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위의 발자국
메어리 스티븐슨(1922-1999)
- 케시 비(Kathy Bee)가 메어리 스티븐슨(Mary Stevenson)을 만나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판권은 마가렛 피쉬백 파워(Margaret Fishback Power)의 판권 소유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 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예수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애야,
나는 너를 사랑하며,
결코 한순간도 너를 떠나지 않았단다.
네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마다
모래위에 발자국이 한 줄 밖에 없음은
그때마다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란다.
" Footprints in The Sand "
One night a man had a dream.
He dreamed he was walking along
the beach with the Lord.
Across the sky flashed scenes
from his life.
For each scene,
he noticed two sets of footprints
in the sand; One belongs to him,
and the other to the Lord.
When the lsat scene of his life
flashed before him, he looked back
at the footprints in the sand.
He noticed that many times along
the path of his life there was
only one set of footprints.
He also noticed that it happened
at the very lowest and saddest
times in his life.
This really bothered him and he
questioned the Lord about it.
"Lord, you said that once I decided
to follow you, you'd walk with me
all the way. But I noticed that during
the most troublesome times in my life,
there is only one set of footprints.
I don't understand why when I needed you
most you would leave me.."
The Lord repli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ould never leave you.
During your times of trial and suffering,
When you see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3월 15일(토) 여호수아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 세상이 가는 길(수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Now I am about to go the way
of all the earth. You know with all your heart and soul that not one of
all the good promises the LORD your God gave you has failed. Every
promise has been fulfilled; not one has failed.
온 세상이 가는 길( to go the way
of all the earth)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새한그 / 사람들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은 후의 일을 누가 아느냐?
이런 질문을 하면 어느 누구도 죽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안다는 지식은 주로 배움과 경험에 의해서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것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배움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의 과제는 신앙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제공하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가르침이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선택한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영생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영벌의 세계라고 합니다(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일
것입니다.
소위 직업에 대한 문제가 사람들에게마다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기술을 배우려고 하고 고학력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도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대하는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들을 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는 '무슨 일을 하느냐?'를 따져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대우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회로부터 대우받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대학교 교수라는 직업과 공사장
막노동꾼이라는 직업을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면 우리 역시 '무슨 일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세상처럼 '무슨 일을 하느냐?'를
통해서 평가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어떤 일을 하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지 받지 않은
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일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주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래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은 남들 보기에 자랑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았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며 살았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가는 길, 세상을 떠날 때는 내가 무슨 일을 했든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통해서 과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는가를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 좋은 일 나쁜 일의 구분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14절에서 여호수아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온 세상이 가는 길, 즉 죽음이라는 길에 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의 삶이 어떠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마지막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만 가는 길이 아니라 온 세상, 누구하나 예외 없이 빠짐없이 가야될 길을 여호수아 역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습니다.
아주 보편적이고 평범한 이치이고 자연적 법칙입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죽음을 늦추고 싶고, 될수록 이 세상에서 더 머물다가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이 가는 길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사도라고 해서
선지자라고 해서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늙는다는 것, 온 세상이 가는 길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아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바로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며 살았든, 악한 일을 한 사람이나 착한 일을 한
사람이나 죽음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나약하고 별것 아닌 존재이고, 기껏 활개치고 살아봐야 70에서 80을 살다가 온 세상이 가는 길목에 서서 나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그 길에 섰을 때 비로소 실감이 되고 내 마음속 깊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 이치를 미리 마음에 두고 산다면 사는 것이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 후에 국회의원 선거를 합니다.
신문을 보면 당마다 공천 문제로 인해서 시끄럽습니다.
공천을 안해준다고 폭력을 휘두르고 탈당을
하고 야단들입니다.
국회의원 한번 해 보겠다고 모든 것을 다 걸고 동분서주합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자기 이권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짓밟히고 죽는다고 해도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 것을 챙기고 지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을 온
세상에 가는 길에 서서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여호수아가 바라보았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여호수아가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늙어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노인네들이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인생의 헛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헛됨에 대해서 솔로몬이 깊은 고백을 했지 않습니까? 왕도 해보고 천하에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린 솔로몬이었지만 노년에, 온 세상이 가는 길목에 서서 인생을 돌아볼 때 그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얘기들을 보고 들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 있는 여호수아가 곧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노년에 인생의 헛됨을 고백하는 솔로몬의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모습, 솔로몬의 모습이 마치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상관이 있다고 해도 아직 미치지 않은 저 멀리 있는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헛된 것을 손에 놓으려고 하지 않고 쫓아가고 또 쫓아가면서 온갖 괴로움을 다 짊어지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 토요일 조선일보에 한국의 유명한 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씨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 기자가 이번 선거에 나선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박경리씨는 "시골 사람 셋만 앉아도 그 얘기요, 모두 권력 지향적이에요.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식인에게도 권력지향이 있고….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은 스스로 영원히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인지 기득권에 대한 그들의 집념이 너무 서글퍼요. 다 놓아 버리면, 그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그 되찾아 오는 것을 맞이하면 될테인데, 그걸 몰라요. 다 놓아버리고 다시 찾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는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슬퍼져요 왜 놓지를 못할까. 권력이나 명예가 너무 초라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74세의 노인이 정치인을 바라본 시각인 것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아옹다옹하는 모습들을 서글프게 바라본 것입니다. 허무함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74세의 노년에 이른 사람이 인생을 보니까 인생은 우리가 스스로 찾아가서 우리들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 놓아 버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노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신문기자가 다시 '선생님은 다 놓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경리씨는 "소설 '토지'의 독자가 많다는 것이 내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걸림돌입니다. 존대받으면 좋고 괄시받으면 싫지만, 존대받으려면 지불해야 할 것이 있으니 부담입니다. 산중에 혼자 사는 어떤 할머니가 갖은 김치를 다 담가놓고 젊은 학생들에게 노나주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 할머니가 진정한 자유를 갖고 있는 게지요."라고 답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작가라면 내 글에 대한 독자가 많기를 꿈꿀 것입니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 글이 인기가 있다는 것이고,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고 가치가 높다는 것은 존경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존대받는 것을 괄시받는 것보다 더 낫게 여기는 우리로서는 독자 많음을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주보를 펴내고 이곳저곳에 주보를 보낼 때, 제 주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보를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만큼 제 설교가 알려졌다는 것에 대한 저의 만족이 아니겠습니까? 제 설교가 알려짐으로서 저의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는 이러한 의식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독자가 많다는 것이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라는 박경리씨의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물론 제 설교가 적혀 있는 주보가 인기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 몇 사람이라도 제 주보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제 설교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저의 자유에 걸림돌이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주보에 글을 쓰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쓸 수밖에 없는 저의 모습이 한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도 주보를 만들기 싫어서 이리저리 뒹굴며 '내일(5일) 주보 만들지 말까'라는 갈등을 수없이 하다가 겨우 억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합니다. 하기 싫으면 안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매주일 주보를 만들어 내는 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 왜 하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그것을 붙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보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주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주보로 인한 내 삶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내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삶이기에 나 자신에게 구속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김치를 많이 담가 놓고 젊은 학생들에게 노나주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말에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놓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모든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존대받고 자신의 것을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욕심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니 아직 부족한 것 같고 더 많이 소유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경리씨의 말처럼 인생에서 모든 것은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주어진 것이지 우리 힘으로 쟁취하고 얻어낸 것들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조용히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맞이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의 삶이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온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서서 이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이고 우리 역시 늙어지고 병들어서 이 길에 서야할 때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면 오늘 미리 그 자리에 서서 여호수아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4절에서 여호수아는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지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두 너희에게 응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을 합니다. 즉 나는 사라지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죽어 가는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말씀을 바라본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말씀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겨 그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 여호수아가 또 다시 거듭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멸절 당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치 아니하면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 그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왜 유독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했습니다. 애굽과 함께 죽어야 할 자인데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들의 죽음을 넘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왜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신이기 때문에 강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진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주어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입은 자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의 도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멸절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을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지금껏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팽개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시 가나안 민족과 똑같이 취급하여 멸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선한 일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서 끌어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끌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야 하는지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우리도 들어서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데 무엇이 필요합니까? 온 세상이 가는 그 길에서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좋은 직업이 인도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한 자식이 인도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우리에게 가치있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는 하나님의 약속일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을 것입니다. 좋은 직업이나 권세라는 것은 내가 세상에 존재할 때는 나와 함께 할지 모르지만 온 세상이 가는 길에 들어선다면 그순간 나로부터 다 분리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는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것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직업이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온 세상이 가는 길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직업으로 돈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젊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날 날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이미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인생을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이고
자유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하나가 버려질 뿐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다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약속만이 영원하며 말씀만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만이 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요한복음 14:1-11)
어떤 분이 나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 오면서 얻은 이득이 무엇이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세 가지를 답변으로 제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오면서 그 분을 통해 길, 진리, 생명을 찾았습니다.'
나에게 질문 했던 분이 다시 '당신이 예수를 통해 발견한 길, 진리,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가는 방향 지시표였습니다.
그 길이 인간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에서 구원, 사랑, 자유를 경험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그 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 나는 매일 하나님과 교제의 삶 가운데서 생의 의미, 행복, 기쁨이란 영적 양식을 공급 받고 있습니다.
나의 일용할 양식은 그 분으로부터 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나의 생명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하든지 그 하는 일을 통해 어떤 의미나 가치를 발견해야 그러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적 차원에서 얻을 수 없는 그 어떤 의미나 가치를 발견해 갈 때 신앙을 포기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서 누구나 경제적 이윤이나 세상적인 성공을 바란다면 결국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상의 것을 예수에게서 추구한다면 예수를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 스승, 구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요즈음 봄바람과 함께 귓전에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마음 아픈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북녘 땅에서는 지하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은 비참하게 처형되어 가면서도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들은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 주체사상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값진 것을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발견하는 새 삶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 저 영원한 세상, 즉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핍박, 환난, 고통, 배고픔, 죽음은 하나님과 더 깊은 연대감을 갖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어느 시대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적대적이며 반문화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일에는 많은 도전과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유 세계에는 사회적 분위기 자체에 예수를 믿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많은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독제체제에서는 아예 예수 자체가 부인됩니다. 인간이 신앙을 갖는 일 자체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누릴수 있는 특혜는 없습니다. 세상적 가치에서는 오히려 손해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생명보험, 노후보험, 교육보험과 같은 생의 안전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삶은 단지 먹고, 마시고, 일하고, 성관계를 맺고, 재화를 축적해가고, 명예나 권력의 자리를 확보해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그러한 것들이 생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삶에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왜'라는 종교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 인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나의 길을 찾았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볼륨이 높은 스피커를 통해 고막이 찢어지듯이 들려오지는 않습니다.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그것도 우리가 생의 깊은 허탈감, 좌절 가운데 있을 때 세상적으로 굉장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허구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균열된 생의 틈바구니 사이로 들려옵니다.
그러한 음성을 계속 무시하거나, 그 세미한 말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길이 아닌 길로 계속 걸어갈 때, 많은 상징적인 증상들이 간접적으로 말을 걸어옵니다.
즉 질병, 실패, 우울증, 갈등, 불면, 적대감, 미움, 두려움, 공포와 같은 상징의 언어들이 우리의 무감각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픔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내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마가 예수께 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삶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마귀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외곡되고, 손상을 입어가고, 의미없이 소멸되어 갈 때 그 곳에 있는 영혼은 울부짓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삶의 부정적인 증상들은 영혼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삶의 신비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여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22)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가야할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길을 육신적인 차원에서 발견해 가려고 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그 길을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적 차원에서 안내해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맛 잃은 소금 덩어리가 됩니다.
