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 묵상 신명기



신명기 주제 - 순복불저(順福不詛)

*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각견청(覺見聽) -  1. 깨닫는 마음(명백적심.
明白的心)
                            2. 보는 눈(견적안청.
见的眼睛)
                            3. 듣는 귀(견적이타. 见的耳朵)

但耶和华至今没有赐给你们能明白的心、能看见的眼睛、能听见的耳朵。
단야화화지금몰유사급니니능명백적심,   능간견적 안청,  능소견적이타

회득(會得) : 모일 회(會), 얻을 득(得)
마음속으로 깨달아서 알아차림.- 이해

내증(內證) : 안 내(內), 증거 증(證)
마음속으로 진리(眞理)를 깨달아 아는 일.

자각심(自覺心) : 스스로 자(自), 깨달을 각(覺), 마음 심(心)
스스로 깨달은 마음.


활안(活眼) : 살 활, 눈 안
사리(事理)를 밝게 보는 눈


총문(聰聞) :
귀 밝을 총(聰), 들을 문(聞)
귀를 밝게 하여 잘 듣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들음을 이르는 말.

천이(天耳) :
하늘 천(天), 귀 이(耳)
하늘의 귀. 세상(世上) 사람의 일을 듣고 안다고 한다.
색계(色界)의 제천인(諸天人)이 지닌 귀. 육도(六道) 중생(衆生)의 말과 모든 음향(音響)을 듣는다고 한다.




듣는 귀(耳) : 청이 /  들을 청(聽), 귀 이(耳) 

聽자는 ‘듣다’나 ‘받아들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聽자는 耳(귀 이)자와 壬(천간 임)자, 悳(덕 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耳자에 두 개의 口(입 구)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후에 口자는 생략되었고 대신 눈과 심장을 그린 悳자와 壬자가 더해지면서 ‘보고(直) 듣고(耳) 느끼는(心) 사람(壬)’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획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단순히 ‘듣는다’라는 뜻에서 ‘듣고 용서하고 살핀다.’까지 모두 표현하려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글자들이 결합한 것이다.

* 청이주(聽耳酒)
귀밝이술.
음력(陰曆) 정월(正月) 대보름날(大---) 아침에 마시는 술.
이날 아침에 찬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귓병(-病)이 생기지 않으며 한 해 동안 좋은 소식(消息)을 듣게 된다고 한다.




3월 7일(금) 신명기 31-3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수룬(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Jeshurun grew fat and kicked; filled with food, he became heavy and sleek. He abandoned the God who made him and rejected the Rock his Savior.

* 트럼프의 선언 / 트럼프의 전략적 계획
-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500만불(70억)을 투자하라!
EB-5 Immigrant Investor Program.
부패한 공산당 미 이민의 꿈 - 중국의 인공 지능이 발표 / 2017년
중국몽? 돈을 벌어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예) 한국인이 500만불을(Gold Card) 투자해서 미국을 가겠습니까?
         영국, 불란서, 독일, 일본인이 투자하겠느냐?
         500만불은 70억
 트럼프의 전략은 중국사람을 겨냥한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 중에서 70억을 투자하고 미국으로 이민하려는 사람들이 상류층에 많이 있다.
중국을 무너트리려는 전략
시진핑은 부자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중국의 부를 무너트리려는 전략

배를 어느 나라 것이냐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느냐?
전세계의 선박 중에 1/2이 중국산
만일 중국제 선박이 항구에 입항할 경우 정박료 100만불(14억)
그러나 한국제 선박이 입항할 경우 정박료 10만불 

    

여수룬(Jeshurun) : 성경에 4구절에서 사용된 특별한 용어
- 이스라엘에 대한 시명. 별명

의미 / 곧은 자, 옳바른 자,
1. 이스라엘의 대명사




여수룬(Jeshurun)이란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된 용어로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4구절 사용되었습니다(신 32:15, 33:5, 26, 사 44:2).
'여수룬'의 뜻은 "곧은 자" 또는 "옳바른 자"라고 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시명(詩名) 또는 별명(別名)입니다.
특별히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읽어 드린 노래와 축복중에 있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수룬(Jeshurun, 의로운 자, upright one,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여수룬'은 '의로운 자' 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의롭고 올바른 자가 된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네 구절이 나옵니다.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신명기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

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다음 구절은, 이스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의로운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는데, 이 사실을 모세 선지자가 역설적으로 비꼬며 혹독하게 꾸짖습니다(존 칼빈의 신명기 32장 주석).

​신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잠언 30:7-9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잠언 30:9a)

배부른 백성들이 벗어나기 쉬운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교만은 마치 내가 잘나서 잘해서 이런 일을 이룬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탄의 전략 중 하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1. 여수룬 히브리어 의미와 뜻, 성경 속 용례 살펴보기 여수룬, 히브리어, 구약, 성경, 역사

여수룬은 히브리어로 곧은 자 또는 정직한 자를 의미해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어요.
특히 신명기, 시편, 이사야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 영주권을 위한 500만불을 투자하라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어느 나라에서 500만불을 투자하고 미국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겠어요.
       - 일본 사람, 한국 사람, 영국 사람, 불란서 사람, ...........
       유일하게 중국에서 신흥재벌들은 500만불을 투자하고 영주권(Gold Card)을 얻으려고 합니다.
       트럼프의 전략은 중국의 재벌들이 소유한 돈을 미국으로 옮기려는 전략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공산국가 - 재벌들이 공산국가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AI에게 질문한 내용 - 중국몽(中國夢)이 무엇이냐?
                                         중국을 떠나야 한다!


성경에서 여수룬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경험하는 백성으로 묘사돼요.

신명기 3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독수리 날개에 태워 데려오신 백성이라고 묘사하며,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세요.

시편 68편에서는 여수룬이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은혜를 강조해요.

여수룬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는 중요한 상징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일깨워줘요.

또한, 여수룬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해요.

2. 여수룬이라는 이름, 히브리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여수룬은 히브리어로 곧은 것 또는 정직한 것을 뜻해요.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애칭으로 사용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께 곧고 정직하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어요.

여수룬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백성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수룬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곧고 정직한 삶을 살기를 기대하셨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여수룬에게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며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셨어요.

여수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이름이에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곧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백성이 되어야 해요.

여수룬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 봐요!

구약 성경에서 여수룬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될까요?

여수룬은 히브리어로 결혼한 여자, 신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수룬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애칭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강조

*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아내로 비유하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강조합니다.

* 신명기 32장, 33장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내 소유, 나의 백성이라 부르는 장면은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여수룬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 시편 68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구원하시고 여수룬을 구속하시리라라고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회개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을 불륜으로 비유하며 슬픔을 표현합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강조합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신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여수룬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명기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

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사야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월 6일(목) 신명기 28-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과 저주(신 30: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When all these blessings and curses I have set before you come upon you and you take them to heart wherever the LORD your God disperses you among the nations.

복(福. blessings)과 저주(詛呪. curses)

복(福) 베라카( Berâkâh)  בְּרָכָה 스트롱번호1293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복(창12:2, 신11:26, 말3:10), 축복(창27:41, 신11:29, 슥8:13), 예물(창33:11, 사36:16), 송축(느9:5).


저주(詛呪) 아라르( ’ârar) אָרַר 스트롱번호 779

1. 미완료형 יָאֹר
2. 니팔형: 수동태 분사형 נֵאָרִים
3. 피엘형: אֵרַר
발음 [ ’ârar ]
구약 성경  / 63회 사용
관련 성경 / 저주하다(말2:2, 창12:3, 민24:9), 저주받다(창3:14, 시119:21, 말3:9). [명] 저주(말2:2, 렘48:10, 민5:18).



축복과 저주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신명기 28:1-68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신명기 28장은 구약성경을 설교할 때, 자주 인용하는 복과 저주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
1절부터 14절까지는 축복에 관한 말씀
15절부터 68절까지는 저주에 관한 말씀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신 이유는 무언인가?
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셨던 의미와 메시지는 무엇인가?
또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은 복의 근원

2절부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1절부터 14절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받게 되는 복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다시 15절부터 68절까지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받게 되는 저주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언제, 어디서나, 복을 받습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가족과 자녀들에게도, 그들에게 속한 모든 소산에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나가도 언제나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언제, 어디서나, 저주를 받습니다. 복에 관련된 모든 말씀이 저주로 바뀌어서 돌아옵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가족과 자녀들에게도, 그들에게 속한 모든 소산에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나가도 언제나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순복 불저(順福 不詛)

순종(順從)하면 복(福)을 받고
불순종(不順從)하면 저주(詛呪)를 받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을 외에 다른 것에 시선을 두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삶속에 직접 체험했습니다. 애굽에 노예생활 중에 고통스러워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었고,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아무런 조건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복을 선물로 받은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압적인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복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그들의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도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신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들의 사랑의 마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내 산에서의 언약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의지하는 백성이 되어라’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동의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을 한 두개를 어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리에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사랑하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뜻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말씀의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그것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워졌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웠듯이,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의 삶이 그렇게 추하고 더럽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이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우리들의 삶과 인생은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이러한 사건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그분을 떠나서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복의 근원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생의 주관자 

본문 1절 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반대로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면 자연 재해를 일으키셔서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상관이 없는 아주 먼 나라까지 동원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고 멸망시키겠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이야기 하시면서 복과 저주의 차원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는 가나안 땅에만 해당되거나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과 저주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며, 모든 창조물과 창조의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실 때는 전 세계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머리되게 하시고, 창조세계를 움직이심으로 토지의 소산들이 풍성케 하는 역사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를 주관하심으로 건강케 하시고 잘되게 하시고, 복 받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저주를 내실 때는, 전 세계의 나라들을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게 하십니다. 창조세계와 자연 질서를 주관하셔서 기근과 가뭄을 일으키게 하시고, 전염병과 질병을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복과 저주를 내리시면서,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것이 무엇들입니까? 전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창조세계와 자연 질서를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주관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은,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왜, 굳이 팔레스타인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러한 일을 벌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는데, 왜 작고 작은 나라, 변방에 있는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난히 큰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에게 전 세계의 역사와 창조세계와 자연 질서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면서 까지 복과 저주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불만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했지만, 그래도 이방인들보다 더 저지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더 악한 이방민족이 많은데, 왜 굳이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심하게 징벌하십니까?’

우리의 불만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처벌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의 김정은도 있고, 수많은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교회와 성도가 조금 잘못하면, 그렇게도 심하게 혼내시는가? 너무 심하게 징계하시는가? 왜 그러겠습니까?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이듯, 교회와 성도도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옆집 아이가 잘못한다고 해서 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잘못하면 때립니다. 혼이 납니다. 왜입니까? 내 자식이니깐 그런 것입니다. 내 자식이 만만해서, 동네북이라서가 아니라, 내 자녀를 사랑해서, 너무나도 아껴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를 고치시고 바르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 이신 한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오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고,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심을 배웠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 삼으셨고, 우리를 향해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전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들, 하나님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교훈은,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해다오’라는 요구입니다. 앞선 레위기 26장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내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과 오늘 민수기 28장의 특징을 보면, 복에 관한 내용보다 저주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에는 단계가 없는데 저주에는 단계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제일 낮은 저주의 단계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만들고, 병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고, 이방민족의 침입 때문에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첫 단계와 동일한 종류의 징계를 받되 더욱 강도가 정도가 강해집니다. 처음보다 더욱 심한 가뭄과 기근을 내림으로 더욱 크게 고통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방민족이 더욱 많이 침입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먹을 것이 없어지고, 자식까지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최종적으로 나라가 멸망당하여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당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제일 먼저 사사시대에 첫 번째, 두 번 째 단계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며 범죄를 하자 하나님은 가뭄과 기근을 내리셨고, 이방민족들에게 고통당하도록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왕정시대에 들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가뭄과 기근, 이방민족의 침입, 역병과 질병 등을 당하다가 결국에는 마지막 단계의 징계까지 당하게 됩니다. 굶주림으로 자녀를 잡아먹고, 마지막에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징계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비롯하여 신명기28장에 공부하면서 축복의 내용보다 징계의 내용이 긴 것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에는 단계가 없는데, 징계에는 단계가 있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축복보다는 징계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하시고, 단계별로 정하셨는지 우리는 그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징계를 통해서, 하루라고 빨리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심으로 죄를 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 징계에 대한 내용이 더욱 많고, 단계별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는 주로 약한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강도를 더해 가십니다. ‘이 기간 동안 빨리 회개하라, 내가 기다려 줄 테니 어서 돌이켜라’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마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실 때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수로 한번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고 참다가,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저주의 내용에서 언급한 죄는 인간이 부족하여서, 어쩔 수 없이 실수로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가운데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지은 허물과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저지른 죄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고 부패한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징계조차도 결국 회복을 위한 징계, 회개를 위한 징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죄죄의 길에서 돌아서며, 겸손히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하는 자에게는 은혜의 회복을 시키시겠다는 약속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징계와 저주는 영원한 멸망을 위한 것입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징계와 저주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사랑의 매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많은 죄인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회방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던 수많은 인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죄인, 그러한 인간들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마음이 낮아져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다왕 므낫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중에서 가장 악한왕이 바로 므낫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우상을 들여놔 섬겼던 악질 중에 악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온갖 나쁜일을 밥 먹듯이 했던 왕이 므낫세였습니다. (대하33:10) 그러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앗수르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앗수르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므낫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당대 최고의 악인에게 왕위까지 회복시키시는 것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함 속에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이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는 불순종하는 것을 즐겨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의 본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져버리고 제 멋대로 우리의 갈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요,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가 나의 주인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원래 모두다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제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할 일은 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구원을 위한 회개가 있고, 성화를 위한 회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원래 믿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때,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예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던 죄들을 자백하는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하여 더욱더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한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수많은 죄 가운데 살았던 우리들에게 때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있었고, 사랑의 매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삶의 여러 가지 환란을 주심으로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이 사랑의 매로 인하여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죄 많은 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나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잡아 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의 근원되시고, 우리들의 삶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된 죄악들을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용서받은 자로서, 또한 회복된 자로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모든 초점과 관심, 우리들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하나님의 사랑의 존재, 그분의 아름답고 소중한 소유로 삼으신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기를 소망하고 애쓰고 힘쓸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전부를 내어주시기 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나 역시 나의 사랑과 나의 전부를 올려드릴 수 있는 믿음의 백성과 사랑의 자녀들로 우뚝 설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복은 영생(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저주는 사망(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죄의 결과는 사망(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 저주의 정의

저주는 다른 사람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행위 또는 그러한 행위에 의해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로 시기심이나 앙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사람을 해치기 위한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주는 저주를 행하는 사람(저주자), 저주행위 그 자체, 그리고 저주를 받는 희생자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2. 저주 발생의 원인

저주는 대부분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원한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시기심, 앙심, 원한 등으로 인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걸어 재앙이나 불운을 빌고 바라는 행동이 벌어집니다. 저주는 희생자를 타겟으로 하여 발생합니다.

3. 저주의 종류

저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일부 저주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언어적 저주: 저주의 내용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경우입니다. 함께 저주의 내용을 들어낸다면 상대방에게 유해한 힘이 전해질 것입니다.

– 물리적 저주: 저주의 내용이 물체나 물건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저주된 인형, 사피엉겅퀴, 나비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정신적 저주: 저주의 내용이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입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은 저주의 내용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 인터넷 저주: 인터넷 시대에는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저주가 전파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익명으로 저주를 행하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저주의 역사

1. 고대와 중세의 저주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저주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외에도 다양한 저주가 존재하였으며, 신화나 전설을 통해 전해져 왔습니다. 이러한 저주는 종교나 주술적 신념과도 연관이 깊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 현대 저주의 양상

현대 사회에서는 저주에 대한 믿음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저주에 대한 흥미와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특히 문화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지역에서는 저주에 대한 믿음과 전승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저주를 응용하여 갈등 조장이나 대리 감정 표현의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3. 인터넷 시대의 저주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저주 역시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였습니다.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익명성을 통해 저주를 행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주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는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주는 인간관계나 사회적 갈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며, 믿음과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에 대한 이해와 예방이 필요하며, 상호 존중과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저주의 영향과 결과

1. 저주가 일으키는 재앙과 불행

저주는 사람들에게 재앙과 불행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며, 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들이 전해져왔다.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운명적인 사고들에 직면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건강 문제, 재정적 문제, 가족 관계의 파괴, 사랑과 우정의 손실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저주에 의해 일으키는 재앙은 종종 예측 불가능하며,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주목도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저주 받은 후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한 경우에는 이 사건에 대한 주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2. 저주 피해자의 심리적 영향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저주가 일으키는 불행한 사건들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고 우울감과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비난과 혐오에 직면하게 되어 사회적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영향은 피해자의 삶과 건강에 영향을 주며, 장기적으로 심리적인 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저주 피해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치유와 회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저주 해제와 대처 방법

저주를 해제하고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부 사람들은 주술적인 절차를 통해 저주를 해제하려고 할 수 있으며, 종교적인 지도자나 치유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자기 성찰과 내면의 변화를 통해 저주의 힘에 대항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피해자는 자기 자신을 믿고, 긍정적인 자기 대화를 실천하며, 사랑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전문적인 심리치료나 상담을 통해 심리적인 회복을 추구할 수도 있다.

4. 저주와 사회적 관심

1. 저주와 민간신앙, 민간의료

저주는 민간신앙과 민간의료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많은 문화와 사회에서 저주는 믿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저주를 해제하는 민간 신성한 의식들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특정 신앙 체계나 민간의료 시스템에서는 저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신앙이나 치료 방법을 통해 저주를 해제하려는 시도를 한다. 따라서, 저주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와 인식은 민간신앙과 민간의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 저주와 범죄, 폭력

범죄와 폭력과 저주는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요소이다. 저주는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응답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저주 행위는 폭력과 범죄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저주는 개인 간의 갈등이나 복수에 사용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저주와 관련된 범죄나 폭력 행위에 대한 예방과 처벌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3. 저주와 사회적 편견, 혐오

저주는 종종 사회적인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저주는 사회적인 비난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다. 이는 편견과 혐오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일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적인 이해와 연대감을 통해 이러한 편견과 혐오를 극복하고, 모든 개인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저주는 개인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저주는 개인과 사회의 건강과 안녕을 위협할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예방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저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사회적 관심을 갖고, 피해자의 심리적인 회복과 사회적인 지지를 제공해야 한다.







성경은 죽음을 ‘세 가지’로 구분지어 말한다.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이다. 이 셋은 하나 하나의 ‘독자적인 의미’와 함께, 또 ‘상호 연관성’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특히 후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하며, 나아가 ‘죽음’의 상대적 개념인 ‘생명’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했을 때, 그 ‘죽음’의 의미는 그 모든 의미들을 두루 함의했다.

◈영적인 죽음

성경이 사람을 ‘죽었다 살았다’고 말할 때, 다는 아니지만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을 의미한 경우가 많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고 하신 말씀에서도, ‘죽음’ 역시 ‘육체의 죽음’ 이상의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영적인 소경인 유대인들은 그것을 ‘육체의 죽음’에 한정지었다.

이는 이어진 그들의 대구(對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 8:52).”

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롬 5:10, 엡 2:12)’과 그로 인한 ‘하나님 무지(엡 4:18 살후 1:8)’를 의미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창 3:6)’ 후 그가 분명 죽었음에도 그의 육체가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은(물론 그 후 얼마간 살다가 죽었기에 죽음은 영육(靈肉)을 다 함의한다),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인 소멸’ 이상의 ‘관계의 단절’임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경험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슬픈 것은 그의 ‘육체의 소멸’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 인해 다신 볼 수 없는 ‘관계의 단절’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죄로 인한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 최종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여기서 ‘구원’을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성자’를 ‘화목 제물’로 표현한 것은 ‘죽음’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임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피할 수 없는 첫째 사망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 육체의 죽음은 응당(應當)한 결과이며,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의 적용은 신·불신자(信不信者)의 구분이 없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모든 인류에게 ‘육체의 죽음’은 보편적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성경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죽음을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25:8; 35:29; 49:33)”고 표현한 것은, 그들도 그의 조상들처럼 예외 없이 ‘죽음의 길’로 갔다는 말이다. (물론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승천한 에녹(히 11:5)이나 엘리야(왕하 2:11) 같은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한 이치(히 9:27)’이기에, 아무리 인간이 그것을 피하려 노력을 하고 의술을 발달시킨다 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육체의 죽음’이 ‘죄의 심판(the judgment of sin)’의 성격을 갖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결과(the result of sin)’라고 함이 더 적절하다. 이는 그것이 그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신·불신자(信不信者)에 따라 그것이 ‘영생의 축복(the bless of eternal life)’, ‘영원한 저주(the eternal curse)’에의 관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복되다(계 14:13)’고 한 것은 그것이 그들을 ‘영생의 축복’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듯, 믿는 성도에게 죽음은 천국 입성을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도의 육체 죽음’을 ‘금세에서 천국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이다’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해설서 저자인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 역시 ‘육체의 죽음’을 ‘죄의 결과’요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정의했다.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형벌로 임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망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죄의 결과로써 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찌르는 것이 못된다. 그것은 비참에서 벗어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라고 했다.

◈피할 수 있는 둘째 사망

심판을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계 20:14)’으로 명명한 것은 모든 죄인에게 정해진 ‘육체의 죽음(히 9:27)’ 이후에 따라오는 죽음이라는 뜻에서다. 그리고 그것은 ‘앞의 죽음’과는 달리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원한 죽음(살후 1:9)’혹은 ‘영벌(마 25:46)’이라고도 한다.

이는 율법으로부터 요구받는 ‘영원한 성자의 죽음(히 13:30)’, 곧 ‘영원치(value of eternity, 永遠値)의 죄삯’이 지불되지 않은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형벌’이지만 앞의 경우들처럼 하나님이 사전에 피할 길을 열어주셨다. 곧 성자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주어(마 20:28) 우리로 하여금 ‘죄삯 사망’을 지불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면 하나님께 ‘죄삯’을 지불한 것으로 인정받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의 해를 받느냐 안받느냐는 죄인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하는 선택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죄삯 사망’을 갚아주신 대속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도 ‘그의 죽음을 내 죄삯으로 받아들여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말씀도 그 뜻이다.

‘둘째 사망’의 ‘죄목(罪目)’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지 않아 율법이 그에게 부과한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한 죄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죄삯’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대속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지 않아, ‘그의 피를 부정하게 만들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히 10:29)’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들(갈 2:21)’이라고 비난한 것은 같은 죄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는 자들은 그의 죽음을 존귀하게 하는 자들이다. 할렐루야!


신명기 28:6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니출야몽복(你出也蒙福) 입야몽복(入也蒙福)
구절을 한문 성경으로 소개합니다.


  • 1. 입다
  • 2. 어둡다
  • 3. 날리다
  • 4. 두껍다
  • 5. 입힘



신명기 28:6
你出也蒙福,入也蒙福。
니출야몽복   입야몽복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受 받을 수(受) 



복을 받으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You will be blessed when you come in and blessed when you go out.)"(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니출야몽복. 伱出也蒙福) / You will be blessed when you come.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입야몽복. 入也蒙福) / You come in blessed when you go.

저주를 받으면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You will be cursed in the city and cursed in the country.)(신 28:16)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니출야수저주. 伱出也受詛呪)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입야수저주. 入也受诅咒)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니출야몽복(伱出也蒙福) 입야몽복(入也蒙福)
신명기 28:6
你出也蒙福,入也蒙福。
니출야몽복   입야몽복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너 니(이)
부수
亻(사람인변)
총 획수
7획
획순보기
1.
2.
당신(當身)



어두울 몽
부수
艹(초두머리3)
총 획수
14획
획순보기
1. (사리에)어둡다.  2. 어리석다. 3.속이다, 기만하다(欺瞞--: 남을 속여 넘기다)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받을 수

저주(詛呪)


저주할 저
부수
讠(말씀언2)
총 획수
7획


빌 주
부수
(입구, 3획)
모양자
吅(부르짖을 훤) + 几(안석 궤)
총획수
8획


1.
저주하다(詛呪ㆍ咀呪--)
2.
맹세하다(盟誓--)
3.
헐뜯다


저주를 받으면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You will be cursed when you come in and cursed when you go out.)"

복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영생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시편 133:1).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저주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3월 5일(수) 신명기 24-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공의로운 재판(신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When men have a dispute, they are to take it to court and the judges will decide the case, acquitting the innocent and condemning the guilty.


재판(裁判) 마를재, 판달할 판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정의(창18:19), 법(렘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שָׁפַט 스트롱번호 8199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shâphat ]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신명기 1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잠언 31: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찌니라.

공의로운 재판
-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라

(공동번역)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주어라.
(현대인의 성경) 입을 열어 공정한 재판을 하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어라.
(새번역) 너는 공의로운 재판을 하고, 입을 열어, 억눌린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의 판결을 바로 하여라
(새한글) 네 입을 열어서 공의롭게 판가름하고, 불쌍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라.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라는 소리는 세상 법정에서 들려오는 탄식과 절망의 외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의로운 재판"을 강조합니다.
'공의로운 재판'이란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라"고 가르칩니다.
'간곤한 자'는 "불쌍한 사람" "억눌린 사람"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궁핍한 자'는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억울하고 아픈 사정을 기도로 아뢸 때 먼저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분명한 심판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의 심판
둘째는 세상의 심판
셋째는 역사의 심판
넷째는 하나님의 심판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재혀 옵니다.
어떤 랍비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내가 자기 집안의 돌을 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있었습니다.
랍비는 '왜 그런 짓을 하시오?' 하고 물었으나 사나이는 웃기만 합니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이 사내가 자기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땅을 남의 손에 넘기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첫발을 떼는 순간 전에 자기가 버렸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자기가 한짓을 잊고 있었을지라도 반드시 어느 때가 되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가 마실지도 모르는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말라"는 속담처럼 내가 무심코 행한 일이 머지않아 내게 그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일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솔로몬의 재판 (The Judgment of Solomon)은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 주장하는 상황에서, 솔로몬이 모성 (母性)을 이용해 참 어머니를 가려낸 사건이다.
솔로몬이 재위 시절 관여한 수많은 소송 중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재판으로, 그의 뛰어난 지혜를 보여준다.

솔로몬의 재판 – 서론

솔로몬의 재판(The Judgment of Solomon)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재판관들과 지혜를 바라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즉위를 시작으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 기록된 열왕기(列王記)에는 솔로몬의 재판 중 단 한 건만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열왕기상 3장 후반부에는 당시의 사건과 재판 과정, 결과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스바의 여왕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솔로몬은 기원전 10세경 실존했던 인물로,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받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백성들의 송사를 판결했다. ‘솔로몬의 지혜’라는 고사성어를 남기고 ‘지혜의 왕’이라 불린 그는 구약성경 중 잠언, 전도서, 아가, 시편 중에서 72편과 127편을 썼다.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에게 지혜와 총명을 허락받은 솔로몬이 3,000개의 잠언을 말하였고 1,005편의 노래를 지었고, 자연과학에도 능통했다고 전하고 있다(열왕기상 4:29~33).

솔로몬의 재판 – 어머니의 본성을 꿰뚫은 혜안과 재치

부왕 다윗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솔로몬은 등극한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이끌고 기브온 산당에 가서 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 그날 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처럼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열왕기상 3:2~15, 역대하 1:1~13). 당시 왕정(군주정치) 체제였던 이스라엘은 왕이 사법적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왕은 백성들의 소송 문제를 공정하게 판결해주거나 사법제도를 공고히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사무엘하 15:2~4, 역대상 23:4, 역대하 19:5~10). 이 때문에 지혜는 솔로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었다(열왕기상 3:6~9). 하나님은 부와 무병장수 등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솔로몬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부귀영화와 명예까지 허락해주셨다.

열왕기 기자는 기브온 산당에서의 일천 번제 제사에 이어 곧바로 솔로몬의 재판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받은 지혜로 기막힌 판결을 내렸던 바로 그 사건이다(열왕기상 3:16~28).

〈솔로몬의 재판〉,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집에 사는 두 여자가 한 아기를 놓고 소송이 붙었다. 이를테면 친자확인 소송이었다. 고소인의 진술에 의하면 사건의 요지는 이러했다. 두 여자는 3일 간격으로 남아를 출산했다. 그런데 피고인 신분의 여자가 자신의 아기를 압사시키고 만 것이다. 그녀는 사건을 은폐하고 죽은 자신의 아이를 고소인의 아이와 바꿔치기했다. 다음 날 아침 고소인이 수유를 하려고 보니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여자는 왕 앞에서도 살아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방을 벌였다. 오늘날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DNA 감식과 같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자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심리 자체가 불가능한 송사나 다름없었다. 물증은커녕 증인이나 심증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 난해한 사건을 단번에 종결 지었다. 아기를 둘로 잘라 반씩 나누어 주라고 판결한 것이다. 솔로몬의 이 주문(主文)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모성애라는 본성을 꿰뚫은 혜안과 재치 넘치는 이 한마디에 한 여자가 고통에 떨며 아기의 생명을 보전해주기를 청원하며 양육권을 포기한다. 고소인이었다. 그녀의 행위는 그녀가 진짜 어머니라는 결정적 증거였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앞에 있는 스바 여왕〉, 살로몬 드 브레이(Salomon de Bray).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솔로몬의 생애에 수많은 사건을 해결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성경에 남아 있는 재판 기록은 이것이 유일하다. 솔로몬에 대한 소문은 인근 나라에까지 퍼졌고, 스바의 여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배우기 위해 찾아와 조공했다(열왕기상 4:29~34).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

이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을 예로 들며 표적을 구하기보다 지혜를 배우기를 교훈했다(마태복음 12:42, 누가복음 11:31). 영혼 구원의 중요한 문제가 솔로몬의 지혜에 담겨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서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잠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을 남겼다(잠언 9:10). 이것은 다윗의 말이기도 하다(시편 111:10).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책망한 바 있다(호세아 4:1~6). 영혼 구원에 있어 가장 필요한 지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실제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 외에도 하늘 어머니, 즉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구절에 걸쳐 암시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천사를 통해 어린양의 아내 될 신부를 목도할 기회를 얻는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한복음 1:29). 즉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그리스도의 아내를 보여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사가 보여준 것은 하늘 예루살렘이었다(요한계시록 21:10). 사도 바울은 요한보다 먼저 하늘 예루살렘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해놓았다.

오직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요한과 바울의 증언을 연결하면 하늘 예루살렘의 실체가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천사를 통해 또 다른 어미를 목도한다. ‘큰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다(요한계시록 17:1~5). 성경은 솔로몬의 재판들 중 단 한 건의 재판 기록을 남김으로써 독자들에게 진짜 어머니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자녀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 진짜 어머니를 가려냈다. 마지막 시대에 자녀의 생명을 살리는 하늘 예루살렘은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축복은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진짜 어머니를 분별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것이다.


솔로몬의 재판이 왜 명판결일까?

솔로몬의 판결이 소개된 열왕기상 3장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면

3:1-3. 애굽 와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솔로몬
3:4-15.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후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3:16-28. 두 여인의 주장에 대한 판결

9-14.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
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게 하리라.

