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묵상 욥기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일(Identity)

    엘리바스(Eliphaz) אֱלִיפַז : 데만 사람 /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 2:11, 4:1, 15:1, 22:1, 42:9, 42:7

    빌닷(Bilad) בִּלְדַּד : 수아사람 / 벨이 사랑한다, 본쟁하다
      - 2:11, 8:1, 18:1, 25:1, 42:9

    소발(Zophar) צוֹפַח : 나아마 사람 / 거만한, 출발함
     - 2:11, 8:1, 25:1, 42:9

    엘리후(Elihu) אֱלִיהוּא :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 나의 하나님
     - 32:2, 4, 6, 34:1, 35:1, 36:1



   욥(Job)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욥기 38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합니다.

욥기 39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합니다.

욥기 40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일을 너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한다.

욥기 41장 요약

사나운 짐승도 내가 지었다.
아무도 내게 맞서지 못한다.

욥기 42장 요약 / 욥의 회개

욥기 자신이 함부로 말한 것을 시인하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다시 자손과 재산의 축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6월 18일(수) 욥기 38-4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주를 뵈옵나이다(7200) 라아(râʼâh) רָאָה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râʼâh ]
구약 성경  / 1299회 사용


듣기만 하였삽더니(8088) 쉐마(shêmaʽשֵׁמַע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shêmaʽ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들음, 욥42:5, 시18:45(44)
  • 2. 명사, 남성 명성, 풍문, 보고, 출23:1.
  • 3. 명사, 남성 음악, 노래, 시150:5.
  •  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사 66:19), 소문(욥 28:22, 렘 37:5, 합 3:2), 큰소리(시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사람은 눈으로 본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눈으로만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감각으로도 본다.
귀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본다. 역사를 통해서도 보고, 옛 스승들의 교훈을 통해서도 본다.

사람은 세 가지의 눈을 사용한다.
첫째, 육신의 눈인 육안(肉眼)
둘째,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
셋째,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인 영안(靈眼)

사람들 중에는 육안은 밝은데 심안이 어두운 사람들이 있고, 육안과 심안은 밝은데 영안이 닫혀 있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께서 “눈 있는 자 볼지어다.”라고 말씀하심에는 표면적인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눈 있는 자는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안으로 거룩한 세계와 생명의 교훈을 듣고 보라는 말씀이시다.

현대 지도자들의 비전 제시 중에는 육안으로 보거나 심안으로 보아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미학적이고, 운율적인 표현을 담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대체적으로 근시안 적이어서 오늘의 대안이 내일의 두려움이 될 경우가 허다하다.
진정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이 닫혔거나 없어서 “눈 있는 자는 보라.”는 주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지도자들이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중에 F. J. Crosby(1820-1915)가 있다.
Crosby는 생후 6주 만에 보모와 의사의 실수로 실명(失明)하였다.
육안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Crosby는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는 열린 영안으로 자신이 체험한 영의 세계를 1만여 편에 이르는 신앙시로 남겼고, 많은 신앙시가 찬송가가 되었으며 우리 찬송가에는 23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로 시작되는 288장 찬송은 크로스비가 영안으로 만이 볼 수 있는 영의 세계를 감동적으로 그린 찬송 시이다. Crosby는 육신의 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영혼의 눈으로 보고, 맹인이 된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노래하는 복된 삶을 살았다.

찬송가 288장 중에서도 특별히 3절이 내게 은혜로 다가온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Crosby는 후일에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육안이 보이지 않게 되었기에 심안과 영안이 열려 하늘의 기쁨과 은혜를 땅 위에서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린다.’는 고백을 남겼다.
그리고 크로스비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은 시험과 시련 받았기에 나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주의 법은 항상 옳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증명해왔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그것들은 항상 ‘예’와 ‘아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다른 어느 것보다 귀하고, 나는 그것을 기쁘게 볼 수 있는 영적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의 삶이 어떠하든지 나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쉬게 될 것임을 말씀을 통해 알고 믿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인류의 장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비전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 말을 주제에 맞게 고쳐 “인류의 미래는 참된 신앙과 비전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상상력과 신앙이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상상력은 바른 신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앙적 상상력 곧 영적 상상력이 창조적인 상상력의 뿌리가 된다.
물론 이런 상상력에 도달하려면 신앙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폐쇄성이나 독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신앙 없이도 비전은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비전은 개인과 공동체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기가 쉽고, 아집과 자기 충족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귀결되기 쉽다. 바람직한 비전은 바른 신앙의 바탕 위에 서있을 때에 건강하고 창조적인 비전이 된다.

성경 잠언에 이르기를 “비전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요즘 같이 혼란스러울 때 일수록 지도자의 비전제시가 중요하다. 국민들로 하여금 힘을 모으고 잠재력을 동원할 수 있으려면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에 국민들이 동의하게 함으로 힘을 모아 질 때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시되는 그 비전이 올바른 신앙의 바탕 위에 창출된 비전일 때,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 희망을 주는 비전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신앙과 비전은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눈이 열렸던 아브라함과 눈이 어두웠던 롯의 삶
- 롯은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곳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의 반대편쪽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의 종들은 그들의 주인이 참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우습게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롯이 거하는 곳은 타락한 지역이 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선택한 땅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곳으로 드러납니다.

눈이 열렸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고통의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천사들이 왕래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열린 눈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눈이 열린 사람(사도행전 9:10-18)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있는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복받은 남편 만나야 일생동안 복있게 살고, 복있는 아내를 만나야 자기도 일생동안 행복하게 삽니다.
망할 사람 만나면 망하고 복있는 사람 만나면 안될 일도 잘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은 사람을 만나야 그 은혜가 내게 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내 은혜까지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 복이 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난 많은 사람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 좋아하고 예수 사랑하고 예수님을 항상 흠모하고 살다가 가장 복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므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동행하고 배우고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예수를 정확히 알고 정확히 믿었고 예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복을 받았는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슴에 모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그를 이끌어 그의 생을 일관되게 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심적 사건이라고도 말하고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그가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시키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삼일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가라고 하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기도해라”
“오, 주여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하고 또 이곳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자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말고 가거라”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보지도 못한채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첫째,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20절)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순간부터 사도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뜨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바르게 보지 못하던 눈을 주님께서 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 이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눈은 떴으나 잘못 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가치관, 세계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눈 먼 사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지식이 없으면 문맹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양심이 마비되면 눈먼 사람이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안이 먼 맹인입니다.
사울이 뜬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이 먼 자였습니다. 어떻게 눈이 먼 자였느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기독교 박해하는 것을 끝내고 이제는 선교사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를 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제 성경에서 예수를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성경에서 글자를 보는 것은 지식의 눈입니다. 안믿는 사람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예수를 보는 사람이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7-18)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목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고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사는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고 또 눈을 열어야 합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눈을 떴어도 빛이 없으면 캄캄한 밤에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어야 됩니다. 또 빛이 있어도 눈이 멀면 보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됩니다. 빛과 내 눈이 열려야 됩니다.
이와같이 신령한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육신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보는 눈이요, 지식의 눈은 배움으로 열리는 눈이요,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는 눈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를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비추어 주어야 되고, 열어 주어야 되고, 감동해야 되고,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 됩니다. 마치 육신의 눈도 태어날 때는 세상 만물만 봅니다. 그러다가 배우면서 지식을 봅니다. 자라면서 글을 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의 눈이 열려가지고 세계를 보고 미래를 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양심의 눈이 떠져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알아보고, 돈을 가졌으나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도록 눈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요 17:3).
성령의 역사로 그를 점점 더 많이 아는 것이 성화입니다(빌 3:10).
부활하여 그를 완전히 아는 것이 영화입니다(고전 13:9-10).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처음에는 구원받은 신앙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내가 믿으면서 계속 내 자신이 죽어가면서 성화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상을 보면서 예수를 보고 내가 죽어서 부활된 영화로운 몸을 입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린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보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화와, 영화로운 경지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눈을 뜨고 겨우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예수를 믿는 초보 단계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희미한 경지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 듣고 깨우쳐서 내 눈이 열리고 열려서 매사에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변화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도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거지로 여리고 성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나사렛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지”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그쪽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소리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저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할 때 겉옷을 내팽개치고 뛰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을 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으니 얼마나 볼 것이 많겠습니까 자기 부모도 보고 싶고, 고향길도 보고 싶고, 뒷동산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즉시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떴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즉시로 예수를 좇았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란 예수님 보는 것이요, 예수님 찾아 좇는 눈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 사울도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고 다메섹에 들어가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열면 몸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주님을 따릅니다. 생각도 주님을 따릅니다. 내 모든 존재가 주님을 다르게 됩니다. 내 지식도, 내 명예도, 내 권세도, 내 학식도, 내 재산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자입니다.
성경 가운데 영안이 열린 위대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고 결박시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이삭을 보면서 부활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최고 밝은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요, 이 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식의 눈입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보는 눈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요,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를 볼 수 있는 눈까지 열어주는 것이 영안입니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밖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을 칠하면 거울이 자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비젼도 영광스러운 존재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이 내 존재를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다윗과도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별세는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그 안에서 나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나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슨 눈이 밝아졌는지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돌아가서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비전은 허황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현장에서 삶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보면서도 ‘내 아내이면서도 주님의 신부야 함부로 건드리면 내가 벼락을 맞지’ 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별세의 영성을 가지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분리된 거룩을 너무 가장하는 사람들은 꼭 거룩해야만 은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별세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이 속에 예수가 있으면 그 사람은 시장 바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면 사단의 노래라고 정죄하지 말고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가 내 눈을 열면 자식을 보면서도, 아내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 저 분이 내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야 저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아내가 될 수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사도 바울은 천하만물이 다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신론의 얘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눈을 뜨고 창조의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손길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벌레먹은 나무를 보고 그 속에서 탄식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 사랑의 눈이 열린 사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은 떴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의 눈뜨고 본 것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과거의 눈은 멀었고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기니 사랑의 눈으로 섬김과 봉사, 용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눈을 열게 하니 보는 것이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정죄하던 눈이 멀고 이제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았기에 용서하기를 힘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늘이 벗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눈에 비늘이 덮혀있을 때는 정죄, 증오, 살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비늘이 벗겨지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며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하고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어두운면만 보고 삽니다. 태양을 등지고 삽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좋은 세상으로 느끼면서 행복하여집니다.
이 역사를 보면서 종말로 가는 망할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고 종말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보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을 열어서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좋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소망의 눈이 열린 사람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면서 그리스도를 보고 죽습니다.
그가 이런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서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희한한 광경을 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지고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신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은 여기에서 스데반의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훌륭한 공부를 했다고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 아닌가 저 분이야말로 위대한 분이구나!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난 자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할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밤이 오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만약에 잠 자러 온다면 그곳은 하숙집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곧 행복이었습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렇습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별세의 은혜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곧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은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이것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그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욥기는 욥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 인과 관계적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을 향한 친구들의 신랄한 비판과 자의적인 지적들은 욥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국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고난의 실마리를 찾아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욥의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경험함으로써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고난에 대한 이해의 범주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런 후 고난 가운데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철저히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 이전에 누리던 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복을 주심으로써 그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관해 말씀을 마치신 후, 욥이 자신을 돌아보며 했던 고백은 무엇인가요?(2~3절)

욥은 못 하실 일이 없는 주님 앞에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바로 자신이며,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했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주께서는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2절).
이는 그 계획의 출처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은 어떤 힘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음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이전에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무고함을 항변했지만, 이제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3절)라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주권을 고백합니다. 또한 앞선 항변들이 모두 무의미한 탄식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3절)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제한적인 생각으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은 욥은 자신이 직접 만난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마음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헤아리지 못해 불평하며 항변했던 일을 나누어 보세요.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해 주셨나요?
산 높은 곳에 있는 관광지를 방문하면 산 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망원경을 사용하면 수십 배, 수백 배 더 많은 것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와 같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의 실제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전에 욥은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를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시야가 넓어지고 높아지게 된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으십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됩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고 고통의 시간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고난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2.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그분을 눈으로 뵌 후에 욥은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4~6절)
욥은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라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묻는 말에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대답해 보라고 하셨지만(38:3), 욥은 여전히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위대한 창조주의 권능을 구체적으로 펼쳐내셨고, 욥은 완전히 굴복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6절)라고 반응합니다. 창조주의 권능 앞에 완전히 꿇어 엎드려 자복합니다. 이전까지 욥은 전통적인 믿음의 전수를 통해 귀로 들은 추상적인 지식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아니라 타인의 입에서 전해진 관념적인 지식으로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욥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하고 체험한 신앙인이 되었고, 이로써 욥에게 있던 의심과 의혹들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이제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6절)라고 고백합니다. 회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티끌과 재’는 욥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적용과 나눔
지적인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체험하는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묵상할 때 적용할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3P’입니다. 첫 번째는 ‘Personal’,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Practical’,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추상적인 적용은 바른 적용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Possible’, 실천 가능해야 합니다. 실천 가능한 묵상이 삶을 말씀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런 묵상은 신앙을 올바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경우를 보면 이 세 가지가 부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지식적인 신앙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3P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체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을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받았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 욥은 마침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이전에 그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관념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눈으로 하나님을 뵙고 난 후에는 체험적이고 생생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고난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문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하는 통로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롬 8:28).

[말씀으로 기도하기]
지금 당면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뜻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이 고난을 제가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는 기회로 여기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소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1-6)


하나님 없이 살고픈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산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 고 생각한 청년은 세상에서의 삶을 즐겼습니다. 결혼하여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고 미8군에 근무하던 중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행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원인모를 안질로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더니 나이 37세에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자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난생 처음 느끼는 안식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역 거리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함께한 거리의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야간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8백여명의 아이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각자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그가 설립한 새빛 맹인선교회에 수많은 시각장애인이 찾아왔습니다. 새빛 맹인선교회 설립자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안 목사의 희망과 도전 이야기는 1982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앞을 볼 수 있었던 37년보다 영의 눈으로만 생활하는 지금이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안 목사는 오늘도 소외된 시각장애인들의 재활 치료와 복음 전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안과의사가 수술을 하면 볼 수 있다며 수술을 권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실명의 선물로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다고 안 목사는 간증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버림받았기에 버림받은 자들의 아픔을 알 수 있었고, 시력을 잃었기에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종이 눈 감은 덕에 알게 된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 끝까지 전하려고 합니다. 복음 전파가 제 여생 마지막 사명입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뜬 소경의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뼈아픈 신앙고백이자 욥기의 결론입니다. 귀로 듣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욥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 순간에 자녀와 재산과 건강과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모년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적인 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눈으로 주를 뵈옵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눈으로 주를 뵙는 은혜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스스로 믿으오니

인도에 의료선교로 있던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낙네가 아기를 업고 병원으로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랍니다. 진찰을 해보니 자기 병원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고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우니 서둘러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답니다. 그러자 아낙네가 하는 말이 “그러면 그 사이에 우리 집 소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더라는 겁니다. 선교사는 마음이 답답해 “아니, 아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소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소가 중요합니까? 아이가 중요합니까?” 묻자 “당연히 소지요. 

아이는 2~3년 후면 또 낳을 수 있지만 소는 일평생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도 사기가 어렵습니다”. 여인에게는 아이보다 소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식 구조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더 의지하며 믿고 삽니까?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을 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처럼, 영혼마저 세상에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무엇이 우선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스스로 택해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계획과 행사는 어떠한 것이더라도 끊거나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며, 계획하신 것은 완전하게 실행하심을 믿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돈 버는 것을 영혼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한 언제나 선택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생애에 못 하실 일어 없으며, 못 이루실 것이 없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과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막연하고 희미하게 섬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고백처럼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스스로 깨달으오니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운동 중의 하나는 해비타트(Habitat) 즉 사랑의 집짓기운동입니다. 미국의 사업가 밀러드 퓰러(Millard Fuller)와 부인 린다(Linda Fuller)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고 있던 퓰러에게 갑자기 아내가 이혼하자고 합니다. 너무 놀라서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이 전부인줄 아는 당신에게 환멸을 느꼈습니다”.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기 시작했습니다. 소홀히 하던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클래런스 조던(Clarence Jordan)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종을 초월하여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활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예수께 영생을 얻으러 왔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고민하며 돌아간 부자를 생각하며 그런 부자가 되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재산을 정리하였습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을 정리하고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사역에 헌신하였습니다. 백만장자에서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며,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퓰러는 해비타트 운동으로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마틴 루터 킹 인도주의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들에 대해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충고를 가리웠던 사실을 스스로에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도 기이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듣는 단계에서 눈으로 보는 체험적인 단계로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과 내 방법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을 이루기보다 주의 일을 파괴하는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유아적인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눈으로 뵙는 체험적인 신앙의 단계에 들어서기 바랍니다.

셋째, 스스로 회개하오니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도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다가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몰래 아버지 침실로 들어가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는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너무나 맛이 있어서 먹어 치우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밤에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어려워 종이에 몇 줄 적어 돌돌 말아 아버지 침실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버지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가 없어졌습니다. 구멍을 통해 살펴보니 아버지께서 종이조각을 읽으시며 눈물 닦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더 오래 지체할 수 없어 간디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해주셨습니다. 후에 간디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노라고 술회하였습니다. 스스로 회개하는 자에게 임한 은혜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여기 ‘거두어들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엔'은 '거부하다, 싫어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스스로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대한 뉘우침을 표현한 것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 것은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의 표시이며 애통하며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중심으로 회개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잃었던 평안과 기쁨이 회복됩니다. 억지 회개가 아닌 스스로 회개에 이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알래스카 주(State of Alaska)는 본래 소련의 소유지였습니다. 소련인들은 얼음덩어리로 덮여 살기에 부적합하고 관리가 힘들다고 알래스카를 1867년 미국에 단돈 720만 달러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그 땅에 숨어 있음을 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이 알래스카에서 나오고, 가스는 물론 묻혀있는 지하자원의 양이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랍니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보는 눈이 없기에 빼앗긴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 축복을 부어도 볼 줄을 모른다면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귀한 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영적인 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천국의 복이 무엇인가 깨닫고 눈으로 주를 바라보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함으로 갑절의 복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귀로 주를 들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Therefore I despise myself and repent in dust and ashes.

(개역개정)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새한글성경)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뉘우칩니다. 흙바닥과 잿더미에서요.

(공동번역)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현대인) 그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새번역)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 '한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엔'(*)은 '거부하다', '싫어하다'(KJV, abhor), 또는 '멸시하다'(NIV, RSV, despise), '뉘우치다'(Pope)란 뜻이다. 즉,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순전성을 고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기까지했던 욥의 과거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포함하는 표현이다.

מָאַס 스트롱번호3988
1.

거절하다

2.

삼상15:23

3.

왕하17:15

발음 [ mâʼaç ]
구약 성경
76회 사용

  • 관련 성경
    ☞싫어하다(잠15:32), 버리다(사7:15), 사라지다(시58:7).



  •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 '티끌'(*, 아파르)은 '먼지'나 '흙'을가리키며, '재'(*, 에페르)는 타버리고 남은 찌꺼기를 뜻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슬픔과 비하를 나타내기 위하여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는 전통적 습관이 있었다(에4:1;사 58:5). 그런데 여기서 욥이 이처럼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의 표시로 크게 애통하여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회개하다'의 '나함'(*)은 '위로', '슬픔', '뉘우치다'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진실로 뉘우쳐 회개함을 뜻한다. 이것은 곧 욥의 비탄과 그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전격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껄였던 지난 과오를 깊이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욥은 고난을 통과한 후 “귀로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는다”는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주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아들들과 딸들과 재산과 건강 등 소유를 모두 잃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 고통이 아물기도 전에 아내와 세 사람의 친구들과 한명의 젊은이로 인해 또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고난이 와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잘 지켰던 욥이 친구들의 정죄를 받으면서 자신의 의를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과,

    과거에 선행을 많이 하고,

    존경 받은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벌 받고 있고,

    모두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항변했습니다.

     

    자신에 대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희망이 없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고,

    지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욥23:8-9),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욥13:15, 16:19, 23:10)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 마귀를 알지 못한 욥과 그의 친구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마귀를 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따지고, 불평을 합니다.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마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귀가 성도를 대적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 알수 없었습니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은 의인을 복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한 가지 논리로 욥을 공격했습니다.

    욥이 위선자요, 벌을 받을만한 악한 자요, 숨겨 놓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혹독하게 정죄했습니다 (욥8:13, 15:34, 20:5, 34:30).

    마귀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욥도 마귀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모두 마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친구들의 정죄에 대해 서슴없이 항변하던 욥이었지만,

    하나님이 마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욥41장).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마귀와 대등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의 종노릇을 합니다 (욥41:4-5).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욥은 경건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믿음과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연단하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는 연단은 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금같이 나오게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을 겪은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5)”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이유

     

    사탄의 송사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욥1:9-11, 욥2:4-5).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42:5).

    시련을 통해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40:4, 욥42:6).

     

    의인을 정죄하는 자를 하나님이 친히 책망하심으로, 남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욥42:7).

    욥으로 하여금 그를 비판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욥42:1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선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욥42:10).

     

    욥이 고난을 통해 받은 복

    욥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는 것처럼 그 자신을 보았습니다.
    욥은 비판적인 세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의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입증 받았습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한 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욥은 형제와 자매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욥은 이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다시 돌려 받았습니다.
    욥은 4대손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욥은 고난 후에도 추가로 140년의 수명을 더 향유했습니다.

     

    귀로 듣던 주를 눈으로 보다(욥기 42:5)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분이 보이지 않지만...

    * 욥 23:8-9 "보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도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뒤로 나아가도 내가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며"

    / 그분께서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그분을 바라볼 수 없고 그분께서 오른쪽에 숨으시므로 내가 그분을 볼 수 없도다.

     

    - 그분을 신뢰하리라

    * 욥 13:15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 오직 나는 그분 앞에서 내 자신의 길들을 유지하리라."

     

    * 욥 16:19 "또한, 보라, 이제 내 증인은 하늘에 계시고 내 증거는 높은 데 있도다."

     

    *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

     

    - 친구들의 정죄

    * 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자의 길들도 그와 같으며 위선자의 소망은 사라지리니

    * 욥15:34 위선자들의 회중은 황폐하게 되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들은 불로 소멸되리니

    * 욥20:5 "사악한 자의 승리는 잠시뿐이요, 위선자의 기쁨은 잠깐뿐이니라."

    * 욥34:30 이것은 위선자가 통치하지 못하게 하사 백성이 올가미에 걸리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 사탄을 이길 수 없는 인간

    * 욥41:4-5 그가 너와 언약을 맺겠느냐? 네가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 네가 새와 놀 듯 그와 놀겠느냐? 혹은 네가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를 묶겠느냐?

     

    - 사탄의 송사

    * 욥1:9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그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

     

    /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 욥2:4-5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

     

    /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해

    * 욥40:4 "보소서, 나는 비천한 자이오니 내가 주께 무엇을 대답하리이까? 내가 내 손으로 입을 막으리이다."

     

    * 욥42:6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 욥을 정죄한 친구들을 하나님이 책망

    * 욥42:7 "{주}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뒤에 {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 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오르나니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자신을 정죄한 자를 위한 기도, 고난 후의 보상

    * 욥42:10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주}께서 욥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성경비교] 욥42:5

    1. have heard (현재 완료: 현재까지 계속된 것)

    : had heard (과거 완료: 과거의 어떤 시점까지)

     

    KJV는 자신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주님을 귀로 들어왔다고 증거했습니다.

    NIV는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주님을 귀로 들었었다 라고 증거했습니다.

    KJV는 현재까지 계속된 것으로 표현한 반면, NIV는 과거 사건으로 표현했습니다.

     

    2. seeth (현재형)

    : have seen (현재 완료)

     

    KJV는 현재 내 눈이 주를 본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NIV는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 눈이 주를 보고 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KJV가 왜 귀와 눈을 단수로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답글 보내 주세요.

     

    욥기42:5 귀로듣던 주님을 눈으로 보다
    흠정역, 한킹 / KJV 개역성경·개역개정판 / NIV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흠정역)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 (한킹)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개역)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개정)
     
     
    have heard of thee by the hearing of the ear: but now mine eye seeth thee. (KJV)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NIV)
     


    영안이 열린 자에게 보이는 것(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눈을 뜨고 보는 사람들 중에 못 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눈은 가까운 것도 못보고 먼 것도 못보고 작은 것도 못보고 큰 것도 보지 못합니다.
    눈은 육신의 눈, 지식의 눈, 마음의 눈, 영의 눈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눈이 다 떠진 사람이 완전한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은 영의 눈이 뜨이면 무엇이 보여 지는 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영적 궁핍이 보인다(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행가로 부르던 노래의 가사 중에 “제 잘 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인데 이러쿵저러쿵 남의 말을 하지 맙시다”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사람의 해골을 많이 집에다가 달아 놓아야 부자이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는 술을 많이 먹고 취하지 않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사회도 있습니다.
    어느 민족은 아내를 많이 거느리고 있어야 부자인 것으로 인정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부자이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돈이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 때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너는 부요한 자라고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요한 계시록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의 눈에 보이는 부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주를 인하여 당하는 고통과 환난이 있는 사람이 주님이 인정하는 부자입니다.

    서울 큰 교회의 담임 목사님들은 교회에 가면 큰 사무실이 국회의원 사무실보다도 더 크고 비서가 그 앞에서 통과를 시켜야만 만나 볼 수 있고 고급 승용차와 운전사가 따로 대기하고 있고 많은 월급과 좋은 집을 제공받아 부요하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농촌에 가면 생활비도 안 나오고 자녀 교육비가 없어서 쩔쩔 매면서 교인들을 예배 시간 전에 Pick up을 다니면서 어렵고 가난하게 목회를 하는 목사님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다 동일한 주님의 종이요 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종을 더 귀히 보실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부요를 판단하지 말고 주님의 입장에서 영안으로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영적 부요가 있고 생명의 면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더 부요한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영적 궁핍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고 설교가 지루하고 듣기가 싫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먹기를 싫어합니다.
    기도를 하고 또 하고 하여도 아직도 다 기도를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게 됩니다.
    영적 궁핍이 보여지면 영안이 열린 자요 영적 궁핍이 안 보여지면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이 눈을 감은 사람을 볼 때에 상당히 답답히 여겨지는 것과 같이 영안이 열린 사람이 영안이 안 열린 사람을 볼 때에 상당한 갑갑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소경을 소경이라 말하면 놀린다 하고 멸시한다 하고 화를 내는 것과 같이 우리가 영안이 안 열린 사람에게 소경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위하여 기도를 하여 줄 뿐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느끼고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무지가 보입니다(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기의 곤고한 것, 가련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석이 보여지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 상태가 보여지고 자기의 부족하고 모자람이 보여 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영적임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지혜와 정신과 계시의 영을 가지면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성경을 많이 연구하여 신학 박사가 된다고 영적 무지가 벗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이 임하고 지혜의 신, 계시의 신이 임하면 환하게 영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나도 어려서부터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된 후에도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 지난 후에 교회가 부흥이 안되어서 그 원인을 찾는 가운데서 기도를 하게 되어 성령을 받고 난 후에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의 능력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병자를 대할 때 어느 병은 귀신으로 인하여 온 병이 확실합니다.
    이러할 때 당신 귀신 들렸다고 하면 아주 싫어하고 저 목사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영안을 열어 병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병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람에게 오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오는 병,
    인간의 실수로 인하여 오는 병,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는 병,
    생리적으로 인하여 오는 병,
    죽을 병 등으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어떤 종류에 속한 병인가를 알게 되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면 병마가 떠나가고 병이 났고 하는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리면 엘리사도 죽고 모든 사람도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 죽을 병을 놓고 살리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죽을 병자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잘시켜 하나님 나라에 잘 들어가게 인도하여야 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병은 회개를 하지 않는 한 치료가 안됩니다.
    회개를 시키고 병마를 좇아 버리면 예수 이름의 권세로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의 실수로 온 병은 조심하면서 약을 사용하면 빨리 났습니다.
    생리적으로 인하여 온 병은 쉬면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낫게 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서 영안을 열고 나의 부족함을 항상 보고 주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항상 요구하면서 살아가는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영적 수치가 보여 집니다(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의 눈이 열린 자는 자기의 수치가 보여 집니다.
    자기의 크나큰 죄가 보여 집니다.
    그리고 이 수치를 씻고 가리려고 회개를 철저히 하게 됩니다.
    이 영적인 수치는 흰옷을 사서 입음으로 가려지게 됩니다.
    교회에 돈을 많이 내어 그 돈으로 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돈으로 이것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흰옷은 무슨 재주를 부려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 3:4- 6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흰옷은 믿음으로 의롭게 성결하게 살면서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하며 회개를 철저히 할 때에 주님이 입혀 주시는 세마포 흰옷입니다.
    세상을 믿음으로이기며, 마귀를 이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입을 수 있는 주님이 입혀 주시는 옷입니다.
    돈으로 사서 입는 옷은 절대로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으며 성결한 삶에서 떠난다면은 이 사람은 벌고 벗고 잠을 자는 사람과 같이 갑자기 일어 날 때에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불이 났을 때에 벌거벗고 뛰어나와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죄인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입니다.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가 안되도록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눈을 열고서 밝은 내세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보면서 영의 세계를 보면서 좀더 값지게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부자가 부자가 아닙니다.
    물론 물질의 부자가 될수록 비례하여 하나님께 믿음의 부자가 되는 영의 눈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복음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물질의 부자는 되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망한 사례를 주님이 말씀하며 깨우쳐 주었습니다.
    물질의 부자도 되고 영의 눈이 열린 사람도 되고 믿음의 부자도 되어야 합니다.
    영의 무지에서 벗어납시다.
    착각에서 벗어납시다.
    영의 눈을 열고 나를 정확히 보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보십시다.

    요한 복음 9:39-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영의 눈이 열린 자를 영의 눈이 안 열린 자가 하는 말은 신비주의, 기복 신앙, 성령파라고 말을 합니다.
    영적 수치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되십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부끄러운 구원에도 참례하지 말고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나를 알고 세마포 흰옷을 항상 깨끗이 빨아 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십시다.

    믿음의 눈과 믿음의 귀

    이사야 43: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시편 115: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편 135:1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가복음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예레미야 5:21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

    에스겔 12:2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Son of man, you are living among a rebellious people. They have eyes to see but do not see and ears to hear but do not hear, for they are a rebellious people.

    - 반역하는 족속
    - 거역하는 백성









     
     

     
     

     
     

     
     

     
     

     
     

     


    욥기 35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이여유.'당신들이 의롭거나 죄가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

    욥기 36장 요약

    하나님은 욥을 축복하셨지만 지금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고 잇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욥기 37장 요약

    하나님은 신기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사람은 당연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6월 17일(화) 욥기 35-3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하신일(36:24)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찌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Remember to extol his work, which men have praised in song.

    찬송(7679)


    하나님의 하신 일(6467)



    하나님의 하신 일(God's Work)  파올로( פָעֳלֹו )


    찬송하기를(*, 타스기아)
    원래 '증가하다', '성장하다', '확대하다'의 뜻을 가진 '사가'(*)의 파생형이나 '사가'(*)가 상징적으로는 '찬양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임에 유의해야 하겠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드높여 찬양하고 광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노래하였느니라(*, 쇼레루)
    '노래'를 뜻하는 명사 '쉬르'(*)에서유래된 파생형이다.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시 13:6;101:1;106:12 등)
    이 단어는 '찬송하다', '노래하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동사가 '보다', '깨닫다'는 뜻의 '슈르'(*)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Ezra, Larcher, Tur-Sinai).
    이 경우에 본절은 '너는...찬송하기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욥기 36장 24절 말씀묵상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버티고 있던 욥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인간의 위치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업적을 경외와 기쁨으로 우러러보고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나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업적에 대해 경외와 놀라움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외심으로 보는 것이 곧 찬양이며 예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겸손하고 상한 심령의 예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버지의 업적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찬양하는 마음이 충만한 인생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욥기 37:5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기이하게(*, 니플라오트)
    -  '기적', '불가사의한 일', '경이로움'을 뜻하는 명사 '펠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사실이나 현상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반절의 '헤아릴 수 없는'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한다.

    큰 일(1419) 가돌( gâdôwl) גָּדוֹל   

    1. 큰.  2. 민 34:6. 3. 수효
    발음 [ gâdôwl ]
    어원  /  14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26회 사용

    관련 성경 /  큰(창1:16, 신6:10, 왕상19:11), 무거운(창4:13), 중한(겔9:9), 강대한(창18:18, 신4:38, 수23:9), 높은(창29:7), 많은(창44:12, 삼상17:25), 더하다(민22:18, 삼하13:15), 장대한(신1:28, 9:2), 강한(신2:10), 광대한(신8:15,왕상8:42), 장성한(삼상17:14), 부한(삼상25:2), 강성한(삼하5:10), 존귀한(삼하7:9, 왕하10:6), 귀한(왕하4:8), 심한(느9:37), 창대한(에9:4), 자랑하는(시12:3), 요란한(렘51:55), 일어나는(욘1:4). [명] 대신(욘3:7), 큰 자(욘3:2), 이층(겔43:14), 권세자(미7:3, 나3:10), 큰일(시106:21, 욥37:5, 시71:19, 렘45:5), 형(창10:21, 겔16:46), 세력 있는 자(레19:15), 큰 인물(삼하3:38). [부] 심히(창15:12, 왕하20:3), 많이(대하16:14), 맹렬히(잠19:19).



    * 1431 . 가달(gâdalגָּדַל   

    1. 함께 꼬다.  2. 위대해지다.  3. 좋은 평가를 받다
    발음 [ gâdal ]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שַׂגִּיא 스트롱번호7689
    1.

    2.

    위대한

    3.

    욥36:26

    발음 [ saggîyʼ ]
    어원
    767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큰, 위대한, 욥36:26, 37: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큰(욥36:26, 37:23).


    שַׂגִּיא 스트롱번호7690
    1.

    위대한

    2.

    많은

    3.

    매우

    발음 [ saggîyʼ ]
    어원
    아람어
    구약 성경
    13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위대한, 단2:31
    • 2.
      형용사, 남성 많은, 단2:48, 4:9(12).
    • 3.
      형용사, 남성 [부사] 매우, 몹시, 단2:12, 5:9.

    참고 정보

    문법설명

    7689와 동일

    연관 단어

    • 문법설명
      7689와 동일
      관련 성경
      ☞큰(단2:6, 5:9), 높은(단4:10), 많은(단4:12,7:5). [부] 많이(단2:48), 심히(단6:14,23).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욥기 36:24~37:24)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충고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6:26절과 37:5절에서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헤아릴 수 없는 분인가에 대한 엘리후의 말이 마지막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다만 그게 욥에게 적용될 때 어떤 의미인가는 생각할 문제입니다. 특히 욥은 이미 하나님의 때에 관한 묵상에서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욥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고 회개하고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23~24절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23~24절입니다.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그럽니다. 이게 엘리후가 지금까지 말한 변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고 완전한 분으로 그 위엄과 더불어 무한한 공의를 행하시기 때문에 죄악된 인간에게 결코, 당신의 행위를 판단받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불가사의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때까지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욥은 그런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대한 욥의 묵상은 결국,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로만 깨달아 알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미 욥이 하나님에 관한 수많은 묵상을 이야기했음에도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정의하고 욥이 고난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한 마음이 교만한 자들에게 결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불의한 비난을 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변론을 통해 욥의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하나님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힐 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공의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욥에게 내린 고난은 매우 정당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욥은 악인이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욥이 이것을 인정치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항변하는 교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켜 멸망당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면서 엘리후의 말이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머지 부분은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엘리후의 말에 관한 묵상을 마치려고 합니다. 엘리후의 말을 살피는 동안 내적 피로도가 너무 심해서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36:1~23절에서 엘리후는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며 고난 중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그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총을 얻어야 한다고 욥에게 가르쳤습니다. 특히 17~23절에서는 고난 중에 경계해야 할 일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고난받는 자의 마땅한 자세를 역설적으로 교훈했습니다. 욥은 죄인이기 때문에 젊은 엘리후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와 권능을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그 안에 살고있는 하나의 피조물로서의 인생이 마땅히 취해야 할 찬송과 겸손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36:24~33절입니다. 엘리후는 인생들이 마땅히 찬송해야 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연 현상들 속에서 찾아내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 두 가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신 하나님 섭리의 위대함입니다. 25, 26절입니다. “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럽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을 설명한 엘리후의 의도는 각각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긴 고난을 지극히 현상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세 친구와 욥의 신앙적 한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와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듯한 욥을 향해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공의로운 섭리 앞에서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순종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37:1~13절)

    여기서는 36:33절에 이어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과 주권적 섭리에 대해 더욱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온 우주적 현상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엄과 헤아릴 수 얼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 표현한 천둥소리 번갯불이 당 끝까지 이르는 모습 천둥이 칠 때 번개가 멈추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말합니다. 6~13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운행되는 자연 현상들을 증거합니다.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고 하시고 적은 비와 큰 비도 명하여 내리게 하신다고 합니다. 폭풍우도 추위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창조 신앙고백입니다. 비가 형성되는 과정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나 땅으로부터 습기를 하늘로 끌어 올려 비를 준비하시고 구름 속에 보관하고 계시다가 그의 목적에 따라 다시 땅과 바다에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12~13절은 새번역으로 읽어 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뭉게뭉게 떠다니며,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이 땅 위의 어디에서든지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에 물을 주시려고 비를 내리십니다. 사람을 벌하실 때에도 비를 내리시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에도 비를 내리십니다.” 그럽니다. 구름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서 땅의 여러 지역에 비를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해 내리는 비를 인생들을 징벌하는 도구로도 쓰시고 축복하시는 도구로도 쓰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14~24절)

    사실 이 말씀들의 결론은 이미 살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또한 이러한 자연 현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욥이 그분의 섭리를 함부로 말하며 불평하기보다는 그분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깊이 묵상하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15~18절은 ‘아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만한 엘리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그럽니다.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고 묻습니다. 18절에서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설의적 질문들을 동반함으로써 사실상 인간의 이성적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9절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엘리후 자신이 지금까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연 현상에 개입된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이해할 만큼 욥이 지혜롭다면 욥이 갖고 있는 지혜를 자신들에게 내보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욥 또한 자신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책망이며 비웃음인 것입니다. 20절도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럽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호소하는 자신의 변론을 듣고 속히 응답해 주시기를 바랬지만 이러한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는 것을 몹시 탄식했습니다(23:2~9). 이에 대해 엘리후는 피조물에 불과한 욥이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몹시 잘못된 태도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20절에서 욥이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섣불리 행동하는 것은 매우 패역한 행위라는 사실을 욥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패역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만큼 속히 이러한 행동을 중지하라는 훈계인 것입니다.

    21절부터 엘리후는 측량할 수 없는 권능으로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끝까지 경외할 것도 권면합니다. 특히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찬란히 빛나는 위엄이 나타난다는 표현을 통해 그 공의가 실현될 것이 증거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욥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새번역으로 21~22절을 읽어 봅니다. “이제 하늘에서 빛나는 빛이 눈부십니다.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밝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북쪽에는 금빛 찬란한 빛이 보이고, 하나님의 위엄찬 영광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럽니다. 구름이 끼면 하늘에 있는 태양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구름이 개이면 사람도 다시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바로 이와같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닥치면 고난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은 그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을 견디어 내면 그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21절을 통해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욥의 모습에 대한 비난과 아울러 욥이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내면 다시 그의 상태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복선적인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이 고난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 말이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틀린 말인 것입니다. 22절 역시 북쪽 하늘에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 두려운 위엄이 있다는 것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구름이 걷히면서 눈부신 금빛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23~24절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없으니 불평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킴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욥에게 조용히 기다리면서 불평하지 말라는 권면은 도무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날입니다. 엘리후처럼 교만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하루를 열어 봅니다. 내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가르치는 어리석은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욥기 32장 요약 /

    욥의 말이 끝납니다.
    엘리후가 세 사람이 대답 못하고 정죄한 것에 대하여서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친구들이 못했으니 이제부터 내가 반박하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속에 전능자의 기운이 있다(8절)

    욥기 33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 '잘못 없다는 욥의 말에 대한 반론을 제기
    욥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욥기 34장 요약

    엘리후가 욥과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곳이 없다.
    욥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6월 16일(월) 욥기 32-3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능자의 기운(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The Spirit of God has made me; the breath of the Almighty gives me life.

    엘리후는 계속하여 잘못이 없다는 욥을 향하여 이렇게 내뱉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셨느니라."
    엘리후의 말은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떳떳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루아흐 엘(רוּחַ־אֵל)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루아흐 엘(רוּחַ־אֵל)"이란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루아흐 엘"이란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루아흐는 "생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 즉 피조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는 말씀은 전능자의 호흡(네쉬마)에 의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능자의 기운(the breath of the Almighty) 니쉬마트 솨다이( וְנִשְׁמַת שַׁדַּי)

    전능자(7706)  솨다이 [ Shadday ]  שַׁדַּי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가장 능력있는 자, 전능자, 창17:1, 28:3, 출6:3, 욥5:17,6:4.
    •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 7703. שָׁדַד      

    1. 강하다.  2. 난폭하게 행동하다. 3. 분사 ׃ שׁדְדֵי לַיְלָה 밤도둑
    발음 [ shâdad ]
    구약 성경  / 43회 사용



    기운(5397) 네쉬마(neshâmâh)   נְשָׁמָה     

    1. 호흡.  2. 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  3. 사람의 정신
    발음 [ neshâmâh ]
    어원  /  53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4회 사용
    • 1. 명사, 여성 호흡, 정신.
      • a. 명사, 여성 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רוּחַ אֱלֹהִים과 동일], 욥32:8, 33:4.
      • b. 명사, 여성 사람의 정신, 영혼, 창 2:7, 욥 27:3.
      • c. 명사, 여성 생기, 호흡, 신 20:16, 수 10:40.
      • d. 명사, 여성 마음, 잠 20:27
    • 2. 명사, 여성 여호와의 호흡[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사용], 사 30:33, 시 18:16(15).
    • 관련 성경  /  생기(창 2:7), 호흡(신 20:16, 사 2:22, 단 10:17), 호흡이 있는 자(수 11:11, 14, 시 150:6), 콧김(삼하 22:16, 시 18:15), 생명(왕상 15:29), 숨(왕상 17:17), 기운(욥 4:9, 33:4, 37:10), 정신(욥 26:4), 영혼(잠 20:27), 혼(사 57:16).

