서 있는가? 무엇이 무너지면 우리는 무너지는가? 우리 시대의 성전은 무엇이며, 그것이 무너질 때 나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남는 자는 피신한 자, 곧 하나님께로 향한 자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전이 무너져도, 세상이 흔들려도, 그 이름을 붙들고 산으로 도망가는 자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 위에서 우리는 다시금 참된 예배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전체 결론
마가복음 13:14은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영적 결단을 상징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거룩을 모독하는 세속의 표지이며,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의 삶을 요구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의 시대에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을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해석의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원근법"(foreshortening)을 사용하여 앞으로 올 다중적인 예언의 성취를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한 그림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구절로 역사속의 종말을 관통하는 통시성(diachrony)으로 예언의 해석방법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멸망이 얼마 남지 아니한 성전에 임할 무서운 미래를 그리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임할 세상의 파국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성전의 파괴로 시작되는 일련의 사건을 구약의 다니엘서를 인용하셔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단 9:27, 11:31, 12:11)이라는 말로 종말의 증거를 삼습니다.
예수님의
종말예언은 그러므로 중층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이미 과거에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의 등장으로
성취된 일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적 구절은 기원전 167년 안티오커스 4세라는 셀류시드의 왕이 제우스 신상과 자신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우고 돼지와 여타 부정한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가까운
미래의 성전 파괴를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는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서기 70년의 예루살렘의 붕괴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요세푸스는 안티오커스 시대의 역사기록과 거의 동일한 필치로 예루살렘성의 붕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던 제자 공동체는 유대-로마 전쟁이 시작되던 해인 서기 66년에 벨라(Pella)로 이주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세계적인 무서운 전쟁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살던 인류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전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림 직전에 전례가 없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있을 전무후무한 예루살렘의 재앙과 전쟁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예언과 묵시가 풀려 이해를 할 수 있는 해석의 단초들이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마 24:15).
악으로부터 피하여야 합니다(마 24:16). 그리고 삼가서 미혹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마 24:23, 26). 고개를 들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11월 4일(화) 마가복음 10-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믿으라(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피스틴 데우(πιστιν θεου)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때 비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짐 월리스(Jim Wallis. 1948. 6. 4 ~ )의 <하나님 편에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해야 할 공동선에 관한 책입니다.
영어 제목도 “On His Side”이니 우리 제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동참하는 기도,
하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신앙,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이루는 시도,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월리스의 한국어 번역 책 표지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라(출 14:10-2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차를 운전할 때,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옆 차선의 차는 잘 빠져나갔는데, 내 차선의 차들은 그대로 멈추어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살피고 있다가 옆 차선의 공간이 많이 벌어졌을 때, 얼른 그 차선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 차가 그 차선으로 들어간 순간, 잘 빠져나가던 차들이 순식간에 멈추어 버리고, 원래 내가 있던 차선의 차들이 생생 달릴 때, “그대로 있을걸” 하는 후회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끈기있게 서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으면, 끝이 보입니다. 옆 차선을 자꾸 신경 쓰다보면, 피곤합니다. 내 차선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똑바로 가야 합니다. 자꾸 옆에 눈길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갈멜산 대결이 나옵니다.
대결이 시작되기 전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고, 선뜻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열심히 기도했지만 하늘에서는 불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편에 서야 할지, 바알과 아세라 편에 서야 할지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렸습니다. 선뜻 하나님 편에 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살아 계십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시는 하나님,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 곁에 찾아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머뭇 필요가 없습니다.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우리의 신앙은 병들고 맙니다. 당당하게 드러낼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감추지 맙시다.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기도합시다.
사람 편에 설까, 하나님 편에 설까? 물질 편에 설까? 권력 편에 설까?
당당하게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의 북군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링컨의 안타까움을 보고 있던 그의 보좌관들이 다가와 링컨을 위로합니다.
“대통령이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북군의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링컨은 오히려 “절대 그리하지 마십시오.”라고 그들의 기도를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만약에 그대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려거든 하나님께서 북군의 편에 서기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되풀이 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118:6)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염려와 걱정 가운데 아파하십니까? 마음 아픈 일이 있습니까? 육체적인 연약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조건을 보고, 우리 편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의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환난 날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상을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에, 우리는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설임을 던져버리고 확고히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염려에 쉽게 하나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승진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망설입니다. 세상 유익을 위하여 교회 다니는 것을 숨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숨기며 안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32-33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서야 하는데,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합시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인정합시다.
어느 날,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너무 기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심문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사람들과 함께 바깥 뜰에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조금 후,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 앞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위험에 처하자,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편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분 편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야 진리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야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요 1:9)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박했습니다.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편에 서야 합니다.
중간 회색지대에서 망설이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망설이지 맙시다. 주님을 드러냅시다. 주님을 증거합시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결단하지 않으면 내일 영원한 후회를 하게 될 줄 모릅니다. 후회하기 전에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나의 주님이 누구인지를 단호하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짝퉁 보화를 버리고 하늘의 진짜 보화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처럼, 대담하게 뜻을 정하여 세상 가운데 우뚝 서야 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남긴 유언의 말씀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5-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 하나님 편에 서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너무 힘들다 해도, 신앙을 버리면 안됩니다.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의 힘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됩니다. 살기 위하여 신앙을 버리면 안됩니다. 살기 위하여 신앙을 지켜야합니다. 믿음을 지킬 때,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버리면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에는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을 바라보지 마시고, 일의 결국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만 바라보고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육적인 싸움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숨겨서는 안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의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려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
하나님 편에 설 때, 믿음의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의 나아가는 길이 평탄의 길이요, 형통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깊이 생각해야 할 질문은 “나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인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피곤하고 힘든 인생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떼를 쓰기도 하고, 과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가에 의문을 표하기도 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싸움을 합니다. 싸움을 시작할 때, 우리는 “내 편”과 “네 편”을 형성합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보면, 상대방 편에 가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내가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나를 대변해 주고,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순간,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속았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비참함을 느낍니다. 삶의 목표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마음에 근심하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다고 해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시지만, 죽음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 어둠의 골짜기, 절망의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등진다 해도 하나님은 내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나의 얼굴을 도닥도닥거려 주십니다. 나를 위로하여 주십니다. 나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나의 좋은 배경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일 때, 외롭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습니다. 설령 넘어졌다 할지라도, 주님의 손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편이실 때,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삶의 문제들을 쉽게 풀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사람들도 변합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어제는 친구였는데, 오늘은 적이 됩니다.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토록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말씀을 의심합니다. 왜 의심합니까? 왜 불평합니까? 왜 좌절합니까? 아직도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때로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고, 질병이 찾아오고, 누가 나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송사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노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13-14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멘.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가만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서서, 주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할 때,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가라 하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아멘.
우리의 삶은 뒤로 물러가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17-20절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아멘.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앞에서 막고 있는 장애물도 있고,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런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담대함을 주십니다. 막아 주십니다. 제거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문제를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들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내게 유리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 편에 서 있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 편에 서 있으므로 늘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편에 서라 (창 49:5-7, 신 33:8-11)
오늘 저는 레위 지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앞서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은 지파입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은 지파입니까? 사실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은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큰 저주를 받은 지파였습니다. 창세기 49:5절 말씀에 보면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라고 했습니다. 레아의 아들이었던 시므온과 레위를 가리켜 성경은 “잔해 하는 기계” 즉, 살인 기계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는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기계라는 말이 어떻게 축복의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6절에는 “그들은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성격이 얼마나 포학했는지 7절에는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 받은 결과로 그들은 야곱 중에서 나누어지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레위 지파하면 우리는 복 받은 지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지파,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 지파, 성막을 관리하며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지파로서 참 복을 받은 지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레위 지파는 창세기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지파요, 저주 받은 지파요, 세상에서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흩어진 지파요 분깃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이유는 거짓 맹세를 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용하여 살인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 12 아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세겜이라는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형제 중에 디나라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세겜 땅의 어느 여인을 보기위해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지방의 추장 하몰이라는 사람에게 세겜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겜이 디나를 보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세겜은 자신의 권력과 힘을 사용해서 디나를 강간하고 욕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물이 끊듯이 그 마음에 분노가 부글부글 끌어 올랐습니다. 기회만 오면 복수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특히 디나와 같은 어머니를 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등 8명의 형제들은 더욱 마음에 복수심이 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지만, 세겜 족속은 야곱 족속에 비해 힘도 강했고, 그 땅의 토박이들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복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회만 오면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마음먹은 그들에게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가 방문한 목적은 아들 세겜도 디나를 너무 너무 사랑하고 있고,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사자들을 결혼시켜서 부족과 부족이 서로 연합하여 잘 지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디나의 형제들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추장의 뜻을 알겠으나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족속이 되려면 반드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하셨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결혼을 위해 당신 부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만 한다면 이 청혼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동생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당사자인 세겜과 그 아버지 하몰은 이 제안을 듣고 그 제안을 좋게 여겨 받아들였고, 세겜 부족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추장이었던 하몰도 할례를 받고, 새 신랑될 세겜도 결혼의 날을 꿈꾸며 할례를 받고 혼례 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삼일 만에 발생했습니다. 세겜 부족인 할례를 받고 움직일 수 없는 큰 고통을 이용해서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세겜 성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할례의 고통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새 신랑 될 세겜도 죽이고, 추장인 하몰도 죽이고, 그 성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입니다.
세겜 성은 시체로 가득하게 됐고, 부녀자들과 여자 아이들은 고성을 지르며 도망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겜 성에 있었던 양떼와 소떼와 나귀를 자신의 재산으로 갈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안에 있는 재물로 시작해서 모든 집 안의 재물과 들에 있는 재물까지 모두 갈취했습니다. 그들의 자녀와 아내와 부녀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말하기를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로서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라고 했겠습니까? 그들은 분노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분노와 혈기로 남의 재물을 갈취하며 소의 발목 힘줄을 끊어 버린 잔인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결국, 시므온과 레위의 거짓된 행위와 그들의 악한 분노로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분과 혈기를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결코 받지 못합니다. 가인도 마음의 분노로 인해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잠언 27:3절에는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레위 지파하면 우리는 저주 받은 지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제사장이 된 지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는 복된 지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함께 읽은 신명기 33:10~11절에는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해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하나님께 대표로 제사를 드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복을 받아 인생이 절대고 가난하지 않은 재산이 풍족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을 대적하거나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의 허리를 하나님께서 꺾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참으로 놀라운 복을 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저주 받은 레위 지파가 복의 근원이 되는 지파가 되었을까요? 나는 오늘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복을 받고 인생이 역전되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된 사건이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의 내용을 보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기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40일 동안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며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세가 금식하며 성령에충만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에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속히 내려오지 않자 이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라 모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가 알지 못함이다”라고 말하면서 연약한 아론을 위협하여 결국, 그들의 아내들과 자신들이 귀에 끼고 있었던 금고리를 빼어서는 금 송아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 앞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가진 추태를 벌이면서 우상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일입니까?
모세는 너무나도 진노하여 십계명의 돌 판을 던져 깨어 버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그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부순 모세를 원망하고 시비를 걸면서 방자하게 행동하며 그 원수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분노하여 진문에 서서 12지파를 모두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출32:26)
이 때 11 지파가 잠잠했지만 오직 한 지파만이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모세 앞에 나왔습니다. 그 한 지파가 어떤 지파겠습니까?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출 32:27)고 명령을 내리자 레위 지파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칼로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의 민족을 그 자리에서 3천명이나 죽이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각 사람이 그 아들과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고 축복하였습니다. 사실 레위지파가 행한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짓 우상을 만들고 거짓 위상을 경배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큰 죄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형제요 가족이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자신들의 이웃과 형제와 친척을 죽인다는 것은 도무지 인간의 인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이런 인간의 정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직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람의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신명기 33:9절에는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라고 했겠습니까?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레위 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 때문에 때로는 형제를 형제로 보지 못하고, 자녀를 자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부모를 보지 않는 일도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명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부모나, 형제나, 친척이나 심지어 자녀보다 하나님을 우선 순에 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 시대에 그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자 그들에게 임했던 저주가 바뀌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반드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됩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 애굽에는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받아 히브리 사람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살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의 명령을 따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집을 하나님께서 왕성하게 하셨고, 그들의 가문은 크게 날마다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다니엘도 우상 숭배를 강요받았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우상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섬기는 마르둑이라는 신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 6:10절에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레위 인들은 오직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복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저를 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서자 그들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보면 그 첫째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오직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사장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제사장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편에 서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레위인들이 받은 축복은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33:11절에는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땅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1지파는 자신들을 축복하고,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계와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게 하도록 하기위해 십일조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결국, 레위 지파는 분깃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11개 지파로부터 받은 물질의 공궤로 가장 큰 부유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람 편에 서는 것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편에 서야 복을 받습니다. 레위 지파는 저주를 받은 지파였지만 하나님 편에 서자 그들에게 임한 저주가 큰 축복으로 변하고, 물질의 복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가 받은 복을 보면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모두 망하게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복입니다. 그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망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3:11절 후반절에 보면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결코 사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인 사람을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에게 손을 댔다고 오히려 그를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히브리서 13:17절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복을 쌓은 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레위 지파는 저주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복을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복은 영혼이 잘 되는 복이었고, 물질이 풍부한 복이었으며, 그 대적의 누구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복을 받은 원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을 때에 사람의 얼굴이나 사람의 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영혼의 복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란 영어 단어는 'GOD' 이라고 합니다.
GOD이란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DOG가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면 애완견이 아니라 거리에 버려진 개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은 "믿으면 보인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이 우선일까요?
아니면 믿은 후에 보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요?
어느 젊은이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선생님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랍비는 젊은이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선생님 어떻게 빛나는 해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때 랍비는 젊은이 자네는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가?
이렇게 깨우쳤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 55:8-9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들도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성경(Bible) 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먼저 믿음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 1. 보다.
- 2. 쳐다보다, 들여다보다 [εἰς+대격과 함께], 눅9:62, 요13:22, 행1:11, 3:4. [대격과 함께] 마5:28, 계5:3,4.
- 3. 관찰하다, 조심하다, 경계하다, 막13: 9, 빌3:2, 요이1:8. [주] [μή, μή- ποτε, μήπως와 부정과거 가정법이 뒤따라와 서] 돌보다, 바라보다, 마24:4, 막13: 5, 눅21:8, 행13:40, 고전8:9, 10:12, 갈5:15, 히12:25. [미래간접 화법] 골2:8. [ἀπό ...
- 1.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 2. [완곡어법] ㉠ ὁρ. τό πρό- σωπόν τινος, 얼굴을 보다, 행20:25, 골2:1, 계22:4. ㉡ ορ. τὴν δ όξαν τοῦ θεοῦ :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요11:40.
-
3.
바라보다, 주목하다[정신적으로], 롬15:21.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문자적으로] 보다, 인식하다.
- 2.[τι- νά, τὶ와 함께] ㉠ 별을 보다, 마2:2. ㉡ 아이를 보다, 마2:11. ㉢ 하나님의 성령을 보다, 마3:16. ㉣ 빛을 보다, 마4:16.
- 3. [ἀκούειν과 함께] 눅7:22, 고전2:9, 빌1:27,30, 4:9, 약5:11, [πιστεύειν과 대조해서] 요20:29. ㉠ 누군가를 쳐다보다, 막8:33, 요21: 21. ㉡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보다, 눅14:18. ㉢ [환상을] 행10:17, 11:5, 16:10, 계4:1.
- 1. 보다.
- 2. 찾아보다, 방문하다, 마22:11.
- 3. [육안으로 보는 것].
- 1.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2.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 3.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5:28, 눅6:41, 요1:29), 보게 되다 (마12:22), 뵙다(마18:10), 주의하다(마24:4, 막8:15, 눅21:18), 삼가다(막4:24, 눅8:18), 보이다(막8:23), 조심하다(막13:9, 고전8:9), 돌아보다(눅9:62), (눈이)밝아지다(요9:7).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19
발음 [ thĕōrĕō ]
관련 성경 /
바라보다(마 27:55, 막 15:40), 보다(막 3:11, 눅 10:18), 구경하다(눅 23:35, 계 11:12), 생각하다(히 7:4).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1:22
발음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관련 성경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관련 성경 /
보다(마 5:8, 눅 13:28, 행 2:17), 보이다(마 17:3, 행 7:30, 고전 15:5), 나타나다(막 9:4, 눅 1:11, 행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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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블레포. 991)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은 무덤‘보다’라는 헬라 단어는 ‘블레포’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데오레오. 2234) 세마포가 놓였고.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 단어는 ‘데오레오(2234)’입니다.
데오레오는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게 보는 것을 ‘데오레오’라고 한다.
