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들
빛
요한일서 1:5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빛이며, 그 안에는 어떠한 불의나 어둠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 순수함, 절대적인 선하심을 상징합니다. 빛은 또한 인간을 진리로 인도하는 계시의 속성이며, 길 잃은 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위로를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도 이 맥락 안에서, 어둠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구속적 진리이자 사랑의 상징입니다.
불
신명기 4:24 –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불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정결하게 하시는 사역을 드러냅니다. 죄와 불의, 우상숭배를 태우며 하나님의 질투는 그 백성을 향한 언약적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됩니다. 이 불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금속을 정련하듯 인간을 정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불은 죄인을 소멸하지만, 회개하는 자를 단련하여 의롭게 만드십니다.
바람(성령)
요한복음 3:8 – 바람이 임의로 불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힘과 방향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인간의 예측을 넘어 자유롭고 주권적으로 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한된 이해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권과 신비를 상징합니다. 성령은 재창조의 숨결이며, 교회와 개인을 일으키는 생명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불과 바람으로 임하신 성령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여는 능력입니다.
반석
시편 18:2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반석은 흔들림 없는 기반과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며, 어떤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근거입니다.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심으로 교회의 기초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로, 우리의 믿음이 머물고 의지해야 할 절대적 존재이십니다.
사자
호세아 11:10 – 그들이 여호와를 따라가리니 그는 사자 같이 부르짖으실 것이라
사자는 강력함과 위엄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주권을 드러냅니다. ‘유다의 사자’로 불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의 왕으로 세상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짖음은 그 백성을 심판하시며 동시에 회복으로 이끄시는 구속적 음성입니다. 사자의 위엄은 하나님의 진노일 수 있으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정의를 세우는 정의로운 통치자의 상징이 됩니다.
구름
출애굽기 13:21 –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도 구름이 산을 덮었으며, 성막과 성전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구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표시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통치를 상징합니다.
독수리
신명기 32:11 –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새끼를 업는 것 같이
독수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 그리고 능동적인 인도하심을 상징합니다. 새끼를 업어 높은 곳으로 데려가는 독수리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구체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상징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강력하면서도 섬세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업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속사는 독수리와 같은 보호자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버지
마태복음 6:9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가장 친밀한 언어입니다.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관계를 넘어서서, 돌보심, 인도, 훈육, 사랑의 총합체로서의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빠”(아바)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신약의 결정적인 계시이며,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복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의 대상입니다.
목자
시편 23:1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는 돌보고 이끄는 존재이며, 양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친히 인도하시며, 길 잃은 자를 찾고, 상처 입은 자를 싸매시며,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동행하시는 보호자이십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셨으며, 목자의 삶은 희생과 돌봄, 끝없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목자는 책임지는 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상징합니다.
왕
시편 47:7 –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하나님은 창조의 통치자이시며, 전 세계의 주권자이십니다. 이 상징은 하나님의 통치권, 절대적인 권위,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주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은 인간 왕과는 달리, 의롭고 자비로우며 영원한 통치로 구현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왕국은 세상 나라와 구별된 하늘의 통치 질서를 의미합니다.
신랑
이사야 62:5 –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로 삼으시고, 언약적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십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헌신과 연합을 포함하며,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심벌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이 이미지로 표현되며, 재림은 신랑의 도래요, 종말의 혼인 잔치는 구원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약이 아닌 언약으로, 신실하고 영원합니다.
포도원 주인
이사야 5:7 –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하나님은 세심하게 돌보시는 농부이자 주인이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혹은 교회를 상징하며, 하나님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시고 그것을 위해 환경을 조성하시는 분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진리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기대, 심판과 회복의 이중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도공
이사야 64:8 –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도공은 창조의 손길이며, 인간의 삶을 설계하고 조형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진흙은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창조자의 뜻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겸손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도공이 그릇을 빚듯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조각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 삶의 목적성을 동시에 시사합니다.
방패
시편 3:3 –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외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방패는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방어 수단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싸움 중에도 평안으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방패는 물리적인 보호만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과 영적 안전, 신뢰와 의지의 대상임을 나타냅니다.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서도 하나님은 성도의 앞에 서 계신 분입니다.
샘(우물)
예레미야 2:13 –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리고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깊은 갈증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샘은 메마른 땅에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필수 요소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공급자이자 만족자이며, 인간이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으려 할 때 생명의 근원을 떠난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고갈되지 않는 참된 기쁨과 힘의 원천입니다.
어머니 같은 위로자
이사야 66:13 –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만, 때로는 어머니의 속성으로 위로와 돌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드럽고 온유한 사랑,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건네는 위안과 공감을 드러냅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하나님의 위로는 영혼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함 안에 포함된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의 조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해 태양
말라기 4:2 –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하나님은 의롭고 치유하시는 분으로, 해처럼 어두움을 밝히고 병든 마음과 몸을 치유하십니다. 이는 메시아적 희망이자, 구속사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회복 사역을 상징합니다. 해는 또한 새로운 시작, 부활,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을 상징하며, 구원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신실한 증인
요한계시록 1:5 –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참되신 분이십니다. 증인은 진실을 밝히는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를 드러내는 최종적 계시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변함이 없으며, 이는 언약의 성취와 구원의 확실성을 보증합니다.