    5395. נָשַׁם    

    1. 숨이 가쁘다.  2. 사 42:14.
    발음 [ nâsham ]
    구약 성경  / 7회 사용
    • 1.  원형 숨이 가쁘다[출산시의 부인에 대한 쓰임], 사 42:14.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를 통해 엘리후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욥을 비교하고 있다.
    즉, 여기서 그는 자신 역시 욥과 조금도 다름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인간적인 권위로는 욥에게 어떤 권고나 교훈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반어적으로 자신의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감동된 것이기에 능히 욥을 가르칠 수 있다는 뜻으로서 자신의 변론에 신적(神的)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전능자의 기운(니쉬마트 솨다이)
    - 직역하면 '전능하신 자의 숨결, 전능하신 자의 호흡'
    전능하신 자는 하나님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앞 구절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반복한 평행 구절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다름아닌 인간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의 숨결이 주어져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함으로써 한편으로 욥과 동일한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능자의 기운'으로 영감된 자신의 말을 꼭 주의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엘리후는 자신의 존재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신이 자신을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자신을 살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엘리후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그분의 영감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자이므로 욥에게 충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말의 권위를 자신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있음을 역설한 것입니다.

    a. 생기는 하나님의 영(민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b. 총명을 주심(욥 32: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성령은 하나님의 숨이요, 호흡이란 사실은 상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진리입니다.
    누가 성령(Holy Spirit)과 성신(Holy Ghost)의 차이를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둘은 정확히 같습니다.
    다만 성령의 기능, 사역적 측면을 언급하고 강조할 때는 성령(Holy Spirit)을 쓰고 하나님으로서의 신격과 존재를 강조할 때는 성신(Holy Ghost)를 씁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만 138회나 등장합니다.
    영이 비인격적 존재와 속성적 어감을 느끼게 해 주는 반면 Ghost는 인격적 존재와 속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숨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생명이 탄생했고, 마른 골짜기의 뼈들 속에 들어가 그들이 부활했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 살아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본래 흙이었지만 하나님의 숨이 들어왔을 때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골짜기에는 이미 죽어서 뼈들만 남았지만 바람에게 대언하여 숨이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겔37:9,10).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셨을 때 말씀의 소리는 인간의 목과 입과 혀를 통해 나오는 육성이었지만 그 말씀 자체는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영감있는 말씀이었습니다(딤후 3:16).
    영감이란 단어는 inspiration인데 이는 “숨을 들이킨”이란 뜻입니다.
    어떤 물체는 밀봉을 해서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 있음으로 생명의 말씀이 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 됩니다.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말씀](벧전1:23)이 됩니다.

    우리는 잠시도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몇 일을 살 수 있지만 호흡 없이는 몇 분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생명은 호흡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호흡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코나 입으로도 숨을 쉬지만 우리의 피부 역시 호흡을 합니다.
    단전호흡, 뇌 호흡, 복식 호흡 등 호흡법에 대한 훈련도 매우 많습니다.
    사람은 하루에 13,500여회나 끊임없이 호흡을 합니다.
    우리는 공기에 무슨 성분이 있는지 정확히 다 알지 못하지만 호흡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압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무릇 모든 생명체는 호흡을 통해 삽니다.
    공기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호흡이 필요 없는 것은 무생물일 뿐입니다.
    보통 사람이 한숨에 들이 마시는 공기의 양은 3.9리터 전후이며 폐에는 늘 1.2리터의 정도의 공기가 잔류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잠잘 때 호흡하는 공기량은 500cc 정도로 줄어듭니다.
    호흡 곤란, 호흡 장애를 느껴 보셨습니까?

    고산 등반을 하는 사람들은 호흡 훈련을 합니다.
    노래를 하는 사람들 역시 호흡을 조절하는 법을 배웁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숨이 차지만 않는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일하고 뛰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호흡입니다.
    호흡의 활동이 인간의 활동입니다.
    숨 쉬는 것이 가장 쉬운 듯하지만 호흡 곤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호흡보다 고되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응급 구조 훈련을 받는 사람은 가장 먼저
    호흡법을 배웁니다.
    사람을 구조할 때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진 것보다 더 급한 것은 그 사람이 숨을 쉬고 있는가? 입니다.
    응급 구조자는 제일
    먼저 호흡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호흡 정지 또는 호흡 감소가 있을 때는 즉시 기도를 확보한 후 기도가 열리면 환자는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약에 환자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거나 전혀 숨을 쉬지 못하면 인공호흡을 시작해야 합니다.

    호흡(숨)은 생명입니다.
    숨을 거두었다고 하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의 어휘입니다.
    숨을 거두는 것이 죽는 것이고, 숨을 쉬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죽음이 무엇이냐?
    언제 죽은 것으로 결정하는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뇌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뇌파가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했고, 심장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은 뇌사, 심장사가 아니라 ‘숨을 멈추는 것, 호흡이 정지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내 뇌파가 멈추어, 내 심장이 멈추어]란 식으로 죽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주님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죽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니라.](창 25:8a).

    숨을 거두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나이 많고 날수가 차서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합쳐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묻으니라.](창 35:29).

    숨을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야곱 역시 그러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치고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자기 백성에게로 합쳐지니라.](창 49:33).
    숨을 거두는 것이 죽음입니다. 호흡의 유무가 생명과 죽음의 기준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신즉 그것들이 떨고 주께서 그것들의 호흡을 거두어가신즉 그것들이 죽어 자기들의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
    이것이 정확한 죽음의 정의입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몸은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이는 [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호흡을 주신 분이 호흡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것이 죽음의 성경적 정의입니다.
    이는 의학적 정의보다 더욱 정확하며 영적 진리입니다.
    숨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두시는 것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돈을 회수하듯이, 물건을 회수하듯이, 들에 있는 곡물을 창고로 거두어들이듯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있는 숨(호흡)을 거두어들이신다는 것입니다.
    호흡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자신의 것인 줄 아는 신체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특히 호흡은 주님의 것임이 성경에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주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임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주셨고, 호흡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이사야 42:5, 사도행전 17:25입니다.

    [하늘들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과 땅에서 나오는 것을 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고 땅에서 걷는 자들에게 영을 주시는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42:5).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인간을 창조하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흡을 주시고...영을 주시는 [주] 하나님”. 주님은 호흡과 영을 주셨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호흡을 주관하는 신체 기관으로 폐를 지목하지만 호흡이 필요한 이유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약 2:26a)라고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은 죽은 몸입니다.
    영이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호흡이기에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의 영 역시 하나님이 주신 영이기에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다.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행 17:25).

    주님이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부귀와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눈을 주시지 않으셨고, 어떤 이에게는 귀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습니다.
    호흡을 받은 것이 출생이요, 숨을 거두어 가시는 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호흡을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리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기술을 이용해 로봇을 만듭니다.
    기계 장치를 써서 움직이기도 하고, 일도 잘합니다. 강력한 힘을 부여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봇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까?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에너지가 있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생명입니까? 호흡이 있어야 합니다. 호흡이 생명의 유무입니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각종 우상들이
    움직입니다. 조각들 속에 전자 장치를 달아서 관광객들에게 안내 방송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호흡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화 있을진저, 나무에게 말하기를, 깨라, 하며 말 못하는 돌에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가르치라, 하는 자여!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한가운데는 전혀 호흡이 없느니라.](합2:19). 호흡의 유무가 생명의 유무입니다. 동작의 유무,
    에너지의 유무가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 역시 그러합니다.
    호흡으로 예표 되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영적 생명이 출생합니다. 호흡이 없으면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성령이
    없으면 우리의 영은 죽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친교할 수 없고, 경배할 수 없고,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들어오면 우리의 영은
    새롭게 되며, 거듭납니다. 거듭난 영은 점점 자라나면 강성해지고, 주님의 형상과 완전히 일치할 때까지 계속 변화됩니다. 우리의 영은 완전을 향해
    자라갑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호흡이 사라지면 즉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호흡이 떠나가면 그가 자기
    땅으로 돌아가고 바로 그 날에 그의 생각들이 사라지리로다.](시146:4).

     그러나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몸과 영은 가는 곳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나와 모두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거니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는 자가 누구이랴?](전3:20~21). 사람들은 몸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다 알지만
    영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죽습니다. [영]은 우리에게 영을 주신 주님께 돌아갑니다. 영은 하나님이 회수해 가십니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12:7). 우리가 숨을 거둔다고 할
    때 영이 주님께로 떠나는 것입니다.

     호흡은 주님이 주신
    것이요, 주님의 것입니다. 창세기로 가 보겠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창2:7). 여기서 생명의 숨이 바로 하나님의 호흡 즉 성령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 부분으로 만드셨습니다. 영, 혼, 육입니다. 육은 땅의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타락했을 때 “너는
    본래 흙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영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입니다. 몸을 지음받은 그대로 지탱하는 것은
    영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호흡이 동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영과 호흡을 동시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이라는 헬라어 "프뉴마"
    와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숨 또는 영"을 의미합니다.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호흡이 없이는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호흡을 통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힘을 발휘할
    때도 호흡을 동반합니다. 역도 선수들이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릴 때 호흡을 가담 듬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임을 말해 줍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호흡, 숨)으로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말이 호흡을 통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작품을 완성하면서 [숨을 불어 넣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마치 숨을 쉬는 것 같다는 말은 살아 있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누구와 일을 같이 할 때는 호흡을 맞춘다고 합니다. 호흡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이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 역시 그러합니다. 주님은 “내 말은 곧 영이요,
    생명이다”(요6:63)라고 하셨는데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호흡(숨)]이 담긴 말씀이란 뜻입니다.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의 호흡(숨)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이란 하나님의 호흡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 좋은 공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고 산을 찾고 바다를 찾습니다. 자연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숨을 받아 마시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공기는 바다나 산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맡을 수 있고, 깊이 들이킬 수
    있습니다.

     영감을 얻고 싶습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취하십시오.
    영감이 없는 모조품들에서 영감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감]의 보고인 성경을 보십시오. 그 속에서 숨을 불어 넣으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이 주신 숨은 빽빽한 숲이나 풀이 뿜어내는 자연의 공기보다 훨씬 맑고 깨끗하며, 넘치는 생명을 줍니다. 주님의 영감(숨)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사람들에게
    명철을 주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 작가의 숨결이 느끼듯이 주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우리를 지으신 주님의 호흡이 우리
    속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명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점을 알고 꾸준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한다면 놀라운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숨결과 함께 나온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숨이 막히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맺지 못하는 자라.](마13:22).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전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몰라 고민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숨을 막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를 처리하지 않은 채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숨을 막아 놓으면 어떤 생명도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 염려, 재물의 속임, 쾌락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은 말씀의 숨을 틀어 막고 콘크리이트 바닥보다 더 두꺼운 것들입니다. 배고픈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목마른 것이고, 목마른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숨이 막히는 것입니다. 숨이 막힌다!!

     교회를 오래 다녔고, 설교를 수 천편 들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분이 부족하고, 숨이 막힌 관계로 들은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눅8:14). 이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듣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누가 목을 조르거나 숨통을 조여 들면 살 수 있습니까? 하루 하루가 숨이 콱콱 막히는 것 같고 곧
    질식할 것만 같다면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활로를 얻지 못하고, 숨이 막힌 상태가
    아닌지 살펴 보십시오.

     호흡은 영입니다. 호흡은 생명입니다. 우상들이 왜 우상입니까?
    호흡이 없기 때문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시135:17). 호흡이 없는 것들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호흡이 있습니다. 호흡이 없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아는 것이 짐승 같고
    주물공마다 새긴 형상으로 말미암아 당황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형상이 거짓이요, 그 속에 호흡이 없기 때문이로다.](렘10:14).
    호흡이 없다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며, 영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은 형체는 있으나 생명과 영이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호흡을 불어 넣으셔서 숨을
    쉬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서 왔습니까? “전능자의 호흡”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흡이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숨이 코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생명의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증표이며, 매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귀한 증거입니다. 숨을 쉬는 것은 단지 신체의 활동이 아닙니다. 숨을 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의 활동입니다. 영이
    내 안에 존재하고,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때로 폐나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호흡 곤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흡과 신체(몸)의
    관계만 규명할 뿐 호흡과 생명, 호흡과 영의 관계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호흡법에 대한 강좌나 책들이 매우 많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호흡]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보았는데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자료가 이교도들의 것이었습니다. 전통 민족 종교나 인도의 종교, 불교 등에서
    호흡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한계는 호흡을 통한 몸의 건강, 마음의 평안 등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요
    전부였습니다. 호흡과 영의 관계를 규명해 주는 책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호흡이 몸에 미치는 관계는 이미 의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호흡이 영에 미치는 관계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호흡이요,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영의 존재와 활동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욥은 말하기를, 자신의 육체적 생명이 살아 있는 동안이란 말을 [내 호흡이 내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내 코에 있을
    동안에는] (욥27:3)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지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영적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호흡과
    영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산소를 들이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전부인 지금 세대에 성경적 진리를
    들이대는 것은 우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호흡과 영을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영의 존재나 실체에 대해서 가물가물하신 분들은
    호흡/숨이 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위에 하신 일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주님은 그들 위에 숨을 내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신 것은
    '자신의 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지금 제자들 위에 내 쉬는
    숨(호흡)이 곧 성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성령]이란 증거는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호흡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성령이란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서리가 내리고 물의 너비가 줄어드느니라.](욥37:10).
    사람도 때로 호흡으로 물을 식히기도 하고, 언 것을 녹이기도 합니다. 입술의 호흡으로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흡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고 물의 너비가 줄어듭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으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불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단지 호흡이 아니라 성령님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무리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시33:6). 창조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십시오.
    주의 말씀과 그분의 입의 호흡이 창조 사역의 주체이십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호흡은
    성령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삼위일체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 숨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호흡이요,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심판의 도구입니다.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하여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며](사11:4). 주님은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인다고 말씀합니다. 말과 호흡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칼과 입술의
    호흡 역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역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씀, 입에서 나오는 호흡은 매 한
    가지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혼이 되게 하신 것처럼 다시 사람을 살리실 때도 동일한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너희 위에 살이 생기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숨을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살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숨’입니다.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입니다.
    주님의 숨은 성령입니다.
    주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 넣으셨듯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서 뼈만 남은 자들을 살리시는 방법 역시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바람처럼 몰아와 그들 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살게 됩니다.
    여기는 논리나 자연 과학적 지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권능이 전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누구든지 살리실 수 있습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숨이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는데 심히 큰 군대더라.](겔37:10). 하나님의 숨이 들어갔다!는 말은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숨(호흡)이 대륙의 북풍처럼 몰아치고,
    토네이도나 허리케인처럼 몰아쳐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임합니다. 말씀을 믿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들 속으로 하나님의 숨이
    들어갑니다. 주님은 자신의 숨결을 그들 속으로 불어 넣으셔서 새로운 창조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에베소서 2:10에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이는 성령을 통해 새롭게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새 생명을 불어
    넣으셨음을 말합니다. 신선한 바닷바람이나 산바람이나 계곡의 바람과 달리 성령의 숨이 우리 속으로 스며들어 죽은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를 살리며, 새롭게 빚으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저와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호흡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호흡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속으로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쉼 없이 숨을 들이키고 내뱉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성령 역시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십니다.
    숨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듯이 성령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호흡이 그칠 수 없고, 중단될 수 없듯이 성령의 임재 역시 그러합니다.





    루아흐(7303) [ rûwach ]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관련 성경 / 영(창1:2, 삼상10:10, 사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2:11). [동]헐떡이다(렘14:6).

    네페쉬

    נֶפֶשׁ 스트롱번호5315
    1.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nephesh ]
    어원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13:20], 5314에서 유래
    구약 성경
    7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 a.
        명사, 여성 숨, 욥41:13.
      • b.
        명사, 여성 נֶפֶשׁ חַיָּה 생기, 창1:20,30.
      • c.
        명사, 여성 [향기로운] 냄새, 잠27:9, 사3:20.
    • 2.
      명사, 여성
      • a.
        명사, 여성 영혼, 창9:4,5, 레17:11, 신12:23.
      • b.
        명사, 여성 생명, 생명의 본원, 창12:13, 35:18,출21:23, 민31:19, 수9:24, 삿16:30, 왕상3:11, 17:21, 시119:175, 사53:12, 애2:12, 겔32:10.㉠ [생명에 대하여] 목숨, 왕하7:7, 렘44:7.㉡ 삼하14:7, 18:13, 23:17, 왕상2:23, 대상22:19, 잠7:23, 애5:9,욘1:14.㉢ 창9:5, 민11:6, 신4:15, 수23:11,욥14:22, 잠6:30, 27:7, 사55:2,58:10; [민30:3(2), 시69:11(10),잠10:3, 25:25, 27:7, 사5:14,29:8, 겔4:14, 합2:5].
    • 3.
      명사, 여성 마음[감정, 느낌, 그리고 다양한 감성의 처소로서], 창27:4,25, 34:3, 출15:9, 23:9, 신12:20,21, 삿5:21, 삼상1:15, 스36:5, 시6:4, 15:4, 욥19:2,24:12, 27:2, 30:16,25, 시17:9, 27:12,41:3(2), 42:3(2), 57:2(1), 63:2(1),86:4, 104:1, 105:22, 119:28, 143:8,잠6:30, 10:3, 12:10, 21:10, 23:2, 아1:7, 3:1-4, 사1:14, 42:1, 49:7, 렘2:24, 4:19, 5:9, 겔23:18, 미7:1.
      • a.
        명사, 여성 느낌이나 행동 양식[사랑, 인내 등],욥6:11.
      • b.
        명사, 여성 의지, 창23:8, 왕하9:15, 대상28:9.
      • c.
        명사, 여성 이해력, 지력, 시139:4, 잠19:2, 삼상20:4, 신4:9, 애3:20.
      • d.
        명사, 여성
    • 4.
      명사, 여성 동물, 생물, 수10:28,30,32,35,37, 창1:24, 2:7,19.
      • a.
        명사, 여성 [관사를 붙여서] 창1:21, 9:10.
      • b.
        명사, 여성 생령, 창2:7
      • c.
        명사, 여성 [보통 집합적으로] 생물, 창1:21,24,9:10,12, 15, 레11:10, 창2:19, 신24:7, 겔22:25.
      • d.
        명사, 여성 [주]㉠[율법에서]사람, 레4:2, 레5:1,2,4,15,17. ㉡[백성에 대한 통계에서] שִׁבְעִים נֶפֶשׁ 70명, 창46:18,27, 출1:5, 16:16, 민31:46, 신10:22, [비교] 창14:21. ㉢[종들에 대하여] 창12:5, 겔27:13.㉣어떤 죽은 사람, 시체, 레21:11,22:4, 민5:2, 6:6, 9:6,7,10, 학2:13,[비교] 민19:13.
    • 5.
      명사, 여성 어미활용 נַפְשְׁךָ נַפְשִׁי: 나 자신, 너 자신, 창44:30, 욥9:21, 16:4, 시3:3(2),7:3(2), 11:1, 35:3,7, 120:6, 사3:9,26:9, 46:2, 51:23, 호9: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물(창1:20, 2:19, 9:16), 생명(창1:30, 출4:19, 민35:31), 사람(창12:5, 레7:25), 목숨(창12:13, 삼하1:9, 왕상20:42), 뜻(창23:8, 왕하9:15), 마음(창27:4, 출15:9, 레26:30), 혼(창35:18, 삼하11:11), 명(창46:15), 사정(출23:9), 죽은 자(레19:28), 몸(레21:1), 시체(레21:11, 민6:6, 합2:13), 주검(민5:2), 기력(민11:6), 명(名)(민31:35), 영혼(삿5:21, 욥10:1), 죽음(삿9:17), 심정(삼상1:15, 사58:10), 왕(삼상17:55), 중심(왕하4:27, 시131:2), 홀로(에4:13), 기력(욥6:11), 탐욕(시78:18, 사56:11),소원(잠11:23, 19:2), 음식을 탐하는 자(잠23:2), 식욕(전6:7), 욕심(사5:14), 성욕(렘2:24), 생기(겔37:9), 힘(암2:14), 욕심(합2:5).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의 프랑스 계 보수주의 자 "조세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811년 러시아 헌법 제정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쓴 말이다.
    오늘날에는 정치 명언으로 쓰이고 있다.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 vs. 악이 승리하는 유일한 조건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

    –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수구의 원조, 조제프 드 메스트르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누구던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며 절대 군주 정치와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했던 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프랑스의 전통주의, 국가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말이 좋아 국가주의자이지 반동주의적 이념을 대표하는 자다.

    메스트르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란 역사적 연속성의 불행한 단절이며 가톨릭 전통에서의 그러한 이탈 행위는 반드시 제압돼야 한다.”

    보수와 수구(반동주의)는 구별해야

    이나미 박사(연세대)는 [수구 이념의 특징: 보수이념과의 차이를 중심으로](2009)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보수주의는 버크(Edmund Burke)식 보수주의와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식 보수주의로 나뉘기도 하는데(Viereck 1981, 14-16) 전자는 보수주의, 후자는 반동주의로 볼 수 있다. 두 입장 모두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기 위해 등장하였으나, 버크는 변화를 어느 정도 용인하여 융통성이 있었고 입헌주의자요 의회주의자였다. (… 중략 …) 반면 버크와 달리 드 메스트르는 반동주의자로서 군주제와 권위주의를 옹호했다. 우리 역사의 수구파 역시 군주제를 옹호했는데 그 이유는 군주제가 공화제보다 더 공정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동주의의 특징은 수구 이념의 특징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다.

    – 이나미, ‘수구 이념의 특징: 보수이념과의 차이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2009 제7권 제2호, 294쪽.

    이나미 박사는 보수주의와 반동주의를 명확히 구분한다. “반동주의 역시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의로서, 이러한 반동주의의 내용은 개혁을 일부 수용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드 메스트르는 그 반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꼭 유념하자.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수구 반동주의자를 인용한다는 건 나가도 너무 나간 꼴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런 맥락에서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발언은 귀를 기울일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 정치는 그 나라의 시민 수준에 불과하지 시민 수준이 이런데 정치가 좋아질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지만 정치학의 출발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들 만든다’라고 하는 생각 속에 있다.   (…중략…)

    백년 전의 스웨덴을 보면 유럽에서 가장 교육수준도 낮고 가장 못 배웠고 문화라고 하면 거의 술 많이 마시는 문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 사이 스웨덴의 사회도 바꾸고 시민성도 이렇게 달라지게 만든 건 스웨덴의 정치가 역할을 크게 했다.”


    지금은 ‘에드먼드 버크’ 떠올려야 할 때

    시민이 무지하고 무식하다는 이야기 성급하게 꺼내 들지 말자. 시민의 일상적 삶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굴러가지 못한다.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건 정치의 몫이다.

    무지한 정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정치를 비판해야지 시민의 무지함을 탓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자신의 편이 당선되면 시민이 위대하고 반대편이 당선되면 시민이 무지하다고 하는 아전인수, 아무리 봐도 너무 위험한 발언이다.

    지금 우리가 떠올려야 할 역사 속 정치인은 르 메스트로가 아니라 에드먼드 버크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크는 이렇게 말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참고: 버크가 정확하게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사한 취지의 진술을 그의 책(Thoughts on the Cause of the Present Discontents, 1770)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버크가 한 말로 널리 인용된다. (편집자)

    수구 이념의 대안적 개념들로는 반동주의, 근본주의, 정통주의를 들 수 있다.

    1. 첫째, 이분법적 세계관

    보수주의는 세계를 하나의 체계 내지 질서로 보는 반면 수구 이념은 세계를 두 개의 영역으로 본다.
    즉, 자신의 영역을 이상적 세계로, 다른 영역은 열등하거나 악한 세계로 인식하여 이 두 세계는 서로 투쟁하는 관계로 파악한다.

    2. 이러한 수구 이념의 특징은 수구의 두 번째 특징인 유토피아니즘으로 나아가게 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이성을 불신하므로 이러한 이성에 따른 이상 사회 건설 즉, 유토피아니즘을 반대한다. 그러나 수구 이념은 자신의 신념에 따른 정치상 이상을 추구한다. 단, 그것이 진보와 다른 것은 유토피아가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으며 그 목표는 ‘좋았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3. 셋째 보수주의는 실리를 중시하는 반면, 수구 이념은 원리를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는 실리 이외에 고수해야 할 원리가 없으므로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수구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할 원리가 있으며 특히 경전이 존재한다. 경전은 무오류이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된다.

    4. 넷째, 수구 이념은 경전의 원리를 고수하기 위해 실리의 문제뿐 아니라 생사의 문제까지 뛰어넘고자 하는 극단주의가 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반면 보수주의는 안전을 중시하므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대세에 따른다.

    5. 다섯째, 수구 이념은 본래의 원칙과 전통의 고수가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다른 모든 개혁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완강히 변화를 거부한다. 반면 보수주의는 버크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을 존중하는 전통을 갖고 있으며 수구 이념과 달리 남녀차별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 보수(保守) : 지킬 보, 지킬 수
     - 보전(保全)하여 지킴.
     - 새로운 것이나 변화(變化)를 적극적(積極的)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傳統的)인 것을 옹호(擁護)하며 유지(維持)하려 함.


    * 수구(守舊) : 지킬 수, 옛 구
     -
    옛 제도(制度)나 풍습(風習)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


    [고난이 유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
    *잠깐묵상 | 욥기 33장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욥 33:17)

    엘리후는 고난에 대해 세 친구들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고난이 징벌이라 얘기했지만, 엘리후는 고난이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세 친구들보다 훨씬 나은 관점입니다.
    적어도 엘리후는 인과응보 논리에 묶여서 욥을 단죄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의외로 엘리후가 많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같은 이들은 공동체가 감당하지 못하든지, 그들이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든지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드뭅니다. 그러나 엘리후 유형의 사람들은 영적인 통찰력도 좋고, 조리 있게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고, 열정도 있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는 동역자나 동료보다는 해설 위원이나 심판의 역할을 자처할 때가 많습니다. 늘 진리를 말합니다. 맞는 말을 합니다. 물론 그들은 결코 악의적이지 않습니다. 타인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그의 말을 몹시 힘들어합니다. 그가 하는 말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유익하게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 죄책감에 빠집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성경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 스스로 고백해야 할 말입니다. '당신이 당한 고난을 유익하게 생각하라'고 그 누구도 함부로 얘기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유익으로 느낄 것을 강요당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수술용 메스와 같습니다. 진리를 어설프게 휘두르다가 상대방의 상처를 도리어 난도질해 놓을 수 있습니다. 외과 의사들이 사람의 몸에 칼을 대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을 거치는지 모릅니다. 맞는 말일수록 잘 말하는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공감’이 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함께 있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진리가 수술용 메스라면, 감정적 공감은 마취제와 같습니다.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받아주다가 감정이 방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병원에서 진료받다가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되어 버리는 꼴입니다.

    마취제 사용량의 적정선을 알고, 칼을 대야 하는 최적의 시기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입니다.




    욥기 29장 요약 / 욥의 마지막 독백

    '지난 시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욥기 30장 요약 / 욥의 마지막 독백

    도움을 준 내게 사람들은 조롱한다.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렇게 치시는가 모르겠다.
    나는 지금 통곡하고 있다.

    욥기 31장 요약 / 욥의 마지막 독백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일을 알고 계신다.
    나는 정직하고 죄없이 살아왔다.
    나는 돈이 많다고 자랑하지도 않았며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


    6월 14일(토) 욥기 29-3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내 길과 내 걸음(31:4) / 여정(旅程)

    그가 내 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

    히브리서 11:14-16

  •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3968. 파트리스)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1565. 에케이노스)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2909. 크레이트톤)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People who say such things show that they are looking for a country of their own.
  •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e country they had left,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
  • Instead, they were longing for a better country--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3968. 파트리스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 4:44, 히 11:14.
    • 2. 고향, 마 13:54, 막 6:1, 눅 4:23.
    • 관련 성경 /  고향(마 13:54, 눅 4:23, 요 4:44), 본향(히 11:14).



    1565. 에케이노스 ἐκεῖνος, η, ο 스트롱번호1565

    1. 그 사람.  2. 일반형.  3. οὗτος
    발음 [ ĕkĕinŏs ]
    어원  / [지시대명사] 15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저 사람, 저것, 저, 이, 그(마17:27, 10:14, 눅18:14)



    2909. 크레이트톤  κρείττων, ον 스트롱번호 2909

    1. 더 뛰어난.  2. 더 유용한. 3. 더 잘
    발음 [ krĕittōn ]
    • 1.  더 뛰어난, 더 높은, 더 나은, 히1:4, 7:7, 19,22, 8:6, 9:23, 10:34, 11:16, 35,40.
    • 2.  더 유용한, 더 유익한, 더 좋은, 고전7: 9, 11:17, 빌1:23, 히6:9, 벧전3:17, 벧후2:21.
    • 3.  [부사] 더 잘, 히12:24.
    • 관련 성경 /  보다 나은(고전7:9, 히6:9, 10:34), 더 좋은 (빌1:23, 히7:19), 높은(히7:7), 더 유익한(고전11:17).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

    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라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창세기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당신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고후13;5)

    1. 시내산의 깨달음(롬3;21-24)

    2. 가이사랴 빌립보-올바른 발견과 신앙고백-그리스도(마16;13-20)

    3. 변화산의 체험-그리스도에 대한 유일성(마17;1-8)

    4, 갈보리산 십자가의 은혜-나를 바꾸는 변화(마28:1-20. 갈2;20)

    5. 감람산의 미션(천명)-하나님의 나라(행1;1-8)

    6. 마가다락방의 결단(소명)-집중(행1;14)

    7. 성경적 응답과 참 전도(사명)-5가지 시간표(행2;1-47)

    8. 참 선교와 세계복음화(행11:19-31. 행16;6-10, 행19;21)

    9. 영원한 그리스도의 제자(롬16;1-27)




    이력서(履歷書) : 밟을 이, 지날 력, 글 서
    이력을 적은 서면

    (Am) résumé, (Brit) curriculum vitae ((abb.)CV)

    이력서란 어떤 사람이 신발을 식고 걸어온 길을 말합니다.

    인생은 여정이다
    -"Life is a Journey"


    명언의 유래

    "Life is a journey"라는 표현은 라르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유명한 격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의 이 말은 삶이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철학을 나타냅니다.
    에머슨은 이것을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경험을 소중히 여길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습니다.

    ​"Life is a journey."의 의미

    "Life is a journey."라는 명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일련의 경험, 모험, 시련, 그리고 성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 명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Life is a journey."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Life is a journey."는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매우 다재다능한 명언입니다.
    이 명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해하고 활용하는 법을 배워보겠습니다.

    1. 목표 설정과 동기부여:

    • "Life is a journey, and my goal is to climb the highest mountains of success."

    • "인생은 여정이며, 나의 목표는 성공의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다."

    2.어려움 극복:

    • "In the midst of adversity, remember that life is a journey, and this too shall pass."

    • "역경 가운데서도 기억해라, 인생은 여정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3. 새로운 경험과 모험:

    • "Let's embrace new opportunities and adventures because life is a journey meant to be explored."

    • "새로운 기회와 모험을 환영하자, 왜냐하면 인생은 탐험할 운명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4. 자기 발견과 성장:

    • "Through the ups and downs, I've learned that life is a journey of self-discovery and personal growth."

    • "언덕과 골짜기를 통해, 나는 인생이 자아 발견과 개인적인 성장의 여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5. 세계와 연결:

    • "Traveling and meeting people from different cultures has shown me that life is a beautiful, interconnected journey."

    •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하는 것은 인생이 아름다운, 연결된 여정임을 보여주었다."

    "Life is a journey." 명언은 우리의 삶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하며, 새로운 경험과 모험을 즐깁니다. 이 명언은 우리의 목표를 이루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세계와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것이 우리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Life is a journey."를 우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가이드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모든 경험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봅시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 요약

    아브라함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의 심령이 변하는 여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이 세상에 속했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삶에 이르는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처한 환경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각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 과정을 거치는 시간(크로노스적인 시간)의 차이나 과정을 겪는 심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겪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점점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은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먼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하여 인식한다.
    태어나면서, 철이 들면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태신앙이라도 다를 바 없다. 모태신앙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알게 된 하나님의 인식을 바로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요 수단이요 형식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이 세상 안에 보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신앙의 여정을 세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아니 어디에 속했다는 것이나,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이 어디 아래에 있다거나 어디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법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의 법을 따른다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속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을 따르는 생명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속한 상태로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법대로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흑암이 혼돈하고 빛이 없고 어두운 상태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존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렇다. 그 고향 땅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즉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즉 아브라함 역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체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자리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냥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떠났다고 바로 하나님의 정한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떠나라 했으면 단숨에 인도하실 것이지 뭐 그렇게 복잡하고 이래라 저래라는 것이 많으냐는 식의 태클은 다분히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하고자 하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여정은 여러 과정을 거쳐 간다.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다니다가 애굽을 사모하는 롯과의 갈등이 있었듯이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가기 시작해도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안목이 열리고서 마음에 ‘그래도 돈이 있으면 더 복음을 누리는 삶이 더 좋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떨치는데 정말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라고 했다.
    복음을 아는 것이 힘든 삶의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만족이 되지 않았는데 만족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정들을 거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과 같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으려 하고,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더 알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에 때에 이르러 야곱에게서 12아들이 나오고 12지파가 되어 나라가 된 것 같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길 위의 영성 : 걷기의 신학적 의미

    1. 길과 걷기

    우리는 걷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길이 무엇인가 물어야 한다.
    길은 무엇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길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
    , 교통수단으로서의 길,
    둘째, 방도를 나타내는 길,
    셋째,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이 세 가지 의미의 길은 두 종류의 길로 정리될 수 있다.
    ‘유형적 길’
    ‘무형적 길’이다.
    유형적인 길은 걷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은 길 위에서 존재하며, 길을 만든다.
    보이지 않던 길들이 사람이 걸으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곧 걷기를 통해서 오솔길, 산길, 골목길, 자갈길, 순례길 등 다양한 길들이 생겨난다.

    그러면 무형의 길은 어떠한가?
    무형의 길도 걷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걷기는 인생의 길을 만들어낸다.
    인생의 길들은 행위의 규범이 되기도 하고 삶의 좌표가 되기도 하다.
    현자들은 ‘바른길을 가라’라고 말한다.
    그러면 바른길은 무엇인가?
    무엇이 바른길인가?
    이처럼 우리는 길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길을 한자로 ‘道(도)’라고 부른다.
    도에 관한 물음을 던질 때, 그 답은 절대로 쉽지 않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는 ‘도(길)’를 삶의 근본원리로 보고 있다.
    즉 도는 현상을 가능케 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와도 같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한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λόγος(로고스)’로 ‘도(道)’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최초 번역 성경인 로스(J. Ross) 성경은 “태초에 도가 있느니라”라고 번역했다.
    태초부터 길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길은 삶의 원리이며, 근본을 말한다.
    그러면 그 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구도자(求道者)’이다.
    우리가 ‘전도’라고 할 때, 전도는 예수의 길을 따르라는 설득이다.
    그러므로 유형적 길이든, 무형적 길이든 모두가 걷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이 걷는 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며, 인생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삶의 진리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길로 표현하곤 한다.
    우리의 인생에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때론 꼬불꼬불한 길도 있고, 갈림길도 있다.

    창세기에 등장한 야곱은 자기 인생을 험한 길로 표현했다.
    그는 인생 말년에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다(창 47:9).

    ​야곱은 자신의 인생길을 ‘나그네 길’ 그리고 ‘험악한 세월’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삶이 험악한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야곱은 ‘오르막길’을 걷기도 했고, ‘내리막길’를 걷기도 했다.
    그리고 형 ‘에서’와의 갈등 속에서 ‘갈림길’도 경험했다.
    야곱은 그가 걸어왔던 모든 길을 험악한 세월로 정리했다.
    이처럼 길 위에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곧 우리는 길 위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길 위에는 ‘영성’이 있다.

    ​2. 걷기와 영성

    일부 인류학자들은 걷기의 시작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에서 찾는다.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걷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살았던 화석인류로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인류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길을 떠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의 진화를 바로 ‘걷기(직립보행)’에서 찾았다.
    인류가 두 발로 걷는 동안 뇌와 다리 사이에 복잡한 신호 교환이 일어나면서 두뇌가 발달하게 되었다.
    곧 걷기를 통해서 사유하는 존재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걷기를 발의 움직임을 통한 정신의 운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황용필은 『걷기의 인문학』(샘솟는 기쁨, 2017)에서 “가장 원시적인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 속에서 우리들의 사고는 춤을 추고 생각은 구름처럼 왔다가 흩어진다.
    느리게 걷고 깊이 사유하는 발끝은 위대한 문장과 선율 그리고 성찰의 시작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걷기는 우리의 생각을 더욱 자극한다.
    발의 움직임 속에서 생각도 움직이고 사색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 D. Thoreau)도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머리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발(발끝)이 사유의 시작이다.
    곧 걷기가 사유와 성찰의 시작임을 말한다.

    ‘사유(thinking)’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성(reason)’이며, ‘정신(spirit)’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삶을 성찰하며 이성의 합리성을 회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나(i)’ ‘나(I)’이게 하는 성찰적 움직임이다.
    여기서 ‘소문자 i’는 ‘다양한 자아의 모습들’이다.
    나에게는 하나의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자아들이 있다.
    거기에는 ‘거짓된 자아’도 있고 ‘참된 자아’도 있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서 ‘거짓된 자아’를 넘어서, ‘참된 자아’, 즉 ‘대문자 I’로 나아간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존재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걷기는 몸을 흔들게 하며, 존재의 음성을 듣게 한다.
    여기서 존재의 음성은 ‘내면의 소리’일 수 있고, 또는 신의 음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영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영성은 무엇인가?
    산드라 슈나이더스(S. Schneiders)
    는 영성을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를 향하여 자신을 초월하여 자신의 삶을 통합하려 할 때 경험되는 그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슈나이더는 영성을 두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영성은 자기를 초월해서 궁극적인 가치를 향한다.
    즉 영성은 ‘자기 초월성’에 근거한다.

    ​둘째, 자기 초월을 통해서 궁극적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현재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언어로 쉽게 표현하면, ‘자기 부인(자기초월)’을 통해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 위의 영성은 무엇인가?
    존재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걷기를 통해서 영혼의 감수성이 열리고 나를 있게 하는 근원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길 위에서 신(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을 시온의 대로에서 만나기도 하고, 좁은 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험한 고갯길에서도 만난다.

    ​사람은 길 위를 걷기 시작하면서 신(하나님)을 만난다.
    그래서 길 위를 걷는 것은 육신의 운동을 넘어선 영적인 운동이다.

    영성가 안셀름 그륀(Anselm. Grün)
    은 “걷기는 늘 종교적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걷기는 묵상이며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길 위의 영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길 위에서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해보자.

    3. 아브라함의 걷기

    하나님의 구속사는 ‘걷기’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에덴을 걷고 계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동산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영이신 하나님은 바람처럼 에덴동산을 걷고 계셨다.
    길 위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길 위에 서면 그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길은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길 위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하나님은 길 위에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를 깨닫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걸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걷기는 ‘구원의 걸음’이다.
    그분의 걸음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있다.
    길을 벗어난 사람을 다시 길 위를 걷도록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길을 벗어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그들을 다시 길 위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언약의 길을 걷게 하셨다.
    그러므로 걷기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걷기의 구속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화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는가?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서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까지 왔다가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고,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먼 거리를 걸었을까?
    우르에서 하란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1,000㎞ 정도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처음으로 정착한 가나안 세겜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700㎞ 정도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을 직선거리로 환산하면, 대략 1,700㎞를 걷는 셈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이 직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 계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수천 킬로를 걸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

    아브라함의 걷기 여정

    아브라함에게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브라함의 걷기는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걷기는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그의 걷기가 주는 의미를 세 가지 관점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부르심(떠남과 순종)’

    ‘정체성’
    '인생의 가장 힘든 길’

    ​1. 약속의 땅을 향한 걷기 : 부르심(떠남과 순종)

    아브라함에게 길이 주는 첫 번째 의미는 ‘부르심’이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런데 그 길들은 나를 부른다.
    내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때론 한 길만 있어서 선택할 필요가 없이 그 길을 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여러 길이 있을 때,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길은 부르심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냥 그대로 있던 곳에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걷기의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걷기는 ‘떠남이다.
    직립보행의 최초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가 걷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를 떠났듯이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과거를 뒤로하고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과거와의 이별’이다.

    ​아브라함도 걷기 위해서 삶의 익숙한 것들을 떠나야 했다.
    그 당시 유목민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친족들과 함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걷기를 통해서 삶의 안전판들을 떠나보냈다.
    이처럼 걷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하게 한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서 떠남을 훈련해야 한다. 전통과 관습 그리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걷기가 없이는 새 길을 발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떠남이 없이 새 길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순례객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성 야고보의 무덤을 향한 그 길 위에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고 있다. 그 떠남을 통해서 새 길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익숙한 고향을 두고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떠남이며 새 길을 찾는 움직임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걷기가 주는 첫 번째 의미이다.
    곧 걷기는 부르심에 떠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또한 걷기는 ‘순종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걷기는 나를 비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몸짓이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각이 있었다면, 약속의 땅을 향한 길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란에 머물며 자신의 장막을 더 안전하게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다.
    왜 아브라함이 떠날 수 있었는가?
    아브라함의 걷기에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라고 기록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붙잡고 길을 떠났고, 말씀을 의지하며 길을 걸었다.
    그에게 말씀은 순종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나안을 향한 걷기는 ‘말씀의 순종’이다.
    여기서 우리는 걷기가 ‘말씀 묵상’임을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으면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묵상이 희미해질 때, 그는 길을 잃기도 하였다.
    길이 보이지 않아서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방황은 무슨 의미일까?
    그의 방황은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했다.
    그럼 계속해서 길 위에서 방황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자.