예수는 사람이 찾고 있는 그 길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 길을 열어놓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길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가 제시하는 길의 궁극적인 종착지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본문에 그 아버지의 품안이 '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넓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용서 못하실 죄가 없고, 그 분이 받아드릴 수 없는 죄인이 없습니다. 그 분에게는 종족, 신분의 제한도 없습니다. 성차별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 안에는 우리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바로 그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 아버지를 믿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스승이며, 구주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새로운 이해와 의미로 그들에게 경험되었습니다. 그들의 스승 예수가 그들을 떠난다고 했을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생겼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의 대상과 기반이었습니다. 예수의 부재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구성해온 신앙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한 편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환경은 그들의 신앙에 끊임없는 도전을 해오고, 마음과 깊은 자아까지도 강타할 수 있는 불안과 유혹을 낳게 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마음이 약해져서 불안정한 공격을 용납한다면 신앙을 포기해버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곳에 정초시키기 위함임입니다. 신앙의 정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한 곳에 정초시켜야 합니다. 그 영원한 곳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께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도마는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그들이 스승과 함께 목적지로 삼고 걸어가고 있는 그 길, 도마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따로 보여줄 아버지는 없고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진 그 분이 빌립이 보기를 원하는 그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정초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께 우리의 실존의 뿌리를 깊이 내릴 때 생의 의미, 목적을 붙잡게 되고 죽음의 문제까지도 문제 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의, 무의미, 갈등만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그 의미와 이해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가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포기할 때 우리의 신앙은 뿌리채 뽑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과거의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우리에게 계속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깊이 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창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의 신앙에 쇄신이 있고, 세상이 주는 무의미성, 회의를
극복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만 우리의 삶은 가치있는 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도 역시 바뀜니다.
예수를
통해서 바뀌는 삶의 방식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입니다.
"이러한 안목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모든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존중하는 마음은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베일 너머로 실패한 다섯 번의 결혼을 보셨고, 다시 그 너머로 이혼 때마다 점점 깊어간 삶의 공허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상처 너머로 영원히 가치 있는 한 영혼을 보셨고, 부자의 옷 너머로 누더기를 걸친 한 영혼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독 가운데 울고 있는 우리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우리의 실체를 보십니다.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과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요청은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 세계 깊은 곳에 간직해 갖고 태어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두 개이지만 의미는
하나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그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며, 우리가 만나야할 진리요, 우리가 그렇게 갈급해 하는 생의 의미, 기쁨, 목적입니다.
3월 14일(금) 여호수아 18-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방에 안식을 주신 하나님(수 21: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The LORD gave them rest on every side, just as he had sworn to their forefathers. Not one of their enemies withstood them; the LORD handed all their enemies over to them.
- 여기서 '안식'(*, 누아흐)이란 구체적으로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 압박 등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를 뜻하는데, 이러한 '안식' 역시 이미 하나님께 약속받은 것이었다.
비록 가나안 족속들이 완전히 멸절되지 않고 가나안 땅도 완전히 점령되어진 것은 아니지만(13;1), 이미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할만한 세력이 완전 꺾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해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이상 그들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고 평화로운 상태를 누릴 수 있었다(Calvin).
안식일(샤바트. shabbâth) שַׁבָּת 스트롱번호 7676
어원 / 767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1회 사용
안식(5117) 누아흐(nûwach) נוּחַ 스트롱번호 5117
발음 [ nûwach ]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4. 이사야 11:2(강림하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5. 이사야 14:7(평안하다)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질러 노래하는도다.
6. 이사야 7:2(동맹하다)
혹이 다윗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사야 30:32(예정하다)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
- 구약 성경 / 143회 사용
[명] 안식(수 21:44). 평강(느 9:28), 평안(대하 14:7), 태평(왕상 5:4).
이사야 40:2(내려놓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에스겔 24:13
너의 더러운 중에 음란이 하나이라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안식(安息)이란?
안식이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서 벗어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안식의 다양한 의미
안식은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의미
- 휴식과 유사한 개념으로, 일상의 피로를 풀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과정입니다.
- 바쁜 일상 속에서 충분한 안식을 취하는 것은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2. 종교적 의미
-
기독교 : ‘안식일(Sabbath)’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자들에게는 예배와 쉼의 날로 여겨집니다.
-
불교: 열반(涅槃)과 같은 개념으로, 번뇌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평온을 얻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유대교: 안식일(샤밧, שבת)은 금요일 해 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 노동을 금하고 쉼을 가지는 날입니다.
3. 사회적 의미
-
안식년(Sabbatical Year) : 교수나 연구자가 일정 기간 동안 연구나 자기 계발을 위해 일을 쉬는 기간입니다.
- 근로자의 안식 : 노동법적으로 일정 기간 근무한 후 주어지는 휴가나 장기 휴식의 개념입니다.
안식의 중요성
-
건강 회복 : 충분한 휴식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신체적 피로를 해소합니다.
-
창의력 향상 : 충분한 안식 후에는 더 좋은 아이디어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 정신적 안정 : 번아웃을 예방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 안식을 취할 수 있을까?
- 일정한 휴식 시간 확보 – 하루 중 일정 시간을 온전히 쉬는 시간으로 활용하세요.
- 운동과 명상 – 가벼운 운동이나 명상은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여가 활동 즐기기 – 여행, 독서, 음악 감상 등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통해 재충전하세요.
- 디지털 디톡스 – 스마트폰, SNS 사용을 줄이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보세요.
인생을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포기할 때 끝이 난다.
따라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불철주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면
반드시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곧 사방에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The Status Anxiety, 2004)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철학적·사회적·심리적 관점에서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특히 "지위 불안(status
anxiety)"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안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책은 우리가 왜 사회적 성공과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불안의 원인 : 우리는 왜 불안을 느끼는가?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불안이 주로 사회적 비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가졌지만, 동시에 사회적 성공과 인정에 대한 압박도 커졌다.
저자는 불안의 주요 원인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① 사랑 부족(Lack of Love)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과거에는 귀족이나 성직자처럼 신분이 고정된 계층이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성취가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
② 기대의 증가(Increasing Expectations)
산업혁명 이후,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기대가 높아질수록,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불안도 커졌다.
사회가 강조하는 "성공적인 삶"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③ 자본주의와 경쟁(Capitalism and Competition)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하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도
증가한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사람들의 가치를 경제적 성취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부와 명성을 얻지 못하면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④ 계급 변화(Possibility of Snobbery)
과거에는 신분이 고정되어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이동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킨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은 지위를
원하고, 타인의 평가에 민감해진다.
이러한 "속물주의(snobbery)"는 사람들을 비교 경쟁 속으로 몰아넣는다.
⑤ 세속화(Secularization)
과거에는 종교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해 주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물질적 성공이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종교적 위안 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성공하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불안에 시달린다.
2. 불안의 극복 :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안적 태도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① 철학(Philosophy) :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라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이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만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타인의 평가)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가르쳤다.
② 예술(Art) :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여라
예술은 인간의 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물질적 성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반드시 부와 명성을 얻지 못했음에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③ 정치(Politics) :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인식하라
많은 불안이 개인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을 이해하면, 불안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심리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④ 종교(Religion) : 세속적 성공을 초월하라
종교는 인간이 물질적 성취가 아니라, 내면의 성장과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돕는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신념이 약해졌지만, 종교의 교훈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을 수 있다.
⑤ 보헤미안적 태도(Bohemian Attitude) : 기존의 성공 기준을 거부하라
보헤미안들은 전통적인 사회적 성공 기준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다.
이들은 부와 명성이 아니라, 창의성과 자아실현을 가치 있게 여긴다.
우리는 이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성공을 재정의할 수 있다.
3. 결론 / 불안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각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불안이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기대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고, 자신만의 가치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안적 태도
등을 활용하면,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결국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불안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철학적 위로와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다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성도님들은 한 해 동안 계획한 것을 얼마나 성취하십니까?
서울 리서치에서 국내 30개 기업 직장인 3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직장인의 30.7%가 60-80% 미만이라고 응답했고 29.1%는 40-60% 미만, 21.6%는 20-40%
미만이라는 응답하였습니다.
3.3%는 20% 미만이라고 응답하였다고 합니다.
한 해 동안 성취하는 것은 평균적으로 57.25%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해 동안 계획한 것을 반 절 쯤은 이룬다는 조사입니다.
아마 실제로는 이보다 더 못 이룰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누구와 약속을 하면 얼마나 지킵니까?
철도청에 따르면 하루 평균 예약 부도율이 30%가 넘는다고 합니다.
항공기
승객의 예약부도율도 평균 23%나 된다고 합니다.
병원 예배 부도율도 10%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예약을 할 때
선납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계획하는 것을 다 이룰 수도 없고 약속한 것을 100% 다 지키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을 다 이루시고 약속하신 것을 다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민 23:19)”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호11:12)”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계획하시고 언약하신 것을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땅을 다 분배하고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수 21:43)”
약속하신 대로 땅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약속한 땅입니까?
열조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조는 누구이겠습니까?
69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75세에 이 약속 붙들고
떠난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라고 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자기의 상속자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삼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해 주면서 분명하게 지시할 땅에 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18-21)” 그 땅에 대한 규모를 정확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또 이스마엘을 자기의
후손으로 세우려고 할 때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 땅을 상속받을 자가 이삭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창17:18,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 17:19)”
또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에게도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창 26;2, 3) 이삭이 가뭄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2-4)”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대한 약속을 다시 이삭에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약속해 주십니다.
야곱이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채고 밧단 아람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무엇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 28:13-14)”
모세에게 이 땅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 3:8)”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출6:8)” 이 약속은 광야 여행 중에도 계속 됩니다(출33:1)
하나님은 그 언약을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취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수 1:2-4)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이제 언약이 더 이상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그 약속대로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땅은 우연히 주신 것이 아니라 열조들에게 하나님이 맹세하시며 주마 약속하신 땅인데 이제 그 약속한 온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지시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69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해주셨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는 약속이 더디 성취되는 것을 보고 힘겨워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고 종과 이스마엘을 그 땅을 상속할 후손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수해도 하나님은 정확히 약속해주시고 그
약속을 정확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룰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했습니까?
땅이 주는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이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거듭 약속한 바로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여호수아까지 우리 하나님게서 이 땅을 선조들의 후손들에게 주기로 맹세하시거나 서약하셨다는 사실을 무려 30회 이상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창 15:18-21) 언제 그 땅을 주실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창15:12-16) 이방의 객이 되고 이방의 객이 되어 4대 만에 돌아 올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받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의 땅이 무엇입니까? 가정의 젖과 꿀이 흐는 땅, 사업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교회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민족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어서라도 이루어 주십니다(왕하7:1-30)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 때에 이스라엘의 서울 사마리아가 아람 나라의 포위를 받아 양식이 떨어져 모두 굶주림으로 이성을 잃어 갔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가 아들을 삶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왕하5:24-33).
이 때 선지자 엘리사의 마음을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오늘은 내 아들, 내일은 네 아들을 잡아먹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내일 사마리아성에 곡식이 많아지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왕하7:1).
이 말을 들은 한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고 믿지 않았다(왕하7:2).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영혼이 있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합니다. 언젠가는 이 땅이 다 끝이 난다고 말씀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정신나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었습니까?(왕하7:3-20) 성문 밖에 4명의 문둥이가 굶주려 죽을 수 밖에 없으니까 어차피 굶주려 죽을 것 이판 사판으로 아람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아람 군인들이 이 문둥이들이 오는 소리를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황혼에 일어나서 다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문둥이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먹고 이 소식을 왕궁에 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고 믿지 않았던 장관은 백성들에 의해 성문에서 밟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믿지 않는 그를 보고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왕하 7:19)”라고 했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받드시 이루어 집니다. 환경을 바꾸어서라도 이루어 주십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여 다 복을 받는데 홀로 축복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어서라도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전 606년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끌려갈 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70 년 만에 해방 받아 돌아올 것을 약속해 주었습니다.(렘25:12,13, 렘29: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렘 25: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하나님은 이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주십니까? 이스라엘을 포로로 끓고 간 바벨론 나라를 멸망시켜 바사 왕 고레스에게 주셨습니다. 바벨론 나라의 멸망원인은 죄악이었습니다(렘25: 12).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성취되었습니다.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잠21:1)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어서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냥 기계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통해 성취하시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의 노력과 기도를 통하여 성취됩니다. 출애굽사건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4대 만에 있을 것을 약속했지만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성경 출애굽기 2장 23-25을 보십시오.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회복되는 것도 보십시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 약속이 유대 민족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렘 29:10-14, 겔36:3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0-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 36:37)”
엘리야 때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땅에 비를 주시겠다는 약속도(왕상18:1)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왕상18:41-46).
