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나훔


한글개역 성경

1. 보복 / 11구절

2. 투기 / 23구절

3. 사랑 / 517구절 


보복 / 11구절


1. [사무엘상 18:25]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2. [사무엘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보복 / 나캄”(נָקָם)

여호와께서는...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않겠나이다

 -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롬 12:21; 히 10:30; 신 32:35)는 사상은 다윗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을 '보수하시는 하나님'(시 94:1)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에게 극악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그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심히 원하시는 일이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신명기 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판단하사(*, 솨파트) 
- 공의적(公義的) 심판을 전제로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적 재판 행위를 가리킨다(시 7:8; 96:13; 겔 18:30).


 

3. [시편 41: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4. [시편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5. [이사야 35: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6. [이사야 59: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7. [예레미야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8. [예레미야 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9. [예레미야 51: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임함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10. [요엘 3: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11. [나훔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투기 / 23구절


1. [창세기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레위기 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찌니라

3. [시편 37: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4. [잠언 6:34]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5. [잠언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6. [아가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사야 11:13]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8. [에스겔 8: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9. [에스겔 8: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10. [에스겔 16:38]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 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고

11. [에스겔 16:42]
그리한즉 내가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투기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12. [에스겔 23:25]
내가 너를 향하여 투기를 발하리니 그들이 분노로 네게 행하여 네 코와 귀를 깎아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13. [에스겔 31:9]
내가 그 가지로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투기하였느니라

14. [에스겔 36:5]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진실로 내 맹렬한 투기로 남아 있는 이방인과 에돔 온 땅을 쳐서 말하였노니 이는 그들이 심히 즐거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심령으로 내 땅을 빼앗아 노략하여 자기 소유를 삼았음이니라

15. [에스겔 36: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을 대하여 예언하되 그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투기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욕을 당하였음이니라  

16. [에스겔 38:19]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17. [나훔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18.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9. [갈라디아서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0. [갈라디아서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21. [빌립보서 1:15]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22. [디모데전서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23. [디도서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2:1-13)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참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다에게 권고하는 성격이 짙은 첫 신탁(1:9-15)에 이어, 본격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1-9절에서는 니느웨를 공격하는 자들을 묘사하고, 그 공격에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을 묘사하며, 10-12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조롱 섞인 애도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13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니느웨의 멸망(1-9)

세상의 부와 권력을 의지하며 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 의인을 압제하는 자들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1-9)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악행을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니느웨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서언한 후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파괴하는 자(1-4)

1절의 ‘파괴하는 자’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1절의 “너는 산성을 지키며…굳게 할지어다”라는 조롱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산성’을 의지하여 교만했으나 이렇게 굳건하게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2절은 2: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며 ‘파괴하는 자’가 공격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갑작스럽게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회복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법은 선지자 나훔이 이미 사용한 방법입니다. 이미 1:12-15에서 유다에 대한 구원 신탁을 다루는 단락에서도, 1: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언급함으로써 유다의 구원이 니느웨의 멸망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하여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즉 나훔서는 주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지만(1:1), 이 니느웨의 멸망이 유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a절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표현입니다. ‘이는’이라고 이유를 밝히는 표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이후 오랫동안 앗수르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진노하기를 늦추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 되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승승장구함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부재하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유다는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야곱’과 ‘이스라엘’이 각각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같은 대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사 44:1을 참조하라).

2b절의 ‘이는’으로 시작하는 표현은 니느웨의 기구한 운명을 드러냅니다. 약탈하며 땅을 넓혔던 앗수르가 이제 약탈당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유익을 주는 나무로 풍요를 대변하는데,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는 말은 니느웨의 풍요가 제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4절은 다시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약탈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공격하는 용사와 병거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정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떤 학자는 방패가 붉은 것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전쟁에 임하면서 상대방의 방패를 볼 때 공포감이 몰려오는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의 군사들이 붉은 옷을 입었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겔 23:14-15), 나훔이 앗수르를 공격하는 군대가 바벨론의 군사임을 염두에 두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면서도 위엄 있게 공격하는 군대 앞에서 니느웨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데, 멸망하는 시기가 가까워 왔을 때에는 이미 국력이 쇠한 때이기 때문에, 이런 멸망의 선포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니느웨는 강대국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보며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치 눈앞에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이 내용이 전달될 때 유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현실을 본다면 의구심이 들겠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2) 니느웨의 패망(5-9)

1-4절의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에, 5~9절은 그 앞에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당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합니다. 앞의 문장에 속할 수도 있고, 니느웨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키고 존귀한 자들은 군대의 장교나 고위직을 가리킬 것입니다.

5절은 특히 ‘파괴하는 자’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전쟁 준비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 급히 성에 이르러 대비하려는 허둥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6절의 ‘강들의 수문’은 니느웨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런 것도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안을 쳐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왕궁이 소멸”되기까지 합니다.

7절의 “정한 대로”라는 표현은 니느웨의 멸망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됐고 결정된 일이며, 따라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확고하여 변개할 수 없는 예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7절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과 패전을 애도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8-9절은 니느웨의 역전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물이 모인 못” 같다는 것은 니느웨가 강성하여 부가 넘쳤던 것을 가리킵니다. 니느웨에게서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고 모였으나 이제 망하게 되자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9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축한 것이 많으나 이제 망하여 약탈당하는 상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강대국이라고 교만하여 우쭐대지만, 자신들이 약탈한 상황 그대로를 당하면서 니느웨의 신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풍요롭게 복을 누리는 것 같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며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니느웨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줄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10-13)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서면, 세상의 악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버려질 것이비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만 하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거되고,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식, 화평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10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서 악인들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시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1) 애도의 노래(10-12)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애가의 형식으로 니느웨가 당할 멸망의 모습에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만 해도 5-9절에서 묘사된 대로 처참하게 당할지는 모르고 전쟁에 대비했을 것입니다(1). 그러나 여호와의 심판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0절의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는 니느웨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1-12절에서는 11절과 11-12절의 대조를 통해 니느웨가 멸망당한 비참한 상황을 부각합니다. 11b-12절은 니느웨가 멸망 당하기 전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마치 숫사자가 사냥하듯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그 전리품을 챙겨 자신의 성을 풍요롭게 했었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굴과 사자가 흔적조차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2) 여호와의 선언(13)

13절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결론적 선언입니다. ‘파괴하는 자’를 통해 니느웨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네 대적이 되어”는 니느웨를 멸망시킨 주체가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려다 보면 억울한 일을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어쩌면 징계하셔서 더욱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한 도구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복수하신다. 하나님이 보수하신다.

복수는 정의에 대한 공의이다. 정의는 개인간의 사적인 공평성을 말한다면 공의는 개인을 넘어서는사회적 원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보복하는 것은 공의다. 죄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위한 공의를 실행 하신다. 즉 심판하신다. 보복하신다. 

