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0장 요약 / 언약에 인친 자들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언약문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10:1-29).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10:30-31).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정기적으로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10:32-39). 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실천적 다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요약 / 귀향민들이 자리를 잡다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제비 뽑아 10분의 1을 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합니다(11:1-2).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등의 수가 제시됩니다(11:3-24). 그 외 유다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도 정리되어 공동체 전체의 조직이
드러납니다(11:25-36).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일의 일환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요약 /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기록
스룹바벨 때의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이 기록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족보도
정리됩니다(12:1-26).
성벽 봉헌식이 열리며, 백성은 노래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성을 돌며 기쁨을 표현합니다(12:27-4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물을 정리하고 성전을 위한 직무를 정돈합니다(12:44-47).
하나님의 일에
질서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느헤미야 13장 요약 /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오다
느헤미야는 잠시 바사 왕에게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 내에 도비야가
거처를 차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13:4-9).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진 것을 바로 잡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합니다(13:10-14).
또 안식일을 범하는 상인들을 단호히 막고, 성문을 폐쇄하여 안식을 회복시킵니다(13:15-22).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다시 책망하고, 제사장의 정결을 회복시킵니다(13:23-30).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행하며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3:31).
5월 31일(토) 느헤미야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주를 복으로(13:2)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Our God, however,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because they had not met the Israelites with food and water but had hired Balaam to call a curse down on them. (Our God, however,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저주(7043) 카랄(qâlal) קָלַל
저주(詛呪) : 저주할 저, 빌 주
저주(咀呪) : 씹을 저, 빌 주
* 차(且) : 또 차, 버금 차, 도마 저, 경할 저
복(1293) 베라카(Berâkâh) בְּרָכָה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복(창12:2, 신11:26, 말3:10), 축복(창27:41, 신11:29, 슥8:13), 예물(창33:11, 사36:16), 송축(느9:5).
복(福) : 복 복, 간직할 부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엄금한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신명기 23:4-5의 요약이다.
저희가...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 '암몬'과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접해야 했던 이유는, 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적으로 한 뿌리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다(창 19-30-3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절대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었다(신 2:9,19).
양식과 물
-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두 가지였다(신 2:6,7).
발람에게...저주하게 하였음이라
- 이것은 모압 왕 발락이 주동이 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브올에 살던 복술가(卜術家)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처럼 행동했던 까닭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했던 아모리 족속까지 격파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군사 행동을 취할까 염려해서 였다(민 22:2,3).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염려는 어처구니없는
기우(杞憂)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다(신 2:9,19).
이에 따라 그들은 다만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날 수 있는 길만 비켜주고(신 2:27,28),
(2) 먹을 양식과 먹을 물을 돈을 받고 공급해주면 그만이었다(신
2:6).
뇌물을 주어(사카르)
- '품삯을주고 고용하다' 혹은 '어떤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다'의 뜻(창 30:28; 민 18:31; 전 4:9; 9:5).
이것은 구체적으로,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대가로 발람에게 많은 은금(銀金)을 주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2:18; 24:13).
뇌물(사카르. sâkar) שָׂכַר
스트롱번호 7936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 비록 발람이 모압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마음을 가졌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에 따라 그가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4장).
저주 / 177구절
창세기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세기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복 / 1037구절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복과 저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복을 예로부터 좋아하다보니 우리는 복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옷, 베개, 숟가락 등에 ‘복’(福)자를 새겨 넣었다.
이처럼 복을 좋아하고 복 받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과 혼동하게 되었다.
복과 반대적 의미의 말이라면 ‘저주’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저주라는 말만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 신명기 28장의 복과 저주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가 혹시 저주하면 마치 그 저주가 그대로 자신에게 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 또는 복의 계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이 일로 인해 시므이에게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므이를 죽이려고 흥분하는 아비새를 말렸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저주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0,11).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것을 기대하였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善)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
이는 다윗의 만용이나 객기가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다.
즉 다윗은 언약의 씨(후손)를 이어가도록 선택받은 자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있는 내용이다.
창세기 12: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 약속이 지금 다윗에게 담겨져 있다(삼하 7장).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언약의 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에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야곱이 하란까지 가서 고생해서 얻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채워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언약의 복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후손에 대한 약속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후손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언약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선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그것이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선포하시고 팔복을 말씀하시며 그 복이 곧 천국임을 밝히셨다(마 5:3-10). 시편 속에서도 이미 복을 영생이라고 언급하였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복이란 언약 안에 거하게 된 것이고 그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이 곧 천국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복이 그러하다면 저주에 대한 이해도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저주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핍박을 하고 나쁘게 만든다는 표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지(선택받지) 않은 상태를 말씀한다. 곧 죄 아래 버려져 있는 상태가 저주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신 분이다(눅 22:20).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또 다른 언약을 새롭게 세우셨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던 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새 언약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품고 있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복을 누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이고 천국이며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깨달은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었다. 이미 언약의 복을 허락하셨기에 시므이의 저주가 결코 저주로 돌려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그 언약 때문에 구원의 복을 누리는 자이다. 이런 자에게는 사람이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 아래에서 죄의 권세에 매여 사는 세상의 삶이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덮어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복을 비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상대에게 평안을 빌라 만일 그 사람에게 빌었던 평안이 합당치 않다면 오히려 그 평안을 빌었던 자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 10:12-13). 오늘 우리는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비난의 말, 저주에 대해 신경쓰지 말자. 오히려 저주한다면 그 저주를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 그것이 복으로 바뀌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저주가 우리에게 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저주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저주가 오히려 복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과 저주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누구신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언약의 성취자로서 언약의 복 그 자체이시다.
최근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책이 출판되는 것을 계기로 복과 저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샤마니즘적인 관점을 가지고 성경에 대입하여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죄의 권세에 매여 저주 아래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이제 성도는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비는 복이나 혹은 비난, 저주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복의 목록(신명기 2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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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와 소출이 풍성함 (28:4).
- 곡간과 창고가 가득 찰 것 (28:8).
- 가축의 번성 (28: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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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손의 번성 (28:4).
-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음 (출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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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들에게 승리를 얻음 (28:7).
- 하나님이 보호하심으로 안전함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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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국 위에 뛰어나게 높여짐 (28:1).
- 이웃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두려워함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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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민 6:24-26).
-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 (수 1:9).
저주의 목록(특히 신명기 28:15-68에서 경고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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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와 가축이 열매를 맺지 못함 (28:18).
-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흉년이 듦 (28: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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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질병과 재앙에 걸림 (28:22, 27-28, 60-61).
- 건강이 나빠지고 수명이 짧아짐 (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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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들에게 정복당하고 쫓겨남 (28:25).
- 외국 땅으로 끌려가 노예가 됨 (28:36,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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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민족들에게 비웃음과 멸시를 당함 (28:37).
- 나라가 멸망하고 지도자가 부재함 (28: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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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김으로 영적 파멸에 빠짐 (28:20).
-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은혜를 잃음 (28:15).
신약에서의 복과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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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령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2).
- 영원한 생명: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 (요한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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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신앙의 결과: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요한복음 3:36).
- 악한 자의 운명: 영원한 심판과 불못(지옥)에 떨어짐 (마태복음 25:41).
성경은 다양한 복(blessings)
1. 영적인 복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얻는 복으로,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강조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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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
-
-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어지는 평안과 인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로마서 15:13).
-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어지는 평안과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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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유산.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에베소서 1:3).
-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유산.
2. 물질적 복
- 순종과 충성을 통해 주어지는 현실적인 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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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작물의 풍성함, 가축의 번성 등.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소득에 따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릴 것이니라" (신명기 16:17).
- 농작물의 풍성함, 가축의 번성 등.
-
- 하나님의 백성에게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보호하시는 약속.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없게 하리니" (출애굽기 15:26).
- 하나님의 백성에게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보호하시는 약속.
-
- 적들로부터의 보호와 전쟁에서의 승리.
"여호와께서 너를 너의 원수들 앞에서 이기게 하시리라" (신명기 28:7).
- 적들로부터의 보호와 전쟁에서의 승리.
3. 관계에서의 복
-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복을 주심.
-
- 자녀의 번성과 가정의 평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가축의 새끼가 번성할 것이며" (신명기 28:4).
- 자녀의 번성과 가정의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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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복을 누림.
"원수가 너를 공격할지라도 너는 승리하리라" (잠언 16:7).
-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복을 누림.
4. 천국에서의 복
- 신약에서는 이 땅의 복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이 강조돼.
-
- 마음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평화를 이루는 자 등이 받는 복들.
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마음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평화를 이루는 자 등이 받는 복들.
-
-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안식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요한계시록 21:3-4).
-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안식처.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의 목록
1.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의 목록
(신명기 28:1-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복들:
① 개인적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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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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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가축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28:4).
-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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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28:6).
② 공동체적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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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치러 오는 적군들이 네 앞에서 패할 것이라"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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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며"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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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네 땅에 비를 내리시며" (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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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고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며" (28:12).
-
-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28:13).
-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28:13).
2. 신명기에서 말하는 저주의 목록
(신명기 28:15-68)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주어지는 저주들:
① 개인적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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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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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8).
-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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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28:19).
② 건강과 환경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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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온갖 질병과 재앙을 내리시리니..." (2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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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놋과 같고 땅은 철과 같을 것이며" (28:23).
③ 적들로 인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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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너로 네 원수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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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 흩어질 것이며" (28:64).
④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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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지 못하고 그들은 네게 꾸어 줄 것이며" (28:44).
- "너는 두려움과 조롱과 조롱거리가 되리라" (28:37).
⑤ 영적 저주
- 하나님과의 단절
- "네가 다른 신들을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미워하시리라" (28:20).
"복 있는 자"
1. 팔복 (마태복음 5:3-12)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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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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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
-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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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
-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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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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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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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
-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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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
-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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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2. 기타 복의 종류
구약과 신약 곳곳에서 "복 있는 자"에 대한 묘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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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시편 1:1).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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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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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명철을 얻는 자:
"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언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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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명철을 얻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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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35). -
보지 않고 믿는 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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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
3.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복 있는 자들
요한계시록은 총 7번 "복 있는 자"를 언급해. 각각 하나님과의 관계와 순종에 따른 복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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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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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계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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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계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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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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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계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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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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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계 22:14).
요약
- 팔복 : 영적 성품과 삶의 태도에서 오는 복.
- 성경 전반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복이 약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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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 종말론적 맥락에서 믿음을 지키고 순종하며 예언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함.
저주로부터의 자유(갈라디아서 3:13-14, 5:1)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부자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가 와서 앉았다.
마침 그 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게 물을 주면서 아주
난초를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다.
그것을 지켜본 두꺼비는 그것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좇아 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 구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길러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이런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야!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누가 와서 나를 뜯어 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지 않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이 말을 들은 두꺼비가 비로소 자기는 난초가 갖고 있지 않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말이지만 그 가운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죄가 자유를 억압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가 많다.
더욱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가 분명히 있는데도 마치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본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죄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죄가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서 지금까지 구속하고 그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죄가 억압하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다.
죄는 율법을 무기로 사용하여 인간을 다스린다. 폭정을 행사한다. 사탄은 죄와 그 악한 영들을 자기의 졸개로 사용하여 인간을 부린다. 사탄은 죄와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공갈치며 협박한다.