솔로몬 판결에 담긴 심리학 통찰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해

솔로몬의 전략은 어머니의 사랑은 이타적이라는 보편적인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녀가 다치는 것을 보기보다는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포기하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진정한 어머니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이러한 본능에 호소했습니다.

감정 자극의 활용

솔로몬의 양육권 나누기 제안은 심리 조작의 탁월한 활용이었습니다.
이 제안은 두 여인이 속임수와 수사를 피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드러내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의와 공감의 균형

아이의 양육권을 나누라는 명령은 가혹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해를 입히지 않고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계산된 행동입니다.
솔로몬의 접근 방식은 엄격한 정의와 자비로운 이해 사이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판결에서 배울 수 있는 문화적, 도덕적 교훈

정의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솔로몬의 판결은 진정한 정의는 진실을 추구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공정성을 추구하려면 종종 표면적인 외양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더 깊은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리더십에 있어서 지혜의 힘

이 이야기는 리더십에 있어서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결정은 법에 근거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통치에 필수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도 근거로 삼았습니다.

모성애의 보편성

이 이야기는 모성애의 보편적인 개념을 다루기 때문에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자녀 양육에 내재한 이타심과 희생에 대한 증거입니다.

솔로몬의 리더십 심리학

1. 지혜로서의 감성 지능

솔로몬의 리더십 스타일은 감성 지능, 즉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능력의 좋은 예입니다.
그의 결정은 논리적 추론과 정서적 공감 사이의 균형을 일관되게 반영했으며, 이러한 조합을 통해 그는 사람들과 연결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감성 지능은 효과적인 리더십의 초석으로 간주합니다.
상황의 감정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리더는 추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큽니다.

2. 권력 속의 겸손

솔로몬은 당시의 많은 통치자들과는 달리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위치에 접근했습니다.
부와 권력보다 지혜를 구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리더십이 특권이 아니라 봉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그를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했고, 공정한 왕으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했습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겸손은 열린 마음과 자기 인식을 촉진하기 때문에 리더에게 중요한 특성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3. 정의와 자비의 균형

많은 경우, 솔로몬의 결정은 정의와 자비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맞추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모든 상황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균형은 사람들이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탐구하는 도덕 심리학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예를 들어, 두 여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솔로몬의 해결책은 법적 판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통찰력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4. 신성한 지혜의 역할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솔로몬이 신성한 지혜에 의존한 것은 더 높은 도덕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의존은 솔로몬이 지도자들을 괴롭히는 오만과 탐욕의 함정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더 넓은 윤리적 틀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위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현대적 해석

솔로몬의 판결 이야기는 역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재해석되어 왔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종종 감성 지능과 비판적 사고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인용됩니다.
법과 윤리에서는 공정하고 통찰력 있는 판단을 위한 은유로 사용됩니다.

이 이야기는 리더십, 정의, 인간 상태에 대한 토론을 계속 불러일으킵니다.
지혜는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해하고 진리와 연민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솔로몬의 현명한 판결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성경 기록 그 이상입니다.
정의, 사랑, 리더십의 영원한 원칙을 말하는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갈등에 어떻게 접근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서 공정성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지혜

솔로몬의 판결에 대한 심리학은 지혜, 겸손, 그리고 연민의 힘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는 리더와 개인 모두에게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의사 결정, 갈등 해결, 진정한 리더십 등 우리 삶에서 솔로몬의 모범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성과 공감, 힘과 겸손, 정의와 연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시대의 도전에 맞서고 미래 세대를 위한 지혜의 유산을 남길 수 있습니다.


자궁(라함. racham) רַחַם 스트롱번호 7356

1. 자궁.   2. 처녀
발음 [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회 사용
  • 1. 명사 자궁, 창 49:25, 사 46:3
  • 2. 명사 처녀, 여자, 삿 5:30.
  • 관련 성경 /  은혜(창 43:14), 사랑하는 마음(창 43:30), 위하는 마음(왕상 3:26), 긍휼(신 13:17, 느 9:27, 28, 시 51:1),
    불쌍히 여김(왕상 8:50, 슥 1:16), 자비(대하 30:9), 긍휼하심(시 25:6), 은혜(느 1:11), 태(창 49:25, 잠 30:16, 사 46:3), 처녀(삿 5:30).

7355.
רָחַם 스트롱번호7355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 47회 사용
  • 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 18:2(1).
    • 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 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 관련 성경
    ☞사랑하다(시18:1), 긍휼히 여기다(신13:17,왕하13:23, 사49:10), 자비하다(시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8:50, 시103:13, 사27:11).[명] 자비(렘6:23, 애3:32), 긍휼(겔39:25, 합3:2), 로루하마(호1:8), 루하마(호2:1).




긍휼


צִדְקָה 6665 [tsidqâh]

  • 명사 너그러움, 긍휼, 의로움, 단4:24(2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חֶמְלָה 2551 [chemlâh]
  • 여성형 명사 자비, 동정, 긍휼,인자함, 고상함, 예의바름, 창19:16, 사63: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שָׁחַת 7843 [shâchath]
  • 1.

    원형 [비유로] 긍휼을 버리다, 암1:11

  • 2.

    원형 피엘형 שִׁחֵת

  • 3.

    원형 파멸하다, 폐허가 되다, 창9:11, 19: 13, 수22:33, 삼하24:16, 렘12:1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성경에 보면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온다.
다윗이 이스라엘 최고 번영기를 만들어 놓고 그 아들인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다고 한다.

그 지혜가 발휘된 명장면 중 하나가 위 솔로몬의 재판이다.

같은 집에 기거하던 두 여인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만 한 여인이 자던 중에 자신의 갓난아기를 압사시키고 말았다. 아침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 여인은 옆에서 자고 있던 다른 여인의 품에 있던 갓난아기를 자기에게로 가져 오고 죽은 자신의 아기를 그 여인의 품에 슬그머니 바꿔치기하여 놓았다. 영문도 모르고 일어난 다른 여인은 자신의 품에서 아기가 죽은 걸 보고는 자신의 아기가 아님을 직감한다. 죽은 아기의 엄마에게 내 아기를 내놓으라고 하자 바꿔치기한 여인은 자신의 품에 있는 아기가 자기 아기라고 우기며 발뺌한다. 이 두 여인이 솔로몬 앞에 호소하러 나온 것이다.

솔로몬은 두 여인이 모두 산 아기의 어미라고 우기고 있으니 ‘아기를 두 쪽으로 갈라 반반씩 나눠 주라’는 명령을 내린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부하들이 그래도 왕의 명령인지라 칼을 들어 아기를 두쪽내려 한다. 아기의 진짜 어미는 아기가 죽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절규하며 아기는 저 여인의 아기이니 제발 죽이지 말라 호소한다. 반면 가짜 어미는 아무런 감흥이 없이 아기의 반쪽이라도 갖겠다고 한다. 이를 본 솔로몬은 부하들의 칼을 멈춘 후, 아기가 죽을 것 같아 절규하던 여인에게 ‘이 여인이 아기의 진짜 어미이다’라며 아기를 안겨 준다는 것이, 이 솔로몬의 재판의 내용이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기의 생명을 두 쪽 내라는 게 어떻게 지혜로운 판결인가? 어떻게든 두 여인의 말을 들어 보고 부하들을 시켜 주변 인물들에게 증거를 수집해서 누가 진짜 어미인지 따져보는 소위 ‘탐문수사’도 해 보지 않았다. 오늘날 같으면 DNA수사 하나면 끝장날 텐데, 당시는 그러한 기술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기를 둘로 쪼개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기가 죽게 될 상황 앞에서 진짜 어미의 모정이 불일 듯 발현될 것이라는 점을 노렸던 것이다. 제 아기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 승소판결을 받아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가짜 어미는 이런 모성애가 발휘될 리가 없다. 이 점을 간파하고 솔로몬은 아기의 죽음 앞에서 모성애를 발휘하는 여인이 진짜 어미라는 진리를 극적인 연출을 통해 설파한 것이다.

사안의 진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 양쪽 다 꼼짝없이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억눌려 있는 억울함을 풀어 주고 무고한 사람 뒤집어씌우는 잘못된 고발자들의 입을 할 말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 헝클어진 실타래 같이 내 앞에 놓여진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줄 수 있는 맥을 잡아주는 그 무언가, 솔로몬은 이 무언가를 해당 사안마다 간파하는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생활 역시 다르지 않다. 신의를 베풀었는데 대가는 오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이기적인 마음과 사기 치려는 뻔뻔한 마음을 마주할 때, 열심히 일하려던 것뿐인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영문 모를 소환 통보를 받을 때, 평상시는 화목했던 가정이 재산을 둘러싸고 갑작스런 불신과 다툼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과 불안함이 갑자기 닥칠 때, 우리 모두에게는 솔로몬의 재판이 필요하다.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 속에, 이 무언가를 발견해 주고 짚어 내 주고 판단해 주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모든 법조인들 역시 솔로몬의 재판 속에 있는 이러한 지혜를 본받고 실력을 가다듬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솔로몬의 재판을 경험하는, 정말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라

  1. 다윗은 억울한 상황에서 인간적인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쫓아오는 대적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건지소서" (1절)
  2. 우리의 삶에서도 억울함을 느낄 때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복수나 판단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기도합니다.
    👉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1절)
  4. 악인의 죄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며, 하나님은 의인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5. 악인의 최후와 의인의 승리
    악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세우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감사와 찬양을 고백합니다.
    👉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5절)
    👉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하며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17절)
시편7편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1.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의 자세
    억울함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맡기고,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라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높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공의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3. 감사와 찬양의 삶
    다윗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믿음의 표현이며, 우리의 삶에 기쁨을 더합니다.
시편7편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

마무리하며

시편 7편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했던 다윗의 간구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확신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겪고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기도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기고,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월 4일(화) 신명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총회(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No Ammonite or Moabite or any of his descendants may enter the assembly of the LORD, even down to the tenth generation.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
-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의 두 딸 간의 근친 상간으로 인해 태어난 족속(창 19:36-38)으로서 원래는 이스라엘과 화친(和親)할 대상이었다(2:9,19).
그러나 이 두 족속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방랑할 때 호의를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화친 제의에도 불구하고 이방 선지자 발람(Balaam)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었다(민 22:1-24:25).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방해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한 죄를 범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는 것이 영원토록 금지되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총회(the assembly of the LORD)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식 집회나 제사(예배)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자가 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신 말씀처럼(마 22:14) 비록 이스라엘 가운데 속한 자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는 참석할 수 없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1절).

‘신낭’즉 생식기가 상하거나 거세되어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신낭이 상했다 하심은 겉으로 보기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가라지처럼 겉만 그럴듯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신을 베인 자”라는 말씀은 또 그 당시 이방신을 섬기는 가나안 풍습을 따라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방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치겠다고 ‘신을 베어 맹세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겠다고 사탄에게 영혼을 파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2. 사생자(맘제르)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2절).

사생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맘제르’는 원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킵니다.
스가랴 9장 6절에서는 이 단어를 ‘잡족’으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학자들은 ‘맘제르’를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자식’으로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70인 역에서는 이를 ‘음행의 자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생자란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또 죄의 결과로 태어난 자녀를 의미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혈통적 신앙적 순결을 지키지 못한 자, 또 죄의 결과로 태어난 자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 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5)하십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만이 여호와의 총회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3.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3절).

암몬과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두 딸 사이에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족속입니다(창 19:36-38).
사생자로 태어난 이 두 족속은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갈 때, 발람 선지자를 매수하여 저주를 내리려 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했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모압 여인을 통해 간음죄,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함으로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와 심판의 길로 이끌어갔던 족속들입니다(민 25:1-3).

이처럼 암몬과 모압은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려 멸망의 길로 이끌어간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3).

오늘날에도 믿음의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는 어둠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려고 애쓰는 세계정부주의자들과 성도들을 미혹하여 배도의 길로 이끌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신 모압과 암몬 족속들인 것입니다.

4. 에돔과 애굽 사람은 삼 대까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7, 8절)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또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긴 했지만, 사실 가나안 땅에 7년 기근이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받아줌으로 저들이 기근으로 죽지 않고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에돔과 애굽 사람들은 삼대가 지나가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8)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형제인 에돔과 이스라엘을 어려움 중에 돌봐준 애굽 사람들에게는 삼대가 지나면 여호와의 총회에 함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겠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7년 대환난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형제인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푼 자들에게는 “예비 된 나라(천년왕국)를 상속하는”(마 25:34) 축복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창 12:3)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돕고 축복하는 자에게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사생자와 암몬과 모압 족속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 하셨지만, 사생자요 모압 족속임에도 메시아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맺고 낳은 아들 베레스(마 1:3)와 모압 여인 룻(마 1:5)이 그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자들을 엄격히 규정하는 법이 있었지만 이를 초월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방인 된 우리도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총회(23:1, 2<2번>, 3<2번>, 8) - 6회 반복

신명기 23:1-8. 여호와의 총회에 관한 내용
신명기 23:9-14. 이스라엘 진영을 거룩하게 하는 것
신명기 23:15-25.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의 규정


신명기 23:1-8 /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

“여호와의 총회”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총회”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 처음으로 사용된 말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모임을 말합니다.
이 총회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면 자동적으로 들어오거나 이방인이라서 들어 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격을 하나님께서 정하고 계십니다.

1-2절은 신체의 일부가 손상된 사람들과 사생아에 관한 것으로 종교적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스라엘백성 중에서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을 따라서 이방 신전에서 우상에게 행하는 제사의식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바치거나 손상시킨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이방신전에서 창기들과의 음행으로 태어난 사생아로 그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엄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드려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총회에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의식 등이 들어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성을 더럽히고 총회를 영적으로 와해시킬 수 있는 나쁜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3-6절의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이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데 이들은 룻의 후손들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갈 때 돈을 주고 떡과 물을 사고 그들의 진영 안의 길을 어떤 훼손이나 폐를 끼치지 않고 지나가겠다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압의 왕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7-8절에서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들에 대하여는 관대하여 그들의 3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에돔 사람은 에서의 자손들로 이스라엘의 형제이기 때문이고,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릴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 구해주었고 또 그들이 애굽의 비옥한 땅 고센에 정착하여 살도록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 민족으로 태동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400년이 넘도록 고통가운데 살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그들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돌아 본 것들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나 은혜를 받았어도 섭섭한 일이 한 두 가지라도 생기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말씀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 23:9-14. 이스라엘 진영을 거룩하게 하는 것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군 진영을 정결하게 하는 규례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군인들의 전쟁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쟁이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서 도덕적 정결함을 지키게 하셨고, 개인의 부정하게 된 것은 정결케 되는 의식을 요구하셨습니다. 군대 진영에서는 질병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위생적 청결함을 지시하심으로 공동생활을 하는데서 생길 수 있는 불결함과 전염병들로부터 군대를 보호하셨습니다.

신명기 23:15-25.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의 규정 

세 번째 부분에서는 공동체 생활에서의 실제적인 규정들입니다.

15-16절에서는 주인을 피하여 도망한 종에 관한 것으로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인으로부터 피신해 왔다면, 그들을 돌려보내지 말고 보호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탈북자 문제와 난민의 처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통과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탈북하다 죽을 수 있다는 것 보다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따뜻하게 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18절은 종교적인 매춘을 엄격하게 금하셨고, 오늘날과 같이 음란한 대중매체가 일반화되어 있는 시대에 적용해야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19-20절에서는 형제가 어려워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내가 가진 것을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

21-23절은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하지 말며, 서원한 것은 속히 갚아야 합니다.

24-25절은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너무 인색하게 하지 말고 급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존중하시고, 약자를 배려하시며 형편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하나님의 공동체에 소속된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상과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색하여 거절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오래전에 입었던 은혜를 잊지 않고 성숙하게 감사하며 보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친히 함께하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승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정결케 하십니까?

어렵고 핍박당하는 이웃을 엄격한 법이 아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돕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며 오늘 한 가지씩 실천하여, 이 질문들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안에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받아 들여 주신 것을 기억하며 마음과 삶이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 볼 수 있는 주님 나라의 한 일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살면서 나그네 된 사람들과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읽은 말씀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와 용어를 살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신명기 23장에서는 "여호와의 총회"라는 용어가 6번 반복됩니다(1절, 2절에서 2번, 3절에서 2번, 8절).
성경 전체적으로 "여호와의 총회"라는 용어가 15구절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신명기 23장에서 4구절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비중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총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호와의 총회"는 거룩한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일까요?

 

1) 어떤 분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거기 기록된 대로 ‘고환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나 사생자나

모압 사람이나 암몬 사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즉 장로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로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2)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총회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모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민권이나 영주권 같은 개념이 없었지만

오늘날의 용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언제나 타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라”(출12:48).

 

할례를 받으면 이방인도 본토인과 같이 시민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총회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총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혼으로 이루는 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결혼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뉘앙스를 전혀 풍기고 있지 않습니다.

 

4)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여호와의 총회는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의 상황으로 볼 때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의 군사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9절), 모인 사람들이 여호와의 총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전쟁은 보통 전쟁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영토를 확장하거나 노략물을 차지하거나 국가의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여타의 전쟁 목적과는 다른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악이 극한에 달한 자를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전쟁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극한에 달해서는 안 됩니다.
극한에 달하지 않으면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극한에 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죄악이 극한에 달했을 때 하나님의 징벌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둘째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정착해서 전 세계 민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야가 오실 지리적, 정신적, 영적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첫째는 징벌의 목적
둘째는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군사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능력이나 잘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물러설 수 없는 신앙, 절대 순종의 신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군사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서 제외되는 자 

첫째, 고환이 상한자나 음경이 베인자(1절)
내시, 환관, 고자 등을 말합니다.

고환이 상했거나 신을 베인 자를 오늘날의 용어로 내시, 환관, 혹은 고자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내시나 고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 집사의 전도로 구원을 받아서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이사야서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라”(사 56:4-5)

 

그렇다면 이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이방 종교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 스스로 고환을 상하게 하거나 신을 베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향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총회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생자(2절)

세상에서 말하는 ‘사생자’는 혼외자식을 가리킵니다만, 본문이 말하는 사생자(메므제르)는 ‘이방 신전에서 창기노릇을 하는 여인의 자식’, 또는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자녀, 더 넓게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인데, 불법적인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방인과 정식 결혼해서 태어난 경우는 아님)

 

이방 종교는 모두 농사에 관련된 종교입니다.

하늘에 있는 신들이 비를 내려주어야 농사가 잘 된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방종교를 섬기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신들이 연애를 해야 비가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이방 신전에서 하늘의 신들의 연애감정을 자극하는 음란한 행위를 남발했습니다.

 

따라서 이방 신전에는 언제나 창기와 미동이 있었습니다.

이 창기가 낳은 자식을 가리켜서 본문은 ‘사생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생자들은 어려서부터 이방 신전의 창기 노릇을 하는 어머니에 붙들려

이방 종교에 얽매였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암몬사람과 모압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3절).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후손들입니다.

롯의 후손들이기는 하나 족보가 아주 지저분합니다.

롯의 두 딸들은 후손을 얻겠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롯에게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족속들이 바로 모압과 암몬입니다.

암몬과 모압은 그 족보만 따져봤을 때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다”(4절)고 말합니다.

 

모세는 소극적인 이유와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소극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압과 암몬이

떡과 물로 길에서 영접치 않은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친척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무자비했기 때문에 모압과 암몬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무자비하기는 에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었음이니라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애굽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3대가 지나면 이스라엘의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독 모압과 암몬 족속만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적극적인 이유가 존재합니다.

바로 메소포타미아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민22~24장까지의 이야기가 바로 그 원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으며,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의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5절의 경고는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2. 여호와의 총회의 특권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총회에 주시는 특권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두 가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자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1) 첫 번째는 보상의 방법입니다. 욕을 많이 먹어도 먹은 만큼 복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삼하16장에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쫓길 때에

사울 집안의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계속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의 심복들이 시므이를 해하고자 할 때 다윗은 심복들을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12).

 

다윗은 사람의 저주를 하나님께서 복으로 바꾸어주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보상의 법칙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이 저주하고 욕할지라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이처럼 여호와의 총회는 복이 와도 복이요, 저주가 와도 복으로 바뀌는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두 번째 방법은 섭리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저주와 고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고통이 도리어 축복의 첩경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시기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후에 가뭄으로 인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나 “형들이 내게 고난과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것이 복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족들을 모두 살리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저주 받고 고통 받아서 ‘나는 망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보니 그것이 더 큰 축복의 첩경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섭리적인 방법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서에도 이런 섭리의 방법이 잘 드러납니다.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인 하만은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모르드개가 속한 유대민족을

모두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대인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지만 시간이 흐르자

도리어 하만과 그의 열 아들과 유대인의 대적 칠만 오천명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인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었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 가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저주가 도리어 축복이 되는 섭리의 기록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혹시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면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고난이

도리어 큰 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영적인 방법입니다. 저주와 핍박이 도리어 영적으로는

복음의 진보와 성도의 성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겪은 후, 흩어져서 더 빨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가끔 고난이 와야 기도하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살면 새벽기도하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조금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옵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아무래도 피상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몸이 병들고 연약해지면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이유 없는 저주와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도리어 그것을 통해 영혼이 겸손해지고 정화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큰 축복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롬8:18절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총회가 누리는 첫 번째 특권입니다.

 

▲2. 여호와의 총회가 누리는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중에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14절).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의 빽빽한 구름 가운데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 가운데 특별히 임재하십니다.

 

진 가운데 임하셔서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일하십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운행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로 구원하시고,

둘째로 대적을 우리 손에 붙이십니다.

 

1) ‘구원하신다’는 것은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를, 하나님의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지난주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눈이 충혈 되어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노안이 와서 수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눈이 노화되면 수축력이 떨어져서 눈 뒤에 있는 망막이 찢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수술을 해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한 기관입니까? 먼지 하나만 날아와도 순간적으로 눈꺼풀이 덮이면서

보호 받아야 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스가랴서에도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총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습니다.

 

2)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거하시며 <특별한 승리>를 주십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전쟁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우리의 손에 붙이시기 때문입니다.

 

군사력만 가지고 봤을 때는 열등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3. 여호와의 총회의 의무

 

그러나 여호와의 총회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의무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 의무는 한 마디로 ‘정결함’,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진을 거룩히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찌라”(9절)

 

첫째로 도덕적인 정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도덕적인 불결함이 있다면 모두 자복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심령의 거룩함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의식적인 정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 밖으로 나가고 진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10-11절)

 

어떤 사람이 몽설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인 불결함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불결함이 오게 됩니다.

 

레15:16절에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위생적인 청결함입니다.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11-12절)

 

화장실을 진 안에 만들지 말고, 진 밖에 만들며 용변을 볼 때에도 반드시 삽을 가지고 가서

용변물 위에 흙을 덮어 묻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위생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중세 천년의 역사를 교회사에서는 ‘목욕 없는 천년’이라고 말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집을 지을 때도

짐승하고 사람이 한 곳에서 살도록 건축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가장 유행한 병이 페스트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전쟁보다도 이 페스트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한 번 유행하면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 작품 중에 죽음에 대한 그림이 많고 중세의 신학이 내세론을 발전시킨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연옥 이론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위생규례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규례는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명기나 레위기 전체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혹시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거룩하고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어려울 때일수록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교회에 승리를 주시며

온갖 고난을 모두 축복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의 교회가 흑암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불결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털어 놓으시고

예수의 보혈로 씻음 받아 정결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마음껏 행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느13:1 그날에 모세의 책을 랑독하여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 오지 못하리니



1. [민수기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2. [민수기 20: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3. [신명기 23: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신명기 23: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5. [신명기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6. [신명기 23:8]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3월 3일(월) 신명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신 20: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When you march up to attack a city, make its people an offer of peac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 18:13)

완전하라(타밈. 8549) <tâmîym>  תָּמִים   

1. 완전한.  2. 온전.  3. 건전한
발음 [ tâmîym ]
어원  / 여성 תְּמִימָה, 85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관련 성경  /  정결한(겔  43:22), 흠 없는(출 12:5, 민 6:14, 겔 46:6), 완전한(창 17:1, 삼하 22:26, 시 101:2), 진실한(삿 9:16),
안전한(삼하 22:33), 온전한(욥 12:4).
[부] 종일토록(수 10:13), 진실로(욥 36:4), 정직히(시 84:11).
[명] 진실(삿 9:19, 시 15:2), 실상(삼상 14:41)

여호와 앞에
- 여기서 '앞에'에 해당하는 '임'(*)은 '~와 함께', '~에 의해서'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이는 성도가 거룩해 질 수 있는 길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도와 주어야만 됨을 시사해 준다(레 20:8; 빌 4:13).

완전하라
- 도덕적으로 최대한 정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이지 결코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자의적으로 무흠(無欠)해질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책(罪責)을 걸머지게 되었으며(시 51:5; 롬 3:10-12),
그러한 죄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공로에 힘입어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9:13,14, 26).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 19:19)

악(라. 7451)
רַע    


1. 나쁜.  2. 사악한.  3. 해로운
발음 [ raʽ ]
어원  / 748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45회 사용
관련 성경  /   악한(창8:21, 출10:10, 삿9:23), 해하는(창26:29), 못하는(창28:8), 파리한(창41:3), 흉악한(창41:21), 슬퍼하는(출33:4), 사나운(레26:6), 고난당하는(민11:15), 불길한(수23:15), 학대하는(삼하24:17), 악행하는(삼상3:39),흉한(왕상22:8), 좋지 못한(왕하2:19, 잠20:14), 심한(대하21:19), 근심하는(느2:10), 엄한(잠15:10), 험악한(잠15:15), 괴로운(전1:13),무익한(전4:8), 좋지 않은(렘42:6), 악(렘48:2), 독한(겔5:16), 나쁜(민13:19), 심한(전10:13), [부] 매우(욘4:1). [명] 죄악(창6: 5), 재앙(창19:19, 민14:37), 근심(창40:7, 느2:2), 재해(창44:29), 환난(창48:16, 왕상11:25), 화(출5:19, 신29:21, 전8:5), 속임(출21:8), (선)악(간)(창31:24, 민24:13), 흠(신15:21), 악질(신17:1), 악(민32:13, 삿9:56), 악행(삼하2:23), 재난(삼하10:19), 시비(삼하13:22), 원수(삼하18:32), 누(삼하19:35), 수색(느2:1), 곤경(느2:17), 고난(시34:19), 곤란(시88:3), 위험(시107:26), 손해(잠11:15), 행악자(잠24:20), 악한 자들(사57:1), 화(삼하19:7), 악(왕상20:7), 상해(시35:4), 모해(시71:24, 잠3:29), 행악(잠2:14, 사59:7). [동] 상심하다(삼하12:18).



제하라(바아르. 1197) [ bâʽar ] בָּעַר    

1. 게걸스레 먹다.  2. 소실하다.
발음 [ bâʽar ]
구약 성경  / 87회 사용
관련 성경  / 불이 붙다(민11:3), 불타다(삿15:14), 숯이피다(삼하22:9, 시18:8), 불붙다(에1:12, 민11:1, 사34:9), 태우다(사9:18, 레6:12), 살라버리다(욥1:16), 급하다(시2:12), 불붙듯 하다(시79:5, 89:46, 사42:25), 사르다(시83:14), 타다(사43:2, 신5:23), 횃불(사62:1), 무지하다(렘10:8), 일으키다(호7:4), 일어나다(호7:6), 어리석다(렘10:14, 51:17, 사19:11), 먹이다(출22:5), 제하다(신13:5, 19:19, 24:7), 내다(신26:13), 떼어두다(신26:14), 쓸어버리다(왕상14:10, 21:21), 쫓아내다(왕상22:46),놓다(출22:6), 불을 피우다(사50:11, 겔39:9, 렘36:22), 쇠약하다(민24:22), 불을 켜다(대하4:20, 13:11), 소멸하다(사4:4), 먹히다(사5:5), 황폐하게 되다(사6:13), 먹이다(출22:5), 불사르다(대하28:3, 겔5:2), 어리석은 자(시94:8), 용광로 불(말4:1), 숯불(겔1:13),번제(사40:16), 화목(사44:15).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 여기서 '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아르'( bâʽar )는 '태우다', '소비하다', '먹어치우다'란 뜻으로, 곧 불로 깨끗이 소각시키거나 혹은 먹어 치움으로써 흔적조차 없애는 것을 뜻한다.
이는 거룩한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떠한 악의 모양이라도 잔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탈리오 법칙(lex talionis)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법칙'을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혹은 반좌법(反坐法)이라고 하며,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당했을 때 복수하고자 하는 것, 더 나아가서 내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정도로 앙갚음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자칫하면 다시 반대편의 복수를 불러오고, 결국 대를 이은 복수의 연쇄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사투(私鬪)가 계속되면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한 조치가 바로 탈리오 법칙이었다.
권력 당국이 판단하여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똑같은 정도로만 복수를 허용하고, 다시 그에 대한 반대편의 재복수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제한의 복수가 가해지는 원시 상태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고대국가의 법질서 체제이다.

탈리오 법칙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기원전 1750년경에 제정하여 쐐기문자로 석비에 새긴 함무라비 법전을 들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조문은 잘 알려진 대로 "다른 사람의 눈을 뽑은 자는 똑같이 눈을 뽑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 사례들이 많이 있다.
"임신한 여자를 때려서 임신부와 태아가 죽으면 가해자의 딸을 사형에 처한다."
"의사가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으면 의사의 팔을 자른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아들의 두 손을 자른다."
"집이 무너져서 집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그 집을 지은 건축가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이슬람국가 중에 아직도 샤리아(이슬람법)에 규정된 대로 탈리온 법칙을 적용하는 나라들이 있다.
최근 이란의 종교법정은 여성의 얼굴에 황산 테러를 가해 눈을 멀게 한 남자에게 똑같은 처벌을 하기로 결정했다.
흉악한 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 눈에 황산 20방울을 떨어뜨리라는 판결은 너무 가혹한 느낌이 든다.
다른 나라 다른 종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는 결국 국가가 다시 한 번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공산주의자들은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미혹(迷惑) 합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라!"
그러나 성경은 평화를 누리려면 싸움의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깨우칩니다(신 20:11-14).

11.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14.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찌니라.

상대방이 평화를 원하여 성문을 열고 조공을 바치고 섬길 것을 약속하면 싸움이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평화를 싫어하고 대적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성을 포위한 후에 칼날로 그 성의 남자들을 쳐 죽이고 연약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종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죄경화된 사람들은 마치 전쟁이 없는 평화가 다가올 것처럼 사람들의 귀에 속삭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쟁이 없이 평화를 유지하고 회복한 때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죄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blessing' 이란 '피를 흘리다'라는 'bleed' 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 복은 거룩한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얻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4:6-8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가장 짧은 전쟁  - 38분간의 전쟁
1896년 잔지바르(현 탄자니아) :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을 기록한 전쟁은 록밴드 ‘퀸’의 리드보컬이며 그의 소망대로 전설이 된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지역)와 1896년 영국(대영제국)과 사이에서 일어난 총 38분의 전쟁이다.

