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굴로 광풍이 주는 세 가지 교훈
매년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할 때마다 모두가 긴장합니다.과거 강력했던 1959년 9월 12일 사라호 태풍과 2003년의 태풍 매미가 끼친 피해를 기억합니다.
이러한 태풍의 위력을 바다에서 경험한다면 살 소망을 갖기 어려울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로마행 배에 탄 바울과 일행들이 이 같은 일을 겪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강력한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유라굴로 광풍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평온한 인생에도 갑작스러운 광풍
죄수의 몸이 된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레데 섬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겨울 항해는 대단히 위험하기에 미항에서 머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선주와
선장은 뵈닉스로 이동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반대해 보았지만, 총책임자 율리오는 선장의 말만 믿고
뵈닉스 행을 강행합니다. 출발 당시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13절에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남풍이 순하게 불어 배도 선조롭게 나아갔습니다. 모두가 평온한 항해라 여겼던 그 순간, 갑자기
광풍이 불어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정적이라 여겼던 순간 인생의 광풍이 불어닥칩니다. 경제적 문제, 질병, 자녀 문제, 부부관계 등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유라굴로가 찾아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둘째, 목적지를 벗어나 표류할 수 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뱃사람들 모두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강력한 바람 앞에 배는 계속 떠밀려 갔습니다. 15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는 지금 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크고 호화로운 유람선이라 해도 목적지를 벗어나 방향을 잃으면
항해가 아니라 표류하는 배가 됩니다. 인생에서도 아무리 높은 지위, 재산이 많이 있어도 유라굴로라는 인생의 광풍을 만나 방향을
잃으면 표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항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표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살 소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희망을 선포합니다.
25~26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은 자신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을 믿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모두가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유라굴로를 만난 배처럼 위태로워 보입니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유라굴로를 만난 이유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고 교만해서는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수 있고, 다시 회복할 수 있으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도다.” (시 107:28~30)
유라굴로 광풍(A Hurricane, Called Euroclydon)
사도행전 (Acts) 27:14, 21~22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Before very long, a wind
of hurricane force, called the Euroclydon, swept down from the island.)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After they had gone a long time without
food, Paul stood up before them and said: “Men, you should have taken my
advice not to sail from Crete; then you would have spared yourselves
this damage and loss.)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But
now l urge you to keep up your courage, because not one of you will be
lost; only the ship will be destroyed.)
<26장>에서 살펴본데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재판문제를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소송하기를 베스도 총독에게 요청했고, 베스도가 그렇게 할 것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 (행.27:1)라고 <사도행전 27장>은 시작되는데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떠나는 것입니다 (행.27:1).
오늘 본문을 포함한 총 <44절>로 구성된 사도행전 27장에서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을 포함하여 276명을 태운 배가 로마를 향해 항해하는 가운데 광풍 ‘유라굴로’ 로 인해 지중해를 표류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던 극심한 고난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 그것은무엇이 유라굴로 광풍을 통하여 배울 영적 교훈일까요?
첫째, “인간의 욕심”
바울은 지금 시기가 지중해의 강한 ‘태풍’을
동반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면서 출항을 만류했지만 (행.27:10), 이 배의 선장과 선주는 강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리하더라도
‘뵈닉스’항구까지 가서 곡물을 팔아 큰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바울의 리더쉽”
이런 선장과 선주의 잘못된 리더쉽에도 불구하고,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바울’은 이 조난당한 배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감’ (strong credibility)를 얻고, ‘올바른
판단’ (Sound judgment)을 행하고, ’깊은 영성’ (Deep spirituality)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v.25) 말입니다.바울의 리더쉽
셋째, “하나님의 구원하심”
제가 깨닫게 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은 진정한 구원은 단순한 ‘육신적 구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말입니다.하나님의 구원하심
어리석은 선주와 선장처럼 욕심에 사로잡혀 자신과 사회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육신의 소욕을 벗어버리고, 인생의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빛된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난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살
소망조차 끊어질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힘든 고난은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때론 우리가 바라지도 예상치도 못한 시련의 순간은 찾아오기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7장에서 로마로 가는 배에 탑승한 바울을 포함한 ‘276명의 사람들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7장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는 평화롭고 태평한 시기에
찾아오기 보다, 오히려 오늘 말씀처럼 광풍이 불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 더욱 강력하게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사회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행해야 할 ‘빛과 소금’의 삶이 무엇인지를 바울의
모습을 통해 배워가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동안 몇 주에 걸쳐 살펴본대로 유대인들에 의해 고소당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재판이 처음 시작될 때는 벨릭스가 총독이었을 당시였는데, 그는 바울의 ‘무죄함’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언도했을 시에 유대지도자들의 반발과 마찰을 우려하여 2년간 재판을 연기하다가 결국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고, 그가 오자마자 바울의 재판은 속개되었지만, 먼저와 같이 여러 유대인들이 여러가지 중대한 혐의로 그를
고소했으나 그 어느 것도 증명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베스도에게 자신의 소송문제를 로마황제에게 의뢰할 것을
청원했고, 그는 그렇게 할 것을 언도했습니다.
2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유대 분봉왕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자신의 신앙은 유대 율법에서 변질된 이단신앙이 아니라, 조상들이 믿고 간절히 바라던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야를 믿는 유대 전통신앙임을 강조하며, 그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자신이 주님을 만난 ‘다메섹
사건’을 통해 강력히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께 받은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들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함으로 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돌아오게 하는 죄사함과 구원받아 자녀의 거룩한 권세를
얻게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그가 밝혔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라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던 것입니다(26:29).
27장이 시작되는데 그 전체 주제는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한 바울의 로마
압송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건’입니다.
27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를 황제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행 27:1)
이제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한 배를 타게 되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입니다.
그런데 그 배의 실제적 (법적) 책임자였던 ‘황제부대’소속의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의 동역자인 친구들이 와서 그를 보살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던 것입니다 (v.3).
이것은 사도
바울이 앞에서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을 변론했을 때 왕과 함께 가이사랴 성중에 높은 사람들이 함께 참석했다고 2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행.25:23), 이 율리오라는 백부장도 그들 중의 있었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주목할 것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당하고도 논리적으로 변론하는 것을 율리오가 보고서, 바울이 무죄함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에 대한 인격적 존중과 깊은 신뢰를 가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번 벨릭스 총독이 그러했듯이, 율리오 백부장도
바울에게 일반 죄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유와 인격적인 대우를 허용해 준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배를 타고 여러 날 항해하다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배를 갈아타게 됩니다 (v.6). 왜 갈아탔을까요? 왜냐하면, 이 당시는 유대지역에서 로마로 직행하는 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알렉산드리아 배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베이스캠프 (거점)으로 하여 <미항>이라는 항구로 와서 정박중이었던 배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제국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세계 최고의 곡창지대였던 애굽을 점령하여 애굽의 막대한 곡물을 ‘알렉산드리아’항에서 싣고 수도 로마로 운송해 갔는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루시아의 ‘무라성’이라는 항구도시에서 두번째로 갈아탄 배가 바로 그 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갈아타고 ‘그레데’섬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간신히 <살모네>항을 지나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항해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누가는 기록하면서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v.9a)라고. 여기서 ‘금식하는 절기’를 언급한 이유는 ‘유대인의 어떤 종교적 규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금식은 유대민족의 ‘속죄일’ (Day of Atonement)로서 유대력으로는 <7월10일>이고, 양력으로는 <9~10월경>임으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시점’이란 이미 11월에 접어든 기간이기 때문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늦가을의 계절풍, 곧 ‘강력한 태풍’이 발생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v.10)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경고를 무시함으로 항해를 강행합니다. 그리하여 이곳 <미항>을 떠나 <뵈닉스>항에 가서 겨울을 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부장의 결정은 비록 그가 바울을 인격적으로는 신뢰하고 존중했겠지만, 항해에 관한한 전문가들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항을 떠난 배는 처음엔 남쪽에서 부는 순풍을 따라 순항하여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문제의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유라굴로’라는 태풍은 그 이름이 <동풍>을 가르키는 ‘유로스’와 <북풍>을 가르키는 ‘아킬로’가 합쳐진 단어로써 <동북풍>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 ‘유라굴로’태풍이 휘몰아 침으로 바울을 포함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2주가 넘도록 (v.27) 지중해를 표류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오늘 사도와 배를 탄 많은 사람들이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 겪었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무엇이 유라굴로 광풍을 통하여 배울 영적 교훈
첫째, 인간의 욕심
사도
바울이 2번째로
갈아탔던 ‘알렉산드리아’의 배는 사실 출항하기에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기가 늦가을의 강력한
계절풍, 곧 ‘태풍’이 발생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살펴봤듯이 사도 바울은 세번에
걸친 선교여행을 거치면서 14년간의 기간동안 여러 번의 배로 이동한 경우를 포함해서 대략 15만km라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경험을 가진 역전의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선교여행 가운데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경험을 했는지는 여기서 다 언급하기도 힘든데, 그
중에서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의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나눈 자신이 겪은 고난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3)라고 말했고,
또한 “세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11:25)라고
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이 배로 이동하는 가운데 겪은 위기상황을 열거합니다. 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는 시간적
순서로 볼 때,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기 이전에 쓰여진 것임으로, 바울은 이미 배를 타고 가다가 3번씩 배가 부서지는 조난사고와
일주일을 깊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힘든 상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구보다도 이런 늦가을의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바울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v.10)고 바울은 자신의 경험치를 통해 충분히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위험한 항해시기인 것을 선장과 선주는 몰랐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항해의 전문가가 아닌 바울도 여러 번의 승선경험을 통해 그것을 절실히 깨닫았을찐대, 평생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과 선주가 그것을 모를리 만무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런 위험한 항해를 강행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과연 이번 항해가 상당한 위험요소가 따르는 시기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리한 결정을 한 것은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뵈니스>항구는 <미항>에 비해 훨씬 넓고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뵈니스’항까지 가게 되면 그곳에서 곡물을 겨울이 오기 전에 비싼 가격으로 팔아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때문에 이번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문제없다’고 백부장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는 무리한 항해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 해 전에 제가 미국에 와서 얼마가 되지 않았을 당시, 미조리주에서 사역하시던 ‘서정곤 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저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목사님은 서해안 어느 작은 어촌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수영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학생시절 친구와 몇 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갑자기 자신의 수영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멀리 보이는 작은 섬에 멋있게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섬 모래사장에 예쁜 조가비 몇 개를 잡아 손에 쥐고 여학생들에게 선물로 주고자 다시 헤엄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헤엄쳤을까 했을 때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몸이 갑자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마도 상당히 오랫동안 헤엄을 쳐 힘이 빠졌을 뿐 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손에 조가비를 쥐고 있었기에 제대로 헤엄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이러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손에 펼쳐 쥐고 있던 조가비를 내어 보어 보내고는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목사님은 이렇게 우리를 도전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때로 손에 쥔 조가비 하나를 놓지 못함으로 인생을 파괴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게도 되는 불행한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라고 말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일확천금’이라는 돈의 조가비를 그리고 명예와 쾌락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해 줄 것 같은 조가비 하나를 부여잡고 놓지 못함으로 깊은 물 속에 빠져 들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그 욕심의 조가비는 무엇입니까?
둘째, 바울의 리더쉽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 13장> 이후에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동역자들이 함께 이루어 낸 복음증거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27장>에서 언급된 주된 내용은 ‘로마로 가는 배를 탄 바울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심한 고생과 위기 그리고 모두 생명을 보존함’이지만, 그 실질적인 중심내용은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의
리더쉽이 배에 탔던 276명 전원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리더쉽을
결정하는 것일까요?바울의 리더쉽
먼저 <강한 신뢰감> (Strong credibility)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2년전 총독 ‘벨릭스’가 바울의 재판을 지연하면서도 그에게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허용한 이유라든지, 오늘 백부장 ‘율리오’도 역시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고 친구들이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총독과 백부장이 특별히 바울을 편애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만나는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한결같이 신실하고 겸손하게 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배 안에서만 보더라도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백부장과 여러 군인들과 선원들과 승객들 그리고 죄수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신분과 신앙상태는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결한 인품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깊은 신뢰를 받는 것이 ‘리더’로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우선적인 덕목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의 <올바른 판단> (Sound judgment)이 리더쉽을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에서만 보더라도, 뵈닉스로 향하는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에 있어서 “이번 항해가 ~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v.10)고 그는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내용에 보면, 배가 표류하고 깨어진 상태에서 점점 더 육지에 가까이 나아갔을 때 사공들이 몰래 <그룻배>를 따고 자기들만 도망치고자 했을 때, 바울이 그것을 눈치채고 ‘만약 사공들이 없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림으로 이 일을 막습니다 (v.31). 만약 이런 민감하고도 신속한 바울의 판단이 없었다면, 사공들은 먼저 도망가고 그의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살 가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위기상황에서 바울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력은 많은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리고 그의 <깊은 영성> (Deep spirituality)이 리더쉽을 확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수 있듯이, 그는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여러 날 먹지 못하고 좌절해 있을 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바울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자신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타격과 손상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분명히 일깨움 (v.21)과 동시에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v.22)고 확정적으로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그가 이렇게 확신 가운데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지난 밤에 그의 곁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바울이 장차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배에 탄 모든 자들이 안전하게 될 것’이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v.25)고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순전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깊은 영성이 그의 리더쉽을 결정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하심
아마 성도
여러분이 <27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묵상하고 읽어 나간다면 한가지 분명한 결론을 저와 같이 내리게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이 ‘유라굴로 광풍’의 위기를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종 바울을 통해 함께 배에 탄 사람 모두를 안전하게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구원하심
앞서 사도 바울의 리더쉽을 살펴보았지만, 그가 이런 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절망과 자포자기했던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게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v.22)고 선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먼저 바울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고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증거할 비젼을 새롭게 해 주심으로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 위로와 구원과 비젼의 시작도 끝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그 은혜와 권능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울의 말은 단지 위로의 말로 그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사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v.23~25)고 말입니다. 이런 난파된 배에서 성난 파도와 사나운 태풍의 위기를 넘기게 한 것은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지혜요, 권능이요 은혜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사나운 풍랑 가운데 안심시키시고,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로마로 가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기에 바울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캄캄한 밤 바다에 그분만을 신뢰하는 그의 종, 바울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한줄기 등불같이 어둠을 비취게 하시고, 그 선한 뜻을 따라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은 진정한 구원은 이 땅에서 잠시 더 생명을 연장하는 ‘육신적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만물의 주관자 일 뿐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현재 어떤 인생의 힘든 풍랑과 거센 파도를 겪고 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끊임 없이 몰려오는 인생의 크고 작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안전하게 그분의 희망의 항구로 이끄시길 기뻐 하시는 선한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생명의 말씀 안에 거하는 복된 삶 사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의 어리석은 선주와 선장처럼 돈에 대한 욕심이나 혹은 명예와 지식과 향락과 수없이 많은 육신에 속한 욕심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가 되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된 주의 자녀되기를 축원합니다.
욕망의 반대말
그만큼 욕망 이 녀석이 문제라는 말이고 알쏭달쏭하다는 말일 게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도 욕망 때문이고 때때로 쾌락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이유도 욕망 때문이다.
욕망만 없다면 모든 삶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게 과연 좋을까?
나는 욕망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있어야 살아가는 의욕이 생기고
동기가 생기고 활력이 생기지 욕망이 없는 삶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원치 않는 삶일 게다.
물론 나도 그런
수도원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욕망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우리가 욕망을 원한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욕망은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생명체에게 산소와 같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현실이 안맞아 떨어질 때가 많다.
욕망과
현실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론머스크 인생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과 현실이 잘 안맞아떨어진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을 낮추든가 아니면 욕망을 줄일 수 없다면 뼈와 살을 깍아내는 노력으로 현실을 키워서 앞서나가는 욕망을 따라잡을려고 애쓴다.
전자는 쉬운 편이고 후자는 어렵다.
그렇지만 욕망을 낮추는 전자를 택한 쪽도 비난받을 사람들이 아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어렵기도 하다.
모든 일들은 상대성이고 케이스 바 케이스가 많기 때문이다.
둘다 노력이다.
때때로 체념도 노력이
된다.
많은 희생과 자기포기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금연이 노력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욕망의 반대말은 체념이 아니다.
체념에는 의지가 투영되어 있고 삶의 애정과 긍정의 매세지가 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꾸리게 된 작은 텃밭에도 햇빛은 공평하게 내비치고 똑같은 태양이 뜨고 진다.
어쩌면
욕망의 반댓말은 "부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이 부정하고 부정하지 않은지 정하는 기준은 남의 잣대가 아니라
내안의 잣대다. 결국 내안에서 해소되어야 하는 무언가 부당하고 부정한 마음의 일들이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부정한지
정당한지는 내가 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체념도 노력과 같고 욕망의 한종류일 뿐이다. 내 마음의 일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즉
모든 것들은 공평했고 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체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욕망의 부정적인 측면들, 즉
욕망의 반댓말이 계속 옮아매고 있을 것이다.
욕망은 좋은 말이다. 욕망은 단지 필요한 에너지원일 뿐이다. 문제는
욕망의 해석에 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부당한 해석을 하면 욕망은 부당한 것이 되고 정당한 해석을 하면 정당한
것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을 부당하게 해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더욱 누려야 되고 존중받고 우월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과 욕망의 간격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뼈와 살을 깍는 노력으로 언제나
앞서가는 욕망을 따라잡을려고 노력한다. 그래야지만 그 부당함이 소멸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마음 속의 일이다.
단지 마음이란 세계에서 일어난 작은 부당함이 못미더운 것이다. 필사적으로 이 작은 부당함을 해소 시킬려고 욕망을 쫓아간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쉬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산소와 같아서 끊임없이 우리가 갈구해야 한다. 끊임없이 희망하고 동기와 의욕을
찾아해매야 한다. 그래서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 속의 일들"을 우리가
해석하는 차원은 내가 기준을 정하고 내가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해결된다. 끊임없이 부정과
부당함, 그리고 불공평함의 파편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산소를 쓰고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같다.
12월 9일(화) 사도행전 27-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심하라(27:25)
So keep up your courage, men, for I have faith in God that it will happen just as he told me.
Rest assured. - 안심하세요.
믿음이란 풍랑가운데서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죄수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배를 타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출항하기 전에 바울은 이번 항해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겨울을 지나고 출항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난 선주는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듣고 출항했지만 결국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 배에는 모두 276명이 승선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파선되기 직전에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로마로 압송되어야 하므로 이런 풍랑에 의해서 무너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풍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은 것 뿐만 아니라 배에 승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말씀은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과 소망을 강조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성경 구절 (개역한글):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을 호송하던 배가 그레데 미항에서 머물 때 바울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더 이상 항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그때 미항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그레데 서남쪽에 있는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자는 의견이 많았다.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그들은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한 채로 배를 뵈닉스로 항해시켰다.
그때 유라굴로란 광풍이 몰아쳐서 배가 바람에 밀려 떠내려갔다.
그리고 뵈닉스 남서쪽 35킬로미터 지점의 가우다란 섬 아래를
지나면서 섬이 약간 바람을 막아주어서 간신히 배 뒤편의 거룻배를 보호하려고 거룻배를 끌어올렸다.
거룻배가 없으면 항구시설이 없는
곳에서 배를 정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체를 튼튼히 밧줄로 감고 스르디스란 모래톱에 배가 걸릴 것이 두려워서 다시
바람에 배를 내맡겼다.
그 뒤로도 바람이 잔잔해지지 않자 다음날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버렸고 3일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까지
버렸다.
그 후 며칠 동안 해와 별은 안보이고 풍랑도 그대로이고 구원의 여망도 없고 오랫동안 먹지도 못한 채 모두가 절망적인 나날을
보냈다. 그때 바울이 일어서서 말했다.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고 배만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어제 밤에 주의 사자가 ‘너는 황제 앞에 설 것이고 너와 함께 승선한 자도 무사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시 배에서 바울의 신분은 죄수였는데 광풍의 위기에서 그가 마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줄 권세가 있는 리더처럼 말했다.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살면서 공동체에 시련이 다가오면 바울처럼 말하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그 멋진 한 마디 말에
믿음의 진수가 들어있다.
믿음이 크고 영성이 깊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기도를 멋지게 잘하고 어떤 봉사를 잘하는 삶보다 어려움
중에도 “이제는 안심하라.”라고 믿음의 말을 할 줄 아는 삶이다.
위기 속에 빛나는 리더십
어떻게 바울처럼 위기 속에서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해 담대한 믿음의 외침을 발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
하나님은 가끔 문제와 환난 중에 침묵하신다. 그래도 인내하면서 구원과 축복의 믿음을 잃지 말라.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도 태양이
있음을 알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라. 때가 되면 문제가 실타래 풀리듯 풀린다. 하나님의 손길이 해결하지 못할 인간 상황은 없다.
둘째, 문제도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으라.
인생의 광풍은 영적인 시야를 넓히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생긴 것이다. 광풍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 극심한 문제 중에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음을 확신하라. 사랑의 하나님은
영혼을 향한 가장 위대한 설계자이시다. 성도의 문제는 하나님의 원대하고 아름다운 계획 속에서 펼쳐진 것이고 그 계획에는 실수나
오차가 없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라.
바울이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말씀을 그대로 믿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 나의 꿈을 좌절시키는 위기가 닥쳐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
요셉의 위대성은 그가 찬란한 꿈을 꾸었다는 것보다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꿈이 잠시 깨진 모습을 보여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 깨진 꿈도 다시 회복하면 되고 누더기가 된 꿈도 다시 다듬으면 된다.
찬란한 꿈을 가지고 나아갈 때 수많은 절망의 순간을 겪는다. 인생에는 낭만이 있지만 늘 낭만적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낭만주의의 환상을 깨야 꿈을 멋지게 이룰 수 있다. 낭만이 넘치는 때를 인생의 찬란한 개막이고 낭만이 깨지는 때를 인생의 비참한 폐막으로 여기지 말라.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빛나게 하고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찬란한 꿈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마침내 축복의 때가 찾아온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
사실 바울은 오랫동안 로마 복음화의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어떻게서라도 로마를 방문하기를 기도해 왔었다. 로마서 서두에서 바울은 로마를 향한 나의 열정에 대하여는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라고까지 고백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10)하고 자신의 애타는 심경을 토로하였다.
바울 사도 앞에 열린 로마여행은 그가 소망하던 설레이는 여행은 아니었다. 죄인 된 몸으로 로마의 황제 앞으로 호송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는지 전혀 그 누구도 그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물론 바울의 로마행은 바울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소망 가운데 꿈꾸어 오던 복음전도를 위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의 계책에서 벗어날 방편으로 억울한 판결을 당한 로마시민에게 주어진 마지막 카드였다.
베스도 총독의 재판에 함석한 유대의 왕 아그립바는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일 수 있을 뻔 하였다’(행26:32) 하였다. 이와 같이 앞날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인간의 선택은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언서 기자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기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직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가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옥에 갇혔을 때 한 밤중에 나타나신 주께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I. 복음을 위해 로마황제 가이샤에게로 가는 바울 사도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더라”(11)
A. 백부장 율리오의 만남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책임은 궁전 시위대원이던 율리오 백부장에게 주어졌다. 그는 가이샤라에 주둔하고 있는 5개의 로마 보병부대의 하나인 아구사도대 곧 황제의 군대의 백부장이였다. 로마시대의 백부장은 오늘날 중대장과 같은 편재로서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꽃으로 불리웠다. 실제로 군대를 움직이는 권한은 천부장 곧 오늘의 대대장에게 있었지만 천부장들은 정치세력에 이끌리고 있었고 실제적으로 로마황제의 위호를 받는 지휘관은 시위대 출신 백부장이었다.
성경에는 복음서와 사동행전에서 각각 두 사람의 백부장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 자기 부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께 간청한 가버나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주께서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려 하셨을 때 ‘나는 주께서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합니다. 명령하시면 내 부하가 병이 낫겠습니다’ 말하였다. 또 한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형장을 집도한 백부장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나타난 이적들을 보며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27:54) 증거하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 고낼료 백부장으로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그의 식솔들과 성령의 체험을 하는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이후 이들이 복음을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하였을까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백부장들의 권위와 위세로 보아 로마군대 안에서의 복음전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이샤랴에서 로마까지 가기 위해서는 배편을 이용하는 길 밖에 없다. 풍랑을 없다 하드라도 로마항까지의 여행은 참으로 고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배편의 연결을 위해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는 배를 타야만 했다. 그 배에는 바울의 누가와 실라를 비롯한 동역자들과 마게도냐 데살로니가 사람 아르스다고가 함께 하였다.
죄수의 인솔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행선에 많은 편의를 베풀었다. 그들의 배가 시돈에 멈추었을 때 율리오 백부장은 바울이 그곳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방문하여 교제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아마 율리오 백부장이 이처럼 죄수된 바울에 관심을 갖었던 것은 복음서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백부장 동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B. 출항을 만류하는 바울의 예언
그들은 겨울 항로의 풍랑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끼고 루기아의 무라항에 도착하여 이탈리아로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큰 화물선으로 갈아 탔다. 그러나 그들의 항해는 심한 바람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했고 따라서 항해는 매우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로하여 그들은 어렵게 미항에 도달했고, 연말이 가까워 항로에 무리가 있음을 예견한 바울은 행선을 강행하면 재물과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러나 선주들은 선장과 사공들이 바울보다 바다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고 백부장을 설득하여 결국 그들은 그레데 섬의 다른 항구, 곧 겨울을 지내기에 편한 뵈닉스 항을 향하여 행선을 계속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 당시 율리오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바울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과 예정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후일 바울은 후일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이 때를 회상하며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위대 안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되었느니라” 증거하였다. 이것을 이제 곧 유로굴로 광풍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율리오 백부장의 증언이 시위대에 미친 영향을 말한 것이라 생각된다.
C. 광풍 유라굴로와의 투쟁
그들의 배가 출발하자 때마침 남풍이 불어 와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적중한 것이라 생각하며 닻을 감아 올리고 그레데 해변을 끼고 행선을 서둘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갑자기 섬 가운데로부터 유로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 유로굴로란 그레데 섬 이다산맥에서 발생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발생한 동풍이 강한 난기류로 형성된 돌풍으로 그 시 항해 기술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예상치 못한 돌풍을 만난 선장과 선원들은 점점 더 심해진 바람을 막을 수가 없어서 거대한 배는 바람이 밀려 가는 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 배가 물위에 더 높게 뜰 수 있도록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배 위 기구들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풍랑이 약해지지 않자, 그들은 살아날 소망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바울이 그들 앞에 등장하여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1-22) 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그들 앞에 서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각이나 예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의 폭풍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남들이 모두 사경을 헤맬 때 그는 폭풍 속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II. 폭풍은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므로 인생의 광풍 유로굴로를 만나곤 한다. 특별히 그 하나님의 사람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비아냥거리기 일수다. 만약 그들의 눈에 바울이 위대한 선지자로 보였다면 선장이나 선주는 물론 백부장도 그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손에 잡힌 죄수였다. 믿음이 없는 그들의 귀에 죄수의 말이 선지자의 말로 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미한 음성 가운데 들려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엇을 행하고자 할 때 특히 무엇인가 하려는 일들이 지지부진하게 잘 풀리지 않을 때 당신 주위에 있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나는 내 주변에서 주의 권고를 듣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광풍을 피하지 못한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 사람들은 그 때라도 세미한 음성을 듣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인생의 폭풍에서 항상 구조하시지는 않으신다. 또한 그렇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시지 않으신다. 때때로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음을 인식케 하는 사나운 폭풍을 경험한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정할 수 없음을 느끼며 결국 자신의 어떤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된다. 오늘 바울을 권고를 듣지 않아서 유로굴로의 광풍을 만나 사경을 헤매게 된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때에 이르면 그들의 삶에서는 밝은 해와 별을 볼 수 없는 흑암에 놓이게 되어 살아날 의식을 상실하게 된다. 그 상황이 되면 아무도 도와 줄 사람도 없고 절망과 고통이 생명을 위협할 뿐이다. 인생에서 이러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날의 고통과 아픔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III. 인생의 폭풍 가운데 주목할 사항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A. 폭풍우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
바울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너에게 주셨다 하였으니 생명을 잃는 자가 없으리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4) 말하며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다.
주님은 바울이 폭풍을 만나지 않도록 하시지는 않았지만, 주님은 폭풍우 중에서 그와 함께 계셨으며 그가 살아 남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다. 바울은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다”(23,24) 하였다.
이 증언으로 보아 바울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사흘동안 해와 별을 볼 수 없는 암흑의 풍랑 속에서 생명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 이 때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주님의 경고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자신의 교만함에 대해 철저히 후회하며 회개하였을지 모른다.
B. 환난과 주의 말씀
또한 흥미로운 것은 주의 사자가 밤에 곁에 서서 말하였다는 것이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주께서 친히 나타나신 것도 또한 성령으로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사자는 주께서 보내신 사람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던 빌립집사를 아라비아로 행하던 내시에게 가라고 하신 것도 주의 사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자와 성령과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빌립집사를 보게 된다(행8:26,29,39 참조).
나는 바울 앞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바울과 함께 배에 탄 복음의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나 실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일 수도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옥에 갇힌 바울에게 나타나신 주께서 바울이 로마에서도 나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 하셨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의 고집으로 이하여 인생의 광풍으로 향하여 돌진하는 뱃머리를 막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폭풍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도 주님은 함께 하고 계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의 동역자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마가복음 4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신 주님은 배를 삼키려는 폭풍을 잠재우셨다. 또한 오병이어 이후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실 때 한밤중에 폭풍이 일자 주님은 바다를 걸어서 가셨다. 제자들 앞에는 그들이 복음을 위해 해야 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센 풍랑이 있을 동안 그들은 뱃멀미로 인하여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음식을 먹으라 권하며 떡을 가져다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메시지에 소망을 갖게 된 그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음식은 소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불꽃이 되었을 것이다.
C.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와 같이 우리는 인생 가운데 돌연히 몰아 친 폭풍 때문에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로 하여 우리는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자책할 때가 있다. 바울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바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이미 바울에게 네가 가이샤 앞에 서야 하리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울이 네로황제 앞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은 바울이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사자는 바울에게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려야 하리라” 하셨다.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정처없이 그들이 떠내려간 것이 아니라 주님은 폭풍을 통해 바울에게 큰 사역의 문을 열어주시려 계획하신 한 섬에 다다르게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의 폭풍우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보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그 목적은 다음 장에서야 우리에게 나타난다.
잠언기자는 우리에게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잠16:1) 하였고 다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잠16:9)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겪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람을 통해 하신 말씀에 대해 확실한 응답을 내리신다.
바울 일행이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그의 곁에서 일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말씀으로 약속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합니다.
1.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 (13~17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3절)
바울은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선장과 선주는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항이 작아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까, 저 옆에 있는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뵈닉스로 우리가 잘 갈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하며 계획대로 닻을 올리고 출항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배’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생각이 옳고 ‘바울이 괜히 저런 말을 해서 우리 마음을 언짢게 했다.’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조심하기 위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크고 긴 그레데 섬 해안을 끼고 항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죽음의 북동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4절)
항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섬의 내륙으로부터 큰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도 이처럼 모든 일이 우리 계획처럼 순풍에 돛단 듯 잘 나가다가,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이런 광풍이 몰아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바람의 이름을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유라굴로’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Euros)와 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Aquilo)의 합성어입니다. 선원들(뱃사람들)이 말하는 북동풍, 그것도 아주 강력한 죽음의 북동풍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 잘 표현해놓았는데 “a wind of hurricane force”, 즉 허리케인과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진 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NRSV, ESV 등 요즘 많이 사용하는 영어성경 번역들은 이것을 ‘유라굴로’라고 하지 않고 ‘Northeaster’ 즉 북동풍이라 불리는 광풍(혹은 허리케인)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그것은 허리케인과 맞먹는 엄청난 파워를 가진 바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큰 상선이나 크루즈 배처럼 강한 추진력의 엔진을 가진 배들도 태풍급 바람이 불거나 큰 파도가 몰아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배들은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이기고 나아갈 수 없는 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용기가 대단하고 경험이 많은 뱃사람들이라도, 강력한 두 개의 폭풍(북풍과 동풍)이 합쳐져서 몰아치는 역대 최강의 바람이 만든 파도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냥 그 파도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상황입니다. 잘못된 파도에 엉뚱한 데로 떠밀려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파도가 칠 때 아무리 노련한 뱃사람이라도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5-16절)
제가 오래 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설교를 어느 교회에 갔다가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본문만 가지고는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바람에 계속 밀려가다가 크레타 섬에서 약 23마일 떨어진 가우다라는 섬 근처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우다(Cauda) 섬은 지금의 가우도스(Gavdos)라는 섬입니다.
계속 항해하기에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배 뒤에 끌고 다니는 “거루” 즉 작은 거룻배들을 끌어올렸습니다. 이 거룻배들은 얕은 해안가에 상륙할 때 사용되는 작은 배들이고 때로 구명정처럼 사용되었는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거룻배들이 날아와서 배에 부딪치면 거룻배들도 깨지고 모선도 해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풍과 파도에 날아와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룻배들을 끌어올려서 밧줄로 꽁꽁 동여매었습니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7절)
위험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스르디스에 걸리는 게 뭐고 연장을 내리고 쫓겨 간 것은 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스르디스”는 ‘시르티스’(Syrtis)라는 단어입니다.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크레타 섬의 남쪽 에게 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부터 밀려드는 모래톱(모래언덕)을 말합니다.
‘연장을 내렸다’는 것은 어떤 무거운 짐이나 도구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에 빠르게 밀려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내리는 일종의 닻 같은 것을 말합니다. 너무 빨리 밀려가니까 무거운 닻을 내려서 천천히 밀려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갔다’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서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을 보면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가고 있었다.” (14절)
지중해 남쪽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리비아 해안이 있는데, 그 당시는 북아프리카를 주로 ‘리비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 속에 ‘모래언덕’으로 불리는 ‘스르디스’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배든 그 바다 속에 있는 모래언덕에 탁 걸리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고 붙들리는 겁니다.
그레데 섬 미항을 출항한 이 알렉산드리아 배가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남서쪽에 위치한 가우다 섬으로 휩쓸려갔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자칫 배가 남쪽으로 밀려가다가 결국 리비아 해안까지 밀려가서 바다 속 스르디스(모래언덕)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래언덕은 선원들에게 아주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 번 걸리면 누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는 꼼짝없이 있어야 하고, 망망대해에서 그런 데 걸리면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고작 돛을 내리고 그냥 휩쓸려 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처음 출항할 때는 순풍이 불어서 ‘우리가 바울의 말을 안 듣길 잘했지. 전문 뱃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의견대로 한 것은 참 잘했다.’라고 생각했겠지만, 바로 조금 후 급작스럽게 돌변한 사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을 태운 이 배가 겪고 있는 일은 마치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작은 비유와도 같습니다. 때로는 세상 일이 순풍처럼 보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와서 아주 잘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경 내용도 그렇고,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나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을 통해 ‘그렇게 하면 안 좋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데...’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그래도 내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는 다르게 하는 게 낫다.’ 하며 나아갔을 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내가 알아서 했는데 일이 잘 풀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생각을 아주 잘한거지.’ 하며 의기양양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풍이 광풍으로 변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사람으로부터 예상 밖의 광풍이 불어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조금 살아보면 그런 것을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알아서 했을 때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다가, 중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Icarus)의 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미노아 문명과 관련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바로 이 그레데 섬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날개를 달고 날아서 크레타 섬을 탈출하고자 했던 이카로스의 꿈이 막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태양의 열에 녹아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는 것이 이카로스의 신화입니다.
인생이 그것과 참 비슷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뭔가 열심히 해서 날아오르며 잘되는 것 같지만, 뜻하지 않은 불행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 위기를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증명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든, 다 좋은 일도 찾아오고 위기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좋은 일보다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진짜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풍이 순풍으로 바뀔 때는 누구나 감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분 좋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풍이 광풍으로 바뀔 때 진짜 신앙이 어떠한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쉽게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혹시 내가 불순종하여 광풍을 초래한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다 불순종이나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죄 때문은 아니더라도, 욥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어려움이 올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어려운 순간 낮아져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혹시 제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추며 돌아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위기 상황도 벗어나도록 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다.
2.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 (18~20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8절)
‘풍랑으로 심히 애썼다’는 표현은 ‘폭풍우로 심히 괴롭힘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폭풍을 견디는 데 힘을 보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아리스다고 등 일행이 거기 탄 사람들과 같이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 이튿날이 되었지만, 광풍의 위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광풍 속에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을 제외한 하물들을 모두 바다에 내버려야 했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실은 거대한 양의 곡물, 또 많은 하물주들이 실은 온갖 하물들을 다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선주의 돈이고 선장의 돈이고 또 하물주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미항에 있지 않고 조금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뵈닉스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항해의 위험에도 바로 옆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뵈닉스로 가자고 주장해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광풍 앞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광풍 속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곡물과 하물들)을 다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19절)
지금 누군가가 내버린 게 아닙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째가 되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은 침구, 의자, 테이블 등 “배의 기구”도 바다 속으로 버리게 되었습니다. 배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할 기구들마저 바다 속으로 버릴 정도로 상황이 아주 위급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0절)
“여망”이라는 말은 ‘남을 여(餘)’에 ‘바랄 망(望)’, 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인데, 이제 남은 희망도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시적으로 ‘햇님, 별님’이라고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굳이 여기서 해와 별을 쓴 것은, 그 당시 뱃사람들이 해나 별을 보면서 방향도 알고 시간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볼 수 없으니 측정하여 알아낼 수 없는 상황,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단어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을 왜 이들은 바다 속에 버려야 했습니까? 배에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기구들까지도 왜 바다에 다 버려야 했습니까? 그렇게 해야 혹시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했지만,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날들만 계속될 뿐, 죽음의 풍랑 유라굴로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는 겁니다. 실날같은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입니다. 이제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해도 별도 보이지 않으니까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알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바람은 강하게 불고 거대한 파도는 쉬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삼키려 막 몰려옵니다. 그냥 배를 타서 조금만 흔들려도 배 멀미를 하며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물이 쏟아지고 물을 먹어야 하는 상황, 또 바람이 불고 배가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이리 밀려갔다 저리 밀려갔다 하며 쓰러지고 부딪히고 피가 나고 팔다리도 부러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이런 상황이 조금 후에 멈추면 그나마 다행인데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조금만 견디면 좋은 일이 생길 거다.’라는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나 힘듭니까? ‘이제는 그냥 놓아야겠다. 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해도 별도 달도 다 안 보이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배에 있는 사람 숫자가 바울까지 합쳐서 276명입니다. 지금 이러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괜히 왔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괜히 미항을 떠났다가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그런데 누가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면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위기 속으로 자신들을 몰아넣은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왜 미항에 머물지 않고 뵈닉스로 가자고 하며 무리해서 떠났습니까? 자신들의 피와 같은 돈, 소중한 돈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돈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다, 생명보다 돈이 귀하다.’라고 여겼습니다. ‘돈이면 생명도 지킬 수 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이 중요하다. 그래서 미항이 아니라 뵈닉스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했던 바로 그 돈 때문에, 결국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이 지금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돈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도구이어야 할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돈이 오히려 우리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수없이 많은 곳에 돈에 대한 경고가 있지만, 지금 이것을 겪고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썼던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성경에서는 돈 자체가 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돈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중립적(neutral)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합니다.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썼을 당시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돈에 넘어가서 믿음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돈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자기에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를 찌르고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뿐이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학위나 사회의 성공이나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맨 끝에 가보면 다 돈입니다. 아무리 유명해지더라도 돈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유명해질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량상품을 만들어냅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졌는데, 부실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지난번 세월호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무리하게 한계를 넘는 화물을 실었다가 배가 돌 때 넘어져 침몰하는 일이 왜 일어납니까? 돈 때문입니다.
이 콜럼버스는 그래도 괜찮지만, 제가 오래 전에 살던 애틀랜타에는 이상하게 유흥업소가 많습니다. 옛날에도 많았고 나중에는 뉴욕 쪽에서 온 사람들이 큰 식당도 세우고 또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를 세웠습니다. 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도박 산업이 왜 안 없어집니까? 도박이 나쁘다는 건 다 아는데 왜 안 없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아주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가 왜 벌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테러도 결국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기는 조금 덜하지만, 한국은 좁은 땅인데도 부동산 투기가 지금까지도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사기 치고, 횡령하고,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횡포를 부리고, 사람 간에도 갑질을 하는 일이 왜 계속 일어납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벌려고,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그런 모든 행동들을 통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내가 사는 겁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생명까지 스스로 찔러서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이든 무엇이든 그쪽으로 가다가 어느 날 이런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이 갑자기 우리를 덮칠 때, 우리의 돈이 그 죽음의 광풍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 다급해서 이제 돈을 다 포기하고 살고 싶다고 한들, 그 광풍이 조용히 사라져주겠습니까? 우리의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학벌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겠습니까?
결국 이런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올 때 우리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 결정을 하지 말 걸...’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때 주님을 붙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하지 않는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안심하라 (21~26절)
이렇게 죽음의 풍랑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기는 사실 죽음의 풍랑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기가 뭔가 하면, 이것이 너무 힘드니까 ‘이제 끝이다’ 하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덴마크의 크리스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엄청난 외부적인 풍랑이 몰려오고 불행이 일어나는 것이 최대의 위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 그런 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토리는 이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1절)
지금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친 후로 며칠이 지났는데, 27절에 보면 “열 나흘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누가는 날짜를 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2주 동안 이 엄청난 폭풍에 계속 시달린 겁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가운데 서서 외칩니다. 바람이 불고 배가 흔들리고 몸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먹겠습니까?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바울이 말을 하는데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볼 때 어떻게 들리는가 하면, ‘내가 뭐랬어? 거봐.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라고 들릴 수 있는데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을 면했으면 좋을 뻔했다.”라는 것은 ‘꼴좋다. 거 봐라.’ 하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내 말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말입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는 돈이 자기를 살려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일깨워주며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그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2절)
우리말 “안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사실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기뻐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여망이 다 사라지고 살 소망이 없으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라, 안심하라’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비록 돈은 날렸지만 생명에는 아무 손상도 없을 것이며 돈은 살아서 다시 벌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바울이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나오는데, 이때 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뱃사람이고 엄청난 파도에 힘들어하며 괴로워하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안심하라! 기뻐하라!” 하고 말합니다. 그때 얼마나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는 느낌이 들었겠습니까? 이 상황에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자기들에게 경고한 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귀가 번쩍 틔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3-26절)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대단한 선언입니다. 지금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근거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 관광을 위해서 지금 무슨 알렉산드리아 크루즈 배에 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것은, 베스도 총독의 법정에서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그리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또 로마로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고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라굴로 광풍이 바울을 비켜간 것이 아닙니다. 광풍이 불었는데 바울이 서 있는 곳만 조용하고 옆에만 폭풍이 몰아친 게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다 휩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이 젊은 때도 아니고 노년에 접어든 나이이며 몸도 아주 허약합니다. 그런데도 이 폭풍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넘어지고 뒹굴고 하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때만 이야기하신 게 아닙니다. 이때는 천사를 보내어 이전에 주신 말씀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인데, 23장 11절에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데, 아무리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어도 바울은 분명히 ‘나는 괜찮다. 살아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동역자 누가와 아리스다고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하고 있는 273명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여기서 새롭게 추가해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살아나서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내용입니까? 정말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2020년이 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늘 벌써 1월 마지막 주일로 1월이 다 갔습니다. 그럼 이제 11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오늘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예배는 매주 있고 주중에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말고 그냥 다음 주에 가지.’ ‘그 다음 주에 가지.’ ‘삶 공부는 이번에 관두고 다음에 또 있을 테니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있을지 없을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그때까지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탄 배에 엄청난 광풍인 유라굴로가 불었습니다. 꼼짝없이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선주와 선장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거기에는 화물주들이 많이 타고 있었습니다. 보따리 장사꾼들로서, 돈을 벌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 화물을 꽉 붙들고, 이것이 곧 돈이기 때문에 가서 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로마 군인들이 있습니다. 강한 군사력을 지닌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또 백부장이 그 배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지시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죄수 바울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이지만, 그 배에서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배에는 다른 죄수들도 있고 다른 여행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결국 276명 모두를 살린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아니,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군사력도, 육체의 강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보다 강하신 주님, 광풍도 다스리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조차도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리더십은 이제 주님을 섬기는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뒤에 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절망 속에 있던 273명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작은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이처럼 큰 유라굴로가 불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부느냐가 문제이지, 반드시 옵니다. 그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유라굴로가 불지 않고 있을 때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 주님의 소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해야 되겠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어떤 상황이 우리 삶에 닥치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낼 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살려내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는 안심하라(사도행전 27:13-37)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행 27:22)
본문 22절을 보면 “이제는 안심하라”는 사도 바울의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생존의 소망이 전혀없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276명의 선객들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는
음성은 절망에서 소망의 빛을 찾게 하는 음성이자, 죽음에서 생명을 약속하는 음성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고해를 항해하는 인생들에게도
현대의 ‘유라굴로’는 쉼없이 부딪쳐옵니다.
불경기로 인한 ‘경제 불황의 유라굴로’, ‘우르과이 라운드(UR)라는 유라굴로’가
우리 민족전체에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업과 가정에도, 여러분 개인 한 사람에게도 이 강렬한 20세기의 유라굴로 광풍은
미친듯이 여러분을 파멸시킬 것처럼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 시간도 “이제는 안심하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여러분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음성은 세상의 풍파에 지치고 허기진 우리들에게 오늘도 여전히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심의 형편과 때
그러면 어떠한 형편에서 안심하라고 하였습니까?
또한 안심의 때는 언제입니까?
첫째로 “안심할 수 없을 때 안심하라”
‘이제는 안심하라’는 바울의 말은 당시의 형편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도저히 안심할 수 없는 때입니다.
광풍을 만나 짐을 바다에
던지고, 배의 기구를 버리고, 식량인 밀까지 바다 속에 집어넣은 가장 위험한 때였습니다.
“심히 애쓰되”(18절)라고 하였고,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다”(14절)고 하였으니 육체적인 손실도 컸습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 선객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이제는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안심의 때가 아님에도, 아니
안심할 수 없는 환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호송되는 긴 항해 여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누가는 뱃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어설픈 표현을 사용했지만, 현장에 없던 사람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상세한 표현으로 이 과정을 기록했다(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1절). 이 여정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2절). 그는 에베소 폭동 때 극장에 끌려간 성도로(행 19:29; 20:4), 바울의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누가는 배에 필요한 주치의로 함께 했을 것이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은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져 배를 두 번 타는데, 첫 배는 시돈에서 무라까지 가는 연안선이었고 아무 문제 없이 항해했다. 하지만 두 번째 배는 무라에서 로마까지 가는 큰 배였으나 폭풍을 만나 파선했다.
