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묵상 역대하





깨닫는 것이 은혜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은 먹이를 사냥하여 셋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귀가 제안했습니다.
“이 사냥감은 우리 셋이서 잡은 것이니 똑같이 세 등분하자.”
그 소리를 듣고 사자가 매우 화가 나서 나귀를 꽉- 물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냥감을 어떻게 나눌까?”
그러자 여우가 9대 1로 나누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자가 9이고, 여우인 자신은 1이라는 겁니다.
이에 사자는 여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우야, 너는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우가 대답합니다. “바로 전에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즉시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이 은혜고, 깨닫는 것이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많이 보고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번 보고 들으면 즉시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대 매를 맞아야만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 문 앞에 가서야 비로소 “아차,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고 후회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지요? 애급의 바로 왕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절대 왕이다 보니 자기가 가장 잘나고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강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놓아주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깨닫지 못하다보니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두드려 맞았습니다.
나라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장자를 비롯해 애급의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홍해까지 달려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물에 수장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들을 대체로 잘 깨닫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런 보편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 둔한 편입니까? 만약 그런 보편적인 깨달음이 매우 둔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식이 없다, 경우가 없다.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 못 말린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물론 사람들은 각자의 깨닫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잘 깨닫습니다.
여성은 대체적으로 감성적인 것을 잘 깨닫고, 남성은 대체로 이성적인 것을 잘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과 예술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학문의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 쪽에 잘 깨닫습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아하’ 하고 깨닫는 체험을 누구나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뇌 과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아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 켜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하아 체험’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말씀을 들을 때에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잘 깨닫는 사람입니다.

물론 타종교인 불교(엄격히 말하면 불교는 철학)에서도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깨달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깨달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깨달음을 말하지만, 불교는 인간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력 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 종교 즉 은혜의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비로소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성도로서의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갈망합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적인 깨달음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단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체크해 봅시다.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믿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습니까?” 모두들 아멘 하시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즉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깨닫고 믿는 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냥 무덤덤해집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감사와 감격과 활력이 없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자연히 신앙생활의 흥미를 잃고, 믿음이 후퇴하고 맙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3년간 그토록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였지만 그들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즉 깨달으면 겸손해지고, 깨달음이 바른 신앙인의 토대가 됩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삶에 소망이 되고 감격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가운데 즐거워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깨달아져야만 주님을 위해 바르게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깨달음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으면서 “아- 성경에는 깨달음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이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해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말씀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도다.”(롬3:10-11) “너희가 백발이 얼룩얼룩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호7: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9)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호4:14)

특히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과 악에 대한 깨닫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용감하고 무식하게 죄와 악을 계속 짓고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9)

예수님도 제자들이 잘 깨닫지 못하자 너무 답답해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8:43)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16:9-11)

심지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12:16)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해 저와 여러분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결국 전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게 되니까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게 뭐지요? 다름 아닌 진리의 성령님을 각자의 마음속에 보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요. 깨닫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고로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시면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

다시 말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마치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것처럼 진리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령님이 오시면 이런 깨달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셨구나!” “아하, 하나님은 바로 나의 친아버지가 되시는구나!” “아하,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구나!”

이렇게 깨달음이 오니 그 사람은 자연히 교회에서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 교만의 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옳은 것을 틀리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로 용감하게 나아가게 되고 맙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옳다고 계속 착각을 합니다.

어떻게 깨닫느냐에 따라 우리의 장래가 결정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바르게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이 있다면 당신의 행위도 바르게 될 것이요, 그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의 칭찬과 보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으면 그 행위가 자신이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실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이요, 그 행위에 대한 쓰디쓴 열매를 결국 자신이 먹고 말 것입니다.

고로 보다 나은 장래를 원한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저에게 바르게 깨닫는 영을 주시옵소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여러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혜, 인간의 아이큐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주여,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
“주여,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여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시 119:125)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예화 모음

▣ 깨달음

두 은둔자가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다퉈보세!”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다툴 줄을 모르네.”
다시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자네와 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면
자네는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싸움이 시작될 걸세.”
그래서 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았고,
첫 번째 사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한 뒤에
이내 마음이 편치 않아 “맞아, 그건 자네 거야. 어서 가져가게”라고 대답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 출처 / 사막 교부들, 《깨달음》 중에서

▣ 35세에 깨달은 것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셰를 샀죠.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죠.
그런데 그 다음에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 나는 깨달은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 자료 출처 : 공지영《수도원 기행》 중에서

▣ 깨달음은 큰 복입니다.

길거리 호떡장수에서 1,200여 개 가맹점의 대표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죽 전문점 '본죽'의 CEO가 된 김철호씨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 경험담을 [정성]이라는 책으로 내 놓았습니다.
본죽을 시작하기 전 운영하던 회사를 부도처리로 은행에 넘기고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부도난 회사를 처리하고 남은 것은 승합차 한 대였다고 합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 문간방에 쓰러져 잠이 들어는데 잠에서 깨어난 순간, 불현듯 어릴 적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답니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여자 혼자 몸으로 포목점을 하며 다섯 자녀를 기르신 어머니는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늘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장에 가면 소도 보고 말도 본다.'

평범한 말이지만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고 합니다.
장에 가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것저것 보게 되는 것처럼,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생기니, 모든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에게 그 말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힘이 되었답니다. 그는 그 후 재기하여 오늘의 기업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복입니다.
깨달음은 힘입니다.
깨달음은 유익을 줍니다.
깨달음이 행동화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사업가의 깨달음은 회사를 살리게 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이동현 교수는 그의 책 [깨달음이 있는 경영]에서 “백 가지 거창한 기법보다 한 가지 소박한 깨달음이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린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깨달음은 발명품으로 형상화되어 인류에게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미술가들의 깨달음은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보는 이의 사고를 자극하고 정서를 순화시켜줍니다.
음악가의 깨달음은 선율이 되어 귀를 호강하게 하고, 종교인의 깨달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고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게 합니다. 깨닫는 것은 우연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전에서 ‘깨달음’을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듯이 깨달음은 생각하고 궁리하다 발견하게 되는 진리입니다.

시라쿠사왕 히에론 왕이 어느 날 갓 만든 금관을 구했는데, 그것이 위조물로 순금이 아니고 은이 섞였다는 소문을 퍼졌습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감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에게 금관과 금의 부피를 납득시키기 위해 아르키메데스는 고민을 했습니다.

생각에 골몰한 그가 우연히 공중 목욕탕의 욕조에 들어갔는데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문득, 자신의 체중과 같은 부피의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레카, 유레카!(알아냈다. 알아냈다.)" 라고 외치며 알몸으로 뛰쳐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액체 속의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낸 액체의 무게만큼의 부력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달팽이는 어떻게 고정관념의 틀을 깼을까?"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퍼킨스은 이런 것을 쿠데타적 사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깨달음입니다.
몇 마디 말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영감에 의해 이뤄진 쿠데타적인 사고가 문명을 형성하고 진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는 순간 깨달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그리고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서 인상주의까지, 불의 사용에서 레이저까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무는 쿠데타적인 사고, 사고의 혁신의 소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제 1단계로 오랜 탐색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제 3단계는 일반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진다고 합니다.

제 5단계는 혁신은 결국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킨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보이는 세계만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보이나 데이비드 퍼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앙을 갖기까지는 신앙적 환경, 누군가의 기도, 오랜 방황 등의 과정들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태어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쿠데타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 것처럼 신앙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의 쿠데타는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지는 것처럼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결국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처럼 신앙 역시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며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깨달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힘이며 최상의 복입니다(마 16:17).
모든 은혜는 깨달음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최상의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영안이 열립니다. 영적 깨달음도 힘인데 겸손해야 깨닫는 마음이 열립니다(단10:12). 말씀을 들을 때 깨닫습니다(마13:23).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고전2:10).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사50:4)

* 자료출처 / 열린편지/김필곤 목사

▣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제가 진지하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부터였지만, 처음3년 동안은 ‘도대체 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여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65년에서야 진정한 복음을 찾았습니다. 그때까지는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끌어안고 답답해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교회를 다녀보았지만 별 차이가 없고 결국 기독교라는 것이 도덕의 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의 독특성과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야간 신학교를 기웃거리면서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캐나다의 오스월드J. 스미스 목사님이 쓴 [구원의 길]이라는 작은 책자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구원의 진정한 길이 아닌 것 여러 가지를 열거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종교적인 노력과 도덕적인 선행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나아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갈라디아서 2장 21절이 적혀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저는 저의 노력을 통해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이 십자가에 내 대신 죄 값을 치루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깊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오만했던 지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당신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날 밤의 깨달음은 저에게 형언할 수 없는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복음과 십자가가 참으로 제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성경의 말씀이 한 구절 한 구절 저를 지배하고 감격하게 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성경을 들고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 깨달음의 보물 창고

얼마 전에 거북 두 마리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 큰딸의 성화에 못 이겨 사주었지만, 여러 가지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가 먹지도 못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강한 녀석이 등에 올라타 짓누르며 괴롭히는 게 아닌가? 나는 원인을 몰라 어항 뚜껑을 열어 아픈 녀석만 계속 관찰했다. 그 결과, 눈병이었다. 하얀 막이 덮여 있어 앞을 못 보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애처로워 강한 녀석을 피해 먹이 하나라도 더 넣어 주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에 아픈 거북을 향한 나의 애타는 마음이 영적, 육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통함을 깨달았다. 앞을 보지 못해 시련을 겪는 거북이 나의 지난 모습이자 지금의 모습이었다. 말씀을 봐도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은 행동들….

우리는 육적으로 필요한 영양소를 음식으로 공급받는다. 우리의 영적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을 때,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 소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깨달음’이라는 영적 영양소를 공급하시며 은혜를 주신다. 그 보화를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으로 주위를 살펴보라. 곧 마음을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는 ‘깨달음’의 보물 창고를 반드시 발견하게 되리라.

「생명의 삶 독자 에세이」/ 한유진

* 기도: 지난날 하나님이 아닌 허탄한 것을 의지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제 삶의 모든 어그러진 부분을 회복시켜 주소서.

/생명의 삶

▣ 루터의 깨달음

성경: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 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영적 안내자는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 선각자란 앞서 깨달은 사람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우칠 수 없다. 깨우치기 위해서는 먼저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상의 복은 깨달음의 복이다(마 16:17). 최상의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다. 모든 은혜는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존귀에 처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더욱 귀히 여기신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시 49:20).

깨달음은 열림이다. 깨달음이란 영안이 열리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귀가 열리는 것이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지각이 열리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영적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영적 감각이란 거룩한 사랑의 감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순간에 우리의 가슴에 들어온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만큼 깨닫게 된다. 사랑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사랑하면 온몸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깨닫게 된다. 깨달음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다.

깨달음의 운동은 사랑의 운동이다. 사랑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깨닫게 되면 모든 영적 감각이 소생케 된다. 깨달음의 극치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데 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을 알게 된다. 인생의 사계절을 알게 된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인생의 사계절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깨닫기를 사모해야 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깨닫게 된다. 깨닫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열린 마음이다. 다니엘이 깨닫기를 사모하여 자신을 겸비케 할 때 하나님은 깨달음의 은혜를 베푸셨다(단 10:12).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마 13:23).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사야 50장 4절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드린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는 건강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이나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많을 때, 공기가 풍부할 때 그것들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홍수로 먹을 물이 없을 때 물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가 없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 봅니다. 그 마음의 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열립니다. 이솝우화에 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살이가 놀다가 내일 만나자고 합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웃습니다. 메뚜기가 가을 지나 봄에 만나자고 합니다. 개구리가 웃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한계, 인식의 한계 문제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민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게나.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내 귀여운 아기를 품에 안을걸세.
내가 비록 지친 상태에서 피곤해도 어린 천사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네.
왜냐하면 아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아기가 나를 얼마나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거의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내가 병이 들어 잠을 못 이루고 고통스러워할 때도 아기는 그냥 잠만 쿨쿨 잘 걸세.
혹 마음 아픈 일이 있어서 괴로워할 때도 아기는 혼자서 즐겁게 떠들며 놀 걸세. 그뿐인가?

우리집 꼬마는 나에게 10원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앞으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할 걸세. 그래도 나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걸세. 생각해 보게. 아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내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내가 사랑하기 전에 내가 주는 사랑의 값어치 만큼 무언가를

우리 아기가 내게 해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친구의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것 같네."

▣ 동태 두 마리

장성한 아들 형제가 있는 김 권사는 주의 종과 성도들을 섬기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하루는 그녀가 동태 다섯 마리를 사서 목사님 가족은 둘이니 두 마리, 자기 식구는 셋이니 세 마리로 나눴다.
이것이 김 권사의 주의 종 섬기는 자세였다.
그날 김 권사는 강도를 만나 머리에 각목을 맞고 쓰러졌다.
강도가 심방 가방을 일숫돈 가방으로 착각한 것이다.
김 권사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한 아들이 말했다.
“예수를 대충 믿으세요. 돈만 생기면 교회에 바치고, 불쌍한 사람 도와줘도 하나님이 지켜준 것 뭐가 있어요?
강도가 휘두른 각목에 어머니만 죽을 뻔했잖아요.”
그때 김 권사의 대답. “얘야 그렇게도 깨닫지 못하겠니?
내 머리에 이고 있는 동태가 강도의 각목을 대신 맞아줬기에 죽지 않고 산 거란다.
깨달으면 천국이요, 못 깨달으면 지옥인 게야.”

* 자료출처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큰 깨달음

한 젊은이가 큰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삶의 그 시종을 다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네!”

▣ 진정한 깨달음

어느 날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실감나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레이 목사님은 고민하는 이 부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인, 오늘부터 집에 가서 다른 기도는 하지 말고 이 한 가지 기도만 계속하십시오.
하나님께 부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 주간만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목사님의 충고에 따라 이 부인은 집에 돌아가 이 기도만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하나님, 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십시오.”

이 기도를 계속 하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불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부인은 자기의 죄악을 보며 절망한 채 일 주일만에 토레이 목사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죽어버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토레이 목사님은 “이제부터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집에 다시 돌아가 두 번째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보여 주십시오.” 그때 이 부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을 선언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분을 통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써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으며 그로 인해 깨끗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 8)



깨닫지 못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깨닫는 사람(마태복음 13:23)

깨닫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

1. 은혜는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복을 복으로 깨닫고 잘못을 잘못으로 깨닫고 부족을 부족으로 깨닫고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깨닫고 은혜를 은혜로 깨닫 는 것이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이다.

2.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는 책망을 받지 않고 항상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3. 한 가지를 들으면 열가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기 바란다.

4.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받았음을 깨닫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깨닫는 은혜 는 가장 귀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깨닫는 유형

1. 보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2. 듣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듣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3. 매맞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매맞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다.

4. 잃어버리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은 잃고도 고치지 않는 것 보다 낫다.

5. 죽을지경이 되어도 못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다.

6. 끝까지 못깨닫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 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

7. 부자와 같이 지옥가서 깨닫는 사람도 있으나 가장 어리석은 깨달음이요 소용 없는 깨달음이다.
버스 지나가고 나서 손을 드는 것은 바보이다(눅 16:24-)

8. 나중에 깨닫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 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 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

9. 말씀을 들을 때 마다 깨닫고 주의 은혜를 받을 때 마다 깨닫고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가 되자.
매맞고 잃어버리고 손해보고 낭패 당하고 실망당하고 난 뒤에 깨닫는 어리섞은 자가 되지 말자.

깨닫지 못하는 이유

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 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2. 자아가 살아있으면 깨닫지 못한다.
전에 죄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 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3.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 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4. 교만한 마음이 깨닫지 못하게 한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5. 성령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성경을 읽어도 깨닫 지 못한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행8:30-31)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1.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자

2. 환란과 질병과 어려움이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자.

3. 내가 약할 그 때가 곧 강한 때임을 깨닫자(고후 12:10)

4. 나의 부족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깨닫고 내 눈속의 들보를 깨닫자.

5. 죽을 죄에세 용서받고 구원 받았음을 깨닫자.

은혜를 깨달은 사람

1.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 한다(히 10:22)
모이기를 기뻐한다. 억지로 모이지 않는다. 기쁨으로 주의 전에 모이자.

2. 기도하게 된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기도하게 된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 12:12)

3.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된다(눅 24:45)

4.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은혜를 깨닫는 사람에 게 주시는 결과이다.
은혜를 깨닫는 만큼 충성하고, 믿고, 복받고 은혜받는다



마음공부는 지식 쌓듯이 않고 기존에 있는 것 덜어내는 공부
추구심에 탐심으로 접근 말고 부처성품 구족 믿고 쉬어보라
처음 마음공부에 뜻이 있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어떤 이는 경전이나 법문집, 명상 서적과 같은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아있는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분들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출가를 결심하고 절에 들어가기도 한다.
즉, 우리는 구도의 종착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면서
본인이 찾은 것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꾸 무언가를 해서 본인이 상상하는 어떤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는
그 욕구 때문에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음공부는 지식을 쌓듯 무언가를 더하는 공부가 아니고,
기존에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공부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자꾸 하려는 의도를 멈추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 사람 말을 믿겠는가?

이미 종착지에 도착해 있는데 본인이 그 진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 준다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12연기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로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첫 번째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行)이 발생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기 성품에 스스로가 밝지 못하게 되면
그 무명으로 인해 마음이 멈추어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자꾸 움직이고자 하는 성질이 연기되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부처와는 달리 중생은 지금 이대로 가만히 쉬면서 스스로를 살피지 못하고
자꾸 지금 상태보다 더 좋아 보이는 다른 상태로 움직여(行) 변화하고 싶어한다.
더 쉽게 말하면, 중생의 병은 마음이 가만히 멈추어 있지 못하는 것에 있다.
움직여서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다른 말로 ‘추구심’이라고도 하고 ‘탐심’이라고도 한다.

주어진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탐하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만족인 것이다.

왜냐면 문제는 더 좋은 상태에 도달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도달하려고 노력을 하는 동안 느끼게 되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저항감과

비교에서 오는 결핍감이 번뇌를 일으켜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은 상태에 도달하더라도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무명의 관성이 멈추어지지 않는 한 이내 곧 다시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추구심을 가지고 탐심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추구심이 멈추고 탐심이 사라지는 것이 핵심인데,

움직이려는 마음을 멈추고 돌아보려 하지 않고,

주어진 현재를 떠나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보면 혹자는 이렇게 또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할 것이 없다고 내내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말을 못 알아듣고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되지 않을까 묻는 것이다.

‘깨닫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답답해 질 수 있다.

왜냐면 마음이 평소 관성대로 어디론가 움직여서 가고 싶은데

갈 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심행처(心行處)를 이처럼 끊어 놓으면,

처음에는 사량분별의 습관 때문에 할 것이 없어 답답해 할 수는 있으나

그 자리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보면 밝아지는 것이 있다.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 성품을 구족하고 있다는 그 말씀을 믿고

답답한 그 자리에서 쉬어 보자.

생각을 일으키면서 계속 움직이려던 마음이 멈추니 어떠한가?

생각이 완전히 멈추니 어떤 번뇌나 불만족, 이야기나 질문이 남아 있는가?

나 혹은 너라는 분별이 있는가?

텅 빈 이 마음에 어떤 한계가 있는가?

텅 빈 이 마음은 항상 있었나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면 이 마음이 사라질 일이 있겠는가?

경허 스님께서 참구하신 화두가

“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다가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이다.
깨달음은 그런 것이다.
처음엔 나귀처럼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문득 말이 찾아오듯,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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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이전에는 우리가 오늘날 대하는 것과 같은 뚜렷하고 독립적인 민족 집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바벨에서 반역의 탑을 쌓은 이후로 각자의 언어와(아마도 그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생된 것이지만) 독특한 문화 및 인종적 특수성을 지닌 민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수십 개의 민족들 중에서도 아홉개의 민족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영적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 같다.

그 아홉 개의 민족이란 이렇다. 가나안 수메르, 블레셋, 애굽, 앗수르, 바벨로니아, 바사, 헬라및 로마. 위 민족들 중에서 마지막 로마를 제외한 여덟 나라가 이미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의 아홉번째 나라인 로마는 아마도 예언적 부분을 떠맡을 것이다(물론 이전에 이미 로마는 역사적 역할도 떠맡은 바 있다). 왜냐하면 로마의 옛 제국은 다시 소생하고 무서운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의 아홉나라

가나안

1. 쇄

1) 가나안 족속이란 말을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그곳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들 족속 가운데는 베니게, 블레셋, 암몬, 헷, 여부스, 아모리 및 히위 족속이 포함될 것이다.

2)이들 족속 대부분은 함의 4대손인 가나안의 후예였다(창 9:22-27창10:6,15-20). 가나안 족속이란 이름은 아마도 그에게서 유래한듯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땅이 베니게인들에 의해 가나안이라 일컬어졌다고 믿는다. 베니게인들은 뿔고둥(murex)이라는 조개에서 추출된 자주색 염료를 얻기 위해 그곳을 왕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역은 헬라인들이 그 지역 전체를 가나안이라고 명명하리만치 유명해졌는데, 헬라어로 가나안이란 '피처럼 붉다'는 뜻이다.

3) 가나안 족속들이 세운 몇몇 도시들이 있는데,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게셀, 므깃도, 여리고, 소돔, 고모라 및 예루살렘이다.

4) 이 땅이 비옥하다는 것은 기원전 1950년경에 가나안으로 도망했던 시누헤(Sinuhe)라는 한 애굽난민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증언을 들어 보기로하자.

  "정말 좋은 땅이었다. 그곳에는 무화과와 포도 나무가 있었다. 물보다는 포도주가 흔했으며, 꿀과 올리브유가 무진장 흔했다. 갖가지 열매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으며, 끝없는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고, 온갖 종류의 양떼와 소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진술은 출애굽기 3:8및 신명기 8:8과 비교할만 하다.

5) 아마도 가나안 족속들은 알파벳을 창안해낸 것 같은데, 그 글자들은 모두 31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6) 성서의 역사서 기록된 맨 처음 전쟁은 네명의 메소보다미아 왕들과 다섯 명의 가나안 왕들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참조, 창14장).

2.가나안족속들의 종교

1) 가나안의 종교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성적으로 가장 변태적이며,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하고 잔혹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그들의 바로 그러한 문화와 주민과 도시를 멸절하도록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참조, 신 7:1-5;신20:10-15;수 9:24).

2) 가나안 족속들의 명백한 방탕을 입증하는 주요한 것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참조, 창 13:13;창15:16;창18:20;창19:1-11 ; 민 25:1-3;삿19:14-25;왕상 14:24;왕상15:12;왕상22:46;왕하 23:7). 이들 구절은 무엇보다 우선 그들의 성적 죄를 언급하고 있다.

(2) 비블로스의 필로(Philo of Byblos)의 증언. 이 사람은 기원전 100년경의 시대 상황을 기록한 베니게의 학자인데, 고국에서 고대의 종교적 자료를 수집했다.

(3) 옛 우가리트의 라스 샤므라 문헌. 1927년에 발견됨.

3) 가나안 종교의 으뜸 가는 신은 엘(El)이었다. 엘의 처는 아세라(Asherah)이다. 그는 또한 자기의 세 누이와 결혼했는데, 그 세 누이 중의 하나가 바로 아스다롯(Astarte)이다(삿 10:6참조). 엘에게는 70인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이가 바알(Baal)이다. 엘은 자기의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아들까지도 몇 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딸의 목을 치고, 그의 아버지를 거세했으며, 자기 자신도 거세하고 또 한 그의 일당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다.

4) 바알의 누이(엘의 딸)는 아낫(Anat)이었다. 그녀는 격정과 전쟁과 폭력의 비열하고 악의에 찬 여신이 되었다. 그녀는 바알의 원수들과 싸웠다. 우가리트의 바알 서사시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막강한 권세로 도시 주민들을 쓰러뜨리고, 해안 거주자들을 때려눕혔으며, 동쪽의 사람들을 멸하였도다. 그녀는 사람들을 그녀의 신전에 몰아넣고 아무도 달아날 수 없도록 문을 닫았도다. 그리고 젊은이들한테는 의자를 집어던지고, 전사들에게는 탁상을, 강한 자들에게는 발등상을 집어던졌느니라, 그녀의 무릎에까지, 목에까지 피가 찼구나. 사람의 머리가 그녀의 발아래 나딩굴고, 인간의 손들이 메뚜기처럼 그녀 위로 날았도다. 그녀는 그 희생자들의 머리를 장식물처럼 그녀의 등에 매달았고, 그들의 손을 그녀의 허리 띠에 달았나니라. 그녀의 오장은 웃음으로, 그녀의 육부는 기쁨으로 가득 찼노라. 이윽고 성에 차면 피의 강에서 손을 씻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몸을 돌렸노라."

5) 가나안 암몬 족속의 민족 신은 몰렉이었다(참조, 왕하 11:5,7), 몰렉 숭배에 있어서 중요한 의식은 아이를 번제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유다의 두 왕 아하스와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아이를 이 살인귀몰렉에게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왕하 16:3;왕하21:6). 이리하여 어린아이를 살해하여 희생으로 삼는 일이 가나안 종교의 흔한 관습이 되어갔다(참조, 겔 16:20-21;겔33:37). 마갈리스터라는 이름의 한 고고학자는 게셀 지역의 발굴 당시에 폐허가 된 가나안의 한 신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안에서 어린아이의 뼈가 담긴 수백개의 항아리를 찾아냈는데, 그 뼈의 주인공들은 네 살에서 열 두 살에 이르는 아이들이었으며, 산 채로 불에 태움을 당해 죽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유형의 다른 끔찍한 관습은 "터를 위한 제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집을 지을 때 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리킨다. 그 아이의 시체는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기 위해 벽밑에 매장되곤 했다.

6) 우리는 앞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성적 변태를 약간 언급한바 있다. 가나안의 제사장들은 흔히 악명높은 동성애를 자행하는 자들이고, 여사제는 보통 매춘부였다. 이들 비교의 크고 작은 우상 및 다른 숭배의 대상물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의 약간은 인간의 성기를 돌이나 나무에 새긴 것들이다.

수메르 족속

1. 메소보다미아의 도시들 및 민족들의 기원

1)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함의 자손 니므롯은 바벨 탑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주도하였다.

2) 갈래갈래의 언어로 갈라지고 난 후에 갖가지 집단들이 중동 각지에 정착했다.

3) 기원전 3000년경에 두 집단의 족속들이 메소보다미아에 정착했다. 메소보다미아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인데, 두 강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남으로 흘러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간다.

4) 한 족속은 아카드인들로 윗 계곡에 살았으며, 다른 족속은 수메르인들로 아랫 계곡에 살았다. 이것은 수메르의 땅으로 알려졌다.

2. 두 계곡의 정치적 역사

1) 수메르인들이 살았던 남부의 중요한 도시들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에?, 기스, 라가쉬, 라르사, 닙푸르, 움마, 우르 및 우륵.

2) 기원전 2500-2300년 사이에 우르의 왕들은 전 수메르를 지배하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들은 북부의 아카드인들을 침략했다.

3) 기원전 2300년 직후, 이야기는 뒤바뀌어 오히려 수메르인들이 아카드인의 강력한 지배자 사르곤에게 정복당했다.

4) 전승에 따르면 사르곤은 유아기에 바구니에 담겨 유브라데 강에 죽도록 버려졌다. 그러나 한 정원사의 눈에 띄어, 그의 보호를 받아 군사가 되었다.

5) 사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요, 조직가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유사 이래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였고, 메소보다미아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6) 그의 사령부는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56년 간 지배하였다. 사르곤은 위대한 입법가였다.

7)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은 그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수메르는 북쪽 산지의 야만인들(구티 족속)의 침입을 받아 그들에게 복속당했다. 그들은 백년 가량 지배하였다(기원전 2170-2079년).

8) 이번에는 수메르인들이 세력을 회복하여 구티인들을 쫓아냈다. 새로운 수도는 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는 번영 일로의 항구도시 우르였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지배자는 덩기(Dungi)라는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행정가로 덩기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 가량 앞선 것이다.

9) 이 수메르인의 국가는 엘람 족속이라는 동방의 유랑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받아 기원전 2000년 경에 멸망했다.

3. 메소보다미아인들의 업적

1) 수메르인들은 훌륭한 건축가들이자 건설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우르 시에는 거대한 계단과 기둥과 패널을 댄 벽으로 치장된 웅대한 왕궁이 있었다. 이들 벽에는 인간과 동물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다. 귀족들은 왕궁 주위에 세워진 2층 집에 거주했다. 그들은 둥근 천장(vault)과 아아치와 돔(dome)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알고 있었다. 건용한 방법으로, 후에 애굽인들이 피라미슬 만들때 이것을 모방했다. 지구랏 신전은 탑 모양의 신전으로 한 단층 위에 그보다 작은 단층을 계속 포개는 건축 방식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바벨탑의 모양을 흉내낸 것 같다.

2) 그들은 금과 은을 사용했으며, 합금, 주물, 성형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 덕분에 훌륭한 금속세공과 보석류가 나올 수 있었다.

3) 각 학교에서는 천문학, 수학, 점성술, 지도 제작 및 외과수술을 교과목으로 가르쳐졌다.

4) 수메르인들에게는 무수한 시가 와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천지창조'와 '길가메쉬의 서사시'이다.

5) 수메르인들은 육진법에 토대를 둔 숫자체계를 창안하는 등, 수학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했다. 그들은 곱셈, 나눗셈 및 분수를 활용하고, 1년이 354일로 이루어진 태음력을 사용했다.

6) 고대 수메르의 왕들은 전차를 이용했다. 그들의 군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밀집대형을 이루어 행진했다. 그들은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역시 구리로 만든 창을 사용했다.

7) 그들은 농업에 아주 익숙했으며, 곡물, 채소, 대추 야자를 엄청나게 수확하곤 했다. 또한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길렀다. 밭을 가는 데는 황소를 이용하는 한편, 짐수레와 전차를 끈 데는 당나귀를 이용했다. 그리고 낙농없이 번성했다.

8)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는 최초의 족속들이다. 그들은 상형문자를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문자를 간편한 기호로 단순화하여 부드러운 점토판에 끝이 날카로운 철필로 썼다. 이 철필은 삼각형의 촉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점토판을 긁으면 쐐기 꼴이 새겨졌다. 이 글자는 후에 설형문자, 즉 "쐐기 꼴"의 문자로 일컬어지게 된다.

4. 메소보다미아의 종교

1) 고대의 다른 문명권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다.

2) 각 도시와 마을에는 각각의 신들이 있었으며, 그 신들의 성격은 각각 달랐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신화가 발전하였다.

(1) 어머니 신 이스타르는 사랑과 다산의 여신이었다.

(2) 사랑하는 아들 신 담무스는 봄의 신이자 꽃과 곡물을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는 또한 저승의 신이었으며, 일년 중 반년 기간 동안 저승에 살다가 매년 봄마다 이승으로 돌아오곤 했다.

(3) 바벨론 왕조가 통치하던 기간 중에, 담무스는 그와 비슷한 신 아모리 족속의 마르둑으로 대치되었다.

3) 바벨론인들은 천체를 숭상했는데, 이 결과 천문학과 점성술이 성하게 되었다.

4) 그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를 희생제물로 바쳤다.

5) 사제들이 주관하는 성전, 제단 및 학교가 있었다.

6) 징조, 신탁, 마법이 종교에서 중요한 역항을 수행했다.

(1) 꿈이 중요시되었으며,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2) 희생제물로 구입한 양의 간장 위에 나타난 핏줄을 읽음으로써 미래를 예언하곤 했다.

블레셋

1. 소개

1) 이 해안 족속은 그레데 섬에서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1200년경에 팔레스틴에 정착하였다(참조, 신 2:23;렘 47:4;암 9:7). 그들은 함의 계보에서 나온 족속이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의 후손이었다(대하 1:12). 이 때문에 그들은 애굽인들과 먼 친척이 되었다.

2) 아마도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가는 도중에 헷 족속과 거대한 옛 수리아 도시 우가리트를 멸망시킨 것 같다. 기원전 1190년에 그들은 애굽을 침략하려 했으나 애굽의 바로인 람세스 3세에 의해 격퇴 당했다. 이 후에 그들은 연안 상류에 정착하였으며 팔레스틴에 자기네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

3) 블레셋인들은 5개 도시 연맹을 결성했다. 이 다섯 도시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및 갓이다. 각 도시는 방백이 다스렸다.

4) 블레셋인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으며, 다곤(곡물의 신), 아스다롯(번식의 신) 및 바알세붑(주거의 신)을 섬겼다(참조, 삼상 5:4;삼상31:10;왕하 1:2). 바알세붑은 후에 "귀신의 왕"이란 뜻의 바알 세불로 알려지게 되었다(마 12:24). 블레셋인들은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당에서 승리를 축하했으며(삼상 31:9), 곧잘 자기네들의 우상을 전장으로 모시고 다녔다(삼하 5:21).

5) 처음에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이유는 당시의 "원자탄"이라 할 수 있는 철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은 철기제작을 헷 족속(힛타이트)으로부터 배운듯 한데, 헷 족속은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맨 처음 이 기술을 발견한 족속이다(참조, 삼상 13:5,19-22).

6) 블레셋인들은 엄청난 양의 맥주를 소비하는 "폭주가"들이었다.

2. 성서와 블레셋

1) 삼갈과 삼손은 블레셋 족속과 싸웠다(삿 3:31;삿13:1;삿15:20).

2)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들을 격파했다(삼상 14:1-47).

3) 그들은 결국 사무엘에 의하여 바닷가로 밀려났다(삼상 7:12-14).

4) 사울은 그들에게 패하여 전장에서 죽었다(삼상 31장).

5)다윗은그들과 싸웠다(삼상 17장;삼하5장).

6)그들은 솔로몬 치세 때에 완전히 복속당했다(왕상 4:21).

애굽인들

1. 소개

1) 메소보다미아와 마찬가지로 애굽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민족이다. 애굽은 주위를 둘러싼 천연 방벽의 보호를 받았다. 북쪽에는 바다, 남쪽, 동쪽, 서쪽에는 사막이 있었기 때문에 애굽은 침략해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2) 애굽 문명은 진실로 나일강의 선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 강(4037마일)은 남아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3) 또한 바람 때문에 강의 왕복 항해가 용이하였다. 북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흐르는 물을 타고 쉽게 항해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바람을 이용하여 쉽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4) 지리적 위치 때문에 나일강 상류의 애굽은 남쪽에 위치한 반면 나일강 하류의 애굽은 북쪽 나일 강의 삼각주에 위치했다. 삼각주에 이르러 나일 강은 7개의 지류로 나뉘어 지중해로 들어갔다.

5) 윗 애굽(Upper Egypt: 남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흰 왕관을 썼고, 아래 애굽(북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붉은 왕관을 썼다.

2. 애굽의 왕조들

기원전 3300년에서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치세(기원전 330년)에 이르는 시기는-기원전 3세기경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의 분류에 따르자면- 정치적으로 30개의 왕조로 나뉜다.

3. 애굽 역사의 기본적 윤곽

1) 기초 왕조의 시대-기원전 3000-2700년. 제 1,2왕조, 수도는 멤피스(성서적 표현을 따르자면 '놉' ; 참조, 사 19:13;렘 2:16;렘46:14,19;겔 30:13,16).

주 : 메네라는 이름의 지배자가 30개 왕조의 초대왕이었으며, 아마도 이 사람은 창세기  10:6에 나오는 미스라임이었던듯 하다. 미스라임은 함의 둘째 아들이었다.

2) 고 왕국 - 기원전 2700-2200년, 제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임. 이 시기에 거대한 피라밋이 건축되었다.

3) 제 1 중간기 - 기원전 2200-2000년, 제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임.

4) 중 왕국-기원전 2000-1800년, 제 11왕조부터 제 12왕조까지임. 수도를 더베(성서적 표현을 따르자면 '노'  ; 참조, 렘 46:25;겔 30:14-16)로 옮김, 이 시대는 무덤을 예술적으로 꾸미던 때였다.

5) 제 2 중간기- 기원전 1800-1600년. 제 13왕조부터 제 17왕조까지임. 힉소스왕조(아시아의 방백들)가 기원전 1674년에서 1567년까지(제15-17조) 통치함.

6) 신 왕국 - 기원전 1600-1100년. 제 18왕조부터 제 20왕조까지임. 애굽의 국력과 부가 절정에 이른 시대. 이 때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에 있었으며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

7) 제국 이후의 시기 - 기원전 1100-300년. 제 21왕조부터 제 30왕조까지임. 이 기간 중에 22명의 시삭이 지배했다(왕상 11:40;렘14:25-27;대하 12:2-12). 제 26왕조때에 느고가 통치하였다(왕하 23:28-30,33-35;대상 35:20-24;대상36:4;렘 46:2).

바사의 지배 - 기원전 525-332년, 프톨레미의 시기-기원전 300-30년,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32-323년, 프톨레미 1-12세-기원전 304-51년. 클레오파트라-기원전 51-30년, 이들 일곱시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기에 일어난다.

4. 중요한 사건들의 간략한 역사

1) 고 왕국(기원전 2700-2200년). 제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의 왕국.

(1) 맨 처음의 피라밋이 바로 조세르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아마도 이 건축물은 메소보다미아의 지구랏을 모방하여 개량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세르는 제 3왕조의 왕이었다.

(2) 제 4왕조의 쿠프(Khufu 혹 Cheops)는 대피라밋의 건설을 명령했다. 헬라인들은 이 피라밋을 세계 불가사이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완성하는데는 20년에 걸쳐 10만 명이 동원되었다. 피라밋의 저변은 755피트이다. 하나에 2.5톤이나 되는 석회석을 쌓아 지은 것이다.

(3) 같은 제 4왕조의 바로인 카프르(쿠프 왕의 아들)를 위해서 거대한 스핑크스가 건축되었다. 그것의 모양을 보자면, 몸은 사자이고 머리는 바로였다. 그 몸의 길이는 240피트, 높이는 66피트, 얼굴의 너비는 13피트이다.

(4) 제 6왕조의 페피 2세는 고왕국의 바로 중 최후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90년 이상 동안 권좌에 있었다. 그가 죽은 직후에 고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200년간(기원전2200-2000년) 애굽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줄곧 침략자들이 사막을 건너 쳐들어왔으며,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야심을 품고 있는 세 일가가 정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통에 수리 계획 및 건축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내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때때로 봉건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제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족장 아브라함은 이 시기에, 즉 기원전 2084년경에 애굽을 방문하였다(창 12:10-20).