교전 시간이 총 38분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분쟁이나 전투가 아닌 '전쟁'으로 칭해지는 이유는 분명 이 짧은 시간동안 제대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졌고, 군대가 투입되고, 교전을 통해 사상자가 나왔으며, 항복으로 마무리까지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위치한 섬으로 구성된 나라이며 섬의 넓이는 2,461㎢로서 서울특별시 면적(605.25 ㎢)의 약 4배 크기 정도로 작다.
인구는 약 130만 명 수준(2018년 기준)이이다.
이처럼 인구와 면적은 탄자니아 전체에 비해 미미하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강한 자치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전쟁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가장 긴 전쟁 -  335년 전쟁(1651년 - 1986년)
네델란드 : 실리 제도

335년 전쟁(1651년 ~ 1986년)은 네덜란드와 영국 남서쪽 해안 바깥에 자리 잡은 실리 제도 사이의 전쟁이다.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며, 총 한 발도 쏘지 않아 사상자도 가장 적은 전쟁이다.
사실 긴 전쟁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은 아마도 백년 전쟁(영어: the Hundred Years' War, 프랑스어: la guerre de Cent Ans)일 것이다.
실제로 가장 오랜 시간의 전쟁은 당연히 335년 전쟁이지만 백년전쟁은 긴 전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은 1337년에서 1453년 사이에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플랜태저넷 가와 발루아 가 양측 모두 여러 동맹자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로, 서유럽에서 가장 넓은 땅의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 116년에 걸쳐 싸운 장대한 전쟁이다. 기사의 최고 전성기이자 동시에 기사계급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이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고한 국민정체성이 싹트게 된 계기를 마련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의 기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입니다.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았을 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에 시라큐스라는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동상의 모습을 묘사해 보면 발에 날개가 붙어 있고 앞머리에는 무성한 머리카락이 있는 반면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습니다.
이 이상한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리시퍼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회
왜 날개가 발에 달렸습니까?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
왜 당신의 앞머리는 그렇게 무성합니까? 그것은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왜 뒷머리는 대머리입니까? 지나가면 도저히 다시 붙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참 행복의 의미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μακάριος, ία, ιον 스트롱번호 3107

1. 복된.   2. 행 26:2.  3. 마 5:3
발음 [ makariŏs ]

  • 문법설명 /  μάκαρ의 연장형
  • 관련 성경 /  복 있는(마5:3, 눅6:21, 고전7:40), 복된(눅14:15, 딤전6:15), 복이 되는(눅14:14), 복스러운(딛2:13), 다행한(행26:2), 복 받을(약1:25).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bless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으며,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로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거룩한 삶이 바로 축복된 삶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6-8)





3월 1일(토) 신명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율법서를 등사하라(신 17:18-19)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When he takes the throne of his kingdom, he is to write for himself on a scroll a copy of this law, taken from that of the priests, who are Levites.
It is to be with him, and he is to read it all the days of his life so that he may learn to revere the LORD his God and follow carefully all the words of this law and these decrees.

율법서를 등사하라(copy of this law)

등사하다(카타브. kâthab) כָּתַב 
스트롱번호 3789

1. 쓰다.  2. 기록하다. 3. 기술하다
발음 [ kâthab ]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관련 성경
☞기록하다(출24:12, 신6:9, 사10 : 1), 쓰다(출34:1, 겔37:16, 에3:12), 등사하다(신17:18), 그리다(수18:8,9), 등록하다(시87:6), 새기다(출39:30, 잠3:3, 합2:2), 계수하다(사10:19),쓰이다(욥19:23), 기록되다(신29:20, 왕상11:41, 사65:6). [명] 기명(민11:26), 율법책(느8:14), 기록(시139:16, 렘17:13), 편지(대하30:1, 32:17, 왕상21:9), 글(스4:6,7, 에9:23), 조서(에8:5, 3:9), 서명(욥31:35), 매매증서(렘32:12), 글자(출32:15).

새기다
출애굽기 39:30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잠언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피그말리온 효과(피그말리온 效果, pygmalion effect)
교육 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사기대 효과, 로젠탈 효과, 실험자 효과라고도 합니다.
교사가 기대하지 않는 학습자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골렘 효과라고 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을 말한다.
1964년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과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레노어 제이콥슨(Lenore Jacobson)에 의해 실험되었다.

원래는 그 전년에 로젠탈과 포드가 대학에서 심리학 실험으로 학생들에게 쥐를 통한 미로찾기 실험을 시켰다.
그 결과 쥐가 미로를 잘 빠져나오는 그룹과 그렇치 못한 그룹, 두 그룹간의 실험결과의 차이를 찾을 수 있었다.
전자는 학생들이 쥐에게 정성을 다해 키운 반면, 후자는 쥐를 소홀히 취급했다.
이는 쥐에게 거는 기대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로젠탈은 생각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교사와 학생 간에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교육현장에서의 실험은 1964년 봄 샌프란시스코의 초등학교에서 하버드식 돌발성학습능력예측 테스트라는 보통의 지능 테스트를 했다.
학급 담임에게는 앞으로 수개월 간에 성적이 오르는 학생을 산출하기 위한 조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실험시행자는 조사의 결과와 관계없이 무작위로 뽑은 아동의 명부를 학생 담임에게 보여주고, 명부에 기재된 아동이 앞으로 수개월 간에 성적이 향상될 학생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후, 학급 담임은 아이들의 성적이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고, 확실히 그 아이들의 성적은 향상되었다.
학급 담임이 아이들에 한 기대가 성적 향상의 원인이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도 기대를 의식하였기 때문에 성적이 향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세히 정리한 보고서는 Rosenthal, R. & Jacobson, L.:"Pygmalion in the classroom",Holt, Rinehart & Winston 1968로 간행되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에서 유래되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성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이를 지켜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조각상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수록한 고대 로마의 오비유스의 변신 이야기 제10권에 수록되어 있다.

비판 /
로버트 로젠탈에 의한 실험 방법을 둘러싼 비판도 있었다. 로버트 로젠탈의 실험에 참가한 교원은 실험 때, 명부를 대충 한번만 보았다고 한다. 더욱이 명부에 기재된 아이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았다. 스핏츠의 재실험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는 극히 일부만 인정되었다.

또, 피그말리온 효과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의 소양으로서 설명되고 있지만, 학습자 스스로가 공부를 해가는 입장에서 보면 부족한 면으로 여겨진다.




잊어버린 보화
윌리엄 허스트(William R. Hearst)라는 신문 편집인이면서 고대 미술품 수집광인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대 미술품이라면 뭐든지 좋아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귀중한 도자기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야할 일을 모두 뒤로하고 즉시 유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도자기를 찾으려고 유럽의 이곳 저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도자기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한 도자기 상에게 새로운 정보를 들었습니다. 몇 해전에 미국의 어떤 언론인이 그 물품을 사갔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도자기를 사간 사람이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가운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이 산 저 산을 넘어 헤매다가 돌아와 보니 행복은 바로 옆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처럼 자신이 찾던 보화를 이미 오래 전에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값어치도 모르고 창고에 쳐 넣고 있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혹시 우리들도 그처럼 자신 안에 있는 보화를 잊어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로새서 2:2-3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신명기17:18-20)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생명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 생명에 대한 말씀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그저 이 세상에서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교인이 되어 있지만 자기가 종교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정말 싫어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만 만들면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난 후에 광야에서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다.
이 율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종교인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점점 더 종교인이 되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종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따라 가기를 좋아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살아온 것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경계를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 있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그들이 정직하고 지혜롭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늘 타락했습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성막을 주시고 하늘의 것을 보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오자마자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또 아세라를 섬겼고 이 세상의 있는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끌어 들여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하든이 세상의 것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고 또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의 출세가 하나님의 축복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몰라서 늘 타락의 길로 갔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성경을 너무 몰라서 자기들이 얼마나 타락을 했는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야 하고 또 그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은 봅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이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성적 지식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그저 이 세상의 지식으로 채우고 있고 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적인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를 많이 깨달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리고 그 비밀이 얼마나 깊이 감추어져 있고 또 은유와 비유가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학문을 조금 아는 것으로 그런 방법으로 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 개인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개인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사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 세상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온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거짓 선지자입니까?

거짓 선지자가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알고 있을까요?
아마 그 중에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의 진심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 선지자이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미 그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짓 선지자를 섬가라

지금 이 시대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지칭하는 그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입니까?
물론 그들도 거짓 선지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 역시 거짓 선지자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로운 가를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단이라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단을 알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는 그 행위들을 하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6:7-8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구원입니다

단번에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구원이 단번에 주어진다고 하니까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떻게 합니까?

어느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날 집회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있고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행위들이 성경적으로 맞습니까?
그 한 시간 집회에 참석을 해서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옳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그가 무엇을 알기에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한 시간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영접이라는 말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하긴 최근에는 성이 너무 개방이 되어 있다 보니까 하룻밤에서 만나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즐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똑같이 육체가 즐거워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즐기는 것이고 사랑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도 최소한 그에 대해서 알고 또 함께 혼인을 해서 살아갈 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저 교회에 몇 번 나와서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아니 그 예배에 참석을 했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그런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 주지도 않고 있는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외적인 감정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개미를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령도 없습니다.
그리고 간역자도 없습니다.
또 주권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식을 여름 동안 모아야 가을에 그가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름입니다

인생의 청년은 여름입니다.
그 여름동안에 먹을 것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을이 되어서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는 개미도 여름 동안에 가을에 먹을 생명의 양식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양식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에 의해서 이성이 없이 그 생활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개미에게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자기가 마치 생명의 양식을 먹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름에 모으지 않으면 죽습니다.
가을이 오고 추수가 다 끝이 난 후에는 먹을 것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 합니다.
영생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청년의 때 지금 여름의 때에 성도는 먹을 것을 성경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을 구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생명의 양식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마치 자기가 한 두 번들은 그 말씀으로 마치 먹을 것을 다 구한 줄 알고 있고 또 더 이상은 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는 다 먹었으니까 율법을 지키고 또 교회 안에서 교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혹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평생을 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의 양식을 이 성경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본다고 해서 생명의 양식이 구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의 텍스트와 생명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텍스트를 조금 아는 것으로 마치 생명의 양식을 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아니 이 시대는 목사도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수백 번을 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저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안 보아도 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생명의 양식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개미는 다릅니다. 아니 성도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늘 깨어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 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자기 영혼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개미보다도 더 열심히 청년의 때에 먹을 것을 구해서 가을에 생명의 양식을 먹고 구원을 받습니다.

종교적인 쇼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지도 않은 그가 예배라는 그 행위에 몇 번 참석을 했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 거짓된 종교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 방대하고 오묘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로 깨닫게 하시고 또 그가 양식을 나눠 줌으로 해서 쉽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하루아침에 이 성경을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사람들이 얼마나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성경의 비밀이 한꺼번에 열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단 한 번에 성경의 모든 비밀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습니다. 한 번 뚝딱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구하지도 않았으면서도 그저 종교인으로 신앙생활만 했으면서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 몰론 쉽습니다.

그러나 여름동안에 먹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꼭 내가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주변에 먹을 구하는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해서 먹든 내 주변에 있는 성도가 구해서 먹든 우리는 개미와 같이 이 먹을 것을 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늘 깨어 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이스라엘은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드시 왕을 달라고 할 것을 아시고 이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사기를 거치면서 주변국들에 왕이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왕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사울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해서 얻은 왕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울은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겸손하고 낮아지려고 했지만 실제 생명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율법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은 그 문자 그대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굳이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가 왜 버림을 받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늘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왕이 누구입니까?

그 백성을 보호를 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지만 역사를 보면 왕이 죽으면 그 나라가 사라집니다. 왕이라는 존재가 그렇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원해서 왕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들이 원한 것도 있지만 이 왕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두 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단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해서 사울 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한 나라에 두 왕이 있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사단을 예표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 두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왕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찌되었든 왕이 되거는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을 자기 옆에 두고 읽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왕은 권력자입니다. 왕이 타락을 하면 그 백성들이 다 타락을 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열왕기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이 있습니다. 그 왕들에 의해서 진리가 사라지기도 하고 또 진리가 세워지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왕이 세워지는가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에 진리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두 가지 예표입니다.

이것은 실제 이스라엘에 있었던 왕들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그렇게 하시고 영원히 왕으로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사울부터 시작을 해서 다윗 왕이 세워졌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지 않아서 버림을 받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을 하시고 내가 그를 통해서 내 뜻을 다 우루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은 앞으로 이스라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서를 등사해서 평생을 자기 옆에 두고 읽으라고 말씀합니다.

왕이 이 율법서를 등사해서 평생을 자기 옆에 두어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서를 잃음으로 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정말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어떻게 배웁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모든 율법의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성경을 보고 또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습니까?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서을 등사하여 곁에 두고 늘 읽음으로 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규례를 지켜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서를 동사하여 곁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려면 이 율법서를 늘 읽어야 합니다. 율법서를 읽는 것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이 함께 있다 보니까 더구나 한 절에 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주의에 빠집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또 생명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면서 그저 다 한 문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곁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말씀을 끌어들여서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서를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읽으면 뭐 합니까?

그들의 사상이 이미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 율법서를 읽지 않아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너무도 열심히 읽고 있고 어느 목사 같은 경우에게는 이 율법서를 수백 번을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율법서를 아무리 많이 읽고 그것을 달달 외운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를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서를 왜 읽어야 합니까?

그것을 지켜 행하기 위해서 읽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율법서를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구약을 보아야 하고 또 이 율법서를 읽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이 율법서를 통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라는 것을 먼저 알고 읽어야 합니다.
율법서를 실체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로 읽어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고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실로 보고 있습니다.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율법을 그림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모두가 다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서를 읽을 때는 그림자로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율법서를 읽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체로 보고 읽으면 그가 아무리 율법서를 많이 읽는다 해도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을 등사해서 읽으면 그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무리 율법을 보아도 장차 오는 좋은 일을 못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율법을 문자 그대로만 보고 있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를 못하니까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그림자로 안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오히려 그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교회는 점점 더 종교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율법서를 날마다 읽지를 않고 있기 때문이며 이 율법서를 읽으면서도 그것의 실체를 못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누가 지킵니까?

율법서를 보고 그것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도 어리석습니다.
율법서를 보고 그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율법을 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서를 왜 읽습니까?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율법서를 읽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들은 율법서를 보고 지켰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보고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을 경외하루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똑 같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십일조를 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주일을 지켰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했습니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율법서를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서를 보고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깨달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 자기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연약하다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가 되어야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데 율법을 보고 그것을 지키느라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서를 읽으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살인한 자입니다

내가 도적질 한 자입니다 내가 간음을 한 자입니다. 내가 우상 숭배를 한 자입니다 과연 이 시대 율법서를 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데 지금 이 시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서를 수백 번을 읽어도 자기가 누구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성경의 기본을 알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까? 그런데 신명기에서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너희 중에 왕을 세우면 그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왕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 왕을 세우면 그가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왕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셨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왕은 물론 이스라엘에 있었던 왕일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고는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할 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왕입니다

다윗 왕, 히스기아 왕, 요시야 왕입니다.
그들도 이 모든 율법의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자 지켜 행하신 왕은 에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이 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까?

그것은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셨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주님과 같이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키지 못 했습니다.

누가 겸손합니까?

오직 주님만이 겸손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의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겸손의 모양을 나타낸다 해도 겸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몇 가지 지키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교만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 그들은 문적으로는 어느 정도 지켰을지 몰랐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얼마나 교만해졌습니까?

주님은 다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신 분입니다 다 지키시고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신 분으로 주님의 멍에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영의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을 완성케 하심으로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습니다. 그것을 신명기에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시고 그 왕위가 영원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왕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왕위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의 왕위가 영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해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역시 주님의 은혜로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바로 알아 내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4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민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방의 잘못된 애도방법을 따르지 말고, 바른 음식을 먹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낼 것을 명령하십니다.
또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돌볼 때에 범사에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5장에서는 매 칠 년에 면제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면제는 물질과 노예와 땅에 해당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안식을 잘 보여줍니다.

16장에서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17장 상반부에는 우상과 일월성신 숭배자를 처벌하는 방법과 재판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왕을 세우기 원하여 왕을 세우게 되면 왕은 병마와 아내와 은금을 많이 쌓아 두지 말고, 율법서를 평생 옆에 두고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2 . 하나님의 선포적 선언의 말씀

여호와 라파 - 하나님의 선포적 말씀이다. 쓴물을 단물로 만드시고 선포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적인 말씀은 하나님과 같이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3. 모세의 간증의 신앙고백 선언

여호와 닛시는 모세의 신앙 고백의 선언이다.

출15:26 절의 '여호와 라파'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적 선언이고 

출17:15 절의 '여호와 닛시'는 그 앞의 내용을 체험한 모세의 간증이며 신앙고백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선포적인 말씀을 하나님 자신과 같이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의 그 간증의 내용은 우리에게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그 간증의 신앙고백을 우리도 시인 선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그 응답의 체험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 라파로 선언하셨고

아말렉의 공격에 승리케 하신 후 이것을 기록하여 여호수아에게 외어 들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의 귀에도 계속 계시적 선언과 승리의 기록의 말씀과 그 선언을 외어 들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한해에도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

또한 여호와 이레 삼마 샬롬의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임하기를 기원하여야 할 것이다.

                                                           

=. 묵상 (meditation)

신약에서는  천국비유를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모든 비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데 어떻게 다른 비유를 알겠느냐 하셨기 때문이다.

(마13: )

( 막4:)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하기에 가장 정확한 그 말씀을 보관하여야 하기에 정확하게 번역하여야 한다.

1. 이 율법서를 등사하라.

(신17:18)

When he takes the throne of his kingdom, he is to write for himself on a scroll a copy of this law, taken from that of the priests, who are Levites.

* 등사하다:  새기다’; , 기록하다, 쓰다. write

1. 선언적 말씀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He said,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1. 여호와 닛시는 누가 언제 무슨 일 후 선언한 또는 간증한 말씀인가,

( 출17: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Moses built an altar and called it The LORD is my Banner.

1. ' 기억함이 없게' 와 '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는 전혀 다른 뜻이다. 완전 다른 뜻이다.(출17:14)

(개역)

출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7: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개정)    

출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이미 언급한 내용이나 다시 볼 때마다 마음이 그렇다. 개역을 개정판으로 번역할 때 잘못 수정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읽을 때마다,, 할 말을 잃는다.

( * 다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한 아말렉을 천하에서 도말하여 없애버리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젠가 마침내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정은 그것을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고 수정을 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알고 이렇게 수정하였는지 참으로 얼토당토 않는 수정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 속 또한 뇌속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인가, 기억하려는 자유의지를 제한하신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뜻으로 알고 이렇게 수정하였는지

성경을 모르고,

아니면 국어를 모르고가 아니면 이렇게  수정할 수가 없다.

이 예언의 말씀은 나중에 사무엘 시대에 사울 왕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였다. 사울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하고 막으려는 이 세력을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천하에 아말렉이라는 이름을 기억함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정확하게 그 심판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는 말을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뇌 속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고

기억함이 없게는 상황이 즉 아말렉이 완전 멸망함으로 이제 아무도 기억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는 문장은 그 내용을 어떻게 알고 수정하였는지 말도 안되는 수정이다. 이러한 내용이 너무나 많은데 이러한 내용을 읽을 때마다 어 이건 아닌데 하며 읽어야 하는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

1. 다음은 어떠한 상황에서 모세가 선언 간증하였는가,

(출17:15-16)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 성경은 연결하여 보아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의 일을 막고 방해하고 공격하는 아말렉 족속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많이지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사울왕에게 실행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의 약속은 정확하게 성취될 수 있었다.(출17:14, 삼상15:2-3)

그런데 여기에 사울 왕이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판단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실행하여 사울왕이 버림 받은 이유도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고 그 심판은 너무나 엄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성경은 연결하여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한편으로 가장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노아홍수 사건과 홍배바다 사건을 보라. 또한 절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두 부분을 완성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다음을 보자.

(

삼상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15:2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I will punish the Amalekites for what they did to Israel when they waylaid them as they came up from Egypt.

15:3 Now go, attack the Amalekites and totally destroy everything that belongs to them. Do not spare them; put to death men and women, children and infants, cattle and sheep, camels and donkeys.'"

(삼상15:9-11)

사울 왕은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였으며  그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15:9 But Saul and the army spared Agag and the best of the sheep and cattle, the fat calves and lambs--everything that was good. These they were unwilling to destroy completely, but everything that was despised and weak they totally destroyed.

15:10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Samuel:

15:11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Saul king, because he has turned away from me and has not carried out my instructions." Samuel was troubled, and he cried out to the LORD all that night.

*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정 수정은,

1). 성경 전체의 이해의 부족 즉 성경 전체를 잘 모르는

2). 원어와 그리고 참고할 수 있는 잘 번역된 영어본을 참고 하지 않은 듯 하고

3). 성경의 깊은 내용을 그 동안 선배님들이 잘 번역하고 부분 수정하여 거의 완벽한 번역을

   그리고 성경 주석을 하신 선배님들의 감수를 받고 시간을 거듭하여 거의 완벽한 번역을

   그리고 깊고 심오한 내용을 이해를 못하고 잘못 번역한 줄 알고 수정하였고

   정작 수정할 극히 일부분은 왠지 그대로 두었다.

4). 그리고 국어실력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이해를 못하니 국어적으로 잘못 수정할 수 있고 또 국어실력이 부족하여 그러할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이 너무나 많았고 이미 시리즈로 지적하였으나 여기 한 구절 예를 보자. 기억도 못하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출17:14) 얼마나 잘못 수정이 되었나 알 수 있는 한 구절이다. 성경을 몰라서일 수도 있고 국어를 몰라서 일 수도 있다.

5). 금년이 종교개혁 몇 주년이라는데 모든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개정판를 다시 수정 반복하고 보완하는 것은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으로 본다. 개역판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분 수정하며 된다.

개역판은 이미 훨씬 더 실력있는 분들이 번역하였고 이미 많은 검증과 평가를 거치었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 참 잘 번역된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원문 성경 전체의 내용 국어실력 등등에서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무슨 학위를 받아왔으니 실력있는 줄 알았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몇 백 주년 이라고 하는데 성경번역의 문제가 공론화 되어 개역중심에 극히 적은 부분 보완하면 매우 좋을 것이다. 개정번역은 잘못 수정한 부분이 너무 많아 부분적인 수정을 반복한다면 오히려 더 ,,,,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부분에 관해서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가슴치며 방성대곡하여야 할 것이다. 학설을 높이고 관심 갖다가 수평이동의 교인 숫자와 건물 짓기만 경쟁 자랑 과시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2월 28일(금) 신명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신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for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he LORD has chosen you to be his treasured possession.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people holy to the Lord)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란 용어가 신명기에서만 강조됩니다(7:6. 14:2, 21. 26:19. 28:9).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신명기 14: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찌니라.

신명기 26:19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신명기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성민(聖民)이란 거룩한 민족이란 뜻입니다.

기업(基業)의 백성(百姓)

기업(基業) : 터 기(基), 업 업(業)
  1.
대대(代代)로 이어 오는 재산(財產)과 사업(事業)
  2. 기초(基礎)가 되는 사업(事業)

기업(5159)
자기 기업의 백성
- 여기서 '기업'(나할라)이란 정당한 '소유권' 또는'몫'을 뜻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께 속한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하는데(7:6),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열국 중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출 19:4-6).

기업(基業) 나할라(nachălâh)  נַחֲלָה  스트롱번호  5159

1. 소유.  2.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  3. 여호와께서 주신 소유물
발음 [ nachălâh ]
어원  /  515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관련 성경 /  유산(창 31:14, 48:6, 왕상 21:3, 전 7:11), 기업(출 15:17, 신 4:20, 시 16:6, 미 7:18). [동] 상속하다(잠 19:14)

5157. נָחַל 스트롱번호  5157

1. 소유하다.  2. 거류지를 얻음.  3. 출 34:9
발음 [ nâch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계승하다(렘16:19), 택하다(슥2:12), 나누다(민34:18, 수19:49), 얻다(민35:8), 상속하다(시69:36), 차지하다(사57:13), 분배하다(수14: 1), 더럽히다(겔7:24), 수치를 당하다(겔22:16), 누리다(슥8:12), 끼치다(잠13:22), 이기게 하다(신12:10). [명] 기업(출32:13, 신21:16, 시119:111), 소득(잠11:29), 산업(잠13:22).



신명기 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이름 값

신약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다양하게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마 5:13),
세상의 빛(마 5:14),
그리스도의 종(고전 7:22),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
그리스도의 병사(딤후 2:3),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모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다채로운 표현들입니다.
정체성을 잃으면 존재를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으면 세상에서 그 존재와 역할을 상실하게 됩니다.

키위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뉴질랜드에서만 사는 토종새로서 그곳의 비옥한 토양 속에 서식하는 벌레를 잡아먹고 삽니다.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이다 보니 새라고 부르기도 뭐합니다.
날개는 퇴화하여 없어지고 긁은 다리로 무거운 몸을 지탱합니다.
주로 밤에만 활동하기에 눈도 자연히 퇴화되고 맙니다.
단지 후각과 발의 감각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을 밟아, 움직이는 벌레의 냄새나 촉감으로 먹잇감을 찾습니다.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인 날개와 눈은 퇴화되고 부리와 다리만 발달된 것입니다.
키위는 새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새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새입니다.

창공을 가르며 활공하는 다른 새들처럼 날지 못하는 키위의 형편이 정체성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키위처럼 흐려진 영안으로 진위를 가늠하지 못한 채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이 세상을 뒤뚱거리며 살아갑니다.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제 이름값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값 혹은 정체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그에 걸맞게 인식하고 그 자격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누구나 제 이름값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름값이란 세상에 알려진 상태나 정도에 맞는 노릇이나 됨됨이를 일컫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평가할 때 쓰는 “이름값도 못한다” 혹은 “이름에 먹칠을 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름이 본래 가지는 의미와 가치에 그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턱없이 못 미쳐 그 이름의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름과 실상이 부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 그리스도의 종, 편지, 사신, 병사와 향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예로운 별명들입니다.
그 이름값대로 살지 않으면 무익한 종이 되고,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채 발신인에게 되돌아온 편지가 되고, 자신을 파송한 왕이나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무능한 사신이 되며, 제대로 전쟁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백기 드는 오합지졸이 되고 맙니다.
짠 맛을 잃고서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어둠에 갇혀서 발하지 못하는 빛처럼 이 세상에 하찮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결국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마 5:13).

바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각각의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정체성도 중요합니다.
하늘나라 사신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이들이 있다면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그들이지만 자신 안에 하나님 나라를 품고 있어 신앙은 깊고 기개는 웅대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이름값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값에 맞게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 둘 세워질 때 새들이 깃든 나무처럼 모든 것을 품는 하나님 나라와 그 질서는 이 땅에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새창조의 역사를 그렇게 써내려 가시길 원하십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는 불신자의 정직함도 포함됩니다.
불신자의 정직함이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들과 그것을 해하는 것, 예를 들어 그들의 종교의 계율이나 개인의 양심을 따라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강탈이나 절도나 이웃의 소유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 가난한 이들을 학대하거나 누구든지 협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을 알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부도덕을 싫어하며,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규정되어 있는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겉모습은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선을 행합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진 그들은 또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진지한 일상생활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대화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는 등 외적인 종교를 언제나 실행하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매우 성실합니다.

한 가엾은 에피쿠로스주의 시인도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사람들은 덕을 사랑함으로써 죄 짓는 것을 미워하고, 악한 사람들은 형벌의 두려움으로 죄 짓는 것을 피한다.”

형벌을 피하고 친구들이나 이익이나 세상 평가를 잃을 것을 피하기 위해 악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많은 선을 행하며 더구나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더 좋은 원리를 지니고 있지 않은 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여전히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쯤이면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여기 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그러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 이상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나는 무엇보다 먼저 “그 정도까지 행하고서도 ‘Almost Christian'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체험의 확실한 증거도 가지고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 해를 그렇게 ‘그 정도’로 살아왔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든 악을 피하고 죄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했고, 모든 사람에게 대한 여러 가지 선행의 기회를 전부 얻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공적인 또는 사적인 은총의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도 철저하고 신실하려고 힘썼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려는 진정한 의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마음으로부터 바라고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나 자신의 양심은 이 기간 중에 내가 단지 ‘Almost Christian'에 불과 했다고 나를 향해 증언합니다.

2.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눅 10:27)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구주를 기뻐 찬양합니다(눅 1:47)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시 75:1, 78:7).
사모합니다(시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입니다.
아무리 원수라도 그들을 제외할 이유는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다면 사도바울이 사랑에 대해 말한 것을 고찰하면 됩니다.(고전 13장)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위의 것과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따로 생각해 보자면, 모든 것의 근거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들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자신을 참 하나님으로 분명히 드러내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게시며, 세상 끝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믿음이 아닌 바르고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나 신앙강령이 참되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는다는 확실한 신뢰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신을 깨끗이 한 후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이 사랑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나 사탄의 악의가 자신에게 더해지는 것도 기쁨으로 견디게 합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참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각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불신자의 정직한 수준’을 실행이라도 실행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모양은 갖추셨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성실한 의욕이 있으십니까?
여기까지 ‘예’라고 대답하기도 어렵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에 부어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전부’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으로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 환희, 기쁨의 면류관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한 계명이 당신의 마음에 기록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 당신을 책망하여 불리하게 떨어뜨릴 증서를 소멸하고 그것을 없이하여 자신의 십자가에 달아 버리셨음을 믿습니까? 당신은 실로 그 피에 의한 속량, 즉 당신의 죄의 사면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에 대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이 신앙과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그를 위해서 좋을 뻔 했다는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잠자고 있는 여러분이여, 깨어 여러분의 하나님을 불러 찾으십시오. 밤낮 우리가 아직 연약한 가운데 있을 때,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롬 5:6)를 향해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당신은 당신이 믿는 분을 알게 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Almost Christian이 아닌 Altogether Christian이 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명목상 교인,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이자 선교적 대상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에 다니거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면서도, 신앙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또는 교회 출석 외의 실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어 “사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오래된 관심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경고하셨다”며 “입술로만 표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는 신앙이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는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또 “역사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관습화되고 힘을 잃을 때마다 명목상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며 “청교도들은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한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고 했다.

“명목상 기독교(nominal Christianity)는 주로 탈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에 접어든 서구 교회의 현상이었지만, 기독교가 전래된 지 4세대가 지난 곳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며 “한 세대를 25-30년으로 볼 때, 기독교가 전래된 지 138년이 된 한국 교회에서 명목상 기독교 현상은 주목해야 할 과제이다.

1885년 4월 5일 기독교 선교사 제물포 항 입국
2025년 2월 28일 선교 140주년

어느 나라에서든지 기ㅣ독교가 전래되고 4세대가 지나면 나타나는 현상은 "명목상 기독교 신앙"

최근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사실 명목상 교인은 가나안 성도와 탈 교회 현상의 전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고민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나, 심지어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 판단으로 무신론자가 된 이들보다도 더욱 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다”며 “명목상 교인 조사는 누군가의 신앙을 등급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 여정 가운데 명목상 신앙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영적 변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수동적이며 불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명목상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예 신앙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명목상 교인은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일 뿐 아니라 선교적 대상이기도 하다”고 했다.