건축자
히브리서 11:10 –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으니
하나님은 거룩한 성을 짓는 설계자이며, 인간의 삶과 역사를 조형하시는 궁극적 건축자이십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지으실 참된 도시, 곧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이 상징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 성도의 본향, 그리고 완성될 영원한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영(Spirit)
요한복음 4:24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공간에 제한받지 않으시는 무형의 존재이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어디에나 임재하십니다. 이 상징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교제를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한 영적 실재를 요구함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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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할 통(通)
1. 사물이 막힘이 없이 잘 통함
2. 의견이나 의사 따위가 남에게
* communication
이야기 /
어느 추운 겨울 날 밤사이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덮였습니다.
참새 떼들은 모이를 찾아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앉을만한 곳도 찾지 못합니다.
한 농부가 참새 떼를 위하여 마당의 눈을 쓸어내고 마당 위에 참새가 먹을 수 있는 곡식을 뿌려 놓습니다.
그리고 참새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이리로 내려와서 모이를 먹어라!
아무리 외쳐도 참새들은 여전히 공중을 날아다닐 뿐 마당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참새와 농부가 서로 소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참새가 되면 소통이 가능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소통하려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내려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내려오신 방법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이라고 합니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성육신'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이 신의 모든 성품을 그대로 지닌 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성경은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이 인간의 특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탄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지니신 채, 육신적으로도 흠이 없는 상태에서 탄생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칼케돈 회의(451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동정녀를 통하여 탄생하신 것에 대한 교리를 확실하게 정리하여 공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2항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요리문답 제22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참 몸과 이성적인 영혼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복중에서 잉태되어 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신앙의 핵심에는 개념(槪念)들이 있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歷史的) 인물(人物)이 있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성탄(聖誕)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첫 출발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다른 관념(觀念)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의 창시자의 존재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헤겔주의(Hegelianism)나 마르크스주의(Marxism)와 같은 관념들은 그 관념의 주창자(主唱者)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 비록 그 사상체계가 그들에 의해 소개되거나 종합되었을지라도 이제 그 사상 체계는 그 주창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떤 철학이나 사상처럼 단순히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기독교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핵(核, nucleus)으로 하여 둘러싸며 존재하는데 그 예수그리스도는 또한 육신(肉身)이 되신 말씀(Logos)이다.
1.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14 말씀에 근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요 1:3) 성탄은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이 같은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 같이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創造物)에 불과한 인간(人間)과 같이 되셨다는 성탄의 사건은 천지창조(天地創造) 보다도 더 경이(驚異)로운 사건이다.
기독교신앙은 역사적(歷史的)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敬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絶頂)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1) 구원론의 차원과 2)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성육신사건은 기독교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는가?
- 성육신사건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성육신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樣式)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2. 성육신의 구원론적 의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救援論的)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경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使者)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神性)과 참 인성(人性)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贖罪)의 사역을 대신하시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成肉身)의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基礎)를 마련해 주게 된다.
3. 성육신의 신론적 의미
다음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神論的)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일까?”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像, Image)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릿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며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自信)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 본성’(유사본질, homoiousios, 아리우스의 주장)을 가졌을 뿐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동일본질, homoousios, 아타나시우스 주장)을 가졌는가?” ‘homoiousios’와 ‘homoousios’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자 한 자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被造物)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超越的)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저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相衝)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로서의 성경과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그저 추상적(抽象的)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不滅)하시며 무한(無限)하시며 불변(不變)하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며, 유한하지 않으시고, 변하시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性稟)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像, image)은 우상(偶像)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골 1:15)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요 15: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像, image)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독생 성자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학 사상과 같은 추상적 개념(槪念)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人格的)으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首肯)만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信賴)와 순종(順從)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行動) 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被造物)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 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原理)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抽象的)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4. 성육신과 기독교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런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신앙은 어떠한 삶의 양태(樣態)를 요구하는가?
다시 말하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신앙은 이 세상을 부정(否定)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經綸)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해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해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마치는 말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 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 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해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7월 19일(토) 이사야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아기 한 아들(9:6)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관주성경
ㅌ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ㅍ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ㅎ어깨에는 ㅏ政事(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奇妙者(기묘자)라 ㅑ謀士(모사)라 ㅓ全能(전능)하신 하나님이라 ㅕ永存(영존)하시는 ㅗ아버지라 ㅛ平康(평강)의 王(왕)이라 할것임이라.
ㅌ
누가복음 2:11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 ㅍ아들을
ㅍ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ㅎ
사22:22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ㅏ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고전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때까지 부가부 왕노릇하시리니
ㅑ
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ㅓ
사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요,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뢰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느9: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열조와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바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렘32:18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
시45:3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ㅕ
시72:17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ㅗ
사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ㅛ
시72:7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탄생에 대하여 예언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아기를 보내주시고 그 아기를 통해 장차 택한 백성들을 영적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1-5). 그리고 그 메시야는 아기로 탄생하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 아기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들이 나옵니다(6-17).
1.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1-5)
하나님께서는 1절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에 고통받던 자들 즉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심판을 받고 고통하던 스불론 땅, 납달리 땅에 대한 회복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성취됩니다(마 4:14-16).
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칩니다(2). 이 빛은 장차 하나님의 구원을 가지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고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 즐거워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님께서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습니다(3-5).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될 교회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사기 7:21에 보면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 군대를 격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계속해서 5절은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심판하시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5).
하나님의
심판은 순식간에, 방어할 틈도 없이 갑자기 주어질 것입니다. 1차적으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의 모습입니다. BC 539년에 거대한
제국 바벨론은 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망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도 이러할 것입니다.
2. 한 아기, 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6a)
하나님께서 장차 구원자로 보내주실 주인공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6a).
