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 묵상 / 창세기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개요

구약의 첫 성경이자 모세 오경의 시작인 창세기를 장별 요약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며 권위있게 생각하는 모세 오경에 속하며 ‘토라’로 불리는 성경입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연대기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출애굽으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즉 출애굽의 이유와 목적, 기원을 조명하기 위해 창세기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창세기 개론에서 좀 더 깊이 다루고 오늘은 창세기를 간략하게 장별로 요약하도록 합니다. 각장 강해가 완성되면 제목 아래에 강해 링크가 추가됩니다.

창세기 구조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아브라함의 이전의 시대로 창조와 타락, 노아의 홍수와바벨탑 사건까지를 다룹니다. 12장부터 50장까지는 족장 시대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의 생애까지 다룹니다. 더 세분화 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넘어갑니다.

  • 1-11장 창조에서 바벨탑까지
  • 12-50장 족장 시대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1장 요약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신다. 첫날에 빛을, 둘째 날에는 궁창을, 셋째 날은 땅을, 넷째 날은 광명체를,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를, 여섯째 날은 땅 위에 거하는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창세기 2장 요약

  • 창조 7일째 안식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신다.

창조 7일째 안식함으로 창조가 완성된다. 7일째 되는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사람의 창조 내력이 소개된다.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신다. 아담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대로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다.

창세기 3장 요약

  • 3장은 뱀의 유혹으로 사람이 타락한다.

하나님이 만드시 가장 간교한(지혜로운) 동물인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도록 한다. 하와는 자신도 먹고 같이 있던 남편에게도 준다. 결국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 뱀은 평생 기어 다니고,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으면 아이를 낳은 고통을 더한다. 남자는 땅이 저주 받아 일한대로 얻지 못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예언을 하시고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 내신다.

  • 창세기 3장 강해

창세기 4장 요약

  •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는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친다. 어느날 둘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 시기한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그를 돌로 쳐 죽인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는 저주를 내린다. 하지만 가인은 유리하기를 거절하고 놋(유리하다) 땅에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짓고 산다. 아담의 후손들이 번창한다. 그 중에 라멕은 두 아내를 두고 많은 사람을 살인한 것을 자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다시 동침하여 셋을 낳는다.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5장 요약

  •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가 소개된다.

아담부터 시작하여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소개된다. 족보는 태어나고 낳고 살다가 죽는다는 규칙으로 되었다. 에녹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소개되고, 노아의 죽음은 9장 28-29절로 이어진다. 5장의 족보 안에 6-9장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창세기 6장 요약

  • 사람들이 번성하지만 악을 행하자 홍수로 심판할 계획을 세우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다.

사람들이 번성하며 악을 행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타락한다.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려 한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다. 노아에게 방주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를 설명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대로 행한다.

창세기 7장 요약

  • 방주가 완성되고 노아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자 홍수가 시작된다.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 하신다. 정결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한쌍이 함께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칠일 후에 40일 동안 홍수가 일어난다. 홍수로 물이 불어나고 땅에 있던 코로 호흡하는 짐승들과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비가 오는 동안 노아는 방주에 계속 거한다.

창세기 8장 요약

  • 홍수가 그치자 노아는 까마귀로 비둘기를 통해 사정을 알아본다. 방주에서 내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드디어 홍수가 그친다.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문다. 홍수 후 열째 달 초하루에 산 봉우리들이 보인다. 사십 일이 지나 까마귀를 내 보내고, 이후에 비둘기를 내 보낸다. 비둘기가 감람잎을 물로 들어온다. 육백일 년 둘째 달 27일에 방주에서 나온다. 노아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한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창세기 9장 요약

  •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신다. 노아는 포도주 농사를 짓는다.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가족들에게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절) 축복하신다. 고기를 먹 되 피째 먹지 말라 하신다. 무지개를 통해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야속하신다. 노아는 땅에 내려와 포도주 농사를 짓는다. 포도주를 마시고 옷을 벗고 누운 모습을 함이 발견한다. 셈과 야벳이 가려 준다. 노아는 함의 행동을 알게 되어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살고 950세에 죽는다.

창세기 10장 요약

  • 야벳, 함, 셈의 족보가 소개된다.

홍수 이후 세 아들의 후손들이 소개된다. 야벳의 후손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다. 함의 아들은 구스, 마스라임, 붓과 가나안이다. 셈의 아드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다. 이들에게서 많은 족속으로 갈리고 후손들이 일어난다.

창세기 11장 요약

  • 사람들이 동방으로 가다 시날 평지에 머물며 바벨탑을 쌓는다. 하나님이 내려와 그들을 흩으신다.

11장은 창조시대의 마지막 장이다 족장 시대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노아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일부의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겨 간다. 시날 평지를 만나 그곳에서 도시를 건설한다. 그들은 성을 쌓으면서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고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흩으신다.

창세기 12장 요약

  •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다. 아브람은 말씀을 쫓아간다.

12장은 족장 시대가 시작되는 첫 장이다. 바벨탑 공동체 안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하신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순종한다. 하지만 가나안에 기근이 일어나 애굽으로 내려가고 사래를 바로에게 빼앗긴다. 하나님께서 바로 궁에 저주를 내리시고, 다시 사래를 찾아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13장 요약

  • 애굽으로 돌아온 아브람과 롯은 가축이 불어나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롯은 요단들을 선택하고 아브람과 헤어진다.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은 아브람과 롯은 가나안에 도착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불어난 가축으로 인해 목자들이 서로 초장을 얻기 위한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아브람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롯을 부른다. 롯에게 원하는 곳을 선택하라고 하고 자신은 그 반대로 가기로 한다. 롯은 요단들을 보니 애굽과 같고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워 보여 그곳으로 향한다. 안타깝게 그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인이었다.(13절) 롯이 떠난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와 동서남북을 보라하시고 모두 주겠다고 위로하신다. 아브람은 헤브론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는다.

창세기 14장 요약

  •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나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에 살던 롯을 붙잡아 가자 아브람이 가서 구출한다.

롯은 아브람을 떠난 후 소돔에 살게 된다.(13:12) 그런데 하필이면 그돌라오멘 연합군이 소돔과 주변을 공격한다. 소돔에 살던 롯과 가족들이 붙잡혀 간다.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동맹한 사람들과 사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급습한다. 롯과 그의 재물, 사람들을 구출해 데려온다. 그때 살렘(후에 예루살렘)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찾아와 축복한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창세기 15장 요약

  • 전쟁 후에 두려워하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햇불 언약을 맺으신다.

전쟁 후 걱정에 쌓인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느 ㄴ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1절)이라 말씀하신다. 아브람에게 후손을 재차 약속하신다.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바치라 하신다. 밤이 깊을 때 하나님이 햇불 사이로 지나면서 언약을 맺으신다.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사백 년 후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 약속하신다.

창세기 16장 요약

사래는 자신이 출산하지 못하자 자신의 몸종인 애굽 사람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다.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른다. 하갈이 임신을 하자 하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 사래를 조롱한다. 화가 난 사래는 하갈을 핍박한다.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을 가게 되고 결국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후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한 다음으로 다시 사래에게 돌아가라 명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이를 낳으면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신다)로 짓도록 한다.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 부른다.

창세기 17장 요약

아브람의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러 주신다.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한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행하도록 하신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표징이 되게 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과 종들, 이스마엘에게도 할례를 행한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25절)였다.

창세기 18장 요약

아브라함의 집에 세 사람이 찾아온다. 그들은 천사들과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집 근처를 지나자 아브라함이 가서 집에 초대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많은 음식으로 대접한다. 손님들은 아브함에게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사라가 뒤에서 듣고 속으로 웃는다. 하나님이 사라가 웃었다면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말씀하신다.(14절) 두 명이 떠나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한다. 소돔을 멸하는 가는 길이라 말하자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 간구한다.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 소돔을 멸망하게 된다.

창세기 19장 요약

두 천사가 소돔을 찾아간다. 롯이 성문에서 보고 나그네를 대접한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가 두 사람을 내어 놓으라 한다. 롯은 자신의 딸들을 줄테니 손님에게 손대지 말라 한다. 두 천사가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에게 빨리 소돔성을 빠져 나라가 말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 경고한다. 하지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나 소금 기둥이 된다. 소돔과 고모라 근방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멸망당한다. 롯과 두 딸은 산의 동굴로 피신한다. 두 딸은 롯에게 술을 먹기고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다. 이들은 모암과 암몬의 조상들이 된다.

창세기 20장 요약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간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이 현몽하여 사라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 경고하신다. 깜짝 놀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하고 사라를 놓아 준다.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냐고 묻는다. 아비멜렉은 많은 가축을 상으로 주고 아브라함을 보낸다.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아비멜렉의 집에 자녀가 생긴다.

창세기 21장 요약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던해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출생한다. 이름을 이삭(웃음)이라 부른다. 이삭이 자라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괴롭힌다.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을 찾아가 하갈과 그의 아들을 쫓아 내라고 한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 낸다. 쫓겨난 하갈은 광야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지만 천사가 나타나 도와 준다. 이야기는 다시 아비멜렉으로 돌아간다. 아비멜렉의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가 언약하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 한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22장 요약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지시살 땅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말도 없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삼일삼야를 지나 지시할 산에 도착한다. 산 밑에서 종을 두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게하고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난 막는다. 아브라함이 주변을 둘러보다 숫양을 발견하고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린다.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른다.

창세기 23장 요약

사라의 나이 127세에 숨을 거둔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무덤을 헷 족속의 에브론에게서 은 사벡 세겔을 주고 산다. 막벨라 굴에 사라를 장사한다. 후에 이곳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굽이 묻힌다.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다. 마므레의 다른 이름은 헤브론이다.

창세기 24장 요약

사라의 장사를 마친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낸다. 그곳에서 리브가를 만나 데려 온다. 리브가가 헤브론에 도착할 때 묵상하고 온 이삭을 보고 얼굴을 가린다. 둘은 결혼하여 사라의 장막에 거한다.

창세기 25장 요약

아브라함은 노년에 그두라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는다. 그두라는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는다. 175세에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고, 이삭이 막벨라 굴에 장사 한다.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가 이삭이 20년 동안 기도해 쌍둥이를 낳는다.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니다. 야곱은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에게 밭죽을 팔아 장자권을 얻는다.

창세기 26장 요약

이삭의 때에 기근이 찾아 온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명하신다. 이삭은 그랄 땅에 거주한다. 이삭은 리브가는 누이가 속인다. 아비멜렉이 데려갔다 하나님이 벌하셔서 다시 데려 온다.

이삭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를 얻는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막아 버린다. 그곳 이름을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으나 또 막는다. 다시 옮겨 우물을 파서 거한다. 다시 막자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판다. 그곳은 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줄 것이 말씀하신다. 얼마 후에 아비멜렉이 찾아와 사과하고 화해한다.

창세기 27장 요약

이삭이 에서에게 사냥하라 요리하라 한다. 요리를 먹고 장자의 축복을 할 것이라 한다. 밖에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꼬드겨 대신 축복을 받게 한다. 후에 에서가 들어가 통곡하며 분해 한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밖에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하란으로 보낼 생각을 한다.

창세기 28장 요약

이삭은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밧단아람(아람의 들)인 하란으로 보낸다. 루스 즉 벧엘에 도착하여 돌을 베개하여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본다. 사다리 끝에 하나님께서 서서 야곱에게 함께 하시겠다 약속의 말씀을 하신다.

창세기 29장 요약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인 하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여인 라헬을 발견한다. 라헬이 라반의 딸임을 알고 야곱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가서 고하고 야곱을 집으로 데려 온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칠년을 봉사하고 결혼하지만 아침에 보니 그의 언니 레아였다. 야곱이 라반에게 따지 칠 년을 더 봉사하라 하여 14년을 봉사하여 라헬과 결혼한다. 레아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난다.

창세기 30장 요약

라헬이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자신의 몸종 빌하를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레아도 자신의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주고 야곱을 데려 간다. 잇사갈, 스불론, 디나를 낳는다. 라헬이 임식하여 요셉을 낳는다.

야곱이 라반의 양을 키우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자 라반이 품삭을 정하고 야곱을 붙잡는다. 점박이 양들을 야곱이 가져간다. 하지만 라반이 다시 조건을 바꾸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선택한 가축들만 새끼를 잘 낳게하여 야곱의 가축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창세기 31장 요약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자신의 아버지의 가축을 도둑질한다고 생각하여 시기한다. 꿈에 하나님 나타나 야곱에게 고향 가나안을 돌아가라 한다. 드디어 라반이 양털을 깎을 때 모든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야반도주한다. 라반이 소식을 듣고 쫓아가 만나다. 야곱을 만나기 하루 전 밤에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건드리면 죽을 것이라 경고하신다.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고 각각 되돌아 간다.

창세기 32장 요약

가나안 접경에 다다를 때 두 진영의 천사가 야곱의 앞을 지나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두 진영이란 뜻으로 ‘마하나님’이라 부른다. 에서를 만날 것이 두려운 야곱은 밤새워 기도한다. 밤에 천사와 씨름하고 축복해 달라고 한다. 천사에게 허벅지 관절을 맞아 어긋난다. 그곳으 이름을 하나님이 얼굴이란 뜻의 ‘브니엘’이라 부른다.

창세기 33장 요약

날이 밝자 얍복강은 건너 에서를 만난다. 에서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준비한 제물을 바친다. 에서는 거절하지만 강요하여 갖게 한다. 가족들을 소개한다. 에서가 호휘하겠다고 하지만 거절하고 에서는 먼저 앞서 간다. 야곱은 숙곳에 도착하여 장막을 친다.

창세기 34장 요약

레아의 딸 디나가 세겜 성에 놀라 다니다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소식을들은 야곱은 분노하고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게하여 세겜 성의 남자들을 모조리 학살한다. 이 일로 죽음의 위기를 느낀 야곱은 두려워하며 레위와 시므온을 책망한다.

창세기 35장 요약

야곱이 가족들에게 우상을 제하게 하고 벧엘로 올라간다. 벧엘에 올라가 자신의 맹세를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벧엘을 떠나 에브랏(베들레헴) 길을 가다 라헬이 산통으로 괴로워하며 아이를 낳고 그의 이름을 베노리라 하지만 야곱이 베냐민으로 바꾼다. 베냐민을 낳고 라헬은 숨을 거둔다. 라헬은 베들레헬 길에 장사하고 비를 세운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소개되고, 이삭이 죽고 장사 된다. 이삭은 180세에 숨을 거둔다.

창세기 36장 요약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족보와 그의 자손들이 세운 에돔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지에 정착하였고, 그의 자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에돔 족속을 이루었습니다. 이 장은 에서의 아내들, 자녀들, 족장들, 그리고 에돔 땅의 왕들에 대한 목록을 상세히 나열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과 에서 모두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37장 요약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꿈을 꾼다. 하늘의 별들과 들의 곡식단에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야곱의 심부름을 올때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린다. 요셉의 애굽의 바로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다.

창세기 38장 요약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 세 아들 엘, 오난, 셀라를 낳았다. 큰아들 엘이 악하여 죽자, 둘째 아들 오난도 다말과 결혼했으나 후사를 잇지 않으려 해 죽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성장할 때까지 다말을 기다리게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유다를 속여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이는 예수님의 족보에 중요한 사건이다.

창세기 39장 요약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이집트에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보디발은 그의 집과 재산을 모두 요셉에게 맡겼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으나, 요셉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녀는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결국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요셉과 함께하시며 감옥에서도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창세기 40장 요약

요셉이 아직 옥에 있을 때 바로의 술관원장과 떡관원장이 옥에 들어온다. 그들이 꿈을 꾸고 요셉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몽한다. 해몽대로 술관원장은 복직하고, 떡관원장은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요셉은 다시 잊혀진다.

창세기 41장 요약

사건 후 만 이 년이 지난 후 바로가 두 번의 불길한 꿈을 꾸고 술사들에게 해몽을 부탁하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다. 그때서야 술관원장이 나서서 자신의 옥에서 요셉을 만난 이야기를 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서서 꿈을 해몽한다. 먼저는 7년 풍년이 들 것이고, 후에는 7년 흉년이 들 것이다.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한다.

창세기 42장 요약

요셉의 형들이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산다. 요셉이 형들을 발견한다.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옥에 가두고 심문하는 척 하면서 캐 묻는다. 그들의 곡식 자루에 그들이 지불한 모든 돈을 다시 넣어 둔다.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가두고 다른 형들은 가나안으로 돌려 보낸다. 다시 내려올 때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므온을 죽일 것이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이 야곱에 모든 사정을 아뢰자 야곱이 고통스러워 한다.

창세기 43장 요약

곡식이 떨어진 형들이 두 번째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요셉의 청대로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함께 보낸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고 옥에 갇힌 시므온을 풀어 준다.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한다. 베냐민을 보고 안방으로 몰래 들어가 운다.

창세기 44장 요약

요셉을 청지기를 불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하여 형들을 시험에 빠뜨리게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을 추격한 요셉의 신하들이 각자의 배낭을 뒤져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발견한다. 다시 요셉에게 붙잡혀 와서 베냐민을 옥에 가두려 한다. 이때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변론을 한다.

창세기 45장 요약

유다의 목숨 건 변명을 들은 요셉은 그제서야 형들이 베냐민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게 된다. 형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형들이 두려워 떤다. 서로 입맞추고 화해한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들은 바로가 축복하고 자신의 수레를 내어주며 아버지를 모셔오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 요셉 이야기를 전하지만 믿지 못한다. 그러자 바로가 보낸 마차를 보고 기뻐한다.

창세기 46장 요약

야곱이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라 말씀하시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시키신다. 애굽에 있던 가족까지 합하면 모두 70명이다. 요셉은 바로를 만나기전 바로에게 자신들을 목축하는 자라 소개하도록 한다. 애굽에서 목축 업자는 비천한 자들로 여긴다.

창세기 47장 요약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에게 가서 인사하고 축복해 준다. 야곱의 가족들은 고센 땅에 머문다.(바로는 라암셋을 주었다고 말한다. 11절)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축과 곡식을 바꾼다. 하지만 기근이 멈추지 않자 결국 자신의 토지를 팔아 곡물을 산다. 이후 모든 토지는 바로의 것이 되어 새로운 토지법이 만들어 진다. 수확의 1/5을 바로에게 마치게 한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토지를 빼앗지 않는다.

창세기 48장 요약

야곱이 나이들이 병이들자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려간다. 야곱은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로 입양한다고 밝힌다. 둘을 축복하는데 장자인 므낫세는 왼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에게는 오른손으로 얻자 요셉이 바꾸려 하지만 야곱이 알고 있다면 그대로 축복해 준다. 이후 에브라임은 장자와 같은 권한을 갖게 된다.

창세기 49장 요약

야곱이 나이들어 조상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자 아들들을 불러 축복해 준다. 르우벤은 장자권을 빼앗기고 유다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역대상 기자는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갔다 말한다. 역대상 5:1-2)

  •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축복을 마친 야곱은 자신을 아브라함이 샀던 막벨라 굴에 자신을 묻어 달라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창세기 50장 요약

야곱이 죽자 바로는 슬퍼하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한다. 애굽의 병거와 기병이 따르고, 요단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서 요셉이 칠일 동안 애곡한다. 가나안 백성들이 듣고 ‘아벨 미스라임’이라 부른다. 야곱은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장사된다.

장례를 마치고 애굽으로 내려오자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어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하며 종들을 보내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요셉이 그 소리를 듣고 울자 깜짝 놀란 형들이 직접 찾아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한다. 요셉은 걱정 말라며 자신이 돌보겠다 말한다. 요셉은 죽으면서 후손들에 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어 가실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 달라고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11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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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Professor Jackson explains the four relationships that dominate the Book of Genesis: God and creation, God and man, man and man, and man and creation.

These relationships are explored in the narratives of Adam and Eve, Abraham and Sarah, Abraham and Isaac, Jacob and Esau, and finally, Joseph.

잭슨 교수는 창세기를 지배하는 네 가지 관계, 즉 하나님과 창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창조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사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이야기에서 탐구됩니다.

족장(族長)

נָשִׂיא 스트롱번호 5387

1. 방백.  2.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3. 창 17:20.
발음 [ nâsîy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 관련 성경 / 두령, 고관(창 17:20. 방백, 겔 32:29), 추장(창 34:2), 지도자(출 22:28), 어른(출 34:31), 족장(출 35:27, 민 27:2, 대하 5:2), 귀족(수13:21), 총독(스 1:8), 구름(잠 25:14, 렘 10:13), 족속(겔 12:10), 왕(겔 12:12, 39:18, 48:21), 통치자(겔 45:9).

창세기 36:15
에서 자손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에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אַלּוּף  스트롱번호 441

1. 친밀한.  2. 황소.
발음 [ ’allûwph ]
어원  / 5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족장(창 36:15, 대상 1:51, 54), 두령(출 15:15), 친우(시 55:13), 수소(시 144:14), 짝(잠 2:17), 벗(잠 16:28, 17:9), 보호자(렘3:4), 우두머리 (렘 13:21), 이웃(미 7:5), 지도자(슥 9:7, 12:5, 6).

성경 속 '족장 이야기'의 역사를 찾아서

창세기 1~11장은 워낙 오래된 이야기로 역사성을 증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12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조상 대대로 살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Ur, 오늘날 유프라테스 강 하류 서쪽으로 약 16㎞)를 떠나면서 족장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14장에는 평원에 있는 다섯 도시(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혹은 소알)의 왕들이 메소포타미아 동쪽에 있던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네 왕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돌라오멜, 시날 왕 아므라벨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며 살렘 왕 멜기세덱 역시 성서를 벗어나면 흔적도 없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창 20장, 26장)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헤브론의 유지였던 헷 사람 에브론(23장), 세겜의 지도자인 하몰(34장), 보디발(39장), 그리고 창세기 36:31~39의 에돔의 왕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찾아서

족장 이야기는 적어도 3단계의 기록 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10세기이며 가장 늦은 것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7년~6년)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모든 기록의 층들은 제2성전 시대(기원전 538년 이후), 또는 일러야 바벨론 포로기(기원전 587~6년~538년)에 한데 모아져서 오늘날의 형태로 편집되었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족장 이야기가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기는 해도 이러한 자료들이 더 이른 시기(족장 이야기의 실제 배경이 되는 시기)부터 유래하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들에 기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올브라이트 학파

탁월하고 위대한 신학자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와 그의 제자들은 족장 이야기에 나오는 세부 자료(사람 이름, 사회적 관습, 법적 절차, 생활 풍속)는 기원전 2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등의 문화 특징과 잘 들어맞는다고 보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창세기의 묘사는 역사적(historical)이다. 전기적 세부 사항의 일반적인 정밀도와 족장들의 생생한 삶의 묘사는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올브라이트

올브라이트의 수제자인 G. 라이트(G. Ernest Wright)에 따르면,

"아브람이 실존 인물이라거나, 이런 저런 일을 했다거나, 이런 저런 말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마도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삶과 시대가 제2000년대 초기와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그 이후의 다른 시대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은 증명할 수 있다." - 라이트

성경은 이스라엘이 모압, 암몬, 에돔(창 19:30~38, 36장)만이 아니라 미디안과 아라비아 부족들(25:1~5, 12~18)과도 혈연관계가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특히 아람인들(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대규모로 이집트로 이동)과 강한 혈연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메소포타미아 친척들의 고향은 아람-나하라임이나 밧단아람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라반은 거듭 아람 사람으로 불립니다(창 25:20, 28:1~7, 31:20, 24). 창세기 22:20~24에는 아람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후손으로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신 26:5)"라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학계에서는 성서의 족장들을 아모리 사람(아람 사람)과 같은 인물들로 보며 이것을 '아모리 가설(Amorite hypothesis)'이라고 합니다. 올브라이트는 자신이 기원전 2100~1900년으로 잡은 이 시기를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I: MB I)로 불렀습니다.

라이트의 제자인 존 브라이트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첫째,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언 형상과 유사한 현상들이 마리 문서(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마리'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2만 장 이상 되는 점토판 문서. 대부분 기원전 18세기의 야스마하 아다드 왕 시대와 짐릴림 왕 시대의 것으로, 외교·의식·역사·상업·행정 문서 등)에서도 나온다. 이러한 문헌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스라엘 선조들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마리(Mari) 문서에서도 볼 수 있는 예언 제도는 이스라엘에서 사사 시대(드보라, 사무엘 등)에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비슷한 문화 환경으로부터 이주해 온 선조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계약 법전(출 21~23장)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판례법이 에쉬눈나(Eshnunna)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잘 드러나는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전승과 비슷하다. 따라서 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사법 전승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이주해 오면서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전해졌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셋째,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와 6~9장의 홍수 이야기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자료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는 가나안이나 이집트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세기 시원사(창세기 1~11장) 배후에 있는 전승들은 기원전 2000년대 전반에 이주해 온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물론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끼어 있었던 일부 아모리인들이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족장들이 2000년대에 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성경 전승의 역사성은 근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성경 자체에서 나오는 증거 자료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브라이트가 창세기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강력한 이유는, "고고학 역시 족장 이야기의 실제성을 부정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폅니다.

또 다른 시도들

많은 학자가 올브라이트처럼 엄격하게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 단계를 MB Ⅰ(중기 청동기 Ⅰ)로, 야곱 단계를 MB ⅡB(중기 청도기 ⅡB)로 추정하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연대를 제시합니다. G. E. 라이트는 "간단히 말해, 족장 이야기는 제2000년대 초의 배경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올브라이트가 주장한 MB Ⅰ시대에는 실제로 '도시'와 연관된 고고학 유적이 나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성서의 아브라함 시기에는 몇몇 도시 이야기가 나온다. 요단 계곡의 여러 도시들(창 14:2), 블레셋 도시 그랄(창 20:1), 요새화 된 도시 헤브론(창 23:2)). 그러므로 그것보다는 더 나중 시기인 MB ⅡB로의 재도시화 시대와 족장 시대를 동일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중심 도시들 가까운 곳에서 장막 생활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는 MB ⅡB의 마리(Mari)나 다른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과 도시민의 공존 생활과 비슷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타당한 듯 보입니다.


연대-기원전
 
고고학적 시대
 
올브라이트의 분류
 
올브라이트의 연대
 
2250~2000
 
EBⅣ(Early Bronze)
 
MBⅠ(아브라함?)
 
2100~1900
 
2000~1800
 
MBⅠ(Middle Bronze)
 
MBⅡA
 
1900~1750
 
1800~1630
 
MBⅡ
 
MBⅡB(야곱?)
 
1700~1600
 
1630~1550
 
MBⅢ
 
MBⅡC
 
1600~1550
 

그들은 성서의 족장들과 제2000년대(특히 MB ⅡB)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해 특히 창세기 12~50장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야곱'이라는 이름은 제2000년대 초기 자료에 일곱 번 나타나며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같은 시기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나 '요셉'과 같은 예는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이름 모두 '모리어 형태'이므로 이 주장은 족장 시대에 나오는 성서 인명이 제2000년대 초의 역사적 맥락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이죠.

둘째, 올브라이트나 에프레임 A. 스파이저(E. A. Speiser)는 제2000년대의 성서 이외의 문서에 나오는 사회, 법률 관행들이 족장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누지(Nuzi)에서 나온 설형문자 문서들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누지 토판은 제2000년대 중기에 동 티그리스 지역에서 번영했던 민족인 후리 사람들(Hurrians)의 관행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토판입니다. 족장들을 후리 왕국 미타니(Mitanni)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려는 학자는 없었지만 이 시기에 후리 사람들이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은 후리 사람들과 족장들 사이에 수많은 연결 고리를 제안했습니다. 누지의 결혼 계약서에 보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 자녀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16:1~4의 하갈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은 나중에 쫓아낼 수가 없으며 이는 창세기 21:10~11의 이스마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주장입니다.

"실질적인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아내를 남편의 누이로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법을 보면, 후리 사회에서 한 남편의 아내는 특별한 지위와 보호를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역할은 아내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 -스파이저

그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12:10~20, 20:1~18)이, 그리고 나중에 이삭(26:6~11)이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소개하는 일화들의 배경에 이 관습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전반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많은 사회‧법률 관습이 제2000년대 중기나 초기의 관행과 비슷하지만, 그 후대의 관행과는 유사점이 없기에 성서 전승이 제2000년대의 '실질적 역사성'을 담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학자는 창세기 14:14의 히브리어 '하닠'(훈련된)과 14:23의 '미후트 베아드 쉐록-나알(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과 같은 낱말이 기원전 15세기에 쓰인 표현이기에 창세기 14장이 고대의 것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נשיא 나시/지휘관. 족장의 뜻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개혁개정)

민 7:2. 이스라엘 족장들 곧 그들의 종족의 두령들이요 그 지파의 족장으로서 그 계수함을 입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예물을 드렸으니 (개혁성경)

민 7:2. 이스라엘의 대표자, 각 가문의 어른들이 예물을 바쳤다. 이들은 각 지파의 대표로서 등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람들이다.(공동번역)

נשיא 나시 = 방백,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족장, 종족의 두령, 왕, 치리자, 지휘관, 감독, 지파의 대표

복수형 נשיאים 네시임 : 땅으로부터 올라온 증기, 구름

유래 נשא 나사 = 들어 올리다, 쳐들다, 깃발을 세우다, 맹세하다

נשא 나소 = 총계하다, 계수하다

토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들입니다(시 20:5)

여호와의 깃발을 높이 들자들입니다(시 60:4)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는 자들입니다(민 7:2)

땅을 갈아엎어서 옥토로 만들 자들입니다(롬 8:22)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에 동참하는 자입니다(롬 8:17)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계 1:2)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 땅에서 왕노릇할 자들입니다(계5:10)

하나님의 종들로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을 자들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예수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기는자(계 12:1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계 12:17)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자들(계 20:4)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노릇 할 자(계 20:6)

1. 지휘관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들의 족장들입니다

민 4: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민 7: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144,000의 인맞은 종들(지휘관, 족장)을 유추 할 수 있습니다(히브리뿌리 관점)

1) 이스라엘 지휘관 12명

덮개 있는 수레 여섯

소 열 둘(12)

족장 둘에 수레가 하나 = 2x6(수레 여섯) = 족장 12명(12지파)

족장 12명(12지파) x 소 열 둘(12제자) =144

144 x 1,000(완전) =144,000(열방을 대표하는 족장들, 왕 같은 제사장)

2) 이스라엘의 집의 하나님의 종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천년왕국은 열방에서 택한자 중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이사야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이사야 66:21.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3) 계수함을 받은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올리는 자입니다

“נשא나소/총계하다” “운반하다”“들어올리다”와 어원이 같다

총계하다 = 운반하다(나사) = 원형(들어올리다, 깃발을 세우다)

레위자손을 총계하여 성막을 이동하는 일을 맡겼으며, 성막의 이동은 바로 하나님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자”

민 4:27. 게르손 자손은 그 모든 일 곧 멜(나사) 것과 처리할 것에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명대로 할 것이니 너희는 그들의 멜(나사) 짐을 그들에게 맡길 것이니라

결국 레위인들이 총계함을 받아 짐을 메는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들어 올리는자,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자 에 있습니다

민 4:49. 그들이 그 할 일과 멜 일을 따라 모세에게 계수함을 입었으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이 계수함을 입었더라

12지파의 지휘관, 족장들 나시נשיא의 뜻은 “올림을 받은자” 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진 밖으로 쫒겨난 자가 있습니다

민 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

진 안에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장소로 거룩한 곳입니다

민 5:3.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진 밖으로 내어보냄을 받은 자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문둥병환자, 유출병이 있는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자

3.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회복

눅 17:11~17은 본문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 예슈아께서 잃어버린 이스라엘 집의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열 명의 문둥병자는 열방에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예슈아를 만난 자는 이스라엘의 집으로 돌아올수가 있습니다

2)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이방인이라 말합니다

이방인이 예슈아를 만났다면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3) 예슈아를 만나 고침 받은 열 명중에 한명만이 진 안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방인이 예슈아를 만난 것은 고침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4) 이스라엘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이 없으면 아직은 소경입니다

눅 17: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분명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토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사야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예레미야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예레미야 25: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1월 17일(금) 창세기 49-5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입관하였더라(50:24)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요셉의 입관으로 창세기가 막을 내립니다.
더 이상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요셉이 입관한 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심을 갖는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창세기 51장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51장의 주인공이 되려면 사람은 영화 혼과 육으로 구분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마감하면서 두 개의 히브리 단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바라"
둘째는 입관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아론"
아론이란 단어

바라와 아론



창조(創造)  בָּרָא 스트롱번호 1254

1. 새기다.  2. 창조하다. 3. 창 1:1.
발음 [ bârâʼ ]
구약 성경  / 48회 사용


입관(入棺)(727)하였더라(3455)

입관(아론. ’ârôwn)  אָרוֹן 스트롱번호 727

1. 궤,  2. 왕하 12:10, 3. 창 50:26.
발음 [ ’ârôwn ]
구약 성경  / 201회 사용
  • 1.명사 궤, 상자
    • a. 명사 [돈 상자를 나타내는 경우] 왕하12: 10(9), 11(10).
    • b. 명사 [시체를 넣는 관을 나타내는 경우] 창50:26.
    • c. 명사 [그러나 대부분 율법이 기록된 두 돌판을 담고 있는 언약궤를 나타냄], 출 25:22, 26:33, 신10:8, 31:9,25, 수 3:6, 4:9, 삼상5:3,4, 6:8.
  • 문법설명
    혼성[남성, 삼상 6:8, 여성, 삼상 4:17, 대하 8:11]
  • 관련 성경 /  궤(출 25:10, 민 4:5, 신 10:1), 언약궤(삼하 11:11).

모세의 형 "아론"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히브리어로는 구별이 됩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아하론"이라고 발음합니다.


אַהֲרוֹן 스트롱번호 175

1. 모세의 형 ‘아론’   2. 출 6:20.  3. 7:7.
발음 [ ’Ahărôwn ]
어원  /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347회 사용
  • 1. 고유명사 모세의 형 ‘아론’, 출6:20, 7:7.
  • 관련 성경  /  아론(출 6:20, 7:7).


    야삼(yâsam) יָשַׂם 스트롱번호 3455

    1. 놓다.  2. 놓여지다
    발음 [ yâsam ]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원형 놓다, 두다, 배치하다, 삿 12:3
    • 2. 원형 놓여지다, 두어지다, 배치되다.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יִּישֶׂם, 창 50:26, 24:33
    • 관련 성경  /  베풀다(창 24:33), 입관하다(창 50:26).



    󰃨 몸에 향 재료를 넣고 - 요셉의 시신(屍身)을 미이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 입관하였더라 - 요셉의 장례 행사는 야곱의 장례행사에 관한 기록과는 달리 매우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애굽의 총리였으므로 성대한 장례 예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이라 관에 안치된 유해는 약 400년 후 가나안 땅 세겜에 완전히 묻히게 된다(수 24:32).

    성경 첫 번째 책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천지창조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끝은 한 인간의 죽음과 입관으로 마무리됩니다.
    태어날 때, 자랄 때, 한창 잘 나갈 때가 있었지만 죽고 나면, 입관 즉 관속에 들어가게 한 줌의 흙으로 남는 것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서 이집트의 국무총리였습니다.
    이집트는 요셉이 살던 시대는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였습니다.
    고대의 대제국 이집트의 국무총리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임종의 때가 가까운줄 알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24절에 보시면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그 땅은 요셉의 증조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받았던 땅입니다.
    가나안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4대가 지난 요셉이 믿고 있었고, 또 그 약속을 그 후손들의 때에 이루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킬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은 곧 언약입니다.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무려 294번이나 사용됩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목숨을 담보로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를 잃지만,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언약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때,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잠간이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인생은 말 그대로 신속히 날아갑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합니다(전 9:5).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죽을 죽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입니다.
    모든 분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언젠가 죽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생각보다 빨리 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이 있을 것을 기억하고 그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 김은신님은 하늘에 나 아갈 소망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파트리스교회 권사님으로서 긴 시간 수고와 봉사로 교회를 섬기셨고, 또한 믿음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이제 김은신권사님께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슬픔을 주지만 동시에 소망가운데 잠드셨기에 저와 파트리스교회 성도들 그리고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에게도 큰 위로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혹시 이자리에 예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김은신권사님이 누리신 복을 함께 누리시도록, 예수님을 믿어 이 확신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입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 잠깐임을 말해줍니다.
    영원할 것 같아도 영원하지 않고, 늙지 않을 것 같아도 곧 늙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아니겠습니까?
    안개 같은 인생임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이 유족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신 고인의 영정 앞에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해 왔던 성도들이 함께 모여 남겨두신 유족들을 위로하며 예배로 모였습니다.
    장례의 절차에 은혜를 구하옵고 또 슬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리 교우들과 자녀와 가족분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긍휼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_______님은 눈물 많고 근심 많던 이 세상길을 마치고 주님의 품안에 안기셨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들 또한 그 안식을 바라며 소망가운데 있게 하시고, 우리 _______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자녀들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하옵시고, 남은 장례 절차 가운데 안전으로 보살펴 주시고, 남은 절차가운데 은혜를 주시되, 부활의 소망을 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 길로 인도하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셉의 영성(창세기 50:15-21)

    성경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치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 중에서 요셉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는 의미보다 더 강한 "상속자"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고난을 당하고 애굽과 주변 국가들을 7년 흉년으로부터 구원했습니다. 
    이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요셉은 은 20냥에 상인들에게 팔렸는데 우리 주님은 은 30냥에 팔렸습니다. 
    요셉을 판 형의 이름이 유다인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판 사람이 유다입니다.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영성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요셉이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순종의 영성 

        창 37:12 이하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곱과 요셉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고 요셉의 형들은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오라고 명합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요셉은 아버지에게 순종해서 세겜으로 갑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약 100km입니다. 100km의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룻길이 30km이고 요셉은 어린 나이였으니 족히 4일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없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명한대로 순종해서 세겜까지 갔으나 형들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가 보낸 목적을 알기 때문에 들에서 적극적으로 형들을 찾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요셉에게 무엇을 찾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도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요셉은 나흘을 걸어서 세겜에 왔으니 많이 피곤하고 지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30km가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들을 만납니다. 지금이야 웬만한 사람들은 자동차가 있고 또 대중교통이 발달해서 130km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걸어서 130km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100km를 걸어서 세겜까지 가고 세겜에서 형들을 만날 수 없으니 또 30km를 걸어서 도단까지 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빌 2:7에 보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종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주님도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넷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시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로 영성을 측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교통법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동차의 용도에 맞게 그리고 교통법규를 따라서 안전하게 자동차를 몰 줄 아는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슨 일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올바른 판단을 내렸지만 육신을 따라 형편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저주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적인 갈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야 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의 갈등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고 물질적으로 손해가 되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 할 때 일입니다. 한 달 월세가 530만원이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빚도 좀 있는 상태였고 그 달에는 교회 재정이 400만 원 정도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제게 예배당 인테리어와 지역노인을 위한 제주도 무료효도관광을 명하셨습니다. 저희 형편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을 했습니다. 예배당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지역노인 80분을 모시고 무료효도관광을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빚을 져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테리어 비용도 채워졌고 효도관광도 잘 다녀왔고 교회 재정은 오히려 400만원이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들과 약한 짐승들은 죽였지만 건강한 짐승들은 남겨두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남겨두었다고 말했지만 그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여러분들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갈등 속에서 내 뜻을 선택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영성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성장하는 영성 

        요셉은 여러 면에서 성장했습니다. 육체적인 성장이야 당연한 것이고 신앙적인 성장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성장 중에 중요한 것이 관계의 성장입니다.

        오늘 요셉의 영성을 설교하면서 제가 창 50:15-21을 분문으로 잡은 이유가 있습니다. 창 37장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관계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관계의 영성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기꺼이 형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형들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일을 생각하니 요셉이 복수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요셉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죽더라도 요셉이 형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본문 19-21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요셉은 원수를 사랑으로 갚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을 때 요셉은 이 정도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속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눅 2:52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키도 자라셨고 지혜도 자라셨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장하셨습니다. 성경이 당연히 자라야 할 예수님의 키 까지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성장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신앙이 자라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생활을 몇 십 년 씩 했지만 신앙성장 전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니까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교회에서 사역도 하지만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중생은 했으나 영적인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전 3:1-3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영적인 어린 아이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화력이 약합니다.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밥을 먹을 수 없고 젖만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어느 날 밥을 먹이면 어떻게 될까요?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버립니다. 갑자기 고기를 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납니다. 소화력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소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설교를 듣다가 시험에 잘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해내지 못해서 생명의 말씀을 듣다가 시험에 듭니다.

        또 영적인 어린아이는 사람들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소화해내지 못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A가 시험거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잘 소화해냅니다. 전혀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그가 A를 소화해 낼만큼 성장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두 번째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은 영이 중심이 되어 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중심이 되어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대한 사인(sign)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받은 사인을 우리의 혼에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혼이 육체에게 명령해서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을 육체가 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생활이고 영중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이 혼을 통해 몸에 전달이 될 때 순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이 받은 사인과 반대되는 몸이 원하는 일들을 합니다.