성령의 역사가 희미해지는 시기
왜냐하면 기독교가 전래되던 시대보다 월등한 경제적 가치를 누리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주’(퀴리오스)라는 말은 ‘최고의 권세자, 으뜸인 분,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 만유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왕이시고, 주님이시고, 주권자이신 나라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교회 안에는 인간 중심의 복음이 만연하다.
이 복음은 염가 판매되는 싸구려 복음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성공과 건강과 풍요와 축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작은 것을 드리면, 그 분이 몇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사람의 관심에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중심은 ‘나’이다.
나 중심의 신앙에서는 믿음이 알라딘의 램프와 같다.
램프를 흔들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들이 세속 기업들과 똑같은 성장 전략으로 교회를 키우려고 하였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대형 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교인의 수가 수천명, 수만명, 아니 수십만명으로 늘어날 지라도 이것은 자란 것이 아니라 단지 비대하게 살찐 것일 뿐이다.

지난 2007년에 윌로우크릭 교회의 32년을 돌아본 목회 보고서를 엮은 책 <Reveal: Where Are You? 드러남: 당신은 어디에?>를 통해서 빌 하이벨스 목사는 지난 32년간의 자신의 목회가 실패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빌 하이벨스 목사가 이렇게 실패하였다고 고백한 요지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줄 생각을 안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심판, 정죄, 회개, 변화, 헌신, 충성, 고난, 이런 말씀들을 원하지 않는다.
성도들은 축복, 용서, 치유, 건강, 성공, 번영 같은 말씀들을 원한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곳에는 성도들이 모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십자가의 복음, 어린양 예수의 진리는 외면하고 성도들이 원하는 달콤한 것만 주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 솜사탕 교회가 되어 버렸다.
영적 성장과 제자도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 성도들이 원하는 달콤함을 채워주는 가벼운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도나 말씀 묵상, 교회 봉사와 헌금 등 신앙생활을 하지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뚜렷하지 않은 이른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통계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66.7%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퍼레이선월드는 전세계 기독교인의 60%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한국 기독교인의 40%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국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3년에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나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 잘 믿으면 무조건 복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과 풍부한 물질과 재물(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성공(번영)신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 우리 신앙의 구심점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요한 웨슬리

웨슬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성례를 받고, 기도를 하고, 죄를 피하고, 선행을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웨슬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성령의 증거와 열매를 가지며,
하나님의 의로운 의지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웨슬리는 이 설교를 1741년 11월 5일 런던의 세인트 메리 르 보우 교회에서 했습니다.

큐티를 위한 Q&A :

Q1.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A1.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성례를 받는 등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죄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15:8-9, 요한일서 2:3-6)

Q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으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3:16, 행전 2:38-39, 갈라디아서 5:22-23)

Q3.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A3.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믿음과 사랑에 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자기 의지와 힘으로 외적으로만 복음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적으로는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다. 반면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내적으로 변화되어 믿음과 사랑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로마서 10:9-10, 고린도전서 13:1-3, 갈라디아서 5:6)

생활의 적용 :

C1. 오늘 하루 내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처럼 살았던 부분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자.

C2. 오늘 하루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감사하고, 내일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C3. 내 주변에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구원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자.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만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죄에서 회개하지 않고, 주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저에게 진정한 믿음과 사랑을 주시고, 성령의 충만을 주시며, 말씀을 순종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국 교회 3명 중 1명은 ‘명목상 그리스도인’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 결과...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사귐의 중요성

한국 교회 교인 3명 중 1명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지난 7월 31일부터 8월 13일까지 구독자 5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58차 넘버즈 Poll 결과 이같아 나타났다.

 

“명목상 기독교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 생활을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평소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귀하 교회 교인 중에는 이러한 명목상 기독교인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10%~19%’와 ‘30%~39%’ 응답률이 각각 19%, 18%로 가장 높았다.

 

3명 중 2명 정도(65%)는 39% 미만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구간별 중위값 기준으로 평균을 산출한 결과 명목상 기독교인 인식 비율 평균은 36%로 나타났다. 교회 내 ‘교회 생활을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평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3명 중 1명 이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밀한 사귐(기도, 말씀 묵상, 예배 등)를 갖도록 돕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 / 명목상 그리스도인

초대교회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참 신앙과 거짓 신앙,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5장 참조).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였고, 이 일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약 교회의 탄생기에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그때에도 거짓 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거짓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이 있다는 것을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그 모양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은 돈보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겨 온 것들보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성령께서 중생자 안에 만들어 내시는 능력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말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가장 경건하고, 가장 괜찮은 사람들 같았지만 실제의 삶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거짓 신앙, 즉 위선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사데교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이것은 자신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름뿐이고 명목상인(nominal)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죽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살아 있는 신앙 같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마 25:1-13).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가 신부의 집에서 신랑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등을 준비했습니다. 이 열 처녀 모두 혼인잔치의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모두 끝까지 갔습니다. 끝까지 갔는데 다섯 처녀는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열 처녀 모두 자기의 등을 준비했습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이 오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다섯 처녀는 등 안에 기름이 없었습니다. 겉으로 볼 땐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등 안의 기름이 다하였고, 다섯 처녀에게는 준비해 둔 기름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혼인잔치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혼인잔치의 문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거짓 신앙을 가지고도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문제, 즉 참 신앙이냐 거짓 신앙이냐 하는 것은 겉으로 쉽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알고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명확한 증거를 원합니다. 시험을 봐서 정확한 점수가 확인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편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놓고 볼 때 그렇습니다. ‘아, 내가 합격이구나! 들어갈 수 있구나. 안심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겉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영접 기도를 했다거나, 부흥회 때 강단 앞으로 나가서 결신했다거나, 세례를 받았다거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다거나,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거나,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영혼에 관한 문제를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앙은 우리 내면에 속한 것이고, 성령께서 행하시는 신비한 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

중동 국가들과 중앙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국민 대 다수가 무슬림입니다. 터키 같은 경우는 무려 99%가 무슬림이라고 합니 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을 실제로 방문해 보면, 정작 무늬뿐인 무슬림들 이 적지 않습니다. 무슬림 부모아래서 태어나, 무슬림 국가에서 성장하다보니, 무슬 림이 그저 자신의 정체성이 된 것이지, 진짜 이슬람 종교를 알고 알라신을 철저히 믿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명목상, 무슬림들이 많습니다. 미국은 대략적으로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70퍼 센트의 기독교인이 매 주일 교회를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 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크리스챤 가정에 태어나, ‘미국인이라면, 기독교인이어야 한 다’는 일종의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늬만 기독교인, 명목상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 한국말로, -그리스도인이란, ‘종교가 무엇입 니까’라고 묻는 설문서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기타’ 중에서, ‘기독교’에 별 생각없이 동그라미 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미국내 인종차별주의자 가운데, 뜻밖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 금도 있습니다. 한 때, 미 남부에서는 KKK 단원 중에 목사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합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에서 네 이웃은 오직 백인만을 뜻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흑인은 창세기, 노아 아들 중, 함의 아 들이기에 노예가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백인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은 아닙니다. 아시안들도, 특히 우리 한국인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내 이웃은 한국 인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내 나라, 내 민족밖에 모르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함부 로 대하고, 흑인은 함의 후손이기에, 노예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 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단지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지 않고 무늬만 그리 스도인인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 해서 행해지는 모든 잘못된 행동과 사상은 모두 “garbage in, garbage out”이라고, 잘 못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크리스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단순히 기독교 라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 르는 자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동, 그리고 삶에서 정말 그리스도를 닮았었습니다.
사실, 로마 황제를 온 세상이 세상의 주인으로 받아들 였던 시절,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하는 믿음의 행위는 반역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칫 온갖 사회적,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 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유 일한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본받아 닮아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는가를 돌아보 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일까?

사람의 이름은 크리스티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마이클인데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과 중생한 그리스도인(born again christian)입니다.

사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필요시 주님을 찾는 종교인, 습관적으로 일년에 특별한 절기 때만 교회 출석하는 church-men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러한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보다 자신은 중생한 그리스도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영성이 살아져 버린 그리스도인들, 교회 직분자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중생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을 의미한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역사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로부터 붙혀진 고귀하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별명, 애칭, 명칭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인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존재하는가?
얼마전 스스로 장로라고 불리우는 새신자가 왔습니다.
주보 소개에 아무개 성도라고 소개했더니 매우 언잖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장로이기 전에 성도입니다.
성도가 되고, 그라스도인이 되어야 직분의 의미가 있지 않은가?

 

참 그리스도인의 표징(로마서 2:23~29)

오랜 전 남대문 시장의 한 가게에 이런 광고문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가게는 정말 순 진짜 참기름만 팝니다.”
정말, 순, 진짜, 참 모두 같은 말 아닙니까?
오죽 가짜가 많으면 이런 광고문을 붙였겠습니까?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가짜가 많은지 모릅니다.
가짜 식품, 가짜 화장품, 가짜 약품, 가짜 가방, 가짜 시계, ...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각 나라 사람들마다 묻는 말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미국 사람은 “그 물건 돈을 얼마 내면 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영국 사람은 “그 물건 얼마나 오래 쓰냐?”고 묻고, 프랑스 사람은 “그 물건 최신 유행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은 어떻게 물을까요? “그 물건 진짜냐?”

여러분, 가짜는 무엇이든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사람이 가짜이면 정말 곤란합니다.
가짜 경찰, 가짜 공무원, 가짜 의사, ... 그러면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겠습니까?
가짜는 없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만큼은 가짜가 있으면 큰일 납니다.
만일 믿는 신자가 가짜라면 어떤 나쁜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지 못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전도
의 문을 가로막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킴으로 예수님
께 나아오는 것을 방해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땅에는 약 1천만 명 가량(통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의 그리스도
인이 있습니다. 전 국민의 약 20%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중에서 얼마나  참
그리스도인일까? 의구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비율이면 이 나라와 이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비근
한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전체 그리스도인의 비율보다 훨씬 높
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그 모양 그 꼴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국회의원들께는 죄송한 말
이지만, 혹시 득표에 도움이 되니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어놓은 사람들이 많지 않나 생
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1910년대 3.1운동 전후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당시 국가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예수 믿는 신자에게 돈을 꿔줄 때는 영수증도 받지 않고 꿔줘도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 한국교회는 다수가 되었지만 그 영향력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그 힘이 크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참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오히려 큽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그래서 나 자신만큼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구원과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기 바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거짓됨을 비판하고 참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유대인을 겨냥한 것이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한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참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우리 자신이 그런 참 신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도를 넘어 문제가 됐습니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받은 참 백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 율법(구약의 십계명 등의 말씀), 그리고 할례 등입니다.
특히 할례는 생후 8일째 사내아이의 생식기에 하나님 백성의 표시로 수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위생적 이유로 그런 수술(포경수술)을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당시 종교적 이유로 시행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명령하셨음) 그들은 이런 것들로 인해 자신들은 자동적으로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했
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만 외적인 표시, 즉 형식일 뿐입니다.
그것에 걸맞은 내용이 있어야 참 신자입니다.
그들은 겉모습만의 표면적 유대인이요, 이름뿐인 명목상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지 않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24절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나머지 이방인들을 가리켜 지옥의 땔감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전혀 참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데(29절下),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참과 거짓의 감별사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겉과 속을 두루 감찰하는 눈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찬가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어엿한 그리스도인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독일은 명목상으로는 거의
전 국민이 신자로 되어 있는 소위 ‘국가교회’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악한 인물이 판을 쳤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만 가득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 형식만 그리스도인, 외양만 그리스도인, 명목상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비극입니다.
겉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교인 명부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다고 해서,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교회를 출입한다고 해서, 심지어는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설교 중에 이런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거의 그리스도인’이란 뜻입니다.
겉보기에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런 예들 들어보죠. 대학입시에 ‘거의 합격’이면 어떻게 된 겁니까? 불합격입니다. 차점으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된 겁니까?
불합격입니다. ‘수석 불합격’도 불합격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의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런 명목상의 신자가 되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참 그리스도인의 표징,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변화의 증거들’이 있어야 합니다.  

내면의 변화 : 중생, 회개, 믿음
  

28절~29절 보면 할례는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육신에 표시는 하는 것이지만 마음에 진실한 변화가 없으면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 마음의 세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례식 이전에 문답을 통해 신앙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그 고백도 만일 건성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세례는 무효입니다.
설사 세례 받고 세례교인 명부에 올라간다 해도 하늘나라 생명책에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세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생(重生), 죄 씻음, 연합 등입니다.
중생 : 중생은 새로운 탄생이란 뜻으로 영적 출생을 말합니다.
요3:5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
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구약의 할례도 8일째 시행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7+1 즉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의미
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회개
: 중생하고 나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뉘우침으로 회개
합니다.  

믿음 :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외면의 변화 : 말씀 순종, 인격 성화, 사명 충성

내면의 변화가 생기면 그 다음으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외면으로 표출됩니다.  

말씀 순종
: 믿음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그 말
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바울 유대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할례를 받았어도 율법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헛것이라는 겁니다. 본문
25절~26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예수님도 순종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20~21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 행위 구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다만 구원받은 참 신자라면 중생하고 회개한 변화의 증거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를 비교해 보십시오. 겉모양으로는 그게 그겁니다.
그러나 돌감람나무는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리 겉모양으로 그리스도인이라도 말씀 순종의 열매가 없으면 가짜입니다.
그래서 이런 조크가 있습니다.
천국에 분실물 센터가 있는데, 거기에는 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 없는 입들입니다.
그 주인들은 다 지옥에 가 있습니다.
천국에는 입만 와 있고, 지옥에는 입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말씀 순종이 없는 신자는 가짜 신자입니다.

인격 성화 :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저절로 점진적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성화의 과정입니다. 

한국교회 초대 역사 가운데 걸출한 인물 중 김익두 목사님(金益斗 1874∼1950)이 계십니다.
그분은 일반 백과사전에 나올 정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본래 황해도 신천 지역의 주먹이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국을 누비는 부흥사로 많은 이적을 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6.25 때 공산군에게 총살당한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예수 믿고 변화된 직후의 일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은 후 새로운 사람을 살겠다는 다짐의 표시로 신천  장터에서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그 내용은 “김익두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책 들고 전도하고 있었는데, 불량 청년들이 사기 쳤다며 “죽기는 뭘 죽어!” 하며 바가지로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을 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익두가 죽었기에 망정이지 살아 있다면 너희들은 벌써 요절났을 거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물론 우리가 모두 다 이렇게 큰 변화를 갖지는 못합니다.
성격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변화의 모습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점진적일지라도 일관성 있는 변화는 필수적입니다.
그 변화는 향기와 같아서 주위에 영향을 끼칩니다.
세상에서 절대 속일 수 없는 게 냄새입니다.
좋은 냄새이든 나쁜 냄새이든 숨길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변화됨으로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예수의 향기’(고후 2:16)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명 충성 : 내면에 중생을 체험하고 예수 믿으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면 “주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 사명에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특권층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됩니다.
그 이유는 특권만 누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다하면 특권을 누려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영국의 경우를 보십시오.
영국 왕실에 예산이 얼마나 많이 소요됩니까?
그래도 영국 국민들은 흔쾌히 여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실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는 한편 책임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나면 왕자들이 먼저 참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당연히 왕실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특권층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특권만 누리고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명과 책임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자가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대다수가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순 진짜 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라고 소리치며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귀한 모습

 

성경에 과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몇 번 나오겠습니까? 3번 밖에 안나옵니다(행11:26; 행 26:28; 벧전 4:16). 첫 번째 등장하는 곳이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복음을 전해 새로 교인에 나온 새교우들을 바울과 바나바가 열심히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쳤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가 되었고 또한 그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제자,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모습을 따라가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고, 세상 가치관에 따랐던 자들이 완전히 바뀌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세계관, 인생관, 물질관, 결혼관, 직업관, 생사관, 자녀관, 가정관, 역사관, 정치관, 경제관 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by christ, for christ”의 사람, 제자들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찬송가사처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람입니다. 변화된 깡패 이기풍처럼 “구약과 신약으로 온전히 새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고 예수님의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정적 이미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 세상에 비친 이미지, 자화상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매우 부정적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매우 손가락질 받는 모습들입니다.
목사에 대해서 먹사, 장로들에 대해서 사기꾼, 권사들에 대해서 수다쟁이, 집사들에 대하서 거짓말쟁이 등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라면 참으로 신뢰가 가고, 믿음이 가고, 차원 다른 고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 존경받은 사람들, 참으로 거룩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보왔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보증수표였읍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자들이었습니다.
“틀림없다”, “분명하다”, “깨끗하다”, “친절하다”, “사랑이 많다”, “믿을 수 있다” 등으로 신임이 두터운 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 성도들은 정말 예수쟁이, 예수에 미친 사람, 예수에 전적 드린 사람 답게 고귀한 애칭과 별명으로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섬기고, 사랑하고, 도와주고, 손해보고, 포용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쟁이 깍쟁이, 예수쟁이 빚쟁이, 예수쟁이 부도쟁이, 예수쟁이 싸움쟁이, 예수쟁이 거짓말쟁이, 예수쟁이 못믿을 사람들로 부정적 이미지를 먹칠하고 있습니다.
예수믿은 자들이 성경을 끼고, 주일날 교회를 가고, 교회 직분을 부르지만, 가정, 사회, 직장, 심지어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말썽만 피우는 가짜, 짝뚱 그리스도인들, 문제의 예수쟁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함량미달인 교회 직분자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빛을 잃고, 소금의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미국교회는 수천명 모이는 교회에도 장로, 집사가 손가락곱을 정도로 적습니다.
교회 직분도 은퇴하고나 그 교회를 떠나면 그 직분의 명칭을 자신과 타인도 부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조금난 다니도 너나 한 것없이 장로, 권사, 집사입니다. 심지어 직분을 쉽게 얻기 위해 작은 교회로 돌아다닌 사람들도 있다.

진실한 직분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절대적 필요합니다.
그러나 급조 제자, 함량미당 직분자는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듭니다.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교회의 위상을 망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지적처럼, 주님이 만드신 값비싼 포도주를 꾸정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가?
진실된 그리스도인 인가?
깊이 자성해야 합니다.
나부터 냉철하게 목사이기 전에 참된 그리스도인가?
가장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통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내 속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가는가?


히브리민족이 성민이 된  것은 히브리 민족이 세계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유전적인 원죄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죄를 범하는 자범죄를 갖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게 하심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현재 유엔에 가입한 나라가 193개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는 몇 개의 국가가 있을까? 지구상에 있는 나라는 모두 몇 개일까?
전 세계에 있는 모두 몇 개의 나라가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국가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흔히 세계의 국가라고 하면 유엔 회원국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 국가의 수
유엔(UN) 193개국(정회원)+참관 회원국 2개국(바티칸, 팔레스타인)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등록된 국가 249개국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국 211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국 206개국
헨리여권지수 199개 국가/지역 

- 현재 유엔(국제연합)에는 193개국이 정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유엔 비회원 옵서버 국가(non-member observer state)인 바티칸 시티와 팔레스타인을 합쳐 195개다.
정회원국 마지막 가입국은 남수단(South Sudan)으로 2011년 7월 14일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 유엔(UN) 회원국의 수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가입국 수가 더 많은 것은  부분적인 자치를 하는 속령들과 일부 국가들에 의해서만 독립 국가로 인정받는 곳도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올림픽 참가국은 유엔 정회원국 193개에 유엔 참관국 1개, 일부 나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는 나라 2개, 타국의 속령 10개를 포함해 총 206개다.

- 월드컵 출전 국제축구연맹(FIFA) 국가는 211개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모두 영국의 일부이지만 개별 팀으로 출전한다.

국제표준화기구(ISO)에는  249개국이 등재되어 있다. 독립적인 속령을 비롯하여 해외 식민지와 무인도, 심지어 남극대륙도 개별적인 ISO의 국가 약호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사이트의 국가/지역별 정보에는 198개의 국가/지역명을 볼 수 있다.  

- 전 세계 여권 파워를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헨리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는 특정 국가의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 합산해 산출하고 있는 지수이다. 헨리앤드파트너스에서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글로벌 여행정보 자료를 바탕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성민(신명기 14:1-2)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국가는 인간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뭔가 특이성을 지닌 채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탄생의 배경에는 애굽의 심판이 있습니다. 애굽을 치시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의 심판 없이도 얼마든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미리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400년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시고 애굽의 심판을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로 출발하게 하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신 애굽을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를 건설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 참된 생명을 계시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계획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을 보여주는 삶인가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피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감으로서 살아난 사람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피를 경험한 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죽음의 심판 속에서 피를 경험함으로서 살아나는 체험을 하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할 일은 어린양의 피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피를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애당초의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고 400년간 고생하게 하시고 심판을 경험하고 피를 경험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뭔가를 담아서 보여줘야 하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담아야 할 내용들을 미리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과 같이 전도하면서 여기저기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다만 심판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체험을 그대로 몸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신 것은 애굽이라는 국가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애굽의 사고방식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애굽의 사고방식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지시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지시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약속이란, 한 자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에 의해서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흠없는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이 애굽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감으로 함께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을 보여야 했고, 약속을 간직한 삶은 어린양의 피를 의지함으로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신자의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로 부르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릇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담아서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그릇입니다.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신약에 와서는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인간들의 기준이나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되고 구약에서 무엇이 참 이스라엘이었던가를 밝히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애굽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피에 있었던 것만큼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의 구분은 역시 피 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형적인 모습이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담고 있어야 할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늘 십자가를 담고 십자가를 드러내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시켰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과 신자를 구별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를 그냥 '신자' '자녀'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녀' '여호와의 성민' '자기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여호와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은 자가 여호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닫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너무 무디어져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낡고 퇴색되어진 은혜요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더럽고 악한 우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수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진 그런 상태로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무디어져 갑니까? 그 이유는 자신을 선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나는 신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못박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백성으로 삼으신 은혜가 반복될수록 은혜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못박고 하나님께 나오시면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될 자격이나 있습니까? 한 주간의 삶속에서 자녀 됨을 과연 얼마나 보여주며 삽니까? 그런 우리가 어떻게 떳떳하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우린 항상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올 때,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과 은혜로서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닌 자로 나왔다가 자녀가 되어 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 아닌 자가 자녀된 그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 있었던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증명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선물 받을 자로 택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믿음을 이해한 신자는 '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역시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길 때 내가 여호와의 자녀 되고 거룩한 백성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복을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보다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이기 때문에 변함없이 교회로 부르셔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인할 때 그 사랑은 어제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 깨달은 새로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된 채 '나는 자녀다'라는 생각 아래 맹목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돌아가 버린다면 그속에서 새로움이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자녀 됨에 대한 은혜와 사랑이 무디어지고 상실된 신자아닌 신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녀답게 산다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면 분명히 자녀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입니다. 애굽의 심판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행한 심판이었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적 사고방식과 대치된 관계에서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산다는 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거꾸로 살고 세상의 상식과 반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녀의 삶을 자녀 됨에 대한 사랑과 은혜와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 과연 그들이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성민으로 구별되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는 것이나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미는 것은 모두 가나안 민족의 풍습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 풍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산 사람이 뭔가 하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만의 풍습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들은 살을 베지 않고 눈썹 사이의 털은 밀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다거나, 묘를 잘 쓰기 위해서 터를 보는 것이나, 귀신을 달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는 것들이 다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사람이 굳이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그 이유는 죽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있는 자신들의 일이 잘되기를 원해서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헛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은 귀신의 도움을 받으려고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지 말고 털을 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금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인생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 되이 사는 것은 세상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고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마음이 채워지기보다는 헛된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신자아닌 신자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흘리신 사랑으로 내 손잡고 가실 때 그 사랑에 끌려가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세상은 헛되다, 이 땅의 마지막은 죽음 뿐이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평안이고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날마다 먹는 음식에까지 성민의 모습을 담아 놓는 조치를 하십니다. 3-21절까지 보면 음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네발 달린 짐승 중에 새김질 못하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김질 못하는 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이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구별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중에는 비늘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땅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성도에게 있어야 할 구별의 모습을 가리는 것입니다. 새중에서는 땅에 있는 죽은 시체를 즐겨 먹는 새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의 더러운 것을 취한다면 그것은 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곤충 중에서도 땅으로부터 뛰어 오르지 못하는 것은 먹지 말도록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구별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먹으라고 하신 것은 이것과 반대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땅에서 살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살 사람이다. 땅의 것이 힘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우리 힘이다'는 것을 항상 새기면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의 구별된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교회에서만 보지 말고 날마다 집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집에서도 말씀을 대함으로서 '나는 하늘에서 살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에 게으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든 생활 속에서 '나는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성민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는 삶에 모든 힘을 기울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으로 산다면 나에게 돈이 없어도 괜찮고 남이 무시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분이 우리를 '너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힘든 일을 당한다고 해도 굳건하게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말씀을 통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14: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찌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26:19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2월 27일(목) 신명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켜 행하라(신 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Be careful to follow every command I am giving you today, so that you may live and increase and may enter and possess the land that the LORD promised on oath to your forefathers.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Be careful to follow...so that)

살고(live)
번성하고(increase)
얻으리라(possess)



마가복음 7:21-2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For from within, out of men's hearts, come evil thoughts, sexual immorality, theft, murder, adultery,
greed, malice, deceit, lewdness, envy, slander, arrogance and folly.
All these evils come from inside and make a man 'unclean.'

21안에서부터, 사람 마음에서 나쁜 생각이 나와요. 곧 음란한 짓, 도둑질, 살인입니다.
22또 혼외 관계, 지나친 욕심, 악함, 속임수, 멋대로 놀아남, 못된 눈초리, 하나님 모독, 시건방짐, 아둔함입니다.
23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부터 나와서 사람을 더럽힙니다.”

악한 생각들(evil thoughts)
1. 음란(sexual immorality)
2. 도적질(theft)
3. 살인(murder)
4. 간음(adultery)
5. 탐욕(greed)
6. 악독(malice)
7. 속임(deceit)
8. 흘기는 눈(lewdness)
9. 훼방(envy)
10. 중상모략(slander),
11. 교만(arrogance)
12. 광패(folly)



지켜 행하라

신 8:1-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4-6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고 그를 경외하라 고 하였습니다.
말씀 가운데 하라는 1537회, 하지 말라는 9+639=748회 나옵니다.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1. 하라

개역한글 성경 인터넷 판에서 "하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1,531구절로 나타납니다.
구약 1,035구절, 신약 496구절

하지 말라는 225구절
구약 144구절, 신약 81구절

대한성서공회 검색란에 입력한 결과
하지 말라 187구절
하라 1547구절

율법 613가지 - 하지 말라는 365가지, 하라는 것은 248가지

율법을 구체적으로 613가지인데 하라는것은 248가지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가지다.
토라 (구약 성경)에 기록된 613가지 율법 중 하라는 것이 248 개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개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레위기 11장에서는 부정한 음식에 대하여 먹지 말 것을 규례로 정해 놓았다.
거기에는 3개의 할 것 과 10개의 하지 말 것을 지정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으로 명령 하셨다.

하라고 허락된 것은 다음과 같고 그 외에 구체적으로 부정하니 먹지 말 것들을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렘11:3)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렘11:9)

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렘11:21)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구체적으로 자세히 Not to do list 를 적어 논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1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 인가를 가름할 수 있는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렘11:44a)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렘11:45b)

I am the LOAD your God; be holy, because I am holy. Be holy, because I am holy.

 

하나님께서 거룩 하시니,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거룩 하라 하신다.

거룩의 본래 사전적 의미는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 이니 꼭 신령한 경건의 의미인 Holy 외에 추가하여 Most high dignity 인 최고 존엄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긍심 까지 느끼게 하신다.

 

거룩을 묵상하며 사람이 얼마나 거룩하고 경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근본적 성품인 거룩을 인간의 성품으로 담아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잠깐 거룩 할 수는 있어도 매일의 일상으로 거룩함을 습관으로 유지하면서 살수 있다면…

 

믿음장 으로 불리우는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예수님의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자만이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신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화평함은 화목제의 결과이며 거룩함은 하나님께 번제 드림에 경외함의 결과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믿음의 필수 과정이라고 들린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하나님이 거룩 하시니 우리들의 행실까지 거룩하라 하시며 레위기의 본문 11장45절을 그대로 인용하셨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5-16)

 

거룩은 마치 경건한 마음만을 유지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 까지도 거룩하심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상의 말씀의 묵상을 마치며 나는 거룩의 의미를 얼마나 마음에 품고 있으며 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았다.

 

주말 사역을 위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을 거쳐 주일날 순장반을 마치고 오후 늦은 시간까지 교회와 성도 라는 관계의 틀 안에서 나를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속에서의 나의 모습은 어떨까? 나를 보는 우리 직장 동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세상 속에서 나의 모습이 단지 세속적인 시류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는 사람 정도로는 봐주고 있는지?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던 지라 왜 이리 마음이 움츠려 지는지 부끄러울 지경이다.

 

지금부터 해야할 거룩함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따라 보자, 일단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 되이 선택 받은 자 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를 매일 묵상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거룩한 행동을 찾아보자, 내가 하는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 무엇 인가를 찾아 하지 말자.

 

결단은 내가 지금부터 거룩하기 위해 해야 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 나의 규례를 정해 보자.

시간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을 닮아 가는 성화의 과정을 기대해 본다.





활기찬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자신 있게 권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인류역사 속에서 반복된 것 입니다. 너무너무 확실하게 임상실험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게 그대로 시행한 것 입니다. 또한 실감 있게 행한 분들이 많습니다.
틀림없는 것 이며 의심할 바 없는 것 입니다. 과연 하는 것이 생활의 척도인 것 입니다.
신 30: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은 좋은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순종은 축복입니다. 활력입니다. 건강입니다. 기쁨이요 아름답습니다. 이적입니다.

요 2:5-9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하인의 사명은 갖다 주는 것 입니다. 연회장이 선포함.

순종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회개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불평, 불화 불만은 불행입니다.
화해와 순종과 행함은 행복입니다. 화해도, 욕심을 버리는 것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순종의 기술, 사랑의 기술, 행함의 기술입니다. 왜요 잘 안되니까? 기술은 배워야 합니다.
반복해야 합니다. 합숙 훈련해야 합니다. 단련하고 숙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격증을 따야합니다.  가정 바로 세우기를 위한 아버지 학교에 가면 아버지 자격증을 줍니다.

2. 살고 번성하고  얻으리라

선민의 고난은 인격이 다듬어집니다.
마음의 단련, 행함의 시금석(試金石)이 됩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면 생명을 얻으리라. 받으리라, 체험하리라, 새로워지리라, 만족하리라, 풍성하리라, 감사 감격 감탄하리라.

