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의 상징에 대해서 아시나요?
비둘기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조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기는 비둘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비둘기의 상징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평화의 상징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20세기 초반부터 국제적인 군비 경쟁이 격화되며 전쟁이 불어난 시기에 비둘기의 상징적 의미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49년에 설립된 유엔(UN)에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유엔 로고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사랑과 충성의 상징
비둘기는 사랑과 충성의 상징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는 성경에서부터 비롯된 전통적인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홍수 이후에 새로운 세상을 찾기 위해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노아의 방주에 도착하여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사랑과 충성,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미소와 행복의 상징
비둘기는 미소와 행복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비둘기가 매우 온순하고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둘기가 자신이 먹이를 찾아가고 새끼를 낳을 때 매우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에게 근면과 성실함의 모범을 보여주는 동물로도 평가됩니다.
자유와 희망의 상징
비둘기는 자유와 희망의 상징으로도 널리 사용됩니다. 특히, 20세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추구가 대두되면서 비둘기는 이러한 가치들을 상징하는 동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자유와 꿈, 희망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마지막 세상 대전 이후에는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비둘기의 이미지가 활발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종교적 의미의 상징
비둘기는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둘기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도 비둘기는 가족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지며, 프로페트 무함마드가 비둘기를 길이 안내하는 동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운송수단의 상징
비둘기는 운송수단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편지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비둘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세기에는 비둘기 우편이 발달하여 급속한 통신 발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비둘기는 소식이나 메시지의 전달과 관련된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삶의 변화와 성숙의 상징
비둘기는 삶의 변화와 성숙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비둘기가 새끼를 키우고 날개를 펴 나가며, 성숙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둘기가 사랑과 충성, 친화력 등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의 삶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합적으로 비둘기는 평화, 사랑과 충성, 미소와 행복, 자유와 희망, 종교적 의미, 운송수단, 삶의 변화와 성숙 등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자주 사용되는 가치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비둘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는 비둘기가 새끼를 키우며,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며, 날개를 펴 나가는 모습에서 유래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새로운 시작, 변화, 성장 등과 관련된 가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추모와 기념의 상징
비둘기는 추모와 기념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비둘기는 평화와 추모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대중문화에서도 비둘기는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동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인내와 인내력의 상징
비둘기는 인내와 인내력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비둘기가 오랜 시간을 끈질기게 날아다니며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습에서 유래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가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비둘기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와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비둘기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예술 작품이나 문학 작품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이를 통해 비둘기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의 문화와 예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는 12세기 이탈리아의 성인으로, 겸손과 사랑, 평화를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인물입니다. 그의 기도는 ‘평화의 기도’로도 불리며, 신앙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기도문 중 하나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려는 가치관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한글)
주님,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아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영문)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주는 교훈
기도의 전반부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으로 변화시키려는 평화의 도구로서의 간구를 담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자기 중심적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삶, 나눔과 봉사로 이어지는 삶의 가치를 설파합니다.
마지막 문장인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나이다”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평화의 도구가 되라는 초대
기도문의 첫 구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 목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적용 방법:
-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화해를 청하기
- 분노와 미움을 줄이고, 용서하는 자세를 가지기
2️⃣ 사랑과 용서의 실천
기도문의 다음 부분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 적용 방법:
- 비판이나 원망보다는 이해와 용서를 실천하기
- 사랑이 필요한 곳에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다가가기
3️⃣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베푸는 삶 살기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남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적용 방법:
- 먼저 사랑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기
-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공감하는 마음 키우기
전쟁 속에서 빛난 평화의 메시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 속에서도 이 기도문은 희망의 언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16년에는 바티칸의 일간지에서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실렸고, 이후 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대표적인 기도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는데,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이 기도문을 인용한 것은 유명한
사례입니다.
전쟁과 갈등,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대일수록, 이 짧고 간결한 기도문은 그 어떤 연설보다도 강력한 울림을 전했습니다.
평화의 기도가 오늘날 갖는 의미
오늘날 이 기도는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 불교, 심지어 비종교인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영적 선언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봉사 단체,
평화 운동, 치유 모임, 정신적 회복 프로그램 등에서 이 기도문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낭송되거나 노래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기도가 특정 종교 교리를 강요하지 않고, 인간 보편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랑, 이해, 용서,
평화, 기쁨, 희망. 누구나 바라고 지향하는 가치들이기에 이 기도는 종교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줍니다.
📌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삶의 실천 지침입니다.
이 기도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 하루 5분 묵상 실천 방법:
- 매일 아침 또는 저녁,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천천히 읽기
- 하루 동안 실천할 한 가지 내용을 선택하여 적용하기
- 하루를 돌아보며, 실천한 내용을 짧게 기록하기
✝ 마무리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사랑, 용서, 평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기도 : 성 프란치스코 기도의 기원과 의미
"평화의 기도"로 알려진 이 기도문은 널리 사랑받는 기독교의 기도로, 종종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와 연관되지만 실제로 그의 저작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형태의 기도문은 1912년에 파리의 가톨릭 단체 La Ligue de la Sainte-Messe가 발행한 작은 잡지 La Clochette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잡지는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저자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체의 창립자인 에스테르 부케렐(Esther Bouquerel) 신부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겸손과 사랑, 평화를 기원하며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삼아달라는 간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특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널리 홍보되며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서 포용적 언어로 사랑받았으며,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를 장려하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기도문은 평화를 추구하는 상징으로 여겨지며, 여러 저명한
지도자와 작곡가들이 인용하거나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비록 성 프란치스코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의 정신과 가르침을 이어받은
기도문으로 평가받아, 그의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 기도"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Belle prière à faire: (1912년 원문)
Seigneur, faites de moi un instrument de votre paix.
Là où il y a de la haine, que je mette l'amour.
Là où il y a l'offense, que je mette le pardon.
Là où il y a la discorde, que je mette l'union.
Là où il y a l'erreur, que je mette la vérité.
Là où il y a le doute, que je mette la foi.
Là où il y a le désespoir, que je mette l'espérance.
Là où il y a les ténèbres, que je mette votre lumière.
Là où il y a la tristesse, que je mette la joie.
Ô Maître, que je ne cherche pas tant
à être consolé qu'à consoler,
à être compris qu'à comprendre,
à être aimé qu'à aimer,
car c'est en donnant qu'on reçoit,
c'est en s'oubliant qu'on trouve,
c'est en pardonnant qu'on est pardonné,
c'est en mourant qu'on ressuscite à l'éternelle vie.
Prayer of Saint Francis (or Peace Prayer)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bring love.
Where there is offence, let me bring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let me bring union.
Where there is error, let me bring truth.
Where there is doubt, let me bring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let me bring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et me bring your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let me bring joy.
O Lord,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one receives,
it is in self-forgetting that one finds,
it is in forgiving that one is forgiven,
it is in dying that one awakens to eternal life.
교만의 세 유형(다니엘 4: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교만의 세 유형
1. 지적 교만 :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의 우를 범하기 쉽다.
2. 도덕적 교만 : 내가 남보다 더 깨끗하고 더 잘 믿는 것은 좋지만, 정도를 넘어서 교만하게 되면 도리어 자기에게 화가 된다.
3. 권력의 교만 : 느부갓네살 왕
4. 영적 교만 : 발람 거짓 선지자
느부갓네살 왕은 고대 근동 일대를 정복하고 바벨론 나라를 매우 융성케 했다.
정복지의 각 나라에서 똑똑한 청년들을 뽑아서 훈련시킬만큼 뛰어난 리더쉽이었다.
그러나 교만에 빠지고 말았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 : 충고를 듣지 않음
주위의 충고를 듣는 자는 지혜롭고,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충고를 들으면 자존심 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잠언의 곳곳에는 거만한 자에게 충고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
▲천한 자를 세우시는 하나님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단 4:17)
높은 권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세워 주신 것이며,
<천한 자>를 세우신 것임을 늘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사탄은 종종 인간을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아무렴 그래도 내가 이 정도면 대단한 사람이지....'
▲악한 지도자가 세워지는 이유
동로마의 어떤 수도사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악독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나이까?”
“그 보다 더 악독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노라...”
백성이 선하면 선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그를 통해 은혜를 입게 하시고,
백성이 악하면 악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그를 통해 죄 값을 치르게 하신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선하면, 선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가 악하면, 자기 보다 더 악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보내신다.
백성들이 방탕, 방종, 양심을 팔아먹는 일들이 많이 생기면
앞으로 하나님은 선한 왕이라도 강하게 하셔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성도들은 나라의 도덕적 미래를 위해 늘 기도해야 한다.
▲경고는 돌이키라는 싸인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으로 경고를 주신 것은 <돌이키라>는 싸인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이렇게 간언했다.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시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7)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교만을 돌이키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단 4:28)
▲더딜지 모르나 확실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딜지는 모르나 확실하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꾼지 1년 이후에 꿈꾼 그대로 이루어졌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징벌이 더딘 이유는,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회개하고 돌이키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말을 들어보면 안다
교만함은 말로 제일 잘 드러난다.
교만한 사람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늘 아끼고 조심해야 한다.
성인은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네.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모두 선하게 되네.
미더운 사람을 믿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믿으니
모두 미덥게 되네.
성인이 세상에 임할 때는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상 사람들과 마음을 하나로 섞네.
(이에) 백성들 모두 보고 듣는 것을 성인에게 맡기게 되니
성인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보살핀다네.
聖人, 恒无心
以百姓之心, 爲心.
善者, 善之
不善者, 亦善之
得善也.
信者, 信之
不信者, 亦信之
得信也.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 渾心.
百姓皆屬耳目焉
聖人皆孩之. 〔백서본〕
[해설] 지도자가 지녀야 할 포용력에 대해 말하면서 무위정치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지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백성의 바람에 따라서 마음을 쓸 뿐이다.
때문에 성인은 늘 무심하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정사를 너무 각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하지 않은 사람, 미덥지 않은 사람까지 두루 포용하고 수용한다. 그 결과 불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돌아오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신뢰할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백성은 지도자를 신뢰하고, 자신들이 보고 듣는 것을
모두 그에게 맡기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맡기듯이 말이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다〔聖人, 恒无心〕.” 무슨 말인가?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변덕쟁이란 말인가?
성인은 마음이 열려 있다. 때문에 성인은 자기 고집이나 어떤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이는 곧 ‘아상(我相)’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 나는 존귀하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지도자다 하는 아상(我相)이 없으니 우월감도 ‘결연한 의지’도 없다. 백성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살피려고 노력한다. 백성이 원하는 일을 살펴 행할 뿐, 백성이 원하지 않으면 굳이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직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을〔以百姓之心, 爲心〕”뿐이다. 이 때문에 성인에게는 고정된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지도자상과도 어느 정도 통한다.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善者, 善之; 不善者, 亦善之… 〕.”
성인이 지닌 이런 무심(無心)의 태도는 사람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고정된 마음이 없기에 사람을 대할 때도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고 상대방에 대한 분별심 이 없다. 이 사람은 선한 사람이니 좋게 대해주고 저 사람은 불선한 사람이니 무시하자, 또는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신뢰하고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 경계하자 등과 같은 차별과 구분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사물 자체에 맡긴다. 때문에 취함과 버림도 없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긴다.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142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미더운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착한 사람, 또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호의를 베풀지는 않지만 심성이 반듯한 사람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지고 그에 대해 호감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불선한 사람,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호의로 대하고 선하게 대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오직 성인만이 불선한 사람이나 미덥지 않은 사람도 모두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다. 이는 노자에게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報怨以德〕”(63장)는 관용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노자의 이같은 사고는 예수의 생각과도 통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5:46~47〕 태양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두루 비추듯이, 그리고 비가 의로운 사람이나 의롭지 않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적셔주듯이,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구별하지 말고 모두 하나로 끌어안고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노자와 예수의 이런 정신에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선한 사람과 불선한 사람, 미더운 사람과 미덥지 못한 사람이 어디 따로 있는가? 악인도 처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사기꾼도 처음부터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그 내면에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선한 존재들이다. 악을 미워하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더 없이 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이 그러했고, 중세의 카톨릭이 그러했으며, 인도의 브라만계급이 그러했고, 조선 시대의 양반들이 그러했다.143
그러니 성인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불선한 사람이라 해서 혼내기만 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 불신만 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더욱 더 비뚤게 나갈 것이다. 이에 성인은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미덥게 대한다는 것이다. 아니 성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 불선한 사람, 미더운 사람 미덥지 않은 사람의 구분조차 없다. 성인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모두 그냥 ‘사람’으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지 위를 각양각색으로 흐르던 강물과 냇물들도 바다에 이르면 모두 그냥 물이 되듯이, 악인이나 사기꾼도 성인의 품에 깃들면 각자의 마음에 새겨진 ‘결’들을 지우고 그냥 ‘사람’이 될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그를 한결같이 선함과 미더움으로 대해 준 미리엘 주교에 의해 선한 사람으로 변화했듯이 말이다.
“성인이 세상에 임할 때는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상 사람들과 마음을 하나로 섞네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 渾心〕.”