21세기에도 배가 침몰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진다. 아무리 구명조끼 및 안전 도구가 잘 구비되어 있어도 깊이를 알 수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면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천 년 전 항해는 더더욱 안전과 거리가 멀었다.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 때문인데, 10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는 항해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항해술도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이어서 나침반도 없이 별을 보며 운항해야 했다.
한달이 넘게 표류하는 배에서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 때, 자유로운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모두 영혼의 파멸을 피부로 느낄 때 영혼의 안전함을 확신했던 사람, 바울이다. 어떻게 바울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을까?
긴 항해를 종종 인생에 비유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을 만난다. 오래 표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딤전 1:19). 어떻게 우리는 험악한 바닷길 같은 인생에서 ‘내 영혼이 안전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1. 바울의 여정(1-20)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육로를 통해 시돈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해변을 순항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탔다(2절). 백부장 율리오의 호의로 시돈 성도에게 대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곧 거기서 떠나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다(4-5절). 서방 사본에 따르면 이 여정은 약 2주를 소요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일행은 이달리야 행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다(6절). 로마의 주된 곡식을 운송하는 큰 배로 많은 양의 곡물과 사람(276명, 37절)을 태울 수 있었다. 이때부터 풍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틀이면 도착할 니도에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도달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기로 했다(7절). 일단 그레데 섬 라새아 부근 미항에 멈췄다(8절).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가는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고 했는데, 많은 학자가 지지하는 59년에 이 일이 있었다면 유대인의 금식하는 대 속죄일인 10월 5일이 지난 시점 즉 항해가 불가능한 시점이 된 것이다(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9절: 짧은 낮, 긴 밤, 조악한 시야, 구름, 폭풍, 폭우, 폭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절). 수년간 전도를 위해 여러 번 지중해를 항해한 경험에 의하면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백번 옳았다. 하지만 바울이 선장인가? 선주인가? 한 죄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미항보다 겨울을 나기 좋은 항구 뵈닉스까지 가기로 했다(11-12절). 하루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다. 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안심한 그때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타이푼)이 크게 불어닥쳤다(14절).
이때부터 배는 통제 불능이 됐다(15절). 하루만 이동해서 겨울을 편안하게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망가졌고 거의 한 달간 불안과 공포에 벌벌 떨며 혼동하는 표류에 빠졌다.
그래도 한 달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서 긴급 조치할 틈을 얻었기 때문이다(16절). 그들은 1)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2) 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배를 꼭 잡아 맴), 3) 연장을 내렸고(큰 돛대의 하활을 내림), 4) 짐과 기구를 내버렸다(16-19절). 파도와 폭풍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배를 가볍게 하여 더 떠오르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희망의 마지막 불씨까지 모두 꺼져버렸다.
2. 바울의 확신(21-26)
타고 있던 비행기 양 날개의 엔진이 멈춰버렸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인생이란 항해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위기를 종종 겪는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모든 노력과 수고가 소용 없을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이제 끝이구나’ 자포자기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사람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 ‘내가 뭐랬어’라는 타박이 아니다. 그들을 동정하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기 말의 신뢰성을 높이는 말이다. 그가 하는 다음 말을 믿어 주길 바랐다.
모두가 구원의 소망이 전무하다고 느꼈던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안심하라고? 혼자 다른 배에 타고 있는건가? 큰 풍랑이 그대로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안심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바울은 평안한가? 무슨 근거로 모두 안전할 거라고 확신하는가?
여기 바울이 확신했던 근거가 나온다. 그의 영혼이 폭풍 중에 평온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4절)
바울도 폭풍 중에 크게 흔들리는 배 위에 있었다. 눈앞엔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 하는 말이나 그 상황에 압도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 영혼이 내는 소리도 안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발견하기 원하신다. 그럴 수 없을 때에 하나님 말씀을 붙들기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들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롬 4:18).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믿음대로 이루신다.
그분은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군대가 에워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배 안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주무시다가 일어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타이르신다.
결국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내면의 소리가 내는 소리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 우리 믿음을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평안하다. 결혼, 출산, 양육, 취업, 건강, 구원, 사업 등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두 세세히 말씀해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다음을 확신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롬 8:3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9).
하나님이 우리 삶에 두신 뜻을 온전히 이룰 그 날까지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바울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반드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당신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3. 바울의 구원(27-44)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게 하셨을까? 바울의 믿음대로 됐을까? 벌써 열 나흘째가 됐다(27절). 여전히 배는 파도와 폭풍에 따라 정신없이 이리 저리 쫓겨가기를 자정까지 계속했다. 그런데 보니까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물 깊이를 재어 보니 스무 길(37m)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27m), 점점 뭍을 향해 가는 게 분명했다(28절). 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일단 네 닻을 내려 배를 고정하고 날이 밝으면 뭍으로 가기로 했다(29절).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몇 사공들은 도망하려고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몰래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울이 이를 알고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했고, 이에 군인들이 거룻 줄을 끊어 거룻배를 떼어 버렸다(31-2절). 바울이 그만큼 신뢰받는 상황이었고 또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그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어 가자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음식을 권했다. 그들은 혼돈과 공포 속에 음식을 잘 챙겨 먹지 못한지 십사일이나 됐다(33절). 그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구원, 34절) 음식이 분명 필요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너희 중 머리 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절).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배에 있는 이백칠십 육명의 사람들도 바울의 확신에 찬 말에 안심했고 음식을 먹었다(36절).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하나님 말씀에 확신에 찬 바울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대표로 하나님께 축사 기도하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식사 후 남은 모든 곡물(밀)을 바다에 버렸다(38절).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배를 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의논하여 결정한 후(39절), 닻을 끊고 키를 풀어 배가 육지를 향하게 하고, 돛을 올려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40절).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 한 번의 기회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배는 그만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형성되는 끈끈한 진창, 모래톱에 처박혔다. 이물 곧 배의 앞부분은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됐고, 뒤쪽에서 부딪치는 거대한 파도가 배를 점점 부서뜨리기 시작했다(41절).
바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배는 손상됐다. 하지만 배에 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생명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다(42절). 이 틈을 노려 뭍으로 도망쳐 사라지면 군인들이 그 죄수가 당할 형벌을 대신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을 보호하셨다(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43절).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은 헤엄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하여 육지에 나가게 했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다 상륙하여 구조됐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이다(44절).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 조바심 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상세히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쉽게 믿을 텐데. 어쩌면 이런 마음 깊은 곳엔 얕은 해안 주변을 다니며 아주 작은 믿음만 가지고 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긴 항해, 망망대해를 지날 때 어떤 위험과 환난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을 배운다. 조롱과 핍박, 무거운 죄의 짐과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 중에도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으셨다(믿음의 주, 히 12:2).
기독교의 믿음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막연한 믿음에 ‘예수님’ 이름만 차용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물으신다.
절벽 끝 한 영혼 살리는 한마디…'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새벽 2시 수화기 너머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한 마디. 김성경 전도사는 한밤 중 '전도사님 한마디가 저를 살렸어요'라며 한 청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잊을 수 없다.‘Relax, God’s Timing is Perfect!’
깊은 좌절에 빠져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던 한 청년이 삶의 희망을 갖게 된 바로 그 한마디다. 김 전도사의 차에서 무심코 챙겨온 설교 원고가 여느 때처럼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청년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번역해서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는 이 말은 김성경 전도사가 펴낸 책 제목이기도 하다. 책은 단 한 문장이 한 청년을 일으켜 세운 것처럼 지금도 어딘가에서 남모르게 눈물 흘리고 있을 수많은 영혼들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김 전도사는 16세의 나이로 침례신학대학교에 최연소 입학했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 싶은 마음에 중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돼 학교를 그만두고 신학의 길에 입문했다.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살이 되던 해에는 미국 사우스웨스턴신학대학원으로 건너가 목회학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처음에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걸어온 길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전도사는 “자퇴를 결심한 당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라는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며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온 나를 흔들림 없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한 한마디”라고 말했다.
책은 김 전도사의 인생을 견인해 온 성경 한 구절처럼, 하나님조차 나를 버린 것 같은 깊은 절망에 빠진 영혼들을 살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담았다.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당신의 모든 아픔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달려오시는 길이 된다’고 저자는 책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 김성경 / 토기장이
8일 출간된 책은 이틀 만에 기독교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올랐다. 20대 연령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15위를 기록했다. 이례적으로 무명의 독자 322명의 추천사를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전도사는 “이 땅에서는 무명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유일하고 특별한 이들이 이 책의 증인이 되어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교회를 떠났던 사람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까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서평을 남기며 많은 독자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김 전도사는 “요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우울감 등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청년들이 많다”며 “혹시 내가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너무 늦어 버린 건 아닐까 절망하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것은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
사도행전 27:22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2월 8일(월) 사도행전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와 같이 되기를(26:29)
Paul replied, "Short time or long--I pray God that not only you but all who are listening to me today may become what I am, except for these chains.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갈 4:12;빌 3:17;살전
1:6; 2:14; 살후 3:7, 9).
갈라디아서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I plead with you, brothers, become like me, for I became like you. You have done me no wrong.
빌립보서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Join with others in following my example, brothers, and take note of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pattern we gave you.
데살로니가전 서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in spite of severe suffering, you welcomed the message with the joy given by the Holy Spirit.
데살로니가전서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For you, brothers,
became imitators of God's churches in Judea, which are in Christ Jesus:
You suffered from your own countrymen the same things those churches
suffered from the Jews.
데살로니가후서 3: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For you yourselves know how you ought to follow our example. We were not idle when we were with you.
데살로니가후서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We did this, not because we do not have the right to such help, but in order to make ourselves a model for you to follow.
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 붙어 다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11:1).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는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
2.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Pronunciation [ mimētēs ]
Etymology / 3401에서 유래
-
1. 모방자, 본받는 사람, 고전 4:16, 엡 5:1, 살전 1:6, 히 6:12.
-
관련 성경 /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Pronunciation [ mimĕŏmai ]
Etymology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
1. 모방하다, 본따다, 본받다, 따르다, 살후 3:7, 9, 히 13:7, 요삼 1:11.
-
관련 성경 / 본받다(살후 3:7, 히 13:7, 요삼 1:11).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영국 대형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신사가 이 박물관에 들어와 그곳에 진열된 작품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그 작품들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열심히 적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습니다.
이 신사의 이런 거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지켜보던 수위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젊은 신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은 작품들 앞에서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설명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잘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관람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그 신사에게 수위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바로 이 아이들의 작은 키로 이들이 볼 수 있는 눈높이에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죠. 제 자세가 좀 이상했지요?”
비유하자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이 바로 이 선생님의 자세였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그 박물관에 근무하던 수위의 궁금히 여기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시기 위해 그렇게 눈높이를 낮추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육신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눈높이를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우리 뜻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입니다.
‘판단’에는 이미 우리의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눈높이를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해 질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눈높이를 맞춰야 주님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력할 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주님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냐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흉내’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남의 행동이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모욕이 될까?
그 이유는 ‘그렇게 변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그렇게 변화될 마음이 있는 것이지만 흉내는 상대를 자신보다 낮게 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남미의 어느 축구선수가 손으로 눈을 찢으며 동양인을 비하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행동이어서 많은 한국 축구 팬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습니다.
동양인이 될 마음이 없이 흉내낸 것일 뿐입니다.
몇년
전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관짝 밈’을 올렸을 때 흑인 비하 논란이 일었습니다.
흑인들이 춘 춤을 따라 하기 위해 얼굴도 검게
칠했기 때문입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씨는 SNS에 그런 인종차별적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만약 고등학생들이 흑인이 되고 싶어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흑인을 비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마음이 없으면서 그런 모습을 취했다면 그런 흉내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흉내‘를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그리스도인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의지와 노력, 그리고 믿음이 없으면 그 모든 행위가 ’흉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 인물이 마술사 시몬과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마지막 변론을 듣는 베스도 총독과 그리립바 왕에게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흉내내지 말고 눈높이를 맞춰가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눈높이를 맞추려면 우리의 본성을 바꿔주시는 성령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분명히 흉내내지 않고, 하나님께 눈높이를 맞추며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흉내만 내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님께 눈높이를 맞추게 하소서
늘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하소서
가이사랴에서의 마지막 심문은 아그립바 왕의 심문이었습니다.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사건은 그저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에게 또 한 번의 공적인 심문은 그의 신앙을 변호하며 복음을 한 번 더 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때
바울의 변명과 전도에 아그립바 곁에 있던 베스도의 대답은 미쳤다 였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구나 였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왕뿐만 아니라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결박된 것 말고는 저처럼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였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는 만족합니다 라는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결박되고 감옥에 갇혀 심문 받는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과 은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고도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정말 괜찮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오해와 누명과 결박과 갇힘과 모욕과 핍박과 불안한 미래와 죽음의 위협이 그로 하여금 불평하게 하거나 생을 저주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갖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에게 하님이
얼마나 크고 귀한 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어느 날 어미 게가 옆으로 가는 새끼들에게 "옆으로 걷지 말고 앞으로 걸어가라"고 야단 칩니다.
세끼 게들은 아무리 앞으로 가려해도 앞으로 갈 수 없자 어미에게 "그럼 엄마가 앞으로 먼저 가 보세요"하고 부탁합니다.
어미 게가 앞으로 가려해도 자꾸만 옆으로 갑니다.
그러자 새끼들은 "엄마도 옆으로 가면서....." 하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어미 게와 새끼 게의 이야기에서 모델링(Modeling)과 모방(模倣. imitation)의 중요성을 생각합니다.
모작(模作)이란 모방한 작품을 말합니다.
성경을 바울을 가리켜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바울의 모델링은 한때 바울이 핍박했던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회개한 후에 철저하게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예수님의 모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델링이 되셨고 주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삶을 모방하면서 이 세상에 드러난 모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나를 본받으라고 외쳤습니다(고전 4:16, 11:1).
또한 아그립바 앞에서도 자기를 변론하며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처럼만 살아라!
나처럼 일하라!
나처럼 믿으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가 맡은 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임무를 완수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거짓의 권력이 진리를 다스리려고 위조된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거짓이란 법은 앞으로 가지 못하는 어미 게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앞으로 걸어가는 왜소한 진실을 짓밟는 무자비한 힘에 대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외쳐야 합니다.
우리처럼 믿으라!
우리처럼 행하라!
우리처럼 외쳐라!
법치가 무너지는 세상을 향하여............
자유민주주의 틀을 허물고 김일성주의 독재의 길을 향하여 달리는 부정한 권력을 향하여 외칠 수 있는 올바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미래가 너무 암담할 뿐입니다.
자유를 누릴 줄 아는 믿음과 자유를 물려줄 수 있는 강력한 진실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만 즐기는 자유는 자유가 무너질 때 동시에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통일행진곡(統一行進曲) (1951)
김광섭 작사 / 나운영 작곡
壓迫과 설움에서
解放된 民族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共産 오랑캐의 侵略을 받아
共産 오랑캐의 侵略을 받아
自由의 人民들
피를 흘린다
同胞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白頭山에
太極旗 날리자~
살거나 죽거나
이 땅의 겨레
무찌르고 넘어진
勇士와 함께
以北은 부른다 눈물의 疆土
以北은 부른다 눈물의 疆土
民主 統一 獨立을
싸워서 찾자
同抱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白頭山에
太極旗 날리자~
통일행진곡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본문은 에베소서 4장 25~32절 말씀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서로 인자하게 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의 원칙을 세우고, 친절하고 겸손하며 공손한 행동으로 이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들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생각해서 민망히 여겼고,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ἐλεημοσύνη, ης, ἡ
1654
[ĕlĕēmŏsü- nē]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ἐλεήμων, ον
1655
[ĕlĕēmōn]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πάρεσις, εως, ἡ
3929
[parĕsis]
ἄφεσις, έσεως, ἡ
859
[aphĕsis]
ἀνέχομαι
430
[anĕchŏmai]
ἀπολύω
630
[apŏlŏuō]
성경에 보면 ‘용서’에 대해서 언급할 때 꼭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실수나 죄를 사하여 줍니까? 그만큼만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는 사해 줄 줄 모르면서 내 죄만 사해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준 것 같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속에 내 개인의 구주로 모셔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어떤 복잡한 수속이나 절차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아니, 우리가 외국에 이민을 가려 해도 그렇게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 있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했다면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내 육정을 통해서 한 것도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하반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고, 같은 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수양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혹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직접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예배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그렇게 쉽겠어요?”하고 대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로 믿습니까? 그러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믿을 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못 믿습니까? 너무 쉬워서 못 믿습니다. 너무 쉬우니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천만 원 이상의 돈을 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준다고 하면, 돈 있는 사람 치고 안할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대학 이상 졸업해야 그 자격이 부여된다면, 공부한 사람 치고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에게 시비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해서 불뱀을 보내서 돌아가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물게 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은 열이 올라서 고생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런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그러면 놋으로 불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불뱀에게 물린 사람이 장대 위에 달려 있는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불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텐데 그게 너무 쉬우니까 믿어지지 않아서 쳐다보지 않아 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모세의 말을 믿고 쳐다 본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사람이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려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본문에 ‘사랑을 입은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왜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계속해서 9~10절에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옛 사상, 옛 습관에서 벗어나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을 “거듭난다,” “중생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를 향하여 하신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습니다. 어디 가나 누구를 대하나 화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지켜 나아가야 할 윤리적인 면을 말씀해 내려가다가 18절에 “할 수만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하였습니다. 다른 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잘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였다는 곳에 평화가 없으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더구나 본문에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했습니다. 옛날 헬라의 아덴 사람들은 논리가 정연한 웅변을 아주 잘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훌륭한 웅변가의 웅변술을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은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모습도 닮습니다. 생각도 닮습니다. 생활도 닮습니다. 닮지 않으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할 일입니다. 본문 2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셨으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배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대로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형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신앙 생활에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워야 하며,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한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그의 선하심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됩니다. 또한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지시해 줍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며, 그에게서 우리는 가장 자유롭게 관대한 사랑의 실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사랑에 공동 참여자요, 그 사랑의 위로의 동참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수직선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을 의미하고, 수평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9~1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위대한 속죄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희생의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세상 죄를 한 몸에 짊어진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받아들이시고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께 효과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며 그것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3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1~2절과는 너무 대조적인 말씀입니다. 구별된 무리의 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그 생활에 있어서 이방신을 섬기는 그와 같은 사람들과는 단연코 구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것이나 탐욕은 그 당시 이교도 세계에서는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옛날 고린도의 신전에는 수백 명의 매춘부를 두어서 신상 앞에서 매춘행위를 하는 것을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생각했고, 거기서 얻어지는 돈으로 신전(神殿)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음행은 그 당시 이방 종교인들의 종교 의식에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음행 그 자체가 이교와 사교의 상징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음행을 포함한 성적인 악풍을 총칭한 것입니다. “탐욕”은 끝없는 성적인 욕심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더러운 죄는 이교도들만의 사회에서 보통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유명한 철인, 정치가들도 모두가 이런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교에서 회개한 성도들에게는 철저한 회개의 열매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온갖 더러운 것을 행치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런 생각도, 그런 말도 피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더러운 일이 증가되는 것을 경고하였을 뿐 아니라, 그 악행을 가볍게 취급하게 되거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누추함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모두 방탕하고 격에 맞지 않는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또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음탕하고 음란한 이야기나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어리석고 경솔함으로 가득 찬 헛된 이야기와 듣는 사람에게 덕이 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말을 가리킵니다. 여기 “희롱의 말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이 말을 ‘대화의 유희’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악의 없는 농담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주석가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욕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행동 또는 다른 사람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 경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일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쁜 짓입니다. 그러나 즐거운 대화라고 해도 그 속에 외설적이고 추잡한 내용이 담긴 대화를 허용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마땅치 아니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요소가 담겨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런 말들은 유익을 주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듣는 사람에게는 해가 되고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마땅치 않으며 그들의 신앙고백과 성품에도 적당치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즐기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돌이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음란과 더러운 환락을 멀리 해야 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림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하고 경건한 표현이 많아지면 악하고 마땅치 않은 말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축복과 저주, 음란과 감사의 말이 한 입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더러운 죄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5절에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하고 제외시키는 여러 가지 죄를 경계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6절에 권고했습니다. 그러한 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허용되며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혹은 그러한 죄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거나 거스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또는 그런 죄를 범해도 용서받을 수 있거나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해도 무사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이 인간의 조상을 타락시킬 때 쓴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정말 헛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게 됨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믿지 않고 복음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불순종은 죄 가운데서도 악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때로는 이 세상에서도 임하지만 오는 세상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고 7절에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범하는 죄에 참여하지 말라 그래야만 너희가 그들이 받을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다. 에베소서 5장은 가장 놀라운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5:1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명령은 불가능한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지 못할 명령을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우리가 어떠한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 부모와 함께 동행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자녀는 누구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까? 부모를 닮아가고 부모를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 라고 할 때 쓴 본받는 이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인 mimic 즉 따라하다 라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태도를 따라한다 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살고 시간을 보내고 부모를 보고 자라기 때문에 부모의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을 본 받으라”는 명령은 어려운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 곁에 꼭 붙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사랑 가운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억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가까이 하려고 힘쓰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도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는 비결을 이렇게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는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어떠한 부분을 본받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단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2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사랑으로 살아가라 즉 사랑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사랑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하신 것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2절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사랑이셨습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받으라 하시고 행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본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지만 사랑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저절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사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지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화나는 것을 참고 인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을 잘 듯고 방긋 웃을 때는 정말 사랑스러운데 고집 피우고 땡깡 피우면 얼마나 짜증나는지 사랑스러운 것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입어야 합니다. 사랑의 근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본 자만이 하나님이 보여 주신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절에 “여러분은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가슴으로 느껴 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 깨달아지고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입은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 연약함, 실수들에 대해 관대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했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 상대방이 불쌍히 여겨지고, 내가 사랑해야 할, 내가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이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격에서 메말라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해야지, 내가 노력해야지 결단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체험하고 받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이러한 말씀들이 내 마음에 감동으로 감격으로 물결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말씀해 주신 비유가 바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가 잘 압니다. 한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20만년동안 벌어야 하는 값을 수 있는 돈입니다. 수천억입니다. 절대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그 빛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웬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갚을 길 없는 수천억의 돈을 탕감 받고 돌아오는 길에 100데나리온 약 100일정도 일해야 하는 돈을 꿔준 친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당장 100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당장 갚은 돈이 없어서 엎드려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친구의 멱살을 잡아서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게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그 사람을 다시 불러 들여 그를 책망하고 꾸짖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그 사람이 왜 자신의 동료, 친구에게 용서의 마음을 베풀지 못했습니까? 자기가 탕감 받은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수천억, 평생 갚아도 값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사했다면 한 만불되는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을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 가운데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용서를 받았는데도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백 데나리온도 안되는 잘못과 실수를 범한 친구, 성도, 가족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했거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 |
프랑스혁명, 자유·평등·박애
혁명의 슬로건, 이상인가 현실인가?프랑스 혁명 (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 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 이다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이 외침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었다.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라는 세 단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자,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실천의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들은 혁명의 빛나는 기치이면서 동시에, 혁명 자체가 마주한 근본적인 모순과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수많은 민중이
‘자유’를 외쳤지만, 그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등’은 선언되었지만, 여성과 노예, 빈민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박애’는 혁명 동지 간의 형제애로 불렸지만, 서로에 대한 강제와 숙청의 논리가 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자유는 정말 모든 시민의 권리였는가, 아니면 새로운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가?”
“평등은 법전 속 문장에만 머물렀는가, 아니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 실현되었는가?”
“박애는 진정한 인간적 연대였는가, 아니면 혁명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는가?”
이 세 질문은 단지 과거를 되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해방의 과제’로 남아 있다.
자유: 해방인가, 새로운 억압인가?
프랑스혁명에서 외쳐진 '자유'는 구체제의 억압적 구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절대왕정 하에서 왕권은 신의 권위로 정당화되었으며, 시민들은 신분제의 족쇄에 얽매여 정치적 권리조차 박탈당한 상태였다. 혁명은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을 통해 사상과 언론의 자유, 정치 참여의 권리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공포정치(1793~1794) 시기에 극명한 모순을 드러냈다.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파의 지도자 중 한 명)와 자코뱅파(Jacobin, 프랑스혁명 당시 중앙 집권적 공화정을 주장한 급진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자유는 오직 혁명 이념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조건부 권리로 전락했다. 이는 혁명이 추구한 자유가 새로운 종류의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사례였다.
평등: 제도의 파괴, 하지만 여전한 차별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직자(1계급), 귀족(2계급), 평민(3계급)으로 나뉜 이 구조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 조세 부담의 불균형, 특권적 정치 참여를 제도화한 체계였다. 혁명은 이 계급 질서를 해체하고,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은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이후 민주주의의 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 ‘평등’은 어디까지나 법률적 선언에 그쳤다. 실제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새 지배층으로 부상하며, 하층민과 농민의 삶은 여전히 빈곤과 불안정 속에 놓였다.
더 큰 문제는 평등의 적용 범위였다. 여성, 노예, 식민지 민중은 ‘시민’의 범주에조차 들지 못했다. 여성 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에서 “여성도 정치적 주체”임을 외쳤으나, 결국 그녀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은 평등을 외쳤지만, 평등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지 않았다.
박애: 형제애인가, 동지애인가?
‘박애(Fraternité)’는 가장 추상적인 가치였지만, 동시에 프랑스혁명의 가장 근본적인 이상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사회, 이념과 계급, 지역을 넘어선 연대의 공동체—이것이 박애가 지향한 세계였다.
그러나 이 형제애는 철저히 선택적이었다. 이념이 다르면, 계급이 다르면, 심지어 출신이 다르면 박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여성과 노예, 외국인은 형제애의 울타리 밖에 있었다.
혁명기 자코뱅당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공공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외치며, 연대보다 숙청과 처벌을 우선시했다. 결과적으로 ‘박애’는 무조건적인 연대가 아니라, ‘동지애’에 가까운 이념적 결속으로 기능했다. 박애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혁명에 복무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이상은 살아남았는가?
프랑스혁명은 수많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이상이 짓밟혔다. 자유는 때로 억압이 되었고, 평등은 불완전했으며, 박애는 배제와 조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와 인권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반식민지 해방운동의 깃발 아래 이 세 단어는 여전히 살아 숨 쉬었다.
그것은 완성된 구호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질문되어야 할 가치이며, 현실과 충돌하며 구현되어야 할 미완의 과제이다.
프랑스혁명이 던진 이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 문장 요약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인 ‘자유·평등·박애’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인간 해방이라는 영원한 과제를 향한 선언이었다.
12월 6일(토) 사도행전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은 자의 소망(23:6b)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My brothers, I am a Pharisee, the son of a Pharisee. I stand on trial because of my hope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사도 바울은 부활(復活)을 죽은 자의 소망이라고 정의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영과 천사와 부활을 믿는다고 주장하였지만 사두개인들은 영과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인으로서 믿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의 소망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 산 소망 (Living Hope): '죽은 소망'(옛 소망)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희망을 뜻합니다.
- 죽음을 이기는 희망: 죽음이 끝이 아니며, 하나님 부르심으로 재림 때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 하늘의 소망: 이 땅의 삶에서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않을 것을 거두는 부활을 바라보며,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이여.
사두개인 - 이들은 당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그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때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에까지 거술러 올라간다. 사두개인들이 구체적인 집단으로두각을 나타낸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 166-63) 부터이다. 이들은 순수 유대적전통만을 고수하고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는데,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라 하여 배격하였다.이들은 철저히 현세 지향적이고 친로마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민중들의 생활과는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바리새인 - 이들 역시 사두개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났는데, 이들은 '하시딤', '하시디안'으로 불리어진 경건 집단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달리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동일하게 권위있는 정경으로 취급하였고, 죽은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보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 사과의 뜻이 담겨 있는 바울의 변론(5절)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아무 대책없이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헤드린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던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논쟁(論爭)을 불러 일으켰다.
바울이 이렇게 한 행동에 대해 혹자는 노련한 수를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Preuschen), 마 10:16에 언급된 소위 뱀 같이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보기도 하는 반면(Nestle),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너무 근시안적 해석이라 할수 있다.
적어도 바울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고, 또한 그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1절).
자기가 감당해야 할 막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희생을 대책없이 감내하려 드는 것은 도리어 책임성이 결여된 행동일 뿐이다.
지금 바울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넓은 안목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더욱이 지금 일어난 사건이 그의 로마행의 한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옮길 수 있으며(공동 번역), 이는예수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부활 소망이다(고전 15:16-58).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부활을 믿는 것이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와 관계없이 전승되어온 신앙에 근거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는다.
부활의 소망 - 죽은 자의 소망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2~19)”
산과 들에 저절로 피고 지는 무성한 꽃과 풀, 보이지 아니하는 무수한 생물들 동면(겨울잠)이 지나서 잠시 동안 존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의 생을 위해서 그것들은 값진 희생을 (죽음)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어쩌면 겨울은 이 사물들에게 있어서
땅속에 섞여있는 자양분을 가득 흡수하여 저장하는 계절인 듯싶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깊고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하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에 다시금 기지개를 켜고 한 해 동안의 생을 만끽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미물에 지나지 아니하지만 그들만의 세계에는 그것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어 자연의 법에 따라 움직이며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보면서 인간은 시간이 흐르는 것과 세월이 지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만물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언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며, 무엇을 알려 주시고자 함일까요? 부활(다시 살아남)의 소망에 관하여 우리 각자에게 인지시키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죽었거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해 오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장차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잠자는 상태를 두고 보시지 아니 하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체적 죽음을 잠자는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고전 15장 12~19절의 말씀은 부활에 관한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고 부활의 내용을 밝히며 담대히 변증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부정과 믿지 아니하는 완악한 자들의 도전에 응수하는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죽을 수밖에 없고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의미와 그에 관한 소망과 확신과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극진하신 사랑이시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서려있는 경고의 말씀이며, 그의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요 소망의 대상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만민을 향하여 주셨다 하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하여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
12절의 말씀은 당시에 유대교의 한 분파인 사두개인들의 주장하던 것으로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부활의 문제로 유혹하던
무리입니다(마 22:23~32). 이 무리들이 부활에 관하여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소경이었던가를 살펴볼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저희들이 중시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 곧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고 저들에게 증거하고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들 무리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행 23장 8절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영과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며 부인하는 단체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이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되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하여 각 개인의 신앙은 물론이고 교회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진리에서 이탈하면 그는 거짓과 하나가 될 것이며 그 결국은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파멸에 이르도록 방치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13~14절은 부활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은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 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사건은 신앙의 기초이며 모든 삶의 최대 가치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부인하는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영존하십니다.
진실하시고 참되십니다. 우리들 각자의 양심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여러분 각자의 심령 속에 이 사실을 의혹
하거나 부인을 한다면 유감스럽지만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15~16절의 말씀을 보면 “죽은 자의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 하셨을 것이요 그리스도 역시 다시 사시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각자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 심판 여하에 따라서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의하여 처리될 것입니다. 한 부류는 거짓된 증인으로 또 다른 한 부류는 참된 자들로 인정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목격하고 이를 위해서 모진 박해와 조롱과 멸시 천대를 감내하고 진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썼던 제자들의 항변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주체 곧 하나님이 친히 부활의 사역에 참여하신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암시하는바 그러하신 하나님 앞에 사도들이 거짓증인으로 나타날 것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 하는 자들을 칭찬하시고 이들의 증인이 되신다는 소망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함으로 소망이 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7~18절의 기록은 “그리스도께서 살지 못했으면 믿는 우리들의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을 것이라”고 서술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말이 진실하지 않겠습니까? 거듭 말하거니와 죽은 자를
헛되이 믿는 것이며 그 죽은 자를 위하여 능욕을 당하며 수고하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타의 종교는 내세관을 희미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차 일어날 사실들과 내세에 이루어질 사실들을 우리 인생들에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합니다. 히 11장 1~2절의 기록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알려줍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실체와 그 약속하신 사실들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그는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죽음에 내어줌이 되었으며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롬 4:25).
넷째. 부활의 소망을 가집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얼마나 우리의 상태가 불쌍하고 가련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생에서의
삶에도 성실하여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에 더욱 충실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와 비방을 당하며 그 수모를 기꺼이 감당하고자 자처했습니다(고전 4:9).
형제, 자매들이여 ! 우리의 잠시 동안 당하는 육신의 고통과 질병 그리고 사망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잠시 후면 오실 우리의 사랑하는 주께서 우리 모두를 깨우러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육체를 입고 이생에 살면서 주님의 오심을 맞이하지 못하더라도 주의말씀을 의지하여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주님이 오시면 거짓말하는 자 악한 마귀는 그 입김으로 죽일 것이며 조롱과 멸시와 비방을 일삼던 무리들 역시 심판을 자처할 것입니다(살후 2:8~12. 갈 5:10b).
부활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으로서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진 후 증거 되는 첫 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남을 외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 성경에는 표징으로 부활에 관한 암시를 해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요나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표적들을 말씀하실 수 있었으나 자신의 다시 사심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심으로 부활의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벧전 1:3~9).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바울은 우리를 격려합니다(롬 5:4~5).
바울은 딤후 2장 8~12절에서 그의 간증을 합니다. 고백과 소망의 말을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 소망을 둡시다. 주께서 우리로 능히 자신과 같은 썩지 아니하는 부활의 몸으로 우리를 변케 하시고 몸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을 현재의 삶 가운데 우리 자신을 매순간 죽음에 넘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31b). 그것은 부활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육신의 생명을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살 소망이 없는 극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부활은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옳은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4절의 기록은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로마서 기자는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소망이 깃 든 말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매 순간 부활의 삶을 살면서 소망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을 생각해보면 옛날 조선시대 정승이나 갑부들 보다 엄청 잘 삽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삽니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나 에어컨 같은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고
전화나 자동차 같은 엄청난 것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나타내는 행복지수를 따져봤더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 못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보다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나보다도 더 좋은 아파트에서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돈을 많이 벌어서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이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지수가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높은 교육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우파의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진보좌파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같은 사안을 놓고도 어느 한편은 옳다고 하고 어느 한편은 그르다고 하기 때문에 늘 서로 싸웁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용자와 그 기업에서 일을 하는 근로자가 서로가 합심하여 기업이 잘 되게 하여야 하는데 자기 이익을 좀 더 챙기기 위해서 서로 싸우다가 함께 망하기도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음을 합하여 나라가 잘 되도록 해야 되는데 여야로 나뉘어서 당리당략만을 위해서 싸우다가 세월만 보냅니다.
어디 그런 것뿐입니까? 심지어는 태어난 고향을 두고도 전라도니 경상도니 해서 서로 미워하고 남자와 여자들도 서로 싸우고 젊은이들과 늙은이들도 서로 싸웁니다.
이런 분열과 반목의 역사는 성경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늘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생각이 달라서 그 후예들이 다른 길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과 그 밖의 세상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가야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로 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그 사람들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로 공회에 함께 참석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이 있고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면서도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소를 합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바리새인들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의 호응을 받았고 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가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바울이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 이유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활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외면을 당합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본문 6절-8절 말씀에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바울이 공회 앞에 나가면서 공회를 주목하였다고 했습니다. 공회에 어떤 사람들이 재판관으로 왔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 이미 공회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바울은 그들의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그들의 교리로 삼는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그것도 어제오늘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 때부터 바리새인이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대강 적당히 바리새인이 되었거나 바리새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가 아니라 전통적인 바리새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사두개인
복음서에서 사두개인들은 늘 예수님께 혼날 때 바리새인들과 함께 혼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을 가르치신다는 소식을 듣고 따지러 왔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법에는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둘째와 세째도 형수와 살았으며 일곱이 다 그렇게 하여 자식 없이 죽었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눅20:28-33, 현대인성경)라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부활의 불합리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도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겠지만 차원이 다른 하나님나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두개인들만 내세를 믿지 않았고 천사나 영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위직을 독차지 했고 유대교의 최고 정치기구인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직책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잘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세는 필요가 없었고 오직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좋아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출입하지만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을 최고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직책을 이용해서 권력을 형성하고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열심히 전도하고 대형교회당을 짓고 좋은 사업들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천국처럼 꾸미고 천국에서의 삶처럼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영원한 천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좋아합니다.
2)바리새인
이런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천사도 믿고 영도 믿고 부활도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내세를 믿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율법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엉터리로 하면서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잘 모르고 겉으로만 지키는 체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따랐으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고신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려파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신행일치를 강조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율법을 가지고 이웃을 정죄하고 괴롭히는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키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자신보다 착한 사람을 더 큰 죄인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흉악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갖 죄들을 지었으면서도 한두 가지 잘한 것 가지고 의로운체하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처럼 교만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6절 말씀 중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이 있는 것을 보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서로 싸움을 붙였습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어서 사두개인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바울이 지금 이런 재판을 받는 것은 부활의 문제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서 이런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을 죄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한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서 사형을 시켰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은 정말로 흉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구주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병정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으로 꾸몄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증언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철저하게 입을 막거나 죽여서 증거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부활의 소식은 점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그 부활로 인해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식이 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입증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내세도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고 오직 현세의 행복만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도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서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행의 능력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보다 더 높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를 해버립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본문 9-10절에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증언하고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을 하자 바리새인들이 바울을 동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바울을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말하는 것이 진짜 성령님이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런 바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이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큰 분쟁이 생겼고 잘못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 것을 두려워하여 천부장이 부하들을 명하여 바울을 그들 가운데서 빼앗아서 다시 영내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악한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로 착한 사람입니다. 최고 착한 사람이고 최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너무나 귀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최고로 선한 사람입니다. 가장 멋있는 사람이요 가장 큰 복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일을 말해주는 사람을 최고로 여기고 박수를 칩니다.
저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목사들이 부활의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는 목사라고 한다면 부활보다 더 중요하게 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약에 부활의 복음만 전하다가 나중에 부활이 없으면 자신에게 항의할 것을 대비해서 부활은 그저 생색만 내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더 많이 강조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해도 욕먹지 않을 만큼 조금만 언급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맞아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만 믿고 이 세상에서 고생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막상 부활이 없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활이 믿어지고 또 성경 말씀이 온통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혹시 만에 하나 부활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 귀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부활이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복이 이 부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에 또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12월 5일(금) 사도행전 19-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는 것이 복되다(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In everything I did, I showed you that by this kind
of hard work we must help the weak, remembering the words the Lord Jesus
himself said: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서로 도우며 나누는 삶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불행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모두 이해관계를 떠나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은 서로 나누며 도우라고 하십니다.
왜 주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 공동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 형상 공동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족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 때 돕지 않는다는 것은 가족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서로 나눔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인간은 공동 운명체이므로, 서로 타인의 아픔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은밀한 보상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이 구절은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참된 사랑을 베푸는 것에 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예로 들며 서로
주고받는 대상 대신,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의 선하신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품앗이를 통해 이웃 간에 서로 도움을 나눴습니다.
품앗이란 한국 전통 사회에서 서로 돕기 위하여 노동을
교환하는 협동 방식이었습니다.
주로 농사일, 집안일, 공사 등에서 일정한 보수 없이 상호간 노동을 교환하는 형태입니다.
품앗이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던 전통적 상부상조의 상징입니다.
품앗이의 ‘품’은 일손과 노동을 뜻하고, ‘앗이’는 서로 교환한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노동을 나누고 빌려주면서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로서 품앗이를 통해 어렵고 힘든 난관들을 잘 헤치고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수확량으로 일손이 모자랄 때
품앗이를 통해 일을 잘 해냈습니다.
농사일은 날씨에 맞춰 제 날짜에 그때그때 끝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날씨 때문에 일찍 농사일을
끝내야 할 때, 서로 협동심을 발휘해 모두 힘을 모아 농사일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Give and take(기브 앤 테이크)’라는 말이 주로 사용됩니다.
말 그대로 ‘주고 받기’입니다.
무엇인가 주었으면 받을 수 있고, 받았으면 주라는 말일까요?
이번엔 내가 줬으니, 다음은 네 차례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결혼식 문화에서는 축의금을 낸 상대가 있다면, 다음 내 자녀가 결혼할 때 축의금을 내야 합니다.
금액도 중요합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많은 축의금을 내야 하거나, 뜻하지 않은 일로 인간관계에 흠집이 생겨 자칫 우정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할 경우, 다음에 그 부유한 사람이 잔치를 초청한다면 엄청난 것으로 되갚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생길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을 초청하면 의전부터 시작해 잔치 내내 신경을 써느라 잔치의 의미가 자칫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소외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 잔치를 기쁨으로 참석할 것이며, 갚을 것이 없으므로 초청하는 사람이 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 행위에 대한 갚음을 받는다고도 하십니다.
‘내가 당신에게 줬으니, 당신도 나를 위해 줘야 한다’는 세상의 방식에 안주하지 말고, 주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여기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어느 복음서에도 없지만, 이 말씀이 말하는 정신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 속에 표현돼 있습니다.
‘복’이란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며, 헐벗고 굶주리며 압제당하는 이웃을
위해 마음과 물질로 돕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곧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되며 정신적·물질적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에서 일부라도 나누는 데서 기쁨을 누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이웃의 친구가 돼야 하겠습니다.
많은 세상 친구들은 나눔의 즐거움을 모른 채, 오롯이 자신의 이익과 환락과 쾌락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술과 담배, 놀음과 향락에 젖거나 오래살기 위해 값진 보약을 먹고, 조금만 몸에
이상이 오면 난리법석을 부리며 혹 죽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딱해 보이기도 합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나누며 살자는 말 한 마디 없이 매일같이 ‘오늘은 어디서 즐길까’만 찾다 보면, 결국 한계가 올 것입니다.
신앙인들마저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와서는 근엄한 척하고 찬송을 크게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은 이중적 태도 아닐까요?
세상 끝날 아버지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외면하시면,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한복음 21: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다시 찾으신 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한복음 21:10)” 하시고, 고기를 숯불에 구워 직접 요리하셔서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고기를 잡으러 갔던 제자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생선과 떡을 먹도록 권하십니다. 비록 소박한 아침 밥상이지만, 사랑이 넘칩니다. 집을 떠나간 작은 아들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갔던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며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와 조반을 챙겨주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먹먹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다시 주님을 만났고, 제자와 사도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사도의 삶을 굳건히 이행하며 순교도 불사하는 삶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과거 주님께서는 갈릴리 외딴 빈들에서 3일 동안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굶주림을 안타까워하시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 앉아 있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베풂과 나눔의 정신 아니겠습니까? 광야에서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인 칠병이어의 기적 역시,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나눔과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사건은 부활과 함께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기적입니다.
요한은 비록 최후의 만찬에 대한 세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축사하신 후에”라는 용어를 통해 성만찬을 연상시킵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만 의지하고 행동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앉은뱅이와 눈먼 자, 한센병자들을 비롯해 그
시대 각종 불치병자들을 살리신 주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14)”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서 떠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결코 주님께서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롯이
사랑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들은 성경에 의해 양육받을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결속 매체는 이제 예수님의 육체에서, 영적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계명은 구약에 이미 기록된 것으로(레위기 19:18),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셨듯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사랑의 동기와 표준이 이제 예수님 자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자신과 친한 성도에게만 신경쓰고, 처음 교회에 나온 분이나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무관심으로 대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불순종하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성도들은 참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초대교회 정신을 계승하는 성도라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에 젖어 자신의 영욕만을 위해 애쓰지 말고,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 소외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나를 내려놓고 겸손으로 십자가의 좁은 골짜기 숲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는 사랑의 향기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천국의 문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반드시 그 천국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 낙원에 입장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반드시 지켜내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위 사람들부터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젊음의 샘물
어느 산골 마을에 마음씨 착한 노부부가 산에 살면서 나물을 캐거나 나무를 하면서 근근히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무를 하고 잠시 쉬며 땀을 식히던 중 우연히 작은 샘물이
솟아오르는 걸 보게 되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그 샘물을 마시고 다시 나무를 하려는 순간, 할아버지는 갑자기 힘이 솟고 나무를
하는데 힘이 들지 않는 걸 알게 되었다.
샘물에 얼굴을 비추어보니 젊은 청년이 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샘물이 젊음의 샘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니 할머니가 남편의 모습이 바뀐 걸 보고 놀라 물었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하다 우연하게 샘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마시고 보니 자신이 젊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할머니는 놀라워했고 다음날,
남편과 함께 남편이 발견한 샘으로 가서 그 샘물을 마셨다.
그러자 할머니도 젊은 처녀가 되었다.
그 뒤 우연히 옆집에
살던 괴팍한 노인이 옆집의 노부부가 젊어졌음을 눈치채고 자신도 젊어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냐고 물어보자 마음씨 착한 젊은 부부는
숲에 있는 샘물을 알려줬다.
그러자 노인은 부부가 알려준 샘가로 가서 샘물을 마셨는데, 욕심이 나 계속 마시니 점차 어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옆집 노인이 돌아오지 않음을 눈치챈 부부는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긴게 아닐까 해서 서둘러 숲에 있는
젊음의 샘으로 달려갔더니 웬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는데, 옷을 보니 옆집 노인의 옷이었다.
부부는 노인이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갓난아기가 되었음을 알고 씁쓸해했으며, 노인이 어려져서 된 갓난아기를 자신들의 양자로 삼아 정성스레 돌보았다.
그 뒤 갓난아기는
마음씨 착한 양부모 밑에서 자라 착하고 정직한 농부로 자랐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과유불급'이라는 성어는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성어는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서 나온 말로,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누가 현명하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자장은 지나쳤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자공이 자장이 나은 것이냐고 물자, 공자는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과유불급'이라는 성어를 더 깊게 이해하고 그 의미를 일상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성어 '과유불급'의 뜻과 의미, 그리고 사용 예시를 비교해보며 이 성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함께 알아가보시죠!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란?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성어의 유래는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 나옵니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누가 현명하냐고 물었고, 공자는 자장은 지나쳤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자공이 자장이 나은 것이냐고 묻자, 공자는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한자풀이
- 過 : 지날 과
- 猶 : 오히려 유
- 不 : 아닐 부
- 及 : 미칠 급
이렇게 각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過猶不及'은 '지나침은 오히려 미치지 못함과 같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 모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성어입니다.
이렇게 옛날의 지혜를 담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성어를 이해하고, 일상생활에서 적용해보면, 무엇이든 적당한 정도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어 '과유불급'의 사용 예시를 살펴보며, 이 성어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과유불급(過猶不及)
한자 뜻(겉뜻) :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어떤 일이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해를 입게 된다는 경고.
유래 :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말한 표현으로,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공자는 학생들에게 "활을 쏘는 데 너무 당겨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안 된다"고 가르치며, 지나침과 부족함의 균형을 이야기했습니다.
2. 소탐대실(小貪大失)
한자 뜻(겉뜻) :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음을 경고.