우리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게 하는 것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우리도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가나안의 축복을 약속 믿고 나아가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더디다고 포기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하신 안식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44절)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 압박 등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젠 노예 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삶이 끝이 나고 정착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는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불안으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안식이란 말은 "쉼"(rest)을 말합니다. 안식은 성취의 결과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육체적 쉼과 정신적 평과, 사회적 안정, 가정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에덴동산은 안식의 동산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추방되었습니다. 그 안식의 동산에서 추방되는 역사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안식의 땅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가인이 살인하고 추방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참된 안식의 땅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차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은혜의 땅, 안식의 땅 입니다.
이 안식의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보십시오. 신12:9-10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애굽과 광야에서는 불가능했던 이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해주셨는데 그것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5장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 25:19)”
하나님께서 그 기적같은 일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 이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수 1:13)”
안식은 대적으로 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안식은 방황의 끝을 말합니다. 평화와 안전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 광야의 방황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평안과 안전 속에서 그를 기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레위기25:23) 안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속에서 나타나는 안식은 국가적 평안과 안전 속에서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으로 땅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 안식으로 누리는 영원한 영원한 천국에 대한 상징입니다(히4:1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라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 사람들이
누리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을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아안 땅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새 예루살렘,
새땅의 모형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한숨도 갈등도 질병도 가난도 없는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자들은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가데스 바냐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한 사람들은(민14:11) 다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신1:32;9:32;시106:24).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믿음이나 신뢰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믿지 않는 결과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완전 분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미 안식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안식의 땅에서 삶을 오늘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44절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아직 다 점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안식을 주셨다는 것은 그들이
순종하면 어떤 대적도 그들을 넘어뜨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적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안식을 누리는 한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약적인 용어로 바꾸면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이미 참 안식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천국 백서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대적이 없습니까? 수많은 어려움과 안식을 파괴하는 대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대로 안식을 이루어 주십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 없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45절)
여호수아는 다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땅과 안식에 대하여는 열조에게 맹세하신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무엇을 하나님이 하나도 남음 없이 다 응하게 하여 주었습니까?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좁게는 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참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일입니다. 넓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에게 약속하시고 이 땅을 점령하게 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를 통하여 다 이루실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일이 다 하나도 남음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쉽게 포기하고 어려워지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선한 일을 꼭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친히 가나안 족속의 멸절 명령을 지시하시면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신 7:9).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 더디게 성취되는 것 같아 보이는 때라도 우리는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선하신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살후 3:13)”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시작하였으니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마지막 유언적인 설교를 하시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수 23:14)”
세상의 불의가 득세하고 악이 이기고 선이 굴복하는 것같다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은 반드시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1-28에 귀신들린 딸을 두 어머니가 나옵니다. 딸을 났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많은 재산도 허비했을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자기 동네 두로와 시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딸을 낳게 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누구 눈치 볼 일이 아닙니다. 체면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가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은 채도 하지 않습니다. 침묵합니다.
23절 보십시오.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의 소리를 듣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을 보내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 여인의 접근을 방해합니다. 그 때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절을 하며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거절합니다. 그래도 그 여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시하고, 방해하고, 거절당했지만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개처럼 취급받고 자존심 상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습니다. 끈기 있게 메달립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성취하기 까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입니다. 다윗은 17여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고 선포해 주십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가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선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느헤미야를 보십시오(느헤미야 2:10-20)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얼마나 장애물이 많았습니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평생 권력과 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자처햇습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고 시작한 일입니다. 왕의 적극적인지지 가운데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비자도 받았고 성벽을 건축하고 집을 지을 건축 자재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첫 삽도 파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페르시아의 관리가 된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고 하면서
느헤미야를 대적합니다(4:12, 6:10, 14, 18)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왕을 배반하는 일을 한다고 방해합니다. 세력을 너
넓혔습니다. 아라비아 사람 게셈도 느헤미야의 일을 반대하는 무리에 가담하였습니다. 주제 파악 좀 하라고 비웃습니다. 능력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입니다. 새 사업을 한다고 “자금이 있느냐? 인맥이 있느냐? 경험이 있느냐?” 이런 식으로 조롱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할 때도 장애물은 있는 법입니다. 장애물이 없이 모든 일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동안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이 3년 광야 생활을 하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선한 일이고 민족을 위하여 나선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데 첫 번부터 살인자로 쫓겨 광야에 나갔고 무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우상을 섬기던 아버지를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그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뭄이었습니다. 가뭄만 있습니까?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재물이 많아지자 조카 롯과 싸움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목동으로 살다가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왕궁에 들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울의 시기였습니다. 17여년 동안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요셉이 목동이 직업을 그만두고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와 가정 총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순탄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중년 여성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자고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폭풍이 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간 길입니다. 기도하고 간 길입니다. 약속받고 간 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한 일입니다. 장애물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장애물을 성장을 위한 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장애물을 주십니까? 각기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을 보십시오.
광야를 걷게 하신 첫 번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낮추시겠다는 말입니다. 겸손의 훈련을 시키겠다는 말입니다. 바로 모든 것이 잘 되면 교만해져서 미래 더 긴 축복의 삶을
누리지 못하니까 겸손의 훈련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이며 겸손하면 세상이 다 내 편이 됩니다.
둘째는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16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그런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462장 1절)”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갖은 어려움을 당한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
38:17)”
주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 고통을 당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느헤미야는 고백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시리니”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헤미야서 6장 15절 이하를 보십시오.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 6:15-16)”
우리 하나님께서는 주시겠다고 한 땅, 안식, 선한 일 모두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안식과 선한 일을 다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월 13일(목) 여호수아 14-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 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Now give me this hill country that the LORD promised me that day.
You yourself heard then that the Anakites were there and their cities
were large and fortified, but, the LORD helping me, I will drive them
out just as he said."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hill country)
산지(2022) 하르(har) הַר 스트롱번호 2022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쫓아내리이다
- 여기서 '혹시'에 해당하는 '울라이'(194)란 말은 '만약', '혹시'라는
가정과 의심의 뜻도 있지만, 아울러 '정녕', '필시'라는 소망과 확신의 뜻도 지닌다.
혹시(울라이. ’ûwlay) אוּלַי
스트롱번호 194
어원 / 1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5회 사용
실로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 이후, 38년 동안의 광야 생활 기간과 7년 동안의 가나안 정복 전쟁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하고, 또한 확신했을 것이다.
정녕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창 21:22), 이삭(창 26:28), 야곱(창 28:20;31:5;35:3;48:21), 모세(1:5, 17;출 3:12;4:12, 15), 여호수아(1:5, 7)와도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형통케 하셨다.
여기서 갈렙도 그러한 '임마누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개념은 출 33:16;민 23:21;신 2:7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와같은 임마누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결코 저버리시거나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는 뜻(1:5, 7;3:7;신 31:6;왕상 8:57;대상 28:20),
(2) 적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이(신 31:8;대상 28:20;대하 20:17) 언제 어디서나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는뜻(신 31:23).
(3)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뜻(신 2:7)
민수기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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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Kaleb) כָּלֵב
1. 뜻 : 개 <충성, 헌신의 상징> - 충성된 자, 온전하게 따르는 자
2. כָּל (kal) : <온전한, 모두>
לֵב (lev) : <마음> - 온전한 마음, 전심으로 따르는 자
출애굽과 광야 생활
갈렙의 첫 등장은 민수기 13장에서 열두 정탐꾼 중 한 명으로 소개될 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출애굽 사건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세대의 일원입니다.
1. 가나안 땅 정탐 (민수기 13-14장)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했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뽑혔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가나안을 탐지한 후,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 거민들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다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수기 13:30)
하지만 백성들은 불신과 두려움에 빠져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항의했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세대를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도록 징벌하셨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민수기 14:24).
2. 광야 40년 동안의 인내와 충성
그는 불평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기업으로 받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충성심과 믿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3. 가나안 정복과 기업의 약속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 정복 (여호수아 14장)
광야 생활이 끝나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갈렙은 여전히 강한 믿음과 용기를 보여줍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아가 헤브론 산지를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르신 날에 나를 40세에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고...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신 이래로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말한 그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여호수아 14:7-11)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건하며, 헤브론 산지를 정복할 믿음과 능력이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안학 자손(거인 족속)이 거주하는 어려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그 땅을 요구했고, 결국 헤브론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2) 헤브론 정복 (여호수아 15장)
갈렙은 안학 자손과 싸워 헤브론을 정복하고, 그곳을 자신의 땅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의 믿음과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싸움을 이끌었습니다.
3) 다른 땅의 분배
갈렙은 자신의 딸 악사에게도 유업을 나누어주며, 결혼 선물로 물 있는 땅을 요구하게 했습니다(여호수아 15:16-19). 이는 갈렙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유산을 남기려는 책임감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4. 갈렙의 죽음과 유산
갈렙은 가나안 정복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신의 기업을 얻고 평안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의 이름은 성경 전체에서 믿음의 사람, 온전한 순종의 본보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순종한 자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말은 꿈을 가진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몸이 많이 불편하신 할머니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분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빨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있습니다. 왜 빨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삽니까?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나이는 들었고, 몸은 안 아픈 데가 없고,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는 않고... 계속 이렇게 아프게 힘들게 사느니 빨리 죽고 싶다는 것이지요. 맞습니까? 그런데 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도, 또 몸이 아파도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아예 하지 않은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아니, 빨리 죽을 까봐 겁을 내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나이가 90이 되고, 몸도 많이 아파서 약으로 버티는 데도 그분들은 빨리 죽을 까봐 겁을 냅니다. 어떤 분들입니까? 할 일이 있는 분들입니다. 아들은 먼저 죽고, 며느리는 도망치고, 자기가 어린 손자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들... 이런 분들은 제발 일찍 죽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할머니는 93세인데 매일 동네를 하루에 몇 바퀴씩 돌면서 빈병을 모읍니다. 큰아들은 사고로 죽고, 딸들은 시집가서 그럭저럭 사는데... 40이 넘은 막내아들이 집도 직장도 없이 90넘은 어머니에게 빌 붙어서 삽니다. 제가 볼 때에는 건강한 사람인데... 자기 어머니에게는 맨날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할머니에게 나오는 정부 돈과 병을 주원 판 돈을 뜯어갑니다.
참 나쁜 아들입니다. 늙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늙고 병든 어머니에게 빨대를 꽂아놓고 쪽쪽 빨아먹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그 아들을 위해 매일 빈병을 줍습니다. 딸과 사위들이 아무리 말해도 그 아들 걱정만 합니다. 이 할머니는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같이 죽을 까봐 제발 좀 더 오래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아시겠지요?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 다르게 말하면... 꿈이 있고 목표가 있는 사람은 죽을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꿈이 있으십니까? 해야 할 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십니까? 죽는 것을 미뤄서라도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그런 일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젊다고 다 꿈이 있습니까? 젊다고 다 해야 할 목표를 가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노인이라고 다 꿈이 없습니까? 노인이라고 하고 싶은 일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꿈과 목표는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은 ‘갈렙’입니다.
이 갈렙이 나이가 85세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85세의 할아버지가 꿈이 있습니다.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말합니다.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합니다.
85먹은 노인이 ‘나는 꿈이 있소. 나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소. 이 산지를 나에게 주시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갈렙이라는 사람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갈렙은 영웅입니다.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오직 두 사람,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20세 이상으로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이 두 사람만 살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도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 했지만 결국 들어오지 못한 가나안 땅을 갈렙은 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영웅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는 혈통적으로 이방인인 그니스 사람이었습니다(수 14:6. 14)
창세기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즉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출애굽에 합류한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군대’ 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납니까?
계급입니다. 그러면 유대인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까?
혈통(血統)입니다. 유대인은 철저히 혈통에 매인 민족입니다.
분명히 신앙공동체이지만, 실제로는 혈통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을 ‘개’요 ‘지옥의 땔감’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그런 이방인 이었습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차별이 있지 않습니까?
