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멜렉 + 나오미 (1:2) 마라(1:20)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 (나의 즐거움)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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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 룻(4:10) 기룐 + 오브라
(병약자)
3월 25일(화) 룻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룻기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But Ruth replied, "Don't urge me to leave you or to
turn back from you. Where you go I will go, and where you stay I will
stay. 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and your God my God.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your God my God)
로득설(路得說)
불요최아근타니(不要催我回去不跟隨你)
니왕나이거(你往那裡去)
와야왕나이거(我也往那裡去)
니재나이주숙(你在哪裡住宿)
아야재니주거(我也在那裡住宿)
니적국 취시아적국(你的國 就是我的國)
니적신 취아적신(你的神 就是我的神).
路得說、不要催我回去不跟隨你、你往那裡去、我也往那裡去.你在哪裡住宿、我也在那裡住宿.你的國就是我的國、你的 神就是我的 神.
사사기를 통해서 사사 시대가 얼마나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룻기서를 통하여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직 시어머니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려는 모압 여인 룻의 결의에 찬 믿음을 만나게 됩니다.
환경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환경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환경에서 꿋꿋하게 믿음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환경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1: 15. 돌아가라.
나오미는 룻의 동행에 대하여 다시 돌아가도록 촉구하였다.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이라면 염려하지 말고 너의 갈 길로 가라는 것이다.
너와 함께 고락을 하였던 오르바도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또 네가 떠난다고 할지라도 누가 너를 비웃겠는가?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오르바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육의 눈으로 살펴보면 나오미를 따라가면 겹겹이 놓인 불가능의 조건들을 헤쳐 가야 한다.
최후로는 가는 세월에 청춘을 붙잡아 둘 수 없는 처지에 암울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 남편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일이 현명한 처사였다.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결과적으로 볼 때 오르바는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삿 11:24) 또는 바알브올(민 25:3, 5) 신을 섬기는 우상의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이 말을 한 것은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시모(媤母)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여,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본 것으로 이해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기 종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본토나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웠다.
특히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당시에는 부족 신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흔하지 않았으므로, 나오미는 이것으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보았다.
풀러(Thomas Fuller)박사는 야곱과 비교하여 역설적으로 묘사했다.
즉 "마치 하나님이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신앙을 꺾기 위해 애쓰신 것처럼, 나오미는 자부 룻의 올바른 결심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Pulpit Commentary)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동서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룻도 너의 백성과 너의 신(神)에게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오미의 이 말속에는 다분히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코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서 나오미(Naomi)가 오르바(Orpah)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서 볼 때, 오르바도 나름대로 시모 나오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룻(Ruth)의 각오와 신앙이 더욱 뛰어나고 위대했을 뿐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오르바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한 것은 결과만을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은 떠나가고 이삭은 남았고, 에서는 떠나가고 야곱이 남은 것처럼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의 결과였다.
창세기 25: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세기 36: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1: 16. 강권하지 마소서
룻은 나오미와 생활하면서 신앙을 전수받았다.
마태복음 10: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8:29-30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룻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시어머니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다. 지금은 고통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내세에 영생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시어머니를 떠날 수 없었다.
(1) 어머니를 떠나며
따라서 어머니를 떠난다는 것은 어머니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는 것으로 터득하였다. 육신의 부모로는 부족함이 많지마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긍휼하심은 무한하다는 것을 알았다.
(2)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감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인간이 헤어지게 할 수 없다. 어머니를 따르지 않고 모압으로 돌아가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참혹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3) 강권하지 마소서.
그러므로 강권하여 떠나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나오미에게 고백한다.
2)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룻은 나오미가 가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가겠다고 선언한다. 그곳이 비록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따르겠다는 선언이었다. 엘리사가 엘리야 보다 갑절의 은사를 받았던 것은 그를 붙좇았기 때문이다.
