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개요
레위기 1-16장 / 거룩한 길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 <제사법>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레위기 17-27장 / 거룩한 삶 <하나님 앞의 실존> <거룩한 삶의 방법>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세분하여 세 부분으로 설명할 때
1. 제사 규례 (1-7장)
- 다양한 제사의 종류와 규례를 설명하며,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각 제사의 목적과 절차를 다룹니다.
- 제사를 통해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2. 제사장 직무와 정결 규례 (8-16장)
- 제사장 위임식(8-10장) :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되고, 그들의 책임과 거룩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정결 규례(11-15장) : 음식, 피부병, 유출물 등과 관련된 정결과 부정의 규정을 다룹니다.
- 속죄일(16장) :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설명합니다.
3. 거룩한 삶과 축복 (17-27장)
- 거룩한 삶의 규례(17-22장) : 예배, 도덕적 순결, 제사장의 거룩함을 다룹니다.
- 절기와 예배 규례(23-25장) : 이스라엘 절기의 의미와 규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합니다.
- 축복과 저주(26장) :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책임을 강조합니다.
- 헌물과 서원 규정(27장) :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약속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레위기의 신학적 메시지
레위기는 성경에서 거룩함과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신학적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기반으로, 거룩함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필수적인 조건임을 보여줍니다. 레위기의
주요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
레위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강조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너희는
거룩할지어다."(레 19:2)는 레위기의 중심 구절로, 하나님의 성품이 백성의 삶에 반영되어야 함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며, 거룩함을 통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속죄와 희생제사 :
레위기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 제도를 상세히 설명하며,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며, 신약에서 완성되는 구속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예배와 공동체의 중심성 :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와 정결법은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백성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공동체가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리와 생활의 거룩함 : 레위기의 법과 규례는 단지 종교적 의식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어떻게 예배하고,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보여줍니다. 자, 이제 레위기 전체 장별 요약으로 넘어갑니다.
전반부는(1-16장) 제사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후반부는 (17-27장)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한 삶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레위기는 출애굽기와 민수기 사이의 책이다.
모세 오경 중에 세 번째 책이며, 저자는 모세이며, 레위인들의 사역을 주로 담아내고 있다.
레위기의 핵심은 성결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해주는 율법을 담고 있다.
레위기는 읽기 쉬운 책이 절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모호하고, 어떤 부분은 난해하다.
또한 번역상의 오류도 있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레위기는 출애굽기 안에서 읽어야 한다.
애굽에서 나와 율법과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가 그릇이라면 레위기는 그릇을 채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장은 번제를 소개합니다.
번제는 제물의 전체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다른 말로 전번제라고 합니다.
소와 양이나 염소,
새를 사용한다.
이곳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물은 드리는 사람과 부와 상관있다.
소는 가장 부유한 사람이, 새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드렸다.
예수님의 부모는 새를 드렸다.
1. 번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번제의 히브리어 단어는 ‘עֹלָה’(올라)로, 이 단어의 근본적인 뜻은
‘오르다’ 또는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번제의 목적과 과정이 "위로 오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물이 제단에서 불태워질 때, 그 연기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것은 제물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히브리어로 ‘올라’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연기가 올라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헌신과 순종의 마음이 함께 드려지는 영적인 상승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이 온전히 바쳐지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번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제물의 일부분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 전체가
불에 태워져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제사의 방식은 제물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점에서, 제물을 바치는 자의
헌신이 부분적이거나 조건적이지 않고, 전적이고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제물의 소멸은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제물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완전히 태워짐으로써 그 죄를
하나님께로 돌려보내고, 그 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번제는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헌신을 강조하는 예식입니다.
2. 번제를 드리는 방법
번제를 드리는 과정은 레위기 1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제물을 사용합니다.
소, 양이나 염소, 그리고 비둘기입니다.
이러한 제물들은 모두 흠 없고 깨끗한 것들이어야 하며,
이는 제물이 죄 없이 순전한 상태여야 함을 상징합니다.
제물로 선택된 동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하나님께 인간이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한다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번제의 첫 번째 단계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레
1:4).
이 행위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 사이의 동일시를 의미합니다.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써,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는 제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합니다.
피는 구약에서 생명을 상징하며,
그 피는 제단 주위에 뿌려지는데(레 1:5), 이는 죄를 정결케 하고 속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를 뿌리는 행위는 죄의
용서와 정결을 상징하며, 하나님께서 그 피를 통해 인간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후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레 1:6), 제물을 잘라 제단 위에서 불태웁니다.
이때
제물의 모든 부분이 철저히 태워지며,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이 과정에서 제물을 태우는 불은 제단에 항상
유지되었으며(레 6:12-13),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지속적인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제물의 가죽은 제사장들이 가질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온전히 태워졌습니다.
이러한 완전한 태움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며, 이는 번제가
다른 제사들보다 독특하게 구별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 성경에서 번제는 매우 중요한 예식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번제는 주로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단순한 죄 용서 이상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번제의 중요한 예로 여겨집니다(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조차 아끼지 않고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번제는 단지
물질적 제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깊은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제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 헌신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번제는 성막과 성전에서 매일 드려졌던 제사였습니다.
출애굽기 29:38-42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과 저녁에 매일 번제를 드렸으며, 이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제도였으며, 절기나 특별한 상황에서도
번제를 드리며 그들의 신앙과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속죄일이나 7월 1일 나팔절과 같은 절기에는 특별한 번제가
드려졌습니다(레위기 23:24-27).
번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번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번제와 같은 역할을 하셨다고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10-12는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고, 그로 인해 우리의 죄가 완전히 속죄되었습니다.
번제에서 제물이 완전히 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지듯, 예수님의 희생 또한 온전하고 완전한 헌신과 속죄를 상징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번제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12:1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번제와 연결되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번제에서 제물이 완전히 소멸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헌신되어야 합니다.
또한, 번제를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번제는 물리적인 제물이 아닌, 우리의 시간, 재능, 그리고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번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사랑, 그리고 예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 번제 : Burnt offering
1) 어의 - 이스라엘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상번제나 특별한 절기 때 가장 많이 사용하던 제사양식이다. 번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라’ 는 연기가 제물로부터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판관기 13:20 참고) - 번제는 일반적으로 소제나 전제와 함께 드려졌다.(출애굽기 29:38-46; 민수기 15:1-16) 번제는 버려질 더러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희생 제물 전체를 모두 태워 드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완전함 또는 온전함’을 의미한다. 죄와 관련된 경우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진노와 관계되며,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과 관련된다. - 또 번제는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려졌다.(민수기 28장)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지속적인 경각심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하느님께 대하여 변함없이 헌신해야 함을 나타낸다.
2) 제물의 종류 -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레위기 1:3, 5, 10, 14) - 비둘기를 드리는 경우는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이다. 비둘기의 번제는 머리를 비틀어 끊고 불 위에 불태우고 피는 단 곁에 흘린다. 먹통과 더러운 것은 단 동편의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적정히 찢어 불 위에 태웠다.
3) 번제의 방법 - 번제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은 출애굽기 29:38-46과 레위기 1장, 6:8-13 그리고 민수기 15:1-16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배자가 성막 문 앞으로 희생 동물을 가져와 자신의 손을 그 머리 위에 얹는다.(레위기 1:4) 이는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예배자의 죄가 동물에게 전이된 것을 상징한다. - 그 후 예배자는 희생 동물을 번제단 북쪽으로 가져가 잡았으며(레위기 1:11),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잡을 때에는 번제단 위에서 목을 비틀어 잡았다. (레위기 1:15) 번제에 있어서는 오직 새들만이 제사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나머지는 예배자가 직접 죽였다.(레위기 1:5, 11, 15) - 피가 제단 위에 뿌려지는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피는 제사장에 의해 번제단 사면에 뿌려졌다. (레위기 1:5, 15) 그리고 예배자가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 지체를 자르고 물로 그것들을 씻은 후, 동물은 모두 제사장에게 옮겨졌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것을 취해 제단 위에 놓고 완전하게 태웠다. 동물의 가죽은 봉사의 대가로 제사장이 가져갔다.(레위기 7:8)
4) 번제를 드리는 경우 - 집단적 번제 - 매일 아침과 저녁(상번제) - 개인의 번제 - 절기, 평소(임직식, 산후결려,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된 후, 나지르인 서약이 끝난 후, 본인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드리고 싶을 때)
5) 번제의 목적 - 레위기 1:4은 번제의 목적이 ‘속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속죄와 직접 관련 있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그러나 번제는 속죄제나 속건제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번제가 ‘야훼를 기쁘게 해 드리는 향기’ (레위기 1:9, 13, 17)가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번제가 주로 인간의 범죄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하느님의 태도를 돌이키는 역할과 관계된 것 같다.(창세기 8:21) 즉,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민수기 15:24; 사무엘 하 24:25; 역대기 상 21:26; 욥기 1:5; 42:8; 역대기 하 29:7)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의 결과인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다. - 번제의 목적이 속죄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번제가 죄와 관계되지 않는 구체적인 예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의 번제는 아브라함의 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전적 헌신, 즉 전적 포기와 관련되어 있다. - 또 언약제사에서 드려진 번제의 경우(출애굽기 24:5; 신명기 27:6; 비교. 출애굽기 32:6)는 이스라엘이 지은 또는 지을 죄와 무관하게, 이스라엘이 언약 당사자이신 야훼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나타낸다. 그외의 경우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출애굽기 18:11-12; 민수기 6:14; 15:3; 사무엘 상 15:22; 열왕기 상 18:38-39; 시편 40:6; 66:13-15) 번제가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는 헌신과 감사와 봉사와 관련되었다
6) 번제의 영적 의미 - 이 제사는 모든 제물을 하느님께 완전히 불살라 드리는 것으로서, 온전한 헌신의 의미로 드려졌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이고 하느님과 동등된 분이셨으나 (필립비서 2:6)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히 드려졌다.
2장은 소제를 소개합니다.
소제는 곡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로 드리는 예물은 곡물 자체가 아닌 가루로 만들어 드립니다.
소제는 일부만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들에게 줍니다.
소제로 드릴 때는 가루로 드리거나, 화덕에 굽거나, 철판에 부친 것으로
드린다.
소제물에는 소금을 치며, 누룩을 넣으면 안 된다.
1. 소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소제는 히브리어로 ‘מִנְחָה’(민하)라고 불리며, "선물" 또는
"헌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제는 주로 곡물로 드리는 제사로, 레위기 2장에서 그 절차와 규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민하’라는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나 공물을 의미하며, 이는 곡물과 같은 물질적인 헌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는 제사였습니다.
소제는 죄의 속죄보다는 감사와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였으며,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소제는 일반적으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졌으며, 제물로는 곡물(밀이나 보리)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농경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물질적 자원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의 노동과 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소제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려 드리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소제의 예식은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수확과 일상의 복을 인정하고, 그분께 대한 의존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2. 소제를 드리는 방법
소제의 제물은 주로 고운 가루, 기름, 향료,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나 과자를 사용하여 드려졌습니다. 소제는 동물 희생제와 달리 곡물이나 곡물로 만든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소제를 드리는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고운 가루(밀가루)와 기름 : 제물로는 고운 밀가루를 사용하며, 그 위에 기름을 부어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레위기 2:1). 고운 가루는 인간의 노동을 상징하며, 기름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풍요와 축복을 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혼합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풍성한 헌신을 상징했습니다.
- 유향 : 제물에는 유향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레위기 2:2). 유향은 향을 내며 불에 타올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고,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냅니다. 유향은 제물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상징하며, 기도나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 누룩 없는 빵과 꿀을 배제 : 소제에서는 누룩(발효된 빵)과 꿀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레위기 2:11). 누룩은 발효를 상징하며, 죄나 부패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소제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따라서 소제에서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순결하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 제물의 일부 태움과 나머지의 사용 : 제사장은 제물 중 일부를 불태워 하나님께 바쳤으며,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레위기 2:3). 이때 태워진 부분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념" 부분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나머지 부분을 제사장이 취함으로써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의 일부를 나눠 받는 공동체적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 소금의 사용 : 소제에서 반드시 소금을 포함해야 했는데(레위기 2:13), 이는 “언약의 소금”이라 불리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했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하나님과의 언약이 영원히 지속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소제는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하는 제사로 드려졌으며, 주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졌습니다. 소제는 주로 농작물 수확, 풍년,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소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헌물 이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리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소제는 농작물, 즉 인간이 일상에서 얻은 수확물을 바치는 제사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인간의 노동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농사로 얻은 모든 수확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그 일부를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소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로 드린 곡물이 단순히 물질적인 헌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상징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그분께 다시 헌신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예식으로,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소제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재확인하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들을 돌보시고 지켜주실 것을 믿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오늘날 소제는 물리적인 곡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소제의 영적인 의미는 여전히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감사의 상징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노동의 열매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소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축복을 감사함으로 돌려드리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로마서 12:1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께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우리가 물질적, 영적 자원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소제는 또한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과 수고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일터나 가정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돌려드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기부나 헌금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제에서 강조된 "언약의 소금"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변치 않으며,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구원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보존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분의 영원한 보호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소제의 정신을 실천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에서 소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와 수고가 하나님께 드려지며, 그분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2. 소제(곡물제) : Grain offering
1) 어의 -소제를 뜻하는 히브리어로는 ‘민하’(minchah)로 '분배하다', '수여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마나'(mana)에서 유래한 것으로 '헌물', '조공', '희생 제물'을 뜻하는데 특별히 '피 없는 곡물 제사'에 사용되어 말 그대로 '소제', 또는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뜻한다.(레 2:1-16)
2) 제물의 종류 -소제는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동물을 드리지 않아 피 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대개 소제는 단독으로 드리지 않고 번제(출애굽기 29:38-42; 레위기 9:17)나 화목제(레위기 7:11-13)와 함께 드렸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여 의심할 때는 기름을 섞지 않고 유향을 두지 않은 보리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다른 제사 없이 단독으로 드렸다(민수기 5:11-15). 그리고 산비둘기조차 드릴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기름과 유향 없이 속죄제물로 드렸다(레 5:11-13). 소제에는 누룩이나 꿀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레위기 2:11). 누룩은 부패를 상징하고 꿀은 유혹과 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잠언 5:3). 꿀은 나지르인들에게도 금지된 것이었다(민수기 6:3). 그렇지만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사용해야 했다(레위기 2:13). 소금은 정결과 불변(민수기 18:19; 역대기 하 13:5; 마태오 복음서 5:13; 마르코 복음서 9:49; 골로사이서 4:6)을 상징하는 것으로 언약의 소금은 불변의 언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3) 소제의 방법 고운 가루 : 곱게 빻은 밀(레위기 2:1; 역대기 상 21:23)이나 보리(에제키엘 13:19)를 소제물로 드린다. 고운 가루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유향을 취하여 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취하였다(레위기 2:1-3). 제사장들이 위임식 때 드리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절반씩 아침 저녁으로 드리되 반드시 불살라야 했다(레위기 6:20-23). 고운 가루는 귀빈(창세기 18:6)이나 왕가에서 사용하는 음식물(열왕기 상 4:22)로 고급스런 식물이었다(에제키엘 16:13, 19). 최고급의 식물을 소제물로 하느님께 바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 기름(출애굽기 27:20; 레위기 24:2)로 음식을 요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향은 강한 향기가 났으며(사무엘 상 60:6; 예레미야 6:20) 향료로 사용되었다(출애굽기 30:34). 기독교에서는 고운 가루는 껍질이 깨어져야 만들어지는 것으로, 모든 죄를 없애려고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온전하고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히브리서 4:15)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의 헌신을 상징한다(고린토 2서 4:10-11).
화덕에 구운 무교병 : 화덕에 구운 무교병을 소제물로 드렸는데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만들어야 했다(레위기 2:4). 번철에 부친 소제의 예물 :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작은 조각으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기름을 발라서 드렸다(레위기 2:5-6). 솥에 삶은 소제물 :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것을 솥에 삶아서 드렸다(레위기 2:7). 첫 이삭의 소제물 :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제사장은 곡식과 기름의 일부, 유향의 전부를 기념물로 단에서 불태워 드렸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레위기 2:14-16).
4) 소제물을 드리는 경우 속건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레위기 7:9-10; 7:12-14; 8:26)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임할 때(레위기 9:4, 17; 민수기 8:8) 성막과 성전 봉헌 시(민수기 7장; 열왕기 상 8:64)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 때(레위기 14:10, 20-21, 31) 나지르인 서약이 끝났을 때(민수기 6:15-19)
5) 소제의 목적 소제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물질을 공급하고 보호하여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경배 돌리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6) 소제의 영적 의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한 복음서 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수기 18:19, 역대기 하 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주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주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는 자는 죄악과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과 달콤한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꿀'을 모든 소제물에서 제하라는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으로 주어졌다.
3장은 화목제에 대해 소개한다.
제물은 소의 수컷뿐 아니라 암컷으로도 가능하다.
양과, 염소로 드린다.
새가 빠져 있다.
1. 화목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זֶבַח שְׁלָמִים’(제바흐 셸라밈)이라고
하며, 이는 "평화의 제사" 또는 "화목의 제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바흐'는 "희생" 또는 "제물"을
뜻하고, '셸라밈'은 "평화" 또는 "화목"을 의미합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상징하며, 또한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특히 이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드리며, 그분의 은혜로 이루어진 평화와 공동체의 화목을
축하하는 예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드려졌고, 하나님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상징적인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는 희생제물의 일부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평화와 축복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2.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
화목제는 제물로 소, 양, 염소 같은 흠 없는 짐승을 사용하며, 제물을 드리는 방식과
절차가 상세하게 레위기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의 핵심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함께 공동체가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평화와 화목을 기념하는 데 있습니다.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물의 선택 : 화목제의 제물로는 흠 없는 소, 양, 염소를 선택하며, 이 짐승은 반드시 깨끗하고 흠이 없는 상태여야 했습니다(레위기 3:1, 6).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질 때, 가장 완전하고 귀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흠 없는 제물이 요구되었습니다.
- 제물의 머리에 안수 :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며(레위기 3:2), 이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과 제물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안수는 제물이 자신을 대신해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이로써 하나님과의 화목과 평화를 구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 제물을 잡고 피를 뿌림 : 제물을 잡은 후, 그 피는 제사장이 제단 주위에 뿌렸습니다(레위기 3:2, 8, 13).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 제단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피 뿌림의 의식은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생명의 대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 지방과 특정 부분의 태움 : 제물 중 지방과 내장 부분은 하나님께 태워서 드렸습니다(레위기 3:3-5). 이 지방은 화목제에서 중요한 상징적 요소로 여겨졌으며, 제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최선의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특히, 레위기 3장 18절에서는 "모든 지방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명시되어, 하나님께는 가장 귀한 부분을 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 나머지 고기의 나눔 : 제물의 나머지 고기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이 고기는 제사장과 제사를 드린 사람이 나눠 가졌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공동체 안에서 나눠지고 축하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념하고, 그 화목을 공동체 내에서 함께 나누는 중요한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 먹는 시간의 규정 :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이나 다음 날 안에 먹어야 하며(레위기 7:15-17), 이는 제물이 신선한 상태에서 공동체의 화목을 기념하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오래된 고기를 먹지 않도록 한 것은 제물의 거룩함과 신선함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가 거룩하게 보존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냅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평화와 결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제물의 일부를 공동체가 나누어 먹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화목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퍼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화목제는 세 가지 주된 상황에서
드려졌습니다.
- 감사 제사 :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졌습니다(레위기 7:12). 전쟁에서의 승리, 질병에서의 회복, 농작물의 풍성한 수확 등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를 통해 백성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에서 받은 모든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드렸습니다.
- 서원 제사 : 서원한 내용을 성취했을 때 드려졌습니다(레위기 7:18).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이루어 달라고 서원한 후 그 서원이 이루어졌을 때, 감사의 표시로 서원 제사를 드렸습니다.
- 자원 제사 :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레위기 7:18).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의 마음으로 드려졌으며, 그분께서 주신 평화와 화목을 기념하는 예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먹는 예식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화합과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으로 나누는 예식이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온전하게 유지되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화목제는 오늘날 신앙 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비록 구약의 제사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통해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그 은혜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묘사됩니다(로마서 5:1,
고린도후서 5:18-1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의 희생을 드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 사이의 화목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화목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와 화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화목제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과의 화목을 유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화목제의 중요한 요소인 "공동체와의 나눔"을 통해 우리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세워주는 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평화는 개인적인 축복을 넘어서,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화목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주어진 화목과 평화를
기억하며, 그 평화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14-18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벽을 허무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화목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념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공동체와의 화평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는 우리 안에 머물지 않고, 이웃과 세상
속에서 나누어져야 합니다.
화목제(친교제) : Peace offering
1) 화목제의 의미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위해 드린 동물의 의식 국가적인 경축일이나 제사장의 성별식, 나지르인 서약식 등의 행사에서도 이루어졌다.
2) 화목제의 의미 평강(peace)과 친교(fellowship)를 위한 제사이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자원하며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다. 화목제는 제사자가 고기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이다 자신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웃들까지도 함께 감사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하 제사인 것이다.. 향기로운 냄새가 있고, 자발적 행위로 이뤄지는 제사이다.
3) 제사방법 -흠이 없는 것 - 바칠제물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손을 올려야함 - 아론의 혈통은 이어받은 제사장이 피를 제단에 뿌림 - 제물의 내장과 기름기를 살라바쳐 그 향기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제사
4)성구 레위기 3장 1 - 17절 , 7장 11 - 21절, 28 - 34절
5) 제물의 구성 1) 소 중에 흠 없는 암놈이나 수 놈 (3장 1-5절) 2) 양 중에 흠 없는 암놈이나 수 놈 (3장 6-11절) 3) 염소 (3장 12-17절)
- 소나 양으로 드리는 자원의 화목제일 경우, 다소 흠이 있는 것도 허영 되었다.
(서약의 화목제는 흠 있는 경우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셨다. 레위기 22장 23절)
6) 하느님의 몫 기름 부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운다 (3장 3-5절)
7) 제사장들의 몫 가슴(요제)과 뒷다리(거제) 가 몫이 된다.(7장 30-34절) (1) 화목제를 드리는 자가 제물 중에서 기름과 가슴을 가지고 온다. 제사장은 그 가슴을 흔들어 요제로 삼고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사른다. 요제로 삼은 앞 가슴이 그 몫이 된다. (2)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준다. 제사장은 그것을 거제로 드리고 제사를 집례한 자가 소득으로 삼는다. (3) 흔든 가슴은 제사장들이, 우편 뒷다리는 집례한 자가 소득으로 삼는다.
4장은 속죄제에 대해 소개한다.
속죄제는 죄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제사이다.
여호와의 계명을 어길 때(2절) 드리고, 나중에 깨달으면 드린다.
속제죄는 신분별로 다르다.
제사장(수 송아지), 이스라엘 온 회중(수 송아지), 족장(수 염소), 평민(암 염소, 어린 양)으로 구분한다.
1. 속죄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חַטָּאת’(핫타트)라고 불립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죄" 또는 "죄로 인한 속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핫타트’는 죄를 범한 사람이나 공동체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죄의 결과로부터 정결함을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속죄제의 목적은 단순히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속죄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결케 되어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속죄제는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죄까지 속하기 위해 드려졌습니다.
개인이 알지
못한 죄나 공동체가 무심코 범한 죄도 속죄해야 했습니다. 이 제사는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지은 죄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한
용서와 정결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죄제가 인간의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2.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속죄제를 드리는 방식은 죄를 범한 사람의 신분과 범위에 따라 약간씩 달라집니다(레위기 4장). 속죄제는 대개 개인, 공동체, 지도자 등 다양한 상황에서 드려졌으며, 제물로는 흠 없는 소, 양, 염소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신분에 따라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절차가 달라졌는데, 이는 죄의 중대성과 사람의 책임에 대한 강조입니다.
대제사장이나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를 범했을 때
이 경우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레 4:3, 13). 대제사장은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온 공동체를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으며, 온 공동체가 죄를 범했을 때도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은 성막 또는 성전의 성소로 가져와서, 그 피는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졌고, 제단의 뿔에 바른 후 나머지 피는 번제단 주위에 부었습니다. 제물의 지방은 태워지고, 나머지 부분은 진영 밖에서 완전히 소각되었습니다(레 4:3-12).
이스라엘의 지도자(족장)가 죄를 범했을 때
흠 없는 수염소가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레 4:22-26). 이 경우 제물의 피는 번제단의 뿔에 발리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주위에 쏟았습니다. 지방은 태워졌고,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암염소나 어린 양이 제물로 사용되었으며(레 4:27-35), 그 과정은 지도자의 속죄제와 비슷했습니다. 제물의 피는 번제단 주위에 뿌려졌고, 지방은 태워졌으며 나머지는 제사장이 가졌습니다. 제물이 양이 가장 적습니다.
속죄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드림으로써 죄의 대가가 치러졌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피를 뿌리는 행위는 그 죄를 덮어주며, 제물이 대신 죽음으로써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면제되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레 17:11), 피를 뿌리는 행위는 죄를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속죄제는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는 제사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그 죄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심각한 문제로 보셨습니다. 따라서 속죄제를 통해 그들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죄로 인해 더러워진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에서 죄는 단지 개인적인 잘못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죄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속죄제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백성을 대신하여 속죄제를 드렸고, 이는 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속죄제는 또한 인간의 죄가 피로써만 씻겨질 수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했으며, 죄는 생명을 요구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통해 백성들이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오늘날 속죄제는 더 이상 동물 제물을 요구하지 않으며,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통해 속죄의 의미를 새롭게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구약의 속죄제가 상징했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성취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나"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속죄의 완성임을 강조합니다. 구약의 속죄제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은 한 번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속죄제는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과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죄의 용서와 정결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회개와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한 삶이 필요합니다. 속죄제는 또한 회개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속죄제는 우리에게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죄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대하지 않으시며, 그 죄의 대가는 피와 생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분의 은혜로 매일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속죄의 의미를 기억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속죄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 둘째, 죄는 반드시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야말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능력을 기억하며, 감사와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속죄제
1) 속죄제의 언어적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속죄제가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히브리어 “하타트”를 "속죄제"(sin offering)로 번역하기보다는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속죄제”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히브리어 “하타트”가 속죄제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구약에서 대략 135회 정도이다. 속죄제(하타트)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 하느님의 백성다운 목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범한 죄에 대해서 속죄함을 받고 사함을 얻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속죄함을 받게 하고, 용서함을 얻게 한다.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상황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첫째는 부지중에 하느님의 금령을 어긴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4:3-35). 특히 2절에서 ‘사람이 실수로 야훼의 명령을 어겨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하나라도 하였을 경우에는’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명시적인 계명을 부지 중에 어겼을 때 드리는 예배였던 것이다.
둘째는 법정의 증언을 기피하거나 부정한 물체 등에 접촉하였거나 맹세한 것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등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5:1-13). 그 어느 것이든 고의성이 없는 잘못과 허물에 해당한다. 부주의하여 저지르거나, 무심코 저지르거나, 태만하여 저지른 범법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만약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는 것이다. 성소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는 하느님 자신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곳이다. 바로 그 성소에 속죄제의 피가 뿌려졌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죄의 삯은 부정(不淨)이다. 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을 남긴다.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담스러운 실체이다. 이 같은 관계의 파괴는 단순히 죄인에게 주는 죄책(罪責)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파괴는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기를 초래한다. 하느님의 성소가 죄로 인한 부정에 오염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2) 속죄제의 구분 (1) 대제사장의 속죄제(4:3-12)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4장과 6장에만 나타난다(4:3,5,16; 6:22). 이 표현은 오직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3절의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에게 주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는 물론 사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어야 했다. 대제사장이 지은 죄가 일반 백성이 지은 죄보다 심각했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제물로 드렸다(4:4,14)
(2) 온 회중의 속죄제(4:13-21)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속죄제의 의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 회중 전체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수 없었기에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다(15절).