원문의 ‘渾心(혼심)’은 첫 구절의 ‘無心(무심)’과 연결된다. 이는 곧 마음 씀에 있어서 시비나 선악을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때문에 성인은 선하지 않은 사람, 미덥지 않은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포용한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지상의 여러 강물들이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사물 사이에는 피차와 시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를 체득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그 마음 씀이 두루 포용하고 지나치게 이것저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바다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대지 위를 흘러가는 강과 냇물들은 서로 제각각 구별되지만 바다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바다는 이것과 저것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처럼 성인, 즉 지도자가 세상과 하나가 되어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으로 삼게 되면, 백성은 지도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백성들 모두 보고 듣는 것을 성인에게 맡긴다〔百姓皆屬耳目焉〕”는 것은 그만큼 성인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은 성인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인이 듣는 것을 신뢰하고 믿는다. 백성과 위정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믿고 따르듯이 말이다. 이처럼 백성이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믿고 따르면 위정자는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이 최선을 다해 보살피게 될 것이다.
좋은 지도자 행복한 백성(잠언 28:1-18)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언 28:16)
좋은 지도자를 갖는 것은 큰 복이다.
물론 좋은 지도자가 있어도 악한 백성들이 나라를 망치기도 한다(대하 27:3).
그러나 파급력은 지도자가 우선이다.
무지학고, 악한 지도자를 갖는 것은 재앙이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를 갖고자 투표를 한다.
좋은 지도자는 누구일까?
첫째, 좋은 지도자는 정직하기에 담대하다(1)
둘째,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를 학대하지 않고 존중한다.
모든 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간다(3,15).
셋째, 법을 존중히여기고 성실하게 지킨다.
악한 지도자의 특징은 자신의 권력으로 법을 악용한다(4,16,17).
넷째,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시행한다.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5)
좋은 지도자에게 행복한 백성이 있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6,10).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탐욕에 친구가 되지않는다.(7)
욕망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9).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웃을 유혹하지 않는다(10).
자신를 살피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복된 삶을 추구한다(11-14,18).
무지한 지도자에게는 불행한 백성이 있고,
지혜롭고 정직한 지도자에게는 행복한 백성이있다.
모든 공동체가 같다.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와서 쉬라고 하셨다.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 때로는 생명과 같다.
예수님이 있기에 행복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성인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으니” - 聖人無常心
“성인은 항구한 마음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으로써 (자기) 마음으로 한다.
선한 사람을
선하다고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또한 선하다고 하므로 덕은 선하다.
신실한 사람을 신실하다고 하고, 신실하지 모한 사람도 또한
신실하다고 하므로 덕은 신실하다.
성인은 천하에 있으면서 맞추고 맞추어 천하가 되고, 그 마음은 순수하다.
백성은 모두 귀와
눈을 모으니 성인은 그 모두를 어른다(사랑한다).”
- 노자, 『도덕경』, 49장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歙歙焉)爲天下, 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百姓皆屬耳目), 聖人皆孩之
성인은 자기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는다.
학문과 지식을 가지려는 마음이 없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일
없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어떠한가?
성인은 선한 자나 선하지 못한 자나 모두를 있는 그대로 품는다.
선한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식을 잘 아는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자는 다스림을 잘 따르는 자이다.
선한 자나 믿음이 있는 자는 노자 시대의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나라에 쓸모가 있는 사람을 착하다고 하여 상을 주는 것은 일을 만드는(有事) 정치이다.
일이 있는 정치를 하면 백성이 인위적으로 삶을 구하게 된다.
성인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하여 이익과 재화를 수단으로 삼으면 사람들은 더 많은 풍요를 요구하게 되어 마음이 혼탁해진다. 백성의
마음을 흐리게 하여 지식이나 이익을 구하는 태도를 가라앉힐 때, 백성이 눈과 귀를 밖으로 쓰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은 소박하게
된다.
잘 다스리는 성인은 사람들 모두를 똑같이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사물에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도 없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
만약 마음을 활짝 열고 사물에 맡겨 최후로 천하를 잊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사물에 맡겨 시간에 따르는 것이다.
사물에 맡겨 시간에 따르는 것이 易行이며
저항하여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難行이다.
사물이 오면 그에 맡겨 거스르지 말며
떠나가면 떠나가는 대로 좇지 말며
무엇을 하였든지 간에 지나간 것은 후회하지 말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염려하지 말라.
이를 두고 도를 행한다고 한다.
- 야나기다 세이잔, “달마”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경제적 성과를 수치로 나타낸 지표이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공직자들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이익과 이윤을 취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숫자에 따라서 지지도와 인기는 오르내린다. 그 수치는 경제성장률, 국민소득통계, 국제수지 지표, 고용과 임금 지수, 주식지표 등이 있는데, 이 숫자에 의해서 사람들이 마음이 놀아난다. 이러한 숫자가 삶의 질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아전인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모두가 더불어 어르면서(사랑하면서) 함께 사는 삶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지지도를 위해서 숫자에 연연하기도 하고, 반대하는 세력은 숫자로 공격이나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자의 성인이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무위의 정치를 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처럼, 편중되지 않고 모두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노자의 정치를 따르는 현대의 성인이 아니겠는가. 소위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표를 얻을 때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동안에 새겨둘 말이 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현대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하느님 선교”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공동체 내적인 일을
넘어서 외부에서도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모든 것을 디아코니아라고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선교하는 것, 이 모두가 디아코니아의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교회를 통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활동하고 일할 때에 누구에게든지 가장 기본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면서도 가장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과 봉사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군가를 대신하는 희생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려해서, 그리고
제자들 사이에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맡은 자들의 섬김과 희생을 가르쳤습니다.
섬김과 희생을 말할 때에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섬김과 희생을 의무로 받아들이거나 강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섬김과 희생의 목적과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디아코니아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초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갔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불의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위한 집사(섬기는 사람)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위에서 구체적으로
따르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을 위해서 함께 가는 교우들을 섬겨야 합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일을 하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따르고 섬기는 일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섬김과 다스림” 중에서>
에스더 8장 요약 / 유대인에게 살 길이 열리다
왕이 에스더에게 하만의 재산을 주었으며,에스더는 하만의 조서를 무효화화도록 왕에게 요청합니다.왕의 명령으로 모르드개가 조서를 꾸며서 유다 민족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9장 요약 / 부림절을 지키다
유다 민족이 그들의 대적들을 모두 죽였지만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모르드개가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라고 지시하여 부림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10장 요약 / 모르드개가 칭송을 받다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아서 페르시아의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6월 4일(수) 에스더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림일(9:31)
정한 기한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의 명한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을 인하여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to establish these days of Purim at their designated
times, as Mordecai the Jew and Queen Esther had decreed for them, and as
they had established for themselves and their descendants in regard to
their times of fasting and lamentation.
유대인들이 지키는 부림절 (Purim)은 어떤 절기?
부림절을 맞는 현대 유대인들의 모습이 다양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부림에 대한 주요 내용만 간단히 소개한다.
부림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세 절기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하누카와 더불어 이스라엘 내외
모든 유대인들이 기쁨으로 지키는 국가적 명절이다.
율법이 정한 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일하고 매매행위를 해도
종교적인 해를 당하지 않는다.
푸림은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 형태로써 '제비 뽑다'는 의미의 아카드어에서 온 단어이다.
부림절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음모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에스더 3:7절에 의하면, 아각 사람 하만은 제비를
뽑아 유대인들을 살해할 달로 아달월(Adar)을 얻었고 13일 하루 동안 페르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꾀하였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하만은 죽임을 당하고, 반면 살해당할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다.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부림절이다. 유대인들은 아달월 14일과 15일 이틀간 부림절로 지킨다.
에스더 9:17-22절에 부림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다.
아달월 13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14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며 즐겼고 수산에 거한 유다인은 13일과 14일에 모였고 15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그러므로
촌촌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 고을에 거하는 자들이 아달월 14일로 경절을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네 가지를 실천한다.
첫째는 회당에 참석하여 공적으로 읽는 에스더서를 듣는 일이다.
회당에
참석하여 첫날과 둘째날에 에스더서를 들으며, 모든 사람들은 2:5절, 8:15-16절, 10:3절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 목소리로 그
구절을 암송한다. 이 세 구절은 모르드개의 인물, 승리, 유대인의 구원을 담고 있는 말씀들이다.
두번째는 가까운 이웃과 친지들에게 선물을 보내며 기쁨을 함께 나눈다.
세번째는 가난한 사람 두 명 이상에게 자선을 베푼다.
네번째는 세우다트 푸림 만찬을 나눈다.
안식일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이 절기마다 갖는 만찬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식일 식탁에서도, 부림절 식탁에서도 그들은 그 날과 그 의미를 반복하여 묵상한다.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만약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날과 절기, 성경의 구원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묵상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부림절[ Purim] 의 의미와 축제유래
부림절[ Purim]
이스라엘 민족이 페르시아의 총리 하만이 꾀한 유대인 절멸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축제
1. 축제 정의
부림절(Purim)은 매년 이른 봄, 히브리력의 마지막 달인 아다르(Adar) 월 14일 또는 15일에 지내는 유대교의 축제로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에서 3월 사이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의 「에스더서」(Esther)에
등장하는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권력자 하만(Haman)의 음모에서 유대인 동포들을 구해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부림절은 다른
종교적 절기에 비해 세속적인 성격을 지니며 유대인들이 마음껏 취하고 소란스럽게 즐기는 기쁨의 축일이다.
부림절을 맞아 「에스더서」를 낭독하는 유대인들유대인들은 부림절을 맞아 페르시아 총리 하만의 유대인 멸절 계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에스더를 기리며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 두루마리를 낭독하고 떠들썩한 파티를 연다.
에스더는 유대인 모르드개(Mordecai)의 사촌으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의 왕비가 된 인물이다.
그녀가 유대인을 모두 없애려는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하기에 앞서 금식을 했다고 전해오기 때문에 부림절 전날에는 금식을 하고, 부림절 당일에는 유대교 사원인 시너고그(synagogue)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한다.
「에스더서」에서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장난감 ‘그레거’(Gregger)을
돌려 하만의 이름을 지우는 풍습이 있다. 이날 유대교 가정에서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만찬을 열고 ‘하만의 주머니’라는 의미를
가진 전통 과자 하만타셴(Hamantaschen)을 만들어 나눠 먹는다.
또한 친구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보내고 가난한 이를
도우며, 거리에 나와 가장 행렬을 벌이거나 장난감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축제를 즐긴다.
2. 축제 어원
‘푸림’은 제비뽑기나 주사위를 의미하는 아람어 ‘푸르’(pur)에서 온 말이다.
하만이 제비뽑기로 유대인을 학살할 날짜를 정한 데서 ‘푸림’이라는 축일의 이름과 날짜가 유래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림절, 부림제 등으로 부른다.
3. 축제 유래
부림절은 유대교의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토라, 곧 모세 5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부림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1) 「에스더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림절의 유래는 『구약성경』의 「에스더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기전 6세기 말경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유대인을 메소포타미아로 끌고 가 박해했다.
그 중심에 교만한 총리 하만이 있었다.
하만은 문지기인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유대인을 전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Ahasuerus,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청해 전국에 이에 관련된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사촌 동생이자 수양딸로 유대인임을 숨긴 채 왕비가 된 에스더로 인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고함으로써 유대 민족을 구해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던 처형대에 대신 매달렸고 하만의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은 유대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렇듯 부림절은 유대 민족이 죽음에서 벗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해방의 날이며,
유대인은 여러 기념일 가운데 부림절을 가장 유쾌하게 보낸다.
이 역사로 인해 유대인에게 ‘하만’이라는 이름은 절대적인 악인이나
일반적인 원수의 대명사가 됐다.
아르트 더헬더르, <에스더와 모르드개>(1865)에스더 이야기는 예술 작품의 주제로 애용됐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아르트 더헬더르(Arent de Gelder)의 작품으로 모르드개가 에스더 왕비에게 하만의 음모를 고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한 「에스더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의 발생 시기는 크세르크세스
1세(서기전 486년~서기전 466년 재위)가 통치하던 서기전 5세기경인데 반해, 이 경전이 편집된 시기는 서기전 2세기 초 셀레우코스(Seleucos) 왕조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억압하던 시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에스더서」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느헤미야서」, 「에즈라서」 등에 나타나지 않으며, 쿰란(Qumran)에서 「에스더서」 이외의 모든 경전이 발견되었고 이들 경전 대부분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에스더서」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논쟁을 부추겼다.
게다가 「에스더서」에는 신의 이름인 여호와(יהוה)나 성전(聖殿)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른 경전에 비해 세속적인 특성과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띤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이 이민족에게 관대해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았으며 경전의 기록과 페르시아 궁중 관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연대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에스더서」가 후대에 기술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에스더서는 유대 민족을 살피고 이들을 절멸의 위기에서 구하는 신의 은혜가 가장 잘 드러난 경전으로
평가된다.