그래서 갈3: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좀 쉽게 풀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율법 아래 매여서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사탄은, 아니 죄는 이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이렇게 억압하고 구속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다. 지금도 사탄은 죄로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거느리고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으면서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
죄로부터의 자유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시고 죄의 손아귀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죄가 부리는 악령에 우리가 놀아나지 아니하며 죄가 사용하는 율법의 무기에 우리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요한복음 8:36절에 주님이 이렇게 선언했다.
아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속에 속박 당하고 노예생활을 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계시는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말씀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 되었다.
예수님이 주신 이 영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죄가 주인이었을 때 우리는 노예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 것이다.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지도도 받지 않고, 자기 홀로 스스로 독립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그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은 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어느 쪽에든지 소속이 되어야지 독립된 자유인으로서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스러워지기에는 너무나 사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마음속에 악마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나 현실을 보나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 속에 있는 악마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 없다.
오직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때만이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나 자신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할 때에 자유는 도리어 짐이 되고 말았도다. 자유가 새로운 감옥으로 변해 버리기에 나는 주님이 묶어 놓은 밧줄 속에서만 자유를 발견할 수 있도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어 놓는 밧줄 속에서만 나는 진정 자유인이로다.”이것이 진정 자유이다. 이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계신 형제 자매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여시고 이 말씀을 꼭 깨닫도록 해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는가? 기독교, 혹은 교회에 매이지 않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유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유인이 아니다. 여러분은 죄에 매여 있다. 죄가 여러분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한다.
갈라디아 5:1절 오늘 우리가 읽었다.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님이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치 죄의 종이나 된 것처럼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심령에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 눌려 사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예견된 어떤 불안일까. 아니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포일까. 아니면 누구로부터 들은 이상한 말 한마디에 내가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누리고 자유하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짓눌려 있다. 영적으로 해방이 안 되고 있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한국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마 옛날에 무속 신앙에 젖어 있었던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도 자유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무엇인가 늘 끌려 다니고 있다. 그리고 억눌리고 어떤 면에서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자들의 이론
이런 심기를 이용하여 최근에 이상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돌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저주 시리즈”라고 할까. 이 저주에 관한 책이 십여권 나와 있는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런 책을 사서 잘 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은 이런 것이다.
“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집안에 저주가 흐르니까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것이다. 또 “뜻 모르게 당하는 고통 풀리지 않는 저주 때문이다.”“당신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저주가 있다.”
이런 이야기이다. 이런 등등의 제목을 단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이런 책들이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면 좋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지고 팔리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용을 보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가정일지라도 조상의 죄로 인해서 저주가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를 잘 믿은 집안에 할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아들이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는 손자까지 심장이 약해서 애를 먹는가? 그것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저주의 대물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왜 어떤 가정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우환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 가정에는 분명히 무슨 저주가 지금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 악한 영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저주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불행이 생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밭에 이상한 잡초가 무성하여 농사를 망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그 땅에서 한 때 몰살당했던 원혼들이 서려 있어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도를 해라. 특별히 하나님께 금식기도하고 매달려서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능력 있는 목사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마치 굿을 해야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쟁이 소리 듣는 것 같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런 말에 약하다. 우리 교회 서점에 한 때 이런 책이 들어 와서 제가 전부 다 반송시켰다.
여러분,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무슨 소리를 갖다 붙여도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제목을 보고 “아! 이게 뭔가 진리가 있구나” 하고 사서 보셨다면 여러분들의 수준을 이제 내가 평가를 해야 될 판이다.
미국에 이민을 간 어떤 형제가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자기 아버지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어떤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목사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저주를 받은 것이요. 하나님이 저주를 하신 것이요. 그러니 내 앞에 엎드리시오. 같이 기도합시다.”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대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믿지 않겠소.”
이 청년 똑똑한 청년이다. 보통 청년 같으면 “옳소이다”하고 머리를 내밀고 기도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를 바르게 믿어야 한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여러분,
기독교가 이런 정도의 저질종교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는 것이
고작해야 대물림을 하는 집안의 저주 하나 쫓아내지 못한 그런 정도의 자유인가?
조상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간에 심지어 과거에 내가 어떤 죄를 범했고 어떻게 살았을지라도 일단 예수 믿고 십자가를 붙들면 그 모든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능력을 가진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아멘.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가? 대물림을 한다니 그게 무엇인가? 우리가 잘 외우고 사랑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이전 것은 다 지나 갔다. 조상 때 모든 것도 다 지나 갔다. 내가 과거 예수 모르고 있을 때 행하던 일 다 지나 갔다. 그 모든 것 십자가에 다 못박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 이제는 저주가 나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것 안에 무슨 저주가 있는가?
만약에 새것이 되었다고 하는 그 말씀 안에 아직도 저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또 사랑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갈라디아 2:20절이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과거에 예수를 모르고 살았던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완전히 죽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여러분,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저주 때문에 벌벌 떠는 분이신가?
우리가 좀 똑바로 예수 믿고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 3:13절에 보면 우리가 받을 저주는 예수님이 이미 다 받으셨다.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다. 뭐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 다 담당하셨는데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고 마귀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고, 조상의 죄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저주는 우리를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리셔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였다.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를 받기 위해서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가 이렇게 우리를 완전히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셨는데 왜 우리가 저주를 받는 사람처럼 이말 저말에 끌려 다니면서 가슴에 짐을 지고 허덕여야 하는가?
오늘 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이 자유, 곧 저주로부터 해방,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남 모르게 점쟁이한테도 가보고 또 이런 소리, 저런 소리하는 곳에 가서 귀를 기울였던 전과자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예배 마치고 나가기 전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나를 대신해서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수 믿는 가정의 불행은 무엇인가?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목사님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렇게 잘 믿는 집안에 이해할 수 없는 불행들이 닥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대답해 드리면 이렇다.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될 사실은 우리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어도 주님께서 아주 높은 성벽을 우리 주변에 쌓아 놓고 세상에 그 어떤 악한 영향이 들어오지 않는 어떤 피난처에다 우리를 두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안 믿는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하시고 많은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그 무대 속에서 우리를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은 죄악의 소굴이다. 악령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이다. 부패한 육신을 가진 인간들의 거처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주님이 우리보고 세상에 살면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한다. 환난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법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환난도 당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담대 하라고 한다.“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아무 일도 없는데 담대 하라고 하는가?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예수 믿으면 아무 어려운 재난이 우리 가정에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담대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당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담대 하라고 하신다. 믿음 좋다고 해서 안 당하는 것 아니다. 당할 수 있다고 하신다.
우리가 이런 말씀은 주목해 듣지 않고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완전히 지켜 주셔서 남이 다 병이 들어서 죽어도 우리 가정은 안 죽는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이 다 실패해도 나만은 절대 실패하지 않고, 나만큼은 기도하는 것 백배로 주신다고 하는 이런 약간의 미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약해지는 것이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가 자꾸 약해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조금만 무슨 문제만 있어도 벌벌 떨고 어쩔 줄을 모른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 생활인 줄 아는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사실들을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 예측하고 있어야 할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한다.
일반은총의 보편적 법칙첫째,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신명기 20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나라를 세우고 떳떳하게 독립국가를 세우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끔은 적군이 너희 나라를 침범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군인들은 싸워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적군과 싸우러 나갈 때에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군사가 약해 보여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해 낸 나 하나님 여호와가 싸우는 너희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으니 부상자가 생겨야 하는가 안 생겨야 하는가? 절대로 안 생겨야 한다. 전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한 사람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부상자가 생기고 전사자가 생길 수 있는가? 그 전쟁은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전쟁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현실론자이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전선에 나갈 군인들 중에서 새 집을 지어 놓고 한 번도 들어가 살아보지 못한 군사가 있는지 찾아보아라. 만약에 이사를 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그 이유는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돌려 보내라.
또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수확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돌려 보내라. 싸우다가 전사하면 그 포도원은 다른 사람이 차지 하느니라.
또한 병사들 중에 약혼만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고 나온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만약에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여자는 다른 남자가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현실적인지 모른다. 이게 무슨 뜻인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인정하신 것이다. 이게 세상이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부상 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총알이 곧바로 오다가 휘어져서 옆으로 빗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어떤 깊은 섭리에 의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도 전사하고 다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우리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동안 우리 나라에 다이옥신 파동이 있었다. 우리들은 다이옥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각종 음식물을 섭취했다. 외국에서 있다고 하니까 비로소 자다가 날벼락 맞듯이 갑자가 일어나 다이옥신 아우성을 쳤던 것이 아닌가? 청산가리 1만 배의 독성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남성 호르몬을 감소시키고 면역체계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암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데 98%의 다이옥신이 전부 음식물을 통해서 섭취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식물을 안 먹고 금식을 할 수도 없지 않는가?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사는가? 고기를 먹기는 먹어야 되는데 누가 책임을 지고 다이옥신을 다 검출해서 아무 문제 없도록 해서 먹게 해 주는가? 우리 나라에서 해 줄 사람 아무도 없다.
그저 다른 나라에서 호들갑을 떨면 우리들도 같이 호들갑을 떨고 조용해지면 우리들도 조용해진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도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다 먹는다. 다 먹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입에 넣자 마자 성령께서 그 다이옥신을 다 녹여주신다.”여러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몸 안에 축적 되지 않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셔서 온 장(腸)안을 깨끗이 청소해 주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 못한다. 그저 먹을 뿐이다. 그것 먹다가 병이 들 수도 있다. 어쩌다가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그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을 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병이 오면 저주라고 한다. 너무 미신적으로 생각하며 신앙 생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꾸 약해지는 것 아닌가? 저주와 징계(시험)를 구분하라
둘째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 법칙을 역행하면 믿는 사람이라도 다친다.
비가 와서 고속도로가 미끄러운데 160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하면서 “하나님 정말 잘 나가네요. 아멘” 하고 해 보라. 그러다가 부상 당하면 할 수 없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그저 그런 피해를 다 비켜 갈 수 없다.
또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해서 뿌려진 어떤 불행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할 수 없다. 예수 믿기 전에 깡패 노릇을 하다가 칼을 맞아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예수 믿고 중생 받고 난 다음 하나님이 그 다리를 고쳐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평생 절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속도 위반을 해서 사고를 내도 그것은 사고이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저주가 아니다. 또한 깡패 짓을 하다가 다리가 절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다리는 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절고 있는 다리를 볼 때마다 누구의 은혜를 감사 하겠는가?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간증거리는 되어도 저주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는 있다. 목격자에 의하면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끌려가서 용광로의 쇳물을 부어 죽이는 데 그런 비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사탄의 공격이다.
사탄에게 공격을 받아서 저주받은 사람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기뻐하고 감사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저주가 아니라 핍박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받아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시험을 당할 수가 있다. 집안이 갑자가 잘 살게 되었다든지, 남편의 지위가 올라간다든지, 모든 것이 너무나 형통해서 어찌할 줄 모를 만큼 흥분한다든지 해서 나도 모르게 기도를 덜하게 된다.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다가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진다. 그래서 엄청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이지 저주는 아니다.