    2. 걷기와 아브라함의 정체성

    아브라함은 75세, 그의 아내 사라는 65세에 가나안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가나안 땅에서 무려 62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자기 소유의 땅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127세에 가나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 장지를 구하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가서 은 사백 세겔에 막벨라 동굴을 샀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다.
    그때까지 자기 소유의 땅 한 평도 없다니 말이 되는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약속의 땅에 왔는데, 여전히 나그네로 살고 있는 자신을 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히브리서 11장은 그의 인생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라고 기록했다.

    ​나는 여기서 걷기의 두 번째 의미를 발견하였다.
    걷기는 내가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알게 한다. 걷는다는 것은 내가 나그네요, 순례자임을 알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곳에 오래 머물고자 한다. 울타리를 치고 내 성을 쌓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걷기는 내 경계와 울타리를 넘어서게 한다. 내가 길 위의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나그네를 환대하게 된다. 길 위에서는 누구나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걷기는 단순한 세상의 나그네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브라함의 방황은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더 나은 본향”(히 11:16)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정의하고 있다. 분명 아브라함에게도 ‘고향(본향)’이 있다. 언제든지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길 위에서 걷기를 훈련한 사람은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한다. 이 땅의 고향이 영원한 본향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걷기를 통해서 배운 순례자의 영성이며, 길 위의 영성이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순례자의 영성을 갖고 걷기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걷기를 멈추고 한곳에 머물면서 그곳의 주인이 되고자 하기도 한다. 내 소유의 울타리를 더 높이 쌓고 안주하고자 한다. 마치 그곳을 영원한 본향으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걷기는 나의 거짓된 환영을 걷어내 준다. 곧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외국인임을 깨닫게 한다.

    3. 모리아 산을 향한 3일간의 걷기

    우리 인생이 가장 힘든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 길은 견디기 힘든 고통의 길이다. 그래서 그 길만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구나 한번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믿음의 걷기를 시작한 아브라함에게 가장 힘든 여정이 있다. 그것은 100세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지정한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다. 우리는 앞 절에서 길은 부르심이며, 떠남과 순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이삭을 떠나보내는 길을 향한 걸음은 결코 쉽지 않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흘 길을 떠났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서 바라본지라”(창 22:2-4)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브엘세바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그동안 눈에 가시처럼 자신을 괴롭게 했던 그랄 왕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래서 그는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창 21:33)을 찬양하였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시기가 있다.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이제 시온의 대로만 펼쳐질 것으로 생각할 때이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길이 우리를 부른다. 독자 이삭을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그때 우리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아브라함은 부르심의 길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들 이삭을 제물로 태우기 위한 나무를 쪼갰다. 아브라함의 도끼질은 자신을 죽이는 예배였을 것이다. 나를 죽이지 않고 어떻게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대략 80㎞ 정도 된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 길을 두 종과 아들 이삭과 사흘 동안 걸었다.
    마침내 그의 눈에 모리아 산이 보였다. 여기까지 왔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수없이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속담도 있다.
    충분히 무시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길을 걸었다.

    아브라함은 그 길 위를 걸으며, 자신을 수도 없이 죽었다. 그 길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과 같다. 우리 인생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부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길 위에서 부활을 보았다. 설령 독자 이삭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이 살려내실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근처에 도착하자, 종들은 그곳에 남게 하고 아들 이삭과 함께 산에 올랐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22:6).

    아들 이삭과 아버지 아브라함이 함께 걷는 모습이다. 아들 이삭은 순종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동행하고 있다. 길 위에 있는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죽음으로 순종의 길을 완성해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걷기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행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거기에는 죽음이 존재해야 한다. 죽음 속에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길 위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있는 인생은 기가 막힌다.

    길 위에서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내 아버지여”라고 부른다. 그러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대답한다. 이삭이 또다시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부자간의 대화이다.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브라함에게 여전히 이삭은 “내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길 위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는 때론 내 생명보다 귀한 것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다. 길은 그것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아브라함의 사흘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절망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부활이 숨쉬고 있다. 죽음의 길을 걷는 것 같지만, 그 길에는 영원한 부활이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아브라함의 사흘 길은 바로 우리에게 절망의 길 위에 소망의 길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절망의 길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길 위의 영성을 지녀야 한다.

    4. 예수님의 걷기

    1) 예수님의 걷기 사역

    예수님은 길 위에서 사셨고, 길 위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주변을 두루 다니셨고, 지중해 쪽으로 두로와 시돈을 가시기도 했다. 그리고 유월절, 칠칠절, 오순절이면 예루살렘까지 가셨다. 공생애의 마지막 해에는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가시고, 그곳에서 다시 예루살렘 골고다까지 걸어가셨다.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걷기 사역이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의 걷기를 간략하게 정리한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셨다”(마 4:23)

    마태는 주님의 걷기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즉 ‘가르침(교육)’, ‘전파하심(전도)’, ‘치유’이다. 주님의 걷기는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걸으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하셨다.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마 4:19) 주님을 따랐다. 그리고 더 걸어가시다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마 4:22) 예수를 따랐다.

    우리는 여기서 걷기의 두 면을 볼 수 있다. 먼저 주님의 걷기는 ‘찾아감’이다. 예수님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가셨다.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찾아가셨고, 야고보와 요한을 찾아가셨다. 주님의 걷기가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의 걷기는 사욕의 도구가 아니었다. 곧 주님은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걷지 않으셨다. 주님이 걸으면 걸을수록 다른 사람들은 더 큰 기쁨과 만족을 누렸다.

    예수님의 걷기는 ‘남을 위한 걷기’다. 주님의 걷기는 나를 위한 걷기가 아니라, 남을 위한 걷기임을 알게 하셨다. 우리도 이제 나를 위한 욕망의 걷기를 멈추고 남을 위한 걷기를 훈련해야 한다. 얼마 전 SNS를 통해서 어떤 분이 자신이 걷는 만큼 기부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남을 위해서 걷기를 시작한 것이다. 주님처럼 걷기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걷기는 무엇인가? 그들의 걷기는 ‘권리포기의 걷기’다. 성경의 언어로 표현하면, ‘부르심의 순종’이다. 제자들은 걷기를 통해서 자기를 내려놓았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무엇을 내려놓았는가? 자기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였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생명과도 같다. 그것이 없이는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의 길을 따랐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의 길을 따랐다. 그러므로 걷기는 ‘내 욕망의 멈춤’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걷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뒤를 자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불안감’ 때문이다. 그리고 남겨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연민 때문이다. 그래서 걷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곤 한다. 우리는 뒤에 남겨둔 것들의 아쉬움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부인’을 알고 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9:62)라고 하셨다. 주님의 걷기는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는 걷기는 방황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걷기는 방향이 있다.

    예수님이 길 가실 때 한 서기관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라고 했다. 그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하셨다. 아쉽게도 한 서기관이 걷기를 포기했다. 그는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과 걸을 수가 없었다. 왜일까? 그에게는 내려놓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가 지닌 학식과 재산 그리고 배경 등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걷기를 포기하고 안주를 택했다.

    주님은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러자 그는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눅 9:59)라고 했다. 걷기는 내 삶의 우선이 무엇인가를 보게 한다. 그는 먼저 내 일 처리를 한 후에 함께 걷겠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길을 걷는 데는 많은 방해물이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길 위를 걷다 보면, 전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된다. 진정 삶의 중요한 것들을 보게 한다. 또한 삶의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서 절대자를 바라보게 한다.

    주님은 길 위에서 ‘공중의 새’를 가리키면서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게 하셨다. 그리고 들길을 걸으면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들꽃의 영광이 위대함을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걷지 않고는 들꽃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다. 걷기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주변을 보게 한다. 가까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자세히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한다.

    예수님은 걷기를 통해서 “생활의 염려”를 길 위에 내려놓게 하셨다. 우리는 생활의 염려에 자주 빠지게 된다. 생활의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걷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길을 걷다 보면 생활의 염려가 사라진다. 그리고 길 위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걷기

    “13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눅 24:13-15)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대략 1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두 제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들었다.
    특별히 안식 후 첫날에 예수의 무덤에서 천사를 만난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소식을 듣고 직접 무덤으로 달려가서 세마포만을 발견한 베드로의 간증도 들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의 마음을 품고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실패자의 걸음이며 소망이 없는 걷기였다.
    그러나 그 절망의 길 위에 하나님이 계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다.
    주님은 길 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 24:17)

    길 위에서 주님은 두 제자에게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물었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슬픈 얼굴빛으로 가던 길을 멈추었다.
    둘 중 한 사람은 “글로바”였다.
    그는 핀잔하듯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8)라고 책망했다.
    주님은 길 위에서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면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길 위에서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길 위에는 인생의 답
    이 있다.
    그러므로 길 위를 걸으면서 내 길을 묻고,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글로바는 성경에서 등장하는 인물로, 클레오파스(Cleopas)와 동일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영광"을 의미하는 클레오스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의 결합으로 해석됩니다.
    글로바는 예수의 작은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골로새에서 노년을 보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눅 24:19)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의 말은 선지자처럼 권위가 있었으나,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기대가 실패로 끝났고, 그 일이 있은 지 사흘이 되었다고 했다.
    오늘이 그날인데 무덤을 다녀왔던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했고, 두 사람이 가서 확인까지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들의 말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신다는 말을 기억하게 하셨다.
    그리고 또다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서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주님은 두 제자와 무려 11㎞를 걸으면서
    듣고 질문하기를 반복하면서 대화하셨다.
    이처럼 길은 우리들의 학습장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자 두 제자는 예수를 집으로 모시어 식사를 했다.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서 비로소 그들은 길 위에서 신(神)을 만났음을 알게 되었다.
    두 제자는 길이 주는 교훈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그들은 이미 길 위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마음의 변화를 체험했다.
    그러나 길 위에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는 몰랐다.
    그러나 주님과 성만찬을 하면서 그 길이 절망의 길이 아닌 소망의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길 위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곧 길 위를 걸으면서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길을 걸으면서, ‘다이몬(daimon)’의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다이몬은 영적인 소리로 넓게 보면, 양심의 소리와도 같다.
    길은 우리에게 묻고 또한 그 답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걸어야 한다.

    5. 바울의 걷기 : 걷기는 기도이며 선교이다.

    사울은 욕망의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한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바울은 길 위에서 신을 만났고, 그의 삶은 180도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삶을 길 위에서 만난 예수를 위해서 바쳤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이 잘 기록되어 있다.
    메멋 타스리알란(Mehmet Taslialan)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여행이 대략 2만㎞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지구의 절반 거리에 해당한다.
    바울이 뱃길을 이용했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울은 걸어서 선교지를 찾아다녔다.
    그는 걷고 또 걷는 길 위의 복음의 전도자였다.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코스를 보면, 구브로 – 버가 - 비시다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더베였다.
    다시 역순으로 해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2년 동안 대략 2,240㎞ 정도나 되는 거리를 다녔다.
    그가 걸었던 주요 길을 찾아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Cyprus)의 ’살라미(Salamis)에 도착해서 섬 한 가운데를 관통해서 '바보(Paphos)'까지의 걷기다.
    이 거리가 대략 180㎞ 정도 된다고 한다.

    바울은 구브로 섬 중앙을 관통해서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울은 처음 도착한 살라미에서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섬의 총독이 있는 '바보'로 가고 싶었다.
    곧 섬의 심장부에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섬의 가장 짧은 길인 중앙을 관통해서 바보까지 걸었다.
    바울은 이 길을 걸으면서 살라미에서의 선교를 성찰하면서 다시 시작될 바보에서의 선교를 계획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바울의 걷기는 기도이며, 선교이다.
    바울은 구브로 선교를 마치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버가에 도착했다.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4)

    비시디아 안디옥은 버가에서 북쪽 방향으로 약 160킬로 떨어진 곳으로, 해발 1200m가 되는 산악지역이다.
    바울은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울이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험산 준령 ’타우루스(Taurus)산맥‘을 넘어야 했다.
    타우루스 산맥은 산지만 험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강도들의 소굴이 있었다.

    ​그러므로 타우루스 산맥을 걸어서 통과하는 것은 목숨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론 목숨을 포기하며 걸어야 할 길이 있다.
    바울은 그 길을 걸어서 결국 안식일에 비시다아 안디옥 회당에 앉아서 복음을 전파했다.

    과연 이때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이 그때 심한 말라리아에 걸렸다고 한다.
    병든 몸을 이끌고 험산 준령 타우루스 산맥을 걷고 또 걸어서 회당에 앉았다.
    무엇이 그를 걷게 했는가?
    바울의 걷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선교’다.
    또한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서 루스드라에서 30㎞ 떨어진 ‘더베’까지 걸어갔다.

    ​바울의 전도 여행의 길을 묵상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길이 있다.
    그 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걸었던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길이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안식 후 첫날에 다음날 길을 떠나야 했지만, 밤늦도록 강론했다.
    그때 창에 걸터앉아 강론을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바울은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를 살려내고, 성도들과 떡을 떼며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행 20:13)

    여기서 “우리”는 누가와 함께 한 바울의 선교팀을 말한다.
    그들은 배를 타고 ‘드로아(Troas)에서 앗소(Assos)’로 먼저 갔다.
    그러나 바울은 홀로 걸어서 앗소에 도착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측정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2㎞~40㎞ 정도 된다고 한다.
    왜 바울은 그 길을 홀로 걸었을까?
    바울은 그동안 수천 킬로를 걸었다.

    ​그런데 대개는 혼자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한 동역자들과 걸었다.
    그러나 드로에서 앗소까지, 이 길만큼은 의도적으로 홀로 걸었다.
    바울이 왜 의도적으로 홀로 길을 걸었을까?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그를 죽이려는 자들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이미 성령의 음성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있었다.
    바울이 홀로 걷기를 마치고, 밀레도에서의 장로들과 만남에서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단독자로 만났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일대일 만남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때 바울의 걷기를 ‘홀로 있음의 영성’으로 정의한다. 홀로 있음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단독자로서의 만남이다.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서의 만남이다.

    바울은 의도적 고독을 통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 사명자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를 다시 깨달았다. 바울의 그 길은 골고다 언덕을 향한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사흘 길을 걸었던 모리아 산을 향한 걷기이기도 하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의 목숨도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 2:20)라고 되새김질했다. 또한 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임을 고백했을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의도적 고립을 선택하며 홀로 걷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고독한 길 위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먼저 혼자 걷지만, 그 길에 나만 홀로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곧 바람과 햇살 그리고 자연과 함께 걷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홀로 걷는 길이 더는 외롭지 않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새 길을 걷게 된 바울은 또다시 드로아에서 앗소의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가야할 길을 간 것이다.

    6. 결론: 걷기는 영과 육을 아우르는 인간을 만든다

    실존주의 철학자 케에르케고르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절망(Verzweifelung)’이다. 절망은 자기 상실이며,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절망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길을 걷다 보면, 절망이 사라진다.





    욥기 25장 요약 / 빌닷의 3차 충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말할 수 없다'.

    욥기 26장 요약 / 욥의 8차 답변

    '자연 만물을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다'.

    욥기 27장 요약 / 욥의 첫번째 독백

    '너희는 옳지 않고 나는 결백하다.

    욥기 28장 요약 / 욥의 독백 계속

    하나님만이 지혜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이다'.


    6월 13일(금) 욥기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지혜와 명철(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And he said to man, 'The fear of the Lord--that is wisdom, and to shun evil is understanding.'


    *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 명철(998) 비나(bîynâh) בִּינָה 

    1. 이해.  2. 총명
    발음 [ bîynâh ]
    어원  / 9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이해, 사33:19, 단8:15, 9:22, 10:1
    • 2.명사, 여성 총명, 통찰, 잠4:5,7, 8:14, 9:6,10,16:16, 욥28:12,20.
    •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테부나() תְּבוּנָה 8394 [tebûwnâ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지혜, 통찰력, 신32:28, 잠2:6, 3:19, 21:30.
    • 2. 여성형 명사 [주][복수형]: 욥32:11, 잠11:12, 28:16, 사40:14.
    호크마() חָכְמָה   2452 [chokmâh]
    • 여성형 명사 지혜, 총명, 단2:20.

    네히르() נְהִיר 5094 [nehîyr]

    • 명사 조명, 지혜, 단5:11,14.

    호크모트() חָכְמוֹת 2454 [chokmôwth]

    • 여성형 명사 지혜, 지혜로운 여자, 잠9:1, 24:7.

    에차() עֵצָה 6098 [ʽêtsâh]

    • 1.여성형 명사 지혜, 분별, 잠8:14, 21:30, 사11:2, 렘32:19.
    • 2. 여성형 명사 상담, 충고, 삼하16:20, 왕상1:12, 시119:24, 사44:26, 46:10
    • 3. 여성형 명사 충고, 교훈, 욥38:2, 사14:26, 46:11,19:3, 호10:6.

    다아트() עַת 1847 [daʽath]

    • 1. 여성형 명사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 2. 여성형 명사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만다()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 2.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투쉬야() תּוּשִׁיָּה 8454 [tûwshîyâh]

    • 1. 여성형 명사 사려, 지혜, 능력, 욥11:6, 12:16, 26:3,잠3:21, 8:14, 18:1, 사28:29.
    • 2. 여성형 명사 원조, 욥6:13, 30:22, 잠2:7, 미6:9
    • 3. 여성형 명사 계획, 욥5:12. 
    레바브() לֵבָב 3824 [lêbâb]
    • 1. 남성형 명사 지력, 지성, 이지, 총명, 이해력, 지혜, 분별력, 현명함, 삿16:17, 왕상10:2, 대상29:18, 욥12:3, 34:10,36:5, 잠7:7, 9:4, 전7:21, 사10:7
    • 2. 남성형 명사 1) 마음, 심장, 삼하18:14.
    • 3. 남성형 명사 혼, 영혼, 정신, 생명, 삶, 잠, 깸,식사, 마심, 시22:27(26), 73:21,84:6(5), 102:5, 사1:5, 렘4:18.

    학킴() חַכִּים 2445 [chakkîym]

    • 1. 형용사 현명한, 총명한, 지혜로운, 단2:21
    • 2. 형용사 마기승, 마술사, 바벨론의 박사 [명사화될 경우] 단2:12이하, 4:3(6), 5:7.

    하크모니() חַכְמוֹנִי 2453 [Chakmôwnîy]

    • 1. 남성형 고유명사 지혜로운: 한 이스라엘 사람 ‘학몬’, 대상11:11, 27:32.
    • 2. 남성형 고유명사 [주] ‘학몬 사람’이란 뜻도 가짐.

    아몬() אָמוֹן 525 [’âmôwn]

    • 남성형 명사 직공, 건축가[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잠8:30.

    타흐케모니()) תַּחְכְּמֹנִי 8461 [Tachkemônîy]


    아흐반() אַחְבָּן 
    257 [’Achbân]
    • 남성형 고유명사 지혜로운 형제: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 ‘아반’, 대상2:29.






    명철(테부나)은 분별력, 지혜(호크마)는 도덕적 실천력 등으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명철이 스승, 노인 보다 뛰어나다고 표현합니다. 즉, 스승은 지식(비나)을 비유한 말이며, 노인은 세상 경험이 있어 지혜를 뜻합니다.

    인식론에선 명철은 관조(contemplation)로 직관(intuition)과 달리,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종교심리학의 견지에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심지어 초자아인 신의 의지도 일치시키려는 과정의 인식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가끔 이 같은 명철 의미와 유사한 뜻으로 성경에선 대구법 형식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이와 달리 실행력, 영적이며 도덕적 실천력(praxis)을 강조한 의미로 봐야 합니다.

    칸트가 명철과 지혜의 이분화를, 애써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구분지어 저서로 남겼다는 추측도 해봄직합니다.


    명철

    חָכְמָה 2451 [chokmâh]

    • 1. 여성형 명사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2. 여성형 명사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3. 여성형 명사 다양한 학식, 단1:17.


    טְעֵם 2942 [ṭeʽêm]
    • 1. 남성형 명사 분별력, 명철, 지성, 이성, 단2:14, 6:3.
    • 2. 남성형 명사 맛, 미각, 단5:2
    • 3. 남성형 명사 판단, 포고, 왕의 칙령, 명령, 스4:19,21,5:3,9,13, 6:1,8,12, 단3:10,12,29.


    חֶשְׁבּוֹן 2808 [cheshbôwn]
    • 남성형 명사 이성, 명철, 이해,전7:25,27, 9:10.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 2.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지식



    מַדָּע 4093 [maddâʽ]

    • 1.

      명사 지식, 대하1:10,11,12, 단1:4,17

    • 2.

      명사 마음, 영혼, 전10:2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ת 1847 [daʽat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 2.

      여성형 명사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 2.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תְּבוּנָה 8394 [tebûwnâ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지혜, 통찰력, 신32:28, 잠2:6, 3:19, 21:30.

    • 2.

      여성형 명사 [주][복수형]: 욥32:11, 잠11:12, 28:16, 사40: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 1843 [dêaʽ]
    • 남성형 명사 지식, 의견, 견해,욥32:10, 32:6,17, 36:3.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ה 1844 [dêʽâh]
    • 여성형 명사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לֶקַח 3948 [leqach]
    • 1.

      남성형 명사 교리, 주의, 신조, 지식, 교훈, 신32:2,욥11:4, 잠1:5, 4:2, 9:9, 사29:24.

    • 2.

      남성형 명사 법, 명령[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잠7: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지식

      | 2021-06-22
    오픈사전
    אֲבִידָע 28 [’Ăbîydâʽ]
    • 남성형 고유명사 지식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아들 ‘아비다’, 창25: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전문 지식

      btlz | 2023-02-07
    오픈사전
    יְדַע 3046 [yedaʽ]
    • 1.

      원형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단5:22.

    • 2.

      원형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단2:8,5:23

    • 3.

      원형 알게 되다, 배우다, 단4:6, 6:1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יָדַע 3045 [yâdaʽ]
    • 1.

      원형 알다,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창19:33,35, 삼상22:15, 욥37:16, 렘38:24, 잠17:27.

    • 2.

      원형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알다

    • 3.

      원형 알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감각기관을 통해] 창19:33, 사6: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רוּחַ 7307 [rûwach]
    • 1.

      여성형 명사 공기, 공기의 이동, 미풍, 창3:8, 욥41:8(16), 렘2:24, 10:14, 14:6, 바람, 창8:1, 사7:2, 41:16, 폭풍, 욥1:19, 30: 15, 사27:8, 32:2, 헛된 것에 사용되어, 사26:18, 41:29, 미2:11, 헛된 말, 욥16:3, 헛된 지식,욥15:2

    • 2.

      여성형 명사 영, 호흡.

    • 3.

      여성형 명사 입 기운, 욥7:7, 시33:6, 78:39, 사11:4, 숨, 기식, 창6:17, 7:15,22,욥17:11, 19 :17, 시135:1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지혜(2451. 호크마. chokmâh) חָכְמָה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명철(998. 비나) בִּינָה

    1. 이해.  2. 총명
    발음 [ bîynâh ]
    어원  /  9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이해, 사 33:19, 단 8:15, 9:22, 10:1
    • 2. 명사, 여성 총명, 통찰, 잠 4:5,7, 8:14, 9:6,10,16:16, 욥 28:12, 20.
    •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 지식(1847) 다아트(daʽath) דַּעַת    

    1. 지식.  2. 지성
    발음 [ daʽath ]
    어원  / 304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 2. 명사, 여성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지식()



    מַדָּע 4093 [maddâʽ]

    • 1.

      명사 지식, 대하1:10,11,12, 단1:4,17

    • 2.

      명사 마음, 영혼, 전10:2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ת 1847 [daʽat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 2.

      여성형 명사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 2.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תְּבוּנָה 8394 [tebûwnâ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지혜, 통찰력, 신32:28, 잠2:6, 3:19, 21:30.

    • 2.

      여성형 명사 [주][복수형]: 욥32:11, 잠11:12, 28:16, 사40: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 1843 [dêaʽ]
    • 남성형 명사 지식, 의견, 견해,욥32:10, 32:6,17, 36:3.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ה 1844 [dêʽâh]
    • 여성형 명사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לֶקַח 3948 [leqach]
    • 1.

      남성형 명사 교리, 주의, 신조, 지식, 교훈, 신32:2,욥11:4, 잠1:5, 4:2, 9:9, 사29:24.

    • 2.

      남성형 명사 법, 명령[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잠7: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지식

      | 2021-06-22
    오픈사전
    אֲבִידָע 28 [’Ăbîydâʽ]
    • 남성형 고유명사 지식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아들 ‘아비다’, 창25: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전문 지식

      btlz | 2023-02-07
    오픈사전
    יְדַע 3046 [yedaʽ]
    • 1.

      원형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단5:22.

    • 2.

      원형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단2:8,5:23

    • 3.

      원형 알게 되다, 배우다, 단4:6, 6:1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יָדַע 3045 [yâdaʽ]
    • 1.

      원형 알다,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창19:33,35, 삼상22:15, 욥37:16, 렘38:24, 잠17:27.

    • 2.

      원형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알다

    • 3.

      원형 알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감각기관을 통해] 창19:33, 사6: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רוּחַ 7307 [rûwach]
    • 1.

      여성형 명사 공기, 공기의 이동, 미풍, 창3:8, 욥41:8(16), 렘2:24, 10:14, 14:6, 바람, 창8:1, 사7:2, 41:16, 폭풍, 욥1:19, 30: 15, 사27:8, 32:2, 헛된 것에 사용되어, 사26:18, 41:29, 미2:11, 헛된 말, 욥16:3, 헛된 지식,욥15:2

    • 2.

      여성형 명사 영, 호흡.

    • 3.

      여성형 명사 입 기운, 욥7:7, 시33:6, 78:39, 사11:4, 숨, 기식, 창6:17, 7:15,22,욥17:11, 19 :17, 시135:1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사람에게...명철이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창조한 세계를 인간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혜도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는 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졌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Lange). 즉 인간은 주를 경외함으로써 그 지혜에 동참하는 것이며, 다만 주를 경외하는 것이 그 지혜의 시작일 뿐이다(잠 1:7). 아마 욥은 인간 지혜의 상대성과 한계성을 인식할 때만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주와의 교제에 힘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한편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별칭으로 욥기에서는 여기에서 단 한번 나타난다. 이것은하나님의 창조와 지혜에 대하여 인간은 마땅히 찬양해야 하며, 영원한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외함'(*, 야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엄위(嚴威)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떠나다'의 '수르'(*)는 '쫓아버리다', '피하다', '잡아찢다'라는 뜻으로 자기의 삶 속에서 모든 불의와 죄악을 적극적으로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을 통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된 지혜를 사모하는 자임을 밝힘과 동시에 자신의 결백을 충분히 입증하게 되었다고 믿게 된듯하다. 때문에 29장에서 욥은 자기 일생을 자신있게 회고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16
    개역개정,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지혜(智慧) 프로니모스(phrŏnimŏs) φρόνιμος, ον 스트롱번호 5429

    1. 지각 있는.  2. 생각있는. 3. 총명한
    발음 [ phrŏnimŏs ]
    어원  / 5424에서 유래
    • 1. 지각 있는, 생각있는, 총명한, 현명한, 마24:45, 눅12:42, 고전10:15.
    •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7:24, 고전4:10, 고후11:19), 지혜 있는(마24:45, 롬11:25, 고전10:15), 슬기 있는(마25:2,4,9).

    * 5424

    φρήν, φρενός, ἡ 스트롱번호5424
    1.

    생각

    2.

    이해

    3.

    고전14:20.

    발음 [ phrēn ]
    어원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 1.
      생각, 이해, 고전14:2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지혜(고전14:20).

    순결(純潔) 아케라이오스(akĕraiŏs) ἀκέραιος, ον 스트롱번호 185

    1. 순진한.  2. 죄 없는. 3. 단순한
    발음 [ akĕraiŏ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767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순진한, 죄 없는, 단순한, 섞지 않은, 흠 없는, 마 10:16, 롬 16:19, 빌 2:15.
    • 관련 성경  /  순결한(마 10:16), 미련한(롬 16:19), 순전한(빌 2:15).
    κεράννυμι 스트롱번호2767
    1.

    혼합하다

    2.

    섞다

    3.

    계14:10

    발음 [ kĕrannümi ]


    󰃨 보라(*,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4-21)

    나이 아흔이나 된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녀 5남매가 늙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둘러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맏딸을 부릅니다. 그 딸도 이미 환갑이 넘었습니다. 어머니는 특히 그 맏딸을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귀한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깁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닙니다. 철학적 유언을 할 분은 더욱 아닙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일 없이 평생을 소박하게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90평생을 살면서 체득한, 진주보다 더 귀한 말씀을 자녀들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선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죄는 절망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을 부정하는 죄,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죄-참으로 무서운 불신앙의 죄요, 교만의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부인하는 죄-절망의 죄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많은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했다고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서운 죄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도둑질하는 것, 살인하는 것, 교만한 것만이 죄가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한숨쉬는 것, 낙심하는 것, 눈물 흘리는 것, 신세타령 하는 것, 자포자기하는 것. 절망하는 것, 실의에 빠지는 것도 엄청난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쉬어보십시오.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가 하여 상심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도 말며 한숨을 쉬어서도 안됩니다.

    요즈음 우리는 새로운 말을 많이 접합니다.
    총체적 위기니, 총체적 도덕성의 부재니 하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무엇이 전체적으로 망해간다는 것입니까 보편화(普遍化)는 무서운 죄입니다. 철학적으로 'generalization' 이라고 하는 보편화 시각과 판단의식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둡시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보고, 하나가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과거의 은혜도 현재의 축복도 미래에 대한 소망도 다 포기하려 합니다. 남녀가 연애를 하다보면 간혹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해도 보고 마음의 상처도 입습니다. 언젠가 한 아가씨가 찾아와서 울며불며 이야기합디다. "세상 남자는 다 도둑놈이에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한마디했습니다. "아가씨는 도대체 남자를 몇이나 경험해 보았나요 어째서 세상 남자가 다 그렇다고 하지요 나도 남자인데…… 그렇게 도매금으로 매도하면 쓰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좀 보았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해서 세상을 통째로 뒤엎어서야 됩니까 하나가 잘되었다고 다된 것처럼, 또 하나가 안되었다고 다 망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 이 나라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오늘까지 유지되어온 것입니다. 그리 쉽게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다 망했느니, 다 썩었느니, 소망이 없느니 하는 것은 불신앙적입니다.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선(善)과 악(惡)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선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한 것일까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대로 때로는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도 악도 각기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대로 영역을 넓혀가고 선은 선대로 또 그렇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선이 악에게 패배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계에는 전세계적으로 자유화 물결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어 통쾌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만 공산주의가 온 세계를 잠식해들어가고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몹시 불안해했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도에다 표시를 해가지고 다니면서 말하곤 합디다. "소련도 새빨갛고 중공도 새빨갛고 일본조차 불그죽죽하니 이제 쥐꼬리만한 우리나라는 큰일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중공의 12억 인구 가운데 공산당은 불과 몇 사람뿐입니다. 소련에도 나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쁜 몇 사람 때문에 전체 국민이 그들의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공산사회라고 해서 소망 없다, 망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그들 사회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교회가 있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선과 악의 대결을 비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시각 자체가 병들어 있는 시각입니다. 선의 무기력함을 통탄하기도 하고,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비참한 생각마저 들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죄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선의 힘과 선의 최종 승리를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믿는 순간에 오늘의 내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십시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man like-인간적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beast like-동물적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devil like-악마적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God like-바로 성도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앞으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까 상대방이 선하면 나도 선하게 대하고, 상대방이 악하면 나도 악하게 굴고, 맞으면 때리고,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는 생활은 비인간적입니다. 동물적이지요.
    적어도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고 말씀합니다. '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음미해 보십시다. 진다는 말은 외면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일에 외면한다는 말입니다. 눈을 감습니다. 대항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관심하려듭니다. 그러는 동안에 악은 악대로 득세하게 되고 세력을 확장해나갑니다. 결국은 악을 조장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 악을 기피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악한 대우를 받으면 저 마을로 피하고 그래도 안되면 마지막에는 외국으로까지 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민 가봐도 똑같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악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는 절망입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 실망하는 사람, 낙심하는 사람, 그리고 기대를 버린 사람 이들은 악에게 진 사람들입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만, 기적을 체험하는 등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일만 생기면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라고 하더냐"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느냐"-이렇게까지 한심해집니다. 악에게 진 것입니다. 기대를 포기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부부간에나 자녀교육의 경우, 잘나가다가 어디에선가 그만 좀 뜻대로 안되면 금방 실망하고 맙니다. 실망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선언입니다. 어떠한 일에도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종속적인 태도로 변하여 선한 입장을 떠나거나, 상대방이 악하게 나온다고 해서 나 자신도 악하게 대항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악에 예속된 것이지요.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 나 자신이 변질되는 것 자체가 실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상대방이 악하게 나올 때, 대항하지는 못하고 뒤돌아 증오와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면서도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참으로 높은 차원에서 그 악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짓궂게도 이 부분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서 웃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창으로 찌르고 침을 뱉으며 저주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놈들 어디 두고보자'고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 같았으면 꼭 그랬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께서 그 동안 행하신 모든 것들은 그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세상 끝이다'라고 말세로 대했다 하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이 한마디의 말씀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잘 나가다가 실패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민수기 20장의 말씀을 보십시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갖은 핍박과 환난을 겪으면서도 잘 참아 견딥니다. 그러나 가데스에 거할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침내 모세를 죽이겠다고 까지 들끓습니다. 모세는 낙심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이렇게 저주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을 악으로 대하면 안됩니다. 그 악으로 인해 내 마음속에 증오심을 가져도 안되고. 절망해도 안되며, 원수 갚고자 하는 복수심을 가져도 안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핍박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재미있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디오콘타스' 사냥개가 사냥감을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자라 함은 자기 먹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냥개처럼 하나님의 성도를 괴롭힌다는 말이 됩니다. 일생을 두고 괴롭힙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이 곧 승리의 길임을 말씀함입니다. 13절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는 '디오콘테스'입니다. 선한 일에 사냥개가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힘쓰라는 뜻이 있습니다. 전자는 악한 일에 집요하고 후자는 선한 일에 집요하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는 말씀입니다.
    Being and Doing에 문제가 있습니다.
    존재에 문제가 있고 행위에 문제가 따릅니다.
    상태에 문제가 있고 행동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악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사는 것만이 이기는 것입니다.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또한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임을 강조하곤 합니다.
    신랑 신부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하루에 열 번, 아니 백 번도 좋으니 부지런히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향하여 "나를 사랑해요"라고 묻지는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사랑해주면 나도 당신을 사랑할게"--이런 뜻입니까 사랑하는 데에 눈치보지 맙시다. 사랑을 헤아리지 맙시다. 상대방이 늦게 돌아오든 일찍 돌아오든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떠하든 나 먼저 사랑하고,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칭찬한다고 좋아하고, 상대방이 미워한다고 같이 미워하고, 상대방이 욕한다고 욕하는 것은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림이 없이 내 신앙적인 페이스를 곧게 지켜야 됩니다. 어떠한 대우를 받아도 내 할 본분을 다할 때에 비로소 이기게 됩니다.
    또한 내 사명을 다합시다. 내게 맡겨진 사명 선교적 사명, 도덕적 사명, 교육적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지는 맙시다. 알아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전도를 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자랑을 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친 사람도 결국은 늙어서 죽을 테니까 대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긴다는 말은 낙심하지 아니하며 더 나아가서는 장차 악이 선에게 패배하고 굴복할 것을 기대하고 내다보는 일입니다. 거기까지 도달해야 진정코 이기는 것입니다.

    「유토피아(Utopia)」를 쓴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요.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고 있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토머스 모어는 엄청난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겼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을 많이 비난했습니다.
    어지간히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그는 분명히 꼽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상대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입니다.
    악을 죽이는 것도 아니요 악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요, 악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기는 것입니다.
    목적도 선하고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어떤 영국 신사가 미국에서 가든파티를 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문간에 서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배가 고프니 빵을 좀 주세요."
    그러나 주인은 거절합니다.
    "당신 같은 야만인에게 줄 빵은 없어!"
    "그러면 목이 마른 데 물이라도 좀 주세요."
    "너 같은 놈한테 줄 물이 어디 있느냐"
    영국 신사는 추장을 몹시 모독했습니다.
    추장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뒤 어느 날, 그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지친 채 산을 헤매다가 그만 기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디언 추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 옵니다.
    물을 먹이고 음식을 주어서 살려놓았습니다.
    "자, 당신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소"
    영국 신사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
    당신은 나에게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을 지경에서 살렸습니다.
    마침내 나는 원수를 갚았소.
    "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원수를 갚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주하지 말라, 복을 빌어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사랑으로 증오를 갚으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우리는 흔히 역사상에서 3대 악처를 꼽습니다.
    욥의 아내, 소크라테스의 아내, 요한 웨슬리의 아내입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를 저주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됩니다.
    요한 웨슬리 또한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삽니다.
    그래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악을 선으로 갚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가장 무서운 힘은 진리의 힘이요, 가장 강한 힘은 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대의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바로 그 사람 편에서 그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한번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식(知識)과 지혜(智慧), 명철(明哲)

    잠언1장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식(知識)의 "知"

    아는 것이 많다고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수해 주는 것을 학습과 공부, 수련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다.
    지식(知識, Knowledge)을 정의해 보면, 일반적 상황에서 평가된 자료들이 축척된 것을 말하는데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어떤 분야의 대상을 연구하여 얻은 데이터(Data)나 정보(Information), 혹은 사실(Facts)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로 "정보를 보다 체계화하고 개념화한 것"을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습득한 것을  사람들이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은 어떤 분야에 숙련된 기술이나 축척된 정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知)라는 것은 고대사회에  무언가를 안다(知)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숙련된 기술로 《사냥이나 싸움, 전쟁》에 필요한 경험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矢(화살 시)와 말(口, 입구)로 전수해 주는 것이다.
    화살이 어떻게 정확히 과녘을 맞추는지, 혹은 과녁의 어느 부분을 맞추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식(識)은 言(말씀, 말 언)과 戠(새길 시)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말(言)하는 것을 새길(戠) 수 있다는 말은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운 것, 익힌 것을 '적다, 기록하다(記)'는 의미이다.
    종합해 보면 지식은 문자나 표기로 기록해 놓은 것을 습득하여 알게 된 사실이나 정보를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은 얻는 자에게는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것을 얻으면, 잠언2장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지혜(智慧)의 '지智'

    지혜 지(智),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알 지(知)자에 해(日)가 붙어 있어 밝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이 두루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Wisdom)는 지식을 통해 깨달은 원리를 계속해서 응용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슬기로울 혜(慧), 그같이 알고 있는 원리를 '슬기로움'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다.
    慧(지혜 혜), 글자는 彗(빗자루 혜, 날카로울 혜)+心(마음 심)의 형성자(形聲字)이다.
    빗자루는 산란할 개(丯)인데 이는 산란스럽게 많다. 많아서 예쁘다(예쁠 봉), 풍채가 있다(풍채 풍)는 의미로 쓰인다. 거기에 손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이는 금상첨화가 아닌가.
    손 씀씀이와 마음 씀씀이가 예쁘꼬 또 예쁜 것이 바로 '지혜'라는 뜻의 한자가 된 것이다.
    이같이 혜(慧)자는 윗부분이 빗자루의 상형이고,  그 밑에 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 혜는 긍정적으로는 '총명하다, 사리에 밝다, 상쾌하다, 시원스럽다, 슬기, 능력, 지혜'로 쓰이고, 이것이 나쁜 부정적 의미로 쓰이면 '교활하다, 간교하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이든 양날의 칼과 같다.
    그러므로 지식은 바탕이며, 지혜는 활용이니 둘은 피를 나눈 형제나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응용하여 확장하며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잋빛나개 두루 펼쳐내며, 손 재주와 마음의 생각으로 많은 것들을 예쁘게 솟아오르고 가득차게 만드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같이 "지혜"는 문제해결 능력을 의미한다.
    잠언1장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20,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히브리어원전(잠언2:2~3) “비나”를 '지식', “호크마”는 '지혜', “테부나”는 '명철'로 번역했다.
    지식(知識), 지혜(智慧), 명철(明哲)의 차이
    • 지식(비나)은 이해나 총명 = 아는 능력(정보)
    • 지혜(호크마)는 숙련, 지식, 다양한 학식 =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테부나)은 지식, 지각, 능숙함 =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성경속의 지혜 - 히브리어

    일반적으로 사물의 도리나 선악 등을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였다.
    지혜란 사람에게 쓰일 때는 인간의 기술, 실제적인 지식 등을 가리키고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창조의 주, 백성과 민족의 운명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며 지혜는 주를 경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주어진다(욥 28:28; 시 111:10). 그러므로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다(잠 1:7; 시 73:16).


    구약에서의 지혜 : 히브리어로는 ‘호크마’(chokma)로 절반 이상은 지혜문학이라 불리는 욥기, 잠언, 전도서에서 쓰였다. 이 단어는 장인이나 선원, 관리, 상담자 등의 기능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고 금속을 다루는 일(대상 22:15-16), 목수 일이나 베 짜는 일(출 35:35) 등 전문 영역에서 지식과 기술을 갖춘 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여기서 지혜는 실용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탁월한 숙련성, 기교적인 기술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막을 제조할 때 임명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롭다’는 표현을 사용했다(출 28:3; 36:2, 8).


    신약에서의 지혜 : 헬라어로는 ‘소피아’(sophia)로 신약성경은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완전한 이해, 즉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롬 11:33-36; 골 1:15; 계 3:14 참고).


    또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즉 성육신하신 로고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잠언 8장을 자신과 연관시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고 말씀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충만하였다고 적고 있다(눅 2:40, 52).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치유의 권능에 놀랐으며(막 6: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며(고전 1:30), 그 속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적고 있다(골 2:3).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며(고전 1:23-24)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꺼리는 것, 미련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전 1:19-20)고 말한다.