2) 여러 가지 유래
부림절의
유래를 성경이 아닌 곳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부림절이 「에스더서」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명절에 가상의 역사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에스더서」에 기술된 사건이 바빌로니아 신화를 받아들여 생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모르드개가 바빌로니아 신화의 으뜸 신인 마르두크(Marduk)에서, 에스더가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슈타르(Ishtar)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부림절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축제인 파르바르디간(Farvardigan)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파르바르디간은 초기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행해지던 모든
영혼들의 축제로, 조로아스터 달력 마지막 달에 5일간 열렸다고 전한다.
이 축제 때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파수꾼으로 세우고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유대인 유민들이 받아들인 이 전통이 후에 부림절로 유대 역사에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림절 축제에 등장하는 가면,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장난감, 만찬 등이 성경이 등장하기 이전의 이교 의식에서 기원했다고도
한다.
역사가 하임 샤우스(Hayyim Schauss)는 『유대인의 축제』(The Jewish Festivals)에서 “부림절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소리는 하만과 관련이 없다.
부림절은 고대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과 관련해 치르던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에는 계절이 바뀔 때 사악한 영이 큰 힘을 가지고 모든 것에 해악을 끼치려 한다고 믿었고, 이 사악한 영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 바로 소음이었다”라고 썼다.
이스라엘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스라엘
고(古)유물청은 웹 사이트에 흙으로 만든 고대 가면과 소리를 내는 유물을 공개하고 있다.
4. 축제 역사
1) 부림절의 역사
서기전 10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경(外經)
「마카베오서 하」 15장 36절에 “그들은 모두 이날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말고 기념일로 지내자는 결의에 따라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날은 열두 번째 달, 아람 말로는 아다르 달 열사흗날이며 모르드개의 날 하루 전날이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모르드개의 날’이 바로 부림절을 가리키는데, 시기적으로 「마카베오서」의 배경이 서기전 2세기였다는 점을 들어 이
무렵부터 부림절 축제를 즐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세기에 고대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저서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에서 에스더 이야기를 부연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 책이 93년경
그리스어로 작성된 것을 고려할 때 요세푸스가 살던 1세기에 이미 부림절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유대 축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무렵에 부림절은 히브리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널리 행해지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유대 법전인 『미쉬나』(Mishna)에 따라 부림절에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는 전통이 생겼다.
로마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이후에도 유대인 유민들은 부림절을 지켰다.
이러한
역사는 부림절을 금지하려던 로마 당국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유대인에게는 모닥불 주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하만 인형을 불태우는
관습이 있었는데, 408년 동로마제국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가 이 관습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마의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황제 역시 하만 인형 태우기 풍습을 금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관습은 9~10세기까지 이어졌으며 14세기에도 종종 행해졌다고 한다.
20세기에도 이란과 쿠르드 족이 살고
있는 쿠르디스탄(Kurdistan)의 일부 공동체에서는 부림절에 하만 인형을 태우는 전통이 이어졌다.
히틀러 또한 부림절을 금지했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다음 날인 1938년 11월 10일, 히틀러는 연설에서 “유대인은 하룻밤에 페르시아인 7만 5천 명을 난도질했다.
만약
독일인에게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유대인들은 독일에서도 새로운 부림절을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치는 유대교의 명절에
맞춰 유대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1942년 부림절에는 고대에 유대인이 하만의 아들 열 명을 매단 것에 대한 복수로 유대인 열 명을
처형하는가 하면, 1943년에는 폴란드 피오트르쿠프(Piotrków)의 유대인 집단 거주지에서 유대인 열 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부림절 전날에는 쳉스토호바(Częstochowa)에서 1백 명이 넘는 유대인 의사와 그 가족들이 나치의 총에 사살됐고, 그
이튿날에는 라돔(Radom) 출신 유대인 의사들이 시드워비에츠(Szydłowiec)에서 저격당했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는 이렇게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며 또 다른 부림절을 만들어나갔다.
핍박과 고통에서 벗어난 역사를
공동체의 부림절로 삼고 기념한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부림절 가운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부림절 바로 다음 주에 치르는 ‘푸림
빈츠’(Purim Vintz)가 유명하다.
이날 이 지역의 유대 공동체는 1616년에 유대인을 말살시키려 했던 빈첸츠
페트밀히(Vincenz Fettmilch)의 계획을 저지한 일을 기념하고 있다.
또
다른 공동체 부림절인 ‘푸림 타카’(Purim Taka, 창문 부림절)는 1741년에 벌어진 사건에서 비롯됐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헤브론(Hebron)에 자리한 유대인 공동체에 엄청난 세금이 부과됐고,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지 못하면 죽거나 노예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때 유대인 구역의 시너고그 창턱에서 세금과 정확히 일치하는 금액의 금화가 발견됐다.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해 헤브론의 유대인들은 ‘푸림 타카’를 지낸다.
이렇듯 부림절은 유대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지속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부림절의 날짜
유대인은 모든 명절이나 행사에서 공식적으로 히브리력을 사용한다. 유대력이라고도 부르는 히브리력은 태음태양력으로 한 달이 29일이나 30일이며 1년은 353일, 354일 혹은 355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19년 주기로 윤달을 7번 추가해 날짜를 맞추되, 윤달은 마지막 달인 아다르(Adar) 월 앞에 넣는다. 이때 중간에 끼워 넣은 윤달은 ‘첫 번째 아다르’라는 의미의 ‘아다르 알레프’(Adar Aleph), 매해 되풀이되며 윤년에는 뒤로 밀리는 아다르 월은 ‘두 번째 아다르’라는 의미의 ‘아다르 베트’(Adar Bet)라고 이른다. 일반적으로 하루가 자정에 시작해 자정에 끝나는 것으로 여기나, 히브리력에서는 해 질 무렵 하루가 시작되고 다음 해가 질 때 하루가 끝난다.
부림절은 아다르 월 14일,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이나 3월 사이에 해당한다. 부림절의 그레고리력 날짜는 고대 히브리인이 태음력을 사용하던 전통에 따라 매해 달라지는데 안식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한다. 안식일에는 「에스더서」를 비롯한 유대의 연례 절기를 다룬 다섯 권의 경전 두루마리 메길라(Megillah)를 읽는 것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윤달, 즉 첫 번째 아다르 월이 추가되는 해에는 두 번째 아다르 월의 14일을 부림절로 정한다. 이는 최초의 부림절이 윤년의 두 번째 아다르 월에 치러진 것을 따르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경우에는 부림절을 아다르 월 15일로 잡는다. 「에스더서」 9장 18절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Susa)에 있던 유대인들은 15일을 경축일로 지켰고, 그 외 지역의 유대인들은 14일을 명절로 지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5일의 부림절을 ‘수산 부림’(Sushan Purim)이라고 부른다. 유대의 법전 『미쉬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15일에 부림절을 축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땅 안에서도 성벽이 없는 텔아비브(Tel Aviv)는 아다르 월 14일에, 고대부터 성벽이 있던 예루살렘은 아다르 월 15일에 부림절을 기념한다.
한편 윤년에만 돌아오는 첫 번째 아다르 월의 14일을 ‘작은 부림절’이라는 의미의 ‘푸림 카탄’(Purim Katan), 15일을 ‘수사의 작은 부림절’이라는 의미의 ‘수산 푸림 카탄’(Shushan Purim Katan)이라고 부른다. 작은 부림절 또한 기쁜 날로 여겨 금식과 장례를 금하지만 축제를 열지는 않는다.
유대 가정의 부림절절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기쁨을 나누는 부림절에 유대인들은 푸짐하게 먹고 마시며 즐긴다. 부림절 점심부터 시작되는 식사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가정에서 즐기는 부림절 만찬부림절에는 오래된 풍습에 따라 주로 견과류와 전통 과자, 만두와 비슷한 음식 크레플라흐(Kreplach)를 먹는다.
5. 축제 주요 행사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림절은 모세 5경에 기록된 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다. 이날 유대인들은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고 가정에서 부림절 파티를 연다. 예배 의식에는 다른 날과 달리 묵도인 ‘아미다’(Amida)를 올리고 식후에 ‘알 하니심’(Al hanisim)’을 추가한다. 알 하니심은 ‘기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의 특별한 기도로 하누카에도 낭독한다
한편 부림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네 가지 ‘미츠바’(Mitzvah, 계율)가 있다.
첫째,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 낭독하거나 이를 듣는다.
둘째, 친구들에게 음식이나 선물을 보낸다.
셋째,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넷째, 축제 음식을 먹는다.
1) 「에스더서」 낭독
미츠바 가운데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시너고그에 모여 「에스더서」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절기에 따라 정해진 ‘메길라’(Megillah)를 읽는다. 메길라는 유대 절기에 관련된 책 다섯 권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메길라’하면 「에스더서」를 가리킨다. 「에스더서」가 대략 서기후 70년에서 250년까지를 이르는 미쉬나 탈무드 시대 초기에 시너고그에서 낭독되는 유일한 두루마리였기 때문이다. 부림절에 시너고그에 모여 「에스더서」를 함께 읽는 것은 민족의 역사에서 기인한 부림절의 의미에 따라 공동체 의식을 더하기 위해서다.
「에스더서」를 읽을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먼저 구속에 관한 네 구절(2장 5절, 8장 15절~16절, 10장 3절)은 큰 소리로 읽는다. 또한 유대인을 몰살시키려 했던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시너고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각자 준비한 도구를 사용해 소음을 내고 발을 구르며 야유를 보낸다. 「에스더서」에는 하만이 총 54번 나오며, 9장 7절에서 10절 사이에 나오는 하만의 아들 열 명의 이름은 이들이 한 번에 처형된 것을 상기하며 단숨에 읽어야 한다.
2) 선물 교환과 이웃 돕기
대부분의 축제와 마찬가지로 부림절 역시 민족과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하는 축일이다. 「에스더서」 9장 22절의 “이달 이날에 유대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을 얻어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해 길한 날이 됐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라는 구절에 따라 부림절에는 가난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미슐로아흐 마놋’(Mishloach Manot)을 보내는 풍습이 있다.
부림절 바구니라고도 불리는 미슐로아흐 마놋은 부림절에 선물하는 음식과 마실 것을 뜻하며 한 사람 앞에 최소 두 가지 종류의 음식물을 보내야 한다. 기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풍습은 「에스더서」가 쓰이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느헤미야서」 8장 10절에는 핍박에서 벗어나 모세 5경을 다시 공식적으로 낭독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음식물을 두 가지 이상 보내는 이유는 ‘마놋’이 복수형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림절의 풍습부림절에는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족과 지인에게 음식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유대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에도 부림절에는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음식을 보내고 가난한 사람 두 명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시너고그에서는 부림절에 맞춰 정기적인 자선 행사를 열고 기부금을 받기도 한다.
미슐로아흐 마놋(Mishloach manot)부림절에 주고받는 음식 선물을 ‘미슐로아흐 마놋’(Mishloach Manot)이라고 부른다. 이때 음식물은 두 가지 이상이어야 한다.
3) 부림절 음식
기쁨을 나누는 부림절에는 마음껏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것이 용인된다. 일반적으로 점심부터 저녁까지 푸짐한 음식을 먹고 부림절 오후가 되면 축하연을 연다. 14세기에 쓰인 책 『마세켓 푸림』(Masechet Purim)에는 부림절에 먹는 고기 요리가 무려 27가지에 달했다고 쓰여 있다. 부림절에 반드시 먹는 요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견과류와 강낭콩
부림절에는 호박씨나 해바라기씨, 호두 등의 견과류와 강낭콩을 먹는다. 견과류를 먹는 것은 에스더가 궁에 살면서 유대인의 율법 코셔(kosher)를 지키기 위해 견과류만 먹었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또한 강낭콩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장례식 때 먹어온 음식으로, 강낭콩을 먹으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애도한다.
② 하만타셴(Hamantaschen) 또는 오즈네이 하만(Oznei Haman)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중부와 동부에 주로 거주했던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은 양귀비 씨나 치즈, 과일을 넣어 만든 삼각형 모양의 파이 하만타셴 또는 오즈네이 하만을 먹는다. ‘하만타셴’(Hamantaschen)은 ‘하만’(Haman)의 이름과 가방 또는 주머니를 뜻하는 독일어 ‘타셴’(Taschen)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하만의 주머니’라는 뜻이다. 하만의 ‘만’과 발음이 비슷한 양귀비 씨앗 ‘몬’(Mohn)을 주요 재료로 삼으며, 하만의 주머니가 항상 뇌물로 가득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편 이 과자의 다른 이름은 ‘하만의 귀’라는 의미의 ‘오즈네이 하만’(Oznei Haman)이다. 파이가 삼각형인 것이 하만의 귀를 닮았다는 설, 하만이 즐겨 썼던 모자가 삼각형인 데서 따왔다는 설이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없다. 일부 사람들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삼각 모자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계 유대인 세파르디(Sephardi)는 파주엘로스(Fazuelos)라고 하는 과자를 먹으며 이것을 ‘하만의 귀’라는 뜻의 에스파냐어 ‘오레야스 데 하만’(Orejas de Haman)이라고도 부른다.