고급 옷 로비 사건에 여러 명의 권사님, 집사님이 연루되는 것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분들 믿음이 참 좋은 분들이다.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저도 그분들을 잘 안다. 같이 옷 가게는 안 다녔지만….(웃음) 믿음이 참으로 좋은 분들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놓였는가? 시험받았기 때문이다.
또 불순종하여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
구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라
그러면 한 가지 꼭 알아두어야 한다. 신명기 28장 구약에 가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 살아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신정 국가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계속 지키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저주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셨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 28:15)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불순종은 곧 저주를 끌어 들이는 무서운 행동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에게 ‘너희들 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할 지어다’하는 말씀이 신약에 있는가? 없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계시의 발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구약의 저주가 신약에는 저주가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배우게 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다. 왜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저주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징계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는 징계는 하셔도 저주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은 저주한다고 하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로 하여금 숨을 못 쉬게 협박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안 좋게 말하면 조금 공갈 끼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여러분이 어떻게 알겠는가?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다른지,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의해서 어떻게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적인 그 지도자가 인도하는 대로 여러분들은 말씀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지도자가 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는 구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참뜻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버티면 하나님이 징계하신다고 했다. 또 하나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저렇게 믿음이 좋은 집안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누구나 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일이 일어난다. 욥의 가정에 갑자기 재난이 닥쳐오는 것처럼 말이다.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모두가 답답하게 생각되어 질 때가 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다. 그 목사님은 참 가문이 좋은 집안이다. 세상적으로 양반 집안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는 너무나 거룩한 가정이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후 할아버지는 목사님이 되셨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들도 목사님이 되었다. 참 훌륭한 목사님이시다.
그 목사님에게 자녀 중에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서울 상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친구들하고 캠핑 가서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다.
여러분 설명할 수 있는 불행인가?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대대손손이 믿음이 좋은 집안에 어떻게 그런 끔직한 비극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아버지 목사님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원래 갖고 있던 지병이 악화된 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터키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고 처자를 이끌고 터키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그 선교사가 암에 걸려 죽었다. 이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안구에 암이 걸렸다. 얼마 전에 수술을 했다. 우리 교인도 아닌데 우리 교인들이 매달려서 기도하고 헌금을 모아서 수술을 깨끗이 끝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겠다는 이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 속에는, 아니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불행 속에는 더 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역사 한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 닥치는 어떤 불행도 우리는 축복을 위한 씨앗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저주로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들을 왜 저주하겠는가?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석해야 된다. 그 다음에 대처해야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페러다임을 가지고 보지 않고 꼭 세상 사람들처럼 날마다 벌벌 떨면서 굿이나 하고 점쟁이나 찾는 것 같은 그런 나약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잘못된 짓을 범하지 않는가?
교회 안에 못된 사람들 많다. 왜 못되었는지 아는가?
“아이구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저 가정에 저런 일이 생겼을까? 어떻게 저런 가정에 저런 애가 나올까?”당사자 앞에서 아무 말하지 않지만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입을 삐쭉삐쭉 하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을 한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남이 모르는 일이 저 가정이 있다”고 하면서 수군거린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는 것은 내 믿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의 그 어려움을 보는 눈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순전히 점쟁이들, 굿쟁이들, 무속 신앙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모두가 다 무엇인가에 눌려 있고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니까 이상한 설교도 나오고 이상한 가르침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볼 때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자유인 답게 무장해야 한다.
이렇게 살라
첫째로 믿음을 강하게 가지라.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민수기 23:8에 발람이 이런 말을 했다.“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우리를 저주하겠는가? 우리들이 이 믿음을 꼭 갖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둘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시험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기도를 게을리 하면 안 당해도 될 어려움을 더 많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만 한다.
세 번째로는 말씀에 꼭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순종하는 것은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자유는 있어도 내 뜻대로 살 자유는 없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 태도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7: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서 살면 집을 반석 위에 세웠으므로 그 집이 무너질까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집이 기울어질까 불길한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과 같다. 집을 모래 위에 세워 놓고 날마다 집이 기울어지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내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불길한 생각을 갖지 않아도 된다. 어떤 불행한 일,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만나도 떳떳하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환난이 쉴 사이 없이 찾아오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 사는 자기 자녀가 심적으로 짓눌려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신다. 서로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해도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아니하는 당당한 모습, 자유인의 모습,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에게 하나님도 저주하지 않는다. 마귀도 저주할 수 없다. 율법도 우리를 저주하지 못한다. 오직 우리에게는 은혜가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축복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저주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추호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믿음을 가지고 대처하라. 그곳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따라 온다.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발락과 발람)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돌고 돌아 수많은 사건과 세월을 보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진행된 인구조사와 각종 숫자들을 이용한 규칙들이 적혀 있는 성경입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한 대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셨고, 바로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이 났습니다. 노예의 삶을 살던 백성들이 탈출을 막았던 바로를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셔서 항복하게 만드신 후 비로소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3일을 지나면서 불만이 생기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은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광야에 들어서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시험과 전염병, 배신과 반역, 굶주림, 전쟁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결국 약속의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다다랐습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발락 왕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민수기 23:5-12
마지막 걸림돌 발락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광야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고자 했으며, 당시 유명인이자 술수를 가지고 이름이 높았던 발람을 이용하여 그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수로 유명했던 발람을 이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량과 힘을 통한 정당한 방식이 아닌 꼼수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고 했음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마귀와 죄 속에서 그들의 종으로 사는 삶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쾌락과 돈과 권력의 힘에 눌려 그들의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이 땅에서 살면서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나는 우리의 일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많은 불평과 불만, 반역, 우상숭배, 전쟁, 굶주림을 겪었던 광야의 삶은 우리가 일생동안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 방해와 유혹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들과 같습니다. 막힘이 찾아왔을 때 신앙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코로나 같은 질병에 의해 교회를 멀리하게 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극복하고 거의 이루었다고 생각할 시점에도 발락과 같이 막아서는 세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의 방해 활동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는 어느 학회에서는 마귀의 IQ를 2000 정도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160을 넘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인간이 마귀를 대적해서 수 싸움으로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외 다른 무언가를 이용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입니다. 악한 영의 세력, 권력과 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뛰어난 존재들이 하는 방해이기 때문에 늘 성공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발락과 발람의 콜라보를 무마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성공처럼 보이는 활동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
발락 왕의 이름은 파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의 이름은 삼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괴자와 삼키는 자의 콜라보로 하나님의 백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발람이 하려던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발람은 당시 유명한 인사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발락 왕과는 다른 국가의 사람이었음에도 발락 왕이 청해서 저주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마귀의 세력에 의해 복수와 저주를 하려고 하는 노력들은 하나님의 축복하고자 하는 바에 비교하면 소위 쨉이 되지 않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똑똑하고 따르는 세력들이 많아도 전능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발람이 따르는 바알 신 따위와는 비교하기 힘든 역량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변에 혹은 유명한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할까 생각이 들면, 이는 영적인 현상으로 보시는 게 맞습니다. 악한 영에 의한 행동임을 깨닫고, 그 사람과 행동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발락 왕과 발람의 콜라보, 즉 파괴자와 삼키는 자의 콜라보는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의 본모습을 이름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과 힘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에 비할바가 안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악한 영의 방해를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발락의 부탁을 받은 발람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여러 번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합니다. 발락 왕은 혹여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에 눌려 발람이 저주하지 못한다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끄트머리만 보이는 곳에
가서 그들을 보고 저주해 달라 요청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도리어 축복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발람은 선지자가 하는 고백과 같은 영적인 말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모르게 고난 받는 뒤에 처진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복 주기로 작정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에서 허물이 많고 반역함과 수많은 잘못을 했지만,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비록 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음, 입술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 사로잡히길 축원합니다. 복 주기로 작정한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은 결국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발락과 발람의 저주에 그대로 당할 뻔한 사람들은 맨 뒤에 쳐져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돌리셨지만, 뒤에 쳐져있던 백성들은 발락과 발람이 그들을 저주하려고 했던 일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악한 영의 세력들이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활동들을 모르고 당하기 십상입니다. 뒤처지지 말고, 앞장서서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뒤쳐지면 삼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세력들의 먹잇감이 되어 고난을 겪게 되기 십상입니다.
마치며
발락 왕과 술사였던 발람은 약속의 백성들을 저주하고자 집요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쳤습니다. 항상 뒤처진 자들, 심령이 약화되어 있는
자들을 노리는 악한 영의 습성을 깨닫고,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충성된 주의 종으로 헌신하여 주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의 노력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복음(열왕기상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엘리사 선지자가 여리고성에 갔을때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와서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땅을 어떻게 해줄것을 간구했습니다. 여리고성은 여호수아가 저주를 선포한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26,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그래서 그 말씀을 무시하고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재건하다가 그 저주의 말씀대로 맡아들과 말째 아들을 잃습니다 (열왕기상 16:34).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닮아 물의 근원에 뿌리니 그 저주받은 물로인해 소산의 열매가 맺다가 떨어지고 아이를 낳다가 유산하는 그러한 여리고성이 고침을 받습니다. 새 그릇의 소금은 복음과 하나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한 복음과 하나님 말씀이 저주받은 성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다시 가져다 주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리고성의 저주는 “여호수아”(“여호와가 구원이시다”는 뜻)에의해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주를 거두어 들이고 은혜와 생명으로 바꾸는 일을 또 다른 여호수아인 “엘리사”(“하나님이 구원이시다”는 뜻)가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영원한 여호수아인 “예수”(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는 “예수”입니다)께서는 사람의 죄로인한 죽음의 삶을 은혜와 생명의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구한 팔자와 찌질하게도 운이 없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생명이 펄떡거리는 삶으로 바꾸어지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한복음 7:38). 우리의 죄로인한 독이 있는 물이 흐르는 삶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치유해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하십니다. 저주를 복이되게하십니다.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느혜미아 13:2).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 있을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아멘!
크누트 대왕(Canute the Great)
하랄드 블라톤의 손자이며, 스베인 튜구스게그의 차남이다.
1016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인과 덴마크 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고 서로의 문화가 융화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잉글랜드 인을 관리로 임명해 정책을 일임했고, 덴마크 문자와 앵글로 색슨 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교회와 수도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십일조 세금 징수를 시행했는데, 이는 교회와 잉글랜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덴마크 출신 잉글랜드 국왕이었다.

크누트 대왕이 통치했던 북해제국(North Sea Empire), 1030년 경.
덴마크 대왕 스벤 1세와 슬라브 레프족 족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누트에게 폴란드 국왕 보레스와프 1세는 삼촌이다.
크누트는 아버지 스벤 1세와 보레스와프 1세의 제후와 함께 잉글랜드를 정벌했다.
1014년 아버지가 전사한 뒤에도 계속 싸우고
세력을 떨쳤다.
우선 크누트는 덴마크로가 하랄을 왕으로 인정하고 잉글랜드 정복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지원받게 됐다.
1015년
여름 크누트는 1만 명의 바이킹 대군과 200여 척의 함선을 잉글랜드 정복에 동원했다.
1016년, 앵글로 색슨 가신단 회의에서
영국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되었다.
1018년에 형 하랄 2세의 죽음으로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다.
그 뒤, 노르웨이와 스웨덴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공략했다.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위도 겸하게 되어, 3국의 왕위를 겸한 '대왕'이라고 불렸다.
