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석가모니 /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알렉산더대왕 / "To the strongest!" 라는 짧은 말이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했더냐? 그랬다면 박수를 쳐다오"
유비 /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 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
징기스칸 /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잠을 잤구나."
이순신 /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데카르트 / "자, 이제 출발해야지"
이완용 /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간디 / "오 신이시여"
오빌 라이트 /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 문천상(1236~1282)
중국 남송의 시인, 정치가. 원나라(몽고) 징기스 칸이 남송을 함락한 뒤, 문천상의 재능을 높이 사며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네."
괴테
독일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작품으로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남겼다.
"좀 더 빛을!"(Mehr Licht!)
마르크스(1818~1883)
독일의 경제학자·철학자·언론인. '자본론'을 집필했다. 공산주의를 사실상 창시한 인물이다.
"꺼져! 마지막 말은 살아있을 때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나 하는 거야."
(Hinaus! Letzte Worte sind für Narren, die noch nicht genug gesagt haben.)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영국의 여왕.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이뤘다. 국교(성공회) 확립을 꾀하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짧은 순간을 위한 것이었군."
(All my possessions for a moment of time.)
이승혁 / 행복한 예수쟁이가 되자!
유언(遺言)
히브리서 9:16-17
* 유언(in the case of will) - 의지의 경우
1242. 디아데케(diathēkē) διαθήκη, ης, ἡ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셨음을 시사한다(Hewitt, Lane).
이러한 죽음의 필요성은 언약의 절차에서 비롯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비준(批准)은 희생 제물에 의해서 보증된다(창 15:9-21;출 24:3-8;시 50:5;렘 34:17-21, G.E. Mendenhall).
그리스도는 이러한 새 언약의 비준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고자 하시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으며(요 4:34;6:38, 39)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죽으셔야만 했다(8:9-12;요6:40).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According to the last instructions of David, the Levites were counted from those twenty years old or more.
* 유언(the last instruction) - 마지막 지시
1697. 다바르(dâbâr) דָּבָר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다윗의 유언대로
-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남긴 유언(遺言)은 28, 29장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본절에 따르면 그때 다윗은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의 연령을 20세로 낮추도록 다시금 지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사야 38: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In those days Hezekiah became ill and was at the
point of death. The prophet Isaiah son of Amoz went to him and said,
"This is what the LORD says: Put your house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die; you will not recover."
집에 유언하라( Put your house in order) - 집을 정리하라
6673. 차브(tsav) צַו
구약 성경 / 9회 사용
-
1. 명사, 남성 명령, 지시, 사28:10,13, 호5:11.
-
관련 성경 / 교훈(사 28:10,13), 명령(호 5:11).
그 즈음에
-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통치하였다(왕하 18:2).
그중 15년은 질병이 나은 후에 여호와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이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그의 재위 1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의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36:1).
히스기야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어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그토록 슬퍼하며 통곡한 것도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그가 슬퍼한 것은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보다도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민족이 당할 비극적인 처지를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Calvin, Vitringa)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앗수르 군대 퇴각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치유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구원까지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6절).
따라서 본장과 39장의 사건은 36, 37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위치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Lange, Leupold, Oswalt, Delizsch).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 히스기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21절의 '종처'(腫處)라는 말을 근거로 할때, 그의 병이 염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가령, 종기나 등창 같은-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레 13:18;욥 2:7 참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살지 못하리라'는 말은,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히스기야에게 이 말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냉혹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철회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새의 운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고에도 집행 유예(執行猶豫)는 있다(출 32:6-12 참조).
언제나 인생에게 복주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종들이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며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나, 성도의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을 변경시킬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Oswalt).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히스기야의 겸손과 기도의 열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다.
4월 15일(화) 사무엘하 23-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의 마지막 말(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These are the last words of David: "The oracle of
David son of Jesse, the oracle of the man exalted by the Most High, the
man anointed by the God of Jacob, Israel's singer of songs :
다윗의 마지막 말(the last words of David)
운동 경기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고 그 사이에 Half time이라는 잠깐의 틈이
있는 것 같아요.
배구, 농구, 축구, 골프까지도 전부 전/후반이 있더라고요.
왜 그렇게 했을까?
전반
마치고 나서 생각하고 리뷰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짜고 또 후반 게임에서 이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간이 Half time입니다.
인생도 어떤 면에서는 게임과 같아요.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 전쟁의 게임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스포츠는 지면 패자고
승리하면 승자로 상급이 있고 하지만 영적 전쟁에서 실패하면 그건 죽는 것입니다.
Spiritual Half Time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간이 새롭게 될 때마다
자기의 영적인 Half time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는 거에요.
일반적으로 나이로 보자면
Half time은 30~40대 정도 되겠죠.
여러분들 나이가 40세가 가까워 왔다면 절반의 인생은 지나 간겁니다.
그러면
Half time에 무엇을 해야 되는가?
내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점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 하나님이 주신 나의
것,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나의 현장을 점검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향해서 살아왔는지도 생각해 봐야해요.
불신자들은 창세기 3장의 나만을 위해, 창세기 6장의 보이는 물질을 위해, 그리고
창세기 11장의 자기 성공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요. 그러나 어느날 점술, 무속, 우상앞에 그 인생들은 무너지며 불신자 상태
속에서 결국은 방황하다가 후손에게 영적 되물림을 물려주고 자기는 스올이라는 지옥불로 가게 되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인생 설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빌3:13-14에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 살아가지만 잡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있을 잡아야 하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의 이민 생활속에서 여러가지 고난과 열악한 환경속에서 열심히들 살아오셨습니다.
어떤분은 보이는 세계도 정복해서 뿌듯하게 잘
살고 계시죠. 그러나 보이는 세계를 정복 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전도자를 통해 CVDIP의 메시지를 주셨어요. Half time을 지나 어느날 마지막 말을 할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 부터 생각한다면 미래가 촉망한 렘넌트가 될 겁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어요. 아직까지 여러분 인생의 참 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CVDIP를 개인적으로 정돈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물질, 건강, 명예, 권력도 좋지만 사람은 고전10:31절 대로 먹는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어요.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날 60대, 70대가 찾아오고 이 세상을 떠날 그 날이 찾아오는 거에요. 그 날에 우리는 나
스스로에게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후대들에게 뭐라고 기록하여 남기고 한 인생의 영혼을 전달해 줄 것인가…
다윗은 자기 정체성을 알았다(삼하 23:1)
다윗은 먼저 자기 정체성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이새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어요.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니에요. 삼상20:30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그리고 삼하20:1에 다윗의 부하 세바가 배신할 때 다윗을 부르기를 이새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왜 이새의 아들이 깔보고 비하하는 말이냐 하면 촌사람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에 요동치지 않았어요. 다윗은 스스로 말하기를 이새의 아들 다윗인 내가 말함이라 했어요. 부모를 무시하지 않는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말씀따라 허락하셨어요. 비록 목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하늘 배경으로 살아가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어요. 우리의 참 배경은 하나님 아버지가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롬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다윗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 배경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배경속에서 앞으로 달려갔던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다윗은 자기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삼하23:1에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낮은 자였는데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은 약삭빠르고 못된 야곱을 고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야곱의 씨를 통해서 요셉과 그리스도가 나온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문제 끝인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서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나의 정체성은 가문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줄로 믿습니다. 사43:4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처럼 다윗은 스스로의 자존감이 굉장히 높았어요.
다윗은 하나님의 천명(天命. Heavenly Mission), 소명(召命. Calling), 사명(使命. Mission)속에 살아가야 함을 알았다(삼하 23: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천명, 소명, 사명 속에 살아갔어요.
삼하 23: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었어요.
구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신약은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우리가운데 거한다고 했어요.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그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늘로 다시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마 10:19-20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리고 사람은 창조자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는
권세가 주어졌어요. 사사기를 통하여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중심인 그 때는 나라가 흥하고 백성들이 태평하고 가정이
행복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등질때마다 그 나라는 전쟁, 재앙,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계사를 바로 알고 사명의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줄을 놓치지 않고 현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3오늘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다스릴 때 공의로 다스렸어요. 그리고
삼하23:3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였어요.
하나님의 언약속에 있는 자의 삶 (62가지 성취자)
하나님의 언약속에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는 그런자들은 삼하23: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처럼 된다고 했어요. 아침 햇살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햇살이 주장하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요. 돋는 해의 아침 빛과 구름 없는 아침을 맞이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비 내린 후에 광선을 맞이하는… 다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데 비가 온후 광선, 햇빛은 무지개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과 같다고 했어요. 이 축복이 삼하23:5에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다윗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어요. 장인이 죽이려 하지, 부하는 배반하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어요.
만일 나의 마지막 날이 내 앞에 다가왔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셨는지요?
마지막 할말은 무엇인가?
그 마지막 말과 후손들과 보이지 않는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너는 이와 같은 복을 받고 살고 네 집의 후손들이 이런 복을 받고 살리라는 그
마지막 말을 남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말과 환경에 치우치지 말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기 바랍니다. 언약중의
언약은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가 현실에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수고는
절대로 헛되지 아니한 줄로 믿습니다. 고전15:57절 말씀이죠. 그리고 주신 시대적 사명을 딱 붙잡아야 되요. 목사님이 자꾸
외치고 마음속에 간직된 237개국에 빛을 발하는 공동체 선교시대에 협력자만 되어도 하나님은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사명속에
기도로, 마음으로 동참하고 손에 손을 잡고 237개국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믿음의 사명자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뜻, 의미, 반야심경,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한문으로
읽혀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는 음역된 것으로 우리말로는
그대로 번역 할 수 없다.
그 뜻을 알고자 하면 인도의 고대 글자인 산스크리트어의 원음을 알아야 한다.
산스크리트어 원음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ragate prasam.gate bodhi svh)’
이 문구는 일반적 문장이 아니라 진언 혹은 주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진언이나 주문은 주로 번역을 하지 않으나 보기 드물게 이 문장은 번역을 하기도 한다.
진언이란 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이 깊은 명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깊은 명상 속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노니는 투명한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물의 본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반야심경> 속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진리를 이해하고 세상을 꿰뚫어 본 뒤,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다. 완벽한 해탈에 이른 그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진언이다.
‘아제(gate)’는 가버린 것을 의미한다.
괴로움에서
해탈로 가버린 것이고, 혼란스러움에서 고요한 명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반복어 ‘아제아제(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이다.
‘바라아제(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한다.
‘바라승아제(prasam.gate)’는 완전히 저 먼 곳 피안의 세계에 가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가버리네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피안)로 완전히 가버렸네!’라고
번역 할 수 있다.
이어서 ‘모지 사바하(bodhi svh)’는 ‘모지(bodhi)’가 깨달음을 뜻하고, ‘사바하(svh)’는
기독교의 할렐루야처럼 기쁨과 행복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 한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이루어지이다!’ 혹은 ‘만세!’,
젊은 세대들 표현이라면 ‘아싸!’ 정도로 번역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모지 사바하’는 ‘깨달음이여, 아~(만세)!’가 되겠다.
정리하자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이 경의 핵심인 ‘공(空)’을 이해하고 깨달은 희열을 외마디 탄성으로 표현한 진언이다.
굳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줄거리
비구니들의 절인 청정암의 여승 진성은 신비스러움의 세계와 이상을 좇는 인물이다. 같은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순녀는 은선 스님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임에도 아직 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순녀는
남다른 과거를 앓고 있다……. 어머니, 오빠와 살아온 그녀는 스님인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나지만 그 스님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는 가운데 '너희 아버지는 실패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떠나 버린다. 아버지의 입적(入寂)과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오빠의 자원 입대 이후, 순녀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 현종을 보고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고독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현종 선생은 전교생의 관심 대상이 되며 순녀도 늘 그의 행적에 주목한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을 나선 차에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현종 선생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에 나선다. 그 길에서 현종 선생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순녀는 평생 그에 곁에 붙어 있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는 현종과 순녀 사이를 가리키는 헛소문이
떠돌아 결국 현종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순녀의 가슴에는 깊고 큰 구덩이가 패게 된다.
……진성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오라는 은선 스님의 뜻에 따라 절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대학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진성은 은선
스님이 있는 청정암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방학 때 청정암에 돌아온 진성은, 이제 청화라는 법명을 얻은 순녀가 박현우라는 한
남자의 생명을 구해 주고 이를 계기로 절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를 비웃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미망으로 인해 방황할 때마다 순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성이 만행에서 돌아왔을 때 은선 스님은 중생들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다. 진성은 은선 스님이 기다린 것이 자신이 아니라 속세를
헤매고 다니는 순녀임을 깨닫고 크게 실망한다.
한편 박현우가 순녀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어딘가에 버리고 돌아온 뒤 그녀를 떠나가자, 순녀는 낙도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 과중한 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젊음과 원기가 하릴없이 외롭게 사그라져 가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얼마
후에 환자 수송차를 운전하는 송 기사와 결혼하게 된 그녀는 성심껏 환자와 주민들을 돌보면서, 현종 선생이 출간한 시집으로 마음을
달랜다……. 섬마을에 콜레라가 돌자 온 마을이 공황에 빠지고 병원에선 환자를 돌보기에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진정되고 병원 관계자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던 날, 모든 이들의 칭찬을 받아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송 기사가 갑자기 밤중에
죽고 만다.
……은선 스님의 열반이 가까워 올 무렵, 폭설이 쏟아지는 어느 밤에 순녀가 청정암에
돌아온다. 진성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하는 순녀와 누워 있는 은선 스님 사이에 말없는 교감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챈다. 은선
스님은 열반하기 전 효정과 정선 스님에게, 몸소 체험하여 법도를 깨달은 청화(순녀)도 자신의 귀한 상좌라는 말과 함께 순녀를
부탁한다. 순녀와 둘이 남겨지자 은선 스님은 한 아기가 청정암에 버려졌었다는 것과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키워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열반에 들어간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고, 순녀는 은선 스님이 얘기한 버려진 아기가
자신이 낳은 아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기를 데려다 키워 왔던 윤 보살은 순녀에게 그 아이의 죽음 소식을 전한다. 불길이
사그라진 다비대에서 사리를 찾는 진성은, 은선 스님의 유골을 찾아 품에 감추는 순녀를 빈정거린다. 이튿날 순녀는 낙도를 향해
떠나며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주문을 중얼거린다.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의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문이당 청소년 현대문학선'의 일곱 번째 기획물로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989년 영화화되어 대중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제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출간됨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참다운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보다 가깝게 접하고
이해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초월적인 이상 세계를 좇는 진성과 파계하고
맨몸으로 세속을 떠도는 청화, 두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참다운 자유인의 길을 일깨워 주는 구도 소설의 대표작이다. 제목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이 작품은 구도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어둠 속에서 슬프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눠 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불교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작품의 내용과 메시지는 종교적 영역을 뛰어넘어, 정신적 방황과 미망을 극복하는 과정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울러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된 정현주의 일러스트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이끌고 가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잘 드러내 줌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심도 있게 해독하는 데 훌륭한 코드가 되고 있다.
목차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승과 도화살
꿀벌은 꽃잎을 해치지 않고
파계
심심삼천에 붙는 불
깨들음의 진주
고기가 놀아서 물은 흐려지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둠의 시간에서 빛의 시간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장 세속적인 곳에서 중생을 보듬는 보살행
한승원 소설 원작…거장 임권택 감독의 ‘대승불교관’ 드러낸 영화
수행 매진하는 진성 스님과 세간 속 순녀의 대승적 수행 비교 구도
은사 스님의 열반 후 다시 저잣거리로 향하는 순녀로 대승 지지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소설가 한승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한승원이 각색한 영화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고유한 색과 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도 동시대의 풍경과 공기를 프레임에 담는다. 시대적 풍경과 분위기를 담는다는 명제에 충실한 영화가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화두를 담아낸다. 하나는 작품 속에서 제시한 ‘달마 대사는 왜 얼굴에 수염이 없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시대적 화두인 ‘역사의 변화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지식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영화가 1989년에 제작됐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역사와 한국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엮여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 임권택의 존재가 두 개의 화두를 직시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은 대승불교의 길의 제시를 통해 두 화두를 통합한다.
첫 시퀀스에서 순녀(강수연 분)에게 은선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고향인 광주 이전에 어머니 뱃속 그 이전에 자신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순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는 포크형 구조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순녀의 개인 서사가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순녀가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회상 장면으로 아버지와의 만남과 열차 여행 그리고 이별 장면을 제시한다. 더 거슬러가서 고등학교 시절 현종 선생님과의 만남과 함께 백제 문화권의 여행과 입산의 과정이 펼쳐진다. 순녀는 자살에 실패한 박현우(한지일 분)를 만나서 탄광촌으로 떠난다. 이 지점에서 저잣거리에서의 순녀의 삶과 대비되는 진성 스님의 수행과 만행이 평행 편집되어 두 개의 서사로 나누어 진다.
순녀와 인연을 맺은 많은 남성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 같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부친은 참회를 위해 입산 수도하였으며 순녀에게 하늘의 구름을 보여주면서 “저 구름이 너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고 떠난다. 순녀가 아버지라는 뜬 구름을 찾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돌려 당부한 셈이다.
순녀의 또 다른 아버지는 광주 민중항쟁 때 임신한 아내를 잃은 현종 선생님이다. 그는 아내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멸망한 백제와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집필하려고 답사한다. 두 사람의 여행은 학교 당국의 오해로 현종과 순녀의 이별을 야기한다.
두 인물이 아버지를 표상한다면 ‘당신은 나의 빛이며 내 목숨은 스님 것’이라고 순녀에게 애원하는 현우는 아들과 같다. 은선 스님은 수행은 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순녀를 저잣거리로 내보낸다. 이와 같은 순녀의 행보는 대승불교를 경유하여 불교세계를 녹여내려는 임권택 감독의 의도에 부합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길 영화로 대표되며 ‘실패한 자의 떠돌기’라는 임권택의 인물을 작가적으로 특징한다. 세상에서 신산한 삶을 겪으면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 순녀는 임권택의 실패한 자들이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과 대담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첫 장면의 천불전 장면에 대해 “천불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대승적 수행이란 바로 중생과 더불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전면에 내세웠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은 겉은 정주민이지만 속은 떠돌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뿌리 깊은 사유도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고 믿는 것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떠돌고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 속 순녀의 삶과도 닮았다. 그녀는 절에서 탄광촌으로, 탄광촌에서 섬으로, 다시 절로 그리고 다시 저잣거리로 떠돈다. 그녀는 연좌제로 인해 막장의 광부가 된 현우와 상이군인인 병자, 병원의 기사인 송기사까지 사회적 타자를 껴안고 살아갔다.
그녀는 많은 인간 군상과 인연을 맺었지만 감독은 “남자들과의 모든 관계도 그런 자비심의 발로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우와 술 취한 순녀가 여관방에서 행한 정사 장면은 순녀의 정서를 드러낸다. 순녀는 현우를 거부하다가 얼굴을 은선 스님이 주신 모자로 가리면서 허용한다. 은선 스님은 모자를 주면서 속세에서도 수행자의 삭발을 가리면서 수행자로 살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몸은 속세에 있지만 정신은 절에 두고 있기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애욕의 거부와 수행의 경계 확장으로 읽을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승불교는 속세에서 보살행하는 순녀를 긍정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순녀를 배척하는 보살들과 진성 스님의 질타는 소승적 입장에서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은선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순녀의 손을 들어준다. 은선 스님은 ‘오욕의 진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순녀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진성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는 순녀를 미망에 빠져있다고 질타한다. 순녀는 탑 천 개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진성 스님은 탑을 세우겠다는 욕심을 미망으로 치부한다.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순녀는 반문한다.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순녀는 저잣거리로 향한다. 순녀는 대승불교의 행보를 이어간다. 대승도 소승도 모두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우열과 옳고 그름이 없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승의 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셈이다.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39)
둘째 세 용사의 업적(13~23절)
13) 또 30명의 두목 가운데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추수가 시작될 무렵)에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14) 그때 다윗은 산성이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주둔지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15) 다윗이 간절한 마음으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하고 말하자
16)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물을 여호와께 제물로 부어드리며(땅에 쏟아버리며)
17)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용사가 한 일은 이러했습니다.
18)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이 세 사람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 창을 들면 300명은 거뜬히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 명의 용사 가운데서도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19) 아비새는 이 세 용가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그들의 두목이었으나,
처음 세 용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갑스엘 출신의 용사로, 큰 용맹을 떨친 자였습니다.