신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보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악인들의 손아귀에 뺘져들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찾는다.

사 63: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원수 갚는 날은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 때 하지 않으신다. 죄라고 다 징계하지 않는다. 죄가 자랄지, 사라질지 기다리신다. 죄가 자란다면 그는 악인이다. 자라지 않으면 실수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과 악인의 특징은 죄가 자라는냐 돌발적으냐의 차이기도 한다. 죄가 자란다는 말에는 더 많은 악이 일어나고 더 많은 피해가자 생긴다는 말이다. 땅이 많이 흘리고, 그들의 손에 피가 많아지면 하나님일 보복하실 때가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할 수 없게 하셨다. 복수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복수는 공의다. 이는 이, 눈은 눈, 생명은 생명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공의다. 

그러나 개인이 복수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나의 빰을 한 대 때리면 한대로 보복하지 않는다. 열 대 백 대를 때리는것이 사람의 심리다. 하나님은 하나는 하나로 만족하라 하신다. 그것은 법으로 하는 것이다. 엄밀하에 말하게 눈은 눈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한다. 도둑질하면 네 배를 보상하듯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공의는  이 하나에 이 하나가 아니다. 두배, 네배 다섯배를 갚도록 한다. 이것이 공의다. 

보수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1. 신명기 32:35

“보복은 내 것이라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 하나님의 보복은 반드시 이루어질 심판이며, 때가 되면 정확하게 실행됩니다.


2.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하나님의 보복은 죄에 대한 거룩한 진노이며, 대적자들을 향한 심판임을 강조합니다.


3. 이사야 34:8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 하나님의 보복은 억울한 자를 위한 신원의 해로서, 공의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4. 이사야 63: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음이라”

👉 하나님의 원수 갚는 날과 구속의 날은 동시에 언급되며, 보복은 구속의 일부로 나타납니다.


5.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인간의 복수는 금지되며, 하나님만이 보복의 권리를 가지심을 암시합니다.


6. 잠언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 보복을 자제하고 하나님의 보응을 신뢰하며 기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7.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보복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언합니다.


8.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확실하며, 백성에 대한 책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9.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보복을 호소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10.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죄악된 세력을 보복하시며, 순결한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십니다.


히브리서 10:30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브리서 10:30, 개역개정)

히브리서 10:30은 하나님의 보복과 심판에 대해 선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구약 신명기 32장의 인용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로운 성품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복음적, 성경신학적으로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을 단순한 보복 행위가 아닌, 구속사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1. 보수의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이 선언은 인간에게 복수할 권리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인간의 판단과 정의는 언제나 제한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며, 그의 판단은 언제나 의롭고 완전합니다. 이 말씀이 복음적 신앙의 중심에 자리 잡는 이유는, 억울한 상황이나 악의 현실 앞에서 성도가 스스로 정의를 실행하려 하기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믿음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보수는 복음의 틀 안에 있다

신약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만난 사건입니다. 죄에 대한 보수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하나님은 그 대가를 그리스도에게 지우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의 대상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그 진노를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보복의 대상에서 구원의 대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틀 속에서 하나님의 보수는 우리에게 구원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3.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기도를 잊지 않으신다

히브리서 10장은 경고의 장입니다. 고의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합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며, 세상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이 “우리 피를 갚아주시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호소할 때, 하나님은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시며 그들의 신원을 약속하십니다.

히브리서 10:30의 말씀은 이처럼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또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갈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4.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심판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면책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보수는 외적 대적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에게도 적용됩니다. 이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다시 죄로 돌아가고, 은혜를 짓밟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가볍게 넘기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동시에 성도의 삶에 대한 경건한 긴장감을 줍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나, 그것이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주의 말씀 앞에 자기를 살피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5. 신자의 삶은 ‘맡김’의 삶이다

이 구절은 결국 신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모욕을 견디며, 주님께 맡기는 그 믿음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셨고, 그 맡김이 결국 승리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신앙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억울함, 우리의 손해,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참된 태도입니다.

결론

히브리서 10:30은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반드시 공의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그 보수하심은 십자가 안에서 은혜로 완성되었고, 종말의 날에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보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으로 살며, 억울한 일을 주께 맡기고, 복음을 따라 용서와 인내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이 의롭게 갚으시고 심판하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소망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보수는 사랑 안에서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보수(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의미

1. 서론 : 보수하시는 하나님의 본질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계시되십니다. 
그분은 죄악을 미워하시며, 악에 대해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이때 사용되는 개념 중 하나가 ‘보수’ 또는 ‘복수’입니다. 
‘보수’란 단순히 인간의 원한을 갚는 복수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이제 어원과 용례, 그리고 신학적 의미들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2. ‘보수’의 원어적 정의

보수는 복수, 신원이란 단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2.1 히브리어 원어 정의

구약 성경에서 ‘보수’ 혹은 ‘복수’로 번역된 대표적인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나캄”(נָקָם)
    뜻: 복수하다, 보복하다, 원수를 갚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정당한 심판의 행위입니다.

  • “샬렘”(שָׁלֵם)
    뜻: 갚다, 보상하다, 되돌려주다.
    ‘보수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악행에 대해 공정한 보응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2.2 헬라어 원어 정의

신약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 “에크디케오”(ἐκδικέω)
    뜻: 복수하다, 처벌하다.
    ‘디케(δίκη)’가 ‘정의, 판결’을 의미하므로,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따라 심판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안타포디도미”(ἀνταποδίδωμι)
    뜻: 되갚다, 보상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상과 벌 모두를 포함하는 공정한 보응을 말합니다.

3. 성경의 용례

자 이제 보수가 사용된 성경 속의 용례를 간략하게 봅시다.

3.1 구약의 보수하시는 하나님

  • 신명기 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니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며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실현됨을 말합니다. 인간의 악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보복하심을 선언하십니다.

  • 이사야 34:8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하나님의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억울한 자의 송사를 해결하시는 ‘신원’의 행위입니다.

  •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자기 대적에게 보복하시며 자기 원수에게 진노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보복은 거룩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2 신약의 보수하시는 하나님

  •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신약에서도 하나님만이 보복하실 자격이 있으며, 인간은 심판자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하나님은 심판자시며, 죄에 대해 정당한 보응을 행하십니다.

  •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보수의 정의를 호소합니다.

4. 하나님의 보복과 인간의 감정적 복수의 차이

성경은 인간에게 복수를 금하고, 보복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단순한 보응이 아니라, 공의롭고 거룩한 목적을 지닌 신적 행위임을 드러냅니다.