(3) 족장의 속죄제(4:22-26) 족장은 존경받는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족장 또는 지도자의 죄는 일반 백성보다 심각하게 간주되었다. 족장의 죄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족장은 일반 백성의 제물보다 더 비싼 숫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 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경우 콩팥과 기름을 제외한 모든 고기들을 진 바깥에서 소각한 반면, 족장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이 속죄제를 드렸을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들을 먹을 수 있었다. 즉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으며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던 반면(4:12,21), 회막 뜰에서 의식을 행한 제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다(6:24-30)
(4) 평민의 속죄제(4:27-35; 5:7-13) 평민은 대제사장이나 족장과 같이 비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평민은 암염소(4:28) 또는 암컷의 어린양(4:32)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다. 평민의 속죄제 의식은 족장의 경우와 동일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며(5:7-10), 극빈자는 밀가루로도 드릴 수 있었다(5:11-13). 선택적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반드시 생축(소, 양, 염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했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생축이 아닌 비둘기 또는 밀가루(소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가난한 자가 비둘기 두 마리로 각각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을 보면(5:7),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도 속죄제와 함께 번제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5:1-6) 레위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를 소개한다. 출산으로 부정해진 여인이 정결해지기 위하여(12:6), 심각한 피부병으로 부정해진 사람이 나았을 경우 정결해지기 위하여(14:19), 그리고 성기 고름병에서 나은 자가 정결해지기 위하여(15:15,30)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그 외 번번하지는 않지만 제사장 위임식(8:14), 제단의 봉헌식(민수기 7:16), 그리고 레위인 위임식(민수기 8:8)에서 속죄제를 드렸으며, 나지르인 서약이 성취되었을 때에도 속제죄를 드려야 했다(민수기 6:14) 레위기 4장은 단순히 야훼의 금령을 부주의로 그릇 행했을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언급하지만(4:2,13,22,27), 5:1-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소개한다.
① 법정에서 증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경우(5:1; 참조, 잠언 29:24) ② 부지중에 부정한 동물의 사체에 접촉했을 경우(2; 참조. 11:24-28) ③ 모르고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후에 그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3, 참조.15:13-15, 25-30) ④ 무심결에 맹세를 했다가 후에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경우
이런 네 가지 경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5:6절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게 “그 벌로 야훼께 속죄제물을 드리는데 양떼 가운데서 면양이든지 염소든지 암컷 한 마리를 바쳐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여기 사용된 속죄제라는 말은 하타트가 아니라 야샴이라는 말로 벌금의 성격이었다.
4) 속죄제의 목적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동물을 죽이며, 그 피를 제단에 뿌린 다음 그 고기 전체, 또는 콩팥과 기름을 단에서 태운다. 따라서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속죄의 기능이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번제는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제물 전체를 불사름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즐기는 제사다. 속죄제의 독특한 점은 피 뿌리는 의식에서 발견된다. 구약에서 속죄제는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속죄제는 특히 출산한 여인(12:6), 악질 전염성 피부병(14:19), 또는 성기 고름병(15:15, 30)의 경우에서 보듯이 몸의 정결과 관련하여 드렸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너희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을 타지 않도록 일러주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을 더럽히다가 그 더럽힌 죄로 죽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15:31).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번제 단에 뿌렸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하기 위함이었다(16: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느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이 오염된 것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라는 것을 보여준다. 번제가 죄인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가져다주는 반면, 속죄제는 죄로 생긴 오염과 더럽힘을 처리하는 제사라는 것이다. 속죄제는 성소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실수 있게 한다.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하느님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에 피가 칠해졌다. 향단과 번제단, 그리고 휘장 뿐 아니라 속죄소에까지 피가 뿌려졌으며(16), 더 나아가서는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그들의 옷에도 피가 뿌려졌다(출29:19-21; 레8:22-24, 30). 히브리서 9:22절은 이것을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고 설명한다. 히브리서 9-10장은 이런 속죄제사와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제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보고 있다. 죄로 인한 부정과 타락에서 하느님의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피라는 것이다(베드로 1서 1:2; 요한 1서 1:7). 이런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히브리서이다(히브리서 9:12-14).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을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레위기 5장 요약 / 속건제(贖愆祭) ‘אָשָׁם’(아샴) Trespass Offering
5:1-13, 속건제에 관련된 부가 설명
5:14-6:7, 속건제를 설명한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에 관한 계명이다.
1. 속건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속건제는 히브리어로 ‘אָשָׁם’(아샴)이라고 불리며, "죄책" 또는 "속건"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주로 법적 또는 도덕적 책임과 관련된 죄를 다룹니다. 즉, 속건제는 잘못된 행위로 인해 발생한 죄책감과 손해에 대한 배상을 포함한 제사입니다. 다른 제사들과 달리, 속건제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 배상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이는 잘못이나 손해를 회복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죄책을 해결하기 위한 제사로, 개인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속건제는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속건제의 핵심은 잘못된 행위로 인한 죄책을 인식하고,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제물을 드림과 동시에 배상까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순히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손해와 책임이 수반되는 문제임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속건제는 도덕적, 법적 책임을 깨닫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2.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은 레위기 5장 14절에서 6장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주로 하나님께 대한 죄와 이웃에 대한 죄를 다루며, 각각의 죄에 따라 제물과 배상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속건제는 흠 없는 숫양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그 손해에 대한 배상도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제물을 통해 죄책감을 해결함과 동시에 피해를 입은 이웃에게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죄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속건제를 드리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 제물의 준비와 드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흠 없는 숫양을 준비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 제물의 흠 없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속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제사는 다른 제사들과 마찬가지로,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지고 그 고기는 일부는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습니다. 이는 속죄의 완성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관계 회복을 상징합니다.
- 배상: 속건제는 단순히 제물을 드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손해를 입힌 부분에 대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원래 금액의 5분의 1(20%)을 더하여 배상해야 합니다(레위기 5:18).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 맹세로 손해를 입혔다면, 그에 대한 배상은 원래 금액에 추가 금액을 더해 보상해야 했습니다. 이는 죄의 심각성과 그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완전한 회복을 이루려는 의도입니다.
- 속건과 용서: 제물이 드려지고 배상이 이루어지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죄를 사해 주고, 그 죄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서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통해 죄를 속하시고, 인간 관계에서는 배상을 통해 정의가 실현됩니다.
속건제는 단지 영적인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손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복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한 피해를 실질적으로 보상하고 바로잡으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3. 구약 안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속건제는 죄에 대한 책임과 배상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영적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바로잡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시고, 그 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는 원칙을 나타냅니다.
속건제는 특히 하나님께 대한 무지한 죄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잘못들을 다루고 있습니다(레 5:17). 예를 들어, 성물을 부주의하게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어겼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속건제를 통해 죄책을 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재산을 손상시킨 경우에도 속건제를 통해 배상함으로써 정의를 회복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줍니다.
속건제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를 강조하는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관계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요구를 나타냅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법과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속건제를 현대적으로 묵상할 때, 우리는 죄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잘못된 행위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단순히 사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정의롭고
바람직한 행동입니다.
속건제는 바로 이러한 책임과 보상을 요구하는 제사로,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도덕적, 윤리적 원칙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속건제의 완성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53:10에서 그리스도는
"속건 제물"로 묘사되며,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잘못에 대해 완전한
보상을 이루셨습니다.
속건제가 잘못에 대한 배상과 용서를 강조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 죄에 대한 궁극적인 보상과
용서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속은 더 이상 우리가 직접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웃에게 잘못을 저지른 경우 회개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속건제는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결과를 책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발생한 인간 관계의 손상을 회복하는 것까지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네가 제물을 제단에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이는 속건제의 정신을 반영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웃과의 화해와 정의를 기반으로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속건제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피해를 회복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책임을 실천하며, 하나님과 이웃 모두와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는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정의롭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및 그 의미(레위기 5:1-19)
레위기 4장에서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 언급되었습니다.
제물은 빈부에 따라 형평에 맞게 드렸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로,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로,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극빈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곧
2.3리터를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에 차별을 두신 것은 속죄제나 속건제가 의무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가 경제적인 이유로 속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속죄제나 속건제의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에 이르는 길에 결코 빈부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모형이자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남녀반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누구한테나 주어진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속죄제는 대속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라도 범했거나 어떤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증인이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나(1절), 자신도 모르게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한 것에 접촉하여 부정을 입었을 때나(4절),
경솔하게 맹세한 후에 그 맹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4절) 반드시 바쳐야 하는 제사입니다.
이 경우 범죄자는 반드시 먼저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속죄를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어린 암양이나 암염소를 취하여 속죄제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의 근본정신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쳐진 예물 가운데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속죄제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한 죄, 곧 성물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로써 오분의 일이 플러스되는 벌금형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단순한 벌금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제사를 바치는 이유는 죄의 근원적인 용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형식적 차이를 보면,
첫째, 제물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를 드렸지만,
속건제는 오로지 흠 없는 숫양을 드렸습니다.
둘째, 속죄제는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으나 속건제는 쏟지 않았습니다.
셋째, 속건제는 언제나 개인적인 제사였지만, 속죄제는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했습니다. 동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문제를 속건제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끝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달리 특별한 경우에도 드려졌습니다. 곧 문둥병자가 나은 후에(4:1-20), 또한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 속건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책임, 범과 등을 보상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무의식중의 범죄를 속하고
속건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바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한 죄이고(14-19절),
둘째는 이웃에게 범한 죄입니다(6:1-7).
첫째 죄는 다시 고의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범과한 것과 부지중에 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5장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채는 사기 행위를 했거나 그것을 부인하며 거짓 맹세하였을 때도 속건제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되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웃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건제를 바쳐야 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배상을 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인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예표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속죄제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순종하심으로써 속건제를 완성하셨습니다.
속건제(면죄제) : Guilt offerig
속건제는 범과(trespass), 혹은 배상(repayment)에 대한 제사이다. 이웃에게 해를 끼쳤을 때 범과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속죄제와의 차이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가벼운 허물이나 하느님이나 사람의 재산이나 권리를 침해했을 때 드리는 제사라고 하겠다.
1) 제물의 구성 만약 하느님께 잘못한 것이라면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한다. 손해 배상은 제사장이 평가한 죄 값에 1/5를 더하여 계산했다. 만약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라면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한다. 손해 배상은 손해를 입힌 값에 1/5를 더하여 계산했다.
2) 성물에 대한 범과, 부지중 금령 위반(레위기 :14~19) 야훼의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하면 속건제로 지정한 가치에 따라 흠 없는 수양을 드려야 한다. 속건제의 예물에 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제사장은 수양을 하느님께 드리므로 그의 허물을 사한다. 금령 중에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 된다. 지정한 가치에 해당되는 무흠한 수양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하면 속건제를 드리는데 그 허물의 상태에 따라 속건제물을 다르게 드린다. 허물의 경우에 따라 가격을 달리 정해 그 허물의 대가에 적합한 수양을 사서 제사를 드리도록 한다. 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올 것이다.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하므로 그가 허물을 사함 받는다. 하느님께 잘못을 범했으니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여기서 금한 명령은 아마 사람들의 제산에 관한 것이나 피해에 대한 법이 아닌가 여겨진다.
3) 관리 소홀, 부인(6:1~7) 또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경우는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이다. 제산에 관계된 것이므로 본물건과 배상금을 본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 당사자가 없는 경우에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야 했고, 친족이 없는 경우에는 제사장에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속건제물로 지정한 가치에 따라 무흠한 수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와 드려야 한다. 흠 있는 것을 드릴 수 없다. 제사장은 야훼 앞에 그를 위하여 속죄를 한즉 그의 허물이 사함을 받게 된다.
4) 속건제의 규례(7:1~10) -속건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다. 당사자는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물을 잡는다. -제사장은 수양의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고 모든 기름을 불태운다. (기름은 기름진 꼬리, 내장에 덮인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다.) -제물은 거룩한 것이므로 제사장의 남자마다 거룩한 곳, 성막에 뜰에서 먹는다.
5) 하느님의 몫 기름 부분은 번제단 위에서 태웠다.
6) 제사장들의 몫 남은 것은 성소에서 먹었다.
제사에 해당하는
'제바호(זבח)는 본래는 "동물의 육체를 도륙한"다에서 유래하여 제사, 헌물, 제물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점점 하나님에게 정성을
드리는 의식, 하나님을 경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인격적교제로서 오늘날의 예배의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제사의
방법으로는 동물, 식물, 액체 분향하는 방법이 있고 동물제사의 종류로는 (1)번제(燔祭), (2)화제, (3)속죄제(贖罪祭),
(3)속건제(贖愆祭), (5)화목제(和睦祭), (6)요제(搖祭)가 있고, 식물제사 종류로는 (1)곡식을 드리는 소제(素祭)와
(2)술을 부어 드리는 전제(奠祭)가 있다.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따라,
화제(火祭) - '불살라 드리는 제사', 거제(擧祭)- 제물을 높이 들어서 바치는 제사, 요제(搖祭)- 제물을 위 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 전제(奠 祭)- 포도주, 기름, 피 등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로 나뉜다.
이중 번제, 화목제, 소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의 절차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희생을 성전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끌어오다라는 사역 동사는 그 성격상 '희생 제사를 드리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규정에 따라 가축 중에서 흠없는 것을 골라서 그것을 제단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는 안수(按手)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희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손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세째는 예배드리는 자가 그 희생을 죽이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드디어 제사장이 처음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그 피를 가져다가 처분하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전 회중을 위한
'전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피를 휘장 앞에서 일곱번 뿌리고 그 피의 일부는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에 쏟는 것이다. 만일 그 '전제'가 제사장이 아닌 일반 개인을 위한 것이면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생략하고 그 피를 분향단에
바르는 대신에 번제단에 바른다. 기타 모든 제사에 있어서는 그 피를 단순히 제단에 붓는다.
다섯번째 단계는 또 다른 규정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내장의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것이다(번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름뿐만이 아니라 그 희생을 통째로 불사른다).
여섯번째는
그 남은 고기를 처분하는 것이다. 화목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부분만을 제사장에게 주고 그 나머지는 예배(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다. 죄제(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고기를 전부 먹는다.
그러나 그 제사가 제사장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고기는 진 밖의 깨끗한 곳에서 불태워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로버트슨
스미드(W. Robertson smith)는 주장하기를 기본적인 제사는 화목제이며 따라서 제사란 것은 무엇 보다도 예배자(제사를
드리는 자)와 하나님과의 친교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레이(G. Buchanan Gray)는 주장하기를 무엇보다도 '번제'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본적인 개념을 갖춘 제사라고 한다.
반면에 '속죄제'의 기본제사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1. 번제(레 1:1-17, 6:8-13)
'번제'는
또다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희생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불살라
드리는 세상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기꺼이 드리신 것을 나타낸다.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עלה)는 전(全) 제물이 모두 태워졌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전번제'(全燔祭) 혹은 '온전한 번제'(신33;10)라고 불리워졌다.
레위기
1장과 6:8-13에서 묘사된 제물은 수소, 양, 염소나(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집비둘기로 드려질 수 있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죄의 전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 후 그 짐승을 잡았으며 속죄를 위해 그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제단에
뿌렸다. 누구든지 번제물을 드릴 수 있었지만 정규적인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는 안식일과 특별한 축제 날에 다른 제물과 함께
드려야만 했다.(민28:2-29:39)
번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예표한다. 다윗의 메시야 시편 가운데 하나인 시편 40편에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번제 희생을 위해서 아무 흠이
없는 동물이 택해지고,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지듯이, 온전히 헌신되신 우리 주님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2. 화목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거나 또 소원을 드릴 때 흠없는 양과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을 태우며 정성을 드리던 구약 제사의
한가지이가. 수은제, 감사제(fellowship offering.peace offering 출 20:24, peace
offering 출 20:24)로 불린다.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 제물로는 제물 드리는 자의 생활 형편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짐승이 가능했다. 즉 그것은 1)흠 없는 수소나
암소 (1-5절) 2)흠 없는 수양이나 암양(6-11절) 3)흠 없는 수염소나 암염소(12-17절) 등이 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화목제의 경우, 번제의 경우와는 달리 희생 제물로서 비둘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은 화목제의 독특한 특징인 제사 후
공동식사에 있어. 비둘기는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량으로서 그 고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희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바흐(זבח)'는 '죽이다', '도살 하다'란 뜻을 가진 '자바흐(זבח)'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써, 곧
죽임 당하여 재물이 될 짐승을 가리킨다.
번제나
속건제 등 대부분의 제사가 제사 예물로서 반드시 수컷만을 요구하였던 반면, 특별히 화목제 제물의 경우에는 암수컷에 전혀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화목제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와 교통,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 친밀한 교제를 도모하는데
있는 만큼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補血)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은혜와 교통을 나누는 데에는 남녀는 물론
노소(老少)나 빈부(貧富), 그리고 귀천(貴賤)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굽 제사의 경우,
암컷은 철저히 금지시킨다고 한다.
화목제(레
3:1-17, 7:11-36)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과 교제의 근거가 되심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란 있을 수 없다. 주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골 1:20)으로 우리가 더 이상
"외인이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골
1:21-22).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교제가 바로 그리스도가 자신을 화목제로 드린 결과이다. 이 화목제는 번제와는 달리
희생제물의 각 부분이 제사장을 위한 음식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제사장 모두가 이 희생제물의 분깃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제사장"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와 교제를 누린다.
화목제의
독특한 점은 무교병(누룩 없는 빵)과 유교병(누룩이 든 빵)이 함께 드려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진리는 누룩이 든
빵으로 묘사된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며, 또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여전히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화목제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화목제의 감사 희생을 가져오면 예물을 가져온 사람과 그 희생제물을 함께 먹게 될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과
행복한 시간이다. 그 희생제물은 분명히 그리스도로 인해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될 교제의 근거요, 행복한 연합의 실제적인
그림이다.
3. 속죄제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사람이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offerings for unintenti onal sins, 출29;14).
여러가지
희생제사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제사가 속죄제이다(대하29, 스6:17, 느10:33). 속죄제를 드리는 법은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매우 치밀하게 만들어졌다(레4:3-35). 신약 히브리서는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속한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히9:28,10:12).
여호와께서 속죄제를 위해 바치도록 규정한 제물은 죄를 지은 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다음 4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홈 없는 수송아지였고 (3절) 둘째,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한 경우에도 역시 흠 없는 수송아지였으며(14절) 셋째, 족장이 범죄한 경우에는 수송아지 보다 한 등급 낮은 흠 없는 수염소였다(23절). 그리고 넷째, 평민이 범죄한 경우에는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속죄제물을 삼아 바치도록 하였다(28,29절). 단, 평민의 경우 그 힘이 암염소나 암양에 미치지 못할 빼는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제물로 삼도록 배려하였다(5: 7-8). 그러나 만일 그 형편이 비둘기 새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자의 경우에는 고운 가루 십분 일(1/10)에바를 바치도록 하였다(5: 11-13).
그러나 이 경우는 소제 때와는
달리 기름과 유향을 섞지 않게 했고, 또한 반드시 다른 생축을 희생한 번제단 위에 함께 올려 불사르게 했다. 즉 피흘린 생축의
제물과 더불어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속죄제(Sin-Offering)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반드시 피(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후일 신약 시대에 히브리 기자는 이 사상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는
말로써 명쾌히 서술하고 있다.
속죄제(레
4:1-35, 5:1-13, 6:24-30)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죄를 담당하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21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러"고 말씀하고 있다. 속죄제는 우리가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모습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속죄제에서 우리는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사
53:4)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고난이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 그가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버림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사 53:5).
4. 속건제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감람기름 0.3리터를 제단 앞에서 흔들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 어린 숫양은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거룩한 곳에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건제물은 매우 거룩하므로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다."(레위기 14:12-13)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드려졌다. 즉 1)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한 경우(5:15,16) 2) 이웃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금령을 어겼을 경우(5:17-19) 3)인간상호간에 범과했을 경우 (6:1-7) 등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례이다.
속건제를 준비하고 드리는
과정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과 유사하나 속건제는 범죄한 사람이 완전한 배상을 해야 하며, 그 죄로 인해 야기된 상해에 오분 일을
더해야 한다. 즉, 희생제물 외에 더 가져와야 했다! 이 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예외나 조정이 있을 수 없었다. 즉 그 사람이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 혹은 알고 범죄했거나 모르고 했거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주님과 성막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혹은 이웃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간에 범죄한 사람은 속건제를 드리는 그 날에 배상과 함께 오분 일을 더해서 가져와야 했다.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레위기 6:4-5)
속건제(레
5:14-19, 6;1-7, 7:1-10)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결과도 감당하신 사실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까지도 감당 하셨다.
5. 소제
번제가 동물성 제물 제사라면 소제는 식물성 제물 제사이다. 이 소제는 번제나 화목제에 곁들이는 부속적 제사로서 고운 가루, 화덕에 구운 것, 부친 것, 삶은 것 등이 있다.
소제(민하,
מנחה)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
다른
제사에 규칙적으로 따르는 부수적인 제사로 떡, 첫열매, 고운 가루, 기름 등이 그 제물이었다. 보통 번제 뒤에 따랐고 그 가루와
기름의 양은 희생 제물에 따라 정해졌다(민 15:2-10). 한편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소제가 드려진 다음에는 언제나 화목제가
뒤이어졌음올 알 수 있다(레 7:12-14;민 15:4). 이 소제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감사를 의미하는데, 제사 후 남은
부분은 다른 제사 때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레2:3;6:16-18).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올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피흘림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레 17:10-16).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엡 1:7).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 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소제에는
'유향을 첨가하였다'. 여기서 유향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 부터 짜낸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 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소제(레
2:1-16, 6:14-23)의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완전하고 균형잡힌 삶을 나타내고 있다. 기름과 유향이 이 예물과 함께
어우러져 우리 주님의 삶 가운데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향기로 드리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소제(음식이나 곡물로 드리는 예물로 알려진)는 유일하게 피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보통 피를 흘려 드리는 다른 희생제사와
함께 드려졌습니다(출 29:38-42, 민 15:1-12을 보시오). 소제가 준비되어 드려질 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누룩을
넣어서는 안되었다. 누룩은 성경전체를 통해 악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소제를 단에서 불사르기 전에 "화덕에 굽는
"준비과정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전생애를 통해 죄가 없이 받으신 고난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2:18, 5:8을 보라).
• 구약 제사의 4대 방법
1. 화제
화제(火祭)는
히브리어 '잇췌(אשּׁה)'는 '태움'(burning), '불사름'(firing)이란 뜻으로, 곧 '불살라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5대 제사 종류와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거제, 요제, 전제
등과 더불어 제사를 드리는 4대 방법 중 하나로서 고대로 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취해졌던 제사 형태이다.
2. 전제
일반적으로
술(포도주)을 제물위에 뿌리는 제사의 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전제(drink
offering)는 상번제(매일 드리는 제사, 민28:7)때에 아침저녁으로 함께 드려졌고, 안식일 제사때(민 28:14)에도
드려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막절 제2일과 그 이후의 각 절일들에도 드렸던 것으로 확인된다(민29:18, 21). 그러나 그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Josephus).
3. 요제
봉헌하는
제물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앞뒤로 흔드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음식을 식탁 위에 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제는 번제나 화목제
또는 소제 등과 같은 제사의 종류가 아니고, 화제(祭)나 거제(擧祭), 전제(奠祭)와 같은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요제의
방식은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들어 흔들었다가 내리는 것으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 바쳤던 것을 다시금 제사장이 자신의 양식으로 되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적으로 중요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는데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성도의 양식으로 주신
사실이다(요6:27,48-58). 한편 이러한 요제(save offering)는 치유된 문둥병자의 속건제(레 14:12,
21,24)나 첫 열매의 곡식 단(레 23:15) 및 칠칠절때 드리는 두 떡덩이(레23:17, 20)등을 하나님께 바칠 때도
이용되었다.
4. 거제
거제란 제물의 가슴부위를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제사 방법으로 그 실제적, 영적 의미는 요제와 동일하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그 거제 제물 중 오른쪽 넓적다리가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
성경에서 피가 갖는 속성
1. 생명
2. 속죄 / 예수님의 성만찬 : 내 피니 받아마셔라.
구약 5대 제사
1. 번제(올라)
번제는 제물을 완전히 불에
태우는 제사입니다(레 1:9, 13, 17).
예배자는 희생제물을 가져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 죽인 후에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떴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피를 모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이 떠진 제물 전체를 불로 태웠습니다.
이때 제물을 완전히 불에 태우는
것은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번제와 같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드리는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우리의 생각과 기준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번제는 헌신의 제사인 동시에
속죄(레 1:4)의 제사이기도 합니다.
제물을 죽이기 전에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손을 얹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것은 제물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다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번제 / 1. 제물을 완전히 태우는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는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내려놓고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소제(민하)
소제의 히브리어는 ‘민하’인데 이
단어는 선물, 봉헌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바로 소제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5대 제사 중에서 유일하게 피 흘림이 없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식의 일부분은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소제를 드릴 때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죄를 상징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은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삶을 돌이켜 점검하고 회개하여 정결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누룩과는 달리 소금은 소제에
반드시 넣어야 하는 품목입니다.
소금은 정결함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약속을 상징합니다(민 18:19).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십니다.
소제 / 1. 누룩을 빼고 소금을 넣은 소제처럼 우리의 예배는 죄가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풍성해야 합니다.
3. 화목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영적
친교를 상징하는 제사로 그 종류에는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가 있습니다(레 7:15∼16).
제사후에는 성도들이 성막 뜰에서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교제했습니다.
화목제는 제사장이 아닌 예배자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였습니다(레 7:15).
화목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모형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과의 모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화목제 / 1.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셔서 우리와의 관계를 친히 회복시키셨습니다.
4. 속죄제
속죄제는 다섯 가지 제사 중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지는 제사로서 제사장(레 4:3∼12), 온 회중(레 4:13∼21), 족장(레 4:22-26) 그리고
평민(레 4:27∼35)이 드리는 제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고의성이 없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입니다(레 4:13).
우리가 죄와 허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속죄제는 인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셔서 모든 죄와 허물을 단번에 그리고 완전히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합니다(요 1:29).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성도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속죄제 / 1. 속죄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2.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성도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5. 속건제
속건제는 고의든지 실수로든지
하나님의 성물과 계명을 범한 경우(레 5:15∼19)
이웃에게 상해나 손실을 입힌 경우(레 6:1∼7)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제물로 오직 숫양만을 사용하는것과 죄를 지은 이웃에게 그 피해에 대해 배상해야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웃을 속이거나 이웃의 물건을
가로채고 빼앗는 것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전 6:8∼10).
죄를 지은 자는 자신이 빼앗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고 그 가치의 5분의 1을 더해주어야 했습니다(레 5:16).
우리는 속건제의 규범을 통해 이웃 간에 죄를 지을 경우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속건제 / 1. 속건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명을 어기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드리는 제사입니다.
2. 사람 사이의 죄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립시다.
2.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드립시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4.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5.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기도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시다.
2. 삶을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성령충만을 구하는 기도를 합시다.
3.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합시다.
레위기 6장 요약 / 속건제
6:1-7, 속건제의 추가 설명
6:8-13, 번제의 추가 설명
6:14-23, 소제의 추가 설명
6:24-30, 속죄제에 대한 추가 설명
레위기 7장 요약 / 속건제 추가 설명, 화목제 추가 설명
7:1-10, 속건제의 추가 설명
7:11- 21, 화목제의 추가 설명
7: 22-27, 무슨 생물이든 피 채 먹지 말 것을
경고
7: 28-38, 제사장들의 몫에 대해 설명한다. 제사장들이 가져갈 몫은 화목 제물에서 남겨진 부분이다.
레위기 8장 요약
아론과 그 아들들, 즉 대제사장들의 위임식을 거행한다. 먼저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힌다. 관유를 발라 정결하게 하고, 그들의 머리에 관유를 붓는다. 관유로 부음 받은 물건이나 사람은 거룩해진다. 이것이 끝나면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로 드린다.
레위기 9장 요약
드디어 제사장들이 첫 사역을 시작한다. 아론에게 속죄제를 지내게 한다. 아론이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다. 또한 백성이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린다. 마지막 화목제를 드린다. 아론이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레위기 10장 요약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직을 행하다 잘못된 불을 가져와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자 불이 나와 두 사람을 삼킨다.
여호와는 아론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죽음을 면하라 말한다.(9절)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는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 잘못된 방식으로 분향한 듯 보인다.
- 레위기 10: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레위기 11장 요약
참조 / 신명기 14장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한다.
동물 중에서 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 진다.
(하지만 부정한 짐승을 만진다고 부정해지지는 않는다.)
[추가 설명]
먹을 수 있는 조건은 되새김질, 쪽발이어야 한다.
양, 염소, 소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두 개중 하나만 해당되면 먹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돼지처럼 쪽이 갈라지나 돼시김질을 하지 않는 가축은 부정하다.
토끼나, 사반(낙타), 돼지, 등을 먹을
수 없다.
물고기의 경우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한다.
붕어나 잉어 등이 해당된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업으면 먹지 못한다.
예를 들면 비늘이 없는 곰장어, 민물장어, 미꾸라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새는 부정하지 먹을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새든 먹지 못한다.
특히 치킨은 먹을 수 없다.
레위기 12장 요약
출산 후 정결 규례이다. 남자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고, 8일째 할례를 행하고 33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다. 여자는 낳으면 두 이레(14) 동안 부정하고 산혈은 66일 지나야 깨끗하다. 기한이 차면 여인은 번제를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린다.
레위기 13장 요약
전염성 피부병에 관한 규례이다. 제사장은 피부에 뾰록지나 반점이 생기면 진찰하고 나병인지 일반 병인지 처방해야 한다.