그는 모압의 장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 죽였고,
또 눈이 올 때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습니다.
21) 브나야는 또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도 창을 가진 애굽의 거인에게 달려가서,
그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해서
그 세 용사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23) 그는 30명의 용사들보다는 존귀한 자였으나, 처음 세 용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자기의 시위대장(경호대장)을 삼았습니다.
2. 다윗의 30명의 용사들(24~39절)
24) 30명의 용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5) 하롯 사람 삼마와, 하롯 사람 엘리가와,
26)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7)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8)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9) 느보다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렘과, 베냐민 자손으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30)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31)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32)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요나단과
33)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34) 마아가 사람의 손자이며 아하스배의 아들인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35)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36) 소바 사람으로 나단의 아들인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37)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 들고 다니는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38)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39) 헷 사람 우리야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합하여 37명입니다.
* 묵상 point
1. 둘째 세 용사의 충성심
1) 다윗을 향한 세 용사의 충성심(13~16절)
다윗의 마지막 말에 이어 기록된 세 용사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다윗의 충성스러운 또 다른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와, 여호야다의 아들 브냐야,
그리고 이름 없는 또 한 사람을 합하여 세 명의 용사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에피소드 하나가 소개됩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이므로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떠와서
나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을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이들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17절은 이들 세 사람의 하는 일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렇게 그 명령에 충성했다는 말입니다.
● 묵상 :
사무엘서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용사가 다윗에게 충성하는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이들이 다윗을 충성하는 모습 그대로
우리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충성된 자도 그 충성됨을 기뻐하여 이렇게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자는 얼마나 더 귀한 이름으로 기록되겠습니까?
2) 세 용사의 용맹(18~22절)
두 번째 세 용사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우두머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입니다.
그는 창을 한 번 들면 300명은 거뜬히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 명의 용사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러운 자로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세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모압의 장수 둘을 죽였습니다.
또 눈이 왔을 때 브나야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그 구덩이에 사자가 있었습니다.
본래 사자는 배부를 때는 옆에 짐승이 지나가도 상관하지 않지만
굶주렸을 때는 아주 포악해집니다.
그런데 사자가 구덩이에 빠져 며칠을 굶주렸고, 브나야 역시 그 구덩이에 빠졌으니
도망할 수도 없는 좁은 곳에서 포악한 사자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한 주먹에 그 사자를 때려 죽였습니다.
또 브냐야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도 창을 가진 애굽의 거인에게 달려가서,
그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3) 그러나 처음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하였더라(19, 23절)
그러나 이들 세 용사는 삼하 23:8~12에 나오는 처음 세 용사보다는 못하였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19, 23절).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서를 보는 동안
처음 세 용사들인 아디노와 엘르아살과 삼마의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두 번째 세 용사들인 아비새와 브나야가
다윗의 가장 용맹스러운 용사들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이름도 나오지 않았던 처음 세 용사가
가장 충성되고 가장 용맹스러운 자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처음 세 용사가 가장 용맹스럽고,
나라를 위하여 공도 가장 많이 세운 자들이었으나
그들이 겸손하여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그들보다 못한 자들이었으나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그 이름이 더 많이 기록된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십시오.
아비새와 브나야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알려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처음 세 용사들을 더 충성된 자로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들을
더 기뻐하시고 그 이름을 더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들처럼 오직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기에 힘쓰십시오.
2. 다윗의 신실함 :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1) 세 용사가 떠온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다윗(14~17절)
블레셋 군사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다윗이 혼자말로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린 것을 듣고
아비새와 브나야와 이름 없는 또 다른 사람,
이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그 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이고, 엄청난 충성입니다.
그때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칩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떠온 용사들의 피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이 물을 마시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며,
그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다윗은 가장 귀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와 같은 그 귀한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2)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17절)
그리고 다윗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부하들에게 목숨을 걸게 하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위해서만 왕의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한 자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들(24~39절)
처음 세 용사와 두 번째 세 용사와 나머지 31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었고,
마지막에 다 합하여 37명이라 하고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뒤에 31명은 그냥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16절이나 할애하며 이름만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헷 사람 우리야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길게 이름을 기록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이렇게 주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 묵상 :
주님을 참되게 믿는 자들의 이름이 이렇게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영원한 기쁨의 나라,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처럼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주를 섬기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4. 요압의 이름이 빠졌다
1) 다윗의 부하 중 가장 강력한 장군 요압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입니다.
아마도 두 번째 세 용사 중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한 사람이
바로 요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 그는 다윗의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사사건건 다윗을 힘들게 했습니다.
요압은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보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겼습니다.
아브넬을 죽였고,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총사령관의 자리에 계속 머물기 위해 그의 경쟁자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힘들어할 때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우신 자를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고통스럽게 한
요압의 이름이 마지막 용사들의 명단에 빠진 것입니다.
●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보기에만 그럴듯하게 겉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사람은
요압처럼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순전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처음 세 용사들이 오직 다윗을 섬기기에만 충성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 섬기기에만 충성된 종이 됩시다.
* 기도제목
1. 다윗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주께 충성된 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까지 충성하여
37명의 다윗의 충성된 사람들처럼
주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다윗의 용사 가운데 두번째 3용사에 대한 말씀이 있다.
다윗은 암둘람 동굴에 숨어 있는 처지이고 블레셋은 베들레헴에 주둔해 있다.
다윗은 소원을 듣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바친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용사들의 목숨을 건 피 같은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드린다.
다음으로 다윗을 경호하며 전쟁을 수호한 30 용사들의 명단이 소개 된다.
다윗의 용사는 헷 사람 우리아까지 포함해서 총37명이다.
말씀묵상:
다윗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다.
첫번째 3 용사가 소개 되었다.
단번에 800명을 죽인 첫번째 용사는 요셉밧세벳 이였다.
두번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도망가도 담대히 싸운자이다.
이름이 알르아살이다.
세번째는 녹두나무 밭에서 블레셋과 맹렬히 싸운 삼마이다.
이들 3명의 공통점은 큰 업적들을 세운 사람들인데 다 하나님이 함께 했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큰 승리를 얻었던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3 용사가 소개 되고 있다.
3명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대표자는 아비새이다.(18)
시대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숨어 있을 때이다.(13) 다윗의 초기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입하여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13)
블렛셋의 주둔지는 베들레헴이였다.(14)
전쟁 중에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의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다.(15)
이 때에 오늘 소개되는 3 용사가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베들레헴의 성문 곁 우물물을 가져왔다.(16)
그러나 다윗은 그 우물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16)
왜냐하면 이는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 온 것으로 피 처럼 귀했기 때문이다.(17)
다윗은 다시는 자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17)
희생을 각오한 충성된 부하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참 감동이다.
믿음의 동역자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사랑과 마음을 움직이는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내가 이런 믿음의 동역자 되길 기도한다.
아비새는 창으로 300명을 죽이고(18) 두 번째 3 용사의 두목이 되었다.(19)
브나야는 사자를 쳐 죽인 용사이다.(20)
또 막대길 가지고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죽인자이다.(21)
왕의 시위대 장관에 임명된 자이다.(23)
나머지 30명의 명단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오고 있다.
소바 사람, 암몬 사람, 헷 사람등 이방인도 포함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데 있어서는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학연, 지연,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목표
비전이 같을때 연합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가 보다.
말씀을 보면서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가 다시 한번 느껴진다.
현재는 다윗의 황혼기인 것 처럼 보여 지는데
인생의 마지막에 자기 힘들고 어려웠던 때의 자기를 충성스럽게 도와 준
용사들의 이름을 한 한명 기록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겠다.
세상에서는 1등만을 기억하고 위대한 이인자들은 기억도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전체 3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업적과 함께 기록한다.
때때로는 출신 지역까지 심지어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해서 공적에 따라서 기록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1. 첫 번째 ‘세 용사’ (8~12절)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맹스럽게 목숨 바쳐 싸운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23장의 뒷부분은 안 읽었지만 맨 뒤에 보면 총수가 37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39). 그런데 세어 보면 사실은 36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족속인지와 함께 죽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용사 중 가장 용맹한 ‘세 명’에 대한 일화가 간단히 나온 다음에 ‘삼십 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특별한 사건 없이 죽 나옵니다.
역대상 11장에도 다윗의 용사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장과 역대상 11장 명단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용사들의 숫자가 역대상 11장에는 46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36명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또한 그 두 명단에 모두 나오는 용사들 가운데 이름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게 나오는 등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예들이 있다는 겁니다.
두 명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명단이 나오는 문맥에 있습니다. 앞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다릅니다. 역대상 11장의 명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 대관식이 나온 다음 명단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왕으로 통치를 시작할 때가 그 명단을 작성한 배경입니다.
그뿐 아니라 역대상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 46명은 훨씬 더 많은 용사들의 일부입니다. 명단에 굉장히 많은데 그중 일부만 적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역대상 12장에서는 다윗을 도운 용사들의 이름을 추가적으로 죽 말해 줄 뿐 아니라, 용사들을 도운 병사들의 숫자도 지파별로 몇 명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명단은 다윗을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나옵니다. 22장이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이 명단이 나온다는 것은, 사무엘하 이야기의 결론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주석가 아브라바넬이라는 사람은 역대상 11장에 나오는 용사의 명단과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명단이 왜 다른가 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즉위식에 참석해서 충성을 선언한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반면, 여기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용사들은 끝까지 다윗에게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들, 즉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던 진짜 충신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수가 더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이런 유대인 주석가의 설명이 맞는다면,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용사들은 단순히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들이 아니라 다윗에게 끝까지, 변함없이 충성했던 용사들이었고 충신들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37명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36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안 나오고 빠진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놀랍게도 가장 다윗을 위해서 많은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던 동시에 또한 다윗에게 가장 골칫거리가 되었던 요압입니다. 요압은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랍고도 큰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 요셉밧세벳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더라” (8절)
첫 번째로 소개된 용사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인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합니다. 이 이름은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상 11장 11절에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야소브암도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역대상 12장에 따르면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해서 시글락에 머무를 때 다윗의 부하가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첫째 달에 2만 4천 명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했습니다(대상 27:2).
여기 보면 그는 군지휘관이었고 그중에도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지휘관의 두목’이라는 말은 가장 용맹한 ‘세 사람(용사)의 우두머리’였다는 겁니다. 세 사람 중에도 대장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세 용사’ 또는 ‘세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100%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 성경을 읽어보면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도 사실은 세 명이 아닙니다. 앞에도 ‘세 사람’이라고 나오고 뒤에도 ‘세 사람’(또는 ‘세 용사’)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요셉밧세벳이 그렇고, 뒤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비새도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두머리라는 말입니까? 세 명 중 우두머리가 두 명이면 나머지 한 명만 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첫 번째 세 용사가 있고 두 번째 세 용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특A급인 최고의 용사 세 명이 있었고, 그다음 레벨 세 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특A가 세 명, A가 세 명이었습니다. 그다음 세 명도 엄청난 용사들인데, 그들을 능가하는 세 명이 또 꼭대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최고의 특A급 세 명의 우두머리가 바로 요셉밧세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시피 이 사람은 여기서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별로 알려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최고의 용사인데 전혀 나오지 않다가 여기 잠깐 나오고 역대상에 잠깐 나옵니다. 오히려 요압 같은 사람은 여기 끼지도 못하는데 계속 나왔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해 주고 사람들 앞에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잘 알려졌는데 다른 민족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런 요셉밧세벳 같은 사람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 준다는 겁니다.
요셉밧세벳은 특수부대 30명 중에도 세 용사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중에도 첫 번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무용담이 무슨 신화나 전설 같은 스케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용사였는지, 단번에 800명을 쳐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히브리어 과장법입니다. 이 말은 창을 들고 한 번 휘둘렀더니 800명이 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800명을 한 번 휘둘러 다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800명을 죽였더라도 한 번 휘둘러서 다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엄청난 용사, 최고의 용사 중의 최고의 용사였던 사람이 바로 요셉밧세벳이라고 하는 ‘생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하나님은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엘르아살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9-10절)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여기 보면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 군대를 향해 조롱하고 도발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다윗이 어렸을 때 군대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그때 블레셋에서 엄청난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와서 막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 군대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워낙 대단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특A급 세 용사가 블레셋을 상대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여기서 ‘싸움을 돋우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고 했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 진을 갖추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러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다는 것은, 싸움을 피해 평야에서 높은 데로 올라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후퇴했을 때 엘르아살이 일어나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검을 든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10).
그때 산으로 피했던 백성은 전투가 끝나자 내려왔고,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따라가며 전리품을 취하는 것뿐이었다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쁨에 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르아살도 대단한 용사입니다. 혼자서 다 하니까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장군만 하나 있으면 다른 군인들은 든든했을 겁니다.
3) 삼마
특A급 ‘세 사람’의 셋째 용사는 삼마라는 사람입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1-12절)
삼마에 대한 설명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전투에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투가 있었고 세 사람은 각각 공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바로 레히라는 곳입니다. 레히와 연결되는 인물이 바로 삼손입니다.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이 블레셋을 당나귀 턱뼈로 다 쳐 죽인 곳이 바로 레히입니다. 그후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간구하니까 하나님이 물을 주신 바로 그곳입니다.
엘르아살의 전투가 세 용사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었다면, 삼마의 전투는 블레셋이 약탈하기 위해 침략한 것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레히에는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이 있었는데 블레셋이 바로 그것을 약탈하기 위해 침략해온 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군인들)은 또다시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하지만 삼마는 홀로 서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 밭을 지켜냈다는 겁니다. 혼자서 지켜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블레셋과 싸우면서 오래전 바로 이 장소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이 블레셋과 싸웠던 삼손을 생각하며 싸웠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가 승리한 것을 가리켜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12)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2. 세 용사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베들레헴 우물 사건 (13~17절)
지금까지는 특A급 세 용사의 이름을 소개하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들을 짧게 설명했는데, 13절 이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다윗의 최고 엘리트 용사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사건을 말해 줍니다.
앞선 이야기들이 세 용사의 신화적이고 전설 같은 전투 능력을 이야기했다면, 이 사건은 다윗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들이 ‘세 사람’(최고의 용사)의 영예를 얻은 것은 남들보다 훨씬 강한, 다윗 왕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 이후에 보면 두 번째급 세 사람(용사)이 나오는데, 그것은 두 번째 세 용사가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다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보면 첫 번째 세 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 용사도 용맹하고 엄청난 장수였지만 그들은 다윗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 중 두 명만 이름이 나옵니다. 아비새와 브나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름이 안 나오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요압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부러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는 겁니다. 워낙 불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다윗을 힘들게 할 때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3~17절에 나오는 세 용사는 그들이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새와 요압은 언제나 다윗이 사울과 대적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물론 요압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군대장관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에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길어 오는 사건의 주인공 세 사람은 앞의 세 사람, 즉 요셉밧세바, 엘르아살, 삼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에서는 이름뿐 아니라 누구 아들이라고까지 다 나오는데 왜 여기서는 이름이 안 나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주인공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명예를 드높이려고 일부러 순교하며 죽을까 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통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무엘서는 다윗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둘을 연결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오시는데, 다윗이 메시아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3절)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즉 30명의 대장 중 세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은 다윗의 30 용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장에서 전부 3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36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기 때문에, 30 용사가 있고 세 명의 용사가 따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다윗은 자신의 경호 부대의 병력을 30명으로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37명(또는 36명)의 명단에 이미 죽어서 없는 아사헬(요압과 아비새의 동생)과 다윗이 죽게 만든 우리아와 같은 사람의 이름도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죽는 용사가 나올 때마다 30명에 새로 충원해야 했습니다. 한 명이 죽으면 채워 넣고, 또 다른 사람이 죽으면 또 채워 넣다 보니까, 36명 또는 37명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은 다윗의 ‘삼십 용사’ 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트리오였다는 것, 그 최고 엘리트 트리오가 둘이었다는 것, 그중에도 가장 최고가 처음 나온 세 사람이었다는 것, 그 외에도 엄청난 세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세 용사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4-15절)
블레셋과의 전쟁 중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있는 곳에 베들레헴 성문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배경이 언제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아둘람 굴’(13)이 언급되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 사울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고 다윗은 다른 데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르바임 골짜기’(13)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사무엘하 5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투가 어떤 전투였든지 간에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진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곳입니까? 자기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쪽으로, 블레셋과 가까워 블레셋이 잦ㄹ 쳐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우물은 다윗이 어릴 때 양을 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자기도 마시곤 했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던 그 우물이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저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내가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냥 해본 말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 중에서도 내 고향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에 있었습니다(14). 그런데 놀랍게도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달려가서 우물물을 떠서 가지고 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6절)
‘나는 베들레헴 우물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부하였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무 물이나 마시지, 베들레헴이 어딘데 무슨? 게다가 블레셋 군대가 거기 있는데 무슨 베들레헴 우물? 그냥 이거나 드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 용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 왕이 원한다고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가는 길에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합니다. 또 물을 떴어도 오늘 길에 다시 블세셋 군대를 뚫고 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왕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엄청난 충성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최고의 엘리트 트리오 세 명 안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 세 용사가 다윗이 목을 축이도록 목숨을 걸고 적진 안에 들어가 물을 길어 왔고, 그때 다윗은 그 용사들의 행위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부어 버립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서 블레셋 군대를 뚫고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는 동안 다윗은 이미 물을 실컷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을 떠 왔을 때 ‘주여, 제가 이 물을 어떻게 마시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사이드 스토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시면 될 것을 하나님께 부어서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배를 드린 겁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유비의 부인들과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온갖 위기를 벗어나서 아들을 구하여 왔을 때, 유비가 구해온 그 아들을 땅에 던져 버리고 조자룡에게 가서 크게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압록강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군인들이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7절)
다윗이 세 용사의 목숨값인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버렸다는 것은 그가 정말 자기 용사들을 아끼며 위하는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곡식을 벨 때’(13)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해 침공하기 좋은 때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곡식을 벨 때이니까 그것을 빼앗으러 오는 게 아닙니까. 또한 ‘곡식을 벨 때’라는 것은 다윗의 갈증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이때는 건기의 끝자락으로 물이 귀한 때였습니다.
이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명의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깨고 들어가 우물을 길어 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업적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길어 온 물은 그들의 목숨값입니다. 그들의 피입니다. 그냥 물이 아닙니다. 같은 물이라도 콸콸 나오는 것과 한 방울이 아쉬울 때 마시는 것은 가치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어버립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서 된 것이고, 또한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다윗이 혼자 잘나서 위대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왜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다윗을 위해 충성하며 싸웠습니까?
첫째, 다윗의 용맹함을 그의 부하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졸장부인데 부하들만 용맹한 게 아닙니다. 다윗은 어떤 용사보다도 용맹하고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리더였습니다. ‘얘들아,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나가서 싸워라.’ 하는 리더가 아니라, ‘나가자! 나를 따르라!’ 하던 리더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때는 어렸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도 어떤 사람보다 용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다윗 왕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사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보고 배워서 그와 같이 용맹한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녀들이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는 것은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라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모범을 보여줄 때, 하라고 안 해도 따라 합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배운 겁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질투와 야망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지금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데 다윗을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다녔습니다. 군사력을 낭비했습니다. 개인의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군사력을 낭비하는 사람이었던 사울의 부하들은 그런 그의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명령이 이스라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다. 백성을 위해 싸우는 분이시다.’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다윗에게 충성했고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따랐지, 못 믿을 만한 사람이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다윗은 갈증 해소를 위해 부하들에게 베들레헴에서 우물물을 길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하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한 요구였음을 깨닫고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그를 더욱더 따르게 한 요소였던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용사들이 물을 떠 왔는데 목숨 걸고 떠 왔으니 얼마나 많이 떠 왔겠습니까? 근데 그때 다윗이 그것을 받아서 마시면서 ‘이야, 시원하다!’라고 한다면 다른 용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이것은 이들의 목숨값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어버릴 때, 충성심이 활활 타오르며 ‘내가 저분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리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더이십니다. 자신이 생명까지 주신 분입니다. 성도는 완전한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는 용기와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나도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 하는 결단이 나오는 겁니다.