1. 감정에 근거한 인간의 복수

인간의 복수는 주로 상처와 분노, 억울함에서 비롯된 반응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즉시 보복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이런 복수는 종종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이루어지고, 또 다른 악을 낳기도 합니다. 인간은 모든 사정을 완전히 알 수 없고, 마음조차도 흔들리기 쉬워 복수의 판단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복수는 대체로 정의보다 보복감정에 휘둘리기 쉽고, 결과적으로 더 큰 불의나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서 라멕은 자신을 다친 자에게 “일흔일곱 배로 보복하겠다”(창세기 4:24)고 선언하는데, 이는 과잉된 보복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복수는 하나님의 정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인간적 분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보복은 거룩한 공의의 실현

반면, 하나님의 보복은 감정에 의한 충동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움에서 비롯되며, 죄에 대한 정당하고 완전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사건의 전후 사정, 동기, 결과까지 모두 아시며, 누구에게 어떤 보응이 합당한지를 가장 공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1:2)이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시편 7:11)이십니다. 그의 보복은 단지 징벌이 아니라, 악을 억제하고 의를 드러내며, 억울한 자를 신원하시는 사랑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복은 결코 무자비하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선과 질서의 회복을 위한 의로운 조치입니다.

3. 신자의 태도: 맡김과 용서

하나님의 보복은 신자에게 위로가 되며,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억울함이 끝까지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심판자 되심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확신하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자에게 감정적인 보복 대신 용서와 사랑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보복의 권한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친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보복은 공의롭고 완전한 심판이지만, 인간의 복수는 감정과 한계에서 비롯된 불완전한 행위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신뢰하며,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나며, 우리는 정의가 실현될 날을 기다리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보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

하나님께서 보수하신다는 진리는 억울한 일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이 당장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반드시 보응이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를 믿을 때,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좌절하지 않고, 의롭게 살며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반드시 그 송사를 해결해 주시며, 고통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8)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섬세한 신원(伸寃)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6. 하나님의 보수의 목적

성경에서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단지 감정적 분노나 무자비한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수(복수)는 분명한 목적과 질서를 갖고 있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 목적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때로는 심판하시고, 왜 보상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 실현

하나님의 첫 번째 보수의 목적은 공의(公義)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시편 89:14은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자체가 정의 위에 세워졌기에, 죄에 대해 무반응하실 수 없습니다.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죄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인간 사회에서 정의로운 재판이 행해지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보수는 단순히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필연적 결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그 진리가 죄악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2. 고통받는 자를 위한 신원(伸寃)

하나님의 보수는 억울한 자를 위하여 행해지는 **신원(伸寃)**의 행위입니다. 이사야 61:2에서 주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신원하시려”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신원은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성경 속의 순교자들, 고난받는 예언자들, 억울하게 당한 의인들의 고통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6:10에서 순교자들이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호소할 때, 이는 하나님의 보수의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과 피를 무시하지 않으시며, 정의롭게 보응하심으로써 상처 입은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3. 죄악 억제와 경고

하나님의 보수는 죄악을 억제하고, 아직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질 때,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통해 죄가 얼마나 무겁고 파괴적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나훔 1:2는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질투가 죄악을 향한 거룩한 분노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 홍수 이전 시대, 소돔과 고모라, 가나안 족속의 멸망 등에서 나타나듯이, 단순히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목적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보수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키게 만드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4. 구속사적 계획의 일환

하나님의 보복은 단지 개별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큰 계획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인간의 죄를 갚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보복이 십자가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수는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라는 더 큰 목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값을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하나님의 보복을 자기 자신에게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수라는 주제를 단지 심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통하여 전체 구속의 맥락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 선포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보수는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거룩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에스겔 36:23에서는 “내 거룩한 이름을 열국 가운데서 알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 이름을 위해 행동하십니다. 이는 단지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성과 존재 자체의 존엄성을 위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모욕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우롱당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권위를 회복하십니다. 보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수는 단지 감정적 분풀이가 아니라, 공의와 자비, 회복과 경고, 그리고 거룩함의 선포라는 다차원적인 목적을 가진 신성한 사역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7. 결론: 신자의 자세

신자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을 믿으며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고통과 불의를 당하더라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미가 7:7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바라보며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보수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신자들의 눈물과 한숨을 기억하시며, 그 때에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물론입니다. 아래는 ‘보수(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약적, 복음적 의미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약 3,000자 분량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신약적, 복음적 관점에서 본 보수하시는 하나님

보수하시는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신약,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 보수하심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신약에서의 보복은 단지 심판의 개념을 넘어, 사랑과 구속, 그리고 최후의 정의 실현이라는 더 크고 깊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

신약은 하나님의 보복 또는 보응을 감정적이거나 보복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12:19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이는 구약의 신명기 32:35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며 진정한 보수의 주체이심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보수는 단지 악인을 벌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신약은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심판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의 보복이 실현된 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보복과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는 말씀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죽음이라는 보응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인간에게 직접 내리시는 대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복을 ‘대신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를 예언하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이 실제로 행해진 역사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여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믿는 자는 그 보복에서 면제되고,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던 보수의 대가를 하나님 스스로가 대신 지불하셨다는, 전례 없는 은혜입니다.

3. 보복의 유예와 회개의 기회

신약에서 하나님의 보복은 종말론적인 시각에서도 다뤄집니다. 베드로후서 3: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유예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실 수 있지만, 죄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은 사랑 안에서 참고 기다리시는 보복이며, 결국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때까지는 은혜의 시대요, 복음의 시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4. 최후의 심판과 완전한 보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수하심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6:10에서 순교자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결코 망각되거나 무시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피를 기억하시고, 마침내 의와 불의 사이에 영원한 분리를 행하십니다.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자로 다시 오셔서 악한 자들에게는 정당한 보응을, 의인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예수님은 “충신과 진실이라 불리는 자”로 묘사되며,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자로 등장합니다. 이는 복음의 완성이며, 보수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5. 신자의 삶과 하나님의 보수에 대한 반응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보복을 경험한 자는 더 이상 복수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악을 선으로 갚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는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삶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참된 태도입니다.

로마서 12:17-21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바로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며, 오히려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를 살아갑니다.

결론

보수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며,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여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신약은 이 두 가지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조화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보복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는 그 심판을 면제받고, 생명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보수를 기다리며, 악에 대해 절망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않고, 오직 복음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결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누리는 복음의 열매이며,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구절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깊고 강한 사랑과 충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영광을 다른 신이나 우상과 나누지 않으시며,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길 때 질투하십니다(출애굽기 34:14, 이사야 42:8). 이 질투는 인간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언약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크게 경고하시며, 백성이 온전한 경배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신명기 4:24). 동시에 하나님은 백성의 보호자와 구원자로서 질투의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시고 사랑하십니다(스가랴 8:2).