한
아기, 한 아들이 올 것입니다. 한 아기라는 말은 구원자가 인간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인에게서 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기라고 한 것입니다. 장차 이 아기가 출생했을 때
하나님의 천사는 이 아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2).
한
아기, 한 아들로 오신 구원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에 주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한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이고 경배를 받아야 하고, 축하를 받아야 하는 분입니다. 그 자리를 다른 그 어떤 것이 차지해서는 안됩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6b)
계속해서 6절 하반절을 봅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6b).
여기
정사(미쓰라)라는 말은 지배, 통치권을 나타냅니다. 다윗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나옵니다. 즉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는 기묘자입니다. 이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자, 경이로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분, 능가하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사는 충고자, 계획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계획, 온전한 계획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원자로 오는 아기가 신성과 전능성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영속하시는 아버지, 끊임없는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창조주시면서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평강의 왕은 메시야로 오시는 한 아기가 행하실 사역에 대한 성격을 말해줍니다. 그 아기는 전쟁을 하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무기로 나라를 얻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실 분입니다.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완전하고 온전한 승리를 이루실 분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한 아기와 한 아들 / 그 위대하신 이름
에수님께서는 기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탄생과 사역, 부활과 승천의 모습이 기묘합니다.
두 번째 이름은「모사(Counselor)」입니다.
사람의 인생의 모든 경영이 이루어지려면 모사가 필요합니다. 유비와 조조에게도 제갈공명과 사마의라는 모사가 있었고 다윗에게는 아히도벨과 후새가 있었습니다. 기업경영과 군대전투 그리고 국가정치에서도 모사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우리의 모사(상담자)가 되셔서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도우시고, 탄식과 중보기도로 붙들어 주십니다. 세 번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The Almighty God)」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엘 기보르(영웅이신 하나님, 용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못하실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네 번째 이름은「영존하신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아버지」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라 부름은 그가 백성을 돌보시는 아버지같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한 왕국의 왕, 백성들의 왕, 포로들의 왕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선지자 엘리사 당시의 요아스 임금도 엘리사를 아버지로 불렀던 것을 볼 때「아버지」는 백성들을 돌보시는 아버지 같으신 메시야에 대한 이름이고 호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영생을 주시는 아버지, 왕이십니다. 마지막 이름은「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두려움을 없애시고 전쟁을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왕과 통치자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음으로 혹은 두려움과 강압과 압박과 공포와 힘, 그리고 교만과 전쟁으로 다스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강과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놀라우신 기묘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삶의 상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도우시는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
영생을 주시고 돌보시는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평강으로 다스리시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이사야 9:1-7)
성경에서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 1:24, 마태복음 26:71).
이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스불론 (Zebulun) 지파에게 배분된 땅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단순히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모두가 다 같은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대인들은 따로 성(姓)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개인의 출신지 이름이나 (예를 들어,
가룟 유다, 아리마대 요셉) 그 사람의 아버지 이름을 (예를 들어, 요한의 아들 시몬,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함께
사용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기본적으로 “나사렛 사람 예수”를 의미합니다.
또 이 이름은 예수님을 조롱할 때 부르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갈릴리 지방과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유대인들 중에서 멸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에,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이 나사렛 사람 예수님을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로 소개하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심지어 나다나엘은 갈릴리의 다른 마을인 가나 (Cana) 출신(요한복음 21:2)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사람들조차도 “별 볼일 없는 마을”로 취급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름을 예수님 자신과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용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주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베드로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3:6-7).
또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모여있는 이방인들을 향해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38).
전에 예수님을 멸시하기 위해 쓰였던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이제는
제자들에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 높여 찬송하고
증거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 땅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갈릴리 땅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스라엘 땅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는데 남쪽의 유대 지방(Judea)과 중부의
사마리아(Samaria) 그리고 북부의 갈릴리(Galilee)입니다. 이 중에서 남쪽의 유대 지방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유대인의 전통을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잘 지켜온 가장 순수한 유대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부심도 매우 강했습니다. 반면에 북쪽에 위치한 갈리리 지방은 외세의 칩입도 자주 받고 이방의 문화에 많이
노출되어 있어서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순수성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1절에서도 갈릴리를 가리켜 “이방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예 이스라엘의 일부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9:11절에 보면, 솔로몬 왕이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넘겨줍니다. 이는 히람이 솔로몬 궁과
성전을 지을 재료들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로왕 히람은 이 성읍들을 보고는 “뭐 이런 땅을 주는 거야!” 하고
불평합니다. 땅에 대한 애착이 몹시나 강했던 고대의 왕들조차 이렇게 값싸게 취급했던 것을 보면 갈릴리 땅이 얼마나 멸시를
받았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갈릴리 땅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7:52) 하고,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한복음
7:41) 하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사야의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갈릴리 땅은 이전에 흑암 중에 있었는데, 이 땅에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전에 이 땅은 고통하며, 멸시를 당하며, 사망의 그늘 아래 거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땅이 빛으로 인해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갈릴리 지방의 역사에 대해 소상히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있으며, 또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사람들의 삶이란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몇 년 동안 저 혼자 아이들을 돌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 때 저는 아이들을 위해 매 끼니 음식을 만들고, 등하교 길에 차를 태워주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공부와 숙제를 도와주며, 함께 한국 비디오를 보거나 책방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상담을 하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침대 머리에 앉아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성년이 되었지만 이들은 자주 그 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 장면들이 마치 “선명한 사진”처럼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아빠가 그들에게 했던 말들과 그들을 위해 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그 시간이 어두웠던 만큼 아빠와 함께 했던 좋은 기억들이 더욱 선명하게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려움은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자랑으로 그 날을 회상합니다. 사실 이것은 제 아이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어둠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구원이 네게
부족하냐?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넌 뭐가 그렇게 힘드냐?” 저는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제 인생의 유일한 빛이 되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흑암 같은 제 삶을 이 빛으로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리 각자의 삶이 마치 “네거티브 필름 (negative film)”에 “빛”을 비추어 “한 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 자체는 “네거티브”입니다. 거기에는 빛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어두움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일 때, 우리 인생이 아름답게 변합니다. 감추어졌던 색들이 예쁘게 그 빛깔을
드러내며, 가장 어둡던 곳은 오히려 가장 환하게 빛을 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지 않은 인생은 아무리 빛을 찾아 애를 써도 여전히 “네거티브”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빛과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세상 모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며 흑암 속을 행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삶을 빛과 생명으로 아름답게 채우시며 영화롭게 하십니다.