돈의 많고 적음, 지식이나 학벌, 키와 얼굴 같은 외모, 심지어는 피부의 색으로도 사람을 구별합니다.
미국에서 흑인은 ‘노예’였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차별이 엄연히 존재 합니다.
그리고 현재, 흑인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 받는 것이 황인종입니다.
미국가면 여러분은 2류 아래, 3류 인종입니다. 백인은 자기의 피부색을 무슨 색 이라고 할까요?
그들은 White 라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One of Colors 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의 피부, 사람의 색’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피부가 흰색이 아닌 것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취급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작은 것이라도 차별하여 남을 낮추고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약점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이 너무 거대하면 욕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웅으로, 신으로 섬겨버립니다. 갈렙이 꼭 그런 신과 같이 존경 받는 이스라엘의 영웅입니다.
갈렙은 지금 85세인 노인이요, 이스라엘 수백 만 명 중 최고령의 2명중의 한명입니다.
그 말은 동년배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모두 다 자기보다 최소한 20세 연하의 사람들뿐입니다.
단 한명의 친구도 없는 그런 천하의 외로운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수백만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문자 그대로 홀로 늙어가는 사람입니다.
노인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가까운 사람 없이 ‘홀로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교회 오라고 오라고 해도 안 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한 번 교회 나오면, 그 이후로는 교회 버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집에서 나와서 기다립니다. 어쩌다 자기를 안 기다리고 그냥 가면 매우 섭섭해 하고 바로 삐칩니다. 오지 말라고 할까봐 오히려 겁냅니다. 노인들은 정말 사람이 그립고 정이 그리운 분들입니다. 갈렙이 그런 노인입니다. 애굽에서 같이 나온 조강지처 아내도 당연히 죽었습니다.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
아들이 있고 딸이 있었다면,(20세 이상이었다면) 그 아들도 딸도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다만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딸 이 있습니다. (수15;16)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고 적혀 있기에...
그런데 오늘 그런 갈렙이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갈렙을 따라 유다 지파도 함께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갈렙은 말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는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지금 12지파가 다 땅을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자기가 원하는 땅 ‘헤브론’을 꼭 찍어서 ‘주세요’ 합니다.
밭에서 사람을 불러서 쓰면, ‘놉’을 얻으면 하루에 4~5만원을 줍니다. 물론 공짜가 아니지요. 종일을 일을 하니까 주는 돈입니다. 일은 힘듭니다. 힘든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놉을 주니까 돈보고 하는 것이지요. 돈이 힘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배인 10만원을 준다면 어떨까요? 서로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없던 힘도 날것입니다. 그러면 10배인 50만원을 준다면, 아니 100만원 주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주인보고 미쳤다고 하면서 아무도 일을 안 할 것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고 일을 하지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10배인 50만원을 준다면, 아니 20배인 100만원 주겠다고 하지 않고 아예 그 밭은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명의 변경을 시켜주는 것을 오늘 성경이 말씀합니다. 갈렙은 말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는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땅을 갈렙에게 줍니다. “헤브론 산지”는 영원히 갈렙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 하느냐?
세 가지입니다. 갈렙은 3가지를 잘 했기 때문에 “헤브론 산지”는 영원히 갈렙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단순히 일한 만큼 놉을 받는 것을 넘어서 갈렙처럼 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갈렙처럼 되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충성(忠誠) 14:7-8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12명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다른 정탐꾼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말 합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충성하였다고 먼저 말합니다. 그 성실한 행동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성실한 사람, 충성된 사람 갈렙에게 모세는 상을 줍니다. 그 상은 ‘약속’입니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이 약속은 45년 전에 그가 모세로부터 받은 약속입니다. 갈렙은 45년 동안 이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모세가 죽었고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5년이 지났습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그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스스로 나옵니다. 45년 전의 모세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합니다. 그는 한 번도 모세가 준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실함으로 약속을 받은 그는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사실을 여러분에게 설교 합니까? X2
여러분에게 삶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비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85세된 노인의 삶과 인생, 꿈과 비젼을 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시면 성경에서 무엇을 봅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닫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갈렙은 모세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약속은 ‘아멘’하면 나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갈렙에게 ‘꿈이나 비젼’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는 ‘교회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에게 준 것이 꿈이요 비젼이다’ 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설교)을 듣거나 읽으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강하게 감동을 주십니다. 그것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잡으면 됩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꿈이요 비젼입니다.
(살전5;19,2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라고 하십니다. 감동을 무시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며, 예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45년을 그 약속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붙잡았다(14: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런데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은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갈렙은 제비뽑기와는 상관없이 직접 달라고 합니다.
먼저 왜 하필 ‘헤브론’일까요? 살기 좋은 평야가 아닙니다. 기름진 강변도 아닙니다. 山地입니다.
그 산지는 아무도 안사는 곳입니까?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며” 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15절) “헤브론은 옛 이름이 기럇아르바요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고 성경에 기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골리앗이 키가 293cm이었습니다.
헤브론은 그런 거인들이 가득 살고 있는 곳이고 또 산지입니다.
또한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 합니다.
그런 거인들이 얼마나 전쟁을 좋아하고 또 자기의 고향을 죽기 살기로 방어하겠습니까? 그런 곳을 공격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85살이나 된 노인이 이런 어려움을 자초 할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땅을 분배 받는데 말입니다.
비밀은 그 땅의 이름에 있습니다. “헤브론” 이 그 비밀입니다.
“헤브론” 에 막벨라 굴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가 누워있는 곳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장사되어 있습니다. 야곱도 거기 누워 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은 조상이 있는 선산이요,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고향입니다. 축복의 발원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왜 유다 지파가 갈렙과 같이 왔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요. 갈렙이 유다지파 소속이므로, 헤브론이 갈렙의 기업이 된다는 것은 곧 유다지파의 소유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지만, 정신적인 중심지는 헤브론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출신의 갈렙의 이런 당당한 요구 앞에, 이방인 출신의 갈렙의 우선권 앞에, 여호수아는 물론이고 전 이스라엘이 아무 불평을 못하고 그 중요한 땅을, 조상의 선산이 있는 정신적인 고향 땅을 자손 대대의 영영한 기업으로 합법적으로 이방인 출신의 갈렙에게 넘겨줍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성실함으로 약속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에 근거하여 구하기 때문에 아무도 반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렙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면 운명이 바뀐다’ 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경의 약속을 내 것으로 붙잡고 ‘이 말씀대로 해 주세요. 이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하고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의 기도를 절대로 들어주십니다. 안 들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요삼2절 말씀을 붙잡고 우리 교회가 이 말씀대로 되는 교회가 될 것을 매일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약속을 믿음으로 자기의 것으로 소유(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성도여러분, 약속은 아직은 그냥 ‘약속’입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내 손안에 아직 없지요. 어떻게 하면 그 약속을 내 것으로, 현실로 ‘소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소유합니다. 믿음으로 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믿음으로 자기의 것으로 소유합니다.
(12절)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헤브론은 평야가 아닌 산지이고 그 성읍은 높고 견고합니다. 또 키가 3m에 달하는 거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해도 거절할 판입니다. 좋기는 좋지만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지 않습니까? ‘85세나 먹은 당신이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하겠느냐, 그만두어라. 그들은 거인들이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지 않느냐. 더구나 당신은 아들도 한명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11지파의 입을 그는 어떻게 막습니까?
(12절)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혹시’라는 말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지극한 겸손입니다.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이것이 85세 노인의 진정한, 변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40세 때에도, 또 45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그의 믿음은 여전합니다.
성도여러분, 자기의 힘과 건강, 재능과 열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 그들을 에굽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를 성실히 믿는 그런 믿음이 갈렙은 85이 된 지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 곧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믿음대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멘!
성도여러분, 아들도 없고, 85세나 먹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천지간에 친구하나 없는 외로운 노인 일지라도, 그는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거인족 들이 아무리 강하고 그들의 성읍이 크고 견고해도, 그들은 여호와보다 약합니다. 약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멘? 아멘!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남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은 ‘신앙’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문제를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푸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 내가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과 이세상과의 문제라고 생각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갈렙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헤브론”을 점령 합니다. 이 갈렙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교회 식당을 확장하는 문제가 있었지 않습니까? 2배의 인원이 와도 수용할 정도로 확장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럽니다. 3배로 인원이 늘면 그때는 어떻게 할거냐? 하는데... 머리가 띵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꿈이 2배 밖에 안 되는구나. 놉을 2배 받는 것만 생각하고 있구나. 하나님께서는 10배도 20배도 주실 수 있는 분인데... 아니 땅을 통째로 주실 수 있는 분인데... 갈렙은 말씀을 붙잡고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나는 2배도 많다고 생각을 하고 있구나. 참 많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작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작게 여기지는 마십시다.
하나님 안에서 큰 꿈을 믿음으로 세우십시오. 그것이 바른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구하라 주실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가 얻을 것이요 찾는이가 칮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말라 ....” (약 1:6-7)
문제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자기의 인생을 이해하고 있나요? 또 얼마나 성경의 약속을 강하게 붙잡고 있나요? 믿음이 있나요? 없나요? 갈렙이 여러분에게 도전이 되나요??? 갈렙이 여러분을 자극하나요?
갈렙처럼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충성합시다.
갈렙처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담대히, 믿음으로 기도하시는 사람이 되십시다. 사실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됩니다. 한 알의 씨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한명이 내가 되겠다’ 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인 일이 여러분의 꿈이 되십시오.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 여러분과 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다 그런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3월 12일(수) 여호수아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업이 되게하라(수 13:7)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and divide it as an inheritance among the nine tribes and half of the tribe of Manasseh.
11:15 / 여호와께서 그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As the LORD commanded his servant Moses, so Moses
commanded Joshua, and Joshua did it; he left nothing undone of all that
the LORD commanded Moses.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정복해야 할 남은 땅은 너무 많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정복한 요단 동편의 땅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의 절반(1/2) 지파가 차지했습니다.
이제 남은 아홉 지파와 므낫세의 절반(1/2) 지파에게 요단 서편의 땅을 분배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점령해야 할 땅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가족 구원을 이루라(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내 가족들 모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삶의 주위에서 구원 받을 사람을 찾으라(마 28:19-20a)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에서 아직도 내 주위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불신자를 만나야 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낙심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지체하며 머뭇거리며 방황하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블레셋의 온 땅과 애굽으로 위치한 땅과 같은 남부 지역과, 시돈에 속한 서쪽 땅과 동쪽의 레바논
전체와 하맛으로 들어가는 북쪽 땅이 남았고, 여호와께서 그 땅 거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쫓아내어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영원히 상속할 소유로 삼게 할 것이며, 그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하여 기업을 삼게 하라고
하시고, 또 이미 정복한 요단 동편의 땅은 모세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하였는데, 요단강을 서쪽 경계로 하여 북쪽
헤르몬 산과 남쪽 사해의 중간 지역에 이르는 땅이며, 그곳 가운데 그술과 마아사 족속은 미처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하여
여호수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그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였며, 한편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분배한 땅이 없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고 백성들이 드리는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의 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심을 보며,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안일한 태도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마땅한 자세가 아니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군사로 아지도 미처 정복하지 못한 우리의 영적 싸움터로 쉼없이 나아가고 복음 사역자가 하나님의 일에 전심 전력을 할 수
있도로 물심양면으로 돕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하심을 믿고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순종하며 신실하게 충성을 다하는 사명자가 되며 세상의 죄에 종노릇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늘 나라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고 세상의 기업이 아닌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며 생명보다 귀한 주의 일을 감당하며 결코 세상적인 걱정에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업(基業) 5159. 나하라(nachălâh) נַחֲלָה 스트롱번호5159
어원 / 515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
1. 명사, 여성 소유, 점거함, 민18:21, 민18:23, 26:62, 27:7, 신4:21, 수13:23, 사17:11,יִהוָֹה נַחֲלַת]
-
a. 명사, 여성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이스라엘], 신4:20, 9:26,29, 시28:9.
-
b. 명사, 여성 여호와께서 주신 소유물, 여호와의 선물, 시127:3
-
-
2. 명사, 여성 상속, 왕상21:3,4, 잠19:14.