        고전 3:3에서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을 두 가지 말합니다. 시기와 분쟁입니다. 시기심은 분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자기를 죽이게 됩니다. 잠 14:30에 보면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시기심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상대를 괴롭게 하는 것만 아니라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을 따라 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A팀과 B팀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두 팀 다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 팀이 이길까요? 당연히 힘이 좋은 팀이 이기는 것입니다. 영과 육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약하면 영이 육에게 끌려 다니기 때문에 육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영이 강하면 영이 육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강해지는 비결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딤전 4:5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날마다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근육이 풍성해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영혼에 힘이 생기게 되면 육신이 원하는 일들을 부인하게 되고 영이 육을 끌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3:3에 보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이 하나 더 나옵니다.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하거나 다수를 따라 행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오직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 

        요셉의 영성 중에 가장 알려진 부분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창 39장에 보면 4번이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동행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했다’고 말씀 합니다.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형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여러분!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모두 형통하기를 원하시죠? 형통의 비결이 뭔지 압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창 39:2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3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사 41: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는 마 28:20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14:17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말씀을 근거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나 요셉 등 몇 사람들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적은 이유는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셉에게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한다고 표현하신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창 39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요셉, 외로운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합니다. 9절에 보니 그 때 요셉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인정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그 집에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 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창 40장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관원은 요셉의 해몽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복직이 되어 왕을 섬기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때도 요셉이 꿈을 해몽할 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0:8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41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왕인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7년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1:16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역시 요셉이 여기서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창 45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자기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5:5,7,8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50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살기 위해서 비굴하게 아버지를 팔고 있을 때 요셉은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50:19,20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내 편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해드릴 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고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잠 3:6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음식을 먹으면 조미료가 들어간 것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것의 맛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들어간 일과 주님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 없이도 선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빠지면 모든 것이 짝퉁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최근에 천주교의 교황이 된 프란시스 교황은 하나님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설교했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이 배제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골 3:17에 보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없는 선한 생각, 주님이 없는 사랑, 주님이 없는 좋은 일, 주님이 없는 평화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의 영성의 특징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순종(順從) 

    • obey, be obedient (to)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שָׁמָע 스트롱번호8091

    1.

    순종하는: 한 이스라엘인 ‘사마’

    2.

    대상11:44.

    발음 [ Shâmâʽ ]
    어원
    8085에서 유래
    구약 성경
    1회 사용
    • 1.
      고유명사 순종하는: 한 이스라엘인 ‘사마’, 대상11:4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사마(대상11:44).



    둘째, 성장(成長) Growth 
    영도 성장하고 관계도 성장하고 인격도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רָבָה 스트롱번호7235

    1.

    증가하다

    2.

    확대되다

    3.

    위대해지다

    발음 [ râbâh ]
    구약 성경
    176회 사용



    צְמִיחָה


    셋째, 동행(同行)  accompany, go with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הָלַךְ 스트롱번호1980

    1.

    가다

    2.

    ㉠ 창7:18.㉡ 대하26:8.㉢ 수16:8.㉣ 느6:17.

    3.

    ㉠ אֶל

    발음 [ hâlak ]
    구약 성경
    1549회 사용






    요셉 생애

    대흉년 2년차이자 요셉 나이 39세였을 때, 요셉의 형들은 이집트에 오자 얼굴을 땅에 대고 백성에게 곡물을 파는 이인 요셉에게 절한다. 졸지에 과거에 꿨던 꿈이 현실이 된 셈이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때 요셉은 아직 형들이 과거에 자신을 노예로 판 일이 생각나 형들이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닌지 시험도 하고 아버지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의 생사도 알고 싶었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형들을 가리켜 "너희들은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첩자"로 몬다. 형들은 "우리는 첩자가 아니며,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곡물을 사러 온 것뿐"이라며 해명하나, 요셉은 "그렇다면 그 막내를 데리고 와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라며 사흘 간 전부 옥에 가두어 버린다. 사흘 뒤 요셉은 형제들을 풀어주며 "내가 이집트의 총리이지만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이니 너희가 살 방법을 말해주겠다. 너희 중 한사람은 볼모로 남고 나머지는 식량을 사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후에 식량을 다시 사러 올 때 그 막내를 데려와 내게 보여준다면 모두 살게 될 것이다"라고 지시한다. 형제들은 "우리가 요셉에게 못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 불안해하며 르우벤은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하더니 결국 그 핏값을 치르는 것이다'하고 동생들을 야단치는데, 사이에 통역관을 세워뒀던지라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요셉은 자리를 피해 혼자서 몰래 통곡한 뒤 다시 돌아와서 시므온을 체포해 데려간 뒤 나머지 형제들에게 식량을 팔아서 돌려보내고, 시종을 시켜 그들의 식량자루에 곡식 값을 도로 넣어두도록 몰래 지시한다. 이집트를 떠나고 얼마 후 자루 속에서 곡식 값을 발견한 형제들은 '하느님이 진짜 벌을 내리시려는가보다'하고 두려워하며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 야곱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장남 르우벤은 '만약 제가 베냐민을 무사히 데려오지 못한다면 제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라는 선언까지 하며 약속했으나 야곱은 "너희들이 아주 형제들을 다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느냐? 전에는 요셉을 잃어버리더니 이번에는 시므온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은 베냐민까지 빼앗아가겠다고?"라고 노발대발하며 거부한다.

    고향에 돌아오고 얼마 후, 사 온 식량이 다 떨어져 다시 이집트에 곡물을 사러 가게 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설득한다. 야곱은 "대체 왜 그 사람에게 베냐민 얘기를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고 한탄하는데, 넷째 유다가 "베냐민을 보내주셔야 우리가 다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담보가 될 테니 만약 제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제가 아버지 앞에 영원한 죄인이 되겠습니다." 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형제들로서는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 자루들마다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가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야곱은 과거 요셉을 잃었던 아픔도 있었기에, 또 다시 자식을 잃기 무서웠던 것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도 전부 소진되고,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시므온은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야곱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베냐민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야곱은 그 총리에게 성의를 보여야 할 테니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감복숭아 등을 선물로 들려보내며, 자루에 들어가있던 곡식 값은 2배로 챙겨 사죄비로 다시 지불하도록 한다.

    이집트에 도착한 형제들은 약속대로 요셉에게 베냐민을 제시한다. 요셉은 시종을 시켜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들인 뒤 연회를 열어 형제들과 호화로운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형제들은 관리인에게 지난번 곡식자루에서 나온 돈을 돌려주며 상황을 설명하자, 미리 요셉에게 지시받은 관리인은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일 것이다. 나는 지난번 곡식값을 벌써 받았다."고 하며 돈을 받지 않으며 시므온을 데려온다. 시므온도 그간 감옥에 갇히지 않고 방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잘 지내시냐'고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특히 친동생 베냐민을 보고 '네게 하느님이 은혜 베푸시길 바란다'고 축복까지 하며 총애한다.[20] 그리고 형제들 순으로 자리를 앉힌 후 식사를 하게 했다.[21] 요셉은 형제들의 곡식자루에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채워 주지만 막내인 베냐민의 곡식자루에는 몰래 자기 은잔을 집어넣도록 지시한다. 형들이 옛날에 자신을 팔아버린 것처럼 막내 베냐민도 버리고 가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형제들은 기분 좋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집트 병사들이 따라와 "너희가 어째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냐? 총리께서 술 잡수시거나 점 칠 때 쓰시는 은잔을 훔쳐가다니!" 라고 호통을 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던 형제들은 "은잔 같은 걸 훔칠 거였으면 우리가 지난번 자루에 들어가있던 곡식 값을 두 배나 챙겨서 돌려드리러 가져왔겠습니까? 만약 우리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며, 우리가 모두 총리의 노예가 되어도 좋습니다." 라고 역설한다.[22] 이에 대장이 좋다고 하며 각자 짐을 풀도록 시키는데, 당연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형제들은 절망하고, 결국 또다시 요셉 앞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사실은 위에 나온대로 요셉이 형들을 상대로 옛날 자신이 당했듯 베냐민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바뀌어 베냐민을 지켜주려 할 지 우애를 시험해 본 것. 다행히 형들은 예전과는 달리 베냐민을 팔지 않았고, 넷째 형 유다가 나서 "변명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베냐민 뿐 아니라 우리들도 베냐민과 같이 종이 되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요셉은 "그럴 것 없고 잘못한 베냐민만 남고 나머지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고 명한다. 그러자 유다는 자신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유독 아끼시던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죽고 그 동생인 베냐민이 남아 아버지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고, 그 형이 죽었을 때 아버지가 '나도 죽어 저승에서 아들을 만나겠다.' 라고 슬퍼하셨는데 베냐민마저 잃는다면 이번엔 정말 그리될 것이니 베냐민을 보내주시고 차라리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으로 남겠다고 간청한다.[23]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해버린 요셉은 고함을 질러 주위의 모든 이를 물린 후 파라오가 있는 편전까지 들릴 정도로 목놓아 울면서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형들은 경악하며 요셉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하고 애굽으로 팔아 넘기기까지 했던 형들을 차례차례 포옹하며 기꺼이 용서한다. 이후 요셉은 아버지를 모셔와서 이집트에 살게 하겠다고 말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파라오는 매우 기뻐하며 형들을 불러와 '좋은 수레들을 빌려 줄테니 가져가서 너희 가족과 재산들을 챙겨 이집트로 데려오라'며 요셉의 가족들을 이집트로 이주하도록 장려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각각 좋은 옷을 한 벌 씩 선물하고,[24] 그들이 가나안 집으로 갔다가 다시 오면서 먹을 양식과 선물까지 넉넉히 챙겨서 형제들을 돌려보낸다. 돌아온 형제들은 앞다투어 아버지에게 요셉이 살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요셉이 아버지를 태워 모셔오게 한 좋은 가마까지 보여주자 야곱은 다시 기력이 되살아났으며, '이제 됐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요셉을 다시 만나고야 말겠다.' 고 마음먹는다.

    곧 가나안에 있던 야곱의 부족들이 모두 막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고 가축들을 몰아 이집트로의 대이주를 시작한다. 가던 도중 브엘세바에 도착한 야곱은 문득 불안했는지 밤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에 응답한 하느님은 '이집트로 가는 걸 무서워할 것 없다. 너의 일족이 이집트에서 대성할 것이고, 네가 거기서 편안히 죽어 요셉이 네 눈을 감겨줄 것이다.' 라고 야곱을 위로한다. 이윽고 이들이 이집트에 도달하자 요셉은 고센 땅까지 마중을 나오러 달려와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버지와 얼싸안고 울며 재회한 뒤 아버지와 형제들과 둘러 앉아서 '이제 파라오를 만날건데, 이집트인들은 목축업을 천시하니 직업이 목축업이라고 하면 이집트인들에게 크게 엮이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조언한 뒤 형들 중 다섯을 데리고서 파라오를 알현한다.

    형들은 요셉의 조언대로 파라오에게 자신들을 목자라 소개했고, 파라오는 이들을 배려해 이집트 고센 땅에 머무르게 하며, 그들 중 실력 좋은 자를 뽑아 자신의 가축들도 관리하게 한다. 이어서 아버지 야곱도 파라오에게 소개한 이후 요셉은 파라오의 명을 받아 비옥한 라암세스 지역을 받아 가족들이 살게 했다.

    파란만장했던 가족사가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요셉은 업무로 복귀한다. 자신이 예견했던대로 흉년이 점점 심해지고, 백성들이 매년 대량의 곡식을 사 가다 보니 국가의 경제력이 왕실 재정으로 몽땅 몰리기 시작했다. 끝내 백성들이 곡식을 살 돈조차 없어지고 마는데, 이에 백성들이 찾아와 호소하자 요셉은 '그렇다면 돈 대신 각자 가축들을 끌어오면 그 가축 값대로 곡식을 대신 팔겠다'고 선언하고 덕분에 백성들은 다시 기근을 넘겼다. 하지만 이 또한 1년뿐이었고 이듬해 다시 식량이 떨어진 백성들은 다시 찾아와 '이제 남은 건 몸과 밭밖에 없으니 차라리 우리 몸을 파라오에게 팔아 종이 되고 식량을 받겠다'고 한다. 이에 요셉이 수락하여 '이제 여러분의 토지는 공식적으로 파라오의 소유가 될 것이며, 여러분은 파라오의 소작농이 될 것입니다. 씨앗과 모를 나누어줄테니 밭을 일구어 식량을 얻고, 추수 때마다 수확물의 1/5을 떼어 파라오께 세금으로 납부하시고 나머지를 쓰도록 하십시오'라고 선포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야곱은 사망하기 전 자신의 열두 아들을 불러 각자에게 축복을 내려줘야 했는데, 이때 형제들 모르게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을 따로 불러내고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같은 몫을 차지하게 해준다. 야곱의 임종이 다가오자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에게 가는데, 야곱은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 일어나 두 손자에게 축복의 입맞춤을 하고 포옹한 뒤 나란히 세우고, "내가 살아서 요셉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하느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너의 아들들까지 내 눈으로 살아서 보게 해주셨구나"라고 기뻐하며 팔을 X자로 펴서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에게, 왼손을 장남 므낫세의 머리에 올린다. 이를 본 요셉은 '아버지, 얘가 장남 므낫세입니다. 오른손을 므낫세에게 얹으시죠'라 했지만[25] 야곱은 '나도 안다. 므낫세도 잘 되어 크게 번성할 것이다. 하지만 에브라임이 형보다 더 크게 될테고 이 아이에게서 수많은 핏줄들이 갈라져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두 손자를 축복한다. 어쨌든 이로써 이집트 여인과의 혼혈인 요셉의 아들들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인정받았고,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12지파 중 두 지파의 선조가 된 셈이다. 이후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축복할 때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으로 축복을 받았고 그 후 야곱은 아들들이 둘러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사망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40일에 걸쳐 방부처리하고, 이집트의 지인들이 70일간 애곡하는 기간을 가진 뒤, 파라오의 윤허를 받아 요단강의 동쪽으로 운구해 가는데, 왕실의 문무백관, 궁중 장로, 가문 사람들, 대규모 호위 군사들까지 붙어 왕의 장례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요셉이 아버지 생전에 애써 숨기던 적개심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라 여겨 요셉에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위로하였다.

    이 말은 즉, 요셉이 자신의 가문을 통해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잡고 자신의 모든 힘들었던 여정이 언약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실제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넷째 형 유다족속을 통해 탄생하셨다.

    외경 중에 요셉의 언약에서는 요셉이 꿈에서 유다 지파의 여자와 어린 양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후 요셉은 110세까지 살게 되는데, 죽기 전 "언젠가 자손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죽을 때는 이집트에 묻히나,[26] 후손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가나안 땅으로 옮겨진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 탈출기의 시대로 가면 요셉의 공적이 잊혀져서, 요셉과 형제들의 후손들은 단순한 이방인에 노예 취급을 받는다. 탈출기 후기설을 채택하여 해석하면, 이것은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파라오가 외부 유목민인 힉소스 계통의 혈통이었는데[27] 이집트인들이 요셉이 죽은 후 힉소스인들을 몰아내면서 지배층이 바뀌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28]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에는 실제 요셉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20세기 들어와서 수난을 겪었는데 6일 전쟁 이후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지만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소속으로 하되 유대인들이 계속 현장 방문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나블루스를 재관할하면서 무덤 참배객들이 계속 총격을 받는가 하면 훼손 또한 자주 일어났다.

    [1] 참고로 요셉이 입은 색동옷은 이름처럼 여러 색으로 되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소매가 길고 술이 달린 외투/겉옷을 말한다.[2] 철장은 우리말로 하면 쇠 막대기 또는 쇠 지팡이.[3] 말이 좋아 꿈쟁이지 좀 거칠게 말하자면 꿈이나 꾸는 자식 같은 멸칭에 가깝다.[4] 성경에서는 '이스마엘의 사람들(미디안인)'이라고 언급하였다.[5] 정확한 직책은 가정 총무이다.[6] 고대 노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노예 제도와 조금 다르다. 노예 신분이라도 전문직에 종사한 사례가 많다. 일반 가정에서도 막일하는 노예부터 가정교사나 집사를 담당하는 노예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로마의 경우 자유민이 된 노예에게 부모가 없다면 옛 주인이 법적인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법도 있었다.[7] 성경에도 매일 요셉을 유혹하였다고 기록한다.[8] 이 부분은 고대 이집트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두 형제 이야기'와 유사성을 보인다.[9] 이를 보면 보디발도 요셉이 그러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감옥행으로 끝낸 것 같다[10] 북한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살인 수용소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범털' 전용 감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북한의 수용소 수준이었다면 요셉은 죽거나 최소한 그런 전개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차피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보호해주시긴 했겠지만...[11] 다만 성서 원문에서는 그냥 투옥시킨 게 아니라 분노해서 투옥시켰다고 언급되므로 문맥상 아내의 모함을 믿고 요셉한테 분노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니면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려고 했고 총애하던 요셉을 모함함으로 분노했을 수도 있다.[12] 주류 역사학계는 이 당시의 파라오를 상이집트(제 17왕조)의 파라오였던 세누스레트 4세로 본다.[13] 소의 암컷[14] 皮骨, 살가죽과 뼈.[15] 相接, 살가죽과 뼈가 맞붙을 정도로 몹시 마르다[16] 성경에서는 '파리한'이라고 쓰여 있다.[17] 파라오는 신분만 높을 뿐, 통치권은 거의 모두 요셉에게 위임하였다.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내가 너보다 높은 이유는 그저 이 옥좌 하나 때문이다"라는 파라오로서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전근대시대에 왕이 직접 의전과 집무실을 빼면 나와 동급이라고 공인한거다.[18] 재물을 다 바치고도 식량을 충분히 구하지 못해 나중엔 가축을 바쳐야 했고, 그것마저 떨어지자 나중엔 땅까지 내야 했다. 땅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수확의 1/10를 바쳐야 했기에 사실상 소작농 신세가 되어버린다. 다르게 보면 지방 귀족들을 몰락시켜서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토지를 가진 지역 귀족들이야말로 왕조교체의 주역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방 귀족들의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서 중앙집권을 성사시킨 것.[19] 최초의 마이너스 금리 시행자로 보는 주류 역사학자들도 있다.[20] 그를 만났을 때 감격하여 뒷방으로 가서 한참 조용히 울기도 했다.[21] 형제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하며,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5배의 음식이 제공되었다.[22] 요셉이 점치는 데 쓰는 잔이라고 하는데 요셉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로 점을 쳤을 리는 없고, 형들을 상대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겸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꺼낸 말일 것이다. 이집트에는 그릇에 기름을 넣어 퍼지는 모양으로 점을 치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26절에서는 점을 치는 미신을 금하고 있다. 천주교 주교회의, 창세기, 154쪽[23] 이집트로 오기 전 유다가 아버지께 "만약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평생 그 죄를 짊어지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24] 베냐민에게는 다섯 벌을 주었고 덤으로 은 삼백 냥까지 얹어준다.[25] '오른쪽'이 '서열 1위의 권위, 권력자의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26] 이때 요셉의 유해 역시 미라로 만들어졌다. 창세기 50장에서도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27] 기원전 1600년경 제15왕조 말기 무렵.[28] 그러니까 빗대자면, 마치 원나라 시기에 고려양 전파나 기황후 처럼 요셉도 힉소스 궁중이었기에 고관으로 기용이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명나라는 중기부터 의도적으로 고려식 복색을 규제해간다.)


    아름다운 마무리(창세기50장)

    본문은 야곱의 죽음 후에 요셉에게 있었던 일과 요셉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죽음을 맞이하자 요셉은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는데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과 그 규모입니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40일에 걸쳐서 향으로 처리를 하고 슬퍼하며 곡을 하는데, 애굽 사람들이 곡을 하는 기간이 무려 70일입니다. 바로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 것과 비교하면 요셉의 아버지는 바로의 애도 기간보다 불과 2일이 적은 기간입니다.

    장례 기간뿐만 아니라 요셉이 바로의 허락을 받아 가나안으로 떠나는데 규모를 보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7~9)

    장례의 기간이나 규모를 통해 애굽에서 요셉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성대하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매장지에 아버지를 장사합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요셉, 열일곱 살에 떠나 대략 39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 겁니다.

    야곱의 장례를 보면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슬픔입니다. 애굽에서 70일의 애도의 기간이 지나고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와서 다시 7일 동안 슬퍼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면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자신의 체면이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표한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슬픔에 빠져 울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요셉을 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슬퍼하는 요셉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요셉의 형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요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요셉의 형들은 슬픔보다 다른 것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

    그들이 행한 악을 요셉이 되갚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소서”(19, 21)하고 말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동생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이었던 요셉이 당한 충격과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이야기는 어떤 걸까요?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이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해서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 것, 그런 걸 기대합니다.

    이제 요셉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고 요셉의 말 한 마디면 형들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자신을 외면했던 형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돌려 줄 수 있습니다. 곁에서 요셉을 말릴 수 있는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한 말입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17) 형들은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전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어렵게 만듭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형들에게는 죄책감이 남아있었고 불안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또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치르고 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까 불안하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할 거 같으니까 상대방도 이렇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요셉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지금이 기회인데 분명 복수할거야! 당한 만큼 돌려줄 거야!‘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 그 사람도 아팠으면 좋겠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더 힘들었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래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마음에 불만과 원망이 생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본성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떻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셉처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하나님을 대신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상황을 아시고 나의 어려움을 아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을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죄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셉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자유를 빼앗긴 나의 상황, 거짓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여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나의 상황, 상황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상황들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니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상황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문제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어려움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속삭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 내가 뭐라고 반대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 일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감사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괴로웠지만,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그 일에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황은 어떠십니까?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속이려고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 말 못할 아픔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앞뒤에 꽉 막힌 상황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고, 남들과 비교되는 나의 처지 때문에 낙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 뜻대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복수하는 것,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갚아 주는 것, 요셉은 이런 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그의 마지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자손들에게 유언의 말을 전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

    요셉의 유언은 두 가지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땅에 이를 때에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약속에 대한 요셉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의 유언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특별히 강조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방문한다’,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실 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오셔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니 하나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 명하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삶을 우리는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셉의 삶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어려움을 이기고 총리가 되어 성공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삶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이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가꾼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의 삶이 하나님이 빚으신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KBS 다큐에 방영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채팅방에도 공유된 적이 있는데 교회오빠라는 제목의 다큐입니다.

    젊은 한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어느 날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투병 생활을 하는데, 다음해에는 아내가 산후 조리를 마치고 나와서 검사를 받았는데 림프종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남편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아내의 항암치료가 시작됩니다.

    남편은 그 과정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이러다 저희 가정 다 죽겠습니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가 그 아픔을 알기에 배우자가 투병 중에 있을 때 어떤 마음인지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치료는 종료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14개월 만에 남편의 암은 재발되었고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복막에서부터 여러 장기에까지 전이된 것입니다. 의사의 표현으로 모래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는 겁니다.

    제가 이 영상을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할 텐데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암에서 나아서 건강해져야 될 텐데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이 질병에서 완치되어야지 기적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런 기적들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우리가 질병을 만나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지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서 깨달았잖아. 그래서 암 자체는 축복은 아니지만, 암을 통해 우리가 얻은 유익인거 같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보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되냐고 물어봤을 때는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지는 기회를 얻고 싶은 거예요

    하루하루 눈뜨고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부부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명, 그렇게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죽는 죽음이라면 삶에 대한 후회가 없을 것 같고

    그의 아내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해도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걸 우리는 알잖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삽니다. 약속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조금 더 성숙하는 기회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기회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요셉의 입관(창세기 50: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세기의 하나님의 역사는 50장에서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태초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이 땅에 계획과 목적이 있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그 기대와 마음은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창세기를 보면서 본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이삭을 보면서, 야곱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 사람 일생의 작고 어두운 일까지도 때론 매우 섬세하게 때론 매우 역동적으로 기술하며 보여준다.

    오늘 5~6,000년이 지나서까지 우리 모두는 그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고 하나님의 손안에 무엇을 체험하고 배우고 잃으면서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살았는지를 보고 있다.
    이 두꺼운 성경책에 하나님은 사람의 일생에 대해 계속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이 무슨 책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말한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일생을 관심하신다.
    우리의 일상을 관심하신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체험하는 지를 관심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역사와 계획과 완성이 사람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의 끝은 요셉의 입관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이 땅에서 역사가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인상이 깊다.

    창세기(Genesis)는 창조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하신 역사이다.
    그 역사가 오늘날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관심하시며, 기억하시며, 간섭하신다. 당신의 근심에서, 당신의 원함에서, 당신의 기쁨과 만족에서, 당신의 두려움에서, 당신의 간절함에서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신다. 당신의 창세기는 아마도 당신이 죽고 입관하게 될 때 끝날지 모른다. 책이 끝날때는 그 책의 주제와 흐름과 방향이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책이 시작될 때 거기엔 이미 다른 주제와 내용과 흐름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창세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다.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와 돌보심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도 우리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분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응원하시지 않겠는가? 누구는 응원하고 누구는 저주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넘치도록 갖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지 않는가? 그분은 우리를 응원하고 계신다. 다만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위해 제물을 드리는 가인을 본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에서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우습게 여기는 요셉의 형제들을 본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시고, 야곱만을 사랑하셨고, 요셉에게만 꿈을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왜 그럼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가? 왜 다른 이들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는가?

    그 차이를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제물을 그냥 드리면 되지 않는가? 내가 잘 준비해서 드리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바로 가인이다. 아벨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감동하고 감사하고, 고민하여 드린 것이다. 제물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보이는 팥죽보다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에서의 생각이다. 내가 첫째인데, 내가 열심히 사냥하고 노력하고 수고하면 되는것이지, 넌 무슨 ‘장자권’... 그래 그것을 네가 가진들 무엇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네가 어떻게 쓸건데? 기집애같이 약하고 팥죽이나 만들지 사냥도 못하면서 뭘 어떻게 할건데? 야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었다. 그가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축복 만큼은 받고 싶었다. 어쩌면 에서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모함과 간절한 믿음이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것과 분명 그분이 축복하심을 받기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요셉에게만 주었겠는가?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형들이 그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왜 그런생각을 하니? 너는 왜 그런 것을 바라니? 하나님께 그런 것을 바란다고 이루어질 것 같니?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으면 무시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미워한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꿈을 꾸었다. ‘요셉아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건데, 너 나를 믿고 따라올수 있겠니? 네가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네가 순종할수 있겠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씩씩하게 반응하였을 것이다. ‘하나님 주님이 주신다면 제가 순종하며 따라갈께요’.

    하나님은 오늘 사람을 관심하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심하시기에, 누군가 하나님을 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가 사람의 일생을 기록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관심하신다. 당신이 반응한다면, 당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하나님은 오늘 다시 그분의 창세기를 기록하실 것이다.

    창세기가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아무도 하나님을 관심하거나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책인 출애굽기를 보면 430년간 애굽에 있으면서 그들은 이제 애굽의 종이 되어버린다.
    요셉이 있을 때 그들은 왕과 같은 지위를 가졌지만 이제 430년이 흐를 때 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도, 능력도 없는 세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창세기가 이어질수 있기를 원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는 책이다.
    다시말하지만 이제 하늘과 땅을 만드는 그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의 삶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이 땅에 보여주고 싶어하신다.
    그일을 위해 오늘 이 땅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끝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움직임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 요셉의 죽음과 입관을 가장 슬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할 때 그 때가 바로 창세기가 끝나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창세기가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1월 16일(목) 창세기 46-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센 땅(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Now Jacob sent Judah ahead of him to Joseph to get directions to Goshen. When they arrived in the region of Goshen,


    고센(Gôshen) גֹּשֶׁן 스트롱번호 1657

    1.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2.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발음 [ Gôshen ]
    어원 / 애굽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 1. 고유명사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창45:10, 46:28,34, 47:27, 50:8, 출9:26
    • 2. 고유명사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수10:41, 11:16, 15:51.
    • 관련 성경  /   고센(창 45:10, 46:28, 34, 47:27, 50:8, 출 9:26, 수 10:41, 11:16, 15:51).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 2차 애굽 방문 때의 공적(44:18 -34)으로 인해 야곱은 유다를 매우 신임하였으므로 가족을 대표하여 그를 요셉에게 보낸것 같다.


    고센(Goshen)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터전으로 삼은 애굽땅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ㅇ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창세기 46:26-27) 



    고센 땅의 위치는 애굽의 국경지대로서 야곱의 고향인 가나안 땅과 가까운 지역으로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생활터전을 좋은 땅-고센으로 정한다.
    고센은 나일삼각주에 위치해 비옥하고 강우량이 양호하며 나일강이 가까워 관개가 용이한 풍요의 땅이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다. 

    모세의 출애굽시기까지 430년간 애굽에 거하며 번성하여 전쟁나갈 수 있는 장성한 남자만 60만(603,550명)이 넘고 온 백성은 250~300만에 이른 대민족이 되어 애굽을 두렵게 한다.


     *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7년 기근으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은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애굽으로 온다.

    애굽으로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인가 75명인가?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숫자는 1이 2가 될 수 없고 2가 1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창 46:27)이 옳은가? 아니면 75명(행 7:14)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옳은가?
    70명이 옳고 75명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잘못이라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만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하는 75명의 숫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스데반 집사의 개인 설교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을 뿐이다.
    만약 성경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 실수한 부분을 올바로 고쳐서 기록했다면 성경이 잘못(유오) 된 것이다.
    성경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 내용 중 그가 실수(mistake)한 부분도 그대로 인용했기에 전혀 거짓이 없고 무오한 것이 된다.
    성경은 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장점을 기록해 줄뿐만 아니라 단점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해주고 있으며, 유명한 모세, 다윗, 사울(바울)도 살인하는 죄를 범하였고, 아브라함도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우리 자신을 점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실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코 스데반 집사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님을 이해하여 주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이 글을 쓴다.

    스데반 집사 설교 내용 중에 잘못(mistake) 된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명했는가? Not Sure.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즉 갈대아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다고 했는데, 구약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가족과 함께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착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데라는 갈대아를 떠나려 했을까? 성경엔 기록이 없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데라가 자기 아들 하란이 죽은 충격으로 가나안으로 가려 했다. 가던 도중 머물게 된 곳의 이름을 자기 아들 이름인 ‘하란’이라 지어서 정착했을 것이다. 하란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자,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종)들,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고 하셨던 때와 장소는 갈대아에서 아브라함이 젊은 청년의 때가 아니라 하란에서 가장으로 부요하게 되었을 때라고 보여진다.



    둘째, 아브라함이 그 아비 데라가 죽으매 가나안으로 떠났다? No.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비가 죽으매’(행7:4)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의 사건들의 숫자 계산을 해보면 분명히 그의 아비 데라가 살아 있을 때 떠났다. 왜냐하면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창11:26),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떠난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출 12:4)였다. 그 당시 데라는 145세 였고, 데라가 죽은 때는 205세(창11:32)이므로 데라가 죽고 나서 떠난 것은 아니다.
    데라가 70세에 세 쌍둥이를 낳았다고 보지 않는다. 만약 아브라함이 큰아들이었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날 때 아버지 데라는 살아 있었으며 그 후에도 하란에서 데라는 6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큰아들이 아니고 둘째나 셋째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 형제들의 나이 차이가 60살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향해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아브라함이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이 더욱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셋째, 야곱과 그 가족들이 애굽에 이주한 숫자가 75명이었다? No.

    창세기 46장 26절에는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간 숫자는 야곱의 자부를 제외하고 66명이며, 27절에는 야곱과 요셉, 그 아들 둘 모두 4명을 합하여 정확하게 70명이었다고 말해 준다. 그러니 이 70명은 야곱을 포함한 직계 가족의 숫자가 분명하며 며느리들과 손자 며느리들까지 모두 합하면 필자의 견해로는 100여명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75명이란 숫자는 스데반 집사가 잘못 알고 설교했던 것이다.

    넷째,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에 장사되었다? No.

    창 23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마르레 앞 막벨라 굴을 에브론에게서 사서 그곳에 장사지냈다. 그후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그리고 야곱과 그 아내 레아도 그곳에 장사 되었다(창49:30-33). 그러므로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에 장사 되었다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틀린 것이며 세겜은 그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요셉의 후손들이 차지한 땅에 속하며 이 세겜에는 요셉이 장사됐다(수24:32).

    스데반 집사의 이러한 잘못된 언급은 공회원들의 큰 반감과 분노를 갖게 되었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업신여겼으며 상종도 하지 않았는데,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 즉 사마리아 지역에 장사되었다고 하는 잘못된 말에 공회원들은 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유다지역과 갈릴리 지역을 통행하던 사람들이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안 지역의 땅을 밟지도 않으려고 우회해서 요단강 동편의 길을 통해 왕래했던 상황인데 자기 조상들이 그러한 땅에 묻혔다고 말했으니 얼마나 분개했겠는가?

    다섯째, 야곱과 그 조상의 장지는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샀다? No.

    아브라함이 산 땅은 세겜이 아니요, 마므레 앞 즉 헤브론이며, 에브론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고 샀던 땅이다(창23:15). 세겜 땅은 야곱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 100개로 샀던 땅이다(창33:19).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는 야곱과 그 조상의 장지도 틀리고, 누구에게서 구입하였던 땅인 것도 틀리게 말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설교에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도 실수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과오나 실수를 통해 “성경은 거짓 없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이 더욱 증명된다. 그리고 그 기록된 숫자들을 통해 성경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더욱 깨달아가게 된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나 곧 물에 빠진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수영을 잘할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주님의 손에 붙잡힌 베드로는 다시 물에 빠지지 않는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의 능력과 영광은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 집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데반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 주셨다. 스데반 집사는 주님의 영광이 모든 자들에게 선포하며, 기쁨으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됐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말하며 잠을 자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부지 중이건 무지 중이건 말에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겸손(Humble)하고 정직(Honest)한 믿음(Faithfulness)의 사람들에겐 저들의 실수마저 아름답게 만들어 자기(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 보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1〕

    나일 강의 삼각주의 동쪽 지역이다.  야곱의 애굽 이주로부터 출애굽까지 이스라엘 사람이 살은 목축에 적합한 땅이었다(창 45:10,46:28,29,34,47:1, 4, 6, 27,50:8, 출 8:22,9:26).

    범위는 분명치 않은데, 구약 외전 유디드서(Book of Judith) 1:9에는 다바네스와 라암셋을 고센 땅에 포함하고 있다(창 47:6의 `고센 땅'과 11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는 이름은 다르나 같은 땅이다).

    유다계 문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이 지방에 살면서 애굽인과의 접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에브라임계 문서와 제사전(祭司典)에 의하면, 고센은 목축생활의 최적지로서 농경지로서는 대체적으로 부적합한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고센은 나일 강 본류로부터 멀고 관개에 불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경작되고 있었음이 민수기 11:5로 짐작된다. 헬라역(LXX)은 창세기 45:10,46:34을 Gevsm jArabivas(아랍의 게셈)이라고 하였다.

    이 아랍은 희랍, 로마 시대의 하부 애굽의 정치적 분할 23개 도의 하나인 nomosArabia(아라비아 도)를 가리키고 고대의 상형문자의 도표(舊柰)에는 하부 애굽의 제 20도셉드(Sept)라 불리우고 있던 것이다(고대에는 20도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희랍,로마 시대에는 23도로 늘었다).  아랍도는 하부 애굽의 동단을 이루는 도인데, 스트라보(Strabo)는 이것을 나일과 펠루시움(Pelusium), 그리고 고호(苦湖, Bitter Lake) 사이에 두고 도레미는 부바스틱(Bubastic), 즉 펠루사익(Pelusaic) 지류의 동쪽에 두고 있다.

    또 헬라역(LXX)은 창세기 46:28에서는 헤오른 볼리스(`Hrwvwn povli)를 그 도성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헤오른 볼리스는 이스마리아의 서쪽 20㎞, 와 디 두밀랏(wady Tumilat)에 있는 오늘날의 델마슈구다(Tell-Mashkuta=像丘)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1883년과 85년에 나빌(E. Naville)에 의해 조직적으로 발굴되었다.그러나 지리학자 톨레미(Ptolemaeus)에 의하면, 아라비아도의 서울은 바쿠사(Fakou'ssa,Phacussa)였다고 한다.

    이것은 애굽어의 `市'를 의미하는 바(pa)를 같이 읽는 것으로서 게셈(kes^em)의 음역(音譯)이라고 생각된다. 게셈은 상형문자의 도표(道表)에는 바소보드(Pa-Sopt)라 기록되고 소브드도의 서울인데, 자가직그(고대의 부바스데스)의 동쪽 13㎞, 운하의 우안에 있는 오늘날의 사프텔헨나(Saftel-Hennah)에 옛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이유적과 동일시된다.

    나빌은 여기서 람세스 Ⅱ세(Ramesses Ⅱ)의 화강암의 거상(巨像)을 발굴했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제 30왕조의 넥타네보 Ⅱ세(Nec-tanebo Ⅱ, C. 350 B.C.)에 의해 소프트(Sopt) 신에게 헌납된 신전의 유물이다.  그 비문의 하나에는 왕은 게스(Qes)에행차 후 게스 제신의 영광을 위해 이같은 것들을 하라고 명했다라고 되어 있다. BC 350년 경에는 이 성읍의 이름이 `게스'(Qes=K ^esem)라고 불리웠다는 것올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바 소프트'(PaSopt)라고 불리웠을 것이다.

    스테인돌프(Steindorff)는, 애굽에서도의 서울이 종종 한 성읍에서 다른 성읍으로 옮겨지곤 하였다는 관례를 생각한다면, 이 곤란은 설명되리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여하튼 고센의 땅은 대략 부바스데스의 동쪽에 있는일대인데, 서쪽은 사프트 엘헨나(Saft el-Hennah), 남쪽은 벨베스(Belbes), 동쪽은델 엘 게빌(Tell el-Kebir)을 잇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면적 155-207㎢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2〕

    유대의 남부(네게브)의 성읍 또는 그 지방이다(수 10:41,11:16). 아납의

    동쪽 2㎞, 에다하 리예(ed-Dahariyeh)와 동일시된다.

    〔3〕

    헤브론의 남쪽에 있던 성읍인데, 위치는 불명이다(수 15:51)


    고센 땅(אֶרֶץ גֹּשֶׁן, ʾEreṣ Gōšen)히브리어 성경에서 요셉파라오가 히브리인들에게 준 이집트의 장소로 명명되었다(창세기, 창 45:9~10). 그들은 나중에 출애굽할 때 이집트를 떠났다. 이 지역은 이집트 하류의 나일강 삼각주 동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힉소스 왕들의 권좌인 아바리스(Avaris)나 그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센 땅은 성경의 창세기출애굽기에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을 구성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족장 야곱은 기근에 직면하여 곡식을 사러 그의 아들 열 명을 이집트로 보낸다. 야곱의 또 다른 아들인 요셉은 이집트의 고위 관리였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집트에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창세기 45장 10절에서는 고센을 바로의 궁정에 사는 요셉과 가까운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창세기 47장 5절에서는 고센을 이집트 땅의 “가장 좋은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요셉이 그의 가족에게 가축을 지키는 자로서 파라오에게 나아와 '너희가 고센 땅에 거하게 하리니 이는 모든 목자를 가증히 여기기 때문이라'라고 한 것처럼 이는 이집트의 나머지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구별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창세기 47장 11절은 "라암셋 땅"을 고센과 바꾸었다. "요셉이 그 아비와 형들에게 바로의 뜻과 같이 이집트 땅의 가장 좋은 라암셋 땅에서 그 아비와 형들에게 땅을 주어 기업을 주게 하였느니라"라고 지시했다.

    출애굽기에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애굽에 거주하며 번성한다.
    고센이라는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에서 단 두 번만 등장한다.
    여기서 고센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이집트인들을 괴롭히는 파리 재앙과 우박 재앙을 면했다.



    고센의 뜻은 ‘땅의 언덕’으로 교회(기독교)에 대한 예표

    성경 말씀을 보면 생명(生命)과 사망(死亡), 영생(永生)과 영사(永死) 등 대조되는 극단적 두 개념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믿음은 여당 야당, 보수 진보처럼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생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8: 44- 45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가는 길은 영생과 영사의 T형 갈림길에서 생명이 아닌 사망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총론 불변의 진리의 틀(거울)로 보면 어떤가?

    택자와 불택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따라서 복음교실은 누가 주어인가?
    즉 누가 자신의 주님인가를 깊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체(실상)가 아닌 그림자(예표, 허상)에 소망을 두고 그림자를 붙들고 가서 그 결국은 영사에 이르게 되고 썩을 씨와 썩지 않을 씨(벧전 1:23)를 분별하지 못하고 본향(히 11:14-16)을 향해 가는 삶이 아닌 나그네(행인. 벧전 2 :11)의 삶을 살면서 그것이 본향인 것으로 착각하는 나그네 믿음의 삶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생명과 사망의 T형 갈림길은 중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름다운교회 복음교실은 총론 불변의 진리와 성경의 주제인 구원과 심판을 거울에 비춰보는 분별을 할 것을 계속 말씀드립니다.

