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토) 누가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마 동안 떠나니라(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얼마 동안 떠나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누가복음 4:13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풀이하면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st, he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이 되겠습니다. 얼마동안이라도 번역된 이 단어의 헬라어는 단순하게 “αχρι καιρού”입니다. 즉, until [opportune] time이 되는 것입니다. opportune 이란 말은 ‘기회가 좋은, 형편이 좋은, 적절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을 일단락하고 다시 적절한 때에 다시 오기 위해 떠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누가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매우 주의깊에 이 단어를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언제 적절한 때가 될까요? 바로 누가복음 22:3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많은 분들은 유다에게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꼬임을 받아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누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번에는 유다를 시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유다에게 먼저 들어가서 유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인해 사탄의 시험받은 사람을 나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시험을 당한 이란 말보다 공격적입니다. 사탄은 감히 예수님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유다에게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주님이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유다도 어떤 나쁜 이미지로 변모할 이유가 전혀 없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누가는 유다를 언급하여 “열둘 중의 하나”라고 적었습니다. 이 말은 열 두명의 사도중의 한 명이 바로 유다이며 그는 여전히 열둘중의 한 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사탄의 시험을 당했지만 열두 사도의 의심할 수 없는 명단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사고중에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꾸미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명령없이 활동할 수 없다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기부여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막중의 사명의 한 일무였던 것입니다. 사탄이 유다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오히려 유다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 사탄으로 인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섭리가 있었음을 알리고 유다를 변호하고자 하는 누가의 기록의도를 알아차리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잠시동안 떠납니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사탄은 다시 시험을 시작합니다.
마귀는 저희도 시험합니다. 하나의 시험을 잘 통과하면 잠시동안 평온하다가 또 다른 시험을 주어 쓰러뜨리려 합니다.
마귀의 시험은 저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맞닥뜨립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나 혹은 믿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첬을 때에나 시험은 저희에게 다가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음을 통하여 저희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찌보면 마귀의 시험은 달콤하며 지름길로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원하는 재물과 능력을 겸하여 주겠다는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주님의 자녀는 그런 지름길을 택해서는 결코 않됩니다.
때로는 원치않는 인고의 시간을 지날 때도 있는 그런 굴곡있는 저희 삶의 과정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야 하며 지나고 나면 한결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저희는 오죽하겠는가요.
순간순간 마귀는 저희를 시험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자녀인지를 시험합니다.
마귀는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자녀가 받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1. 시험받는 요인
정욕과 교만과 탐심이 저희가 시험받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요일2:15-16) 누구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엡6:12) 저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저희를 힘들게 하는 시험의 근원은 악의 근원인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웅크리고 숨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사용하여 저희를 힘들게 합니다.
2.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적하셨습니다.
저희 또한 성령과 말씀 안에 조화를 이루어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 Too much Word and not enough Spirit: you puff up in the sense of pride
· Too much Spirit and not enough Word: you blow up
· With the Word and the Spirit together: you grow up
말씀의 능력:
저희에게 성령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시험이 임했을 때에 능히 이겨내게 합니다.
주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주님 말씀의 능력은 저의 영혼육에 임합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이 저희에게 임하면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추악하고 더러운 죄성을 도려냅니다. 병으로 앓고 있다면 말씀의 능력이 환부를 도려낼 것입니다. 말씀은 저희의 영혼육의 연약함을 드러내어 환부를 도려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하세요. 주의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세요. 왜 한 입에서 저주의 말을 하십니까?
주님의 자녀인 저희의 입에서는 복된 주님의 말씀이 선포됨이 마땅합니다. 말씀에 무지한 자가 아니라 유식한 자가 되세요.
기도에 게을리해서는 않됩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저희 주변에 널려 있어 기도를 방해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세상으로 유혹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어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어 성령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어 드려진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3. 감당할 시험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믿음의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내에서 욥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만일 저희에게 욥이 겪은 시험이 임하면 견디어 낼 자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의 육신은 연약하여 유혹이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닥치면 전전긍긍하며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제가 감당할 만하여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만일 저희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면 결단코 저희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욥이 겪은 극단적인 시험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만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만큼 인정하셔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저희 안에 내주하십니다. 제가 시험을 겪을 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용기를 주시며 피할 길을 내사 능히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어려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연약한 저희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저희를 마귀로부터 지켜주시고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인도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아멘.