3-5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흑암 중에 고통하던 백성들에게 가져다주시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 그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이며,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각 개인의 삶은 여러가지 비유로 설명됩니다. 그중 하나는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원수와 싸워서 이기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the day of
Midian’s defeat)과 같이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미디안의 날”이란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기드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메뚜기 떼와 같이 무수한 미디안 군대를 다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기드온을 찾아왔을 때 그는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사사기
6:11). 당시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름 내내 농사를 지어놓으면 추수 때에 쳐들어와서 모든 곡물들을 싹
쓸어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움푹 패인 포도주 틀에 숨어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내 고생하면서 키운 농작물을 거두자마자 원수들에게 빼앗긴다면 그것만큼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사람들을 기드온의 손에 붙이시고 오히려 그가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많은 탈취물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수들을 두려워하며 몰래 농사를 짓고 타작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 앞에서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은 “(예수께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귀의 종이 되어 살다가 결국은 그 생명을
죽음에 빼앗겨버립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여름내 초조함 가운데 많은 고생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것은 “추수하는 즐거움”이며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헛된 수고”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손으로 수고한 것을 축복하시며, 또 그것을 원수로부터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 일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 살면서 많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그의 “많은
재산”이 오히려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사는 것이 매우 무모하고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축복이 되시며 아브라함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군인의 갑옷을 입거나 피 흘리는 싸움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즐거움(joy)”과 “평강
(peace)”만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나의 방패가 되시며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앞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며, 고통하던 자들에게 큰 즐거움이 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약속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그것은 “한 아기”를 통해서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아기는 바로 우리 가운데 아들로
태어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이 아들은 “한 아기”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이름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 믿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곧 내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는 “씨”입니다. 작고 연약하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신비와 가능성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아기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모든 축복들을
그 몸 안에 다 담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에 두 소경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붙들고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들은 비록 눈이 멀었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하신 모든 약속들을 오직
“한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십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예수님께 대한 더 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더 크신 분으로 자라시는 것이 바로 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예수님의 첫 이름은 “기묘자(Wonder)”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놀랍고 신기한 비밀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이 이름은 사사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하나님의 천사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신 이름이기도 합니다. 천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사사기 13:17-18).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얼마 전에
NASA에서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이라는 우주 망원경을 발사하여 운영중이라고
합니다. 이 망원경은 기존의 우주 망원경인 허블 우주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이 볼 수 없는 더 깊은
우주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고성능 우주 망원경으로도 우주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우주의 더 깊은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더 많은 은하들을 관측할 뿐입니다. 여전히 우주는 “기묘”로 남아있습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자신의 참 모습을 감춘 채, 또 수없이 많은 빛들을 우리에게 비추어 그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가장 밝은 계시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은
“기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다함이 없이” 예수님께 대해서 배우고,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으며, 매일 “새로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18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사람들이 “지식”을 갖게 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귀납적 (inductive)”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연역적 (deductive)” 방법입니다. 귀납적 방법은 보고 관찰하고 경험한 사실들을 근거로 더 큰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한복음
3:2).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아 이 분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시구나” 하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를 “귀납법”이라고 합니다. 연역법은 반대로 큰 지식으로부터 개별적인 사실들을 유추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 백부장은 자신의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인을 고치시기 위해 그의 집에
가시려고 하자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태복음 8:8). 이 로마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감히 자신의 누추한 집에 모실 수 없는 한없이
귀하고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불치병을 고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의 속에는 예수님께 대한 이 놀라운 지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놀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이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께 대한 이런 지식과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크신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다스리시고
축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모든
것을 아시며 지혜로우신 선생님)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사실은 세상 만물과 우리 인생들을 다 그 품에 안고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빛을 비추셔서 이 예수님의 크고 높으심을 깨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야말로 우리를 빛과 생명과 영광으로 이끄는 우리의 소중한 영적 재산이 됩니다.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검고 칙칙한 네거티브 필름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담을 때, 우리 삶은
한없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빛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의미 (마태복음 2:23)
마태복음은 약속과 성취로 구약과 신약, 두 시대를 잇는 다리로써 “구약성경의 광범위한 인용”이 들어 있다.그런데 마태복음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게 된다.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애굽(이집트)으로 피난했던 아기 예수의 가족은 헤롯이 죽은 후 천사의 지시에 따라 요셉은 아기 예수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유대로 올라가려 하였으나,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였다(마 2:19-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23)
요셉은 다시 꿈에 계시를 받고 갈릴리 나사렛에 가서 살게 되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그런데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이 구절의 해석이 난해한 것은 구약성경 어느 곳에도 ‘나사렛’이라는 지명이나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자라나 ‘나사렛 사람’이라 불린다는 명확한 구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라는 표현을 예언적 성취로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의 주석은 일반적으로 이 부분을 이사야 11:1 말씀에 대한 성취로 해석하고 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נצר)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נצר)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이사야 11:1)
이사야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하는 ‘싹’과 ‘가지’라는 히브리 단어가 네쩨르(נצר)인데, 이 ‘네쩨르’가 ‘나사렛’의 히브리어 어근이다.