유래 :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한 상인이 작은 이익에 욕심을 내다가 소중한 물건을 잃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조급한 욕심은 결국 손해로 돌아온다는 교훈이 탄생했습니다.
3. 견물생심(見物生心)
한자 뜻(겉뜻) :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긴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인간의 본성인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해칠 수 있다는 경고.
유래 : 한 농부가 시장에서 화려한 물건을 보고 충동구매를 반복한 결과, 가정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4. 득롱망촉(得隴望蜀)
한자 뜻(겉뜻) : 농(隴)을 얻으면 촉(蜀)을 바라본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보여주는 말로,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심리를 표현.
유래 : 삼국지에서 촉나라 유비가 한 땅을 얻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땅을 바라보았다는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5. 무염지욕(無厭之慾)
한자 뜻(겉뜻) :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적당히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
유래 : 고대 한 제후가 자신이 가진 부유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탐하다가 패망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이로 인해 절제의 미덕이 중요하다는 교훈이 확립되었습니다.
득롱망촉의 교훈 / 목표를 이루는 것만큼 그 이후를 준비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끝없는 욕심은 결국 만족감을 앗아갑니다.
11. [마태복음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4. [요한복음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15. [요한복음 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 [요한복음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사도행전 20장 35절: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
의미
- 나눔의 가치: 이 구절은 세상의 가치관과 달리, 얼마나 많이 받는지가 아닌 얼마나 많이 주는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 진정한 행복: 줌으로써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 세상은 받는 것에 가치를 두지만, 하나님 나라는 주는 것에 가치를 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3-38)
Giving is more blessed than receiving(Acts 20:33-38)
언제 행복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받고 인정받을때 행복해 한다.
더 큰 행복은 나의 것을 줄 때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주고 나의 사랑을 줄때 그때, 만족을 느끼게 된다.
가진 것이 많아도 주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나 밖에 모르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사는것을 말한다.
하나님 만난 사람은 나 중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살리고 세계복음화를 할수있다.
주는자의 삶을 살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자녀가 이땅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주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려면 주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다
타락한 인간의 특성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산다.
물질과 성공이 행복의 키 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모든 인생을 투자한다.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유와 마음이 없다.
내게 필요하지 않는것은 남에게 주지만,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것은 주지 않는다.
“내가 마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
탐욕은 지나치게 남의것까지 욕심 내는것이다.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명예나 물질이 아니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유하였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것으로 돈을 벌고 자기의 동역자들이 필요한것을 공급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모든일을 하였다(35절).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중직자에게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35절)고 말씀으로 권면했다.
주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주께서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의 중직자로 새운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의 복을 받고 그 받은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는다’ 하셨다.
너에게 모든 복을 주고 너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겠다고 약속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사는 자이다.
이 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항상 누려야 할것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것을 받은자’ 라는것을 알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있다 라는것을 실제로 느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셨다.
우리에게 우주 만물을 다 주셨다(행17:25).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것 같이 보이지만 근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것을 주셨다.
빛이 없으면 동물, 식물, 사람도 살 수 없다.
하나님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것을 주신것으로 청지기의 삶을 감당하는것이다.
하나님만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이는 없다.
하나님의 속성은 주는것에 있다.
하나님은 부족해서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우리가 죄짓고 멸망가운데 있을떄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그리스도게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사단, 지옥, 죄 문제를 다 한번에 해결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나.
또 하나님이 우리속에 성령으로 내주, 인도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걸 깨닫게 된다.
내것 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이 땅에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내 생명도, 자녀도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것이다. 내가 성공하고 먹고사는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이 깨달아진다. 진짜 깨닭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한다.
하나님의 은혜받고 감사하며 사는 자는 어떤 삶을 사는가?
주는 자의 삶
세상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높이 되고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 성공이라고 한다. 반대로 내가 가지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게
사는것을 보고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사단이 주는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것을 가지고 살면서 주는자의 삶이 행복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는 받는자가 아니라 주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성경말씀의 기준이 달라서 갈등이 온다. 성경에는 “네 목숨을 버리면 생명을 얻겠다” 하시고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 높이 될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 우리의 생각과 반대이기 때문에 갈등이 온다. 그러면
주는 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부터
우리가
준다고 할때는 물질부터 생각한다. 돈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난하고 일도 못하니까 하나님께 드릴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남을 도울수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단지 남을 도와줄 마음이 없는것이다.
스스로 남을 도와주는것을 포기하고 사는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배려의 한마디, 믿음의 한마디, 용기의 한마디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그 사람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줄 수있다. 부모의 말 한마디가 자녀를 낙심시킬수도 용기를 줄수도
있다. 물질만이 아니다. 말로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남들이 다 무시하는 사람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가 용기를 주고, 친구가
되어주면 그 사람이 부자인 것이다. 아무리 내가 모든것을 가지고 있어도 남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는 가난한 자이다.
나의 복음을 주라
더
복있는 사람은 내가 가진 복음을 주는 사람이다.
육신적인 도움은 그 사람의 근본적인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정신문제있는 사람을 육신적인 말로, 물질로 살리 수 없다. 그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한것이다. 내가 내 문제 해결 되고 인생문제
해결받은 복음을 그 사람에게 줄 수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베드로는 날때부터 앉은뱅이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의
문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만이 앉은뱅이의 문제를 해결할 답인것을 알았다.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는 무엇을 주었나?
“내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앉은뱅이는 복음듣고 단번에 인생문제 해결 받았다. 그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 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화는 복음이다.
이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 복있는 자이다.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그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미한다면 그것처럼 기쁜일이 어디 있나? 우리가 육신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복음이 들어갈 수있도록 하는 것이다.
참된 이 복음이 들어가서 변화받고, 치유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다.
주는 자가 받을 복
내가 가진걸 주면 손해보는것 같다고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면 큰 축복을 받게 된다. 어떤 축복을 받게 되나?
참된 기쁨과 행복
남에게
주지 않고 받으려만 하려는 사람은 받을려고 하기때문에 만족이 없다. 사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부담감을 가질 수 있다. 늘
갚아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주는 자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남에게 도움 받기도 싫고 도움주기도 싫고 혼자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불행한 삶을 사는것이다.
사람이 가장 기쁘고 행복할 때는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며 살아갈때 행복한 삶을 살게된다. 또 내가 가지고 있는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때 그 때 기쁨이 솟아난다. 주는것 자체가 기쁨이다. 정말 상대방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때 그때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영원한 기억이고 응답이다. 그 사람이 인생문제 해결받고 살아나는 것을 볼때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산다. 이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더 풍성한 삶
그런
사람은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5: 10). 남에게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면 내 마음속에 사랑이
솟아나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의 샘물이 있다. 자꾸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더 풍성해진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점점
메말라 간다. 사해바다에는 물이 들어오는 통로만 있고 나가는 통로가 없다. 그래서 아무 물고기도 살수가 없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샘물이 들어와서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늘 새로운 물이 있어서 많은 물고기들이 산다. 샘이 흐름으로 말미암아 강주위에는
많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는다.
주는 자의 삶은 마치 이와 같다. 늘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속에
주는 자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속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과 함께 그 행적들이 기록 되어 있는가?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성전 연보궤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칭찬 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마12:41-44). 마리아가 결혼하기 위하여 평생동안 모아둔 지극히 비싼 향유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칭찬하였다.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 하리라”(마26:6-13).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은 것 가지고 예수님은 축사하시고 5천명의 무리를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기적의 역사를 이루신다.
또 이 사람들의 이름이 복음 전파하는 곳마다 그들의 행적도 함께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받는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모든 것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임을 알아야한다.
우리는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죄, 저주와 사망 권세 아래 영원한 지옥에 갈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셨다.
그것도 자기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시키시고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에게는 아무 대가 없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었고 소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 사랑을 전해주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나누는 사람은 “사랑받는것도 행복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더 행복하게 만드니라”.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한 자로다” 고백이 나오는 사람이 바로 복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주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이다. 땅에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늘의 사람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천국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이
사람은 세상의 어디에 가는지 참된 행복을 누리고 산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실제로 감사하며 누리게 하옵소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깨닫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삶을 살도록 도와 주옵소서.
나를 통해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l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는 주님의 말씀은 어느 복음서에도 없지만, 이 말씀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 정신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지금 나라 안팎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많은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도와달라는 호소가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월드비젼과 유니세프 등 많은 봉사 단체와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영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참상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물이 없어 샘물을 파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인해 죽어가는 모습,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의 딱한 처지 등을 바라보면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우리 역시 얼마 전만 해도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픈 나머지 물로 배를 채우고, 부잣집 아이들의 도시락을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워했던 추억이 솔솔 떠오릅니다.
어떤 부잣집 아이의 도시락은 하얀 쌀밥 위에 노란 계란프라이, 그리고 빨간 마른오징어 반찬을 볼 때마다 먹고 싶은 충동으로 점심시간마다 늘 군침을 흘렸던 시절을 추억하면, 참으로 웃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정말 먹고 싶어 그 학생의 가정환경이 부러웠던 모습이 생생하게 그리움으로 젖어오는 깊은 밤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에 먹을 것이 풍족하다 못해 아까운 음식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는 광경을 바라보면, 그리고 북한의 우리 동포들, 가난한 우리 이웃들과 아프리카 난민들의 처참한 생활 모습들을 보노라면, 금 새 눈가에 눈물이 흐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아들을 내어주시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계명과 십자가의 신비로 매일매일 영적인 떡, 예배를 통해 배불리 먹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려 주신 영적인 떡을 통해 튼튼해진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정 세상에 살아있는 떡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함을 늘 고백하며, 사랑의 군병으로서 이웃을 향한 시선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나의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호흡하고 살아간다는 이 순간이 감사하며, 또한 어려운 환경이지만 분명 나누며 살아가는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부자들보다 나눔의 실천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더 많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 형편에서 내가 가진 것 중에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의 정신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갈증을 호소하는 난민들에게는 물을,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저 아프리카의 난민들과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질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나눔의 실천을 한다면, 우리 이웃들에게는 분명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33세에 백만장자가 된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55세에 불치병에 걸려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l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사도행전 20:35
그 글을
보는 순간 록펠러는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는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는지 후일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큰 기쁨이 생겨납니다.
내가 무엇을 받으려 하는 생각보다, 무엇을 주려고 하는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최고의 기쁨과 만족은 어디서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삶입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된 록펠러 역시 병원 로비에 걸어둔 액자의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침 병원비가 없어 병원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을 보며, 조금 전 감동을 받았던 그 심령으로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 1년 밖에 살지 못할 위기에서 100세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며, 선한 일에 최선을 다한 그로서는 기쁨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그는 이제 98세까지 존경받으며 살았던 나눔의 모델 아닐까요?
지금
코로나19라는 질병 때문에 나라 안에서는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합니다.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어렵고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한 정치는 하지 않은 채, 오롯이 권력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저마다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몸부림치며 네거티브와 시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를 볼 때, '언제 우리나라가 이렇게 변했을까?'라는 생각이 미래를 암울하게 할 뿐입니다.
저 정치가들은 왜 받기만 하며 챙기려고만 할까요?
그들도 이웃을 위해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나라는 참으로 좋은 나라가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크리스천들은 한 마음이 되어 이웃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이 땅에서 손수 담당하셨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당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라를 위해,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기는 귀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뜻
이 속담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이에요.
콩은 아주 작아요. 이렇게 작은 콩이라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은 매우 따뜻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에요. 그래서 서로 돕고 사는 게 매우 중요하죠. 콩처럼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려는 마음을 품고 산다면 우리 인생은 보다 행복해질 수 있어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사용 사례
사례 1
중학생 지수는 토요일마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요. 우연히 같은 반 친구인 영아를 만났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지수는 영아와 함께 벤치에 앉았어요. "이 샌드위치 먹어.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 지수가 샌드위치를 나눠주자 영아는 맛있게 먹었답니다. "고마워.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더니! 넌 늘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를 좋아하는구나."
사례 2
20대 현기 씨는 백수예요. 고시원에 사는데요, 생활비가 부족해서 늘 라면만 먹어요. 오늘도 라면을 끓이는데 옆방에 사는 아저씨가 저녁을 굶고 있는 게 보였어요. 현기 씨는 라면 2개를 더 끓여서 아저씨와 함께 먹었답니다. 라면을 후루룩 먹은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어요. "총각, 라면 맛이 기가 막히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던데, 총각은 마음이 따뜻해서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사례 3
50대 민정 씨는 오이김치를 만들었어요. 양을 조금 더 많이 만들어서 동네에 친한 언니에게 나눠 주었죠. 언니는 오이김치를 받고 매우 기뻤어요. "뭘 이런 걸 만들었어. 맛도 정말 좋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더니! 자기는 만날 음식을 나눠주더라."
지금까지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오늘도 빛나는 하루 보내세요.
12월 4일(목) 사도행전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When Silas and Timothy came from Macedonia, Paul
devoted himself exclusively to preaching, testifying to the Jews that
Jesus was the Christ.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붙잡혀(4912) 수네코(sünĕchō) συνέχω
Pronunciation [ sünĕchō ]
Etymology / 미래 συνέξω, 제2부정과거 συνέσ- χον, 미완료수동태 συνειχόμην, 4862와 2192에서 유래
-
1. 결합하다, 유지하다, 지탱하다
-
2. 막다, 멈추다, 닫다, 행 7:57.
-
3. 밀어내다, 몰려들다, 눅 8:45.
-
4. 감금하다, 눅 22:63.
-
5. 붙들다, 공격하다, 괴롭히다, 아프게 하다, 마 4:24, 눅 4:38, 빌 1:23.
-
6. 정신이 팔리다, 열중하다, 행 18:5.
-
7. 역설하다, 주장하다, 강권하다, 제어 하다, 내포하다, 고후 5:14.
-
관련 성경 / 앓다(마 4:24, 눅 4:38), 밀려들다(눅 8:45), 답답하다(눅 12:50), 가두다(눅 19:43), 지키다(눅 22:63), 막다(행 7:57),
붙잡히다(행 18: 5), 걸리다(행 28:8), 강권하다(고후 5:14), 끼이다(빌 1:23).
실라와 디모데가...내려오매
- 마침내 바울이 고대하던 두 명의 사역자가
당도했다. 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먼저 도착하고 그 후에 실라가 빌립보에서 도착했을
것이다(Lenski).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신앙 생활에 열중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살전 3:6),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섭섭한 소식도
전하였다(살전 4:13; 5: 11).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나서 이에 대한 답장을 썼는데 이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혼란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두번째 서신인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였다.
한편 실라는 빌립보 교회의 소식과 그들이보낸 연보를 가지고
왔다(고후 11:9; 빌 4:]4, 15).
빌립보교회에서 보내준 헌금은 이 때의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시기 적절하고 유용한
것이었다.
빌립보교회의 헌금으로 바울은 더 이상 생계 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오로지 말씀 전파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말씀에 붙잡혀
- 실라와 디모데가 온 후 바울의 회당에서의 말씀 증거는
안식일에만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있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현금덕분으로 장막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말씀 준비에만 몰두했고 또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데만 전력 투구(全力投球)했다.
특히 '붙잡혀'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쉬네나케토'(*)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사역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다이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를 말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인도받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헌신 :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 말씀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결정하는 원칙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 :
말씀에 붙잡힌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붙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름 :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 예시
아브라함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한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바울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증언했습니다 (사도행전 18:5).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인도하도록 내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2. 말씀은 예수(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말씀은 진리(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4. 말씀은 삶의 길잡이(시편 119:105)
12월 3일(수) 사도행전 14-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믿음에 거하라(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they said.
이 믿음에 거하라!
이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얘수 믿고 구원 받은 믿음일까요?
예수 믿고 세상에서 온갖 축복을 누리는 믿음일까요?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온갖 환난 가운데서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일까요?
사도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쳤습니다.
여러 성을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한 후에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세운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이 믿음이란 제자로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제자의 믿음이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배움(디모데후서 3:14)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you have learned and have become convinced.
그러나 너는
- '그러나 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 데'(*)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13절)과 대조를 나타내는 말로서 문장 첫머리에서 강조되고 있다(11절 주석 참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거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네'(*)는'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무르라'는 의미이다. 당시 신자들 중에 유대 출신의 기독교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숭앙하기도 하였으며 이방 출신 개종자들은 영지주의의 유혹에 넘어가곤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바른 진리를 굳게 믿고, 신앙을 지킬 것을 권면한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 디모데는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웠으며(1:5),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진리는 바울로부터 배웠다(10,11절;행 14:12).
1. 무식한. 2. 배운 것 없는. 3. 벧후3:16.
-
1. 무식한, 배운 것 없는, 벧후 3:16.
-
관련 성경 / 무식한(벧후 3:16).
1. 배우다. 2. 고전 14:35. 3. μένε ἐν οἷς ἔμαθες : 네가 배운 것에 거하라
Pronunciation [ manthanō ]
1. 확신하다. 2. 딤후 3:14.
Pronunciation [ pistŏō ]
-
1. 확신하다, 딤후 3:14.
-
관련 성경 / 확신하다(딤후 3:14).
둘째는 현장(요한복음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Teacher, this woman was caught in the act of adultery.
현장(現場) / 나타날 현, 마당 장
- 사물이 현재 있는 곳
- 일이 생긴 그 자리
- 일을 실제 진행하거나 작업하는 그곳
현장(에파우토포로. ĕpautŏphōrō) ἐπαυτοφώρῳ Storng number 1888
Pronunciation [ ĕpautŏphōrō ]
Etymology / 1909와 846과 φώρ ‘도둑’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도둑질할 때, 요8:4.
-
관련 성경 / 현장에서(요 8:4).
1. 자신[다른 것으로부터 개인을 떼내어 강조. 2. 막 12:36. 3. 예수
Etymology / [재귀] αὖ에서 유래
1. ㉠ ~을 다스리는
배운 후에는 현장에서 적용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이 믿음에 거하라(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의 말씀의 내용은 소아시아의 중심지 이고니온에서 발생된 일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른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그곳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한 후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에베소에서
로마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이고니온으로 내려왔다.
이고니온은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까운 지역으로 갈라디아로 둘러 쌓인
루가오니아 주에 속한 소아시아 중심 도시로 바울의 1,2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도의 불연속성(1-7)
“그 성내에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4)
표적과 기사의 나타남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곧바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다. 흥미롭게도 복음의 현장에서 나타난 두 가지 현상은 믿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로 나누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같은 복음의 속성이다.
3절에는 “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라고 기록되었다. 흥미롭게도 이제 바나바는 성경에서 사도라 칭함을 받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로 주께서 복음을 위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다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저희가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 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주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 가운데 주께서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있는가? 이점은 우리가 깊이 각성하고 또 우리 자신의 사역적 역할이 어떠한가 생각해 볼 일이다.
군중의 분열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은혜의 말씀을 전하자 회중들 가운데 사도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구원의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로 나뉘었다. 이에 유대교를 열성당원들이 일어나 사도들을 죽이려 하자 결국 두 사도와 일행들은 루가오니아의 성 루스드라와 더베의 지역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후일 바울은 그 지역 더베에서 루스두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젊은 청년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행16:1). 그후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였다.
사람의 성정(8-15)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하노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발견
루스드라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어 본 일이 없던 사람이다. 그가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본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명하자 그가 일어나 뛰어 걸었다. 나는 가끔 메시지를 전할 때 회중들 중에서 믿음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커다란 기쁨이다. 대게 그렇게 만난 사람은 믿음의 동역자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신적 반응
11절에는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기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기록되었다.
여기서 쓰스란 헬라의 최고의 신 제우스를 가르치며 허메는 제우스 신의 막내 아들로 신들의 일들을 제우스에게 전하는 지식과 웅변에 능한 신을 말한다. 사람들이 바나바를 쓰스라 한 것으로 보아 바나바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들고 나와 무리들과 함께 두 사도를 향하여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신적 불가사의한 일을 접할 때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일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발생된 일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였다. 나는 이럴 때가 사역자들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옷을 찢고 그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가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15) 외쳤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현상은 오직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짐승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나든지 소경이 눈을 뜨던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짐승은 신을 감지할 영적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의 영광과 위기
바울은 먼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다.
분명 바울을 통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킨 능력이 나타난 것이지만 이 일은 주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가사를
베푸신 것이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처럼 신적 능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지 결코 그 사람에게 주신 영적 권세는 아닌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신적권능을 마치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그는 영원히 멸망을 받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12장에서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은 사건을 알고 있다.
성경에는 이러한 신적 능력은 성경에 여러 번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신적 권능을 나타낸 선지자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를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약 5:16,17)
사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왕과 대신들 앞에서 이세벨의 이방인 선지자
45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그들과 신적 경합을 벌렸다.
그들은 제물을 잡고 북을치고 춤을추며 그들의 신이 내려 오기를 빌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도록 그들의 신은 아무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나무제단에 물을 가득붓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도하였다.
이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열납하셨다.
이것으로 엘리야는 이방인 선지자들을 모두 목베어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에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취해 줄 것을 호소 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후일 하늘로 들림을 받은 엘리야도 두려움에 쌓여 우울증에 사로잡혔던 연약한 인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사사 기도온은 미디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포도주 틀에 숨어 타작을 하던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서도 과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인가를 시험하였다(삿 6:11).
이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다 연약한 인간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이나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도
모두 어미의 복중에서 지음받고 구별받은 택한 자일 뿐이다.
후일 바울은 자기의 연약함을 증거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처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네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려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바울의 증거(16-18)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천지를 지으신 만유의 하나님
두번째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언급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라”
하였다.
현대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서 무당집이나 산간 부처에게 절을 하며 또 힌두교와 같이 소를 신을 삼는 것을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모두 그러한 데 이끌려 가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여 그
영혼으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 말미암은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15)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피조물 곧 창조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그 물질들은 모두
우리 인간을 위해 둘러치신 환경 조건인 것이며 또한 처음부터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갈 바를 발견하지 못하여 자신의 두려움을 안식하기 위해 그 대상을 이성과 감각으로 느끼기 어려운 곳에 놓인 피조물을 자기의 신으로 삼던가 또 자신의 이상의 모양을 따라 신상을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태고로부터 가져야 하는 비극이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하여 만유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증거하였다.
살아계신다는 것은 지금도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사신 하나님인 것이다.
그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빌어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묵인하셨다는 것은 방임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죄인된 인간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를 말하여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17) 증거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깨닫지 못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우리에게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형상도 두고 있지 않으며 또 어떤 미혹을 받지 않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손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심령이 미혹되어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물을 드리려 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19절에서
바울의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울의 전도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대교에 큰 혼란이 생기자 유대교에 비상이 걸렸다. 그로하여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교도들이 몰려와 바울을 돌로 친 것이다.
그들은 기절한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루가오니아 성밖으로 내쳐
버렸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는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에 특별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14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들어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십사년 후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사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쓴 것이다.
이 사건의 연대가 서로 맞던지 아니던지 어쨋던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 시점에 유대인돌에 맞아 죽은 것을 생각되어 성밖으로 버려졌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바울은 둘러선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그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서 1차 전도의 기틀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때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나라와 환난에 대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제자들에게 ‘이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였다.
맞아 죽을 각오로 순교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증인이란 순교자를 뜻한다.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모두 복음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죽음의 고통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육체를 이겨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환난을 자랑스럽게 권면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은 금식과 기도이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였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의 믿음의 결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풍족함을 외치는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의 메시지와는 상반된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 귀에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이 메아리처오지 않는가?
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 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일을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나보다 싶지마는 그 사건들을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앙이 아니고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 믿음의 구조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느냐--이런 것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진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되어진 일들을 우리 한번 간결하게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건이 있다면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어서라 했을 때에 벌떡 일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렇게 됨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하고도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이 기적으로 이렇게 저들의 목전에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일로 인하여 온 성이 소동을 합니다.
바울을 두고 저들은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다" "신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합니다. "제우스신인가, 헤르메스 신인가"해서 결국은 제물까지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저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의 세계관, 저들이 종래에 가졌던 종교에 준 한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놀랐고 놀란 바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그런 소동을 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사건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이게 또 사람의 간사한
마음들이라 금방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가차없이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이야말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짚고 넘어갑시다.
본문에 보니 루스드라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요.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저들의 요샛말로 말하면 소위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한두 가지 베푸셨습니까?
눈앞에 그런 일들을 보아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빌라도 법정에 모여서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신앙적 역설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바울이 그 성에서 몸을 빼 다른 성으로 갔으면, 그렇게 쫓아냈으면 되었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릇 이 죄라는 것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또, 죄가 된 다음에는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자랍니다.
마침내는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자, 바울을 향해서 핍박을 했으면 한 번 한 것으로 족하지,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올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바울도 한때 이런 이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랬으면 되었지 다메섹까지 쫓아갈 것은 또 뭡니까?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아도 할말은 없는 사람입니다.
안디옥에서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와 가지고 죽이겠다 해도 바울이 할말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과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꼭 죽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대사람들의 유례대로 돌을 던져 자꾸 때리다보니까 바울이 그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죽고 나니까 겁이 더럭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의 법이 있거든요. 여기는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는데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시끄러워집니다. 재판도 하지 않았고,
로마사람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이지는 못하니까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 스스로 자기네 민족 나름의
자치적인 법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법은 어떤고 하니, 사람을 혹 때리기도 하고 태형을 내릴 수도 있지마는,
사형은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만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돌을
던지는 것까지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돼요. 그런데 죽였거든요. 따라서 겁이 나니까, 바울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네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죄를 짓는 것이지요. 로마사람들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저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신학적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바울의 말 한마디로 벌떡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매맞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한 말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함입니다. 그것 말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데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시나,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맞지 않도록 왜 돌보지 않으셨을까? 왜 맞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생각건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장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바울을 돌 던져 치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팔이 부러지든지 장님이 되든지 그랬다면 얼마나 더 희한했을까, 더 큰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라게 되었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지 않도록, 바울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바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살리시면 서도 바울이 매맞는 것은 내버려두셨습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신들,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죽여주지"하며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끌어 매놓았습니다.
밀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이제 물이 깊어지면 절로 익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신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 도저히 더는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순교적 고난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주님께서는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굉장했습니다.
분명히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 고난과 이 핍박과, 이 어려움을 모면하도록 하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똑똑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을 없게 하는 데에 나타나는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 매 안 맞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만사 형통하게 해주세요,
소원 성취하게 해주세요--어떻습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 하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구력 있게 이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본문에서 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필수적 믿음의 내용입니다.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믿는 사람의 최종적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고, 병들고, 죽고, 매맞고, 굴욕
당하고, 억울하고 문제되지 안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잘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그런 지엽적이고
2차 3차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세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그것이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게 할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작품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주신 말씀대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곧 '들립시스'에는 조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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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압박, 탄압, 곤란, 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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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적 환경에 의하여 생기는] 환난, 행11:19, 롬5:3, 12:12, 고후1:8, 6:4, 계1:9, 2:9, [주] ἡ θ. ἡ μεγά- λη: 대환난, 계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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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지막 날의 환난에 대하여] 마24: 21, 막13:19,24, 어려운 처지, 고후8:13, 약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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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에 대하여] 요16:21.
-
c.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골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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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징적으로] 곤란, 괴로움 [마음의 정신적인 영적인 상태에서의] 고후2:4, 빌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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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환난(마 13:21, 롬 2:9, 고후 1:4), 고통(요 16: 21), 괴로움(빌 1:17, 4:14), 고난(골 1:24), 곤고(고후 8:13).
'파데마'라고 하는 말도 같은 '환난'이지만 고통은 고통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παθήμα / 고통
이것은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기보다는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따위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들립시스'--외부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겪어야 합니다.
겪는다는 말은 헬라어에는 본래 동사가 없으므로 '이런 고난' '이런 환난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오는 고통이지 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초조해하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고통은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봅니다.
매도 맞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결론지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외적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고난이 꼭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소망 있는 고생이 고생입니까?
확실한 약속을 받고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요새 학생들, 대학입시 보느라고 고생한답니다.
그것도 보통 고생이 아니지요.
그 젊은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 싸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 안쓰러워요.
불쌍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숫제 갈 대학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애써 해서 정말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해 가지고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확실하게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저도 옛날에 고학을 하면서 남 고생하는 것만큼은 고생해봤어요.
누가 고생한다고 해도 나 만큼 고생한 것 같지 안을 정도로 꽤 많이 고생했어요.
밥 벌어먹고 빨래해가면서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밥은 얻어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지요.
찬물에다 뭐 좀 빨아보려고 하니 비누가 안 풀어집디다.
빨래비누가. 아무튼 그래가면서 지내봤어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거기 있어요.
아무리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고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적어도 외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상황으로 변질되면서 고민이 되고, 불안이 되고, 초조한 마음이 되고, 불 신앙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절망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외적 상황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열심으로 살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생명체에 있어서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필요조건입니다. 당위 조건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깊이 분석해봅시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원리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에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작품 만드시느라고 그래요.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했습니다.
내가 외적 상황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서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고 수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적어도 번민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있어요. 아픔은 있어요.
슬픔은 없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때리는 데 아니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다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마다하겠어요?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고난을 통해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선교가 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알렌 선교사를 아시지요?
우리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들어와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2년 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가 들어와 사람들이 마구 죽어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어요.
여기서 감동이 되고, 예수를 믿게 돼요.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그 헌신적인 수고를 보면서 마음을 돌려 예수믿는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환난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이래도 고통이 꼭 없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환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화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 분쟁하다가도 환난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강해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난 속에서 영원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잘사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든가 북한, 러시아 같은 곳의 핍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요.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오직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데 안녕하십니까?"--그렇게 나와요.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뭐, 부하냐 가난하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간다고 하는 영원 지향적 신앙이 분명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거든요. 이게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자, 그래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장로를 선택하고 교회를 조직합니다. 그 핍박 속에서도요. 그리고 임명을 하고, 믿은바 주께 부탁을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도의 젖을 먹고,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늘나라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원론적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로 임명하고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인즉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교훈도 하고, 근면도 하고, 명령도 하고, 친히 모본을 보이기도 하고, 기도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3절)"
----주님께 부탁을 해요. 주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위탁합니다.
주님께 위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도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하고 애쓰지만 마지막에는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하고 위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대하는 자녀,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겠습니까?
주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를 잘 인도해나가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26절 끝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께 부탁하고, 여기서는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부탁을 해야 되겠어요.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주님 친히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더 바른 자세로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디슨이라고 하는 찬송가 작가의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는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야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 못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 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일을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나보다 싶지마는 그 사건들을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앙이 아니고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 믿음의 구조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느냐--이런 것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진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루스드라에서 되어진 일들을 우리 한번 간결하게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건이 있다면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어서라 했을 때에 벌떡 일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렇게 됨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하고도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이 기적으로 이렇게 저들의 목전에서 나타났습니다.
온 성이 소동을 합니다.
바울을 두고 저들은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다" "신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합니다. "제우스신인가, 헤르메스 신인가"해서 결국은 제물까지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저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의 세계관, 저들이 종래에 가졌던 종교에 준 한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놀랐고 놀란 바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그런 소동을 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이게 또
사람의 간사한 마음들이라 금방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가차없이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이야말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루스드라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요.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한두 가지 베푸셨습니까? 눈앞에 그런 일들을 보아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빌라도 법정에
모여서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신앙적 역설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바울이 그 성에서 몸을 빼 다른 성으로 갔으면, 그렇게 쫓아냈으면 되었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릇
이 죄라는 것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또, 죄가 된 다음에는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자랍니다.
마침내는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자, 바울을 향해서 핍박을 했으면 한 번 한 것으로 족하지,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올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바울도 한때 이런 이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랬으면 되었지 다메섹까지 쫓아갈 것은 또 뭡니까?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아도 할말은 없는 사람입니다. 안디옥에서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와 가지고 죽이겠다 해도 바울이 할말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과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꼭 죽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대사람들의 유례대로 돌을 던져 자꾸 때리다보니까 바울이 그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죽고 나니까 겁이 더럭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의 법이 있거든요. 여기는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는데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시끄러워집니다. 재판도 하지 않았고, 로마사람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이지는 못하니까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 스스로 자기네 민족 나름의 자치적인 법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법은 어떤고 하니, 사람을 혹 때리기도 하고 태형을 내릴 수도 있지마는, 사형은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만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돌을 던지는 것까지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돼요. 그런데 죽였거든요. 따라서 겁이 나니까, 바울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네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죄를 짓는 것이지요. 로마사람들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저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바울의 말 한마디로 벌떡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매맞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한 말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함입니다. 그것 말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데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시나,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맞지 않도록 왜 돌보지 않으셨을까? 왜 맞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생각건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장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바울을 돌 던져 치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팔이 부러지든지 장님이 되든지 그랬다면 얼마나 더 희한했을까, 더 큰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라게 되었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지 않도록, 바울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바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살리시면 서도 바울이 매맞는 것은 내버려두셨습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신들,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죽여주지"하며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끌어 매놓았습니다.
밀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이제 물이 깊어지면 절로 익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신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 도저히 더는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순교적 고난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주님께서는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
침묵(소설)
소설 결말부가 주제의 대립항 중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큰 강요 없이 맺어지긴 하지만, 결말부의 모습은 사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가톨릭의 가르침과 상반된 부분'이며 '프로테스탄트'적 면모를 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도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소신이라는 점에서 가톨릭계에서도 이 소설을 가톨릭 소설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종교소설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하고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과 신, 신앙과 현실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한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작
<침묵(沈黙)>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1966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로, 기독교 신앙과 박해,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침묵이라는 깊은 주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파견되어 겪는 고난과 신앙적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작품은 단순한 역사 소설을 넘어, 인간과 신, 신앙과 현실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하며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야기는 로마 가톨릭 신부 로드리게스와 동료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고,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들은 가혹한 박해를 받으며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일본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곧 가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일본 당국은 신자들을 잡아 고문하고, 그들을 배교하게 만들기
위해 선교사에게 극심한 심리적 압박을 가합니다.
소설의 핵심은 ‘신의 침묵’이라는 주제입니다.
로드리게스는 고문당하는
신자들의 고통을 보며 끊임없이 기도하지만, 신은 그에게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습니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방관하는지, 왜 그토록 침묵하는지를 그는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로드리게스가 직면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은 ‘후미에(踏み絵)’ 장면입니다.
그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발로 밟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배신할 것인지, 아니면 신자들의 고통을 끝내 외면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국 그는 신앙을
지키는 대신 성화를 밟으며, 그 순간 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체험을 합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배교 속에서 신의 사랑을
발견하는 역설적 경험으로,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침묵>은 단순한 종교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과 신앙의 본질, 그리고 신의 부재와 침묵 속에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신앙의 문제를 교차시키며, 인간과 신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이 소설은 세계 문학사 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의 침묵과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철학적 고전
<침묵>은 발표 직후부터 일본 문단과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당시 일본 문학계에서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소설은 드물었기에, 기독교 신앙과 박해라는 민감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또한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은 특정 종교적 맥락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기에 더욱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닙니다.
비평가들은 <침묵>이 단순히 종교적 소설이 아니라 철학적·윤리적
탐구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주인공 로드리게스의 갈등은 곧 인간이 직면하는 근본적 질문과도 같습니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신은 왜 침묵하는가?’라는 물음은 특정 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고통을 경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주제입니다.
작품의 문학적 성취 또한 높이 평가됩니다. 엔도 슈사쿠는 단순한 사건 서술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
긴장과 내적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하여 독자가 주인공의 고통을 함께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일본의 풍경과 박해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담은 문장은 독자에게 현실적 긴장감과 사색적 깊이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국제적으로도
<침묵>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66년 발표 이후 곧바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리암 니슨과 앤드루 가필드가 주연을 맡아
원작의 철학적 깊이를 영상으로 옮겼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의 메시지를 전 세계 관객에게 다시금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로드리게스의 배교 선택을 두고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보다 인간적 연민을 선택한 그의 행동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인지, 아니면 나약한 인간의 타협인지에 대한 해석은 지금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해석의 다층성이 작품의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침묵>은 단순한 종교 소설을 넘어, 신의 침묵과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철학적 고전으로 평가됩니다. 이는 시대와 종교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논의되는 현대문학의 명작입니다.
기독교 세계관과 일본적 정서를 결합해 일본 문학의 지평을 넓힌 작가, 엔도 슈사쿠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기독교적 세계관과 일본적 정서를 결합한 독창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적 주제를 깊이 탐구한 작가로, 인간 존재와 신앙, 구원의 문제를 꾸준히 다뤘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도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프랑스로 유학하며 서양 문학과 기독교 문화를 접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소수 종교였던 가톨릭 신자로서 그는
끊임없이 정체성의 갈등을 겪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문학적 사유에 깊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의 몸과 기독교적
영혼’이라는 주제를 평생 탐구하며, 일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에는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여자의 일생> 등이 있습니다. 특히
<바다와 독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생체 실험을 다루며 인간의 죄와 도덕적 책임을 탐구한 작품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깊은 강>은 종교적 구원과 인간적 사랑을 결한 그의 후기 대표작으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은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교리적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인간의 나약함과 죄, 그리고
용서와 구원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치열하게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는 신앙을 이상화하기보다, 고통과 의심, 배신
속에서도 신을 찾으려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문단에서 ‘제3세대 작가’로 분류되며, 전후 일본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했습니다. 또한 해외에서도 번역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일본을 넘어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96년
엔도 슈사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일본과 세계 문학계는 한 시대를 마감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특히 <침묵>은 인간과 신, 신앙과 의심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세대를 넘어 읽히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문학의 지평을 넓힌 작가이자, 인간 존재와 신앙의 본질을 탐구한 진정한 사상가로 기억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 매 안 맞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만사 형통하게 해주세요, 소원 성취하게 해주세요--어떻습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 하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구력 있게 이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본문에서 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필수적 믿음의 내용입니다.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믿는 사람의 최종적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고, 병들고, 죽고, 매맞고, 굴욕 당하고, 억울하고 문제되지 안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잘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그런 지엽적이고 2차 3차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세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그것이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게 할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작품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주신 말씀대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곧 '들립시스'에는 조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파메마'라고 하는 말도 같은 '환난'이지만 고통은 고통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기보다는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따위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들립시스'--외부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겪어야 합니다. 겪는다는 말은 헬라어에는 본래 동사가 없으므로 '이런 고난' '이런 환난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오는 고통이지 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초조해하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고통은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봅니다. 매도 맞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결론지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외적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고난이 꼭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소망 있는 고생이 고생입니까? 확실한 약속을 받고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요새 학생들, 대학입시 보느라고 고생한답니다. 그것도 보통 고생이 아니지요. 그 젊은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 싸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 안쓰러워요. 불쌍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숫제 갈 대학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애써 해서 정말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해 가지고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확실하게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저도 옛날에 고학을 하면서 남 고생하는 것만큼은 고생해봤어요. 누가 고생한다고 해도 나 만큼 고생한 것 같지 안을 정도로 꽤 많이 고생했어요. 밥 벌어먹고 빨래해가면서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밥은 얻어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지요.
찬물에다 뭐 좀 빨아보려고 하니 비누가 안 풀어집디다. 빨래비누가. 아무튼 그래가면서 지내봤어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거기 있어요. 아무리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고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적어도 외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상황으로 변질되면서 고민이 되고, 불안이 되고, 초조한 마음이 되고, 불 신앙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절망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외적 상황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열심으로 살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생명체에 있어서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필요조건입니다. 당위 조건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깊이 분석해봅시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원리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에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작품 만드시느라고 그래요.
마치 쇠를 불에 넣어 가지고 때리는 것과도 같아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공장에서 일을 좀 해보았는데 참 대단합디다. 차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데 그 거리 안에는 다른 집을 못 짓습니다. 공장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기 때문입니다. 허허벌판에다 지은 공장인데 거기서 별것을 다 만들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나, 해머 하나가 40톤입니다. 무게 40톤의 해머이지요.
이게 전기로 올라갔다가 꽝하고 떨어지니 굉장하지요. 이렇게 반복하여 때려 가지고 쇠를 만듭니다. 이 쇠에는 번호만 붙어 있고 이름도 없어요. 이 쇠로 다른 쇠를 깎는 것입니다.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또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많이 맞은 쇠가 강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했습니다. 내가 외적 상황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서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고 수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제가 고학할 때에 한번은 몸이 나빠졌어요.
식은땀이 나고 못 견디게 괴로울 때인데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 나가서 억지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 잘살자고 합디까? 목사 되어서 하나님 일 하겠다는 데 이건 너무하십니다. 저는 고난을 각오했습니다마는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응답이 없습디다. 마음에 정말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적어도 번민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있어요. 아픔은 있어요.
슬픔은 없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때리는 데 아니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다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마다하겠어요?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고난을 통해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선교가 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알렌 선교사를 아시지요? 우리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들어와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2년 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가 들어와 사람들이 마구 죽어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어요. 여기서 감동이 되고, 예수를 믿게 돼요.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그 헌신적인 수고를 보면서 마음을 돌려 예수믿는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환난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혹 돈 많은 사람 전도해보았습니까? 가끔 제게 재벌 전도를 부탁하는 분이 있어요. 한번 모시고 와서 잘 좀 전도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저는 특별히 안 만나줍니다. 왜요? 만나나마나니까요. 두 번 나와 보고는 친절하지 않다면서 가버리고 맙니다. 여기서도 "회장님" 할 줄 알았던가봐요. 어림도 없으니 이야기지요. 깨끗이 다 저버리고, 하나의 죄인으로 무릎을 꿇어야 되는데…… 교회에 와서도 어깨에 힘주고 있으면 누가 알아줍니까? 안돼요. 깨지려면 한참 걸려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겠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러면 여기 보세요. 그런 환난 속에서 겸손해지지요, 마음 문을 열지요? 환난 속에서 믿는 사람의 믿음이 순수해집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게 돼요.
자기 정욕을 포기하게 돼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를 고칠래도 고칠 수가 없어요. 환난이 고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 담배 못 끊어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폐암 걸리니까 싹 끊어버립디다. 늦었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자기 의지로는 못 끊어요. 의사가 폐암 선고를 하니까 끊습니다.
보세요. 나로서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환난입니다. 고통입니다. 이래도 고통이 꼭 업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환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화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 분쟁하다가도 환난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강해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난 속에서 영원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잘사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든가 북한, 러시아 같은 곳의 핍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요.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오직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데 안녕하십니까?"--그렇게 나와요.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뭐, 부하냐 가난하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간다고 하는 영원 지향적 신앙이 분명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거든요. 이게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자, 그래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장로를 선택하고 교회를 조직합니다. 그 핍박 속에서도요. 그리고 임명을 하고, 믿은바 주께 부탁을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도의 젖을 먹고,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늘나라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원론적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로 임명하고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인즉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교훈도 하고, 근면도 하고, 명령도 하고, 친히 모본을 보이기도 하고, 기도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3절)"----주님께 부탁을 해요. 주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위탁합니다. 주님께 위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도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하고 애쓰지만 마지막에는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하고 위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대하는 자녀,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겠습니까? 주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를 잘 인도해나가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26절 끝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께 부탁하고, 여기서는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부탁을 해야 되겠어요.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주님 친히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더 바른 자세로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디슨이라고 하는 찬송가 작가의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는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야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 못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더베에서의 전도와 다시 방문 (21-23절)
- 더베에서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안디옥 등 이미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을 돌아보며 교회를 세우고 믿는 자들을 격려합니다.
- 특별히, 각 교회마다 장로를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묵상포인트
- 복음 사역에는 반대와 고난이 따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 오해와 시련, 위험 속에서도 복음의 핵심을 붙잡는 사도들의 태도와, 겸손과 진실함을 갖춘 지도력은 오늘날 교회와 우리에게도 중요한 본이 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내가 복음의 진리를 전하거나 선을 행할 때, 혹 오해와 시련, 외부의 비난을 경험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 때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과 겸손,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 나의 삶에도 복음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위해, 삶의 자리에서 꾸준히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용기와 인내, 기도가 필요함을 묵상해봅시다.
12월 2일(화) 사도행전 8-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간절히(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
간절히(earnestly) - 진지하게, 진정으로
한글개역 성경에서 24구절을 찾게 됩니다.
간절히(에크테네스. ĕktĕnēs) ἐκτενής, ές
-
1. 열심 있는, 진지한, 행12:5, 벧전4:8.
-
관련 성경간절한(행 12:5), 뜨거운(벧전 4:8).
1619. ἐκτενῶς
-
1. 열심히, 맹렬히, 끊임 없이, 지속적으로, 눅 22:44, 행 12:5, 벧전 1:22.
-
관련 성경 / 뜨겁게(벧전 1:22).
NIV 영어성경에서는 “earnestly(간절히)”라고 번역합니다(진지하게, 진정으로).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크테네스. ĕktĕnēs. ἐκτενής)”라고 합니다.
‘에크테네스’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는 ‘간절히’라고 하였으나 베드로전서에서는 ‘열심히’라고 번역합니다(행 12:5, 벧전 4:8).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베드로의 체포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를 위한 교회의 간절한 기도에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적용해야 할 신앙은 무엇일까?
첫째는 위기를 기도로 맞이하라
둘째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가 되라
셋째는 위기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라
간절히 기도하라
첫째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둘째는 열심히 기도하라
셋째는
1. 성도들이 베드로의 체포를 교회의 위기로 판단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이미 영향력있는 사도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베드로 역시 처형될 것이라는 결론은 자명했다.
따라서 핵심적 지도자의 상실은 곧 교회의 위기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2. 교회의 단결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되어 뭉쳤다는 뜻이다.
즉 교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흩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결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고난 중에 해야 될 교회의 본분 중에 기도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들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초능력만을 기대하는 현실도피적
신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불법적 힘에 맞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그것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구성상 7-11절에서 나타난 기적적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즉 교회의 기도는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단결과 기도하는 힘은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이와 같은 교훈적
의미를 초대 교회에 시사해 주기 위해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1:5-6)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힘은 기도할 때 나오고,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부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편하게 대화하듯 기도할 때도 있지만, 정말 목숨을 걸고, 간절히 매달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고난을 당할 때 간절히 구하라
13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아멘.
교회 안에서 누군가 슬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줍니다.
그리고 즐거울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함께 찬양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납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살았다는 사람도 가만 보면, 다 나름대로,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좋겠는데,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 울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고보 사도는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고난 중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과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 중에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은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 있는 자신을 저주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원망은 더 큰 고난을 불러일으키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말을 조심하라고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저주하는 말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내 안에 부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데도, 온갖 잡생각이 떠오르고, 두려움과 좌절감, 분노 등의 마음이 생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강을 달라고,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주님께 더욱 크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더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마음의 평안과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만큼 고난이 많았던 사람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기도합니다.
아주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기도합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쉬지 않고, 기도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고난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초대교회에 가장 큰 고난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가정에서 배척당했으며,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합심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는 그 순간에도, 찬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하고 있을 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흔히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는 그 고난을 말끔히 해결해 주시는 방법
또 하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두시면서, 나의 변화를 통해,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주님의 응답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시며,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여전히 바울에게 부어지고 있었으며, 약할 때 강함 되심을 찬양하며, 주님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때론 이렇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우리는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고난이 해결되어 있든지, 아니면, 그 고난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은 한 단계 더 성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주님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까?