4. 시험의 근원인 마귀를 대적하라
예수님을 손대지 못한 마귀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지만 밀어서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가 마귀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마귀는 그럴듯한 의견을 내세우며 저희를 유혹하며 시험합니다. 이를 취할지는 저희 몫이며 선택입니다. 저희를 힘들게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저희가 결단하고 대적하면 마귀는 피해서 물러갑니다.
(약4:7)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찿나니
마귀를 대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저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에 있는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며,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님을 믿는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저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선포하는 것이 이루어 집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도 주님의 이름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음껏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며 선포하세요.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기세요.
5. 돕는 은혜를 받으려면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4:15) 모든 일에 저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저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저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입니다.
·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세요. 성령님은 깊이 감추어진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 육신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인 기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의 영적인 소통을 하는 기도를 통해서 저희의 영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님께서는 저희의 영을 주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은혜를 받아 예배를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하세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게 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품어 안으시며 지켜주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역을 시작하며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저희 역시 많은 시험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시험을 저희에게 줄 것입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마귀를 대적하여 시험을 이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하섰습니다.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시험을 잘 통과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저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월 7일(금) 누가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아들(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
예수님의 족보가 소개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그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1. 성경에 기록된 두 족보
예수님의 족보는 신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님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합니다.
- 누가복음 3장 23~38절: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여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 소개합니다.
두 족보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이는 각각의 기록 목적과 초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합니다.
2. 마태복음의 족보: 왕권과 메시아 예언의 성취
1) 족보의 시작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유대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죠.
2) 특징
- 아브라함부터 시작: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 다윗을 강조: 다윗 왕조와 메시아 예언의 연결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14대씩 구분: 족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아브라함부터 다윗,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 바빌론 유수부터 예수님까지로 구분합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조의 계승자라는 점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자격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였죠.
3. 누가복음의 족보: 인간성과 신성을 연결
1) 족보의 시작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세례 후 족보를 소개하며,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쯤 삼십 세쯤 되셨더라…” (누가복음 3:23)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2) 특징
-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감: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 거꾸로 진행: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는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올라갑니다.
-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을 기록: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아닌 나단을 통해 계보를 이어갑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든 민족을 위한 구세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4. 왜 두 족보가 다를까?
1) 기록 목적의 차이
-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2) 혈통과 법적 계보
- 마태복음은 요셉의 법적 계보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 왕조의 합법적 후손임을 보여줍니다.
-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다윗의 두 아들
마태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고, 누가복음은 나단을 통해 이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이으면서도, 왕권과 인간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신학적 의미
1) 인간성과 신성의 조화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임을 증명합니다.
- 아담과 연결: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 다윗과 연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세대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 다윗, 바빌론 유수라는 굴곡진 역사를 통해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의 절정입니다.
3)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
누가복음의 족보가 아담으로 연결되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나타냅니다.
6.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교훈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족보의 세대들이 때로는 죄로 얼룩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과 신성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죠.
예수님의 계보
(1) 요셉의 족보 (마태복음 1장 1-16절, 룻기 4장 18-22절, 역대상 2장 5-15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다말에게서)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살마 / 라합에게서) ‣ 보아스 (룻에게서) ‣ 오벳 ‣ 이새 ‣ 다윗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 솔로몬 ‣ 르호보암 (남유다 1대왕) ‣ 아비야 (2대) ‣ 아사 (3대) ‣ 여호사밧 (4대) ‣
요람 (=여호람 / 5대) ‣ 아하시야 (6대)* ‣ 요아스 (8대)* ‣ 아마샤 (9대)* ‣ 아사랴 (=웃시야 / 10대) ‣
요담 (11대) ‣ 아하스 (12대) ‣ 히스기야 (13대) ‣ 므낫세 (14대) ‣ 아몬 (15대) ‣ 요시야 (16대) ‣
여고냐 (=여호와긴 / 19대 / 바벨론에 포로가 됨) ‣ 스알디엘 ‣ 스룹바벨 (포로 1차 귀환 당시의 지도자 / 성전을
건축함) ‣ (생략)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마리아에게서)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악행을 저지른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왕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아하시야와 요아스 사이의 7대왕은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랴로, 남유다에 우상을 들여오고 다윗의 계보를 멸망시키려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 외에 생략된 이름들이 더 있다.