그러니까 ‘나사렛’은 ‘네쩨르’에서 파생된 단어인 것이다.
웨야차 소테르 믹게자 이솨이 웨네체르 밋솨라솨우 이페레
וְיָצָא חֹטֶר מִגֵּזַע יִשָׁי וְנֵצֶר מִשָּׁרָשָׁיו יִפְרֶה׃
개역개정,1 이새의 줄기에서(게자) 한 싹이(호테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네체르) 나서 결실할 것이요
줄기(게자. gezaʽ) גֶּזַע
스트롱번호 1503
어원 / 어미활용 גִּזְּעוֹ,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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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쓰러진 나무의 줄기, 나무줄기, 욥14:8, 사11:1, 40:24.
-
관련 성경 / 줄기(욥 14:8, 사 11:1, 40:24).
싹(호테르. chôṭer ) חֹטֵר
스트롱번호 2415
어원 / 의미가 확실치 않은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명사, 남성 회초리, 작은 가지, 젖먹이, 막대, 잠14:3, 사11:1.
-
관련 성경 / 매(잠 14:3), 싹(사 11:1).
가지(네체르. nêtser ) נֵצֶר
스트롱번호 5342
- 어원 / 5341의 ‘푸르름, 신선’이란 뜻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4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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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싹, 발아, 사6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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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명사, 남성 [주][은유법] : 자손, 사11:1, 단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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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남성 가지, 사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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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가지(사 11:1, 60:21), 나뭇가지(사 14:19).
* 5341 나차르
1. 경계하다. 2. 파수대. מִגְדַּל נֹצְרים . 3. 위험으로부터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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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 nâtsar ]
- 구약 성경 / 61회 사용
다윗의 가지
어원론적으로 볼 때 나사렛이란 이름과 메시아의 칭호인 “네쩨르(가지)”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어떤 선지자도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태어날 것이나 혹은 나사렛에서 자라실 것에 대해 예언하지 않았고, 오직 기름 부음을 받은 한 특별한 다윗 자손(가지)의 왕이 오심을 예언하였다(사7:14; 9:1-7; 11:1-5; 단2:44; 7:13-14).
성경학자들이 헬라어의 ‘나조라이오스’(Ναζωραῖος) 즉 ‘나사렛 사람’과 이 구절을 연결시키는 것은 ‘가지’의 히브리어가 ‘네쩨르(נצר)’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줄기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고 이것은 메시아의 낮아지심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한 ‘싹’ 이 넷째르와 한 ‘가지’는 바로 앞의 구절인 이사야 10장 34절의 ‘빽빽한 숲’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시작은 미약하나 충만한 생명력으로 큰 산림을 덮어버릴 메시아 사역의 성질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마태복음을 섰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사용하여 너희들이 대망하고 있는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것을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나사렛의 어원
나사렛이 구약이나 탈무드에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나사렛이 예수님 탄생 시기에 만들어진 신생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사렛(Nazareth)의 지명은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네쩨르(נָצְרַת 신생, 새싹, 가지)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나조라이오스’(Ναζωραῖος : 나사렛 사람)의 뜻은 이후에 고착 되어진 헬라어 지명으로 본다.
나사렛의 시대적 배경과 지리적 위치
나사렛은 갈릴리 산간 지방에 속하며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작고 고립된 산간마을의 분지로 레바논 산맥의 최남단 구릉지이며, 갈릴리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24Km 위치하며 지중해와 갈릴리 사이 중간 지점에 있다. 해발 약 433m의 언덕 위에 삼면이 가로막혔고 남쪽으로만 통할 수 있었다.
기후는 온화하고 강우량도 식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나 마을 중간에 있는 마리아의 우물 외에 물을 저장 관리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현재는 아랍인이 사는 동네로 예수를 영접한 기독교인(60%)과 이슬람교도들이 섞여 살고 있고, 유대인은 산등성이에 새로이 정착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나사렛
신약 성경에 나사렛은 마리아가 가브리엘을 만난 곳(눅1:26).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보낸 곳 청년기에 일한 곳 (눅2:4,마2:23,눅2:51)
예수께서 요단강에 세례받으러 나가실 때도 이곳에서 나가셨고(막1:9).
시험을 받으신 후에도 나사렛으로(마4:13) 돌아오셨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자 (눅4:28)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올라가사 그 곳을 본거지 삼으셨다(눅4:16, 마4:13, 마13:54, 막6:1).
이후에 예수께서 나사렛으로 돌아 오셨다는 기록은 없다.