레위기 14장 요약
전염성 피부병의 정결 의례에 관한 규례이다.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으면 정결의식을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레위기 15장 요약
유출병에 관한 규례이다. 유출병은 부정한 병으로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다. 여인이 유출하면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만약 기간이 지나도 계속 유출하면 유출이 있는 동안 부정하다.
레위기 16장 요약
속죄일에 이야기 한다. 속죄일에는 일 년에 한 번 있으며 대제사장이 분향하고 지성소에 들어가 온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하는 날이다. 이날은 두 염소를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버려진다.
레위기 17장 요약
가축을 잡을 때 회막에 가서 먼저 제물을 드리도록 명한다. 가축을 잡을 때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화목제를 먼저 드리고 잡으라. 절대 피 채 먹지 말라. 피는 생명의 일체다.
레위기 18장 요약
성에 관해 명하신다. 가증한 성관계를 하지 말라. 가족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월경인 여자를 범하지 말라.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
레위기 19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설명합니다.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라. 화목제물을 드리고 남은 것은 이틀째까지 먹고 셋째 날을 불태우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불의한 재판을 하지 말라. 등을 명령합니다.
레위기 20장 요약
20장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도리를 열거합니다. 20장은 성관 우상 숭배와 관련됩니다. 몰렉에게 자식을 주지 말라. 접신한 자와 무당을 따르지 말라. 남의 아내와 간음하지 말라.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
레위기 21장 요약
제사장에 관한 규례를 명한다. 제사장은 백성의 죽은 자를 만져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출가하지 아니한 가족으로는 더럽힐 수 있다. 부정한 여인이나 창녀,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 육신에 흠이 있는 자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레위기 22장 요약
성물을 대하는 방법과 열납되는 제물을 소개한다. 부정한 자는 성물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시체나 죽은 것을 만져 부정하게 되지 말라. 제사를 드리다 남은 성물은 오직 제사장과 제사장의 가족과 제사장이 돈을 주고 산 종들만 먹을 수 있다. 흠 있는 제물을 드려서는 안 된다.
레위기 23장 요약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절기를 소개하고 지키도록 명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초실절) 오순절을 지키라. 나팔절을 지키라. 속죄일을 지키라. 초막절을 지키라.
레위기 24장 요약
여호와 앞에서 등잔불을 하루 두 번씩 점검하라. 진설병은 매 안식일에 교체하라. 그들은 거룩한 곳에서 진설병을 먹으라.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돌로 쳐라.
레위기 25장 요약
안식년을 지켜라. 6년은 열심히 땅을 부리고, 7년이 되는 해는 파종하지 말라. 안식년의 소출은 종들이나 품꾼으로 먹게 하라. 7년의 7번을 계산하여 희년을 지키라. 50년이 되던 해 희년을 지켜라. 희년이 되면 종을 삼은 자나 빚을 대신해 가져온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라.
레위기 26장 요약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희들이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철 따라 비를 내리고, 땅과 나무는 소산을 낼 것이다.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원수들도 모두 도망갈 것이다. 하지만 불순종하면 온갖 질병으로 너희를 징벌할 것이다.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 당할 것이다. 여러 민족 중에서 유리하리라.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다.
레위기 27장 요약
서원하기로 했으면 값을 정하고 그것을 드리라. 나이에 맞게 정하라. 한 번 정한 서원의 가축은 변경되지 못한다. 기업의 토지를 드리려면 그 값을 제사장에 보이고 정하라. 한 호멜지기는 은 오십 세겔이다.
레위기 서론과 개요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라는 명령과 함께 제사법에 대해서 말씀합니다.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으로 보면 예배입니다.
성도도 이 세상을 살면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원죄가 사라진 백성은 자범죄를 짓기 때문에 항상 예배를 통해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계속해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범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레위기 제사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레위기 서론
레위기(Leviticus)는 “레위인들에게 해당되는“의 뜻이다.
레위인들은 성막의 봉사를 책임진 사람들이었다(민 3:1-13).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제사와 절기들, 정결한 것과 정결치 못한 것의 분별법에 관하여 제사장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주제 : 창세기가 인간의 죄와 벌을 설명하고, 출애굽기가 구속을 설명하는 책인데 대하여, 레위기는 주로 분리와 교통 하심(separation and communion)을 다룬다.
이 민족은 출애굽기를 통하여 애굽에서 인도되어 시내 광야로 왔다.
이제 레위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성막으로부터 말씀하시며(레 1:1),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 하며 그 안에서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 책에는 “거룩한“ 또는 “거룩함“이란 단어들이 80회 이상이나 발견된다.
첫 부분에서는 희생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피 흘림이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피“라는 말이 레위기에서 87회나 찾을 수 있다는 사실로서, 명실공히 희생 제사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은 백성들이 그들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분리된(성별 된) 생활을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자세히 풀이해 주는 순결 법(the laws of purity)을 다룬다. 하나님은 노예생활에서 그 민족을 구하셨고 이제는 그 민족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이 원리는 오늘날의 신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을 받고 세상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행해야만 한다(요일 1:5-10).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즉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순전함과 거룩함으로 행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레위기에서 모형과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
● 희생제사 : 레위기는 희생 제사와 피의 책으로 현대인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주제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피 없는 종교“, 희생제물이 없는 도덕을 원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레위기 16장이 이 책의 중심장이 된다. 17장은 피 흘림이 죄를 처리한다고 명백히 밝힌다(17:11). “속죄“란 “가리운다“는 의미를 갖는다. 레위기에서 이 속죄라는 말은 45회 사용된다. 구약 희생 제사의 피로는 죄를 결코 없애지 못한다(히 10:1-18). 이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단번에 모두 성취되었다. 구약 희생 제사의 피는 죄를 가릴 수만 있었고,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실 구세주의 죽음을 앞서 지적할 수 있었을 뿐이다. 희생 제사를 드린다고 하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영혼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희생 제사만으로는 자기 죄를 없앨 수 없음을 알았다(시 51:16-17). 선지자들도 조심성 없는 백성들에게 이 점을 명백히 밝혔다(사 1:11-24).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나아왔을 때, 그의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될 수 있었다(창 4:1-5 참조).
● 모형 : 레위기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룩하신 구속의 사역을 나타내는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다섯 가지 희생제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여러 면으로 예증하는 것이며, 속죄일은 십자가 위에서 그가 죽으신 것을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다. 모형의 세부적인 면을 억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희생 제사에 따른 몇 가지 지시 사항들은 그 배경에 실제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특별한 영적인 교훈을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 실천적인 교훈들 : 오늘날 우리는 레위의 제사를 실행하지 않지만 이 책은 아직도 몇몇 무게 있는 실제적 교훈들을 주고 있으므로 깊이 숙고하는 것이 좋겠다.
죄의 무서움-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피가 흘려져야 한다. 죄는 가볍고, 중요치 않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워하시는 것이다. 죄는 값을 치른다. 유대의 예배자들에게 있어 모든 희생 제사는 값이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책에서 하나님은 정결한 것과 정결치 않은 것 사이에 구별을 지으시고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자기 백성에게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그는 용서와 회복의 길을 마련하신다 물론 이 “길“은 그리스도이시며 새로운 삶의 길이다(히 10:19-)."
레위기 개요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1-10장
희생 제사/ 1-7장
-번제/1장, 6장 8-13절
-소제/2장, 6장 14-23절
-화목제/3장, 7장 11-34절
-속죄제/4장, 6장 24-30절
-속건제/5장 1절-6장 7절, 7장 1-7절
제사장 직분/8-10장
2. 성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11-24장
거룩한 백성 /11-20장
-정한 것과 부정한 것-순결법/11-15장
-속죄일/ 16-17장
-성별에 관한 여러 조항/ 18-20장
거룩한 제사장 직분/21-22장
거룩한 날-여호와의 절기 / 23-24장
3.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25-27장
땅의 안식년/ 25장
순종의 중요성/ 26장
맹세의 가치/ 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흑인 부부가 백인 아이를 낳다?...“100만분의 1 확률”
흑인 부부 사이에서 백인 아이가 태어났다고?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게다가 이 아이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흑인 부부 사이에서 백인 아이가 태어날 확률은 고작 100만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놀라움을 주고 있다.
중국 안휘TV(安徽卫视)는 5년 전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한 흑인 부부가 런던에서 백인을 출산했다고 보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벤자민(44) 부부로, 나이지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이보족 출신이다. 물론 친척 중에서도 백인계 혈통은 없다. 또한 먼저 낳았던 두 남매는 일반적인 흑인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옥스포드 유전학 교수 사익스는" 이런 일은 매우 특이한 경우로 보통 인간의 피부색은 7종류의 다른 유전자가 결정하는데, 친척 중에도 백인계열이 없는데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는지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벤자민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이보족 언어로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뜻인 ’NMACHI’로 짓고, 소중히 예쁘게 키워보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 2018)
- 백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아기, 친자 여부를 둘러싼 의심과 갈등의 결말
■ 감독 : 윌 맥패든(Will McFadden)
■ 제작국가 : 미국
■ 출연진 : 윌 맥패든(톰), 사라 버틀러(젠), 제이미 헥터(론)
백인 부부인 톰과 젠 사이에서 흑인 아기가 태어난다.
톰은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주위의 시선과 사람들이 지어내는 거짓말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결국 톰은 젠과 친구 론 사이를 오해하고 마는데... 계속되는 갈등에 젠의 어머니는 숨겨진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제목부터 강렬하다.
의심하는 토마스? 의심받는 토마스?
예전에 리뷰한 영화 《다우트(Doubt, 2008)》와 유사한 영화려나 궁금하기도.
참고로, 영화 《스파이 스쿨(Spy School, 2008)》의 부제가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라서 그런지 정보 검색시 그 영화가 먼저 나오기도 한다.
또한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로 정보 검색시 동명의 카페가 나오기도 한다. 미국 LA 한인타운의 브런치카페인 모양이다.
알고 보니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는 의심 많은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의심 많은 도마로부터 비롯되었고 한다.
의심을 뜻하는 다우트(Doubt)가 원제 그대로 제목이 되면 그 느낌이 사뭇이 달라지는 게 신기하다.
이 영화는 1987년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결백한 흑인 캠벨의 아버지 로저스 캠벨의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혼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다른 인종의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만약 백인 부모에게서 흑인 아이가 태어난다면? 혹은 흑인 부모에게서 백인 아이가 태어난다면?
황인종이 주류를 이루는 아시아권 나라들과는 달리, 백인과 흑인, 유색인종이 혼재하는 북미, 유럽 등의 나라에서는 부모와 확연히 외양이 다른 아이가 태어날 경우, 친자 여부를 의심할 만도 하다.
특히, 머리색과 피부색이 다르다면 다른 인종의 피가 섞여들어갔으리란 의혹이 생길 수밖에.
하지만 부모 윗세대에 다른 인종이 있을 경우, 부모에게서 발현되지 않은 열성인자가 자식에게 발현되면서 부모와 피부색이 다른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형제 자매의 피부색이 다른 경우도 있다고.
A형 부모에게서 O형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처럼(부모 모두가 AO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O형 자녀 탄생이 가능).
또한, 매우 드문 사례이긴 하지만 한 여자가 두 남자와 번갈아 잠자리를 했을 경우 '아버지가 다른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마치 암코양이가 여러 마리 수코양이의 새끼를 동시 임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한 남자가 두 여자와 연속으로 관계를 했는데, 처음 여자의 몸 속에 남아 있던 다른 남자의 정자를 묻혀와서 다음 여자를 임신시킨 엽기적인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는 졸지에 정자 배달부 역할을 한 셈이다. 《신비한 TV서프라이즈》에서 나온 이야기다.
물론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DNA 검사)로 친자 여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 남편이 아내의 불륜이나 외도를 의심할 만도 하다. 혹은 남의 아기와 바뀌었다든가.
최근에는 어느 부부가 시험관 시술(체외 인공수정)로 아기를 낳았는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사로 추정...)의 정자로 생긴 아기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고.

행복한 부부인 톰과 젠은 첫 아이를 갖게 된다.
아내 젠이 출산을 하게 되면서 톰은 얼른 달려온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그는 몹시 초조해진다.
다행히 톰이 도착했을 때 젠은 무사히 아기를 출산한 후였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톰의 흑인 친구 론은 그 소식을 전하면서도 뭔가 염려하는 듯한 태도다.
5주 전, 톰과 젠은 설레는 마음으로 출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삭의 젠은 아기용품을 구입하고, 톰은 캐치볼을 하는 부자(父子)를 바라보며 자신도 곧 아빠가 될 거라는 사실을 기대한다.
톰과 론은 절친 사이로, 함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톰의 아내 젠 역시 론을 친구로 대하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젠의 출산이 임박한 바로 그날, 강도가 차에서 젠의 가방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톰은 얼른 강도를 쫓아가지만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톰을 의심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다.
그러는 동안 젠은 예정보다 일찍 출산을 하게 되면서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젠이 출산한 아기를 본 톰은 당혹스럽다. 그도 그럴듯이 아기는 흑인처럼 피부가 가무잡잡잡했기 때문이다.
톰과 젠 둘 다 백인이건만...
톰은 확인이라도 하듯이 되묻는다. 이 아기가 우리 아기가 맞느냐고...
젠은 당연히 우리 아기가 맞다고 대답한다. 젠의 확신에 톰은 곧 수긍하게 된다.
젠의 동의 하에 친자 검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젠을 믿고 아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마 그들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톰과 젠, 아기 리암은 한가족이 된다. 이제 셋이서 행복할 일만 남았건만...
백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아기라니... 그들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십중팔구는 리암을 입양한 아기로 오인한다. 심지어는 론을 리암의 아빠로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게다가 계속 의심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 발생한다. 톰은 친구 론을 초대해서 셋이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잡지만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젠과 론 둘이서만 만나게 되자 둘의 친근한 모습을 목격한 직장 동료가 그들의 사이가 수상하다고 톰에게 얘기한 것이다.
의심이 의심을 낳으면서 톰의 불안은 점차 가중되기 시작한다.
아내와 친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그는 정말 그들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론은 톰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도 정황상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되레 톰을 도와주려고 한다. 그럴수록 톰의 불안과 의심은 심해진다.
결국, 톰은 자신이 출장 간 사이 젠을 만나서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대놓고 론에게 따지게 되는데...
톰은 젠에게 뒤늦게 친자 확인 검사를 요구한다.
갑자기 의심을 하며 태도를 바꾸는 남편에게, 젠은 크게 상심하며 친정으로 가 버린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리암은 정말 톰의 친아들이 맞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반전과 결말이 이어진다. ↓
얼마 후, 젠의 친정엄마는 톰을 불러서 놀라운 얘기를 한다.
과거의 진실에 관해서다.
그것은, 젠의 친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남편 빌은 젠의 친부가 아니라고 한다.
젠의 엄마가 결혼 전에 만난 흑인 남자 로저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젠이라고...
그녀가 털어놓는 진실로 인해 비로소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즉, 젠은 친부로부터 물려받은 흑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의 엄마는 따로 젠을 불러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젠의 친부 로저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불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까지도...
그럼에도 젠이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백인 남편 빌과 결혼해서 젠을 키웠다고 한다.
반신반의하던 톰은 죽은 로저스의 가족을 수소문해서 그들이 사는 집까지 찾아갔다가 이내 의심을 풀고 돌아온다.
그는 론에게 사과하고 젠에게도 사과하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일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은 것으로 보인다.
론은 사과하는 톰에게, 그동안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갖은 편견과 차별의 시선에 대해 얘기한다.
젠은 톰이 그토록 원했던 친자 확인 검사서를 남긴 채 톰의 곁을 떠난다.
남은 것은 불신과 의심으로 깨져버린 관계 뿐...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이미 무너져버린 신뢰는 회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상처받은 사람들만을 남긴 채 결말을 맞이한다.
편견과 차별에서 비롯된 의심으로 인해 결국은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게 된 백인 남자 이야기...
이미 신뢰가 무너진 마당에 뒤늦은 사죄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젠의 엄마가 오랜 세월 동안 마음 깊이 간직해왔던 비극적인 진실은 미국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인종차별과도 맞닿아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한들 흑인을 향한 편견과 차별의 시선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만연하는 아시아인 차별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차별과 멸시를 언제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바로 친자검사를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 젠도 그러자고 했건만, 톰의 위선이 되레 일을 크게 만든 셈이다. 톰이 아이를 받아들인 것은 신뢰보다는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때 이미 의심의 싹이 톰의 마음 속에 자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심의 싹은 일찍 뽑아버려야지 방치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뿌리를 내리건만...
'편견'이란 정신의 '밀실'이며 우리는 그 안에 든 '포로'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문구를 되짚어본다.
톰의 명대사
"정말 예쁜 아기네요. 그런데 이 아기는 아마..."
"난 교회도 안 가. 당신이 내 믿음이니까. 당신을 믿지 않으면 난 세상 어느 것도 믿지 못해. 테스트는 필요없어. 리암은 우리 자식이야."
"생각보다 믿음이 부족했나 봐. 사실 당신도 정말로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잖아. 난 흑인 아이는 원치 않아."
"실수였어. 젠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진 거야.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어. 그때 난 나약했고, 통제력을 상실했어. 어떻게 하루아침에 남이 될 수가 있어?"
젠의 명대사
"내가 낳은 아기가 맞아."
"가족 중에 우리가 모르는 유전자가 있나 봐요."
"아기를 낳고 친자 검사를 요청했어. 결과는 지금 당신 손에 있어. 친자 검사 결과는 내게 선택지가 아니야. 당신에겐 선택지가 되겠지. 리암을 만난 건 축복이야. 그애가 흑인인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언제나 그애 곁을 지킬 거야. 당신이 사과할 순 있겠지. 다시 가족이 되자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말로 일을 바로잡을 순 없어. 행동은 목소리가 커. 그러니 큰 소리로 말을 해. 그게 아니라면 입을 열지 마."
론의 명대사
"네 눈을 봤어.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가방을 꼭 껴안던 여자, 나를 태워주지 않던 택시 운전사, 백화점에서 나를 쫓아오던 경호원도 모두 같은 눈빛이었어. 너는 그날 그 눈빛으로 나를 봤어."
젠의 엄마의 명대사
"가게에 갔었어. 한 남자가 들어와서 가게를 털려고 하자 로저스가 막았어. 그런데 경찰은 로저스를 강도인 줄 오해하고 로저스를 목 졸라 제압했어. 로저스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그가 백인이었다면 아직도 살아 있겠지..."
2월 11일(화) 레위기 25-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품군(레 25:55)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for the Israelites belong to me as servants. They are my servants, whom I brought out of Egypt. I am the LORD your God.
품군(5650) 에베드( ʽebed ) עֶבֶד
스트롱번호 5650
어원 / 564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99회 사용
☞ 종(창 9:25, 삼상 17:9, 사 65:13), 노비(창12:16, 신12:12, 삼상8:16), 가신(창14:15), 신하(창 40:20, 출7:10, 신29:2), 노예(창 43:18, 왕상9:22), 수종(창50:2), 남종(출20:10, 레25:6, 신5:14), 품군(레25:42), 사환(삼상25:10).[동] 종노릇하다(미6:4).
* 5647. 아바드(ʽâbad) עָבַד 스트롱번호 5647
구약 성경 / 289회 사용
손잡이입니다.
옛날
옛적, 작은 마을에 유다라는 이름의 목재 장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업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특히 그가 만든 문
손잡이는 튼튼하고 아름다워서 모든 집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다의 작업장에 낯선 노인이 찾아와 고장 난 오래된
상자에 새 손잡이를 붙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유다는 그 상자를 보고 그 상태에서는 손잡이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은 꼭 손잡이를 붙여 달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유다는 최선을 다해 정성껏 손잡이를 다시 붙였습니다.
노인은 매우 감사하며 유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다"고 제안하지만, 유다는 미소 지으며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손잡이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며 조심해서 다루라고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후 놀랍게도, 그 손잡이를 단 상자는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안에 두었던 물건을 지키고, 마지막에는 순금의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물건이나 사람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그 기능이나 내용물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은 "겉모습이나 표면적인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의 외모는 때때로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가치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한눈에 평범한 사물에 새로움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지고 있는 "손잡이"가 사물을 올바른 방향으로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본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당신의 종으로서 하나님께만 속한 자임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영구히 타인의 종이 되거나 혹은 압제당하는 것이 부당함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백성의 고귀성과 존엄성을 새삼 엿볼 수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42절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바 -
노예 민족된 비천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킨 사건과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토록 허락한 사건을 결코 이스라엘의 공로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의 결과요, 한량없는 자비의 결과일 뿐이었다.
이 사랑과 이 자비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을 입은 자답게 같은
사랑을 이웃의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야 했다(요일 4:11).
그것이 바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 한명 한명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였다.
그러므로 결코 경제적 문제로 인해
공동체의 사랑의 정신이 퇴색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듭 출애굽 구속 사건을 역설함으로써, 스스로 사랑의 실천을
하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나의 품군인즉 -
'품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베드'(*)는 '일하다',
'봉사하다'는 뜻의 '아바드'에서 유례한 말로 곧 '여호와의 종들'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질상 하나님께
속해 그 분을 위하여 살아야 할 자들이며, 모두 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한 형제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종으로 삼아 억압하거나
학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상은 후에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고전 7:22, 23)
여호와의 은혜의 해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을 다룹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안식일의 확장으로, 일주일 중 마지막 날(7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는 것처럼, 7년 중 마지막 해를 안식년으로, 7번째 안식년이 되는 해(또는 그 다음 해)를 희년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안식년와 희년을 통해 안식일의 정신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사회로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말씀은 23절입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는니라.”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땅에서 잠시 거주하는 나그네요, 잠시 맡은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을 통해 우리가 이 땅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안식년
안식년은 기본적으로 땅을 안식하게 하는 날입니다(2절).
6년 동안 땅을 사용하고,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땅이 황폐해지는 것을 예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 땅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당연히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내게 주신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나누게 하기 위함입니다(5-6절).
안식년에는 내 땅에서 난 곡식과 열매를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인과 종, 일꾼과 나그네, 심지어 들짐승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땅이 나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할 때 안식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은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요,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많이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좀 더 자유롭게 하시고 풍성하게 베푸십니다.
6년 동안 먹고 사는데 바빠서 이 정신을 잊게 될 쯤, 이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을 맡기신 본래의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 땅이 주는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날이 안식년입니다.
희년
희년은 7번째 안식년인 49년이 되는 해(혹은 50년째 해)입니다.
희년은 성경을 제외하고 세상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도입니다.
희년은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희년은 마치 리셋 버튼과 같이 50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의 토지를 처음 분배받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원칙적으로 땅의 소유권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희년을 기준으로 땅의 경작권을 매매할 수 있었습니다.
희년에는 땅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잃고 종이 되었던 사람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찾는 해이기도 합니다.
희년의 제도 아래에서 모든 사람의 부와 신분은 상대화됩니다.
설령 내가 노력해서 얻은 소유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 이상의 소유는 희년까지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희년을 지키기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배우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나그네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이 정신을 우리의 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각해지거나, 영구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회복될 수 있도록, 그들의 자녀들이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희년의 정신을 적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적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바로 예수님께서 이 희년을 성취하셨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말하며, 메시아가 오시면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 16-21절에서 이 희년이 지금 너희에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희년을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희년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와 죽음의 종이 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가까운 친척이 땅을 무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셨고,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주님꼐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을 소망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 비로소 우리의 모든 죄를 벗어 던지고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전파할 희년의 의미는 단순히 사회,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살게 하시고, 마귀의 종 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진정한 소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쓰러지고 망가져도 괜찮다. 다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위로와 소망이고, 희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레위기 25장의 구조 매일성경 새벽설교주제 해설
레위기 25장의 구조
1절-17절,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6년 간은 밭에 파종하여 열매를 수확하고 제 7년째가 되는 해는 땅이 쉬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안식년는 땅과 땅 주인과 종들과 모든 나그네와 가축들까지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해입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7번 반복되고 난 후 50년이 되는 해는 7월 10일을 기점으로 희년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희년을 지키는 규례와 토지 매매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8절-34절,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구체적인 규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모든 교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이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희년과 관련해서 토지와 집들을 매매하는 모든 규례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희년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하신 거룩한 규례입니다.
35절-55절, 이웃을 향한 희년 규례들
하나님께서 희년에 반드시 지켜야 할 가난한 동족에 대한 규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난한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 주어야 ㅎㅂ니다. 가난하여 팔려 온 동족은 희년이 될 때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방인에게 팔린 동족은 속량해야 합니다.
레위기 25장의 매일성경 새벽설교주제
1절-19절,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때가 되면 모든 매였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된다고 규정해 주셨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하게 알려 주시는 규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며 자신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내가 가진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23절-38절,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지를 영원히 매매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들을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를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도 같이 나그네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땅에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은 영원한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소유한 것을 지혜롭게 잘 사용하고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되돌려 드립시다. 그리고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39절-55절,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도 가난하여 스스로 종으로 팔려 가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종으로 대하지 말고 품꾼으로 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형제가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려 가게 된다면, 친척들이 그를 구속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해서 동족의 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의 종, 쾌락의 종, 재물의 종이 되지 맙시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레위기 25장의 해설
8절-17절,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희년은 땅에서 자유를 외치는 나팔 소리를 연상하게 합니다. 모든 백성이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이러호 규례는 희망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놀라운 증거입니다.
10절, 희년(禧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50년 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요벨의 해’(Jobel Jahr)라고도 합니다. 요벨은 ‘숫양의 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악기(나팔)의 일종으로, 50년째 해의 속죄일에 요벨을 불어 그 해가 온 것을 알게 했습니다.
18절-24절,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토지 무르기(redemption. 24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땅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신학적 기초는 23절에 있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이 땅의 소유주이시기 때문에 땅은 영원히 팔 수 없습니다. 곧 땅은 완전히 팔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다시 살 수도 없습니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은 25장 전체를 형성하는 신학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닝께 속한 나그네요 임차인입니다. 첫 번째 용어(나그네)의 의미는 공동쳬의 시민이 아니요,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미 이러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갑니다.
36절, 이자를 받지 말고
‘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נשך ותרבית'(네쉐크 웨타르비트)는 고리(高利)의 이자와 일반 이자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줄 때 어떤 이자도 받지 말라는 것을 규정한 본 규례는 이스라엘 신앙 공통체라는 특수한 사실이 전제된 것으로, 의식주 해결, 질병 등 절박한 상황에 처해 돈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부자의 경제적 횡포를 금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하에서 성경은 ‘이자를 받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을 의인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48절,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이방인들이 히브리인들의 종이 될 때 영구히 노예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이 이방인의 노예가 될 경우에는 그 친족이나 자신 스스로가 언제든지 속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도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한편 ‘속량’(גאולה, '게울라'는 '속량한다'는 동사인 'גא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은 원어적으로 ‘몸 값을 지불하고 노예 상태에서 풀어주다’라는 뜻입니다.
참고할 글
현자의 일곱 가지 강점
이
이야기에는 한 마을의 장로로 존경받는 지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고, 어려운 상황을
이끌어왔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지혜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우리를 이끌어주실 수
있습니까?"
지혜자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지혜는 일곱 가지 강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청의 힘 - 지혜자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마음가짐으로 삼았습니다.
사려 깊음 - 그는 사물의 이면과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하며, 경솔한 결정을 피했습니다.
공정성 - 감정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평하고 공정한 판단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인내력 -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을 배웠습니다.
공감의 마음 -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공감을 키웠습니다.
수양의 정신 - 끊임없이 배워서 자신을 다듬어 나가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용기 - 필요한 때에는 어려움에 맞서고, 대담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 일곱 가지 강점을 실천함으로써, 지혜자는 마을 전체를 이끌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알려주는 것은, 진정한 지혜란 단순히 지식의 풍부함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태도에 있습니다.
지혜자처럼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 자신과 사회에
진정한 강점이 됩니다.
유대인이 절기를 지킨 것이 아니라 절기가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지켜주었다.
2월 10일(월) 레위기 21-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절기(레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절기라는 히브리 단어는 "모에드(môwʽêd. מוֹעֵד)"라고 합니다.
레위기 23장과 민수기 28장 및 29장에는 구약 시대에 지켜진 이스라엘의 공식 절기를 소개합니다.
이와 같이 절기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소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절기들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시려는 것
둘째는 절기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구속사적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일목요연하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모에드'라는 절기는 "야아드"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야아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을 말합니다.
특별히 레위기 23장에서는 일곱 절기(7대 명절)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절기의 기본이 되는 날은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의 절기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절기를 계시하셨고 그 계시에 따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일곱 절기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소개합니다.
유월절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어린 양 예수
Passover(패스오버), פֶּסַח(페사흐), πασχα(파스카)
무교절은 무덤에 안장된 예수
자아의 파쇄, 죽음
초실절은 부활하신 예수
부활, 성화, 잘 될 것이다.