둘째, 아픔이 있을 때에 간절히 기도하라
14-18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아멘.
초대교회에는 병든 자가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신자들은 가난했습니다.
노예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제대로 된 의사들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약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대교회시대는 사도들이 의사 노릇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들 주변에는 언제나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 사도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장로”는 각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오늘날 “목사”, “장로” 둘 다 해당됩니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로서, 말씀을 가르치는 동시에, 성도들을 대변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특히 병든 성도를 찾아가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병이 낫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픈 부위에 기름을 바르며, 기도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도 나와 있듯이, “기름”과 “포도주”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의약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항상 포도주와 기름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며, 장로들은 청함을 받으면, 곧장 기름을 챙겨, 환자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바울도 의사 누가와 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고,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십니다.
우리는 아프면 병원을 갑니다.
그리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병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작은 질병인데도, 쉽게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고, 불치병인데도, 깨끗이 고쳐져서, 잘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질병이 생겼을 때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듯이 최선을 다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시켜 주셨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는 말은 질병이 원인이 죄에 있어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죄 사함을 받고 병도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질병은 죄 때문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집의 지붕을 뚫고, 고침을 받았던 중풍병자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의 병의 원인은 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저 사람의 맹인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죽었다,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위대한 메시지를 알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했을 때, 무조건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17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는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까?”라는 의심의 마음이고, 또 하나는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며, 그만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심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가 주로 사용하는 전법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 선지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어떤 것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 간절한 기도에, 모두 응답하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을 때는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기도했을 때는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하늘을 열어, 비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절한 기도의 힘입니다.
엘리야는 초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엘리야도, 평범한 사람으로, 우리처럼,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기도입니다.
“간절히 기도한즉”이라는 말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야가 기도할 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 어떤 질병도, 아픔도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보게 됩니다.
언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까?
셋째,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19-20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아멘.
로마서 10:1절을 보면, 바울은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늘 자신과 같은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또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의 마지막 말씀에서도, 이런 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영혼 구원”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특히 병든 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는 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선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맡은 귀한 사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과도 같습니다.
주님은 영육 간에 병들어 있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영과 육 모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는 사자들처럼 성도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막고, 떠난 자들이라 할지라늘날에도 사단은 끊임없이 성도를 미혹합니다. 성도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우도, 돌아서게 하는 것이, 교회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성도는 숨을 쉬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둘째는 질병으로 인해 아파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 간에 참 교제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화 : 고난 가운데에도 감사의 제목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Illustration : Evenin the midst of tragedy, we can find reasons to be thankful.
신촌 세브란스 심장병동에 걸린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기도문으로 인해 많은 환자들이 위로를 받고 소망을 얻는다고 합니다.
There’s a famous prayer in Shinchon Severance Heart Disease Center.
Many patients would hear this prayer and receive hope.
주님, 때때로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 던지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나의 교만함을 반성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하시고 더러는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감사합니다.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Lord!
Thank you for making me sick from time to time.
You make me realize the
frailty of humans.
Thank you for sometimes throwing me into a pit of
loneliness.
That’s a chance for me to get closer to you, Lord.
Thank you
for making things go wrong.
That way I can repent for my arrogance.
Thank
you for making me worry about my children and feel that my parents and
friends are a burden.
That makes me realize how worth while it is to be
human.
Thank you for making it hard for me to make a living and eat.
That
makes me understand what it’s like to eat apiece of bread in tears.
I’m
also thankful for being born in a time of injustice.
It’s makes your
justice clearly stand out.
간절함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나 또 신앙인으로 믿음을 살아갈 때 그 모든 일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인식의 수준’이다. 사람들은 아는 만큼 자라고 성장한다. 그래서 사람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는 존재이다.
배우지 않고 되는 본능도 사용법을 배워야 사람됨의 인격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과 지혜는 절대적이다.
신앙도 배워야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 모르면 사용할 수 없고 누릴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지혜서인 잠언은 중요한 성경이다. 잠언은 세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상-지혜, 중-성공, 하-행복) 이제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된 11월 큐티에 더욱 집중하자.
- 왜 야곱일까?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야곱과 그렇지 못한 에서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야곱 : 경쟁의식, 교활함, 이기적 VS 에서 : 직선적, 포용력, 용맹함)
하나님은 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일까?
야곱은 영적인 복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영적 축복에 대해 간절함도 장자로서의 거룩한 사명감도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적인 약점이 있고 흠이 많아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그 은혜를 앙모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선택하신다. 그러니 신앙과 교양은 다른 것으로 신앙 성숙에서 교양은 필요한 것이지만, 신앙이 배제된 인간적인 처세술과 교양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까? 부족하고 흠이 있어도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사랑과 은혜를 더하신다. 자기의 약함과 죄인 됨의 흠을 알고 눈물 흘리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다.
지혜가 가지는 세 가지 특징
1. 보편성 : (본문2,3절) 지혜는 특정한 곳이 아닌 일상에 있다.
2. 우선성 : (본문10,11절) 무엇보다 지혜를 더 귀하게 여겨 지혜를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화하라.
3. 계시성 : (본문17절) 간절히 찾는 자가 지혜를 만날 것이라 했다.
간절함은 어떤 일을 이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이다.
간절함은 양면적이다.
대상이 잘 못 되면 집착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간절함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간절하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붙잡아야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다른 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특징
1. 악을 미워하는 사람(본문 13절)
2.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창 22장)
3.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시 25:14)
오늘 본문 17절의‘간절히’=‘새벽에’라고도 번역된다.
“능력은 고요함 속에서 온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을 때 혼자 고요히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통해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나의 결정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맞는가를 평가하여 그 길로 갈 힘을 얻게 된다.
예배에서의 간절함이 필요하고 마음의 태도가 바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물에 가치를 두는 존재의 대상이 두 가지가 되면 안 된다.
우리가 갈망해야 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우리 주님뿐이다.
하나님만을 간절히 원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고 죄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면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해도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다 가진 것입니다.
간절함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더 4:8 /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시편 63:1 / 간절히 주를 찾으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78:34 /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잠언 8:17 /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것이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11:27 / 선을 간절히 찾으라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이사야 26:9 / 주를 간절히 구하라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사야 26:16 / 어려울 때 간절히 주께 구하라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1:7 / 간절히 경계하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에스겔 24:25 /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라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의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제하는 날
호세아 5:15 / 고난 받을 때 간절히 구하라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마가복음 5:10 / 지방에서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니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누가복음 7:4 / 간절히 구하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누가복음 22:44 /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사도행전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사도행전 26:7 /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고린도전서 16:19 /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린도후서 5:2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린도후서 8:4 /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빌립보서 2:6 /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데살로니가전서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히브리서 2:1 /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히브리서 6:11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야고보서 5:17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베드로후서 3:12 /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ζωή, ῆς, ἡ 2222 [zōē]
- 1. 생명.
- 2.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3.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1. 영혼, 목숨, 생명:
- 2.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 3.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 1. [기본형]: 생명, 삶.
- 2.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8:14, 딤전2:2, 벧전4:3.
- 3.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12:44, 눅8:43, 15:12,30, 21:4, 요일2:16, 3:17.
- 1.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27:50, 눅8:55, 행7:59, 히12:23.
- 2. 불기, 숨.
- 3. 바람, 요3:8, 히1:7.
여호와의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主)이십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 사망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죽어야 할 악인들이라도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따라서 죄인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시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생명과 구원을 받습니다.
이사야 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하려면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죄의 문제는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보혈을 믿기만 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받고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요일 3:4-6)
하나님과 인간이 멀어진 것은 죄악 때문입니다.
죄는 큰 권능이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키며, 죄인 된 인간들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떨어지게 합니다.(사 59:1-3; 계 20:13-15)
이사야 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요한계시록 20:13-15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야고보서 4장 8~10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기에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일까?(렘 23:23-24)
이는 하나님께 겸손하여 애통함으로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망할 수밖에 없기에(시 73:27), 인간이 회개함으로 가까이할 때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구약에서 회개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니함”과 “슈브”로서 “슬퍼한다”와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 Old Testament / 107회 사용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Old Testament / 1059회
그리고 신약에서 회개는 대표적으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로서 “메타노이아”는 히브리어 “니함”을 번역한 말로서 내적인 변화를, “에피스트레포”는 히브리어 “슈브”를 번역한 말로서 외적인 삶의 변화를 각각 강조합니다.
- Etymology / 3340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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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심, 회개, 돌아섬, 마3:8, 눅3:8, 행26:20, 고후7:9, 히12:17.
Related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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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회개(마3:8, 눅3:8, 행20:21, 고후7:9, 딤후2:25, 벧후3:9), 후회(고후7:10).
1. 돌아오게 하다 2.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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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nunciation [ ĕpistrĕphō ]
- Etymology / 미래 ἐπιστρέψω, 제1부정과거 ἐ- πέστρεψα, 제2부정과거 수동태 ἐπεσ- τράφην, 1909와 4762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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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 [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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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동사] 돌아오게 하다, 눅1:16,17, 약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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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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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으로] 돌아오다, 돌아서다, 마12:44, 막13:16, 눅2:39, 8:55, 17:31, 행15:36, 16:18, 계1:12b, ἐ. ὀπίσω, 마24:18, πρὸς τὸ σῶμα, 행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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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징적으로] [좋은 뜻이나 나쁜 뜻으로 마음의 변화나 행동의 변화를 말할 때] 돌아서다, 돌아오다, 행9:35, 14:15, 고후3:16, 벧후2:21, 살전1: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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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중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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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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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돌아서다, 막5:30, 8:33, 요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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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돌아가다, 돌아오다, 마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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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유적으로] 돌아서다, 벧전2:25, 회개하다, 요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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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돌이키다(마9:22, 막13:16, 행16:18), 돌아 오다(마10:13, 눅8:55, 행11:21), 돌아가다(마12:44, 눅2:20, 행26:20), 돌아서다(약5:19, 20), 저버리다(벧후2:21), 돌아오게 하다 (눅1:16, 행26:18), 다시 가다(행15:36)
회개(悔改)
구약과 신약성경의 회개를 나타낸 단어를 살펴보면, 회개는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것이며, 외적으로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서 행동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엘 2장 12~13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예수와 침례 요한의 메시지 시작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 3:2, 4:17) 또한, 회개는 사도들의 설교에서도 주된 주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행 2:38; 3:19)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며, 사망 가운데 있던 인간이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롬 6:23),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18절에서 ‘생명 얻는 회개’라고 하였습니다.
죄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6~17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의적으로 습관적 반복적으로 짓는 죄(고전 6:9-10; 갈 5:19-21; 엡 5:18), 배교함으로써 진리에서 떠나 양심에 화인 맞은 죄(딤전 4:1-2; 히 6:1-8) 그리고 성령 훼방죄를 말합니다. (마 12:31-32; 히 10:26-31) 이러한 ‘사망에 이르는 죄’는 회개가 불가능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범하는 죄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로서 성령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죄입니다.
또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성도들이 믿음이 연약해져서 일시적으로 짓는 죄와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로서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함(όμολογῷμεν)으로써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한편,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 난 자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3장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마귀에게 속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1-3)이었으나, 예수가 자기 몸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리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그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둘째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귀의 속성을 따라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의 기원으로서 고의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만, 성도들은 더 이상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에 고의로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들도 믿음이 연약해지고, 죄의 유혹으로 인해 죄를 짓지만, 이는 일시적이며 하나님께 자백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가 일어난 장면을 고넬료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고넬료와 그 가족들은 성령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다른 사도들에게 전했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라는 말은 반드시 옛사람을 벗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엡 4:22)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반드시 생명을 얻는 결과로 나타나고 참된 회개는 영적인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더 이상 ‘속된 것’이 아니라 ‘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였고,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그들과 며칠 더 머무른 것으로 보입니다.(행 10:48)
이 기간은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예루살렘에 전해지기에, 충분하였습니다.(행 11:1)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들어가 이방인과 며칠을 함께하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라는 소식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는 빌립에게서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예루살렘에 알려진 것과 같습니다.(행 8:14)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을 전도했을 때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사마리아에 내려갔지만, 지금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유숙하며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습니다. 여기서 ‘할례자들’은 유대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들로서 단순히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율법에 열심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났다고 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갈 2:12)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는 것은 이방인에게 침례를 주었다는 것보다 이방인과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 11:3)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가까이하기 전에 그들이 정결하다는 확증을 받아야 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부정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내려온 유대교 전통을 베드로가 무시해 버린 것이 할례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일은 스데반처럼 동족 유대인들에게 공격당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에게는 할례자들의 고정관념을 변화시켜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 예루살렘교회에 돌아와서 자신을 향한 유대 그리스도인 할례자들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비난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으므로 자신들이 지켜오던 정결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 11:3) 이러한 비난의 내용은 초기 교회가 이방 선교를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며,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도 동시에 여전히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가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외적이고 율법적인 구분과 차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주장은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행 10:34; 15:9) 이것은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정신에 근거를 두며(신 10:17; 대하 19:7; 약 2:1, 9),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자이며, 차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종교, 관습, 인종, 성, 계급 등으로 나누어진 인간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철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려 하나님의 벡성으로 교제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 11:18; 15:9)
베드로의 변호는 성공적이었고, 도리어 할례자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자기 뜻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할례자들과 이방인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으면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는 복음을 듣고 난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명은 ‘구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영원한 생명인 ‘구원’과 ‘회개’를 주셨고,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회개’는 인간의 반응이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공급으로서 구원과 성화의 관계입니다.(행 2:38; 3:19; 5:31; 20:21; 26:20)
이러한 관계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예수 안에서 모든 민족이 서로 화해하게 합니다.
이것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열린 복음의 문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확산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방인 선교로 야기된 할례 문제가 등장하기까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선교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영입에 관한 것이 아니고 율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고넬료 사건을 예로 지적하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인 영입이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습니다.(행 15:1-21)
12월 1일(월) 사도행전 9-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 얻는 회개(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When they heard this, they had no further objections
and praised God, saying, "So then, God has granted even the Gentiles
repentance unto life.
"회당의 이방인"에 대한 묵상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너머로 복음이 확장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사도행전 1-7장이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워지고 그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담고 있다면,
8-20장은 어떻게 복음과 교회가 예루살렘를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산되어
갔는지를 그리고 있다.
이 두 번째 부분에는 여러가지 종교적 수식어로 불린 이방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해 묵상해 보려 한다.
이 이방인들은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들과 지속적 연관을 갖은 이방인들을 말한다.
이방인들이 디아스포라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갖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이고 중첩적일 것이다.
종교적 이유가 주가 되었겠지만, 사회적 이유나 경제적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이들을 통칭하여 "회방의 이방인들"이라 부르며, 어떤 이방인들이 회당 안팎에
존재하였는지, 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묵상하려 한다.
헬라어 세 단어에 따라 사도행전의 용례와 지칭을 분류될 수 있다.
1. προσήλυτος(프로셀뤼토스)
첫
번째 단어 프로셀뤼토스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이다.
"개종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개종의 의미 보다는, 특별히
다신교 신앙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단어였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김범식 교수님께서 일찍 일점일획말씀묵상 통하여
소개한 바 있다. 용례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새번역 2:11a 개역 2:10a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προσήλυτοι 프로셀뤼토이)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새)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개)
6:5b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προσήλυτον 프로셀뤼톤) 니골라를 뽑아서(새)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개)
13:43a
회중이 흩어진 뒤에도, 유대 사람들과 경건한 개종자들이(προσηλύτων 프로셀뤼톤) 바울과 바나바를 많이 따랐다.(새)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개)
이 그룹에 사용된 헬라어의 한글 뜻이 명백하기에, 한글로 "유대교 개종자"로 부르면 되겠다.
2. φοβέω(포베오)
두
번째 단어는 포베오이다.
단어의 뜻은,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여러 차이를 말할 수 있겠지만, 일상 언어에서는 혼용할 수 있는 뜻을
가졌다. "두려워하다" "존경을 표하다"라는 뜻이다.
아래 (3)의 세보σέβω에 비해 포베오가 좀 더 부정적인 뉘앙스의
의미를 가졌지만, 이방인을 부르는 지칭으로 사용될 때는 그런 뉘앙스는 의미 없어 보인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로 이방인을 지칭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10:2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φοβούμενος τὸν θεὸν
포부메노스),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새)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개)
cf. 참고로 이 구절에 나오는 "경건한"에 사용된 헬라어는 세보가 아니라 유세보스(εὐσεβής)이며, 이 글이 설명하는 세 헬라어 단어에 해당하지 않는다.
10:22a
그들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φοβούμενος τὸν θεόν 포부메노스 톤 쎄온) 사람입니다.(새)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개)
13:16
그래서 바울은 일어나서, 손을 흔들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οἱ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호이 포부메노이 톤 쎄온)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개)
13:26
아브라함의 자손인 동포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οἱ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호이 포부메노이 톤 쎄온) 사람들이여,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6)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새)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개)
포베오 동사가 이방인에게 사용될 때, 원문의 형식도 일관되고((οἱ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 번역어도 일관되다(새번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역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포부메노이φοβούμενοι 이방인이라 부르겠다.
3. σέβω(세보)
뜻은 "예배하다" "존경을 표하다"이다. 이 단어 분사형을 통하여 이방인을 수식하였는데, 용례는 아래와 같다.
13:50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τὰς σεβομένας γυναῖκας 타 세보메나스 귀나이카스)과 그 성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개)
16:14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σεβομένη τὸν θεόν 세보메네 톤 쎄온)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새)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개)
17:4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τῶν σεβομένων Ἑλλήνων 톤 세보메논 헬레논)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개)
17: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τοῖς σεβομένοις 토이스 세보메노이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개)
18:7
바울은 거기를 떠나서,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이방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σεβομένου τὸν θεόν 세보메누 톤 쎄온) 사람이고,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새)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개)
이상에서 보듯이 세보 동사에 대한 한글 성경의 번역은 다양하다. 원어 성경은 일관되게 세보 동사의 분사형을 사용하여 이 일련의 그룹을 표현하고 있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여, 이 그룹이 한 그룹일 수 있다는 인상이 희석되었다. 한글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니, 이 그룹을 원어대로 세보메노이σεβόμενοι 이방인들이라 부르겠다.
이상, 복음이 이방 세계로 퍼져나가는 사도행전 장면(8-18장)에 등장하는, 유대 회당의 이방인들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회당의 이방인들
- 개종자
- 포부메노이
- 세보메노이
1개종자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 않다. 이방인 중에 할례까지 받아 유대인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반면,
2포부메노이와 3세보메노이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분명한 것은 이들 역시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회당 근처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이 같은 정도로 유대교를 받아들인 것인지, 그래서 모두 God-fearers의 범주에 들어 가는
것인지, 아니면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2포부메노이는 할례 빼고 모든
것을 받아 들여 실제 유대 회당의 (열등한) 일원으로 살아간 반면, 3세보메노이는 유대교에 호감은 가졌지만 회당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는 이방인들로 분류한다.
어찌 되었든 하나는 분명하다.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선교적 활동이 있었고, 그 덕에 유대교에 호의적인 이방인들을 회당 근처에 존재하였고, 이들이 기독교 이방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은
이방 사회 속에 있었지만, 고립되지 않았고, 이방 사회와 소통하여 다양한 층위로 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만들었다.
교회를
돌아본다.
교회는 마을에서 고립되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포부메노이와 세보메노이는 있는가?
외국인 거주자로서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비유대인들이나 언약의 공동체 일원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 이스라엘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유대인 외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구약에 나타난 이방인 :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모든 민족들과 구분되도록 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 유대인 선택된 이유, 상징, 유대인의 성경 예언(회복, 때, 방법) 이방인들의 때와 충만한 때
유대인과 이방인
신약성경에는 ‘유대인’1)과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라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고전10:32).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아닌 하나의 ‘새로운 몸’입니다.
1) 원래 유대인(Jews)은 ‘유대 지방에 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다인’으로 쓰는 것이 맞지만 이미 우리말 성경에서 이 단어가 유대인으로 고정되었으므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연대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은 이집트 탈출 때에 다른 민족과 확연히 구분된 독립 민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이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반면에 교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자체의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되었고 연대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끝이 날 것입니다.
현재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탈선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하늘로 들려 올라가 휴거(携擧)를 받을 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와 세상 모든 민족들의 머리가 될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는 이방인들이 현재 이 땅을 통치하고 있으며 성경은 이때를 ‘이방인들의 때’라고 부릅니다(눅 21: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유대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셈족에 속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새로운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했던 때 즉 노아 홍수 이후에 전개된 인류 역사의 태동기부터 시작됩니다(창 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 번 나타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나타나심을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들은 무조건적인 약속들이었으며(창 13:14-17; 15:1-5, 18-21) 이것들은 뒤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창 26:1-4) 그의 손자인 야곱에게(창 28:10-15)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유다 민족의 역사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합니다.
유대인들은 억압받고 짓밟히고 포로가 되어 다른 땅으로 끌려가 여러 민족들 가운데 널리 흩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모든 정복자들을 이기고 살아남아 민족들 가운데서 당당하게 활보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이라면 아마 타민족에게 완전히 흡수되거나 민족의 주체성 혹은 특성들의 대부분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보존된 것은 역사의 기적입니다.
유대인들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 표적 즉 ‘불타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떨기나무’입니다.
인류 역사상 유다 민족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뚜렷하게 눈으로 본 민족은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홍해의 물이 갈라져서 벽이 되었고 요르단 강이 갈라졌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음식을 먹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전쟁에서 양 뿔 나팔을 불자 그들이 포위한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고(수 6:1-27) 그들이 적을 섬멸할 때까지 태양과 달이 중천에 머물러 서기도 했습니다(수 10:12-14).
또 주님의 천사가 그들 주위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보호했으며 185,000명이나 되는 아시리아 병사들을 죽이고 그들을 구해 내기도 했습니다(왕하 19:35).
그리고
유다 민족만큼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민족도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 겸
입법자, 이집트의 요셉이나 바빌론의 다니엘과 같은 정치가, 다윗과 같은 훌륭한 왕, 지혜의 사람 솔로몬 등이 구체적인 예들입니다.
어느 민족도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 같은 훌륭한 대언자들을 배출한 적이 없으며 특히 모든 사람보다도 뛰어나신 ‘갈릴리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배출해 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주후 1세기에 사도 바울보다 더 빛났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21세기 현시대에서 역사를 만들어 왔고 역사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입니다.
이와 같이 유다 민족이 놀랍게 보존되어 온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고 지금도 수행하게 하신다는 전제만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된 이유는
첫째, 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전수하도록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맡겨졌습니다(롬 3:1-2).
모든 성경이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 기록을 보존하고 그것이 손상되지 않도록 소중하게 간수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셋째, 그들이 세워진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세상에 구원자를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습니다.
넷째, 그들이 세워진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을 도덕적 부패로부터 구해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요 4:22)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로부터 구원자 예수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셨을까요?
아니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고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유다 민족이 세상의 도덕적 부패를 막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이 더 이상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게 될 때가 곧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라는 것을 의미하셨을까요?
전자도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후자도 의미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민족들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구원받는 것과
땅에 있는 인류가 보존되는 것은 유대인이 하나의 확실한 민족으로 보존되고 존속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세상이
지금과 같이 타락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들이 소금으로서의 성질 즉 자신들의 짠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맛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의 타락은 계속되어 극에 달하게 될 것이며 결국 세상 민족들의 부패로 인한 악취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것이고 이때에 유대인들은 회심하여 소금으로서 제맛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사를 주도하는 으뜸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에게는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없습니다.
또한 예전처럼 희생 제단이나 희생 제물 그리고 제사장도 그들에게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유월절은 지키지만 유월절 어린 양을 잡지는 않습니다.
속죄일은 지키지만 속죄를 위한 피는 흘리지 않습니다.
모든 희생
예물과 헌물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왕도 없고 재판관도 없으며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도 없습니다.
이제는 우림과 둠밈도 하나님의 상징이 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귀하지만 ‘열린 환상’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위대한 대언자는 ‘갈릴리 사람’ 예수님이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요셉을 배척하고 그를 붙잡아 은 20개를 받고 팔아넘겼으나 그는 그들의 시야 속에서 사라져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요셉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분을 붙잡아 은 30개를 받고 팔아넘겼으나 지금 그분께서는 그들의 시야 속에서 사라져 자기 아버지의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이방인들에 의해 민족적으로 밀려났습니까?
혹은 교회라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밀려났습니까?2)
과연 유대인들이 다시는 자신들의 땅과 왕과 수도를 얻지 못할까요?
또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할까요?
오늘날3) 그들이 처한 상황은 호세아서 3장 4-5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 아닌가요?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통치자도 없고 희생물도 없고 형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거하다가 그 귀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주 자기들의 하나님과 자기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들에 주와 그분의 선하심을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라."
2) 주후 313년 이후 천주교회와 또 천주교회에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특정 교파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이스라엘 대체 신학’을 믿어 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을 향한 미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3) 라킨 목사가 이 글을 쓴 때는 1920년대였다.
그는 1948년에 유다 민족이 이스라엘 국가로 독립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으나 성경을 면밀히 상고함으로써 말씀을 통해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얼마나 놀라운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다.
성경의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드시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야 하지 않겠습니까?(눅 21:24).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이것이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나 혹은 교회에 의해 밀려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때가 이르면 그들이 다시 이 땅에 하나의 나라를 구성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의 장래를 예견하려 할 때 우리는 쓸데없이 억측을 부리지 말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것을 모두 모아서 논리 정연한 순서로 배열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방법은 매우 단순하며 그 결과 역시 확실합니다.
유대인들의 회복
1. 그 사실에 관하여
"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포로 된 자들을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피폐한 도시들을 건축하여 거기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세우고 그것들의 포도즙을 마시며 또한 동산들을 만들어 그것들의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준 그들의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네 하나님이 말하노라"(암9:14-15).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뒤에도 그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그들이 더 이상 자기들의 땅에서 쫓겨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미래에 있을 완전한 회복을 가리킵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첫째 회복이었고 지금 이 성경 구절은 둘째 회복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천년왕국이 임하는 때에] 주께서 다시 자신의 손을 두 번째 세우사 자신의 백성 중의 남은 자들 곧 남게 될 자들을 되찾되 아시리아와 이집트와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의 섬들로부터 되찾으실 것이요, 또 그분께서 민족들을 위하여 기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의 사방에서부터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함께 모으시리라" (사 11:11-12).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회복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회복은 바빌론으로부터의 회복이었습니다.
이집트로부터 가나안까지 진군한 것은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가나안을 소유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어떤 것도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 땅을 소유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 때는 동쪽에서 나왔지만 이제 미래에 돌아올 때에는 북쪽과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런즉,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다시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모든 땅 곧 친히 그들을 쫓아내어 머물게 한 모든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다시 데려가리라"(렘 16:14-15).
이 말씀과 더불어 다음의 말씀도 참조하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내가 네 씨를 동쪽에서부터 데려오고 너를 서쪽에서부터 모으리라.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 곧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그를 창조하고 그를 지었으며 참으로 내가 그를 만들었느니라" (사 43:5-7).
2. 그때에 관하여
이방인들의 때가 성취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4).
3. 그 방법에 관하여
(a)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옴
"내가 너희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취하고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너희 땅으로 데려가리라.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너희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또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 또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판단의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겔 36:24-27).
(b) 회심하기 전에 심판을 받음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반드시 강한 손과 뻗은 팔과 쏟아붓는 격노로 너희를 다스릴 것이요,
또
강한 손과 뻗은 팔과 쏟아붓는 격노로 너희를 백성들에게서 데리고 나오며 너희가 흩어져 거하던 나라들에서 너희를 모으고 백성들의
광야로 너희를 데려가 거기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변론하되 내가 이집트 땅의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과 변론한 것같이 너희와
변론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고 언약의 속박 속으로 들어가게 하며 너희 가운데서 반역하는 자들과 내게 범법하는 자들을 제거하리라.
그들이 머무는 나라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되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20:33-38).
이 일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용광로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나니 그런즉, 보라,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한가운데로 모으리라.
그들이 은과 놋과 쇠와 납과 주석을 모아 용광로 한가운데 넣고 그 위에 불을 내뿜어 녹이는 것같이 내가 친히 분노하고 격노하는 가운데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참으로
내가 너희를 모아 내 진노의 불속에서 너희 위에 불을 내뿜을 터인즉 너희가 그것의 한가운데서 녹되 은이 용광로 한가운데서 녹는
것같이 너희가 그것의 한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주가 내 격노를 너희 위에 부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 22:19-22).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누가 견디겠느냐?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서겠느냐? 그는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으니라.
그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의 아들들을 깨끗하게 하되 금과 은같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의 안에서 주에게 헌물을 드리게 하리라" (말 3:1-3).
"주가 말하노라. 그 온 땅에서 그 안의 삼분의 이는 끊어져 죽을 것이요, 오직 삼분의 일만 그 안에 남으리라.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며 금을 단련하듯 단련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또 말하기를, 그것은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로다, 하리라" (슥 13:8-9)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위에서 기록된 것과 같은 시련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서 30장 4-7절과 다니엘서 12장 1절은 이 환난 기간을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말하며 예수님은 친히 이것을 ‘큰 환난’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한편 예수님과 스가랴 대언자는 이 기간을 주님의 재림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마 24:21-31; 슥 14:1-11).
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결과 유대인들은 비참한 가운데 주님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리로다.
그 날에 마치 므깃돈 골짜기의 하다드림몬에서의 애곡과 같은 큰 애곡이 예루살렘에 있으리라"(슥 12:10-11).
이렇게 된 뒤에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으로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 (슥 14:4).
이때에야 비로소 유다 민족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단 하루 만에 태어날 것(즉 회심할 것)입니다.
"누가 그러한 일을 들었느냐? 누가 이러한 일들을 보았느냐? 땅이 하루에 만들어져서 열매를 내겠느냐? 혹은 한 민족이 순식간에 태어나겠느냐? 시온은 진통하자마자 자기 자녀들을 낳았도다" (사 66:8).
이스라엘(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로부터 나올 때 이집트 사람들의 재물을 취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 그들이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올 때에 그들은 이방인들의 재물을 취할 것입니다(사 60:9; 61:6).
이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본토로 다시 돌아갈 때에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왕가의 땅’은 ‘이집트의 강’ 곧 나일강에서부터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입니다(창 15:18).
대언자 에스겔에 따르면 이곳은 다마스커스의 북동쪽 하맛에서부터 남쪽에 있는 가데스까지입니다(겔 48:1-29).
이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에스겔서 40-48장 참조) 주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며 희생 예물이 다시 드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가 재수립되고 땅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슥 8:20-23).
Ⅱ. 이방인
인류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방 국가들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이방인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론 같은 국가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덮쳐 그들을 정복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찰 때까지 그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 두셨습니다.
그 뒤에 그들을 풀어놓으시고 세상의 권능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넘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은 주전 606년경에 일어났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21장 24절에 말씀하신 ‘이방인들의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때’란 하나님께서 심중에 정하신 어떤 한정된 연대의 기간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는 것’과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는 것’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이 충만히 차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눈먼 것’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공중으로 휴거를 받을 때가 이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는 것’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방인들의 때’가 완료되기 7년 전에 그들의 충만한 수가 다 차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때’에 관해서는 다니엘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이 꾼 꿈과 다니엘이 본 네 ‘환상’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의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즉위 제2년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단 2:31-45).
그는 꿈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이 신상은 세상 왕국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왕국들의 통일성과 역사적 계승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한 이방인들의 통치가 거대한 ‘금속으로 된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신상에 사용된 금속의 질적 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것은 세상 왕국들의 쇠퇴를 보여 줍니다.
신상의 무게 또한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상은 머리 부분이 가장 무겁습니다.
신상을 구성하고 있는 네 금속은 연이어 일어난 네 개의 세상 왕국을 의미합니다(단 2:37-40).
이것은 곧 느부갓네살 왕의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네 왕국 즉 바빌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왕국이 세상의 정부로 계승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왕국들의 개수뿐만 아니라 그 이름들까지도 계승하는 순서대로 밝혀져 있습니다(단 2:38-40; 8:20-21; 9:26).
신상을
구성하고 있는 금속들의 특성 속에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신상의 쇠퇴는 그 정부들의 특성을 예언의 형태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정부들은 느부갓네살의 통치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절대 군주제로 시작하여, 신상의 발을 구성하고 있는 철과 진흙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종국에 가서는 독재적 민주 정치의 정부 형태로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단 2:41-43).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방인들의 통치가 몸의 모든 기관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으뜸 기관인 머리에서부터 머리가 명령한 곳으로 몸을 옮겨주는 구실만 하는 발로 점차적으로 옮겨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상은 ‘산에서 깎아 낸 돌’에 의해 발에 일격을 맞고 부서져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여기서 이 돌은 점진적으로 땅에
가득 차서 신상을 밀어내지 않고 일격에 그것을 부수고 맙니다.
돌이 신상을 친 것은 심판이지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돌은 기독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란 하나의 과정인 반면에 이 돌이 신상을 친 것은 갑작스러운
재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상의 멸망의 때는 발가락이 형성된 이후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상의 두 다리는 주후
364년에 가서야 나타났고4) 열 발가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돌이 신상 위에 떨어지는 때는 이 왕들의 시대(단 2:44) 곧 장차 있을 열 발가락이 대표하는 왕들의 시대로서 이것은 다니엘의 해석 속에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단 7:23-24).
4)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된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돌은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네 금속으로 표현된 네 왕국은 문자 그대로 실질적인 왕국들입니다.
그러므로 뒤따르게 되는 ‘돌 왕국’ 또한 문자 그대로의 실질적인 왕국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돌 왕국’이 이 세상 왕국들을 파괴하고 대신하여 온 땅을 정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돌 왕국’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며 신상이 상징하는 ‘이방인들의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이 신상에 관한 꿈을 꾼 지 약 48년이 지난 뒤에 다니엘은 네 짐승에 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단 7:1-8, 15-27).
이 짐승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것들은 짐승의 왕인 사자에서부터 철로 된 이와 놋으로 된 발톱과 머리에 열 뿔을 가진 짐승 즉 말로 묘사할 수 없는 기이한 괴물에까지 격하됩니다.
다니엘은 이 짐승들이 이전에 보았던 신상의 네 금속과 일치하며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짐승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다니엘은 넷째 짐승의 머리 위에 있는 열 뿔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뿔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단 7:8).
이것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느부갓네살의 신상의 열 발가락 가운데서 작은 발가락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보여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또 하나의 계시를 자신에게 보여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넷째 짐승의 열 뿔 가운데서 일어난 그 작은 뿔로 인해 그 열 뿔 가운데 세 개가 그 앞에서 뿌리째 뽑히고 그 작은 뿔이 사람의 눈과 입을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네 개의 세상 왕국이 계승되는 순서대로 다니엘에게 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뿔의 환상을 통해 이방인들의 마지막 왕 곧 적그리스도도 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네 왕국이 처음에는 금 머리를 가진 금속 신상으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일련의 짐승들로 나타나는 이유는 세상 왕국들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네 왕국 속에서 부와 위엄과 권력이 집중된 모습을 보는 반면에 하나님은 서로 삼키고 싸우는 데 급급한 욕심 많은 일련의 짐승들로 이 왕국들을 보십니다.
이 네 개의 세상 왕국은 이미 이름이 밝혀진 대로 차례차례 서로를 계승해야 했지만 시간상으로 끊어지지 않으면서 연속적으로 서로를 계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계시되었습니다(단 8:1-27).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인해 숫염소의 큰 뿔인 그리스 왕국이 네 개의 소왕국들 곧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주전 323년에서 주전 3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주전 30년에 로마는 넷째 세계 대제국이 되었고 주후 364년까지 지속되다가 동서로마로 분열되었습니다.
비록 로마제국이 주후 364년에 이처럼 동서로마로 분열되어 사라졌지만 법이나 종교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 신상의 열 발가락과 다니엘이 본 넷째 짐승의 열 뿔이 보여 주듯이 이것은 끝 날에 재건될, ‘열 개의 왕국으로 된 하나의 세계 권력’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때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때’(Times)란 예언적 시간이고 예언적 ‘때’는
360일로 된 1년이며 하루가 1년을 의미하므로 한 ‘때’(Time)는 360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들은
레위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곱 배(7 times)로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레 26: 18-21, 24-28)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때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에도 이 일곱 배(혹은 일곱 때, 7
times)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5)
5) 영어로 ‘times’는 ‘때’도 되고 ‘배’도 되므로 레위기의 ‘7 times’를 ‘일곱 때’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때’가 360년이라면 ‘일곱 때’는 2520년이 될 것이며, 이방인들의 때가 주전 606년경에 시작되었으므로 주후 1914년에 끝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날이 이미 지나갔지만 이방인들의 때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한 달은 30일이고(창 7:11-24; 8:3-4) 1년은 360일입니다.
그러나
주전 606년부터 주후 1914년까지 365.25일을 1년으로 하는 율리우스력(구태양력)으로 2520년에 해당하며 이것을
360일로 된 유다력으로 환산한다면 2520년보다도 36.75년 더 많은 2556.75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의 때는
주후 1877년에 끝났어야 합니다.
사실 레위기의 ‘일곱 배’(혹은 일곱 때)는 ‘예언적인 때’(Prophetic times)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정확히 일곱 번 노예와 포로로 넘겨져 벌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것은 노예 상태도 포로도 아니므로 여기에 이것을 더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때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때가 주전 606년에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돌 왕국’ 즉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에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6)
6) 여기서 저자가 ‘돌 왕국’이라고 한 것은 다니엘서 2장 44-45절에서 신상을 단번에 산산조각 내고 영원한 왕국을 이루는 돌 즉 ‘사람의 손으로 깎아 내지 않은 돌’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분들이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성경을 읽고, 믿으며,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지요. 그런데 성경 전부를 다 믿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합하여 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들이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하신 것인지, 신약과 구약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날 때부터 백성으로 태어나 백성의 삶을 살았던 유대인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거듭난 삶을 사는 이방인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은 구약의 유대인을 향한 말씀들을 신약의 이방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각도가 빗나가게 되었으며, 올바른 진리 안에 걸을 수 없었지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8:1-4)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25:38)
광야의 성막과 불기둥을 표현한 그림.
우리가 구약을 살펴보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 뿐이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들 이외에는 어떠한 민족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과 언약과 축복 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의 말씀들을 상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섬기라, 이방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크나큰 축복이 임하리라는 그 모든 말씀들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른 어떠한 민족들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백성에게만 주신 말씀이었지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애굽기 3:15)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호하시며,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해 오셨지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지정하여 주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고, 엄청난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며 출애굽을 시키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시고 십계명을 주신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며, 요단강을 건너 다시금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었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사무엘과 엘리야와 이사야와 같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13-14)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8:2-4)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무엘과, 다윗과, 솔로몬과, 엘리야와, 그 모든 구약의 이야기들을 여러분께서는 자세히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 수천 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말씀해 오셨으며, 구약에 기록된 것은 누구의 역사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며 그들과 함께하신 이야기이지요.
다시 말해, 구약은 하나님과 유대인과의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하시며 그들과 동행하시고 엄청난 기적과 이적을 통해 그들을 돌보시고, 섬기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 이방의 풍속을 좇았지요. 바로 이것이 구약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원수가 되고,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야 하며, 전쟁을 통해 진멸되어야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살고있는 족속들을 칼로 쳐서 진멸하며, 멸절시킬 것을 명하셨지요.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다 하시며, 태양을 하늘에 머물도록 하는 기적까지도 보이시며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멸하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
(신명기 20:16-17)
이스라엘 <아얄론 골짜기>. 기브온과 아얄론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사람과 전쟁할 때에 태양과 달이 그대로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여호수아 10:12-13)
이처럼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상세히 알려 주신 것이 바로 구약이지요. 그 율법과 계명은 애초부터 이방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며, 이방인이 지킬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었으며,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도록 하신 것이었지요.
반면,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방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자들로, 처음부터 죽어있던 존재였습니다. “죽어있다”라는 것은 바로 “없다”라는 의미이지요. 다시 말해 이방인들은 “하나님 안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죽어있었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조차 없는 자들, 즉,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에 배제되어 있던 자들이 바로 이방인들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 나름의 여러 신을 만들어 섬겼으며, 우상을 숭배했고, 가증한 행위들을 했으며,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에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 알지 못한 채 죄의 종이 되어 살아왔고, 이것이 바로 죽은 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멸하라고, 없이하라고,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과 친근히 하지 말라고 자기 백성에게 명하셨던 것이지요.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레위기 20:22-23)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여호수아 23:11-13)
유대인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난 자들이며, 이방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밖에 있었으며 죽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며 모든 기적과 이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던 자들이며, 이방인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과 축복 안에 들어올 수 없던 자들이었지요.
그렇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갈라지게 된 기점은 어디부터일까요? 또한 이방인이 받은 은혜는 유대인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차이,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이 영접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자기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우리는 성경을, 복음을,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올바른 진리 안에 흔들림 없이, 혼란 없이, 확고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새명(조에)
육체적 생명(비오스)
정신적생명(푸쉬케)
영적 생명(프뉴마)
조에는 프쉬케나 비오스와는 다른 생명이다. 프쉬케와 비오스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목숨이나 생활의 수준과 방식은 상당 부분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두신 생명이다. 씨앗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씨앗을 피우고 열매 맺어 풍성하게 사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생명"(ζωή 조에)에 관한 묵상
신약성서에는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가 셋 나온다.
프쉬케(ψυχή),
비오스(βίος),
조에(ζωή)가 그 셋이다.
이 셋은 넓게 말해서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는 각각의 독특한 뜻을 지니고 있다.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이다.
의학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육체적 목숨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고 말씀하시거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 10:15)라고 말씀하셨을 때,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이다.
비오스는 영어 바이오(bio)의 기원이 된 헬라어이다.
그러나 영어에서 바이오가 "생물" "생명" "생리"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헬라어 비오스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생활"이나 "살림"에 가깝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유혹으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꼽는다.
여기서 "이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새번역은 "세상 살림"으로 번역하여 이해를 돕는다.
헬라어로는 비오스이다. 살림살이 혹은 생활 수준으로 번역할 수 있다.
탕자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비오스다(눅15:12). "살림"을 미리 나누어 준 것이다.
조에는 프쉬케나 비오스와는 다른 생명이다.
프쉬케와 비오스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목숨이나 생활의 수준과 방식은 상당 부분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두신 생명이다.
씨앗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씨앗을 피우고 열매 맺어 풍성하게 사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요 6:35).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생명을 살리는 빵,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빵으로 오셨다는 말씀이다.
조에 생명은 예수를 만날 때 살아나 역동 친다.
이 생명이 있으면 비오스가 어려운 형편이라 할지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조에의 힘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바이다. 아래 성경말씀 7절의 "보물"을 "생명"(조에)로 바꾸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7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 4:7-10)
비오스 수준의 신앙생활이 있다.
기복신앙을 제외하고라도, 삶의 질을 높여주려는 일체의 계몽적 신앙 프로그램이 비오스를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 교실, 부부학교, 자녀교육교실 등등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전하는 신앙의 본질은 비오스에 있지 않고 조에에 있다. 조에를 살리고 풍성케 하는 신앙생활!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 볼 일이다.
생명(life,生命)이란 단어가 한국어, 영어, 일어로는 모두 하나의 글자로 쓰지만 헬라어로는 그 대상에 따라
*조에 ZOE : 하나님의 생명
*푸쉬케 PSYCHE : 혼의 생명
*비오스 BIOS : 육의 생명
이렇게 3개의 단어로 각각 표현되지요.
조에 ZOE(ζωή) / 하나님의 생명, 창조되거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
푸쉬케 PSYCHE (ψυχή) / 혼의 생명,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갖는 '혼(Soul)'의 생명
비오스 BIOS (βίος) / 육의 생명,우리 몸의 '생물학적 생명',숨 쉬고, 먹고, 자라는 육체적인 생명
하나님은 사람을 그형상과 모양에서 하나님을 따라 만드셨지만, 생명은 조에(ζωή)를 주시지 않고 푸쉬케(ψυχή)를 주셨어요.
푸쉬케와 비오스의 생명만을 가진 사람은 "불못"이 최종 종착역입니다.
"조에(ZOE)의 생명"만이 심판을 피하고 영원한 누림안으로 인도하지요~~~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조에(ZOE)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생명, "조에(ZOE)의 생명"을 우리안에서 자라게 하도록 교회생활 안에 보존되시기를 권고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모이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양무리"처럼 함께 모여 무리지어 살아야 마귀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습니다.
단독으로 떨어지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교회생활을 회복하시길 간곡히 권합니다.
시대가 바뀌려 합니다.
그날이 가깝습니다~!
최근에 AI를 활용하여 뜻을 다시 한번 찾아 보았습니다.
1. 조에 (Zoe, ζωή) -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
뜻 : 비오스나 푸쉬케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생명' 이에요. 창조되거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을 뜻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영생(永生)'이 바로 이 조에예요.
특징 : 이 생명은 생명의 질(Quality)을 나타내며, 단순히 오래 사는 것(시간) 이상의 풍성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해요.
예시 :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요 10:10)라고 하셨을 때 사용된 단어예요.
2. 푸쉬케 (Psyche, ψυχή) - 혼의 생명, '목숨' 또는 '혼'
뜻 : 몸 안에 깃든 '개인의 생명' 또는 '목숨'을 뜻해요.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갖는 '혼(Soul)'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적, 감정적인 영역과 연결된 생명이에요.
어원 : 영어 단어 'Psychology(심리학)가 이 푸쉬케에서 나왔어요.
예시 : 예수님이 "누구든지 제 목숨(푸쉬케)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마 16:25)라고 말씀하실 때 쓰인 '목숨'이 바로 푸쉬케예요.
3. 비오스 (Bios, βίος) - 육체의 생명, '생활'
뜻 : 우리 몸의 '생물학적 생명'이에요. 살아 있는 동안 숨 쉬고, 먹고, 자라는 육체적인 목숨과,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자체, 즉 살림살이나 생활 방식을 뜻하기도 해요.
어원 : 여러분이 아는 영어 단어 'Biology(생물학)가 바로 이 비오스에서 왔어요.
예시 : 성경에서 '이생의 자랑' (요일 2:16), '생활' (눅 8:14) 등으로 쓰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어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이죠.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오래 사는 비오스나, 개인의 목숨인 푸쉬케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 즉 조에를 얻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입신자들의 간증
1. 양팔천대 권사 간증
창원 중앙교회 양팔천대 권사님
이날은 양력 설날이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안을 치워 놓고 아이들과 목사님댁에 세배드리러 가기로 약속하고 잠깐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천지가 깜깜한 느낌이 오면서 하늘 위에서는 불칼을 든 천사들이 수 없이 내려 오면서 공중의 마귀들을 땅으로 내려 쫓아 보내고 있었다.