강력한 북해 제국을 손에 넣었다.
1035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고, 북해 제국은 크누트의 사후 불과 7년 만에 무너졌다.
영국인에게 권력관 심어준 크누트 대왕의 교훈
영국 역사에는 두 명의 위대한 대왕(大王)이 있다.
우선 잉글랜드 7국을 통일한 앨프레드 대왕(재위 871~899년)이다.
이
왕은 통일 후 라틴어 문헌들을 고대 영어로 번역 출간해 영어를 영어답게 만들면서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바이킹들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영국의 대왕은 앨프레드만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크누트 대왕(990?~1035년· 잉글랜드 왕
재위 1016~1035년)도 앨프레드와 함께 영국인에게 대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정복자 크누트의 업적
그러나 크누트는 정복자이다.
덴마크의 왕자이던 26살의 크누트는 1016년 당시로는 엄청난 대군인 1만명의 병력을 ‘긴
배(long ship)’라고 불리던 바이킹 선박 200척에 싣고 쳐들어와 잉글랜드 왕위를 쟁취했다.
그리고는 잉글랜드를 19년간
강권 통치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토착지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빼앗은 토지를 자신을 수행하고 온 덴마크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전국에 중세(重稅)를 매겨 왕국을 유지하면서 재화의 대부분을 덴마크로 보냈다.
그런 뒤 잉글랜드가 자신의 손에 잡혔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강권통치를 누그러뜨려 잉글랜드인들에게도 귀족 작위와 봉토를 나누어 주고 잉글랜드인을 관리로 등용해 충성을 바치게 하고
자신의 수하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당시 잉글랜드를 수시로 침공하던 덴마크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침공을 막아냈다.
당시 또 하나의 권력인 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십일조를 확실하게 제도화했다.
바이킹 침공으로 무너진 교회와 수도원 건물을 모두 수리하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는 교회를 신축해 주어 교계와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크누트제국이 햄릿의 배경
그렇게 해서 28살의 크누트는 덴마크 왕(1018~1935년)과 노르웨이 왕(1028~1035년)을 겸하고 스웨덴 일부까지 통치해
명실공히 ‘북해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지도를 보면 북해가 바로 크누트제국의 내해(內海)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대의 걸작 ‘햄릿’의 배경 시기이다.
‘햄릿’의 정식 제목이 바로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인 이유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44㎞
떨어진 북해 해변 크론보르성이 바로 햄릿의 무대인 ‘엘리노어성’이다.
덴마크는 물론 해외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셰익스피어가
북해 바닷가 성을 주 무대로 삼아 극본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런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역사적 관계 때문이다.
이런 업적 외에 크누트는 ‘왕의 힘의 한계(the limits of royal power)’라는 금과옥조 같은 가르침을 남겨 후세
영국의 사회제도와 영국인의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현재의 영국을 만든 말들 중 하나가 ‘너희들이 지금 보았지
않느냐? 이제 왕의 힘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Now let all men know how empty is
the power of kings)’라는 크누트의 말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거의 모든 영국인이 이 말과 함께 여기에 얽힌
일화를 알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크누트 왕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신하들은 칭송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분보다도 더
최고로 위대한 분이십니다”라고 누군가 말하면 다른 신하가 “왕이시여! 당신 같은 전지전능한 분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현명한 왕은 그런 바보 같은 칭송에 지쳐 싫증이 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해변가를 신하들과 같이 걷던 중 신하들이 평소와 같이
또 칭송을 시작하자 크누트는 그들에게 교훈을 주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크누트는 “내 의자를 가지고 와라. 우리 모두 바닷가로 나가자”라고신하들에게 명했다. 신하들은 즉시 왕좌를 바닷가 모래로
가지고 왔다.
크누트는 “내가 보기에는 파도가 밀려 들기 시작한다.
너희들은 내가 파도에게 정지하라고 하면 정지할 거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혼돈에 빠졌다.
자기네들이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 온 말이 있기에 감히
“아니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위대한 왕이 정말 신탁(神託)의 힘을 소지하고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갈망도 있었다.
왕이 신력(神力)을 발휘해 물결을 세워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나는 그런 힘이 없다”
그런 모든 희망과 갈망과 염원을 합쳐 신하들은 “위대한 왕이시여! 명령만 내리소서! 파도는 폐하의 말을 들을 겁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왕은 “그렇다면 좋다. 바다야! 나는 너에게 더 이상 앞으로 오지 말 것을 명한다.
더 이상 밀려들어 오지 마라!
파도야! 더 이상 밀려들어 와 내 발을 건드리려 하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말을 마치고는 왕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조그만
물결이 왕의 발끝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바다야! 지금 당장 뒤로 물러서라!”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더 밀려와 왕의
발을 건드렸다.
바닷물은 점점 더 차올라 왔다.
급기야는 왕좌까지 차올라 왕의 발은 물론 어의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왕의 옆에 서서 왕이 미치지는 않았는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왕의 신력을 바라기도 하고 믿기도 했지만 결국 현실을
보고는 당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마침내 왕은 왕좌에서 일어서면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친구들이여! 봐라! 너희들이
가지기를 바랄 정도의 힘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너희들은 오늘 무언가 하나를 배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왕이 있어 그만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기억하리라 믿는다.
바다를 비롯한 온 세상을 자신의 손 안에
거머쥔 단 하나의 왕, 우리들의 신 말이다.
나는 너희들이 그에게만 칭송을 바쳤으면 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했다.
그러고 난 뒤 크누트는 왕좌에서 일어나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건 다음 절대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크누트 왕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크누트는 ‘왕이 신적 존재가 아님(the King was not divine)’을 신하들과
국민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연현상을 막을 신탁의 힘(divine power)이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여 신하들과 국민들로 하여금 허망한 미망(未忘)에서 깨어나게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왕 자신이 손수 흔들리지 않던 신앙을 깨버렸다는 사실이 주는 함의는 엄청나게 크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지금도 크누트
왕은 영국인의 존경을 받는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그 옛날에 앞장서서 왕의 권위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후세 왕들에게 교훈을 준
사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신 앞에서 보인 겸손이 존경의 근원
당시 기독교 왕국의 신민들은 ‘왕은 신의 가호로 왕위를 받아 행복한 왕국의 지배자 자리를 누려도 된다’고 믿었다.
이 왕권신수설은
누구도 감히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론이었다.
왕은 신의 신탁을 받은 자라는 불가침의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크누트는 그런 힘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증명하면서 신 앞에서 자신의 겸손(humility)을 내보였다.
크누트가 보인 겸손의 일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왕정 국가에서 왕에게 무조건 충성하고 따르는 신하들과 국민들은
자기네들의 왕은 무오류라고 믿는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전지전능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어 한다.
왕이 신에게 임무를 받고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라고 믿고 그를 따르는 일도 당연하다고 믿는다.
크누트의 신민들은 크누트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이 이 일화를 보는 첫 주안점이다.
신의 대리인인 군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민들의 믿음을 누리고
즐겨야 할 크누트가 오히려 신민들이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우쳐준 것이다.
여기에 크누트의 위대함이 있다고 영국인들은
여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왕이 아니라 신만이 할 수 있다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의 겸손한 자세가 영국인들이 크누트에게 갖는
존경심의 근원이다. 그 겸손함을 영국인들은 존경한다.
크누트 이후 영국 역사에는 절대권력을 누린 왕도 많지 않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왕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횡포를 부린 왕도
많지 않다.
이는 균형과 견제(check and balance)를 잘 겸비한 영국 왕정제도와 사회구조 덕분이다.
영국 왕은 프랑스
왕처럼 절대권력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고 왕이 거의 힘이 없던 독일처럼 철저하게 지방분권국가도 아니었다.
독일의 지방분권과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적절하게 조합한 왕국이었다.
과하지 않아서 독재를 휘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귀족들에게 휘둘리지도 않을
적당한 왕권, 그와 함께 왕권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나 왕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의 힘은 가지지 않던 귀족들의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 대다수의 왕과 귀족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룬 덕분에 독재나 혼란을 겪지 않았다.
물론 전횡을 시도한 왕도 있었다.
의회를 무시하고 전비 마련을 위한 증세를 시도하다가 결국 시민군에 져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인물, 유럽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이양해 영국 왕 중 가장 굴욕적이라고 평가받는 존 왕(재위 1199~1216년)도
그중 하나다.
의회 없이 증세를 하려다가 시민전쟁에 패배해 결국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참수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 찰스1세(재위
1625~1649년)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영국 역대 왕들은 자신의 자리와 권한을 알고 의회와 귀족들과 적당하게 협상,
타협하면서 통치를 했다.
영국인들의 독재에 대한 반감
찰스1세를 참수하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을 만든 크롬웰(통치
1653~1668년)도 역설적인 교훈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정권을 잡자 처음에 영국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왕이 지배하지 않고
자신들이 선출한 의회가 지배하는 ‘선출된 권력’의 나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 공화국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의회가 갈라져 큰 혼란을 겪는 사이 크롬웰의 실정과 원두당(圓頭黨·Roundhead)의 극심한 횡포로 국민들은
넌더리를 냈다. 결국 크롬웰의 공화정 실험은 16년 만에 끝났다.
공화정 실험은 크롬웰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찰스1세의 아들인
찰스2세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면서 끝났다.
시민혁명 기간 동안 영국인들이 겪은 독재의 공포는 이후 영국의 권력구조와 사회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집권 초기 신민들이
모두 왕으로 즉위하라고 권했으나 크롬웰은 사양하고 왕권보다 더 큰 절대권력의 호국경으로 남았다.
영국인의 권위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잘 파악한 탓이다.
그 이후 영국인들은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절대권력을 가진 정치제도에 원초적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와 달리 대통령제가 아닌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택하게 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도 결코 영웅시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공헌이 아무리 위대해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의 각종 공항 이름이나 길, 혹은 광장 이름 어디에도 개인의 이름을 발견하기 어렵다.
영국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의 지배하에 들어갈 위기에서 구한 호레이쇼 넬슨의 승전을 기념한 트라팔가 광장도 넬슨 동상이 비록 52m 높이의 탑
위에 있지만 넬슨 광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국 최대의 히드로공항도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이름을 따서 윈스턴
처칠 공항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데 그냥 지역 이름을 따서 히드로공항이라고만 부른다. 프랑스의 관문 파리 공항을 샤를 드골
공항이라고 부르는 프랑스인과는 다르다. 물론 런던 시내 각 골목 이름이나 광장에는 개인 이름이 들어간 곳이 많지만 이는 일대를
개발한 귀족이나 부자들의 이름이다. 개인 재산에 대한 존중은 있어도 국가적 영웅에 대한 명명에는 인색한 것이 영국인이다. 개인을
영웅시하면 또 언제 크롬웰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는 듯하다.
영국은 의회가 거의 전권을 가진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말이 의원내각제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의원 독재국가 같다. 하원의원 650명이 모든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특히 하원 의석 과반수인 325석 이상을 차지한 여당 의원은 의회와 내각의 장관은 물론 행정부 차관, 심지어는 국장급까지 꿰찬다. 정말 선출된 권력이 지배하는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사항은 영국 같은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부 수반인 총리를 국민들이 직선으로 뽑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당의 당수가 바로 총리가 되는 것이다.
