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누가복음




11월 15일(토) 누가복음 23-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7)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증인(證人) 마루투스(martüs)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3144

1.  증거.  2. 마 18:16.  3. 롬 1:9 
Pronunciation [ martüs ]
Etymology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I.  증거, 증인
    • 1.  [문자적으로, 법적 의미에서] 마18:16, 막14:63, 행7:58, 고후13:1.
    • 2.  [비유적으로]
      • a.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증인이 되시는 경우] 롬1:9, 빌1:8, 살전2:5,10.
      • b. [사람의 눈이나 귀로 듣고 보고 증언 하는 것] 살전2:10, 딤전6:12, 딤후2:2.
      • c.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증인, 계11:3.
    • 3. 순교자, 행22:20, 계2:13, 17:6.
  • 관련 성경  /  증인(마18:16, 막14:63, 눅24:48).


증인(證人) - 증거 증,  사람 인

  •  1. 어떤 사실(事實)을 증명(證明)하는 사람.
  •  2. 소송법(訴訟法)에서, 법원(法院) 또는 법관(法官)에 대하여 소송(訴訟) 당사자(當事者)가 아니면서 법원(法院)의 신문(訊問)에 대하여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 사실(事實)을 진술(陳述)하는 사람.
  •  3. 보증(保證)하는 사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 
- 예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31절) 마음이 열리게 된(45절) 제자들에게 예수는 47절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모든 활동이 완결부(完結部)에 이르고 있다. 
예수의 일은 지금부터 증인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시작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로,
예수의 삶, 죽음, 부활 및 그로 인한 구원의 사건을 직접 보고 들은 증인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 성경적 근거: 누가복음 24장 48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의미: 단순히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믿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입니다.
  • 역할: 이 구절의 '증인'은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튀스'에서 유래했으며, 나중에는 순교자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즉, 생명을 걸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 사명: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사명을 감당해야 했으며, 이는 곧 기독교의 선교적 사명을 나타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맨 앞에 집필 동기를 밝히길, "존경하는 데오빌로에게 우리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여 순서대로 정리하여 보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누가복음의 컨텐츠에 대해서는 "예수에 관한 글이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에게 전해졌다"고 밝힌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오늘 묵상의 마무리 구절인 24장 53절에서 끝나는 누가복음을 집필한다. 누가는 생업이 의사였기에 자신의 생업에 종사했겠지만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서 예수의 출생부터 부활 승천의 모든 일을 기록했다.

누가의 그러한 헌신과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나는 누가복음을 읽으며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짧은 감상을 이곳 블로그에 적곤 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 적고 누가 푸시(push)하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복음을 알리는 방법이다. 복음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확산 전파되는 힘이 있다.

복음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는 증언의 역사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를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서는 예수는 없지만 그의 사랑과 기적을 삶에서 체험한 사람들에 의해 증언되어왔다. 오늘날 세계(최소한 서구)의 문명은 그러한 증거중심의 믿음체계를 기반하여 건설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마지막 당부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증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즉, 증인 선서처럼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누가복음 24:36~48)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증인이 되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변에 어떤 문제로 인하여 증인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증인을 찾고 찾아서 증언해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학사전에서 설명하는 ‘증인’은 법률적으로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법원이나 법관의 신문에 대하여 자기가 듣고 본 사실을 진술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검사나 변호사의 요청으로 즉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하여 증언하므로 판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수십 년을 옥살이 하다가 재심청구로 인하여 억울함에서 해방되는 일들이 최근에 많이 있는데 재심청구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증거.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 주 중에는 중부연회가 있었습니다. 연회의 여러 가지 행정 중에 목사 안수식이 연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순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 안수 받는 안수자는 반드시 안수보좌를 두어 목사안수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금 번 중부연회에서 목사안수 받는 자가 안수보좌를 세웠는데 직무 정지된 목사를 안수보좌로 세워서 큰 이슈가 되어 앞으로 어떻게 처리가 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결혼식은 증인 앞에서 정부의 행정 관리의 주도로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증인은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서기 2세기 중반 소아시아 스미르나, 지금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캅’이 이제라도 그리스를 욕하고 로마 신들과 황제를 섬긴다면 용서하고 풀어 준다는 로마 총독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팔십하고도 4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리스도는 한 번도 나를 서운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배신 할 수 있겠소?’ 그의 진지한 눈빛과 거룩한 희열에 젖은 표정으로 감동에 젖어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그의 모습에 입도당한 총독은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폴리갑은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화형 틀로 걸어갔다고 합니다.(위리스턴 워커, 「세계교회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보도하는 눅 24장의 세 번째 단락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신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13~35절에 이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지상 명령을 주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증인’으로 번역된 ‘마르튀레스’는 ‘목격자’를 뜻하는 ‘마르튀스’의 복수형으로서 예수님께서 47절에 언급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 3주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큰 은혜 받고 증인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구운 생선 한 토막

  저는 지난 주일에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말씀을 소개하면서 제자들이 대 내외 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기를 평안하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기뻐하거나 평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두려움과 의심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마치 하나의 물체와 같이 움직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것 입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 냅니다. 그 주된 생산물이 바로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쓴 노만 빈센트 빌 박사의 착안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끝없이 불안과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양산해 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길러야 함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람은 의심덩어리입니다. 의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의심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 과학이라든가,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수많은 결과들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진 것이 바로 이 의심의 극대화 입이다. 오늘 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심에 노예가 되어 스스로 불신과 두려움에 빠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 오늘 날 물질문명이 최고조로 발전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황폐화 되어 가고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생기와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의심에 포로가 되어 신앙에 귀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해결책을 이스라엘의 한 시인의 울부짖음과 고백을 통해 찾고 위로를 받습니다.

  ☛시편42: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어 분출되는 두려움과 의심을 제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생산되는 의심에 대해 무기력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부활 하신 주님은 의심 덩어리인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절에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친히 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42절에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보다는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하심으로써 그들이 부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하게 하여 의심에서 벗어나 증인이 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 요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을 깨닫게 하시다.

  본문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에 저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가 세상 책을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 마음의 눈이 먼저 열려야 합니다. 열린 눈으로 볼 때에 성경 속에 담긴 진리가 보입니다. 비로소 그것이 진리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오늘 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성도들만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작가도 성경을 읽고, 심지어 스님이나 불신자들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실체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세로는 절대로 성경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 오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시대와 그 이후 사도 시대에, 물론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까?

  ☛요5:39,40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 어디를 들쳐보아도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이유가 바로 그들이 모세가 영광스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 올 때에 수건을 썼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수건으로 그 마음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후 3:14~1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3:14~16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시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일단 눈을 가리고 나면 한 치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을 보아도 알 턱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무작정 읽을 것이 아닙니다. 다행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려진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시도 베드로는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께 겸손히 구하십시오.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조명을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하면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닫게 되어 증인이 될 것입니다.

셋째,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

본문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증인’이라는 말의 헬라어 ‘마르튀스’는 본래 법정에서 나와 증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순교자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독자들이 이 복음서를 읽을 때는 박해의 시절이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법정에 나와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면서 죽어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롱을 다했고, 채찍에 맞기도 했으며, 사자에게 삼켜 죽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고통이란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이나 교회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러한 순교적인 일들을 구차히 피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입술로만 전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자세는 바로 죽음을 각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내 생명을 건 전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단단한 마음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본래 아이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자로 나선 이후에는 어떠했습니까?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수많은 위협과 핍박이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렘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자기 생명이 위협받는 한이 있어도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말씀 증거하는 일만큼은 중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하지 못해 한이 되고,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에게는 이러한 순교자적인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모든 일에 근심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근신하면서 또 외부적으로는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전도의 일을 중단 없이 진행 시키는 것이 전도인의 직무입니다.

  사실 오늘날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어 왔습니까? 결코 쉽게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수많은 무명의 전도인들의 순교적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여전히 복음과는 무관한 자로 스스로를 자처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는 명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증인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의심에서 벗어나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진리를 깨닫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건 사명감이 있어야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코로나로 인하여 복음 증거하는 일이 위축되었다고 하면 다시 일어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에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순교저적인 각오로 단단히 재무장하고 다시 복음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내 삶이 주님의 말씀에, 또 세상이 기독교인에게 기대하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치기에 복음에 누가 될까 자신있게 전하지 못하지만, 엄밀히 말해 증인이 증거해야 하는 내용(컨텐츠)은 그의 인격이나 삶이 아니라, 보고 듣고 경험한 바 그 자체이다.











11월 14일(금) 누가복음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뜻과 원(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불레이. 1014)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델레마. 2307)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Father, if you are willing,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뜻(블로마이) 1014

βούλομαι Storng number 1014

1. 원하다.  2. 소원하다.  3. 고후1:17. 
Pronunciation [ bŏulŏmai ]

2. [하나님의 경우] θέλω가 좀더 일상적으로 쓰인다. 

[독립적으로] 눅 22:42, 약 1:18. 
[부정과거 부정사와 함께] 히 6:17. [대격+부정사와 함께] 벧후 3:9. 
[예수의 경우] 마11:27, 눅10:22. 
[성령의 경우] 고전12:11.

βουλή, ῆς, ἡ Storng number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Pronunciation [ bŏulē ] 
Etymology(어원) / 1014에서 유래
  •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4:5.
  •  2. 결의, 결정.
    •  a. 사람의 결정, 눅23:51, 행5:38, 27:12.
    •  b. 하나님의 결정, 눅7:30, 엡1:11, 히6:17.
  • 관련 성경 /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원(데레마) 2307

θέλη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 6:10  
Pronunciation [ thĕlēma ]

관련 성경 /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뜻불래'는 헬라어
불레(βουλή)를, '델레마'는 헬라어 델레마(θέλημα)를 잘못 쓴 것입니다. 
둘 다 성경에서 '뜻'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이며, '불레'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뜻, '델레마'는 사람이 바꿀 수 있는 뜻이나 계획을 의미합니다. 

불레(βουλή)
  • 의미 : 성경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로, '불가항력적이고 결정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 특징 : 이 뜻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델레마(θέλημα)
  • 의미 : 역시 성경에서 '뜻'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 특징 : '불레'와 달리 사람이 바꿀 수 있는 뜻, 의지, 의향, 소원, 결심 등을 나타냅니다.
  • 관련 성경 구절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에서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 관련 용어 : 히브리어 '헤페쯔'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이는 '즐거워하다', '만족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뜻 (will) : 델레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델레마'는 '원하다, 생각하다, 의도하다, 좋아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델로'의 연장형으로 '이루고자 원하거나 결심한 것, 의지, 선택, 경향, 욕망, 기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인역에서 '델레마'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즐거워하다, 기쁨을 취하다, 마음에 들다, 만족하다, 희망하다'의 뜻을 가진 '하페쯔'에서 파생된 '헤페즈'로 '가치있는 것, 소원하는 것, 기쁨, 즐거움, 목적, 뜻, 아름다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선악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뜻'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처럼의 삶을 살려는 욕망인 '정욕'(에피두미아)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기에 그 속에는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만이 가득한 자이다(롬 1:29)
그들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목적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완전히 파괴되고 썩을'(아플뤼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델레마)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 1:4,5).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언약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마 26:42, 눅 22:42).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다(요 4:34)

그에게 있어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요 6:39) 이며,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요 6:40)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언약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뜻(델레마)을 이루셨으며(요 19:30)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삼으신 것이고(고전 3:16)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엡 1:5)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델레마)이 무엇인지를 분별(도키마조) 하여 그것만이 유일한 참인 것을 인정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참된 가치로 여기는 자이며(롬 12: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델레마)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아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품고 사는 자이다.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16.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7.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22.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

28. [베드로전서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32.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 하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데 있어서 많은 경우에 ‘아버지’를 덧붙어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하나님’과 ‘아버지’ 붙여 부르는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이 두 경우에 그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

언어에서 복합어(겹낱말)가 쓰일 때 그 두 낱말은 문법적 관계에 있어서 주(主)와 종(從), 즉 주어와 수식어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달밤’이란 말은 ‘밤’이라는 주어에 ‘달’이란 수식어가 붙어 “달이 빛나는 밤”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과 ‘아버지’에 적용시켜 보면 어떠한 표현이 맞는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를 결합시킬 때 거기서 주가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고, ‘아버지’는 그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그 두 낱말 ‘하나님’과 ‘아버지’를 어떻게 결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든 ‘달밤’의 예에서 보는 대로, 주 된 낱말이 ‘하나님’이 되므로 따라서 그 복합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개념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을 수다히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아버지’라는 낱말의 쓰임을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 중 구약에서보다는 신약에서 훨씬 많이 쓰이고(거의 400회), 신약 중에서는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110회) 나타난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를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 중에 수많이 쓰는 이 복합어를 ‘하나님 아버지’로 써야 하느냐,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으로 써야 하느냐? 
성경에서는 이 두 낱말이 따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것이 복합어의 형태로 쓰이는 대표적인 예를 사도신경 중의 첫 고백의 항목에서 볼 수가 있다. 
헬라어로는 Theon Patera, 라틴어로는 Deum Patrem, 이들 원어의 영어 번역은 God the Father 이다. 
여기서 우리말 사도신경은 처음에 (아마 영어로부터의 번역인 듯) 그 두 낱말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 ‘하나님 아버지’로 번역하여 오랫동안 쓰여 왔다. 
그러나 이 번역이 바르지 못 한 것을 최근의 재번역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바로잡았다. 이것은 인구어의 구문과 우리말의 구문이 다른 것을 간과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말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라고 할 때, 영어로는 ‘Einstein a scientist'이지 ’A scientist Einstein'이 될 수 없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분석해 볼 때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과 ‘아버지’를 겹낱말로 쓸 때는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뜻(불래 - 결정적인 뜻.  델레마 - 소원적인 뜻)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뜻으로 "불래"
불래의 뜻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bŏulē ]
어원 / 10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 4:5.
2. 결의, 결정.
 a.  사람의 결정, 눅 23:51, 행 5:38, 27:12.
 b. 하나님의 결정, 눅 7:30, 엡 1:11, 히 6: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둘째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으로 "델레마"

델레마는 사람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 6:10
발음 [ thĕlēma ]

뜻풀이부
I. 뜻, 의지.
II. [객관적으로] 뜻하는 바.
 1. [일반적으로] 마 6:10, 26:42, 눅 11:2, 요 6:39, 행 21:14, 골 4:12, 히 10:10.
 2.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바라는 바] 요 5:30, 6:38, 고전 16:12, 엡 1:9.
 3.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의지된 바]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마 21:31, 눅 12:47.
  b. [마귀에 대하여] 딤후 2:26.
  c.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탁월성] 롬 12:2, 엡 5:17, 살전 4:3, 5:18, 벧전 2:15, 4:2,
      γινώσκειν τὸ θέλημα : 뜻을 알다, 롬 2:18, 행 22:14.
  d. ποιεῖν τὰ θελήματα τ. σαρκός : 육체의 욕망을 행하다, 엡 2:3.
III. [주관적으로 의도하거나 욕망하는 행동]
 1. [인간의 뜻에 대하여] 고전 7:37, 벧후 1:21, [예수의 죽음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뜻에 대하여] 눅 23:25.
 2. [하나님의 뜻] 엡 1:11, 벧전 3:17,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 하나님의 뜻대로, 롬 15:32, 고전 1:1, 고후 1:1, 8:5, 엡 1:1, 골 1:1, 딤후 1:1

연관 단어 / 문법설명
2309의 연장형
관련 성경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자풀이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를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耳(이) : 귀, 청각 기관의 일부를 나타내며, 소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 懸(현) : 매달리다, 달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떠올리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 鈴(령) : 종, 방울, 소리와 관련된 물체를 나타내며, 소리의 발생을 의미합니다. 
  • 鼻(비) : 코, 인체의 기관 중 하나를 나타내며,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懸(현) : 매달리다, 달다
  • 鈴(령) : 종, 방울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 중 하나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양쪽에 관련되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며, 언론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다가 이현령비현령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속담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절대군주인 만만황제의 첫째 아들인 묵황(穆皇)이 임금의 위치를 먼저 물어봤다가, 버릇없는 몸짓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버려 실패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위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현령비현령은 상황에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제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모든 선택이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자어 속담의 경우 유래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현령비현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이 무척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이현령비현령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적인 문헌인 '밍자(明子)'에는 "귀는 귀걸이로 장식을 하며, 코는 코걸이로 장식을 한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여성의 장신구로서의 귀걸이와 코걸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현령비현령은 고대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황제(黃帝)의 십 신(十神) 중 하나인 이神(耳神)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생각을 형성하고 판단할 때, 손가락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귀와 코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神은 인간의 판단능력이나 직관력과 관련된 신이었으며, 이현령비현령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속담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의 경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은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취해야 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속담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뜻, 의미에 관한 예화

▣ 세 배의 축복

한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원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언어 훈련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네 가정에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아들 셋, 딸 하나를 둔 언니가 그만 병들어 세상을 떠나더니, 곧 그 남편마저 죽었습니다. 졸지에 아이 넷을 떠맡게 된 그녀는 도저히 아이들을 남기고 선교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지 못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믿음으로 정성껏 키웠습니다. 25년 후, 4명의 아이들 중 세 명이 인도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선교본부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25년 만에 세 배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저희 세 자녀를 인도로 파송해주세요.”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시간은 내 시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뜻을 초월해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 상어와의 혈전

플로리다 주에 사는 제리라는 사람이 친구 두 사람과 함께 고무 구명보트를 타고 5일 동안 대서양에서 표류했던 일이 있었다. 그들은 닷새 동안이나 추운 바다에서 표류하던 참이라 세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이때 상어가 나타나서 세 사람이 누워 있던 구명보트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구명보트에 구멍이 나게 되고, 구명보트를 잃으면 곧 죽음이었다. 그들은 상어와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주머니칼 하나뿐이었다. 세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주머니칼로 상어와 싸웠다. 그 무렵에 화물선 한 척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멀리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고, 결국 그들은 구출되었다. 만약 세 사람이 모두 구명보트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면 멀리 지나던 화물선은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어와 열심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멀리 지나가던 화물선이 그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악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죄의 세력과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죄와 싸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

▣ 뜻을 맞춰라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영국선교사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사역자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제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과 맞추는 일부터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있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2)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 한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적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감사는 하나님의 뜻

미국의 자동차 왕이었던 헨리 포드는 믿음이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한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고아원생들을 위해서 강당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2,000파운드를 기증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신문에 뜻밖에도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헨리 포드 회장이 고아원을 위해서 20,000파운드를 기증하기로 약속하다.”
 2,000파운드가 20,000파운드로 잘못 게재된 것입니다. 
고아원 측에서 그 기사를 보고 포드 회장을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사에 정정 기사를 내도록 요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헨리 포드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 없지요.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18,000파운드를 더 내겠습니다. 
그 대신 고아원의 강당이 완공이 되고 나면 그 입구에 이런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헨리 포드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드려진 헌금으로 지어진 강당’.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함도 마땅히 넘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낭비가 아닙니다.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언제나 축복의 전주곡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게 마련입니다.

▣ 죽음에서 건진 이후…

사랑스러운 딸 하나를 둔 과부가 목사님에게 심방을 와 달라고 부탁했다. 찾아오신 목사님에게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딸이 세 살 때 심한 병이 들었는데 의사들이 얼마 살 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 하나님께 너무 잔인하다 비난했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강요했다. 만일 자기 원대로 안 살려 주시면 다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질렀다. 의사들의 비관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병이 나았다. 그 이후 13년 동안 그 딸은 어머니의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그 딸이 16세가 되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별의별 문제를 다 일으켜 어머니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결국 “제 딸은 죽었습니다. 어제 밤에 자살을 했어요. 오늘 아침 시체를 그 애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얼마 동안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하다가 이렇게 말을 마쳤다. “오, 목사님 그 애가 세 살 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왜 하나님의 뜻에 맡기지 않고 제 뜻대로 고집을 부렸는지요!” 그녀는 다시 회한과 슬픔으로 울었다. 인생의 최선은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수다한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도 하나님께 상달되지를 않고, 맥없이 툇자를 맞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상해 한다.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까닭은 그들의 효험 있는 기도를 드리는데, 가장 중대한 조건, 즉 완전한 순종의 계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할 때라야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을, 그의 뜻으로 받으신다.

▣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똑똑한 젊은이 한 명이 변호사가 되겠다는 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자기 장래에 대해 한번도 의논한 적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선생님이 물었다.
“자네는 그 많은 재능을 가지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자네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이 말은 젊은이를 놀라게 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이런 글을 썼다.
“나는 그제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했다. 주님을 섬기기 시작한 지 35년. 나는 그때 내가 선택한 목회자의 길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의논하고 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말하기를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지어다”(약 4:15)

▣ 못난 자식· 예쁜 사위

사랑하는 아내가 직장을 마치고 와서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설거지를 도와주던 남편이 주부습진에 걸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시어머니와 장모의 입장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못난놈. 얼마나 일을 했기에 그 모양이냐. 아예 앞치마를 두르고 집에 들어앉지 그러냐 ”
“아이구 예쁜 우리 사위, 고무장갑을 껴야 하는데 그냥해서 그렇지. 다음엔 꼭 고무장갑을 사용하게나”

남편은 못난놈이 되기도 했고 예쁜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내 쪽으로 모든 것을 유리하게 생각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혹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도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묵상과 기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의존해 마치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은혜는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계획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똑똑하고 젊은 변호사였던 척 콜슨은 영향력 있고 권력이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고자 계획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그는 주님께서 간섭하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높은 지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공작에 연루되어 감옥에까지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 중에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교도소 선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하나님을 모르던 과거 정계의 삶이나 그 삶이 줄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보람이 있다고 간증합니다. 성경에는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세 만대 전에 보고 아시고 우리의 일생을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비된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시며,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 있는 리빙스턴에게 하루는 역시 아프리카에서 선교중인 그의 장모로부터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리빙스턴,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대롤 꼭 평안히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해 왔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네. 무엇을 소원하거나 간절히 기도할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라고 하는 경건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네'.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야말로 참된 기도라 할 수 있다.

▣ 링컨과 하나님의 뜻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이 예상외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동족끼리 싸우며 하루에도 수백명씩 젊은 청년들이 죽어갔다. 마음이 괴로운 그에게 주위에 있는 이들이 다가와 승리를 회의하며 물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 편이실까요?" 링컨이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 하는 점입니다."

▣ 하나님의 뜻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는 언제나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세째는 환경의 추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그리고 환경가운데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일치하기까지는 절대 일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요한1서에서 나타난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계속 행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 윗치만 니의 청혼

윗치만 니라는 유명한 성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생각이 계속 그의 마음 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두번째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에 이 여인이 허락을 해서 10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 인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10년간이나 계속해서 그 여인을 따라 다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주의 뜻을 구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는 후에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네거리를 만나서 어느 방향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동쪽으로 갈 것을 마음에 정하고, 그래도 “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지” 하고 던졌더니 서쪽을 가리켰습니다.
다시 던지니까 북쪽을 향했습니다.
계속 지팡이를 던지니까 드디어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랬더니 “이것 봐라. 이 지팡이가 동쪽을 가리키지 않느냐” 하고 좋아하며 가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고집과 욕심대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신앙이 기초가 된 서구사회에서 유행하는 용어가 “하나님 뜻이면”(데오 보렌데 Deo Volente)라는 용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슨 일을 하거나 계획할 때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뜻이면”(If it's God's will)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야 합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고 복 받게 해달라고 하면 큰 잘못입니다.

▣ 하나님의 뜻으로 상황을 판단하라

너무 쉽다고 생각될 때, 이것쯤은 내 경험과 상식으로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방심할 때 우리는 덫에 걸리고 만다.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당신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처세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신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파일럿들 가운데서도 가장 숙달된 파일럿들이 뜻밖에 평이한 비행 중 사고로 죽는 비율이 높은 원인을 아는가?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계기판을 보지 않으므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일럿들을 훈련시킬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기판을 철저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영리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 영리함이 오히려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솔하게 결정해 버린 일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라고 여겨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처리해 버린 일들이 뜻하지 않게 당신의 덜미를 잡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 하나님의 뜻 알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때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삶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6가지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관한 나의 의사가 있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둘째, 결과에 대해서는 나의 감정이나 이상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넷째, 주변 상황을 고려한다. 종종 상황과 말씀과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혀준다.
다섯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시기를 간구한다.
여섯째, 앞에 열거한 대로 하나님께로 향한 기도를 통하고, 성경 말씀과 묵상을 통한 뒤에 심사 숙고하여 다다르게 된 결론에 따라 행한다.
이때 내 마음에 평안이 따르면, 두세 번 더 기도한 다음 진행한다.

죠지 트루엣은 이런 말을 했다.“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비록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행복과 풍요로움이 보장되어 있다.
매일 매순간의 삶 가운데 우리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을 구하자.

▣ 돼지를 잘 먹이는 이유

돼지는 주인에 의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사육되어진다.
돼지가 잘 먹는 것을 주며 좋아하는 것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를 위함인가?
돼지를 위해서 돼지를 먹이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돼지의 주인을 위해서 돼지를 먹일뿐이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이나 혜택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게하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것들을 과감히 배격했다.
그것으로 자기를 더럽힐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다.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고 채식과 물만 먹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물론이다.
진미로 배불린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셨다.
사단이나 세상권력은 우리를 자신의 세력 밑에 두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다.
세상의 좋은 것들, 귀한 것들, 맛나는 것들 화려한 것들을 제공하고 진열하고 마음껏 먹으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종을 삼고자 함이다.
신앙인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 배불리려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고 외쳤던 베드로의 말을 되새겨봐야 할 때이다.

▣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뜻

1920년 아르메니아가 공산 러시아에 의해 유린당한 이후 이나라에서는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고 위험했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인인 네리 먼 남작은 사람의 법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쉬지 않았고어려운 때일수록 굳건히 서야 함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도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를 본 간수가 그를 조롱했다.
"여보시오. 당신의 그리스도는 너무 무력해서 당신을 옥에서 구해내지도 못하지 않소?"
"내가 옥에 갇힌 것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권능을 증명하는 것이오.
내가 그대더러 이 옥에 들어와 갇힌 사람들에게 전도하게 해달라고 청한다면 들어 주겠소?"
"물론 안되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깨달아야 해요.
그 분께서 나를 여기 갇힌 자들에게 전도하게 데려 오셨소.
그대는 사실 내 전도를 위하여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셈이오."

▣ 뜻에 관한 성경 말씀

0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 8)
0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0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 35)
0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0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0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
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
0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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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0-25)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예수스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케테 피스틴 데우.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ιησους λεγει αυτοις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개역개정,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새번역,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우리말성경,2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가톨릭성경,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을 믿어라. 
영어 NIV,22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영어 NASB,22 And Jesus answered saying to them, "Have faith in God. 
영어 MSG,22  Jesus was matter-of-fact: "Embrace this God-life. Really embrace it,
영어 NRSV,22 Jesus answered them, "Have faith in God.
헬라어신약 Stephanos,22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ιησους λεγει αυτοις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라틴어 Vulgate,22 et respondens Iesus ait illis habete fidem Dei
히브리어 Modern,22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הם תהי נא בכם אמונת אלהים׃



ō) ἔχω 스트롱번호 2192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믿음을 소유하라(가져라)

에코(ĕch
발음 [ ĕchō ]



έχετε (échete)

  1. 2nd person plural present indicative form of έχω (écho).: "you have"
  2. 2nd person plural present imperative form of έχω (écho).: "have!"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는 또 다시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이 질문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적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배우고 깨달은 바로는, “믿음”은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실재(reality)”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재에 대한 나의 확신과 참여(confidence and participation)”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한 편으로는 “우주적인(universal)”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개인적인(personal)”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Yet the earth does move)”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실재(universal reality)가 있고, 마음 속에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신(personal confidence)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갈릴레오의 심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세상의 어떤 권세도 그것을 깨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실재가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망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재를 인정하지만 내가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몸소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하고 비겁한 행동입니다.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비유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하실 때 그 믿음이란 우리가 모든 ‘불리한’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Yet God is living)”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들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베이스(base - fundamental principle or underlying concept of a system or theo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은 “승리(victory)”가 그 삶의 베이스가 될 것입니다. 적을 이기는 승리야말로 그의 삶을 명예롭고 가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굳이 “이기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떻게 하면 싸움을 이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며, 그것과 상관이 없는 일들은 이 사람에게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베이스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이야 말로 가치의 근본이며 믿을만한 의지가 됩니다. 그래서 돈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얘기합니다. “결국은 돈이야!”라고 실토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회사는 주식을 공개했습니다. 회사의 주식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입니다. 주식을 공개하면서 회사 직원들에게도 일정 수의 자사 주식을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당시 주식시장은 활황이었고 더구나 회사에서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그냥 서류에 서명만 하면 수백 주의 주식을 받고 적지 않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흔쾌히 서류에 서명을 하고 회사 돈을 빌려 주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당시 막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열정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저는 매일 주가의 등락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나 주식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것이 불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회사 주식을 사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런 저의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식이 공개된 지 얼마 후 한국의 주식시장이 급격히 침체되고 저희 회사 주식의 값도 처음 공개시의 가격보다도 더 낮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주식을 산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의 “이상했던 행동”을 이제 매우 “유의미한 (significant) 행동”으로 달리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전낙무씨, 주가가 떨어질 것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손을 내둘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되는 두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좀 특이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이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다음날 아침에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이 발견됩니다. 한 사건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또 다른 사건을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매 없는 거짓 신앙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멀리 서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본문에는 이 나무를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에서 먹을만한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가까이 가셨을 때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그런 나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이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고,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한 율법이 있었고, 또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바 선민의 표시인 할례가 있었습니다. 성전과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옷”과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로 치자면 아름답게 보이는 “무성한 잎”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서 보신 모습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곳은 성전이 아니라 물건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동물을 거래하는 장사꾼들로 붐비는 시장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고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책망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한 예로,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릴 짐승을 직접 갖고 오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성전의 제사장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갖고 오는 짐승들을 “흠이 있다”고 하며 퇴짜를 놓고 대신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내야 하는 성전세를 시중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특정한 화폐로만 내도록 하면서 엄청 높은 환전수수료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실상 강도들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올바른 삶(義)과 행복한 삶(福)입니다. 이 둘은 모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는 대신,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고집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열매 없는 자신을 치장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과 할례로 꾸민 종교생활로 자신들의 죄를 가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인 양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겉을 “자기의”로 치장함과 동시에 그들의 내면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런 유대인들의 거짓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가복음 7:6). 갈릴레오는 비록 위협에 굴복하여 입으로 자신이 믿는 지동설을 철회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존경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기의”를 자랑하고 “돈이 최고야!” 속삭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시자 곧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습니다 (20절). 뿌리가 말랐다는 것은 이 나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계명들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뿌리(베이스)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는 “위선적인 종교 생활로 세워진 자기의”와 “세속적인 축복(돈)”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과 같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성전 곧 그들이 “도적의 소굴”로 더럽힌 성전은 후에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인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삶은 그것이 아무리 푸르고 무성하더라도 이미 죽은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베이스가 되시며, 우리의 삶은 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의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계절을 따라 무성한 잎을 내고 있습니다. 이 “자연 속에 살아있는 나무”는 절대로 마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 모든 자연의 조화들이 중단되고 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건축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건물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보고 감탄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주 “세상 속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ld)” 세상과 자신을 보고 이해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명을 감탄하며, 매일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날을 계속해서 이렇게 평안히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태평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경고의 말씀 안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d) 깨어있는 삶을 살며,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의 눈으로 보고,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긍정 (Absolute Yes)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keyword는 “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 대한 어떤 의심 곧 부정적인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다가 (시험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 6-7장에 보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성 내의 사람들은 심지어 자식까지 삶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내일까지” 그들에게 먹을 양식이 흔해빠질 정도로 넘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한 왕의 장관이 비웃었습니다.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자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람 군대가 쫓겨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버리고 간 식량들을 마음껏 노략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왕의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산”처럼 절망적인 문제(Absolute No)에 가로막힌 자신을 봅니다. “산”처럼 그 문제는 당연히 그리고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Absolute No”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 희미한 의심의 그림자조차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Absolute Yes”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이란 오직 기도와 감사로만 사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즉시” 받는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때”에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갭(time gap)을 믿음의 기다림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물 없는 광야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받은 줄로 믿으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잘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끊임없이 불평하며, 성내며, 방황합니다. 믿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다림의 시간을 오직 기도와 감사로 채웁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기도하고 구한 것이 “그대로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란 쓴 뿌리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원망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너”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미움이나 원망은 우리 영혼에 해로운 독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이 쓴 뿌리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에베소서 4:31,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의 원어는 ‘보낸다 (let go, send away),’ ‘포기한다 (give up)’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조건 없이” 베풀어져야 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허물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형제의 허물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대신에 “나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부터 온갖 향기로운 생명의 기운들이 흘러나옵니다.