가끔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다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처형당하거나 테러범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낙심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의문도 듭니다. ‘왜 하나님은 저분들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이것은 헛된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돌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3. 두 번째 ‘세 용사’ (18~23절)
1) 아비새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18-19절)
여기 “세 사람”이 나오는데 또 “첫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로 구성된 첫째 세 사람과 구별되는 둘째 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A급 세 사람 트리오가 있었고, 그다음인 A급 트리오가 있었는데, 그중의 우두머리가 아비새였다는 겁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세 사람’의 반열에도 ‘첫째’와 ‘둘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둘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는데, 왜 그를 자꾸 ‘요압의 동생’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요압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압의 이름이 여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압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되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지나치게 다윗의 일을 간섭하고 개입하면서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 같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에게 불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용사들은 단순히 잘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다윗에게 충성하는 충신들이었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이야기는 첫 번째 용사인 요셉밧세벳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가 한 번 휘두르니까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세 사람에 들었는데, 첫 번째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충심이 미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단순히 군사력이 모자랐다는 게 아니라, 다윗을 향한 마음이 첫 번째 세 사람보다 못했다는 말입니다.
2) 브나야
둘째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입니다.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0-21절)
그는 다윗 아래서 블렛 사람과 그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고(삼하 20:23), 후에 아도니야의 반란 때 솔로몬을 지지하고 아도니야를 처단하는 업적을 세운 사람입니다(왕상 2:25). 또 솔로몬 아래서 요압을 대신해 군대장관이 됩니다(왕상 2:35). 본문은 그런 브나야가 어떻게 자신의 용맹을 처음 알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인 에돔 접경 지역의 도시(수 15:21) 갑스엘 출신의 용사인데,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의 무용담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먼저, 그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나오는데(20), 원어에는 ‘아리엘 둘을 쳤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엘이 두 명이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기에 개역개정은 ‘아리엘의 아들’로 고쳐 번역했습니다.
둘째로, 브나야는 눈 오는 날 구덩이 안에 내려가 사자를 죽였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족 가운데 용사로 인정받으려면 사자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손도 사자를 죽여 자신의 용맹을 인정받았음을 생각할 때, 사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 용사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사자와 싸우는 것은 절대적 힘에서 밀리는 사람에게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일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 오는 추운 날은 사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사자를 이겼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악조건에서 이겼을 정도로 엄청난 용사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막대기로 장대한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고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21). 다윗도 그랬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 그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사람은 역대기에 의하면 키가 ‘다섯 규빗’의 ‘거인’입니다. 220~230 센티미터(7’4“)나 되는 엄청난 거인입니다. 지금 NBA 선수 중 최장신 정도 되는 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묘사는 브나야가 다윗과 비슷하게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22-23절)
시위대 대장을 삼을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지만 앞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시 충성심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전투 능력보다는 충성심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인 여섯 명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사람 중 세 번째 용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배신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바로 요압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요압은 이 37명의 용사 명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비새나 브나야는 용맹했고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실은 무모하게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자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왜 일부러 거기 들어가서 싸웁니까? 참 무모한 일입니다. 거인과 막대기로 싸운 것도 무모한 일입니다. 공은 세웠지만 무모했고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합니까? 이렇게 거칠고 제어가 안 되고 막 나갈 수 있고 조폭과 같이 될 수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용맹한 장수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훌륭한 리더를 만남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계는 있지만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냥 놓아두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사도가 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놀라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고의 리더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리더, 최고의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과 질책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값지고 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요압처럼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자기가 마치 왕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면, 여기서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처럼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느 용사보다 요압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명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물론 다 받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어떻게 따르는지를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인정받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첨부 1
본문에 다윗의 영웅들에 관한 두 번째의 목록이 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된 것은 다윗이 아둘람의 요새에 피난하였던 초기시대로 되돌아가는 매력있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성 베들레헴의 우물에서 나는 샘물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의 충성과 사랑에 감동되어 다윗은 그 귀한 물을 하나님께 대한 희생물로 땅 위에 쏟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무사들이 취한 희생적 모험을 생각할 때 그 물이 그의 눈에는 피와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피는 생명의 요소를 함축한 것이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쏟아버려야 하고 이를 결코 소비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 11:10-41에 영웅들에 대한 똑같은 목록이 있는데 이것보다 본문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제 1급의 세 용사의 업적(8-12절) 본문의 세 용사는 다윗의 용사 중 제 1급에 속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은 체력과 용맹이었습니다. 세 용사의 이름은 첫째가 다그론 사람 요셉 밧세벳이요, 둘째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요, 세째가 하랄 사람 아개의 아들 삼마인데, 이들이야말로 다윗의 군부의 최고의 용사들입니다. 요셉 밧세벳은 다윗의 12군단 중 제 1군장으로써 (대상 27:2) 단번에 적군 800인을 타살한 무공을 빛내고 있습니다. 다음 엘르아살은 제 2 군단장으로써 이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 패한 때에도 홀로 서서 칼이 손에 붙어 떠나지 않기까지 싸워 마침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전세를 만회케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돌아와서 노획물을 취하도록 한 그야말로 최후일각까지 싸운 끈기있는 용장입니다.(9-10절). 그리고 삼마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병사들이 모두 도망친 후에도 녹두나무가 무성할 밭에서 벌떼처럼 모여오는 적군을 맞아 홀로 버티고 서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둔 용사입니다.(11-12절). 특별히 더 귀한 일은 이들의 공로가 무한히 크면서도 그 승리의 영광을 오직 여호와께 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군대의 정신이며 승리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2. 세 용사의 의리(14-17절) 블레셋과의 전쟁은 또 다시 일어나 다윗은 고지산성에 있고 블레셋 진영은 베들레헴 저지에 있는 계곡 르바임에 표진했는데, 다윗은 산성에서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을 내려다보면서 사모의 정에 끌어올랐으며 더구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단 한 번이라도 마셔보고 싶은 갈증을 느끼었습니다. (1) 용감스럽게 물을 길어왔습니다. 때는 추수기여서 날씨는 더웠고 몸은 피곤하고 갈증은 심했습니다. 마실 물이 산지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단 한모금이라도 마셔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용사는 다윗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이 세용사의 의리는 용감스러운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용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 움직여진 것입니다.(대상 12:18-23). (2) 다윗은 거절할 것은 용감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때마침 다윗의 심정을 이해한 충성된 세 용사는 화살이 빗발치듯하는 적진에 뛰어들어 적군과 충돌하면서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바쳤을 때, 다윗은 그 우물물을 마시기를 거절했습니다. 심히 목마른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물을 거절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을 내걸고 길어온 물을 받아들고 “이는 물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갔던 용사들의 피라”고 느껴져서 감히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더니 피는 사람이 마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깃이라(레 17:10-16)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거절할 것은 언제나 깨끗이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은 모든 군인들의 사표가 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의 오늘의 신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있어서 절대불가결의 요소는 충성심인 것입니다. 3. 제 2급의 용사의 업적(18-23절) 이 부분에 기록된 삼 인의 다윗의 용사 중 제 2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물을 길어온 용사입니다. 첫째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로서 저는 다윗의 제 4군단장(대상 27:7)이며 여기 삼 인 용사 중에 두목입니다. 아비새는 투장의 명수로써 일거에 300인을 사살한 용장입니다. 둘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써 이는 일찌기 모압아리엘의 아들들을 죽였고, 눈이 오는 겨울에 함정에 빠진 사자를 쳐 죽였으며 창 대신 막대기를 가지고 애굽인을 쳐 죽인 무용에 빛나는 자입니다. 세째 용사는 그 이름이 생략되었으나 이상의 두 용사를 보아 이도 역시 두 사람과 비견할 수 있는 용사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3조의 세 용사 중 첫 세 용사가 제 1급으로 충, 용, 지(忠勇知)를 겸비한 자들이라면, 둘째 세 용사는 불타는 자들이며, 세째는 용감무쌍한 자고서 부각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은 오늘도 충, 용, 지, 덕(忠勇知德)을 겸비한 용사의 출현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4. 삼십인의 용사(24-38절)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32인의 용사들의 얼굴을 또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통칭 30인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 30인 용사는 다윗의 군단장을 위시하여 각각 개인적인 특기를 자랑하는 유능한 용사들인 것입니다. 24절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인 중에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라고 했습니다. 아사헬에 대해서 삼하 2:18, 대상 11:26-41에서 “아사헬의 발은 노루같이 빠르더라”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아브넬에 대해서는 2:23에서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들을 뚫고 나간지라”라고 했습니다. 엘하난은 삼하 21:19에 보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25절에 보면 “하롯 사람 삼훗과 하훗 사람 엘리가와” 라고 했습니다. 하롯은 삿 7:1에 “기드온과 그를 쫓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루 샘곁에 진쳤고”라고 했습니다. 길보아산 서북쪽에 있는 곳이요 거기 동굴에서 나오는 샘이 큰 못을 이루었고 요단강으로 흐릅니다. 그 곳 사람 삼훗은 대상 27:8에 “오월 다섯째 장관은 이스라엘 사람 삼훗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또 26절에는 “발디 사람 헬리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라고 했습니다. 발디는 사울의 딸 미갈의 남편되었던 사람의 이름이기도 한데 (삼상 25:44) 30인 용사 중의 하나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또 거기 출신 헬레스가 30인 중 일인이 되었습니다. 드고아(삼상 14:2)는 슬기있는 여인의 출신처요,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암 1:1) 이기도 합니다. 27절에서는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라고 했습니다. 아나돗은 예후와 예레미야의 출신지 (대상 12:3 렘 1:1)인데 아비에 셀도 이곳 사람으로 그는 대상 27:12에서는 “구월 아홉째 장관은 냐민자손 아니돗 사람 아비엘이니”, 라고 설명합니다. 또 후사는 용사를 많이 낸 곳입니다. 삼하 21:18에는 “후사 사람 십부라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 죽였고”라고 했는데 십부라는 므분내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28절에 “아호와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아호아는 9절에 나왔습니다. 여기도 많은 용사가 나왔습니다, 느도바는 갈렙 자손의 살던 곳(대상 2:54)으로 예루살렘에서 22키로미터의 거리에 있는데 스붑바벨 때 귀환자들의 거주지요 거기서 노래하는 자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느 12:18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리에서 모여오고”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마하래 같은 용사가 나왔습니다. 29절에서는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라고 했습니다. 느보아에서도 인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바아나란 사람은 성경에 여러명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헬렙의 아버지로서 나옵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영으로 그 곳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를 말합니다. 30절에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라고 했습니다. 비라돈에서는 사사 압돈이 나왔습니다. 삿 12:13에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 사사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브나야는 여호야 다의 아들 브나야와 다른 사람으로 대상 27:14에 보면 “십일월 열한째 장관은 에브라임 자손에 속한 비라돈 사람 야나” 라고 했습니다. 가아스 시냇가는 수 24:30에서 보듯이 “가아스 산 북” 그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인 듯합니다. 거기사는 첫대가 30인 용사 중에 끼었습니다. 31절에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흐훔 사람 아스마과”라고 했습니다. 아르바는 수 14:15에서는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비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아르바는 헤브론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비알본은 아비엘입니다. 대상 11:32에서 “아르바 사람 아비엘과”, 삼하 3:16에서 “바르흠은 혹바우림” 과 같은 지방입니다. 32절에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라고 했습니다. 사알본이나 엘리아바는 이곳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야센은 대상 11:34 에 “기손 사람 하셈”과 통하는 이름입니다. 32절에 “하랄 사람 삼마와 아릴 사람 시랄의 아들 아히암과”라고 했습니다. 삼마는 삼하 23:11-12에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발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공을 세운 이로 첫 삼인 중 한 사람입니다. 아랄에서는 아히암이 났습니다. 34절에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렉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가 죽었을 때 그 아들 하눈에게 조문사절을 보냈더니 도리어 욕을 보인 일이 있습니다. (삼하 10장). 양국의 전쟁시에 암몬이 마아가 왕과 연합전선을 벌였으나 다윗에게 패전하여 점령당한 곳입니다. 이 마아가에서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 났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참모이다가 그 손녀 밧세바의 일로 압살롬에게 붙었다가 자기 참모가 통하지 않음으로 삼하 17:23에 보면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 엘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입니다(삼하 11:3). 그는 다윗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35절에 “갈벨 사람 헤레스와 아람 사람 바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갈멜은 나발의 고향입니다(삼상 25:2). 유다 족이 얻은 땅입니다. 헤레스는 이곳 밖에 안 나옵니다. 아랍은 아라비아 족 중의 이름입니다. 이 지방에 살던 바아래가 용사 중 일인입니다. 36절에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라고 했습니다. 소바도 다윗에게 점령 당만 곳입니다. 그 곳 사람이 다윗에게 용사로 일했던 것입니다. 나단의 아들 이갈이 고했고, 갓 지파 아들 바니를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은 이름입니다. 37절에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암몬인으로 다윗의 용사 셀렉을 말합니다. 또 나하래를 말합니다. 브에롯 사람은 베냐민 족속입니다(삼하 4:2).이 족속의 나하래도 삼십인 중 일인입니다. 38절에 “이델 사람 이리와 아델 사람 가랍과” 라고 했습니다. 아델은 기럇여아린 족이니 대상 2:53에 보면 “기럇여아림 족속들은 미델 족속과” 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30인 중에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26절에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본 절의 이라입니다. 가렙도 이델 족입니다. 39절에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도합이 삼십 칠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32인에다가 제 1급의 세 용사와 제 2급의 세 용사 중 두 사람을 합쳐서 37명이 됨을 말합니다. 이 37인 위에 총사령관 요합 장군이 있습니다. 요압은 성격이 조급하고 사려가 깊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창은 수명의 동료마저 살해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다윗에 대한 충성은 전혀 두 마음이 없는 그야말로 일편단심의 충절을 가진 자입니다. 그가 압살롬을 죽인 후 총사령관 직에서 면직된 후에도 왕에 대하여 추호의 불평이나 원망을 한 일이 전혀 없음을 보면 요압은 확실히 다윗 왕국의 공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윗 왕국은 다윗만으로 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37인의 용사와 12군단의 4천의 군대의 충용이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다윗에게 위대함이 있었다면 충성된 용사들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를 한데 묶어 초점을 모으게 한 그의 신앙과 진실이 있을 뿐이며 그의 애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이 있을 따름입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8-12, 다윗의 용사들 :
①다윗이 거느린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하크모니 사람 요셉 바쎄벳은 세 용사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②그 다음으로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아자르가 있었는데,
그도 세 용사 가운데 하나다(9-10절).
③그 다음으로 하라르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가 있었다.
⇒다윗을 힘껏 도와 그를 왕으로 세운 용사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출중한 용사들의 행적을 소개한다.
이상 세 용사의 용맹은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 일들은 더욱 대단하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다윗을 세우셨지만
다윗 혼자 나라를 힘겹게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보내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그 용사가 훌륭하다 기록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가 행한 일을 기록할 때 함께 기록된 이름이 바로 하느님이다.
13-17, 세 용사의 헌신 :
①수확 철에, 삼십 인의 우두머리 가운데 세 사람이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에게 내려갔는데,
필리스티아인들 무리가 르파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②그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비대는 베들레헴에 있었다.
③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기를 바랐다.
④그러자 그 세 용사들이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뚫고,
베들레헴 성문 곁에서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왔으나,
다윗은 마시지 않고 그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린다(16절).
⇒이 세 사람은 앞 절에 언급된 3인이 아니라,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이다(18, 22절).
이들은 둘째 3인으로서 이들의 충성은
첫째 3인(요셉 바쎄벳, 엘르아잘, 삼마)에 못지않았으나
능력 면에서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23절).
고향의 향수로 베들레헴 우물물을 간절히 바라는 다윗 왕을 위해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물을 떠오지만,
다윗은 그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물을 마시지 않고
주님께 부어드림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그들과 同生共死 하리라 결단한다.
18-23, 아비사이와 브나야의 공적 :
①츠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사이는 삼십 인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②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세 용사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다윗은 그를 호위대장으로 삼았다.
⇒다윗에게는 그를 도와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운 부하들이 있었다.
앞에서는 다윗의 군대 지휘관 세 명과 30인 중의 세 용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그 세 명 중에 두 명의 이름과 그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다윗 곁에는 가장 출중한 삼 인 외에도 첫 삼인에 들지 않지만
다양한 지파에 속한 많은 용사들이 다윗과 함께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었다.
24-39, 용사들의 명단 :
24-39절에 서른일곱 명의 용사들 명단이 나열되고 있다.
⇒본문(24-39절)을 따를 경우 용사의 수는 도합 31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 37인이라는 수는 다음과 같이 산정되었을 것이다.
①첫 3인의 용사단(8-12절)과
②둘째 3인의 용사단(13-23절) 및
③세째 그룹의 31인의 용사단(24-39절)의 수효를 합하여 산정했을 것이다.
⇒유다 지파만 아니라 다양한 지파와 지역에서 용사들이 나왔고
이방 출신 용병들도 있다(24~39절).
출신과 인종과 배경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 아래 하나를 이루는 개방적인 공동체이다.
특히 이 명단에는 마땅히 들어가야 할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빠져 있다.
그는 기록할 필요가 없이 "위대한" 용사이거나 기록되어 서는 안 될,
그 나라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인 듯 보인다.
또한 명단의 마지막에는 다윗의 희생양인 헷 사람 우리야가 소개되고 있다.
한편 이 용사들의 명단에 '요압'(Joab)이 빠진 이유로서 우리는,
①요압이 全軍의 군대 장관이었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②그러나 또한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과 압살롬, 그리고 아마사 등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하였고,
아울러 솔로몬 왕을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본 명단에서 삭제되었으리라는 추측도 무시할 수 없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 용어로,
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어 ‘아제아제 (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입니다.
‘바라아제 (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 (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합니다.
4월 14일(월) 사무엘하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후에야(21:14)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They buried the bones of Saul and his son Jonathan in the tomb of Saul's father Kish, at Zela in Benjamin, and did everything the king commanded. After that, God answered prayer in behalf of the land.
그 후에야(After that)
아하레 켄(아하레 켄) אַחֲרֵי־כֵן
3651 310
그(3651) 켄(kên) כֵּן
어원 / 3559에서 유래한 불변사
관련 성경 / 옳다(출10:29, 민27:7), 명령하다(출39:43),올라가다(삼상9:13), 알다(대하32:31), 같다(겔42:11), 보다(삿6:22), 아니하다(느2:16), 나아가다(에4:16), 되다(전8:10). [부] 어떻게(민10:31), 마땅히(삼하13:12). [명] 후(창6:4, 41:31, 삼상9:13).
후에야(310) 아하르( ’achar) אַחַר
셀라
- 베냐민 지파의 땅이나(수 18:28),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들으시니라
- 사울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3년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과의 교제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적극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시
66:18; 사 59:2; 요일 3:21, 22).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If I had cherished sin in my heart, the Lord would not have listened;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But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you from your God; your sins have hidden his face from you, so that he will not hear.
요한일서 3:21- 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Dear friends, if our hearts do not condemn us, we have confidence before God.
and receive from him anything we ask, because we obey his commands and do what pleases him.
"그 후에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서로 소통(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날이 흐리고 소나기가 퍼붓는 날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가면 높은 하늘에는 해가 맑게 빛나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밝게 비추고 있을 때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 햇빛을 볼 수 없습니다.
빛나는 해를 하나님으로 구름과 손바닥을 죄라고 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죄"라고 하는 얼룩입니다.
얼룩은 반드시 깨끗하게 씨겨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인 14절 말씀을 보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 고 합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기도하는데,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는데 언제 들어주시는가?
‘그 후에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기도가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응답에 대한 분명한 원칙하나를 말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면 됩니다.
그 이전을 넘어 그 이후로 가면 됩니다.
그 이전 상황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오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면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굉장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21장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연거푸 삼년동안이나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오질 않습니다.
3년이나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없이 3년이 지났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나?
답답해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문제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값으로 지금 너희들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먼저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참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다윗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울이 살아있을 적에 한 행동이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그냥 그 사람만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울의 죄가 장성하여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라는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잊혀진 사건을 되살리실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실의 일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아예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사울의 학살이 추억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현실입니다.
둘째는 사울의 행동이 언약을 어기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일까요?
또 살인죄를 지은 것은 사울이니 사울만 벌하시면 될 것을, 왜 온 백성에게 이런 엄청난 벌을 내리시는 걸까요?