2) 중왕국(기원전 2000-1800년). 제 11,12 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 제 11왕조의 아멘호텝 1세는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그와 후계자들은 국가를 재건하고 세계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2)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도 중왕국의 마지막 때인 기원전 1897년경이었으며(창 37장)그의아버지야곱이 애굽으로 옮겨간 것도 대략이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875년경이었다(창 46장).

고왕국말기를점철하였던 바와 같은 격동과 전쟁의 상황이 다시 중왕국 말기에 만연하였다. 기원전 1700년 직후 힉소스 왕조로 불리는 일단의 침입자들이 수리아와 아시아에서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옮겨와 북 애굽(아랫 애굽)을 정복하였다.

힉소스 족은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날이 있는 단검과 칼을 사용했다. 활의 몸체는 두 겹으로 되어 있어 강력하고 화살촉은 놋이었다. 훈련 및 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애굽인들로서는 그들의 대적이 될 수 없었다. 힉소스 족은 피라밋과 관계된 모든 일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신들을 소개했으며, 애굽어를 단순화시키려고 했다.

이 두번째 중간기 전체는 제 13부터 제17왕조까지 기원전 1800-1600년 간의 시대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약간의 사람들은 이 시기, 즉 기원전 1730년경에 히브리인들의 탄압이 애굽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출 1장).기원전1580년에애굽의 한 병사 아모스(Ahmose) 1세가 반란을 일으켜 가증스런 힉소스의 침입자들을 모아 내는데 성공했다.

3) 신 왕국(기원전 1600-1100년). 제 18-22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 아모스 1세와 후계자들은 애굽을 재건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격렬한 민족주의 정신이 곳곳에 충만했다. 애굽의 히브리인 탄압이 시작된 것은 이 시기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값싼 노동력과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따라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모든 바로는 이 유명한 제 18왕조로부터 기인한다.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자.

① 출애굽기 1:8의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새왕"은 아마도 투트모스(Thutmose) 1세인듯 하다(기원전 1539-1520년 경) 모세는 기원전 1525년에 태어났다.

② 출애굽기 2:5의 "바로의 딸"이란 핫셉수트를 가리킨다. 그녀는 모세를 길러 그녀의 남편 투트모스 2세가 죽가 애굽의 왕위를 모세에게 넘겨주었다.

③ 출애굽기 2:15의 모세를 죽이려 했던 바로는 핫셉수트의 의붓아들 투트모스 3세였으며, 그는 왕후를 지독히도 미워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켰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핫셉수트의 한 친구였던 모세는 또한 투트모스 3세는 노여움을 자연히 받게 되었다.

④ 출애굽기 5:1의 열 가지 재앙이 기세를 떨치던 시기의 바로는 아멘호텝 2세이다. 이 바로의 무덤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14:8-13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서 우리는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를 건너려다 그 중간에서 수장되고 말았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 게다가 그의 아들조차 애굽을 다스리지 못했다. 아마도 출애굽기 12:29은 이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으며, 여기서 우리는 바로가 유월절에 내린 죽음의 재앙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기록을 대하게 된다.

(2) 이 시기의 더욱 중요한 지배자들은 유명한 제 18왕조에 속한다. 얼마쯤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신 왕국 시대의 몇몇 왕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모스 1세. 제 18왕조의 첫번째 지도자. 힉소스 왕조를 쫓아내는데 힘썼으며,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② 핫셉수트. 모세를 기른 장본인이자 애굽의 왕위와 더불어 여신의 지위에 오른 최초의 여왕. 그녀는 두개의 면류관을 썼으며, 거짓 수염을 길렀다.

③ 투트모스 3세. 핫셉수트의 의붓아들로 그녀를 격렬히 증오한 나머지 폐위시켰다. 투트모스 3세는 애굽의 모든 바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바로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애굽의 알렉산더 대왕, 혹은 애굽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웠다. 그의 제국은 수단에서부터 북부 수리아에 뻗쳐 있었다. 그는 모세가 40세에 애굽을 탈출했을 때 애굽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그는 나라를 지극히 안정되게 하고 죽었기 때문에 애굽은 당시 수십년동안 여전히 매우 강대한 채로 남아있었다.

④ 아멘호텝 2세. 열 가지 재앙 당시의 애굽 왕.

⑤ 아멘호텝 3세. 그의 치세 때에 애굽 제국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대제 아멘호텝 3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⑥ 아멘호텝 4세. 그는 아크나혼이란 이름으로 더욱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애굽의 다신교를 태양신 아톤만을 섬기는 유일신교로 뜯어 고치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열 가지 재앙 당시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참된 권세에 영향을 입은 듯하다.

아멘 호텝 4세는 네페르티티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다. 이 한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하여 옛날부터 허다한 그림과 조각이 제작되었다. 아래 내용의 고대 기록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엘 아마르나 서판이 발견된 것은 기원후 1880년이다). 여기에는 하비루라고 하는 침략 족속을 내쫓기 위해 애굽의 도움을 구하는 팔레스틴의 가나안 왕들로부터 애굽 왕 아멘호텝 4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비루 족속아 사실상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한다(그렇지만 이 설은 다수의 주장은 아니다).

⑦ 투탄카톤. 그는 아멘호텝 4세이 양자였다. 기원후 1922년에 그의 무덤이 금만 해도 10만달러어치 이상을 소장하고 있었다. 투탄카톤의 미이라는 세개의 금곽 안쪽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카다란 석관에 누워 있었다. 시체는 또한 네개의 나무입힌 외곽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는 기원전 1361년, 열 살에 등극하여 19세에 사망했다.

⑧ 람세스 2세. 그는 최후의 강력한 바로 였으며, 67년간 재위한 가장 자부심 강한 왕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역사기록상 가장 오래된 협정을 헷 족속과 맺은 사람이기도 했다(기원전 1250년 경).

⑨ 람세스 3세. 그는 기원전 1190년에 일어난 유명한 해전에서 블레셋을 격파한 것으로 기억되는 왕이다.

이 후부터 애굽은 줄곧 내리막길로 치달린다. 이외의 성서 역사에 나오는 중요한 바로를 들자면, 제 26 왕조의 느고 2세 즉 느고왕을 들 수 있다. 그는 경건한 유다 왕 요시야를 살해했으며(왕하 23:29), 기원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로니아인들에게 참패당했다(참조, 렘46:2).

바빌로니아인들

1. 소개

1) 기원전 2000-1800년 사이에 메소보다미아는 엘람 족속이라 불리는 일단의 동방인들에게 지배를 받았다(참조, 창 10:22;창14:1,9). 엘람 족속이란 오늘날 흔히 페르시아(바사)인들로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다.

2) 기원전 1760년에 엘람 족속들은 유브라데 강 서쪽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에 의해 메소보다미아에서 쫓겨났다. 이 침입을 주도한 승승장구의 아모리 장군을 함무라비였다. 이 인물로 더불어 고 바빌로니아 왕국이 시작했다. 그가 죽자 그의 제국을 분열하며 근 100년 동안이나 지리멸렬한 상태로 있다가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의 갈대아 군인에 의해 신(즉 두번째)바벨론 왕국이 수립된다.

2. 고 바벨로니아 왕국

1) 기원전 1760년 함무라비는 티그리스-유브라데 계곡을 점령하고, 유브라데 강가에 수도 바벨론을 세웠다.

2) 바벨론의 대신은 마르둑이었다. 함무라비는 마르둑의 지상 사자임을 주장하여 통치권의 신성성을 수립하였다.

3) 그는 바벨론 제국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의 편찬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생활 중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부면을 규제하는 약 300조항의법률집이다.그러나 함무라비가 이 법률을 입안한 것은 아니며 그보다 약 300년전의입법자였던수메르의 덩기가 이미 입안했던 것을 함무라비가 법률화하여 요약한 것이다.

4) 고 바빌로니아 제국은 그의 치세 기간 중에 번성일로를 걸었다. 결국 그는 42년 동안의 치세를 끝으로 죽었다. 기원전 1708년 그가 죽은 직후에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일단의 전사들인 헷족속이 메소보아미아를 점령하자 고 바빌로니아 왕국은 멸망했다. 헷 족속은 헷의 후예이다(참조, 창 10:15;창23:3-20;창27:46).

5) 대략 170년 동안 헷 족속이 바빌로니아 영토를 지배했으나, 기원전 1530년 메소보다미아 북부에 살고 있던 캇사이트 족에게 복속당했다(참조, 창 2:13;창10:8). 그들은 이 지역을 근 400년 동안 지배했으며, 앗수르와 엘람인들에게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역대하 33장 요약

므낫세의 패악으로 인해 이방 제단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무당과 점쟁이를 믿었으며 우상을 성전에 두었으나 므낫세가 기도함으로 회개하였습니다.므넷세는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요약

요시야가 왕이 된 후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서 산당과 우상을 없애게 됩니다.성전을 수리하였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과 백성이 율범의 언약을 지키기로 약속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5장 요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켯고 제사장과 레위의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번제를 드리고 무교절을 지켰으며 애굽의 느고와 요시야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요약

여호아하스,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잡아간후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시드기야가 왕이 되고 느부갓네살을 배반,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고 고레스가 귀국 명령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3일(금) 역대하 33-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느고의 말(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Josiah, however, would not turn away from him, but disguised himself to engage him in battle. He would not listen to what Neco had said at God's command but went to fight him on the plain of Megiddo.

요시야는 남 유다 왕국의 제16대 왕입니다.
느고는 애굽 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의 왕이 우상을 숭상하는 애급의 왕 느고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느고의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애급 왕 느고가 '갈그미스'를 치러올라왔습니다.
이 싸움은 앗수르와 애급의 세력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두 강대국 앗수르와 애급의 싸움에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왕은 변장을 하고 싸움에 임하였다가 결국에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애급 왕 느고의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요즈음 교회가 왜 저래!"
"요즈음 목사들이 왜 저래!"
"요즈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이러한 비난의 화살이 지금 정치판에서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힘 정당인가?
더불어 민주당인가?

김문수인가?
이재명인가?

누가 들어도 자유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김문수 후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범법자이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재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닫지 못하는 백성들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길은 당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자유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철저하게 망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있는
소망이 있다면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 주여,
자유대한민국이 흥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속히 흥하도록 역사하시옵소서.








왜 선한 왕 요시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을 듣지 아니하였을까?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35:22,23)


 요시야는 쇠락해 가는 남방 유다 왕국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그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라 부친 아몬과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재위 18년인 BC 621년에 율법서인 신명기 서를 발견한 후 대대적인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일소하고 실지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특히 신명기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는 그 자신이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으며 가나안 정착 이후로 가장 큰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사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고 하였다.

 그런 그가 아직도 젊은 39세인 BC 609년에 쓸데없는 외교 분쟁에 휘말려 전사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조부 므낫세의 엄청난 죄악 때문이었다(왕하23:26~27). 그러나 역대하 35장의 본문에서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찌 요시야 같은 이가 그렇게 하였을까? 그는 왜 그런 어리석은 결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방 왕인 느고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는가? 여하튼 역대개의 본문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므깃도 전쟁 기사를 시작하면서까지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대하35:20)라고 하여 요시야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헌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요시야가 최후를 맡은 소위 므깃도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기 이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그 시대에는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신흥 패권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바벨론인 이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와 하란을 정복하였다.

 그 후 앗시리아의 잔 군들이 앗슈르-우발릿(Ashur-uballit)의 지휘 아래 갈그미스를 수도로 삼았다. 이에 애굽은 근동 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는 바벨론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앗수르 왕국을 돕고자 갈그미스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BC 609년 여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틴의 므깃도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성경의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agianst)하여”(왕하23:29)0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알(ל󰘽)은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치고자”(ahainst)가 아니라 “위하여”(on behalf)로 번역되어야 한다.그래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무두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 왕을 도우려고”라고 번역하였다.

 여하튼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고 올라오는 바로느고와 므깃도에서 맞섰다. 이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을 물리치면 팔례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고 결국 통일 히브리 왕국의 꿈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 바로느고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다 왕이여 내가 오늘날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잇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였은즉 g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고 하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호와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여호와의 제지하시는 음성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 이였든지 간에 요시야는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대하35:22)였다.

 이때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선민 국가의 왕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마치 큰 부흥과 개혁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견하고 영감적인 목사에게 어떤 세속적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할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과 k같다 .그러나 요시야는 바로느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사실 하나님은 전에도 이방의 왕들에게 기별을 주신 것이 있었다.(창12:17-20;20:3~7; 단4:1~3)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귀를 이용하시어 개별을 주시기도 하셨다.(민22:28~31).

 요시야가 비록 바로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애통하게 전사하였지만 성경은 여전히 그를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여선지자 훌다의 입을 통해 예언한바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성경은 요시야 왕의 삶에 대해 심지어 이 므깃도 사건 이후에도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 시종 행적이”(대하 35:26) 기록되었다. 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애굽왕 느고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그 여러 기능들 중에서 “말씀 선포의 기능”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代身) 전한다는 권위(권위)를 갖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말씀 선포자의 성서해석적 기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이중적 특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기능은 영감을 받아 성서를 기록하던 성서 기자들의 성서기록 활동을 통하여서도 감지할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전사(戰死) 사건에 대한 두 성서 역사가 즉 열왕기를 쓴 신명기적 역사가역대기를 쓴 역대기 역사가의 서로 다른 역사해석이 통일된 하나의 역사해석으로 귀결되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활동하신 어떤 한 역사적 사건을 성서 기자가 해석할 때, 그 해석은 영원불변하게 고착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일한 하나님의 사건은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의 두 본문은 동일한 사건을 매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원 전 609년경, 팔레스틴 서북부, 갈멜산에서부터 동쪽으로 이스르엘 평원에 이르는 길의 중간 지점 쯤에 “므깃도”라고 이름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앗수르 제국을 도와 신흥 바벨론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 가의 갈그미스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막으려고 하다가 유다가 낳은 전대미문의 선한 왕으로 존경받든 요시야 왕이 전사(戰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역사 최대의 “신명기적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서 남 왕국 다윗 왕조의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었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아마, 다윗 이래 가장 존경받았던 왕이었고 기울고 있는 유다 왕국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메시아 왕국을 세워 북방에서 일고 있는 앗수르-바벨론 제국 사이의 힘겨루기 갈등에서부터 유다 왕국을 확고하게 지켜 줄 바로 그 장차 올 메시아로서 유다 백성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그런 성군이었습니다. 그런 그 성군 요시야가 나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즉 나이 만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만 30년 간의 통치생활을 끝내고 므깃도에서 전사(戰死)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물어야 할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8.15의 역사적 사건을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를 “8.15는 조선민족에게 도둑같이 찾아 온 하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라고 해석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요시야의 므깃도 전사 사건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출애굽 해방 사건이나 출 바벨론 해방 사건이나 한국민에게 있었던 8.15 해방 사건과 같은 그런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요 새롭게 증언되어야 할 신(神)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반드시 해석 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역사의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건이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학적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는 것이 우리들 인간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이 일은 교회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는 저의 확신 에서부터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꼭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시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에 의한 중동세계의 판도변화에 따라 꺼져 가던 유다 왕국도 이 틈에 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유다 백성의 희망으로 달아오른 그 뜨거운 가슴에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이러한 국제 정세의 판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다 왕 성군 요시야가 그리고 그의 그 위대한 신명기 개혁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유다인들의 그 가슴 벅찬 희망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는 매우 절망적이고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분명, “요시야” 왕은, 모세 이래로,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성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최대의 종교적 위인으로서 성서 역사가들이 한결 같이 입이 마르게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차 올 새 메시아 대망 신앙의 중심부에도 이 “요시야” 왕이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의 그런 성군(聖君)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요시야 왕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어이없는 비운의 전사(戰死)를 하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몰락이 눈 앞에 다가와 있다는 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수고대한 희망이 곧 이루어 질지도 모를 그런 가슴벅찬 희망의 사건이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이 희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 지도자인 요시야가 어이없게도 앗수르를 지원하러 가는 애굽 원정군의 길을 막다가 그토록 어이없이 비명에 죽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든 이스라엘인들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래, 남아 있는 왕국인 유다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란 오직 요시야의 반 앗수르 개혁정치가 성공을 거두는 그것이었는데, 또 정말 때맞추어!! 저 원수의 앗수르 제국이 신흥 바벨론 제국의 힘에 밀려 몰락의 위기에 몰린 이런 다시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감히 거슬러서 반드시 망하여야 할 저 원수의 나라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는 애굽 왕 “느고”의 행위란 누가 보아도 유다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反) 역사적 반역행위였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분명 역사의 주(主이)신 야훼 하나님의 역사섭리란 앗수르를 멸망케 하고 바벨론을 일으키는 그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서 이 “느고”의 원정길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이미 중동세계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기시고 계신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어이없게도 “요시야”가 바로 이 바로 느고의 반 역사적 북방 원정길을 막다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놀랐습니다.  유다 역사가들은 정말 당황하였습니다. 당시 신앙심있는 유다 엘리뜨들은 모두 이 충격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악명 높은 저 꺼져 가는 앗수르 제국을 도우려는 애굽 왕 느고의 북방 원정길이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거스르는 잘못임을 알려 주려한 그 요시야가 도리혀 그 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는 “역사의 모순”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군 요시야가 이 때에 죽음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요시야의 죽음의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냐?”  “왜 야훼 하나님은 성군 요시야가 이 곳에서 죽게하신 것일까?”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죽음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성서해석학적 노력은 유다 역사가들의 연구실 곳곳에서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에 나타난 이 돌연변이적인 요시야 왕의 급서(急逝)는 신학적으로 해명되지 않고는 결코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사료(史料)는 “신명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열왕기 하 23: 24-30과 그리고 “역대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역대하 35: 20-25”, 즉 우리가 오늘 읽은 두 곳의 본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의 역사가들은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와 같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보도할 때, 그들은 결코 그것을 ”우연한 해프닝“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인과(因果)의 객관적 법칙이 낳은 한 결과로 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가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세계사를 해석하는 역사 해석가들의 경우와 성서의 역사해석가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존 맥머리(John Macmurray)라는 역사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유대인의 사상은 역사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본다. 우리의 역사가들은 “시이저가 루비콘(Rubicon)을 건넜다” 또는 “넬손(Nelson)이 트라팔갈(Trafalgar) 전투에서 승리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유대인 역사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히브리 [역사가들]이 연속적으로 취하는 [역사해석의] 형식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는다고 구약의 히브리 사가(史家)들은 철저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역사신앙의 기초요 기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과 무관한 그 어떤 엄격한 합리적 원리가 따로 있어서 “토정비결(土亭秘訣)”과 같은 그 어떤 주역(周易) 원리로 짜여진 “숙명적 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직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만이 작용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난데 없는 “요시야 왕의 전사” 사건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이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 역사가의 해석인 열왕기의 해석과 그리고 역대기 역사가의 해석인 역대기의 해석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열왕기 하 23장을 통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약 50년의 장기 집권기 동안에 저질른 그 극악무도한 폭력과 노략과 겁탈의 악한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앗수르의 신성모독적인 종교정책을 이스라엘로 이끌어 들인 그 종교적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너무 컸기 때문에!!, 요시야 왕의 의(義)로움으로서도! 즉 저 전대미문의 성군 요시야 왕의 의(義)와 선(善)을 가지고서도 이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이 저질러 온 죄, 그 중에서도 약 50년 이라는 반세기 이상의 통치기간 동안에 범한 므낫세 왕의 범죄는 이미 야훼 하나님께서 신흥 바벨론 제국을 등장시켜 유다 왕조를 징계하여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한다면, 할아버지 므낫세 왕의 죄(罪)가 요시야 왕의 의(義)를 압도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을 통하여 저질러 온 이스라엘의 그 극악한 죄 때문에 앗수르를 통하여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시고 그리고 신흥 제국 바벨론을 통하여서는 남왕국 유다를 치도록 벌써부터 확고하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이 이미 그 한계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진노는 이미 역사의 대세(大勢)가 되어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 왕의 선(善)과 의(義)로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은 이스라엘 전(全) 역사를 를 단지 범죄의 역사로만 보는 철저히 참회적 관점에서 역사 반성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요시야의 “의”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가 비록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는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의 의지를 막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일 사건에 대하여 이와는 다른 역사해석을 하고 또 이 사건을 통하여 이와는 다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끌어 낸 역사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 째 본문인 역대기 하 35장 20-25절을 기록한 역대기 역사가입니다. 이 역사가는 요시야 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의 역사적 내막과 그 사실의 정확성 여부 등 보다는 단지! 요시야 왕의 전사 그 자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가,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가 대대로 기다린 메시아인 그 대망의 요시야 왕이 왜 이 중요한 시기에 죽어야만 했나 라고 하는 것에 만 관심하였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이 때, 여기서 전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는 과연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느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이 중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방 왕, 즉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등장시켰고 그가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야훼 하나님의 “신탁”(神託: oracle)을 알려 준 그 사실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요시야 왕의 이 므깃도 전사사건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자신의 북방 원정길을 막는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여기에 나온 것은]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여 ‘속히 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멸하실까 염려하노라.”

    이 신탁(神託)의 의미는 이것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갈그미스 전쟁에 참여하여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는 것은 비록 “바로 느고”가 이방 나라의 왕이고 또 앗수르를 도우는 것이 비록 선민 이스라엘의 원수를 도우는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과, 이 “바로 느고”가 비록 이방 나라 애굽 왕일지라도 그의 입에서 선포된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 준 신탁(神託)의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하여도 바벨론을 일으켜 이 앗수르를 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요사야가 나서서 개입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길을 막는 일, 그것은 분명 이스라엘로서는 마땅한 일임이 확실한데, 그리고 악명 높은 민족 앗수르와 그 종교를 돕는 일을 막는 일은 매우 의로운 혁명적인 일임도 확실한데, 사실이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왜, 무엇 때문에, 애굽 왕 바로 느고에게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그 일을 서둘러 하라고 명령하셨으며 또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이 잘못된 길을 막는 요시야 왕을 왜 죽이시기까지 하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요시야 왕 이전의 왕인 므낫세 왕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너무 확고하여 요시야의 의로움을 가지고서도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그러한 메시지를 전혀 일축해 버리고, 이 와는 매우 다르게, 바로 느고가 가는 이 원정 길이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급히 하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고 명석한 판단과 지혜를 가진 요시야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이 일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신흥 바벨론 제국이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이스라엘은 이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다가 매국노(賣國奴)라는 오해를 받고 그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가진 의미와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전 왕의 악한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비판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즉 유다의 죄를 치시려고 신흥 바벨론을 중동 역사의 지평 위로 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역대기 역사가는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두 역사가의 역사해석적 접근방법에 나타난 극명한 차이를 봄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계시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따라 전혀 서로 다르게는 나타나지만, 그러나, 역사를 보는 신앙적 시각은 즉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는 역사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성서의 진리가 지닌 진정한 역동성(力動性) 같은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통하여 역사의 주권은 인간의 이념적 판단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계획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 역사가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는 메시지는 <요시야와 같은 전무후무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역사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인간 자신이, 인간의 이념이, 인간의 도덕적 잣대가 그것을 장악하려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려는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남쪽에 있는 대국 이집트라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 중동지역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신흥 바벨론 제국에게 넘겨 주셔서 그 바벨론 제국으로 하여금 유다의 죄를 치게 하시려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는 못하리라는 것, 즉 갈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이 바벨론에게 패배하리라는 것을 왜 요시야가 깨닫지 못하고 이 거대한 하나님의 중동 역사 재편의 섭리에 간섭하려 들려고 하느냐는 것이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해석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요시야 대왕 조차도 앗수제국은 여하튼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 애굽제국이 나서서 앗수르를 도운다 할지라도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를 건질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 신앙을 증언하기 위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특이한 증언을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악”(惡)을 임시방편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그것을 말해 주는 가장 드라마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요셉 이야기의 역사신앙에 관해서는 이미 이 강단을 통하여 이미 증언해 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즉 “나를 이곳 애굽으로 팔아 넘긴 것은 실제로는 형님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문을 살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미리 계획하셔서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신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증언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주권은 그 어떤 인간 이념에 의해서도 간섭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군 요시야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인문주의, 계몽주의, 등등,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3세계가 내어 놓은 “해방의 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교권으로부터 지키는 데에는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구 상의 인류는 <점차적으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오류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단지 우주의 한 일부분이요 자연의 한 일부일 뿐, 연약하고 허무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지식의 급진적 성장과 더불어 인간은 오히려 더욱 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닌 위험성과 어리석음을 더욱 더 현실적으로 실감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간 생명이 아무리 존엄하다고 하여도,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들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들은 오히려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는 더욱 더 뚜렷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방 나라 애굽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는 없다는 잘못된 확신과 그리고 악명 높은 제국 앗수르를 돕는 일이 역사를 거스러는 일이라는 확신이 너무나 지니치게 확고하고 뚜렷하여 성군 요시야 왕은 그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에 대하여 순종하기를 싫어 하게 되고 오만스럽게도!! 자기의 이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바꾸어 보려고 하였을 때, 비록 성군 요시야라고 할찌라도 불행스러운 심판의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다소 놀라실른지는 몰라도, 함석헌 선생님은 그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런 무서운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원자탄이며, 왜 일본의 급작스러운 항복인가?....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자리에서 보면, 해방을 하루 아침에 [조선] 땅에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은 우리는 모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념과 사상 만을 잣대로 하여 하나님 위에 군림하여 인간의 이념으로만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에서부터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에로 넘어가는 한 전환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는 분명 젊어지고 있고 동시에 성년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진행되어 가는 것일 뿐입니다.

    성군 요시야의 죽음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짓고 그 애가를 노래하는 남녀 성가대들이 슬픈 곡조로 노래하며 그 곡조와 가사를 애가집 중에 수록하여 오래 오래 역사 속에 전승시켜 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운영은 요시야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대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신의 계시입니까?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4a) 라고 시편 시인이 노래 하였듯이, 하나님의 뜻은 도도하게 온 하늘과 온 땅에 통하고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뜻은 세계 끝까지 이를 뿐이라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저는 8.15 해방 사건에 대한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은 정확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직 요구되는 것은 단지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의 평화의지, 구원의지, 사랑의지를 믿는 것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역사의 의미에 대한 정답을 인간은 갖고 있지 않음이 확실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시야”와 같은 그런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그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오만이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였다는 것, 이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조리의 역사현실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성서의 일관된 답변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불운한 운명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모든 증언과 그리고 성서역사의 그 결론부에 자리잡고 있는 저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증언이 웅변적으로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평화의지, 하나님의 구원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지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것, 그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민중신학이 강변하였듯이, 그렇게,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선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많은 젊은 이들이 기쁨에 들떠서 <민족주의적 주체사상이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유일한 대안이다>라고 성급히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확신 위에만 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우리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 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정한 신탁(神託)이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인의 오만(傲慢)과 오산(誤算)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대하 35:21)




오만
거만할 오
거만할 만
장단음
오ː만 
  • 1.
    태도(態度)나 행동(行動)이 건방지거나 거만(倨慢)함. 또는 그 태도(態度)나 행동(行動).
오산
그르칠 오
셈 산
장단음
오ː산 
  • 1.
    잘못 셈함. 또는 그 셈.
  • 2.
    추측(推測)이나 예상(豫想)을 잘못함. 또는 그런 추측(推測)이나 예상(豫想).



느고(Necho[h])

유다 왕 요시야와 동시대에 살던 이집트 파라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II, 158, 159; IV, 42)에 따르면, 네코스(느고)는 프삼메티쿠스(프삼메티코스, 프삼티크 1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승하여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끝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느고는 페니키아 선단을 보내어 아프리카 일주 항해를 하게 하였다. 이 항해는 3년 만에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31년간의 요시야 재위 기간(기원전 659-629년)이 끝날 무렵, 파라오 느고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아시리아군을 돕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에 요시야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느고의 말”을 무시하고 므깃도에서 이집트군을 격퇴하려다가 치명상을 입었다. 석 달쯤 후에, 파라오 느고는 요시야의 왕위를 계승한 여호아하스를 붙잡아 갔으며 25세인 엘리아김을 예속된 왕으로 삼고 이 새로운 통치자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또한 느고는 유다 왕국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였다. (대둘 35:20–36:4; 왕둘 23:29-35) 삼사 년 후(기원전 625년) 갈그미스에서, 느고의 군대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휘하에 있는 바빌로니아군의 손에 패배를 당하였다.—렘 46:2.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셨다고 얘기하는 느고의 말이 요시야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을 더 잘 알겠습니까? 애굽의 느고 왕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요시야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여기는게 당연합니다.

요시야는 탁월한 영적 리더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열왕기하에 의하면 그 스케일과 디테일이 전무후무한 개혁이었습니다. 느고는 애굽의 왕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방인 따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시야로서는 코웃음을 칠 얘기입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대하 35:22)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역대하는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는 메시지로 마무리가 됩니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이루고 유월절을 성대하게 치른 요시야조차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세운 업적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누구를 통해서든 그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불신자 사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져 갑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성경 좀 읽었다고, 교회 좀 다녔다고, 설교 좀 했다고, 기도 좀 더 많이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오만이고 오산일 수 있습니다. 더 알아갈수록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잠잠할 뿐입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무시했다가 므깃도에서 죽고 맙니다.



역대하 29장 요약 / 히스기야의 개혁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에게 충고합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 제사장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였고,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요약 / 유월절 준비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였고, 백성들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1장 요약 / 종교의식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번제와 십일조를 드렸으며 저성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요약 / 앗수르의 산헤립이 쫓겨나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괴롭히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이에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
산헤립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
히스기야의 병, 교만, 부, 영광에 대해 기록 이후 히스기야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2일(목) 역대하 29-3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룩한 처소(30: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
The priests and the Levites stood to bless the people, and God heard them, for their prayer reached heaven, his holy dwelling place.

처소(處所) : 곳 처, 바 소
사람이 살거나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
어떤 일이 벌어진 곳이나 물건이 있는 곳

처소(4583) 마온( mâʽôwn) מָעוֹן 스트롱번호 4583

1. 집.   2. ㉠ 성전.  3. 굴
발음 [ mâʽôwn ]
어원  / 5772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8회 사용
  • 1. 명사, 남성 집, 주거, 거처, 거주.
    • a. 명사, 남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성전, 시26:8.㉡ 하늘, 신26:15, 시68:6(5).
    • b. 명사, 남성 [들짐승에 대해 사용] 굴, 동굴, 렘9:10(11), 10:22, 51:37, 나2:12(11). 

    • c명사, 남성 도피처, 은신처, 시90:1. 

  • 문법설명
    복수 מְעוּנִים, 대상4:41
    관련 성경
    ☞처소(신26:15, 삼상2:29, 시68:5), 거처(시90:1, 렘51:37, 습3:7), 굴(렘9:11, 나2:11), 거하시는 곳(대하36:15), 숨을 바위(시71:3),계신 (집)(시26:8).

에베소서 2:22 / 처소 2732

κατοικη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2732

1. 거처.  2. 집. 3. 엡 2:22
발음 [ katŏikē- tēriŏn ]
어원 / 2730의 3717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거처, 집, 엡 2:22, 계 18:2.
  • 관련 성경 /  처소(엡2:22, 계18:2).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에베소서(Ephesians)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1.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nd rises to become a holy temple in the Lord.)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신앙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에베소 2장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정의하고 묘사함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 (What means ‘Church’ as ‘a holy temple’?) 하는 것입니다.

첫째, ‘무엇이 성전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장한다는 것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성전으로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질 뿐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v.20,22). 그 성장은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구원받는 자’가 늘어나는 것 (행. 2:46~47)이요, 내적으로는 성도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영적 성숙’인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 진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joined together) :

우리가 좀더 사도가 ‘교회’를 해석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 성전인 교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v. 21) 라고 그는 말합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믿음의 실천이요,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고전. 12:26~27).

셋째, ‘성령께서 지으신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built by the Holy Spirit) :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성전된 교회를 지어 가신다는 것이 우리가 감사와 확신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2)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과 그로 말미암아 변화된 심령 (갈. 5:22~23) 가운데 우리는 함께 연결될 수 있고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함께 자라감으로, 우리 가운데 구원받는 자가 날로 늘어나는 아포슬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2). 처소란 거주하는 곳입니다. 헬라어로 "처소"는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곳을 뜻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만든 성전이나 건물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즉 자기 백성들의 심령과 몸 안에 거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주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성전 곧, 그분의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이렇게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물리적 장소에 국한해서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나, 수도도(심지어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아니며 산꼭대기도 아닙니다. 구름이나 공중도 아니며, 어두움과 빛, 해와 달 그리고 별들도 그 분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 분의 존재는 모든 만물을 채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안에 사실 집을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마음이 그분이 항상 거하실 처소입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기 시작했을까요? 우리가 처음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부터 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 안에 채워졌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를 성부, 성자, 성령 즉 완전한 거룩함으로 이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한 14:20,23).

잠언서 8장에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거하실 사람에 대한 언약이 영광스럽게 증거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오래 전, 이미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들이 그분들의 거하실 처소가 될 것임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심령과 몸 안에 거하시기 위해 땅으로 오실 것에 대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써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잠언 8장에는, 예수님이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언 8:30). 이 절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분만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잠언8:22-23). 그때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서로 누렸던 그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은 천상의 놀라운 기쁨과 영광가운데 함께 계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어떠한 슬픔에 대해서도 아시기 전이었습니다. 아직 육체로 계시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한 어떠한 짐이나 시험도 경험하시기 전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거절과 비웃음과 조롱과 침 뱉음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가리워짐도 경험 못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결코 경험하시기전 이었습니다.

그때 새 언약의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 계획에서, 자유의지를 가지도록 창조된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타락하게 될 것과 구속자가 필요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언약의 중재자가 되실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육체를 입고 타락한 인간을 대속하는 제물이 되겠느냐? 그들의 죄를 담당하고 악으로부터 그들을 건져내겠느냐?"

예수님은 이미 채찍과 가시면류관,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오는 미움과 거절의 그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다가올 십자가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 주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앞날의 고통에 대해 미리 예견하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40:8).

아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언 8:31).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무수한 은하계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혹성들 가운데 하나님은 이 자그마한 행성을 지구라 부르시며 살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곳에서 거처할 장소로 인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그분이 사실 처소가 된 것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아버지와 더불어 대면하며 교통 하는 천상의 기쁨을 누리지 못함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기대감으로 오심을 기뻐하셨습니다.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언 8:31).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내 안으로 이르게 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교제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의 기쁨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이 그의 거하실 성전이 될 것임을 보시고 기뻐하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절대 예지를 믿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그의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주님은 아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속죄의 제한성에 대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주할 사람과 구원할 사람을 정해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그에게로 오면 구원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의 멸망도 원하시지 않습니다(요한복음 3:15-17, 베드로후서 3:9). 하지만 그가 우리의 이름을 이미 아셨다면 자신의 희생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지 혹은 거절할지도 역시 아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지를 공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자신을 왕과 구주로서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은 이미 보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중국, 러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혹은 어느 나라에 있건 우리 모두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오실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은 날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 했던 서약,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약속, 당신이 경험했던 이런 그 때의 감정들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영겁전부터 그 사건을 보았으며 당신으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중에 존재하기 전부터 당신이 그를 영접하리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노래합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자 없나이다"(시편 22:9~10).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

당신이 심기어 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의 책에 당신 몸의 모든 구성 요성에 대해 기록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님도 당신이 자신의 처소로 자랄 것을 아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이 그의 처소가 될 것임을 보시고 기뻐하신 세가지 이유를 대겠습니다.

1. 예수님은 당신의 신랑으로서 당신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신부와 더불어 친교하며 이룰 연합을 예견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우리의 다양한 역할과 위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몸 혹은 그의 양 떼 그리고 처녀, 아들, 종, 친구 등으로도 불리어 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호칭들 중 가장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리어 질 때 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과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이사야 62:5).

만약 당신이 기혼자라면 여러분의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약혼한 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서로 사랑에 빠져서 상대와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도 역시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셨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절대 연합에서 떠나시기로 동의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신부가 되는 그 날을 이미 예상하셨습니다. 그분의 눈에 당신은 사랑스러운 짝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되실 것이고 당신은 그에게 속할 것입니다. 그의 기쁨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신랑은 당신이 매일 밀실로 와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세상을 잊고 그와 더불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달콤한 교제를 위해 몇 시간을 보내겠지요.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취하시고 당신으로 인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이제 예수님과의 첫 사랑에 대해 회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전심으로 그분을 갈망했습니다. 순전한 기쁨으로 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집으로 흥분되어 향하였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당신과 함께하는 날들은 언제나 결혼 잔칫날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고백하셨습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다. 이곳에서 이 세상 무엇 보다도 나를 더 원하는 이와 함께 하리라."

아내 그웬과 저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의 결혼 생활 내내 향유했습니다. 불과 24시간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에 3차례씩 서로 전화를 걸고 맙니다. 지난 50년 간의 결혼 생활 내내 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상상이 가십니까?

2. 주님은 당신과 그의 가장 비밀한 것들을 나눌 것을 생각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당신의 배우자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것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신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에게 그의 비밀한 것들을 나누실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그분과 함께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나누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세속적 연인들 간에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비록 데릴라에 대한 삼손의 즐거움이 육체적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습니다(사사기 16:4). 데릴라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의 힘의 비밀을 발설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그의 생명으로 대가지불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즐거움으로 인해, 주님은 당신이 그의 신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분은 기도의 골방에서 전적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당신을 선견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결코 보거나 듣지 못한 것들을 당신에게 계시할 것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15:15).

그분은 당신과 더불어 하나님의 가장 은밀한 비밀들을 나누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언 3:32). 실로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시고는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 3:7).

주님은 이 세상과 당신의 삶 가운데 이루시기 원하셨던 것들, 새 언약과 그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 십자가 희생의 위대함, 이 모든 하나님의 심중의 비밀들을 당신과 나누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문제, 아픔과 실패, 기대와 소망, 꿈과 두려움까지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분으로 다가가시기 원하십니다.

3. 예수님은 그의 신부가 주의 말씀으로 인해 즐거워함을 기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언 8:34).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말을 청종하는 자, 매일 아침 나의 문에서 나의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자, 간절히 나의 목소리를 바라는 자, 내가 그에게 한 나의 모든 말에 기뻐하는 자, 그들 안에 내가 거하리라."

그의 신부로써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 2:14).

다윗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편119:16).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시편119:47).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편119:77). 이 마지막 절에 대한 히브리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을 즐깁니다."