    복음교실 첫째 틀 :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진리로 알려주시는 총론 불변의 진리.

    1. 생각 ;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참고 : 하나님이 말씀만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할 것.

    2. 속성 : 온전성은 오직 하나님(창조성, 전지성, 전능성, 주권성, 거룩성 등등)과 예수님(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속성만 온전성이 있고,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진 3차원 물질로 된 현재의 세상이나 피조물은 온전성 속성은 있을 수 없다.

    3.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4. 천국은 조금 간다.

    복음교실 둘째 틀 : 성경 전체로 구원과 심판.

    이렇게 분별할 기준에 대한 말씀을 드려도 분별과 깨달음은 사람의 영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성령이 몸에 들어와 깨닫게 하셔야만 깨달을 수 있고‘ 성령이 몸에 들어오시려면 죄 사함을 얻어야 하고, 죄 사함을 얻으려면 죄 사함의 비밀을 하나님이 깨닫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성경말씀이나 사건 지명 등등을 아무로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시는 총론 불변의 진리만이 진정한 참 진리인 것입니다.

    막 4 : 9-13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갈 2 : 9-14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경지명 강해 - 고센(Goshen)

    고센(Goshen)은 뜻이 ‘땅의 언덕’입니다.
    고센은 어떻게 땅의 언덕이 되는가?
    땅은 본체가 아닌 잠시 있다 사라질 신천신지 그림자(예표)입니다.

    성경지명에서 고센은 세 곳이 있는데 애굽에 속한 고센이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것을 머리에 두고 고센을 생각합니다.

    첫째 고센은 여호수아가 점령한 고센 땅(여호수아 10:41-42)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둘째 고센은 하나님의 백성인 열두지파 중 유다가 받은 기업 (여호수아 15:20, 51)

    20.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러하니
    51. 고센과 홀론과 길로니 모두 십일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

    셋째 고센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아닌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

    애굽에 있는 고센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센이 땅의 언덕이 되는 성경적 과정

    1.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사기꾼 야곱

    야곱은 '뒤를 쫓는 자', 혹은 '발뒷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에서 뒤를 따라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지자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죽 한 그릇으로 사기를 쳐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사기꾼이 야곱입니다.
    이런 사기꾼 야곱이 비슷한 사기꾼인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런 저런 훈련과정을 거친 후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얍복강 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환도뼈가 위골이 되면서 겨루어서 이겼는데 이때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됩니다.

    창세기 32: 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 ‘땅의 언덕’ 고센(Goshen)

    성경에서 땅은 애굽과 함께 세상의 예표입니다.
    이런 세상에 속한 애굽에 있는 땅인 고센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피난처로 머물게 됩니다.

    창세기 46:24-34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31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요셉은 야곱의 막내아들로 야곱이 막내인 요셉만을 예뻐하자 야곱이 낳은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요셉을 죽이려고 들판에 데리고 나가서 구덩이를 파서 구덩이 속에 빠뜨렸는데 지나가던 대상들이 요셉을 발견을 해서 애굽에 있는 애굽 사람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런데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꿈 해몽을 잘 해서 애굽 왕 바로에게 신임을 받고 애굽 왕 바로 밑에서 승승장구 출세를 해서 총리까지 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는 야곱의 자손들이 먹고 살기 힘이 들어지면서 애굽 땅 고센에 들어가고, 애굽에서 바로의 신임을 받아서 승승장구한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과 자기 형제들을 맞아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센은 땅의 언덕이 되었다는 지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과 사건이나 지명 등을 진리의 일관성으로 마지막 때를 맞는 오늘의 기독교에 적용을 하면 이 세상에서 형편없고 부족한 나(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 따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 대속을 하심으로써 죄 사함을 얻게 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이땅의 교회를 땅의 언덕을 삼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살게 하신 것은,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이 왜 땅의 언덕인 것인지 고센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및 기독교 진리와 복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지체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강해가 중요한 것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에서 구원은 협의의 구원과 광의의 구원으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진리와 복음에서 협의적 구원의 핵심이 죄 사함이라면 광의의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서 구원을 해서 영원으로 들어가는 구원하는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및 기독교 진리와 복음으로의 구원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구원을 해서 하나님의 재창조로 시간과 공간이 없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되는 다시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부활로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지는 예수가 친히 그리스도가 되는 왕국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분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늘 고센 2 강해는 대단히 중요한데 문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내용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겨우 A4 용지 몇 장으로 이런 내용을 설명을 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예표적으로)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 등으로 이어지면서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의 예표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있었던 일이 야곱의 얍복강 사건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간교한 외삼촌 라반에게 야곱이 많은 일을 당한 후 다시 고향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얍복강에서 야곱이 날이 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며 겨룹니다. 그리고 환도 뼈가 위골이 되는 불구의 몸으로 그 사람을 이기는데 하나님은 이때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 즉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이스라엘(야곱)의 막내인 요셉을 미워해서 광야에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구덩이에 빠뜨려놓고 왔는데 이곳을 지나가던 대상이 요셉을 구해서 애굽 사람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하나님이 꿈 해몽을 잘 하도록 지혜를 주셔서 애굽 왕 바로가 꾼 꿈 해몽을 잘해 애굽 왕 바로의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를 하면서 애굽의 총리가 되고 가나안 땅에 살던 이스라엘 가족들이 기근이 들어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는 아스라엘(야곱)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으로 갔는데 형들이 죽이려고 했던 요셉이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신임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센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있습니다.

    창 45 : 1-11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따라서 이 말씀과 사건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지명 고센을 통해 땅의 언덕이 되는 것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복음교실은 이런 것으로 강해를 합니다.

    성경 기록의 3단계.

    1단계 구약단계 - 구약시대 -  예표(그림자) 단계

    2단계 신약단계 - 성령시대 - 예표와 본체의 혼재 단계

    3단계 영원단계 -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로 이루어지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통치하는 왕국 -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완전한 본체로 구원의 완성을 이룸

    예표와 본체를 이렇게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면 기독교시대는 성령시대로 예표와 본체가 혼재한 뒤섞여 있는 단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창 47 : 23-27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25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성경지명으로 나오는 세 곳 고센은 하나님이 택하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열두지파와 신약시대 예수님 열두제자로 이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예표로서 예수님과 동일한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시대지만 3차원 물질로 된 육을 가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진 상태로는 구원의 완성은 이루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재창조에 의한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왕국과 둘째 사망으로 표현되는 무저갱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신비주의신앙이 만연해 있는 것은 창세기 47장에서 예표로 알려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2. 하나님 언약의 결국 신천신지에서 완성이 되는 구원.

    계 21 : 1-4 ; 12-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3. 애굽의 고센은 하나님의 재앙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고 간과된 성읍.

    출 8 : 20-32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직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 떼가 바로의 궁에와 그 신하의 집에와 애굽 전국에 이르니 파리 떼로 인하여 땅이 해를 받더라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26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을 오늘의 기독교에 이 말씀을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간과는 히브리어에서는 ‘파스카(Pascha)’이고 헬라어로 원형이 ‘파레시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을 시키실 때 하나님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지 않는다고 해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파스카 즉 간과되어 지나감으로서 하나님이 내릴 재앙을 받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은 그들의 맏아들을 모두 하나님이 죽여 버립니다. 맏아들은 대표성 원리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백성들, 자손들)입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게 한 ‘파스카’는 우리말 ‘간과’로 번역된 것인데, 히브리어 파스카가 헬라어 ‘파레시스’로 번역이 된 것은 ‘페레시스’는 ‘옆에서’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와 ‘보내다’라는 뜻을 가진 ‘헤미’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말 간과로 번역된 페레시스는 ‘옆으로 보냄’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롬 3 : 19-28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4.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간과(파스카=페레시스)하심이 연결되는 하나님이 죄를 기록하는 곳 두 군데.

    성경전체의 주제는 구원이고 구원의 결국인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져 창조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구원을 해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로 재창조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통치하는 영원한 그리스도 왕국이 구원의 완성인 구원의 결국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핵심에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어디에 기록해 놓는가에 대해 이렇게 성경에서 알려줍니다.

    레 17 : 1, 1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예표가 되는 유다의 죄를 절대로 잊을 수 없도록 금강철필로 새겨서 두 군데에 새겨놓는데 마음 판과 단 뿔에 두 군데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첫째, 예표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죄를 지었을 때 단 뿔에 기록해 놓은 것은 죄와 죄 사함의 방법을 율법으로 정해서 짐승을 대속 제물로 죽여서 그 피를 발라서 안 보이게 함으로써 죄를 간과하심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한 것이고,

    둘째, 본체적으로는 마음 판에 새겨놓은 죄들은 본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피로 죄를 덮으셔서 하나님이 그 죄를 없다고 간과하심으로써 죄 사함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띠라서 이런 하나님을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으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서 예수님은 새 언약으로 하신 언약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의롭다 칭하시는 칭의인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온전히 율법을 지키고 행해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을 육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1월 15일(수) 창세기 41-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이 그 하실 일(41:25)

    요셉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Then Joseph said to Pharaoh, "The dreams of Pharaoh are one and the same. God has revealed to Pharaoh what he is about to do.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감히 대국의 왕인 바로와 이런 방식으로 대면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한 요셉은 신적 권위로서 바로와 대면하고 있다.
    즉 요셉은 종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스승의 자격으로 제국의 왕 바로를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보이심이니이다
    - 요셉은 먼저 바로의 두 가지 꿈이 같은 의미임을 밝혔다.
    또한 이 꿈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시되 그 사실성을 확신시킬 목적으로 반복해 주셨다는 증언을 첨가하였다.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 비록 꿈을 두 번 겹쳐 꾸었기는 하나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사실을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일하심으로써 그의 하나님되심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은 항상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 이전에도 있고 그 아래에도 있고 그 안에도 있다는 진리는 나를 참으로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고 하면, 자칫 우리를 높이고 하나님을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 마치 고용인이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 (이사야 64:4)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파산선고를 받아 긴급구제가 필요한 상황과 같습니다. 내가 위험에 처하여 보호해 줄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내가 어리석기에 지혜로운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길을 잃었기에 구조해 줄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말은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로 인해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나에게는 아무 영광이 없습니다. 베푸는 이께서 영광을 얻습니다. 능력있는 이께서 찬양을 얻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표현한 성경구절들을 기념하면서, 아래에 요약한 목록을 읽고, 각자 저마다의 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바랍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시편 55:22).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하십시오.

    1.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4)

    2.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 17:25)

    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10:45)

    4.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6.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4)

    7.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8.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시편 127:1)

    9.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 4:11)

    10.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2–13)

    11.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린도전서 3:6-7)

    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1-7)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숱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간단한 문제를 만나서 가볍게 해결하게 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도무지 이해하기도 힘든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주어지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도무지 풀 길 없는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긴히 여쭈어 볼 말씀이 너무나 많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숱한 문제들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흉악한 택시 강도에게 화를 당한 어떤 여인의 어머니가 "왜 하필 내 자식인가,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은데, 그렇게 착하던 내 딸이 왜 그들의 손에 무참하게 죽어야 했는지 나는 모르겠다"하고는 탄식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흉악한 사람의 손에 목적 없이 죽어야 한다면 이 땅에 값없이 죽을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은데 왜 죄없는 어린 아리들이 죽어야 하고, 죄 없는 선한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고 혹시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는 이 사람이 왜 소경으로 태어났느냐?

    이 사람이 병을 앓다가 시력을 잃었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또 사고로 눈을 다쳐서 소경이 되었다면 납득이 가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을 보며 그 원인을 꼭 묻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되면 그것이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일이 잘 안 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그리고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그러면서 한탄을 합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 응보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불교를 믿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불교 문화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자연스럽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는 수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합니다.
    아이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고, 불치의 병을 얻게 되는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문란하게 외도를 하고, 방탕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서 마침내 시력을 상실하고 눈이 멀었다고 하면 그것은 물론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활이 문란하고 무질서하고, 외도를 해서 성병을 얻은 부모가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떤 아이는 기형아로 태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시력을 잃은 채 소경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임신중인데도 술을 과음하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고, 마약을 복용하고 그러면 그 아이가 온전하게 태어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불구아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것도 분명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제3의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그가 소경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어떤 섭리가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건에는 세상적인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좀더 높은 차원의 섭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십니다.
    그 방법은 사람들이 하는 방법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성경적 사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생각할 줄 아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

    - 하나님의 생각
    - 하나님의 길(방법)


    첫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그 뜻이 미래적이라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의 특징

    첫째, 미래적 - 목적, 결과
    둘째, 소망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원인이나 목적이나 결과가 모두 미래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소망적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일의 원인을 과거에 둡니다.

    예를 들면 내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병 문안하러 와서 그 병의 원인을 한결같이 과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병들었느냐, 어쩌다가 그랬느냐"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이 사람도 병든 원인을 과거에 두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미래에 어떤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 이 소경이 살면서 한을 많이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일까?"
    이 사람이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았을테니 얼마나 불행한 세월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에게 미래를 위한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어떤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서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오늘 비로소 그 해답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난 후에 이 소경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신앙인은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을 하면 모두가 소망적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그 결과가 이렇게 소망적이고 미래적입니다.

    가끔 약혼 주례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약혼식은 결혼식과는 그 뜻이 조금 다릅니다.
    약혼식을 집례하다 보면 결혼식보다 더 소망적이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약혼하는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살면 분명히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다투게도 될 것이고, 미워하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몇 년을 살면 덤덤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약혼할 때 보면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현재보다도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신 좋아합니다.
    예물을 서로 교환할 때 보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계속 싱글 벙글합니다.
    땀흘리고 당황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은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 미래가 있어야 합니다.
    삶은 오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고, 뜻은 언제나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래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나온 소경을 통해서 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목적이 모두 선하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여기 이 소경의 일생을 보면 잠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런 후에 엄청난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소망적으로 발전하고, 결과가 유익함으로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나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슬퍼하고, 동네 사람들이 애도하고,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나중에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11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도 손해를 보지 않고 나사로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다른 차원의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을 통해서도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큰 시련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심각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기적같이 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깊은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감쪽 같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소위 간증입니다. 이 간증이 잘만 되면 아주 좋은 전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는 일은 그 결과가 모두 유익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난한 것도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부한 것도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약한 것도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그 일 후에는 반드시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같은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어떤 처지에 처해도 삶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경에게서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옵니다. 또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나 세상을 전체에서 한 부분을 보려고 하지 말고 한 부분으로 전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무익한 사람 같아 보이는 사람이 세상을 오래 사는 경우를 보게 될 때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오래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 같은데도 오래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병 중에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아직도 내게 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분이 임종할 때가 되었는데도 숨을 거두지 못하고 죽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아들이 오면 그때서야 아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하고는 편안히 눈을 감습니다.
    그분은 그 한마디를 못했기 때문에 눈을 감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모두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보고, 해석하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의 인생이 소중하고 값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눈도 멀고, 거기다 거지이고, 보잘것없은 그의 인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인생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고, 나의 인생입니다.
    이렇게 나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섭리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값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 같은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월 14일(화) 창세기 37-4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통한 자(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and he lived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형통한 자(6743.  376)

    찰라흐(tsâlachצָלַח 스트롱번호 6743

    1. 돌진하다.  2. 침범하다. 3. 잘되어가다
    발음 [ tsâlach ]
    구약 성경  / 65회 사용
    • 1. 원형 돌진하다, 통하여 가다, 삼하19:18(17)
    • 2. 원형 침범하다, [עַל을 수반하여] 여호와의 영이 사람에게 내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삿14:19, 15:14, 삼상10:10, 11:6,[אֶל을 수반하여] 삼상16:13, 18:10,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나심에 사용되어, 암5:6.
    • 3. 원형 잘되어가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시45:5(4), 사53:10, 렘22:30, 식물이 번성하다, 겔17:9,10, [לְ을 수반하여]~에 적당한, 알맞는, 렘13:7,10.
      • a. 원형 히필형
      • b. 원형 번영하다, 성공하게 하다. ㉠ [~의 일에] 창24:21,56, 39:3,23. ㉡ [인칭대명사의 목적격을 수반하여]대하26:5, [לְ를 수반하여] 느1:11,2:20
      • c. 원형 잘 성취하다, 끝내다, 신28:29, 삿18:5,왕상22:12, 대하7:11, 시37:7, 잠28:13, 렘2:37, 단8:12.

    미완료형 יִצְלַח

    • 관련 성경  /  ☞임하다(삿14:19, 15:14, 삼상10:6), 건너다(삼하19:17), 건너가다(삼하19:18), 형통하다(대하20:20, 렘12:1, 겔17:15, 대하20:20), 감동되다(삿14:6, 삼상11:6, 16:13), 힘있다(삼상18:10), 성취하다(사53:10), 쓸데없다(렘13:10), 번성하다(겔17:9,10), 평탄하다(창24:21,40), 행하다(단11:36), 윤택하다(렘5:28), 승리하다(렘32:5), [명] 소용(겔15:4).


    אִישׁ 스트롱번호 376

    1. 사람.   2. 남자. 3. 남편
    발음 [ ’Îy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79회 사용

    관련 성경 /  ☞ 남자(창2:23, 신22:22, 렘44:7), 사람(창4: 23, 삼상20:15, 겔9:2), 남편(창3:6, 신25:11, 삼상25:19), 농사(창9:20), 임자(창38:25, 출 22:14), 청지기(창43:19), 각 사람(창49:28), 양쪽(출18:16), 백성(출33:10, 삼하16:15), 아무(출34:3, 레21:9, 시49:7), 쌍방(신1:16), 노인(신32:25, 삼하19:17), 명(수7:3, 삿1:4), 하나(삼하16:5, 왕상18:40), 인생(욥12:10, 시4: 2, 렘52:7), 시체(왕하13:21). [부] 서로(창11: 3), 피차(창31:49), 아무든지(출16:19), 무릇 (출30:33, 레21:17), 균등하게(레7:10), 누구든지(레13:40, 17:3, 신22:13).


    אִשָה 스트롱번호 802

    1. 연계형 נְשֵׁי
    2. 여자
    3. 여성
    발음 [ ’ishshâh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관련 성경  /  ☞ 여자(창2:22, 출21:28, 느8:2), 아내(창2:24, 20:7, 스2:61), 여인(창12:14, 출21:22, 욥14:1), 첩(창16:3, 삿19:1), 부인(창24:36), 시집(민 36:8), 기생(수2:1, 6:22), 과부(삼하14:5), 계집(잠2:16), 어머니(왕하8:5, 사45:10).

    אָנַשׁ 스트롱번호 605

    1. 병든.  2. 렘 15:18. 3. 사 17:11.
    발음 [ ’ânash ]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 1. 원형 병든
      • a. 원형 [거의 치료불가능한 병이나 상처에 대해 쓰임], 렘15:18, 미1:9, 욥34:6.
      • b. 원형 [고통에 대해 쓰임], 사17:11.
      • c. 원형 [재난을 당한 경우에 쓰임], 렘17:16.
      • d. 원형 [악한 마음에 대해 쓰임], 렘17:9.
      • e. 원형 니팔형: 몸이 매우 약하다, 삼하12:15.
    • 관련 성경  / 
      ☞상처를 입다(욥34:6), 낫지 아니하다(렘 15:18), 부패하다(렘17:9), 고칠 수 없다(렘 30:12, 미1:9), 앓다(삼하12:15). [명] 재앙(렘 17:16).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형통한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을 가리킵니다.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성공’의 의미가 강합니다. 예를 들어 ‘뼈대있는 가문’ ‘인품이 있고 덕망 있는 자’ ‘적당히 베풀 줄도 알고 돈과 명예를 소유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형통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할 때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내시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즉,형통의 복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야 형통합니다. ‘마이 웨이’가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정한 길,하나님을 위한 길을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머무르거나 후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합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주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강령을 수반합니다. 

    ‘건너라,가라,밟으라’는 신앙생활의 3대 명령은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말고,오직 하나님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땅으로 전진할 때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가도 형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만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만 따라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전진해야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의 물질을 볼 것 없고 왼편의 명예도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치우치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면 누구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 자리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성공입니다. 소위 잘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다릅니다.

    요셉을 보면 ‘형통’이란 단어의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살다가 그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타국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요셉을 두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니 형통하다’고 합니다.

    또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려다가 자신의 주인이자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부인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도 성경은 ‘하나님이 감옥에 있는 요셉과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하다’고 합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전체적인 그림 안에서 보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감옥에 갔기 때문에 훗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련들이 없었다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순간,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적인 그림 안에 있지만 세부적인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힘들고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삶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은 좋지 않지만 하나님은 좋으시다.” 요셉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의 인생은 결코 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세부적인 상황 속에 여전히 함께하시며 그 순간순간들을 모아 큰 그림을 그려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다음 요셉의 할 일은 그 자리에서 충성되게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되게 일했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충성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거나, 우리 자신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자꾸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주변을 바라보며‘이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필 때 그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믿음의 역사가 회복되기를, 더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 이후 애굽에서의 요셉의 성공은 족장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15:13-16;  26:4; 28:14)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언약의 신을 강조하는 여호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Quarry).

    형통한 자(*, 이쉬마츠리아흐)
    -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찰레아흐'의 사역형 분사가 합쳐져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셉과 함께 하는 어떤 신적 축복과 가호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케 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의미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보디발(비신자)이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했는데 문득 그 형통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신자)와 달리 비신자는 매사에 내가 잘 되는 것 즉, 출세하고 성공해 부자가 되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여호와가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면 비신자가 생각하는 그런 형통하는 모습이 요셉에게 보였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런 뜻일까요?

    또 만약 요셉의 형통이 그런 것이라면 현재의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텐데,  제 짧은 생각으로도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요셉에게만 주신 특별한 형통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현재에도 그런 형통을 주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말하자면 저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고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는 제가 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주위사람은 저를 형통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질문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비신자가 신자의 어떤 모습, 또는 신자가 행해서 나타나는 어떤 결과를 보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할 수 있는가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삶이 예배가 되게 또 삶으로 주의 증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정작 주의 증거가 되는 일들이 저에게는 아주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세기 39:2-6)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세기 39:21-23)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했다는 성경기록 둘을 인용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의 모든 사건과 진술은 반드시 관련 문맥 안에서 뜻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두 기사 안에 형통의 구체적인 의미가 사실상 부연 설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상기 두 기사를 자세히 묵상해보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어떤 것인지 추정해 낼 수 있습니다.  

    불법 동남아 노동자보다 못한 요셉

    두 기록에 사용된 ‘형통’의 히브리어 ‘짜라흐’는 ‘돌발하다’, ‘(세차게)오다’, ‘건너가다’, ‘좋다’, ‘적당하다’, ‘유익하다’, ‘번영하다’ 등의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용례는 ‘번영하다’입니다. 본문에서도 3절과 23절에선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prosper) 하셨다는 사역동사 용법으로, 또 2절 “형통한(prosperous) 자”에선 형용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럼 그 번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출세하여 재물, 권력, 명예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까? 본문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첫 번 형통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신분이었고, 두 번째 형통은 감옥에 갇힌 죄수 신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인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말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한국에 돈 벌러 온 불벌체류 동남아 노동자보다 더 못한 신분입니다. 그들은  비록 불법체류 신분이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족쇄가 되지만 일상적으로는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 한국생활이 싫어지면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며, 만약 단속에 걸리더라도 국외추방의 벌만 받으면 됩니다.

    반면에 요셉은 노예이자 죄수이기에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할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대사회에선 언제든 주인이나 왕의 말 한마디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가 있는 가나안으로 자의로 돌아갈 수는 절대 없습니다. 설령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애굽에선 외국인 청년인지라 금방 들켜 잡혀서 처형당할 것입니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더러 어느 누구도 형통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오히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그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요셉을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형통케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될 큰 꿈(vision)을 품고서 고난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요셉을 믿음으로 큰 꿈을 실현한 자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선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3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의 글도 참조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 저자가 인간의 상황을 기록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세상에선, 심지어 21세기 현대교회 내에서조차 요셉의 처지를 형통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도 성경은 두 번이나 그렇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는 분명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그를 그런 모습으로(?) 형통케 했다고 확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의 형통과 인간이 이해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맥에서의 의미  

    상기 두 기사에서 요셉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장 큰 특성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요셉이 자기들과 가장 다르다고 여겨지는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기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추정하기 힘들면 두 기록의 결론을 보면 됩니다. 참고로 성경의 진술과 사건의 의미가 애매모호할  때에는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지 유심히 살피면  바로 그것이 핵심 주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6절)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23절) 두 사람 다 요셉에게 일상적인 사무를 전부 맡기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완전히 대신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주인과 전옥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는 일 마다 다 번창, 형통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은 물론, 경영의 귀재가 아니었기에 하는 일마다 성공했을 리는 없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절)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요셉이 경영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감옥에선 특별히 번창할 즉, 경영을 해서 이익을 낼 일이 없지 않습니까?

    주인이 전 소유를 맡겨 대신 관리하도록 한 것은 요셉이 그전부터 하던 행사를 죽 지켜보고 나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의 관리 혹은 장사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장점을  보고 가정 총무로 맡겼던 것입니다. 또 그랬더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잘해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좋게 평가한 그의 특성은 앞뒤 문맥의 흐름 상 아무래도 성실성, 특별히 정직성일 개연성이 가장 높습니다. 주인의 재산 관리나 감옥의 사무 처리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으려면 이 두 요소가 절대적 전제입니다. 절대로 주인을 속일 사람이 아니며, 게으름부리지도 않는다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식료(食料) 외에는 챙기지 않은 것도 자신의 기호, 감정, 기분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이지 요셉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기까지 틀림없이 그 주인과 전옥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요셉을 시험해 봤을 것이며, 요셉은 어떤 경우도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범하려 했다는 물증(物證)까지 있음에도 보디발이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기만 했던 이유가 강간 미수에 그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셉을 그간에 아주 좋아했었고 또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아내의 말을 완전히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성과 정직성의 근원

    요셉이 그 시대에는 도무지 없는, 지금도 눈 닦고 찾아보기 힘든 그런 성실성과 정직성을 가지게 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성실히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형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광야 구덩이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 자랑만 하던 철부지에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로 말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살아날 수 없는 광야의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마침 바로 그 때에 미디안 상고가 그 곁을 지나고 있었던 것(창37:25)과 그 일행을 본 형 유다의 마음이 움직인 것(창37:26)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은 계획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 개인적으로는 틀림없이 구덩이에 빠져있던 그 잠시 동안에 평생에 할 수 있는 기도를 다 했을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적 양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가 동반되는 간절함을  볼 때 말입니다. 자기가 형들을 무시하고 설쳤던 것이 너무나 큰 잘못이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그럼 정말 주님의 뜻대로만 살겠다고 헌신하며 눈물로 매달렸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비록 노예로 파려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여 살려주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노예로 보디발에게 팔려가야만 하나님의 이미 마련되어 있는 원대한 계획에 쓰임 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새롭게 바뀐 인생은 보디발의 집에서부터 믿음의 열매를 활짝 맺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여전히 노예로서 척박한 여건에 처해 있는데도, 무엇보다 모든 것이 낯선 이방 땅에서 혈혈단신 고아로 살아야 함에도, 그는 틀림없이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었다 살아났는데 더 이상 무엇이 힘들고 두렵겠습니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 기도, 경배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이나 주위 애굽 사람들이 그런 그를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과 분명 뭔가 다르다고 여기면서 호기심을 갖다가, 차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기쁨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또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환경 가운데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주고 성심껏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 성경은 기록한 것입니다. 주인이 그에게서 여호와의 형통함을 보았던 것은 분명히 가정총무를 맡기기(4절) 전이며, 또 주인의 모든 소유에 여호와의 복이 미치기(5절) 전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21절)는 3절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또 그 일도 전옥이 감옥의 사무를 그에게 맡기기(22절) 전이었습니다.

    여호와가 주인의 소유에 복을 내린 형통의 의미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요셉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즉,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정의 일과 사업을 경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개인적 욕심을 가지고 주인의 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빼돌리려 들었다면, 속이지는 않아도 주인의 일이니까 게으름 부리며 대충 건성으로 했다면 하나님이 결코 복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goodwill, 기쁘고 친절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6:5-8) 노예 요셉은 그때 이미 신약의 계명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신구약 시대에 동일하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인 것입니다.  

    거기다 요셉은 온갖 우상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애굽에서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의 눈에는 흠모할 것 하나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이었지만, 그 사악한 도성에 비취는 한 줄기 빛이었고 참 생명의 호흡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며 정직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총무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번영케 해주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도 요셉을 형통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이방의 땅에서도 상천하지에 범사를 주관하는 오직 한분 하나님만 계심을 스스로 보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형통한 자

    그런데 성경은 더욱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순전함과 성실함과 정직함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보이기도 전에 그를 이미 “형통한 자”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 보디발의 집에 팔려갈 때에 이미 형통한 자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과연 형통합니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니 도무지 형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까? 또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해주셨는데 그분이 나를 형통케 해주신 적이 거의 없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형통과 우리가 이해하는 형통을, 특별히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목사님들의 가르침과 혼동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요셉처럼 되었기에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또 그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번영케 해주시니까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성령의 씻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거듭난 자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 즉, 형통한 자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객관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에 충성한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그래서 이제는 오직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직함과 순전함과 성실함을 갖고 세상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꾼 자는 비록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직도 연약하여 수시로 실패하더라도, 그럴수록 영적으로 애통해하며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쪽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을 완전히 바꾼 자는 이미 형통한 자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 요셉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요셉 같은 인생을 산다면, 백 프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대한다면 현실적 번영에 대해서 욕심 아니 관심조차 갖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런 자를 보호 인도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잡혀 있고 그분의 뜻대로 이끌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더 이상 세상의 어떤 문제, 고난, 상처, 멸시,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신자의 형통은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그 인생이 이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쓰임 받는 것 외에 신자의 형통을 찾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소원도, 그 인생의 목적도 전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따라가게 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불신자나, 일부 신자가 자기 뜻대로 인생이 번영하며 잘 풀리는 것을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아예 다르게 말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의 이 고백이 단순히 절제하며 검소하게 사는 비결을 배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풍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기도했더니 무슨 일이든 이뤄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반대로 분명히 배고프고 궁핍할 때도 있었습니다. 자기 믿음과 능력으로 큰 비전을 달성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쓰임 받기를 원하고 어떤 여건에서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했더니 그분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그분이 다 이루시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세상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 즉, 여호와가 함께 하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처럼 순전함으로 주님 뜻대로만 행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일을 형통케 했던 신약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었고(고후11:23-27), 마지막을 로마 감옥에서 비참하게 지내다 처형당했습니다. 신자가 가장 형통한 대표적 예입니다.  

    신자의 형통에 진짜 중요한 모습

    요셉의 형통하는 모습에서 진짜로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살펴본 대로 요셉 개인적으로 번영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주인과 전옥의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개인 재물, 권력, 명예가 늘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노예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훨씬 다른 의미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그 글을 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주인과 전옥이 형통했습니다. 주인의 소유가 늘어났을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전처럼 가정 총무에게 속아서 뒤로 빠져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겨 놓은 전옥도 아주 편하게 지내며 남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했을 것입니다. 정작 바쁘고 힘들게 고생했던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형통한 자”가 되어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믿음의 조상이자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이 또 다른 형통한 자의 예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된 것 즉, 현실적 번영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만 창대케 되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뿐이지, 죽을 때에 자식은 하나였고 얻은 땅도 무덤뿐이었습니다. 그의 형통의 실체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요셉처럼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그의 후손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들은 다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애굽 땅에서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던 그의 어떤 점을 보고 축복했겠습니까? 바로 요셉처럼 그가 의롭고 신실하고 정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존경할 만한 요소가 없는데도 외국인을 축복할 리는 없습니다. 또 그의 흔들림 없고 경건한 신앙 때문 아니겠습니까? 비록 서로 믿고 있는 신의 이름과 그 믿음의 내용은 달라도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그의 신앙이 뭔가 권능이 있고 의롭다는 점은 인정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의 신약 신자의 형통도 그래야 합니다. 요셉과 아브라함처럼 신자로 인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지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는 것, 자기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더라도 불쌍하고 미혹된 이웃이 살아나는 그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또 그러려면 그 전에 실제 삶에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언제든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야 하고, 또 어떤 기막힌 고난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 받아야 합니다. 고충 토로나 현실적 충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기도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도록 이웃들 앞에 신자는 신령하고 경건해져야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형통은 그래서 바울의 바로 이 고백과 같은 모습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는” 것 이상의 신자의 형통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신자는 자신은 궁핍에 처하든 부요에 처하든 아무 관계없이 말입니다. 또 그래서 남들로 어떤 멸시, 비방, 반발, 핍박을 받더라도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주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위 사람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심정적으로 바라는 대로 현실이 술술 풀려져나가는 것이 결코 신자의 형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인도하는 그대로 살고 있는 것만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성서에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형태의 생애와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립하거나 대적하는 모습으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 가룟 사람 유다에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이나 특성 없이 주어진 일상성의 그대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주지도 않고, 도움을 받거나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안에서 안주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을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산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선두자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17: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생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굽에 살게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여 이끌어간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창세기 39장 23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39장 2절에서는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으며, 범사를 형통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통한 삶이란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았다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귀중하고 필요한, 없어서는 안될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형통한 자의 삶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자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는 그가 있는 곳에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나타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역사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어떤 투기나 우연한 사건으로 횡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통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없는 좋은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 중에도 그 사건에서 나타나는 가치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생애 중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이 모두에게 귀하고 유익하게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그런데 성서본문은 요셉의 형통한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
    그렇다면 하나님게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성실하였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성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의 행복했던 환경은 불행한 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 가장 큰사랑을 받았던 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애굽의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 노예로 팔려 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행하고 억울한 환경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성실함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성실함의 자세는 주어진 불행한 환경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과정으로 받아드리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성실함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보디발에게 신임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에 요셉으로 인하여 더 큰복이 성취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요셉에게는 더 큰 시련의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하여 요셉을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요셉을 모함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옥에 갇혔습니다. 노예에서 죄수로 전락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곳에서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에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믿음의 성실함은 형통케 하는 자의 삶을 이룬 것입니다.

    금발 미녀 제인이 왼쪽 젖가슴을 내 놓은 채 급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습니다. "아가씨, 당신의 왼 쪽 젖가슴이 노출됐다는 것을 아십니까? 노출 죄로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오 마이 갓! 너무 서두르다가 아기를 버스에 내려 놓았어요"
    우리의 현재의 삶은 바쁜 세속의 삶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차에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드러내면 사는 불성실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성실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실함에서 나오는 진실함으로 주어진 자기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투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얻어지는 도박의 횡재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최선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노동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이 주어진 환경에 성실함으로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곳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삶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분리됨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등진 행동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더욱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따라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요셉의 용모의 준수함과 성실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여인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치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39:8-9)

    요셉은 죄악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유혹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기웃거림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계속되는 죄악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옷을 잡아당기며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죄악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즐거움 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물리친 것이 패배를 안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감옥의 생활로 애굽을 지배하는 총리가 되는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죄의 뿌리침은, 결국 더 큰일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에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은 죄의 능력에 패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이 되십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형통한 삶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사는 삶이었습니다.
    인간 삶의 전문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애를 다루십니다. 모든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치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섭리안에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고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총리가 되어 식량을 얻으러 온 형들과 만났을 때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5-8)
    또한,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혹시 자신들을 미워하여 과거의 자신들의 죄악에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같은 표현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19-20)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야곱의 자손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인 언약의 백성과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셉이 7년 흉년에 앞서 노예로 팔리는 과정과 죄수가 되는 과정이 필요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후손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약속의 백성들을 7년 흉년의 어려움 속에서 보호하셔야 했고, 거기에 요셉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불행한 환경 중에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중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소중한 생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한 젊은이가 사진기술을 배우고자 도시의 큰 책방에 우편으로 사진술교본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서점의 착오로 복화술에 관한 책이 배달되었습니다. 가난함으로 반송할 수도 없고 하여 복화술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고 복화술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되어 복화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후에 유명한 복화술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에드가 베른'입니다. 그가 자신이 조각하여 만든 인형으로 복화술을 구사하며 연기할 때,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며 삶의 시름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건들은 그 어느 하나라도 우연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많은 삶의 사건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나의 삶의 의미와 함께 가치와 형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생활의 정황은 어떻습니까? 어렵고 힘든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삶의 과정을 어떻게 걸어가고 있습니까? 감사의 사건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모두에게 유익함을 전해주는 삶의 역사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바로 형통케 하시는 역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역사는 믿음의 성실함을 가짐으로서 입니다. 죄악에 대한 단호한 태도의 생활에서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보는 지혜로움에서입니다. 바로 여러분 모두가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의 삶으로 승리하십시오. 아멘.


    형통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으므로 장차 누려야 할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형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을 유혹하는 세속적인 미끼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킬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사형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의 뜻을 성취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결코 개인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는 만사형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이나 ‘긍정의 힘’(오스틴)과 같은 서적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필독서로 변모되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과연 신자를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러한 형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믿으면 형통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 필자의 이러한 말이 개인의 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조용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과연 현세의 복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러한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신자가 아니다.

    형통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예로 들지만 그것이 현대 기독교가 말씀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통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9:2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중요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세상에서의 형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긴 하였지만 어쨌든 애굽 왕인 바로의 신하다. 그렇다면 누가 더 복을 받았으며 형통한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정말 세상에서의 형통의 복을 주신 것이라면 이왕이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애굽의 왕이 되게 했어야 맞지 않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꾼 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미디안 사람 상인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인가?

    또한 요셉이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서 그의 가정총무가 되긴 하였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종으로 팔린 요셉이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요셉은 형들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어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통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역시 옥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옥중의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옥에 갇힌 당시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던 것에 비하면 형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심하게 꼬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두고 형통한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갈수록 꼬여만 갔는데도 불구하고 종이지만 가정총무가 되었고, 옥에 갇혔지만 죄수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서 편하게 지냈으니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연 형통의 복으로 간주하며 기뻐할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의미는 창 45:4-8절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는 구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셨음을 깨닫는다. 꿈을 꾼 것이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린 것 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야곱과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결국 요셉에게 있어서 형통이란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형통이라는 뜻이다.

    제자 베드로는 형통한 삶을 살았지만 가룟 유다는 형통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형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형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치없게 보기 때문이다.

    신자는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어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이라고 해도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과 고통을 동원하여 나를 생명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사형통을 말하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의 형통에 가치를 두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값없게 여기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타인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을 가지고 형통이라고도 복받았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신자의 참된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편이 나아진 것을 형통한 것으로, 복받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 밖에 안된다. 이것은 결국 형편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오히려 저주에 이를 자임이 증거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고 성경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십자가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나 ‘믿는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말이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켜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만사형통(萬事亨通) 소개

    '만사형통(萬事亨通)'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다'라는 의미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인생의 여러 길에서 발생하는 도전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성어는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꿈과 목표가 있더라도, 그 길은 항상 순탄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사형통'의 마음가짐으로 장애물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만사형통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 성어가 사용되는 실제 사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의 뜻과 유래

    ‘만사형통(萬事亨通)’은 고대 중국 문헌에서 유래한 성어로, 직역하면 '만 사물이 형통하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 말은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기원하거나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보통 사업, 관계, 학업, 가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거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계획이 순리에 따라 진행되고 성공하는 상황에서 "만사형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는 것을 기원할 때나, 친구나 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성어로서 고대로부터 인간의 삶과 세상의 동향에 대한 이해를 깊게 담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활력 넘치는 에너지를 상징하며, 부정적인 장애물이나 어려움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각자의 목표와 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얻는 성공과 만족감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성어로, 현대에 와서도 이를 기원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사형통은 인생의 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라는 진심어린 기원이자,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 그리고 희망을 담은 성어로 여겨져 현대인들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萬(만): 만, 많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모든'을 의미합니다.
    • 事(사): 사물, 일을 의미합니다.
    • 亨(형): 원활하다, 순조롭다는 뜻입니다.
    • 通(통): 통하다, 관통하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순조롭게 진행되다'를 의미합니다.

    실생활 예시

    1.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만사형통이다."
    2. "그는 학업과 운동, 인간관계까지 만사형통으로, 정말 부러워할 만하다."
    3. "결혼 초반엔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된 후에는 만사형통이 되었다."
    4. "회사 프로젝트가 처음에는 험난했지만, 팀원들의 노력 덕분에 만사형통으로 마무리되었다."
    5. "처음엔 거침없던 그는 성격 개선 노력 덕분에 사회생활이 만사형통이 되었다."
    6.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후, 그의 삶은 이제 만사형통이다."
    7. "학교 선후배와의 관계가 만사형통인 그는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8. "우리 팀은 처음부터 만사형통이었으므로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9. "건강을 회복한 후로는 일도, 가정도 만사형통이다."
    10. "그녀의 디자인 능력 덕분에 회사의 판매는 만사형통이 되었다."
    11. "자신의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운 그는 이제 직장에서 만사형통이다."
    12. "신입사원 시절 힘들었던 그가 이제는 회사에서 만사형통으로 일하고 있다."
    13. "어린 시절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그는 노력으로 학문과 직업에 만사형통하게 되었다."
    14. "가족들의 도움과 응원 덕분에 그의 사업은 만사형통이 되었다."
    15. "그는 인생의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이제는 만사형통의 삶을 살고 있다."