악령들의 아우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면서 자기들의 때가 다 되었다고 하였다 .
땅도,산도,바다도 소리치기를 세상 끝이 다되었으며 몇날이 남지 않았다고 야단들이었으나 나무들은 말하기를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동안 조용하더니 불칼을 든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 가고 세째 하늘의 아름다운 광채가 둘째 하늘로 쏟아지더니 빛들의 사이 사이로 많은 천사들이 온갖 악기들을 가지고 둘째 공중으로 내려와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려 오는 천사들은 큰 나팔을 들고 하늘가에로 흩어지더니 동서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나팔소리의 맨 끝에서 들려 오는 자기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순가 부터 앞도 옆도 뒤도 보이지 않고 세상이 온통 핑크에 가까운 분홍색 으로만 가득차고 옆에 있는 천사만 보였습니다.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성도는 현재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이라도 세상이 눈에 보이면 자연히 유혹이 따르게 됨으로 아예 세상 일이 좋아 보이는 요소들을 미련없이 다 버리고 오직 위에 계신 이만을 바라보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천사는 하늘위에서 나를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는데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가슴에는 세마포 흰옷을 안고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밝아서 내마음도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그 천사를 바라보고 있으니 천사가 내려와 나에게 흰 옷을 머리에 얹어 주는 듯 하였는데 그 옷이 발끝까지 입혀졌으며 어느새 머리에는 면류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또 신기하게도 내 몸이 홀연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몸의 색깔이 점점 불같은 색으로 변하며 나중에는 몸에서 빛이 나는데 깜깜한 밤에 자동차 불빛이 강하게 비치듯 우리들의 육체가 변하더니 흰 옷도 같이 빛을 발하면서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데 그 속도가 번개빛이 반짝하는 듯이 그렇게 빨랐습니다.
현재 낙원에 있는 성도들은 육을 벗어나 영들만 올라갔기 때문에 육신들은 모두 땅에 흩어져 있으므로 그 형체를 찾아 볼 수 없을지라도 그것에 상관없이 흩어져 있는 살과 뼈들이 땅 속에서 물 속에서 불빛처럼 빠른 속도로 모여 들어 변화된 육신이 형성되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다 은발로 변화하였고 각자의 육신을 찾아서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였습니다.
그 순간에 온 우주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불꽃바다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음악소리를 잘 생각해 보니 천국방언으로 불려지고 있었으며 이 찬송외에는 귀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귀들은 벌벌 떨면서 어느 구석으로 숨어 버렸는지 흔적도 없었고 산천초목들만이 아니고 흙과 돌까지도 춤을 추어주는 가운데서 휴거를 받게 되는데 이날에 당하는 기쁨을 억만분의 일이나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이렇게나마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성도들은 그 당시에는 서로가 세상의 인연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일가 친척 골육과 이웃을 세상에서 정답게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서 얼싸안고 춤을 추고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랄들 가운데 일부러 아는 사람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이 생각만 하면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보고싶은 생각을 하여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불쌍하게도 휴거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정답게 지내던 사람들이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때는 모두가 이때는 일가 친척 골육은 다 없어지지만 정답게 지내던 사이는 여전히 계속해서 정답게 지내게 됩니다.
영원한 저 하늘나라에 가서는 완전한 중성으로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꼭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버려도 여전히 정다운 사이는 계속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자기에게 주어진 평안의 마음은 하늘나라에까지 가지고 가야함으로 잘 보존하라고 천사가 경고하는 소리를 들어면서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들어 갔습니다.
모두들 울긋 불긋 화려한 색깔이 담긴 옷으로 갈아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받아 쓰고 기뻐뛰며 즐거워하며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먹고 마시는데 천국에서는 먹어도 살고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때는 축제 중에서도 대 축제라 음식이 무더기로 차려져 있었습니다.
음식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음식들이 그냥 날아와서 입에 대어지며 그 순간에 씹지 않아도 저절로 녹아 버리니 음식들이 물처럼 들어 가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신기한 일들이 천국에는 수 없이 많으니까 역시 천국은 표현할 수 있는 곳이 못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천국을 표현하는 수 많은 언어가 있으나 천국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언어는 이 땅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생명(조에) 2222
회개(메타노이아) 3341
Pronunciation [ mĕtanŏia ]
Etymology / 3340에서 유래
-
1. 개심, 회개, 돌아섬, 마3:8, 눅3:8, 행26:20, 고후7:9, 히12:17.
-
관련 성경 / 회개(마 3:8, 눅 3:8, 행 20:21, 고후 7:9, 딤후 2:25, 벧후 3:9), 후회(고후 7:10).
‘생명 얻는 회개’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말합니다(고후 7:10).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그 믿음 이전에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구원의 첫 단계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으며(막 1:15),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38)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인해 사도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흩어졌습니다(행 8:1 ; 11:19).
그중에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파했는데(행 8:5),
많은 사람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8:12).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했습니다.
하물며
이방인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짐승처럼 여겼고, 그들과의 교제를 일절 금지했습니다.
이를 어기는 건 위법 곧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행 10:28).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자기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 주신 것도, 성령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제의에 선뜻 나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행 10:28).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처럼, 생명 얻는 회개 역시 유대인에게만 주어졌다고 여겼습니다(행
11:18).
‘생명 얻는 회개’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말합니다(고후 7:10).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그 믿음 이전에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구원의 첫 단계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으며(막 1:15),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38).
따라서 회개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고(벧후 3:9),
회개가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D. M. Martyn Lloyd-Jones) 목사는
“회개가
없다면 그는 아직 중생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생(重生)이란 ‘거듭나다, 다시 태어나다 혹은 위로부터 나다’라는 뜻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심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엡 2:1 ; 골 2:13 ; 약 1:18 ;
벧전 1:3).
이렇게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요 3:3), 또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 3:5).
즉 중생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가 없다면 그는 아직 중생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은 결국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의미입니다(눅 13:3, 5).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서 떠나는
것이며(겔 18:30),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신 30:9 ; 행 3:19 ; 살전 1:9).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 3:16).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회개 역시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무 할례자 곧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습니다(행 11:3).
이는 유대인 신자들이 아직도 율법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들
가운데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행 15:1).
이에 베드로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환상과 성령께서 하신 말씀에 관해
이야기했고, 고넬료가 받은 환상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이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게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혼자가 아니라 여섯 형제와 함께 갔다고 말합니다(행 11:12).
그들은
욥바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로 베드로는 자신이 고넬료의 집에 방문한 게 문제가 되었을 경우 그 일을 변호해 줄 증인으로 그들을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도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또 베드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것을
보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 1:6)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행
11: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
성령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한 선물을 이방인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은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요 1:12) 백성입니다(벧전 2:10).
거기에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은 자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나, 종이나 자유인이 따로 없습니다(골 3:11).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유대인들이 부정한 짐승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잠잠해졌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 누구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 11:18).
그런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건 베드로만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으로 인하여
발생한 환난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란 그리스 사람을
말하는데, 이방인과 같은 의미입니다(롬 1:16 ; 2:9 등).
성경에는 안디옥이란 도시가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시디아
지방에 있고(행 13:14) 다른 하나는 수리아 지방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냥 안디옥이라 하면 수리아의 안디옥을 말합니다.
당시 안디옥은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로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고 합니다.
또 ‘동방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도덕적으로는 제2의 소돔이라 할 만큼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죄악의 도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방 지역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후
안디옥 교회는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행 13:1-3).
안디옥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란 뜻의 바나바라 불렀습니다(행 4:36).
이는 그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낸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11:24).
특히 그는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었으므로 헬라인인 안디옥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굳게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가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교회는 더욱
부흥했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둘이 일 년을 함께 안디옥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행 11:26).
이에 안디옥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가리켜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행 24:5),
이는 예수님의 출신지가 나사렛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나(마 2:1),
자라신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었기 때문에(마 2:23)
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고(마 21:11 ; 26:71 ; 요 18:5 등)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사람들'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유별난 집단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안디옥은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그런 생활을 멀리했습니다.
또 믿지 않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만은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같은 종교로 여겨지는 유대교 사람들로부터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생활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행 2:47).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법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이 주축이 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신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잘 증명해 줍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예가 2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큰 기근이 있었습니다.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네 번째 황제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을
추방한 인물입니다(행 18:2).
안디옥 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들 가운데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입니다(행 11:28).
이에 안디옥 성도들은 각기 힘닿는 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안디옥은 큰 상업 도시였으므로 교인들의 생활 수준도 높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지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데다가 기근까지 들어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즉시 부조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작정했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여기서 부조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즉 섬김 혹은 봉사를
말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곧 섬기는 것이요 봉사입니다.
우리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생활에 모범이 되고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말한 살면서 필요없는 인간 유형 4가지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사람을 잘못 만나면 인생이 꼬인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발언을 살펴보면 성과 중심의 메시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사람 옆에 서야 하는가’에 대한 조용한 조언이 담겨 있다.
평생을 경영자로 살았던 사람이 꼽은 불필요한 인간 유형은 놀랍게도 일상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다.
그 네 가지를 정리해본다.
1. 책임을 회피하고 핑계만 만드는 사람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어떤 이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늘 환경 탓, 타인 탓을 먼저 찾는다.
이런 유형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공동의 목표까지 흔들어버린다.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은 함께 성장할 수 없고, 결국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된다.
2. 배우려 하지 않고 익숙함 속에만 머무르는 사람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방식은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에도 경쟁력을 잃게 만든다.
이건희 회장이 가장 경계한 유형이 바로 ‘어제의 성공법을 내일에도 쓰려는 사람’이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발전까지 막아버린다.
3. 뒷말과 불평이 많은 사람
어떤 집단에서든 발전을 막는 가장 빠른 독은 ‘불평의 기운’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확대하고, 사람을 도우는 대신 사람을 나누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 유형과 가까이 지내면 의욕이 줄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건강한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
4. 정직하지 않고 작은 이익에 흔들리는 사람
거짓말과 약속 위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은 이익 앞에서 일관성을 잃는 사람은 신뢰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결국 미래가 없다는 것이 경영과 인간관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이런 사람 옆에서는 나도 쉽게 무너진다.
생명을 얻는 회개(사도행전 11:1-18)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하나 된 교회, 교회의 통일성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 이것은 곧 복음을 들은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현상이 있었기에 성령이 부어진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성령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신 것처럼
비둘기같이,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그런 신기한 현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성령이 부어짐을 알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당시 고넬료의 집안에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일까?
1.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로 자기가 경험한 것과 같은 것이었음을 증거 한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0장 46절을 보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라고
말한다. 당시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어떤 말을 하게 되었느냐가 성령이 부어진 증거로
보였다.
2: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복음을 말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복음을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는 복음을 하나님을 높임을 들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전하게 되어 있다.
2. 그래서 그는 예수 믿을 때 주신 선물이 같았다고 말한다. 성령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막지 못한다고 말한다.
3. 이런 같은 선물인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다른 말로 ‘생명 얻는 회개’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opportunity to repent and live,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를 주셨도다 하니라
1) 생명 얻는 이란 죄 사함 곧 구원이다.
그럼, 생명 얻는 회개란 바로 구원 얻는 회개라는 뜻이다. 구원의 전제가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이고 이런 회개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말이 심오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2) 베드로의 말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3)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죄로 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죄에 후회하고 죄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 예가 두 아들의 비유이다.
회개에는 2가지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먼저 후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4) 그럼, 무엇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a. 행 5: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죄 사함을 주시는 것처럼 회개도 주신다.
b. 행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c. 딤후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못된 길로 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말하면서 그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화개가 어디서 오는 것인데 알 수 있다.
그래서 회개는 사람들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 그런데 잘못된 회개도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회개가 아닌 회개가 있을 수 있다.
아합의 경우.
왕상
21: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21: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회개가 아니었으므로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지는 못했다.
6) 회개는 반드시 말씀 전파를 통해서 일어난다.
a. 요나의 외침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는 것
b.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회개의 표시인데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듣고 한 것이다. 회개는 진리가 전해 짐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오늘 본문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진리(하나님과 인간을 화평케 하신 분, 부활, 심판자)를 선포 할 때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복음 전파는 반드시 회개를 일으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이 세상보다 하늘에 더 소망을 두고 살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열매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자신에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설령 수 십 년 동안 미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높인다면 성령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의심하려는 습성이 있다. 내게 있는 미움의
감정이 '저 사람이 예수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 어떤 사람도
회개케 할 수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이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였다.
17절에 보면 베드로는 '내가 누구 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결코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감정으로 만나고 교통하는 곳이 아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생명의 회개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럼 생명의 회개를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기도 안한 것, 교회에 빠진 것, 십일조 안한 것,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러한 것은 생명의 회개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러한 회개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
생명의 회개란 나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회개이다. 생명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회개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쓸모 없음을 아는 회개이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회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회개를 하는 신자라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 누군가를 구분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악이 된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히 성령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과 미움은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짓된 회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짓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생명의 회개는 분명 그 열매를 드러낼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거짓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열매를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다짐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에게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형제이다. 하나님이 형제 되게 한
사람을 우리가 구별하고 밀쳐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하고 다 같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서 만나야 한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교회의 모습이다.
렉시오 디비나-영적 독서
영적
독서(sacred/spiritual reading)를 의미하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주후 4,
5세기경에 처음 사용된 기도의 방법으로 성경 구절로 기도하는 방법을 말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특히 4가지의 방식으로 성경 구절을
경험하는 방법
① Lectio (Reading)
② Meditatio (Meditation)
③ Oratio
(Prayer)
④ Contemplatio (Contemplation)
렉시오 디비나는 “우리 자신을 은혜의 행위와
성령의 감화에 개방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p. 6)
“하나님께로 향하는 평생의 과정의 한 요소”(p.
9)이다(Michael Casey, 1996).
렉시오 디비나의 목적은 말씀과 기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과 고투의 일환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실천하면 좋고
매우 유익하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라는 명사 렉시오(Lectio)와 「신적(神的)」이라는 형용사 디비나(divina)로 되어있는데 여기서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를 뜻한다.
따라서 흔히 「영적 독서」, 「거룩한 독서」 또는 성독(聖讀)으로 말하고 있다.
가톨릭 전통에서, 수도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하는 영성수련법. 성서에 관한 지식을 쌓기 위해 성서를 읽거나 성서에 관한 주석서를 읽는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는 독서법이다.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관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성서를 읽을 때 단순한 글자 차원을 넘어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 더 나아가 그 말씀을 하느님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성서 묵상법인 것이다.
그 기원은 불분명하나 오리게네스(185-254)가 "신적 독서에 충실하라"고 권면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이후 12세기에 들어 카르투시오회 소속의 수사였던 귀고 2세(Guigo II)가 렉시오 디비나의 실제를 정립하였다.
개신교의 큐티와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렉시오 디비나를 베네딕도회의 전통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서방교회의 수도생활은 거의 베네딕도회였고 이후 수도승적 전통이 베네딕도회 안에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여럿이 있지만, 중세 초 수도자들의 고전적 형태 기준으로는 성경을 지성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인격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텍스트를 분석하지 않고 내면화하여 최종적으로는 절대자와의 합일감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인 단계는 다음과 같다.
종교활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종교적 체험을 연구할 때 연구대상으로 즐겨 삼는 주제이기도 하며, 일군의 신경과학자들이 신 헬멧(God helmet) 등을 활용해 연구할 때 관상단계에 도달한 수녀들의 뇌파 검사를 하기도 했다.
입문하고 싶다면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수사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2]#와 허성준 신부의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전 2권)#1#2이 권할만하다. 전자는 160여 페이지의 짧은 입문서로, 간략하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고전이다. 후자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깊이있게 파고들고자 할 때 유용하다. 또는 본당 수녀님께 여쭤보면 본당내 모임이 있을 경우 그 모임을 안내해주시거나 없으면 본당내에 소모임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간략한 역사: 「성경독서」,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렉시오 디비나」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래된, 성경을 읽는 태도와 자세, 영적 체험이자 영성 수련 및 방법론을 망라한다. 교부 오리게네스(185~253년경)와 카르투시오회의 귀고 2세Guigo II(?~1188년)에 의해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얼마간 잃어버린 듯한 교회의 소중한 유산인 렉시오 디비나가 본격적으로 교회 안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이다.(*살레시오회의 공식적인 문헌에서 이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2002년 제25차 세계 총회-총장 신부의 문헌 소개 인사말-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관한 귀고 2세의 말씀
「…영적 4단계요, 층계는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이다.
독서는 행복한 삶의 감미로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묵상은 그 감미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독서는 기초와도 같아 맨 먼저 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제를 제공해주고 또 우리를 묵상으로 인도합니다. 묵상은 추구해야 할 것을 더 열심히 찾아 나서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땅을 파고 들어감으로써 보물을 발견하여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것을 간직할 힘이 없기에 우리를 기도로 인도해 줍니다. 기도는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스스로를 들어 높이면서 갈망하던 보물을 청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관상의 감미입니다. 이 관상은 그 도래와 함께, 천상적 감미의 이슬로 목마른 영혼을 적시면서 이전 세 단계의 모든 수고를 갚아줍니다. 독서가 표면과 관련된 훈련이라면 묵상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지성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갈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관상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초심자들의 것이요, 두 번째는 진보한 이들의 것이며, 세 번째는 열심한 이들의 것이요, 네 번째는 복된 이들의 것입니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
첫째 단계에서 열심히 애쓰고, 둘째 단계에서 주의 깊게 두루 살피고, 셋째 단계에서 정성스럽고, 넷째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 드높아진 사람, 하느님께서 당신을 향해 오도록 그 마음에 깔아놓으신 오르막길을 따라 점점 더 힘 있게 올라가 마침내는 신들의 신이신 하느님을 시온에서 뵈옵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네 층계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네 가지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 선행의 유익함, 인간적인 나약함, 그리고 세상의 헛됨입니다. 첫째 것은 변명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것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며, 셋째 것은 불쌍히 여길 것이고, 넷째 것은 정녕 죄스러운 것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다정하시고 온유하시며 상냥한 친구이자 현명한 조언자, 능하신 도움이신 분! 주님을 팽개치는 이, 그토록 겸손하고 유순한 손님이신 주님을 제 마음에서 몰아내는 이는 얼마나 인간답지 못하고 무모한 자인지요! 아, 그 얼마나 불행하고도 재앙스런 맞바꿈인지요, 자기의 창조주를 팽개치고 대신 고약하고 해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의 신방(新房), 곧 조금 전까지도 천상의 기쁨에 경도되어 있던 저 마음 깊은 곳을, 순식간에 불결한 생각들에 넘겨주어 도지들로 하여금 짓밟도록 하는 것이!(마태 7,6)
아직 마음속에 신랑이 남기고 간 흔적의 온기가 남았건만, 벌써 간음의 욕망이 고개를 내밀다니요. 모두가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말을(2고린 12,4) 방금 들은 귀가, 꾸며낸 이야기와(2디모 4,4) 분심 거리에 그토록 빨리 귀 기울이게 되다니, 조금 전에 거룩한 눈물로 세례를 받았던 눈이 즉시 헛된 것에 시선을 돌리다니, 조금 전에 달콤한 축혼가를 부르던 입이, 뜨겁고도 솜씨 좋은 언변으로 신부를 신랑과 화해하게 했으며 신부를 포도주 창고로 이끌었던(아가 2,4) 그 입이 다시금 상스럽고도 야비한 이야기로 되돌아가다니, 속임수를 꾸미고(시편 50,19) 헐뜯는 소리를 내다니.
주님, 이 허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렇지만 인간적 허약함으로 인하여 저러한 잘못에 다시 떨어진다 해도, 이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시편 113,7) 어진 의사이신 당신께 되돌아가렵니다. 그러면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는 그분께서(에제 33,11) 우리를 다시금 보살피시고 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호세 6,2).”」
(* 위 단락은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Pregare la Parola”, 이연학 번역, 분도, 2001년> 중에서 귀고 2세라는 분이 쓴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Epistola de vita contemplativa”의 부분 발췌이다. 귀고 2세는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에서 1084년 창설된 카르투시오Grand Chatreuse수도회의 초기 회원 중 한 사람이다. 스스로에 대해 침묵한다는 카르투시오의 영성에 따라 널리 알려진 바는 없다. 1173년에 공동체 책임자 자리에 있었고 아마도 같은 해 아니면 이듬해에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제9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가 1180년 소임을 마치고 1188년에 귀천했다.)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사전 준비
침묵과 고독의 장소– 고독과 침묵의 장소: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를 데려다 놓도록 잠시 침묵 한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등 하느님의 현존을 긴장하여 받아들이는 몸동작이 중요하 다.
– 충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
–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려는 자세
– 렉시오 디비나의 목표는 하느님 관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취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분의 기도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
– 나 자신에게서 이탈,
나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 자신으로,
땅의 것들로부터 하늘의 것들로 탈출
– 나의 세례 재확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므로
나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 내적인 침묵,
이는 식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
말씀을 듣기 위해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할 것.
– 나 자신의 무력함 고백,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흉내 내기가 아니고
진정 내가 잃은 양,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 중풍 병자이니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
시작 기도: (혹은 조용한 성가, 허밍)
성령 초대: 교회와 하나되어 성령을 초대한다.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경 위에 머무르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보호한다. 시편 119편의 적절한 대목을 낭독하거나 ‘오소서, 성령이여!’와 같은 기도문이나 성가를 활용할 수 있다.
신앙고백: 신경 안에서 성부의 아이콘인 그리스도를 본다.
성경읽기: 무작위로, 주관적으로 성경 본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주일 복음과도 같은) 선정된 본문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소리를 내어 읽는다. 다른 번역본(예를 들어 ‘공동 번역’과도 같은)과 함께 본문을 서로 확인하면서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다.
공부하기: 말씀을 영리하게 읽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의 경우 병행구를 확인하거나 권위 있는 요약본이나 주해서, 혹은 어휘 사전(참조. 주석 성경) 등을 활용하는 것이 유용한 도구들이 된다. 성경 본문에 관한 교부들의 말씀(예를 들어, 분도출판사 발행의 ‘교부들의 성경 주해’ 등)을 통해 영적인 요점을 파악하고 시야를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묵상하기: 읽은 내용에 대한 심화. 보조 자료 활용 가능. 병행구를 읽으며 본문의 메시지 확장, 신학적 요점 파악, 본문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 자신을 본문에 적용한다. 공동체와 교회, 그리고 인류 가족 안에서, 또 그들을 향한 나의 태도와 행동을 살펴본다.
기도하기: 성경 본문을 통해 나에게 말씀해오신 주님과 대화하며 나를 주님께 봉헌하며 감사하고 청원하며 전구를 청한다. 모든 것이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래와 함께 하는 성체강복으로 기도하기와 관상하기가 연결되는 것도 좋다.
관상하기: 신비로운 환상을 기대하거나 제멋대로의 상상이나 공상이 아니다. 영적인 항구함으로 말씀과 성령 안에 머묾, 마크로티미아μακροθυμία(makrothymia)이다. 하느님의 마음 안에, 은혜로움 안에, 성실한 마음 안에, 평화 안에 잠기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마음을 확장하는 것으로 힘 있는 말씀의 효과가 드러난다.
***
내 안에 그분의 초막을 짓고,
그분의 사랑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응답한다.
말씀을 춤추며 그분 앞에서 전례로 이를 거행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처소에 돌아갈 그때까지
나의 걸음걸음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로고스, 아드님, 나의 주님이시기를!
오로지 말씀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데려가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말씀께서
내 안에 오시어 머무르시기를,
내 안에 당신의 처소를 마련하시기를!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하게 되는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은총,
렉시오 디비나는
시간이 있기 전
삼위일체의 공간 안에서 아드님께서 거행하신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라는 초막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입니다.
1. 묵상 준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다음 날 묵상할 본문(특히 복음서)을 미리 전 날 읽어봅니다. 이 때 관주나 주석서를 참고하여 본문에 관한 지적 이해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주 1 회 (주일 묵상본문이나 기도 가운데 더 깊은 묵상의 필요를 느꼈던 본문을 택하여) 충분한 시간을 내어 탐구를 함으로써 자칫 감성적으로만 치우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의 균형을 맞춥니다.
2. 묵상 시작
(1) 매일 일정한 시간(가능하면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과 조용한 장소에서 묵상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가볍게 몸을 풀고, 호흡을 안정되게 하고, 자세를 바로잡아 경건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동그랗게 둘러 앉아 조용한 분위기에서 성가를 듣거나 부르면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불에 불을 켭니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친히 인도하시기를 믿음으로 청하면서, 약 5분간 주님 앞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세상에 젖어있던 분주한 생각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3. 렉시오 디비나
다음의 네 과정은 모든 과정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앞의 두 과정은 마음의 명료함 가운데서 시도되는 개인의 깊은 성찰이 주가 되는 반면, 뒤의 두 과정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쉼을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1) 말씀봉독 Lectio
그 날의 본문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습니다. 잠깐의 침묵(약 30초∼1분)후에 본문을 반복하여 3번 읽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누구나 자원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리 내어 입으로 읽고, 귀로 말씀을 들으며,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말씀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간절함으로 읽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서는 잠시 머물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합니다.
(2) 묵상 Meditatio
말씀의 전체적인 상황과 주제를 생각하면서 논리나 상상을 동원하여 묵상을 할 수도 있고, 말씀이 나의 마음속에 와서 어떤 울림이나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거나 특별한 깨달음을 깊이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날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면 이것을 붙잡고 집중적으로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마음을 열고 아기가 젖을 빨 듯, 읽고 또 읽는 것을 되풀이 할 수도 있습니다. (15분∼20분)
(3) 기도 Oratio
의식을 주님께로 향하면서 이제까지 묵상했던 내용들, 깨달음이나 감동, 의혹이나 질문점, 그 무엇이든 주님을 바라보며 대화를 합니다. 마음 속의 하고 싶은 말을 아뢰고, 침묵 가운데 머물러 그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그 분의 음성은 허공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서 들린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기도를 열어주시고, 또한 이끄시는 성령께서 나와 이 순간 함께 하심을 믿으며 솔직히 주님께 고백합니다. (5분)
(4) 관상 Contemplatio
기도 가운데 기쁨이나 위로를 주신 경우 거기에 머물러 충분히 맛을 보고, 평안을 주신 경우 사랑의 눈길로 그 분을 바라보며 주님 품에서 안식하며, 때로는 회개와 아픔을 주시는 경우 겸허히 받아드리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문 후 기도를 마칩니다.(5분)
4. 기도 나눔 Sharing
주님께서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신 것을 영성일기로 적거나,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과 나눕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두어 사람이 성령님께 직접 받은 것을 차례로 나누고 나머지 사람은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공동체 멤버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분별합니다. 나누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침묵 가운데서 기다립니다.
* 로뎀포레스트 카페 묵상나눔에 올려 나눔과 분별의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5. 기도성찰 Reflection
잠깐 동안 오늘의 기도과정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며 성찰합니다. 이 과정도 매우 중요하므로 생략하지 않고 묵상 후에 반드시 합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사람이 간결하게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나누고, 나머지는 침묵 가운데 묵상적 경청을 합니다.
6. 마무리
침묵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성령님께 감사기도를 드림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깨달음을 마음속에서 되뇌며 삶의 한복판으로 나아갑니다.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기독교인의 신앙은 인간의 역사와 시간, 개인 삶 속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그 분의 일을 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비교되거나 혼합될 수 없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사건이었으며,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사건이었으며, 매일매일의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과 함께 반복되어져 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묵상 또한 성경읽기를 통하여 언제나 말씀으로 오신 주님의 오심과 사역, 수난, 부활, 그리고 재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로뎀묵상은 이 주제에서부터 멀어지는 어떤 묵상의 방법도 배격하며, 우리를 더욱 주님께 다가가게 하기 위하여 말씀 묵상을 합니다. 성서일과는 이러한 교회력에 따라 매일의 묵상을 위하여 만들어진 전통적인 방법이기에 로뎀묵상은 성서일과와 함께 가려고 합니다.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동일한 말씀으로 함께 묵상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성령만이 기도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과(요한일서 2:27), 한 성령 안에서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능한 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체들과 월 1-2회 함께 말씀으로 묵상기도를 하고 함께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입니다.
1. 묵상 준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다음 날 묵상할 본문(특히 복음서)을 미리 전 날 읽어봅니다. 이 때 관주나 주석서를 참고하여 본문에 관한 지적 이해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주 1 회 (주일 묵상본문이나 기도 가운데 더 깊은 묵상의 필요를 느꼈던 본문을 택하여) 충분한 시간을 내어 탐구를 함으로써 자칫 감성적으로만 치우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의 균형을 맞춥니다.
2. 묵상 시작
(1) 매일 일정한 시간(가능하면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과 조용한 장소에서 묵상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가볍게 몸을 풀고, 호흡을 안정되게 하고, 자세를 바로잡아 경건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동그랗게 둘러 앉아 조용한 분위기에서 성가를 듣거나 부르면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불에 불을 켭니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친히 인도하시기를 믿음으로 청하면서, 약 5분간 주님 앞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세상에 젖어있던 분주한 생각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3. 렉시오 디비나
다음의 네 과정은 모든 과정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앞의 두 과정은 마음의 명료함 가운데서 시도되는 개인의 깊은 성찰이 주가 되는 반면, 뒤의 두 과정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쉼을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1) 말씀봉독 Lectio
그 날의 본문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습니다. 잠깐의 침묵(약 30초∼1분)후에 본문을 반복하여 3번 읽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누구나 자원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리 내어 입으로 읽고, 귀로 말씀을 들으며,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말씀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간절함으로 읽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서는 잠시 머물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합니다.
(2) 묵상 Meditatio
말씀의 전체적인 상황과 주제를 생각하면서 논리나 상상을 동원하여 묵상을 할 수도 있고, 말씀이 나의 마음속에 와서 어떤 울림이나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거나 특별한 깨달음을 깊이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날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면 이것을 붙잡고 집중적으로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마음을 열고 아기가 젖을 빨 듯, 읽고 또 읽는 것을 되풀이 할 수도 있습니다. (15분∼20분)
(3) 기도 Oratio
의식을 주님께로 향하면서 이제까지 묵상했던 내용들, 깨달음이나 감동, 의혹이나 질문점, 그 무엇이든 주님을 바라보며 대화를 합니다. 마음 속의 하고 싶은 말을 아뢰고, 침묵 가운데 머물러 그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그 분의 음성은 허공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서 들린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기도를 열어주시고, 또한 이끄시는 성령께서 나와 이 순간 함께 하심을 믿으며 솔직히 주님께 고백합니다. (5분)
(4) 관상 Contemplatio
기도 가운데 기쁨이나 위로를 주신 경우 거기에 머물러 충분히 맛을 보고, 평안을 주신 경우 사랑의 눈길로 그 분을 바라보며 주님 품에서 안식하며, 때로는 회개와 아픔을 주시는 경우 겸허히 받아드리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문 후 기도를 마칩니다.(5분)
4. 기도 나눔 Sharing
주님께서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신 것을 영성일기로 적거나,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과 나눕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두어 사람이 성령님께 직접 받은 것을 차례로 나누고 나머지 사람은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공동체 멤버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분별합니다. 나누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침묵 가운데서 기다립니다.
* 로뎀포레스트 카페 묵상나눔에 올려 나눔과 분별의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5. 기도성찰 Reflection
잠깐 동안 오늘의 기도과정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며 성찰합니다. 이 과정도 매우 중요하므로 생략하지 않고 묵상 후에 반드시 합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사람이 간결하게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나누고, 나머지는 침묵 가운데 묵상적 경청을 합니다.
6. 마무리
침묵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성령님께 감사기도를 드림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깨달음을 마음속에서 되뇌며 삶의 한복판으로 나아갑니다.
주의를 기울입니다.
1. 렉시오 디비나의 가장 큰 요점은 개개의 성경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은 말씀하시는, 말씀 자체이신 사랑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절대의식을 추구하거나, 마음의 평안을 얻거나 문제의 해결책을 얻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이 아님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나 자신의 문제에 적용할 경우에도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분별하도록 합니다.
2. 주어진 성경구절이 주시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 지엽적인 내용이나, 개인적 내면의 문제나 체험 속으로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도록 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지나치게 추구하거나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주제에서 너무 벗어난 기도체험은 좋지 않은 묵상태도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기도 시간이외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금주의 말씀 주제에 대해 관주성경이나 주석을 통해 성경공부를 함으로써, 말씀의 지적인 부분과 균형을 맞추도록 합니다. 공동체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함께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것은 이러한 분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며 매우 효과적입니다. 카페의 묵상 나눔에 간략한 댓글을 올려 자신의 체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비교해 보는 것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편향된 묵상에 치우치지 않도록 함께 분별을 이루어가는 좋은 방법입니다.)
3. 때로는, 아니 아주 많은 경우, 주님께서는 침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느낌이나 체험 없이 묵상을 마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럴 경우라도 우리는 겸손히 삶 속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특히 마지막 관상이라고 하는 부분,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거나 황홀경이나 신비로운 합일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에 지나치게 마음을 두거나 의도적으로 추구하지 않도록 합니다. 겸손하고 솔직한 마음만을(시 51) 주님께서 받으신다는 믿음과,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묵상을 해야 합니다.
묵상, 거룩한 읽기
시작하는 말
“대혁명이란 성경을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그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통해 종교개혁을 평가한 것입니다. 일반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종교개혁이 성경을 읽고 본래 의미를 찾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아타루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미 교회사(敎會史) 학자들은 이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교회사 학자들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그가 로마서를 접하고 읽은 과거 시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에서 더 나아가 책을 바르게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대단한 일인가에 집중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읽기는 유럽이 수백 년간 지켜온 견고한 중세의 세계관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대변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읽기 혁명’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주장하고 증명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창세기는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됐음을 기록합니다. 또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중략)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14)는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성을 인간에게 알려 줍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적 이견들이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르게 알려주는 참된 세계관을 얻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성경 읽기’의 한 방법론인 ‘묵상’(默想)에 대해서 논하고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관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바른 성경 읽기’가 묵상이다.
묵상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성경적 묵상’이 ‘바른 성경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묵상’을 ‘바른 읽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묵상은 시편 1:2과 여호수아 1:8의 ‘묵상’(הגה, hagah)이라는 단어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읽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 71:24, 143:5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다른 곳에서는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이 ‘큰 소리’를 의미하거나 슬픔에 흐느끼는 ‘작은 소리’를 나타내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가 상반된 상황(狀況)아래 동일한 단어를 쓴 이유는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묵상’이란 단어는 ‘성경을 읽는 것’이며 동시에 ‘반복해서 계속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묵상은 기독교가 오래전부터 실천해 온 바른 ‘성경 읽기의 방법’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 )는 1973년에 쓴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의 첫 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묵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패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모름으로 인해서 통탄할 만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패커는 ‘바른 성경 묵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사역과 도(道, way) 그리고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여러 가지 것을 상기하고(calling to mind), 숙고하고(thinking over), 깊이 생각해 보고(dwelling on), 적용하는(applying to oneself) 활동이다. 그것은 하나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an activity of holy thought)이다.”
이 내용을 볼 때 우리는 패커가 묵상을 크게 두 가지 활동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고의 활동이고, 둘째는 행함의 활동입니다. 이는 묵상은 단지 성경을 읽어 정보를 취하는 활동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참뜻을 발견하는 작업이며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전자는 바른 읽기이며 후자는 바른 읽기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수 1:18)
2. ‘바른 성경 읽기’가 어려운 이유
제임스 패커가 하나님을 아는 길로서의 성경 묵상을 이야기한 지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묵상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묵상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70년대 중반 ‘성서유니온’이 시작되면서 일 것입니다. 그 후로 많은 단체가 ‘성경 묵상’을 보급하기 위해 관련된 프로그램과 책자들을 만들었고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여전히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바른 성경 읽기’에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점들만 수정한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이 ‘바른 성경 읽기’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성경 읽기와 묵상 습관에서 가장 미숙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두 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바항으로 한 것이기에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성경 읽기’와 ‘묵상’은 사고(思考) 과정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거나 이를 무시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의 과정이 무시된 ‘성경 읽기’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성경의 권위를 손상(損傷)하는 것인지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전라남도에서 한 목회자 부부가 자신의 삼 남매를 죽이고 시신을 방치(放置)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경찰 조사에서 구약성경의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라는 구절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박 씨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면 맞았으며”라는 성경 구절에 따라 아이들을 때렸다고 진술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는 상식적인 사고(思考, thought)의 과정이 없이 신비적(神秘的)인 방법으로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일어날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은 유익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무시하거나 왜곡시켜 자신을 선의의 사람으로 가장하고자 합니다. 또 그런 인간들은 진리에는 눈을 감아버리고서도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깊은 ‘사고(思考) 활동’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진리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진리를 찾고자 할 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사고 활동을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은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이다.”
둘째, 저는 적용 중심적이며 실용적인 성경 읽기와 묵상 방법들이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복잡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주된 원인입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왜’(Why)나 ‘무엇’(What)이라는 질문 보다, 실용적인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이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지루하고 따분한 성경 본문해석 과정은 건너뛰고 즉각적인 적용 중심의 ‘성경 읽기’와 ‘묵상’이 성도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아부하여 각종 ‘성경 읽기’ 잡지들은 독자들이 해석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답을 제공해주고 심지어 무엇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거의 유치원 수준의 교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성경을 실용서적으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3.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세계관을 바꾼다.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안 하든 지 간에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 경험들을 해석하는 로드맵이거나 줄거리이다. 또 이것은 실제 하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인가를 결정한다.”
위의 내용은 오스 기니스(Os Guinness, 1941- )가 세계관에 대해 정의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스 기니스가 세계관을 크게 네 가지의 특징들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 세계관은 해석의 틀을 제공하여 주고, 셋째, 세계관은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세계관은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여 준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철학에서는 인식론, 존재론, 도덕론(윤리)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당대를 지배했던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으며, 바른 세계관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방인(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7-19)
바울은 이방인의 세계관을 ‘마음의 허망함’(The futility of their mind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무지이며(인식론), 둘째는 영적 사망이고(존재론), 셋째는 도덕적 무감각(도덕론)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비록 현대인들처럼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가 세계관의 틀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세계관)을 통해서 문제의 발단은 무지(無知) – 바울은 무지가 영적 사망을 낳고, 영적 사망은 도덕적 무감각에 이르게 했다고 말합니다. – 라는 갈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참된 지식이 도덕적 삶을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지식은 무엇일까요? 지혜서 특히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은 ‘모든 지혜가 헛됨’을 알았던 그만큼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선(善)을 알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우둔함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 계시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또한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할 때 성도 안에 지혜가 가득하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골 3:1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변화무쌍한 인간들의 지혜가 아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지혜는 처세술이 아니라 ‘도덕적 선의 실제적 측면’(the practical side of moral goodness)이며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 요소’(His essence in His character)입니다.
4. 실제 사례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과연 ‘성경 읽기’가 성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한 실증적 자료 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사례
첫 번째 연구는 영국 웨일즈 대학의 레슬리 프란시스(Leslie J. Francis)가 2002년 겨울 ‘Religious
Education’에 발표한 만 13-15세 청소년들의 약물과 담배에 대한 태도와 ‘성경 읽기’와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입니다.
이
연구에서 프란시스는 25,888명의 청소년을 설문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이들 중 41%가 스스로 유신론자라고 했으며, 19%가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교회에 나간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성경을 읽는 청소년은 3%, 매일 읽는 청소년은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회를 다니지만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취하는 마약류 약물들과 담배에 대한 입장을 조사한 결과입니다.
프란시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 신자들이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은 약물 사용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한 반면에 성경을 읽는 청소년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 청소년 신자들보다 약물 사용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성경을 읽는 것은 약물 사용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 읽기’가
청소년들의 영혼만 아닌 그들의 육체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 두 번째 사례
두 번째 연구는 2007년 미국의 베일러 대학(Baylor Univers)의 아론 프란츤(Aaron Franzen)이 ‘성경
읽기’의 사회적 영향을 조사한 연구입니다.
그 결과 프란츤은 ‘성경 읽기’를 통해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 진보의
성향으로 변하게 된다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읽고 변한 대상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으며,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 칭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의미합니다.
데일리 대학의 조사를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들이 사회, 경제 정의에 대해 더욱 민감하며, 활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비적인 삶보다
절약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더욱 열린 자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동성애나 동성 결혼에 대해 거부 입장인데 동성 결혼이 성경적이라고 찬성하는 기독교인들(6%를 제외한) 대다수는
성경을 일 년에 단 한 번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연구 사례를 보면 ‘성경 읽기’가 단지 우리의 영적인 참에 국한된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 읽기’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의 세계관을 확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연구가 이루어 겼는지 알 수 없으나 영국과 미국에서 이루어진 ‘성경 읽기’와 관련된 연구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으면 우리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뒤바뀌는 세계관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도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성령을 근심’(엡 4:30)하게 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5. 어떻게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인가?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지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이글을 마치려 합니다. 위의 조사 모릅니다. 그도 그릴 것이 각 교회에서는 ‘성경 필사’나 ‘성경 통독 수련회’를 열고 연말에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하여 시상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이며 철학자인 강영한 서강대 교수는 1985년 인도에서 선교했던 레슬리 뉴비긴 목사를 스위스에서 만나 나눈 대화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이신가요?’ 그랬는데 ‘아닙니다!’라고 아주 강하게 부인하더라고요.
‘왜요?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처럼 보이는데요.’라고 되물었죠.
그의 책에 나타난 복음에 대한 태도나 전도에 관한 이해나, 사회변혁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로잔언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했더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라고 하잖아요.
내가 다시 한번 처다보니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고 암송은 하나 그러나 읽지는
않아요.’라고 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요. 복음주의자들이 칭의는 이야기하는데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하고, 성경이
‘총체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주의자들은 ‘영혼 구원’만 이야기하고,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원하는
내음만 읽는다는 말이었어요.”
강영한 교수의 회고는 바른 ‘성경 읽기’가 가능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1) 내가 원하는 것만 읽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런 식으로 읽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그것을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도식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옛사람이란 하나님을 몰랐었던 그 상태와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 변화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에게는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이유는 이미 새사람이라는 옷을 입었다는 현재 상태에 대한 당위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첫 옷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이죠.
이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지적함으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새 옷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적으로 교회와 성도가 고백했던 신앙고백이나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통해 가능합니다. 달리 말해 새롭게 변화된 성경 해석의 틀을 배우는 것이죠.
(2) 기도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마 5-7장)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장은 주로 성도의 ‘도적적 삶의 원리’이며, 6장은 성도의 ‘기도 생활’, 6장 후반부터 7장은 성도의 ‘믿음의 확신’입니다.
최근 한 청년과 산상설교를 공부하던 중 “5장의 말씀을 우리가 과연 지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요?”라고 그가 질문했습니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던 중 왜 예수님이 ‘도덕적 원리’를 제시하시고 기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답은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일까요? 기도는 바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합법적이며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님과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자신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 일이 단지 정보를 아는 수준에서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체험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렀습니다.
제임스 패커가 설명했듯 하나님을 아는 것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려면 상대방이 마음을 열어 자신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관계라고 하지요. 이때 내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정보는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어 우리를 받아들이셨고 그렇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깊어져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요. 이때 우리가 읽은 성경의 내용은 인격적인 지식이 되고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라 불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이자 양자로 받아주셨다는 증거입니다.
(3) 확신하며 읽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세 번째 부분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는 외식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해서 남들을 향한 자기 자랑이나 우월의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시는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모습은 또 다른 대상을 염두 해 두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보이기 위해서 대로에서 기도하고 금식을 하면서 재를 머리에 뿌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봐주시고 인정해 주시길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참으로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경건과 순종을 보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숨어계신 분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4)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달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6) 하나님은 숨어서 남들이 보지 않았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짜 모습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참된 제자가 되려면 겉으로 떠들고 다니지 말고 은밀한 마음으로부터의 변화를 보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을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그러기에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숨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우리도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4) 교회(공동체)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 서신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 서신들은 혼자서 조용히 속으로 읽도록 쓴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큰 소리로 단번에 읽도록 할 의도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만이 아닌 대다수 성경은 공적으로 공동체에서 함께 읽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개인의 확신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우리의 확신과 의지가 약해질 때 우리가 강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셔서 자신이 거할 집으로 교회(공동체)를 건축하시기 때문입니다.(엡 2장) 이 집에 하나님은 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모든 우주에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동 운명체이며, 공동의 사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은 반드시 교회와 함께 읽히지 않으면 안 되는 핵심 이유입니다.
정리하자면 ‘바른 성경 읽기’란 새 사람(기독교 세계관)의 프레임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읽어야 하며, 읽은 말씀이 내
속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말씀은 우리 안에 성취되고,
삶은 변하며,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란 무엇인가요?
렉시오 디비나는 “신성한 독서”, “영적 독서”, “거룩한 독서”에 해당하는 라틴어로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촉진하고 특별한 영적
통찰력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기도와 성경 읽기 방법을 일컫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원칙은 약 220년경에 나타났고, 이후
가톨릭 수도 사제들, 특히 성 파코미우스(Pachomiu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바실(Basil),
베네딕트(Benedict )의 수도 사제 규칙에 따라 행해졌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관습은 현재 가톨릭과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으며,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의
신앙적 관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 (Benedict XVI )는 2005년 연설에서 “저는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의 고대 전통을 상기시키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기도와 함께 성스러운 성서를 근면히 읽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해주며, 기도 안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신뢰로 응답하는 은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렉시오는 또한 타종교인들이 자기들의 경전을 읽는 데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바가바드 기타이든, 토라, 코란이든 상관없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단순히
방법을 고쳐 자기들에게 적절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렉시오 디비나의 네 가지 원칙은 융 심리학의 네 가지 원칙인
지각, 생각, 직감, 느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실제적으로 긴장을 푸는 시간으로 시작합니다. 즉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고 일상적인 생각과 염려를 마음에서
비워냅니다. 일부 렉시오 실천가들은 마음을 비우는 데 깊고 정화된 호흡과 특정 문구나 단어를 반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네 가지 단계를 따릅니다.
렉시오 (Lectio) – 성경 구절을 몇 차례 천천히 조용하게 읽는 것입니다. 구절 그 자체 보다는 읽는 각 부분을 음미하고, 한편으로 수행자에게 들려지는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메디타티오 (Meditatio) – 본문 구절을 반영하여, 그것이 자기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매우 사적으로 읽는 것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적용으로 여겨집니다.
오라티오 (Oratio) –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서 구절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로 지적 훈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콘템플라티오 (Contemplatio) – 하나님을 듣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이고도 종교적인 자신만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향으로 생각과 마음, 영혼이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읽기와 기도를 함께 하는 것은 권장되어야 마땅합니다. 둘은 언제나 함께 행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실천에 내재하는 위험성, 그리고 초월 명상법이나 다른 위험한 의식과 놀랍도록 유사한 점들은 신중히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그러한
실천의 목적이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신비주의 체험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진리에 따라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본문의 객관적인 의미를 통해 하나님과 지혜,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과의 신비스럽고 개인적인 만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식이 없으므로
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4:6).