위에서 언급한 말씀(잠언 8:34) 가운데 다음의 두 문구 즉,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그리고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여기서 언급한 문이란 무엇입니까?

시편기자는 그 해답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편118:19). 저는 이 "의의 문"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라 믿습니다. 그들은 의를 배우기 위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거룩한 삶 가운데로 인도하는 모든 계시의 말씀으로 인해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기를 원해. 단지 설교 테이프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는 부족해. 나는 주님을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해. 그러면 그분은 나에게 그의 문을 열어 주실거야."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매일 아침 그를 만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환영하네 친구여. 오늘도 하나님의 의에 대해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려네."

두 번째,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모든 신앙인들을 지칭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선지자가 성전 문설주 옆에서 기다렸던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는 거기서 천사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룩, 거룩" 그들의 찬송이 하늘에 울려 퍼집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압도하는 음성이 울렸습니다. 그 음성이 얼마나 크고 분명했던지 모든 것들을 흔들었습니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이사야 6:4).

이 강력한 음성은 이사야를 뼈속까지 떨게 했습니다. 너무나 죄에 대해 그를 각성케 한 나머지 그는 울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6:5).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한 예입니다. 이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임하면 그의 영혼은 죄로 인해 각성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이사야 66:2).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예수님이 우리로 인해 어떻게 기뻐하셨는지 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임재 하시고, 우리로 그의 처소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 오직 그 분께 매달리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를 찾고 그와 더불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나누실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짐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말씀을 찾으며 그의 길에서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의 순간 우리는 떨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주님이 그의 처소인 우리에게서 무었을 기대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의 기대를 성취해 나가십니까? 그는 당신과 더불어 일생을 함께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매일 멀어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랑은 당신을 더 가까이 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날마다 당신과 더불어 달콤한 교제를 원하시기에 주님은 당신에게 마음을 열기 원하셨습니다. 또한 아무도 보지 못했던 많을 일들을 보여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당신 안에 영적인 열매를 맺도록 당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결핍에 대한 마음까지 제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눈물과 친밀함 그리고 전폭적 헌신으로 당신은 그의 마음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한 신부의 노래입니다.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가 2:3).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아가 2:14).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이 창조되기 전, 바로 이와 같은 당신과의 관계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관계를 가지게 된 때가 이르렀지만 당신은 주님을 거절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TV 시청, 쇼핑, 인터넷 서핑, 정원을 가꿀 시간은 있지만 주님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묻겠습니다. 신부의 마음이 신랑에 대해 지루함을 느낀다면 그가 신부의 마음 가운데 계시리라 믿습니까? 그와 함께 지낼 시간도 대화할 시간도 들을 시간도 없는 사람에게 왜 계속 머무시겠습니까?

엄중히 권고합니다. 주님은 절대 자신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자에게 거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항변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결코 주님께 냉담한적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난 수주 동안 말씀과 기도에 태만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친밀히 교제하는 개인적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사실은 당신은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의 행동은 내가 예수님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가지 못함을 증명합니다. 나의 가족, 직장 그리고 개인적 욕망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습니다."

Beware of Being Given Over to Salt.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브리서 2:3). 그리스도께 무관심하게 되면 커다란 대가지불을 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의 구원의 선물을 망각하게 되면 소금으로 변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에스겔 47장은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의 강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강은 거룩하며 치료하는 물입니다. 그래서 황폐한 땅을 흘러 들어가 닿는 모든 것을 소성 시킵니다. 이 강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 헤엄할 물이 됩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에스겔 47:8~9).

이 생명의 강은 선포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처음에는 그의 12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단지 조그마한 물방울로 시작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그의 개종자들에 의해 더 넓게 전파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헤엄할 큰 강이 되었습니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47:9).

이 강은 갈보리로부터 흘러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므로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와 무감각을 깨우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이 크게 떠져 주안에서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을 구하며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와 긴밀히 교제합니다. 그들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성령 안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중의 비밀이 주어졌고 그것은 그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치료의 물에서 헤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강이 당신을 지나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 물이 흐르지 않는 사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십시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에스겔 47:11).

아마도 당신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죄를 범했을지 모릅니다. 당신에겐 기도도 없었고 순종도 없었고 말씀도 태만해 왔습니다. 당신은 죄를 각성케 하는 설교를 듣고 마음도 움직였지만 언제나 다시 자족감의 자리에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무관심은 당신의 삶의 한 방편이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주님의 당신에게 가졌던 모든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언급한 "소금 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완전한 불모지이며, 열매 없는 공허함이며, 메마름과 고립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를 보십시오. 완전히 소금 땅이 되어버린 물입니다. 그곳에는 심지어 그 주변에도 고기가 살지 못하며 식물도 자라지 못합니다. 완전한 황폐함입니다.

당신이 이와 같이 고립되고 메마른 개펄과 진펄이 되었습니까? 당신의 삶이 하나님께 열매가 없는 불모지가 되었습니까? 당신의 하루하루가 이처럼 공허하고 메마르고 고립되었습니까? 아마 당신은 소금 땅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자원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이 메시지가 당신을 흔들어 각성케 한다면 당신을 위한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강이 흐를 때면 모든 죽은 것들이 다시 소성합니다.

새 언약이 세워졌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그리스도께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을 이미 보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온적으로 혹은 냉담한 사람들로 발전해 결국은 파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셨습니다. 만약 한마라의 양이 길을 잃고 벗어난다면 예수께서 쫓아가 그를 무리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치료의 강이 흘러 죽은 인류를 생명가운데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에스겔 47:8). 하나님의 치료의 강이 흐르면, 여기저기 푸른 풀과 나무들이 사방에서 싹트기 시작해 곧 온 들판에 생물이 번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계획도 여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진정 바로 오늘 여러분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 속에서 아무리 오래되었더라도 소진되고 침해된 모든 것들을 다시 회복시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데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나"(요엘 2:25).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비밀을 듣고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그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이러합니다. 주님께 태만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십시오. 주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분주했던 것을 시인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불렀을 때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에베소서 5:14).

이제 그 분께 부르짖으십시오. "오 하나님,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을 깨우소서. 나로 잠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변화되기 원합니다. 당신이 내 안에서 하실 일이 있음을 내가 아나이다. 주여 당신의 강한 손길로 나를 만지소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패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패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너희의 패역함을 고치리라"(예레미야 3:12~14,22)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재확인시켜 줍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이사야 57:15~19).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아 잠시동안 너에게 화가 났구나. 너에게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탄이 파괴했던 너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리라."

당신의 삶은 푸른 숲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습니다. 오늘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 되게 하십시오.









저는 오늘 우리 신앙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성도의 공동체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교회의 정의를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에게 무엇이 교회인지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영적 건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교회’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기에 성령 안에서 함께 연결되고 거룩하게 지어져 간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하실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성령 안에서 함께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함께 지음 받기를 결단하고 성령께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한 서신서,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연합” (the unity of the Church)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연합은 그 당시 특별히 2 그룹간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유대종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챤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간의 연합인 것입니다. 물론 그 뿐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까지 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실로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엡. 2장>은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하는 성경적인 <교회론> (Ecclesiology)의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엡. 2장>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교회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하고 기억해야하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몸>은 단순히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며 더욱이 <건물>이 아닙니다. <몸>은 <유기체> (organism/ organic body)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잘 알듯이 유기체는 살아 있는 조직임으로 그것은 자라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성장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매우 심각한 성장의 문제가 아닐수 없듯이 말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된 교회 공동체를 사도 바울은 지금 ‘건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 (an holy temple)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으로 정의되어지는 교회의 본질과 특성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전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일까요?” (What means ‘Church’ as ‘a holy temple’?) 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장한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grow up) :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0,22).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인 교회는 계속해서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치 건축가가 어떻게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완성해 나가는지를 설명하듯이, 교회라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져 가는지를 잘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기초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튼튼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건물이 세워질 땅을 깊이 파고 기초공사를 견고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질 터는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진들이 순종과 순교로 다진 견고한 터 위에 성전인 교회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이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말 그대로 그것은 성전 건물이 점점 더 지어져 나가고 완성 되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다면, 몸이 성장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의미일까요?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 안에 계속해서 구원받는 성도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 많은 불신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 불신자가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늘어나는 역사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성장은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믿음의 성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함으로 복음과 주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성전된 교회가 자라난다는 뜻인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 진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joined together) :
우리가 좀더 사도가 ‘교회’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따라가 본다면 한가지 중요한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출발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진행형)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짐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는 <20절>에서 성전인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순교의 터 위에서 지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나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v. 21) 라면서 설명을 이어 나갑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혹은 ‘성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어 질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 12:5) 말합니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머리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몸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코 머리의 통제를 받지 못하여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4장>에서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합니다” (엡. 4:16)라고. 여기서 본다면, <연결되었다>는 것은 ‘영양분을 잘 공급받고, 몸이 잘 자라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준다’는 뜻입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 아포슬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이 각자를 돌아보며,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라고 도전합니다. 사도는 한 형제가 고통받을 때 함께 힘들어 하고, 한 자매가 영광을 얻을 때 함께 즐거워한다면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하나로 연결된 한 몸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 입니까? 아니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관계입니까?

셋째, ‘성령께서 지으신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built by the Holy Spirit) :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된 교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요, 계속해서 서로 연결됨을 통하여 지어져 가는 존재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한가지 마지막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이 성전된 건물을 짓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성전건축의 주관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머릿돌’ (The Coner Stone) 되실 뿐 아니라, 성전건축을 책임지시는 주관자 되시는 것입니다. 바로 약속하신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서 아름답게 완성시켜 가시는 주권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전된 교회를 저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된 교회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성장하고 자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2)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사실 교회성도들을 한사람 한사람 살펴본다면, 서로 자란 환경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 하는 공부와 앞으로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매우 다양함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이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양성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더욱 가까움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비성경적인 이단들에게서 보게 되듯이, 한가지 색깔과 한가지 가르침만 인정하면서 획일적인 집단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전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영적 공동체 안에는 자유함이 있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고 선포한 ‘주님의 자유하신 영’이 의미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유하신 영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분열과 혼란으로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리어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으로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의 통치하심과 도우심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함께 아파하고, 영광 받을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육신에 속한 우리 자신의 노력 만으로는 안타깝게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님께 순종하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자들은 서로의 모든 다름을 극복하고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신뢰합니까? 성령님께 순종합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그럼으로 우리 상호간에 있는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로 연결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자라가는 지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영광된 성전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된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 나가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로 서로를 품어주고 사랑으로 종 노릇함으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일 하루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된 우리 공동체의 산제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월 21일(수) 역대하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정도(正道)(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Jotham grew powerful because he walked steadfastly before the LORD his God.

요담(Jotham) : 여호와는 바르심

유대왕 웃시야의 아들로 부왕이 문둥병으로 정무를 살피지 못하여 대리로 얼마동안 섭정하다가 죽은후 25세때(758)계승 즉위하여 16년간의 치세를 공의롭게 하고 만년에 다메섹왕 베가에게 위협을 받았다.
이 시대의 선지자는 이사야이다(왕하 15:, 대하 27:, 마 1:9)


정도(正道) : 바를 정, 길도 right way 

1. 올바른 길
2. 정당한 도리

사도(邪道)
/ 간사할 사, 길 도 out of the right way

  • 1. 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邪惡)한 도리(道理).
  • 2. 건전(健全)하지 못하고 요사(妖邪)스러운 종교(宗敎).
        흔히 그 사회(社會)의 도덕(道德)이나 제도(制度)에 나쁜 영향(影響)을 끼친다.

    오도(誤導) : 그르칠 오, 길 도 / misleading

  • 1. 어떤 대상(對象)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

    9대 / 조부 아마샤 - 10대 / 부 웃시야 - 11대 / 요담 

    아마샤(Amaziah) :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


    1. 남쪽 유다왕국의 제 9대 왕으로 B. C. 800-783년까지 통치하였다.
    2. 아버지 요아스 왕이 신하들에 의해 피살당하자(왕하 12:20-21)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왕권을 확립하고,아버지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3.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신 24:16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다(왕하 14:1-6).
    4. 그는 에돔 정복을 계획하고 북 이스라엘군 십만 명을 보충 고용하였다가 한 선지자의 충고를듣고 그들을 다시 돌려보낸 후 유다의 군대만으로 에돔을 정복하였다(대하 25:5-11).
    5. 전쟁에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의 신들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왔고,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을 선고받았다(대하25:1416).
    6. 에돔에 대한 승리로 고무된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도전하였다가 크게 실패하였고,전 쟁 도중 벧세메스에서 요아스에게 생포되었다가 왕궁과 성전의 보물을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석방되었다.
    7. 그 후 아마샤는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살았으나 내란에 의해 라기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반역 음모를꾸민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장사되었다(왕하 14:8-14,17-20; 대하 25:1-27),
    8. 역대기 기자는 그의 비운이 여호와를 떠난 것과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악 때문인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대하25:1-27).

    웃시야(Uzziah) : 나의 힘은 여호와

    아사랴라고도 불린 유다 왕.
    아마샤가 아내 여골리야를 통해 얻은 아들인 웃시야는 52년 동안(기원전 829-778년) 통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 동안 여로보암(2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가 연이어 북쪽 왕국을 통치하였다.
    (왕하 15:1, 2, 8, 10, 13, 14, 17, 23, 25, 27; 대둘 26:3)
    예언자 이사야(1:1; 6:1), 호세아(1:1), 아모스(1:1)가 웃시야와 동시대 사람들이었으며, 아마 요엘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왕의 통치 기간에 대단히 큰 지진이 있었다.—슥 14:5.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16세 된 웃시야는 유다 백성에 의해 왕이 되었다. (왕둘 14:21; 대둘 26:1) 하지만 열왕기 둘째 15:1에 의하면 웃시야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제27년에 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웃시야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대략 12년이 지난 후에 웃시야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되므로, 이것은 그가 특별한 의미에서 ‘왕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로보암 왕 제27년에 두 지파 유다 왕국이 북쪽 왕국에 복종하던 상태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그 복종하던 상태는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를 쳐부수었을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대둘 25:22-24) 따라서 웃시야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두 번째로 왕이 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웃시야는 “여호와의 눈에 올바른” 일을 행하였다. 이것은 주로 그가 스가랴(더 후기에 살았던 같은 이름을 지닌 예언자가 아님)라는 사람의 훌륭한 교훈에 청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민들은 계속 산당에서 부당한 희생을 바치고 있었다.—왕둘 15:3, 4; 대둘 26:4, 5.

    웃시야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얻은 군사적 성공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는 엘랏(엘롯)을 유다 왕국에 회복시키고 아카바 만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그 도시를 재건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가드와 야브네와 아스돗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그다음에 아스돗 지방에 도시들을 세웠다. 웃시야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므우님 사람들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암몬 사람들이 유다에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의 막강한 중무장 군대는 부계 가문들의 우두머리들 2600명의 지휘 아래 있는 30만 75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웃시야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그곳에 전쟁 장비들을 세웠다.—왕둘 14:22; 대둘 26:2, 6-9, 11-15.

    이 왕은 또한 농사와 목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웃시야는 가축 떼에게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많은 저수조를 깎아 팠으며, 광야에 망대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풀을 뜯는 가축 떼와 양 떼를 약탈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농사와 포도 재배 작업이 그의 지시 아래 산지와 갈멜에서 수행되었다.—대둘 26:10.

    웃시야는 여러 차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결과 거만해져서 성전의 ‘성소’를 침범하여 분향하려고 할 정도까지 이른 것 같다. 대제사장 아사랴는 80명의 보조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즉시 왕을 따라 성전에 들어가서 이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그를 질책하며 신성한 곳에서 떠나라고 촉구하였다. 웃시야가 분향용 향로를 손에 들고 제사장들에게 격노할 때, 기적에 의해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황급히 그를 성전 밖으로 인도했다. 웃시야는 부정한 나병 환자가 되었으므로, 신성한 곳에서 그 어떤 숭배도 드릴 수 없게 되었으며, 왕의 직무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한 집에 머물렀으며, 그동안 그의 아들 요담이 국사를 처리했다.—대둘 26:16-21.

    그의 죽음과 장사와 관련하여, 역대기 둘째 26:23은 이렇게 알려 준다. “마침내 웃시야가 그 조상들과 함께 눕자, 사람들이 그를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지냈으나, 왕들에게 속한 매장지의 땅에 장사지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나병 환자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웃시야가 나병 때문에 바위를 깎아 판 무덤에 안치된 것이 아니라 왕실 묘지에 인접한 들판에 장사되었음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고 기원 1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회암으로 된 한 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유다 왕 웃시야의 뼈가 이곳으로 운반되었다. 열어서는 안 된다.”—1권, 960면 사진.



    요담(Jotham) : 여호와는 완전하시다, 여호와는 정직하시다 

    유다의 제11대 왕(BC 740년경
    ~ BC 736 년)

    요탐이라고도 한다.
    요담(יותם,  Ιωθάμ) 
    하나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만 한 왕이었다.

    웃시야 + 여루사<사독의 딸> = 요담

    아버지 웃시야가 하는 그대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백성들은 여전히 타락해 있었다.

    요담은 성전에 '윗대문'을 세웠고 오펠의 성벽 위에 많은 것을 지었으며 유다의 산악 지방에도 성읍들을 세우고 산림 지대에 성채들과 탑들을 세웠다.
    또한 암몬군과도 싸워 승리해 암몬에게서 은 100달란트와 밀 10000코르, 보리 10000코르를 바쳤다.
    암몬은 두 번째 해에도 세 번째 해에도 같은 양을 가져왔다.
    이렇게 요담은 하나님을 굳건하게 섬겨 강해졌다.


    여담으로 상당히 늦둥이 아들이다.
    아버지인 웃시야가 16세에 즉위해 52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그럼 68세에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요담은 25세였으니 웃시야가 43세일 때 요담이 태어난거다.
    요즘 기준으로도 늦둥이에 속하지만 당시로 치면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뻘 나이 차이다.


    열왕기하 15:32-33
  •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아버지 웃시야가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분향하려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을 얻게되었는데, 그 이후 왕자 요담이 아버지 대신 왕의 역할을 수행했고, 웃시야가 죽고 난 뒤 25세부터 나라를 본격적으로 다스렸다.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 역대하 26:16-23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음을 보고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왕이 죽는 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이 외에 웃시야의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웃시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저는 문둥이라 하여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역대하 27:2-9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지 십 륙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그는 성전 윗문을 세우고,
    오벨의 성벽을 세우고 많은 도시와 망대를 세우는 등 건축 공사를 일으켰다.
    또한 암몬 족속과 싸워이겨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지만,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 무렵에 아람왕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베가 왕이 공격해 왔다.

    열왕기하 15: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르신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그는 죽어서 다윗성에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선지자들 /  이사야, 호세가, 미가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호세아 1:1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미가 1:1
    유다 열왕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권위 있는 말씀이며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2. 오직 은혜(Sola Gratia) :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3. 오직 믿음(Sola Fide) :
      사람의 행위나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4. 오직 예수(Solus Christus) :
      세상 모든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5.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
      하나님의 영광만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며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이다.












    요담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버지 웃시야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분향하려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웃시야를 나병으로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담은 성전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경건하다고 인정을 받는 어떤 교인이 카톡의 메시지를 받고 이런 말을 합니다.
    "왜 갑자기 목사님께서 정치적인 발언을 합니까?"

    목사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 안된다는 성경의 교훈이 있는지 확인해보셨나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과 제사장이 잘못할 때는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문제는 국민소득이 점점 더 높아지면서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번영, 축복, 건강을 강조하므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한 설교에 길들어져 있으므로 꾸짖거나 죄에 대한 설교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요담(요람)은 남 유다 왕국의 11대 왕이었습니다.
    16년 동안 통치할 때 그 시기를 역사가들은 "좋았다" 라고 평가합니다.


    요담(Jotham)

    출생과 배경 :
    요담은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의 아들로 태어났다(열왕기하 15:32).
    그의 어머니는 사독의 딸 여루사(열왕기하 15:33)

    웃시야 + 여루사(사독의 딸) = 요담

    왕위 계승 :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려 격리된 후, 실질적으로 유다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열왕기하 15:5, 2)
    그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라 유다를 통치했습니다(역대하 26:21)

    통치와 업적(열왕기하 15장, 역대하 27장)

    즉위와 통치:

    요담은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다(열왕기하 15:33)
    그는 아버지 웃시야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열왕기하 15:34, 역대하 27:2)

    성전 수리와 건축

    요담은 성전 윗문을 건축하고, 오벨 성벽을 크게 수리했다(역대하 27:3)
    그는 유다 전역에 여러 성읍과 요새를 건축하여 유다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했다(역대하 27:4)

    군사적 업적 :

    요담은 암몬 자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그는 암몬 자손들에게 조공을 받아 유다의 부를 증가시켰다(역대하 27: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를 경험했다.

    신앙과 순종 :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따랐다(역대하 27:6)
    그의 신앙과 순종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요담의 죽음과 후계자(열왕기하 15장, 역대하 27장)

    요담의 죽음 :

    요담은 16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었으며, 다윗 성에 묻혔다(열왕기하 15:38, 역대하 27:9)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열왕기하 15:38, 역대하 27:9)

    교훈과 적용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

    요담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순종과 신실함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행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받을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

    요담의 이야기는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의 정직하고 신실한 통치는 유다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건축과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 :

    요담은 성전과 성읍을 건축하고, 유다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안정과 번영을 위해 기초를 다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평화와 번영의 시기:

    요담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신뢰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요담의 생애와 통치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순종과 신실함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으며, 그의 정직한 통치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건축과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 그리고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정도(正道) 헤킨 데라카우(הֵכִין דְּרָכָיו)

    헤킨 1879 / 다쉔(dâshên) דָּשֵׁן
    스트롱번호 1879

    1. 살진.  2. 즙이 많은. 3. 부유한
    발음 [ dâshên ]
    어원 / 187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형용사 살진, 기름진, 비옥한[흙에 대해 사용],사30:23
    • 2. 형용사 즙이 많은, 수액이 많은[나무에 대해 사용], 시92:15(14).
    • 3. 형용사 부유한, 넉넉한[사람에 대해 사용], 시22:30(29).
    • 문법설명  / 복수 דָּשֵׁן, 복수 연계형 דִּשְׁנֵי
    • 관련 성경 /  풍성한(시22:29, 사30:23), 풍족한(시92:14).
    1878.    

    דָּשֵׁן 스트롱번호1878

    1. 살찌다.  2. 피엘형  3. 살찌게 하다
    발음 [ dâshên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데라카우 3559 / 쿤(kûwn) כּוּן
    스트롱번호 3559

    1. 똑바로서다.  2. 세우다  3. 필렐형 כּוֹנֵן
    발음 [ kûwn ]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요담(Jotham)왕은 25세에 왕이 되어 16년 동안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실은 요담왕은 15세에 왕이 되어 20년 동안 다스렸고 35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왕 웃시야왕이 성전에서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나병)이 걸려 별궁에 거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요담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다가 10년 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요담왕이 25세에 왕이 되어 혼자서 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아들 아하스를 왕으로 세워 4년 동안 섭정을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담왕이 왕으로 있었던 전체 년 수는 20년이었고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아들을 왕으로 세운 때까지는 16년이었고 부왕과 아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혼자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6년에 해당된 셈입니다.   

     

      한편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지 않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절).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정직히 행하였으나~'라는 한글 표현이 마치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라크'(רק)라는 부사는 '단지' '오직' '조차'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조차'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רַק 스트롱번호7535
    1.

    오직

    2.

    단지 ~조차

    3.

    ~뿐

    발음 [ raq ]
    구약 성경
    108회 사용
    • 1.
      부사 오직, 단지, 창47:22,삿14:16, 삼상1:13, 대하28:10, 욥1:15, 암3:2.
      • a.
        부사 단지 ~조차, ~제외하고, 수11:22, 왕하17:18, 대하5:10.
      • b.
        부사 ~뿐, 신4:6, 왕상14:8.
      • c.
        부사 확실히, 분명히, 창20:11.
    רַק 스트롱번호7534
    1.

    여윈

    2.

    마른

    3.

    창41:19

    발음 [ raq ]
    어원
    7556에서 유래
    구약 성경
    3회 사용
    • 1.
      형용사, 여성 여윈, 마른, 창41:19, 20,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파리한(창41:19,20,27).


    신앙생활의 정도(正道) 

    시편 119:97-105, 로마서 13:11, 고린도전서 10:31, 이사야 45:22, 마가복음 16:15

    모든 삶에는 바를 정(正), 길 도(道) : 정도(正道)바른 길, 의(義)의 길이 있고,
    그릇 오(誤), 길 도(道) : 오도(誤道)잘못된 길, 죄악의 길이 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정도(正道)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 자신후손에게 위대한 축복과 영향을 가져다준다.

    미국의 두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시대에 한번 날까, 말까한 하나님의 귀한 종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후손 1,394명
    또 다른 사람, 불신자, 형편없는 사람, 깡패, 불량배 맥스 주크(Max Juke)의 후손 두 사람이 일생을 살다가 죽었다.903명.

    그 후에 사회학자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후손 1,394명을 조사했다.

    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국회의원 다수, 외교관 다수, 주지사 3명, 시장 3명, 군대장교 75명,

    대학 총장 13명, 대학 교수 54명, 의사 90명, 변호사 60명, 판사 39명, 책을 쓰는 저자 32명,

    목사와 선교사 200명, 성공적인 농부 300명이 되었다.

    불량자 맥스 주크의 후손 903명도 조사했다.

    310명의 거지, 300명의 범법자, 145명의 술주정뱅이, 70명의 살인자, 285명 매독 보균자,

    90명의 창녀, 100명의 교도소 재소자. 단 20명만이 직업기술을 배웠는데, 그 중 10명은 교도소에서 배웠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당대(當代)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명심(銘心)하며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세상의 마지막종말이라고 한다.
    예수님 재림의 를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종말이 있다.
    개인의 종말세상의 종말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 때말세라고 한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말세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며, 우리가 말세에 굳건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눅 18:1) 예수님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고 염려하셨다.

    그리고,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롬 13:11)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이 시간 우리가 천국 장막을 제치고 3사람을 이 강단에 모시고 와서

    신앙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

    1) 첫째로 모세를 모시고 싶다.

    당신은 신앙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

    모세는 이렇게 대답하 것이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 둘째로 세례요한을 모시고 싶다.

    당신은 신앙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

    (요 3:30) 예수님, 그는 하여야 하겠고 나는 하여야 하리라

    셋째로 사도 바울을 모시고 싶다.

    그가 전에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 변화된 다음에 순교하여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 분이시다.
    사도 바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신앙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그리스도죽는 것유익함이니라.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信仰) 인가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우리가 신앙생활바르게 해 나가기 무엇보다도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한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없다.

    시간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져야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은 세속주의를 이용해서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해서

    신앙을 흔들어 놓고,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매우 바쁘게 지나가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주신 평생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시간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한 헌신이다.

    ★ 그래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우리의 시간을 드려야 한다.

    1) 시간을 내서 성경 말씀 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읽는 자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이 있다

    (시 119:98-105)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원수보다도, 스승보다도, 노인보다도 지혜롭고,

    명철하게 하고, 주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의 이요, 내 발의 이 된다고 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롬 10:17)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벧전 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시 119:105) 주의 말씀이요 이니이다 고 했는데,

    시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학생일 때, 어떻게 하면 성경을 보게 할까?

    궁리한 끝에 성경 1장 보는데 1불 줄게 그랬더니,

    하루 지나 20장 읽었다고 20불 내놓으랍니다.

    2틀 지나 30장 읽었다고 30불 내놓으랍니다. 1장 보는데 1불이다.

    내가 Bank of America 은행의 돈을 다 빌려오고, 생명 보험의 돈을 다 빌려와도

    너희들이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 1장 볼 때마다 1불씩 주겠다.

    (단, 중학교 3학년까지만) 그래서 아이들이 1불씩 얻는 재미에 성경 읽었다.

    목사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돈 1불씩 주면서 성경을 읽게 한 것은 적어도: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수님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수님성품을 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겸손마음이 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을 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지혜를 얻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거룩해지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기를 바래서

    목사 아버지의 심정으로 1불씩 주면서 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 119:72) 주의 입의 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하니이다.

    (시 19:11)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이 크니이다

    성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까?

    영국의 시인 죤 밀톤은 창세기에 감동을 받아 실낙원 12권을 썼다.

    이태리 시인 탄테는 성경의 영향을 받고 불후의 대작 신곡을 썼다.

    영국의 세익스피어, 불란서의 위고, 러시아의 톨스토이... 등등

    그들의 사상과 문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안다.

    인류 구원의 역사도 성경에 있다.

    불란서의 종교 개혁가 요한 칼빈이사야 53:5을 읽으면서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영접하고 구원받았다.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쳔 목사님 :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라

    리빙스턴 선교사는 :

    (행 16:31) 주 예수믿으라 그리하면 네 집구원을 얻으리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

    (갈 3:11)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나의 경우는 (요 5:24)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발전시킨 비결은 성경에 들어 있다고 하면서

    아프리카 추장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 영국 제국의 영토는 버려고 성경은 버릴 수 없다.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성경 없이 백성을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

    맥아더 장군은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 1장을 읽지 않고는 잠자지 않는다고 했다.

    이럴 때 이런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낙심되면 시편 23편을 보세요,

    고난이 닥치면 시 103편을 보시고,

    질병고통이 있으면 시 91편을 읽으시고,

    소망이 사라지면 롬 8장을 보시고,

    들 때 이사야 40장을 묵상하시고,

    을 당했을 때 고전 15장을 읽으시고,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시 37편,

    믿음이 식어질 때는 계시록 3장,

    남에게 공격을 당할 때 시 27편

    를 지었을 때는 요일 1장,

    궁핍할 때는 빌 4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⑫ 지혜가 부족하면 잠언을 읽어보세요.

    말세에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고,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들은 신앙생활정도(正道) 바른 길을 가게 된다.

    2)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시간 내서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껍데기 신앙생활이요, 힘없는 신앙이다.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잠을 쇠이다.

    (약 5:16) 의인간구는 역사하는 많으니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역사경험할 수 있다.

    기도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 열쇠와 같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기도에는 위대한 이 있다.

    6.25 전쟁 당시, 38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철원 근처에서 산등성 하나 놓고 UN 군은 이쪽에서, 공산군은 저쪽에서 미군 사병이

    에 맞아 쓰러져 흘리고 있다.

    Help me, Help me...도와 주세요,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적탄이 비오듯이 날아오니 누구 하나가서 구조해 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병 하나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9시 정각이 되니까 갑자기 달려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응급 치료하고 살려냈다.

    최고 선임자가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가만히 있다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9시가 되니까,

    담대히 가서 죽어가는 병사를 데리고 왔느냐?고 물었다.

    상사님 ! 제가 고향을 떠나 올 때 어머니가 제 손목을 붙잡고 하시는 말씀이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기도해 줄 테니 안심하고 전쟁터에 다녀오너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믿고 다녀 왔습니다. 9시에 기도 해주시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데리고 왔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① 마르틴 루터의 기도가 종교 개혁을 이루었고,

    ② 요한 웨슬레의 기도가 감리교를 창설했고,

    ③ 모세의 기도가 홍해 바다를 갈라 놓았고,

    ④ 여호수아의 기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⑤ 다윗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도우심을 받게 했고,

    ⑥ 엘리야의 기도가 하늘에서 이 떨어지게 했고,

    ⑦ 다니엘의 기도가 사자의 입을 봉했고,

    ⑧ 바울의 기도가 옥문을 흔들었고,

    ⑨ 존 낙슨의 기도가 메리 여왕을 떨게 했고,

    ⑩ 죠지 뮬러의 기도가 고아원을 세웠고,

    ⑪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을 얻었고,

    ⑫ 히스기야의 기도가 15년의 생명을 연장했고,

    ⑬ 마가 다락방120문도의 기도가 성령강림을 맞이했다.

    무디 목사님17세에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누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교회 나가게 되었다.

    예수 믿고 나니,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주일학교 교사 하겠다니까 성경학교 안 나왔다고

    해서 시키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실망하고 그만두었을 텐데 무디는 실망하지 않고

    에 올라가 기도했다. 소나무 붙잡고 기도했다. 바위가 흔들렸다.

    얼마나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지 기도하고 내려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1년만에 7,000명, 2년 지나 2만명이 되었답니다.

    국민학교 6개월 밖에 못 다닌 무디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능력의 종으로 일평생 쓰임 받은 것은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

    미시시피 강에 홍수가 나서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구르면서 서서 울고 있었다.

    신문 기자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늘 아끼고 사랑하던 인형이 떠내려가서 운다.

    그러면?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가 무엇을 갖다 주면 좋겠니?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다. 자기가 데리고 놀던 인형 하나 보내 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신문기자는 우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가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그 사연을 쓰고

    주소를 적어 신문에 내면서 어느 산타 할아버지가 이 어린 소녀에게 인형 하나 보내 줄

    [산타 크로스]는 없는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보낸 인형이 무려 8,000개나 되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8,000개를 보내 줄 수 있었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필요한 것을 기도할 때 주실 줄 믿습니다.

    (마 7:7, 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문제는 시간 내서, 기도해야 한다. 시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 경건의 시간(QT)을 갖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바뻐서 말씀도, 기도도 할 시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도하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3) 시간을 내서 전도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영혼구원하는 전도는 우리 성도의 지상 최대 과업이다.

    예수님께서 세계 전도(복음화)를 위해서 승천 직전에 유언처럼 부탁하셨다.

    (마 28:18, 막 16:15, 눅 24:47, 요 20:21 행 1:8)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전파하라. (막 16:15)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요, 마지막 부탁이며, 마지막 명령이며, 마지막 말씀이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딤후 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해야 한다.

    (시 126:5-6)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달라스 어느 거리에서 죤 F. 케네디가 총에 맞어 저격당해 죽었다.

    그런데 불과 2시간만에 전 세계 국민은 죤 F. 케네디,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은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분 !

    예수님은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담당하시고, 죽으셨는데,

    아직도 이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말세에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들릴 때, 그 누군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자녀, 부모님이나 친척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이 아닌가?

    가장 안타깝고 불쌍하고 불행한 일이다.

    지체 말고 눈물호소하고 그 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결론 /
    인도의 지도자 깐디가 이런 말을 했다.
    인도를 망친 것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도 사람이 망쳤다고 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망친 것은 성경과 찬송가를 끼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특별히 시간을 드려야 한다.시간 내서 성경 읽고,시간 내서 기도 하고,시간 내서 복음을 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정도(正道) 이다.
    그래서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하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저 좋은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 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신앙생활의 정도(正道)  요한복음 6:66~71, 사도행전 20:28 

    항성인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은 정확하게 궤도를 따라 운행합니다. 
    바다의 선박이나 하늘의 항공기는 그것들이 통행하는 해로와 공로인 항로를 따라 운항합니다. 
    기차가 철길로만 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각종경기엔 경기규칙이 있듯이 정치인에겐 정치철학, 경영자에겐 경영철학, 목회자에겐 목회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인생에겐 인생살이의 법도가 있는 법이며 성도에겐 신앙생활의 정도가 있는 것이므로 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요합니다. 

    나의 생애는 한 번만 전개되므로 회한이 쌓인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겠금 살아야 하고 종교는 지고지선한 것이로되 자칫 중심을 잃고 궤도를 벗어나면 최악의 궁지에 빠질 수 있기에 더욱 정도를 걸음이 중요합니다. 
    현모양처가 무개성하나 남편과 자녀들에겐 최고의 여성, 최선의 주부이며 그 가정으로선 가장 안정성 있는 이상적 주부상이듯이 정도를 걸음은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 너무 일상적이므로 지극히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개성적이며 파격적인 경우보다 훨씬 안정감 있고 덕성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면에서 고지식하다 할 정도로 인생의 삶에서나 신앙생활, 목회생활에서 정도를 걸으며 정석을 놓으려는 입장입니다. 
    순리와 상식, 논리성과 합리성, 신앙면과 윤리면에서 일탈하는 행위란 옳지 않으며 양심에 어긋나며 신앙에 맞지 않고 무책임하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정도를 걸음이란 어떤 입장에 서는 경우를 말함인지 몇 가지로 새겨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중심

    우리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숭앙하는 종교입니다. 
    십계명 중 제일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유형적 표현이 인성을 취하여 세상에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이며 누구든지 신인(神人)이신 그를 나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고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확신과 감동과 희열은 보혜사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사 거하시며 항상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내 안에 영접한 그 순간부터 자아가 왕 노릇하던 자리에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고 나는 그 수하의 신민이요 하인으로 자처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롬 14:7, 8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한 것처럼 주님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엔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함만 있을 뿐입니다. 
    고전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으며 
    엡 1장에선 성부의 예정과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이 모두 성삼위를 찬미케 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선생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행복보다 우선시 했고 사람을 기쁘게 함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빌 1:20, 21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살전 2:4에서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했고 

    갈 1:10에서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하나님께 영광돌림이 자신의 행복 추구나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려는 입장에 앞서는 것입니다.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중세의 지구중심 세계관에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아간다는 태양 중심의 세계관으로 사고의 전환을 가져 왔듯이 코펠닉스적 삶의 전환을 가지는 게 신앙생활의 출발점인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중심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입니다. 중세의 암흑과 미몽으로부터 벗어나는 두 가지 흐름 중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서 이성의 자유, 개성의 해방 등을 추구했다면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므로 제도 우선, 전통 우선에서 성경 우선, 말씀 우선으로 전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혁신앙이란 교회도 신학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성경은 무오하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고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여 항상 성경대로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성경이 가는 만큼 나도 가고 성경이 멈추면 나도 멈추어야 합니다. 주경 신학자 박윤선 목사가 강조했듯이 계시의존사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이성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진화론과 창조론이 마주칠 때 교육받은 자기지성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면 진보주의, 자유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체험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주관적 체험은 객관적이며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성경의 검증을 통해서만 인정되며 그 사실의 공인은 교회가 하게 됩니다.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체험은 탈선이며 성경에 있는 체험은 새 계시가 아니므로 새 계시를 받았다 함은 거짓입니다. 사람들이 세속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정욕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약 1:15의 말씀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금령을 벗어나 자행자지 하게 됨이 세속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반드시 성경의 원칙에 따라야 하고 성경의 권위에 순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성장과 부흥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했다(행 6:7), 흥왕했다(12:24),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19:20)하므로 말씀으로 이루어진 말씀의 부흥을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의 원칙을 벗어날 때 이는 궤도 이탈입니다. 교의 신학자요 변증학자인 박형룡 목사가 성경원전의 축자영감설에 그렇게 집착했던 까닭도 이것만이 교회의 신앙을 바로 지키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성경위에 서 있고 교회는 신학체계가 그 성격과 승패를 가름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경에 비추어 내가 얼마나 틀렸고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바로 알아 교정하므로 원위치를 회복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벧후 3:15, 16의 말씀대로 성경을 자의대로 무리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그보다는 교회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 성경을 이해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캐논(canon)이란 말 그대로 척도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1조의 표현대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것입니다. 버나드 램의 표현대로 하면 성경은 카돌릭의 경우 신앙의 제일 기준이지만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에선 신앙의 유일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성경의 권위에 호소해야 하고 성경이란 이정표(guide post)를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중심  

    우리 기독교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인정되고 모든 것이 표현됩니다. 교회는 행 20:28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기관이며 엡 4:15, 16과 고전 12:27 말씀대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이며 딤전 3:15 말씀대로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세우고자 성자 예수께서 속죄 피를 흘리셨고 그 일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졌고 세상 끝 날까지 교회가 할 일은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봉사와 선교입니다. 만유 주 하나님께 최선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교육을 통해 훈련받고 형제자매로서 성도의 교제를 강화하고 주님 정신 받들어 힘써 봉사하고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전도함인 것입니다. 

