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 묵상 열왕기하



요시아(공동번역),
요시야(개역개정)(히브리어: יאשיהו, 그리스어: Ιωσίας; 기원전 640년경 ~ 기원전 609년경 재위)
유다 왕국의 16대 왕으로, 재임중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신명기 개혁운동 과정에서 성서에 속한 여러 책들이 편집되거나 확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왕 아몬과 보츠캇 출신 아다야의 딸 여디다의 아들이었던 요시야는 아몬이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에 의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에 눈에 드는 옳은 일들을 하였고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걸었다.

역대하는 요시아가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다고 기록한다.
재위 8년째에 그는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고, 재위 12년째에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 있는 바알, 아세라 제단과 우상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린 몸으로 하나님을 찾아 산당과 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들을 치우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바알 제단도 무너뜨리고 제단 위 분향 단들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과 주조 신상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는 그 가루를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의 무덤 위에 뿌렸다.

그리고 사제들의 뼈를 그 제단 위에서 태웠고 이렇게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였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에 이르기까지의 성읍들의 광장에서, 곧 온 이스라엘 땅에서 제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들을 깨뜨려 가루로 만들고 분향 단들을 부순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역대기에서는 요시아가 재위 18년 이전부터 추진하던 종교개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열왕기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복원에서부터 기록을 시작한다.

요시야는 나라와 성전을 정화한 다음 아찰야의 아들 사판마아세야 성주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 기록관을 보내 성전을 보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나머지 이스라엘 지역의 모든 주민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레위인에게서 모은 돈을 힐기야 대제사장에게 내놓았다.

그 돈을 성전 보수 공사를 책임지는 일꾼들에게 나눠주고 일꾼들에게 성전을 고치고 보수하게 하였다.
또 목수와 석수에게도 돈을 주어 전 유다의 왕들이 폐가로 만들어 버린 건물들을 고치는 데 쓸 깎은 돌과 도리와 들보 재목을 사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일을 성실히 하여 그들을 지휘할 사람으로 므라리의 자손 야핫오바드야, 크핫의 자손 즈카르야므술람 등 레위인들이 임명되었다. 악기를 잘 다루는 레위인들은 짐꾼을 감독하고 각종 작업을 하는 일꾼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몇몇 레위인들은 서기관, 행정관, 문지기 역할을 맡았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온 돈을 꺼내고 있었는데 힐기야 사제가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하나님의 율법서를 발견했다.
힐기야는 사반 서기관에게 책을 주고 사판을 그 책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열왕기하 22장 8절에 나오는 '세페르 하토라(ספר התורה)'라는 구절은 여호수아 1장 8절 8장 34절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받은 율법을 묘사할 때 사용한 구절과 동일하다.
본문에서는 이 책이 토라라고 명시하지는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본문이라고 본다.
율법서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캄, 마가의 아들 압돈, 사반 서기관,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해 힐기야는 왕이 보낸 이들과 함께 여예언자이자 하스라의 손자이자 톡핫의 아들 살룸 예복 담당관의 아내 훌다에게로 갔다.

이에 훌다는 이스라엘에 큰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법궤는 이스라엘의 기럇 여아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기원전 7~8세기에 이 곳은 강력한 신앙의 중심지였고, 이 도시 유적에서는 이스라엘 북왕국과 관련된 일종의 거대한 신전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 같은 발견과 역대하 35:3을 근거로, 사실 법궤는 성경에서처럼 왕국 형성 초기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후기 요시아 통치기에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성물을 상자 속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매우 흔한 전통이었음을 지적하며, 법궤 속에 사실은 수천년 된 석상들이 대신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시야는 사람을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원로들을 소집해 왕은 모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 레위인들과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를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잘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하나님의 앞에서 계약을 맺었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의 사람도 그 계약에 참여시켰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의 계약을 잘 따르게 되었고 요시야는 모든 지역에서 역겨운 것들을 없애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다.

성경적 인물이다.

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유월절)를 지냈다. 유월절 양을 잡고 사제들에게 임금을 맡기고 성전에서 맡은 일을 잘 하라고 격려하였다. 또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에게 유월절의 준비에 대해 일러두었다.

요시야는 모든 백성이 유월절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3만 마리와 황소 3000마리를 기부하였다.
대신들도 백성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기부하고 성전 책임자들인 힐기야와 즈카르야와 여히엘도 사제들이 파스카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2600마리와 황소 300마리를 내놓았다.
레위인들의 지도자 코난야, 그의 동생 스마야와 느탄엘, 하사브야, 여이엘, 요자밧도 레위인들이 파스카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 양과 새끼 염소 500마리와 황소 500마리를 기부했다.

예배가 준비되었을 때 임금의 명령으로 사제들은 자기 자리에 서조 레위인들은 조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파스카 양을 잡자 사제들을 그 피를 받아 뿌리고 레위인들은 가죽을 벗겼다.
그러고 나서 레위인들은 번제물을 따로 떼어 백성의 집안 갈래에 따라 나누어 주고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다.
황소도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법규대로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 나머지 거룩한 제물을 냄비와 솥과 단지에 넣고 삶고 뛰어다니며 온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들과 제사장들의 몫을 준비하였다.

아론의 자손 사제들은 번제물과 굳기름을 밤까지 바쳐야 했으므로 레위인들이 자신들과 아론의 자손 자세장들이 몫을 준비하였다. 아삽 자손의 성가대는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임금의 환시가 여두둔의 명령에 따라 제 위치에 서고 문지기들도 저마다 책임을 맡은 대문에 서 있었는데 레위인들이 그들의 몫을 준비해 주어 자기들의 일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배가 모두 준비되어 유월절을 지내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 번제물을 바칠 수 있었다. 이렇게 요시야 임금은 어느 임금들 보다도 가장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켰다.

기원전 609년 봄 또는 초여름에, 파라오 네카우 2세신아시리아 제국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원조하기 위해 출정을 떠난다. 네카우 2세는 군대를 비아 마리스 해안 도로를 따라 시리아로 배치한 뒤 블레셋과 샤론의 저지대를 따라 이동시키고, 남쪽의 이스르엘 골짜기에 있는 언덕의 능선을 넘을 준비를 했다. 이 때 요시아가 이끄는 유다 군대가 메기도에서 이집트군을 막아섰다. 그러나 유다 군대는 패퇴했고 요시야는 전사했다. 이집트는 아시리아와 합류하여 하란에서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웠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부터 엘룰월까지 이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 이전에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7]

구약성경은 요시아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을 전한다. 열왕기하에서는 네카우 2세메기도에서 요시아를 만나 죽였다고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8] 역대하에서는 요시아가 이집트 궁수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죽었다고 말한다.[9] 후자의 경우 요시아의 죽음은 네카우가 신의 명령에 따라 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여기서 전하는 네카우의 말은 다음과 같다.[10]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

— 공동번역 개정판, 역대기하 35장 21절

이 두 기록 중 역대기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이 있다.[11] 이들은 이 구절이 다른 왕인 아합의 죽음에 대한 묘사와 (1)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인 것, (2) 전투 전에 변장한 것, (3) 화살에 맞아 죽은 것, (4) 화살에 맞은 뒤 남긴 말을 비롯해 많은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의로운 왕의 죽음의 까닭을 특정한 죄로 돌리는 연대기의 종교적 의제로 서술되었다고 본다.[12]

특히 에릭 클라인은 메기도에서의 전투가 아예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노먼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에서 요시아가 네카우를 전투에서 조우한 것이 아니라, 네카우의 신하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선 이집트에게 바친 공물의 양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본다.[13]

유대교 랍비 문헌은 요시아의 경건함과 그의 아버지 아몬에 대해 "아몬이 유다의 모든 악한 왕들 중 가장 죄가 많았던 사실은 탈무드의  다음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아하즈는 제사를 중지했고, 므나쎄는 제단을 허물었고, 아몬은 성전을 황량한 곳으로 만들었고, [거미줄로 덮혀 판독 불가] 아하즈는 율법의 두루마리를[17] 봉인했고, 므나쎄는 신성한 이름을 도려냈고, 아몬은 두루마리들을 모두 불태웠다.[18] 아합은 근친상간을 허용했고, 므나쎄는 스스로 그 일을 저질렀으며, 아몬은 네로처럼 행동해 네로가 어머니 아그리피나로부터 들은 말을 들었다. 아몬은 아들 요시아가 존경받은 왕이 되었음에도 그 스스로의 이름을 앞으로 세상에 올 왕조에 기록되지 못하였다"라고 전한다.[19][20]

하란에서의 패배 이후, 파라오 네카우 2세는 상당한 병력을 남겨두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네카우는 돌아오는 길에 여호아하즈가 그의 아버지 요시아의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았다.[21] 네카우는 재위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아하즈를 폐위시키고 형 여호야김을 그 자리에 앉혔다. 네카우는 여호아하즈를 포로로 데려가며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받아갔다. 메기도에서 요시아의 패배는 다윗 왕조의 종말을 의미하는데, 요시아의 후계자들은 단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가 전통적인 지배권을 되찾으며 유다의 자치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요시아의 사망 이후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예언자 예레미야도 그를 위한 애가를 지었다.







* 남왕국 제8대 요아스왕 <7세에 왕위에 오르다> 

요 아 스 /  은혜를 원수로 갚은 유다 제8대 왕

1. 인적 사항

    (1) 요아스는 '주께서 주셨다'는 뜻.
    (2) 유다 왕 아하시야와 브엘세바 사람 시비아의 아들(왕하 12:1).
    (3)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 생명을 건짐.
    (4) 남유다의 제8대 왕으로 40년간 통치.
    (5)두 아내를 둠(대하 24:3.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으로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저녀를 낳았더라)

2. 시대적 배경

    B.C.835-796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북왕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요아스 때에도 북왕국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를 갖지는 못했다.
    이 시기는 가나안 땅 북방에 위치한 아람이 계속 남쪽으로 세력을 펼치던 시기로서 요아스 당시에도 아람 왕 벤하닷의 한 차례 큰 침입을 받았다.

3. 주요 생애

    출생

    B.C. 841 년

    여호세바가 구출

    대하 22:11

    숨겨져 6년간 양육

    대하 22:12

    여호야다에 의해 왕위에 오름

    7세, B.C. 835 년

    대하 23:11

    두 아내를 취함

    대하 24:3

    성전을 수리

    대하 24:5

    여호야다의 죽음

    대하 24:15

    우상을 숭배

    대하 24:18

    선지자의 경계 거절

    대하 24:19

    여호야다의 아들 살해

    대하 24:20,21

    아람군의 침입

    대하 24:23

    암살됨

    B.C. 796 년

    대하 24:25


4. 성 품

    (1) 여호야다의 조언에 따라 정직히 행하고, 성전을 수리할 만큼 현명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
    (2) 성전 수리가 지연되자 재정관리 방법과 책임자를 달리하여 마침내 성전을 복원시킨 것으로 보아 행정력과 지도력을 갖춘 자(대하 24:5-14).
    (3)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신하들의 간언에 마음이 흔들려 우상을 섬길 만큼 심지가 유약한 자(대하 24:17).
    (4) 선지자 징계를 듣지 않고 더욱이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인 것으로 보아 경솔하고 배은 망덕한 자(대하 24:20-22).

5. 구속사적 지위

    (1) 아달랴로 인하여 다윗 가문의 멸절위기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출됨으로써 다윗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어가게 된 자.
    (2) 유다 열왕 중 처음으로 성전을 수리한 자.
    (3)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인 자로서 하나님의 종을 핍박한 자.

6. 평가 및 교훈

    (1)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서 자신에게 조언을 베풀 동안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호야다 사후에는 바알의 지도자들과 방백의 충동에 따라 악정을 행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는 요아스의 믿음이 여호야다가에게 깊이 의존되어 하나님과의 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에 보이는 신앙 인물이나 지도자에게 우리의 신앙을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할 때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버티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 현명하고 분별력 있었던 요아스가 통치 말년에는 배은 망덕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변모했다.
    이는 요아스가 처음과는 달리 주님의 훈계로 자신을 부단히 경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보다 현재에 더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진정 주의 말씀아래 겸손히 나를 살펴서 항상 오늘보다 더 경건한 내일을 만들어야 하겠다.


* 남왕국 제16대 요시야왕<8세에 왕위에 오르다>

요아스(  יואש : Ιωάς 기원전 835년경 - 기원전 796년경 재위) <모. 지비야>
유다 왕국 8대 왕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했으나 후에는 변절하여 악한 일을 저지르다가 죽었다.

브엘세바 출신의 어머니 지비야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왕이 되었다.
처음에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옳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한때는 요아스와 여호야다가 성금으로 돈을 모아 성전 보수를 맡은 이들에게 주고 석수들과 목수들을 고용해 성전을 고치게 했다.

성전 복구가 끝난 뒤 남은 돈은 그것으로 집을 위한 기물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하나님께 번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130살로 죽은 후 유다의 대신들의 말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경고하던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살해했다.

이 해가 끝날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들 가운데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전리품들을 가져갔으며, 요아스는 큰 부상을 입었다.
결국에는 암몬 출신 여자 시므앗의 아들 자밧과 모압 여자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이 일으킨 모반으로 밀로 궁의 침상에서 살해당했다.

훌다(Heldah)

유대왕 요시아 시대의 여선지인데 예루살렘 제 2통에 사는 살롬의 아내이다(왕하 22:8-20).
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대하여 그 여선지에게 묻기위하여 힐기야를 파견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 책에 있는대로 재앙을 내릴 것이로되 왕이 이미 겸손히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목전의 그 재앙을 면케되리라고 하였다.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을 도왔다(왕하 22:3-20, 대하 34:8-28).




5월 1일(목) 열왕기하 21-2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시야(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Neither before nor after Josiah was there a king like him who turned to the LORD as he did--with all his heart and with all his soul and with all his strength, in accordance with all the Law of Moses.

요시야 왕은 남 유다 왕국의 16대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잘 섬겼던 인물이며 이와같이 율법을 잘 지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고 칭찬하는 왕입니다.

남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들을 먼저 정리한 후 그 이름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16대 요시야(31년) - 요하난,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역대상 3:15)
 * 여호야김의 아들 : 여고냐, 시드기야(역대상 3:16)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18대 여호야김(11년)
19대 여호야긴(3개월)
20대 시드기야(11년)

요시야 왕의 업적을 소개합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Josiah)"
‘요시야(Josiah)’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격려하신다’라는 뜻이다.
부친은 아몬왕이고 조부는 므낫세왕그리고 증조부는 히스기야왕이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암살당하자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여 예루살렘에서 31년을 치리하였다.
우상숭배에 빠졌던 분열 왕국시대에 하나님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각종 우상을 타파하면서 요시야왕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앙심을 갖게 해주었다. 

어둡고 암담했던 그 시대에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전멸시켰던 요시야왕의 과감한 개혁은 오늘날 이 세상을 진리로 개혁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종교 개혁자로서의 사명을 고취시켜 준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시야왕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다(왕하 22:1∼2).

시대적 배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뉘어 분열 왕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북쪽 이스라엘(사마리아)은 여로보암왕이 10지파를 규합하여 나라를 세울 때부터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던 호세아왕 시대까지(B.C.721) 하나님을 떠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등 각종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또한 남쪽 유다 나라도 몇몇 왕을 제외한 대다수의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백성들을 각종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 특히 요시야의 조부였던 므낫세왕은 치리 기간 중 너무나 많은 악을 행하였고 각종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섬겼으며 또한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다. 그리고 혹독하게 백성을 다스렸고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렸다(왕하 21장 2∼16절).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기에 충분했다. 

왕하 21장 20∼22절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이렇듯 그 시대적인 상황은 어지럽고 어수선하였으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못하다 보니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영적 세계는 매우 피폐해졌다. 

성전을 수리하다
요시야왕은 8세의 나이로 왕이 되다 보니 초기에는 별다른 업적이나 치적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18년이 지나 사리를 판단할 수 있게 된 나이(26세)에는 나라의 상황을 세밀히 관찰하여 평가하고 크게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대제사장 ‘힐기야’를 시켜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다. 

왕하 22장 3∼7절 “요시야 왕 십팔 년에 …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그때까지만 해도 성전 주변 곳곳에는 바알과 아세라, 해와 달과 별을 섬기는 단들이 있었고 몰록과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 태양수레 등 각종 이방나라 우상들과 섬기는 단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책을 발견하다
왕의 명령을 받고 성전을 수리하던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 안에서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언약책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쁨의 소식이었으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언약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왕하 22장 8절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대제사장 힐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전해 주었고, 사반은 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을 봉독하였다. 

왕하 22장 9∼10절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 …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왕은 마음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고 때로는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참담한 현실이 언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왕하 22장 11∼13절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할아버지(므낫세왕)나 아버지(아몬왕)가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던 형편으로 보아 요시야는 어린 시절 부패한 궁중에서 자랐고 그 누구한테도 종교적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한 요시야의 심장을 찌르는 언약의 말씀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감동시켰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님의 언약(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진노를 샀던 선왕들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다. 

또한 예루살렘 도처에 각종 더러운 우상이 널려 있었고 심지어 성전 안까지도 우상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고 올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요시야왕에게 들려왔던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심령에 비를 내렸고 마음을 감화시켜 눈과 귀를 열어 주셨고 무릎을 힘있게 일으켜 세워 주셨다. 그리하여 요시야왕은 입을 열어 외쳤고 하나님의 언약(유월절)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왕하 23장 2∼3절 “…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한 요시야왕은 드디어 왕위에 나아간 지 제 십팔년에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을 거룩히 지키게 된다. 

왕하 23장 21∼23절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쁜 일인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서 당연히 기억하여 지켜야 할 이 소중한 절기 유월절을 참으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다가 이제야 지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대하 35장 1절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대하 35장 18절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의 종교개혁
북쪽 이스라엘은 물론 남쪽 유다 나라도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살았다. 또한 온 나라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등장한 요시야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 파악을 정확히 하였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게 하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악명 높았던 므낫세왕의 52년 통치와 부왕이었던 아몬왕의 2년 통치 기간에 유다 나라는 더욱더 깊은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었고, 성전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언약은 멸시되고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일은 당연시되었고 너무 오랜 세월동안 습관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관습을 뜯어고쳐 올바르게 바로잡는 개혁에 요시야왕이 나서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니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었다. 먼저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읽게 된 요시야왕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분명한 길을 알게 되었다. 언약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읽어주며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다. 철저한 회개와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킬 것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성전 안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꺼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우상을 섬긴 제사장들을 폐하며 예루살렘과 유다 여러 고을에 있던 각종 우상을 타파하였다. 그것은 그가 유월절을 지킴으로 우상과 신접한 자까지 다 멸하는 개혁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왕하 23장 4∼7절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

왕하 23장 23∼24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켰더라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께 받은 축복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던 요시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공경하여 섬겼던 요시야! 참으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던 유월절을 지킨 요시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더러운 우상들을 가차없이 멸하고 개혁을 이루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한 요시야왕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며 칭찬과 축복을 내리셨다. 

왕하 23장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하나님)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장 37절) 하시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첫째 되는 계명!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섬기는 이 첫째 계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축복이 되겠는가? 그런데 성경 66권, 모든 선지자의 기록 가운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을 지킨 사람은 유다 왕 요시야의 행적 가운데서만 볼 수가 있다. 요시야왕은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행한 임금이라고 하였는 바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인 유월절을 지킨 것이 그에게는 큰 성공이고 축복이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종교 개혁! 진리의 개혁! 이것은 오늘날 이 어둠의 세상을 깨우치라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이다. ‘개혁(改革)’이라는 뜻은 잘못된 제도나 기구 따위를 올바르게 뜯어고치는 것이다. 오늘날 역시 요시아왕 당시처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마지막 종교 개혁자의 사명을 받은 우리라 한다면 옛적 요시야의 그 불붙는 마음처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개혁을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렘 5장 30절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언된 말씀처럼 참으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거짓과 우상이 참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참 진리로 세상을 깨우치며 개혁해야 할 사명을 허락하셨으니 우리는 어떠한 마음과 정신을 가져야 하겠는가 ? 

요시야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개혁을 이루어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영원한 새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하나님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리의 개혁을 힘있게 이루어가는 마지막 종교 개혁자가 다 되어야겠다. 또한 마지막 종교 개혁자로서의 받을 축복을 세상의 돌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 요시야를 칭찬하셨던 것처럼 잘했다 칭찬 듣는 시온의 자녀가 되자.

요시야(Josiah)




시대 분열왕국 시대(B.C. 7세기경)

가족 관계 증조부: 히스기야
아버지: 아몬 어머니 : 여디다
아들 : 여호아하스

직업(특징) 남 유다 왕국 제16대 왕
활동 지역 예루살렘
통치 기간 31년
주요 행적 유월절 지킴
대대적인 종교개혁 주도

요시야(Josiah. יֹאשִׁיָּה)

13대. 히스기야 - 14대. 므낫세 - 15대. 아몬 - 16대. 요시야 <부 아몬 + 모 여디다>


요시야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고쳐주신다', '여호와께서 지지하신다'는 뜻이다.
아몬왕과 보스갓 사람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시야8세에 왕이 되어 31년 동안 국가를 다스렸다(왕하 22:1).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비롯한 각종 우상들을 타파하며 종교개혁을 주도했으며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킴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했다는 인정을 받았다.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왕국은 제3대 왕 솔로몬 사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예루살렘이 있는 남 유다로 향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곳에 금송아지 제단과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해 제사를 행했다. 하루는 여로보암이 벧엘에 있는 제단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선지자가 '장차 다윗의 후손 중 요시야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등장해 여로보암이 만든 산당과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여전히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고,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시간이 흘러 남 유다의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부친이 없앤 산당과 우상을 다시 만들어 이방 신을 섬겼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이방 신의 제단을 쌓았다. 또 힌놈의 골짜기에 있는 도벳 산당에서 자기 아들을 불태워 이방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악한 행위를 일삼았다.[7] 므낫세가 죽고 그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우상 숭배하는 악행을 행했다.[8] 이에 신하들은 반역을 일으켜 아몬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9]

요시야의 생애

왕위 등극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왕위에 오른 지 8년에 다윗하나님을 찾았고, 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우상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11]

성전을 수리함

요시야가 나라를 다스린 지 18년째,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서기관 사반을 보내 성전 수리를 지시했다.
힐기야는 성전 공사 감독을 레위인에게 맡겼다. 
이때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다.
힐기야는 율법책을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요시야왕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요시야는 외적의 잦은 침입과 수많은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참담한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옷을 찢으며 크게 슬퍼했다. 
이에 온 백성을 불러 모으고 율법책의 내용을 읽어주며 유월절 등 모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백성들도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따르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상을 타파함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통해 유월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은 요시야는 대대적으로 우상을 타파했다.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든 모든 기구와 아세라상을 내어다가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15] 각 성읍에 있던 산당도 부수었고, 우상 숭배를 했던 제사장들을 폐했다.[16] 그리고 자식을 불살라 이방 신의 제물로 바쳤던 힌놈의 골짜기(도벳 산당)를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더 이상 자식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했다.[17] 태양신에게 바친 말들을 없애고 태양신을 섬길 때 사용하던 수레도 불태웠으며,[18] 솔로몬왕이 세운 이방 신의 제단을 헐고 그곳을 해골로 채웠다.[19]
요시야왕의 개혁은 이미 멸망해 앗수르(아시리아)의 치하에 있던 북 이스라엘 땅까지 이르렀다. 이는 요시야가 왕위에 있던 기원전 7세기경, 앗수르의 국력이 국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약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20] 요시야는 벧엘에 가서 여로보암이 세웠던 제단과 산당을 헐고, 그 주변 산에 있는 무덤의 해골을 끄집어내어 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부정하게 했다. 이로써 여로보암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 주신 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6]

유월절을 지킴

남 유다와 더불어 북 이스라엘 지역까지, 온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한 요시야는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켰다. 요시야는 유월절 제물로 어린양과 어린 염소 3만 마리와 수소 3000마리를 하나님께 바쳤다. 대신들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수많은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21] 사사 시대부터 분열왕국 시대까지 이때처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예루살렘 거민을 포함한 남 유다 사람들 그리고 북 이스라엘 무리가 모두 함께 유월절을 지킨 일은 처음이었다.[22]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의 위에 있은 지 십팔 년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 역대하 35:18-19

요시야는 계속해서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각종 우상들을 제거했다.[23] 그 결과, 요시야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그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었다.[3]

요시야의 죽음


기원전 612년경,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메대(페르시아)의 연합군에 의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가 함락됐다.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애굽(이집트)의 바로(파라오) 느고와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항하고자 했다. 느고가 앗수르의 니느웨 탈환을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으로 출병했을 때, 요시야는 느고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나섰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 그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하며 길을 내달라고 했지만[24] 요시야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 요시야가 적이 쏜 화살을 맞았다. 간신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치명상을 입어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5]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했다. 요시야는 예루살렘 조상의 묘실에 안치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뒤를 이었다.

교훈

요시야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왕이었지만, 즉위 후 18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들을 그대로 두었다.
하나님의 계명인 유월절을 깨닫고 나서야 온 나라에 있던 각종 우상을 멸하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실시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성경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으로 기록됐다.
어느 시대든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인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한일서 5:2-3)



요시아 왕의 죽음(逆說의 죽음)

열왕기하 23장은 요시야 왕의 역동적인 신앙개혁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성전 수리 중에 발견된 율법 책을 토대로 하여 무너진 신앙을 새롭게 구축하는 반면, 과거의 잘못된 신앙의 악습들을 깡그리 말소시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요시아의 신앙개혁은 하나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로 남는다.

그런데 23장 후반부에는 성군(聖君) 요시아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8세라는 이른 나이에 등극하여 30년의 선전(善政)을 펼치다가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신앙의 관점에서 그의 죽음은 참 아쉽고도 큰 손해인 듯하다.
요시야가 죽은 당시에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였다(대하 36:24~25절)]고 전한다.

너무나 아쉬워서 심정(心情)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요시야 왕의 죽음을 묵상해 본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열왕기 기자는 이렇게 전한다(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개역한글이나 개정 번역에는 애굽 왕이 앗수르와 전쟁을 하기 위해 원정 길을 나선 의미로 번역하고 있으나 표준 새번역이나 영어 번역은 보다 구체적인 목적을 부연해준다:
[그가 다스리고 있던 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앗시리아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올라갔다(During Josiah's rule, King Neco of Egypt led his army north to the Euphrates River to help the king of Assyria).]
즉 당시 앗수르와 신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서 원정했던 것이다.
요시아는 그 바로 느고의 원정길을 막아서다가 전사(戰死)하였던 것이다.

요시아 통치 시절, 유다의 원수인 앗수르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나 신바벨론은 급부상하는 시기였다.
요시아 왕을 비롯한 남 유다는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들떠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카운트다운>에 돌입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앗수르를 돕고자하는 바로 느고의 원정은 유다의 희망에 찬물을 껴 얹는 것과 같았다.
이는 요시야에게는 너무나 쉽게 인간적인 힘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 일로 요시야는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열왕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25~26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즉 요시아의 선정이 므낫세의 악정을 극복하기란 역부족이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동시대의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던 역대기 기자는 좀 더 부연 해석한다(대하 35:20~21절).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이 부분은 아주 특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요시아 왕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요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22~23절).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즉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와 남 유다의 판단과 행동보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앗수르가 쇠퇴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지라도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달려 있지,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좌우되지 않음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사실상, 열왕기 저자 역시 아무리 요시야가 선정을 펼쳤을지라도, 그것보다 그 이전 므낫세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즉 남 유다의 역사를 일개 왕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해준다.

열왕기 저자나 역대기 저자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요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메시지를 전해 준다. 다된 일 같고, 당연한 결과로 여겨질지라도, 모든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그 분의 시간과 뜻에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아(自我)가 죽고, 하나님의 의지에 기꺼이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종교개혁자 요시야(열왕기하 23:21-25, 역대하 34:1-33)

요시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와 주신다’ ‘여호와의 낫게 한 자’ 또는 ‘고치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유대 왕 아몬의 아들로(마 1:10),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요시야는 유다 왕들 중에서 가장 경건한 왕입니다(왕하 23:25).
선지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성실함에 비추어 요시야의 무가치한 후계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렘 22:15).
역대기에서 요시야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히스기야의 모든 장점들을 지닌 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조부 므낫세는 55년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다가 말년에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나라에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과거에 범한 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던 백성들의 마음은 좀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아몬도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2년 만에 죽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런 사악한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하나님만 섬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다윗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선대의 악한 왕들이 섬기던 우상을 제하고 우상을 섬기던 제단을 훼파하였습니다.
그리고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고 정결케 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유다 뿐 아니라 북국 이스라엘에 까지 미쳤으며 앗수르의 세력을 배제하는 운동이기도 하였습니다.

제사장 힐기야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내다가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을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읽으니 왕은 옷을 찢고 발견된 율법책에 비취어 볼 때에 자기와 그 백성과 그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여호와께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호와께 알아보기를 원했던 유다 백성들의 장래는 여선지자인 훌다가 예언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살지 않고 사신 우상을 섬긴 결과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자신의 옷을 찢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죽을 때까지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을 예언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모든 백성을 모은 후에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먼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언약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아가 사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 애급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려고 유대국을 통과하는 것을 막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니 전 국민이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대하 35:24-25).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시대적 배경

B.C. 640- 609년경, 애굽(이집트)과 바벨론(바빌로니아), 앗수르(아시리아)가 근동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시기입니다.

2. 생애

① 부왕 아몬이 암살당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4:1)

② 즉위 8년째 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정을 펼쳤습니다.(대하 34:3)

③ 즉위 12년에 모든 이방 우상을 파괴하고 이교의 예배를 폐함(대하 34:3- 7)

④ 18년에 성전을 수리함, 이때 율법서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신앙개혁 운동을 펼침

⑤ 애굽과 교전 중인 앗수르를 돕기 위해 므깃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였습니다.

3. 성품과 행적

① 선왕들의 실책과 우상숭배오 인해 퇴락된 성전을 수리하여 예배의식의 규율을 확립하였습니다.

② 율법서를 발견하여 대대적인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③ 온갖 악행으로 범죄한 선대의 두 왕들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율례대로 선정을 베푼 어질고 신실한 왕입니다.