    마무리

    오늘은 '만사형통(萬事亨通)'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성어는 '만사' 즉 모든 일이 '형통'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무엇이든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가리키며, 비즈니스나 개인의 삶에서 흔히 사용됩니다.

    이 성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공은 '만사형통'의 가장 큰 특징이며, 그로 인해 얻어진 성취감과 만족감은 개인과 팀, 그리고 조직 전체에 큰 자부심을 안겨줍니다.

    이 성어는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열정이 만나 탄생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오늘 배운 '만사형통'을 일상에서 활용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향해야 할 긍정적인 마인드와 지향점을 제시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성어와 그 뜻을 소개하며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단지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


    성공은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제이슨 크리스 -

    이 표현은 《주역(周易)》이라는 고대 중국의 철학서에서 유래합니다. 《주역》은 음양과 오행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인데, 그 안에서 "亨通"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역》의 '형통': 《주역》에서 '亨(형)'은 '흉통'이 아니라 '형통'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잘 풀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통하지 않고, 길이 열리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형통'은 《주역》의 64괘 중에서 '건(乾)' 괘와 '태(泰)' 괘에서 나오는 중요한 개념으로, 특히 사람이 자수성가하고 모든 일에서 번영을 이루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亨通"이란 말은 '사방이 막히지 않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태'를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 문화적 배경


    "만사형통"은 중국의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특히 새해를 맞이하거나 사람들의 사업이나 개인적인 성공을 기원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새해 인사나 출사(出仕) 또는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종종 사용되며, 어려운 일이 많을 때, 모든 것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입니다.

    3. 만사형통(萬事亨通)의 현대적 해석


    만사형통

    ① 문제 해결과 순탄한 진행


    현대적 해석에서 "만사형통"은 단순히 일이 잘 풀린다는 의미를 넘어, 어려운 문제들이 원활하게 해결된다는 의미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특히,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만사형통"은 문제 해결능력이나 위기 극복을 잘 해내고 결과적으로 순조로운 상황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② 개인적인 성장과 발전


    현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실현이나 개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만사형통"은 개인의 목표 달성과 관련하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승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의 성공, 또는 개인적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만사형통"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계획대로 잘 풀린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③ 사회적 관계와 협력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협력과 소통을 통해 성공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만사형통"은 개인 간의 갈등이나 소통의 문제 없이, 협력과 조화를 통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팀워크가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서로 잘 협력하고, 원활하게 소통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상황에서 "만사형통"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④ 행복과 평화로운 삶


    "만사형통"은 또한 행복과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바람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의 만족과 심리적 안정을 기원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많이 겪는 가운데, "만사형통"은 내면의 평화와 균형을 이루어, 삶이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⑤ 디지털 및 글로벌 시대에서의 의미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에서 "만사형통"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기술 발전을 통해 사업이나 개인적인 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사업 확장, 원활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 등에서 "만사형통"은 빠르고 효율적인 연결과 진행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4. 만사형통(萬事亨通) 한자풀이


    만사형통

    萬 (만): '많을 만', 즉 '많다', '무수하다'라는 뜻입니다.

    事 (사): '일 사', '일', '사건', '일어난 일'을 의미합니다.

    亨 (형): '형통할 형', '길하다', '잘 풀리다'라는 의미입니다.

    通 (통): '통할 통', '통하다', '원활하다', '잘 연결되다'는 뜻입니다.

    만사형통


    ▣ 형통한 축복

     

    성경: "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 6:28)

     

    형통이란 ‘처음보다 끝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처음 포로생활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남들보다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끝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인해 범사가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형통한 삶 /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한 삶(여호수아 1:1-8) /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7절)

    "형통한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
    "목적한 바를 이룬다"
    성공의 의미가 강합니다.
    예를 들어 뼈대있는 가문, 인품이 있고 덕망 있는 자, 적당히 베풀 줄도 알고 돈과 명예를 소유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형통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할 때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내시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즉, 형통의 복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야 형통합니다.
    마이 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길, 하나님을 위한 길을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 머무르거나 후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합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주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강령을 수반합니다.

    건너라, 가라, 밟으라는 신앙생활의 3대 명령은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 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말고,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땅으로 전진할 때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가도 형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만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만 따라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전진해야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의 물질을 볼 것 없고 왼편의 명예도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치우치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면 누구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하게 하옵소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형통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인의 형통(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공격하던 당시 세계 역사학자 회의가 있었는데 그 때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토인비 박사와 일본의 역사학자가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토인비 박사가 일본의 역사학자에게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킴으로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일본 학자는 “대동아 전쟁을 통해 온 아시아 사람들이 더 잘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토인비 박사는 그 사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일본이 행한 침략적 악행은 일본 패망의 씨앗을 심은 것으로, 그 열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평화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토인비의 말과 같이 그렇게도 흥왕하던 일본의 제국주의는 곧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중상하며, 가정을 불화하고 파탄케 하며, 사회와 국가에 불신과 멸망을 가져다주는 사특한 자를 싫어하고 그들이 잘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패망하면 온 성읍 사람이 기뻐 환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온 성읍에 덕을 쌓아 그 형통으로 이웃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시편 73편)  /  악인의 형통함이 의인의 실족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주변에서 악인이 오히려 건강하게 살고, 재물을 얻고 번영하는 것을 봅니다.
    악인이 더 출세하고 승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병들고 재산을 잃고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자로 밀려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렇다면 그는 공평하신 분이십니까?

    시편기자는 이 질문으로 인하여 그가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해성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을 끌어안고 성소에 들어가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악인이 자랑하던 것들이 졸지에 소멸하는 진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길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순간 한 바탕의 꿈인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깨이면 우리는 더 이상 간밤의 꿈을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형통해 보일 때 그로 인하여 질시가 내 안에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지각해야 합니다.
    그의 영원하신 임재와 실재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인의 번영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가를 깨움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악인의 번영을 시기하거나 구함이 아니요, 주를 가까이 함인 것입니다.

    주여, 악인의 번영이 부러워 보일 때 오히려 예배에 힘쓰게 하시고 주안에 거하는 행복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유태영 박사의 형통  /  유태영 박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형편 때문에 교육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 박사는 어릴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아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5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는 중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통신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낮에는 구두닦기를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졸업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굶어 보았으며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이 얼어 붙은 추운 겨울에는 냉방에서 내의도 없이 있어야 했는데 너무 추워 잠을 못 자고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햇볕이 나면 교회 담 밑에서 몸을 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자 비록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미국, 이스라엘, 덴마크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 박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꿈을 가지고 기도에 힘쓴 것이 형통의 비결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사가 형통하려면(이사야 14:24-27)  /  우리의 행사가 형통하려면
    첫째,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에는 우리의 행사가 형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서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키려고 힘쓸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모든 행사를 야웨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을 우리의 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형통으로 인도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을 성경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사오니 늘 묵상하게 하시고 모든 경영을 맡겨 드림으로 형통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심은 대로 거둔다 / 레오나르도 킬러 박사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하고 25,000명을 시험한 후, 인간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하고 진리는 단순하다.
    내 손이 수고할 때 먹고 복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겉으로 그렇게 사는 척만 한다면 결코 그 열매를 맛볼 수 없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해 단두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만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숙하고 싶다면 셈 레벤슨의 말에 귀 기울여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희 음식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 주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다면 어린아이에게 하루 한 번씩 네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결코 혼자서는 걷지 말라.”

    이제 영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건의 시간을 심고 경건의 습관을 갖고 눈물로 씨를 뿌리라.
    그러면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둘 수 있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승엽 선수가 국민타자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2할 4푼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대 선수 중 타이거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통산 타율은 3할6푼7리입니다.
    세계 최강의 타자도 평균 3타수 1안타에 불과합니다.
    만약 모든 야구선수의 타율이 5할대 이상이라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고 또 야구 구경을 하겠습니까?
    인생도 야구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자람 속에서 세상을 사는 의욕과 재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케 하셨습니다.
    인생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습니다(전 3:4).
    순탄한 날과 험난한 날 등이 번갈아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일생 동안 성공만 거듭하는 사람도 없고 실패만 거듭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했다고 자만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고 좌절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3분의 1이라도 이루어졌다면 그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쉽게 성취된다면 그것은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 소개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표현을 오늘 소개하겠습니다.

    이는 '병이 없이 오래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건강한 삶을 오래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목표와 소망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의 고대부터 바라던 가치로, 이 성어는 건강하게 살아감에 있어 올바른 생활 습관과 균형 잡힌 식단,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건강한 생활습관, 균형 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무병장수는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무병장수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이며, 건강한 삶의 기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병장수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실천, 그리고 이 표현이 사용되는 실제 사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뜻과 유래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표현은 병 없이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이는 오래 살되 질병이나 건강 문제 없이 튼튼하게 생활하는 것을 표현하는 성어입니다.

    유래를 보면, 동양 문화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건강과 장수에 대한 중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 의학, 영양학과 심리학을 접목시켜 무병장수의 이상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기원전의 동양 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건강한 삶의 기반으로 간주됩니다.

    예로, 중국의 고대 의학인 도인은 신체, 마음, 영혼의 조화를 통해 무병장수를 추구했습니다.

    무병장수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건강한 국민은 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신념이 있었으며, 여러 왕조에서는 무병장수를 국가의 목표로 삼기도 했습니다.

    무병장수의 개념은 요가, 명상, 올바른 식습관, 일상적인 운동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현대의 건강 추구와도 연결됩니다.

    건강과 웰니스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현재, 무병장수의 철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반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무병장수는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삶의 질이 저하되는 것을 방지하고, 인생을 최대한 즐기고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목표로 여겨집니다.

    이는 모든 세대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꿈입니다.

    결론적으로 '무병장수'는 병 없이 오래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인생의 질을 높이고, 개인과 사회가 함께 번영하고 발전하는 길을 제시하는 현명한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건강과 웰니스 추구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無(무): 없다를 의미합니다.
    • 病(병): 병, 질병을 의미합니다.
    • 長(장): 길다, 오래를 의미합니다.
    • 壽(수): 장수, 수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병장수'는 병 없이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마무리

    오늘은 '무병장수(無病長壽)'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병 없이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과 오래 사는 데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무병장수는 우리 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며, 규칙적인 운동, 올바른 식습관, 스트레스 관리 등을 통해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활 습관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무병장수'의 의미를 일상에서 찾아보고, 실천해보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성어와 그 뜻을 소개하며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월 13일(월) 창세기 34-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엘로 올라가자(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Then come, let us go up to Bethel, where I will build an altar to God, who answered me in the day of my distress and who has been with me wherever I have gone."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let us go up to Bethel)

    벧엘(
    Bêyth-ʼÊl) בֵּית־אֵל 스트롱번호 1008

    1.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2. 수 16:1
    발음 [ Bêyth-ʼÊl ]
    어원  / 1004와 4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회 사용
    • 1. 고유명사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가나안 족의 고대 도시였으나 훗날 베냐민 지파에 부속되었다], 수16:1,2, 삼상13:2.
    • 관련 성경  /   벧엘(수 16:1, 2, 삼상13:2).

    기둥 - 기둥 주(柱) / 열 십(十) + 사람 인(人) + 주인 주(主)

    올라가자( ʽâlâh) עָלָה 스트롱번호 5927

    1. 올라가다.  2. 사 14:14. 3. 출 24:13
    발음 [ ʽâlâh ]
    구약 성경  / 89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트다(창19:15, 삼상9:26), 치솟다(창19:28, 삿20:38), 새다(창32:26), 피다(창40:10), 오르다(창49:4, 신5:5), 올라가다(창49:9, 수2:8, 암9:2), 가다(출1:10, 수18:11, 호8:9), 올라오다(출8:3, 삿12:3, 아8:5), 나오다(출13:18, 아4:2), 뽑다(레16:9), 메다(민19:2, 삼상6:7), 나아가다(신25:7, 삿4:5), 닿다(수8:20, 욥20:6), 이르다(수15:6, 삿21:5), 대다(삿16:18), 일어나다(삿20:40, 호13:15), 들리다(왕하19:28, 사37:29), 들어오다(삼상14:21), 기록하다(대상27:24), 중수되다(느4:7), 나타내다(시78:31), 퍼지다(잠24:31), 들다(잠26:9,슥14:13), 뛰어나다(잠31:29), 기어오르다(렘4:29), 덮다(사8:7), 생각하다(렘7:31), 두다(렘32:35), 치료받다(렘8:22), 뜻하다(렘19:5), 넘치다(렘51:42), 올리다(왕상10:29, 에1:14), 솟아오르다(사34:3, 암8:8), 상달하다(출2:23, 욘1:2), 돌다(수6:15), 드리다(왕상18:29, 왕하3:20), 미치다(대하36:16), 달다(시62:9), 움돋다(암7:1), 솟아나다(민21:17), 타다(창31:10, 렘46:4), 달리다(렘46:9),치다(렘49:31), 올려 보내다(창44:33), 마르다(출16:14), 떠오르다(출19:18, 사34:10), 행하다(출33:5), 입다(레19:19, 겔44:17), 지나가다(민20:19), 높아지다(신28:43), 사무치다(삼상5:12), 물러가다(삼하23:9), 맹렬하다(왕상22:35, 대하18:34), 승천하다(왕하2:11), 떠나가다(왕하12:18, 렘34:21), 진척되다(대하24:13), 일으키다(전10:4), 날리다(사5:24), 자라나다(사53:2), 떠나다(렘21:2, 겔11:24), 날아오다(렘49:22), 들이다(겔14:7), 자라다(겔47:12), 강성하다(단8:8), 뛰다(암3:5), 가리다(욘4:6), 통하다(대상26:16), 품다(겔20:32), 지존하다(시47:9), 초월하다(시97:9), 머물러 있다(민9:22), 데리고 오다(스1:11), 인도하다(창50:24, 출17:3), 가지다(출13:19), 켜다(출27:20, 민8:3), 이끌어내다(민16:13, 수24:32), 나오게 하다(민20:5), 주다(삼상2:19), 메어올리다(대상15:12),데리다(대하8:11), 가지고 오다(스1:11), 기도하다(욥42:8), 끌어내다(시30:3, 겔29:4),인도하여내다(출32:4, 삿6:8, 렘16:15), 인도하여 올리다(민21:5, 왕상12:28, 암3:1), 무릅쓰다(애2:10, 겔27:30), 입히다(겔37:6), 거느리다(겔23:46), 굽이치다(겔26:3), 옮기다(삼상7:1, 렘27:22), 옮겨가다(삼상6:21), 가져오다(삼상19:15), 불러올리다(삼상28:8),몰아오다(렘51:27), 새기다(대하3:5), 쌓다(대하32:5), 고치다(렘30:17), 키우다(겔19:3), 건지다(욘2:6), 새김질하다(레11:3,5, 신14:7),채우다(삼하1:24), 제사하다(렘48:35), 충돌하다(나3:3), 기록되다(대하20:34), 끌려가다(나2:7), 서다(렘51:3).



    벧엘 & 루스

    벧엘 ㅡ 하나님의 집

    히브리어로 '집'을 뜻하는 '벳(Beth, 혹은 Beit)'과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을 합쳐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

    역사

    야곱이 형 에서/에사오의 칼부림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루스/루즈 지역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층계가 보였고 이를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야곱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나님인 야훼가 그의 옆에 나타나 이렇게 계시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니 진정 두려운 곳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음 날 아침 베개 삼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기도를 올려 그곳을 벧엘/베델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 8:12, 8:17

    ㅡ이스라엘 족속이 아이와 "벧엘"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기원전 1240-35년 사이에 강성한 도시였던 벧엘은 무참히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을 포함한 학자들은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무위키)

    ​벧엘 / 베델(Bethel)

    ㅡ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

    ㅡ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17~19km 지점

    본래 ‘루스’로 알려졌던 성읍(창 28:19). 예루살렘 북쪽 세겜 방향으로 약 17~ 19㎞,

    실로 남쪽 약 29㎞, 아이 성의 서쪽 약 3㎞ 지점에 위치한 곳.

    가나안 정복 전쟁 후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되었고(삿 1:22-25; 4:4-5)

    사사 시대 말기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길갈에서 이곳 벧엘로 옮겨져 성막이 세워짐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기 되기도 했다(삿 20:18, 26-28).

    사무엘은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는 동안 이곳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 이스라엘 전역을 치리하였다(삼상 7:15-16). 그리고 훗날 엘리야 시절에는 이곳에 선지자 학교가 있었으며(왕하 2:1-3),

    또 이곳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42명이 암콤에게 죽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왕하 2:23-25).

    한편, 이곳은 아브라함 이후(창 12:8) 구약 족장들이 일찍부터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곳이다.

    특히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던 길에 꿈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본 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 이름하였다(창 28:19).

    왕국 분열 후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왕상 12:29-33; 13:1-22; 왕하 10:29). 그러자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는 이곳의 우상 숭배 행위를 엄하게 지적하면서 회개치 않을 경우 당할 멸망을 경고하였다(암 3:14; 5:5-6; 7:10-13; 호 4:15; 5:8; 10:5, 8).

    특히 호세아는

    ㅡ ‘벧엘’(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사악한 집, 우상 숭배의 집)이라 고쳐 불러 그 죄악상을 고발하기도 했다(호 4:15).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이곳에 있던 우상 제단을 부수고 여호와 예배를 회복시켰다(왕하 23:15-23). 신구약 중간 시대에는 수리아의 바키데스(Bacchides) 장군이, 신약 당시 유대 전쟁 때에는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장군이 점령하였다.

    이후 벧엘은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며 도시가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슬람 제국의 침공 이후 폐허화되었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일명 ‘브둘’(수 19:4), ‘브두엘’(대상 4:30)이라 일컬어지는 시므온 지파에 속한 벧엘(삼상 30:27)이 있는데 그 위치는 분명치 않다.(라이프성경사전)

    ■ 루스(Luz) ​

    뜻 : 편도나무(살구나무)​

    1.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하나님을 만난 장소. ‘벧엘’이라고도 한다(창 28:11-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28/19

    가나안 정복 후 영토 분배시 베냐민 지파의 북쪽 경계지가 되었다(수 16:2; 18:13). 수 16:2에는 벧엘과 루스가 별개 지역으로, 루스는 벧엘에 속한 남쪽 산맥에 위치한 가나안 성읍이었는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두 지역을 합쳐서 벧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벧엘은 야곱에게 신앙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특별한 장소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듯 집을 떠났을 때 노중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길가의 돌을 취하여 베개를 삼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언제 다시 부모님을 뵈올 지 알 수 없는 막막한 밤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잊혀졌던 벧엘의 기억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두 개의 자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는 기도의 자리
    둘째는 말씀의 자리

    왜냐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투를 벌일 때 모세는 지팡을 들고 아론과 훌과 더불어 산위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아말렉과 싸우려고 나갔습니다.
    지팡이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칼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기도의 자리와 말씀의 자리를 갖는 사람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기둥 주(柱)자를 보세요.
    사람이 어려운 십자가를 내 몫이라고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둥이 모여서 맡은 자리를 지킬 때 기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건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왜 벧엘로 올라가야 할까요?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삶의 환경으로는 아주 적합한 곳이며 만족할만한 지역일지라도 벧엘로 가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날 야곱을 믿음으로 세웠던 은혜의 자리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만족에 도취한 삶이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벧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 세가지가 제시됩니다. 
    이것을 "영육간의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이방 신상을 버리라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들과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상화된 신상(神像) 뿐 아니라(사 45:20; 렘 10:5; 행 17:29; 롬 1:22, 23) 유일신 여호와를 배척하는 모든 세력과 사상까지(범신론, 샤마니즘, 애니미즘 등)를 포함합니다.

    한편 어떻게 우상 숭배가 야곱의 집안에 행해질 수 있었던 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1. 라헬이 자기 부친의 드라빔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31:19)
    2.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얻은 노비(30:43)중에 우상 숭배자가 있었을 가능성
    3. 세겜 성의 약탈물 중 이방 신상이 섞여 있을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라

    몸과 마음의 동시적 정결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레 11:45).
    이것은 모세 때 결례 의식으로 표현된(출 19:14; 민 19:12-13; 레 14:8)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벧전 1:22).

    세째, 의복을 바꾸라

    출애굽 직후 모세에게도 내려진 이 명령은(출 19:10) 영적, 도덕적 정결상태를 외형적으로도 나타내라는 뜻으로 '회개'를 상징합니다(겔 36:25; 히10:22; 유 1:23; 계 19:2).
    사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삼의 양태를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의복을 바꾸는 것은 곧 현재의 삶과 신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에로의 전진을 위한 결단이라고 하겠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이...이르시되 - 자신들의 힘으로 선민의 명예 회복을 추구하다가 끝내 피의 복수자와 약탈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야곱 가정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를 죄악과 위경의 올가미로 묶어버린 야곱 가정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허물을 정확히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셨다. 태초부터 선포되고(1:3), 택한자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6:13;12:1;26:2) 창조주 하나님(엘로힘)의 말씀만이 죄악의 진흙속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며 새 삶을 살게 하신다.

    일어나( 쿰)
    - 큰 일을 앞에두고 그것을 향하여 떠날 것을 촉구할 때 발(發)하시는 하나님의 의미 심장한 분부이다(신 17:8).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제 일 조처로 절망적인 현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을 명하신다(12:1;출3:10-12).

    벧엘로 올라가서
    -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생애중 (1) 가장 괴로울 때 가장 뜨겁게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장소이자 (2) 가장 순수한 심정으로 가장 진실되게 신앙을 고백하였던 서원의 장(場)이었다(28:10-22).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바로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명한 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했던 내용들(28:20-22)을 이제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더우기 하나님은 언약 후손의 가문이 세속에 휩쓸려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더이상 좌시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은혜의 처소 벧엘로 부르셨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과 변화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다.

    거하며( 웨쉐브)
    - '야사브'(체재하다)의 명령형으로 서원했던 '단'(28:22)을 쌓기까지 그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단을 쌓으라
    - 옛날 벧엘에 하나님의 전(집)을 건축키로 서원한(28:22) 야곱에게 제단 수축을 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전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제단이기 때문이다. 제단은 회생의 피를 통해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곳이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 이 외침은 파란 만장했던 야곱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온갖 괴로움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언약을 되새기며(신 32:7; 욘 2:7) 다시 한번 신앙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과거 야곱의 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세월 동안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 회복 운동의 모토(Motto)가 되어왔던 의미깊은 구호이다.
    한편 벧엘은 숙곳보다(33:17) 해발 300m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올라가자'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단을 쌓으려 하노라
    - 하란에서 돌아온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야곱은 자신의 집안을 번창케 하는데 전력한 나머지 아직까지 벧엘 서원(28:22)을 이행치 않고 있었다. 아마 세겜 성의 비극적인 사건(34:25)의 원인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영력있는 그리스도인(출애굽기 17:8-16)


    기둥 주(柱), 버틸 주(柱) : 나무 목(木) + 주인 주(主)
                                             나무 목(木) = 열 십(十) + 사람 인(人)

    1. 기둥, 2. 기러기발(거문고, 가야금, 아쟁 따위의 줄을 고르는 기구), 3. 줄기,  4. 풀의 이름, 자운영(紫雲英), 
    5. 버티다, 괴다,  6. 막다,  7. 비방하다(誹謗--), 헐뜯다,  8. 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순종(順從)하지 않다

    柱자는 ‘기둥’이나 ‘줄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柱자는 木(나무 목)자와 主(주인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主자는 촛대에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주인’이라는 뜻이 있다.
    柱자는 이렇게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主자에 木자를 결합한 것으로 ‘중심이 되는 나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즉 柱자는 방 중앙에서 불을 밝히던 촛대처럼 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영력(靈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靈性)이라고도 합니다.
    영력은 영적인 능력, Spiritual Power를 말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영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능력이 있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있어서 말씀을 선포하기만 해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영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을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영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기도도 할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세상에서 힘있고 능력있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성도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재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해 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 기도할테니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아주 특별한 전투방법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전쟁터로 나가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론과 훌이 모세 곁으로 다가가서 모세를 돌 위에 앉히고 양쪽에서 팔을 붙잡습니다.
    모세의 팔이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한 것 - 기도의 자리
    여호수아가 칼로 싸운 것 - 삶의 자리

    11절에 "모세가 그의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더욱 우세하다"
    13절에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손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다는 말
    여호수아의 칼은 무기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칼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전쟁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였던 겁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기도해야 승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동안에만 승리합니다. 그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능력있는 분이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가 있을 때에만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해야 영력을 얻고 기도해야 신앙생활을 근사하게 할 수가 있고, 기도해야 능력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지금은 고인이 된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왔었습니다.
    베긴 수상이 White House에 와서 보니까 전화기가 세 대가 있는데, 붉은 색 전화기, 은색 전화기, 금색 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베긴 수상이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습니다.
    "이 세 대의 전화기가 각기 다른 색깔인데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습니까?"

    레이건 대통령이 하는 말이 "예, 뜻이 있지요. 여기 붉은 색 전화기는 소련과 전화할 때, 지금 러시아지요, 소련과 전화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고, 은색 전화기는 일반적인 전화 통화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대화할 때 사용하는 전화기입니다."

    베긴 수상이 다시 물었어요.
    "하나님과 통화하시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의 국력을 은근히 자랑하는 의미로 말합니다.
    "네, 많이 나옵니다. 한 통화에 1만 달러 정도가 됩니다."

    얼마 후에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을 이스라엘로 초청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가서 보니까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도 색깔이 다른 세 대의 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유를 물었더니 베긴 수상이 설명합니다.
    "붉은 색은 공산 국가와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고, 은색은 우방이나 업무 관계로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고, 금색의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통화하려면 요금은 얼마나 냅니까?"
    베긴 수상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전화하면 미국 돈으로 1센트 정도 나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깜짝 놀랐어요.
    "아니, 전화 요금이 왜 그렇게 쌉니까?"
    베긴 수상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의 하나님은 장거리에 계시기 때문에 한 통화에 1만 달러씩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요금이 아주 쌉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동행하십니다.
    오늘부터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영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 영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력으로 직장 생활하고, 그 영력으로 공부하고, 그 영력으로 자녀를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력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력은 성경을 가까이 할 때에 생기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에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한 거예요.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는 자세를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영감을 얻어서 영력이 생기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다고 했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내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낸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믿고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면 언제든지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세우고 영력이 생겨서 세상에 나아가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확실하게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어린이 동화 가운데 "개미들의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 청년 개미 하나가 길 건너편에 사는 여자 청년 개미를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 청년 개미가 용기를 내서 애인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개미가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길다란 지푸라기 두 개를 등에 업혀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로가 오래되고 위험하니까 이것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게다. 꼭 가져가거라."
    염려되었던 거지요.
    아들 개미는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을 지고 가야만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아버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등에 업고 집을 떠납니다.

    청년 개미가 조금 가다가 보니까 도로에 틈새가 났는데, 얼마나 깊이 파였는지 개미가 보니까 그랜드 캐년의 계곡 같더랍니다.
    애인을 만나러 가던 청년 개미는 깊은 벼랑 때문에 좌절하게 됐습니다.
    개미는 낙담하여 땅에 주저앉습니다.
    순간 등에 업고 있던 두 개의 지푸라기가 떨어졌습니다.
    청년 개미는 두 개의 지푸라기를 계곡 위에다 놓고선 다리를 만들고 계곡을 무사히 건너갔습니다.
    애인을 만나서 데이트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승리하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 밖에 없어요.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거예요.
    개미가 지푸라기로 계곡을 무사히 건너간 것처럼, 성도에게는 말씀과 기도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거예요. 때로는 말씀과 기도가 힘들고 부담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씀과 기도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가 우리 삶에 있어서 구원의 다리가 되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나 말씀과 기도로, 기도와 말씀을 지니고 살아서 영력을 얻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력을 주셔서 능력있게 살아가게 하시고 능력있는 신앙 생활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와 말씀을 지니고 살아서 영력을 얻고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엘로 올라가자(창세기 35:1~8)

    레이건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시절,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베긴이 백악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레이건 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어가 보니 붉은 색 은색 그리고 금색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베긴 수상이 물었습니다.
    “이 세 대의 전화기를 각각 어떤 용도를 쓰십니까?”
    “예, 여기 붉은 색 전화기는 소련과 전화할 때 쓰는 것이고, 은색 전화기는 일반적인 통화를 할 때 사용합니다. 
    특별히 이 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입니다.”

    농담으로 한 얘기이지요.
    베긴 수상이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화하시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그렇지요. 한 통화에 1만 달러 정도는 될 것입니다.”

    얼마 후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을 이스라엘로 초청했습니다.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도 색깔이 다른 세 대의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저기 금색의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사용하시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과 통화하려면 요금은 얼마나 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베긴 수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1 센트밖에 들지 않습니다. 
    미국의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기 때문에 한 통화에 1만 달러가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요금이 싼 것이지요.”

    두 지도자들은 진담 섞인 농담을 서로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나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하나님의 숨소리가 느껴지나요?
    아니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사나요?
    그러다가 주일이면 화들짝 놀라 성경 찾아들고 부랴부랴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여러분은 벧엘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나요?

    벧엘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벧엘은 여러분에게 낯선 곳입니까?

    삶을 살다보면, 열심히 살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일 때가 있습니다.
    문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나긴 날들이 있습니다.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으면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어느 정도 굴러간다고 싶으면 종업원들이 문제를 일으켜 힘들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 중에 야곱만큼 악착같이 산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야곱은 ‘악발이’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요.
    평안한 날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취급하려고 하는 사건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것입니다.(함께 따라하자)

    1. 야곱이 당한 어려움은?

    야곱이 세겜성에 이르러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정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에서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만난 위기는 이렇습니다.
    창 34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바깥출입을 했다가 그 땅 추장의 눈에 들었습니다. 
    디나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추장은 디나에 대한 연모가 지나쳐 그만 강제로 욕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디나의 오라비들이 들에서 이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우리 누이 디나를 욕보였어! 어디 두고 보자!’ 
    그래서 형제들이 꾀를 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누이 디나를 가지려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할례 지 않은 족속과 혼사를 맺을 수 없다.”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고 삼 일째 되는 날, 고통이 가장 심하여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날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뛰어들어 그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디나의 강간사건을 순리대로 신앙으로 풀어야 하는데 ‘욱’ 치미는 감정으로 복수를 해놨으니까 이게 될 일입니까? 
    복수는 복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 본토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고 “이 웬 뜨내기들이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려! 싹 쓸어버리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기껏해야 야곱의 숫자는 한 가족에 불과합니다. 

    우선 숫자적으로 열세입니다. 
    야곱가족이 몰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난을 겪었습니다. 
    형 에서로부터 쫓겨보기도 했고,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해보기도 했고, 이런 저런 시련을 다 겪어 보았지만 전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는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처음입니다! 
    야곱은 아찔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창 34:30을 보세요! 야곱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을 수 있겠지요.
    하나는, 밤에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가족을 이끌고, 많은 짐승을 몰고 정처도 없이 도망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제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공격과 방어는 1:3 비율이니까 적이 세 배정도라면 해볼 만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 부족들과 싸운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꾀 많고 약삭빠른 야곱일지라도 그에게 마땅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서남북이 꽉 막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런 삶의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2. 야곱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벧엘로 올라가자!”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을 듯한 결심을 했습니다.
    창 35: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사실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 살펴보겠습니다.
    창31:13절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창35: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더 쉬운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전인 교회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입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장 배고팠을 때를 노려 팥죽 한 그릇으로 낚아챈 사람, 
    자기 몸에 털을 붙여 형처럼 꾸민 다음 늙어 안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속여 축복기도를 받은 사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얼룩진 양과 염소를 낳게 하여 자기 재산을 불려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 인생의 결론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일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봉착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을 그 순간에, 야곱은 인생살이의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기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벧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머리 싸매고 누워있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은 두 마디로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절) 
    야곱은 염치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한결 같이 이런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①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어요? 
    그때 하나님은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라, 들어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곽선희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심호흡을 하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세 번만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어요? 
    Wesley 목사형제의 기념비에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과 함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한 적이 있는 얘기입니다.
    사우디의 왕이 유명한 프로골퍼를 초청하여 골프 라운딩을 했습니다.
    왕은 골프 선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시간이 돈인 프로선수가 시간을 내서 왕에게 서비스를 했으니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골프채 한 세트를 부탁드립니다.”
    “ 아, 그래요.”

    기다리고 기다려도 골프채가 오지 않던 어느 날 편지 봉투가 날아왔습니다.
    골프 선수는 실망했습니다.
    “왕이 꽤 쩨쩨하구먼. 기껏 감사장이야?”
    뜯어보았더니 골프선수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골프장 한 곳을 통째로 선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골프선수의 스케일과 왕의 스케일은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스케일과 하나님의 스케일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믿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어찌 좋지 않겠어요?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3. 그 결과로 받은 축복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간 결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이런 축복을 기대합니다.

    1) 평안히 길을 갔습니다.
    5절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누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평안히 길을 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봐주시는 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2)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7절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은 기어이 야곱을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 스토리의 중심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야곱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한 인간이 그 무엇보다도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4: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인격 높은 사람도 아니고, 권력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인물 잘난 사람도 아니고.......

    참되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를 참 예배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미국 캘빈 신학교의 로저 그린웨이(Roger S. Greenway)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회심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들의 얼굴을 숙이게 되면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선교는 단기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참 예배자가 되십시오.
    이런 은혜는 언제나 예배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를 양보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3)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붙잡는다.’라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도 바꿔졌습니다.

    우리의 옛 이름은 죄인, 사탄의 종,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대로 죄를 범하고, 사탄의 종노릇하다가 멸망 받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의 새 이름은 의인,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우리를 향한 현재의 축복과 미래의 축복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시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렇게 됩니다.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야곱은 문제를 만나 벧엘로 올라갔고, 벧엘에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문제를 만나거든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 때 문제는 엄청난 축복으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르까프"라는 상표의 신발이 있지요.
    "르"는 전치사인데 "....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까프"는 "발"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르까프'라는 신발의 상표는 "발에" 또는 "발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만들 상표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하면 "야콥"이라고 하지요.
    '야'는 "잡다"는 뜻
    "콥"은 "까프"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란 이름은 "발 뒤꿈치를 붙잡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야곱이란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복잡했습니다.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서로 먼저 나오려고 하였는지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 원래 다사다난하지만, 야곱 또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25장 22절부터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과 싸우기를 시작했구요, 결국은 먼저 나오고 있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왔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형과 싸우고, 태어날 때는 형의 발을 잡고 따라 태어난 사람입니다.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팥죽 사건입니다.  
    배고픈 형에게 떡과 팥죽을 주면서 장자권을 달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보면 욕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잔꾀, 잔머리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의 잔머리는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유전된 것 같습니다.  
    27장 3절에 이삭은 늙어 언제 죽을 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에서를 불러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것을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다가 염소를 잡게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리브가가 직접 만듭니다.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 염소 새끼 가죽으로 둘째 아들 야곱을 꾸며 털이 많은 첫째 아들 에서처럼 꾸미고 또한 에서의 옷을 입혀 냄새도 속입니다.  
    이삭은 잔꾀 많은 모자에게 속아 넘어가서 맏이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을 막내인 야곱에게 주게 됩니다.  
    급기야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 했고, 그래도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을 동안에 하기보다 돌아가신 뒤에 실행하려 했습니다.  

    남편 이삭의 말을 엿들었던 리브가는 이번에는 아들 에서의 이런 계획도 듣고 야곱을 자기 친정, 하란으로 도망가게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 머물던 바로 그 땅, 메소포타미아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도상으로 확인해보니까 약 500마일, 8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27장 28절부터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 준 아주 멋진 복의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이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어져오던 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거의 백 년 전에, 아브람이 저 메소포타미아 지방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을 때부터 큰 나라와 민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늙을 때까지 자식이 없다가 귀한 외아들 이삭으로 간신히 연결되었고, 이제 이삭대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서 좀 나아지나 했는데 아우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채고, 형은 그러한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어머니는 결국 막내 아들을 자기 친정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지금 도망가고 있습니다.

    28장 10절 이하를 보시면, 만민이 너를 섬길 것이라는 축복을 받은 야곱은 도망가다 어느 한 곳에서 노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13절부터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 아버지 이삭이 빌어주었던 그 복을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해주십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지금 도망가는 막막한 여정을 앞에 두고 너무나 감사한 약속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 줄 것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부모, 친척, 고향에서 도망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너를 무사히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다.’  

    16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곳 벧엘입니다.  
    ‘벧’은 ‘집’이라는 뜻이구요,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원합니다.  
    20절부터 22절입니다.  
    의식주가 잘 해결되고, 안전하게 돌아오면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그 여호와라는 신을 곧 나의 신으로 섬길 것이고, 내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아직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외삼촌 라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결혼도 하고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 외삼촌 라반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곱의 잔머리를 능가하는 사람이죠.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를 닮은 것 같다고 했는데, 라반은 바로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아버지의 어두운 눈을 속였던 대가를 한 번 치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을 하루같이 여기며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첫 날밤에 외삼촌 라반은 라헬의 언니 레아를 들여보냅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른 채 첫 날밤을 보내고 날이 밝은 다음에야 라헬이 아니라 레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서 생각해볼까요?  
    어두운 사막의 밤, 신혼 장막 안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신랑 야곱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7년을 기다려 온 자기의 사랑, 라헬에게 온갖 사랑의 고백을 하며 첫 날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행복한 단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옆을 돌아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제 밤에 한 모든 고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일어나서 외삼촌에게 가서 따지지만, 너무나 태연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1주일 후 약속했던 둘째 딸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다시 7년의 봉사를 약속합니다.  
    그 1주일 동안 집안 분위기 참 안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두고 마음에도 없는 레아와 잠을 자러 들어갑니다.  
    레아는 어떻게 하든 그러한 야곱의 마음을 얻어보고자 하고, 라헬은 또한 질투가 납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는 결국 아들 낳기 경쟁으로 이어지고 열 두 아들과 한 딸이 태어납니다.  
    인간의 모든 것들, 심지어 이런 질투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에 쓰여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31장 13절을 봅시다.  
    벧엘의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외삼촌 라반이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는 않고 라반이 멀리 떠나 있을 동안 도망치듯 나옵니다.  
    고향에서도 도망쳐왔는데 이제 20년을 살아온 하란에서 온 가족과 함께 다시 도망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삼촌에게 추격을 당합니다.  
    29절입니다.  라반은 너무나 아쉬워하면서 야곱일가를 떠나보냅니다.  

    야곱 입장에서 보면, 조금 치사한 외삼촌 라반에게서 도망나와 이제 가야할 곳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 에서가 있는 곳입니다.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여전히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형이 거주하고 있는 땅 세일이라는 곳에 먼저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소식은 형이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일이라는 곳은 원래 야곱이 살았던 곳보다 
    한참은 더 남쪽 지방입니다.  

    세일에서 지금 야곱이 있는 마하나임까지는 부산에서 만주보다도 더 먼 거리입니다.  
    차라리 조금 속으면서 외삼촌에게 있는 게 낫지 400명을 이끌고 저 먼 곳에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오고 있을 형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냥 세일에서 기다리면 되지 아니면 몇 명과 함께 오면 덜할텐데 무슨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고 400명이나 함께 오는 건 또 뭡니까?  