    부름 받은 성도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아직은 불완전하고 흠과 결함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그의 몸이요 신부로서 끔찍히 사랑하시며 또한 이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려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창 1장과 2장에서 남녀를 창조하사 복을 주시므로 가정을 직접 만드셨고 신약의 행 1장과 2장에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직접 세우사 복음 선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표방하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비교되거나 버금가는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교회를 중심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교회를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경우는 - 선교적 차원에서 정상적으로 분리하여 주는 경우가 아니면 - 성경에 대한 기본입장과 주요해석이 다른 경우일 때입니다. 

    하지만 이단(αιקεσις)은 당파(sect)란 뜻을 가지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잘못된 교훈을 따르며 그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 당을 짓는 경우이기에 우리 교단의 헌법에는 이단과 불법 분리시 면직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권징조례 제6장 42조). 특히 그 행위가 교리를 방해하려하여 전력으로 다른 사람을 권유하려 했을 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닌 주님의 교회요 성도들의 교회이기에 공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을 중심한 집단은 사설단체이며 심지어 교회를 표방한다 해도 사교회(私敎會)로서 교회의 성격이 매우 약합니다. 교회는 특정개인에 따라 세워지고 폐쇄되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서 있는 장목사도 일정한 기간 지 교회를 섬기라고 보냄 받은 사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공교회(共敎會)의 성격이 분명하고 성경의 가르침이 바르며 신본주의가 확실하면 가장 신앙생활의 안정성이 확보되어 정도를 걸음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 특정집단의 다른 복음이나 특정개인의 은사 집회 등에 심취한 나머지 서로 권유하고 무리를 지을 때 이는 정상적 궤도를 이탈하여 빗나가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견과 벽을 만들므로 교회의 확대며 연장인 복음 선교에 의한 천국확장의 전열을 혼란케 하며 교제를 가로막는 애찬의 암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와 우리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함에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지 않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청교도들의 세 가지 생활 신조
    예배의 순결
    교리의 순결
    생활의 순결

    과연 우리들도 하나님께 향하여 예배의 순결,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의 순결, 교회의 지체로서 생활의 순결을 주장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은 인본주의를 극복한 신본주의 신앙생활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관주의를 극복한 성경주의 신앙생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은 당파중심을 극복한 공회중심 신앙생활

    웨스터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둘 다 제1문답이 사람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위함(Soli Deo Gloria)은 개혁교회 신앙과 신학의 중심사상입니다. 
    곧 신본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표적 때문에(요 6:2), 떡 때문에(요 6:26) 예수를 좇던 무리들이 장시간 말씀만 강론하시니 어렵다고 투덜대면서 다 돌아갔을 때(요 6:60, 66) 주님이 물으셨고 베드로가 답한 것으로 말씀이 있고 주님이 계시면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말씀중심, 주님중심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사회생활은 6일 동안 가정과 직업전선 등 세상에서 천국확장에 직접 간접으로 기여하는 삶을 뜻합니다. 

    목사로서 개인적 욕구가 이것저것 있어도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맞는가 생각하여 늘 자제합니다. 
    나의 작은 실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함이 될까, 교회에 손상을 주고 성도를 실족케 할까 하여서입니다. 
    만일 사람들 기분과 감정에 맞추고 인기에 영합하여 원칙과 기준이 없는 채 행동, 처신하고 교인들 삶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려 가정, 교회, 사회에서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저해한다면 진리가 자유케 함이 무엇이며 복음의 효용성이 무엇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능률만을 위주한 장사꾼이 아니며 여론만을 따르는 정치꾼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지도하고 말씀을 외치고 천국을 확장해야 할 입장이므로 지금까지 그런 자세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가정이 정말 중요하지만 하나님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성경보다, 교회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매인 몸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할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엡 4:11~12).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신앙생활의 정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27:6에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한 말씀대로 정도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사 계속 강화시켜 주시며 결국 승리케 해 주십니다.




    부왕 웃시야왕은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으나 신앙적으로 지도를 해 주던 스가랴 선지자가 죽은 후에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율법에서 제사장 외에는 분향할 수 없는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분둥병에 걸려 10년 동안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되는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이 처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왕 웃시야왕이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징계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은 그같은 실수를 범하기 않기 위해 성전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담왕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요담왕은 아버지의 잘못을 전감 삼아 철저히 성전 규례를 지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담왕과는 달리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했다고 했습니다 (2절). 병행구절인 열왕기하15:35에는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담왕은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 했지만 산당은 미쳐 제거하지 못했고 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사5:7, 미1:5, 2:1).

     

         2. 요담왕의 번영 (3-9절)

     

      3-9절에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십육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로 행했기 때문에 점점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성전 수리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전 윗문을 건축했습니다 (3절).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겔9:2)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입니다.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 뜰로 통할 때 사용되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마샤왕 때 북이스라엘군이 성벽 400규빗(약 180m)를 헐었는데 그 때 이 문도 헐렸을 것입니다 (25:23, 왕하14:13). 그리고 웃시야왕이 이 문을 보수했습니다 (26:9).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한 것입니다.

     

      둘째, 성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했습니다 (3절). 오벨(Ophel)은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남쪽 경사지를 말합니다 (33:14, 느3:26-27, 11:21). 요담왕은 그 곳에 있는 성채의 외곽 벽을 증축하여 전보다 더 강화된 요새지역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유다 산중의 성읍들을 건축하고 수풀 가운데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했습니다 (4절). 유다의 여러 성읍들을 요새화하기 위해 높은 지대에 건축을 하고 숲 속에 진영(영채)를 짓고 망대(초소)들을 지었습니다. 앗수르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을 대비하여 요새화 한 것입니다. 

     

      셋째, 주변국을 압제했습니다. 암몬(Ammon) 족속과 전쟁하여 승리를 하고 은 100달란트와 밀 10,000고르와 보리 10,000고르를 3년 동안이나 조공으로 받았습니다 (5절). 100달란트는 1달란트가 약 34kg이므로 3,400kg 정도 됩니다. 밀과 보리가 각가 10,000고르라고 했는데 10,000고르는 1고르가 약 230ℓ이므로 2,300t 정도 됩니다. 암몬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밀과 보리가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웃시야왕 때 암몬 족속이 자진해서 조공을 바쳤는데 요담왕 때 배반을 했는지 요담왕이 그들을 쳐서 응징하고 조공을 받았습니다. 아니면 웃시야왕이 일부 점령했으나 요담왕이 전 지역을 점령해서 조공을 더 많이 바쳤는지도 모릅니다. 웃시야왕은 남쪽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는데 요담왕은 동쪽에 암몬 족속까지 복속시킨 것입니다.

     

    <結言>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왕의 좋은 점은 본받았습니다. 웃시야왕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성전수리 사업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시야왕이 나쁜 점은 본받지 않았습니다. 웃시야왕은 교만해져 하나님의 성전에서 율법에서 금한 분향을 하므로 징계를 받아 문둥병이 걸려 10년동안 별궁에서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요담왕은 그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아예 성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보통 아버지의 좋은 점은 본받지 않고 나쁜 점을 본받기 쉬운데 요담왕은 좋은 점을 본받고 나쁜 점은 본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려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웃시야왕은 남쪽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는데 요담왕은 동쪽에 암몬 족속까지 복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나 스승에 대해 장점은 본받고 단점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보통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스스로 그 잘못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든 번영과 쇠퇴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이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은 본받고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저주를 받은 것은 전감을 삼아 바로 서야 합니다.

     


    남 유다 요담 왕의 통치와 죽음(대하 27:1-9)

    기혼샘
    5~6분

    역대하 27장에서는 요담의 통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요담은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이다. 요담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했다. 요담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걸었더니 점점 강성하여졌다. 성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27:1

    나이 이십 오 세라 - 그가 약 10년 정도를 그의 부친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는 35세 때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 육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16년은 웃시야가 섭정한 기간도 포함하고 있다.

    여루사 - 이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예루솨'인데 왕하 15:33에는 끝 자음이 알렙이어서, '예루솨'로 되어 있고(BHS), 몇몇 사본들에서는 역대기 본문과 일치한다(BHS Appartus).

    사독의 딸이더라 - 이 사독이 대상 6:12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독일 가능성이 있는데(Curtis), 요담의 부친 웃시야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26:16-19) 정책적으로 사독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고, 반면에 제사장들의 간섭에 의해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다(24:3).

    =====27:2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정직히 행하였으나 -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 상당히 오랫동안 웃시야가 살아 있었다. 요담의 부친 웃시야는 비록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였지만(26:21),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Leon Wood). 따라서 요담은 웃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요담은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 맛소라 본문(MT)에는 본 구절 앞에 '단지'(only)라는 뜻을 가진 부사, '라크'(* )가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행하였)으나'로 번역된 이 접속사가 앞 문장과 대조를 이루게 하여 요담이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행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범죄 하는 일만큼은 삼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5:35에서는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당 제사를 '사악을 행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역대기 저자가 이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발견하게 된다.

    =====27:3

    전 윗문 -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베냐민의 윗문'(렘 20:2)이라고도 불리워진다(Benzinger). 그리고 또 23:20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뜰로 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마샤 왕 때 헐린 것으로 보여진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와 전쟁하던 아마샤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이 헐렸는데, 이때에 윗문도 무너졌을 것이다(25:23;왕하 14:13). 그리고 이때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은 요담의 부친 웃시야에 의해 거의 보수되었고(26:9), 요담도 웃시야의 건설 정책(26:9f.)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오벨성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펠'의 원뜻은 언덕, 낮은 야산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3:1) 남쪽 경사지를 그렇게 불렀다(33:14;느 3:26,27;11:21). 어떤 학자들은 이 성을 다윗성과 동일시하지만(G.A. Smith), 오벳성은 다윗성과는 분명히 다르며, 다윗성이 있는 언덕의 북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후기 유다 왕들이 요새화하려 했던 곳이다.

    =====27:4

    유다 산중에 - 여기서 '산'은 평지 또는 저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써 요새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성읍들은 산지나 산지의 숲 속에 세워졌다(사 2:15;호 8:14).

    영채(營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라니요트'는 '성'(castle) 또는 '궁'(palace)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상 11:16의 '영채'(네치브)나 삼하 11:11의 '영채'(숙코트)와는 달리 여기서는 '요새'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Lange,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숙영(宿營)할 수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 수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는 그만큼 위장이 잘 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망대 - 이것은 적의 침공을 사전에 발견하여 대비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하여 대비하는 데 용이했다(14:7;26:9;삿 8:9). 이와 같이 웃시야 때로부터 계속되어 온 건축 사업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이 기록이 열왕기에는 없다. 부친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력과 명예를 배경으로 하여, 요담은 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웃시야는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한 반면, 요담은 반대편인 요단 동편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Kittel). 한편 혹자는 요담이 암몬과 싸운 이유를 암몬 자손이 웃시야 때부터 바쳐오던 조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arker, Keil).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백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요담이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암몬과 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 - 요담이 암몬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밀과 보리를 조공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암몬 족속의 주산물의 밀과 보리였으며 그 땅이 매우 비옥하였음을 입증해 준다(Barker). 3년 동안 계속해서 바쳐진 이 밀과 보리는 아마 군량미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이상 암몬 족속이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하였거나, 아니면 요담 말년에, 유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몬 족속이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이 시기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실(왕하 15:37)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조공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사 7:1-8:8). 한편 역대기 저자가 르신과 베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언급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한다. 그 이유는 베가와 르신의 침략이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던 것처럼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5:37;16:5). 그러나 왕하 15:37의 기록과 16:5의 기록이 각각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 사건은 아하스 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사 8:6ff.).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아람. 이스라엘 동맹군의 침략과 요담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열왕기 저자가 같은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 통치를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더욱이 왕하 15:30에서는 '요담 이십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본장에서는 '16년을 치리했다'(1절)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섭정을 했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아람. 이스라엘 동맹군이 공격했던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을 하고 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아하스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왕하 15:30 주석을 참조하라.

    =====27:6

    요담이...점점 강하여졌더라 - 본절은 역대기 저자가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실제적으로도 요담의 왕국이 강하여졌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즉, 요담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의 관할 아래 있던 에시온게벨에서 그의 공식적인 인장(印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Payne).

    =====27:7

    모든 전쟁 - 역대기 저자는 본장에서 요담의 사적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웃시야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동맹군(26:11ff.)을 요담이 맡았을 것이다(26:21). 이는 요담이 그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딜리(Thiele)는 앗수르의 연대기를 근거로 하여 B.C.743년경에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유다가 패퇴되었다고 제안하는데(Payne),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패전 사실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 왕하 15:36에는 '유다 왕 역대 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이스라엘'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은 역대기 기자의 규칙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며(16:11, Williamson), 열왕기서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Curtis).

    =====27:8

    본절은 1절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글의 형식상 이러한 반복이 생긴 것 같다. 즉, 1절은 통치 서론으로서, 8절은 통치의 결론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28:1의 표현과 명확하게 대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 같다.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 육 년이라 - 딜리(Thiele)는 베가 17년(B.C. 743)부터 요담이 그의 아들 아하스와 섭정하였고,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는 20년 간이라고 한다. 이는 왕하 15:30에서 '요담 이십 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요담 20년은 그의 아들 아하스가 24세 되던 때이다. 뿐만 아니라, 혹자는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시대 가운데 4년 동안은 그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3대에 걸친 섭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ood).

    =====27:9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8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볼 때, 본문은 아하스가 웃시야와 요담의 섭정을 함께 받았다가(Wood), 요담의 섭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역대하 27장 짧은 설교는 요담 왕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담 왕이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요담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악한 자가 되지 않고 선한 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점점 강하에 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의 길을 강하게 하셔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따라서 선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요담이 정직히 행하며 성전 문과 여러 성을 건축함 (1-4)

    • 27:1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륙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요담은 웃시야왕의 아들로서 25세에 유다 왕으로 즉위하여 16년 동안 통치하였다. 사독 다윗 때의 제사장 사독보다 8,9대 후의 사람으로 그 후손인 것 같다(대상 6:8-12 참조).

    • 27:2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요담은 선한 부왕(父王) 웃시야에게서 좋은 신앙을 물려받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여호와의 전(殿)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좋은 행위를 본받아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아버지가 잘못한 것, 즉 웃시야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분향한 것은 본받지. 않았다. 아버지의 잘한 점만 본받고 잘못한 것은 본받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요담왕은 정직한 길을 걸어갔으나 백성들은 사악을 행하였다. 열왕기하 15:35에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원문을 건축하니라"고 하였다. 요담왕이 좋은 왕이지만 산당들을 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까지 섬긴 것 같다. 산당을 전부 제해 버리고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하라고 했더라면 백성들이 악을 행하지 않았을 것인데 산당을 그냥 두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쉽게 섬기려고 예루살렘까지 오지 않고 산당에서 제사하다가 우상까지 섬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도 말씀대로 믿기가 힘들다고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타락하게 된다.

    • 27:3-4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요담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성전 윗문을 건설하고, 오벨 성을 증축하고, 유다 산중의 성읍과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설하였다.

    여호와의 전(殿) 윗문은 성전 북쪽에 있는 문이다. 요담왕이 아버지 웃시야가 성전에서 잘못한 것을 전감(前鑑) 삼아서 성전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 윗문을 건축한 것이다. 오벨 성(城)은 예루살렘의 한 지역으로서 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비탈진 요새지이다. 그곳은 다윗의 옛 도성 일부로서 원수들이 쳐들어 올 우려가 있으므로 이 성을 많이 증축하여 예루살렘을 안전케 했다.

    유다 산중은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데 있는 산들을 가리키고, 영채(營寨)는 요새를 가리킨다. 망대는 원수들이 침입해 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세운 탑같은 시설물이다. 요담왕이 이렇게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27:3-6). 오늘날 우리도 영적 방패와 요새를 견고하게 하여 원수 마귀의 침략을 잘 막아야 한다.

    요담이 암몬 사람을 승리하고 강성하여짐 (5-6)

    •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을 드렸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요담왕이 국방을 튼튼히 한 후 원수 암몬 자손과 싸워 이겼다. 그러므로 암몬 자손이 3년 동안 요담왕에게 조공(朝貢)으로 매년 은(銀) 100달란트(3,400kg)와 밀과 보리를 각각 1만 석(2,200㎘)씩 바쳤다. 이것은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으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다(2절).

    • 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정도(正道)”는 하나님의 길이므로 그리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점점 강성(强盛)하게 해 주신다. 요담왕이 역대왕들보다 뛰어나게 큰 일을 행한 것은 없으나 아버지의 좋은 신앙을 본받아 정직하게 행하고 신앙 양심을 써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른길로만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열왕기하 15:37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고 하였다.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 정도를 행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암몬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한 것은 잘하였으나 유다 각 지방에 있는 산당을 제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사악을 행했기 때문에(2절), 하나님께서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를 보내어 한번 징계하신 것 같다.

    요담의 사적(事蹟)과 후계자 (7-9)

    • 27:7-9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륙 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선한 요담왕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그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역대하 22장 요약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됨, 아하시야는 아합왕의 길을 따라갔으며 예후가 아하시야와 그 신하들을 죽였다, 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으며 요아스가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3장 요약

    여호야다가 백부장을들 모아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아달랴는 살해당하였고 여호야다는 개혁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장 요약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와 함께 성전을 수리하였고 여호야다가 죽게 됩니다.
    요아스와 백성들이 악하게 되는데...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이 처들어왔고 요아스를 반역자들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0일(화) 역대하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달랴(22:1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를 진멸하였으나.
    When Athaliah the mother of Ahaziah saw that her son was dead, she proceeded to destroy the whole royal family of the house of Judah.

    여호사밧 + 아달랴 <오므리 왕조,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
                  ㅣ
              여호람,  아사랴, 스가랴, 아사랴, 미가엘, 스바댜(대하 21:2)
              왕위에 오른 후에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였다(대하 21:4)   


    "아달랴"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여호와께서 높이신다"

    근본(根本) : 뿌리 근, 근본 본

  • 1. 초목(草木)의 뿌리.
  • 2. 사물(事物)의 본질(本質)이나 본바탕(本--).
  • 3. 자라 온 환경(環境)이나 혈통(血統).
  • 4. 처음부터 애당초(-當初).


  • 아하시야

    남 유다 왕국의 6대 왕
    천주교회에서는 아하즈야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동명 이인.
    여호사밧 왕의 아들인 여호람의 후임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려와 여호람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이스라엘의 요람(여호람) 왕의 제안으로 동맹을 결성하여 라못에서 아람(시리아)의 하사엘을 쳤으나 원정은 실패하고, 요람 왕은 부상을 입었으며 본인은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후의 역성혁명이 일어나, 요람 왕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다 화살을 맞고 사망, 아하시야 본인은 도주하다 결국 체포되어 사망했다.

    이 부분에서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기록이 약간 나뉜다.
    열왕기하에서는 아하시야가 도망치자 예후가 쫓아 공격해 부상을 입히고, 아하시야는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도망치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죽었다고 기록하는데, 역대하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자 사마리아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예후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기록한다.

    두 기록은 서로 일치하는 기록이다.
    시리아 원정에 실패해 이스르엘에서 요양 중이던 요람에게 아하시야가 문병을 왔고, 그 때 예후가 요람을 찾아가 살해하였는데, 거기서 아하시야가 근처의 므깃도로 도주하여 숨어있다가 예후의 반란군에게 검거된 것.
    '이스르엘'이라는 명칭이 당시 근처 성이었던 '이스르엘 성'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병용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혼란이다.

    이후 유다의 왕위는 아하시야의 어머니이자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차지한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
    열왕기하 11:1-21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와이었던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 유다 왕국으로 시집을 온 후에 남편 여호람이 죽고 유다 왕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예후의 반정 과정에서 목숨을 잃자, 아하시야의 어미요 이세벨의 딸이기도 했던 황후 ‘아달랴’가 왕권을 장악하고 다윗의 후손들을 진멸하려고 합니다.

    마치 북한의 김일성주의에 정신을 빼앗긴 좌편향된 사람들이 통치권을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남 유다 왕국의 메시아 혈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를 통해 왕자들 가운데 요시야를 숨겨 두게 하셨습니다.
    훗날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요시야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단함으로 다윗 왕조의 계보가 이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도록 한때는 노동조합의 선봉자로 으뜸이었던 사람을 동구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본 후에 공산주의가 잘못된 사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편향으로 돌아와서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인식한 후에 경기도 도지사 2회 역임, 국회의원 3회 역임, 최근에는 고용노동부장관으로 재직 중 사직을 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문수 후보를 보면 이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도록 예비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기 기독교의 전파를 위하여 기독교를 탄압하던 바울을 회개케 한 후에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은 반대파에 속했던 사람을 회개시킨 후에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십니다.
    어거스틴도 마니교에 심취하여 방종한 삶을 즐겼던 과거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초석으로 삼았습니다.

    아달랴의 왕의 혈통을 끊어버리려고 하였던 것도 결국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분명히 한반도 땅에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근본(根本)이 중요합니다.
    근본이란 자라온 환경이나 혈통을 의미합니다.

    거짓과 변명과 술수로 다져진 사람과 정직과 겸손과 청빈으로 훈련된 사람 중 누구를 지도자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나의 선택의 결과에 의해서 역사의 장은 어워질 수도 있고 새벽의 동트는 희망을 바리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희망을 찾아 모두 함께 일어나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근본을 든든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그 어미 이세벨과 같이 잔혹한 방법으로 권세를 잡고 남유다를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다가 심판을 받은 아달랴의 행적을 통해 주시는 몇 가지 교훈들을 생각해봅니다. 

    I. 아달랴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 하였습니다(1)

    열왕기하 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를 진멸하였으나.

    황후인 아달랴는 그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문병 갔다가 그 곳에서 예후의 손에 뜻하지 않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를 기회로 다윗의 후손들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친손자들인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모두 진멸하려 한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친손자들까지 모두 죽이려 한 아달랴는 그의 어미 이세벨 못지않은 사악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가야 할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한 아달랴의 행위는 단순히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막으려는 사탄 마귀의 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헤롯왕을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둠의 권세들은 아달랴와 같은 사악한 자들을 내세워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려던 아달랴의 계획과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왕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보려는 어둠의 세력들의 궤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권세를 잡은 아달랴는 유다 땅을 바알의 우상으로 가득차게 했습니다(3, 18).

    열왕기하 11:3. 18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나라를 다스렸더라.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같이 바알 숭배에 열심을 가졌던 아달랴는 손자들을 죽이고 권세를 잡은 6년의 기간 동안 남 유다 땅에 바알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불의한 자가 권세를 잡으면 온 나라가 죄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II.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

    요아스를 숨겨두었습니다(2-3)

    열왕기하 11:2-3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나라를 다스렸더라.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하던 당시 아하시야 왕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기도 한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해내 성전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극적으로 살아남은 요아스를 왕으로 세움으로 사악한 아달랴를 제거하고 다윗의 왕조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아스가 왕이 될 당시 7세였다는 것을 보면(21),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들을 죽일 당시 요아스가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 아이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 요아스가 자라 왕의 자리에 앉음으로 아달랴를 몰아내고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에 큰 나무로 자라 새들에게 먹이와 안식처를 제공하는 겁니다.
    주는 교회도 작은 교회이지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을 품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차매 제사장 여호야다가 나섰습니다(4-5)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
    명하여 가로되 너희의 행할 것이 이러하니 안식일에 입번한 너희 중 삼분 일은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여호세바의 남편이기도 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의 손에서 요아스를 구한 뒤 6년 동안 성전에 숨겨두고 모든 준비가 되었다 여길 때 요아스를 유다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심판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할 때도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를 드러내실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 때를 바라보며 제사장 여호야다처럼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달랴에게는 6년 동안 유다 땅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졌지만, 7년 째 되는 해에 홀연히 심판의 날이 임한 것처럼(4), 적그리스도의 세력들도 교회의 휴거 사건이후 7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지만, 7년의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아달랴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평안과 기쁨을 가져왔습니다(20)

    열왕기하 11:20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심판하고 다윗의 왕조를 복원하고 유다 땅에서 바알의 당을 무너뜨리고 바알의 제사장을 죽이는 개혁을 단행하자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다”했습니다.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이세벨, 아달랴와 같은 불의하고 사악한 자들이 공의의 심판을 받을 때 비로소 나라의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III. 결론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아달랴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어미 이세벨처럼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아달랴 이세벨처럼 불의한 자가 잠시 잠깐 권세를 얻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 역사 상 유일한 여왕인 제 7대 아달랴는 권력에 굶주린 여인, 음모와 살인의 화신이 된 악녀로서 참으로 악독한 왕이었다.
    아버지가 아합이고 어머니가 그 악명 높은 이세벨이니 아달랴는 이 둘의 악한 것만 뽑아서 모아 놓은 것 같은 여자였다.
    이세벨은 악녀였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죽이지 못해 화병이 난 여자이다.
    궁중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학교를 만들어 놓고 850명의 무당들을 양성할 정도로 철저히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다.
    아달랴는 그런 어머니가 섬기는 신을 똑같이 섬기면서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 아합은 자신의 집안과 전혀 신앙적 배경이 다른 집이었지만 사돈을 맺음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 딸 아달랴를 정략적으로 남쪽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을 시켰다.
    아달랴가 시집에 와보니 시아버지가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지옥에 갈 인생이 천국 갈 인생으로 바꾸어질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달랴는 어릴 때 잘못된 환경 속에서 주어진 바알과 아세라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달랴는 어릴 때부터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남편도 죽고  시숙들도 없고 장성한 아들도 없고 나이 어린 아들까지 타지에서 죽임을 당하자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왕이 될 만한 손자들까지 다 죽여버리고 스스로 여왕이 된다.
    그렇게 다윗 가문의 씨를 말리고 피를 뿌리며 왕이 되어 영원히 집권할 것 같던 아달랴는 6년 만에 혁명군의 칼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참으로 비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어릴 적에 무엇을 보고 자랐는가?
    어떤 환경에서 인격과 인성이 형성되었는지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달랴는 누구인가?

    여호람 왕 : 아버지 여호사밧, 아내 아달랴 : 오므리왕조.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 이세벨 : 아버지-시돈 왕 엣바알, 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의 왕비,

    * 아달랴 : 아합과 이세벨의 딸, 여호람 왕의 아내

    여호람(Jehoram) 뜻 : 여호와는 존귀하심

    -성경의 인물- 여호람의 아내 이세벨의 딸 아달랴

    아달랴(재위 기원전 841년경-835년경)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 유일한 여왕이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남유다 왕국의 5대 왕이었던 여호람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이렇듯 분단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왕가끼리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간교하고 잔인한 왕비였던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는 그 어머니의 냉혈한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여자였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로 왕가를 이교신앙으로 물들였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다(역대하21:20).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자 여섯 형제를 살해하는 등 악행을 자행하다가 결국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 병들어 죽게 된 것이었다. 아달랴의 아들들은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모두 살해당하였고, 오직 막내아들인 아하시야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여호람이 병들어 죽자 아하시야가 42세에 즉위하여 남유다의 6대 왕이 되었고 아달랴의 섭정을 받던 아하시야는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북 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맹하여 아람(지금의 시리아 지역)과 전쟁하였으며, 요람이 상처를 입고 병을 치료하는데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갔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를 피해 도망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 왕자 칠십명을 처형하고,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10:7, 13~14).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왕하 8:29, 9:16, 27-28, 대하 22:5-12)을 접하자마자 권력에 한껏 굶주린 야수가 되어 요아스를 제외한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고 무참히 도륙하였다. 이세벨의 핏빛 광기가 유다 역사에 되살아난 듯 아달랴는 자신의 피붙이까지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살해한 것이다. 손자들이 행여 왕위를 차지할까봐 살해한 아달랴의 이러한 잔학한 행위의 이면에는 남유다 왕국의 정통 계보인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기 위한 정략적인 의도 또한 있었으리라. 예후의 반역으로 아달랴의 친정인 아합 가문이 몰락하였고 주변 국가인 아람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혼란한 국내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아달랴는 6년 동안 다스렸으니 정치적 역량이 있는 여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아달랴 재위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가 성전에서 숨겨 키우던 아하시야의 아들 곧 아달랴의 손자 요아스를 성전에서 기름붓고 면류관을 씌워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백성의 무리가 즐거이 환호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자 그 소리를 듣고서 온 아달랴는 "반역이로다."고 소리쳤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결국 아달랴는 성전 바깥으로 끌려가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민심과 천심이 떠난 권력은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토마스 홉스(영국의 철학자)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는 끝없고 쉼 없는 인간의 권력욕"의 덧없음을 아달랴의 인생 종말이 보여준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 족보(마 1:6-10)에서 생략된 인물 중 ‘아달랴’를 들 수 있다. 남유다 제7대 왕인 아달랴는 유다 왕들 중 유일한 ‘여왕’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대표하는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로서(왕하 8:18, 대하 21:6), 여호사밧(남유다 4대 왕)의 며느리(대하18:1)로 유다에 들어와, 남편 여호람과 그 자손들이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손자 요아스는 구원사의 그루터기가 되었다.

    요아스 왕자를 즉위 하기 위해(대하 23:3) 목숨을 걸고 혁명을 결단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숨겨놓았던 요아스(7세)왕자를 왕으로 등극하게 하고 성중이 평온을 찾게 하였다(왕하 11:4-16, 대하 23:1-15).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의 통치 8년,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1년, 여왕 아달랴의 통치 6년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달랴의 악행은 온 나라를 우상숭배로 만들었다.

    다윗의 등불을 끄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방해하려 한 아달랴의 계획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 무너졌고, 다윗의 후손 요아스를 통해 구원의 등불이 이어지게 되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거짓과 권모술수로 무수한 영혼을 사망의 길로 인도한 사탄 마귀와 악한 영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0).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 : 여호사밧은 다윗의 길로 행한 선한 왕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35세에 4대왕으로 등극,  25년간 통치했고 북이스라엘 아합과 정략 결혼을 하였다.
    여호사밧 왕은 아들 여호람이 조상 다윗의 길을 가도록 배려하고 교육하지 않은 것일까?
    자식 교육이 얼마나 철저했겠는가마는 결론은 처참하고 말았다.

    여호사밧은 며느리가 될 아달랴의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단 말인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누구를 닮겠는가?
    남유다의 미래를 생각하고 혼인을 시켰는지... 참 모를 일이다.
    인간의 역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또는 순환의 계절처럼 흘러가는것인가?


    악녀의 상징 이세벨의 딸, 악녀의 대명사 아달랴(Athaliah) 여왕

    아달랴(Athaliah 재위 : BC 841~BC 835)는 북 이스라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이며, 남유다 5대 왕 여호람(Jehoram)의 왕비이자 남유다 6대 왕 아하시야(Ahaziah)의 어머니다.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다스린 남유다 왕국 유일한 여왕이다.
    아달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결혼 동맹

    아버지 아사(Asa)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사밧(Jehoshaphat)은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대량의 식량을 비축하였다. 한편으로 전국적으로 율법 교육을 시키며 전국에 남아 있는 이방 신들과 아세라 목상들을 모두 없애는 등 왕국을 바르고 튼튼하게 세워 놓았다. 이에 인근 나라들이 두려워하며 조공까지 바치는 등 여호사밧 왕은 이미 부귀와 영화를 크게 누리고 있었으나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북 이스라엘과 결혼 동맹까지 맺게 되었다.


    아달랴(Athalliah.   עתליה,   Γοθολία, 재위 BC 841경~BC 835경)

    남유다 왕국의 왕비가 된 북 이스라엘 왕국 공주 아달랴
    남과 북의 정략적 결혼 동맹으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유다 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부왕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여호람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여호사밧의 장자였던 여호람은 왕위에 오른 후, 여섯 명의 아우들과 자기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또한 모든 산에다 이방 신들을 섬기는 제사처를 두고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는 어머니인 이세벨의 냉혈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달랴의 사주로 인한 것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가 출신의 아달랴가 남유다 왕국의 왕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로 유대 왕국을 이교 신앙으로 물들였다.

    ​아달랴의 세상이 된 유다 왕국

    부왕 여호람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Ahaziah)가 왕위를 잇자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아하시야를 마음대로 조종해 마치 악마와도 같이 자기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의 추악한 행실을 따르도록 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의 예후에게 살해당하자 아달랴는 자기가 직접 왕위에 오르겠다고 선포했다.
    그러고는 유다 왕국 내의 다윗 왕가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선언하고 오므리 왕조의 잔재를 포함하여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청구인(all possible claimants to the throne)을 처형하였으며, 왕족 혈통(royal lineage)의 아이들을 72명이나 살해하는 전대미문의 학살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유다 왕국에서 다윗 왕가는 멸족될 위기를 맞았으나, 피바람이 몰아치는 다윗 왕가의 멸절 위기 속에서 여호람의 딸 여호사브앗(Jesheba. Jehosahabeath)이 다급히 갓난아기였던 왕자 요아스를 빼내 유모와 함께 대피시켜 당시 남편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에게 위탁하는데 성공했다.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Jehoiada)의 아내였다.


    어린 요아스 왕자를 숨기는 여호사브앗

    요아스는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하는 6년 동안 성전에 숨어 제사장인 고모부 여호야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고 여호야다는 어린 조카의 보호자로서 장모 아달리야의 서슬 퍼런 집착에서 요아스를 보호하였다.

    요아스(Joash)의 등극과 아달랴의 최후

    아달랴의 폭정이 시작된 지 6년 후인 아달랴 재위 7년 차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유다의 다섯 장군들과 손을 잡고 요아스를 왕으로 모셔 유다왕국을 바로잡기로 결의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는 이에 동조한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앞에서 여호야다가 선포하였다.

    " ~~~~~ 아하시야 왕의 아드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이제는 이분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역대하 23 : 3)"


    D-day를 안식일로 잡은 여호야다는 성전에 모인 레위인들과 백성들 앞에서 자기 아들들을 거느리고 요 아스 왕자를 모셔다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었다. 백성들은 '임금님 만세!"를 크게 외쳤다. 또한 수많은 백성들이 성전으로 몰려가 새왕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으며 성전의 가수들이 새왕을 축하는 노래를 연주하였고 온 백성들은 기쁜 환호성을 올렸다.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은 성전에 들어가 군중 속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아달랴가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며 " 반역이다! 반역이다!" 하고 절규했다. 여호야다는 백부장을 불러 그녀의 체포를 명령했고, 결국 아달랴는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말들이 출입하는 대문 앞에서 칼로 살해당했다.

    아달랴가 처형당하고 요아스가 새왕으로 등극하자, 유다의 온 백성들이 기뻐하고 온 유다 왕국은 평안해졌다.


    7세에 유다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으며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였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아달랴에게 몰살당한 왕족의 번성을 위해 요아스에게 두 아내를 골라주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요아스왕은 많은 자손을 두었다.


    여호야다(Jehoiada) 대제사장,아달랴로부터 요아스를 구해 왕위에 오르게하고 예배 회복,성전 수리, 바알 우상 파괴 등등 종교개혁을 하는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130세로 죽었을 때 다윗성 열왕의 묘실에 안장되었다

    아달랴의 행실 기록

    열왕기하와 역대하 등 성경에서, 요아스가 성전에서 숨어 성장하는 동안의 아달랴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다윗의 혈통이 아닌 여호와 신앙을 철저하게 거부한 오므리 왕조의 혈통이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북 이스라엘에서 남유다 왕국으로 시집와 여호람 왕의 왕비, 아들 아하시야 왕의 대비로 살다가 자기의 양친인 아합과 이세벨의 못된 행실을 그대로 따라 하며 권력을 휘둘렀던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이 죽고 또한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신변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정권을 잡는 것이었을 것이며 이를 지켜내기 위한 아주 심한 폭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생과 배경 대표적 사건

    • 오므리의 손녀(대하 22:2)
    • 아합의 딸(왕하 8:16-18)
    • 여호람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아사랴 왕(왕하 8:25-26)
    • 손자는 요아스(왕하 11:2)

    대표적 사건 

          아들 아사랴가 죽자 손자 요아스를 제외하고 왕의 씨를 진면한 후 자신이 왕위에 올라 6년간 통치(왕하 11:1-3)
          7년째에 여호야다에 의해 왕궁에서 칼로 죽임을 당했다(왕하 11:4-20)

    관련 인물

    • 아합(북 이스라엘 왕)
    • 여호람(남 유다 왕)
    • 아사랴(아하시야 왕)
    • 여호야다(대제사장)
    • 요아스(남 유다 8대 왕)








    남 유다의 20명 왕

    남유다의 왕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요.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과 후입니다.