④ 하나님께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하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앞서 성급하게 행동하는 일면도 있었습니다.(왕아23:29)

4. 종교 개혁자로서의 요시야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반기를 든 종교 개혁가들의 보편적인 사상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인본주의적인 악습과 제도를 개혁함과 동시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 번역 및 성경적인 교리 체계를 수립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신이 온 세계 교회를 변화시켰고 세계 도처에 많은 개신교들을 융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개혁의 기치로 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사상은 일찍이 유다 왕 요시야의 치적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다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성군(聖君)이였으며 또한 하나님께 인정받은 인물로서, 오늘날 개혁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중심

요시야 종교 개혁의 첫 번째 목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순종하다는 말은 '따르다'(삼상 30:21), '좇다'(신 11:28) 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시아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이것을 종교 개혁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매사에 하나님의 뒤를 따를 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2) 말씀 중심

요시야 종교 개혁의 두 번째 목표는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시야는 말씀을 부흥시키고 또 그 말씀을 실행하는 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요시야 이전의 왕들은 우상을 섬기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였지만,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그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중세 암흑 시대에 교회의 부패에 의해 가려 있다가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으로 다시 부흥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요시야는 말씀 중심의 개혁가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이념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안주하던 종교가들을 질타하는 세례 요한에게서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원리는 다시 정립되었고 후에 교회사 가운데는 또다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종교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로부터 약 오백년,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 상태는 어떻습니까? 과연 성경이 보여 주는 개혁 정신을 따라 하나님과 말씀 중심의 신앙 위에 굳게 서 있습니까? 우리 안에 그 어떤 부패적인 요소가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이므로 개혁하지 않으면 점점 더 부패의 정도는 심해집니다. 또한 신본주위(神本主義) 신앙은 사라지고 말씀은 우리 삶에 더 이상 영향력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개혁가의 자세로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신앙에 바로 서야겠습니다.

5. 여호와를 향해 힘을 다한 사람 요시야

요시야는 불과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어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 왕입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는 므낫세로 55년간 유다를 통치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죄한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21:16) 유다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유명했습니다. 므낫세가 죽고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과 신하들은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몬 역시 그 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신하들은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그 아버지처럼 수십 년간 이런 사람을 왕으로 섬기고 이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려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신복들이 왕을 반역하였습니다. 왕을 궁중에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또 반역한 신복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비록 어리지만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 된 요시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22:2에 기록된 종합평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살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그는 선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불과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요시야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왜 왕을 죽였을까요? 할아버지에게 고생한 사람들이 아버지에게도 큰 소망이 없음을 알 때 살해한 것이 분명함을 알았을 때 요시야는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백성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고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배나 조상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나로 저분처럼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것과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것인데 요시야는 후자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신뢰받기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니 하나님께라도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향해 힘을 다한 왕이라는 칭호를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입니다.

첫째, 요시야는 여호와의 전을 깨끗이 수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히스기야가 죽은 이후 누구에 의해 청소되거나 수리된 일이 없었습니다. 60여 년이나 누가 돌보지 않았으니 지저분하고 낡을 대로 낡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요아스가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모았듯이(12:4-14) 요시야도 성전 보수를 위해 은을 모았습니다. 요아스는 어머니(아합의 딸) 아달랴가 우상숭배 정책을 쓰면서 낡아진 성전의 보수를 위해 20세 이상의 장정에게서 주민세 성격의 은을 받았고 서원한 사람들이 몸값으로 드리는 은과 자원하여 드리는 은을 제사장들이 받아 성전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성전을 보면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나 교역자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식어진 교회는 건물도 사방 구석이 낡고 지저분한 채로 있습니다. 누구나 청소하는 사람이 없고 덜렁거리는 창문을 고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는 교회는 항상 건물이 깨끗하게 청소 정리되었고 부서지고 낡아진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성전 관리하는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청소를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모습과 그저 할 수 없이 한 사람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청소하고 보수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이 흔치 않던 시대에 발견된 이 율법 책은 대단한 선물이었습니다. 수십 년, 아니 그 이상 성전의 어느 구석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이 보수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것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이 율법 책 때문에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어본 서기관 사반은 왕 앞에서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내릴 경고와 저주의 말씀인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26장 같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곧 이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여선지 훌다를 찾아갔습니다. 선지자는 왕이 읽은 재앙과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시야는 이 재앙에서 제외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다시 율법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로 하였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따르기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요시야는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숭배에 쓰이던 물건들을 꺼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을 내다 불사르고 미동(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전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3:4-20까지 읽어 보면 얼마나 철저히 우상의 뿌리를 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제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바로 기억하지 못하고 해마다 형식적으로 지켜온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전국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헐어 버린 요시야는 온전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킨 모습은 역대하 35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습관적이고 관례적인 주일 성수나 절기를 지키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 주일에 하루, 주일을 성수하게 하시고 여러 기념할 절기를 주신 것은 그 의미를 바로 헤아려 하나님과의 신앙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없이 형식적으로 지나치는 절기는 차라리 지키지 않은 만도 못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된 그날의 감격을 잊지 않고 지켜지는 유월절, 일 년의 풍성한 수확과 소출을 감사하여 드리는 수장절, 율법을 받아 언약 백성이 된 것을 잊지 않고 지키는 칠칠절이 의미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어진 절기마다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절기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잔해를 제거하는 종교개혁, 다시 새롭게 지켜진 유월절, 이 모든 것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한 요시야의 값진 업적이었고 하나님은 이런 요시야를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아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

우리가 요시야를 통해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 요시야 왕은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이미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해 “요시야란 아들이 태어나 우상숭배하는 제사장들을 죽여 그 뼈를 태우리라”(왕상13:2)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요시야는 멸망직전에 있는 유다왕국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통치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는 16세 때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고 20세 때는 예루살렘의 여러 우상들을 훼파하였으며 6세 때는 각 지방에 있는 우상과 그 단들을 다 훼파하였습니다. 이만큼 그는 일찍부터 신앙생활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2. 등극한 요시야는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 뿐 아니라 교회의 지체된 마음의 성전까지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마수가 뻗치는 곳은 어디든지 가지 말고, 죄악된 사람과는 교제를 끊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요시야 왕은 즉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런 행위는 깊은 후회와 자책의 표시입니다. 요시야는 왜 그토록 자책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한 기준을 듣는 즉시,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요시야가 단지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를 따르기 위해 결단했고, 명령을 내려 행동을 취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응답은 즉각적이었고, 과감했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는 단지 즉석에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한 진리를 찾고는 끝나지 않는가요? 또는 ‘며칠안에 시작하도록 하자. 언젠가 행동을 바꿀꺼야. 이건 그 당시에나 가능해’라면서 꾸물거리거나 적당히 합리화시키지 않는가요?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결단할 것은 결단하자.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즉시, 그리고 온전히 순종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4.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표현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심령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순종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신령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5. 요시야의 개혁이 왕국분열 이후 전대미문의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다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그의 개혁이 외형에 치우친 미완성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시야의 개혁은 국가 외적인 생활에만 작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까지 파고드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를 완전히 소생시키거나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개혁이란 마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개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6. 요시야가 거의 60여년 동안이나 사회의 곳곳에 뿌리박힌 온갖 우상숭배와 악한 제도를 철저하게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악에 물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호한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요시야는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왕하22:2)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관을 가졌기 때문에 과거의 오랜 악습과 부정을 척결할 수 있었습니다.

8.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다음을 묵상합시다.

 ① 당신은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② 당신의 경우 말씀의 즉각적인 적용과 순종에 방해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③ 당신의 습관 중 당장 변화되어야 할 것들을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9. 그토록 신실했던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다가 죽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가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 왕을 치러왔을 때, 요시야 왕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습니다. 즉 앗수르에 반감을 지녔던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채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로느고의 행진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느고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요시야 왕에게 전하여서 전투에서 물러서게 하십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전쟁을 하다가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뜻보다 자신의 뜻이 앞서는 것은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생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라"(롬12:2)


또한 요시야처럼 신실했던 자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신앙생활에서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요시야는 기도하기를 잊어 인생을 수치스럽게 마감했습니다.

 참고로 요시야라는 동명이인으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대상4:34, 슥6:10)

지금 우리는 ‘교회 성장 감소’라는 위기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이런 위기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무감각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맞이하고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에 빠지지 말고, 요시야 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의 회복과 도덕성의 회복,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목회의 역량을 집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순교적 신앙의 유산으로 이러한 것을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교회여! 다시 부흥을 일으킵시다! 다시 뜁시다! 다시 일어납시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닌 이중적인 생활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하겠으며 특히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회개운동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섬김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몸입니다. 따라서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의 몸된 교회는 마땅히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교회요 예수의 정신에서 떠난 것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영혼이 떠난 몸과 같습니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갱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그리고 섬김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고, 복음을 가지고 앞장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제목

1. 동성결혼 철폐

2. 성경적 가정의 회복

3. 공립학교와 각급 교사들의 영적 회복

4. 영화 TV 방송 인터넷 언론계의 복음화

5. 대통령과 장관들, 입법부 사법부와 군 지도자들을 위해

6. 각 주와 도시 및 교회를 위하여 기도

한국의 국가 기도의 날 제정을 위하여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회할 때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장의 제안에 따라 의원이 기도하므로 모든 의원들이 함께 기도를 하였다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며 그 날을 국가 기도의 날로 정하도록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갖고 새로운 한국을 세워나가야 하겠다.

기도 제목 /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1. 손해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겠습니다!(경제 분야) 

2. 막말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겠습니다!(언어생활) 

3. 퇴폐문화 멀리하고 깨끗하게 살겠습니다!(문화 분야) 

4. 방황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하겠습니다!(가정 회복) 

5. 외면하지 않고 이웃을 돕겠습니다!(사회봉사) 

6. 불편하더라도 참고 아끼겠습니다!(환경 공해) 

7. 대한민국을 사랑하겠습니다!(조국 사랑)



요시야 ― 남유다의 마지막 개혁자

1. 인적 사항

① 요시야는 ‘여호와께서 도와주심’이라는 뜻
② 남유다 제16대 왕,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 통치(왕하 22:1)
③ 므낫세 손자, 유다 왕 아몬의 아들(왕하 21:24).
④ 모친은 보스갓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왕하 22:1).
⑤ 아들로는 요하난과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살룸이 있음(대상 3:15).
⑥ 그리스도의 조상(마 1:10).

2. 시대적 배경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대로 접어든 B.C.640년경부터 왕국 분열 후 유다 역사상 가장 부흥했던 시기인 B.C.609년까지를 주활동 배경으로 한다. 당시의 대외 정세는 남유다를 계속하여 위협하던 앗수르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때였다. 즉 앗수르는 무리한 대외정복 정책으로 국력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고 급기야 B.C.612년에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 城 함락(陷落)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신흥 바벨론이 앗수르를 제치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세력이 활발하여지는 요시야 왕 말기부터였다. 그러므로 8세에 왕에 오른 요시야 왕 때에는 앗수르의 힘은 약화되었고, 아직 바벨론은 대외적으로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요시야 통치 초기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운 중에 여호와의 신앙을 제정할 수 있었다.

3. 주요 생애

여로보암 때에 출생이 예언됨

B.C.926년경

왕상 13:1,2

출생

B.C.647년

부왕 아몬이 암살 당함

8세, B.C.640년

왕하 21:23

왕이 됨

왕하 21:24

1차 종교 개혁 실시

20세, B.C.628년

대하 34:3

성전 수리

26세, B.C.628년

왕하 22:3-6

율법 책 발견과 대각성

왕하 22:8-13

백성들과 언약 체결

왕하 23:1-3

대대적인 종교 개혁 단행

왕하 23:4-15

유월절을 지킴

왕하 23:23

므깃도에서 전사

왕하 23:29

예루살렘에서 장사됨

왕하 23:30

4. 성품

①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뒤 선왕들과는 달리 다윗의 율례를 모범으로 삼아 그 율례대로 선정을 베푼 것을 볼 때 어질고 신실한 자(왕하 22:2).

② 율법서를 발견한 후 말씀을 읽으며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할 만큼 겸손하고 순종적인 자(왕하 22:10-13).

③ 백성들과 더불어 여호와 앞에서 말씀에 순종했다는 언약을 맺을 만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뢰하는 자(왕하 23:3).

④ 대대적인 회개 운동 후에 우상 숭배의 제단과 그 형상, 또 이를 주관하는 자들까지도 제거할 만큼 결단력 있고 실천적인 자(왕하 23:4-15).

⑤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만큼 가치관이 확고한 자(왕하 22:2).

⑥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을 볼 때 일면 경솔한 자(왕하 23:29).

5. 구속사적 지위

①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신앙 개혁운동을 주도한 남유다 제16대 왕(왕하 23:4-15).

② 신앙적 암흑기에 여호와 예배 의식을 회복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한 지도자(왕하 23:1-3).

③ 이스라엘 분열 왕국 이후 유다 역사상 최대의 종교적 부흥기를 꾀한 왕(왕하 23:25).

6. 주요 업적

①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이 때 율법 책을 발견함(왕하 22:3-8).

②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 책을 읽어 자신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함(왕하 22:8-19).

③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함(왕하 23:1-3).

④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하고 정결케 함(대하 34:3).

⑤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 시대 이후 처음으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킴(23:21-23).

7. 실수

애굽 왕 바로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끝까지 므깃도 전투를 감행하다 죽임을 당함(대하 35:20-24).

8. 평가 및 교훈

① 요시야 왕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지라도 선왕의 악행을 따르지 않고, 오직 다윗의 본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하나님만을 섬겼던 현군이었다(대하34:1-7). 곧 그는 즉위 후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고, 또 온갖 이방 신을 다 제하여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대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결단력 있고 진취적인 신앙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결단과 행동이 살아있는가? (롬12:2).

② 요시야 왕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겠다는 결심과 함께, 나아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왕하 23:21-25). 이러한 요시야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약 2:14)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참 신앙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실로 우리도 그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③ 요시야는 왕으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개혁이 아닌, 자신부터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방 우상 숭배에 젖어 있던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국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왕하 22:11-13). 이처럼 성도들도 먼저 겸손하게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켜 변화하는 가운데 교회와 사회를 예리한 말씀으로 변화시켜 나아가야 한다(히 4:12). 실로 요시야가 오직 말씀에 준거하여 모든 개혁을 일으켰듯이 우리 역시 말씀에 근거하여 변화하는 모습과 노력이 있을 때 진정 이 사회가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경배드릴 수 있는 것이다.

9. 핵심 성구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4월 30일(수) 열왕기하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느후스단(18: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He removed the high places, smashed the sacred stones and cut down the Asherah poles. He broke into pieces the bronze snake Moses had made, for up to that tim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 )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강단이었습니다.
- 어거스틴

The cross was a pulpit, in which Christ preached His love to the world.
- Augustine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선포된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발견합니다.

복음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며,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유일하고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십자가는 매일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샘물과 같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형벌'의 도구이며,
거룩한 삶을 향한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결국 십자가는 기독교의  처음이자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세상 가운데 선포되는 살아 있는 강단입니다.






 느후스단이란 히브리어 놋쇠 또는 구리라는 단어 "네호세트(nechôsheth)"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구리 또는 놋쇠로 만들어진 것(a thing of brass)을 말합니다.

네호세트(nechôsheth) נְחֹשֶׁת 스트롱번호 5178

1. 놋쇠.  2. 놋쇠로 만든 물건.  3. 렘 6:28
발음 [ nechôsheth ]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철(창4:22), 놋(출25:3, 신28:23, 사60:17),동(민31:22, 신8:9, 대하2:14), 놋줄(삿16:21), 차꼬(삼하3:34), 사슬(왕하25:7, 렘39:7), 쇠사슬(대하33:11, 36:6), 누추한 것(겔16:36).

1. 느후스단의 역사적 배경

느후스단은 구약성경 열왕기하 18:4에 등장하는 유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 사건(민수기 21:4-9)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도록 명하신 놋뱀(bronze serpent)을 가리킵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의 마음을 가진 백성들을 위해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놋으로 된 뱀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놋뱀을 우상화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를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속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느후스단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이러한 우상 숭배를 폐지하려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느후스단을 파괴하며,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본래의 뜻을 잊고 그것을 숭배 대상으로 삼았음을 비판했습니다.

2. 신학적 의미

구원의 상징 :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이 구원의 본질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바로 그 놋뱀처럼 십자가에서 들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4-15).

우상화의 위험성 : 느후스단 사건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상징조차도 잘못된 방식으로 숭배될 때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도 인간이 그것에만 집중하고, 그것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신앙의 본질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오직 말씀으로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순수성 : 히스기야 왕의 개혁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를 회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조차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경우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점은 예배에서 형식보다는 본질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3. 현대적 적용

우상의 현대적 형태 : 느후스단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화되었듯이, 오늘날 우리는 종종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나 교회 전통을 절대화하며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물, 교회의 사역, 특정 교리나 전통 등을 하나님보다 우선시할 때 그것은 우리의 느후스단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 회복 : 하나님은 우리가 형식적 예배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요한복음 4:24).
예배가 형식적이거나 외형적인 것에만 집중될 때,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후스단의 교훈을 통해 우리가 진정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의 필요성 : 느후스단 사건은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예배 속에서 개혁이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든 사람의 관습으로 자리 잡은 느후스단을 부수고 예배의 순수성을 회복한 것처럼, 현대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서도 영적 개혁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통이나 문화적 요소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

느후스단의 이야기는 하나님께로의 순수한 믿음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느후스단 사건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형식적인 요소나 전통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수한 예배를 추구하며, 우상화된 요소들을 제거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화려한 예배가 사람들을 감동시킬지라도 주님께서 기뻐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상징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기호와 상징의 차이

1. 상징(das Symbol. symbol)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하나의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Zeichen)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상징의 필요성

왜 기독교는 상징이 필요한가?
- 상징이 주는 신앙적 의미 

신앙은 참된 하나님의 상징성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은 상징적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를 대변하게 된다.

기독교 상징을 통한 의미부여 :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투영하며 그 본체에 가깝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상징이 주는 신앙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거룩성 수용

2.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

부정적인 요소

1. 인간의 이해 방식에 따라 자의적 해석가능

2.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고착화 우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적인 요소가 있는가?

인간의 신앙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투영을 가깝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상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가톨릭은 상징을 절대화하여 우상적인 요소가 있고, 개신교에서는 본질적 상징마저 잃어버린 현실의 상황이다.

나는 신앙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참된 기독교의 상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 삶의 회복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참된 신앙의 자리를 갖기 위하여 상징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상징이 고착화가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지만 상징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상징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 찬양, 기도, 말씀에 대한 상징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

상징을 통하여 성서와 신앙을 위한 제언

성서는 과학적인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를 위한 텍스트로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 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의 토대로서의 말씀이다.
자신을 어떤 대상물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자 할 때, 대부분 그 자신이 투영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미와 정신이 반영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릇된 편견 또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자신을 마음대로 신앙을 판단하고 해석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개방이자 열림이다.
신앙은 자신의 삶만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장애물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신앙을 그러한 참된 의미를 각성하게 하고 자신의 나태한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근거이다.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습관적인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힌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민 21:4).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사라진 그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고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범죄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얻은 사망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이 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고 원망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트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 밀려옵니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의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던 것을 회개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나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것,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것 등은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은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이 천막 안을 기어다니고,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원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제발 불뱀을 떠나게 해주소서!”

모세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놋뱀을 쳐다보면 어떻게 삽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은은 구속의 대가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나타냅니다.
불뱀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아들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대요. 놋뱀을 쳐다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몸에 독이 퍼져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리 있냐?”

“아버지, 쳐다보세요.”

“글쎄, 헛소리하지 마라니까!”

“아버지, 그래도 한번 쳐다보세요.”

“그만하라잖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죽습니다. 제가 강제로라도 아버지가 놋뱀을 보시게 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놋뱀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가서 얼굴을 들어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던 뱀의 독이 사라졌습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놋뱀을 쳐다보니까 몸이 싹 나았다!”

구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불뱀이 왔지.
죄로 인해 불뱀이 온 거야.
놋뱀은 그 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니 우리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구나. 그러면 죄가 끝났네!’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를 표시하기 위해, 혹은 보기 좋으라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심판받은 곳입니다. 죄가 끝나고, 저주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고통이 끝난 곳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다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셨지!’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벤허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는데,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인인 멧살라는 자라면서 다른 이념을 가져 서로 원수가 됩니다.

멧살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호민관이 되어 유대로 돌아온 뒤 벤허를 로마군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려고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벤허가 노를 젓는 배에 탑니다.

곧 로마군과 해적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싸움 중에 아리우스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본 벤허가 바다로 뛰어들어 아리우스를 구해 부서진 배의 큰 나무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리우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의 배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습니다.
잠시 후 함선들이 몰려오고, 아리우스는 해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들이 가까이 와서 보니 로마군 함대였습니다.
아리우스가 배에 올라가자 한 장군이 ‘배 두 척만 잃고 해적들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합니다.

로마로 돌아간 아리우스벤허를 양자로 삼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의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유대로 돌아가서 멧살라를 만나러 갑니다.
가기 전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은 선물을 멧살라에게 보냅니다.
멧살라가 선물을 보고 “집정관 아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최근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나 멧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지?”

“요술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내 내가 전쟁터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그러고는 “표식은 알겠지?” 하고 서판에 인장반지의 문양을 찍어 멧살라에게 보여 줍니다.
벤허가 이전의 벤허가 아닌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정관의 아들이기에 멧살라가 쩔쩔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모든 걸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어 가문의 반지를 껴도 그 능력을 모르면 멧살라에게 여전히 수모를 당해야 했겠지만,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반지’가 가진 힘을 알았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거짓말했잖아! 너, 나쁜 짓 했잖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우리를 슬퍼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고 벌하고 버리실 거야!”

그때 우리가 놋뱀을,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탄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어. 하지만 저 십자가 앞에서는 죄가 죄가 아니야. 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졌어. 거기서 죄가 끝났어! 심판이 끝났어!’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하다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죄로 인해 우리를 조소하고 괴롭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너, 거짓말했잖아!”라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 거기에서 내가 거짓말한 죄가 끝나고 모든 죄가 끝났어!’ 하면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이 없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모두 도말(塗抹)했습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옛날에는 입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의 선한 행위로도 아니고, 노력이나 수고로도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경 구석구석에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내용만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됩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심판받을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에서 저주가 끝나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 밝게 삽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기서 내 죄의 심판이 끝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값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느후스단 (열왕기하 18:1-4)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던 구리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그 뱀은 죄를 지은 백성들을 불뱀의 독으로부터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히스기야 임금이 그 놋뱀을 파괴하고 누후스단이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느후스단이라 부르며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에서 16년간 통치하는 기간에 역대 유다 임금들 중에 우상숭배를 가장 심하게 했던 왕이었습니다. 
금송아지와 바알을 섬겼을 뿐 아니라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길 정도로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궁지에 몰릴 때 아하스는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은 보화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큰 나라 앗수르 제국을 의지하였습니다.  

아하스의 선물을 받은 앗수르 왕은 구원병을 보내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을 함락시켰고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우상 제단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제단에 제사를 드리니 효험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우리도 이렇게 크고 화려한 제단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구조와 규격 등을 그림으로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것과 똑같은 제단을 만들어놓으라 명령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왕은 새롭게 세워진 제단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그 단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놋단을 북쪽으로 옮겨버리고 그날 이후로 모든 제사는 새로 만든 큰 단에 드리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들을 닫아 걸었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했습니다.  예루살렘 곳곳에 새로운 산당을 세워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 시달렸습니다(역대하 28장). 

그와 같은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호세아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든 산 위에 산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였고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멸망당한 사마리아 성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앗수르에 패한 이방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앗수르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뿔뿔이 흩어놓는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온 이방 민족들이 각자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마다 산당을 짓고 거기 우상들을 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잡족이 되었으며 이방의 신상들이 득실거리는 종교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행을 보시고 벌하여 이방인들 몇을 죽게 하셨더니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앗수르 왕에게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법을 몰라 이런 벌을 받았으니 전에 사마리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제사장을 보내어 우리에게 그 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온 제사장 하나를 돌려보내 벧엘에 살면서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잡족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 민족이 각각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운 여러 산당에 두었고, 각 성읍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을 세워 자기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땅의 수호신에게 잘 보여야 재앙을 만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저 사마리아 지역의 수호신 정도로 여겨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앗수르에게 망한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럴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는 아하스 왕을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상 다윗의 의로운 길을 따랐던 히스기야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 산당들을 무너뜨리고 거기 두었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고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유다 왕국에 일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를 가리켜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었으니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하였습니다. 

역대 어느 왕들보다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킨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백성들이 그 놋뱀을 향해 향을 피우며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놋뱀이 처음부터 우상으로 섬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인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 섬겨졌던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내용과 오늘 말씀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던 놋뱀은 불신앙으로 멸망당하는 죄인들의 치료와 생명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방식이었지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뱀의 모양을 한 그 놋조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상징적인 도구였습니다.  ‘놋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죽을 사람이 살아나느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라’ 하고 끝까지 거부하던 사람들은 고통 중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놋뱀을 언급하시며 ‘나도 높이 달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요3:14, 15) 하셨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이 나의 죄를 대신한 형벌임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높이 든 놋뱀과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전남 보성의 어떤 교회 목사 부부가(엄밀히 말하면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자칭 목사지만) 세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게 했습니다.  처음에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는 정신질환을 앓는 부부가 아이들을 학대한 폭행치사 사건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면서 이 부부의 어리석은 행동이 갈수록 기가 막혔습니다. 감기 든 아이들의 몸 안에 병을 가져다 준 귀신이 들었으니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냥 때린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며 어린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가며 때렸습니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알고 보니 이 어리석은 부부를 부추겨 아이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하고 돈을 뜯어낸 또 한 여인이 있습니었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하리니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 14) 잠언의 말씀을 귀신 내쫓는 푸닥거리에 적용하였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무지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지요? 

   작년 5월 경북 문경에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자기 손발을 못 박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나 이번 보성의 사건들 모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박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나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자칭 예수의 엽기적인 자살 사건은 종교적 영웅심으로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재현한다고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코메디 같은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닙니다. 연극 무대에서 공연 중이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기독교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이 날보란 듯이 쇼하는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히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바퀴달린 십자가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나무 십자가를 끌고 다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전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자신의 이익과 성공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모세의 놋뱀 느후스단을 깨뜨렸던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자기 주관적인 어떤 신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느후스단을 섬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신앙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었습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되고 있는 왜곡된 신앙 행동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이기적인 욕심과 소원성취를 위해 종교행위에 몰입하는 일입니다.  예배당과 불당이라는 장소만 다르고 의식이 서로 다를 뿐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면 그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금식하며 맹렬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미신이지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시지 사람들이 부자되고 성공하도록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심판을 말하기 꺼려하는 기독교는 세상의 도덕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선생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영생이라는 진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신앙 체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도와준 사람, 존경스런 신앙의 인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봐야지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놋뱀 섬기듯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신성한 부적처럼 여기는 믿음도 있으니 이것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라는 물질을 바라보거나 이차적인 축복에 더 관심이 있으면 그것이 곧 느후스단이고 불신앙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만 보더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의 놋뱀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찍어 불태우고 깨뜨려야 할 누후스단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빙자하여 자기 이익의 기회로 삼는 종교인들이나 종교 장사치들의 헛된 영웅심과 세속적인 욕심을 깨뜨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놋뱀을 바라보라 했지 그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셨지 주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형상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절하며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종탑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모두 거룩한 교회는 아니며, 거실과 안방 벽에 십자가를 걸었다고 거룩한 백성의 집은 아닙니다.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그 행실과는 상관없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입을 열면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고 모두 좋은 믿음,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 중심에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모든 종교활동은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따르고 제사했던 혼합주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히스기야가 부쉈던 놋조각 느후스단일 뿐입니다.  
사마리아에 강제 이주된 앗수르의 식민지 백성들이 섬겼던 다원주의, 혼합주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옥스포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컬리지의 성당에 가면 옥스포드 수호신을 기념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부서져 일부만 전시되었고 주변의 여러 조각상들을 보면 코가 깨지거나 얼굴이 무너진 흔적들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의 조각상, 벽화 등을 너무 성스럽게 여기다 못해 그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기 절하고 복을 비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을 비판하며 교회 안에 어떤 형상이든 세우거나 걸어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의 성상들도 대부분 파괴되고 교회 밖으로 내던져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고 있는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한 하나님이라 하며 그 앞에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조차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형상 속에 가두어 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섬기려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와 섬김의 궁극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주문을 외면 불려 나오는 알라딘 등잔의 거인처럼 하나님은 그저 필요할 때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상숭배요 미신적인 습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아니고는 나에게는 도무지 구원 받을만한 아무 능력도 자격도 지혜도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내맡기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타우형(헬라어 T자)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예로부터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십자가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언(의)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타우형 십자가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힘겨운 어깨를 상기시킨다.
가로막대와 교차하는 세로막대의 윗부분이 생략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요르단에서 꼭 가봐야 할 역사적 기독교 유적가운데 하나는 해발 835m의 느보산이다.
눈치 챘겠지만 모세의 출애굽 여정 중 마지막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신 32:49)

모세기념교회 옆 전망대에 서면 멀리 사해와 예리코(여리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감람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모세의 무덤위에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모세기념교회는 지금도 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정원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모세의 지팡이'' 작품이 세워져 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됐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됐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돼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숨을 거뒀다.
느보산에 거대하게 세워진 모세의 지팡이 ''놋뱀''이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고 오늘도 경고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놋 뱀 사건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비교하여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다섯 부류의 주장이 있다.

1. 전통적 주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 뱀을 달게 하여 이를 쳐다본즉 뱀에 물린 자가 살게 되었으므로 놋 뱀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놋 뱀을 예수라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순(矛盾)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마 16:24) 하였으며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아야(갈 5:24)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인가?
뱀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혜로 포장하고 있다.

2. 일부 주장 (1)

놋 뱀은 사탄이므로 사탄이 매달렸으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속성을 독배로 마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모순(矛盾) : 예수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려고(롬 8:2, 갈 4:5) 바리새인들의 손을 빌어서 죽으신 것이지 사탄의 독배를 마신 것이 아니다.

3. 일부 주장 (2)

놋 뱀은 예수님이다.
놋 뱀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놋 뱀에 대하여 무엇이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놋 뱀이 예수이다'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이유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했으니 뱀을 예수라 주장한다.

모순(矛盾) : 뱀은 사탄이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중하라(프로니모스)고 하셨으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뜻이지 뱀을 지혜롭다고 오역한 부분을 가지고 뱀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신중하고 순수하라는 것은 방법이 선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부이다.

4. 전통적인 주장 (2)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침묵하겠다는 부류가 있다.

모순(矛盾) :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어 오늘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5. 새로운 주장

놋 뱀사탄이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놋 뱀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상황이다.
그 해답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 있다(스타우로스 원어성경연구원).

요한복음 3장 14절 번역에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을 들었다는 것은 매단 것으로 보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기에 내용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든 것이 아니라 높인 것이다.

아래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

높이다(5312, 휘프소오)에 대한 고찰

휘프소오(
hüpsŏō) ὑψόω
1. 높이 올리다.
2. 높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312)(마 23:1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12)(눅 1:52)."