부림절에 먹는 과자 하만타셴(Hamantaschen)부림절에 먹는 전통 과자 하만타셴은 ‘하만의 주머니’라는 뜻으로, 양귀비 씨나 치즈, 과일을 넣어 만든다. 양귀비 씨의 발음이 하만의 ‘만’과 비슷한 것과 하만의 주머니가 항상 뇌물로 가득했던 것을 빗대어 만든 것이다.
③ 크레플라흐(Kreplach)
크레플라흐는 고기와 으깬 감자, 양파 등을 소에 넣어 빚은 뒤 닭 육수에 끓여 먹는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한 음식으로, 아슈케나지 공동체에서 먹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레플라흐’(Kreplach)라는 이름은 프랑스어 ‘크레프’(crêpe)에서 유래한 독일어로 추측된다. 크레플라흐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잘게 썰거나 자르는 동작이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며 발을 구르거나 그레거(Gregger)를 돌리는 것과 비슷해 부림절에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밀가루 피 안에 소를 숨기는 것이 마치 「에스더서」에 여호와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 안에 신이 숨어 있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④ 다양한 빵
각 공동체마다 다양한 종류의 빵을 만들어 부림절을 기념한다. 헝가리나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후손은 바닐라 커스터드를 채운 도넛 볼을 만들고, 모로코 유대인들은 하만의 머리 모양을 흉내 낸 빵을 굽는다. 폴란드에서는 유대인이 축일에 먹는 빵 ‘할라’(hallah)를 먹는데, 하만을 매달 때 사용했다는 밧줄을 흉내 내 꼰 모양으로 만든다.
⑤ 주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인들도 부림절에는 마음껏 술을 마시고 즐길 수 있으며, 오히려 술에 취하는 것을 권하는 편이다. 탈무드에는 부림절에 포도주를 마실 때는 ‘바루흐 모르드개’(Baruch Mordecai, 모르드개에게 축복을)라는 말과 ‘아루르 하만’(Arur Haman, 하만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구분하지 못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과거 탈무드 시대에 부르던 부림절 노래와 관련이 있는데, 위 두 문장은 거듭 반복되는 후렴구로 쓰였다.
4) 가장 행렬
옷을 차려입고 가면을 써 여러 모습으로 꾸민 채 거리를 행진하는 가장 행렬이 부림절에도 존재한다. 15세기 말 로마의 카니발에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부림절에 가장 행렬을 시작했고, 이 풍습이 점차 다른 공동체로 퍼져나갔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행사를 가리키는 단어 ‘마하리 민츠’(Mahari Minz)는 1508년경 베네치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같은 전통은 고대의 축제에서 가면과 소리를 내는 장난감을 사용했던 데서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신명기」에서 남자는 여자 옷을 입지 말라고 못박아두었지만, 부림절은 유일하게 남녀가 옷을 바꿔 입을 수 있게 허락된 날이다.
부림절을 즐기는 유대인들부림절에 거리와 광장 곳곳에서 대규모 거리 행진과 공연이 펼쳐지곤 하는데, 이는 서구의 카니발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거리로 나와 가두 행진을 하는 행사를 ‘아들로야다’(Adloyada)라고도 부른다. 이는 ‘누군가가 더는 알지 못할 때까지’라는 뜻으로, “‘모르드개에게 축복을’이라는 말과 ‘하만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더는 알지 못할 때까지’ 포도주를 즐겨야 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912년 텔아비브에서 최초로 부림절에 ‘아들로야다’라는 이름으로 거리 행진을 개최했다.
부림절의 거리 행진 아들로야다(Adloyada)아들로야다는 유대인들의 부림절 거리 행진을 이르는 말로, ‘모르드개에게 축복을’이라는 말과 ‘하만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더는 알지 못할 때까지’ 포도주를 즐겨야 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5) 시끄러운 소리 내기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는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큰 소리를 내어 하만의 이름을 지우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 「신명기」에 나오는 “나무와 돌에서조차 아말렉(Amalek)족의 기억을 지워버리겠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16세기 폴란드의 랍비 모세스 이세를레스(Moses Isserles)는 하만을 사악한 아말렉족의 후손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관습이 생긴 것이라고 추정했다.
보통 소리를 내는 데는 손잡이를 손에 쥐고 돌리면 나무토막이 톱니 바퀴를 지나갈 때마다 따다닥 소리를 내는 기구 그레거(Gregger) 혹은 라아샨(ra’ashan)을 이용한다. 그레거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Yiddish)어로 소음을 의미하며, 라아샨은 히브리어로 소음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나무로 만들지만 금속으로 만든 것도 있다. 하만의 이름을 지우는 방법에는 매끄러운 돌이나 석판에 하만의 이름을 쓴 뒤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른 돌로 문지르거나 부딪쳐 지우는 경우도 있다.
그레거(Gregger)그레거스 손잡이를 돌리면 나무토막이 톱니 바퀴를 지나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레거로 소음을 내 하만의 이름을 지운다고 한다.
에스더 4장 요약 / 에스더와 모르드개
유다 민족이 탄식하고 금식하였고,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다 민족의 어려운 상황을 알립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에스더가 할 일을 알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5장 요약 / 에스더가 어전에 나가다
에스더가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청하였고, 하만은 집에 가서 에스더의 초청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만은 장대를 만들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6장 요약 / 모르드개가 영광을 얻다
왕이 궁중 실록에 기록이 된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되고, 모르드개를 높여서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록 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7장 요약 / 하만의 몰락
두 번째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동족을 구원하여 줄것을 요청하였고, 왕이 하만의 음오를 알게 되었으며 하만을 자기집에 세워둔 장대에 매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6월 3일(화) 에스더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족을 위하여 구하라(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He also gave him a copy of the text of the edict for
their annihilation, which had been published in Susa, to show to Esther
and explain it to her, and he told him to urge her to go into the king's
presence to beg for mercy and plead with him for her people.
민족을(5971) 위하여 간절히(2603) 구하라(1245)
간절히(하난. chânan) חָנַן
스트롱번호 2603
구하다(바카쉬. bâqash) בָּקַשׁ 스트롱번호 1245
관련 성경 / 구하다(민16:10, 대상4:39, 삼상13:14), 찾다(대하15:15, 왕상2:40, 렘50:20), 요구하다(느5:18, 사5:12, 잠15:14), 수색하다(시54:3,삼상26:20), 내다(전7:29), 묻다(단1:20, 창43:9, 삿6:29), 간구하다(대하20:4, 스8:21, 단9:3), 살피다(전7:25), 알아보다(전8:17),얻다(렘2:33, 잠11:27), 물어내다(창31:39),추종하다(레19:31), 벌하다(수22:23), 꾀하다(삼상19:2), 명령하다(대상21:3), 힘쓰다(잠17:11, 슥12:9), 따르다(잠18 : 1), 앙모하다(출33:7), 원하다(왕상10:24, 대하9:23), 걸식하다(시37:25).
[명] 바라는 자(시69:6), 구하는 자(시105:3, 잠29:26), 찾는 자(잠28:5, 렘2:24, 겔34:6).
조서 초본을...에스더에게 뵈어 알게하고
- 이는 유대인 대학살의 실행 날짜가
결정됐고 그것에 관한 변개될 수 없는 명령이 전국에 하달되어, 대응책을 강구치 않을 경우 유대 민족이 진멸될 상황에 처해 있음을
에스더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나아가서...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 모르드개가 굵은 베를 입고
벗기를 계속 거부했던 이유는, 에스더가 바로 이와같이 행해주기를 바랬던 때문이다. 사실 모르드개의 이 같은 요구는
(1)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2) 에스더를 향한 아하수에로의 애정에
호소하여 위기를 극복해보기 위함이었으며,
(3) 나아가서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 유대인들을 대학살의 위험으로부터
건져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본(14절)때문이었다.
한편, '자기 민족을 위하여'는 에스더에게 유대 민족을 구출해 내야할
절대적 의무가 있음을 암시해주는 문구이다(Rawlinson).
또한 지금까지 고하지 않았었던 출신 근본을(2:10, 20)
이제는 도리어 왕에게 고해야 할 때임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Paton).
사실, 이제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간절히 구하라'(바카쉬)는 어떤 일의 달성을 위해서
부지런히 탄원하는 것을 의미한다(Schultz).
결사 기도(決死 祈禱)
금식 기도(禁食 祈禱)
응답 기도(應答 祈禱) -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이루소서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Pray earnestly for the nation) plead with him for her people.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의 외침처럼 오늘의 시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할 매우 중대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결사항전을 위한 기도
결사항전(決死抗戰) – 죽을 각오로 맞서 싸움, 뜻과 유래
사람들은 도망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일반적으로 죽을 각오가 필요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평소 이런 마음가짐을 하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決 : 결단할 결, 死 : 죽을 사, 抗 : 겨룰 항, 戰 : 싸움 전
결사항전은 과거 전쟁에서 밀리는 쪽이 많이 사용했던 사자성어로 죽을 각오로 맞서 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유래
고려 전기 거란의 성종(聖宗)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강행했으며 전략적 요충지인 흥화진을 점령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고려군의 방어가 견고해서 전투는 1주일 정도 지속되었으며 이내 포기하고 통주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리게 된다.
소식을 들은 고려의 병사들은 삼수채에서 거란군을 맞이했으나 패배하였고 행영도통사 강조가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거란은 강조를 시켜 흥화진에 서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양규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정신으로 성을 포위하고 있는 거란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9일 동안 방어에 성공해서 나라를 지켜냈다.
이후에도 거란은 3차 칩입을 강행했지만 흥화진이 문제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전쟁에 패배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2. 계백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에 임한 위인을 생각하면 계백 장군이 떠오르는데 가족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비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학자들은 전쟁을 앞두고 자신의 가족을 희생해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황산벌 전투를 끝으로 백제는 멸망이 예상되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의 가족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계백은 자신의 가족들이 욕보이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것을 우려해서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명예, 나라에 대한 충성심,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가족을 위한 마음에 목숨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김유신의 5만 병력과 4번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내 전멸했고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3. 예문
- 결사항전보다는 항복이 필요하다.
- 차이가 심해 결사항전 의지가 꺾임
- 우리는 끝까지 결사항전할 것이다.
- 아이를 결사항전에 끌어들이지 말자.
- 의료계는 이익을 위해 결사항전 중
- 이 정도 결사항전은 예상하지 못했다.
- 그게 싫어서 결사항전 선언을 한다.
유대인 최후의 항전지, 마사다(MASADA)
마사다 항전은 A.D.70년 경에 일어난 유대인들과 로마군의 전쟁이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남부의 암층 지대에 위치한 고대 요새이다.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40m에 불과하지만 동쪽으로 인접한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m 낮기 때문에 실제 요새의 높이는 440m 정도이며,
서쪽 절벽은 약 90m로 매우 가파른 난공불락의 지형이다.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은 1.3km이며 방호벽의 평균 높이는
3.7m이다.
방호벽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들이 있으며 내부에는 창고, 병영, 병기고, 궁정, 저수조 등이 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기록에 따르면 B.C.37년부터 B.C.31년 사이에
헤롯 왕(Herod, B.C.73? B.C.4 재위)이 반란에 대비하여 마사다를 요새화 했다.
마사다 요새가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 무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A.D.66년이다.
시카리(Sicarii), 혹은 열심당(Zealots, 젤로트 黨)으로 불리는
유대인 저항 집단을 중심으로 로마군의 유대영토 주둔에 반발하는 무력투쟁이 발생했으며, 열심당원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마사다
요새로 피난하여 그 곳을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다.
마사다
요새를 근거지로 하는 유대 저항군의 로마 정착촌 급습이 빈번하게 일어나 피해가 커지자 로마 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는 로마 보병군단인 제 10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방호벽을 파괴하는데 수 차례 실패한 끝에 로마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약 6천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하여 서쪽
측벽에 공격을 위한 누벽(壘壁)을 세웠다.
당시 마사다 요새 안에는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azar ben Yair)가 이끄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들이 남아 항전의 의지를 끝까지 불태우고 있었다.
풍부한 물과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A.D.73년에 누벽이 완성되었으며, 약 3개월간의 공략 끝에 A.D.73년 4월 16일 마사다 요새의 성벽이 무너졌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적의 노예나 포로가 되느니 자결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에
동의한 저항군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결국 마사다에
입성한 로마군은 936구의 시신만을 보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 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서 마사다 항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1965년부터 1963년 사이에 독일계 이스라엘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의 마사다 유적 발굴 결과 요새
내부에는 저항의 흔적과 참수된 유골 및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마사다 유적은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 "투표는 나의 목소리, 미래를 바꾸는 힘!"
2. "선거는 권리, 참여는 의무!"
3. "당신의 한 표가 세상을 바꾼다!"
4. "투표로 나의 의견을 전하자!"
5. "선거 참여, 민주주의의 시작!"