여호수아서 9장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며,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맞서 싸울 생각을 거두고, 다 헤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서 여호수아를 찾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청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꼼꼼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저들에게 속아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을 맺어 주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속은 것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저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400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사람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왜 저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아닌데, 그것도 선지자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은 가증한 것들 아닌가?
내가 왕이 된 이참에 아예 저들을 정리하리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2절)
결국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살지 못하도록 그들을 해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나 할까요? 성경은 이것을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민족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마땅하거늘, 그 맹세를 저버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민족주의적임 감정으로 400년 이상이나 같이 살고 있던 저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맹세를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씨앗입니다. 잘못 심은 씨앗입니다. 나중에 악한 열매로 돌아옵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다 댓가를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는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죄책감도 다 던져버리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감당하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죄였습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일방적으로 깨트린 하나님의 언약은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년 기근은 죄의 댓가라기 보다는 언약회복의 댓가 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화근이 되어서는 안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덕분에 내 자식들이 복을 받을지언정, 부모 때문에 화를 입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가장 자녀들에게 안 좋은 것이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자녀 3-4대까지 내려간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을 받거나, 우리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기근의 고통을 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이 다윗의 질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합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은 ‘나의 나라. 내가 다스리는 나라’ 가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업입니다.
깻잎 밭, 인삼 밭, 직장이나 사업이 여러분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 기업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소출이 풍성하고 땅을 더 사서 밭과 논이 늘어나고 인정받고 승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정한 기업은 밭이나 논, 직장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부모는 부자인데 자녀는 손을 대는 것마다 망해서 거지가 되는 것과, 부모는 가난한데 자녀는 갈수록 부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복입니까?
자녀가 잘되는 것이 복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자면 ‘나이 들어서 혼자 살겠다.
자녀들 힘들게 안 하겠다’ 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집에서 넓은 방에서 대접 받으면서 호강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업인 여러분을 복 주시고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인들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왜냐면 교인들이 목사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잘 되고 형통하고 복 많이 받는 것이 곧 목사가 복 받는 것입니다.
교인이 많아지는 것이 기업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저들은 은과 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배상금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는 말은 이스라엘중에 섞여 사는 자기들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족을 살해한 죄는 금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무참한 학살에 동참했던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할 장소로 “사울의 고향 기브아” 에서 목매달아 죽이되 “여호와 앞에서” 죽이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이로서 모든 죄와 원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 “여호와 앞에서”은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는 것이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인 3년 기근을 진정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언약 위반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언약을 회복하고 3년 기근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의 요구대로 사울 집안의 7명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저들에게 넘겨주었고, 저들은 그 일곱 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입니다.
사울 왕의 언약파기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정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일곱 아들에게 카메라를 비추어 봅니다.
저들 아들들의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들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저는 ‘이어짐’을 느꼈습니다.
누구의 탓 만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의 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어집니다.
사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울은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죽으면 그 책임도 끝납니까? 아니오! 이어집니다.
마치 부모님 사업이 잘되면 자녀가 외국 유학이라도 부담 없이 가지만,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이어가는 사울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죄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는 행동이 죄를 끊어버리는 행동입니다.
또 ‘리스바’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포함한 7사람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 왕의 첩 리스바는 바위에 굵은 베를 가져다가 펴고 죽은 7시체들의 곁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그 시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10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언제 부터입니까?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입니까?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입니다.
보리를 베는 봄부터 정상적인 우기인 가을까지는 약 6개월입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낮에는 공중의 새가, 밤에는 들짐승이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리스바는 아들의 시체가 포함된 7사람의 시체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낮에는 중동지방의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저녁에는 광야의 추위와 무서움을 이겨내며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가 무슨 비입니까?
3년 기근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지는 비입니다.
우기를 맞아 내리는 그런 비가 아니라 악인에 대한 형벌을 보시고, 공의의 심판을 보시고, 언약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표시로서 내리는 비입니다.
‘리스바’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새와 짐승의 위협을 막아내는 정성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시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보기에 흉할 정도로 뼈만 남았을 것이고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바’는 그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저들의 어머니이기도 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어머니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녀는 그냥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시체를 지킨 것 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라고 성경이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스바’의 행동의 핵심은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입니다.
그래서 ‘리스바’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이, 7명의 죽음이 아버지 사울의 죄의 댓가로 인한 징벌적인 죽음이 아니라 언약을 회복하고,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비를 오게 하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러한 ‘리스바’의 행동은 죄를 끊고 축복을 회복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해하게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다 이 ‘리스바’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리스바’의 행동은 또 다른 화해를 불러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윗 왕이,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침내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13-14절)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라고 합니다.
조상의 묘실에 장사합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성벽 위에 내다 걸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되어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뼈를 이장하여 가족의 묘실에 장사지내 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7명의 뼈도 같이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였습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준 것입니다.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아비의 묘에 장사하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도 국장에 참여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왕의 명대로 좇아 행했더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일은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해입니다.
또한 사울 집과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의 화목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브온 주민과의 화해도 됩니다.
사울이 자기 조상들과 자기 때문에 죽은 7명의 아들들과의 화목도 됩니다.
나아가서 다윗과 사울 집과의 화목도 됩니다.
사무엘하 21:14b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화해를 온전히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문과 가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힌 것을 온전히 풀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벧전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사이에도 막힌 것이 없어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와 막힌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사람사이에 막힌 것이 화해를 통해 허물어 졌을 때 그때 하나님과의 사이에 기도도 열립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그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는 방해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화해를 이루면 응답 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또 태풍이 비껴가고, 수확이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리스바’같은 여인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원수 갚는 일을 잘 합니다.
때론 원수 잘 갚는 사람을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은혜를 갚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시고, 그 은혜 갚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은 하늘의 자비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리스바’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무엘하 21:5-6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 학살(칼라누) 3615
칼라(kâlâh) כָּלָה
스트롱번호 3615
*멸하여(딤마) 1819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학살하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3615)
'멸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드'(1819)는 모두 '진멸하다', '멸망시키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브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울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진멸하려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은 '이방 세력 멸절'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충족시키고자 기브온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인간적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보복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여호와를 위하는 일은 그 목적과 실행 방법 및 실행
원칙이 공명 정대하고 선해야 한다.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 다시 바꿀 수 없었다(수 9:18).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 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 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삼하 21:1-14)
모든 종교에는 경전과 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안에도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교회의 교리가 조금씩 틀립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경전이 성경이라 합니다.
종교마다 경전이 기준인데 우리는
성경이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빗나가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해석의 각도에 따라 조금은 틀릴 수가 있지만 중요한 맥은 똑같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원자, 주님이라 하고 이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부활의 능력 없이는 구원을 체험할 수 없는 거에요.
이것은 말씀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교인들 즉
거듭난 식구들이 기도응답을 받아야 되요.
기도응답의 체험없이는 신앙생활에 힘이 없어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축복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전달 되어지는 증인이 되어야 되요.
말씀과 기도와 전도를 누리는 것을 오늘의 축복이라 합니다.
말씀, 기도, 전도가 맞물려 증인이 되면 신앙생활이 힘이 있고
역동적으로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나의 감정, 기준, 체질, 생각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전도의 증인되는 오늘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왜 기도하는가? – 자녀의 특권
오늘 본문속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조건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선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 외에는 윤리, 도덕이 좋아도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만있어도 천국가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는 언약의 백성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장은
불신자나 신자나 똑같이 밥먹고 일하고 학교다니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 이지만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했어요.
신자의 삶의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에요.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게 신자의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너무 많아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아야 되고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몸에도 정신에도 옵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문제가 문제이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고 해결 못한다 할지라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이 기도인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기도에요. 롬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가 다른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즉각
우리와 눈동자를 맞춰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과 모든 특권을 누구에게 줬어요? 아들에게 허락하신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 아버지의 권세 가지고 이곳에 오신 줄 믿습니다. 이것을 증거하시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연합의 비밀이 기도라는 겁니다. 요14:13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 성자 제2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리고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다른것이 아니고 성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의
하나되는 연합의 비밀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할 때 성삼위 하나님은 이미 영광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한다는 자체가
축복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문제가 아닌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어요. 여러분, 축복중의
축복은 마음의 평안일 줄로 믿습니다. 가난해도, 못 배워도, 병들어도 괜찮아요 내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차고 넘치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 될 줄로 믿습니다. 잠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저는 죽을 때까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속에 거하는 신앙, 언약적 신앙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영적인
힘도 길러서 육신의 피곤함도 덜고 지혜도 갖고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함 받지 마시고 또 체력도 건강하시고 경제력도 있고 사람과의
만남의 축복도 있는 5력의 증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응답은 우리가 기도할때 No, Yes, Wait 이렇게
3가지 결론으로 주십니다.
2. 위기 속의 다윗 (삼하 21:1)
오늘 다윗이 위기를 당했어요.
다윗이 왕이 된 후 나라가 3년동안 기근에 처했어요.
3000년전 농경시대에 다윗의 나라에 3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 재앙입니다.
그런 재앙속에 다윗왕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몸부림을 치다가 3년이 되어서 하나님앞에 나아갔다 했어요.
삼하 21:1에 “다윗이 여호와앞에 간구하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했어요.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 확실하다면 살아가면서 문제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절대 절망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소망이 기도속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기도는 우리의 안식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 남편, 돈이 안식이 아니에요… 우리의 기도속에 있는 안식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있고 기대감이 있고 제자와 하나님의 일꾼이 될 확률이 있는 거에요.
오늘 다윗이 여호와앞에 나아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삼하 21:1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울 집안 때문에 너희 민족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십니다.
문제를 기도속으로 가지고 가보세요.
하나님께서 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브온 땅에 달려가 물어봅니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삼하 21:3에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하니” 그리고 4절 마지막에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말합니다.
5-6절에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그렇게 다윗은 사울의
후손 일곱 사람을 내어주고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을 동시에 죽입니다.
일곱 사람
- 리스바가 낳은 두 아들(21:8)
1. 알모니
2. 므비보셋
- 아드리엘의 5 아들
그런 후
10-11절에 “사울의 첩 리스바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다윗이 감동을 받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그 일곱명의 시체를 가져다가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합장을 해서 장사를 치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 한것도 내가 지고가면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친히 감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삼하 21장에 나온
기근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었던 다윗의 마음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의 마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이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사울이 잘못한 것도 본인의 죄값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했던 다윗처럼, 또 왕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던 많은 동역자들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세계복음화의 237개국을 향한 주역자의 교회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우리를 남은 자로 남을 자로 남길 자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참된 기도로
축복하옵소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과 일치되는 시선으로 축복하옵소서.
내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참된 기도로 축복하옵소서.
사무엘하 1-10장 / 다윗 왕이 되는 과정, 업적
사무엘하 11-20장 / 다윗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 시련
사무엘하 21-24장 / 앞부분에서 누락된 사건의 추가 기록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있었던 3년 기근과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을 처형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기름 부어 세운 다윗 왕의
통치시대에 3년이나 기근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생각에 따라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합당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로 인함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멸하라”고 명하셨던 가나안 족속 중 일부였던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기 위해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같은 징계를 내리신 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그들의 조상인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저버린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을
쉽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그들과는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단단히 명령하셨습니다(신 7:1-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데서 온
사람들로 위장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과 언약을 맺고 말았습니다(수 9:3-21).
하지만 그 언약은 속아서 맺은
언약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었기에 이미 맺은 이상,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했습니다.
만일 그 언약을 어긴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2절에 기록된 것처럼, 민족적인 배타성이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는
악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사울이 이것을 회개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간이나 기근의 재앙이 임하게 하심으로 다윗과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죄를 깨달아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해결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련을 죄의 결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욥의
경우처럼, 어떤 특별한 죄가 없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 시련이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그릇된
행위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시련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산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이전의 죄악 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양심이 무뎌져 그러한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할 경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여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알 수 없는 시련이
계속된다면 여러분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아 무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질 만한 일이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없는지 살피시기 바랍니다(전 7:14).
그리고 만일 해결하지 않은 죄가 생각난다면,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당면한 시련을 속히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죄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징계에 의한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과 근심 걱정 염려들이 나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다시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의 고난을 죄
문제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응답을 받으셨다면, 더욱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기브온 사람들은 4절에서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악행으로 인해
파기되었던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언약이 바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5-6절에,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내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들을 죽임으로써 사울로 인해 깨어진 언약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았다면 그 원한은 계속 돌고 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깨어진 언약이 회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속죄의 제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므로 깨어졌던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언약이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죗값은 은금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오직 목숨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아
주셨기에 잠시 실수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더라도 우리의 목숨으로 갚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함으로써 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울의 죄악과 그의 후손들의 희생을 보면서 죄의 삯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돌아보며,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로서 믿음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7-9절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생각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속죄 제물 대상에서 제외하고 사울의 두 아들과
사울의 외손자 다섯 아들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의 목숨으로 죗값을 갚게 했습니다.
사울의 2 아들
사울의 외손자 5
그러자 14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심판하시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즉시 바로잡는 공동체를 축복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람 간의 약속이라고
해도 그것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고의로 어기고 잘 지키지 않는 사회는 거짓되고 부패한 사회로서 그러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간의 약속이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때는 그들이
더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심판의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을 신중하게 하고, 이미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도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나는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지, 또, 약속을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믿음으로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울 왕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후손 일곱 명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알게, 모르게 사울처럼 행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므비보셋을 살려준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언약으로 인해 회개하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작은 약속이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반드시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월 12일(토) 사무엘하 16-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시므이의 저주(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David then said to Abishai and all his officials, "My
son, who is of my own flesh, is trying to take my life. How much more,
then, this Benjamite! Leave him alone; let him curse, for the LORD has
told him to.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반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급하게 떠나게 됩니다.
다윗의 일행이 바후림이란 지역에 도착했을 무렵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습니다.
비록 다윗이 급하게 떠나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왕입니다.
신하들이 시므이를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할 때 다윗은 신하들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이(Shimʽiy) שִׁמְעִי
스트롱번호 8096
어원 / 80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
1. 고유명사 유명한 : 이스라엘인의 이름 ‘시므이’, 출6:17, 민3:18, 삼하16:5, 왕상1:8, 4:18, 에2:5.
-
관련 성경 / 시므이(출 6:17, 민 3:18, 삼하 16:5, 왕상 1:8, 4:18, 에 2:5).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shêmaʽ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들음, 욥 42:5, 시 18:45(44)
-
2. 명사, 남성 명성, 풍문, 보고, 출 23:1.
-
3. 명사, 남성 음악, 노래, 시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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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 사 66:19), 소문(욥 28:22, 렘 37:5, 합 3:2), 큰소리(시 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1. 곡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게라’. 2. 돌아다니다. 3. 소멸하다 4. 창 46:21. 5. 삿 3:15.
구약 성경 / 9회 사용
- 관련 성경 / 게라(창 46:21, 삿 3:15, 삼하 16:5, 대상 8:3,5).
* 1626. גֵּרָה
스트롱번호 1626
- 어원 / 1641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낱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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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사, 여성 히브리의 가장 작은 무게 단위 [한 세겔의 20분의 1], 출30:13, 레27:25, 민3:4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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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게라(출30:13, 민3:47, 겔45:12).
사무엘하 16: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다윗이 바후림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사울의 친족인 게라의 아들이며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바후림은 시므이의 고향으로서 사울의 가문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다윗이 싫었습니다.
사울 가문은 베냐민 지파이고 다윗은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시므이는 싫었습니다.
태생 자체가 다릅니다.
시므이는 자신의 아버지 게라로부터 온전한 신앙을 전수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정착하여 온전한 신앙을 배워야 하는데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니 제대로 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니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므이가 온전한 신앙을 배웠다면 다윗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온전하게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못하니 인간이 원해서 세운 자신의 가문에서 나온 사울 왕을 추대하고 믿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위시키고 다윗 왕을 세웠습니다.
시므이도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압살롬에 의해서 다윗이 쫓겨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은 인간이 요구하여 세운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욕적인 뜻대로 살았습니다.
예배도 자신 마음대로 드렸고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시므이는 이런 자의 신앙을 따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 왕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럼 다윗 왕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는 사울 왕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인간을 구원자로 믿고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며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정착된 신앙입니다.
시므이의 이름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시므이가 다윗 왕을 쫓아다니면서 저주했던 것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시므이를 저주하게 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죽고 난 후에 솔로몬에게 죽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저주를 모면하여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반드시 자신 생전에 하나님이 갚아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아닌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때가 되매 저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기회를 보면서 시므이처럼 주님을 배반하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모욕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으면 안 됩니다.
시므이도 다윗 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다윗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는 다윗에게만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 왕을 따르던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표상입니다.
사울의 신앙을 따라가면서 자신만 높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자입니다.
이런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저주합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시므이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은 흔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를 핍박합니다.
저주하고 돌을 던지면서 괴롭힙니다.
그것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저주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후벼대면서 고통을 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들추어내어 수치를 줍니다.
이런 자의 신앙이 시므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도 시므이와 같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모욕과 수치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성도들이 핍박받고 순교했습니다.
스데반도 같은 민족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시므이의 신앙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시므이가 저주하는데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떠나가라고 합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은 비통합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가는 신세인데 그 틈을 타서 시므이는 사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악한 자여 : 벨리야알 1100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
시므이는 다윗에게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저주합니다.
파멸될 자이며 더 이상 쓸모없는 왕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구원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주님을 무가치한 자로 여기고 너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냐고 떠들어댔습니다.
다윗과 시므이(사무엘하 16:5-8)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들 중에는 다윗에 대한 분개심이 아직도 계속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울의 친척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므이는 미갈과 관련이 있었던 바후림을 지나갈 때에 분명한 말로 다윗에게 “돌 투족을 당하고 피흘린 자”라는 저주를
했는데, 이러한 저주를 받으면서도 다윗은 이를 완전히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는 자기 호위병들이 시므이를 처치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마저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륜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사랑과 존경도 받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사울의 일가에게 존경을 기대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는 어떤
위인이었는지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시므이는 하나님께 기쁘신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전연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감정으로 “다윗이란 놈은 비루하고 정권야욕에 눈이 어둡고 우리 베냐민 지파의 원수요 사울의 족속을 죽인 살인마이다”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란에 대해서는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고
은근히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시므이는 압살롬의 왕국이 견고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마침내 사울의 정권은 붕괴되고 압살롬의 왕국은 후새의 모략대로 따르니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7:14).
시므이야말로 평생을 두고 하나님을 단 한 번이라도 찾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저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살다 끝낸 사람입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경을 보면 다윗 왕같이 마음이 어질고 선량한 분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든 분입니다(행 13:22).
그러나 그도 사람의 아들이기에 밧세바로 인한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애통하는 시편 51편의 회개의 기도를 다 들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후 다윗의 등불을 여전히 끄지
않겠다고 언약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에서 탄생하셨습니다(마 1:1).
다윗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성왕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그러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본문에 저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계속하여 저주했습니다(삼하
16:5).
골리앗 장군이 소년 다윗을 저주할 때에는 자기가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저주했습니다(삼상 17:43).
그러나 시므이는 다윗 왕을 연발로 저주했습니다.
2. 독한 말로 저주했습니다(왕상 2:8).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을 독한
말로 저주했으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왕상 2:44).
3.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면서 저주했습니다(삼하
16:13).
이것은 포학과 야비가 뒤섞인 저주 방법입니다.
4. 피흘린 자, 비루한 자라고 저주했습니다(삼하 16:7).
피흘린 자는 살인자란 뜻이고, 비루한 자란 비겁한 자란 뜻입니다.
5.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저주했습니다(삼하 16:8).
“여호와께서” 라고 두 번씩이나 들먹거렸습니다.
성경 중에 시므이같이 남을 독한 말로 저주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때 아비새
장군은 참다못해 “왕이여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데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관용의
미덕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과연 다윗은 원수를 축복 하였기에 축복을 받았고, 시므이는 남을 저주하므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시므이의 큰 잘못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중을 저주한 죄입니다.