    야곱은 다시 잔머리를 굴리면서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 선물로 바치면서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고 합니다.  
    가족들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는 혼자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보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기반으로 열 두 지파가 되는 것이고, 야곱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에서와의 재회는 야곱이 걱정했던 것 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33장 16, 17절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의미가 조금 확실하지 않은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16절과 17절 사이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에서는 세일로 함께 가자고 하고 야곱은 곧 따르겠다고 하고 그래서 에서는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숙곳, 세겜 땅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에서가 사는 세일 땅과 현재 야곱이 거주하려고 하는 세겜 땅은 부산과 만주만큼이나 떨어져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이제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0년만에 고향 땅으로 무사히 그것도 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걱정했던 형과의 만남도 무리없이 해결되었습니다.  치사한 외삼촌 라반도 없고, 무서운 형 에서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두 다리 뻗고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34장에 바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납니다.  애지중지 하나 뿐인 딸 디나가 그 동네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추장 아들 세겜은 그래도 신사적이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가축들을 먹이러 멀리 나갔기 때문에 아들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잠히 기다립니다.  잔머리 좋은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조건으로 내세워 세겜 땅 남자들을 다 할례받게 하고,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가 그 틈을 타 잔인한 복수극을 펼칩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어떻게 한다고, 남의 나라에 온 하 가족이 한 성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린 엄청난 사건입니다.  34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산전수전을 겪은 야곱도 놀랍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를 언급하십니다. 야곱이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금 벧엘로 부르시고, 그들이 벧엘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나올 때나, 야곱의 두 아들의 심한 복수극으로 일가족의 몰살 위기에서나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을 부르십니다.  야곱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세겜은 벧엘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딩과 옥스포드보다 가깝습니다.  여기서 비스터보다 조금 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돌아온 거,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그 벧엘인데 왜 가지 않고 굳이 세겜에서 머물렀을까요?  궁금한 일입니다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 대비가 나옵니다. 2절에서 너희와 함께 하는 이방신을 버리고, 3절에서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한 하나님께 단을 쌓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집안의 신앙을 책임져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그 가족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것을 방치해 왔습니다.  심지어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 일종의 우상을 훔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신앙상태를 쇄신해야 했습니다.  2절, 3절입니다.  이방신상을 버려라,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자입니다.  가장 힘들고 급박했던 순간에 만나주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다윗이 지은 시편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적들이 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수 많은 전쟁터를 누볐고, 사울왕에게 쫓겼고, 노년에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외쳤습니다. 물론 노래의 마지막들은 나의 피난처시오, 바위시오,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하면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또한 지금 온 가족의 몰살의 위기 앞에서 20년전 그 벧엘, 형 에서의 손아귀에서 도망가던 그 벧엘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부르시기 때문에 너무나 반갑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을 걸만한 사건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가장 급박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던 순간이 없었습니까?  우리가 먼저 찾았던 것 같은 그 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기다리고 계셨던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벧엘, ‘하나님의 집’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이것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야곱이 에서로부터 도망갈 때 서원하듯 그렇게 기도하신 적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이 바로 여러분의 벧엘입니다.  그 벧엘!  자주 찾아가십니까?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꼭 맞아야 정신 차리는게 보통의 사람입니다만, 그러기 전에 벧엘로 올라갈 수 없을까요?  물론 평안할 때 지금 야곱이 가진 절박한 심정처럼 벧엘로 올라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는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겜 땅과 벧엘은 그야말로 지척입니다.  야곱은 애써 애면하고 세겜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기만 가면 벧엘인데… 내가 20년전 도망가던 길에 하나님을 저기서 만났었는데… 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바쁜 일이 끝나면 다음 주에 한 번 가볼까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야 되는데, 말씀 읽어야 되는데 하면서 하루, 이틀 보내고 있는 저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번 바쁜 일만 끝나면, 시험 끝나면 혹은, 이번에 영국 가면 말씀 많이 읽어야겠다, 신앙생활 다시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시다가 그냥 하루, 이틀 보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영국에 가기만 하면, 비자만 무사히 나오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적 없습니까?  영국에 가기만 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는 네이티브처럼 하리라 그런 생각 없었습니까?  학교에 합격만 하면, 아니면 학위만 무사히 끝낼 수 있다면, 직장만 잡으면 등등 여러 가지 만약에 어떻게 하기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야곱이 20년 전 벧엘에서 했던 그런 기도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셨는데 세겜에 눌러 앉아 있는 야곱처럼, 그 일들을 해결해 주셨는데 내일부터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벧엘이 아닌 세겜에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기도를 했는데 기억조차 못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금 급박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20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진작 올 것을 꼭 사고가 나고 옵니다. 지난 20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벧엘입니다.  지난 2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나를 이곳에서 만나주시고,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신 벧엘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주로 섬기리라 다짐하고 내렸왔을 겁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게 안정되는 줄 알았습니다.  형과의 문제도 해결됐고, 벧엘의 하나님도 만났고, 이제 정말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고향 땅으로 가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이어서 큰 아들 르우벤은 자신의 첩 빌하와 동침합니다.  약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만, 20년 전 곧 죽을 것 같다던 이삭은 야곱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죽게 되고 에서와 야곱은 함께 장사지냅니다.  여하튼 다시금 신앙을 점검하던 벧엘에서 내려온 야곱은 아내를 잃고, 장남은 자신의 첩과 동침하고, 장수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아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다 팔아버립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아버지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여하튼 요셉은 배다른 형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많은 유산을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왕위를 위한 다툼도 아니고 배 다른 동생 요셉을 죽일만큼 미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다시금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대로 아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처럼 어두운 밤에 라반에게 동생과 언니를 바꿔치기 당했습니다.  짐승과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던 야곱은 이번에는 아들들에게 짐승의 피가 묻은 요셉의 옷으로 속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태어난 베레스가 결국 다윗과 예수님에게로 연결되는 왕통라인이 됩니다만 야곱은 현재 정말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느 누구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욕심 많고, 꾀 많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이스라엘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 중심에 오늘 이 벧엘로 올라가자는 야곱의 외침이 있습니다.  
    35장 전까지는 야곱이 자신의 뜻대로, 어쩌면 하나님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이는 듯 합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려고 했고, 아버지의 어두운 눈를 속여 축복도 가로채는 등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기 보다는 자기의 계획대로 온갖 머리를 굴리며 움직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35장 이후 야곱은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되갚음 당하면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 아내 라헬, 아버지 이삭, 아들 요셉을 차례로 떠나보내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 벧엘의 하나님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의 큰 아픔 앞에서 신앙의 아버지로 굳건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48장, 49장에서 야곱의 유언은 이 모든 삶을 담은 신앙고백입니다.  

    48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무지막지한 인생여정이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국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고비고비마다 벧엘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기근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잠시 애굽, 이집트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자신의 지난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게 지켜져 왔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요셉 또한 그 약속을 굳게 믿어 자신의 시신을 보존하여 이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게 될 때 꼭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사실 총리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집트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 또한 야곱 못지 않게 힘든 세월을 살면서 하나님의 손에 다듬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는 동안 요셉도 하나님의 약속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게 된 것 같습니다.  
    50장 24절에서 26절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400여년이 지나 모세를 통해 성취됩니다.  출애굽기 13장 18절부터 19절입니다.  그리고 땅 분배가 끝나는 여호수아 마지막 24장 3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심에 벧엘의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곱을 길러가셨습니다.  야곱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동시에 믿음이 단련되어지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욥의 고백도 기억납니다.  욥기 23장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리고 조금 밑에 14절을 보시면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혹은 아니면 어려웠던 지난 어느 날 나를 만나주셨고, 그에 따라 내가 다짐했던 그 벧엘, 그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십니까?  
    신앙의 많은 선배들, 평안하다고 외치던 그 많은 선배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선배들은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손 아래서 힘든 길들을 걸으며 다듬어져왔습니다. 
    그 길이 욥처럼 하나님에게서부터 왔을 수도 있고, 야곱처럼 자신의 욕심으로 빚어진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빚어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길들을 지나며 신앙의 선배들은 결국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고, 만나시고,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월 11일(토) 창세기 31-3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엘의 하나님(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I am the God of Bethel, where you anointed a pillar and where you made a vow to me. Now leave this land at once and go back to your native land.' "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I am the God of Bethel)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아노키 하엘 벧엘)   אָנֹכִי הָאֵל בֵּית 

    - '나'를 강조하는 일인칭 대명사 '아노키'와 '하나님'인 '엘'에 정관사 '하'가 붙어 '나는 벧엘의 그 하나님이다'란 뜻이다.
    이는 시간을 초월한 연계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말로서 도피 중인 야곱에게 나타나 언약을 맺은 장소인 그 벧엘을(28:19)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으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선언이다.

    지금 일어나
    - 신앙적인 결단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이어야 함을 촉구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뜰지 모르는 그림자이자 안개이기 때문이다(전 6:12; 약 4:14)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한계 상황이란 말그대로 인간이 한계에 부딪힌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죽음, 질병, 가난, 그 외 여러가지 극단적인 어려움의 상황들.
    이러한 한계상황에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좌절이야 초월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은 실존주의의 대가 중 한 명인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실존과의 관계를 탐색해 본다. 

    한계상황의 정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상황. 한계상황은 죽음, 고통, 우연, 죄책, 투쟁 등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직면하게 하는 상황이다.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무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즉,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의 숨은 정의는 인간의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가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유로움과 책임, 불확실성과 불안에 직면할 때 나타나는 특별한 상황으로 간주된다.


    한계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

    1. 자유로움과 책임의 수용 /  야스퍼스는 자유로움이 책임을 수반한다고 강조했다.
    한계상황에서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자유로움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불확실성과 불안의 이해 /  한계상황에서는 불확실성과 불안이 더욱 두드러진다.
    야스퍼스는 이를 통해 진정한 존재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불확실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성장과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3. 존재적 자기극복과 창조적 행동 / 한계상황에서는 존재적인 자기극복이 필요하다.
    야스퍼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봤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적 자원을 동원하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4. 타자와의 상호작용과 소통 /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과 소통은 한계상황에서의 대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스퍼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아를 발견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찾을 수 있다.

    5. 존재적 선택의 중요성  /  야스퍼스는 존재적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봤다.
    한계상황에서도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칼 야스퍼스의 관점에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유로움과 책임, 불확실성과 불안을 이해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열심히 해도 무언가가 너무너무 안되고 힘든 시기를 맞이한다.
    단순히 죽음이나 질병 이런것보다는 일적으로 혹은 인간관계적으로 바닥을 치는 힘든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바로 그것이 한계 상황이라할 때 인간은 한 번쯤 진지하게 자신과 삶, 존재 자체에 대해 심오한 탐색을 하게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한 심오한 탐색은 곧 자유이며 또 자유로 가는 길이다.
    그 자유를 통해 한계에서 가능성으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순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을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처법으로 한계상황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맛보기 바란다.


    ‘한계상황(Grenzsituation)’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인데, 극한상황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가는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달리, 변화시킬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겪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사람들이 한계상황을 맞아 어쩔 수 없는 벽에 부딪쳐 좌절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각성하고 초월에 닿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존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기 전 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합리성과 존엄성을 신뢰하여 인류가 계속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여 나갈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인간의 집단적인 광기와 야만성을 체험한 후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동안의 희망과 낙관이 무너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야스퍼스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으로부터 유태계 출신인 아내와 헤어지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반면 자신의 친구인 하이데거는 나치에 적극 협력하며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으로까지 출세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친구인 하이데거를 통해 ‘학자의 절개 혹은 변절’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실존의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사람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 즉 한계상황을 다음의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1. 생로병사(生老兵死)
    . Birth, aging, illness, and death
    2. 고독(孤獨) Loneliness
    3. 방황(彷徨) Wandering
    4. 투쟁(鬪爭) Struggle
    5. 죄악(罪惡) Sin

    첫째, 생로병사
    -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다는 것, 사람인 이상 누구나 이 생로병사의 벽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둘째, 고독
    -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고독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도 고독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고독합니다.
    인간인 이상 고독감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셋째, 방황
    - 실존주의에서는 끊임없는 방황도 인간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거나 분명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방황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투쟁
    - 인간은 둘만 만나도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한계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섯째, 죄악
    - 모든 사람은 죄를 짓고 삽니다.
    인간은 숨을 쉬고 있는 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역시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상황인 것이지요.

    칸트와 헤겔에 의하면 ‘이성’이 비록 시행착오를 반복하기는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이성은 계속된 진보를 통해 완전에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좌절’을 통해서 비로소 이성의 진정한 한계를 자각하며, 그 좌절을 직시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나아가 존재 실현의 길을 열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초월자(절대자)를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인간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왜 한계상황이 존재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실존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휴머니즘적인 정치 저술가로이며 정신과 의사로도 활동했던 독일의 실존철학자인 칼 야스퍼스(1883-1969)는 자신의 철학을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해한다.

    ​그는 나치 정권이 자기 아내가 유태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요구하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 하이데거는 오히려 나치에 적극 협력하며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으로까지 출세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하이데거의 경우에서처럼, 학자의 절개 혹은 지식인의 변절이라고 쉽게 속단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있음을 절감하고 이를 <실존의 과제>로 발전시키게 된다.

    1. 한계상황(Grenzsituation)  /  야스퍼스가 지적한 <한계상황 Grenzsituation>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벽 같은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죽음>과 <투쟁>, 그리고 이에 관한 <고뇌> 등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겪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같은 것 등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인간은 대체적으로 도피하려 하거나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자기 존재가 상실되는 길로 빠져든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그와 같은 한계상황 가운데서도 진지하게 그 과정을 성찰하면, <하나 뿐>이며 <한 번 뿐>인 <자기 존재의 자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야스퍼스의 개인적 삶에서, 확실히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절하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태계 부인과 결별하지 않았다는 삶의 진지함이 그가 말하는 한계상황의 전부를 의미하거나 그의 실존철학의 내용을 확실히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한계상황>은 이런 상황에서의 좌절을 직시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나가려는 태도이다. 야스퍼스는 이 세계에는 결코 합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초월자>를 강력히 요청한다.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대부분의 비극은 <이성의 기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은 <가스>를 통한 살상이라는 과학적 산업 형태가 주조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원자폭탄은 태평양의 군도에서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미군 병사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학적 성과의 주도하에 기획, 투하되었다. 즉 지난 세기의 중요한 결정들이, 이와 같이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칸트에 의해 시작되고 헤겔에 의해 완성된 <독일관념론>은 <이성>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지식의 진보를 이룩해 가다 보면 진리의 최종 형태인 객관적인 <물 자체 Dinge an Sich>까지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이성은 진보를 통해 완전에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야스퍼스는, <이성적 세계>와 <비합리적인 세계>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서 나치시대와 같은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존재>의 해명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학문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을 통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전제이다. 오히려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좌절을 통해서 비로서 이성의 진정한 한계를 자각하며, 아울러 존재 실현의 길을 열 수 있다.

    야스퍼스는 자신의 실존사상 전체를 나타내는 첫 번 저서인 <철학 1932>에서 <세계가 모든 것>이며 <과학적 인식이 확실성의 전부>라고 하는 소위 <세계 내재적>인 기존의 학문적 인식이 가지는 한계를 통렬이 비판한다.

    2. 실존(Existenz) / “나는 학문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서만이 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철학의 과제는 그것 보다 <세계>로부터 <초월자>에게로 초월해가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주장은 <실존>의 과제로 파악된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은 우선 <자기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 실존>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투쟁>, <고통> 그리고 <죄>와 같은 <한계상황>에 인간을 가두어 두고 스스로 절망하게도 하지만 아울러 <초월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본래적 자기존재>가 되살아나게도 한다.

    < 초월>은 실존적 자유의 근원이자 가능성이다. <실존>은 <초월>에서 방향을 찾는다. 즉 인간은 한계 상황 가운데서 <외적 생활 조건>에 전면적으로 의존해 있는 자신을 깨트려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이 명백하다.

    인간은 <현존재>로서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자연적, 문화적, 역사적인 기존의 제약에 묶여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말하는 <실존>은 혼자서는 자기 실현에 도달하지 못하고 <타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인간의 의사소통>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실존의 의사소통> 양태 중의 하나가 <사랑의 투쟁 Liebender Kampf>이다. <투쟁>은 인간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이어서 누구를 막론하고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적대적 투쟁>을 <사랑의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으며, 이의 실현을 통해서 보편적 진리 형태가 드러난다. 즉 <실존간의 내적 평화>를 통해서 <외적 세계평화 조건>의 달성도 가능한 것이다.

    3. 포괄자 Umgreifende

    인간은 원래 칸트가 말한 대로, 세계 안에서 주관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객관적 존재이기도 하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주관으로서의 인간은 실존으로서, 현존재로서, 의식일반으로서, 정신으로서, 또한 현존으로서의 <포괄자>의 양태로 존재한다. 아울러 이 인간에 맞서 있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초월>이 객관적 <포괄자>로 상정되어 있다.

    포괄자의 양태는 다음과 같다.

    1. <현존>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내에서의 나의 삶이다.
    <존재>를 위해서는 <현존>이라는 <경험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2. <의식 일반>은 보편 타당하고 객관적인 사유의 매체이다.

    ​3. <전체>로서 이해되는 <정신>은 <나 자신>이기도 하다.

    ​4.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대상 공간>으로서의 <세계>가 <정신>에 맞서 있다.

    ​5. <포괄자>의 이 같은 내재적 양태들은 <실존>과 <초월>로 채워진다.

    ​6. <초월>은 <포괄자의 포괄자>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7. <초월>은 <실존>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고 <내재>는 <초월>을 향해 더욱 자신을 드러낸다.

    ​이 모든 통합된 진리를 추구하는 힘은 여전히 <이성>에게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포괄자>의 모든 양태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즉 각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에 의존하는 데서 진리를 생산한다.
    그러나 여러 양태 중의 하나가 고립되면 그 가운데 <비진리>가 생겨난다.

    4. 마무리하며 /  야스퍼스가 이와 같이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초월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아 <케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정태적인 <실존 조명>과 유사한 주장을 펴는 것 같지만 이미 언급한 실존의 사귐형태(의사소통)와 적대적 투쟁을 사랑의 투쟁으로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데서 그의 철학은 사변이 아니라 즉 실존에 대한 탐구 를 사회변혁과 인간 구원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승화하려 했음을 확신하게 된다.

    벧엘의 하나님(창세기 27:15∼17)

    모태신앙인 야곱이 벧엘에서 겪은 경험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다신에서 유일신 사상으로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중요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다 광야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강도의 위험, 맹수의 위험, 그리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를 떠난 어린 청년이 쉽게 잠들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돌베개는 바로 고난의 인생여정을 의미합니다.
    돌이 얼마나 딱딱합니까?
    물론 성경에서 돌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보다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며 겪는 고난과 시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절망의 나락, 즉 앞이 안보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위기들을 겪게 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고 고백합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살아오며 너무 고민하고 슬퍼하여 위출혈을 여러 번 경험하고 정말 잠 못 이루는 밤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야곱이 처한 상황은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어두움의 정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했듯 신을 만날 수 있는 ‘한계상황’인 것입니다.
    이처럼 한계상황에 이를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야곱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힘들게 잠들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곳으로부터 하늘에 사닥다리가 닿았고 하늘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천사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교통하였습니다.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꿈속에서 보니 하나님이 고향 동네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계속 따라오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관은 각 민족마다 지배하는 신이 있고 그 신들은 그들의 영토를 통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말로만 들었던 자신들의 부족신 여호와가, 바알의 영토까지 따라오셨고 바로 그곳도 통치하신다는 것을 꿈속에서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면 바알은 가짜인가? 아니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에게 쫓겨났나?’ 바로 그 순간 야곱의 신관과 신앙이 바뀌게 됩니다. 다음의 고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5∼17)

    야곱은 잠에서 일어나자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엘’은 바로 히브리어 ‘알렙’에서 왔으며 알렙은 힘센 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말하고 그분이 바로 우주의 가장 힘센 분이십니다.
    그래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따라다니시며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국경이 없습니다.
    바로 전 우주가 바로 그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오늘은 가나안 땅에서 하란 땅으로 가는 야곱에 관하여 성경 말씀을 풀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창세기 28장 10~2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대략 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형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어머니 리브가와 합동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가 받아야할 축복을 동생 야곱이 받아 형 에서에게 쫓겨서 하란 땅 라반 외삼촌의 집으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보내는 사건이며 리브가가 에서의 분이 사그라질 때 까지 피신시키는 내용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하란 땅으로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벧엘 (하나님의 집) 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 하게 되는데 그 밤에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야곱이 아침에 자고일어나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아침에 기둥으로 세워 기름을 붓는 사건입니다. 이정도만 성경을 보지 않고 줄거리를 설명하면 아마 성경을 많이 알고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원리로만 야곱의 벧엘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중심되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벧엘 사건이 야곱이 주체가 되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우리는 예수그리도와 연관을시켜 깨달아야 이사건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알게되고 이 사건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많이 들어도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전체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5:39) 너희가(현재 신앙인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성경 말씀이 예수그리스도로 깨달아지지 아니하면 영생 얻지 못함)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아무리 연구해도 예수님을 모르면 허사라는 것)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성경 전체의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내용 이라는 것)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단어 한단어를 해석하여 풀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 해석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신비한 내용의 말씀을 경험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럼 본문말씀을 한 번 더 인용 하겠습니다. (창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적인 그림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는 바로 하나님의 상징적인 그림자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약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삭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야곱은 오순절날 다시 오실 성령님의 예표적인 그림자입니다. 세 사람을 다 설명 할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비될 것입니다. 이 내용에 관하여는 다음에 시간이 나는대로 자세하게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야곱이 성령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면 야곱이 벧엘에서 유숙하는 이 사건속에 예수님과 직접적인 사건이 연결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야곱은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야곱이 가나안 땅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하란으로 가는 사건은 가나안땅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며 이삭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상징이며 어머니 리브가는 성령님을 상징하며 야곱은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삭에게 축복의 안수를 받는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축복의 말씀을 가지고 이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하나님의 장자는 마리아 몸속에서 먼저나신 율법의 예수님이 아니시고 두 번째 하나님의 몸으로 거듭나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에 뒤에 태어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인 성령 세례를 이삭에게 받는 것입니다. (마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한 곳을 더 참고 하겠습니다. 아래 구절에 육신의 율법의 예수님과 복음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롬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럼 결론적으로 하란땅은 이 세상을 예표 한 것이고 라반은 사단의 상징이며 라반의 두 딸과 딸들의 종 실바와 빌하 네 여자가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이 뜻은 넷 숫자는 동서남복 사방에 있는 신부 믿음을 지킨 처녀들이 마지막 심판날 성령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어 가나안땅인 하늘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20년 동안 종살이는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은 성령이 오시기전 율법시대 칠칠절 49일의 상징이며 짐승들을 위한 6년 또한 성령이 오시전 율법의 숫자인 천지 창조의 숫자인 것입니다.

    넷 아내들은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신부로 예표하신 것입니다. 이정도 해석이 되면 어느정도 사건의 윤곽이 영적으로 잡혀지질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문맥적으로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본문 첫 단어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성경이 증거하는 아침은 무덤 속에서 새벽 아침에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침에 일찍 부활 하셨습니다.

    다음단어입니다. 일어나 일어났다는 단어는 누워 죽어 계시든 율법에 예수님이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셔서 일어나실 것을 상징 하신 것입니다. (계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속해서 성경은 우리에 증거합니다. (베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위에 구절들이 아침에 일찍 부활하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증거 하신 것입니다.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신비한 내용이 숨겨져있는 비밀입니다. 야곱이 베개한 돌은 무덤속에 죽어계시는 율법의 예수님이 십니다 베게는 누워 있습니다 벤엘의 어두운 밤은 예수님이 해가 질 무렵에 죽은 시신이 무덤속에 들어가 캄캄한곳에 누워 장사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여기 소개하는 건축자의 버린돌은 야곱이 베고잔 베개를 상징합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합동하여 십자가에 버려진 예수님이십니다.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계속해서 다음 소절입니다.
    기둥으로 세우고 기둥으로 세웠다는 것은 죽어 계시든 예수그리스도께서 아침에 부활하셔서 기둥으로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와 신명기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깍아 다듬어가지고 아침에 일찍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오라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 부활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버려진 돌은 십자가에 못박은 율법의 예수님이 십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예수님이 삼 일날 새벽에 무덤 속에서 성령 세례를 받는 사건입니다.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기둥은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때에 광야생활 사 십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 하신분이 바로 오순절날 오실 성령의 말씀이 이 땅에 성령 받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 하실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우리들에게 미리보여 주신 것입니다.
    광야는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세는 율법의 예수님의 상징이고 모세를 대신한 두 번째 인도자인 여호수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율법에 장사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오직 여호수아의 실체가 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나안땅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라는 뜻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무덤속에서 성령세례 받으실 장면을 미리 보여 주실 때에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그 위에 임합니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도 일백 이십명 위에 임합니다.
    돌 기둥 위에 야곱이 기름과 전제 부은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기름은 성령의 말씀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인류 최초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이 말씀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내용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사건입니다.
    저녁 먹은 후 라는뜻은 오순절 성령이 저녁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그 장소에 저녁때에 오실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은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피는 오순절날 오실 성령의 말씀에 그림자입니다. 성령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깨달아 질 때에 내 속에 사단이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바로 피의 실체이신 성령에 말씀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참고(엡2:13) 이제는(복음시대) 전에(율법시대) 멀리 있던 너희가(율법시대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말씀과 만날 수 없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성령의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는 부활하신분이 십니다. 여기에 신비한 비밀이 숨겨 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2019년 동안 하늘나라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또 채찍 맞고 고통 속에 다시 피흘러 죽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 그럼 여기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피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피의 근본이 되는 말씀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깨닫지 못하면 다 비밀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피가 말씀으로 관련되는 성경말씀을 참고 하겠습니다.
    (마26:27) 또 잔을 가지사 (잔은 성령을 가지신 예수님 자신) 사례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심) 저희에게 주시며(오순절날 제자들 일백이십명 에게 주실것)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인류전체 중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성령의 말씀을 다 마시라는 뜻)

    (26:28) 이것은(포도주는 성령의 말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성령의 말씀이 사단의 죄를 이김) 많은 사람을 위하여(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전체)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오순절날 오실 언약의 성령의 말씀 새 언약)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사건이 우리들이 단순한 세상적인 사람이 알고 있는 원리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장사 되셨다가 다시 부활하시는 사건에 관하여 말씀을 풀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1월 10일(금) 창세기 27-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전(창세기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and this stone that I have set up as a pillar will be God's house, and of all that you give me I will give you a tenth.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בַּיִת 스트롱번호 1004

    1. 집.  2. 장막. 3. 왕하 23:7.
    발음 [ bayith ]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 안의 성전을 말하는 것 같다(왕상 6:1-38).
    성전을 본절처럼 '하나님의 전'(the house of God) 또는 '여호와의 전'(the house of the Lord, 왕하 6:37; 7:48) 등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의 지성소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처소를 정하신 것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성막을 짓도록 계시하신 데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출 25:8, 2).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 28:21~22)

    3.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음(창 28:10~22).

    21절.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게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거이요는 그렇게 하시면 라는 조건이 아니다.

    “평안”은 히브리어로“샬롬”인데“온전하다, 건전하다, 안전하다”을 뜻하는“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안전함, 건전함, 충분함, 평화, 평강, 친목, 화평, 형통, 건강, 안녕”등등을 말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번영을 구하거나 빌 때(창 43:27, 출 4:18, 삿 19:20) 혹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친할 때(수 9:15, 왕상 5:12). 또 누군가가 어떤 도시나 어떤 나라의 평안을 구할 때(시 122:6, 렘 29:7)사용했다.
    물질적인 번영이나(시 73:3) 육체적인 안전(시 4:8), 육체의 쉼, 근심 걱정 없음(창 15:15)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영적인 안녕도 배제하지 않는다.
    한편 이 말은 의와 진리와 항상 연합 한다(마 27:29, 28:9, 막 15:18, 요 19:3).

    본문에서 야곱의 이 간구는 문자적으로는“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고”로서 야곱의 상호 교환식 서원을 지지한 듯하나 전체 문맥으로 보아 야곱이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과 값싼 흥정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절을 부연 설명으로 보아“여호와께서 내게 하나님이 되시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Hengstenberg).
    이 서원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평생 섬기며 살겠다는 의지의 발로(發露)이자 신앙 고백이다.

    22절.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야곱은 자기가 무사히 귀환 하게 된다면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킨다(35:7).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십분 일”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란 전제가 붙어 있다.
    즉 내게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이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 임에 분명하며(14:20).
    후에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삯으로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반드시”는 우리말로 틀림없이, 기필코, 또는 꼭 한다는 말이다.
    영어로 surely(슈얼리)는“분명히, 확실히, 물론, 정말로, 틀림없이, 반드시, 거짓이 없이, 정녕히,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다”을 말한다.
    히브리어에서는 한 단어를 강조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는 말을 뜻하는“슈브”인데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반드시, 기필코, 시작했던 지점으로“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 돌이키다, 회복한다”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벧엘의 사닥다리(창세기 28:10~22)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은 살던 곳 브엘세바에서 외가가 있는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 들판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쓸쓸한 광야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곤하게 잠이 들었을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았고 그 위에서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펼치게 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입니다.

    야곱이 본 벧엘의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계시의 환상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17절).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령한 교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이 후 야곱은 중동 천지를 유랑하는 나그네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그곳 벧엘의 환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곧 벧엘의 사닥다리 환상은 야곱 인생의 초점이었고 삶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언약의 현장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본 환상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자리에서 사닥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고 동시에 하늘로부터 선포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에 앞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야곱을 통하여 실현하시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자손의 번성을 약속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창 15:5).

    지금 야곱은 혈혈 단신으로 방랑자의 길을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래와 후손들에 대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가 누운 벧엘을 중심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백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후손을 약속하셨고(창 15:4), 이삭도 결혼 후 이십 년 동안 자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창 25:21). 야곱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열두 명의 아들을 두어 족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2. 복의 기관이 될 것을 약속

    14절에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손의 복을 약속하실 때 수적으로 많게 하는 것과 질적으로 우수한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7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티끌」이나 「바닷가의 모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자손을 뜻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박해를 받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숫적으로도 무한대이지만 질적인 면에서 존귀하고 뛰어나게 된다는 축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14절). 창세기 12:2-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중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약속은 그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훗날 모세가 율법을 반포할 때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하였습니다.

    3. 언제까지나 함께 하실 것을 약속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떠난 야곱이 가족이나 이웃과 격리된 채 삭막한 광야에서 홀로 내동댕이 처져있는 상태이고 보면 가장 절실한 것이 외로움과 내일의 불안을 해소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닥다리 환상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지키시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을 주셨으니 그로서는 최상의 기쁨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야곱이 가는 길에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그의 길을 열어주셨고(창 29:9-14),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를 위험에서 건져내시며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창 31:42, 33:4, 35:1).

    Ⅱ. 서원의 현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장래의 비밀한 계획을 알려주실 때 이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나타내며 감사와 헌신의 서원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 사닥다리의 환상이 있는 벧엘의 현장에는 야곱과 그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고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기도와 서원이 있었습니다.

    1. 감사와 감격의 표현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고는 너무나 큰 감격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17절에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사닥다리의 현장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문이라고 믿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의 은혜를 받게 되면 가장 먼저 감사하는 마음과 감격의 표시가 있어야만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찬송으로 기도로 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헌신으로 나타나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이 언제나 자기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게 됩니다(롬 12:1). 이것이 성도의 예배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기도와 소원을 아뢰다

    20-21절에는 야곱이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약 1:5).

    여기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보면 지금 당장 자기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며 그의 가는 길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衣食住) 문제는 가장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입니다. 셋째는 저를 평안히 아비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역대상 4:10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3. 헌신의 약속

    야곱은 하나님께 간곡한 소원을 아뢰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헌신의 약속을 드렸습니다. 21-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신앙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의 목표를 밝히는 것으로써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고전 10:31).

    또한 그가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하는 약속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의 의지입니다. 야곱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든지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단 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훗날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약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약속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하므로써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십일조가 율법으로 제정되기(레 27:30)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행위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Ⅲ. 은혜의 현장

    성도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마주 대하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하게 됩니다.

    친구의 권유에 못이겨 따라 갔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49). 이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51).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을 가지게 되는 것과 그 순간의 감격은 평생을 두고 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은혜의 추억이 됩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도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면서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16-17절).

    1. 시은소(施恩所)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십계명의 돌 비가 들어 있는 증거궤를 안치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날 수 있도록 구별해 놓았습니다(출 30:6).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출 3:5), 하나님과 대면하고 만나게 되는 것은 최상의 축복입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성소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시편 84:3에는 하나님의 성소를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로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항상 주의 얼굴을 뵈옵고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회복의 은혜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던 야곱이 숙곳에 머물다가 그곳 추장의 아들에게 딸 디나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창 34:7). 이때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가지고 가서 세겜성 사람들을 도륙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눈앞이 캄캄하여 큰 공포에 떨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5:3에 보면 야곱이 가족을 모아 놓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환난과 죽음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저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7:6).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속에 품어 주듯이 세상사에 지치고 피곤해진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날개 아래 품으시고 새 힘을 얻도록 회복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룻기 2:12에 보면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룻은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모압 땅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고 패가 망신한 나오미의 가정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왔다고 보았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축복으로 회복되었습니다(룻 4:18-22).

    3.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

    벧엘의 사닥다리는 이상적인 그리스도 교회의 모형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 곧 교회를 뜻하며 거기 나타난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동시에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와 찬양과 예배로 헌신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이요 비길 데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비록 광야 같은 세상에서 방랑자의 생활을 할지라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고 주님과 만남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도 깊음의 샘과 이른 비의 은택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시 84:5).

    이런 것이 이상적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삶의 중심이요 이상향(理想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편 84:4)

    여기에 나오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인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경배하는 모든 백성들인가?
    둘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복되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성전에 나가는 자들만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들은 주의 성전에 나가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들은 복된 자들이고, 이런 자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늘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찬송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뽑내기 위해서 찬송을 불러서도 안됩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찬송을 불러도 안됩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고 신앙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가수처럼 잘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음정 박자가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음정 박자를 잘 맞춘다면 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에서 드리는 찬송이면 됩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복을 노래합니다(5-12)

    이제 시인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의 복을 노래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원문은 ‘복이 있다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의 태도입니다.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 생활 방식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의 태도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제 시인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고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준다고 고백합니다(6).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입니다(7).

    눈물 골짜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장소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샘이 있다는 말은 1차적으로 빗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웅덩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여행자들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인생 여정 중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한한 은총입니다.

    이른 비는 가나안 땅의 파종기인 9-10월 경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길을 가는 자들에게 신령한 복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힘을 얻는다는 말은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이라는 말은 당시 순례자들이 긴 순례의 여행을 하여 성전에 도달하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기쁨을 말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얻는 기쁨, 영생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시 84:8-9)

    만군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 통치자라는 의미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유다의 조상 야곱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시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방패이신 하나님은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주시는 생명의 보호자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기름 부으신 자는 왕을 의미하는데 이는 장차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얼굴을 살펴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주의 궁정, 다른 곳은 대조를 나타냅니다. 또 한 날과 천 날은 대조를 이룹니다. 또 악인의 장막과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도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비록 눈에 보기에 비천해 보이나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의 문지기는 가장 비천한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11-1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12)

    다시금 강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원문은 ‘만군의 여호와여 복이 있다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이 있는 자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참 구원받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복된 자는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의지하는 자는 분사형입니다. 즉 계속해서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론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복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신앙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이사야 2:1-4)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세상은 가치 있는 것은 환영을 하고 가치 없는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 있고 없고의 판단 기준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고,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도 진리의 판단 기준을 내 교회에 이익이 되고 안되고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유익 되게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진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교회에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를 따르고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접해야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대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찾아보기가 힘들고 대다수의 교회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약하고, 비진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에 결국 이 땅에서는 진리가 비진리에 눌리고 공격당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싫어하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된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눌린다고 해도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가치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에게 가치를 두게 되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야 하고, 눌려야 하고,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에 대한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지옥갈 인간이었는데 남들이 욕한다고 그것을 못참고 원망을 하는가?'하면서 모든 것을 견디어 갈 때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하여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였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참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무너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다고 진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말일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고 작은 산 위에 뛰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만이 모든 산위에 굳게 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입니다. 이곳으로 피할 자는 이곳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는 자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란 오늘날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3절을 보면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을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칠 때 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오해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며 자기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 것은 그에게 참된 복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장자란 섬기는 자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 인생에 개입하셔서 간섭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에서에게 절함으로 장자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전이란 우리에게 세상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여호와의 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말씀이 다스리고 있는 그 자리를 여호와의 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산에서 마지막 때까지 남는 신자는 세상의 다른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을 향해서 올라가며 '이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하면서 참된 말씀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산은 참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그 자리가 여호와의 산입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산에서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을 때 다른 산은 작은 산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굳게 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산은 무엇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아니한 모든 것을 작은 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이 없는 것을 작은 산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아니한 모든 것은 마지막 때에는 모두 작은 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은 아주 큰산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큰산인지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모든 것이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큰산으로 여기며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헌금이 많아지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작은 산에 불과한데 말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큰산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큰산을 보지 못하고 작은 산을 큰산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모든 작은 산 위에 곧게 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산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못견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자들을 작은 산에 서 있는 자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해도 마지막 때에는 말씀 위에 서 있는 자가 굳게 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봅시다. 작은 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가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벌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작은 산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내세운다고 그것 때문에 기가 죽거나 낙심하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산에서 그것이 최고인줄 알고 자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부럽지가 않습니다. 신자는 언제나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4절의 말씀과 같이 경쟁과 다툼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이 은석교회가 말씀이 다스리는 여호와의 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 여러분 각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역대상 22:1- )

    성전을 건축할 장소가 정하여졌습니다(1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으로써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장소를 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땅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택하신 그 터전은 이방사람들 사이에도 복음의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낸 행복한 전조가 되었습니다(행 15:16-17).
    그 땅은 타작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의 마당이며 그의 타작물이며 또한 “그의 마당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사 21:10).
    그리스도는 그의 마당을 온전히 정결케 하기 위해 그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집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질 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제단은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다윗 때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으로 옮겨다가 장막에 모시고(대상 16:4) 그 앞에서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가대 악대를 조직했습니다(대상 16:4, 25:1-7).
    그러나 나단에게 성전 지을 의사를 표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려고 했습니다(대상 17:1-12). 다윗은 성전을 위해 많은 돈과 재물을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대상 18:5-13, 22:6-17).
    아버지의 유물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솔로몬(주전 960-922)은 그의 치세 제4-11년간에 아담한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그것은 헤롯 성전보다 적으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처음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의 예배처소는 아니었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지정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도 기름, 향, 떡을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성전 구내가 전부 집이었습니다(시 66:13).
    솔로몬의 성전은 400년을 못갔습니다.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11년 후 유다의 젊은 왕 여호야긴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왕하 24:10-16) 성전 보물도 (25:13-17)다 옮겨 갔습니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의 성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왕상 10:4).
    솔로몬 성전은 베니게 직공들이 지었는데 베니게, 가나안, 애굽, 신전들의 영향을 맡이 받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좁은 정방형으로 동편에는 문이 있고 서편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33.33m, 넓이가 9m 가량이요 약 3m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베니게 노동자 수천명을 풀어 흰 석회석을 갈아서 아름답게 지었습니다(왕상 5:6, 6:7).
    내부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목수들을 시켜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6:5-36, 5:6).
    출입구로 올라가는 층계는 10계단이 있었고 층계 좌우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벽과 따로 서있었습니다.
    좁은 출입문(10×4.5m)은 백향목으로 짰고 그 위에 그룹,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핀 꽂은 금으로 박았습니다(왕상 6:18-35).
    문지기가 있었습니다(시 84:10).

    1.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울람-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2) 헤칼-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3) 드빌 - 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2. 성전 비품 성전 비품은 두로의 건축 기술자 허람(그 어머니는 출애굽 납달리 족속)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전 앞 마당 우편에는 큰 번제단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큰 바위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겔 43:14).
    또 어떤 이는 대하 4:1에 묘사한대로 만든 것인데 층계있는 거룩한 탑 모양이었다 합니다.
    제단 4귀에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 남쪽에는 큰 놋으로 부어만든 “바다”가 있었는데(대하 4:1) 그 두께가 1m 직경이 4.5m 고가 약 2.25m 되었습니다.
    그 가장자리는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굽었습니다(왕상 7:23).
    놋으로 만든 12마리의 황소등에 놓였는데 3마리씩 4방(춘하추동의 암시)을 향했습니다.
    그 황소들은 모양 뿐 아니라 생식력의 상징인 동시에 비를 주는 신으로 중동에서 널리 믿는 바알에도 관련되었습니다.
    거룩하게 생각한 동물들이 왕의 보좌나 거룩한 것을 바친 것은 옛적 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놋바다는 원래 제사장들이 깨끗케 하는 의식에 쓰려한 것보다 물이나 바다는 생명의 근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3. 성전 안에 불박이로 놓여 있던 것은
    (1) 후대 제사 규칙에 의한(레 24:1-4, 민 8:1-4) 7촛대의 전신인, 10개의 금촛대 (왕상 7:49, 대하 4:7) 이 촛대란 사실, 3다리 달린 동경(등잔)으로 그 위에 불심지 7있는 등잔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출 37:17).
    제 2성전에도 하나였는데 안디오커스 에피피네스에게 도적맞고 마카비 시대에 다시 만들었더니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가져갔습니다. 그 모형만은 티도 개선문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진설병 상을 12개 만들어 떡 12개를 차례로 놓을 때 상도 차례로 하나씩 썼습니다.
    이 떡상은 왕상 6:20-22의 제단과 일치하며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고, 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3) 움직일 수 있는 향단은 금으로 장식했으며 뿔이 있었습니다.

    4. 솔로몬 성전은 초막절에 봉헌되었습니다(왕상 8:12)
    솔로몬의 기도는 넉줄의 시였으나 주전 550년경의 포로 후의 부연하여 봉헌기도를 유창하고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부는 때를 따라 변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때(주전 922-915) 애굽 왕 시삭이 노래했으며 (왕상 14:25) 악한 여왕 아달야(주전 842-837)가 바알 예배를 성전에서 행했습니다.
    아하스(주전 735-715)는 성전 내부를 개조하고 제단도 고쳤습니다(왕하 16:10-18).
    히스기야(주전 715-687)는 모세의 율법의 놋뱀을 버렸습니다(왕하 18:4).
    므낫세(주전 687-642)가 앗수르 방식을 따라 성전을 주력했더니(왕하 21:4) 요시야(주전 640-609) 왕이 연보궤에서 율법책을 찾은 후 그것을 폐지했습니다(대하 34:14).
    솔로몬 때 시작한 예루살렘성전 중심주의를 강화하여 지방성소들을 폐지하고 그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할 일을 주었습니다(신 12:2-28).