    지혜와 총명은 그리스도인이 성숙하면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더욱 알게 되는 은혜의 선물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엡 1:8, 17; 골 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다(골 1:10; 엡 5:15).

    잠언 속의 지혜
    잠언서에 나타나는 지혜는 실제적인 총명, 정신적 예민성 그리고 기능적인 숙련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삶의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데 지혜있고 숙달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는 것은 경건한 삶,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가졌음을 뜻한다.

    ​Q 요즘 저의 삶의 문제에 지혜를 얻으려고 잠언을 읽고 있는데, 잠언 2장2절~3절에 나오는 지혜(wisdom), 지식(insight or knowledge), 명철(outstanding)의 히브리적 원어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지식은 여기에서는 통찰력으로 보는 것같아 조금 놀랐습니다. 지혜, 지식, 명철을얻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 알고 싶습니다.

    히브리어원전(잠언2:2~3) “호크마”를 ‘지혜’로, “비나”를 ‘지식’으로, “테부나”를 ‘명철’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 ( חָכְמָה) 의 동사형은 “하캄”(חָכַם) (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이고

    http://biblehub.com/hebrew/2451.htm

    http://biblehub.com/hebrew/2449.htm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에서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에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일테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1:7) 이는 먼저 여호와경외 곧 하나님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지식,명철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도 보시면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샬롬!!!  

    신명기 32:7에서 ‘생각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빈’(bin)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각’보다는 ‘분별과 통찰’의 뜻이 훨씬 강한 단어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된 히브리어 명사들은 ‘비나’(binai)와 ‘테부나’(tebuna)로, 둘 다 ‘이해, 깨달음, 분별, 명철, 지식’ 등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진리에 대한 깊은 숙고를 통해 분별함으로서 새로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다. 이를 나타내 주는 단어가 ‘알다’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yada)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물과 환경 등과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또 하나의 길은 ‘판단력과 통찰력’이다. 경험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의 깊은 관찰이나 숙고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식습득의 과정엔 사람의 ‘지각’이 동원되기도 한다. 눈을 통해 분별하고(잠 7:7), 귀로 말을 이해하고(잠 29:19), 촉감을 통해 느끼기도 하며(시 58:10), 미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욥 6:30). 하지만 성경은 진정한 이해와 통찰은 사람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단 2:21)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깨달음을 보일 수도 있고 감출수도 있으며(시 119:34), 사람의 ‘마음’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시 111:10). 모세는 이러한 통찰을 ‘역대의 연대’에 적용하고 있다. 즉,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것은 연대와 연대를 잘 살피고 숙고하여 그 속에 있는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는 깊은 저수지처럼 역대의 연대 속에 담겨진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는 영적인 작용이다.  

    히브리어 동사 ‘빈’(bin)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보면, 대표적으로 ‘~사이에’라는 뜻의 전치사 ‘벤’(ben)이 있다. 전치사 ‘벤’은 영어로 between의 의미를 갖는다. 두 대상 사이의 간격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뜻 외에 ‘열흘 간격으로’(느 5:18)의 경우처럼 ‘시간의 사이’를 나타낼 때도 쓰였다. 전치사 ‘벤’이 원래 어원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열왕기상 3:9에서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에서 ‘판단하다, 구별하다’의 의미로 쓰인 경우가 있다.  

    이 밖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명사형 ‘비나’(bina)와 ‘테부나’(tebuna)가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예지, 분별, 이해, 깨달음”의 뜻을 갖는 동의어이다. 특별히 ‘테부나’의 경우 한글성경에서 주로 ‘명철’(잠 15:21), ‘지혜’(욥 26:12) 등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테부나’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는”(욥 26:12) 분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상과 지혜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고 분별할 때, 사단의 세력을 파하는 참된 지혜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그 지혜가 ‘역대의 연대’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연대와 연대를 비교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http://www.abrahampark.com/kor/basic_heb/2642

     순수’‘정직’은 지혜의 다른 이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음악 테이프도 너무 많이 들으면 늘어지는 것처럼, 너무 많이 오는 비를 보니 온 몸이 늘어지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피해 소식과 교통사고 소식은 이내 보도를 접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무너지게 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브레이크를 밟게되면 자동차가 원을 그리며 돌게 되는데, 이 때 주변에서 달려오던 차와 충돌하게 되면서 대형사고로 이어지게된다.
    이런 사고는 바퀴와 도로 사이가 밀착되지 않고 비 혹은 눈이라는 「이물질」이 끼어 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도로와 바퀴만이 존재해야할 순수 공간에 비(눈)라는 불청객이 끼여듦으로써 바퀴는 도로에 착지하지 못하고 흔들리게되는 것이다.
       지혜문학에서 말하는 지혜가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느님-나, 인생-나, 너-나, 이러한 모든 관계성이 줄 긍정적 결과는 그 둘 사이의 밀착으로 인해 생겨난다. 만일 그 사이에 이물질이 들어오게 되면 둘 중 하나는 흔들리며 충돌하게 되는데, 흔들려버린 존재도 다치지만, 주변의 다른 존재들에게도 치명적 상처를 입히게 된다.
       도로와 차바퀴뿐 아니라 신앙, 일, 사랑에도 이물질의 개입은 언제고 우리를 차선에서 이탈하게 한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순수한 경외말고 다른 마음이 끼여들면 신앙은 무너진다. 성공도 그렇다. 일에 대한 성실과 정직한 노력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와 정직은(이물질이 끼여들지 않은) 「지혜」의 다른 이름이며 이러한 지혜는 구원, 생명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지혜(호크마)의 어원적 의미

       이제 좀 더 학문적 차원에서 구약성서 「지혜」라는 용어를 살펴봐야겠다. 히브리어로 지혜는 「호크마」(그리스어로는 「소피아」)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에서 318번 등장하며, 그 반 이상이(138번) 잠언, 욥기, 전도서에 등장한다. 매우 「성문서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이 단어가 등장하는 책들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셈이다. 원래 「지혜」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처럼, 지식이 많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사람 혹은 태도를 표현하거나,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솜씨, 기술, 테크닉, 방법, 수단 등 다소 「경험적인 기술」을 의미하는 말이었다(창세 41, 33 ; 신명 1, 13 ; 2사무 14, 20 ; 판관 28, 14 참조)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 『지혜』(호크마)는 사변-이론적 능력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솜씨, 기술 등 실제적인 것(이론적인 것이 아니라)과 관련된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성적 차원보다는 경험의 중요성이 부각된 용어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약성서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지혜는 점쟁이, 마술사, 해몽가, 건축가, 기술자, 항해사(1열왕 9, 27; 22, 48~49; 에제 27, 8), 조각가(출애 35, 31~33), 시인, 가수, 연주가(1열왕 5, 10~12) 직물 짜는 사람(출애 35, 25), 대장장이(예레 10, 9), 직업적으로 곡하는 사람, 제사장, 서기관, 재판관, 왕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는 이들이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기술과 솜씨들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적용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왕을 지혜로운 자라고 일컬었던 이유는 그가 백성을 통치하는 「솜씨」와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는, 다분히 경험적 측면의 기술인이라는 이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혜문학이 언급하는 지혜는 나와 그(사람, 사건, 사물, 하느님)를 이어주는 가장 순수한 힘이며 역동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진실과 순수 보다 위대한 힘은 없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억지스럽기 만한 세상, 진정한 지혜를 발견하지 못해 흔들리며 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지혜문학이 선포하고자 하는 구체적 전략이며 지혜의 메시지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론에만 머물며 권력과 자본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전락해온 세상의 얄팍한 지식에 일침을 가하는….(가톨릭 신문에 김 베아트릭스 수녀님이 게재한 글입니다.)​






    성경적인 지혜와 명철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지혜와 명철에 대하여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마치 세트처럼 묶여 다니는 지혜와 명철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그것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 정의하고 있다. 또 명철은 '세태나 사리에 밝고 총명함'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지혜와 명철을 무엇이라 말씀하고 계실까?

    우리는 흔히 '지혜와 명철을 주시옵소서'라고 습관처럼 기도를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지혜와 명철에 대하여 짚어보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 3:13~15)

    금이나 진주보다 더 귀하고 우리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지혜와 명철, 그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얻으라는 지혜와 명철이 과연 세상에서 말하는 사전적인 정의와 같은 종류일까?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 28:28)

    그렇다. 성경에서는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명철이란 악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과연 주를 경외함이 왜 지혜가 되는 것일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지혜)를 가지셨으며 (잠 8:22)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잠 3:19)

    지혜와 지식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소유하신 분에게 달라고 해야 맞는 것이고, 그분을 사모하고 공경해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혜와 명철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명철에 대한 부분을 짚어보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명철이란 악에서 떠나는 것이고,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명철할 수 없는 것이고 악에서도 떠날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을 앎이란 무엇일까?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과 천지 창조주라는 것,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이름과 얼굴을 안다 해서 그를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지 알고 있는가? 그 아버지가 하시는 일과 뜻과 목적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아버지라 부르기만 하면 아버지를 아는 것인가?

    정말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라도 바로 알고 있는가?

    흔히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들과 또 전쟁과 불법, 살인이 판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나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악한 자들이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 두시나요?' 하며 한두 번 하늘을 향하여 탄식해 봤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생각하시며, 인류를 위한 계획이 무엇인지 도무지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나오는 한탄이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요한복음 1장과 요한 일서 1장 서두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씀(요 1:1~4, 요일 1:1~2)이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읽는다 해도 성경 안의 뜻을 알지 못하면 말씀을 안다 할 수 없다. 자신이 성경 속에 감추어진 뜻을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결코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은 사람이 헤아리거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지혜와 명철은 사전적인 의미와 그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차원 높은 지혜와 명철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지혜가 되고 주를 아는 것이 명철함이 된다면, 우리는 그분을 항상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고, 힘써 그분을 알기 위한 노력, 즉 말씀을 알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와 명철을 얻는 최고의 방법이다.





    욥기 21장 요약 / 욥의 여섯번째 대답

    '악한자들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거짓말이나 반말로 나를 위로하지 마라'.

    욥기 22장 요약 / 엘리바스의 세번째 충고

    네가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해라.
    네가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

    욥기 23장 요약 / 욥의 일곱번째 대답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내 사정을 아뢰겠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될 것이다.

    욥기 24장 요약 / 욥의 7차 대답 계속 

    악인은 잘 되다가도 금방 사그라지는 곡식처럼 된다.
    12.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6월 12일(목) 욥기 21-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나의 가는 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시금석(試金石) : 시험할 시, 쇠 금, 돌 석
    귀금속(貴金屬)의 순도(純度)를 판정(判定)하는데 쓰이는, 검은빛의 현무암(玄武巖)이나 규질(硅質)의 암석(巖石).

    금은방에서 금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현무암과 같은 검은 빛의 돌을 시금석이라고 합니다.
    먼저 시금석 위에 순도가 좋은 금을 문지르고 그 옆에 측정하려는 금을 문지른 후에 그 위에 왕수(王水)라는 용액을 떨어트립니다.
    순수한 금은 황금색 빛으로 나타나고 순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구리빛과 같이 빛으로 드러납니다.

    욥의 고난은 욥의 믿음을 정금과 같은 신앙으로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왕수(王水) :

    진(津)한 염산(鹽酸)진(津)한 질산(窒酸)3 대(對) 1 정도(程度)의 비율(比率)로 혼합(混合)한 액체(液體).
    강(強)한 산화제(酸化劑)로, 산(酸)에 잘 녹지 않는 금(金)과 백금(白金) 따위를 녹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혼육의 치유자로 오셨습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가득한 이 땅에 살면서 무수히 상처 입은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기 위해, 연약한 육체의 질병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영혼을 부요케 하고, 연약한 마음을 강건케 하며,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충만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혼육의 온전한 치유를 위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며 많은 치유와 변화를 가져 온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We all, like sheep, have gone astray, each of us has turned to his own way; and the LORD has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히브리서 4:12-13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 '나의 가는 길'을 직역하면 '나와 함께 있는 길'이다.
    바로 앞에서 욥은 그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한 바 있다.(8,9절).
    그러나 욥 자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뒤에 정금같이 단련된 영광이 오리라고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J.E.Hartley).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즉,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자기 무죄성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고, 고난 뒤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욥의 확신과 기대는 절정에 다다른다.
    욥이자신의 시련을 금 제련에 비유한 것은 그의 염원이 재물의 회복이 아니라 바로 인격과 영예의 회복이었음을 암시한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더러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금과 은처럼 여기라고 충고하였으나(22:24, 25), 욥은 자신이야말로 신앙인격과 신앙안에서의 명예를 그 무엇보다 종요시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금(2091) 자하브(zâhâb) זָהָב     

    1. 금.   2. 욥 37:22.  3. 슥 4:12.
    발음 [ zâhâb ]
    어원 / 연계형 זְהַב, ‘반짝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87회 사용
    관련 성경  / 금(창 2:11, 출 20:23, 말 3:3), 황금(욥 28:17, 겔 27:22).

    단련(974) 바한(
    bâchanבָּחַן    

    1. 조사하다.  2. 시 7:10.  3. 말 3:10
    발음 [ bâchan ]
    구약 성경  / 28회 사용
    관련 성경 /  단련하다(욥 23:10), 시험하다(시 17:3, 말 3:15, 욥 7:18), 연단하다(렘 9:7, 잠 17:3), 감찰하다(렘 12:3, 시 11:4, 대상 29:17), 분간하다(욥 12:11, 34:3), 증명하다(창 42:15), 시험받다(욥 34:36).
    [명] 시험(겔 21:13).



    나오리라(3318) 야차(yâtsâʼיָצָא   

    1. 나아가다.   2. 생물에 대한 경우.  3. ㉠ 삼상8:20
    발음 [ yâtsâʼ ]
    구약 성경  / 1067회 사용
    • I. 나아가다, 진행하다, 발행하다, 창 8:19, 44:4, 출 9:29,33, 신 14:22, 욥 3:11, 29:7, 렘 10:20, 암 4:3.


    단련(鍛鍊) : 불릴 단, 불릴 연

  •    1.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함.
  •    2.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    3.  어떤 일을 반복(反復)하여 익숙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    4.  귀찮고 어려운 일에 시달림.

  • 시험하다(욥기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that you examine him every morning and test him every moment?

    분간하다(욥기 12:11)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Does not the ear test words as the tongue tastes food?

    시험받다(욥기 34:36)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Oh, that Job might be tested to the utmost for answering like a wicked man!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언급할 때, 대부분 영혼과 육체의 이분설을 지지한다.

    언뜻 보기에 영과 혼이 구별되는 것 같지만, 성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영과 혼을 구별했다기보다는 서로 교환 가능한 동일한 실체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영(spirit)은 '루아흐', 혼(soul)은 '네페쉬'를, 신약에서 영은 '프뉴마'를, 혼은 '프쉬케'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지금 내 마음(프쉬케)이 민망하다(요 12:27)"고 말씀하신지 얼마 뒤, '심령(프뉴마)'이 괴로우셨다(13:21)고 하셨다.

    마리아의 찬송시에도 "내 영혼(프쉬케)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프뉴마)이 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을 고백한다(눅 1:46-47). 이는 영과 혼이 교환 가능한 동일한 실제를 나타내는 용어임을 보여준다.

    또 영과 혼을 합쳐 '영혼'으로 종종 사용하는데, 이는 헬라어로 프쉬케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프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서 프쉬케는 비물질적인 부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서두에 말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의 '영과 혼과 몸'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는 존재적 구분에서 영, 혼, 몸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 존재를 표현하는 성경의 수사방법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다음의 구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여기도 영과 혼을 구별한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를 관절, 골수, 마음으로 더 세분화하며 나아간다. 이는 사람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요소라기보다, 전 존재를 지칭하는 수사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눅 12:30)"는, 인간의 전 존재를 마음과 목숨과 힘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전 존재를 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분설을 붙들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삼분설은 이단적 가르침에 노출되기 쉬운 취약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을 영·혼·육으로 나누면 육은 죄를 짓기에 죄가 머무르는 곳이 되고, 혼은 육에 의해 영향받는 연약한 곳이 되며, 영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특별한 기관이 된다.

    더 나아가 영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기에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죄를 짓는 것은 육체로 짓기에 죄는 우리 육체에 거한다는 것이다.

    삼분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탄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73쪽)'.

    주님은 우리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고, 사탄은 우리의 육체에 그의 거처를 삼았다(위트니스 리, <왕국>, 228쪽).

    이와 유사한 주장이 이미 주후 4세기 경 초대 교부 '아폴리나리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아폴리나리스는 예수는 육신과 혼만 있었고, 그의 영의 자리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채워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오늘날 이와 유사한 주장이 여러 이단 단체가 주장하는 '신인합일' 교리로 나타난다. 신인합일은 종말에 하늘의 순교자의 영이 이단 단체의 성도들에게 임하여 하나가 되면, 육체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늘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순교자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면 신도 자신의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해 한다.

    종말에는 이분설 혹은 삼분설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최종완성 때는 성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몸의 부활을 경험하여, 영혼과 부활의 몸이 온전한 통일체를 이루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를 부어 생령이 된 것과 같다.

    사람은 육체도 아니고, 생기만도 아니다. 육체와 생기가 온전히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에 사람인 것이다. 종말에 사람은 태초 아담의 모습보다 더욱 영광스럽고 영원한 통전적 존재로 설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 죽음을 경험하는 성도는 최종적인 완성을 내다보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중간 시기를 거치고 있지만, 종말에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죽을 몸이 살아나 영혼과 함께 온전한 통전적 인간을 구현하게 될 것이다(롬 8:11, 참조 계 20:13).








    영혼육의 완전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영혼육의 치유자로 오셨습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가득한 이 땅에 살면서 무수히 상처 입은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기 위해, 연약한 육체의 질병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영혼을 부요케 하고, 연약한 마음을 강건케 하며,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충만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혼육의 온전한 치유를 위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며 많은 치유와 변화를 가져 온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육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 대신 경험하신 고통들을 생생하게 이 구절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찔리시고 상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는 언제나 죽음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고통당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신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손발에 못 박히시고 머리는 고통스러운 가시관에 찔리시고, 몸은 채찍에 맞아 처참하게 찢기시고 으스러진 예수님의 육체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임을 마음 속 깊이 믿고,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U-Turn),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기 바랍니다.
    이것만이 그 은혜를 기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1년에 한 차례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를 진정한 내 인생의 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순간순간 의지하며 하루하루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영혼이 더 이상 죄에 빠져 종노릇하지 않고, 영혼의 자유 /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 아버지와 충만한 관계 속에서 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영원한 멸망인 죽음과 영원한 형벌에서 구하시기 위해 그가 친히 대신 ‘나의 허물과 죄를 인해 찔리시고 상하신’ 것을 결단코 잊지 않고 날마다 믿음의 고백, 감사/찬양의 고백, 주 되심의 고백, 순종/헌신의 고백을 드리는 성도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기 위해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은 우리의 슬픔과 상한 마음, 불안과 염려와 두려운 마음, 수치와 죄책의 마음, 분노와 우울의 마음, 좌절과 절망의 마음, 한숨과 탄식의 마음,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등 우리 인생이 죄와 인간관계의 상처로부터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마음과 감정의 치유를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평화’야말로 어쩌면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주는 축복일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부터 오는 평안, 죄의 형벌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얻어 안심이 되는 마음, 죄 때문에 두려웠던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랑의 관계 회복, 영광스러운 부자 관계의 회복은 모두 예수님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온갖 종류의 학대와 멸시로 인해 상하고 찢긴 마음을 예수님은 진정으로 위로/치유하시고 싸매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함부로 대접하고 상처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나의 친구요, 위로자요, 동반자요, 부모요, 목자요, 보호자요, 사랑의 인도자로 오셨습니다.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 고통과 눈물을 아시고 나를 치유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품안에서 모든 상처를 내려놓고 위로/치유/안식/자유/행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은 우리의 영혼육의 완전한 치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질병은 영혼의 죄와 허물, 마음의 상처와 고통으로 인해 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내과의사요, 20세기의 최고의 상담자요(게리 콜린스의 말), 인격의학을 창시한 ‘폴 투르니에’는 모든 병의 70-80%는 마음으로부터 온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심인성 질환).

    그래서 그는 그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으로 위로/상담하여 치유하는 의사요 상담자였습니다.
    병든 영혼과 상한 마음이 말씀으로 치유받았을 때 모든 육체의 병도 저절로 치유되는 많은 사례를 발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와 허물,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받은 자는 육체적 질병도 대부분 치유받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이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통당하심(채찍에 맞으심)이 진정 나를 위한 고통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 어떤 육체적 질병도 분명히 치료하시는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벙어리를 고치시고, 문둥병들을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분명히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믿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고 선포할 때 기적적으로 치유받고 고침받는 사례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육의 연약한 모든 것을 고치고 치유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진정으로 의지함으로써 영혼육의 연약함이 치유받고 자유를 누리며 강건함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영혼의 영원한 구원과 영생, 천국의 시민권, 죄 용서와 자유, 마음의 치유와 평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예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보호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들을 받은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믿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육의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온전한 치유와 회복, 건강과 자유, 기쁨과 평안, 성장과 성숙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기독교와 비교)

    ​참신이 담아낸 인간 영의 발현은 인류를 영적 체험으로 인도했던, 한 인간의 두뇌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이 인류의 두뇌와 동기화되는 객관적 현상이다.
    신화, 구전되는 전설, 기성 종교에도 전혀 없었던 신 존재의 사실성은 역사 이래로 과학적 방법으로 관찰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인간 영의 존재와 참신의 기록, 전과 후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신혁명의 기폭제였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간 영의 순수성은 영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실재하는 인간 영의 원리는 기성종교의 신론 및 영혼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가장 큰 특징은 인간 영은 인간의 육체에서 발현되어야 하는 현상이며 물질과 생명의 본원적 원리이고, 살아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체험 가능한 객관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하며, 특별계시인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서술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를 믿는다. 순수한 영이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육체를 가졌거나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개념을 부인한다[1].

    ​성서에 기반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관념적 실재로 객관적 실재인 인간 영은 아니다.
    인간 영은 누구나 두뇌를 통해 체험이 가능한 형이상학 존재가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육체에서 발현되는 인간 영이 아니라면 우주를 지배하는 물질의 영이 기독교의 하나님인 셈이다.
    영의 순수성은 인간 영의 독립성과 유일성에 두어야 옳다.

    ​인간 영과 함께하는 시대엔 기성 종교인들(기독교인, 불교인, 무슬림, 힌두인, 신도인들) 모두가 새로운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야만적인 정신으로 인하여 미래에 사라지는 민족이나 낙오되는 분들이 없기를 축원한다.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부활과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나눔 및 분리를 뜻하는 11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몸에 대한 주석 링크는 여길 누르시고, 해당 설명만 발췌한 부분은 이 글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자연히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의 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은 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금 분향단과 금향로 및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또한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라고 노래합니다.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육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합니다. 성막뜰의 기구가 2개 즉, ‘영혼’과 ‘육’으로 밖에 나뉘지 못하는 영적 조명에 대한 내용은 여길 눌러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막뜰의 기구는 2개로 밖에 나뉘지 못하지만, 대신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희생 제물과 헌물에 차이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저의 생각을 도표로 만들어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은 2021년도에 썼던 글인데, 최근에 이 글에서 파생하는 중요한 조명에 대해 시리즈로 올렸으니 다음 글들도 순서대로 읽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막에 거하십시오:지성소로 올라가는 5단계

    성막과 하늘과 영혼육의 관계

    루아크(ruach): 영, 숨, 바람에 대한 상고

    번제단과 십자가:지옥과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

    #이하영의프례젠트를 들으면서

    요즘느껴지는 내마음을본다.♡

    다른것인가?

    이하영님

    대철씨가 얘기하는내용인데

    두사람의 결과치는

    이리 다름이 뭘까요?

    제가 요즘

    다시

    영혼육에 대한 내용을

    정확히 나눔하고싶은데

    제가 아는게 맞는지

    ᆢ마음공부때

    처음

    으로이뤄져있다고 ᆢ

    들었네요

    네이버에서 찾게된내용 ᆢ

    영혼육ᆢ

    영ㅡ생명/ 수증기

    혼ㅡ마음/물

    육ㅡ생각/얼음

    맞나요?

    ♡수증기 물 얼음 같은 이분법적 방법으로는 이해가 안되는영역이에요

    만남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릴께요^^

    지금 일하는중..ㅡ

    임유경님과의 성경공부

    만남이 기달려진다.♡














    정금같이 나오리라

    1942년 11월 8일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화재가 보스턴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하여 무려 493명이 타죽고 200여명이 불 속에서 구출되었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였던 린드만 박사는 정신건강 연구소에서 불 속에서 구출된 100명을 면담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난 이들의 85%가 오히려 그것이 건설적인 체험이 되어 새 출발을 하거나 신앙으로 돌아오거나 부부관계가 좋아지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는 등 좋은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린드만 박사의 연구논문에서 ‘위기 개입’ 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위기는 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므로 바로 이때 누군가가 개입해주면 큰 긍정적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 학설이 나온 후 ‘생명의 전화’ 등 위기 구조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를 보아도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악인이 형벌을 받으며 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욥은 의인으로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본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자녀들이 혹시나 하나님께 범죄치 않았나 하여 자녀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만큼 악에서 떠나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욥이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찬송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본문 10절에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정금’ 이라는 말의 뜻은 ‘의롭다, 하나님 앞에 영화롭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 받은 금처럼 자신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확신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지금 당하고 있는 위기와 고통은 자기를 영화롭게 만드는 것이요, 자기를 복되게 하는 것이요, 영적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과정이라고 분명히 믿었습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도 고통 당하는 이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령을 깨끗게 하시고 인격을 성숙시켜 정금같이 세워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여 주심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욥처럼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의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의 뜻은,

    첫째, 나의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 아이가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다 팬 장작을 한데 쌓아놓더니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이 장작을 부엌으로 날라야겠는데 좀 도와주지 않겠니?”
    “예, 그러지요.”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가 놓아주는 장작을 받았습니다.
    수북히 올려놓은 장작을 들고 부엌으로 가는 아이를 본 동네 어른이 묻습니다.
    “조그만 체구에 너무 많이 들고 가는구나. 무겁지 않니?”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내가 얼마나 들 수 있는지 아버지는 나를 잘 아시거든요.”
    본문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의 뜻은 “나는 나의 길을 한치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나는 나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의 미래도 다 알고 계신다” 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욥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위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자기 남편이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을까?
    나는 지금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나에게 왜 이런 엄청난 비극이 찾아왔을까?
    나는 지금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길을 열어주시고, 나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나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이 엄청난 고통과 환난에서 건져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단련한 후에 반드시 나를 정금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금같이 된다는 말은 금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정금같이 되고, 우리의 사업이 정금같이 되고, 우리의 가정이 정금같이 되고, 우리의 자녀들이 정금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장차 귀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계획을 알고 계십니다.
    나를 알고 계시는 그분에게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게 고난이 벅찬 것 같아도 하나님은 내가 견딜 수 있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께 아멘 해야 합니다.
    혹시 사람들이 내 형편을 몰라준다고 할지라도 낙심치 말고 나의 쓰라린 마음과 답답한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욥처럼 고난 뒤에 정금같이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의 해결책을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하지만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께서 아시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담대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뜻이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대천덕신부로 불리우는 아쳐 토레이 박사는 중국 선교사로 일할 때 자동차 사고로 그만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6.25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많은 한국 청년들을 향해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1951년부터 그들을 위해 의수족 사업을 하고 전도 사업을 하면서 한국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알고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설립하여 한국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토레이박사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변치 않음을 믿고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든지 나름대로 뜻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생동안 세상을 살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 보다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내 뜻대로 이루어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더 귀하게 보배롭게 여기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욥은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원했습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거역하면 거역할수록 우리의 생은 비참해 집니다.
    더 큰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하나님의 뜻 위에서 묵묵히 행할 때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욥은 스바 사람을 원망치도 않았고 갈대아 사람을 원망치도 않았으며 충성스럽게 양떼를 지키지 못한 종들을 원망치도 않았고 자기를 저주하고 도망간 아내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삶 속에 온갖 고통의 소용돌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심을 믿기에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이었습니다.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감옥에서 쓴 소설입니다.
    원래 청교도였던 존번연은 복음전도자로서 소명을 받고 열심히 사역하던 능력 있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전도의 사역을 포기하라는 핍박자들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로 투옥되어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왜 오랜 세월동안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존 번연을 향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천로역정’ 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천로역정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의 가사를 지은 존 뉴톤 목사는 존번연의 생애를 생각하며 “주께서 유능한 설교자의 입을 다물게 하시면서 넓은 문을 여시는 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만약 존 번연이 감옥에 갇혀 있지 않고 설교를 계속했다면 자신의 했던 일의 절반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쓴 천로역정은 수세기 동안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후에야 존 번연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더 크게 쓰시려고 감옥의 고통을 주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19장 26절에 “나의 가죽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주를 보리라” 고 했습니다.
    상처가 나서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이해하기 어려운 시련과 고난도 의미를 알고 보니 하나님의 작정하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성숙한 믿음으로 승화되어졌습니다.

    그리하여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추상적이며 관념적이었지만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작정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을 주었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작정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꼭 이루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에는 후회함이 없으며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작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캄캄한 밤중에 환한 아침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역경 가운데 있을 지라도 보이지 않게 일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를 더욱 성결케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단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삶의 고통 속에서 욥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심으로 정금같이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삶의 위기 가운데 개입하셔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얻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금같이 되어 내가 나오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나면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삶에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오면 자주 읽는 책이 욥기 서입니다.
    이 책에 나타난 욥의 고난을 통해서 나의 고난을 승화시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당대에 의인이며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욥의 인생에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자녀들이 죽게 되며 종들이 죽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욥의 몸에 알 수 없는 악창들이 생겨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인생에 예기치 못한 일들이 닥쳤기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욥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다가 자신의 고통이 심해지자 자신이 탄생한 날을 저주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예상하지 못한 환난이 불어 닥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욥의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정직하고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악에서 떠난 흠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에게 갑자기 시련이 닥쳐옵니다.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열심히 믿었고 열정을 다하여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련이 닥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욥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욥의 신앙을 생각해 보면 철저한 율법주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하고 정직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의 표상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시련이 닥친 이유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믿음으로 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시련을 사탄에게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씩 깨달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엘리바스의 세 번째 말에 대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서 나오겠다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현재 닥친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바한 974 VQAMZS.CXS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생의 풀무 불과 같은 고난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을 연단하시고 검사하셔서 계속적으로 시험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통한 믿음이 되었는지를 입증할 때까지 연단시켜서 사용할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주시는 시험이며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연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욥은 온전한 하나님의 풀무 불에 들어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능동태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연단의 용광로를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시험이 끝날 때까지 시험은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70인역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70인역은 (디아크리노 1252 VIIAS3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정확하게 분별하다, 결정을 내리다, 판단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연단을 받은 사람은 모든 일에 정확하게 분별을 할 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쓴 맛을 본 사람은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결정을 내릴 때에도 정확하며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마가복음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에 ‘의심하지’ 라는 단어가 (디아크리노)입니다.
    하나님께 연단을 받은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별하여 매사에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연단을 받은 사람은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자는 자신의 발이 주님의 걸음을 바로 따르게 되고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욥도 하나님께 연단을 받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주님의 뜻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욥이 그의 걸음을 따랐다고 했는데 그의 걸음이 무엇일까요?
    70인역에는 (엔탈마 1778) 계명, 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연단을 받은 후에 자신의 뜻대로 판단하고 살았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교회에 나온다고 하면서도 나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하나님께 연단을 받을 후에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따랐으며’ (아하즈 270 VQAFZS 동사, 칼, 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붙잡다, 취하다, 연합하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순금처럼 나온 후에는 주님의 계명의 말씀을 온전하게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붙잡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율법주의에 빠져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연단을 받은 후에는 순금과 같은 믿음과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연합된 신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과 연합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게 됩니다. 전에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된 줄 알았는데 연단을 받고난 후에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주님의 계명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능동태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완전히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치우치지’ (나타 5186 VHICXS 동사, 히필,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기울이다, 구부리다, 펴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주님의 길을 지키고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기울이거나 아니면 마음에 구부려 자신의 생각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철판을 두들겨 펴서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 어떠한 제품을 만들 듯이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나의 생각에 가감하여 만들어 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욥은 연단을 받고 순금처럼 나온 후에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오직 주님의 계명의 말씀이 먼저인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생각이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님의 생각이 우선인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앞으로 계속해서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이 우선이 되면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우선인 신앙생활을 할 때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명령을 어기지’ (무쉬 4185 VHICXS 동사, 히필,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떠나다, 제거하다, 옮기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순금처럼 나온 후에 주님이 말씀하신 명령을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제거하거나 그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을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고 떠나거나 교회를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신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나는 이런 신앙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어기거나 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제거하면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뜻에 맞는 신앙을 하는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귀히 여겼도다’ (차판 6845 VQACXS 동사, 칼,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귀하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말씀을 저장했습니다.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비축하여 겨울을 나듯이 다람쥐가 자신의 굴에 열심히 도토리를 저장하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비축하고 저장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욥은 어떠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마음에 저장했습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능동태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강단에서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이 없다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생수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영혼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마음에 비축해야 합니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셔서 아무도 능히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은 그것을 모두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행하고자 하신 구원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내가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을 때까지 찾아가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또한 육체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이루게 됩니다.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아바 183 VPAFZS 동사, 피엘, 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바라다, 소원하다, 열망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작정하신 일들은 반드시 이루시고 포기하지 않는 분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과 원하고 바라는 소원하는 일은 반드시 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일을 끝내기 전에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능동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포기하거나 미루거나 잠잠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가면 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로 돌아올 때까지 길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세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구원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끝내 구원시켜 주시고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있는 소명을 주셔서 그 뜻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셔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로 인도해 주십니다.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고백하기를 자신에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께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루실 것이라’ (샬람 7999 VHIMZS 동사, 히필,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온전하다, 완성하다, 완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들을 모두 완성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온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작정하신 일은 모두가 온전하고 완성되어 완벽하게 됩니다.
    욥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계획한 일은 불완전합니다.
    내가 세운 계획은 완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온전치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모두가 완벽하여 사람이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하게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하시고 말씀으로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세우신 계획을 이루실 때까지 절대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나를 단련시킵니다.

    내가 단련 받지 않고는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사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고로 바꾸어진 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들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복음주의 사고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개인의 생각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나에게 닥쳐온 시련도 하나님이 나를 순금과 같이 나오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용광로 속에 들어간 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의 시간을 견디면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금이 바뀌게 됩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제품으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귀한 보석으로 탄생되게 됩니다.

    현재 내가 받는 고난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단의 시기를 잘 견디고 나면 순금과 같이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구원받은 인생은 이제부터 세상에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거룩한 주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나에게 작정하셔서 세상에서도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작정하신 모든 일들을 마치기까지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18장 요약 / 빌닷의 두 번째 충고

    '악인이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욥기 19장 요약 / 욥의 다섯 번째 대답

    '나의 잘못이 있더라도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

    욥기 20장 요약 / 소발의 두 번째 충고

    '악인의 형통은 잠시 뿐이다.
    악인은 하나님이 반드시 치신다' 



    6월 11일(수) 욥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나의 구속자(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나의 구속자(my Redeemer) 고알리(גֹּאֲלִי)

    구속자(1350) 가알(gâʼal) גָּאַל 스트롱번호 1350

    1. 되찾다.   2. 레 25:25. 3. 레 27:13
    발음 [ gâʼ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속량하다(출 6:6, 시 103:4, 사 63:4), 무르다(레 25:25, 27:20, 룻 4:4), 주장하다(욥 3:5), 구원하다(시 106:10), 건지다(창48:16),
    [명] 보수할 자(민 35:12, 24,27), 원수갚는 자(삼하 14:11), 속량(사 52:3), 기업 무를 자(룻 3:13, 4:1, 14), 친족(민 5:8, 룻 3:12), 보복하는 자(민 35:21, 수 20:5), 족속(왕상 16:11), 대속자(욥 19:25, 시 19:14, 사 41:14).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욥기 19장에서 그의 고통은 깊고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친구와 친척들은 그를 피하고, 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멸시합니다.
    그의 아내가 밝힌 것처럼, 그는 육체적으로도 혐오스러웠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합심해서 그를 대적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듯이 그는 거의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말들이 영원한 형태로 기록되었다고 확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일어나, 법정에서 그러듯이 그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것이 25절에서 ‘나의 구속자’의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결함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그의 가죽이 썩기 전에 행하실 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REV margin).

    욥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욥이 말한바와 같이, 살아 계셔서 그를 변호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의 믿음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 확신하기를 ‘그러나 내가 내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리라(26절, KJV)’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러나’ 라는 단어는 이러한 번역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부활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본다’ 라는 단어가 매우 강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7절).
    아니면, 이 구절을 ‘외인으로서 보지 않고’ 라고 해석할 수 도 있습니다(REV margin).
    그리고 27절의 전반부를 ‘내 곁에 계신 그분을 보리라’ 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인 욥의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욥은 그분을 그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의 부분은, 질병과 고난으로 그 육체가 파괴된 사람 안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확신과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에게 쏟아진 부당한 모욕으로 인해 심리적으로도 매우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서, 그는 그가 아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신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우리는 욥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놀랍니다.
    그가 하나님의 변호를 받게 되는 시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랜시스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문맥상 해석의 어려움이 최종적인 변호에 대한 욥의 확신을 삼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 욥은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될 만한 죄가 없는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 원하였다(23- 24).
    이제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후일에 구속자가 그를 신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이란 말(* )은 역설체(力說體)로서 확신을 강조한다.
    "구속자"란 말(* )은 종을 사서 그를 자유하게 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피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욥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와 옴을 생각하면서 살아 계신 구속자(救贖者)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내다본다.
    이것은 요셉이 임종시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라고 말한(창 50:24) 그의 신앙과 흡사하다.

    창세기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Then Joseph said to his brothers, "I am about to die. But God will surely come to your aid and take you up out of this land to the land he promised on oath to Abraham, Isaac and Jacob.

    우리 본문의 "살아 계시니"(* )란 말은 여기서 요긴한 뜻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죽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완전한 구주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한 말에 포함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중요한 뜻을 가지는 것으로, 욥이 그의 생전 어느 때에 한 번 하나님이 변증해 주신다는 해석(ante-mortem-view)이 있으나 개혁주의 학자들은 욥의 죽은 후(세상 끝날)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신다는 뜻이라고 한다(Kuyper, Loc de Consumm. bl. 31-44; Bavinck, Geref. Dogmatiek IV, bl.771; Honig, Handbuch.bl.782).
    이 말씀은 단지 욥의 주장을 옳다고 할 증인이나 변호자가 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구원론적 또는 종말관적인 신원(神怨)을 말해준다(C. Van Gelderen, Beide, soteriologisch en eschatologisch heeft hij vooreerst zijn hoogtepunt bereikt. -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bl.44).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내가 육체 밖에서"란 말(* )은 "내 육체를 떠나서" 혹은 "내 육체 없이"란 뜻이다.
    "육체 밖에서"란 말은 물론 "죽은 후에"란 뜻과 같다.

    반 겔데렌(C.Van Gelderen)이 역시 그렇게 해석하였고(Denkt Job wel aan een leven der ziel na den dood, een leven in gemeenschap met God, maar niet aan eene opstanding des vleesches. -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bl. 45).
    흴쉘(Gustav Holscher)도 위의 해석과 같이 "내 육체 없이"라고 해석하였다(Mithin ist (* ) 19:26 nicht zu ubersetzen: "von meinen Fleische aus", sondern "ohne mein Fleisch". - Handbuch zum Alten Testmnt, Das Buch Hiob, 1952, s.49).

    어떤 다른 학자들처럼 이것을 "육체로부터"(육체를 입은 그대로 곧, 아직 살아 있어서)라고 번역한다면, 그것은 그 윗문귀(26절 상반)에 있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란 말과 통하지 않는다.
    그의 "가죽이 썩은 후"란 말은 그의 죽은 후를 의미하므로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육체 그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고난 속에서도 구속자를 바라보라

    욥은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고백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믿음의 선언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이때 욥기 19:25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며,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붙들도록 격려합니다.
    오늘은 이 구절을 중심으로, 고난 중에도 구속자를 바라보는 믿음의 힘을 묵상해보겠습니다.

    1.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욥은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절망을 이겼습니다.

    • 구속자란 누구인가?
      구속자는 죄와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대가를 지불해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행위를 뜻하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을 상징합니다.

      • 이사야 41:14: "여호와가 네 구속자라."
        하나님은 단순히 돕는 자가 아닌, 우리의 죄와 고난을 대신 짊어지시는 분입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 "살아 계신다"는 의미
      이는 하나님이 활동적이며,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2.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은 자신의 구속자가 이 땅에 나타나실 것을 고백했습니다.

    • 미래에 대한 소망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가리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날 날을 바라보았습니다.
    • 메시아의 예표
      이 구절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3. 욥의 고백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욥의 고백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본보기가 됩니다.

    1.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아시며, 그 안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2. 미래의 소망을 품으라.
      지금의 고난이 영원하지 않음을 믿고,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기대하십시오.
    3. 구속자 예수님을 붙들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자로서 우리의 모든 죄와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믿음의 고백

    욥기 19:25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든 욥의 강력한 고백입니다. 우리도 삶의 역경 속에서 욥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선언은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끄는 믿음의 힘입니다. 구속자 예수님을 붙들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며 나아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욥처럼 절망 속에서도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주님의 계획을 신뢰하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속자는 누구인가?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에 등장하는 고엘(גאל -redeemer 구속자. 대속자)을 하나님 (혹은 예수님)으로 해석하고 26절은 욥기에 등장하는 "부활 신앙"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욥기 19:26은 구약에 흔치 않는 부활을 언급한 것인가?
    성서의 해석은 그 본문의 상황, 본문 주변 (앞&뒤장), 그리고 그 성서의 전체적 맥략속에서 해석을 시작해야 한다.
    성서의 이곳 저곳에 관련 성구가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성서의 기록된 상황, 그리고 등장 인물의 상황, 그리고 문자적 표현의 뜻을 이해하는데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욥기뿐 아니라 구약성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아주 미미할 정도로 그 개념 자체가 약하다.
    어쩌면 조직신학적인 틀이 익숙하다보니 그 틀을 성서의 본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히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욥기에는 "고엘"이라는 단어가 두번 (3:5; 19:25) 등장한다.