(2) 마리아의 족보 (누가복음 3장)
예수는 요셉의 아들 ‣ 요셉의 위로는 헬리(요셉의 장인) ‣ 그 위는 맛닷 ‣ 그 위는 레위 ‣ 그 위는 멜기 ‣ 그 위는 얀나 ‣ (중략) ‣ 그 위는 나단 ‣ 그 위는 다윗 ‣ 그 위는 이새 ‣ 그 위는 오벳 ‣ 그 위는 보아스 ‣ (중략) ‣ 그 위는 에노스 ‣ 그 위는 셋 ‣ 그 위는 아담 ‣ 그 위는 하나님
마태복음은 요셉의 혈통,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시대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예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계보는 같으며, 다윗으로부터 양쪽으로 갈라진다. 요셉의 족보는 다윗왕 ‣ 솔로몬 왕(밧세바의 넷째 아들)으로 이어지는 반면, 마리아의 족보는 다윗왕 ‣ 나단(밧세바의 셋째 아들)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데 부모 양쪽 모두 다윗의 계통이다.
예수의 계보는 신약성경의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1] 마태오의 복음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순서대로 나아가고, 루가의 복음서는 예수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담까지 이어진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이름 목록은 일치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칭호인 '다윗의 자손'을 확증한다. 그러나 다윗 이후로는 두 족보가 크게 다르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7세대를, 루가의 복음서는 42세대를 기록하는데 두 목록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예수의 친할아버지, 즉 요셉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태오의 복음서는 야곱이라고 하고, 루가의 복음서는 헬리라고 한다.[2]
이처럼 예수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다는 점에 대해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를[3] 시작으로 한 초대 교부들은 두 족보를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며 이 차이점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했다.[4] 대표적인 가설은 하나(주로 마태오의 복음서)는 요셉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주로 루가의 복음서)는 마리아의 족보일 수 있으며, 또는 하나는 예수의 관습적인 법적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예수가 마리아에게서만 태어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요셉은 단지 법적 양아버지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 요셉과 마리아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또한 요셉과 같이 한 사람이 두 명의 법적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계대결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 등의 현대 비평 학자들은 두 족보가 모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유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5]
마태오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마태오의 복음서 1:1–17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로 시작하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모두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의 유배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로 이어진다.
마태는 예수의 칭호인 '그리스도'를 복음서의 시작부터 강조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기름부음 받은 왕의 의미를 가진다. 마태는 예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제시하며, 그가 다윗 왕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를 부르며 그의 왕족 혈통을 나타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그가 이스라엘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두 표현에서 '자손'은 '후손'을 의미하며, 야훼가 다윗과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상기시킨다.[6]
여러 사본들에서 마태의 서론적 제목(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출생의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후에 나오는 족보를 위한 제목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같은 구절이 족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70인역 성경과도 일치한다.[7]
마태오의 복음서의 족보는 루가의 복음서의 족보보다 기교적이고 명확한 구조로, 14대씩 세 범주로 나누어 구별하고 있다.
- 1대에서 14대까지는 유다의 형제들과 베레스의 형제를 언급하며, 네 명의 여성 조상을 포함하는 등 주석이 풍부하다.
- 15대에서 28대까지는 다윗의 왕조 계보를 다루지만 여러 세대를 생략하고 "바벨론 유수 시기의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로 끝난다.
- 마지막 29대에서 41대까지는 13세대로 보이지만, 요셉과 즈루빠벨을 사이 조상들에 대한 고유한 전승이다. 이 시기는 그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조상이 적혀 있다.