    하나님의 전(God's house)과 십일조(tenth)는 야곱의 서원이었습니다.

    왜 야곱이 이런 서원을 했을까요?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므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의무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위한 최소한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지만 육체의 몸을 유지하며 살아야 할 연약함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하고 최소한의 것을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간다는 고백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가족을 이루었고 가족들과 많은 가축을 몰고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 예전에 형으로부터 빼앗은 장자의 축복을 생각하면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에 노숙하려고 돌을 베개로 삼아 자리에 누웠을 때 땅위에 세워진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는 신기한 꿈을 꾸게 됩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곳은 하늘의 문이며 하나님의 전"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배게로 삼았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땅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루스(편도나무, 아몬드나무)"라는 땅에서 하룻밤을 잔 후에 신비한 꿈을 통하여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고 블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 야곱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킨다(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묘사합니다(딤전 3:15).

    십분 일
    -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이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임에 분명하다(14:20).





    1월 9일(목) 창세기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자의 명분(창세기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Then Jacob gave Esau some bread and some lentil stew. He ate and drank, and then got up and left. So Esau despised his birthright.

    장자의 명분(1062)

    베코라(bekôwrâh)  בְּכוֹרָה 스트롱번호 1062

    1. 초태생.   2. 느 10:37. 3. 창 4:4
    발음 [ bekôwr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관련 성경  /  첫 새끼(창4:4), 장자의 명분(창 25:31, 27:36, 대상 5:1), 처음 난 것(신 12:17, 14:23, 느10:36).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장자의 명분(베코라. bekôwrâh)"이란 "태를 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사람이나 짐승의 '초태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말하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외적 특권(外的 特權)

    1.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창 27:1-45. 대하 21:3)
    2.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

    둘째, 내적 특권(內的 特權) 

    1.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
    2.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되며,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신앙의 명분(The responsibility of faith)"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본분과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명분이 무엇일까요?

    1.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라(고후 2:15-16)
    2.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후 3:3)
    3. 세상의 본이 되라(벧전 2:9)
    4.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라(빌 3:20)

    이러한 명분을 바르게 감당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를 세워가는 삶에 성공하는 승리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인의 명분(마태복음 5:13-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하셨을 때 세상이란 헬라 단어는 "게"라고 합니다.
    "게"라는 헬라 단어는 "땅" "지면"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땅의 소금, 지면의 소금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어지러운 것은 땅의 소금으로 지면의 소금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된 것처럼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땅(게)의 소금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gē ]
    • I.  땅.
      • 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 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 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 4. 지구.
        • 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 b.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 관련 성경 /  땅(마 2:6, 막 2:10, 행 1:8), 세상(마 5:13, 9:6, 막 9:3), 흙(마 13:5, 막 4:5), 뭍(막 6:47), 육지(마 4:1, 눅 5:3, 요 21:8),
                         지구(눅 21:35), 지면 (계 20:9), 천하(계 16:14).



    땅의 소금, 세상의 빛(마태복음 5:13-16)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들은 가나안 땅에서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려면 반드시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가나안 땅이 우상 숭배가 가득한 땅이었는데 그 백성들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 숭배에 깊이 참여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장자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장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지요.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땅의 소금은 맛을 잃어 버렸고 거룩한 땅을 더럽혔다(렘 2:7, 3:9). 
    땅의 소금은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혔다(렘 52).
    땅의 소금 /  이스라엘의 남은 자(롬 9:6, 27, 11:5).

    로마서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세상의 빛. 예수님은 세상의 빛, 생명의 빛, 참 빛이시다(요 1:4, 5:9:5).

    요한복음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이로라.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빛이다(엡 5:8, 살전 5:5).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의 아들이요 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장자의 명분(장자 상속권)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특별한 권리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당시의 장자 상속권은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뿐만 아니라 바빌론, 앗수르에서도 정착된 제도였다. 이미 발굴된 고대 바빌론, 앗수르의 기록물들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특별한 책임

    장자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 부친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도 부양 할 책임이 있었다.

     

    장자권의 이동

    장자의 권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박탈될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례로는 르우벤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으나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의 명분을 누리지 못했다.

    장자의 권리는 매매를 통해서 다른 형제에게 넘겨질 수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다(에서의 경우). 첩이나 종의 자식들에게는 먼저 태어났어도 장자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이스마엘의 경우).

    • 출애굽 이후 주어진 율법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 곧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에서의 장자권과 가나안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장자 상속권을 ‘가벼이’ 여겼다.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당장의 배고픔 앞의 죽 한그릇 보다 못한 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에서가 물려 받을 장자의 명분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 받는 것이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이삭의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었다. 에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입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은 속여서 받았지만 훗날 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아들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에 정착한다.


    장자의 명분이란 무엇인가.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속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주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다. 야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결국 복의 자손이 되었고, 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없었기에 결국 복을 빼앗겼다.

    사실 에서가 원하던 복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였다. 아래의 대화를 보면 이것을 좀더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에서는 이생에서의 축복, 즉 부와 권력을 원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뒤 에서가 분노를 하는데, 이때 에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축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번영에 대한 축복이었고, 이것을 얻을 수 없자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 또한 에서가 결혼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면 에서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볼 수 있다. 에서는 자신의 번영을 위해 결혼한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살펴보면 결국 에서는 원하던 것을 얻는다. 야곱과 에서의 부유함을 비교하면, 야곱이 자신의 재산 절반을 에서에게 주었기 때문에 부유함에서만큼은 에서와 야곱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에서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즉, 에서는 자기가 원했던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를 얻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이것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글이 너무 비대해질 것 같기에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다. 간단하게만 다루자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 약속된 땅 위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들이 살게 될 것인데, 그들로 인해 이방 민족들이 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구분하자면, 1) 자손에 대한 약속, 2) 땅에 대한 약속, 그리고 3) 이방의 복이 될 거라는 약속이다.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방의 복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온다.

    과연 야곱은 장자권에 대해서 알았을까? 에서는 장자권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곱은 확실히 이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최소한 그의 말년에는 그렇다.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장 1-4절

    창세기 46장을 보면,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성공에 대해서 들은 야곱이 두려워하고 있다.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된 땅은 애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하여 올라올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 뒤에야 야곱은 기쁜 마음으로 성공한 아들을 만나러 떠난다.

    즉, 말년의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어려서부터 원하고 바랐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야곱은 어려서부터 이 사실을 알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추측이 필요하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창세기 25장 20절

    아브라함이 100세 때 이삭이 태어났으니, 이삭이 40세 때 아브라함은 140세였다. 그리고 이삭은 40세 때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래의 말씀을 보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것은 이삭이 60세였을 때였다. 곧, 이 당시 아브라함은 160세였다. 즉, 아브라함 160세, 이삭 60세, 야곱과 에서 0세이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세기 25장 2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175세에 사망하였다. 즉, 이때 이삭은 75세, 에서와 야곱은 15세였다.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세기 25장 7-8절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창세기 26장에서 나타난다. 26장에 아브라함이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이때 가장은 이삭이었다. 그 사실은 그랄로 이사를 간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약속을 주신다.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6장 1-4절

    여기서 이제 우리는 추측을 해야 한다. 25장에 에서와 야곱의 탄생이 등장하고, 그 뒤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산다. 26장, 아직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이삭이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 땅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하나님이 이 계획을 막으시고 그랄 땅에 남아 있게 하신다. 그뒤 에서의 결혼을 언급하는데, 이때 에서의 나이 40이다. 그리고 27장에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창세기 26장 34절

    즉,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탄생(25장)과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26장) 사이에 두 가지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죽었고, 다른 하나는 이삭이 이사를 가려다가 가지 않았다.

    먼저 이사(moving)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온 가족이 그랄 땅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가려다가 가지 않았던 일. 갑자기 왜 이사를 가려다 말았을까? 이에 대한 이유, 곧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셨던 새로운 약속을 야곱과 에서가 듣지 않았을까? 어떤 가장이 사업을 하던 중에 그것을 접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온 가족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장성한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건을 말이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에서와 야곱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았던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아마 최소한 야곱은 나이가 들어 장막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종종 방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장막에 거주했기 때문(창세기 25장 27절)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을 야곱이 알았을 거라는 사실은 있음직하다. 특히 야곱이 어렸을 때 가정의 중대사를 결정하게 만든 "땅과 자손에 대한 이 약속"을 전혀 듣지 못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좀 무리가 있게 느껴진다.

    물론 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상반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서가 이 약속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서가 이 약속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약속의 방향과 정 반대로 나아가는 에서를 보고 근심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세기 26장 34-35절

    에서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만 하고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이 약속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 오늘날 (*, 카욤) - 직역하면 '오늘처럼'이나 여기서는 '빨리' '우선적으로'를 뜻한다(삼상 2:16; 왕상 1:51).

    󰃨 팔라 (*, 마칼) - '팔다' '양도하다'의 강조 명령형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1)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2)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3) 사전(事前)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 내가 죽게 되었으니(*, 히네 아노키 호레크라모트) - 직역하면 '보라 나는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으니'이다. 에서의 이 대답에 대한 해석들로서는 에서가 (1) 너무 굶주려 죽어가는 급박한 위경에 도달했다는 것과(Calvin) (2) 사나운 짐승을 쫓음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3) 삶의 종국적 결과가 죽음이니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란 견해 중 에서가 평소 취했던 경박한 태도를 보아 지금 당장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현실 지상주의의(Keil) 세째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마 제) - 직역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이다. 에서가 한 이 말의 의도는 (1) 지금 아사(餓死) 직전에 있는데 장자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2) 내가 죽으면 야곱이 대신 장자권을 차지할텐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두 의중이 복합된 듯하다.

    주제2: [사고 판 장자의 명분]

    󰃨 맹세하고 (*, 솨바) - 완전 수인 '일곱'이란 명사에서 유래하여 '일곱번 말하다' 즉 '서약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맹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아래 쌍방간에 맺은 약속을 신실히 이행할 것을 서약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약속한 바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출22:11; 민5:19).

    󰃨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1) 본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2)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21:10) (3)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48:22, 대상 26:10) (4)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49:3, 4 ;대상 5:1) 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한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 떡(*, 레헴) - 어근 '먹다'에서 유래하여 식량, 곡물, 빵 등을 포괄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죽과 함께 먹는 빵을 의미한다.

    󰃨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와야칼 와예쉐트 와야캄 와예라크) -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갔다'. '와우'(*, 그리고) 용법으로 계속 이어지는 본절은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목전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육적 사람의 상태를 생생히 묘사했다.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바자)
    - '업신여기다' '경멸하다'는 뜻이다.
    본절에서는 와우 용법으로 앞의 문장인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에 연결됐다.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전혀 뉘우치는 빛이 없는 에서의 강퍅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영생을 금단의 열매와 바꾼 이래(3:6)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정의(知情意)가 마비되어(엡 2:1-3; 4:8) 무분별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히12:16은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베베로스)자라 일컫는데 이는 '속된' 혹은 '불경건한'이란 뜻으로 속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축복의 기회를 하찮게 다루는 자란 뜻이다.






    1월 8일(수) 창세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말씀대로(창세기 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Now the LORD was gracious to Sarah as he had said, and the LORD did for Sarah what he had promised.


    창조를 뜻하는 네 가지 히브리 단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관련하여 한글 성경에서는 모두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어 성경을 보면 창조라는 단어가 네 가지로 구분되어 상황에 맞게 쓰이고 있다.

    바라 בָּרָא Bara

    자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곧 이전에 있는 것을 완전히 잘라낸 상태를 의미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창조행위를 나타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아사 עָשָׂה Asah

    바라와 비슷하지만 과거에 있던 재료들을 써서 새로운 생명이나 물질을 만들어 내는 느낌을 강조할 때 쓰인다.
    영어 단어로는 'make'와 뜻이 비슷하다.
    넷째 날에 해, 달, 별을 창조하실 때 아사가 쓰였는데, 이들이 첫째 날에 만들어진 빛을 이용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으실 때도 흙을 이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사가 쓰였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창 1:1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야차르 יָצַר Yatsar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만드는 느낌을 떠올리면 된다.
    영어 단어로는 'form'과 뜻이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창조하실 때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바나 בָּנה Bana

    재료를 이용해서 성을 쌓아가듯 세밀하고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는 의미를 강조한다.
    영어 단어로는 'build'와 뜻이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이용해 하와를 창조하실 때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인 이유

    네 가지의 창조의 표현이 모두 쓰인 것은 오직 인간을 창조하실 때 뿐이다.
    바꿔 말하면 그가 만드신 것 중에서 최고로 정성을 들인 걸작품이 바로 나, 너, 우리인 것이다.
    한글 성경으로는 쉽게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히브리어 원어들을 통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고영민.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번역·주석 성경(구약)』. 쿰란출판사, 2018.


    פָּקַד 스트롱번호 6485

    1. ~에게 가다.   2. 방문하다.  3. 찾으러 가다
    발음 [ pâqad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עָשָׂה 스트롱번호 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말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입니까? 말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이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왜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살라고 하시니 사는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 갑니다. 왜 갑니까? 말씀이 가라하시니 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으로 비추지 않은 삶은 어둠이요 거짓이며, 말씀으로 비춘 삶은 진리가 됩니다.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비추고 있습니까?

    그 말씀대로에서 그는 지시대명사, 말씀은 명사, 대로는 조사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막연한 내용이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내년 이 때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사래는 그 말씀을 듣고 헛웃음을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래는 이미 경수가  멈추었고 남편 아브람은 나이가 많아 노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래는 자기의 몸 상태와 남편 아브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년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엘 샤다니)"고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말씀을 따라 사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드디어 21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더욱더 말씀에 따라 삽니다.
    말씀이 이루어지고, 말씀의 열매를 맺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씀대로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s)과 주관적 사실(subjective facts)
    절대적 사실(
    Absolute facts)

    객관적 사실은 사래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객관적 사실을 믿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신앙은 특히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절대적 진리를 신뢰합니다.

    가장 쉬운 예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객관적 사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1절에는 “말씀대로”라는 구절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역사하셔서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볼 때 사라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됩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진리(Universal Truth)와 창조적 진리(Creative Truth)
    - 보편의 반대어는 특수라고 합니다.


    세상은 보편적 진리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세상보다 더 크고 광대한 우주적 진리(Cosmic Truth)는 세상의 진리를 능가합니다.
    우주적 진리를 다른 말로 창조적 진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경수가 끊긴 사래가 아들을 낳을 수 있습니까?
    기력을 잃어버린 아브람이 어떻게 아들의 씨를 아내 사래에게 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진리는 보편적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주적 진리 창조적 진리는 아파르와 같은 흙먼지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신앙이란 보편적 진리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도 창조적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믿습니까?
    문제는 나에게 그 말씀이 들려졌는가?
    아니면 내게 그 말씀이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읽으세요!
    그리고 읽던 말씀 중에서 이 말씀을 나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세요!
    주님, 이 말씀은 곧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주여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일시적인 것(temporary)과 영원한 것(eternal)

    세상의 가르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그 가치와 본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철학의 명제는 희랍의 철학의 아버지가 만물의 아르케는 "물"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헬라 철학자들은 "물" 아니라 "불" 또는 "공기" 이렇게 주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르침은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살아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주으셨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어떤 학문에서도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리를 계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라는 교훈은 절대적 사실, 창조적 진리, 영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 마음속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보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더욱더 크게 놀라며 기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말씀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면 나머지 모든 말씀도 그래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 말씀의 복이 임합니다. 말씀대로 복을 얻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복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말씀이 나의 생각과 기분에 맞고 나에게 유익할 때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의 생각과 기분에 맞지 않고 나의 유익에 상치된다고 여겨질 때는 어렵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그렇게 맞지 않을 때 순종해야 순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젖을 뗀 날 잔치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삭이 3살쯤 되어 젖을 떼던 날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데리고 희롱하며 장난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를 집에서 쫒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매우 고민을 합니다. 이스마엘도 엄연히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사라의 말대로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며 보내라 하셨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스마엘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즉시 보냅니다.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말씀을 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보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무엇이든지 이루어지기 전에는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말씀을 믿기에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말씀이라 하면 무조건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말씀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근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의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그 때 말씀대로 하였느냐 그렇지 못하였느냐 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이루었느냐를 보십시오.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그럼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라도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준이 되고 중요합니다.

    말씀을 믿기에 더 알고자 노력하고 있고, 순종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화가 임하고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 더욱더 말씀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말씀을 읽으십시오. 묵상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말씀의 열매

    나의 뜻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고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결정체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후 더욱더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멜렉 왕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군사동맹을 맺기를 청합니다. 전에는 아비멜렉이 강자였습니다. 지금도 강자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이후에 강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약정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하는 모든 것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크고 분명하여 믿음이 없는 아비멜렉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말씀의 열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오늘을 사는 우리 삶 안에서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말씀도 그냥 헛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들을 때 그 어떤 것도 허튼 것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자라서 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져 자라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먹고 그들이 행복하고 건강해집니다.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떨어져 죽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려면 기도와 묵상을 잘해야 합니다.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도 많은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야 때로는 어떤 것은 죽어도 어떤 것은 살아나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의 실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인생은 말씀 실현의 자리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말씀의 어떤 것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삶이 얼마나 많이 말씀이 실현될 수 있는 현장이며, 우리가 얼마나 많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참 조개를 캐러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호미로 갯벌을 긁으면 조개가 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작은 수고로 그렇게 조개를 얻을 수 있으니 기뻤습니다. 저는 조개를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개를 얻는다는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게 열매를 얻어야 행복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을 볼 때 행복합니다. 삶을 말씀으로 긁으면 말씀의 열매라는 열매를 얻습니다. 말씀의 열매는 말씀을 더 깨닫게 되고, 말씀이 더 깊어지고, 말씀이 이루어지며, 말씀에 감사하고, 말씀이 힘이 되고, 말씀이 위로가 되며, 말씀이 빛이 되는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말씀의 열매를 얻으십시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삶이 행복해집니다. 말씀 읽기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이 행복이 될 때 그 사람의 삶은 말씀의 열매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됩니다. 세상 속에는 말씀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따십시오.

    말씀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다른 열매는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말씀이 실현되어 열매를 맺을 때 그것이 진정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천국까지 이어지는 열매입니다.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말씀의 어떤 것을 더 깨닫고 실현하는지 그것을 아는 삶이 되십시오. 어느 한 날 특별히 은혜를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은혜를 더 발견하는 열매를 맺었으면 또한 그 다음날은 은혜 위에 은혜를 발견하는 그 위에 더 추가적으로 무엇을 배우고 열매를 맺을지 기대되는 삶을 사십시오.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진실로 믿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말씀대로 복을 받습니다. 말씀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필연코 이루어집니다. 커다랗게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기에  오늘 말씀대로 사십시오.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지금 세상은 별의별 말들이 많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말씀을 깨달으며, 말씀을 실현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구체적으로 매일매일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살다가 말씀이 생각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말씀이 생각나면 화내지 못하고 인내하여야 하기에 손해인 것 같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힘든 것이기에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것이 가장 복입니다. 말씀을 알기 위해 씨름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이 내 손에서, 머리에서, 내 가슴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할 때는 성령의 예리한 바늘로 온 몸과 마음을 찔러 깨닫게 하옵소서
    이전 보다 더 주님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게 하시고 흔들림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율법서를 읽을 때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그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침묵하는 그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율법서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명칭을 거룩하고 존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씀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 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그 말씀대로"라고 하겠습니다.
    첫번째 그 말씀대로에서 말씀은 "아마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합니다.
    두번째 그 말씀대로에서 말씀은 "다바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말씀대로"라는 신앙은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이며 또한 당시 풍속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사건입니다.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눅 1:38).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니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려고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은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눅 2:29).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지금 나에게 닥쳐온 고통과 시련이 있습니까?
    그 고통과 시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이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구하며 성경에서 답을 얻기까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내게 약속된 말씀을 집중적으로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참된 평안을 회복하고 그 평안에 따라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을 겪으며 마리아처럼 시므온처럼 믿음의 선진들이 누렸던 그 은혜와 복을 직접 경험하고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구나!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었구나!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넘어서는 그 날을 기다려 봅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아마르. 559)

    אָמַר 스트롱번호559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발음 [ ’âmar ]
    구약 성경  /  5298회 사용



    그 말씀(다바르. 1696)

    דָּבַר 스트롱번호1696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발음 [ dâbar ]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 여기서 '그 말씀'이란 일전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언약(17:19-22; 18:9-15)을 가리킨다.
    이제 예고하셨던 기간이 이르자(2절) 그 언약을 말씀대로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을 증거해 준다.

    권고하셨고(*, 파카드)
    - 문자적인 뜻은 '방문하다'. 이 말은 종종 특별한 인물에 대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호의의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50:24; 롯 1:6; 삼상 2:21), 반대로 심판의 행위(사 24:21; 렘 9:25; 호 12:2)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사라를 돌보신 것을 뜻한다.

    행하셨으므로
    - 사라가 잉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후에서 역사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생명의 잉태와 죽음 등과 같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테(사 44:2) 특히 90세에 이르는 사라가 단산(斷産)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히 11:11).


    그 말씀대로 라는 말씀에서 "대로"라는 단어를 문법에서는 "조사"라고 합니다.
    조사를 우리말로 설명하면 "토씨"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씀대로, 믿음대로, 행하는대로......
    영어로 번역하면 어코딩 투(according to)라고 하겠지요.

    "...대로"라고 하면 앞에 있는 단어가 기준이 되는 것이고, 영어로는 국어와 순서가 반대로 ’according to‘라고 하면 뒤에 나오는 단어가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대로‘는 기준을 나타내는 조사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 기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면 잘하는 것이고, 이 성경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못하는 겁니다.
     

    그 말씀대로
    창세기 21장 1절을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개역개정,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새번역,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우리말성경,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라에게 이뤄 주셔서 

    가톨릭성경,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해 주시니,



    1. ‘믿음대로’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대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믿음대로’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행함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믿음대로’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을 때도 ‘믿음대로’라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백합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8) 이에 대해 예수님이 그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느니라.“(마8:13) 아멘! 여러분들도 백부장처럼 믿음의 고백을 하시므로 그 믿음대로 병이 낫는 기적이 반드시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다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의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30) 아멘!

    즉 병 고침을 받는 방법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의 병이 나았다(사53:5)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도 언급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5:15) 혹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을 믿고 병을 고치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며, 혹은 그런 일은 예수님 시대 때나 일어난 것이고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신학자도 자기 자녀가 몹시 아파서 다 죽어갈 상황이 되면 “하나님, 우리 아들 좀 제발 고쳐주세요.” 하고 아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니 왜요? 그렇게 병 고치는 기적은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면서요. 그건 미신이라면서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오늘날에도 믿는 자에게는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 병 고침의 기적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아멘!

    2. ‘행함대로’입니다.

    이전부터 많은 목사님들이 외치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구원은 믿음대로, 축복은 행함대로”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선물 즉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에 주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행한대로, 수고한대로, 헌신한대로, 노력한대로, 일한대로, 심은대로, 뿌린대로 보답해 주시겠다는 것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입니다. 로마서 2:6-8에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또한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16: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리라.”(계22:12) 세상 격언들 중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즉 자기가 심은대로, 뿌린대로, 행한대로 그 열매를 자기가 먹게 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여러분, 우리가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와서 종종 밤중에나 혹은 새벽에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와- 여기 하늘엔 별들이 참 많이 있구나!“ 캐나다 땅에 와서 누리는 축복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처럼 미세먼지와 황사 혹은 공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도 참 맑습니다.

    이곳 캐나다 땅에 와서 이렇게 하늘의 별들을 보고 산다는 것이 건강은 물론이고, 낭만스럽기도 하고, 내가 캐나다에 와서 산다는 것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특권을 받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고로 밤중에 혹은 새벽에 종종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거 압니까? 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있고,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입니다. 이를 가리켜 ‘항성’이라고 합니다. 반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들이 많습니다. 태양계를 중심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수금지화 목토천해’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은 ‘행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단지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별의 주위를 맴도는 별을 가리켜 ‘위성’이라고 하는데, 지구를 맴도는 달도 지구의 위성입니다. 또한 인공적으로 로켓을 쏘아 올려 지구 주위를 돌면서 각종 자료를 보내는 것을 가리켜 ‘인공위성’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위성인 달도 우리 눈에는 밝게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행성이나 혜성과 같은 다른 별들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들입니다. 이에 대해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별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면 그거 이상하다. 너 진짜 별이 맞아?” 그래서 어떤 분은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을 가짜별이라고 하고,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을 진짜 별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즉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행한대로 하늘에서 차별적으로 갚아주겠다는 겁니다. 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옳은 일, 바른 일,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 특히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은 영원토록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에 있을 때 하나님 속을 지지리 썩인 사람은 그날에 반딧불처럼 잠시 반짝하고 금방 사라지는 것처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순복음 교회의 특징은 예수님을 아주 열심히 믿는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집이 이사를 해서 순복음 교회에 가니까 아- 이것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열심히 믿는지 저와 저의 어머니가 크게 쇼크를 받았습니다.

    장로교에 있을 때에는 저의 어머니가 여전도회 전도부장이었고, 제가 청년회 전도부장으로 가장 전도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아- 순복음 교회에 오니까 저와 저의 어머니가 등수에도 못 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더 열심히 전도하자.” 하고 미친듯이 전도에 애를 쓰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왜요? 아- 하나님이 행한대로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우리 캘거리 순복음 중앙교회에 오신 여러분들 한분 한 분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을 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바른 일, 옳은 일, 착한 일, 주의 일, 특히 전도의 일, 영혼 살리는 일에 보다 열심히 하므로 그 행한대로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대로‘입니다.

    작년(2023년) 10월 7일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여 1200명을 살해하고, 251명의 인질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제가 수요예배 때에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전한 말씀은 하마스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이스라엘 위에 있는 헤즈볼라를 비롯해 이스라엘 주변의 적들이 박살이 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처럼 지금 그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예언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뭐- 제가 특별히 하나님께 예언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이에 대해 성경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해준 것뿐입니다.

    에스겔 38:8에 보면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다시 돌아와 그 땅에서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8:1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38:14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밑에는 하마스가 있고, 위에는 헤즈볼라가 있어서 툭하면 미사일이나 로켓이나 드론이 날아옵니다. 도저히 평안하지 않습니다. 잠도 제대로 평안히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예언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평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하마스나, 위에 있는 헤즈볼라나 그 어떤 세력들도 이스라엘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무너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여러 번 기록이 되었기에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록한대로, 작정한대로 되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밖에 말세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참 많습니다. 옛날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 옛날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자 홍수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로 멸망을 당했듯이, 앞으로의 세상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로써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우리들은 심판 전에, 환난 전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함께 부활이 되고, 공중으로 휴거가 되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같이 24보좌에 앉아 세상을 같이 심판하고,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게 됩니다. 이런 예언들은 어느 용하고 신령한 점쟁이의 말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리고 말세에는 인간들의 성적 타락이 극도로 심해지고, 특히 동성애가 만연하는 롯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오며, 사람들의 인성이 매우 안 좋게 변하므로 심히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딤후3:1-5)

    결론입니다. 여러분, 요즘 살기가 좀 어떻습니까? 많은 분들이 아- 살기가 참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 간의 관계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말세로 가면 갈수록 더욱 살기가 힘든 고통의 세상이 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로 이 고통 하는 때에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살기가 힘들어지는 세상이 옵니다. 그리고 말세가 되면 마귀와 귀신들이 자신들의 심판 날이 가까워지므로 인간들을 더욱 괴롭히려고 합니다. 고로 우리는 마귀를 이기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과 병 고침을 받으시고, 바른 행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상급도 많이 받으시고, 말씀대로 되는 이 말세의 고통의 시기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극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복하시고, 더욱 더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기준인 “믿음대로, 행함대로, 말씀대로”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이 법칙을 잘 실천하고 적용하므로 약속한 하나님의 구원과 병 고침과, 축복과 상급을 확실히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록된 말씀대로 되는 이 말세의 고통의 세상을 바라보며 더욱 깨어 기도하며, 한 영혼이라도 더 전도할 수 있도록 계속 힘을 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 말씀대로 삽시다(시 119:25-32)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삶은 어떤 삶일까요?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일까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답고 존귀한 삶은, 주의 말씀대로 사는 삶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나, 또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의 말씀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물론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주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또 쓴 뿌리처럼 쓸 때도 있고,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우리를 감싸고 어루만져 줄 때도 있지만, 비수처럼 날카롭게 우리를 찌르고, 우리 가슴을 후벼 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신앙은 병든 신앙일 뿐만 아니라, 그 병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오늘 주시는 이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설교를 하다보면, 열심히 설교를 들으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분이 있습니다. 그 설교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곁에 있는 사람이, 듣고, 깨닫고, 회개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은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듣고 깨달아야 한다” 혹시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모두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은혜 받아야 한다. 나는 지금 축복받아야 한다”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복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마트 시식코너에서, 지나가면서, 음식 하나 집어 맛보듯이, 말씀을 대충 맛보지 말고, 하나하나 직접 요리하여 먹고 소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한 자리에 앉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소화를 잘 해야,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고,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가서 살아야 할 땅에 대하여도 정확하게 그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까? 여기 있으면 복 안 주십니까? 꼭 떠나야만 복 주실 것입니까? 아버지랑 함께 가면 안됩니까? 아버지가 함께 가야지 가겠습니다.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 떠나면 안되겠습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왜 떠나야 하는지,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을 듣고, 정든 고향을 그대로 떠났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준 모리아 땅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따랐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왜 아들을 바쳐야 합니까? 건강한 소 열 마리 정도 바치면 안됩니까? 잘 생긴 종 바치면 안됩니까? 다른 것 바치라고 하면 쉽게 바치겠는데,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엄마인 사라 생각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바치고 싶어도 엄마인 사라가 바치지 말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네요. 내 마음 아시지요.”

    아브라함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주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고, 그 후손이 번영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으며, 세계 민족 구원의 은총을 받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비록 가난했지만, 항상 가정이 화목했고, 또 한 사람은 생활은 넉넉했으나, 늘 가정이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늘 가정 불화로 속이 상하던 사람이, 친구에게 가정 화목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 가서 가르쳐 주겠다”며, 그 친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두 사람이 그 집에 도착하자, 아들, 며느리, 손자 모두 나와서 인사를 하는가 하면, 밥상을 차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가 아들 내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얘야, 마당에 있는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라”고 하자, 온 가족이 총동원하여 사다리를 걸치고, 지붕 위로 올라가 멍석을 펴더니, 송아지를 끌어올렸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끌어내려라”고 하자, 온 가족은 다시 달라 붙어, 지붕에 올려 놓은 송아지를 끌어내렸습니다.

    그 수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어느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아버지가 “얘야, 엊그제 사온 소금 가마 있지 않느냐? 그것을 내어다가 냇가에 담가라”고 하자, 그 아들은 그 자리에서 지게에 지고, 냇가로 나가 담그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에 그 친구는 “이것이 우리 집에 화목한 비결일세”라고 말했습니다.

    따라갔던 친구가, 그 정도라면 자기 자식들도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친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기침을 하고 들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녁 상을 억지고 차리게 해서, 먹고 난후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얘야, 마당에 있는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라”고 말하자, 온 식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아직 노망들 나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면서 삿대질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꺾인 아버지가, 그러면 그보다는 좀 쉬운 것을 해보라며 “엊그제 사 온 소금을 강에 내다 담가라”고 하자, “김장 소금으로 사 온 것을 미쳤다고 버리느냐, 소금 한 가마는 흙 퍼 주고 사는 줄 아느냐”면서 정신이 돌았다고, 마구 다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옛 이야기 속에서 행복과 불행의 기준과 성공과 실패의 비결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 말씀대로 순종하는 집안은 잘되는 집안입니다.
    어른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는 가문은 행복한 가문입니다.

    라디오의 다이얼이 맞지 않을 때, 잡음이 나고, 맞을 때 제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다이얼을 정확하게 맞추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행복한 교회가 되고, 아름다움 신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왕입니다. 처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습니다. 보통 왕이 죽으면 그 아들이 자연스럽게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처음으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렇게나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사울을 왕으로 뽑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최고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런데 왜 그 큰 사랑과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버림을 받게 되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게 되었을까요? 신중하게 고르고 골랐던 사울을 왜 하나님은 버리셔야만 했을까요?

    사무엘상 15:23절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왕을 버린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데,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고, 그의 아들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복의 근원입니다. 받은 복을 계속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 때,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13절을 보면,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언제나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고, 우리를 억압하고자,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첫째, 주의 말씀대로 살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며칠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 못해, 배 가죽이 달라 붙어 있는 사람이 뭔가 먹고 난 다음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장시간 일을 하다보면, 목이 마르고, 더 나아가 목이 타지 않습니까? 그때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게 되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은 책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활력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수없이 많은 책들이 발행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나왔다가 사라졌고, 알려지지 않고, 죽은 책들도 있습니다. 살아서 활력이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닙니다.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던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만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육적인 삶밖에 몰랐던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절 말씀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변화 받는 것도 모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27살이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낙담과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그의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병으로 죽을 것을 생각하자, 겁이 났습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 줄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요한복음 11:25-26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을 읽고, 호흡을 하듯, 약을 먹듯, 그 말씀을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정신병에서 서서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고하기를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의 정신병에 대한 고통을 책으로 써서,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대의학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귀신이 쫓겨갔습니다. 육체가 살아 났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역사는 과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간증하는 것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 문턱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질병을 치유받고, 건강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없었는데,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고 순종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믿고 순종하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둘째, 주의 말씀대로 살면,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아멘.

    “나를 세우소서”

    “세운다”는 말은, “뿌리를 깊게 한다. 든든하게 한다.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일하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려면, 주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5-6절을 보면,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했습니다.

    밭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씨앗이 타 버리고 말았습니까?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듭니까?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단이 어떻게 접근합니까?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편지 한 장이 왔습니다. 그 교회를 다녔던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신천지에 빠져서 도저히 회복불능 상태여서, 그 교회에서 “출교 정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법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벌이 무엇인줄 압니까? 출교정지입니다. 교회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즉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데 교회 나오지 말라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을 필요 없이 하늘나라 말고 다른 데 가라는 소리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가라는 소리입니다. 도저히 예수님께 돌아올 가망이 없을 때, 큰 죄를 지어 회복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출교정지를 시킵니다. 이러한 법이 교회법에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회에서 이 법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 나오지 말고, 차라리 지옥이나 가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에서 출교정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 가서는 그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신천지 성경공부하러 가자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조심하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여러분! 대부분 이단들이 성경공부 하는 대로 데리고 갑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성경 말씀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책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성경책 들고 와서, 성경책 펴 보여주고,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 찾아가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뿌리가 깊게 내려 있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이단에 빠지고 맙니다.

    여러분! 성경공부는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본 교회에서 하여야 합니다. 다른 데 가서 성경공부 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절대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혹시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즉시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세워 줍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세워 주는 그 사람도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나를 세워 줍니다. 주의 말씀은 나를 사람답게 세워 주고, 나를 성도답게 세워 주고, 나를 주의 종답게 세워 줍니다.

    베드로전서 5:10절을 보면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80%가 요통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허리가 아파서 길게 고생을 했든지, 아니면 잠깐 동안 아팠든지간에, 요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통의 원인 중 60%가, 본인의 자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상시 본인이 취하는 자세 때문에, 요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방바닥이나 의자에 앉을 때, 정좌하지 않고, 비뚤어진 자세로 앉는다든지, 다리를 꼬고 앉는다든지, 옆으로 비스듬히 앉는 따위의 자세가, 반복되고 습관화되면서, 요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의학 상식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적인 자세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의 자세라든지, 말씀을 먹는 영적인 자세가 비뚤어져 있으면, 요통환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갈급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어디 앞뒤가 안맞는 곳은 없나, 의심의 눈초리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비판의 눈초리로 뚫어지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들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있습니까?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닫고,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있는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밥상 앞에 앉아서, 반찬 투정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밥 먹어가면서 꾸중 들을 것은 뻔한 이치 아닙니까? “그래 맛 없으면 먹지 마. 밥 먹지마” 엄마의 화난 목소리만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반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 없이 잘 먹어 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맛있게 차려 주었는데, 반찬 투정하면, 성질 좋은 엄마라도, 나중에는 잘 안 차려 줍니다. “너가 알아서 차려 먹어”

    그러나 없는 반찬에도 잘 먹어 주면, 부모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될 수 있으면, 더 잘 차려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뭐 해 줄까? 뭐 먹을래. 말해. 다 해 줄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더하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더하거나 뺄 계획도 없습니다. 2천년전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그대로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말씀 그대로 우리도 듣고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일수록 잘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 계속 음식 투정만 한다면, 병은 더욱더 깊어만 갈 뿐입니다.
    잘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잘 먹어야 육체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도 잘 먹어야 영적 건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밥은 밥상에 차려 놓을 수는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억지로 먹여 줄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억지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먹는 것은 각자 개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강제로 먹일 수도 없고, 내가 대신 먹어 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먹여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은, 각자 개인이 할 일입니다. 밥상은 차려져 있습니다. 먹고 건강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먹지 않고 병든 삶을 살 것인가는, 밥상 앞에 앉은 각자 개인이 할 일입니다. 열심히 먹으면 있던 병도 사라지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으면, 은혜를 받게 되고, 날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깨닫게 되고, 날마다 믿음이 잘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거나 요동함이 없이 바르게 세워지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으로 찾아오시며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
    갈급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월 7일(화) 창세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브라함을 생각하사(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So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he remembered Abraham, and he brought Lot out of the catastrophe that overthrew the cities where Lot had lived.

    아브라함을 생각하사(he remembered Abraham)
    하나님이 롯이 거주하는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아브람의 조카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 이유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헬라단어 "에클레시아(ĕkklēsia)"를 기억하십니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치사 "에크(ἐκ)"와 동사 "칼레오(καλέω)"가 합성하여 만든 아주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에크'라는 전치사는 "밖으로" 라는 뜻이며, '칼레오'라는 동사는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자를 그곳에서 불러내는 일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죄 가운데 머물던 인생을 죄 밖으로 불러내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파크리스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불낙지교회"로 발돋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불신자(不信者)들을 찾아내어 믿음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불신자(고린도전서 10:27. 디모데전서 5:8)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둘째는 낙심자(落心者)들을 찾아내어 희망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또는 교인들과 직분자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낙심자라고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히브리서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셋째는 지체(遲滯)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결단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지체라는 한문자는 "더딜 지(遲)" 와 "막힐 체(滯)"라는 문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체자(遲滯者)"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세상에서 소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곧 지체하고 있는 인생입니다.

    대분의 교회들은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때로는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불신자들과 낙심자들과 지체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복음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진리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믿음의 사명을 갖고 모였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힘을 모아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에게 요청하기를 만일 그곳에 의로운 사람 오십 명이 있다면, 45명이 있으면, 40명이 있으면, 30명, 20명, 10명으로 그 수를 줄여가며 조카를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하여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파트리스교회 성도들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불신자와 낙심자와 지체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은혜의 2025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며 영혼 구원을 위한 일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하늘의 위로와 땅의 보람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 위하여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7:38
    발음 [ ĕkklēsia ]

    교회(마16:18, 행2:47, 롬16:4), 모인 무리 (행19:32), 민회(행19:39), 모임(행19:41).

    ἐκ 스트롱번호1537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 2:15.  3. 요 15:19
    발음 [ ĕk ]

    καλέω 스트롱번호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창세기 20:6
    아브라함은 선지자(나비. 5030)

    아비멜렉의 행위는 그의 도덕 양심과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악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에 누(累)를 끼쳤기 때문에 선지자의 중재를 통해서만 죄 용서 받을 수 있었다.

    선지자(*, 나비)
    - 원뜻은 '쉬임없이 말하다'로 신적 영감을 받아 말하는 '대언자'(출 7:1)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차적 사명 외에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칭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상, 아비멜렉이 그의 아내를 취하려고 한 것은 선지자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 행위였다.
    따라서 이러한 아비멜렉의 죄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기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미 소돔에 사는 조카 롯을 위한 중재 기도에서 발휘된 적이 있었다(19:29).

    נָבִיא 스트롱번호 5030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 관련 성경  /  선지자(창20:7, 신18:22, 왕상18:4), 대언자(출7:1), 예언자(렘28:9), 예언(단9:24), 예언하는 자(겔13:2,3).