    욥기 3: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May darkness and deep shadow claim it once more; may a cloud settle over it; may blackness overwhelm its light.

    * 이그알루후(가알. 1350) -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구속자 /  가알(구속자)  גָּאַל 스트롱번호 1350

    1. 되찾다.  2. 레 25:25.  3. 레 27:13
    발음 [ gâʼ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속량하다(출6:6, 시103:4, 사63:4), 무르다(레25:25, 27:20, 룻4:4), 주장하다(욥3:5), 구원하다(시106:10), 건지다(창48:16), [명] 보수할 자(민35:12, 24,27), 원수갚는 자(삼하 14:11), 속량(사52:3), 기업 무를 자(룻3:13,4:1,14), 친족(민5:8, 룻3:12), 보복하는 자(민35:21, 수20:5), 족속(왕상16:11), 대속자(욥19:25, 시19:14, 사41:14).

    먼저 고엘의 일반적인 의미를 이해한 후 이를 욥기에 등장하는 고엘에 적용을 해 보자.

    고엘은 가족이나 친족이 특정한 경우(특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가족의 유산을 판 경우)에 그 유산이 타인에게 영구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대신 책임을 지고 돈을 지불하고 그 가족의 유산을 지키는 것이다(레 25:25-34; 렘 32:6-15).

    혹은 가족이 종으로 팔린 경우에도 돈을 지불하고 속량하는 가족 연대책임을 고엘이라고 한다(레 25:47-54).

    이 외에도 고엘은 가족중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을 하여 가계의 대를 이어가는 것 (룻 3:12), 가족의 복수 (민 35:12; 19-27)등에도 적용된다. 

    욥기 19:25에 등장하는 고엘은 위에서 언급한 고엘의 일반적인 기능과는 거리가 먼 경우이다.
    욥기의 특징은 욥과 그 친구들 사이의 변론, 욥이 독백적으로 침묵하는 하나님 (38장 이전)께 하는 변론의 반복이다.
    마치 재판자리에 서 있는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욥기의 그림이다. 

    욥기를 읽는 독자는 욥이 고난을 당하는 직접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욥 1:11-12; 2:4-6).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욥은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의 친구들은 욥에게 Cause and Result (원인과 결과 -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로 접근하여 욥의 죄악이 그 고통의 원인임을 고발한다.
    그러나, 욥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자신은 그런 고난을 당할만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그 고난의 원인을 친구들의 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싶은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일지라도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묻는다.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욥의 입장에서는 답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야속할뿐 아니라 무고한 그를 치시는 하나님. 고난이라는 무거운 돌을 그에게 던지신 하나님을 향해 그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19장 이전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해 그 고난의 이유를 물으면서 욥은 하나님의 이유없는 징계와 진노에 대해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다. 19장 11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가 되었다 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고엘 이야기로 돌아가서, 19:13절 이하는 욥이 말한 고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3절 이하에서 욥은 그의 형제들 (v.13), 친척, 가까운 친지 (v.14), 내 아내, 내 허리에서 난 자식들 (v.17) 즉 고엘이 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모든이들이 욥을 떠나버렸다.
    다시 말해 욥의 법적 고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욥의 곁에 없다.
    뿐만 아니라 법적 고엘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욥을 지지할 "나를 아는 모든 사람 (v.13),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 내 여종들 (v.15). 내 종 (v.16). 어린 아이들 (v.18). 가까운 친구들 (v.19)이 욥을 떠나거나 욥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욥은 홀로 남은 것이다.
    그 누구도 욥의 고엘이 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왜 욥은 "고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정말로 욥은 하나님이 그의 고엘이기에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일까?
    만일 하나님이 그의 고엘이라면 무엇으로부터 그의 고엘이 된다는 것인가?
    이미 욥은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믿음의 신앙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오히려 본문은 욥, 그 자신이 스스로의 고엘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본문의 상황에 맞다.
    다시 레위기 25장의 고엘 제도로 돌아가 보자.
    고엘 제도를 자세히 읽어보면 욥이 자신을 위한 고엘이 될 수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을 힘이 있으면 (레 25:26),"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레 25:49).
    고엘은 가족이나 친족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자신도 고엘이 될 수 있다.
    욥은 이미 아내. 자식. 친척과 친지들 그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고엘이 될 수 없음과 심지어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가 되어 자신을 징계하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따라서 19:25의 고엘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욥 자신이다.

    욥은 고엘을 제 3자로 표현한다.
    그 고엘은 지금 재 위에 앉아 있다(7:21).
    26절에서 욥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라고 말한다.
    이를 마치 욥이 몸의 부활을 고백한듯이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후 세계나 부활을 말할리가 없다.
    욥에게는 부활이 그 고난의 해답이 될수 없다. 
    오히려 26절은 그가 죽을지라도, 혹은 죽음 이후에라도 하나님을 찾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만 욥의 고난 당하는 이유의 답이 있기 때문이다.
    27절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다.
    욥은 그 스스로가 고엘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그 어떤 죄로 인해 자신이 고난을 받는다면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혹 그가 알수 없는 다른 이유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숨어있다고 여겨지는 그 하나님.
    그 답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고엘이 되어 하나님과의 변론을 하고 자신을 그 고난속에서 속량하고 싶은 것이다. 

    구속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제외하면 세상의 쓸모없는 다른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16-19).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 장사,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다 중요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역사적이며 육체적인 부활은 기독교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생명의 위협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높이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부활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 성경 욥기에 나오는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내가 안다 』라는 말씀은 "나는 압니다."라는 말인데, ① 지식적으로 안다, ② 직접 보고 확인하였으므로 안다는 체험적인 지식, ③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와 ④ "확실히 믿는다."고 하는 신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구속자에 대한 욥의 신앙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욥은 "구속자"가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본문 25절에 "구속자"라는 말은 『가알, gawal 』이라고 하는 히브리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이 『가알 』이라는 동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다시 사낸다"는 뜻입니다. 
    어쩔 수 없이 토지나 가옥이 팔렸을 때, 그것을 다시 사서 원주인에게 되돌려 놓는 경우에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레 25:25, 33; 룻 2:20; 3:9, 12; 4:1, 3, 6, 8, 14,;왕상 16:11…). 
    이 경우 성경은 "기업을 무른다."고 하였으며, 돈을 지불하고 사는 자를 가리켜 "기업 무를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이 그 일을 하였습니다. 

    2) "속량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나 동족에게 어쩔 수 없이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 때에 형제나 친척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그를 다시 사내어 자유자가 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레 25:47-55).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상당한 대가(代價)를 지불하고 사내는 것입니다. 이때 지불되는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레 27:13, 15 참조). 

    3) "보수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는데 타인에게 고의로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의 가족이나 형제, 또는 친척은 고살자에게 고의로 죽은 자의 피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민 35:16-34; 수 20:3, 5; 신 19:6, 12). 
    이 경우는 "피를 보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원수가 한 것만큼 그에게 갚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4) "구속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사에서 있을 수 있는 일에 사용되던 단어 『가알, gawal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에 고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 구원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바벨론에서의 해방 등을 말할 때 동사 『가알 』과 명사 『고엘, gwoel 』이 사용되었습니다(시 103:4; 호 13:14; 애 3:58; 출 6:6; 15:13; 시 74:2; 77:15; 78:35; 사 43:1; 44:22, 23; 48:20; 62:9; 63:9; 미 4:10,…). 
    인생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시편 103장 4절을 보시면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파멸로부터 구원하실 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Ⅱ. 욥은 그 구속자가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 』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구속자"는 '나를 구속하시는 자'라는 말입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 나의 구속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나의 하나님 외에는 나를 구속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자인 것을 자주 자주 말씀합니다(사 41:14; 43:14; 44:6, 24; 47:4; 48:17,…). 
    호세아 13장 14절에는 『내가 저희(이스라엘)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음부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2) 나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출 3:15; 약 1:17; 히 13:8). 
    (3)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내 안에서, 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구원 역사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에 완성되어질 구원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Ⅲ. 욥은 그 구속자가 "땅 위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 

    본문 25절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땅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파르, awfawr 』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지구" 또는 "마른 땅"을 뜻하기도 하지만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티끌" 또는 "진토"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사 29:4; 47:1; 욥 16:15; 40:13, 시 119:25; 113:7). 창세기 2장 7절과 3장 19절에서는 "흙"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진토와 같고 티끌과 같은 이 땅에 서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땅 위에 서신다"는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① 구속자이신 하늘의 하나님이 욥이 살고 있는 땅 위에 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②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욥을 살려주시기 위하여 욥이 처한 고통의 현실인 진토 위에 서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③ 잠시 후 욥의 육체는 그 본래인 땅의 티끌과 먼지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때에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욥의 육신을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티끌로 돌아가 버린 자신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④ 그때에 자기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땅의 티끌로 돌아가 버린 자기 위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하늘에서 땅에 오실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Ⅳ. 욥은 그 구속자를 "육체 밖에서 만날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본문 26절에서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그를 보리라 』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욥은 자신의 육체는 썩어져 티끌로 돌아갈 것을 알았습니다. 인생은 모두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끝날 때, 영혼을 담고 있던 그릇이었던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창 3:19).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 갑니다(눅 16:22; 23:43; 전 12:7). 
    그렇게 되면 육체 밖에서, 육체를 벗어나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욥은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 눈으로만 읽고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 시대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큰 부자였으며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훌륭한 열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다복(多福)한 삶의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생애에 뜻하지 않은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일곱 아들들과 세 명의 딸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었습니다. 그의 수많은 재물들(양, 소, 약대)도 어느 날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 자신의 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었습니다. 욥은 재 가운데 앉게 되었습니다. 기와 조각으로 굳어버린 그의 피부를 긁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사건을 그때까지 지켜보던 사랑하는 아내가 그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만큼 그의 형편은 처참하였습니다. 

    이렇게 욥의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펄이 되어버린 육체 가운데서 욥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욥은 그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라고 불렀습니다. 욥은 "나의 구속자는 살아계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그 구속자가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그 구속자를 육체 밖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 앞에 서 계신 구속자를 아십니까?
    그는 저와 여러분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하여 저 하늘 먼 곳으로부터 땅에까지 달려오셨습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어 주셨습니다(막 10:45; 벧전 1:18; 19; 요 10:11, 15…).
    그는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구속자가 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가 땅 위에 서셨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땅에 오시고 서셨습니다.
    그는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주린 자에게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주기 위하여 땅 위에 서셨습니다.
    그가 부활의 생명을 나사로에게, 청년에게, 소녀에게 주시려고 그들 곁에 서셨습니다.
    그가 자기를 주기 위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총독 빌라도의 재판석에 서셨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우리 대신,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주시기 위하여 저 갈보리 위에 서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고 믿게 하려고 제자들 곁에 와서 서셨습니다. 
    그는 저 하늘로 승천하시기 위하여 감람산 위에 서셨습니다.
    그는 이제 하늘로부터 이 세상으로 다시 오셔서 서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티끌인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이름 나의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을 나의 구속자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주님이 살아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 주님을 육체 밖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고 고백합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결코 낯 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귀한 신앙의 어머니 엄분연 권사님도 진토와 같은 육체 가운데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고 살았던 분입니다. 이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주님을 육체를 벗어나 만나 뵙고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의 구속자", "우리의 구속자"되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을 함께 그 날에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속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구속 (救贖, 죄를 대속하여 구원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연 상태는 죄로 특징 지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를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로마서 3:24) 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속의 유익에는 영생 (요한계시록 5:9-10),
    죄 사함 (에베소서 1:7),
    의 (로마서 5:17),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갈라디아서 3:13),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 (갈라디아서 4:5),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출 (디도서 2:14; 베드로전서 1:14-18),
    하나님과의 평강 (골로새서 1:18-20),
    성령의 내주하심 (고린도전서 6:19-20) 등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구속을 받는다는 것은 용서를 받고, 거룩하여지며, 의롭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양자가 되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30:7-8; 누가복음 2:38; 사도행전 20:28 참조).

    구속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값을 치르고 사다" 라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특별히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것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를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전 상태는 노예 상태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사서 주셨고, 우리는 더 이상 죄나 구약의 율법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구속”의 이러한 은유적 사용이 갈라디아서 3:13과 4:5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의 구속 개념은 몸값이라는 단어와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디모데전서 2:6).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삶과 맞바꿈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구속이 “그분의 피,” 곧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골로새서 1:14).

    천국의 거리는 이전에는 속박되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 받고 용서 받고 자유롭게 된,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는 자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죄에 노예였던 자들이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한 구원자를 새 노래로 찬양할 것은 당연합니다 (요한계시록 5:9).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정죄 받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대가를 치르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영원한 죄의 결과로부터도 구출 되었습니다.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78:35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잠언 23:11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을 펴시리라.

    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이사야 43: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이사야 47:4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이사야 48: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9: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이사야 49:26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이사야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이사야 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59: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이사야 60:16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이사야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예레미야 50:34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니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결코 그들의 원을 펴서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거민으로 불안케 하리라.




    욥기 15장 요약 / 엘리바스의 두 번째 충고

    '욥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사람은 죄없는 사람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 없다'.

    욥기 16장 요약 / 욥의 네 번째 대답

    '당신들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게 한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셨지만 나는 항상 진실했다."

    욥기 17장 요약 / 욥의 대답 계속 진행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6월 10일(화) 욥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나의 보주(保主)(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Give me, O God, the pledge you demand. Who else will put up security for me?

    보주(保主)(6148)  아라브(ʽârabעָרַב   

    1. 섞다.  2. 서로 바꾸다.  3. 보증인이 되다
    발음 [ ʽârab ]
    구약 성경  /  22회 사용
    관련 성경  /  보증물(욥 17:3), 보증(잠 11:15, 20:16, 22:26), 저당(느 5:3), 중보(사 38:14), 상인(겔 27:27), 담보(창 44:32, 잠 6:1),
    내기(왕하 18:23), 기뻐하는 바(호 9:4), 무역(겔 27:9).
    [동] 참여하다(잠 14:10), 섞이다(시 106:35), 사귀다(잠 20:19, 24:21).

  • 보증물(保證物)(7760) 숨(sûwm) שׂוּם  

    1. 두다.   2. 심다.  3. 낳다
    발음 [ sûwm ]
    구약 성경  /  581회 사용
    관련 성경 /  메우다(창 21:14, 사 47:6), 세우다(창 28:18, 출 18:21), 두다(창 30:41, 출 9:21), 베풀다(창 32:12), 갇히다(창 40:15), 넣다(창43:22, 신10:2), 짓다(출4:11), 관리하다(창47:6), 행하다(출4:21, 민24:22), 정하다(출15:25, 욥34:13), 마주하다(출26:35), 달다(출28:26), 매다(출28:37), 씌우다(출29:6, 신22:14), 덮다(출33:22), 치다(출40:8), 들여놓다(출40:3),붓다(레2:15), 진노하다(레20:5), 펴다(민4:6), 진설하다(레24:6), 보존하다(창45:7, 민4:19), 담다(신26:2, 삿6:19), 바치다(수6:18),매복하다(삿20:36), 뉘다(삼상19:13), 드리다(삼상21:6), 주다(삼하14:19), 놓다(왕하4:29), 거주하다(대상17:9), 지키다(욥2:3), 주의하다(욥1:8), 뚫다(욥28:3), 가리다(욥40:4), 의지하다(시40:4), 변하다(사21:4, 렘13:16), 만들다(사25:2).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보주가 되옵소서
    - 여기에서 '보증물'이란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상호 거래를 위한 물질적인 계약 증표를 가리킨다(창 38:17-20; 출 22:25,26; 느 5:3).
    따라서 본문은 욥이 하나님께 그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보증할 수 있는 표를 주십사 하는 의미이다(RSV, Lay down a pledge for me with thyself).
    한편 '손을 치다'란 어떤 사람이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으로 보인다(잠 6:1; 17:18).

    보증물은 법적인 용어로 법정에서의 맹세 또는 서약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욥이 당하는 고난은 죄의 결과(인과응보)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간구라고 하겠습니다.
    무죄를 변호해 달라는 간절함을 묵상해야 합니다.

    보주는 증인을 말합니다(시편 119:122, 로마서 8:33-34, 히브리서 7:22).


    시편 119:122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Ensure your servant's well-being; let not the arrogant oppress me.

    로마서 8:33-34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Who will bring any charge against those whom God has chosen? It is God who justifies.
  • Who is he that condemns? Christ Jesus, who died--more than that, who was raised to life--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d is also interceding for us

  •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욥기 11장 요약 / 소발의 첫번째 충고

    '하나님은 악한 것을 상관 안하는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신다.
    마음을 다시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라'

    욥기 12장 요약 / 욥의 세번째 대답

    '나도 친구들보다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다.
    쓸데 없는 충고는 하지 말라.

    욥기 13장 요약 / 욥의 변론

    너희가 아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
    너희는 무식한 사람들이나 나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다.

    욥기 14장 요약 / 욥의 변론 계속

    나의 고난의 때를 기다리겠다.

    6월 9일(월) 욥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나의 허물과 죄(13:23)

    나의 불법과 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를 내게 알게하옵소서.
    How many wrongs and sins have I committed? Show me my offense and my sin.

    나의 불법(不法)과 죄(罪)를 알게하옵소서
    나의 허물과 죄(罪)를 알게 하옵소서

    소발의 충고에 대한 욥의 변론입니다.
    참된 위로는 내 생각과 느낌과 판단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위로 하려고 찾아왔던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에게서 오히려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감추어진 죄가 무엇인지 밝히셔야만 이 고난 가운데서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질책에 대하여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불법과 죄를 알게 하옵소서"
    "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옵소서"

    불법(不法)이란 '아온"이란 히브리어로 "구부리다, 굽게하다"라는 뜻으로 바른 길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아온이란 단어가 불의라고도 합니다(욥 33:9, 레 16:20, 22)

    아본(ʽâvôn) עָוֹן 스트롱번호 5771


    1. 사악.   2. 부패한 행동. . 죄에 대한 징계
    발음 [ ʽâvôn ]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사악, 부패.
      • a. 명사, 남성 부패한 행동, 범죄, 창4:13, 44:16, 욥31:11
      • b. 명사, 남성 죄에 대한 징계[가끔], 사5:18.
      • c. 명사, 남성 비참, 시31:11(10).
    • 관련 성경 /  죄벌(창4:13), 죄악(창15:16, 삼상3:13, 겔4:6), 죄(출20:5, 민30:15, 애4:6), 죄책(출28:38), 악(출34:7, 신19:15, 잠5:22), 허물(레5:1, 삼하3:8, 욥7:21), 불의(레 16:21, 욥 33:9, 사 27:9), 형벌(레26:41, 느19:29), 벌(삼상28:10,왕하7:9), 범죄(시89:32, 겔4:5), 죄짐(사43:24), 불의함(호 14:1).

    아바(ʽâvâh)   עָוָה 스트롱번호 5753

    1. 구부리다. 2. 죄짓다
    발음 [ ʽâvâh ]
    구약 성경
    17회 사용

  • 관련 성경 /  잘못하다(에1:16), 행악하다(단9:5), 아프다(시38:6), 굽다(잠12:8), 뒤집다(사24 : 1),굽게 하다(렘3:21, 애3:9), 패역하다(삼하19:19, 왕상8:47, 대하6:37), 범죄하다(삼하19:19), 바꾸다(욥33:27), 사악을 행하다(시106:6),죄를 범하다(삼하7:14), 악을 행하다(렘9:5).[명] 고통(사21:3), 패역(삼상20:30).







  • 허물이란 히브리어는 "페솨"라고 하며 "이탈하다"는 뜻으로 "반역적인 죄" 또는 "배도"를 말합니다.

    페솨(peshaʽ) פֶּשַׁע 스트롱번호 6588

    1. 반역.  2. 잘못. 3. 죄에 대한 대가에 사용되어
    발음 [ peshaʽ ]
    구약 성경 / 93회 사용

    관련 성경 /  허물(창31:36, 왕상8:50, 잠10:12), 악(출34:7, 겔33:12), 범함(레16:16), 죄악(민14:18, 욥35:6, 사24:20), 죄(욥 34:37, 시19:13, 잠28:2),죄과(잠17:19, 사59:20), 범죄(잠29:6,22), 패역(사57:4).



    죄(罪)라는 히브리어는 "하타트"라고 하며 "빗나가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죄" 또는 범법(犯法)"을 말합니다.

    하타트(chaṭṭâʼth) חַטָּאָת 스트롱번호 2403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관련 성경 /  ☞죄(창4:7, 레4:3, 대하6:25), 죄악(창18: 20,사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하타(châṭâʼ) חָטָא 스트롱번호 2398


    1. 벗어나다.  2. 삿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châṭâʼ ]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관련 성경  /  범하다(창20:9, 출32:31, 렘33:8), 죄를 짓다(창39:9, 삼상19:4, 욥8:4), 범죄하다(창40:1, 삼하7:6, 애5:16), 죄짓다(창43:9, 삿11:27), 잘못하다(레5:5,15), 죄를 범하다(삼하12:13,24:10, 왕상18:9), 잃다(잠8:36), 해하다(잠20:2), 보충하다(창31:39), 깨끗하다(출29:36, 레8:15), 정결하다(레14:52, 겔43:22), 제사 드리다(레6:26), 깨끗이 하다(민31:19), 달아나다(욥41:25). [명] 죄(출5:16, 레5:7,16, 민12:11, 신9:18, 호8:11), 죄인(잠11:31, 13:22,전2:26).



    따라서 욥은 불법과 허물과 죄를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며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를 하려는 욥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며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욥과 같은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회개(悔改)는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 죄와 허물과 불법의 자리에서 방황하게 내가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옛 생활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새로운 생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나의 불법과 죄...내게 알게 하옵소서
    - 그토록 심한 고난을 당해야 할 정도로 악한 죄를 저질렀는가를 알려 주시라는 탄식이다.
    혹자는 이를 욥이 하나님께 그를 고난당하게 한 기소장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M. H. Pope).
    한편 본문의 `불법'에 해당하는 `아온'(*)은 `구부리다', `굽게 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바른 길에서 떠난 `불의'(33:9; 레 16:20, 22), `불법'등을 의미한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빗나가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인 `죄', `범법'(犯法)등을 의미한다.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페솨'는 `이탈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반역적인 죄', 배도' 등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 가지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죄(罪) : 허물 죄

    1. 불신(不信)
    2. 불선(不善)
    3. 불의(不義)
    4. 불법(不法)

    히브리어로 된 여섯 가지 죄(罪)

    성경 언어권에서 사용된 ‘죄’라는 말에 대한 쓰임새가 있다.
    이걸 안다고 죄를 덜 짓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에 담긴 죄의 흔적을 통해서 죄에 대한 심리와 공동체의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볼 수는 있다.

    아삼(אָשָׁם) ─ 위반 죄
    에베르(עֶוֶל) ─ 정당하지 못한 죄. 불의
    라(רַע) ─ 파멸의 죄, 폐허로 만드는 죄. 악한 죄
    파솨(פָשַׁע) ─ 반역 죄
    아원(עָוֹן) ─ 저주 받을 죄
    하타(חָטָא) ─ 벗어난 죄

    아삼(אָשָׁם) ─ 위반 죄

    죄 중에 위반 죄 아닌 죄가 없지만 특별히 그 위반 행위의 개념이 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어휘는 성결 법전인 레위기나 민수기 그리고 에스겔서 중에서도 성전/제사 예전에 의미 있게 분포된 죄 용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존전에서의 죄책에 민감한 죄 개념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지은 죄나 의도적으로 짓지 않은 죄 구분과는 별개의 ‘죄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삭의 아내를 범하려던 아비멜렉이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고 말한다.
    이때 발생한 죄는 의도인가 의도가 아닌가.
    둘 다 아니다.
    이런 죄 개념이 속건제, 속죄제를 지향할 때 주로 사용된 것이다.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하는 식의 오늘날 죄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속건/속죄제는 명백한 의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에베르(עֶוֶל) ─ 정당하지 못한 죄

    신명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무릇 이같이 하는 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25:16)
    여기서 지목하는 죄인이 지은 죄는 저울을 속여 먹은 죄를 가리킨다(17).
    사기 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욥기에 다량으로 분포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판관에게 판정을 촉구하는 기제에서 나타나는 죄 개념일 수 있다.
    궁극적 판관은 물론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도 유의해서 보면,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삼하 7:10), 하나님이 다윗과 성전 계약을 맺는 장면인데 여기서 ‘악한 유’로 번역된 아블라(עַוְלָה֙)가 정당하지 못한 죄의 종족들이다. 주로 다윗의 대적 내지는 침략자를 일컫는 말로서 이 본문의 맥락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주권자(심판관)로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신명기와 지향성이 같다.

    라(רַע) ─ 파멸의 죄, 폐허로 만드는 죄

    이 죄는 헬라어 포네로스(πονηρός) 내지는 카코스(κακός)로 주로 번역되는 용어이다. 헬라어에서의 죄 개념은 따로 설명을 드리겠지만, 헬라어로 된 죄들 중에서도 죄질이 안 좋은 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죄가 토라에서는 파멸과 폐허의 원인이 되는 죄로 주로 쓰인다. 다름 아닌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알게 된’ 악(惡)이 바로 라(רַע)였다. 그런데 여기서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알게 되었다는 것인가. 같은 말이다. 한마디로 ‘아는’ 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것이 개인 자신 또는 공동체를 파멸/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파솨(פָשַׁע) ─ 반역 죄

    파솨를 간혹 ‘허물’로 옮길 때가 있지만 그 죄는 본질상 반역이다. 솔로몬이 백성을 대표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왕상 8:50) 여기서 언급되는 죄들이 파솨이다. 마치 허물(모르고 지은 죄)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자기네 집안(다윗 왕가)을 배반했다며 규탄하는 대목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12:19) 이것이 파솨이다.

    아원(עָוֹן) ─ 저주 받을 죄

    이 죄는 어떤 의미에서는 히브리인의 세계관과 습속을 가장 잘 반영하는 죄 개념일 수 있다. 저주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말하기를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호소하는 대목에서 이 죄성에 대한 포문을 열고 있으며, “그것(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는 대목에서도 이 아원이라는 죄를 언급한다. 이는 부정함(inquity)인 동시에 죄책(guilt)이며 또한 그것은 저주와 맞닿아 있다.

    하타(חָטָא) ─ 벗어난 죄

    언뜻 이 죄는 아삼 죄와 비슷하다. ‘위반하는’ 행위와 ‘벗어나는’ 행위가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반하는’ 행위는 안으로 들어가는 관성을 띤다. 즉 침범하는 행위이다. 반면 ‘벗어나는’ 행위는 밖으로 나가는 관성을 띤다. 따라서 아삼의 경우는 손과 발에 묻는 오물이었다면 하타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뭔가를 묻히는 행위라기보다는 벌거벗은 ‘상태’를 표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때는 (아직 내 안에서) 죄가 구성되지 않지만, 알았을 때는 강력한 죄를 구성한다. 그렇지만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참고로 다윗은 일생일대의 죄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그 죄에 하타라는 죄명을 붙이고 있다. 시편 51편의 회개에 등장하는 죄 개념이 바로 하타이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을 사지로 몰아 넣고 죽인 악질적인 죄를 저지르고도 우리가 앞에서 다룬 모든 악한 죄명이 아닌 단지 ‘과실’을 뜻하는 하타로 경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죄 하타는 엄밀한 의미에서 밧세바 간음 죄, 우리야 살인 죄를 지목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죄들을 짓는 순간에 ‘몰랐던 상태’에 대한 회개의 요청이란 사실이다. 지구상의 모든 죄는 아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행위이지만, 그 죄로부터 빠져나올 때는 오로지 모르는 상태 즉 벌거벗었던 사실을 ‘아는 행위’를 통해서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상 모든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죄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아는’ 순간에 ‘몰랐던’ 상태가 구성되는 선험의 구조 때문이다. 이것이 하타이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회개 행위(죄를 벗는 행위)의 전형이기 때문에 토라에서 하타는 522회나 나타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  

    1. 죄의 본질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견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징,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인간의 자아 적 의식의 투쟁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不法)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는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이라는 뜻이며,

    이와 관련된 용어들은 아바르(벗어나다, 위반하다), 파솨(반역하다, 위반하다)

    솨가(잘못을 범하다, 길을 벗어나다)등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하마르티아, 포네로스, 아디키아, 파라바시스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악, 불의, 부정, 위반”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단순히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말하며, 그 기준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를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 39: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태만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가 아닌 것, 둘 중에 하나라는 선(線)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 원죄(原罪, original sin)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원죄(原罪)란, 아담이 지은 죄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가 있다.

    창세기 시대에 아담이 저지른 그의 실수 때문에 왜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 되어지며,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나까지도 죽어야만 하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결코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롬 5:12-14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에는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반대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첫 사람으로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당부는 아담과 하나님만의 관계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언약”이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로 “언약적 대표설”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되며,

    그 실과를 먹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언약인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5장이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증거 한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오염)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책과 오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관계를 의미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 더 분석하면,

    그것은

    첫째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이다. 

    특히 원죄에 의한 죄책을 우리는 원시적 죄책(Original Guilty)이라고 한다.

    또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 된 성질(죄 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

    혹은 연약성을 가리킨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의 전가(轉嫁)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인성의 부패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즉 원죄의 결과가 오염된 죄 성을 초래한다.

    그것을 우리는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이라고 부른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다윗은 내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죄 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엡 2:4)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부패와 오염된 죄 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시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 자범 죄(自犯罪, actual sin)

    자범 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 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로, 그 둘은 인과(因果)의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겹(sins)이다.

    둘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빈번히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죄의식이 많이 상실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흔히 생각된다.

    원죄는 본성의 죄로서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고 본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것은 “죄책”에 대해서 면책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성”은 갖고 있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법적 신분적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에

    우리는 소위 칭의적 상태(의롭다고 부르심)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효력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징계와 책망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2:47, 48). 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골 3:25)이라고 하였고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울 사도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 

    2.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죄의 개념 

    ♣ 구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8가지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신구약 성경에서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grace)'를 나타내는 단어에 비해서

    죄에 대한 용어는 상당히 많이 있다.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의 단어가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있는 첸(chen)과 체세드(chesed), 그리고 신약성경에 있는 카리스(charis)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에는 죄를 나타내는 최소한 8개의 기본 단어가 있으며

    신약에는 최소한 12개의 기본 단어가 있다. 

    그 모든 단어들이 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1. 챠타(Chata) - 표적을 벗어난 것 

    죄에 대한 모든 형태의 단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522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표적을 벗어난 것(to miss the mark)' 으로 헬라어 하말타노(hamartano)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표적을 벗어난 것'은 '다른 표적을 쏜 것' 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올바른 표적을 맞히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표적을 맞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수동적인 벗어남의 개념(a passive one of missing)'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쏨의 개념(an active one of hitting)'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인 죄악, 우상숭배, 의식적인 죄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2. 라(Ra) -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구약성경에서 444번 나오는 이 단어는 헬라어 카코스(kakos) 및 포네로스(poneros)에 상응하는 단어로,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때때로 재난(calamities)을 의미하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 '사악한 것(wicked)'이라고 번역된다. 이 단어는 또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something morally wrong)' 은 물론 '손상을 입히는 것(something injurious)' 도 의미한다(창 3:5, 38:7, 삿 11:27). 이사야 45:7에서는 하나님이 빛과 어둠, 평안(well-being)과 라(ra, 환난)도 창조하신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가 재난 및 다른 사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비록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책임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있을지라도 사악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파샤(Pasha) - 반역하는 것(to rebel) 

    이 단어가 보통 '배반(transgression)'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을지라도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반역하는 것(to rebel)' 이다. 열왕기상 12:19, 열왕기하 3:5, 잠언 28:21, 이사야 1:2을 보라. 

    4. 아원(Awon) -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 

    이 단어는 히브리 사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삼상3: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고난당하는 종(사53:6, the Suffering Servant)' 및 '훼방하는 죄(a defiant sin)' 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5. 샤가그(Shagag) - 잘못한 것(to err),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잘못한 것(to err)'이나 양 혹은 술 취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사 28:7). 이 단어는 실수를 언급하는 단어인데, 그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율법에서 이 단어는 길을 잃은 사람이 율법에서 어떤 명령을 했는지 알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6. 아샴(Asham)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레위기, 민수기 및 에스겔서에 나와 있는 성막 및 성전의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7. 라샤(Rasha) - 사악한 것(wicked) 

    이 단어는 출애굽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편, 에스겔, 그리고 지혜서(the Wisdom literature)에 주로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의로운 것' 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악한 것(wicked)'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출 2:13, 시 9:16, 잠 15:9, 겔 18:23). 

    8. 타흐(Taah) -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로, 비록 사람이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우연히 벌어진 죄라기보다는 계획적인 죄를 뜻하는 단어이다. 민수기 15:22, 시편 58:3, 119:21, 이사야 53:6, 에스겔 44:10,15을 살펴보라. 

    이러한 단어 연구를 통해서는 우리는 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죄에 대한 개념의 3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죄는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의 다양성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가 특별히 어떤 죄의 형태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2) 죄는 율법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3) 불순종에는 긍정의 개념과 부정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개념은 부정의 개념에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한 것(omission)' 뿐만 아니라 긍정의 개념에서

        '그릇된 일을 한 것(commission of wrong)'도 강조하는 개념이다.

        죄는 '표적을 벗어난 것' 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쏜 것'을 의미했다. 

    ♣ 신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12가지 

    1. 카코스(Kakos) - 나쁜 것(bad) 

    '나쁜 것(bad)'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단어의 부사형은 때때로 '육체적으로 나쁜 것(physical badness)'

    즉 질병(disease)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막 1:32), 이 단어의 형용사형은 보통 '도덕적으로 나쁜 것(moral badness)'을 지칭합니다(마 21:41, 24:48, 막 7:21, 행 9:13, 롬 12:17, 13:3-4,10, 16:19, 딤전 6:10). 

    2. 포네로스(Poneros) - 악한 것(evil) 

    이 단어는 '악한 것(evil)'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로, 거의 대부분 '도덕적 죄악(moral evil)'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마 7:11, 12:39, 15:19, 행 17:5, 롬 12:9, 살전 5:22, 히 3:12, 요이 11), 악한 영이라 불리는 귀신을 지칭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눅 11:26, 행 19:12). 

    3. 아세베스(Asebes) - 경건치 않은 것(godless) 

    '경건치 않은 것(godless)'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 경건치 않는 배교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지칭된다(롬 4:5, 5:6). 

    4. 에노코스(Enochos) - 죄책(guilt) 

    이 단어는 '죄책(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개 자신의 범죄가 죽기에 마땅한 경우를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마 5:21-22, 막 14:64, 고전 11:27, 약 2:10). 

    5. 하말티아(Hamartia) -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 

    이 단어는 죄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서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약227번 등장하는 단어이다. 어떤 작가가 죄에 대해 한 가지 용어만을 꼭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은유하고 있는 원래 뜻은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의 챠타(chata)처럼, 이 단어는 부정형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맞추는 것(hitting some wrong mark)'이라는 긍정형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용서 혹은 구원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발견된다(마 1:21, 요 1:29). 이 단어와 관련된 다른 몇 개의 중요한 참고구절로는 사도행전 2:38, 로마서 5:12,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야고보서 1:15, 베드로전서 2:22, 요한일서 1:7, 2:2, 요한계시록 1:5이 있다. 

    6. 아디키아(Adikia) -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관련해서(롬 1:18), 돈과 관련해서(눅 16:9), 인간 육신의 지체와 관련해서(롬 6:13, 약 3:6), 행위와 관련해서(살전 2:10) 사용되는 단어이다. 

    7. 아노모스(Anomos) -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 

    '불법(iniquity)'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법을 어기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마 13:41, 24:12, 딤전 1:9).

    종말론적 사상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살후 2:8). 

    8. 파라바테스(Parabates) - 법을 위반하는 것

    범죄자(transgressor)'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보통 특별히 '법을 위반하는 것' 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롬 2:23, 5:14, 갈 3:19, 히 9:15). 

    9. 아그노에인(Agnoein) -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 

    이 단어는 참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 대한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행 17:23, 롬 2:4), 그러한 무지는 사람을 죄인의 상태로 만든다(히9:7). 

    10. 플라나오(Planao) -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2:2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그들을 길을 잃게 하는 것)(마 24:5-6);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요일 1:8); 그리고 사단은 만국을 미혹으로 이끕니다(계1 2:9, 20:3,8). 

    11. 파라프토마(Paraptoma) -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 의도적인 타락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 5:15-20에서 6번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6:14, 18:35, 고린도후서 5:19, 갈라디아서 6:1, 에베소서 2:1, 그리고 야고보서 5:16을 보라. 

    12. 히포크리시스(Hypocrisis) - 

    이 단어는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1) 어떤 사람이 계시를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to interpret falsely as an oracle might do);

    (2) 어떤 사람이 거짓된 행동을 꾸미는 것(to pretend as an actor does);

    (3) 그릇된 것으로 알려진 해석을 따르는 것(to follow an interpretation known to be false).

         종말의 때에 거짓 선생들은 거짓된 해석을 할 것이고, 거짓된 행동을 꾸밀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좇게 될 것이다(딤전 4:1-2).

    외식하는 자들은 처음에 그들 자신이 미혹되어서 그릇된 것을 옳게 만들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까지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이 죄의 치명적인 속성이다. 

    신약성경의 단어 연구로부터 몇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1) 죄는 '존재하는 어떤 뚜렷한 기준'을 어기는 것이다.

    (2)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표준을 어기는 것이다.

    (3) 죄악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의 책무는 분명하며 모든 인간들은 그 책무를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큰 의미에서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 이다.

    우리는 죄에 관한 단어연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3.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 罪)란, 

    죄 - 히브리어로 핫타스

    죄 -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이다. (헬)- 목표를 어긴 것 

    1) 화살이 과녁의 목표에 미달하는 것

    2) 과녁의 목표를 더 지나쳐 빗나가 버린 것 

    이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칭하는 과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이 죄이며,

    이단이므로 죄와 이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의 죄를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으로써는 정당한 기준 점이 없으므로 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표현이며,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 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적중 시킬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 되었다.(창 1:26-27)

    그럼에도 인생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고 빗나가 버렸다.

    바로 그 상태가 죄이며, 불행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도덕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

    죄는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됨(모르고 지은 죄)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말함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이반하여 자기 임의대로 행동하는 것(롬8:6-8).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세상 죄는 어린 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 1:29)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4:12, 요 14:6)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이다.(히 9:27. 계 20:10. 계 21:8. 롬 3:23. 롬 6:23. 요일 1:9)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마 8:21-22)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는 것이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이다.(자아)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자아), 유다서1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이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이다.

    죄는 항상 외모-지상주의 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이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죄는 항상"먹음직도 하고, 보암직 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특징이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이다.

       요일 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된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딤후3장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5장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이다.

    또, 보이지 않는 -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출32:)와 똑같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며, 변장술로 은폐한 죄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 육신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죄이다.

    (롬 8:5-7. 롬 8:13.- 요 14:17. 고전 2:12. 요 3:6. 요 6:63)

    죄는 하나의 세력이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이다.

    죄는 지옥이 지옥 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이다.(약 3:6) 

    * 죄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순종도 죄다(롬10:2-3) - 자존심, 체면, 자기생각

        마 5:45-47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안 된다.) - 원수 사랑해야

    *죄와 관계된 성경구절

    약 4:17, 약 2:9, 롬 14:23, 삼상 12:23, 요 8:24-27, 16:9, 롬 12:11, 잠 21:4, 신 15:7-11, 렘 48:10

    *죄의 종류

    바이스 - 음주(중독), 마약 복용(자기가 자신에게)

    크라임 - 율법 상의 죄 - 도적, 상해, 살인, 사기

    씬(sin) - 종합적인 죄(하나님을 떠날 때)

    4. 죄란 무엇인가? 

    1. 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말할 때 살인, 강도, 간음, 사기 등 외형적인 범죄를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형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교만, 질투, 증오, 시기, 탐욕, 음욕 등도 내적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있을까?

    성경은 인류 모두 죄의 구속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10).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율법아래선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 없는 이가 없다고 말씀한다. 기독교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에 대해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다. 인류는 죄의 영향에 의해 온갖 부패와 불의, 불행, 질병 등을 영육 간에 불행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창3:16-19, 롬6:23).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표준 새 번역, 욥14:1)죄의 기원과 종류모든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실은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가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는 크게 4가지인데 불법, 불의, 불신, 불순종이다.

    죄의 기원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먼저 교만과 탐욕으로 하나님께 도전한 천사들(사단)의 타락으로 죄가 기원했다고 본다(유 6, 벧후 2:4).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된 인류가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선택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창3:1-13).

    즉 죄는 사단에게서 기인하였고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사단이 유혹했다.

    타락에서 기원된 죄는 외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그 근원(분노, 욕심, 교만 등)까지 죄로 규정하고 있다.

    불신자나 초신 자의 경우 왜 모든 인류가 죄인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요16:9).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시 51:5).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구분한다. 원죄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발생한 죄악이다.

    또한 원죄는 아담이 인류에게 남긴 상속 물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며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왔다(롬5:12). 이 원죄의 속박의 틀을 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죄악으로 사망이 들어왔던 것을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게 됐다(롬 5:15-21).

    한편 아담 이후 인간들은 수많은 죄악을 범하게 됐는데 이를 ‘본죄 혹은 자범 죄’(Actual Sin)라고 불린다. 자범 죄는 한 개인이 원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고의적으로 짓는 범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범 죄는 ‘살인, 강도, 사기, 간음 등’ 외부적인 생활의 죄와 ‘교만, 질투, 증오, 육욕, 사욕 등’ 마음으로 짓는 내적 생활의 죄로 구분된다.