* 왕하 2: 2 -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룻도 육신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시어머니지만 그를 보호하고 계시는 여호와를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를 붙좇았다.
(1)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룻은 구체적으로 나오미를 설득하였다. 어머니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 어떤 고난과 궁핍이 있던지, 때론 견딜 수 없는 어떤 환난이 임한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라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따라 가겠다고 말한다.
(2)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유숙하겠다.
어머니가 머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머물겠다는 선언이다. 어머니가 쉬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유숙하여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긍지에 까지 이르렀다.
야곱이 빈들에서 잠들었지만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생활하면 그곳이 천국임을 고백하도록 하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 어머니 백성은 나의 백성
룻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자매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백성은 곧 룻의 백성이라는 고백에 이른다.
* 마 12: 50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2)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룻의 고백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여 남편의 집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도 안식처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9절) 자기의 부모, 친척, 그리고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17절).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나오미가 이방 우상의 나라에서도 그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신앙을 물려주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훈시켰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면, 이처럼 룻이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 17.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1)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은 시어머니와 생사를 함께하여 죽은 일까지라도 동행할 것을 서약한다. 어머니가 죽는 곳이라면 룻도 어머니를 따라 죽고, 어머니가 묻히는 곳이라면 룻도 어머니를 따라서 묻힐 것을 다짐한다.
* 삼하 15: 21 -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 롬 14: 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2)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죽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룻의 신앙은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즉 룻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서약의 형태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했다.
* 삼상 3: 17 -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삼상 25: 22 -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왕상 2: 23 -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서약에는 어떤 표적이나 의식이 동반되지만, 여기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 서약을 범할 경우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특히 여기서 룻이 맹세를 할 때 '여호와'(Jehovah)라는 신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란 성호는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고유한 신 명칭이기 때문이다.
* 왕상 19: 2 -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방인이었던 룻이 여기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확신
룻은 나오미의 신앙을 따라 자기 나라 모압의 신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확실히 지니고 있었다.
(2) 신뢰
룻은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성호로 맹세함으로써 이미 언약의 백성에 속해 있음을 고백했다.
(3) 믿음
이러한 룻의 신앙에 근거하여 진정 그녀는 여기서 언약을 어긴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엄숙히 맹세했다고 볼 수 있다.
1: 18. 결심에 대한 확신
1)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나오미는 여러 가지 현실을 들춰 가며 룻이 동족에게로 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룻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신앙으로 승화된 룻을 보고 나오미의 권유는 단순한 이유에 불과하였다.
* 시 16: 8-11 -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 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2) 굳게 결심함을 보고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려는 진술을 듣고 그녀의 결심이 확고부동함을 확인하였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항변하는 룻에게 더 이상의 권고가 무익함을 알았다. 심지어 여호와의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는 더 이상 권고 할 수 없게 하였다.
* 단 9: 3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의 굳은 결심으로 70이레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 단 10: 12 -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결심하던 첫날부터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로부터 말일에 될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이상을 깨닫게 되었다.
3)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홀로 된 나오미 역시 그동안 정든 두 며느리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진정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두 자부의 현세적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은 접어두고 그들을 돌려보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험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결국 룻만이 통과하게 되었다.
반면 두 자부는 나오미의 의도대로 각자 자신의 행복의 길을 추구했다. 즉 오르바는 모압 땅 자신의 아비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를 통한 여호와의 돌보심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들의 선택을 기쁘게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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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에 나오는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와서 살다가, 그만 남편도 두 아들도 잃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땅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를 그들의 어미 집으로 보내고자 했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입을 맞추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나오미는 룻의 결심이 굳음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룻의 말을 자세히 보면 그녀가 단순히 나오미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 말은 룻과 나오미의 관계가 단순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룻이 나오미를 사랑하는 기초에는, 나오미의 뿌리가 되는 그 백성들과 또 나오미의 하나님이 되시는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큰 사랑이며 견고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개인 대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합니다.