나사렛 사람 Nazarene 조롱의 이름
복음서에 등장하는 나사렛은 유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는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요 1:46; 행 24:5), 특별히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는 것은 무척이나 멸시와 조롱과 가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단호하게 부정적으로 반문했으던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예언에 이르는 베들레헴에서 난 자로 불리지 않고 경멸과 무시로 일관된 나사렛 사람으로 알려졌다.(요7:41,42)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사53:3) 많은 유대인들(눅18:37)과 제사장의 하인들(마26:71)과 군인들(요18:5)에게 나사렛 예수, 나사렛 사람이라 불렸으며 마지막으로 빌라도가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요19:19~20).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12-16)
갈릴리 예수(Jesus of Galilee) 마태복음 28:1-10
갈릴리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보여주신 사역과 사건에 연루하여 우리가 찾아야 할 예수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미션필드의 센터역할을 하였던 바로 그 갈릴리를 부활하신 예수님 스스로가 예언하시며 성취하신 중요한 지명입니다. 갈릴리 예수는 나사렛 예수와 사뭇 그것이 가르치는 구속사적인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렛 마을에서 자라, 나사렛 동네 가난한 목수 아버지 요셉 밑에서 성장한 가정환경배경을 한마디로 지적하면 나사렛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나사렛은 정말 보잘 것 없으며, 소위 사람들이 천시하며 과소평가할 수 있는 약한 자의 상징, 볼품없는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는 보잘것없는 예수, 그러나 이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처럼 보잘것없는 자를 위하여 이토록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이 전반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역점은 단순히 겸손하신 예수님, 자신을 한 없이 낮추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더 이상 언어활동이 불가능한 숨이 멎어버린 <죽은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 강력한 주안점입니다.
갈릴리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역하셨고, 다시 갈릴리에서 예수님 스스로가 예언하신대로 그 약속을 지키시는 "Promise Keeper"(약속, 언약의 주님)되심을 보여주신 부활의 역사입니다. 이 갈릴리 예수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큰 메시지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메신저로서 하늘의 천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큰 지진(A Great Earthquake)"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출19:18, 민16:31, 왕상19:11, 욥9:6, 시18:7, 68:8, 77:18, 사3:13, 5:25, 13:13, 24:18, 29:6, 렘10:10, 49:21, 욜2:10, 나1:5, 학2:6)과 신약(4복음서, 마28:2, 계6:12, 8:5, 11:13-19, 마27:51)에서 <지진>을 통하여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셨는데, 이 <지진>이 시사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Listen, the Lord is speaking!"입니다. “들어라, 여호와가 말씀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실 때는 반드시 이 <지진>을 동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Incarnation)하게 하셔서, 낮추시고, 공생애(33년간의 갈릴리목회)로 더 낮추시고, 이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므로 최고로 낮추셨다가, 무덤에서 올리기 시작하십니다. 그 사건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소 중에 하나가 갈릴리입니다. 이 <갈릴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진이 일어난 그 원인은 하나님의 특사(특별한 메신저)인 천사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마28:2). 더욱이, “무덤의 돌이 굴려진 사건”(2절)은 이 돌이 단순한 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천사가 무덤의 인봉석을 옆으로 굴려서 그 돌을 땅 위에 <넓적한 돌(중후한 석판)>로 만들어 그 위에 앉았습니다(“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2절). 인봉석(Seal)이 거대한 석판으로서 천사의 좌석이 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리를 상징합니다.
갈릴리 예수는 마28:10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새로운 영적안목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에 오셔서 세상 속에 계시다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그런 필그리머(이민자같은 삶)로만 부각될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가 아닌 산 예수, 갈릴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부활의 메시지는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의 의미는 산 소망의 믿음으로 만나자는 것이요, 슬픔을 이기고, 절망을 이긴 생명의 주 예수 안에서 만나자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절망과 슬픔의 연속, 모순과 부정적인 퇴락의 연속이지만, 주님은 이 현실의 절망에서 벗어나 승리의 관을 쓴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실 목적으로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신 것입니다.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길,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길, 그 길은 오직 하나, "갈릴리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과 예수님의 출생: 구속사적 해석
서론
신약에서 “갈릴리 나사렛”은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의 배경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의 지리적 출생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독특한 상징성과 예언적 성취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역설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글에서는 갈릴리와 나사렛의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님의 출생이 갖는 신학적 중요성과 구속사적 해석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1. 갈릴리와 나사렛의 역사적·문화적 배경
1) 갈릴리: 이방과 접촉한 지역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부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이방 민족들과의 접촉이 많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주전 722년), 이 지역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식민화되었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살았습니다. 이로 인해 갈릴리는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여겨졌고,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종종 무시되거나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나사렛: 갈릴리 내의 작은 마을
나사렛은 갈릴리의 작은 마을로, 구약 성경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지역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했을 정도로, 나사렛은 당대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2. 예수님의 출생과 나사렛의 의미
1) 예언의 성취
마태복음 2장 23절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특정 구약 본문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여러 예언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성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은 “가장 낮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네제르”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은 메시아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기서 “싹”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네제르”입니다.
2) 낮아지신 메시아
나사렛은 작은 마을로서, 예수님의 출생이 겸손하고 낮아진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메시아는 세상의 왕궁이 아닌, 소외된 지역에서 태어나셨고, 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나사렛 출신은 “가장 낮은 자를 통해 가장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3. 갈릴리의 상징성과 예수님의 사역
1) 이방의 빛으로서의 메시아
마태복음 4장 15-16절은 이사야 9장을 인용하며,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고 기록합니다. 갈릴리는 유대와 이방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으로, 예수님이 이곳을 중심으로 사역하신 것은 그분의 메시지가 유대인을 넘어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는 메시아가 단순히 한 민족을 위한 구원자가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2) 구속사의 확장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은 구속사의 지리적·영적 확장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전해졌습니다(사도행전 1:8).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특정 민족이나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음을 상징합니다.