갈릴레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진리는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그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All truths are easy to understand once they are discovered; the point is to discover them).”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에 따라 하늘을 관찰하면 모든 천체의 움직임들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을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하!”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깊이 내려진 “자기의”와 “탐욕”의 뿌리를 뽑아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중국 고사에 “우공이산 [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북산에 우공이라는 아흔 살 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노인집 앞에 만 길 높이의 태행산과 왕옥산이 가로막고 있어 생활하는 데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힘을 합쳐 두 산을 옮기자. 그러면 길이 넓어져 다니기에 편리할 것이다. 당연히 가족들은 반대했으나 노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날부터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우공과 아들, 손자는 지게에 흙을 지고 발해 바다에 갔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웃 사람이 “이제 멀지 않아 죽을 당신인데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합니까?” 하고 비웃자, “내가 죽으면 내 아들, 그가 죽으면 손자가 계속 할 것이오. 그동안 산은 깎여 나가겠지만 더 높아지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는 길이 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두 산을 지키던 산신이 이 말을 듣고는 큰일 났다고 여겨 즉시 상제에게 달려가 산을 구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두 산을 각각 멀리 삭땅 동쪽과 옹땅 남쪽으로 옮기도록 하였다는 우화입니다.

  어리석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알려 주는 고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을 옮기는 일은 상상속의 우화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모두가 산을 옮기기까지 하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난 주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에 머물던 주님과 제자들은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왔을 때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인가를 먹을 것이 있을까하여 무화과나무 가까이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주님은 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주님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제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을 보고 어떤 주석가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주석은 무화과 때가 아니라도 열매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영적 추수기 전에도 열매를 찾으실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불신자인 영국의 작가“버틀란드 러셀“은 ”나는 왜 크리스챤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때도 아닌데 열매를 찾으시고 자연의 일부분인 나무를 말라 죽게 저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단순히 주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매우 준엄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깨우쳐 가르치시고자 한 사건입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의 영어 번역은 “Have faith in God" 로 직역하면 ”하나님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라“이고 킹제임스 번역은 ”Have the faith of God" 즉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믿음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소유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지라고 한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3가지의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과 마귀를 믿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을 믿는 것은 믿을 수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사람들 속에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용이 좋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모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마귀를 믿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를 짓게 합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게 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주먹을 믿게 합니다.

 한없는 명예욕을 갖게 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탐욕으로 돈에 눈이 멀게 합니다. 환경을 믿고 세상에 취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목석 과 금은으로 만든 우상을 믿고 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소유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건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그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는 “엘 샤다이”라는 호칭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1절에 보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되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보고 말씀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시에 같이 계셨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신 것입니다. 두 인격자이시나 완전히 하나로써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28절에“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 짐, 세속의 짐, 마음과 몸의 질병의 짐, 가난과 저주의 짐, 죽음의 짐을 십자가에서 홀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시고 치료와 건강을 주시며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모든 가난에서 놓여나게 해 주시고 형통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창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은 3차원의 세계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질세계에 사는 우리 인간의 삶은 공허한 상태에 무질서가 지배하여 절망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나 노력으로는 이 삶의 문제를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운행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삶을 혼돈에서 질서로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절망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성령을 보내 주시여 새로운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과 희망을 갖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에 절망상태에 빠져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여도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늘 보좌에 가만히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일을 행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레미아 33장 2-3절 말씀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고 순종하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시편 68장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날마다 지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짐을 지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무거운 짐을 기도로 맡기고 의지할 때 우리의 일을 대신해 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고 나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순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즐겁고 보람찬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믿고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젊음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우리의 길을 정해놓으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담대한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져라. 여러분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해변 가 마을에 어떤 믿음이 좋은 분이 집을 가로 막고 있는 앞산을 향하여 성경에 말씀대로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지우라”하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미쳤다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바다 매립공사가 시작되어 그 산을 파서 바다를 매웠다고 합니다.

 정말로 앞산이 바다로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이 산은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산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에 잡혀갔던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성전건축을 합니다. 성전건축을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해서 짓지 못합니다. 그 때 스가랴 선지자가 말합니다. 스가랴 4장 7절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 때에 산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입니다. 풀어야 할 문제요,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 산을 바다에 던져지라는 것은 문제를 풀고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다가오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태산 같은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을 물리칠 수 있는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라도 내가 믿음으로 입술의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창출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책에서 “너는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믿음이라는 말은 한번 나오는데 ‘말하다”라는 말은 세 번이나 나온 것을 아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큰 깨닮음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말하다가 문맥상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이 되어 있으나 영어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되리라”는 영어성경에 “He shall have whatsoever he SAITH”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 라 말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말한 그대로 되리라” 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함으로서 밖으로 쏟아 놓아야 말한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3배로 중요합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마음에 믿고” 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그것을 말하고 그 말한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나 이영훈 목사님이 설교 후 치유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하므로 역사가 일어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담대한 꿈과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상식을 넘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과감한 꿈을 꿔야 합니다. 나의 태산 같은 문제가 입술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큰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 구원조차도 우리가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가지고 입술로 아무리 고백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태초에 천지창조 역사는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매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도 말씀을 가지고 사역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성령 받고 성전미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우리를 바라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바라보고 “애니아야 예수께서 너를 고치시니 일어나라” 애니아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또한 욥바에 가서 도르가라는 여자가 죽어 시체를 돌아보고 기도하고“도르가야 일어나라”말하니 죽은 도르가가 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말씀으로 사역하였던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우리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을 통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희망찬 말을 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파괴적이고 절망적이며 원망과 불평의 말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생활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하면 그것이 심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말을 선택해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시는 말이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말을 잘 선택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분의 전능하심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그러므로” 는 23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구하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산을 옮기는 믿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소원이 일치하여야 합니다. 기도해 주는 사람의 소원이 다르다면 내 소원을 떠 안겨 이루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두 사람이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병석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살 것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태산을 옮기는 믿음을 사용하여 기도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죽으리라고 믿는 다면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합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합심기도하고 “아맨” 한 후에 당사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 잘못 기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믿고 기도하고 한 사람을 바라고(hoping)있기 때문에 함십 기도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분명해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현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어성경은 "Now faith is~"입니다. 지금 구원 받아야지 “구원 받을 것을 믿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거듭거듭 자주자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장 8절로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에 간청이라는 것은 인내를 가지고 강하게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구하다가 어렵다고 해서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로 8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는 원한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서린 그런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속의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여의도 순복음교회 복음지를 거실등에 붙여 놓고 불안해 질 때 마다 붙잡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믿음에 하나님의 믿음이 와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예화로 조용기목사님이 신학교 다닐 때 일어난 일입니다. 삼각산 기도회 도중 비기 와 계곡물이 넘쳐 길이 막혔습니다. 모두가 기도 하는 중 두 처녀가 베드로가 물을 걸은 것을 상기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여 믿습니다” 건너다가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그 처녀들은 한강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처녀들은 하나님을 진짜 믿었는데 왜 믿음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기적이 일어날 줄 알고 스스로 행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명했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 부어진 것이고 이 때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24절에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는 것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목표를 분명한 기도를 통해서 받은 줄 믿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는 기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모범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보면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20절로 21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말씀을 능히 이루 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즉시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응답의 시기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고 기도를 그만두면 안 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낙심케 만듭니다.

    예수님은 본문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라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불화하거나 원한을 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기도해 보았자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또는 기도할 의욕이 생기지 않거든 우리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용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담력을 얻게 됩니다. 의인의 간구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해 줌으로써 기도에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내 생의 가장 큰 영향을 준 말씀입니다. 나를 일으킨 말씀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일년에 2-3번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4차원 영성의 핵심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실 가장 기본적인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오늘 본문을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태산 같은 문제가 가로 막혀 주저앉아 있을 때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라는 명령, 그 생명의 말씀이 들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문제가 생긴 그 시간에 일을 행하시고 역사하시며, 우리의 짐을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고 저는 그것을 믿으며 체험을 했습니다. IMF 때 회사 부도로 세상에서 쫓길 때 본문의 이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간증하며 선포했습니다. 이제 태산이 옮기여 지고 모든 신용이 회복되어 1등급이 되고 이제는 홀로 어느 정도 경제활동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을 의지하여 굳게 선 것입니다. 이 말씀에 확고히 서서 여러분이 믿는 바를 말로 하십시오. 믿음을 지금 밖으로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태산 같은 문제가 앞을 가로 막고 있더라도 바다로 던지우고 길을 여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열매를 맺고 여러분 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정주영회장님이 계실 때 현대자동차에서 포니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멋지고 좋은 자동차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자동차를 주면 타고 다닐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 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최첨단기능을 가진 멋진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T.V나 다른 전자제품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발전했고 품질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름대로 잘 믿었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때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도 점점 더 발전해야 되고 성장하고 차원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근심걱정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어떤 문제로 인해서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빌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으며 벧전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과 염려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1-33/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불신자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됩니다. 의식주문제로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염려하지 않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놀면서 할렐루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믿음이고 주님의 참된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언제 성경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되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은 후 하루가 지나고 나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 전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저주의)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셔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서 잠을 주무시고 그리고 다음날 다시 성전으로 올라가시는 바로 그 날 어제 그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보다 눈살미가 있었는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믿으라든지 아니면 이렇게 믿어야 돼 라는 부가 설명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11:23-2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에 대한 부가설명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씩이나 믿음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하셨고, 23-24절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구체적인 방법과 부연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떻게 믿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산을 향하여 말했으면 말한 그대로 될 줄 믿는 것입니다.

막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들으면 성경을 통해서 보여 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존재나 일하심에 관하여 믿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그분의 이름이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존재나 사역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와 연관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적용하고 응용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나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시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다면 이제는 그 믿음을 나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내가 지금 당면한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그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23절을 통해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막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라고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산이란 상징적인 의미에서 문제나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나 장애물들이 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라는 산이 생겼을 때 그 산을 향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는 것은 곧 사라지라는 뜻입니다. 어떤 물체든지 바다에 떨어지면 가라앉아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산더러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했으면 그 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기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실제로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방법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나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이 산더러(자신의 문제를 향하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문제를 향하여 사라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말의 힘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말의 권세란 곧 예수님이 주신 천국열쇠이며, 이 땅에서 말하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말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과거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또는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침묵의 미덕이라고 할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함부로 말하지 말고 말한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을 해야 합니다. 문제를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데도 떠나라고 말하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스럽고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어집니다. 할렐루야!

2.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했으면 반드시 그대로 될 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을 믿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응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자신의 기도에 적용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을 자신의 기도에 적용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목과 이런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라고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문제든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해도 되고 저것은 기도하면 안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닮은 아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능하고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같은 자녀가 아니라 모든 일을 척척해 내고, 어떤 문제든지 기도로 해결해 내는 그런 유능하고 탁월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까 서론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는 근심과 염려를 하지 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면 근심 걱정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불신자처럼 근심 걱정하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이제부터 말씀 드리려는 것은 당면한 문제라는 큰 산을 향하여 말을 했고,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구했는데도 즉시 산이 제거되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만약 기도했지만 즉시 응답되지 않고 응답이 늦어지거나 내가 볼 때(보이는 형상이)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그것은(허상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되고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100%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허상이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은 받아들이지 말고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자주 보이는 현상을 믿는지 모릅니다. 보여지는 현상이나 과정은 허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귀가 주는 어떤 의심과 의심을 주려는 현상이나 느낌이나 반응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의심입니다.

내가 말하는 즉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하고 기도하는데도 즉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들어오고, 또한 기도하고 말한 것이 즉시 이루어지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의심이 밀려올 때 그것을 방어하고 잘 막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23-24절을 읽겠습니다. 막11:23-2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23절에서도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고, 24절에도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여기에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고 믿음을 말하고 기도하면 다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믿음인데 왜 그 믿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일하고,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역시 의심입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마귀의 방해작전 때문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전파를 보내면 상대방에서 전파를 교란시키려고 방해전파를 맞받아 쏩니다. 그래서 내가 보내는 전파가 목적대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말이나 기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도 결국에는 방해작전인 의심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이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의 말과 기도를 무너뜨리는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말씀드립니다.

1) 의심을 이길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제가 치질을 고친 것을 이야기 할 때에도 보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처음 믿음을 가지고 말할 때의 그 믿음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하며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명령을 했을 때에도 즉시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명령하는 즉시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렇게 신기하고 놀라면서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셨고,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말하고 기도하는 것도 시간이 걸립니다. 나의 말과 기도가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하는 데로 즉시 이루어진다면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많은 시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이미 받은 것처럼 믿고 기뻐하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그대로 되어집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만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입니다. 요1:40-42/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말씀입니다. 마16:15-18/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두 번의 말씀들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그렇게 말한 즉시 이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은 성경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고 난 뒤에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시몬을 게바 즉 베드로라고 부르신 말씀도 그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보건 데 우리가 산을 향하여 말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즉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이 변화되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문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베드로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과 실수들을 보면서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반석같은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 너무나 늦게 이루어졌는데 그렇게 늦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가 믿음이 없었다거나 그의 믿음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믿기 힘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꿋꿋이 견딘 믿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 더 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6:13-15/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하는 첫 날 내려왔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가 방해를 했기 때문에 21일만에 응답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물이 끊는 온도는 100°가 되어야 합니다. 온도가 99도까지 올라가도 물이 끊지 않습니다. 100°가 되어야 물이 끊게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임계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2)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데 왜 자꾸 의심이 생길까요?  이유는 의심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근심 걱정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쫓아내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근심 걱정 염려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신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을 주는 악한 영의 모든 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해야 합니다. 마12장에 보시면 사람에게서 쫓겨난 귀신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악한 영이 쫓겨나면서 그 마음이 수리되고 청소되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쫓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절반의 청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을 완전히 쫓아낸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서 떠나라고 명령해서 밖으로 내 보내는 일도 해야 하지만 다시 의심의 영이 찾아왔을 때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과 믿음의 말씀이 내 마음에 가득차 있어서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비고 청소된 상태로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악한 영이 떠난 그 자리에 말씀의 물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돌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운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입을 열면 말씀이 철철 흘러 넘칠 때까지 말씀을 채우면 내가 쫓아낸 의심은 더 이상 들어올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렇게 믿고 말하고 기도했으면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의심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이 다시 들어와서 발붙일 곳이 없도록 내 마음속을 믿음에 관한 말씀들로 가득 채우는 온전한 믿음, 승리하는 믿음, 원하는 것을 받는 성공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10가지)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받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 주셨듯이 말씀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단련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그 성격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 불순물이 도가니에서 완전히 정제된 은은 자신의 얼굴을 볼 때 환히 보이는 거울과 같은 정도의 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 앞에 서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다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짓말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 말씀이 순수하다는 것은 말씀의 정화 작용에 대한 언급입니다. 순수한 말씀은 생각이나 상상조차도 악한 것으로 기울게 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양심, 순수한 신앙은 순수한 말씀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순수한 말씀을 제쳐두고 마음이 순수해야 성경을 읽는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잠30:5). 순수한 말씀이란 왜곡, 거짓, 편견, 부풀림이 전혀 없고, 불순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신뢰할 수 있습니다. 조금의 오염 물질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순수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나도 변질되지 않으며, 부패되지 않으며, 해롭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때 주님은 방패가 되십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순수한 말씀은 성도를 자라나게 하는 양식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성장이 없고, 열매가 없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어쩌고 설교가 어쩌고, 오늘날 기독교가 어쩌고 별별 진단이 많지만 핵심은 그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말씀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의 말씀은 단련된 말씀입니다.

단련되었다는 것은 마치 금이나 은이나 놋 등이 불속에서 단련되어 불순물이 다 제거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광택이 나고 단단해지고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꼭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금속보다 강하여 불속이나 물속에나 그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단련됩니다. 여러분은 10년 전에 들었던 설교나 지금 들었던 설교의 내용이 같아도 동일하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몇 십년 전에 읽었던 성경을 읽으면 또 다르게 느껴지고,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으며 단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삼하22:31). 여러분이 한 때는 의심했고, 싫어했고, 무관심했고, 멸시했던 말씀들이 새롭게 능력있고 은혜롭게 내게 다가오는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은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시험과 공격과 근거없는 비방과 의심과 욕을 먹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더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시18:30). 단련된 말씀이 여러분을 단련합니다. 말씀이 단련된 것처럼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단련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한 사람을 그들보다 앞서 보내셨으니 곧 요셉이라. 그가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족쇄에 상하고 그는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분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그러하였도다/. [주]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진리임이 드러나듯이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가 읽고 듣고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신뢰할 만한 말씀이란 사실이 입증됩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간증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단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시66: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어떻게 단련합니까?  말씀을 보내셔서 단련하십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 사건에서 한 마디 말씀을 더욱 깊이 배우게 됩니다.

셋째, 주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영생은 모든 사람의 꿈입니다. 생명이 없이는 삶이 없습니다. 생명이 출발이고 삶이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통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는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며,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여러분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이 없이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합니다. 때로 영적인 것처럼 산다 해도 그것은 위조품이요, 흉내 내는 것이지 영적인 삶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divine nature), 신성한 권능이 없이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벧후1:3). 생명의 말씀을 받지 않고 영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제시해야 할 말씀입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하라](행5:20). [또한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제시할지니...] (빌2:16). 우리는 삶을 제시하기 전에 생명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땅에 속한 생명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나 행위로나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생명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생명-life)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I am crucified with Christ :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2:20).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살리십니다. [내가 고난 당할 때에 이것이 내 위로가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넷째, 주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믿음의 말씀이란 믿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생기며,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믿음은 성도들에게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크고 강하게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이 믿음의 말씀들을 얼마나 읽고 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들로 양육됩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딤전4:6). 여러분이 주님의 사역자가 되고, 무슨 영적인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필히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 주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의 확실함을 알게 하며 또 너에게 /사람을/ 보내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잠22:21). [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전12:10).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알아야 하며, 답변해 줄 수 있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을 넘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것들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성경을 읽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에 교회 오는 것이 전부인 사람도 있고, 그것마저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속기를 잘하며, 이리 저리 흔들리는 법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형제들을 보면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읽는 척을 하기에 부지런히 읽나 보다 싶으면 지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일주일을 채 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을 낳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약1:18). 이는 우리가 진리를 통해서만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태생의 근원이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섯째, 주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은혜의 말씀은 강건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의 은혜의 말씀을 맛보면 볼수록 속 사람은 강건해지고, 든든히 세움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여러분은 마음 속에 늘 말씀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성령 충만이란 말씀 충만이며, 말씀 충만이라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증거하실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눅4:22). 그들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나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지만 주님의 말씀이 매우 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사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니라.](행14:3).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지만 특히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은혜로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얻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보고 들으십시오. 은혜가 풍성한 삶은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서 나옵니다. 주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풍성한 은혜의 주님을 맛보려면 말씀의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배가 끝난 후에 얼굴 표정이 다르고, 말투가 다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삽니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하여 있나니 이것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넘쳐 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4:15), [그런즉 너희가 모든 일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열심과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할지니라.](고후8:7). 고린도 교회가 은혜가 풍성한 일을 했던 것은 이들이 은혜를 풍성히 받았음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여러분들의 감사, 찬양, 헌금, 물질의 나눔, 구제 등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은혜의 말씀을 받아 누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곱째, 주의 말씀은 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은혜의 말씀이 우유라면 의의 말씀은 고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히5:13). 성경은 때로 어렵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며,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부분은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씁니다. 오늘날 교회는 은혜의 말씀을 잘 증거하는 목사님들이 많고, 은혜를 받았다는 분들의 간증도 많습니다. 감동이 되고, 전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말씀들을 들으면 기분도 좋습니다. 덕분에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귀엽지만 성장이 멈추었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고전3:2). 이들은 의의 말씀을 접하지 않았거나 거부했기 때문에 늘 젖으로만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라나야 하며, 장성해야 합니다. 의의 말씀은 지각을 사용해서 선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의의 말씀을 바라고 사모해야 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의 말씀을 바라며 쇠약하오니](시119:123). 젖을 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젖을 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통스럽고, 울고, 불어도 과감히 젖을 떼고 입에다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넣어주고 씹게 해야 합니다. 못 먹으면 굶겨서라도 먹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젖을 떼어야 할 나이에도 젖을 물고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이런 성장통을 겪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는 저런 설교가 싫어!! ....앙앙 웁니다. 얼굴은 굳어지고, 노려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여덟째, 주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음이더라.](눅4:32). [이에 그들이 다 심히 놀라며 서로 말하되, 이 어떠한 말씀인가! 권위와 권능으로 부정한 영들에게 명령한즉 그들이 나가는도다, 하더라.](눅4:36). 주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말과 차이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그냥 말입니다. 산을 향해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책상을 향해 “움직여라!” 백번을 말해도 움직이게 하는 권능(힘-power)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되어지는 권능이 있습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4:12).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능의 말씀을 통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입의 말로는 아무 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입으로는 무엇을 못하느냐? 는 조롱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갈 때 우리 입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입에서 생명의 말씀이 나가면 생명을 주고, 진리의 말씀이 나가면 해답이 없는 인생들에게 답변을 주며, 은혜의 말씀이 나가면 강건하게 하고, 믿음의 말씀이 나가면 믿음을 주며, 의의 말씀이 나가면 정확한 판단력을 줍니다.

권능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 성령의 능력, 믿음의 능력, 학습 능력, 돈을 벌 능력조차도 다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사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재물과 존귀가 다 주께로부터 나오며 또 주는 모든 것을 다스리사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주님을 통해 권능을 얻고자 한다면 권능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은 곧 능력으로 내게 띠를 두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는 이시니](시18:32). 다윗이 능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이나 지혜나 가문이나 인물이나 백성들의 인기나 지지 기반이 튼튼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늘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서 말씀의 권능을 힘입어 살았습니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默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아홉째, 주의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바른 법도와 참된 율법과 선한 법규와 명령을 그들에게 주시고](느9:13).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선한 말씀, 선한 법규,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아야 합니다.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 우리 말에는 “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맛보고 알아야 제대로 사람이 됩니다. 주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고, 생수보다 시원하고, 버터보다 달콤한 경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우리의 입이 어디에 길들여지고, 무엇을 맛보아 아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을 때 여러분은 그 맛을 알게 됩니다.

열 번째, 주의 말씀은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단순한 자는 민감하게 되며, 우둔한 자는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고전12:8). 어떤 많은 책을 읽어도 사람은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 누구나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요즘 어려서부터 조기 교육을 시키고, 아이들 교육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주는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또 어린 아이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주기 때문입니다.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가는 어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를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성경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습니다.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내게 있으며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잘 깨닫나이다.] (시119:99~100).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나의 모든 스승”-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인생에서든 누구를 막론하고-보다 더 많은 명철이 있게 되며, 그것들을 지킬 때 노인들보다 잘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지혜롭게 되는 것이나 자녀를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같습니다. [네 귀를 기울여 지혜로운 자의 말씀들을 들으며 네 마음을 내 지식에 쏟을지어다.](잠22:17)란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부지런히 설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주일 예배 등 모임에는 가능한 한 다 참석하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은 집중력과 인내력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을 쏟아야 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효능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 참으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이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이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報償)이 있나이다.] (시19:7~11). 지혜와 지식, 명철의 말씀들은 쉽게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들은 그동안 자라오면서 배우고, 익혀온 가치관, 생각, 사상 등을 모두 깨뜨리고 버리게 하며,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채찍을 맞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내 가슴 속으로 강하게 파고드는 못과 같이 박힙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고 평생 동안 내 마음 속에 있게 됩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공부할 때 요한복음 8:32절과 로마서 1:17 두 구절이 얼마나 깊게 박혔는지 아직도 그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집회의 스승들이 굳게 박은 못들 같으니 이 말씀들은 한 목자께서 주신 것이니라.](전12:11)고 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지혜의 말씀들을 주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고치시고, 건지시고, 녹이시며,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말씀으로 비추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며,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말씀으로 위로를 주고 말씀으로 씻으시며, 먹이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시107:20). 주님의 말씀으로 추운 겨울에 얼어 있는 대지를 녹이시고 싹이 나게 하시며, 얼어붙은 강을 녹이사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시147:18~19). “말씀을 보내사”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사9:8). 이제 여러분이 받을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에 따라 주님은 그 말씀에 있는 대로 복을 주시기도 하고, 저주를 내리시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보내 주시는 말씀을 거부했을 때 포로가 되었고, 멸망했습니다.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말씀을 선포할 자신의 사자들을 보내십니다. 대언자, 목사, 교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성령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시고,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나옵니다. 우리는 역대기를 기술한 한 성경 역사가의 증언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 (대하36:15~16). 주님이 하신 일은 자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일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있고, 성경이 있으면 족할 것 같은데 주님은 목자와 교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누가 저를 욕하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딴죽을 걸고 불평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제 개인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말씀과 기도로 섬기고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있지 군림하고 섬김 받고 존경받기 위해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말씀을 받지 않는 일은 목사의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25:4). 이것이 패망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 주실 때 선생들을 보내 주십니다. 주님은 선생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 (사30:20~21).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목자들이 전념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딤전4:13). 성경을 읽고, 권면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제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도록 촉구하고 권면하는 일 역시 제가 할 일입니다. 저는 올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 읽기를 다시 한번 촉구하며 이 말씀들을 생명의 양식이요, 삶의 법전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달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성도님을 심방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할머니는 얼마나 가난하든지 방에 불도 넣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방에 벽지도 신문지,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리고 집을 나올려고 하면서 방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벽에 이상한 딱지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딱지가 아니고 수표였습니다.
보통 수표도 아니고, 0이 굉장이 많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액의 수표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이 수표를 왜 여기다 붙여 놓았습니까?”
“응, 내가 파출부하면서 한 할아버지를 돌봐 드렸는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맙다고 저걸 내게 줘서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기념으로 붙여 놓았지, 뭐”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게 수표라는 거에요. 돈이에요. 저 돈이면 큰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어요”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종이 한 장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님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그 수표로 좋은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여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머니가 거액의 수표를 벽에 붙여 놓고 판자촌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능력의 하나님을 제껴 놓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준 말씀입니다. 저도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지치고 낙심이 될 때 이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을 제 방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 주시는 이 귀한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 믿음의 능력(20-23)

20절을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아침에 성전 앞을 지나가다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전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 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전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4절에 보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수님이 무섭게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헤롯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크고 멋있고, 성대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크신 능력이 나타나리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 성전 짓는데 8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만 명의 인부들과 천 대의 마차, 천 명의 사제들이 동원 되었습니다. 공사 완공 후,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한 성전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앞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제사의식이 아무리 성대해도 그들 내면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셔서 뿌리채 마르게 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나 형식으로 우리를 치장한다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없으면 메마른 무화과 나무처럼 심령이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성전 건물을 믿지 말고, 거대한 조직이나, 돈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경력, 타이들 의존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권세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죄 사함의 권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우리 가정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능력,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1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1-6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

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우리 손에 당장 돈이 없고 나를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비빌 언덕이 없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고, 나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서 남은 제자들에게 남겨주실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리에 관심이 많았고, 예수님에게 뭔가 인간적인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자리에서, 권력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보장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주실 수도 있으신데 일부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면 그런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근원적인 것, 모든 축복과 능력의 쏘스가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붙들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하나님만을 믿게 되었을 때 후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성전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3천명, 5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회 건물도 없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나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외적 조건이 다 열악할지라도 능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저는 요즘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 신인식(57세) 이사장의 간증을 보고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분은 경상도 의령,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4살 때 술래잡기를 하다 이마를 뭔가에 부딪혀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아파서 병상에 누워 계시고, 자신은 실명해서 앞을 못 보니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너무 많이 울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물도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결핵 말기에 신경성 폐렴까지 걸려서 치료를 위해 약을 4년 동안 14만알, 주사를 매일 한 대씩 1400대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우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 분은 하나님을 믿고 운명에 도전했습니다. 초등학교때 부터 껌팔이, 볼펜팔이,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드럼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귀로 듣는 잡지인 <사랑의 메아리>를 창간하였습니다. 1994년에는 <종달새 전화도서관>을 개원하여서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만 하면 매일 신문기사를 읽어주고, 주간지, 월간지 등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히말라야산에도 등정하도록 후원해 주고, 해병대 병영체험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서울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faith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피아노, 드럼, 트럼펫 연주가 수준급이고, 노래는 성악가도 놀랠 정도의 실력입니다. 전 세계 20여개국에 다니며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가 최근에 쓴 책 『꿈꾸는 자의 무한도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거닐고 있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일곱 블록을 가득 채우는 안개라도 담으면 물 한 컵 분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망은 가장 게으른 선택입니다. 불행에 절망하지 말고 희망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아무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Have faith in God”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의 최고 자산이요,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일반적으로 산은 거대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 거대하고 견고한 산을 향해서도 외칠 수 있습니다. “산이여,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이렇게 말하고,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아주 복음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집어 던지시면 산 아니라 한 나라도 바다에 집어 던져 버리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직후 바로군대가 철병거 6백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탱크 600대를 몰고 뒤쫓아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애굽 군대를 다 물에 던져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은 세계 최강의 군대도 다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바다에 빠뜨리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에 믿음이 없습니다. 거대한 산 아니라, 작은 언덕만 만나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산도, 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고후 4:7).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산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울 수 있고, 뽕나무도 뽑아서 바다에 심으실 수가 있습니다(눅17:6).