요한복음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호라오. 3708) 믿더라.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호라오’이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호라오. 3708)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호라오. 3708)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에이도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
데아오마이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
블레포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요1:18).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고(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는 것’(인식)과 ‘지식’과 관련된 신약의 헬라어 단어 정리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언어에 담긴 특징을 알면 성경을 보다 깊이 인식할 수 있는데,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호흡으로 기록된 것이며(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given by inspiration of God/ θεόπνευστος 데오프뉴토스 ; 하나님의 숨, 호흡), 또한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기록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한 증거의 두 판을 받은 것으로 상징되듯이,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준 말씀이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주어졌고 또한 권위를 나타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후대에 읽기를 위해 모음을 붙이고 띄어쓰기와 장 절을
나누었다.
반면
신약의 헬라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생으로 오시고 과정을 거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글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의 마지막이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인 것이다.
주의 다 이루심은 인자로서 자신 안에 우리와 온 우주와 그 모든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기록한 헬라어 역시 그 어떤 언어보다 가장 정교하고, 예수의 그 이루심을 다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보는 것(인지)과 지식에 관련되는 단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유는 단어 해석에 있어 인지와 지식을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또 같은 부류에 속더라도 단어에 따라 그 영적 의미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욥기 42:4-6
4.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Ⅰ. 보는 것(인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헬라어
➀ ὀπτάνομαι(3700) 옵타노마이
◾ 보다, 나타나다 등, 이 단어는 어떤 대상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인식되는 것을 나타내며, 시각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나 대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being seen)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➁ θεάομαι(2300) 데아오마이
◾ 데아오마이는 눈여겨보고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7: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➂ βλέπω(991) 브레포
◾ 눈으로 보다, 식별하다, 살피다, 관찰하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➃ ὁράω(3708) 호라오
◾ 눈으로 보아서 깨달아 알다(to see with the eyes i.e. become acquainted with by experience),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의미를 분별하다(gives prominence to the discerning mind)
◾ ‘호라오’는 눈으로 보고, 그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에 속하지만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가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 성경은 본래부터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다로스 καθαρός)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으로만 깨끗해질 수 있다(요 15:3).
우리는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헬라어에서 본다는 의미를 가진 대표적인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호라오”이고 또 하나는 “블레포”입니다. 두 단어는 쓰임새가 약간 다릅니다. 블레포는 육적인 눈으로 본다는 의미로 쓰이고, 호라오는 물리적으로 보는 이외에도 이해, 인식, 통찰, 그리고 영적인식이나 지적시각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은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은유(메타포)가 무엇입니까?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본다고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 뒤에 숨어 계십니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자연을 보는데 하나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와! 원더풀!”하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본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아하! 그게 하나님을 보는 것이군요!! 나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환상을 보거나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아하! 하고, 영적인 지식이 확장됩니다. 새로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늘 나는 새를 보면서 예전과 다르게 하나님이 그 새를 키우고 계신다는 믿음이 직관적으로 들어옵니다. 영적인식, 지적시각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볼까요? 만물을 볼 때 하나님처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성용어로 관상(contempl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런 경험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줄을 몰랐을 뿐입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장애인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슬픈 드라마도 아닙니다. 그냥 대화를 들으면서 눈물이 납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냉랭한데 나는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귀한 어떤 가치가 생각이 납니다. 마음에 변화가 생깁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인데 무엇이라고 표현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통찰, 이해, 인식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흔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무어라고 표현한다고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무수히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만물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에게서 죄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강도에게서 영원에 대한 갈망을 보았습니다. 하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에게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았습니다. 비참하고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어느 오후에 자연걷기를 하였습니다. 마음이 고요했습니다. 하늘을 보았습니다.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구름들이 몰려서 떠내려갑니다.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우주의 영원성과 광활함을 느꼈습니다. ‘저 푸른 하늘은 옛적부터 그대로일 것이다. 창조 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일 것이다. 변함이 없다. 창세후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무구한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공의로 우신 하나님의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작은 점 하나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미세한 점하나 같은 존재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다 홀연히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심장에 나의 존재의 표시로 나의 작은 하트를 각인하고 사라지는 존재였습니다. 나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이 순간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이 느껴집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하트의 점을 새기고 사라지는 작지만, 아버지께 영원히 기억되는 작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벅차왔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나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보는 기쁨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제자도의 온전한 실현이라고 본다.
이것을 지복직관(beatific vision. 지복의 비전)이라고 한다.
지복직관의 개념을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신성화(deification)로
보는 반면, 서방전통 특히 개신교회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여겨 지복직관이라는 용어 사용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스 부어스마(Hans Boersma, 1961-현재)의 『지복직관』은 이것을 잘 소개해 주는 책이다.
부어스마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신학자이다.
그는 개혁파 목회자의 자녀로 자랐으며, 개혁파 목회자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북미 성공회
사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캐나다 레스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B.A.)을 공부했고, 캐나다 개혁신학대학원(M.Div.)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Th.M./Ph.D.)에서 수학했다.
그는 캐나다 랭글리에 있는 트리니트웨스턴
대학교(1999-2005)에서 가르쳤고, 리젠트 칼리지에서 제임스 페커(James Packer) 신학 교수(2005-2019)로
활동했다.
지금은 성공회 전통인 미국 내쇼다하우스(Nashotah House)의 성 베네딕트 그리스도의 종 수덕신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력에서 보는 것처럼, 부어스마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에 서 있는 에큐메니컬한 신학자이다.
하지만 대표적인 저작을 읽어보면, 그는 다양성 속의 일치만을 주장하는 학자가 아니라 기독교 전통과 교부 신학의 풍부함을 추구하는
가톨릭의 새로운 신학(nouvelle théologie)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복직관』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책에서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지복직관을 살피며, 독특한 “성례전적 존재론”(sacramental
ontology)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부어스마는 지복직관을 성서적 기반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 가를 공정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직관(vision. 直觀. 곧을 직. 볼 관. 바로 눈에 보임),
즉 바라봄은 인간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은유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모두 다 담을 수 없지만 그분과의 관계를 표현 할 수 있는 은유이다.
직관이란 일종에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접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도달하지만 결국 인간의 기호를 통해 간접적으로 도달하는 성례전적인 접근”이기도
하다.(부어스마, 29쪽)
동시에 성례전적 존재론은 실재가 물질 세계를 통해 영적인 실재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목적인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근대성은 어떤 사물의 목적이 그것의 본성과 함께 주어진다는 창조적 목적인 개념을 거부했다.”(부어스마,
61쪽)
그리고 이것은 지복직관의 개념 상실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부어스마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는 신학적이고 기독론적인
지복직관의 교리를 회복하고 재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부어스마, 92쪽)
이를 위해 부어스마는 다시 한번 기독교
전통에 집중할 필요를 말하며 다음과 같이 책을 구성한다.
책은 서론과 제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4장은 제1부로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의 지복직관’을 다루고,
5~8장은 제2부로 ‘중세 사상에서의 지복직관’을 논의한다.
9~12장인 제3부는 자신의
사상적 토대인 ‘개혁파 사상에서의 지복직관’을 다루는 데, 칼뱅으로 시작하여 청교도와 네덜란드 개혁주의에서 지복직관의 의미를
찾는다.
부어스마는 근대 초기의 청교도와 네덜란드 개혁주의 사이의 차이를 자세하고 날카롭게 대비시키지만,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의
지복직관 개념을 논의하지 않는 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마지막 13장은 책의 4부로 결론인데, “지복직관”의
교리적 평가를 교육의 입장에서 다룬다.
하나님 섭리를 신적 교육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훈련 과정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그로 인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증진되는 직관을
낳는다”(부어스마, 631쪽).
직관을 낳는 형성과정으로 교육은 독일어 Bildung에 일맥상통한다.
Bildung은 교육,
교양으로 번역되지만 엄밀히 말해 도야이다(슈바이처, 36-42쪽).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육은 네 개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부어스마, 632-638쪽).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적 돌봄에 근거를 둔다.
둘째,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견습이 필요하다.
견습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견습의 단계는 다양하지만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은 동일하다.
넷째, 하나님의 교육에는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지복직관이란
창조주-피조물 구분을 제거하지 않지만, 신적 영광과 덕에 참여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적인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참고도서 /
슈바이처, 프리드리히. 『기독교교양: 사람은 어떻게 빚어지는가?』. 손성현 옮김. 서울: IVP, 2023.
Vanhoozer,
Kevin J.. Mere Christian Hermeneutics: Transfiguring What It Means to
Read the Bible Theologically. Grand Rapids: Zondervan, 2024.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환상이나 꿈속에서 만나 봤다고 하는 신앙인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 봤다고 증거 하는 내용들은 대개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성경을 통해서 자세하게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그들이 증거 하는 내용이 성경과 맞는지를 확인해 보고 진위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보신 일이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 보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4:6)
그런데 예수님이신 길도 말씀이요, 진리도 말씀이요, 생명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성경)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으신 독자님들은 “생명의 말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말씀이라 해서 다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씨”가 있는 말씀이 있고 “씨”가 없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로 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다면 하나님의 “씨”로 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7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혈통(씨)이셨으나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가 다르다”
오늘날 목회자는 “씨”가 없기 때문에 아비는 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2~13
벧전 1:23
우리가 육적인 “씨”를 받고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씨(말씀)를 받고 거듭나야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 갈 수 있다 하셨습니다(요3:3~5)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탄생을 보지 못했어도 성경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통달했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옆에서 본 사람같이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예수님(하나님)을 만나는 방법과 천국을 보고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보물섬에 감춰놓은 보물지도와 같은 것이어서 보물지도의 암호(비유비사)를 해독해야만 보물(천국)을 찾을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실 때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각종
“비유비사”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감춰 놓으신 천국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비유비사”를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비유비사”를 해독하려고 힘써 왔지만 부분적인 해독은 할 수 있었으나 결코 완전한 해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결코 해독할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완전히 봉해 놓았기 때문입니다(계5:1)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비유비사를 해독해 주실 때가 와서 천국을 보고 들어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만날 때가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 성경의 비유비사가 해독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천국이 반드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우리가 “비유비사”로 되어 있는 성경을 완전히 해독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보고 들어 갈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거듭난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바로 묵시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봉함해 놓으신 묵시와 예언이 마지막 때가 이르면 실제상황으로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2~3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 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묵시(예언)는 정한 때가 있다 하시고 종말이 이르면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한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묵시 곧 예언이 성취되면 그 예언의 내용과 같은 실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실상으로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타난 실상을 알아보고 믿으려면 비유비사를 해독하여 묵시의 내용을 완전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을 마지막 종말이 이르면 완전히 깨닫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니엘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예레미야 23: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따라서 마지막 종말의 때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나 종말이란 뜻은 천지개벽으로 세상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기독교에 입문해서 씨가 없는 목자의 비 진리로 잘못 지어진 내 육체의 성전을 헐면(죽고) 내게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니 끝이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는가? 그것은 “씨”가 있는 목자를 만나 진리의 말씀으로 죽는 것입니다(침례) 내가 그리스도와(말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갈2:20) 그러므로 이렇게 죽고 부활하면 “재림의 영”이 임함으로 모든 것을 깨닫고 통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묵시(예언)를 해독해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진리의 성령으로부터 “비유비사”가 해독되어진 진리를 듣는 자들이 거듭나는 자들이요 “재림예수”로 탄생하는 자들이요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비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해독하여 성경의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 1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렇게 재림의 영이 임하면 성경을 통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5:1절의 안팎으로 일곱 인으로 봉해진 말씀이 해독되어 열어서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감춰져 있던 천국을 보여주시고 그곳에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으신 신앙인은 생명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듯이 혈통의 씨로 태어나신 지금 우리 옆에 계신 현제인간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계시의 말씀을 깨달아서 천국을 보고 들어가서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보는 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독자 분들께서는 필자를 신천지 인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계신데 저는 미국 씨애틀에 살며 기독교를 탈퇴한 사람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2.014 NO 271
하나님을 보는 법!!을 3가지로 정리해 볼께요.
첫째.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알진 못했지만 어려서 교회를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간 머리가 크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믿겠다.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말고도 이런 생각 한 분 많을거에요. 그런데 목회자분들께 질문해도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분들이 설명을 못 한것인지, 제가 이해를 못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작년에서야 이 답을 찾았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6장 16절-
성경에 적혀있더라고요. 죽지 않는 존재, 그리고 빛에 거하시는데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적혀있습니다. 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그 분의 생각이시니 성경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본다? 만날수는 있습니다. (맨 처음 제목은 그냥 시선을 끌려고 '하나님을 보는법'이라고 적었어요.) 성경을 직접 읽어보시면서 '아, 이건 정말 사람의 생각이 아니구나. 신의 생각이구나'를 여러분도 경험하시길 기대합니다.
둘째, 자연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다!!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 사람들은 다 지옥가는가? 세종대왕, 이순신같은 분도 지옥 가는가?? 단골 주제죠. 이것도 역시 전에는 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각자가 열심히 살아있는한 공부해야 되요.
자연을 봄으로써 창조주를 느낄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꼐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그래서 자연을 볼 때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때가 맞으면 '이게 저절로 생겼을까? 어떤 전능한 존재가 만든 것 아닐까?' 이렇게 되어있답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은 곳에서도, 예수님에 대해 듣지 못한 분들에게도, 원주민들도 포함이고 자연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찾을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것이죠. 물론 아직(?), 자연을 봐도 별 느낌, 생각이 없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너무 정신 없이 지내거나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경우면 그렇게 되지 싶습니다.
셋째, 역사를 공부함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참 놀라운데요. (아니 위에 1,2번도 다 놀랍습니다..)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거에요. 저도 더 공부해서 더 많이 정리해야는데 일단 대략이라도 얼렁 전해드리고 싶어서 적어보고 있습니다. 로마사와, 유대인의 역사를 공부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왜 기독교 탄압이 생겼고, 나중에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는 지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신기하거든요. 예수님이라는 분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의 제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유대인 말인데요. 저도 학교때 공부를 잘 안해서 몰랐는데 은근 유대인, 유태인의 단어를 여러번 들었단 말이죠. 유대인이랑 유태인이 다른건지 같은건지도 모르고 그냥 그런게 있나보다 했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대인이 성경에 나오는 그 유대인이랑 같은건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성경에 그 모세가 구출한 민족, 홍해를 가르고 나오는 민족 그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에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서 너희를 구원할거다' 적혀있는데도 실제 예수님이 태어나시니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부활을 본 제자들이 놀라고, 정말 믿게 되면서 순교하며 기독교가 퍼져나가죠.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인걸 믿지 않아요.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추방당하고 나라를 잃고 떠돌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나라(이스라엘)을 찾죠. 그렇게 나라 없이 떠돌던 민족 유대인, 그러나 또 세계 부의 40%를 장악하고 미국 대통령 거의 전부를 뽑는데 큰 영향을 준 민족 유대인. 그런데 현재 기독교를 가장 탄압하는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가 유대인입니다. 좀 단순히 말하면 인구수는 2천만으로 정말 적은데 세계 경제와 역사를 흔드는 민족이지요. 하나님이 택했던 민족이신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 반대하는 일들을 하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이방인이였던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게 하고, 또 우리를 '유대인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방식...
역사를 공부함으로써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말로만 살아계신 하나님...하는게 아니라 아 진짜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시구나. 그 분이 이끌고 가시는구나.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전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 이 말이 어색합니다. 그냥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더 맞는 듯 해요. 사람들이 연구한 바로는 약 46억년 전에 지구가 만들어 지고 약 400만년전 인류가 생겼다 하죠. 지구가 만들어 지기 전에, 태양계와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 ‘I am Who I am’ 이 The GOD. 하나님이시니까요. 사람의 언어로 적힌 성경을 읽으며 아주 조금 알아갈 뿐 우리의 머리로 어찌 다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죠.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경을 읽으세요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곧 생명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죽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 4:6)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만 참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냥 “하나님!”하고 외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걸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요?
오늘의 시편은 바로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본론
시편 19편이 말하는바
시편 19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각각 1-6절, 7-10절에서 말씀합니다.
자연계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자연’에 나타나 있습니다.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늘’과 ‘궁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자연입니다. ‘영광’과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은 각각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입니다. 그렇다면 1절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자연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자연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자연이 말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에 떠있는 저 태양을 바라보면서, 높고 높은 산과 깊고 깊은 바다와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지난달에 살펴 본 시편 8편 3절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하면서 그것들이 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2절을 봅시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날은 낮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낮과 밤은 합쳐서 ‘하루’입니다. 여기서는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라고 말하면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한다”에서 ‘말하다’는 말은 ‘쏟다, 끓어오르다’라는 뜻으로 “마치 샘에서 물이 터져 나오며 분출하는 듯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연이 증거 하는 하나님은 단순하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샘에서 솟아난 물이 지속적으로, 쉬임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연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자연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본성의 빛들(lights of nature)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리켜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말합니다.