6. "소중한 한 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7. "선거는 선택, 참여는 책임!"
8. "모두의 목소리가 모여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
9. 당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상황을 개선해 주지 않을 것이다.
- 베르톨드 브레히트
10. 기권은 중립이 아니다. 암묵적인 동조다
- 단테 알리기에리
11.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손님이다.
- 도산 안창호
12.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들이 다 해 먹는다.
- 함석헌
13. 투표는 소중하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비폭력 수단으로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 존 루이스
금식기도(禁食祈禱)
금식기도의 의미는 심중하며 그 실제적 유익도 큽니다.
예수님도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40일 간 금식했으며, 구약에선
하나님이 특정한 날을 율법으로 정해 시행하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대로 많은 신자들이 금식의 의미를 온전히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 - 구약의 금식
"너희는 영원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安息日)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29-31)
레위기 16장은 일 년에 하루 대제사장이 전 백성의 죄를 속죄하려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날은
모든 백성이 하루 금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괴롭게"(afflicting ones's soul)한다는 것이 바로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먹고 마시지 못하는 금식을 뜻합니다.
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 것에는 목욕, 기름 바르는 일, 신발 싣는 것,
일상적 부부관계 등이 포함됩니다.
"큰 안식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음력을 지켰기에 칠월 십일이 마침 안식일과 겹치면 이 규례가 기존의 안식일
규정을 대체한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안식의 안식일"이라고 표현되었기에 안식일 중의 안식일 또는 가장 큰 안식을 얻는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속죄일을 진정으로 신실하게 지키라고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또 안식을 속죄와 연결시켰다는 면에서 큰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어야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과 역사 전부를 통치하실 뿐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이 그분께로 오기에 죄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에 틈과 왜곡이 생기면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큰 안식일이라고 했으니 일상적 안식일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근본 목적도 바로 공동체나 개인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말로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라고 동작의 대상이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영어 번역은 생각 혹은 마음(soul)을 괴롭게 즉, 진정으로 참회하라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금식은 반드시 기도를 동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지 건강상 이유로 절제하는 것에 불과해집니다. 이 답변 글에서 단순히 금식이라고 표현되었어도 금식기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정황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금식이 행해졌지만 그 기본 맥락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며(왕상 21:9, 느 9:1),
전쟁을 앞두고(삿 20:26, 삼상 7:6, 28:7-20),
임박한 국가적 위험을 맞아서(대하
20:3, 렘 36:9, 스 8:21, 느 1:4, 에 4:3),
아픈 자의 치유를 위해(삼하 12:16, 시 35:13),
죽은
자를 애곡하며(삼상 31:13, 대상 10:12, 삼하 2:12) 등의 이유로 금식을 했습니다.
직접적인 회개 말고도 전쟁과 국가적
위험과 질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려면 마땅히 자기들 죄부터 씻어야만 합니다. 죽은 자를 애곡하는 것도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
앞에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겸비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적 동기와 별개로 개인적인 사유로 분노에 차서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브닌나에게 모멸을 당해서(삼상1:7), 요나단은 절친인 다윗에게 사울이 창을 던지자 분노에 차서(삼상20:34),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사지 못해(왕상21:4) 금식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금식한 것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고 하나님께 참회했기에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참회하려는 직접적 동기가 없었어도 제 삼자(한나와 요나단의 경우), 혹은 본인(아합의 경우)의 죄와 연결된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한 율법을 전수받을 때에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출34:28, 신9:9)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온전하게 세워서 그분의 계시를 받으려는 뜻이었습니다. 다니엘도 동일한 의도로 금식했습니다.(단9:3) 모세는 또 산에서 내려왔더니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음란한 죄를 범하자 돌 판을 깬 후에 백성들의 사죄를 받고자 똑 같이 40 주야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신9:18)
신랑을 잃은 후에 금식하라. - 신약의 금식
우선 예수님은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로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한 것입니다. 주님의 예표였던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 또 백성의 죄를 사하려고 두 번이나 40주야를 금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전에 한번만 40주야를 금식했지만, 백성의 죄는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사해주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여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경건의 훈련으로 금식을 시행했습니다.(막2:18, 눅5:33) 반면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에 등한히 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주님은 신랑을 뺏긴 후에 금식할 때가 온다고 답했습니다.(마9:14, 막2:18,19 눅5:33-35) 예수님의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애곡하게 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금식을 통해 생명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종들로 준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눅18:12) 경건한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지켰으며 그 사실을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신의 의로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적, 위선적, 형식적으로 금식하지 말며 금식할 때는 남들이 알지 못하게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며 더 깨끗케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밀히 행할 때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마6:16-18)
신약에서 금식은 주로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구약의 동기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여 선지자 안나는 성전에서 섬기고 금식하며 메시아 보기를 기다렸고(눅2:37),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금식했고(행9:9), 고넬료는 금식 중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행10:30)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교회는 금식했고(행13:2,3), 기도할 때 부부가 각방을 따로 쓰라는 권면(고전7:5)이 바로 금식하며 부부관계도 갖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야 금식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적 금식 말고도 아주 잘못된 금식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때까지 금식하기로 결의했습니다.(행23:12,14) 금식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 악행을 모의하고는 그 일을 수행할 결의를 높이려는 가증한 죄였습니다. 종교적 경건마저 얼마든지 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예입니다.
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살펴본 대로 금식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간에 일상적인 경우보다 비상 상황에서 이뤄졌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혹은 간섭이 절실하거나, 그분의 뜻을 간절히 묻거나 계시를 받고자 할 때에, 주의 종으로서 그분의 일에 충성하려는 결의 내지 준비로 행했습니다. 또 그런 동기들이 달성되려면 무엇보다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기에 모든 금식 기도에는 자신과 공동체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비상상황의 기도에서 금식의 방식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 요소입니다. 그것마저 금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즉, 전부를 온전히 주님께 의탁한다는 온전한 헌신의 표식입니다. 살고 죽음 자체가 주님께 있듯이 이 큰 문제의 해결 내지 응답 또한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임박한 전쟁 같은 경우에 금식하는 이유도 꼭 승리하게 해달라는 간구이기도 하지만, 생사가 달린 전쟁을 오직 하나님이 주관해 주시고 자기들 목숨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치려면 죄가 남은 채로는 불가능하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차 강조하지만 철저한 회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재를 뒤집어쓰거나, 굵은 베를 걸치거나, 옷을 찢는 행동이 바로 처절한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참회와 무관하게 개인적 헌신의 표시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거나, 특별한 기도 응답을 바랄 때는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금식 때마다 그런 형식을, 최소한 재를 뒤집어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금식할 때에 얼굴을 일부러 흉하게 하지 말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지적한 까닭입니다. 또 신약 시대에선 심령으로 진정한 회개를 하면 되지 구태여 그런 의식을 곁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으로는 최초의 금식기도는 모세가 행했습니다. 율법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 그리고서 율법의 대속죄일의 금식 규례를 받습니다.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그전에 금식기도의 관습이 일반화되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전 처음 하는 금식부터 40일이나 하라고 성령이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추측컨대 금식의 유익을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 의학도 식사를 하지 않으면 피가 배 대신에 머리로 몰린다고 증명하듯이 소식 내지 금식하면 머리가 아주 맑아집니다. 고대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굶는 일이 다반사라 누구나 쉽게 그런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고래로 모든 종교에서 경건의 훈련에 금식기도가 포함되는 까닭입니다. 머리가 맑아진 상태에서 참회는 물론 기도가 더 잘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금식기도하며 진심으로 참회하며 헌신되었다면 자연히 영적 충만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충만이 깊어지면 초자연적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자기 육신적 죄의 본성과 정욕은 물론 일상생각마저 다 죽이고서 그 영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거룩한 율법을 수여했습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을 마치자 당신의 메시아 직분과 앞으로 행할 사역에 관해 사단이 시험을 걸어온 것입니다.
잘못된 금식과 그 부작용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면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면서 금식하면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소통이 가능케 됩니다. 이런 유익을 많이 체험한 유대인들로선 필연적으로 금식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초기 유대인들도 이전 습관대로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되 유대교와 차별하기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했습니다.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인 클레멘트는 심지어 기도보다 금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Pictor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 2 p. 504 (Zondervan, 1976)].
무엇이나 과유불급이듯이 금식의 유익이 강조되면 새로운 결점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살인 모의를 위한 금식이나 바리새인의 위선적 금식 말고도, 금식 자체를 너무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금식 기도만 하면 기도 응답이 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순수하고 진정한 금식을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했다면 응답이 잘 되는 것이지, 금식이라는 형식을 취했다고 응답이 잘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금식 자체에 기도를 응답시키는 능력이 있는 셈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또 습관적 의무적 형식적 금식을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경건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게 됩니다. 금식을 얼마나 자주 또 오래 했는지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의로 내세웁니다. 금식이라는 종교적 형식에만 치중한 것입니다. 그럼 금식만 하면 그만이기에 금식 중에 다른 나쁜 짓을 자행해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흐르게 됩니다.
나아가 금식의 유익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잘못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초자연적 체험을 하는 즐거움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 중에 떠오르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하기도 하며, 일상사를 완전히 끊고 금식을 너무 오래 하다보면 사단의 훼방이 아주 심해지고, 심지어 사단에게 잡혀 넘어가는 경우마저 생깁니다. 예수님이나 모세 같이 영적으로 바로 서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고 붙들고 계신 금식을 한다면 경우가 당연히 다릅니다. 반면에 영성이 뒤떨어지고 말씀의 분별력이 없으면서도 금식으로 영적 체험만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사단에게 악용당합니다.
일반 평신도로선 삼일 정도까지의 금식은 몰라도 그 이상 넘어가는 장기 금식은 반드시 전문사역자와 상의하고 건강상의 문제도 철저히 체크한 후에 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이해와 협조도 구해야 합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금식기도 계획을 알려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금식 후에도 조심스럽게 체계적 보양식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클레멘트와는 반대로 금식보다 기도가 우선입니다. 금식은 기도를 순수하고도 온전히 하기 위한 방도입니다. 금식의 이런 근본 목적을 이루려면 식음료만 금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사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기도에만 메달리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히 식사만 금하고 기도에 전무하기보다는 일상사를 계속하면 온전한 금식이 아닙니다. 물론 일상업무를 수행하면서 전적으로 헌신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건강이나 체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육식을 금한 다니엘처럼 일부만 금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분 금식의 경우도 일을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맞추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58:6-10)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에 관해 말했습니다. 먼저 지적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흉악의 결박"과 "멍에의 줄"을 사단이 죄인을 묶고 있는 영적 사슬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귀신을 쫓거나, 사단의 방해를 물리치거나,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선 꼭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쫓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했지(막9:29) 금식기도를 해야만 나간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이미 받았습니다.(마16:18,19) 따라서 주님의 뜻은 귀신을 쫓거나 불신자 전도를 위해선 교회가 즉, 교인들이 함께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은 유대인들이 금식 기도를 했는데도 왜 응답이 안 되는지 의아해한 것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까"(58:3) 서두에 설명한 대로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이 바로 금식인데 같은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즉,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라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불합리한 해석이 됩니다.
흉악의 결박은 권세를 이용해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유린하는 잔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멍에의 줄에 묶인 것은 그런 부당하고 강제적 억압을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은 모든 폭력과 압제 등 사회적 부당한 행위를 그만두게 하거나, 그런 상태에서 노예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약자를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린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나 궁핍한 친척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식음을 전폐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금식은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 되는 이유를 금식하면서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고,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아무리 대속죄일에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칠해도 하나님께 전혀 열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3-5절)
결론적으로 금식을 종교적 형식에 치우치거나, 자기 기도만 빨리 응답 받으려는 이기적 욕심으로 하거나, 죄를 참회하여 자신의
영혼을 순화할 동기 내지 의도가 없거나, 주변 이웃과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 충성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그분의 계시와 소명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책망 받는 금식이 될 것입니다. 그 반대는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기도일 뿐 아니라, 또 그런 금식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이웃 사랑과 사회적 선행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결사 기도(4:4-17)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고하니 왕후가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를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에스더가 왕의 명으로 자기에게 근시하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연고인가 알아보라 하매 하닥이 대궐 문 앞 성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하닥이 돌아와 모드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고하매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에스더 4장 4~17절)
설교개요
A. 결사기도에 대하여
1. 위기 앞에서의 기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
2. 본문 배경 설명(에 4:4~12) - 민족의 위기
B. 에스더의 결사기도
1.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 공동체의식, 자신의 행복과 안정만 생각지 말라(에 4:13)
2.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 하나님의 예비하심, 섭리, 사명감당(에 4:14)
3. 나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 결사의 기도, 금식기도(에 4:15~17)
C. 에스더처럼 위기 앞에서 결사의 기도를 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자
결사 기도(決死 祈禱)
1. 위기 앞에서의 기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
목숨 걸고 기도하고, 목숨 걸고 일하고,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서 하면 반드시 그 열심과 노력, 기도를 통해서 응답이 있고, 보람이 있고, 기적도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생각지 못한 어려움과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 성격, 학식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험이 닥치고 위기가 닥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결국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나와서 깨어 기도하고 겸손하게 감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함으로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고, 믿음의 분량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이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지진이 한번 일어나면 됩니다. 지진이 한번 지나가면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이나 다리들은 모두 무너지지만, 견고하게 잘
지어진 건물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깊으면 태풍이 지나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이와 같이 믿음의 깊은 뿌리를 박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자살할 만한 위기의 때에도 흔들림 없이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고, 전화위복이 되는 축복을 받아 더 큰 성공과 은혜를 입게 됩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살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정열소진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신경증 증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다가도 갑자기 성적이 떨어졌다든지 하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면 공부를 포기해 버립니다. 또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터지면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가정생활을 할 때나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나타나면 의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잘 나오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어려운 시험이 닥치면 금방 낙심해서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도 않고 교회를 떠난다든지 불신앙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과 믿음,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갑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며 발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마치 풍차와 같습니다. 풍차는 바람이 세게 불수록 빨리 돌아가고, 빨리 돌아갈수록 더 많은 양의 전기를 발생시킵니다. 또한
기도는 마치 물레방아와 같습니다. 물살이 세면 셀수록 물레방아가 빨리 돌아가고, 빨리 돌아가는 물레방아에서 동력이 발생합니다.