출애굽기 16:14, 31.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40년 동안의 한결같은 만나의 양식은 그야말로 완전(完全)식품(食品)이요 바이타민A-Z까지 들어있고 마그네슘이나 철분(鐵粉)이나 혈압(血壓)조절(調節)이나 소화기능(器能)이나 모든 것이 함유(含有)되어 있는 그야말로 종합(綜合) 식품 입니다. 간편하면서도 가장간단하게 매우 편리하게 먹을 수 있도록 공평(公平)하게 주시는 고기능(高技能) 식품입니다. 초월(超越)첨단(尖端) 최첨단((最尖端) 식품(食品)입니다. 이런 식품을 연구하여 개발하면 성공 할 것 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것 입니다. 옷이 헤어 지지 아니 합니다. 발병이 나지 아니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역사를 알게 되는 지혜가 생깁니다.

창 12:2-3“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신28:1-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30:5-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 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신 30:8-9“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3,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외할지니라. 그리고 영광을 돌릴지니라.

신 6:1-3“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 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義)로 여김]

창 22:2,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할 때에 즉시 순종하였더니.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활력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될 것 입니다.
일상생활의 건강한 환경이 이루어질 것 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입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라

감사 체질 

 어떤 자녀는 부모와 같이 앉은 식탁에서 가급적이면 부모보다 먼저 음식을 먹지 않는다. 부모를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니까 부모도 대견해하며 말한다.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흐뭇하다. 부모가 그렇게 편하게 행동하도록 배려해주니까 자녀는 더 감사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부모보다 먼저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어느 날 A 집사가 부모 앞에서 먼저 음식을 먹지 않는 그 자녀의 행동을 보았다. 그 행동이 자발적인 행동임을 느끼고 칭찬하며 격려했다. “얘야, 참 예의가 바르구나. 네 모습을 보니까 참 좋구나. 앞날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A 집사로 인해 그 가정에 감동, 배려, 감사, 평화, 평안이 더욱 넘치게 되었다. 좋은 집사다.

 반면에 B 집사는 팩트를 잘 모른 채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녀가 그러는 줄로 오해하고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부모도 똑같은 사람이야.” 겉으로 보면 그 자녀를 생각해주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상황에서 부모가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라고 한 말에는 신뢰와 평화의 코드가 숨어있지만 B가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라고 한 말에는 불신과 불화의 코드가 숨어있다.

 남의 잘못에 대해 말하거나 비판할 때 시기나 질투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팩트를 잘 모른 채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게 하라. 특히 자기 의에 대한 과시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주의하라. 자기 의의 표출이나 자기 존재 의미의 확인을 위한 비판은 남도 힘들게 하고 공동체도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생일에 목사와 교인을 초청해 음식을 주는데 교인들부터 주고 목사에게는 제일 나중에 주었다. 몇 교인들이 “목사님께 먼저 드려야지요.”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목회자는 구약시대 제사장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잖아요. 괜찮아요.” 언뜻 들으면 바른 말 같은데 왜 공감이 잘 안 되는가? 그 언행에 자기 의가 빠끔히 드러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면서 무지의 선봉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 때 바울의 사역과 글은 큰 감동을 주었지만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바울의 글도 다 맞는 것은 아니야.”라고 하며 그의 글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면 자신은 올바른 비판으로 여기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비판보다는 비판이란 프레임을 사용해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의와 사랑을 드러낸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비판에는 팩트에 근거한 논리적이고 정당한 비판도 있지만 자기 의를 은근히 과시하는 비판도 있다. 비판을 최대한 신중히 한다는 전제에서 전자의 비판은 대개 경청되고 존중되지만 후자의 비판은 대개 무시되고 외면된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한 좋은 비판은 내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좋고 공동체에도 좋지만 자랑과 과시가 은근히 섞인 비판은 공동체나 상대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자기에게도 해가 된다. 내면의 성숙을 막기 때문이다.

 칭찬과 비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 단정해 말할 수 없다. 칭찬 중에는 나쁜 칭찬도 있고 비판 중에는 좋은 비판도 있기 때문이다. 비판도 정당하게 잘해야 하고 칭찬도 정당하게 잘해야 한다. 특히 비판이 자기 한과 상처의 토로나 축소된 입지에 대한 반발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 의의 표출이나 과시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자기 의와 사랑을 빠끔히 드러내는 비판이 체질화되면 인간성과 사회성이 저하되고 더 심해지면 반사회적으로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반사회적인 의인 행세자가 디모데전서를 보고 바울에게 편지했다. “바울님! 당신 편지를 읽어보고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당신 글 중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표현을 봤는데 그 표현에 감춰진 자기 의에 대한 과시가 역겹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전도자이자 저술가인 바울을 비난하는 자기 편지에 오히려 자기 의가 빠끔히 드러나 있는 사실을 모르고 바울보고 자기 의에 대한 과시적인 표현이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 편지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당신이 후매네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표현도 봤습니다. 진정 당신은 사랑을 아는 사도입니까?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어도 잊고 용서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면 당신부터 병들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실명을 내세워 왜 인신공격을 합니까? 아무리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잘못했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글에 실명을 쓰면 그와 그의 가족이 입을 상처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언뜻 보면 사랑과 용서가 풍성한 사람인 것 같지만 그 무례한 편지는 자신의 의와 인격을 과시하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잘못한 사람의 인격과 이름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지만 때로는 자기 행동에 상응한 오명을 받을 사회적 책임도 있다. 남을 생각해주는 것 같은 말이 자기 의를 나타내는 증거는 아니다. 잘못한 사람 편에 무조건 서기보다 의로운 편에 서려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사랑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는다.

 자기 의가 표출된 비판적 관점에서는 무서운 징벌 얘기가 많이 담긴 성경은 무자비한 책 같다. 잘못된 관점이다. 비판을 통해 자기 의를 과시하지 말라. 비판은 필요하지만 바르고 지혜롭게 비판하지 않으면 자기 의를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의 병이 통제가 안 되고 심해지면 반가족성, 반사회성, 반공동체성이 체질화된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수시로 이런 말을 한다. “요새 우리 교회의 모습이 천국인 것 같아요.” 왜 그런 천국 평화가 펼쳐지는가? 가장 큰 이유는 의인 코스프레(변장놀이)가 없기 때문이다.

 비판할 때는 자기 의가 빠끔히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라. 내 의는 나의 비판적인 말보다 나의 헌신적인 행동으로 인정된다.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 의와 덕을 쌓아올리고 나타내라. 잘 모르면서 남을 깎아내리며 은근히 자기 의를 과시하는 비판은 좋지도 않고 효과도 없고 자기 내면의 성숙과 평안도 막는다. 그런 의인 코스프레 없이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체질화시키라. 모세가 신명기 유언 설교에서 가장 강조한 말씀도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이었다.

< 신세대에게 필요한 말씀 >

 신명기 29장 1절에 언급된 호렙에서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구세대가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을 뜻한다.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거의 다 죽고 당시 모압에 진 친 사람들은 40년 전의 호렙산 언약 때 20세 미만이었거나 출애굽 이후 태어난 20세 이상의 신세대 성인들이었다. 그들과 모압 평지에서 호렙산 언약 외에 새로운 언약을 세웠다. 그 언약의 핵심 내용이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내용이다.

 본문 9절을 보라.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하나님이 광야 40년 동안 은혜로 지켜주신 것은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해질 것이라고 했다. 형통의 비결은 단순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된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은혜도 말씀을 힘써 지킬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가끔 문제와 기도제목이 생기는 이유도 말씀을 가까이하며 지키도록 생길 때가 많다. 말씀을 외면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축복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런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속이 좁은 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축복도 바르게 주어져야 진정으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안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땀과 수고의 가치는 작은 가치가 아니다. 숫자나 수량이 많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내가 너무 많이 가짐으로 남이 너무 적게 가지면 인간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병들 수 있다.

 말씀이 없는 인생과 사회는 투쟁적인 인생과 사회가 된다. 말씀이 욕망을 잠재울 때 사회는 따뜻해지고 내 몫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안도 넘치고 인간관계도 회복되어 참된 행복을 누린다. 또한 말씀을 통해 참된 기적에 대한 깨달음도 깊어진다. 겨울에 꽃이 피면 기적이라고 하지만 봄에 꽃이 피는 것도 기적이다. 사실상 생명 자체가 기적이다. 그처럼 말씀이 있는 삶도 축복이지만 말씀을 지키는 삶은 더욱 큰 축복이다.

 열심히 일하는 삶도 축복을 가져다주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은 더욱 축복을 가져다준다. 땀도 가치 있지만 말씀에 순종하며 흘리는 땀은 더욱 가치가 있다. 참된 성공은 사람의 힘으로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지만 순종하며 심으면 더욱 풍성히 거둔다. 수시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늘 말씀을 앞세워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제 뜻이 되게 하소서.” 말씀에 순종하면 고난 가능성이 크게 낮아지고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은 축복으로 인도하는 직통로가 된다.

< 말씀을 널리 전파하라 >

 모세의 고별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이었다. 출애굽 신세대에게 주어진 모세의 유언의 말씀은 현대인에게도 가장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가장 필요한 말씀이다. 말씀은 나도 살리지만 내 후대도 살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도 살린다. <월새기(웥간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을 하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넘치는 이유는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의 소식을 넘치게 듣기 때문이다.

 세계 선교의 핵심 콘텐츠도 말씀이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의 열정은 대단해서 결국 세계 2위의 선교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개척과 교육과 구제 사역에서는 큰 역사를 이뤘지만 성숙한 제자를 만드는 말씀 사역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 선교사들의 손에 1불 가격으로 주어질 <월새기 영어판>이 있었다면 말씀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대인 전도가 점차 힘들어지는 시대이기에 문서와 미디어를 통한 말씀 전파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선교에 동참하고 공헌하는 것도 간접 전도다.

 간혹 <월새기 영어판> 창간을 위한 후원자가 되거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비전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이 이뤄지기도 한다. 그 중에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약속을 한다. 대개 비전은 화려한 약속도 없이 은밀히 기도하다가 때가 되어 감동 가운데 결단하고 헌신하는 사람에 의해 구체화될 때가 많다. 그래서 많은 화려한 약속이 말로만 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도 자신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하루라도 빨리 표현하고 싶어서 나온 약속 자체의 순수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화려한 약속을 하면서 “내가 <월새기 영어판> 창간 후원자로 이름을 날려야지.”라는 명예심 때문에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월새기>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전 세계로 말씀을 전파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도 그 약속들을 너무 믿지는 않는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약속들이 공수표가 되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 약속에 담긴 선의를 느끼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결국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요새 한국 교회 전체에 선교 후원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그래서 저희 <월새기> 문서선교 사역도 재정적으로 매달을 힘들게 넘기고 있다. 매달 재정적인 마이너스가 너무 커서 문서선교에 동참해줄 보다 많은 교회와 동역후원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월새기> 발행 사역이 재정적인 문제로 중단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달라. 신기한 일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인데도 <월새기 영어판> 발행의 비전이 퇴색되기보다 오히려 더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조급해하며 서두르면 욕심이 개입되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비전도 하나님의 때에 시작되어야 과정도 좋게 되고 열매도 좋게 된다. <월새기 영어판> 사역도 때가 되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멋지게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전파하려는 순수한 열정을 무엇보다 기쁘게 여기신다. 그래서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삶에는 궁극적으로 낙오가 없다. 말씀 전파의 비전을 가지고 계속 힘쓰면 하나님은 그 비전이 이뤄지도록 힘과 능력도 주시고 좋은 만남도 허락하시고 길도 열어주실 것이다.







2월 26일(수) 신명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멸할 것이라(신 7:2)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and when the LORD your God has delivered them over to you and you have defeated them, then you must destroy them totally. Make no treaty with them, and show them no mercy.

진멸(殄滅) : 다할 진(진), 다할 멸(滅)
- 무찔러 죽여 없애 버림


盡滅 : 다할 진, 다할 멸(멸망할 멸)
-
죄다 멸망(滅亡)하거나 또는 멸망(滅亡)시킴.

진멸(殄滅)하라

1. 에스더 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2. 예레미야 51:3
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주를 갖추고 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 활을 당길 것이라 그 청년들을 아끼지 말며 그 군대를 진멸하라.

진멸(殄滅)

1. 출애굽기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2. 출애굽기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신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출22: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레27:29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민21: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수10:1 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수10:37 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수10:39 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요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수11: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헤렘(חֵרֶם )은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파문", "추방", "몰수", "억제" 등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인 용도로의 사용을 금하고 성별(聖別)하는 것, 봉헌된 것, 저주받은 것 등을 뜻한다.

חֵרֶם 스트롱번호 2764

1. 그물.   2. 비유적으로 여자들의 ‘아첨’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3. 돌이킴
발음 [ chêrem ]
어원  / 27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회 사용
  • 1. 명사 그물, 망, 어망, 합1:16,17, 겔26:5,14,47:10.
    • a. 명사 [주]비유적으로 여자들의 ‘아첨’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전7:26
  • 2. 명사 돌이킴, 내맡김, 쏠림, 말4:6, 슥14:11.
  • 관련 성경  /  드림(레 27:21, 민 18:14), 바친 것(레 27:28, 수 6:18, 7:12), 진멸 당할 것(신 7:26), 진멸할물건(신 13:17), 멸할 것(삼상15:21),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왕상 20:42), 진멸시킬 물건(대상 2:7), 그물(전 7:26, 겔 26:14, 합 1:15), 진멸(사 34:5, 사 43:28), 저주(슥 14:11, 말 4:6).

헤렘의 사전적 의미

  • 동사 하람은 ‘완전히 멸하다, 저주 아래에 두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 명사 헤렘은 흔히 ‘멸하기로 작정된 물건, 금지된 물건’으로 번역된다.

개념

  • ‘헤렘’의 개념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또는 그에게 봉헌된 것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사용이나 접촉으로부터 구별된 지위”를 뜻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Greenberg 1971:344)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뒤집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개념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헤렘’은 “궁극적인 봉헌”을 의미한다(Milgrom 1990:428). 그것은 어떤 물건을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 채 하나님께 드리는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하람/헤렘’이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몇 가지 다양한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기는 해도, 신명기로부터 열왕기하까지의 모든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그 중심 개념이 전쟁과 파멸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헤렘의 이유

이처럼 인상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에는 나름의 일관성 있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출 23:33);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6);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5:55);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야웨를 떠나고”(신 7:4);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신 20:18).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명령, 곧 가나안 원주민을 향한 ‘헤렘’의 명령은 주로 질병 예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오염을 막는 확실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변 민족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이스라엘의 잠재력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한층 강조될 분이다.
그 명령의 주된 관심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처럼 행한 결과 가나안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헤렘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엘리야의 시대 이후 요시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종교와 맞서 싸우던 오랜 투쟁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헤렘의 구속사적 의미

출 15:3절에서 주 하나님이 처음으로 ‘용사’로 불린다.
구약에서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별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을까?
너무 잔인하지 아니한가?
왜 하나님은 자기 민족만 사랑하시고 이방 민족을 미워하시는가?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출애굽2세대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실 때에는 무슨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수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다 진멸해야 하는가?
이 명령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

1. 들어가며

가나안 땅의 입성을 앞두고 있는 출애굽2세대들에게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반드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신 7:1~2).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더 힘이 센 민족인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물리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 것이며, 그들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족속에게 가서 그들을 전도하라거나 그들을 개종시켜서 함께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자들과 어린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던 것인가?
하나님은 너무 잔인한 하나님이 아닌가?
오늘은 우리는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은 정말 잔인한 하나님은 아닌가?

기독교의 잘못된 점만을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안티기독교인들은 신명기 7:1~4과 같은 말씀을 매우 좋아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을 공격하기에 참 좋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사람들은 여자든 어린이든 상관없이 다 잔인하게 철저하게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오직 자기민족만을 아끼고 사랑하되 타민족은 잔인하게 죽이라고 명하시는 "나쁜 하나님"이라고 매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나안 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여호와의 명령은 정말 나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초기 기독교 이단 가운데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폭력과 보복의 하나님"이라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는 "저급신"이라고 매도하였다.
그는 신약의 용서와 희생을 실천하신 예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안티기독교인들이 마르시온의 주장처럼 구약의 하나님은 정말 잔인한 하나님인가?

그런데 우리가 먼저 알 것은 구약의 하나님 여호와나 신약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나 한 분 하나님이지 다른 하나님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출애굽2세대들)에게 가나안민족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족속과 섞여살면서 유일한 하나님의 신앙을 유지할 만한 상태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야 2세대들의 신앙은 불완전한 상태


사실 출애굽2세대들은 유일한 여호와 신앙이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4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신앙을 잃어버렸다.
애굽인들이 섬기는 송아지우상(하토르)를 보고 자란 세대였다.
그러니 잠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자 금방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면서 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그동안 인도해내신 여호와를 만든다고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에서 보고 자랐던 것은 송아지 우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굽에서처럼 광란의 춤을 추면서 즐거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민족은 어떤 민족이었는가?
그들 이전에 그 땅에 살고 있는 토종원주민을 다 토벌하고 정착했던 매우 강한 민족이었다.
그런데 어찌 가나안인들이 자기들의 신을 포기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두 민족이 함께 살거나 혼인을 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락없이 이방신에 동화될되어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지않아도 출애굽1세대들은 이미 전에 거의 전멸되다시피 광야에서 엎드려 죽었는데, 어찌 또 출애굽2세대를 잃어버린다는 말인가?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가나안 민족을 전멸하여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 가나안 민족은 그때야말로 죄악이 최고조로 관영한(가득찬) 상태여서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즉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창 15:16)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면서 보이는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대대손손 주시겠다고까지 약속하셨다(창 13:14~16).
그러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했었고,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곱에게도 했었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들이 차지한 가나안 땅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거의 없었다. 단지 그것은 헷족속에서 구입한 막벨라굴 한 켠 뿐이었다.
그것도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가 죽자 그녀를 묻어줄 매장지가 필요했기에, 토착원주민에게 돈을 주고 구입했던 땅이다.
그냥 차지한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창 23:9~20).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족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실 수가 없었다.
아직 죄악이 그땅에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악이 관영해야 그 땅이 그 백성을 토해낼 수 있었을텐데, 아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것이 무려 430년이나 된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족속과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2세대들에게 가나안 일곱족속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진멸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렘전쟁을 가리키는데, 이는 모든 생명체는 다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여기에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다 포함된다.
그래서 혹시 그들과 접촉하게 되더라도 그들과는 절대 3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신 7:1~4).

첫째, 언약하지 말라
그들과 무슨 약조를 맺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거민 중에 히위족속 기브온 거민에게 속아서 그들과 덜컥 약속해버렸다.
그러나 한 번 약속한 것은 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우상을 전해주지는 않은 듯 하다. 

둘째, 불쌍히 여기지 말라
불쌍하다고 여자가 아이들을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혼인하지 말라
자기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며, 그들의 딸도 며느리로 주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신 7:2~3).
이렇게 해서 결혼하게 되면 가나안 땅의 거주민이었언 배우자로 인하여, 가나안 신을 숭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땅의 여자들이 아무리 예쁘고 그들의 아이들이 귀여워보여도 그들을 죽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성을 알고 있던 포로귀환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간곡히 자기 백성에게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자는 즉시 이혼할 것이며, 자기의 자식들일지라도 그들과 헤어질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슥 9:1~10:44, 느 13:23~31). 

4.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는가?
혹시 그들을 접촉할지라도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 것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그들와 혼인하지도 말라고 하셨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 가나안인들을 섬기는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신 7: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거든 그들의 제단을 헐어버리고,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며, 조각한 우상을 불살라버리라고 하셨다(신 7:5).

오늘날에 들어와 이 말씀을 살펴볼 때에, 이 말씀 속에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 속에는 거하는 것이 3가지나 되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의 영이 거주하고 있다(슥 12:1).
사람이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는 순간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둘째,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였다면 악한 영들이 그 사람 속에 거주할 수 있는 것이다(창 3:14).
이것은 창 3:14에 의하면,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뱀(사탄마귀)이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갈 합법적인 권한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마 12:43~45에서,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려고 할 때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이는 사람의 몸이 귀신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그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고 있다(고전 3:16).
물론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 속에 거주한다.
참고로, 악한 영들은 귀신들이나 뱀들은 사람의 혼(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거한다.
그리고 육체 속에는 죄되 본성도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와 교제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출 20:5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죄값을 3~4대까지 물린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조상들 중에 다른 신들과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자들의 몸 속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으면 그 악한 영들은 그들의 몸에서 빠져나와 또다른 숙주를 찾아야 한다.
이는 경험상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계가족에게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그 집안 가족 구성원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또한 들어가려할 때에 잘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했는지를 우리는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귀여운 자식에게도 다 귀신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그때에 죄악이 관영한(가득 찬)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과 결혼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들이 꾀어서 자기들의 신들을 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모압여인들의 제사에 초대되어 음식을 나눠먹다가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들에게도 절하므로 바알브올(바알의 브올신)과 결합되어버린 것이다(민 25:1~3).
그때 하나님은 대노하셨다.
그래서 염병으로 치셨는데, 그날 이스라엘의 남자가 2만 4천명이나 죽고 말았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누워있으면, 옆 사람 속에 있는 영이 내 몸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면 간접적으로나마 그 영향을 내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결코 가나안 사람과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거의 구원받지 못해왔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에 다녀온 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예수믿지 않는 자들은 100% 지옥에 들어가고 있으며,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약90%는 지옥에 떨어지고 있으며, 목회자들은 약 95%가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짓고 있는 것이며, 죄를 지어도 그 죄들을 회개하지 않아서, 귀신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았어도, 자기의 조상들 중에 누군가 그런 자가 있었다면, 자손들이 그 형벌을 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는 자들과는 결코 언약을 체결하지도 말고 결혼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최악의 상태였고,출애굽2세대의 신앙도 아직은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이방인들은 무조건 죽여야 하는가?
이제 우리가 가서 그들을 살려야 하는 시대에 돌입해 있다.
이제는 우리가 영적으로 무장하여 능력을 받은 후에(행 1:8),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후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복음을 전파하도록 돕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제대로 무장하는 성도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악령에 붙들려 있는 자를 충분히 꺼내올 수 있다.
고로 이제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필요하다.
그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그들을 직접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해 오는 일이 우리의 과업이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

가나안 땅넓은 의미에서는 팔레스틴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해안 지대 및 내륙지대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כּנעני)은 그 땅에 거하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을 의미한다.


  3      -

신명기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1. 헷 족속(the Hittites)
2.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3. 아모리 족속(Amorites)
4. 가나안 족속(Canaanites)
5. 브리스 족속(Perizzites)
6. 히위 족속(Hivites)
7. 여부스 족속(Jebusites)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지명으로 "평강의 집"


여부스란 무엇인가? (여부스의 뜻과 의미)

 

'평강의 집'이라는 뜻

예루살렘의 옛 명칭

이 이름은 예루살렘에 살던 가나안의 한 종족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수 15:63)

원래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되었으나 정복하지 못하다가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곳을 함락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삼하 5:6~7)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보통 우리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말한다(그들 대부분이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다).
사실 가나안 땅의 가장 호전적인 족속을 성경은 블레셋 족속이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다른 일곱족속과 분리하여 언급한다.
이유는 다른 일곱족속과 달리 블레셋은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가나안의 조상은 '함'(창세기 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함'(חם)은 '검다', '뜨겁다'는 뜻이다.
그는 부도덕한 태도로 인해 노아의 저주(9:22-25)를 받았는데 그 결과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아라비아, 북동 아프리카 등과 같은 열대 지방에 흩어져 살면서 주로 타민족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 민족이 되었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창 9:18).
노아의 여러 손자들 중 특별히 가나안만 그의 아비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함이 실수한 결과 저주를 받게 될 인물(24, 25절)로서 향후 전개 되는 성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의 아들들은 주로 이집트, 가나안, 남아라비아, 에디오피아 등지에 정착하였는데 오늘날을 기준으로 하면 아프리카를 중심한 흑인종(Negroid)분포 지역이다.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창세기 10:15-19)

가나안의 후손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후손들이 정착하여 거한 땅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다"고 증언한다(창세기 10:20).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 족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
아브람이 세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8,9절).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예(10:6)로 우상숭배 행위에 탐닉하며 배타심이 강하던 족속이었으니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로인해 아브라함이 많은 식솔들과 가축 그리고 롯의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나안 사람과...그땅에 거하였는지라"(창 13:7). 이것이 아브람의 가정과 롯의 가정이 서로 분쟁하게 된 간접적인 이유임을 성경이 증언한다. 즉 아브람일행이 장막을 친 곳은 임자 없는 지역이 아니라 이미 원주민이 주거하고 있던 지역이었으니 한정된 주거 면적 안에서 상대편보다 더 유리한 목축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다툼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은 위의 일곱족속이며, 함의 자손이 아니며 외지에서 들어온 블레셋족속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 왜 하나님은 가나안족속을 그토록 미워하실까?

모세는 죽기 직전에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가나안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 그들이 기억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선포에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들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새로운 광야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긍휼과 베풀지 말고 그 땅의 거민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사실 이것은 모세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가나안 족속과 그 문화를 말살하라

신명기 7: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1(상).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이 숫자도 많고 강하지만(1(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하셨다(2(상).

여기에서 '붙인다'('나탄, נתן')는 말은 '배당하다', '주다'라는 말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속의 심판을 이스라엘에게 양도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진멸이란 단어 '하람(חרם)'은 '철저히 죽이다'는 뜻으로 어미와 그 새끼를 함께 죽이는 '몰살'을 가리킨다. 외견상 잔인무도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 원리에는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1)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성전(聖戰)으로, 죄와 사단의 왕국을 철저히 섬멸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의 예표가 된다.
(2)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로 부터 제외된 피조물에게는 엄격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만이 있을 뿐, 어떠한 자비나 동정도 허용되지 않는다(7:2; 마 24:40-44).

이스라엘 군대의 이러한 행위는 민족적인 원한이나 포학성에서 기인된 대량 학살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한 행위로, 하나님의 공의 구현 및 가나안에 신정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지(整地)작업의 일환인 죄악 근절 행위였기 때문이다(2:34).
즉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등의 각종 죄악으로 부패한 자들이었으므로(7:2-5, 25),
이들을 살려 둘 경우 도리어 이스라엘이 악에 물들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레 3:1-11).
가축이나 재물 등은 통상 승전군의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상례이나,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는 가축들조차 칼날로 멸할 정도로(수 6:21)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생명체(롬 8:22)를 철저히 진멸했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 이 말은 가나안 족속들의 죄에 대하여 단호한 조치와 철저한 징벌을 명령한 것이지, 일반적인 동정이나 자비심까지 엄금(嚴禁)한 것은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진정 죄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미온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죄, 특히 우상 숭배 죄에 대한 감상적인 태도나 미온적인 대처는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 아니라 결국 자신마저 그러한 죄에 휩쓰려들 우려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진정 '죄인'(罪人)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또한 '죄'(罪)와는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명령하시고 계심(히 12:4)은 의미심장하다.

가난안의 여러 신들(바알, 아스다롯, 하늘황후 등)은 대개 타락한 형태의 주신제(酒神祭)의식이나 음란한 성(性) 의식을 통해 예배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들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다 보면 자연히 각종 방탕과 음란, 도덕성 부패 등과 같은 심각한 죄악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들과 혼인하지 말자니"
- 통혼(通婚)으로 야기될 문화적 혼합과 우상 숭배 감염현상을 막기 위한 조처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신앙과 가나안 민족의 바알 신앙이 결코 혼합될 수 없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고전 6:14 - 16).
그러나 후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 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받아들였는데(왕상 11:1 -8).
그 결과 이스라엘 통일 왕국은 분열되고 급기야는 멸망당하고 말았다(왕상 11:26;렘 52:3 - 6).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누구나 선(善)을 좇아 행하기 보다는 악(惡)으로 쉽게 빠져들 위험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적 권면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결혼, 결국 우상 수배에 빠지게 되면 아무리 자비하신 하나님일지라도 지체없이 벌하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올무가 되리라"
- 여기서 '올무'에 해당하는 원어 '모케쉬'는 '유혹하다'(ensnare)란 뜻의 '야코쉬'에서 파생된 말로, 곧 (짐승을 잡는) '밧줄', (코를 꿰는) '갈고리'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가나안 족속과의 교제 및 통혼 등은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덫'(trap)이 됨을 시사하는 말이다(3절).

결국 가나안 족속으로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첫째 아브라함 이후로 연기된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련하여 더 이상 그들을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창세기 15: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노아 홍수 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신"(창 6:5).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한 땅을 정화시키기 위해 물로 세상을 정결케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지이다.
그 땅을 사용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금하신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죄악, 특히 우상숭배와 음란, 폭력(살인, 전쟁, 인신매매)같은 죄악은 창조질서와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며 심판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욥, 멜기세덱이라는 같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가나안 족속이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도 일찍이 경고하셨으나 그들은 추가로 주어진 430년(이스라엘의 애굽 생활)의 시간이 지나도록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둘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족속에게 물들어 타락할 것을 염려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싹, 사악한 문화를 입은 종교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위한 조치이다.

먼저 그 땅을 기경하시고 새로운 나무(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입은 이스라엘)을 삼으시고 원하셨다.



가나안 일곱 족속 및 그 영적 의미

신명기 7:1-7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1>헷 족속과 2>기르가스 족속과 3>아모리 족속과 4>가나안 족속과 5>브리스 족속과 6>히위 족속과 7>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가나안의 일곱족속이란?

1. 헷 족속(Hittites)

헷 족속의 조상인 '헷'은(창 23:10)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아들로서(창 10:15; 대상 1:13)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 밭을 사서 사라를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고( 창23:3-20), 이삭의 장자 '에서'가 헷 족속의 딸과 통혼하였다(참조, 창 27:46). 이들은 유다 산지에 거하였는데(참조, 민 13:29; 수 11:3)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면서(창 15:18, 20) 그 대신 그들을 진멸하라 명하셨으나(신 7:1, 2, 24),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하므로(삿 3:5) 후에 이스라엘이 그들과 통혼하는 죄악의 근원이 되게 하였다(삿 3:6; 왕상 11:1; 스 9:1, 2)

2. 아모리 족속(Amorites)

'아모리 족속'의 명칭은 '산악인들'이라는 뜻으로(Ewald) 때로 가나안 족속 전체를 지칭하는 통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창15:16; 수24:18; 삿6:10; 삼하21:2).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 진입을 막기 위해 다섯 왕이 기브온에 집결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흩으신 사건이 있었다(수10:1-21). 그러나 그들 역시 완전히 진멸되지 아니하여(삿1:34-36) 그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이 좇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3. 가나안 족속(Canaanites)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의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요단 강변을 잇따르는 한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민 13:29; 신 11:30; 수 5:1; 11:3) 그들은 주로 '게셀'에 거했다(수 16:10). 성경에 많이 언급되지 않아서 자세한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단지 가나안의 7족속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민족이며 완전히 진멸되지는 않아서 후대에 얼마간 그 종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수 16:10).