핑계할 수 없는 계시
자연이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히 그 누구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로마서 1장 19-20절을 봅시다.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라고 말합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8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역개정성경의 난외주에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인 시편 19편 3절에도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연세계가 언어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그 소리가 분명히 땅 끝까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몰랐었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을 선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우리 귀에 들리지 않지만 이 소리는 온 땅에 통합니다. 자연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연 속에 하나님의 신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연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밤하늘에서 별을 본 지가 오래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연을 즐길 줄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산을 한 번씩 가보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보면서 자연의 무한함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함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자매가 산에 가서 쓴 짧은 시 한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산이라는 무거운 존재가 있어 사람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한편 희망을 품고 미래를 본다. 눈에 보이는 산을 통하여도, 인생에 있어 산이라는 어려움을 통하여도 동일하다. 결국 산도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매개체다.”이러한 감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연입니다.
말씀계시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7절부터 10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6가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합니다.
7절 :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8절 :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9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규례; 개역한글)
이 모든 표현이 사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씀의 효력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갖고 있는 능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7-9절에는 이 하나님의 말씀들이 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효과는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절),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8절), 영원까지 이르고, 의롭게 하는 효과(9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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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
말씀 |
특성 |
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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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
율법, 증거 |
완전, 확실 |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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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
교훈, 계명 |
정직, 순결 |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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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 |
정결, 진실 |
영원까지 이르고, 의롭게 한다. |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지혜를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해 준다. 이 말은 우리의 지각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눈을 밝게 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9절에서 말씀을 가리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특성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은 완전, 확실(7절), 정직, 순결(8절), 정결, 진실(9절)합니다.
자연계시의 한계
여기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앞서 분명히 말하기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뭣 하러 성경을 읽을까? 나아가 뭣 하러 전도를 해야 하나? 그렇지 않습니까?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자연 만물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왜 자연만물을 뻔히 보고도, 아니 그것들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진화를 창조보다 더 신뢰합니까? 그리고 성경은 왜 있어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가?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정답은 자연계시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연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한계가 생겼습니다. 분명히 자연만물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자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것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만(히 11:3)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선포하는 창조주의 영광이 들립니다. 자연을 통한 계시는 마치 희미한 유리로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고 느낄 수 있기는 하지만 선명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는 없습니다. 더 분명한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특별계시로서의 성경
그래서 자연계시는 흔히 일반계시라고 하고, 말씀계시를 가리켜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라고 합니다. 자연계시가 귀중하지만, 그것은 특별계시인 말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10절 말씀을 봅시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앞서 1-6절까지에서 자연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7-9절에서 특별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하면서 특별계시가 더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 가치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금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가치이죠. 경제학 용어 중에 ‘금본위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달러가 화폐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각 국가 간의 돈의 가치가 다른데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러입니다. 하지만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금본위제’라고 해서 금이 모든 화폐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금이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의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그런데 그 절대적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더 위대한 가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19편 저자의 관점에서
오늘의 시편을 지은 다윗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목동이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넓고 광활한 이스라엘의 평원에서 양을 치면서 하늘을 보기도 하고 땅을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변화를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늘과 땅의 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임을 볼 수 있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그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교훈입니다. 계명입니다. 말씀입니다. 그는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묵상하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편 119편에서 말씀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매우 길게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시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입니다. 이 2가지 중에 성경이 더욱 중요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절
이 사실은 우리 고신교회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첫 장 첫 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1장 성경에 관하여
Of the Holy Scripture
1. 비록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사역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사람이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낸다고 하더라도,1) 구원에 이르게 할 정도로 필수적인 지식 곧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2)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과 자신의 뜻을 자신의 교회에 선포하기를 기뻐하셨다.3) 그 이후에 육신의 부패, 사탄과 세상의 사악함에 맞서 진리를 보다 잘 보전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더욱 굳게 세우고 안위하기 위하여, 주님은 그것을 전부 기록하게 하셨다.4)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5)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던 이전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6)
1) 롬 1:20; 시 19:1-3; 롬 1:32; 2:1; 14-15 2) 고전 1:21; 2:13-14 3) 히 1:1 4) 롬 15:4; 잠 22:19-21; 사 8:20; 마 4:4,7,10; 눅 1:3-4 5) 딤후 3:15; 벧후 1:19 6) 히 1:2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2가지 방식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11절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2-13절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영혼이 소성케 되면서 자기의 허물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알려주면 자기를 돌아볼 줄 알고 더 이상 죄에 빠져 살지 않기를 간구하며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항상 가까이 하며 충고를 받고 권고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나 죄에 빠져 사는 삶을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렬하여 징계 가운데 들어가지 않습니다. 평소에 삶의 정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와 연약에 대해 권고를 받고 지적을 받고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듣고자 하는 마음 자세와 생활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에 자신을 진정으로 비추는 사람은, 허물과 고범죄(고의로 범하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죄가 주장하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13절에서처럼, “깨닫게 해 주시고 벗어나게 해 주소서”하는 간절한 심정을 갖게 됩니다.
짐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종종 성경을 짐처럼 생각합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율법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짐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신앙생활이 생활의 굴레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은 꿀보다 달다고 말합니다.
말씀과 학문
이번 달은 “종교개혁과 학문”을 주제로 살피는 달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말씀과 학문의 관계에서 이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일한 기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이것이 곧 종교개혁의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초대교장 박윤선 목사님은 “계시 의존적 사색”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에 있어서 항상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휘튼 대학의 아더 홈스(Arthur F. Holmes) 교수라는 분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All Truth is God’s Truth)”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함을 말합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학문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을 알아감에 있어서 그러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에 기초하여 볼 때에 바람직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2개의 책을 주셨습니다.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라는 2개의 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자연만물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말씀으로 또한 계시하십니다. 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을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분명히 말씀하시는 자연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당신이 세우신 설교자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또렷하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참답게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구원받은 자의 눈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얼마나 신비로운 지요? 춥디추운 겨울에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무들이 생존해 있는 것을 보십시오. 밟아도 밟아도 생명을 유지하는 풀들을 보십시오. 넓고 넓은 강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가 되는 그 신비를 보십시오. 오직 구원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알려줍니다. 이 성경을 한 해 동안 열심히 묵상하는 우리가 됩시다.
지구 두 바퀴 반의 여행
1873년에 소개된 쥘 베른의 장편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
소설의 주인공인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는 80일 만에
세계 일주가 가능한지를 두고 2만 파운드를 건 내기를 한다.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그는 하인 파스파르투를 데리고 런던에서 인도를
거쳐 일본, 미국을 통과하여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80일간의 긴 여행길에 오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설 속 세계 일주보다 무려 2배 이상 긴 여정이 우리의 몸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혈액이다.
혈액은 뼈 안에 있는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혈액의 성분은 물이 주성분인 혈장과 세포인 혈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속을
여행하는 모든 혈액의 총 무게는 체중의 약 7~8퍼센트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인 성인 남성의 경우 약
5리터 정도가 혈액이다.
그 5리터의 혈액은 혈관을 따라 쉼 없이 돌며 여러 기관 사이에 산소와 이산화탄소, 영양분과 노폐물 등의
물질을 운반한다.
그런데 피는 왜 붉은색일까?
피가 붉은색을 띠는 이유는 혈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적혈구 때문이다.
우리 몸속에서
25조 개라는 어마어마한 수를 자랑하는 적혈구는 가운데가 움푹 파인 원반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고 지름이 7.5마이크로미터가량으로
아주 작다.
이 조그마한 적혈구는 폐에서 산소를 받아서 세포에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받아 폐로 실어 나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적혈구는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헤모글로빈 안에는 산소를 붙잡는 끈끈이 역할을 하는 철이 들어
있다.
녹슨 철이 붉게 보이는 것처럼 헤모글로빈의 철도 산소와 결합하면 붉은색을 띠게 된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작은 적혈구가
개당 약 300만 개의 헤모글로빈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적혈구 한 개가 약 1200만 개의 산소 분자를 실어 나를 수 있다.
혈액 속에는 적혈구 외의 다른 여행자들도 존재한다. 그중 무색투명한 백혈구는 외부의 침략자들로부터 인체를 지켜낸다. 세균이나 이물질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면 백혈구는 여기에 대항하는 항체를 생성해서 침입자를 무력화시킨다. 또 체내로 들어온 이물질을 직접 공격하여 삼켜버리기도 한다.
혈구 중 가장 작고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혈소판은 혈액응고에 관여한다. 혈관이 손상되어 피부나 점막에 출혈이 생기면 혈액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게 되므로 출혈을 멈춰야 한다. 이때 혈소판은 혈액을 응고시켜 손상된 부위를 막아 혈액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한다. 이러한 혈액응고의 과정은 혈소판이 자신의 몸을 던져 터지며 시작된다.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사이에도 약 2천억 개의 적혈구, 1천억 개의 백혈구, 2천억 개의 혈소판이 새로 생성되어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심장을 떠난 적혈구는 불과 23초 만에 세포에 산소를 전달하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생성된 적혈구는 약 120일을 사는데 매일 적혈구의 125분의 1 정도가 새것으로 바뀐다. 백혈구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50개의 세균을 없애고 사멸하며 단 몇 시간도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혈소판은 길어야 10일을 산다. 우리 몸속 혈액의 15퍼센트는 여유분이며, 새로 생성되는 혈구들에 의해 빈자리가 금방 채워지기 때문에 헌혈을 해도 아무 문제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혈액은 어떠한 힘으로 온몸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일까? 심장의 주기적인 펌프 작용이 혈액 순환의 원동력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혈액을 순환시키는 괴력은 심장의 특수한 근육으로부터 나온다. 달리기를 하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팔을 굽혔다가 펼 때처럼 마음대로 심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자율신경의 지배를 받는 심장에는 동방결절 1 이라는 특수한 근육이 있어서 스스로 주기적인 전기 자극을 만들기 때문이다. 동방결절의 전기 자극으로 심장박동이 시작되고 조절되기 때문에 이 근육을 ‘페이스메이커’라고 부른다.
1. 동방결절(sinoatrial node, 洞房結節) :
심장의 한 부분으로, 전기자극을 생성하여 포유동물의 심장이 수축되게 하며 심장 박동의 리듬을 결정한다.
심장은 보통 자기 주먹보다 약간 크다. 1분에 약 72회, 하루에 약 10만 회를 뛰며 사람이 80세가 되면 심장은 약 29억 번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뛴 것이다. 팔이나 다리 근육이 심장만큼 움직이려면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금방 지칠 것이다. 그러나 심장은 수십억 회 박동에도 지치지 않는다. 좌심실이 한 번 박동할 때 약 70밀리리터의 혈액을 동맥을 통해 온몸으로 내보낸다. 심장은 한 시간에 약 300리터, 하루에 약 7000리터 정도의 엄청난 양의 혈액을 펌프질하는 셈이다.
혈액은 막중한 임무를 띤 채 심장의 도움으로 혈관이라는 길을 여행한다. 동맥과 정맥은 우리나라 중심 지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와 같아서 굵고 지나는 혈액량도 많다. 그리고 손끝, 발끝까지 이어진 아주 가는 모세혈관이 우리 몸속 구석구석까지 넓게 퍼져 있다. 그러나 혈액의 여행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심장에서 나가는 길인 동맥에서는 심장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압력을 견뎌야 하고, 모세혈관은 너무 얇아 적혈구 하나가 온몸을 찌그러뜨려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심장으로 돌아오는 정맥에서는 판막 2 의 도움으로 겨우 심장으로 돌아온다.
2. 판막 : 혈액의 역류를 막기 위해 심장과 정맥에 존재하는 막.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동맥을 지나온 혈액은 모세혈관을 따라 여행하며 자신의 목적지인 몸 곳곳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받아서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산소를 세포에 주고 온 혈액은 산소를 받기 위해 다시 폐로 향한다. 폐에 도착한 혈액은 세포에서 받아 온 이산화탄소를 폐에 건네주고 산소를 받아 출발지인 심장으로 돌아온다. 혈액은 이 일주 코스를 지금도 쉼 없이 돌고 있다.
작디작은 혈구들이 혈액을 타고 이동하는 혈관은 모세혈관까지 총 10만 킬로미터로 한 줄로 이으면 지구 두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거리다. 신장이 겨우 2미터도 되지 않는 사람의 몸속에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의 250배에 달하는 10만 킬로미터의 길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심장이 1분에 5리터 정도의 혈액을 내보내므로 혈액이 심장에서 나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데 채 1분이 걸리지 않는다.
혈액의 이 기나긴 여행은 어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한 여행이다. 특히 뇌의 경우는 다량의 산소와 포도당이 필요하지만 저장기능이 없으므로 혈액을 통한 물질공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15초만 혈액순환이 멈춰도 의식을 잃고, 4분이 지나면 뇌세포가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된다. 몇 초만 혈액순환이 멈춰도 우리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혈액의 머나먼 여정은 그만큼 인체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삶 속에서 아주 특별한 기적을 원한다. 그러나 일상이 없이는 특별함도 전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아무런 문제 없이 1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상의 기적, 혈액의 지구 두 바퀴 반 여행.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관한 성경구절 21가지
1.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2.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3. 시편 112: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4.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5. 시편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7.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8. 요한복음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9.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10.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11. 시편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12.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3.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4. 시편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15. 이사야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16. 시편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17. 시편 32: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8. 시편 118:8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19.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20. 예레미야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21.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을 믿으라(11:22)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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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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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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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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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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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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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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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24:14 |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11-25)
“이 녀석은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어!”
여기서 주인공이 말한 “이 녀석”은 바로 돈입니다.
그는 돈을 믿었으며, 돈은 늘 그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고, 대신 돈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원수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돈 때문에 원수와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돈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돈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모두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관일 것입니다.
돈이 아주 많다면 여러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또 돈이 아주 많다면 “원하는 것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돈이 갖고 있는 권세는 거의 “신적인 권세 (divine pow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돈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십니다.
22-24절에 쓰인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대로 되리라”를 반복하십니다.
하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며, 어떻게 원하는 것을 구하고 기도한 그대로 받게 됩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을 때 그렇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세상 사람들의 돈에 대한 신앙과 비슷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은 돈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천국 비유들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가리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그리고 그 진주를 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 보배는 감추인 보배이며, 극히 값진 보배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보배이며,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 보배입니다.
이 진리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셔서 이곳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또 예루살렘을 오가는 길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자 이 나무가 뿌리 채 말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사건들과 가르침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큰 그림”을 구성하는 부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Temple)이 있었습니다.
성전(Temple)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성전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며, 동시에 세상 만민이 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제사에 관한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이 제사는 죄인 된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 그곳에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희생 제물로 사용할 동물들을 팔거나 성전세로 낼 돈을 환전해 주는 거짓 성직자들 곧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희생 제물을 드리거나 성전세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속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전”은 매우 훌륭한 비즈니스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라, 돈을 내고 죄를 세탁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전”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전은 죄를 속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효능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방문하고 이곳에서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가 유월절을 며칠 앞둔 때라서 아마도 성전은 제사를 드리려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아 “대목”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는 헤롯 대왕이 이전에 있던 옛 성전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예루살렘에는 솔로몬 왕이 기원전 957년에 세운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유다 총독이 된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성전이 재건축되었습니다.
기원전 516년에 완공된 이 2차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하는데,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작고 초라했다고 합니다.
학개 2:3절에 따르면, 이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Temple)의 이전 영광 (솔로몬 성전)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 없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이 새 성전을 가리켜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아마도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작고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음과 같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약속하십니다. 학개 2:4-9절 말씀입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 하나님의 말씀과 신(Spirit)이 그들 중에 머무실 것,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성전을 채우실 것, 그리고 이 성전에 평강을 주실 것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만국의 보배 (The Desire of All Nations)”를 이 땅에 보내시고 또 그를 통해 온 세상을 진동시킴으로써입니다. 그리고 이 “만국의 보배”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성전의 의미를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만국 백성이 그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누리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헤롯은 이 “보잘것 없는 스룹바벨 성전”을 헐고 그 자리에 대리석과 금으로 치장한 크고 화려한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요한복음 2:19-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자, 유대인들이 반문하기를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합니다. 이 말에 따르면, 헤롯 대왕이 시작한 성전 건축은4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당시에도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대규모 프로젝트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3:1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선생님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헤롯 대왕은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한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희생 제물을 드리고 헌금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상거래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오가시는 길에 만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를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멀리서 이 무화과 나무를 보셨을 때 그것은 “잎사귀 있는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아마도 푸른 잎사귀가 무성했던 것 같습니다.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혹시 나무에 무엇인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해서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에 대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아직 먹을만한 열매가 열릴 철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의 “열매 없음”을 인하여 그것을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그리고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무화과 나무는 이튿날 아침에 뿌리까지 마른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직 철이 아닌 때에 무화과 나무의 열매 없음을 인해서 이 나무를 저주했을까요? 이는 그것의 “무성한 잎사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가장 먼저 성전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잘것 없는 성전”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전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머무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전”을 통해 거둘 열매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매” 대신 “잎사귀”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보잘것 없는 성전”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그 영광을 사모하며, 그 하신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 그 보잘것 없는 성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한 크고 화려한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의 죄”를 이용하여 제사용 동물들을 팔고 “금과 은”을 모으는 장사를 했습니다. 이 성전은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람들도 “첫 눈”에는 이 화려한 성전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탄을 하지만, 결코 이곳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사장들의 안내에 따라 비싼 값을 치르고 희생 제물을 드린 후 거짓 제사장들이 주는 “가짜 면죄부”를 받고 헛헛한 심정으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참으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사람이 먹을만한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았으며, 또 열릴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위에 인용한 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들 중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가장 귀한 보배라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 안에 있으며,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사”에 대해서 가르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값 없이 은혜로”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으며, 친히 그 몸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성전의 “터(Foundation)”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 항상 성령님께서 거하시며, 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며 (로마서 8:16), 또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해 주십니다 (로마서 8:26-27).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으신 이 새로운 “아버지의 집”에서 아무런 제약이나 장애물이 없이 자유롭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죄”나 혹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23-24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믿음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 눈으로 보기에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것을 입으로 말하고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이 하나님의 한 없는 능력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으로, 말로, 그리고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돈”이라면, 기도는 그 “돈을 꺼내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 믿음의 거래가 매일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리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아버지의 돈을 창기와 함께 허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했으며, 그 귀한 돈을 허비한 동생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아들의 가치관은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서운합니다.