    죄의 본질과 특성인류에게 원죄를 선사한 아담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않으셨거나 선악과만 없었다면

    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인류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 위해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아담의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죄라기보다는 불순종이 죄의 원인이 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선택권)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킬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교만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들은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죄의 특성은

    ①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온 인류에 전가됐으며, 죄는 주변 사람들을 쉽게 오염시킨다. ② 불치의 병(사망에 이르는 병)과 같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없었다면

        완치되기 어려운 병처럼 용서받기 어렵다.

    ③ 고리의 빚과 같다. 죄는 빚처럼 갚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며,

        고리의 이자처럼 불어나듯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다른 죄까지 불러온다(눅 7:41, 마 6:12).

    ④ 족쇄와 같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듯 죄를 범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요일 3:4).

    ⑤ 사단의 노예로 만든다. 죄를 진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롬 6:17-18).

    그렇다면 전적 부패한 인간은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 질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치유하거나 속죄 받지는 못한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와 그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롬 3:25, 고후 5:21).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회개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2. 죄의 본질 4대 요소 

    ① 불순종(不順從)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며, ‘믿음과 신뢰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신에서 파생된 죄악이다. 특히 불순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탈, 지나침(반항, 계명위반)으로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았다(아담, 사울 등).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② 불법(不法)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인류를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법이든 사람이 만든 법이든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 법을 알면서 어겼거나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어기게 된 경우도 불법에 해당된다(눅 12:47,48, 롬 2:1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③ 불의(不義)

    가장 근본적인 불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시 50:6, 신 24:13). 또한 선지자시대에는 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단 4:27, 암 5:1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④ 불신(不信)

    불신은 불순종과 배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도 믿지 못하는 죄다(요 16:9). 불신은 범사에 믿음을 좇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따라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원천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것들,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죄악들을 속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은혜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기도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요한일서 5장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데, 전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고 후자의 경우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16-17절).

    죄악 가운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성령 훼방 죄 :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있고 비방·모독하는 죄(마12:31)② 성령 거역 죄 :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사역을 부정(불신)하는 참람 죄(마12:32)

    ③ 성령 배반 죄 :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 능력, 은사 등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다가 배교하는 죄

                         (히6:4-5, 10:26-27)

    <죄를 이기는 비결>

    ▲ 죄에서 떠난 성결의 삶을 살아라.

    거룩과 순결의 삶을 가는 성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성결의 삶을 살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한다(롬 1:4, 약 3:15-18, 4:8)..

    ▲ 육신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라

    죄악 된 인간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며, 성경은 육체의 욕망 1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갈 5:19-21).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이에 순종해서는 절대 안 된다(요일 2:16).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벧전 2:11).

    ▲ 의의 병기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만들어 죄를 짓지 말고 의의 병기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롬 6:13).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히 6:13-18).

    3. 파멸로 이르게 하는 7가지 죄악

    인간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내적인 죄악을 크게 7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외적인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등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내적인 7가지 죄악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가장 심각한 죄악들이다.

    1) 교만(Pride)

    교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행위로 ‘겸손’의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을 죄의 근원이며 본질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다. 지나친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은 이웃(교인)과 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다. 중세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루시퍼가 교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최초로 교만이 나타났다(사 14:12-14)고 말했다. 즉 교만은 마귀가 타락한 원인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주요 수단이다. 잠언에서는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고 있고(잠 16:18), 예수님은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더럽게 하는 악덕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막 7:22).

    ▲성경어원 : 교만(게아, 잠 8:13), 거만(가아와), 장점을 뽑아내는 것(가온, 잠 16:18)으로 신령한 지혜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느부갓네살(단 4:30,37),

    2) 탐욕(Greed)

    탐욕, 탐심은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으로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성경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고(딤전 6:10),

    십계명에서는 10번째 계명으로 탐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히브리인들은 ‘욕망은 영혼을 충동질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에 미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으로 탐심을 금하고 있다(출 20:17). 사도행전 20:33, 디모데전서 6:9, 로마서 7:7에서는 ‘강렬한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면 돈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것(금전욕)과 동일시하였다(딤전 6:10).탐욕이란 단어는 종종 악한 것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비도덕성과 관련되며(엡4 :19), 신약에서는 본질적으로 으뜸가는 우상숭배로 표현하고 있다(엡 5:5, 골 3:5).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눅 12:15),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출 20:17),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가지려는 노력(딤전 6:10) 등을 의미한다.

    ▲성경어원 :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하마드, 신 5:21), 부당한 이득을 탐내는 것(베차, 잠 28:16), 이기적인 욕심(아와, 잠 21:26), 강렬한 욕망(에피뒤미아, 행 20:33), 무지비한 자기 주장(플레오넥시아, 고후 2:11).

    ▲대표적 인물: 아간(수 7:16-26), 발람(벧후 2:15)

    3) 분노(Wrath)

    분노 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범죄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분노 자 가인은 제사문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격분해 동생을 살인하게 됐다. 가인의 상황을 예로 볼 때 분노의 원인은 내 자신 속에서 발생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케 만들며 항상 폭력을 유발하게 만든다.구약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난폭한 주먹은 신적 권위를 주제넘게 사칭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시 37:8-9). 그래서 맹렬한 격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금지되고 거부되었다(창 49:5-7). 신약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그 실행에 대해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마 5:9,21,22). 분노는 본질적으로 성도를 성화(聖化)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榮化)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기도와 용서를 제안하고 있다.

    ▲성경어원 : 성나다, 화를 내다(카챂, 사 8:21), 흔들리다, 격동하다(라가즈, 신 2:25)

    ▲대표적 인물 : 가인(창 4:3-16)

    4) 음욕(Lust)

    성경은 모든 음행과 정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무절제한 정욕(색욕)은 선한 생활을 파괴할 뿐 아니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고난과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음행을 믿음으로 대항해 직접 싸워야 하는 죄악이기보다는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만큼 연약한 인간이 음행의 죄를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전 6:18). 또한 음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도의 몸(성전)을 오염시키는 일과 같다. 방탕한 마음에서 생기는 음욕은 식을 줄 모르며 급격히 오염되는 특성이 있다. 성경에서 음행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했고(유 7), 모압 여인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다(민 25장). 한편 성경에서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이 아닌 신앙적인 배교행위까지 영적 음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어원 : 음탕함과 부절제함, 외설스러움, 육욕(아셀게이아, 갈 5:19). 아셀게이아는 육욕과 관계되는 의미로 공공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범하는 호색스러움을 의미한다.

    ▲대표적 인물 :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 19장)

    5) 탐식(Gluttony)

    인간을 죄악으로 유혹하는 3대 욕구를 물욕, 성욕, 식욕이라고 한다.

    식욕은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으로 에서는 식탐으로 인해 장자 권을 팔았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책망되고 있는 악습으로 지적하고 있다(잠 23:21). 고대 히브리인들은 배나 육체는 열정이나 탐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보았다.

    그래서 배를 의미하는 ‘베텐’(욥 20:20)이 탐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탐식이라는 것은 우리를 순간적인 유혹에 굴복시켜 버리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죄악이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악이다. 성경은 탐식이 탐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지닌 특성(롬 1:29, 잠 21: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은 육체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서서히 육체를 파괴시켜 나가는 죄악이다. 또한 탐식은 육체만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 영성을 파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히브리 기자는 탐식으로 장자권을 판,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기록하였다(히 12:16-17).

    ▲성경어원 : 탐식을 뜻하는 파고스(마 11:19, 딛 1:12)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 장이’, ‘나태한 배’, ‘태만한 탐식가’ 등으로 사용됐다.

    ▲대표적 인물 : 에서(창 25:29-34, 히 12:16-17)

    6) 질투(Envy)

    질투, 시기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며,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질투가 죄악 된 행동의 동기가 되어 분쟁과 분열, 미움, 살인까지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2:20, 갈 5:21). 질투는 사랑의 반대행위로 이웃이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겨난다(고전 13:4).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불순한 내적 감정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죄이다.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로 증오로 발전하게 되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전 13:4). 그래서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가 따르지 않더라도 생각과 태도만으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21-31).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키나)와 헬라어(젤로오, 행7 :9)는 감정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질투는 결국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성경어원 : 검붉게 된다(키나, 민5 :14), 이기주의, 야망, 경쟁(에리디아, 롬 1:29)

    ▲대표적 인물 : 요셉의 형들(창 37:34), 사울(삼상 18:6-9)

    7) 나태(Sloth)

    일반적으로 나태라는 말을 행동이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태만한 것, 게으른 것, 느린 것, 부지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행동이나 정신적인 사물(事物)에 대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활동에 대해 냉담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의미한다. 나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단테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나태한 자를 한없이 게을러 늘 잠자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나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행동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 반응치 못하고 어떤 목적도 없는 말을 분주히 분에 넘치게 말한다. 또한 나태는 일상생활과 함께 신앙생활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다. 사단은 성도를 죄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성경 보기 싫은 나태, 기도하기 싫은 나태, 전도하며 봉사하기 싫은 나태 등 영적 태만을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경어원 : 비생산적, 무익한, 비효과적인, 텅빈(알고스, 마1 2:36),

    ▲대표적 인물 :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장)4.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살펴보면

    ‘과녁을 쏘아 맞출 수 있는데 맞추지 않는 오만한 행위’를 뜻한다.

    ①표적을 쏘아 빗나가다(이탈)

    ②표적을 지나쳐가다(과도)

    ③표적에 못 미치다(미달) 등으로, 죄는 알고 있는 의무의 태만을 의미한다(약 4:17). 

    5. 무엇이 죄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목표)’에 반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죄를 나타내는 3대 용어는

    A) [불의] 아-와(아벤)(에벨) :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B) [허물] 페솨 [파-솨] : [거역, 반역]

    C) [죄] 헤-트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

    A) [불의]

    [아-원]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아-와]에서

    온 명사 ⇨사악한 행위. 의도적, 의식적, 악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 --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

    B) [허물]

    원어 페솨[파-솨]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창 31:36, 왕상 12:19, 사 1:2, 호 8:1).

    창 31: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페솨)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왕상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파솨; 반역한, 거역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 12:18,19 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파솨)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호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파솨 ; 반역한, 거역한)이로다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등으로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불의](아원)라면 [허물](페솨)(거역, 반역)은 보다 <근본>을 배반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정해 놓은 <사회 도덕규범>을 범하는 것이 [불의](아원)이며,

    나라의 헌법에 반역함{[허물](페솨)(거역, 반역)}은 <그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 과거 5공 당시 사기행각, 강도행각, 거짓, 살인 등등의 범죄(도덕적인 것 거역)는 죄 값을 치루면

    되지만, 당시의 ‘반공법위반’은 <대한민국 자체를 배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거역하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도덕법 위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가 ‘반공법위반’으로 <국가 반역> 죄에 해당하는 것.

    (반공법 위반은 도덕법으로 근거한 “악행”[아-원]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히브리 원어 [헤-트 af] <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C) [죄]

    [헤-트 af]와 그 여성 형 [핫타-아]그리고, 가장 많이 씌어진 꼴로는 [핫타-스]인데 (창 4:7 기타 빈출), 하말티아 (헤-트,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창 4:4-7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헤-트)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욕망)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욕망)를 다스릴지니라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헤-트)악이 심히 무거우니

    왕상 8:50 주께 범죄(헤-트)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파-샤)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죄>라는 단어의 원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면 “과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풀이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왜 벗어났는가”에 대한 문제 해결점으로 접근 해 본다. 

    첫째 <과녁>.

    “목표물”, 또는 “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일”

    이 “목표”는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며, 이는 인간(人間)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곧 “Will of God”이다.

    이 “죄의 개념”에서 “과녁에서 벗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표물이 보이지 않았던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표물을 보려하지 않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목표물이 오해 됐던지’, 

    둘째 <목표물의 내용>.

    성경에서 사용되는 “화살이 맞추어야할 <목표>”는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어떤 자의 말처럼 “저절로 우주가 생겨나고, 저절로 발전되어지고,

    그리고 현재 저절로 존재되고 있다”고 한다면 “저절로 생겨났으니 저절로 우주가 없어진다.”고 해야 한다.

    (‘저절로’는 ‘진화’란 뜻)

    논리가 옳은가?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의 그 내용은---

    신은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분명히 어떤 목적에 의해서, 계획하시고,

    그리고 그 계획대로 완성하시고, 또한 온전한 완성을 위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의 계획된 내용”을 기록한 성경은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신은 우주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출현을 계획’하셨고,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됨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신(神)의 궁극적 목표가 됨을 설명하는 구절이 된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신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살게 하는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짓고 +생기=생령-이것은 사람 만드는 공식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혼이 있는 모든 생물’을 만드는 하나님의 공식일 것 같다.

    이런 공식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영원 할 수 있느냐’에 문제점이 있다.

    죽지 않고 거의 천년을 살아온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 해 본다.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어떻게, 왜 ‘행복하고 불행 했을까’ 

    <하나님의 목표>는 “신(神)이 특정 피조물과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영원히 거하는 존재”는<신(神)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신(神)만이 영원하다. 신(神)이 아니고는 영원 할 수가 없다.

    모든 짐승들은 ‘죄를 범하는 범죄’라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짐승들에게는 어떠한 율법도 주신일이 없기 때문이며,

    율법이 주어 졌다 해도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지킬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지켜야 할 법을 주셨다>고 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고, 사람만이 주어진 율법을 “지키던지, 안 지키던지”일 뿐이다.

    ‘신의 목표에서 벗어난 자’들 중에 짐승들은 없다.

    짐승은 신의 목적과 무관하게 지음을 받았기에 짐승에게는 <죄>가 없다.

    짐승을 지은 신의 목적은 “잡혀 먹히기 위함”

    즉 ‘짐승들은 신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계획’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어떻게 태어나든, 어떻게 자라나든, 그 짐승이 동료를 몇이나 물어 죽였던지,

    혹은 사람을 몇 명이나 잡어 먹었던지 - “신의 과녁에서 벗어나는 짐승은 없으며,

    신의 과녁(목적)과는 무관 한 짐승들이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 했다”면 얼마의 기간 동안

    에덴에서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6000년? 아니면 6억년?) 신과 영생하지는 못한다.

    혈과 육은 신과 영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을 수 있게 된다.

    혈과 육을 가지고는 결코 신의 세계로 갈 수 없다.

    혈과 육을 가지고 있으면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이 없어야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 자체가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산혼)신의 영을 받아서

    <혼과 영(신)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신으로부터 출생되고,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혈과 육을 포기하여 죽을 때

    ‘혈과 ’육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흙으로 귀향하고,

    영은 신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신에게로 귀향한다.

    단 귀향 때는 결합된 혼과 같이 간다.

    혼과 영의 결합은 독립된 하나의<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것 자체가 <원죄>라고 알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가르침을 누구로부터 오랫동안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원죄>라는 단어는 없으며 또한 ‘선악과를 먹은 것이<원죄>’라고

    기록된 성경도 없다. 

    <원죄>란 뜻은

    성경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억지로 라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불순종”이<원죄>일 수가 있다.

    <죄의 시작>이 되는 것이 원죄(原罪)다. 원조(元祖), 원천(源泉)

    모세 출현 오래전부터 있는 죄는 ‘율법을 범함으로 오는 죄’

    곧 “[불의](아-와), [허물] (페솨)”가 아니라 “[죄](헤-트)”이다

    *****************************************************************************

    롬 5:12-19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헤-트,하말티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헤-트, 하말티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헤-트,하말터노)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헤-트, 하말티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헤-트, 하말티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원형, 모형)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도레아)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누구든지 사단에게 순종하면 사단이 그의 왕이 된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단이 “우리”의 왕이면 “우리”는 사단의 종이다.

    ‘사단의 종’이 낳은 후손도 ‘사단의 종’이니 아담과 같은 범죄를 하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사단의 소유물이며, 그의 종이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되어야 한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며, 사단은“사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이라도 사망이 왕 노릇하여” 모든 사람은 다 죽음에 이른다.

    ***********************************************************************

    사람으로 갓 태어난 아기의 범죄([불의] 아-와, [허물] 페샤)는 없다.

    그러나 <육체로 태어난 자체>가 치명적인 죄이다.

    ‘육으로는 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

    ‘육으로는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없는 악 조건. 

    창 6:2-4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육체가 됨”은 “하나님의영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육체가 되고, 영의 존재가 결혼 생활과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은 육적 존재가 됨이다.

    성경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아-와()와 페샤(허물)로 불리는 죄는 사함이 가능할지 모르나

    헤-트(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사함이 못되는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 된다.

    “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죄> 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원죄>가 드러난다.

    이 죄에서의 해결은 육적이 아니라 “혈과 육”을 초월 할 수 있는

    “신의 과녁(목표)에 맞는 신의 영을 받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6. 죄, 죄인,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죄는 거역이다.

    곧 선과 악 사이에 하나님께서 두신 경계인 율법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시 51:1, 눅 15:29)

    죄는 죄악이다.

    곧 금지된 것으로 명시가 되었던 안 되었던 간에 본질적으로 그릇된 행동이다.

    죄는 잘못이다.

    곧 옳은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시 51:9, 롬 3:23)

    죄는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죄는 범죄이다.

    곧 하나님의 권위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의지가 침입하는 것이다.(엡 2:1 허물)

    죄는 불법이다.

    곧 영적인 무정부상태이다.(딤전 1:9)

    죄는 불신이다.

    곧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요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둘째 죄는 그것이 행동이든지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일치되어야 할 것이지 부족한 것이다.

    셋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죄인으로 규정된다.

    이는 의가 없는 모든 인간의 타락한 상태이다.

    모든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다.(롬 5:12)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죄는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은 죄를 타고 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받으면 옛 사람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변화된

    새 성품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벧후 1:4)

    둘째 죄는 행동이다.

    죄의 성품이 표출되는 것, 즉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태에 있거나, 갓 태어나거나 죽기 직전의 사람이나

    누구든지 죄인의 상태에 있으며 죄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심판 받으러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이다.(엡 2:1-3)

    죄는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 왔으며 그 죄는 사단과 함께 온 것이다.

    약 1:14-15

    롬 5:12

    사 14:12-14

    죄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비방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심하는 것이다. 로마서1장은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롬 1:29-31) 

    그 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롬 3:23, 5:12, 3:10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는다는 사실도 믿었다. 

    그런데 그는 죄를 지었다. 바로 죄는 알면서 짓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롬 5:12,14,16,17,18,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롬 5:12-19  

    죄는 세상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브에게서 죄가 끝났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브는 아담 없이 혼자서 자녀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의도적인 죄는 세상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지금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서 죄는 계속되고 있다. 

    시편 51:5 - 이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롬 1;29-31, 갈 5:19-21, 골 3:5,8, 딤전 1:9-10, 고전 6:9-10, 막 7:20-23

    50여 가지의 죄들이 기록되어 있다. -

    바울은 죄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딛 1:15, 딤전 4:2, 전 7:20, 시 39:5 롬 3:4, 요일 1:8,

    과녁에 미치지 못한 화살이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 인간과 같다. 

    나무에 열린 열매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나무는 그 열매의 이름에 따라 그 나무로 불려 진다.

    그 이유는 그 나무 안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 되는 것 가운데는 외양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 성씨, 성격, 말씨, 행동 등도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

    비물질적인 것이 유전되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죄(의 성품)이다. 

    그런데 정작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16:9에 죄에 대하여 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3:18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으로 구원받을 길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7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로 혹은 일시적인 미혹에 빠져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죄는 회개하면 즉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마 12:31-32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했을 때는 아들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했을 때는 성령님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하면 더 이상 중보자가 없기 때문에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현재시대)

    *성령을 훼방하는 가장 흔한 죄 중의 하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일 두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훼방죄가 된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또 하나의 유형은 히 6:4-6, 10:26-27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다.

    *받은바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는 회개하여 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범하는 것 - 우상숭배 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마 22:37-39)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구원받지 못함 

    악 - 하나님께 불순종, 윤리적으로 부패한 행동, 영적으로 악의 본체는 마귀(요 8:44)

    죄 -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간을 항상 욕심과 거짓과 미움에 갇혀 살게 만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2)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하지 않는 것 -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노력 없는 상태)

               영적으로 짐승인 상태 (시49:12, 20)






    죄(罪)(חָטָא 하타)에 대하여

    <하타 חָטָא>는 ‘죄를 짓다’란 뜻의 동사이다.
    동사 <하타 חָטָא>는 성서에 580회 언급된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헤트 חֵטְא>가 있다.
    ‘죄’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페샤 פֶּשַׁע>, <아온 עָוֹן> 등 여러 가지 있다.
    동사 <하타 חָטָא>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상황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어로 <아노미아 ἀνομία>인데 접두사 <아> 붙어서 ‘무법/불법’을 의미하며 법정의 재판을 전제한 개념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하타> 개념은 법정개념이 아니다.

    <하타 חָטָא>의 개념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그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반대말로서 동사 <야라 יָרָה>가 있다.
    이 동사에서 ‘율법’이라 번역하는 <토라תּוֹרָה >란 명사가 파생하였다.
    <야라 יָרָה>는 활을 쏘아서 과녁을 명중하거나 돌을 던져서 어떤 대상을 맞혔을 때 사용한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에 걸맞게 행동할 때 <토라>를 준행하는 선행이 될 것이지만, 그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행할 때 <하타 חָטָא>가 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두 마디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하타 חָטָא>이다.

    명사형은 <헤트 חֵטְא>인데 ‘죄/벌’이란 뜻이다.
    법률을 위반한 것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창 41;9; 전 10:4), 대부분 하나님을 뜻에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민 27:3; 신명기의 전부; 왕하 10:29; 시 103:10; 사 38:17; 애 1:8; 단 9:16).
    신명기에는 이 명사가 모두 이런 의미로 쓰인다.
    특히 신 21:22; 22:26은 사형 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명사로서 <핫타 חַטָּא>가 있는데 거듭하여 죄를 짓는 ‘죄인’을 가리킨다(왕상 1:21; 민 32:14).
    여성명사는 <핫타아 חַטָּאָה>인데 출 34:7에서 <페샤 פֶּשַׁע>와 <아온 עָוֹן>와 함께 언급된다.
    또 ‘속죄제물’을 가리키는 명사 <하타아 חֲטָאָה>가 있는데 대개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창 20:9; 출 32:21; 출 30:31; 왕하 17:21, 등).
    여성명사 <핫타트 חַטָּאת>는 ‘죄/속죄제물’을 가리키는데 무려 290회 가량 언급된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를 없애려고 바치는 제물이 ‘속죄제물’, <핫타트>이다.
    <핫타트 חַטָּאת>는 ‘속건제물/guilt-offering’이란 뜻의 <아샴 אָשָׁ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동사 <하타 חָטָא>가 성서에 사용된 용례들을 찾아 보자.
    왕법이나 국제조약을 어긴 경우(창 40:1; 왕하 18:14), 히브리 노예들이 벽돌 생산을 위한 짚을 공급해 주지 않은 애굽의 감독자들의 행위(출 5:16 [히7]),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의 깨어진 관계(삿 11:27), 돌로 팔매질을 하여 명중시키는 베냐민지파 700명의 왼손잡이들(삿20:16), 사울과 다윗 사이에 깨어진 의리(삼상 19:4; 24:12; 26:21), 길을 잃은 상황(잠 19:2), 주님을 잃은 경우(잠 8:36)를 가리켜 <하타 חָטָא>를 사용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 반드시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아버지에게 굳게 약속하는 유다의 말에 <하타 חָטָא>가 나온다.
    유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창 43:9; 44:32).
    레위기에서는 <하타 חָטָא>가 확장되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종교적인 용어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레 4:2; 5:16).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살지 못하는 것 일체를 ‘죄’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동사의 목적어는 대부분 ‘하나님’이거나 ‘율법’이 된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준이나 목표를 벗어나서 거룩하게 살지 못하거나 영적으로 온전하지 못하게 된 것이 ‘죄’이다.

    신 9:18은 명사 <헤트>와 동사<하타>를 둘 다 강조하고 있다.
    오경은 금송아지를 섬긴 죄를 대표적인 경우로 제시한다(출 32:30; 신 9:21).
    신명기뿐만 아니라 지혜문학과 예언서들에 <하타>의 동종어들이 <페샤>나 <아온>과 나란히 병기하는 구절이 많다.
    역대기하서와 에스라, 느헤미야서와 에스겔서에 ‘속죄제물’이란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을 벌하신다(수 24:19; 왕상 14:16; 느 9:37, 등).
    사람은 자기의 고백하고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돌이키면 죄를 용서하고(왕상 8:36; 대하 6:25, 27; 시 32:5; 렘36:3), 죄를 없애주기도 하신다(시 51:2; 사 6:7; 슥 13:1).

    고대중동의 종교들에서는 죄를 사회체제를 해치는 행위를 ‘죄’로 이해했다.
    그들은 주술을 행함으로써 죄의 결과를 되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야훼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사랑의 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타인의 권리를 무시고 빼앗는 폭력을 죄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폭력을 멈추고 사랑하게 되면 죄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면 회복되고 기쁨의 새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된다.




    죄 ; 罪[zuì,쭈이] 辜 [gū,구] [히]2403 תa;F;j'/ha;F;j' *ḥaṭ·ṭāṯ/chatta'ah 핱타트/핱타아 [그] 266 aJmartiva 하마르티아(hamartia) [영] Sin -하나님을 이반(離叛)하는 일.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죄의 관념’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죄 관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인격적 의지)에 대한 배반(背反)을 말한다. 성서에는 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주 많아, 원어에 있어서 명사만도 23종이 죄(罪)로 역(譯)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거의 동의어로서 씌어지는 [악(惡)], [어리석음], [미련함] 등의 유(類)원어까지 합치면 실로 많다. 그러나 이렇듯 수많은 원어 중에도 구약성서에는 히브리인의 죄의 개념을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세 가지 말이 있다. 그것이,[죄]라는 말과 [불의] 및 [허물]의 셋으로서, 이 셋을 죄를 나타내는 ‘3대용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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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죄(罪); [히]2398, חָטָא 핫타/하ㅌ타(chattaath) [히]2403 תa;F;j' 하타트 chatta'th [헬]266 aJmartiva 하마르티아(hamartia) [헬]264 aJmartavnw 하마르타노(hamartano)[영]Sin *발음상 주의; 히브리어, ‘테트’에 2중점(다게시포르테, 엑센트)이 찍혀있어 ‘핱타’여야, 헬라어 알파에도 강숨표(rough breathing)가 있음. *로고스사전은 ‘하타’로, 엘피스는 [-타ㅎ-하ㅋ]로 음역함.

    -‘죄(罪)’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2398, חָטָא 핫타/하ㅌ타(chattaath), 2399 af]je 헤트 chet' 와 그 여성형 2401 ha;f;j} 하타아 chata'ah 그리고, 가장 많이 쓰인 꼴로는 2403 תa;F;j' 하타트 chatta'ah (창4:7,외 구약294회),인데 이것은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삿20:16,잠8:36,) 등의 뜻으로서, 죄의 형식적 측면을 말해주는 것이며, 죄(罪)는 잘못인 것으로서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레4:2,22,27). 즉 동기보다도 주로 나타난 행위가 문제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범죄는 일반 사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 중, 법에 의해 처벌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된 행위를 말하는데, 성경에서 범죄는 목표(-하나님)를 잃고, 올바른 길(-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을 말한다.

    -범죄로 번역된 원어에 있어서 대표적인 2399 af]je 헤트 chet' 와 여성형 2401 ha;f;j} 하타아 chata'ah (창 20:6,40:1,출9:27,34,20:20,32:33,외 8회)는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의 의미로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해당되는 헬라어는 264 aJmartavnw,하마르타노(hamartano)(롬2:12,12,5:16,딤전5:20,히3:17,벧후2:4,I요1:10,3:6,6,8,5:16,18,외 신약43회)이다. 이 2398, חָטָא 핫타/하ㅌ타(chattaath) 의 명사형과 동사형은 구약성서 중 가장 많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떠한 인생을 보내도 결국은 최종적인 목표가 없는 불행한 존재임을 의미하고 있다. <슈퍼바이블>

    -범죄(犯罪) [히] [名] 2403 תa;F;j' 하타트 chatta'th , [動]2398 af;j; 핫타/하ㅌ타 chata' [헬] [動] 264 aJmartavnw 하마르타노(hamartano) [영] Sin

    -범죄로 번역된 원어에 있어서 대표적인 2399 af]je 헤트 chet' 와 여성형 2401 ha;f;j} 하타아 chata'ah (창 20:6,40:1, 출 9:27, 34, 기타, 20:20, 32:33,외 구약8회)는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의 의미로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이것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264 aJmartavnw 하마르타노 hamartano(롬2:12,12,5:16,딤전5:20,히3:17,벧후2:4,I요1:10,3:6,6,8,5:16,18,외 신약43회 )이다. <슈퍼바이블>

    2. 허물 ; [히] 6588 [v'P, 페솨 pesha` [헬]3900 paravptwma 파라프토마(paraptoma) [영] Transgression

    -‘허물’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6588 [v'P, 페솨 pesha`,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6586 [c'P; 파솨 pasha`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 (왕상12:19,사1:2,호8:1). 죄의 기원을 보여주는 듯이 묘사되어 있는 기록이 창3장의 인간 시조 아담의 범죄 타락의 기사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말씀)을 중히 여기지 않고, 유혹되어,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떠나, 죄 때문에 죽는 자가 되게 했다. 이 근원적인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선에 대해 부적당하게 하고, 무력케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에 반항하기에 이르게끔 하여, 거기서 모든 현실적 위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의 죄의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롬5:12,19->창3:4,엡2:1-3,딤후2:26,요일3:4). 또한 죄의 보편성의 사실도 명백하게 단언하고 있다(마7:11,15:9,롬3:9,23,요일1:10,약3:2,->왕상8:46,욥14:4,잠20:9). 그리고 이 죄의 보편성의 사실은 역사에 의해 증명될 뿐 아니라, 인간 각자의 의식에 있어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3. 불의(不義), 죄악(罪惡); [히]5771 @/[; 아본 `avon [헬]266 aJmartiva 하마르티아(hamartia) [영] Iniquity, Guilt

    -의도적으로, 의식적인 악, 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3대용어의 세째의 것인 ‘불의(不義)’,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5771 @/[; 아본 `avon, 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 5753 hw:[; 아바 `avah {aw-vaw'}에서 온 명사인데, 그것은 사악한 행위를 의미하고, 의도적, 의식적인 악을 나타내며, 여기서는 행위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이 문제시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위가 구부러진 길처럼 비뚤어지고 구부려져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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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어 단어검색]

    1.[히]205 אָ֫וֶן 아붼 Original Word: @w<a; 'aven{aw-ven'}‘헐떡거리다’란 어근에서 유래한 듯함. (따라서 헛되게 ‘노력하다’ ‘실패로 끝나다’) ; ‘쓸데없음’ 또한 ‘고통’, ‘헛됨’, ‘악(惡)함’ 특별히 ‘우상’: -고통, 헛됨, 악한(악함). 369(아인;없다)와 비교. 죄악(罪惡). <민23:21,신26:14,욥22:15,시5:5,6:8,7:14,10:7,14:4,28:3,36:3,4,12,41:6,53:4,55:3,10,56:7,59:2,5,64:2,66:18,90:10,92:7,9,94:4,16,23,101:8,119:133,125:5,141:4,9,잠6:12,18,10:29,11:7,12:21,17:4,19:28,21:15,(22:8),30:20,외 구약78회>

    *Strong's Hebrew 205 - 78 Occurrences ; ~생략~ .

    2.[히]816 אָשַׁם 아솸 Original Word: !v'a; 'asham {aw-sham'} or 아쉠 'ashem {aw-shame'} 기본어근; ‘죄(罪) 있는’ 함축적으로 ‘벌 받다’, 또는 ‘멸망하다’: -황폐하다 (해지다, 하게 하다), 파괴하다, 크게, 죄 있다(유죄로 되다), 범죄(犯罪)하다 (죄 인식), 죄짓다. <레위4:13,22,27,5:2,3,4,5,17,19,2회,6:4,민5:6,7,삿21:22,시5:10,34:21,22,잠30;10,외 구약35회>

    *Strong's Hebrew 816 - 35 Occurrences ; ~생략~ .

    3.[히]817 אָשָׁם 아솸 Original Word: !v;a; 'asham {aw-shawm'}816(아솸;파괴하다,크게 죄 있다)에서 유래;‘죄과(罪過)’ 함축적으로 ‘과오’ 또한 ‘속죄제’:- 유죄(속죄제물), 범과(犯過)하다(속건제) <창26;10,레위5:6,7,15,2회,16,18,19,6:6,2회,17,7:1,2,5,7,37,14:12,13,14,17,21,24,25,2회,28,19:21,2회,22,민5:7,8,2회,6:12,18:9,시68:21,잠14:9,외 구약46회>

    *Strong's Hebrew 817 - 46 Occurrences ; ~생략~ .

    4 [히]818; אָשֵׁם 아쉠 Original Word: !vea 'ashem {aw-shame'}816(아솸;죄짓다)에서 유래;‘죄 있는’ 따라서 ‘속죄제를 드리는’:- 흠(欠), 죄 있는 사람 <창42:21,삼하14:13,에스라10:19, 구약3회>

    *Strong's Hebrew 818 -3 Occurrences ; *’ă·šê·mîm[아쉐밈]—1.Occ.(창42:21), *kə·’ā·šêm[케아쉠]—1.Occ.(삼하14:13),*wa·’ă·šê·mîm[케아쉐밈]—1.Occ(에스라10:19).

    5.[히]819 אַשְׁמָה 아쉬마 Original Word: hm;v]a' 'ashmah

    ​{ash-maw}817(아솸;죄과,속죄제)의 여성형; ‘죄 있음’, ‘과오(過誤)’, ‘속죄제를 드림’: -죄짓다, 범죄하다 (죄의 원인, 범죄 하는, 속건제) ’ashmurah. 아쉬무라 ; 821(아쉬무라;파수)을 보라. <레위4:3,6:5,7,22:16,대상21:3,에스라10:19,시69:5,외 구약19회/롬8:1,>

    *Strong's Hebrew 819 -19 Occurrences ; ~생략~ .

    6.[히]2154 זִמָּה 짐마 Original Word: זִמָּה/ hM;zI zimmah {zim-maw'} or 잠마 zammah {zam-maw'} 2161(자맘;생각하다,꾀하다)에서 유래; ‘계획(計劃)’, 특히 악한 계획 :-가증한 죄(罪), 음탕(하게함), 실수(失手), 사악한(계획,마음). <레위18:17,19:29,20:14,2회,삿20:6,욥17:11,31;11,시26:10,119:150,잠10:23,21:27,24:9,외 구약29회>

    *Strong's Hebrew 2154 - 29 Occurrences ; ~생략~ .

    7.[히]2398 חָטָא 하타/하ㅌ타 Original Word: af;j; chata' {khaw-taw'}기본어근; 본래 의미는 ‘빗나가다’, 따라서 (상징적, 일반적으로) ‘죄(罪/(異體;辠)짓다’ 추론적으로 ‘상실하다’, ‘부족하다’.‘ (사역동사)‘타락시키다’, ‘책망하다’: -죄책을 지다, 죄(罪)를범하다, 과오(過誤)로, 해악(害惡),범죄(犯罪)하다,동사; sinned. <창20:6,9,31:39,39:9,40:1,42:22,43:9,44:32,출5:16,9:27,34,10:16,20:20,23:33,29:36,32:30,31,33,레위4:2,3,2회,14,22,23,27,28,2회,35,5:1,5,6,7,10,11,13,15,16,17,6:2,3,4,26,8:15,9:15,14:49,52,19:22,2회,22:9,민6:11,8:21,12:11,14:40,15:27,28,19:12,2회,13,19,20,21:7,31:23,신1:41,9:16,18,19:15,20:18,24:4,수7:11,삼상14:33,시4:4,39:1,41:4,51:4,7,78:17,32,106:6,119:11,잠8:36,11:31,13:22,14:21,19:2,20:2,전2:26,5:6,7:20,26,8:12,9:2,18,애가1:8,외 구약238회> *기타; 기본형(칼) 외에는, 대부분 ‘테트’에 2중점(다게시포르테)이 찍혀있어 ‘핱타’로 적음. *로고스사전은 ‘하타’로, 엘피스는 ‘하ㅋ-타ㅎ’, [-타ㅎ-하ㅋ]로 음역함.

    *Strong's Hebrew 2398 - 238 Occurrences ; ~생략~ .

    8.[히]2399 חֵטְא 헤트 Original Word: af]je chet' {khate}2398(af;j;핫타;죄짓다/사역동사)에서 유래; 범‘죄(罪/異體;辠)’, 또는 그 ‘형벌’:- 과오(過誤), 심하게, 범죄, 죄(罪)(의 벌), 허물(창41:9), 명사; <창41:9,레위19:17,20:20,22:9,24:15,민9:13,8:22,32,27:3,신15:9,19:15,21:22,22:26,23:22,24;15,16,시51:5,9,103:10,전10;4,애가1:8,3:39,외 구약34회>

    *Strong's Hebrew 2399 - 34 Occurrences ; ~생략~ .

    9.[히]2400 aF;j' 핫타/핱타 : Original Word: חַטָּאּים/ aF;j' *ḥaṭ·ṭā·’îm/chatta' {khat-taw'} 2398(핫타;죄짓다/사역동사)에서 유래한 강세형; ‘죄인(罪人)’ 또는 ‘유죄(有罪)’로 간주된 사람 :-범죄자, 죄 많은, 죄인(罪人). chatta: sinful, sinners 형용사, 명사, <창13:13.민16:38,32:14,시1:1,5,25:8,26:9,51:13,104:35,잠1:10,13:21,23:17,외 구약19회> *로고스사전은 ‘핫타’로, 엘피스사전은 ‘하ㅋ ㅎ타-’, [-타ㅎ 하ㅋ]로 한글 음역함.

    *기타; 테트(󰖯)에 경강점(다게시포르테;2중점)이 찍혀있음. ‘베가드케파트’ 6문자에만 ‘거친 음가’인 연강점(다게시레네)이 아님으로 한글음역(음독)은 ‘핱타’로 표기함.
















    프린스턴대학원의 한국인 교수로 재직했던 이상현박사(작고 6월 4일)는 그의 아들을 잃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 한인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위로하려고 찾아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고 귀찮다는 학 리고 아ㅇ와서 차우 대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박사 별세 / 06-04-2023

    최초의 아시안 교수 기록  31년 강의, '명예전당' 헌정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로 활동했던 이상현(사진) 박사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 박사는 세계적 석학이자 한인 1세대 신학자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명예의 전당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박사는 지난 1980년부터 31년간 이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면서 아시아계미국인프로그램(AAP)도 개설했다. 미국 신학계에서 ‘아시안-아메리칸 신학’ ‘이민 신학’ 등의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정립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 박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에 뉴저지로 유학을 왔다.
    이후 우스터대학교를 졸업,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호프칼리지에서 교수를 하다가 프린스턴 신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존 보울린 학장은 “이상현 박사는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던 세계적인 학자였다”며 “그의 유산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 그가 양성한 목회자와 학자 등을 통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욥의 신앙의 10대 특징


     1. 역경 중에도 주를 찬송함 (1: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and said: "Naked I came from my mother's womb, and naked I will depart. The LORD gave and the LORD has taken away; may the name of the LORD be praised."

     2. 역경 중에도 하나님께 범죄치 않음(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In all this, Job did not sin by charging God with wrongdoing.

     3. 믿음의순전함을 굳게 지킴(2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He replied, "You are talking like a foolish woman. Shall we accept good from God, and not trouble?" In all this, Job did not sin in what he said.

     4.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음(6:10)

    그러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Then I would still have this consolation-- my joy in unrelenting pain-- that I had not denied the words of the Holy One.

     5. 고난 때문에 원망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함(7:13-14)

  •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때에
  • 주께서 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 When I think my bed will comfort me and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 even then you frighten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with visions
  •  6. 부활 신앙을 소유함 (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I myself will see him with my own eyes--I, and not another. How my heart yearns within me!

     7.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애씀(23:3-5)

  •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 If only I knew where to find him; if only I could go to his dwelling!
  • I would state my case before him and fill my mouth with arguments.
  • I would find out what he would answer me, and consider what he would say.


  •  8. 고난 후의 영광을 바라봄(23:10)


    나의 가는 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9. 일평생 스스로 책망 할 것이 없는 순전한 생활을 함(27:6)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I will maintain my righteousness and never let go of it; my conscience will not reproach me as long as I live.


    10. 모든 사람에 대해 선을 행함(31:1-40)

          1.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1. 1. "I made a covenant with my eyes not to look lustfully at a girl.
      2. For what is man's lot from God above, his heritage from the Almighty on high?
      3. Is it not ruin for the wicked, disaster for those who do wrong?
      4. 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
      5. If I have walked in falsehood or my foot has hurried after deceit-

    - 『그랜드 종합 주석』에서




    욥기 8장 요약 / 빌닷의 첫번째 충고

    수아 사람 빌닷의 충고가 나옵니다.
    '자네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
    자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것이다.
    악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9장 요약 / 욥의 두번째 대답 

    .'하나님과는 논쟁할 수는 없다.
    나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릴 수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10장 요약 / 욥의 기도

    '하나님이 왜 나를 죄인 취급 하시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만약 악인이라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
    나를 지금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6월 7일(토) 욥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림자와 같으니라(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for we were born only yesterday and know nothing, and our days on earth are but a shadow.

    망매(茫昧) : 아득할 망, 활홀할 황
     - 견문(見聞)이 좁거나 없거나 하여 세상(世上) 물정(物情)에)아주 어두움.

    식견망매(識見茫昧) : 식견이 어둡다

    그림자는 나그네 인생
    역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욥기 17:7 /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그림자와 같은 인생 생명의 빛을 따라야 한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림자의 의미

    1.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영원한 생명의 삶

    2. 빛이 있어야 드러난다.
     빛 되신 주님이 없는 인생은 헛되다.

    3.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이 책은 피터 슐레밀의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피터 슐레밀은 어느날 파티에서 회색인과 조우합니다.
    이 인물은 토마스 존의 하인으로 보였고, 토마스 존이 원하는 물건을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어주곤 했습니다.