저희들이 6년 전에 이 곳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을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돈이 충분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 집 최사장이 여러모로 방해공작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 마가복음 11:22절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붙들고 밀어 붙였습니다. 그때 단 한 건의 민원도 없이, 단 한 푼도 빚을 지지 않고 기적같이 건축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신인식 목사님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해 봤자 안 될 일 뭐 하러 힘을 쓰냐 라고 말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습니까. 단번에 될 수 없겠지만 끝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습니까?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 분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각장애인은 일반고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혈혈단신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어 물어서 정부청사에 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장관을 만나서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 바로는 법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서 지금은 시각 장애인이 일반고도 가고, 판사도 임용되고, 대기업도 들어가고 각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있는 사람과 믿음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음없는 사람은 계란으로 바위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과감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깨진 계란 자국만 남기지만 나중에는 바위가 깨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차사순 할머니 이야기 아십니까? 전북 완주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손주 손녀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운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운전면허에 도전했습니다. 70이 다 된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959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시험보기 위해 지출한 인세만 50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않고 도전해서 960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도전정신에 감동받은 승용차 회사에서 무료로 차도 한 대 선물해 주고, 승용차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올해의 광고모델상’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운전면허증 못 따신 사모님들,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이번 여름수양회도 100명의 양들을 능히 초청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12명의 형제 노아, 12명의 자매 노아 제자양성역사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지난 주 파트모임 메시지에서 나베드로 목자님은 “우리 모두 거룩한 뻥쟁이가 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뻥쟁이. 참 좋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하는 말들이 뻥을 치는 것 같고, 얼도 당토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뻥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위대한 성경선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2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거장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하고 있는 캠퍼스들이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야고보서 1:6절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음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Ⅱ. 기도의 능력(24-25)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사단이 심는 의심을 극복하고 확신가운데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의심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마음에 서광이 비쳐 옵니다. 기도할 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위축된 마음이 풀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자신감과 열정이 생겨납니다. 또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제이 필립스(J. B. Philips)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이란 책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꾸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의 하나님이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면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라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길을 보여 주시고, 용기와 담대함과 지혜를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된 파이프 라인이 막히고 녹슬어서 하늘의 능력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지치고 낙심되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신기하게도 힘이 솟구치고 의욕과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기도하자 감옥 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유유히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순식간에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등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만날 때 힘이 빠지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기가 막힐 때 기도합니다.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3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예례미야 33:3절은 말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이번 여름수양회를 앞두고, 또한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실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기도 파이프라인을 막히게 하는 것이 불편한 인간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 서운한 사람이 있으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도 사하여 주시고 기도도 응답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능력의 쏘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거룩한 꿈을 꾸고, 꿈을 선포하고, 도전해서 꿈을 성취하는 거룩한 꿈쟁이, 뻥쟁이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마귀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다. 또 돈을 믿지 말고, 자기 재주를 믿지 말고, 수단 방법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란다.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자매를 보고 "하나님 공경하고 예수 믿으세요"하니까 "아니, 나는 안 믿어요" 한다. "뭘 믿으려고 안 믿어" 하니 "내가 나를 믿지요"한다. "아니! 여보 자매, 그거 무슨 소리요, 내가 나를 믿다니 자매가 무엇인데요?" 자매가 아무리 안다고 해도 눈앞에 눈썹이 몇 개인 줄도 모르면서, 또 아무리 잘났대도 콧구멍 두 개와 입 구멍만 막으면 팩팩하다 십 분 후에 눈알이 나와서 죽을 터인데 그것을 믿다니...... 그런 망령된 소리를 하지 말고 피조물 된 인간은 조물주(하나님)를 믿어야 된다고 전도하였다.

그 자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계와 이 강산이 요 모양이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다는 무신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아니 무신론자들과 사회주의자들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심을 증거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말과 붓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하면서도 실제 생활로는 무신론자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베다니에 가셨다가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시어 열매를 찾으셨으나 잡수실 만한 실과가 없으므로, 이제 후로는 네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영원히 없으리라 하시고 그곳을 떠나 그 이튿날 그곳을 다시 지나가실 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모두 말라진 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억하고 여쭈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임의로 말랐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시장하신데 잡수실 것이 없어서 감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40일 동안 금식하셔도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시는 시험을 이기셨으니 그것은 자기를 위한 감정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니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는 믿는다.

1. 어떠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나무 한 그루라도, 풀 한 포기라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너희들도 특별한 은총을 받고도 주님의 열매가 없으면 버림을 받게 하신다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의 주님, 두려우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죄많은 세계를 홍수로 멸망시키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 일본의 죄악을 원자탄으로 징계하시고, 한국의 죄악을 38선으로 가로막아 놓으신 것이다.

삼손의 죄악은 결국 삼손이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하셨고, 웃시야 왕의 교만한 죄악은 문둥병이 들어 죽게 하셨으며, 헤롯의 교만은 몸에 충이 먹어 죽게 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민족의 죄악을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2)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라.

무화과나무의 이적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여 얻은 능력이다. 너희들도 기도하여 구한 것은 이미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라.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증거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다(롬 1:20). 본능으로 알 수 있고 자연과 인생의 조직, 피조물을 보아 조물주를 아는 것이다.

둘째,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하였다(벧전 3:21). 양심이 선악을 분별하며 책망하고 심판한다.

셋째,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요 5:39).

넷째, 세계의 역사가 증명한다(단 4:17, 7:27).

다섯째,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모든 소원을 아뢰고, 거룩한 뜻을 분별하게 되고, 죄를 자복하게 되고, 능력을 구하여 얻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위험과 실패와 사망에서 구함을 받는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였더니 "여보, 예수쟁이들만 하나님을 공경하시오? 우리도 다 하나님을 공경한답니다. 하나님이 우순풍조(雨順風調)로 오곡백과를 주어서 다 잘 산답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노인장,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시오?" 하니 "나는 해 뜨는 데로 향하여 소변도 보지 않지요"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는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활태도

1. 철두철미한 회개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먼저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다윗을 보시라. 한때 인간성을 가지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무서운 죄를 짓고 타락했었으나 나단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용상에서 내려와 부스러진 심정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시는 눈물의 회개를 밤마다 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회개와 베드로의 회개! 하여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때 죽었다 살아나는 철저한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러하였고 존 번연과 루터가 그러하였다. 아직도 회개가 철저치 못한 연고이다.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2.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양심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나니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면서도 어두운 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 하였다. 사람들이 볼 적에는 점잖고 의롭고 깨끗하게 사는 것 같으나 혼자 있을 때는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까닭이다.

외식하는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지 않음으로 주님에게 얼마나 책망을 들었는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시라.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팔리어 이국 타향에 가서 보디발 장관의 가정에 총무로 충성되게 봉사할 때에 장관의 부인이 날마다 유혹하여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주인께서 나를 신용하여 가정의 모든 것을 맡기셨으나 당신만은 맡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하고 거절할 때에 달려들어 옷을 붙잡고 더욱 유혹함으로 붙잡힌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 그랬더니 부인이 모함하여 잡히게 되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 정조를 지킨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결정이 아닌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일한다 하면서도 양심을 버리고 개인의 편리와 안일을 위하여 이리저리 좌우하는 생활로 신앙의 정조를 더럽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 끝이 없는 것이다.

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희에게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사람들이 그 양심을 버렸으니 그 믿음을 의논컨대 파선한 배와 같으니라(딤전 1:9).

3.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생활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을 알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다고 하였다(롬 1:21).

물고기가 물 안에 있으면서도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땅에 사는 인간들이 땅덩어리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지중하여 무감각하게 지내는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밥 한 그릇을 대할 때나 물 한 잔을 대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신기하고 오묘하게 지음을 받아 열 달 동안 그 속에 있다가 나올 때에 배꼽줄 하나 가지고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그것을 똑 잘라 버리니 정말 핏덩어리로 된 것을 젖으로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사랑을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이웃집에서 떡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도 감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세계에서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방초(錄陰芳草) 우거지고,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겨울에는 백설강산이 은세계를 이루어 보기 좋고, 놀기 좋고, 살기 좋게 축복하시었건만 우리는 얼마나 조물주께 감사를 하였는가? 캄캄한 밤중에 수렁에 고무신 한 짝을 빠뜨리고 헤맬 때에 누가 성냥 한 개비를 켜서 밝혀 주면 아이고 이 양반 고마워라 하면서도 낮에는 태양으로 변함없이 비추어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로서 밝게 해 주시는, 그 빛을 주시는 조물주 하나님께는 얼마나 감사하였는가? 배은망덕하는 인간들을 다 멸망시킬 것이로되 자비와 긍휼로 무조건 사랑하심을 깨닫는 자는 행복스러운 인간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독생자까지 주신 그 사랑, 어찌 다 말로 형언하리오.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만 가지 일이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므로 행복과 순경(順境)에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불행과 역경 중에서도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어떤 독실한 신자 노인이 있었다. 그가 쌀 한 가마니를 외상 맡아다가 마루에 두었더니 그날 밤에 도적이 와서 홀랑 가져다 버렸다.

그의 마누라는 도적을 욕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영감님은 "마누라, 너무 떠들지 마시오. 나는 쌀 한가마니 잃어버렸는데 다섯 가지 감사가 생기는구먼" 한다. "원, 저런 영감두,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요" 하니 "보라구, 우리는 쌀 한 말도 얻기 힘든 집에서 한 가마니나 외상으로 얻게 된 신용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또 감사할 것은 남은 도적질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오. 또한 그것 모두 다 우리가 잘못했지, 그것을 방안에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루에 두어 실패하였으나 결국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잃어버렸어도 영혼의 양식은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외상으로 얻어온 쌀이라도 남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것을 잃었으니 감사하지 않소?" 하며 찬송을 불렀다 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안할 것이 없고 감사 안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약하지만 벽에 붙어 있게 될 때는 강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지만 만세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신앙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과 나와 그리스도의 피로 반죽하여 콘크리트를 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쳐서 죽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게 하였고 다시 기도하여 비가 쏟아지게 한 것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을 믿어 유대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위기 일발에 구원하여 낸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욱 큰 것도 행하게 하리라(요 14:12).

5.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깨어 기도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생활을 하는 것이다.

효자 효녀는 무엇이든지 부모님께 문의하고 보고한다. 불효 자식은 무엇이든지 다 제 맘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 부모님이 무엇을 좀 알고 싶어서 이번 일이 어찌되었느냐, 아까 왔던 사람이 누구이냐 하고 물을 때 "아이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겠소. 어서 진지나 잡수시고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원, 노인네들은 별 간섭을 다 하시려고 드시네" 하면 부모님들은 그만 쑥 들어가 손을 비비면서 "이거 왜 여지껏 살아서 이 수모를 받고 있을꼬" 하면서 뒷방에서 한숨만 짓는다. 물론 늙은 부모님은 아무 것도 몰라도 자식들이 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시다. 무엇이든지 기도로 그에게 문의하고 보고하면 대소만사(大小萬事)를 최선으로 인도하여 주실 터인데, 불신앙의 무리들은 무엇이나 제 뜻대로 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며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교통의 기도 호흡이 두절되면 벌써 죽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 12:23).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말단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어 참된 회개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서 양심적으로 살며, 항상 기도와 감사와 희락과 화평으로 살며, 극히 강하고 담대하여 악마와 세상과 죄악과 싸워 날마다 백전 백승하는 개선장군이 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11월 13일(목) 누가복음 17-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불쌍히 여기옵소서(2433) 속죄하여 주옵소서

ἱλάσκομαι Storng number2433
1.

진정시키다

2.

속죄하다

Pronunciation [ hilaskŏmai ]
Etymology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수동태 명령 ἱλάσθητι, 2436의 동일어에서 유래
  • 1.
    진정시키다, 화해시키다, [수동] 진정하게 되다, 자비를 베풀다, 눅18:13.
  • 2.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께서] 속죄하다, εἰς τὸ ἱλάσκε- συαι τὰς ἁμαρτία ς τοῦ λαοῦ: 백성의 죄악을 속하시려고, 히2:17.

Reference

Grammar Explanation

중간태.

Related Words

  • 문법설명
    중간태.
    관련 성경
    불쌍히 여기다(눅18:13), 속량하다(히2:17).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When Simon Peter saw this, he fell at Jesus' knees and said,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누가복음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베드로의 경우
사업에 대박이 날 경우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왜 갑자기 죄인이라고 고백했을까? 

성경 시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성경 시대 어부들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의 배경 안, 이른 아침입니다
사람들이 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갈릴리 호숫가로 몰려들었죠
하지만 밤새 혹독한 추위에 고생했지만 한 마리 물고기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은 후 말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세마포 그물은 바로 씻어서 빨리 말리지 않으면 금방 썩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을 때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잡은 어획량은 2개의 만선입니다
시대의 사이즈를 기준으로 4분의 3톤에 해당하는 양이었습니다.
2주간의 어획량으로,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대박의 순간이었죠
예수님과 통하면 갈릴리 수산업 틀을 평정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겠죠
하지만 이때 베드로의 순정을 더욱 빛나게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베드로는 만선의 축복으로 인한 흥분과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 통하여 성취할 부와 명예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수치와 절망감을 생애 최고의 기쁨과 흥분으로 바꾸어 준 예수님께 집중했던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말씀에 순종해서 축복받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 같으면 이 순간에 잡은 물고기에 십일조를 바치고 "할렐루야! 아멘!"을 외칠 것 같은데요

혹시 다른 어부들이 잡을 물고기를 내가 다 잡아버린 탐심을 회개한 건가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드로의 엉뚱한 행동을 푸는 열쇠는 당시 어부들의 삶과 사고에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부들의 사고에서 바다는 바다를 주관하는 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각각의 문화는 고유한 바다의 신이 있죠

그리스 - 포세이돈
로마 - 
한국 - 용왕 신
성경 시대 -  얌

05:38바다의 신인 야미, 오늘날 바다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될 정도로 바다의 신 얌은 바다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죠

05:48많은 나라에서 어부들은 출항에 앞서 각자의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05:54바다의 신을 기쁘게 해야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혹여 바다의 신이 화가 나면 풍랑으로 배가 뒤집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05:59그래서 화가 난 바다의 신을 달래기 위해, 한국에서는 심청이, 성경에서는 윤아를 던진 겁니다

06:09갈릴리는 활동 무대인 갈릴리에서는 물 반, 고기 반으로 불릴 정도로 물고기가 잘 잡히기로 유명했습니다

06:24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밤에 맞도록 쓰고 있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 이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이건 어획량이 많은 갈릴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06:37좀 적게 잡힐 순 있어도,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건, 베드로의 수십 년 어업 생활에서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불가사의였죠

06:43이런 아침에 예수님이 소호수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옆에서 그물을 씹던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에게 일어난 믿기 어려운 경험으로 인해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었을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뭐지, 참 귀신이 곡할 로 계실 새

07:09이건 바로 예수님의 사전 정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07:15예수님은 그날 밤 갈릴리에 있는 수많은 고기 떼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얘들아, 너희들 오늘 밤은 베드로한테 협조하지 마." 간밤에 일어난 조화로 멘붕이 된 채

07:27그물을 쳐 보려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07:34베드로는 혹시나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내렸죠

07:41그런데 이때 간밤에 경험한 것보다 더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07:48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찬성을 하면서 베드로가 내린 세마포 그물 안으로 달려드는 게 아닙니까? 당시 어부들이 밤에 고기를 잡은 것은 해가 뜨고 나면 새 마포 그물이 물속에서 눈에 보였기 때문이죠

08:05물고기가 아무리 아이 귀가 나 따지만 장님 물고기가 아닌 이상, 아침 시간에는 그물 안으로 돌진하는 자살 행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08:16물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일론 그물이 개발된 1950년대까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큰 변화가 없었죠

08:22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순간 베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08:27그렇죠, 이런 일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창세기 1장 10절, 바다(יָם, 얌, sea) - 히브리어 원어 정리

창세기 1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마른땅인 뭍을 '땅'으로 부르시고 물을 יָם(얌, 바다, sea)로 부르셨습니다. 
흩어져 있던 물을 한 곳에 모아서 구별해 주신 바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원어인 יָם(얌, 바다, sea)에 대한 여러 의미들과 해석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 10절, 바다(יָם, 얌, sea) - 히브리어 원어 정리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창세기 1장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waters that were gathered together
he called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1장 10절

וַיִּקְרָ֨א אֱלֹהִ֤ים ׀ לַיַּבָּשָׁה֙ אֶ֔רֶץ וּלְמִקְוֵ֥ה הַמַּ֖יִם קָרָ֣א יַמִּ֑ים 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יָם(얌, 바다, sea)에 대한 정리와 여러 해석들

יָם(얌, 바다, sea)은 남성 명사로 '바다 sea'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0회 나온다. יָם(얌, 바다, sea)은 특정한 바다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1. יָם(얌, 바다, sea)의 의미 - 대해

"대해"(민 34:6), "뒤쪽 바다", 즉 서해(신 11:24), "블레셋 바다"(출 23:31), 그리고 스 3:7에서 "욥바 바다"로 불리어진 지중해.

2. יָם(얌, 바다, sea)의 의미 - 염해

"염해"(민 34:3), "동해"(겔 47:18), 그리고 "아라바 바다"(신 3:17)라고 지칭되는 사해.

3. יָם(얌, 바다, sea)의 의미 - 홍해

홍해, 얌수프, 직역하면 "갈대 바다"(출 10:19), "애굽 해"(사 11:15), 그리고 "홍해"(행 7:36).

4. יָם(얌, 바다, sea)의 의미 - 갈릴리

긴네렛(kinneret, 민 34:11)으로 알려진 갈릴리 바다. 긴네렛이란 말의 철자는 때로 약간씩 수정되기도 하였다. 즉 마카베오 일서 11:67에서는 "겐네사르(Gennesar)의 물"로 표기되며 신약성경 시대에는 게네사렛 호수(눅 5:1)나 갈릴리 바다(마 4:18) 혹은 디베랴 바다(요 21:1)로 알려졌다.

5. יָם(얌, 바다, sea)의 기타 의미들

또한 얌은 나일강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는데(나 3:8), 틀림없이 그 이유는 그곳이 유프라테스와 마찬가지로(렘 51:36, 참조: 사 21:1, 여기에서 이 단어는 페르시아만을 가리키는 것 같다) 광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상 7:23이하에 의하면, 솔로몬의 성전에는 "청동 바다"라고 불리는 거대한 놋대야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얌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상징도 순전히 억측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그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던 것 같다.

지중해의 위치 때문에 특히 히브리 사상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셈인들의 사상에서 "서쪽"이란 말이 사용되게 된 것 같다. 우가릿어에는 '바다' sea를 뜻하는 이와 같은 동족어가 있다. 이스라엘은 해상 무역에는 결코 주목하지 않았다. 사실상 솔로몬이 상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뵈니게 선원들을 고용하여 그곳에 배치시켰던 것 같다.

구약성경은 여호와를 바다의 창조주(창 1:10)이시며, 또한 바다의 물에 한계를 부여하신 분(시 104:6-9, 잠 8:29)으로 언급한다.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지배하신 하나님의 강한 힘은 그 당시에(출 15장) 그리고 후대에(시 78:13, 시 136:13) 찬양의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전능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기대된 승리에 대한 상징이 되므로, 확신을 가지고 기도와 약속이 행해졌다(사 51:10, 참조: 시 107:23-32). 이방 민족들은 포효하는 바다에 비유되나(사 17:12) 그들은 여호와의 질책을 받고 도망칠 것이다(사 17:13).

다니엘서에서 사탄의 세계의 힘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모양을 취하지만(단 7:3), 창조주의 주권적 힘에 의거하여, 지극히 높으신 자가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때에 이것들을 전복하신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바다는 일반적으로 위험으로 가득찬 공포의 장소로 인식되었음에 틀림없다. 욘 2:2 이하는 스올과 요나가 구출받은 바다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나타내 주고 있다. 바다에 대한 이런 공포 때문에 요한의 종말론적 환상,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가 생겨난 것 같다(계 21:1).

베드로는 두 가지 기적을 체험합니다.
첫번째 기적은 갈릴리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을 때 단 한마리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
두번째 기적은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어부로서 단 한번의 그물질로 2주동안 잡을 양의 물고기를 한번에 잡을 수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베드로 앞에 계신 예수님은 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따나소서 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식적인 세상에서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과정

세리의 경우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세리는 공통점은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성찰(省察. reflection)과 추론(推論. speculation)

 
성찰(省察) 살필 성, 살필 찰 
  • 1.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反省)하여 살핌.
  • 2. 저지른 죄(罪)를 자세(仔細)히 생각하여 냄.
 省察 /  introspection, self-examination, soul-searching, introspect, reflect (on)

추론(推論)  밀 추, 논할 론(논)

  • 1.  이치(理致)를 좇아 어떤 일을 미루어 생각하고 논급함.

  • 2. 추리(推理)

推論 / apriorism,  Noun [U] [철학] 선천설, [논리] 연역[선험]적 추론

          jillation,   [논리] 추리, 추론(推論), 추정(推定), 추측; 결론  
  
         dianoia, Noun 논리학 추론(推論)(의 결과). (전제(前提)에서 이끌어지는) 결론(cf. NON SEQUITUR). (→SUE, SEQUEL)



  • 사람의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reflection)
    다른 하나는 추론(speculation)
    그런데 묵상을 중심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은 성찰에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성찰의 차원에서 이해를 합니다. 
    즉, 자세한 관찰과 올바른 해석과 바른 적용이라는 귀납적 접근이기에 깔끔하게 성찰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의 단점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깨달음을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좁다는 것입니다. 
    나와 내 주변 몇 마일 내에서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식의 접근은 여성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찰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영적 신사임당을 양성하기에 안성맞춤이 됩니다.

    추론은 어려가지 진리가 연결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부분도 논리상의 추론에 의해서 확장되고 강화가 되어 집니다. 
    상상이 들어가게 되고. 흥분됨이 있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추론을 통해서 보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추론은 남자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추론적 접근을 하면 남성들이 열광하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말씀을 붙들고 세상과 한 판 붙는 마음을 가지고 결전의 자리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이것이 추론에 의해서 나오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영적 무장은 생각의 무장인 것입니다. 
    깊이 있는 성찰과 진리의 연결을 통한 추론이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강력한 군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영적 무장은 여섯 가지가 나옵니다. 
    허리와 가슴, 머리와 발, 왼손과 오른손" 즉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과 구원의 투구와 복음의 신과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을 가지고 무장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무장은 단 두 가지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과 구원의 소망의 투구입니다. 
    즉,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고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가슴은 감정을 말하고, 머리는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굳건한 감정의 용사가 되고, 예리한 생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약해짐으로 인하여.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멘탈의 붕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귀한 존재로 인식되는 사람은 사람의 비난과 구설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열등감은 사랑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어떤 결핍에서도 쫓기지 않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되고, 세상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리의 영적 성찰(省察)

    바리새인의 전통 고찰(考察) 

    고찰(考察) : 생각할 고, 살필  
     1.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硏究)함.


    누가복음 18:9b-14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입니다. 
    인간 존재의 중심인 ‘마음(심장, heart)’을 기도의 자리로 보고 발전시켜온 기도인데, 좀 더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하나님 체험을 추구하는 이 ‘마음의 기도’는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예수기도(Jesus Prayer)’라는 이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장 라프랑스(Jean Lafrance)는 이 ‘마음의 기도’를 ‘우리의 영혼이라든가 감정은 물론 기도의 방법까지 뛰어넘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기도의 근원과 뿌리를 찾는 기도’(1)라고 했는데, 이 기도의 성서적 기원은 예수님께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신 마 6:6절 말씀입니다.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은 ‘기도의 체험’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지나갈 결심을 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어디로 가야하고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 
    뒤로도 위로도 아니고 깊이 더욱 깊이 들어가서 길을 막는 저항과 감추려는 거짓을 뚫어버리고 가장 깊은 핵심까지 들어가야 한다.(2)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가장 깊은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까지 도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더욱 깊이 뚫어 내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3:16절에서 이 ‘마음’을 ‘속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고 당부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엡 3:1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마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마음을 깊이 더 깊이 들여다봤던 것일까요?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으로서 육(肉), 혼(魂), 영(靈)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인간의 모든 정신적 기관이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면 우리 마음은 천국이 되지만, 우리 마음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방치해버리면 악마의 유혹이 판치는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영성가인 테오판(Theophane the Recluse)은 마음에 특히 영(靈)이 연결되어 있고, 바로 이 마음에 자의식, 양심 및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깃들여있기 때문에 이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하는 것’이 그 어떤 기도보다도 우선되고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각각 다른 기도의 태도를 보게 되는데, 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를 하고 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극명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눅 18:9, 10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
    는 이 비유를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오늘의 비유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율법 안에서 살아가는 경건의 본보기였다면, 
    세리는 율법 밖에서 살아가는 죄인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고(눅 18:10), 똑같이 성전에서 기도하고(눅 18:11-13), 똑같이 성전에서 내려갑니다(눅 18:14).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는 서로 같았는데, 기도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길었고, 기도의 주어는 계속 ‘나’였습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 내용은 짧았고,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눅 18:11-13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그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리와 같은 시간에 성전에 올라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떤 우월감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세리와 자신을 비교해 보니까 자기가 기특하게 의로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자랑으로 채워지는데, 우선은 자기가 범하지 않은 것들, 즉 토색, 불의 간음을 열거하고, 다음은 자기가 잘한 것들, 즉 금식과 십일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의로움에 취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그 마음을 교만이 이끄는 대로 방치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손할 것’을 교훈하시려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는 기도의 자리에 섰지만, 그러나 시선은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을 경멸스럽게 응시하며 상대적인 의로움에 취해 있었습니다.

    교만의 출발점이 자신에 대한 허영이라면, 교만의 중간지점은 자기 업적을 과시하는 것이고, 교만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무서운 함정입니다. 이 교만이 무서운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나를 더 숭배하도록 만들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감사의 내용이 자기 찬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사도 야고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약 4:6). 

    교회의 원로에게 말씀을 듣던 어느 교만한 형제가 “아버지여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지혜로운 원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교만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네가 교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냐?”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교만이라는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속이 썩은 석류와도 같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3)

    교만한 사람은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의로우며,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이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그들과 다른 한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주님은 이 세리의 기도에서 그의 겸손함을 발굴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던 바리새인이 아닌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눅 18:14

    사실 이 사람은 그 삶의 내용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권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 그 차액을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로마 정권은 계약 기간이 될 때마다 입찰을 붙여서 가장 많은 액수를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가 개입되었을지는 뻔합니다. 세리를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성도 커서, 세리와 죄인이 동의어로 사용될 지경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었고, 특히 부활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보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들로 인해 유대인들은 신앙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는 정말 그들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비난하고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의 차이를 봐야 합니다. 세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자기 존재의 중심인 ‘마음(심장, heart)’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그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밖을 향해 자랑을 늘어놓는 기도라면, 그의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기도의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자기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 삶이 타인보다 의로워 회개할 것이 없었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지 못하고, 그 삶이 타인보다 악해서 회개할 것이 많았던 세리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기도의 표본으로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지난 2천 년 간의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세리의 기도를 자신들이 해야 할 기도의 표준으로 삼고, 자신의 심장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내면의 거짓들과 아프게 대면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그 한 마디 언어로만 기도해 왔습니다.

    살전 5:17절에 보면 사도 바울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던 이 세리의 기도를 ‘마땅히 쉬지 말고 해야 할 기도’로서 우리에게 전승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그래서 우리교회도 세리의 기도로부터 시작되고,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전승된 기도의 모범을 따라 예배 때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 찬양대는 ‘키리에 엘레이손’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핵심적으로 전하려고 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솔라 피데(Sola Fide)’입니다. 솔라 피데는 ‘오직 믿음’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루터가 보았을 때, 인간은 아무리 선한행위로 무장해도 온전하게 의로워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지만 밤이면 피어나는 악한 욕망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한 일도 하지만 악한 죄도 짓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고, 루터 역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주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구석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보다 못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바리새인도 있고, 세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의롭게 살기도 하지만, 세리처럼 악하고 이기적이게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기도도 하지만, 가끔씩은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이 저물어 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겸손은 하나님을 얻고 교만은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의미 깊은 고백을 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딤후 4:6-8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인생의 겨울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인생의 겨울 앞에서 바울의 시선은 의로우신 재판장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바울에게 중요한 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사실과,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사실과, 믿음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와의 비교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 재판 받을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살기도 하고 세리처럼 살기도 하고,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기도 하고 세리처럼 기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시선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견고하게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새 가을이 익어, 겨울로 치달아 갑니다. 지난 주 목요일(23일)은 상강(霜降)이었고 기온도 뚝 떨어졌습니다. 밤에는 기온이 낮아져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되는 계절, 겨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조차 다 무의미해 버린 시간이 도래하는데, 그래서 ‘죽음 앞에 선 자로서’ 바울이 절감하는 건 오로지 하나님의 뜻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가 체포되어서 처음 재판정에 섰을 때, 한 사람도 자기를 위해 변론하지 않고 모조리 도망쳤다고 말합니다(딤후 4:16). 그럼에도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 우월감을 비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자기의 힘 되심(딤후 4:17a)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심(딤후 4:18)을 알고 있었고,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잘 스며들어 있는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욜 2:23, 24

    요엘 선지자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기쁨을 만들어내고, 내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악한 죄를 짓고, 그로 인해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회개한 자녀들에게 계절을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되고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세리가 자신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진 심정이 되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여미고, 나의 죄인 됨을 통절하게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존재 전체가 다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시선을 타인에게 둔 채 자기 내면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자기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가?