-
3. 명사, 여성 하나님께 받은 분깃, 욥20:29, 27:13,31:2.
-
관련 성경☞유산(창 31:14, 48:6, 왕상 21:3, 전 7:11), 기업(출 15:17, 신 4:20, 시 16:6, 미 7:18). [동] 상속하다(잠 19:14)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계승하다(렘16:19), 택하다(슥2:12), 나누다(민34:18, 수19:49), 얻다(민35:8), 상속하다(시69:36), 차지하다(사57:13), 분배하다(수14: 1), 더럽히다(겔7:24), 수치를 당하다(겔22:16), 누리다(슥8:12), 끼치다(잠13:22), 이기게 하다(신12:10). [명] 기업(출32:13, 신21:16, 시119:111), 소득(잠11:29), 산업(잠13:22).
기업(企業) 꾀할 기. 바랄 기(企). 업 업(業)
מִפְעָל
스트롱번호4659
어원 / 646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구약 성경 / 56회 사용
חֲבֻרָה 2250 [chăbûrâh]
-
여성형 명사 줄, 상처, 상함, 채찍 자국, 창4:23, 시38:6(5), 사1:6, 53:5.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여성형 명사 교제, 사귐, 욥34:8.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여성형 명사 동료, 친구, 단7:2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9지파 반(半)에게 분배되어야 했다.
그것은 2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은 이미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기 때문이다(민 32:33-42).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13:1-6.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열거
13:8-33. 요단 동편 땅의 기업 분배
- 본장 1-6절은 가나안 땅 가운데 이스라엘이 채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열거하였으며,
8-33절은 요단 동편 땅의 기업 분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14장부터는 요단 서편 땅의
기업 분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 기업 분배 명령은 14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나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크'(*)는 '분배하다', '매끄럽게 하다'란 뜻으로, 곧 제비뽑기를 위해
매끄러운 돌이 사용되는 것을 뜻할 때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기업 분배가 제비 뽑기를 통해 되어졌음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민 26:55, 56).
여호수아서 13-21장은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땅을 기업으로
나눠주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13장은 땅 분배의 서론으로 핵심은 기업입니다.
그냥 땅을 나누는 부동산 분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기업이 되게 하라고 기업에 방점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13:8-33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미 두 지파
반에게 주신 요단 동편의 기업 분배를 다시 회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회상은 그들이 요단강 건너 서편 가나안에서 하나님께 받을
기업의 성격과 분배의 원칙을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업이라는 말이 무려 13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이 기업은 이스라엘 혼자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음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주었다”가 8, 15, 24,
29에 네 번 나오고, “받았다”도 8, 23, 28, 31에 네 번 나옵니다.
주다(5414) 나탄(nâthan) נָתַן 스트롱번호 5414
구약 성경 / 2011회 사용
받았는데(3947) 라카흐(lâqach) לָקַח
스트롱번호 3947
구약 성경 / 966회 사용
땅(776) 에레츠(’erets) אֶרֶץ
스트롱번호 776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אַרְצִי, ‘확고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504회 사용
기업을 기억하십시오.
13-21장의 땅 분배에서
기업이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을 그들은 그냥 땅이 아니라 기업으로 받아야 합니다.
13:8-12, 요단
동편의 기업 - 르우벤과 갓 지파 및 므낫세 반 지파가 받았던 기업의 전체적인 요약
15절은 르우벤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한 뒤,
16-23절에 르우벤 지파가 이런 성읍과 촌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24절에는 갓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하고,
25-28절에 갓 지파가 받은 성읍과 촌락을 열거합니다.
29절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하고
30-31절까지 므낫세 반 지파가 받은 성읍과 촌락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에게 기업을 나눠주실 때 한 지파에게 덩어리로 주시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분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4절입니다.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9절입니다. “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대로 주었으니” 가족대로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기업을 주시되 가족대로 주어서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누구나 기업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요단 서편 가나안 땅도 기업으로 받을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각자의 분량대로 가장 적합하게 나눠 주십니다.
이렇게 요단 동편 땅을 두 지파 반에게 이미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셨고 그들은 받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은 14:1절부터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차지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3:1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11:23절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선언은 무엇입니까?
가나안의 주요 거점을 정복하는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가나안
남부 연합군이 무릎을 꿇었고 북부 연합군도 크게 무찔렀습니다.
가나안의 모든 왕을 다 죽였고 군인들도 죽였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작은 지역의 전투가 남아 있습니다.
기를 쓰고 그 땅을
지키려고 저항하고 있는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투는 남아 있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앞으로 싸워서 마저 얻어야 할 땅은 이러하다고 2-6까지 세세하게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너는 너의 할 일을 다 하고 나이 많아 늙었으니 그 땅을 미리 아홉 지파 반에게 나누어주고
그들 자신의 전투로 기업을 차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13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니 이스라엘은 그 땅을 각자의 기업이 되게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땅만 차지하지 말고 그 땅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도록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은 각자
믿음으로 싸워서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13장만 아니라 마지막 24장까지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아니 사사기까지 이어집니다.
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일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이는 장차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업을 은혜로 주셨지만, 그냥 주시지 않고 이스라엘이 믿음의 싸움을 통하여 받게 하십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물리쳐주셨습니다. 신약 성도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을 물리쳐주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끈질긴 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전투들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투도 믿음으로 싸우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다 약속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가나안 영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32-33절입니다. “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시지 않고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기업이며,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이는 나머지 지파가 받은 기업의 궁극적인 지향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심은 결국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의미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땅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화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주신 계명을
통해 그리스도를 붙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일상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화제, 영적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기업을 주시기 위해 기업 무를 자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내가 이미 다
이기었으니 너희는 이제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기 위한 믿음의 싸움을 각자 싸우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일상이 예배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싸우고 우리 밖에 죄의 가치관들과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 싸움을 잘 싸우려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영광을 방해하는 죄와 잘 싸울 수 있습니다.
엡 1:16-19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의 기도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성도 안에 허락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땅의 썩어질 기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고 기업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와 도전을 힘
있게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기업은 상속이라는 뜻이며 소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속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란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된 우리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상속으로 너무나 놀랍고 크고 영광스러울 뿐 아니라 풍성합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엡 1:11-12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기업(2820) 크래로오(klērŏō) κληρόω
스트롱번호 2820
발음 [ klērŏō ]
-
1. [능동] 추첨하여 지정하다, 엡 1:11.
-
2. [중간태] 추첨으로 얻다.
-
관련 성경기업(基業)이 되다(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기업이 되었으니
- '기업이 되었으니'의 헬라어 '에클레로데멘'(*)은 '제비를 뽑아 지정하다' 혹은 '기업이 되다'라는 의미의 동사 '클레로오'(*)의 단순 과거 수동태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께 어떤 기업을 받는다는 것보다 훨씬 더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Lincoln, J.A.robinson).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대로 우리를 택하시고 소유하셔서 자기의 기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보호하며 돌보신다(5절, Blaikie).
또한 '에클레로데멘'이 수동태인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이 우리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3:6 분배하여(나팔) נָפַל 스트롱번호 5307
발음 [ nâphal ]
여호수아 14:2 제비뽑아(고랄. gôwrâl) גּוֹרָל 스트롱번호 1486
발음 [ gôwrâl ]
어원 / 복수 גּוֹרָלוֹת ,גּוֹרָלִים, ‘거칠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7회 사용
-
1. 명사, 남성 제비, 추첨, 행운, 레16:8, 욘1:7, 겔24:6
-
2. 명사, 남성 어떤 사람에게 몫으로 할당된 것(특히 유산), 삿1:3, 사57:6, 시125:3.
-
관련 성경☞제비(레16:8, 수17:14, 21:5), 제비 뽑힌 자(대상24:7, 25:9), 제비 뽑음(레16:8, 민26:55, 수14:2).
하나님이 우리의 상속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도록 예정을 입었다고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영광의 찬송이 되는 기업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 영광과 복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이 복된 그림 말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좁은 땅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피 흘리며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그의 자랑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며 기쁨이 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이 13장에서 말하는 그 땅을 기업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남아 있는 각자의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세상에서 얻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일부만이라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위한 일에 애쓴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리 냉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더 뜨거워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는 일에 더 감격적이면 좋겠습니다.
3월 11일(화) 여호수아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태양아 멈추어라(수 10:12b)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On the day the LORD gave the Amorites over to Israel, Joshua said to the LORD in the presence of Israel: "O sun, stand still over Gibeon, O moon, over the Valley of Aijalon."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O sun, stand still over Gibeon, O moon, over the Valley of Aijalon."
해와 달을 멈춘 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견고한 성 여리고를 7일 동안 돌고 나팔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릅니다.
그 함성 소리에 여리고는 힘 없이 무너집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여리고를 점령한 후에는 아이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브온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합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살면서도 마치 먼 곳에 사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입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사신들에게 헤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만나게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거짓으로 위장한 것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서 미리 조약을 맺으려는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의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갑니다.
그리고 기브온 족속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후에 기브온 족속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이기에 기브온 족속을 받아드립니다.
가나안 남방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연승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하여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5개국 연합군은 우선 기브온을 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배신하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한 기브온을 치기 위하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기브온과 대진합니다.
연합군과 대진하게 된 기브온 족속들은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서 도움을 구합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의 소식을 듣고 밤새도록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올라갑니다.
밤새도록 올라갔다는 말은 야간행군을 했다는 것입니다.
길갈에서 기브온까지는 약 35km의 거리입니다.
기브온은 해발 1800m가 넘는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의 연락을 받은 그 밤에 멀고 험한 기브온까지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대낮에는 적들에게 노출될 수도 있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이기 때문에 혹 적들이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해온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힘들어도 먼 길을 밤에 행군했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행군을 한 이스라엘 군대는 갑자기 가나안 연합군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연합군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11절에 보면 놀란 다섯 나라의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도망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큰 우박이 내려 도망치는 자들이 맞아 죽었습니다.
우박이 얼마나 컸는지 우박에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날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한 전쟁입니다.
얼마나 큰 우박이 떨어졌으면 우박에 맞아서 사람이 죽었을까요?
호주에서는 가격이 아주 싼 차가 있는데 바로 우박에 맞은 차라고 합니다.
호주에서는 우박이 내리면 자동차가 찌그러질 정도로 큰 우박이 내린다고 합니다.
그 우박에 잘못 맞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합니다.
11절에서 말하는 우박도 그런 우박이었던 같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떨어져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연합군은 그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지형지물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브온은 처음 가보는 낯선 곳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떨어져 밤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밤이 되면 싸움이 어려워 질 게 뻔합니다.
참으로 시간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순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향해 소리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수아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명령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태양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믿음을 보시고 태양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기브온을 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사건 안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음성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약속에 충성된 자에게 복 주시는 분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비록 기브온 족속이 속임수로 계약을 맺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계약이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이었기에 그 약속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과의 약속에 충실하니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의 남쪽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브온과의 약속에 충실해서 남쪽 땅을 얻게 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맺은 계약은 영원히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배신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삼하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에 3년간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400년 전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한 맹세를 사울이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너희에게 속죄하겠느냐?” 묻습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자신들을 학대한 사울의 자손 일곱을 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자손 7명을 기브온 족속에게 내어줍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그 7명을 산 위에서 목을 매달아 죽입니다. 그 결과 3년간 오지 않았던 비가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삼하 21장 사건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약속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충성의 상징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기브온 족속은 남방 히위족속으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도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이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기브온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아론 계열의 일부로 들어가서 성전에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브온의 충성됨을 아시고 거룩한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시편 15편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의 자격 중에 하나는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자’입니다. 서원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시대가 되어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깁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항존직 직분자들을 세울 때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님에게 순종하고 교회를 옮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은 시험거리만 생겨도 임직식 때 했던 약속을 어깁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갑니다. 물론 견디는데 까지 견디다가 도저히 은혜생활이 안 되어서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속에 신실하십시오. 약속만 잘 지키고 살아도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족속들에게 속아서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켰더니 가나안의 남쪽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자에게 복 주시는 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합군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기브온 족속들을 도왔는데 그 일로 인하여 가나안의 남쪽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잠 21:13에 보면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어려운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남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어려운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 7:12에 보면 기독교의 황금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인도의 성자라 불리던 선다싱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친구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을 넘게 되었습니다. 산을 넘다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선다싱은 친구에게 쓰러진 사람을 함께 업고 산을 넘자고 했으나 친구는 “그를 돕다가는 우리 둘도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산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라며 혼자 앞서 가버렸습니다. 선다싱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를 등에 업고 산을 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눈 덮인 산을 그것도 사람을 업고 넘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두고 가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을 넘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다싱이 힘들게 한참 길을 가다보니 앞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혼자 살겠다고 앞서간 친구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다싱은 앞서 쓰러진 사람을 업고 산을 넘느라고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흘렀습니다.