    이 주머니가 탐이 났으나,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들어 파티를 벗어나다 회색인물과 마주칩니다.
    회색인은 그에게 아름다운 그림자를 준다면, 금화가 나오는 주머니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주머니가 탐났던 슐레밀은 이를 수락합니다.
    회색인은 즉시 주머니를 주고 그림자를 돌돌 말아 가져갑니다.
    당장은 금화를 무한으로 가질 수 있어 기뻐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그를 받아줄 세상은 없었습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를 세상은 등졌으나 그에게는 금화가 있었고, 충직한 하인 벤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벤델의 도움을 받아 한 마을에 정착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마을사람에게 들켜 마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회색인은 다시 나타나 그에게, 영혼을 내게 준다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악마임을 깨달은 슐레밀은 이를 거부하여 그에게서 도망을 다닙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그를 유혹하지만, 금화를 주는 주머니를 던져버리고(주머니를 사용할 때마다 악마가 위치를 알게 되기 때문), 길에서 만난 상인에게서 장화를 구매하여 도망갑니다.

    우연히도 이 장화는 마법 장화로, 한걸음에 동서양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는 이를 계기로 동서양을 건너다니며 생물을 탐구하는 생물학자가 됩니다.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그의 절친한 친구인 샤미소(책의 저자)에게 이 일련의 이야기를 편지로 갈음하며 마지막 말을 남기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샤미소, 나의 환상적 이야기를 간직해줄 사람으로 나는 자네를 선택했네.

    (중략)

    친구야,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출처: 그림자를 판 사나이(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저, 138p

    감상평

    이 책은 독특하게도 실존인물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1800년대를 풍미한 낭만주의 시인인 푸케에게 샤미소(작가)가 먼저 원고를 보여주었는데, 감명을 받은 푸케는 당시 이 원고를 편집장에게 보낼 때,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하여 이 이야기가 실제 인물의 이야기인 것처럼 각색을 했습니다.

    이런 배경지식이 없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뭐지? 이야기가 시작된건가? 그냥 편지인가? 했는데, 이 편지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에필로그 격이었으며 현실과 소설의 구분을 허물어트려 이야기를 몰입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허무는 장치는 중간중간 등장합니다. 소설속 주인공은 종종 작가를 부르는데, "사랑하는 벗 샤미소"라 언급하며 실제 인물이 작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독창적인 소설기법이 19세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또 한번 놀라웠고, 2023년에 읽은 제게는 너무도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라미제라블>이 생각이 났습니다. 라미제라블 속 장발장은 빵을 훔쳐 감옥살이를 했고, 전과가 있던 그는 사회에 섞이지 못해 정체를 숨기고 먼 타지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줄곳 자신의 전과기록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까 매번 전전긍긍했죠. 소설 속 슐레밀 또한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으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림자가 없다>라는 것은 <사회적 통념을 어겼다>라는 것으로 치환해서 이 책을 읽었고, 조금 더 편하게 해석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을 버렸다>로 해석했습니다. 즉, 그림자를 버리고 금화를 택한 그는 인간의 양심을 포기하고 물질을 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도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배척과 그보다 더 중요한 <그림자> 즉, 제 해석대로라면 사회적 통념의 준수를 강조합니다.

    어찌보면 2023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소 고리타분한 주제의식일 수 있겠지만, 이 글이 쓰여진 시기는 1813년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 초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적 성장 속에서도 "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지 않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난 <라미제라블>은 산업혁명 직후 발생한 프랑스혁명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관통하는 두 소설이 제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산업혁명 속에서 재화보다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강조한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라미제라블>. 이 두 혁명기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문학적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그림자와 같은 인생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 6:12)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그림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에서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자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시편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편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각 사람은 그림자와 같이 실체가 없는 허상처럼 떠돌아다니며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져버릴 안개와도 같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저마다의 그림자를 달고 살아가는데...
    이 그림자는죽음의 그림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일평생 우리의 발목을 잡고 따라다닙니다.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림자가 없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을 발하며 세상을 비추는 빛의 근원이시기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 갈 죽음의 그림자를 영원히 떨궈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빛의 근원되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여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4, 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생명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들여 진심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은 세상을 비추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에 발목잡혀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림자 인생’이라는 어두운 존재가  ‘세상의 빛’이라는 영광의 존재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여 주심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적용 / 내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의 빛되신 성령하나님이 나를 통해 빛으로 드러나시도록 거룩하고 깨끗한 통로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나의 삶을 빛 가운데 돌아보며 주님 기뻐하시는 말과 생각과 행실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그림자처럼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아가던 저희들을 은혜로 구원하사 거듭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죄와 사망 권세의 종 노릇하며 죽음의 그림자에 발목잡힌 인생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할 수 없었던 저를 빛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세상을 비추는 발광체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탄마귀는 끊임없이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와 위협하며 다시금 발목을 잡으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기에 더이상 어두움과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임을 믿습니다.
    저를 통해 주님의 빛이 여과없이 세상을 비출 수 있도록... 거룩하고 깨끗한 통로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온전히 발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림자 같은 인생(시편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Man is a mere phantom as he goes to and fro: He bustles about, but only in vain; he heaps up wealth, not knowing who will get it.

    빛을 등지고 걸으면 앞에 그림자가 보이나
    빛을 안고 걸으면 그림자가 뒤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그가 자란 환경에 의하여 그의 사색과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그가 속한 세계, 그가 속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가 자란 환경, 속한 환경이 그의 정체성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그의 실체일까요?
    사람에게서 총명이 떠나면  사람은 자기의 실체를 모릅니다.
    자기의 실체를 모르면 그림자가 실체인 줄 알고 부지런히 따라 다닙니다.
    그림자가 답인 줄 알고 그림자 속에서 열심히 답을 찾습니다.
    사회적인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등이 곧 자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 사람의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등이 곧 그의 실체일까요?
    또, 캄캄한 밤에는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일도 많습니다.
    빛을 만나면 비로소 그가 따라다닌 것이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두렵고 놀라게 한 것이 허수아비 그림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빛이 옴으로 인해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은 안경을 낀다고 해서 눈이 어둡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 진리의 빛이 있어야 눈이 어둡지 않습니다.
    왜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한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죽기살기로 출세하려고 하십니까?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미모에 신경을 쓰십니까?
    예뻐진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돈을 벌려고 하십니까?
    돈을 번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많이 배우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많이 배워서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오래 살려고 하십니까?
    오래 살아서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렇게 열심히 쌓고 모으십니까?
    많이 모아서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렇게 병에서 나음을 받으려고 하십니까?
    병에서 나은 뒤에는 무엇을 위해 사실 건데요​?

    소망이 하나님께 가있지 아니하면  이에 대한 궁극의 답을 아무도, 어느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쁨, 소망, 생명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이 있을 때만이
    건강도, 출세도, 미모도, 재물도, 장수도, 종말의 연한도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1. 한글 성경에는 본문이 “재물을 쌓으나” 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에는 그냥 ‘쌓으나’, ‘모으나’ 의 뜻만 있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는 번역자에 의해 가미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인해서 이해를 다소 도울지는 모르나 사람이 헛된 일에 쌓고 모으는 것은 비단 재물만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성경의 뜻을 축소, 왜곡할 우려가 있다.
    2.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존재됨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누리는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영화(榮華) 등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말하자면 손가락에 끼고 있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하며 “나 이런 사람이야” 하게 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나 사장이야”, “나 장관이야”, “나 고위 관료야”, “나 돈 많은 사람이야”, “나 건강한 사람이야”, “나 예쁜 사람이야” 등등. 그러나 나=다이아 반지, 나=장관, 나=고위관료, 나=부자 라는 실체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피조물인 인간은 어느 것 하나도 본질적인 그의 것은 없는 법이다. 모두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시고, 빌려 주시고, 잠시 펴 놓으신 것이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인생을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음 직전에 가면 그가 그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 그의 전부라고 여겼던 것들이 이미 떠나갔거나 떠나가는 중에 있음을 안다. 이것을 보면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다. 나의 실체로 여겼던 것이 강할 수록 그것이 떠나갈 때는 고통도 심하다. 직장의 지위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갑자기 퇴직이라도 하게 되면 그에게 공황이 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선조들이 인생무상(人生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지적했다. 이들의 후손들은 이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조상들이 걸은 같은 길을 간다. 세상에는 깨달음은 혹 있어도 궁극의 답이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것을 넘어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영화(榮華) 등이 곧 그의 실체인 것은 아니다. 목욕탕 들어가기 전에 잠시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다.

    3. 어린 나이에는 사장보고 놀라고, 상관보고 놀라고, 직위 때문에 놀라고, 승진 때문에 놀라고, 부자보고 놀라고, 돈보고 놀라고, 공부 때문에 놀라고, 취직 때문에 놀라고, 힘과 권력보고 놀라고, 재능보고 놀라고 하는 일이 많다. 그러다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때 괜히 놀랐구나 하는 일들이 많다.
    4. 시 39:7









    골로새서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림자는 나그네 인생(역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욥기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욥기 14:2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기 17:7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시편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편 102: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시편 109:23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

    시편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전도서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도서 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아가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가 4:6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골로새서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림자를 판 사나이
    또는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작품이다.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사람의 이야기로서 부자가 되긴 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탓으로 불행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이상한 장화를 입수하여 그것으로 지구를 뛰어다니면서 자연 과학 연구에 몰두하며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우연한 인연으로 어떤 부유한 상인의 사교장에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회색빛 옷을 걸친 사나이가 그의 주의를 끌게 된다.
    사나이는 좌중의 누군가가 소원을 말하면, 즉시 포켓 속에서 그 물건을 끄집어낸다.
    망원경과 터키 융단, 마구가 달린 삼두마 등등.
    그날 슐레밀은 그의 그림자와 무한히 금화가 쏟아지는 행운의 부대와 바꾸자는 회색 사나이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온갖 희비와 파란을 겪은 끝에 어느덧 계약했던 1년이 지나고 회색의 사나이가 나타나 그림자와 행운의 부대와의 교환 조건으로 주인공 사후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는 단호히 그 유혹을 물리치고 부대를 들어 물 속으로 내던지지만 이미 바꾼 그의 그림자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구제를 받는다.
    그는 어느 고물상에서 우연히 헌 구두를 손에 넣게 된다.
    과거의 죄과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소외당했던 그는 그것을 신고 전세계를 다니면서 자연 연구에 심취한다.

    인간은 생활에 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된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적은 것일수록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과 슬픔은 큰 것이다.
    이 소설은 그와 같은 교훈 형식을 취한 작품이다.




    그림자와 같은 인생 (전6장)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6:12)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그림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에서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자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39:6)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144:4)



    나그네 예화

    1.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라

    히브리서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어느 비바람치던 날 밤, 필라델피아에 있는 여관에서 한 노부부는 머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여관이나 호텔은 다 사람들이 꽉 차 있군요. 우리가 들어갈 방이 있습니까?"
    노인이 물었습니다.
    안내인은 마침 이 도시에 세 개의 큰 총회가 모이는 관계로 빈방이라곤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알려 주며, "객실은 모두다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밤 한 시에 이렇게 비 쏟아지는 거리로 당신들같이 나이 든 부부를 쫓아내고 싶지는 않군요.
    누추한 제 방에서라도 쉬었다 가시면 어떨까요?
    제 걱정은 안하셔도 좋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신사는 방 값을 지불하면서 그 안내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 주인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호텔 하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안내인은 웃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뉴욕행 왕복 기차료와 비바람 치던 날 만났던 그 때 그 손님을 찾아와 달라는 초청장이 동봉된 편지를 받아들었던 때도 그는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거대한 도시 뉴욕에서 그 젊은 안내인을 데리고 5번가 34거리로 가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새로운 빌딩을 가리켰습니다.
    "저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운영해 보라고 지어 주는 호텔일세."
    벼락에 맞은 듯이 그 젊은 안내인은 땅에 꼿꼿이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바로 윌리암 왈도르후아스톨이었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2. 노인과 샘물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 아래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 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 나중에는 동전을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더 많은 물을 나오게 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샘터를 최신 시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샘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주변의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야자수 그늘도 없어져 버렸고 샘물은 말라 버렸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3. 인생의 본질

    인생의 본질을 안다면 애착을 버리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떤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인 몇 명이 폴란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이들은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랍비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 마을에서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 거룩한 사람을 보려고 그의 집을 찾아간 그들은 집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살림살이가 거의 없이 집안이 썰렁했던 것이다.
    랍비가 앉아서 성경을 공부하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간단한 침대가 눈에 띄는 가구의 전부였다.
    손님들은 물었다. "랍비님, 당신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랍비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이들을 올려다 보면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는 여러분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가구요? 왜 우리가 가구를 들고 다닙니까? 우리는 잠시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랍비가 말했다.
    "나도 똑같습니다." 애착에서 벗어나고 소유에 대해 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나그네 인생길에 들고 다녀야 하는 '가구'가 얼마만큼이 적절한지 깨닫게 된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지고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그 자유와 아울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인생을 누리게 된다.

    선한 목자이신 주여, 나그네 된 인생길을 사는 동안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오늘 나를 이 세상으로 부르신 그 뜻을 알기 원합니다. 고난과 손해가 있더라도 천국에서 내게 주실 의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4. 주님의 심정으로

    며칠 전에 우리 병원에 러시아 여성 2명과 어떤 남자 한 분이 진료를 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앳된 얼굴에 금발머리,푸른 눈 등 한눈에 이방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고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간호사들이 알려주었습니다.
    남자분은 친구 정도로 생각했는데 일반 진료를 보는 선생님이 러시아 아가씨들이 아프다면 늘 같이 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으니 한 사람은 넘어져서 다리에 타박상을, 다른 한 사람은 손을 다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국에서 겪는 아픔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혹시 일을 잘못 한다고 맞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분들이 왜 다쳤는지는 몰랐지만 마음에도 상처가 있는지 표정이 무척 어두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진료를 다 마치고 기도회 때에 병원 가족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참 잘 해드려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풍습에는 얼마나 나그네를 선대했습니까?

    지난 설날 처가에 가는 길에 우리 가족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동남아 노동자 네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메뉴의 가격표를 보다가 주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격이 너무 비싸고 아마 이런 음식을 먹지 못하는 고국의 부모님과 동생들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긴 시간이 흘렀고 급기야 포기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우리 아이들이랑 의논하여 닭튀김과 음료수 등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사와서 드리니 너무도 고마워하며 맛있게 잘 드셨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힘들게 생활하는 저분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위로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아프시면 우리 병원으로 오라고 일러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닭튀김을 먹을 때면 꼭 이 만남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주말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무료 진료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 파키스탄인은 물론 중국의 우리 동포와 탈북민들…. 조금 멀리 보면 외국인 노동자를 섬겨 그분들이 예수님을 알게 하여 귀국시킨다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의 디아스포라 선교 사역이 될까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방인들을 삶의 현장에서 친절하게 대해주고 인격적으로 선대하시고 도와주고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5. 외국인과 나그네 인생

    어떤 공원에 한 나그네가 벤치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습니다.
    공원 청소부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자 서둘러 청소를 하는 중 벤치에 앉은 나그네를 보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그네가 대답하길 “글쎄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도 잘 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입니까?
    ”글쎄요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도리어 이 나그네는 반문을 하듯 했습니다.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이 나그네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방향이 다르기는 했지만 공원 청소부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이 질문내용은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성경에서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73:20절에서는 인생은 꿈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시편 90:5절에서는 잠깐 자는 잠으로 표현했고.
    욥기 7:6절에서는 베틀에 북보다 더 빠른 인생이라고 표현했고.
    이보다 더 많이 나와 있는 표현은 그림자와 같은 인생(대상 29:15, 전 6:1·2)
    꽃과 같은 인생(욥 14:2, 시 103:15, 사 40:6).
    풀과 같은 인생(시 37:2, 사 40:6-8, 약 1:10, 11).
    손바닥만한 인생(시 39:5)
    지렁이 같은 인생(사 41:14)
    안개와 같은 인생(약 4:14) 등이 있습니다.

    6. 주님대접

    비가 퍼붓는 어느 날 한 중년 부인이 비를 피하여 조그만 집 처마 밑에 들어섰다.
    늦은 저녁이었는데 주인은 그 낯선 사람을 안으로 맞아 난롯가에서 옷을 말리게 하며 따뜻한 보리차를 대접하고 저녁 식사로 준비한 감자 몇 알까지도 나눠주었다.
    잠시 후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 부인은 바로 수행원을 일찍 돌려보내고 혼자 거닐던 평상복 차림의 여왕이었다.
    성경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에 대해 말한다.
    평상시에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것이 곧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주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다

    7. 짧은 인생여정

    P.B. 셸리가 쓴 ‘오지만 디아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고대 대륙에서의 한 여행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을 여행하던 중 하나의 커다란 석상을 발견했습니다.
    발견 당시 그 석상은 돌로 된 커다란 다리가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고, 머리는 몸체와 분리되어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을 뿐 아니라 아주 보기 흉하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석상의 주춧대 표면에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왕 중의 왕인 나는 오지만 디아스다.
    나의 과업과 이 강대함을 보라.
    온 인류가 나를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석상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람세스 2세를 가리키는 이 위대했던 왕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자신의 위대함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누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한 분이라도 그를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은 죽으면 물론 얼마간이야 가겠습니만 영원히 기억될 수는 없습니다.

    8. 나그네의 삶을 지혜롭게

    터키 사람들은 고난과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인사할 때 “빨리 지나가기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아서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 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라고 했고 야곱도 “나그네”(창 47:9)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풀과 같아서 조만간 시들어 죽고 마는 것이니 그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말고 영생하는 영혼의 뜻을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태리의 밀라노 대성당에는 세 가지 아치로 된 문이 있는데
    첫째 문은 장미꽃이 새겨져 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하는 글귀가 있고,
    둘째 문은 십자가가 새겨졌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쓰여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인생살이는 고통도 잠깐이고 즐거움도 잠깐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을 육신의 정욕대로 아무렇게 살지 말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고 선악 간에 심판 받을 날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조심스럽게 두려움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70세를 살든 100살을 살든 인생은 전광석화와 같이 빨리 지나갑니다.
    나그네와 같은 이 짧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할 날이 오게 됩니다.

    9. 하룻밤 묵고 갑시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뉘엿뉘엿 해가 지기에 한 동네에 들렀다. 마침 궁궐 같은 큰 집이 있어 주인을 불렀다.
    "저는 길가는 나그네올시다. 하룻밤만 묵고 갔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곳은 여관이 아니요. 저 건너편에 있는 여관으로 가보시오." 라며 거절을 했다. 이때 나그네는 "그러면 주인장 하나 물어봅시다.
    이 큰집에 몇 대나 살아오셨소?"
    "예, 나까지 16대를 살아왔죠."
    "그러면 그 16대가 다 지금 생존해 계신가요?"
    "아니죠, 다 세상을 떠났죠."
    "그렇다면 이집도 여관집과 뭐가 다릅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고 16대를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도 하룻밤 묵고 간들 뭐가 이상하오?"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이 제치 있는 나그네를 하룻밤을 묵게 하고 잘 대접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너무나 정확한 대화입니다.
    오늘 한번 지난날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아 한해의 마무리를 잘 합시다.



    욥기 5장 요약 / 엘리바스의 계속된 충고

    엘리바스의 계속된 충고 '욥에게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하다.
    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지 않으면 자네를 구해 주실것이다.

    욥기 6장 요약 / 욥의 첫번째 대답

    욥의 대답.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좋겠네. 친구들은 나를 비방하지 말라.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욥기 7장 요약 / 욥의 계속적인 대답

    욥이 대답을 계속합니다.
    '나는 살아갈 소망이 없다. 나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다.'

    6월 6일(금) 욥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능자의 살(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The arrows of the Almighty are in me, my spirit drinks in their poison; God's terrors are marshaled against me.

    전능자의 살( 힛체 솨다이)  חִצֵּי שַׁדַּי

    전능자(7706) 솨다이(Shadday)  שַׁדַּי  스트롱번호 7706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 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 살(2671) 헤츠(chêts)  חֵץ 스트롱번호 2671
    1. 화살.  2. 하나님의 화살. 3. 번개
    발음 [ chêts ]
    어원  /  268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5회 사용
    관련 성경 /  활(창 49:23, 시 64:7, 겔 39:3), 화살(민 24:8, 신 32:42, 렘 50:9), (창) 자루(삼상 17:7), 살(신 32:23, 왕하 13:15, 잠 7:23),
    상처(욥 34:6).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 여기서는 하나님의 징계, 보다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재앙을 가리킨다(1:13-19; 2:7,8).
    이처럼 하나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로, 그의 진노(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신 32:23, 42; 시 7:13; 21:12; 45:5; 애 3:13, 14 등).


    신명기 32:23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

    신명기 32:42
    나의 화살로 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살자와 포로된 자의 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시편 7:13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시편 21:12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시편 45:5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예레미야 애가 3:13-14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전능자의 살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징계를 말합니다.
    욥에게는 갑자기 닥쳐온 재물의 파괴와 자녀들의 죽음 그리고 그의 몸에 나타난 악창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다고 합니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다는 말씀은 그 독이 나의 영혼을 삼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인들이 사냥을 할 때 화살 촉에 곧을 묻혀 사냥감을 향하여 화살을 당기면 화살을 맞은 사냥감은 온몸에 독이 퍼져서 점점 육체가 굳어갑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마치 온 몸과 영혼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짓누른다는 시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죽음과 연관된 표현으로 극대화합니다.

    보고 싶어 죽겠다!
    배가 고파 죽겠다!
    배 불러 죽겠다!
    용용 죽겠지

    죽어도 못 보내 -
    너 죽고 나 죽자 - 사셍결단의 싸움
    죽은 나무에 꽃이 핀다 - 보잘 것 없던 집안에서 영화로운 일이 있을 때 하는 말.





    여기에서 보듯 일단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왜'(why) 그것을 주셨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고로 그의 갈등은 지속된다.(7:20; 16:12, 13 등).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 이 말은 `그 독이 내 영혼을 삼켰다'(KJV, the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그 독'이라 함은 앞절에 나온 `화살의 독'(NIV, RSV, their poison)을 가리킨다(pope, Dahood).
    고대인들은 사냥을 할 때 화살의 끝에 독을 묻혀 쏘곤 했는데, 욥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독화살을 맞은 짐승이 그 독성이 온몸에 퍼짐으로 인해 차츰 죽어가듯, 하나님의 진노(화살)를 받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절 상 반절에서는 `화살'이 `몸'에 박혔다고 했으나 하반절에서는 그 `화살의 독'이 `그의 영'을 삼킨다고 표현함으로써 `신체'에서 `영혼'으로까지 이행(移行)되어 가는 그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전능자의 살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게 된 죽음의 재앙을 말합니다.
    욥은 그가 겪는 온갖 시련 중에서 지금까지는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많던 재물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렸습니다.
    열 명의 아들과 딸들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서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끝자락은 반드시 죽음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이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날아온 징계의 화살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난 6월 3일 자유대한민국에서 실시된 21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도저히 지도자로 세워질 수 없는 사람이 당당하게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을 선택했습니까?
    물론 부정선거의 흔적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일 천만의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인간이 추잡하게 저지르는 부정을 능가하는 결과를 돌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세계에서 자랑할만한 교회들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이며 더구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한 나라의 국민들의 의식 세계와 기독교인들의 신앙 상태는 결코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결과를 나타낸 것입니다.

    역사는 분명하게 외칩니다.
    악한 백성들에게는 악한 지도자가 세워 질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동안 일 천만의 기독교인들이 진실한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랐다면 이런 결과를 추잡스런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좌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역사 의식을 갖고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진리의 마음으로 성경적 자세로 뚜러지게 응시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을까?

    욥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동방 우스 땅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 잠시 잠간 사탄의 손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의 현실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서 노래개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회복하려면 이제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베네수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서 지배되면서 2700만의 인구 가운데서 대략 280만명이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부자들입니다.
    남아 있는 백성들은 극도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여러 나라들 중에서 19개 국가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 입국을 거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나라들 중에 베네스엘라도 포함되었습니다.

    최하위의 빈국으로 급하게 타락한 베네수엘라처럼 자유대한민국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의 화살을 몸의 아픔으로 인식하고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동방 우스 땅의 욥처럼 전능자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혔구나!
    이것을 뽑아내기 위하여 귀로만 듣던 신앙의 내용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실체로 만들어내기 위하여 다 함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주님의 도움을 간구합시다.

    오, 주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6장 4절부터 욥의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앞서 어떤 고난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욥… 그러나 이제 지속되는 고난 앞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탄식의 말을 내뱉기 시작합니다. “(욥 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은 이제 자신이 당한 이 모든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향해 화살을 쏘셨습니다.
    화살이 욥의 몸 깊숙히 박혔고, 화살촉 끝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욥이 지금 하나님을 마치 자신을 향해 독화살을 쏜 궁수로 표현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활시위를 당기시고 자기를 겨냥해서 쏘신 거에요.
    욥은 자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인간적으로 욥을 보면 참 그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 경건한 의인 욥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탄식과 원망을 쏟을까 하는 이해도 됩니다만, 신앙적으로 욥을 보면 초기 그가 고백했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남습니다.
    4절 후반부를 봅시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전투태세를 펼치시고 계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 것만큼 세상에 든든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이 되시는 것만큼 세상에서 두려운 것도 또 없습니다.
    욥의 심리가 느껴지시죠?
    욥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시는지 알 수 없으나, 연거푸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거에요.
    욥은 엘리바스에게 자신이 왜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5절 봅시다. “(욥 6: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여기 보면, 먹을 풀이 있는데 들나귀가 울 이유가 무엇이 있겠어요?
    먹을 꼴이 있는데 소가 무엇 때문에 울겠습니까?
    욥은 들나귀나 소가 먹을 것이 없어 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비참한 환난에 빠진 자신이 울부고 탄식하는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고 엘리바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엘리바스 자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탄식하고 아파하는지 이해가 안 되나?
    내 형편 좀 보게. 내가 당하는 고통 좀 보게. 풀이 있으면 나귀가 왜 울고, 꼴이 있으면 소가 왜 울겠는가?
    나 역시 고통이 없다면 왜 이렇게 탄식하겠는가?”
    욥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은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맹렬히 자신을 정죄하는 엘리바스를 간접적으로 질책하고,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 하였습니다.


    초록 열기/

    이 연구는 욥의 죽음 언급들에 나타나 있는 실제적인 욥의 의도를 추적한 것이다.
    욥이 고통의 종결을 위해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원한 것인지, 궁극적 죽음 자체를 소망한 것이었는지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욥의 죽음 언급은 비인격적으로 물질화된 자신의 현실에 관한 고통의 탄식 속에서 발견되었다.
    욥의 죽음 갈망은 3장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나타난다.
    3장에서는 그에게 죽음 이외의 다른 갈망은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런 급진성은 약화 된다.
    반면 죽음의 위협이 진술되고 다양한 은유를 통하여 강화된다.
    죽음의 위협은 “전능자의 화살”(욥 6:4)로 가장 특징적인 은유의 형태로 진술된다.
    욥은 “전능자의 화살”로 가시화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며 도래하는 죽음, 고통의 궁극이 될 죽음, 임박한 죽음 앞에 있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
    인격적인 파멸 상태의 회복 불가능성, 죽은 자에 가까운 육체의 증상들은 도래하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욥에게 가져온다.
    이러한 극단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 욥은 죽음을 요청한다(욥 6:9).
    살아있는 고통과 도래하는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인 자신의 정체성을, 반복적인 죽음 언급을 통해 알린다.
    그러나 욥은 죽음을 소망하지 않았다.
    붕괴한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 죽음보다 못한 고통의 제거와 안식, 물질화된 실존의 회복을 소망한 것이다.




    욥의 대답(1)(욥기 6:1-7)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는 욥에 대해 매우 날카로왔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다 이야기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 편견없는 판단을 하려는 자는 참을성 있게 그것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끝내었을 때 욥은 답변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매우 실감나게 말하고 있다.

    Ⅰ. 그는 일반적으로 그의 재앙이 그가 표현하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심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2, 3절)

    그는 그것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그들이 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공평한 손으로 그의 슬픔과 재앙을 달아 봄으로써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제 삼자에게 그것을 기꺼이 호소하려 하였다.
    그는 그들이 그의 슬픔과 그것에 대한 모든 표현을 한 저울에 달고 그의 재앙과 그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다른 편 저울에 달아 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비록 그가 슬픔 속에 있는 그 자신을 모두 합리화 시키려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23장 2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재앙이 탄식보다 중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이 하여간에 그의 재앙은 "바다 모래보다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복잡하고도 심한 것이었으며, 슬픔 하나 하나가 모두 무거웠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합하면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고 그는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내 표현이 지리멸렬하고 비통함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내 연설이 유창한 웅변가의 것처럼 훌륭하고 정중하지 못하거나, 슬픔에 잠긴 철학자의 것처럼 묵중하고 질서정연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아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 중의 누구처럼 꾸밀 수가 없다. 내 말은 현재의 나처럼 아주 경솔하다."

    1. 욥은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이 그의 경우를 완전히 파악하고 그 최악의 사태를 알기도 전에 그에게 영적인 약을 처방해 주려고 하는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원망하고 있다.
    편안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환난을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올바로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 짐이 무거운 것을 느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짐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는 자들은 거의 없다.

    2. 욥은 그가 그의 날을 저주했을 때 사용한 과격한 표현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비록 그 자신이 한 모든 말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이처럼 과격하게 그것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 경우는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자기는 지금 일반적인 슬픔이라고 간주될 수 없는 그러한 슬픔에 처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묵인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3.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자비롭고 사랑에 찬 동정을 보여 주기를 부탁하고 있으며, 그의 재앙이 극심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그를 좀 더 온유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동정은 어느 정도 위로가 된다.

    Ⅱ. 욥은 그의 재앙의 가장 아픈 부분으로서 그가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원망하고 있다(4절)

    이 점에서 욥은 고통 가운데에서 그의 영혼의 고통을 원망하던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나이다"(요 12:27).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게 되었도다"(마 26:38).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여기에서 불쌍한 욥이 슬프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욥은 그가 느끼고 있는 것, 곧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힌"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가 이러한 혼돈과 궁핍, 치욕, 그리고 육신의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도려내어 그를 깊은 번민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은 그가 사랑하고 섬기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가져다 주시고 그가 불쾌히 여기는 이 흔적들을 그에게 남겨 놓으셨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의 고통이 가장 아픈 고통이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으리요!" 우리는 몸이나 재산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난의 고통을 기꺼이 내리시든지 간에 그가 계속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시고 우리 양심을 화평케 하시는 한 우리는 그것에 복종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한 가지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프고도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이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그의 화살은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의 칼이 그 영혼에 미치도록 하실 수 있으시다. 이 화살의 독과 열은 그의 영혼을 마셔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이성을 혼란시키며 그의 결심을 흔들고 그의 기력을 쇠하게 하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정이 격한 표현들이 비록 정당화될 수는 없다할지라도 그것들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는 전투 대형을 취한 군대들에 대해 포위된 것처럼 그 자신이 "하나님의 두려움"에 의해 책망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를 두렵게 함으로써 그와 대적하여 싸우셨다. 욥이 그 자신의 내면으로 움츠러 들었을 때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했던 것과 같이 그가 하늘을 향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역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로로써 격려받던 자들은 그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해 놀라기도 한다.

    Ⅲ. 그는 그의 친구들이 그의 원망을 가혹하게 책망하고, 그의 경우를 미숙하게 다룬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1. 그들의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그가 이 환난에 빠진 것을 원망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형통할 때는 결코 불만에 가득 찬 불안정한 영혼을 지닌 자들처럼 불평한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풀이 있으면 울지 않았으며, 꼴이 있으면 울지 않았다."(5절). 그러나 이게 그가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서도 그의 슬픔을 전혀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는 들나귀나 소만도 못한 무감정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했다. 그리고 너무 가난해서 음식의 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에 간을 낼 만한 약간의 소금도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요리였던 것이다(6절). 그가 한 때는 만지기조차 싫어 했으며 "못된 식물"같이 여겼던 것들까지도 이제는 그가 즐겨 먹는 식물이 되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 자식들이 까다롭지 않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가 그들이 가난하게 될는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업신여기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그 위로는 시들고 무미건조한 것이었다고 보는 견해들도 있다(6, 7절). 그는 그에게 적합한 위로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마음을 소생시키고 기력을 회복시킬 강장제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그들이 준 것은 달걀 흰자위처럼 그 자체가 무미한 것이었고, 가장 못된 식물같이 맛없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엘리바스가 매우 훌륭하게 말한 것과 같이(5:8 ~) 욥도 그처럼 말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흥분되어 있는 자들은 이처럼 그들을 위로하는 자들을 모욕하기 쉽다.


    성경 구절
    fromTreasury of Scripure Knowledge

    화살: 욥 16:12-14, 신명기 32:23, 신명기 32:42, 시편 7:13, 시편 18:14, 시편 21:12, 시편 38:12, 시편 38:12, 시편 45:5, 인사 Lamentations 3:123:12, 애도 3:13

    술: 신명기 32:24, 시편 143:7, 잠언 18:14, 마크 14:33, 마가복음 14:34, 마가복음 15:34

    공포: 욥 9:17, 욥기 30:15, 욥 31:23, 시편 88:15, 시편 88:16, 고린도후서 5:11

    상호: 룻 1:20 - 십일 6:26 - 하나 그 일 7:20 - 왜 욥을 차지 16:13 - 궁수 작업 18:11 - 테러 욥 19:21 - 손 욥기 20:25 - 공포 작업 22:10 - 갑작스런 일 32:13 - 하나님 일 34:6 - 상처 시편 55:5 - 두려움 시편 64:7 - 하나님 시편 77:3 - 나는 시편 88:7 - 당신의 진노 시편 91:5 - 또는 Psalms 102:4시편 102:4 - 심장 시편 109:22 Lamentations 2:4-

    성경에 대한 Gill's Notes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고난의 무게와 무거움을 증명하는 이유이며, 또한 그의 뜨겁고 열정적 인 표현의 그가 터뜨 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화살이라고 불리는 기근, 역병, 천둥 및 번개와 같이 너무 많은 외경을 설계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2:23; 욥에 참석 한 모든 것, 그의 경우였습니다.
    극심한 빈곤으로 축소되고, 그의 화살은 그의 Psalms 38:1Job 7:20큰 고통으로, 그의 큰 열성 궤양, 그리고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등한 화살과 함께 그의 큰 충격과 함께,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등성Psalms 120:4, 그의 큰 열성으로 인해, 그의 큰 열성,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띤의 화살과 함께 그의 열렬한 화살과 함께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띤 암과 함께 그의 열렬히 오는 것, 그의 큰 열성적인 화살과 함께 그의 열렬히 일어나는 것;

    독은 내 영혼을 마신다;
    어떤 사람들의 관습을 암시하면서, 그들은 독에 화살을 담그거나 그것으로 그들을 얹곤했다.
    그래서 페르시아 인, Jarchi가 관찰 한 바와 같이, 그리고 Heliodorus c 에티오피아 인은, 그들은 용의 독에 그들의 화살을 담궜다.
    그리고 그 그들을 선동하고, 그 열과 같은 열과 그 작은 고통을 제기하지 않았다Job 6:3Psalms 88:3, 그는 단지 그의 열과 같은 열과 그 작은 고통을했다, 그 (것)들은

    하나님의 공포는 나를 향해 배열에 자신을 설정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그의 분노와 질투를 자극, 출애굽기 15:3 ; 그리고이 빛에서 그는 욥에 의해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를 체포, 그를 체포, 그를 체포, 그를 체포, 그에 대해 앞으로 나오는 것, 끔찍한; 그리고 그의 공포는 또한 전투 배열에 설정 군인의 군대 같았다, 계급과 파일, 때로는 그를 출력 할 준비가, 또는 그의 포격을 제공 Job 7:14할 수 있습니다.

    Barnes' Notes on the Bible에 대한 리뷰 보기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 즉, 내가 견뎌내는 가벼운 고난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이 일으킬 수없는 방식으로 상처를 입었고, 전능자로부터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통의 심각성을 견뎌야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야기 할 수없는 것을 고통스럽게 부르십시오.
    그는 불평하는 것이 옳고 그가 고용 한 말은 슬픔의 정도를 부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독은 내 영혼을 마시는 곳
    -
    나의 엄격함, 나의 편안함, 나의 삶을 빼앗는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고난이 독이 든 화살로 상처를 입은 것과 비교합니다.
    그러한 화살들은 고대인들 사이에서 드물게 사용되지 않았다.
    물체는 화살 자체에 의한 상처가 그것을 생성하지 않는 곳에서도 특정 죽음을 확보하는 것이 었습니다.
    독이 너무 집중되어 화살의 지점에 의해 전달되는 가장 작은 양이 사망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 관행은 야만적 인 전쟁의 야만적 인 전쟁에 많은 기여를했습니다. 따라서 Virgil은 독이 든 화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Ungere tela manu, ferrumque armare veneno.

    Aeneid ix. 773

    그리고 다시, Aen x. 140:

    Vulnera dirigere, et calamos armare veneno.

    그래서 Ovid, Lib. 1. de Ponto, Eleg. ii. 스코틀랜드인의 :

    Qui mortis saevo geminent ut vulnere causas, 퀴모티,

    Omnia vipereo spicula felle linunt.

    Justin, Lib. ii. c를 비교하십시오. 10. 섹션 2; Grotius, de Jure Belli et Pacis; 그리고 Virgil, En. xii. 857. 오디세이에서, 나는 260ff 우리는 그가 Thesaly의 도시 인 Ephyra에 갔다는 Ulysses를 읽었습니다. Mermer의 아들 인 Ilus는 치명적인 독으로 화살의 철점 위에 그것을 묻을 수 있습니다. 그레시안 수용소에서 그토록 큰 파괴를 일으킨 역병은 호머(일리아드 i. 48)가 아폴로의 활에서 화살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마신다”는 문구는 매우 표현적이다. 우리는 지금 피를 갈망하는 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이 언어는 더 표현적이고 눈에 띕니다. 이 수치는 동양의 시와 고대인의 시에서 드문 일이 아닙니다. Zohair의시, Moallakat의 세 번째 또는 황금 글씨로 필사되고 메카의 사원에 매달린 시에서도 동일한 이미지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윌리엄 존스 경 (Sir William Jones)이 렌더링합니다.

    그들의 창백함은 Naufel의 피를 마시는 데 아무런 몫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표현은 Trachinn의 Sophocles, 1061 절에서 Shultens가 인용 한대로 Hercules가 겪은 역병에 대해 설명 할 때 발생합니다.

    ἐκ δὲ χλωρὸν αἵμα μου Πέπωκεν ἤδη -

    ek de chlōron haima mu Pepōken ēdē -

    이것은 Tusculan의 Cicero에 의해 모방되었습니다. 반대. ii. 8:

    Haec me irretivit veste furiali inscium, 내게 irretivit 조끼 furiali inscium,

    Quae lateri inharens morsu lacerat visera,

    Urgensque graviter, pulmonum haurit spiritus,

    Jam decolorem sanguiname omnem exsorbuit.

    그래서 Lucan, Pharsa. ix. 741ff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합니다.

    Ecce subit 바이러스 taciturn, caritque medullas

    Ignis edax calidaque aiacentit viscera 탭.

    Ebibit humorem circa 바이티아 fusum

    Pestis, et in sicco linguan tore laato Coepit.

    그러나 고대 고전의 표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더 섬세하고, 파토스로 가득 찬 -은 기독교 시인 Cowper가 죄인의 측면을 관통하는 화살을주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변환의 계정입니다 :

    나는 무리를 떠난 stricken 사슴이었다

    오래 전부터. With many an artery 깊은 infix'd

    내가 철회했을 때 내 헐떡 거리는면이 청구되었습니다.

    먼 그늘에서 평온한 죽음을 찾는 것.

    그곳에서 나는 자신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

    궁수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의 옆구리에 그는 짊어졌고,

    그리고 그의 손과 발에, 잔인한 흉터.


    그런 상처에 대해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화살은 혼자서 그것을 할 수있는 힘을 가진 그의 부드러운 손에 의해 추출되었습니다. 욥이 그를 알았더라면 그를 통해 자비의 계획과 상처 입은 죄인이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위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그가 그의 시련에서 말한 쓰라린 불평들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복음의 완전한 빛 아래에서 불평하는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엄중함으로 그를 판단하지 말자.

    하나님의 공포는 나를 향해 배열에 자신을 설정합니다 - 하나님이 테러를 흥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 " 배열로 설정"(ערך ârak)으로 렌더링되는 단어는 전투를위한 선의 그림을 적절하게 나타냅니다. 그리고 감각은 여기에 있습니다.이 모든 테러는 마치 그를 파괴하려는 목적에있는 것처럼 전투 배열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표현도 깨어있는 죄인의 상태를 더 현저하게 묘사 할 수는 없지만 욥이 이러한 의미에서 정확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한 아이디어는, 일반적으로 경보를 생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고용 한 모든 것이 그에 대한 전투의 선에서와 같이 그려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Clarke's Notes on the Bible에 대한 리뷰 보기

    욥기 6:4. 전능자의 화살여기에 독이 든 화살에 의해 가해진 상처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처에 의해 발생하는 불타는 열에 대한, 시스템의 모든 수분을 건조시키고, 모든 침 덕트를 멈추고, 혈액을 두껍게하고 염증을 일으키고, 부패를 유도하고, 격렬한 조증으로 종결하여 환자가 죽음에 의해서만 완화되는 가장 무서운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이것은 훌륭한 인물로 강하게 표현됩니다 : POISON DRINKETH UP my SPIRIT; the TERRORS of GOD SET THEMSELVES in ARRAY against me.재난은 동양 작가들 사이에서 전능자의 화살로 대표되며, 우리는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Toozuki Teemour에서 Mohammed의 사위 인 Aaly에게 기인 한 훌륭한 말을 추가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때 네 번째 칼리프(알aly)의 요구되었다. '하늘의 캐노피가 활이라면; 그리고 땅이 그 끈이라면; 만일 재앙이 화살이라면; 만약 인류가 그 화살들의 표라면;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경건치 않은 아처가 있다면; 아담의 아들들은 누구를 위해 도망할 수 있겠느냐?' 그 목사는 “아모의 아들들은 주님께 도망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 훌륭한 이미지 욥은 욥기 6:8, 욥기 6:9에서 계속 보입니다., 6:9, 그 틀림없는 명사수가 이 화살을 날게 하고let, 그의 손을 풀어서 그를 멸하고 끊길 바랍니다.