"무리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삶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에 이르도록 머무신다고 들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를 높임을 받아야(5312) 한다고 말하느냐? 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요 12:34)."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혹시 내가 너희가 높임을 받게(5312) 하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내가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예수님을 높임 받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전제 조건은 낮아짐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낮아졌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의 말씀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십자가의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는(5312)약속이다.

광야에서 뱀을 높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린도전서 10:7-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 죽었고 시험하다 뱀에게 멸망하였고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다간 다 죽이게 생겼기에 뱀(사탄)을 깃대(닛시) 위에 높이고 이를 쳐다봄으로 살도록 하여서, 구세주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종살이하게 두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뱀(사탄)을 높인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갔고, 이후 히스기야 왕 이전까지 산당에서 분향하며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놋 뱀을 파기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유념하여 볼 필요가 있다.

놋 깃대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열왕기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하나님께서는 뱀(사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신 것인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맡겨 두심(사 5:7)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 20:9~15)."

유대인들 : 마귀 자식

"어찌하여 내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의 삶은 마귀인 아비에게서 난 삶이니 너희 아비의 정욕을 너의 삶도 행하려 하는구다. 저는 시작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안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면 자기 삶에서 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의 아비가 거짓말쟁이더라(요 8:43~44)."

서기관 바리새인 : 후견인과 청지기

"내가 또 말하나니 상속자가 모든 삶의 주인이지만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는 아무도 종에서 옮겨 가지 못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작정함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도다. 이와 같이 우리도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살이 당하고 있더니 기한의 충만이 이르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속하여 아내에게서 낳아 내어 보내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삶을 속량하려 함이요, 나의 삶이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에 이르고자 내어 보내사 아버지 아빠라 외치게 하셨느니라(갈 4:1~6)."

뱀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이며 뱀의 후손은 머리요,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로서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디 한군데도 뱀이 예수를 예표하는 성구는 없다.

은 히브리어로 '5175(스트롱번호) 나하쉬'라 하는데, 동사 '5172 나-하쉬 : 점치다'에서 유래한다.
동의어로는 '5173 나하쉬 : 점, 예지력'
'5174 네하쉬 : 놋쇠, 구리'
'5178 네호세트 : 청동, 놋쇠'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어 다니는 뱀의 히브리어 이름은 '텓트'이지만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하쉬
(뱀)은 예지력을 가진 자, 점쟁이로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구원 계획을 미리 수립하시고 각 날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정하셔서 그 과정을 학습하고 통과하게끔 하시고 일정한 날에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여서 종살이하면서 믿음으로 낮아지고 순종하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데까지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느후스단 우상 (열왕기하 18:1~4)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각 나라를 순방하며 국제 외교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중 하나라 일컫는 히스기야 임금은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우상 타파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일은 바로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산당(山堂)을 제거하고 각종 우상들을 깨뜨려 없애는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운 집들인데 이 산당이 이스라엘 전국에 산마다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신(男神)인 바알 신과 여신(女神)인 아세라를 비롯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느후스단’이라 불리던 특이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가 만든 놋뱀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원망을 했나 들어볼까요? 5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한 마디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런 황량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음식 싫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살려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던 것은 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냈냐”고 불만입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실 때는 환호하고 감격하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하찮은 음식”에 이제 질렸다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뭐가 없다, 뭐도 없다, 뭐가 불편하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와서 부족한 것만 보이고 불편한 것만 보이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 없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보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고 찬송은 잘 부르는데 정작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도우심은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뭐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건망증에 걸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 벌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불뱀은 한 번 물리면 몇 분 만에 즉사하는 맹독을 지닌 독사 종류입니다.
특히 사막에 사는 독사는 더 독합니다.
미국 사막지역에 사는 방울뱀은 물리면 수십 분 내에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맹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모든 백성들이 다 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뱀에 물린 자가 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바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그 놋뱀을 보는 자는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하고 교훈을 얻게 끝냈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놋뱀을 소중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놋뱀을 보관했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이 놋뱀이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보관되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놋뱀을 보관했을까요?

놋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이 놋뱀을 끝까지 보과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까닭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이 놋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 내가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달린 이 놋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구요.”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 놀라운 힘을 지닌 놋뱀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놋뱀을 아예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병이 들면 그 놋뱀 우상 앞에 가서 분향(향으로 제사 드림)하며 그 신기한 힘으로 고쳐달라고 빌었겠지요.

아무튼 히스기야 임금은 왕이 되자마다 이 놋뱀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다른 수많은 우상도 부수었는데 특히 이 놋뱀 우상을 부순 것을 본문이 기록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

첫째로, 히스기야가 이 놋뱀 우상을 부순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릅니다.

‘느후스단’은 히브리 말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 놋뱀 우상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마 ‘전지전능하신 뱀님’ 이런 식으로 불렀겠지요.
하지만 이 놋뱀을 부숴버린 후 히스기야는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짓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수어 버린 후에 이름을 짓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형산강 다리가 멀쩡하게 서있을 때는 이름도 안 붙이다가 다 철거해서 없어진 다음에야 이름을 ‘형산강 다리’ 하고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히스기야 임금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느후스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이름은 이 놋뱀이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돌조각, 나무 조각,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로, 나무로, 쇠로 만든 우상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거나 내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똑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갓바위 부처 앞에서 기도하면 대학입학 시켜준다고 열심히 비는 사람들, 그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엎드려 절하는 대웅전의 부처상은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와 영험한 나무는 바윗돌과 나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붙이고 몸속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은 붉은 글씨가 쓰인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생물인 나뭇조각, 돌덩이, 쇳조각이 내 소원을 들어주고 종잇조각이 나를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소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상은 돌덩이, 쇳조각, 나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우상은 나를 고쳐줄 수도, 나를 지켜줄 수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우상

둘째로, 느후스단은 본디 장대 위에 단 놋뱀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정말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바로 앞에 이 놋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인자(人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할지니,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숭배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놋뱀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 상징에 불과한 놋뱀을 숭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느후스단 우상은 오늘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우상을 뜻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그 상징을 숭배할 때 아주 위험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눈으로는 십자가를 보더라도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오직 거기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이 십자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가지고 다닙니다. 마치 영화에 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덤벼들 때 십자가로 물리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예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일 뿐 교회 자체가 결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고 내 교회만 옳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숭배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주인이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그 심부름꾼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목사님 보고 교회 다닙니다.” 이런 말이 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큰 함정입니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힘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느후스단이 자신이 아니라 그 느후스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고 하나님 받으실 경배를 대신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느후스단을 “교회 안의 우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되기 쉬운 것은 목회자나 어떤 사람(person), 재정이나 전통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표적의 우상

셋째로, 느후스단은 진정한 기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시험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봐라. 그러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러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내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곤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이란 영어로는 사인(sign)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적,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sign)을 구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인이 있어야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을 받아야 예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간증집회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처럼 죽을병이 고침 받거나 망해가는 사업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이적이나 기적도 체험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을 ‘표적(sign)의 우상’이라고 불러봅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다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은 지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만 사모한 나머지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이적이 반드시 일상적인 신앙생활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나는 이런 특별 은혜 받았다, 나는 이런 특별한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이때입니다. 

누구누구가 어떤 분에게 기도 받으러 다닌답니다. 어디 가면 신령한 분이 있답니다. 기도 받으러 가고 신령한 것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또 기도 받으면서 힘을 많이 얻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령한 것, 특별한 것 좋아하다가 기도해준다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기도 받으러 갈 때나 기도원이나 집회 갈 때 꼭 저에게 먼저 의논하라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과연 그 곳이, 그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위험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며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돼. 그게 뭐야? 시시하잖아? 나처럼 특별한 은혜 체험해야지” 하고 깔보듯이 이야기한다면 그 분은 이미 교만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은혜나 체험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할 때 특별히 허락하는 별식(別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어쩌다 한 번 별식으로 메추라기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것은 이 만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매일 별식으로 메추라기 달라고 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 보고 “너희는 어떻게 매일 그 지겨운 만나만 먹고 사냐?”고 깔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 교회와 내 지도자, 내 목회자를 허락하신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내 교회를, 또 내 지도자와 내 목회자를 우선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하신 것인데 별미만 좋아하며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나아가 기적이나 특별한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하나님이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인정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만한 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표적이나 이적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제로 표적이나 기적을 구하는 태도, 이런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이 기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적이나 이적에 매여 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후스단 우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용어가 몇 가지 있지요. ‘영적 건망증’이나 ‘배은망덕의 죄’, 또한 우상은 쇳조각, 돌덩이에 불과하지 결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 ‘교회 안의 우상’ 그리고 ‘표적의 우상, 기적의 우상’ 등 꽤 많습니다. 이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놋뱀이 느후스단 우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마치 열심 있는 신앙, 뜨거운 신앙처럼 위장하고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상임을 깨닫고 하루빨리 버리고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잘 믿는 줄 알고, 나는 아주 특별하게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만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한 우상의 무서운 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심 있는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지만 바르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올바른 신앙관 위에 건전하게 바르게 믿어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바르게 믿자!”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며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관 위에 바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우선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적십자나 병원이 떠오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고대 근동의 앗수르,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나무에 못박아 고정 시켜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며 심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을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3-5일간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매우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써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에게만 적용했던 사형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은 단순한 좀도둑들이 아니라 정치범이거나 반정부세력의 테러리스트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와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잔인하고, 끔직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참수를 당하시거나, 사도 도마처럼 창에 찔려 죽으시면 간단할 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3)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포함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 만큼’ 크고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보기 전에,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이 죽으시고, 대신 내가 살게 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는 Icon (아이콘) 또는 Symble (심볼) 로 불리는 여러가지 신앙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1. 익투스 (ἰχθύς)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익투스 (고대 그리스어 :  ἰχθύς 이크투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생각했으며 위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익트스가 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아식별의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활용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카타콤'에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 키로(XP) 십자가

 

그리스도(Χριστοσ) 라는 헬라어의 단어 첫번째와 두번째 알파벳

 

 

 

영어 스펠링 PX 를 겹합한 것 처럼 보이는 이 아이코은 그리스도 Χριστοσ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알파벳을 결합시켜 놓은 것 입니다.

X 를 헬라어로 [ㅎ키], P 를 [로ㅎ-] 로 부르기 때문에 키로 십자가 입니다.

 

이 아이콘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인 국교로 삼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것을 깃발로 삼아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문장입니다.

 

키노문자는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입니다.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가 아닙니다.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이 됩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티버강 너머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가지고 정복하라 In this si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호가 바로 키로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이 키로문자로 장식을 했고, 실제로 전투에서 정말로 승리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에서 기독교의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기에 키로문자는 이제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물고기와 키로문자는 서로 완전히 상반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숨어있는 기독교를, 후자는 제국을 점령한 기독교입니다.

 3. INRI

 

(라틴어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I.N.R.I.)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19:22]  

 

라틴어 성경 요한복음 Evangelium Secundum Ioannem 19:19~19:22

scripsit autem et titulum Pilatus et posuit super crucem erat autem scriptum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hunc ergo titulum multi legerunt Iudaeorum quia prope

civitatem erat locus ubi crucifixus est Iesus et erat scriptum hebraice graece et latine dicebant

ergo Pilato pontifices Iudaeorum noli scribere rex Iudaeorum sed quia ipse dixit rex sum

Iudaeorum respondit Pilatus quod scripsi scripsi

 

 

위 라틴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INRI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영어 / Jesus of Nazareth, King of the Jews)

 

  

 

 

 

 

 

    

4. IHS

 

고대 그리스어로 예수 'Ιησους' 의 첫번째, 두번째, 마지막 스펠링의 약자    

또는 라틴어라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HIS 는 예수(Jesus) 를 뜻하는 약어 입니다. 

희랍어는 'Ιησους'라고 표기하며 ...η (에타)는 라틴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로 'H' , σ(시그마) 는 대문자 'S' 가 되며, 양피지로 필사하던 시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단어들을 약자로 기록하던 시절의 유래입니다. 

그후, 라틴어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는데 옮겨쓰는 과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고도 추정되며 뜻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라틴어에서 I J는 종종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예수Iesus 를 지저스Jesus라고 부르게 되는 과정이 이 I와 J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IHS라는 글은 JHS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5. 알파와 오메가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표기]

 

그리스어 알파벳 기호 θ (세-타) theta; 를 하나님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헬라어 '테오스' (하나님 θεοs =Θεου) 의 머릿 글자와도 같으며 세계 각국의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   국 : 하나님

일   본 :    神

중   국 : 上   帝

미   국 : God

독   일 : Gott

터   키 : Tanrı

프랑스 : Dieu

그리스 : θεός

러시아 : бог

이태리 : Dio

스페인 : Dios

폴란드 : Bóg

아랍어 : الله

페르시아 : خداوند

포르투갈 : deus

우크라이나 : Бог

인도네시아 : Tuhan

 

6. 닭

 

 

마지막으로 소개할 기독교의 상징물은 ‘닭’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위한 상징물도 있지만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를 가진 상징물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닭’이라고 생각됩니다. 닭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상징 용어 설명

  • by 메리 페어차일드

그리스도인의 상징에 대한 예시 여행

의심의 여지없이, 라틴 십자가 - 소문자, t 자 모양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많은 다른 표식, 식별자, 구별되는 표식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 기독교 상징의 수집은 가장 쉽게 확인 된 기독교 상징의 그림과 묘사를 포함합니다.

크리스티앙 크로스

 셔터 잭 / 게티 이미지

라틴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 받고있는 상징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힌 구조의 형태 였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지만 라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져 네 개의 직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십자가의 로마 가톨릭 묘사는 십자가에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합니다. 이 형태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회는 부활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빈 십자가를 묘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의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식별합니다 (마태 복음 10 장 38 절, 마가 복음 8 장 34 절, 누가 복음 9 장 23 절).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내 추종자가되기를 원한다면, 네가 이기적 인 길에서 돌아 서서 네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 16:24, NIV )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Ichthys 기독교 기호는 용어 설명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이미지 © 수에 Chastain

예수 물고기 (Jesus Fish) 또는 이시스 (Ichthys)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밀의 상징이었습니다.

Ichthys 또는 물고기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확인하고 기독교에 그들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시스 (Ichthys)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물고기"또는 "예수 물고기"기호는 물고기의 윤곽을 따라가는 두 개의 교차 호로 구성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왼쪽으로 "수영"합니다). 그것은 신원을 밝히는 비밀의 상징으로 초기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 (Ichthus)라는 단어는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약어를 형성합니다.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흔히 물고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 났으므로 물고기를 상징으로 식별합니다. 그들은 성경 시대의 필수품이었고 물고기는 종종 복음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복음 14 장 17 절에 있는 두 개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 덩어리를 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 1:17 절에 "와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기독교 비둘기

기독교 기호 용어 해설을 설명합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 또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 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받을 때 비둘기처럼 예수님 께 내려 왔습니다.

...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육체적 인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요, 너와 함께하면 나는 기쁘다." (눅 3:22)

비둘기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8 장 홍수 후에 비둘기가 그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가진 노아 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과 인간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나타 냈습니다.

가시 왕관

 Dorling Kindersley / 게티 이미지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징 중 하나는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전에 입었던 가시관의 면류관입니다.

... 그리고 나서 가시관을 뒤틀어 머리에 씌워 라. 그들은 오른손에 스탭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우박, 유대인의 왕!" 그들은 말했다. (마태 복음 27:29)

성서에서 가시는 종종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은 적합합니다 - 예수 께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관은 기독교의 고난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 왕의 왕, 그리고 주님의 군주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관도 적합합니다.

트리니티 (Borromean Rings)

 Borromean Rings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삼위 일체 (Borromean Rings)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는 삼위 일체의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Borromean Rings은 신성한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연동 서클입니다.

" 삼위 일체 "라는 단어는 라틴어 명사 "trinitas"에서 유래했습니다. "trinitas"는 "three is one"을 의미합니다. 삼위 일체는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님 과 동등하고, 영원한 교제 속에 존재하는 세 분명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삼위 일체 개념을 표현합니다 : 마태 복음 3 : 16-17; 마태 복음 28:19; 요한 복음 14 : 16-17; 고후 13:14; 행 2 : 32-33; 요한 복음 10:30; 요한 17 : 11 & 21.

트리니티 (트리 케라)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트리니티 (Triquetra)를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Triquetra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3 부분으로 구성된 연상 기호입니다.

세계의 빛

 기독교 기호는 세계의 빛을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에 대한 언급이 너무 많으므로 양초, 불, 램프와 같은 빛의 표현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들은 메시지이며,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가볍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요일 1 : 5, NIV)

예수 께서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나를 따라 오는자는 결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나,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 8:12)

여호와는 나의 빛 이요 나의 구원 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할까? (시편 27 : 1)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타는 덤불모세 에게 불꽃의 기둥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불꽃은 예루살렘에있는 성전에서 항상 켜져 있어야했습니다. 사실 유대인 의 헌신 축제 또는 "빛의 축제"에서 우리는 마카비의 승리와 그레코 - 시리아의 포로 생활 속에서 신성 모독을당한 이후의 성전 재 헌법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은 단지 하루 동안 충분한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더 많은 정화 된 기름이 처리 될 수있을 때까지 8 일 동안 그의 존재의 영원한 불꽃을 기적적으로 일으켰습니다.

빛은 또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19 편 105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고 우리의 길에 비춰 진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2 장은 주님은 등불 이시며 어둠을 빛으로 변하게하십니다.

크리스티앙 스타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스타. 이미지 © 수에 Chastain

데이비드 스타는 두 개의 연동하는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여섯 개의 별 모양의 별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고 하나는 아래로 향하게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스라엘의 국기에 나타납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있는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스타와도 동일시합니다.

다섯개의 별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탄생 과 관련된 기독교의 상징이기도합니다. 마태 복음 2 장에서 동방 박사 (또는 현자)는 신생아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한 별을 따라 갔다. 거기에서 그 별은 베들레헴 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위치로 인도했습니다 . 그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절하고 경배하며 선물로 선물했습니다.

계시록 에서 예수님은 아침 별 (계 2:28, 요한 계시록 22:16)이라고 불립니다.

빵과 와인

 기독교 기호는 빵 & 와인 용어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빵과 포도주 (또는 포도)는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날마다 마나를 저장 하시거나 "하늘에서 나는 빵"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 복음 6 장 35 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나에게 오는자는 결코 주 리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빵은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 너에게 주어 졌음 이니라."(눅 22:19).

포도주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쏟아 부은 피의 하나님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 장 20 절에서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 이니 너희를 위하여 부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찬을 취합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자기 점검과 참여의 시간입니다.

무지개

 쥬타 쿠스 / 게티 이미지

그리스도교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대한 상징이며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놓아 노아 와 언약을 맺으셔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다시는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 셨습니다.

지평선 위로 높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무지개는 은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충실 함을 완전히 포용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부 소수 영혼들만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구원복음 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보도록 권유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 이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지 않으시 고 세상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3 : 16-17, NIV)

성경의 저자들은 무지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구름 속에있는 활 모양처럼, 모든 주위에 밝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나는 말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스겔 1 장 28 절, ESV)

계시록 에서 사도 요한하늘계신 하나님 보좌 주위에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즉시 나는 성령 안에 계셨고, 나 앞에 하늘에 앉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보좌가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재스퍼와 카네 리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를 닮은 무지개가 왕좌를 둘러 쌌다. (계시 4 : 2-3, NIV)

신자들이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신의 충실 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총, 그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보좌에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크리스천 서클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끝이없는 원이나 결혼 반지는 영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인 부부 의 경우, 결혼 반지 교환은 내재적 인 유대의 외적 표현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고 서로를 영원히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한 것입니다. 남편은 희생적인 사랑과 보호를받으며 목숨을 바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안전하고 소중한 포옹에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제출과 존중으로 응답합니다. 끝이없는 순환계에서 상징되는 결혼 관계 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든 영원을 위해 견디게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Agnus Dei)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미지 © 수에 Chastain

하나님의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주신 완전하고 죄가없는 희생 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압제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어린 양 같이 인도되었다. (사 53 : 7)

그 다음날 요한은 예수님 께서 자기에게 다가와서 "보라,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구나!"하고 외쳤다. (요한 1시 29 분, NIV)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 어린 양에게 달려있다." (계시 7:10, NIV)

성경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성경입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수첩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 그의 연애 편지 -는 성경의 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받은 것이며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정하고, 훈련하는 데 유용합니다 ... ( 디모데 둘째 3:16)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그 목적이 성취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복음 5:18, NLT )

십계명

기독교 기호는 10 가지 계명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계명 또는 율법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모세 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약의 법에서 발견 된 수백 가지 법칙을 요약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및 도덕적 생활을위한 행동의 기본 규칙을 제공합니다. 십계명이야기는 출 20 : 1-17과 신명기 5 : 6-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크라운

  기독교 상징 십자가 및 왕관 용어 설명.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자가와 왕관은 기독교 교회에서 친숙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지상에서의 삶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후에 받게 될 하늘 (크라운)에서 기다리고있는 보상을 나타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알파 그리고 오메가

 기독교 상징은 알파 & 오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알파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두 문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중 하나 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또는 상징을 이룹니다. 요한 계시록 1 장 8 절에 나오는 용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고 주 하느님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 시며 누구이며 앞으로 올 것인가?" 요한 계시록 에서 예수님에 대한이 이름이 두 번 더 나옵니다 .

"나는 끝났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야. 목이 말린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고 마실 것이다."(계 21 : 6 , NIV)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이다." (요한 계시록 22:13)

예수님에 의한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에있어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께서 창조 전에 존재 하셨고 모든 영원 토록 존재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상징 인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Chi Rho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치로 (Chi-Rho)는 그리스도를위한 가장 오래된 알려진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어떤 이들은이 상징을 "크리스 그램 (Christogram)"이라고 부르며 로마 황제 콘스탄틴 (Constantine) (AD 306-33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 스럽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기 전에 하늘에서이 상징을 보았고, 그는 "이 표식으로 정복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군대에 상징을 채택했다. Chi (x = ch)와 Rho (p = r)는 그리스어로 "Christ"또는 "Christos"의 처음 세 글자입니다. Chi-Rho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종종 원으로 둘러 쌉니다.

예수님의 모노그램 (Ihs)

Ihs  기독교 기호는 Ihs (예수의 모노그램)를 설명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Ihs는 1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그리스어 "Jesus"의 처음 세 글자 (iota = i + eta = h + sigma = s)에서 유래 된 약어입니다. 서기관은 문자 위에 줄을 쓰거나 줄을 써 약어를 나타냅니다.


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양의 문>(요 10:7), <세상의 빛>(요 8:12)과 <포도나무>(요 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막 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마13:44)나 <진주 장사꾼>(마14:45-46), <씨 뿌리는 농부>(마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막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창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민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출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계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 시간의 상징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레 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계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창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창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밤(요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  장소의 상징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행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시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마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 상징적인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목사(딛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 거룩한 용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마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막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시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시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잠30:5-6, 롬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시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삿6:12, 눅1:28) 등이다.

 

다섯째, 거룩한 행동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시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막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민6:22-26) 등이다.

 

여섯째,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마16:16, 요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시27:1, 요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행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렘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출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수7:10, 삼상9:26, 사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막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시95:6, 엡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사40:31, 행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눅1:28) 등이다.

 

여덟째,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마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마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루므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자료출처 : https://lutherfriend.tistory.com/6246 [lutherfriend.tistory.com]




סֵפֶר 스트롱번호5612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çêpher ]
어원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구약 성경
185회 사용



  • 관련 성경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 דָּבָר 스트롱번호1697
    1.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1442회 사용
    יוֹם 스트롱번호3117
    1.

    2.

    יוֹם: 낮에

    3.

    날마다

    발음 [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91회 사용



    4월 29일(화) 열왕기하 14-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대지략(14: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As for the other events of the reign of Jehoash, what he did and his achievements, including his war against Amaziah king of Judah,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el?

    역대지략이란 용어가 구약 성경에서만 35구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1구절, 열왕기하 22구절, 역대상 1구절, 느헤미야 1구절).

    역대지략이란 이스라엘의 여러 왕대(王代)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으로 성경에 포함된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기 저자에 의해 활용된 자료라고 합니다.

    역대지략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대기의 편찬자는 바로 이 문서를 이용하여 역대기를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역대지략에는 왕들의 남은 사적들을 기록한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하 15:6), 특정한 왕명(王名)이 들어간 다윗의 역대지략(대상 27:4) 등이 있습니다.

    역대지략은 과거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생명책" 또는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5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명책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입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계시록 3:5; 20:12과 4: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도 부릅니다(계 13:8; 21:27).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빌 4:3; 계 3:5).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계 3:5; 롬 8:37-39).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요 10:28-30).





    역대지략이란 무엇인가? (역대지략의 뜻과 의미)

    왕조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을 간략하게 적은 역사 기록
    이것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대기의 편찬자는 바로 이 문서를 이용하여 역대기를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29; 왕하 1:18), '다윗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그리고 '제사장 가계에 대한 역대지략'9느 12:23)을언급하고 있다

    1. 역대지략에 대해서

    역대지략이란 이스라엘의 여러 왕대(王代)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으로 성경에 포함된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기 저자에 의해 활용된 자료입니다.

    이것은 아마 왕국의 사관(史官)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왕상 14:19) 분실이 된 관계로 오늘날 전해져 오지 않고 있습니다.

    역대지략에는 왕들의 남은 사적들을 기록한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하 15:6), 특정한 왕명(王名)이 들어간 다윗의 역대지략(대상 27:4) 등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제사장의 가계(家系)와 명부(名付) 및 여러 가지 기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역대지략(느 12:23)도 있습니다.


    2. 밧세바에 대한 다윗의 맹세에 대해서

    다윗이 밧세바에게 했다는 맹세, 즉 솔로몬에게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맹세는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는 다윗이 실제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았음에도 나단이 다윗의 연로함과 기억이 희미한 것을 이용하여 계략을 꾸민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대상 22:9에 의하면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이미 있었음이 분명하고, 열왕기상 1:28-30에서 보듯이 다윗이 즉각적으로 수긍과 대응을 한 것을 보면 기억이 희미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비록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를 한 기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윗이 그런 맹세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따라서 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달리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는 위기 상황에서 다윗 왕으로 하여금 맹세를 재확인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밧세바에게 이같이 권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역대지략(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역대 왕들의 역사기록을 말한다(왕상 14:19, 29; 15:23; 대상 27:24; 느 12:23).
    이것은 지금의 ‘역대상·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분실된 문서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문서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왕하 1:18 등),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상 14:29; 왕하 8:23), ‘다윗 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제사장 가계에 대한 ‘역대지략’(느 12:23) 등이 언급되고 있다.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이라는 자료는 지금은 망실되었다고 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세페르 디브레 하야밈[날마다의 사건의 일]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역대지략(Book of Chronicles)은 문자적 의미는 '날마다의 사건의 일'로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 또다른 말로 '왕조의 역사기록'을 가리킨다.
    현재의 역대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는 분실된 문서로, 열왕기의 편찬자가 역대기의 편집에 쓴 문서이다.
    그 실물은 분실되고 남아있지 않지만 본래는 2종의 역대지략이 있었다.

    (1) 이스라엘왕의 역대지략

    ㆍ왕상 14:19,15:31,16:5,14,20, 27, 22:39

    ㆍ왕하 1:18,10:34,13:8,12,14:15, 28, 15:11, 15, 21, 26, 31

    (2) 남쪽 유대왕의 역대지략

    ㆍ왕상14:29,15:7,23,22:45

    ㆍ왕하 8:23,12:19,14:18,15:6, 36, 16:19, 20, 21:17, 25, 23:28, 24:5

    이들은 상세한 기록이었는데, 열왕기 편찬자는 그의 사관(史觀)에 따라 정리하여  이용했다.
    또한 특정 왕명이 들어간 '다윗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제사장 가계와 명부 및 여러가지 기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역대지략(느 12:23)'도언급되어있다.

    역대지략은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를가리킨다.
    현재의 역대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는 분실된 문서로 열왕기의 편찬자가 역대기 편집에 쓴 문서이다.
    그 실물은 분실디고 남아 있지 않지만 본래는 2종의 역대지략이 있었다.
    왕하 1:18, 10:34, 13:8, 12, 14:15, 28, 15:11, 15, 21, 26, 31.

    생명책


    1.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2.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4.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5.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6.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7.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8.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0:12(개역개정)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최후 심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첫째 부활을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주장한다(Mounce).
    3.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첫번째 책인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행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책들이 펴 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첫번째 책은 다니엘 7: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다니엘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의 책이라.
    -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출 32:32, 33; 단 12:1; 눅 10:20; 빌 4:3). 


    출애굽기 32:32-33 /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다니엘 12:1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누가복음 10:20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빌립보서 4:3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수 있는 책이다(3:5. 13:8. 21:27).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생명책이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0:15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명책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입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계시록 3:5, 20:12, 4: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도 부릅니다(계 13:8; 21:27).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빌 4:3; 계 3:5).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계 3:5; 롬 8:37-39).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요 10:28-30).

    요한계시록 20:11-15에 묘사된 백 보좌 심판은 불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계 20:12-14).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심판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3:5를 어떤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증거"라고 말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5의 약속은 주님께서 그 이름을 지우지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기는 자는. .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악을 이긴 사람으로 구속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부분에서 때로 혼돈을 일으키는 구절은 시편 69:28입니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천국의 영생이 아니라 이 땅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 말하는 “책”도 다윗이 언급한 책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이름을 책에 영원히 기록하셨습니다.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떻게 다른가요?

    신약 성경에는 '생명책'에 대한 8개의 구절이 있고(시 69:28, 빌 4:3, 계 13:5. 8. 17:8. 20:12. 15. 21:17).
    2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책을 언급합니다(계 13:8, 21:27).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일컬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빌립보서 4:3).
    여기서 다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 3:5도 주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적 삶의 시험을 이겨낸 사람들이며, 구원의 진실성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면, 예수님이 결코 그 이름을 지우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영원한 보장에 대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시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요한계시록 20:15은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 즉 영원한 불못에 대해서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3:8과 21:27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당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들이며 (요한계시록 21:10),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될 자들입니다.
    생명책이 어린 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므로,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월 28일(월) 열왕기하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수리하라(12:5)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 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Let every priest receive the money from one of the treasurers, and let it be used to repair whatever damage is found in the temple.