    창세기 18:2

    사람 셋
    - 13절과 19:1에 의거할 때 이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 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달려나가
    - 생면 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출 22:21;욥 31:32; 마 25:35; 딤전 5: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체험적 신앙(體驗的 信仰)

    기독교 신앙은 ‘체험적’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간에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사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체험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역시 일종의 체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예수에게서 어떤 절대적인 사건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렇고, 그 뒤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의 설교자들이 신앙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를 아무리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어보지 않는다면 실제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기만 하면 사과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렌지를 가져와서 사과라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하면 그것을 먹은 사람은 실제로는 오렌지를 먹었지만 말로는 사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사과와 오렌지는 쉽게 구별되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종교적인 경험에서는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술 담배를 즐기다가 완전히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삶의 평화를 체험했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평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양한 체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부수적인 것이 전체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침 받았다. 문제가 해결 되었다. 등등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방언을 한다. 예언을 한다.  등등

    부활 생명을 확신한다면 이것보다 더 귀한 체험은 없습니다.

    18세기의 훌륭한 목회자인 요한 웨슬리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건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머리 둘째 가슴 셋째 손입니다.
    머리는 지식을 말하고 가슴은 체험을 말하며 손은 실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 있게 되면 체험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험되어지면 신앙의 힘은 굉장한 것이 됩니다.

    웨슬리 이야기를 더 해 보겠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지인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만 배가 파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하고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 한 모퉁이에서 몇몇이 모여 이런 와중에도 아주 담대하게 찬송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무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저들의 행동에 웨슬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인 나도 이런 와중에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데 저들을 전혀 두려움 없이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무리들은 바로 모라비안 형제단들 이였습니다.
    이 모라비안 형제단은 침례교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 모라비안 지도자인 스팽킹버거를 찾아갔습니다.
    물론 모라비안 경건주의자의 아버지는 진젠도르프이지요.

    스팽킹버거를 찾아간 웨슬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어떻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웨슬리의 말을 듣고 있던 스팽킹버거목사는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모르십니까?’‘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랑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신앙으로 자라났고 명문대인 옥스퍼드대학 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독실한 신자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여름철 신앙인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는 좋을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쁜 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팽킹버거목사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들의 신앙은 겨울신앙입니다. 어떤 두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팽킹버거는 다시 웨슬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십니까? ’이제 긍정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거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 아닙니까?’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세 번째 묻기를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까?’이 질문은 당신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식으로 믿는 신앙이지 체험적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대화에 충격을 받은 웨슬리는 모든 신앙을 백지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미국선교를 실패하고 도망하다시피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지요. 그리고 가끔씩 모라비안 형제단의 모임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이였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1738년 5월 14일 모라비안 교도의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그날 간증이 있는 날 이였습니다. 어떤 성도가 간증을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웨슬리에게 깊은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개념적으로 믿었는데 이 순간에는 나 같은 흉악한 죄인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가 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극적인 영적체험이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그는 영적체험을 통한 강력한 능력으로 영국의 잠자는 신앙을 깨었고 부패한 사회를 정화했든 것입니다.

    요엘3장1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인 줄 알리라’이제는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너희들이 나를 잘 모른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존 칼빈은 안다고 하는 이 부분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요 또 하나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저가 ‘알다’하는 이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기에 성경공부시간에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이 알다는 헬라어로 ‘디다스코’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그냥 우리가 아는 것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노무현대통령을 아는 것과 노무현대통령 어머니나 부인이 아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알다’ 라고 쓴 이‘디다스코’의 단어의 뜻은 본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 날이 어떤 날인지는 세상 사람들도 다 잘 압니다. 그러데 그들이 알고 있는 성탄의 의미와 우리가 알고 있는 성탄의 의미는 틀립니다. 그들은 어떤 행사로 여기며 놀고먹고 즐기는 날로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날만이라도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며 경건한 예배와 삶으로 이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이 ‘알다’는 것이 이론적인 앎이냐 아니면 주님의 본질을 아는 앎이냐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앎은 체험에서 나오는 앎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이렇게 공부 안하고 빈둥빈둥 놀면 장차 커서 아무 일도 할 수없을 것이다’ 는 것을 알고 계속 노는 학생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면 누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학생입니까? 알면서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후두암에 걸려서 담배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담배를 피운다면 이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앎이란 실천을 동반한 앎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디다스코’의 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창조과학회가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가 홍수 후 머물렀던 아라랏산의 방주조각을 탄소측정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 보니까 몇 천 년 전의 나무 조각이 분명하여 그렇다고 하면 노아의 방주가 틀림없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유적을 발굴하다가 당시의 기록 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이 소개될 때 ‘그래, 성경은 진실이고 역사적인 뒷받침이 분명해...’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정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지금도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등의 지역도 고고학적인 발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을 통해 가나안땅으로 들어왔던 것을 성서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리아지역에서 아브라함 시대에 그 지역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성서고고학의 쾌거를 이룬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이 입증될 때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입증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연구되고 발굴되면서 성경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질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발굴 작업과 과학적인 근거로 객관적인 경험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고 말합니다. 보여 달라는 것이지요. 보면 더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요구하는 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 되도다’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말에 쇄기를 박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매일 보는 사람이나 성경공부를 통해 체계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보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할아버지, 할머니 나를 누가 만들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 그야 하나님이 만들었지,’그래서 이 꼬마는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꼬마 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본 꼬마가 하는 말이 ‘하나님 들어오신다. 그러더랍니다. 우스개 소리지만은 저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리 되지 않은 지식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리되지 않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웨슬리처럼 여름신앙이 될 수 도 있고 어렵고 힘들거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체계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면 나 되신 성령이 오실 것이다. 그러니 그 성령을 받으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다락방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들만이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이 임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했지요.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면서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물론 안다고는 하지만 ‘디다스코’의 앎이 아니란 말도 했습니다. 본질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을 알듯이 겉의 이론을 아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알지만 실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지만 체험되어지지 않는 앎이란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확인되어지지 않은 앎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이 확인시키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는 일은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이나 깨닫게 하는 일들을 하고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성령님을 초청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기위해 간구 하십시오. 성령을 받을 때 증인이 되듯이 성령을 받아야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 낼 뿐만 아니라 말씀을 깨닫게 되며 우리가 아는 지식이 체험적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여기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아는 것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믿음이란 야고보서에 의하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믿음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체험적 지식과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는 것 즉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에 믿음을 가지는 행함으로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적 신앙이란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 땅에 임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개념적인 지식은 절대로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적용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실천의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으로 성화되기도 굉장히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은 객관적인 지식은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수 없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개관적인 지식으로 끝나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다 그 현장에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체험이 없는 지식은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알고 믿고 체험해야합니다. 체험은 깨달음입니다. 말씀을 현장에 늘 놓아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원리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주관적인 체험을 가지니까 다 나가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는 속수무책 이였지만 모여서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기다리고 인내했기에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든 것이지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은 모여서 기도로 성령을 초청하고 예배를 통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한다면 성령의 뜨거운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개념적 말씀이 체험적 말씀으로 확실히 믿는 역사를 맛볼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잠언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알아야 그 앎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이 나무라면 믿음은 불입니다. 나무가 있어야 불을 붙일 수 있고 나무는 있는데 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알아야합니다. 체계적인 말씀을 공부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개념적 지식이 성령을 통해 깨달아지고 체험되어져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을 붙들고 승리하며 축복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돌덩이처럼 굳어서 냉혹합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마른 풀과 같아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무능합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미신에 빠지거나 이단에 빠져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이웃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문명은 시들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각사공이 교수한분을 태우고 갑니다. 둘이서 말없이 가는 것이 적적했던지 교수가 사공에게 묻습니다. ‘결혼을 했는가?’아니요. 교수가 다시 묻습니다. ‘철학을 아는가?’ 사공이 대답합니다. ‘뱃사공이 무슨 철학을 알겠습니까?’그러니까 교수가 하는 말이 ‘자네는 인생의 1/4을 잃어 버렸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묻습니다. ‘심리학이 무엇인지 아나?’‘저 그런 것 모릅니다.’‘그러면 인생의 1/2을 잃어 버렸네.’ 교수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천문학을 아는가? 사공이면 천문학 정도는 알아야지?’‘그런 것 잘 모릅니다’‘그러면 인생의 3/4을 잃어 버렸네.’그러면서 교수가 하는 말이 ‘사람의 인생의 3/4을 잃어버리면 죽음목숨이나 다름없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것입니다. 갑자기 거센 바람에 못 이겨 배는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물에 빠졌습니다. 대학교수는 당황하면서 허우적거립니다. 그 모습을 본 사공이 대학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그랬더니 교수가 ‘아니 이 사람아 내가 헤엄을 칠 줄 알면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겠는가?’그 말을 들은 사공이 한마디 던집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 없는 지식, 신앙 없는 문명, 신앙 없는 과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9세기에 낙관주의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 기술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H.D 월슨은 낙관주의의 대표인물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 인생의 지친 모습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하나님 없는 재물, 하나님 없는 권세, 하나님 없는 육체는 오래 못갑니다. 마태복음 7장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은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이 연속성을 위해서는 기초가 중요한데 이 기초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는 것을 개념적으로 이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은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 있는 것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무너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생활을 한 것을 성경을 통해 봅니다.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냥을 하고 돌아온 형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이 팥죽으로 유혹해서 거래를 한 것이요. 아버지인 에서를 속여 축복 권을 빼앗았습니다. 라반 외숙집에서 외숙를 속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집을 떠나 외숙집으로 향할 때 벧엘에서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속에게 주리니 제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펀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그런데 이 말씀을 개념적으로 듣고 맙니다. 순간적인 위로에 불과했지 이 말씀이 야곱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이 후로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계속 속이는 인생이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라반외숙을 속이고 도망 나오게 될 때 뒤에서는 외숙이 쫓아오고 앞에서는 형인 에서가 야곱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삼백용사를 거느리고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오갈 때 없이 사방으로 둘려 쌓여 포위되다 시피한 사건을 맞이 하게됩니다. 이때 얍복강의 씨름이 나오게 되지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씨름을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로 알고 있는데 기도라기보다 야곱과 하나님의 고집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 말대로 살래 아니면 네 고집대로 살래’하는 싸움이지요. 여기서 야곱이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부러트립니다. 환도뼈를 맞고 난후에 그는 하나님을 재대로 본 것이지요. 그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개념적인 지식에서 체험적인 지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얍복강의 사건 이후에 야곱이 고난당한 일은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오빠들이 세겜족속들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은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자기 지혜로 풀려고 한 삶에서 이제 하나님께 맡기고 예배의 삶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이후의 야곱의 삶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이 바로를 만날 때도 그 바로 앞에 축복을 합니다. 감히 왕 앞에 축복할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애굽에 얻어먹기 위해 와 놓고 요셉 때문에 바로를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왕 앞에 축복하는 이유는 네가 아무리 왕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삶에 평화를 얻을 수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성도의 숫자도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성도 침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지식으로만 개념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행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체험적인 신앙 증명된 신앙 확고한 신앙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누가복음 7:11~17)

    함께 “길을 가던 세 사람이 뱀을 보았는데, 첫째 사람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멀리” 피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과거 뱀에 물린 상처 때문에, 비명을 치며 줄행랑을” 칩니다.
    셋째 사람은 “땅꾼이어서! 뱀의 종류가 무엇인지 보고, 손으로 뱀을” 잡았습니다.
    이를 보면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은 사람이 겪은 체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체험했는가! 이는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삶에서 “성장은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경험과 체험을 통한 배움이 더” 확실합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례로 “교회 마당만 밟는 영혼과 주님을 체험적으로 만난 영혼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같겠어요? 말만 “하는 신앙생활과 직접 고생하며 은혜를 체험한 영혼의 신앙생활이 같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 나를 사랑하심을 직접 체험함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나인 성에서 이미 죽었던 과부의 독자를” 살리셨습니다. 과거 “주님은 야이로 딸과 나사로를 살리셨기에, 이 청년은 세 번째 살린 경우가” 됩니다. 구약의 경우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렸지만, 이는 본문과 무려 900년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주님 주변에 세 부류의 사람들, 제자와 무리, 나인 성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의 은혜를 누가 가장 깊이” 체험했을까요? 제자와 “많은 무리도 죽은 자가 살아남을 보고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하나님 은혜를 가장 깊게 체험한 영혼은 나인 성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보고 듣기보다, 오히려 내 것으로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보고 듣지만, 깊은 영적 체험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성경에 기록된 능력을 직접 체험하며 신앙생활” 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주께서 상식을 깨고 일하심을 직접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은혜를 직접 체험하는 영혼이 점점” 줄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변하거나, 성경의 교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은혜받으려면, 보고 들음을 넘어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은 “성경의 이야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에 들어와서,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 간증은 악한 세상에서 내 믿음을 굳게 붙들어주는 힘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는 확신 

    본문에서 “주님의 일행과 장례 행렬이 우연히! 들어가고 나가는 중 만나게” 됩니다. 당시 “나인 성 과부는 독자를 잃은 상실감으로, 어쩌면 아무것도, 누구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가 독자를 잃고, 또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겠어요? 그런데 “주께서 먼저 그런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특히 “불쌍히 여기다! 원어는 창자가 뒤틀리듯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주님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창자가 뒤틀리듯 아파하시며 먼저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관에 손을 대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말씀합니다. 율법은 “죽은 자를 만지면 부정하다! 여겨서, 시신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이를 잘 아셨지만, 과부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율법까지 깨며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을 깊이 아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함이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우리 자녀에게, 과거에 겪은 6.25와 보릿고개를 말하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많은 경우 “피자 먹으면 된다. 물이 없으면 음료수를 마시면 된다! 기막힌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과거 어른 세대의 아픔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 내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때! 큰 상처가” 됩니다. 반면에 “내가 당하는 아픔을 공감하고, 같이 아파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적 존재이기에! 내 아픔을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내 창조주시기에! 나의 모든 사정과 아픔, 눈물과 기도 제목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낱낱이” 아십니다. 또한, “주님은 만왕의 왕이지만, 낮고 낮은 구유에 오셔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천민과 귀족, 모두의 아픔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그 아픔을 불쌍히 여기고, 친히 나를 도우시려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주께서 내 모든 아픔을 다 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께서 내 아픔을 다 알기에! 절대로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나를 아는 주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못합니다. 말은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신다 인정해도! 실제 삶은 반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 “어떤 교수님이 예배 시간에 하신 말씀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설교 중! “바르게 목회하려면! 반드시 세 가지 중보 기도 그룹이 필요한데! 첫째! 생명 걸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중보 기도자! 부모와 배우자를” 언급했습니다.

    둘째! “시간을 정해서, 나를 위해 기도할 수십 명이 필요하다!” 말했습니다. 셋째! “기도할 때마다, 나를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그룹 백 명은 넘어야 한다!”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불신 가정에서 신학교에 입학했기에! 세 가지 중 어느 중보 기도 그룹도” 없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믿음의 개척자였기에! 그 말씀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예배 후! 모두가 예배당을 빠져나간 후! 혼자 남아서 참 많이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정말 어렵게 신학교에 왔는데!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답변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그 후 “저는 불신 가정에서 목회자가 되었다는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픔을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고, 나를 가장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이 체험을 한 영혼보다, 영적 체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영적 “성장은 내 아픔과 내 기쁨도 아시는 주님! 나와 동행하는 주님을 만나는 깊이와” 비례합니다. 또한 “내 아픔을 아는 주의 사랑을 체험하면, 악한 세상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셨나요? 힘들다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외면함은 가장 큰불 신앙”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경우에도,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을 깊이 체험해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회복시킬 것을 확신하라

    본문 12절은 “죽은 자가 과부의 독자이다! 많은 이가 장례 행렬에 함께 있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장례 행렬에 함께한 많은 사람이 독자가 이미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고 관에 손대며, 본문 4절에서” 말씀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침내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죽었던 영혼이, 아네카디센! 일어나서 똑바로 앉았다!” 말했습니다.

    이는 “주께서 애달프게 울었던 과부의 아픔, 장례 행렬의 아픔을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죽었던 독자를 살리셔서! 일어나 앉았고, 말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직접 체험한 과부의 신앙은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이 청년이 체험한 은혜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치 죽은 독자처럼, 이제는 가망 없다. 끝났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이룬 것도 없고, 게다가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얼굴이 어두워지고, 상처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없어서 힘들었다는 그것이 채워지면, 내 삶이 더” 나아질까요? 일례로 “물질로 고생한 영혼이, 물질이 차고 넘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회복될까요?

    인간은 “천하보다 귀하기에! 천하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온전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어려움, 눈물과 절망은 오직 하나님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회복하게 하심, 긍휼히 여겨주심만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는 개인은 물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 소망교회 “모든 교인은 누구나 교회가 더 나아지고 회복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회복은 일부 중직자와 당회의 희생과 수고로만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회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루만지고,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조차 하나님의 위로보다 세상의 위로를 더 사모하며” 삽니다. 실제로 “연약한 인간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누가 문제야! 누구 때문이야! 원망부터” 많아집니다. 그러나 “정말 회복을 원한다면! 사람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 은혜만 구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주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준 체험이 깊을수록 누리는 은혜도” 커집니다. 문제는 “모든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내 믿음, 평안함, 기쁨과 감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회복의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회복된 체험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기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기등등함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기에!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박해자 바울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 중 괴수를 “용서하셨고, 덮어주셨고, 위로와 은혜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온전한 회복의 체험이 있었기에, 신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나도 바울처럼 많은 영혼을 넘어뜨리고 아프게 한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주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우리는 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재철 목사의 “새 신자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시관을 쓰심은 내가 머리로 지은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로마 군인의 채찍으로 가슴을 맞음은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손에 못이 박힌 이유는 내 손이 범죄 한 것을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두 발에 피를 흘린 이유는 가서는 안 될 곳을 간 내 발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은 내 모든 죄를 다 씻어주기 위함이다.”

    놀랍게도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든 사역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은혜로 회복시켜 주심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이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면 절대로 영적 곁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체험해서,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체험적 신앙인 도마(요한복음 20:24-29)

    체험의 함정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Bacan)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망상을 우상이라고 표현하고, 대표적인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그는 참된 경험과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우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족의 우상’이란 맹목적인 습관, 감정, 신앙에서 오는 편견을 뜻합니다.
    ‘동굴의 우상’이란 개인적인 취미, 성격, 환경에서 오는 편견을 뜻합니다.
    ‘시장의 우상’이란 인간의 접촉, 언어에 의하여 나타나는 편견을 뜻합니다.
    ‘극장의 우상’이란 전통, 역사,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믿는 편견을 뜻합니다.

    철학자들은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 네 가지 우상도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공감이 가는 내용들입니다. 지금 네 가지 우상을 다 설명할 시간은 없고 이 가운데 두 번째 우상인 ‘동굴의 우상’만 생각해 봅니다. 이 ‘동굴의 우상’은 오늘날 우리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치 동굴 속에 묶여 있는 포로들처럼 자기가 있는 좁은 세계만 바라보고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에 아주 이 ‘동굴의 우상’과 딱 들어맞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입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다인 줄 알고 삽니다. 하늘도 자기가 보는 우물 입구의 둥그런 부분만 하늘인 줄 알고 삽니다. 그래서 이 ‘동굴의 우상’이나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모두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 의존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편견, 넓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 ‘동굴의 우상’이나 ‘우물 안 개구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모두 지구가 평편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평편한 지구 끝을 지나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자기네가 사는 유럽대륙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레이가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했을 때 이단으로 몰아붙여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가 체험한 것만 인정하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만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으로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릅니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 도마는 의심이 많다기보다 자기 체험에만 의존하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체험주의자에서 체험신앙으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 천국으로 가야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라고 묻습니다. 한 마디로 그 길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도마는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도 이 도마와 쌍둥이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못 믿겠다, 있다면 한 번 보여줘 바라. 그래서 천국에 가봤다는 사람들이 뭔가 천국의 증거를 대보려고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책이 뭐가 필요합니까? 안 가 보면 없는 것입니까? 저는 중국이나 영국은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당연히 있는 줄 압니다. 어떻게 아나요? 있다고 배웠으니까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솔솔 부는 바람은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분명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안 봤어도 바람을 몸으로 느끼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봐도 얼마든지 느끼고 믿을 수 있는데도 어리석게 천국은 내가 안 가봤으니 있는지 없는지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입니다. 도마와 쌍둥이 벌 되는 사람들이지요.

    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때 하필 도마라는 제자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도마가 나중에 나타나자 제자들은 기쁜 마음에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마가 어떤 사람입니까? 안 보면 절대 안 믿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도마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교회에서 보면 꼭 이런 분이 있습니다. 소위 ‘당당한 결석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모임에 안 와서 중요한 말 할 때 못 듣고 나중에 와서 “왜 나 없을 때 그런 중요한 말 했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모처럼 선물을 줬더니 “왜 하필 나 없을 때 선물 주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결석은 왜 했습니까? 그 자리 지키고 있었으면 받을 것 다 받고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저는 예수 믿은 후 교회에 한번도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나 없을 때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나, 나 빼놓고 전부 다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재미있는 이유지만 건전한 신앙인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은혜도 받지요.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 나타나셨을 때 결석하고는 남이 하는 말 안 믿고 우기는 것입니다. 사실 하필 자기 없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도 가르치고 성령도 주셨는데 얼마나 손해가 막심합니까? 그런데 도마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지는 않고 난 못 봤으니 못 믿겠다고 우기기만 합니다. 정작 받을 은혜는 못 받은 채 내 눈으로 안 보면 못 믿겠다니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 26절을 보니 그로부터 8일이 지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한번 나타나십니다. 왜 다시 한번 나타나신 것일까요?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27절부터 보면 도마하고만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어떤 대화입니까? 27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도마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네가 못 보고 못 만져보면 안 믿겠다고 하니 한번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 말씀 속에 왜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는지, 왜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맹목적인 경험주의자 도마를 변화시켜서 주님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성격, 다른 특성을 지닌 제자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만나 설득하고 변화시켜 각자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깁니까? 28절을 보세요.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에게 어떤 변화가 온 것입니까? 여전히 도마는 체험을 중요시 합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더니 그제야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체험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그의 태도는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자기 체험만 믿던 맹목적인 체험주의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경험만 믿던 어리석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건전한 체험신앙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입니다.

    체험의 힘

    이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서 체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도마는 자기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예수님 손의 못자국,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본 후 그 놀라운 체험을 바탕으로 열정적인 사도가 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체험입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그저 머리로만 믿는 것이기 때문에 뿌리가 없고 조금만 시련이 와도 금방 무너집니다.

    우리도 체험신앙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직접 체험해야만 은혜를 진심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체험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는 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는데 그 열한 명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도마 한 사람 설득하지 못합니다. 체험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해보셨을 것입니다. 부흥회 가서 은혜 받았는데 부흥회 안 간 남편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데 내가 만난 주님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상대방은 고개만 갸우뚱,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답답해도 할 수 없지요. 이 체험이라는 것이 말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체험만 하면 아무리 의심 많고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는 체험만 하면 제 아무리 도마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을 것입니다. 본디 이 ‘벤허’라는 영화는 루이스 월리스라는 퇴역군인이 쓴 소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월리스는 1827년 미국 인디애나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를 거쳐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월리스가 어느 날 한 친구와 대화하던 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임을 밝히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메시아니 초능력적인 인물이니 하는 허구를 다 벗기고 순수한 인간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 그의 집필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것이다.”는 친구의 말만 믿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에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소설을 쓰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고 연구하며 그 배경을 알려고 성경을 읽는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게 되었습니다. 월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스란히 소설의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1880년 ‘벤허’라는 제목으로 출판합니다. 이 소설이 1959년 영화화돼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특히 불신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월리스는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이 담긴 소설과 영화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러 나온 힘,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의 능력입니다.

    나만의 체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영적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체험이라고 하면 다들 겁부터 먹습니다. “체험은 무슨 체험, 난 그런 거 없어. 남들은 죽을 병 걸렸다가 살아난 체험도 하고, 완전히 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체험도 있다지만 난 그런 체험 없다구. 그냥 교회 나가고 그냥 믿는 거지 뭐.” 맞습니다. 우리에게 거창한 체험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간증할만한 거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누구에게 간증할만한 큰 체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보면 죽을 병 걸렸다가 기도하면서 나았다는 분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런 체험은 없는지 몰라도 나름대로 참 귀한 체험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주님의 은혜를 뜨겁게 느낀 일, 말씀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진 일, 어렵고 힘들 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주님이 까마귀를 보내주셔서 도움을 주고 힘을 주신 일들 등등 비록 초자연적이고 남에게 자랑할만한 대단한 체험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저만의 체험, 제 나름대로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체험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했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을 만났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3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영적으로 십자가를 체험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데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하는 찬송가 136장 가사처럼 저도 영적으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서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찔리신 그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고 나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피를 느껴보았습니다. 이만큼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영적인 체험이 어찌 죽을 병 나은 체험보다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체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의 성격을 보면 감성적인 면보다 이성적인 면이 더 발달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빌립이나 오늘 본 도마처럼 이성적이고 차분하고 때론 냉정하며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편입니다. 자칫하면 차가운 이성주의자나 체험주의자가 될 위험이 많은 성격이지요. 그런데 이런 저의 성격이 이 작은 체험들을 통해 뜨거움을 경험하고 변화된 것입니다. 목회에 열정을 가지고 뜨거운 은혜와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목회자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이 꼭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연약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인은 정말 불행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도마처럼 체험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좁은 경험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체험이 없는 신앙 또한 정말 위험합니다. 건전한 신앙적 체험을 통해 우리 신앙이 탄탄해지고 뜨겁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자기 체험만 믿다가 체험적 신앙인으로 변화된 도마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도마는 성령강림 이후에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도가 힌두교 국가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도 남부지방에 가면 소수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다 도마의 후예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마는 열두 제자 중 가장 멀리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종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된 사람이 도마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허리에 창을 찔리신 것처럼 자신도 창에 찔려 순교한 것입니다. 내 삶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고, 또 내 죽음으로 주님의 고난을 그대로 체험한 사람이 도마입니다. 오늘날 인도 마드라스의 케나이 공항 근처에 도마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자그마한 언덕도 있고 그를 기념한 성 도마 교회도 세워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체험적 신앙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 머나먼 인도까지 복음 들고 가서 순교까지 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그의 특별한 체험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머리로만 믿지 말고 체험적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체험보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는 체험,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서 보혈의 피를 느껴보는 경험을 하기 바랍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 어떤 근심이나 두려움도 사라지고, 어떤 제약이나 장애물도 걱정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의 힘인 것입니다.




    결혼 - 결국은 혼자
    이혼 - 이제부터 혼자


    1월 6일(월)
    본문 / 창세기 14-17장
    주제 / 나는 전능한 하나님(17:1)
    성구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When Abram was ninety-nine years old, the LORD appeared to him and said, "I am God Almighty ;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I am God Almighty)
    전능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el Shadday. שַׁדַּי אֵל)"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합니다.
    주로 야훼(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 (El Shaddai)(창 17:1, 출 6:3), 엘 엘리욘 (El  Elyon)(창14:19), 엘 로이 (El Roi)(창 16:13)와 같은 "엘"이 들어간 복합적인 명칭을 사용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란 의미를 소개합니다.
    "엘(El)"은 "유일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샤다이(Shaddai)"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다이(ShaDai)"가 "파괴하다", "압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리슈도드(leShDoD)"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둑, 강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데드-ShodDeD" 역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 샤다이(El Shdai)의 ShaDai는 문법적으로 봤을 때 "가슴"을 뜻하는 ShaD와 더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미에 "i"나 "ai"가 오게 되면  대부분 "나의"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와 같이 해석했을 때, 엘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머니의 가슴 즉 어머니의 품을 생각해 보면 그 가슴은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 찾아올 때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온갖 어려움과 힘든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가 눈폭풍이 쏟아지듯 퍼부어주시기를 소망합시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창세기 17:1
    아브람
    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엘(’el) אֵל  스트롱번호 413

    1. 어떤 것을 지향하다.  2. ~으로. 3. 사 38:2.
    발음 [ ’el ]
    구약 성경  / 5464회 사용
    • 1. 전치사 [전치사] 어떤 것을 지향하다, 어떤 곳을 향하다.
      • a. 전치사 [한 장소로의 운동: ‘가다’는 동사와 함께 쓰임] ~으로, ~을 향해, 삼상 6:11.
      • b. 전치사 [어떤 것에 대한 전환] ~으로, 사 38:2.
      • c. 전치사 [운동이나 전환이 적대적일 때] ~에 반하여, 창4:8.
      • d. 전치사 [어떤 점이나 표시까지 도달할 경우] ~까지, ~까지도, 렘51:9.
      • e. 전치사 [어떤 경계 안으로 들어갈 때] ~안으로, 신23:25(24).
      • f. 전치사 ~이외에도, 레18:18.
      • g. 전치사 ~에 관하여, 출14:5.
      • h. 전치사 ~에 따라서, 수15:13.
    • 2. 전치사 [어떤 사람이 바라는 한 장소에 머무를 때 사용]
      • a. 전치사 ~곁에, ~근방에, 삼상17:3.
        b. 전치사 ~안에서, ~가운데, 신16:6.

    •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 30:40, 삼상 3:12, 렘 22:11), 때문에(삼상 4:21), [부] 서로(렘 36:16).
    샤다이(Shadday) שַׁדַּי  스트롱번호  7706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가장 능력있는 자, 전능자, 창17:1, 28:3, 출6:3, 욥5:17,6:4.
    •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 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שַׁדַּי אֵל

    엘 샤다이( ’el Shadday) שַׁדַּי אֵ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3) .

    이 때 아브람은 75세였고, 그의 아내 사래는 65세이었습니다. 
    더 이상 자녀를 얻을 수 없는 육체의 한계에 부딪친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여서 이내 자식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속절없이 가는 세월에 점점 늙어만 가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후손에 대한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갈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키고 너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에게 주의 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내 집안의 종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고 말씀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창 15:1-6) 

    이후 10년이 지난 아브람 나이 85세 때에, 사래가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자 남편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창16:2) 
    여호와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당신은 내 여종과 함께 잠자리에 드세요. 
    아마 그녀를 통해서 자식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사래가 자기 몸종을 첩으로 내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이러한 요구가 분명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어긋나는 것으로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고서도 아내에게 한 마디 반대도 없이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해보려는 아내와 그 뜻을 같이 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 인격체인 여종 하갈을 생산의 도구로 이용한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일부일처제를 파괴한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스스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섣부르게 행동하므로 장차 큰 비극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람의 기대와는 달리 아브람 가정은 하갈의 몸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해 긴장과 불화가 생겨났고,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 이 세 사람 모두 심각한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잉태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 16:12)

    이 말씀대로 훗날 첩의 소생 이스마엘은 오늘날 아랍 민족의 시조가 됨으로 해서 중동 전쟁의 뿌리 깊은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인간의 얄팍한 지혜로 이뤄보고자 하는 것은 교만일 뿐 아니라 이웃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악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약속한 자식은 아브람과 한 몸인 사래에게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첩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래가 낳은 자식과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자식을 분명히 분별해서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22-23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7-8)

    사래의 뜻을 따라 하갈이 낳은 자식은 ‘육체를 따라 낳은 자식’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래가 낳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람의 상속자는 ‘약속의 자녀’라야만 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종의 자식을 낳은 후 13년이 지난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새롭게 확신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자 끝까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조급하게 하갈과 동침하여 가정 분란의 갈등과 고통을 초래했던 아브람에게, 그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17:1-2)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아브람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문제아로 자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믿음 없었던 행동에 대해 후회되기도 했지만 지난 13년 동안, 즉 나이 100세가 다 되어가는데도 하나님께서 후손에 대해 한 마디 말씀이 없었던 것이 불안했습니다. 몸은 날로 노쇠해져 가고 마음 역시 가정 갈등으로 인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날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던 자신의 생각, 그리고 아내 사래의 뜻에 따라 종의 자식을 낳은 일 등으로 하나님께서 혹시 자신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후손에 대한 모든 소망을 접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백수(白壽)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으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제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며 절망할 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새롭게 하시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창 12:3)는 언약을 확실하게 이루시겠다는 뜻으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창17:4-5)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 곧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을 단순히 한 가문의 존경받는 조상이 아니라, ‘모든 믿음을 가진 사람의 조상’,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갈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언약에 걸맞는 이름, 즉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의 ‘사라’로 개명하셨습니다. 분명히 90세의 할머니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7:15-16을 보겠습니다.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나이 99세에 찾아오셔서 언약을 재확인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 즉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고 개명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았습니다. 로마서 4:19-22을 보겠습니다. 

    (롬4:19-22)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엘”(EL)은 ‘전능하신 하나님’(The Strong One)이란 뜻이고, “샤다이”(Shadday)는 ‘어머니의 젖가슴’(the breast)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엘 샤다이”는 ‘어머니 젖가슴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기적을 행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1) 먼저,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든지 풍족하게 양육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따라 나왔던 이방인들이 광야에서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음에도 애굽에서 살던 때 먹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괜히 나왔다며 이렇게 원망불평을 터트렸습니다. ‘애굽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도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같은 원망불평이 금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염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영양 실조되어 죽어가는 것처럼 소리쳐 울며 모세에게 대들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주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잉태하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민11:1-14) 

    이러한 모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백성들을 돌보는 짐을 너 혼자 지도록 하지 않고 장로들 중 70명을 세워 함께 지도록 하겠노라. 그러면 너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니라. 그리고 또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일 너희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니라. 하루만 먹고 그치지는 아니할 것이니라. 이틀만도 아니고, 닷새만도 아니고, 열흘만도 아니고, 스무 날 동안만도 아니라,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니라.’ 

    그러자 모세가 되물었습니다. ‘장정만 60만명입니다. 애들과 노인들, 여자들을 모두 하면 200만명이 넘습니다. 그들을 먹이려고 애굽에서 나올 때 끌고 나온 양과 소를 다 잡는다 해도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바다에 있는 고기를 모두 잡은들,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 이제 너는 내가 말한 것이 너에게 사실로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왠 떡이냐며 정신없이 주워 먹는데 씹지도 않고 삼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원망불평을 일삼았던 무리들을 진노하시자 그들이 고기를 입에 문채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땅에 묻고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습니다.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원망불평하다 식탐(食貪)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양육하시되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시고자 때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면 부족함이 없이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8:1-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들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 모든 인생들의 ‘양육자’이심을 믿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유명한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힘의 상징인 머리털이 밀리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쳐 삼손을 결박하자 과연 힘을 전혀 쓸 수 없었습니다. 

    삼손은 그 길로 블레셋에 끌려가 감옥에서 멧돌을 돌리는 비참한 노예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마치고 축제를 시작할 때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하기 우상숭배 신전에 세웠습니다. 
    삼손이 믿는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숭배하는 우상 ‘다곤’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삼손이 신전 기둥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그 신전에는 블레셋의 모든 지도자들과 수많은 백성들로 가득했는데 신전 지붕에만 3천명이 있었습니다. 

    이때 삼손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리고 신전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자 신전이 한 순간에 무너져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압사당했습니다. 그 때 죽은 자들이 삼손이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습니다.(삿16:1-31) 

    삼손은 자기 민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힘을 구하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앙망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새 힘’을 주십니다. 이사야 40:28-31을 보겠습니다.

    (사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전능하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새 힘’이 날마다 충만하여 모든 일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을 만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He is the Satisfier, who pours himself into believing lives). 
    ‘만족케 하신다.’는 것은 ‘풍족하게 하신다’(sufficiency), 
    ‘충만하게 하신다’, ‘부요하게 하신다’(enrich),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신다’(fruitful)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6-18을 보겠습니다. 

    (창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처럼 ‘엘 샤다이’는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차고 넘치도록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에베소서 3:19-21을 보겠습니다. 

    (엡3:19-21)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B.C.853년경 모압과 암몬, 마온이 연합군을 만들어 유다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즉시 전 백성에게 금식명령을 내려 기도에 동참하도록 하고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주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세계 만민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십니까? 권세와 능력이 주께 있으니, 아무도 주께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이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시지 아니하셨습니까? 이 땅에 주의 이름을 위해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만일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기근과 같은 재난이 닥쳐온다면, 하나님 앞, 곧 주의 이름을 빛내는 이 성전 앞에 모여 서서, 재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겠고, 그러면 주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이제, 암몬과 모압과 마온이 우리를 저렇게 공격하려고 하나이다. 우리를 치러 온 저 큰 대군을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주님만 바라보나이다.’ 

    이같은 기도에 즉각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찬양드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가 여호사밧이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고 거룩한 찬양대를 만들어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소리높여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며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연합군으로 하여금 서로를 공격하도록 만들어 전멸시켜버렸습니다. 연합군 중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전리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전리품 가운데는 상당히 많은 재물과 옷과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마음껏 탈취했는데, 전리품이 너무 많아서 운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리품이 이처럼 많아서, 그것을 다 거두어들이는 데만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그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불렀습니다. ‘찬양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군을 이기심으로 유다 백성을 기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연합대군을 치셨다는 소문을 주변 국가들이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구하는 것 이상으로 축복하셔서 전승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거두게 하시고 나라의 태평성세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뜻대로 잘 통치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구했을 때,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 베풀어주시되 전무후무할 정도로 축복하셨습니다.(대하1:9-12)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엘 샤다이’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온갖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한데요, 주로 야훼(Yhwh)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엘 샤다이 (El Shaddai) - 창 17:1, 출 6:3

    창세기 17:1
    아브람
    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월 4일(토)

    본문 / 창세기 10-13장
    주제 / 복의 근원(창 12:2)
    성구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복의 근원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ing)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하며 복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바라크의 복
    복을 히브리어로 “바라크(bârak)라고 합니다.
    바라크라는 단어는 "무릎을 꿇다" "하나님께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이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질의 복과 육체의 강건이 우선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참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복을 영생이라고 선언합니다(133:3).
    따라서 영생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요 17: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복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곱 가지 복을 살펴보겠습니다(창 12:2∼3)
    1. 자손의 축복: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물질의 축복: 복을 주어
    3. 명성과 명예의 축복 :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복된 존재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 하나님 편에 서는 것: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6. 보호를 받는 축복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7.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복을 누리기 위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복을 주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한 후에 복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옛 생활의 정든 곳을 포기할 때 복을 받을 수 있는 순종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은 먼저 내가 즐기던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버려야만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내가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살필 줄 아는 믿음으로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 찬송 / 예수 따라 가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바라크(bârak) בָּרַךְ  스트롱번호 1288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 이에 속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하던 일도 잘 안되고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1-4)

    예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복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수저에도 ‘복(福)’자를 새기고, 사람 이름에도 ‘복’자를 넣습니다.

    복(福) : 복 복(福) / 시(示) 보일 시. 한 일(一). 입구(口). 밭 전(田)


    또 어떤 사람은 대문에다 ‘복’자를 써서 붙였습니다.
    ‘개문복래(開門福來)’라 해서 대문을 열면 복이 들어온다고, 다들 잠자는 이른 새벽에 문을 활짝 열어놓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공하고, 행복하고, 장수하며, 자손이 번창하는 것, 이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복 받기 원치 않는 다면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우리 개인적인 삶이나 직장, 사업,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자체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과, 복에 대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복을 주실 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서 아브라함 같이 복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B.C. 2241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75세 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거부가 되었고, 100세에 자식을 얻었으며, 175세까지 살다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고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축복 받는 비결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둘째,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셋째,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넷째,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따라갔다. 

    1.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 과거의 죄악된 삶에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a) 

    여러분, 이 말씀은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본토’는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 지역은 달의 신 ‘난다(Nannda)’와 그의 아내 ‘닌갈(Ningal)’여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살던 그 지역은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토’를 떠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상과 죄를 버리고 떠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척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들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는 친족 공동체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기득권을 행사하고, 서로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친척을 의지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움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 이 모든 것도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유산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부모가 주는 유산보다 몇십 배 더 많이, 더 풍족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토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아비 집을 떠나면, 직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쉽습니까? 여러분, 정말 이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마 이 말씀을 듣고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고향을 떠날 것인가? 친척을 떠날 것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것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세상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과정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전에 나와 겸비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겸손한 삶이요,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말씀에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나쁜 것, 좋지 않은 것,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버릴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는 떠나고, 버릴 때는 버려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버려야 되겠습니까? 

    우상숭배를 버려야 됩니다(왕하 10:29). 돈이 우상입니까? 돈을 버려야 합니다. 명예가 우상입니까? 명예를 버려야 합니다. 권세가 우상입니까? 권세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분노를 버리고(시 37:8), 거짓 행위를 버리고(시 119:29), 속이는 것을 버리고(잠 4:24), 악한 행동을 버리고(사 1:16), 악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사 55:7). 욕심도 버리고(엡 4:22), 불의도 버리고(딤후 2:19), 세상 정욕도 버려야 합니다(딛 2:12). 

    순종하는 삶,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축복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사람은 돌아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길로, 의의 길로, 하나님께로 향할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한사람이 간증을 했습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은 별로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병이 걸렸습니다. 발에 딱지가 생겨 처음에는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피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의사는 암이 퍼질지도 모르니 수술을 해야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수요예배, 금요일 예배,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예배까지 나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몸에서 암 증세가 다 떠나게 하시옵소서.” 