사람들도 편안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고, 게으름과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닥치면, 그 때서야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떠나가지 않습니까? 왜 불치병이 생깁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손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의 풍차를 돌리고, 기도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그 사람들은 앞으로 더 발전하고 전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그 사람의 생활에 발전과 성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여 그 고난을 잘 극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족의 위기(에스더 4:4~12)
에스더는 바사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의 포로인 유대인 중 한명이었지만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만의 모함으로 모든 유대 민족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가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가 “이제 우리 유대 민족이 멸절을 당하게 생겼으니 너는
왕에게 나아가서 민족을 위하여 구하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왕의 허락 없이 나아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목숨을 걸고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에스더는 온 유대 민족과 함께 3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리고 담대하게 믿음을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민족의 원통함과
자기 민족을 멸절시키고자 음모를 꾸민 하만 총리에 대해 보고하였습니다. 왕은 에스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을 구하게 되고, 구원받는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위험을 당했을 때, 위기에 닥쳤을 때 에스더는 결사적인 기도를 함으로 자신도 살고 가족과 민족도 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결사기도를 함으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를 해결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나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B. 에스더의 결사기도
1.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 공동체의식,
자신의 행복과 안정만 생각지 말라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에 4:13)
하만이라는 총리가 왕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멸절시키라는 조서를 받아 내었습니다. 에스더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모르드개가 와서 “비록 네가 왕후가 되어 왕궁에 있다고 해서 온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도 유대 민족이 아니냐? 유대 민족이 다 멸절당하면 너에게도 그 위험이 닥칠 수 있다. 너 혼자만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국가가 잘돼야 회사도, 가정도, 개인도 잘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생각하고, 부정부패하고 뇌물을
챙기고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면 나라도 잘못되고 개인도 잘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이웃을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믿음만 지키면 괜찮겠지’라고 하면서 교회에 충성하지
않고, 자신의 주어진 직분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하고, 민족과 나라, 교회, 이웃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25절 말씀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양자가 되어서 한 평생 궁전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고난 받는 자신의 민족을 생각하고 그 민족과
더불어 고난에 동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민족의 편을 들었다가 결국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연단을 받은 후에,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명령으로 민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호강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감당하면 나중에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는 “우리는 누구나 이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 혼자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웃도 생각하고, 나라도 생각하고, 내가 소속한 단체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의 연방대법관 윌리엄 더글러스(William Orville Douglas ; 1898~1980)는 “경제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체인과 같다. 고도로 산업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일어서거나 함께 쓰러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어나면 다 같이 일어나고 쓰러지면 다 같이 쓰러지는 것이지, 혼자서만 잘 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떤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중국 사람들은 ‘나는 죽어도 너는 살라’는 자세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차이나타운(Chinatown)’을 형성해서 자기 민족끼리 똘똘 뭉쳐서 그 안에서 강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상부상조하여
살아갑니다.
또 유대 민족들은 ‘너는 죽어도 나는 산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은 타민족들에 비해 수적으로는 불리하지만 이러한 지독한 생존의식을 가지고 막강한 경제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자세로 삽니다.
그래서 자기 민족들끼리 서로 싸우고, 분열해서 결국 다 같이
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나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1967년 6월에 중동에서 6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 아랍국가(이란, 이라크, 이집트, 사우디 등)들과 작은 나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6일 만에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전쟁이 터졌을 때 아랍 청년들은 자기 나라에서 소집 영장이 날아오자 모두 도망치고 숨었는데,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진해서 이스라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전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단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았더니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귀국하겠느냐는 질문에 56%가 절대로 귀국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나라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 혼자 잘살겠다는 생각은 결국 전체가 다 멸망하는 부정적인 사고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과거의 고질적인 욕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신앙과 말씀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적인
인간성과 가치관으로 삶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 ; 1835~1919)는 멋진 인생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서 43명의
백만장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행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부자가 되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은 결국 그 죄악이 자신에게도 엄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 하나님의 예비하심, 섭리, 사명감당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왕후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네가 잠잠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만족을 다른 사람과 다른 방법을 통해서 구원하시겠지만, 너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나 하나쯤 일 안 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을 다하지 않은 그 사람은
멸망과 심판을 당합니다.
포로 생활을 하던 보잘것없는 유대인의 처녀 에스더를 하나님께서 왕후라는 높은 자리에 올려주신 것이니 스스로 잘나서 왕후가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왕후가 되게 하셨을 줄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지 말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앞장서서 왕에게 가서 보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교회 나와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세해서 권력을 가지게 된 사람도 있고, 능력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역사를 나타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고, 앞장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동참하지 않은 그
사람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받은 축복은 오래 가지 않고, 그 사람이 받은 권력과 욕망도 결국 소멸될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감옥까지 갔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뭄이 들었을 때 애굽에 찾아온 형제들에게 곡식과 살 처소를 마련해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과거에 요셉에게 고통을 준 것을 생각하고 혹시 요셉이 보복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창세기
45장 5절 말씀을 보면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목적이 있고,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고,
재능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민족을 위한 것이고, 교회를 위한 것이고,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사명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사명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국가에 빚을 진 것입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등록금을 적게 내고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더 나라를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하고 이웃에 대한 봉사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밖에
모른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혹시 서울대학교 졸업생이 있다면 신문기사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2년 9월 14일자
경향신문입니다.
배운 것만큼, 축복받은 것만큼, 능력 있는 만큼, 무언가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프리카 선교사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 1875~1965) 박사에게 한 부인이 질문을
했습니다.
“박사님, 당신은 위대한 학자요,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어떻게 미개한 아프리카에서 보수도 없고
대우도 없이 한 평생을 헌신하며 살기로 결심하셨습니까?”
그 질문에 슈바이처 박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능을 주신
것도, 학문을 주신 것도, 능력을 주신 것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선교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관을 깨달아야 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서 내 인생의 보람을 느낄 것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하나님,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디서 행복을 추구하고 어디서 보람을 느껴야 하겠습니까? 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금식 기도(禁食 祈禱)
나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 결사의 기도, 금식기도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에 4:15~17)
왕후 에스더는 자신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3일 동안 온전히 금식기도를 하면서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어려운 위기와 환난이 닥쳤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한 기도, 사생결단의 기도, 마지막에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목숨 걸고 하는 기도가 바로 금식기도이며, 가장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사야 58장 6~9절에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은 세상적인 규례를 어긴다 할지라도, 세상적인 질서,
세상적인 법을 어긴다 할지라도, 초월적인 역사를 하시기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왕의 규례를 어겨도 생명을 보전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에스더는 기도한 후, 민족을 구하겠다는 결심으로 목숨을 걸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갔습니다.
에스더를 본 왕은 금홀을 내밀어 에스더의
죽음을 면케 하고 그의 탄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을 모함했던 하만을 처형해서 원수를 갚아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에스더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여 응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20장 1~6절 말씀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여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았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어려움을 당했을 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고 금식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20장 1~26절 말씀을 보니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과 암몬 자손이 침입해 왔을 때,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여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적군이 침입했을 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위기를 당했을 때, 병들었을 때, 모함을 당했을 때, 생각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절망하고 낙심하여 갈 바를 몰라 좌절하지만, 여러분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8세기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 1706~1790)은 훌륭한 명언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일할 때는 백 년을 살 것처럼 왕성하게 일하고, 기도할 때는 내일 죽을 것처럼 진지하게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백 년을 내다보고 계획하고 일을 하지만, 기도할 때는 당장 내일 죽는다 생각하고 아주 목숨을 걸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얘기합니까?
그것은 목숨 걸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응답해 주시려면
주시고, 말라면 마세요.’ 하면서 기도하니까 수 십 년을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내일 죽을 것처럼
진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그 성적을 통해서 보람을 느낍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면 그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먼저 구원하시고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장 건강 협의회 회장인 ‘스미스’ 박사는 “묵상 기도하는 것보다 목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것이 병 치료가 2배 이상
빠르고, 암 병에도 걸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라고 말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암에 걸리지 말고, 병이 들었어도 빨리 고침 받고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열심히 하고, 기도를 할 때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열심히 들으며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응답하시고, 열매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 2001년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센터 테러 사건 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간증을 했는데, 당시 그는
100층에 있었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와서 부딪히자 그는 100층에서 뛰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로마서 10장 13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외치면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 내려가자 연기와 화염이 없어지면서 길이 보였고, 그들이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자 빌딩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니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위험을 당했을 때는 하나님 밖에 부를 분이 없습니다.
옛날에 한강이 얼었을 때, 한 중이 그 길을 불경을 외우며 지나가다가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물 속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부를 이름인데 좀더 일찍 부르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어느 대학교수가 석가, 공자, 예수님이 다 똑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한 분이지 어떻게 몇 분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이시며,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십니다.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응답 기도(應答 祈禱)
에스더처럼 위기 앞에서 결사의 기도를 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자.
어려움을 당했을 때, 문제가 생겼을 때, 생각지 못한 질병에 걸렸을 때, 그 때는 낙망하고 포기하지 말고 에스더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결사기도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이 목숨 걸고 가정과 직장, 사업장, 교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과
보호하심이 함께 할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춘자 성도의 간증
그가 29세가 되었을 때, 공군부대에 근무하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팔다리와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고,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주저앉기 일쑤고, 급기야는 기어
다녀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척추신경 전문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다가, 나중에는 국립의료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40㎏이었고,
허리 통증으로 인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경 치료를 받다 다쳐서 거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국립의료원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 후복막 전이암으로 3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최종 진단을 내렸습니다.
후복막 전이암은 척추와 배 사이에 암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송장 취급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이 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을 통회자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약을 다 버린 후 기도원으로 가서 10일 금식기도를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 오직 살려달라고만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금식 7일 째가 되자 배 안에서 무언가 뭉클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8일 째에는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러자 몸이 가벼워지면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을 하며 적절한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한 결과
몸무게가 56㎏으로 정상이 되었고 얼굴의 혈색도 좋아졌습니다.
항암치료로 인해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했더니 의사가 아무 이상이 없다며 기적이라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생을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을 살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강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죽다가 살아나서 충성하지 마시고 살아있을 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병에 걸리는 등 고난이 닥쳐서야 충성하지 마시고 미리미리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기를 결심하고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려주십니다.
고쳐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를 뒤집는 말씀을 한다.(34절)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다.
그런데 본문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며 칼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마귀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
되기에, 빛과 어둠이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으로 싸우고
이겨야 한다.
그러면 검을 주러왔노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을 시인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검을 주셨다
세상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시인해야한다. 어떤 손해와 유혹 앞에서도 예수를 시인하기 위해싸우라고 칼을 주셨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지기까지 주를 시인했다.(단3:18)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승리 할 수 있는 영적전쟁이다.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외면
당한 경험이 있는가? 아직 도박판이나 술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가? 년말 년시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둘째,가족과 영적으로 싸우라고 검을 주셨다. (35-37절)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다.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고 화목하고 단란하게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먼저는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의미이다.(37절)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안 믿는 가족이 있을 때 생긴다. 믿지 않는 가족들은 가족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챙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하고 핍박자가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족들과 싸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위해서 검을 주러 오셨다.(38-39)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이것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래서 벗고 싶고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르라!(마16:24) 결단이란 말은 “선택(Choice)”이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선택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을 말하지만, 결단이란 말은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길 결단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
(1) 죄와 싸워야 한다.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 한다. 저항 없이 세상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사람은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다.
(2)
마귀와 싸워야 한다. 영혼이 거듭나서 영안이 조금이라도 열린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사탄 마귀가 저항해 오고 핍박해 오고 유혹해 올
때에 마귀와 타협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해 가지 않는다.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한다.(약4:7-8)
(3). 잘못된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못 박힌 정욕이 다시 살아 발동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고전9:27)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 검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이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다.