    전을 수리하라(repair the temple)

    요아스(Joash)는 일곱 살에 남 유다 왕국 제8대 왕이 되어 40년을 치리하였으며 그의 중요한 업적은 성전을 수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아스는 남왕국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왕의 혈족들을 전멸시키려 할 때 요아스의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서 6년 동안 성전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남국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B.C.837-80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왕의 계통을 전멸할때 어린 요아스는 고모 여호세바에게 구원을 받아 6년간 성전에서 숨어 자랐다(대하 22:11).
    그 후 왕이 되자 아달랴와 바알의 제사장 맛단은 죽임을 당하였다.
    바알의 산전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성전이 수축되었다.
    그러나 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 타락하여 진언하는 스가랴(여호야다의 아들)를 성전에서 돌로 쳐 죽였다(대하 24:20-22).

    열왕기하 12장은 대체로 요아스의 왕권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왕권 강화라는 주제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지만, 변질되는 신앙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변화는 좋은 것이지만, 변질은 역시 나쁜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아스의 지시대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수리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갑니다.
    우선 성전 수입에 관한 규칙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문 앞에 궤(헌금함)를 놓고 먼저 채워지는 것을 계산하여 밀봉하고 성전 맡은자의 손에 넘겨 성전 수리하는 사람과 재료를 위해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재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춰놓는다고 해도 쓰는 사람이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15절에는 다소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여러 규칙을 통해 제사장들이 성전 수입에 손을 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뜻 밖에도 은을 일꾼에게 주는 사람과 회계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성전을 수리하는데 일꾼들에게 정확한 돈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듯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꾼들은 자신들이 받을 사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고, 일꾼에게 사례하는 쪽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꾼을 섬기는 것에 노력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성령을 통해 초대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데 어색함이 없었습니다.
    "주고 받는" 사탄의 법칙이 아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예로 들어볼까요?
    사역지가 없으면 "사역지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역지가 생기면 "사례비 없어도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죠. 취직만 해도 좋겠다고 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첫 본전 생각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각의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헌신한 것에 대해서는 빨리 잊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길게 기억하세요.
    그래야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헌신한 것을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헌신을 잊게 되면 섭섭한 '감정'이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요아스의 종교 개혁에 협조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권을 다 내려 놓고 자신의 삶 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 권력, 이성 문제에 대해 초월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사장들(그리고 레위인들)은 오랜 시간 요아스의 개혁을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수입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위치가 '부'를 축적하는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아스의 개혁에 (싫든 좋든) 협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선을 다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찾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헌신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서 제사장들과 같이 새로운 개혁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아스의 유다 통치

    남왕국 유다의 제8대 왕으로서 통치한 요아스의 영성에 대한 평가와 그의 치세하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종교적 사역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요아스의 의로운 통치력을 나타내지만, 후에 언급된 그의 정치적 사업은 불신앙적 범죄로서 악정을 행했다.
    본장의 내용은 요아스의 선정과(1-3절),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4-8절), 그리고 수리되는 성전(9-16절) 및 아람 왕 하사엘의 침입과 요아스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다(17-21절).
    요아스 왕은 처음엔 성전 수리를 제사장들의 소관 사항으로 그들에게 맡겼는데, 후에는 왕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전개시켰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요아스는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달랴의 손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고, 또한 감격스런 즉위식을 치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아달랴로부터 왕권을 빼앗아 즉위한 요아스는 흐트러져 있는 유다를 다스려 재정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 이후 근 100년 기간 동안 유다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요아스의 40년 통치

    요아스는 역대 유다의 왕들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7세에 즉위하여 40년 간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모부이자 은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생존한 기간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올바로 행동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경우에도, 이들은 바알의 제단을 훼파했으나 여호와가 금지한 산당에서 제사하는 행위는 계속 행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왕들처럼 요아스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율법에서 금한 죄악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a. 계속되는 백성들의 죄악(왕하 14:4)
    b. 여호와께 대한 일시적인 순종(수 24:31)

    2. 요아스의 성전 수리 명령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아달랴가 통치하던 6년 동안 성전이 많이 파손되고 손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아스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이 성전에 헌금으로 바치는 각종 은을 모아 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계획을 제사장들에게 알리고, 헌금된 은으로 성전 수리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a. 여호와의 전에 드린 헌금(왕하 22:4)
    b. 자원함으로 드리는 헌물(출 35:5)

    3. 요아스와 제사장들의 합의

    성전 수리에 대한 왕의 명령은 그가 통치한 지 23년이 되기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을 불러모아 성전 수리 작업에 진전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새로운 계획을 제사장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즉 백성들이 직접 성전 수리 헌금을 내되 이를 제사장들이 관여하지 못하고, 또한 성전 수리 책임도 제사장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성전 수리 실무자들이 담당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아스의 제의에 제사장들은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a. 성전 수리에 게으른 백성들(학 1:2)
    b. 전을 건축하라(학 1:8)

    4. 요아스의 성전 수리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명령대로 구멍 뚫린 큰 나무 궤짝을 성전 문 옆에 두었습니다.
    백성들이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으로 은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들은 이 은을 궤짝 구멍에 넣었습니다.
    그 궤짝이 다 채워지면 왕의 비서와 대제사장이 이 은을 계수한 후 성전 수리의 감독자에게 그 은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감독자는 성전 수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 미장이, 그리고 석수들에게 정직하게 인건비를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성전 수리를 위해 필요한 각종 재료들을 샀던 것입니다.

    a. 연보궤(막 12:41)
    b. 성전의 수리(왕하 22:5-6)

    정직하게 쓰여진 헌금들

    백성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바쳤습니다.
    이러한 헌금이야말로 거룩한 재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헌금이 거룩하고 정당하게 쓰여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전 수리 감독자들은 모든 일들을 신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어떠한 부정 축재도 하지 않고 정당하게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일꾼들에게 지불하였던 것입니다.
    자연히 일꾼들도 열과 성을 다하여 성전 수리에 힘을 썼고 성전은 하루가 다르게 복원되어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부지중에 범한 죄와 이웃에 대한 과실을 사함받기 위해서 드린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성전 수리하는 것에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물들은 제사장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제사장들에게 돌리도록 조치하였습니다.

    a. 헌금으로 만든 성전의 그릇(대하 24:14)
    b. 여호와의 성물(레 15:15-16)

    5. 요아스의 죽음

    1)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친 요아스
    아람의 하사엘 왕은 나신의 세력을 극대화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여세로 유다의 해안을 따라 침공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도시 중에 하나인 가드도 공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이 같은 하사엘의 침략은 이제 유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사엘은 유다를 공략하기 위한 전위대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요아스는 하사엘의 환심을 사서 위험을 모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보물들을 하사엘에게 조공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왕실 내의 보물들과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금들, 그리고 선조들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쳤던 모든 신성한 성물들을 하사엘에게 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사엘은 자신의 군대를 철수하였습니다. 결국 요아스 왕은 왕궁 내의 모든 보물들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 꼴이 되었습니다. 이는 요아스가 점차적으로 여호와를 떠난 결과로 나라가 약해졌으며, 이 같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a. 아람 왕 하사엘(왕하8:12)
    b. 앗수르에 바친 조공(왕하17:3)

    2) 요아스의 죽음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친 요아스의 행적은 백성들에게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또한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쳐죽인 행위는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요아스에 대한 적대감이 날이 갈수록 팽배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아스는 실라라는 지역으로 가던 중 밀로 궁에서 자신의 신복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였습니다. 요아스를 암살한 장본인은 바로 요사갈과 여호사바드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요아스를 암살했는지 분명히는 모르지만 스가랴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 내지는 왕의 잘못된 통치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다윗 성에 장사되었고 유다의 왕위는 요아스의 아들인 아마샤가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a. 암살되는 요아스(대하24:25)
    b. 밀로 궁(삼하5:9)

    결론
    요아스 왕의 통치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힘입어 성전을 수리하는 등 의욕적인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의 죽음과 함께 요아스의 신앙도 곤두박질하였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을 멀리하며 선지자 스가랴를 살해하는 등의 악행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요아스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하사엘에게 조공도 바치고 끝내는 신복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단어해설

    1절. 예후의 칠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한 예후의 7년.

    3절. 산당. 이방인들이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기던 장소. 보통 산이나 구릉의 정상에 있었으며 그곳에 높은 단을 쌓아 제사를 드렸음.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방의 우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음.

    4절.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일종의 종교세로 정규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임.

    5절. 아는 자. 성전에서 헌금을 계산하고 관리하는 담당 회계사.

    6절. 퇴락한. 원어 <qd<B,:베데크>는 건물의 '갈라진 틈'을 가리키는 말로 예루살렘 성전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을 나타냄.

    8절. 응락하니라. '오다, 나타내다, 동의하다'를 뜻. 입술로만 승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으로 동의하는 것.

    10절. 계수하여. 원래는 '담다'라는 뜻. 고대에서는 화폐를 개수로 세지 않고 무게를 달아서 계산하였음. 봉하고. 원어 <rWx:추르>는 '속박하다, 포위하다, 동여매다'라는 뜻. 본문에서는 자루에 넣어 묶는 것을 의미.

    15절. 회계하지. 숫자를 나열하거나 계산함.

    16절. 속건제의 은. 성전에 바치는 헌금의 일종.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돈.

    17절. 아람. 셈의 다섯 번째 아들인 아람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음.

    18절. 구별하여. 원어 <카다쉬>는 '성결하다, 거룩하게 봉헌하다'를 의미.

    20절. 밀로.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성으로 요새로 쓰였음.

    신학주제

    성전 수리 사역 / 본문에는 요아스가 행한 종교 사역 중에 가장 큰 사역인 성전 수리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즉위 후에 첫 사역으로 아달랴의 통치로 인해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전 수축을 명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1차 수축의 실패와 그 대책, 그리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완결되는 2차 수축의 전모를 기록함으로써 제사장들의 사명감 결여가 그 원인이었다는 암시적인 표현과 함께, 성전 수축이 왕의 지휘와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왕의 사역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성전 수리 사역이 왕과 백성들의 협력으로 성취되었다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영적교훈 /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그 외형상에 있어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같이 보였으나, 솔로몬 사후 예배에 대한 생각과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문제는 점차 약화되어 성전이 없던 사사 시대에 성행하였던 산당 예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호람 왕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바알 숭배까지 허용했기에 그 심각성은 더욱 깊어 갔다.
    이러한 때 일어난 요아스의 성전 회복 운동은 바알 숭배로 말미암아 멀어져 있던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 여호와의 전으로 돌이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성도들도 각자의 삶 속에서 요아스와 같은 신앙 회복 운동을 꾸준히 일으켜야 될 것이다.

    요아스의 성전 수리(열왕기하 12:1~8)

    7세에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자신을 교훈하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으나, 산당은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백성들로부터 직접 예물을 받아 성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제사장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백성들이 직접 성전을 수리하는 자들에게 드리게 합니다. 

    1. 성전을 수리하는 요아스(1~5절)

    예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에 요아스가 (남왕국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40년을 다스렸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없애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바치는 모든 은, 곧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개인이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수리하라”하고 말했습니다.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
    직역하면 ‘각 사람이 지나갈 때 내는 돈’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세금 같은 돈을 뜻합니다.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반 세겔을 냅니다(출 30:11~16).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칩니다(레위기 27장).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
    각자 자원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예물입니다.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아들여(5절) :
    위의 세 가지 헌금을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직접 거둬들이라는 것

    제사장을 책망하는 요아스(6~8절)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 않았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을 수리는 데를 위하여 직접 드리게 하라.”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돈을 직접 받지도 않고, 또 성전 수리하는 일을 맡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 = 성전 + 장막(고전 3:16-17. 고후 5:1-5)

    I.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교우들 가운데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 차례의 수술 때문에 얼굴도 야위고 몸도 야윈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창세기 2: 7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 중에 하나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 19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봅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병마로 온몸이 일그러진 분들이나 숨을 거둔 분들의 시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육신(SOMA)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육신은 무조건 악하고 영혼은 무조건 선하다는 영육 이원론(DUALISM)을 배격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를 가장 큰 위기에 몰아넣었던 이단 종파도 이와 같은 이원론에 빠졌던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었습니다.
    이들은 물질로 만들어진 육체는 악하고 오직 영혼만 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론(INCARNATION)을 거부해버렸습니다.

    영지주의와 달리 우리 기독교는 육체를 긍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우리와 똑같이 썩어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체가 겪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남김없이 당하셨다고 믿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 인간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린도 후서에 가서 바울은 인간의 몸을 장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전'과 '장막,' 이 두 가지 비유(METAPHOR)야말로 우리 몸의 속성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II.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비유했을까요?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몸을 온갖 더러운 쾌락에 내맡긴 채 그릇되게 사용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서 아주 부유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대개 항구 도시가 그렇듯이 고린도는 온 세상이 알아주는 향락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희랍어 'CORINTHIAZOMA'라는 말은 '고린도인처럼 행하다'는 뜻인데 '매춘 행위를 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음란 행위가 일반화된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음행에 젖어 몸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여러분, 성전의 제일가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시는 것 아닙니까?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곳이 성전이 아닙니까?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을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주인을 모시고 사는가에 따라 그 주인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존귀하신 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존귀한 몸이 됩니다. 세상의 정욕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추한 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전이 성령의 전이듯이 여러분들의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십시오! 거룩한 영을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몸이 되게 하십시오!

    ②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각종 예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가 성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 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전임을 잊지 마십시오!

    ③ 성전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성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무리 인간이 공을 드리고 고생을 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할지라도 성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 몸의 주인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제것인양 함부로 자기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군인이 훈련에 빠지기 위하여 잔꾀를 부렸습니다.
    자신의 새끼발가락에 자해를 입혀서 고장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이 병사의 잘못을 알아낸 상관이 영창에 보냈는데 그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국가 기물 훼손죄'였습니다.
    군인은 몸 전체가 국가를 위해 바쳐진 몸인데 그 몸을 훼손했으니 국가 기물을 자기 맘대로 파손했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듯이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사셨습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의 몸을 엄청난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멋대로 하나님의 소유물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과 같은 나쁜 것으로 우리 몸을 축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행이나 노름이나 오락에 빠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늘 건강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게 가꾸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롬 6: 12-13에서 주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옳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매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인데 병에 걸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왜 툭하면 질그릇처럼 깨질까요? 왜 늙어서 쇠약해지고 결국은 싸늘한 시신이 될까요? 바울 선생에 따르면 그 이유가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즉 장막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III. 우리의 몸은 장막이다

    바울은 고후 5:1-5에서 부활 후에 우리가 영체(SPIRITUAL BODY)로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신비하고도 신령한 몸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위에서의 우리의 몸을 '장막,' 즉 '텐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세 가지 장막의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라 임시용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아 이곳 저곳 장막을 치며 떠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과 달리 장막은 언제나 일시적이었습니다. 한 곳에 장막을 쳐 놓고 일평생 그곳에 몸담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었습니다. 임시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몸이 장막이라는 것도 우리의 몸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유한합니다. 일시적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늙고 일그러져 보기 싫을 날이 오고 쇠약해질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산이나 사막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사람의 해골을 옆에 놓고 그 해골을 쳐다보면서 자주 관상(觀想)에 빠졌다고 합니다. 인생무상을 깊이 체감하기 위해서였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장막처럼 일시적입니다. 영구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잠깐 보이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약 4: 14). 풀의 꽃과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② 장막은 연약하다.

    그 옛날 바울이 살았을 때의 장막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리 튼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추위가 장막 안에까지 미쳐서 사람들이 덜덜 떨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장막처럼 기후와 지형 조건에 'VULNERABLE,'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에 왜 병마가 찾아오고 노쇠가 찾아오고 죽음이 찾아옵니까?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장막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 몸을 성전처럼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인 이상 온전할 수 가없습니다.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또한 인정하십시오!

    ③ 장막은 언젠가 거두어서 무너질 날이 온다.

    장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목적이 있어서 장막을 세웠다면 그 목적이 다 끝난 다음에는 반드시 해체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장막이 아닙니까?
    한국에서 운동회를 하거나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꼭 큰 텐트를 여러 개 쳤습니다.
    그러다가 행사가 다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갈 때가 되면 그 많은 텐트를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고 하는 사실도 꼭 이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인 우리의 몸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일이 다 끝날 경우 우리의 몸은 거두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땅에 있는 장막집, 곧 우리의 육체가 해체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하늘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훨씬 더 좋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 즉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바꾸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으로 변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맺음말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선물이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을 더러운 것으로 채우는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학대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잘 관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십시오! 성전을 성전답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몸을 성전처럼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과도 같이 무너질 날이 올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장막처럼 영구하지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모든 목적이 다 달성될 경우 반드시 해체할 날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신령한 집으로 다시 세워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 16: 52-53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오늘 우리 몸에 찾아오는 가지가지의 고통을 잘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도의 몸(에베소서 4:1-16)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있다. 영혼 없는 몸은 짐승과 같고 몸 없는 영혼은 귀신과 같다. 영혼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몸도 같이 귀중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하려 십자가를 지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실 때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사람의 몸은 약 71%가 물이고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나트륨, 04%의 염소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도 모든 원소, 마그네슘, 아연, 망간, 구리 등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 이렇게 단순한 물질의 집합처럼 보이는 몸이지만 정교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많은 일을 한다. 몸이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들이 각자의 몫을 해주어야 한다. 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몸의 건강이라고 한다. 몸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몸의 정체는 무엇인가? 곧 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냥 몸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몸의 즐거움이 목표인가? 그래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몸의 목표인가? 오늘은 그것을 보려고 한다. 특히 성도의 몸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를 보려고 한다.

    1. 성도의 몸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바로를 위한 것이다. 바로는 그들에게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도록 했고 이스라엘은 싫어도 해야 했다. 그 몸이 바로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모세가 나타나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 시내산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제부터 그 몸은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오셨다.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 우리의 몸은 사탄의 몸이 되었다. 사탄이 시키는 대로 그 몸을 사용하였다. 몸은 사욕과 음란과 악의 도구가 되었다. 그 몸은 죄악의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은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샀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들의 몸은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달라진다.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된다. 만약 그 몸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게게 준다면 이를 간음이라고 한다. 그 몸은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몸은 예수님의 몸이고 하나님의 몸이다.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고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배우자의 부정이다. 이스라엘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면 오직 그 몸을 하나님에게만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몸을 바알이나 아스다롯 우상에게 보였다. 간음을 저지른 것이다. 결혼을 안 했으면 모르되 결혼은 약속이요 구속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몸의 소유자이다. 그 몸으로 다른 신에게 절할 수 없다. 왜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면 안되나? 왜 불당에서 내 몸을 굽히면 안되나? 우리가 절에 가서 구경을 하고 불상을 보는 것은 관계없다. 나도 불교국가에 가서 절을 보고 불상을 본다. 그러나 몸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것이 절에 갔으면 예의라고? 아니다. 결혼한 여자가 남의 집에 방문했다고 그 집 남자에게 내 몸을 주는 것이 예의인가? 아니다. 내 몸은 하나님께만 굽혀야 한다. 아람 나라에 나아만 장군은 나병환자였다. 이스라엘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나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하였다. 몸을 담그라는 것이다. 나아만은 나았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그가 가지고 온 예물을 드리려고 하니 엘리사가 받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아만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주시면 고국에 돌아가 제단을 쌓고 거기에다 번제나 다른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자 엘리사는 허락한다. 그런데 다만 한가지만 용서를 구했다.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갈 때 내 손을 의지하고 들어가 신당에서 몸을 굽히는데 그러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내 몸도 굽히게 되는데 그것을 용서해 달라고 한다. 지금 그는 자신의 의사로 굽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하기에 옆에서 도와 주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허락했다. 나아만이 지금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내 몸은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니 그 분에게만 내 몸을 굽혀야 한다는 얘기다. 어찌 하찮은 돌이나 나무나 우상이나 돼지머리에 몸을 굽힐 수 있는가? 우리가 일제36년의 치욕적인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 치욕의 역사 속에서 교회도 치욕의 역사가 있었다. 한국교회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평양 대 부흥을 통해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기독교 인구가 3.5배 정도 증가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국 교회의 부흥이 시작되었던 평양이 현재는 가장 심각한 기독교 박해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해방 후 3차에 걸쳐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고 이후 사분오열을 거듭하여 지금은 수 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그 근본원인에 신사참배가 있다. 신사참배는 일제강점기에 신도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에게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했으며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히 굴복하기 시작해 천주교,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모든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 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지금 내 몸을 누구에게 굽히라고 하고 있는가? 내 몸은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된다. 아내든 남편이든 자신의 몸은 배우자 외에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 마귀가 예수님께 와서 ‘네가 내게 몸을 굽히면 이세상을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였다. 왜? 내 몸은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에서도 우리가 그 때 잘못 결의한 것을 회개하자는 헌의안이 들어와 있다. 잘못된 것은 용서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만큼 그 영혼과 몸을 귀하게 하셨다. ‘너는 내 것이라’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몸이 됨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

    2. 성도의 몸은 형제의 것이다.

    요1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셨고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많은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 고 하였다. 원수라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 형제니까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인은 형제 아벨을 살해하였다. 최초의 살인이고 그것도 형제살인이다. 형제는 피로써 맺어진 형제가 있고 믿음으로 맺어진 형제가 있다. 우리는 피가 아닌 믿음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돈은 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믿음은 돈보다 진하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을 무척 원하였다고 하였다. 최후의 식사였다. 최후의 식사치고는 빈곤했다. 빵과 포도주가 다였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잔도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 대부분은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떡과 잔을 가지고 나누어 준다. 그런데 최초의 성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 양편에 제자들이 각기 여섯씩 나누어 앉았다. 다빈치 그림에는 그렇게 그려 있다. 설사 그렇게 앉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예수님께서 빵을 주셨다. 베드로에게 이만큼, 요한에게도 요만큼, 야고보에게도 요만큼 주셨을까? 포도주도 각각의 잔에 이 만큼씩 각각 따로 나누어 주셨을까? 아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이것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고 하셨다. 예수님이 일일이 나누어 주시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빵을 둘로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다. 내 앞에 빵이 왔다. 내 앞에 포도주가 왔다. 얼마를 떼어야 할까? ‘지금 나는 배가 고파. 누가 배가 고프던 말든 우선은 내가 먼저 받았으니 기회야 이왕 뗄 것 왕창 떼어야지’그렇게 생각하면 맨 나중에 ‘주여, 내 빵은 어디 있나이까?’ ‘주여, 내 포도주는 어디 있나이까?’하고 물을 것이다.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신대원 전체가 운동장에 모여 성찬식을 한 적이 있었다. 한 400명 정도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멘트 바닥에 다 앉았다. 그 때는 빵이 아니라 떡을 주었다. 큼지막한 것을 주면 앞에서 떼고 다음으로 넘기면 다음 사람이 떼고 하였다. 그러면 맨 마지막 사람이 뗄 때는 엄청 손때가 묻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위생관념 없이 먹었다. 그런데 포도주가 문제였다. 포도주도 조그만 잔이 아니라 대접에다 부어 앞 사람이 마시고 뒤로 돌리면 뒷사람이 마시고 또 뒷사람한테 돌렸다. 그러면 마지막 사람은 얼마나 입을 많이 된 대접으로 마셨을까? 지금 생각하니 위생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떡은 괜찮은데 포도주를 돌릴 때 우리는 성찬식이니 조금씩 마시고 뒷사람도 생각해야 한다. 신학생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목사도 그렇다. 그런데 포도주가 오니 조금씩 마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벌컥 마셨다. 그러니 얼마 못 가 포도주가 떨어졌다. 내 포도주는요? 중간에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져 성찬식 중간에 포도주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던 적이 있다. 마지막 만찬은 무엇인가? 떡을 주고 잔을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가족의 탄생이요 형제의 탄생이다. 너희는 형제요 너희는 가족이다. 너희끼리 나누라는 뜻이 그런 뜻이다. 내 몸은 성도의 것이다. 형제가 그런 것이다. 유대교의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그것이 양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좋은 대답이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두 번째 제자가 말했다.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올리브나무인지 무화과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아니다. 정확한 대답이 아니다."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랍비님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의 눈을 보고 그가 형제인지 자매인지 알아볼 수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아침이 되는 때이니라. 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아직도 밤이니라." 사람의 눈 속에서 원수의 증오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 됨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상대방과 내가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의 절망이 나의 절망이 된다. 그런데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때, 그에게 치유가 시작된다. 그의 절망이 나의 절망이 될 때, 그에게는 희망이 싹튼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입으시고, 지리적인 한계에도 함께 갇히셨고, 인종적 편견의 고통을 받으셨고, 종교의 억압과 정치의 잔혹함을 함께 겪으셨다. 인간의 죄악의 고통을 함께 당하시고, 인간의 병의 고통에 함께 우셨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만지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신 것이다. 내가 형제로서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몸은 형제의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성도의 몸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세상에 속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불타는 연기 속에서, 넘치는 홍수 속에서 건져 내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다시 불구덩이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우리는 그 세상에서 건짐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건진 이유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럼 우리는 또 세상에서 빠져 버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를 다시 세상에 보내신 것은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 아직 불구덩이와 물 속에 있는 자들을 건지려 함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면서‘두려워 말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게 할 것이요 불 가운데 지날 때에 불이 너희를 사르지 못하게 하리라’ 하였고 ‘내가 세상을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내는 양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나왔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세상에 유행 따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려 가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교회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과 떨어져 살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가? 마귀는 세상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였다. 그 말씀은 세상은 더 이상 마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내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접수하신 것이다.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마귀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졌고 새로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쓰여져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였다. 그 땅에는 이미 이방의 7부족의 족속들이 그 나름대로 문화와 종교와 경비를 하고 저마다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임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도 아니었다. 그런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였다. 여호수아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 하라 하였고 이 땅과 백성을 다 너희 손에 붙였다고 하였다. 그 세상은 이스라엘의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마귀의 것이 아니다. 가나안 부족들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선포하였듯이 오늘도 마귀가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귀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으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다. 세상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의 몸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접수하려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을 최우선으로 삼으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최우선 하라.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신다. 내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는 벌써 세상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 하였다. 어떤 지도자가 젊은이를 위한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 중의 한 총명한 젊은이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기독교적인 일들에 대해 반대하는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우호적으로 웃는 얼굴이었으며 독선적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해냈다. 그가 학생 회장직의 입후보자가 되었을 때 그는 교내에서 춤을 추는 것을 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주머니에 매일의 성경 말씀을 넣고 다니면서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이 그가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어떤 학생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학생 회장으로 당선이 되었다. 한 학기의 임기를 마쳤을 때 학생들은 그가 재선에 입후보하기를 원했다. 그는 그 지역 사회에서 젊은이들의 방종을 배격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시 당국으로부터 특별한 상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태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세울 만한 용기가 없었던 다른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히 강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모을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쓴 그였기에, 그는 우정과 존경을 그리고 대중의 변덕스런 마음에 기초된 것이 아닌 그의 장점에 근거를 둔 인기로 보상을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17)

    구약 시대에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법궤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하셨기에 그곳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께서 입주해 계신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주인으로 와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입주를 하면 그때부터 내가 그 아파트의 주인으로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입주하시면 그분 뜻대로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귀신이 내 마음에 입주하면 귀신이 시키는 언어와 행동이 있듯이 성령께서 입주하셔서 자리를 잡으면 성령께서 시키는 언어와 행동이 있습니다.

    고전12:3절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도록 만듭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임하시면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고백이 신앙을 좌우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⑵주의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4: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과 같다고 합니다. 질그릇은 ⑴볼품이 없습니다. ⑵깨어지기 쉽습니다. ⑶우리 인생을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질그릇 속에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보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하나는 '진리의 복음'입니다.
    ▶고후6:9절 이하를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 자"라고 했습니다.
    ▶고후4:10절에 이 보배를 전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복음전파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세상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임을 깨닫고 우리 몸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1. 우리 몸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맘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인을 위해 주인이 원하는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는 자체도 문제고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입니다.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아무렇게나 살다보면 죄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가 우리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치명타를 가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우리 몸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죄가 멀어질까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2. 내 몸을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영혼의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몸이 늘 건강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잘 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을 해하는 도구로는, ▶몸의 과로는 성전을 더럽히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일 중에 하루를 쉬어야만 살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주의 영이 성전 삼고 계신 내 몸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3. 남의 몸도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전이면 다른 사람도 성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학대해서도 아니 되고 ▶미워해서도 아니 되며 ▶살인은 제일 큰 죄악입니다.

    4. 어떻게 하면 성령을 내 안에 영원히 모실 수 있습니까?

    ▶순결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나의 마음에 모시기는 했으나 내 마음 한 구석에 죄가 있다면 성령은 근심하고 괴로워하시다가 떠나가고 맙니다.
    ▶화목해야 합니다. 성령은 화목의 영입니다. 부모님을 주안에서 평안히 모시는 가정,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가정은 화목한 가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화목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임을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5. 성령께서 오신 목적은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19, 21, 26)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평강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고후5:20), 형제와도 화목해야 합니다. 평강이란 화목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나?

    뿔이라는 뜻을 가진 고린도.

    “스파르타커스”의 본고장 또한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고린도와 이웃한 도시국가, “스파르타(Sparta)”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인구3만 명의 작은 시골이지만, 고대 고린도를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로 만든 참주(僭主) 페리안더(Periander)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업이 번성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도시로 번영하다 보니 여러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 문화의 생활 습성과 또 여러 신들을 믿던 그네들의 종교가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던, 인구 60만명의 큰 도시가 되였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 후서”를 써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던 로마 시대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가 다 그랬듯이 고린도 역시 심한 빈부의 차이와 부유층의 퇴폐적인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 되었지요.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영어로는 Venus)”라는 여사제가 있어, 600피트나 되는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 부르는 산상에 신전을 지어 놓고는 무려 1,000명이나 되는 무녀들을 거느리며 고린도를 찾아온 뱃사람들을, 또 신들을 숭배한다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불러 드려 온갖 음탕한 짓들을 다 자행하였기에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음탕한 풍습에 젖게 되어 “고린도 사람”은 “음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로 가자!”하는 말은 남자들 사이에서 “몸 풀러 가자!”라는 말의 은어처럼 사용되였었다고 합니다.  (전 호의 답이 되었나요? ㅎㅎㅎ)

    시시포스(Sisyphus)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에 전해오는 재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신이 신과 결혼을 하면 신을 낳고, 신이 인간과 결혼을 하면 영웅을 낳고, 신이 동물과 결혼을 하면 괴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도 많았고, 켄타우로스 (Kentauros)처럼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괴물도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는 시시포스(Sisyphus)가 바위를 굴려 올려야만 하는 산이 바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고대 코린토스 왕국에서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었던 시시포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 사람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입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뜩잖은 인간으로, 일찍이 신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 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 형인 아폴론의 소 떼를 훔쳤습니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운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하였답니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시포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라고 일러바쳤던 것이지요.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시포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 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감히 신들의 일에 오지랖 넓게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시포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의 신 아소포스는 딸을 찾아 사방을 헤매다가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시포스가 다스리던 고린도에는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에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어 주면 딸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자, 딸을 찾는 게 급했던 아소포스는 시시포스의 청을 들어주었고, 시시포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려던 찰나,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타 죽었다지요.