    그런데 한 번은 새벽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샤워를 하는 것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니 마음속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병에서 고침 받았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셨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병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암 증상이 다 사라졌음을 확인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을 고침 받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병에 걸리고,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당하면, 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 때라도 겸손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죄악을 버리고, 불신앙을 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이젠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총으로 영접하시고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병을 고쳐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갈 길을 비춰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나아가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b) 

    가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아무 데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앞으로 가서 살 땅, 비전(vision), 미래를 말합니다. 과거를 통해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은 현재도 역사 하시고, 미래에 앞으로 일어날 일도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2000년대 하나님의 지시대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의 죄악된 우상, 또 과거에 의존하던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삶을 향해서 신앙의 개척자요, 인생의 모험가로서 새로운 축복을 기대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창세기 26장 2절 말씀에 이삭이 흉년이 들어 그랄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지시 하셨습니다. 그곳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 말씀에 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축복을 주셔서 백 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시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마다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와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축복,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잠언 3장 6절 말씀에도 솔로몬 왕이 말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내 생각, 내 지식보다도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결재를 받고 움직여야 합니다. 종이 상관의 허락 없이 제 멋대로 하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옵니까?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재를 받고, 인정을 받고, 허락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대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시길 원하십니다.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창 20:6), 음성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왕상 19:12), 마음의 소원으로(시 21:2), 또는 환상을 통해서(시 89:19), 평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롬 8:16)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경시하거나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비록 내가 해 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라 할지라도 희망과 꿈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서 앞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 Thomas ; 1225∼1274)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어떤 청년이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습니다. 의사도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청년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만약,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간곡하게 말했는데 청년은 ‘희망을 가지라’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죽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야.” 

    그런데 정말 몸이 점점 더 수척해 지고 눈이 퀭해지더니 자기가 말한 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잠 18:20).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아!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한다’하는 사람은 성공하지만 ‘실패한다’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하는 사람은 사랑 받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 나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거야.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셔.’하는 사람은 미움밖에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땅을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땅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땅을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인간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인간 역사만 바라보면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새시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희망을 주십니다. 천국이 임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허락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7가지 축복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창세기 1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곱 가지 축복

    1. 자손의 축복 -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물질의 축복 - 복을 주어,
    3. 명성과 명예의 축복  -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복된 존재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 하나님은 나의 편이 되는 축복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하나님이 내편이 되고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는 축복입니다.
    6. 보호를 받는 축복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하나님께서 모든 저주를 막아주시고 또, 보호하시는 축복입니다.
    7.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시고, 내편이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자 요셉은 가는 곳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시니까 보디발의 집도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 5절 말씀에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축복이 따라옵니다. 회사를 가면 그 회사가 잘 됩니다. 집안에 있으면 그 집이 잘 됩니다. 나라도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러분이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꾸 남편에게 의존해서 복을 받겠다고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남편을 도와주고, 부모에게 효도하시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8장 2∼6절 말씀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즉 조건부입니다. 무조건이 아닙니다.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물질로 순종하면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몸으로 순종하면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시간 드려 예배를 드리면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기도하면 응답을 주십니다.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축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1900년대는 어렵게, 가난하게, 궁핍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 2000년대는 하나님 앞에 풍족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유업으로, 상속으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종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번성케 하시는 복(창 1:28), 자녀의 복(창 49:25), 대적으로부터 승리하는 복(출 23:22), 건강의 복(출 23:25), 형통케하시는 복(왕상 2:3), 구원의 복(시 3:8), 평강의 복(시 29:11), 장수의 복(시 34:12∼14), 물질의 복(시 132:15), 영생의 복(시 133:3), 지혜의 복(잠 19:8),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복을 받아서 다른 사람도 축복 받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성공하고 당신도 성공하고, 나도 행복하고 당신도 행복합니다. 내 복을 타인에게,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역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는 많은 나라들을 도와줍니다. 기독교 회사도 많은 회사들을 도와줍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집사, 권사, 장로 되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전도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현실보다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자기 계획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적적인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충남 부여에서 한 교회 장로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간증했습니다. 그는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그 포도나무들 중에서 한 나무를 정해 놓고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 것입니다. 여기서 열리는 포도는 교회에 바쳐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성찬식 하는 포도나무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포도나무를 정해놓고 포도농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포도농사가 잘 되는지 풍작일 뿐 아니라, 질도 좋아서 포도농사로 아주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게 되고, 일본연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정해놓았던 그 포도나무 한 그루 때문에 온 포도원이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수박농사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교회 가기 전에 수박밭을 돌아보니 수박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럴 때 인공수정을 시켜야 하는데 교회는 가야 되겠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사 시절에 ‘나는 꼭 주일성수 하겠다.’고 선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로가 되었으니 ‘성도들에게, 제직들에게 더욱 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주일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박농사를 망친다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수박은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부랴부랴 수박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수박밭에 웬 개미떼가 그렇게 많은지 사방이 다 개미떼였습니다. 동태를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가 수박꽃에 붙어서 수정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먼저 예배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개미를 통해서 수정시켜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수박농사, 포도농사가 모두 다 잘 되니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오고, TV, 라디오에도 출연하고, 300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어도 올바로 믿으면,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축복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믿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하는 척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브라함같이 하나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시고, 많은 축복을 받게 하셔서 사람들 앞에 간증하도록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 - 말씀에 순종하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느 때라도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물질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중심, 자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순종했습니다. 불기둥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불기둥이 멈추면 자기도 멈췄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자기도 멈췄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역사 하시는 대로 따라서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과 축복을 성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고, 아브라함은 큰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창대케 되어서 하나님의 벗, 믿음의 조상, 선지자, 열국의 아비, 그리스도의 조상, 여호와의 종 등 각종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께서 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받고, 천국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축복 받았으니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겠습니다. 

    신명기 15장 4∼5절에 모세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강남교회에는 가난한 자 한 사람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1장 19-20절 말씀에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순종 아니면 배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려면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한번 순종했다가 한번 배반하고, 다시 순종했다가 또 배반하고 그러니까 만날 제자리걸음입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안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고 현상유지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단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러자 누가복음 5장 5절 이하에 보면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자손의 축복을 받고(창 26:4∼5), 질병에 걸리지 않고(출 15:26), 은혜를 받습니다(출 20:6; 신 5:10). 장수합니다(신 4:40).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신 15:4∼5).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만들어 주시고(신 28:1), 형통케 만들어 주십니다(신 29:9). 가정이 행복하고 잘 되고(왕상 11:38),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며(요 14:23), 성령으로 충만함받고(행 5:32), 또한 순종하는 사람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요일 3:22).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합니다(신 28:15). 재앙과 질병이 닥칩니다(신 28:58∼59), 번영하지 못합니다(신 28:62), 하나님께 버림을 당합니다(삼상 15:23). 교회에서도 버림을 당합니다. 가진 것도 빼앗깁니다(삼상 28:18∼19). 죽음을 당합니다(왕상 20:36), 곤고에 들어갑니다(시 107:10∼11).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요 3:36). 그 사람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살후 1:8∼9).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는 것은 축복을 받는 특권입니다.
    여러분, 이 특권을 버리지 말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순종할 줄 몰라서,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탐욕과 욕심과 교만과 거짓과 도적질과 속임수로 그들은 복을 받은 척하지만,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월 3일(금)

    본문 / 창세기 7-9장
    주제 /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
    성구 /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The LORD then said to Noah, "Go into the ark, you and your whole family, because I have found you righteous in this generation.

    방주로 들어가라(Go into the ark)

    방주로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습니다.
    노아와 아내, 세 아들(세, 함, 야벳) 그리고 자부들(세 며느리들)

    한자의 "배 선(船)"자를 파자(破字)하면 "배 주(舟)" "여덟 팔(八)" "입 구(口)"라는 세 문자가 결합된 문자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여덟 명의 입이 배에 올랐다는 뜻으로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방주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문자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문자인데 그 대표적인 문자를 "한문자(漢文字)"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한문자에 나타난 의미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이여!
    만일 지금 노아 홍수 때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면 나의 가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의 방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가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믿음의 눈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에 방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교회를 선택해야 할까요?
    어느 목사를 따라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안으로(In Christ)"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라!(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둘째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라!(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셋째는 온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라!(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행 2:21).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가서 물로 심판을 하실 때 구원을 얻었다면 오늘의 시대는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방주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가족은 없는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들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나서야 하겠습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마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눅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방주(方柱) 테바(têbâh) תֵּבָה    

    1. 궤.  2. 방주. 3. 상자
    발음 [ têbâh ]
    구약 성경 / 28회 사용
    • 1. 명사, 여성  - 궤, 방주.
      • a. 명사, 여성 [노아가 만든] 방주, 창 6:14이하
      • b. 명사, 여성 [갓난 모세를 두었던] 상자, 출 2:5.
    • 관련 성경 / 방주(창 6:14, 7:1, 9:10), 갈 상자(출 2:3), 상자(출 2:5)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백 20년 동안 신실하게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하기는 쉽습니다.
    누가 들어도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방주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이상한 모양의 방주를 1백 20년 동안 짓고 있는 노아를 어느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어느 한 청년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상식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게 하나님은 ‘너와 네 집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복입니다. 날이 좋고 심판이 없을 때에는 방주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심판이 임할때에는 방주에 들어가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장 1절을 보면 노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6장에서는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장 1절에서 또 다시 하나님은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변함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변함없는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폭풍과 비바람이 치고, 회사가 망하고,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생길지라도, 건강에 위기가 올지라도 여러분의 믿음이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내가 너의 의로움을 보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하나님앞에 설 때 ‘너는 내 앞에서 의로왔다’고 평가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노아는 자기가 지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6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1백20년 전에 노아에게 ‘내가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세상에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옛 것을 버려야 새 것이 나옵니다. 노아시대에는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노아시대 이후 인류가 쌓은 죄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노아를 통해 구원을 계획하시고 방주를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배신합니다. 아무리 신실하고 착한 사람일지라도 한 두 번은 배신하고 몇 번씩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천년을 지나도 배신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구약은 옛 적의 약속을 말하며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신약에서 모두 성취되었고 신약의 약속은 앞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라는 사람을 택하여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불의 심판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노아입니다. 노아와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자신도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구원받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과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6장 19절을 보십시오.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하나님은 동물의 모든 종을 보존케 하기 위하여 암수 한 마리씩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마리씩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방주는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인의 현주소입니다. 방주 안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이 은혜를 받고 복을 받으며 구원을 받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마리씩을 데리고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번식을 더 많이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짝을 지어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종족보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결한 짐승 일곱쌍은 제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이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짐승을 의미합니다. 제사는 방주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에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림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배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신 산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제사는 피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동물의 피로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참 제사는 아벨은 비록 에덴동산을 쫓겨난 죄인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죄인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곳은 감옥도 영광의 자리로 변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과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할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여러분도 눈치챘을 것입니다. 좋을 것 같아 보였던 결혼생활도, 아이가 태어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죽을 때까지 고생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우리가 하는 사업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드리는 자는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천국처럼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는 사실을 이 험악한 세상 한복판에서 소리높여 외칠 수 있습니다.
    방주는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듯이 방주 안에는 노아가 드리는 예배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이 소생하고 육체가 새로와지고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복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열쇠는 바로 예배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에게는 기적의 7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여러분에게도 놀라운 기적의 7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예배하는 7일입니다. 이 7일동안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혈육있는 모든 동물들을 노아의 방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7일 동안 방주안으로 모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많은 동물을 모두 방주안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자연법칙이나 상식과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하게 됩니다. 상식과 이성으로는 심판이 온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일주일안에 모든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법칙과 믿음의 법칙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쉬운 일입니다. 개미떼를 보면 먹이를 물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줄을 잘 맞추어서 지나갑니다.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떼도, 꿀을 따는 벌도 정확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동물들이 한 순간에 짝을지어 쌍쌍의 모습으로 나타나 줄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만일 노아가 동물을 잡아 방주안으로 넣겠다고 시작했다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이와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쉽게 해결됩니다. 그 많은 동물들이 때가 되자 방주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한 일은 그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모든 일이 그저 힘이 들고 어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기쁘고, 쉽고,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동물들은 제각기 방주 안으로 들어왔고 무게의 균형을 맞추어 1층과 2층과 3층으로 나누어 자리잡았습니다. 기온이 낮고 햇빛도 없고 산소가 부족하면 동물들은 동면을 취합니다. 방주 안의 동물들은 1년동안 동면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방주안의 동물들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아주 쉽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간섭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8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권념했다’라는 단어는 ‘기억했다’ 혹은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안의 동물들을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키우기가 힘이 듭니다.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도, 결혼한 자녀들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봐주시면 스스로 알아서 성장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복받고 살 수 있는 비밀입니다. 방주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에 방주 안이 복받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마지막시대에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방주 안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사실 방주안은 그렇게 행복한 장소는 아닙니다. 창도 없이 동물과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방주 안에 있는 기간은 고작 1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삶은 40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곳입니다. 방주는 노도 없고 돛도 없습니다. 방주는 의지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임의로 빠르게 혹은 늦게 가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방주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키가 없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방주 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만일 방주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의 결론은 ‘내 인생을 산 적이 없이 끌려 다녔다’라는 고백입니다. 인생 여정동안 회사에 의해, 어떤 사람에 의해 평생 노예처럼 끌려다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마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허무하다’ 입니다. 자신이 인생을 운전한 것 같지만 계획한 대로 된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속고 있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죽음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배를 운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믿고 경배하며 찬양하며 그 분앞에 나아갈 때 자연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근심과 걱정이 내앞을 우겨쌌더라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만나도 답답하지 아니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십니다. 물이 없을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십니다. 절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간섭하심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직장문제도, 자녀문제도, 이웃간의 문제도 하나님이 간섭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돈을 따라 다니지 말고 따라오게 하십시오. 이것이 방주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기준, 영적인 법칙과 놀라운 믿음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일동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비가 올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갔을 때에도 요셉에게 미리 총리대신이 되기 위한 각본이라며 미래의 일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믿음을 보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사환에게 지중해 저편에 구름이 있는지 몇번이고 확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을 하지만 많은 갈등과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면서 갈등과 의심이 나는 것은 정상입니다. 엘리야가 포기하지 않고 일곱번 기도했을때 지중해 저편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인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 구름은 폭풍과 비바람을 몰고오는 하나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갈등과 고민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가’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성에 순종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말하는 사람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말하는지 확인해 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비 한방울도 오지 않더니 정확히 7일후에 홍수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 동안 의심과 갈등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소리가 있을 지라도 여러분이 선택한 것을 의심하지 마시고 뒤돌아서지 마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신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기뻐하는 길인지 확신이 있다면 고난이 따르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의 박수소리가 없을지라도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11-12절을 보십시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하늘이 창을 열고 물을 쏟아 부었고 바다와 땅의 경계가 흐트러졌습니다. 사십주야동안 비가 내렸습니다. 방주를 짓는 1백20년동안 이 사실을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홍수는 인간의 이성과 자연법칙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성의 속삭임이나 세상사람들의 이론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는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불의한 세계를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 깨어있어 게으르지 말고, 방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같이 여러분을 통해 방주를 예비하시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2천/1만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어도, 환율이 올라도 선교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24)

    네피림의 시대

    1.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6:2)
    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6:2)
    3.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6:3)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6:4)
    5. 그들은 용사라(6:4)
    6. 고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6:4)

    우리의 유일한 방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1. 영세전에 그리스도(창 1:1-3)
    2. 성육신한 그리스도(요 1:14. 빌 2:5-9)
    3. 부활하신 그리스도(행 1:2, 고전 15:3-4)
    4. 재림하실 그리스도(행 1:11. 마 24:14)
    5. 심판주 그리스도(히 4:1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마 16:16-20)

    인생의 근본문제

    1. 옛 뱀 - 만왕의 왕(요일 3:8)
    2. 원죄 - 대제사장(롬 8:1-2)
    3. 하나님 떠난 지옥배경 - 참 선지자(요 14:6)
    4.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마 28:18-20)

    방주의 특징

    1. 2절 - 모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것을 네게로 데려오며
    2. 10절 -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3. 16절 -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4. 18절 - 물이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5. 23절 -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자들만 남았더라.

    방주로 들어가라(누림)

    신앙의 본질 - 누림

    복음이해(방주를 만들라) - 복음화(방주로 들어가라)

    복음화(롬 1:1, 갈 2:20)

    복음화된 증거 - 문제, 위기, 갈등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소화시킴

    1. 방주의 열쇠(요 14:13-14)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2.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마 28:18-20) - 예배와 말씀 회복
    3. 보좌의 축복 -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9가지) - 기도회복
    4. 3시대 증인 - 현장회복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24)

    창세기에는 크게 네 사건과 네 인물이 나옵니다.

    창 1장 창조
    창 3장 타락
    창 6장 네피림과 노아홍수
    창 11장 바벨탑

    그리고 그 이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창 3장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네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는 것입니다.
    창 6장은 나의 것을 찾으란 것입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입니다.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생불, 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불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메혹적이고 좋은 말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3단체는 더 나아가 너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
    다른 힘이 있다.
    다른 내가 있는데 그것을 찾으라 합니다.
    전부 네피림의 가르침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과연 가능할까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났는데 인간이 과연 눈이 밝아져 선악과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이 되었습니까?
    파멸이었습니다.
    저주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사상이 이론상 얼마나 좋습니까?
    다 같이 생산하여 공평하게 나누어 똑같이 살자 얼마나 메혹적이 이념입니까?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대로 되면 정말 지상낙원이 되어야 합니다.
    단 한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습니다.
    창 3. 6. 11장 나, 나의 것, 나의 성공, 네피림에 각인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후예들이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을 주장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을 하여 네피림의 문화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네피림의 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서론-네피림의 시대

    네피림이란 말은 나팔이란 말로서 ‘위에서 떨어지다’ 동사가 명사화된 말입니다. 위에서 떨어져 공중권세를 잡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악한 영을 부리며 인생을 끊임없이 도적질하며 죽이며 멸망으로 끌고 가는 존재가 과연 누굽니까?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나, 나중심, 성공중심의 문화를 깊숙이 심어 놓았는데 이 사단의 문화를 가르켜 ‘네피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조금만 주목해 보세요. 완전히 네피림의 시대입니다.

    전부 ‘인권’이란 미명하에 극단적 이기주의 팽배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도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중심의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시대가 없었습니다.

    특히 요즘 MZ 세대들은 심각합니다. 비혼주의 청년들이 60%가 넘습니다. 페미니즘에 빠져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용으로 애완동물을 키웁니다. 그래서 지금 온통 세상이 개판입니다. 자녀를 내 마음대로 결정하기 위해 정자은행, 난자은행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일단 살아 보고 결정하자는 동거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 되었습니다. 결혼해도 아기를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구 역사상 전쟁이나 큰 전염병의 재앙시대보다도 인류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는 이런 MZ 문화를 응원하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사랑이 아닙니다. 참 가정이 아닙니다. 전부 네피림의 문화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포악한지 보험을 타기 위해 자기 친자식조차도 다치게 만들어 사고로 위장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보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사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게 멸하리라(창6:12-13) 다 썩어 그 부패함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다치고 부러지고 생채기가 것은 치료하면 되지만 부패하여 썩어 문들어지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네피림의 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6:2)

    언약가진 하나님의 아들들 셈의 후손들이 네피림의 문화 속에서 가인의 후손들이 낳은 딸들이 아름다움은 보고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재앙의 시작입니다. 재앙 막을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네피림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2) 네피림의 절대 가치는 전부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입니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최고의 우상이 맘몬, 돈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도 그 수준이 영적어린 아이들입니다.

    바울은 이 네피림의 시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는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한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은 자기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0-21)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네피림이란 말속에는 위에서 떨어지다 라는 말도 있지만 거인, 장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피림의 모든 가치들은 물질의 크기와 양이 기준입니다. 남 들보다 더 크게 웅장하게 멋있게 만들어 이것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게 하여 문화를 만들고 흐름을 주도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리메이슨이 아닙니까?

    (5) 그들은 용사라 네피림의 정의는 힘이 기준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6) 고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피림의 문화입니다. 재앙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노아야 너를 위하여, 네 가문과 가정을 위하여, 생명보존을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제 방주를 만들었으면 ‘방주로 들어가라.’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더니 이 방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우리의 유일한 방주(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일까요?

    (1) 영세 전에 그리스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태초에 ‘베레쉬트’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계신 하나님, 생명의 빛이십니다.

    (2) 성육신한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을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게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기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5-9)

    (3) 부활하신 그리스도

    ‘데텔레스타’이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 그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증거로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증거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입니다.

    (4) 재림하실 그리스도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이 천국 복음의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도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복음화 되는날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5) 심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방주가 되시며 피난처가 되시며 온전한 배경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주 안에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마16:16-20)

    인생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단에 장악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것으로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한 만왕의 왕이십니다.(요일3:8)

    크라쉬-박살내다. 가루로 만들다. 흔적도 없게 하다.하는 뜻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방시키신 대제사장이십니다. (롬8:1-2)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떠난 지옥배경 속에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새롭고 살 길을 여신 참 선지자이십다. (요14:6)

    (4)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열쇠, 키입니다.(마28:18-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씀이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능력 천군천사가 동원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권능 모든 흑암이 결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배경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증인 땅끝까지 증인되는 것입니다.

    3. 방주의 특징

    (1)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만약 제가 하나님이라면 부패하고 패역한 세상를 멸하기로 작정한 이상 이참에 모든 부정한 짐승은 아예 씨를 말려야겠다. 하겠는데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결한 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무조건 방주 안에 들어가면 삽니다. 구원의 기준이 선행, 열심, 노력, 공로가 아니라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기준입니다.

    (2) 10-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저는 이 구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자마자 홍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방주 안에 들어간 후 칠 일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 노아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했을 것 같아요. 혹시 홍수가 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한편 멀쩡한 날이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그 안에 7일 동안 들어가 있는 노아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저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드시 성취됩니다. 묵묵히 언약을 붙잡고 남은 자. 순례자, 정복자의 길을 우리는 가야 합니다.

    (3) 16-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마지막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닫힌 방주의 문을 아무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닫히면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해 전도해야 합니다. 살려야 합니다.

    (4)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드디어 홍수가 나서 물난리가 난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한 노아에게 물은 구원의 수단이 되었지만, 방주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은 멸망이요

    (5) 23-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자들만 남았더라. 여러분 오늘 말씀을 그냥 대충 들으시면 안됩니다. 이 방주의 특징은 ‘오직’입니다. 유일성입니다. 절대입니다. 다른 것으로 절대 안됩니다. 그냥 물에만 뜨면 되지 그래서 패타이어 주부나 고무보트를 만들면 안됩니다. 반드시 방주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오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이 아닌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이 아니면 네피림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1. 방주로 들어가라
    이것은 중요한 복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노력과 열심이지만 복음의 본질은 피난처와 배경이요 그래서 누림입니다.
    방주 밖에 사람은 발부치고 오만 수고를 다 하지만 방주안에 있는 사람은 그 방주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방주를 만드는 것은 복음 이해를 말하는 것이요 방주로 들어가란 복음화를 말씀합니다.

    ③ 복음화가 되었다는 말은 방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가 됨을 말합니다.(롬 1:1, 갈 2:20)

    ④ 복음화가 된 증거는 모든 문제, 위기, 갈등을 다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1) 방주의 열쇠(요 14:13-1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2)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마 28:18-20)-예배와 말씀의 키는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

    (3) 보좌의 축복-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9가지)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현장을 회복하여-3시대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치명적 함정은 3가지는 무엇인가?

    2. 네피림의 문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하나님은 왜 노아시대에 홍수심판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4. 네피림의 시대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 방주는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은 무엇인가?

    6. 방주의 특징을 말하라

    7.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
    그동안 제기된 주장들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상대적으로 급이 낮은 신들
    둘째, 왕족이나 귀족 등 지체 높은 집안의 청년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천민 출신의 후궁들을 가리킨다.
    셋째, 타락한 천사들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인간 여인들이다.
    넷째,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셋의 후손들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이다.

    첫 번째 견해는 성경을 로마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내용으로 보지 않는 한 해당되지 않는 견해이다.
    성경은 다신론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들의 계급 개념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두 번째 견해는 유대인 랍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석으로 천사들은 성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는 시편 82편 1절에서 재판장들이 신들이나 지존자의 아들들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 또 다윗 혈통의 왕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삼하 7:14; 시 2:7), 그리고 우가리트(Ugarit)의 왕 케렛(Keret)을 엘(El)의 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등이 제시된다.
    이 해석은 왕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음으로써, 즉 백성의 아내와 딸들을 강제로 후궁을 삼음으로써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역사 이래 부도덕한 정치가들의 폭력에 분노하는 대중의 구미에는 맞지만 통치자들의 그런 죄가 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되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왕들의 죄와 인류에 대한 심판인 대홍수와는 인과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세 번째 견해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
    필로(Philo)나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유대인 학자들, 클레멘트(Clement)나 오리게네스(Origenes)같은 유수한 초기 기독교 학자들, 심지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까지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는 구약에서 하늘의 영적 존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욥 1:6; 2:1; 38:7; 시 29:1),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범죄한 천사들을 심판하신 것’과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것’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유다서 6절에서 천사의 타락과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을 나란히 언급한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여호와의증인이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등에서는 현재에도 그들의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여호와의증인들은 이 창세기 6장 2절을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사들은 육체를 입었으며 아름다운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갖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이들 천사들과 그들의 아내에게서 아기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기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거인이 될 때까지 그것도 악한 거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였습니다…천사들은 익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버리고 영물로서 하늘로 돌아갔습니다”(「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93~94).
    그들은 네피림도 곧 천사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 반신반인(半神半人)적인 거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과 반론들을 직면하고 있다.

    1. 창세기 6장의 본문은 문제 당사자들이 ‘인간임’을 분명히 한다.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문제가 언급된 다음, 3절에서 여호와는 그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 당사자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면 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사람’에게서만 찾으시는가?
    이어지는 홍수 기사는 인간에게 내린 심판의 내용이다.

    2. 비록 구약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린 희미한 증거들이 있지만 히브리서 1장 5절은 선명하게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하셨느냐”고 묻는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3. 예수는 천사들은 본질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결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대답하셨다(마 22:30).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 20장 35~36절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라고 대답하였다.
    어떤 이들은 여기 천사와 같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받는다고 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고’ ‘죽지도 않는 것’이 ‘천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무절제한 식욕과 성욕에 탐닉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그것이 “노아의 때와 같이”(마 24:38) 되는 일이라고 하셨다.
    만일 노아의 때의 범죄를 천사들과 사람 사이의 범죄로 이해한다면 결국 예수께서는 재림 전에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된다.
    예수는 마지막 때에 있을 사람들의 식욕과 성욕의 타락을 홍수 때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네 번째 견해는 어거스틴, 제롬, 칼뱅 등이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견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그의 백성들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출 4:22)라고 불렀으며, 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른다(신 14:1; 32:5; 시 73:15; 호 1:10).
    이들의 죄가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일부다처주의인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에게서 바로 그 죄가 시작되었다(창 4:19~23).

    이러한 이해는 지금 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다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과 일치된다.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대홍수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사람들의 도덕적인 타락’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4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마치 그리스도를 섬기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처럼 여호와를 섬기기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던 셋의 자녀들이 어떻게 타락해 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은 거룩한 그의 백성을 통해 그분의 뜻을 실현하기 위함인데 그 일을 감당할 그의 백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에서 추방한 것처럼 셋의 후손이 타락하여 세상을 멸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을 의미한다.
    엘렌 G. 화잇도 이 이해를 지지하였다.

    “셋 자손이 가인의 후손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하여 그들과 통혼함으로 여호와를 불쾌하게 하였다”(부조, 81).

    이들의 죄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보았다(saw)…아름다움(good)…삼는지라(took)’는 창세기 3장 6절에 묘사된 하와의 범죄, 즉 금단의 나무를 ‘보았다(saw)…직 하고(good)…따 먹고(took)’와 밀접한 평행을 이루고 있다.

    4절 하단에 이 결혼으로 탄생한 후손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그 후에도’라는 부사는 이러한 결혼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사’란 단지 ‘용기 있는 자’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폭력을 행하는 힘 있는 자’라고 보는 것이 문맥과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홍수를 내릴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으로 제시된 것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6:11, 13)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왜 셋의 후손의 경우는 늘 아들들이고 가인의 후손의 경우는 늘 딸들인가?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즉, 셋의 후손의 딸들이 가인의 후손의 아들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그들과 통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주어로 삼은 것은 셋의 후손들이 수동적으로 유혹당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기법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행위였다.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성적 문란의 범죄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1월 2일(목)

    본문 / 창세기 4-6장
    주제 /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 6:2)
    성구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인명 사전에 의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대략 1,888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하여도 지금의 성경책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등장한 이후 수 많은 사람들이 땅(아다마)에 번성하였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만 구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렇게 구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참 복잡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성도들 중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이 비성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에 몰두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을 좋아하실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요즈음처럼 교회안에서도 좌파의 주장을 옹호하는 성도들도 있고 우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단지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그 생각의 결과를 예측한다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가 세상을 어지럽힐 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라는 용어가 더 심각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은 불행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이해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복잡한 해석 보다는 이해를 돕는 결과를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경건하지 못한 가문의 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가문의 아들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가문에 속할까를 생각하며 오늘도 경건한 믿음의 가문을 형성하는 일을 위하여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의 군병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경건한 계열의 남자들
    사람의 딸들이라는 불경건한 계열의 여자들로 구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의 해석
    히브리어의 일반적인 용례로 볼 때 비성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2. 성경의 일반적 용례에 따른 천사라는 해석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합당하지 않습니다.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라는 해석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되었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합니다(신 32:5. 시 73:15. 80:17. 호 1:10).

    사람의 딸들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이라는 해석
    2. 인간의 딸들이라는 해석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이라는 해석
    세 가지 해석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세번째 해석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6:1-4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에 대한 세 가지 주요 견해
    1. 타락한 천사들
    2. 힘 있는 인간 통치자들
    3. 사악한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한 거룩한 셋의 후손들

    첫 번째 가설에 비중을 두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어구는 항상 천사들을 지칭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욥 1:6; 2:1; 38:7).
    이 견해의 잠재적 문제는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천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성별을 지녔거나 또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른 두 견해들은 이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2와 3의 견해의 약점은 평범한 남성들이 평범한 여성들과 결혼하는데 왜 그들의 자손이 “거인” 혹은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 명성이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힘있는 남성들이나 셋의 후손들이 평범한 여성들이나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하는 것을 결코 금한 적이 없으셨는데 왜 이 땅에 홍수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셨냐는 것입니다(창 6:5-7).
    창세기 6장 5-7의 다가오는 심판은 창세기 6장 1-4절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인 여성들의 음란하고 비뚤어진 결혼만이 그러한 가혹한 심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첫 번째 견해의 약점은 마태복음 22:30에서 선언한 내용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지만 본문은 “천사들은 결혼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단지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뿐입니다.

    둘째, 마태복음 22:30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관해 신경 쓰지도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할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는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결혼 및 성적인 관계들을 맺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탄과 그의 마귀들도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천사는 성별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로부터 자식을 얻었던 타락한 천사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로운 ‘모순’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인 반면에(히 1:14), 그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막 16:5).
    소돔과 고모라의 남성들은 롯과 함께 있었던 두 천사와 성관계를 갖기를 원했습니다(창 19:1-5).
    천사들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성적인 존재로 변해서 자녀까지 낳을 가능성은 있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왜 타락한 천사들은 이런 일을 좀 더 자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죄를 저질렀던 타락한 천사들을 옥에 가두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유다서 1:6에 묘사된 것처럼).
    초기 히브리 해석자들과 외경, 그리고 위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창세기 6:1-4에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데 전부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결코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세기 6:1-4을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 여성들과의 관계로 보는 견해는 강력한 문맥과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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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피림,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은 각각 누구인가요? (창세기 6장 4절)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1. 네피림 (Nephilim) : 성경의 이 부분에서는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합으로 인해 네피림이 탄생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성경에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이뤄져 왔습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존재, 권력이 강한 사람들, 혹은 다른 종류의 신화적인 존재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 : 이 부분은 종종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적인 신하로 간주되며, 종종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3. 사람의 딸들 : "사람의 딸들"은 인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결합하여 네피림을 낳았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내용일 수도 있으며, 여러 해석이 가능한 복잡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전통과 학문적인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네피림이 거인인지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에서 명확한 답변이 제시되지 않아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네피림은 거인"이라고 기술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한 해석들이 존재하며,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일부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은 네피림을 거인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네피림을 그저 권력이나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종교적인 신화나 상징으로 해석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세기  6:1-8)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본문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로 모든 생명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말씀대로 재림 전의 마지막 심판 때에도 (벧후 3:6-7) 노아 때에 있었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래서 노아 때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일들이었는가를 아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난해 구절이다.

    ①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떤 자들이길래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을까?

    ②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들이 낳은 자식이 네피림 (거인족 또는 포악한 사람들)이 되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4절)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기독교 전통적 해석

          셋의 경건한 후손(남자들)

               가인의 불경건한 후손 (딸들)      

       유대교 전통적 해석

              타락한 천사들

                      인간의 딸들

    기독교 전통적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경건한 후손, 사람의 딸은 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 하나님의 백성 (성도)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출 4:22-23 갈 3:26, 롬 8:19, 롬 9:25-26)

    출애굽기 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로마서 8:1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9:25-2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둘째. 예수님께서 천사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마 22:30, 눅 20:34-36)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2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셋째. 하나님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끼리 결혼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는데, 셋의 후손 남자들이 자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가인의 후손들 (요즘 말로 불신자들)과 결혼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교 전통적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사람의 딸들은 인간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욥기에서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욥 1:6, 2:1, 38:7)

    욥기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욥기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욥기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② 창 19장에서 나오는 천사들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롯과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에게 성관계를 시도했다.
    그래서 천사들이 땅으로 내려와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③ 경건한 남자와 불경건한 여자가 결혼한다고 네피림 (거인, 장수)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지칭한다.

    ④ 당시 세상의 지배층은 가인의 후손들이다(창 4:20-24).
       
    그런데 어떻게 사회적 약자인 셋의 후손들(남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지배층인 가인의 후손(딸들)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천사와 관계를 맺으면 아주 특출한 자식(네피림)을 낳아 세상의 권력과 부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므로 어떤 여자도 천사의
        청혼을 거부하지 않고 천사의 아내가 되었다.

    창세기 4:20-24
    아다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⑤ 사람과 천사가 결합함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 수 없는 (DNA가 완전히 변질되어버린) 별종의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홍수로 심판하셨다는 주장이다.

    ​2. 본문의 교훈

    안타깝게도 기독교 안에서 위 두 주장이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사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시원한 해석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말씀 앞에서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라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네피림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 때 임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세상에서 뛰어나고 위대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살 때 바로 그때가 마지막 때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것이 그들 삶의 목적이었다'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당신의 생명을 주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삶의 목적이 완전히 바뀐 자들이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과 사랑 가운데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엡 1:4, 롬 8:29)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똑같이 산다면 (네피림이 되어 내 이름 내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간음이고, 그것이 바로 현대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일 것이고 마지막 때의 징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십자가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한 곳인가?

    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곳이요

    ② 네피림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을 못 박은 곳이다.

    ​십자가에서 네피림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이미 함께 죽었음을 알 때 내 안의 옛사람의 본성이 힘을 잃게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기 시작한다(롬 6:6).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교회만 다닌다고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피림이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의 본성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이때 예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심판이 지나간다.
    물론 내 노력과 결단으로 옛사람의 본성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피림이 되고 싶어 다들 미쳐있을 때 노아 한 사람은 바보처럼 살았다.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목표로 살았더니(9절)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8절).

    창세기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세상은 네피림을 요구한다.
    실력과 능력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도 이 땅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능력과 실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 먹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인생 목표는 네피림이 되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마음을 가져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 삶의 목표가 바꾸어진 자만이 참 크리스천이고, 그때 심판이 지나가게 되고(요 5:24), 참 안식과 참 평강을 누리게 된다(히 4:10)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주님!
    네피림이 되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아담의 본성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처리되고,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Onkelos, Symmachus, Aben Ezra)의 견해
    (2)성경의 일반적 용례(욥1:6; 2:1; 38:7; 단3:25)에 따른 '천사'란 견해(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이 중 (1)은 히브리어의 일반적 용례로 볼 때 비성경적이며
    (2)는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상치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니라 천사의 타락사가 된다는 견지에서도 이 견해는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시되는데 이는 신학적 의미와도 부합되며 또한 이와 유사한 표현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성경 관례(신 32:5; 시 73:15;80:17; 호1:10)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사람의 딸들
    -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도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2)인간의 딸들
    (3)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이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과 자연스레 대응을 이루는 견해는 역시 세번째 것이다.

    아름다움(*, 토브)
    -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뜻을 지닌 단어로 성격상에 있어서의 사랑스러운 면을 뜻할 수도 있으나 여기선 외견상의 '미모'를 의미한다(24:16; 단 1:15).

    보고(*, 라아)
    - 단순히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세히 주목하거나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0:7; 시 31:7).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 등과 같은 응당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면적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인간의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간에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전도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처럼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갈 때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 패망일 수밖에 없다(7절).

    좋아하는
    - '선택하다', '지정하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좇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0:7).

    아내(*, 나쉼)
    - '이솨'(2:24; 3:20; 4:17)와 교체하여 쓸 수 있는 단어로 '아내' '부인'(4:19; 삿 8:30)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인'(신 20:14; 느 8:3)을 뜻하기도 한다.

    삼는지라(*, 라카흐)
    - 4:19에서는 '취하였으니'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민 12:1).



    창세기 3:1 / 그런데 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Now the serpent was more crafty than any of the wild animals the LORD God had made. He said to the woman, "Did God really say, 'You must not eat from any tree in the garden'?"

    간교하니라 - עָרוּם 스트롱번호6175

    1. 교묘한.  2. 신중한
    발음 [ ʽârûwm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교묘한, 창3:1, 욥5:12, 15:5
    • 2. 형용사, 남성 신중한, 잠12:16,23.
    • 관련 성경 /  간교한(창3:1), 간사한(욥15:5), 교활한(욥5:12), 슬기로운(잠12:16, 22:3), 지혜로운(잠14:8).




  • 창세기 2:7(개역 개정) /  여호와 하나님이 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לֹא־טֹוב הֱיֹות הָאָדָם לְבַדֹּו -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이 말씀은 분명히 1:31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최종 평가가 있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자연 발생적인 고독과 완전한 만족의 결핍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아직 창조 사역을 완성하기 전의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의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적 갈망을 만족시킬 '돕는 배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Yates).
    그리고 여기서 '좋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토브'는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 지으신 피조물 중에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은 본래 하나도 없었다(1:31). 
    따라서 이 말은 다만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하와와 함께 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1:31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God saw all that he had made, and it was very good.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the sixth day.)

    * 돕는 배필(עֵזֶר כְּנֶגְדֹּו - 에제르 케네그도)

    '조력자', '반려자', '응답하는 자'(one who answers)라는 뜻
    성품과 신분에 있어서 남자와 같고 언제나 그 곁에 살면서 상호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뜻. 
    동시에 이 말은 남편과 책임을 나눠 지며, 이해와 사랑으로써 남편의 본성에 대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섬기는 데 남편과 혼연일체가 되어 협조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란 의미도 지닌다.
    더불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역할을 암시하는 말로, 곧 아내의 일반적 기능이 '조력'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말이 남성 우위론의 근거로 오용(誤用)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차이이지 인격적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그분의 성품을 함께 나눠 받은 동등한 인격체일 뿐이다(고전 11:11).

    고린도전서 11:11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In the Lord, however, woman is not independent of man, nor is man independent of woman.)


    1월 1일(수)

    본문 / 창세기 1-3장
    주제 /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 아다마와 아파르
    성구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사람을 흙으로(아다마)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때 땅은 "아다마"라고 하며, 흙은 "아파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흙(아마다)으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아파르(먼지, 티끌)로 만든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이때 흙은 아파르(먼지, 티끌)를 말합니다(창 3:19).
    "필경은 흙으로(아다마)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아파르) 흙으로(아파르) 돌아갈 것이니라."

    사람은 먼지와 같은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의 결말은 아파르 즉 티끌과 같은 먼지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인명 사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1,888명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2025년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모두 성공하기 위하여 “말씀따라 살고 말씀따라 순종”하는 신앙적으로 발돋움 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결말은 ‘아파르’로 만들었으니 ‘아파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빌 3:20).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이라고 합니다.
    체렘이란 거대한 돌덩어리가 조각가의 손에 의해서 어떤 모양의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작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내가 갖고 있었던 잘못된 버릇과 행실과 언어와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모두 벗겨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회복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오롯이(모자람이 없이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에 성공하는 복된 2025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송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형상(체렘. tselem) 스트롱번호צֶלֶם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 그림자, 시 39:7(6), [은유적으로] 헛된 것, 시 73:20
    • 2. 명사, 남성  - 형상, 창 1:27, 5:3, 9:6, 우상, 형상, 왕하 11:18, 암 5:26.
    •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