둘째, 말씀이다.(히4:12)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쳤다.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마귀와 싸우지도 않는 교회는 마귀들이 지붕에서 졸고 있다. 그런데 기도하고 전도하고 영적싸움을 하는 교회는
마귀가 어쩔 줄 모르고 활동한다. 성령 충만하여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마련이다.
서문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탄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다. 싸워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편안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라! 이런 자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사탄이 깔보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사탄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한 이후에 주시는 참된 평안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라 시인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사랑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주어진다.
나라를 위한 기도 성경구절 BEST 10
1.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2. 잠언 11:14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3. 시편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4. 시편 22: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5. 예레미야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6. 시편 72:11
“모든 왕이 그 앞에 엎드리며 모든 나라가 그를 섬기리로다.”
7.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는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너를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8. 시편 33:10-11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9. 다니엘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10. 시편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민족과 나라를 위한 기도선포문
사랑이신 하나님
오직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전심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 열방을 위해 주신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 시간 하늘의 큰 권세와 능력을 충만케 부어
주세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 내고 이 한반도에 3년 만에 반드시 기독교적으로 복음적으로 자유통일이 이루이지게 해주세요.
순국, 순열,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복음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기독교 대국으로 세워주세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모든 집회 위에 날씨를 비롯한 모든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서게 해주세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불같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주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성전에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믿고 바라고 구한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우리 영권, 인권, 물권을 주세요.
이 성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영광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과 부활의 영으로 연합되어져 성령으로 하나되게 해주세요.
성도들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심겨지게 해주세요.
복음의 사명의 불이 붙어 그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의 불을 던지는 영적
군사들로 세워지게 해주세요.
묶인 것이 풀어지고 닫힌 것이 열리고 병든 자가 치료되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게 해주세요.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온전한 축복과 응답과 증거가 나타나게 해주세요.
믿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흥황하게
해주세요.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을 세우고, 신자들을 세워가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나가는 성전으로 만들어주세요.
이 성전의 부흥을 막고 성령의 불의 역사를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근접하지 못하도록
칠만 칠천의 불 병거로 지켜 주세요.
열두 명이나 더 되는 하늘의 천군천사의 군대를 동원하여서 악을 정복하고 다스리어 그들의 높은
곳을 밟는 역사가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땅이 풍성하고 충만하게 되어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속히 오게 하여
주세요.
불신, 분열, 불안, 다툼으로 역사하는 어둠의 세력은 성령의 불과 화염검으로 막아 주세요.
이 성전의 성령의 부흥이
날마다 타오르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성취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다 승리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다 성취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다 완성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다 이루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립니다
에스더 1장 요약 / 아하수에로의 잔치
아하수에로왕이 잔치를 베풀었고, 왕후인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였고, 대신들의 말과 왕의 결정으로 인해서 폐위가 된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더 2장 요약 / 왕후가 된 에스더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조서를 내리며, 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서 에스더에게 알렸으며 이를 왕에게 에스더가 고발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3장 요약 / 앙심을 품은 하만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하만이 앙심을 품고서 유다 민족을 없앨 궁리를 찾게 됩니다.
조서를 써서 유다 민족을 줄일 것을 알리게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월 2일(월) 에스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굄을 얻더라(2: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When the turn came for Esther (the girl Mordecai had
adopted, the daughter of his uncle Abihail) to go to the king, she asked
for nothing other than what Hegai, the king's eunuch who was in charge of the harem, suggested. And Esther won the favor of everyone who saw her.
새번역. 공동번역 / 아리 따웠다
현대인 / 호감을 주었다
새한글 / 마음에 들어 했다
굄(2580) 헨(chên) חֵן
스트롱번호 2580
구약 성경 / 69회 사용
-
1. 명사, 남성 -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
2. 명사, 남성 -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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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사, 남성 - 탄원, 기원, 기도, 슥 12:10.
-
관련 성경 / 은혜(창6:8, 삼상1:18, 렘31:2), 은총(출33:12, 삼상16:22, 잠3:4), 사랑(삼상 20:29, 에 2:15, 잠 28:23), 장식(잠3:22), 덕(잠22:11).
[형] 은혜롭다(전10:12), 유덕하다(잠11:16), 사랑스럽다(창30:27), 아름답다(잠1:9, 4:9).
2603. 하난(chânan) חָנַן 스트롱번호 2603
아비하일
- '아버지는 강하다'의 뜻을 갖는 히브리식 이름이다.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에스더 이외의 다른 처녀들은
왕에게 보다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향품이나 의복 등을 규정 이상으로 요구하였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에스더는 헤개가 마련해
준것만을 사용했다.
이는 에스더의 침착하고 검소한 일면과 헤개에 대한 그녀의 신뢰를 엿보게 한다(Huey).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보는 자의 눈에서 은혜를 얻었다'의 뜻이다.
즉, 에스더를 본 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호의를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
AI
"굄을 얻다"는 "사랑받거나 총애를 얻다"라는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즉, 누군가에게 매우 귀엽거나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 사람의 사랑을 받거나, 특별히 총애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굄 : "유난히 귀엽게 여겨 사랑함"이라는 뜻으로, 보통 "굄을 받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얻다 : "갖게 되거나 받게 되다"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사랑"이나 "총애"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시 : 어려서부터 남의 굄만 받고 곱게 자란 진수는 진지는 하되 끈기가 부족하였다.
왕에게서 굄을 얻어 왕후로 선발되었다.
굄성 : 남의 사랑을 받을 만한 특성.
에 2:15 얻음의 비결
... 굄(*총애)을 얻었다. 물론 왕에게서도 굄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에 왕후로 선발되었다. 에스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때 이렇게 굄을 얻을 있었던 비...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잠언 11:16) - 블로그 - 네이버
2020. 10. 27. — ... 을 받다', '영광을 얻다' 등의 뜻을 가진 (3513)에서 유래되었다. 3. '얻고'는 (8551)로 '잡다', '얻다', '취하...
굄, 괴다
2018. 4. 26. — 우리 고유어 표현 가운데 '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유난히 귀엽게 여겨 사랑함'이라는 뜻으로, 보통 '굄을 받다'라는 표현으로 많이...
굄을 얻는 신앙
성경 전체를 흐르는 구원의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한 '작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나오도록 권유하는 것
'얻고'는 <타마크>(8551)로 '잡다', '얻다', '취하다', '꽉쥐다', '움켜쥐다' 등의 뜻이다.
미완료 능동태 동사이다. 주는 자의 고집으로 인해서 존귀를 ...
잠언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A kindhearted woman gains respect, but ruthless men gain only wealth.
얻고(타마크. tâmak) תָּמַךְ
스트롱번호 8551
1. 잡다. 2. 창 48:17. 3. 잠 5:5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관련 성경 / 붙들다(출17:12, 시41:12, 63:8), 붙들리다(사41:10), 굳게 지키다(시17:5), 움키다(창48:17), 잡다(욥36:17, 암1:8), 지키다(잠4:4,시16:5), 막다(잠28:17), 사로잡히다(암1:5),매이다(잠5:22).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 이것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지조(志操)있게 처신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말이다.
* 지조(志操) : 뜻 지, 잡을 조 / 곧은 뜻과 절조
요컨대 에스더는 그 몸을 단장하는 데 전력하지 않고 "헤개"가 정해준 범위 안에서 단장품을 사용하였을 뿐 그 이상 다른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셀(P.Cassel)은 말하기를, "그녀는 싫은 마음으로 자기 집을 떠나 나왔고, 그 모든 처녀들 중에 으뜸이 되려는 경쟁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높은 자리에 대한 야심도 없었고, 그 광채나는 왕궁에 왔어도 모르드개의 가정에서 받은 율법의 교육에 의한 덕스러운 인격을 파수하고 동요하지 않았다"(抄譯)고 하였다(Commentary on Esther, 1888,pp.71-73). 카셀
(P.Cassel)의 이 해석은 정당하다.
에스더는 권력에 순응하는 태도는 가졌으나 왕후의 영광을 탐한 것은 아니었다.
본장에는 그의 피동적 태도가 몇차례 나타났다.
8, 15, 16, 20 참조.
* 피동(被動) : 입을 피, 움직일 동 / 남의 힘에 의(依)하여 움직이는 일.
주체(主體)가 다른 힘에 의(依)하여 움직이는 동사성(動詞性)의 성질(性質).
곧, 「안기다, 먹히다」 같은 동사(動詞).
아이온사이드(Harry Ironside)는 그의 "에스더서 강해"에서 에스더의 인격을 비평하여 말하기를, "왕후가 되는 에스더의 처신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가 믿음으로 행하였더라면 자기는 수모 받는 여호와의 백성, 곧 유다 여자임을 내세웠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모르드개가 그에게 자기 민족과 종족을 밝히지 말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10절), 결국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함보다 왕후의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모르드개도 유다 민족의 성별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행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혼인 관계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그 때의 그와 같은 혼인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후에 그 기대대로 되기는 했으나 그 혼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라고 하였다(Notes on The Book of Esther, 1921,pp.24-25).
그러나 아이온사이드(Ironside)의 이같은 말은 에스더서를 오해한 것이다.
* 역설(逆說) : 거스를 역, 살씀 설 / 어떤 주의(主義)나 주장(主張)에 반대(反對)되는 이론(理論).
언뜻 보면 진리(眞理)와 모순(矛盾)되는 것 같으나 사실(事實)은 그 속에 일종(一種)의 진리(眞理)가 있는 말.
(1)에스더는(모르드개도) 그 때에 이방의 포로였고 그가 아하수에로 왕궁에 들어가게 된 것도 강제로 끌려 간 것인데 어찌하여 그
여자가 왕후의 영광을 탐해서 자진하여 들어간 듯이 간주될 것인가 ?
(2)그 때에 파사의 왕후 선발에 에스더가 순응한 것은 물론 모르드개의 지도를 받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드개의 신앙 인격을 바로 알 때에 그의 지도를 받은 에스더를 이해할 수 있다.
모르드개는 피압박 민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10:3).
그런데 그의 투쟁 방법은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 집권자에게 순응하는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그 때 이방 파사 왕에게 자기의 사촌 동생을 혼인시키는 것이 죄였던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신 7:3)은 특별히 가나안 민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과 혼인할 경우에는 그 민족의 우상주의와 동화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민족과 결혼한 일이 적지 않다.
요셉도 이방 여자를 취하였고(창 41:45), 모세도 그리하였다(출 2:21).
모르드개의 신앙과 삶의 태도(에스더 4:4-17)
모르드개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사람'
바벨론의 신 '마르닥'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입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사람으로 그 부친은 야일이고,
에스더의 사촌입니다(에 2:5)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이때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이때 유다 왕을
비롯한 많은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였던 모르드개도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스 2:2, 느 7:7)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를 이었는데 왕비 와스디가 그의 말을 거역하자 왕비를 폐하고 모르드개의 사촌 에스더를 새 왕비로 간택하였습니다.
한
번은 모르드개의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을 품고 모살하려 할 때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하므로 왕의 암살음모가 미연에 방지되었고 이 일은
궁중일기에 기록되었습니다(에 2:21-23).
그는 왕의 신하로서 그것도 적국의 군주이지만 상전되는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므로서
그의 행위는 기록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민족을 구하고 자신도 존귀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하만을 높이
들어 총리대신으로 앉혔습니다. 궁궐대문에서 일하는 모든 신하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무릎을 꿇고 절하였는데 모르드개는 무릎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 아니하므로 하만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은 그 벌이 경하다 생각하고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그와 그 민족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왕의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채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더는 새 옷을 보내어 갈아입으라고 했으나
모르드개는 듣지 않고 왕께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자기가 아무리 왕비라 할지라도 국법으로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한 모르드개는 그녀가 왕 앞에 나아가기를 강권했습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기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하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았고, 궁중실록을 읽다가 모르드개의 공적을
보았으며 그의 공적에 대한 상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왕은 하만에게 그 방법을 물었습니다. 하만은 자기에게 주는 상인 줄 알고
임금과 같은 대접을 받으려고 제안했으나, 모르드개에게 그 영광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모르드개는 그의 대적 하만이 갖고 있던
권위의 반지를 자기의 손에 끼게 되었고,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도리어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자기 종들의 눈물과 통곡을 노래와 찬송으로 바꾸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즉 하만이 처형된 후, 왕 다음가는 총리대신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에8:15, 에9:10)
이러한 모르드개의 공로를 기념하여 부림절이 제정되었습니다.(에9:26-28) 모르드개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유대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습니다.
모르드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모르드개와 금식 기도
바사
나라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나라에 국무총리쯤 되는 하만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새말로 하만이 실세이기 때문에
그가 지나갈 때는 모두 엎드려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라는 사람은 신앙의 절개가 굳은 사람이라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이를 괘씸히 여기고 바사 나라의 전 유대 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목매달아
죽이려고 50규빗 되는 장대를 집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왕후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키운 조카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후를 찾아가 중요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해 줄 때, 그 때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비장한 각오로
대답하기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3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이 부르지 않을 때 나아가면 죽이는
법인데, 왕의 눈에는 금식까지 한 왕후가 초라해 보이지 않고 청초한 코스모스처럼 예뻐 보였는지 기쁜 마음으로 금홀을 내밀었습니다.