선다싱의 친구는 혼자 살겠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봐주지 않았다가 추위에 죽게 되었고, 선다싱은 남을 돕다가 추위를 이기고 안전하게 히말라야 산맥을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기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잠 11:25에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돕게 되면 자기가 자진 것을 남을 위하여 소비하기 때문에 부족해질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풍족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을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우면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다 도와준다면 우리의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늘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수아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도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도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도와야 합니다.
사실 기브온 족속과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은 여호수아의 실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평화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브온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브온 족속을 돕는 일을 담대하게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돕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부담감을 주시기도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구제하고 선교하십시오. 반드시 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박을 내리셔서 연합군을 치셨습니다. 연합군은 칼로 죽은 자들보다 우박에 죽은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또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태양도 멈추게 하셨고 달도 멈추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사도신경대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믿지 못하는 교인들은 태양과 달,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잠깐 태양을 멈추게 하신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시계를 만든 것은 믿는데, 시침을 멈추게 하는 것은 못 믿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태양도 달도 멈추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미국의 우주항공국(NASA)은 전 세계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과학자들 대부분은 크리스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해롤드 힐(Harold Hill) 이란 과학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배경은 NASA의 슈퍼컴퓨터가 우주 천체의 시간으로 지구 역사를 추적해 나가는데, 희한하게도 시간이 사라져 버린 적이 두 번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슈퍼컴퓨터로 계산해 보니 한 번은 23시간 30분, 또 한 번은 40분 정도의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지구가 자전을 감속했다는 얘기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일을 멈추었던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의 사라져 버린 시간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미스터리로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롤드 힐이 우연히 성경책을 읽다가 여호수아 10장 12,1 3절에서 그만 온 몸이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바로 지구가 하루 가까이 자전을 멈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해롤드 힐은 곧바로 여호수아의 남부 전쟁이 일어났던 연대를 찾아서 슈퍼컴퓨터가 잡아 낸 사라진 시간의 타이밍과 맞춰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기가 막힐 정도로 거의 일치했습니다.
그 순간 무신론자였던 해롤드 힐은 바닥에 엎어지면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정말 존재하시는군요!”
그때부터 그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아니라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셨고, 죽은 자를 살기셨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셨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김상만 장로님 간증
장로님이 다니시는 회사가 다른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새로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는 날짜가 필리핀 선교 기간 중에 걸렸습니다.
장로님은 회사를 그만둘 각오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분이시니 믿음으로 기도를 시작했고 선교팀원들도 중보로 협력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1주일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지금의 회사가 정리를 하고 다음 회사에서 업무를 시작하는데 1주일의 공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백 기간이 바로 필리핀 선교기간인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문제가 아무리 크고 그 일에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태양이 멈추는 기적보다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태양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내게 응답하시며, 지금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적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
4. 하나님은 명령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
다양한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명령기도라는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령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명령기도도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민 14:28에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라고 담대하게 명령합니다. 13절에 보면 그 결과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다고 말합니다.
강준민 목사의 명령기도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권세를 주셨음을 깨달으십시오(창 1:28, 마 16:19, 눅 9:1).
둘째, 믿음으로 명령 기도를 사용하십시오.
명령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명령하는 바대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명령 기도를 할 때는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하십시오.
넷째, 명령 기도를 할 때는 사람에게 하듯 명하십시오.
예수님이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실 때 마치 사람에게 하듯 꾸짖으시며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를 하십시오.
그리고 명령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명령 기도는 권세 있는 기도입니다”
마가복음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거지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앉은뱅이는 그 말을 듣고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나에게 명령기도의 능력을 주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불평은 감사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미련함은 지혜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가난함은 부요함으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약함은 건강으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가난의 저주는 떠나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은 떠나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채무의 영은 떠나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는 떠나라”
1. 하나님은 약속에 충성된 자에게 복 주시는 분
2.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자에게 복 주시는 분
3.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
4. 하나님은 명령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
태양 정지 명령의 과학성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라고 명함으로써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내려가지 아니한' 이적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태양을 멈추도록 명한 여호수아의 이러한 말은 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성경 비평가들은 지적했다. 즉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지구야 멈추어라'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여호수아가 과학적 모순의 우를 범한 것이 아님을 살펴볼 수 있다.
1. 행성 운동의 과학적 이치
현대 과학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으며, 이 운동이 태양의 중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냈다. 그러므로 지구가 그 궤도 진행을 멈추기 위해서는 먼저 태양의 중력, 곧 인력(引力)이 중단되어야 한다. 즉 태양의 인력이 감소해야 만이 1초에 30만km 달리고 있는 지구의 자전이 감소되어져, 결과적으로 날 혹은 시간이 연장되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여호수아는 지구의 30만km 저편에 태양이 있으며, 지구 스스로 자전을 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긴다는 등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만을 믿고(8절) 태양의 멈춤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말속에는, 성경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늘날의 과학이 인정하는 질서 체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2. 과학적인 여호수아의 명령
먼저 여호수아가 명한바 '태양아 멈추어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태양아 일하기를 멈추어라'는 뜻이다. 이는 곧 태양이 멈춰 설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 대한 태양의 인력을 중단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바로 그 때에 태양 인력이 멈추었고, 그래서 지구의 궤도 속도가 줄게 되어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또한 태양도 지구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태양아‥멈추어라'는 말은 전혀 어폐가 없다. 왜냐하면 태양이 실제로 어느 정도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에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태양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라고 기록한 것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지구를 고정시킨 채 태양의 속도를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달도 역시 멈추었다는 기록처럼(13절) 실상 그 날에는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를 멈추어 모든 행성의 동작이 멈추게 되었다.
3. 교훈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의 긴 날'에 지구와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에서 23시간 20분 동안(본장 자료노트 '태양의 정지' 참조) 회전을 중단한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다. 더욱이 긴 낮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말미암아 파괴적 우박이 수반되었다(11절).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도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4절). 또한 이는 성경의 증거 외에도 고대 중국의 문헌과 페루의 잉카(Inca), 맥시코의 아즈텍(Aztecs) 및 고대 바벨론(Babilon)과 페르시아(Pelsia) 등의 문헌에도 분명히 기록되어져 있다. 이처럼 이 사건은 과학적으로도 모순이 없고, 역사적으로도 틀림없는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한편 본문과 같은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믿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아무리 증거를 제시한다 해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과학적인 증명이 없다 해도 이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천지를 만드시고 회전 운동을 허락하신 창조주께서 원하시면 이를 멈추게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창1:1). 또한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의 말씀이 비과학적일 수 있겠는가!
또한 성경은 과학으로만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으로만 세상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창조되고, 역사가 흘러왔다면 과학 자체가 신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들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시지만, 때로는 신적 능력으로 기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신적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성경은 맨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말로 기록되었으며, 그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면 완전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의 정지
기브온과의 전투가 벌어진 날에 여호수아가 태양이 멈추도록 기도함으로써 하루가 연장되었다는 본장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논란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만약에 태양이 실제로 정지했다면 물리적 법칙에 따라 지구 전체와 그 위의 모든 생물에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여호수아의 긴 날'을 한낱 전설로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현대의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기록과 완전 합치되는 수치를 계산해 냄으로써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확증하고 있다.
1. 지구 공전과정에서 없어진 하루
우주 개발 관계 과학자들인 해롤드 힐(Harold
Hill)의 연구팀은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전자계산기로 지금부터 10만 년 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정지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정확히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는 없어진
하루와 완전히 일치하는 수치가 아니었다.
아직도 40분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곧 성경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태양의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사실을 찾아냈다(왕하 20:8-17).
그런데 놀랍게도 그
10도는 시간으로 계산할 때 정확히 40분에 해당된다.
이로써 그들은 여호수아 때의 23시간 20분과 합하여 정확히 궤도 진행상에
없어진 하루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2. 없어진 하루의 교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전설로만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과학의 계산을 통해 태양의 궤도 진행상에 24시간이 비어있음을 보이셨고, 또 그 근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아무튼 과학자들은 성경의 기록 가운데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함으로써 주권자 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여호수아의 긴 날'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몇 천 년이 지난 후대에 와서도 전혀 오류가 없는 과학적 사실로써 규명되고 있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은 실로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이다(사40:13).
아모리 사람 - 즉 아모리 다섯 왕과 그들이 이끌던 가나안 연합군들을 가리킨다(5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 기브온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섯 동맹국을 기습 공격, 격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던 중 벧호론 비탈에서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우박으로 죽이시던 10, 11절의 내용을 뜻한다.
태양이...머무르라
이 말은 기브온 전투 중 낮이 연장되기를 바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이다.
그 결과 기도의 응답으로 태양이 머물렀는데, 이 사실을 두고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1. 여호수아가 자신의 군대에게 힘을 더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힘을 주셔서
하루 온종일 싸워 이길 것을 반나절만에 승리케 하셨다는 사실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2. 여호수아가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멈추게 해달하고 호소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잠시 구름으로 덮으셔서 여호수아 군대가
싸움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셨을 뿐이다.
3. 이 기적은 실제 해는 졌지만 단순히 빛의 굴절(屈折) 현상으로 인해 마치
해가 머문 것처럼 낮이 길어져 전쟁터를 환하게 비춘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견해들은 성경의 이적을 단순히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인본주의적 견해에 불과하다.
14절에 분명히 기록된 바 이 이적 사건의 '전무 후무성'(前無後無性)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전통적 견해를 따라 본사건을 실제 해가 중천에 머문 초자연적 이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Leon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자세한 내용은 본장 6-14절 부분의 강해, '해가 멈춘 이적'을 참조하라.
달아 너도...그리할지어다
- 본절의 표현은 당시 태양과 달이 동시에 하늘에 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혹자는 '태양은 거의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은 동편 하늘에서 막 떠오를 때' 곧 석양
무렵으로 보기도 하나, 13절의 표현('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으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때는 아침 무렵으로 보인다.
실제
기브온은 동쪽이요, 아얄론 골짜기는 서쪽에 위치 했는데, 대략 기브온에서 서쪽으로 북위 17도가량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는 '때는 7월 경이요, 태양과 달의 위치는 달이 3/4 공전 때로, 곧 반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A Survey ofIsrael's History).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아얄론(Ajalon) 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산위의 한 성읍으로서, 오늘날 얄로(Yalo)와 동일 지역으로 추정된다(Robinson, Van deVelde,
Conder). 기브온 서쪽 약 4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주로 전쟁사의 무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가나안 토지
분배에서 단 지파에게 할당되었으나(19:42), 나중에 레위 지팡의 성읍으로 지정되었다(21:24). 후일 사울과 요나단이 이
성읍 근처에서 큰 승리를 거둔 적이 있으며(삼상 14:31), 분열 왕국시에는 유다에 속했다.
잃어버린 23시간 20분(수 10:12-14)과 40분(왕하 20:8-11)
성경의 기록이 전자계산기에 의해 입증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 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헤롤드 힐(Harold
Hill)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릴랜드주의 그린벨트에서 연구하고 있는 우리회사 우주 관계과학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지금부터 10만년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괘도 진행을 살폈습니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양 및 달과 그 주변의 혹성들의 궤도조사가 끝나야만 우리가 발사 할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기계가 정지해 버렸습니다.
전자계산기의 동작이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모든 기사들은
긴장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자계산기에 제공한 정보에 이상이 있든지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곧 기계 기술자들을
불러서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가 지시하는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금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결국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판명되었습니다.