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심

출애굽기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애굽기 20:5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5:9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며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할 것을 요구하심

신명기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여호수아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허물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3.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에스겔 8:3

그가 손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뭉치를 잡으시며 하나님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중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 어귀에 이르게 하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이 있어 질투하게 하는 것이 있더라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4.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것에 대한 권고

신명기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시편 78:58

그들이 자기 산당들로 그를 격노하게 하며 자기들의 우상들로 그를 질투나게 하였도다

고린도전서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질투하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5. 하나님의 열정과 사랑

선물 바구니

스가랴 8: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하므로 질투하노라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나의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6.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질투적 열심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질투하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였음이라

호세아 13:4

그러나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 나 외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보복하시고 투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강자가 되었다고 자기들 맘대로 힘을쓰고 이웃 국가들을 복속시키고 악을 일삼고...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 환경을 무도하게 약한 상대들을 짓 밟고 잔인하고 혹독하게 다룰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BC 612년에 앗수르 (앗시리아)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

나훔서에는 앗수르를 시켜서 북 왕국 사마리아 사람들을 잡아다가 훈련 좀 시키라고 했더니 교만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루살렘까지 삼키겠다고 185000대군을 끌고 와서 히스기야를 협박 하면서 여호와도 자기 백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막말을 해대자 하나님의 진노로 산혜립의 대군이 전멸을 당합니다.

​그 뒤에 이 히스기야가 척추가 썩어가는 병이 나는 거에요 
이사야가 찾아와서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에 집 정리하고 죽을 준비하랍니다”하고 가버리니까 히스기야가 벽을 보고 돌아 누워서 살려달라며 통곡을 합니다. ​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 수명을 15년 연장해 주신다고 하시자 증거를 보여달라고 해서 태양의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증거를 보여주었고 실제로 수명이 15년 연장 됩니다. 

그 기간에 결혼한 후 바로 내 쳤던 전 부인 헵시바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천하의 괴물 므낫세에요. 
그 때 바벨론에서 사신이 오는데 히스기야가 감동 받아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국의 모든 걸 다 보여 주면서 자랑을 합니다

​이사야가 이 답답한 소식을 듣고 와서 히스기야에게 이제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왕궁과 성전의 모든 보물을 다 가져가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 잡아다가 바벨론의 환관을 만들 것이라 경고하지만 히스기야는 “내 때에만 그런 일이 없으면 되고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하고 넘어가 버려요. ​

히스기야가 거룩하고 착한 임금이고 기도해서 응답 받았던 인물은 맞지만 이렇게 우유 부단하고 분별력이 없고 겁도 많았던 인물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나훔서, 히스기야, 니느웨하고 삼각 관계가 물려 있는 겁니다

나훔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전에 우리가 잘 보지 못한 또 다른 면을 보게 되는데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성경 66권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들을 우리들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정리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 정리가 되고 다 알아져 가면 그 다음에 우리가 실천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이고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세와 삶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나훔서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간에는 오바댜서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0월 6일(월) 나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복하시는 하나님(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The LORD is a jealous and avenging God; the LORD takes vengeance and is filled with wrath. The LORD takes vengeance on his foes and maintains his wrath against his enemies.

보복하시는 하나님(avenging God)
선지자 '나훔'이란 이름의 뜻은 "위로" "위안"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을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사랑과 보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보복의 근본은 그 출발점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나훔서는 니느웨 성의 멸망에 대한 선포를 선언합니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치게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 성의 멸망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일시적인 회개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유를 누리려던 작은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일시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아들은 이제부터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토록 종으로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한번 종은 영원한 종입니다.
마치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한번 종이 되면 이제는 영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작은 아들을 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보복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사랑이 먼저 고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보복이란 감정은 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렸지요.

니느웨에 대한 보복의 감정이 솟구친 것은 니느웨가 예전의 방탕과 우상숭배의 도시로 돌아섰기 대문입니다.

믿음이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성을 향하여 날마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만일 전진해야 할 인생이 과거를 그리워하며 돌아설 때는 보복의 빛나는 칼날이 하늘에서 번쩍이며 내려올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남은 시간들을 전진하는 발자국으로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 형용사 '투기하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칸노'는 수 24:19과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일반적으로는 '칸나'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시내 산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용하셨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쓰인다(출 20:5; 34:14). 
이는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 관계를 전제하며, 이스라엘에게 불신앙이나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로 하나님의 질투의 속성이 나타난다(민 25:11; 히 10:27).

민수기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7068) 질투하여(7065)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7068)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7065

קָנָא 스트롱번호 7065

1. 부러워하다.  2. ~를 부러워하다.  3. 열심을 내다.
발음 [ qânâʼ ]

7068 

קִנְאָה 스트롱번호 7068

1. 질투.   2. 시기.  3. 열심
발음 [ qinʼâh ]

어원  / 706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히브리서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투기(7072) 칸노(qannôwʼ)  קַנּוֹא

1. 시기하는.  2. 성난.  3. 수 24:19.
발음 [ qannôwʼ ]  
구약 성경 / 2회 
  • 1. 형용사, 남성  시기하는, 성난, [하나님께 사용되어] 수 24:19.
  • 문법설명  / 7067참조
  • 관련 성경 / 질투하는(수 24:19), 투기하는(나 1:2).
보복(5358)  나캄(nâqam) נָקַם     

1. 복수하다.   2. 레 19:18.  3. 신 32:43.
발음    [ nâqam ]  
구약 성경 / 35회 사용
관련 성경  / 보복하다(삼상24:12, 14;24, 사1:24, 렘5:9, 나1:2), 보응하다(겔24:8), 갚다(민31:2, 신32:43, 겔25:12), 갚아주다(왕하9:7), 형벌을 받다(출21:21), 벌 받다(창4:15), 원수를 갚다(레19:18, 수10:13, 삿15:7). [명] 보복(삼상18:25), 벌(창4:24), 보복자(시8:2), 복수자(시44:16).

여호와는 보복하시며...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보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켐'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그 단어는 법과 도덕을 범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시행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어느 개인을 대상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뉘앙스를 갖지 않고, 대개의 경우 어느 집단이나 백성을 향한 심판을 가리키며, 구약 성경의 용법은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Mendenhall).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니느웨를 멸망시킨다는 의미이다(13절; 2:1).




나훔 1장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나훔은 엘고스 사람의 묵시로, 니느웨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훔 1장의 내용 요약
  • 니느웨에 대한 경고 :
    나훔 1장은 니느웨 성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며,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임을 밝힙니다.
  • 하나님의 속성 :
    나훔 1장 2절은 하나님의 속성이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 보복하시는 하나님 :
    2절은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 대적에게 보복하시며 자기의 원수에게 원한을 갚으시도다"라고 선포합니다. 

  •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며, 그분의 공의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 위로와 희망 :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통해 유다 백성에게 위로를 전하며,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경고를 받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위로와 구원을 받게 됨을 보여줍니다. 