    미주

    (1) 장 라프랑스/이순희 역, 「마음의 기도」(성바오로 출판사), 5쪽.
    (2) 안토니 블룸/김승혜 역, 「기도의 체험」(가톨릭출판사), 56쪽.
    (3) 요한 클리마쿠스/최대형 역,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은성) 221쪽.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1-11)

    언젠가 소개해드렸는데 서강대 교수를 역임했던 한동일 신부님이 ‘라틴어 수업’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펴냈습니다. 
    서강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쓰셨는데 주로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겪고 느꼈던 일들을 재밌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 아주 특이한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로마인의 욕설.’

    아마도 죄가 세상에 들어 온 후 처음 인간이 만든 것이 있다면 바로 욕설인 것 같습니다. 
    어느 문화에도 욕이 없는 문화는 없어 보입니다.

    한 교수님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 무척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바티칸 변호사가 되었는데 바티칸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3년간을 라틴어로 공부를 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정신 없이 공부하는 중 종종 어느 공원을 방문하곤 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정원을 들어가는 문에는 한 걸인이 항상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늘 술취해 있었는데 신부님이 지나가면 늘 물었다고 합니다.

    “너 일본 사람이니?”

    아니라고 해도 볼 때마다 똑 같이 묻곤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다행히 갈등하다가 그 날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도 공부하다가 쉬려고 정원을 찾아 갔습니다. 당연히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너 일본 사람이니?”

    순간 입에서 뭔가 튀어 나왔습니다.

    “Stultus es!” (멍청한 놈!) 싼뚜 에스 / 스툴투스 에스

    라틴어 욕입니다. Stultus 에서 영어 stupid이 유래됩니다. 
    앞으로 stupid이란 말은 쓰지 마시고 정 쓰시고 싶으면 ‘stultus’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다음 글이 더 재밌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욕이란 걸 하지 않았지만, 로마생활은 저에게 욕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로마는 혼잣말로 욕이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곳이었어요. 
    욕에 이런 순기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거룩한 설교 시간에 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시나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다 보니 욕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1, 2절 말씀을 보면,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금방 이해가 되실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말고 두 그룹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여기 저기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가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호숫가에 서 있으셨습니다. 자 얼마나 장관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왔고 예수님은 호숫가에 간신히 서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거룩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한편 2절 말씀입니다.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다른 그룹은 어부들입니다. 이들은 처음 무리들과는 꽤 대조적입니다. 아마 어부들도 소문으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척에 와 있는 소식을 접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이 날도 생업을 위해 호숫가에 나왔습니다.

    한 그룹은 말씀을 듣기 위해 나왔고, 한 그룹은 생업을 위해 나왔습니다. 생업을 위해 호숫가에 나온 어부들은 잠시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겠습니까?

    고기를 많이 잡은 후 또 잡기 위해서 신나게 씻고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빈 손으로 집에 들어 가자니 발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물을 씻으면서 오기만 남아서 고기를 몇 마리라도 잡고야 말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옴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가 몰려 옵니다. 한가한 사람들입니다. 한 청년의 소문을 듣고 몰려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리를 보면서 별 생각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족도 없나?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자들인가 보지?’

    그런데 문제의 주인공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들 배에 슬쩍 올라 탑니다. 그리고는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합니다. 좀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기왕 쉬었다가 다시 나갈 생각이었으니…,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을 보면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인데 가장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니, 청년이 요청한대로 합니다.

    한참 말씀을 전하는데 귀에는 들어 오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생계 걱정이 머리에 가득차 있으니…. 그런데 생각 보다는 끝나질 않습니다. 슬슬 입에서 또 다른 말들이 튀어 나오려고 합니다. ‘stultus’ 같은…. 다행이 청년 선생은 말씀을 마쳤습니다.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마음을 먹고 있는데 젊은 선생이 말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여기서 시몬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청년 예수의 이 말을 듣고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동안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머리에 생계 걱정이 가득차서 이해가 안 되었을테지만, 이제 다시 고기 잡으려고 나가려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또 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아니 젊은 선생이 말씀은 권위가 있게 해도 고기 잡는 것을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에게 목수일을 배워서 가사일을 도왔다는 소문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모습에는 목수의 모습은 보여도 어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감히 평생 고기를 잡아 온 자기에서 목수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제가 세탁소에 심방가서 ‘빨래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두 가지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밤새껏 해도 안 되었는데 한 번 더 실패하면 어떠냐’, 또 하나는 ‘그래도 이처럼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신통한 사람이니 한 번 순종하면 어떠냐’.

    그렇지 않습니까? 세탁소에 하루 종일 손님이 없었는데 제가 가서 뭐라고 말씀드리면 밑져야 본전으로 따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물론 지혜로우신 분이라면 안 따라 하셔야겠지요. 5절 말씀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는 청년 선생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저의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짓을 자기가 하고 있다고 불평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잖은 욕이라고나 할까요? 6절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놀랍니다. 놀라 예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왜 놀랐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놀란 것입니다. 이해되고 기대되어진 일이 일어나면 놀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놀란 게 아닙니다. 같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9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모두 놀랐습니다. 모두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유독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모두 똑 같은 것을 보았는데 왜 유독 베드로만 이런 고백을 할까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베드로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 죄에 대한 정의도 잘 몰랐던 때입니다. 단지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은 하였습니다. 불평어린 마음으로…. 그런데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감동합니다. 도저히 자기와는 같이 있을수 없는 분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떠나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떠나 달라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는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분과 함께 할수 없는 죄인임을….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놀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감동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감동 받음의 최고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동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모두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게 아닙니다. 감동받은 베드로에게만 합니다. 사람을 취하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왜 베드로에게만 이 말씀을 하시죠?

    감동받은 자들만 올인을 할수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입이 거칠고 순하고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첫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감동할줄 아느냐가 첫 조건이었습니다. 감동하는 자들만 올인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말씀은 감동받은 베드로에게만 했지만, 함께 놀랐던 다른 친구들도 따라 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면 놀라운 일들이 또 많이 생겨 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언젠가 놀라운 일을 보고 또 보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될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제자를 부르셨고 더불어 두 명의 제자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다고요? 베드로와 어부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따른 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로 몰려 오는데 이들은 자기 생업을 먼저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아울러 그 날도 고기가 안 잡혀서 낙심하고 한편으로는 불평 내지 몰려 오는 무리를 보고 욕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목수의 전직을 가졌던 선생의 말에 이해는 안 되지만 마지 못해 순종합니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동합니다.

     

    서강대 교수였던 장영희 교수가 어느 날 잡지에서 치매 예방법에 대한 글을 유심히 보았다고 합니다.

    ‘하루 두 시간 이상씩 책을 읽는다.’ ‘의도적으로 왼손과 왼발을 많이 쓴다.’ ‘많이 웃는다.’ ‘오랫 동안 혼자만 있는 시간을 피한다,’ ‘일회용 컵이나 접시를 쓰지 않는다’, ‘가능하면 자주 자연을 접한다,’ 등등 상식적인 예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감동을 많이 하라.’

    베드로는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러 매달려 순교했는데, 제 명을 다 살았어도 분명히 치매는 걸리지 않았을줄 압니다.

    예수님은 제 발로 자기를 따라 오는 자들 가운데서 당신의 수제자를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를 잘 못 하는 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게다가 쉽게 감동받는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툭하면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니이다’ 입버릇 처럼 고백하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감동받은 베드로는 쉽게 올인할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는 더 놀라운 일들을 약속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물고기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친구들이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밤새 일했으나 하나도 잡지 못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는데 큰 물고기 백쉰세 마리가 잡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후에 성령을 받고 베드로가 설교를 하니 단 번에 3000 명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취하는 놀라운 기적이 아니었겠습니까?

    물고기 백쉰세 마리도 많지만, 한번 설교에 3000명! 이 놀라운 기적을 주님께서 감동의 사람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말이 없고 젊잖은 자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입은 거칠지라도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쉽게 감동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올인하는 자들에게 보여집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직 임직식을 거행했습니다. 서약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온 정성과 지혜와 상상력과 사랑으로 섬기기를 힘쓰겠습니까?

    ‘상상력’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상상력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일에도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 것을 상상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가 작년 65주년을 맞이하여서 이웃 초청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습니다. 성대한 축제였습니다.

    정확히 16년전에 첫번째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었습니다. 평가회에서 귀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한 교우님께서는 도저히 이런 축제를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결정한 것이니 속으로는 의심이 많았어도 끝까지 도왔다고 합니다. 다 마치고 난 후 Brookline 학교 뿐 아니라 주위 분들로 부터 많은 좋은 평가를 받고는 당신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후에 집사회장이 되어서 축제를 책임지기도 하셨습니다. 끝내 축제에 올인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순종이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했기에 놀라게 됩니다. 놀란 사람들만이 감동하게 됩니다. 감동의 사람들만이 올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은 부르십니다.

    사실 주님도 평생 이해가 안 되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결국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올해도 때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1년 내내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주변에 항상 있을줄 압니다. 아니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는 항상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치매도 안 걸리구요…!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일로 감사하십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때마다 상상의 날개를 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해는 안 되어도…. 놀라운 일이 생기질 않을까요? 감동의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닛시’를 외치십시다.

    물론 이 고백도 잊지 마십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Mary Hartman시인의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라는 시입니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간혹 가슴앓이가 오고 가지만
    다른 얼굴을 한 축복일 뿐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여주리.

    Life’s Made up of Little Things

    by Mary R. Hartman

    Life’s made up of little things,
    no great sacrifice or duty,
    but smiles and many a cheerful word
    fill up our lives with beauty.

    The heartaches, as they come and go,
    are but blessings in disguises,
    for time will turn the pages o’er
    and show us great surprises.

     

    우리들의 삶은 이해할수 없는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 일은 더욱 그렇구요. 그러나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게 될줄 압니다.

     

    이해할수 없는 일로 인해 거친 말을 하는 대신 순종의 덕을 쌓아 가십시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동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세리의 회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9~14)

    바리새인이 세리와 비교하면서 했던 말은, 나는 십일조를 드렸고 금식을 했으며 저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곧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의로움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은밀한 곳에서 행하여지는 선행과 헌신과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랑하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세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아는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며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며,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분이심도 알고 있었다. 이로써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의 비결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서서 기도하고,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기 바빴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듣게끔 한 기도였다. 그러나 세리는 오직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솔직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가 바를 때 응답이 오는 것임을 잊지 말자.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응답을 받는 것이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구원을 받기 위한 첫 단계는 회개이다. 믿음의 결과가 회개이다. 회개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에 대한 반성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것과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살아온 것에 대한 뉘우침이다. 그래서 회개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 됨으로써 하나님 없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회개는 그 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에 대한 두려움인 동시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픈 영적인 갈망을 말한다.

    (겔 18:30~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천국에 가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날마다 생각나고 일어나는 죄를 회개하고,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주님 앞에 통회, 자복하면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게 되는 것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세리와 같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과 같이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눈물로 자복하는 것이다.‘진실로 죄인입니다’하는 통회의 기도이다.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누구를 탓함도 없다. 오직‘하나님이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것이 회개이다. 오직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의 잘못입니다' 라고 자백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하나님께 내세울 것도 없고 변명할 말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거나 긍휼을 기대하는 자세이다. 그저 불쌍히 여기고 처분대로 맡기겠다는 마음이다. 모든 것은 다 십자가의 은혜이고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보혈로만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강도의 진심 어린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하시고 낙원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막 1: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당시에 세리들은 죄인 가운데 대표적인 죄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를 못했다. 세리들은 기도를 하는 동안 그들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경멸의 눈초리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들이 기도한 곳은 성전 밖에 있던 이방인의 뜰, 한 구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성전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반 경배자들과 같이 기도할 수 없었다. 이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다. 당시에 가슴을 치는 것은, 대부분 여인들이 견딜 수 없는 극한 분노를 느낄 때나 고통스러울 때에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가슴을 친 것은 자기 죄를 통회하며 한탄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느껴 가슴을 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기도를 드렸던 것 같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세리는 자기의 부족함과 자기의 연약함을 느끼고,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겸손히 엎드린 것이다. '불쌍히 여겨 달라' 고 간구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면서 하나님께 그 죄를 덮어달라는 간절한 용서를 구하였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곧 구원을 받는 참된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계셨다. 곧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신다. 그러나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긍휼을 구하는 자를 높여주신다. 인간을 높이고 낮추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그러나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했다. 그 모습은 계속적으로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자기의 추악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형태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다. 이에 반해 세리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결과로써 하나님은 그를 자기의 의로 덮어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막힌 곳이 없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만들어 버렸다. 관계를 단절되게 만든 장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막아 버렸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단절을 말한다. 이때 회개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인간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죄의 종이 된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범죄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것에 대해 미련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가증한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겔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복음에 의해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임을 알리는 것은, 죄인들이 죄의 멍에와 타락으로부터 나옴으로써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을 청산함으로써, 자기의 과오를 버리고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한 회개를 실천하기 위해 바른 길로 돌아서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된다. 따라서 회개와 죄의 용서는 복음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 5: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돌아보면서 뉘우치고 회개하고 자복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의 보혈은 반드시 나의 회개가 전제 되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회개가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실로 회개하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됨으로써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그러한 십자가의 보혈이 나의 것이 되려면 날마다 회개를 통해 그 보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이다. 세수를 매일 하는 것처럼, 죄 또한 날마다 회개해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십자가를 부여잡고 죄를 회개하면서 씻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 
    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자신의 능력으로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참된 회개의 과정을 겪은 후에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이 ‘마태’라는 세관원의 집에서 세리,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육신이 건강하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지만, 영혼의 병은 누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자칭 의로운 자요 건강한 자들이므로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율법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자들을 죄인으로 분별하여 알아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심이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오히려 자만하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건강한 자일까?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자는 빛 되신 예수를 믿고, 우리도 빛 가운데서 순종함으로써 십자가의 도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된 것들을 고침 받으면서 긍휼함을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다.(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면 병든 자는 누구일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기 때문에 율법의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모든 생을 속량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일서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율법 아래에서 의인이 되어 있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율법 아래에서 죄인으로 있는 자신을 고백하고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같은 나를 불러 고쳐주시고, 거룩함을 입혀 주셔서 건강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육신의 병이 아니라, 마음에 병든 자신을 자백하여 고침 받는 자가 되자.


    11월 12일(수) 누가복음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세와 선지자(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Abraham replie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listen to them.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와 그 후로 이어진 다른 선지자들을 지칭하거나, 신명기 18장 15절에 기반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위대한 선지자이자 율법 수여자였으며, 후대의 예레미야, 호세아 등 많은 선지자들은 각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
    • 모세 :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이자 율법 수여자입니다.
    • 다른 선지자들 : 모세 이후 예언 활동을 한 예레미야, 호세아 등 성경에 기록된 많은 선지자들을 포함합니다.
    • '모세와 같은 선지자' :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기독교적 해석 : 예수님은 바로 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
    •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악한 왕의 위협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 둘 다 기적을 행하고 피의 언약을 세워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 높은 지위를 버리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고 가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 자신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생명을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성경 역사 시대별 요약, 시대별 흐름을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다.

    생각을보는지혜
    7–9 minutes

    1️⃣ 태초와 족장 시대 (창조 ~ 약 1800 BC)

    📌 성경

     책: 창세기 1~50장
    📌 핵심 사건:
    창조(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
    타락과 노아의 홍수 (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
    바벨탑 사건 (언어가 혼잡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요셉 이야기 (애굽으로 이주, 히브리인들이 번성)


    2️⃣ 출애굽과 광야 시대 (약 1800 BC ~ 1400 BC)

    📌 성경 책: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핵심 사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
    모세의 출애굽 (홍해를 건넘, 십계명 받음)
    40년 광야 생활 (가나안 입성을 준비)
    여호수아 지도 아래 가나안 정복 시작


    3️⃣ 사사 시대 (약 1400 BC ~ 1050 BC)

    📌 성경 책: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 핵심 사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착
    왕이 없는 시기,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심 (기드온, 삼손 등)
    이스라엘 백성이 반복적으로 타락 → 심판 → 회개 → 회복


    4️⃣ 통일 왕국 시대 (약 1050 BC ~ 930 BC)

    📌 성경 책: 사무엘상·하, 열왕기상 1~11장, 역대상·하
    📌 핵심 사건:
    사울 왕 즉위 (이스라엘 첫 번째 왕)
    다윗 왕의 통치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음, 메시아 계보의 조상)
    솔로몬 왕 (성전 건축, 이스라엘 최전성기)


    5️⃣ 분열 왕국 시대 (약 930 BC ~ 722 BC, 남유다 586 BC까지)

    📌 성경 책: 열왕기상 12~22장, 열왕기하, 역대하, 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등)
    📌 핵심 사건:
    솔로몬 이후 나라가 북이스라엘(사마리아)과 남유다(예루살렘)로 분열
    북이스라엘(10지파)과 남유다(2지파) 왕국으로 나뉨
    우상 숭배로 인해 선지자들(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등)이 경고
    722 BC: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586 BC: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성전 파괴, 바벨론 포로 생활 시작)


    6️⃣ 바벨론 포로 시대 (약 586 BC ~ 538 BC)

    📌 성경 책: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 핵심 사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감
    다니엘과 세 친구(느부갓네살 왕의 통치 속에서도 신앙 지킴)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 해방 선포


    7️⃣ 귀환과 성전 재건 시대 (약 538 BC ~ 400 BC)

    📌 성경 책: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 핵심 사건:
    바사 제국의 허락으로 유대인 귀환 시작
    성전 재건 (스룹바벨 성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말라기 이후 400년간 선지자 활동 없음 (신구약 중간기 시작)


    8️⃣ 신구약 중간기 (약 400 BC ~ 예수 탄생, 4 BC)

    📌 핵심 사건:
    헬레니즘 문화 확산 (알렉산더 대왕 정복 이후 그리스 문화 영향)
    마카비 혁명 (이스라엘 독립운동, 한때 하스모니아 왕조 수립)
    로마 제국이 등장하고 팔레스타인을 지배


    9️⃣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약 4 BC ~ 30 AD)

    📌 성경 책: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 핵심 사건:
    예수 그리스도 탄생 (메시아의 도래)
    공생애 (가르침, 기적, 제자 훈련)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인류 구원의 완성)
    승천과 성령 강림(오순절, 교회의 시작)


    🔟 초대교회와 복음 전파 (30 AD ~ 100 AD)

    📌 성경 책: 사도행전, 바울 서신, 요한계시록
    📌 핵심 사건:
    사도들의 복음 전파 (예루살렘 → 로마로 확장)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복음 전파)
    초대교회 박해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시작)
    요한계시록 기록 (종말 예언과 하나님의 나라 완성)


    📌 성경 역사 시대별 요약

    시대연대(B.C. / A.D.)주요 사건

    태초~족장 시대     창조 ~ 1800 BC     아담, 노아, 아브라함, 요셉
    출애굽과 광야     1800 ~ 1400 BC     모세의 인도, 출애굽, 십계명
    사사 시대     1400 ~ 1050 BC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 사사들 활동
    통일 왕국     1050 ~ 930 BC     사울, 다윗, 솔로몬 통치
    분열 왕국     930 ~ 586 BC     북이스라엘(722 BC 멸망), 남유다(586 BC 멸망)
    바벨론 포로     586 ~ 538 BC     예루살렘 성전 파괴, 포로 생활
    귀환과 재건     538 ~ 400 BC     성전과 성벽 재건
    신구약 중간기     400 ~ 4 BC     그리스, 로마 지배
    예수 그리스도 시대     4 BC ~ 30 AD     예수의 탄생, 사역, 십자가 사건
    초대교회 시대     30 ~ 100 AD     복음 확산, 사도행전, 교회 설립

    결론 :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대별 흐름을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어요.


    모세와 엘리야가 오리라

    오늘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갑자기 제 마음에 성령님께서 짧지만 분명하게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걸 느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모세와 엘리야가 올 것이다”였고,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연결되면서 그것을 명확히 해주는 말인, “도덕적 대립”이었습니다.

    타나크의 “마지막 예언”인 말라기 4장 4~6절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신약의 “첫 번째 예언”이 된 이 말씀은 누가복음 1장 17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이 이 세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중대한 명령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과 일치하는데,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심판을 선포하는 “두 증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매우 흡사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토라를 전해준 위대한 사람이었고, 엘리야는 선지자들 가운데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이 둘은 “율법과 선지자” 전체를 대표합니다. 
    모세는 애굽에 맞섰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맞섰습니다.

    מלאכי ג:22-24

    22 זִכְרוּ תֹּורַת מֹשֶׁה עַבְדִּי אֲשֶׁר צִוִּיתִי אֹותֹו בְחֹרֵב עַל־כָּל־יִשְׂרָאֵל חֻקִּים וּמִשְׁפָּטִים׃ 23 הִנֵּה אָנֹכִי שֹׁלֵחַ לָכֶם אֵת אֵלִיָּה הַנָּבִיא לִפְנֵי בֹּוא יֹום יהוה הַגָּדֹול וְהַנֹּורָא׃ 24 וְהֵשִׁיב לֵב־אָבֹות עַל־בָּנִים וְלֵב בָּנִים עַל־אֲבֹותָם פֶּן־אָבֹוא וְהִכֵּיתִי אֶת־הָאָרֶץ חֵרֶם׃

    말라기 4:4~6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제 생각에 그 의미는 마지막 때가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는 예슈아의 말씀과 비슷할 것입니다(누가복음 17:26~29). 마지막 때 메시지는 모세와 엘리야의 것과 같을 것이고, 그 상황은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사회 사이에는 틀림없이 심판의 날이라는 정해진 때 직전에 일어날 크나큰 도덕적 대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면, 인류와 함께 행하시는 완전한 정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정의는 악의 처벌을 요구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악이 있습니다. 이 악은 점점 더 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공의에 따르면, 그분은 악을 처벌하실 뿐 아니라, 그 형벌이 집행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경고하실 것입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권고하기 위해 경고하셔야만 합니다.

    심판 전의 이러한 도덕적 변화를 성경은 회개라고 합니다. 
    인간의 악한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용서하시고 죄를 사하시며 형벌을 무효화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노아의 예를 들면, 온 세상에 엄청난 폭력과 살인이 있었습니다(창세기 6:5).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최악이었습니다(창세기 6:7). 
    하나님의 정의에 따르면, 이 모든 죄악된 행위는 처벌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의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도록 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형벌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는 경고하기 위해 그들에게 의를 전파하고 촉구했습니다(벧후 2:5).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들었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했을 것을 고려해볼 때, 정말 오랫 동안, 대략 500년 동안이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또한 (수십 년에 걸쳐) 방주도 지었는데, 이것은 듣는 이들을 구원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도 사람들에게 형벌이 온다는 경고였습니다. 
    (방주는 배였고, 이것은 물이 넘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비가 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방주는 “육지”에 지어졌는데, 이곳은 방주가 뜰 수 있는 물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주 자체가 다가올 홍수에 대한 시각적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엄청난 심판이 온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미래에 있을 심판에 대한 경고 역할을 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전 세계적인 죄악은 전 세계적인 형벌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 형벌이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면 즉시 임할 것입니다. 
    회개할 시간이 많이 주어질 것이지만, 정해진 형벌의 날이 되면 급작스럽게 시간이 전혀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많은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시간이 많지만, 회개를 미룰 시간은 전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도덕적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은혜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오래 참으십니다. 
    두려운 심판이라는 면에서 보면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심판의 시기에 대한 예언들에 관한 논쟁은 시간 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그 시점은 항상 “지금”입니다. 
    타이밍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지만, 그 형벌이 집행되는데 있어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임박한” 속성이 있기도 합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온갖 동물들이 배를 타고 나오는 이야기라 확실히 아이들에게 매력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뿐 아니라 동물도 사랑하십니다. 
    아마도 처음 나타난 무지개일 듯한 이 아름다운 무지개는 창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정교한 예술품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하게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약속을 보여줍니다. 
    낙원도 영원하고, 형벌도 영원합니다. 
    아름다움과 은혜 가운데서 심각하고 진지한 냉정함도 있습니다. 
    즉 요점은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있을 전 세계적인 죄에 대한 도덕적 대립입니다.

    [참조 : 악행은 형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의 기회를 줍니다. 
    간단한 전제 조건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멈추는 것, 곧 회개입니다. 
    (용서에 대한 법적 규정을 “속죄” 혹은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데, 이는 형벌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위해 댓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죄는 제사장의 희생 제사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되었으며, 그 후 예슈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의로우신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모두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전가하고 취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제공합니다. 
    복음의 메시지 이면에 깔린 사법적 논리는 속죄/화목 제물> 댓가 지불> 용서>형벌입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이 있은 후 롯의 시대에 심판이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경우, 폭력, 강간, 동성애의 죄악들은 매우 널리 퍼져 있었기에 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창세기 18:32). 소돔과 고모라는 매우 부유한 “상류층” 도시였습니다(창세기 13:10-13). 그들의 죄에는 교만, 안일,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되었습니다(에스겔 16:49). 소돔의 성적 타락과 재정의 타락은 역사에 걸쳐 많은 곳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1:8 참조).

    롯의 때에 있었던 불의 심판과 노아 때의 물 심판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선례입니다(요엘 2:31, 말라기 4:5, 유 1:7).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곧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멈추고 용서 받고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크고 두려운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 경고의 메시지와 도덕적 맞섦의 메시지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회개에 대한 예언적 부르심은 모든 세대에 적용되어 왔습니다. 예슈아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세대에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메시아는 형벌을 집행하는 재판관이시고 속죄를 주시는 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사하시기도 하고, 형벌을 내리시기도 합니다(마태복음 16:27, 25:31-46).

    소돔 이후에 그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인 애굽의 심판이 나옵니다. 애굽은 요셉 시대에는 의롭고 복된 나라였지만, 모세 시대에는 악하게 변했습니다. 얼마나 악했는지 정부 지도자들이 머리에 뱀을 쓰고 있었습니다. 마술, 노예, 학대, 아동 희생 제사 그리고 온갖 악이 만연했습니다. 이 나라는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지자로 보내셔서 바로에게 맞서게 하셨습니다. 바로가 회개하기를 거절했기에 벌을 내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악한 제국은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먼저는 말로 하는 경고가 있었고, 그 다음에 부분적인 벌로 열 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재앙에 대한 경고도 무시했기에, 홍해를 건널 때 마지막 심판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우리에게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종말의 끝에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악한 애굽 왕 대신에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악한 세계 지도자가 기괴하고 짐승 같은 정부와 함께 등장할 것입니다. 심판이 반드시 와야 하지만, 심판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도덕적 대립과 경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와 죄와 악에 맞서는 메시지를 풀어낼 것입니다. 이렇게 맞설 떄에 그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순결을 요구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권세들에게 선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영적 권세와 또한 기적적인 표적과 이사를 행하는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 “모세” 혹은 “엘리야”라는 인물의 정체나 어떤 사건들의 시기는 주된 이슈가 아닙니다. 핵심은 메시지의 내용, 예언의 목적, 그리고 그것에 담긴 영과 능력입니다.

    우리의 입장을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에 두는 것(모세)과 이 세대를 향해 예언적으로 담대히 선포하는 것(엘리야)은 우리 시대 가운데 마지막 크나큰 영적 전쟁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틀어 온갖 도덕적 대립의 정점입니다. 전 세계적 차원으로 열 가지 재앙과 출애굽,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의 불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쓰여진 기간이 1500년이라고 하는 기간 동안에 쓰여졌습니다. 

    다양한 저작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1500년의 간격을 가지고 있는 그런 기록 시기를 가지고 있고요. 뿐만 아니라 지금 가장 늦게 쓰여진 성경도,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쓰여진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소도 우리나라에서 쓴 것이 아니라, 중동지방에서 쓰여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지방에서 쓰여진 것이고, 성경은 66권이라고 하는 방대한 책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도 다른 언어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로 쓰여져 있고, 또 문화도 다른 문화 속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의 장르를 보면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시도 있고 예언도 있고 자원도 있고 묵시문학도 있고, 다양한 문학 종류가 들어있는 그러한 방대한 말씀이 바로 성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방대한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이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읽을 수가 있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왜곡된 관점으로 바라보면, 좋지 못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무리 유익한 것도 유익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도, 건전하고 바른 신학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리딩 지저스라고 하는 프로그램은 제가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고, 물론 100%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정말 제가 마음들어하기 때문에, 이 교재를 따라서 성경 읽기를 진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굳이 구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값이 굉장히 비싸게 나가는 책이 출간되어 있는데, 굳이 굳이 하실 필요는 없고, 제가 그 책의 내용들을 오후 예배 시간 때마다 그대로 잘 전달하고 설명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예배 시간에 참여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시도하는 성경일독 프로그램의 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따라가면서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무 하나하나를 조사하다가 숲을 보지 못하는 그런 우를 범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에 정말 세밀한 거 하나하나,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 전체가 전달해 주려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들이 종종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경 일독 프로그램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큰 그림이 무엇인가를 따라가면서 읽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큰 유익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하나님의 큰 그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번 성경 읽기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그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잘 적용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예배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성경 읽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해져 왔던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고, 익숙해져 있던 것과 떠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 있지만, 그래서 변화를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고 변화하기를 꺼려하고, 보수적으로 살려고 하는 게, 우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정말 유익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깨닫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대가 되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주중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주중에 할 일이 있습니다. 주중에 할 일은 그날에, 하루 전날 톡장이 해설 카드를 발송해 줄 겁니다. 해설 카드가 어떻게 생겼냐면,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 해설 카드를 해설 카드를 하루 전날 보내주면, 그 해설 카드에는 다음 날 읽을 성경 본문이 들어가 있고, 그래서 그 본문대로 읽으면 되겠고, 그 본문에 대한 대략 대략적인 설명이 그 해설 카드 안에 아주 간단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톡장들이 하루 전날 6시에서 9시 사이에 단톡방에 올려놓으면, 그 단톡방에 올라온 것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읽어보고, 거기에 있는 성경 본문에 따라서 성경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읽는가? 제일 간단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읽는 방법이 제일 간단한 것이고, 제일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성경 읽는 것이 눈이 침침해서 못 읽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톡장들은 단톡방에다가 그 날에 읽을 다음 날에 읽을 성경 본문 유튜브 영상을 링크를 올려줄 겁니다. 그래서 그 링크만 클릭해서 들으면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래 가지고, 유튜브로 영상을 쭉 읽어주는 것을 그 영상을 보거나 또 들으면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을 수가 있겠고요. 그래서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탄 속한 단톡방에 오늘 성경 본문 잘 읽었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남겨야 되겠죠. 거짓말로 남기면 안 됩니다. 솔직하게 남겨주세요. 못 읽어도 괜찮아요. 솔직하게 남겨주시고 그래서 오늘은 못 읽었으니까 내일 읽겠습니다. 자꾸 그래버리면 큰일 나지만, 아무튼 읽었다고 하는 메시지를 올려주고 서로 서로 격려하며 수고했다. 잘 읽었다. 아이고 너무 감사하네요. 또 톡원들 격려하는 것은 보너스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구절이 참 마음에 와닿았어요. 이런 내용들을 함께 전하면서, 주중에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성경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주 돌아오게 되면 무슨 일을 해야 되는가 복습 문제 풀기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예수비전 광장 여기에, 이제는 앞으로 설교 요약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주에 읽었던 본문에 대한 복습 문제가 여기에 수록이 될 겁니다. 그러면 그 복습 문제를 보면서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그래서 그 주 푼 것을 사무실로 제출해 주시거나, 톡장이 토요일 날 복습 문제 링크를 단톡방에 올릴 겁니다. 그러면 단톡방에 올린 복습 문제 링크를 클릭해서 문제가 나옵니다. 태초에 누가 천지를 창조하셨나요? 하나님이! 딱 답을 체크해서 제출 딱 누르면, 그 문제 답변 쓴 것이 교회로 다 수집이 됩니다. 그래서 복습 문제를 푸는 일을 주일날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다 읽은 사람들에게는 완독 증서를 줄이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성경 읽은 사람들의 상이 뭘까요? 성경을 읽는 게 상이에요. 성경을 읽는 게 상입니다.