예를 들어, “난 네가 무엇을 믿든 상관하지 않아. 너만 나를 사랑해준다면……”
이런 사랑은 보기에 순수하며 조건 없는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룻이 나오미를 따를 때,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을래요. 저는 그냥 어머니가 좋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였습니다. 또 룻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룻과 시모 나오미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두 개인의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안에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 관계는 “Face-to-face”의 관계가 아니라 “Side-by-side”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Face-to-face”의 관계는 서로를 마주 대하고 바라보며,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입니다. “나는 너만 바라볼 테니까 너도 나만 바라봐야 해!” 이런 관계입니다. 반면에 “Side-by-side”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곧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Side-by-side”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늘 “Face-to-face”의 관계를 소망하며, 또 이를 잘 맺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Face-to-face”의 관계, 곧 서로에 골몰하는 관계는 결코 건강하거나 아름답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에게 그만큼 잘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며 제 삼 일에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21).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에 놀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할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주님! 나를 두고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입니까?”였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16:22,23).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먼저 예수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베드로의 “Face-to-face” 사랑은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이 될 뻔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거의 “사단” 노릇을 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개인들끼리의 인간 관계는 사랑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늘 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지를 경쟁했습니다.
예수님 옆자리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 교회에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3:3, 4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이와 같이 책망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성도들은 유명한 사도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내세우며 자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15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도 바울님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 사람이야!” 하고 떠벌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육신에 속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따라 행한다” 책망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9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을 묶어주는 끈은 그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이들이 서로 만났으며,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며,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인간 관계를 사모합니다.
인간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기 위한 책들, 강의들, 프로그램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좋은 인간 관계”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사단”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나만 봐! 나도 너만 볼께!” 하는 식의 관계는 결코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나오는 “경건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과 나오미의 사랑은 “두 과부의 처량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축복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관계에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그런 관계를 맺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룻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관습과 문화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는 결단을 했습니다. 이 결단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룻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믿음과 결단으로 한 해를 살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1대지: 룻의 결단은 헌신과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룻기 1장은 흉년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나오미와 그녀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 땅을 떠나 모압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습니다. 룻은 말론의 아내로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있던 젊은 과부였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녀는 두 며느리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고 권했습니다.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떠났지만,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라는 룻의 고백은 단순한 동정이나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룻이 나오미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녀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룻의 결단은 헌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헌신은 우리의 신앙과 결단의 출발점입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단순한 감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이어지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2대지: 룻의 결단은 믿음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룻의 결단은 단순히 나오미와의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시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오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압 땅의 우상을 떠나, 참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룻의 믿음은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면할 어려움과 낯선 환경을 예상했지만,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아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대지: 룻의 결단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졌다
룻의 결단은 그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후, 그녀는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여 그녀와 결혼하였고, 그들의 후손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의 헌신과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놀라운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마 1:5).
이는 우리의 결단이 단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룻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그녀의 결단이 위대한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결단이 사용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의 삶을 믿음의 결단으로 시작하라
룻은 헌신과 믿음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그녀의 결단은 단순히 나오미를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백성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날마다 룻의 결단을 본받아야 합니다.
헌신의 결단 :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시오.