칠칠절은 성령으로 임재하실 예수
성령을 부어 주리라!
성령 세례(체험), 요나가 토함을 받는다(물고기 배속)
나팔절은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
대속죄일은 심판하러 오실 예수
심판(審判), 심판하리라!
알곡과 죽정이로 구분할 것이다. 신부(거룩한 세마포 예비)
초막절 -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이 임하리라!
* 야아드(3259)( yâʽad). יָעַד
스트롱번호 3259
구약 성경 / 29회 사용
절기(4150) 모에드(môwʽêd) מוֹעֵד 스트롱번호 4150
발음 [ môwʽêd ]
어원 /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계절(창1:14), 기한(삼상13:8, 시102:13), 때(출23:15, 수8:14, 습3:18), 회막(출27:21, 레24:3, 왕상8:4), 성막(출35:21, 40:2), 회막문(출40:12, 민16:18, 27:2), 성회(레23:2,37, 겔46:11), 절기(레23:37, 민29:39, 대하8:13, 호2:11), 절기제(민15:3), 회중(민16:2, 시74: 4),시기(민28:2, 렘46:17), 군호(삿20:38), 날(삼상13:11), 시간(삼상20:35), 한 해(왕하4:16),회당(시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2:7, 호9:5). [동] 돌아오다(왕하4:17), 정하다(욥30:23, 시104:19).
성회(* - , 미크라 코데쉬) - '거룩한 모임들'이란 뜻으로 앞으로 언급될
모든 절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냈다.
여호와의 절기 - '절기'(*, 모에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란 뜻을 가진 '야아드'(*)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이다.
구약의 7가지 절기에 대한 뜻과 의미 유래 레위기 23장
레위기 23장은 하나님께서 지켜야할 절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신다.
구약의 7가지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절기였다.
각각의 절기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미와 뜻이 있으니 살펴보며 묵상 해보자

|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
레위기 23장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 23장 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레위기 23장 3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섯날을 일하고 일곱날은 일하지말고 여호와의 안식일을 충성스럽게 지켜야 한다.
|유월절(레 23:4-5)과 무교절(레 23:6-8)
안식일 다음 말씀하신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유월절 :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 양 예수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무사히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던
것인데,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 중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이 죽을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유월은 '넘는다, 넘어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어린양의 피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흘리신 보혈을 상징한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예수님인 것이다.
무교절 : 무덤에 안장된 예수
유월절에 이어 1월 15일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이다.
여기서 무교병은 우리가 빵을 만들때 부풀게 하기 위해
넣는 효모,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다.
무엇보다 출애굽을 하며 하나님께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를 올리기 위한 날이며
첫날과 마지막날은 모두 안식일로 지켰다.
이때는 성전에 올리는 진설병 역시 고운 곡식가루, 기름, 소금으로만
만들어졌다.
무교병에 누룩이나 다른 첨가물을 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뜻하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지키며 부패와
거짓을 버리자고 다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첫 이삭 한 단을 바치는 절기
초실절은 무교절 안식일 다음날 지켜져 무교절 안에 포함되었다.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을 말한다.
추수한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리면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다.
신약에서는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뜻하는 날이다.
유월절에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주으신 예수님이 이 초실절에 첫 열매로 부활을 하신다.
오순절(레 23:15-22) : 성령으로 임하신 예수
|두 번째 거둔 곡식을 바치는 절기
맥추절(오순절, 칠칠절)
이다. 초실절이 보리라면 맥추절은 밀의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다.
초실절로부터 50일 후이므로 오순절(순은 열흘을 뜻한다)이라고도 한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안식일이 일곱번 지난 다음날이므로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맥추절, 오순절, 칠칠절은 모두 같은 날이다.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신 후 맥추절에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만드신 영적추수,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맥추절에는 속죄제, 화목제, 번제가 함께 드려졌고 모든 것을 다 추수하지말며, 떨어진
것은 남겨 놓으라 하신다. 이는 가난한자 그리고 손님을 위해 남겨 놓는 것인데 그 뜻은 이방인들 역시 수확에 참여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나팔절 (레 23:23-25) 일곱째 달 첫 날은 쉬는 날
나팔절이다. 따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나팔을 불어 9일 후에 다가올 속죄일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날이었다. 나팔을 불며 세상에 속죄를 알린 것인데, 오늘날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 속죄일(23:26-32)
속죄일은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날이다. 유대 절기 중 가장 경건하게 보내야하는 날로 이스라엘은 지금도 나팔절을 포함하여 열흘간 죄에 대한 회개로 속죄일을 준비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고백하고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며 우리가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것처럼 속죄일은 우리의 모든 죄를 고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막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초막절(레 23:33-44)
초막절(장막절, 수막절)은 매년 7월 15일부터 7일동안 하나님 앞에서 기뻐 즐거워 한 날이다. 이때 추수는 이미 끝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모두가 즐겁게 보내는 절기다.
물론, 즐겁고 웃고만 지내는 날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풀로만든 초막에서 지내면서 광야생활을 기억해야 했다. 안락하고 편안한 집에서 잠시 벗어나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신 것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하는날이다.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수장은 추수한 것을 곳간에 들여 저장한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창고가 가득 차올랐으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짐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약의 7가지 절기는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모든 절기들은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만들어졌기에 절기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지키는 것 보다 이 절기가 가지는 그 의미와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2월 8일(토) 레위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거룩할지어다(레 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You are to be holy to me because I, the LORD, am holy, and I have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to be my own.
성(聖) 성스러울 성 /
- 귀 이(耳) + 입 구(口) + 천간 임(壬) <임금 왕(王)>
*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들어진 갑골문자(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입 구(口)자가 그려져 있다.
耳(귀 이) 자를 맨 먼저 쓰는 이유는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듣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야 상대가 만족하기 때문에 입(口)을 나중에 쓰게 만든 것이고, 마지막에 왕(王) 자를 넣은 것은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한다는 것은 왕이 되는것 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공자님께서도 60세가 되어서야 "이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먼저 모두 다 듣고 나중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청득심(耳聽得心)'이란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인은 먼저 남의 이야기와 진리의 소리 그리고 역사(歷史)의 소리를 모두 조용히 경청하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을 때 비로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耳順)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를 않는 경지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하는 경지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경지입니다.
말을 배우는 것은 2년이면 족하나 경청을 배우는 것은 60년이 걸리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귀를 먼저 열어야 합니다.
귀에 지금도 거슬리게 들리는 말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고, 여기에 더해 아직도 듣기 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부단히 노력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거룩이란 한자는 임금님처럼 들을 줄 알고 말을 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
1.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高潔)하고 거룩함.
-
2. 종교(宗敎)의 본질(本質)을 규정(規定)하는 독자적(獨自的)인 성질(性質)이나 가치(價値). 초월적(超越的) 존재(存在)로서의 신(神) 또는 신성(神性)의 숭고(崇高)함이나, 그 능력(能力) 및 그에 대(對)한 접근(接近) 불가능(不可能)함을 나타낸다.
-
3.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받는 사람의 이름 앞에 쓰는 말.
-
4. ‘거룩한’ 또는 ‘성(聖)스러운’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接頭辭).
성경에서의 거룩
성경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중요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거룩"의 의미와
성경 속에서 거룩이 가지는 다양한 실례를 구약과 신약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거룩의 원어적 정의와 의미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카도쉬’(קדוש, qadosh)와 헬라어 ‘하기오스’(ἅγιος, hagios)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구별됨’과 ‘다름’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
히브리어 ‘카도쉬’ : 이 단어는 ‘분리하다’ 또는 ‘따로 떼어놓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구별되어 계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의미로도 확장됩니다.
- 헬라어 ‘하기오스’:
-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목적에 맞추어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신앙인의 생활과 행동 전반에 걸쳐 그 삶이 구별되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거룩의 구별된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을 '거룩하다'라고 말합니다.
2. 구약에서의 거룩 :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구약 성경에서 거룩은 주로 하나님의 성품, 그의 백성의 성결함,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율법과 제사 제도에 관련하여 설명됩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으로, 그의 모든 속성 중 거룩함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 출애굽기 15:11: "여호와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피조물과 구별된 절대적 순결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죄가 없고, 완전히 의로우시며, 인간의 불완전함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거룩함을 지니고 계십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함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 레위기 11:45: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율법과 정결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이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구별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3) 율법에서의 거룩과 정결 의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율법과 정결 의식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 정결 음식법: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여, 음식 섭취를 통해 백성이 정결하게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 정결 예식: 구약 율법에는 제사와 속죄를 통해 죄와 불결을 씻어내는 다양한 정결 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 안식일과 절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령된 절기와 안식일도 있습니다. 안식일과 절기 준수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순종의 상징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구별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의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4) 성막과 성전에서의 거룩함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머무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하는 중심지였습니다.
- 성소 내에서 행해진 제사와 속죄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는 백성에게 거룩의 개념을 각인시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3. 신약에서의 거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거룩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거룩의 모범이시며, 그분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 예수님의 거룩함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보여주는 존재로,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거룩함의 완전한 모범이 되십니다.
-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죄를 씻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통한 거룩의 성화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점차 거룩하게 변화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이 신자들 안에서 거룩을 이루어 가는 과정, 즉 성화(sanctification)로 설명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로 인한 신자의 거룩한 삶을 설명하며, 성령의 역사로 인해 신자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게 됨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신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역사하며 그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추도록 인도하십니다.
3) 신자들의 삶에서의 거룩
신약에서는 신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신약에서는 율법적 의식을 통한 거룩보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며, 이는 신자가
-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4) 교회와 성도들의 거룩함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한 공동체로 불립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 에베소서 5:2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셨다고 설명합니다.
- 고린도전서 3:16-17: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를 세우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4. 거룩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종합
거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구별된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개념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의 거룩은 율법과 제사 제도, 정결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받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삶을 강조합니다.
신약과 구약의 거룩의 개념을 종합해보면, 거룩함은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요소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삶,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거룩은 모든 신자의 삶의 목표이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수거(受去) : 받을 수, 갈 거
- 수령해 감
קְדֹשִׁ֣ים תִּהְי֑וּ כִּ֣י קָדֹ֔ושׁ אֲנִ֖י יְהוָ֥ה אֱלֹהֵיכֶֽם
You shall be holy, for I the LORD your God am holy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장 2절)
레위기의 주제와도 같은 구절이 바로 레위기 19장 2절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면서 거룩할 것을 명령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1.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거룩에 대해 알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명령하셨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고 번역된 것이 사실은 히브리어 미완료형으로 기록된 것인데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단지 미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기록, 특히 구약의 다양한 미완료형태의 기록은 상당수가 명령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구절에서도 "되리라"가 미래형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 명령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구절은 두 개의 문장으로 구분되는데 뒷 문장, 곧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의 시작이 כִּ֣י(발음: 키)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כִּ֣י(발음: 키)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할 이유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작정하셨고 이제 그들과 거룩함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십니다. 거룩이 훼손되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거룩은 훼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잊은 백성들은 그 분의 거룩하심과 같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은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그 분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 분과의 단절은 사람을 공허로 이끌 것입니다.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명령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행동입니다.
2. 하나님 경외, 정의, 이웃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추상적일 수도 있는 이 단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부적인 사례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유형, 곧 하나님 경외, 정의(justice), 이웃사랑으로 구분됩니다. 거룩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 죄를 공동체 내에 놔두지 않는 것은 분명 거룩의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것도 거룩과 관련되어 있다고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약자라고 봐주거나 세력이 있는 자라고 두둔하는 행동은 세상에서도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의와 관련하여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는 것 역시 기억해야 할 정의로운 행위입니다. 당일에 줘야 할 마땅한 대가를 주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고용인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가지고 임금체불의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앞의 연관구절에서는 특히 착취의 행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웃을 억압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경계하시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거룩은 이웃사랑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이웃사랑이 거룩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사랑하는 것 역시 거룩의 한 속성입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이기적인 형태가 아니라 원수를 갚지 않고 동포를 원망하지 않는 행위,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죄를 견책하는 적극적인 권고의 행위를 이웃사랑에 포함시키셨는데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죄는 전염성을 갖고 있으니 온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한 사람의 죄라도 간과하지 말고 또 죄를 가볍게 여기는 조짐이 없도록 항상 서로를 견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벧전 2:9).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은 전도와 같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거룩을 지키는 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것은 중요성을 크게 부여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께서 어떠하심을 알고 그대로 행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아버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누군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있었는데 대번에 그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러면 되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소한 행동, 발언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일에 거룩한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거룩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거룩이란?
섬김의 삶의 질(quality)은 한 마디로 '거룩(코데쉬)'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의 근거는 출애굽으로 인한 구원이다.
따라서 이 명령은 이제 출애굽 이후 새롭게 역사 선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창조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성의 회복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백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창 1:26,27).
이 거룩의 근거를 창조에서 찾지 않고 구속으로부터 찾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창조의 완성이요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거룩'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거룩은 첫째, '~으로부터의 분리적' 의미와
둘째, '~와의 합일된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 개념이 레위기에서 강조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코데쉬'의 의미는 '정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들어가면서
"before, after", 전과 후를 비교하는 사진을 종종 봅니다.
성형 전과 후, 다이어트 전과 후를 비교하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과 후는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세상의 부와 명예, 쾌락과 권력을 좇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에는 거룩함을 욕망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배받는 대상에 따라 욕망의 대상도 바뀝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으면 세상 것을 욕망하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속하면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를 욕망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임할 은혜를 소망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무지하였을 때처럼 육신의 사욕을 좇아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입니다.
성경 속으로
1.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들은 흩어진 나그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벧전 1:1,2).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벧전 1:3).
우리들은 택하심을 받아 거듭나서 산 소망을 얻어 유업을 얻은 성도들입니다.
즉 구원함을 받은 자, 대속함을 입어 주 안에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대속함과 거듭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
첫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습니다(19절).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알린 바 되신 이지만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나실 분이시다.
-
둘째,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23절).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는데,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항상 있다. 이것이 복음 곧 말씀이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되었습니다(20-22절).
2.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이처럼 우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식으로서,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말고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이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욕망을 말합니다.
이는 경계하여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려 죄 가운데 빠지게 하며, 육신의 욕구의 충동에 따라 살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의 특성인 도덕적 죄악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은 이 땅의 사람들과 구별된 삶,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구별된 삶이란 차별화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임할 은혜를 소망하며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이전에 무지하였을 때처럼 육신의 사욕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에 가득찬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까?
첫째, 우리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기 때문(15-17절)
여호와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45 ; 19:2 ; 20:26)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4,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위기 20:26)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찬 세상이므로, 그런 세상에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따라 더욱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게 된 거룩함을 더럽혀서는 안되고, 모든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도록 하며, 그 행위를 거룩함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18,19절)
-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18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19절).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기 이전의 우상숭배의 삶을 말한다.
대속함이란 전쟁 포로나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몸값으로 돈을 대신해서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지불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대속함을 받아 자유를 얻은 자들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우리들은 이전의 삶의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나그네 삶을 거룩한 삶이 아닌 방탕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모독하는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거듭난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23절).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23-25절).
죄인이 거듭난 것은 자신의 율법적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 그렇다면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1. 레위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거룩의 의미
레위기 11장 44,45절에서는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4,45)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가증한 동물들, 즉 땅 위에 사는 것, 공중에 나는 것, 물 속에 사는 것, 그리고 곤충 중에 가증한 것들로부터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궁극적인 사명은 여호와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자를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서는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라고 하시면서 부모 경외, 안식일 준수,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한 배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 이웃 억압 및 착취 금지, 이웃에 대한 배려, 공의로운 재판 시행, 이웃 사랑 등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 관계에서의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더럽고 가증한 것들로부터 정결하고 구별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불신자들과는 구별된 삶, 덕을 펼치는 삶, 인간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4-2. 라이프성경사전과 교회용어사전의 정의
거룩(holiness)이란?
성경 원문에서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기본 의미들은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
그리고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레 11:44).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죄악과 구별된 도덕적인 삶(요 17:19), 그리고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경건한 행위를 말한다(벧전 1:16).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성품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기도 하다(레 19:2; 벧전 1:15-16).
그리고 성전, 성물, 제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절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등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역시 지극히 거룩하다.
거룩(holiness)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요소요, 성도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다(레11:44-45; 19:2; 벧전1:15-16).
성경 원문에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는데, 그 기본 의미는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 '유일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것,
오직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하나님에게 접붙이는 것,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
세속과 구별되고 변화되어 정결해진 상태 등을 의미한다.
특히,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탈피하여(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레11:44),
죄악과 구별된 정결한 삶(요17:19),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에서 자신을 엄격히 구별하는 경건함을 말한다(벧전1:15; 벧후3:11).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죄악된 옛 본성을 벗고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죄사함을 얻고 구원받은 인간(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한 자)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칭의에 뒤따라서 성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즉, 거룩함 가운데 자라는 과정으로, 개인의 성품과 삶 가운데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 '성화'는 '칭의' 곧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justification)처럼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후 오랜 기간 거룩한 생활을 통해 성숙되어 감으로써(성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끝날에 '영화'(glorification)를 얻게 될 것이다.그런 점에서 '성화'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이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다'(롬13:14),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다'(엡4:15), '완전한 데로 나아가다'(히6:2)는 모두 성화를 묘사한 말씀이다.
이 말씀들에서 보듯이, 성화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사역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협력과 선한 반응을 필요로 한다.
성도는 은혜 안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을 온전히 이뤄가야 한다(빌2:12).
4-3. 구원의 서정(칭의와 성화와 영화)에서 거룩의 의미
성화(聖化)란 ‘성스럽게 됨 또는 그렇게 함’을 의미한다.
성화(sanctification)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아가며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영화(榮華)란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남‘을 뜻한다.
기독교에서 영화(glorification)란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아 예수님이 다시 올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완전하게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그 분의 영광 안에서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세 가지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는 칭의(稱義, 과거 시제), 죄의 세력과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아가는 성화(聖化, 현재 시제),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영화(榮華, 미래 시제)로 구분하고 있다.
칭의(稱義)는 현재 상태는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의를 입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말한다.
성화(聖化)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하신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의롭게 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화(榮華)란는 주님이 다시 올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완전하게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그 분의 영광 안에서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묵상해야 한다.
신분상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성화되었다.
우리가 믿을 때부터 신분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죄를 짓는 죄인으로서 죄의 세력 아래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죄와 싸우고 발을 씻듯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점진적으로 육신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부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즉 신분상은 이미 성화가 되었지만, 상태 상으로는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죄인이다.
성화(聖化)는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과정이므로 성품과 인격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다.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해 나갈 때 반드시 성화의 과정에 따라 인격이 성숙하게 변하는 과정이다.
성화(聖化)는 하루아침에 이루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꾸준히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나가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하다.
영화(榮華)란 미래 시제에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아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우리가 죽을 때, 죄가 없는 천국으로 옮겨가기 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온전한 영화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5. 거룩한 삶(성화)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은혜 받기를 소망해야 한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13절).
베드로는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먼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동이고’는 ‘(여행 등의 출발을 위해) 의복을 허리띠로 조이고 단단히 태세를 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잠 31:17 ; 빌 2:1) ‘아나존뉘미’의 명령 분사로서 명령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수신자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은 것처럼(출 12:11) 급한 일을 당할 때를 대비하는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허리가 아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매사에 긴장된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땅의 문화에 취해 주위의 핍박과 혼란한 상황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흔들리거나, 혹 사단이 활동할 여지를 제공하여 유혹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근신하여’는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명령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항상 권고나 충고 또는 훈계를 할 때에 사용됩니다(살전 5:6,8 ; 벧전 4:7 ; 5:8 ; 딤후 4:5).
이 말은 ‘동이고’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당하는 수신자들의 영적 자세를 당부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고, 세속적 욕구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영적 나태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텔레이오스’라는 단어를 ‘온전히’가 아닌 ‘끝까지’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KJV도 ‘끝까지(to the end)’로 번역하여 소망하기를 인생의 종말 때까지,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 함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과 NASB는 ‘완전히(completely)’라는 의미로 번역하여 소망하되 조금도 빈틈없이, 혹은 체념이나 낙담하지 말고 순수하게 소망을 지니라는 측면을 부각시켰습니다.
종합해 보면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소망하되, 또한 그 주실 은혜에 대한 소망이 온전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의 대상은 ‘은혜’에 해당하는 ‘카린’이다.
원형 ‘카리스’는 자기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나타내 보이시는 기쁨과 호의와 은총을 말하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5절)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계시되어 드러나실 때(at the revelation),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주실 구원의 은혜를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의 도가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환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을 온전히 바라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평온할 때 뿐 아니라 내 감정과 상황이 풍파가 불어 불안할 때에도, 로마 시대에 격한 박해 속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주실 구원의 은혜(미래)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들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움으로 지내야 합니다(17절).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고 있을 때 사람의 눈을 만족시키는 행위를 벗어버리고 진심으로 섬기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종말에 심판이 있을 것을 잊으면 삶이 흐트러지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을 동안에 두려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박해 가운데 놓인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육신은 죽이고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분 앞에서 온전하고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이웃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마음으로 뜨겁게 형제를 서로 사랑해야 한다(22절).
우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되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22절).
우리는 진리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거짓 없이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외적 환난 중에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랑을 뜨겁게 계속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최고도의 힘을 동반하여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다른 형제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의 영혼을 맡기는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그들은 깨끗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거짓이 없이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 선한 행실에 힘쓸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2:11,12,20 ; 3:16,17).
비록 이방인들의 제도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의 각종 제도에 순복하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도 상호간 및 이방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도가 거룩한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사회나 국가의 제도를 거부하고 이방인들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거룩한 삶은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며 오히려 복을 비는 것과 같이, 이방인들과의 공존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선한 행실’에 힘쓰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3:12에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서 밝히고 있는 거룩한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도 불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선한 행실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는 성도이기 때문에 '손해 보고 살아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방 세계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며(2:20 ; 3:17), 그리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결국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2:12).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교회 안에는 성도가 많지만 교회 밖에서 거룩한 삶으로써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를 발견하기 힘든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함을 받아 거듭난 구원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는 등지고 그들과는 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구별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_ 벧전 1:15
거룩한 삶의 필요성
거룩이란 모든 죄악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삼고 섬기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즉 모든 이방적 요소와 죄악된 요소로부터 분리되어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총회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거룩한 화평과 친교의 언약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친교를 저해하는 모든 더러운 요소 및 부정한 요소를 개인 및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제거시키는일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했다.
거룩해야 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11:44,45)
-
여호와께서 거룩한 백성 삼으시기 위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기 때문(11:45)
애굽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건져내신 여호와이기 때문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압제와 폭정으로 생명이 기진한 애굽에서 / 생명과 평강이 있는 가나안으로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 새로운 삶의 원칙을 주셨다.
거룩해야 하는 대상 ; 여호와께 거룩하라(레 20:26)
레위기에서 '거룩'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4,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20:7)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위기 20:26)
거룩하기 위한 방법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되었다(출 19:6).
이렇게 선택된 백성은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다.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하시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부정한 동물들로부터 정결한 것을 구분해 내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지상의 모든 이방 족속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성결을 유지하는 비결(11:1-32)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본의 아니게 죄와 접하기도 하며, 부정케 되어 영적으로 침체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이 사단에 속하여 성도들을 유혹하며, 더럽히게 하는 속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요일 2:15-17 ; 5:19).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환경을 핑계로 죄 가운데 또는 부정한 상태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이 거룩하신 바, 당신께 속한 백성들 또한 거룩하기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44, 45절).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죄지을 경우 자백함으로 속죄받고(요일 1:9), 부정케 될 경우 정결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막힘 없는 교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레위기 11장에서는 부정한 동물을 명시함으로 부정케 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으며, 또한 부정케 되었을 경우 대처할 사후(事後) 처방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죄악된 길을 삼가야 한다(23, 27, 31절).
고사성어 중 '근묵자흑'(近黑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로, 악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이란 좋은 습관보다는 악한 습관을 더 쉽게 배우는 경향이 있다.
본문은 부정한 짐승을 먹지 말며, 그 주검을 만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죄의 삯'(롬 6:23)의 결과로 야기된 것으로서 그것을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죄로 인한 부정에 접하지 말 것을 제시해 준다.
이것에 대해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라고 노래했으며,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살전 5:21,22)고 하였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죄 되고 부정한 것의 곁에는 가지 않고 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말해 준다.
2. 의로운 행실로 돌이켜야 한다(25, 28절)
본문은 사람이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질 경우 옷을 빨라고 경고한다.
'옷'은 그것을 입은 자의 외적인 모양새나 행위를 암시해 준다(계 19:8).
따라서 부정한 자로 하여금 옷을 빨라고 한 것에는 그의 외적인 모양이나, 행위를 쇄신하여 새롭게 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부정케 되었을 경우 자포자기하거나 또는 그 부정한 상태에서 머물지 말고 즉시 돌이켜 새롭게 되길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죄를 짓거나 부정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죄와 부정에서 돌이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렘 18:8;25:5;롬 2:4, 5).
성도들은 부정되었을 경우 무엇보다 먼저 죄악으로부터 결연히 돌이켜 새롭게 하는 결단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3. 주의 생명수의 은혜로 씻음 받아야 한다(32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이 목기나 부대 등에 떨어질 경우 그것들은 물에 담가야 한다.
이것은 그것들을 물로 씻어 다시 정결케 한 상태에서 쓰기 위함이다.
이 사실은 성도들이 부정케 되었을 경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씻음 받고 새롭게 되어 그분께 나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하셨으며, 바울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엡 5:26)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의 생명수의 은혜를 힘입어 모든 부정에서 깨끗함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삶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 책임이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속한 죄악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변모되었기 때문이다(요 1:12, 13 ; 고후 5:17 ;엡 4:22-24).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욱 성숙하고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좇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의 삶에 대하여 그의 옥중서신들 후반부에서 많은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의 서신들을 보면 전반부는 신앙 원리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실천적인 삶의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다(엡 4:1-6, 24; 골 3:14, 17).
또한 성도의 합당한 삶에 관해서는 구약 율법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기도 했다(출 19:5, 6).
과거 선지자들도 이 율법에 근거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했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정한 짐승은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부정한 짐승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신 것도 성도들의 바르고 정결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구별된 삶(3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특징 중 하나를 굽이 갈라진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굽이 갈라진 것'이란 짐승의 발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가리키며, 이는 성도의 구별됨, 즉 세속이나 죄악 등에서 분리됨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과 나라들 중 이스라엘을 택하사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해 주셨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의 엄청난 복과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위치에 있는 나라답게 이스라엘도 죄에 오염된 타락한 삶으로부터 분리될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성도의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은 하나님이 율법 시대에서나 복음 시대에서나 한결같이 요구하신 바이다(44, 45절 ; 벧전 1:16).
이것은 하나님이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구별되신 분이며 또한 죄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하지도 말며(요일 2:15-17), 세속을 본받지도 말라는 말씀(롬 12:2)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② 묵상의 삶(3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또 다른 특징을 새김질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새김질'이란 짐승이 이미 먹은 음식을 다시 게워 되새김하는 반추운동을 가리킨다.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성도들이 이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하나님의 말씀, 은혜 등을 다시 묵상하고 되새김하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내지 말고 반복적으로 되새기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성도의 이런 삶을 가리켜 "복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 2)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적인 이론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것인 바(딤후 3:16) '영이요 생명'(요 6:63)이다.
따라서 이를 반복적으로 묵상하며 구체적인 삶 가운데 적용하면 할수록 더 깊은 은혜와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혼탁한 세상 속에서 사는 성도들은 그 심령 가운데 항상 말씀을 묵상하는 자세를 견지함이 마땅하다.
③ 역동적인 삶(10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물고기)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은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전진하고 외부의 압력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기까지 성장해 가며(엡 4:13), 영적 대적자들의 침입을 막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말씀과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마 4:4 ; 롬 10:17 ; 고전 3:1, 2 ; 히 5:12-14).
또한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무장하여 신앙적인 삶을 훼방하고 미혹된 길로 빠지게 하는 모든 대적들을 능히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엡6:10-18).
이방 세계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며(2:20 ; 3:17),
그리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결국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2:12).
2월 7일(금) 레위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는 생명(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a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피는 생명이다
(레 17:14)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육체의 피인즉 누구든지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채소와 과일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그들은 땅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곡식과 채소를 재배하여 필요한 양식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죄가 온 땅에 만연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겼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채식뿐만 아니라 육식도 허락하셨습니다.
(창 9:3)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신 이유는 방주 안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이 다 떨어졌고 다시 농사를 지어 작물을 수확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홍수 이후에는 지구에 계절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달라진 기후 변화에 적응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와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육식을 하려면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은 짐승을 죽일 때마다 생명체의 피를 흘리게 되는데 처음에는 피를 보고 충격을 받지만 나중에는 점차 무덤덤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는 일에 익숙해지면 짐승을 죽이거나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존중하도록 두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라
둘째는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그 사람의 피도 흘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몸속에 있는
피의 양은 자기 체중의 약 1/12∼1/13 정도인데, 과다 출혈로 이 중 절반을 잃으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피의 주요
성분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입니다.