4. 구속사적 해석: 갈릴리와 나사렛을 통한 메시지
1) 하나님의 역설적 방식
예수님의 출생과 나사렛 배경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의 권력 중심에서 나타나길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가장 미미한 나사렛에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며, 겸손과 낮아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고린도전서 1:27-29).
2)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
예수님이 나사렛과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사역하신 것은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갈릴리는 이방과의 경계에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과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3)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으로 불리신 것은 또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멸시와 소외를 상징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멸시를 몸소 겪으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된 고난받는 메시아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5. 그리스도인의 사명: 나사렛 출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나사렛 출생과 갈릴리 사역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1) 겸손과 낮아짐의 삶
예수님의 나사렛 출생은 그분이 겸손과 낮아짐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본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구원의 빛을 전하는 사명
갈릴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본 지역으로 묘사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는 것을 포함합니다.
3) 보편적 복음을 위한 삶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민족과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
갈릴리 나사렛은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에서 지리적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이루어지며, 낮아지고 소외된 곳에서 시작되어 모든 민족에게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으로 불리신 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사의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출신 예수님을 따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며, 구원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새롭게 결단합시다.
갈릴리 나사렛사람 예수
본문은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왔다’고 보고한다.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증언이다. 그런데 ‘갈릴리 나사렛’은 예수시대의 유대사회․종교․정치 체제에서 멸시와 천대의 땅이었다. 히브리 성서는 일찍부터 갈릴리지역을 ‘이방인들의 땅’이라고 멸시했다.(미가서 5:15) 나아가 ‘나사렛’은 유대인들의 종교․역사문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외지고 궁벽한 산골마을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냐’라고 반문한다.
실제로 갈릴리는 히브리 지파동맹 때부터 끊임없이 이방민족들의 침략을 받았다. 이방민족들의 침략으로 인해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법규에 따른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 건설과 누림’을 위협당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갈릴리지역은 기원전7백22년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전혀 유대인들의 땅이 아니었다. 완전한 이방인들의 땅이었다. 그러면서 시나브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전통과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혈통마저도 불분명해졌다.
그런데 복음서의 갈릴리 이야기에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시대상황과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유대와 갈릴리 땅에서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세운 ‘마카비 왕조’다. 마카비 왕조는 기원전1백65년 무렵 헬라제국과의 투쟁 속에서 유대 땅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마카비 왕조는 세력을 키워서 갈릴리와 에돔 땅까지 차지했다. 그런 후에는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갈릴리와 에돔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혈통(血統) 세탁을 했다. 마카비 왕조 이야기는 개신교 성서에서는 빠졌으나 고대헬라어 70인 역 성서와 카톨릭 성서에서는 경전으로 포함되었다.
마카비 왕조시대가 저물고 예수시대에 이르러 갈릴리지역은 로마제국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렸다. 이 시대 갈릴리지역은 ‘로마제국과 헤롯왕가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와 대지주 등’ 기득권 세력들로부터 사중(四重)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지역에는 농사짓기에 좋은 기름진 땅들이 많았다. 또 하늘 은총을 받은 갈릴리 호수는 온갖 물고기들로 풍성했다.
이렇듯이 복음서 시대의 사회․종교․정치․경제 상황과 역사 속에서 갈릴리에는 피라미드 사회계층구조가 뚜렷했다. 최상층부에는 소수의 헤롯왕족과 귀족 그리고 대지주와 대상인과 세금징수업자 등이 터를 잡았다. 아마도 그 시대 세금징수업자는 고리대금업을 겸업했을 것이다. 중간층에는 최상층에 봉사하는 하급관리들과 세리 또는 마름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소규모 자영농과 어부와 수공업자들도 중간층에 자리를 잡았다. 최하층에는 한해살이 소작농과 소작농노들 그리고 날품팔이와 천민노예 등 풀뿌리 사람들이 자리를 깔았다.
그러나 또 한편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사회․종교․정치 대항운동의 근거지였다. 기원전63년 로마제국 폼페이우스가 갈릴리를 침략한 이후 유대인들의 수많은 항쟁봉기가 갈릴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갈릴리는 로마제국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폭력항쟁을 벌였던 젤롯당(Zealot 열심당)과 자객암살단(시카리오이 σικάριοι)의 활동무대였다.
고대유대 역사가(歷史家)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기원전47년 이방인 헤롯대왕이 유대의 왕이 되었을 때 갈릴리로부터 항쟁봉화가 타올랐다. 또 기원전4년 헤롯대왕이 죽었을 때에도 갈릴리로부터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나아가 서기66년에서 70년까지 예루살렘 독립전쟁 때와 서기1백32년 ‘바코흐바’ 독립전쟁 때에도 맨 처음 항쟁의 불길이 타오른 곳은 갈릴리였다.
이렇듯이 예수는 삼년 여 짧은 공생애를 사는 동안 오롯이 ‘갈릴리 나사렛사람 예수’라고 불렸다.