(누가복음 15:29). 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그가 동생을 바라보는 눈과 똑 같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며, 염소 새끼도 주지 않는 구두쇠 영감이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죄”와 “돈”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큰 아들이지만 노예처럼 비참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에는 큰 아들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었습니다.
둘은 항상 함께 있었으며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벽이 생긴 것일까요?
이는 그에게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돈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사장들은 성전 장사를 통해 스스로 부자가 되었으며, 또 소소한 규례들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부를 쌓고 의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부와 의는 “무성한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가난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세우시고 성령께서 항상 거하시는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소원을 들으시고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실 그들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의 영광스러움을 짧은 설교에 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1월 3일(월) 마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목의 원리(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화목(和睦) : 화할 화, 화목할 목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
화목이란 단어가 사용된 한글개역성경의 구절 수는 : 104개 구절
화목(1514) 에이레뉴오(ĕirēnĕuō) εἰρηνεύω
Pronunciation [ ĕirēnĕuō ]
Etymology / 1515에서 유래, 미래 εἰρηνεύσω, 제1부정과거부정사 εἰρηνεῦσαι
-
1. ~와 평화롭게 살다, 평화를 유지하다, 막 9:50, 롬 12:18, 고후 13:11, 살전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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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화목하다(막 9:50, 롬 12:18, 살전 5:13), 평안하다(고후 13:11).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고린도후서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99.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00.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101. [골로새서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103. [요한1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04.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떤 뜻일까요?
먼저 화목이 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고,유대인과 이방인인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화목하게 만드는것, 십자가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화목하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5대 제사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이제 소금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모든 제물에 항상 소금을 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소금이 바로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을 가르키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놔둔다고 하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지 않듯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언약 = 예수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은 바로 구약과 신약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두고 화목제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깨트린 우리가 지옥을 가야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몸이 갈라지십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요즘에 돈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구절 그대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는데도 화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잠언서의 이 내용은 문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바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른 떡 한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떡은 떡인데 그렇다면 마른 떡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뜨거운 떡이 왔을때에 마른 떡은 옮겨지는 것,
레위기 24:5-8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 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7일마다 진열을 합니다.
금방한 떡을 두면 7일 동안 떡이 말라 비틀어지고 다시 새로운 떡을 거기다가 올리는 것입니다.
마른 떡을 두고도 화목하다는 구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것과 마른 떡을 두고 화목하다는 구절과 같은 개념입니다.
11월 1일(토) 마가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를 배척한지라(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Isn't this the carpenter? Isn't this Mary's son and the brother of James, Joseph, Judas and Simon? Aren'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배척(排斥) : 밀칠 배, 물리칠 척 / took offense, reject
천국 가족(하늘 가족, Heavenly Family)은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 Heavenly Father), 어머니 하나님(God the Mother, Heavenly Mother),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가족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믿음의 대상이자 구원받을 성도들의 아버지, 어머니시다. 그림자인 지상 가족으로 천국 가족을 이해할 수 있다. 천국 가족은 유월절로 혈연관계를 맺는다. 유월절로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후사로서 영생하는 축복을 누린다.
사랑의 결정체, 가족
가족은 사랑의 결정체다. 사랑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가 자녀를 낳아 사랑으로 기르는 곳이 가정이다. 부부애(夫婦愛),
부성애(父性愛), 모성애(母性愛), 형제애(兄弟愛), 효성(孝誠) 등 가족 간의 사랑은 행복한 삶의 주요 덕목이다.[1] 특히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서, 동물들에게도 흔히 나타난다. 가시고기와 황제펭귄은
부성애가 강하다.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들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며 침입자들과 사투를 벌이는 가시고기는, 알들이
부화하면 기력이 소진해 죽는다. 죽은 아비는 부화한 새끼들의 먹이가 된다. 황제펭귄은 약 두 달간 꼼짝없이 알을 품는다.
먹이활동을 중단하고 영하 60도에 이르는 혹독한 추위와 포식자들로부터 알을 지켜낸다. 모성애는 조류와 포유류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미물은 물론 이성을 가진 사람도 자녀의 위험 앞에서는 본능이 앞선다. 태아를 위해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2] 추락하는 케이블카에서 아들을 품에 안아 살린 아버지,[3] 달려오는 트럭 앞에서 자녀를 밀어내고 희생된 어머니[4] 등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종종 보도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은 생명의 보금자리이자, 사랑이 근간인 조직이다.
“ 인간의 가장 위대한 미덕, 가장 뛰어난 미덕이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유지되는 곳이 가족과 가정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윈스턴 처칠(Winston S. Churchill)“
천국 가족과 지상 가족의 관계
가족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제도로서, 하나님은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기를 바라신다.[5][6] 이처럼 사랑으로 맺어지는 지상 가족은, 천국 가족과 함께 그림자와 실물의 관계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소를 건설하라 명하실 때, 하늘 성소를 보이며 그것을 본떠서 만들라고 하셨다.[7]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언급하며 이 땅의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8:5
모형과 그림자는 실체(實體)를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지구본 모형으로 지구를 한눈에 보듯 이해할 수 있고, 손그림자로 손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늘의 것과 같은 모형을 땅에 짓게 하신 데에는 모형을 통해 하늘의 이치를 알게 하시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짓게 하신 성소만 아니라, 천국을 알 만한 창조물을 이 땅에 많이 두셨다.[8][9] 그중 하나가 가족 제도다.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가족은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 부부로 맺어주시면서 시작되었다.[10][11]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자녀들을 낳아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를 이루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루게 하신 지상 가족을 통해 실체인 천국 가족을 이해할 수 있다.
천국 가족의 구성원
천국 가족의 구성원은 그림자인 지상 가족에 그대로 나타난다. 가족은 일반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이루어진다.[12] 지상 가족의 실체인 천국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아버지는 사전적 의미로 '자기를 낳아 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자녀를 둔 남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13]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알려준다.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다. 성경은 육체의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을 말하면서 영의 아버지도 공경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이는 육체의 아버지만 아니라 영의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우른다. 영의 아버지는 사람에게 생기(영혼)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이다.[14] 자신의 육체를 낳아 준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처럼, 영혼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마땅하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우치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태복음 6:9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15]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은 '왕과 백성' 혹은 '주인과 종'으로서 주종(主從)관계의 개념이 절대적이었다.[16][17] 그러한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버지'라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천국에도 가족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가족 제도가 있듯 천국에도 가족이 있고, 지상 가족에 아버지가 있듯 천국 가족에도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 Heavenly Father)이 계신다.
자녀(형제자매)
아버지라는 신분은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자녀가 없는 남자는 아버지라 불릴 수 없다. 하나님 역시 자녀가 있기에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구원받을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구원받을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아울러 천국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도들끼리는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 지상 가족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자녀가 있는 것처럼, 천국 가족에도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다.
어머니
어머니는 가정의 구심점(求心點)이다. 어머니 없이는 자녀가 태어날 수 없고, 자녀가 없으면 아버지도 될 수 없다. 지상 가족에 어머니가 있음은 실체인 천국 가족에도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위'는 하늘, 즉 천국을 가리키고 '우리'는 구원받을 성도들을 가리킨다. 구원받을 성도들은 천국 가족의 일원이자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God the Mother, Heavenly Mother)의 자녀들이다. 생명 탄생의 결정적인 역할을 어머니가 하듯, 하늘 자녀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도 하늘 어머니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영의 아버지만 아니라 영의 어머니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성도들을 지칭하는 '우리' 안에 포함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통해서도 어머니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 그 결과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 이는 남성 형상의 아버지 하나님과 여성 형상의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나타낸다. 지상 가족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 부모의 형상대로 아들과 딸이 태어나듯, 하나님의 아들딸들에게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계신다.
유월절로 맺는 혈연관계
유월절로 천국 가족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관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타인과 맺는 여러 관계 중 가족은 혈연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인간관계와 구별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혈육의 정은 남보다 강하다'는 뜻으로, 언어권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림자인 지상 가족의 자녀가 부모의 피를 이어받듯 천국 가족의 자녀도 하나님의 피를 이어받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혈통(血統)을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혈통을 물려받음으로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영생하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으로,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라 명하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떡을 주시며 '내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며 '내 피'라 하셨다. 새 언약 유월절 안에는 오직 자녀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는 고통까지 감내하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진실된 믿음으로 그러한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유월절 예식에 참예하는 자는 하나님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녀로서 천국 가족의 일원이 되고 영생하는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단지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녀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과 혈연관계로 맺어진다. 유월절은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진리다.[1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9] 하신 예수님의 당부처럼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녀는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한 몸같이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월절 떡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한 떡에 참예함으로 한 몸이 된다고 말했다.[20]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어 서로를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게 된다. 천국 가족은 그림자인 지상 가족이 그러하듯이 사랑의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가 얻을 영광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후사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도 일러준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의 후사는 천국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21]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천국은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는 곳이다.[22] 그러나 영광에는 고난이 뒤따른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는 말처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왕실의 자녀는 엄격한 교육을 받는다.[23] 교육 과정은 다소 고통스러우나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후사 역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땅에서는 환난과 고난을 받는다.[24] 그 고난은 천국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미미하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 속한 자들로 천사와 같이 신령한 몸을 갖는다.[25] 이 세상에서는 육체를 따라 부모도 되고, 자녀도 되지만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면 각자 동등한 자녀의 입장이다. 천국의 후사들은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 안에서 서로 형제간의 우애를 가지며,[26] 우주 천체 안에 있는 각 별세계를 시찰하게 된다.[27]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수님,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전했지만, 정작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배척을 받았습니다.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사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사건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13:53-58과 누가복음 4:16-3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나사렛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의 사건 (누가복음 4:16-22)
- 예수님은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시고,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라워하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점 의심하고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들의 반응 (누가복음 4:23-27)
-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할 것을 아셨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또한,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례(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엘리사와 나아만 장군)를 언급하셨습니다.
- 이 말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려 했습니다.
2.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은 이유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익숙함’이 만든 편견
-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며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이 사람이 우리가 알던 그 예수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아일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2) 기적을 기대했지만, 실망함
- 예수님이 가버나움 등 다른 지역에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나사렛에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배척했습니다.
3) 교만과 시기심
-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구약의 사건을 언급하자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데,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언급한 것에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 또한, 같은 마을 출신인 예수님이 자신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가르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4)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 예수님은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태복음 13: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선지자들이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패턴을 보여줍니다.
3.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예수님의 나사렛 배척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1) 편견을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는 익숙함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2) 믿음이 있어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 마태복음 13:58에 따르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3)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 예수님도 배척받으셨기에, 우리도 진리를 전할 때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에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이유는 사람들의 편견, 기적에 대한 기대, 교만과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배척받으신 예수님(마태복음 13:53-58)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므로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일부 사람들로부터만 인정을 받으셨고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왕따와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왜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배척을 당하여야 하셨습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오늘 아침에는 배척받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메시야로 인정을 받지 못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의 지혜로 고향의 회당에서 하늘나라 진리를 전파하셨는데, 가르치심에 모두가 놀라서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라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진리를 전하신 회당은 ‘쉬나고게’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만을 보고 사람이상으로는 생각을 하지 않고 가르침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누구 하나도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 요셉과 약혼을 하고 육체관계를 아직 갖지 않았던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 가문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시면서도 메시야로 인정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의 원래 신분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해를 받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고 오해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에 속이 많이 상하겠지만 속이 상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도 오해를 받으신 것을 생각하시면서 잘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2.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배척하였다는 말은 적대시하다, 용납지 않다, 감정을 매우 상하게 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고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부족해서 배척까지 하였습니다.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격언은 유대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눅4: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강해를 하셨는데 강해를 듣고 있던 무리들이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알아차리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배척을 받으셔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사53:4-6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후8:9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들을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갈3:13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을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흠도 티도 없으신 하나님의 본체시오 메시야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찔림을 당하시고 버림을 당하시고 가난하게 사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배척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아 또 다른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고통과 버림과 배척을 당하시면서 단 한번도 짜증이나 불평이나 원망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고 망신을 당할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잘 참고 견디어 내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불신 세계로부터 오해를 받고 배척을 받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배신을 당하고 이용을 당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서 잘 견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우리 주님이 머리되시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 참겠느냐는 각오와 결단으로,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달려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고향에서 능력을 행치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 5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행하시는 것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장소에서나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믿음을 보시고 행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나 병을 고치실 때 믿음을 보시고 치료를 하여 주셨습니다.
마8:13에 보면, 하인의 중풍병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오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마9:2에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22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을 앓던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9:23에 보면,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복을 받고 못 받는 것, 기적을 체험하고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 병을 고침 받고, 또 받지 못하는 것은 다 믿음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 기적을 체험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 응답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 질병을 고침 받고 또 받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믿음의 장소냐 아니면 불신의 장소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믿음의 장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님은 본인 고향에서는 배척 받았나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1.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잘았기 때문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코흘리개 어린이 적부터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어머니가 어떤지, 형제 자매들이 무엇을 하는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선감이 없고 존경심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아버지 일을 거들어 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황당했을 것입니다. 막 3: 21에 보면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도 예수님을 정신 이상자 취급을 했습니다. 또한 막 3: 31-35과 요 7: 5에 보면 예수님의 친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집에 돌아오도록 채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 친지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보통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 보지 않았던 일은 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는 생전에 모두 800 여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단 1개만 팔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3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흐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겨우 있었다고 합니다. 고흐는 자기 고국인 네덜란드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척 당했던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한국 속담이 있듯이 자기 고향 땅에 별 볼일 없는 가문의 사람이 갑자기 출세라도 하는 날에는 사람들이 옛날 일만 생각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별로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 인심인데 예외 없이 예수님께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출신 지역을 들먹거린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 46) 그렇게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동네, 아직까지 아무도 위대한 사람, 유명한 사람이 나오지 못한 동네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위험한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고전 1: 27-9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신 지역을 가지고, 가문을 가지고,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 시골 마을 작고 별 볼일 없는 동네 나사렛에서 인류를 구원한 그리스도께서 나오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BC와 AD로 나누신 메시아 예수께서 나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나사렛 동네의 초라한 목수'가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예수님의 초라한 과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예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수의 아들'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서 엄청난 권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에 '선지자'라는 용어를 쓰고 계십니다. 이사야나 에레미야나 에스겔,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 반열에 당신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과거를 보지말고 현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국무총리 지명자 장상씨의 청문회를 보면서, 사람의 과거를 자꾸 캐내면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장상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국회의원들 역시 과거에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면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한국 속담처럼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내 이웃 역시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그럽게 인정하고 이웃을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이웃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나사렛 촌동네의 목수로서 보았지만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요, 메시아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죄 많고 초라했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모습을 세상에 보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요 동향 사람들
막 3: 31-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과 누이들이 찾아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누가 우리의 진정한 가족입니까? 누가 우리의 고향 사람들입니까? 단지 피가 섞였다고 해서, 이른바 삼연(三緣), 즉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을 함께 나눈다고 해서 친근감을 느낍니까? 어리석습니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나눈 형제 자매가 육신의 피붙이보다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사렛에서 살았던 예수님의 가족 친지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누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누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요, 친척이요, 동향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세상의 모든 연줄을 끊어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한 형제 자매로서 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천대 받던 직업
τελώνης (텔로네스, 세리)에 대하여
신약성경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 사역의 청중이거나 혹은 비유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특별한 직업이 있다. 그것은 세리(τελώνης, 텔로네스)라는 사람들이다. 헬라어 τελώνης(텔로네스)를 영어성경은 tax collector라고 번역하고, 한글성경은 ‘세리’라고 번역한다. 이 세리는 단순히 세금을 징수하는 관료이거나 공무원이 아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세리라고 불렸던 사람은 나라가 임명한 공무원이 아니었고 민간인이었다. τελώνης(텔로네스)라는 헬라어는 τέλος(텔로스, toll)와 ὠνέομαι(오네오마이, I buy)의 합성어로서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정부로부터 내가 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명칭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서 시작된 명칭이고, 도시국가들은 재정수입을 위하여 세금제도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정부의 관료들을 동원하여 직접적인 징수를 한 것이 아니라, 민간 세금업자들을 동원하여 세금징수를 하였다. 이런 세금징수 방법을 tax farming이라고 지칭하였다. 도시 혹은 나라의 일정구역에 세금징수를 담당할 업자들을 모집하고 그들 중에 한 사업자(tax-farmer)를 선정하여, 세금목표액만 도시에 바치고, 나머지 것은 그들의 소득으로 챙기도록 권리를 주었다. 이런 세금징수 방법은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 중 한 명인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서 발전되었고, 후에는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에도 받아들여졌다. 로마는 tax farming을 속주인 유대 땅에서 시행하였고, 예수님 시대에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가지고 일한 사람들이 바로 τελώνης(텔로네스)이었다. 이들은 민간 사업자로서 세금사업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거나(tax farmer), 이 사업자의 고용인으로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tax collector)이었다. τελώνης(텔로네스)가 세금을 거두는 집이나 사무실을 τελώνιον(텔로니온, 세관)이라고 불렀다(눅 5:27).