적혈구는 폐에서 산소를 받아서 말초세포까지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함께
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인 이산화탄소와 수소 이온을 운반합니다.
백혈구는 우리 몸에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는 일을 합니다.
혈소판은
상처에서 흐른 피를 응고시켜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게 보호하고 피의 유출을 막으며 상처가 치유되도록 도와줍니다.
혈장에는 항체가
있어서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며, 각종 영양분을 세포로 나르고, 세포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해 주며, 몸의 완충용액으로
pH 농도, 무기염류농도, 체온 등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피의 생명 활동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피가 생명의 양식인 산소와 영양분을 온 몸에 공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요 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피가 우리 몸속에 있는 노폐물을 씻어내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골 1:14)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요일 1:7)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피가 우리 몸을 병균으로부터 보호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죄와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고, 영적 질병을 치유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계 12:11)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피는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고나 수술로 인해 출혈이 심한 환자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헌혈하고 수혈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만 살릴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의로운 피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레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요 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레위기 17:11
피는 생명(5315) 네페쉬(nephesh) נֶפֶשׁ
스트롱번호 5315
어원 /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13:20], 531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53회 사용
피는 속죄(3722) 카파르(kâphar) כָּפַר
스트롱번호 3722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피는 생명이다 (창세기 9장 4절)
אַךְ־ בָּשָׂ֕ר בְּנַפְשֹׁ֥ו דָמֹ֖ו לֹ֥א תֹאכֵֽלוּ
But flesh with the life thereof which is the blood thereof shall ye not eat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창세기 9장 4절)
홍수는 사람이 사는 환경을 크게 바꾼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요, 단! 피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1. 피는 생명이다
창세기 9장 4절에는 고기를 먹을 수는 있으나 "생명 되는 피째" 먹지는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 되는 피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בְּנַפְשֹׁ֥ו דָמֹ֖ו(바나프쇼우 다모)로
생명이라는 의미의 "네페쉬"와 피라는 의미의 "담"이 이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되는 피"는 "생명, 곧 피"로
번역이 가능하며 피가 곧 생명이므로 그것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강조되었습니다.
분명 피를 먹는 행위 자체는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먹는다는 의미만큼은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피를 마시는 것이 잔인하고 기괴한 일일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과 연합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피에 대해 또 다른 측면을 말씀하십니다.
2. 타인의 피를 흘리면 피로 갚아야 한다
동물의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피에 대한 보복을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값을 요구하신다는 것인데요, 창세기 9장 5절에는 이것에 대해 "피를 찾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찾으리라"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אֶדְרֹ֔שׁ(에드로쉬)로 단지 "찾다"는 의미보다 "요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9장 6절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만들다, 짓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싶을 때 히브리어 עָשָׂ֖ה(아사)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단지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는데 사용된 히브리어 בָּרָ֣א(바라)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분의 권위로 그저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정성스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존귀하게 만들어진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해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엄위한 보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살인을 왜 피를 흘리게 한다는 식으로 표현하셨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피"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과 더불어 "고의성"을 언급하고자 하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타락한 시대에는 강포,
곧 타인을 해하는 일들이 만연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존귀한 사람들을 해하고 물건을 빼앗고 업신여겼습니다.
비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그저 괜찮은 일로 생각하셨을리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빈부와 귀천을 떠나 사람을
고의로 악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인류를 위해 특별한 생명을 준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생명을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생명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이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분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목숨까지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예수 보혈의 아홉 가지 의미(히브리서 9:19~22)
보혈이란 말은 보배로운 피 라는 말의 한자어입니다. Precious blood 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의 대부분의 생물은 피가 있습니다. 피는 혈관을 따라 흐르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며 노폐물을 운반하여 간에서 해독하거나 신장에서 독을 빼주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피 속에는 면역력을 유지시키며 나쁜 세균을 죽이는 백혈구라는 것이 있어 우리의 몸에 건강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수많은 종류의 짐승과 사람들에게도 피가 있으되 , 그들의 피는 보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피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보혈’이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서 2,000년 전에 흘린 피만이 인류의 죄를 사하는, 곧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은 9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란 분이 죄를 많이 짓고 죽을 짓을 해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 흘리며 죽었거니…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처음 창조된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처음 범죄하였을 그 때부터, 약 6,000여 년 전에 이미 언약된 피였습니다. 창세기 3:14~15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14 |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
[창] 3:15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 했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 이름을 보면 이씨, 박씨, 김씨, 강 씨, 최씨……등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곧 아버지 성을 따서 성을 붙입니다. 그러니 모든 후손들을 남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혼자서는 자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곧 남자가 있어야 하지요.
맞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의 후손이라 하면 그것이 왠 말인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혹은 서류 상으로 어머니 성을 따서 이름을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아버지가 분명히 있었기에 그 자식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은 다 남자의 후손입니다. 아버지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마리아와 요셉이 동침도 안하고 약혼만 했는데,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1:18~25절입니다.
[마] 1:18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 1:19 |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마] 1:20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마] 1:21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마] 1:22 |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
[마] 1: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마] 1:24 |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
[마] 1:25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
그런데 이 사건이 있기 700여 년 전, 즉 지금부터는 2,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예언의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사 7:14절입니다.
[사] 7:14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했습니다. |
여기서 ‘처녀’란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한 여자를 말합니다(동정녀라고도 하죠?). 영어로는 버진(Virgin)이라 했습니다. 일단 남자와 잔 여성 분들은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여기에 범주에서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아줌마’라고 하지요? 영어로는 미세스(Mrs), 불어로는 마담입니다.
전혀 남자를 모르고 잉태한 사람,’마리아’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의 자격 곧 메시야, 혹은 구원자의 어머니로서의 자격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세주 혹은 메시야에 대한 징조, 곧 영어로는 사인(sign)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은 아들, 곧 남자 아기여야 하며, 그 별명이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곧 이 말은
“원래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주하신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 아기 예수는 곧 아들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창세기 3장 15절의 에덴동산으로 갑니다.
[창] 3:15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 했습니다. |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여자의 후손, 곧 남자 없이 태어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했지요? 곧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단이 가져다 준 죄악과 저주와 사망에서 ‘여자의 후손’이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철저히 멸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상한다는 의미는 곧 사단이 예수님 때문에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공산주의자들은 곧 사단의 무리들인데 그들이 왜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죽이고 핍박하는지 이해가 되시겠지요?
그런데 15절 후반에 “너는…곧 사단은 그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했습니다. 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기 까지는 성공하지만 아주 죽게는 못하고 3일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년에 부활절이 며칠이었습니까? 4월 20일이었지요? 달력을 체크해 보시길 바랍니다. 해마다 세계의 캘린더(달력)에는 이 ‘부활절’이 있고, 또한 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곧 성탄절’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일요일 마다 쉽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는데 곧 일요일, 선데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 드리지 아니하고, 예수 부활을 기념하여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날 도 일요일에 교회 가고 쉬기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매일 보는 달력은 사실 성경 이야기를 숫자로 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력 이야기 좀 더 할까요? 그럼 금년이 2014년인데, 이 2014년이란 무슨 뜻이지요?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 태어나신 지 2014년 즈음 됐다는 말이지요? (서기=A.D= Anno Domini=주후=예수님 태어나신 후!)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의 피, 곧 십자가에 달려 죽고 피 흘리심은 인류가 처음 죄를 지었을 때부터 언약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가 피 흘려 대신 죽어 구세주가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많아 도무지 오늘 하루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기록된 구약 성경은 수백 군데에서 예수님이 오시리라, 예수를
보내주리라는 예언들이 수없이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예수의 종 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예수의 피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옛날 중동지역의 부족이나 사람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몸의 일부분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흘리고 모은 피를 함께 나누어 마셨습니다. 술잔에 피를 타서 마시기도 했지요?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었고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돕고 살았습니다. 피는 생명, 곧 목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피를 섞는다는 것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지옥에 가야만 할 인간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국 갈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죗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란 말 속에 저와 여러분 포함되지요? 곧 ‘우리’라고 부르면 됩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분이 계시면 교회에 나오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히9:22은
히] 9:22 |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
구약시대엔 죄 사함을 받으려면, 죄인을 대신하여 흠 없는 양이나 소를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하고 그 피를 제단에 바르고 제사를 드려야만 했으나, 예수님 시대 이후엔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를 우리 마음에 믿고, 그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 주시마 라고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고, 입으로 시인 하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내 맘대로 살던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로 작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참으로 우리의 모든 죄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피는 ‘칭의’의 피입니다. (칭의=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라고 선언하고 인정해 줌)
성경에는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9)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든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라 하여도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보실 수 있지만, 예수님의 피로 페인트 칠 된 우리 죄는 보지 못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성경에서 한자어로 ‘도말한다’ 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세번 나옵니다. 그 중에 사 43:25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 43:25 |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
-고 했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 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을 없애고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게 합니다.다섯째,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듭니다.
성경에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멀고먼 하늘나라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피는 화평의 피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과 20절에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했습니다. 아벨의 피가 “악한 형 가인이 자기를 죽였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성경은 말씀했는데, 바로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원통한 것을 부르짖게 하여 줍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기도를 도와주시게 될 것입니다.
여덟째로, 예수님의 피는 생명, 곧 영생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예수)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원래 헬라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라어에서 생명을 뜻하는 단어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Bios 인데, 일반적인 모든 생물의 생명입니다. 여기서 biology곧 ‘생물학’이란 말이 나왔지요. 한편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단어는 조애(Joe)라는 단어입니다. 여자의 후손되신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용서하신 피요, 하나님의 아들의 피임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 곧 ‘조애’를 얻는다고 방금 읽은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요, 뜻입니다.
아홉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승리의 피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보면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세상의 어려움과 죄 많은 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모나고 거친 성품도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잠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성도 여러분! 이 귀한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풍성하게 흐르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이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찬송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혹 우리 중 이 예수의 보혈의 피, 우리를 구원하는 피를 아직도 마음에 모시지 못하였거나 믿지 못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걸레는 빨아도 걸레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죄는 아무리 선행을 하고 봉사와 구제사업을 해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는 방법 밖엔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예수의 피가, 바로 나의 죄 위해 흘리신 하나님 아들의 피임을 믿기 원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분 혹 계시면 잠시 손들어 표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나의 죄를 회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죄 대신 지고 죽으신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존경받던 성철 스님께서 임종하기 직전에 임종계를 말씀하셨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한 평생, 남녀를 속였으니 그
죄업은 하늘에 넘치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라. 한 덩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렸네. '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그토록 존경받는 성인, 스님이라고 해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끝까지 위선의 말로 허풍떨지 않고 진솔하게 자기의
참모습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죄가 태산같이 많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고 하는 말씀은 아무나 하는 말이 못됩니다.
또
어느 집사님이 편지를 보내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있는 나마다경 38:8에 '하시 야소래 오도
유무지등야'(荷蒔 爺蘇來 吾道 油無之燈也) 즉 '언젠가 예수가 오시면 나의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 '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석가모니도 위대한 스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므로
영생하는 존재이며 영적인 존재이므로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내세의 영원한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원받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윌리암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란 사람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3000년 된 미이라에서 곡식 단지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완두콩이 있었습니다.
돌같이 딱딱하고,
쪼글쪼글하게 굳어져서 도무지 생명이 없어 보였는데, 가져다가 땅에 심었더니 한 달이 지나서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간증하기를 '일 년 생 식물도 3000년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백 년
미만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겠는가?'하면서 부활과 영생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길을
알지 못해서 성철스님의 말씀대로 영원히 지옥 불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참선이나 착한 일 많이 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했습니다. 작은 돌이나 큰돌이나 물에 던지면 다 가라앉는 것처럼 작은
죄인이나 큰 죄인이나 다 멸망하고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 큰 원리가 하나 있는데, '피는 생명'이라고
하는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즉 죄 씻음을 받아야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데 그 죄라고 하는 독소를 중화시킬 수 있는 약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1. 인류 역사에 나타난 피의 속죄
기독교가
아닌 인간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슨 종류의 피든지 꼭 피를 뿌리면서
신에게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고, 신의 진노를 푸는 제사(Appeasing Sacrifice)를 드렸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A. D. 300년 경 멕시코에서는 지진이 나거나 유행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 이것은 그 나라
백성들의 죄가 많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피를 뿌려 신의 진노를 푸는 제사를 드리는데 그 나라에서 제일 잘
생기고 흠이 없는 청년을 골라서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당사자는 그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그 청년을 외딴 섬으로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대로 먹게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소원을 다 들어 준 다음에 제사
드리는 날이 되면 그 청년의 옷을 벗긴 다음에 온 몸에 빨간 칠, 파란 칠, 까만 칠 온갖 색칠을 다 한 다음에 제사장이 배에
태워 가지고 육지에 도착하면 '내 죄를 가져가십시오. 내 죄를 가져가십시오. '(Take my sins, take my sins.
) 외치고 또 '나를 기억하십시오. 나를 기억하십시오. '(Remember me, remember me. )라고 외치면 그
소리를 다 듣고 피라미드식으로 된 높은 제단에 올려다 눕혀 놓고 제사장이 큰칼을 들어 그 청년의 심장을 푹푹 찌르면 피가 솟구쳐
나온 다음에 제사장이 '이 피로 인하여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선언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안심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한 때는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도 유행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게 되면 이것도 죄
때문에 받은 신의 진노라고 믿고, 가난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돈을 많이 주고 사다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사람을 가운데 놓고
모두 돌을 들어 던지면서 '나는 무슨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돌을 던지면, 그 사람은 피를 다 흘리고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구라파의 색소니(Saxony)에서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다가 후에는 더
좋은 제사를 드린다고 페르시아 전쟁 때 붙들어 온 포로들을 잡아서 피의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 구 소련의 영토였던
스키디안(Schythian) 사람들은 죄를 씻기 위해서 병에다 피를 담아놓고 거기다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죄의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다호미(Dahomy)에서는 해마다 궁중에서 닭이나 거위나 소 등 짐승의 목을 쳐서 피를 뿌리며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를 더듬어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무슨 종류의 피든지 꼭 피에 의해서만
죄 사함 받는다고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레이저(Frazer)교수는 그의 저서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라는 책에서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종교적인 경축일에 반드시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다. '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또 기독교 인간학자 알렉산더 그리골리아(Alexander Grigolia)도 역시 '세계 인구의 95% 이상이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다. '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런 인간 공통의 습관과 신념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신께 죄를
범하거나 어떤 악을 행했을 때에는 어떤 종류의 피든지 꼭 피에 의해서만 속죄 받는다고 믿는 것은 사람이 원래부터 타고난 성품일
것이다. '라고 연구 결과를 말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피
레위기 17장 11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사망인데 반해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만이 죄를 속할 수가 있지, 다른
방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연구한 결과도 모든 인간이 거의 피를 뿌리며 신의 진노를 푸는
제사를 드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피를 뿌리며 속죄의 제사를 드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은, 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죄 없는 피를 다 쏟아 주시면서
'다 이루었다. '고 하셨습니다. 단번에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그의 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결혼 관계를
통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는 피를 가지고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죄 없는
피를 드려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중대한 의식을
행하시면서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빵을 뜯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하시고, 또 붉은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게 하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Covenant)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언약'은 '약속'혹은 '계약'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짐승의 피로도 죄 사함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씻지 못할 죄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금 은 보배를 한 트럭 갖다 바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착한 행실 많이 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불당을 짓고, 예배당을 지어 바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의 피로써만 죄 씻음 받고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① 예수의 피는 구속(救贖, Redemption)의 피입니다.
'구속하다'란 말은 '되사다' 혹은
'한 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되사온다'는 뜻입니다. '저당 잡힌 것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찾아온다. '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죄 값으로 사탄의 종이 되었었는데,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돈 많은 신사가 흑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한 흑인여자를 경매하는 것을 보고 부르는 값의 배를 주고 사서,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문서를 주었더니,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나를 풀어 주려고 나를 샀다구요?', '나를 자유케 하려고 나를
샀다구요?'하면서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냉소하더니, 나중에는 고마운 뜻을 깨닫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더니 '주인님,
제가 감사한 마음으로 주인님을 따라가 섬기겠으니 저를 데려가 주세요. '하고 따라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② 예수의 피는 대속(代贖, Atonement)의 피입니다.
'구속'이나
'대속'이란 단어를 구분 없이 사용합니다마는, '구속'이란 말은 '한 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되 사온다'는 뜻이고,
대속(Atonement)이란 말은 '대신'(substitution) 혹은 '대리'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심판 받을 '대신'
예수님이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가 갚아야 할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Vicarious)'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 '대신' 고난받으신 것입니다. (Suffering in the
place of others. )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대속물'(ransom)이란 '몸 값'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귀한 아이가 유괴되어 갔을 때 그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는데, 결국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③ 예수의 피는 용서하는 피입니다.
'구속'이나
'대속'은 결국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9장 13-14절에 '염소나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즉 예수님의 피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가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가져다가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시고 나서 '낚시 금지'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던져진 죄를 낚시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라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사야 44장 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아침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④ 예수의 피는 의(義)롭다 함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전혀 새로운 의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함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원래는
죄인인데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의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로마서 4장 4절 이하에 '일 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는 가리우심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⑤ 예수의 피는 사탄을 이기게 합니다.
이 우주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살인하고 죽이고 도적질하는 사탄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를 물리치고 이기는 길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피 권세를 의지하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다'고 했습니다. 악한 마귀 사탄을 이기는 길은 예수의 이름과
예수님의 피의 권세 뿐 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탄 마귀를 이기는 길은 예수의 이름과 그 피의 권세 뿐 입니다.
결코 종교라고 다 똑같은 것도 아니고 아무 종교나 믿으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김홍도 목사
우리가 다쳤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붉은 색의 액체가 상처에서 흘러 나옵니다. 이 붉은 액체를 우리는 "피"라고 부릅니다. 피는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액체로, 온 몸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피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 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피가 곧 생명"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온 몸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는 피의 중요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먹길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와 범죄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먹을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끝나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3-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창세기 9:3-4,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이 때부터 인간은 고기를 먹었으며, 피가 생명임을 알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피 흘림의 두 가지 의미
피가 곧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피 흘림에 대한 두 가지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살인의 의미
피가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첫 번째 의미는, 살인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피째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후, 창세기 9장 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창세기 9: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인간이 다른 사람이 피를 흘리게 만들고 그의 생명을 빼앗으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생명을 찾으시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피흘림을 통하여 살인을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창 9: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 6계명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인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을 통하여,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미련한 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간접적인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야만 합니다. 형제와 이웃에게 분노하는 일을 경계해야 하며, 말과 행동으로 모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함부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예수님 닮은 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속죄의 의미
피가 생명이라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속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제물을 끌고 가서 번제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고 그 제물은 반드시 피 흘림을 통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속죄함을 받았습니다.레위기 17장 11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같은 속죄제를 통하여, 우리가 지은 죄는 번제물이 대신 죽어 피를 흘림으로써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내가 죽어야 하는데, 제물이 대신 죽고 피를 흘림으로써 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제물을 죽여 피를 흘리며 속죄함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 생명은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제는 나를 위해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로 멸망이 아닌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얻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용서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널리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주님의 죽으심과 속죄의 은혜로 내가 살았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 나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희생으로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의 속죄의
사랑을 널리 전하여, 죄 속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살려 내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월 6일(목) 레위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먹을 만한 생물(레 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Say to the Israelites: 'Of all the animals that live on land, these are the ones you may eat:
성경에서 금지된 음식 목록
1. 돼지고기
2. 낙타, 사반, 토끼
3. 물고기 중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
4. 새 중에서 금지된 것들
5. 곤충 중에서 금지된 것들
6. 피와 기름
7. 죽은 짐승과 찢긴 짐승의 고기
구약 성경, 특히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음식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법을 통해 제시하신 규정에 따라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로 언급되며, 주로 동물의 종류에 따라 금지된 것들입니다.
1. 돼지고기
금지이유 : 굽이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
레위기 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신명기 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2. 낙타, 사반, 토끼
금지이유 :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들.
레위기 11:4-6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되새김질하거나 굽이 갈라진 중에서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라 낙타는 되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토끼도 되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며
신명기 14:7
다만 되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이라 이것들은 되새김질을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은즉 너희에게 부정하고
3. 물고기 중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
금지이유 : 바다나 강에서 나는 물고기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종류.
레위기 11:10-12
물에서 있는 모든 것 곧
물에서 있는 모든 생물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사체를
가증히 여기라. 물에 있는 생물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신명기 14:9-10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곧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모든 것이라 너희가 먹을 것이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지 못할 것이니라
4. 새 중에서 금지된 것들
금지이유 : 특정한 종류의 새들, 주로 맹금류나 시체를 먹는 새들.
레위기 11:13-19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그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당아와 너새와 황새와 백로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신명기 14:12-18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라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와 새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당아와 너새와 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5. 곤충 중에서 금지된 것들
금지이유 : 기어 다니는 날개 달린 곤충 중 특정 종류.
레위기 11:20-23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메뚜기 종류와 배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는 먹으려니와 다른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6. 피와 기름
금지이유 : 짐승의 피와 특정한 기름.
레위기 3: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거주지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위기 7:26-27
너희가 거주하는 어떤 곳에서도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 말지니라. 무릇 피를 먹는 사람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 죽은 짐승과 찢긴 짐승의 고기
금지이유 : 자연사한 짐승이나 다른 짐승에 의해 찢겨 죽은 고기.
레위기 17:15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는 자는 물론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니 그 후에는 정하거니와
출애굽기 22:31 너희는 나의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요약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양한 음식 규례를 통해 정결법을 주셨습니다.
돼지, 낙타, 토끼와 같이 특정 짐승,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 죽은 짐승이나 찢긴 고기, 특정 새와 곤충 등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과 구별된 삶을 강조하는 의미로 주어졌습니다.
구절 |
영역 |
먹을 수 있는 동물 |
먹을 수 없는 동물 |
2b-8 |
땅 |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동물 (양, 소, 염소) |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
9-12 |
물 |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
물에서 사는 것 중에 지느러미가 없고 비늘이 없는 것들 |
13-19 |
공중 |
시체를 먹는 새들은 제외 곡식(씨)을 먹는 새들 |
독수리, 수염수리, 물수리, 검은 소리개, 각종 붉은 소리개, 각종 모든 까마귀, 타조와 올빼미, 갈매기, 각종 매, 부엉이, 가마우지,따오기, 백조, 펠리컨, 흰 물오리,고니, 각종 푸른 해오라기, 오디새, 박쥐 |
20-23 |
땅과 공중 |
날개가 있지만 발로 걷는 것을 제외한 모든 곤충 (메뚜기, 방아깨비, 누리, 귀뚜라미 같은 것) |
날개가 있지만 발로 걷는 곤충 |

앤서니 라빈스
미국 자기 변화를 위한 최고의 심리학자
한 줄 평 /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둘중의 하나이다.
줄거리, 요약, 서평
작가인 앤서니 라빈스는
미국의 자기계발도서계의 거대한 스테디셀러 거장이다.
그의 책은 과연 '성경'에 버금갈만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로, 오랫동안 꾸준히 팔려왔으며, 그의 1년간의 강의 스케쥴이 미리 예약 되어있고 강연을 듣고자 하는사람들로 인한 교통마비로 인해 본인인 앤서니는 정작 '헬기'를 타고 강연장으로 이동하는 정도라고 한다.
1인기업을 꿈꾸는 분이시라면,
꼭 한번쯤은 읽어야할 정석같은 책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책은, 일단 가격도 만만찮을뿐더러 가격에 버금가게 양도... 빅백수준이랄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지한 내용들이 빽빽히 적혀져 있는 이 두꺼운책을 무려 1년에 걸쳐서, 혹은 10년에 걸쳐서 읽었다는 독자분들의 후기도 참 다양하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책은 그냥 읽는책이 아닌, 바로 따라서 해보는 실습의 내용이 많다.
그것도 아주 진지한 실습.
그럼, 이 진지한 분이 책을 어떻게 썼나 내용을 한번 훑어보자.
1. 자신의 기준을 높혀라.
정말 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라.
그리고 빠짐없이 모두 적어라.
2. 부정적인 신념을 바꾸어라.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라.
이 확신은 당신에게 또한 활력을 줄것이다.
3. 거기에 맞는 전략을 성립하라.
가장 뛰어난 전략은?
원하는 겱결과를 먼저 성취한 사람의 전략과 마인드를 참고하여 똑같이 실행하라.
4.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라.
저자는 책을 읽으며, 자신이 시키는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을것.
그리고 그 적은 답들을 위한 어떤 행동이라도 바로 즉시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장 강력한 힘은 행동에 옮기는 것.
또한, 필자는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조건이 아닌 자신의 결단임을 강조하고 있다.
앤서니는 이 결단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해서 수백번은 반복한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거 말하길, 결단이란 내리면 내릴 수록 좋은것이며, 진정으로 결단을 내리면 우리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결단을 내릴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결단 내리는 법
1. 초점을 어디다 맞출 것인가?
2.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원하는 결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는,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길때 일상적으로 그것이 제대로 안되는 것 처럼 보일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기에, 성공할려면 Long-term (장기간) Focus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
첫째, 관유는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을 상징한다.
성령님이 구약시대에는 구별된 하나님의 일군들에 한해서 하나님의 신의 권능으로만 나타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선물로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친히 함께 하신다.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 하시는 축복이 구약시대에는 없던 신약시대만의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성령시대라 부른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만 있었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는
않았다.
성령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시작한 것은 주후 30년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사도들에게 임하신 때부터이다. 처음에는
사도들에게 임하셨지만, 이후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침례 또는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셨다.
둘째, 관유는 하나님이 특별히 뽑으셨음을 상징한다.
관유는 성막과 기물들과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를 뽑을 경우 선지자가 그들의 머리 위에 올리브유를 부어 임직했다. 예를 들면,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으며(삼상 10:1; 16:12; 왕상 1:45), 사독은 기름부음을 받고 제사장이 되었고(대상 29:22), 엘리사는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다(왕상 19:16).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특별히 뽑힌
자들은 안수례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 자들이다.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 자들이다(엡
4:12). 다윗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왕의 직책수행을 위한 권능의 덧입힘을 뜻한다. 다윗의 개인구원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뽑힌 자들이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봉사의 일을 하는 자들이다. 만인제사장 개념에서는 성도들도 모두 주의 일군들이다. 그러나 안수례를 받고 전임(專任)하는 일군들과는 차이가 있다.
셋째, 관유는 하나님이 뽑으신 자들을 성령님으로 도장
찍으셨음을 상징한다.
또 관유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고 그 사실을 성령님으로 보증하셨음을 상징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하였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셨다. 그 때 하늘로부터 예수님을 보증하는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님과 바울이 말한 성령의 기름부음에는 차이가 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경우는 안수례의 개념으로써 그리스도의 직책을 맡을 자로 뽑히시고 성령님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하신 말씀은 성도들이 구원에로 뽑힘을 받고, 그 구원에 대한 보증과 도장 찍음으로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임한 성령님은 직책수행을 위한 권능의 덧입힘의 뜻이고, 성도들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은 성도 각자의 구원을 위해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넷째, 관유는 하나님께 드려질 제사와 제사를 바칠
자들을 거룩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관유를 만들 때 섞는 향료를 최상품으로 쓰도록 명령하셨다(23,24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거룩히
구별돼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제조된 관유는 제사에 쓰이는 도구들과 그것들을 사용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는 거룩해야 함으로 제사에 쓰이는 각종 제기들은 거룩히 구별된 것들이어야 했다.
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행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도, 예배에 참예하는 성도들도, 예배에 쓰이는 모든 기물과 제기들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깨끗하게 구별되고 거룩하게 바쳐져야 한다. 여기에는 몸과 마음이 겉과 속이 모두 해당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한다. 26-29절에서 “너는 그것을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이며 등잔대와 그 기구이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고 한 말씀은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이는 모든 도구와 장소가 성물로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소의 모든 도구들은 그 자체가 거룩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관유가 발라짐으로써 비로소 성스러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디도서 3장 5절의 말씀대로,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늘 우리 자신들을 세상과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사로 마음을 모아 드려야할 것이다.
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가지고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1. 기름을 바름. 2. 한 조각
어원 / 4886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25회 사용
-
1. 명사, 여성 기름을 바름, 기름부음, 성별, 성유, 출25:6, 29:7,21, 30:25,31
-
2. 명사, 여성 한 조각, 일부, 부분, 몫, 레7:35.