그것도 다윗의 곤경을 틈타서 악담하며
저주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끝나고 다윗은 개선장군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맨
먼저 환영나온 분이 시므이였습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 1,000명과 함께 요단강을 밟고 건너와서 다윗 왕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마침 다윗은 나룻배를 타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시므이는 왕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사무엘하 19:19-20
“내
주여 원컨데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이
때 옆에 있던 아비새 장군이 말하기를 “왕이여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리이까”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같은 날에 어찌 피를 보겠느냐”
맹세하므로 살려주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하나님 잘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 솔로몬을 불러서 여러 가지
유언을 하다가 맨 나중에 시므이에 대해서 유언을 했습니다.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랄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한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그 후 다윗 왕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솔로몬이
시므이를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시므이가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러하겠나이다”
그리고 시므이는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3년 후 하루는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들을 자기 주인에 대한 왕의 금족령을 혹시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시므이는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무 생각없이 가드 아기스에게 가서 두 종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렸습니다.
열왕기상 2:42-44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또 내 부친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브나야에게 명하매
칼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품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어도 하나님 품을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그 예루살렘을 아무 생각없이 떠났기에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알고 생활합시다.
오늘은 시므이의 실패의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시므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몰랐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했습니다.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악한 시므이를 선대한 다윗 왕의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관용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시므이의 저주
이제 다윗은 도망자다.
다윗은 비록 이빨빠진 호랑이지만 한때 전쟁의 맹수였다.
예루살렘성도 난공불락인 요새이다.
싸워서 이길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손에 아비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아들과 맞서 싸울수도 없고 아들의 손에 죽을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이다.
더군다나 아들 압살롬은 아비를 죽이고도 남는 놈이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은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삶속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두고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의 반역에 그는 속수무책 도망할수 밖에 없다.
다윗과 따르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서 약4km 떨어진 바후림이란 곳에 도착했을때 시므이란 작자가 따라 붙었다.
시므이란 작자는 무너진 사울왕가가 존립했더라면 동경해마지 않는 소위 특권층의 권력과 삶을 누릴수 있는 최고 엘리트 가문 베냐민지파의 인물이었다.
시므이는 사울왕가가 다윗왕가에게 왕권을 일방적으로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초야에 묻혀있으면서도 사울왕가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자신의 지파 베냐민지파의 결속을 다져오고 있었다.
베냐민지파쪽에서 보면 분명 다윗은 적법한 왕이 아니다.
한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잠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원래는 베냐민 지파가 권력의 중심이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누렸던 그 기득권에 미련이 너무 많았다.
사실, 사울이 죽고 왕권을 두고 다윗 가문과 사울 가문사이에 물밑에서는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바후림에서 다윗은 필연인지 우연인지 자신의 간접적 사연이 있었던 곳임을 기억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울의 딸인 조강지처 미갈이 필요했었다.
잊혀졌던 여자였다.
사실 미갈은 다윗의 조강지처였으나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도망자생활을 할때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에게 시집을 보내 버렸다.
사울은 악한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집안과 다윗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했었다.
다윗이 후에 왕이 되어 정치적 의도로 미갈을 다시 찾아 올때, 이곳은 그녀의 남편인 발디엘이 울면서 여기 바후림까지 쫒아 왔던 사연많고 눈물많은 곳이다.
발디엘은 미갈을 사랑했나보다.
남자의 눈물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꽃과 같은 시간(화양연화)을 함께 보낸 그 시절 미갈과 발디엘은 그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별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무엇이 그들을 갈라 놓았나?
우연챦게도 미갈과 발디엘을 갈라놓은 이장소에서 다윗은 시므이에게 저주 세례를 받는다.
시므이는 정치계에서 밀려난 자이지만 다윗에게 숙청대상이며 경계대상이다.
시므이는 분노를 쏟아낸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여호와께서 갚아 주셨구나.네가 사울왕의 자리를 빼앗았으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네 아들 압살롬에게 주었구나 . 너는 사람을 죽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도다.”
시므이는 착각도 단단히 하고 있다.
사울의 피는 사울이 자초한것이다.
다윗과 무관하다.
다윗의 다음 왕은 솔로몬이지 압살롬이 아니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 건가?
그 저주안에 감추어진 이루어지지 못한 갈망, 좌절된 소망에 그의 분노는 폭발했다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모욕을 준다.
백성이 다 듣고 있다
이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당장 건너가서 저 놈의 목을 치게 하소서!
“스루야의 아들들아 이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다윗은 자신의 죄때문에 일어난 일에 누구를 탓할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하며 자신의 신세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다윗은 악을 선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한것이다.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나는 중에도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며 따라오면서까지 저주를 퍼붓는다.
압살롬의 난이 진압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할때 요단을 건너는중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사울 집안의 종 시바와 아들 15명, 종 20명과 함께 대규모 환영 퍼레이드를 하며 다윗을 만나 절을 하고 용서를 빌었다.
다윗이 왕권이 회복되니 제일 먼저 마중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므이에 대해서 다윗이 용서를 했을까?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권력 이양을 할때 궁중에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므이에 대해서 주의를 준다.
다윗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시므이를 평생 의식한 것이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하자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 살며 다시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루살렘 안에서, 솔로몬 눈앞에서 유배생활 하란 말이다.
시므이는 이 약속을 3년 동안 지켰다.
그러나 시므이의 종들이 가드 임금 마아카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시므이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벗어나 종들을 잡아왔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솔로몬의 명령으로 군대 장관이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솔로몬의 명령을 깜박 잊은건가?
아니면 설마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임금말이 말같지 않게 여겼나?
정확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생명줄인 예루살렘을 벗어나고야 말았다.
다윗은 시므이 사건을 덮고 지나갔다.
유다가 완전히 망한후에도 사람들은 다윗왕조의 부활을 꿈꿔왔다.
다윗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이다.
그때그때 마다 자신이 판단하고 칼이 지나갔으면 그 백성은 다윗을 잊었을 것이다.
다윗 왕국은 인간의 쟁취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개인적 감정보다 왕국의 가치가 우선시 된 왕국이었다.
내가 주도하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되어야겠다.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대처(사무엘하 16:5-14)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 왕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 600여명 가량은 이제 베냐민 땅 바후림이라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울왕의 친족(친척)되는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는 다윗과 다윗일행을 저주합니다.
저주하면서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다윗과 일행을 향해 흩날립니다.
다윗의 일행 가까이서는 자신이 없었던지 좀 먼발치에서 떨어져 산비탈로 일행을 따라 내려가면서 다윗과 일행을 저주합니다.
분명 낙담과 슬픔에 잠겨있을 다윗과 일행들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말그대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시므이 혼자서 다윗을 저주했는지, 아니면 베냐민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제일 선봉에서 서서 비방하고 저주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므이 혼자 했다면 미쳤거나, 아니면 간이 배밖으로 나온것 둘중에 하나 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윗에 대한 증오가 너무 커서, 에스더 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의 각오로 다윗과 무리들을 저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므이는 다윗과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합니다.
다윗이 실력이 죽지 않았다면, 몸이 기억한다면, 그 옛날 골리앗을 무찌를 때 처럼 물매돌 5개까지 필요없겠고, 짱돌 2-3개 정도면 시므이 이마에 정확하게 꽂아 넣을텐데 말입니다.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 행위….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 모든 소유물, 심지어 그의 가축들까지 모두 돌에 맞아 죽고 불살라 졌습니다.
이처럼 돌을 던지는 행위는 죄인을 죽음으로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이미 죄 지은자, 죽어 마땅한 자로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돌을 던지며 말하기를 “피를 흘린자, 사악한 자”로 다윗을 규정하며 “가거라 가거라” 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니 Get out – Get out ..꺼져라 꺼져라 우리 사울왕을 베출한 베냐민 땅 바후림에서 후딱 꺼지라는 말입니다.
시므이처럼 ‘시’자로 시작하는 성경인물들의 이름이 아주 별로 입니다.
시므리도 별로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조 ..여로보암.. 어쩌구.. 시므리, 오므리…. 누가누가 더 악하나 악한왕 끝판왕 아합으로 이어지는 ..7일 천하로 끝난 왕, 나는 죄를 심으리의 시므리 , 나는 오므리..왕..아주 별로입니다.
아들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모두 처형당한 인간적으로 볼때 너무 안됬지만 비운의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중에도 있지요.. 잔해하는 기계, 세겜과 하몰추장, 감언이설로 할례받게 한 마을 남자들을 모조리 무자비하게 칼로 집단 살인을 저지른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 그리고 오늘 본문의 시므이, 결국 본색을 드러낸 므비보셋의 종 시바까지.. 이 시바는 발음에 유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이유?
첫째, 사울의 피를 갚아주신다는 것(8절)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지금 도망하는 이유는 사울의 가정에 흘린 피를 여호와께서 갚아준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울 족속의 모든피를 말합니다.
시므이가 직접적인 언급을 하진 않지만, 비단 사울왕의 죽음뿐만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죽음도 모두 다윗 탓으로 돌리고 있는 듯 합니다.
요압이 죽인 아브넬의 죽음도 다윗 탓이고, 낮잠을 자다 목이 잘려 머리만 다윗에게로 보내진 이스보셋의 죽음도 레갑과 바아나의 일탈이 아닌 다윗이 사주한것으로 믿고 있는듯 모든 피를 다윗이 흘린것으로 치부하며 모함합니다.
둘째, 친족 사울 왕위를 다윗이 빼앗은 것 때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이유는 친족이었던 사울의 왕위를 다윗이 찬탈, 강탈 한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친족이었던 사울이 왕으로 있을때 자신도 한자리 꾀찰수 있었을 것인데, 모든 것이 숲으로 돌아가 버린 그 원흉이 다윗에게 있다고 보는것 같습니다.
셋째, 압살롬이 왕위를 빼앗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
시므이 그가 다윗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하며 비방하는 것을 실행에 옴긴 결정적인 이유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가 넘어 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확신, 자기 자신의 손해, 정치적 상황을 보니 충분히 다윗을 저주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깔린듯 합니다.
그러니 다윗과 일행을 보자마자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붙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시므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자인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정보와 판단으로 다윗을 정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판것입니다.
즉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시므이 그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사무엘하 19:16-20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다윗왕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며 의기 양양할때는 언제고 이제 180도 돌변한 모습입니다.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다윗 일행이 600명 가량 인데, 그보다 많은 사람 숫자1000명을 데리고 다윗에게 나아온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요?
혼자 나서기 불안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천명 정도는 급히 모을 수 있는 자신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과시하며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압살롬이 전투에서 죽고 다시 전세가 역전된 것을 보게 되자 시므이는 번개같이 태세 전환하며 다윗 왕앞에 바짝 엎드립니다.
이처럼 그는 처세에 능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한나라의 왕에게 대들고, 여러가지로 주제 넘게 선 넘다가 후에는 진짜 선을 넘었다가 죽게됩니다.
남은 평생 예루살렘 지역에서만 살아야하는 솔로몬왕의 자택연금과 같은 명령을 어기고 예루살렘 지역을 넘었던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당해 죽게 됩니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의 반응과 대처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를 보자 화가 치민 아비새가 건너 가서 시므이의 머리를 배도록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10-11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시므이의 험한 욕설과 저주는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로 고스란히 자신의 죄로 인해 야기된 것임을 다윗은 인정하며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대한 다윗의 대처는 무엇을 하는것이 아니라 그저 시므이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주에 대한 다윗의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비방과 저주가 부당한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헤하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신실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난과 저주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었고, 신앙적 대처였습니다.
다윗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야! 하지 않고 스루야의 아들들아! 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아비새 뿐만 아니라 요압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스루야의 아들들 : 요압, 아비새, 아사헬 (아브넬 쫒다가 죽임당함)]
개인적인 생각은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과 자신의 해후를 도운 요압의 어설픈 중재로 이 사단이 난것에 조금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짜증아닌 짜증을 아비새뿐만 아니라 요압에게도 부린것 같습니다.
의문의 패를 당한 요압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것도 베냐민 지파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시므이 같은 정치적 반대 급부 세력을 만들게 되는, 다윗에게는 정치적으로도 큰 곤경에 빠지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한나라의 훌륭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뒤끝 장난아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요압도 나이 많아 거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백발이 성성한 요압이 평안히 죽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인간 진상 시므이도 제거 대상입니다.
나이 많은 백발의 시므이도 피를 흘리고 죽어 스올(무덤)에 내려가도록 잘 처리하라고 솔로몬에 당부아닌 당부를 하고는 다윗이 숨을 거둡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10절 중반)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로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죄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1-3절의 기록을 보면..(PPT)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교살한 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 다윗을 책망한 후에 다윗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지난 자신의 죄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나라의 왕으로서 국운이 달린 전쟁에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나태하게 궁에 남아 낮잠을 자다 일어나 산책을 하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됩니다. 그녀를 보고 음욕을 품은것에 그치지 않고, 왕의 지위를 이용해 그녀를 데려다 통간합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남편인 우리야를 데려와 교묘히 일을 꾸미지만 허사로 돌아갑니다. 충직한 우리아를 맹렬한 전장터 맨앞에 보내어 교살 시킵니다. 큰 아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한 것을 듣고는 그저 버럭 화만 낼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딸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터인데 딸 다말을 다윗이 위로했다는 소리 못들어 봤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없는 외모로는 요셉도, 모세도, 그리고 자신 다윗도 압살하는 압살롬이었기에, 자신의 뒤어 왕위에 올라야 했기에,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눈감아 버린 것.. 이 모든 일들, 자신의 지난 과오와 죄과를 다윗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지금 까지 겪어온 일련의 일들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 다윗의 집안에 칼로 인한 재난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게 될 것
2.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일으킬 것
3. 다윗의 아내들을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백주 대낮에 동침할 것
다윗은 은밀하게 그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드러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언들은 암논의 다말 강간, 압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론의 반란과 다윗의 후궁 10명과의 동침, 솔로몬의 아도니아의 처형 사건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3:1-29, 16:21, 18:14-15, 왕상 2:24-25).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탐욕과 거짓, 행음과 살인으로 기울어진 데 대한 다윗 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들입니다.
죄는 이처럼 무서운 형벌이 뒤따른 사실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 한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들이 무섭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인구조사를 범죄함으로 3일동안 7만명이나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아담 한사람의 범죄로 인해 죄가 땅에 들어 옵니다. 7만명이 뭡니까?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해 집니다.
그러나 한사람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생명 얻게 되는, 구원얻게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던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한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땅에 오시어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에 십자가 피 흘려 주시고 죄사함 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값진 하나님의 약속을 친히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 예수그리스도를 선물로, 은혜로 받았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저버리고 죄짓고, 정욕과 세상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 옛사람을 다시 입겠습니까? (개) 토한것을 다시먹고, (돼지) 몸을 씻고도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겠습니까? 아니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겠습니까? 죄의 유혹은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말씀합니다. 이제 선하신 주님의 음성을 따라, 그 나팔소리를 듣고 구름기둥과 불기둥 바라보면 인도하심만 따라 갑시다.
다윗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없는 모진 비방과 인신 공격을 당할 때가 생긴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다윗의 반응과 대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다시금 헤아려 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믿음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늘 신실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윗이 고난과 저주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적 대처이기를 기도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낙담하고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에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품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만 바라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4월 11일(금) 사무엘하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압살롬의 반역(15: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Then Absalom sent secret messengers throughout the tribes of Israel to say, "As soon as you hear the sound of the trumpets, then say, 'Absalom is king in Hebron.'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1. 다윗 + 아히노암(이스르엘 여인) = 암논
* 친구 <요나답>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2. 다윗 + 아비가일(갈멜사람 나발의 나내) = 길르압
3. 다윗 + 마아가(그술 왕 달매의 딸) = 압살롬, 다말(딸)
4. 다윗 + 학깃 = 아도니야
5. 다윗 + 아비달 = 스바댜
4년에 이르는 압살롬의 반역 준비와 헤브론에서의 반란 봉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절에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위병’이란 왕이 행차할 때 앞서 달리며 길을 여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호위병까지 둔 것은, 반역에 필요한 기초적인 병력을 갖춤과 동시에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차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이방의 왕들이 자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병거를 타고 많은 호위병을 거느리며 행차하는 관례를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은 3년간 ‘그술’에
머물면서 외조부인 그술 왕의 화려한 행차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모습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신정국가의 왕위 계승자로서 위엄과 신비감을 더하고자 이방의 관습을 끌어들이며 자신을 포장할 것이 아니라, 인품과 경건을
쌓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품과 경건을 훈련하는 대신 외식하는 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6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의롭고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에 속한 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포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고, 선으로 위장된 거짓으로 진리를 파괴하고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타락시킵니다.
압살롬의 미혹에 넘어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도 모두가 결국에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18:7-10).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신들을 경건한 자처럼 위장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에 있는 위선과 악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마 23:25-28).
그리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마 12:34).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아는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압살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에 빠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듯이
우리도 그러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3절.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라며 다윗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부추겼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당신 말은 내가 보기에도 옳고 정당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왕의 귀에
들어가기나 할 것 같소?”라는 뜻입니다.
4절에 “내가 이 나라의 재판관이 된다면 소송할 일이 있어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앞에 와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오”라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자기 아버지인 다윗 왕을 직무 유기자로 무고하게 비방함으로써
백성들과 다윗 사이를 이간질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5절에, 누가 앞에 와서 그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하면 손을 내밀어 붙잡아 일으키며 입을 맞추어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자를
일으켜 붙들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그를 동료나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겸손한 행동은 그것을 본
사람들에 의해 온 이스라엘로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믿고 따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지도자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당시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란의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6절에,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하여 성도들을 교회에서 훔쳐가는 악한
마귀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된 사실을 믿게 하여 다윗을 신뢰하는 그들의 마음을 훔쳐갔습니다.
이시대에도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 우리 주변을 서성입니다.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압살롬처럼 우리의 마음을 훔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훔쳐서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간계를 깨닫지도
못한 채 망하고 말 것입니다.
7절 이하에 압살롬은 드디어 반역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서슴없이 도용합니다.
그는 예전에 암논을 살해할 때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4년 동안 은밀하게 반역을 준비해 왔습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다윗에게 향해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려놓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14절에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까지 포섭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로서, 아마도 압살롬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였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를 반역에 끌어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반역의 준비를 마친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며 다윗을 속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헤브론으로 간다고 말하면 다윗이 막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신실한 신앙을 악용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은 사탄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면 형사상 무거운 형벌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압살롬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의하며 삼가하기를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압살롬의 치밀한 계획과 자기 의로 가득찬 복수심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설득시켜
헤브론에 가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데 성공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1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압살롬이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일을 하는 자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작업을 합니다.(6절)
그래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민심을 움직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압살롬이
꾸민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했다고 나옵니다.(11절)
압살롬이라는 인물이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 하고
언변과 지혜가 뛰어나 보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군중심리가 얼마나 낭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도 포섭하고 다윗 왕을 모반하는 일에 동참시키는 것을 보면 민심을 움직이는
압살롬의 계략이 탁월하고 시기적절하게 기회를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나의 삶속에서 압살롬과 같이 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은 뒷전에 미루고 내가 계획을 세우고 이루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이루어 진다해도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지 물어보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압살롬처럼 나를 위하여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묵상을 하는 가운데 다가옵니다.
한 눈에 보는 압살롬 이야기(13-18장)
13장 / 압살롬이 여동생 다말을 범한 암논을 죽이다.
14장 / 다윗이 도망간 압살롬을 용서하다
15장 /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하다
16장 / 압살롬의 책사 아히도벨의 계략
17장 / 아히도벨의 계략 실패와 죽음
18장 / 압살롬의 죽음과 다윗의 통곡
이 기도문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본 회의록에 속기된 것으로서 임시의장을 맡으신 이승만 박사는 단장 의장석에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여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제헌국회 기도문이다.
1948년5월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록 기록: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의장석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하고, 이윤영 의원(목사)이 기도했다.
임시의장 (이승만)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 기도 : (일동기립)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이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압살롬은,
자기가 탈 수레와 말 여러 필을 마련하고, 호위병도 50명이나 거느렸습니다.
압살롬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 가에 서 있으면서 소송할 일이 있어서, 판결을 받으려고 왕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왕이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모든 송사를 다 들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대신 풀어줄 사람도 다윗이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나라의 재판관이 되면, 자기가 나서서 공정하게 판결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누가 가까이 와서,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하면, 그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곤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윗에 대한 불만은 쌓여가고 압살롬에 대한 인기는 높아만 갔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해 받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은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아버지 다윗의 무관심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 사랑 결핍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 압살롬을 살인자에 반역자가 되게 했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버드란트 러셀, 샤르트르, 카뮈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과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종교와 관련하여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방금 언급된 사람들이 모두 무신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이들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거나, 설령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폴 비츠’라는 저명한 심리학자요 뉴욕대학교 심리학교수가 있습니다.