성경 본문에 초자연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문맥과 본질적인 의미로부터 본문을 분리시키고, 본문이 절대 의도하지 않았던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경험적인 방식으로 본문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렉시오와 영지주의가 이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영지주의는 사람이 오직 적절히 시작된 이후에만 “그노시스” (“안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그노스코로부터
유래)적이고 신비한, 내적 지식을 얻게 된다는 신념입니다. 오직 소수만이 이러한 신비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특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체험을 소유한 사람은 스스로를 “아는 자”로 여기며
자기가 중요하고 특별하다고 느낍니다. “아는 자”는 군중은 영적 지식을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진정으로 “깨우친 자”만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색적이거나 중심적 기도, 즉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명상적인 관습이 교회에 재도입됩니다. 사색적인 기도는 동유럽 종교, 그리고 뉴에이지의 사이비 종교에서 사용된 명상 훈련과
비슷합니다. 사색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비록 성경을 시작점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경 안에는 그와 관련한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것에 내재된 위험성은 명백합니다. 사색적인 기도를 하는 자들은 무엇인가를 –
어떤 것이라도 – 듣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과 자기 자신의 생각, 생각으로 들어오는 마귀들의 침투를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객관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수하들은 언제나 의심 없는 마음으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은 재앙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사탄이 언제나 두루 다니며 우리 영혼을 삼키려 한다는 것과 (베드로전서 5:8),
광명의 천사로 나타날 수 있으며 (고린도후서 11:14), 우리가 기꺼이 마음을 열 때 거짓말을 속삭인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렉시오 디비나의 뚜렷한 특징으로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이 크리스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디모데후서 3:16), 렉시오 지지자들은 부정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계시를 구하며
“대화적인”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영원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주신 모든 약속을 저버리기라도 하실
것처럼, 이미 인류에게 계시하신 것을 우회하도록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시편 19:7-14은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궁극적인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진실하여 다 의[롭고]”, “순금보다 더 사모[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편에 하신 말씀이 진정으로 의도하셨던
것이라면, 추가적인 계시는 필요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 추가적인 계시를 요구하는 것은 이미 계시하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서, 연구되고 묵상되며 그것을 기반으로 기도하고, 그 안에 담긴 지식 및 객관적인 의미,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위를 기억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성경 말씀의 자극을 통해 신비적인 체험이나 개인적인 능력 및 내적
평화를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지식이 먼저 있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교제함으로써 영속적인
체험과 평화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성경과 기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따르는 사람만이 성경대로 믿으며 그리스도를 따랐던 자들이 이미
권한 것과 같은 묵상과 기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What is Lectio Divina?
Lectio divina is Latin for “divine reading,” “spiritual
reading,” or “holy reading.” Lectio divina, according to author and
spiritual director Becky Eldredge, is “a slow, rhythmic reading and
praying of a Scripture passage” (from Busy Lives & Restless Souls,
Loyola Press, 2017). The intention of this traditional monastic
practice is to promote communion with God and provide special spiritual
insight. The principles of lectio divina were first expressed around the
year 220 and later practiced by Catholic monks, especially the monastic
rules of Saints Pachomius, Augustine, Basil, and Benedict. The practice of lectio divina was revived in 1965 with the publication of Dei Verbum by the Vatican II Council.
A related practice is visio divina, which is praying while contemplating
on icons, illustrations, or other visual images. In addition, various
Catholic teachers promote musica or audio divina (using music as a means
of opening the “ears of the heart”) and walking divina (participating
in a Corpus Christi procession or a rosary procession, visiting the Stations of the Cross, or walking the Camino).
The practice of lectio divina is popular among Catholics and is gaining
acceptance in the evangelical church, especially those involved in the spiritual formation
movement. Pope Benedict XVI promoted lectio divina, and in a 2005
speech, he mentioned its purpose: “I would like in particular to recall
and recommend the ancient tradition of lectio divina: the diligent
reading of Sacred Scripture accompanied by prayer brings about that
intimate dialogue in which the person reading hears God who is speaking,
and in praying, responds to him with trusting openness of heart. If it
is effectively promoted, this practice will bring to the Church—I am
convinced of it—a new spiritual springtime” (“Address to the
Participants in the International Congress Organized to Commemorate the
40th Anniversary of the Dogmatic Constitution on Divine Revelation Dei Verbum,” 9/16/05).
Lectio divina is easily adaptable to the reading of other sacred texts
of other faiths. And, as psychologist John Uebersax points out, the
steps of lectio divina “correspond fairly well to the four primary
cognitive functions posited by psychologist Carl Jung: sensing,
thinking, feeling, and intuiting” (“A Method for Lectio Divina Based on Jungian Psychology,” www.john-uebersax.com/plato/lectio.htm, accessed 3/2/23).
The practice of lectio divina begins with a time of relaxation, making
oneself comfortable and clearing the mind of mundane thoughts and cares.
Some practitioners find it helpful to concentrate by beginning with
deep, cleansing breaths and repeating a chosen phrase or word several
times to help free the mind. Then they follow four steps:
Lectio – Reading the Bible passage slowly several times. The
passage itself is not as important as savoring each portion of the
reading, constantly listening for the “still, small voice” of a word or
phrase that speaks to the practitioner.
Meditatio – Reflecting on the passage and thinking about how it
applies to one’s life. The practitioner pays special attention to
feelings that arise and ways that God is speaking.
Oratio – Responding to the passage by praying and opening the
heart to God. This is seen as the beginning of a conversation with God.
Some practitioners of lectio divina keep a journal to record their
prayers to God and God’s messages to them.
Contemplatio – Contemplating on all that was learned. This step
involves sitting in silence, resting in God’s presence, and
experiencing union with Christ.
Some versions of the instructions for lectio divina also include a fifth step: Actio, or action. Having received God’s love, the practitioner is to go about serving others in love.
Of course, devotional Bible reading, unhurried prayer, and meditating on
and responding to the written Word are good. Insofar as lectio divina
promotes those activities, believers can participate. Focusing on the
Bible to commune with God is laudable. But there are some cautions
concerning lectio divina:
1) The origin of lectio divina is problematic. Anything that originated
with monks, practiced by mystics, recommended by popes, and taught by
Catholic teachers is suspect. Believers should be wary of any exercise
identified as a traditional monastic practice.
2) The subjective, personal focus of lectio divina downplays objective,
methodical Bible study. Proponents of lectio divina freely admit that
the practice “does not treat scripture as texts to be studied. . . . In
Lectio Divina we let go of more intellectual, studious, or effortful
ways of reading the scripture. . . . Although Lectio Divina involves
reading, it is less a practice of reading than one of listening to the
inner message of the Scripture delivered through the Holy Spirit. Lectio
Divina does not seek information or motivation” (Archdiocese of St.
Louis,
www.archstl.org/Portals/0/Documents/Worship/Divina%20Resources/Lectio%20Divina.pdf,
accessed 3/2/23). A devotional reading of Scripture should not replace
“intellectual, studious” Bible study but supplement it. A serious study
of the Bible should naturally lead to communion with and worship of
God.
Believers have a responsibility to correctly handle the word of truth and be workers who do not need to be ashamed before God (2 Timothy 2:15).
We approach the Bible from a position of sound knowledge and faith; the
personal experience of peace and contentment comes as a byproduct of
knowing and communing with God rightly.
렉시오 디비나 | Olivetano
"성령께서는 누구에게 머무십니까? 겸손한 사람, 곧 고요함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편지2
"하느님의 권위로 씌어진 신구약 성경의 어느 면이나 어느 말씀이 인간 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이 아니겠습니까?" 성규 73,3
수도승이 삶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가르침은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내는 것, 그래서 말씀을 통해 기도에 이르고 그분을 만나는 것, 이를 가리켜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라 합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좁아집니다. 그래서 Lectio Divina라고만 합니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은 하루 일과를 짜임새 있게 제시하는데, 전례와 식사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노동과 렉시오 디비나, 이렇게 두가지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 렉시오 디비나에는 2-3시간 가량이 할당됩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히 책에 적혀 있는 문자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하시는 그분의 메시지를 잘 듣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기도와 마음의 순결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단순한 독서에 그치지 않고 이를 곰곰이 되새기는 깊은 묵상, 그리고 이를 통해 그분을 만나고 바라보는 관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를 실천함에 있어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방식은 12세기 카르투시오 수도승이었던 귀고 2세의 방법입니다. 그는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을, 독서 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 contemplatio, 이렇게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들은 그 사이가 확연히 구분된다거나 불연속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뜻에서의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단계들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앞의 단계들이 있어야 뒤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 1,1-2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3)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란?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Lectio Divina이며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으로도 번역됩니다. 오랜 수도 전통이 전하는 이 독특한 방법은 지적⋅비판적 접근 방법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맛 들이는 수행법입니다.
근본 목표 :
“렉시오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말씀으로 듣고, 이 말씀이 나 자신 안에 육화肉化incarnatio되어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 더 친밀한 인격적 만남을 가지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위한 준비
1) 순수한 마음을 가져라
2) 적합한 자료를 선택하라: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성경
3)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
4) 마음을 다하여 읽어라: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한다.
5) 성경 말씀에 집중하라: 영적 수행
6) 성령께 도움을 청하라(요한 14,26): 겸손한 마음
7) 항구하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8) 여유를 가져라: 빠르고 많이 읽기보다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9) 성경을 자주 읽고 되뇌어라: 옛 수도자들에게 있어 묵상meditatio은 오늘날과 같이 머리로 숙고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반추反芻동물인 소가 되새김ruminatio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반복하여 끊임없이 되뇌이는 수행이었다.
10) 하느님 말씀에 순종의 삶으로 응답하라
렉시오 디비나의 네 단계(귀고 2세 원장)
‣ 첫째 단계 : 독서lectio
‣ 둘째 단계 : 묵상meditatio [반추기도ruminatio]
‣ 셋째 단계 : 기도oratio
‣ 넷째 단계 : 관상contemplatio
1) 독서lectio
성경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주의 깊게 하느님의 말씀(성경)을 읽고 듣는 단계 /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과 같다.
2) 묵상meditatio [반추기도ruminatio]
하느님의 말씀 안에 숨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성과 정신을 사용하는 능동적인 단계 / 입에 넣은 음식을 잘게 씹어 분해하는 것과 같다. [“반추기도” “되새김 수행”]
3) 기도oratio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지게 되는 단계 / 입에 넣은 음식을 씹어 분해한 후 맛을 느끼는 단계와 같다.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의 은총으로 천상적 기쁨과 생명을 맛보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을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단계 / 씹어 분해한 음식으로 인해 기쁨과 새 힘을 얻는 감미로움 그 자체와 같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당신과의 일치에로 초대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반추하면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도 안에서 주님께 응답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만찬을 나누실 것이다.
성경 독서에 관한 조언들
성경에 대한 아무런 전前 이해나 지식 없이 성경을 읽을 경우, 자칫 말씀을 자구적으로 혹은 주관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구절만 선별적으로 읽는 것은 편식과 같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성체를 소홀히 하여 길바닥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아를의 체사리오, 강론 782)
<참고 도서>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허성준, 분도출판사, 2006.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Ⅱ-기도와 관상-, 허성준, 분도출판사, 2011.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의 원리와 실천-, 이연학, 성서와 함께, 2007.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재발견-, 텔마 홀 저, 차덕희 역, 성서와 함께, 2006.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11월 29일(토) 요한복음 7-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는 것을 깨닫느뇨?(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Then Philip ran up to the chariot and heard the man
reading Isaiah the prophet. "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Philip asked.
읽는 것을 깨닫느뇨?(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독서 방법
1. 속독(速讀)
2. 다독(多讀)
3. 정독(精讀)
4. 영독(靈讀)
靈 영묘할 영 - 하나님 영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의 한 구절(예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의 곁에 다가가서 그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성경을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글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분합니다.
누가복음 24:44~47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모든 말씀이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고 나타나서 오실 것과 오셔서 우리 사람(인생)으로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 속한 자(계시록 14:4),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마서 13:14), 그에게 붙은
자(고린도전서 15:23)가 되게 하여 구원의 근원(히브리서 5:7~9)이 되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장으로, 나라로, 소유된 백성(베드로전서 2:9)으로서 삼으시려는 것이며 우리도 잘 모르고 어렸을 때에 말로는 빛 가운데
있다고는 하였지만 말과는 다르게 어두움(죄,악,불의) 가운데 행하는 사실상 말과 행함(야고보서 2:26)이 일치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우리들로 참 빛, 온전하신 의(義)을 알게 하시고 이를 온전히 행하게 하시며 그런즉 하나님의 생명(부활)과 안식과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를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기록하여 주신 말씀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며 중요한 것은 "죄 사함" 이 말로만, 입으로만, 혀로만 외치고 부르짖는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행하여 왔던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며 무례히 행하던 모든 불의와 죄와 악이 그 마음과
생각에서 깨끗하게, 정결하게 씻어 제하여졌을 때를 말하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우리가 얻었다 함(빌립보서 3:12)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닌, 죄악과 불의에 사로잡혀 그것을 행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잡혀서 죄 사함을 받으려, 얻으려
끝까지 좇아가려고 노력(훈련,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하여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이사야의 글" 은 잘 알고 계시듯이 구약 성경의 가장 대표적인 선지서, 예언서이며 이사야의 글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들에 담긴 하나님의 뜻하심과 우리 사람을 향한 바라시는 마음은 표현 방법은 약간씩 다를 수는 있지만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글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신약 성경의 마태,마가,누가,요한 즉 4복음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이르는, 얻는 방법(지혜)과 길(지식)을 거의 동일한 말씀으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니 이렇듯 동일한 말씀을 여러번 반복하여 기록하여 주신 것은 욥기서 33:14~17에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하는 것처럼 쉽게 말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며 마음과 생각에 콕 박혀서 새겨질 정도가 되게 하여 이전에 육체의 소욕대로(갈라디아서 5장17절) 미우면 미워하고 원망하며, 못마땅하면 비방하고 함부로하며, 마음에 안들면 훼방하고 무례히 행하며 언짢아지면 사나워져서 싸우기를 서슴치 않았던 못됐고 나쁜 악과 죄와 불의를 버리게 하며 막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의(義) 곧 그 계명(마가복음 12장31절)과 법(로마서 13장10절)대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 이러한 불의와 죄와 악이 뒤섞여 있는 모습(자세)으로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백성(자녀,성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이 불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6~9절에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입술로는, 말로는, 혀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외치며 부르짖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삶에서는 못마땅하고 언짢고 마음에 안드는 일(상황,문제)이나 그러한 사람(타인,남,상대방)과 마주하게 되면 믿음과 의(義)로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계명(마가복음 12장31절)과 법(로마서 13장10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참지 못하여 미워하고 비방(흉보고 욕함)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무시,멸시,업신여김)하기를 서슴치 않는 죄와 악과 불의를 행하니 외식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이며 이러한 것은 자기의 유익(입장,처지)과 이익(기준,관점)만을 앞세우고 내세우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오게 되는 사람의 계명으로써 이는 우리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그 부모의 부모가 그러하여서 대대손손 유전처럼 행하여 왔던, 이 유전을 지켜 행하다보니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저버리게 되며 멀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이는 온전히 믿지 못하는 까닭(요한복음 12장38~40절)이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빚은 완악하고 완고한 사람의 마음이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 곧 그 계명과 법을 깨달을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로마서 10:16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글" 을 비롯한 선지서, 예언서의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여 주셨지만 전하신 바를 누가 믿어서 그
뜻대로 행하였는가? 하는 것이니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믿고 있는, 그리 외치며 부르짖고 있는 우리는 말로만 할 뿐
행함(행실,행위,행동)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좇아가기 보다는 자신의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은 욕심을
좇아서, 욕심의 소욕대로 좇아 행하기 바쁨으로 하여 우리가 일깨우고 돌이켜서 고쳐 행함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원
가지들(로마서 11장20~25절)도 하나님께서 아껴보지 않으시고 꺾으셨는데 접붙임을 받은 우리들을 오죽하랴.
그런즉 항상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리니 높은 마음은 죄와 악과 불의를 행하기 쉽고 눈과 귀를 가리워서 깨달을 수 없게 만들며 지나간 세대들이
끝까지 선지자들의 전하여 주신 바 선지자들의, 예언의, 복음의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꺾이운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저버린다면 꺾이게 될 것이며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문의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즉 다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완악한 가운데서 행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전하고자 하여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사도행전
3장20~26절)들을 보내주신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
빌립은 성령님의 음성에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말씀하시는 것에 즉시 순종하여 광야길로 갔습니다.
(26절)
그 곳에서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광야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그 내시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자였습니다.
빌립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갔고,
그 사람이 읽고 궁금해하던 이사야 성경구절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35절)
에티오피아 내시는 예수님을 믿고 자기 갈 곳으로 돌아갔고,
빌립은 주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대로 갔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40절)
오늘 말씀과 같이 성령님의 음성에 즉시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먼저 말씀으로 기도하여 성령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구하고 찾은뒤,
성령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즉시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충성된 한 사람을 얻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박군의 마음 - 사람의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정욕의 사람에서 그리스도인(성화) 되는 과정
[갈라디아서5:19-23]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첫째 그림 : 죄인의 마음

둘째 그림 : 죄인임을 깨닫는 마음

셋째 그림 : 회개한 마음

넷째 그림 : 그리스도인의 마음

다섯째 그림 : 하나님의 성전인 마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청진기로 심장의 박동소리도 듣고,
X-ray나, MRI나 초음파로 뇌파 활동과 심장의 박동소리를 모니터에 떠오르는 그라프로 보고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그려내는 기계는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려 내는 기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표지 그림을 봅시다.
여기 한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동물로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심령을 형상화한 성경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오른편 위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살펴봅시다.
첫째, 개구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내린 재앙 중에 개구리 재앙이 있었습니다.
이는 더러운 영을 비유한 재앙입니다(계16:13).
둘째, 뱀입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유혹한미혹의 영입니다(창3:3).
셋째, 사자입니다. 사자는 맹수의 왕이라고 불리 울 만큼 사나운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물어뜯고 찢는 핍박의 영입니다(시22:13).
네 번째 거북이입니다.
거북이는 손만 되면 움추려 들고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이는 더디하는 나태한 게으름의 영입니다.
다섯 번째는 돼지입니다.
성민에게 돼지는 저주받은 가증한 짐승입니다(마8:32).
이는 곧 탐욕의 영입니다.
여섯 번째, 염소입니다.
염소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뿔로 남을 지어 박고 해하는 심술 굳은 짐승입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꼭 높은 곳에 서는 교만한 영입니다(마25:45).
여덟 번째 공작새입니다.
공작새는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사람만 다가가면 깃털을 새우고 날개를 펴서 자랑하는
잘 난 척 하고 싶어 하는 허영의 영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보면 예리한 눈이 하나 있습니다.
이 눈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행위를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할 때마다 우리를 정죄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파견한 파수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합니다.
이 양심이 우리가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황폐하게 하여 그 양심이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이런 깨끗한 양심이 죄로 오염이 되어
더러워지고 화인을 맞아 양심의 기능을 마비시키게 합니다(딤1:15, 딤전4: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심이 파수꾼의 사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가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은 다 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힘으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짐승들을 다스리는 괴물이 사람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괴물은 창을 들고 자기의 명령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가정과 산업을 파괴하려고 위협해 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마귀요 사단이라고 합니다.
이 사단을 물리치기 전에는 이런 짐승들을 좇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총이나 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약을 먹여 줄일 수도 없습니다.
이 사단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이 딱 한 분이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내 인생 주인으로 모시면
마귀는 저절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막5:7-8).
갈릴리 바다 동편 거라사라고 하는 지역에 군대 귀신
이 들린 자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명심도(明心圖)서』

숭실대학의 설립자인 윌리엄베어드 박사가
복음 전도를 목적으로 번역 발간한 수많은
신앙교리서 가운데 하나이다.
1912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초판 발행되었고,
1913년부터 재판을 거듭하며
1926년까지 일곱 번이나 발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본서의원 저자는 독일 신학자 요한네스 방넬리스타 고스너
(J. E. Gossner,1773-1858)이며,
독일 출신의 한사백 선교사가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베어드 박사가 우리말로 옮겼다.
영문 제목은 ̒The Human Heart̓이다.
‘총론’에서 저자는 『명심도』 발간 취지를
“사람이 도를 좇아 하나님을 공경하고
정욕을 쫓아 마귀에게 꾀임을 받아 죄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고 밝히고,
‘강해’에서는 사람에게 있는 마음눈이
천사와 성령에게 있으며 착하고 마귀에게 있으면
악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일곱동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공작은 교만한 태도를,
염소는 음란하고 더러운 것을,
돼지는 음식을 탐하는 것을,
이리는 재물을 탐하는 것을,
뱀은 궤휼과 시비하는 것을,
호랑이는 강포함을,
자라는 게으름을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악한 정욕 7가지를 일곱 동물로
비유하고,
이 정욕을 물리치는 길은 성령의 빛을 받아
그 마음속에 거하게 될 때 가능하며 그 마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모시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본서는 해방 이후 『 박군의 심정』『박중사의 마음』 등으로 발간되어 널리 읽혀졌다.
[출처] 박군의 심정(마음) (갈5:19-23).|작성자 예수 진리
박군의 심정 가장 최신 어린이 버전 같은 느낌이고 그림도 눈에 시원해서 인용합니다.
소년의 얼굴이 아주 요즘 최신의 얼굴입니다^^
뭔가 철수-챨스같은 느낌이 들어서 제가 챨스, 철수 버전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아래에 인용한 설명은 제가 쓴 것이 아니고 베껴온 것인데 상당히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하는 신학적 언어를 써서 어린 챨스에게는 조금 어려운 듯한데 읽어보면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것으로 내용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인공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린 철수라기보다는 미남 청년같기도 합니다.
(1)

(1)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박 군은 늘 자신을 살피며 참되게 살려고 하는 한 청년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속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짐승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난 체하는 공작
지기 싫어하는 염소
욕심내는 돼지
집요한 소유욕의 거북
혈기 내는 호랑이와
자신의 입장에서 이간질하는 뱀,
그리고 말의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두꺼비.
그런데 그 모든 육성(肉性 인간속성)의 중심에는
자아(自我 Ego)라고 하는 대장 마귀가 이것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참되게 살고 싶은 박 군은 자신을 보고 알게 될수록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7:24]
(2)

(2)
이 호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통하게 되었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권면하시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마음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보이는 하늘과 땅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서도 이루어지는 역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에 있는 짐승의 성품과 자아는 그대로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3)

(3)
알아듣고 이해하고 감동으로 느끼던 말씀이 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영으로
박 군의 마음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박 군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생겨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즐거움과는 분명히 다른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지금껏 살아온 성품과 같지 않은
새로운 자신이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5:25]
(4)

(4)
이 시기에 박 군은 천국의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이 다 하늘에 속하여
이전에 있던 세상 성품과는 분명한 구분이 되어
더 이상 성낼 일도, 욕심 부릴 일도 없이
세상과 육성이 다 사라진 듯 보였습니다.
이때의 느낌과 체험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르는 증거로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마귀나 짐승이 박 군의 삶에서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
(5)

(5)
사람의 성품은 습관이나 유전보다 강한
어둠의 권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박군의 마음에는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권세가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위한 열심이 육의 성품을 삼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6)

(6)
그러나 마귀의 영역은
주를 위한 열심에까지 미칩니다.
자신의 의義를 뒤집어 쓴 혼魂의 열심이 구분되고
말씀의 전신갑주全身甲胄가 입어집니다.
헛된 투기妬忌의 열심이 아닌
하늘의 평안이 자리잡게 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자리합니다.
(7)

(7)
복음의 전신갑주가 원수의 모든 해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은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합니다.
이제의 희생은 덧없음이 아니고
부활의 삶을 누리게 합니다.
(8)

(8)
이 세계는 모든 언약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주의 임재로 거룩함이 이루어지고
평안의 열심이 심령을 채웁니다.
주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강은
온 세상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의 실재를 알고 순간 순간 끊임 없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의 하루하루는 가슴 설레는 모험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① 자연인 (그리스도를 영접한 일이 없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2:14)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
나 : 내 인생의 왕좌에 나 자신이 앉아 있으며
† : 그리스도는 내 인생 밖에 계십니다.
● :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집니다.
② 성령의 사람(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 충만한 사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리라' (고린도전서2:15)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사람]
† :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계시며
나 : 나는 내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습니다.
● :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③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으나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3:1-3)
[예수님을 영접했으나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
나 : 내 인생의 왕좌에 나 자신이 앉아 있으며
† :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 앉아 계십니다.
● :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집니다.
위의 세 그림 중에 어느 그림이 당신의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또 당신은 어느 그림에 속하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음은 성령 충만한 생활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10:1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1:8)
[성령의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인격적 특성이 나타납니다.
|
삶의 특징 |
성령의 열매(인격적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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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격적 특성이 나타나는 정도는 그가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또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정비례합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Ⅱ.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사함의 능력에 대하여 모르거나 잊고 있습니다.
(로마서5:8-10, 히브리서10:1-25, 요한일서2:1-3, 베드로후서1:9, 사도행전1:8)그는 변화가 심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옳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 생활에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3, 로마서7:15-24, 8:7, 갈라디아서5:16-18)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성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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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특징 |
인격적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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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요한일서2:3, 3:6-9, 에베소서5:5)
세 번째 진리가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을 줍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는 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 생활이 성령 충만을 받은 결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의 생활이란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삶으로서,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는 생활입니다. (요한복음15장)
요한복음 3:1-8절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며, 성령은 항상 그리스도인 안에 계십니다. (요한복음1:12, 요한복음14:16-17)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살아 계시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차고 넘치는 삶의 원천입니다. (요한복음7:37-39)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16:13-14)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가 승천하시기 전에 최후의 명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사도행전1:4-9)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Ⅳ.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약속하신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 생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십니오. (마태복음5:6, 요한복음7:37-39, 시편42:1-2)
당신의 죄를 남김 없이 고백하십시오. (요한일서1:9)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에 대해 믿음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골로새서2:13-15, 요한일서2:1-3, 히브리서10:10-12)
성령 충만을 믿음으로 간구하십시오.
'또 우리를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3:14)
① 그의 명령 -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5:18)
② 그의 약속 - 우리가 그의 뜻대로 기도하면 그는 언제나 응답해 주십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일서5:14-15)
믿음은 기도를 통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성령 충만을 위한 믿음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믿음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내가 나의 삶을 주관해 왔고, 그 결과로 주님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를 대신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의 왕좌를 취하여 주시기를 이제 다신 한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성령 충만 받으라고 명령하시고, 믿음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내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하시고 나를 다스리심을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당신이 성령 충만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은 하나님께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당신은 지금 성령 충만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히브리서11:6, 로마서14:22-23)
감정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음 기차 그림은 사실(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믿음(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과 감정(믿음의 순종의 결과)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요한복음14:21)
기관차는 객차가 있으나 없으나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객차로 기관차나 연료차를 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신실성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 당신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성령 충만한 신앙 생활의 유일한 비결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순간 순간 끊임 없이 신뢰할 때,
당신의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며, (갈라디아서5:22-23)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점 닮아갈 것입니다. (로마서12:2, 고린도후서3:18)
당신의 기도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부가 날로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때 그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1:8)
영적 싸움에 있어서 당신을 대적하는 세상(요한일서2:15-16)과 정욕(갈라디아서5:16-17)과 사단(베드로전서5:7-9, 에베소서6:10-13)을 이기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죄와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능력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10:13, 빌립보서4:13, 에베소서6:10, 디모데후서1:7, 로마서6:11-12)
● 영혼의 호흡
믿음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계속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했음을 알았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음을 감사하며 믿음으로 그의 사랑과 용서를 요청하여 주님과의 사귐이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불순종의 행동으로 당신 인생의 왕좌를 다시 차지했다면 즉시 영혼의 호흡을 하십시오.
영혼의 호흡(더러운 것을 내뿜고 깨끗한 것을 들이마시는 일)은 믿음으로 끊임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는 운동입니다.
① 내뿜는 일 - 당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동의하고 요한일서1:9절에 따라 죄를 용서해 주심을 감사하십시오. 죄의 고백은 회개하는 일인데 회개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② 들이마시는 일 - 당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당신의 것으로 삼고 활용하십시오. 믿음으로 에베소서5:18절(성령충만을 받으라)의 명령과 요한일서5:14-15절(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의 약속에 따라 성령께서 지금 당신을 주관하시고 능력 주심을 믿으십시오.
* 만일 위의 내용이 당신에게 뜻 깊은 도움이 되었다면 이 소책자를 구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 주거나 선물로 주어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하십시오.
- 성령의 지배와 인도: 성령께서 개인의 삶을 주관하시고 지배하며 인도하시는 상태입니다.
- 삶의 주권을 드림: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드리고,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성령의 능력 체험: 이성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회복되어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고,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 성령의 열매: 성령 충만한 삶에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타납니다.
- 영적 변화: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며 관계가 회복되는 등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 사모하는 마음 :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 죄의 고백 : 자신의 죄를 철저히 고백해야 합니다.
- 믿음 :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 순종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 꾸준한 영적 루틴 : 말씀 묵상과 기도를 꾸준히 함으로써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충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이 아낌없는 사랑과 성령의 친밀한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메시지 성경, 고후 13:13).
성령님의 소원은 우리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혜와 사랑이 무한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갖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그분께 온전히 굴복하는 삶, 즉 성령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삶을 말합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의 실례들은 주로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우선 초기 교회 당시 오순절에 성령 충만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어 초기 교회에 성령 충만의 역사가 반복되어 일어났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이곳에 나오는 무리는 제자들과 사도들인데, 이들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들은 또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6:3-6에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집사로 세우는 사건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그리고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박수 엘루마를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성령 충만했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사도행전 외에도 성령 충만을 받은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
또 침례 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사가랴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41).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67).
구약성경에도 성령 충만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셉, 브사렐, 여호수아, 삼손, 다윗 등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 41:38).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출 31:2-4; 35:31).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신 34:9).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삿 14:6).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이와 같이 성령 충만의 역사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성령 충만의 목적
왜 성령 충만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예, 물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위의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에게 성령 충만이 또 필요합니까? 성령 충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섬김과 증거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심을 위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증거하는 일과 희생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성령 충만’이라는 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류 최고의 교사로부터 3년 반 동안 최고 수준의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에 함께 그 자리까지 따라갔으나 계집아이의 질문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드러냈습니다. 그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유대의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베드로와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행 1:8). 이것이 성령 충만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성령 충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사렛에서 30년간의 생애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침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형체로 그의 위에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2). 다음의 두 성경절을 잘 보시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은 성령의 권능, 성령 충만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오직 성령이 (위로부터)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요단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 4:1)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는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 일을 지내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입고 갈릴리에 돌아와 사역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예수님은 제자들과 작별하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 전도 사업을 감당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을 받고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이것이었습니다.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사도 바울도 복음 전도에 있어서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필수적임을 증거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3] 성령 충만의 약속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매우 강력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이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약속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시기로 한 귀중한 약속입니다. 성령은 마치 객차(客車)를 끌고가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다른 많은 축복들은 기관차에 매달려 따라오는 객차들처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특정한 개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이 말씀을 읽는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이 본문을 읽는 당시 신자들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끝으로 이 명령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경험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도록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성령의 충만함은 받으면 큰 능력을 얻어 인간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업가가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미국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보여주겠소.” 그리고는 그를 나이아가라 폭포로 데리고 가서, 순간순간 산더미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바로 저거요.” 그러자 그리스도인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용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이요 약속인 성령 충만을 받아 누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4]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
어떻게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고전 12:3), 성령은 믿는 자의 중생에 역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중생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 충만한 단계, 즉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을 간단하게 네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 성령 충만의 첫 단계는 회개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하였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회개는 마음의 변화요 삶의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단계입니다. 인간은 본래 성령 충만한 상태였으나 죄로 인해 성령을 상실한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죄된 심령에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가 없는 곳에 성령이 임재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할수록 성령은 더욱 더 크게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롬 2:4)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할 때는 하나님께 회개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 깊은 곳에서 죄를 미워하고,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입니다.
②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이 말씀의 배경은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웃에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끈질기게 요청하여 마침내 떡을 빌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간곡하게 요청하기 때문에 이웃집 주인은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떡을 줄 수가 없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8).
성령 충만을 원하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배고픈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찾듯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듯이, 성령을 갈급하여 간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령 충만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성령을 거저 주시지 않고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주실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품성이 변화되는 등 현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인데, 성령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은 자에게 성령 충만이 오면 자기 신앙심의 좋아서 그런 줄 알고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 그 결과에 대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겸손하게 준비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고, 그 준비가 바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그 필요를 느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③ 기도한 후에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한 다음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마 21:22).
④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진정한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면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만이 아니라 모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의 핵심은 의지에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의 본질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와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을 받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입니다.
[5] 성령이 머무는 위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머무시는 위치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전치사)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를 가리키는 ‘엔’(en)과, “곁에”를 가리키는 ‘파라’(para), “위에” 혹은 “위로부터”를 가리키는 ‘에피’(epi)입니다.
① “안에”
로마서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성령은 우리 ‘속에’ 그리고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때, 성령이 내 속에 거주(내주)하기 시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죄인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거하신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은혜의 역사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주로 죄를 씻고, 인격을 변화시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은 나의 생각과 인격과 존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십니다.
② “곁에” 혹은 “함께”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말은 “곁에”를 의미하는 ‘파라’와 “부른다”를 뜻하는 ‘칼레로’의 합성어입니다. 보혜사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부르심을 받은 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행하는 일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일입니다(요 16:8). 성령이 곁에 오셔서 역사하시면, 나도 모르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게 됩니다. 또한 사탄이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과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 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리고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께서 언제나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도우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③ “위에” 혹은 “위로부터”
성령이 위에 혹은 위로부터 임하신다는 것은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위로부터, 때로는 불 같이, 때로는 바람 같이, 때로는 비둘기 같이 임합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사역은 권능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론과 장애물과 대적을 타파하는 사역이고,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권능을 받으셨습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 쌔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1, 22).
예수님이 공생애를 준비하실 때,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고, 성령이 그분 안에 내주하셨지만, 메시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의 공생애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눅 4:14, 18).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제자들은 오순절에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행 1:8).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님 승천 이후,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락방에 모여 합심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그 이후로 성도들은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아름다운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6] 역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성령 충만 사건들
①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
가장 대표적인 것은 초기교회가 경험한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입니다. 성령 시대가 개시되는 사건입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예수 재림까지 교회 시대는 성령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은 구약 시대가 끝나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는 교회의 탄생일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했으니,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요 성령은 교회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의 영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 충만은 보편적인 영적 은사 체험 사건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욜 2:28~30). 그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성취되었습니다(행 2:1~4, 16~19). 구약 시대의 성령의 사역은 특수한 사람들에게 특수한 일을 위해서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로 이러한 제약은 해제되고 하나님의 영의 보편적인 역사로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특수한 은사를 받아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친교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충만은 선교의 사건입니다(행 1:8). 오순절이 없었다면 교회가 없었을 것이고, 성령의 권능이 없이는 선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실존적인 사건이 되게 만들고, 그 객관적 사건을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이 되게 만드는 능력은 오직 성령이 가지고 계십니다.
오순절에 120명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당일에 3,0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 5,000명으로, 수만 명으로, 그 다음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오순절에 시작된 것입니다.
② 요한 웨슬리 성령 충만 사건
요한 웨슬리(1703-1791)는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교회, 갱신주의 교회와 은사주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35개 이상의 교단과 신앙 운동의 영적 아버지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40만 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했고, 42,000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가 저술, 번역, 편집한 작품만 200권이 넘습니다. 그는 형제, 아버지, 조부, 증조부 모두가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1728년에 영국 성공회에서 안수를 받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 8시 45분, 런던의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있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집회에서 그의 생애에 큰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의 모든 죄를 가져가셨고, 그를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참된 신앙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성으로만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 능력의 체험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영과의 교통입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성령의 적극적 역할을 중생 이후에 경험하는 두 번째 은혜, 성령 침례, 그리스도인 완전(죄 없는 순수한 동기와 사랑의 상태), 성화로 보았습니다. 즉, 성령 침례를 통해 성화와 그리스도인 완전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통적 신학은 중생과 성령 침례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요한 웨슬리, D. L. 무디, R. A. 토레이는 중생과 성령 충만을 구분하였습니다. 중생할 때 생명의 부여가 나타나고, 그것을 받은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성령 침례를 받을 때에는 능력이 부여되며, 그것을 받는 자는 봉사에 적합하게 됩니다. 토레이는 성령 침례,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성령을 받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음 등은 다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로 통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일생을 통해 웨슬리는, 신앙생활의 목표는 칭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성화의 완전에 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중생을 거쳐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인류가 새롭게 창조되는 성화와 완전, 즉 신성으로 충만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인 성숙에까지 진보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와 그 목표인 완전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 속에 회복하여 참 인간성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있어서 성령은 끊임없이 현존하심으로써 그의 은혜를 통해 충만한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성화와 관련하여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목적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라고 웨슬리는 말합니다. 웨슬리의 성령 이해는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첫째, 현대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진정한 뿌리; 둘째,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의 완성자; 셋째, 19세기 미국 대부흥운동의 모체; 넷째,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토양 등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③ 찰스 피니의 성령 충만 사건
피니(1792-1875)는 제 2 대각성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피니를 통한 각성 운동은 자신의 영적 회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회심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 믿었으나, 회심 후에는 성경 말씀을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821년 10월 10일,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법률 사무소에서 환상 가운데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나의 영혼을 주님에게 쏟아 놓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면서 목메인 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영적 체험을 한 후, 피니의 복음전도 사역은 화산처럼 폭발하였습니다. 피니가 미국의 소돔이라는 어느 타락한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앉은 자리에서 넘어지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피니가 뉴욕 방직공장을 견학하는 동안 일하던 한 여직공이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푹 쓰러졌습니다. 그 여직공이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순간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그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공장 주인은 ‘공장 일보다 영혼 구원의 일이 더 중요하다’라고 외치면서 그 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하여 공장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사장은 모든 직공들을 참석하게 했으며, 며칠이 지나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모든 직공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자 1826년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동안 유티카 지방에서 부흥회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은 그 노회 내에 3,000명에 달했습니다. 많은 법관들, 변호사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각성 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피니는 뉴욕에서 7년 동안 대형 집회를 가졌습니다. 피니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뉴욕의 롬(Rome)에서 500명, 유티카에서 500명, 주변 지역 교회에서 1,000명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피니는 3,000명을 수용하는 한 독일계 교회에서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그 집회에서도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미국 뉴잉글랜드 전역에 부흥이 일어났으며, 부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 년에 100,000명의 개종자(改宗者)가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짓 성령의 역사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절은 거짓 영의 역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사탄도 일종의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짓 영의 역사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며, 그것이 마치 참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거짓 영의 역사를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거짓 영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그 실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어떻게 다른가?
시작하는 말
일부 성도들 가운데 흔히 오해하는 교리가 성령에 관한 교리이다. 어떤 분은 성령을 하나의 힘(power)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령은 어떤 힘이 아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도 믿지 않고 성자 예수도 우리가 믿는바 성삼위 중 이위(二位)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가 ‘우리 보다 먼저나신 피조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골로새 1:15절 말씀에 의거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골로새 1:16을 보면 저들이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예수는 바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조물주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1. 성령세례
(1) 일생의 단 일회적인 사건
성령세례는 곧 구원을 말하며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고, 로마서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라고 했으니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을 이룩할 때 경험하는 일회적(一回的)인 사건이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였을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들 모두는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손을 머리에 얹고 안수해야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안수는 안수 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일을 위임할 때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더하기를 기도할 때 안수 한다. 안디옥교회는 사울과 바나바를 구별(區別, set apart)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했다.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기름 부어 안수를 대신했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인데 그 메시아는 헬라어로는 그리스도(Christos)이고 그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령 세례는 중생하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다시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 아니다. 중생할 때 일생에 한번 받는 일로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처음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2)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
오순절파와 순복음파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도로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생은 자기 본인의 힘으로 되고 그 다음 성령세례를 받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에 성령세례가 구원을 얻은 다음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란 말은 없다. 에베소서 4:5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라고 했다. 세례는 하나뿐이다. 그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즉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聯合) 할 때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는 성도가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의(義)에 대하여 산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의 설명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찾아 불 수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중생(重生, born again)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枝)로서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는 것과 같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으로 붙어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의 의미이다.
(3) 예수님과 성령세례
예수님의 사역은 1)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것(代贖)과 2)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예수를 믿게 하는(重生) 두 가지 사역이다. 요한복음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한 구절에서 우리의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시고 또 세례 요한이 한 말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요.”라고 한 대로 그는 성령세례를 주어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구약을 보면 “영을 부어 주신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요엘 2:28은 베드로가 오순절 때 인용한 말씀이지만 그 외에도 구약성경을 보면 가령 에스겔 39:28,29에도 “이스라엘 집에 영을 퍼부어 준다.”는 말이 있고, 이사야 32:15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해주시고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는”이란 말은 원문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현재분사(現在分詞, present participle)이다. 구원할 자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피택(彼擇) 자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말이고, 그가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말도 현재형 분사이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이다. 즉 이는 단회적(單回的)으로 성령을 부어 죄를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한다는 말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구원’ 받았다는 말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주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일이다.(요 14:26, 15:26)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게 하려 하심이다.(엡 1:17, 갈 4:19, 고후 3:18)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갈 5:15-25)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가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 많은 그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고 죄 없이함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령세례는 사람이 거듭날 때 즉 구원을 얻을 때 누구나 처음 단 한번 경험하는 일이며 중생한 다음에 다시 경험하는 특별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회적(單回的)며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성령의 역사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성령충만
한편 ‘성령충만’은 다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자. 먼저 결론을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重生)과 관련되고 ‘성령 충만’은 성화(聖化)와 관련 된 성령의 사역(使役)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퍼부어 주시어 즉 성령님을 통하여 처음에는 120명에게 성령세례를 주셨고 후에는 3,000명에게 성령세례를 주셨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주어 회개하고 중생한 결과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사도행전 2:4에 보니 ‘성령충만’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결과는 ‘성령충만’이다.
성령세례는 주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주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주신 성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중생할 때 단 한번 주님이 성령의 도움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성화의 은혜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말씀에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날마다 닮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성화(聖化)가 시작된다. 성화는 과정이다. 성화는 한 번 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연속된다. 바울도 빌립보서 3:13에서 “내가 이미 잡았다 함도 아니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나간다.”라고 말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룩하라.”고 하기도 했다. 이 말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룩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충실하게 힘써 나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한번이고 성령충만은 계속되어져야한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그 증거로 날마다 성화를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성화가 완성되는 사람은 없다. 성도는 죽을 때 그의 성화가 끝난다.
그러나 성화 역시 성령의 도우심(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음)이 필수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화는 구원 받은 성도 개개인이 힘써 맺어야 할 열매이다. 성화를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면 된다. 성도가 성화되지 않으면 성령이 근심하신다.(엡 4:30) 성화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말씀이다.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계속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회심(conversion)에는 믿음과 회개가 따르는데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고 회개는 과거 지향적이며 성화와 직결된다. 성령충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충만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은 칭찬을 들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보라. 이들은 칭찬을 받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행 6:3-5) 바나바도 그렇고(행 11:2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그러했다.(행 13:52)
(2) 성령충만은 특정 직무를 담당할 때도 하나님이 내리신다.
누가복음 1:15-17을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9:17과 22:12-15을 보면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사울은 그 후로도 사도로 성령이 충만했다.
(3) 성령충만이 임시적으로 주어지는 때도 있다.
성령충만은 사도나 선지자 같은 항구직(恒久職)을 맡은 사람을 따로 성별하여 세울 때가 아니더라도 임시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도록 일을 맡길 때 주어진 사실들이 있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선지가가 아니고 제사장이었지만 그와 그의 부인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했다고 누가복음 1:5-8에 말한다. 바울도 전도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베드로도 산헤드린에서 증언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에베소 5:18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데 성령충만은 모든 성도가 받는 것이며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받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이다. 에베소서5:18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연구하면 성령충만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로 살펴보자.
-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형은 신약에서 모두 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은 항상 동작이 반복되는 것을 말하고 정과거(定過去, aorist form)는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독을 채워라!”(2:7) 하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은 정과거형 동사(定過去動詞形)를 사용하여 말씀했다. 즉 물을 채우는 일을 한 번만 하라는 것이지 자꾸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일서 3:9에서도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현재 동사이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이 정확한 뜻은 원어에서 온다.
- 또 주목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복수형이다.
원문에서 보면 그 동사는 ‘plerousthe en pneumati’이다. 그러므로 ‘복수 수동태 현재 명령’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의미는 자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서 어느 특정한 부류들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 지도자 중에 성령충만은 어느 특정한 교파나 교회에 출석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속이는 자들이 있는데 이에 속으면 안 된다. 이런 사이비 지도자들을 조심하라. 말세의 특징은 ‘속임수’이다.
- “성령충만 하라!”는 말은 수동태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너의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기쁨으로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서 취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저절로 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야 취하듯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도록 사모하고 힘써야 한다.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양자 등은 모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순간에 하시는 사역이지만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도가 이루어 나가야 되는 일이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결론
(1)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성령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예수를 믿을 때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외부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종합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받는 일생에 한 번 있는 일 즉 중생(重生, 거듭남, born again)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은 다음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연합한 다음 우리의 생활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경대로 살려는 욕구가 증대해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늘 믿음을 지켜나가며 그리스도인의 훈련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우리 안에 이루려고 노력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선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죽게 하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聖靈)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자.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각자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2) 우리 생활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함으로 성화되고 성장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
(3) 모든 성도는 한 가지 이상 성령의 은사와 직임이 있다.