-
관련 성경 / 관유(출25:6, 레8:2, 민4:16), 기름부음(출29:29). [동] 기름 부음 받다(출40:15, 민18:8).
발음 [ hittûwk ]
- 어원 / 5413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명사 녹음 : 겔22:22.
관유를 만드는 재료
* 성소의 세겔이란 보통 세겔, 성소의 세겔, 왕의 세겔이 조금씩 달랐다.
일반적인 세겔의 중량은 11.4g, 그러나 성소 세겔은 9.7g정도이다.
세겔이란 단위가 나오면 대략 곱하기 10g하면 된다.
1. 약체 몰약 500세겔 (약 5,000g)
2. 육계 250세겔 (약 2500g)
3. 창포 250세겔 (약 2500g)
4. 계피 500세겔 (약 5000g)
5. 감람 기름 1힌 (약 3.67L)
상등 향품이란 ‘상등’에 해당하는 원어의 의미는 ‘머리’, ‘최고’이다.
즉 향품 가운데 최고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향품들은 모두가 인도를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되던 것들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가장 좋은 부분이어야 한다.
관유를 만드는 재료는 크게 다섯가지가 들어갔다.
몰약 오백 세겔 분량, 육계 이백오십 세겔 분량, 창포 이백오십 세겔 분량, 계피 오백 세겔, 감람 기름 한 힌.
액체 몰약 – 아라비아, 동 아프리카 등에서 나는 감람과의 관목 껍질을 벗겨 흘러나오는 즙을 채취한 것이다.
애굽에서는 방부제, 페르시아에서는 향수로 진통제, 건위제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무리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었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목적으로 몰약을 가지고 오기도 했었다.
육계 – 애굽, 팔레스틴에서 귀중하게 취급되던 향물이다.
월계수와 같은 나무껍질에서 채취한 것이다.
성소의 세겔이란 보통 세겔, 성소의 세겔, 왕의 세겔이 조금씩 달랐다.
일반적인 세겔의 중량은 11.4g, 그러나 성소 세겔은 9.7g정도이다.
세겔이란 단위가 나오면 대략 곱하기 10g하면 된다.
창포 – 못가나 습한 땅에서 자라는 풀로 얻어지는 물품이다.
주로 인도에서 수입되어 방향제로 사용되었다. 향초 줄거리라고도 한다.
계피 – 계피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방향제이다.
해충을 쫓는 방향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람유 한 힌이었다.
한 힌이란 ‘힌’은 액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라고 보면 된다. 약 3.67L이다.
이런 제조법으로 관유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관유를 회막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구에 다 바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접촉하는 모든 것은 거룩해 진다고 말씀하신다.
관유를 성막의 기구에 바르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영향력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관유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도들을 거룩하게 구별시키는 성령의 사역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제사장의 위임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제사장의 의복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래서 누가보더라도 제사장인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 옷만 입고 있어도, 피로 정결하게 씻지 않으면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속죄제의 희생 제물의 피를 발라야 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고 회막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의식이 더 필요하다. 기름을 바르는 것이다.
기름이 무엇인가? 성령님이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침례로 물로 씻음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다.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옷, 피, 물, 기름(성령)이다.
출애굽기 30:29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
관유를 성막의 모든 기구에 바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바른 것만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바른 성막의 기구에 닿는 것도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 거룩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에, 우리 교회와 닿는 모든 사람이 거룩함을 덧입게 될 것이다.
거룩한 우리가 가는 곳,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거룩함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전도를 하는 것, 제자를 삼는 것이 다 같은 이유이다. 그렇게 거룩함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분향단에서 사용할 향을 만들라고 하신다.
출애굽기 30: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분향단에서 태울 향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유향을 기본 재료로 하여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3가지 향재료를 혼합하여 만들라고 하신다.
이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 자료를 찾아보는 가운데, 박윤식 목사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분향단의 기도의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소합, 나감, 풍자향이 모두 기도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① 소합향(stacte) <나타프>
‘소합향’은 ‘스며 나오다, 새어 나오다, 방울방울 떨어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타프’에서 유래하여, ‘물방울, 향기로운 나무의 진’을 의미한다.
나무에서 진액이 떨어질 때 눈물 모양으로 나오며, 그 맛은 쓰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많이 자란다고 한다.
소합향은 햇빛을 받으면 분출되는 향이다.
실로,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분출하는 소합향의 기도였다.
소합향을 얻는 나무에서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 우리 성도들도 소합향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나감향(onycha) <쉐헬레트>
‘나감향’은 히브리어 ‘쉐헬레트’로, ‘껍질’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중해나 홍해에서 사는 소라 혹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향이다.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향 조개’입니다.
이 가루는 태울 때 진한 향을 내며, 다른 향품과 섞으면 그 향기를 더욱 진하게 하여 오래가도록 도와주며, 철저히 부수어질수록 향기를 더 발한다.
나감향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진 향이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42, 44)라고 기도하셨다.
소라나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만든 나감향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완전히 부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신령한 나감향의 기도를 올렸다.
우리 성도 역시 나감향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③ 풍자향(galbanum) <헬베나>
‘풍자향’은 히브리어 ‘헬베나’로, ‘풍성함, 기름짐, 비옥함’을 가리킨다.
페룰라(ferula)식물의 줄기 밑부분에서 얻는 강한 향의 진액이며, 저절로 흘러나온다. 풍자향은 방부제 역할을 하며, 해충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풍자향은 강한 향의 진액이다.
풍자향처럼 진액을 짜듯 마음을 다 쏟는 기도가 될 때, 모든 죄와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러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이었고 강물같이 쏟아지는 눈물이었다(히 5:7).
예수님께서 온 힘과 진액을 쏟아 기도하시는 순간,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도왔다. (눅 22:43-44). 분명히 기도는 보통의 힘으로는 안 되는 영적 중노동이요, 피나는 투쟁이다. 자신을 진액처럼 쏟아 재물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눅 22:44, 히 5:7).
④ 유향(frankincense) 레보나<희다>
‘유향’은 히브리어로 ‘레보나’이며, ‘희다’(white)라는 뜻을 가진 ‘라반’에서 유래하였다.
고대로부터 유향은 매우 귀한 향료로 알려졌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자생하는 유향나무(Boswellia trees)에 상처를 입혀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을 지니고 있다.
유향은 ‘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향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향과 같이 깨끗한 기도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도에는 단 1퍼센트도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도의 기도도 예수님처럼 깨끗한 유향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이렇게 4가지의 향료를 사용하여 거룩한 향을 만든 후에는 그 향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다. 이 소금에도 의미가 담겨 있는데 소금 언약이란 변함 없는 영원한 약속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 만든 향을 분향단 위에 있는 향로에 넣고 아침과 저녁에 불을 피움으로써 향기로운 향연이 지성소 속죄소에 흘러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은 그 속죄소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이다.
요한1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한1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부음이란 무엇인가요?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기름부음은 본래 목자들의 관습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머릿니와 그 밖에 다른 곤충들이 종종 양털에 들어가곤 했는데 그러한
곤충들이 양의 머리 가까이 들어가 귀를 파고들면 양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목자들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부음은 양털을 미끄럽게 만들고 곤충들을 떨어뜨려 양의 귀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름부음은 축복과 보호, 권한 부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에 해당하는 신약성경 헬라어는 “기름을 묻히거나 문지르다”를 의미하되 함축적으로는 “공직이나 종교 봉사를 위해
봉헌하다”를 뜻하는 크리오와 “기름을 붓다”를 뜻하는 알레이포가 있습니다.
성경 시대에, 사람들은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출애굽기 29:7, 출애굽기 40:9, 열왕기하 9:6, 전도서
9:8, 야고보서 5:14).
사람은 특별한 목적, 즉 왕이 되거나 선지자가 되기 위해, 또는 건축자 등이 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기름부음의 목적이 성경에 부합하는 것인지
확인하면 됩니다.
기름부음을 “신비의 약”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기름 그 자체는 어떤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에게 기름 부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기름을 사용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상징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름부음 받은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죄에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누가복음 4:18-19, 사도행전 10:38).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을 떠나신 후에,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4:16).
이제 모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선택받았습니다(요한일서 2:2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는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1-22).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과 계획의 핵심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육체적, 영적 영역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강력한 명칭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단어는 "마시악"으로,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라는 단어를 얻게 됩니다(Price, 2005).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로 "그리스도"라는 뜻이 됩니다(Mcfall, 2009, 673쪽).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실제로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고, 봉헌되고, 권한을 부여받는다는 의미입니다(Oderinde, 2019).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누군가에게 "바로 여기 이 사람은 내 것이며, 내가 이 사람에게 사명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성한 승인 도장을 찍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주요 그룹의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의례적인 직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했으며,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로 인도했습니다(Müller, 1991, 99-111쪽).
하지만 이 모든 기름부음은 더 큰 것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림자와 같아서 장차 오실 궁극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를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수행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최고의 선지자입니다(히브리서 1:1-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완벽한 희생 제물로 바치신 위대한 대제사장입니다(히브리서 4:14-16). 그리고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요한계시록 19:16).
잠시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개념은 목적과 의미에 대한 인간의 깊은 욕구를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사실, 우리 삶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찾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유대 역사의 전 과정을 형성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약속된 구원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은 그들의 기대를 뒤집어 진정한 구원은 정치적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역사적 개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기름 부음 안에서 그분의 제자로서 걷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 여러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기름부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매일매일 여러분의 목적에 동력을 불어넣으세요!
성경에 따르면 어떻게 기름 부음을 받나요?
성경에 따라 누군가가 어떻게 기름 부음을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지 건조하고 오래된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신성한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표시하는 강력하고 변화적인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의 물리적 행위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머리에 기름을 붓거나 바르는 것이었습니다(Oderinde, 2019). 하지만 이 점을 놓치지 마세요. 이 기름은 그냥 부엌에 있는 오래된 식용유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대로 특정 재료로 만든 특별하고 봉헌된 기름이었습니다(출 30:22-25).
프로세스를 세분화해 보겠습니다:
- 선택: 하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을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결정이 아닙니다! 신성한 약속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외모나 키를 고려하지 말라... 주님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보십니다."(사무엘상 16:7).
- 준비: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은 종종 먼저 깨끗해지거나 정결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예전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면전에 그냥 왈츠를 출 수 없습니다!
- 행위: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때로는 소량만, 때로는 수염과 옷에 흘러내릴 정도로 많이 부었습니다(시편 133:2). 이 기름은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했습니다.
- 선포: 종종 그 사람의 새로운 지위와 역할에 대한 공개적인 선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적인 일이 아니라 커뮤니티 행사였습니다!
- 임파워먼트: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성경은 종종 "여호와의 영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임했다"고 기록합니다(사무엘상 16:13). 기름 부음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신성한 능력을 동반했습니다!
잠시 심리학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기름부음의 과정은 인간의 깊은 욕구를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갈망합니다. 기름부음 행위는 강력한 방식으로 사람의 가치와 목적을 확인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기름 부음 관행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는 대관식의 일부로 왕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화적 관습에 더 깊고 영적인 의미를 불어넣어 당신의 백성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기름으로 기름을 붓는 물리적 행위는 덜 두드러지고 성령의 영적 기름 부으심이 더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누가복음 4: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은 "그러나 너희에게는 거룩하신 분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머리에 바르는 기름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그분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으며, 그분의 영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기 위해 누군가 여러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줄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일의 현실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됩니다!
기억하세요 - 여러분의 기름부음은 여러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좋은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름부음을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사용하세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 기름부음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도록 하세요. 여러분이 기름부음을 따라 걸을 때, 여러분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름부음의 영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능력의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세상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신성한 권한 부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음을 의미합니다(Oderinde, 2019). 마치 하나님께서 "나는 당신을 주시하고 있고, 당신의 인생에 대한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소명, 즉 신성한 사명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의미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깊은 욕구를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그분은 여러분의 가치를 확인하시고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영혼을 위한 신성한 GPS와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의 삶에서 기름 부음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는 그저 양치기 소년이었어요. 하지만 사무엘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후 그는 거인 사냥꾼이자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 부음은 그의 잠재력을 깨우고 그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주입됩니다. 어디를 가든 천국의 한 조각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성령의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누가복음 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름부음은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이와 같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았으니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요일 2:20)라고 기록합니다. 이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고,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잠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그것은 여러분이 신성한 지혜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해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통찰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이는 여러분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섰던 것처럼, 여러분의 기름 부음은 거인과 맞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 이는 여러분의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기름 부음은 여러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 보호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만지는 것은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역대상 16:22). 여러분이 기름부음을 받고 걸을 때는 하나님의 신성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 여러분의 기름부음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관리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 하나님의 말씀 공부를 통해 원천과 연결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에 너무 집중하지 마세요. 여러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겸손하게 그분께 의지하면 그분은 여러분이 꿈도 꾸지 못했던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 여러분의 기름부음을 인식하세요.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안에서 걸어가세요. 그 기름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하여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세요. 여러분이 신성한 기름부음 안에서 걸을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기름부음 받은 인물은 누구인가요?
성경에서 중요한 기름부음 받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역사의 근간을 뒤흔든 영적 거인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흐름을 바꾼 신성한 임명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과 권위로 전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대변자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어 악한 왕들과 맞섰던 엘리야를 생각해 보세요(뮐러, 1991, 99-111쪽). 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이사야를 생각해 보세요. 이 선지자들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름 부음의 능력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초대 대제사장 아론은 하나님께서 기름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을 정도로 성스러운 의식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출 30:22-33). 이 기름 부음을 통해 그는 중보기도와 희생이라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하지만 왕들을 잊지 마세요! 사울, 다윗, 솔로몬 -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성경은 "그날부터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강력하게 임했다"(사무엘상 16:13)고 말합니다. 그 기름 부음이 양치기 소년을 전사의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이러한 기름 부음은 단순히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가시적인 연결을 백성에게 제공했습니다. 이교도 신들과 지상의 왕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 기름부음 받은 인물들은 참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의 삶에 활동하시고 관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기름 부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는 군주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는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적, 심지어 우주적 의미를 지닌 행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름 부음은 더 큰 것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기름부음은 우리를 궁극적인 기름부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의 이정표와도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기름부음을 성취하시고 능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위대한 선지자(신명기 18:15), 멜기세덱의 계통을 이은 제사장(히브리서 7:17), 만왕의 왕(요한계시록 19:16)이십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던 세례 때의 기름 부으심은 이 모든 구약성경의 기름 부으심의 정점이었습니다(Price, 2005).
그리고 제자들도 잊지 마세요! 오순절 이후, 그들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복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한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일어나 수천 명을 믿게 하는 설교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위대한 기름부음 이야기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요일 2:20). 우리는 구약의 의미에서 왕이나 선지자로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모두 '왕 같은 제사장직'의 일원으로 부름받았습니다(벧전 2:9).
우리의 기름부음은 다윗이나 엘리야의 기름부음과는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덜 현실적이고 덜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이 되고, 맛이 없는 세상에서 소금이 되며,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멀리서 이 기름부음 받은 인물들을 동경만 하지 마세요.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되,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기름부음을 따라 걸어가세요! 홍해를 가르거나 거인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윗과 엘리야,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기름을 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러니 당당하게 서서 담대하게 걸어가며 여러분의 빛을 발하세요. 여러분이 기름부음을 받으며 걸어갈 때,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몇 가지 강력한 진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기름 부음과 성령 충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중요한 면에서 구별되는 하나님의 능력 부여의 두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름 부음에 대해 살펴봅시다.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종종 특별한 목적을 위해 누군가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구별하는 신체적 행위였습니다(Oderinde, 2019). 특정 역할이나 임무에 대한 지정과 권한 부여를 의미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거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내적 임재와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성령께 굴복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지속적인 경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름부음의 개념은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이 신자들이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요일 2:20)고 말할 때, 그는 기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신약의 신자인 우리에게 기름 부음과 성령 충만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야 할 몇 가지 뉘앙스가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종종 특정 목적이나 사역을 위해 힘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임무를 위해 너를 준비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영적 은사 및 소명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기름 부음, 영적 은사, 소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여러분의 신성한 목적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기름부음은 특정 업무나 사역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승인과 능력의 도장과 같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능력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영적 은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신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단순히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왕국 사업을 위한 초자연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서 이러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고유한 임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그분의 장대한 구속의 이야기에서 여러분이 하도록 설계하신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될까요?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름부음은 여러분이 소명을 따라 걷고 영적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역의 엔진에 동력을 공급하는 연료와 같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영적 은사를 발휘하여 소명을 완수할 때야말로 여러분이 왕국을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때입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충만함 속에서 걷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은 화려한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순종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수천 명에게 설교하든 조용히 뒤에서 봉사하든,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이 쉬워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 때로는 기름부음이 반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는 왕위에 오르기 훨씬 전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 사이에 수년간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의 아름다운 점은 여러분의 완벽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합당하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여러분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유능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자신의 영적 은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세요.
기름 부음은 강단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시장, 가정, 교실 등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배치하신 모든 곳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다면 그분께서도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감을 갖고 걸어가세요. 그리고 그 기름 부으심은 여러분의 신성한 소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영적 은사를 갖추게 해줄 것입니다.
오늘날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평범한 크리스천이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변화를 가져올 만큼 강력한 진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 사실을 바로잡겠습니다. "평범한" 크리스천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다면, 그분의 은혜로 구속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비범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왕족이며, 선택된 세대의 일원이며, 왕 같은 제사장 직분입니다(벧전 2:9).
질문에 직접 답하자면, 예, 물론 오늘날의 크리스천도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고 또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름 부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구별되게 하는 물리적 행위로 여겨집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기름 부으심이 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1-22에서 "이제 우리와 여러분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에게 소유권의 도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에 그분의 영을 보증금처럼 넣어 주셔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장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이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지만, 모두가 그 충만함 속에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기름부음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교만은 기름 부음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세요.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은 깨끗한 그릇을 통해 가장 자유롭게 흐릅니다.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의 보혈이 당신을 깨끗하게 하도록 하세요.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함을 원하는 것보다, 성공을 원하는 것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기름부음을 갈망하세요.
순종을 연습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은 여러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걷다 보면 여러분의 삶에서 기름 부으심이 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기름부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흘러나옵니다. 예배할 때, 기도할 때, 그분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분의 기름부음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세요. 말하자면, 기름 부으심은 종종 여러분이 물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 나타납니다. 봉사할 때, 사역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은사를 사용할 때 그분의 기름 부으심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을 위해 기름 부음을 구하지 말고 임무를 위해 기름 부음을 구하세요.
그리고 이것을 아십시오 -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동일한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로마서 8:11). 여러분은 부활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하여 여러분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키세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기름 부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기름 부음에 대해 가르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깊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 영적 거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초대 교회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세례 및 견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2세기 후반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세례 후 새 신자가 모든 신자의 사제직을 상징하는 축복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은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존재임을 표시하는 인장으로 여겨졌습니다.
4세기 예루살렘의 시릴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세례 후 기름 부음이 신자가 성령을 받는 상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 거룩한 세례에 합당하게 여겨졌으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며, 너희의 거듭남으로 그 이름을 증명한다"고 썼습니다. 시릴에게 기름 부음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바로 그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름 부음을 신자의 삶에서 계속되는 현실로 보았습니다. 3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속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를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2세기에 글을 쓴 이레네우스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이 기름부음이 예수님을 통해 신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단순히 영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름 부음이 실제적이고 심지어 육체적인 효과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4세기의 황금 혀를 가진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음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육체적 치유의 수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초대 교부들은 기름 부음에 대해 강력한 무언가를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신자의 본성을 변화시킨다고 가르쳤습니다. 단순히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특별한 소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모든 신자의 타고난 권리로 여겼습니다. 밀라노의 암브로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름 부음을 받아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갖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 교부들은 기름부음이 쉬운 삶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진 아프리카의 주교 어거스틴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시련과 핍박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기름부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기름부음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기름부음이 변화를 일으키고 힘을 주며 모든 신자에게 제공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초대 교부들은 단순히 신학적인 사변에 몰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의 생생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세기에 세상을 뒤집어 놓은 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름다운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동일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힘을 주셨던 동일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도 힘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력한 기독교에 안주하지 마세요. 기름부음을 구하세요. 그 안에 거하세요. 그 안에서 여러분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키세요.
예수님은 어떻게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이신가요?
예수님을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성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칭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실제로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기름부음은 장차 오실 궁극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그림자이자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옛 선지자처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단번에 자신을 바치신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기 위해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지상의 왕국만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 들어와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정말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예수님은 옛날의 선지자, 제사장, 왕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측정할 수 없는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나니 이는 그가 성령을 값없이 주시기 때문이라"(요 3:34)고 말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름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는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사 61:1)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름부음은 그분이 하시는 일뿐만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기름 부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의 기름 부음을 받았으므로 모두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요일 2:2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나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동일한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름 부음 받은 자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의 기름 부으심이 됩니다.
궁극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예수님은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향이 필요하신가요? 그분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십니다. 용서가 필요하신가요? 그분은 당신을 위해 속죄를 이루신 제사장입니다. 보호와 공급이 필요하신가요? 그분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측면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마세요.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예수님은 여러분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선지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제사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왕으로 부름받아 적을 다스리고 삶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말할 때 그분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고백하는 것임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자신의 기름 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기름부음 받은 자의 능력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하여 여러분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키세요.
현대 기독교에서 기름 부음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현대 기독교에서 기름 부음에 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이제 기록을 바로잡을 때입니다.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드리겠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은 기름 부음이 목회자, 전도자, '초영적' 기독교인 등 '특별한'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신자가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요한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으니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요일 2:20)
이는 일부 소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기분이 좋아지고 성령에 '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임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은 주로 여러분의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봉사를 위한 권한 부여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지,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부음이
노력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오래 기도하고, 충분히 열심히 금식하거나, 충분히 열심히 예배하면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기름 부음은 항상 눈에 보이거나 극적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리거나 즉각적인 기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기름부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작용합니다.
엘리야는 바람, 지진, 불이
아닌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 부음을 받으면 영적으로 '도착'했다고
믿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으면 더 이상 어려움을 겪지 않고 모든 해답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믿음의 거인이었던 바울도 자신의
약점과 영적 여정에서 "계속 나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비판이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이 있습니다.
일부 리더는 '기름 부음'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시험하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부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 부음은 기적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자녀를 인내하며,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등 일상적인 일에도 적용됩니다.
기름 부음은 영구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울처럼 기름 부음이 사라지거나 다윗처럼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 새로운 기름부음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 부음이 일종의 영적 상품처럼 사람 간에 전달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할 수는 있지만, 기름 부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기름 부음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멋지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정의(누가복음 4:16-19)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 기름부음에 대해서 좀더 정리하고 살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늘 생각해 왔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잘 정리되었다 라고는 볼 수 없는데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시리즈를 살펴볼 때, 현재 영국의 웨스트 민스트 채플 담임으로 계시는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쓴 기름부음이란 책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사역과 같이 가는 토대가 되어질 때, 하나님의 교회가 놀라웁게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동일한 토대와 이해 위에서 교회의 각 분야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면 예배, 리더십이면 리더십, 중보기도면 중보기도, 사역 중에서도 예언 사역이면 예언사역, 치유사역이면 치유사역, 이렇게 각 부분들이 회복되어야 되는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동일한 이해의 바탕, 즉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되, 사람마다 각각 세워 가시는 분야가 다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리더십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이시고, 어떤 분은 중보기도로 세워 가시고, 어떤 분에게는 예언사역을 세워 가시고, 어떤 분에게는 치유사역을 세워 가시고, 이렇게 각 분야별로 세워 가시는데, 중요한 것은 동일한 가치관 위에서 세워 가시는 분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또 많은 경우에 그분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알게 하심으로써 우리 신앙의 각 요소와 교회의 사역의 각 부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도움을 받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하나의 부분들이 너무나 소중한 부분들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마틴 로이드 목사님이 계셨던 교회에 후임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약 25년 가까이 사역하고 계신데,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분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라는 책인데, 원래 영어 제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갑자기 능력으로 임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다루는 책입니다. 그래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책을 통해서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쓴 책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부분 한 부분이 참 영적으로 뛰어나고 가치관이 너무 귀한 분입니다.
영국의 웬스터 민스터 채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계실 때는 주로 강해 설교로 유명하셨습니다. 그분은 많은 책을 쓰셨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아마 그분을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쓴 책 중에 하나가 “부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생전에 늘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고대하고 기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후임으로 가신 분이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인데, 이분이 가신 뒤로 하나님께서 그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놀랍게 방문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때는 폴 케인 목사님에게 하나님이 그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가라고 하셔서 2년 동안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과 같이 동역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과 폴 케인 목사님이 같이 영국에서 말씀과 성령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도 하셨습니다. 그 설교가 지금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 재미있는 것은 말씀을 대변하는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세미나 내내 성령에 대해서 설교하시고, 반대로 성령을 대변하는 폴 케인 목사님은 세미나 내내 말씀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웬스터 민스터 채플에서도 주일 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지금 우리처럼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놀라웁게 함께하시고, 또 말씀을 전하고, 기도사역도 합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도 기도사역을 하는데, 전반적으로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도 정해진 좌석이 있어서 기도받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 때라도 거기 앉으면 예배 끝나고 기도사역자들이 기도해 줍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전통적인 교회인데, 놀라운 새로운 갱신의 역사가 그러한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 중에 “어제의 기름부음, 오늘의 기름부음, 내일의 기름부음”이란 제목으로 90분 정도의 설교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쓴 “기름부음”이란 책이 폴 케인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과 아주 일치됩니다. 책을 쓰기 전에 설교했으니까 그 내용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은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께서 쭉 비추시면서 그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풀어가는 형식으로 아주 귀한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그 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조나 구도의 전반적인 이해는 책에 나온 내용들인데, 책에 나온 내용들만이 아니고 말씀드린 대로 제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제 개인이 먼저 배워가면서 그 말씀을 토대로 해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적용할 부분들은 적용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무엇인가(정의)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좋은 정의는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기름부음이 함께 할 때, 성령의 은사가 쉽게 역사한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은사가 쉽게
역사할 때 그곳에 임해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기름부음이 함께 하면 성령의 은사가 쉽게 작동한다.
모든 쉬운 것이 다 기름부음은 얘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먹는 것, 노는 것, T.V 보는 것,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 이러한 것들은 쉬운데, 이런 것들은 기름부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할 때는 성령의 능력이 쉽게 작동하고, 어떤 긴장이나 피곤함이 없이 작동합니다.
한번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홍콩에 있는 재키 플린저를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키 플린저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을 길거리 암흑가(마약중독, 매춘 등으로 얼룩진 지역)로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직접 사역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제가 설교하다 보면 똑같은 설교라도 어떤 때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을 압도 하시면서 놀라웁게 깨우치시고, 만지시고, 운행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똑같은 설교라도 설교하기도 힘들고 목은 목대로 아프고 사람들은 집중도 하지 않고, 말씀은 그냥 흩어지는 것 같고, 땀은 뻘뻘 흘리고, 자신도 없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기름부음의 차이입니다.
폴 케인 목사님이 가끔 설교하면서 “기름부음은 확신이다.”그랬는데, 전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는 담대하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이 뒷받침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재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전혀 확신이 없습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땀만 뻘뻘 흘리고, 빨리 내려가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 은사가 쉽게, 그리고 자유롭게 작동합니다.
한번은 잭 디어 목사님이 사역이 끝난 다음에 폴 케인 목사님하고 같이 걸어가면서 “오늘 괜찮냐” 그랬더니 태연하게 하는 말이
“오늘은 그런 날 중에 한 날이야” 라고 그랬답니다.
무슨 얘기냐면, 사역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설교 시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함께 하실 때가 있어서 그야말로 청중을 압도 하시고 강력한 일을 이루시고, 또 어떤 때는 말씀이 강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역시간에도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말씀을 그냥 더듬고 횡설수설하고 내용도 별로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설교가 끝나고 폴 케인 목사님이 강단에서 내려오면서 잭 디어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아-오늘 참 힘들었다
폴 케인 목사님에게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말씀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데 사역은 별로 안 나타나고, 어떤
때는 말씀은 별로인데 사역은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어떤 때는 둘 다 강하게 나타나고 이런 일이 대부분인데 그날은 말씀도 전혀
핵심을 찌르지 못했고, 사역도 별 다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이 일을 안하시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날 기름부음이 함께 안하시면, 땀만 뻘뻘 흘리고 사역시간에도 성령님의 움직이심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 그날 너무너무 힘듭니다. 그것이 아직은 자연스럽게 안 받아 들려집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조용히 혼자 있고 싶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다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뭔가를 일으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부음이 나타날 때, 그것을 시작할 수도 끌 수도 없다.