믿음의 결단 :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결단 : 우리의 결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저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고,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저도 머물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저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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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룻기 1:6-14)
오늘 본문을 소개해 드릴 것 같으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흉년을 만나게 되자 남편인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룐이라는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내려갔다가 10년만에 남편 죽고 두아들 죽고 병들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효성스러운 작은 며느리 룻이라는 여인이 따라와 모든 삶이 회복되어지는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룻기서를 통하여 귀한 진리들을 발견 할 수 있는데 본문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요 그 땅을 치리 하던 사람들은 사사들이 였다고 하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면 "베들레헴"은(떡집이라는 뜻으로 생명의 떡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세 전에 보내시기로 예정해 놓으신 거룩한 땅입니다) "나오미"는(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사들은"(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400년을 국가 정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기도의 사람들이요 임시정부의 수반이였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은 유다 백성인데"(유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데(이것이 바로 룻기서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징계는 몇 가지가 있는데 전쟁이 징계요 흉년이 징계요 유행병이 징계요 천지 지변이 진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땅은 거룩한 성지요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요 다스리는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이요 나오미는 은혜를 입은 자인! 데 그 땅에 하나님의 진노인 흉년이 작년에도 들고 올해도 들었습니다
상황을 보아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실 곳이 아닌데 흉년이 들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보여집니다 본문을 볼 것 같으면 "사사들이 치리 하던 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은 사사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사사기를 보아야 합니다
사사기2:11-15절의 내용을 보면"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을 섬기며 애굽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신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돗을 섬겨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자의 손에 붙여 그들이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른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원인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1)하나님을 버렸습니다 2)바알이 복주시는 신이라고 바알을 택했습니다 3)바알만 택한 것이 아니라 아세라 목상을 깍아 세워놓고 복을 달라고 싹싹 빌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디를 가던지 저주를 내리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의 위치를 보면 복을 받을 만 한데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오미의 생애에다가 자신의 생애를 맞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를 만난 나오미의 두 가지 생활모습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모암이라는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것 같으면 모압에 내려가서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흉년을 피해 잘 살아 보겠다고 내려갔는데 내려간 가족중에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마는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내려간 모압 땅은 저주의 땅에 되어 나오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이미 위에서 들으셔서 아시듯이 나오미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남편 죽는 고난 두 자식을 죽이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은 병들고 내려간 10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였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모압 땅은 문제 해결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저주의 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나오미의 모습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내려간 10년동안 남은 것이라고는 3명의 과부와 자기의 몸은 병들어 거동이 불편한 것 뿐이였습니다 이때쯤 되자 나오미는 자신을 바로 보게되는데 그제서야 모압으로 내려온 것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기력이 없어요 그때 효성스러운 며느리 룻이 그를 도와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베들레헴에 올라가니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모든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모습과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깨달을 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룻기서1장7-13절을 보면"나오미가 10년이 지나 남편 죽이고 두 자식 죽이고 난 후에 자기의 입지가 바로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베들레 헴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습니다"특히13절에 보면"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실컷 얻어 터지고나서 깨닫습니다 나오미는 10년만에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치신 것을 깨닫았습니다 남편 죽을 때까지도 명이 짧아서 그런줄 알았을 거시고 두아들 죽었을 때도 며느리 때문이라고 생각 했을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자기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는 내 신앙생활에 왜 기쁨이 없는가를 깨닫아야 하며 내 가정에 왜 우환이 있는가 깨닫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깨닫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돌아가려고 하니 하나님이 돕는 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나오미가 마음을 베들레헴으로 돌리고 돌아가려고 하지만 몸은 병들고 늙어서 돌아갈 기력이 없습니다 그때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작은 며느리 룻을 붙여 주시어서 시어머니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룻기1:16-17절에 룻이 고백 하기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룻이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자유라고 했습니다 롯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 시요 남편과 함께 정을 나누며 재미있게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 세상은 남편 두고도 남편을 떠나려고 하는 여자들도