4.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이 족속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기에 성경에 증거하는 그대로 '이스라엘이 쫓아낸 가나안 종속 중의 하나'로만 이해하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5. 히위 족속(Hivites)

'가나안'의 아들 중 하나로서(창 10:17) '레바논 산지'(참조, 삿 3:3)와 '헬몬 산'(수 11:3), 그리고 '세겜'과 '기브온 성읍'(수 9:7; 11:19) 등에 거하였다. 이들 역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에 의해 가나안으로부터 축출되었는데 이들 족속과 족장들과의 대표적인 관련성은 야곱의 딸 디나를 욕보인 '하몰'의 아들 '세겜'의 강간과 죽음인데 그들 '하몰'과 '세겜'이 바로 히위 사람이었던 것이다(창 34:2).

6. 브리스 족속(Perizzites)

이들은 '시골 사람', '미개인'이라는 뜻으로 산악 지대에 살면서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거한 족속들이다(수 11:3; 삿 1:4, 5). 이들의 기원은 꽤 오래 되어 아브라함 때에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었고(창 13:7; 15:18, 20) 야곱이 두려워한 족속이었다(창 34:30). 이스라엘의 정복 때 패한 이들은 완전히 진멸되지 않고 남아 있다가 유다 족속에게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하였고(삿 1:4, 5) 후에는 솔로몬이 노예로 삼은 족속이었다(왕상 9:20, 21).

7. 여부스 족속(Jebusites)

예루살렘의 산악 지대에 거한 민족으로서(민 13:29), 후에 이들이 거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 잡아 이스라엘의 도읍이 되었다. 즉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실시할 때 여부스 족속을 다스리던 자는 '아도니세덱'이었는데(수 10:1-5) 여호수아가 '아도니세덱'을 죽이기는 했어도 땅을 뺏지 못한 이곳을(수 10:23-26) 다윗이 요압을 시켜 정복한 후(대상 11:6) 도읍으로 정하고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이다(삼하 5:4, 5).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여부스 족속을 부역시켰다(왕상 9:20, 21)


가나안 7족속의 의미

헷 족속(Hittites) :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악몽, 우울증, 거짓, 속이는 것 등으로 영적 두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헷 족속은 B.C. 1600-1700년 사이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 그곳에 거주한 종족 중에서도 매우 큰 민족이었다. 광야와 레바논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이 헷 족속의 영토로 불리웠을 정도다. 또 헷 족속은 히타이트족속들을 말하는데 BC10세기에 일어난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지역의 두려움이 대상이 된 족속이다.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 진흙탕을 의미하며 혼돈과 무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기르가스 족속은 우리의 삶에 진흙탕 같이 앞 길을 볼 수 없도록 혼돈하고 공허함을 주고 어디서 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게 얽히게 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중에 우선순위를 놓치게 만든다. 성경은 에서를 가르켜 ‘망령된 자’라고 지칭했다.

에서는 장자권의 진가를 모르고 야곱에게 팔았다. 이러한 기르가스의 영을 물리치고 지혜와 분별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모리 족속(Amorites) : 산중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만 또는 교육(지식,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Amorite라는 단어는 ‘자랑하다’, ‘불룩 내밀다’, ‘산을 오르는 자’, ‘교만하게 행동하다’, ‘마음에 교만을 품다’ 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모든 정의들은 다 함께 인본주의적인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아모리 족속은 교육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적인 인간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시 하는 윤리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에 의해서 강화된다.

가나안 족속(Canaanites) :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 경제, 저주(가난과 실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기에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이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흡수됐다.

가나안 족속은 ‘저주’라는 뜻(창9:25)도 있다.

브리스 족속(Perizzites) :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신경질,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난 무식하다고 하면서 비신앙적인 사람이 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멀리 볼 수 없게 해서 약한 자립심과 존재감을 갖고 있다. 또 브리스는 ‘광할한 평야, 전쟁터’라는 의미도 있는데 혈기와 짜증, 신경질이 미움을 일으킨다.

히위 족속(Hivites) : 마음에 속한 축제(예술, 음악, 스포츠, 패션, 오락) 등으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면서 기만하고 땅의 것을 즐기게 하는 향략과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 등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기며 깊게 빠지게 되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여브스 족속(Jebusites) :  짓밟다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 그리고 의료계로 해석할 수 있다.

밟히다 혹은 타작마당 등의 뜻을 가진 여부스는 다윗 왕 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임했던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자리가 바로 여부스 족속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와 긍휼을 느꼈지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부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장성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올바른 마음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상 가나안 7족 같은 우리 안의 구습과 욕망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7족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죄성을 가르킨다.

7족은 요단을 건너간 이들의 영적 쟁투라는 점에서 우리 기존 신앙인들이 해결 해야할 인간 죄성의 쓴 뿌리다.

가나안 7족은 수십년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성도의 고질적인 죄성으로 이것을 내쫓는 일에 있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가나안 전쟁은 나의 전쟁이아니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전쟁은 여호께 있는 것이다

신7;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1.헷 족 속-뜻/두려움=[계21:08과 같은 사람]

-2.기르가스-뜻/진흙탕=[물반,/흙반=하나님을 반신/반의 하는 사람]

-3.아 모 리-뜻/산중 사람,=[자칭 깨끗한 척하며 속세를 떠난 사람]

-4.가 나 안-뜻/낮은 땅,=[자기 신분이 낮은 자]

-5.브 리 스-뜻/마음에 속한,=[신념,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딧어 하며 마음먹기 나름이란 주장하는 사람]

-6.히 위-뜻/촌 사람=[난 무식해서 라며 비신앙적인 사람]

-7.여 브 스-뜻/집밞힘=[집밞힘의 결과는 증오/원망/불평]

 여호수아 3:10에서 7:1사이에 나오는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살펴본다.

●헷 족속………

헷 족속은 족장시대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까지의 가나안 거주만 중에서 비교적 큰 족속이었다.

그들은 본래 소아시아에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는데 그 일부가 이 지역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예루살렘의 거주민들과 헷족속과의 혼혈이 많았다. 그들은 점차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흡수되었다.

●가나안 족속………

가나안 사람이란 말은 넓은 의미로는 가나안에 살고 있는 모든 종족을 총칭하나 구약성경에는 가나안 사람을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로 구별하고 있다. 이들은 주전 3000년 전 아라비아 동북부에서 이동해 온 족속이다. 그들은 레바논에서 수리아에 이르는 좁은 해안지역, 특히 시돈, 두로를 중심한 베니게의 해안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다. 이 가나안인을 후에 헬라인들이 '베니게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으며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가나안인들은 점차적으로 이스라엘에 흡수되었다.

●아모리 족속………

아모리족은 가나안의 최강 족속의 하나였으며 아모리는 서부인이라는 뜻의 악카드어이다. 아모리인이란 명칭은 구약성경에서는 가나안인과 같은 뜻으로 쓰엿다. 양자의 구별은 그들의 거주지역에 따라 아모리인을 '산지에 사는 자'라고 하고 가나안인을 '해변과 요단강가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다(민 13:29). 대부분의 경우 그 종족명은 동의어는 아닐지라도 막연하게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실상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시대에 와서는 아모리인은 벌써 여러 세기 동안 그 땅에 자리잡고 살아오는 가운데 가나안 언어와 사회조직과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종족은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아모리족은 특히 트란스 요르단에 많이 살았다. 헤스본 왕국과 바산 왕국은 아모리인이 세운 나라이다.

●히위 족속………

히위 족속은 호리 족속과 동일시 된 것 같다. 그들은 본래 함의 후손으로 북쪽 부근에서부터 레바논 산맥과 안티 레바논 산맥 사이의 하맛 어구까지 널리 자리잡고 살았다. 베니게의 시돈과 두고에는 가나안인과 더불어 히위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또 그 일부는 세겜, 기브온과 그 주변 성읍들에 살기도 했다.

●여부스 족속………

여부스족은 가나안에서 소수 민족이기는 하나 가나안의 중심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산지에 살았다. 그들이 거주할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여부스라고 불렀다. 가나인 땅에 일곱 족속들 ① 헷 족속과 ②기르가스 족속과 ③ 아모리 족속과 ④가나안 족속과 ⑤브리스 족속과 ⑥ 히위 족속과 ⑦여부스 족속


김영진교수<연세대 연합신대 구약학>

사사기 3:1-6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사사기 2장에서와 같이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아직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원주민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성전(聖戰)의 개념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쫓아내지 않으신 것이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오늘날 구약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2절에서는 가나안 원주민을 남겨둔 것은 전쟁을 모르는 자, 즉 전쟁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쳐 알게 하기 위하여 이방민족들을 남겨두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3절에 남아 있는 민족은 블레셋 다섯 군주, 가나안 모든 족속, 시돈족속, 그리고 히위족속이다. 블레셋 다섯 군주는 여호수아 13:3절에 의하면 가사 족속, 아스돗 족속, 아스글론 족속, 가드 족속 그리고 에그론 족속을 의미한다. 여호수아 13:3절에서 블레셋 다섯 도시를 족속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 이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의 다섯 도시에 거주한 것으로 같은 민족이다.

히위(Hivites) 족속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구약성서에서는 보편적으로 가나안 칠족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신 7:1). 히위(Hivites)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시골뜨기”(villager) 혹은 히위족속들이 가나안의 중앙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중부사람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창세기 10:17절에서 히위는 가나안의 여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 9:3-27, 특히 17절에 의하면 히위 사람들은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그리고 기럇여아림 등 네 도시를 차지하였다. 4절에서는 또 다시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절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명령을 순종하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는 바이메탈로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셨다는 것이다. 6절에 의하면 명령의 내용은 가나안에 정착하면 가나안 원주민과 통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5절에서는 가나안 족속 가운데 여섯 족속이 기록되어 있다. 즉 3절에 기록한 남겨진 도시와는 달리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7:1절과 비교할 때 기르가스 족속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6절에서는 이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즉 가나안 사람들과 서로 통혼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 7:1-3절의 가나안 민족들과 어떤 종류의 언약도 맺지 말며, 또 그들과 혼인하여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며, 또한 그들의 딸을 며느리로 삼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다. 이들과 결혼함으로서 생기는 죄는 6절 하반절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신명기 7:4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사기 3:1-6절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으신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사기 3:1-6절의 역할은 이제 사사기 3:7절 이하에서 사사가 등장하게 되는 종교적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아 가나안 여인과 통혼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어 멸망당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사사를 보내시어 이들을 구원하셨다는 신학적 내용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가나안 일곱 족속

여호수아가 몰아낸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악한 일곱 기질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에 행하시는 사역을 예표하는 것임.

0 일곱 족속 ; 헷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

- 수 3: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 신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 민13: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0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 살아야 할 곳인데 가나안 족속이 선점해서 살고 있음.

- 레 18: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 막 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카톨릭 칠죄종(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es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을 일컫는 말) ;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


가나안 Canaan

‘낮은 땅’이란 뜻. 팔레스타인의 옛 이름.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

위치는 레바논과 수리아 남단에서 가자 지역 남쪽 애굽 시내까지 이르는 땅으로,

통상적으로는 요단 강 서쪽 전 지역을 일컫는데, 성경에서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묘사된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했던 땅이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을 완전히 멸절시킬 수 없었다.

다만 솔로몬 시대에 와서 이 광활한 땅을 잠시 정복했을 뿐이다.

한편, 이 땅은 각종 산물이 풍부하고, 광물질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매우 아름다운 땅, 기름진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불렸다.

이런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으로 인해 이곳은 일찍부터 물물 교환이 빈번하였고, 거래도 활발하였다.

가나안 @['n"K (케나안) Canaan

케나안은 사람과 지역의 명칭이며, 가나안으로 번역되었다.

1. 인명.

(a) 가나안은 함의 아들 중의 하나로 제일 먼저 창 9:18에 나온다. 그는 시돈과 헷의 아비이며,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을 포함하여 아홉 족속의 조상이다(대상 1:13).

가나안의 운명이 그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저주(창 9:25,27)는 나중에 여호수아와 다윗의 왕조 때에 가나안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에 정복당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b) "가나안 거민"(출 15:15) 혹은 "가나안 열왕"(삿 5:19)과 같은 그러한 표현에서 한 지역의 집단이 고려된다. 사 19:18의 "가나안 방언"은 다른 방언이 있긴 하였으나 히브리어였다.

2. 지명.

가나안은 팔레스틴의 고대 명칭의 하나이며, 이스라엘이 침입하기 이전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민 13:29, 수 11:3). 가나안이란 이름은 앞에 언급한 조상 가나안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혹은 창 10:15에서 발음상 노아의 손자 이름과 동일한 "가나안"에 대한 말 기교로 여겨진다.

가나안은 2세기 동안 애굽 행정구역으로서 팔레스틴과 남쪽 수리아를 포함하였다.

성경에 의하면 가나안은 요단강 서쪽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요단강 동쪽 지역에서는 분리되었다(민 32:29-33, 35:14, 수 22:32). 가나안의 영역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묘사되나 남쪽 신(2:3)에서부터 북쪽 레보-하마트(Lebo-hamath)의 레호브(Rehob)까지 포함하여 거의 300여 마일에 이른다. 라스-샤므라(Ras-Shamra)에서 발굴된 유물로 알 수 있듯이 가나안의 문화는 실제적으로 시리아의 해안을 따라 저 멀리 북쪽으로 하메트(Hamath)까지 이른다.

가나안 땅의 서쪽 경계는 지중해 연안이며 동쪽 경계는 요단강이다(민 13:2,17-33, 34:2-12, 참조: 창 10:19).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은 연안지역과 평원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모리 족속은 산지에서 거주하였다(민 13:19, 수 5:1, 11:3, 삿 1:27).

가나안은 거주하는 땅이었다(출 16:35, 수 5:12).

족장들은 거기에 살았다(창 31:18, 37:1).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 13:5)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비옥하고 풍성한 땅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에는 헤브론(창 23:2,19), 세겜(창 33:18), 루스(혹은 벧엘, 창 35:6), 마므레(창 49:30), 실로(수 21:2)라는 성읍이 위치하였다. 한번은 가나안이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언급되었다(습 2:5).

몇몇 성경 구절은 가나안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인들의 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창 28:1, 6, 36:15).

또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레 18:3).

그러나 그 후의 성경 기자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시 106:38).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땅이다(민 13:2).

이미 이곳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줄 것이라고 약속된 땅이었다(창 12:7, 출 6:4, 레 25:38).

출애굽 후에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약속의 땅을 차지했다.

이 땅은 12지파에 분배되었으며,

후에도 가나안 사람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살며 분쟁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 즉 풍요의 땅에 거하게 된 것이나

이 땅으로 포로기 이후에 되돌아온 것은 하나님 뜻의 일부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유익하시기를 원하신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유지(레 14:34, 신 32:49)로 그리고 거주지(대상 16:18 = 시 105:11)로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흩어진 유대의 남은 자들이 모두 이새의 메시야적 그루터기의 지배하에

조상의 땅으로 다시 모이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사 11:10-12을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족속들과 가나안 일곱 족속을 구분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 아닌 이들에게는 1절 말씀처럼 ‘먼저 화평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아주 관대해 보입니다. 그런 반면에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해선 단 한 치의 접촉점까지도 치워버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토록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해선 잔혹하다할 정도로 그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가 바로 1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가나안 일곱 족속들은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 신을 섬기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할 것이기에 그들을 진멸하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첫 계명을 어기는 것에 가장 진노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시켜 바로 이 첫 계명을 어기게 할 것이기에 그들을 진멸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신을 섬기도록 미혹시켜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부축일 것이기에 이들은 마땅히 진멸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염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죄의 가능성에 대해선 조금도 타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타협할 대상이 아닙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줄 대상도 아닙니다.

죄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죽으셔야만 죄의 대속이 이루어질 정도로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심을 이루고자 하는 탐욕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고 확장해 나가는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죄를 미워함으로 세상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며 ,당당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주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그 현장에 항상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입주때 가나안 지역의 족속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시기는 출애굽 연대에 따라 다르다.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서는 13세기와 15세기의 두가지 학설이 있는데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는 출애굽을 한 후 40년뒤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당시 팔레스타인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민 중 비교적 큰 무리를 형성한 족속들은 아모리족속, 가나안족속, 브리스족속, 헷족속, 히위족속, 겐족속, 아말렉족속, 기르가스족속, 블레셋족속, 여부스족속 등이다.

1. 아모리족속(Amorites)

아모리족속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올라와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BC2000년 이전에는 주로 유프라테스강 중류 서쪽인 시리아에 거주했다. 그러나 함무라비에 의해 정복된 후 남쪽으로 내려와 사해 서쪽 고원지대와 요단 동편의 헤스본에서부터 북쪽인 바산 왕국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살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가나안 전지역의 족속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2. 가나안족속(Canaanites 

가나안족속은 최소한 BC2000년경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있었다. 이들은 BC1500년경 이후에 작은 도시국가를 이루어 북쪽은 헷족속에, 남쪽은 명목상 이집트 제국의 소속으로 있었다.

3. 히위족속(Hivites

히위족속에 대한 자료는 오직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예루살렘 북쪽에 거주했고(수9:7, 11:19)북쪽으로는 레바논 산지(삿 3:3)와 헤르몬 산 기슭에 거하기도 했다.(수 11:3)

4. 헷족속(Hittites) 헷은 가나안의 아들이며 햇족속의 시조로(창10:15, 대상 1:13)원래 소아시아와 아나토리아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족장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까지 헤브론에서 브엘세바에 이르는 남쪽 지역과(창23:10, 26:34) 시리아의 광대한 지역에 살았는데 BC1200년경 바다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블레셋에 의해 붕괴되었다.

5. 블레셋족속(Philistines)

블레셋인들은 원래 에게해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갑돌(그레데섬의 히브리식 이름, 렘 47:4)을 점령한 것으로 생각된다.라암셋 3세(BC1188년)에 의해 '바다 사람들' 이라고 불리워졌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블레셋인들은 BC1300년경 애굽의 세티 1세(sethos I)때 팔레스타인에 처음 등장하였다. 지중해변 중남부 지역에 자리잡은 이들은 라암셋 2세때에는 애굽을 침공하는 정도의 세력을 확보하였다. 이후 국가는 건설하지 못했지만 BC1100년경 이후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의 도시국가를 이루어 이스라엘을 끝까지 괴롭히는 족속으로 남아 있었다. (팔레스타인이란 말은 블레셋의 헬라어 Palaistine를 라틴어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6. 그외의 족속들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족속들 가운데는 브리스족속(Perizzites), 겐족속(Kenites) , 기르가스족속(cirgashites), 여부스족속(Jebusi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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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그 족속들의 수는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신명기 7장 1절에는 기르가스 족속 (the Girgashites) 를 포함한 일곱 민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3장 8, 17절에 대해서 사마리아어 모세 5경 (Samaritan Pentateuch) 그리고 70인역 (Septuagint) 에도 일곱 민족으로 되어 있습니다. (70인역은 신명기의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또한 창세기 15장 19-21절에는 열 민족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데 성경의 한 특징인 다양성이라는 견해가 있고 신명기가 2개의 다른 출처에 근거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랍비들은 출애굽기에 기르가스 족속이 빠진 이유가 모세가 가나안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여섯 민족이 맞다고 합니다.

- 가나안 민족 (The Canaanites)

일반적으로 가나안 민족은 요르단 강 (the Jordan) 서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셈 계통의 (Semitic) 민족을 뜻합니다. 때로는 요르단 강의 계곡과 해안 평야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이 의미인 것 같습니다.

- 헷 민족 (the Hittites)
셈 계통이 아닌 인도-유럽계이며 (Indo-European)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아나톨리아 (Anatolia, 현재의 터키 지역) 그리고 시리아 (Syria) 북부에 넓은 제국을 형성했던 민족입니다. 1200 BC 쯤에 작은 왕국들과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헷 민족은 자주 언급되며 아브라함에게 땅을 팔았던 에브론 (Ephron) 이나 밧세바 (Bathsheba) 의 남편인 우리아 (Uriah) 도 헷 사람입니다.

- 아모리 민족 (the Amorites)
이들은 아무루 (Amurru) 에서 살던 민족인데 '아무루' 는 아카디아어 (Akkadian) 로 ‘서쪽’을 뜻하며 한 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북쪽을 포함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원전 2000년 초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에 중요한 왕조를 형성하였는데 그 중에는 바빌론 (Babylon) 의 첫번째 왕조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때때로 가나안 민족과 대체로 같다고 보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팔레스타인의 언덕 지역에 살던 민족이고 요르단 강을 걸쳐 있던 Heshbon 과 Bashan 두 왕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가나안 민족을 평지에 살던 사람들, 아모리 민족을 언덕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브리스 민족 (the Perizzites)
이 민족은 지금 구절과 같이 여러 민족들을 나열할 때만 나타나고 총 23번 언급됩니다. 정확히 어디서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민족의 히브리어 이름인 פרזי (perizzi) 의 뜻이 유랑 농민을 뜻하는 perazi 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민족이 아닌 계급으로 보는 것이죠. 하지만 나열된 이름이 모두 민족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곳이 유랑 농민의 땅이라고 믿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 히위 민족 (the Hivites)
히위 민족은 민족을 나열할 때 자주 등장하고 세겜 (Shechem), 기브온 (Gebeon), 시돈 (Sidon) 과 베르셰바 (Beersheba) 사이, 레바논 산 (Mt Lebanon), 헤르몬 산 (Mt Hermon) 의 기슭에서 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히위 민족의 이름인 חבי (hiwwi) 는 חרי (hori, the Horite) 의 잘못된 표기라는 설명이 있는데 타당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호리 민족 (the Horites 또는 the Hurrians) 은 기원전 2000년대에 근동지역에 널리 퍼진 민족입니다. 또한 34:2 과 여호수아 9:7 에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Hivites 으로 나와있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Horites 로 되어있는 것과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36:2 에서 지브온 (Zibeon) 을 히위 사람이라고 했는데 36:20 에서 그의 아버지를 호리 사람이라고 한 사실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 여부스 민족 (the Jebusites)
여부스 민족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19:10 에서도 예루살렘이 여부스 (Jebus)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이 민족은 가장 마지막에 나열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마지막으로 점령당했기 때문입니다.

- 기르가스 민족 (the Girgashites)
이 민족의 이름은 우가릿어 (Ugaritic) 기록에 남아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시기의 초기에도 가나안 땅에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 (Cannanite)_낮은 땅, 자줏빛

가나안 Canaan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하기전에 살던 본토 주민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창 12:6, 창 24:3, 창 24:37). 넓은 의미에서 가나안에 살던 사람을 가나안 사람이라고 한다. 가나안 사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BC 1440년경의 인물인 아메 노피스(Amenophis) 2세의 비문으로 그가 아시아에 두번 원정한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

"팔레스티나"의 옛 이름이다. "이스라엘"이 입주하기 이전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고 대체로 "요단강" 서쪽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려져 있고(출 3:8, 신 6:3)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된 땅이다(창 12:7).

"가나안"의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자주빛 땅" 혹은 "낮은 땅"이라고 한다.

[가나안 족속 관련 성구]


-가나안의 후손. 일곱 족속 ☞(창 10:15-19 | 신 7:1 | 대상 1:13-16)

-영토 ☞(창 10:19 | 창 12:6 | 창 15:18 | 출 23:31 | 민 13:29 | 민 34:2-12 | 수 1:4 | 수 5:1)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짐 ☞(창 12:6, 7 | 창 15:18 | 창 17:8 | 출 23:23 | 신 7:1-3 | 신 32:49 | 시 135:11, 12)

-가나안 족속의 죄악 ☞(창 13:13 | 레 18:25 | 레 18:27, 28 | 레 20:23)

-가나안 땅으로부터 쫓겨남 ☞(출 33:2 | 출 34:11)

-파멸됨 ☞(출 23:23, 24 | 신 19:1 | 신 31:3-5)

-쫓겨나지 않음 ☞(수 17:12-18 | 삿 1:1-33 | 삿 3:1-3)

-이스라엘을 물리침 ☞(민 14:45 | 삿 4:1-3)

-이스라엘에게 패배 ☞(민 21:1-3 | 수 11:1-16 | 삿 4:4-24)

-애굽에게 패배 ☞(왕상 9:16)

-가나안 족속의 병거 ☞(수 17:18)

-아브라함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이삭의 아내 얻는 것을 금함 ☞(창 28:1)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 ☞(창 38:2 | 대상 2:3)

-포로되었던 유대인들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서 아내를 취함 ☞(스 9:2)

-가나안 족속에 대한 예언 ☞(창 9:25-27)

아브라함에게 약속됨.........창12:5

아브라함의 거주지; 옥토......창13:12; 출3:8

일곱족속이 우거함...........신7:1; 행13:19

죄악이 가득찬 땅............민35:34; 시106:38

이방인들이 추방됨...........출34:24

가나안 방언.................사19:18

아브라함 후손에게 약속됨....창13:14; 15;15:16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땅....출6:2-8

모세가 정탐군을 보냄...........민13:1-33

불신앙으로 정복이 연기됨.......민14:1-35

하나님이 정복을 성취케 하심....수23:1-16

이스라엘의 태만으로 부분성취...삿1:21; 27-36

열두 지파에게 분할.............수14-17장

남북왕국 분열; 후에 로마가 통치-왕상11:35; 눅3:1

가나안 땅.....................창11:31; 17:8

히브리 땅.....................창40:15

블레셋 땅.....................출15:14

이스라엘 땅...................삼상13:19

임마누엘의 땅.................사8:8

결혼한 여자.............사62:4

영화로운 땅...................단8:9

여호와의 땅...................호9:3

거룩한 땅.....................슥2:12

유대인의 땅...................행10:39

약속하신 땅...................히11:9

(bible and knowlege)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라

신명기 20:10~20

신 20: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절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7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절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 하셨을까요?

가나안 족속들은 어떤 족속이기에 그토록 진멸하라고 하셨을까요?

1. 헷(두려움) 족속은 두려움과 절망의 영을 상징하며, 영혼으로 하여금 거짓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낙담하도록 만들며 그로 인해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신실치 못하게 하며, 또 땅에 속한 지혜를 가지고 믿음과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에 대적하여 논쟁하도록 만듭니다. 곧 어떤 사람도 온전함에 이를 수 없으며, 누구도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겨낼 수 없으며, 누구도 죄와 자아와 옛 사람의 정욕을 이겨낼 수 없다고 우리에게 속삭이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낙망케 하는 두려움의 영들이 영혼으로 하여금 온전함에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도록 그들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행하는데 심지어 모든 일이 끝나고 온전함에 이를 그때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 안에서 믿음의 영은 마침내 이런 헷 족속의 영을 이기고 정복하게 됩니다.

2. 아모리(산중 사람/ 탁월함, 평판) 족속은 쓰고 상처를 주는 말과 판단하는 영을 상징하며, 이것저것을 판단하는 모든 것이 이 쓴 뿌리에서 나옵니다. 이 쓴 영들은 아름다운 백합의 향기가 영혼에서 솟아나는 것을 방해하며 심지어 어린 양의 부드럽고 유순하며 온화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나 다른 사람 안에서나 또 친구나 적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심술궂은 영은 우리에게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도록 자극합니다. 또 사나움과 분노로써 유순함과 사랑함과 한마음이 되는 것과 선한 행동을 대적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을 경멸합니다. 한 마디로 질투와 증오와 시기와 성급한 판단의 영들이 바로 아모리 족속의 영인데 여호수아 곧 예수께서 좇아내게 될 것입니다.

3. 가나안(낮은 땅/ 장사꾼) 족속은 장사하는 영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과 감각과 관념과 애정을 거래합니다. 이 영은 사는 자들과 파는 자들을 영혼의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과도하게 우리의 마음과 뜻을 소모시키고 또 일시적이고 무익한 것에 지나치게 우리를 관여시키도록 하여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거룩한 침묵과 순전한 고요함인 어린 양의 법을 거슬려 더럽혀지게 하고 필요한 한 가지 것에서 떠나 많은 것에 빠지게 하고, 연합과 조화에서 떠나 잡다함과 불일치로 빠지게 합니다.

4. 브리스(열린 시골) 족속은 부주의하고 헛된 안전에 속한 영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일이 완성되고 할례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중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거짓 자유에로의 문을 열어주는 영입니다. 이 영은 계속해 우리로 깨어있지 못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소홀히 하도록 하여서 거짓 안전에 머물도록 합니다. 또 온갖 악한 영들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어린 양의 생명을 억압하여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과 계속적인 할례를 버리게 합니다.(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순례자로서 완전함 안에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와 자아는 계속 다시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억압합니다.

5. 히위(야영지, 작은 마을) 족속은 말과 관념의 영으로서, 우리로 헛되고 무익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이 영들은 우리에게서 헛된 생각과 관념을 깨워서 공허한 환상으로 채우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사상과 관념에 많은 생각들을 주입시키고 만들어내어서 쓸모없고 죄성 있는 담론과 논쟁을 유발하는데 이는 신성한 생명의 발생과 성장을 매우 방해합니다. 그 영들은 우리를 관념으로 채우고 우리의 생명과 힘을 허황된 사색과 불필요한 논쟁에 소모하도록 만드는데 이로 인해 우리로 변함없는 순종과 깨어있음에 머물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히위의 영들 아래서 세상의 예술과 과학의 모든 것들이 나옵니다. 이 영이 하는 것은 다만 환상 안에 있는 관념과 사색을 깨워서 그것을 통해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순전한 하늘에 속한 생명을 번잡하게 하고 유혹하고 혼잡하게 합니다.

이 영들은 이 세상의 영에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에 관한 추구가 자신들을 속여서 스스로 잘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타락 아래 서 있으며 또 영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있어서도 머릿속에 온갖 종류의 관념과 의견들로 계속해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와 환상과 신령한 것들과 관련된 깊은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관념적으로만 말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우리를 온전한 죽음과 우리의 옛 본성과 세상에 속한 나쁜 관습들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 것으로 인도하고 그리고 겸손과 영적인 가난과 순전함과 단순함으로 들어가도록 해주는 거룩한 고요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무시하고 소홀히 하도록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 영적 고요함이야 말로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어떤 다른 은사나 지식보다 더욱 단장하게 해줍니다.

6. 여부스(짓밟는, 타작마당) 족속은 교만과 자만의 영을 나타내며, 이 이름은 짓밟고 경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불의 교만과 힘으로 예수의 피와 미덕을 계속 짓밟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수의 마음과 사랑의 힘 위로 높여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겸비와 유순의 길을 모욕하고 경멸합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 안에 있는 진주를 밟도록 하며, 영원한 지혜의 순전함과 하나님의 귀한 것들의 가치를 무시하도록 하며, 우리를 그들의 배역 속으로 끌어들여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의 구속의 피를 얕보도록 하며 또 우리를 영적 교만에 빠지도록 부추겨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온전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또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예수의 생명을 소홀히 하도록 만듭니다.

7. 기르가스(진흙땅에 사는) 족속은 육에 속한 더러운 영을 상징하는데, 우리를 땅에 속한 생명과 그것의 공허함 속으로 유혹하고 이끌고 또 육신적인 정욕 속으로 이끌어서 온건함과 절제와 순전함의 법을 거슬려 모든 일에 지나치도록 조장합니다.