    먼저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르호보암(왕상 14장 / 대하 11-12장)

    유다의 첫 번째 왕인 르호보암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남유다의 초대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던 기간은 고직 3년뿐이었습니다.(대하 11:17) 3년이 지나고 나라가 견고해지고 튼튼해지자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율법을 저버립니다.(역대하 12 :1) 르호보암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던 해, 예루살렘은 애굽 왕 시삭의 공격을 받게 되죠.(왕상 14: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유다가 행한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삭의 손에 넘겼다고 말씀하시죠.(대하 12:5)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를 빼앗겨(대하 12:9), 간신히 놋 방패로만 궁문을 지키게 했죠.(대하 12:10) 르호보암은 그렇게 17년 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대하 12:13)

    2. 아비얌(아비야)(왕상15장 / 대하 13장)

    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야라고도 불리는 아비얌입니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고, 총 3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비얌 역시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그대로 행합니다.(왕상 15:3)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전쟁만 하다가(왕상 15:6)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3. 아사(왕상 15장 / 대하 14-16장)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입니다. 아비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고, 총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했고, 여러 종교 개혁들을 단행합니다.(왕상 15:11) 먼저 남자 창기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 버립니다.(왕상 15:12, 새번역) 그리고 우상을 섬기던 할머니 마아가도 과감히 쫓아냅니다.(왕상 15:13, 새번역) 또 오뎃의 아들 아사랴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대하 15:1) 우상 제거와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죠.(대하 15:8)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아사였지만 북이스라엘 바아사와의 전쟁 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아람 나라를 의지하였는데요. 이를 꾸짖는 예언자 하나니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대하 16:10) 아사 왕은 통치 말년에 발에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4. 여호사밧(왕상 22장/대하 17-20장)

    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입니다. 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고, 2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를 따라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데요.(대하 17:4) 여호사밧 왕 때 남유다는 굉장한 부와 영광을 떨치게 됩니다.(대하 17:5) 여호사밧 역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아버지 아사 왕의 개혁 후에도 남아있던 남자 창기들을 모두 쫓아내고(왕상 22:46), 재위 3년 차에 신하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뽑아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합니다.(대하 17:9) 유다는 점점 더 강성해져 갔고(대하 17:10), 북이스라엘의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동맹을 맺게 됩니다.(대하 18:1) 하지만 그것이 여호사밧의 발목을 잡게 되었고, 하나니의 아들 예언자 예후를 통해 따끔한 질책을 받게 되죠.(대하 19:2) 여호사밧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2차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유다 곳곳을 직접 다니며 백성들을 살피고 재판관을 세우며,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얼마 후,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남유다를 공격 했고, 이에 여호사밧은 유다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대하 20:5-6) 결과는 유다의 대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호사밧도 산당을 철거하지 않아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대하 20:33)

    5. 여호람(왕하8장/대하 21장)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고, 8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람은 왕권을 잡은 후, 형제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는데요.(역대하 21:4)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해 아합의 길을 따릅니다.(대하 21:6)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람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대하 21:15) 그리고 말씀 그대로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됩니다.(대하 21:19)

    6 .아하시야(왕하8-9장/대하 22장)

    유다의 여섯 번째 왕인 아하시야입니다. 여호람의 뒤를 이어 막내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하시야 역시 아버지 여호람을 따라 아합의 집의 길을 따르죠.(대하 22:3) 아하시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요람과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예후와의 싸움에 휘말려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9)

    7. 아달랴(왕하 11장/대하 22-23장)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입니다. 아하시야의 죽음 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유다의 왕족을 죽이기 시작합니다.(대하 22:10)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빼내었고, 그렇게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왕하 11:2) 아달랴가 남유다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렇게 아달랴의 6년 간의 통치가 끝나게 됩니다.

    8.요아스(왕하 12장/대하 24장)

    유다의 여덟 번째 왕인 요아스입니다. 할머니 아달랴의 죽음 뒤에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아스는 아달랴 시대에 방치되었던 성전을 보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등 선한 왕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돌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 건데요. 이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 무섭게 경고하시지만, 요아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얼만 지나지 않아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고,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요아스는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9.아마샤(왕하 14장/대하 25장)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인 아마샤입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아마샤을 왕권을 잡은 후, 아버지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먼저 처형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와 섬기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에 크게 패배한 후에, 아마샤는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0.아사랴(웃시야)(왕하 15장 / 대하 26장)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아사랴입니다. 아마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52년간 다스립니다. 아사랴는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성을 튼튼히 하는 등 힘을 키워갔는데요. 유다의 힘이 커지는 만큼 아사랴의 교만도 커져갔고, 어느 날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향을 피우는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하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향을 피우려던 아사랴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격리되어 별궁에서 지내게 됩니다.

    11.요담 (왕하 15장 / 대하 27장)

    유다의 열한 번째 왕인 요담입니다. 아사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 동안 다스립니다. 요담은 성전을 증축하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에도 겸손을 잃지 않은 요담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시죠. 요담은 그렇게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2.아하스(왕하 16장/ 대하 28장)

    유다의 열두 번째 왕인 아하스입니다. 요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간 다스립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데요.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심지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벌이죠. 그는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죠. 급기야 앗시리아의 다메섹 제단을 그대로 유다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물러간 뒤 에돔 사람이 다시 유다를 공격 해 왔고,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하스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과 다메섹 신들을 의지합니다. 마침내 아하스는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 문을 닫기까지 합니다. 또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

    13. 히스기야(왕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유다의 열세 번째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 왕이었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길을 따른 건데요. 히스기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먼저 아버지 아하스가 닫아 놓았던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는 성전 정화 운동을 벌였고,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멈춰있던 제사와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유다 온 땅에 펴진 우상과 산당 등을 제거하고, 유명무실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왔죠. 성경은 히스기야를 유다 모든 왕들 중에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은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그런 히스기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다스린 지 육 년째 되던 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십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는 병에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요. 이때 히스기야는 벽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역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한 히스기야였지만, 병문안 차 방문했던 바벨론 왕의 사절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교만했던 히스기야에게 네 자손들이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죠. 히스기야는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됩니다.

    14. 므낫세(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네 번째 왕인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고, 5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길이 아닌, 할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따랐는데요.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우상의 제단을 쌓고, 손수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성전에 세우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시죠. 포로가 된 므낫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므낫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므낫세는 우상과 이방신들의 제단을 헐고,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보수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웃사의 동산에 장사됩니다.

    15. 아몬(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다섯 번째 왕인 아몬입니다. 므낫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2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몬은 아버지 므낫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6. 요시야(왕하 22-23장, 역대하 34-35장)

    유다의 열여섯 번째 왕인 요시야입니다. 아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유다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킨 신하들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3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르는데요. 성전 수리를 지시했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옷을 찢었고, 백성들에게도 언약책의 말씀을 읽어 주며 다시 여호와의 언약을 세울 것을 백성들과 함께 맹세하죠. 이러한 맹세는 우상과 산당의 제거 그리고 유월절의 부활로 이어졌는데요. 이후 애굽과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요시야의 죽음에 유다의 백성들은 슬퍼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7. 여호아하스(왕하 23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일곱 번째 왕인 여호아하스입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3개월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애굽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8. 여호야김(엘리야김)(왕하 23-24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여덟 번째 왕인 여호야김입니다. 동생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엘리야김)이 왕이 되고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에 의해 왕이 되는데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19. 여호야긴(고니야,여고냐) (왕하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열아홉 번째 왕인 여호야긴입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석 달 열흘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바벨론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때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과 그릇들도 빼앗기게 되죠. 바벨론에서 37년 간 포로생활을 하던 여호야긴은 후에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다스릴 때, 감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에윌므로닥 왕의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20. 시드기야(맛다니야)(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스무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세워진 왕입니다.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리는데, 역시나 돌이킬 줄 모르고 여호와 앞에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세 왕에 의해 120년 동안 계속되어 오던 통일왕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은 253년이나 계속되니 B.C 722년 호세아 9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남왕국 유다는 136년간 독존하여 오다가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때까지 20명의 왕이 한 왕조 (참조 : 북이스라엘 9왕조)에서 활동을 합니다.


     제1대  르호보암 (왕상 11 : 43, 14 : 21-31)
    솔로몬과 암몬여인 나아마의 아들로서 아버지때부터 분열되기, 시작한 나라를 완전히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솥로몬 때의 학정으로 인해 불만으로 가득찬 백성들의 요구(왕상12:4)를 악한 고문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거절함으로써 반란의 도화선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집세고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12지파중 유다와 베냐민 2지파의 지지를 받아 남왕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가18명, 첩60명, 아들28명, 딸60명이였고, 제위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받아 성전과 왕국을 노략질 당하게 되었습니다. 금방패를 빼앗기고 놋방패로 대치합니다.(왕상 14:25-28) 영적으로는 처음 통치3년(대하11장)까지는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지만 제위5년에 율법과 하나님을 버립니다.(대하12장)

     제2대  아비야 (왕상 15:1-8, 대하 13장)
    아비야는 3년동안 유다를 통치했는데 그는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제사를 지적하고 남유다의 규례대로 직무를 수행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사악한 왕이 됩니다. 

    북왕국의 왕 여로보암을 전장에서 패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버지와 같이 악을 행하였고 우상 섬기는 것을 허락하므로 백성들은 회개치 못하고 더 악해졌습니다. 

     제3대  아사 (왕상 15:9-24, 대하 14-16)
    아비야의 아들인 아사는 위한한 건축자이고, 최초로 구원받은 유다왕이고,유다의 중흥을 이끈왕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선한 왕 가운데 하나였으나 슬프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의 첫 10년은 평화로왔고 우상숭배를 금하여 아세라 목상을 만든 할머니(마아가)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지적한 예언자 하나니를 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마지막 2년 동안은 발에 병이나자 이방인 마술사를 불러 마법을 행하였습니다.(대하 16장)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유다의 선한 왕들이 말년에 가서는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므낫세가 처음에는 악했으나 후에 선하게 된 일입니다.(대하 33장) 이 시기의 남왕국 예언자들은 스마야, 오뎃, 아사랴. 하나니등입니다.

     제4대  여호사밧 (왕상 22:41-50)
    25년동안 유다를 통치했고 유다의 선한 왕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없애고 전 국가에 율법교사를 파송하여 종교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종교관리와 민정관리를 임명하여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습니다. 

    외적이 주는 두려움이 기도와 금식을 하게했고 유대의 큰 영적인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레서 주변의 나라들이 그를 무서워했으며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13년에 이스라엘 왕 아합과 동맹관계를 맺기 위하여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시켰고(대하18:1) 이에 대하여 예후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통치 초기에는 율법을 유다의 여러 성읍에서 가르치며 부흥운동으로 왕권이 점점 강해졌으나 통치 말기에 여호와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아합,아하시아,요람)과 연합함으로 씁쓸한 인생말년이 됐습니다.


     제5대  여호람 (왕하 18:16-24. 대하 21:1-20)
    유다의 12명의 악한 왕 중의 세번째 사람입니다.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 후에 그들의 악한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우상을 만들었고 그는 왕위에 오른뒤에 그의 여섯형제을 죽였습니다.

    선한아우를 죽이고 포악한 정치 때문에 선지자 엘리야의 심판예언을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에 걸려서 죽였습니다. 그는 열왕의 묘실에도 못들어 갑니다.


     제6대  아하시야 (왕하 8:25-9:29)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는 아버지 아합의 길로 행한 유다의 네번재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계속했으며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예후가 여호람을 죽이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갔을때 아하시야는 함께 있다가 죽음을 당했으며 또한 그의 42명의 형제 친척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제7대  아달랴 (왕하 11장. 대하 22:10-23:21)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이며 아하시아의 어머니입니다. 이세벨과 아달랴는 이스라엘 역사상 5대 악한 여성중의 포함됩니다. (이세벨,아달랴,들릴라, 세레스(하만의 아내 에스더 5:14, 6:13),헤로디아)

    그녀는 아들인 아하시야가 죽자 도망한 왕자 요아스를 제외한 모든 왕족을 죽였고 6년 통치 후에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여호람의 미망인으로 왕비8년, 아하시야의 어머니로 황후1년, 왕위를 찬탈하고 왕으로 6년을 정권을 가졌으나 제사장 여호야다의 명령으로 백부장들이 여호와의 전 밖으로 길을 열어주어 왕궁 말문 어귀에 일를때에 군대의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제8대  요아스 (여호아스) (왕하 11-12장, 대하 22:10-24:27)
    요아스는 선하게 시작했다가 악하게 끝난 왕입니다. 그는 아달랴가 훼손한 성전을 수리하고 이를 위해 모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행은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었을 뿐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요이스는 우상숭배에 빠져 선지자들의 충고에 마이동풍이었습니다. 또 여호야다의 아들인 당시의 대제사장 스가랴를 왕의 죄를 백성에게 담대하게 알리자 돌로 쳐 죽이도록 허락합니다. (대하 24:20-21) 

    후에 수리아(아람)왕 하사엘이 유다로 진격해 오자 요아스는 성전의 보물들을 뇌물로 주었습니다. 말년에 심복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대하 24:23-25)

    그는 다윗의 씨로 7세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왕에 등극하여 성전을 수리하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죽음을 분깃점으로 기생식물적 신앙을 보입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을 세우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고 불신앙 외교를 하는등, 의를 위하여 자신의 발로 스스로 서지 못했던 사람의 불행한 종말을 보여줍니다.

     제9대  아마샤 (왕하 14:1-22. 대하 25장)
    아마샤는 살해당한 요아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살해자들을 죽임으로써 그의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준비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용병을 은100달란트에 10만명을 사왔으나 선지자의 질책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용병들이 돌아가면서 성을 엄습하고 3천명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해 갑니다. 

    그는 통치기간중 에돔을 격파했는데 돌아올 때에 그들의 신들을 가져와서 그 에돔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때 선지자의 책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선지자의 입을 막으므로 멸망을 자초합니다. 

    또 승리에 대해 교만하여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전쟁을 일으켜  패하고 왕궁의 보물과 사람들을 볼모로 잡혀가게 합니다. 그리고 80년을 계속해온 남북간의 동맹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마샤는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 당했고 아마샤 이후 유다는 다시 이스라엘과 대립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제10대  웃시야 (왕하 15: 1-7, 대하 26장)
    웃시야란 말은 "여호와의 힘"이란 뜻이나, 웃시야는 선하기 보다는 위대한 왕으로서 그의 후반기 생애는 악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그는 에돔, 블레셋, 아람, 암몬등을 점령했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튼튼하게 했고, 탑들을 쌓
    았고 강력한 전쟁무기를 발명하며 군대의 수를 증가시켰고 예루살렘의 관기시설을 개선함으로 큰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는 스가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했습니다. 형통할때의 업적을 보면 엘롯성을 재건, 블레셋의 강한 성들 정복, 아라비아인들 물리침, 암몬족속으로 조공을 바치게함, 명성이 원방에 퍼집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하는 분향을 대신 하려다가 만류하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므로 이마에 문둥병이 들어서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로 별궁에서 외로운 삶을 보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스가랴, 아모스, 호세아가 예언하고 있었으며, 그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암 11:1, 호1:1. 사6:1)

     제11대  요담 (왕하15:32-38, 대하26:1-9)

    요담은 25세때 왕위에 올라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고 산간지방에 성읍건축하고 수풀사이에 진영과 망대를 세우고 암몬을 쳐부수고 매년 엄청난 조공을 거두워드립니다. (은100달란트, 밀 1만석, 보리 1만석) 요담은 하나님앞에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 졌습니다. 그는 선한왕이였습니다. 


     제12대  아하스 (왕하 16장, 대하 28장)
    아하스는 이버지와는 달리 악한 왕이었습니다. 유다의 왕중 가장 악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배교자였습니다. 그는 바알과 다른 거짓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바치고, 동정녀 탄생에 대해 최초로 들은 왕이고, 성전모독,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란 불명예스런 칭호가 붙습니다. 아하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회개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아하스 왕을 끝으로 분열왕국 시대의 종말을 오게 하고 유다만의 시대가 136년 동안 계속됩니다.


     제13대  히스기야 (왕하 16:20, 18:20장, 대하 28:27-32장)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유다가 대단히 어려울때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왕 중 가장 선한 왕이자 가장 부유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하고 더러운 것들을 성소에서 제거합니다. (대하 29:2) 

    그리고 여호수아 이후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히스기야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속된 것은 뿌리채 케어내고 거룩한 것은 새로 심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히스기야는 교만으로 중병이 생겼을 때 그의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15년동안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습니다.(왕하 20장, 대하 32:24-31) 

    그는 말년에 궁중에 있는 많은 보물을 자랑하다가 이사야 선지자의 혹독한 책망을 받았고 이사야는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128년 후에 성취됩니다.


     제14대  므낫세 (왕하 20장, 21:1-20, 대하 33장)
    므낫세는 남,북 전체왕중에 가장 장기집권한 왕입니다. 55년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가 없애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폐하고 자기의 아들까지 사신에게 불살라 제사 지낸 일이 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을 심히 핍박하였습니다. 

    후에 앗수르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므낫세를 잡아갔으나, 감옥에서 깊이 회개함으로 다시 왕노릇 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열심히 시작하였습니다. 


     제15대  아몬 (왕하 21:18-26, 대하 33:20-25)
    아몬이란 이름은 애굽 신의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2년 동안 아버지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악한 왕으로 군림했고, 그는 부친 므낫세의 나중에 스스로 뉘우치고 겸비함 같이 여호와앞에서 스스로 겸비치 않고 더욱 범죄하더니 신복들의 반역하여 그를 죽입니다. 


     제16대  요시야 (왕하 21:24,26, 22-23장)
    이름의 뜻은 "여호아께서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31 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선한 왕중의 하나입니다. 성전을 수리하고 율법을 가르치며 신당을 다 없애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는 율법책을 발견하여 가르칠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한 왕이고, 치리를 시작할때 우연히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유다 온 땅에 율법이 읽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증조부 히스기야 때보다 더 큰 유월절 축제 행사를 주관합니다.

    그의 신앙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바알의 모든 산당을 부수고,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이방 제사장들의 뼈를 섬기던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요시아는 8세에 즉위하여 16세에 하나님을 찾고, 20세에 예루살렘의 성결작업을 시작하여 26세때 성전정결완료하고 성전수리하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39세때 애굽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제17대  여호아하스 (살룸) (왕하 23:30-34 대하36:1-4)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요시아의 둘째 아들로서 히스기야나 요시야를 본받지 않고 므낫세와 아몬의 행위대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애굽을 반대한 그는 부왕을 죽인 바로느고에 의해 3개월만에 폐위되고 불잡혀 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김 (엘리야김) (왕하 23:34-24:7, 대하 34:4-8)
    여호야김은 요시아의 맏아들이고, 애굽의 바로느고의 의해서 왕위에 오르고, 죄없는 자를 죽이고 예레미야를 핍박한 왕입니다. 

    11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악한 왕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4년은 애굽의 속국이 되었으나, 그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시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쇠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데려갑니다. 이때 많은 학살이 있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잡아 갔는데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어 시체가 나귀처럼 취급받아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여호야긴 (고니아,여고니아) (왕하 24:6-16, 25:27-30)
    여호야김의 아들로 3개월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왕하24:9) 그가 통치한지 100일째 되는 날,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왕과 주요인물 1만명을 잡아 갔습니다.(왕하 24:14) 이때 에스겔도 같이 잡혀갑니다.

     시드기야  (왕하 24:17-25:21. 대하 36-10-21)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네째 아들로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애굽과 동맹하여 느부갓네살을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이 다시 쳐들어 와서 도망하는 시드기야를
    잡아 눈을 빼고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모든 기물들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반 바벨론 정책으로 유다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악을 행하며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에 관심이 없었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의를 알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용기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모든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시드기야왕을 끝으로 20명의 왕이 활동했던 남유다왕국도 끝나버리고 맙니다.




    북이스라엘 왕

    솔로몬왕이후에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라가 분단됩니다. 그 당시의 왕들을 간단하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제1대  여로보암  (왕상 11 : 26 - 14 : 19)

    반란의 지도자 여로보암(느밧의 아들)은 솔로몬 밑에서 행정관리로 일하였던 자입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10지파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로보암은 곧 세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르호보암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대표단을 인솔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이를 거절하자 북쪽 지파들에게 반역할 것을 충동하였습니다. 북족 지파(10지파)들은 여로보암을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들이 유대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둔 신당을 세워 경배하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22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제2대  나답  (왕상 15 : 25 - 32)


    여로보암은 아들 나답에게 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성경에는 나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쫓아 악한 행실을 자행했으며 겨우 2년을 통치한 후, 그가 블레셋의 한 성읍을 포위하고 있을 당시 잇사갈 사람 바아사에게 살해 되었습니다.


     제3대  바아사 (왕상 15 : 26 - 16 : 7)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장군으로서 약탈과 살륙으로 권력을 잡고 나답과 온 집안을 쳐서 죽이고 왕이 되어 24년동안 통치하였으나 여전히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악을 행하였습니다. 

    유다의 아사왕에게 전쟁을 포고하고 유다로 통하는 길을 막기위해 라마에 성벽요새를 축성하고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제4대  엘라 (왕상 16 : 6 - 14)
    바아사의 아들인 엘라는 정신이 혼란한 바보였습니다. 그가 디르사에 있는 그의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때에 병거 절반을 통솔하던 군대장관인 시므리가 그를 암살함으로써 2년 동안의 그의 통치시대가 끝났습니다.


     제5대  시므리 (왕상 16 : 9 - 20) 

    시므리 왕은 새 조정을 시작하고 7일동안 왕노릇 하였습니다. 살륙과 약탈로 왕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때에 오므리가 시므리 왕이 있는 궁을 둘러싸고 죽이려고 하자 스스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타 죽었습니다.


     제6대  오므리 (왕상 16 : 15 - 28)

    오므리는 12년동안 왕노릇 했고 이때까지 왕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고 사마리아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전왕인 시므리 보다도 더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제7대  아합 (왕상 16 : 29 - 22 : 40)

    아합은 22년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바알신을 섬겼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죽이고 바알을 위해 신당을 세우고 백성을 심히 악하게 다스렸으며 그의 아내 이세벨은 베니게 왕의 딸로서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가지고 들어 왔으며 중심으로 바알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의 바알 숭배가 나라의 큰 기근을 초래하였으며 유다왕 여호사밧과 사돈을 맺어 군사동맹을 맺고 이득을 얻어 몇번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회개(왕상21:29)가 있었지만 결국은 수리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 때에 유명한 선지자가 엘리야이고 갈멜산에서의 대결은 유명합니다.

     제8대 아하시야  (왕상 22 : 51 - 왕하 1 : 18)
    아하시아는 아합와 이세벨의 첫째 아들로 2년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힘은 아합 왕에 미치지 못했으나 악한 일은 아버지 못지 않게 많이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때 치유를 위해 바알세붑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므로 엘리야가 와서 책망하자 아하시야는 두번이나 엘리야를 죽이려 했으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군대들을 다 죽이고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제9대  여호람(요람)  (왕하 3 : 1 - 9 : 29, 대하 22 : 7 - 9)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막내아들로 형인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승천했습니다. 여호람은 바알을 섬겼으며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하여 일어나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의 도움을 구하여 모압을 치려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벤하닷 2세가 다시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그는 도망했습니다. 엘리사의 명을 따라 엘리사의 생도 중 한 사람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자 예후는 이스라엘로 가서 여호람의 염통을 활로 쏘아 죽여 나봇의 밭에 던지었습니다.


     제10대  예후 (왕상 19:15-18, 왕하 9-10장)
    예후는 엘리사가 보낸 생도중에 한사람으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람왕을 죽이고 왕이 된 자로서 잔인함에 있어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람. 아하시아, 이세벨. 아합의 70명의 아들들 이스라엘에 있는 아합의 추종자들. 아하시야의 42명의 가족들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추종자들, 선지자들과 바알의 추종자 모두를 색출하여 죽였습니다.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멸하고 그들의 신당을 공중 화장실로 만들며(왕하 10:19-28)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른 우상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왕하 10:29)


     제11대  여호아하스  (왕하 13 : 1 - 9)
    여호아하스는 예후의 아들로 수리아의 하사엘과 벤하닷의 손에 붙여져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범죄를 그대로 실행했던 자였으며 17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맥없이 죽습니다.


     제12대  요아스 (왕하 13 : 10 - 25)
    여호아하스와 같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으나 몇 가지 잘한 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의 죽어가는 자리에 방문하여 그를 위해 슬퍼한 일(왕하 13:14), 수리아 군대를 3번이나 물리친 일(왕하13:18-19), 하사엘이 그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요단 서편의 모든 도시를 회복한 일, 유다의 어리석은 왕 아마사에게 관용을 베푼일등이 있습니다.


     제13대  여로보암 2세 (왕하 14 : 28 - 29)
    여로보암 2세는 가장 호전적인 왕이었으며 이스라엘 왕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행정가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수리아를 안전히 격퇴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때 잃어버린 모든 지역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왕하14:25)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한탄할 만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고 도덕적으로도 부패한 사람이었다.(호2:8) 이 시대에 중요한 사건은 예언 문화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서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요나가 이때 활동했습니다.


     제14대  스가랴 (왕하 15 : 8 - 12)
    여로보암2세의 아들로서 6개월간 보좌에 앉아 있다가 살룸이라는 폭도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후왕의 4대손이고 그가 죽으므로 예언이 성취되어 예후왕조가 4대로 막을 내립니다. 그는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왕하 15:9)


     제15대  살룸 (왕하 15 : 18 - 15)
    살룸은 왕위의 찬탈자로서 제 6대 이스라엘 왕조의 창설자입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스가랴를 쳐죽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1개월후 므나헴이라는 잔인한 병사에게 암살 되므로 끝나고 맙니다.

     제16대  므나헴 (왕하 15 : 16 - 22)
    므나헴은 세 조정을 이룬 후에 10년 동안 왕노릇 했는데 이스라엘터 의 지독한 독재자 중에 한사람이고 그때에 앗수르 사람에게 정복당했으나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은 1천 달란트로 조공을 바쳐 벗어 났습니다. 이때 부터 앗수르의 이스라엘 정복이 시작됩니다. 영적으로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17대  브가히야 (왕하 15 : 23 - 26)
    브가히야에 대해서는 므나헴의 아들이란 것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과 그의 호위대장인 베가의 손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제18대  베가 (왕하 15 : 27 - 31, 16장)
    베가는 그의 선조들과 같이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의 통치기간 중 유명한 것은 수리아의 왕 르신과 동맹을 맺어 유다에 대항한 일입니다. 그는 유다에 많은 손실을 주었고 12만명을 죽었고 20만명의 여인들과 자녀들을 사마리아로 잡아왔으며 많은 재물을 노략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오뎃의 권면으로 그들을 다시 돌려 보냈습니다.


     제19대  호세아 (왕하 16:30, 17장)
    이스라엘이 마지막 왕조인 9대 왕조의 창설자로서 북이스라엘의 마지막왕으로 앗수르에 대항하여 애굽과 연합하지만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 잡혀감으로 감금당합니다.  B.C 722년에 이스라엘 왕조는 끝을 맺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253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그이유를 "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듣지도 아니하며 지키지도 아니함" 이라고 말합니다. 살펴본 북왕국 이스라엘의 모든 왕조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두 19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그중 7명의 왕만 자연사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불운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는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잇도, 오뎃, 예후, 미가야, 오바댜, 요나, 아모스, 호세아 등입니다.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한 여왕 아달랴

    예수 그리스도 족보 제 2기(마 1:6-10)에서 생략된 인물 중 독특한 프로필의 소유자를 뽑자면 바로 ‘아달랴’를 들 수 있습니다.
    남 유다 제 7대 왕인 아달랴는 유다 왕들 중 유일한 ‘여왕’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대표하는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로서(왕하 8:18, 대하 21:6), 여호사밧(남 유다 4대 왕)의 며느리(대하 18:1)로 유다에 들어와, 남편 여호람과 그 자손들이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더 나아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

    1. 아달랴의 다윗왕조 진멸사건

    (1) 유다 집의 모든 ‘왕의 씨’를 진멸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갑자기 피살되자(왕하 8:29, 9:16, 27-28, 대하 22:5-9), 남 유다 왕권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왕하 11:1, 대하 22:10). ‘왕의 씨’는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과 친척’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달랴는 이들만 제거하면 다윗왕조의 모든 씨 전체가 진멸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친손자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샅샅이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손 계승’의 의미를 갖는 ‘씨’(히. 제라)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다윗 왕가를 완전히 멸망시켜 아합 왕가를 이루고자 했던 아달랴의 사악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는 왕이 되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에서 더 나아가 다윗왕조를 통해 여자의 후손(창 3:15)을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가로막는 사악한 행위였습니다.

    (2) 아달랴의 손에서 요아스를 도적하여 살리심

    아달랴가 모든 왕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상황 속에서, 여호람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사브앗(여호세바)이 한 살 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도적하여’ 자신의 침실에 숨겨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왕하 11:2, 대하 22:11). 이는 다윗의 왕손이 보존되어 여자의 후손이 오실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였습니다.


    2. 아달랴의 비참한 최후

    (1)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

    아달랴의 손에서 도적해낸 요아스를 6년 동안 성전에 숨겨 노심초사 보호해오던 제사장 여호야다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게 하기 위해(대하 23:3) 목숨을 걸고 혁명을 결단함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한 씨 요아스를 마침내 왕위에 올렸습니다(왕하 11:4-12, 대하 23:1-11).

    (2) 극악한 여왕 아달랴의 최후

    6년 전 모조리 진멸된 줄 알았던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보존되고 있었음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만세를 부르고 나팔을 불고 찬양을 하였고, 그제야 개혁을 알아챈 아달랴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라고 외치며 최후의 발악을 하였습니다(왕하 11:13-14, 대하 23:12-13).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여호와의 전 밖, 왕궁 마문 어귀에 이를 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1:15-16, 대하 23:12-15). 아달랴가 죽었을 때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습니다(왕하 11:10, 대하 23:21).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의 통치 8년,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1년, 여왕 아달랴의 통치 6년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달랴의 악영향으로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들끓는 절망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남 유다로 시집온 후 평생을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남 유다의 거룩한 등불을 꺼뜨려 흑암의 역사로 바꿔 버리려 했던 아달랴의 계획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 철저히 무너졌고, 유일한 다윗의 후손 요아스를 통하여 새로운 소망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괴롭히심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마지막 때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세상의 거짓 통치자인 마귀와 그 하수인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조우(遭遇) / 만날 조, 만날 우


    1. 신하(臣下)가 뜻에 맞는 임금을 만남.
    2. 우연(偶然)히 서로 만남.

    조봉(遭逢) / 만날 조, 만날 봉

    우연(偶然)히 서로 만남.


    회우(會遇) / 모일 회, 만날 우

    1. 한데 모여 만남.
    2. 오다가다 만나거나 마주침.












    남 유다
    1. 르호보암(17년) - 2. 아비얌(3년) - 3. 아사(41년) - 4. 여호사밧(25년) - 5. 여호람(8년) - 6. 아하시야(1년)

    북 이스라엘
    1. 여로보암(22년) - 2. 나답(2년) - 3. 바아사(24년) - 4. 엘라(2년) - 5. 시므리(7일) - 6. 오므리(12년)




    “만남은 교육에 선행(先行)한다.” 


    실존주의 교육 철학자인 O. 볼노브는 ‘교육이 있기 전에 만남이 있었다’ 고 말한다.  

    어느 날, 그리스 제일의 시인을 꿈꾸며 두툼한 원고 뭉치를 옆구리에 낀 18세의 청년이 여느 때처럼 오가던 그 길에서 한 노인이 길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늘 지나던 길에서, 늘 보았던 그 노인이 그날 새롭게 보인 것이다.
    인생에 관해 진지한 노인의 표정과 겸손한 태도와 그 질문에 관해 토론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껏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한 것이다.
    겉만 화려하게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되어 알맹이가 결여된 자신의 시 원고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청년은 원고를 버리고 그 노인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노인과 플라톤이라는 젊은이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러한 만남을 철학에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해후(邂逅)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만남은 또 있다.
    바로 기독교의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예수(Jesus Christ)를 만남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낚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도가 된 것이다.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 것이다.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만남인가?


    불교에서는 만남은 수억 겁 년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佛家(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웅용샘을 만난 용화인들은 행복합니다.
    그 행복은 진정 자유로운 자, 정의로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멋진 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살아있는
    용화인이기를 기원합니다.

    cafe.daum.net/18yong/CJM0/702 

    볼노브의 교육이론

     

    교육과 만남: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라고 했으며 진정한 교육은 너와 내가 마음으로 호흡할 때, 인격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질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볼노브는 인간이 천부적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계발을 통한 점진적 성장을 부정한다. 인간은 위기, 각성, 충고, 상담, 만남, 모험, 좌절 등과 같은 비연속적 요소에 의해 비약적으로 성장 할 수 있다.

     

    실존주의의 기본 입장과 교육적 관점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인간관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 없으며 단지 살아가면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존재라고 이해한다. 다만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투되는 존재이므로 과거는 어찌됐든 현재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겠다. 그것이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 동기유발, 학습방법, 상담이론에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 특히 상담이론은 실존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된다

    . 상담을 요할만큼 문제가 되는 학생들의 특징은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을 감성적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 자존감을 높여주어야 상담이 될 것으로 보이고, 이는 실존주의 철학과 일정부분 상통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라고 합니다.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독일의 의사이며 작가이었던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 12. 15~1956. 9. 12)가 남긴 말입니다.



    해 지는 땅의 비가

    한스 카로사[독일]

     Hans Carossa 187812251956912              1                                                                         1956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12.25~1956.9.12) ]
    독일의 시인, 소설가, 번역문학가, 수필가. 내과 의사. 의학박사.『시집』과『뷔르거 박사의 죽음』으로 인정받고, 제 1차 대전시에 군의로서 종군한 때 착상한 자서전 소설(자서전소설)『유년시대』와, 대전 종군의 기록 『루마니와의 일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괴테에 사사(사사)하고, 특정한 유파에 속함이 없어, 자기의 생활만을 소재로 하여 절도있는 수준 높은 작품을 썼다, 나찌스 시대, 권력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던 유럽 저작자 연맹(著作者聯盟)의 회장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권력에 영합됨이 없이, 항상 고고한 정신으로 암흑시대를 성실하게 살아 갔다.
    상가의 작품 외에, 『어느 청춘의 변화』『의사 기온』『지도(指導)와 신종(信從)』『성년의 비밀』『미쳐 버린 세계』『젊은 의사의 하루』 등의 작품이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해 지는 땅의 비가

    나는 그대의 숲에서 나이 들고,
    그대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배웠다.
    지금 나는 내 기억을 불러내어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초목이 아는 것,
    창밖으로 보이는 해바라기가 아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하나의 별이라는 것을,
    누가 이것을 잊게 하는가?
    초침이 멈춘다면,
    천년을 계획하는 것,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불행한 사람들은 무서운 일들에 익숙해진다.
    이제 곧 그들의 사랑의 촛불은 꺼지고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이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아직도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빛을 숨겨야 한다.
    완벽한 사랑의 소리를 깨우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 무엇을 찬양하리,
    새로운 기적의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
    먼 곳으로 달리고 싶은 편편한 도로를?
    화물선을? 자랑스러운 디자인의 도로,
    세상을 가로질러 가는 비행선을?
    엄청난 기술로 만든 파괴의 도구들을?
    진실이든 허위든 관계치 않고
    공중으로 전파하는 음파의 도구를?
    아, 침묵하라, 이 모든 것은 그대가 아니다.
    밤은 아름다움과 아픔이 가득한 모습으로 침묵하고
    우리는 밤의 여신으로부터 슬픔을 배우고자 한다.
    위로를 멀리하고 오래 견디며 슬퍼하는 것을.
    거기에서 생각은 크게 헤매지 않고 여신을 위하여
    인간의 모든 고뇌보다 오래된 단순한 표지를 남길 것이다.
    그리하여 줄기는 빛을 향하여 꼿꼿이 서고
    죽은 잎사귀로부터 새싹이 하나 싹터 나오고
    또 다른 싹이 쫓아 나온다. 닫혀 있던 장미 꽃받침
    성장을 착실하게 지키며 숨어 있었는데,
    이제 그 조심스러운 꿈에서 태어남을 보라!
    불꽃 찬란한 수레바퀴가 열렸다,
    둥근 씨앗의 바구니에 꽃들의 둘레가 짜여,
    마치 합창하는 목소리들처럼 단단히 하나가 되고,
    잎사귀들 위로는 금빛 꽃가루가 숨쉰다.
    그리하여 열병 앓는 해지는 땅이여, 희망을 가지라!
    생각없이 부수어버린 것을 스스로 버티어낸 영혼이
    또 다시 세우려할 때, 용기를 가져라. 그 때 영혼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스러운 새 일감을 주리라.
    폐허로부터 새로운 축복의 날이 떠오르리.
    그때는 밝은 빛을 감추지 아니하여도 되고
    우리는 태고로부터의 힘들과 함께 노닐 것이니.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만이라도
    순수한 시작에 임하여 서서
    지구의 별 모양을 짤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의 세기도 기꺼이 견디리니.



    별의 노래  / 한스 카로사

    내일이면 숱한 별들이 비치겠지

    내일이면 너는 나를 찾아 울겠지

    잠잠한 창(窓)안을 엿보고 있겠지

    끝내는 아스라이 반짝이는 곳으로

    네 마음은 달아나겠지

    환하게 두 눈에 눈물이 어리면

    수천의 별, 하나같이 고요한 별들

    태양(太陽)들 마냥 커다랗게 떨고 있는 모습

    네 눈에 비치겠지

    강변의 숲 속에서 / 한스 카로사

    강변의 숲 속에
    숨어 있는 아침해
    우리는 강가에 배를 띄웠다.
    아침해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강물 위에서
    반짝이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였다.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산정 / 한스 카로사

    오르지 못할 것만 같은 산정(山頂) 이제는 쉽사리도 지나간다.
    저 멀리 아련한 첫 번째 길, 새로운 하늘에 이르다.
    태고(太古)적 산과 넓은 땅은 하나로 반조(返照)되어
    아물거린다.
    밖에 지나온 도시들은 조촐하고 밝은 한 폭의 그림
    나직이 떠나가는 밝은 구름 달려가는 그림자는 우리를 감싸고
    커다란 파란 나비들이 우리 앞에 책처럼 펼쳐진다.
    사람이 무엇이며 무엇이었던가는 떠날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노래가 울러 퍼질 때, 우리는 그것을 듣지 못하고
    그 노래가 침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율한다.
    오, 시간을 망각하라 오, 시간을 망각하라
    그대의 모습이 시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마음이 시들지 않게
    이름일랑은 떨어버려라!
    겨울을 가리어라! 위험에
    자신을 내맡겨라!
    존재 속에 눈짓을 좇아가는 자,
    많은 것을 하나로 짓는 자는 별은 시간마다
    그를 다져간다.
    그리고 정열의 해가 지나고
    우리가 현세에서 눈이 멀 때
    위대한 자연은 성숙 하는 것.