  • 심판과 구원 :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악을 보고만 계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분의 백성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은 모든 열방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1:1~3)

    나훔서는 3장으로 구성된 작은 예언서로서, 하박국 스바냐와 더불어 유다 말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예언서로 알려져 있다. 
    나훔서는 니느웨의 구원을 선포하는 요나서와 짝을 이루는 예언서로서 니느웨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고 있다. 
    예언자 나훔은 그 이름이 '위로받은 자'라는 뜻으로 오직 나훔서에만 등장한다. 
    때문에, 나훔 선지자의 출신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를 엘고스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엘고스 지역 출신이거나 엘고스 가문 출신일 것이다.

    표제에 나타난 나훔 예언서의 성격(1:1)

    나훔서는 니느웨를 향한 경고와 묵시를 묶어놓은 책(세페르 하존)이다. 
    개역개정은 '세페르 하존'을 "묵시의 글"로 번역하고 있지만 공동번역은 "니느웨가 받을 벌을 내다보고 적은 책", 새번역은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경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사'는 짐을 뜻하는데, 나훔의 예언이 니느웨에게는 큰 짐이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묵시로 번역된 '하존'은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자'의 명사형이다. 하존'은 예언의 시각적 성격을 암시한다. 
    나훔은 환상 가운데 이 예언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언의 매체가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예언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화려한 환상을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백일몽에 불과하다. 
    한편, 나훔 예언의 대상인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서 당시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니느웨는 폭력적인 도시로 유명했다. 때문에 니느웨는 유다의 적국으로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상징할 수 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1:2~3)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나훔서의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보복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질투의 하나님'으로 번역된 '엘 카노'는 여호수아 25장 19절 외에 이곳에만 사용된다. 
    인간적 질투는 폭력으로 변화되기 쉽다. 
    왜냐하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 질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질투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기본적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질투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당신 외에 다른 경쟁자를 두지 않으시겠다는 열심의 표현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불길 같은 질투는 그 사랑하는 자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보복으로 표현된다. 
    2절에 세 번 반복되고 있는 '노켐'(개정-"보복하시는", 공동, 새-"원수를 갚으시는")은 '보복하다', '복수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캄'의 분사형태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보복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신명기 32장 35절에 "그때에 내(하나님)가 보복하리라(나캄)"고 하였으며, 같은 장 41절에서는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나캄)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보복의 날"(욤 나캄, 사 61:2)을 선포하며 고통당하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기도 하지만 폭력적인 수단으로 보복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질투가 강렬한 만큼 그분의 보복도 철저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니느웨에게 보복하신다. 

    이스라엘의 적은 바로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독단적인 폭력이 아니라 반역하는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복수의 하나님을 부르짖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보복과 복수는 하나님의 주요 역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지 않으시면 힘없이 압제당하는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나설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수의 하나님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복수에 대한 기대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보복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복수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며, 힘이 있든 없든 간에 복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기다린다는 고백이다. 
    복수의 하나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에 대해 순응만 할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싸워야 함을 웅변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을 열정도 없이 값싼 사랑을 베푸는 분으로 오해하기 쉽다.




    나훔 개론

    1. 표제

     이 책의 표제는 단순히 이 책의 저자인 선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훔(히, Nachum)은 “위로받은” 혹은 “위로 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것은 느헤미야의 이름의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와 므나헴이란 이름의 “위로자”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나훔이라는 이름은 오직 이곳에만 나타난다.

     2. 저자

     나훔 자신의 예언에서 발견되는 것 이외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출생지가 엘고스(Elkosh)인 “엘고스 사람”(나 1:1)이었다.

     3. 역사적 배경

     나훔이 선지자로 봉사한 시기에 대한 암시는 노아몬의 멸망에 관한 말씀 가운데서 발견된다(나 3:8). 
    이 도시는(헬라인들에게 처음에는 Thebes로 후에는 Diospolis로 알려짐) B.C. 663년에 앗수르 왕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러므로 나훔의 봉사 중 일부는 적어도 그때 이후에 행해졌음에 틀림없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아직 미래의 일로 보고 있다(나 3:7). 그렇다면 나훔의 합리적인 연대는 B.C. 약 640년 이다. 앗수르의 멸망을 말하는 이 선지자의 예언이 앗수르가 그 번영과 권세가 극에 달했을 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나훔서가 성서적 예언임을 뚜렷이 증명하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수르바니팔 치세 때는 초생달형 옥토(Fertile Crescent)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앗수르 군대에게 점령되었거나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도 전에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후에(B.C. 626년경) 앗수르 제국은 곧 붕괴되었다. 마침내 석달 동안 포위 당한 끝에 니느웨는 메대와 바벨론에 의해 B.C. 612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4. 주제

     나훔서에는 뛰어난 한가지 주제가 있는데, 곧 니느웨의 임박한 운명이다. 
    그것 때문에 이 예언은 요나의 기별에 대한 보충이다. 
    요나는 니느웨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으며 그 거민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했으므로 그 도성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앗수르는 또 다시 죄악에 빠졌으며, 그 성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를 예언하는 것이 나훔의 짐이었다. 
    니느웨의 교만, 잔인, 우상 숭배는 그 도를 넘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앗수르의 왕들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무시하고 우주의 창조주를 주변 국가들의 우상들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왕하 18:33-35; 19:8-22). 
    왜냐하면 앗수르의 왕들은 다른 나라들과 싸울 때 자기들의 신 아슈르(Ashur)의 소원을 성취시키고 있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앗수르의 도전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으로라도 그쳐져야만 하였다. 
    유다에서의 앗수르 세력의 몰락은 이미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바 있으나(사 37:21-38), 나훔의 예언은 그 제국의 수도가 종국적으로 멸망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5. 개요

    Ⅰ. 니느웨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1:1-15
         1. 서언 1:1
         2. 악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1:2-8
         3. 임박한 징벌의 확실성 1:9-15

    Ⅱ. 니느웨의 임박한 멸망에 대한 서술 2:1-13
         1. 도성의 포위와 점령 2:1-8
         2. 도성의 약탈 2:9-13

    Ⅲ. 니느웨 도성의 죄악 으로 인한 징벌 3:1-7

    Ⅳ. 니느웨의 멸망의 표본인 노아몬의 멸망 3:8-11

    Ⅴ. 니느웨의 멸망의 종국과 그 철저함 3:12-19



    [기록연대]
    본 서의 저작 시기는 대략 주전 663~612년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본 서의 기록(나3:8)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현재의 '티벳'인 노사몬의 멸망을 주전 661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니느웨의 멸망(나1:12)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 예언은 니느웨가 멸망당하기 이미 4년 전에 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니느웨가 멸망하기 이전에 항상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그 시기가 멸망당하기 전인 주전 654년경이었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본 서에 기록된 예언은 사건 후의 예언이라고 하면서 주전 612년 후에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하는 기자도 있다.