기름부음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사람이 컨트롤을 잃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전 14장 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다시 말하면 지금 나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이 있으니까 나를 제재할 수 없어 나는 말해야 돼 멈출 수 없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예언하고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예언이 임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중단하고 새로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한 그 사람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고전14:30). ‘제재를 받는다.’ 이 말은 우리 마음대로 기름부음을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기름부음을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 생전에 한번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밖에서 빌 웨이놀드 라는 교회 사무장 집사님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러니까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그분을 존 윔버 목사님에게 소개 해주고 싶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 집사님이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들어오자마자 존 윔버 목사님이 빌 집사님을 주시하며 보면서 “당신은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고넬료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빌 집사님의 두 아들에 대해서 예언하기 시작하는데, 몇 년 전에 폴 케인 목사님이 그곳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왔을 때, 그 집사님에게 예언했던 내용을 그대로 예언하더랍니다. 참고로 존 윔버 목사님은 빌 집사님의 아들이 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I cant turn dumb, I cant turn dome” “나는 그것을 틀수도 없고 끌 수도 없다” 이 말은 내가 내 임의대로 기름부음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임하시는 것이고, 기름부음이 떠나면 떠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점에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그 예언을 주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건 없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를 순종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가르치는 것, 경배하는 것, 중보기도 하는 것, 설교하는 것, 직장에 가서 일하는 것, 가족을 돌보는 것, 다 잘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음이 언제 임하실지 또 언제 성령의 기름부음이 거두어질지는 성령님이 선택하십니다.
셋째,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의 관계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한편으로는 서로 상호교환(交換相互)해서 쓸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어떤 때는 은사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음은 단순히 은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의 활력이 은사가 잘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은사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심지어 자기의 기름부음에 기름부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은사는 항상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말하는 은사는 사역으로서의 은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활발하고 놀라웁게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삶에서도 하루는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함께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5:17) 그럼 전에는 함께하시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럼 왜 누가복음 5장 17절에서는 ‘하루는’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날 치유의 기름부음이 더욱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나도록, 혹은 치유의 기름부음이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도록 그날 특별히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상호교환(相互相互)해서 쓸 수 있으되, 기름부음은 보다 광범위한 것으로써 기름부음이 은사가 잘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라는 것입니다.
넷째,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동의어다.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령이 임한 것과 기름을 부으신 것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전체적으로 기름부음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그런데 같은 저자가 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여기에 보면, “기름부음이 너희 속에서 너희를 가르치시리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바로 기름부음을 성령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임의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주권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역사하시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을 때도 성령님은 움직이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전반적으로 볼 때, 성령의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능력인데,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의 은사가 쉽고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성령님은 모든 기독교인들 속에 함께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고, 반면에 에베소 4장 30절에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데살로니가 5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성령님을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성령께서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반면에 사무엘상 19장 23절에 보면 성령님이 떠나셨는데도 다시 성령께서 그에게 임해서 그가 예언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사울은 왕으로서 버림받았는데, 사무엘상 24장 6절에 보면 훨씬 이후인데도 성경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하게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점점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구원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라고 말했고, 폴 케인 목사님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 하기 위한 비결은 “첫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둘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셋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라고 얘기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기름, 혹은 기름부음의 용어
첫째, 기름부음은 기름을 의미함.
출애굽기 30장 25절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 유가 될지라”
여기 관유가 바로 기름을 말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a sacred anointing oil, 거룩한 기름 붓는 기름”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이 관유(기름)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26절에서 28절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이렇게
모든 성소에 있는 기구들에 발랐고, 그 기름이 그것들에게 발라졌을 때, 그 기구들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29절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둘째, 제사장들을 구별하기 위해 기름을 바름.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출30:30)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레10:7)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레21:10-12)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가 관유를 취하여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관유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 발라 거룩하게 하고 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레 8:10-13)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드리지 아니함으로 불이 하나님께 나와서 그들을 사르는 사건입니다. 졸지에 그것도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었는데,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 자녀들을 위해서 슬퍼할 기회도 주시지 않고, 심지어 머리도 풀지 못하게 하시고, 성전 문도 떠나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론에게 거룩한 관유, 즉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레10:5-7)
이처럼 기름부음의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는 의미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드려졌고, 매우 심각한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심각합니다.
제가 그 부분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구절에서 그러한 내막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떤 분의 책을 봤는데, 그분 같은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예언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예언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고 있었는데, 어떤 A라는 사람이 그분 앞에서 자꾸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참다못해서 A라는 사람에게 저주 비슷한 말을 퍼부어 댔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그 저주한 말이 그대로 그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그 일로 인해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몇 달 동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비춰 주셨던 바는, 기름부음이 함께 할 그 시점에 그분이 그 기름부음을 가지고 범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약의 제사장들을 구분할 때, 하나가 기름을 붓게 하셨는데 그 기름부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중대하고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1장 10절-12절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그 기름부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왕들을 세울 때, 기름부음을 사용함.
사무엘상 10장 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울이 실재로 왕이 되었고, 하나님의 뒷받침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예언한 대로,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 갈 때, 그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성령이 놀라웁게 임해서 그가 예언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냐’ 라고 말할 만큼, 성령이 그에게 강력하게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10:2-11)
사무엘상 16장 1절을 보면 사울이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다고 하셨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4장에 가면 성경은 여전히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린 이후에도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성령의 기름부음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고, 다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름부음이 성령의 임하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크게 감동되니라” 이 말은 N.I.V 성경에는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David in power"이라고 되어있는데, ‘여호와의 영이 다윗 위에 능력으로 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붓는 것과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무엘상 10장 6절에 성령이 사물에게 놀라웁게 임했고, 9절과 11절에도 역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여기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이 시점에서도 사울은 여전히 왕입니다. 그래서 왕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은 떠나 있습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떠났는데도 나중에 보면 다시 그에게 성령이 임해서 예언도 했고, 또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제의 사람입니다. 아직도 실재로 사역을 하고 있고, 영향력의 위치도 여전히 가지고 있고, 타이틀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떠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면 사무엘상 16장 13절 이후로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그 위에 임하여 계시고, 그 위에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왕관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내일의 사람입니다.
2월 5일(수) 레위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관유(레위기 8:10)
Then Moses took the anointing oil and anointed the tabernacle and everything in it, and so consecrated them.
레위기 8:1-9. 제사장 위임식
제사장(폰티팍스. Pontifax) - 다리를 놓는 사람
시편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 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거룩한 관유(출애굽기 30:22~33)
유질 몰약 500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와 향기로운 창포 각 250세겔과, 계피 500세겔을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만든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상등 향품을 재료로 하여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든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이다.
관유의 용도는 회막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지성물로 구별하는 것이다.
지성물은 무릇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여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관유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의 몸에 붓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관유는 상등 향품에 감람 기름을 섞어 만든 향기름이다. 향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기름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소와 그 모든 기구는 그것에 발리운 향기름에 의해서 지성물로 구별되며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거룩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속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향기름으로 발리운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향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속하여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러한 기름을 만들거나 몸에 부으면 죽는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이 내려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다. 그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얻었다(마9:20-21, 14:36).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증거 하는 사도들과 함께 하시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행19: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출30:34-38 증거궤 앞에 두는 향품
재료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무게로 한다.
그것으로 향을 만드는데 향을 만드는 법대로 만든다. 그 향에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 향을 곱게 찧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날 곳이다. 이 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거룩하다.
모세가 만든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만들지 말 것이다.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향을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향을 만들게 하시고 곱게 찧은 그 향을 성소 안의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친히 맡으신다. 향을 두는 증거궤 앞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실 장소이다. 여호와께서 향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밖에 두게 하시고 아론으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에 여호와께 향을 사르게 하셨었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만날 장소였다(출30:6-9). 모세는 언약체결의 중보자요, 아론은 백성의 제사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향을 증거궤 앞에 두게하시고 맡으시며, 제사장의 향을 속죄소 앞 휘장 밖에서 사르게 하시고 맡으신다. 거룩한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만나시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인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여호와를 섬기며, 직접 이러한 친교에 아직 들어갈 수 없다.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영원한 교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그 기록된 형식대로 여러 번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단지 제가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그 기록된 특징을 드러냄으로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것이고 더 다른 좋은 방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그렇게 해 놓고 상등 향품이 무엇이냐? 이제 몇가지 쭉 이야기를 한다. 24절에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도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니라. 그러니까 관유는 향기름이다 그 말이다. 어떤 향기름이냐면 고급 향 기름이다 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처음에 상등 향품을 취해라. 그리고 상등 향품의 종류를 쭉 이야기 하고 향을 만드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어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한 관유니라. 그런 표현 방법들을 유의하시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관유는 고급 향 기름이다 하는 것을 그냥 알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향과 기름을 섞어서 향기름이다. 왜냐하면 감람 기름에다 섞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의 용도는 26절에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모든 기구에 쭉 발라라. 그 기구들을 회막과 증거궤부터 쭉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28절에 보면 번제단과 물두멍과 그 밭침에 바르면 지성물이 되는데 지성물은 어떤 의미로 지성물이냐? 그것의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지성물이다. 향기름이 발라졌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다. 그러면 성소의 기구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론에게도 그것을 발라서 하나님을 봉사케 해라. 그리고 아론과 일반 백성들은 그것을 만들지도 말고 몸에 붓지도 말라. 아론에게는 부어도 일반 백성에게는 붓지 말아라. 이제 아론과 일반 백성들을 구별해 주고 있다. 흐름을 알겠지요? 그러니까 성경 본문을 차분하게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거룩한 관유의 재료는 상등 향품이다. 유질 몰약 500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와 향기로운 창포 각 250 세겔과, 여기 보니까 향기롭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상등 향품으로 취할지니 그렇게 해 놓고 향 기름만 쭉 나열해도 되는데 향기로운 뭣 해가지고 그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계피 500세겔을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만든다. 이것이 재료다. 그러니까 재료는 고급 향이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상등 향품을 재료로 하여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든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이다. 이 향은 제조하는 법은 향단에 사르는 향 제조법일 것이다. 이 법으로 만드는데 향 기름을 만든다. 감람 기름 한 힌을 섞어서 만드니까 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 이다.
관유의 용도는 회막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지성물로 구별하는 것이다. 지성물은 무릇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여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하나님의 향기름이 발라진 모든 것은 지극히 거룩하다. 그러니까 이 지극히 거룩한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도 향기름을 발랐다. 그러니까 성소적인 영광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있다. 그 옷도 성소 내부의 색깔로 옷이 직조되어 있다. 그것이 거룩한 관유에 대한 내용들이다.
관유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의 몸에 붓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성소밖에는 이것을 부을 수 없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아론 외에 부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향 기름이 발라진 성소와 아론은 지극히 거룩하고 나머지는 아니다. 어느 정도 거룩하냐면 그것을 만지는 자가 거룩해 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거룩케 하는 거룩은 누구에게만 있는가? 실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 모든 생명의 근원이어서 그로부터 모든 거룩이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성소와 아론은 그런 거룩으로 발라라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는 그것을 발라서는 안된다.
설명이다. 관유는 상등 향품에 감람 기름을 섞어 만든 향기름이다. 향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기름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그들이 감람 기름을 짜서 이런 저런 용도로 쓰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기름진 것 생명의 충만으로 복 주신 것이 감람기름 그런 것이다. 더구나 이 감람 기름도 향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참 기름 정도가 아니라 아마 향이 날 것이다. 그런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선물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소와 그 모든 기구는 그것에 발리운 향기름에 의해서 지성물로 구별되며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여기서 거룩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속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향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게 된다 했을 때 죄인에게 향 기름이 발라지면 도덕적으로 느닷없이 깨끗해진다 그런 것이 아니라 향 기름이 발라진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 생명이다. 그것에 발리 우거나 또 접촉되면 그것과 연합이 된다. 그러니까 향기름을 바르면 성소밖에 있지 않고 성소 안에 있다. 그런 의미로 거룩하게 된다 그런 말이다. 그러지 아주 더러운 사람이 기름 목욕을 해 버리니까 느닷없이 깨끗해 저버리고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관계로 살기 때문에 그 거룩을 누리는 것이다. 자꾸 결혼 관계를 예로 들고 있다. 가령 아무리 여자가 도덕적으로 얌전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알지 못하면 사람은 착한테 못 쓰겠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마누라 아니다. 소위 세상에서 싸움을 잘하고 집에서 남편한테만 잘해도 좀 짬짬해도 좋은 마누라라고 혹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만 평가를 못한다 그 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로 모든 윤리를 설명하지 하나님은 거룩하니까 절대적인 기준을 줘서 백성을 대면한다 그런 방식으로 대면하지를 않는다.
아까 어떤 형제가 질문한 것처럼 살인하지 말아라.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을 몽땅 죽여라 해서 변덕이 심해서 이렇게 됐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끼리는 죽이면 안되고 밖에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라 그런 말인가? 그런 문제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박에는 하나님의 대항자로 있다. 성경은 그들을 죽었다 원수다 그렇게 되어 있다. 더구나 가나안 땅 밖에 사람을 몽땅 죽여라 하지 않고 가나안 땅 사람을 몽땅 죽여라 했다. 그러면 그냥 땅에다가 집 짓고 사니까 열나고 그것은 전부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로 구별했고 그것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왕국이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은 거기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들을 전부 죽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과 전쟁하는 관계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예수 안에서 끝났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니까 이제는 구약 방식으로 있지 않다. 교회는 이방인과 전쟁하는 관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까 세상을 정복했다. 그러니까 그전처럼 전쟁하고 원수를 정복하고 그런 방식으로 있지를 않다. 지금은 오히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나라로 변화되어 있다.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하는 절대적인 도덕 개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경영했는가를 따라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백성의 삶의 윤리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 때 이방인을 죽이라고 했는데 안 죽이고 살려주면 사울처럼 자기가 죽어야 될 것이다. 사울이 보니까 소가 튼튼하고 사람도 쓸 만 하니까 갖다 써야 되겠구나 하고 안 죽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제물을 기뻐하는가? 그렇게 해서 오히려 사울은 그 원수한테 죽임을 당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 판단으로 그들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살인하지 말라 한 개념도 단순한 도덕적인 절대적인 기준 그런 방식으로도 구약 때도 집행이 안된다. 이제 그것이 완전한 방식으로 집행된 것이 신약 때 예수의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신약 때 완전한 방식으로 집행이 된다. 이제는 소위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 그런 개념보다도 교회가 우주적인 나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원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이 안된다.
그러니까 저도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님이 고약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일단 옳기는 옳겠다고 고개를 끄떡 끄덕 했지만 그 때도 안 믿었으면 아주 불사스러웠을 것이다. 일단 믿으니까 아버지가 하라고 한 것이 옳겠지. 우리 아버지 아니면 이해가 되어야 믿겠지만 우리 아버지니까 이해를 안돼도 옳겠지요?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면서 읽어도 이해는 안되었다. 나중에 성경을 알고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항상 돌 판에 새긴 법을 절대적인 도덕 규칙 이런 방식으로만 읽어 버리면 구약의 문제는 이해가 안되고 더구나 구약 때 솔로몬이 아내를 천명쯤 두고 살았는데 간음했다고 법정에 서지를 안했다. 그러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는고? 잘 이해가 안될 것이다. 우리들은 도덕법으로 이해하면 간음하지 말라 딱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 그러니까 솔로몬도 간음 다윗도 간음하고 전부 벌을 줬으면 아하 하나님이 공평하고 명쾌하구나 알겠는데 그전에 천명을 둔 사람도 왕이고 더구나 평화의 왕이고 신약 교회는 둘 정도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고 이것은 고약한 선생을 만나 버린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여유 있게 봐 주셨는데 신약은 조금만 해도 이런다. 그러니까 참 난처하겠다. 아 왔다갔다하고 복잡하다. 이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인류라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라 인류로서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도덕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서 아버지를 순종하고 살수 있도록 되어 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 아버지를 나타내야 한다. 그런데 신약 교회는 소위 어른의 교회가 되었고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여러분은 모세 보다 훨신 밝은 빛 가운데 있고 훨신 큰 능력 가운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윤리가 요구된다. 그러니까 구야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교회에서는 소위 도덕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배운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대하시는 줄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그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게 되고 또 거기 접촉하게 되는 것이 거룩하게 된다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낸다. 왜 모든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성소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론도 그렇게 되어 있다. 거기 접촉하면 거룩하게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무슨 제물을 가져다 아론의 손으로 제단에 드리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양식으로 거룩하게 된다. 그러면 무슨 음식물을 소독을 했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방부제를 넣어서 소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상에 놓는다는 의미로 거룩하게 된 것이고 사람도 기름을 바르면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다는 의미로 거룩하게 된다.
향기름으로 발리운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향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그러니까 아론과 그 아들들은 성소에 있는 기름으로 발라졌기 때문에 성소와 같은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속하여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러한 기름을 만들거나 몸에 부으면 죽는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구약은 전부 이런 간격이다. 가장 근본적인 간격은 하나님의 보좌와 제사장을 가리고 있는 휘장이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 그것뿐만 아니라 향 기름을 일반 백성이 만들거나 부으면 죽는다. 왜냐하면 일반 백성에게는 아직 성소에 속한 거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성소 밖에서 성소에 속한 거룩을 스스로 누리면 아직 주지 않았기 그는 죽어야 된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이 내려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다. 그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얻었다(마9:20-21, 14:36).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증거 하는 사도들과 함께하시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행19: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구약의 가나안 땅의 감람 기름 이것은 아주 귀한 기름이고 향내나는 기름일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감람나무가 무성한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안식의 거처로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 땅에 감람나무도 말갛게 말라지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도 없으면 그것은 황무지다. 그래서 이 감람 기름은 귀한 손님한테 발라 주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기름 바른 의식이 없어서 잘 모를 것이다. 그래도 옛날 멋쟁이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고 그런다. 그래서 파리가 않으면 미끄러지겠다고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요새는 기름 바르면 웃기는 사람이다. 요새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구두만 광이 나도 촌 사람 같고 나같이 중간색으로 신어야 세련된 사람 같다. 아마 옛날 같으면 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손님이 오면 발닦을 물을 주고 기름을 발라 준다. 가령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초청을 받았는데 한 여자가 귀한 기름을 바르고 눈물로 발을 닦는다. 그래서 너는 내가 들어올 때 감람 기름도 붓지 아니했는데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니까 귀한 기름으로 붓는 것이 아니냐? 이것을 봤을 때 우리는 그 의식을 몰라도 아하 귀한 손님에게 기름을 바르는구나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그런 정도 귀한 기름이 아니라 아주 최고급 향으로 범벅한 기름이다. 그 향도 조금식 넣은 향이 아니다. 거기 보면 성소의 세겔대로 제한을 했다. 성소의 세겔은 일반 세겔의 갑절이다. 그러니까 오백세겔 하면 우리 나라 작은되로 열대일 것이다. 향도 많이 넣은 식이다. 그리고 고급 향이 여러 가지다. 그러니까 향으로 범벅한 것이다. 이런 향은 세상이 맡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주 성소의 모든 기구와 제사장을 최고급 향으로 바르게 했다.
그것이 백성이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다. 그러니까 기름을 생명의 충만함이면 향은 하나님이 기뻐 맡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소는 완전히 향 집이고 기름 집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최고 기분 좋아서 충만한 생명으로 거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사장도 그 향과 기름으로 발랐는데 아직 백성은 발라 주지 않았다. 백성은 제사장에게 무엇을 가져오면 제사장을 통해서 그 제물도 향 기름으로 거룩하게 되고 또 성소에 접촉함으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이 드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나중에 보면 불로 태워 드려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소밖에는 이런 기름으로 발라진 적이 없다. 성소 밖은 하나님이 그렇게 향기로운 향으로 맡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에게 발라지면 그는 죽어야 되고 아직은 아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관계다. 완전히 향에 취해 계신다. 그래서 완전한 교제 가운데 계신 것이다. 왜 제사장이 성소의 향으로 완전히 발라져 있다. 그런 기쁜 교제 가운데 있다. 그것이 여기 성소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성소와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가 하는 출애굽기의 언약 체결의 문제다 그런 말씀이다.
그러면 이것이 신약 교회에서는 어떻게 주어졌는가? 우리 예배당 들어오면 냄새가 나더라. 왜냐하면 그러면 우리는 냄새가 덜 좋으니까 안 좋은 것인가? 그래 가지고 문성명이처럼 묘한 향이나 뿌려 놓고 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에서 가장 기뻐 맡으시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 향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신약 교회는 향 기름을 바르고 그런 것은 없다. 신약 교회는 절에 나온 사람들보다도 의복이 단정하지 않다. 절에 올라간 사람들도 단장하고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슬리퍼를 끌고 살살 와서 아빠 아빠하고 가도 봐 준가 몰라. 옛날 노인만 같아도 혼날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신식이 되었다. 그런데 절에 올라간 사람도 깨끗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도 그렇게 안 나온다. 그러면 그들이 훨씬 거룩하고 깨끗한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항상 구약 언어 개념으로 이해하라 그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됐는가? 우리의 대표자는 아론처럼 향 기름을 바르고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아니다. 그는 향 자체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또 성령이 머물러 계신 분이다. 요한 복음에 말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분이고 성령을 주셔서 씻으신 분이다. 그는 이처럼 성령으로 머물러 계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휘장밖에 세워두시고 기뻐하자 냄새 맡자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신 분이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맛보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하나님이신데 그는 본래부터 아버지와 영원한 교제 가운데 계신 분인데 그런 관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신 분이다. 그가 우리의 대표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 계신다. 하늘 보좌 우편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완전한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신것이고 가나안 땅의 향을 바른정도가 아니다. 그는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로 거기 들어가셨는데 구약 때는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휘장밖에 아론이 있었고 백성은 성소밖에 있었따. 휘장이 하나님과 사람을 가르는 근본적인 가름 원수된 가름이다. 왜 하나님이 가리고 계시고 보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셔서 그의 온전한 순종안에서 이제는 죄가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하나님이 휘장을 찢으셨고 이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신 왕이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그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무덤이 열렸고 땅도 진동하고 바위도 터졌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진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신 장면이다. 바위가 터지고 땅이 진동한 것은 하나님이 죄 된 세상에 강림하실 때 세상이 그러했다. 예수님 죽으셨을 때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에서 휘장은 찢어졌다. 이제는 죽음이 지배하던 옛 시대는 끝났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이제는 천지를 진동시키시고 이전의 무덤의 권세를 열어 버리시고 자기 백성과 거룩한 성에 함께 사시는 분으로 마태복음은 묘사를 한다. 이제 예수 안에서 휘장은 찢어졌고 성소 안과 성소 밖이 상관이 없고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 바로 그렇게 하시려고 그의 성령을 우리 안에 부으셔서 한 성령으로 살게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생명의 권세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 죽을 육체도 영화로운 몸으로 살리신다. 우리가 이런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 보다 더한 향 기름으로 발라졌다. 그의 성령으로 발리어졌고 충만하게 되었다. 이제는 성소 밖과 성소 안이 상관이 없다. 우리의 대표자가 계시는 하늘의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아들을 기뻐하신 기쁨으로 우리를 기뻐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한 기쁨으로 기뻐하신다. 왜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심장으로 부르셧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교회가누리는 거룩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이 있다. 옷만 만져도 낫겠다. 마태복음은 내 안에서 능력이 나갔다 그런 말은 안한다. 왜냐하면 옷자락을 만져서 낫는 분은 누굴 까요? 구약으로 하면 제사장이 그렇게 거룩하다 그 말이다. 그런데 구약 때 제사장이 성소 밖으로 나가서 부정한 자를 진찰은 했어도 만진 적은 없었다. 자기 아버지가 죽어도 시체를 만지지 않았다. 제사장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예수님이 예수님 옷 자락을 만지면 나았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옷 자락을 만져서 나은 분이 누군고 그냥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누가 나를 만졌는가 찾지를 않는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알았다. 왜냐하면 옷자락을 만지면 그분의 능력이 그에게 간다는 것을 이방 백성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다. 왜 제사장이 거룩하면 누구든지 그를 만지면 거룩하게 되어 있다. 또 한 성소를 만져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분이 여기 계신다. 그분은 성소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군중들 사이에 있다. 구약에는 거룩한 분만 나가서 제단에서 봉사했는데 죄인이 만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나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분이 구약에서 성소 안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데 그 보다 더한 분이다. 왜 성소 안에 있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을 누리고 있는 대제사장인데 그분이 여기 계신다. 그분 옷만 만져도 낫는다. 그러면 그분에게 무슨 기름 부음이 있는가? 없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한분으로 그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 분으로 특별히 죄인들이 성소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둘러 쌓여서 만질 수 있도록 가까이 오셨다. 이분이 임마누엘 하나님시다. 이제는 성소 안에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이 모든 죄인에게 나타났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 열두해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 나은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 지상 생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저 위로 올라가시고 안 계시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셔서 만민을 그의 권세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바울이 전도했을 때 그 옷자락 또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 보다 능력이 훨씬 더 있었는가? 예수님은 옷이라고 입고 있으니까 전기가 통할라 해도 선이 이어져 있어야 되니까 옷을 만지면 옷에서 무엇이 나갔는가 보다 하고 이해나 되겠는데 바울은 앞치마를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얹어도 나아 버리고 하니까 바울은 훨씬 크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종들과 함께 하신 권능이다. 그러니까 다른 많은 사도의 권능을 이야기하지 않고 베드로와 바울의 권능만 이야기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해서 세운 사도이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서 세운 사도다. 다른 사도들의 이야기는 일체 거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대표자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 종과 권세로 함께 하셔서 고치셨다. 너희가 믿는 예수가 이 사람을 고쳤다. 그렇게 사도들을 증거 했던 것이다. 만일에 바울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깜짝 놀랠 것이다. 왜 너희들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예수를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를 하늘의 주가 되게 하셔서 그 권능이 너희들을 고치셨느니라. 그가 지금 고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개인의 권능으로 이야기하면 안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셔서 친히 성소에 거룩을 나타내셨다. 이제는 사도에게서 무엇만 가져다 얹어도 나았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면 우리들도 요새 누가 목사 옷자락을 만지면 나을까요? 누구 목욕한 물로 목욕해도 낫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단 터를 놓았다.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터를 놓은 것처럼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이제는 성소의 거룩을 온 땅에 확대시켰다. 그 토대는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 복음을 믿음으로 그 권세를 받는 것이지 누구의 옷자락을 만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오셔서 그가 성소에 계신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 하셨고 그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성전에 계시는데 이제는 사도들을 통해서 그 권능을 나타내심으로 이제는 천하 만민에게 복음의 권세가 성소의 거룩이 확대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발리어졌다.
향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냄새다. 그것과 제사장이 관계가 있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소를 그의 향내나는 거처 기름 집으로 완전히 기뻐하시는 생명의 충만한 거처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고 그 대표자도 향기름으로 발라서 하나님 앞에 향을 사르는 존귀한 봉사를 감당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소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출30:34-38 증거궤 앞에 두는 향품
항상 성경 본문의 구조를 읽어야 한다. 여러분도 그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이 읽으면 아 이것이구나. 여기서는 이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또 이것을 똑같이 말해도 여기다 강조를 두어서 표현하고 있구나. 그런 식으로 읽으라 그 말이다.
3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여기도 보니까 전부 향이다. 향도 한가지 향이 아니고 여러 향을 섞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아주 고급 향이구나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상등 향품 이런 말은 없는데 아마 여기 나온 향 이름에서 그것이 귀한 향인 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향 장사를 하면 안된다. 이제 이 향을 보고 주석을 보니까 소합향은 조개 껍질을 갈아서 어떻게 만드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들은 그 재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조개 껍질은 딱딱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부서버려야 합니다. 갈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향기가 될 것이다. 딱딱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왜 교회 말 안듣고 딱딱한 사람이 있거든. 그러니까 밀가루처럼 완전히 반죽하라고 한 대로 해 버리고 자기는 모양이 없이 하라는데 맡겨 버리고 아하 이것이 진짜 떡이구나. 전라도 말로 하면 밥이다. 이제 이런식으로 설명해서 밥을 만들지 말라 그 말이다.