    옛샘 / 한스 카로사

    등불을 끄고 자거라! 줄곧 일어난 채
    언제까지나 울리는 것은 오직 옛샘의 물줄기 소리
    하지만 내 지붕 아래 손님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곧 이 소리에 익숙해진다.
    네가 꿈에 흠뻑 배어 있을 무렵 어쩌련
    집 근방에서 이상스런 소리가 들릴는지 모른다.
    거친 발소리에 샘 근방 자갈소리가 나며
    기분 좋은 물소리는 딱 그치나니
    그러면 너는 눈을 뜬다하지만 놀라지 마라!
    별이란 별은 모두 땅 위에 퍼지고
    나그네 한 사람이 대리석 샘가로 다가가서
    손바닥을 그릇삼아 솟는 물을 뜨고 있다.
    그 사람은 곧 떠난다. 다시 물줄기 소리가 들리나니
    아아 기뻐하여라, 여기에 너는 혼자 있지 않으니.
    먼 별빛 속에 수많은 나그네가 길을 가고
    그리고 또다시 네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에게 / 한스 카로사

    고양이, 거만한 포로,
    한동안 다가오지 않더니
    이제야, 어스레한 탁자를 넘어
    주뼛주뼛 이리로 오는구나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령인가
    부지런한 펜에 앙심을 품고는
    내가 막 쓰기 시작한 종이 위에
    살포시 앞발을 올리네
    새로운 상념에 잠기게 하는 너는
    참으로 차분하고 멋지구나!
    너의 은밀한 오르간 소리가
    가르랑 가르랑 나직하게 들리누나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네 이마에 손을 대면
    별안간 달이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나 여러번/한스 카로사
    그리고 얼나마 여러번 나는
    밤에 잠을 깨었던가
    밝은 달은
    침상과 의장 위에 빛을 던지고
    나는 바깥 골짜기를 바라본다
    꿈속에 서 있는 것은 너의 집
    나는 다시금 더 깊은 꿈에 젖어드나니

    장미는 이제 어디 있는가 / 한스 카로사

    장미는 이제 어디 있는가, 白鳥는 이제 어디 갔는가.
    금붕어떼가 불길을 일으키던 연못은 이제 보이지 않고
    제 몸속으로 갈라 떨어진 噴水
    水盤은 말라 까맣게 수령밭이 되었다.
    앙상한 나무들 안개비를 흘리고
    저기 똑바로 늘어선 탁자들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찾아올 손님이 있을라구, 허사다.
    활짝열린 伽藍, 이끼낀 층계
    비렁뱅이 하나 구차한 밥술이나 신나게 먹어치우고 있다.
    누가 불렀나. 塔쪽으로 날개 파닥이며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들
    성스러운 비둘기떼다.
    비둘기떼 비렁뱅이 벙거지, 볼을 맴돌다
    마지막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훑어 간다.
    당황한 사내 아이 같고나, 잔잔히 흘리는 微笑
    홀연 흐뭇한 생각이 든다, 궁색한 자기 處地.

    봄 / 한스 카로사

    聖堂 앞 廣場은 이제 다시 해의 보금자리
    옛 분수가는 아이들의 놀이터
    층계에 모여든 비둘기가족 구리빛으로 빛나고 
    온통 빛살에 빨려든 해면일까, 무겁게 맴도는 구름장, 봄이다.
    성당 앞 광장에 이어난 어느 집
    창문을 열어젖힌 채 핏기없는 아가씨 하나 이제 날이 날마다 앉아 있다.
    구름을 뒤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탐스러운 비둘기떼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판 남남인 女子들 옷을 짓고
    비단 모자를 다듬어야 한다.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더러는 초저녁 내내
    아가씨 모습은 언제 보아도 냉엄하고 쌀쌀맞은 것.
    자라가는 어린 것
    들릴 듯 말 듯 심장 아래서 간간히 고동치면
    어렴풋 자그마한 魂이 어느 사이 빛을 잡으려는 듯 꿈틀대면
    이때뿐, 매서운 입술에 불길이 타오른다, 봄이다.


    5월 19일(월) 역대하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람(21:1)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Then Jehoshaphat rested with his fathers and was buried with them in the City of David. And Jehoram his son succeeded him as king.

    여호람(Jehoram)이란 이름의 왕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홉번째 왕 '여호람'과 남유다 왕국의 다섯번째 왕 '여호람' 두 사람입니다.
    같은 이름이므로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단순히 자신을 부르는 명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인격, 존경받는 품성, 그리고 그가 행한 선행 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성어를 통해 '이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호사유피인사유명'이란 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성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더욱이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사회에서 인정받고,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이러한 '호사유피인사유명'의 의미는 단순히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이를 이해하고 적용하면, 우리는 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호사유피인사유명'이란 성어의 더욱 깊은 의미와 그 유래, 그리고 이를 현대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실제 상황에서의 사용 예시를 통해 이 성어가 어떻게 우리 삶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제, 함께 '호사유피인사유명'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찾아보며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가치를 더해보는 여정을 시작해봅시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이란?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고사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입니다. 또한, 이 성어는 사람이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가르치며, 그 명예는 그 사람의 이름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성어의 유래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 의미와 메시지는 수세기 동안 전해져 왔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생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이제, '호사유피인사유명' 이라는 성어를 구성하는 한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 虎: 범 호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류(유) 
    • 皮: 가죽 피 
    • 人: 사람 인 
    • 名: 이름 명 

    각 한자가 가지는 의미를 조합하면, 이 성어의 전체적인 뜻이 '범이 죽어서 가죽을 머무르고,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머무른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그 가치가 죽음을 넘어서 후세에 어떻게 전해져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사유피인사유명'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하며,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원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어를 한자로 분해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면, 성어가 가진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성어가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정신과 정의로운 행동은 우리 모두에게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처럼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2. "장군님의 무예와 용기는 사후에도 그 이름이 울리는 '호사유피인사유명'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3. "도서관에서는 과학자들의 노력과 업적이 '호사유피인사유명'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몸은 물러가지만 그 행적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가치 있는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4.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늙은 할머니는 치히로에게 어려운 시기에도 끈질기게 희망을 잃지 말라며 '호사유피인사유명'을 강조합니다."
    5.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호사유피인사유명'의 교훈을 살아가면서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그의 성과는 우리 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6. "법륜스님이 자신의 설교에서 '호사유피인사유명'을 언급하며, 선한 행동과 참된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7.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에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포레스트는 '호사유피인사유명'처럼 그의 사랑을 계속해서 기억하며 삶을 살아갔습니다."
    8. "TV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주인공 대장금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발휘하며 '호사유피인사유명'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끝맺음

    지금까지 성어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의미로, 인간이 살아가며 남기는 흔적, 즉 명예와 덕목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한자 하나하나를 해석하며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해보았는데요. 
    각 한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虎(호)'는 범을, '死(사)'는 죽음을, '留(유)'는 남길을, '皮(피)'는 가죽을, '人(인)'은 사람을, '名(명)'은 이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들이 조합되어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깊이 있는 성어를 형성합니다. 
    또한 이 성어는 우리 일상생활에도 다양하게 활용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이 성어가 어떻게 우리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심"
    여호람은 남 유다의 다섯번째 왕입니다.
    르호보암(17년), 아비얌(3년), 아사(41년), 여호사밧(25년) 그리고 여호람은 8년을 통치합니다.
    어떤 왕은 오랫동안 통치하였지만 어떤 왕은 1년(6대, 아하시야) 심지어 북 이스라엘의 시므리 왕은 7일 동안만 다스렸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수명을 70 또는 80이라고 합니다(시편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런데 칠십년도 팔십년도 지나고보면 참 신속하게 날아간 것 같다고 합니다.
     
    여호람은 유대왕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왕하 8:16).
    아합왕의 딸 아달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법행하게 하고 그 동생들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외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 대하21:8-10)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21:16-20).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 22 ~ 1626. 4. 9)
    잉글랜드의 철학자, 정치가
    제임스 1세 시기 잉글랜드의 법무장관, 대법관(총리를 겸직)을 역임
    근대적 경험론의 시조로 평가되는 베이컨은 자연철학을 연구하고 과학적 방법의 발전을 주도하였고 그의 저작은 훗날 과학적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아는 것이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남 유다왕 여호람(Jehoram)

    여호람은 남 유다의 왕(BC 853-841)

    [ 선왕: 부친 여호사밧 <-- 여호람 --> 후왕: 아들 아하시야 ]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이된 여호람은 그의 형제들을 죽이고 다윗의 길이 아닌 이스라엘 왕들을 길을 행하였는데, 이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에돔과 립바가 배반하여 독립할 정도로 나라가 약해졌고 여호람은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유다 백성까지 미혹하게 했습니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행위를 질책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합니다.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쳐들어 와 재물을 빼앗고 막내아들 여호아하스(아하시야)를 제외하고 모두 죽였으며 후에 여호람은 중병에 걸려 팔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습니다.

    • (대하 21:6-7)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관련 자료


    유다 왕 여호람이 왕이 되고 에돔이 유다를 배반하다(왕하8:16~24).

    16절.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은 히브리어로“자존자, 영원한자”을 뜻하는“예호바”와“일으키다”을 뜻하는“룸”의 다른 형태로“여호와께서 받쳐주신다”을 뜻한다“여호람”이라고도 한다.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유다왕 여호람”은 히브리어로“예호람”인데“자존자, 영원한자”을 뜻하는“예호바”와“일으카다”을 뜻하는“룸”에서 유래한 것으로“여호와께서 일으키신다”을 뜻한다.“요람”이라고도 한다. 여시서 보는 것처럼“여호람”은 동명 이인이다.

    ①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며 아합의 딸 아달랴의 남편이다(왕상22:50, 왕하1:17, 8:16~18). 그는 삼십 이세에 왕이되어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다스렸다

    ② 아합의 둘째 아들이며 아하시야의 동생이다, 그는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자 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사마리아에서 십 이년간 다스렸다(1:17, 3:1).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북왕국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처남 매부(妹夫)관계이다.

    17절.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본문은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 할 때 나이가 삼십 이세였으며 그가 예루살렘에서 팔 년간 통치한 것을 뜻한다. 즉“통치하니라”는 히브리어로“말라크”인데“통치하다, 지배하다, 왕이 되다, 보좌에 오르다, 다스리다”을 뜻한다.


    여호람(Jehoram)

    뜻 : 여호와는 존귀하심

    1.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왕하 8:16).
    아합왕의 딸 "아달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범행하게 하고 그 동생들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외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 대하 21:8-10)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 21:16-20)

    2. 아합의 아들로서 요람이라고도 부른다
    그 형제 아하시아의 왕위를 계승한 후 유대왕 여호사밧과 화친하고 돔돔과 같이 모압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진군할 때 음료수가 없어 고생하다가 선지 엘리사에게 구하여 많은 물을 얻고 모압을 진격하여 승리하였다.
    다시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므로 엘리사가 책망하매 그것을 받아 회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왕하 6:30-33)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아람왕과 싸우다가 상하여 이스라엘에서 치료하고 있는중 예후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니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였다(왕하 8:28-29, 9:7, 24-26)

    3. 유대왕 여호사밧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파견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다(대하 17:18).


    여호람(유다)

    여호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르게 매우 악하게 행동했는데,[1] 단독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그 형제들이 여호람의 왕위를 넘보는 것도 전혀 아니었고, 아버지인 여호사밧이 분명 왕위 쟁탈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미리 자식들을 교육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쪽의 에돔은 남유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결국 에돔이 승리하여 남유다에게서 독립하였다. 그리고 여호람의 아들들은 아하시야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하였다. 그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말년에 창자에 불치병을 앓다가 창자가 튀어나오며 고통스럽게 사망했고, 백성들도 그를 지지하지 않아 역대 왕들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는 수치를 겪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고작 1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게 되었다.

    [1] 그가 악하게 인생을 보낸 건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북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 왕의 딸인 아달리야가 그의 아내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그 후 이 아달리야는 자신의 손자들을 모두 없애고 남유다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여호람(Jehoram) - 남유다 여호사밧① 아들, 아합의 사위,  아달랴 남편

    의미 - ‘여호와는 높으시다’
    다른 이름 - 요람②(왕하 11:2)
    제 5대 남유다 왕.(BC 848~BC 841년 재위) - 8년 다스림 (왕하 8:16, 대하 21:1)

                          ※ 왕하 8:16 -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①(여호람①) - 제 5년에

                                                 여호사밧①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

                                                              ※ 유다의 왕 여호사밧①의 아들 여호람②이 -

                                                                                          ⇒ 왕이 되니라

                          ※ 대하 21:20 - 여호람②이 - 32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다스리다가

                                                              ※ 아끼는 자 없이 -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 열왕의 묘실에는 - 두지 아니 하였더라




    여호람 (이스라엘) (JEHORAM OF ISRAEL)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홉 번째 왕인 여호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1. 여호람의 출생과 초기 생애

    출생과 배경:

    • 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왕기하 1:17)
    • 그는 부모의 영향 아래 자라면서, 이방 신들을 섬기고 우상 숭배를 하는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가족 배경:

    • 아합과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왕국에 바알 숭배를 도입하고, 엘리야 선지자와 갈등을 빚은 인물들입니다.
    • 여호람은 형 아하시야의 죽음 이후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2. 여호람의 즉위와 통치 (열왕기하 3장)

    즉위와 초기 통치:

    • 여호람은 형 아하시야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으며, 북이스라엘을 12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열왕기하 3:1)
    •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처럼 심각한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알의 석상을 제거했습니다. (열왕기하 3:2)

    모압과의 전쟁:

    • 모압 왕 메사는 아합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하 3:4-5)
    •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동맹을 맺고 모압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열왕기하 3:6-7)

    엘리사의 예언:

    • 여호람과 그의 동맹군은 물이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열왕기하 3:9-12)
    •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모압을 무찌를 것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하 3:16-19)

    전쟁의 결과:

    •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이 공급되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모압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 메사는 절망하여 그의 장자를 번제로 바치는 끔찍한 행위를 했습니다. (열왕기하 3:20-27)

    3. 여호람의 종교적 행보 (열왕기하 3장, 9장)

    우상 숭배와 죄악:

    • 여호람은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처럼 우상 숭배를 조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열왕기하 3:2)
    •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악으로 이끌었습니다.

    엘리사와의 관계:

    • 여호람은 여러 차례 엘리사 선지자의 도움을 구했으며,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여호람을 도왔습니다. (열왕기하 3:9-19)
    • 그러나 여호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4. 여호람의 죽음과 후계자 (열왕기하 9장)

    예후의 반란:

    •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열왕기하 9:1-6)
    • 예후는 여호람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하 9:11-14)

    여호람의 죽음:

    • 여호람은 예후의 반란 중에 이스르엘에서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그의 시체는 나봇의 포도원에 버려졌습니다. 이는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열왕기하 9:24-26)

    아하시야의 즉위:

    • 여호람의 죽음 후, 그의 동생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9:29)

    5. 교훈과 적용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 여호람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결국 그의 죽음과 북이스라엘의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

    • 여호람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죄악된 행보가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불순종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와 여호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

    • 여호람은 엘리사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결론

    여호람의 생애와 통치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불순종과 영적 타락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으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통독(通讀) : 통할 통, 읽을 독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음.

    reading through, reading from cover to cover

    • 그 책을 거침없이 통독(通讀)하다.



    정독(精讀) : 정할 정, 읽을 독
    뜻을 새겨 가며 자세(仔細ㆍ子細)히 읽음.

    • careful[close, intensive] reading, (formal) perusal, read intensively[carefully, with care], (formal) peruse



    환장(換腸) : 바꿀 환, 창자 장

  • .
    마음이나 행동(行動) 따위가 비정상적(非正常的)인 상태(狀態)로 달라짐.
  • 2.
    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沒頭)하여 정신(精神)을 못 차리는 지경(地境)이 됨을 속(俗)되게 이르는 말.
  • 환장 換腸

    • 1.

      명사 going crazy, going mad, being out of one's mind

    • 2.

      명사 obssession, mania, preoccupation




    영적 고향(故鄕) / 파트리스(3968) 요한복음 4:44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 4:44, 히 11:14.
    • 2. 고향, 마 13:54, 막6:1, 눅4:23.
    • 관련 성경  / 고향(마13:54, 눅4:23, 요4:44), 본향(히11:14).
    영적 골방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6:6, 24:26, 눅 12:3.
    • 관련 성경
      골방(마6:6, 24:26, 눅12:24).

    '골방'의 의미
    '골방'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리쉬카(לִשְׁכָּה)'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타마이온'(ταμεῖον)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타마이온’은  ‘자르다’라는 뜻의 ‘템노’
    ‘청지기’, '담아두는 용기'라는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
    세상 모든 것을 잘라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아두는 곳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저장실, 내실, 침실, 거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골방이란 바깥과 대조되는 조용하며 비밀스런 공간을 뜻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안에는 제사할 때에 사용할 떡이나 분향할 향이나 기름을 만드는 방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방이 '골방'입니다.
    그리고 '골방'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고, 지정된 사람만이 그곳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그것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분향단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향을 만들어서 피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떡상이 있는데, 그 위에는 12개의 떡을 6개씩 2줄로 놓아야 했습니다.
    떡이 12개인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며 6개씩 2줄로 놓은 것은 이스라엘의 6지파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나머지 6지파는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법으로 받아서 억지로 하게 되면 저주가 되며, 진리로 받아서 기쁨으로 행하면 복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법도 억지로 지키려고 하면 자유함을 누릴 수 없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법을 무시하며 자기 멋대로 살면, 법에 의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법을 지키면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법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복과 저주를 우리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은 즐겁게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불평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따라서 힘이 들더라도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비난하며 살아간다면 부정적인 생각과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잘 차려진 떡상이나 분향단이나 등대를 보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멋진 표면적인 것만 눈에 보이므로 골방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떡상에 떡이 차려지기까지 어떠한 수고가 있었는지, 분향단에서 향을 피우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대에 불을 피우기 위하여 어떻게 기름을 만드는 지에 대해 감추인 것, 숨은 것 즉 진리를 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골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따라서 골방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지성소란 성전을 말하며 성전은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신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따라서 골방은 어느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인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그곳 또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본향(本鄕) - 천국(天國)

    παράδεισος

    βασιλ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932

    1. 왕권.
    2. 마 4:8
    3. 하나님의 왕국
    발음 [ basilĕia ]
    어원
    935에서 유래
    • 1.
      왕권, 왕의 지배, 왕국, 왕의 권위, 눅1:33, 19:12,15, 22:29, 23:42, 고전15:24, 히11:33, 계17:12.
    • 2.
      왕국[즉 왕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 마4:8, 12:25,26, 24:7, 막3:24, 6:23, 13:8, 눅11:17,18, 21:10.
    • 3.
      하나님의 왕국[주로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대하여 묵시적 어귀에 사용 되어지고,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종말적 개념]. [주] β. τοῦ θεοῦ와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유대인들이 οὐρα- νός를 θεός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 a.
        β. τῶν οὐρανῶν, 마3:2, 4:17, 5:3, 10등 마태복음에만 나옴.
      • b.
        β. τοῦ θεοῦ, 마6:33, 12:28, 21:31, 43, 막1:15, 4:11,26,30, 눅4:43, 6: 20, 7:28, 8:1, 요3:3,5, 행1:3, 8:12, 14:22, 19:8, 28:23,31, 롬14:17, 고전4:20, β. θεοῦ 고전6:10, 갈5:21.
      • c.
        β. τοῦ πατρός, 마13:43, 26:29.
      • d.
        β. αὐτοῦ, 마13:41.
      • e.
        β. τοῦ πατρὸς ἡ- μῶν Δαθίδ, 막11:10.
      • f.
        ἡ β. αὐτοῦ (=κυρίου) ἡἐπουρανιος, 딤후4:18.
      • g.
        αἰώνιος β. τοῦ κυρίου, 벧후1:11.
    • 관련 성경  /  천국(마3:2, 13:31, 18:1), 만국(마4:8, 눅 4:5), 나라(마6:10, 눅1:33, 행1:3), 왕권(마16: 28), 왕위(눅19:15).
      [동] 다스리다(계17:18).

    앤소니 드 멜로우(1931-1987)라는 신부님이 쓴 '종교박람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로 평생토록 영성 지도, 영성지도자 양성으로 헌신하며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앙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종교박람회」 분도출판사

    드멜로 신부가 쓴 이 짤막한 단상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성실히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죠.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들음과 올바른 들음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은, 우리가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이미 자신이 생각한 것을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싶으면 가슴이 시원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싶으면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들음’이다.


    ‘올바른 들음’은

    단순히 남의 말에 찬성과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무슨 말이듣지 '듣겠다'는 겸허한 자세로)

    즉  '개방된 태도,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이고

    '그렇게 듣고서, 내게서 배움이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나십시오」


    그러므로 ‘들을 때’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한 수도자가 밤에 창문을 열고 명상 기도를 드리는데

    바깥 개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제발 조용해!”


    화가 치민 수도자의 마음에 즉시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너도 기도하고 있고, 저 개구리들도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데

    너는 왜...?’


    개구리들이 소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후부터 수도자에게 개구리들은 도리어 ‘기도의 동반자’가 되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바다로 간 소금인형」에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네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은, 정작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몰아붙여보아도, 힘만 더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수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느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라는 친구의 말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안에서 바다 찾기.


    “실례합니다.” 라면서

    어린 바닷물고기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바다라...?”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인 것 같으냐?”


    “아, 여기 말이에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바다.”


    실망한 어린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다시 헤엄쳐 나갔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


    옛날에 매우 믿음이 깊은 성자가 있었는데, 천사들도 그를 늘 주목했다.

    그는 대단히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늘 보통 사람으로서 순진무구하게 살았다.

    진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인지 몰랐다.

     

    (신발이 발에 맞을 때는 발을 의식하지 않는다.

    옷이 허리에 맞을 때는 옷이나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실제로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면이 있다.

    매사에 신경을 써서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그런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아직 성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리라!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직접 치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무수히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일은 주님의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덕행의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주님만 관심의 초점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정 그러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성자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 곳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즉 그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마른 땅에 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 성자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자기가 지나간 후에 항상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그 그림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성인은 잊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성자는 교만으로 넘어지지도 않았고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그 성자의 소원도 충분히 성취되어졌다. 

     


    보석보다 더 귀한 것

    어떤 수도사가 여행 중에, 우연히 빛나는 보석을 하나 발견해서는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는 한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수도사가 음식을 나누기 위해 자기 등짐을 풀자, 거기에 빛나는 보석이 보였다.
    그 동행한 여행자는, 보석을 보고는, 그 보석을 자기에게 달라고 수도사에게 부탁했다.
    수도사는 기꺼이 선뜻 그 보석을 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각자 자기 길을 갔다.
    보석을 얻은 여행자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평생 부와 안락을 보장해 줄, 값비싼 보석을 얻은 행운에 기뻐 뛰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수소문 끝에, 보석을 들고 이 수도사를 다시 찾아왔다.
    그는 수도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에게 이 보석보다 더 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것을 나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었습니까?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목마른 내 영혼」The Unknown God에 나오는 앤소니 드 멜로의 글

    소문

    1946년 여름, 기근이 휩쓸 것이라는 소문이 남아프리카 대륙을 휩쓸었다.
    사실 곡식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날씨도 추수하기에 정말 좋은 기후였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놀란 2만 명이나 되는 소작농들이 농토를 버리고 모두 도시로 도망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고 남아있던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졸지에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근이 든다는 소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앤소니 드 멜로우라고 하 는 신부님이 쓴 '종교박람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 는데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낸 친구, 그는 믿지 않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더불 어 대화를 나누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 가 처음 예수 믿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래, 자네 요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며?" 라고 묻습니다.
    "그렇게 됐네"라 고 대답합니다.
    "그럼 그리 스도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알겠구만."
    "글세.. 뭐 그렇 게 아는 것이 없는데.."
    "그러면 내가 묻겠는데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 태어났나?"
    "모르겠는데.."
    "그러면 몇 살 때 죽었지?"
    "그것도 모르겠 는데..."
    "설교를 몇 번이나 하셨나?"
    "그것도 모르겠는 데..."
    대화가 이쯤 되니까 그 믿지 않는 친구가 예수 믿 는다는 친구를 비웃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구만. 그래도 예 수 믿는 건가? 한심하게 보 이누만."
    그때에 예수 믿는 친구가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별로 아는 게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으네.
    그러나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달라진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걸 알기 시작했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에게 변화가 왔구 만.
    내 자신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내가 보고 나 스스로 놀라고 있네.
    자네도 알다시 피 3년전 까지는 나는 주정뱅 이요 빚도 많았고, 가정은 산 산조각이 나고,
    내가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와 아 내 할 것 없이 온 집안 식구 가 나를 무서워했네.
    그리고 모두가 나를 반가와 하지 않았고, 또 반가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기에 늘 골 부리면서 화를 내며 그렇 게 살아왔는데 예수 믿고 달 라진 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반가와 하네.
    또 나도 내 가족들과 아이들과 만나는 것이 이렇게 반갑고 즐거울 수가 없구만.
    그리고 나는 몰랐는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 그 한 가지를 배웠네.
    그러고 보니까 감사하고, 내가 사는 하루 하루의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삶 자체가 소중해졌네."

    이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 믿지 않는 친구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어서 얼마나 공부를 했습니까?
    가끔 보면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 자신은 하나도 안 달라지는 사람이 있어요.
    어느 젊은 목사님의 설교에 그런 말이 있더라구요.
    지방에 살면서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하숙을 했는데 그 하숙집 주인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에요.
    전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고, 전도 많이 해서 전도상도 타고 이런 권사님인 데 좌우간 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때는 온 동네가 알게 시끄 럽게 싸우는 거예요.
    이 청 년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저렇게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이 왜 사람은 저 모 양일까? 왜 이럴까?' 이거 고민하다가 그거 해결하겠다고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데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은 혹은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과 사랑으로 인 해서 내가 나도 모르게 달라 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경건이요, 경건의 능력이요, 경건의 신비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사람 하나가 경건하게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 이방인의 경건이 있는데 그건 아주 심 각한 신학적 의미를 가졌습니 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하 시기를
    "예루살렘과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 파 되겠다."고 했는데 사도행 전은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된 이야기 사마리아의 전도, 그 다음에 땅 끝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가이사랴에 와 있 는 로마 사람 전형적인 로마 백부장이 예수를 믿는 겁니다.
    땅 끝으로 향하는 관문 이요.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 니다.
    그는 군인입니다. 점령지의 군인이요, 부자요, 이방인인데 이 사람이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노골적으로 민족 차별을 하던 남아 공화국을 여러분이 아실겁니 다.
    거기에 있던 실화입니다.
    남아공화국 거기는 흑인, 백인이 따로 따로 예배를 드리는데 흑인 교회에 Holy Church of Zion, '시온성교 회'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성만찬을 하기 전에 세족예라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겁니다.
    여기에 그 세족 예가 있는 날 올리버라고 하는 백인이면서 대법원장, 지체높은 대법원장이 이 흑인 교회에 혼자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세족예를 하는 시간에 자기가 지명해서 마르다라고 하는 여성을 불러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서 발을 씻어 줍니다.
    모든 사 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백인이, 그것도 귀족이, 고관이 어떻게 흑인의 발을 씻기느냐?"
    그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집에 노예로 있던 사람입 니다.
    한평생 우리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씻겨 주었습니다.
    그걸 내가 늘 보면서 마음이 괴로웠는데 오늘 내가 이 거룩한 날 우리집의 아이들을 씻어준 바로 이 사람, 내가 그의 발을 씻겨 주어야 만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발을 한번 씻겼는데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은 이 대법원장은 이것 때문에 파면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경건이 뭡니까?
    오늘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요.
    정치적으로는 로마 군인이요.
    당당한 로마 군인 문화적으로는 헬라 철학에 도통한 사람이요.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점령지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단 말이요.
    이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조그만 한 것, 별 것도 아닌 것을 극복하지 못해서 예수 못 믿는 사람 많습니다.
    어떤 남편은 부인이 집사인데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왜 안 나오냐?"

    그러니까  "마누라가 먼저 나가서 예수 믿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갈 수 없잖아요."



    도대체 몇 푼 가 졌다고 이렇게 거만한 겁니 까? 사람 이런 것 다 벗어 버리기가 이게 쉬운 게 아닙 니다.

    제2차대전 나찌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을 때 독일 사람들이 이 유대 사람을 전부 죽이기 위해서  "유대 사 람은 전부 가슴에 노란 별을 붙이라."

    그랬어요. 전부 노 란 별을 붙이게 될 때 이래가 지고는 하나씩 하나씩 잡아가 는 거예요.
    잡아다 처형하는 거예요.
    덴마크 크리스찬 10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온 국민에게 "다 노 별을 붙여라. 덴마크 사 람은 다 붙여라."
    모두가 노란 별을 붙였습니다.
    이것으 로 인해서 어떤 불이익이 온 다하더라도 우리는 유대 사람 들이 죄없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하는 일이 좋은 일이지만은 첫째는 받는 사람이 받을만 해야지요. 받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돼 요. 하나님의 마음을. 그걸 잊지 말아야 돼요. 이게 얼 마나 귀한 일인지 몰라요. 난 그래서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대하 16장 요약

    아사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하였고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가 가두고 이후 아사가 발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 요약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고 점점 강대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8장 요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여호사밧의 동맹,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라못을 공격하기를 제의,선지자들 400명에게 물어보는데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엿지만 이를 무시하고서 아람과 싸우다가 아합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7일(토) 역대하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의 눈(16:9)

    여호와의 눈은 온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You have done a foolish thing, and from now on you will be at war.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

    신명기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열왕기상 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잠언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말라기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두 눈을 가졌는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주님께서는 돈 중심의 세상을 하나님 중심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이런 눈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눈은 밝은가. 밝아도 돈에 미친 벌레 눈이 아닌가. 마땅히 돈을 사랑한 벌레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새의 눈으로 살아야 한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데 영어의 정월(January)이라는 말은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서 온 말이다. 지난 과거의 역사도 보고 창창한 새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새 출발이 된다는 뜻이다.

    한 쪽에 치우치고 한 쪽 눈으로 보는 그 확신만 지닌 채 밀고 나가면 소망이 없다.
    국민총생산지수(GNP)도 보고 국민총행복지수(GNH)도 보며, 세상 나라의 번창도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의 왕성함도 볼 줄 알아야 희망이 있다. 




    눈동자

    사람이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과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합니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검겨 눈동자를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마치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

    한 유대 청년이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은 비록 없어도 서로 돕는데 왜 부자가 되면 남을 돕지 않을까요?'
    '창밖을 내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예, 어린애와 그의 엄마가 걸어가고 있네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자, 그럼 이번엔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제 모습밖에는 뭐가 보이겠습니까!'
    '바로 그것이야, 창이나 거울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네만 유리에다 은칠을 하게 되면 자기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네'.

     

     

     

     
     
     

    안목

    눈으로 본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겠다.
    겉모습을 본다는 뜻과 사물의 본질과 가치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겉모습은 시력으로 보고 본질과 가치는 안목으로 본다.

    * 최고의 안목은 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보는 눈!

    그 눈은 결코 하루 아침에 열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안목도 자라납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속사람'을 튼실히 잘 키워야 비로소 자랍니다.


     

     

     

     
     
     

     믿음의 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느 외판 사원이 여러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늘 물건을 못 파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그의 판매 실적은 아주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이 두려움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말씀 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암기하여 그 말씀을 통해 두려움을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그 카드에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 17:20)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여러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말씀은 외판원에게서 두려움을 몰아 내고 판매 실적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어두운 인생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등불이 되고 안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
    믿음을 가진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은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학적인 말이자 심리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 즉 사실에 부딪힌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그 사람의 믿음의 자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환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 환난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절망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 1-2)






    믿음의 눈

    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본 것을 열 사람의 정탐꾼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장애물 속에서 기회를,
    장애물 속에서 비전을,
    장애물 속에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구름이 우리 앞을 막을 때에도
    구름 뒤에 있는 태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의 눈을 가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도 주님이 우리 손을 놓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장애물 너머에 있는 주님의 축복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

    대학 4년 동안과 대학원 2년 동안 내게 라틴어를 교수해 주시던 파울로스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 두 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라틴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이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같은 학과 친구와 함께 교수님 댁을 찾아가 잠깐 만나 뵙고 나왔지만, 그때의 방문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는 한 가지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방에 붙어 있던 라틴어로 쓰여진 짧은 문구였다.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
    ’)
    한참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터이라 그 문구는 유별나게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Coram Deo, 코람 데오) 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진지한 삶의 자세일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이래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눈치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고 체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자세에 비교한다면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은 얼마나 귀한가?


    예견의 눈

    알래스카주는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아무데도 쓸모없어 보이는 얼음덩어리인 이 땅을 제정러시아로부터 사들였습니다.
    미 의회는 발칵 뒤집혀 대통령에게 온갖 질책과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황금과 백금광산, 풍부한 어장, 우거진 삼림, 엄청난 석유 매장량 등으로 황금박스로 불리고 있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그 땅의 가치를 예견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알래스카를 사는 것 같은 축복의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바라보는 예견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생겨도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오히려 더 복받을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환란과 역경이 닥쳐도 언제나 당신의 각본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감사하고 찬양하여 큰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예견의 눈을 가진 성도가 됩시다.


    가능성을 보는 눈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의사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 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 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기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코와 눈

    사이좋게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던 코와 눈이 어느 날부터 서로 비쭉거리더니 싸우게 되었다.
    코 : 너는 쑥 들어가 볼품이 없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얼굴이 예쁜 것은 내가 오뚝하게 나와 있어서이다.
    눈 : 뭐야? 내 눈이 볼품이 없다고? 그래? 그렇다면 너 한번 당해볼래?
    화가 난 눈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넘어져 코가 깨지고 말았다.
    흐르는 코피를 솜으로 틀어막은 코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냄새를 맡아 주어서 나쁜 것을 먹지 않아 건강하게 산 것도 모르고…”
    코는 궁리 끝에 대변을 쌈장처럼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볼 줄만 알았지 냄새를 맡지 못하는 눈은 대변으로 상추쌈을 먹었다.

    세 가지 시력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다.
    첫째. 신체적 시력
    둘째. 정신적 시력
    이성(理性)이 밝아야 한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이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
    셋째. 영적 시력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토마스 제퍼슨

    미국, 어느 강의 나루터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 벌벌 떨면서 서 있었다.
    누가 자기를 좀 강 저편으로 건너 주기를 청하려는 것이었다.
    마침 말을 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선뜻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말을 탄 사람들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노인은 맨 마지막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한 청년을 유심히 처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를 좀 강 건너편으로 건너줄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선뜻 노인을 말에 태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을 다 건너가서 이 청년은 노인에게 물었다.
    "제 앞으로 많은 군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갔는데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지나가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고 있었네.
    그러나 자네를 앞선 사람들은 모두가 아주 피곤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엇인가 가득 차 있어서 남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네.
    그런데 젊은이의 눈을 쳐다보았더니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으며, 이리저리 주변 풍경을 살필 줄도 알더구먼.
    그래서 젊은이에게 부탁했던 것이오."
    이 청년은 그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여호와의 눈(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다. 살아계 신 신이신 여호와께서 그 눈으로 우주 만물과 인간의 심령까지를 살 피신다.

     1. 여호와의 눈은 어떤 눈인가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슥 4:10)이 는 여호와의 눈이 일곱(7)으로써 온 세상을 살피신다는 표현이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잠 15:3)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 라(신 11:12)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왕하 19:16).

    여호와의 눈은 살피시는 눈이신데 그 범위는 온 세상을 살피시되 악 인과 선인을 아울러 살피시는 공평한 판단을 하실 수 있는 감찰자 이 시다.

    또 세초부터 세말까지는 시간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나중까지 언제 나 항상 살피시는 눈이시니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잠시라도 감찰하 심을 쉬거나 살피심을 못하심이 없아온즉 누가 그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요.

     2.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 감찰하신다는 말의 뜻은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바로 살피고 깊이 살 피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 선인과 악인을 살피시는 중에 악인 의 범죄상을 색출(索出)하기 위한 탐색(探索)이나 숨겨 둔 죄상을 적 발(摘發)하기 위한 추궁(追窮)적 자세가 아니라 보다 더 선인들이 전 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것을 보시려고 감찰하신다.

    다시 말하면 선량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여 나오는 모 습을 보시려는 눈이시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찾아 보시는 눈이시다. 사랑이 담뿍 담겨져 있는 눈이시요,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자비하신 눈이시다. 그 눈길을 사람이 피할 수 없다.

    바다 건너 먼 곳에 가도, 골방 속에 홀로 숨어도 어떤 비밀한 장소 에 가서 꼭꼭 숨어도 하나님의 눈은 다 살피시고 나아가자.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눈은 우리들의 마음 속을 살펴 보시는 신령한 눈 이심을 깨닫고 바로 살아야 한다.

    여호와의 눈(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The eyes of the LORD are everywhere, keeping watch on the wicked and the good.

    잠언 5:21
    대저 사람의 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For a man's ways are in full view of the LORD, and he examines all his paths.

    욥기 34:21
    하나님은 사람의 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His eyes are on the ways of men; he sees their every step.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Does he who implanted the ear not hear? Does he who formed the eye not see?

    성경을 읽으면 종종 『여호와께서 보시매 좋았더라』하는 구절과『여호와께서 보시매 악하였더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이 우리 인간을 보십니다.
    감찰하십니다.
    주목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 하리라.』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흔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은 거울(鏡)을 발명하였습니다.
    옛날 동판이나 철판을 갈아서 거울로 사용하였습니다.
    현대는 유리로 거울을 더 많이 만듭니다.
    문명할수록 거울이 더 커지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가서 여관에 들어  보면 그저 방마다 문짝 같은 거울을 달아 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현대 문명은 거울의 문명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보기를 좋아하고 또 보통 자기가 잘 생긴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이런 관심을 가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잘 보이기 위해서 얼굴도 단장하고 좋은 옷도 입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말을 듣게 되면 분노합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여론을 때때로 조사합니다.
    또는 국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알기 위해서 정보원을 각처로 파송 합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 스스로 잘난 줄 생각하고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일시 칭찬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사람이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높이 보았고 모든 신하들과 국민들이 그를 역시 높이 보았습니다.
    큰 나라의 제왕이요, 금은 보옥(寶玉)이 많습니다. 지위가 높습니다.