    [배경]
    본서에 언급된 앗수르는 B.C. 722~721년에 이미 사마리아를 멸망시켰으며 북왕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유대인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요나는 일찌기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한 바 있지만(<욘 3:4>), 그들이 회개함으로 잠시 동안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니느웨는 또다시 극도의 잔인함과 사악함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마침내 B.C. 612년에 이르러 멸망되고 말았다.

    [특징]
    본서는 요나 사역 150년 이후의 기록으로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에는 유다의 대적인 앗수르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그들의 멸망에 대한 기쁨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 군대의 잔인성은 유다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 그들의 멸망은 유다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적]
    본 서의 목적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서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악인과 의인들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 앗수르의 심판은 유다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으며, 유다가 당하는 고통은 앗수르의 죄악된 모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본 서의 내용으로 보아 앗수르의 압제를 받는 유다가 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앗수르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유다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희망의 소식이었다. 따라서 앗수르에 대한 유다인의 입장이 정확히 나타나고 있다. 본 서의 내용은 크게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보여 주는 것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다. 한 도시 니느웨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구조]
    나훔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멸망이 선포됨(1장), 멸망이 묘사됨(2장), 멸망이 불가피함(3장)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하실 것인가?로 대별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 우주적 통치자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니느웨 백성들이 천연적 방어물로 그토록 믿고 자랑하던 티그리스 강을 넘치게 함으로써 그 성을 심판하신 것은 자기들이 만든 세상 문명을 의지하고 스스로 교만해 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주실 참 보호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깨닫게 해 준다.

    [내용]
    부흥은 대개 단지 일시적일 수 있다. 요나가 갔던 니느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 백년 후에 앗수르의 죄악의 잔은 다시 넘쳤고 그들의 멸망이 임박해졌다. 나훔은 이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 [해자, 성벽 및 높은 망대로 둘러쌓인] 가 어떻게 불과 홍수로 멸망할지를 미리 썼다. 사람의 요새는 그것이 아무리 견고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응보를 받는 날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날 멸망치 않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본서는 니느웨를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묘사함으로서 유다에 있는 신실한 자를 위로하고 있다. 특히 니느웨의 멸망은 불의한 국가와 부패한 백성은 반드시 패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교리적인 교훈: 본서는 악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 기독론적인 교훈: 본서는 그리스도를 질투하시는 하나님(1:2)으로, 그 대적에게 반드시 복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국가와 개인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인간은 전혀 대항할만한 자격이 없음을 알게 해 준다.


    고대 앗수르 제국의 역사: 세계 최초의 제국에서 몰락까지

    고대 앗수르 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제국으로, 기원전 2450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약 1800년 동안 서아시아에서 정치적,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후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앗수르는 끊임없는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혁신을 통해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내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앗수르의 흥망성쇠를 역사적 관점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앗수르의 기원과 초기 역사

    앗수르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기원전 2500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아수르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시는 남부 수메르 도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카드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는 상당히 아카드화된 풍습과 신앙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인들은 수메르어나 아카드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인 앗수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앗수르는 중개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히타이트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인들은 아나톨리아의 카네시 지역에 교역 기지를 설립하고 금, 은, 구리 등을 다른 지역으로 팔고, 이란 고원에서는 주석을, 바빌로니아에서는 직물 등을 교환하여 급속히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러한 중개무역의 성공은 앗수르가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전 19세기 말, 샴씨 아다드 1세가 앗수르를 최초로 정치적으로 통일하면서 고앗수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2. 고앗수르와 중앗수르 시대: 통일과 팽창

    고앗수르 시대는 샴씨 아다드 1세의 통치로 시작되었으며, 그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마리와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하며 앗수르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앗수르는 내분과 분쟁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였고, 바빌로니아와 미타니 왕국의 속국이 되면서 오랜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이 시기는 중앗수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로, 앗수르가 다시 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아슈르 우발리트 1세의 통치 아래, 앗수르는 히타이트와의 동맹을 통해 미타니 왕국을 공격하여 독립을 쟁취하였고, 이후 아다든 이라리 1세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타니 왕국을 앗수르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앗수르는 약 160년간 팽창 정책을 펼치며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회복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2세기 바다민족의 침입과 함께 청동기 문명의 붕괴로 인해 앗수르의 팽창은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고, 주변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으며 다시 한 번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신앗수르 제국의 부흥과 확장

    앗수르의 부흥은 아슈르단 2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적들을 진압하고 다시 정복 사업을 재개하면서 본격적인 신앗수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빠르게 주변국들을 정복하며 앗수르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신앗수르 제국의 군사적 성공은 철제 무기와 기마병, 그리고 최초의 정규군 편성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군사력 덕분에 앗수르는 단기간에 서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통치로 유명했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점령지에서 반란이 발생할 경우, 반란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그 기록을 남겨 다른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공포 통치를 통해 앗수르의 안전을 보장하려 했으며, 이러한 방식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문화적 융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수도를 님루드로 옮기고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하여 앗수르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4. 앗수르의 쇠퇴와 몰락

    신앗수르 제국의 전성기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사르곤 2세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군사적 개혁과 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 앗수르의 영토를 서아시아 대부분으로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최초로 상비군을 편성하고, 기병대를 도입하는 등 군사 혁신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군사력 사용과 잦은 전쟁은 국력을 소모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이후 내부적인 문제와 외부적인 압력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사르곤 2세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산헤립은 수도를 니느웨로 옮기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집중했지만, 끊임없는 내분과 속국들의 반란으로 인해 제국은 점점 더 약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5. 앗수르 제국의 유산과 교훈

    앗수르 제국의 멸망은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앗수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잔혹한 통치는 피정복지의 단결을 초래했고, 이는 다시 반란으로 이어져 앗수르의 국력을 더욱 소모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했지만, 오히려 앗수르 본토의 인구 과밀을 초래하고, 장기적인 가뭄이 겹치면서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앗수르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채 현재까지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로, 이라크 북부, 시리아 북서부 등에 약 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400만 명의 앗수르인이 존재합니다.

    고대 앗수르 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과 잔혹한 통치만으로는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국의 영광과 몰락은 강력한 힘의 양면성을 보여주며, 그 역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아시리아)와 나훔 선지자(B.C. 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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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4분

    150년 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의 전도를 받고 왕에서부터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150년 만에 앗수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즉 하나님께 중한 경고를 들어야 할 만큼 타락해 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진멸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라고 완전한 멸망을 말씀하신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티그리스 강의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기에 니느웨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0년 전 요나 선지자를 통해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이제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는 니느웨에 대한 완전한 멸망을 가차 없이 말씀하신다. 반드시 멸절하시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멸절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롭게 할 것도 없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니라.”(나 1:12)

    나훔서가 기록되기 약 100년 전(B.C. 760년 경)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회개를 하자 심판을 유보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멸망 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손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데 회개 운동이 일어난지 약 100여년이 지난 나훔 선지자 당시의 니느웨 사람들은,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에 대하여 매우 포악했고 간교했으며, 지극히 교만했다.