    절망하면 안됩니다(욥기 6:1-23)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말씀은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그가 얼마나 고통 중에 있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나의 분한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내가 당하는 고통은 누구도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다 모래보다도 더 무거울 것이다”라는 말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보고 마음 속으로 참 안 됐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동정도 하게 되지만 그 고통의 천분의 일도 알기 어렵습니다.

    엘리바스는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욥에 대해 매우 날카로웠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다 이야기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 편견없는 판단을 하려면 참을성 있게 끝까지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욥이 답변을 했는데 매우 실감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솔직한 말인지 모릅니다.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의 고통이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워서 무게를 달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통 중에 욥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표현하기 어렵고 참기 힘든 이런 고통 속에서 욥은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되는 대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것을 뉘우칩니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이 말은 “나도 모르게끔 이런 말이 흘러 나와 버렸구나. 내 말이 너무 심했었구나”하는 말입니다.

    욥은 처음에 이런 일을 당할 때는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온유함과 인내로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니고 너무 오랫동안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니 마귀의 시험에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가 당하는 고난이 실제보다 더욱 커 보이게 되었습니다.

    욥의 외적인 고난도 컸지만 내적인 고난 역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서 당하는 무자비한 고난으로 여겨졌습니다. 4절을 보세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고 이 구속 사업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나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육신의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심합니다. 사실 육신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아픈 고통입니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단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우리의 육신밖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으셨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인간이나 천사의 그 어떤 힘도 전능자의 화살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 이외에는 그 어떤 방패도 이 화살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 이외에 그 어떤 손도 그 화살을 뽑아 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이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진통제도 우리의 불타는 듯한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 한 분 이외에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2. 나 슬픈 일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3. 저 마귀 유혹합니다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합소서 오 주여

       (후렴)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움 중에 있습니까? 사람의 백 마디 위로의 말을 기대하기보다는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했습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전능자의 화살들은 재산이나 자녀들의 손실보다도, 육체적인 괴로움보다도 훨씬 더 무섭습니다. 이 화살은 욥의 외적인 고통을 훨씬 더 심화시켰습니다.

    욥은 그가 형통할 때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5-6절을 보세요.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이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제 욥이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서도 그의 슬픔을 전혀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는 들나귀나 소보다도 못한 목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전에 신학사조 중에 대조적인 두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피큐리안파인데, 이것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마음껏 즐기는 생활을 하자고 하며 육신적인 만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스토익파였는데, 지나친 육신의 극기를 주장해서 육신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절제와 극기에 주력했습니다. 아파도 아픈 것을 나타내지 말고, 화가 나도 화가 난 것을 나타내지 말고 다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스토익파에 골몰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도를 닦았나 보려고 그 사람의 한 친구가 와서 팔을 비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스토익파 사람이 “여보게, 그 팔 그냥 비틀면 부러질 걸세”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계속 그 팔을 비트니까 아닌게 아니라 그만 그 팔이 “뚝” 소리를 내면서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팔이 부러진 스토익파 사람이 그 팔을 비튼 친구에게 “내가 뭐라던가. 그냥 팔을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어?” 하더랍니다.

    이것은 만든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프면 “아야”하고 소리지르고 아파하는 것이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어요? 사람은 목석이 아닙니다. 목석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욥은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음식에 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에 간을 할 만한 소금도 없었습니다. 욥의 형편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가 한 때는 만지기조차 싫어했던 보잘것없는 식물까지도 이제는 그가 즐겨 먹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소식이 감식”이란 말이 있고 “배고픔이 반찬”이란 말이 있습니다. 음식이 많아서 배가 부르면 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 놓아도 별로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가 고플 때 적은 음식은 맛이 있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이런 찬 저런 찬 가릴 것이 없습니다.

    전에 한국동란 때 피난 다니던 일을 저는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배가 고픈데 쌀이 있어서 밥까지는 지어 놓았으나 반찬거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장, 된장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소금이 조금 있어서 밥에다 소금을 조금씩 섞어 먹는데 어쩌면 그렇게 맛이 있는지요. 맨 밥에 소금 넣어 먹던 생각을 하면 반찬 없다고 투정할 수가 있겠어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까다로우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언제 가난하게 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업신여기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는지 모릅니다.

    이제 8-9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우리의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책망과 저지를 당하면 보통의 경우 그 감정이 더욱 격렬해지게 마련입니다. 강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무서운 세력을 내며 갈라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3장에서 욥은 이처럼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는 생명이 끝나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생각해서 세상에 난 날을 저주하고 사는 날을 원망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을 엄히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욥은 더욱 격렬하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마치 이 세상에서 다시는 좋은 날들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은혜와 믿음의 일을 통해서도 이 지극한 환난의 날이 좋은 날로 변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그는 여전히 죽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처지에 처했다고 해도 거기에 소망이 있을 때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소망이 없을 때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고 절망하여 죽기를 원하며, 믿지 않는 사람인 경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전에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아합 왕과 바알신 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 위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왕후 이세벨의 표독스러운 앙갚음이 무서워 멀리멀리 도망했습니다. 그처럼 왕 앞에서 담대하게 말했던 엘리야, 바알 선지와 대결하여 승리한 용감한 엘리야였음에도 불구하고 겁이 나고 마음이 약해져서 로뎀나무 밑에 누워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약해지기 쉽고 낙심하기 쉽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망을 대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비참하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체념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선다”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이 가로막히게 마련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그런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또 다른 길을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도록 하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다른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말고 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빅톨 유고는 48세 때 불행하게도 게르세이 섬으로 추방이 되어 20년 동안을 고독한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형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빅톨 유고는 오히려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세계적인 명작 ‘레미제라블’(쟝발장)을 저술하였습니다. 빅톨 유고에게 게르세이 섬의 귀양살이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명작을 남겼을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의 감옥 생활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의 뜻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운명을 저주하고 간수들을 욕하며 비난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향하고 오히려 그의 갇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절망적인 환경을 선용하지 못하고 곧 잘 좌절해 버립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침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더구나 상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새로운 고통을 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때 우리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에게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그는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일로 인하여 마음이 감옥에 갇힌 것과도 같이 낙심되고 절망 상태에 빠진 분은 안 계십니까?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가도록 최선을 다 합시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했는데도 실패한 것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를 부둥켜 안고 있을 때, 우리의 실패는 정말 수치스러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새 힘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오히려 사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죽기를 소망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새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죽을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때 죽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빠져 들어가는 우리의 팔을 잡아당기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끝으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곤고한 자는 불쌍히 여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가혹한 책망을 하였습니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14-16절).

    환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했습니다. 환난을 당해 보아야 참된 우정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환난 당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누구이며 가면과 같은 친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색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판단하고 정죄할 줄은 알았지만 사랑과 동정 그리고 자비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 속의 티는 볼 줄 알았지만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어려우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말이 나올 수가 있는데 조심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주님께 구합시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악의 때를 선의 기회로 바꾸십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동정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도 언제 그런 자리에 들어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 요약 / 사단이 욥을 시험하다

    욥과 욥의 가족들에 대한 소개
    욥의 재산에 대해서 소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욥, 이러한 욥을 사탄이 시험.
    욥이 재산을 잃고 자녀들도 잃게 됩니다.

    욥기 2장 요약 / 사단의 두번째 시험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병들게하는 것으로 시험할 수 있게 요청.
    욥의 몸에 종기가 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욥기 3장 요약 /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한탄하였다.

    욥기 4장 요약 / 엘리바스의 첫번째 충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충고.
    죄가 있으니 망하고 죄가 있으니까 죽는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


    6월 5일(목) 욥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3: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What I feared has come upon me; what I dreaded has happened to me.

    인과응보(因果應報) : 인할 인, 실과 과,  응할 응, 갚을 보

    전생(前生)에 지은 선악(善惡)에 따라 현재(現在)의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고, 현세(現世)에서의 선악(善惡)의 결과(結果)에 따라 내세(來世)에서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는 일.

    응보인과(應報因果) :

    인과응보의 사상은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물이 나타난다는 전통적 사고 방식
    그러나 사탄은 결과를 이미 주셨기 때문에 원인이 따른다는 식의 역발상 사고 방식으로 흔들고 있다.






    두려워하는(6342) 파하드(pâchad)  פָּחַד  스트롱번호 6342

    Which I greatly feared 

    פָּחַד 스트롱번호 6342
    1. 떨다.  2. 신 28:66.  3. 사 60:5
    발음 [ pâchad ]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관련 성경 /  두려워하다(신 28:66, 시 14:5, 사 51:13), 경외하다(시 119:161, 잠 28:14, 호 3:5), 놀라다(사 60:5, 렘 36:16).
    [명] 두려움(신 28:67, 시 53:5, 사 12:2).

    무서워하는(3025)  야고르(yâgôr) יָגֹר 스트롱번호 3025

    1. 두려워하다.  2. 무서워하다. 3. 욥 3:25
    발음 [ yâgôr ]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원형 두려워하다,무서워하다, 욥 3:25, 9:28, 시 119:39. 

    • 관련 성경 /  두려워하다(신 9:19, 욥 3:25, 렘 22:25)





    아타(’âthâh) אָתָה 스트롱번호 857
    is come upon me

    1. 오다.   2. 같은 뜻의 아람어는 אֲתָא임. 3. 우연히 일어나다
    발음 [ ’âthâh ]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관련 성경  /  오다(신 33:2, 사 21:12, 렘 3:22, 신 33:21), 돌아오다(사 21:12), 임하다(욥 3:25), 지나다 (욥 16:22), 달려들다(욥 30:14), 나오다(욥 37: 22, 시 68:31), 이르다(잠 1:27), 가지다(사 21: 14), 모으다(렘 12:9).
    [명] (장)래(일)(사 45:11), (뒤에) 올 (일)(사 41:23).

    미쳤구나(935) 보우(bôw’)
    is come

    בּוֹא 스트롱번호935
    1. 들어가다.   2. 창 19:8. 3. 창 6:18
    발음 [ bôw’ ]
    구약 성경  / 2565회 사용




    두려워하는 그것, 무서워하는 그것

    1. 물질적 축복(1:2,3)을 상실하는 것,
    2. 육체적 질병(2:7,8)을 당하는 것,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욥은 자신의 번영(1:2,3)중에서도 그 자손이 행여 범죄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성결케 하는 의식을 일장한 시기에 행하기도 하였다(1:5).
    이에 근거해 볼때 욥은 언제 닥칠지도 모를 하나님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항상 경성(警醒)하는 삶(히 13:17)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늘 두려워하던 것, 곧 하나님의 축복(소유물의 번성, 건강, 하나님과의 교제)을 상실하는 것이 지금 욥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재앙)은 구체적인 욥의 범죄가 없는 가운데 임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회의(갈등)에 빠졌던 것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욥(욥기 3:1-26)

    욥기 3장에서는 욥기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1절)
    사탄의 시험에 의하여 힘들어하고 있다. 욥은 죽기를 바라고 있다. 욥의 환란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욥이 생일을 저주함(1-10)

    • 3:1-3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이 재난과 고통 속에 친구들과 7일 동안 침묵한 후에 입을 연 것은 오랫동안 깊이 기도한 후에 깨달은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이것은 욥이 자기가 당하는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고가 끊어진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고통의 유익을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나의 난 날은 욥이 태어난 날을 가리키고,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은 욥이 임신이 되던 날 밤을 가리킨다. 이 날이 저주를 받았다면 자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며 극심한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심정을 토한 것뿐이다.

    • 3: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욥은 자신이 출생한 날을 저주했다. 그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그날”은 밤이 아니라 낮을 가리키는 말로써 그날이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욥이 그날이 캄캄하기를 바란 것은 너무 자기의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자기가 출생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3: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유암(贍睹)은 깊은 흑암을 가리키고, 사망의 그늘은 사망의 세력을 가리킨다. 이 세력이 욥이 태어난 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즉 사망이 그날을 정복했었다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날에 밝은 빛이 없어지고 모든 활동이 없었다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것으로 이것도 욥이 자기가 나지 않았었다면 좋았겠다는 말이다.

    • 3:6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욥은 자신의 잉태와 출생을 저주했다.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기쁨”은 욥의 출생의 기쁨을 가리키는데 이것도 자기가 나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출생한 날이 그날의 달력에서 삭제되어 자신이 출생되지 않았었다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 3: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은 욥이 잉태되던 날 밤을 가리키고, 적막하였었더라면 욥이 잉태되지 않았었다면의 뜻이다.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욥이 출생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말이다. 보통 남아(男兒)가 출생할 때 온 집안이 즐거워한다.

    • 3: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이 고대 근동 신화에 머리가 7개 달린 바다 괴물 리워야단이 태양을 삼킴으로 일식을 일으키는데, 그 괴물을 이용해서 날을 저주할 수 있다고 하던 요술쟁이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의견은 합당치 않다. 욥이 같이 경건한 성도가 그러한 미신(迷信)을 옳게 여겼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날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의 생일을 저주하여 그날이 없어서 욥 자신이 나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뻔했다는 것이다.

    • 3: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여기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하는 것과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하는 말은 아침이 오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뜻이다. 욥이 아마 아침에 출생한 것 같다. 이것도 욥이 자기가 출생하지 않았다면 좋을 뻔하였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처음에는 태어나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생일을 저주하다가 이번에는 어머니가 자기를 낳을 때에 모태의 문을 닫았더라면 자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며, 환난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출생을 탄식했다.

    욥이 출생을 탄식함(11-12)

    • 3:11-12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욥은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 나오던지 아니면 어머니가 자기를 낳았을 때에 자기가 숨지던지 하였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자기를 유산(流産)하거나 사산(死産)하지 않고 잘 낳아 무릎에 놓고 어머니의 젖을 먹게 하여 살게 된 것을 탄식한 것이다.

    욥이 출생 시에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함(13-19)

    • 3: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어머니가 자기를 낳을 때 자기가 죽었으면 지금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텐데 죽지 않았으므로 지금 고통을 당한다는 뜻이다. 욥은 안식처로서의 죽음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려는 뜻도 있다(19:26). 여기서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 3:14-16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욥은 자신이 사산되거나 유산되었다면 세상 임금들과 의사(議士)들과 금과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牧伯)들의 죽음과, 또 낙태(落胎)된 아이들의 죽음과 같이 무덤 속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백(牧伯)”은 성주(城主)와 군왕(君王)을 가리킨다.

    • 3:17-19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이 출생할 때 죽었었더라면 땅 속에 묻혀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덤은 악한 자도 말썽을 피우지 못하고 세상에서 곤비한 자도 육체의 고통이 없이 평안히 쉴 수 있는 곳이다.

    곤비한 자는 힘이 없어 지쳐 버린 사람을 가리킨다. 또 무덤은 감옥에 가두어둔 죄수나 죄 수들을 감독하는 간수들이나 상전이나 종이나 큰 자나 작은 자나 일반으로 있는 곳이다. 거기는 아무 차별이나 속박(束縛)이 없는 곳이다.

    욥이 곤고를 인하여 죽기를 원함(20-26)

    • 3:20-21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욥은 죽기를 갈망한다. 곤고한 욥이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 죽음을 원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번뇌(煩惱)한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깊은 섭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고통이 막심한 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원한다. 그러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욥은 자기에게는 죽음이 오지 않으므로 한탄하는 것이다. 욥은 고통이 너무 심해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 다 끊어지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단지 죽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세상 줄을 다 끊어 버리고 천국 갈 소망만 갖게 한 것이다. 성도가 세상의 것이 잘되고 세상 사는 재미가 좋고 단맛이 나면 롯의 처와 같이 세상에 대한 애착심(愛着心)이 많아 천국에 갈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이사야 3:1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다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했다. 세상에 애착심을 갖고 살던 것을 다 끊어 버리고 의지할 데가 없어야 하나님께 돌아와 주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만 사모하고 천국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 것이 잘되고 평안한 때보다 큰 풍파가 일어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

    • 3: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하다는 것은 고통으로 희망이 없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살길이 없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아직도 빛을 비추어 주시고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지 욥 자신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고를 주어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 3: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욥이 먹으려고 음식을 갖다 놓고 먹기 전에 탄식부터 나오는 것은 고통으로 식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너무 아파서 신음하는 소리가 물 쏟아지듯 계속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 3:25-26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두려워하는 그것, 무서워하는 그것은 큰 고난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서움이 안 될 수 없다. 무서운 큰 고난을 욥이 갑자기 당하게 되어 탄식하게 되었으며 욥에게 평안과 안온(安穩)과 안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때에 욥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영적으로 유익이 되었다.




    두려워 말라(욥기 3:25~26)

    담장을 쌓고 문을 닫는 것은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두려움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포기하게 하고 담대함을 갉아먹습니다. 두려움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합니다. 뒤로 물러서다가 침륜에 빠집니다. 물에 빠져 가라앉아 완전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 침륜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은 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그는 부자였고 아내와 7남3녀를 둔 다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일컬어 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합니다. 두려움, 무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약점하나가 그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게 했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누구나 두려워한다. 

    석가는 “목숨이 있는 자는 모두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어린아이는 우레에 겁을 먹고 심약한 자는 협박에 떱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입니다. 두려움은 욥의 재산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양이 7천, 약대 3천, 소5백, 암나귀 5백이나 되는데 불태우고 강도들이 와서 종들을 죽이고 빼앗아 갔습니다. 재산도 자식도 모두 잃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 하였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일반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겉보기에는 담대해 보이고 성격이 활발하지만 그것이 곧 담대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도 두려워 한 것이 나타납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창15:12) 

    그가 애굽 땅으로 내려가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원컨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12:13) 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 같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모세도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한 자였습니다(행7: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말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왕 앞에 설 수 없다며 대인 공포증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심히 떨었노라, 사시나무 떨듯했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떠는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지난달에 동산지기들과 에버랜드에 갔었습니다. 재미있는 놀이 기구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무서운 코스는 피하고 누구나 가는 곳으로만 피해 다녔습니다. 흐르는 물을 타고 45도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오는데 아내를 앞에 태우고 저는 뒤에 탔습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한 일은 아닙니다. 내려오는데 물이 얼굴로 튈 것 같아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처박고 내려왔는데 그 장면이 사진으로 찍힌 것입니다. 집사람은 뭐 그리 좋은지 활짝 웃으며 내려오는 것이 찍혔습니다. 그 사진보고 누가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무서워서 숙였죠?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안 믿어 주는 것입니다. 아마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두려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이야기하는 겁니까? 나도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물리쳐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두려움은 시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저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걷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하면 됩니다. 다윗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울 때 간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두려울 때 기도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굴복당합니다. 

    다윗은 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기도 때문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91:1) 다윗은 기도하며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였다”고 했습니다(욥22:10). 침범이란 다른 사람의 권리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가 볼 때 두려움이 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있을 때 두려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루즈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정탐꾼 열두명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들은 강하고 신장이 장대한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10)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목이 달아날 판인데도, 베드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끊임없이 두려움의 공격을 받습니다. 두려움은 위협에 굴복하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역사 하는 영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기도가 필요하고, 들어온 두려움을 추방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세요. 두려움을 물리치세요. 계시록에는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계21:8). 기도하면 두려움의 영이 물러갑니다. 담대한 영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좇아 내 달라고 요구했으나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더니 내 쫓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두려움을 막아낼 수 있고 좇아낼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말씀으로 무장하라.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있구나” 무서워하는 일이 자기를 고난에 빠뜨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무서움에 사로잡히면 무력해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마14:30). 물을 무서워하면 물에 빠지고 병을 무서워하면 병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두려움은 노예로 만드는 영입니다. 양자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담대하게 하는 영입니다(롬8:15).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로 컴퓨터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게 되면 프로그램이 모두 망가져 버립니다. 그동안 수고해서 작업한 파일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바이러스 한방이면 모두 무너집니다. 두려움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두려움의 공격을 방어할 진지를 구축하고 빈틈없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전신무장을 하면 두려움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권 13개국 군대와 전쟁을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 다얀 장군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지금 우리 군대는 막강한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있다. 우리는 이 무기로 아랍군대를 몇 시간 내에 물리치겠다” 이 성명이 발표되자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한 것이 아닌가하고 긴장했습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 후 다얀 장군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스라엘의 무기는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이스라엘은 전군,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무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가진 단창도 갑옷도 없었지만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으로 무장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여호수아의 승리도 말씀의 무장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성경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잘 지키면 하는 일이 잘 되고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6)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위하는척하면서 해치는 우리의 적입니다. 두려움의 정체를 파악하고 방어하고 공격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우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포기하게 합니다. 두려움에 공격을 받으면 패자가 되고 맙니다. 욥과 같은 의인도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비참하게 쓰러졌습니다. 두려움과 맞서 싸울 무장이 필요합니다. ‘아니오’ 이 말을 왜 못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왜 맞서서 싸우지 못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왜 타협을 하려고 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담대해진다면 ‘아니요’라고 할 것입니다. 맛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립니다. 뒤로 물러서면 침륜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리라”(요일4:1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5)



    "두려움"에 관한 성경 구절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 즉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두려움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거룩함을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2. 인간적 두려움과 걱정

    두 번째는 인간의 실존으로서의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삶에서 겪는 두려움과 염려에 대해 언급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사야 41:10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위로하십니다.

    3. 두려움과 믿음의 관계

    세 번째는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두려웁니다. 우리는 두려움은 믿음이 부족할 때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8:26에서 예수님은 폭풍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두려움의 극복

    그렇다면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까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디모데후서 1:7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긍정적이지만, 염려와 공포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 이제 두려움과 관련된 다야양한 성경구절을 찾아 정리해 봅시다.

    주제별 성경구절 모음

    창세기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창세기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며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신 것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레위기 26: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에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신명기 1: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신명기 3: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신명기 31: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 10:2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설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사사기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2: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따르며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

    사무엘하 9: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열왕기하 6:16

    엘리사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역대하 20:15

    여호사밧 왕이여 모든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느헤미야 4: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고관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

    욥기 11:15

    그래하면 네가 반드시 네 얼굴을 들고 흠이 없으리니 네가 두려움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요.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편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91: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잠언 1: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3:25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이사야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그들의 연기가 나는 두 부지깽이 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4

    굳센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이사야 41: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43:1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레미야 1: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42:11

    너희는 바벨론의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구원하고 건질 것이라.

    에스겔 2:6

    너 인자야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 간구함이 들린지라.

    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고린도후서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히브리서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본문의 구조

    1.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방문 (1~2장)
    2. 욥과 친구들의 논쟁 (3~37장)
    3. 하나님의 응답과 욥의 회복 (38~42장)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방문 (1~2장)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는 부유했고 자녀들도 많았으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보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이 그의 복과 형통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을 확증하시기 위해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시지만 그의 생명은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후 욥은 순식간에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녀를 잃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다시 욥의 몸까지 치면 그의 신앙도 무너질 것이라 주장하고, 욥은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며 고통 속에 앉아 있게 됩니다.

    아내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하며 신앙을 지키려 애씁니다. 이때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 일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욥과 함께 슬픔을 나눕니다. 이 침묵은 고통 앞에서 친구들이 보여준 처음이자 마지막 진정한 위로였습니다. 이후의 대화는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과 신학의 충돌로 이어지며 점차 욥의 외로움과 고통은 더 깊어지게 됩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 (3~37장)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고난에 대한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억하시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존재의 의미와 고통의 이유를 묻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죄 없이 고난당하는 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충고하지만, 그 말은 욥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닷과 소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욥의 자녀들이 죄로 인해 죽은 것이라며 욥 역시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당시 일반적인 보응 신학을 바탕으로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전제를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친구들의 논리를 반박합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묻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논쟁이 계속되면서 욥은 점점 격앙되고 절망에 빠집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됩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여 해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을 설득하려 하지만, 오히려 욥은 점점 하나님만이 자신의 답이 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고통은 그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엘리후는 젊은 자로서 지금까지의 논쟁을 지켜보다가 하나님은 사람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이나 친구들의 주장을 모두 넘어서 하나님은 결코 악하지 않으시며, 모든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엘리후는 욥의 교만을 지적하고, 고난의 의미가 단지 죄의 징벌만은 아니며 하나님의 교육과 경고일 수도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전환점이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욥의 회복 (38~42장)

    드디어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시며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고통의 이유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창조 세계의 신비와 자신의 전능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땅의 기초를 놓을 때 그가 어디 있었는지를 묻고, 바다를 한계 지으신 이가 누구인지, 아침을 명령하고 번개를 보낸 분이 누구인지 물으십니다. 이는 욥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련하고 무지했는지를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던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감히 하나님께 말하였음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귀로만 듣던 주를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라고 말하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깊은 신앙의 성장을 나타냅니다. 이 고백은 욥기의 절정이며,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는 욥과 같이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욥에게 제사를 부탁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욥은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욥은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게 되고, 자녀도 다시 얻게 되며, 장수와 평안을 누리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단지 외적 축복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욥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그의 신앙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습니다.

    결론

    욥기는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의 뜻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게 합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욥기의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욥은 처음에는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고,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았고,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 계시며, 그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깊습니다. 고난은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되, 그 이유를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욥은 하나님의 설명 없이도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마주하고, 거기서 진정한 회복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는 신앙이 이해보다 앞선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욥기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쳐줍니다.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일하고 계시며, 그분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욥의 이야기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 앞에 설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을 믿고 붙드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욥을 회복시키셨고, 그 삶의 마지막은 이전보다 더 복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욥기는 기원전 23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아홍수가 기원전 2450년으로 추정된다면 욥은 홍수후 약 150~200년경에 살았던 인물이다

    ​욥은 190세 정도 살았는데 그의 수명을 감안해 봐도 아브라함 이전에 살았다

    오빌은 셈의 4대손으로 벨렉과 형제인 욕단의 아들인데 오빌의 금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홍수 후 150년에서 200년경으로 추정한다

    오빌(Ophir)은 '풍부한' 뜻으로 오빌의 자손들이 차지했던 땅인데 아라비아 반도 서남쪽 아카바만에 위치한다


    홍수전에 금이 나던 지역은 하윌라(창2:11)였는데 오빌의 자손이 차지하면서 지명이 바뀌었다

    질 좋은 금이 생산되어 다윗은 성전 건축용으로 약 3000달란트(약 10만kg)의 금을 수입했다

    기원전 2300년경의 시대 기록물이나 생활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면에서 보면 

    욥기는 이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다

    욥은 바벨탑 사건 후에 살았으며 바벨탑 사건은 홍수 후 100년이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70개 종족이 퍼져 나갔는데 

    이들은 200세 전후를 생존하였고 30세부터 자녀를 낳아 순식간에 인구가 불어났다

    욥기에는 스바사람, 갈대아사람, 데만사람, 수아사람, 나아마 사람들이 등장한다

    당시는 민족이 나누어진지 얼마되지 않아 민족개념보다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였다

    욥과 대화한 데만사람, 수아사람, 나아마 사람인 친구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쨓든 욥은 홍수 후 100년경에서 최대 아브라함이 살았던 족장시대인 300년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화폐통용

    케쉬타(욥 42:11)는 고대의 화폐단위인데 대략 양 한마리 값으로 추정된다

    노아홍수 후 300년 이내에 벌써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2. 멸종동물

    욥기에는 현대에는 멸종된 두 동물이 나오는데 둘 다 공룡과 같은 이미지다

    베헤못(욥기 40: 15~24)에 성경의 묘사는 풀을 먹는 초식동물로 

    그 동물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다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과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다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막대기 같은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다

    리워야단(욥기 41장 1~34)은 입에서 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온다

    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으며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다고 묘사되었다 

    특이한 것은 불을 뿜을 뿐 아니라 물도 뿜어 낸다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처럼 보이게 만든다

    3. 빙하시대

    욥이 살던 우스(Uz)는 요단강 동쪽이나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와 동일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우르(Ur)는 수메르의 수도로 우르크로 불리기도 한다

    이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기후로 겨울에 눈을 이따금 볼 수는 있겠지만 

    상시 얼음이나 눈을 볼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다

    하지만 욥기에 눈은 다섯번, 얼음은 네번이나 기록되었는데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특이한 것이다

    눈과 얼음이 일상의 대화로 나오고 깊은 바다의 수면까지 얼어붙는다고 기록되었다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욥38:30)

    대홍수 후 기후의 변화가 있었는데 

    지각의 이동으로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재가 태양을 가려 빙하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빙하시대는 현재 남극 북극의 빙하가 10%정도라면 30%까지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출어질지라도" (욥6:16)

    얼음이 녹아 물이 검어진다는 표현도 화산재에 의해 물이 검어졌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욥9:30)

    당시에는 눈이 많이 오고 눈 녹은 물로 몸을 씻는 일이 일상이었다

    4. 하나님에 대한 지식

    욥기에서 하나님은 전능자, 창조자, 하나님으로 표현하였는데

    각 지역에서 온 친구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특이하게 전능자에 대한 호칭은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던 놀라운 사건이기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사탄의 호칭이 처음 기록된 것도 욥기인데 

    구약에서 사탄은 네권의 책(욥기,역대상,시편,스가랴)에 18번 나온다

    욥기에서만 '사탄' 단어가 14번 기록되었다

    욥기는 고대의 일상과 관심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고대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지식은 세대의 교체와 민족의 이동으로 잊혀지고 변질되었다

    모든 민족은 노아의 자손에서 퍼져나갔고 하나님은 한 분이셨지만 

    각 민족은 다른 이름으로 신을 호칭하고 지식도 변질되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말씀을 보존하게 하셨다 


    욥기에서 네명의 상담자들의 비교표

    구분 \이름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이름의 뜻 하나님의 금, 하나님의 집행자 다툼의 아들 거칠은, 털이 많은 그는 나의 하나님
    특징 신학자, 실용주의자 역사가, 율법주의자 도덕가, 독단론자 신학자, 지성인
    의존대상 경험 전통 가정 교육
    인격 사려깊음 논쟁적임 노골적(직선적) 예리함
    무슨소리 철학 역사 정통 논리
    논고 죄를 범하면 고난 당한다 네가 죄짓고 있음이 틀림없다 네가 죄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순결케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에게 준 충고 악한 자만이 고난 당한다 악한자는 언제나 고난 당한다 악인은 장수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라
    핵심 구절 욥 4:85:17 욥 8:8 욥 20:5 욥 37:32
    하나님께 대한 관념 의로우심, 악인은 벌하시고 의인을 축복함 심판관, 움직일 수 없는 입법자 굽힐수 없는 무자비한 분 훈련자, 교사

    한 눈으로 보는 욥기의 도표

                                      욥기의 총 제목 : 구원의 신비성(메시아 발견의 비결)
    욥의 질문과 
    교훈
    의인의 고난
    인내의 가치를 배우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난 중에도 도우심을 바라며 용기를 가져라
    사람이 죽으면?
    죽음 앞에서 겸손 하라
    구속자 메시아를 발견하라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질문의 대답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심이 나의 부활이다.
    의인이신 예수님이 내 죄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
    경험의

    계시
    불가능
    부귀와 재물로 불가능함
    힘과 건강으로 불가능함
     가문과 자녀로 불가능함
    애정과 아내로 불가능함
    지식과 명예로 불가능함
    두뇌와 지혜로 불가능 
    의리와 친구 세상 것으로는 불가능함(모두 상실·허무)
    가능성
    생활의 경험
      경건의 가능성 = 인내의 가능성
    신앙의 경험
      인간의 죄악과 무능 = 겸손과 감사
    아이의 

    교훈
    1. 천국 입국의 우선권(마 18:2-5). 

    2. 기도와 사죄(42:8-10).   

    3.계시와 순종(42:8).4.회개와 겸손(42:6). 5.중생의 영적 의의(42:5). 

     어린아이와 같은 새사람은 말씀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다.        
    말씀을 

    통한 계시
    영적인 새 사람으로
    자유해방·천국입국
    기도와 사죄·생사
    열납과 순종(피)
    회개와 겸손
    중생(눈으로 주를 뵈었나이다. 42:5)
    깨닫게 하심
    인간의 무지성
    인간의 유한성
    인간의 무능과 비천함
    인간의 죄악 성
    말씀의 설교

    : 엘리후
    하나님의 섭리와 진리이신 예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 말씀의 권유




    의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이 당하는 환란의 뜻
    우리의 구원 앞에 위선과 형식은 무익하고 예수님의 공로가 있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의로 시판하시는 하나님
    오직 우리의 구원은 중보자이신 예수님! 구속자의 기도 응답
    참된 의와 지혜 자는 하나님 한 분 뿐임
    말씀의 성격:
    비유로
    음성과 소리 같이 사랑으로 다가옴.
    모두생명적임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60개의 질문 

    "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를 만드실 때 어느 것이 더 난이도가 높았을까?

    우주가 거대하여 더 난이도가 높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주는 하루 만에 창조하셨지만 지구는 지구환경과 생명체를 채우는데 4일이 걸렸다

    지구에는 약 600만 종이 생명체가 있는데 화성에는 단 한 종도 발견되지 않았다

    지구에는 600만 종이나 있지만 새로운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나거나 진화가 관찰되지 않으며 현대 과학은 단 한 종도 만들어 낼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그 모든 것들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도 6일이나 걸려 우주와 생명체를 만드셨다는데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지 그 자체다

    6일 만에 만물이 진화되었다고 믿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30억년이라면 가능할까? 바보들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60개의 질문과 의미>

        유형 NO                                                    하나님의 질문              의미
    우주 창조 1 내가 땅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땅 = 우주와 지구
    우주 창조 2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느냐? 도량법 = 물리법칙
    우주 창조 3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행성의 운동
    우주 창조 4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공간과 중력
    우주 창조 5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동서남북
    지구 창조 6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물의 기원, 바다와 육지의 분리
    지구 창조 7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낮과 밤
    지구 창조 8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지구 창조 9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우주 창조 10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스올의 세계 11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스올의 세계 12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지구 창조 13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태양계 14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태양의 궤도와 지구의 자전
    태양계 15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태양계 16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태양계 17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자연의 순환 18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대환난에 대형우박이 떨어진다는 예언
    자연의 순환 19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느냐?
    자연의 순환 20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바람의 근원
    자연의 순환 21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느냐
    자연의 순환 22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자연의 순환 23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느냐?
    자연의 순환 24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자연의 순환 25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26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이슬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27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얼음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28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서리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29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0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1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2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3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4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우주법칙
    자연의 순환 35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대기순환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36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얼음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37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지혜의 기원
    생물과 생태계 38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생물의 DNA설계
    자연의 순환 39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구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40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흙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41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원소들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2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3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4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5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6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7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8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0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1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2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3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4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사람의 도리 55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인간설계
    사람의 도리 56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인간설계
    사람의 도리 57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인간설계
    사람의 도리 58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인간설계
    생물과 생태계 59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누가 잡을 수 있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60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욥은 왜 고난을 받았을까?

    “왜 의로운 욥이 이런 고난을 당했을까?”
    “고난에도 감사하라는데… 정말 가능한 걸까?”

    욥기는 단순한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신뢰, 믿음의 본질,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아주 깊고 묵직한 책입니다.

    욥은 누구일까요?

    욥은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부유하고 자녀도 많았죠. 
    그야말로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완벽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탄이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욥기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은 욥의 믿음이 진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며 시험해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욥기 1:11-12
    이제 주의 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후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를 모두 잃고 재산을 잃고 몸에 병까지 얻으며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욥기 1:13-15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말하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1)

    욥의 세 친구와 논쟁

    욥의 세 친구는 처음엔 침묵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지만,

    곧 “네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죄에 대한 벌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죠.

    이 긴 논쟁 속에서 욥도 점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하나님은 정말 공의로우신가?”

    욥의 말은 점점 의문과 분노, 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결국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기 38:4)

    ​내가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하나님은 자연, 우주, 생명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닫습니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을 말했습니다.”

    욥기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결말 – 회복과 새로운 시작

    욥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재산을 주시고 새로운 자녀를 주시고 친구들을 위해 중보한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욥은 이전보다 더 깊은 신앙과 이해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욥기의 결말은 단순한 보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욥기를 통해 얻는 교훈

    고난은 죄의 결과만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통로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듣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믿음은 축복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향한 신뢰다.
    진짜 신앙은 ‘잘 될 때만 믿는 믿음’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길 때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루라도 성경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무엇인가 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느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그런 감정을 느껴보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 조금은 부족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는 마음이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우리에게 매일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삼아 성경을 멀리합니다.
    성경보다 기도하는 것이 먼저라고 성경을 멀리합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성경을 멀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참 많기도 합니다.
    성경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고 지켜야 하는 책입니다.
    지켜야 하기 전에 바르게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영적 부흥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 한번 제대로 읽지 않고 말씀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성경의 말씀대로 명령대로 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욥기 각 장별 주제

    욥기는 누가 기록했는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욥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고 추정하는데, 이는 그가 우스 출신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스를 고대 이스라엘의 동남쪽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를 추정한다면 그가 에스겔서에도 등장을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아무리 늦어도 에스겔이 살았던 시기인 BC 6세기를 넘지는 않는다고 보는게 최선일 것이라고 합니다.

    욥기 1장 요약

    욥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어유.욥과 욥의 가족,욥의 재산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유.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욥,이러한 욥을 사탄이 시험해유.욥이 재산을 읽게되고 자녀들도 잃게 되어유.

    욥기 2장 요약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병들게하는 것으로 시험할 수 있게 요청해유.욥의 몸에 종기가 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어유.세 사람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어유.

    욥기 3장 요약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한탄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4장 요약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충고해유.죄가 있으니 망하고 죄가 있으니까 죽는다고 말이죠.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5장 요약

    엘리바스의 계속된 충고 '욥에게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해유.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지 않으면 자네를 구해 주실것이다라고 말해유'.

    욥기 6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좋겠네.친구들은 나를 비방하지 말라,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7장 요약

    욥이 대답을 계속해유.'나는 살아갈 소망이 없다.나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8장 요약

    수아 사람 빌닷의 충고가 나옵니다.'자네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자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것이다.악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9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하나님과는 논쟁할 수는 없다.나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릴 수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10장 요약

    욥이 대답을 계속해유.'하나님이 왜 나를 죄인 취급 하시는지 알 수 없다.내가 만약 악인이라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나를 지금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11장 요약

    소발의 말이여유.'하나님은 악한 것을 상관 안하는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신다.마음을 다시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라'고 말해유.

    욥기 12장 요약

    욥의 대답이여유.'나도 친구들보다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잇다.쓸데 없는 충고는 하지 말라

    욥기 13장 요약

    너희가 아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너희는 무식한 사람들이나.나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하나님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다.

    욥기 14장 요약

    나의 고난의 때를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있어유.

    욥기 15장 요약

    엘리바스 두 번째로 욥에게 말해유.'욥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사람은 죄없는 사람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말해유.

    욥기 16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당신들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게 한다.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셨지만 나는 항상 진실했다.

    욥기 17장 요약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해유.

    욥기 18장 요약

    빌닷이 욥에게 말해유.'악인이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해유.

    욥기 19장 요약

    욥이 말해유.'나의 잘못이 잇더라도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말이여유.

    욥기 20장 요약

    소발이 말해유.'악인의 형통은 잠시 뿐이다.악인은 하나님이 반드시 치신다'고 말이여유.

    욥기 21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악한자들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거짓말이나 반말로 나를 위로하지 마라'.고 답해유.

    욥기 22장 요약

    엘리바스가 대답합니ㅏ다.'네가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것이다.하나님과 화해해라.네가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답해유.

    욥기 23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하나님을 볼 수 잇다면 내 사정을 아뢰겠다.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될 것이다.

    욥기 24장 요약

    악인은 잘 되다가도 금방 사그라지는 곡식처럼 된다'고 대답해유.

    욥기 25장 요약

    빌닷이 대답해유.'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해유.

    욥기 26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자연 만물을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대답해유.

    욥기 27장 요약

    세 친구에 대한 계속적인 욥의 대답이여유.욥이 비유로 말해유.'너희는 옳지 않고 나는 결백하다.

    욥기 28장 요약

    하나님만이 지혜의 근본이시다.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이다'.라고 대답해유.

    욥기 29장 요약

    욥의 마지막 말이여유.'지난 시간으로 돌아갓으면 좋겠다.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엇다.

    욥기 30장 요약

    도움을 준 내게 사람들은 조롱한다.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하나님이 나를 왜 이렇게 치시는가 모르겠다.나는 지금 통곡하고 있다.

    욥기 31장 요약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일을 알고 계신다.나는 정직하고 죄없이 살아왓다.나는 돈이 많다고 자랑하지도 않앗으며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고 대답해유.

    욥기 32장 요약

    욥의 말이 끝납니다.엘리후가 세사람이 대답 못하고 정죄한 것에 대하여서 화를 내면서 말해유.'친구들이 못했으니 이제부터 내가 반박하겠다'.고 말해유.

    욥기 33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 '잘못 없다는 욥의 말에 반론해유.욥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유.

    욥기 34장 요약

    엘리후가 욥과 친구들에게 말해유.'사람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곳이 없다.욥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말해유.

    욥기 35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이여유.'당신들이 의롭거나 죄가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

    욥기 36장 요약

    하나님은 욥을 축복하셨지만 지금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고 잇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욥기 37장 요약

    하나님은 신기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사람은 당연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욥기 38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셔유.

    욥기 39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셔유.

    욥기 40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셔유.'내가 하는 일을 너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한다.

    욥기 41장 요약

    사나운 짐승도 내가 지엇다.아무도 내게 맞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어유.

    욥기 42장 요약

    욥기 자신이 함부로 말한 것을 시인하고 회개해유.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셔유.하나님께서 욥에게 다시 자손과 재산의 축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