있다는데 타국 시어머니 무엇이 좋다고 따라나서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깨닫고 돌아서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오미라는 은혜입은 여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룻의 마음을 감동 시키셔서 시어머니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으니 오늘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모두 이 시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으로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 합니다
셋째:돌아가니 때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룻1:22절을 보니"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는데 그들이 보리추수 시작 할 때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간 때가 언제 라고요 "보리추수 시작 할 때라"그들이 만약 보리 고개에 왔더라면 어찌 했을까요? 보리고개가 뭡니까? 보리고개는 양식은 떨어지고 보리 이삭은 아직 덜 익어서 먹을 수도 없는 때가 보리고개 입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가 보리고개 였더라면 굶어 죽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10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을 때가 보리추수 시작 할 때였으니 얼마나 때를 잘맞춘 것입니까 뭐니 뭐니뭐니해도 시골 인심은 추수때가 제일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닫는 자는 발걸음이 닫는 곳에 때가 맞아 돌아 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해도 때가 맞아 돌아가야 하고 정치를 해도 때가 맞아 돌아가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으로 부터
때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올라가 집에 있고 며느리인 룻이 바구니를 들고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갔는데 그
밭이 보아스의 밭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엘리멜렉의 며느리임을 알고난후 일꾼들에게 이삭을 단 사이에서 줍도록 하여 양식의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깨닫고 돌아서면 모든 일에 때가 맞아 돌아가는 축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까지의 내용이 룻기서의 내용입니다 내용을 다시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오미가 흉년이라는 문제가 생기자 문제를
앉은자리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남편 죽고 두 자식
죽고 과부 3명만 남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나오미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고 발걸음이
닫는 곳에 때가 맞아 돌아가고 마음먹은 것에 인도의 손길이 나타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모압인가요? 베들레헴인 가요? 내중심으로 살고 있으신 가요? 아니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계신 가요? 깨닫고 돌아서서 말씀안에 살아가시므로 하나님의 인도의 축복 도와 주시는 축복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때가 맞아 돌아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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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가족의 모압땅 이동 경로
흔히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큼 "걸어서 광야의 세계속으로"의 길들이 많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도 있을까? 물론 성서 시대의 모압이 현재는 요르단 땅이기 때문에 직접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까지 걷는 체험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을 어느 정도 따라 걸을 수는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길들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1. 베들레헴(주황색) -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길 (아둠밈 비탈길 - 수 15:7, 본 블러그의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참조) - 여리고 - 요단강 도하 - 사해 남쪽으로 이동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파란색 선)
2. 베들레헴(주황색) - 드고아 - 엔게디 (사해) - 사해 도하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노란색선)
사진: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땅 이주
이 두개의 길들중 어느 길을 선택해서 엘리멜렉은 그 가족을 이끌고 모압으로 갔으며 나오미는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까? 모압과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땅 사이의 이동과 관련된 다른 성서 이야기들을 통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정할 수가 있다.
A. 다윗의 피난 경로 (삼상 22장)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닐때, 아둘람 굴로 도망을 하였다가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삼상 22:3). 아둘람 굴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광야 지역에 위치해 있다. 아둘람 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울이 살고 있던 기브아 (예루살렘 북쪽)에서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 - 드고아 - 엔게디 - 사해 도하 - 모압으로 가는 것이 가장 짧은 루트이다.
만약, 다윗이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 여리고 방향으로 가려 하였다면 그는 죽음을 자초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루트는 사울의 기브아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사진: 엔게디
사진: 엔게디의 사반 (잠 30:26)
B. 여호사밧과 아람 사이의 전쟁 (대하 20장)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아람의 연합군이 사해 건너편 엔게디 (하사손다말 -대하 20:2)에 주둔지를 만들고 여호사밧을 공격하려 할때,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아간다 (대하 20:20). 드고아 들은 엔게디로 내려가는 광야 길에 위치해 있다. 이방의 연합군은 사해를 건너 엔게디로 이동하였는데 사해 중간에는 리숀 반도라고 해서 물의 깊이가 아주 낮아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건널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해의 수위가 낮아져서 사해가 리숀 반도를 중심으로 사해가 두개로 나누어져 있다) 만약 아람 군대가 사해의 리숀 반도를 건너올 수 없었다면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방향으로 진격해 올라왔을 것이다.