총 42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이름을 생략해야 하므로, 세 부분의 14대 구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14는 7의 두 배로, 완전함과 언약을 상징하며, 또한 다윗이라는 이름의 게마트리아와 일치한다.[8]
이 족보에 나오는 히브리어 이름의 그리스어 표기는 대부분 70인역 성경과 일치하지만, 몇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다. '아삽'이라는 형태는 아사 왕을 시편의 저자인 아삽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아몬 왕을 암모스라고 표기하는 것은 예언자 아모스를 연상시키지만, 70인역에도 이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보다 친숙한 이름에 대한 동화 현상으로 해석되곤 한다. 보에스(보아스, 70인역에는 부스)와 라캅(라합, 70인역에는 라아브) 역시 독특한 형태다.[9]
생략된 왕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지야의 세 왕이 생략되었다. 이들은 아합의 저주받은 혈통에서 아달리야를 통해 3대, 4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악한 왕들로 여겨진다.[10] 동시에 이들을 생략함으로써 두 번째 14세대를 맞출 수 있으므로 수비학적 의도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1]
또한 생략된 왕은 여고니야의 아버지인 여호야킴이다. 헬라어에서 여호야킴과 여호야긴의 두 이름은 매우 유사하며 때로는 둘 다 '요아킴'으로 불린다. 마태오가 "요시야가 바벨론 유수 시기에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했을 때, 그는 이 둘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여고니야가 아니라 여호야김에게 형제가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수는 여고니야 시대에 발생했다. 따라서 이를 실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다윗 이후의 왕들이 정확히 14세대를 구성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1]
마지막 집단 역시 14세대로 구성되었다. 만약 요시야의 아들로 기록된 여고니야가 본래 가리키고자 하던 대상이 여호야김이었다면, 여고니야는 유수 이후 세대로 계산될 수 있었다. 일부 저자들은 마태오의 원래 본문에 마리아의 아버지 요셉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2]
여고니야(기원전 약 616년 출생)부터 예수(기원전 약 4년 출생)까지 14세대에 걸쳐 있으며, 세대 간 평균 간격은 약 44년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세대 간 격차가 더 넓게 나타나기도 한다.[13] 또한 이 기간 동안 흔했던 '조부 이름을 따는 관습'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데, 마태오가 이러한 반복을 압축했을 수도 있다.[14]
루가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족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는 요셉부터 아담까지 역순으로 올라간다.[15]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전한 후, 루가복음 3장 23절에서 38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헬리의 아들이요, ..." (3:23) 그리고 계속하여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니라." (3:38)라고 끝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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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족보는 구약성경에 잠깐 언급되었을 뿐인 다윗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들 나단을 통해 다윗의 후손임을 보여준다.[17]
다윗의 조상에 대해서는 루가의 복음서와 구약성경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70인역(Septuagint)을 따른 것이며 대부분의 현대 성경에서 따르는 마소라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루가 복음서에 있는 족보의 세대 수를 77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든 죄의 용서를 상징하는 숫자로 인식된다.[18] 이 숫자는 또한 루가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에녹서』에서 언급된 에녹 이후 70세대와도 일치한다.[19][20] 루가는 비록 마태오처럼 세대를 세지는 않았지만, 일곱 단위로 구성하는 원칙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레네오는 아담부터 72세대만을 계산했다.[21]
구약성경에서 아미나답의 아들로 아람이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신뢰받는 네슬레-알란드 비평판은 "아미나답의 아들, 아드민의 아들, 아르니의 아들"이라는 변이 형태를 받아들이며,[22] 이를 통해 아담부터 시작하는 세대 수를 76으로 계산한다.[23]
루가가 사용한 표현인 "사람들이 생각하던 대로"(ἐνομίζετο)는 예수가 실제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진술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인식된다. 이는 동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루가가 예수의 외조부인 엘리로 계보를 전개하는 등, 가장 가까운 혈연 관계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의 족보를 추적했다고 본다.[24] 이 경우 족보의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을 언급했다는 견해도 있다. D. A. 카슨은 이러한 해석을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지적하며 독자들이 이를 유추하기 어렵다고 본다.[25] 마찬가지로 R. P. 네텔호스트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억지" 해석이라고 평가한다.[26]
이 외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머지 족보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나머지 족보를 요셉의 실제 족보로 보고 있으며, 마태오의 복음서에 제시된 다른 족보와 비교하여 해석한다.[27]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족보는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에서 잠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알디엘 위쪽과 즈루빠벨 아래쪽에서 두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또한 이 지점에서 마태오는 구약성경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즈루빠벨은 기원전 520년경 유대인들을 바빌론에서 귀환시키고 유다를 다스리며 성전을 재건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여러 번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28] 즈루빠벨은 『역대기』의 족보에 한 번 등장하는데,[29] 그 후손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기록되어 있다.[30] 그러나 복음서와 함께 볼 때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70인역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스알디엘로 되어 있지만, 마소라 본문에서는 스알디엘의 형제 브다야로 적혀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여고냐 왕의 아들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마소라 본문을 수용하고, 브다야가 계대결혼을 통해 스알디엘을 위해 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오 및 다른 모든 기록들과 일치하는 70인역을 원문으로 받아들인다.[31]