τελώνης(텔로네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어떤 사회에서도 결코 곱지 않았다. 이들은 할당된 세금액을 정부에 내면서도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기에 세액에 대한 불만, 세금을 내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모든 고대 사회에서(헬라, 로마, 팔레스타인 등)에서, τελώνης(텔로네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부정적이고 비호감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교 랍비들은 이런 세리들을 강도나 도적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부정한(unclean) 사람의 목록에 넣었다. 왜냐하면 남의 돈을 강제하여 가져가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하여 율법으로도 부정한 사람처럼 대하였다. 누가복음 3:13에서 세례요한은 세례 받으려 나아오는 세리들을 향하여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 정해진 세금을 넘어 탐욕을 채우는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시의 세금업자들은 나라가 정한 세금을 거두어 납세하지 못하면 세금업자들이 부족한 세금을 채워야 했고, 그러지 못하면 그들이 내세운 재정보증인들(guarantor)이 내어야 하는 것이 tax farming 제도였다. 그래서 τελώνης(텔로네스)는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악착같이 세금을 징수하였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시의 관료들에게 보고하였고, 자신들이 손해를 보지 않고 최대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사람들의 원성과 미움 받을 일들을 하게 된 것이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여리고의 세리장(ἀρχι-τελώνης 아르키텔로네스) 삭개오는 주님 앞에 세리로서 행한 일에 대하여 회개하며 회개의 열매로 주님 앞에 고백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단순한 tax collector가 아니라, 세금업자(tax farmer)로서 세금업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일 것이다. 당시 로마는 유대 땅에 직접세를 무겁게 부과했고, 물품이나 계약, 거래, 통관에 대한 간접세를 부과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인두세(poll tax)를 외세의 지배로 간주하였고, 간접세는 불의와 부정직의 상징처럼 보았다. 세금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와 불만이 주후 6년 갈릴리 유다의 조세저항운동으로 폭발한 것임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이 세금을 거두는 세리에 대하여 당연히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회개도 온전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남의 돈을 착복한 것을 율법이 정한 대로 되갚아야 하는데, 불특정 다수의 돈을 착복하였기에 그것을 빠짐없이 되갚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강조한다(마 11:19; 막 2:15; 눅 7:34). 누가복음은 세리를 다른 복음서보다 더 우호적으로 묘사하면서, 세리들은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지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이 세례를 거부했음을 말한다(눅 7:29). 또 누가의 특수자료인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특별한 비유적 가르침의 청중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15:1)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15:2)이다. 이후에 나오는 비유들, 특별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1-9),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16:19-31)는 가난한 이웃을 향한 재물의 나눔을 강조한다.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듣고 비웃을 때, 누가는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16:14)라고 판단한다. 누가복음은 죄인으로 여겨졌던 세리의 나눔과 회개를 부각시키면서(19장의 세리장 삭개오),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는 바리새인의 탐욕과 죄성을 대조한다. 그리고 세리 마태(레위)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되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공관복음서가 소개하면서 세리의 회개뿐만 아니라 부르심을 기뻐하며, 세리의 잔치에 어울리시는 주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낸다(마 9:9; 막 2:14; 눅 5:27).
마태복음은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세리를 이방인처럼 여기는 이런 유대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마 9:11; 11:19), 순종하는 둘째 아들인 세리가 불순종하는 첫째 아들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세리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마 21:31). 이런 예수의 모습은 누가복음에서 더욱 강화되어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참회하는 죄인으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심을 부각시킨다. 돈에 대한 탐욕과 불의의 존재로서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위선적인 바리새인, 성전 뜰에서 가축을 매매하게 하고 성전세를 쉽게 거두기 위해 환전상의 탁자를 허락하며 시장터로 만든 탐욕적인 성전 제사장들을 더욱 악하게 여긴다.
세리의 존재와 회개를 부각시키는 예수의 전승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이 사회에서 지탄받고 비판 받아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 목자들의 사회적 위치
🔹 1. 가난하고 천대받는 직업
• 목자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농민 계층이었어요.
• 교육을 받지 못했고, 종교적·사회적 행사에 참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죠.
• 노동이 고되고 외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 2. 부정하게 여겨졌던 직업
•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목자들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 안식일이나 정결법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에서 일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들”로 낙인 찍혔습니다.
•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회에서는 목자들의 증언조차 법정에서 무시되었다고 해요.
🔹 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심
•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낮은 자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예수님 탄생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사람들이 누구였나요?
바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8–20)
👉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겸손하고 낮은 자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상징입니다.
대한민국 상위 1% 이상 : 금수저
자산 30억 이상, 부모가 사업가 혹은 의사,교수등과 비견되는 전문직, 건물주, 성공한 연예인 등
대한민국 상위 1%, 흙갤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
금수저들끼리는 1%내에서도 금수저와 재벌가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얘기하며
금수저 이상의 플레티넘 수저 다이아 수저 비브라늄 수저 핵수저 등등 이야기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금수저와 재벌가의 차이보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차이가 더 큼.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우수한 교육, 우수한 환경, 해외여행, 대학 졸업시까지 등록금+공부에 부족함 없는 용돈, 학원, 취준
자녀는 진짜 지적장애급 아니면 서울 괜찮은 대학 이상 졸업하고 대기업 가는경우가 많음
여기서 끝나면 금수저가 아니지 마지막으로 결혼할때 서울에 평타치는 곳(7~10억, 목동급)에 집까지 하나 선물해줌
부모의 경우는 사업가나 전문직이므로 정년 후에도 계속해서 돈을 벌기때문에
자기 손자 손녀에게 용돈도 두둑하게 주는 경우가 많다.
신앙의 명문가
중국 근대사를 움직인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의 삶을 그린 ‘송가황조’라는 영화가 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송가희로 목사다.
명문가로 키워낸 송가희의 교육방법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한다.
송가희는 어려서 미국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거기서 기독교인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온 송가희는 한편으로는 사업을 해
돈을 벌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쇄소를 차려 성경을 출판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 때 친구면서 사위가 될 손문을 만나게 되는데,
손문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송가희는 결혼을 해 세 딸을 낳게 되는데, 세 딸을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 보내 공부를 시킨다.
그러다 세 딸 모두
미국에 보내 공부를 시키는데 그것은 큰 세상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고 와서 훌륭한 일꾼이 되었으면 하는 그의 비전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세 딸은 아버지의 뜻대로 믿음 안에서 잘 자라서 큰 딸 송애령은 중국 최고의 부자인 공상희와 결혼을 했고,
둘째 딸
송경령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는 손문과 결혼을 했으며,
막내딸인 송미령은 후에 중국 국민당 총재가 된 장개석과 결혼했다.
한
집안에서 2명의 퍼스트레이디를 배출한 것이다. 돈과 나라, 권력이 세 자매와 연결되면서 세 자매는 중국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세 자매의 성공적 삶 뒤에는 아버지 송가희 목사로부터 배운 신앙이 있었다. 막내딸인 송미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송미령이 살았던 ‘메이링 궁’을 가보면 2층 거실 중앙 벽에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 성경책이 놓여 있다.
남편인 장개석과 송미령은 그 거실에서 늘 기도를 했다고 한다. 송미령이 결혼을 할 때 장개석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결혼조건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개석은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앙의 명문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신앙교육과 커다란 비전이 어우러질 때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도 신앙의 명문가가 있다.
김승규 전 국정원장의 가문이다. 5대 째 믿음을 이어오고 있는 김승규 전 국정원장의 가족들은
연말이나 새해 초가 되면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데, 특히 연말에는 한 해 동안 신·구약 성경을 통독한
가족에게 선물을 주고 특별 찬양과 연주의 시간을 갖는다.
온 가족들이 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가정에서 가족예배를 드리는
것은 오랜 신앙의 전통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가족들의 영혼을 키우는 젖줄이 되어 8남매 모두 훌륭하게 자라났다.
장남
김홍규 장로(전 순천매산고 교장), 차남 김병규 장로(명보 회장), 3남 김성규 장로(유성T&G 회장), 4남 김명규
장로(전 국회의원), 5남 김승규 장로(전 국정원 원장)는 모두 다 사회의 훌륭한 일꾼들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신앙의 명문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대에 걸쳐 신앙의 계승이 이루어지고 거룩한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신앙의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명문가야 말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증거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명문가문
몇 년 전 <미국 명문가, 위대한 유산의 비밀>이라는 내용을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도시 노드댐프턴에 오래된 교회 앞에 250년 전 이곳에서 목회를 했던 목사님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순수한 복음을 강조하며 대각성 운동과 여성해방을 주장했고, 도덕과 박애라는 미국사회 특유의 가치를 만들어 냈던, 초기 미국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이 어떻게 위대한 명문가가 되었을까요?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가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는 ‘내가 이곳에서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 생각하고 뉴욕에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으니 바른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신앙의 자유의 나라인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생각했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컴퓨터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벌어서 많은 재산을 남겨 자손들을 잘 살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도소에서 5년 이상 형을 살은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만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명이었습니다.
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을 당대에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자손들
중에 부통령 1명, 주지사 3명, 예일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대학총장 13명, 교수, 교사 86명, 인구 6백만 이상의 대도시
시장 3명, 장.차관 82명, 변호사 149명, 판.검사 48명, 의사 68명, 교수 65명, 세계적인 사업가 75명, 뛰어난
발명가 25명, 군인이 76명, 문학가가 75명, 장로 집사가 286명, 그리고 목사도 116명이 탄생했습니다.
방송 기자는 위대한 명문 가문이 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현 노드댐프턴 교회의 목사를 인터뷰했는데, 목사님은 그 이유로 ‘신앙의 유산’을 꼽았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성경을 제대로 읽히기 위해서 10대 초반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가문에서 예일대학교 총장도 나오고 교수도 나오고 수십명이 예일대를 졸업했습니다.
예일대학 내에서도 조나단 연구센터를 세워서 가문의 비밀을 연구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내 놓은 결과도 에드워즈 목사의 가문이 위대한 명문가가 된 것은 ‘신앙에 기초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가족의 사랑이 위대한 가문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6:4~5]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길 원하십니까? 큰 집, 고급 자동차, 재산,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계시진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만물을 담고 있는 하늘의 유업을 주시려는데, 우리는 이 좁은 땅에서 세상의 지위와 재산을 얻으려고 믿음마져 내팽개치고 아둥바둥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유업은 세상적 상속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언제가는 썩어버리고 끝내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유업이 아닙니다.
이 하늘의 유업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유업이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 그리고 약속된 저 천국까지 모두가 하늘의 유업입니다.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았다면, 우리 자녀에게도 하늘의 유업을 상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집이나 재산이나 권력을 상속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곧 하늘의 유업을 상속하는 것이요 천국의 보화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유산은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교회 주일학교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창세기 26: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이 제단을 쌓고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듯이 아버지의 제사장 자리가 회복되고
아버지의 믿음이 자녀들에게 계승되기 위해서는 ‘가정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모두 사랑하는 자녀들이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잊지 말고
세상적인 교육에 앞서 신앙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어려서부터 주님을 경외하며 진리의 말씀 안에서
인격과 삶의 영성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보석처럼
쓰임 받는 믿음의 일꾼들이 되도록 가정예배를 회복하길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또한 하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자녀들이 악하고 음란한 문화에 빠지지않도록 신앙으로 교육하게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신실하신 은혜가 담겨진 믿음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이 믿음의 일꾼이 되도록 매일 3분씩 가정예배 드리기를 결단하고 아버지가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 앞에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명문 가문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유업을 상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믿음의 명문가문 세우기.
믿음의 명문가문을 말할 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됩니다. 할아버지대로부터 손자와 손녀에 이르기까지 3대를 계승하는 신앙, 3대가 조화를 이루는 신앙의 모습은 너무나 아릅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도 3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 복되다 생각됩니다. 어르신들은 힘이 없으시고 연로하시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나, 소년시절을 지나 청장년에 이르고, 반드시 노년층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교회는 그러한 믿음의 계승이 잘 이루어지는 가정들이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또한, 부지런히 3세대를 말씀과 기도로 잘 양육하여서 믿음의 가정들이 잘 세워지도록 목회적 노력을 기울일 책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교육문제이듯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자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사상의 분명한 전환을 결단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말세의 가장 우선된 현상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에서 시작합니다. 지독한 이기적 개인주의의 생각으로는 결코 자녀손들과 함께하는 믿음의 가문을 세울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학교, 스승, 부모에 의존하여 정보를 습득하고 삶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부모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정보의 유해 유무에 관계없이 더 많이 노출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녀세대입니다. 의존적이 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구글님(?)이 제공하는 지식이 부모들의 지식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모자신이 오직 자식사랑에만 목을 맨다면, 아쉬울 것이 없는 자식들은 교만하거나 부모앞에서 우상노릇을 할 것입니다. 많지도 않은 하나 둘 되는 자녀들에게 쏟아붓는 부모의 사랑은 가엾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넘치는 사랑은 자식을 오히려 교만하게 하거나 부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우상의 자리에 이르게 하기가 쉽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신의 방종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내 부모는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그 오만한 생각이 자식들을 폐인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식사랑의 자리에서 한걸음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가장 먼저 100세에 낳은 자식이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포기하고 내려놓으며 모리아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부모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까울 것이 없는 분이시고, 오직 하나님앞에 생명을 걸고 순종의 삶을 산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눈앞에서(코람데오) 그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살게 할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내 교회를 생명바쳐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우습게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하나님 사랑을 가장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체험장이 주의 몸된 교회입니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국교회를 매입해서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가끔씩 부모의 장례를 치른 날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출입하던 본 교회를 그리움에 찾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계신 어머니가 그리운데, 그 어머니와 함께 천국을 노래했던 그 자리로 다시 회귀하는 애틋한 마음입니다. 어머니가 이 교회에서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을 준비하였음을 알게 될 때, 그 자녀들도 결코 신앙의 세계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천국을 향해 가는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길은 바로 부모가 이 교회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사랑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와 함께 부르며 듣던 그 찬송과 말씀의 향취는 어디에서 배어나옵니까? 예배가운데 성령의 임재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지식유무를 불문하고 예배의 자리에는 차별없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은혜가 머무는 장소가 됩니다. 3대가 함께 예배하며 한 말씀을 듣고 새기며 은혜를 경험하는 가정,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각기 만나는 새로운 믿음의 명문가문의 탄생을 목도하며 누리게 괼 것입니다.
대한민국 상위 5% 이상 : 은수저
자산 10억 이상, 부모가 중소 사업가 혹은 대기업 차장 부장급, 개천에서 용나서 돈 모은 전문직, 소형 건물주 등
대한민국 상위 5%, 흙수저가 보기엔 금수저랑 별 차이가 없는 계급
금수저와 자녀가 자라는 환경은 큰 차이는 없음
다만 금수저는 강남 8학군에서 공부하고 은수저는 우수한 학군인 목동, 수성구 등에서 공부하는 차이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우수한 교육, 우수한 환경, 해외여행, 대학 졸업시까지 등록금+공부에 부족함이 없는 용돈, 학원, 취준
자녀는 진짜 지적장애급 아니면 서울 괜찮은 대학 이상 졸업하고 대기업 가는경우가 많음
근데 은수저급 자녀들중에 의외로 부모 재력에 비해 공부실력이 형편없어서 인생 대충사는 애들도 꽤 있음
그래도 뭐 부모 사업 물려받고 빽으로 괜찮은 곳 들어갈 정도는 되니 부럽다...
금수저와 은수저의 차이는 결혼하면서 부터임
금수저는 결혼할때 부모에게 서울에 평타치는 집을 선물로 받지만
은수저는 값이 좀 싼 일산, 김포와 같은 3~5억대 신도시의 집을 받는 경우가 많음.