하루가 없어진채 궤도가 진행되어도 별 문제거 없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하루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 일어나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하루동안
정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어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
노련한 과학자가 자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할게 아니라 성경책을 가져다 자세히 조사하여 그 시대의 궤도를 전자계산기로 조사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여호수아 10장12-14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을 찾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족속들간의 전쟁은 아주 치열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사에게는
매우 불리한 전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 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여호수아가 기도하고 외친대로 해와 달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거의 하루 동안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 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이라는 계산은 정확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40분이라는 시간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청년이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성경 어딘가에 태양이 뒤로 물러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곧
성경에서 열왕기하 20장 3-10절의 히스기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냈습니다.
거기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 갔다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는데 10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천년전에 기록 된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겼던 과학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참으로 천지창조를 이루시고 그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대속의 재물로 삼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을 통해 영생의 소망을 주시며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우리를 항상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3월 10일(월) 여호수아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일을 기다리라(수 7:13a)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Go, consecrate the people. Tell them, 'Consecrate yourselves in preparation for tomorrow.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Go, consecrate the people. Tell them, 'Consecrate yourselves in preparation for tomorrow;
for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That which is
devoted is among you, O Israel. You cannot stand against your enemies
until you remove it.
내일을 기다리라(preparation for tomorrow)
내일을 준비하라는 깨우침을 들어야 합니다.
미래가 보장된 민족은 내일을 준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만일 내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이 난다."고 한 것처럼 심은 것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까?
첫째, 일어나라(go)
둘째, 성결케하라(consecrate)
셋째, 내일을 기다리라(preparation for tomorrow)
일어나서(6965) 쿰
성결케하여(6942) 카다쉬
내일을 기다리라(4279) 마하르
일어나서(6965) 쿰(qûwm) קוּם 스트롱번호 6965
구약 성경 / 629회 사용
성결케하여(6942) 카다쉬( qâdâsh) קָדַשׁ
스트롱번호 6942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내일을 (4279) 마하르(mâchar)
내일(마하르. mâchar) מָחָר 스트롱번호 4279
어원 / 309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52회 사용
관련 성경 / 후일(창 30:33, 신 6:20, 수 4:6), 내일(출 8:10, 민 11:18, 에 5:8).
- 309 아하르( ’âchar) אָחַר 스트롱번호 309
구약 성경 / 96회 사용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다.
어릴 때는 시간과 에너지는 많지만 돈이 없고
젊어서는 돈과 에너지는 있는데 시간이 없고
늙으면 시간과 돈은 있지만 에너지가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돈은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고, 에너지는 건강관리로 더 얻을 수도 있지만 시간만큼은 우리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시간은 뭘까?
자본주의를 말뜻으로 풀어보면 돈이 기본인 사회다.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며, 시공간은 우주를 구성하는 두 축이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놀고 무엇을
하든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인생은 시간으로 구성된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각자 자유지만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9988’ 이란 말이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산다는 의미다.
99세까지의 삶을 계산해보면 대략 87만 시간쯤 된다.
별 사고 없이 산다면 누구나 87만 시간을 누리며 살 수
있단 이야기다.
한 분야 전문가가 되려면 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만 시간 법칙’에 비춰본다면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일생 동안 적어도 몇 가지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주어지는 시간은 똑같지만 사람마다 하루 24시간, 그리고 인생에 주어진 긴 시간을 다르게
사용한다.
사람이 평생 일하는 시간은 23년, 잠자는 시간은
20년, 식사 시간 7년, 길에서 보내는 시간 5년, 옷 입고 꾸미는 시간 5년, 화내는 시간 5년, 전화통화 1년, 잡담
70일, 웃는 시간은 겨우 89일 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평생 일하는 시간이 과연 20년 이상 될까. 사회가 발전하면 노동시간은 줄어든다. 인공지능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체하면 미래 노동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7 고용동향’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연평균노동시간이 2,069시간으로 OECD 국가 중 2위다. 35개국 평균 1,764시간에 비하면 한국인은 연간 300시간 이상 더 일한다. 25세부터 60세까지 일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은 8만 시간이 채 못 된다. 잠자는 시간은 인생의 3분의 1에서 4분의 1 정도지만 일하는 시간은 고작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구소련 과학자 류비세프라는 사람은 26세부터 82세 사망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매일
하루 시간을 기록했다고 한다.
곤충분류학 공부 2시간, 논문작성 1시간, 편지쓰기 3시간, 신문읽기 1시간 등 간략하게 시간을
기록했고 월별, 연간 시간통계도 냈다.
이렇게 시간을 관리하며 살았던 그는 일생 동안 학술서 70권, 논문 1만 2500장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시간을 어떻게 보내며 사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시간통계를 내보면 자기 삶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인생 자체가 짧다는 생각은 틀렸다. 인생은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인생을 유용하게 쓰면서 살고 있는가.
주제2: [여호와의 죄악 제거 명령]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다(출19:6).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기대할 때 그들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여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자했을 때(출 19:10), 요단 강 도하를 목전에 두었을 때(3:5) 등에 서도 먼저 성결케 될것을 지시받았었다. 그러므로 지금 아이 성 패전의 원인인 '바친 물건'을 범한 자를 가려내고자 하는 여기서도 성결케 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율법의 심판을 받을 때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동시에 이 명령은, 범죄자는 빨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복하라는 촉구 명령이기도 했다(Calvin).
주제2: [여호와의 죄악 제거 명령]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 본절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유기적인 언약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1절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범죄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다음 문구에서 1절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이 지적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곧장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실패의 생활을 한 것도 바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갈렙과 더불어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경험한 유일한 생존자로서 이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 전쟁 실패의 원인도 바로 당신의 뜻을 거스린 죄에 있음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화를 당할 것(신 7:26)이라는 금지 규정을 어긴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만한 신성 모독죄였다(Calvin).
바친 물건 - 6:17; 레 27:28 주석 참조.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두었느니라 - 위 문구에 언급된 '범죄하다', '언약을 어기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한편 여기서 '취하다', '도적하다', '사기하다','두다' 등의 동사가 히브리 성경 원어에서는 4개의 '뿐만 아니라'(*, 감)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그 범죄 행위가 얼마나 큰가를 여실해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자칫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를 그러한 죄악의 극악성을 극명하게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Calvin).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과거를 잊은 나라에게는 미래가 없다!
뉴 멕시코 주립 도서관에 보면 처칠이 한 말이라고 보란듯이 간판을 달아놨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몬테카시노 전투 관련 자료에, 영국의 국방부 차관이자 재향군인 장관이었던 아이버 캐플린조차도 저 말을 처칠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2]
하지만 실제로 처칠이 한 말인지는 불분명한데, 어느 연설이나 저서에서 나온 말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위의 사례만으로는 의혹이 가시지 않는다.
게다가 처칠이 남겼다는 말과 굉장히 유사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미국의 작가인 데이비드 매컬러이다. 그가 한 말은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can function no better than an individual with amnesia."[3]인데, 이것이 원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말조차 그가 언제 어디서 한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밖에도 비슷한 문장이 쓰인 사례가 존재한다. 1909년 휴버트 칼턴이 쓴 'St. Andrew's cross' 24호에는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lost its future; and the Church which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to it ...'[4]라는 비슷한 문장이 있으며, 문장의 출처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다.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신문을 검색해 보면 1913년 7월 13일자 Omaha daily bee.에서 'The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will never have much of a future.'라는 비슷한 문장이 보인다. 시기적으로 따져보면 처칠이 처음에 이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말일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유래를 찾아보면 신명기에서 야훼를 잊지 말라고, 잊어버리면 다른 민족들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한 것과도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칠은 오히려 의미가 상반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식의 말을 남겼다.[5]
오히려 의미가 상반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식의 말을 남겼다.[5]
대신은 스페인계 미국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자신의 저서 In the Life of Reason[7]에서 언급한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8]가 좀더 비슷하다. 해당 어록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추모 현장 등에도 새겨져 있다.
'수전망조'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 유래를 생각하면 이 문서의 제목과 알맞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한국통사』 中
-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 이 속담은 개인이 아닌 국가나 기업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이러한 역사 문제는 개개인의 기억 말고 지속적인 역사 학습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3월 8일(토) 여호수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붉은 줄(수 2:18)
unless, when we enter the land, you have tied this scarlet cord in the window through which you let us down, and unless you have brought your father and mother, your brothers and all your family into your house.
붉은(8144) 솨니(shânîy) שָׁנִי
-
1. 명사, 남성 진홍색 외투, 잠 31:21, 사 1:18.
- 진홍, 진홍색 옷감, 창 38:28, 30, 렘 4:30. [주] 복수형
발음 [ chûwṭ ]
어원 / ‘꿰매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1. 명사, 남성 실, 줄, 끈, 선, 삿 16:12, 전 4:12, 아 4:3
-
2. 명사, 남성 밧줄, 끈, 수 2:18.
-
관련 성경 / 실(창 14:23, 삿 16:12, 아 4:3), 줄(수 2:18, 왕상 7:15, 전 4:12).
1. 신호. 2. 군기. 3. 창4:15.
어원 / 미완료형의 복수 1인칭 어미활용 נֵאךת, 복수 3인칭 어미활용 יֵאוֹתוּ, 225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79회 사용
1. 확고함. 2. 수 2:12. 3. 성실성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이 붉은 줄
- 이 줄은 15절에 나타난바 정탐꾼들을 달아내리운 그 '줄'을
가리킨다(Luther, Keil).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라합과 그 권속을 구하게될 이 붉은 줄에 특별한 생명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 같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붉은 줄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한다고
해석하였다(Clement, Justinus, Origen, Luther). 그리고 이 붉은 줄의 의미를 출애굽 직전 문설주에
뿌려진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Matthew Henry).
실로 성경 전체의 사상을 통해 볼 때 '붉은
색'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와 밀접히 연관된다(C. Vonk).
네 집에 모으라
- 초대 교회의 교부 오리겐(Origen, 185? -
254?)은 라합의 가족들이 오직 집 안에 있을 때에만 구원이 약속된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을 달아 여리고 밖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고 그녀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내리고 있는 줄을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줄로’라는 단어가 (헤벨 2256) 노끈, 괴로움, 슬픔, 고통이라는 뜻이며 חבל(하발 2254) 단단히 감다, 악을 행하다, 범죄 하다, 진멸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린 줄은 영적으로는 기생 라합이 현재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나도 기생 라합처럼 원죄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입니다.
인생 자체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항상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죄악 된 생각과 행동만 했습니다.
이런 나는 하나님께 진노받아 진멸될 인생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던 기생 라합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가진 정탐꾼을 보내주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점령되어 심판받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때 라합은 복음의 증표를 받고 살게 됩니다.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히 심판받아 죽을 인생을 십자가 복음을 주셔서 원죄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에게 영원히 멸망받지 않는 증표를 주셨습니다.
현재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리는 줄은 원죄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줄입니다.
잠언 30:7-9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Two things I ask of you, O LORD; do not refuse me before I die:
Keep falsehood and lies far from me;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
Otherwise, I may have too much and disown you and say, 'Who is the LORD ?' Or I may become poor and steal, and so dishonor the name of my God.
7. “두 가지를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마다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내가 죽기 전에요.
8. 속임수와 거짓말이 나한테서 멀어지게 해 주십시오. 나를 빈곤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내 몫으로 정해 주신 양식만 입에 대도록 해 주십시오.
9. 배불러 주님 모른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야?’ 하지 않도록요. 빈곤해져서 도둑질하며 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요.”
구원의 징표인 붉은 줄
하나님은 기생 라합의 집에 달린 붉은 줄에 의해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붉은 줄과 같은 복음을 붙잡을 때 구원의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홍해를 마르게 하셔서 건너게 하신 일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하셔서 죽이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현재 여호와 하나님만 알고 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만 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도 라합에게 약속한 증표만 보게 됩니다.