영웅을 백안시하는 전통
과거에는 의원들의 총회에서 당수를 바꾸면 바로 총리가 바뀌었다. 지금은 당원과 의원들이 투표해서 당수를 바꾸면 총리가 총선 없이 바뀐다. 3번의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 역사상 가장 장기간인 11년을 총리로 지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재임 1979~1990년)도 그렇게 물러났다. 인두세 비슷한 주민세 도입으로 인기가 떨어져 당내 반란으로 임기도 못 채우고 중도에 눈물을 흘리면서 밀려 나갔다. 그래서 영국 총리는 문자 그대로 장관(minister) 중 수석(prime)이라는 뜻의 ‘prime minister’이지 전권을 휘두르는 ‘president’, 즉 대통령이 아니다. 절대적 권력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영국인들에게 이런 내각책임제는 정말 안성맞춤의 정치제도이다.
영국인들은 모든 일에 냉소적이긴 하지만 특히 권력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적인 반감을 나타낸다. 정치인이 ‘애국심’ 어쩌고 하면 사기꾼으로 볼 정도다. 지나친 사명감을 입에 올리고 독선으로 일관하면 덜떨어진 저능 인간 취급을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미국 정치인처럼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정치인을 잘 볼 수가 없다. 영국인들은 웬만해서는 공식모임에서 국가(國歌)도 잘 안 부른다. 그래서인지 18세에서 24세 영국 젊은이 중 43%가 영국 국가 첫 구절 ‘신이여! 우리의 자애로운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를 모른다고 한다. 13%는 국가의 음을 전혀 모르고 28%는 한 번도 국가를 불러 본 적이 없다는 기막힌 통계도 있다. 그렇다고 영국인들이 국기와 국가에 감정을 대입하는 미국인들보다 애국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영국인들은 남들에게 보여 주려는 애국심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영국인들은 애국심도 얼굴 표정 변화 없이 조용하게 표한다.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영국인의 초연한 자세는 어쩌면 크누트 대왕의 냉소와 같은 영국인 특유의 기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치인 누군가가 자신의 불순한 목적을 위해 영국인을 선동하려고 미사여구와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늘어놓아도 영국인들은 잘 따라가지 않는다. 영웅을 영웅시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권력자 누구도 크누트가 가르쳐 준 대로 영웅이 아니다. 정치인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영국에서는 독재가 자리 잡을 방법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법(역대하 34:22-28)
성경을 읽으시면서 ‘사람의 마음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역시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왕이면서도 왕관을 쓰지 않은 괴짜 황제가 있었습니다. ‘카누트’ 황제 (King Canute
1014-1035) 입니다. 카누트 황제는 신하들이 지나치게 자기를 찬양하는 것이 싫어서, 어느 날 왕좌를 해변에 옮기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물이 해변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왕이 분연히 일어서서 그 밀려오는 바닷물을 향하여 “바다여,
멈추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밀물은 계속 왕좌를 향하여 밀려왔습니다. 여러 번 같은 명령을 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어 왕좌의 절반이 물에 잠겼습니다. 결국 황제는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때, 카누트 황제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보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너희가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왕관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에 걸어 놓고,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창세 이래로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에 왕들이 있었지만 아마 이런 왕은 전무후무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세력이 큰 나라의 권세 있는 황제로서의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57: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살리시고 번성케 하시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팔복 중에 첫 번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 즉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4:6절은 함께 찾아봅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남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할 때의 유다는 이미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죄악으로
B.C721년에 앗수르에게 망한 후, 남 유다도 거듭되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4대 왕인 ‘므낫세’와
15대 왕인 ‘아몬’과 백성들의 큰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왕이 된 이후 우상들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순간 왕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통회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은 즉시 제사장과 서기관과 왕의 시신을 당신의 여선지자인 ‘훌다’에게로 보냈습니다. 곧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행할 것을 묻게 한 것입니다.
읽은 본문인 24-28절에 하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요약하면, ‘ꊉ남 유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남 유다에 내릴 것이다. ꊊ그러나 유다의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며 겸손을 보인 요시야 왕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모든 재앙을 보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의 겸손함이 저주의 재앙을 복으로 바뀌게 한 것입니다.
남 유다의 깊은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뜻은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부동했습니다. 비록 요시야 왕이 우상을 없애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겸손함으로 통회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요시야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의 위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두렵게 여기며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징계마저 복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느껴 보셨겠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일에 있어서 겸손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며,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테너 가수 중에 ‘엔리코 카루소(1873-1921)’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많은 노력과 폭넓은 음성영역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만 607회나 출연하는
진기록을 보유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거리낌 없이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에게 ‘자존심 없는 사람’이라고 놀림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내를 걷다가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음식을 청할 때 종업원이 그를
알아보고 주방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요리사 아저씨! 테너 가수 카루소 선생님이 오셨어요.” 종업원의 말이 떨어지자 요리사가 즉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을 이곳에서 뵈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노래를 직접 듣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하고 요리사가 말했습니다. 카루소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들려드리지요.”하고 아주
쉽게 말했습니다. “정말요? 선생님과 같은 세계적인 가수의 노래를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요리 복을
입고 있는데 어쩌지요?” 그가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는 즉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식당 홀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모든 손님들은 그가
카루소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의 아름다운 선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요리사는 더욱 감격해 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가
시작되어 친구가 카루소에게 왜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노래를 부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노래를 듣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네. 더욱이 저 요리사도 요리를 맛있게 해서 남들을 기쁘게 해주는 예술가가 아닌가. 예술가를 위해 노래하나 하는데
그렇게 인색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뜻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겸손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연약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도 겸손을 무시하는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11:28-30절에서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겸손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성부 하나님의 뜻에 그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가르치는 말씀 한 마디, 베푸시는 이적 등 모든 삶이 성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8:28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겸손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빌립보서2: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며, 생명을 다하는 충성심입니다.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높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입니다. 지금은 겸손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해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관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겸손한 마음이 되어서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6장 요약 / 대적들의 음모를 물리치다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은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 가자,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6:1-2).
거짓 예언자들을 동원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 하지만, 그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도에
힘씁니다(6:10-14).
결국 대적들이 두려워할 만큼 성벽 공사는 52일 만에 완공됩니다(6:15-16).
그러나 도비야와
유다 귀족들 사이의 비밀 연대가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6:17-19).
느헤미야 7장 요약 /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
성벽이 완공되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문지기, 찬양대,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7:1-3).
그는 유다 귀족들과 백성의 계보를 조사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7:5-7).
이
명단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과 그 수, 가축, 헌금 등을 자세히 보여줍니다(7:6-73).
백성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다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 8장 요약 / 초막절을 지키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습니다(8:1-3).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며,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8:7-9).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격려하며 초막절을 회복합니다(8:10-17).
말씀의
회복과 절기의 실천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느헤미야 9장 요약 / 금식하고 회개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하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되새깁니다(9:1-3).
레위인들이 인도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인내가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9:5-31).
백성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9:32-33).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언약하며 문서로 기록합니다(9:38).
5월 30일(금) 느헤미야 6-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는 여호와시라(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You alone are the LORD. You made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s, and all their starry host, the earth and all that is on it, the seas and all that is in them. You give life to everything, and the multitudes of heaven worship you.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You alone are the LORD.)
역사는 디딤돌입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 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Thou, even thou, art LORD
alone; thou hast made heaven, the of heaven of heavens, with all their
host, the earth, and all things that are therein, the seas, and all that
is therein, and thou preservest them all; and the host of heaven
worship peth thee.(Neh9:6)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2025년은 해방 80주년 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어 해방된 것이 아니고,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니 무조건 항복을 해서,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는 금세기 최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1.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히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랴
이날이 사 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반만년의 역사가운데 960여 회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5년마다 한 번의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힘이 없으면 외세의 침략을 받습니다.
그런데 70여년간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동시대가 받은 큰 축복입니다.
6.25사변 후 우리나라에 70년간 전쟁이 없었던 것은, 우방인 미국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1973년 3월 29일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망했습니다.
베트남이 패망하기 2년 전에 평화협정을 맺고, 1975년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미군을 철수하라고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누구의 지령을 받고 있습니까? 속지 마세요.
역사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역사는 디딤돌과 같습니다.
역사를 딛고 미래를 지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역사는 거울과 같습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현재를 설계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한다는 말은, 자신을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백성,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은,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젊은이도 어른들도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식 없이 남의 말만 듣고 살면 지탄을 받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없는 사람을 희생한다든지, 나라를 망쳐 놓는다면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 아합 왕이 그러했고, 웃시야 왕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가문을 마1:6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다윗이 자식을 낳았다는 부끄러운 가정 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복귀하여 성벽재건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재건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붙여주셨고, 자재가 필요하면 이웃나라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공급해 주셨고, 적들마저 하나님의 손이 끌어다가 돕도록 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늘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세 가지 신앙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 회개운동(9:1, 3)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2. 말씀운동(9:3)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낮 사분의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3. 기도운동(9: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은혜(9:9)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도 이런 운동이 일어나야 삽니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놓고, 과거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신앙개혁운동을 실시하면서 세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9:1-2)
1. 모든 이방인과 절교하였습니다(2절)
모든 이방인들과 절교하고..
구별되게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회개하면서 이방인들과 절교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은혜의 통로가 열립니다.
2. 영이 맑아지고 지혜가 임합니다.
3. 막힌 혈관이 뚫리듯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평안이 옵니다.
4. 기도의 응답이 열립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방인들과 혼합되어 간음을 하며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은 불레셋을 통해, 아말렉을 통해, 바벨론을 통해, 채찍의 몽둥이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70년간 갖은 고난을 당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역사를 회고해 줄때,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절교하겠다는 결단을 선포했습니다.
1. 진정한 회개는 마음만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길갈을 정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2. 이방인들과 절교하는 행동까지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3. 진정한 은혜는 회개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역사를 회고할 때, 일어난 회개 운동입니다.
우리도 버릴 것을 정리하고, 세상과 종교의 다원(혼합)주의에서 성별해야 합니다.
매여 있는 줄을 끊어야 합니다.
걸터앉은 생활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무엘도 미스바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을 버리라, 그리하면 너희를 불레셋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7:3)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했습니다(2절)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자기 죄만이 아닙니다.
조상들이 잘못했던 과거 역사까지 자복하면서 회개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를 회고하며 자기 죄만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조상들의 허물까지 후손들이 자복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도 수문 앞 광장의 회개운동이 다시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3절 상)
1. 낮 4분의 1은 일어서서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일어서서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낮 4분의 1은 3시간 동안입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진정한 개혁운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날 때 영혼이 삽니다.
말씀으로 돌아갈 때 해답을 얻습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날 때 나라가 흥했고, 적들을 막아 주셨고, 재앙이 없었습니다.
말씀 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영혼이 살고 민족은 흥하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을 때 다 일어서서 백성들이 귀를 기울였습니다.(8:3)
너희는 내게 나와 귀를 기울이라 그리하면 너희영혼이 살리라.(사 55:3)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성경을 풀어줄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했습니다.(눅 24;32)
말씀이 열릴 때 은혜의 불이 나왔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이 생명이요, 영의 양식이요,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질러 쪼갠다고 했습니다.(히 4:12)
말씀을 듣고 완악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의 근본은 지식이 변화시키는 것 아닙니다.