폴 비츠는 무신론자들의 성장 배경 연구를 통해 무신론과 심리학의 관계를 설정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유명한 책이 《Faith of the fatherless》,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의 심리적 배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온갖 상처와 안 좋은 기억들, 부정적 태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지나친 분노와 열등감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지만 아버지와의 따뜻한 대화나 스킨십이 없었던 아이들 역시 성격이
삐뚤어지고,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15:7-12절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헤브론에서 왕이 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4년이 지났습니다.
압살롬의 인기는 점점 높아만 갔고, 다윗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이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헤브론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이 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었다고 뻥을
칩니다. 압살롬이 시리아의 그술(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에, 여호와 자기를 다시 예루살렘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시면, 헤브론으로
가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데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겠다고 하는데 안 보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압살롬의 요청을 듣고 보낸 거지요. 다윗의 허락을 받은 압살롬은 곧바로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첩자들을 보내서, 나팔 소리가 나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고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200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의 손님으로 초청받은 것일 뿐이며, 압살롬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큰 해를 입힐 사람들은 아닙니다.
압살롬은 또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참모이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인 길로에서 올라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에게 큰 위협이 될 인물입니다.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입니다. 아히도벨은 길로에서 정규적인 제사 일을 맡아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점점 커지니,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도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사무엘하 15:13-18절은 압살롬이 반역한 소식을 듣고 다윗이 도망친 내용입니다.
전령 한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모두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서둘러,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고 말했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신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기에 다윗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왕은 왕궁을 지킬 후궁 열 명만 남겨 놓고, 온 가족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왕이 먼저 가고, 모든 백성이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벧메르학에 이르자, 모두 멈추었습니다. 왕의 신하들이 모두 왕 곁에 서 있는 동안에,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이 왕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가드에서부터 왕을 따라 온 모든 가드 군인 600명도 왕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사무엘하 15:19-23절은 도망가는 다윗을 따라 나선 가드 사람 잇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잇대는 블레셋 가드 출신의 군인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부터 함께 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울을 피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을 때 만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잇대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다윗 곁에서 큰 힘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다윗은 잇대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도망 다니며 함께 고생해봤기 때문에 지금 이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잇대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새 왕을 모시고 사는 게 편할 거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실하심으로 잇대와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줍니다.
그러나 잇대는 다윗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잇대를 보는 순간,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자기를 따르지 말고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에 죽어도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대답한 며느리 룻 말입니다. 잇대는 룻 처럼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다윗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요!
그리하여 가드 사람 잇대도 자기의 부하들과 자기에게 딸린 아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다윗과 함께 건너 갔습니다. 물론 잇대가 가장 먼저 건너갔지요. 이렇게 해서, 다윗의 부하들이 모두 그의 앞을 지나갈 때에, 온 땅이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니, 그의 부하도 모두 그의 앞을 지나서, 광야 쪽으로 행군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5:24-29은 다윗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언약궤를 들고 온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돌려보내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이 반역해서 도망가는 중인데, 사실 한 사람이 귀한 때 아닙니까?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함께 가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가 더 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기기 위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갔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비록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고 있지만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들고 다윗에게 왔는데, 다윗은 언약궤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언약궤가 있으면 큰 힘이 됩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곁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독에게 말한 것을 보세요. 다윗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께 은혜를 입으면, 주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
다윗은 제사장 사독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독 혼자 돌아가라고 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뿐만 아니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도 데리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두 아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하여 사독은, 아비아달과 함께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다 놓고서, 그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시간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길로 걷다가 이제 감람 산길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사무엘하 15:30-31은 울면서 도망치는 다윗 이야기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누가 다윗에게,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히도벨도 끼어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거 큰 일 났습니다.
아히도벨, 그 놈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든요.
그때 다윗이 한 일은 기도입니다. 다윗은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사무엘하 15:32-37절은 다윗의 친구 후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후새는 장차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울 인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산 꼭대기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슬픔을 못 이겨서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쓴 채로 나아와서 다윗을 맞이했습니다. 후새가 다윗을 따라가려고 온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자기와 함께 떠나면, 짐만 될 거라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을 만나거든, 그를 임금님으로 받들고, 이제부터는 새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이제까지는 압살롬의 아버지 다윗을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다윗의 아들, 새 임금 압살롬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것이 다윗을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라고 하면서요.
후새를 남겨두는 것, 이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기고 보내면서 그 곳에 가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도와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아히도벨의 모략을듣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해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그 말을 전해주고, 제사장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그 말을 다윗에게 전하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을 무너뜨릴 드림 팀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아히도벨을 무너뜨릴 드림 팀은 후새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계획을 다 들은 후,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간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어디에 있다고 예루살렘으로 온 겁니까?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잖아요? 다윗은 왕궁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고, 압살롬은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내일 함께 나누겠습니다.
적용 질문 / 아히도벨이 반역한 압살롬을 도와 다윗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다윗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언약궤를 들고 온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돌려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심정
압살롬 반역이야기는 사무엘하 15장부터 19장까지 장황하게 이어진다.
압살롬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썩 좋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압살롬 반역이야기보다도 다윗의 심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얼핏 보기에는 다윗의 심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다윗을 서술하는 글이기에 분명 다윗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으리라 믿고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압살롬 반역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보고 이어서 다윗의 심정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다윗은
예루살렘 왕이 된 후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는다.
천국과 같은 살게 됨을 뜻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게 하였다.
단순한 음행 사건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며, 우리아를 죽인 사건은 역시 그렇다.
보다 깊이 들여다
볼 때 아담과 가인의 범죄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창조세계를 시작할 때 범해버린 원죄와 같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 후 큰 아들 암논에 의한 다말의 강간 사건을 경험하고 이어 다말의 동생인 압살롬에 의해 암논이 죽게 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어쩌면 다윗 본인의 범죄를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은 느꼈을 것이고 잘못을 깊이 뉘우쳤을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다윗의
왕권을 이을 왕주들의 다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다윗이 이제 60세 쯤 되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새로운 시련을 겪는다.
왕권에 대한 압살롬의 욕심이 담겨진 이야기이다.
이
압살롬의 반역이야기가 사무엘하 14장부터 시작하여 압살롬이 죽음을 기록한 19장까지 전개된다.
13장에서 시작된 압살롬의
이야기의 연속이며, 20장에 언급한 세바 반역 사건과도 연관이 되니 압살롬의 이야기는 장황한 편이다.
왜
압살롬 반역 사건을 그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것일까?
역대기에는 기록하지 않았기에 열왕기 기자는 특별한 기록의 목적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우선 생각해볼 때 압살롬의 반역사건은 다윗의 범죄함에 따른 징계로 생각할 수 있다.
신명기적 구속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목적을 생각해본다면, 다윗의 범죄함을 바라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아닐까?
징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단순한 징벌의 의미를 넘어서 깨닫게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겪는 다윗의 심정을 찾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의 시작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압의 도움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다윗과의 만남이 없어
다윗과 압살롬과의 긴장감을 성경 기자는 지적한다.
다윗은 분명 마아가 가문의 권세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압살롬을 다음 왕이 될 수
있는 세자로 여겼을 수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압살롬이 왕이 될 수 없음 역시 알고 있었을 수 있다.
훗날 솔로몬이 왕이
되었기에 압살롬은 왕이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다윗의 마음은 두 갈래였을 것이다.
솔로몬은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당대의 군대장이었던 요압 장군에 의지하였다. 요압장군을 포섭하고자 하였는데, 요압 장군 역시 다윗의 심중을 잘 알지 못하는 터라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다. 몇 차례 요압에게 전갈을 보냈으나 연락이 없자, 밭에 있는 보리에 불을 지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압살롬이 요압을 회유하여 완전히 자기편으로 강압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사무엘하 15장은 본격적으로 반역의 길을 걸어가는 압살롬 이야기가 전개된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라고 말하고 있다(삼하 15:6).
다윗의 권위보다 압살롬의 권위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크게
여겼다는 의미이다.
그게 가능할까?
다윗의 나이 60세 쯤 되었고, 압살롬은 28, 29세 쯤 되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전술한
바와 같이 압살롬의 집 마아가의 권세가 대단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윗이 어느 정도 압살롬을 세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물론 완전한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히 3절에서 다윗이 백성들의 하소연(송사)를 들어줄 자를 세워주지 않았기에 압살롬이 그 이야기를 들어줄 자임을 강조한다.
압살롬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다윗은 그런 압살롬을 지지해주었던 모양이다.
압살롬은 헤브론 왕이 되겠다고 하자 다윗 역시 그 청을
들어주었다.
어쩌면 후대 왕으로 삼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다윗의 마음과 달리 압살롬은 예루살렘 왕궁마저도 아버지 다윗에게서 빼앗으려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는 더욱 욕심이 생겼나보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을 도망치게 되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며 도망 다니는 생활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으려 했을 것인가?
15장 17절에 “벧메르학”이라는 지역 이름이 나온다.
뜻은 “집에서 먼 곳” 즉 “먼 궁”의 의미이다.
그런데 실제 그곳은 기드론 시내(골짜기)를 건너기 이전의 장소이기에 다윗 왕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다윗궁은 예루살렘 성전터 아래에 있으며 바로 옆이 기드론 골짜기(시내)이다).
벧메르학은 다윗 성에서 떠나는 다윗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더욱 중요한 구절은 23절이다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길로 향하니라(삼하 15:23).
온
땅 사람이 큰소리로 울었다고 말한다.
온 땅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교회가 되었고, 모든
백성과 다윗 왕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만 한다.
건너면 광야이다.
실제 기드론 시내(골짜기)를 건너면 감람산이기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오르거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해 건너가셨던 일들을 생각나게 한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이고 그곳을 광야라 칭한다(누가복음에서 한적한 곳과 광야는 같은 용어이다).
그곳은 기도하시던 곳인 셈이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삶을 의미하리라.
“건너가다(아바르)” 신학은 히브리인의 정체성이요,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일 수 있다.
다윗의 도피생활은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생활로 기자는 기록했으리라
여겨진다.
마치 홍해를 건너야만 광야가 나오고, 광야에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요단강을 다시 건너며 최종적으로 요단강을 다시 건너 돌아옴으로써 예루살렘으로 귀환함으로써 압살롬의 이야기는 마무리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간 다윗은 시련이 뒤따른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거짓으로 다윗을 아프게 한다(삼하 16:3).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 아닌가?
아들처럼 함께 식사를 하였던 그가 사울 왕정의 복원을 꿈꾸며 반역하였다는 이야기에 커다란 아픔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울의 친족 시므이의 저주를 듣게 된다.
시므이 역시 베냐민 지파이면서 사울의 친족이다.
돌을 던지며 강한 저주를
퍼부었다.
시바의 거짓말이나 시므이의 저주는 사울 왕정의 복원을 꿈꾸었던 베냐민지파의 저주이며, 압살롬은 베냐민 지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음을 의미한다.
다윗의
더 큰 아픔은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모사 아히도벨의 배반이다.
아히도벨은 아내 밧세바의 조부이면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함께 전장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용사이자 친구였던 엘리암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가 자신을
미워하며 배반하게 될 줄 몰랐다.
아마도 밧세바의 전 남편 우리아를 죽인 다윗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말한다.
고대 근동의 역사를 볼 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있을 수 있는 관행이었으니,
그와 같은 행위는 압살롬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인 셈이며, 다윗에게는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동행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목숨까지 받칠 수 있는 이방인 출신이다.
잇대가 그렇고 후새가 그렇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그렛 사람, 블레셋 사람, 가드 사람 육백 명이 다윗의 호위병이 되었다.
다윗이
요단을 건너가게 되고 마하나임에 이른다.
마하나임은 어디인가?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올 때 천사를 만난 곳이 아닌가?
다윗 역시
이곳에서 암몬 족속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도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찾아와 환대를 한다(삼하
17:27-29).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였다.
성경 기자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압살롬은 죽게 되고 다윗이 승리를 거둔다.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흥미롭다.
사무엘하 18:9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노새가 큰 상수리 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가 그 이래로 빠져 나간지라.
노새,
상수리 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리고, 공중과 땅 사이 등 묘사에 사용한 단어들이 재미있다.
노새는 귀인이나 왕이 탄다.
상수리나무는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머리는 왕권을 의미한다.
공중은 하늘이며 땅은 세상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볼 때, 왕권에 대한 욕심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압살롬의 죽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윗이 회복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기자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려 한 구절만을 다시 찾아보겠다.
다윗 왕궁에서 도망칠 때의 일이다.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언약궤를 메고 나와 뒤따른다.
그 때에 다윗은 사독에게 명령한다.
그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사무엘하 15:25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로 보이시리라.
다윗의 명령은 마치 예언처럼 들리지 않은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보여주는 회복의 메시지로 들린다.
또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합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15:31)
“어리석음”은
세상적 지식으로서의 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리석은 지혜일 뿐이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 한 사람만을
죽이면 이스라엘 전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세상적으로 볼 때 참으로 탁월한 지혜인 셈이다.
그러나 다윗의 편에 서서 스파이로
침투한 후새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게 우선이라 말하여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을 좋아한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인
셈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셈이다.
결국 다윗은 죽음에서 모면하고 아히도벨은 자결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세 번째 다윗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을 때의 일이다.
시므이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려는 장군 아비새에게 명한다.
그(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삼하 16:10)
사실 아들 압살롬이 다윗 자신을 저주하고 죽이려하는데 하물며 베냐민지파는 오죽하였으랴.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참으며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지켜 봐 주셨기에 다윗 역시 여호와의 마음을 닮고자 했을 것이다.
네 번째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일이다.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잘 대우해주라고 말했으며, 또한 압살롬이 죽자 “압살롬 내 아들아, 압살롬 내 아들아”하고 다윗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사도세자를 쌀 뒤지에 가두어 죽였던 영조의 마음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아들이 반역자라고 생각하면 죽여야만 마땅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도다 언덕을 오르실 때의 모습과 똑같은 상황으로 여겨진다. 돌을 던지는 예루살렘 백성에게, 자신을 죽이려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불평한 말씀 안하시고 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오는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는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압살롬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기록한 목적은 후대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다윗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죄인인 인간을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압살롬의 반역을 바라보는 다윗의 심정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4월 10일(목) 사무엘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다윗의 소위(11: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After the time of mourning was over, David had her brought to his house, and she became his wife and bore him a son. But the thing David had done displeased the LORD.
다윗의 소위(所爲)
(현대인) 다윗이 행한 일
(새번역) 다윗이 한 이번 일
(공동번역) 다위이 한 이일
(새한글) 다윗이 했던 이 일
(NIV) David had done displeased(다윗이 불쾌하게 행했다)
(NASB) David had done was evil(다윗이 행한 일은 악했다)
(KJV) David had done displeased(다윗이 불쾌하게 행했다)
다윗 왕의 범죄 - 간음(사무엘하 11:2-4)
요압에게 내린 다윗의 지령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쟁터로 돌아갈 때 요압에게 쓴 편지를 맡깁니다.
그 내용은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세우고 후퇴하여 우리아를 전사케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합니다.
우리아는 아무 죄도 없이 다윗의 악한 궤계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자 브나야에게 살해당하는 요압
열왕기상 2:33-34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요압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좇아 우리아를 죽게 한 후에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사가 마치매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의 임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 결과의 보고
사무엘하 12:27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
다윗은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잠시 동안 잊음으로써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유혹을 피한 경건한 요셉의 행위와 대조됩니다(참조, 창 39:9).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시편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안목의 정욕에 빠짐(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거닐다가<와이트할례크>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닌 것은 저녁 바람을 쐬기 위한 일상생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상태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랍바를 에워싸고 교전 중에 있는 긴장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낮잠을 즐겼다는 것은 다윗의
나태한 신앙 상태와 왕으로서 무책임함을 보여 주며 범죄하게 된 배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목욕을 하는데<로헤체트>
'씻다' 라는 <라하츠>에서 유래된 것으로
'씻음, 목욕'을 뜻하는데, 이스라엘은 제의를 행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서기 위하여 몸과 손을 씻는 관례가 있었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행위를 의도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본문의 문맥상 어울리지 않으며 다윗 궁이 높기 때문에
지붕에서 이웃 집 마당의 우물이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워 보이는지라<토바트>
'좋은, 아름다운, 기쁜, 귀중한' 이라는 단어로, 보기에 좋은 물건의 모양이나 여인의 고운 자태, 남성의 잘생긴
모습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밧세바의 용모가 뛰어났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왕으로서 나태해진 다윗의 마음이
유혹에 이끌린 상태를 나타낸다.
알아보게 하였더니<와이드로쉬>
시각적으로 유혹을 받은 다윗이 이제는 정욕에 이끌려 간음을 자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함을 나타낸다.
동침하매<와이쉬카브>
'눕다' 라는 동사 <솨카브>는 부정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나타내는데, 부정함을 없애는 의식을 행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남의 아내와 관계를 가진 위선적인 의식이었다.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사무엘하 11:1-4)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그런데도 인간인지라 하나님 앞에서 간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죄를 지음으로 다윗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논이 여동생을 겁탈하는 죄가 일어나게 됩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살인 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므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간음죄를 범하는 다윗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받음(아가 4:9, 요한일서 2:16)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하여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있을 때에 다윗은 예루살렘 궁전에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 때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안목의 정욕으로 인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 그 여인을 불러 동침하였습니다.
다윗의 범죄(마태복음 5:28, 베드로후서 2:14)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죄를 범하였고 신복 우리아에 대해서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렸습니다.
신하가 생명을 걸고 왕과 나라를
위해 적군과 싸우고 있을 때 다윗은 그의 아내를 범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은 왕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도리를 저버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왕이 되어 안일함 속에서 영적으로
나태해지므로 이와 같은 범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도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유혹에 넘어가 범죄에 빠질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밧세바의 임신(레위기 20:10-11, 시편 113:9)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잉태하므로 그의 범죄가 드러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우리아는 오랫 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었으므로 밧세바의 임신은 곧 다윗의 범죄를 알리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범죄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 은폐
우리아를 부르는 다윗(잠언 12:22, 잠언 26:24-25)
다윗은 전방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우리아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기별합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오자 요압과 군대의 안부와 전투
상황 등을 묻고는 우리아에게 집에 가서 쉴 것을 명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행한 일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연극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우리아가 집을 비운 동안 잉태한 것이 드러나면 자신의 악행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우리아를
그 아내와 동침하게 함으로써 밧세바가 잉태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계획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악행으로 죄를 숨기기 위해 또 하나의 범죄를 더하는 행위였습니다.
집에 가지 아니한 우리아(딤후 2:4, 고전 4:1-2)
다윗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 했지만, 우리아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기거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우리아를 집에 들어가도록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수고하는 동료들을 생각하여 자기 혼자 집에 들어가 편히 쉬며 아내와 동침할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다윗은 일부러 우리아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집으로 들여보내나 우리아는 취중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잤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악한 궤계(시 107:27, 잠 23:35)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연극까지 했지만, 우리아의 충성심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사람들만 속이면 자신의 범죄를 은폐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실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인죄를 범하는 다윗
요압에게 내린 다윗의 지령(왕상 2:33-34)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쟁터로 돌아갈 때 요압에게 쓴 편지를 맡깁니다. 그 내용은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세우고 후퇴하여 우리아를 전사케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합니다. 우리아는 아무 죄도 없이 다윗의 악한 궤계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요압(삼하 12:27)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좇아 우리아를 죽게 한 후에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이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사가 마치매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의 임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사 31:2, 요일 2:16)
다윗은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잠시 동안 잊음으로써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유혹을 피한 경건한 요셉의 행위와 대조됩니다(참조, 창 39:9)
다윗의 인격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
이는 전통 신학에 비하여 심리학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위 영적 문제를 심리적으로 해석한다는 선입견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인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글은 방법론적으로 성경의 최종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이 묘사하는 다윗의 인격을 단일체로 받아들여 그의 인격에 접근한다.
또한 심리학적 해석방법 가운데 특별히 다중지능 이론, 특질 이론, 동기 이론에 따라 다윗의 행동과 인격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다윗은 여러 가지 성격과 다중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는 대표 인물이다.