즈루빠벨이 매우 흔한 바빌로니아 이름임에 착안해서,[32] 루가의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즈루빠벨과 스알디엘을 단순히 동명이인으로 보기도 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스알디엘의 조상은 완전히 다르게 제시되어 있으며, 즈루빠벨의 아들에서 다시 불일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려진 연대 사이의 간격을 보완하면 루가의 스알디엘의 탄생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시기의 유명한 즈루빠벨과 같은 시기가 된다. 따라서 루가의 스알디엘과 즈루빠벨은 마태오의 기록과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그들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33]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루가의 기록에 등장하는 이들 부자가 역대기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본다. 이 경우 요셉처럼 스알디엘의 아버지로 서로 다른 두 명이 기록된 것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복잡한 계대결혼 가설이 종종 제안되었다.[33] 그러나 리처드 보컴은 루가의 기록이 실제 역사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대기』의 족보는 즈루빠벨을 선조의 계보에 끼워 넣은 후대의 첨가물로, 마태오는 단순히 왕실 계승을 따랐을 뿐이다. 실제로 보컴은 즈루빠벨의 정당성이 저주받은 솔로몬의 계보가 아닌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20]
루가의 복음서에서 즈루빠벨의 아들로 제시된 이름 레사(Rhesa)는 일반적으로 아람어로 '머리'나 '군주'를 의미하는 rēʾšāʾ로 간주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름이 즈루빠벨의 것인데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본다. 이 견해를 따르면 루가 복음서의 다음 세대인 요아난(Joanan)은 역대기에서 즈루빠벨의 아들 중 하나로 기록된 하나냐(Hananiah)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루가 복음서의 그 다음 이름들과 마태오 복음서의 다음 이름 아비웃(Abiud)은 『역대기』에서 특별히 확인할 수 없다.[20]
같이 보기
각주
누가복음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루칸’으로 되어 있다. 이는 ‘누가에 의한’이란 뜻으로 이 헬라어 성경을 번역한 영어 성경(A.V)에는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Luke(누가에 따른 복음)로 제목을 붙였다. 한글 개역 성경의 제목은
‘누가가 전한 복음’의 의미를 갖는 ‘누가복음’이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 자체에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들로 인해서 기록자가
누가라는 것이 인정된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글이라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공통점(눅1:3, 행 1:2), 누가복음의 끝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연결이 된다는 점 등을 기초로 두 책이 동일한 기록자에 의해
적혀진 사실이 인정되며, 사도행전의 내용에 비추어 누가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였다는 사실(누가의 이름이 골 4:14,
딤후 4:11, 몬 1:24에 기록), 누가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기록자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아니며(눅 1:2-3),
누가복음에 고급 헬라어가 사용되었다는 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사실(골 4:14), 누가가 기록자라는 2-3세기 기록들이
있다는 점, 누가복음의 기록자를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켰다는 사실들 등의 증거들이 누가가 기록자라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누가는 “빛나다”라는 뜻의 라틴어 `루카누스' 또는 `루키리우스'의 약어이며. 성경 저자 중에서 유일한 유대인이 아닌 안디옥 출신으로 추정된다.
2) 기록연대
이 복음서가 적힌 정확한 연대는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사도행전의 기록으로 보아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보다 먼저 적힌 것으로 추정되며, 누가복음에 서기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적혀 있지 않은 점,
사도행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60년대 중반의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적힌 것을 고려하면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3. 대상 및 저술 목적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고’이 글을 썼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1:4).
데오빌로에게 “존귀하신”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Lover of God). 누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초기부터
자세하게 조사하여 본 내용들을 적는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하여 신뢰성 있는 조사 결과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일차적으로 로마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본서에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나,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하는 것이나, 빌라도가 세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죄를 발표한 것 등 전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데오빌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서 로마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알고 있는 바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주제
1) 흠 없는 인자(人子)이신 예수
누가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여 인류의 친구로서의 그리스도, 즉, ‘인자(人子)’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예수는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여성과 어린아이, 소외 계층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있으시며 그들을 동정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왔음을 강조한다.
2) 온 세상의 구주 예수
누가가 그려 주고 있는 그리스도는 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가는 어느 한 민족에
속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높이 부각시키고 있다. 즉,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나타내신 각종 봉사와 관심을 다른 어떤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자세히 다루며 강조하고 있다.
5. 누가복음의 특징
1)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함 - 인간적인 면이 잘 드러나있다.