윤리 도덕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이 속에서 역사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요 6:63)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다 울었습니다(8:9)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눈물은 진실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대신 죽음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 사명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 그 후에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신앙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은 죽을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습니다.(왕하 20:6)
예레미아의 눈물은 민족정신을 깨우고, 멸망을 멈추게 했습니다.(렘 9:1)
한나의 소리 없이 흘린 기도의 눈물은, 한 시대를 살리는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 2:1-10)
주님도 감람산 벧바게 언덕에서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눅 19:41)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예배할 곳을 잃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배드릴 날을 사모하며 바벨론 강가에서 울 때 포로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도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눈물이 마를 때가 영혼이 곤고한 때입니다.
현대는 IQ가 높은 지성적인 사람보다, EQ가 높은 감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답니다.
두뇌는 명석한데 인간미가 말라버린 사람보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 감성이 풍성한 사람이 인간관계를 잘 맺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은혜의 감성이 메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감동 감격이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역사를 회고할 때, 세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8-10)
1. 하나님은 마음의 충성됨을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8절 상)
마음의 충성을 보셨습니다.
충성이란 말씀이 성경에 110번이나 나옵니다.
신실하다. 믿을만하다. 맡길만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을 충성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마음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충성하다가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모르는 것 같으나 다 알고 계시고, 안보는 것 같으나 다 보고 계십니다.
반드시 일한대로 갚아 주십니다.
2. 하나님은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9절)
하나님은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다 듣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부르짖음도 듣고 계십니다.
다윗도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시118:5)
3.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12절)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가나안 축복의 땅을 들어가려면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광야는 고달프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홍해가 앞을 막을 때 동풍을 일으켜 길을 만드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하나님이 먹이셨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여러분의 길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는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신앙을 회복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면서 이방인과 절교하며,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을 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울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요,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축복하셨습니다.
2025년 광복 80주년에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에도,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으시길 축복합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주님, 감사합니다.
새날을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부디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걷는 길을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1. Lectio Divina(거룩한 읽기)
<새번역>
1.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썼다.
2.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였다.
3.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낮의 사분의 일은 주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또 낮의 사분의 일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주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4. 단 위에는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가 올라서서, 주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5.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가 외쳤다."모두 일어나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6. 주님만이 홀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과, 거기에 딸린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땅과 그 위에 있는 온갖 것, 바다와 그 안에 있는 온갖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늘의 별들이 주님께 경배합니다.
7. 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시어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부르셨습니다.
8. 아브라함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함을 아시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의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셔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지 이틀 후에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모여 성회를 갖는다.
모인 시간의 절반은 율법을 읽고, 절반은 엎드려 자복한다.
지금까지 율법을 깨닫도록 도움을 준 레위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 높여 여호와를 송축한 후,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한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다른 한편으로 그 크신 은혜를 저버린 조상들과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한다.
단락 구분
1~5a절 24일의 금식 성회
A. 회개(1~2절)
B. 율법 낭독(3절)
C. 레위인들의 기도(4~5a절)
5b~8절 고백의 기도
A. 송축(5b절)
B.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6절)
C.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7~8절)
배경이해
5b절부터 시작되는 레위인들의 기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며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역사를 확인하는 고백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이 안에 담긴 신학적인 주제들은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6절),
(2)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맺은 언약(7~8절),
(3) 애굽에서의 구원(9~12절),
(4) 모세의 중재를 통한 시내산 계시(13~14절),
(5)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에
대한 성품과 백성들의 참회(27~28절) 등이다.
시갈(P. Sigal)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의 기도는 주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장르상으로는 애가(Lamentations)와 유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기도는 포로기나 포로 이후 예언이나 공동체 고백의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역사회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한 행동을 돌아보아 회보그이 기회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2. 본문 묵상하기
본문의 구조(흐름 문장/본문의 명제)
* 흐름 문장 *
1. 이스라엘 자손이 금식하면서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을 경배함(1~5a절)
2. 찬양 받기 합당하신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함(5b~6절)
3.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7~8절)
* 본문의 명제: 너희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들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메시지
명제 : 우리는 주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Keyword: Why?
대지와 소지:
1.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a.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
b. 우리의 죄를 도말하여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2. 둘째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a.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라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
b.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3.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a.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
b.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3. 기도하기
오늘의 기도 :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고,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구속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당신의 언약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①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늘 기억하면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길…
② 우리가 섬기던 그 땅의 사람들을 택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과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시고,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고, 그들이 직접 그 땅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길…
③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늘 책임져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에 주눅들지 말고, 지혜롭게 홈스쿨링을 진행시켜 나가고, 아이를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일꾼으로 잘 세워나갈 수 있길…
4. 실천하기 /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① 주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항상 거룩하고 정결한 삶의 모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도록 노력하자!!!
②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그 크고 놀라운 일들 가운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하도록 하자!!!
③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를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5. 묵상과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저를 택하여 주시고,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풍성히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살피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 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다시금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느헤미야 3장 요약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여러 지파와
가족들이 맡은 구간별로 성벽을 건축합니다(3:1-32).
각 문과 성벽의 일부가 공동체적으로 나뉘어 맡겨지고, 각자 자신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수고합니다.
"그 다음은" 이라는 문구가 자주 반복되어 성곽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한 가족들과 지파와 직분자들을 소개합니다.
귀족 중 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백성은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3:5).
느헤미야는
기록을 통해 각 작업자와 맡은 구역을 세세히 언급하며 공동체의 협력과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성벽 재건이 단순한 건축이
아닌, 민족 회복의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4장 요약
성벽 재건이 진척되자 산발랏과 도비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방해합니다(4:1-3).
산발랏과 도비야와 함께 훼방한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고, 공사에 계속 집중하게 합니다(4:4-6).
적들의 공격 위협이 커지자
느헤미야는 낮에는 절반은 공사하고 절반은 무장하여 경계하게 하며, 밤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경비하게 합니다(4:16-23).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라"고 외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웁니다(4:14).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성벽을 계속 재건합니다.
느헤미야 5장 요약
성벽 재건 중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자녀를 종으로 팔기까지 합니다(5:1-5).
느헤미야는 이를 크게 분노하며,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고 이자 받는
것을 중지시키며 토지와 자녀를 돌려주게 합니다(5:6-13).
그는 자신은 총독으로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5:14-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한 것이라 밝히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5:15, 19).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5월 29일(목) 느헤미야 3-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5: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Remember me with favor, O my God, for all I have done for these people.
2142. 자카르(zâkar) זָכַר
마음에 두다(사 17:10), 선포하다(렘 20:9), 부르다(사 12:4), 생각나게 하다(왕상 17:18), 칭송하다(대상 16:4), 전하다(렘 4:16),
자랑하다(시 20:7), 진하다(아 1:4), 분향하다(사 66:3).
[명] 소문(사 19:17), 사관(삼하 8:16, 왕상 4:3, 대상 18:15), 서기관(대하 34:8).
제3차 포로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생각하며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여, 한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반도 땅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은혜(恩惠)"라고 하겠습니다.
왜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을까?
느헤미야는 바사(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제3차 포로귀환의 지도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12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다른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총독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고려하여 총독의 임금을 받지 않고 무보수(無報酬)로 총독의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 부유한 사람들은 고달픈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며 그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자녀들을 종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유 자금으로 땅을 구입하고 그들의 부를 계속적으로 축적(蓄積)하고 있었습니다.
총독 느헤미야는 백성들 중에서 이러한 무례(無禮)한 행위를 꾸짖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총독의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은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와 같은 삶을 본받아 귀족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은혜하는 헬라단어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기쁨이라는 "카라"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이어서 은혜라는 카리스에서 은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카라(기쁨. 樂)
카리스(은혜. 恩惠)
카리스마(은사. 恩賜)
따라서 은혜는 내 만족을 위하여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나눠주며 채워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도를 하면 참 좋겠습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반도 땅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받은 은혜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남아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더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골고루 나눠주어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어렵고 힘들고 치열한 삶.
빚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는가?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함(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2년 동안이나 총독의 녹을 먹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차별화이다. 이전의 총독들은 압제와 고리대금 등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했지만 느헤미야는 달랐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에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광야의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신 예수님.
2. 하나님을 경외함(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총독의 녹을 먹지 않고, 그 이전의 총독들처럼 재산을 모으기 위해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와도 이겨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신앙과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도 움직이시고, 길도 여시고, 필요를 채워주신다.
적용
1.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알자!
2.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솔라 그라티아. Sola gratia)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채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 By grace alone)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동안에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다섯 솔라 가운데 하나이다.
오직 은혜 교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충돌한다.
The message of the Lutheran and Reformed theologians has been codified into a simple set of five Latin phrases: 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 Solus Christus (Christ alone), Sola Fide (faith alone), Sola Gratia (by grace alone) and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오직 은혜란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행위로 인한 구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가르침이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은혜로"의 외침
16세기 종교개혁은 타락한 교회의 오류를 바로잡고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하며,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 핵심 진리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 즉 선행과 공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노력했고, 면죄부를 구매하거나 의식을 통해 은혜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진리를 다시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은혜로"의 진리를 묵상하며, 이 은혜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Sola Gratia의 성경적 기초
1.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은 이 진리를 가장 잘 요약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개역개정).
이 말씀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명확히 선언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로 구원을 주셨기에 우리가 그 구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다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어떠함이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
로마서 3:24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값없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선물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의미: "오직 은혜로"
1.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선행, 성례전, 면죄부, 고해성사 등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조건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확신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여정을 시작하며 로마서 1:17—"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통해 인간의 행위나 노력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당시 교회의 교리적 오류를 바로잡고, 복음의 핵심 진리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은혜의 주권성과 하나님의 사랑
"Sola Gratia"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선택에 달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6:44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 : "오직 은혜"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는 "오직 은혜로"라는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묵상해야 할까요?
1. 은혜는 우리의 겸손한 고백을 요구한다
"Sola Gratia"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겸손해야 합니다. 디도서 3:5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2. 은혜는 감사와 헌신의 삶을 요구한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3. 은혜는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로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삶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악된 상태를 생각할 때,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12:9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개역개정).
우리의 약함과 무력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구원받았으며,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의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느헤미야는 본장 결론을 기도로 마감하였는데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다.
기도란 과거에 대한 감사, 현재에 대한 사례, 미래에 대한 간구이다.