    자신의 떳떳지 않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러바친 자가 다름 아닌 시시포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 신 하데스에게 당장 그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영웅이자 현명한 시시포스는 저승사자가 당도하자 되레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습니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 신 아레스를 보내 저승사자를 구출하게 하였습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싸우다가는 온 고린도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시포스는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서 시시포스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부탁한 후, 저승에 당도한 시시포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척했습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 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 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어째 “별주부전(鼈主簿傳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시시포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 왕 노릇하며 오래 동안 잘 살았는데···. 그러나 아무리 영웅이라 한들 어찌 죽음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시시포스도 다시 저승사자의 손에 끌려 저승으로 갈수 밖에요.  
    저승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데스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습니다.
    시시포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습니다.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올리면 떨어지고, 또다시 올리면 또 떨어지고….
    그리하여 시시포스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음행의 원천지인 신전이 있는 산이 바로, 올리면 굴러 내리는 일을 평생 하여야 하도록 형벌을 받은 그 산이라니 흥미 있는 일이 아닌가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산 위로 힘겹게 오르려는 영겁의 형벌!
    "고린도로 가자!” 라는 말뜻을 다시 한번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1.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1) 성전을 수리하는 요아스(1~5절)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서 왕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요아스가 왕이 된 후 첫 번째 한 일은 그의 할머니인 아달랴가 망가뜨린 여호와의 성전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곳을 복구할 것을 명합니다.
    성전을 복구하라는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다시 회복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니 이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성전복구를 위한 요아스의 구체적인 명령(4~5절)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부분을 복구하라고 명하면서 그 복구 비용을 다음 세 가지의 헌금으로 충당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성격의 헌금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을 보면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하게 반 세겔을 낼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이것은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27장)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이것은 오늘날의 감사헌금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입니다.

     각각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5절)

    여기에 십일조가 빠진 것은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 요아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헌금을 성전 복구비로 충당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사장들이 각자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서 그것을 성전 복구비로 충당하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아달랴로 말미암아 바알 신앙이 남왕국 유다에 유입되었고, 따라서 헌금 바치는 일들이 많이 느슨해졌으므로 제사장들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에게 헌금 바칠 것을 독려하여 성전 보수비로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2.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제사장들

    23년째 성전 복구가 지지부진하고(6절)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 복구에 전혀 나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으니 잘 알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문맥을 통해 추정하여 본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독려하여 받아들인 헌금을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고 성전 복구비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 때였으니 십일조가 잘 바쳐졌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사장들의 삶이 그리 넉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그동안 성전세와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 등을 통해서 부족한 살림을 충당하였을 텐데 그것을 모두 성전복구비로 내라고 하니 신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를 책망하는 요아스(6절)

    그런데 요아스가 그가 왕이 된지 23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에 이 말을 한 것은, 이때 그의 나이가 30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그의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가의 섭정을 받지 않고 그가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포함한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에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 :

    제사장들이 왜 23년이나 성전 수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을까요?
    본문에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이기심 때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의 명령이 없었다면 그 돈은 제사장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성전 복구비로 사용하라고 하니 마음이 상한 제사장들이 이 일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체면 때문

    또 하나는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아는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여 헌금을 거두라고 한 점입니다.
    제사장 체면에 마치 오늘날의 영업사원들처럼 사람들에게 헌금을 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마땅치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일은 여호와의 성전을 복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자기들의 이기심이나 체면 따위를 벗어던지고 왕이 명령한 그날부터 온 힘을 다하여서 했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기심이나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니다.

    3. 헌금이 성전 수리에 직접 사용되게 하라고 명하는 요아스(7~8절)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헌금을 걷으라고 하니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헌금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이 제사장의 손을 통하지 말고 성전을 복구하는 자들에게 직접 가져다주게 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성전을 복구하는데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제사장들 역시 성전이 복구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같은 생각이지만 자기들이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성전 복구는 일꾼들이 직접 헌금을 받아서 하는 방식으로 하도록 돕습니다.

    ● 묵상 :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들처럼 자기 이익을 따지면서 하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때의 제사장들처럼 자기 이득을 따져가며 한다면, 주께서도 우리에게 주님의 피의 권세를 거저 주셨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거저 용서받았고, 거저 구원받았으며, 거저 영광을 얻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이득을 따진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주님께 할 일이 아닙니다.

    4. 여호야다가 교훈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요아스(2절)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까지 책망하면서 성전 복구를 완료할 것을 명령한 요아스는 그를 살려준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아스는 말씀대로 사는 모든 일을 중단하며 아세라 목상과 우상들을 섬깁니다.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그 일이 잘못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형통치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자,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요아스가 그의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게 하십니다(역대하 24:17~27).

    ● 묵상 :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에는 누군가를 신앙의 롤모델로 삼고 그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신앙에 도움을 주는 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요아스처럼 누군가를 지나치게 의지하면, 혹 그가 실족하여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여호야다처럼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와 함께 믿음도 같이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제목

    1. 주님의 일을 할 때 이해득실을 따지며 하지 말게 하옵소서.
    2. 주께서 우리를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기게 하옵소서.
    3.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증거하였는데,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주시고,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이 중생하고, 새 생명을 받아 양자가 되게 하셨으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인애하심으로 로마서의 수신자들에게 권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 사랑 안에서 권면을 받아 모든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택한 백성을 의미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께 성도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에는 산 제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산제물은 헬라어 원문의 뜻으로 '희생 제사', 또는 '제사 드리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몸은 육신적인 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중생한 영에게 이용된 마음과 몸을 가리킵니다(살전 5:2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과 마음을 드리지 않는 물질(육신)만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사 29:13).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몸으로 산 제사 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산제물는 육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제물이 아니라 마음과 영이 하나되어 드리는 영적 제물입니다.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되어 믿음과 순종과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여기 제물에는 산 제물이 있고 죽은 제물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제사와 산 제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죽은 제사요 아벨의 제사는 산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아담에게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는 메시아의 언약을 믿고 희생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의지하여 구속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고 산제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농작물로 제사를 드리는 소제의 제사를 드렸지만 메시아의 언약을 믿고 구속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형식에만 치중하는 불신앙적 제사였기 때문에 죽은 제물, 죽은 제사였고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제사를 드리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1).

    하나님은 산 제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언약, 구속 제사를 믿음으로 드려야 하고, 거기에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나가서 제사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값진 제물을 많이 바치고, 성대하게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성경 말씀에 맞지 않는 제사는 모두 죽은 제사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입니다.

    요한복음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제물로 드린 곡식은 레위기 2장에 나와 있는 소제의 제사입니다. 성경에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괜찮다고 하면 안되고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드려야 합니다. 소제를 연구해 보면 이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소제는 첫 이삭이나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싶을 때, 제사 드리는 사람이 감사함으로 드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번제와 화목제와 더불어 자원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가 아니라 누구든지 드리고 싶을 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리려거든 하는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인간이 죄인이므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를 빼먹고 곡식으로 드리는 자원제를 먼저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자신이 죄인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먼저 드려야 할 속죄제사를 드린 것이고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이 맥은 구속사입니다. 구속의 주님을 도외시하고 다른 것의 형식을 먼저 취하면 그것은 죽은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제사인 헛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사야 1:13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양이나 소의 피를 가지고 제사 드림으로 성경에는 맞는 제사를 드렸으나 그 피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통이 없이 의식적으로만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성경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되고, 또 영적으로 드려야 참 예배가 됩니다. 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죽은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2).

    '이 세대'란 속세를 말합니다. 속세는 더러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타락하고 저속한, 경건을 잃어버린 죄악 세상을 말합니다. 그것을 본 받지 않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에는 이 세대를 가리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했으며, 마태복음 16:4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고, 사도행전 2:40에는 “패역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16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는 자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자랑하며 달음박질한 것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2).

    “마음(νούζ)은 영(πνεύμα)과는 달리 선악을 분별하고, 옳은 것을 계획하고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기관입니다.
    마음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과 별개의 기관인데 영이 사용하는 기관입니다.
    죽은 영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여 죄를 범하게 만들고, 중생한 영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고, 선한 일을 시행하도록 사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인간적인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중생한 영으로 살아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진리를 순종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0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멸시하는 자는 마음이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4.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2).

    이것은 심령의 변화를 말하고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상한 인격으로 변화되고, 친절한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술 담배 하던 사람이 변화를 받아 끊어버리게 되고, 조상 숭배하던 사람도 그것이 우상 숭배인 줄 깨달아 변화를 받아 끊어버리게 됩니다.
    산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5.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2).

    분별하라 원어 δοκιμαζω (도키마조)는 시험하여 갈라놓는 다는 뜻인데 우리는 참진리와 비진리를 시험하여 갈라놓고 비진리는 떠나고 참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찾아서 옳은 것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되 희생을 각오하고 몸을 바쳐 나가야 된다.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는 모두가 산제사,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육은 끝나는 것으로 죽은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된 산제사, 구속의 진리를 믿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아스의 성전수리 사역(4-16절)


    솔로몬 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달랴의 악한 통치로 인하여 훼손되었습니다.
    요아스는 훼손된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성전 수축을 명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 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라고 했습니다 (4-5절).

    은(銀) 은 당시 화폐 거래의 수단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은 모세가 한 때 성막을 위해 거두었던 세금입니다(대하 24:6).
    사람의 통용하는 은은 인구조사에 의해 계수된 남자 장정 20세 이상 된 자들에게 부과한 인두세입니다(출 30:13-14).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은 서원하는 자들에게 제사장이 평가하여 징수하는 징수액입니다(레 27:2-8).
    첫 태생을 여호와께 바칠 때 드리는 세금도 여기에 해당합니다(민 8:15-16).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은 성소에 바치는 자발적인 헌물입니다(출 35:21).
    그런데 이 돈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각 자기가 살던 성읍에 가서 잘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 와 성전수리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도록 퇴락한 곳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달랴의 우상숭배 정책으로 피폐해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 돈을 생계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전의 다른 필요한 기명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거나 믿음이 변질되어 수입이 매우 미미했을 수도 있습니다(13절).
    근본적으로 우상숭배가 횡행한 때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성전 회복에 대한 사명이나 능력이 매우 부족했으리라고 추측해 봅니다.
    여호야다의 권면을 받은 요아스는 성전 수축이 23년 동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단점들을 보완하라고 다시 명령합니다.

    첫째는 성전수리를 위한 헌금을 직접 하게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각 성에 가서 아는 사람에게 받아 오라고 했던 것을 이제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거치지 않고 여호야다가 만든 궤를 번제단 옆에 두어, 문지기 제사장들을 통해 직접 넣게 했습니다.
    이 때 만든 헌금궤가 예수님 때까지 사용됩니다.

    둘째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은 오직 성전 수리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비록 성전 기명이라 해도 성전 수리용 돈은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셋째 수리비를 성전 수리를 받은 감독자에게 직접 전달하게 했습니다.
    물론 감독자는 레위인이 맡았을 텐데 건축 담당자에게 직접 주어서 일군을 투입하는데 유용하게 했습니다.

    넷째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헌물은 제사장에게 주게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위한 헌물과 성전수리를 위한 헌물을 구분하여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지난번 1차 수축 명령에서 나타난 폐단을 고쳐서 내린 조치입니다.
    그런 지시에 따라 여호야다가 궤를 만들게 해서 구멍을 뚫고, 그 궤를 성전 단 옆에 두었고 대제사장이 그 은을 계수하여 성전 수리를 맡은 자들에게 주고, 그들은 그 은을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석수와 미장이 등 건축자들에게 곧장 주어 퇴락한 곳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7-16절).

    요아스의 성전수축 사역은 의미가 깊습니다.
    과거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이행하기 위해 7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었습니다(삼하 7:12-13, 왕상 6:38). 그러나 그 성전이 지어진 지 130~140년 가까이 흘렀고 아달랴의 악정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대하 24:7).
    그러기에 성전을 수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아 성전 사역을 잘 완수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우주적 성전도 있고 지역적 성전도 잇고 개인적 성전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의 성전이든 퇴락한 곳을 수축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을 수축하다가 중단한 것처럼, 하박국 시대에 성전을 건축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넋을 놓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 세금

    성경에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셉은 이집트인들에게 20%의 세금을 매겼다(창 47:20-26).
    유대인들은 성막을 지을 때 최초로 세금을 냈다(출 30:11-16).
    사무엘이 왕정을 반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세금 때문이다(삼상 8:14-18).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뉜 이유도 세금 때문이다. 솔로몬이 중과세를 매긴 것은 잘 알려져 있다(왕상 12:4)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세금을 얼마나 냈을까?
    1년 수입이 5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세금 내역은 다음과 같다(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

    십일조 50 데나리온
    3년에 한번씩 두 번째 십일조 (450x10%x1/3) 15데나리온
    첫열매
    들어올려 바치는 것 (500-50)x1/50 9데나리온
    성전세 2데나리온
    총계 76 데나리온 (수입의 15.2%)
    정부에 바치는 세금을 포함하면 28% 정도

    이렇게 수입의 28%나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마 22:17)라는 질문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 질문은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이 반영되어 있다. 헤롯 당시 어떤 물건에는 1,000%의 tax를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종교세를 제외한 세금은 세리가 징수했다.
    1세기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은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로마 정부는 각 지역에 유대인들을 세리로 임명하였다. 로마인들을 세리로 파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동네에 같이 사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네 수입이 어떤지 훤히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거둔 세금으로 로마의 체제가 이스라엘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세금이 로마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갈릴리에서 거둔 세금은 갈릴리에서만 사용되었다.

    1998년 한국의 비리 공무원 가운데 80%가 세무 공무원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예수 당시도 지금처럼 세리는 부정이 많았다. 세리들은 거두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일정량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했다. 세례 요한도 그들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고 가르쳤다(눅 3:13). 동족들에게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세, 과세(taxation)

    당국이 사람이나 재산에 대해 세(돈, 물품, 혹은 노역)를 부과하는 일. 정부의 공공사업과 공무원, 또한 제사장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여러 형태의 과세가 있어 왔다.
    고대에 부과되던 세금에는 십일조, 조공, 통행세, 인두세에 더하여 소비재, 수출품, 수입품 그리고 상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하며 운반하는 상품에 대한 세금이 포함되었다.

    여호와의 신성한 곳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
    신성한 곳의 봉사는 세금을 통해서 유지되었다.
    의무적인 십일조는 아론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으며, 그들은 적어도 한 번은 여호와께서 규정하신 세에 따라 전리품을 할당받은 적이 있었다. (민 18:26-29; 31:26-47. 십일조 참조)
    여호와께서는 또한 모세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등록된 각 사람은 “여호와의 헌금”으로 반 세겔(1.10달러)을 내야 하며 그것은 만남의 천막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출 30:12-16)
    해마다 인구 조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매년 일정액을 내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여호아스는 “모세가 명한 신성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하였다. (대둘 24:6, 9)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성전 봉사를 위해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약 75센트)을 낼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였다.—느 10:32.

     예수께서 지상 봉사를 수행하시던 무렵, 유대인들은 성전을 위해 두 드라크마를 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 세금을 내실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 후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논하시면서, 왕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왕의 아들들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실 그들을 위해서 세금을 걷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숭배를 받으시는 분의 독생자이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시려고 그 세금을 내도록 조처하셨다.—마 17:24-27.

     통치자들이 부과한 세금 이스라엘에 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왕과 왕의 집안사람들, 많은 정부 관리들과 종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가축 떼와 소출의 십분의 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세금이 부과되었다. (삼첫 8:11-17; 왕첫 4:6-19) 솔로몬의 통치가 끝나자, 백성은 강제 노역에 징발되고 정부를 지원하는 데 너무 지친 나머지 솔로몬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르호보암에게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르호보암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자 열 지파가 반란을 일으켰다.—왕첫 12:3-19. 강제 노역 참조.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또 다른 형태의 세금을 내야 하였다. 일례로, 파라오 느고가 여호야김을 자신의 봉신(封臣)으로 삼고 유다에 무거운 벌금 혹은 조공을 부과하자, 여호야김은 신민들로 하여금 “각자에게 정해진 세율에 따라” 일정한 금액을 내게 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왕둘 23:31-35.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 유대인들(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롱기마누스에 의해 면제를 받은, 신성한 곳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은 제외됨)은 세금(아람어, 밋다 혹은 민다), 공세(벨로), 통행세(할라크)를 내야 하였다. (라 4:13, 20; 7:24) 밋다는 개개인에 대한 개인세를, 벨로는 소비재에 물리는 세금 곧 물품세를, 할라크는 여행자들이 도로의 관문이나 강 여울목에서 내는 통행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밋다(느 5:4의 경우 「신세」, AS, KJ에서는 “공세”로 번역됨)는 세율이 상당히 높았음에 틀림없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내기 위하여 돈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부과한 세금을 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총독을 지원하기 위한 세금도 내야 하였다.—느 5:14, 15.

     기원 일 세기에 유대인들은 세금 납부를 몹시 불쾌한 일로 여겼다. 그 이유는 세금 징수원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 때문만이 아니라 세금을 내면 자기들이 로마에 종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원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은 “카이사르” 곧 “위에 있는 권위”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알려 주셨다. (마 22:17-21; 로 13:1, 7. 카이사르 [하느님과 카이사르] 참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세금 중에는 텔로스(간접세, 관세, 혹은 공세; 마 17:25; 로 13:7)가 있다. 또한 켄소스(인두세; 마 17:25; 22:17, 19; 막 12:14)와 포로스(집과 토지와 사람에게 부과된 세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보다 폭넓은 의미의 단어; 누 20:22; 23:2)도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의 세금 종류는 다양하며, 로마 제국 통치기의 유대인들에게는 토지세, 인두세, 재산세, 출입세, 가옥세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실시하는 헌금의 종류도 38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대수
    왕조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여로보암 왕조
    기원전 931년~기원전 910년
    초대 북이스라엘 왕이자 에프라임 지파 출신
    2
    기원전 910년~기원전 909년

    3
    바아사 왕조
    기원전 909년~기원전 886년
    나답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잇사갈 지파 출신
    4
    기원전 886년~기원전 885년

    5
    시므리 왕조
    기원전 885년
    엘라를 제거하고 꼴랑 7일짜리왕위에 오름. 상나라 주왕 비슷한 최후를 맞이함
    6
    기원전 885년~기원전 874년
    시므리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그 초기에 디브니의 세력이 오므리의 세력에 도전하다 패망함
    7
    기원전 874년~기원전 853년
    배우자는 이제벨 왕비, 유다에 딸 아달리야를 시집보내 혼인동맹
    8
    기원전 853년~기원전 852년
    유다의 아하시야와 동명이인
    9
    기원전 852년~기원전 841년
    동시대 유다의 여호람과 구별하기 위해 '요람'이라고도 부름
    10
    기원전 841년~기원전 814년
    유다의 여호람아하시야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1
    기원전 814년~기원전 798년 |
    12
    기원전 798년~기원전 782년
    히브리어로는 '예호아쉬'로 표기되어 유다의 요아스와 구별됨
    13
    기원전 782년~기원전 753년
    최장기 재위
    14
    기원전 753년

    15
    살룸 왕조
    기원전 752년
    즈가리야를 제거하고 꼴랑 한달짜리왕위에 오름
    16
    므나헴 왕조
    기원전 752년~기원전 742년
    살룸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7
    기원전 742년~기원전 740년

    18
    베가 왕조
    기원전 740년~기원전 732년
    브가히야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9
    호세아 왕조
    기원전 732년~기원전 722년
    베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이스라엘 마지막 왕. 아시리아에 압송 억류됨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연구
    정중호(계명대)

    . 서론 

    고대 근동 지역의 성전들은 종교적 임무를 수행할 뿐 만 아니라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성전이 왕의 통치와 연관되어 국가의 중요한 일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주변 환경 가운데 살아간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왕실 중심의 연구만으로는 역사를 재구성하기 어렵다. 왕실 다음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성전이다. 성전의 실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성전의 체계 뿐 만 아니라 성전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인 성전 재정을 파악해야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역사를 재구성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성전 재정 운영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선 '성전'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건물이 있는 성전이 있었는가 하면 제사만 드리는 소위 '야외 제단(open cultic place)'도 있었다. 또한 왕정시대에 중앙성전이 있었는가하면 '산당'이라 불리우는 지방성전도 있었다. 성전경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겠지만 중요한 지방성전인 '산당'도 역시 논의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것이다. 그리고 '야외 제단'에 대해서는 야외 제단의 특성상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함으로 간략하게 언급할 수 밖에 없다.
      왕정시대에는 요아스 왕 시대와 요시야 왕 시대의 성전 수리 사건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고 포로 후기의 상황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II. 왕의 통치와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왕궁 곁에 있으며 왕실의 체플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왕궁과 성전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영역과는 별도로 구분된 하나의 통치중심지역인 아크로폴리스(acropolice)를 형성하였다. 성전의 위치만 보아도 성전이 왕의 통치와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남북으로 분열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앙성전은 벧엘과 단이었다. 벧엘 성전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벧엘 성전을 가리키며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궐이라"(암 7:13)고 하였다. 성전이 왕의 통치기구와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말이다.
      고대 근동 지역의 통치형태를 살펴보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신(神)의 소유이며 왕은 신의 대리자로 지상에서 통치하게 된다. 때로는 이집트같이 왕 자신이 신의 모습으로 혹은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신의 대리자인 왕은 신성한 신분으로 백성 앞에 나타나며 신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 통치를 하게된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된 이러한 통치형태가 있었던 시대에는 성전이 통치기구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성전은 왕의 통치를 합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통치에 필요한 세금을 징수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증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승리한 신과 왕의 특권에 속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이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 거룩한 신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전형적인 왕의 통치시대를 출범시킨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였고 또 건축하였다. 그리고 성전건축은 왕의 독자적인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되었다. 성전건축은 단순한 건축사업이 아니라 왕실통치의 청사진이 담긴 사업이었으며 그 의도는 성전건축설계도에 나타나 있다(출 24:12-40:38; 겔 40:1-44:31).
      성전수리도 왕이 주도하였으며(왕하 12:7-17; 22:3-7) 왕권강화와 맥락을 같이 하였다. 요아스와 요시야는 어린나이에 즉위한 왕들이었다. 이들이 청년이 되어 왕권을 강화시키려 할 때 성전수리를 명하였고 결국 왕이 주도권을 쥐고 성전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할 때 성전의 재정을 왕이 관리를 통해 직접 관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전경제가 왕의 통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방 성전인 산당의 경우는 어떠한가? 산당을 비판한 신명기사가도 산당이 왕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악한 왕' 뿐 만 아니라 '선한 왕'도 산당을 건축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예루살렘 제사장을 왕이 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당의 제사장도 왕이 임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왕상 12:31; 왕하 23:5). 중앙성소와 마찬가지로 산당 역시 왕실의 통치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산당의 기능 가운데는 세금을 거두는 기능도 있었다.
      성전 경제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무게와 부피를 재는 각종 단위가 성전에서 사용된 소위 성전단위(sanctuary weight)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레 5:15; 27:3, 25). 특이한 것은 왕실 재산에 대해 언급하는 곳에도 성전단위만 언급되어 있지 별도의 왕실단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왕실의 경제와 성전 경제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인이 상거래를 할 때는 다른 측정단위가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에브론의 밭을 살 때 "상인들이 통용하는 단위"로서 대금을 지불하였다(창 23:16).
      성전이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장소였다는 것은(왕상 15:18; 왕하 12:1; 18:15)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강대국이 성전을 약탈하는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전에 바쳐진 예물들은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이 창고는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는 역할도 하였다. 약소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강대국의 요구에 의해서 혹은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성전 창고를 열어 그 보물들을 종주국에 바치곤 하였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창고에는 다윗이 드린 것이 보관되어 있었다(왕상 7:51). 이집트 왕 시삭은 "야훼의 전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하여 갔다(왕상 14:26 = 대하 12:9). 유다 왕 아사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바칠 때 "야훼의 전 곳간과 왕궁의 곳간"(왕상 15:18)에서 은금을 취하여 주었다. 또한 유다 왕 요아스는 아람 왕 하사엘에게 "야훼의 전 곳간과 왕궁의 금"을 취하여 조공으로 바쳤다(왕하 12:19).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전인 "야훼의 전 곳간"을 헐어 보물을 탈취하였다(왕하 14:14). 유다 왕 아하스는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 티글랏빌레셀에게 예물을 바쳤다(왕하 16:8).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침공한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바쳤다(왕하 18:15).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느부갓네살은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왕하 24;13)에 있는 것을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이러한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왕궁에 있는 창고는 물론이요 야훼의 전에 있는 창고의 모든 권한이 왕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전창고에는 때로 왕실의 무기가 저장되어 있기도 하였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킬 때 성전에 있는 다윗 왕의 창과 방패를 분배하는 장면에서 그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왕하 11:10 =대하 23:9). 또한 도망하는 다윗에게 놉 제사장인 아히멜렉이 성전에 있던 칼을 주는 장면에서도 성전창고에 무기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삼상 21:10).


    III. 성전 수리 사건에서 나타난 성전 재정 운영


      1. 요아스 왕과 성전 수리


      열왕기하 12장(4-5, 7, 16절)에는 왕정시대 성전에 드리는 헌금 종류가 나타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헌금은 "야훼의 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돈/예물)"(4절)이라 하였다. 즉 은(돈)으로 드릴 수 있는 헌금 종류인 것이다.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가축이나 곡식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이 헌금은 성전세의 성격이 강한 헌금이었다. 이제 그 내역을 살펴보자.


       1)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드리는 성전세로써 인두세(人頭稅).
      이러한 성전세는 출 30:11-16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빈부를 막론하고 20세 이상 남자이면, 이스라엘 땅에 살던 혹은 외국에 살던 간에, 각 사람이 생명의 속전으로 반세겔씩 야훼께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다. {개역}에는 4절에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라 번역된 부분이 바로 인두세인 성전세를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성서(왕하 12:5 - {개역}에는 4절)에서 이 부분 즉 케세프 오베르 이쉬 를 직역하면 "사람이 건너갈 때 드리는 은"이라 번역할 수 있다. 미쉬나에는 양을 헤아려 십일조 양을 선별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그 방법은 양을 우리 속에 몰아넣은 후 양 한 마리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지나가는("오베르") 양 가운데 열번째 양을 십일조 양으로 택한다고 하였다. 짐승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는 이러한 관습이 배경이 되어 사람에 대한 성전세를 드릴 때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사람의 수대로 드리는 은"이라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신약시대에도 반세겔의 성전세 제도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17:24-27에 의하면 지방인 가버나움에서도 이 반세겔을 거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도 이 성전세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2) 사람의 성별과 나이에 따라 능력을 감안하여 드리는 성전세
      이 성전세는 레위기 27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20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이면 은 오십 세겔이요 여자이면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이 성전세는 4절에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으로 표현되어 있다.


        3)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
      4절에 "각사람이 자원하여 야훼의 전에 드리는 은"이 이 예물을 말한다. 이 예물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치는 모든 자발적인 예물을 가리킨다.


      "야훼의 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의 내역은 위와 같이 세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새롭게 번역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하였다, "야훼의 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 곧 각 사람의 수대로 드리는 은, 사람들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 그리고 각 사람이 자원하여 야훼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 등을... (왕하 12:4)


      그러면 요아스가 명령한 기본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요아스는 4절에 나오는 세가지 예물들 즉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으로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다(6절). 따라서 요아스는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을 수리하도록 한번 더 명령하였다. {개역}의 7절 후반절을 보면 마치 백성들이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성전 수리를 위해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히브리어 성서(MT, 8절)를 보면 제사장들이 "성전 회계로 부터의 은"을 받아 소유하지 말고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를 위해 그 은을 내놓도록 되어 있다. 7절 후반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너희들은 너희 성전 회계로부터 은을 취하지 말고 너희들이 성전 수리를 위해서 그것을 주도록 하여라.


      그러나 제사장들은 왕의 명령을 그대로 순복하기 보다 하나의 절충안에 동의하였는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로부터의 예물을 받지 않고 제사장들 단독으로 성전 수리도 하지 않는다는 절충안이었다(8절). 다시 말하면 8절의 "백성으로부터의 은"(4절의 "야훼의 전에 드리는 은"과 동일한 것) 즉 세가지의 예물을 제사장들이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제사장들은 단독으로 성전 수리하는 책임을 벗었다. 그리고 요아스는 제사장의 몫을 분명히 하였는데 배상제사(속건제)의 은과 정화제사(속죄제)의 은을 "야훼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이 차지하도록 하였다"(16절). 여기서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과 제사장의 몫을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이란 표현은 성전 창고에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왕과 함께 계산해야하는 성전의 재산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자발적인 예물 몇 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헌금은 왕의 관리와 제사장의 통제 아래 성전 수리를 위해 사용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2. 요시야와 성전 수리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한 내용은 열왕기하 22:1-9와 역대기하 34:8-17 부분에 나타나 있다. 여덟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는 청년이 되었을 때(26세)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왕의 명령을 받든 사람들은 서기관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였다. 이들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성전수리를 위해 성전에 바쳐진 돈을 기술자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전에 바쳐진 헌금을 사용하는 권한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왕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그 헌금을 사용할 때는 대제사장이 참여하여 왕의 의도대로 헌금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왕의 신하들은 왕명을 대제사장에게 전달할 뿐 만 아니라 실제 그 헌금을 사용하는 과정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의 관리들이 어느정도 개입했는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전수리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상당히 세밀하게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IV. 성전 재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들
     
     1. 왕정 시대의 성전 재정 관리자
        


    1)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 - 쇼므레 하사프


      왕정시대에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은 열왕기하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취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야훼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 두매 무릇 야훼의 전에 가져오는 은을 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대로 그 은을 계수하여 봉하였다.(왕하 12:9-10)


      예루살렘 성전 문전에 헌금궤를 놓아두고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관리하였다. 이 구절에서  "문턱"이라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사프이다. "사프"는 성전문 맨 아래를 가로지르는 부분을 가리키며 성전과 세속세계를 분리시켜주는 경계선의 역할을 한다. 보통 바닥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와 비가올 때 물이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단순한 수위나 경비원이 아니었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성전의 제사장 서열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그 다음 중요한 인물이 바로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었다(왕하 12:9; 22:4 = 대하 34:9; 왕하 23:4; 25:18 =렘 52:24; 35:4). 특히 "문턱을 지키는 사람"은 성전에 드린 예물을 수납하여 관리하는 직책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요아스 왕 시대와(왕하 12:9) 요시야 왕 시대(왕하 22:4 = 대하 34:9), 그리고 유다 멸망 직전에(왕하 23:4; 25:18 =렘 52:24; 35:4) 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요아스 시대에는 제사장이라 명시되어 있으나 요시야 시대에는 명시가 없다. 역대기에는 요시야 시대에 레위인이 "문턱을 지키는 자"로 되어 있으며 이들이 전국적으로 예물을 수납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턱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대하 34:9)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성전에 방이 있었으며 예레미야 시대에 그 중 한 제사장의 이름도 나타나 있다. 즉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가 바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한 제사장이었다(렘 35:4).
      중요한 점은 성전 문전에 놓여진 헌금함에 담겨진 헌금을 사용할 때는 먼저 왕의 관리와 대제사장이 공동으로 그 금액을 계산하여 성전수리를 위해 지출하였다는 점이다. 성전재정을 왕이나 대제사장이 독자적으로 관리한 것이 아니라 왕과 대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운영 관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국한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성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앗수르의 성전관리에 관여하는 왕의 관리인 마르-이쉬타르(Mar-Ishtar)가 앗수르 왕 에살하돈에게 성전수리를 위해 보고한 편지가 있는데, 이 편지에서 그 관리는 제사장과 왕의 관리가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계수하고 지출함을 언급하였다. 열왕기하 12장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왕이 성전운영에 대해 명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선 발견할 수 있으며, 왕의 명령과 제사장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 왕과 제사장의 의견절충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여호야다가 채택한 이 절충안, 즉 왕의 관리와 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관리 운영하는 안은 고대 근동의 관습을 차용하여 실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은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세번째 고위직에 있었던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다. 이들은 헌금을 거두어 들이는 역할도 하였고 수납한 헌금을 관리하고 지출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물론 독자적으로 할 때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안에는 왕의 관리와 공동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이 포로 후기에도 동일한 명칭으로 활동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왕정시대 역사를 기술하는 부분에만 등장한다는 점을 참조해 볼 때 왕정시대에 사용한 성전 재정 관리자의 명칭일 가능성이 짙다.    