성령님은 항상 각 개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사람은 각각 은사(恩賜, gift)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지만 또한 다른 각각의 은사를 받았다. 그 은사들로 성령이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우리 죄를 없이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신다.은사는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봉사하는 직임도 여러 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은사와 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은사와 직임은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진다.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모든 은사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충성하자.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자.(*) 글쓴 이 / 김명도 목사
성령 충만을 받는 것에 대한 성경구절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능력과 지혜를 받아 신앙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의 중요성과 이를 받기 위한 방법을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성령 충만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셨으며,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십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구할 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간구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편 51:10-1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Q) 성경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어떨 때 기도를 많이 하고 나면 성령 충만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정확히 어떤 상태가 성령 충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A) 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정말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말 그 의미가 무언지에 대해서는 딱 꼬집어 말하기가 곤란한 모호한 면이 있는 듯합니다. 사실 성령 충만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성령의 은사나 기적 행함 또는 열광적인 기도의 몰입이나 황홀경의 체험 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 충만의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단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상태만 가지고는 우리를 충만히 다스리지 못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의 욕망과 편견 등으로 가득 찬 영혼으로는 결코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께 온전히 우리의 영혼이 붙잡히게 될 때 성령 충만의 상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와 복종의 영으로 넘치게 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21). 성령 충만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뜻으로 늘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곧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관념상으로는 성령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생활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비록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지만 이를 얻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많은 기도를 드렸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인 복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성령 충만을 구하고 계시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과연 내가 성령께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온전한 복종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시다면 이제는 마음의 태도를 회개하여 주님께 대한 복종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 성령 충만을 받았으나 현재는 충만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쓰러지는 분들이 계시다면, 과연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령께 복종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 그 부분을 새롭게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난 이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히 우리의 영혼을 통치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 신자의 삶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은 인격을 지니고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와 맺기 원하십니다.
또한 성령 충만이란 성령과 친밀히 교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멀리 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온 것은 죄악과 수치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은 부패한 죄성을 유전(遺傳)으로 온 인류에게 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어진 교제의 다리를 다시 잇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신앙의 경륜이 오랜 분들만이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 나누기를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성령 충만한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회복이란 바로 주님과의 끊어진 교제를 다시 잇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는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충만
- 찰스허멜-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또 우리는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
은사 부흥 집회들이 활발하게 열릴 때면 이런 물음들은 서로 상반된 대답들을 이끌어 내곤
한다.
이런 문제의 원인의 일부는 오랫동안 성령이 삼위 가운데서 잊혀진 위(位, person)였다
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령이라는 이름이 생소하기 때문이 아니다. 수 백만의 그리스도인
들은 매 주일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분, 곧 주님이신 성령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 십년 전까지 성령은 교회의 의미를 이해하고 교회의 본질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했을 뿐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 영(靈)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들의 가정을 모형으로 하여
성부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 개념을 얻는다. 또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를 통해 성자 하나님에 관한 상(像)을 얻는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는 그 개념을 정립하기가 어렵다. 그 분은 만질 수 없고, 또 어쩌면 두렵기까지 한, 어
떤 유령과 같은 실재로 생각되는 것이다.
둘째,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은 자신에 대하여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것
이다.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는 여호와
의 영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와 능력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 신약에서 성
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린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다.------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일러 주실 것이
요.------그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 15:26;16:13-4)이처럼 성령은 그 본성
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역의 면에서도 비(非)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사실 때문에 성령에 관한 탐구에 있어 의욕이 꺾일 필요는 없다.
바람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들
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와서 이디로 가느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
셨다(요 3:8). 그렇지만 바람은 강력한 힘이 있다. 거대한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릴 수
도 있고, 범선을 물 위에 떠다니게 할 수도 있으며, 제트기를 가을 낙엽처럼 뒤흔들어 놓
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영(spirit)을 뜻하는 단어들은 바람이나 호흡을 뜻하는 단
어들과 똑같다. 그 단어가 특별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문맥과 저자의 용법에 따라 결
정된다. 그러나 이 세 단어 모두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의미는 생명, 운동력, 힘, 신
비, 예측불가능 등이다.
최근에 들어와 우리는 성령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본성과 사역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행하시는 그 분의 능력 있는 활동 때문
이다. 신학자들과 교인들에게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성령의 은사들이 이제는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었다. 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령의 능력이 현시(顯示) 되곤 하였다. 은사
부흥회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고 때로는 논쟁으로까지 진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책자에서 성령의 활동의 모든 측면을 망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성령 충
만'(filled wiht the Spirit)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영적 은사의 현시에서 뚜렷이 나타나
는 성령의 차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먼저 성령에 나타난 자료들을 살펴본 후에, 이 가
르침이 오늘날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출발점
신약에서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Spirit)이라는 말은 바울서신에서 1회, 누가복음
에서 8회로 총 9회 나온다. 한편 '성령 충만하여'(full of the Holy Spirit)라는 표현은
5회 나오는데, 모두 누가복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우리
의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모든 성경 저자들은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그 문학
적인 형식이 운문이건 산문이건, 시편이건 잠언이건, 역사서건 예언서건 성경의 모든 부분
들은 각각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
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임후 3:16) 따라서 훌륭한 역사가인 누
가의 기록은 단순한 사건 보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분명한 교육적
목적을 가진 한 신학자이다.
누가가 강조한 것 중 하나는 새 시대(New Age)의 도래다. 그는 이 구속사의 드라마에 나
타난 성령의 임재와 활동을 강조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요한의 세 복
음서를 합한 것보다도 많이 성령에 관해 언급한다. 새 시대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누가의 강조는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은 성령 충
만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다.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
구약 성경은 메시야와 성령 시대를 가져다줄 새 시대를 기대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이스
라엘에서 4백 년의 침묵 뒤에 재개된 성령의 활동을 말함으로써 시작된다.
첫 장면이 열리면서 주의 천사가 어느 노(老)제사장에게 돌연히 나타난다. 경건하나 자
녀가 없었던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는 그에게 장차 위대한 예
언자가 될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또한 요한은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
터 그에게 성령이 충만할" 것이며(눅 1:15), 또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엘리야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6개월 후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리라고 약속하면
서, 엘리사벳도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리아가 그녀의 사촌인 엘리사벳을 방문하
였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눅 1:41) 마리아를 축복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
에 대해 예언을 한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요한이라 불렀다. 이 때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눅 1:67), 하나님의 구원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져다 줌에 있어서 요한이 수행하게 될 위
대한 사역에 관해 예언한다. 이 세가지 경우들을 살펴볼 때 성령 충만은 예언적 사역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예수께서 태어나신 뒤, 그의 부모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아이를 여호와께 드린다.
이때 시므온이라 불리는 한 노인이 성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세 번에 걸
쳐 시므온과 성령 사이의 분명한 연관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있었습니
다.------그리고------성령의 지시를 받고 있엇습니다.------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 안
에 들어갔을 때에 ------."(눅 2:25-27) 시므온은 그 아기를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서, 분명히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메시야의 사역에 관해 예언한다.
누가의 이런 기록들을 살펴볼 때, 그는 '성령 충만하다'는 말을 어떤 특별한 결과를 초
래하는 성령의 직접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위의 경우들에
있어서 특별한 결과는 예언,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다. 그런데 행위는 공인된 예언자
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가랴가 제사장이었던 반면에, 시므온, 엘리사벳, 마리
아는 아무런 종교적 직책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요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성령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젊은이와 노인들, 남자와 여자들-에게 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욜 2:28-29). 30년 후 요한은 광야에서 나와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푼다. 군중들은
요단강으로 몰려와 그의 말을 듣고 반응을 보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바로 오랫동
안 고대하던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그는 성령과 불로 당신들에게 세례를 주실 것
이요."(눅 3:16)
곧 이어 예수 자신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이 때 갑자기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고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 온다. "너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눅 3:22) 이 선언은 메시야적 아들(Messianic Son)이면서 동시에 고난받는 종(Suffering
Servant)이신 예수님의 이중 사역을 지시하는 것이다. 성령의 강림은 구약의 또 다른 예언
을 성취시켰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 42:1)
예수님은 새 시대를 위하여 약속된 성령의 권능을 입고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누가는 계속해서 성령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다.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빈들에 가셨습니다."(눅 4:1)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서 성령 충만은 하나의 지속적인 특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성령이 순간적이고 직
접적으로 역사하여서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준비할 수 있도록 광야로 인도하고 있음을 주목
할 수 있다.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오신
다(눅 4:14). 이어 그는 자기 고향 나사렛에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이사야서를 읽으신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눅 4:18-19)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를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신다.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께로 쏠렸을 때, 그는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말씀하
신다.(눅 4:21)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병 고치는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
셨는데, 이 일을 계속해 나가실 때 누가는 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다."
(눅 5:17)고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이와 똑같은 성령의 능력을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될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너희는 오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을 받으리라."(눅 24:49;행 1:5,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기
름부음을 받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들의 사역
을 위해 성령으로 무장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다. 오순절은 봄 수확이 끝날 무
렵에 열리는 성대한 순례의 축제였다.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여러 곳으로부터 온 순례자
들로 붐빈다. 축제 행사가 한창일 때 하늘로부터 세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다른 나라 말로 말하게"되었
다(행 2:4).
여기서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고 그들은 능력으로 입
혔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잠시 후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이 말에 관한 바울의 용
법이 누가의 것과 다르다는 점을 살펴볼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요엘의 예언에 비추어 설명한다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
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행 2:17)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자 삼천 명이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다. 처음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들도 새 시대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는 공개적으로
유형화되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머지 않아 그것은 유다와 사마리아에까지, 그리고 로마
제국의 전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갈 것이다.
다음 장에서 누가는 계속해서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이 예언적인 차원에 대하여 그가 즐
겨 쓰는 말을 사용한다. 누가의 기록 가운데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이
당시에만 국한되는 일시적 경험이라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은 상황이 요구하는 데
에 따라 그들의 증거와 봉사 사역에 능력을 공급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들을 충만케 하신
다(또는, 그들에게 임하신다.) (행 4:8,31;7:55;10:44 ; 19:6). 그러므로 이같은 경험은
그들의 영적 성숙의 증거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와는 달리 일차적으로 그것은
새 시대에 있어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징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전해지는 바 성령의 활동을 요약할 준비가 된 셈이다. 성령
은 세 번 사람들 '위에 내려 오셨고'(fell on), 두 번 그들에게 '임하셨으며'(come upon),
두 번 '부어졌다'(poured our). 이에 대응하여 믿는 이들은 두 번에 걸쳐서 성령을 '받았
고'(received), 5회에 걸쳐 성령으로 '충만해졌다'(filled with). 그리고 이런 성령의 활
동은 어김없이 가시적인, 혹은 귀에 들리는 결과들-예컨대 방언을 말한다거나, 병이 치유
되거나, 복음을 전하게 되는-을 가져왔다. 또 이같은 성령의 현시는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교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며, 봉사에 능력을 공급하였다.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성령 충만해지다'(filled with the spirit)라는 용어는 요엘이 사
용한 구약의 상징에 근거한 것이다 : "내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것은 성령의 역동적
이고 강력한 활동을 그림같이 생생하게 보도하는 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물이 흘러 넘치는
그릇이나 목이 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쏟아 부어주는 수도관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요
7:37-39을 보라.)
누가는 또한 어떤 개인들이 보통 아무런 특별한 결과를 나타냄 없이 성령 '충만하였다'
고 전한다. 예를 들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이 음식 공급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선출되었다(행 6:3). 그들 중에는 스데반이 있었는데,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행 6:5). '성령으로 충만해지다'(filled with the Spirit)라는 표현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어떤 행동을 강조하고 있음에 비하여 '성령 충만한'(full of the Spirit)이
라는 표현은 충만한 상태(being)를 암시한다(한글 성경은 구별하지 않고 있음-역주). 이
두 표현법 상의 차이는 우정 관계에 비추어 보면 알 수가 있다. 날이 감에 따라 두 친구간
의 관계는 눈에 띨 만한 어떤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더 깊어질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갑자기 기회가 생기거나, 혹은 위험이 발생하면 이 우정 관계는 특별한 행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가지 우리는 누가가 '성령 충만하다'는 말을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능력을 불어넣기
위해 수행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행위라는 의미로 일관성 있게 사용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의미가 바울의 용법과, 또는 다른 사도들이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이같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들과 어떻게 비교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되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
바울은 그의 여러 서신에서 성령의 활동에 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가
'성령 충만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단 한 번뿐이다 : "오히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filled)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시오. 그리고 모든 일
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엡 5:18-20)
여기서 '충만함을 받아'(be filled)라는 동사형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먼저, 그
것은 명령이다. 즉, 이 행위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반복적인 경험('계속하여 충만함을 받으라')이다. 이것은 누가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여기서 동사는 수동형으로 쓰이는데 이것은 충만케 하고
능력을 나타내는 분은 성령 자신임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자주 간과되어 온 사실은
복수형이라는 점이다. 즉 우선적으로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결과가 협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서로 화답하며------하나님께 노래하시오.------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말의 의미는 골로새서 3:16의 병행 구절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 분명해진다 : "그리스
도의 말씀이 풍족하게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살게 되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권하
며" 다시 말해 성령 충만은 그 결과인 가르침, 격려, 지혜 등과 같은 영적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롬12:6-8; 고전 12:8-10을 보라).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성령 충만은 영적은사의 현시(顯示)를 내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적 은사들
바울은 '성령 충만하다'는 표현을 단 한 번 사용하였지만, 그는 영적 은사에 관하여 광
범위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은사(charisma)란 문자적으로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고린
도전서 12:7, 11은 이같은 은사들의 본질과 목적을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 :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나타나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 영적 은사는 개개의 재능이나 능력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것은 성령의 현시
(나타나심), 즉 들을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그의 능력의 증거물이다. 둘째, 이 현시는 단
번에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주어지는(given) 것이다. (즉 엡 5:18의
"계속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와 같은 맥락에서, '계속하여 받으라'의 의미다.)
셋째, 이 은사들은 공동의 선(common good)-개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리스도의 몸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넷째, 은사는 각 사람을 통하여 나타
난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은사가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어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전 12:6, 7, 11).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기관이나 직분에만 제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몸의 모든 지체들이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이같은 차원, 즉 은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섯째,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성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은사를 나누
어 주신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중시하여 어떤 은사를 요구하거나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얕보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따라 자신의 방법으로 자기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 아홉 가지를 열거한다 : 지혜의 말씀, 지시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혜,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하는 능력, 영을 분간하는 능력, 방
언을 말하는 능력,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 또 다른 은사 목록이 로마서에 나온다 :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침, 권면, 남에게 주는 일, 지도하는 일, 구제하는 일.(롬 12:6-8)
우리는 여기서 이 목록들에 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영적 은사들이 자주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가. 첫째, 이 목록은 이미 확정된 범주 내에
있는 한 정적인 목록을 뜻한다기 보다는 은사의 다양성을 예시하는 임의적인 표본으로 생각
된다. 둘째, 이 목록이 반드시 영적 은사들을 그 중요도에 따라 서열을 정해 놓은 것은 아
니다.(그러나 고리도전서 12:28은 은사를 받은 세 부류의 사람들의 서열을 정하고 있다-사
도, 예언자, 교사.) 예를 들어, 구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로마서 12:8
-10의 목록에서 가장 나중에 나온다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은사로 여겨져서는 안되는 것
이다. 몸은 때에 따라 각기 다른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어느 한 지체(혹은 은사)도 항상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최상의 중요성은 오로지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은사들 중 대부분이 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또 성도들의 교제 속에 표출되는
어떤 한 능력과 언제나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성령께서 원하시는대
로 몸의 그 어떤 지체를 통해 잠재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넷째, 우리는 '자연적인' 은사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사'라고 부르면서, 마치 후자만이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울은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또한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평범한 것과 특수한 것-이것들은 우리들 인간의 경험에 토
대를 둔 개념들이다-사이에도 구별을 두지 않는다. 예언과 섬김, 가르침과 권면, 지혜의
말씀과 병고치는 은사들은 함께 나타난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강화하기 위한 성
령의 자유로운 현시다.
은사적 차원
그리스도인의 삶에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 중 두 가지 차원은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처음에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 또는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나게 하는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다."(딛 3:5) 그 결과 믿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있고, 그는 또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만은 아니다 : "우리는------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이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각 사람과 연합된다.
(여기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말은 모든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처음
시작할 때 경험한 유일무이한 사건을 묘사한다. 한편 사도행전에서는 이 말을 효과적인
복은 증거와 전파를 위해 제자들이 반복적으로 체험하였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이것을
예수께서는 '능력을 받다'로, 누가는 '성령 충만함을 받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오해와
논쟁을 피하기 위해 두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을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구원을 위한 성령
충만-바울의 용법-과, 섬김을 위한 성령 충만-누가의 용법-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두 번째 차원은 새롭게 된 삶이 발전 해 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화(sanctification), 즉 거룩함에 있어서 자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해지는 그것입니다.------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셔서"(살전 4:3;5:23).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인이 요긴하게
쓸 귀하고 거룩한 그롯이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알맞는 그룻이" 되기 위해서 불미한
것에서 돌아설 것을 권면한다(딤후 2:21).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향한 성숙
한 사랑의 삶을 살아 감에 있어서-때로는 대가를 치르더라도-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그는 또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를 개발시키신다.
전통적으로 영적 은사들은 성화의 한 측면-주를 섬기기 위해 발견되고 개발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나 재능-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영적 은사의 현시에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측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세 번째 차원으로써, 성숙의 정도가 서로 다른 지체들을 통하여 몸의 특별한 필요들을 충족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성령의 활동은 한 개인의 능력을 이용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
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누가는 새 시대를 오게 하고 교회를 확장시키는 성령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그
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함으로써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를 고무시키고 기독교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 영적 은사가 차지하는 위치
에 특별히 주목한다.
그러나 이 두 저자들은 모두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은사적 차원, 즉 어떤 특별한 결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예언이건 지혜의 말씀이건, 병고치는 일이건 구제
하는 일이건, 들을 수 있거나 혹은 볼 수 있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 즉, 성력의 능력을 나
타내 보이거나 입증하는 사건이 있게 되는 것이다.
누가와 바울 그 누구도 이런 경험을 영적 성숙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별개의 단계로 간주하
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증거와 섬김에 힘을 얻기 위해 반
복적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성령은 젊은이와 늙은이에게, 남자와
여자들에게 부어졌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몸의 각 지체가 어떤 은사를 나타내는
것은 공도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성령의 활동에 있어서 이 은사적 차원은 영적 성장의 매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이 교회와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일
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영적 은사의 현시는 '그리스도를 초월하는' 경험이 아니다. 신약 전체를 통해 성령
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사역은 서로 얽혀 있다. 만약 칭의가 우리를 위해 마련된 그리스
도의 의라고 한다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생명이며, 성화는 우리 안에 형성된
그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편 성령 충만이나 은사의 현시는 그의 몸을 강화하고
세상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우리를 통한 그리스도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와 은사 사이의 구별이 가끔 불분명할 때가 있다. 자주 이들 중 하나가 희생
을 통하여 다른 하나가 중시되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차이와 동시에 이들이 어
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
와 절제인데"(갈 5:22-23)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이런 낱말들은 삶
의 질을 표시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최종적인 가치 평가 기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첫 번째 차이는 존재와 행위, 즉 인격과 행위 사이에 놓여 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
도인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를 묘사한다. 즉, 사랑이 많고, 기뻐하며, 참을성 있
고,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서 행하는 행위를 묘사한다. 즉 가르침, 섬김, 지혜의 말씀을 함, 또는 병고침 등이 그것
이다.
두 번째,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만들어 내기를 바라는 그리
스도의 성품을 뜻한다. 아무도 "내가 사랑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 열매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모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
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몸의 각 지체들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대로 다양한 은
사들을 발휘한다.
세 번째, 성령의 열매가 모든 시대, 어느 곳에서나 주어지는 반면, 성령의 은사는 특별한
필요에 따라 주어진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느 경우에나 영적인 열매를 기대
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예언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 사이의 이런 구별을 희미하게 하지도 않고 그 연관성을 배척
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사랑과 자제 속에서 발휘될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
의 영적 은사의 목록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열
매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한편 다른 이들은 성령 충만
의 참된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 중 어느 하
나만을 선택하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 모두가 교회의 건강과 효율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은사
전통 신학과 미국식 개인주의가 결합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자기 중심적 접근 방식을
조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나의 은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
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용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이렇게 묻도록 압력을
가한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완성될 수 있으며 나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사적인 필요와 관련지을 때 중요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성령의 은사에 관한 신약의 강조점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성경에서는 그리스
도의 몸과 그 필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만 나타난다.
은사에 대해 다룬 바울의 두 가지 중대한 논의(롬 12;3-8과 로전 12:1-3)와 은사를 받은
개인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엡 4:1-16)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모텔은 분명
통일성과 다양성 속에 있는 지체들을 통해 기능하는 몸이다. 은사란 공동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나타나심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가 그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들 증의 어떤 이들
은 '그들이'가지고 있는 은사의 지위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책망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귀중한 은혜의 선물
을 열심으로 사모하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고전
12:31)이 길이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매우 감명깊게 선포되고 있는 사랑의 길이다.
내가 몸의 필요에 초점을 맞출때, 나는 어떤 은사들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와 그 은사
들을 다른 은사들과 비교하는 것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바울은 또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개인들, 즉 보다 자주 그리고 보다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를 지닌 몸의 지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전
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기는 일
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엡 4:11-12) 이런 은사를 소유한 사
람들은 그들의 직분을 발휘함으로써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도
록 무장시켜 준다.
고린도전서 14:26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그러면 형제들이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찬미
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하는 사
람도 있고 그것을 통역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모든 것을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합
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 몸의 필요, 지체들의 유익, 그리고 그가 원
하시는 대로 은사를 나타내시는 성령의 자유(고전 12:17,11). 우리의 예배 의식은 전통적으
로 각 사람이 기여할 바를 미리 파악하여 계획되기 때문에, 우리가 예측불가능한 이러한 역
동적인 모델을 받아들이기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성령 충만하려면
아직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나는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가? 나는 성령께서 나를 통해 그의 은사를 나타내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도 자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책임이 있는가?
우선, 우리는 모든 신인적(divine-human) 행위에는 신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
요가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셩령의 활
동을 예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누가와 바울은 모두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
서 언제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누가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으며 주의 모든 계명과 규
례를 어김없이 지켰다."고 말한다(눅 1:6). 마찬가지로 시므온은 "바르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은 분명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누가는 또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그들은
------다함께 마음을 합하여 기도에만 힘썼습니다."(행 1:14) 그 후 "오순절이 되어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행 2:1,4). 제자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며,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의 사명
을 위해 권능을 받았던 것이다.
바울도 그 전달 방식은 다르지만 동일한 메시지를 많이 전하고 있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따라 살며"(롬 8:6), "성령이 지도하시는 대로 따라 행하라고"
(갈 5:16) 권면한다.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마시오.------모든 악
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과 그리고 온갖 악의를 내어버리시오."(엡 4:30, 31)라고
경고한다. 또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마시오."(살전 5:19-20)라고 경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어떤 은사들에 대해서 잘못된 태도
를 가짐으로써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제한시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성령의 활동의 협력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충만
함을 받으라."(엡 5:18)는 명령이 복수형으로 주어졌음과, 그 결과로서의 은사가 공동체 내
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다. 바울은 은사들에 관한 세 곳의 주요한 가르침
속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
하며"(롬 12:9-10).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몸 전체는 "모든 지체가 서
로 어울려 사랑 안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엡 4:15-16) 내가 아무리 위대한 성령의 은사
를 나타낸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사랑을 힘써 구하시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열심히 구하시오."(고전 13:2;14:1). 사랑이라는 토양과 기대감이라는
공기는 성령께서 그의 은사를 나타내시기 위한 가장 훌륭한 기후를 재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생각할
때 혼란스럽다거나, 우리가 우리의 은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분석하면서 수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성령의 활동에 언제나 관계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자. 다음의 물
음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나의 삶은 그 목표와 매일의 결정에 있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놓여지고
있는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회심의 순간뿐만 아니라 살아 가면서도 '예수는 주'라고 고
백하게 된다.
2.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반응은 점점 더 예수를 닮아 가고 있는가? 성령의
열매란 우리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3.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과 같은 도덕적, 윤리적 결정을 하는가?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룩하여 주님을 섬기는 데 쓸모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4.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성령께
서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도록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예배, 전도, 봉사에 능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이 그리
스도 몸의 각 지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살아 갈 때, 상황이
요구하거나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 기름부음, 능력 주심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은사를 기대할 것 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
음과 같은 결의로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자.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통일
성을,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는 사랑을!'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령의 충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4장 16절인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
내주하심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령의 영원한 내주하심은
선택된 몇몇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 결론을 지지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고,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요 7:37-39).
둘째, 성령은 구원 받는 순간에 주어집니다(엡 1:13).
갈라디아서 3장 2절은
똑같은 진리를 강조하는데,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하심은 사람이 믿을 때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 또는 증명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고후 1:22; 엡
4:30).
이는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언급된 성령충만과 대조가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소유하실 수 있도록, 곧 우리 안에
충만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성령께 완전히 순복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9절과 에베소서 1장 13-14절은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께서는 근심하실 수 있고(엡 4:30), 우리 안에서 그분의 활동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살전 5:19).
우리가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나 그분의 능력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주관하시면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맘껏 장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행사되면서 우리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열매가 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외부적인
행위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행위를 주관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동기에도 적용이 됩니다.
시편 19장
14절은 말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죄는 성령 충만을 방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충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곧바로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하고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해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1. 성령 충만이란
신약 성경에서 "성령 충만"은 헬라어로 <플레레오. πληρόω. plēroō>
또는 <플레레스. πλήρης plērēs>가 사용되며,
"가득 채워진다", "완전히 영향을 받는다", "통제되다/지배되다"는 의미를 가짐. 성령 충만은 단지 감정적 고양 상태가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영향 아래에 전 인격이 놓인 상태를 의미함 (에베소서 5:18 참조).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구약에 나타난 성령충만)
히브리어 구약에서는 직접적인 "성령 충만" 표현은 없지만, 루아흐(רוּחַ) 여호와의 영이 임해 사람을 능력 있게 하시고 이끄시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함 (예: 사사기 14:6, 미가야 선지자 – 열왕기상 22:24).
1) 성경적 근거
-
에베소서 5: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사도행전 4:31 / “기도하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2) 신학적 의미
- 성령 충만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상태임.
- 충만은 능력 뿐 아니라 인격적 지배를 의미함. 즉, 성령이 우리 마음과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상태임.
- 개혁신학에서는 ‘성령 충만’을 감정적 열광으로 오해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성경 말씀에)에 복종하는 삶의 상태로 이해함.
3) 충만의 목적과 열매
| 목적 | 예시 | 근거 성경 |
| 담대하게 복음을 전함 | 베드로와 사도들 | 행 4:8, 4:31 |
| 공동체 안의 사랑과 질서 | 초대교회 | 행 2:42–47 |
|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 | 개인 신자 | 갈 5:16–25 |
| 찬양과 감사의 삶 | 에베소 교회 | 엡 5:19–20 |
4) 성령 충만하면 나타나는 현상
-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자 안간힘을 씀 (why? 인간 내부에 거룩하게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갈 5:16–25)
- 증거와 사명 수행하고자 함 (사도행전 1:8)
-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분별하고자 함 (요한복음 16:13)
- 교회 공동체 안의 질서와 연합 유지하려고 함 (고린도전서 12장)
-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사도행전 4:31)
2. 성령 충만의 예시
구약
- 요셉 –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창세기 41:38)
- 브살렐 – 성막 건축을 위해 지혜와 기술로 충만케 함 (출 31:3)
- 사울과 다윗 – 성령의 임재와 떠남의 차이로 삶과 사역에 큰 차이 발생 (삼상 10:10, 16:14)
신약
- 오순절 제자들 – 성령 충만으로 담대하게 복음 증거 (행 2:4)
- 스데반 – 성령과 믿음 충만하여 순교까지 감당 (행 7:55)
- 바울 – 복음 전파와 기적 행함 (행 13:9)
[알기쉬운 예시] 성령 충만은 "내 마음이 성령님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임
🧃 컵과 물 비유
- 너의 마음을 컵이라고 생각해 봄.
- 성령님은 물과 같음.
- 세상 걱정, 죄,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성령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음.
- 회개하고 순종하려 할 때, 성령님이 물처럼 가득 채워주심.(하지만 이 마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
→ 성령 충만은 성령이 너의 생각, 감정, 말, 행동을 내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성경의 말씀)대로 움직이게 하시는 상태임.
실제 삶 속 예시
예시 1 : 친구에게 상처받았을 때
- 내 감정은 "화나고 복수하고 싶어!"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성령님 도와주세요"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김.
이것이 성령 충만의 열매(사랑, 용서) 중 하나임
반대로,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땐?
- 쉽게 짜증나고 화가남
- 말씀 듣고 싶지 않음
- 기도도 안 나오고, 그냥 모든 게 귀찮고 차갑고 성경과 말씀에 무관심해짐
- 이럴 땐 내가 성령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나 걱정에 마음을 빼앗긴 것임
- 성령 충만은 매일 다시 채워져야 함.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 세상 걱정, 죄, 감정으로 컵이 새고 비워지기 때문임.
- 그래서 기도, 말씀, 찬양, (말씀에) 순종 (Not 교회, 사람/목사/사역자) 으로 매일 다시 성령님께 “저를 다시 채워주세요”라고 요청해야 함.
요약
| 성령 충만이란? | 성령님이 내 마음과 행동을 인도하시는 상태 |
| 어떻게 느껴짐? | 기쁨, 평안, 용서, 감사, 순종 등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남(갈라디아서5장) |
| 어떻게 유지함? | 말씀, 기도, 찬양, 회개, 순종으로 매일 새롭게 |
| 비유로 말하면? | 내 마음의 컵이 성령으로 가득 찬 상태 |
3. 성령 충만의 방법
-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김 (골 3:16)
- 자기부인과 말씀에 순종(내 뜻에 맞지 않더라도) (눅 9:23, 요 14:15–17)
- 회개와 거룩한 삶에 대한 사모 (행 2:38)
- 예배와 찬송, 감사 (엡 5:18–20)
4. 성령 충만에 대한 관점 비교
| 구분 | 성령 충만의 정의 | 방법 | 반복성 여부 | 성령 충만을 잃을 수 있는지? |
| 개혁주의 | 말씀과 성례를 통한 지속적 성령의 통치 | 말씀, 회개, 순종 | 반복됨 (성화 과정) | 있음 (은혜의 단절은 아님) |
| 오순절/은사주의 | 성령 세례 = 성령 충만 | 방언, 체험, 간구 | 반복적 체험 가능 | 있음 (심지어 구원의 상실 주장도 일부 : 위험한 사상) |
| 번영신학 | 축복과 능력을 위한 충만 | 믿음의 선언, 기도 | 자주 요구됨 | 있음 (축복 상실의 원인) |
| 신제자운동 | 제자도의 헌신을 통한 충만 | 철저한 순종, 제자훈련 | 지속적 추구 | 있음 (사명에서 멀어질 수 있음) |
5. 성령 충만은 "비워짐"이 가능한가?
성령 자체가 떠나시는 것(구원의 단절)은 참된 성도에게는 없지만, 성령의 충만하신 영향력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제한될 수 있음. 다윗의 고백이 그 예임.
시편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신약에서도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고 권면하며, 이는 그분의 역사와 인도하심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말라는 뜻임.
성령의 사역을 통합적으로 정리하면
| 존재적 사역 | 내주하심 |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심 (롬 8:9) |
| 구원 사역 | 중생, 인치심, 확신 | 구원받은 자로서의 확증과 능력 부여 |
| 성화 사역 | 열매, 인도, 충만 | 거룩한 삶과 인격적 변화 |
| 사역적 은혜 | 은사, 능력, 지혜 |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사역 능력 |
| 종말적 역할 | 부활과 영화 | 최후의 부활과 완전한 영화까지 함께하심 |
결론 :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
- 은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 열매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
- 인도와 충만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모든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성령께서 지금도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임.
결론 요약
- 성령 충만은 성령께 통제받고 인도받는 상태를 의미함.
-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성령의 충만하심이 존재했으며, 오순절 이후 더 보편화됨.
- 충만은 단회적이 아닌 반복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상태임. (거룩함의 추구 : 예수님 닮기를 매일 추구)
- 성령 충만은 우리 삶의 거룩, 사명, 지혜, 연합을 위해 필수적임.
- 교파마다 강조점은 다르나, 성경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충만을 추구하라고 권면함.
11월 28일(금) 사도행전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령이 충만하여(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After they prayed, the place where they were meeting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spoke the
word of God boldly.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씀이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보면 여덟 구절로 나타납니다(인터넷 다국어 성경 참조).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씀은 성령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만이 구원자가 되신다(4:1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2.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 칭찬 받는 일군을 선택하다(6:3, 5)
4. 순교한다(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 안수하여 치유한다(9:17)
6. 사울이 충만하여(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7. 기쁨이 충만하다(13:52)
신약 난해구절 해설
이 질문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120문도라는 대답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그냥 ‘모두’라고 되어 있어서 누구에게 성령이 임했는지 말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제시되었다.
숫자가 적은 학설로부터 소개하자면,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첫째. 사도 보궐선거로 충원된 맛디아를 포함한 12사도이다.
둘째. 행 1:13~14에 열거된 11사도(물론 맛디아도 포함되어 12사도가
됨)와 그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과 아우들이다.
셋째. 행 1:15에
언급된 120여 명의 문도들이다.
이 학설은 12사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설과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로 나누인다.
넷째.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시에 보이신 500여 성도들(참조. 고전 15:6)이다.
이러한 네 가지 학설들 가운데에서 정답은 오순절 날 한 곳에 모인 ‘모두’(판테스)가 누구인지를 규명해야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누가문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에서 보면, ‘모두’는 보궐선거로 선택된 맛디아를 포함한 열 두 사도들이 된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성령강림 보도(행 2:1~13)는 열 두 사도를 언급하는 구절로 감싸여 있다.
이 보도 바로 앞에, 즉 맛디아의
사도 선출 기사의 맨 끝에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 1:26)란 구절이 나오고, 이 기사 바로 직후에, 즉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시작을 설명할 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행 2:14)란 구절이 등장한다.
이렇게 성령강림기사는 열 두
사도에 관한 어구로 감싸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모두”는 분명히 열두 사도를 지시한다.
그것을 뛰어 넘어서 행 1:15의
120여 문도나 행 1:13~14에 묘사된 사람들을 지시하지 않는다.
둘째. 좀 더 원거리에 나오는 ‘모두’도 다 사도들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성령강림 기사 제법 앞에 있는 행 1:14의
‘모두’(개역개정성경에는 13절 끝부분에 ‘다’로 되어 있음)도 사도들의 동아리를 지시한다. 성령강림 기사 뒤에 나오는 오순절
설교 중에 있는 행 2장32절의 우리 ‘모두’(역시 개역개정성경에는 우리가 ‘다’로 되어 있음)는 열 두 사도로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증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 저자 누가는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 엘리사 동기를 그의 두 권의 책을 집필할 때 예수와 그의 제자인 사도들의
이야기에 모형으로 삼는다.
특히 엘리야가 승천한 후에 엘리사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주제는 ‘예수가 승천한 후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주제의 전형이 된다.
넷째. 저자 누가는 또한 모세와 70인 장로의 동기를 그의 두 권의 책을 집필할 때 예수와 사도들 이야기의 모형으로
삼는다.
특히 모세에게 임한 성령이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릴 70인 장로들에게 임한다(민11:16~17.24~29)는 주제는
예수에게 임한 성령이 새로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열 두 사도들(비교. 눅 22:28~30)에게 임한다는 주제의 전형이
된다.
다섯째.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사도들과 성도들의 구분이 뚜렷하다.
열 두 사도들은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열 두 지파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들이다(참조. 눅 22:28~30).
그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더불어 서서 행한 설교로 결국 약 3000명의 유대인이 회심해 세례를 받게
된다(비교. 행 2:41).
이들은 최초로 형성된 새 이스라엘 백성에 해당한다.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인 열 두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무장하고 설교를 통하여 자기들이 다스릴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은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
그러므로 첫 성령강림절에
120 문도가 아니라 사도들이 어떻게 되고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120 문도는 사도의 보궐선거에 단 한번
나와서 사도들의 들러리 역할을 한 셈이다.
120 문도라고 하는 학설은 6절의 소리(헬라어 ‘포네’)가 사람이 내는 소리를 말하고,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오려면 120명이 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집필 용법과 헬라어 문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주장이다.
‘포네’는 인간의 소리만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는 소리로도 사용된다.
혹시 ‘포네’가 복수라면, 모인 사람들 모두가 내는 다른
언어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수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늘로부터 난 강력한 바람 같은 소리(헬라어 ‘에쿄스’)를 지시한다.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대신에 동의이어를 애용하는 저자가 6절에서 ‘에쿄스’를 반복하지 않고 동의이어적인 ‘포네’를 사용한
것이다.
이상으로 오순절 날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12사도들이다.
천하 각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은 모두가 다른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 강력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고 몰려왔다.
그들은 와서 12사도들이
내는 다른 언어들을 듣고 그 내용을 알고 놀라거나, 혹은 그 내용을 몰라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
간절(懇切) : 貇 간절할 간 / 切 끊을 절 - 지성스럽고 절실함
누가복음 22:44. 개역개정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더욱 간절히(에크테네스테론. ĕktĕnĕstĕrŏn) ἐκτενέστερον
Storng number 1617
Pronunciation [ ĕktĕnĕstĕrŏn ]
- Etymology / 1618의 합성어에서 유래
-
1. 매우, 열심히, 눅 22:44.
-
관련 성경 / 더욱 간절히(눅 22:44)
1618. 에크테네스(ĕktĕnēs) ἐκτενής, ές
Pronunciation [ ĕktĕnēs ]
- Etymology / 1614에서 유래
-
1. 열심 있는, 진지한, 행 12:5, 벧전 4:8.
-
관련 성경 / 간절한(행 12:5), 뜨거운(벧전 4:8).
야고보서 5:17

Pronunciation [ prŏsĕuchē ]
- Etymology / 4336에서 유래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관련 성경 / 기도(막 9:29, 행 3:1, 딤전 2:1), 기도하는 곳, 기도실(행 16:13), 구하는 것(마 21:22), 기도하기(행 2:42).
Pronunciation [ prŏsĕuchŏmai ]
- Etymology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
1. 기도하다, 막1:35, 눅1:10, 행1:24.
-
관련 성경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성정이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모이오파데스'는 '유사한'을 의미하는 '호모이오스'와 '고난'을 뜻하는 '파도스'의 합성어로 엘리야도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낸다(왕상 17:11;19:3;행 10:26, Vincent, Blue).
이는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서 초능력적인 자질을 소유하여 비를 그치고 내리게 하는 역사를 행한 것이 아님을 시사함과 동시에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게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적 존재인 것을 부각시켜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Burdick, Mayor, Moo).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 응답을 받은 역사를 나타낸다.
'간절히 기도한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문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는 문자적으로 '기도로 기도했다'는 전형적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강조 구문이다(창 2:17; 눅 22:15; 요 3:29; 행 4:17,Gibson, Tasker, Manton).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엘리야가 기도할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묘사되어 있다(왕상 17:1; 18:42).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아 비를 그치게도 하고 내리게도 하였다.
한편 본문에서는 한발(旱魃)의 기간에 대해 '삼 년 육 개월'이라 하나 왕상 18:1에는 '제 삼 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3년 6개월이 가뭄의 전체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왕상 17장에 기록된 사건들의 전체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해결된다(눅 4:25).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야고보가 왕상의 내용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Lenski, Manton, Macknight).
이사야 26:16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백성이 환난 중에...주께 기도하였나이다
- 선지자의 사고(思考)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온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신앙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일상에서 겪는 경험적 현실 - '환난'과 '징벌'로 표현된 - 앞에서 신자들은 거듭거듭 심각한 무력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Oswalt).
간절히(추쿠. tsûwq) צוּק
Storng number 6694
Pronunciation [ tsûwq ]
Old Testament / 4회 사용
-
1. 원형 붓다, 욥 26:9, 28:2, [은유적으로] 사 26:16
-
2. 원형 세우다.
-
관련 성경 / 녹이다(욥 28:2), 흘려내다(욥 29:6)
인생의 절정에서 뜻밖의 고난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당시 41세)는 오페라 공연 중 백혈병 진단을 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 제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겠습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무대에 섰을 때, 그의 노래는 이전과는 달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선사했습니다.그는 청중들에게 "질병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 나라를 노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2장 1-5절 말씀을 통해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삶에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헤롯 왕의 박해 속에서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베드로 사도마저 투옥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직 한 가지 일에 전념했습니다.
바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간절한 기도를 통해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첫째, 간절한 기도는 고난을 넘어섭니다.
고난은 기도 훈련 학교에 초청하는 초대장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들을 기도할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고난을 통해 기도의 능력을 배우고 훈련하면, 평상시에도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 웬만한 고난은 우리를 흔들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은 로마 황제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유대와 갈릴리 등지를 다스리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에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이제 베드로 사도마저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무교절 기간이라 즉시 처형할 수는 없었지만,
7일간의 축제가 끝나면 베드로를 처형할 계획이었습니다.
16명의 군인이 철통같이 베드로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베드로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였습니다.
교회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잃은 슬픔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 베드로 사도마저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회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은 말씀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여기서 '간절히'라는 말은 '간이 저리도록' 기도했다는 표현처럼, 온 힘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의미입니다.
무교절 축제 기간 7일 내내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성도에게 아무런 힘이 없을 때,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로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예레미야 33:2-3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지나?
요즈음처럼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니 희망의 실타래라도 붙잡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이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이다.
과연 간절히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날까?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쇼에서 소개해서 유명세를 타게 된 #Secret 이라는
자기 개발서가 이 [간절함이 담긴 기도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 책의 핵심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간절히 바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프라가 자신의 쇼에서 이 책을 소개하자 이미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자신도 그렇게 성공했다는 간증이 줄을 이었다.
유명인사들 대열에 심지어는 박근혜 대통령도 한 몫 했다.
어린이 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에게 간절히 바라면 다 이뤄진다는 간증을
남겼다.
이미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줄줄이 이런 주장을 하자 이것은 그냥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래도 일각에서 이런 간절한 기도가 무슨 과학적인 근거가 있느냐고 추궁에 들어가자 #NLP (Neuro
Linguistic Program) 이라는 프로그램이 들고 일어났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간절함은 뇌에 암시를 주게 되고 이
암시를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뇌과학을 이용해서 기적을 설명한다.
심지어 이들은 뇌에 암시를 주기 위한
주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과학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절차를 따르면 똑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NLP에서의
주장은 뇌과학적 포장을 하지만 엄격한 과학적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심령술이나 유사 심리학 등에서 사용하는 방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의 주장들은 이런 #심령과학적 주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실제로 기적처럼 일어나기도 하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없을까?
본인도
사회 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 구조적이거나 제도적 장애가 더 크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이 간절히 텔레파시를 보낸다고 해서
이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것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날 개연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교육이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나향욱 정책관과 같은 사람들 때문에 고질화 되었다고 보고 이와 같은 사람들을 전부 해고 시켜
달라고 혼자 간절히 기도한다고 이들이 해고 당하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원리와 같다.
하지만 우연히 LittleBoy 라는
영화를 보다가 이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설명해주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스토리는 8살 짜리 소년의
이야기이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아 놀림감이 되고 있는 주인공은 믿음이 좋은 소년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평발인
형 대신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나자 아버지를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찾아 나선다.
아버지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전쟁이 빨리 끝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전쟁이 빨리 끝나게 하는 기적을 간구하다가 뭐든지 간절하게 바라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사기꾼의 말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다.
자신 또래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단순히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놀리자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부님을 찾아가 고충을 털어 놓는다.
이때 이 신부님은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이뤄지는 원리를 아주 쉽게 설명한다.
기적을
보여줄테니 아이에게 테이블에 있는 물병을 옮기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보라고 주문한다.
아이가 이 말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자 신부님은 기다렸다가 자신이 물병을 옮겨 놓는다.
아이가 신부님이 물병을 옮기는 것을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하자
신부님이 기적의 원리를 설명한다.
기적은 자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이들의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의 간절한 기도가 신부님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물병을 옮겨 놨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은 비슷한 실화를 담은 영화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Paying Forward]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도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집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선한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하고 진정성이 넘치는 간절한 스토리에 의해 집단적으로 마음이
움직였을 때 이들의 자발적 행동이 집단 행동으로 동원되고 이 집단 행동을 통해서 제도나 사회 구조가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종교 등과 같이 이미 믿음의 플랫폼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기도이던지 간절하고 진정성이 넘치는 선한
스토리의 기준만 통과한다면 플랫폼을 공유한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쉽게 전파될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플랫폼은 있어도 종교가 산출하는 스토리가 이미 진정성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요즈음 한국 기독교가 기복적인 요소로 많이 흐르고 있다.
실제로 자신과 자신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 기도가 늘고
있다. 물론 이런 기복적 기도도 전혀 안 하는 사람들보다는 일어날 확율이 높겠지만 실제로 이런 기도 응답을 받은 사건들을 조사를
해보면 일반 확률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플랫폼을 공유하고 진정성이 있는 스토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적 울림을 줄 수 없다면 세상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강청함’ 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데이아’ 라는 말이 예수님 당대와 그 이전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이 ‘아나데이아’ 가 당시의 수많은 헬라어 문헌에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혹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 등등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교부시대를 거쳐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부터 유감스럽게도 점점 ‘강청함’이나 ‘끈질김’ 등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세 시대는 교회가 확고하게 조직으로서 제도화되는 시기입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즉 교회에 헌신적으로 열심히 봉사할 신도가 필수적입니다
이렇게 제도 교회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중세시대 라틴어 번역본 부터 헬라어 아나데이아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뜻에서
열심히 기도함, ‘끈질기게 졸라댐’, ‘강청함’ 등으로 달리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끈질기게, 귀찮게 졸라대는 것과 부그러움, 수치심을 피하는 것은 그 뜻에 있어서 상당한 간격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도 거의 예외 없이 이 말을 끈덕지게 졸라대는 것, 간청함 으로만 번역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이 본문을 강청하는 기도, 졸라대는 기도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본문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예수님이 집안에서 잠자고 있던 친구가 밤중에 떡 세덩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을 인용하여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가 없노라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침실에 이미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가 없노라 하겠느냐?’ 라는 이 말은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당연히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혹여 우리가 잠자리에 들었다 할지라도 친구가 떡을 꾸러 왔다면 일어나 그에게 떡을 꾸어주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해야 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마땅히 가져야 할 품성으로써 요구신 것입니다
따라서 손님이 왔을 때 그를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은 크나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귀찮아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떡을 구하는 이웃의 청을 거절했다면 이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커다란 수치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간청함’으로 인해 일어나 떡을 꾸어줄 수 밖에 없다는 말은 강청함 때문이 아닌 자신이 당할 부끄러움, 수치심을 면하기 인해
떡을 꾸어준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다시 살펴본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 떼를 쓰고 간청하면 들어주신다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굳이 떼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은 당연히 자녀들에게 그 필요에 따라 채워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기도란 떼를 쓰듯 끈질긴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응답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또한 이와 비슷한 오해를 가지게 합니다
같은 누가 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 말씀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습니다
이 재판장에게 한 과부가 찾아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재판장은 과부의 사연을 귀담아 듣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쉽게 아.. 재판장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었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죽자 사자 매달리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시는 구나
그러니까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들어주실때까지 끝장을 봐야 하는구나 라는 결론이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 역시 첫번째 비유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하기 보다는 우리의 입맛대로, 우리의 의도대로 읽기 때문에 주어지는 해석일 뿐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과부의 요청은 (즉 과부의 기도 제목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기도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
단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입니다
즉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원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고
재판장이 한 일도 단지 이 과부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 떼쓰면,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기도든지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 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원한, 억울함을 못본체 하지 아니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비유에서 또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바는
하나님을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는) 재판장에 비유하는 것인데
이 또한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재판장처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야만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재판장에게 끈덕지게 간청한 이유는
재판장이 불의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불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18:7 을 보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라는 이 말은
재판장은 불의하기 때문에 끈덕지게 귀찮게 해야만 들어주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신 분이란 뉘앙스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기도 할 때에는 과부처럼 끈질기게,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라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또한 그 성도의 고통을 당연히 풀어주시는 분이시기에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말씀의 시작은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는 기도란 단지 기도 응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은 기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을 늘 살피시고 언제나 나의 인생을 가장 최상의 길로 인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관해 아니 더 정확히는, 기도 응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답답해 하고, 궁금해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기도를 단지 나의 요구 사항을 해결하는 수단이요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수단이자 도구가 내 생각대로, 나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답답해지고 ‘ 왜 그러지?’ 하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공명하게 되면 즉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답답함과 의문은 사라지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의미가 깨달아 지면 의문과 의심, 답답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기도를 수단이라 한다면 그것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고,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을 깨달아 가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임을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기도를 통해 이를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깨달아 갈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 기도에 관한 두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기도란 단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기 위해 혹은 하나님이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알게하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의 방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기도와는 상관없이 늘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으로만 보지말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통로로 삼아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이 가운데 나의 인생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깊이 있는 기도생활,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고집
건방짐
뻔뻔스러움
-
Pronunciation [ anaidĕia ]
- Etymology
- 1[부정불변사]과 127의 합성어에서 유래
-
1.고집, 건방짐, 뻔뻔스러움, 파렴치함, 부끄러움을 모름, 눅11:8.