부모의 경우 금수저만큼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노후 대비할 돈은 충분하기에
자식에게 장애가 되지않고 자기 손자 손녀한테 용돈 두둑히 줌
대한민국 상위 10% 이상 : 동수저
자산 5억 이상, 부모가 조그만 사업을 하고있거나 중소기업 임원급, 개천에서 용나서 돈 모은 대기업,중견기업 차장 부장급 등
의외로 대한민국에 순 자산이 5억 이상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실 흙갤러들 입장에선 부모가 이정도 자산만 있어도 부러워할거다
보통 이정도 재산만 있어도 금수저 드립치는게 흙갤러들
흙수저가 자기인생을 갈아서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계급이다.
(천부적인 재능 발현되어서 은수저, 금수저되는 예외적인 경우 제외)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금수저 은수저보단 모자라는 편
무난한 교육, 무난한 환경, 가끔 해외여행, 대학 졸업시까지 등록금+취준비용은 대주나 용돈은 많지 않고 학원 혹은 과외도 알짜배기로 1~2개만 다님
자녀 결혼시 집은 못해줘도 억단위의 돈을 보태주는 경우가 많다.
근데 자녀가 인생 대충 사는 애들이 많은 부류가 딱 동수저부터임
동수저부터는 공부를 안하면 자식대에서 돈 날리는 경우도 많다.
보통 어떤 사람이 연예인이 되거나 성공을 하거나 할때 최소의 마지노선 환경이 동수저 (상위 10%)임
일례로 성공한 사람들 부모 재산 보면 최~~소한 동수저 이상인 경우가 95%다.
대한민국 상위 50% 이상 : 쇠수저
자산 1억 이상, 부모가 그냥 밥벌어먹고 사는 일을 하여 돈을 모아 신도시급에 집 하나 갖고있는 경우임
부모가 정년 퇴직하면 위태로울수도 있는 경우이지만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경우가 많음
그냥 부모 자신이 늙어도 계속 일을 하려고 하지.
확실히 쇠수저부턴 여유롭지 않긴하다.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동수저랑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난다.
굶지는 않을 환경, 평범한 교육, 가~끔 해외여행, 대학 등록금은 입학금 혹은 한두학기 정도는 지원 해주거나 졸업시까지 지원해주거나 아애 지원을 안해주거나 여러 케이스가 있고, 용돈도 많지않고 학원은 필요한 경우 1개정도 다님.
자녀가 본격적으로 결혼을 포기하는 계급. 왜냐면 요즘 신도시급 집값도 3~4억인데
부모가 집값을 대주지 않는 이상 마련하기 아주 어렵거든
보통 자조섞인 목소리로 쇠수저를 물고 태어난 애들이 자기들도 흙수저라고 하기도 함.
근데 엄연히 말하면 쇠수저와 흙수저는 차이가 크다. 아래에 설명함
대한민국 상위 50% 미만 : 흙수저
자산 1억 미만 (보통 빚을 빼면 5천만도 없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일용직 혹은 알바와 다를바 없는 비전문적인 일, 부모가 집이 없거나 집 대출이 많이남음
부모가 자녀가 어릴적부터 본인 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직종 바꿔가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해서 전문성이 없음.
집에 돈때문에 월세가 밀리는 경우 많고 이사를 년마다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도 자주 전학을 감.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거의 없음
굶는 환경, 뒤떨어지는 교육, 해외여행 혹은 제주도 여행 불가능, 놀이공원과 같은 유원지에 갈 일 1도 없음, 당연히 학원은 언감생심이고 대학 등록금은 무조건 학자금 대출 받아서 가야함. 그나마 요즘은 국가장학금이라는게 있어서 흙수저에겐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었지만 나 20살 지잡대 다닐땐 부모가 등록금 대주고 그런거도 일절 없어서 대학 가려면 등록금을 전부 대출 받았어야함. (내가 그래서 20살 지잡대 1개월 다니고 바로 자퇴함) 추후 20중반에 서울 4년제 공대 다니면서도 내가 내돈으로 등록금 마련해서 학교 다녔음. 그나마 국가장학금+교내장학금+성적장학금 덕에 학교 다녔지 안그랬으면 졸업도 못했을듯.
중고딩때 용돈은 아주 최소로 받음 (한달 용돈 2만원 남짓), 학원또한 언감생심이라 사실 인강밖에 답이 없음.
노량진 공시생들 불쌍하게 방송에 나오지만 적어도 공시생은 최소 쇠수저, 동수저급은 되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난 아애 공시쪽으론 쳐다보지도 않음. 결과적으로 공대 졸업해서 취업했으니 괜찮게 풀리긴 했지만...
자녀가 결혼을 포기해야만 하는 계급임 흙수저가 결혼하면 그것은 리얼 재앙이다.
난 알바, 물류창고, 공장노가다, 숙식노가다 하면서 그런 결혼한 흙수저 30~40대를 너무 많이 봤는데
다들 인생 존나 우울하게 살더라. 흙수저 남 + 흙수저 녀가 합치면 진짜 노답인 케이스를 많이 봤음.
흙수저는 빨리 돈벌든 늦게 돈벌든 문제가 많음
내 친구도 흙수저인데 비교적 이른나이에 군대+전문대 졸업하고 20초중반에 취업했지만 지금까지 모은돈 없음
왜냐면 부모가 진 빚을 계속 값아나가느라 돈을 모을수가 없음.
부모가 자녀에게 장애물이 되기 시작하는게 흙수저임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쇠수저 대부분 부모가 자식의 돈에 간섭하고 뜯어가지 않는데 반해서
흙수저는 그런것을 뜯어가는거에 당연시하고 미안한 감정이 없음.
그게 흙수저와 비 흙수저의 차이인듯.
난 그래서 지금 결혼도 포기하고 혼자 살 준비를 하나하나 하려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요셉과 마리아 가정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물론 생물학적인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대망하며 기다리는 메시야가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로 오실 그 사람은 고귀한 신분 즉 왕, 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혈통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노골적인 배척인가 아니면 은근한 배척인가?
익숙함 속의 거절, 은혜를 가로막는 마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53절부터 58절까지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들을 마치시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신 후, 그곳에서 어떤 반응을 받으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구속사의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 천국의 말씀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그분조차도,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셨다는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은혜는 어디에서 거절당합니까? 은혜는 낯선 이들보다, 오히려 가장 익숙한 관계 속에서 더 자주 거절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어떻게 우리의 편견과 익숙함 속에서 가려지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다시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천국 말씀을 마치시고(마 13:5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마 13:53). 여기서 '이 모든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주신 천국에 대한 연속된 비유들을 가리킵니다. 씨 뿌리는 자, 가라지, 겨자씨, 누룩, 감추인 보화, 진주, 그물, 서기관에 대한 비유까지 — 이 모두는 천국의 실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하며, 듣는 자의 마음과 태도를 점검하게 만드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말씀을 마친 예수님은 고향으로 향하십니다. '그 곳을 떠나서'라는 표현은 단지 공간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공적인 사역에서 개인적인 관계로, 넓은 무리에서 좁은 공동체로 시선이 옮겨지는 전환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가장 가까운 이들 앞에 서십니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것은 경탄이 아닌 의심이었습니다.
고향에서 가르치시니(마 13:54)
"고향에 오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마 13:54).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단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유대인의 삶과 전통이 집약된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놀람은 경외가 아니라 의혹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물음은, '우리가 다 아는 사람 아니냐?'라는 편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기보다는, 그 출처를 의심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대할 때 흔히 겪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익숙함은 놀라움을 삼켜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조차도 일상의 피로감 속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가족을 알고 있지 않은가(마 13:55-56)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말리아라 하지 않느냐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마 13:55-56).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인간적 배경을 낱낱이 언급합니다. 가족들의 이름, 직업, 출신 배경까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은 단지 정보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정체성과 권위를 축소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목수의 아들', '우리와 같은 집안의 사람', 이 표현들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틀 속에 가두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틀을 깨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고, 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지 못하는 형태로 우리 곁에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때로 너무 평범하다는 이유로 지나쳐버립니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마 13:57-58)
결국 그들의 반응은 분명해집니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 13:57-58).
'배척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리조(skanalizō)'로, 걸려 넘어지게 하다, 걸림돌이 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능력이 그들의 기준과 기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헬라어 스칸달리조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ō)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그 의미는 단순히 ‘실족시키다’ 또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를 넘어,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만들다’, ‘영적 장애물을 일으키다’, ‘죄에 빠지게 유도하다’는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이 단어의 어근인 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은 원래 동물의 덫에 있는 ‘올가미’나 ‘걸림돌’을 뜻하며, 누군가가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장치를 가리킵니다. 이 말이 신약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단순한 외적인 장애물 이상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진리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내적 작용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6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이라고 하시며, 스칸달리조를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가장 심각한 죄로 지적하십니다. 또한 마가복음 4:17에서는 환난이나 박해로 인해 ‘실족하는 자들’이 언급되며, 이는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생기는 영적 위기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3:57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를 배척했다”고 나오는데, 이 '배척하다' 역시 스칸달리조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이 그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믿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스칸달리조는 외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내면의 반응, 곧 불신, 교만, 편견에서 비롯된 반응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 경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의 '믿지 않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제약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임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통로가 필요합니다. 믿음 없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기적을 제한합니다. 믿음 없는 가정은 은혜의 통로를 막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리를 찾으시고, 거기서 일하십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개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익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이 반복될수록, 그 감동은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내 마음속의 익숙함, 편견, 자기 기준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사렛 사람처럼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일상 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은혜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향에서 거절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그분을 바라볼 때, 그 은혜는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익숙함을 내려놓고, 다시 첫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마태복음 13:53-58)
마지막 부분은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거절 당하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로 본다면 다시 감추어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버림 받은 예수님은 곧 버림 받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맥락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가 거절당할 때 일어나는 일들
마태복음 13장 53절부터 58절은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들을 마치신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신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권능 있는 말씀과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현실 가운데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또 어떻게 거절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적 교훈이 담긴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완악해질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묵상하게 됩니다.
1.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익숙함이 가져온 불신앙의 비극 (마 13:53–56)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 고향으로 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13:53–54)
예수님은 천국 비유들을 마친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십니다. 고향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사람들은 그분의 가족과 배경을 잘 알고 있던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그 놀라움이 불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13:55–56)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신적 지혜와 능력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출신과 익숙함 때문이었습니다. 익숙함은 때로 신앙을 무디게 만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함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백성에게 외면당했던 모습의 반복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 않은 ‘거절당한 메시야’의 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2. 구약 선지자들의 배척과 예수님의 거절: 계시를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
예수님의 나사렛 배척 사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어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 모세는 출애굽 여정 내내 끊임없는 원망과 배척을 받았으며(민 14:2–4),
- 사무엘은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하며 그를 외면했고(삼상 8:7),
-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 생명을 위협당했습니다(왕상 19:10),
-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 불릴 만큼 끊임없는 조롱과 매질을 당했고(렘 20:1–2),
- 에스겔은 듣지 아니할 백성에게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겔 2:5–7).
이러한 배척은 단지 선지자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집단적 거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했지만, 백성들은 눈앞의 현실과 고정된 기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반복적인 거절의 구조이며,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계시의 완성’이자,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성취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배척’이 우연하거나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가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왔던 구속사적 현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가 거절당할 때: 믿음 없음의 영적 결과 (마 13:57–58)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13:57–58)
‘배척하다’는 헬라어 원어는 ‘스칸달리조’로, 이는 ‘걸림돌이 되다’, ‘믿음의 방해물이 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믿음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답하시며, 자신이 겪는 고난이 이미 예언된 것이었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이 믿음에 의존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은혜를 강권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제로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그 은혜가 역사합니다.
이 본문은 믿음 없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해 천국이 임했지만, 많은 사람은 그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거절입니다. 이 거절은 종말론적으로도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자의 존재 방식입니다.
4. 종말론적 의미와 구속사적 통찰: 배척받은 메시야와 남은 자의 신앙
이 본문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읽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거절당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 오지만, 그 권능은 믿음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이는 마지막 날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에도,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본문은 구속사적 흐름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정해진 수순임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들은 늘 거절당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구속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결국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습니다. 믿음 없는 고향 사람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품은 자들은 구속사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 안에도 예수님을 익숙하게 여겨 무감각해진 신앙의 태도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 때문입니다. 익숙함 속에서 거절당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을 요구하시며,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십니다.
결론
마태복음 13장 53-58절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동시에 어떻게 거절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익숙함은 믿음의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예수님은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거절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겪었던 고난의 반복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구속사적 사명이 인간의 거절 속에서도 계속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을 통해서만 임하고, 그 믿음은 종말론적 구원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했던 나사렛의 실패가, 우리에게는 은혜를 향한 각성으로 다가오길 소망합니다.
10월 31일(금) 마가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운데 일어서라(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shriveled hand, "Stand up in front of everyone.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 and, deeply
distressed at their stubborn heart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사람은 누구나 장점(長點. pros)과 단점(短點. cons)을 갖고 있습니다.
장점은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단점은 웬만하면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성향과 전혀 다르게 단점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오른 손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손 마른 사람의 직업을 목수 또는 석수라고 합니다.
만일 목수이든 석수이든 오른 손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오른 손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 생계에 심각한 타격(打擊)을 갖게 됩니다.
그 사람의 단점을 미리 아시고 그의 아픔을 치유하시려는 목적에 의해서 단점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문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잃던 여인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였느냐? 하시며 그 여인을 군중들 가운데서 드러내셨습니다.
38년동안 중풍병자에게 누워 있던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손 마른 사람에게 그 손을 내미랄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으려면 솔직해야 합니다.
가장 약하고 부끄럽고 드러내기 싫은 것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이 곧 나의 단점과 약점 그리고 부끄러운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마가복음 3:1~6)
어떠한 일이든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처음에 가졌던 목적이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되면, 설사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것으로 남아있을지언정, 그 내용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 가졌던 그 목적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선한 목적을 가지고 무슨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쯤에서 마음이 변하여 그 일로 돈을 벌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끝내는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일은 엄연히 같습니다마는 이제는 선행도 아니요 하나님을 위하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건 목적이 분명해야 되고, 그 목적이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경우고 그렇습니다.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주기만 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안됩니다. 사랑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이제와서 사랑받는 데에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일이든, 어떠한 선행이든 애초의 목적에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만 그 일의 참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이 잘못되어서는 안됩니다. 제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방법이 잘못되었으면 결과 역시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숫자는 맞게 채워서 형식적으로는 됐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안될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건 하는 체만 했습니다. 실상은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 가운데도 '하와 운향과 채소 같은 것은 십일조로 바치면서 중요한 것은 바치지 않는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숫자만 맞춘 것입니다. 양을 십일조로 드린다면, 예를 들어 열 마리가 있을 경우 그 중 가장 좋은 놈을 골라서 깨끗한가, 흠은 없는가 확인한 다음에 바쳐야 진정한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자는 맞습니다. 열에 하나를 바쳤으니 십일조가 됩니다마는 그 중 가장 나쁜 놈, 병든 놈을 바친 것입니다. 바치기는 했습니다마는 진정 바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만큼 괴로운 것도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을 위하여 수고하든,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든,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든 마음은 없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본인은 물론 상대방까지 그렇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유대사람들의 종교 의식, 특별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러했습니다. 목적이 변하고, 방법이 잘못되고, 형식주의에 빠졌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안식일도 아닙니다. 아무 의미도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오늘이라도 어떤 사람이 이처럼 귀한 일을 하고 다닌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마는 이상하게도 선한 일에는 비방이 따릅니다. 비방을 받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비방 받지 않고 선한 일을 하리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다. 예수님께서도 비방을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비방 받을 것이 당연합니다. 선한 일을 좀 하는 것 같더니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들이 나오자 얼른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하면 그만이지' 합니다. 언제 내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평생 선한 일을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 하고 좋은 말 들으려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다. 좋은 말 듣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일에 반드시 비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지금이라도 구제를 한다, 봉사를 한다 해보십시오.
당장에 이런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살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다닌다는 둥, 돈도 없는 사람이 돈 쓰고 다닌다는 둥, 좋은 일 좀 해서 국회의원에라도 출마할 모양이라는 둥, 별아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더구나 경건한 체한다. 잘 믿는 체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여러분, 비방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권세의 예수님께서도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쳐주심에도 비방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비방 받아야 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비방을 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이라고 하여 만사가 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반드시 무리가 따릅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를 먹이려면 외양간이 있어야 하고 외양간이 있으면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무슨 일에든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어려운 일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합니다.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마는 하나같이 피하려고만 합니다.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게만 하려고 해보십시오. 아마 모르긴 해도 다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녀 관계에서 그렇다면 시집 장가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데 결혼하려면 부득불한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더구나 내가 두 사람 모두를 좋아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인물이 잘났고, 저 사람은 학벌이 좋고-장․단점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느 쪽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식이라면 다들 좋아합니다 마는 생각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로 적어도 몇 사람이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숨어서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득불 큰 것을 놓고 그쪽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일,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셔서 시비가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팔 년 동안 귀신들려 있는 여자를 고치시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 고침을 분 내어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14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문제와의 충돌만이라도 피하셨더라면 적어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는 한 발짝도 양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아예 병 고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당장 고치지 않으면 죽게 될 사람조차 그냥 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죄로 치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당장 고치지 않아도 죽지 않을 사람, 곧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손 마른 사람쯤이야 한 달 뒤에 고친들 그 사이에 죽기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오래 앓아온 환자인데 몇 달 더 불편하게 지낸다고 대수겠습니까?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서 말썽을 일으킬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참 답답한 분이십니다. 구태여 충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까? 요즘도 좋은 일을 하려면 꼭 그렇습니다. '굳이 힘들이면서 왜 하느냐'고 말들이 많습니다. 사실 안 하면 그만입니다. 저도 목사된 입장에서 뭣 좀 하려고 하면 꼭 난관에 부닥칩니다. 좋게 좋게 하려고만 하면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안 하면 영영 아무 일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을 증축할 때에도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 자꾸만 증축하려고 하느냐'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동을 걸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도 예배당이 차고 넘쳐서 걱정입니다 마는 그나마 증축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까짓 것 안 하면 그만이지'하고 포기하면 저로서는 편합니다마는 밀고 나가려니까 문제가 됩니다. 사실 교인이 많으면 힘들기만 합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도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예수님께 한번 물어보십시다.