        2) 성전 회계(temple-teller) - 마카르


      요아스의 성전 수리 사건 가운데 열왕기하 12장 5절과 7절에 나타나는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인..."이라는 구절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절(MT 6절)과 7절(MT 8절)에서 "아는 사람"이라 번역한 마카르 란 단어는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희귀한 단어이다. BDB사전에는 이 단어가 나카르 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명사형의 뜻은 "아는 사람" 혹은 "친구"이다. {개역}은 이러한 분류에 따라 "아는 사람"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LXX에는 히브리어 모음이 변경되어 "그의 상업행위"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그레이(J. Gray)는 라스 샤므라 텍스트(Ras Shamra Text, UT 82, 83, 113)에서 mkrm이 제사장과 함께 성전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던 점에 근거하여 희생제물의 가격을 사정해주고 예물의 정도를 결정해 주는 "사정자 (business assessor)"로 번역하였다. 몽고메리와 게만(J. S. Momtgomery and H. S. Gehman)은 "성전 회계 (temple-teller)"라 보았고 홉스(T. R. Hobbs)는 "수입 (income)"으로 번역하였다. "아는 사람"이라 번역한 것은 "마카르"의 어원을 "나카르"에서 찾았기 때문인데 이 어원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마카르"에서 어원을 취하면 그 뜻은 예물을 평가하고 계수해주는 사람인 "사정자"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 명칭은 "성전 회계"라고 하느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판단되어 "성전 회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요아스 시대의 성전 회계는 제사장의 지휘 아래 성전 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인원으로 추정된다. 이 인원은 아마도 성전 재정을 총괄하는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의 지휘를 받은 재정 담당 실무자였을 것이다.


      2. 포로후기 성전 재정 관리자


        1) 주조자 - 요체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Hystaspis) 시대에는 왕이 조공으로 받은 귀금속을 녹여서 토기에 넣었는데 토기에 모두 차면 토기를 깨어 귀금속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이 귀금속을 잘라서 사용하였다. 동전이 일반화되기 이전, 적어도 주전 300년 이전에는 이러한 방법이 고대 근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귀금속을 주조하고 보관하는 일을 주로 성전에서 전담하였는데 고대 이스라엘에도 귀금속을 성전에서 주조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특별히 예루살렘 제2성전 시대에 귀금속을 주조하는 것과 관련된 본문이 스가랴에 나타난다.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30을 야훼의 전에서 주조자(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3)


      {개역}에서 "토기장이"라 번역한 요체르 는 문맥에 맞지 않는다 하여 학자들은 히브리어 단어를 오차르 로 수정하여 "창고/곳간"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시리아어 역본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토레이(C. C. Torey)는 70인역(LXX)과 아퀼라역(Aquila) 그리고 심마쿠스역(Symmachus)을 근거로 "요체르"를 귀금속을 주조하는 전문적인 단어임을 주장하면서 히브리어 성서(MT)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토기장이"는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고도의 열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귀금속을 주조하는 역할을 겸임할 수도 있다. 따라서 MT를 수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굳이 MT를 수정할 필요가 없으며, 문제는 "요체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있다. 즉 "토기장이"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귀금속) 주조자"로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문맥상 여기서는 "주조자"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를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귀금속을 주조하는 장면은 열왕기하 12:10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야훼의 전에 있는 대로 그 은을 녹여서 계수하고,


    "녹여서 계수하고"라고 번역한 부분은 {개역}에서는 "계수하여 봉하고"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왕하 12:11)에는 봐야추루 봐임누 즉 "녹여서 계수하고"의 순서로 되어 있으므로 이 순서를 따라 번역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녹이다"로 번역된 단어의 기본 뜻은 "묶다" 혹은 "만들다" 등의 뜻인 추르 인데 NEB와 NAB 등은 이 단어를 "주조하다/녹이다)"로 번역하였다.  은을 계수할 때 동전이 아닌 경우 무게로 달 수 밖에 없고 이 경우 은을 용기에 담거나 묶어서 저울에 달 수 도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시의 보편화된 방법인데 은을 녹여 그 무게를 달게 된다. 히브리어 성서를 그대로 직역하면 "만들어서(묶어서) 계수하고"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귀금속을 "만들 때" 당시의 보편적인 방법을 감안하면 "녹여서 계수하고"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은을 녹여 계수하는 즉 귀금속을 주조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요체르(주조자)"는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기본적으로 "요체르"는 흙을 구워 토기를 제조하는 토기장이를 가리킨다(사 30:14; 41:25; 64:8; 렘 18:4, 6; 애 4:2; 단 2:41; 대상 4:23). 이들은 높은 열을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불을 다룰줄 아는 기술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토기 뿐 만 아니라 귀금속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토기장이만 불을 다룰줄 아는 것은 아니다. 대장장이도 있고 금장색도 있다. 성서에는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나 금, 은 등 귀금속을 다루는 금장색 등의 기술자에 대해서는 다른 명칭을 붙이고 있다. 대장장이는 마스게르(왕하 24;14, 16; 렘 24;1; 29:2), 혹은 하라쉬(삼상 13:19; 사 44:12; 54;16)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금장색(goldsmith)은 초래프(사 40;19; 41:7; 46:6; 렘 6:29; 10;9, 14; 51:17; 느 3:8; 31, 32)로 부른다. 이들 귀금속 주조자들이 성전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광야에서 성막을 건설할 때 필요로 했던 다양한 금, 은, 동의 기구들을 이들이 제조하였고(출 31:2-6),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기구들을 제조하는데 이들의 기술이 필요하였다(왕상 7:14).
      성전세를 비롯하여 성전에 바쳐지는 귀금속 형태의 예물들을 계수할 때는 토기장이, 대장장이, 금장색 등 누구든지 불을 다룰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술자는 귀금속을 녹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성전 창고에 간수하였다. 따라서 왕정 시대에 성전 재정 운영을 담당한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의 지휘아래 귀금속을 계수하고 제조하는 실무자의 역할을 이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가랴 11:13에는 "요체르"가 성전에서 예물을 수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체르"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정 시대에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담당했던 기능 즉 예물을 수납하는 기능을 포로후기에는 "요체르"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후기의 성전 재정 관리자는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아니라 "요체르"였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요체르"는 적어도 고위 제사장이어야 이 직무를 성전에서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요체르"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다는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굳이 찾아 본다면 아론이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들면서 제사장이 귀금속을 제조한 예를 들 수는 있을 뿐이다(출 32:4). 스가랴 11:13을 근거로 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체르"가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무를 어느정도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제사장이었는지 혹은 레위인이었는지 또는 평민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오히려 다음에 논의할 포로후기의 성전 재정 위원회 아래서 귀금속 계수와 관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2) 성전 재정 위원회


      왕정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든 지방 성전이든 제사장이 성전 재정을 관리해왔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 있기 전에는 지방에서 레위인이 제사장 역할을 하면서 지방 성전의 재정을 관리해왔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이 있은 후 예루살렘에 올라 온 레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사독계열 제사장과 동등한 지위를 얻지 못하고 하위직으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레위인은 성전 재정에 깊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로후기에는 느헤미야가 다시 레위인을 등용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느 10:38-39)


    십일조를 받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이 함께 공동으로 받고 관리하고 분배하는 것도 서로를 배려하여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은 느헤미야 13:12-13에 더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로 고지기를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이는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 13:12-13)


    십일조를 받고 관리하고 분배하는 일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함께 동참하였다. 위에 나타난 명단을 살펴보면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와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 등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서기관 사독은 이름만 보아도 제사장임을 알 수 있다. 왕정 시대 서기관은 왕의 신하로서 법률적인 일과 왕명을 출납하는 일 그리고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으며 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로후기에는 제사장이 서기관의 직함을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에스라였다(스 7:11). 즉 하나님의 율법을 맡아 율법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서기관 에스라였다. 따라서 서기관이라는 직함이 있어도 사독은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명단에서 하위직을 맡은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은 족보상 레위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전 재정을 관리한 이들 집단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이제까지 제사장이 관리해 오던 성전 재정을 개혁적인 차원에서 레위인도 성전 재정에 관여하도록 조치하였다. 느헤미야 13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공동으로 재정 관리자 집단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부터 나타난 성전 재정 관리자 집단을 S. J. Spiro는 느헤미야 13:12-13를 근거로 하베르 라 보았다. 원래 하베르라는 단어는 랍비 문학에 나타나는 단어이며 느헤미야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S. J. Spiro는 "하베르"의 전단계가 네에만 이라는 명칭의 성전 재정위원회임을 랍비문학에서 밝혀내었다. 바로 이 단어 "네에만"이 느헤미야 13:13에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고 S. J. Spiro는 느헤미야 시대 "하베르"가 성전 재정위원회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위원회가 유다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이 위원회는 지역의 종교적 정치적 행정적인 역할도 감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J. Schaper는 포로후기의 재정위원회가 종교세 뿐 만 아니라 세속세금도 관리했음을 주장하면서 종교세만을 관리하는 "하베르"가 있었다는 가설에 대해 반대하였다. 또한 이 위원회가 유다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을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J. S. Spiro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느헤미야 13장에 나타나는 성전 재정 관리자들의 명칭이 "하베르"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이들이 재정 위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성전에서 받은 것을 분배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즉 헌금의 수납과 관리와 분배까지 모두 관장하는 실질적인 재정위원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3) 레위인 성전 재정 관리자


      성전 창고를 관리하는 레위인 창고지기의 명단이 역대기상 26:20-28에 나타나 있다. 이들은 성전 창고를 관리하는 인원으로 자물쇠와 열쇠를 관리할 뿐 만 아니라 창고에 들어가는 물목과 창고에서 나가는 물목을 계수하고 관리하는 인원이었다. 단순한 창고지기가 아니라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실무자들이었다. 느헤미야 13장에 나타나는 재정 위원들 역시 그 명칭이 "창고지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역대기상 26장에 나타나는 레위인 역시 중요한 성전 재정 관리자로 볼 수 있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이들을 배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역대기 기자가 기록할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인원 배치 명단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명단을 분류할 때 문맥이 맞지 않는 20절의 아히야 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아히야"는 문맥상 70인역을 따라  아헤헴 즉 "그들의 형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레위인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게르손 자손과 고핫 자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게르손 자손은 주로 성전 운영과 종교 행사와 관련된 물품이 있는 "야훼의 전 창고"를 담당하였고(21-22절) 고핫 자손은 주로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성물 창고"를 담당하였다(23-28절).
      게르손 자손의 명단을 보면 여히엘리의 아들들인 스담과 요엘이 나타나 있다. 고핫 자손의 명단을 보면 게르솜의 아들 스브엘과, 엘리에셀의 아들들인 르하뱌, 여사야, 요람, 시그리, 슬로못 등이 나타난다.   
      느헤미야 시대에 구성된 성전 재정 위원회와 다른 점은, 레위인들 역시 역대기 기자 시대의 성전 재정을 관리하였지만 제사장과 동등하게 위원회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지휘를 받으며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실무자였다는 점이다.  


    V. 포로 후기 성전 재정 운영과 페르시아


      포로 후기의 성전 재정 운영자들이 십일조를 중심한 종교세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포로후기의 상황을 참작해 볼 때 이들이 국가의 세무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로후기 특히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대에는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의 구분이 없었으며 통합해서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던 약소 민족인 유다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세금을 거두어 페르시아에게 바치는 일이었다. 십일조와같은 종교세를 받고 있었던 성전이 이 일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성전 재정 위원회가 종교적인 예물 뿐 만 아니라 세속적인 세금까지 관리하는 일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J. Schaper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에 바치는 은과 금은 주조소에서 관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이러한 주조 기능의 핵심이었으며, 후일 화폐로 통용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장소도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에 바친 세금의 종류에 대해서는 에스라 4:13, 20; 7:2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페르시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세금으로 보통 은으로 바치는 세금형태인 미다, 노동력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인두세인 벨로, 토지세인 할라크 등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페르시아의 세금을 수납하고 관리하는 기구였을 가능성은 크지만 J. Schaper의 주장같이 성전이 국세청이나 화폐주조창의 역할을 전담했다고 주장하기는 이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부족한 형편이다. "요체르"가 성전에 있었고(슥 11:13)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요체르"가 성전에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요체르(토기장이)"에게 가서 토기를 사기도 하였다(렘 18:2, 3, 4, 6). 다시말하면 예루살렘 성전 외에도 "요체르"가 있었고 페르시아에 바칠 세금을 수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포로후기의 "요체르"는 성전 재정 위원회 아래서 귀금속 계수와 관리를 담당하는 실무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십일조가 기본적인 세금이었음을 감안할 때 성전에서 세속적인 세금을 취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페르시아의 통제 아래 그 영향을 받으면서 성전이 핵심적인 주조소의 역할을 하면서 세속세금의 일부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VI. 결론


      왕궁과 성전이 국가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고대 근동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도 왕실과 연결되어 국가 경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왕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더구나 왕은 성전 수리를 주도하였으며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일까지 관여하였다. 강대국에 조공을 바칠 때 왕은 왕궁의 창고와 성전의 창고를 모두 열어 조공물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왕정 시대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내용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곳은 성전 수리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유다 왕들인 요아스와 요시야가 왕권을 강화하는 시점에 성전을 수리하였는데 제사장과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왕의 주도하에 성전이 수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은 제사장과 협동하여 헌금을 수납하고 관리하였다. 바벨론 성전의 "왕의 궤(king's chest)"와 같이 요아스도 예루살렘 성전에 "궤"를 마련하여 헌금을 수납하고 왕의 관리가 그 재정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성전 재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로는 왕정 시대에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과 "성전 회계"를 들 수 있고, 포로 후기에는 "요체르(주조자)"와 "레위인 재정 관리자"와 "성전 재정 위원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왕정 시대의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과 포로 후기의 "성전 재정 위원회" 등이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고위층이었으며 그 외의 인원들은 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헌금을 수납하고 계수하여 관리하며 분배하는 일 등을 관할 하였다.
      왕궁과 성전이 하나의 아크로 폴리스 안에 위치해 있으며 "성전단위(sanctuary weight)"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성전 재정의 최종 결정권자가 왕인 점을 감안할 때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이 세속적인 세금을 수납하고 관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명확한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지만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힘들었던 포로 후기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전이 세속적인 세금을 관리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4월 26일(토) 열왕기하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후는 왕이라(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They hurried and took their cloaks and spread them under him on the bare steps. Then they blew the trumpet and shouted, "Jehu is king!

    예후(Jehu. 그가 여호와시다)
    예후는 북 이스라엘 왕(B.C. 842-815 재위).
    제 4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본래 아람왕을 따랐으나 이스라엘 군대장이 되어 라못 길르앗에서 수리아와 싸웠다(왕하 9:25-).
    이때 여호람이 부상을 입고 엘리사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예후는 신앙적 인물이 아니었고 수리아에 대항코자 친 앗수르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수리아의 침공으로 예후는 실의의 죽음을 했다(왕하 10:35).


    열왕기하 8장 요약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7년간의 기근을 경고하고 피신하게 합니다(8:1-2).
    기근 후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받고, 엘리사의 기적이 왕에게 알려집니다(8:3-6).
    한편,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통해 병의 회복 여부를 묻고,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8:7-15).

    열왕기하 9장 요약

    엘리사는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지시합니다(9:1-6).
    예후는 아합 왕가를 제거하며, 이세벨을 처단하고 아합의 예언된 심판을 이행합니다(9:22-3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다.

    열왕기하 10장 요약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근절합니다(10:18-28).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하여 온전한 개혁에는 실패합니다(10:29-3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명을 받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는 이로써 하나님께 구별되고 하나님의 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악을 일삼는 오므리 가문을 심판할 명을 받습니다.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시는 하나님 (9:1-13)

    ​하나님께서 오므리 가문에게 주신 예언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오므리로부터 시작하여 아합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자행된 우상 숭배를 비롯한 악한 일에 대해 갚으시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불러 예후에게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자 중 한 청년을 택하여 예후에게 보냅니다. 보내기 전에 기름을 붓고는 속히 그 집을 나오라고 주의를 합니다. 이는 사람을 세우는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하십니다(1-3절).

    청년은 엘리사가 명한 대로 예후를 찾아 길르앗 라못으로 갑니다.

    그곳에 모인 군대 장관 중에 예후만 불러 엘리사가 정하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수많은 악한 일을 아시고 그 집안을 심판하시고자 예후를 택하셨음을 알립니다. 예후가 감당할 일은 오직 아합과 이세벨에 속한 심판을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곧장 도망을 갑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사명을 감당할 예후만 남았을 뿐입니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다른 장군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기적을 봅니다(4-13절).

    적용과 결단 (9:1-13)

    ​신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 마귀의 일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두렵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분이 그 사명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그 사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일만 감당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을 받고서 가야 할 그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청년을 보내시면서 그 자리에서 속히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2. 예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후는 아합의 집안을 멸절시키게 됩니다. 예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지 묵상해봅시다. 내게 주시는 도전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봅시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요람왕은 치료를 위해 돌아갔지만, 예후는 길르앗 라못에 남아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계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는 예후를 왕으로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속하게 순종하며 제자를 보내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 명령합니다.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1-6)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사가 직접 가서 기름을 부어 예후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제자를 보낸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긴 하지만, 요람 왕에 대한 모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1).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전에 엘리야에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왕상 19:16). 그런데 이 말씀이 엘리사 때에 이루어진 이유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후에 아합이 죄를 뉘우쳐서 그 집에 대한 심판이 지연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제자에게 예후를 찾아 골방으로 들어가서(2) 이 일을 은밀하게 행하고 지체하지 말고 도망치라(3)는 것은 바로 엘리사에게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을 치라(7-10)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엘리사의 제자는 그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세우시려는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아합의 집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후는 자신의 주인인 요람 왕을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요람 왕의 집을 치라”가 아니라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요람으로 이어지는 오므리 가문의 왕조 중에서 아합 왕의 죄악이 가장 극심했던 이유도 있지만, 열왕기상 19장 15-18절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를 드러내기 위함 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예후가 도구로 선택된 것입니다. 특별히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시체가 개들에게 먹힌다”(10)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로써 그녀가 우상 숭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아합의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 그 후손들이나 심지어 종들까지도 완전히 멸절된다는 것입니다(8-9). 여로보암의 집처럼(왕상 15:29), 바아사의 집처럼 말입니다(왕상 16:11).

     

    적용: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합의 집’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어떻게 제거하시겠습니까?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응답하셔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높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꼭 내가 원하는 방법, 방식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임을 안다면 주님의 시간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예후는 왕이라(열왕기하 9:1-13)

    하나님이 오해받고, 왜곡된 대표적인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세상에서는 ‘신’의 반대말 또는 비교 대상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의 주권’이 강조되면 ‘인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으로, ‘신의 영광’이 강조되면 ‘인간의 수고’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신의 뜻을 따르려면 인간의 뜻을 포기해야 하고, 신을 섬기려면 인간은 신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신과 인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경쟁대상이기에 신이든 인간이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반대말 또는 비교 대상은 절대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경쟁대상이 아니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반대말은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책임’이 수반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역할’이 요청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를 밝고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인간에게 유익하고 좋은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릴 때에야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상대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주시는 분, 인간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며 충성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참 다릅니다.

    열왕기서에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야기가 아합 왕 시대부터 여호람 왕 시대의 불과 30여년 사이에 다섯 번 정도 나옵니다.
    상황적으로는 늘 아람이 우세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늘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아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것이고 더더욱 원수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두 나라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인데 왕하 8:7절에서 엘리사가 적국의 지역인 다메섹을 방문하고, 아람의 왕은 엘리사를 불러서 일종의 국가기밀일 수도 있는 자기 병에 관해 질문을 하고, 엘리사는 하사엘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정도로 우호적입니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변해 8:28절에서 다시 전쟁이 있고 상황적으로는 북 왕국의 왕이 부상을 당하는 등 매우 불리한 상태에서 9장이 전개됩니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단결’과 ‘충성’입니다.
    대표적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인데 하나님은 이 순간에 새로운 왕을 세우십니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병법의 기초도 모르시는 것일까요?
    엘리사 선지자는 최소한의 애국심도 없는 것일까요?

    만약 전쟁 중에 장수 하나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왕을 바꿀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 누가 봐도 이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장수가 등장해야 하고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도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을 만한 지명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저와 여러분의 예상을 깹니다.
    사람들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방법과 하나님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다르고,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과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신분이나 역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왕의 신분이나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그냥 선지자의 제자입니다.
    당시 북왕국은 여호와가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어 엘리야와 엘리사 조차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을 전혀 비중이 없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기에 세우는 사람이나 세움받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위대한 선지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경우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기에 매우 하기 싫은 역할이었고,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을 붓는 것은 사울에게 알려지면 죽을 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역할이었습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 왕을 기름부은 것도 매우 평범한 아히야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이래 최초로 민족이 분열되고, 지파가 붕괴되고, 나라가 갈라지는 엄청난 순간에 지명도도 없고 존재감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그냥 어떤 선지자에 불과한 아히야가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게 성경의 방식입니다.

    새로운 왕으로 세워지는 사람이 예후인데 예후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때 왕으로 세워질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독특성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남들과 다른 우월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후는 그냥 매우 평범한 장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2절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고 소개가 되지만 실제로는 님시가 누구인지, 그의 아들이 누구인지, 그의 손자 여호사밧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5절에 의하면 전쟁터에 군대장관들이 모여 있는데 예후는 유일한 장군도, 뛰어난 장군도, 대장군도 아니고 그냥 여러 군대장관들 중에 하나입니다. 11절에 장수들 간의 대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정황으로 볼 때 예후가 대표가 아닙니다. 만약 예후가 높은 사람이었다면 아랫사람들이 높은 사람에게 발생한 일에 대해 묻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질문한 사람들의 표현이 매우 거친 것으로 보아서 예후는 그들 중에 하급 장교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매우 평범한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우 평범한 장군 중의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비 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방식입니다.

     

    3. 예후는 왕이라

    예후가 왕으로 세움을 받자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동료 또는 자신들의 부하였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후를 높이고 스스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저들에게 왕은 권세요, 신이 선택한 사람, 신이 점지한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기준과 원리대신 이방적 기준과 원리, 세상적 기준과 원리, 죄의 기준과 원리를 따라 생활했기에 ‘여호와가 왕으로 세운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준과 원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지, 여호와가 세운 왕의 위치가 어떠한지, 여호와가 세운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합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은 다윗이 아무 공로도 없을 때에, 집안에서 부모나 형제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었지만 기름부름을 받은 이후에도 다윗은 가족들이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자 사울부터 백성까지 다윗에 대한 반응이 달라집니다.
    당장 사울의 군대에 차출되어서 왕의 무기를 담당하는 부관이 됩니다.
    후에 전쟁에 나가서 연전연승하자 사울은 군대 장관으로 삼고, 백성들은 ‘다윗은 만만이로다’ 칭송을 합니다.
    백성들의 관점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었기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공로를 세웠기에 왕이 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불렀다, 하나님이 세웠다, 하나님이 기름부었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다윗이 행한 업적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사역에 내가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사역을 현장에서, 직접 본인이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사람의 방식은 그 사람이 무엇을 행하였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 사람이 누구를 통하여 무엇을 하였는가에 촛점을 맞춥니다.

     








    여호람

    1. 여호람, 그는 누구인가요?

    여호람은 남 유다의 5대 왕으로, 아버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
    열왕기하 8장 16절에 따르면, 그는 여호사밧이 아직 살아계실 때 공동 통치를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흔한 방식이었죠. 여호람은 32세에 왕이 되어 8년간 통치했어요(열왕기하 8:17). 이름 뜻이 “여호와께서 높이시다”라는 뜻이라니, 뭔가 기대감이 생기죠? 하지만 이 이름과는 달리 그의 행적은 그리 빛나지 않았답니다.

    ​여호람의 이야기는 북 이스라엘의 동명 왕 여호람(아합의 아들)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오늘 다룰 여호람은 남 유다의 왕이에요. 이 점 꼭 기억해 주세요!

    2. 아합 가문과의 위험한 결혼

    여호람의 통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바로 그의 결혼이에요. 그는 북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어요(열왕기하 8:18). 이 결혼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 동맹의 산물이었죠. 문제는 이 결혼이 여호람과 유다 백성에게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는 거예요.

    ​아합 가문은 바알 숭배로 악명 높았는데, 아달랴를 통해 이 우상 숭배가 남 유다에까지 스며들었어요. 열왕기하 8장 18절은 이렇게 말해요: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되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쉽게 말해, 여호람은 아버지 여호사밧의 신앙심 깊은 길을 버리고 아합 가문의 타락한 풍습을 따랐다는 거죠.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3. 백성의 믿음을 배신한 왕

    여호람은 유다 왕으로서 여호와를 섬기기보단 우상 숭배에 빠졌어요. 이건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어요. 왕의 결정은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열왕기하 8장 18절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아버지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충실한 왕으로 칭송받았는데, 아들 여호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죠.

    ​흥미로운 건, 하나님께서 여호람을 즉시 벌하지 않으셨다는 점이에요. 열왕기하 8장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를 멸하시지 아니하셨다”*고 나와요.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유다가 망하지 않은 거예요. 이 부분 읽으면서 여호람이 얼마나 큰 은혜 속에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4. 반역과 전쟁, 흔들리는 왕권

    여호람의 통치는 외부적으로도 위태로웠어요. 열왕기하 8장 20절부터 22절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에돔이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반역했고, 립나라는 성읍도 독립을 선언했어요. 에돔과의 전투에서 여호람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지만, 밤에 적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어요. 이 사건은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줘요.

    ​당시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이었는데, 여호람의 실정으로 이런 기반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죠. 백성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왕이 믿음을 저버리고 나라까지 위태롭게 하니 실망이 컸을 거예요.

    5. 비참한 최후와 그 뒤

    여호람의 마지막은 참담했어요. 열왕기하 8장 23절과 24절에 따르면, 그는 8년간 통치한 뒤 죽었고, *“그 백성이 장사한 후에 다윗 성에 장사되었으나 열조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고 나와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시 왕들은 보통 조상의 묘실에 안장되는 영예를 누렸는데, 여호람은 그 자격을 잃은 거예요. 백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왕으로 기억된 거죠.

    ​더 충격적인 건, 그의 죽음 뒤에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으로 유다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는 점이에요. 여호람의 선택이 대를 이어 비극을 낳은 셈이죠.

    맺음말 : 여호람에게서 배울 교훈

    여호람의 이야기는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라 실패와 경고의 기록이에요. 그는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과 나라를 망쳤죠. 특히 아합 가문과의 결혼은 단순한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신앙의 배신이었어요. 우리 삶에서도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여호람, 아달랴, 요아스, 웃시야, 아하스

    여호람 (정략결혼을 한 남유다 제5대 왕)
     
    1. 인적 사항
    ① 여호람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라는 뜻. 
    ② 여호사밧의 아들로 (요람)(왕하 8:16).
    ③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대하 21:6).  
    ④ 남유다 제5대 왕으로 8년간 통치(대하21:5).
     
    2. 시대적 배경
      B.C.848-841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여호람은 선왕 여호사밧이 아합과 맺은 경혼 동맹의 제물이 된 자로서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였다. 이 결과 여호람 당시 남왕국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밀접한 동맹을, 혈연관계에 있게 되었고 또 북왕국의 바알 종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 당시의 국제 상황은 여호사밧 때와 유사하다.
     
    3. 주요 생애
     출생
            ―
           ―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
      대하 21:6
     반대 세력 제거
      B.C. 848 년
      대하 21:4
     에돔과 림나의 반역
      B.C. 845 년
      대하 21:8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1:11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
      B.C. 842 년
      대하 21:16,17
     창자의 중병으로 사망
      B.C. 841 년
      대하 21:18-20
     
    4. 성품
    ① 등극 후 세력 강화를 위해 잠재적인 반대 세력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아우와 방백 몇 사람을 살해한 것을 볼 때 잔인하고 정권욕이 강한 자(대하 21:4).
    ② 속국들이 독립하고, 또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보아 통치력이 부족한 자(대하 21:10,16,17).
    ③ 아내의 사주를 받아 바알을 숭배하며 악정을 행할 만큼 신앙이 유약하고 주관이 없는 자(대하 21:6, 11).
     
    5. 구속사적 지위
      아내 아달랴로 인해 남유다를 바알 종교로 물들여 놓은 자.
     
    6. 평가 및 교훈
    ① 여호람은 선왕 여호사밧의 신실함을 본받지 못하고 폭정을 가하며,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이는 아무리 부모의 신앙이 신실하다 해도 자신의 신앙은 스스로의 경건에 대한 훈련에 좌우됨을 증거 한다.
     
    ② 여호람의 모든 악행의 원인은 수상숭배자인 아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가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교훈 하는 것이다.
     