현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증표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증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내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라합이 받은 구원의 증표가 무엇일까요? 붉은 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줄입니다. 이 줄을 창문에 매달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쳐들어 와도 붉은 줄을 보고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오직 붉은 줄만 보고 심판이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내 안에 붉은 줄이 있어야 하고 나의 가정과 사업과 자녀에게 붉은 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가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셔서 보호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안에 붉은 줄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수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을 달아 여리고 밖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고 그녀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내리고 있는 줄을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줄로’ 히브리어(헤벨 2256) 노끈, 괴로움, 슬픔, 고통이라는 뜻이며 히브리어(하발 2254) 단단히 감다, 악을
행하다, 범죄하다, 진멸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린 줄은 영적으로는 기생 라합이 현재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나도 기생 라합처럼
원죄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입니다.
인생 자체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항상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죄악 된 생각과 행동만 했습니다.
이런 나는 하나님께 진노 받아 진멸될 인생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던 기생 라합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가진 정탐꾼을 보내주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점령되어 심판받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때 라합은 복음의 증표를 받고 살게 됩니다.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히 심판받아 죽을 인생을
십자가 복음을 주셔서 원죄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에게 영원히 멸망 받지 않는 증표를 주셨습니다.
현재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리는 줄은 원죄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줄입니다.
여호수아 2: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렵건데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생각이 되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산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산으로 도망치라는 말은 너희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산의 개념이
구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 될 때 천사들이 롯에게 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멸망함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이 산은 현재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헤브론 산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으니 아브라함과 함께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천사가 명령했습니다.
마태복음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이 반드시 있을 것을 예언하시고 그때가 되면 산으로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서 멸망 당하게 됩니다. 그때 성안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요단강
계곡의 베레아 지역의 펠라 산으로 도망을 쳐서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라합도 산으로 도망하라는 의미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곳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산에 거주할 때 영원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수2: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증표를 받은 그대로 하고 온 가족이 모여 있어야 하며 우리가 정탐한 사실을 여리고 성에 있는 어떠한 자들에게 발설치 말 것을 맹세시키면서 그대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라합에게 약조를 받아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구원받은 표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함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음을 귀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수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리고 성에 들어올 때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말합니다. 이 붉은 줄이 구원의 증표가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붉은 줄에 관하여 상고해 보겠습니다.
‘붉은’ 히브리어(샤니 8144) 진홍색, 홍색실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성막에서 성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 때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 26:3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짜서 성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
성막 문의 휘장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홍색 실이 정탐꾼들이 이 붉은 줄을 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붉은 줄이 십자가 복음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없이는 절대 속죄함이 없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에게 증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쳐들어 왔을 때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증표가 창문에 붉은 줄을 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을 믿고 붉은 줄을 매어야 합니다.
‘매고’ 히브리어(카샤르 7194 VQIFYS 동사, 칼, 미완료, 여성, 2인칭, 단수)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קָשַׁר
스트롱번호 7194
매다
공모를 꾸미다
묶여진
-
발음 [ qâshar ]
- 구약 성경
- 44회 사용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당신이 우리를 묶어서 구원시켜 준 것처럼 우리도 당신을 구원시켜 줄 테니 붉은 줄을 매라고
말합니다.
이 줄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원죄에 빠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묶여 있지 않으면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어
죽이게 됩니다.
칼형은 라합이 믿음으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 것을 의미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이 줄은 어떠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내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라합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증표입니다.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들은 붉은 줄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붉은 줄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라합은 선택 되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붉은 줄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리고 성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붉은 줄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비밀이기 때문에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비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만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며 누구든지 우리가 너와 함께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누구든지는 누구를 말합니까? 기생 라합의 집에 모여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처럼 선택받은 누구든지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붉은 줄이 있는데 이것을 버리고 전쟁이 났을 때 밖으로 나가서 죽으면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고 그 당사자에게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붉은 줄이 있음에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붉은 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지 않고 행위로 믿는 자들은 사탄에게 죽게 됩니다. 이러면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에게 죽었다면 이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붙여준 영혼은 한 명도 멸망시키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2: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자신들에게는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야 합니다. 둘째, 가족들을 붉은 줄이 있는 집에 모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함부로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셋째, 이와 같은 일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지킬 때 약속한 대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해야 합니다. 첫째, 붉은 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 붉은 줄이 있는 교회에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이 함부로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을 귀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세상에 발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만들면 안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2: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약속합니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러고 난 후에 정탐꾼들을 보내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
‘줄을’ 히브리어(티크바 8615) 끈, 소망, 소원, 희망이라는 뜻이며 히브리어(카바 6960) 앙망하다, 기다리다,
사모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보내고 바로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이렇게 했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라합은 첫 번째 줄을 통해서 원죄의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원죄의 죄인이 고통스럽게 인생을 살았는데
정탐꾼들의 복음을 듣고 원죄에서 해방되어 붉은 줄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악으로 찌들었던 인생에서 해방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준 정탐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다음 정탐꾼들을 보내고 바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심판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소망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라합은 붉은 줄의
증표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은 보호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 성에 빨리 이스라엘 민족들이 쳐들어 와서 죄악으로 물든 성을 심판해 주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게 됩니다.
기생 라합처럼 세상에서 원죄에서 고통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줄이 첫 번째 줄입니다.
인생에
앞길은 막막하고 영적으로 빛은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인생 가운데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줄인 붉은 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찾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내가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들어와 영원히 고통당하는 원죄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얻고 난 후에 세번째줄을 매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 줄인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줄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기를 기다립니다.
더
이상 죄악 된 삶이 싫어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붉은 줄의 증표가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더디게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심판을 받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붉은 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이 하루 속히 오기를 소망하면서 앙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구원의 증표가 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소망의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아야 합니다.
재림의 신앙을 가지고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이 간
즉시 여리고 성을 심판할 날을 소망하면서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구원받았으니 주님을 앙망하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붉은 줄을 항상 매달아 놓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합의 붉은 줄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 정복에 앞서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려 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영광을 부여합니다(히 11:31, 약 2:25, 마 1:5).
라합의 집이 여리고 성벽 위에 세워졌다고 했으니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잠시 들려 술을 마시거나 머물다 가는 주막집이었을 듯 합니다.
라합은 이 주막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의 소식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요단강 동쪽의 족속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복당하고 그 왕들이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여리고 성 안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의 첫번째 성이었던 여리고는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입니다.
여리고의 왕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몇 배나 강화하였고 온 여리고 성 사람들이 바짝 긴장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성을 탐지하고 오라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고 그들은 이미 여리고 성으로 들어와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스라엘의 첩자들이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군사들을 라합의 집으로 보내어 당장 첩자들을 끌어내라 명령하였습니다.
두 정탐꾼을 지붕 위에 숨겨두었던 라합은 거짓으로 군사들을 따돌리고 두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들통나면 죽을 줄 알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목숨을 살려준 셈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봅시다(여호수아 2:9-11)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정탐꾼 앞에서 진술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 고백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모압 땅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 앞에서 진술한 고백과 함께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은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여 택한 백성의 계보에 들어왔고 다윗 왕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여인들이 되었습니다.
라합이 이방인으로서, 기생의 신분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 그 정보는 라합에게 구원을 알리는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 누구를 통해 듣든지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듣고 믿은 라합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지만 거부하고 경계하는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간담을 녹이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과 근심의 원인과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하였습니다. 동일한 소식이며 동일한 냄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죽음이 되는 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면 그 약속의 땅에서 자손대대로 살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면 가나안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약속을 기준으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었음은 물론이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시대에도 모두에게 공평한 복음이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함께 따라 나온 많은 잡족들이 있었으니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고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였습니다.
둘째는, 기생 라합의 가족과 같은 가나안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땅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가나안의 사람들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9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일찌감치 평화조약을 청했던 기브온 사람들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기브온은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한 곳에서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었지만 먼 곳에서 온 것처럼 속임수를 썼습니다.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발에는 낡아 기운 가죽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었으며,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준비하여 여호수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듣고 심히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명성과 애굽에서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으므로 우리 부족 사람들이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어 항복하고 종으로 받아달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집을 떠날 때 뜨거운 떡을 준비했는데 이렇게 말랐고 곰팡이가 폈습니다. 우리가 먼 길을 여행하느라 새 포도주 부대도 낡아 찢어지게 되었고 우리의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습니다’하며 애원할 때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삼 일이 지난 후에야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속은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지 않고 살려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 물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 땅을 모두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말이 우리의 귀에게도 분명히 들렸으므로 우리의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 이같이 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바라고 이스라엘에 항복하였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여호와의 집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전에는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고 다른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던 자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봉사하는 일군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잔인한 살륙자가 아니라 공의를 시행하시는 심판관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그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긍휼과 사랑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라합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선을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나에게 선을 베풀라. 나와 내 부모형제들을 죽음에서 건지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에게 진실한 증표를 달라’고 했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구원의 증표를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가고 우리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리라. 이 일을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 일이 누설되면 너와 우리의 맹세는 무효가 된다.’
이 말을 들은 라합의 행동을 봅시다. 정탐꾼들을 안전하게 내보낸 다음 라합은 곧 붉은 줄을 창문에 달았습니다. 우선 다른 일부터 마무리하고 시간이 되면 나중에 생각날 때 달아야겠다 하지 않고 약속을 받았을 때 즉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일보다 급한 일이 없었고, 붉은 줄은 자신과 온 가족들 살리는 생명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라합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합니다. 부모형제와 그 집 가족들에게 급히 연락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모두 우리 집으로 모여라 그래야 산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리고 성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시점에 꾸물거리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라합은 다시 한 번 정탐꾼들이 남긴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절대로 이 집 문 밖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 그래야 산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의 가족들이 그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방주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도 순종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참아가며 오랜 세월 거대한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가족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습니까? 그래야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노아의 체면이 서는데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고 하늘은 푸르고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들을 보며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을까요?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자녀들과 자부들은 이런 상황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엄청난 조선 공사와 그 배를 가득 채워야 할 식량과 물자를 부지런히 옮겼고, 거기다 각종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안내하느라 숨 쉴틈이 없다가 방주에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것이 아니라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창7:10). 만일 노아의 가족들이 그 칠 일을 견디지 못하고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홍수 심판 때 구원은 오직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애굽의 바로가 끝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주지 않을 때 결국 마지막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일러주신 구원의 증표가 있으니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날 밤에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에 들어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 밤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양을 잡은 그 집에 모여 고기와 발효되지 않은 빵과 쓴나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 안에 모여 유월절 식사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무서운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그 밤에 애굽에 있는 모든 집에서 출생한 장자들과 짐승들의 첫 새끼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그 재앙으로부터 면제를 받았습니다. 문에 바른 그 피를 볼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집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엄하게 경고한 것이 있습니다.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니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였고 의롭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준 댓가로 온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 구원은 라합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신뢰하고 붉은 줄이 달린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탐꾼들을 살려보냈으니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모두 살려준다고 했다’자랑하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정탐꾼들이 신신당부한 것처럼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고 문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군대가 그 성으로 들어갈 때 여호수아는 그 성을 정탐했던 두 사람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정탐꾼들은 명령을 따라 라합의 집에 들어가 그 가족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의 날에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여 구원하십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할 때 여리고 성의 라합을 믿음의 여인으로 추천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라합은 정탐꾼들을 보낸 다음 곧바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라합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증명하였고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빌립보 성 감옥의 간수가 바울에게 이 복음을 듣고 초청에 순종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매맞은 상처를 씻겨주고 온 가족들과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았으며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한 사람 간수의 믿음과 순종이 온 가족에게 구원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안에 있을 때 효력이 있습니다.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행 4:12).
예수 안에 있는 백성은 영생을 얻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 안에 있을 때 구원을 얻었고, 애굽에서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어린 양의 피가 칠해진 그 집안에 있을 때 죽음을 면하고, 이방의 여인 라합이 붉은 줄이 달린 집안에 있을 때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 6)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편지들 가운데‘주 안에서’라는 말을 아주 많이 반복합니다.
‘주 안에서’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2)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있게 됩니까?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5, 16)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원자로 믿고 시인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의 안에 계시며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라합의 붉은 줄이 그를 죽음에서 건지는 언약의 보증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보증이십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Have I not commanded you?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terrified; do not be discouraged, for the LORD your God will be with you wherever you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