    그래서 매주 오후 이 시간에는 그 주에 읽을 성경 본문에 대한 설명을 하는 날인데, 이번 주에는 성경 읽는 분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시간인가? 구약 성경 개관을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드리기 전에 리딩 디저스에서 만든 영상을 한번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을 틀어주십시오.

    리딩 지저스 1권 “더 큰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수업으로 구약 성경의 다양한 내용들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통해 어떻게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 홍해를 건넌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 아브라함, 에스더 유나와 같은 각각의 이야기로 말이죠. 구약의 이야기들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많은 이야기들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통해 하나로 맞춰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따라서 우리는 이번 수업에서 구약성경의 구조와 핵심 메시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지는 성경 수업을 통해 퍼즐 조각이 어떻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되어가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의 목차를 살펴볼까요? 구약 성경은 처음에 히브리어로 쓰여졌는데, 이 성경의 목차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목차와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 성경은 구약을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합니다. 율법서는 모세, 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포함하고, 예언서는 우리가 선지서라 부르는 이사야부터 말라기, 그리고 유대인들이 전기 예언서라 부르는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를 포함합니다. 성문서에는 10편 자본 같은 시각서가 포함되고, 다니엘서와 같은 선지서, 후기 역사서로 간주되는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역대기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창세기로 시작해 역대기로 끝나는 것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 성경은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로 구분됩니다. 역사서는 창세기부터 역대기까지이고, 시가서에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가 포함되고 선지서는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포함합니다. 창세기로 시작해 말라기로 끝이 나는 것이죠.


    히브리 성경과 우리가 읽는 구약 성경의 목차가 이렇게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 성경 이후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기다리게 한다는 것이죠.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는 아담부터 포로 귀환까지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들 때문에 이 다음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 성경 역시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새로운 엘리야를 고대하는 내용으로 끝이 나면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합니다.


    구약 성경을 연대 기준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구약 성경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모두 바꾸어버리게 됩니다. 죄와 저주의 범위는 점점 확장되게 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 시대를 지나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탈출하여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약속의 일시적인 성취를 맛보게 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왕국을 이루게 되지만, 하나의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결국은 강대국에게 침략당해 이스라엘은 흩어지고 포로로 잡혀갑니다. 시간이 흐른 후 본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침략자들의 통치 아래에 살게 되면서 구약 성경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은 이 다음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여러 개의 퍼즐 조각만 줄 뿐입니다. 결국 이 조각들을 맞추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이 필요합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질문의 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줍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생명에 이르는 의를 얻게 됩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언약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죠. 이렇듯 예수님은 새 아담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새롭게 재현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처럼, 어린 예수님도 애굽에서 이끌어내십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은 사건과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 역시 예수님의 40일 광야 금식 후 받으신 시험과 이어집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자 새 이스라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보전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해 깨어진 옛 언약을 자신의 거룩한 보혈로 새롭게 완성하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새 다윗이십니다. 자 여러분 구약 성경의 퍼즐 전체가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보이시나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슬픈 얼굴로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과 마주친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이 길을 떠날 때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딤있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후에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언급된 몇 구절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구약을 읽는다면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 이후의 영광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는 책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약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서 읽는다면,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읽는 그 자체가 우리의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됩니다.


    이런 영상을 단톡방에 또 올릴 겁니다. 그러면 단톡방에서 그걸 보시고 오후 예배에 참석을 못하셨던 분들도 이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겠는데요. 오늘은 구약 성경 전반에 대한 설명을 영상에서 본 것에 대해서 잠깐 제가 추가로 부연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성취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할 분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인 것이죠. 앞으로 우리가 몇 주간 동안 구약 성경의 말씀을 읽게 될 것인데, 이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죄가 계속해서 확장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며,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는 이야기로 연결이 됩니다. 그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으로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아브라함에게 해주셨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성취만이 이루어진 것이죠. 아브라함을 향해서 내 아들에게 아들을 줄 것이고, 그 너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던 그 약속은 결국 그 약속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던 것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모든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구원자를 보내어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죠. 성경 구약 성경 전체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어 주신 이야기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먹을 것이 없어서 기근 가운데서 정말 힘들게 되었을 때, 요셉이라고 하는 구원자가 있어서 그 요셉을 통해서 야곱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모세라고 하는 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시는 모세라고 하는 구원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모세 이후에는 여호수아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었고, 또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에는 그때마다 외적이 침입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당했지만,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어 주셔서 그 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사 시대가 지난 다음에는 왕을 세워주셔서 그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는데, 사울 왕 그리고 다윗 왕 이런 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주고 주신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됐습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 구원이 영원한 것이고 계속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몰락해버리고 포로로 끌려가고 결국은 망해버리는, 그런 힘들고 어려운 결과로 빚어지게 된 것이고, 그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또 몰살당할 위험한 처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 에스더라고 하는 구원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시기도 하셨고,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 쭉 연결되고 있는데,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어 주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 구원자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들이 완벽하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더 이상의 아픔도 없고 더 이상의 고난도 없는 진정한 구원을 이룰 예수님 메시아를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 바로 구약 성경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소개한 것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마치 그 옛날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아담의 역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아담은 어떻게 했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담과 하와라고 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구원해 주는 그런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어떤 역사입니까? 늘 실패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역사였는데,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로 오셔서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로 진짜 이스라엘로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실패했던 것을 이제는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새로운 구원자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다 물리치시고 신앙적인 모습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서 승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다윗의 이야기는 “다윗처럼 우리가 어떻게 잘 되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그 다윗도 어떻게 보면 부족한 왕이고 실패한 왕이고 영원하지 못한 왕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다윗 왕을 대신하여서 예수님께서 결국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그 영원히 다스릴 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어떤 책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책으로서 구약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상 가운데서도 나온 성경 구절이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인 것이죠.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구약 성경, 모세와 선지자 이게 바로 구약 성경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 구약 성경이 누구에 대해서 쓴 것인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쓴 것이고, 예수님이 어떻게 오시고 구원해 주시고, 또 우리를 살리시는가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 구약 성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부터 4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설명하기를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고, 예수님을 기대하게 만드시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든 성경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우리가 읽고 그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또 주님을 더욱더 닮아가는 그런 변화의 과정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읽었냐면 하나의 율법으로 읽었습니다. 율법으로 읽어서 안식일날 쉬어야 된다. 또 이것을 해야 된다 말아야 된다. 이것을 하면 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율법적으로만 모든 것을 다 바라보면서, 이 구약 성경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율법을 배우는 것 같은 그런 말씀으로 율법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정말 너무나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이 구약 성경을 율법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나요? 내가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교만한 마음이 금세 들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정작 율법을 제대로 잘 지켰느냐 하면,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율 배반적인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서 그렇게 막 신앙을 잃어버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 부모님들이 이율배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위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율법을 잘 지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부모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보냐면 부모님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거죠. 그러는 엄마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가? 그러는 아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고 있는가?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이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자꾸만 정죄하는 마음, 그리고 비난하는 마음, 또 뭔가 조금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들이 자꾸만 들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지를 못하는 것이죠. 율법을 들이밀면서 “너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하면 사람들이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키느냐 하면, 잘 안 지켜요. 근데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킵니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지키는 거죠. 엄마가 아들한테 말하는 거죠. 좀 옷 좀 단정히 입고 다녀라. 좀 깨끗하게 하고 다녀라. 그러면 신경을 안 쓰고 마음대로 막 다녀요.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엄마는? 엄마는? 그런 엄마는 정리 잘해? 항상 엄마를 향해서 막 대들고 막 그러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아이가 갑자기 막 세수를 합니다. 갑자기 옷을 잔쟁이하고 다닙니다. 아주 잘 꾸미고 다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애인이 생긴 거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들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아니해도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이 우리의 하나의 율법으로만 생각하고 주일날 이것을 하면 되고 하지 않아야 되고, 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것을 하면 되고 안 하면 되고, 그런 율법의 조항들을 너무나도 많이 나열하다 보니까, 이것이 너무 피곤해지고 정말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믿음 생활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 가운데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 구약성경의 말씀은 우리를 율법의 길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는 거예요. 
    이 구약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지키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잘 지키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율법의 조항들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나 대신에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그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고, 그 복음을 제대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들의 삶이 바뀌게 되고 태도가 변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이 말씀을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성경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금년 한 해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정말 기쁨이 넘치고 변화가 이루어지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 잘 읽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억지로가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 하나님의 그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일에 참여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 금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월 11일(화) 누가복음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과 제자(12:30. 22)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제자(弟子) 마대테스(mathētēs)  3101 μαθητής, οῆ, ὁ

    1. 제자.  2. 생도.  3. 귀의자  
    Pronunciation [ mathētēs ]  
    Etymology / 3129에서 유래
    • 1.  제자, 배우는 자, 생도.
      • a.  [일반적으로] 생도, 견습자, 마10:24, 25, 눅6:40.
      • b.  제자, 귀의자, 마9:14, 10:1, 11:1, 22:16, 막2:18, 5:31, 눅5:33, 6:17, 8:9, 19:37, 요1:35, 6:66, 9:28.
    • 관련 성경 / 제자(마 9:10, 막 8:27, 요 6:3), 형제(행 1:15).

    사도(使徒) 아포스톨로스(apŏstŏlŏs)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652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Pronunciation [ apŏstŏlŏs ]  
    Etymology  /  649에서 유래
    • I.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 1.  대의원, 대표, 사절, 사신.《반》ὁ πέμψας, 요13:16, 고후8:23, 빌2:25.
      • 2.  [특히] 하나님의 사자.
        •  a. 예언자, 눅11:49, 엡3:5, 계18:20.

        • b.  그리스도, 히3:1.
      • 3.  특수한 사명을 맡고 신자들에게 높이 존경받는 사람, 복음을 전하던 사람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라고 불다], 롬1:1, 11:13, 고전1:1, 9:1, 15:9, 갈1:1, 엡1:1, 골1:1, 딤전1:1, 딤후1:1,11,
        • a.  [바나바] 행14:14.
        • b.  [예수의 형제 야고보] 갈1:19.
        • c.   [베드로] 벧전1:1, 벧후1:1.
        • d.   [특히 12사도] 마10:2, 막3:14, 눅 22:14, 행1:26, 계21:14.
        • e.   [베드로와 사도] 행5:29.
        • f.  [일반적인 사도] 행1:2, 2:42, 4:33, 고전4:9, 고후11:5,13, 살전2:7, 벧후3:2, 유1:17.
    •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세상 백성(世上 百姓)(타 에드네 투 코스무) τα εθνη του κοσμου

                                                               
    백성(1484) 


    ἔθνος, ους, τό Strong number 1484

    1. 민족.  2. τὸ ἔ.  3. 족속  
    Pronunciation  [ ĕthnŏs ]  
    Etymology  / 1486에서 유래
    •  1. 민족, 백성.
      •  a. τὸ ἔ. τῆς Σαμαρεῖας: 사마리아 사람, 행8:9.
      •  b. [가나안땅 일곱] 족속, 행13:19.
      •  c. [왕에 대하여] 백성, 마24:7, 28:19, 막11:17, 13:10, 눅21:10.
      •  d. [보다 특별하게] 눅12:30, 행17:26.
    •  2. 이방인들, 이교도들, 마10:18, 행14:5, 21:21, 26:17, 롬3:29, 9:24, 15:10. [주] 그들 역시 구원에 동참하게 되어 있음, 행11:1,18, 14:27, 15:3,7.
      •  a. [이방 기독교에 대해서] 롬16:4.
      •  b. [이방인 그리스도인] 갈2:12, 엡3:1.
      •  c. [때때로 이 말은 유대인들에 의해 당연시되었던 종교적․도덕적 열등함을 함축하고 있다] 마6:32, 눅12:30.
    • 관련 성경  / 이방(마4:15, 엡3:1), 이방인(마6: 32, 행9:15, 고전5:1). 나라(마21:43, 행7:7, 계14:6), 민족(마24:7, 눅7:5, 행24:2), 족속(마24:9), 이방 사람(행13:42), 백성(롬10:19, 계20:8), 열방(롬15:12), 만국(딤전3:16, 계2:26, 12:5), 열국(계17:15)




    세상(2889)

    세상(코스모스) 

    κόσμος, ου, ὁ Storng number 2889

    1. 장식.  2. 세상.  3. 고전 4:9. 
    Pronunciation  [ kŏsmŏs ] 
    Etymology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  1. 장식, 치장, 단장, 벧전3:3.
    •  2. 세상, 우주, 마24:21, 눅11:50, 롬1:20, 히4:3.
    •  3. [동물 이상의 모든 존재 총칭] 세상, 고전4:9.
    •  4. [사람이 사는] 땅, 세상, 마4:8, 막16:15, 요16:21, 롬1:8, 고전5:10, 14:10, 골1:6. [하늘과 대조되는] 땅, 세계, 요6:14, 9:39, 11:27, 딤전1:15, 히10:5.
    •  5. [인류를 가리켜서] 세상, 마18:7, 요8:12, 롬5:13, 고전1:27.
    •  6. 지상적 기쁨, 소유, 근심, 고난의 무대로서의 세상, 마16:26, 막8:36, 눅9:25, 고전7:33.
    •  7.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으로서의 세상, 요8:23, 12:25, 고전3:19, 엡2:2.
    •  8. 전체, 총체, 약3:6.
    • 관련 성경  / 천하(마4:8, 막8:36, 눅9:25), 세상(마5:14, 고전1:27, 계11:15), 천지(행17:24), 세속(약1:27), 세계(약3:6), 단장(벧전3:3).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 백성(the pagan)과 제자(disciples) 

    '세상 백성'은 성경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며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백성의 특징
    • 세상 가치관 추구 : '세상 백성'은 하나님 없이, 사람을 중심으로 사고하며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나 철학을 내포합니다.
    • 인간 중심 : 세상의 쾌락과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며, 이러한 것들을 좇는 삶을 살아갑니다.
    • 하나님과 대비 : 성경은 '세상 백성'이 추구하는 욕망이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하는 것들과 대비된다고 설명합니다. 
    세상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의 백성의 삶 : 세상 백성처럼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 세상과 구별된 삶 :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죄악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께 속하여 구별된 사람들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거룩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코데쉬'에서 유래하며, 이는 '분리되거나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의미
    •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소유하신 백성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안에 있습니다.
    • 구별된 삶: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언약을 지키는 것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합니다.
    • 제사장 나라: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거룩한 백성'
    • 구약 :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신약 :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어둠에서 불러내어져 하나님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인도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뜻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네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출 19: 5~8)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 3)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야훼,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칠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으로 주시겠다고 하신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친히 아담과 그의 여자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많은 것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여기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율법과 계명을 모세로 가르치고자 하신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칠십 인은 하나님을 보며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였다.

    이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그들은 제단 앞에서 제물을 나누어 함께 식사하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그들이 산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의 ‘보다’(히브리어: ra'ah)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시로 ‘보다’(히브리어: hazah)와는 다르다.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그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식사를 하며 교제하여야 한다.

    산 중턱에 장로들은 아론과 홀과 함께 머물고,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산속 깊이 더 들어간다. 모세는 만 사십일(四十日, 四十夜)을 머물게 된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야훼의 가르침을 들은 것을 글로 기록하여 백성에게 낭독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서약을 할 때 그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려는 뜻에 있다.

    앞에 19장에서와 24장에 나타난 하나님이 주신 법도(율법과 계명들)를 백성에게 가르쳤다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언약서(정확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뜻)를 낭독하고 구속의 의미로써, ‘언약의 피’(훗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지만)로 제단에서 취한 피를 백성들에게 뿌린다.

    이것이 오늘날에 구교(가톨릭)에서 행하는 향과 성스런 물을 신도들에게 뿌리는 행위이다. 언약의 피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시는 피인 것이다. 언약서는 계약의 조문인 것이다. 또 피로 맺은 언약(조약)은 중대한 계약임을 뜻한다. 피는 바로 생명을 의미하므로 언약을 어길 때는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중대사이다. 그리고 피는 생명을 쏟아 죄를 벗겨주는(레 17:11) 속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애굽 성경공부에서

    세상 사람들은 신을 창조하여 종교화로 섬기는 사상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든 신(神)은 실존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신들은 인간의 정신적 세계에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두려움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첫째, 물에 대한 두려움

    영웅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도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니므롯의 사상이 무엇일까?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왔더라.」(창세기 11:2,3,4,5,)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들의 왕국이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국이 세워졌다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고 한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왕국시대는 인간중심의 사상에 뿌리인 니므롯의 사상에 있는 것이다.

    인간왕국의 구조는 크게 둘로 나눠볼 수가 있는데, 
    첫째는 통치를 위한 법제도
    둘째는 종교의 제도
    그러나 종종 인간제국에서는 종교를 말살하고 오직 법제도만으로 다스리려는 인간역사의 흔적들이 많다. 
    그 대표적으로 아직도 존재하는 인간왕국은 북한을 들 수가 있겠다. 
    북한의 뿌리는 조선의 제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성을 강조하면서 김일성 사상으로 조선인민국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조선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고려국의 3백 년의 역사는 파란만장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정도전이란 인물이 ‘민초사상’으로 혁명을 일으켰으며, 종교를 말살하고 유학(儒學-중국공자사상)을 도입하여 법제도와 왕권(하늘이 내린 왕) 제도로 민초를 다스리는 국가였다. 
    즉 법제도는 있으되 종교제도는 배제한 왕국인 것이었다.
    (어찌 보면, 공산주의의 근본이 되는 사상주의 왕국) 여기에서 희귀한 현상은 양반들은 왕을 신격화하지 않았지만, 민초들인 백성들에게는 왕을 신격화로 여기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나라들이 곳곳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고 한 것이 인간세상이었다는 것이다. 
    니므롯이 한 곳에 인간들을 모아놓고 인간중심의 세상을 세우려는 것을 보신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으며, 이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던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중심의 세상을 세우려는 니므롯의 태도를 보시고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말살된 한 사상에 복종하는 인간들을 보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무력으로 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언어의 혼란을 이용해서 흩어지게 하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온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왕국을 세우며, 인간을 국법과 종교로 통치하는 양상들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었다. 
    즉 채찍과 당근으로 다스리는 술법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한 인간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간의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던 것이다.

    그 백성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나중에는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은 야곱의 백성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대인이라는, 즉 야곱의 열둘 자식 중에 유다의 후손들로써 유다민족, 또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스라엘 민족, 또는 유다민족은 스스로 선민이라 자칭하면서 선민사상에 빠져서 인류에 우월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게 선민사상에 빠진 교만한 유대민족에 대한 적대감이나 증오감이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면서 멸종, 말살하고자 하는 나라들이 등장하고 했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동에서는 끝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한 백성과 선민사상의 차이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그의 후손들이 하늘에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할 것을 약속한 하나님의 뜻과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은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의 타락한 세상에 있어서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깊은 뜻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진리의 통로로써, 즉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나타내는 목적으로써, 또는 구원의 통로로써 제사장의 나라로 유대민족을 세웠다는 것을,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인간세상으로 알게, 깨닫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즉 유대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심과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민족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민사상’으로 인간세상을 업신여기고, 증오를 일으키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었다. 

    오늘날에 기독교인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손가락질 받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처럼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 구원받았다는 의인행세, 그리고 세상사람들을 죄인취급 하는 그런 태도를 세상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예언자를 불러내어 끝없이 유대민족에게 깨닫도록 하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 믿음의 후손들은 유대민족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아니........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모세에게도, 다윗에게도, 그 외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들어 쓰시면서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간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을 반드시 이루심을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 뜻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돼라.」(베드로전서 1장 15절)

    그리고 예수님도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첫 문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마태 6:9)

    여기서 거룩함이란 인간 사상에서는 뛰어난 존재나 가까이할 수 없는 위엄이나 위품을 의미하려고 하지만, 존귀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높이고자 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 하심에서도 이미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피력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지 그분이 거룩하다 하심은 흠이 없고 온전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분이 태초부터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어긋남 없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뜻으로써 ‘거룩하시다’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도 그분이 거룩하심 같이 너희도 거룩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으로써, 조금도 의심 없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 하심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이루심이라는 것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게 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신다는 뜻으로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신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어둠의 세상에 빛(복음)으로써,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반드시 이루심으로써, 거룩한 백성을 세우셨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실화 하였으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그 언약, 약속을 이루셨음을 확증케 하셨기에, 예수님은 믿는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하라고 기도를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고백하며 확실한 믿음, 즉 거룩한 믿음을 가리라고 베드로는 말했던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4-5)

    하나님의 보물(세굴라)이라는 신분(status)과 제사장 나라라는 사명(mission)을 갖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삶이다. ‘거룩’을 히브리어로는 ‘카도쉬’인데, 어원적 의미는 ‘구별된 것’이다. ‘거룩’의 일반적 용례는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거룩’을 하나님에게 적용시키면,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기계적으로 우리들을 대하지 않으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공통분모인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한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다른 일반백성들 보다도 더욱 엄격한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은 제사장이라는 그들의 위치와 직무가 중요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의 조건은 깨끗한 것이다. 

    디모데후서 2:20-21에 의하면,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
    재료로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이 있고, 용도로는 귀하게 쓰이는 그릇, 천하게 쓰이는 그릇 등이 있다. 
    그러나 이렇듯 다양한 종류와 용도의 그릇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 뿐이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로 값지게 만들어졌다 하여도 깨끗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함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거룩이 필수적 요건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1)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임재하시고 싶으시다는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거룩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밀접히 관련되는 역동성을 지닌다.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이방인들의 제사제도와 다른 것도 그런 점과 관련된다. 
    곧 이방인의 제사는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소극적 면을 지니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적극성을 지니고 있다.

    거룩은 하나님 백성들이 승리롭게 살아가는 능력이며 진정한 카리스마이다. 성경 인물 중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는 요셉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가는 역경의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였고 마침내 당대 최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로 올라서게 만드셨다. 신앙의 힘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력에서 찾을 수 있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떠내려가더라도 살아있는 작은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력이 보여주는 위력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주는 통로이며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참된 능력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의 내적 증거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하나님의 뜻과 밀접하게 상응한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다’는 어원적으로 감사의 대상을 인정하고 신뢰함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과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 감사이다.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같은 상대적 시간 구분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체 시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영역이 되기 때문에, 감사는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까지도 그 범위에 포함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신앙 덕목 중 하나가 인내(기다림)인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기다림은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과 벅찬 감격으로 가득 찬 시간의 연속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이며 거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life style)이다.



    11월 10일(월) 누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별세(別世)하실 것(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榮光(영광) 中(중)에 나타나서 將次(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別世(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후서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별세(別世) 1841. 엑소도스(ĕxŏdŏs) ἔξοδος, ου, ἡ    Storng number 1841


    1. 퇴장.  2. 탈출.  3. 떠남  
    Pronunciation  [ ĕxŏdŏs ]  
    Etymology  /  1537과 3598에서 유래
    •  1. 퇴장, 달아남.
      •  a.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히11:22.
      •  b. [완곡한 표현으로] 떠남, 이탈, 죽음, 눅9:31, 벧후1:15.
      •  c. 운명.
    • 관련 성경  /  별세하실 것(눅 9:31), 떠날 것, 떠남(히 11:22, 벧후 1:15).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은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몸으로 드러나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영광(榮光)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눅 2:9. 3. 위엄  
    Pronunciation [ dŏxa ] 
    Etymology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나타나실 것(3708)은 보게 될 것을 말합니다.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Pronunciation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별세(別世. 엑소돈)하실 것이란 헬라 단어는 엑소도스라고(1841) 합니다.

    구약에서의 출애굽은 노예로 살던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의 출애굽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인생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부활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죽었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 후에는 두 가지 삶의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영생(永生)
    둘째는 영벌(永罰)

    마태복음 25:46
    저희는 永罰(영벌)에 義人(의인)들은 永生(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복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복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死) 죽을 사
    부수 [歺]
    (죽을사변, 4획)
    모양자
    歹(살 바른 뼈 알) + 匕(비수 비)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질고(2483) חֳלִי Storng number 2483

    1. 병.  2. 내상. 3.  외상  
    Pronunciation    [ chôlîy ] 
    Etymology  / 2470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4회 사용
    •  1. 명사, 남성 병, 질병.
      •  a. 명사, 남성 내상, 신7:15, 28:61.
      •  b. 명사, 남성 외상, 사1:5
    •  2. 명사, 남성 고통, 괴로움, 근심, 슬픔, 비통, 전5:16(17).
    •  3. 명사, 남성 악, 재난, 불행, 전6:2. 
    • 관련 성경 / 질병(신7:15, 28:61, 렘6:7), 증세(왕상17:17), 병(왕하13:14, 전5:17, 호5:13), 질고(사53:3,4), 고난(렘10:19). [동] 병들다(사1:5).

    육신의 몸은 죄가 없을지라도 때로는 불의한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세상의 사건과 사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쇼펜하우에르 / 죽음은 모든 고통의 헤방이다.

    셋째는 수고에서 탈출(시편 104: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전도서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살아 있을 동안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수고를 멈추고 쉼을 얻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종류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다양한 차원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 죽음을 단지 ‘육체의 생명 종료’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영적·관계적·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여러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보며, 각 죽음이 지닌 의미와 그 결과, 그리고 궁극적인 회복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을 보다 확장하여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죽음의 상징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실제적, 육체적 죽음 (Physical Death)

    정의

    육체의 숨이 끊어지고 생명 활동이 멈추는 죽음으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본문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특징

    • 전 인류 보편성: 누구도 피할 수 없음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 죄의 결과: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시간 속 존재로 전락.
    • 심판의 예고: 육신의 죽음은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선언입니다.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정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순간에 이미 시작된 죽음이며, 겉으로는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상태입니다.

    본문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특징

    •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 죄에 대한 감각의 마비: 죄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됨.
    • 자기중심성의 확산: 생명 대신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따름.

    회복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관계적 죽음 (Relation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과 왜곡을 겪는 죽음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사랑의 연합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독소입니다.

    본문

    • 아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창세기 3:12) → 책임 회피.
    • 가인과 아벨: 형제를 살해함으로 형제 관계의 파괴 (창세기 4:8).

    특징

    • 책임 회피와 비난: 관계의 단절은 신뢰와 책임의 붕괴로 이어짐.
    • 폭력과 시기, 분노: 인간관계가 생명의 통로가 아닌, 고통과 갈등의 현장으로 변함.
    • 사랑의 기능 상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능이 왜곡됨.

    회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가 관계적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한일서 4:12)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사…” (에베소서 2:14) 

    존재론적 죽음 (Existenti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왜곡, 공허, 허무, 불안으로 드러납니다.

    본문

    • 전도서의 흐름: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 아담이 숨은 장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특징

    • 존재 불안과 공허: 인간은 목적을 잃고, 인생의 의미를 상실함.
    • 자기 정체성의 붕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분을 잃고, 자기 욕망에 끌림.
    • 삶의 허무감: 모든 수고와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짐.

    회복

    예수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존재 의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영원한 죽음 (Eternal Death)

    정의

    회개 없이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지속적인 단절의 상태입니다.

    본문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 “지옥에서는 그 벌이 끝이 없으며…” (마태복음 25:46)

    특징

    •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은혜의 기회가 완전히 끝남.
    • 의식 있는 고통: 존재는 유지되나,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는 단절됨.
    • 영원한 분리와 슬픔: 생명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음.

    회복

    이 죽음에서의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요약: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단절'이다

    죽음의 차원  특징 회복의 길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 삶의 끝, 죄의 물리적 결과 부활 신앙, 영생의 소망 (고전 15장)
    영적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 죄 가운데 죽은 상태 성령 안에서 거듭남 (요 3:3, 엡 2:5)
    관계적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파괴된 신뢰, 사랑의 왜곡 화해와 용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엡 2)
    존재론적 죽음 자기 정체성과 의미 상실, 공허와 불안 창조주 안에서의 정체성 회복 (고후 5:17)
    영원한 죽음 회개 없는 자에게 임하는 영원한 단절과 심판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 (요 3:16) 

    결론 : 생명 되신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은 다양한 차원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영적·관계적·존재적 죽음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말씀과 성령으로 이겨내며,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성경은 죽음을 분리로 묘사합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이고,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a.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온 세상이 죽음을 겪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창세기 2:17에서, 주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 죽음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그는 즉각적인 영적 죽음을 경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8). 이후에,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5:5).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또한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50). 차이점은 아담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 죽기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9). 그 후, 예수님은 사흘째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죄를 뛰어넘는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 요한계시록 1:18). 그리스도 덕분에, 사망은 패배한 적이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호세아 13:14).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구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의 막을 내리게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구원을 받은 자는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도 진실되어 크리스천의 육체적인 죽음은 “잠” (고린도전서 15:51, 데살로니가전서 5:10)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다시는 사망이 없[을]” (요한계시록 21:4) 때를 기대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서론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첫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한정된 시간 동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삶의 소중함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주제를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결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한다면,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의미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인류역사상 변천해 온 내용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그에 대한 태도가 변천해왔습니다.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

    윤리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죽음의 여러 가지 의미와 인류 역사 속에서의 태도 변천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죽음의 의미

    1) 생물학적 의미

    죽음은 생물체의 생리적 기능이 멈추는 상태로, 생명 주기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2) 철학적 의미

    철학적으로 죽음은 존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는 주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죽음이 오히려

    진정한 지혜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의식이 없는 상태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3) 종교적 의미

    죽음은 다양한 종교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구원의 과정으로 보고, 사후 세계를 믿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생사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며, 윤회와

    카르마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죽음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2. 역사적 변천

    1) 고대 사회

    고대 사회에서 죽음은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해, 왕과 귀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죽음은 삶의 연장선으로 생각되었으며, 장례 의식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2) 중세 시대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죽음이 구원의 관점에서 중시되었습니다.