이상의 모든 영들은 우리 안에서 그것들이 완전히 진멸될 때까지 곧 우리 안에서 성령 안에 있는 예수의 부활의 권능과 또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승천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우리와 싸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본성 안에 있는 우리의 완전함이며 그분께서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그 족속들을 반드시 마침내 몰아내고 영원토록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영적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요함이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을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많이 말하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이 단언컨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과 음성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는 유일한 것인 위로부터 오는 내적인 기름부음을 잃게 만듭니다. 실로 사람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 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한 권능을 주목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머무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거룩한 예수의 영과 생명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적인 생각이나 외적인 활동들로부터 오직 거룩한 예수와 하늘의 움직임에로 방향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의 자연지리

페르시아만부터 소아시아,아라비아, 시나이 반도에 걸치는 소위 근동(Near East)지방의 당은 비교적 척박한 땅이다.반면 그 중에서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그리고 요단강과 나일강 등 주요하천 지역은 그 외의 지역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옥토지대를 이루고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나일강까지의 옥토지대를 주변의 척박한 땅과 구분시켜 서로 연결하여 보면 마치 초승달과 같은 모양이 나온다고 하여 이를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ent district)라 부른다.근동 지방의 주요한 역사는 다 이들 지역과 관계된 것이다.


한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중에서도 세 대륙을 잇는 그야말로 가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가나안땅은 평화시에는 무역로로서,전쟁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대 세속 문명의 원형이라 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도 이같은 초승달 지대에서 발생하여 가나안을 통로로 아래에서 위로,위에서 아래로 전달되곤 하였다. 수동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땅에서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가 발생하여 그 순수성을 보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하나님의 간섭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반대로 능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런 가교의 땅을 선택된 백성의 땅으로 삼으사 그 백성의 신앙이 널리 퍼질 기회를 주셨다고도 볼 수 있다.

페르시아만부터 소아시아,아라비아, 시나이 반도에 걸치는 소위 근동(Near East)지방의 당은 비교적 척박한 땅이다.반면 그 중에서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그리고 요단강과 나일강 등 주요하천 지역은 그 외의 지역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옥토지대를 이루고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나일강까지의 옥토지대를 주변의 척박한 땅과 구분시켜 서로 연결하여 보면 마치 초승달과 같은 모양이 나온다고 하여 이를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ent district)라 부른다.근동 지방의 주요한 역사는 다 이들 지역과 관계된 것이다.
한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중에서도 세 대륙을 잇는 그야말로 가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가나안땅은 평화시에는 무역로로서,전쟁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대 세속 문명의 원형이라 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도 이같은 초승달 지대에서 발생하여 가나안을 통로로 아래에서 위로,위에서 아래로 전달되곤 하였다. 수동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땅에서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가 발생하여 그 순수성을 보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하나님의 간섭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반대로 능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런 가교의 땅을 선택된 백성의 땅으로 삼으사 그 백성의 신앙이 널리 퍼질 기회를 주셨다고도 볼 수 있다.

먼저 팔레스틴의 주변 지형을 살펴보자면 서쪽은 바다, 북쪽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위쪽 연장 부분인 레바논 산악 지대, 그리고 남쪽은 시내 광야,동쪽은 아라비아 사막 지대로 되어 있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걸어서도 한 열흘이면 돌아 볼 수 있는 좁은 면적의 땅이지만, 주변 지형의 지형과 어울려 평야 지대,고원 지대, 계곡 지대, 사막 지대를 골고루 포함하고 있어서 고저,기후, 경치 등에 있어서 놀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요단 계곡과 지중해 사이에 낀 좁고 긴 땅인 팔레스틴 자체의 지형은 남북으로,즉 위에서 아래로 연결되는 다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네 지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순서대로 열거하면 해안 평야지대,중앙(서부)고원지대,요단 계곡 지대,동부 고원지대의 순서가 된다. 또한 요단 서부 지역의 남방에는 소위 네게브라 하는 평야 지대가 있어서 이를 첨가하여 팔레스틴 지형을 다섯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성경 역사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본고에서는 직접적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이하에 제시되는 세 개의 지도들은 주로 요단강을 중점으로 지대의 고저에 의해서 구분되는 이상의 기본적 지형개념을 잘 보여준다.이제 팔레스틴의 4대 지역을 지역별로 나누어 그 지형적 특색 및 해당 도시와 주요 장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요단 계곡 지대


팔레스틴의 지형상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요단 계곡 지대이다. 이는 북부 시리아와 레바논 계곡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요단강 그리고 사해 양안지대(兩岸地帶)를 거쳐 남으로는 아라바를 지나 아카바만까지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지대이다.대지진으로 인한 지각의 단층 작용으로 형성된 이 계곡 지대는 전 지역이 해면보다도 고도가 낮다.실례로 북족의 갈릴리는 -210m,남쪽의 사해는 -400m에 달한다. 바로 이 계곡 지대를 기준으로 서쪽의 중앙 고원 지대와 동쪽, 즉 트랜스 요르단 지역의 동부 고원지대가 구분되는 것이다. 이 요단 계곡지대는 모두 5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다.
①갈릴리 호수 이북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1차 수원지를 이루는 홀레호 분지 ②가버나움,벳새다,디베리야 등을 포함하고 있는 갈릴리 분지 ③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강 본류 유역 ④쿰란,소돔,맛사다 등이 포함된 사해 유역 ⑤그리고 그 아래의 아라바 광야 저지대가 그것이다. 한편 이 요단 계곡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의 중부 고원 지대와 이 요단 계곡이 연결되는 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반면, 동부고원지대쪽의 연결 부분은 대부분 급경사를 이룬다.


<가나안 지형의 입체도>


<가나안 지형의 단면도>

<가나안 7족속과 영적의미에 관한 글 모음>





칠죄종(七罪宗,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ia 또는 septem peccata mortalia)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을 일컫는 그리스도교의 용어이다. 칠죄종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사용된 용어로서 인간이 죄를 범하기 쉬운 경향에 대해 교회가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하기 위해 대두되었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교만, 식욕 ,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칠죄종에 속하는 죄로 분류된다.

가톨릭교회는 죄를 대죄소죄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죄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죄를 말하는 것이고, 대죄는 매우 심각한 죄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대죄는 인간에게서 은총의 삶을 파괴하고 죽은 후에 지옥 영벌을 야기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죄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원리인 사랑을 해치는 것인 만큼, 하느님 자비의 주도적 간여와 인간 마음의 회개가 필요하다. 이 회개는 보통 고해성사로써 이루어진다.”[1]

칠죄종은 대죄, 소죄와 더불어 죄의 추가적 개념에 속한다기 보다는 죄원(罪源), 즉 모든 죄를 유발시키는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칠죄종에 속한 죄는 상황에 따라 대죄가 될 수도 있고 소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2]

잠언 6장 16절부터 19절에 있는 하느님이 역겨워하는 7가지.

  1. 거만한 눈
  2. 거짓말하는 혀
  3.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
  4. 간악한 계획을 꾸미는 마음
  5. 악한 일을 하려고 서둘러 달려가는 두 발
  6. 거짓말을 퍼뜨리는 거짓 증인
  7.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

현대의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칠죄종」에 대해서, 요하네스 캇시아누스교황 그레고리오 1세 이래 전통적으로 죄의 근원으로 간주해져 온 것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이하의 일곱 개다[3].

(일곱 개의 게재순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라틴어 규범판[4]과 한국어판(2011년)으로 일부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한국어판에 쓰여져 있는 차례[3]에 의한다.

공식 번역명은 천주교용어자료집에서 따온다.[5]

한국어 라틴어 영어[6]
교만 superbia pride
인색 avaritia greed
시기(질투) invidia envy
분노 ira wrath
음욕 luxuria lust
탐욕 gula gluttony
나태 pigritia seu acedia(중세에는 acedia) sloth or acedia

머릿글자를 모아 SALIGIA로 줄여 사용하기도 한다.

중세의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이 가장 잘 나타내지고 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서사시, 「신곡」연옥편에서도, 연옥산의 일곱 개의 관에서 사망자가 이 죄를 맑게 하게 되어 있다(연옥편을 참조).

1589년, 독일의 페터 빈스페르트(Peter Binsfeld)는 죄와 악마의 관계를 적은 저작을 저술했지만, 그 중으로, 칠죄종도 특정의 악마와 관련짓고 있다. 이러한 일곱 개의 대죄와 악마와의 관련은 크리스트교의 본질적인 부분과 무관계하지만, 통속적인 그리모워르에서 인용되게 되었다.

칠죄종과 악마의 관련을 최초로 표현한 것은 16세기의 판화가 한스 부루크마이어이다. 이에는 악마가 각각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리본을 손에 넣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또, 중세에는 악마가 아니고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칠죄종과 그에 비견하는 악마와 동물
대죄 대응악마 동물
오만 루시퍼(Lucifer) 그리폰, , 공작, 사자
식욕 베엘제붑(Beelzebub) 돼지,파리
질투 레비아탄(Leviatan) ,
분노 사탄(Satan) , 드래곤, 늑대
색욕 아스모데우스(Asmodeus) 전갈, 염소
탐욕 마몬(Mammon) 여우,고슴도치
나태 벨페고르(Belphegor) 달팽이, 당나귀

사탄은 타천사나 다른 악마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에 정석이 무엇인지 단정짓기는 어렵다.




'헤렘(Herem)' -  하나님께서 명하신 진멸전(殄滅戰)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투를 명령 하시며 무자비 하게 모두 다 죽이고 불태워 없이하라 시는사건을 볼때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수가 있나? 하는 이해하기 힘든 불만스런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여리고 전투의 경우를 예로 생각해보면, 이 여리고성 전투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진멸전'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진멸전'을 '헤렘법' 이라고 한다.

헤렘이란 -'헌신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바치다','멸절시키다'란 의미로 하나님께 바쳐진- 전쟁에서의 노획물을 번제나 희생제물로 여호와께 바치는 것을 말한다.

즉 헤렘법은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적용되었다.
노획물을 여호와께 바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성전(聖戰)을 주관하시고 실제로 싸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획물 또한 여호와의 것이며, 그 중 하나라도 취하면 여호와의 것을 사취한 범죄 행위 가 되었다.
헤렘법의 완전한 준수를 위해서는 호흡하는 모든 것은 죽여야 하며, 가연성 물질은 태우고, 귀금속은 성소의 금고 속에 보관해야 한다.
그래서 전리품을 착복한 아간(수 7:11-15)과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준 사울(삼상 15장)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
또한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함락도 헤렘법이 적용된 본보기이다(수 6장).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것이며...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7:2-6 요약)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브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신명기 20:16,17)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라' (레 27:28, 29)
아간은 바친 물건을 횡령했다가 '헤렘'을 범했기 때문에 그와 그 일족이 근절 되었고..(수 7:1)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가 일부를 감추고 자기소유를 판 전부를 사도들앞에 거짓으로 내어놓아,하나님께 드렸을때 그자리에서 즉사한 사건 은 이 헤렘을 범했기 때문이다.

헤렘법은 출애굽한 하늘나라 백성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들에게 요구하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하시며, 그땅의 거민들과 우상들을 다 진멸하고, 그들이 사는 방식과 습관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에로의 초청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 하시려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이며 은혜안 의 훈련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바라는것 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 하셨다면 우리는 영적인 가나안인 예수그리스도 품안에 살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통치를 받아 누리도록 요구하시는것  거룩으로 인도하심을 받는것에 방해받는 사탄의세력 사탄의통치에 해당되는 이세상에 속한 습관들을 버리도록 ...'거짓을 버리고,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도록 ' 요구받고 있는것이 교회로 부름받은 하늘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마음) 즉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한 사울을 다메섹에서 부르셨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사울은  예수믿는 신자를 핍박 하고 있으나 주님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신다. 주님은 주님의 몸인 사울이 핍박하는 신자를 머리이신 주님과 지체로 붙어있는 신자(그의몸)를 뜻하시며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시는것 이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부르셨다. 머리 아래에 건물이 달린 몸을 상상해 보라. 교회는 그의몸이지 그의 건물이 아니다. 몸으로 부름받은 지체된 우리 신자들은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함께 묶여진 존재인 유기체(생명체),뼈와 살이 있는 지체 이다.

교회는 거룩과 성결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열매를 자랑하는.. 특기자랑을 하거나 학예회를 하는곳이 아니다. 헤렘법이 적용되어 거룩을 연습하며 훈련받아 '신의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신앙이 자라가는곳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나무가 나쁜열매를 맺나니 좋은나무가 나쁜열매를 맺을수 없고 못된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수 없느니라.' (마 7:16-18)

신자의복이란 교회안에서 말씀으로 훈련되어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 세상의 빛이되고 소금이되는 아름다운 나무가되는 " "-Being-하는 것이며, 영적가나안 인 그리스도( In Christ )안에서 살아가며  헤렘 을 순종하는 삶 이다.



구약 역사 속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의미

1.문제의 성격

구 약에서 전쟁중에 내려지는, 원수를 '진멸하라' (herem)는 명령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해석하기 힘든 주제 중 하나이다. 무차별하게 모든 원수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 끔찍한 전쟁을 승인하시고 명하실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헤렘 전쟁과 연관된 성경의 몇몇 구절만 인용해보아도, 문제가 정말 심각해 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별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별하니 라"고 말한다(수 6:21).

(2)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첫 왕이 된 사울이 왕권을 확립하자, 및 출애굽 때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을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하셨나이다'(삼상 15:3)고 말한다.

(3)위의 두 본문이 말하는 진멸하는 전쟁에 대한법적인 근거는 신명기에 나타난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첫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데로 하라”(신 20:16-17).

어 떻게 한민족과 여러 족속들을 대량학살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고백하며, 남자와 여자, 어른과어린아이와나아가젖먹이까지불문하고 죽일 수 있을까? 만약 베트남 전쟁이나 보스니아전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학살을 명한 자와 집행한자는 모두 전시 재판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헤렘 전쟁은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구약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가"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문제의 범위

그 러나 문제는 윈수를 전별시키는 본문이 구약의 주류에서 벗어나 격리된 하나의 단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32장 26-28절에서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자들을 다 칼로 처형한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헤렘 전쟁을 집행하시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이 이런 본문에 근거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죄악으로 물든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아람과 유럽을 영원히 갈라놓는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직후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에, 그 동네아이들의 “대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을 저주하였다. 이때,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42명을 및어버렸다고 한다(왕하 2:23-25). 엘리사가 선지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헤렘 전쟁을 선포했는지, 혹은"대머리여 더욱 올라가고 올라가라”는 말에 대한 그의 격노가 무죄한 아이들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했든 갓 부름받은 선지자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곰에게 찢겨 죽게 했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수산 성에 살고 있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아각 족속 하만의 음모에 빠져 학살을 당할 뻔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을 내린 에스더의 헌신으로 구원을 받은 후, 하만을20미터 정도의 나무에 달아 죽인 것까지는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수산성 뿐만 아니라 각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자75,000명을 도륙한 이야기(에 9:16)를 들으면서는, 피와 복수에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몸서리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여호수아서와 에스더서를 자녀들에게 읽어주지도 않는다.

시편으로 넘어가면, 원수들에 대한 분노가 마치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것같은 격렬함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은자신의 원수를 향해, "그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백나 빌어먹게 하쇼(시 109:8-10)라고 저주한다. 또 한 시인은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8-9)라고 선언한다.

원수를 진멸하는 헤렘 전쟁은, 결국 오경과 역사서와 선지서와 시가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구약에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구원, 심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헤 렘 전쟁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약 전체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의 이름으로 집행된 헤렘 전쟁에서 어떤 적극적인 신학을 형성해낼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3.헤렘 전쟁의 의미, 법주 그리고 규칙

(1) 헤렘 전쟁의 의미

개 역성경에서 "진멸하라”는 전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herem)은 '일반적인 용도에서 분리되어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가증하거나 혹은 바쳐졌기 때문이다' (EnclopaediaJudaica 8指). 어근으로 보면, 헤렘이란 단어는 셈어에서 ‘분리하다. 금하다’ 혹은 '성별하다’는 뜻을 가진다.

TDOT 5:188).최근에 성경의 헤렘을 연구한 스턴(p.Stern 1991:16)은, 이 단어가 '파멸을 위해 봉헌함, 혹은 파멸에 봉헌함' (consec-ration to destruction)이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히필형(사역 형)에서는 '진멸을 통한 성별'(consecrate through destruction)이란 뜻이라고 말한다. 전쟁 밖의 맥락에서 헤렘은 '주께 바친 것' (heherim leyhwh,레27:28)으로, 전쟁 상황에서는 '주께 바쳐진 것'(미 4:13;수 6:17)으로 나타난다.

(2) 헤렘 전쟁의 범주

(S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인은 주님께 가증한 자가 되며, 이러한 사람은 죽이고 물건은 태운다(겨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벌할 지니라', 출22:20/히브리 원문상으로는 22:19; 신7:25-26, 13:13-19).

(2)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들은 진멸되며(신 7:1-2, 20:17),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 (20:16).왜냐하면,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할까 함이라 (20:18).

(3)한 개인이 주님께 헤렘으로 바쳐진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qodesh qodas-him). 이것은 철회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활거나, 혹은 바친 자에 의해 속량될 수 없다(레 27:28).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곧 신성모독이며 전쟁의 패배를 겪게 된다.

(3)헤렘 전쟁의 규칙

헤 렘의 규칙은(D생존자를 남기지 않는 다(신 2:34, 3:3;수 10:28, 37, 39-40,11:12, 22; 대하 20:24; 렘 50:26;왕상9:21 참조). 사로잡은 왕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인다. 남자들은 완전히 제거하며(왕상 11:15),때로는 음의 일부를 자르거나(삿 1:6,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때로는 종으로 취한다(신 20:11).여자와 아이들은 전쟁의 노획물이며, 가끔 임신한 여인은 배를 갈랐다(왕하8:12, 15:16;암 1:13).

(D많은 경우에는 육축과 노획물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D가끔 도시 와 노획물을 불태운다(신7:5, 25, 13:17;수 6:24, 7:15, 25; 8:28,11:11,13).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그 결과 군사적인 패배(수 7장)를 겪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게 된다. 이것은 아간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난다.

4.구약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용례들

물 론 구약성경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헤렘전쟁(왕하19:11;대하32:14)과 헤렘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많지만, 헤렘 전쟁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명백하게 헤렘으로 나타난 경우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사 :2; 렘 25:9;슥 14:11;말3:24참조).

아래의 용들을 살펴볼 때, 헤렘 전쟁은 구약 전쟁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룬 모든 전쟁이 다 헤렘 전쟁은 아니었다. 가나안 전쟁에서도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불태워 주님께 바친 경우는 극히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1)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침공하려다 아랏 왕에게 폐한 후 온 이스라엘은 아랏을 헤렘으로 바치길 서원하며, 승리 후에는 이 성과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여 바친다(민 21:1-3).

(2) 요단 동편에 있는 시혼(신 2:)과옥(3:6),그리고 요단 서편의 막게다. 에글론, 헤브론, 드비르, 리브나와 남방 동네들(10:28-40)과 북쪽 동네들◎ 1:10이하)을 진멸하여 바칠 떼, 생축과 노략물은 취하나 동네는 그대로 둔다.

腦) 헤렘 전쟁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여리고이다. 사람과 동물을 모두 칼로 죽이고 성은 불태우며, 전리품은 은이나 금이나 동이나 철로 된 그릇 모두 성전에 바친다(수 6:17이하). 이 바쳐진 물건을 탐내고 취 한 아간과 그의 가족과 생축과 재산은 모두 돌로 치고 불사른다(수 7:24-26).아이 성과 하솔 성도 여리고와 함께 불태우나, 전리품은 미리 취한다(수 8:26, 10:39,10:8, 11:13).

(4)네게브에 있는 스밧 사람들은 모두 진별된다(삿 1:17).

(5)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와의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공적인 명세를 한 후,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사람들,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한 학 (딘 21:11).이런 헤렘 법은 레위기 27장29절을 따른 것이다.

(6)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멸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아말렉 족속이 출애굽 때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쳤기 때문이다(삼상 15;대상 10:13).

(7)후에 솔로몬은 그 당대까지 살아남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지 않고 노예로 역군을 만드는' 정책적 전환을 하였다(왕상9:21;수 15:63,17:12;삿 1:19-35).

(8)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헤렘이 나타나는 곳은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성전에 불러모을 때이다.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를어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위 의 헤렘 전쟁 중 가장 두드러진 두 본문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전투(수 6장.)와 사울의 아말렉 전삼상 15:3)이다. 이 두 전쟁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신다. 여리고의 파멸은 너무나 독특하다. 여호수아6장 24절에서는 여리고의 완전한 파멸이 묘사된다. 여리고 성은 불로 태워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렀다. 이성은 완전한 멸망을 당해야 했다.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진멸하는 전쟁'이었다. 여리고에 대한저주는 절대적이다. 이리하여 가나안의 도시와 땅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신명기 13장 16절의 규례가 이루어진다.

가나안 전쟁에서 완전히 불태워버린 성은 소수이지만, 여리고 멸망은 독특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간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가나안족속의 죄악이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계는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하였으므로 이 약속의 땅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생존권차원에서 자기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동일한 원리가열왕기하에 나온다. 이제는 심판받는 쪽이 이스라엘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부패했기 때문이다. 신명기와여호수아서에 따르면 가나안 땅아 그 거민을 토해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가나안정복으로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즈음에는,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제는 바벨론사람이 거룩한 전쟁의 도구가 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칼을 빼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벌이시는 것이다. 즉 거룩한 전쟁이 역전된다. 이제 당하는 자는 소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리고의 멸망은 죄로 가득 찬가나안족속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하나님께 완전히 바친바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취할 수 없었다. '이가운데서 무엇을 취하면 너희가 바친 바 될 것이다 (수6:18)는 것이다.

5.더 넓은 맥락 : 구속사적 맥락에 나타나는 구약의 전쟁

원수를 하나님께 바쳐 진멸하는 전쟁은보다 더 넓은 '성전' (holy war)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이때, 하나님이 '만군의 주님'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친히 치루신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주 하나님이 '용사'로 불려진다. 모세는 주께서 애굽 군대를홍해에서 수장시키시는 것을 보면서, "주는 용사 시니 야웨는 그의 이름이시다'라고 찬양한다. 용사로서 주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했다. 용사로서 주님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원수를 치고 있다(출 15:6, 12,16린.주님에 대한 '용사' 라는 칭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용사로서의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을 한 후, 그룹과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신다. 주님은 용사로서, 이 거룩한 장소에 죄인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 자신이 용사로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스케일로 모든 창조계를 동원하여 타락한 노아시대 사람들을 다 진멸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보호하신 사건이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 라"(창7:1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예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신 29:23).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 때, 주님께서 다시 거룩한 용사로서, 불로 온 세상을 멸하실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약의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 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 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구약의 전쟁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영해해버림으로써, 옛 언약의 백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실 속에서 살며 '용사이신 하나님' 을 섬겼는지에 대해외면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에 침묵하면, 후에 같은 유형의 문제가 나을 때에도 대안을 만들 수 가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상황 속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현재 자신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지난 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말하고, 이라크도 '성전' 이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자신이 치루는 전쟁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다 '북한전쟁' 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에른스트라이트(G. Ernest Wright)는 "야웨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나도 아니 볼라고 말했다고 한다(Hanson 342).

한국의 상황도 성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겐 국방의 의무가 딘성한 것' 이므로,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신성한 의부 는 어떤 사회적, 윤리적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자는'순국장병' 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 모든 전쟁이 신성한 것이 되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신성한것' 자체가주판적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말시온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여겨졌다.

말 시온은 결국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계를 만든 저급한 창조의 신이며 피를 좋아하는 전쟁의 신으로서, 신약이 말하는 및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불트만은 구약성경이 현실 세계에 밀착되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초월적인 종말론적 실체로 넘어가지 못하고'유관 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전쟁신학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배울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임종 직전,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을 때 여호수아 주석을 마친다.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약화되었지만, 그는'더욱 크고 밝은 빛 속에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Hen Beveridge).

칼 빈은 '교회에 대한 유언으로,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선포한모든 교리 체계를 엄숙히 비준하는 작업' 으로 여호수아 주석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리고의 멸망에 대해,"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비인간적인 학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 공의롭게 이 나라들을 별하시도록 정하셨으므로 이것은 모든 토론을 끝내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약의 전쟁과 송두리째 원수를 주님께 바치는 헤렘 전쟁을 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역사 속에 먼저 침범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 홍수, 소돔과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 그리고 여리고와 아말렉의 진별은 죄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 심판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믿는다면, 구약에 나타난 저 비참하고 냉혹하게 보이는 '진멸하는 전쟁'도 담대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적인 아집과 욕심에 이끌려 이음나라들과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과 헤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boiling frog)

부드러운 힘

개구리가 끓는 물 속에 들어갈 때 반응을 알고 있다.
아주 뜨거운 물 속에 갑자기 개구리를 넣으면 튀쳐 나오지만, 천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서는 그대로 있다는 사실.
심지어 개구리는 끓는 물에 목숨을 잃고 만다.
이를 끓는 물 속 개구리(boiling frog) 효과라고도 한다.
미 스탠퍼드 폴 데이비드 브라이언 아서 교수가 주장한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도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개구리는 어느 순간 다다르면 뜨거운 물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다만, 누군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지 않는다면, 개구리는 위험에서 벗어난다.
경로 의존성에 빠질만큼 정말 무기력한 상태에 있지 않다면 말이다.

얼마 전 블랙 핑크가 온라인 공연을 통해서 전세계팬을 28만명 동원했고 티켓 수익도 매출액 110억원 정도를 논할 만큼 성공했다. 내용 면에서도 첫유료 온라인 스트리밍 콘서트는 실제 공연을 방불케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로써 SM의 비욘드 라이브 콘서트, 빅히트의 방방콘에 이어 YG의 블랙 핑크에 이르기까지 이제 케이팝의 온라인 콘서트는 코로나 19 재난에서 새로운 공연 양식이자, 수익 모델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이러한 점은 대형 기획사들의 합종연횡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이미 지난 8월, JYP는 SM과 온라인 전용 콘서트를 기획·운영하는 기업을 공동 설립했다. 곧 JYP 대표 박진영은 걸그룹 트와이스의 온라인 콘서트 작업에 나섰다. 두 업체가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은 처음으로 그간 경쟁 관계에서 협업적 관계가 되었기에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생존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생존의 탈출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온라인 유료 콘서트인 것이다. 단순히 혼자 위기를 돌파하는 것을 넘어서 강력한 콜라보를 통해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이다. 얼마전 빅히트는 YG에 700억원의 투자를 단행했는데 그 투자의 초점은 온라인 공연 하나에 있지 않았다. 앞으로 YG는 블랙핑크·위너·트레저 등 소속 아티스트들의 MD를 팬 커뮤니티에 입점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의 협력 목표가 단지 온라인 유료 공연이 아닌 플랫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코로나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케이 팝에게 새로운 플랫폼의 세계 중심화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기획사들만이 이런 흐름에 주목해온 것이 아니라는 데 더 중요성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도 케이팝 기획사 투자해 온 네이버와 빅히트가 K팝 팬 플랫폼 ‘V라이브’와 ‘위버스’의 지분과 사업 영역을 맞교환했는데. 구체적으로 네이버는 빅히트 자회사 비엔엑스의 지분 49%를 얻고 빅히트 자회사 비엔엑스는 기업명을 ‘위버스컴퍼니로 변경한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해 10월에는 빅히트와 YG가 증강현실 아바타 플랫폼 네이버제트에 120억원을 투자했는데, 이 역시 온라인 콘서트를 내포하는 팬 커뮤니티 플랫폼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례는 코로나 19 이후 경영에서 뉴노멀 시작일 것이다. 한국의 기업은 일단 성공의 기류가 있으면 무조건 재벌 경영 방식을 추구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각 분야에 진출하는 곳이다. 이른바 문어발식 경영이다. 이러한 점은 케이팝 기획사들에도 반복된 바가 있고, 한때 비판에 직면했으며 실제 경영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번 코로나 19 상황에서 각 기획사들의 대응 방식은 그간의 기업 경로의존성과 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각자 도생으로 1등이 되기 위해 출혈 경쟁을 하기보다는 서로 부족하고 강한 점을 상호보완하면서 전체 파이를 키워가는 가운데 자신의 특화된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뛰는 개구리를 억누르지만 않으면 더욱.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관습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리스도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는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톨스토이에서 그 전형을 본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의 타락한 오락, 학문, 정치에서 탈출하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버에 의하면 이러한 반문화적인 유형의 삶은 그 자체 내에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문화를 완전히 거부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교회 밖의 모든 문화적 요소는 죄로 인해 타락한 것으로 간주된다.
    많은 기독교 종파의 근본주의 그룹이 이 모델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경 본문은 요한일서 2:15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대표적인 그룹이나 개인은 터툴리안, 레오 톨스토이, 수도원 운동, 메노나이트, 퀘이커 신도들이다.

  • '문화의 그리스도'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요 문화의 영웅이시다.
    토마스 제퍼슨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도덕 교육가로 보았고, 술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와 문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이 관점은 신학의 본질과 그 문화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곧, 훌륭한 시민으로서 문화를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성품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가르침과 ‘높은 수준의 문화’를 동일시하기 위해 문화의 가치 있는 활용을 추구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문화 안에서 생활하고, 문화를 접하는 데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높은 가치는 교회에서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그룹과 사상은 영지주의자, 아벨라르, 자유주의 신학 등이다

  • '문화 위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 긍정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로고스와 주님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은 층에 두고 문화를 낮은 층에 둔다.
    이러한 생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 나타났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났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영역에 모두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문화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두 세계의 가치와 삶을 종합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높은 가치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보완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대표적인 단체와 전통은 로마 카톨릭 교회 정교회의 전통이다.


  •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양자간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문화는 문화다.
    니버는 이런 유형의 대표자가 사도 바울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등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다른 영역, 즉 신성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정하는 이원론적 모델이다.
    십계명과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대조되는 가치관과 정체성으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종합적 유형인 ‘문화 위의 그리스도’와 동화적 유형인 ‘문화의 그리스도’에 비해 이원론적 유형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 의견을 가진다.
    대표되는 사람과 단체는 루터, 칼빈, 청교도이고,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
  •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유형의 대표자는 어거스틴, 칼빈, 존 웨슬리 등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계는 구속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 문화의 문제는 변혁의 문제이다.
    세계는 배격되어서도 안되고 소홀히 여겨져도 안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주장된 그리스도는 죽음과 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사는 인간 생활을 계속적으로 성화시키고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죄의 영향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을 구속하심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문화에 대한 단호하고 희망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 생활의 모든 문화를 변화시키고 개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모델을 대표하는 선각자는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이 있다.