느헤미야의 기도
1.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를 위하여 솔직하게 범죄를 시인하고 자복하 며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였다(1:5-11)
2. 왕 앞에서 묻는 말에 대답하기 전에 대담하게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默禱)하고 답하였다(2:4)
3. 멸시를 받으면서 낙심하기
쉬운 때에 낙심을 이기도록 끝까지 참아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4:4-5)
4. 대적자들이 연합하여 위협을 가해오자
특별하신 보호가 필요하다고 보아 안전보장을 호소하였다(4:9)
5. 자기가 이룬 일로 인하여 생각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상
주 시기를 간구하였다(5:19)
6. 대적자들이 선전하기를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할 것이라고 하 니 조용하게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하였다(6:9)
7. 자기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도비야, 산발랏 등...)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막아주소서
하였다(6:14)
8. 자기가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이행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였다(13:14)
9.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자기에게 임하여 큰 은혜를 바라왔다(13:22)
10. 영적 지도자(제사장,
레위인)들의 책임 감당을 위해 기도함(13:29)
11. 최후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하였다(13:31)
계속적인 은혜를 간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라고 함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지나온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셨으며, 비록 포로생활이나 본토에 잔류된 생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보호해 주신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또한 현재 대적자들이
온갖 방해를 다해가며 성 복구공사를 중단시키려고 발광을 하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 는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런고로 앞으로의
모든 일도 은혜 베풀어 주시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니 기도하는 대로 성취될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앞서서 필요한 것을 주시나 구하고 바라는 자에게는 더욱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보수를 받지 않은 느헤미야(5:14~16)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생각해, 느헤미야는 총독에게 지급되는 양식을 포기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진리와 윤리의 관점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관점에서는 탁월한 지식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윤리의
관점에서는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 마음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현합니다.
느헤미야는 12년간 유다 총독으로 일했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총독의 보수는 바사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유다 지역의 세금에서 충당했습니다.
이전의 유다 총독들은 백성으로부터 매년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걷기 위해 총독의 신하들이 유다 백성을 압제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형편이 어려운 유다 백성을 생각해
총독의 보수를 위한 세금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목적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복을 위함이지 부나 권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배려하는 지도자의 모범입니다.
느헤미야는 왜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았나요?
–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인가요?
자기 재산으로 헌신한 느헤미야(5:17~19)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는 필요한 모든 경비를 자비로 충당했습니다.
바사의 고위 관리로 있을 때
축적했던 부와 재산을 유다 공동체의 재건에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상에서 먹은 사람만 150명 이상인데, 그는 그들을
위해 매일 엄청난 양의 고기와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했다고 말합니다(17~18절). 유다 백성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자신의 재산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힘쓰며 자기 것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억해 주십니다.
* 매일 많은 사람의 식사를 자비로 제공한 느헤미야의 헌신은 어떠했나요?
*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기 위해 내가 실천할 일은 무엇인가요?
이전 총독들은 유다 백성을 압제해 양식과 돈을 빼앗았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는 총독 재임 12년간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자들과 함께 힘을 다해 일했고, 일부 백성과 민장들과 이방인들을 자기 상에서 대접 했음에도, 그는 부역이 중한 백성을 생각해
녹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과 우선순위를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두길 원합니다.
제 권리를 누리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과 일을 위해 더 마음을 쏟게 하소서.
제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즐겁게 사용하며, 매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동하게 하소서.
기쁨(카라. chara) χαρά, ᾶς, ἡ
스트롱번호 5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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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쁨, 즐거움.
-
1. [문자적으로] 고후 2:3, 갈 5:22, 히 12:11.
-
2. [환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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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쁨을 주는 사람, 또는 사물, 기쁨의 대상, 눅2:10, 빌4:1, 살전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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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기쁨의 상태, 마25:21,23, 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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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즐거운 잔치, 마25:21,23, 요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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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기쁨(마13:20, 요15:11, 고후7:13), 즐거움 (마25:21, 히12:2, 벧전1:8), 희락(롬14:17, 갈5:22).
은혜(카리스. charis ) χάρις, ιτος, ἡ
스트롱번호 5485
어원 / 5463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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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아함, 매력, 끄는 힘, 눅4:22, 골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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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은총, 총애, 덕택, 호의, 은사, 선의, 눅2:40, 롬4:4, 히4:16, 계22:21.
-
3. 은혜로운 행위, 선행, 선물, 자선, 기특한 행동, 행24:27, 고후1:15, 벧전5:10, 유1:4.
-
4. 감사, 눅17:9, 딤전1:12, 히12:28.
관련 성경 / 은혜(눅1:30, 행4:33, 몬1:3), 칭찬(눅6:32, 34), 칭송(행2:47), 은총(행7:10), 호의(행25: 3), 은사(고후9:15), 기쁨(몬1:7), 아름다움 (벧전2:19,20), 사랑스러움(눅2:52), 감사 (눅17:9, 롬6:17, 고후8:16, 골3:16).
은사(카리스마. )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486
-
1.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11:29, 고전1:7, 딤전4:14, 벧전4:10.
-
관련 성경 / 은사(롬1:11, 고전7:7, 딤전4:14), 선물(롬5:16).
5월 28일(수) 느헤미야 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묵도(默禱)하고(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The king said to me, "What is it you want?" Then 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묵도(默禱) : 잠잠할 묵, 빌도 /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빎. 또는 그런 기도(祈禱).
영어 a silent prayer
히브리어 파랄( pâlal ) פָּלַל
묵도는 찰나의 기도
찰나(刹那) : 절 찰, 어찌나
-
1. 어떤 일이나 사물(事物) 현상(現象)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
2. 매우 짧은 시간(時間).
탄지경(彈指頃)보다는 짧은 시간(時間)이나, 염(念)ㆍ탄지(彈指) 따위와의 관계(關係)는 해석(解釋)에 따라 다르다.
-
3. 탄지(彈指)의 10분의 1이 되는 수(數). 즉, 10⁻¹⁸을 이른다.
-
4. 예전에, 탄지(彈指)의 억분의 1이 되는 수를 이르던 말. 즉, 10⁻⁸⁸을 이른다.
-
5. 탄지(彈指)의 10분의 1이 되는 수(數)의. 즉, 10⁻¹⁸을 이른다.
묵도는 집중(集中)의 기도
-
1. 한곳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모임. 또는 그렇게 모음.
-
2.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이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6419)
- 여기서 '묵도하고'(에트팔렐. וָאֶתְפַּלֵּל)는
'간청하다' 혹은 '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פָּלַל)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1.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2.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6419. 파랄( pâlal ) פָּלַל
-
1. 동사 심판하다.
-
a. 동사 피엘형
-
b. 동사 심판하다, 처형하다, 삼상2:25, 시106:30
-
c. 동사 생각하다, 가정하다, 창48:11.
-
d. 동사 힛파엘형
-
e. 동사 간섭하다, 중재하다, 신9:20, 삼상2:25,7:5, 욥42:8
-
f. 동사 간구하다, 기도하다. ㉠ [특히 하나님께] 시5:3(2), 단9:4. ㉡ [사람에게] 느1:4. ㉢ [단순한 사용] 삼상2:1, 대하7:14.
-
-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 21:7, 신 11:2, 삼상1:27), 간구하다(왕상 8:33, 대하 6:24, 사 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 2:4).
[명] 기도(삼하 7:27, 왕상 8:29, 대상 17:25), 간구(왕상 8:54, 대하 33:13).
묵도와 묵상의 차이점
여기서 묵도라는 뜻과 유래를 알면
대 예배의 맨틀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너무 익숙하여 별 뜻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묵도라는 뜻을 [묵상기도]의 줄임말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용히 드리는 기도로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묵상기도의 줄임말로 사용해도 문법상 하자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묵도라는 말은 일제 잔재로서 일본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거나 다른 잡신을 섬길 때 잠시 묵념하는 것을 묵도라고 한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묵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전통과 예식을 세워 갈 때도 묵도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한국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묵도라는 단어가 예배 순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여 일본의 신사에 먼저 참배하는 묵도가 예배 순서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묵도라는 단어가 우리 예배에 고착화된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으로 준말처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묵도]라는 단어를 주려가고 있으며 멘트 없이 바로 찬양대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습관화로 허전하시면 성경적인 언어 시편 1장 2절에 나오는 [묵상]으로 대체하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는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고 풀어서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다같이 묵도(默禱)하심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은 너무나 귀에 익숙하다.
이 말이 아닌 다른 어떤 표현으로 예배의 시작을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참담한 역사의 산물은 예배의 순서로 굳어지고 정형화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묵도가 예배의 한 순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깨닫는 지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바탕이 돼야 한다.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말씀으로 영적·내적인 성숙을 이끌어내는 것이
묵상기도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묵도하심으로’라는 말의 사용을 점차 줄여가고 있다. 멘트 없이 예배의 부름을 찬양대의 찬양이나 악기의 연주로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다. 하지만 습관에 의해 신사참배의 잔재인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아직 많이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하심으로’라는 말 대신 성경적인 언어인 ‘묵상’(시 1:2)을 사용하거나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유대인의 신앙 회복을 다룬 책입니다. 각 장별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1장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파괴된 상태를 듣고 기도하며, 왕의 허락을 받아 성벽 재건을 준비합니다.
- 2장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벽 상태를 조사하고, 백성들에게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 3장 : 성벽 재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수행한 작업이 기록됩니다.
- 4장 : 외부의 방해를 극복하고, 백성들이 무장을 준비하여 성벽을 지키며 공사를 계속합니다.
- 5장 : 가난한 백성들이 착취당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에게 공의를 실천합니다.
- 6장 : 적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완공되며, 느헤미야는 성벽을 지킬 수비대를 조직합니다.
-
7장 :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 완료된 후, 성전 봉사와 안식일 준수,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를 바로잡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리더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전체 요약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회복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느헤미야는 제3차 포로귀환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의 저자는 느헤미야 자신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5세기경 아닥사스다 왕 시대에 쓰였습니다.
이 책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1-7장)과 에스라와 함께한 율법 낭독과 신앙 개혁(8-13장)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 리더십, 회개,
언약 갱신 등 영적 부흥의 핵심 주제가 강조됩니다.
느헤미야를 읽을 때는 포로 후라는 개념과 페르시아의 식민지 상태임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1장 요약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으로,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형제
하나니에게 소식을 듣습니다.
그로부터 성이 허물어지고 백성이 큰 환난과 능욕 가운데 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1:2-4).
그는 민족의 죄를 자백하고,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1:5-10).
또한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준비합니다(1:11).
느헤미야 2장 요약
느헤미야는 근심한 얼굴로 왕 앞에 나아가 예루살렘의 폐허 상태를 말하며 성벽 재건을
위한 허락과 지원을 요청합니다(2:1-8).
왕은 그의 요청을 기쁘게 허락하고, 조서를 써주며 군사 호위도 붙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밤에 조용히 성벽을 둘러보며 재건 계획을 세웁니다(2:11-15).
그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심과 왕의 허락을 전하며 재건을 독려합니다(2:17-18).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를 듣고 크게 분노하며
방해를 시작합니다(2:19-20).
느헤미야 3장 요약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여러 지파와 가족들이 맡은 구간별로 성벽을 건축합니다 (3:1-32). 각 문과 성벽의 일부가 공동체적으로 나뉘어 맡겨지고, 각자 자신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수고합니다. 귀족 중 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백성은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3:5). 느헤미야는 기록을 통해 각 작업자와 맡은 구역을 세세히 언급하며 공동체의 협력과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성벽 재건이 단순한 건축이 아닌, 민족 회복의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4장 요약
성벽 재건이 진척되자 산발랏과 도비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방해합니다 (4:1-3).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고, 공사에 계속 집중하게 합니다 (4:4-6). 적들의 공격 위협이 커지자 느헤미야는 낮에는 절반은 공사하고 절반은 무장하여 경계하게 하며, 밤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경비하게 합니다 (4:16-23).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라"고 외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웁니다 (4:14).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성벽을 계속 재건합니다.