    죽음은 죄와 구속의 과정으로 여겨졌고, 장례식은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3) 근대와 현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강조하며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죽음은 점차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으로 여겨지며,

    장례 문화와 의식도 변화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신성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현대적 관점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명 연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euthanasia(안락사)와 같은 윤리적 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삶의 질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4. 죽음과 삶의 질

    현대인들은 죽음을 단순한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질과 깊이 연결된 주제로

    인식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방향성을

    모색합니다.


    5. 결론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의미와 태도로 변화해 왔습니다.

    생물학적,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의 죽음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개인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로 바라보며, 삶의 질과

    직결된 주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죽음에 대한 명언(名言) 20篇

    1. "죽음은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바라지 말라."

    - 존 테러 -

    2. "죽음은 생명의 일부로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 미셸 드 몽테뉴 -

    3.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대우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살지를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 루이스 스타인 -

    4.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알버트 카뮈 -

    5. "죽음은 빈 공간이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출발점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6.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살아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7. "죽음은 마치 커튼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뒤에서 삶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

    8. "죽음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미지의 경계선이다."

    - 제임스 콜맨 -

    9. "죽음은 생명의 빛깔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10.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목표를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 로버트 핀크 -

    11. "죽음은 우리가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이유이다."

    - 헨리 반 다이크 -

    12.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 데일 카네기 -

    13. "죽음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회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14. "죽음은 우리가 가진 시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 윈스턴 처칠 -

    15. "죽음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의 연결고리이다."

    - 매튜 아놀드 -

    16.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준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7. "죽음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

    18.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희망에 대한 계기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19. "죽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해주며, 더 나은 버전의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도와준다."

    - 마하트마 간디 -

    20.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현재 순간을 귀중히 여기도록 유도한다."

    - 스티브 잡스 -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했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죽음’은 그가 소르본대학에서 1957∼1959년 두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죽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 강의를 정리한 책으로 1966년에 출판됐다. 죽음 철학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출간됐지만 국내에서는 묵직한 분량과 문장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의 대중적 판본이라고 할 장켈레비치 대담집 ‘죽음에 대하여’(돌베개)가 소개돼 있다.

    고전어와 고전철학 연구자인 김정훈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죽음’은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면 무난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먼저 죽음이 왜 그렇게 난감한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려운지 짚어본다.

    “죽어가는 인간이 존재해 온 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죽을 인간들은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일까요?”

    “죽음의 관념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최소한의 관념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에 기대지 않고 논리적 언어로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정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 말의 사명이라면, 죽음의 유한성의 헤아릴 수 없는 성격은 말에 대한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을 동원한다. 화가가 빛과 어둠을 통해 형체를 그려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산 자는 죽을 운명이라는 조건에서만 산 자인 것이죠… 죽는 것만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 “죽음이라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원과 뒤섞일 테고”, 영원한 현재란 “하나의 끝없는 반복, 밀도도 농도도 없는 하나의 단조롭고 아주 지루한 연속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설명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기관-장애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죽음은 삶의 기관-장애물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저항하는 죽음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이 장애물 덕분에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리 삶을 ‘절반의 열림’이라고 묘사한다. “삶이 한쪽에는 출생 날짜라는 고정점에 붙어 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죽게 되지만 시각의 우연성 덕분에 반쯤 열린 채로 유지된다면, 그러니까 삶이 반쯤 자유롭다면, 그때는 우리의 계획을 한없이 갱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은 비극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신뢰와 먼 장래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이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왕복운동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 나의 모든 미래 중 가장 먼 미래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꼭 붙어 있지만, 나의 삶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격차는 죽음과 나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죽음을 사유한다. 타인의 추상적 죽음이나 부모의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죽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온 삶이 닫히고 완결될 때, 사람들은 자문합니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요, 운명의 창공에서 아무개 씨의 이 짧은 산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아무개 씨는 영원히 비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태어났으면, 왜 어느 날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도대체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유한성의 충만함과 비존재의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삶을 굳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쪽에 선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살았던 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기 전의 무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실존으로부터 구해집니다.”

    죽더라도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영원한 비존재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이다. 또 한 사람이 지상에서 짧게 머물고 갔던 그 세계는 그런 일이 없었던 세계와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달라지는 것이다. “있었던 것은 있지 않았던 것일 수 없습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포괄하면서 독창적인 방식과 언어로 답을 찾아나간다. 죽음이라는 압도적 사실에 맞서면서 기어코 삶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지성이 경탄스럽다. ‘죽음’은 거의 6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자리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올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다.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라는 말을 통해, 죽음을 삶과 분리된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과 본질적인 일부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명언은 하루키 작품 세계의 근간이자, 그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하루키는 죽음을 삶의 끝이나 반대편으로 두지 않고,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필연적 순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 있으며,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해지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245.

    이러한 하루키의 시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죽음이라는 마지막 이정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루키가 전하는 철학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

    삶과 죽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철학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 중세 기독교, 근대 철학, 현대 실존철학, 동양철학, 그리고 현대 심리학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길 바랍니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소크라테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이란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삶과 죽음 모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아래 있으며, 철학자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 영혼의 불멸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삶은 영혼이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철학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의 귀향이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아우구스티누스: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

    기독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 즉 신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삶은 일시적이며, 죽음은 참된 삶을 여는 문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데카르트: 인식 주체로서의 존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생물학적 생명보다 사고하는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죽음조차도 사유의 대상이며,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사고하는 한 존재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인식 가능한 '사건'이며, 주체성은 죽음 속에서도 유지된다.

    현대 실존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하이데거: 죽음은 삶의 완성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진정한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게 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을 외면하면 삶도 피상적이 된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진정한 존재방식이다. 

    사르트르: 죽음은 무의미, 의미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 앞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진다.

    카뮈: 부조리와 죽음

    알베르 카뮈는 인간 존재를 '부조리'로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돌을 굴리는 시지프처럼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야 한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부조리성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노자: 삶과 죽음은 하나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흐름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노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자연스러운 변화다. 

    불교: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불교는 모든 존재가 '무상'하며(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연기) 존재한다고 봅니다.
    죽음 역시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인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핵심 철학: 삶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 삶과 죽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죽음 수용 과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 수용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 부정(Denial)
    2. 분노(Anger)
    3. 타협(Bargaining)
    4. 우울(Depression)
    5. 수용(Acceptance)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심리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심리학적 통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인간 성장의 일부이다. 

    빅터 프랭클: 의미를 향한 의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찾는 노력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적 통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죽음조차 삶을 빛나게 한다. 

    삶과 죽음: 종합적 사유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일부다.
    2.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삶을 깊이 있게 살아가는 열쇠다.
    3.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4. 삶과 죽음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5. 죽음의 자각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결론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열려 있고, 죽음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합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 죽음을 성찰할 것.
    •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이 삶을 사랑할 것.

    오늘 하루,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기억하는 그 마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무활동의 상태이다: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임종의 순간, 그는 웃었다…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의 문이기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의 수도자 묘지. 허성석 신부 제공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도가

    ①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 ( 자연적 )이고 필연적인 과정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② 장자: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변화하여 ( 기 )(氣)가 생기고,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생기고, 생명이 변화하여 ( 죽음 )이 된다.” ☞ 삶과 죽음을 서로 연결된 ( 순환 )과정으로 보며 죽음에 ( 초연 )할 것을 강조함.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태어남을 기빼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이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氣)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다. -장자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며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는 것[徒]이다. 사람의 삶이란 기(氣)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게 된다. -장자 (학평 제시문)

    ③ 장자: “사람이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정해 준 때를 마음 편히 여기고 운명에 ( 순응 )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게 된다.” ☞ 삶을 달관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착한 일을 행하여 명성을 가까이하지도 말고 악한 짓을 행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 -장자

    문상(問喪)하러 가서 대성통곡하는 것은 자연[天]의 도(道)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받아들여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장자 (학평 제시문)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픈 일인가? 생명이란 본래 자연에서 빌린 것이니 마치 티끌과 같고, 삶과 죽음의 이치는 밤낮의 변화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자연스런 변화를 바라보노니, 그것이 내게 왔다고 해서 어찌 싫어하겠는가. -장자 (모평 제시문)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삶과 죽음은 명(命)이다. 대자연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장자 (모평 제시문)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鴻毛) 같다(Loyalty is like a mountain, and death is like a red hair)9


    이 속담(俗談)의 의미는 "의리는 산(山)같이 무겁고, 죽음은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볍다"(Righteousness is as heavy as a mountain, and death is as light as a goose's feather)는 뜻으로, 의리(義理)를 위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의리(義理)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뤼순 감옥"(旅顺监狱)에 투옥돼 있을 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뜻은 ''이익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국가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Think about what's right when you see a profit, and if you see a country at stake, give it your life)는 글대로 국가를 위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나 사회가 곤경 또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부귀나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사회 불신과 갈등, 혼란만 키우게 된다.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만 탐할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본명. 조성녀 趙姓女)는 아들 '안중근' 의사(義士)에게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My son, die with honor for your country!)고 말하였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일본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배신은 내부(內部)에서 시작된다. 내부가 무너지면 외부( 外部)는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다. 이것을 "내파(內破 implosion)와 외파(外破External break)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말씀하신 "최후의 성만찬"(Last Supper) 앞에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背信)을 당하셨다.

    그 이름 '가롯 유다'(Garrot Judas)이다.

    그는 은(銀 silver)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가롯 유다'(Garrot Judas) 가장 불명예를 남긴 역사의 죄인이요, 가장 불행한 이름, 가장 슬픈 이름을 남겼다.

    첫째, , 이력(履歷)이 불명예롭다.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背信者)이다.

    둘째, 유산(遺産)이 불명예롭다. 은 30냥으로 ''피의 땅 아겔다마"를 샀기 때문이다.

    셋째, 죽음이 불명예롭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自殺)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Martyr)는 못 될지언정 역적(逆賊 Rebel)을 스스로 자처했으니 그는 천추만대 부끄러운 존재로, 예수님은 그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4)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의 불행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His bad luck is all of his own doing)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둔 것이다(He has sown the seeds he has sown)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Death is not a period. by 김소엽 시인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우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끝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사 재 미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지겨운 세상, 모든 고통을 순간적으로 끝내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합니 다. 그리고 인생사 너무 재미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어떻게든 죽지 않고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죽으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늘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자는 것과 죽음은 정말 어감이 다릅니다. 자는 것은, 마치 쉬는 것과 같습 니다. 자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 을 때, 저들은 홀연히 죽음이 쉼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기분좋은 쉼표입니다. 잘 자고 일어나면, 지난 날의 피로가 다 풀려, 새롭게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 럼,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쉼표’로 만들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 려 드립니다. 샬롬. 2021.04.04.



    죽음이 인생에게 말하는 것

    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 연구소


    인간의 실존, 유한하고 때론 무력한 존재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실존적인 특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와 무력한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으로 인해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보다는 살아가야 함에 대한 깊은 무게와 걱정이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갈림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만인에게 공평한 조건이기도 하다.

      Gustav Klimt 18621918 Tod und Leben Death and Life 191015   1805   2005 mm    삶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죽음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이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못다한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클림트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이토록 극적으로 묘사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죽음과 삶', 1910/15, 캔버스에 오일, 180.5 × 200.5 cm,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

    죽음 앞에서 삶을 조우한다는 것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보통은 어떠한 경험보다도 강력한 삶의 역경이다. 죽음이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감의 과정이 더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죽어감의 과정 가운데 수많은 삶의 기억과 생각들이 교차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역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후회는 개념적으로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불만족과 불쾌감을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지적으로 반추하는 경험도 한다Tomer & Eliason, 2008. 그리고 이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통합의 반대 개념인 절망despair으로 다가오기도 한다Erikson, 1963.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에 어떤 후회를 할까? 과거에 대한 후회에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와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과거에 한 일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해 더 후회를 한다Tomer & Eliason, 1996. 예를 들어, 자신이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게 되는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나의 것을 더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대인관계와 관련되는 것 같다. 깨어진 가족관계, 용서하지 못한 타인, 단절되고 고립되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러한 후회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하고 마무리할 것인지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큰 연관이 있다장민희, 정태연, 2018.

    흥미롭게도 이러한 후회는 젊은이들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하다. 토머와 엘리아슨은 백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과거 후회할만한 일을 제시하고 어느 정도 후회하는지 평가하도록 했다Tomer & Eliason, 2005. 그 결과,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충분히 관계를 맺지 못한 것, 친구나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공통된 후회에는 돈의 축적과 같은 것이나 건강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 등이었다.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많은 것을 남겨준다. 죽음은 존재와 삶에 대한 반추를 하게하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추의 힘이 과거의 삶을 후회하게 만들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한 동안 ‘호스피스’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어린 나이에 무턱대고 시작한 연구 주제였는데,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조각판으로 남아있을 만큼 큰 의미이다. 그리고 때로 내 인생의 무게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기도 한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러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현재의 삶을 불평하는 일, 나의 여러 삶의 조건에 불만족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다가올지 모른다. 특히나 내 옆에 소중한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머지않아 큰 후회가 될지 모른다.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일, 내 옆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이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에 반드시 깨달아야할 삶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인생에게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야할 이유와 희망을 제시하는 삶의 역설이지 않을까.mind


    <참고문헌>

    • Erikson, E. H. (1963). Childhood and society (2nd ed.). New York: W. W. Norton.
    • Tomer, A. & Eliason, G. T. (1996). Toward a comprehensive model of death anxiety. Death Studies, 20, 343-365.
    • Tomer, A. & Eliason, G. T. (2005). Life regrets and death attitudes in college students. Omega, 51, 173-195.
    • Tomer, A. & Eliason, G. T. (2008). Regret and death attitudes. In A. tomer, G. T. Elisson, & P. T. P. Wong (Eds.), Existential and spiritual issues in death attitudes, (pp. 159-172). New York: Lawrence Erlbaum Associates.
    • 장민희, 정태연 (2018). 호스피스 봉사 경험이 삶과 죽음 태도 변화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연구, 26(2), 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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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대학원 겸임교수 사회및문화심리 Ph.D.

    전 생애에 걸친 자기(Self)와 정체성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와 문화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연구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에 해외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해외에서 사용하던 외화를 그대로 예금할 수 있었던 제도가 있었습니다.
    으례껏 해외여행을 마친 후에 외환은행 창구에 가서 외화를 그대로 예금을 할 때에 한번은 창구 직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좋겠습니다.
    자주 해외에 나가실 수 있으니......." 
    몹시 부러워하는 투의 말을 들었습니다.

    만일 이 자리에 아직도 영생과 영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영생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죽은 후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만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려면 누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죽었을 때의 사정을 자세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할까요?

    지식을 얻는 과정을 몇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단계
    둘째는 경험의 단계
    그런데 죽음이란 배움의 단계로도 경험의 단계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거나 알려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단계를 "신앙의 단계"라고 합니다.

    신앙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를 신약성경 누가복음 16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호이 오프덴테스 엔 돜세 엘레곤 텐 엨소돈 아우투 헨 에멜렌 플레룬 엔 예루살렘

    개역개정,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새번역,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세상에서 떠나가심' 곧 '죽으심'
    우리말성경,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분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영어NIV,31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영어NASB,31 who, appearing in glory,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영어MSG,31  and what a glorious appearance they made! They talked over his exodus, the one Jesus was about to complete in Jerusalem.
    영어NRSV,31 They appeared in glory and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ι οφθεντες εν δοξη ελεγον την εξοδον αυτου ην εμελλεν πληρουν εν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31 visi in maiestate et dicebant excessum eius quem conpleturus erat in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31 אשר נראו בכבוד והגידו את אחריתו אשר ימלאנה בירושלים׃
     
    성 경: [눅9:3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후

    “그 말씀”은 세 가지로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신앙 고백,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누가복음 9장 2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고,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라고 답변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고백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 신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차례로 읽어 보겠습니다.

    8: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16: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9: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막 8:30-31; 마 16:20-21; 눅 9:21-22)

    즉,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역사로 인해 주 예수님의 정체를 바르게 고백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후에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제 삼일에 부활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신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3).

    그리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대표하는 모든 제자들을 앞에서 베드로를 엄중히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마 16:23).

    그리고 그 후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종합하면 이러합니다.

    눅 9:23-25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38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분의 심판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신 말씀은 이제 곧 자신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눅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막 9: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정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뚜렷하게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이요,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며, 곧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임할 것이고, 그 후 예수님께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셔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전한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고, 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 구원하려는 자들로서 도리어 제 목숨을 잃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핵심이 “그 말씀”이고 그 말씀을 하신 후에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29절).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산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하기 전에 이러한 구체적인 복음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산 사건은 ‘세 가지의 메시지를 포함한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건은 환상이나 마음의 내면에서 들은 영적인 음성이 아닙니다. 
    지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으로써 증인들이 있는 사건입니다. 
    이 장면이 실제였음을 먼 훗날에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이 말씀과 사건은 그가 평생 잊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서신 베드로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벧후 1:15-18).

    아무튼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자 모세와 엘리야가 어디선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얼마 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별세의 헬라어 원어는 “엑소더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내용은 과거의 출애굽 엑소더스가 아니라 새로운 엑소더스(New Exodus)였습니다. 
    그들은 “뉴-엑소더스”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뉴-엑소더스는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죄의 심판으로부터, 죽음에서, 병에서, 사탄으로부터, 육욕의 굴레에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이들에게 임할 뉴-엑소더스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졸다가 깨어 부스스한 가운데 이러한 모든 장면을 보게 되고 그들의 대화의 내용을 듣게 됩니다. 이들은 그 광경이 너무나 황홀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황홀함 가운데 헛소리를 합니다.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모세를, 또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위해 짓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함께 놓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과 함께 그곳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고 그 소리가 그치자 엘리야와 모세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참조, 눅 9:35-36).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형은 주의 부활 및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의 상태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을 입증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고난 이후에 있을 분명한 영광을 보게 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영광을 붙들고 더욱 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할 것입니다. 
    또한 더욱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더 생각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칠 것이며 심지어 나의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할 정도로 각오를 한 가운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이 모든 교훈과 사건의 핵심에 ‘별세’가 있고, 그 별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리고 개역 개정이 ‘별세’라고 번역한 원어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엑소더스”입니다. 
    즉, 죄와 사탄과 사탄이 장악한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위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사건에서 영광의 구름 속으로 음성을 들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점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 성령님이 등장하시지만, 이 분들은 “오직 예수”를 증거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오직 예수”만 외치고 생각하도록 힘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분의 장면은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율법, 출애굽)와 모든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선지자, 예언)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곧, 뉴-엑소더스, 진정한 의미의 출애굽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모든 구약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모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까지 약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부활하신 주께서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은 가르침이셨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체를 입고 이 땅에 사십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더 큰 비밀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부활체로 이 땅에 계시면서 가르치신 주의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구약이 자신에 대한 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2-45)

    그리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승천하신지 10일 이후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만유의 왕좌에 즉위하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이 땅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에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임하십니다. 곧,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강림절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는 예수님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신약의 대표입니다. 즉, 구약의 대표들과 신약의 대표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고, 이 모임에서 다룬 핵심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요, 새로운 엑소더스였습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성경 전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한 죄사함 및 영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들 예수님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사실 히브리서 1장 8절을 보면,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 줍니다. 그 구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지극히 높이시는 장면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2:9-11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지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예수가 주로 고백 되어지는 곳에서 받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10일 만에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이 드러나기보다, 그 분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드러내시며 주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바라보고 주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감사와 사랑으로 울렁거리게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더더욱 의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요 15:26-27).

    사도행전을 보아도 성령을 받은 자들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라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즉 성령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내 증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다른 것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임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더욱 알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게 하며 나아가 오직 예수만으로 살며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또한 성령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며 그들을 통한 성령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특히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성령의 성경 해석 방법은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 순교하면서 전한 스데반의 설교, 성령으로 충만했던 빌립의 설교, 또한 바울 사도의 설교를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다름아닌 믿는 자들의 “엑소더스”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순절을 계기로 역사 속에 임하신 이후에, 믿는 자들마다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령을 받은 모든 신약 사도 및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가르침은 모든 성경을 통하여 '오직 예수'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며 그 분의 이 땅에서의 가장 큰 사명은 “오직 예수”입니다. 사도 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바로 “오직 예수”의 사역이시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하나이시면서 “오직 예수”를 외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오직 예수”를 증거하시고 친히 그분의 사역에서도 “오직 예수”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존 라일의 거룩


    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전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날이 있었다. 
    그들은 지음을 받던 때에 가지고 있었던 거룩한 속성을 잃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은총을 잃고 부패하고 무력한 죄인이 되었다. 
    그들의 죄는 그들과 그들의 하늘 아버지 사이에 장벽이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땅한 대로 대하셨다면 그들로부터 나온 인류가 바랄 것은 죽음과 영원한 지옥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에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는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 계시된 때가 바로 그 날이었다. 하나님은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여인으로부터 태어나는 구세주가 마귀를 이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 일을 행하신 분으로 알려진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결코 다른 이름이 없다.

    훗날에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셨던 영원한 영광을 버리시고 불경건한 세상으로 오셨다. 그는 친히 사람의 본성을 취하시고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마땅한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주의 뜻을 지킬 수 없게 되자 그는 사람이 되셔서 그의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 의를 이루셨고 이제 그 의로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셨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와 다시 함께 하게 되셨고, 지금 주님은 그곳에서 진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는 새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 것이며 또한 무엇을 하실까? 그때 그는 이 땅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는 큰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이 세상은 그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에게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입이 그를 주로 고백할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며 결코 사라지거나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온 땅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바다는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죽음과 음부 역시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함에 따라 심판 받을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까? 그리스도는 친히 심판자로 계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매우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세상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생각 속에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는 말씀은 당연하다.

    2.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전부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책에서는 희미하지만 중간 정도에서는 더욱 분명하여지고 마지막 책에서는 완전하게 보인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는 실제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그의 나라는 우리가 성경 어디를 읽든 마음에 두어야 할 주제이다. 그는 성경의 많은 어려운 구절들을 깨닫도록 풀어주는 열쇠이다. 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겠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4-16).

    구약의 동물 희생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이다. 동물 희생은 죄인을 위해 드려진 대속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없앨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또한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을 기억하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아벨이 그의 형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관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다(창 4장). 아벨이 그의 양 떼로부터 그를 대속해줄 제물을 취하여 바친 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 중 하나를 통해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그가 생각하고 있던 자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

    이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다.

    야곱이 임종하면서 그의 아들들에게 예언으로 말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모든 의식법은 장래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설계되어 있었다. 아침과 저녁 제사, 끊임없는 피 흘림, 장막, 대제사장, 유월절, 속죄일, 아사셀 양 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모형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후 광야에서 날마다 체험했던 모든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하늘로부터 내려진 만나,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 독뱀에 물린 자들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바라보았던 구리뱀 등,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속성을 가르치도록 의도되어 있었다(고전 10:4).

    곤경에 처한 주의 백성을 구원한 모든 사사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다윗 왕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왕으로 택함 받았지만 그는 영광과 존경을 받지 못했고 자기 백성의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박해를 당하였다. 하지만 결국 승리를 거둔 위대한 왕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상기 시킨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2-16).

    이사야로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때는 그의 고난을, 또 어떤 때는 그의 영광을 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동되어 어떤 때는 겸손하게 오시는 주의 초림에 대하여, 또 어떤 때는 영광 가운데 오시는 주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의 초림과 재림을 한꺼번에 보면서 마치 그 둘이 하나인 것처럼 언급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마음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었다.

    신약은 그리스도로 가득하다. 복음서는 그의 백성 가운데 사셨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사도행전은 초대 신자들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서신서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설명하여 주고, 계시록은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어떻게 마무리 하시는지 그 종말을 묘사하여 준다.

    당신이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모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당부한다!

    나의 독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필자가 한 말을 통해 죄인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 외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은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을 배우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행한 어떤 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가 전부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바꾸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직접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파선된 배의 선원을 구하는 것은 구조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에 실제로 타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을 구하는 것은 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빵을 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그가 구세주라고 믿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당신을 주께 헌신하여 드림으로 당신과 주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이다. 당신은 “내가 믿음과 신뢰 가운데 주께 나아왔고 그를 나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의 구세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자.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큰 평강을 얻게 될 것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참조, 히 12:14)는 말씀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 존 라일.<거룩> 제 20장에서 발췌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들은 거듭난 후에도 오직 예수를 믿을 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3-5).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곧 주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거듭났으니 “내 안에 거하라” 즉, 나를 믿으라.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화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수 많은 열매들입니다.     

    바울 서신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바울의 서신에는 거의 매 절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표현되어 있으며 쉬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이는 너희들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의미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이름으로 인한 죄 사함”은 단순한 법적 죄 사함에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께서 죄 사함을 선포한 자들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에 의한 죄 사함의 선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양심의 변화와 성령의 도우심이 보장된 죄 사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음욕에 물들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어떻게 그 죄로부터 자유로운 여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평생 죄악에 물들었던 38년된 병자가 어떻게 죄 사함 받은 후에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나누었던 ‘별세’, 곧 참된 엑소더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의 죄 사함을 위한 것으로써 그 안에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부활의 권능이 포함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이 사실을 확증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5-7)

    이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의 남은 삶에, 그리고 주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의 장래에, “오직 예수”로만 살아감으로 참된 승리의 엑소더스를 늘 누리는 영광된 주의 백성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곡하게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문에서 보면 여기에는 아주 특이한 세 가지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표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첫째. “장차 ~하실”(ἤμελλεν)

    이 단어의 본 뜻은 ‘임박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이 확실하게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는 사건은 반드시,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둘째. “것을”(πληροῦν) 

    이 단어는 본래 ‘계속적으로 채워짐을 통하여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의지적 죽음임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셋째. “별세”(ἔξοδον) 

    이 단어는 ‘~으로부터 벗어남’을 가리키는 단어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이 땅의 삶으로부터의 벗어남, 죽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출애굽의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변화된 이 장면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또한 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장차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구속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와 엘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구속자가 아닙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주(主)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던 제자들은 곤하여 졸다가 산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33절).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황홀한 광경에 압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 밑에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를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저 산 밑으로 다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이 영광스러운 상태로 여기서 머물러 있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참 모습과 그분의 사역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얼마 전에 예수님 앞에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마16:16).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을 막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마16:23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영적 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함께 있는 야고보와 요한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황홀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이 와서 저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본문 35절에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말과 엘리야의 말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전한 말도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는 저들은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저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를 중심으로 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 즉 그분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36절에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의 사명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저들은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엘리야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흥분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저들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인도하는 참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바라보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우리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비록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우리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11월 8일(토) 누가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마 동안 떠나니라(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얼마 동안(아우투 아크리 카이루) αυτου αχρι καιρου 
                                                            846    891   2540

    846. 

    αὐτός, ἡ, ὁ Storng number846
    1.

    자신[다른 것으로부터 개인을 떼내어 강조

    2.

    막12:36

    3.

    예수

    Pronunciation [ autŏs ]
    Etymology
    [재귀] αὖ에서 유래

    891. 

    ἄχρι, ἄχρις Storng number891
    1.

    시간: ~까지

    2.

    3.

    αὐ- γῆς: 해뜰 때까지

    Pronunciation [ achri ]
    관련 성경
    …에 이르러(행13:6), 만에(행20:6), 동안 (눅4:13), ~도록(계2:10).
    2540. 

    καιρός, οῦ , ὁ Storng number2540
    1.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Pronunciation [ kairŏs ]
    Etymology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때(마8:29, 눅8:13, 딤후3:1), 날(마16:3, 눅1:20, 고후6:2), 세월(골4:5), 연대(행17:26), 틈(행24:25), 현재(롬8:18, 히9:9), 기회(갈6:10), 항상(엡6:18).






  •  떠나니라(868)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누가복음 4:13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풀이하면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st, he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이 되겠습니다. 
    얼마동안이라도 번역된 이 단어의 헬라어는 단순하게 “αχρι καιρού”입니다. 
    즉, until [opportune] time이 되는 것입니다. 
    opportune 이란 말은 ‘기회가 좋은, 형편이 좋은, 적절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을 일단락하고 다시 적절한 때에 다시 오기 위해 떠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누가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매우 주의깊에 이 단어를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언제 적절한 때가 될까요? 바로 누가복음 22:3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많은 분들은 유다에게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꼬임을 받아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누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번에는 유다를 시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유다에게 먼저 들어가서 유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인해 사탄의 시험받은 사람을 나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시험을 당한 이란 말보다 공격적입니다. 사탄은 감히 예수님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유다에게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주님이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유다도 어떤 나쁜 이미지로 변모할 이유가 전혀 없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누가는 유다를 언급하여 “열둘 중의 하나”라고 적었습니다. 이 말은 열 두명의 사도중의 한 명이 바로 유다이며 그는 여전히 열둘중의 한 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사탄의 시험을 당했지만 열두 사도의 의심할 수 없는 명단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사고중에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꾸미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명령없이 활동할 수 없다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기부여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막중의 사명의 한 일무였던 것입니다. 사탄이 유다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오히려 유다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 사탄으로 인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섭리가 있었음을 알리고 유다를 변호하고자 하는 누가의 기록의도를 알아차리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잠시동안 떠납니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사탄은 다시 시험을 시작합니다.
    마귀는 저희도 시험합니다. 
    하나의 시험을 잘 통과하면 잠시동안 평온하다가 또 다른 시험을 주어 쓰러뜨리려 합니다. 
    마귀의 시험은 저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맞닥뜨립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나 혹은 믿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첬을 때에나 시험은 저희에게 다가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음을 통하여 저희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찌보면 마귀의 시험은 달콤하며 지름길로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원하는 재물과 능력을 겸하여 주겠다는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주님의 자녀는 그런 지름길을 택해서는 결코 않됩니다.