왜 안식일에까지 병을 고치시면서 말썽을 일으키셨습니까? 가만히 쉬면서 안식일을 지키셨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신 예는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일곱 번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는 귀신들린 사람과 베드로의 장모를, 3장에서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누워 있던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며칠 후에 고쳐주셔도 될 일을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주셔서 말썽이 됩니다.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린 여자를, 14장에서는 고창병 들린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일곱 가지의 경우가 모두 며칠 더 있다가 고쳐 주어도 괜찮을 병들입니다. 그런데 왜 안식일에 고치셔야만 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셨습니다. 환자가 눈에 보이는데 다음날에 고쳐야 합니까? 안식일이라고 내일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보셨으면 안식일에, 월요일에 보셨으면 월요일에 고치셔야 한 것입니다.
오늘 선한 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즉시로 해야 합니다. 내일 하자하고는 돌아서면 못하게 됩니다. 끝내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맙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마음에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병들어서 자리에 눕게 된 교인들이 한번 와달라고 청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일이 있어 수첩에 기록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그만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옵니다. 장례식에 참석을 합니다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는대로 가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선한 일은 직감적이고 즉행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 : 16)"-한시바삐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문제로 부딪힌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 일이어서 안 된다는 관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시비가 없도록 해야겠다는 타협적인 마음을 용납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환자를 매임에서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깊은 마음, 그 뜨거운 사랑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에는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았습니다.
십계명에는 안식일에 관한 조항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출 20:8)."
이어 한두 가지의 금기 사항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이 정도였습니다마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던 교재에는 무려 39가지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39가지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보십시다.
씨뿌리지 말라, 밭갈지 말라, 추수하지 말라, 단을 묶지 말라, 타작하지 말라, 곡식을 까불지 말라, 곡식을 씻지 말라, 곡식을 바수지 말라, 곡식을 가리지 말라, 반죽하지 말라, 떡을 굽지 말라, 양털을 깎지 말라, 빨래하지 말라, 타격하지 말라, 염색하지 말라, 실 잣지 말라, 실을 뒤틀지 말라, 두 끈을 묶지 말라, 두 실을 맞추어 짜지 말라, 짜여진 실을 풀지 말라, 매듭짓지 말라, 매듭 풀지 말라(곧 옷고름을 풀지도 매지도 말라), 두 조각의 베를 깁지 말라(곧 바느질하지 말라), 깁기 위하여 베 조각을 찢지 말라, 노루를 잡지 말라, 죽이지 말라, 동물의 껍질을 벗기지 말라, 껍질을 소금에 담그지 말라, 가죽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 머리털을 밀어내지 말라, 머리털을 깎지 말라, 두 글자를 쓰지 말라, 두 글자를 쓰려고 다른 글자를 지우지 말라, 건축물 짓지 말라, 부수지 말라, 망치질하지 말라, 불을 끄지 말라, 불을 켜지 말라(꺼져 있으면 켜지 말고 켜져 있으면 끄지 말라), 이사하지 말라-이상이 안식일에 금한 39가지의 조항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규례 대로 한다면 죄인 아닐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많은 조항을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은 어떠한 근거로든 간에 예수님을 송사 할 생각만 합니다. 선한 일 하시는 예수님을 왜 송사 하려고 합니까? 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가장 큰 이유가 질투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질투입니다. 제일로 치사한 죄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고민이 있는 것도 이 질투 때문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승부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운동하는 것이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남보다 잘하려는 생각만 합니다.
이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 사람은 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죽기 십상입니다. 운동도 적당히 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떻습니까? 남한테 이기려고 바락바락 애쓰다가 그만 과로로 죽고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제가 골프 치러 가서 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잘 치고 저 사람도 잘 치는데 나만 변변치 못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비웃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잘 치려고 정신통일 하다가 그만 머리가 터져서 죽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 질투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잘났느니 네가 못났느니 하면서 팽팽하게 맞서서 뒤로 물러날 줄을 모릅니다. 시기와 질투-에덴동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족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속에서 빼어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하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들의 위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저들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한 저들은 무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견디기 힘드는 것입니다. 남이 칭찬 받는 동안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 저들의 죄인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그렇고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는 저들이 거룩하고 존경받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마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저들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식주의자요 위선자요 돈만 아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추해졌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무서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절)"-의인이건 죄인이건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했습니다마는 사실 속에는 딴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저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이고 내가 살아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형식적으로야 온 민족을 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로마를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는 날에는 민족적으로 시끄러울 것이니 불순세력을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민족적 차원에서 거창하게 말합니다. 또한 덧붙여 하는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 아주 아는 체합니다 마는 정말 바보스런 사람이 가야바입니다.
의인 하나가 죄 없이 죽으면 그 땅이 망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합니까?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여러 모로 의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걸려든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비가 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계속하여 병을 고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뜨거운 정열과 사랑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절의 '송사하려'라는 말은 원문에서 '엿보다'의 뜻입니다. '파레테룬'-못된 의도를 가지고 올무에 걸려들기만을 예의(銳意) 관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충 보아 넘어갑시다. 걸고 넘어가겠다는 듯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볼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를 핍박하고 송사하기 위하여 행동이나 말씀 하나, 하나를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들여다본 것입니다. 범죄 하도록 조건을 만들어놓고는 편견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동정과 이해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올무에 걸려들기만을 바라는 악의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니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저들은 옳다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보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잘 걸려들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상대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이 일을 기화로 삼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른손이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교부 제롬은 이 사람이 본디 석수장이였다고 말합니다. 오른손을 사용하여 먹고살던 사람인데 그 손이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병신이 되어 생계가 어렵게 된 이 사람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어 고쳐주신 것이라고 전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문제로 여러 번 충돌하십니다.
그때, 그때 대답하신 말씀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
이를 바리새인들이 문제삼습니다.
안식일에 타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마 12 : 3~4)."
악의로 한 일이 아닙니다.
먹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지경입니다.
그 지경이기에 제사장들이나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가운데 예외가 있음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형식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동기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둘째,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일을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는 안식일을 가족과 함께 편히 쉬라고 합니다마는 목사들은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듯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난 지 8일 된 아이들에게 할례도 베풀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일을 한다, 곧 예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비로운 마음이지 제사 같은 형식적인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법입니다.
억지로 율법을 지켜서는 안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 누구를 위해 지켜야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 누구를 위해 지켜야 할 법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법입니다.
벌받을까봐 지키고 저주받을까봐 억지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나쁘게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감사함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일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주일날이니 갈 데도 못 가고 할 일도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안 하자니 욕들을 것 같고 하자니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늘상 늦게 오거나 하곤 합니다. 망설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니 당신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법의 결정체입니다.
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강의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온 예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인인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실 때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저들의 의도를 아시면 서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이 자세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만 해봐라. 안식일을 범한 것이니 당장 끌어다가 돌로 쳐죽여야 한다'하고 잔뜩 벼르고 있는 저들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시고도 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보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하고 뒤로 물러서기가 쉽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 마른 자를 세워놓고 저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담대하신 분입니다. 그때 저들은 잠잠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할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들의 입을 막아놓고 저들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자 그 사람, 손을 쑥 내밉니다.
마른손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이미 완악해진 줄 아셨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이 뜨겁고 간절한 마음, 이 엄청난 용기를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에게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요 불신앙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한치의 양보도 없으십니다.
이 일로 당장 돌에 맞아죽을지언정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당장 이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했습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면서 얼마나 용기 있게 나아가 보았습니까?
진정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까?
나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뒤로 재고 앞으로 재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입니다.
해놓은 일없이 그러구러 세월만 가버린 것입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의 이 귀한 말씀과 용기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사역에 이의를 제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가 엿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면서예수님의 안식일 사역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잠재우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의 원칙은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에 따른 선과 악의 기준이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기준, 생명을 살리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을 사역의 기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들,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이 물으신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늘 기억하며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들 마저도 사람들 위주에 따라 일하는 모습을 곧잘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 보다는
"교회의 형편과 처지와 교인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따지며 열심을 내는 교회들과 주의 종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의 옳은 신앙의 모습으로 착각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중심의
신앙생활로 변질된 교회가 결국에는 오늘 날 이 땅의 영적인 혼돈을 키워 세상을 어둡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아무도
부인 할 수 없게된 현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혼돈의 시대
지금처럼 기준이 혼돈한 때가 없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부했던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동성애를 합법화 하자는 차별금지법이 발의가 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합법화가 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의가 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하면 그 목사는 차별금지법을 어긴
것으로 되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이 땅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대적하여 거꾸로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2000년전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기준인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가지고 고민하며 씨름하며 결단하고 선택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오늘도 ‘어느 것이 옳으냐?’고 내게 물으시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다 하시는 길, 의의 길을 따라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마가복음 3:1~6)
예수께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시고 난 후 또 다른 안식일에 다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회당에 들어가시는 거기에 한 손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 있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안식일에 예수께서 율법을
어기고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행하면 고소하려고 지켜보고 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손이 마비된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서라고 명령하시고, 예수를 고소하려는 자들을 향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악을 행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였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것에 대해 슬퍼 탄식하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을 가지고 분노하시면서 그들을 둘러 보신 뒤 손이 마비된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그의 손에 생명력이 더하여져 정상적인 손으로 회복이 되었고, 이를 본 민족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평상시
성향이 정반대여서 원수와 같이 여기던 친로마 성향의 헤롯 지지파들과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서로 음모를 꾸몄음을 보며, 우리는
선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방해하는 자가 되지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 칭찬하고 격려하며 용서하는 자세를 지니고 또 주일을 성수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만남으로써 주가 주시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지금 이 시간에 죽어져 가는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안타까워하시고 회복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를 알고 사람을 죽이려 악한 일을 행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과 싸워
이기며 연약한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힘써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마가복음 3:1-6)
본문에는 ‘한쪽 손 마른 자’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2:23-28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때 안식일 논쟁이 일어 났습니다. 또 다른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6절에는 그가 “오른손 마른 사람” 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람은 손으로 많은 일을 합니다. 손으로 글도 쓰고 위대한 예술 작품도 만들고 문자도 전송합니다. 그런데 한쪽 손 마른 사람은 더군다나 오른쪽 손이 돌돌 말렸으니, 얼마나 ‘불편’ 했을까요? 예수님은 한쪽 손이 말라 콤플렉스가 있고 불편한 사람을 돕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말씀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장 안에 어떤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까? 2절에 “ 예수를 고발하려 하는 사람들” 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6절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쪽 손마른 사람을 고치시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을 어긴 죄’로 고발하고자 함이요, 고치시지 않으면 ‘사랑의 구주가’ 아니다 힐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법조문을 내세워 송사할 구실을 만들고 꼬투리 잡으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6절에 ‘예수를 죽이고자’ 의논 하였습니다. 바래새인들은 겉은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한쪽 손마른 자에 대한 사랑이 메마른자요, 약자를 이용해 예수님 고발해서 죽이려는 미끼로 쓰려한 위선자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은 말씀을 나누는 은혜로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살벌했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 예수님은 고발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묻습니까?
1. 핵심 가치를 물으시는 예수님
3절에 “한 가운데 일어서라” 누가복음 6:8절에는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잡아 죽일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주시하는 상황에서도 한쪽 손 마른 자에게 “ 한 가운데 일어서라 ” 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긴장하며 주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물었습니까? 마태복음 12:10절에 “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안식일 법’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예수님 지금 불법을 행하는 거죠? 라고 추궁한 것입니다. 법조문을 걸고 넘어져 ‘고발 하려는 사람’ 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질문을 되물으십니까? 4절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마태복음 12:11절에 추가된 질문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왜 안식일 법을 어기느냐는 사람들에게 ‘법조문이냐 생명이냐?’ 핵심가치를 물으셨습니다.
안식일 날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그 양을 구해 낼 것입니다. 법조문 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법의 정신’을 잃고, 법조문에 얽매인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적 관점을 핵심가치로 깨트리신 것입니다. 동시에 ‘참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2절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한갖 미물 짐승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건져 내 살려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천하보다 귀한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짐승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살리는 것이 동물 복지요 자비라면, 영혼의 소유자 사람은 더욱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참 뜻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3:16절에 “그러면 열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에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때 회당장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고 비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아’ 책망하셨습니다. “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 곧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탄에게 매여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풀어 주는데 있다’ 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이 일에 있었고, 예수님 자신 또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그 일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참 안식 속에 들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게 하십니다(요 5:23). 마가복음 2:27절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님은 ‘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임을 알려 주신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핵심 가치는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려 하는 일이 사람을 올무에 가두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이라 해도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구덩이에 빠진 짐승은 건져내는 것이 바로 안식일의 바른 정신입니다.
이때 바리새인들 반응이 어떠합니까? 4b절 ”그들이 잠잠하거늘” 왜 그들이 잠잠했을까요? 어느 것이 옳은지 몰라서 대답 못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잠잠한 까닭은 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동안 그들이 가르쳐왔던 안식일 규정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자부심이 무너지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진리는 밝히 드러났는데 받아들일 수 없어 잠잠한 것입니다. 이로서 그들은 ‘진리의 사람이 아니다’ 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낡은 전통과 규례 고수를 진리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낡은 가죽 부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탄식 하셨습니까? 5a절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무지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면, 완악함은 깨달은 하나님 진리의 핵심가치 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전 삶을 고집하며 곁가지만 붙잡고 늘어지는 완악함 때문에 진리의 핵심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의 핵심가치는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이며, 안식일의 핵심가치는 법조문이 아니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곁가지가 아니라 핵심가치를 붙들고 실천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 불편한 문제를 가진 자를 받아 주신 예수님
지금 회당장 분위기는 살벌합니다. 그러면 ‘오늘만 날인가?’ 하고 손마른 자를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회당장안에서 손마른 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한 가운데 일어서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불편한 문제들을 다 가지고 있죠?
겉은 멀쩡해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남모르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불편함의 문제를 다 가지고 있죠?
어떤 이는 외모 콤플렉스로, 혹은 사랑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한나는 남편 사랑은 더 받았으니 자식을 낳지 목하는 콤플렉스로 한맺힌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성경 사무엘서에 나옵니다. 어떤 이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콤플렉스도 있습니다. 어떤이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공항장애를 겪는 이도 있습니다. 혹은 가정 환경 배경 때문에 컴플레스를 겪는 이도 있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콤플렉스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시했습니다. 한쪽 손마른 사람처럼 장애를 안고 불편하게 살아 가는 자를 볼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리새인 처럼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혹 외면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우리주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를 외면하지 않으셧습니다. 관심을 갖고 그를 회당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해 주시고 받아 주셧습니다. 이 예수님은 헤세드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구세주 이십니다.
3. 한 손 마른 자를 살려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긴다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한편 손 마른 자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5b절에 “네 손을 내밀라” 명 하셨습니다.
'내밀라'는 뜻은 “오그라든 네 손을 펴라” 는 말씀입니다.
콤플렉스로
돌돌 말린 ‘심령을 활짝 펴 믿음으로 내 밀라’ 는 말씀입니다.
그가 “내밀자” 곧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니 이전처럼 성하여 진 것입니다. 고발하려는 자들의 주시 속에서 예수님은 당당히 한 병든 영혼을 치유 하셨습니다.
사 59:1~3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의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예레미야 애가 3:40~41절에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말씀하십니다. 여기 ‘손을 들자’는 말은 손이 한 일을 회개 하자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손을 들어 선악과를 따먹었죠? 불순종의 손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손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약 4: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 ‘병든 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오그라진 손’을 주께 내밀고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 오그라든 손을 주께 내밀어 치료를 받으면 주님의 은혜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회복 됩니다. 첫 사랑을 회복 하게 됩니다. 주의 의로운 병기로 회복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긍휼과 인자가 풍성하신 구주이십니다. 안식일이라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12b절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쪽 손 마른 자를 방관하지 않고 고쳐 주시는 것이 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죄와 질병으로 부터 구원하사 참 안식 주셨습니다.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죄와 죽음, 사단의 세력에서 건져 ‘참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캐나다에
Maud Lewis 라는 실존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애칭은 Maudie 입니다.