하나님을 믿고 시로 찬미한 훌륭한 신앙인인 동시에,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파렴치범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내 미갈에게는 극도로 냉담하지만, 자신의 적대자들에게는 매우 온정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윗의 삶과 행위에 나타나는 복잡함은 다윗의 인물 자체에서 비롯하거나, 아니면 다윗과 관련된 여러 본문이 취합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일 수 있다.
다윗은 음악, 문학, 정치, 전투 등의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동시에, 일반인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의 이중 혹은 다중의 면모와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을 비롯한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 빛과 어두움을 함께 가지고, 이들 사이에서 투쟁하고 나아가는 존재이다.
다윗에게 깨진 세 가정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해석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10절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입니다.
동시에 주께서
하신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의 인물, 소위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의인시 하거나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다니엘 등을 비판하면 바로 반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 많은 인간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은 다윗의 이중성과 관련된 논문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토론토 틴델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John
Kessler가 “성과 정치 : 사무엘서에 나오는 쫓겨난 남편의 모티프 (Sexuality and Politics: The
Motif of the Displaced Husband in the Books of Samuel)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한 사람(삼상 13:14), 여호와의 종(삼하 3:18, 7:5, 8,26),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삼하 12:7, 22:51, 23:1)와 같은 존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신약성경도 다윗에 대해 똑같은 찬사를 보냅니다(눅 20:41,
행 13:22-36).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서는 다윗에 대해 매우 다른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정치적
야망과 무능한 가족 관계를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또한, 다윗이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세 명의 남성(나발, 발디엘, 우리아)과
그들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을 통해 다윗이 점차 타락하는데, 이는
다윗의 이중성(선과 악)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서는 왜 이렇게 다윗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을까요?
Kessler 교수는 이
점을 고민하면서 논문을 썼습니다.
1. 나발, 아비가일, 다윗
나발은 악행을 저지르는 거친 사람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입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나발의 양떼를 돌봐주었던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요청하였는데 거절당합니다. 그때 다윗은 분노하여 칼을 빼들고 피의 보복을 감행하려고 합니다. 그런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 나타나 다윗을 지혜롭게 설득합니다. 성경은 가볍게 분노한 다윗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나발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파멸했는데,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여호와의 축복과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고(삼상25:28), 다윗의 정적(나발)을 저주합니다(삼상25:26).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윗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윗과 연관된 나발의 가정은 결과적으로 깨어졌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윗은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2. 발디엘, 미갈, 다윗
다윗에 의해 직접적으로 깨어진 가정은 발디와 미갈입니다. 다윗은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외에 네 명의 아내를 더 얻었습니다(삼하3:2-5).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통일 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브넬과 동맹을 맺습니다. 다윗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청합니다(삼하3:12-13). 이는 분명 정치적 차원의 요구입니다.
미갈과 발디엘의 결혼이 합법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성경 저자는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줄 권리도 없고, 다윗이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음을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성경 저자는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다윗을 은연중에 비판합니다. 삼하 3:2-5까지 다윗은 이미 네 아내와 결혼했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삼하 3:12-13에서 네 명의 아내를 가진 다윗이 소중한 한 명의 아내, 미갈을 발디엘에게 빼앗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삼하3:13)
그는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 부르므로 미갈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미갈이라는 한 인격체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 기반을 두었던 사울왕의 딸을 가지고 싶었을 뿐입니다. 미갈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미갈은 그저 정치판의 졸이었습니다.
다윗은 미갈을 내 아내(삼하3:14)라고 부르지만, 성경 저자는 미갈의 남편은 발디엘이라고 밝힙니다(삼하3:15,16)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삼하3:15)
성경 저자는 미갈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므로 다윗의 무자비함을 드러냅니다.
발디엘은 하나뿐인 아내를 빼앗기고 울면서 미갈의 뒤를 따릅니다. 고대 시대 남성이 공공장소(길)에서 운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동시에 성경 독자들에게도 호소합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아브넬이 이중명령어 즉 “저리 가!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는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고 했던 이중 명령(일어나 나가라)와 같습니다. 발디엘은 다말처럼 굴욕과 수치심을 느끼며 조용히 명령에 복종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 결혼할 때처럼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자신의 요구가 가져올 사회적 영향의 부정적 측면(가정을 깨트렸다는 비난)보다 긍정적 측면(북이스라엘과의 통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갈을 요구하는 다윗의 행동이 완전히 불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비판받을 요소는 분명 있습니다.
3. 우리아, 밧세바, 다윗
밧세바를
강간하고 우리아를 죽인 일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비방당한 나발이나 희생당한 발디엘과 달리 우리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신실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다윗이 그를 불러 밧세바와 잠자리를 가지도록 유도할 때 우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 11:11)
전통적으로
언약궤(법궤)에 대한 연대감은 경건의 상징입니다.
그는 경건하고, 충성스럽고, 자제력이 있고, 공동체와 연대를
존중합니다.
반대로 다윗은 속임수와 이기심의 화신으로 자제력도 없고, 냉담하며, 불충실하고, 배신과 살인을 일삼고 공동체를
심각하게 깨뜨리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아주 악한 마음으로 우리아의 가정을 깨트렸습니다.
사무엘서는
여러차례 군주제의 폐해를 경고하였습니다.
신명기는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신 17:17).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사무엘은 왕이 이스라엘의 딸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삼상 8:13).
신명기
학파(신명기에서 열왕기서에 이르는 저자들)는 일부다처제 및 정략 결혼과 관련된 군주제를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제도로
간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경계선을
무너뜨렸고, 후대 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군주제를 악용했습니다.
나발과 발디엘과 우리아는 모두 일부일처제를 따랐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는 왜 이런 일들을 여과없이 기록했을까요?
타락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지 않고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다윗의 타락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비가일과 미갈과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타락합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장군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의 가정을 깨트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고, 죽음을 유예하며, 그를 지지하고 그에게 가능성을 부여했습니다.
그건 그의 잘못과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도 다윗처럼 참담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계속해서 그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그때 포로로 끌려간 유배자들은 이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다윗의
패러다임을 보았습니다.
허물과 죄가 많지만, 벌을 받고 망한 것 같고, 죽은 것 같지만,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기회와 희망은 있다는 패러다임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유효합니다(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월 9일(수) 사무엘하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I will be his father, and he will be my son. When he does wrong, I will punish him with the rod of men, with floggings inflicted by men.
사람 막대기(with the rod of men)
인생 채찍(with floggings inflicted by men)
징계(懲戒) : 징계할 징. 혼날 징(懲), 경계할 계(戒)
-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警戒)함.
- 부정(不正)이나 부당(不當)한 행위(行爲)에 대하여 제재(制裁)를 가함.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사무엘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징계(3198) 야카흐(yâkach) יָכַח 스트롱번호 3198
구약 성경 / 59회 사용
징계(懲戒) / 징계할 징, 경계할 계
-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
연단(鍊鍛) / 불릴 연, 불릴 단
-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형벌(刑罰) / 형벌 형, 죄 벌
- 범죄자에게 제재를 가함.
맹자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후에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하였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게 한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편-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맹자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다. 맹자는 큰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 같은 이야기를 꺼낸 데는 당시 상황과 맥이 닿아 있다. 맹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제후들 간에 벌어진 빈번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다’는
그의 기록에서 사회 질서 또한 매우 문란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혼란한 시기를 살아간 맹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하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맹자’ 7편을 저술하며 그 사상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태어난 시기와 나라가 분명치 않고, 다만 기원전 4세기 후반,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양으로 본래 마음 회복”
맹자 가르침의 핵심은 크게 ‘성선설’과 ‘왕도정치’로 좁혀진다. 맹자는 ‘사람치고 선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예화로 ‘우물가의 어린아이’를 들었다.
한 어린 아이가 우물가에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모두가 놀라 측은한 마음이 들게 되는데, 이는 그 부모와 친교를 맺기 위함도,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함도 아니요, 이는 선한 본성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한 본성이 있다 하더라도 외적․환경적이 이유로 악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맹자는 이 같은 수양을 통해 궁극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호연지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전제하며 “도의에 근거한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 천지간에 가득한 넓고 큰 정기로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라고 답했다.
◆“덕으로써 백성 다스려야”
맹자는 정치사상으로 ‘왕도정치’를 내세웠다. 그는 임금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힘과 무력 대신 어진 마음과 덕으로써 감화시켜 다스릴 때 백성들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저서 ‘맹자’에는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라는 기록이
있다. 곧 임금은 백성들과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본(民本)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의 ‘성선설’과
‘왕도정치’를 비롯한 사상들은 후대 유학 사상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 장구 하 (告子 章句 下) 에 나오는 말인데, 그 부분 전문을 싣겠습니다. 번역은 직역입니다.
道는 若大路然하니 豈難知哉리오 人病不求耳니라
도 약대로연 기난지재 인병불구이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일 뿐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인댄 必先苦其心志하며 勞其筋骨하며 餓其體膚하며
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필선고기심지 노기근골 아기체부
하늘이 장차 큰 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그 몸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空乏其身하야 行拂亂其所爲하나니 所以動心忍性하야 曾益其所不能이니라
공핍기신 행불란기소위 소이동심인성 증익기소불능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하여 일찌기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人恒過然後에 能改하나니
인항과연후 능개
사람은 언제나 과오를 저지른 뒤에야 고칠 수 있으니
困於心하며 衡於慮而後에 作하며 徵於色하며 發於聲而後에 喩니라
곤어심 형어려이후 작 징어색 발어성이후 유
마음에 곤란을 당하며 생각대로 잘 안된 뒤에야 분발하고, 얼굴빛에 떠오르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야 깨닫게 된다.
入則無法家拂士하고 出則無敵國外患者는 國恒亡이니라
입즉무법가필사 출즉무적국외환자 국항망
안으로 법도가 있는 (사대부) 집안과 (임금을)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망한다.
然後에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니라
연후 지생어우환이사어안락야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도 살아나고 안락한 가운데도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 왕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삼하 8:6, 14).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서 지내고 있을 때 문득 여호와의 궤는 천막(장막)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여호와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즉시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선지자는 그것 참 좋은 발상이라며 성전을 건축할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계시하시기를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윗이 낳은 아들이 그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아들이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성전을 건축한 왕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왕이 죽은 후에 그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나라를 둘로 분열하도록 그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은 같은 뜻으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체벌을 가하면서까지 훈육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면서까지 그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 89:32;잠 3:12;히 12:6,7 참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은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로 "인생채찍"으로 번역됨 라은 원래 "사람의 아들들의 채찍"이란 말로서 "사람 막대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에 주로 사람들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꼭 사람뿐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2)."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2.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녀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징계의 손길을 펴신 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매는 주로 사람인 경우가 많으며 때로 자연 재해나 주변 환경을 이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 하닷을 통해서 범죄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심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왕상 11:14)."
*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서 거역하는 아하시야를 징계하심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왕상 9:27)."
하나님이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우리를 연단하실 때
시편 63: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부제를 보면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쓴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유다 광야에 있을 때가 있었고, 아들 압살롬을 피해서도 유다 광야에 있었습니다.
오늘 시 내용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광야를 헤맬 때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사는 곳은 마르고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광야에서 기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1.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주를 갈망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었습니다. 광야는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습니다. 그는 마실 물이 없었고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몸만 황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황폐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광야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찾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무기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그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의 영혼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배고플 때 빵을 찾듯, 그의 육체는 주를 앙모합니다.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때로는 육체가 건강한데 영혼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영혼이 기쁜데 육체가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육체와 영혼이 다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도와 주시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쫓기고 생명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사울의 문제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로 생각합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핍박받고 전쟁이 있고 질병이 있어도,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어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2. 광야가 성소와 같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절)”.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광야조차 하나님이 함께 계시자,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는 광야가 성소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은 성소와 같은 광야에서 간절히 주를 바라봅니다. 그는 광야에서 주님이 함께 하셔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주님이 권능으로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은 광야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40년간 만나를 주셨습니다. 메추라기를 풍성히 먹게 하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절)”.
다윗이 이렇게 광야를 성소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 없습니다. 특히 죽음과의 거리가 한 걸음 사이인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생명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주의 인자하심이 있을 때 생명이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할 때,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더 고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우리도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주의 인자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에게 쫓기고 있어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그를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으니 자신이 있는 곳이 천국처럼 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고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있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시면 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감격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장래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주의 사랑을 느낄 때 주를 찬양합니다.
신앙의 극치는 찬양입니다. 행복의 극치는 감사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행복이 아닙니다. 초가집에 살아도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지금 하나님을 찬송할 뿐 아니라 평생 주를 송축하고자 합니다. 그는 두 팔을 치켜들고 하늘에 계신 주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주의 사랑이 있었으므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중에 자녀들 간에 살인과 강간이 있습니다.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인구조사를 하고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그래도 그는 평생에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을 때 평생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아멘.
4. 내 영혼이 주로 만족할 것이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5-7절)”.
사람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을 때 만족합니다. 배가 부르면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의 양식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을 때 만족이 생기고 힘이 납니다.
다윗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을 때, 다윗의 영혼은 골수의 기름진 것을 먹을 때같이 만족하였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물질도 사람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자떼가 수십 마리 있어도, 그 앞에서 토끼나 노루가 놀 때 먹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자는 배부르게 먹고 있으면 다른 것을 먹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 외에는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가 만족하면, 아무런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탐욕으로 끝임없이 물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쁜 입술로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성령을 받으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 같이 만족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광야 침상에서 잘 때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 밤새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침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으면 우리 주위에 있는 문제를 넉넉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이 짜증이 날 때는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만족감이 있을 때 모든 것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밤과 새벽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도움이 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광야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공격과 블레셋의 공격에서 다윗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은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방황했지만 주의 보호 아래서 쉼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5.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른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8-10절)”.
다윗의 영혼은 주님을 가까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친밀한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다윗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주님은 권능의 손으로 다윗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복 주시는 자를 복주시고 다윗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을 땅 깊은 곳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칼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하십니다. 결국 승냥이가 그들의 시체를 먹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무리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6.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임금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니, 우리의 임금님은 이 일로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람들은 다 왕과 함께 승리를 기뻐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다, 갑자기 왕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왕은 사울 왕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이므로 다윗 자신을 말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니, 그리스도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도 승리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님께 맹세한 자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승리를 주십니다.
다윗은 한계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여 그들의 입은 막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음으로 황폐한 세상에서도 천국처럼 살 수 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명보다 나은 인자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
다윗 언약의 축복 중 하나는 아비에게 베푸신 은총을 아들에도 베풀어 왕위를 이어받는 아들이 혹 범죄하게 되어 주의 길을 떠나더라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찌언정 사울 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실제 솔로몬이 다윗의 위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재위 초기와 중기의 신앙은 정말 좋았으나 말기에 이르러 이방에서 데려온 처첩들에 의해 그의 마음이 흐려지고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섰을 때 하닷이나 여로보암 같은 대적자들을 일으켜 그를 낮추시고 힘들게는 하였어도 사울의 경우처럼 왕위를 빼앗기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신 것은 아니었습니다(왕상 11:14-22).
이처럼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고통을 주시어 징계할찌라도 은총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은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에게 이런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버리운 자라(히 12:8)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돌이켜 볼 때 내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과했던 시기를 돌이켜 보면 다윗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게하기 위해 사울에게 쫒기어 애매히 고난을 받으며 영적 단련을 받는 것 같은 시기도 있었지만 내가 범죄하고 고집 피우며 겸손히 낮아지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나를 힘들게 하시며 낮추시고 징계 하셨던 때가 있었던 것을 추억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모두 옳았고 징계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며 싫었지만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보니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며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 주님 !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나를 힘들게 하신 것들도 모두 택하심의 은총이며 사랑이었던 것을 깨닫고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고통 스러운 것이지만 이로써 연단을 받은 자들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사오니 내가 받은 징계의 날들이 헛되지 아니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열왕기상 11:14-25)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사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그 몸에서 낳게 되는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되리라는 언약을 나단 선지를 통해 전달케 하신 그 밤에 다윗의 뒤를 잇게 되는 이 아들[솔로몬]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씀도 함께 주셨는데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4)오늘의 말씀은 일찍이 다윗의 시대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달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졌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의 자리까지 떨어진 이 솔로몬이 그냥 그대로 아무 탈 없이 태평성대를 이루어가고 아무런 징계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진정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 버려진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와 영광의 극치에서 태평성대를 누렸던 솔로몬 왕국에 솔로몬을 대적하고 괴롭히는 에돔 사람 하닷이 등장되고 수리아 왕 르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우연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대적 자들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열왕기 저자의 반복된 기록은(11:14, 23)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시험도 다 같은 시험이 아니라 나의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시험이 있고 나의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유혹의 시험이 있는 것처럼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에도 다윗에게 사울의 핍박이 있었던 것처럼 나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인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맞싸우며 제거하려고 하기보다 나를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을 기억하면서 고통의 매를 순히 맞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뭇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 6:9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
다윗이 범죄 후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도 사람 막대기가 되어 자신의 대적 자가 되며 심지어 사울의 집 사람인 시므이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시킨 것이라고 받아드리며 온갖 수욕을 달게 받아 드림으로(삼하 16:10)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은총의 사람이 된 것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으나 다시 회복되는 자들이 본 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솔로몬에게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생애가 마감이 되고 그의 후대에서 나라는 둘로 쪼개어지며
모든 부와 영광이 막을 내리는 것을 봅니다.
내가 범죄 함으로 사람의 미움을 받으며
인생 막대기와 채찍의 고통을 당할 때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통 받을 때
내 마음이 교만하고 강팍하여
인생 막대기와 채찍을 순히 받지 않음으로
더 깊은 고통과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을 정하신 이를 순종하고
매를 순히 맞음으로
주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
더 깊은 신앙으로 연단되고
주님께 더 깊이 사랑을 받는
은총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채찍 & 인생막대기
1. 회개와 징계
범죄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회개 기도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회개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죄로 말미암아 점점 몰락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기억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 기도가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일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상태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다시 재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이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을 비인격으로 대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만 하면 마치 죄가 다 용서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슬퍼할 줄 아는 인격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복해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만일 자녀들이 실수를 하거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용서를 해줍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동일한 죄가 계속되면 엄마는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니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회개라는 개념은 내 쪽에서 진실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마는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몇 번 고백했다는 것이 회개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범죄 했을 때 그 죄만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는 마음을 해결하기 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이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의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했고 어린 시절부터 죄 짓기를 쉽게 생각했으며 습관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고 기질 속에 혈기와 분노가 있는 근본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내가 누구에게 화를 냈다,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는 등 드러난 사건만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 밑에 있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어떤 죄에 대한 징계를 주십니다. 그때 “내가 다 고백했잖아요. 잘못했다고 뉘우쳤잖아요?”라고 항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 있는가를 이해하고 징계하심의 뜻을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창 3장에 보면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덮어주셨습니다. 수치를 가리우시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대가도 치르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하셨고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의 다스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남자들에게는 땀을 흘리고 수고해도 척박한 땅에서 수고한 대가를 다 얻지 못하고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면서 직업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고 정결하게 되는 구속의 방법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은혜로 죄사함 받고 입술로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활 가운데서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는 이 연단과 구속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오랜 세월 믿어도 근본적인 본성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귀를 닮았던 우리의 종자가 하나님의 종자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는 일마다 행악의 씨앗을 뿌렸던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흩뿌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삼하7:14-16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서만 이 아닌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 속의 인격구조를 정결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가정마다 어려움이 다 있을 것입니다. 부부 관계의 어려움, 자식 문제, 혹은 시댁이나 친정의 어려움 등 갖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괜히 나를 미워하고 내가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치사하게 범죄를 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나서 그것도 부족해서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를 최전선에 배치해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죄를 지적했고, 그때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다윗의 회개기도를 받으시고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하12:-20: 까지에서 다윗의 가정과 이스라엘 나라에 우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용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다윗 왕가에 계속 어려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12장에서는 밧세바의 첫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13장에는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범하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합니다. 그러자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2년 후에 암논에게 복수를 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형제 살육(殺戮)의 역사가 다윗 왕가에 나타납니다.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외조부가 있는 그술로 도망쳤다가 3년 만에 돌아와서 자기 스스로 왕이 되고 다윗을 배역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 때문에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18장에 가면 충신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자 다윗은 자기를 배신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장이 끊기는 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 20장에 보면 베냐민 사람 세바가 열 지파의 지지를 얻어서 또 다윗을 반역합니다.