사진: 엔게디의 산양
이 두가지 예들은 엘리멜렉 가족이 1번 루트보다는 2번 루트를 따라 모압 지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지지한다. 오늘날 베들레헴에서 출발해서 광야 길을 따라 엔게디까지 걸으면 약 12-15 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광야의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만 이 광야 계곡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드론 시내의 물이 흘러 사해로 유입되기에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진: 예루살렘-베들레헴- 광야 - 엔게디 - 사해로 빠져나가는 계곡의 물
사진: 마르샤바 수도원
엘리멜렉 가족은 잠시 우거하기 위해 모압으로 떠났다. 아마 당시 모압 지방에는 흉년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베들레헴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압 땅은 과거 아브라함을 떠나 요단을 건넜던 롯이 찬양하였던 그런 땅이었을 것이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오늘날도
요단 동편은 물이 풍부하고 늘 푸르다. 베들레헴에서 바라봤던 그 풍요로운 땅에 잠시 머물기 위해 떠났던 엘리멜렉 가족은 그 뒤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그 땅에서 죽음의 슬픔을 끌어 안고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의 삶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셨다. 반전이 있는 인생 드라마를 쓰신 하나님의 자비가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가 룻기 아니던가.
밟을 이(履), 지날 력(歷), 글 서(書)
발자취를 적은 문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룻기 1:6~14)
룻기 전반부에 보면 네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룻, 오르바 이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흉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방법과 길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묘한 대조를 이루며 각각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두 지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베들레헴이요, 또 하나는 모압입니다.
서로 대조적인 땅입니다. 베들레헴은 이름
그대로 떡집입니다.
하나님의 집, 말씀의 집, 신앙의 고향,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소, 가나안, 메시야가 탄생하신 축복의 땅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모압은 이방세계, 우상숭배, 음란과 부도덕, 불신앙, 신앙에서 멀어지는 그 어떤 곳을 상징합니다.
이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에 좁다란 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한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엔 똑같은 그 길을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그 가족이 이동합니다.
그들이 이동경로를 통해 남긴 발자취들을
살펴보면서 지금 나는 내 인생길에 어떤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지를 확인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흉년이 나자 베들레헴을 출발하여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인생의 종지부를 모압에서 찍습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의 직진입니다.
둘째, 오르바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모압을 출발하여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했다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다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르바는 모압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가다가 다시 모압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즉 모압에서 다시 모압으로의 유턴입니다. 셋째, 나오미는 처음에 남편을 따라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방향을 돌려 그곳에 이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유턴입니다.
그러면 룻이 남긴 발자취는 어떠한가요? 룻은 이방 땅 모압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의 본토,친척, 아비집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한 후 그녀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직진을 합니다. 마치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처럼(삼상6:12), 푯대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다 했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의 길에서 엘리멜렉과 룻, 그리고 오르바와 나오미가 남긴 발자취는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베들레헴→모압), 오르바(모압⊃베들레헴), 나오미(모압⊂베들레헴), 룻(모압→베들레헴),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오늘날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자요,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오르바와 룻은 이방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면, 전에는 이방인이었을지라도 할례를 받거나, 일단 결혼을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오르바와 룻은 처음에는 모압인이었지만 결혼한 이후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는 택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각각 서로 다른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를 잇는 길에는 '슈브'(돌아간다)라는 동사로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모압과 관련하여 6번, 유다와 관련하여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모압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6번, '유다로 돌아가라'는 말이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섯번씩 대등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판단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 또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압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운 말들이 마치 스테레오처럼 귓전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가라'는 음성앞에서 각자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각각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혼돈스럽게 만드는 것은 두 자부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나오미조차도 오르바와 룻을 향해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를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충고, 말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베들레헴과 모압, 모압과 베들레헴 사이에 펼쳐진 길을 걸어가는 노중에 있습니다. 그 노중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들어야 합니다. 누가 하는 말인지, 어디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놓고 재판장인 빌라도가 결정을 내리려 할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급히 보내어 충고를 했지만(마 27:19), 그는 다수의 소리를 (눅23:23) 들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사형언도를 내리는 빌라도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후회 없는 발자취를 남기기 위한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길 자체이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길과 말씀 자체이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따르느니라'(요1:14) 따라서 길이요, 말씀 자체이신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주님을 따라 갈 때에 결코 후회함 없는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를 출발하여,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엘리멜렉과 같이 모압으로 직진하고 있나요?