    ③ 여호람은 다윗의 자손임에도 불고하고 우상 숭배로 일관하며 선지자의 경고조차도 무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람은 중병에 걸려 죽고, 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도 못하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불신자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7. 핵심 성구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대하 21:6).

     

     

    87-아달랴 (왕위를 찬탈한 남유다 제7대 왕)
     
    1. 인정 사항
    ① 아달랴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는 뜻. 
    ② 아합과 이세벨의 딸. 오므리 왕의 손녀.
    ③ 남유다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 아하시야 모친.
    ④ 유다 열왕 중 유일한 여왕(대하 22:12).
     
    2. 시대적 배경
      B.C.841-835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예후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정략결혼에 의해 다윗 가문으로 시집 온 아합의 딸로서 한동안 북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예후의 반역으로 인해 아달랴의 친정 가문인 아합 가문이 몰락하게 됨으로써 아달랴는 북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아람이 세력 확장을 위하여 계속해서 남․북 왕국을 침입해 오던 시기이다.
     
    3. 주요 생애
     출생
            ―
            ―
     여호람과 결혼
            ―
      왕하 8:16,17
     남편의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1:6
     남편의 죽음
       B.C. 841 년
      대하 21:19
     아들의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2:3
     아들의 죽음
       B.C. 841 년
      대하 22:9
     다윗 왕가의 자손 진멸
       B.C. 841 년
      왕하 11:1
     6년간 통치
            ―
      왕하 11;3
     여호야다의 혁명에 의해 살해됨
       B.C. 835 년
      왕하 11:14-16
     
    4. 성품
    ① 남편을 충동하여 우상을 숭배케 하고 악정을 하게 할만큼 사악한 자(대하 21:6).
    ② 다윗 왕가로 시집왔으나 친정의 교훈대로 아들을 양육한 것으로 보아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자(대하 22:3.4).
    ③ 아들의 통치 기간 중 섭정을 행하고 아들이 죽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할 만큼 잔인하고, 권력욕이 강한 자(왕하 11:1).
    ④ 6년 동안 외세의 간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좌를 지킨 것을 볼 때 정치적 역량이 뛰어 났던 자(대하 22:12).
     
    5. 구속사적 지위
    ① 여호람 당시 남왕국 유다에 바알 종교를 들여온 결정적인 자.   
    ②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려 함으로써 다윗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방해하려 한자(대하 22:10,11).
    ③ 남왕국 유다 역사상 유일한 여왕(대하 22:12).
     
    6. 평가 및 교훈
    ① 사악한 아달랴의 비참한 최후는 악인은 그 심은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됨을 깨닫게 된다(갈 6:8).
    ② 다윗 가문으로 시집 온 아달랴가 유다 왕국을 바알 종교로 물들이며, 또 다윗 가문을 진멸하려 한 사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는 것이 자신과 후손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큰 장애가 됨을 보여준다(고후 6:14).

     



    유대인의 생각공부

    부자하면 떠오르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이다.
    로스차일드가문부터 워렌버핏, 스티븐 스필버그까지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본주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유대인들이 북반구에 분산 이주하지 않았다면 근대자본주의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그마한 동네가게에서 부터 거대 재벌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게 되었을까?
    그 비밀과 그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해보자.

    ​첫째, 생각공부

    유대인은 말한다.
    경제적 자유를 찾는 첫걸음은 생각이다.
    여기서 생각이란 적극적인 자세, 다시 말해 사물이나 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한다.

    당신이 누구든 나이가 몇살이든 지금 어떤 상황이든 학력이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부자가 되는 목표를 먼 미래로 설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고를 확장하며 진지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작은 일부터 실행에 옮겼다.
    유대인들은 하나의 사고에만 갇혀있지 않는다.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둘째, 알파와 오메가 전술

    유대상인들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속성은 알파와 오메가 전술이다.
    처음(알파)과 끝(오메가)를 모두 소유한다는 뜻이다.
    가령 A와 B가 경쟁한다고 할 때 유대인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둘 다에게 투자하면서 둘 다로 부터 이익을 얻어낸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석유관련 자본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전기차 회사나 대체 에너지 기업에도 투자한다.
    그들은 어떤 싸움에서든지 항상 돈을 벌수 밖에 구조를 만드는데 능하다.

    ​셋째, 보이지 않는 지식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았다면, 유대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을 팔았다.
    실제로 탈무드에는 음악과 미술같은 지적인 활동이 금전보다 가치가 더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형태가 없는 일은 경쟁자가 적어 비교적 쉽게 비지니스를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데 월스트리트를 위시한 세계금융산업은 사실상 유대인의 손아귀에 있고 아이티 산업에서도 구글, 페이스북, 오라클 등 선두 기업 창업자 역시 모두가 유대인이다.
    영화산업은 아예 유대인에 의해 태동되었으며 할리우드 제작자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이외에도 법률, 의료, 서비스 산업 대부분을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다.

    ​넷째, 디테일이 성패를 결정한다

    '스놈'이라는 유대인이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은 백화점을 헐값에 사들였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불과 3년만에 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과연 그가 어떻게 했길래 이런 폭풍적인 성장이 가능했을까?
    스놈은 백화점을 인수하고 나서 백화점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객들이 버린 영수증을 모아 어떤 상품이 인기가 있는지, 추가 구매하는 물품은 어떤 것들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고객들의 소비심리와 구매양상을 파악하여 백화점을 정상화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었다.
    유대인은 작은 변화와 디테일이 만나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다섯째, 1과 250법칙

    1과 250법칙은 고객 한명을 만족시키면 그 한명의 고객이 새로운 고객 250명을 데려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로 고객 한명을 화나게 하면 잠재 고객 250명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법칙이다.
    고객이 훌륭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으면 고객은 당신을 좋아하게 되고 어디를 가든 당신의 제품과 서비스를 홍보할 것이다.
    당연히 좋은 입소문을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고객 한 사람을 단순한 판매대상이 아닌 250명의 고객으로 여겨야 한다.
    유대인은 언제 어디서나 서비스 제일주의, 진정성이 생명이라는 교훈을 되세기며 단골고객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여섯째, 윈윈전략

    유대인은 사업이란 한 가족만 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돕고 서로 이익을 도모해야 자신의 부가 점점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악성 경쟁으로 인한 피해를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경쟁상황을 교묘하게 조정함으로써 양측 모두 이익을 얻는 윈윈 전략을 실현한다.
    이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단계 높은 협력을 하게 되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일곱째,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려라

    부정적인 감정은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뿐 긍정적인 변화를 거의 일으키지 못한다.
    부를 획득한 유대인은 결코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다.
    부정적인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라는 마인드로 자신과 상대방을 격려한다.
    세상은 주로 긍정주의, 낙관주의자들이 승리한다.


    여로보암 / 벧엘, 단에 우상을 세우고 이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단(Dan), 벧엘(Bethel), 종교의 중심지- 벧엘

    단(Dan) :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라헬의 종 빌하의 아들이다(창 35:25).
    납달리의 친형이었으며 성경의 여러 곳에 그와 함께 이름이 나타난다(창 35:25; 46:23; 출 1:4등).
    단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 지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오홀리압과 삼손은 단 지파 출신이다(출 31:6; 삿 13:2, 24).

    지명 :
    남쪽으로 유다, 서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에브라임, 동쪽으로 베냐민의 땅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다(수 19:40-46).
    그러나 이곳에는 강력한 아모리인들이 살고 있어서 단 지파는 이곳의 골짜기를 차지하지 못하고 산지로 쫓겨났다(삿 1:34-35).
    후에 단 지파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취한 레센(라이스) 땅이 그들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 지파의 땅이 되었다(수 19:47. 삿 18장).

    여로보암 1세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우므로 단은 우상숭배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왕상 12:25-33).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의 의미: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관용구는 구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삿 20:1; 삼상 3:20; 삼하 3:10; 17:11; 24:2, 15; 왕상 4:25; 대상 21:2; 대하 30:5).
    이것은 이스라엘의 북에서 남까지의 전 지역을 묘사하며 이스라엘 최장 길이를 표시한다.


    벧엘(Bethel) :

    예루살렘 북쪽, 실로 북쪽(삿 21;19), 아이 서쪽(수 7:2), 라마 북쪽(삿 4:5)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베이틴’(Beitin)으로 본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벧엘 동편 산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았다(창 12:8).
    이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창 28:19; 삿 1:23)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야곱이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칭하였다(창 28:10-22).

    후에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와서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불렀다(창 35:1-7).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과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재확인받았다(창 35:9-15).
    한편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묻힌 곳도 이곳 상수리 나무 아래이다(창 35:8).
    벧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초기에는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으나(수 18:22) 후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가 되었다(삿 4:5; 대상 7:28). 분열 왕국 시대에는 북이스라엘의 영토였으나 유다 왕 아비야가 이곳을 공략하여 유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대하 13:19) 바벨론에서 돌아온 뒤에는 베냐민 지파가 이곳에 거주하였다(스 2:28; 느 7:32; 11:31).

    신약 성경에는 이곳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마카베오 왕조 때 이곳이 번창했으며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정복한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성경 속의 또 다른 벧엘: 시므온 지파에게 할당되었던 성읍으로 ‘브두엘’(대상 4:30), ‘브돌’(수 19:4)이라고도 하였다. 다윗이 시글락 전투에서 탈취한 전리품을 이곳에 거주하는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다(삼상 30:27).


    종교의 중심지, 벧엘

    사사 시대 이후로 이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곳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고(삿 20:2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이곳에 올라와(삿 20:18)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삿 20:26; 21:4).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순회하던 세 곳 가운데 한 곳일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삼상 7:16).
    또한 선지자의 생도들이 이곳에 있었으며(왕하 2:3)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이곳에 들렀다(왕하 2:2).
    그러나 여로보암 이후 벧엘은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었다(렘 48:13).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워 섬기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였다(왕상 12:28-29).
    북이스라엘의 제일 큰 성소가 되게 하였다(암 7:10).
    예후도 이곳에서 금송아지 섬기는 것을 계속하였다(왕하 10:29).
    이 때문에 벧엘은 아모스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에게서 멸망에 대한 선포를 들었다(호 4:15. 암 3:14).
    호세아가 이곳을 ‘우상의 집’이란 뜻의 ‘벧아웬’이라고 칭한 데서(호 10:5) 이곳에서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요시아 왕 때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이곳에 있던 우상 숭배의 제단이 파괴되었다(왕하 23:15).


    4월 25일(금) 열왕기하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생각에는(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But Naaman went away angry and said, "I thought that he would surely come out to me and stand and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wave his hand over the spot and cure me of my leprosy.

    누가복음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와 목공의 일에 익숙한 예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베드로가 전문가이었지만 자기 생각과 경험 및 판단을 포기하고 말씀에 의지할 때 나타난 결과는 이제까지 잡아볼 수 없었던 어획량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늙은 젊은이


    1967년에 캐나다의 리키 갤런트라는 아이가 ‘프로제리아’란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병은 나이는 어리지만 노쇠, 동맥경화, 탈모, 근육이완,주름살 등 노인의 육체적 증세가 나타나는 조로증세를 나타냅니다.
    이 아이는 당시 11세였지만 신체는 90세 된 노인이었던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나이만 가지고 늙었다거나 젊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청년이란 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붉은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 감정, 생명력에 달렸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을 이기며 모험으로 앞일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고나 신앙이나 생활이 젊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적 젊은이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영적으로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내 생각에는(I thought) in my opinion

    어떤 낚시꾼이 낚시를 하는데 큰고기는 걸러내고 작은 고기만 바구니에 담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낚시꾼들이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놓아주고 보다 더 큰 것을 바구니에 담는 것이 상식이며 낚시법입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집 고기를 굽는 후라이팬이 15인치 밖에 안되서 후라이팬 안에들어가는 고기만 바구니에 담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라이팬의 크기만 생각할 줄 알았지 고기를 토막내서 굽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부족하면, 생각이 막혀 있으면 손발이 고생하고 육체가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사느냐가 그의 인생을 결정하며 그의 미래를 결정하며 영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무엇을 가장 골똘히 생각하며 사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인 것입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든 만사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옛패러다임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내 생각을 버리고 나보다 더 나은 이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내 생각에는" 하면서 자기 생각에 갖혀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이러한 사고의 틀은 영적인 한계가 되고 영적인 경계가 되어 믿음의 기적을 일으키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 생각을 깨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별한 의식을 통하여 고쳐줄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로부터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말을 전해듣게 되었을 때에 그는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엄에 걸맞는 정결케 하는 거창한 의식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체면을 따지고 신분을 따지고 형식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무엇인가 대단하고 거창한 의식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병이 나을 줄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무당 푸닥거리하는 식에 무슨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대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빠질 수 있는 믿음의 과오입니다.

    나아만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노하여 물러가려는 일을 하려했습니다.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병이 믿음으로 고쳐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알게 해 주고 전해주고 도와주는 것일 뿐입니다.

    "아람에는 더 맑고 더 큰 강이 있거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할 때 요단강물보다 더 나은 물이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의 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더 깨끗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한 것은 팔레스틴에 있는 요단강이냐 아니면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냐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 자체의 맑고 더러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거기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요단강물로 뛰어드는 믿음이 그를 치료한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강, 겸손의 강에 들어가는 믿음이 능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일곱번이어야 하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요단강 물이어야 하며 왜 하필이면 일곱번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빠지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빠질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허망한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뚫고 넘어가지 아니하면 안될 견고한 우리의 불신앙과 의심의 성벽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믿음의 과오를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에 7번씩이나 들어갔다 나왔다는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쓸데 없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쓸데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계속적으로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왜 한번이나 다섯번이나 여섯번이면 안되느냐는 자신의 생각을 이기고 7번씩이나 반복하여 그 강물에 뛰어들었을 때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마터면 좋은 기회를 놓칠뻔하였습니다.
    그는 일생일대에 가장 큰 과오를 범할 뻔 한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믿음의 과오"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에는, 혹은 내 소견에는 이러저러하다는 자기 주장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발생하는 아주 뿌리 깊은 본성에 의해서 이 믿음의 과오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치유 이야기 가운데 나타나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믿음의 과오"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좋은 실례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처럼 "내 생각에는 이러 저러하니"라는 이 무서운 믿음의 적을 이기셔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믿음에 있어서 거치는 돌이며 우리를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믿음의 과오로 몰아넣는 불신앙적이고 악마적이고 사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히 머리숙이기를 배우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하였던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마터면 내 생각을 고집하다가 과오를 범할 뻔 했는데 그 종들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전해준 처방전을 믿고 요단강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그곳에서 일곱번 몸을 잠그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그의 문둥병은 고침을 받았는데 그의 육신이 어린아이의 것과 같이 부드러운 살결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문명사가인 호이징하(J. Houizinga)는 3가지 개념으로 정리한 바가 있다(J. Houizinga, 1993).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는 호모 파베르(Home faber)
    인간이 즐길 줄 아는 특성, 그래서 놀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부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호이징하는 인류문명, 심지어 전쟁까지도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른바 ‘문화우위의 시대’로 가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사람은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멍하니 있는 것 같아도 분명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잠을 잘 때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70억이 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쉬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고, 저마다 생각이 전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각자의 생각대로 생각을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맞벌이로 일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아내가 먼저 집에 들어오고 남편이 늦게 퇴근을 했지만, 가끔씩은 아내가 늦게 귀가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날따라 아내는 회사에 일이 많아서 늦게 퇴근을 해서 집에 오게 되던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많은 업무로 인해 지친 몸이었지만, 그래도 집에 들어가면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편안하게 쉬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집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한편, 집에서는 남편이 먼저 퇴근을 해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 역시 피곤한 몸으로 만사가 다 귀찮은 상태에서 아내가 집에 오면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금방 신발을 벗은 아내에게 대뜸 한다는 소리가 “여보, 나 커피 한 잔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얼마나 지친 모습으로 들어왔는지는 보지도 않고, 남편은 TV만 보면서 커피나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힘들기는 서로 마찬가지인데 “힘들었지? 밥은 먹었어?”라고 다정하게 말은 못해 줄 망정,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는 남편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생각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아내가 오면,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인데도 생각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1번 : 아내가 신발을 던지면서 대판 싸웠다. 
    2번 : 그날로 이혼 도장 찍었다. 
    3번 : 커피를 남편 머리에 갖다 부었다. 
    4번 : 사이좋게 커피 마셨다. 
    몇 번일 것 같습니까? 
    정답은 4번입니다.

    남편이 커피를 달라고 했을 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이런 생각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보니까 나와 같이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시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아내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부부는 행복한 커피 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충분히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과 생각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이 있는데, 결혼 전에 처음 만나던 때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가 옷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가짓수도 적은 데다가 대부분 싼맛에 산 거라서 데이트 할 때 입을만한 옷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마음 먹고 좀 비싼 옷을 하나 사입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옷이 제일 좋은 거니까, 만날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한 얘기였지만, 저희 집사람이 장모님께 한 얘기가, “엄마 그 사람은 맨날 만날 때마다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도 데이트할 때 좋은 옷을 입고 간다는 차원에서 새로 산 그 옷만 입고 나갔는데, 저희 집사람은 허구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오니까 그게 못 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저는 늘 싸고 양 많은 것을 좋아하고, 저희 집사람은 싼 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좀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고... 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잘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제 생각에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상대방은 자기 사고방식대로 나를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부부 간에 시댁과 친정에 대해 생각하는 견해의 차이라든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갈등을 겪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와서 나음을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람왕은 자신의 신하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고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왕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왕은 자기 생각대로 오해를 하고서는 이것은 분명, 아람왕이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람왕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생각의 차이는 그 뒤에 나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로 보내달라고 전갈을 보내서, 나아만 장군은 이제 이스라엘 왕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인간들은 늘 끊임없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 역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갔을 때 그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미리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앞까지 도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나아만 장군 생각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직접 나올 줄 알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5장 1절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람 나라를 구원한 적이 있는 큰 용사였고, 나라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아람 나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나아만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명성 높은 장수였고,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하거나 얕잡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는 당연히 엘리사 선지자가 공손히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와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줄 알았습니다.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올 줄 알았는데, 버릇없게도 사람을 보내서 한다는 얘기가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아만이 이스라엘왕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가는 것만 해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엘리사 선지자가 왕궁까지 직접 올라와서 치료를 해줘야지, 자기를 오라 가라 하는 것만도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그것까지는 감수를 하고 내려갔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치료법 한 마디만 던져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병든 부위에 안수해서 고쳐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특정한 의식을 통해 고쳐줄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엄에 걸맞는 거창한 의식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것도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다마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강이 훨씬 더 나은데 하필 요단강에서 씻으라는 것도 못마땅했고, 더군다나 그런 일을 일곱 번이나 반복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도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어찌나 화가 났던지, 1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가 보낸 사람의 말을 듣고 난 후에, “내 생각에는 그가 이렇게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말하고 나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직후에 바로 노하여 물러가면서 그 얘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격분한 나머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부하들의 말을 듣고서 그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나니 어린 아이의 살같이 깨끗이 나음을 얻었다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우리는 나아만과 같이 “내 생각에는 이러하다”고 하면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믿음의 과오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과 뜻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거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기도한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전부 내 생각대로, 내 뜻을 하나님께 주장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40명 정원의 기독교학과에 목회자 자녀 120명이 원서를 넣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자녀가 꼭 합격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내 자녀가 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재수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올 해 이 학과에 못 들어가면 큰 일 나는데! 
    교회에서 내 직분과 체면도 있기 때문에 이번에 떨어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십니다. 우리 생각은 합격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의 뜻을 막아서시고, 그를 마게도냐 지역으로,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왠지 모를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마게도냐 지역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각대로 소아시아로 진출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로 확장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유럽 선교를 통해서 복음의 전환점이 마련되고, 복음이 세계 제일의 나라였던 로마로 들어가게 되었고, 복음이 로마를 정복하게 되었고, 복음의 로마 정복이 오늘날의 거대한 기독교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일하셔서, 결국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게 되면, 나아만처럼 상처를 받고 분노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셔야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목사님이 이렇게 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되는데...” 
    “내 생각에는 교회에서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상처를 받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대로만 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 결과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다시스로 행했던 요나 선지자가 어떻게 됐습니까?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들 생각대로 행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종말이 어떠했습니까? 
    내 생각대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숲속 마을에 숲속 마을을 다스리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호랑이도 어느 날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험한 산 길을 다니다 보니까,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리기도 하고 발이 성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는 인간들이 도로 포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아스팔트를 깔아서 반들거리는 도로를 보면서, 호랑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내가 다니는 산 길에 도로 포장을 해야 되겠다. 
    토끼들을 잡아다가 가죽을 벗겨서 내가 다니는 길에다가 깔아놓으면 발을 다치는 일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니다가 마침 토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토끼에게 “미안하지만 이 어르신이 산 길을 편하게 다니려면 니가 희생될 수밖에 없구나.”하면서 모든 산 길을 토끼 가죽으로 덮을 자신의 계획을 말해줬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하는 말이, “어르신, 참 놀라운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이 산에 있는 우리 토끼들을 다 잡는다 해도 토끼 가죽 길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제 꼬리를 잘라서 어르신의 발에 가죽신을 만들어 신으신다면 산 길 전체가 토끼 가죽길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토끼의 그 말 한 마디로 인해서, 그 숲 속에 있는 토끼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 한 숲속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만 내려 놓으면! 
    자기 생각 하나만 바꾸면 모든 것이 평안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관철하려 들게 되면, 피바람이 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고 무서운 믿음의 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의 적을 믿음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생각과 이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나아만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나병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업장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정과, 또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수능시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러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우리 인생의 질병이 치료되지 못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훈련입니다. 이런 훈련을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생에서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고, 기적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줄 아는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내 생각에는 큰 일을 이루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이 필요하고, 부유함이 필요하고, 성공이 필요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시고, 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가난을 주시고, 실패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만을 구하고, 합격을 구하고, 물질의 축복만을 내 생각대로 구하는 우리들이 되기 보다, 그 이전에 내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을 쌓아가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읽는 훈련을 쌓아 나가서, 하나님의 생각대로 내 인생이 조율되어지고, 움직여질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생각과 착각(錯覺)

    착각이란 한자는 어긋날 착, 깨달을 각이란 훈으로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매우 영리하고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짐승보다도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2004년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덩치 크고 미련해 보이는 코끼리도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두꺼비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보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다가 무수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3절~14절 말씀에“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셨습니다. 

    또한 짐승들은 아무리 맛있는 먹이가 있어도 자기 위장 70%까지만 채운다고 합니다. 심지어 먹는 것 밖에 모르는 돼지도 자기 위장 7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20%~200%까지 먹다가 채하고 탈이 납니다. 짐승들이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만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병이 납니다. 이렇게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착각을 잘합니다. 착각이란 현실과 다른 생각을 말합니다. 두 의대생이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떤 한 남자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의대생이 그 모습을 보고“저런 자세는 류마티스 관절염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의대생이“아니야 디스크 걸리면 저런 자세가 나오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서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냐 디스크냐를 두고 다투는데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아주 심각하게 묻기를“선생님 제가 너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화장실 갈 일이 급해서 억지로 참으며 몸을 꼬며 다가오는 사람을 두고“류마티스 관절염이니, 디스크니”하고 다투었습니다. 

    아는 척하며 전문 병명까지 말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의대생들처럼 이렇게 착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는데 스스로 착각을 하면서 오해를 하고 분노하고 또는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의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3장 41절에는“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방법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기준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9절에“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방법, 내 경험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므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습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 나아만에 대해 설명하기를“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의 직위는 군대장관이며 권력자요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질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병은 전염이 되기 때문에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병은 속에서부터 썩어져서 일 년 이 년은 모르다가 삼 년쯤 되면 피부 겉으로 나타나면서부터 문드러지고 손마디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 병에 걸렸으니 장군이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화려한 모습 속에 날마다 썩어서 죽어가고 있는 이런 나아만을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체는 나아만과 같지 않을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아만과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내면에 말 못할 고민들로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면서 갈등하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속은 다 썩어져 가는 모습들, 겉은 거룩한 척 꾸몄지만 외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만족이 없고, 소유한 것은 많은데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현대사회에는 나아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과 더 나아가 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아만과 같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분이 하나님이 셨듯, 병든 영혼, 병든 가정, 병든 사회를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二.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불치의 문둥병으로 괴로워하던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에“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나타난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나병을 치유할 수 있는 희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하 5장 2절~3절에 기록하기를“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한 여자아이가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부 아이가, 화려함 가운데 나병으로 괴로워하는 주인 에게 희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도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 예수님을 의지하고 섬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식입니다.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주는 소리,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소리, 지옥 갈 사람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는 소리가 복음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사를 만나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확신 있는 소식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교회, 내가 예배드리면서 깨달은 유익한 것을 이웃에게 말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엘리사가 바로 우리 주님의 모형이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전해야 됩니까?“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문제가 해결 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 기쁨과 평안을 잃은 자들,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예수님이 평안이요, 안식이요, 길이요, 인생의 해답”임을 확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무속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8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목사의 10배가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왜 땅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영혼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말씀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가 개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전도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말씀하시기를“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구원받는 역사가 있습니다. 만일 나아만 장군의 집 개집종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나아만 장군은 일평생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면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면 죄악과 힘겨운 삶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부하시기를“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하셨습니다. 

    둘째,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 하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고자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열왕기하 5:11)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12절에“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 가려했습니다. 

    그때 동행한 신하들이 권면하기를“장군이여 당신이 나병을 고치러 왔으면 이것보다 더 한 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고 그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을 받아들인 나아만 장군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고 나왔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문둥병은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어떻게 치유를 받았습니까? 나아만이 11절에 말한“내 생각”이란 말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내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데에 장애물이었습니다.“내 생각, 내 상식, 내 경험”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마침내 장애물인 자신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토록 나병환자로 고통 속에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명적인 장애물이“내 생각”이란 것입니다.“내 기준,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면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고 또는 절망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도“내 생각, 내 방법,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무엘상 23장 2절~4절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과 싸울 때에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하나님, 블레셋을 치리이까 말리이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르고“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내 아집”을 벼리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말씀에“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 결과 어린아이 살처럼 치유가 되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결국은 순종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과 응답의 배후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고 응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온 천하가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부잣집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극히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떡을 구하자 과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 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때 엘리야가 다시 불쌍한 과부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이 말에 사르밧 과부는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기록하기를“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끝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기사가 있습니다. 
    고기잡이가 직업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 경우 상식에 비춰볼 때 순종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것이 직업인 전문가이고, 예수님은 내륙지방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신 분이므로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더욱이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히는 것이 상식인데, 간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물고기를 낮에 잡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라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5:5-6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 상식에 벗어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누가복음 5:6~7)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이사야 55:8~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왜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까요? 
    순종은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죽은 믿음의 사람 즉 순종이 없는 사람,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이 무엇입니까?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약 100년 전 이집트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그만 어떤 사람이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습니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에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수분과 온도만 적당하면 3천년이 지났어도 싹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 밭에 심겨진 씨앗의 싹을 틔우는 습도와 온도는 순종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믿음 즉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이고, 순종의 열매가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 경험,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더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고뇌와 고통과 불안과 평안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포장된 행복, 만족이 없는 소유, 끝없는 불만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아만처럼 “내 생각”을 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내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내 방법의 올무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이 장애물이 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치유됨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 방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아만 장군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제가 해결되었던 나아만 장군의 결단과 경험이 우리의 결단, 우리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5장 요약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받습니다(5:1-9).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나아만은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됩니다(5:10-14).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열왕기하 6장 요약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아람 군대의 동선을 미리 알려줍니다(6:8-10).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군의 눈을 멀게 하고, 사마리아로 이끌어 그들을 살려 보냅니다(6:18-23).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지만,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6:24-33).

    열왕기하 7장 요약

    엘리사는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예언합니다(7:1).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전하자,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물자를 얻어 기근에서 벗어납니다(7:5-16).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반전됩니다.


    영적 여정 / 믿음, 희망,사랑

    영적 여정의 단계들을 구분하려 시도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50년경)였다고 여겨진다.
    그는 영성 생활의 이상을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관상을 통하여, 이어서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과 평정을 실천함으로써 이러한 참된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단계들에서 각각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첫 단계에는 믿음으로 열광을 억제하고 두려움으로 악을 피해야 하며
    둘째 단계에서는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해야 하고
    셋째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한 카시아누스(360년경-435년)도 이와 유사하게 믿음, 희망, 사랑의 차이를 통하여 세 단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믿음을 통한 두려움은 노예들의 속성이고
    희망은 보상을 받으려는 노력의 속성이며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 여정에서 차례로 믿음, 희망, 사랑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사랑의 진보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년) 사랑을 중심으로 여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단계들을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완덕의 길을 시작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면서 하느님을 찾게 되고, 다음으로는 하느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년) 역시 영적인 삶의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 실천, 관상, 신학으로 구분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위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6세기 초 )도 신비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단계를 정화, 조명, 일치의 상승적 단계들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정화 단계는 죄와 싸우는 단계이고, 조명 단계는 덕을 실천하는 단계이며, 일치 단계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신비 체험을 하는 단계이다.

    ​다른 예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누가 9:23)라는 말씀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완덕의 첫 단계인 자기희생과 포기를 뜻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둘째 단계인 적극적인 덕행 실천을 뜻하며.
    하느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내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일치의 길을 뜻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로 세 단계를 구분하는데,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와 같이 사랑을 완덕의 핵심으로 여긴다.
    어떤 존재자의 완성이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할 때, 사랑만이 인간을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덕에 이르는 세 단계에 관하여 그는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내몰아가는 자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죄를 벗어버리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삶을 시작하는 초보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 어떻게 하면 선에 더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을 다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진보하고자 하는 자들의 일인 것이다. ... 세 번째의 단계로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하느님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완성된 자의 일인 것이다."

    영적인 삶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세단계는 정화-조명(빛)-일치 또는 초보자-진보자- 완성자의 단계들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정들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의 영적 안에서도 이와는 전혀 다른 순서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녀 소화 데레사의 경우 일찍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합일을 맛본 후 더 늦은 시기에 오랜 기간 동안 어둠을 겪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는, 영적인 진보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시기에는 영적인 퇴보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저자들은 "여러 단계들의 연속을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고 신적인 시련과 은혜, 위로와 실망의 교차"로 그 여정을 이해한다.


    "죽음"과 관련된 성경 구절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네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5:5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출애굽기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시니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레위기 20:9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민수기 6:6

    그가 여호와께 바치는 구별된 자로 있는 모든 날 동안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여호수아 23:14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사사기 16:30

    삼손이 이르되 나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더라.

    룻기 1:16-17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열왕기상 19:4

    자기는 광야로 들어가 하루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역대하 32:3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자손들이 다윗의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고.

    욥기 14:14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내가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고 내게 임할 변화(부활)를 기다리겠나이다.