    디글랏빌레셀 3세 치하의 앗시리아 제국

    즉 앗수르는 부흥기였던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B.C. 727-722)’ 때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성격을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것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치 않게 되었다.

    성경에서 때로는 ‘불’로 알려지기도 한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가 아시리아(앗수르)의 왕 위에 오른 이후로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의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종주국의 위치에서 군림했던 아시리아는 단순히 종주국들의 정치에 관여하며 조공을 받는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회, 종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가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처지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열왕기하는 유다의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북 왕국의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로부터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주었다.

    “앗시리아의 불 왕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왕하 15:19-20, 새번역)

    유다 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아시리아에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그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사람들을 보내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시리아의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왕하 16:10-16), 이들의 정치 경제적인 압박은 나훔 선지자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아하스 시대부터 유다는 100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존재했다. 아시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억압하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종주국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아시리아는 니느웨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였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니느웨(니네베)는 도시 중심을 흐르는 코서 강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 곳이었다. 북쪽 지역은 면적이 남쪽 지역의 두 배에 달했으며,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니느웨의 면적은 1,800에이커(총 225만평) 정도 되었다. 당시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니느웨가 주전 5,000년부터 도시로 존재했으며, 3,000년 이후부터 이 도시에 이스타르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나안에 정착하던 B.C. 1400~1200년에 이르러 살만에셀(1세)과 디글랏빌레셀(1세)이 대단한 건축 사업을 통하여 니느웨의 규모를 키웠다. 주전 700년경에 산헤립이 니느웨에 새 궁궐을 세우고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는 앗술이었다). ‘산헤립’은 도시에 정원들을 세웠고, 약50Km에 달하는 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에살핫돈’과 ‘아술바니발’도 꾸준히 건축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아술바니발의 도서관은 수만 점의 흙판 문서가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산헤립은 유다를 공략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두듯이’ 가두어 둔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모면했다(사 36-39장, 왕하 18장). 그러나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한 다음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유다 땅에서 지속되었다.

    므낫세(B.C. 697-643)는 바알과 아세라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의 종교를 지향했으며(왕하 21:3), 그의 아들 아몬은 암살될 때까지 2년 동안 아버지보다 더한 배교행위를 지향했다(왕하 21:23). 아몬이 왜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유다의 외교정책에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음모에 의하여 저격되었을 것이다(Malamat).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B.C. 641년) 아시리아는 유다의 종주국으로 이미 100여년 동안 군림해 오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때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옛적 다윗시대에 누렸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갈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 속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술바니발이 B.C. 627년에 죽자, 요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 종교들의 흔적을 뿌리뽑고자 했으며,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수도록 했다(대하 34:3-7). 이같은 행위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하며 므낫세의 종교적 복합주의를 지탄하는 것을 의미했다(Bright).

    앗수르 왕조

    이런 정황에서 볼 때 B.C. 627년은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아술바니발의' 죽음은 곧 아시리아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반유목민으로 분류되는 키메리오스족, 스키타이족, 메대족 등이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바벨론에서는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이 되었으며, B.C. 623년에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시리아 공략에 나섰다. 아시리아는 B.C. 614년에 앗술을 메대 사람들에게 빼앗겼으며, B.C. 612년에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아시리아(앗수르)의 이스라엘 침략

    '아술바니발(아슈르버니팔)'이 죽은 B.C. 627년에 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두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훔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보다 더욱더 강도 높게 아시리아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전을 보수하던 제사장 '힐기야'가 B.C. 621년에 율법 책을 발견한 사건은 이러한 기대와 함께 종교개혁에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율법책이 발견된 후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고 점술가들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열왕기 저자는 ‘요시야’를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유다의 왕 요시야 통치기간(B.C. 641-609년)이 나훔 선지자의 사역 후반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힘들어하던 요시야 왕이 나훔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시야는 종주국으로 섬기기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아시리아가 곧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앓던 이가 빠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리아의 최종적인 종말은 보지 못하고 B.C. 609년에 므깃도에서 죽었다. 아시리아가 B.C. 625년에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B.C.. 605년에야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메대 연합군에 퍄하여 지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과 강제이주정책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으며,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앗수르는 약소국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속이기를 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그들의 간교함과 다른 민족의 피 위에 건설된 국가였다.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고칠 수 없고, 앗수르가 망햇다는 소식에 모두들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 앗수르로 인해 고통 받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 3:18-19)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발흥

    앗수르 제국의 멸망(B.C. 609년)

    앗수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적다운 적의 대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앗수르(아시리아)는 B.C. 732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를 멸망시켰으며, 사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B.C. 722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B.C. 701년에는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을 차지한 적이 있다. B.C. 663년에는 천연의 난공불락 요새로 알려졌던 이집트의 수도 테베를 점령했다.

    그러나 B.C. 609년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앗수르는 수백 년을 이어온 상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완전하게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이미 바벨론에게 함락되었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바벨론의 하란 공격으로 인해 B.C. 610년 하란까지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 제국을 계승할 야심을 품고 앗수르 패잔병들과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B.C. 609년 하란을 재탈환하려다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앗수르는 B.C. 609년 제국으로서의 깃발을 완전히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잔인하고 무섭던 앗수르의 왕들도 모두 사라지고, 앗수르의 마지막 모습은 왕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비겁함 그 자체였다.

    나훔의 예언대로 앗수르의 멸망은 고대 근동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박수를 칠 만큼 기쁜 소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오랜 세월 제국주의를 펼치면서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피지배 민족들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앗수르 왕의 어느 기념비에서 새겨진 문구이다.

    『나는 귀족들의 겁데기를 벗겼고, 3000명의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나는 한 명의 포로도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코와 귀를 베어 내기도 하였다. 수많은 병졸들의 눈을 도려내기도 하였으며, 처녀들을 통째로 굽기도 하였다.』

    그후 바벨론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 609년부터 A.D. 1846년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되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려 혼혈족을 만들어 각 민족의 독특성을 소멸시킴으로 반란의 근원을 도려내, 그들의 제국을 영원하게 하려고 했다. 사마리아가 그 예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심해지자, 앗수르를 몽둥이로 들어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과 거주의 경계는 대제국에 의해 재편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주의 경계를 이미 태초부터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유한 각 민족들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일찍이 앗수르 민족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앗수르 민족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요나를 설득하셔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함으로 니느웨의 12만 명의 생명과 가축들을 살리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점령한 앗수르가 남유다로 공격해올 때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의 뜻은 앗수르가 사마리아까지는 정복했으나, 예수살렘까지는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지켜주신다는 것이었다. 앗수르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경계는 사마리아까지였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앗시리아의 영토 변화

    주전 700년경의 아시리아 제국

    앗수르와 신바빌로니아의 영역

    [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왕국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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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슬기로운 며느리

    어느 집에 효심 많은 맏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식탁을 같이 해서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시아버지 국에 고기를 듬뿍 담아 드리고 자신의 국에는 고기 건더기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식사 기도 시간에 시아버지는 몰래 국을 바꿔 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맏며느리가 곧 눈치를 채고 그것을 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맏며느리의 자녀들은 항상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부모님을 먼저 대접하는 효성이 지극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는 항상 부모님 대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정성껏 대접하지 않고 대신 자기 자녀들을 잘 먹였습니다. 노인들에게 내놓는 음식은 언제나 가장 험한 그릇에 먹다 남은 것을 담아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가장 좋은 음식들만 먹였습니다.