     인류사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세상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므로 기독교인들은 문화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독교인들은 문화에 대하여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버의 유형론 다섯 가지 모델

     니버의 모델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다섯 가지 모델 중 하나에 적절하게 짝지을 수 있는 개별 기독교인이나 종파/교회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어느 시점에서든 각자가 가지는 다양한 기능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접근 방식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교회와 문화의 상호작용은 다섯 가지 모델의 몇 가지 특성들의 부분을 동시에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버의 모델은 우리들에게 교회의 활동을 분석하기 위한 광범위한 원칙을 제공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문화와의 관계를 추구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5가지 유형 각각은 피차간에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다.
    즉, 모델 간에 상당한 중복이 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델에는 특히 공통점이 많다고 이해된다.

     니버의 유형론을 연구에 적용하기 위해 나는 다섯 가지 모델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재분류한다.

     1.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접촉하여 일체 되는 모델,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2. 교회가 문화를 포용한다는 문화의 그리스도
     3. 문화 위의 그리스도,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요구 사항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문화의 변혁자이신 그리스도’이다.

    니버가 개발하고 많은 학자들이 수정한, 교회가 가지는 그리스도 및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유형론은 일반적이고 넓은 원칙을 제공한다.

     

    먼저 기독교단과 개별 교회의 정치와 정체성을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유형론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주변 문화 사이의 교차점에 대하여 가능한 방향을 교회에 제공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에 관한 문헌과 니버의 교회와 문화의 상호작용 유형론을 살펴보면 현대 교회가 유형론에 쉽게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교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니버의 근본적인 통찰력은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고 사려된다.

     

    니버의 통찰력을 좀 더 생동감있게 이해하기 위해 필자가 고민을 해보았는데, 다음의 메타포(비유)를 놓고 같이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말굽자석

     

    초등학교 시절 자연시간에 가지고 놀던 말굽자석을 생각해보자. 교회는 말굽 자석의 북극과 남극 사이에 놓여진 철판과 같으며, 이는 니버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관계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철판이 자석의 북극과 남극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여 완벽한 균형 상태에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럴 경우 철판은 중간에 끼어 그 사이에서 떨면서, 어느 쪽으로도 당겨지지 않고, 남극으로 이동하거나 남극을 쉽사리 끌어안지 못한 채 북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로 북극에 쉽사리 끌리지 않고 남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진땀을 흘린다. 여기서 북극은 그리스도에 대한 은유이고 남극은 문화에 대한 은유이다. 교회의 속성은 무엇과 연결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교회의 컨텍스트(주변 환경)을 이루는 사회와 문화, 교회 안팎에 만연한 구조적, 문화적 속성, 성도들의 삶에 대한 방향과 속성, 그리고 특정 시대 사람들의 속성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말굽자석의 북극과 남극은 분명히 상호 연결되어있고 연속성을 가진 하나의 자석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자석의 북극과 남극은 교회가 부딪치고 감당해야 하는 두 개의 다른 속성이다.

     

    즉, 북극과 남극 사이에서 한쪽으로 끌리지 않고 중앙에 위치하려는 철판의 고민과 어려움이 ‘기독교와 기독인이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서 겪는 고민과 유사하다.

     

    철판이 북극이나 남극에 융합될 때의 위험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를 중재하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기독교인의 삶, 즉,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와 문화의 융합은 교회를 문화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자석에 붙은 철판은 그 자체가 결국 자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속성을 완전히 잃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와 융합시키는 것은 교회가 빛과 소금의 속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교회는 세상에 접근할 수 없도록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에 기독교적 봉사 내지는 복음을 전할 가치를 제공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이를테면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도사들과 같이 또는 외딴섬에서 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사는 기독인의 모습과 비유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북극과 남극의 특성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강한 독립변수이다. 그리스도의 속성은 매우 강한 독립변수이고, 문화도 독립변수이긴 한데 교회가 위치하고있는 주변의 문화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속성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며, 그 속성은 계속해서 발전 변화하는 교회 안팎의 구조적, 문화적, 행위적(인간 개개인의) 속성의 역동성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문화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융합되어 통합될 때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된다.

     

    이를테면, 기독교인들은 대중들이 교회를 표리부동한 조직체로 간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이중의 요구 사항 – Double requirements –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 과정에서 이중 잣대 – Double standards –의 오류라는 덫에 걸리기 쉽다.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는 도전이요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 교회의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 – 말굽 자석과 철판 모델 ©한길수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생각하고 누리는 문화는 대부분 기성세대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비 기독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 말씀의 원칙들은 불변하지만, 내 개인의 배경과 지식, 또는 내가 몸담은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그것이 우리의 목표나 가치가 되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쉽게 상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남기며 마친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3)는 독일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의 사상적 연관관계가 매우 깊다.
트뢸취의 신학은 니버의지난한 노력으로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활짝 꽃폈고, 이질적이고 새로운 토양에서 놀랄 정도로 잘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적용되었다.
니버는 트뢸취의 신학을 미국의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다 심었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탁월한 신학자요 기독교윤리학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니버의 신학방법론은‘역사적 방법’이다.
기존에 니버의 방법론으로알려졌던 ‘반성의 방법론’이라든지 ‘변증법적 방법론’은 니버의 방법론과는 거리가 멀다.
니버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역사적 방법’이라고 직접적으로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트뢸취와 동일한 방법론적 길을 걸어갔다.
니버는 트뢸취처럼 자신의 신학 전반을 역사 위에다 정초했다.
니버는 신학연구를 위한 대상을 개별성과 발전 개념에서 잡았다.
그는 방법론의 대상 빛 아래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대상적 객체나 주체의 개체성과 독특성, 다양성 측면을 명백하게 주목했다.
이것은 니버가 신학연구 작업의 주요 방법인‘역사적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또 거기로부터 파생되고 있는 지난한 신학 과제인 역사상대성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신학의 중요 주제인 계시나 신앙의 의미를 종교적 상대주의로서 실증적이거나 합리적 차원이 아닌 신중심적인 상대주의로부터 해결코자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의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역사비평적 방법의 3원칙인 비평, 유비, 상관관계를 유효적절하게 역사에다 적용하기도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그것은 사회학적방법이다.
역사적 방법의 보충적 측면을 의미한다.
니버는 트뢸취처럼신학에서 사회학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는데, 사회적인 것도 신학적인것처럼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혀냈다.
그는 역사적 방법의 연구 대상이사회적인 것까지 확대되고 있고, 역사화되고 있음을 통찰했다.
신학 형태의 다양성과 교리의 차이점이 생긴 것은 순수 신학적인 이유가 아닌사회적 상황 내지 사회학적 배경구조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니버는사회적 상황에서 계속 다양하고 이질적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가 새로운 모멘트인‘사회학적 관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확신했다. 사회학적방법에서 M. 베버나 E. 트뢸취 식으로 시행된 사회학적 유형론 연구는니버의 저서『그리스도와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25일(화) 신명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할 때마다(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What other nation is so great as to have their gods near them the way the LORD our God is near us whenever we pray to him?


(새한글 성경) 여호와와 같은 신이 가까이하는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

4:8 /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law)과 율례(statutes)와 규례(ordinances)에 관해 자주 언급합니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율례들이 보충한다.
이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레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신명기 4: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법도 : 법율과 제도
        율법(계명) : 기초가 되는 율법
        율례 : 율법의 세부 사항
        규례 : 심판이 포함된 율례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율법(계명)

    사도행전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율례    
    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  율례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 규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율법(계명) - 명령
      율례 - 명령을 위한 준수 사항
      규례 - 율례를 지키지 않을 때는 규제(심판)

골로새서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기도는 감사를 깨닫는 것
      - 아는 것(지적 동의), 깨닫는 것(믿음으로 행하는 것)
     <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

계명(誡命)과 율례(율례)와 법도(法道)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법체계와 성경의 법체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라이프 성경사전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민 15:16. 시 19:8)
헬라어 "노모스"(분배)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whenever we pray to him)
내가 기도할 때마다(Every time I pray)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비록 가장 작고 연약한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신 7:7).
또 다른 은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기도(祈禱. pray)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노예 근성에 찌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를 계시함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 중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광야 세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헤아리게 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신명기에서 모세의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첫째는 왜 광야에서 38년을 방황해야 하는가?(신 1:1-4:43)
둘째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신 4:44-26:29)
셋째는 언약과 맹세(신 27:1-34:12)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중에서 "기도할 따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주제를 묵상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감찰하시고 나의 모든 사정을 먼저 아시고 일마다 때마다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은혜가 임재하기를 기도합니다.

안다는 것은 지적인 동의라고 하겠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실천하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일컬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수 천년 동안 나라 없는 전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이(디아스포라) 1948년 5월 14일(히브리력 5708년 이야르월)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유대인의 독립기념일( 욤 하츠마우트. יום העצמאות)로 지키고 있습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월 15일을 재앙의 날(나크바)이라고 합니다.

알라신을 찾는 아랍사람들과 여호와를 찾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과연 참된 신이 어떤 신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합니다.

종교를 수행종교(修行宗敎)와 계시종교(啓示宗敎)로 구분합니다.
불교(佛敎)를 수행종교라고 한다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계시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수행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를 말합니다.
계시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와서 자기를 알려주신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와 함께 하시며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는 복된 은총의 하루를 즐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성

첫째는 기도(pray)
둘째는 말씀(words)

구약에는 십자가 복음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 대신에 율법적이고 심판만 하는 두려운 하나님만 나타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이 이스라엘의 역사책은 당연히 아닐뿐더러,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예언만 곳곳에, 그것도 묵시적으로 숨겨놓은 책도 아닙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25:11)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2,13)

죄지은 대로 심판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인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자식처럼 용서하시는 분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의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이 외에도 구약에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본문 또한 직접적으로는 기독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면서 간접적으로는 복음도 가득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먼저 기도할 때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하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중에 함께 거하시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에서 직접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어 인생만사를 당신의 뜻에 따라 주도하시며 특별히 당신 백성을 더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말로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인간이 죽은 이후에 생전의 공과만 심사하여 심판을 내리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얼마든지 생전에 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오히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함께 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울면 그분이 함께 울고, 신자가 웃으면 그분이 함께 웃으십니다.
당연히 그분이 울면 신자도 울고, 그분이 웃으면 신자도 웃게 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음 넘어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처럼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신 계명에 도덕적 우월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 나그네 과부 고아를 압제하지 말며(출 22:21, 22),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해 추수할 때 일부를 남기라고 합니다.(레 19:9,10)
또 여자를 상속인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민 36장)
심지어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도 했습니다.(레 19:18)

열거한 예들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내용들입니다.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금하는 영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도 다른 종족의 여타 종교와는 비교가 안 되게 뛰어났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이 재해석하여 가르치고 또 몸소 실천하여서 완성하기 이전에 이미 완벽한 공의에 기초하여 주어졌던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이 두 가지 특징을 문자 그대로 신앙의 기초로 삼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특성대로 믿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의아해집니까?
문제가 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먼저 가까이 있어서 기도 응답에 능한 하나님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을 도덕적 우월성을 실천하는 것에만 중심을 맞추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기에 기독교를 믿기로 한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면 이적 같은 은혜가 가장 많이 일어나니까 믿기로 하고, 또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가장 우수하게 가르치니까 그대로 따르기로 하는 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럼 기독교를 믿은 것이지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두 특성은 기독교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자체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에게선 반드시 이런 두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 이단종파들처럼 결코 기독교라는 종교나 교회나 전통과 관습이 그분보다 앞장설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 신앙은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 그분과 그 아들에 대해 더 깊이 알아나가는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러 직접 이 땅에 비천한 몸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가장 절실하고도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할 그분의 특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공의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기독교의 두 근본적 특성도 바로 그 사랑과 공의를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신자가 신앙의 우선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기도하여 문제 해결 받는 것과 도덕적 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둘 다 아주 중요하고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실천 덕목입니다. 매사에 쉬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여야 하고 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성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귀한 기도와 선행도 예수님을 알아나감으로써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반응으로 따라 나와야 합니다. 그 자체가 신앙을 가진 최종 목표가 되거나 의무적 종교 행위가 되는 것은 오히려 금기 사항입니다.

자연적 반응이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더 정확하게는,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 앞에 절로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게 되며, 또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그분 속에 있고 그분 또한 우리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포도나무 가지요 우리는 가지로 그분께 붙어 있기만 해도 그분의 열매가 맺힙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선 절로 열매 맺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기도는 성도의 특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특권 중에 하나가 기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베푸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접속하는 코드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에 접속하는 코드다.

소냐  카슨(흑인 여성) - 아들 벤 카슨박사(샴 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의사)

그녀는 고아로 자라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13세에 처음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거남이 유부남이었다.
곧 그 남자는 도망갔고, 그녀는 절망 중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새 삶이 시작되었지만, 환경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항상 꼴찌만 하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11살 때 친구와 말다툼 끝에 칼로 친구의 배를 찔렀다.
다행히 친구는 죽지 않았고, 그는 학교에서 살인미수자로 낙인찍혔다.
그래도 소냐 카슨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아이가 없을 때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아이가 있을 때는 웃으면서 아이를 위로했다.
"벤! 너는 공부를 잘 할 수 있어! 힘들면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도와주실 거야!"
결국 아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후 아들에게 꿈과 비전이 생겼다.
꿈과 비전이 생기니 공부할 마음이 생겼고, 공부를 잘 하는 지혜와 집중력도 생겼다.
결국 그는 예일대학과 미시간 대학의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즈 대학병원의 소아외과 과장이 되었다.
그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벤 카슨 박사이다.
미국 언론은 그를 '기적의 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지금도 수술에 들어갈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한다.
기도의 손이 기적의 손임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다.
그가 기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게 기도에서 나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유대교인으로서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메섹의 어떤 집에 도착했다.
앞으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기도였다.
사도행전 9:10- 11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귀신 들린 한 여자 아이를 고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바울은 관리들에게 붙들려, 옷이 찢기고, 매를 많이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기도였다.
사도행전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풍랑을 만났다.
몇 시간이 아니다.
보름 정도 겪으며, 초죽음이 되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밥 한 술도 못 먹었다.
배마저 파선이 되었고, 간신히 한 섬에 도착하였다.
순박한 섬사람들의 친절로 목숨은 건졌으나, 다들 탈진하여 기진맥진하였다.
그들과 함께 지내던 중, 추장의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기도였다.
사도행전 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처럼 바울은 결정적일 때마다 기도했다.
바울이 결정적일 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통 때 기도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다.

사실 기도는 잘 표가 나지 않는다.
기도 며칠 안 한다고, 삶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기도를 쉬고 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혼의 호흡에 이상이 생겼는데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어느 날 자가 호흡이 안 될 수 있으니, 기도생활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왔다.
골로새서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에바브로를 통해서 교회 상황을 듣고는,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왔다.
에바브로를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왔다.
목회자의 눈에 자주 띄면,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온다.
목회자와 멀어지면, 기도에서도 멀어진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교인은 목회자에게 사랑의 빚을 지우는 게 지혜이다.
목회자는 사랑의 빚을 기도로 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교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떤 교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감사와 기대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마음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와 기대의 마음이 들 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기쁨이 생긴다.

바울에게 골로새교회 성도들은 감사의 마음이 들게 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감사부터 나왔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어떤 점 때문인가?

그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다고 했을까?
골로새서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그들의 믿음 때문이다.
그들의 어떤 믿음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믿음의 정도도 중요하다.
믿음의 크기와 믿음의 깊이의 정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믿음의 대상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은 그냥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단순한 믿음, 뭐라도 잘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되지 않는 믿음은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믿음은, 신앙이라기보다 신념에 가깝다.
물론 신념도 필요하고, 신념도 중요하다.
어떤 일에 성공한 사람치고, 신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신념은 미신에서 나올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게 신념이 아니었는데, 누구에게 듣고 그게 신념으로 굳어질 수 있다.
자기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반복해서 듣느냐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복해서 들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날마다 오직 예수 신앙에 견고하게 서있기를 바란다.

목회자인 나 역시도, 3남매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다.
믿음의 유산이 전부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다.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예수 잘 믿는 것이다.
그들이 모든 것을 소유해도, 예수를 잃는다면, 기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인생을 헛산 거 같은 슬픔을 한 채,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것이다.
자녀들이 예수 잘 믿는 것은, 부모된 나의 최고의 소원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다고 했을까?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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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개요와 내용 파악

신명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엘레 하데바림 אלה הדברים(이것들은 그 말씀들이다)이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말은 헬라어 70인 역의 명칭에서 왔는데,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이다.
신명기는 출애굽기부터 민수기까지 나오는 율법들을 다시 강론하는 내용이다.

신명기의 저자는 모세이다(1:1-5; 31:9).
신명기의 모세 저작 성에 관해 다음 몇 가지 점들을 말할 수 있다.

1. 신명기의 구조는 주전 2천 년대(2000년부터 1000년까지) 후반 헷 족속이 피지배국 영주들과 맺은 영주권 조약(suzerainty treaty) 형식과 같고, 주전 천 년대의 것과는 다르다.
주전 2천 년대의 조약은 신명기의 구조와 같이
(1) 서문, (2) 역사적 서언, (3) 법 조항들, (4) 저주와 축복, 혹은 조약의 비준, (5) 조약 계승을 위한 조치 등의 형식을 가진다.
주전 천 년대의 것은 둘째 항목과, 넷째 항목 중 축복이 빠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가 모세 시대의 것을 증거 한다.

2.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주전 8세기나 그 후의 글들에서 자주 나오는 명칭들과는 구별된다.
또 신명기에는 포로 전후의 선지서들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도 나온다.

3. “요단 저편”(베에베르 하야르덴 בעבר הירדן)이라는 표현은 요단 동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여섯 번이지만(1:1, 5; 4:41[두 번], 47, 49) 요단 서쪽을 가리키는 경우도 나온다(3:20, 25; 11:30). ‘요단 저편’이라는 명칭이 요단 동쪽을 가리키는 경우, 그것은 고유명사와 같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오늘날과 같으니라”는 표현(2:30 등 여섯 번 나옴)은 모세 시대 이후 많은 기간이 지난 때를 가리키지 않고 광야 40년이 지나서 모압 평지에 도착한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의 주요 내용은 율법의 재강론과, 언약의 갱신이다. 또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다.

신명기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장, 광야 생활의 회고] ‘기억하라’(14회), ‘잊지 말라’(12회)

1장, 호렙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2장, 가데스부터 헤스본까지 (40년).

3장, 바산 왕 옥을 멸함. 4장,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 계시.

[5-28장, 율법의 재강론]

5장, 십계명. 6장, 하나님 사랑과 말씀 순종(쉐마).

7장, 가나안 7 족속들을 다 멸할 것. 8장, 광야 생활의 교훈--낮추심.

9장, 이스라엘의 실패를 기억할 것--목이 곧고 항상 거역하고 속히 떠남.

10장,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말씀 순종.

11장, 말씀 순종에 대한 상.

12장,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나와 섬길 것.

13장, 이단을 제거할 것. 14장, 깨끗한 생물과 십일조.

15장, 안식년과 면제, 구제. 16장, 절기들.

17장, 왕에 대한 명령. 18장, 모세와 같은 선지자.

19장, 도피성. 20장, 전쟁에 대한 법.

21장, 패역한 아들에 대한 법. 22장, 의복, 씨뿌림, 강간에 대한 법.

23장, 총회에서 제외될 자들. 24장, 이혼과 전당물에 대한 법.

25장, 형제를 위한 결혼 의무. 26장, 첫 열매, 제3년 십일조.

27장, 저주들. 28장, 복과 저주.

[29-34장, 언약의 재확인과 마지막 권면]

29장, 언약에 참여함(유아들과 여자들도 언약에 참여함).

30장, 마음의 할례를 주실 것임. 31장, 여호수아를 격려함.

32장, 모세의 노래. 33장, 모세의 마지막 축복.

34장, 모세의 죽음. 모세의 연대는 대략 주전 1525-14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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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핵심 주제 분석, 해석 및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적용

A. 서론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마무리하고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기 전 모세가 백성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과 법률들을 기록한 책이다.  신명기는 단순한 법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주석학적 관점에서 신명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심화시키며, 백성의 정체성과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한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신명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회상하게 한다.

또한 언약신학적으로 신명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세운 언약의 내용과 그 조건을 명확히 하여, 이스라엘의 삶이 하나님의 법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명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깊은 교훈을 제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공동체의 책임, 그리고 성경적 윤리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B. 주요 주제  분석,  해석 및 적용

1. 모세의 회고와 하나님의 언약 (신명기 1:1-8)

• 성경구절: 신명기 1:1-8 • 핵심 단어: 언약(בְּרִית, 브리트)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하는 약속 • 주해 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 신학자 해석: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언약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명력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어야 함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저를 주님의 언약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새로운 세대에 주는 교훈 (신명기 1:9-18)

• 성경구절: 신명기 1:9-18 • 핵심 단어: 지도자(שָׂר, 사르) – 공동체를 이끌고 책임지는 자 • 주해 해설: 모세는 새 세대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도자들을 세우는 중요성을 가르친다. • 신학자 해석: 나단 하프나(Arthur H. Hurst)는 지도자의 역할이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한다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저에게 또한 저를 신령한 지도자를 만나고 지도자로 세워지게 하소서."

3. 하나님께서 주신 땅 (신명기 1:19-46)

• 성경구절: 신명기 1:19-46 • 핵심 단어: 약속의 땅(אֶרֶץ, 에레츠) –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 • 주해 해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며 불신의 결과로 방황하게 된다. • 신학자 해석: 크레이그 블롬버그(Craig Blomberg)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게 하소서."

4. 십계명의 중요성 (신명기 5:1-21)

• 성경구절: 신명기 5:1-21 • 핵심 단어: 계명(מִצְוָה, 미츠바) – 하나님의 법과 명령 • 주해 해설: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 신학자 해석: 하비 콕스(Harvey Cox)는 십계명이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계명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의 계명을 제 삶의 기준으로 삼게 하소서."


5.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 (신명기 7:6-11)

• 성경구절: 신명기 7:6-11 • 핵심 단어: 선택(בָּחַר, 바하르) –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 주해 해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 신학자 해석: 톰 라이트(N.T. Wright)는 하나님의 선택이 그의 구속 계획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주의 사랑으로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6.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신명기 10:12-22)

• 성경구절: 신명기 10:12-22 • 핵심 단어: 사랑(אהב, 아하브) –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 • 주해 해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명령을 지키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 신학자 해석: 제임스 던(James D.G. Dunn)은 사랑이 신앙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이웃에게도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7. 제사와 경건 (신명기 12:1-14)

• 성경구절: 신명기 12:1-14 • 핵심 단어: 제사(זֶבַח, 제바흐) –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표현 • 주해 해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 신학자 해석: 존 스토트(John Stott)는 경건한 삶이 제사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새기고 경건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사를 통해 제 삶을 헌신하는 경건한 자가 되게 하소서."

8.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 (신명기 14:1-21)

• 성경구절: 신명기 14:1-21 • 핵심 단어: 거룩함(קֹדֶשׁ, 코데시) – 하나님과 구별된 삶 • 주해 해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따르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 신학자 해석: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거룩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 자신을  통해 주님의 거룩함이 드러나게 하소서."

9. 가난한 자와 고아, 과부를 돌보라 (신명기 24:17-22)

• 성경구절: 신명기 24:17-22 • 핵심 단어: 정의(מִשְׁפָּט, 미쉬파트) –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평한 삶 • 주해 해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 신학자 해석: 마틴 부르크하르트(Martin Buber)는 사회적 정의가 하나님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삶을 살게 하소서."


10. 성년식과 공동체의 책임 (신명기 21:18-21)

• 성경구절: 신명기 21:18-21 • 핵심 단어: 성년식(בָּרוּת, 바룻) – 책임 있는 성인으로 성장 • 주해 해설: 성년식은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의무를 강조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 신학자 해석: 에드워드 사지프(Edward Saiz) 는 공동체가 개인의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11. 진정한 왕과 지도자 (신명기 17:14-20)

• 성경구절: 신명기 17:14-20 • 핵심 단어: 왕(מֶלֶךְ, 멜렉) –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도자 • 주해 해설: 진정한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법을 준수하여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 신학자 해석: 데이비드 고든(David Gordon)은 왕의 역할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제가 살아갈 동안,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 주의 뜻에 합당한 지도자로 세워 주시옵소서."

12. 하나님의 경고와 축복 (신명기 28:1-14)

• 성경구절: 신명기 28:1-14 • 핵심 단어: 축복(בָּרַךְ, 바라크) –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 주해 해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축복을 받지만, 이를 어기면 저주가 따른다고 경고한다. • 신학자 해석: 제임스 윌슨(James Wilson)은 축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축복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의 삶을 살게 하소서."

13. 불순종의 결과 (신명기 28:15-68)

• 성경구절: 신명기 28:15-68 • 핵심 단어: 저주(אֵרוּר, 에르르) –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 주해 해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저주와 고난이 따른다는 경고가 이어진다. • 신학자 해석: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불순종이 개인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불순종의 길에서 보호하여 주시고 회개하게 하소서."

14. 회개의 중요성 (신명기 30:1-10)

• 성경구절: 신명기 30:1-10 • 핵심 단어: 회개(שׁוּב, 슈브) –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행위 • 주해 해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이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 신학자 해석: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회개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5. 선택의 중요성 (신명기 30:11-20)

• 성경구절: 신명기 30:11-20 • 핵심 단어: 선택(בָּחַר, 바하르) – 삶과 죽음의 갈림길 • 주해 해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신다. • 신학자 해석: 오스 기니스(Oss Guinness)는 신앙의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매일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지혜롭게, 분별력 있게 선택하게 하소서."

16. 모세의 마지막 연설 (신명기 31:1-8)

• 성경구절: 신명기 31:1-8 • 핵심 단어: 지도자(יָשָׁע, 야샤) –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 주해 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고 그를 지지하라고 권면한다. • 신학자 해석: 존 밀밴크(John Milbank)는 지도자의 임무가 공동체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께서 세운 지도자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통해 영적 지도자와 근실한 사역자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7. 성경을 기억하라 (신명기 31:9-13)

• 성경구절: 신명기 31:9-13 • 핵심 단어: 기억(זָכַר, 자카르) –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않는 것 • 주해 해설: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세대에 전하라고 명령한다. • 신학자 해석: 리차드 하스(Scott Hahn)는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지속성을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기억하고 전파하는 데 힘써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전파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8. 찬송가와 경배 (신명기 32:1-43)

• 성경구절: 신명기 32:1-43 • 핵심 단어: 노래(שִׁיר, 시르) – 하나님을 찬양하는 표현 • 주해 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주며, 그들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 신학자 해석: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찬양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 나의 신앙을 강화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제가 항상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의 성호와 역사를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9. 모세의 죽음 (신명기 34:1-5)

• 성경구절: 신명기 34:1-5 • 핵심 단어: 죽음(מוות, 마우트) – 삶의 끝과 새로운 시작 • 주해 해설: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한다. • 신학자 해석: 존 스토트(John Stott)는 모세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삶의 끝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 기도: "하나님, 저의 삶의 끝마저도  최후의 심장과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주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20. 후계자 여호수아의 임명 (신명기 34:9-12)

• 성경구절: 신명기 34:9-12 • 핵심 단어: 후계자(תַּחַת, 타하트) – 새로운 리더십의 시작 • 주해 해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져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 신학자 해석: 드니 제르신(Denis S. Baird)은 지도자의 연속성이 공동체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후계자를 준비하고 지지하는 것이 공동체의 지속성에 기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늘 어디서 영적 후배, 후계자를 세우고 격려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C. 결론 및 기도

신명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석학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신명기가 단순히 과거의 법적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지속적인 원칙임을 이해할 수 있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신명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언약신학적으로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세운 언약의 조건과 그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통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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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요약 - 장별 내용 및 요점 정리


신명기 요약

신명기 1:5에서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나와 있는 것처럼 신명기는 모세가 율법을 설명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신명기에는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과 율법(레위기)을 설명하는 내용 그리고 모압 땅에서 추가된 율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 ~ 4:43 / 광야 생활의 회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4:44 ~ 28:68  / 레위기를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29:1 ~ 34:12 / 모압 땅에서 추가로 주신 율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 서론
모세가 모압 땅에서 율법(레위기)을 선포하고 설명하기 시작하다.


2 ◈ 광야 역사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간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다.


3 ◈ 전쟁과 정착
바산왕 옥을 치게 된 경위와 경과를 소개하다.


4 ◈ 율법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가르치라고 부탁하다.


5 ◈ 십계명
모세가 십계명을 재확인 해주고 주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라고 말하다.


6 ◈ 쉐마 이스라엘
모세가 주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전하다.


7 ◈ 순종의 복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우상을 파괴하고 주민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다.


8 ◈ 약속의 땅
모세가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면 주를 찬양하고 경외하라고 전하다.


9 ◈ 불순종한 이스라엘
모세는 이스라엘이 착해서 그 땅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다.


10 ◈ 십계명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는 과정을 설명하다.


11 ◈ 약속
모세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일을 이스라엘 너희가 보았다고 말하다.


12 ◈ 예배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택하신 처소에서 제사와 예배를 드리라고 당부하다.


13 ◈ 거짓 선지자
모세는 꿈으로 점치는 자나 예언하는 자를 듣지도 말고 죽이라고 명령하다.


14 ◈ 음식과 십일조
모세가 이방인의 애도법을 따르지 말라고 말하다.


15 ◈ 생활 규범
7년마다 빚을 면제해주고 면제 규례를 지키며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명령하다.


16 ◈ 절기
애굽에서 나온 날을 평생 기억하며 교육하고 규례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다.


17 ◈ 율법
이스라엘에 역겨운 일을 하게 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다.


18 ◈ 레위인과 이교 풍속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니 받을 몫을 주라 명하다.


19 ◈ 재산과 인권보호
도피성을 세우고 과실로 살인한 사람들에게 살길을 만들라고 명하다.


20 ◈ 전쟁
전쟁하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21 ◈ 도덕과 윤리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때 처리 방법을 알려 주다.


22 ◈ 생활 규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규정과 규칙을 알려 주다.


23 ◈ 율법과 생활규정
주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의 기준을 정하여 주다.


24  ◈ 혼인과 약자에 대한 규정
이혼과 재혼에 대한 규정을 정하여 주다.


25 ◈ 재판, 상속 및 기타 규정
올바른 재판에 대한 규정과 원칙을 정하여 주다.


26 ◈ 예물
토지의 첫 소산물과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다.


27 ◈ 율법과 저주
돌 위에 율법을 기록하여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전하다.


28 ◈ 순종과 불순종
주의 말씀을 듣고 명령에 순종하게 되면 받을 복에 대하여 선포하다.


29 ◈ 언약
모압 땅에서 받은 언약과 약속을 백성들에게 전하다.


30 ◈ 당부
복과 저주가 임할 때 말씀을 듣고 돌아오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31 ◈ 여호수아
모세가 여호수아를 자기의 후계자로 세우다.


32 ◈ 모세의 노래
주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했지만 그들은 역겨운 짓을 하여 주를 노하게 했다.


33 ◈ 축복
모세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자손에게 축복하다.


34 ◈ 죽음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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