1903-1970 년까지 산 그녀는
어릴때는 기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라며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뒤뚱뒤뚱 걷고 행동이 불편하며 오른 손이 돌돌 말렸습니다.
오빠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아버지가 남겨준 얼마 안되는 유산마져 처분해 가로채 갔습니다.
그녀는 친척에 의해 양육됩니다.
1928년 24세때 그녀는 딸을 낳았는데, 식구들은 아이도 기형이라 속이고 다른 집에 입양을 보냈습니다.
숙모에 얹혀 살던 그녀는
‘가정부 구함’ 이란 광고를 보고 생선 행상 Everett Lewis 집에 갔다가 그녀 나이 34세때, Everett Lewis
와 결혼 합니다.
그들은 Marshalltown 에 잠자는 다락 방이 있는 에버렛의 방 1개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남편은 거칠고
기형인 마우디를 무시하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은 허용합니다.
Maud Lewis 는 페인트로 집
벽과 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엽서 그림을 그려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녀 작품은 색깔이 화려하고 따뜻하며 밝고 섬세한게
특징입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내인생 전부가 액자속에 있어요’ 입소문이 나서 미 대통령까지 그녀 그림을 구매할
정도록 ‘Naive 화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T.V나 신문에 소개 되고 유명세를 타자 친척이 찾아와 입양간 딸은 실제 장애우가
아니고 양 아빠 와 행복하게 산다는 고백을 듣습니다. 멀리서 자기 딸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본 뒤 되돌아와 ‘자기는 많이
사랑받은 사람’이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이 감동적인 실화 스토리는 장애인인 에이슬링 월시 감독에 의해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 주연으로 영화화 되어 원제가 Maudi, My Love 였는데, 35회 벤쿠버 국제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고, 2017년
전주 국제 영화제 상영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내사랑” 이란 제목으로 상영된바 있습니다.
우리는 장애우를 볼때 불행할 것이란 편견을
갖고 무시하기 쉽죠? 그러나 이 영화의 실존인물 Maud Lewis 는 근육통과 관절염으로 손이 심히 기형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살려 그림 그리는 일로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고 수없이 붓을 들어 자기 마음에 있는 따뜻한 그림을 그려 다른 사람들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장애우에 대한 바리새인의 시각을 에수님 시각으로 고쳐야 합니다. 장애우도 똑같이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입니다. 똑같이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이고 우리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조금 어느 한구석이 불편할 뿐입니다. 장애우도 하나님을 만나 오그라든 손을 펼때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줄수 있는 축복의 샘터입니다.
더나가 고침 받은 우리는 이제 ‘오그라든 손’을 펴서 ‘선한 일’과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것입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6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평소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상극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데는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옛 형식을 고집하는 완악함 때문에 마귀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딤후 3:5절은 말씀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예수님은 자기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쪽 손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한쪽 손마른 콤플렉스와 불편한게 많은 장애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15:13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핵심 가치를 붙들고 메시야의 목숨을 걸고 한쪽 손마른 사람을 치유해 주셧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사랑과 긍휼 헤세드가 풍성하신 주세주이십니다. 오늘날 삼가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법 조문에 얽매이기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성경의 핵심 가치인 ‘선을 행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는 자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어서라(에게이로. ĕgĕirō) ἐγείρω
Pronunciation [ ĕgĕir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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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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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동사] 깨우다,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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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으로: 자던 사람을 깨우는 경우] 마8:25, 행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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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징적으로] 일으키다, 일어나게 하다. ㉠ [앉은 사람을] 행3:7. ㉡ [누운 사람을] 막1:31, 9:27. ㉢ [엎드린 사람을] 행10:26. ㉣ [구덩이에 빠진 것을] 마12:11. ㉤ [앓는 사람을] 낫게 한다, 약5:15. ㉥ [죽은 사람을] 일으키다, 다시 살리다, 마10:8, 요5:21, 행26:8. [주] [예수께서 살리신 일에 대해서] 행5:30, 10:40, 13:37, 고전6:14, 15:15,16,17, 고후4:14, ἐ. τινὰ ἐκ νεκ- ρῶν, 요12:1,9,17, 행3:15, 4:10, 13:30, 롬4:24, 갈1:1, 엡1:20, 골2:12, 살전1:10, 히11:19, 벧전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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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세우다, 일으키다, 다시 세우다. ㉠ [성전을] 요2:19,20. ㉡ [구원의 뿔을] 눅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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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상징적으로] 일으키다, 생기게 하다, 나타내게 하다, 원인이 되게 하다, 눅3:8, 행13:22, 빌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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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동사: 명령형으로만 사용되어] ἔγειρε, 일어나라! 오라!, 마9:5,6, 막2:9,11, 3:3, 5:41, 10:49, 눅5:23, 24, 6:8, 8:54, 요5:8, 엡5:14, 계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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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수동태 자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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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깨다, 잠깨다, 마1:24, 25:7, 막4:27, [비유적] 롬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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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어나다, 마2:14,20,21, 8:26, 눅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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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앉았던 사람이] 마9:19, 눅13:25, 요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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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앓는 사람이] 마8:15,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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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마9:25, 눅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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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식탁에서] 요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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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넘어졌다가] 행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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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 살아나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막6:14, 눅9:7, 요2:22, 21:14, 롬6:4,9, 8:34, 고전15:12, 20, 딤후2:8, ἀπο τῶν νεκρ ῶν, 마14:2, 27:64, 28:7, [독립적으로] 마11:5, 16:21, 막6:16, 12:2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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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력적으로] 일어나다 ἐ. ἐπί τινα: ~을 대항하여 일어나다, 마24:7, 막13:8, 눅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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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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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언자가] 마11:11, 눅7:16, 요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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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거짓 예언자가] 마24:11,24, 막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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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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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ἐγείρου: 일어나라, 막2:9, 눅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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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ἐγείρεσθε, ἄγωμεν: 일어나라, 가자!, 마26:46, 막14:42, 요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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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mmar 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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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ἐγερῶ , 제1부정과거 ἤγειρα, 현재수동 ἐγείρομαι, 현재명령2인칭단수 ἐγείρου, 복수 ἐγείρεσθε, 완료수동 ἐγήγερμαι, 제1부정과거수동 ἠ- γέρθην, 미래수동 ἐγερθήσομα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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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미래 ἐγερῶ , 제1부정과거 ἤγειρα, 현재수동 ἐγείρομαι, 현재명령2인칭단수 ἐγείρου, 복수 ἐγείρεσθε, 완료수동 ἐγήγερμαι, 제1부정과거수동 ἠ- γέρθην, 미래수동 ἐγερθήσομαι.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2:14, 막5:41, 행12:7), 일어나게 하다(마3:9), 깨우다(마8:25), 살리다(마10:8, 요12:1, 행10:40), 살아나다(마11:5, 막6:14, 요2:22), 내다(마2:11), 일어서다(막3:3), 깨다(막4:27, 눅8:24, 롬13:11), 세우다 (행13:22, 23), 살다(고전15:20,43).
1614. 내밀다(ĕktĕinō) ἐκτείνω
Etymology / 미래 ἐκτενῶ , 제1부정과거 ἐξέτει- να, 1537과 τείνω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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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뻗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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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적으로] 뻗치다, 퍼뜨리다, 마12:13, 막3:5, 눅6:10, 행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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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엇인가를 잡기 위하여] 마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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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누군가를 붙들기 위하여] 마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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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누군가를 고치기 위하여] 마8:3, 막1:41, 눅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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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목적을 표시하는 εἰς와 함께] 행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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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적대적 의도로] 눅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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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누군가를 지적하기 위하여] 마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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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말하는 자의 자세로서] 행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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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십자가에 달린 자에 대하여] 요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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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유적으로] 길게 늘이다, 길게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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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내밀다(마 8:3, 막 1:41, 행 4:30), 펴다(마 26: 51), 대다(눅22:53), 벌리다(요21:18), 내려 놓다(행27:30), 들다(행26:1).
마태복음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With that, one of Jesus' companions reached for his sword, drew it out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회복되었더라(600) ἀποκαθίστημι
Pronunciation [ apŏkathistēmi ]
Etymology / 미래 ἀποκαταστήσω, 제2부정과거 ἀπεκατέστ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α- τασταθήσο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 πεκατεςτάθην, 575와 2525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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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생하다, 회복하다, 복구하다, 마17:11, 막9:12, 행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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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의학적으로 용어로] 낫게 하다, 치료하다, 막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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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수동으로] 마12:13, 막3:5, 눅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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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돌려주다, 도로 주다, 히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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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회복하다(마 12:13, 17:11, 막 9:12, 눅 6:10, 행 1:6), 돌아가다(히 13:19), 낫다(막 8:25).
한편 손마른 사람. 처지
1. 육신(마 25:31-35, 개역)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눅 10:30-34, 개역)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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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소개
왜 마가복음을 공부하는가?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죽음, 부활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며, 대체로 구주의 권능 있는 행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행적 중 으뜸은 속죄이며, 마가는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속죄를 강조했다. 여러분은 구주께서 속죄라는 사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다룬 마가의 기록과 간증을 공부하면서 복음으로 더 깊이 개종하게 되고 구주를 따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누가 마가복음을 썼는가?
이 복음서의 저자는 마가(또한 요한 마가라고도 불림)이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 제자들에 속해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개종하여 사도 베드로의 조력자가 되었으며, 베드로에게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경전 안내서, “마가” 참조)
마가와 그의 모친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집은 일부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사도행전 12:12 참조) 마가는 첫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사도행전 12:25; 13:4~6, 42~48 참조) 이후에 바울은 마가가 로마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했으며(골로새서 4:10; 빌레몬서 1:24 참조), 마가를 성역 “일에 유익[한]”(디모데후서 4:11) 동반자로 칭찬했다.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베드로전서 5:13)로 언급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시사했다.
마가복음은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가?
마가복음이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는 주후 64년과 주후 70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 복음서를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때는 아마도 사도 베드로가 주후 64년경에 순교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구를 위해, 왜 쓰였는가?
마가복음에는 아람어 인용문의 번역본, 라틴어 표현,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설명 등이 자세히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주로 로마인과 그 외 이방 국가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 로마와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구성된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다수 회원들이 신앙의 시련을 극심하게 겪던 시기에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마가복음 중 삼분의 일은 구주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 동안 전하신 가르침과 그 기간의 사건들을 다룬다. 마가는 수난을 겪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국에는 악과 죄, 죽음을 이기셨음을 증거했다. 구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이 증거는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나 시련, 또는 죽음에 처했을 때에도 구주를 따랐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며 그분이 하신 약속은 결국 성취될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 있게 견뎌 낼 수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마가복음은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전개되며, 사건들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이어간다. 마가는 곧, 즉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빠른 속도와 행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마가복음의 내용 중 90퍼센트 이상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것이지만, 마가의 기록에는 종종 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구주께서 보이신 연민과 그분의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더 깊이 느낄 수가 있다.(마가복음 9장 14~27절을 마태복음 17장 14~18절과 비교해 본다.) 예를 들어, 마가는 구주께서 성역 초기에 갈릴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널리 열렬한 환대를 받으셨다고 언급했다.(마가복음 1:32~33, 45; 2:2; 3:7~9; 4:1 참조) 마가는 또한 조심스럽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기록했는데, 그들의 반대는 회의적인 생각에서부터(마가복음 2:6~7 참조)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에 이르기까지(마가복음 3:6 참조) 급속도로 커져 갔다.
마가복음에서 다룬 중요한 주제 중에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누가 그분의 신분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마가복음 8:34) 하는 제자의 본분도 포함된다. 또한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마가복음 4:26~27 참조),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 먹은 사람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7:31~37 참조), 그리고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8:22~26 참조)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개요
마가복음 1~4장. 예수께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을 부르고, 기적을 행하는 일을 시작하시다. 그분이 자신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자 비유로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5~7장. 구주께서 계속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보이시다. 침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후, 예수께서 5천 명 이상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다. 그분이 거짓 전통에 반하는 가르침을 주시다.
마가복음 8~10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시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간증하다. 구주께서 자신이 고통과 죽음 및 부활을 겪게 된다고 세 차례 예언하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11~16장. 구주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다.
마가복음서의 핵심 내용과 주요 메시지
Mark → 베드로의 증언을 바탕으로 마가가 기록한 행동 중심의 복음서
2. 헬라어 원어 및 발음
원어: Κατά Μάρκον
발음: Kata Markon (카타 마르콘)
→ 뜻: “마가에 따른 복음서”
3. 복음 중심 한 문장 요약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증거하며,
신속하고 강력한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복음서이다.
4. 복음적 메시지 요약
“즉시”, “곧바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복음서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 병 고침, 귀신 쫓음, 기적들이 중심
예수님은 섬김받으러 온 왕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신 종 (막 10:45)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오해하지만,
십자가에서 비로소 진정한 메시아의 정체가 드러남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구속의 절정
대표 구절(마가복음 10:45)
마가복음은 어떤 책인가?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을 통해서 볼 때 마가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유대풍습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으로 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리스어로 마가복음을 쓸 만큼 그리스어에도 능통하고,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나올 때마다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어에 능통한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봅니다.
마가복음의 대상자는?
로마제국 비유대계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서 족보도 없고 구약 이야기가 적습니다.
반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7:24-30)과 로마군 백부장(15:39)을 등장시킵니다.
2. 마가는 12제자가 아닌데 어떻게 복음서를 썼는가?
사도행전에 보면,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로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구브로섬(키프로스) 출신이므로 그리스어에도 능통해서 주로 통역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원래 마가는 <70인 전도대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최후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에 따라갔다가 <예수님이 체포될 때 포대기를 버리고서 알몸으로 도망간 청년>(막14:51)이 뜬금없이 마가복음에서만 나오는데, 이 사람이 마가라 추정됩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막14:51-52)
마가의 집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은 최후의 만찬과 성령강림사건이 이루어진 곳으로서, 마가는 예루살렘 성안에 집을 가진 사람, 그것도 120명을 수용할 다락방을 가진 상당한 규모의 집을 갖고 있었기에 부유하게 자랐다고 여겨집니다.
부잣집 아들로 (주로 무역업에 종사했을 것) 자라나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1차 선교여행에 따라갔다가 눈앞에 놓인 험난한 타르수스 산맥을 보고 중도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 화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울보다는 베드로의 제자였으며, 문체나 어투 등이 베드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마가복음을 ‘베드로 복음’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 로마까지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베드로에게 전해 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충실히 기록한 것입니다.
3. 마가복음의 특징은?
마가복음이 쓰여진 당시 상황은?
1. 마가복음은 정치적인 복음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정치적 메시아니즘’과는 다릅니다.
그 당시 강경 전쟁론과 낙관주의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화해나 타협 없이 강경하게 전쟁론을 펼쳤고, 이땅에 로마로부터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반대해 유다독립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막15:14-19,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유다 전쟁 이후 유대교와 결별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는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2. 마가복음은 예수의 삶을 강조하는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이전에 쓰여진 바울의 복음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 반면,
마가복음은 인간 예수의 삶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삶을 본 받아라! 우리와 같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대단한 도전의 메시지입니다.
3. 마가복음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강조합니다.
인간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초점으로 구성을 살펴보면,
신의 아들의 출현 (1장 1-13절)
신의 아들의 교훈과 민중들을 향한 사역 (1장14-13장 37절)
신의 아들의 인격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 (14장 1-15장 47절)
신의 아들의 승리 부활과 영광 (16장1-20절) 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오히려 족보나 유년시절이 없이 전개됩니다.
곧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를 말하면서 세례로부터 시작하여 공생애를 중심에 둡니다.
4. 마가복음은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죽음을 앞두고 번민하시는 모습,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부르짖는 장면 등 인간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합니다.
그 이유는 박해 받는 순교자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가는 '우리와 같이 수난 받는 인간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인간 예수, 하나님의 아들, 수난당하는 예수’ 입니다!
4. 마가복음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마가복음 뿐만 아니라 4복음서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예수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 나라와 반대되는 천국, 천당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오해한 결과입니다.
‘하늘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32번)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유대교 관습(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 제1계명)에 따라 마태는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생각해서, 지상 나라와 반대되는 세상, 현세가 아닌 사후세계로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영토가 아니라 ‘통치’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 메시아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세금과 빚 때문에 땅을 잃고 일용직 노동자(품꾼 비유)나 거지나 도둑이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잦은 농민 항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 빠지게 바라던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고자 그들은 유다 독립 전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달랐습니다.
차원이 달랐고, 방법론이 달랐습니다.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전복이지만,
지금의 지배구조를 뒤엎고 또 다른 지배계급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칼과 힘에 의한 방법론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 십자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죽음, 목숨을 건 사랑을 통한 비폭력 평화의 물결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막12: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