    ​둘째 며느리도 할머니가 되어 자녀들의 음식 시중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항상 맛있는 것은 감추었다가 손자들에게 주었고, 먹지 못하고 버릴 것들만 어머니에게 대접했습니다. 음식을 담아온 그릇도 고양이 밥을 주던 그릇을 물로 씻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팠지만 자기가 대접한 대로 결국 대접을 받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녀는 탄식 속에 남은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2. 늙은 말의 지혜

    제 환공이 고죽을 토벌할 때의 일이다. 봄에 출정하여 겨울이 되어서야 귀환하게 된 연고로 주위의 풍경이 생경하여 그만 중도에 길을 잃고 말았다. 이 때 마침 중신 관중과 습붕이 환공을 수행하고 있었다. 관중이 환공에게 늙은 말을 풀어 그 뒤를 따를 것을 권했다. 그의 말대로 늙은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르니 마침내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산길에 들어섰는데 마실 물이 없어 모두가 기갈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때 습붕이 환공에게 말했다. “개미는 겨울에 산의 남쪽에,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 서식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미집 아래 여덟 자를 파면 거기에 반드시 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기슭 남쪽으로 돌아 한번 개미집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먹을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관중이나 습붕 같이 지혜로운 자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말이나 개미 같은 동물에게조차 배우기를 서슴지 않거늘 오늘날 사람들은 어리석으면서도 성인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는 도리를 알지 못하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

    청소년 여러분!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노련한 지혜와 경험이 큰 몫을 하게 됨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선배들의 노련한 지혜와 경험을 겸손하게 받아 들여 우리 생활에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경험이 많은 분들의 뜻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혜를 창출한다면 우리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사자의 지혜

    동물들의 세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자가 총지휘관이 되었고 동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심하다는듯이 수군거렸습니다.

    "당나귀는 멍텅구리라서 전쟁에 방해만 될 테니 돌아가는 게 낫지."

    "토끼 같은 겁쟁이가 어떻게 싸움을 한다고 온 거야! 한심하군."

    "개미는 힘이 약해 어디다 쓰겠어?"

    "코끼리는 덩치가 커서 적에게 금방 들통나고 말걸."

    이때 총지휘관인 사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씨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당나귀는 입이 길어서 나팔수로 쓸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걸음이 빠르니 전령으로 쓸 것이며, 개미는 작아서 눈에 안 띄니 적진에 게릴라로 파견할 것이고, 코끼리는 힘이 세니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단점을 장점으로 살려 씁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누군가의 단점이 보이십니까? 또는 나 자신의 단점 때문에 좌절하시나요? 나와 타인의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을 크게 뜬다면 분명 삶이라는 전투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4. 개미의 지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미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다. 도대체 개미에게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첫째, 노동의 윤리를 배워야 한다. 개미는 성충으로 겨울을 나기에 먹이가 부족한 계절을 위해 식량을 저장한다. 여기서 개미의 저축생활을 배워야 한다.

    ​둘째, 컨베이어 벨트식 분업의 공정을 배워야 한다. 개미는 군락을 이뤄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개미의 경영방식은 철저한 분업제도다.

    셋째, 번식의 분업을 배워야 한다. 가장 신기한 것은 번식 분업이다. 여왕 개미는 평생 알을 낳는 일에 전념하고, 일개미는 여왕을 도와 군락의 번식에 필요한 제반업무를 담당한다. 개미는 그야말로 고도로 조직된 기업경영을 방불케 한다.

    ​하나님은 개미의 이런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과연 내가 속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가정 교회 사회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여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5. 말썽꾸러기의 지혜

    23년 전 다섯 살 된 내 아들이 말썽을 부리다 아끼던 도자기를 깨뜨려 아내에
    게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잘못을 인정한 아들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다섯 대 맞았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엄마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엄마, 엄마가 한번 맞아봐라. 얼마나 아픈데…. 내 다리에서 피나면 좋아?” 아내는 매를 던지고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들아, 엄마가 잘못했다. 얼마나 아팠니. 다시는 엄마 말 거역하지 말고 잘 놀아야 돼.” 자식을 기르다 보면 각양각색이다. 체벌할 때 도망치며 부모 맘 아프게 하는 자식이 있고, 매 맞으면서도 엄마 품에 뛰어드는 자식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십자가 고통을 당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했다. 이는 도망치는 절규가 아니라 하나님 품속으로 뛰어드는 아들의 기도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려도 난 저들을 버릴 수 없어요. 나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였다.

    6.지혜로운 삶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패가 인생의 끝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어진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 현실을 바로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현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물고기의 IQ는 0.3 이라고 한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나가며 발버둥치는 것을 보면서도 입질을 한다.

    그것은 낚시꾼이 낚싯대를 쥐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또 그 일에 뛰어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모든 현실을 움직이고 계심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7. 지헤로운 나귀

    본문: 시편 63 장 10 절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이리 한 마리가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나귀를 보았습니다. 이리는 적당한 거리까지 접근해서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나귀는 얼른 절름발이 시늉을 했습니다. 이리가 ‘자네, 왜 다리를 저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울타리를 뛰어넘다 가시를 밟았네.

    그러니 나를 잡아먹기 전에 가시를 먼저 빼게. 그렇지 않으면 가시가 목에 걸릴 걸세.’ 나귀는 능청맞게 아픈 시늉까지 해보였습니다. 나귀의 이야기에 수긍한 이리는 함정에 빠진 것도 모르고 나귀의 뒷발을 들어올려 곳곳에서 가시를 찾았습니다.

    이때, 나귀가 발길질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리의 이빨이 다 부러져버렸습니다. 놀라움과 아픔으로 정신이 나간 이리는 와락 꽁무니를 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싸지. 아버지가 물려준 백정 일이나 열심히 했어야지, 의사 일은 당초 내 일이 아니었어.’

    ​세상에는 이리처럼 교활하고 잔인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공짜로 차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이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결국은 자기 꾀에 빠져서 망하기 때문입니다.

    * 기도: 악한 자들을 이기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