주석을 보면 그런 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아는 이야기고 우리들은 잘 모른다. 그런 것을 알면 우리는 아 고급 향이구나 이런것만 알아도 된다 몰라도 읽으면 전부 향 이야기구나 알게 되어 있다. 다른 품목이 하나도 없으니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봤을 때는 이것처럼 고급향이 없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소를 향 기름으로 뒤범벅으로 발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 특별히 지성소 안에다가 향 상자를 두고 맡으신 분이다. 이것이 그 향이다. 그러니까 이것만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넣어둘 향이다. 그러니까 최고급향이구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전에는 향 기름이다. 향을 기름에 섞어서 발랐는데 이제는 향에다가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러니까 다른 향보다도 이 향에다가 소금을 치면 성결하게 되는데 어떻게 성결하게 되느냐? 36절에 보니까 증거궤 앞에 두는 성결을 얻는다. 소금 안 치면 거기 까지 못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레위기를 보면 모든 제물에는 소금을 치라 했을 때 이것을 맛내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꿀 섞은 소금 섞은 것 자연식을 좋아하시는가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말이다. 여기 보니까 소금을 섞어 성결하게 해라. 성결의 소금인데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는 소금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다른 성물에다 소금을 치면 그렇게 성결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곱게 찍으면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곱께 찧는 것은 뭐 인격을 부숴라 그런 말이 아니고 아주 향을 가늘게 해서 거기서 부수면 향이 오를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그런데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전에 향은 바를려고 만든 것인데 이 향은 맡을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으신다는 말은 없어도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은 만드는 자는 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맡으신다 그 말이다. 너희들은 맡지 말라 내가 맡겠다 그 말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36절에 보면 그 향을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안 증거궤 앞에 두라. 여기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다. 제가 항상 모세 하면 휘장밖에다 두고 있지만 언약 체결로서 모세는 구름안으로 들어갔고 휘장안에 있다. 그런데도 그 휘장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가리고 있는 지성소 안이다. 그도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는다. 구약에서는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는데 그냥 서서 본 것이 아니라 바위 밑에 감추시고 보게 했다. 그냥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세는 언약 체결 자로서 아론보다 앞서 있다. 모세가 제일 앞서 있다. 그러니까 아론은 휘장밖에 있으면 모세는 휘장 안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거기서 증거궤 앞에서 너를 만날 장소다. 그리고 향은 모세보고 만들도록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들지 말고 모세 네가 만들어서 증거궤 앞에 둬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날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내가 거기서 향을 맡겠고 어느 누구도 그 향 냄새를 맡지를 말아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소는 완전히 향 기름 집이고 그것은 발리운 것이고 하나님은 또 고급 향을 만들게 해 가지고 보좌 앞에 두고 맡으시고 나머지는 맡으면 안되는데 그 향은 모세가 들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모세를 맡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것이 언약 체결로서 성소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다. 성소는 하나님 앞에 기뻐서 자기 종을 자기 앞에 두고 기뻐서 계시는 것으로 모세의 향을 자기 보좌 앞에 두는 분이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재료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무게로 한다. 그것으로 향을 만드는데 향을 만드는 법대로 만든다. 그 향에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 향을 곱게 찧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날 곳이다. 이 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거룩하다. 모세가 만든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만들지 말 것이다.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향을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
지금 성경이 있는 것을 더 쉽게 풀어서 쓴 것이니까 읽으면 더 알기가 나을 것이다. 그런데 저는 성경에 있는 방식을 더 뚜렷하게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뿐이고 항상 성경 자체를 읽으라 그 말이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향을 만들게 하시고 곱게 찧은 그 향을 성소 안의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친히 맡으신다. 향을 두는 증거궤 앞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실 장소이다. 여호와께서 향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밖에 두게 하시고 아론으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에 여호와께 향을 사르게 하셨었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만날 장소였다(출30:6-9절에 보면 금 향단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서 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에 등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사르는데 그 향단은 어디인가? 했을 때 증거궤 위 속죄소 그리고 화목제 맞은 편 휘장밖 속죄소는 어딘가? 내가 모세 너를 만날 곳이다. 그렇게 향단의 위치를 지적하셨다. 그런데 휘장 밖은 밖이어도 바로 속죄소 앞이다. 그런데 아론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속죄소 앞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모세는 언약 중보자이기 때문에 속죄소로 묘사되지 않고 여기서는 증거궤로 이야기한다. 너를 증거궤에서 만나겠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제사장이 향을 사르는 금향단과 모세의 향품이 들어 있는 향 상자를 넣는 것은 위치가 같다. 한 선에 서 있는데 휘장밖에냐 휘장 안에냐 그런 차이점 뿐이지 위치는 같다. 증거궤 앞과 속죄소 앞으로 위치가 똑 같다. 그러면 왜 여기서 마지막에 제사장 이야기를 하지 않고 모세 이야기를 하는가? 모세가 언약 체결자다. 만일에 모세가 향을 들고 휘장밖에 있으면 이것은 온전한 언약 체결은 아니다. 그는 비록 아직도 영광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휘장안에 있어야만 구약의 성소가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증거궤 앞은 모세를 만날 곳이고 그리고 한 휘장이 져져 있는 그 밖에는 내가 제사장을 만나는 곳인데 그래도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앞 휘장밖 거기다가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런 의미로는 같도록 되어 있다.
모세는 언약 체결의 중보자요, 아론은 백성의 제사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향을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맡으시며, 제사장의 향을 속죄소 앞 휘장 밖에서 사르게 하시고 맡으신다. 거룩한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만나시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인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여호와를 섬기며, 직접 이러한 친교에 아직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백성은 이것을 맡아서는 안된다. 하나님만 맡으실 것이다. 모세가 향을 들고 거기 서면 거기서 그 향을 맡으신다.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영원한 교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구약은 성소 밖이 제사장의 거처요 아론이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도 그것은 지상의 증거궤 앞이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의 거처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 시요 언약 중보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시고 이제는 영광의 거처에 들어가셨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시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셨다. 그분이 우리의 향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전에는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왜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때 항상 금향단은 성도의 기도로 묘사되어 있고 가장 가까운 교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아버지께 말씀하시면 그가 우리의 말씀을 들으신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에서 향단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향 기름으로 발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그분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다. 휘장밖에 있고 땅에 있는 증거궤 앞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가 영원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죄의 권세가 제거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그냥 죄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시고 이 순종을 통해서 영원히 죄를 제거하셔서 교회로 이제는 휘장 밖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 기뻐하는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연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그런 교제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버지께서 영원히 기뻐하신 분은 품속에 계신 아들이신 데 그가 우리의 대표로 있을 때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한 교제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광의 자리로 올리셨다. 그는 아버지의 대리 왕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즉 음부의 권세를 가진 자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 분이다. 모든 것은 그 권세 아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분 안에서 우리도 향내나는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에서 기름을 바르고 한 것도 다 이런 구약 문맥에서 기름 부음이다. 그 당시 그 사람들 장사 지낼 때 어떻게 기름을 바르는가? 하는 그런 유대인 장례 법으로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름 발리운 자로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시는가? 왜 구약 때는 이런 기름을 발라야 성소에서 봉사를 하거든요? 그것이 그의 죽음을 말하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의 거처에 들어가시니까 항상 구약 문맥을 염두해 두셔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도 누가 머리에다 손 얹고 기도해야 효과 있을 줄 알고 또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효과 있을 줄 알고 그러지 말아라 그 말이다. 남녀간에는 그렇게 안수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조심해야 되고 이미 예수님께서 그의 영원한 기름을 우리에게 부으셨다.
친히 그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분을 믿으면 여러분은 영광의 거처에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시킬 때도 아이고 목사님이 시키니까 할 수 없어서 한다거나. 또 아들은 아들인데 저 대문 밖에서 얼쩡얼쩡 하고 아버지 눈치나 본다거나 그렇게 안된다 그 말이다. 신약 교회는 그렇게 있지를 않는다. 우리는 땅의 성소에서 기름 발린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완전한 생명의 성령으로 우리가 충만함을 받아서 아버지 앞에서 산다. 우리의 모든 삶은 향내나는 제물의 삶이요 여러분의 모든 언어와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받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 가리움은 끝났고 휘장 밖과 휘장 안은 없다.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2월 4일(화) 레위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증인(레위기 5:1)
If a person sins because he does not speak up when he hears a public charge to testify regarding something he has seen or learned about, he will be held responsible.
증인(證人. witness)
증인(에드. ʽêd) עֵד 스트롱번호 5707
구약 성경 / 69회 사용
-
1. 명사 증인, 잠 19:5, 9
2 명사 증거, 창 31:44, 48, 사 19:20. -
-
3. 명사 증언, 출 20:16, 신 5:17, 31:21.
-
4. 명사 왕자, 방백, 사 55:4.
-
관련 성경 / 증거(창 31:44, 수 22:28, 사 55:4), 증인(출 23:1, 민 35:30, 시 35:11), (위)증자(시 27:12),(위)증하는 자(신 19:16).
-
1. 원형 돌다, 반복하다, 다시하다
-
2. 원형 되풀이해서 말하다, 입증하다, 권고하다, 훈계하다[칼형으로 한 번 쓰임],애2:13.
-
a. 원형 피엘형 עִוֵּד: 둘러싸다, 포위하다, 시119:61.
-
b. 원형 히필형 הֵעִיד
-
c. 원형 증거물로 취하다, 증인으로 부르다, 사8:2, 렘32:10,25,44
-
d. 원형 목격자로 부르다, 법에 호소하다, 간절히 바라다[전치사 בְּ와 함께], 신4:26,30:19, 31:28.
-
e. 원형 ㉠ 시험하다, 증거하다, 왕상21:10,13, 암3:13, 말2:14. ㉡ [좋은 의미로] 찬양하다, 욥29:11.
-
f. 원형 ㉠ 증인으로 부르다, 탄원하다, 확증하다,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도록 부르다[בְּ를 수반], 창43:3, 신8:19, 32:46, 왕상2:42, 슥3:6. ㉡ 훈계하다, 경고하다[인칭목적어 수반], 애2:13, [בְּ 수반] 왕하17:13, 시50:7, 81:9(8), [עַל 수반] 렘6:10,[체벌로] 느13:15,21. ㉢ 율법으로 엄히 금하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왕하17:15, 느9:34, 삼상8:9.
-
g. 원형 호팔형 הוֹעֵד: 선포되다, 보이다, 출21:29.
-
h. 원형 피엘형 עֹדֵד: 복구하다, 확증하다, 시146:9, 147:6.
-
i. 원형 힛파엘형: 스스로 서다, 바로 서다,시20:9(8).
-
-
관련 성경 / 증거하다(애2:13), 증언하다(욥29:11, 슥3:6), 얽히다(시119:61), 경고하다(창43:3),경계하다(느9:34, 렘11:7), 명령하다(출19:23), 권면하다(느9:26), 세우다(렘32:44), 증언을 하다(왕상21:13), 경책하다(렘6:10), 비유하다(애2:13), 경고를 받다(출21:29), 붙들다(시146:9, 147:6), 바로 서다(시20:8), 증거를 삼다(신4:26).
증인이 되어
- 여기서 '증인'(에드)이란 다른 사람의 범죄를 눈으로 직접
목격했거나, 혹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재판장의 판결을 돕기위해 법정에 출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 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재판시 그 재판의 정확한 판결을 위해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충실히
중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 율법 규정은 사건의 올바른 판결을 위해서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필요로 했다(민
35:30; 신 17:6;19:15).
맹세시키는 소리
- 이것은 즉 지금 판결 하고자 하는 범죄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으면 증인으로 나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해주도록 요구하는 쟤판장의 엄숙한 '진술 요청'을 가리킨다. 따라서 증인의
입장에서 보면, 재판장의 이 말은 자신에게 맹세시키는 소리가 된다. 그러므로 재판장의 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증인된 자가
자기의 보고 들은 바를 진술치 않을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5:1-6 강해, 침묵의 죄>. 왜냐하면 자신의
묵비(黙秘)행위로 말미암아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과는 달리 인간 내면의 양심까지도
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신본주의적 율법의 특징이다(25장 강해, 모세의 율법과 고대의 법전들).
죄가 있나니
-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 올바른 판결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증인이 있으면 법정에 출두해 달라는 재판장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실을
숨기고 있는 자는 그 허물이 결국 자신에게 죄가 되어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잠 29 :24). 그러나 이러한 죄는
고범죄(故犯罪)로는 간주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태만이나 두려움 등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죄로 간주되어 속죄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허물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은 "굽다'(CROOK),
'뒤틀리다'(PERVERT), '잘못하다'(DO AMISS)란 뜻의 '아와'(*)에서 파생된 말로, 곧 '죄'(SIN),
'불의'(INIQUITY), '사악'(PERVERSITY)이란 뜻이다(삼하 3:8; 느 9:2; 욥 10:6; 시 59:4; 사 1:4; 렘 5:25).
멘토(mentor) 뜻, 유래
멘토(mentor)는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경험이 부족한
사람(멘티. mentee)에게 조언, 지도, 지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멘토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멘티의 성장을 위한 조언과 격려, 도움을 제공한다.
멘토(mentor) 뜻
멘토(mentor)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고 지도해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주로 멘토가 되며, 멘티(mentee)라고 불리는 조언을 받는 사람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 역할을
한다.
멘티의 역량을 향상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 조언을 제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국의 작가이자 리더십 지도자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멘토를 가리켜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려고 하는 의지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멘토링(mentoring)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그가 가진 신용, 경험,
시간, 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국어사전은 '멘토(mentor)'를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멘토(mentor) 유래
개인적인 스승 또는 후원자이면서 지혜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멘토(mentor)'라고 한다.
멘토라는 말은 그리스신화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를 가장 믿을만한 친구인 멘토에게 부탁한다.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 동안
친구의 아들을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후원자로 정성껏 보살펴 훌륭한 왕자로 성장시킨다.
이 이야기로부터 멘토(mentor)라는 고유명사가 '경험이나 지혜가 많은 사람이 상대방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그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역사
후에 아테나는 멘토의 모습으로 텔레마코스의 앞에 나타나 어머니 페넬로페에게 접근하는 구혼자들을 막고 아버지를 찾아 나설 것을 종용한다.
이 과정에서 고민하는 텔레마코스에게 많은 격려를 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건네는데, 이로 인해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멘토 = 스승'인 것은 아니다.
보통 스승이라고 하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떠올리지만, 멘토의 경우는 동갑내기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멘토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승이 무엇인가를 '직접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멘토는 '이끌어 주는 사람' 이라는 뜻이 강하다.
때문에 멘토를 인생의 내비게이션, 관제소, VTS 등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한 비유가 어울릴정도로 훌륭한 멘토의 존재는 사람의 인생에 긍정적이고 훌륭한 영향을 부여할 수 있다.
여담
2월 3일(월) 레위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막(會幕) 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The LORD called to Moses and spoke to him from the Tent of Meeting. He said.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43cVr1Pmyrk
성막(聖幕) Tabernacle
회막(會幕) (출 27:21) the Tent of Meeting
장막(帳幕)(출 25:9) the Tabernacle
증거막(證據幕)(출 38:21) the Tabernacle of the Covenant
법막(法幕)(대하 24:6) the Tent of Testimony (Covenant)
성소(聖所)(출 25:8) a Sanctuary
여호와의 집(삼상 1:7) the House of the Lord
회막(會幕)이란 한자는 "모을 회(會)"와 "장막 막(幕)"이라는 훈(訓)으로 "모임을 위한 장막"이란 뜻으로 영어성경(NIV)에서는 "모임을 위한 천막(the Tent of Meeting)"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회막(會幕. the Tent of Meeting. 출 27:21)이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집니다.
첫째, 성막(聖幕. the Tabernacle)(출 26:1)
둘째, 장막(帳幕. the Tabernacle)(출 25:9)
셋째, 증거막(證據幕. the Tabernacle of the Covenant)(출 38:21)
넷째, 법막(法幕)(the Tent of Testimony)(대하 24:6)
다섯째, 성소(聖所. a Sanctuary(출 25:8)
여섯째, 여호와의 집(the House of the Lord)(삼상 1:7)
다른 말로 "성막(聖幕)"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회막이란 "모임을 위한 장막" 또는 "만나는 장막"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오헬 모에드"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회막이란 단어가 145번 언급된다고 합니다.
회막이라는 말은 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서 자주 소개됩니다.
회막이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회막이란 용어가 처음 소개된 것은 출애굽기 27장 21절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회막은 제사를 지내려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모여야 하고 그곳에서 만나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만남의 장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사장과 백성들의 만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막을 성막이라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출애굽기 33:7).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 장막을, 주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다."(새번역)
백성들이나 제사장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굳이 성막을 만들고 특별히 ‘만남의 장막’이라 이름 붙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의미부여를 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만남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다음 구절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회막을 사전에 찾아보면 ‘임재의 장막,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막’ 이라고 나와 있다. 회막은 바로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찌라 (출애굽기 29:43/개역한글)
내가 거기 만남의 장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내가 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어 그곳 만남의 장막이 거룩한 곳이 되리라. (출애굽기 29:43/현대인의 성경)
그렇다. 회막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곳이었다. 비록 사람들이 모일지라도 모여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곳이었다.
교회와 예배당
지금 우리가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한다. 거기 모인 성도들을 교회라고 한다. 모여서 무엇을 하나, 왜 모이는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모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함을 확인한다.
성도들 간의 교제는 그 다음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예배당이라는 공간에 함께 모이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몸은 각자 서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영으로는 함께 있음을 체험해보자.
회막과 성막의 차이
회막과 성막은 같은 구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회막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성막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것이 외적으로는 회막이었고 내적으로는 성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는 회막과 성막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가질 수 있고 교회 생활 안에 있을 수 있으나, 안쪽 아닌 바깥쪽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회 생활이 성막이 아니라 단지 회막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를 주의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함으로써 우상 숭배를 범했던 직후에 회막이 처음으로 언급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그의 장막을 진 밖으로 옮긴 다음에 그 장막이 회막이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다만 회막 주위로 모이기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막 안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에서, 회막은 구름으로 덮였으나, 성막은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회막 주위로 모여들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구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막 위의 구름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성막 안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1) 성막은 광야를 위해 설계되었고 본성에 있어서 일시적이었습니다. 한편 성전은 왕국을 위해 설계되었고 본성에 있어서 영원하였습니다(출 40:2, 왕상 6:2).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을 한 백성들이 드려야 할 제사를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을 레위기에서 5대 제사라고 합니다.
5대제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구약의 5대 제사와 4대 방법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따라, 화제(火祭) - '불살라 드리는 제사', 거제(擧祭)- 제물을 높이 들어서 바치는 제사, 요제(搖祭)- 제물을 위 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 전제(奠 祭)- 포도주, 기름, 피 등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로 나뉜다.
이중 번제, 화목제, 소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의 절차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희생을 성전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끌어오다라는 사역 동사는 그 성격상 '희생 제사를 드리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규정에 따라 가축 중에서 흠없는 것을 골라서 그것을 제단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는 안수(按手)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희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손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세째는 예배드리는 자가 그 희생을 죽이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드디어 제사장이 처음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그 피를 가져다가 처분하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전 회중을 위한 '전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피를 휘장 앞에서 일곱번 뿌리고 그 피의 일부는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에 쏟는 것이다. 만일 그 '전제'가 제사장이 아닌 일반 개인을 위한 것이면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생략하고 그 피를 분향단에 바르는 대신에 번제단에 바른다. 기타 모든 제사에 있어서는 그 피를 단순히 제단에 붓는다.
다섯번째 단계는 또 다른 규정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내장의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것이다(번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름뿐만이 아니라 그 희생을 통째로 불사른다).
여섯번째는 그 남은 고기를 처분하는 것이다. 화목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부분만을 제사장에게 주고 그 나머지는 예배(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다. 죄제(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고기를 전부 먹는다.
그러나 그 제사가 제사장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고기는 진 밖의 깨끗한 곳에서 불태워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로버트슨 스미드(W. Robertson smith)는 주장하기를 기본적인 제사는 화목제이며 따라서 제사란 것은 무엇 보다도 예배자(제사를 드리는 자)와 하나님과의 친교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레이(G. Buchanan Gray)는 주장하기를 무엇보다도 '번제'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본적인 개념을 갖춘 제사라고 한다. 반면에 '속죄제'의 기본제사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1. 번제(레 1:1-17, 6:8-13)
'번제'는 또다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희생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불살라 드리는 세상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기꺼이 드리신 것을 나타낸다.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עלה)는 전(全) 제물이 모두 태워졌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전번제'(全燔祭) 혹은 '온전한 번제'(신33;10)라고 불리워졌다.
레위기 1장과 6:8-13에서 묘사된 제물은 수소, 양, 염소나(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집비둘기로 드려질 수 있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죄의 전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 후 그 짐승을 잡았으며 속죄를 위해 그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제단에 뿌렸다. 누구든지 번제물을 드릴 수 있었지만 정규적인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는 안식일과 특별한 축제 날에 다른 제물과 함께 드려야만 했다.(민28:2-29:39)
번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예표한다. 다윗의 메시야 시편 가운데 하나인 시편 40편에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번제 희생을 위해서 아무 흠이 없는 동물이 택해지고,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지듯이, 온전히 헌신되신 우리 주님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2. 화목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거나 또 소원을 드릴 때 흠없는 양과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을 태우며 정성을 드리던 구약 제사의 한가지이가. 수은제, 감사제(fellowship offering.peace
offering 출 20:24, peace offering 출 20:24)로 불린다.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 제물로는 제물 드리는 자의 생활 형편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짐승이 가능했다. 즉 그것은 1)흠 없는 수소나 암소 (1-5절) 2)흠 없는 수양이나 암양(6-11절) 3)흠 없는 수염소나 암염소(12-17절) 등이 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화목제의 경우, 번제의 경우와는 달리 희생 제물로서 비둘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은 화목제의 독특한 특징인 제사 후 공동식사에 있어. 비둘기는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량으로서 그 고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희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바흐(זבח)'는 '죽이다', '도살 하다'란 뜻을 가진 '자바흐(זבח)'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써, 곧 죽임 당하여 재물이 될 짐승을 가리킨다.
번제나 속건제 등 대부분의 제사가 제사 예물로서 반드시 수컷만을 요구하였던 반면, 특별히 화목제 제물의 경우에는 암수컷에 전혀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화목제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와 교통,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 친밀한 교제를 도모하는데 있는 만큼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補血)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은혜와 교통을 나누는 데에는 남녀는 물론 노소(老少)나 빈부(貧富), 그리고 귀천(貴賤)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굽 제사의 경우, 암컷은 철저히 금지시킨다고 한다.
화목제(레 3:1-17, 7:11-36)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과 교제의 근거가 되심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란 있을 수 없다. 주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골 1:20)으로 우리가 더 이상 "외인이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골 1:21-22).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교제가 바로 그리스도가 자신을 화목제로 드린 결과이다. 이 화목제는 번제와는 달리 희생제물의 각 부분이 제사장을 위한 음식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제사장 모두가 이 희생제물의 분깃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제사장"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와 교제를 누린다.
화목제의 독특한 점은 무교병(누룩 없는 빵)과 유교병(누룩이 든 빵)이 함께 드려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진리는 누룩이 든 빵으로 묘사된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며, 또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여전히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화목제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화목제의 감사 희생을 가져오면 예물을 가져온 사람과 그 희생제물을 함께 먹게 될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과 행복한 시간이다. 그 희생제물은 분명히 그리스도로 인해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될 교제의 근거요, 행복한 연합의 실제적인 그림이다.
3. 속죄제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사람이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offerings for unintenti onal sins,
출29;14).
여러가지 희생제사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제사가 속죄제이다(대하29, 스6:17, 느10:33). 속죄제를 드리는 법은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매우 치밀하게 만들어졌다(레4:3-35). 신약 히브리서는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속한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히9:28,10:12).
여호와께서 속죄제를 위해 바치도록 규정한 제물은 죄를 지은 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다음 4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홈 없는 수송아지였고 (3절) 둘째,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한 경우에도 역시 흠 없는 수송아지였으며(14절) 셋째, 족장이 범죄한 경우에는 수송아지 보다 한 등급 낮은 흠 없는 수염소였다(23절). 그리고 넷째, 평민이 범죄한 경우에는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속죄제물을 삼아 바치도록 하였다(28,29절). 단, 평민의 경우 그 힘이 암염소나 암양에 미치지 못할 빼는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제물로 삼도록 배려하였다(5: 7-8). 그러나 만일 그 형편이 비둘기 새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자의 경우에는 고운 가루 십분 일(1/10)에바를 바치도록 하였다(5: 11-13). 그러나 이 경우는 소제 때와는 달리 기름과 유향을 섞지 않게 했고, 또한 반드시 다른 생축을 희생한 번제단 위에 함께 올려 불사르게 했다. 즉 피흘린 생축의 제물과 더불어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속죄제(Sin-Offering)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반드시 피(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후일 신약 시대에 히브리 기자는 이 사상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는 말로써 명쾌히 서술하고 있다.
속죄제(레 4:1-35, 5:1-13, 6:24-30)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죄를 담당하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21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러"고 말씀하고 있다. 속죄제는 우리가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모습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속죄제에서 우리는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사 53:4)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고난이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 그가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버림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사 53:5).
4. 속건제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감람기름 0.3리터를 제단 앞에서 흔들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 어린 숫양은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거룩한 곳에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건제물은 매우 거룩하므로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다."(레위기 14:12-13)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드려졌다. 즉 1)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한 경우(5:15,16) 2) 이웃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금령을 어겼을 경우(5:17-19) 3)인간상호간에 범과했을 경우 (6:1-7) 등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례이다.
속건제를 준비하고 드리는 과정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과 유사하나 속건제는 범죄한 사람이 완전한 배상을 해야 하며, 그 죄로 인해 야기된 상해에 오분 일을 더해야 한다. 즉, 희생제물 외에 더 가져와야 했다! 이 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예외나 조정이 있을 수 없었다. 즉 그 사람이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 혹은 알고 범죄했거나 모르고 했거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주님과 성막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혹은 이웃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간에 범죄한 사람은 속건제를 드리는 그 날에 배상과 함께 오분 일을 더해서 가져와야 했다.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레위기 6:4-5)
속건제(레 5:14-19, 6;1-7, 7:1-10)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결과도 감당하신 사실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까지도 감당 하셨다.
5. 소제
번제가 동물성 제물 제사라면 소제는 식물성 제물 제사이다. 이 소제는 번제나 화목제에 곁들이는 부속적 제사로서 고운 가루, 화덕에 구운 것, 부친 것, 삶은 것 등이 있다.
소제(민하, מנחה)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
다른 제사에 규칙적으로 따르는 부수적인 제사로 떡, 첫열매, 고운 가루, 기름 등이 그 제물이었다. 보통 번제 뒤에 따랐고 그 가루와 기름의 양은 희생 제물에 따라 정해졌다(민 15:2-10). 한편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소제가 드려진 다음에는 언제나 화목제가 뒤이어졌음올 알 수 있다(레 7:12-14;민 15:4). 이 소제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감사를 의미하는데, 제사 후 남은 부분은 다른 제사 때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레2:3;6:16-18).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올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피흘림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레 17:10-16).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엡 1:7).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 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소제에는 '유향을 첨가하였다'. 여기서 유향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 부터 짜낸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 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소제(레 2:1-16, 6:14-23)의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완전하고 균형잡힌 삶을 나타내고 있다. 기름과 유향이 이 예물과 함께 어우러져 우리 주님의 삶 가운데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향기로 드리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소제(음식이나 곡물로 드리는 예물로 알려진)는 유일하게 피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보통 피를 흘려 드리는 다른 희생제사와 함께 드려졌습니다(출 29:38-42, 민 15:1-12을 보시오). 소제가 준비되어 드려질 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누룩을 넣어서는 안되었다. 누룩은 성경전체를 통해 악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소제를 단에서 불사르기 전에 "화덕에 굽는 "준비과정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전생애를 통해 죄가 없이 받으신 고난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2:18, 5:8을 보라).
• 구약 제사의 4대 방법
1. 화제
화제(火祭)는
히브리어 '잇췌(אשּׁה)'는 '태움'(burning), '불사름'(firing)이란 뜻으로, 곧 '불살라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5대 제사 종류와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거제, 요제, 전제
등과 더불어 제사를 드리는 4대 방법 중 하나로서 고대로 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취해졌던 제사 형태이다.
2. 전제
일반적으로 술(포도주)을 제물위에 뿌리는 제사의 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전제(drink offering)는 상번제(매일 드리는 제사,
민28:7)때에 아침저녁으로 함께 드려졌고, 안식일 제사때(민 28:14)에도 드려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막절 제2일과 그 이후의 각 절일들에도 드렸던 것으로 확인된다(민29:18, 21).
그러나 그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Josephus).
3. 요제
봉헌하는 제물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앞뒤로 흔드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음식을 식탁 위에 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제는 번제나 화목제 또는 소제
등과 같은 제사의 종류가 아니고, 화제(祭)나 거제(擧祭), 전제(奠祭)와 같은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요제의 방식은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들어 흔들었다가 내리는 것으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 바쳤던 것을 다시금 제사장이 자신의 양식으로 되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적으로 중요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는데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성도의 양식으로 주신
사실이다(요6:27,48-58). 한편 이러한 요제(save offering)는 치유된 문둥병자의 속건제(레 14:12,
21,24)나 첫 열매의 곡식 단(레 23:15) 및 칠칠절때 드리는 두 떡덩이(레23:17, 20)등을 하나님께 바칠 때도
이용되었다.
4. 거제
거제란 제물의 가슴부위를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제사 방법으로 그 실제적, 영적 의미는 요제와 동일하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그 거제 제물 중 오른쪽 넓적다리가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