느헤미야 5장 요약
성벽 재건 중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자녀를 종으로 팔기까지 합니다 (5:1-5). 느헤미야는 이를 크게 분노하며,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고 이자 받는 것을 중지시키며 토지와 자녀를 돌려주게 합니다 (5:6-13). 그는 자신은 총독으로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5:14-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한 것이라 밝히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5:15, 19).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느헤미야 6장 요약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은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 가자,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6:1-2). 거짓 예언자들을 동원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 하지만, 그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도에 힘씁니다 (6:10-14). 결국 대적들이 두려워할 만큼 성벽 공사는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6:15-16). 그러나 도비야와 유다 귀족들 사이의 비밀 연대가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6:17-19).
느헤미야 7장 요약
성벽이 완공되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문지기, 찬양대,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 (7:1-3). 그는 유다 귀족들과 백성의 계보를 조사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7:5-7). 이 명단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과 그 수, 가축, 헌금 등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7:6-73). 백성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다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 8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습니다 (8:1-3).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며,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8:7-9).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격려하며 초막절을 회복합니다 (8:10-17). 말씀의 회복과 절기의 실천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느헤미야 9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하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되새깁니다 (9:1-3). 레위인들이 인도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인내가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9:5-31). 백성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9:32-33).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언약하며 문서로 기록합니다 (9:38).
느헤미야 10장 요약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언약문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10:1-29).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10:30-31).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정기적으로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10:32-39). 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실천적 다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요약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제비 뽑아 10분의 1을 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합니다 (11:1-2).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등의 수가 제시됩니다 (11:3-24). 그 외 유다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도 정리되어 공동체 전체의 조직이 드러납니다 (11:25-36).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일의 일환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요약
스룹바벨 때의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이 기록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족보도 정리됩니다 (12:1-26). 성벽 봉헌식이 열리며, 백성은 노래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성을 돌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12:27-4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물을 정리하고 성전을 위한 직무를 정돈합니다 (12:44-47). 하나님의 일에 질서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느헤미야 13장 요약
느헤미야는 잠시 바사 왕에게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 내에 도비야가 거처를 차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13:4-9).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진 것을 바로잡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합니다 (13:10-14). 또 안식일을 범하는 상인들을 단호히 막고, 성문을 폐쇄하여 안식을 회복시킵니다 (13:15-22). 마지막으로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다시 책망하고, 제사장의 정결을 회복시킵니다 (13:23-30).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행하며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3:31).
느헤미야 장별 요약
3차 포로교환
1장 : 유다의 범죄에 대한 느헤미야의 기도, 이 때 술관원이 됨
2장 : 성전을 지으러 느헤미야가 유다로 감
3장 : 유다의 예루살렘 성 중수 (낡은 건물 고침)
4장 : 주변국의 침략대비 하면서 성을 중수
5장 : 유다 백성의 빈곤 퇴치를 위해 이자를 낮춤
6장 : 성벽완성
7장 :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손의 계수
8장 : 에스라의 율법낭독
9장 : 단에 올라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개함.
10장 : 이스라엘 자손이 모여 율법을 지키기로 맹세함
11장 : 예루살렘성과 그 밖에 거주하게된 자손 목록
12장 :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
13장 : 삶을 전반적으로 정리.
1. 제사장 직 정리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함
3. 이방인을 떠나게 함
느헤미야, 에스라, 포로귀환 시대, 도표와 연대를 한 눈에 바라보기
포로 귀환 시대
전체 관찰
연대: B.C. 538-404
본문: 스 1:1-10:44; (에스더); 느 1:1-13:31
주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
개요
남 유다를 정복한 신 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던 시대만 반짝 힘을 발했고, 그 이후 급격히 쇄락하여갔다. 페르시아 만 동편의 작은 나라 페르시아(바사)는 고레스 왕의 재위 중에 종주국인 메대와 바벨론까지 정복하여, 고대 근동의 새 주인이 된 고레스는 속 국민들에게 관용정책을 펼쳤다. 고레스의 칙령(스 1:2-4)으로 유다 인들이 자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유다 인들은 세 번에 걸쳐 귀환하는데, 먼저 BC 538년에 스룹바벨총독의 지도하에 4만 2천 여명의 유다 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유다 인들은 대적들의 조직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전을 재건축하여, BC 516년에 봉헌했다. BC 480년(스 6-7장 사이) 바사의 왕비였던 에스더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유대인들을 구했다. 1차 귀환 80년 후인 BC 458년에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을 받은 율법 학사 에스라는 1,500명이 넘는 유다 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율법 재건과 신앙 부흥에 힘썼다. 2차 귀환 13년 후인 BC 444년에 왕의 술 관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임시 총독이 되어 귀환하여 성벽 재건을 시작하여 반대 세력의 완강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BC 425년 성벽을 봉헌하였다. |
포로 귀환 시대 연대표
구분 |
연대 |
성경 본문 |
사건 |
페르시아 (바사) |
고레스의 통치(539-529) |
||
539-538 |
단 5:31 |
분봉왕 다리오 바벨론 통치 |
|
538 |
스 1:1,2 |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
|
538 |
단 9:20-27 |
다니엘의 70이레 |
|
538 |
단 6:1-28 |
다니엘의 사자굴 |
|
538 |
스 2:1-70 |
1차 귀환(스룹바벨) |
|
536 |
스 3:8-13 |
성전 재건 작업 1차 시작 |
|
536 |
스 4:4 |
성전 재건 1차 방해 |
|
536 |
스 4:23 |
성전 재건 작업 중단 |
|
530 |
다니엘사망 |
||
|
|
캄비세스의 통치(529-523) |
|
526 |
애굽 정복 |
||
|
|
스메르디스의 통치(523-522) |
|
|
|
다리오 1세의 통치(522-485) |
|
520 |
학 1:1; 슥 1:1 |
학개, 스가랴의 사역 |
|
520 |
스 5:1 |
성전 재건 작업 재개 |
|
520 |
스 5:3-17 |
성전 재건 2차 방해 |
|
520 |
스 6:6-12 |
다리오 왕의 성전 재건 승인 조서 |
|
|
아하수에로의 통치(485-464) |
||
? |
스 4:6 |
성전 재건 3차 방해 |
|
483 |
에 1:3 |
아하수에로의 잔치 |
|
(480-479) |
|
그리스의 바사 침공(살라미스 해전) |
|
479 |
에 2:12-18 |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
|
478 |
에 2:21 |
아하수에로 암살 음모 |
|
474 |
에 3:1-15 |
하만의 책략 |
|
473 |
에 9:20-32 |
부림일 제정 |
|
|
아닥사스다 1세의 통치(464-424) |
||
458 |
스 7:11-26 |
2차 귀환 조서 |
|
458 |
스 7:1-10 |
2차 귀환(에스라) |
|
? |
스 4:7 |
성곽 재건 1차 방해 |
|
? |
스 4:8-22 |
성곽 재건 2차 방해 |
|
? |
스 4:23 |
성곽 재건 중단 조서 |
|
? |
느 1:1-3 |
성곽 재건 작업 중단 |
|
445 |
느 1:4-11 |
느헤미야의 탄원 |
|
445 |
느 2:1-8 |
3차 귀환 조서 |
|
445 |
느 2:9-11 |
3차 귀환(느헤미야) |
|
444 |
느 2:17,18 |
성곽 재건 작업 재개 |
|
444 |
느 2:19,20 |
신발랏, 도비야, 게셈의 성곽 수리 1차 방해 |
|
444 |
느 4:7,8 |
성곽 수리 2차 방해 |
|
444 |
느 6:2-4 |
성곽 수리 3차 방해 |
|
444 |
느 6:5-7 |
성곽 수리 4차 방해 |
|
444 |
느 6:10-14 |
성곽 수리 5차 방해 |
|
444 |
느 6:15 |
성곽 수리 필역 |
|
444 |
느 7:5-69 |
느헤미야의 1차 인구 조사 |
|
444 |
느 12:27-47 |
성곽 낙성 |
|
433 |
느 2:6; 13:6 |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야 |
|
432 |
느 13:6,7 |
느헤미야의 2차 귀국 |
|
435-425 |
말라기의 활동 |
||
? |
그리심 산 성전 건립 |
||
|
다리오 2세의 통치(423-405) |
||
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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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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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닥사스다 2세의 통치(404-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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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닥사스다 3세의 통치(359-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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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
애굽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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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소의 통치(338-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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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오 3세의 통치(335-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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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
바사(페르시아) 멸망 |
1. 포로에서의 귀환
귀 환 |
제1차 |
제2차 |
제3차 |
성경 언급 |
에스라 1-6장 |
에스라7-10장 |
느헤미야1-13장 |
연 대 |
B.C.538 |
B.C.458 |
B.C.444 |
지 도 자 |
스룹바벨, 여호수아 |
에스라 |
느헤미야 |
바 사 왕 |
고레스(키로스) |
아닥사스다 왕 (아르탁세륵세스, 롱기마누스) |
아닥사스다 왕 (아르탁세륵세스, 롱기마누스) |
칙령의 내 용 |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만큼 돌아갈 수 있고 성전이 재건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국고의 지원을 받았다. 그릇들이 돌려졌다. |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돌아갈 수 있고 국고 지원이 마련되었다. 자신들이 문관을 갖도록 허용되었다. |
성벽 재건이 허용되었다. |
귀환자 수 |
42,360명과 종7,337명 등 총 49,697명 |
남자 1,500명과 레위인 38명, 조력자 220명 |
알 수 없다. |
사 건 업 적 문 제 |
성전 공사가 시작되고 제사를 드렸으며 장막절을 지켰다.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작업이 19년간 중단되었으며, 성전은 B.C.516년에 완공되었다. |
통혼의 문제 |
산발랏, 도비야 및 게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52일만에 재건되었다. 성벽이 봉헌되고, 율법이 낭독되었다. |
2.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의 역사적 배경
3. 남 북
이스라엘의 포로 및 귀환 경로
포로귀환 결론
�� 연 대 |
B. C. 538-404 |
A. 본 문 |
성경 읽기 |
스, 느 |
스1:1-10:44, 느1:1-13:31(에스더) |
B. 주 제 |
본문 관찰 |
유다인 들의 귀환 |
1. 1차 귀환과 스룹바벨 (스1:1-6:22) 2. 2차 귀환과 에스라 (스7:1-10:44) 3. 3차 귀환과 느헤미야 (느1:1-13:31) |
C. 의 미 |
신학적 해석 |
•성전 재건 •신앙 개혁 •성벽 재건 |
1) 제1차 귀환하여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재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와의 협력사역(스1:1-6:22) 2) 제2차 귀환하여 에스라에의해 신앙이 개혁되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스7:1-10:44) 3) 제3차 귀환하여,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재건 *느헤미야는 말라기 선지자와 같은 연대(느1:1-13:31) |
D. 복 음 |
구속사적 해석 |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님의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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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전한 성전으로 살고가신 예수님 2) 성령강림으로 복음이 믿어지게 하셨다. 3) 구원의 조건을 보혈언약으로 세우셨다. |
E. 교 훈 |
복음적 적용 |
주님 만날 준비하는 성도 |
1) 희생과 헌신과 봉사로 사는 신앙 2)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 3) 바른 교리로 무장하는 신앙 |
중간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