    욥기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피부가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49: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리로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전도서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레미야 31: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이 있을 것임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호세아 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을 던질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정의와 원인

    1. 죽음의 정의

    성경에서 죽음은 영적·육체적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체적 죽음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상태이며(전도서 12:7),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리킵니다(에베소서 2:1).
    죄의 결과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로마서 5:12), 모든 인류가 이에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죽음의 원인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온 결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길 때 영적·육체적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창세기 3장).

    • 죄의 삯 :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며(로마서 3:23), 이로 인해 죽음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3.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

    성경은 죽음을 이후의 심판과 연결짓습니다.

    • 육체적 죽음 이후의 심판 : 히브리서 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 요한복음 5:29에 따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생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의 승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이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 예수님의 부활 : 고린도전서 15:54-55에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되리라...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선포하며 부활의 승리를 찬양합니다.

    • 영생의 약속 : 요한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5. 성도의 죽음에 대한 위로와 소망

    성경은 성도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 천국 소망 : 빌립보서 1:21에서 바울은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조합니다.
    • 영원한 안식 : 요한계시록 21:4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라고 말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약속합니다.

    6.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회복

    성경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영적 회복 : 에베소서 2:4-5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짐을 설명합니다.
    • 복음의 능력 :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7. 결론

    성경은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닌, 심판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영적 여정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주어집니다.
    성도들은 이 소망을 통해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4월 24일(목) 열왕기상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1:4) 6. 16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
    Therefore this is what the LORD says: 'You will not leave the bed you are lying on. You will certainly die!' " So Elijah went.

    열왕기하 1장 요약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블레셋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의 회복 여부를 묻습니다(1: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막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1:3-4).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하시야엘리야를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이 군사들을 삼킵니다(1:9-12).
    결국 아하시야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습니다(1:17).

    열왕기하 2장 요약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며, 엘리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2: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요단강을 가르고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2:14-15).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3장 요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모압 왕 메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입니다(3:5-7).
    엘리사는 이들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예언하고, 전투에서 물 공급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3:16-20).
    그러나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제사를 드리며 저항합니다.

    열왕기하 4장 요약

    엘리사는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을 비롯해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4: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독이 든 국을 해독하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하나님의 공급과 구원을 보여줍니다(4:32-44).
    이로써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속에서 크게 존경받게 됩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You will certainly die!)(1:4, 6. 16)

    열왕기상하는 원래 한 권의 책입니다.
    본문은 아하시야가 중병에 걸렸을 때 블레셋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의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알세붑을 헬라식으로는 "바알세불"이라고 합니다.

    1절에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한 나라의 왕이 바뀌면 조공을 바치던 주변국들이 정치적인 독립을 꿈꾸며 바치던 조공을 철회하고 새 왕에게 항거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례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즉위한 왕은 이런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이전 왕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과 정복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3번이나 승리한 아합이 죽자, 북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던 모압이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3:4-5에 의하면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이 이렇게 배신한 것이 오직 아합이 죽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했을 때, 주변국 중에는 조공을 철회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주변국 중에서 한 나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이 살아있을 때처럼 이스라엘을 섬겼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잠잠했던 것일까요?
    성경은 그 해답을 솔로몬이 하나님만을 섬겼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주의 종에게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악한 대적을 막아주시고, 이길 힘과 용기를 주시고, 때로는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든든히 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는 세계에도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불의에 빠졌을 때, 여지없이 세상에 제국들이 일어나고 불의가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서면 세계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죄에 빠지게 되면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신실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절 함께 읽습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왕궁의 다락 난간은 왕궁의 가장 높은 지붕 근처에 만들어 왕의 휴식 장소나 명상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0:12에 솔로몬 왕도 이같은 난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시야가 이러한 난간을 거닐다가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어떻게 난간에서 떨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앞선 열왕기상 22:52-53에 기록된 그의 교만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낮추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51-53
    유다 왕 여호사밧 제 십 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아비의 과 그 어미의 과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기를 그 아비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기도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옵소서!
       - 깨닫는 은혜를 내려주소서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언 28:5) 

    그런데 그는 자기의 병이 나을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 에그론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그가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다급하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파리들의 주’라고 불리는 파리의 형상을 한 우상 바알세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곤충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해충입니다.
    그런데 에그론 사람들은 이러한 파리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고 여기에 아하시야도 동참한 것입니다.
    파리에게 자기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를 묻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태양과 달과 별과 바다를 섬기고 바위와 나무와 동물들을 섬깁니다.
    심지어 개구리를 섬기고 뱀을 섬기고 몸에 붙어사는 이를 섬기기까지 합니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열 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동물들도 다 애굽의 우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굉장히 지혜롭고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자기들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만물, 그중에서도 파리, 개구리, 뱀,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신이라고 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과연 이러한 어리석은 우상 숭배에서 자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4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가 자신의 병의 치유 여부를 묻기 위해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하나님께서 그 사자에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하시야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진노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들의 대적 블레셋의 우상 바알세붑을 찾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농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 아합의 삶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상태였습니다. 8절에 그가 엘리야의 옷차림만 듣고도 알아본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악행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크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악인들이 그의 죄로 인해 멸망하기보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겔 33:11).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마 12:20). 그럼에도 아하시야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죄가 너무 무겁고 커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아하시야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일, 아하시야가 회개했다면 병을 치유받게 되는 것은 물론 다른 큰 은혜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짓밟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바알세붑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멸시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멸시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긍휼 없는 심판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히 10:28-29).

    예수님께서도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2:31-3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실 때 믿음의 자리에서 감사로 받을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알세불은 누구인가요?

    바알세불은 바알세붑의 헬라어식 이름입니다.
    바알세붑은 구약시대에 에그론이라는 고대 블레셋 도시에서 숭배된 이방 신으로 “파리 대왕”을 뜻합니다(열왕기하 1:2).
    고대 블레셋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금으로 된 파리 형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블레셋 시대 이후로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헬라어 신약성경에 따라 “똥의 대왕”을 뜻하는 “바알세불”로 바꾸었습니다.
    파리의 공격으로부터 구제 받기 위해 숭배했던 파리의 신을 딴 이름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알세붑이 향후 바리새인들에게 지독한 경멸의 이름이 된 “오물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알세붑은 특히나 경멸받는 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유대인들에 의해 사탄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알세불은 구약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의 이름인 “바알”과 고귀한 집을 뜻하는 “세불”로 나뉠 수 있습니다.
    두 단어를 합쳐서 악마들의 신인 사탄을 위한 이름을 만든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10:24-25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최초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마가복음3:22; 마태복음12:24)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향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9:34).

    마태복음 12:22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다 놀라 “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12:23-24).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깨달은 무리와는 정반대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그 어떤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초월적인 일을 하셨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지만, 그 힘의 원천을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마는 순수한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중심적인 교만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부정하지 못할 지라도 예수님의 힘의 원천이 악마들의 신인 바알세붑의 악한 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은 바알세불과 현대의 크리스천들의 연관성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사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하십니다(마태복음 10:7).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10:17,22)고 하시고, 이어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태복음10: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탄이라고 부른다면 그분의 제자들 역시 사탄이라 부를 것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한복음15:18-21).


    바알세불

    히브리어로는 'בעל זבוב‎(Baʽal Zebûwb, 바알 제부브)'
    라틴어로는 'Beelzebūb(베엘제부브)' 또는 'Baal-Zebul(바알제불)'로 음역되었다.
    한글 표기는 다양한데,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표기와 히브리어를 기초로 한 20세기 초 역본에 근거하는 개신교 표기, 이 밖에 영어식 표기, 프랑스어 표기, 일본어 서적을 중역하며 들어온 표기,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의 표기 등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알제붑, 바알제불, 베엘제붑, 베엘제불, 바알세붑, 바알세불, 벨제붑, 벨제뷔트, 베르제뷰트, 베르제브브, 베르제부부, 벨제브브, 벨제부브, 벨제부르 등 거의 등장할 때마다 다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 가운데 베르제브브, 베르제부부, 벨제브브, 벨제부브 등은 전부 일본의 가타카나 표기인 '베루제브브(ベルゼブブ)'를 중역하다 수입된 것으로, 라틴어 베엘제부브의 가나 음차에서 유래한 표기이며, 베르제뷰트, 벨제뷔트 등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기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본 문서의 제목은 대한민국의 주요 교단에서 채택한, 공인된 한국어 성경의 표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다.

    성경의 바알(Baal)

    I. 구약성경에서 이것은 페니키아 사람들 특히 두로 사람들의 우상을 가리킨다.

    바알 숭배는 아스다롯 숭배와 함께 히브리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마리아에서 엄숙한 의식과 함께 도입되었다(삿 6:25-32; 왕하10:18, 28). 바알의 복수인 바알들(Baalim)은 바알의 형상들을 의미했다(삿 2:11; 10:10).
    엣바알, 여룹바알, 한니발 같은 이름들을 통해 바알 숭배가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지역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빌론 사람들은 이것을 벨이라 불렀다(사 46:1; 렘 50:2; 51:44).
    바빌론의 바알 숭배는 유명한 바벨탑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탑의 꼭대기 방은 별을 관측하고 그 기록들을 담아 둔 곳이었다.

    동방의 점성술에서 바알 숭배는 곧 천체 숭배를 뜻하였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바알이 태양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행운의 신 주피터라 불렀다.
    그래서 주피터는 비너스와 함께 사람의 행운을 주관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그 관계가 바알과 아스다롯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바알의 형상들과 전들은 대개 높은 곳에 있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두 뜰에 하늘의 군대 특히 아스다롯을 위한 제단들을 세웠다(왕하 21:5-7).
    예레미야는 지붕에서 바알에게 경배를 드린 유대인들에게 경고를 주었으며(렘 32:29) 요시야는 아하스가 자기의 궁전의 난간에 세운 이런 제단들을 파괴시켰다(왕하 23:12).
    또 고대 사람들은 종종 인신 제물을 바알에게 드리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드린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을 책망하였다(렘 19:5).

    바알, 아세라, 바알세불, 아스다롯

    • 바알(בּעל)

    바알'은 당시 모압과 아모리인들이 섬기던 남신(男神)으로서 태양을 상징한다(레 26:1-3).


    모압은 여러 우상들을 섬겼는데, 그 중 주신(主神)으로 '바알'(Baal)을 섬겼다.
    이 '바알'은 '주인'이란 뜻으로서(호 2:16), 주로 생산과 다산(多産)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이 바알 숭배와 관련하여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groupsex), 인신 제사 등의 음탕하고 끔찍한 행위가 곁들여졌던 것이다.
    특히 바알 숭배자와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은 바알 제사의 절정이며 또한 바알 숭배자들의 의무였다.

    *참고 /  히브리어 '바알'은 본래 '주인', '남편', '소유자'란 뜻인데, 때로는 '우두머리'(a chief man) 또는 '지도자'(a leader)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바알의 음란한 종교에 처음 빠진 것은 출애굽후 광야 생활을 할 때 발람의 꾀에 빠졌을 때이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두려워 메소포타미아의 거짓 예언자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결국 그는 이스라엘 축복하게 된다.
    발람은 예언 직후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아(신 23:4)로 가지 않고 자기를 발람에게로 인도해 왔던 미디안 장로들과 함께 미디안 땅으로 갔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는 사악한 꾀를 발락에게 일러줌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저주(심판) 받도록 했다(계2:14).
    발락과 헤어진 발람은 자기의 예언이 이스라엘에게 길(吉)함을 알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찾아가 그 예언의 의미를 풀이해 준뒤, 발락이 보장해주었을 부(富)와 명예를 모세에게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 격분한 그는 이스라엘에게 보복하기 위해 미디안 족속에게로 가서 사악한 꾀를 베풀어 이스라엘을 범죄케 했다(결국 그는 이 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발람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행한 음모는, "모압 여자들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음행"하게 한 것이다.
    모압여인들은 우상 승배 권유에 앞서 음행(淫行)을 미끼로 이스라엘남자들을 유혹하였으며, 그후에 자연스럽게 그들을 우상 숭배로 미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미인계(美人計)를 통한 우상숭배 유도 계획은 발람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후일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민 31:16; 계2:14).
    즉 이같은 계획(바알브올 사건)은 발람의 꾀에 미디안과 모압이 연합하여 주도 면밀하게 시행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의 비극성은 후일 사도 바울에 의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고전 10:8).
    실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유기적인 것으로, 한쪽의 부패는 곧 전인격의 타락으로 발전한다. 그런의미에서 하나님은 영육의 순결을 동시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출 20:3-5,14).

    바알 숭배와 관련하여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groupsex), 인신 제사 등의 음탕하고 끔찍한 행위가 곁들여졌던 것이다. 특히 바알 승배자와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은 바알 제사의 절정이며 또한 바알 숭배자들의 의무였다.

    아마 주도 면밀한 계획하에서 모압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주로 유혹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올무에 빠뜨리는 일에 모압과 미디안이 긴밀히 연락, 협조했던 것 같다.

    이 일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게 했다. 하나님은 거룩한 의미에서 '질투하시는 분'(출 20:5;수24:19)으로서,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버리고 우상의 노예로 전락했을때 당신의 그거룩한 속성상 극열한 진노로 다가오신다.
    이는 역설적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백성을 얼마만큼이나 사랑하시는가를 대변해 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70인역(LXX)은 이를 '파라데이그마티제인' 곧 '공개적으로 수치틀 주다', '드러내다'로 번역하였다.
    한편 '태양을 향하여'란 말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우상 바알이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에 본절과 같이 형벌을 가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바알을 섬긴 자들의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이시기위해 그들이 섬긴 그 '태앙을 향하여' 처형케 만드셨고, 그 결과 우상 숭배자들의 처참한 결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22:41).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을 거울로 삼지 않고 가나안 정착후에도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깊숙이 빠져즐었다.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 전역에 퍼뜨린 장본인은 이세벨이다.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었다(출 22:18;신 18:10, 11).

    •바알세붑

    바알과 더불어 함께 알아야 할 것은 바알세붑이다.
    '바알세붑'(Baal-zebub)에서 '바알'은 '주'(Lord), '소유주', '남편' 등을 의미하며,
    '세붑'(제붑)은 '파리, 날벌레'라는 뜻이다(사 7:18; 전 10:1).
    그러므로 '바알세붑'은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라는 뜻이 된다.
    혹자(G. Rawlinson)는 '바알세붑'을 '베엘 사멘'(Beel-Samen)과 동일한 신으로도 보았다.
    '바엘 사멘'은 베니게인(Phoenician)들이 섬기던 '하늘의 주'이다(풀핏주석). 그러나 이것은 어원적인 자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70인역(LXX)은 '바알세붑'을 '바알 뮈안' 또는 '데온 뮈안'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해 혹자는 '데온 뮈안'을 파리 형상으로 된 신으로서 질병을 보내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지켜 주기도 하는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약에서는 '제붑'이 '제불'(Zebul)로 읽혀지고 있는데(마10:25), '제불'은 '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세불', 즉 '바알 왕'이라는 칭호가 '바알세붑'의 본래의 칭호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바알세붑은 후대 랍비들에 의하여 '바알세벧'(Ball-Zebel)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분토(糞土)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왕이라는 뜻의 '세불'이 점차 '세붑', '세벧' 등으로 불리워진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심어 주려 한 탓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후에 '바알세불'은 여호와의 적대자인 사단의 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마 10:25; 막 3:22; 눅11:1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 아세라
    '아세라'(Ashera)는 본래 두로(Tyre)의 신이었으나 후에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들, 특히 페니키아,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하게 된 여신(女神)이다. 가나안 최고의 신 '엘'(El)의 아내이자 풍요와 다산(多産)의 신 '바알'(Baal)의 모신(母神)이기도 한 아세라는 성교(性交)와 전쟁의 신인데, 아낫(Anath), 아스다롯(Ashtaroth)과 더불어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아세라는 주로 나무에 그 상(像)을 새겼으므로 단순히 '목상'으로만 불리우기도 하였다(레 26:1; 왕하 10:26).


    아세라는 '바알'을 비록한 여타 가나안 70우상의 모신(母神)이기도 했다.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적으로 등장한다.

    '바알' 제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아세라 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두 우상의 숭배에는 필연적으로 성적 타락이 동반되었다(출34:13). 따라서 성경은 종종 바알과 아세라를 함께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다(삿6:28; 왕하23:4). 한편 아세라 상은 흔히 푸른 나무 아래나 곁에 세워졌는데(왕상14:23; 렘17:2), 주로 나무에 그 상(象)을 새겼으므로, 단순히 목상(木象)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다(레26:1; 왕하10:26).

    • 아스다롯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이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 여신 숭배와 관련된 진흙상들이 출토된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유방과 음부를 두드러지게 만든 소규모의 우상으로,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당시에 이 아스다롯 숭배가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삿 2:13; 삼상 7:3; 31:10

    한편, 이스라엘이 가나안 신을 섬기려면 반드시 그 종교의 속성상, 이들 종교의 여사제(女司祭)는 공인된 창기였으니, 신에게 제사드리러 나오는 남자는 곧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그러한 신을 대리한 이들 여사제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곧 신과 접촉하는 행위(예배)를 저질렀음을 뜻한다.

    • 가나안의 다른 신들
    *왕하 17: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다르닥(Tartak)은 아람 이주민들의 신으로서 숭배된 여신 아타르카티스(Atargatis)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은 라스 샤므라 사본들에 나오는 앗타르(Athar)와 아스다롯과 시리아인의 여신 아낫(Anath)을 혼합한 복합적인 존재이다.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은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것으로 보아 이 신은 몰록 종교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절 주석 참조. 그래서 혹자는 이 신들이 스발와임의 몰록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신이 태양 신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아무튼 이 가운데 아남 멜렉(Anammelech)은 일반적으로 '아누'(Anu)라는 메소포타미아의 태양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Hobbs).

    닙하스(Nibhaz)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된 신들 중 숙곳브놋은 암탉의 형상을, 네르갈은 수탉의 형상을, 아시마는 염소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닙하스는 개의 형상을, 아드람멜렉은 노새의 형상을, 아남멜렉은 말의 형상을 각기 띠고 있었다 한다(플핏, 메튜헨리 주석).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러한 우상들과 더불어 또 여호와 하나님을 혼합하여 섬겼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했다는 것은 유일 신 하나님으로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섬겼다는 의미다.

    •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질투의 하나님" - 이 표현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20:5).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에게 애정과 헌신을 바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20:5;신32:16;수24:19,20).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 고유한 영광이나 찬양이 자신의 피조물인 다른 대상에게 엉뚱하게 돌아갈 때, 그리하여 그 백성의 영혼이 헛된 우상에게 빼앗길 때, 당신의 속성상 우러나오는 그러한 공의로써 그러한 행위를 질투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본절에서 다시금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다시는 금송아지 숭배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출 34: 15), 12절 내용의 재차 반복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의 언약 체결을 강하게 금지하시고 있는 까닭은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백성이므로 또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이나 의무를 지게 되는 언약을 이중으로 맺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언약을 맺게 되면 서로 상대방의 신을 인정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대의 관례였으니 하나님께서 그처럼 우상 숭배와 직결되는 가나안인과의 언약 체결을 금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6에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은 모든 인류에 죽음을 들여온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불순종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내려졌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6-17).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너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죽음으로 시작되어, 점진적인 육체의 노쇠로 생애에 걸쳐 지속되며, 결국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이 나는 지속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장의 영적 죽음은 아담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아담의 행동 (창세기 3:8)은 죄에 대한 비난을 여자에게 돌리려 했던 행동과 마찬가지로 (창세기 3:12) 그러한 분리를 입증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영적 – 그리고 결국은 육체적인 – 죽음은 아담과 하와에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은 모든 인류를 그의 죄로 끌어들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12에서 아담의 죄를 통해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6:23은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에, 죄인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당연한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하지만 단지 물려받은 죄만이 영적 죽음의 원인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사악함 또한 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가르칩니다 (1절). 이것은 영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 이전에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5절, 또한 로마서 5:8 참조). 골로새서 2:13은 이 진리를 되풀이합니다.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는 죄로 죽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요한복음 15:5), 하나님의 이끄심 없이는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천성적인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7-8절). 타락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행동을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중생은 오직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중생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고 (에베소서 2:5),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됩니다 (디도서 3:5). 요한복음 3:3, 7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이것은 마치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으므로, 절대 진정으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당신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36, 17:3).

    죄는 사망으로 끝납니다. 그 사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믿음은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vs. “죽을까 하노라” – 하와를 위한 변명

    1. 하와의 문제적 발언

    말 한번 했다고 그렇게 비난 받은 사람이 하와 말고 또 있을까요?
    하와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말을 합니다(창 3:2-3, 창 4:1).
    첫 발언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3, 개역개정)”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창 2:17)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면,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둘 다 생명나무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보더라도,
    1) “반드시 죽으리라”에서 “반드시”가 빠져 있고,
    2)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데 하와가 임의로 첨가했으며,
    3) “죽을까 하노라”라는 표현으로써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말씀을 상대적이고 온건한 표현으로 왜곡하거나, 혹은 가능성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하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의심의 영”으로 가득했고, 이렇게 말을 잘못 옮기는 것은 인류 최초의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여자들의 고질적인 질병이며,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원문 해석과 비교

    문제가 되는 본문의 히브리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17 – 하나님의 말씀

    וּ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לֹא תֹאכַל מִמֶּנּוּ כִּי בְּיֹום אֲכָלְךָ מִמֶּנּוּ מֹות תָּמוּת

    “그러나 좋음(선)과 나쁨(악)의 지식(알게 하는)의 나무에 대해서는, 너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개역한글 “정녕”)”라고 번역한 부분은 부사로 “반드시”란 말이 쓰인 것이 아니고, “너는 죽을 것이다 (תָּמוּת)”라는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 (מוֹת)이 동사 앞에 쓰인 형태로,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적 용법”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3 – 하와의 말

    וּמִפְּרִי הָעֵץ אֲשֶׁר בְּתֹוךְ־הַגָּן אָמַר אֱלֹהִים לֹא תֹאכְלוּ מִמֶּנּוּ וְלֹא תִגְּעוּ בֹּו פֶּן־תְּמֻתוּן

    “그러나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면.”

    이 두 문장은 많은 표현들이 서로 다릅니다.

    첫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직역: 좋음과 나쁨의 지식의 나무)”라는 표현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만지지 마라”는 표현은 2장의 하나님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셋째,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은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주어(인칭-성-수)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의 동사와 인칭어미는 2인칭 남성 단수(“너는”)인데 반해, 3장의 하와의 말은 2인칭 복수(“너희는”)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들을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비추어 살펴보자면,

    우선, 하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강한 명령을 결코 완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하와의 פֶּן־תְּמֻתוּן(펜-테무툰)을 “죽을까 하노라”라고 번역한 개역성경에 있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פֶּן־(펜-)은 “죽을 지도 모른다, 혹은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나 가능성의 뜻이 아닙니다.
    “죽지 않기 위하여, 혹은 죽지 않으려면”의 뜻으로 영어로 주로 “lest – (should)”로 번역되는 접속사입니다 (참고: 공동번역/우리말성경 “죽지 않으려거든”; 새번역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하와의 표현인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פֶּן־תְּמֻתוּן 펜-테무툰)”라는 말은 부정사 절대형을 사용한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 그 강도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썼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거 먹으면 죽어”라는 말이 “죽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라는 말과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요. 이 두 문장 사이에 어떤 문장이 더 강하고 어떤 문장이 더 약한지, 그 세밀한 뉘앙스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경 히브리어의 원어민들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 어느 누구 하나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여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대답은 아마 사람들마다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정사 절대형이 들어간 표현이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만한 강세를 더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고 말하면 100퍼센트 죽는 "강한 명령/단정"이고, 그냥 (부정사 절대형 없이) "죽으리라"고 말하면 살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있는 "약한 명령/단정"이 되나요? 그렇다면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명령들은 부정사가 사용되지 않은 약한 명령이라 가끔 어겨도 괜찮은가요?

    게다가 “만지지도 말라”는 하와의 첨가는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보다 더 강하게 하면 했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와의 "죽을까 하노라"가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면서, 왜 "만지지도 말라"가 명령의 강도를 더 강하게 하는 사실은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까"로 번역된 תְּמֻתֽוּן(테무툰)의 마지막 자음 “n(눈)”은 “energic-nun”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전통적인 문법적 시각에서 동사의 의미를 강조할 때 쓰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대의 비교셈어학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고어체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3. 하와 발언의 진정한 왜곡

    두 문장의 차이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앞에서 말했지만,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주어”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의 하나님의 명령은 2인칭 남성 단수, 즉 아담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바로 그 앞 절 2장 16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함으로써, 2장 16-17절의 명령이 아담에게(만?) 주어지는 명령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하와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서야 “남자가 홀로 있음이 좋지 않다(18절)”고 하시며 여자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하와는 2장 17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하와 혼자만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따로 전달하지 않았다면 분명 아담이 하와에게 전했을텐데, 전달 시에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형평에 맞을 듯 합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자면, 2장 17절의 명령은 하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2장의 “너”를 “너희”로 바꾸면서 남자에게 주는 명령을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한다면, 가장 커다란 왜곡의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자기 남자에게 주는 명령에 자신까지 포함시킨 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3장 11절에서 하나님이 “네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너는 먹었느냐”라는 문장에서 다시 2인칭 남성단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 17절의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네가 먹었은즉” 역시 2인칭 남성단수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와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사실만 문제가 됩니다.

    4. 정말 여자가 문제인가?

    정말 여자가 문제일까요?

    말을 잘못 옮기는 성향이 여성의 DNA에 흐르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여자에게 일타쌍피로 책임을 전가하는 찌질함이 모든 남성의 DNA에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자기 남자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한, 그리고 그 여자를 자기에게 준 신에게까지 연대책임을 물어 면피하려고 한 인류 최초의 찌질남이, 그리고 자기들이 번역해 놓고 그 번역을 빌미로 지난 2천년간 여성들을 비난해온 찌질남의 후예들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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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하 정의

    열왕기하는 구약 성경의 역사서로,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몰락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행한 결과,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특히 선지자들의 활동이 중심에 있으며,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이 하나님의 경고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열왕기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백성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적 개입이 어떻게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기록입니다.


    열왕기하 1장 요약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블레셋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의 회복 여부를 묻습니다(1: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막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1:3-4).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이 군사들을 삼킵니다(1:9-12).
    결국 아하시야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습니다(1:17).

    열왕기하 2장 요약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며, 엘리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2: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요단강을 가르고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2:14-15).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3장 요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모압 왕 메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입니다(3:5-7).
    엘리사는 이들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예언하고, 전투에서 물 공급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3:16-20).
    그러나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제사를 드리며 저항합니다.

    열왕기하 4장 요약

    엘리사는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을 비롯해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4: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독이 든 국을 해독하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하나님의 공급과 구원을 보여줍니다(4:32-44).
    이로써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속에서 크게 존경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 요약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받습니다(5:1-9).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나아만은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됩니다(5:10-14).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열왕기하 6장 요약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아람 군대의 동선을 미리 알려줍니다(6:8-10).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군의 눈을 멀게 하고, 사마리아로 이끌어 그들을 살려 보냅니다(6:18-23).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지만,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6:24-33).

    열왕기하 7장 요약

    엘리사는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예언합니다(7:1).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전하자,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물자를 얻어 기근에서 벗어납니다(7:5-16).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반전됩니다.

    열왕기하 8장 요약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7년간의 기근을 경고하고 피신하게 합니다(8:1-2).
    기근 후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받고, 엘리사의 기적이 왕에게 알려집니다(8:3-6).
    한편,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통해 병의 회복 여부를 묻고,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8:7-15).

    열왕기하 9장 요약

    엘리사는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지시합니다(9:1-6).
    예후는 아합 왕가를 제거하며, 이세벨을 처단하고 아합의 예언된 심판을 이행합니다(9:22-3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다.

    열왕기하 10장 요약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근절합니다(10:18-28).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하여 온전한 개혁에는 실패합니다(10:29-3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열왕기하 11장 요약

    아달랴가 유다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가의 자손들을 살해하려 하지만, 요아스가 구출되어 성전에서 보호받습니다(11:1-3).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역을 일으켜 아달랴를 처단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며,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합니다(11:12-20).

    열왕기하 12장 요약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성전 수리를 진행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통치합니다(12:4-16).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는 신앙에서 멀어지고,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인해 암살당합니다(12:20-21).

    열왕기하 13장 요약

    여호아하스와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아람의 억압이 계속됩니다(13:3-7). 엘리사가 죽기 전 여호아스에게 승리의 상징으로 화살을 쏘게 하고,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13:14-19).

    열왕기하 14장 요약

    아마샤 왕은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교만하여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합니다(14:7-14).
    그의 후계자인 웃시야는 통치 초기에 강력한 왕국을 이루지만, 이후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열왕기하 15장 요약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여러 왕들의 짧은 통치와 반란으로 혼란에 빠집니다(15:8-31).
    특히 북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암살과 정권 교체로 인해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며,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16장 요약

    유다의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변형하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16:7-10).
    이는 유다 왕국의 영적 타락을 심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열왕기하 17장 요약

    북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17:6). 저자는 이 멸망의 원인을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로 설명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17:7-23).

    열왕기하 18장 요약

    히스기야 왕은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앗수르의 위협에 맞섭니다(18:4-7).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18:28-37).

    열왕기하 19장 요약

    히스기야는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앗수르의 협박을 올려드리며 간구합니다(19:1-4).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앗수르가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전멸시킵니다(19:32-36).

    열왕기하 20장 요약

    히스기야가 병에 걸리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연장받습니다(20:1-6).
    그러나 바벨론 사절들에게 국고와 성전을 보여준 후, 이로 인해 바벨론 침략의 예언을 받습니다(20:12-19).

    열왕기하 21장 요약

    므낫세아몬 왕은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를 영적으로 타락시킵니다(21:2-9).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멸망을 예고하시며, 결국 아몬은 신하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21:11-24).

    열왕기하 22장 요약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22:8-13).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고, 우상 숭배를 제거하며 언약을 갱신합니다(22:14-20).

    열왕기하 23장 요약

    요시야는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며, 모든 이방 신전과 우상들을 철저히 파괴합니다(23:21-25).
    그러나 유다의 영적 부패는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결국 요시야는 전투 중에 전사하게 됩니다(23:29-30).

    열왕기하 24장 요약

    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점차적으로 무너집니다(24:1-4).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보물들이 약탈당합니다.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으로 즉위하지만, 바벨론의 압박 속에서 반란을 꾀합니다(24:17-20).

    열왕기하 25장 요약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립니다(25:1-4).
    시드기야는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25:6-7).
    성전과 왕궁은 불타고,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서 석방되며 하나님의 회복의 희망이 암시됩니다(25: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