나사렛 사람
나사렛은 여러 의미로 쓰인다. 나사렛 사람으로 번역된다. 특별히 신약성경에 따르면 갈릴리 나사렛(북쪽 이스라엘 지역)에서 성장한 예수께 적용되는 말이다.[1] 이 단어는 두 번역으로 가능한데 하나는 나사렛의 예수와 예수 나사렛 사람으로 된다.[2] 나사렛이나 나사렛 사람이나 그리스어로는 불규칙한 용어이다.[3]

마태복음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가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예언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구약성경의 출처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구세주 칭호로 이해되는 히브리어 네처('가지')를 헬라어로 읽은 나사렛 사람과 함께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사사기에서 삼손을 나실인으로 언급하는 한 구절을 지적하는데, 그 단어는 그리스어로 나사렛 사람에게서 한 글자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다. 나사렛 사람이 예수를 통치자로 서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헬라어 신약은 나사렛 사람을 여섯 번(마가, 누가) 사용하고 나사렛 사람은 13번 사용한다(일부 사본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사도행전에서 나사렛 사람은 마을 주민이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 즉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노트즈림(Notzrim)은 기독교인을 뜻하는 현대 히브리어(No·tsri, נוֹצְרִי)이며 시리아어(Nasrani)와 아랍어(Naṣrānī, نصراني)에서 '기독교인'을 의미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두 단어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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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나라에 현명한 왕이 있었다.
왕은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청렴한지, 왕의 명령을 잘 준행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며 내년 이맘때 꽃을 가장 아름답게 피운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일 년 후, 왕은 백성들에게 각자 가꾼 꽃을 들고 나오라고 명했다. 길가에 나온 백성들은 왕의 행렬 앞에 빨갛고 노란 색색의 꽃이 핀 화분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유달리 한 소년만 빈손으로 나와서 울고 있었다. 왕이 소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이상하게 자기 꽃씨만 싹을 틔우지 않아, 자신이 이 나라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져 울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이 찾던 사람이 바로 이 소년이라고 선포했다.
사실 왕이 백성들에게 나눠준 꽃씨는 모두 삶은 것으로, 애초에 생명력이 없는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으나 꽃이 피지 않는 씨앗을 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백성을 찾고 싶었던 왕은, 그런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데 기뻐하며 소년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
(사무엘상 15:22~23)
『왕과 씨앗』. 이 책은 중국의 옛 이야기인 '씨앗'을 샬로트 드미 헌트 황이 ≪빈 화분≫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쓴 것이다.
긴수염
왕은 후손이 없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들을 성으로 부른다. 그리고는 씨앗을 하나씩 주며 여섯 달 후에 자신들이 키운 것을
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농부의 아들 잭은 호기심에 씨앗을 받아가 갖은 정성을 다해보지만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는데….
에릭 매던은 호주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이주했어요.
셰필드 대학에서 연극과 사회 심리학을 공부했고, 여러 학교와 도서관,
미술관, 국제 페스티벌 등에서 영국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과 노래를 했어요.
그림을 그린 폴 헤스와 함께《당나귀 귀
임금님》,《손톱 수프》등의 책을 쓰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여러 책과 음반을 낸 다재다능한 작가랍니다.
왕과 씨앗, 바니데(Banide)
옛날 옛적에, 자식이 없어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는 왕이 살고 있었어.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다, 결국 왕은 지금까지 나라를
지켜온 전사들 중에서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을 다음 왕으로 삼기로 결심했어.
그는 모두에게 하나의 씨앗을 주었지.
그리고
이 씨앗을 잘 보살펴라고 말해.
일년 후 얼만큼 잘 자랐는지를 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자와라는 그 씨앗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매일 물을 주고 씨앗을 심은 화분을 들여다보며 정성껏 보살피기 시작했어.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연두색 작은 새싹 하나 볼 수 없었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지 보란듯
자랑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누군가의 씨앗은 나무가 되기도 했고, 꽃을 피우기도 했어.
자와라의 씨앗 빼고는 모든 씨앗은 눈부시게
자라고 있는 듯 보였어.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왕과 약속한 날이 밝았어.
왕은 그때의 씨앗을 지금까지 얼마나 잘 키웠는지 보고싶다고 모두에게 말했지.
자와라는 아무 것도 나지 않은 화분을 가져가기를 망설였지만, 그의 아내가 그대로 가져가도록 권했어.
왕은 한 자리에 모인 모든
화분들, 나무가 되고 꽃이 된 화분들을 둘러보았어.
그리곤 제일 끝에 서 있는 자와라의 텅 빈 화분도 보게 되었지.
왕은 모든 전사들을 불러모아, 다음 왕은 자와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어.
그리곤 자와라 한 사람만이 정직하게 약속을 지켰다고
말해.
왕이 준 씨앗은 뜨거운 물로 한번 삶은 씨앗이라, 절대로 자랄 수 없는 씨앗이었던 거야.
정직함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오직 자와라만이 왕이 될 수 있었지.
중국의 한 임금님이 정성을 다해 꽃씨를 잘 가꾼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에 수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어요.
이렇게 몰려든 아이들에게 임금님은 삶은 씨앗을 나눠주고 정성을 다해 잘 키운 후 화분을 궁궐로 가져오게 했어요.
주인공 핑도 씨앗을 화분에 심고 정성을 다해 키워보지만, 새싹은 나지 않고 근심만 더해갑니다.
결국 핑은 아무것도 나지 않은 빈 화분을 들고 궁궐에 계신 임금님께 보여주려고 가지고 갑니다.
핑의 빈 화분을 본 임금님은 흐뭇한 표정을 지어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화려한 꽃들이 핀 화분을 들고 왔지만, 핑은 아무것도 없는 빈 화분을 들고 나타났어요.
핑이야 말로 진정 마음을 속이지 않은 정직한 아이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