    때로는 원치않는 인고의 시간을 지날 때도 있는 그런 굴곡있는 저희 삶의 과정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야 하며 지나고 나면 한결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저희는 오죽하겠는가요.

    순간순간 마귀는 저희를 시험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자녀인지를 시험합니다.

    마귀는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자녀가 받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1. 시험 받는 요인

    정욕과 교만과 탐심이 저희가 시험받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요일2:15-16) 누구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엡6:12) 저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저희를 힘들게 하는 시험의 근원은 악의 근원인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웅크리고 숨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사용하여 저희를 힘들게 합니다.

    2.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적하셨습니다. 

    저희 또한 성령과 말씀 안에 조화를 이루어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         Too much Word and not enough Spirit: you puff up in the sense of pride

    ·         Too much Spirit and not enough Word: you blow up

    ·         With the Word and the Spirit together: you grow up

     

    말씀의 능력:

    저희에게 성령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시험이 임했을 때에 능히 이겨내게 합니다.

    주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주님 말씀의 능력은 저의 영혼육에 임합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이 저희에게 임하면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추악하고 더러운 죄성을 도려냅니다. 병으로 앓고 있다면 말씀의 능력이 환부를 도려낼 것입니다. 말씀은 저희의 영혼육의 연약함을 드러내어 환부를 도려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하세요. 주의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세요. 왜 한 입에서 저주의 말을 하십니까? 

    주님의 자녀인 저희의 입에서는 복된 주님의 말씀이 선포됨이 마땅합니다. 말씀에 무지한 자가 아니라 유식한 자가 되세요.


    기도에 게을리해서는 않됩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저희 주변에 널려 있어 기도를 방해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세상으로 유혹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어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어 성령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어 드려진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3. 감당할 시험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믿음의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내에서 욥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만일 저희에게 욥이 겪은 시험이 임하면 견디어 낼 자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의 육신은 연약하여 유혹이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닥치면 전전긍긍하며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제가 감당할 만하여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만일 저희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면 결단코 저희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욥이 겪은 극단적인 시험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만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만큼 인정하셔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저희 안에 내주하십니다. 제가 시험을 겪을 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용기를 주시며 피할 길을 내사 능히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어려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연약한 저희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저희를 마귀로부터 지켜주시고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인도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아멘.

     

    4.     시험의 근원인 마귀를 대적하라

    예수님을 손대지 못한 마귀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지만 밀어서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가 마귀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마귀는 그럴듯한 의견을 내세우며 저희를 유혹하며 시험합니다. 이를 취할지는 저희 몫이며 선택입니다. 저희를 힘들게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저희가 결단하고 대적하면 마귀는 피해서 물러갑니다.

    (약4:7)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찿나니


    마귀를 대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저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에 있는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며,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님을 믿는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저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선포하는 것이 이루어 집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도 주님의 이름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음껏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며 선포하세요.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기세요. 

     

    5.     돕는 은혜를 받으려면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4:15) 모든 일에 저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저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저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입니다.

    ·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세요. 성령님은 깊이 감추어진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        육신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인 기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의 영적인 소통을 하는 기도를 통해서 저희의 영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님께서는 저희의 영을 주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은혜를 받아 예배를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하세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게 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품어 안으시며 지켜주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역을 시작하며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저희 역시 많은 시험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시험을 저희에게 줄 것입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마귀를 대적하여 시험을 이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하섰습니다.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시험을 잘 통과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저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시험을 받는 장소는 광야입니다. 
    여러분 “광야”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느낌이 듭니까?
    메마름, 목마름, 무서움, 삭막함, 외로움, 두려움, 고독, 위험이 가득함 
    낮의 사진을 보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밤이 되면 두려움이 커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경험하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광야의 시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서 통과하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힘든 상황을 광야같다고 말하기고 합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연단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광야를 주십니다.
    군대 생활이 마치 광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금식 이후에,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습니다.

    1.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하나님 말씀으로 살라 (신 8:3) /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삶의 원리

    2. 내게 절하라하나님께 경배하라 (신 6:13) /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의 원리 

    3. 뛰어 내리라 -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 : 광야로 인도한 하나님을 원망. 영적 원리 

     

    첫째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물질적인 시험입니다. 생존을 위한 의식주 욕구를 들면서 이 세상은 먹고 살아 가는 것에 만 초점을 맞추도록 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의식주가 전전 인 것 처럼요. 돈 버는 일은 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대항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말씀은 영적 양식, 기도는 영적인 호흡 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과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러한 유혹과 시험이 있을 때 말씀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 신앙적인 문제에 관한 시험입니다.

    사탄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다 준다고 유혹을 합니다.

    세상의 달콤한 거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을 지켜 나아가야 한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꿈꾸며 달려 가고 있나요?

    내 앞에 빛나는 정치적 지위보다 내 마음 속에 빛나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정의” 단어를 좋아하며, 여기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좋아하고, 불의가 있을 때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의 상황에 처했을 때, 정의를 버리기도 합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갑질하는 사람들

     

    셋째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고 합니다. 세상의 영웅으로서의 영광을 누려보라고 합니다. 허영과 야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세상의 영광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지 않고 섬기려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가치관은 삶에 영향을 줍니다. 돈을 최고로 가치로 둔다면 돈을 중심으로 재편이 될 것입니다.

    돈에 대한 강의, 돈에 대한 책,

    영적인 가치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경남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십계명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기존의 가치관이 아닌 영적 가치관으로 나를 돌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의 직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나만의 은사,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벧전2:2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두 질문에 “아니요” 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 이면 해야죠. 기독교인은 정의와 진리 편에 속해 있어야 하니까요.

    기도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 가면서 많은 유혹과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정의와 진리 편에 속해서 세상과 당당하게 싸우는 용사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얼마 동안 떠나갔다(누가복음 4:1-13)

     

    첫 번째 시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셔서 굶주리셨던 예수님에게 광야에 널브러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존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광야의 널브러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은 단순히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돌은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지 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마귀의 교묘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굶주림의 문제나 먹고 사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돌멩이를 빵으로 만드는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것으로 데려가서는 세상 권세의 화려함과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약속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성공에 대한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고는 이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엎으려 절하라 유혹합니다.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은 자신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경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방식 대신 마귀의 방식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탐욕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부귀영화나 성공에 대한 욕심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방식과 말씀 대신 마귀의 방식을 따라 살게 합니다.


    인간의 탐욕을 이용하여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마귀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약육강식, 승자독식,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상관하지 않는 결과주의가 세속의 방식이며 마귀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 없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눅4: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힘이 있는 자는 약한 자를 돕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나누어주며, 권세를 가진 자는 그 권세를 약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거기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시편 91편의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예수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해 줏실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 말씀을 이용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귀의 시험이 없는 청정구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더 치열한 시험과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죽음의 말씀도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종교 지도자가 자신들이 바라고 원하는 목적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함부로 남용하거나 제멋대로 오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의 본질은 신비한 이적을 보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놀랄만한 이적이나 신비한 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조롱하고 세상이 멸시하고, 세상이 저주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보다 더 성공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성공하거나 부자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보다 더 겸손하면 되고, 지금보다 더 낮아지려고 하면 되고, 지금보다 더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누가복음은 세 번에 걸친 시험으로도 예수님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마귀가 잠시 떠나갔다고 기록합니다.눅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나갔다는 말씀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과 영적 도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금이 비록 유혹에 실패하여 잠시 떠나가지만, 우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는 마귀는 언젠가 또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선 마귀를 단순히 악한 귀신 정도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마귀 또는 사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권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회 구조나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자기중심적 욕망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마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났다는 말씀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는 시험은 또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우리가 시험에 빠져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의 시험을 물리쳤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시험이 또다시 반복한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험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시험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한두 번 시험에 빠져 넘어졌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여 더는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권세와 영적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한두 번의 실수나 실패로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도 다시 쓰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죄와 악의 권세가 영영 사라지는 완벽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과 끊임없이 씨름하고 싸우는 과정을 통해 죄악된 권세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잠시 물러간 시기일수록, 우리는 더욱 깨어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전쟁은 가장 평화로울 때 준비하는 것이지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 준비하면 늦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쫓겨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사람에게서 쫓겨난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자기가 머물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마귀가 찾아다닌 물 없는 곳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영적으로 메마른 영역을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다녀도 마땅히 거할 곳을 찾지 못한 더러운 귀신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이 쫓겨난 사람을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다시 찾아간 사람을 보니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집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더러운 귀신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서 쫓겨난 더러운 귀신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돈이기도 하고, 성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도박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과시 욕구나 인정욕구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취약한 부분은 한 번 유혹이나 시험을 물리쳤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귀는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물고 늘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반복되는 마귀의 유혹에 결국 넘어지고 맙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받게 되는 시험과 유혹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났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임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시험과 유혹은 우리가 넘어질 때까지 우리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시험을 물리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능히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며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살 때 악의 힘은 끝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1월 7일(금) 누가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아들(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始作(시작)할 때에 三十歲(삼십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以上(이상)은 헬리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누가복음 4: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마태복음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률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한복음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중 족보, 요셉의 두 아버지

    마태복음 1:15-16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엘르아살은、맛단을 낳고、맛단은 야곱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성경에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족보의 비밀은 그 가족만이 아는 것입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 그 집안사람이 족보의 내력을 알려주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남의 집안 족보의 비밀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족보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으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때가 되면 성경에 숨겨지고 감춰있던 것이 다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세상의 비밀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비밀도 다 드러나게 됩니다. 
    개개인의 비밀도 말할 것 없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총리나 장관을 한번 하려면 국회 인준을 받기위해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이 밝혀지는데 심지어는 몇 년 전, 몇 십 년 전에 돈 받은 것까지도 다 들어나게 됩니다. 

    성경에 지금까지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알 수 없었던 은비한 비밀들이 많이 있는데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심같이 이제 때가 되어 이 모든 사실들이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이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내게(예수) 대하여 증거한 것이니라.

    예수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를 안다는 것은 곧 성경을 아는 것이고 성경을 바로 알고 믿을 때에 우리가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족보에 관한 비밀은 성경의 깊은 말씀 중에서도 아주 깊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족보에 관한 비밀을 알아야 성경의 깊은 오묘한 뜻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두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가 두 사람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며 놀라운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16 
    야곱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태복음에는 분명히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헬리의 이상은 맛닷이요.

    이상이라는 것은 아비를 뜻합니다. 

    이상(5207)  휘오스(hüiŏs) υἱός, οῦ , ὁ

    1.  아들.  2. 사람의 남자 자식.  3. 동물의 수컷 새끼  
    Pronunciation [ hüiŏs ]

  • 관련 성경  /  자손(마1:1, 막12:37, 고후3:7), 아들(마1: 21, 행7:29, 계12:5), 새끼(마21:5), 인자(막14:41), 자녀(눅20:34,36), 자식(요17:12), 족속(행5:21), 후손(행13:26).

  • 누가복음에는 분명히 요셉의 이상(아비)이 헬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헬리가 요셉의 아버지이고 마태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인 것입니다. 
    야곱하고 헬리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나단과 솔로몬이 있었는데 솔로몬으로부터 나오는 족보는 마태복음 족보
                                                                      나단으로부터 나오는 족보는 누가복음 족보

    야곱의 아들 솔로몬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족보에는 야곱에 의해서 요셉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기록된 나단으로 시작한 족보에서 또 요셉이 탄생했다면 이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데 마태복음에 기록된 야곱의 아들 요셉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헬리의 아들 요셉은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으로부터 나단의 혈대는 요셉까지가 42대 이고, 다윗으로부터 솔로몬 혈대는 요셉까지가 27대입니다. 
    다윗의 아들 나단과 솔로몬으로 나누인 두 혈통이 나단의 42대 아들하고 솔로몬의 27대 아들이 절대로 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버지(다윗)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아들들이 수십 대가 지나서 한 아들을 낳았다면 말이 됩니까? 
    그건 불가능 한 일이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이 성경에 예수의 두 가지 족보의 비밀로 기록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 두 가지 족보에 관한 비밀을 성경 상으로 지금 까지 어느 누구도 말한 사람이 없었고, 해석한 자도 해석할 자도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요셉의 두 족보에 관해서 마태복음 족보는 좀 간단하게 기록했고 누가복음 족보는 좀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내용의 본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해석입니다. 
    마태복음 족보하고 누가복음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름들은 많이 익혀진 이름들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족보에 나와 있는 이름들은 전부 생소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어떤 족보가 진짜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두 족보에 관한 비밀은 사람이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족보 속에 놀라운 씨앗의 비밀을 숨겨 뒀습니다. 
    족보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곧 씨앗의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누가복음 족보와 마태복음 족보가 대수도 다르고 사람들도 전혀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대수로 이어 졌는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5:5~6 
    형제가 동거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요. 
    그 과부가 된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고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게 되면 자신의 족보에 올리지 말고 대신한 형제의 이름으로 그 아들을 족보에 올려 대를 잇게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형님이름으로 대를 잇게 하여 그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형제가 셋인데 첫째 형이 죽어 그 형수를 둘째 형이 취했는데 둘째 형이 또 죽었다면 셋째가 둘째 형수 방에 또 들어가서 아들을 낳게 하고 대를 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대를 잇게 하는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5:7-10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 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그 아우가 그 형수를 취해서 형제 된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수와 동침에서 첫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호적에 형의 아들로 올려서 그 대를 잇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이 같으면 한 형제라고 봅니다. 
    조상이 같으면 형제라고 보기 때문에 형제같이 지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마 1:16) 솔로몬의 혈통입니다. 
    나단과 솔로몬은 다 같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에게부터 나단과 솔로몬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갈라져서 두 줄기로 나온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요셉의 아비 야곱은 솔로몬의 25대 후손이고 누가복음에 기록된 요셉의 아비 헬리는 나단의 40대 후손입니다. 
    다윗이 나단과 솔로몬을 낳았는데 나단의 40대 후손과 솔로몬의 25대 후손이 같은 사람(요셉) 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헬리는 나단의 후손이고 야곱은 솔로몬의 후손인데 다윗 이후 혈통도 혈대로 전혀 다른데 어떻게 한 사람의 후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인데 어떻게 해서 헬리의 아들이 되느냐 아니 어떻게 해서 헬리의 아들이 됐는냐 하는 겁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이 같으면 한 형제로 생각합니다. 
    비록 먼 형제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같은 형제입니다. 
    형의 형수가 아들이 없으면 동생이 그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말씀이 기록됨같이 헬리가 자식이 없이 죽자 야곱이 헬리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요셉)을 낳았지만 족보에는 헬리의 아들로 기록하고(눅 3:23) 실제적인 혈통은(마 1:16) 야곱의 혈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비 야곱이 헬리의 집안에 가서 헬리 대신 자식을 낳게 해줘서 대를 잇게 해준 겁니다. 
    헬리가 죽어서 자식이 없었음으로, 야곱이 과부된 헬리의 부인과 동침해서 낳은 자식이 요셉이었다는 겁니다. 
    형이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시동생이 형부인과 동침을 해서 아들을 낳았지만 호적에 동생 이름으로 해야 되는데 형의 아들로 호적에 입적하니 형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지만, 헬리의 아들이 된 것은 그 아버지가 헬리의 집안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 겁니다. 
    자식을 낳아 주었기 때문에 요셉은 두 아버지를 가진 겁니다. 
    자기를 낳아준 친아버지는 야곱이고 헬리 집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 것은 비유를 말하면 야곱의 형님 집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두 아버지가 생긴 겁니다.

    야곱은 요셉의 진짜 아버지이고 헬리가 아버지가 된 것은 명목상으로만 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호적에 올려져있는 대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야곱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와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가 다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명분상의 족보이고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실상적인 족보라는 것입니다. 
    호적상으로는 헬리가 요셉의 아버지이나 실상은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인 것입니다. 
    솔로몬 족보에 있는 사람이 나단의 족보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 것입니다

    요셉의 이중 족보에 관한 비밀은 정말로 심오합니다. 
    구약시대에도 희한하게 야곱의 12아들 중 11번째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꿈을 잘 꾸었는데 꿈으로 인해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아버지 야곱이 가족 70명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찾아와서 같이 살다가 야곱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그 소식을 들은 요셉므낫세에브라임을 데리고 병문안을 가게 됩니다.

    창세기 48:1 
    이 일후에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리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이스라엘은 야곱이 받은 새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야곱이나 마찬가지 이름입니다.

    겨우 일어나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야곱이 옛날부터 하나님께 받았던 축복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야곱이 네가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아들이라. 
    마치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아들이 된다는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는 손자를 아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며 르우벤은 첫째 아들이고 시므온은 둘째 아들인 것처럼 내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마치 장자와 차자와 같이 손자를 아들 반열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장자와 차자의 위치를 뒤바꿔 축복을 하게 됩니다. 
    또한 두 아들은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라고 하며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라고 하여 요셉을 무자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후에 아들을 낳으며 네 아들을 해라. 했지만 후에 요셉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 하리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요셉은 아들이 없는 홀아비가 된 거고 요셉의 부인 아스낫은 애굽의 보이베라의 제사장의 딸이였는데(창 41:45) 아스낫은 아들이 하나도 없는 자가 되 버린겁니다. 
    영적으로 처녀 총각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요셉은 총각 상태가 되고 아스낫은 처녀 상태가 된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아들을 낳으면 네 아들이라고 되리라고 했지만 이후에 아들 낳은 사실이 없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이 후에 아들을 낳으면 네 아들이 되리라고 했는데 요셉은 그 이후에 아들을 낳지를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훗날에 되어질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창세기 49:1에 보시면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훗날에 당할 일을 알려준다고 해 놓고서 요셉에게 대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제 아들이 없는 자입니다.

    창세기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샘 곁의 가지이니 물이 많으니까 가지가 얼마나 잘 자라겠습니까?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야곱의 전능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로부터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버지에게 빼앗겨 아들이 없지만 야곱은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반석인 되시는 목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다 라고 예언을 하지만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태어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예수)가 야곱의 아들인 요셉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5-16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엘르아살은、맛단을 낳고、맛단은 야곱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스라엘 반석이 되시는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나셨단 사실은 실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신묘막측한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반석이신 목자가 날 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신약시대에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이스라엘 반석이신 목자가 나시므로 성취되는 성경의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경이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아들로 기록된 구절이 한 구절 있고 요셉의 아들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의 아들로 기록된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므온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 하였고 여러 선지가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성경 상으로 볼 때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이스라엘 반석이 목자가 나도다 고 기록된 예언과 같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22~23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 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 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구약의 역사는 그림자적인 것입니다. 요셉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다 뺏기므로 아들이 없었고 후에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되시는 아들을 낳는다고 했기 때문에 구약의 요셉이 아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요셉도 아들이 없는 총각이 된 것이고, 제사장 모디바의 딸 아스낫 대신에 마리아가 예수를 성탄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아들도 되고 요셉의 아들도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경적으로 보면 마리아의 아들이기도 하고 요셉의 아들이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면 이중 족보입니다. 
    실상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하면 요셉의 아들이지만, 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 되기도 하고 헬리의 아들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이중 족보의 비밀로 오셨고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섭리도 성경에 그림자적으로 나타낸 것 같이 이중 족보의 비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하면은 김씨, 이씨, 박씨 각자 성씨집안의 아들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큰 비밀은 성경으로 볼 때에 솔로몬을 통한 27대 족보하고 나단을 통한 42대 족보하고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가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데 하나가 된 것은 희한안 일입니다. 
    그것도 성경에 맞지 않고 친형제 같으면 서론에(신 25:5-10) 성경에 읽어준 대로 봐서 말이 되는데 집은 딴 집안인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이 자기의 집안이 아닌 헬리의 집안으로 가서 자식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그러나 실상은 헬리의 아들이 아니고 야곱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중 족보를 통한 예수의 출생비밀을 깨달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귀한자녀로 축복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1:16, 눅3:23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계보,요셉족보)인가? 
    헬리(=마리아족보)인가?


    마1:16, 눅3:23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계보,요셉족보)인가? 헬리(=다윗의 아들 나단의 계보,마리아족보)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다 보면 마1:16절과 눅3:23절을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신 분들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동일한 인물인 요셉(=마리아의 남편)을 두고

    마1:16절은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Jacob)'이라고 하고, 눅3:23절에서는 요셉의 아버지가 '헬리(=Heli)'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마1:16)

    ('And Jacob begat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눅3:23)

    ('And Jesus himself began to be about thirty years of age, being (as was supposed) the son of Joseph, which was the son of Heli,')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부계족보를 위주로 설명하였고, 누가복음은 모계족보로 설명하였습니다.

    참고로, 마1:16절의 begat(=beget의 과거형)과 born(=bear의 과거분사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문법상 '어머니'가 '주어'로 사용되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bear인 것에 반해서, 

    여기서 사용된 단어인 beget'아버지'가 '주어'로 사용되어서 아이를 낳았다고 사용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의 영문법상의 사용예)

    She bore her son yesterday. (그 여자는 어제 아들을 낳았습니다.) *bore는 bear의 과거형

    He begat his son yesterday. (그 남자는 어제 아들을 낳았습니다.) *begat은 beget의 과거형

    beget의 경우이든 bear의 경우이든 모두 친부모의 경우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이런 영어식 구분의 용법을 영어킹제임스성경은 정확히 표기하여 독자의 이해를 정확히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용례를 현대영어를 사용하는 영어성경들(NIV,RSV...)은 모두 버렸습니다.

    참고로, 이 차이를 아시려면 아래의 관련 성경본문링크를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biblehub.com/matthew/1-16.htm

    첫째,

    마태복음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부계혈통의 족보(=다윗의 아들들중의 하나인 '솔로몬' 계열로 요셉까지 내려오는 족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마1:15-16)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Jacob, 요셉의 친아버지) -> 요셉(예수님을 기른 목수 아버지)

    둘째,

    누가복음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계혈통의 족보(=다윗의 아들들중의 하나인 '나단' 계열로 마리아까지 내려오는 족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헬리는 맛닷의 아들이요, 맛닷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멜기의 아들이요,

    멜기는 얀나의 아들이요, 얀나는 요셉의 아들이요,'(눅3:23-24)

    ... 맛다디아 -> 요셉 -> 얀나 -> 멜기 -> 레위 -> 맛닷 -> 헬리(=Heli, 요셉의 장인) -> 요셉(예수님을 기른 목수 아버지)

    보신 것 처럼, 야곱과 헬리는 서로 다른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길러주신 목수인 아버지 요셉의 혈통상의 친아버지는 마1:16절의 야곱(=Jacob)이며,

    요셉의 또 다른 법적인 아버지(=장인)는 눅3:23절의 헬리(=Heli)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동양권에서 사위가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유대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눅3장의 두 족보를 잘 살펴보면

    아담과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내려오다가 다윗의 아들들 중 솔로몬,나단에서 각각 부계족보(='요셉'까지 내려가는

    예수님의 족보)와 모계족보('마리아'까지 내려가는 예수님의 족보)라는 두 갈래 물길(=stream)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계족보(=요셉의 혈통상의 아버지 야곱)는 다윗 -> 솔로몬(마1:6)의 계보를 타고 내려가고,

    모계족보(=요셉의 법적인 아버지 장인 헬리)는 다윗 -> 나단(눅3:31)의 계보를 타고 내려갑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6)

    ('And Jesse begat David the king; an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엘리아김은 멜레아의 아들이요, 멜레아는 메난의 아들이요, 메난은 맛다다의 아들이요, 맛다다는 나단의 아들이요,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요,'(눅3:31)

    ('Which was [the son] of Melea, which was [the son] of Menan, which was [the son] of Mattatha, which was [the son] of Nathan, which was [the son] of David,')

    아직 예수님의 부계족보와 모계족보라는 두 갈래의 큰 물줄기가 잘 안 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삼하5:13-16절을 보여드립니다.

    여기서 '솔로몬'과 '나단'은 모두 다윗의 아들들임을 확실하게 아실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뒤에 예루살렘에서 첩과 아내를 더 취하였으므로 거기서 아들딸들이 여전히 다윗에게

    태어났는데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또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리아다와 엘리발렛이더라. '(삼하 5:13-16)

    정리하면, 

    예수님은 여자의 씨로 오셨습니다.(창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그리고 다윗의 씨로 오셨습니다.(롬1:3;딤후2:8)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롬1:3)

    '다윗의 씨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복음대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것을 기억하라.'(딤후2:8)

    예수님은 부계(=요셉)족보상으로 다윗의 자손이요, 모계(=마리아)족보상으로도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섭리요 계획이셨습니다.

    아울러 마1:1절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면서 동시에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마1:1)

    그러므로 우리 신약교회의 모든 사람들도 믿음의 도리가운데에서 보면 영적으로 모두가 아브라함의 씨입니다.(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갈3:29)









    예수님의 족보가 소개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그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 족보의 만남에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
    (두 족보의 만남)

     A Meeting of Two Genealogies

    야곱은 요셉의 친(親) 아버지(혈통적 아버지)(마 1:6) 
      이새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헬리는 요셉의 법(法)적인 아버지(눅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 솔로몬 ……… 야곱(혈통적 아버지) → 요셉(마 1:6)

    다윗

    ↘ 나단 ……… 헬리(법적인 아버지) → 요셉(눅 3:23)

     (헬) 법적인 아버지 헬리의 아들 요셉 앞에는 ’to’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헬리의 딸로서 헬리가 아들이 없으므로, 유다 지파인 요셉을 기업무를 법적인 아들로 삼아 마리아와 결혼하였습니다
    (민 27:7-8, 민 36:10-12). 
    따라서 다윗으로부터 갈라졌던 혈통적 자손 요셉(혈통적 아버지 야곱)법적인 자손 요셉(법적인 아버지 헬리)이 다시 만났습니다.

    민수기 27:7-8

  •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찌니라.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기업을 그 딸에게 돌릴 것이요.

  • 민수기 36:10-12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 슬로브핫의 딸 말라디르사호글라밀가노아가 다 그 아비 형제의 아들들에게로 시집가되.
  •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 간고로 그 기업이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었더라.  
  • 구약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3대(代)의 믿음을 인정하여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6, 15, 4:5, 마 22:32, 막 12:26, 눅 20:37).

    출애굽기 3:6, 15, 4:5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하나님, 이삭하나님, 야곱하나님이니라 모세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함하나님, 이삭하나님, 야곱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함하나님, 이삭하나님, 야곱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구약의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에브라임과 므낫세)을 불러서 자신의 아들의 반열에 올립니다(창 48:5-6). 
    이미 열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養子)로 삼은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것을 통해서 요셉에게 장자의 축복을 준 것입니다. 

    창세기 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므낫세는 내것이라 르우벤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율법에서 장자는 두 배의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신 21:15-17),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로 독립적인 지파를 형성하므로, 결국 요셉은 두 배의 몫을 받은 셈이 된 것입니다(대상 5:1-2, 겔 47:13). 
    그리하여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21:15-17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여든.  

  •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  

    역대상 5:1-2

  •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 에스겔 47: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 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마태복음 1:16에서 야곱은 요셉의 아버지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기록되는 당대 최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야곱과 요셉, 그리고 신약의 야곱과 요셉의 관계는 무심하게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 족보에는 ‘야곱’과 같은 대(代)에 해당하는 인물이 ‘헬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6에서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 3:23에서는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요, 
    누가복음에서 요셉의 아버지는 ‘헬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은 요셉이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로, 장인의 족보를 법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의 규정상, 만일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다면 그 기업은 딸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 딸들은 그들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같은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민 27:1-8, 36:1-12).

    마리아의 경우도 아버지 헬리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도 그 기업을 상속했으며, 같은 유다 지파인 요셉과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헬리의 법적 상속인 곧 법적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탈무드에도 마리아는 “헬리의 딸이요”라는 기록이 있으며, 
    시나이의 시리아 사본(The Sinaitic Syriac Manuscripts)은 누가복음 2:4을 “그들(요셉과 마리아)은 다윗의 집 족속이니라”고 밝힘으로 마리아도 유다 지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마태가 요셉의 가계를 기록하고 누가가 마리아의 가계를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 각 복음서 내용과 잘 부합됩니다.

    야곱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축복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대신 들어앉은 자(찬탈자)’입니다. 
    이 이름에는 남을 속이고 남의 자리을 빼앗는 자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적극적인 믿음으로 축복을 획득하는 자라는 긍적적 의미도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정적 의미의 야곱 같은 존재였을 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의지할 때 긍정적 의미의 야곱 같은 존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모계 족보 ↖

    예수 그리스도 ⇚ 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삼하 7:12-13)

    부계 족보 ↙

    사무엘하 7:12-13

  •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 (1) 마태복음 족보에서 41대 까지는 남자가 낳고, … , 낳고(히: 에겐에센, 능동태)의 남자의 후손이였는데, 마태복음 1:16에서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시니라’는 히브리어 ‘에겐에데’(수동태)창세기 3:15의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2) 누가복음 3:23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아는 대로는’라는 의미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낳셨다’는 모르는 사실도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두 족보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낳셨으며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인성(人性)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신성(神性)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하여는 마리아의 절대 순종(마 1:18, 눅 1:31, 37-38)과 의로운 요셉의 절대 순종(마 1:19)을 통하여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갈 4:4). 
    하나님의 구속사을 완성하기 위하여 ‘때를 채우는’ 한 사람의 절대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절대 순종으로 두 족보(마태복음 족보, 누가복음 족보)가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한복음 6:42 - 요셉의 아들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요6:42). 
    요셉이 예수님을 키웠지만,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이므로 요셉이 육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요셉과 주의 모친(어머니)’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했고, 다른 성경들은 부모라고 표현했습니다. 

    KJV는 Joseph and his mother, NIV는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2:33), his parents (2:43) 라 했습니다.

    그 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눅2:43-하단박스)

     

    성경(KJV)은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눅2:43).

    이 구절(눅2:43)을 NIV, RSV, NRS, ASV, NAS.... 등 많은 영어성경들과, 개역, 개정 등 한글 성경들은 parents (부모)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씨로 오셨고 (창3:15),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마1:18, 마1:23).

    남자의 씨로 태어난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습니다.

     

    1. 요셉과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은 여자의 씨이며, 낳은 사람이 마리아 이므로, 마리아는 육신적 어머니입니다.

    반면,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지만 예수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씨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마리아와 요셉’ (눅2:16),

    ‘요셉과 아이의 어머니’ (눅2:33),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 (눅2:43)... 등으로 표현했고,

    ‘아이(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나사렛 사람들은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 불렀고,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눅4:22, 요1:45, 요6:42).