    하루 저녁은 천여 명의 귀객들을 초청하고 큰 연회를 배설하였습니다. 술과 많은 음식을 만들고 예루살렘 선전에서 쓰던 그릇까지 가져다가 술을 마시며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담 벽에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데『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뜻은「메네」는「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함이요,「데겔」은 왕이「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함입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서 바벨론 이라고 하는 나라는 멸망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얼마나 중량이 잇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누구나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람을 관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은 어떠한 눈입니까? 여호와는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역대 하 十六장 九절에는『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나 있습니다. 높은 데가 없고 깊은 데가 없습니다. 먼데가 없고 가까운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 이 우주, 어디나 어느 거석이나 다 꼭 같이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나 감찰하시고 언제든지 살피는 눈입니다.
    졸며 쉬지 않는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졸 때도 있고 잘 때도 있으나 하나님의 눈은 졸거나 잘 때가 없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어두우나 밝으나, 흐릴 때나 개일 때나, 우리가 잘 때나 깰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현재만 봅니다. 하나님의 눈은 과거도 현재와 같이 보시고 미래도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모태에서 내 형체가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습니다』그 뿐만 아닙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죽을 것도 주의 눈은 미리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이 주의 눈은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을 살피십니다.
    사적 생활, 공적 생활, 사회 생활, 문화 생활, 직장 생활, 정치 생활, 모든 인간의 활동 상황을 살피십니다.
    인간의 역사와 모든 하는 일을 살피십니다.
    정치도 살피고, 선거도 살피십니다.
    이 눈은 3. 15선거를 살폈습니다.
    이 눈은 외면만 보는 눈은 아닙니다.
    내면까지 꿰뚫어서 엑스광선처럼 보시는 눈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기름 부어서 장차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하는 명을 받고 베들레헴에 갔을 때에 키가 크고 용모가 잘 생긴 이세의 맏아들 엘리압이 왔습니다.
    사무엘이 척 보니 아주 잘 생겼습니다.
    『아! 이 사람이 필연 왕이 될 모양이다.』기름 부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 에게 속삭이는 말씀은『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아라. 나는 이미 이 사람을 버렸노라.』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 그 사람, 그 야심, 그 상상, 그 심리의 증상, 요샛말로「콤플렉스 옵세션」(Complex Obsession)까지, 프로이드의 현대 심리학이 발전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벌써 우리 마음속 깊은 자리를 보고 계십니다.

    에스겔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떤 곳으로 인도했는데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잘 안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벽을 헐어라!』그 구멍을 크게 만들고 헐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또 큰문이 닫혔습니다.
    『그 문을 열어라』그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 속에는 온갖 더러운 벌레와 더러운 짐승들과 그 방의 벽에는 모든 우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그 우상들에게 분향을 하고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마는 실상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며 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을 보노라.』

    사람의 마음을 담으로 쌓아 놓고 문으로 꼭 닫은 다음에 내 속을 누가 알겠는가 합니다.
    사실이지요! 사람은 모르지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시편 39편에 부르짖은 바와 같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눈으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감찰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노아 때에 모든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꼭 그대로 보응 하였습니다. 이런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아합과 이세벨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런 눈으로 압살롬을 보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만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가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눈으로 무솔리니는 보았고, 이런 눈으로 히틀러를 보았고, 하나님께서 감찰하신 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지금까지도 작은 무솔리니, 작은 히틀러를 감찰하시고, 또 보응 하십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동일행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안전에서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는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짓지마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안에서 죄는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후에 깨달았고 시편 51편에 고백한 대로『주님이 시요,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이 악한 일을 하였나이다.』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습니다. 아간이 의복과 금은을 감출 때에 은밀히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은 30을 받을 때에 은밀히 대제사장과 단 둘이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받았습니다. 작은 죄나 큰 죄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이나 밖이나 꼭 같이 보시는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의 악한 생각을 악한 생동과 같이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음욕을 품으면 벌써 너희가 마음속에 간음을 행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마음가운데 누구를 미워하면 네 속에 이미 살인을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마는 특별히 외식하는 이를 미워했습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곁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모든 죄가 가증하지마는 외식하는 죄는 두 가지 죄가 겸했습니다. 더러운 속에 있는 죄, 그것을 가리우는 거짓 죄… 그러기에 성경은『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할지어다.』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목도하십니다. 여호와의 이 눈은 공의의 눈일뿐더러 사람의 눈이요, 자비와 긍휼의 눈이요, 아버지의 눈도 되십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나일강 변 갈대밭에 버림을 받고 외롭게 울 때에 하나님의 눈은 그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보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무고하게 압박을 받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백성의 곤고 한 것, 그 슬프고 억울한 것을 내려다보셨습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오미와 룻, 외로운 두 과부가 모압을 떠나서 베들레헴을 향해서 옵니다.
      그 외로운 모습,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 불쌍한 여인들,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曠野)길을 갈 때에 피곤하였습니다. 더 걸을 수 없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는 피곤해서 앉아서 잠이 들었습니다. 외로운 광야 길에 피곤(疲困)히 잠든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께서는 보셨습니다. 다른 이는 볼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먹을 것과 물을 주어서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이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모양입니다. 은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군문(軍門)에 있는 백부장 이올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은밀히 기도를 하고 남모르게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자선사업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고넬료를 보셨습니다. 기도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해서 온 가정을 처음으로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행하며 그를 진심으로 의지하는 이를 찾아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을 보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억울한 경지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선한 사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눈이올시다.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갔는데 옛날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거기 헬라 정통교회에 들어가면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은 아주 폐지했습니다. 주후 八세기에 아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만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천장과 담으로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면 이 강대, 저 아치 맨 위에 무슨 그림이 있는고 하니 큰 눈(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 하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든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신목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일 밝은 것이 번갯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슬리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고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해 주십니까? 사도 요한 은 말씀하셨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하나님께서 몰라서 자백하란 말 아닙니다.」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볼지어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오늘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 이 시간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새가 알을 품고 있듯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 죄를 자백하고 내놓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보시기'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 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행동을 감찰하고 판단하는데 사용된다.
    이 어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거나 혹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의 문구와 함께 사용된다.
    솔로몬 왕이 이방 여인들의 신들을 따랐는데 이 일을 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열왕기상 11장 6절에서 여호와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 악에 대한 결과로 여호가 진노하여 다윗왕국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즉 코람 데오의 사상과 관련된다.
    여호와의 눈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해당된다.
    여호와의 눈과 반대되는 '인간의 눈'(역대하 20:12)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표현이다.
    유다왕 중에서 눈과 관련된 가장 비참한 기록은 열왕기하 25장 7절에 나온다.
    갈대아 군사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시드기아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다는 내용이다.
    여호와의 눈 앞에서 비극적인 심판의 모습을 보인 유다 왕 시드기야 눈을 대조적으로 보여는 장면이다.

    구약성경

    신명기와 이스라엘의 백성들

    • 신명기 6: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율법과 명령을 바르게 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 열왕기 상, 하 그리고 역대상, 하에서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열왕기상 11: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 열왕기상 14: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 열왕기상 15:5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 열왕기상 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 열왕기상 16:7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 역대하 20: 32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 역대하 25: 2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 역대하 26: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 역대하 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 역대하 29:2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3]

    성문서(케투빔)

    시편과 잠언서에는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개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을 주로 기록하였다.

    • 시편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잠언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 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곳

    여호와의 눈은 마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어 나온다.

    • 열왕기상 9: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역대하 13장 요약

    유다 아비야여로보암과 전쟁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요약

    아비야가 죽고 이후 아사가 왕이 되었으며, 아사는 올바른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계명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였고, 구스유다를 침공하지만 아사가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가 15장 요약

    오뎃의 아들인 아사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아사는 개혁정치를하였고, 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6일(금) 역대하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경고의 나팔(13:1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God is with us; he is our leader. His priests with their trumpets will sound the battle cry against you. Men of Israel, do not fight against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s, for you will not succeed.

    경고의 나팔(The trumpet of warning)

    남유다 제2대 왕 아비야는 북이스라엘 제1대 왕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를 얻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손자이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남유다 제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3년째, 솔로몬의 신하였던 북이스라엘 제 1대 왕 여로보암과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아비야는 4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했고, 여로보암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80만 명의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양 진영은 에브라임 산지의 스마라임에서 맞서게 되었습니다.

    전투에 앞서 남유다 아비야 왕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외쳤습니다.
    그는 다윗 언약을 언급하며 여로보암의 반역과 우상 숭배를 지적했습니다.
    아비야는 유다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제사장들과 율법을 지킨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울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몰래 유다의 후방을 포위하였고, 아비야는 앞뒤로 끼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유다를 대신하여 싸워주셨고, 북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유다 군은 북이스라엘을 추격하여 벧엘을 포함해 여러 성읍을 점령하였고, 여로보암은 그 이후 다시 힘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치심을 입어 죽음을 맞았고, 아비야는 점차 권세를 더해가며 통치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병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 유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가 숫자에서 오는 압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과 능력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아비야 왕의 군대는 여로보암의 병력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나 외적 조건보다 마음의 정직함과 신실함을 보는 분이라는 것을 역대하 13장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의 능력이나 자원, 혹은 주변의 환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남유다 아비야 왕의 이야기는, 숫자의 열세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알려줍니다.
    현재의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어떤 전략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뢰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함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더욱 강건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되살리고, 신실하게 그분을 따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

    • “Ought ye not to know that the LORD God of Israel gave the kingdom over Israel to David for ever, even to him and to his sons by a covenant of salt ?”​(2 Chronicles 13:5, KJV)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는 소금 언약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Covenant of salt [ˈkʌvənənt əv sɔːlt]​ :
      ‘Covenant’는 계약이나 언약을 의미하며, ‘salt’는 소금을 뜻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영속성을 상징하는 물질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covenant of salt’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 ‘소금 언약’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이스라엘 왕국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확고하고 변치 않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특성 때문에 영속성과 순결함을 나타내며,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특별하고 영원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경 속의 나팔

    성경에서 나팔은 다양한 이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용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기 위해
    2.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
    3. 성회로 모이기 위해
    4.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5. 천재지변을 경고하기 위해
    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기 위해

    나팔은 또한 기쁨, 승리, 심판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나팔 소리가 울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민수기 10장에서는 나팔 소리가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용기와 결의를 느꼈습니다.

    나팔은 성경에서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승리, 심판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나팔은 또한 기쁨, 두려움, 용기와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나팔

    민수기 10장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을 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팔은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민수기 10: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신명기 20장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나팔을 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와 결의를 불어넣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나팔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용기와 결의를 불어넣으며,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단순히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의 나팔도 있습니다.
    이 때는 전쟁이 일어났으니 빨리 피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6: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성회와 관련된 나팔

    성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나 스스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특별한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서 모임을 알리고 함께 모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레위기 25: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 민수기 29장1절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속죄와 회개를 위한 나팔

    성경에서 나팔은 회개와 속죄를 부르기 위한 신호로 사용됩니다. 민수기서 10장에서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백성들이 속죄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나타냈습니다.

    기쁨의 나팔

    • 역대상 13장8절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역대하 5장13절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자랑의 상징적 의미

    여기서 나팔을 불다는 진짜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것은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마태복음 6장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재림 / 심판과 구원의 의미

    재림과 심판은 전쟁의 나팔과 같은 의미입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 종말 또는 심판의 때가 되었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 마태복음 24장 31절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고린도전서 15장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불안전한 회개 :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그리고 인간의 불순종과 불완전한 회개가 교차하는 신앙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2장 줄거리 요약

    르호보암이 왕권을 견고히 한 후, 그와 온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애굽 왕 시삭을 도구로 사용해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시삭은 1,200대의 병거와 60,000명의 기병, 그리고 리비아, 숙, 구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유다 방백들에게 와서, 그들의 배교가 이 재앙의 원인임을 전했습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은 이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순복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하지 않기로 하시고, 시삭이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되, 도시는 보존하셨습니다.
    특히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들도 빼앗겨 르호보암은 이를 대신해 놋방패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르호보암은 부분적으로 회개했지만, 그의 통치는 여전히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며 다스렸고 41세에 왕이 되어 17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에 평생 분열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르호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비야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법을 버릴 때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르호보암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징계하심으로써 길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징계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이 겸손해졌을 때, 하나님은 완전한 멸망이 아닌 자비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조차도 우리를 돌이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도 성공이나 안정을 얻은 후 하나님을 잊기 쉬운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위기의 순간뿐 아니라 평안할 때 더욱 의도적으로 유지해야 함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나아가야겠습니다.

    버리다, 포기하다(Forsake)

    • “he forsook the law of the Lord, and all Israel with him.” (2 Chronicles 12:1, KJV)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도 본받은지라
    • Forsake [ fər|seɪk ]: (의도적으로) 버리다, 포기하다, (사람, 원칙, 신념 등에서) 떠나다 (과거형 forsook)
    • 성경에서 ‘forsook’는 단순한 물리적 이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도적으로 저버리는 것, 즉 영적 배교(spiritual apostasy)를 나타냅니다.
      역대하 12:1에서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율법을 ‘forsook’ 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통치력을 신뢰하며 자기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나 약함이 아니라 의지적이고 지속적인 불순종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죄로 간주됩니다.




    경고의 나팔들(요한계시록 8: 6-13)

    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인상이 까다로워 보이는 사람 중에 사귀어 보면 의외로 수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수록 평안하고 다정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첫눈에 보면 계시록은 어려운 책입니다만 계속 살펴보면 의외로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상징과 환상으로 복잡한 책이라기보다는 의외로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책입니다.
    어떤 때는 미래에 대하여 수수께끼 같기도 하나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분명한 소망과 위로를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6장과 8장 초두에는 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입니다.
    7장은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 막간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장 6절부터는 일곱째 인을 떼는 장면에 이어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부는 환상으로 연결됩니다.

    일곱 인을 떼는 사건, 일곱 나팔을 부는 사건,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사건이 계시록의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일곱 경고의 나팔이 차지하는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난 후, 일곱 경고의 나팔이 주는 메시지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에는 일곱 경고의 나팔 가운데 처음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는 일곱째 인봉을 떼는 환상에 이어 등장합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마치 일곱 인이 다 떼어지고 난후, 일곱 나팔이 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곱 인을 떼는 사건, 일곱 나팔이 부는 사건, 그리고 뒤에 살펴 볼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인 사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삼중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일곱 인을 떼심으로, 일곱 나팔을 부심으로.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부음으로 경고의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역사 속에 속히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상징을 달리해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기 직전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들을 다른 상징들을 사용해서 묘사합니다.

    세 가지 일련의 심판행위의 묘사를 통해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숨 막히는 절정으로 이끌어 갑니다.

    다시 말하면, 일곱 인봉을 다 뗀 후에 일곱 나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일곱 인봉의 경고가 먼저 있고 후에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같은 재난과 경고를 다른 상징을 사용해서 거듭 강조할 뿐입니다.

    일곱 인봉을 떼는 사건과 일곱 나팔을 부는 사건을 좀 더 대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봉과 나팔

    일곱 인봉을 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요한 고유의 개념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 양 예수께서 일곱 인을 떼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비록 두 번째 인을 떼실 때부터 어린 양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지만 모든 인봉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 예수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조간신문이나 저녁뉴스를 통해서 세상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남을 보고 있지만 그 모든 일의 배후에서 역사의 인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그 분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요한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분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인을 떼시는 일에 비해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나팔의 상징은 이스라엘 역사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익숙한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전쟁 시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위기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소집하기 위해 불었습니다.

     

    나팔의 기능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할 때에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파수꾼이 접근하는 적을 발견하고 나팔을 불듯이, 에스겔은 자신을 그 백성에게 경고하는 자로 선택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알려주는 일을 그의 사명으로 인식했습니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멸망에 이르면 그 책임은 백성 스스로 져야 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으로서 선지자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아니했다면 선지자는 그 백성의 파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위기와 전쟁을 알리는 일에만 나팔을 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해방과 기쁨의 날을 알리는 일에도 사용하였습니다.

    나팔을 불어 알리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는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동일한 여호와의 큰 날이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던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큰 날은 해방의 날입니다.

    나팔 소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많은 이스라엘 인들은 나팔 소리를 들을 때 공포 대신 기쁨을 연상했습니다.

    축제의 날에, 대 속죄일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 속죄일로 그 절정을 이루는 칠월 첫 날에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어 회개의 기회가 시작됨과 새해가 시작됨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이요 하나님의 심판대신 하나님의 자비로 돌이키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울리는 나팔 소리는 또한 구원의 새 시대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포로에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나팔을 불어 평안과 위로를 주는 날을 알렸습니다.

     

    다시금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흩어진 백성을 고통에서 돌이키시며 구원하시는 일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더 나아가 죽음에서 그 백성을 깨우는 나팔 소리로 이어집니다.

    먼 흑암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빛의 나라로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심판과 회개, 해방과 구원,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왕의 등극 시에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천사장의 나팔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적인 통치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입니다.

    나팔 소리는 이 모든 풍성한 기억과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여러분은 천사가 나팔을 부는 본문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경고의 나팔
    무엇보다도 본문의 나팔 소리는 심판과 경고의 나팔 소리입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는 자연계에 엄청난 재해를 가져오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의 죽음이 초래되었습니다.
    땅과 바다, 강과 하늘, 사람이 사는 생존 환경 모두에 엄청난 재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나팔 소리를 여러분은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환경오염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소리입니다.
    생존 환경을 위협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표현하십니다.
    오늘의 인간의 삶을 - 그 목표와 양상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완전히 멸망시키리라는 경고가 환경오염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육지와 바다, 강과 하늘, 모든 인간의 생존 환경은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이전에도 자연재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쩌다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적인 재해나 미세먼지와 오존층 파괴 등은 때와 장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온 세계에 공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금 우주적, 보편적 재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떨어졌지만, 오늘날은 산성비로 인하여 7월 장마 비에도 시커먼 잎이 떨어지는 현상은 선진 공업국은 물론이고 미개발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재해와는 다릅니다.
    환경보전 운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생태학적인 재난은 인간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 .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 . 세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 . 네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 .”

    하늘로서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난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이런 환상은 수수께끼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은 더 이상 이 계시의 말씀을 수수께끼처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 강과 바다, 인간 생존 환경의 모든 영역이 오염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요 하늘로서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이 네 천사의 나팔 소리로 인한 재난은 출애굽을 연상시키지만 그 보다 훨씬 심한 재앙임을 보여줍니다.
    ‘우박과 불’이 아니라 이제는 ‘피 섞인 우박과 불’입니다.
    재난의 범위 역시 애굽 한 나라가 아니라 우주적인 재난입니다.
    나일 강만이 아니라 모든 강들의 삼분의 일에 임한 재난입니다.
    그 때는 잠깐 어두워졌으나 이제는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삼분의 일이 재난에 빠져든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체적인 심판이 아니라 국부적이라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심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경고 - 환경오염과 생태학적 재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도 자연적 재해는 늘 있었지만 그것의 피해는 시간과 장소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총체적 재난 앞에 처해 있습니다. 자연적 재해가 인류 보편적 현상이 된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세기 말엽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기 시작할 때 석탄 사용으로 인한 탄산가스의 증가로 공기오염이 심각해 질것이라는 경고를 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만에 그의 예언자적 경고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부름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보존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재난을 모면할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환경오염, 생태학적 재난은 마지막 시대를 알리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인간들이 그 손으로 행한 잘못된 일에서 부터 회개하도록 요청하시는 경고입니다.
    여러 가지 귀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입으로 엉뚱한 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고 쓸모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에서부터 돌아서라는 마지막 경고가 네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들립니다.
    삶의 환경 전부를 흔들어 놓음으로써 회개치 아니하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무위에 있는 새집을 헐기 위해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따라서 새집도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새들은 자기의 둥지가 흔들릴 때 무언가 위험한 사태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면 날카롭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재해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지막이 다 되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강, 모든 샘물의 근원에 까지 나팔 소리의 진동이 느껴집니다.
    생존 환경, 그 모든 영역에 남김없이 나팔 소리의 영향이 미치고 있습니다.
    육지와 바다, 강과 하늘 그 어디에도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의 빛이 어두워지고 땅에 죽음의 그늘이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시대마다 종말을 알리는, 회개를 촉구하는 자연계의 재난이 있었습니다.
    자연계의 재난들이 시대마다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나팔 소리는 이전의 나팔 소리와는 다릅니다.
    또 한 번의 경고가 아니라 이것은 마지막 경고의 소리입니다.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재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환경보전 운동뿐만 아니라 회개 촉구 운동에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합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로 인해 재난은 이미 우리 생존 환경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자연계 뿐 마니라 인류 자신에게 직접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영적 고통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가 여러분의 생존기반을 흔들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려워 떨고만 있으렵니까?
    이 나팔 소리와 함께 들려올 또 하나의 나팔 소리를 대망하십시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나팔 소리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경고의 나팔 소리는 마지막 일곱째 나팔 소리를 사모케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면 이 땅에 새 시대가 도래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의가 거하는 바 새 질서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어 봅시다.
    무서움만이 아니라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다가올 새 날을 사모케 하는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환경이 오염됨으로써 우리는 이 오염된 환경보다도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이 더러운 하늘과 땅이 불 태워지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돌아서도록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인생을 돌이키는 일에 쓰임 받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그 순간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역대하 10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1장 요약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싸움을 말리셨으며, 르호보암은 요새를 쌓게되고 유다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2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장(高麗葬)의 오해와 진실

    1. 개요

    1.1. 고려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설화.

    1.2. 해당 설화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해당 설화와 결합한 것은 19세기 말~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일본제국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1.3. 학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문헌학적 접근에 따른 설은 대체로 불경에 나오는 일화와 중국의 효자전에 나오는 일화가 조선에 들어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현지화 되어 전국에 퍼졌다는 것이다.

    1.4. 고려장과 비슷하다고 알려진 설화로는 일본 에도시대에 퍼진 '우바스테야마(姥捨山)'가 있으며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수상작으로도 유명한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이외에 다른 아프로, 유라시아에 걸친 여러 나라들에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설화들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노인 유기 설화는 아프로, 유라시아전역에 퍼진 공통 설화로 볼 수 있다.

    1.5. 현재에는 여러 조사들을 통해 해당 이야기들을 대부분의 경우 실존하지 않은 풍습을 다룬 아동 교육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라고 보고 있다.

    1.6. 특히 한국의 경우 이러한 행위를 풍습처럼 일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고려장은 실존하지 않는 풍습을 다룬 설화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설화로 존재하던 이야기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의해 조선 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조선의 동화를 다룬 동화집에도 실렸고, 이렇게 설화로 여겨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민중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설화이자 동화가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로 둔갑해 민중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경우이다.

    1.7. 다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 시기에 노모를 버리고 달아난 남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발적 사건일 뿐이다. 조선은 웃어른을 버리거나 학대한 자에 대해 강상죄(강상:삼강과 오상 즉 인간이 지켜할 도리)를 물어 처벌하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을 비롯한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관들을 엄히 징계하고 지역의 행정 등급을 강등시키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2. 설명

    2.1.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다.

    2.2.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일본에 의해 창작되고 명명된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속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2.3.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전설을 들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전 왕조,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린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2.4.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측에서 펴낸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가장 먼저 나온다. 다만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2.5. 하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조선에서 채집한 설화들을 엮은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 단원 말미에 동화 파트가 들어 있고, 해당 동화들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 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다만 설화의 내용은 고려장 설화와 동일하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2.6. 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즉,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날조하여 널리 퍼트렸다는 인식과 달리 노인들의 증언이나 서양인 여행자/선교사들의 기록을 본다면 결국 조선 땅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설화와 전설을 채집하여 수록한 것이다.

    2.7.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보자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동화집>을 출간하여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를 다룬 해인 1924년에 고려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속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동화책을 펴냈던 일제강점기 무렵 당시 조선 언론인들 사이에서 고려장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2.8.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는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구전 설화로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의 내용이 담긴 동화책을 펴낼 무렵인 1920년대의 조선의 언론인들은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고 오해하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2.9. 고려장 설화는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의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도정치 시기 민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이 이뤄지고 여러 재해와 환란이 발생하여 곤궁함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당 교육이 좀 더 널리 이뤄지고 여러 공연과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고, 서학과 동학을 접하며 민의 자기 정체성 자각이 이뤄짐에 따라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여러 종류의 창작 설화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배경 위에서 불경과 효자전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로 추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으로 보인다.

    2.10.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

    2.10.1. 조선시대 후기 기록 중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대충 아래와 같다. 해석을 보다시피, 고려가, 혹은 고려때에 묻거나 장례를 지냈다는 뜻일 뿐, 늙은 사람을 갖다버리는 악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2.10.2. 고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그럴 경우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내에서 쓰이게 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을 뜻하는 고려장과 다른 말이다. 마찬가지로 후술 되는 고려장과 구별해야 한다.

    2.10.3. 1908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의 고려장 굴총이라는 기사에도 용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무덤을 칭하는 말로 고려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개성 주변의 고려 고분들이 보물 사냥에 혈안이 된 도굴꾼들에 의해 대거 도굴당했다.

    2.10.4. 이런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자료로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가 있다. 발행 연도가 1942년이지만, 그 내용은 1916~17년께 조사한 고적 대장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고려총', '고려분', '고려산', '고려곡' 등으로 표기된 고분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며 그 수가 전국에 걸쳐 90여곳이나 된다. 그 시절에도 흔히 이름 모를 무덤들을 일컬어 ‘고려장’이라고 불렀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2.11.잘못 알려진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장으로 추정할 만한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웹상에 퍼져 있는데 이는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라는 구절을 '밖에 내다버리니'라고 오독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외사(外舍)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대비되어 '바깥 행랑채'를 일컫는 말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3.논란

    3.1.그리피스의 방한 여부

    그리피스는 두 차례 방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차 방문시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1926-27년 사이이다. 한때 학계는 그리피스의 1차 방문을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 그리피스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조선에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던 정수일교수를 포함한 학계는 최근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전에도 문일평이 <은자의 나라>에 실린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특히 <은자의 나라>에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 되는 주요 근거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리피스가 고대부터 1868년까지 부산이 대마도주의 영지였다는 잘못된 정보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미카도의 제국 같은 저서에서는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는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주장에 치우친 듯한, 신뢰성에 의문을 가게 만드는 저작들도 존재한다.

    그는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료는 방한 여부의 논란과 상관없이 비판적인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3.2. 일본 제국의 역사왜곡설

    먼저 고려장은 어디까지나 설화의 내용일 뿐이며, 실존하지 않은 풍습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리피스의 책에서도 관련 내용은 겨우 '그런게 있다 카더라'는 짧은 언급 딱 하나뿐이다.

    강인욱 교수(사학과 교수)는 "한국에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은 문헌 근거가 희박하다"며 "현재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게 지역 설화와 민담의 형태 외에 명시적인 기록으로 나온 건 19세기 말 이후에 외국인이 쓴 글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대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이전까지는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노인을 버리는 풍습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지 않았으나, 일제시대에 조선 내 학교에서 교육하기 위한 교재에 등장하면서 해당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일본 제국이 악의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했다는 인식이 현대 한국에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 제국에서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다. 이미 조선 말기 정체와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전 시대의 무덤들과 매장된 시체들을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고려장이라고 이름 붙여 부른 바 있다. 그리고 고려장 설화의 원전은 불경의 기로국전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기로"가 "고려" 혹은 "고리"와 음이 비슷하여 당대의 조선의 언중에게 고려로 잘못 인식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언중에게 사용되던 단어인 "고려장"과 합쳐져 현재의 고려장 설화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4.비슷한 설화들

    고려장 설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노인 유기 설화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중국<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는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귀중한 지게'라는 제목으로 나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된 것만 빼면 내용은 전부 동일 하다. 거기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전면 금지 시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그리고 고려장 자체가 실제로는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은비 까비에서는 시베리아나 몽골의 못된 풍습이 전해졌다는 뉘앙스로 전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칠순이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 가서 버렸다. 그 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게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 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크게 깨닫고 반성하며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했다.

    불교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한 나라에서 나이가 든 노인들에게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으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 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보는 거다.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1.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에 명주실 꿰기
    2.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3.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1.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

    2.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3.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그러자 중국 사신이 포기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 이설로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것 대신에 호리병 안쪽에 종이를 바르는 문제가 있으며 닥나무 풀을 개어 호리병 안을 적신 뒤 남은 물을 비우고 말리는 해법이 전한다.

    한편 일본에도 시즈오카 현 후지노미야 시에 있는 밤바 구멍(バンバ穴)의 대한 설화가 있다. 이 구멍은 입구의 크기는 1~2m 정도로 별로 크지 않지만 깊이가 20m에 달해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먼 옛날 여러 늙은 부모가 이 구멍에 유기당하였고, 자식에게 버림받아 죽은 노파의 영혼은 밤중에 구슬프게 울거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한다. 밤바 구멍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공식적으로 '부모를 버렸다'고 확언된 기록은 없고, 탐사 결과 유해 등 해당 이야기가 실존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기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려장 같은 도시 전설로 여긴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장이라 표현하는 것들을 일본에서는 ‘나라야마 부시코’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5.인터넷 용어

    인터넷 용어들이 대체로 그렇듯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 대체로 스포츠팬들이 왕년에 잘 나갔으나 노쇠화하여 팀에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노장 선수를 쳐냈을 때나, 쳐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많이 쓰인다.

    그리고, 막장 부모를 강하게 비판할 때도 "고려장 마렵다", "고려장으로 지게에 태워서 갖다 버리자" 같은 식으로 복수하자는 패드립으로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쓰이는데, "뭐하냐? 빨리 지게 태워버려", "지게 어디 있냐?", "지게! 지게 가져와!"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래서 대놓고 "고려장" 같은 표현보다는 "지게 태워 버린다" 같은 드립을 더 많이 쓴다.

    위와 같은 식으로 본래 없었던 현상이지만 유사한 논리로 고려장이라는 개념 자체는 계속 존재한다.

    6. 기타

    6.1. 폴 펠리오와 아우렐 스타인등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돈황문서 중 일부에는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 Keu-li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Shan-ton 지방의 대신 Chan-Chun-Chi 관할구인 Keu-li 경내의 주민은 턱을 숙여 가슴에 붙이며 인육을 먹고 연로한 부모와 노인을 발가벗겨 죽였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의 모습과 흡사하다.다만 그 문장에 있는 '산동대신의 관할구역'이라는 표현과, 바로 아래 문장인그 아래 주민들은 물 속에서 고기처럼 살고 있다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는 힘들다.

    6.2. 쓸모 없어지면 제거한다는 점에서 토사구팽과 비슷한 용어이나 토사구팽이 '필요해서 데려왔다가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뉘앙스인 반면 고려장은 '원래 있던 존재였는데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뜻으로 좀 다르다. 그런데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시저의 군단의 경우 늙고 약해지면 고려장과 동시에 토사구팽을 행한다고 한다.

    6.3. 한국의 좀 오래된 여관에는 이름이 ○○장 식으로 된 여관이 많은데, 그 중에는 충공깽스럽게도 고려장여관도 있다. 물론 이쪽은 高麗莊으로 한자가 다르다. 다음 지도 확인 결과 김해, 양구, 목포에 있으며 로드뷰 확인 결과 김해에 있는 것은 한울 모텔로 개명, 양구는 아직 남아 있으며 목포는 확인 불가.

    6.4. 성리학 중심의 사회라서 효도에 엄격한 것은 물론, 호환이 국가적 문제라서 입산 자체가 쉽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고려장이 가능했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따뜻한 봄날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을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김형영 -



    고려시대때 고려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김형령씨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보면 아들이 어머니에게 봄꽃놀이 가자고 꼬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니 꽃구경가요. 제 등에 업혀서 꽃구경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 아들등에 엎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멀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버리더니 
    한웅큼 한웅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부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게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혼자 돌아갈 길이 걱정이구나 산길잃고 헤멜까 걱정이구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아들 돌아가는 걱정 때문에 솔잎을 길가에 뿌리고 있더라




    5월 15일(목) 역대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노인의 교도(10:13)

    왕이 포학한 말로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The king answered them harshly. Rejecting the advice of the elders.

    노인의 교도(the advice of the elders)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의 삶의 경험에서 가르치는 지혜를 말합니다.
    교도(敎導)란 한자는 "가르칠 교"자와 "인도할 도"자가 합성된 단어로 그 뜻은 "가르쳐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KJV과 NASB 영어성경에서는 "노인의 교도"를 " the counsel of the old men", "the counsel of the elders"라고 번역합니다.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생의 선배가 되는 노인 또는 장로를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 죽은 후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왕이 됩니다.
    솔로몬왕이 성전과 궁궐을 짓기 위하여 20년 동안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에게 앞으로 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고 질문합니다.

    이때 르호보암은 첫번째는 노인들에게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습니다.
    이어서 르호보암은 젊은층의 답을 듣습니다.

    노인들은 아버지대에 너무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깨우쳤습니다.
    젊은층들은 나는 아벚지보다 더 가혹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제안합니다.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충고보다는 젊은층의 생각에 동의하여 솔로몬 때보다 더 강하게 더 큰 부담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므로 여로보암을 비롯한 열 지파가 르호보암을 떠나 북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에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 민주당의 후보(이재명)의 주장과 자유한국당(김문수)의 주장을 비교할 때 과연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책 없는 퍼주기식의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후보자의 소리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동조한다고 합니다(대략 46%).
    반면에 자유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복지국가의 기강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바람직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김문수 후보의 과거 행적을 살펴봅니다.

    첫째, 2차례 경기도지사를 엮임
    도지사 선거 후 남은 선거비용 10억원을 모두 당에 헌납하였다.

    둘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공로에 의해 10억원의 보상금을 거절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고 김동길교수, 고 장기표, 김문수).
    보상금을 거부한 이유는 경기도 도지사를 2차례 엮임하였고 국회의원과 고용노동부장관을 지내며 국민들로부터 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셋째, 삶의 방향을 돌이킨 것
    젊은 혈기가 왕성 할 때는 오직 민주화에 몰두하였으나 올바른 민주화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뚜렷한 역사관을 갖고 좌파에서 우파로 돌아설 수 있었던 용기.

    넷째, 가족들의 헌신
    부인(설난영)과 외동딸까지도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살아왔던 흔적.

    다섯째, 그늘진 이웃들에게 대한 관심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
    탈북민과 장애인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자세와 실천.

    여섯째, 국제적 감각
    주위 여러 나라들(중국, 일본, 미국)과 협력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러한 주장과 자세를 지켜보며 이번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고 노인들의 교도를 버리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명시킨 르호보암을 생각하며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의 주권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역대하 10:8)

    르호보암이 왕이 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세 청원을 하였다.
    왕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는 경험이 많은 노인들의 교도하는 것을 버렸다.

    1. 노인들의 교도(敎導)

    노인들이란 보통으로 나이 많은 년노자(年老者), 다시 말하면 늙은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부왕 솔로몬을 모시고 오랫동안 정치 를 한 경험자들이다.

    년륜(年輪)을 쌓을수록 많은 지식과 경험을 얻게 되며 실지로 경험 이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저들은 부왕 솔로몬을 보필하였으며, 그 진언(眞言)한 것을 보아서 솔로몬 때에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도록, 즉 다시 말하면 국민의 부담을 경감(輕감)토록 권면하던 사람들 인 것 같다.
    이제 왕의 질문에 노인들은 백성들을 후대(厚待)하기 위 하여 감세 청원을 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교도하였다.

    그렇다면 왕이 왜 듣지 않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젊었으니 노인들 의 경험위주의 안일한 온건책이 마음에 안 들었으며, 그저 인사적인 입장에서 한번 물어보기나 한 것 같다.

    2. 소년들의 교도

    르호보암은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다 시 물었다.
    백성들의 요구가 부담이 무거우니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 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소년(少年)들이란 나이 어린 사람들이지 만 주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소년의 특성이라면 무경험인데다가 쓸데없는 야심이 불타기 쉽고, 모험과 용기는 있으나 이를 잘못 응용할 때에는 큰 실패를 가져오게 된다.

    소년들은 한결같이 가혹한 정치를 함으로 백성들이 꼼짝 못하게 복 종할 것으로 알고 왕의 부친의 정책보다 더 강경책을 써야 할 터인즉 "채찍보다 더 무서운 전갈로 징치하겠다고 선포하소서"라고 교도하였다.

    백성이란 순진하여 선도(善導)하면 순종하여 충성하나 학정(虐政)할 때면 더욱 반발하여 반역하는 데까지 이른다.
    결국 소년들은 왕으로 하여금 자멸지책(自滅之策)을 쓰도록 일러주었다.
    왕이 실정(失政)하 면 신하된 자신들도 실패인 것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하였다.

    왕 자신이 무자격한 자이다.
    아니 고집스러운 편견주의자 이다.
    바른 판단을 못하는 우맹자인 것이다.
    그는 비운을 자취했다.


    첫째로, 교만과 포학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하자.

    르호보암의 죄는 교만과 포학이었다.
    그는 백성의 무거운 짐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그 결과, 왕국은 분열되었다.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교만하면 멸망한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겸손과 온유로 교회의 일체성을 지키라고 교훈하였고(엡 4:1-3),
    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다(엡 4:32).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범죄치 말자.

    솔로몬은 말년에 아내된 이방 여인들로 인해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은 부친 솔로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부모의 죄는, 확실히, 자녀들에게 불행으로 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분명히 선언하셨었다.
    출애굽기 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또 르호보암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아버지 밑에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자랐고 가장 좋은 궁중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인격에는 부족함이 컸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생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를 극복하지 못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며 범죄치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복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자.

    르호보암도 잘못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도 잘못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왕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징벌하실 것이다.
    반역은 나쁜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24:21은,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교훈한다.
    로마서 13:1-2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했고,
    베드로전서 2:17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했다.
    국가에도 교회에도 이치는 비슷하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치 말고 국가에 대해서도 바른 교회에 대해서도 죽도록 충성하자.


















    역대하 8장 요약

    솔로몬의 여러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여러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9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으며,솔로몬의 재산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며 솔로몬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4일(수) 역대하 8-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되도다(9:7)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How happy your men must be! How happy your officials, who continually stand before you and hear your wisdom!

    복되도다!(835) 에쉐르(’esher) אֶשֶׁר 스트롱번호 835

    1. 행복.   2. 시 1:1.  3. 2:12
    발음 [ ’esher ]
    어원  / 83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 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 9:7, 잠 28:14), 복이 있다(시 40:4, 단 12:12).