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기록된 유일한 복음서(2:41-51)
: 성장 과정(2:40, 52), 부모 밑에(2:51), 12세 때의 성전 방문(2:41-50) 기록
②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19:41), 간절히 기도하심(22:44)
③ 인성 표현은 식사에 많이 언급(7:36-50. 10:38-42. 11:37-52. 24:41-44)
④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23:46) - 사람을 위한 대속물 - 구속이라는 말이 신약에서는 처음으로 등장(1:68. 2:38. 24:21)
2)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을 강조함 - 일반 서민들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이 표현된 복음서이다.
① 죄지은 여인(7:36-50), 선한 사마리아인(10:29-37), 탕자의 비유(15:11-32), 세리 삭개오(19:1-10),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23:39-43)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
② 마리아와 엘리사벳(1:5, 1:27: 2:41), 안나(2:36), 사렙다 과부(4:26), 시몬의 장모(4:38), 나인성
과부(7:11),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8:2-3), 십자가의 여자들(23:49), 부활일의 여자들(24:1) 등 여인이 많이
표현되고 있음.
3)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를 강조함
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강조함
에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3:21), 들에서(5:16), 산에서(6:12, 9:28, 22:39, 41)
기도하시며, 홀로(5:16, 9:18; 11:1), 오랫동안(6:12), 무릎을 꿇고(22:41, 44)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 때 외에도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6:12),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받기 전에(9:18),
죽음을 예고하는 변화산에서(9:28), 감람산에서 수난을 앞두고(22:40-44), 십자가상에서(22:34, 46) 등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실 때마다 기도하셨다.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강조하는 내용을 강조.
제자들이 매일 생활에 대한 염려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이기게 하는 것도 기도(8:14)이고,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것도
기도이며(8:13, 22:32, 40, 46). 기도하는 자 만이 인자가 오실 때 합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18:1-8;
21:36), 제자들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부활하신 예수의 요구이기 때문으로 강조하고 있다(24:52).
4) 기타 특징
① 서문이 있음(1:1–4).
이 서문에는 누가복음의 내용(1 :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 기록한 방식(2 : 전하여준 그대로), 수신자(3 :
데오빌로), 작성 목적(4 : 배운 바의 확실함을 위해)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이 서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사도행전과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수신자가 똑같이 데오빌로이다(눅 1:4/ 행 1:1). 둘째,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의
속편임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있다. ‘먼저 쓴 글’(행1:1)의 내용이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1:1) 승천하신
날(행1:2)까지라고 정리한다. 셋째, 세계사적 시대를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주전
30-14년(2:1), 가이사 디베료 15년(Tiberius) 주후 14-37년(3:1)
② 예수님의 탄생시 목자들의 방문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음(2:8-2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의 탄생시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왕께 드리는 예물에 대한 기사를
기록한 반면, 누가복음은 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목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파 되었음을
밝힌다.
③ 족보의 독특성(3:23-38)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와 누가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까지 올라가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다른 계통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마태복음이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으로 왕의 혈통을 따르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나단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요셉의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그 족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예루살렘과 성전을 강조함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① 첫 장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며, ② 아기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고, ③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명시적 표현들이 있고, ④
예수님의 승천시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 있고, 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복음서 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설명하고 있다.
⑤ 의학 용어가 많이 사용됨
“중한 열병”(4:38), “나병 … 원하시면 깨끗하게”(5:12), “혈루증”(눅 8:43), “그(말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 등
⑥ 찬송시가 많이 나옴
누가복음에는 유독 찬송시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찬송시들은 예수님과 요한의 출생부분에서 나오고 있다(마리아의 노래(1:46-55), 사가랴의 노래(1:68-79), 천군의 노래(2:14) 시므온의 노래(2:29-32)).
6. 내용과 구조
공관복음의 공통된 구조는 ① 요한의 세례, ② 갈릴리 사역, ③ 유다와 예루살렘 사역, ④ 죽으심과 부활의 구조를 갖는다.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의 기본구조를 좀 더 매끄럽게 다듬었고, 예수님의 출생 기록에 세례 요한의 출생 기록을 추가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최종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을 기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한다는 표현을 네 번이나 강조하여 명시하고 있다.
1) 인자의 준비(1:1-4:13)
2) 인자의 사역(4:14-19:48)
3) 인자의 수난과 부활(20:1-2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