    이것은 오류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요8:42).

     

    요셉은 호적상 아버지로서 양육에 기여했습니다.

     

    2. 요셉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부모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태어났기에 요셉이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니지만,

    양육하는데에 기여했기에 부모입니다.

     

    부모(parents)란 말은

    step father(계부), adoptive father(입양자를 둔 아버지), 양육권자를 포함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양육권자로서 예수님을 키웠고 예수님은 순종했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모(parents)로 표현했습니다.

     

    요셉을 부모(parents)로 표현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양친(parents, 눅2:27),

    그분의 양친 (parents, 눅2:41)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지만 '부모'(parents)는 맞습니다.

     

    마리아가 ‘네 아버지’라고 요셉을 예수님에게 말할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는 하나님”임을 언급했습니다 (눅2:48-49).

     

    그러므로, 요셉을 ‘그분의 아버지(father)’ 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양친 (부모, parents) 라고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3. 요셉의 아버지는 둘인가?

    예수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혈통에는 두 아버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혈통과 (마1:16),
    헬리의 혈통입니다 (눅3:23).

    이는 친 아버지와 장인의 혈통을 따른 것입니다.

    사위가 장인을 아버지라 부르고, 장인이 사위를 아들로 인정하는 까닭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

    사위가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 헬리는 두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세베대의 부인이 된 여자 입니다 (마 27:56, 요 19:25)]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친 아버지 야곱과 장인 헬리의 아들이 됨으로써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다윗의 씨요, 다윗 왕의 왕위를 모두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

     

    마태복음은 다윗 왕의 계보 즉 왕가의 계보를 다루기에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요셉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다윗의 혈통이면서 솔로몬의 혈통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이지만 솔로몬의 씨가 아닙니다.

    [※ 누가복음은 아담까지 거슬러가서 다윗에서 나단으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계보를 증거합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씨이면서 나단으로 이어진 여고니야의 씨이기에 (마1:11, 눅3:31),

    여자의 씨를 따르면, 예수님은 여고니야의 씨가 되어 버립니다.

    [※ 여고나,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은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모순이 생깁니다.

    왕좌를 이어받지 못한 여고니야를 통해 예수님의 왕권이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고니야에 대해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중에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라는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렘22:30).

     

    예수님이 왕권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여고니야의 씨가 아니어야 하는데,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함으로 마리아의 족보에 합법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예수님은 합당하게 요셉의 왕족의 족보를 잇게 됨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관련구절]

    - 요셉과 그 분의 어머니

    * 눅2:43 그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개역, 개정)

    - After the Feast was over, while his parents were returning home, the boy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they were unaware of it. (NIV)

     

    - 여자의 씨

    * 창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

    * 마1:18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을 때에 그들이 함께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밴 것이 드러나매

     

    - 처녀가 아이를 낳다

    * 마1: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 마리아와 요셉

    * 눅2: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 요셉과 아이의 어머니

    * 눅2:33 요셉과 아이의 어머니는 그가 아이에 관하여 말한 그 일들로 인해 놀라더라.

     

    -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

    * 눅2:43 그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 요셉의 아들

    * 눅4:22 모두가 그분에 대해 증언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온 은혜로운 말씀들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

     

    * 요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그에게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대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곧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님이시니라, 하매

     

    * 요6:42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옴

    * 요8: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나아왔기 때문이라. 나는 스스로 오지 아니하였으며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

     

    - 아이의 양친

    * 눅2:27 그가 성령을 힘입어 성전에 들어가니 마침 아이의 양친이 율법의 관례대로 아이에게 행하려고 아이 예수님을 데려오므로

     

    - 그분의 양친

    * 눅2:41 이제 그분의 양친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갔더라.

     

    - 요셉을 ‘네 아버지’라 함

    * 눅2:48-49 그들이 그분을 보고 놀라며 그분의 어머니는 그분께 이르되,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하매

     

    /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

     

    - 야곱이 요셉을 낳음

    *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 요셉은 헬리의 아들

    * 눅3:23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 헬리의 두 딸

    * 마27:56 그가운데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있더라.

     

    * 요19:25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이모요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더라.

     

    - 여고니야

    * 마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 나단은 다윗의 아들

    * 눅3:31 엘리아김은 멜레아의 아들이요, 멜레아는 메난의 아들이요, 메난은 맛다다의 아들이요, 맛다다는 나단의 아들이요,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요,

     

    - 그의 씨는 다윗의 왕좌에서 다스릴 자가 없다

    * 렘22:30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중에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성경비교] 요6:42

     

    요한복음6:42 요셉의 아들 예수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 (흠정역)

    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지 않느냐? 그런데 그가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 (한킹)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라고 말하느냐?" (한국어 권위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개역)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개정)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공동번역)


    And they said, Is not this Jesus, the son of Joseph, whose father and mother we know? how is it then that he saith, I came down from heaven? (KJV)

    They said, "Is this not Jesus, the son of Joseph, whose father and mother we know? How can he now say, 'I came down from heaven'?" (NIV)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1. 성경에 기록된 두 족보

    예수님의 족보는 신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님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합니다.
    • 누가복음 3장 23~38절: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여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 소개합니다.

    두 족보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이는 각각의 기록 목적과 초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합니다.


    2. 마태복음의 족보: 왕권과 메시아 예언의 성취

    1) 족보의 시작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유대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죠.

    2) 특징

    • 아브라함부터 시작: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 다윗을 강조: 다윗 왕조와 메시아 예언의 연결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14대씩 구분: 족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아브라함부터 다윗,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 바빌론 유수부터 예수님까지로 구분합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조의 계승자라는 점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자격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였죠.


    3. 누가복음의 족보: 인간성과 신성을 연결

    1) 족보의 시작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세례 후 족보를 소개하며,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쯤 삼십 세쯤 되셨더라…” (누가복음 3:23)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2) 특징

    •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감: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 거꾸로 진행: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는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올라갑니다.
    •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을 기록: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아닌 나단을 통해 계보를 이어갑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든 민족을 위한 구세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4. 왜 두 족보가 다를까?

    1) 기록 목적의 차이

    •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2) 혈통과 법적 계보

    • 마태복음은 요셉의 법적 계보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 왕조의 합법적 후손임을 보여줍니다.
    •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다윗의 두 아들

    마태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고, 누가복음은 나단을 통해 이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이으면서도, 왕권과 인간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신학적 의미

    1) 인간성과 신성의 조화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임을 증명합니다.

    • 아담과 연결: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 다윗과 연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세대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 다윗, 바빌론 유수라는 굴곡진 역사를 통해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의 절정입니다.

    3)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

    누가복음의 족보가 아담으로 연결되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나타냅니다.


    6.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교훈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족보의 세대들이 때로는 죄로 얼룩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과 신성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죠.



    예수님의 계보

    (1) 요셉의 족보 (마태복음 1장 1-16절, 룻기 4장 18-22절, 역대상 2장 5-15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다말에게서)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살마 / 라합에게서) ‣ 보아스 (룻에게서) ‣ 오벳 ‣ 이새 ‣ 다윗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 솔로몬 ‣ 르호보암 (남유다 1대왕) ‣ 아비야 (2대) ‣ 아사 (3대) ‣ 여호사밧 (4대) ‣ 요람 (=여호람 / 5대) ‣ 아하시야 (6대)* ‣ 요아스 (8대)* ‣ 아마샤 (9대)* ‣ 아사랴 (=웃시야 / 10대) ‣ 요담 (11대) ‣ 아하스 (12대) ‣ 히스기야 (13대) ‣ 므낫세 (14대) ‣ 아몬 (15대) ‣ 요시야 (16대) ‣ 여고냐 (=여호와긴 / 19대 / 바벨론에 포로가 됨) ‣ 스알디엘 ‣ 스룹바벨 (포로 1차 귀환 당시의 지도자 / 성전을 건축함) ‣ (생략)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마리아에게서)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악행을 저지른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왕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아하시야와 요아스 사이의 7대왕은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랴로, 남유다에 우상을 들여오고 다윗의 계보를 멸망시키려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 외에 생략된 이름들이 더 있다.

    (2) 마리아의 족보 (누가복음 3장)

    예수는 요셉의 아들 ‣ 요셉의 위로는 헬리(요셉의 장인) ‣ 그 위는 맛닷 ‣ 그 위는 레위 ‣ 그 위는 멜기 ‣ 그 위는 얀나 ‣ (중략) ‣ 그 위는 나단 ‣ 그 위는 다윗 ‣ 그 위는 이새 ‣ 그 위는 오벳 ‣ 그 위는 보아스 ‣ (중략) ‣ 그 위는 에노스 ‣ 그 위는 셋 ‣ 그 위는 아담 ‣ 그 위는 하나님

    마태복음은 요셉의 혈통,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시대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예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계보는 같으며, 다윗으로부터 양쪽으로 갈라진다. 요셉의 족보는 다윗왕 ‣ 솔로몬 왕(밧세바의 넷째 아들)으로 이어지는 반면, 마리아의 족보는 다윗왕 ‣ 나단(밧세바의 셋째 아들)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데 부모 양쪽 모두 다윗의 계통이다.


    예수의 계보신약성경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1] 마태오의 복음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순서대로 나아가고, 루가의 복음서는 예수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담까지 이어진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이름 목록은 일치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칭호인 '다윗의 자손'을 확증한다. 그러나 다윗 이후로는 두 족보가 크게 다르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7세대를, 루가의 복음서는 42세대를 기록하는데 두 목록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예수의 친할아버지, 즉 요셉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태오의 복음서는 야곱이라고 하고, 루가의 복음서는 헬리라고 한다.[2]

    이처럼 예수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다는 점에 대해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다. 아프리카누스유세비우스[3] 시작으로 한 초대 교부들은 두 족보를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며 이 차이점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했다.[4] 대표적인 가설은 하나(주로 마태오의 복음서)는 요셉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주로 루가의 복음서)는 마리아의 족보일 수 있으며, 또는 하나는 예수의 관습적인 법적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예수가 마리아에게서만 태어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요셉은 단지 법적 양아버지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 요셉과 마리아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또한 요셉과 같이 한 사람이 두 명의 법적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계대결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존 도미니크 크로산 등의 현대 비평 학자들은 두 족보가 모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유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5]

    마태오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튀르키예 이스탄불 카리예 박물관 남쪽 돔 천장에 있는 예수와 그의 선조들을 그린 그림. 예수의 계보를 표현하는데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방식인 이새의 나무.

    마태오의 복음서 1:1–17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로 시작하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모두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의 유배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로 이어진다.

    마태는 예수의 칭호인 '그리스도'를 복음서의 시작부터 강조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기름부음 받은 왕의 의미를 가진다. 마태는 예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제시하며, 그가 다윗 왕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를 부르며 그의 왕족 혈통을 나타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그가 이스라엘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두 표현에서 '자손'은 '후손'을 의미하며, 야훼가 다윗과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상기시킨다.[6]

    여러 사본들에서 마태의 서론적 제목(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출생의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후에 나오는 족보를 위한 제목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같은 구절이 족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70인역 성경과도 일치한다.[7]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른 예수의 계보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 아브라함
    2. 이사악
    3. 야곱
    4. 유다 & 다말
    5. 베레스
    6. 헤스론
    7. 암미나답
    8. 나흐손
    9. 살몬 & 라합
    10. 보아스 &
    11. 오벳
    12. 이새
    13. 다윗 & 밧세바

      다윗에서 바빌론 유수까지

    1. 다윗 & 밧세바
    2. 솔로몬
    3. 르하브암
    4. 아비야
    5. 아사
    6. 여호사팟
    7. 요람
    8. 우찌야
    9. 요탐
    10. 아하즈
    11. 히즈키야
    12. 므나쎄
    13. 아몬
    14. 요시야

      바빌론 유수에서 예수까지

    1. 여고냐
    2. 스알디엘
    3. 즈루빠벨
    4. 아비훗
    5. 엘야킴
    6. 아조르
    7. 차독
    8. 아킴
    9. 엘리웃
    10. 엘아자르
    11. 마탄
    12. 야곱
    13. 요셉
    14. 예수

    마태오의 복음서의 족보는 루가의 복음서의 족보보다 기교적이고 명확한 구조로, 14대씩 세 범주로 나누어 구별하고 있다.

    1. 1대에서 14대까지는 유다의 형제들과 베레스의 형제를 언급하며, 네 명의 여성 조상을 포함하는 등 주석이 풍부하다.
    2. 15대에서 28대까지는 다윗의 왕조 계보를 다루지만 여러 세대를 생략하고 "바벨론 유수 시기의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로 끝난다.
    3. 마지막 29대에서 41대까지는 13세대로 보이지만, 요셉과 즈루빠벨을 사이 조상들에 대한 고유한 전승이다. 이 시기는 그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조상이 적혀 있다.

    총 42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이름을 생략해야 하므로, 세 부분의 14대 구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14는 7의 두 배로, 완전함과 언약을 상징하며, 또한 다윗이라는 이름의 게마트리아와 일치한다.[8]

    이 족보에 나오는 히브리어 이름의 그리스어 표기는 대부분 70인역 성경과 일치하지만, 몇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다. '아삽'이라는 형태는 아사 왕을 시편의 저자인 아삽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아몬 왕을 암모스라고 표기하는 것은 예언자 아모스를 연상시키지만, 70인역에도 이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보다 친숙한 이름에 대한 동화 현상으로 해석되곤 한다. 보에스(보아스, 70인역에는 부스)와 라캅(라합, 70인역에는 라아브) 역시 독특한 형태다.[9]

    생략된 왕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지야의 세 왕이 생략되었다. 이들은 아합의 저주받은 혈통에서 아달리야를 통해 3대, 4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악한 왕들로 여겨진다.[10] 동시에 이들을 생략함으로써 두 번째 14세대를 맞출 수 있으므로 수비학적 의도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1]

    또한 생략된 왕은 여고니야의 아버지인 여호야킴이다. 헬라어에서 여호야킴과 여호야긴의 두 이름은 매우 유사하며 때로는 둘 다 '요아킴'으로 불린다. 마태오가 "요시야가 바벨론 유수 시기에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했을 때, 그는 이 둘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여고니야가 아니라 여호야김에게 형제가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수는 여고니야 시대에 발생했다. 따라서 이를 실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다윗 이후의 왕들이 정확히 14세대를 구성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1]

    마지막 집단 역시 14세대로 구성되었다. 만약 요시야의 아들로 기록된 여고니야가 본래 가리키고자 하던 대상이 여호야김이었다면, 여고니야는 유수 이후 세대로 계산될 수 있었다. 일부 저자들은 마태오의 원래 본문에 마리아의 아버지 요셉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2]

    여고니야(기원전 약 616년 출생)부터 예수(기원전 약 4년 출생)까지 14세대에 걸쳐 있으며, 세대 간 평균 간격은 약 44년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세대 간 격차가 더 넓게 나타나기도 한다.[13] 또한 이 기간 동안 흔했던 '조부 이름을 따는 관습'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데, 마태오가 이러한 반복을 압축했을 수도 있다.[14]

    루가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800년경 켈트 수도사들에 의해 필사된 켈스의 서에 실린 루가의 예수 족보.

    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족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는 요셉부터 아담까지 역순으로 올라간다.[15]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전한 후, 루가복음 3장 23절에서 38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헬리의 아들이요, ..." (3:23) 그리고 계속하여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니라." (3:38)라고 끝난다.[16]

    루가의 복음서에 따른 예수의 계보
    1. 하나님
    2. 아담
    3. 에노스
    4. 가이난
    5. 마할랄렐
    6. 야렛
    7. 에녹
    8. 므두셀라
    9. 레멕
    10. 노아
    11. 아르박삿
    12. 가이난
    1. 셀라
    2. 에벨
    3. 벨렉
    4. 르우
    5. 스룩
    6. 나홀
    7. 데라
    8. 아브라함
    9. 이사악
    10. 야곱
    11. 유다
    12. 베레스
    1. 헤스론
    2. 아니
    3. 아미나답
    4. 나손
    5. 살몬
    6. 보아스
    7. 오벳
    8. 이새
    9. 다윗
    10. 나단
    11. 맛다다
    12. 멘나
    13. 멜레아
    1. 엘리아김
    2. 요남
    3. 요셉
    4. 유다
    5. 시므온
    6. 레위
    7. 맛닷
    8. 요림
    9. 에리에서
    10. 예수
    11. 에르
    12. 엘마담
    13. 고삼
    1. 앗디
    2. 멜기
    3. 네리
    4. 스알디엘
    5. 즈루빠벨
    6. 레사
    7. 요아난
    8. 요다
    9. 요섹
    10. 서머인
    11. 맛다디아
    12. 마앗
    13. 낙개
    1. 에슬리
    2. 나훔
    3. 아모스
    4. 맛다디아
    5. 요셉
    6. 얀나
    7. 멜기
    8. 레위
    9. 맛닷
    10. 헬리
    11. 요셉
    12. 예수

    이 족보는 구약성경에 잠깐 언급되었을 뿐인 다윗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들 나단을 통해 다윗의 후손임을 보여준다.[17]

    다윗의 조상에 대해서는 루가의 복음서와 구약성경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르박삿셀라 사이에 가이난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70인역(Septuagint)을 따른 것이며 대부분의 현대 성경에서 따르는 마소라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루가 복음서에 있는 족보의 세대 수를 77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든 죄의 용서를 상징하는 숫자로 인식된다.[18] 이 숫자는 또한 루가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에녹서』에서 언급된 에녹 이후 70세대와도 일치한다.[19][20] 루가는 비록 마태오처럼 세대를 세지는 않았지만, 일곱 단위로 구성하는 원칙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레네오는 아담부터 72세대만을 계산했다.[21]

    구약성경에서 아미나답의 아들로 아람이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신뢰받는 네슬레-알란드 비평판은 "아미나답의 아들, 아드민의 아들, 아르니의 아들"이라는 변이 형태를 받아들이며,[22] 이를 통해 아담부터 시작하는 세대 수를 76으로 계산한다.[23]

    루가가 사용한 표현인 "사람들이 생각하던 대로"(ἐνομίζετο)는 예수가 실제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진술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인식된다. 이는 동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루가가 예수의 외조부인 엘리로 계보를 전개하는 등, 가장 가까운 혈연 관계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의 족보를 추적했다고 본다.[24] 이 경우 족보의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을 언급했다는 견해도 있다. D. A. 카슨은 이러한 해석을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지적하며 독자들이 이를 유추하기 어렵다고 본다.[25] 마찬가지로 R. P. 네텔호스트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억지" 해석이라고 평가한다.[26]

    이 외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머지 족보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나머지 족보를 요셉의 실제 족보로 보고 있으며, 마태오의 복음서에 제시된 다른 족보와 비교하여 해석한다.[27]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족보는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에서 잠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알디엘 위쪽과 즈루빠벨 아래쪽에서 두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또한 이 지점에서 마태오는 구약성경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즈루빠벨은 기원전 520년경 유대인들을 바빌론에서 귀환시키고 유다를 다스리며 성전을 재건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여러 번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28] 즈루빠벨은 『역대기』의 족보에 한 번 등장하는데,[29] 그 후손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기록되어 있다.[30] 그러나 복음서와 함께 볼 때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70인역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스알디엘로 되어 있지만, 마소라 본문에서는 스알디엘의 형제 브다야로 적혀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여고냐 왕의 아들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마소라 본문을 수용하고, 브다야가 계대결혼을 통해 스알디엘을 위해 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오 및 다른 모든 기록들과 일치하는 70인역을 원문으로 받아들인다.[31]

    즈루빠벨이 매우 흔한 바빌로니아 이름임에 착안해서,[32] 루가의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즈루빠벨과 스알디엘을 단순히 동명이인으로 보기도 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스알디엘의 조상은 완전히 다르게 제시되어 있으며, 즈루빠벨의 아들에서 다시 불일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려진 연대 사이의 간격을 보완하면 루가의 스알디엘의 탄생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시기의 유명한 즈루빠벨과 같은 시기가 된다. 따라서 루가의 스알디엘과 즈루빠벨은 마태오의 기록과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그들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33]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루가의 기록에 등장하는 이들 부자가 역대기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본다. 이 경우 요셉처럼 스알디엘의 아버지로 서로 다른 두 명이 기록된 것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복잡한 계대결혼 가설이 종종 제안되었다.[33] 그러나 리처드 보컴은 루가의 기록이 실제 역사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대기』의 족보는 즈루빠벨을 선조의 계보에 끼워 넣은 후대의 첨가물로, 마태오는 단순히 왕실 계승을 따랐을 뿐이다. 실제로 보컴은 즈루빠벨의 정당성이 저주받은 솔로몬의 계보가 아닌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20]

    루가의 복음서에서 즈루빠벨의 아들로 제시된 이름 레사(Rhesa)는 일반적으로 아람어로 '머리'나 '군주'를 의미하는 rēʾšāʾ로 간주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름이 즈루빠벨의 것인데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본다. 이 견해를 따르면 루가 복음서의 다음 세대인 요아난(Joanan)은 역대기에서 즈루빠벨의 아들 중 하나로 기록된 하나냐(Hananiah)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루가 복음서의 그 다음 이름들과 마태오 복음서의 다음 이름 아비웃(Abiud)은 『역대기』에서 특별히 확인할 수 없다.[20]

    같이 보기

    각주


     Maas, Anthony (1913). 〈Genealogy of Christ〉. 《가톨릭 백과사전》. 뉴욕: 로버트 애플턴 사.
  • 마태 1:1-16, 루가 3:23-38

  • 마태 1:16, 루가 3:23

  • Eusebius Pamphilius, Church history, Life of Constantine §VII.

  • R. T. Franc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Eerdmans, 1985) pages 71–72.

  • Marcus J. Borg, John Dominic Crossan, The First Christmas (HarperCollins, 2009) page 95.

  •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B. Eerdmans, 65–87쪽, ISBN 978-0-8028-2389-2

  •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 B. Eerdmans, 70쪽, ISBN 978-0-8028-2389-2, considers this harmonization "the most attractive."

  •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B. Eerdmans, 65–87쪽, ISBN 978-0-8028-2389-2

  • Bauckham, Richard (1995), “Tamar's Ancestry and Rahab's Marriage: Two Problems in the Matthean Genealogy”, 《Novum Testamentum》 37 (4): 313–329, doi:10.1163/1568536952663168.

  • 왕상 21:21-29, 출 20:5, 신 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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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례로 에즈라 7:1-5에 나타난 계보와 대상 6:3-14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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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as, Anthony. "Genealogy of Christ"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6.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9. 9 October 2013

  • Robertson, A.T. "Commentary on Luke 3:23". "Robertson's Word Pictures of the New Testament". Broadman Press 1932,33, Renewal 1960.

  • 대상 3:5, 즈가리야 12:12

  • 마태 18:21-22, 창 4:24

  • 에녹1서 10:11-12

  • Bauckham, Richard (2004), 《Jude and the Relatives of Jesus in the Early Church》, London: T & T Clark International, 315–373쪽, ISBN 978-0-567-08297-8

  • 이레네오, 《이단반박》, 3.22.3

  • Willker, Wieland (2009),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Gospels》 (PDF) 6판, 3: Luke, TVU 39쪽, 2009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25일에 확인함. Willker details the textual evidence underlying the NA27 reading.

  • "Faced with a bewildering variety of readings, the Committee adopted what seems to be the least unsatisfactory form of text, a reading that was current in the Alexandrian church at an early period," explains Metzger, Bruce Manning (1971),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판, United Bible Societies, 136쪽, ISBN 3-438-0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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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nkelstein, Louis (1970), 《The Jews: Their History》 4판, Schocken Books, 51쪽, ISBN 0-313-21242-2


  • 누가복음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루칸’으로 되어 있다. 이는 ‘누가에 의한’이란 뜻으로 이 헬라어 성경을 번역한 영어 성경(A.V)에는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Luke(누가에 따른 복음)로 제목을 붙였다. 한글 개역 성경의 제목은 ‘누가가 전한 복음’의 의미를 갖는 ‘누가복음’이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 자체에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들로 인해서 기록자가 누가라는 것이 인정된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글이라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공통점(눅1:3, 행 1:2), 누가복음의 끝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연결이 된다는 점 등을 기초로 두 책이 동일한 기록자에 의해 적혀진 사실이 인정되며, 사도행전의 내용에 비추어 누가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였다는 사실(누가의 이름이 골 4:14, 딤후 4:11, 몬 1:24에 기록), 누가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기록자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아니며(눅 1:2-3), 누가복음에 고급 헬라어가 사용되었다는 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사실(골 4:14), 누가가 기록자라는 2-3세기 기록들이 있다는 점, 누가복음의 기록자를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켰다는 사실들 등의 증거들이 누가가 기록자라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누가는 “빛나다”라는 뜻의 라틴어 `루카누스' 또는 `루키리우스'의 약어이며. 성경 저자 중에서 유일한 유대인이 아닌 안디옥 출신으로 추정된다.

    2) 기록연대
    이 복음서가 적힌 정확한 연대는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사도행전의 기록으로 보아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보다 먼저 적힌 것으로 추정되며, 누가복음에 서기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적혀 있지 않은 점, 사도행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60년대 중반의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적힌 것을 고려하면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3. 대상 및 저술 목적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고’이 글을 썼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1:4). 데오빌로에게 “존귀하신”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Lover of God). 누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초기부터 자세하게 조사하여 본 내용들을 적는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하여 신뢰성 있는 조사 결과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일차적으로 로마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본서에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나,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하는 것이나, 빌라도가 세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죄를 발표한 것 등 전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데오빌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서 로마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알고 있는 바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주제
    1) 흠 없는 인자(人子)이신 예수
    누가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여 인류의 친구로서의 그리스도, 즉, ‘인자(人子)’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예수는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여성과 어린아이, 소외 계층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있으시며 그들을 동정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왔음을 강조한다.

    2) 온 세상의 구주 예수
    누가가 그려 주고 있는 그리스도는 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가는 어느 한 민족에 속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높이 부각시키고 있다. 즉,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나타내신 각종 봉사와 관심을 다른 어떤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자세히 다루며 강조하고 있다.

    5. 누가복음의 특징
    1)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함 - 인간적인 면이 잘 드러나있다.
    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기록된 유일한 복음서(2:41-51)
    : 성장 과정(2:40, 52), 부모 밑에(2:51), 12세 때의 성전 방문(2:41-50) 기록
    ②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19:41), 간절히 기도하심(22:44)
    ③ 인성 표현은 식사에 많이 언급(7:36-50. 10:38-42. 11:37-52. 24:41-44)
    ④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23:46) - 사람을 위한 대속물 - 구속이라는 말이 신약에서는 처음으로 등장(1:68. 2:38. 24:21)

    2)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을 강조함 - 일반 서민들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이 표현된 복음서이다.
    ① 죄지은 여인(7:36-50), 선한 사마리아인(10:29-37), 탕자의 비유(15:11-32), 세리 삭개오(19:1-10),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23:39-43)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
    ② 마리아와 엘리사벳(1:5, 1:27: 2:41), 안나(2:36), 사렙다 과부(4:26), 시몬의 장모(4:38), 나인성 과부(7:11),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8:2-3), 십자가의 여자들(23:49), 부활일의 여자들(24:1) 등 여인이 많이 표현되고 있음.

    3)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를 강조함
    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강조함
    에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3:21), 들에서(5:16), 산에서(6:12, 9:28, 22:39, 41) 기도하시며, 홀로(5:16, 9:18; 11:1), 오랫동안(6:12), 무릎을 꿇고(22:41, 44)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 때 외에도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6:12),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받기 전에(9:18), 죽음을 예고하는 변화산에서(9:28), 감람산에서 수난을 앞두고(22:40-44), 십자가상에서(22:34, 46) 등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실 때마다 기도하셨다.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강조하는 내용을 강조.
    제자들이 매일 생활에 대한 염려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이기게 하는 것도 기도(8:14)이고,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것도 기도이며(8:13, 22:32, 40, 46). 기도하는 자 만이 인자가 오실 때 합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18:1-8; 21:36), 제자들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부활하신 예수의 요구이기 때문으로 강조하고 있다(24:52).

    4) 기타 특징
    ① 서문이 있음(1:1–4).
    이 서문에는 누가복음의 내용(1 :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 기록한 방식(2 : 전하여준 그대로), 수신자(3 : 데오빌로), 작성 목적(4 : 배운 바의 확실함을 위해)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이 서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사도행전과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수신자가 똑같이 데오빌로이다(눅 1:4/ 행 1:1). 둘째,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의 속편임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있다. ‘먼저 쓴 글’(행1:1)의 내용이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1:1) 승천하신 날(행1:2)까지라고 정리한다. 셋째, 세계사적 시대를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주전 30-14년(2:1), 가이사 디베료 15년(Tiberius) 주후 14-37년(3:1)
    ② 예수님의 탄생시 목자들의 방문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음(2:8-2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의 탄생시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왕께 드리는 예물에 대한 기사를 기록한 반면, 누가복음은 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목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파 되었음을 밝힌다.

    ③ 족보의 독특성(3:23-38)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와 누가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까지 올라가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다른 계통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마태복음이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으로 왕의 혈통을 따르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나단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요셉의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그 족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예루살렘과 성전을 강조함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① 첫 장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며, ② 아기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고, ③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명시적 표현들이 있고, ④ 예수님의 승천시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 있고, 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복음서 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설명하고 있다.
    ⑤ 의학 용어가 많이 사용됨
    “중한 열병”(4:38), “나병 … 원하시면 깨끗하게”(5:12), “혈루증”(눅 8:43), “그(말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 등
    ⑥ 찬송시가 많이 나옴
    누가복음에는 유독 찬송시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찬송시들은 예수님과 요한의 출생부분에서 나오고 있다(마리아의 노래(1:46-55), 사가랴의 노래(1:68-79), 천군의 노래(2:14) 시므온의 노래(2:29-32)).

    6. 내용과 구조
    공관복음의 공통된 구조는 ① 요한의 세례, ② 갈릴리 사역, ③ 유다와 예루살렘 사역, ④ 죽으심과 부활의 구조를 갖는다.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의 기본구조를 좀 더 매끄럽게 다듬었고, 예수님의 출생 기록에 세례 요한의 출생 기록을 추가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최종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을 기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한다는 표현을 네 번이나 강조하여 명시하고 있다.

    1) 인자의 준비(1:1-4:13)

    2) 인자의 사역(4:14-19:48)

    3) 인자의 수난과 부활(20:1-2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