    복되도다...지혜를 들음이로다
    - 본절은 잠언 8:34과 일맥 상통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잠언 기자는 그곳에서 날마다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솔로몬의 신복들이 그의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은 물론 복된 일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보다 더욱 복되다고 하겠다(마 12:42).

    잠언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12:42
    심판 때에 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7절은 전형적인 대구법으로 솔로몬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노래한다.
    8절은 위와 같이 솔로몬을 왕을 삼으셨다는 것을 두번 반복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언약적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7절과 8절은 단지 솔로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솔로몬과 관련된 사람들과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한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בְּרָכָה 1293 [Berâkâh]
    • 1.

      여성형 명사 축.

    • 2.

      여성형 명사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 창27:12,33:11, 잠11:11.

    • 3.

      여성형 명사 번영의 결과로서의 , 창39:5, 시3:8, 사44:3, 19:24, 욜2: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רֶכְיָהוּ 1296 [Berekyâh]
    • 1.

      남성형 고유명사 여호와의무릎[여호와의 ]: 여섯 이스라엘 사람 ‘베레갸’.

    • 2.

      남성형 고유명사 스룹바벨의 아들, 대상3:20.

    • 3.

      남성형 고유명사 대상9:1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חוּרוֹת 979 [bechûrôwth]
    • 1.

      남성형 명사 청년, 젊은이들, 민11:28.

    • 2.

      명사 젊음, 청년시대,전11:9, 1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רַךְ 1288 [bârak]
    • 1. 원형 하나님께 기원하다, 을 구하다, 창 28:6, 수 24:10, 삼상 13:10, 삼하 8:10, 대상 18:10.
    • 2. 원형 축하다, [인간들끼리], 을 기원하다[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창 27:27.
         ㉠ [제사장이 백성을 축하는 경우] 레 9:23, 민 6:23.
        ㉡ [백성이 백성에게 축하는 경우] 신 27:12.
    • 3. 원형 축하다, 번성하게 하다, 창 1:22, 9:1, 12:2.
    נִשַׂג 5381 [nâsag]
    • 1.

      동사 자신이 움직이다. [즉] 도착하다, 이루다, 어느 것에 따라 미치다, 창31:25,삼하15:4. ㉠ [시간에 대하여] 창47:9, 부자가 되다, 레25:47, 사35:10, 51:11. ㉡ [] 신28:2. ㉢ [공포] 욥27:20. ㉣ [죄] 시40:13(12). ㉤ [하나님의 진노] 시69:25(24).

    • 2.

      동사 [칼형에서는 쓰이지 않음].

    • 3.

      동사 히필형 הִשִּׂיג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바라크의 축복과 아쉐르의 축복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축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라크의 축복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축복은 내면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는 에쉐르의 축복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내면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은 안 된, 아니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 시절에는 텔레비젼 보는 것이 성경 읽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교회다니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축복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축복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바라크의 복과 아쉐르의 복(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읽어도, 다시 읽어도, 세월이 지나서 읽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ברך)의 복이요 하나는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복이 바로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도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복은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타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복은 내면 깊은 곳의 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복! 내면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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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펄젼의 시편 1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는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데,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시편의 주제이며, 어떤 측면에서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내용을 신성한 교훈으로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겠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 경건한 자가 축복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지 등을 설명한다.

    4-6절 불경건한 자의 상태와 특성을 대조해 보이며, 그 장래를 계시하고, 또한 그의 궁극적 운명을 강한 어투로 묘사한다.

    [강 해]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1편 전체. 아가서가 히브리어 원문상 “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탁월한 노래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시는 “시 중의 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 속에는 기독교의 진수와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제롬이 바울 서신에 대해 언급했던 바가, 이 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구성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설득력은 넓고 강하다.” 이 시는 축복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론이 되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잡이로 지칭되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악인이 빠져들어 가는 파멸의 유사(流沙)와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걸어가는 굳건한 땅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aints’ Spiritual Delight, 1660).

    시 1편 전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주제들로 요약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비참해진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두 가지 도전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나는, 모든 이들 중 경건한 자를 존속시켜 축복의 금양털을 얻는 유일한 용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과시하려 해도 그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1640).

    시 1편 전체. 나는 고대의 주경가들(어거스틴, 제롬 등) 중 어떤 이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들어 왔다. 그들에 의하면, 시 1편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이 받은 상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42).

    1절. 시편 기자는 이 짧은 시 속에서 참된 행복에 관해 그 어떤 철학자, 혹은 모든 철학자들보다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에다 새를 쥐어 주신다. -존 트랩(John Trapp, 1660).

    1절. “복 있는.” 우리가 “복 있는”이라는 푯말이 매달려 있는 곳에 이르면, 그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주정뱅이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1절.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표현의 권고들이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표현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단호하다.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면서 또한 악인의 꾀를 좇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둘을 동시에 좇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좇는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처드 베이커.

    1절. “하이쉬”(vyah)는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그 사람’을 뜻한다. 즉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844).

    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하나님의 손

    1. [사무엘상 5: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2. [에스라 8: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3. [에스라 8:31]
    정월 십 이일에 우리가 아하와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쌔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4. [욥기 19: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5.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6. [전도서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 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7. [이사야 62: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8.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9. [히브리서 10: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얼굴

    1. [창세기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2. [시편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역대하 4장 요약

    성전 안에 있는 여러가지 기구와 물건의 이름과 용도에 대해서, 여러 금으로 만든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5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으며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기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요약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었고, 연설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과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백성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일들을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13일(화) 역대하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얼굴을 구하면(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스스로 겸비하고(3665) 카나(kânaʽ) כָּנַע 스트롱번호 3665

    1. 무릎을 꿇다.  2. 접다. 3. 낮아지다
    발음 [ kânaʽ ]
    구약 성경  / 36회 사용

    그 악한 길(1870. 7451) 데레크 라아

    기도하여(6419) 파랄(pâlal) פָּלַל 스트롱번호 6419

    1. 심판하다. 2. 피엘형
    발음 [ pâlal ]
    구약 성경  / 84회 사용



    구하면(1245) 바카쉬(bâqash)  בָּקַשׁ 스트롱번호 1245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사하고(5545) 사라흐(çâlach) סָלַח
    스트롱번호 5545

    1. 용서하다.  2. 니팔형 : 용서받다
    발음 [ çâlach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 1. 원형 용서하다[여격이 수반되어], 출34:9, 왕상8:34,36,39.
      • a. 원형 니팔형 : 용서받다[죄에 대해 쓰임], 레4:20,26,31, 5:10,13.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סְלַח
    • 관련 성경 /  사하다(출 34:9, 시 103:3, 암 7:2, 왕상 8:39), 사유하다(대하 6:30), 용서하다(왕상 8:50, 왕하 5:18, 사 55:7, 단 9:19), 사하여 주다(왕상 8:30, 대하 6:21), 사함을 얻다(레 4:20, 19:22, 민 15:25).

    고칠찌라(7495) 라파(râphâʼ) רָפָא 스트롱번호 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관련 성경 / 고치다(시107:20, 사19:22, 겔34:4), 고침받다(사6:10), 치료하다(창20:17, 왕하8:29, 렘33:6), 고쳐주다(민12:13, 렘6:14, 8:11), 낫게 하다(왕하20:8), 싸매다(호6:1), 낫다(레13:18, 삼상6:3, 렘51:9), 완전하다(렘9:11),되살아나다(겔47:9), 완치되다(출21:19), 수축(修築)하다(왕상18:30).
    [명] 의원(창50:2),의사(렘8:22).


    기독교인이 세상의 방법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패배입니다.
    - 프랜시스 쉐퍼
    If Christians win a battle by using worldly means,
    they have really lost.
    - Francis Scheffer


    그리스도인이 거짓, 탐욕, 폭력 같은 세상의 방식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외형적인 승리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는 패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그 과정과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성경적인 수단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로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쉬운 길을 내려놓고,
    때로는 더디고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양반문화

    양반(兩班, 량반)은 고려,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체면(體面)
    체통(體統)

    유대사회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양반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인 것을 좋아하였다.
    기도를 할 때에도 거리에 나가서 두 손을 쳐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조선사회에서도 양반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양반 체면에
    양반 체통을 지켜야지 하며 자신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문제는 양반이 양반답게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아가려면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푸주간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양반이 야 돌쇠야! 소고기 한 근만 주라 하고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곧 이어서 다른 양반이 이보게 돌쇠 아범 소고기 한 근만 주시게나 하고 주문을 하였다.
    먼저 주문한 양반의 소고기의 양과 나중에 주문한 소고기의 영이 눈에 보이도록 차이가 나므로 먼저 주문한 양반이 돌쇠야 똑같은 소고기 한 근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푸주간 주인이 예 먼저 자른 것은 돌쇠가 자른 것이고요 나중에 자른 것은 돌쇠 아범이 자른 것이라 다르지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체면과 체통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신앙인답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려면 먼저 언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언어는 일부러 거룩한 척 목소리를 쉰소리 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영적인 것은 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구하면(seek my face)
    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세 가지 상징으로 말씀합니다.
    세 가지 상징이란 "은혜"와 "평강"과 "영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민수기 6:25)

    구약에서 제사장 아론의 축복기도는 민수기 6:24-26에 소개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민수기 6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입니다.
    세상에서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평강을 얻기가 참 어렵고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은 마치 유라굴라 광풍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울에 의해서 평강을 누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장하는 믿음의 사람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은 영광(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주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내 마음에 비추어지고 있는지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여 도망하던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로마로 향하여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버린 순교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시려고 가신다는 음성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돌이켜 발걸음을 로마로 돌립니다.
    그리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한 것은 십자가 후에 약속된 하나님의 영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의 삶

    요새 언어 폭력적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구하는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잡음(雜音, 시끄러운 소리)을 정음(淨音, 깨끗한 소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잡음과 정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어느 교회가 관광 명소가 될 만한 거대한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한다.
    외형만 보아도 압도되어 위압감이 들 만하다는 것이다.
    누려 본 자는 더 누려 보려고 하는 것일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커서 나쁠 것 없고 편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런데 그 건축물을 놓고 세상 사람들은 물론 교계에서마저 왈가불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네 돈 가지고 자기네 건물 짓는데 무슨 할 말인가 하겠지만은 반그리스도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이유들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구 기독교의 몰락을 보며 유명세와 편리함이 망하게 하였다고 하는 시각이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 그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것일까마는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이 역사적 진단의 결과이다.
    아름답고 편안함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에 붙잡혀 거친 세상과 불편한 환경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있다는 걱정이다.
    그래서 복 복 하는 기복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다.
    잘살고 잘 먹고 누리는 기복주의 신앙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본분을 지나쳐 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에는 교회 밖에서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버리면서 교회당은 문을 닫게 되어 버린다는 슬픔이다.
    땅에서 출세하고 왕처럼 누리고 군림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 말 자체도 불신앙적 언어폭력인 것이다.

    개혁자 칼뱅은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던가?
    그래서 제3자가 그의 무덤 자리에 칼뱅의 약자 CV만 표시해 놓았다고 하던가?
    자신이 높아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존귀하신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던가?
    칼뱅이 구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체가 없으시다.
    그분은 항상 빛으로 존재하신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으며 보는 날에는 죽는다(출 33:20).
    죄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브니엘(프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창 32:30).
    이것은 특별 은총이었다.

    성경 시편 105편 4절에서 다윗은 "그(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바크슈 파나브 타미드)"라고 하였고
    시편 143편 7절에서도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알 타스테르 파네카 밈멤니)"라고 하였다.

    다윗의 삶 속에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의미요 앙망한다는 의미이며 명령대로 순종하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방향의 여부에 따라 생과 사 그리고 행운과 불행이 교차되기 때문이요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라보지 않는 여부에 따라 같은 흐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신을 넘어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이나 권위 그리고 존경과 칭찬을 맛보지 못했을 때 그것을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맛보고 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터득하게 됨을 다윗은 보여 준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백성들로부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극치의 영웅 대접을 받았었다(삼상 18:7). 그러나 권력의 무상함을 통해 그런 것들은 적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며,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칭찬이나 추앙에 감사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가 구하고 사모하고 앙망해야 하는 초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분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는 참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우리들도 구약시대의 다윗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의 칭찬이나 세상에서의 유명세에 편승되려고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안락한 환경에 안주하려고 하지 말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싶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앙망하면서 피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나누어야 할 것이다.
    나만 크고 유명해져서 자랑하고 군림하는 자가 되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행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의 삶인 것이다.


    성경 속의 얼굴

    성경에서 얼굴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내면 상태,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임재를 상징하며, 반대로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심판이나 단절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는 얼굴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더 많은 성경 구절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얼굴 – 축복과 은혜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한다는 상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그리고 평강이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임재와 축복의 상징입니다.

    2. 얼굴을 숨기심 – 죄와 심판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가 멀어지거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돌보시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심판이나 훈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 것에 대해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3. 얼굴을 구함 – 하나님과의 친밀함 추구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갈망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얼굴의 빛남 – 하나님의 영광 반영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마라본 까닭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분의 영광이 반영되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와 영적인 빛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후 그 영광을 반영하며, 그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5. 부끄러운 얼굴 – 죄와 수치의 상징

    에스라 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오니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의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치나이다."

    여기서 '낯을 들지 못한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죄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그로 인해 오는 수치심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하며, 그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6.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 – 회복과 은혜의 상징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소서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얼굴이 비춰진다는 것은 회복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비추어 주실 때 우리가 구원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7. 하나님을 대면함 – 변화의 상징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경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며, 이는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숙해짐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8.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 – 친밀한 교제의 상징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지만, 궁극적으로 그분을 직접 대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며, 그분과의 친밀함을 상징합니다.

    9.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과 평안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충만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얻게 되는 내적 기쁨은 얼굴에 드러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에게 영적인 안정과 평강을 가져옵니다.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은 하나님을 통해 얻는 참된 기쁨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결론

    얼굴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 상태, 그리고 내면의 변화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분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은 축복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에서 멀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의 얼굴은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며, 죄로 인한 수치와 회개,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얼굴의 상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인터넷 다국어 성경 사이트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란 용어를 검색하면 36구절이라고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34구절 신약에서는 4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대조해서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였다는 용어는 뭔가 얻기를 바라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세, 다윗, 바울 그 외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대표적 인물들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출애굽 백성들과, 모세는, 환경적으로 같은 상황(광야)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확연히 달랐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지만 즉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임재를 구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했다. 즉, 하나님의 축복, 음식, 풍요를 구했다.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히브리서 3:7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했다.

    히3:15, 17

    그리고 하나님을 40년 동안 시험했다고 했다. :9

     

    그들이 하나님은 안 믿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구한 것이었다.

     

     


    고 볼 때

    오늘날 어떠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 어떠한 위대한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종을 따라다닌다고,

    내가 그 교회에 이적해서 다닌다고 해서

    내 삶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고 훌륭한 교회 나간다고 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신앙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선한 영향력은 받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똑같은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고,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은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그들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업도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기에 달려있다.

    즉, 본질적 신앙생활을 하느냐/ 피상적 신앙생활에 그치느냐.. 거기에 달려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도.. 내가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다. ← 하이라이트

    예배 시간이나, 집회 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서 운행하시는 곳에 우리가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어떨 때는 우리에게 은사가 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언 은사가 임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환상도 보이고 성령의 감동도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게 은사가 임해도

    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지 않고,

    그래서 실제로 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내게 열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때

    환상도 보이고, 감동도 주어지고, 그럴 수 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고, 내게 어떤 감동들이 주어지면서,

    환상도 보여서, 그들을 위해 예언도 해 준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서면 캄캄해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환상이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은 안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에, 즉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이도,

    그냥 은사가 나타나서, 내게 그런 감동들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은사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관계에 있는 줄로 착각한다. 남다른 은사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지 않으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아무리 신기한 외적 은사가 나타나도,

    그것들을 다 무시해야 한다.

     

    언제 내 삶이 변화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이 보여야.. 내 삶이 변화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친밀함 가운데 있다는 싸인 중 하나는,

    (은사의 나타남보다) 자꾸 내 죄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를 들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섰을 때,

    자기 모습, 자기 죄악이 보였다는 점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니라.’

    그는 이렇게 절망하며 애통했다.

     

    이사야는 정말 한편으로는 거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그 영광의 임재 앞에 갔을 때,

    자기 입술이 부정한 죄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사야처럼 이렇게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니까)

    은사가 나타나기 이전에, 자기 죄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죄가 보이지 않고, 자기 본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은사만 계속 나타나는 것은,

    심각한 자기 성찰과 조심을 요한다.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인데..(광야에서 모세가 그렇게 했다)
    그런 상태에 들어간 사람의 증거는 자기의 본 모습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을 때..
    그 분의 영광, 그분의 관점, 그 분의 기준이 보이고 그 앞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진정한 회심이 되어진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없으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 죄악된 모습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땐, 이런 환상도 보이고, 저런 감동도 주어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실상, 자기 죄에 대한 회개가 안 나오는 것은, 그가 현재는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과 예언이 자기를 통해 주어지니까 자기가 꽤 신령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물론 그가, 이웃에 대해, 환상과 예언을 말하므로, 신령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환상과 예언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은사의 나타남만으로, 그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자기 본 모습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성화(회개)의 과정이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모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만.. 보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갔을 때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령사역을 하지만,

    정작 자기 삶은 어느 수준에서 멈추어져 버린다.

    이것은 스스로 시정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분투노력해야 한다.
    즉, 경건의 훈련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을 직접 따르더라도 그냥 자동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이 교회를 다니느냐, 저 교회를 다니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다니신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 교회가 아주 연약한 교회라 하더라도)

    내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이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게 되고 점점 놀랍게 변화된다.
    이런 영적 성장, 신앙 성숙의 과정이 (저는 본격적으로 약 20년 되었는데) 혹시 아직 여러분께 일어나지 않아서, 그저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고, 내 직분이 OO이다’ 라는 사실로 만족하고 계신다면,  그런 허상에서 속히 깨어나서, 진정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이 되도록, 주님께 심각하게 기도로 요청하게 되시기 바란다.
    반드시 주님이 도와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역대하 1장 요약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 병거와 마병의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사람을 준비하였으며, 두로 왕에게 성전 지을 기술자들과 준비물을 요청합니다.
    두로왕이 기술자 후람을 솔로몬에게 천거하였고, 이방인의 숫자를 세어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장 요약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지은 성전의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5월 12일(월) 역대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리아산(3:1)

    솔로몬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Then Solomon began to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in Jerusalem on Mount Moriah, where the LORD had appeared to his father David. It was on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the place provided by David.

    역대하의 내용은 솔로몬의 치세에서부터 시드기야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유다 모든 왕들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에게 신정사회 재건을 촉구합니다.

    모리아(Moriah)란 지명의 뜻은 "높은"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모리아산에 대하여 두 차례 언급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창 22:2)
    둘째는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대하 3:1)

    모리아 산(Mt. Moriah)
    현재는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하며 솔로몬의 성전은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세워져 있습니다.

    골방(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골방(5009) 타메이온(tamĕiŏn) ταμεῖον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 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 6:6, 24:26, 눅 12:3.

    • 관련 성경  /  골방(마 6:6, 24:26, 눅 12:24). 

    προσε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335

    1. 기도.  2. 기도처
    발음 [ prŏsĕuchē ]
    어원  / 4336에서 유래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관련 성경  /  기도(막 9:29, 행 3:1, 딤전 2:1), 기도하는 곳, 기도실(행 16:13), 구하는 것(마 21:22), 기도하기(행 2:42).


    골방 기도 - 타메이온 프로슈케

    영적 고향을 생각하라
    골방 기도처를 만들라

    * 모리아산 - 골방 기도(타메이온 기도
    - 옷장 속의 기도 Προσευχή στην ντουλάπα


    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성경에서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산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그랄과 브엘세바(현재 지명 Beer Sheva) 근처에 거주했다(창세기 20, 21장).
    아들을 번제(burnt offering,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창 22:4)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모리아 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구약성경 역대하에 나온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을 지금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현재 모리아 산은 솔로몬의 성전은 오간데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모리아 산(성전산)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l-Aqsa Mosque - Jerusalem

         Rundreisende - Israel - Felsendom


    당시 예루살렘 언덕에 붙여졌던 이름이 모리아산이었는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의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서 솔로몬 성전의 유적이기도 하다(대하 3:1)
    이 성전 언덕의 정상 바위는 오늘날 이곳에 세워진 오마르 모스크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모리아 산이라고 추정하는 이스라엘 성지에는 바위 사원 실내에는 폭 12야드 길이 15야드 높이 2야드의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표면에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슬람들은 이 바위를 딛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세계의 3대 성지가 되는 것이다.

    모리아산의 대속 제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겨우 생긴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를 드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시험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창 22:8)

    이 사건에 대하여 히브리 기자는 아브라함의 신앙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나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라는 기록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여, 혹 자신이 번제로 죽여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실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이삭을 묶어 번제로 드리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리아산은 지금의 골고다 언덕입니다.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이 번제로 바쳐 지려 했던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2000년후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희생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의 수욕 앞에서 아무 입도 열지 아니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의 무서운 칼날 앞에서도 잠잠하였던 이삭의 모습이 너무도 흡사하지 아니합니까?

    솔로몬 성전이 모리아 산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기 저저는 솔로몬 성전 건축에 대해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입니다.
    둘째는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으로부터 구입한 타작마당으로 다윗 때에 이미 성전이 들어설 자리로 예비된 곳입니다.

    성경에서 역대하 본문이외에 모리아산이 언급된곳은 창세기 22장이 유일하다(창세기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 모리아산에  성전이 세워진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아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리아 산에서 드려질 뻔 했던 독자 이삭을 통해 잘 드러났고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하나님의 자신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의 기초를 놓으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성서 주석인 <미드라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는 본문에 주석을 달면서 성전과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수백년 후 그곳에 세워질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전이 세워질 모리아 산에 대한 유대인들의 특별한 해석은 천지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 여섯째날 흙으로 아담을 만들때도 훗날 세워질 모리아산에서 흙을 취해 아담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 역시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는데 <미드라쉬>는 이곳 역시 모리아 산이라고 한다.
    모리아산과 관련된 유대인들의 이같은 독특한 해석은 예루살렘성전이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 세워질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까?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인 동시에 그의 아버지 여부스사람 오르난한테서 은 50세겔을 주고 산 곳이기도 하다.
    다윗은 통치 말년 요압과 중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온 이스라엘에 역병이 돌아 7만명이 죽는 불행을 겪에 되었다. 이때 다윗은 갓 선지자의 충고를 좆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렸고 이로소 역병은 멈추었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장소에 다윗은 성전을 짓고자 했고 그 임무를 완수한 사람이 솔로몬이다.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부스는 다윗때까지 이스라엘에 정복되지 않는 가나안 성읍이었다.
    이 여부스성을 정복해 다윗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바꾼 사람이 다윗왕이다.
    다윗은 20년동안 가럇여아림에 안치되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왔고 이로서 다윗성은 명실상부한 정치적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다윗이 타작마당 자리에 성전을 세운 이유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신과 관련이 있다 농경문화의 가나안 원주민들은 도시를 세울 때  가장 높은 곳에 타작마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타작마당 옆에 바알 신전을 만들어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준 바알신을 숭배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전에 가나안 땅 최고의 신은 바알이었다.
    그리고 바알이 숭배받던 신전이 있던 곳이 타작마당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소에 여호와의 성전이 들어선것이다. 당연히 바알신전은 파괴었을 것이고 그 자리를 성전이 대체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했고 다윗이 가나안 우상인 바알 신전을 부수고 번제를 드린 그자리에 솔로몬 왕이 7년의 공사 끝에 성전을 완성했다(기원전 960년).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때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기원전 586년).

    1차 성전시대(기원전 586년)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나누는데 이 때를 1차 성전시대라고 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쳐 페르시아 통치로 넘어가면서 유대인들은 본토귀환하였고 결국 똑같은 모리아산에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게 되었다(기원전 515년).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이전의 솔로몬 성전보다 더 화려하게 리노베이션한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이다.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18년전부터  46년간 스룹바벨 성전을 증축했다.
    이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 유월절 명절 때마다 출입하시고 타락한 모습에 분개해서 깨끗하게 하신 헤롯성전이다.
    혹자는 골고다 언덕 곳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룬 곳이 모리아산이라고 하나 이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헤롯성전도 결국 70년 로마장군 티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2차 성전시대(기원전 515년부터)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 기원전 515년부터 이때까지를 제 2차 성전시대라고 부른다.

    헤롯 성전이 무너진 모리아산은 수백년간 페허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슬람 전사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638년) 7세기말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3차 성전시대(기원 후 638년)
    이것이 바로 황금 돔 사원으로 불리는 이슬람교의  3대 성지중 하나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교도의 관심이 집중된 이곳은 유대인들이 "지구의 배꼽"으로 표현하기도한다.


    예루살렘과 시온산, 모리아 산, 성전산, 감람산

    성경에는 시온산, 시온성, 성전산, 모리아 산, 예루살렘 성전, 겟세마네 동산 등 많은 산과 지명이 나온다.
    이들 지명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면 성경을 좀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다윗과 솔로몬 시대부터 신약의 예수님 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중심도시이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알기 위해선 유대인의 역사를 간략하게 알 필요가 있다.

    출애굽(Exodus, 이집트에서 탈출)

    창세기를 보면 가나안 지역(지금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당시 가뭄에 의한 기근과 이집트 총리를 하고있던 동족인 요셉 때문에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다(BC1,847년 경). 이집트에서 400여 년을 노예로 살던 유대인들은 지도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탈출한다(Exodus, 출애굽, BC1,447년 경).

    시나이반도의 광야 사막을 40년 동안 돌고 돌아 유대인들은 지금의 요르단 쪽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지금의 이스라엘 위치)으로 진입해서 가나안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하였다(BC1,440년 경). 이집트 이주 400년 만에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스라엘 왕조와 남북 분열과 멸망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사(士師, Judges, 재판관)라는 지도자가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사사의 통치가 350년 정도(BC1,400-1,050년) 이어졌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즉위(BC 1050년) 하면서 이스라엘 왕조가 시작되었다.
    1대 왕 사울부터 2대 왕인 다윗을 거쳐 3대 왕인 솔로몬까지 각 40년씩 120년 동안은 한 나라를 유지했다.
    이때의 수도가 지금의 예루살렘이며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곳도 이곳이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남북으로 나누어져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두 나라 체제가 되었다(BC 930).
    그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이스라엘 북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앗수르에게 멸망했다.
    북왕국의 멸망 후 남왕국 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지금의 이라크 위치)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의해 멸망을 당했을 때, 바벨론 왕이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데려갔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BC 597-BC 538)라고 한다.
    유수(幽囚)는 잡아 가둔다는 뜻인데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말한다.
    이 바벨론 유수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바벨론에서 귀환 후 성전, 성벽 재건

    당대의 강국 바벨론은 남왕국 유다를 정복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까지 멸망시켰다.
    하지만 바벨론의 승승장구는 신흥 강국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성경에서는 '바사'로 번역, Persia)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BC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BC 539년 고레스 칙령을 선포한다.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온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을 허락하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의 재건을 허락한 것이다(에스라 1:2~4, 6:3~5).
    물론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을 돌려준 것은 아니다. 식민지에 대한 유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신약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스의 지배를 받을 때 잠시 마카비에 의해 독립을 했으나, 곧 로마제국의 지배(BC 63년 - AD 313년) 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다.

    AD 66년 유대인이 정복자 로마에게 항거하다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
    전쟁에 진 유대인들은 사해 근처 마사다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역부족으로 마사다로 간 유대인 전부가 자결하므로 지배자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은 끝이 났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사다 항전(Battle of Masada, AD 73)이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여러 번 로마에 대해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유대인은 로마에 이어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수도가 지금의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 마침내 아랍의 지배를 받아 이슬람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집트에서 나온(출애굽) 유대인이 가나안에 자신의 나라를 건국(BC 1440년) 한 지 860여 년 만인 BC 586년에 남왕국이 멸망하므로 유대인의 나라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생활이 시작되었다.
    디아스포라는 디아(Dia- 건너서)와 스포라(spora, 흩어지다)가 결합된 단어로 '뿔뿔이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나라 잃은 유대인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라 없는 서러움을 감내하며 2500년 정도를 떠돌이 신세로 살았다.

    ​물론 지금의 이스라엘 자리에서 유대인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 있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갖지 못했다.

    2500년 만의 건국

    19세기에 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20세기 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UN은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에 유대인의 나라 건국을 승인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거의 2,500여 년 동안 살았던 팔레스타인( Philistine, 성경에서는 블레셋으로 번역)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결정에 의해 가나안 땅은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주민은 가나안 땅 남서쪽 한 모퉁이인 가자 지구(Gaza Strip)에 살도록 하였다.

    중동 전쟁

    그래서 2,000년 이상 조상들부터 가나안 땅에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졸지에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주변 아랍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이 1948년 일어난 1차 중동전쟁이다.
    그 후 1967년 6일 만에 끝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현재의 영토를 확보했다.

    ​3차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했는데, 요르단이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동쪽의 요단강 서안(West bank)과 시리아가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북쪽의 골란 고원, 그리고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인 시나이반도였다.
    시나이반도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있는 곳이다.
    시나이반도는 1973년 벌어진 4차 중동 전쟁 후 이집트로 반환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영토는 중동의 화약고나 다름없다.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빼앗았던 요르단 서안, 골란 고원,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는 가자 지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 묻혀있는 셈이다.

    현재의 예루살렘

    현재의 예루살렘은 분쟁지역인 요단강 서안에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 예루살렘은 도시가 두 쪽으로 분할되었다.
    예루살렘의 서쪽은 이스라엘, 동쪽은 요르단의 영토로 분할되었다(아래 왼쪽 그림의 푸른색 네모 안의 흰색 부분이 예루살렘 동쪽).
    문제는 예루살렘의 동쪽 요르단 영토에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의 성전, 시온산, 성전산,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 등 모든 기독교 성지가 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3차 중동 전쟁을 통해 요르단을 요단강 동쪽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요르단 서안을 모두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온전히 차지했다. 하지만 이런 이스라엘의 침공에 의한 영토 확장은 아랍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서 아직까지 분쟁 중에 있다.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산 위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온산(Mt. Zion)

    2,500여 년 만에 국가를 재건하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에게 시온산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시온산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시오니즘(Zionism)의 중심인 시온산에는 구약시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모리아 산도 시온산 동쪽 끝이다.

    ​신약시대 예루살렘 성과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등 예수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도 시온산이다.
    시온산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시온성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성 안에는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영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찬송가 249장(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은 영어 찬송인 We're Marching to Zion(우리는 시온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을 번역한 것이다.

    The Celebration Choir - We're Marching To Zion [with lyrics]

    모리아 산(Mt. Moriah)

    성경에서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산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그랄과 브엘세바(현재 지명 Beer Sheva) 근처에 거주했다(창세기 20, 21장).
    아들을 번제(burnt offering,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창 22:4)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모리아 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구약성경 역대하에 나온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을 지금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현재 모리아 산은 솔로몬의 성전은 오간데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모리아 산(성전산)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람산(Mt. Olive)

    "감람나무 숲속에 눈꽃 피는 밤"이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어린이들이 주로 부르는 성탄 찬송이 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 나무이고 감람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무척 많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 바로 앞에 있으며, 성전의 동문과 맞보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예루살렘 성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겟세마네 동산이 나온다.
    겟세마네 바로 앞에 성전 동문이 보인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현재 황금 돔의 모스크가 있는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 성벽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성벽이 동쪽 벽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인데, 모리아 산 황금 돔 뒤에 보이는 청색 돔 모양의 건물이 골고다 언덕 위에 건축한 성묘교회(The holy sepulchre church)이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경로(초록색, Route of Triumphal Entry of Jesus into Jerusalem)인데, 베다니에서 출발해서 감람산을 넘어 벳바게를 지나 겟세마네 옆 길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 성 동쪽 문(Eastern Gate, Golden Gate)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감람산에는 예수 승천당이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이다(눅 24:50).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씀(행 1:11,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을 근거로 예수님의 재림도 이곳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기도 한다.






    구약성경 열네번째 역대하 배경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에게 신정사회 재건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솔로몬의 치세에서부터 시드기야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유다 모든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장 요약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하게 됩니다.솔로몬의 부귀영화,병거와 마병의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사람을 준비하였으며,두로 왕에게 성전 지을 기술자들과 준비물을 요청합니다.두로왕이 기술자 후람을 솔로몬에게 천거하였고,이방인의 숫자를 세어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장 요약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고,지은 성전의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4장 요약

    성전 안에 있는 여러가지 기구와 물건의 이름과 용도에 대해서,여러 금으로 만든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5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으며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기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요약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었고,연설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과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백성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일들을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8장 요약

    솔로몬의 여러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여러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9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으며,솔로몬의 재산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며 솔로몬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0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1장 요약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싸움을 말리셧으며,르호보암은 요새를 샇게되고 유다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2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엿고 르호보암이 죽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3장 요약

    유다 아비야가 여로보암과 전쟁하엿으며,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요약

    아비야가 죽고 이후 아사가 왕이 되었으며,아사는 올바른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우상을 없앴으며 계명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엿고,구스가 유다를 침공하지만 아사가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가 15장 요약

    오뎃의 아들인 아사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아사는 개혁정치를하였고,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6장 요약

    아사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이스라엘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하엿고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선견자 하나니를 아가사 가두고 이후 아사가 발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 요약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고 점점 강대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8장 요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여호사밧의 동맹,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라못을 공격하기를 제의,선지자들 400명에게 물어보는데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엿지만 이를 무시하고서 아람과 싸우다가 아합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9장 요약

    선견자인 예후가 여호사밧을 규탄,여호사밧이 개혁을 시도하고 재판관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0장 요약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오게되자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 주셨으며 이 외에 여호사밧왕의 행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1장 요약

    여호람이 왕이 된 후에 동생들을 죽엿으며 아합의 집안의 딸과 결혼,에돔에 반역하였으며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예언하였고 이후 여호람이 창자가 빠지는 병으로 인해 죽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2장 요약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됨,아하시야는 아합왕의 길을 따라갔으며 예후가 아하시야와 그 신하들을 죽였다,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으며 요아스가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3장 요약

    여호야다가 백부장을들 모아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아달랴는 살해당하였고 여호야다는 개혁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장 요약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와 함께 성전을 수리하였고 여호야다가 죽게 됩니다.요아스와 백성들이 악하게 되는데...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이 처들어왔고 요아스를 반역자들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요약

    아마샤가 유다왕이 되었으며 부왕을 죽인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군대를 돌려보내고,에돔을 물리쳤으며 에돔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이 유다 아마샤왕을 패퇴시켰으며 백성들이 아마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아마샤를 죽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요약

    웃시야가 왕이 되엇으며 선지자 스가랴는 웃시와 왕을 도왓으며 웃시야는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암몬이 조공을 바쳤으며 웃시야는 강한 군대를 만들고,이후 성전에서 불을 피우다가 나병이 생기게 되어서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7장 요약

    요담이 왕이 되어서 옳은 일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8장 요약

    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며 온갖 우상을 섬기게 되며 바알도 섬기게 됩니다.선지자인 오뎃이 유다 백성을 잡아오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꾸짖게 됩니다.아하스가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구하였으며,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갖 범죄를 저질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9장 요약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에게 충고합니다.히스기야와 백성들,제사장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엿고,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요약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엿고,백성들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1장 요약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번제와 십일조를 드렸으며 저성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요약

    앗수르의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괴롭히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이에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산헤립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히시기야의 병,교만,부,영광에 대해 기록 이후 히스기야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3장 요약

    므낫세의 패악으로 인해 이방 제단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무당과 점쟁이를 믿었으며 우상을 성전에 두었으나 므낫세가 기도함으로 회개하였습니다.므넷세는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요약

    요시야가 왕이 된 후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서 산당과 우상을 없애게 됩니다.성전을 수리하였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과 백성이 율범의 언약을 지키기로 약속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5장 요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켯고 제사장과 레위의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번제를 드리고 무교절을 지켰으며 애굽의 느고와 요시야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요약

    여호아하스,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잡아간후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시드기야가 왕이 되고 느부갓네살을 배반,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고 고레스가 귀국 명령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론

    역대하(2 Chronicles)는 구약 성경의 역사서 중 하나로, 솔로몬 왕의 통치부터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의 중요성, 왕들의 종교적 개혁과 불순종의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역대하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현대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내용 요약

    역대하의 배경과 구성

    역대하는 이스라엘의 역대기자로 알려진 인물이 기록한 것으로, 주로 유다 왕국의 왕들과 그들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책은 솔로몬 왕의 통치부터 시작하여 유다 왕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통치 (1-9장)

    역대하는 솔로몬 왕의 지혜롭고 부유한 통치로 시작됩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성전 건축과 종교적 개혁으로 유명합니다.

    1. 솔로몬의 즉위와 지혜 (1장):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부, 그리고 명예를 주십니다.

    2. 성전 건축 (2-7장):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헌신의 증거로 삼습니다.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3. 솔로몬의 정치적 업적 (8-9장): 솔로몬의 정치적 확장과 번영, 그리고 그의 지혜와 부를 듣고 찾은 스바 여왕의 방문을 기록합니다.

    유다 왕국의 역사와 왕들의 통치 (10-36장)

    솔로몬의 죽음 이후, 유다 왕국은 여러 왕들의 통치와 종교적 개혁, 그리고 불순종의 역사를 겪습니다.

    1.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분열 (10-12장):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민족의 불만을 초래하여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분열합니다.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다스립니다.

    2. 여호사밧 왕의 개혁 (17-20장):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여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3. 히스기야 왕의 개혁 (29-32장): 히스기야 왕은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와 예배를 회복하며, 아시리아의 침략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유다를 지킵니다.

    4. 요시야 왕의 개혁 (34-35장): 요시야 왕은 율법 책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실시하며,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5. 유다 왕국의 멸망 (36장): 유다의 마지막 왕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예루살렘은 함락되며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주요 사건 및 인물

    역대하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1. 종교 개혁과 예배 회복: 여러 왕들이 종교 개혁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왕들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회개와 돌아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3. 외적 공격과 하나님의 도움: 아시리아와 바벨론과 같은 외적 공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유다 왕국을 지키려는 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용

    1.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솔로몬 왕의 지혜를 구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와 함께 부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예배와 성전의 중요성

    역대하에서 여러 왕들이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예배와 성전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3.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은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을 받게 해줍니다.

    4. 하나님께 의지하라

    유다 왕국이 외적 공격에서 하나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은 사례들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도움을 주십니다.

    5.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분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