아니면
오르바와 같이 어느정도 가다가 다시 모압으로 유턴하고 있나요?
되돌리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처럼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발자취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룻과 같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직진하는 발자취를 남기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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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과 베들레헴(룻기 1:1~18)
돈 좇아 하나님 버리는 ‘시대의 덫’ 조심해야룻기는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압으로 내려가므로 만난 고통 그리고 베들레헴으로의 귀환을 통한 회복이 보여주는 의미를 살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모압으로 간 사람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흉년을 만나자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1,2절) 그런데 이들은 영적 위험을 간과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흉년을 만난 이들은 당장 그들의 배를 채워줄 떡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23:3). 이스라엘이 그들과 가까이 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정은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양식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에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바로 그곳으로 말입니다.
모압에 내려간 이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더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2,3절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먼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깨닫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오히려 서둘러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킵니다. 모압에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4절).
그랬더니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4,5절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베들레헴 사람이 모압에 먹을 것을 위해 내려간 결과, 집안의 모든 남자를 잃고 맙니다. 그곳에서 밥은 먹었는지 몰라도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고 만 것입니다.
모압과 베들레헴의 의미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때가 되니 흉년이 들었던 백성들을 돌아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돌보셔서 양식을 주실 텐데 그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입니다.
룻기가 보여주는 모압은 경제 위주의 삶, 베들레헴은 신앙 위주의 삶으로 구별할수 있습니다.
떡을 위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의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한, 많이 갖고 많이 먹은들 행복과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떠나고 예배를 떠나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돈 몇 푼을 위해 양심도 신앙도 버리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조금 더 많이 갖기 위해 예배를 뒤로 하게 만듭니다. 경제를 살려야 선교도 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어려울 때 선교를 시작했고 그때 선한 일들에 힘 써왔기에 경제적으로 일어서고 이만큼 살게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을 향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초라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것을 결심합니다(6절). 떡을 찾아 모압으로 가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므로 회복되어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룻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가난한 시어머니, 따라가 봐야 고생이 뻔한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 그러나 룻은 이런 시어머니를 따라 갑니다. 그는 떡을 좇은 것이 아닙니다. 떡을 추구했다면 가난한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16절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렇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간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함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시어머님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선택입니다.
14절에서 동서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모압의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15절이 밝혀줍니다.
죽을지언정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룻은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룻의 선택은 가난해진 시어머니와 함께 가서 고생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습니다. 굶지도 않습니다. 그의 인생에 행복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가문에 복이 임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고(4:13) 다윗의 증조할머니로 성경에 이름을 남깁니다(4:22).
이 세대의 흐름은 모압
모압은 먹을 것을 좇아 하나님도 신앙도 사랑도 놓아 버리는 삶을 보여줍니다. 베들레헴은 죽을지언정 하나님만 붙드는 삶을 보여줍니다. 모압에 가니 살 것 같은데 죽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흐름을 조심합시다. 떡을 좇는 흐름, 경제가 우리를 살릴 것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덫에 걸리지 맙시다.
베들레헴에 거하십시오. 먹을 것을 위해 모압으로 내려가지 마십시오. 예배하며 사십시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예배를 떠나지 마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는 떡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모압에 내려가므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압 여인인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떡을 버리므로 모든 것을 얻는 삶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압을 좇습니까, 아니면 베들레헴을 좇습니까? 떡을 위해 베들레헴을 등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요상상희락(要常常喜樂).
- 불주적도고(不住的禱告).
- 범사사은(凡事謝恩).因為這是 神在基督耶穌裡向你們所定的旨意。
- 不要銷滅聖靈的感動.
- 不要藐視先知的講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