소원을 말하라고 할 때 잔치를 배설할 터이니 하만과 함께 참석하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 잔치석상에서 소원을 말하라고 할 때,
내일 한번 더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어서 소원을 말하라고 할 때 무릎꿇고 울면서 나와 내 민족이
하루에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을 당하게 되었사오니 나와 내 민족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할 때, 깜짝 놀란 왕은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고 격분해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그 원수는 이 악한 하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이 대노하여
벌떡 일어나 후원으로 나가자, 하만이 자기가 죽게된 것을 알고 왕후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그만 두 손을
왕후의 무릎을 잡고 왕후가 앉은 두 무릎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습니다. 왕이 후원에서 들어오면서 이 꼴을 보고,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구나”할 때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서 끌고 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들었던 50규빗 되는 장대에 자기가 목매달려
죽었습니다. 대신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높은 자리와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각 도에 조서를 보내어 온 유다 민족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전 유다 민족이 도륙과 진멸을 당할 위기에서 사태가 역전되어 살게된 것은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금식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2. 2인자 모르드개
세상은
1등만 인정할 뿐, 2등은 아무도 기억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1인자보다 더 위대한 것이 제2인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인자의 자리는 2인자의 역할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2인자는 최고의 1인자를 만들어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민족을 구원한 왕후 에스더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주인공인 에스더 보다 2인자인 모르드개에게 모아져야 합니다. 모르드개의 신앙이 바로 에스더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고 80년이 지난 후, 바사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월 이국 땅에서 살아온 유대 백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이 살아온 땅에서 신앙을
지키며 실향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에스더서는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당시 바사의 왕이던
아하수에로는 왕후 와스디가 왕궁잔치에 나오는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왕후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후를 삼고자 도성의 처녀들을
왕궁으로 이끌어갔습니다. 바로 이 도성 수산에 유대인 모르드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삼촌 부부가 죽자 그들의 딸 에스더를 자기
딸처럼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왕의 명을 받은 헤개가 도성에 들어왔다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고 왕궁으로
이끌어 가, 아하수에로왕의 왕후로 삼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모르드개는 왕의 최고 신하인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결국 유대민족 전체를 말살하고자 계략을 꾸밉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을 충동해 유대민족을 말살할 조서를 받고,
유대인은 곧 모두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로 하여금 유대 민족을 위한 탄원을 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만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자신의 계략에 빠져 오히려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매달려
자신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결국 모르드개의 신앙과 지혜로 인하여 유대 민족 전체는 말살의 위기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꼭 생사를 걸고 충성하는 심복들이 있고 협력자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떠받들어 주었기 때문이고,
누군가가 희생해 주는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가진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등만이 귀한 것 아닙니다. 주연보다 더
소중한 역할이 조연입니다. 주연급 배우들은 반짝 스타가 되지만 조연급 배우들은 나이 들도록 쓰임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등만 되려는 세상에서 훌륭한 2인자로도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앞장서기보다 때로는
뒤에서 묵묵히 돕는자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뛰어난 1인자 뒤에는 반드시 탁월한 2인자가 뒷받침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1인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1인자는 바로 그 2인자일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1인자도 중요하지만, 1인자를 만들어내는 2인자는 더욱 위대합니다. 에스더 왕후의 배후에는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있었기에 에스더 왕후와 유대인들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탁월한 2인자가 됩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각자가 처한 공동체를 위해, 가장 필요한 2인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모르드개의 신앙
첫째,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1)
모르드개는 하만으로 인해 위기가 닥치자, 곧바로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 왕을 만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의 허락
없이 왕을 만났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왕후가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볼 줄 아는 자였습니다.
(에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2)
모르드개는 왕을 모살하려는 음모를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려 왕의 목숨을 구합니다(2:21-22). 그러나 그는 이 일로 당장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선한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후일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을 믿는, 미래를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왕이 모르드개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었을 때도, 그는 절대 교만하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립니다(6:11-12). 왕은 하만을 시켜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을 태워 성중 거리로 다니면서 존귀한 자라
칭함을 받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예를 입고도 모르드개는 곧 바로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묵묵히 때를 기다립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1)
모르드개는 신앙의 교훈을 새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2:5은 모르드개가 베냐민 사람이요, 기스의 증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사울 왕가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삼상9:1).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의 소유를 깨끗이 멸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결국 왕위까지 잃게 되었습니다(삼상 15:20-23).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하만은 아각 사람입니다. 즉, 그는 아말렉 족속의 아각 가문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르드개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으로 인해 하만에게 절대 굽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에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셋째, 기회를 선용할 줄 알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 에스더를 왕후에 오르게 합니다(2:8-20).
모르드개는
왕의 명을 받은 헤개가 에스더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보자, 기지를 발휘합니다. 에스더에게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말라
당부하고(2:10, 20), 오직 내시 헤개가 정한대로 따르도록 합니다(2:15). 이는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게 한 것과 같습니다. 모르드개의 지략은 그대로 효과를 발휘해 결국 에스더가 모든 보는 자들에게 시샘을 얻을 정도가 되고,
마침내 왕은 모든 다른 여자들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2) 왕을 죽음에서 구합니다(2:21-23).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다는 것은 그가 제국 행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는 왕궁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2:11). 그는 업무중에 우연히 왕을 모살하려는 자들의 음모를 듣게 됩니다. 그는 신속하게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왕의 목숨을 구한 사실은 궁중일기에까지 기록되게 됩니다.
3) 위기 속에서 에스더를 잘 활용합니다(4:7-14).
모르드개는
민족말살의 위협 속에서도 매우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먼저 그는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지시합니다. 이는 하만이 감추고 있는 사실들을 왕후를 통해 전달함으로 왕에게 진상을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다인을
모아 금식과 기도에 전념합니다.
넷째, 남을 도와서 성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1) 에스더를 성공하게 만듭니다.
2) 에스더의 성공은 모르드개를 성공하게 합니다.
3) 에스더와 모르드개로 인해 유다 온 민족이 영광을 얻습니다.
1인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2인자입니다. 사람들은 1인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2인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가 성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성공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지식을 넘어 지혜를, 정보를 넘어 영감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모르드개의 탁월함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영감에 있습니다. 그는 작은
정보,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았으며, 사람을 활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의 뛰어난 영감은 유다 민족의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와 기지는 많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에스더 8:17)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4. 모르드개의 고난과 하나님의 역사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참고 견디면 나중에는 보다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는 삶이 온통 무너지는 것 같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나면 유익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응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보존하시는 한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꺾으시고 우리가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하나님은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만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축복이 자신에게서 오는 것임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목적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34:19)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이 그를 몹시 싫어해서 광야의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미디안 무역상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그는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 이제 당신이 여기까지 읽고 성경을
덮는다면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바뀌어 요셉은 감옥에서 석방되고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
되어 형제들과 상봉합니다. 그는 기근 때에 가족과 온 나라를 구합니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바사 왕국에 머뭅니다. 악한 하만은 유대인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일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라는 의로운
사람을 매달기 위해 장대를 설치합니다. 자, 이제 당신이 여기까지 잃고 성경을 덮는다면 나머지 이야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일은 바뀌어 에스더는 포로에서 왕후의 신분으로 상승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 대신 장대에 달리고 에스더는 유대 민족 전체를
살립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한 제자에게 배신당해 종교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를 3년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그를
버렸습니다. 자, 이제 당신이 여기까지 읽고 성경을 덮는다면 나머지 이야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일은 바뀌어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고, 하늘에 올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서 세상을 영원히 다스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뒤엎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모르드개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을 살펴보면
1. 모르드개는 어떤 곤경과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동족을 구하였습니다. 이는 환난에 처한 우리들에게 끝까지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2. 모르드개는 사촌인 에스더를 훌륭하게 양육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와 제자들을 주님 뜻대로 바르게 양육합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3. 모르드개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 모든 일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믿음으로 극복합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4.
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와 분리해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고
역설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멸망 받아도 나 한사람만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다른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삼하10:12)
5.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그에 따르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모르드개의 말은 자신보다 약하고 어려운 이를 도와주어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사복(私福)만 채우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20:35)
6.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역사하신다. 비록 우리가 난관에 처하여 그 되어질 일들을 알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모르드개의 고백(에4:14)과 같은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성도
여러분, 모르드개는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었고, 기회를
선용할 줄 알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곤경과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 모든 일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도 모르드개를 본받아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믿음으로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더 장별 요약 핵심정리
오늘 소개할 구약 성경의 열일곱번째 장인 에스더 장별 요약 핵심정리입니다..
성경을 어려워하시는 분이나 읽을려는 엄두가 나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하여 앞으로 성경요약을 해볼까합니다.또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전체 내용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 열일곱번째 에스더 배경
유대민족을 구원한 책입니다.바사 제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을 구원한 이야기입니다.
에스더 1장 요약
아하수에로왕이 잔치를 베풀었고,왕후인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엿고,대신들의 말과 왕의 결정으로 인해서 폐위가 된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더 2장 요약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조서를 내리며,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습니다.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서 에스더에게 알렸으며 이를 왕에게 에스더가 고발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3장 요약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하만이 앙심을 품고서 유다 민족을 없앨 궁리를 찾게 됩니다.조서를 써서 유다 민족을 줄일 것을 알리게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4장 요약
유다 민족이 탄식하고 금식하였고,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다 민족의 어려운 상황을 알립니다.유다 사람들에게 에스더가 할 일을 알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5장 요약
에스더가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청하였고,하만은 집에 가서 에스더의 초청을 자랑하게 됩니다.하만은 장대를 만들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6장 요약
왕이 궁중 실록에 기록이 된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되고,모르드개를 높여서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록 해주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7장 요약
두 번째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동족을 구원하여 줄것을 요청하였고,왕이 하만의 음오를 알게 되엇으며 하만을 자기집에 세워둔 장대에 매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에스더 8장 요약
왕이 에스더에게 하만의 재산을 주었으며,에스더는 하만의 조서를 무효화화도록 왕에게 요청합니다.왕의 명령으로 모르드개가 조서를 꾸며서 유다 민족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9장 요약
유다 민족이 그들의 대적들을 모두 죽였지만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모르드개가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라고 지시하여 부림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10장 요약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아서 페르시아의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더 요약 | |
에스더서는 포로 기간 중에 유대인들이 겪은 위기를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그 위기를 기회로 인도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더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볼 수 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에스더가 왕후로 있었던 페르시아 왕조의 흐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레스 – 캄비세스2세 – 스메르디스 – 다리오히스타페스(다리우스) - 크레스크세스(아하수에로) -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 다리오3세 여기에서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귀환을 명령했고, 다리우스 때는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했었다. 다리우스 이후 아하수에로 시대에 에스더가 왕후로 있었다. 그 이후 아닥사스다 때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이 있었다. | |
장 |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
1 |
◈ 왕후 폐위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베풀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가 어전으로 올 것을 청했으나 왕후 와스디가 거절하다. •왕후 와스디가 대신들의 말과 왕의 결정으로 인해 폐위가 되다. |
2 |
◈ 왕후가 된 에스더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조서를 내리다.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다.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밝히다. |
3 |
◈ 하만의 음모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하만이 앙심을 품다. •하만이 유다 민족을 없앨 방법을 찾다. •하만이 왕에게 유다인을 죽일 것을 청원하다. •왕이 조서를 내려 유다 민족 말살 계획이 이루어지다. |
4 |
◈ 에스더의 결심 •왕이 내린 조서를 들은 유다 민족이 탄식하고 금식하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다 민족의 상황을 알리다. •에스더가 죽을 각오를 하고 왕에게 나아갈 것을 결심하다. |
5 |
◈ 에스더의 잔치와 하만의 음모 •에스더가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청하다. •하만이 집에 가서 에스더의 초청을 자랑하다. •하만이 장대를 세워 모르드개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다. |
6 |
◈ 모르드개 •왕이 궁중실록을 읽고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되다. •왕이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여 여길 수 있도록 해주다. |
7 |
◈ 하만의 몰락 •두 번째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동족을 구해 줄 것을 요청하다. •왕이 에스더를 통해서 하만의 음모를 알게 되다. •왕이 하만의 집에 세워둔 장대에 매달라고 명하다. |
8 |
◈ 구함 받은 유다 민족 •왕이 하만의 모든 재산을 에스더에게 주다. •에스더가 하만의 조서를 무효하도록 왕에게 요청하다. •왕의 명령으로 모르드개가 새로운 조서를 만들어 지방으로 보내다. |
9 |
◈ 부림절 •12월 13일에 유다 민족이 그들의 대적을 모두 죽이다. •유다 민족이 대적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은 빼앗지 않다. •모르드개가 유다 백성에게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명하다. |
10 |
◈ 권력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 다음으로 실권을 갖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