Related Words
-
관련 성경간청함(눅11:8).
1.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여러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도 불안하고, 제 생각을 의지해도 흔들리기만 합니다.
이 불확실함 속에서 두려움이 커져만 가고, 마음은
무겁고 지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주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 붙듭니다.
주님은 광야에서도 길을 내시고, 사막에서도 강을 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눈에는 이미 모든 길이 펼쳐져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주님, 저를
인도해주세요. 제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제 발을 주의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세요.
내일을 알 수 없어도 오늘 주님을 신뢰하는 용기를 주세요.
주님의 뜻이라면 기다리겠습니다.
멈춰 있는 이 시간이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기회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계획 속에 있는 소망을 붙잡게 하소서.
언제나 저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오늘도 한
걸음 내딛습니다.
말씀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5-6
2. 마음이 지칠 때 드리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제 마음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피곤하고, 괜찮은 척하지만 속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와 아픔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숨 쉬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주님, 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세요. 따뜻한 손으로 토닥여 주시고, 내 영혼에 쉼을 허락해주세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더는 제 힘으로 버티지 않겠습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품에서 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제가 주님을 놓쳐도, 주님은 결코 저를 놓지 않으심을 압니다. 그 사랑으로 저를 회복시켜 주세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주시고, 주님의 평안이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소서.
오늘도 버텨냈음을 감사하며, 내일도 주님 손 붙들고 걸어가겠습니다. 지친 제 마음에, 주님의 생명이 다시 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3. 가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
주님,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있지만, 때로는 서로의 마음이 멀게 느껴지고,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또 상처 주는 일이 반복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가족은 주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선물임을 믿습니다.
몸이 아픈 가족이 있다면 주님의 치유의 손길로 만져주시고, 마음이 무너진 가족이 있다면 주님의 위로로 회복시켜 주세요. 무엇보다도 주님을 먼저 찾는 가정 되게 하시고, 사랑이 중심이 되는 관계가 회복되게 하소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실수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세요.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의 대화를 주관해 주세요. 혹시 믿음에서 멀어진 가족이 있다면,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은혜를 부어주세요.
하나님, 우리 가정이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게 하시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기도하며 이겨내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우리 집안에 주님의 평강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말씀 :
“너와 네 집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도행전 16:31
4.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는 병상 위에 누워있습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통증이 느껴지고, 몸이 아프니 마음도 함께 무너져만 갑니다. 이 시간에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주님의 손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이 아픈 몸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병원 치료와 약보다 더 강한 주님의 능력이 제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제 몸을 덮으시고, 세포 하나하나가 주의 이름으로 회복되게 하소서. 저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또한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지길 소망합니다. 아픔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게 하소서.
저뿐만 아니라 이 병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주님의 평안을 부어주세요. 간호하는 손길에도 주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시고, 이 병실 안에 주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하소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주시고, 회복의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편 34:18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따른다 했지만, 삶으로는 제 뜻을 따랐습니다.
반복되는 실수와 유혹에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낙심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더 이상 숨지 않겠습니다. 제 죄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합니다.
행동으로, 말로, 마음으로 지은 죄를 용서해주세요.
저의 중심을 살펴주시고, 정결하게 씻어 주세요.
더 이상 죄의 습관 속에 살지 않도록, 성령님 도와주세요.
주님의 은혜가 제 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이 제 수치보다 깊음을 믿습니다.
오늘 이 기도를 통해 다시 주님께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주의 십자가를 붙잡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보혈로 제 죄가 사해졌음을 믿고,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말씀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9
마무리하며…
기도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대화입니다.
말이 부족해도, 눈물밖에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은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아시고, 단 한 마디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이 힘들고, 길이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한 마디만 불러보세요.
주님은 그 이름을 부르는 이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초대교회의 기도생활
우리는 지금까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생활과 기도에 관한 그의 교훈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기도생활이 모범을 계속 보이면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권면하셨다.
우리가 본 바 대로 에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바른 기도의 내용, 방법, 그리고 응답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18장에서는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의 바른 자세인 겸손에 대해 말씀했다. 이 기도는 쉼이 없는 밤과 낮의 기도였다. 예수님은 21장에서 또한 그날과 그 시를 모르는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이 항상 꺠어 기도하는 삶임을 가르치셨다. 항상 꺠어 있는 기도생활을 통해서만 주님의 재림 전에 있을 마지막 환난을 믿음으로 잘 이기고, 재림하시는 인자 앞에 신앙을 인정받는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기도생활 을 계속해서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한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 전혀 주님을 닮지 않았던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 이후 그분이 보여주신 기도의 본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사도행전 전체에 묘사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모습은 마침내 예수님을 닮아 철저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하는 모습이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에 관한 언급이 제일 많은 책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에서 기도가 33번 언급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체 28장 중 기도가 언급되지 않는 장은 15,17-19, 23-26 장 뿐이다.이 장들에서 기도의 언급이 없는 것은 이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에 기도가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 늘 따르던 기적들이 줄을 이어 일어났다. 주님이 오랫동안 원하셨던 기도하는 제자들이 되어가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보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기도생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본 장과 다음 장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과 초대교회 기도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본 장에서는 사도들과 120문도의 기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특성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1.120문도의 기도(행1:12-14)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샬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빛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2-14) 이제 주님의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주님을 전송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인다(13절) 예수님의 11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전도 여행을 따라 다니며 수종을 들었던 여자들과 그의 어머니 형제들이 함께 모였다. 이들과 다른 사람들을 함쳐 총 120여명 정도가 이 다락방에 모이게 되었다(15절).그들이 모인 다락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다락방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락방은 아주 작아서 몇 사람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그 안에 설 수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상 가장 좋은 방은 위쪽에 있는 다락방이다. 이 다락방은 오늘날 집이나 아파트의 큰 거실에 해당한다. 다락방은 맨 위층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웃거릴 수 없을 뿐 아니라 , 거리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 가장 좋은 방이었다. 그래서 이 방은 주로 회집 장소나 공부방, 기도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다락방을 사람에게 대여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을 통해선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3절에 "저희 유하는 다락" 이라고 한 것을 보아 제자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장소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다락방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한 장소요(막 14:12-16),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후에 제자들이 숨어 있던 장소,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장소라고 한다(눅24:33-43;요20:19), 아마도 본문에 언급된 "여자들" 중 한 사람의 집이 아닌가 추측한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회집 장소와 기도 장소로 쓰인 점을 볼 때 마리아의 집일 가능성이 높다. 누구의 집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이다. 이 기도의 모임의 주도자는 베드로였다. 13-14절에 제자들 이름 중 베드로가 제일 먼저 언급되었고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하는 것을 보아서(15-22) 그가 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120명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이러한 합심기도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주님의 당부에 대한 순종이었다.(눅 24:49;행1:4),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을 기다렸으며 이 기도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합심기도였다. 이 기도가 초대교회의 근본적인 특징을 형성한다. 우리는 특별히 120문도들이 "기도에 전혀 힘쎴다" 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이 동사는 '프로스칼데레오(proskartelew)'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10번 사용되었다. 그 중 4번만 제외하고(막3:9;행8:13;10:7;롬13:6) 모두 다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행1:14;2:42,46;6:4 롬 12:12;골 4:2) 이 단어가 사람을 목적으로 취할 때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 하는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신하가 상관을 성실하게 섬기는 행위(행10:7)나 제자가 스승을 성실하게 따르는 행위(행8:13)를 가르킨다. 그룬드만(Grundmann)에 따르면 이것이 물건 혹은 사물을 목적어로 취할 때 어떤 일에 집요하게 전념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다시 말해 인내를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어떤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굳게 잡아 놓치지 않고 이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기도'라는 단어를 목적어로 취할 때 이러한 의미를 전적으로 반영한다. 다시 말해서 굳게 참고 인내하며, 끈질기게, 간절하게,계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곧 기도의 인내성, 계속성,지속성, 간절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끈질기게 간절한 기도를 한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11명의 제자들만도 아니었다. 120명의 제자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한마음으로 계속적으로 기도해 왔다.(14절). 14절에 사용된 동사의 미완료 시제와 현제 분사가 보여주듯이 이 합심기도가 계속, 연속적으로 진행돼 왔음을 암시받는다. 아마도 우리는 사도들과 120문도들이 생명을 내놓고 10여 일간 전폭적으로 기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합심기도는 유대교에는 전례가 없었던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기도였다. 그룬트만의 지적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우대인들은 습관적으로 정한 시간에만 기도하곤 했다. 아침, 점심, 저녁에 간단하게 기도문에 따라 기도하는 정도였다. 이때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기도는 주기도문과 비슷한 카디쉬(Kaddish) 기도이다. "주님이 주의 뜻을 따라 창조하신 세상에서 주의 위대한 이름이 높임 받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자의 생전, 제가 사는 동안, 이스라엘의 온 집이 살아있는 동안과 그리고 가까운 장례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시옵소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른 기도문은 18항목의 축복으로 구성되었다. 18개 항목 출복 기도는 회개,용서,선택에 대한 감사,구원의 소망이 주요 내용으로 들어있다.주어진 기도 내용에 따라 습관적으로 외워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에는 간절함, 인내, 강청함이 있을 수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120명의 합심기도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쳤던 기도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주님께서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간절하게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이 누가복음에서 가르치고 명령한 기도는 간절한 기도, 인내하는 기도, 강청하는 기도, 항상 기도인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다. 이러한 가르침을 반영하는 어구가 14절에 사용된 "기도에 전혀 힘쎴다" 는 표현이다. 결국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주님이 명령하신 기도를 본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이 단어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를 집약했다고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1장이 가르치는 기도와 18장에 언급된 끈질긴 밤낮 항시의 기도를 "기도에 전념했다" 는 표현이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이런 디고는 초대교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행활 특성이 되었다(행2:41). 다시 말해서 이런 기도가 초대교회의 기도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기도를 권면할 때 마다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예루샬렘 교회의 최초 합심기도가 온 초대교회의 기도의 본보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잠시 보면, 소망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테 프로슈케 프로스칼데룬테스: te proseuxe proseuxe proskarterountes) (롬 12:12) 기도를 항상 힘쓰고 (테 프로슈케 프로스칼데룬테스: te proseuxe proseuxe proskarterountes)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엔 파세 프로스칼데레세이 : en pase proskarteresei)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고(엡5:18)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들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외에도 우리는 세 가지 면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가 철저하게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두 후보자를 천거하고 기도하는 120문도의 모습을 예수님이 12제자들을 택할 때 하셨던 기도를 반영하고 있다(눅 6:12-13). 사도행전 1장 24-25절에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요셉과 맛디아)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는 기도가 나온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고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사도로 선정하게 되었다(행1:26) 둘째,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했던 것같이(눅3:21,22), 120명의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역사가 있었다(행 2:1 이하).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1장에서 강청하는 기도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가 같이 사도행전 2장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도들과 120문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것을 그대로 본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예수님께 성령의 선물을 주셨듯이 기도하는 교회에게 성령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한 사건에도 이 점은 그대로 반영된다(행8:17). 셋째, 에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가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분명해 진 것같이 (산상 철야 기도와 감람산 기도에서), 제자들도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깨달았고 또한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유다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성경을 통해 베드로가 주장하게 되었다(행 1:20,21) 우리는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에도 모자란 사도를 보충하라는 하나님의 별도 지시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어떻게 제자들이 모자란 사도직을 보충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간절한 합심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었다. 그들의 힘을 합쳐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이 성취해야 항 하나님의 뜻이 그들 마음속에, 특별히 베드로의 마음속에 깨달아진 것이다. 그것도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깨달게 되었다. 20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시편 69편 25절과 109편 8잘에 근거하여 가룟 유다의 비참한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깨달음에 따라 그의 죽음으로 인해 모자란 사도직이 보충돼야 함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가 이 깨달음을 모인 사도들과 나머지 무리들에게 설교를 했을 때 그들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두 명을 천거하였으며, 이둘을 놓고 기도한 다음에 제비를 뽐았다. 아직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약적인 방법으로 제비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제비 뽑는 방법은 성령 강림 이후 더 이상 신약 교회에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을 주시기때문이다(행15:28) 우리는 초대교회의 합심기도의 기록을 통해 철저한 기도가 교회의 참된 모습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른 기도에 전념해야 할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에 전혀 힘쓰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된것같이 우리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일꾼들은 앞장서서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본받아 기도하게 된다. 교회의 합심기도는 각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분별하고 성취하기 위한 것이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상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온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여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분명하게 되고 또한 이 뜻이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손발을 통해서 실행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2.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특성 (다음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7개 단어는 구성된 문장은 세상 창조가 완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토라 포션=파라샤 פָרָשָׁה) 제목은 베레쉬트 בְּרֵאשִׁית 태초에 (in the begining)입니다. 내용을 보면 천지창조의 내막이 나오고 사람이 만들어 지고, 선악나무의 등장과 거짓으로 유혹하는 사탄이 등장합니다. 사탄은 열심히 거짓으로 유혹을 합니다. '너가 먹어도 죽지 않는다,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거짓 증거를 합니다' 마치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스데반을 심판대에 세우고 거짓으로 증거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토라포션 후반부는 타락한 인간모습이 나타나고 스데반을 돌로 살인하듯이 아벨 형제를 살인하는 가인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창세 처음부터 인간이 창조됨과 동시에 죄가 들어온 것과 그 결과를 말씀함으로 성경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사도행전 본문은 그 당시 스데반 한 인물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악의 세력이 스데반을 어떻게 모함하고 거짓 증거하여 심판대에 세우고 결국 살인하게 되는 첫 단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타락하고 온갖 거짓 뉴스가 넘쳐나고 비진리가 진리라고 우기는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같은 믿는 자들 또는 교회 공동체가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데반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앞 장에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하고 닮아가야 하는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고 어떤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 많고 적고가 아니라 오직 기도와 말씀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일곱명의 사역자를 세우면서 교회 공동체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이 있어야 하는 교회 특성을 보았고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읽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특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공동체 각자도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 예루살렘 초대교회 교회 공동체를 닮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특성이 있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닮아가는 그런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하는 바입니다.
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
[행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우리는 앞전에 6장을 시작하면서 일곱 사역자를 선택할 때 그들이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첫 번째로 안수받은 사역자로 선택되었고 고아와 과부를 돕는 구제사역을 담당하였고 평소에 그들의 신앙의 모습은 성령 충만하였고, 지혜가 충만하였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는 전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사도들이 행하는 기사와 표적까지도 행하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다른 사역자들도 이와같이 성령 충만하였고 은헤와 권능이 있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은혜가 임하고 권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분에 따라 능력을 제한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하면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수 있도록 은혜 베푸시는 분임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주시면 누구든지 능력을 발휘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성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합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어떤 직분이나 타이틀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할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였기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을 하나님이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처럼 능력전도와 큰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델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거대한 메가처치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은혜충만할까? 성경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믿는 개인에게 은혜를 주시는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자들에게 주십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은혜 받는 비결을 교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잘했다고 자기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뽐내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은혜는 커녕 도리어 대적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뭔가 잘 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겸손해 집니다. 겸손한 우리 모두 되어 은혜 받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보좌 앞에 나가는 자입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슈아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친히 통로가 되어 주셔서 우리가 그 보좌 앞에 나갈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는 대제사장 예슈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를 얻기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은 은혜입니까? 필요할 때마다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얻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보좌 앞에 나아갑시다. 예배드리는 자리에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즉,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겸손하였고, 기도로 예배로 항상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권능이 있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2. 믿음이 충만한 교회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일곱 사역자를 택하는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들을 택하였다는 것은 그 일곱명 외에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믿음과 성령 충만한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특성은 믿음 충만하였고 성령 충만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믿음이 충만하였다는 뜻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그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슈아는 다음과 같이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은 교회의 지체입니다.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행동으로 전체 교회가 어떤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가르쳐 줍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이고, 믿음이 충만한 교회인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빌립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어떤지 보여 줍니다. 전도하는 교회,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 영역을 정하기가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슈아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까? 귀신을 쫓아낼수 있습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이 달아납니다. 방언을 말하며 바울처럼 뱀에 손가락이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이러한 초 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곱 사역자를 택한 초대 교회는 믿음이 충만한 교회였고 초 자연적인 놀라운 역사가 예슈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식어가는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 처럼 믿음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손을 얹은즉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방언을 하고 온갖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3. 지혜와 성령으로 대처하는 교회
[행 6:9-10]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놀랍게도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각자 나름대로 회당을 이루고 있었는데 아마도 스데반이 방문한것 같습니다. 초청을 해서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빚진 심정으로 예슈아의 도를 전하려고 방문한 것으로 판단되어 집니다. 특히 스데반을 반대하는 뚜렷한 이유가 없이 무조건 논쟁하면서 한 마디로 시비를 걸면서 스데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각이나 노선이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는 그런 부류들이었고, 모두 다 외곽 지역에서 살다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더니 심한 반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면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반대하는 무리들은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증언을 시작합니다.
[행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완전히 스데반의 말을 곡해하고 거짓증언을 세워서 스데반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탄의 술책은 창세 때도 그랬지만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비 진리를 진리인양 만들어 버립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비 진리로 몰아세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세가 전해준 토라의 말씀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 사람을 매수하여 악한짓을 하려는 유대인들처럼 사탄에게 틈을 내어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토라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지 못하니까 스데반이 전한 메시야를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토라에서 분명히 모세가 나같은 선지자를 일으킨다고 말했는데 이 선지자가 예슈아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눈이 가려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쟁을 일삼다가 꾀를 내어 사람을 매수하는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에 대하여 성경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말려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심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논쟁을 하더라도 성령의 지혜로 임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혜와 성령으로 대처하지 않다 보니 미국에 많은 교단들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같이 그렇게 타협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와 성령으로 예슈아를 증거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4. 예슈아로 인하여 핍박받는 교회
[행 6:12-13]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지금 적당한 선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논쟁에서 패배감을 맛본 나머지 복수의 감정으로 이제는 다른 동조자를 끌어 드립니다. 그 사람들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재판에 회부하여 스데반을 심판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슈아의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사수하다 보면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옵니다.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처형하고자 하는 마귀의 본색이 그들에게 나타납니다. 온갖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거짓 증인을 세우고 심판하고 처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있어야만 처형할수 있기 때문에 거짓증인을 세웁니다. 그 거짓말은 다음 절에 나옵니다.
[행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슈아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 말을 가만히 보면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것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 2:19] "예슈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바로 이 말씀을 좀 생각하지도 않고 말그대로 받아들여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을 거슬리어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스데반을 잡아놓고 예슈아의 말씀을 책 잡고 정죄하여 스데반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의도를 볼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성전된 예슈아 자신의 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인데도 완전히 곡해하여 이것을 트집잡아 스데반을 신성모독 죄로 처형을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슈아께서도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행 6:15] "공중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러한 처형의 위기속에서도 스데반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죄 당하는 스데반을 보니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담대함과 기쁨과 평안함이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지혜 충만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식구 여러분! 핍박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얼굴이 천사의 얼굴을 가진 우리 모두 되길 축복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 믿음이 충만한 교회 지혜와 성령으로 대처하는 교회 예슈아로 핍박받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교회이고 닮아가야 할 교회인 것입니다.
11월 27일(목) 사도행전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백이십명(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In those days Peter stood up among the believers (a group numbering about a hundred and twenty)
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After that, he appeared to more than five hundred of the brothers at the
same time, most of whom are still living, though some have fallen
asleep.
예수를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되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수를 사도 바울은 오백명이라고 강조합니다(고전 15:6).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그 많은 사람들(오백명) 중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백이십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백분율에 따라 환산하면 대략 24%라고 하겠습니다.
이와같은 비율을 오늘의 시대에 적용한다면 만일 교인들의 수가 100명이라고 할 때 그 중에서 성령 충만한 신앙의 사람들은 24명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어느 사회이든지 그 사회의 구성원 중에서 신앙을 갖게 되는 최대치의 수가 전체 인구 중에서 25%를 넘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어느 종교가 국교가 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국교가 될 때는 그 상황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앙이 한 나라에서 전체 인구의 1/4(25%)이 되었다는 것은 최대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최대치의 숫자를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상이 그 좋은 사례가 됩니다.
2024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약 5,155만명 중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17%(약 876만 명)이며 실질적인 교회 출석인 수는 약 700만명 내외라고 합니다(목회 데이터연구소 & 지앤컴리서치 공동조사 결과).
한 때는 전체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했었지만 점점 더 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구의 고령화 및 젊은 세대의 이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래 교회의 소망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인구 (2024년 기준)
- 전체 인구: 약 5,155만 명
- 기독교인 비율: 약 17%
- 추정 인구 수: 약 876만 명
- 이 중 실질적인 교회 출석 인구는 약 700만 명 내외로 추정됨
📉 참고로, 향후 25년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65만 명 감소하여 560만 명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요. 특히 젊은 세대의 이탈과 고령화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 이 수치는 목회데이터연구소와 지앤컴리서치가 공동 조사한 결과로, 2023년 10월~2024년 1월 사이에 전국 5,451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을 기반으로 합니다.
- 참고로, 실질적인 교회 출석 인원은 약 700만 명 내외로 추정되며, 이단 포함 여부나 ‘가나안 성도’(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신자) 등을 고려한 수치입니다.
♦ 11월 27일(목)
♦ 본문 / 사도행전 1~3장
♦ 주제 / 일백 이십 명(1:15)
♦ 성구 /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오백 명이었다고 사도 바울은 증거합니다(고전 15:6).
그런데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며 ‘아버지의 역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일백 이십 명이었다고 합니다.
오백 명과 일백 이십 명
백분율에 의하면 대략 24%라고 하겠습니다.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어느 사회에서 특정 종교가 국교가 아닐 경우 어떤 종교를 신뢰하는 수가 전체 인구의 1/4 즉 25%가 최대치라고 합니다.
이런 수치가 사도행전에 의해서도 정확하게 예견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을 목격했던 무리들의 수가 500명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에 따라 한 자리에 모여서 가르침을 따라 순종했던 무리들은 120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전체 인구의 1/4 즉 25%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며 선교 역사상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고 자랑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난 현상을 목회데이터 연구소와 지앤컴리서치가 공동 조사한 결과에 의해서 이렇게 듣게 됩니다.
2024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체 인구 약 5,155만 명 중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17%라고 합니다.
17%의 수는 약 875만명입니다.
더구나 실질적인 교회 출석 인구는 대략 700만명 내외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따라 향후 25년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65만 명 감소하여 560만 명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그 빈 자리를 성령 충만한 120명의 무리들이 채우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에 출석을 자랑하는 교인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예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만한 성령 충만한 믿음의 성도들에 의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표면적인 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수를 세워가는 일에 앞장 서게 하옵소서
♪ 찬송 /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https://www.youtube.com/watch?v=3K-bA_rj3V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성령 충만을 받은 120문도(사도행전 1:6-14)
수억원짜리 기계가 있어도 전기 코드를 꽂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반 동안 이 땅에 오셔서 남겨 놓으신 것이 있다면 12제자를 가르 치시고 훈련 시키신 일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를 보십시요.
아주 좋은 기계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그는 배를 버려두고,그물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단숨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3년 반동안 주님을
쫑으면서 매사에 앞장을 섰습니다.
수많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의 현장에 참여했습니다.
죽은자를 살리시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목 격했습니다.
그리고 천국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해야 한다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때까지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 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리러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아직도 땅에 속했고,육신에 속했고,자기 자신의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했습니다.
성령충만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구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매달려 구해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명령을 믿고, 매달려 간구해서 성령충만을 받은 120문도들처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2:4-10절을 보면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또 갈라디아서 5:2-23절 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하나님을 위한 3가지 은사와 열매,
이웃을 위한 3가지 은사와 열매,
자신을 위한 3가지
은사와 열매라 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구해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주 좋은 축복이요, 은혜인데도 우리는 그 것을 외우지도 못합니다.
그것을 달라고 매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것을 입에 늘 달고 다니며, 늘 마음 속에 묵상하며 살았다면, 눈을 감고도 줄줄 외웠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시간마다 기도하며,은사와 능력을 받아 주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강림절… 마가의 다락방 오지 않은 480여 명은 어디에
부활 후 예수님 직접 목격한 숫자는 600여 명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숫자, 120여 명
예수님 승천 후 10여일만에 사라진 480여 명
2,000년 후 우리, 성경 부지런히 읽고 준비를
들어가는 말
오순절은 예수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을 말합니다.
120문도가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인의 머리에 임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후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능력을 받아 전혀 배우지 않았던 각종 언어로 방언을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를 할 때 한 번에 수천명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성령이 불꽃처럼 또 바람처럼 내린 이날, 비로소 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초실절로부터 칠칠(7x7=49), 즉 49일이 지난 그 다음 날입니다.
이 날은 초실절에서 시작한 추수가 모두 끝나는 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확한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 날이 가지고 있는 더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탄생한 날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 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출애굽후 50일째 되는 날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하였습니다.
2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이처럼 오순절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날, 또 신약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날로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한 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여 볼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과연 이 숫자는 충분한 숫자일까요?
개역개정은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약
120여명 정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약 120명이나 되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120명이라는 숫자가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글성경은 마치 누가가 많은 무리가 모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분명 원어와 상관없는 번역자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다 읽게 되면 ‘120명이나’가 아니라
‘120명밖에’라는 뜻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부활의 첫 열매로 초실절(안식일 다음 날) 즉 주일 새벽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약 6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전 15:4-8).
1. 열두 제자
2. 오백 형제
3. 야고보(예수님 동생)
4. 모든 사도(70문도)
5. 바울
고린도전서 15:4-8
바울은 예수님을 승천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과 또 막달라 마리아 등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 등을 고려하면,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나타나셨던 사람들은 모두 600여 명쯤은 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한 날부터 이들은 마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며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 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여 명밖에 안 됐다는 점입니다.
40일간 약 600여 명의 무리가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정작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사람들은 불과 120여 명밖에 안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어디로?
성령이 내린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 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본 이들 480여 명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기다리라”는 명령을 잊어버리고 (혹은 무시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는 요엘 2장 28-32절 예언이 실현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빗대 예수님 재림 때도 기독교인들 중 약 20%만(즉 600여 명 중 120여 명)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주장합니다. 각 교회로 본다면 교인 5명 중 1명꼴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추론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을 매일 찾아와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귀찮게 하는 과부 이야기(눅 18:1-8)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예화입니다.
이 예화는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고도 단 10일도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480여 명에게, 또 현대의 우리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겐 잠시 혹했던 부활 이야기, 영생 이야기, 천국 이야기가 그렇게 큰 매력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신하들처럼 살진 소를 잡고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에 가는 대신, 이들은 각자 자기 사업을 위하여 또 자기 밭으로 일을
하러 갔던 것입니다(마 22:1-14). 그 결과 이들은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러나 택함을 입지는 못하였습니다.
오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체도 보지 못하고 그의 구세주 되심을 믿고 있습니다.
2천 년 전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의 객관적 신앙 조건은 분명 이들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만 보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심’과 또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습관처럼 입술의 고백은 할 수 있을지언정,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았던 열두 사도처럼 실천하는 신앙을 갖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요즘 주변 신앙인들을 보면 입술의 고백이 마치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고도 못 믿었던 480여 명을 생각하면,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부활체를 보고도 못 믿었던 사람들은 분명 부활체가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밭에 가고 시장에 가는 것이 부활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부활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한 사도들에 의한 증언이 기록된 성경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사도들의 증언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480여 명은 예수님의 부활체를 만나보고도 믿는 특권을 포기하였지만, 우리는 성경 기록만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3년을 보내고 또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한결같은 증거에 힘입어 오늘날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또 미래를 향한 약속에 대하여 먼저 자신이 잘 알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증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벧전 3:15-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천국 잔치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한 가지 즐거운 소식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점입니다(요 14:2). 다만 그곳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잔치에 자주 비유됩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잔치에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온갖 산해진미가 등장할 것입니다.
만세 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이 잔칫상에는 온갖 귀한 것들이 등장하는데, 이사야 25장 6절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보면 별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비유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래 묵은 포도주일수록 좋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지만, 골수가 가득한 것은 약간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이사야서가 쓰여졌을 당시 최고 음식에 대한 이미지 표현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에는 기름이 살코기보다 더 비쌌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등급이 높은 한우일수록 기름이 많으며 또 기름이 많을수록 고기도 더 맛이 있습니다. 구약 제사 때 향기로운 냄새를 내며 타는 고기 기름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피’는 물론 ‘기름’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레위기 3장 16-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포도주도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오래 묵은 맑은 포도주는 이미 예수님께서 가나 잔치
때 선을 보이셨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마셔도 맛을 구별할 정도이니 그 포도주 맛이 어떠하였을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120문도
예수님은
어찌하여 120명의 문도를 세웠던고?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요, 노아부터 야곱까지 12대입니다.
이 2천년 전부를 대신한
종적인 결실체가 야곱의 12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종적인 12수를 중심삼았습니다. 노아부터 야곱까지의 12대와 노아부터
아담까지의 10대를 대표하는 수를 갖추기 위하여 12수에 10을 승하니 120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복귀하기 위한 전체 수를 대표한 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날 여러분을 대해 전도하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땅 위에 사는 동안 120명을 전도하고 가야 됩니다. 그것을 못 하겠으면 12사람이라도 전도해야 됩니다. 12사람을
전도하되 그 12사람만이면 안됩니다. 120명 전도는 못 했지만 횡적으로 120명을 만들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즉 120명이
횡적으로 화(和)할 수 있게라도 해야만 복귀의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1959.01.04, 전 본부교회)
모세노정이 예수님의 노정이요, 예수님의 노정이 우리들의 노정입니다. 모세가 12지파와 70장로를 중심삼고 60만 대중을 거느려 나왔고, 예수님께서도 12사도와 70장로, 120문도를 중심삼고 역사하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움직여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세계적인 발판을 잡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민족이 받들어 드리지 못한 연고로 예수님께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1959.01.04, 전 본부교회)
오늘날 재탕감시대(再蕩減時代)에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 사명을 해야 되는가 하면, 서로 단결하여 셋이 12명을 이루고, 12명이 120명을 이루고, 120명이 60만, 그 이상까지 움직여낼 수 있는 때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중심삼아 하늘이 전권적인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민족을 지나 국가적인 단계에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앞으로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의 한 날을 위하여 준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1959.01.04, 전 본부교회)
세계 역사를 바꾼 마가 다락방 기도
"여자들과 예수의 어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4)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40일을 더 계시다가 모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복음전도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땅 끝까지는 고사하고 예루살렘 한 모퉁이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모두가 두려워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바깥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이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파함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다.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기도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장은 성령강림이 있기 전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 기도하였던 모임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마가의 다락방 기도의 특징은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점이다.
모인 사람은 모두
120명이었는데,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및 예수의 아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의
무덤까지 찾아갔던 신실한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예수를 전혀 믿지 않았던
예수의 아우들 등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분산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보다는 마귀가 그 틈을 타고
들어와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버린다.
예수께서 예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형제와의 화해였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 5:23-24)
형제와의 갈등이 있으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형제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흡족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시 133:1) 여기에서 '선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일치한다는 뜻이고,
'아름답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임'은 기분이 상쾌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가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부정적 상황 때문이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기 위하여 절박한 상황 속으로 우리들을 몰고 가시기도 한다.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억압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극도의 고난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부르짖음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났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 시작되었다.
마가의 다락방 기도 역시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상황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에 의한 박해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음
2. 예수께서는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심;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낮선 외지였음
3. 그동안 든든하게 의지가 되었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셨음;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감격보다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책임지셨던 예수를 잃어버린 허탈감이 더 컸을 것임
4.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심;
당시 제자들은 예루살렘조차도 큰 부담이었음
그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제자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그렇게 하면 성령이 임할 것이요,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기다리는 그 시간, 그것이 기도로 채워진 마가 다락방 기도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인 사람의 수가 120명이라는 점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일시에 함께 목격한 500여 형제가
언급되기도 하지만(고전 15:6), 120명만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여기에서 120명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숫자이다.
1948년 독립한 신생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의 정원이 120명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120명은 최소단위의 정수이면서 곧 전체를 의미한다.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10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고,
이들의 하나 됨을 근거로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세계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120명의 각기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집중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성령은 마음껏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며 복음을
땅 끝으로 확장시키셨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에서 하나가 된다면, 120명이라도 세계를 바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성령의 부으심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해져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기 시작하십니다. 이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이며 ‘임마누엘’이신 것도(마 1:21, 23),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확약입니다. 이처럼 ‘칭의’와 ‘성령 내주’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성경 구절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칭의)’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복(칭의)과 성령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고 한 말씀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에겐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 믿어도 성령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만일 성령이 없다면 그는 육에 속한 비중생자입니다(유 1:1).
성경은 ‘성령의 내주(immanence Of The Holy Spirit)’외에 ‘성령의 부어짐(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행 10:45)’도 말합니다. 이 ‘성령의 부어짐’은 구원받고도 성령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비로소 성령을 받게 됐다 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성령강림의 ‘단회성(once for all)’과 ‘현재적 반복성’같은 해묵은 논쟁에 연루됩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30여년 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성령 강림의 ‘단회성(once for all)’과 ‘반복성’이 뜨거운 감자였고, 그 논쟁의 중심에 ‘고신’과 ‘총신’이 있었습니다.
화란(네덜란드)의 캄펜(Kampen)을 졸업하고 부산 고신대학에서 구약신학을 강의하던 안모 교수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와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의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성’을 주장하다, 학교에서 퇴출됐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마 그런 문제로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동일한 시점, 총신에서도 역시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을 주장한 차영배 교수, 정원태 교수 등이 반대자들과 첨예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총신에서는 고신대학 같은 파국은 없었습니다.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재적 동일 반복’이라기보다, 차영배 교수가 말한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재적 모사(模寫)’라고 함이(김영한 박사)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15장 26절, 사도행전 10장 45절과 19장 1-6절 등을 비롯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가르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는 성령(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1646년판 2장 3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부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은 이미 성령이 ‘내재(immanence)’하는 자를 향한 ‘밖으로부터의 부어짐(The Outpouring from above)’으로 파악됩니다. 한 마디로, '이미 내재해 계신 성령이 또 그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떻게 또 오시느냐며 이는 존재론적 모순이라고 공격했습니다.
대표적 신학자가 화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 1920)입니다. 그는 ‘성령 저수지론’을 통해 “한번 오신 성령은 저수지처럼 수원(水原)이 되어 필요에 따라 성도들에게 공급되며, 성령이 다시 오는 일 같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부어짐’을 외부로부터의 임팩트(Impact)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being filled with the Spirit, 엡 5:18)’도 믿는 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북돋음(invigoration), 고무(incitement)’로 봅니다(행 2:2-3은 ‘성령 충만’을 ‘각 사람 위에 내려앉음(sat upon each of them)’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생각’이라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초월적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유한된 인간의 존재방식과는 달리 ‘이미 와 계시면서 동시에 또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계1:4, 8; 4:8)”라는 성경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의 사례를 근거로, ‘성령의 부어짐’과 ‘내재’를 구분지었습니다. 유능한 성경학자 아볼로(Apollos)의 지도를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내주는 있었지만 ‘성령의 부으심’은 없었으며, 바울을 통해 비로소 그것이 성취됐다(행 19:1-6)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에 대한 것이었으며,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답변 역시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성령 부으심의 목적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뚜렷이 해 준다고 말합니다. 물론 내재(內在)하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가르치지만,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그 지식이 더욱 풍성해지고 확고해진다고 봅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더욱 분명한 이해를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무지한 것은 아들을 믿지 않아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요 15:26)’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유대교인들에게 “성령이 없는 자(유 1:19)”라고 한 것은, 그들이 아들을 부인하므로,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성령의 부으심’과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여는 출발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부으심’을 원하는 자는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 죄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성자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질 것을 권면받습니다.
그들은 또 ‘성령의 부으심’은 의, 죄, 심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며(요 16:8), 믿음의 확신(살전 1:5), 하나님 자녀 됨의 확신(롬 8:16)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변적이고 주지적인 신앙에서 생생한 체험적 신앙으로의 변환을 갖다 준다고 믿으며, 수학자 파스칼(Pascal, Blaise, 1623- 1662)의 사례 등을 들길 좋아합니다.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확신, 감정, 기쁨, 평화… (Blaise Pascal, 'le memorial', 553-554쪽)”.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을 복음 전파를 위한 것으로 봅니다. 이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을 신유, 은사, 능력 행사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사람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것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요 16:13, 고전 2:9-12).
그들은 ‘그리스도’를 복음의 의를 이룬 구속자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시는 교사로 여깁니다(요일 2:27).
하나님은 택자를 복음을 통해 부르시되, 특별히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전도자를 통해 복음이 더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전파된다고 봅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말할 때 회중들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이 그 예증으로 제시됩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10:43-45)”.
성령을 중생(重生), 연합(聯合), 조명(照明), 성화(聖火)와 연결 짓기 좋아하는 개혁주의 진영에서, 성령을 복음 전파와 연결 짓는 것이 희귀한 듯 하나, 사실 그들은 성령을 무엇보다 복음전파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위대한 칼빈주의자요 성령의 사람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1770- 1775년까지 스톡브리지(Stockbridge) 에서 인디언 선교를 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칼빈주의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 1770), 마지막 청교도로 일컫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92)은 모두 탁월한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은 120문도 모두가 복음전도자가 됐다’는 사실 역시, ’성령의 부으심‘과 ’복음 전도‘의 긴밀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 받은 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전도에 열심을 보이기보다는, 더 센 불을 받아 능력자가 되고자 여기저길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씁쓸해집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표적을 행했으나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그것을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요 20:30-31).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도라고 밝혔습니다(막 1:38). 여러분은 왜 성령을 구하십니까? 할렐루야!
■ 사도행전
- 책 제목
헬라어로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즉 ‘사도들의 행적’이란 뜻이며, 우리말 성경도 본서의 표제를 따라 ‘사도행전’이라고 명명했다.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데오빌로)가 누가복음과 같으며 본서에도 먼저 누가복음을 기록했다는 표현이 나온다(1:1). 선교여행에 동참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으므로 동참했던 인물로 보인다.
본서의 ‘우리’란 표현이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부터 로마 감옥행까지 줄곧 바울과 동행한 누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골 4:14; 딤후 4:11; 몬 1:24).
초대교부들 모두가 누가의 기록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바울과 동행하며 선교 여행한 경험들을 토대로 본서를 기술했을 것으로 본다.
의사로서의 누가 : 누가가 의사였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문안하는 편지에서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골 4: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의학 용어들을 살펴볼 때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다(눅 4:48; 8:55; 행 28:8-9 등). 또한 바울의 편지들을 볼 때 누가가 골로새 교회와 안면이 있었고, 빌레몬이나 디모데와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딤후 4:11).
누가는 바울이 두 번에 걸쳐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도 빠짐없이 동행했는데(딤후 4:11),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누가가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는 의사’였다는 것이다(골 4:14).
2) 기록연대/장소
(1) 기록연대
사도행전의 기록 시기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 바울이 순교하기 이전인 A.D. 60-63년 사이로 본다. 그 이유는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과 A.D. 64년에 있었던 네로의 박해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바울의 로마 도착과 2년간의 옥중 생활로 본서가 끝났을 뿐 바울의 순교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A.D. 66-68년 사이에 순교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작 시기를 예루살렘 함락(70년) 이후라고 주장한다. 누가복음 19:43-44; 21:20-24 등의 기사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쓴 것이라고 보고 누가복음 이후에 쓰인 사도행전은 그보다 더 뒤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 기록 장소
사도행전을 기록한 장소는 로마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도행전이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과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 본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기록 장소를 안디옥, 가이사랴, 에베소, 고린도, 알렉산드리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기 직전이나 석방된 이후에 로마에서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 기록 목적
① 신앙의 강화를 위해
데오빌로로 대표되는 수신자들에게 유대인들의 박해와 로마의 압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함이다.
②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됨을 밝히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며 신자와 교회의 풍성한 복과 성장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적은 누가복음(행 1:1)을 쓴 누가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기를 원하였다.
③ 복음의 변증과 확증을 위해
복음이 로마 세계에 전파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주는 불법적인 종교가 아님을 변증하며, 기독교가 구약에 뿌리를 둔 유대교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종교라는 것을 밝혀준다.
④ 복음의 보편성을 증거하기 위해
복음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이방인을 위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특히 구약의 예언 성취(눅 24:47; 행 15:15-18)를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습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⑤ 지금까지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보여주기 위해
역사 속에 끊임없이 개입하사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 사도행전의 주제
1) 그리스도의 부활
①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눅 16:16) 성령님의 주도하에 부활을 확신하고 경험한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까지 이르는 역동적 과정에 대한 기술이다.
②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40일간 직접 설명(1:3)
③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모습의 기술(2:42-47, 4:32-39)
④ 가운데도 담대히 증거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부활신앙(4:1-31, 5:17-42, 7:1-60, 9:1-31, 13:13-41, 17:22-32)
2) 성령님의 사역
① 예수님의 공생애가 성령으로 시작된 것과 같이 교회의 공적 사역도 성령으로 시작, 성령 세례(1:4-5), 성령의 능력(권능) 힘입어 내 증인될 것(1:8), 성령 강림 및 충만(2:1-4)임을 강조함
② 오순절 성령강림사건(2:1-13)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사역하신 결과(눅 24:49, 행 1:4-5)
③ 성령은 증인들을 성령충만케 하고 증언사역을 적극적으로 주도 – 성령행전(2:4, 4:8,31, 6:3,5,10, 7:55, 8:17,29,39, 9:17, 10:19, 11:24,28, 13:2,4,9,52, 16:6-7, 20:22-23, 21:4)
④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경계를 수용하게 하는 확실한 증거로 작용(8:14-17, 10:44,47, 11:15-18, 15:8-9)
3) 제도적 교회의 성립
①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모여 교회 형성(1:12-15) - 부활의 증인 공동체, 기도 공동체
② 사도의 보선으로 12사도를 채움(1:15b-26) ,
③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2:42-47, 4:32-5:11) : 사도(지도자)의 가르침, 교제, 떡, 기도, 모든 물건 서로 통용,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줌, 말씀사역자인 사도들 외 재정 관리자들(집사) 7명 뽑음(6:1-7).
④ 박해를 통해 교회가 확장됨. 경계와 차별을 넘어 확장되는 교회 – 하나된 공동체 -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8장), 베드로의 백부장 고넬료 전도(10장, 11장), 안디옥에서 헬라인 전도(11장)-안디옥 교회, 바울의 아시아와 유럽 선교(13~28장)
⑤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워 교회를 맡김(14:23)
⑥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까지 다스림(15장) - 할례문제
- 사도행전의 특징
① 신약성경 중 유일하게 역사서로 분류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로마 등으로 퍼져나가는 초대교회사를 기록하였다(행 1:8).
②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에서 시작하여(행 2장) 사도행전 곳곳에 성령이 역사하는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행 4:23-31; 5:1-11; 8:14-17, 29; 10:44-48; 13:1-4; 15:28; 16:6-7; 19:1-6; 20:22-23, 28; 21:11).
③ 사도 바울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회심에서부터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 예루살렘에서의 체포 때부터 로마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기록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등 바울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제공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④ 여러 사람의 설교 내용이 많이 나온다. 베드로(행 1:16-22; 2:14-36; 3:11-26 ; 4:8-12; 5:29-32; 8:20-25; 10:34-43; 11:5-17; 15:7-11), 스데반(행 7:2-53), 바울(행 13:16-41; 14:15-17; 17:22-31; 20:18-35; 22:1-21), 야고보(행 15:15-21)의 설교 등 여러 편의 설교가 실려 있다. *이러한 설교들은 모두 교회를 통해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 누가복음과의 연속성
① 누가복음의 맨 마지막 장면을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재차 진술함으로 연속성을 부각시킨다.
②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언이 사도행전에서 성취되면서 서로 연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③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용어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반향(反響) 한다.
④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는 분으로 묘사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난다(눅 3:21-22, 행 2:33).
⑤ 누가복음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지중해를 거쳐 로마로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를 이어서 전개하고 있다.
- 내용과 구조
1) 예루살렘에 있는 증인(1:1-8:4)
① 교회의 능력(1:1-2:47)
② 교회의 성장(3:1-8:4)
2) 유대와 사마리아에 있는 증인(8:5-12:25)
① 빌립의 증거(8:5-40)
② 사울의 회심(9:1-31)
③ 베드로의 증거(9:32-11:18)
④ 초대교회의 증거(11:19-12:25)
3) 땅 끝까지의 증인(13:1-28:31)
① 1차 전도여행(13:1-14:28)
② 예루살렘 공회(15:1-35)
③ 2차 전도여행(15:36-18:22)
④ 3차 전도여행(18:23-21:16)
⑤ 로마여행(21:17-2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