이렇게 다윗의 범죄한 사건 이후에 다윗의 왕가와 이스라엘 전체가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의 영향력은 계속 끊어지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이 사건을 출발로 해서 다윗 속에 있는 기질, 못된 성품, 육신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잘못된 성향, 그의 피속에 흐르는 망령된 행실 등을 깨끗하게 해서 다윗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수준까지 끄집어 올리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잘 안 내다가 회개하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물질을 쏟아부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수입에 더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일을 안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할 수 있는대로 다 합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착착 풀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안 풀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예수를 잘못 믿고 불의하게 살아서 어려움이 있는지 알았더니 예수를 잘 믿어도 어려움이 있구나 생각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높은 뜻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는 그 절호의 찬스를 우리가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합격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징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데는 큰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줘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지금 범죄해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윗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하나님적인 존재로 변해가도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바른 응답
다윗이 징계받을 때, 하나님께서 정결케하기 위해서 그를 다루실 때 다윗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 귀중한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 볼려고 하는데 일이 잘 안 풀려질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포기함
첫 번째로,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이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삶을 지배하시는 통치자요 결국 심판하러 오실 심판의 주라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나의 태어남, 나의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진행, 인생을 마치기까지의 모든 삶의 여정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어떤 사건 앞에 부딪혔을 때,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또 어려움을 준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다윗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잘 보십시다. 삼하16:5-14까지입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리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지금 도망을 치게 됐습니다. 도망쳐 나오는데 이미 몰락한 사울 왕가의 이름도 없는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를 저주하고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다음 9절을 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지금 왕의 좌우에는 군장들이 다 무장을 하고 왕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아비새라는 장군이 내가 저 개 같은 자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할 때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10-11절에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다음 12절에서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시므이가 아닌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습니다. “정말 내가 회개했는지,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던 그 사실을 내가 시인하는지를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너희가 어찌 이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내가 여기서 합격해야 하나님이 내 원통함을 풀어 주실 것이다.” 생각합니다.
사람이 잘 나갈 때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기분이 덜 나쁩니다. 그러나 사업이 좀 어려워진달지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누가 옆에 와서 빈정거리거나 약을 올리면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집니다. 그것도 내 기준에서 볼 때 좀 수준있는 사람이 얘기를 한다해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자기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한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사람이 경멸과 모독의 언사로 “그건 하나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도망치는 상황이라 해도 일국의 왕인 다윗을 지금 그런 식으로 대접을 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주시고 역경의 시간을 주셨을 때,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질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시므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이 비밀을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사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아들을 죽여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정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망해가도록 방치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다 잘되기를 원하고 이 땅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축복을 제한하셨습니까? 죄를 지으면서 잘되는 것은 허망한 것이요 거품이기 때문에 차라리 적나라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내가 죄를 버리고 정결케 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고, 시므이를 통해서 진짜 다윗이 회개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막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딴 길로 가려고 하는 타락한 나의 기질과 본성이 내 원수입니다.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김집사가 아닙니다. 열받게 하는 자녀가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밤을 새워 진땀을 흘려가며 씨름했던 ‘그 어떤 사람’, 야곱은 그 밤에 그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동녘이 밝아올 때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자기를 시달리게 했던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0년 동안 삼촌의 집에서 삼촌에게 이용당하고 사촌 형제들에게 시달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면서 살았던 그 많은 세월들, ‘그 어떤 사람’, 내가 가는 곳곳마다 복병으로 숨어 있으면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어떤 사람들’, 결국은 나의 환도뼈를 부러뜨려서 절뚝거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 어떤 사람이 내 부모가 아니고, 시동생이나 시누이가 아니고, 내 돈 떼먹고 도망친 그 놈이 아니라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내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절뚝거려야 이 씨름은 끝이 납니다. 지지 않으려고 계속 버티면 이 씨름은 더 길어집니다. 고난의 기간은 우리가 단축할 수 있습니다. 2년 만에도 가나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태여 40년을 채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그만 고난의 세월을 더 벌지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빨리 잡아야 합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2)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함
두 번째로, 다윗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는 말씀으로 돌아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회복되면 반드시 말씀과의 관계가 회복돼야 합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신게 무엇이었습니까? 삼하12:9-10에서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말하고 10절에서는 “나를 업신여긴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를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릇 행하였다’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욕이 요구하는 대로, 욕심이 요구하는 대로 기분 나쁘면 배신해 버리고 기분 좋으면 아첨이라도 하는 것이 우리의 옛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한 이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시119:71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당한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례를 배우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내 멋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아래 붙잡히게 되고 하나님이 연단하실 때에는 내 모습을 버리고 말씀 앞에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르는게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 봅시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를 품어주라. 기다려줘라.” 내가 이때 어느 메세지에 순종해야 합니까? 여러분,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개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나를 용납 못하는데 내 남편을 어떻게 평생 100점을 주면서 살 수가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이 감정을 누가 충족시켜 줍니까?
우리는 감정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따르라고 하면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좋아도 말씀이 안된다고 하면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고난을 통해 연단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의지로 결단해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회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다음 11절부터는 정금으로 될 수 있는 비결이 나옵니다. 반드시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금광석을 정금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제련을 해야 합니다. 부숴뜨리고 녹이고 하는 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금처럼 쓰시기 위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고생한다고 다 정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정금으로 변합니까?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릴 수 있습니까? 말씀 앞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기분 나쁘고 분노가 치밀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양보하고 포기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3)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함
세 번째로, 다윗은 고난 당할 때에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샀습니다. 삼하15:14을 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다윗을 따랐던 심복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도망을 쳤습니다. 압살롬을 대적해서 빼앗겼던 왕위를 다시 되찾을려 하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어떤 면에서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20절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왕좌를 빼앗기고 도망자의 신세에 있을 때 남아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이라도 시켜서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방위사령관격인 잇대가 육백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좇아 왔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도망자의 신세다. 지금 나를 따라 오지 말고 돌아가서 압살롬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또 있습니다. 삼하25:26절을 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따라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궤만 가지고 나오면 압살롬이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 편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언약궤를 들고 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시면 내가 다시 언약궤를 볼 것이요 언약궤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봤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서 다시 왕위(王位)를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는 인격적으로 잘하다가도 도망칠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입지를 위하여 보다 많은 사람을 확보함으로 지지를 얻어 자기의 정당성을 드러낼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지 법궤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용사가 나를 지원해 주고 언약궤가 따라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합당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게 축복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면 이 모든 위기는 다 원상복귀될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믿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뒤처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거나 코너에 몰리면 그 사람의 본체가 드러납니다.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법궤를 가져와서 하나님을 이용해 전쟁에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블레셋에게 대패했고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법궤가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니다. 내 중심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근신의 기간을 주셨는데 내가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없다” 말하고 다 포기했습니다. 모든 욕망, 모든 생각들을 하나님께 복종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기분 좋으셨을 것입니다. 근신하는 기간 동안에는 권모술수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받는 지지를 위해 하나님을 잃으면 안됩니다.
4) 말을 조심함
네 번째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특별히 입술의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이 언어를 통해서 실행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내가 로마 시대의 황제라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농담으로 “저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곧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통치권자이기 때문에 내가 농담을 하고 장난을 해도 내가 하는 행동에 의해서 한 사람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입술의 권세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민수기 14:1-3, 26-30을 보면 가나안 땅이 너무 정복하기 어려운 땅이라고 정탐꾼들이 불평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삽시간에 부정적인 말들이 온 백성들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애굽을 안나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들었다. 너희가 원하는대로 행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앞에 한 말을 누가 들었어요?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말조심 하십시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78:9-20에 보니까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하나님이 계속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반석을 깨뜨려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셨는데 좋을 때는 감사하고 찬양하던 사람들이 조금 어려워지니까 하는 말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식탁을 예비하셨어요? 물을 주었다고요? 아이구 고기 맛 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왜 복을 발로 찹니까? 농담으로 했을지라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난이라도 그런 표현을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욥기 2장 9절을 보면 그 아내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자 욥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욥2:10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잘 될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술에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3.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큰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종자가 바뀌는 것입니다. 욥기서 1장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에스겔서 14장 14절과 20절을 보면 이 지상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사람 세 사람을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은 이유는 요즘으로 말하면 그가 교회당을 건축하고 헌금을 얼마를 했고 전도를 몇 사람 했고 어마어마한 사역을 했고 굉장한 직분을 받아서라고 표현하지 앉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에 악에서 떠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성품,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굉장한 사역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인 9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다 외적인 행함이 아니라 내적인 성품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가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소위 팔복이라고 해서 팔복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 8가지를 말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입니다. 이게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 내가 장차 큰 쓰임 받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시는 분이 있다면 먼저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합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을 자꾸 오해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의 행위나 사역은 외식이 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성품, 우리의 기질,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생각을 신령하게 바꾸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치졸한 행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집안에서 근친상간이 벌어지고 형제들 간에 서로 죽이는 일을 했을 때에도 공의롭게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 보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평판이나 여론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몇 점 짜리냐, 이것을 회복하는게 우선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멋있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역시 좀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그가 잘나고 똑똑하고 대단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겪으면서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갔기 때문에 그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가 압살롬의 반역을 거론하고 다윗 왕가의 비극을 계속 나열한 것은 다윗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환경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시어머니가 나를 괴롭히고, 부부간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자식이 골치를 썩이고 나를 괴롭히는 등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왕권을 회복합시다. 실수했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 힘들다고 좌절하지 맙시다.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우리의 중심이 결실을 거둘 때가 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풀리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을 안고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쯤 더 기다려야 좋은 날을 볼 것입니까?
내
원수가 나를 비난하며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험들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주여, 이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묵상자료
1. 환경적으로 꼬인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무엇입니까?
2. 고난과 역경에 대처하는 다윗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3. 나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 채찍과 인생막대기’는 누구입니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징계(懲戒) 예화(例話) 35편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허락하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온갖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과 죄 사이의 상호 관계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전에는 성도에게 가하시는 연단을 결코 완화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복종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의 매를 더욱 더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우리로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체험하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반역과 불순종의 결과를 당신이 면할 수 있도록 계속 내버려 두셨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께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당신의 발걸음을 돌려 그분께로 향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이해되는가?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그분의 사역을 완수하도록 맡기고 허락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의의 평강한 열매를” 거두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초달치 못하는 자
이런 경우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 체면이 있으니 좀 봐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와서 아이를 데려다 놓고 [이제부터 너를 위해서 너도 조금 고생하고 나도 조금 고생하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3일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와서 아들과 같이 기도하고 매를 때린 후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이 아들을 잘못 키웠습니다.
기도도 등한히 하고 잘못 가르쳤으며 나쁜 성격을 유전시킨 것을 회개합니다.
앞으로 이 아이를 위해서 더 가르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회개하며 기도하였더니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면서 [아버지, 다시는 그런 일이 안하겠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으며 그후 그 아이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훈계하며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녀들을 초달할 때의 원칙
첫째, 징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도 납득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규율을 정해 놓고 그 법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징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준비기도를 하고 매를 때려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아들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딸들에게는 매를 때리지 말고 다른 벌, 즉 베개를 머리에 이고 있게 한다든가 성경말씀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읽으라든가 하는 융통성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세째,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때려야 합니다.
매를 때로 놓고 아버지에게서 정이 떨어지고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매를 때리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매를 때린 후에도 존경심이 생기 도록 기술적으로 교육적으로 해야 합니다.
넷째, 분노나 즉흥적인 감정으로 때리면 절대로 안됩니다.
다섯째, 사랑의 원리에 의해 때려야 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3:24)
A. 아담의 혜택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하와와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이해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19-23).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에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과 그 자신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창 2:16, 20, 23).
B. 아담의 도덕적 속성
우리가 타락 전에 아담의 도덕적 속성을 어떻게 묘사하든지 간에, 그가 죄가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이 일종의 '수동적인 거룩성(passive holiness)'으로 아담이 나쁜 것으로부터 깨끗한 존재였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거룩성은 그에게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할만큼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까지 그 하나님과의 교제는 '수동적인 거룩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더 선호합니다. "아담은 견고하지 않은(unconfirmed, 왜냐하면 아담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시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피조물적인(creature, 왜냐하면 그의 거룩성과 창조주의 거룩성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룩성(holiness,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깨끗한 존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을 가지고 있었다."
C. 그의 책무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창 1:26, 28)이 그의 책무였습니다. 신통치학자들(theonomists)은 모든 종류의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들을 철폐함으로, 세계의 모든 구조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해야 함을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서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소위 '문화적 사명(cultural mandate)'라고 이해합니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오늘날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구약성경의 율법 확립(the establishment of the Old Testament law)'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는 신통치학자들과 유사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이 홍수 이후의 노아 및 노아의 후손들(우리도 포함)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창 9:1). 더 나아가서 창세기 1:28에 나오는 "정복하라(subdue)"는 단어는 '반죽하다(knead)' 혹은 '밟다(tread)'라는 어근으로부터 온 단어로 사람이 번성할 수 있도록 '땅을 경작하는 것(bringing the earth under cultivation)'을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아담은 땅에 충만하게 될 사람들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땅과 땅의 피조물들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책무는 아담이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명령받은 것(창 2:15)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II. 시험
궁극적으로 시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혹은 순종하지 않느냐에 관한 시험이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특별한 방법은 '에덴 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것'에 의해서였습니다. 어떤 의미로 그들이 실과를 먹을 수 있었던 다른 많은 나무들과 비교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소소한 금지(a minor prohibition)'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그러한 명령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를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a major matter)'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로봇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III. 유혹자
사단은 현명하게도 그 자신을 드러내어, 즉 하와가 사단을 보고 조심하여 스스로 경계심을 가질만한 상황을 만드는 것 대신에 하와가 친숙하게 생각했던 피조물을 이용했습니다. 그때 하와는 뱀과 함께 얘기했던 내용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IV. 유혹
A. 사단의 거짓
거짓은 소중한 것을 제거한 상태에서 가능한 한 진짜의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은 하나님과 같지는 않지만 이전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적은 있었습니다(사 14:14). 사단은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같지만 온전한 순종이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제안을 가지고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무 지나친 제한을 두셨을 것이라는 암시를 심어주었고, 하와는 그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단은 그녀에게 그러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자신의 계획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와가 금지된 실과를 먹는다면 그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B. 하와의 합리화
사단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는 그 실과가 먹기에 좋아 보이고 아담을 위해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그녀의 아내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즐기도록 그처럼 많은 다른 것을 만드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그 실과를 금지하셨을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현명하게 되기를 틀림없이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실과를 먹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심지어는 꼭 필요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게 되었습니다.
V. 징벌
A. 인간에 대해(창 2:7-13)
1. 옷을 해 입음으로 증명되는 죄책감(창 2:7)
2. 하나님의 낯을 피함으로 증명되는 교제의 상실(창 2:8). 이것은 또한 인간에게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동시에 초래했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분리(seperation)를 의미합니다. 타락 즉시 아담과 하와는 영적 분리를 겪게 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몸은 부패 과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롬 5:12).
B. 뱀에 대해(창 3:14)
뱀은 비천한 존재라는 표시로 기어다니도록 정죄 받았는데, 이 사실은 뱀에 대한 징벌이 가해지기 전에 뱀은 아마 똑바로 선 피조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천년왕국에서조차 이러한 모습은 지속될 것입니다(사 65:25). 사실상 타락한 상태의 인간이 생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치권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생물계도 인간의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0).
C. 사단에 대해(창 3:15)
1.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단의 후손(모든 잃어버린 자들, 요 8:44; 엡 2:2)과 여자의 후손(모든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 적대감이 존재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인 한 분(예수 그리스도)이 십자가에서 사단의 정수리에 죽음의 타격을 가하지만(히 2:14; 요일 3:8), 반면에 사단은 그리스도에게 고난("발꿈치를 상하게 하다")을 초래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의 유대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희미하게나마 메시야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D. 하와 및 여자에 대해(창 3:16)
1. 잉태. 하나님은 여자의 잉태하는 고통("잉태와 고통"이 아님)을 더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탄생에는 이제 고통이 수반되게 되었습니다.
2. 여자는 그녀의 남편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수고 및 출산의 고통에 대한 보상적 요소라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출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깊은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낳으려는 소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통치의 질서. 죄악된 세상에서의 질서의 필요성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 의해 다스려질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질서를 철폐하지 않습니다(고전 11:3; 14:34; 엡 5:25-25; 딛 2:3-5; 벧전 3:1, 5-6).
E. 아담 및 남자에 대해(창 3:17-24)
1. 땅에 대한 저주. 땅은 아담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 아담은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타락이 있기 전에 아담에게 있어서 노동은 즐거운 것이었고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어렵고 공허한 것이 되었습니다.
2. 죽음. 아담과 인류는 죽어서 땅의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3. 추방. 아담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지리적이고 영적인 상징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참고할 내용
위와 같은 특별한 징벌과 더불어,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이 지적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와의 죄는 아담에게 영향을 미쳤고,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는 상태에서 완전히 개인적으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혹은 하지 못하는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소수 혹은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둘째, 죄는 한 번 범해지면 결코 되돌려질 수 없습니다.
용서는 이루어질 수 있고, 교제는 회복될 수 있으나 역사는 변해질 수 없고 삭제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번 추방되면 에덴 동산으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참고사항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의 내용이 있습니다.
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은혜와 선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삭제될 수 없지만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잘 배울 수 있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타락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서 부패와 죽음을 초래했고, 그 타락의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롬 5:20. 요일 2:17).
징계의 복(신명기 8:5-6)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둘째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강으로 놀러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채찍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종아리를 때리면서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일류대학에 가고 출세해서 돈 많이 벌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하고 믿음을 지켜 신앙의 자식이 되기를 더 원하고 있다.
왜 거룩한 주일을 우습게 여기느냐?”
종아리를 맞던 아들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 그 채찍은 아들의 신앙과 장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변호사가 된 그 아들은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교회에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채찍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벌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하시면서 채찍 없는 인생은 불쌍하게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채찍으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히 12:6). 우리가 진정 영혼을 사랑한다면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채찍은 아프지만 하나님은 그 은총을 빼앗지 않습니다(삼하 7:15). 영혼을 때리는 채찍은 바로 내 자신에게 먼저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부자는 자기 영혼에 대해 채찍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영혼은 저주 받았고 음부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채찍 없는 세대는 영적 암흑입니다. 채찍 없는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방자함이 제사장 가문을 망하게 했듯(삼상 2:34) 영혼을 때리는 채찍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존귀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 영혼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채찍을 드십시오.
한 사형수가 형장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사형수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내가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에요. 당신이 내가 잘못할 때 한 마디라도 꾸짖었다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귀를 물어버렸습니다.
외아들인 자식이 나쁜 짓을 할 때 그 어머니는 채찍을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사형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채찍이 있는지요? 방자하게 행할 때 꾸지람이 필요하고 오만해질 때 채찍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속담에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속담에는 “예쁜 자식 매로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야단칠 때 ‘네,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뉘우치는 자녀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야단친다고 대들고 거역하는 자녀들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대항하고 사회에서도 법을 지키지 않아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순종하고 선생님께 순종하고 사회에서는 직장상사에게 순종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더 나아가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자가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키워야 성공하고 효자가 됩니다. 부모보다 키가 커지면 그 때는 늦습니다. 초등학교 때 길을 잘 들어야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13:24)
하루는 그 가정의 남편이 목사님께 승진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고, 드디어 그는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승진을 하고 재산이 점점 늘어나면서 교회에서 그 가족이 앉던 예배 좌석이 가끔 빈 자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아예 주일 예배에 불참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해서 알아보았더니, 그들의 말인즉 조용한 호숫가에 별장을 한 채 샀는데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수상 스키를 타기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아들이 호수에서 수상 스키를 타다가 물에 빠졌는데 그 순간 쏜살같이 지나가던 다른 보트에 받쳐 그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귀한 아들을 졸지에 잃고 크게 낙심한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는 이제 두 부부만이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탐욕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재앙은 속히 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은 물새알을 발견해 그것을 양쪽 호주머니에 넣고 얼른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보였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새알을 맛있게 요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도 소년은 바닷가에 나갔지만 이제는 노는 것에 더이상 관심이 없고, 하루 종일 물새알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루는 물새알을 못 주워 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집에서 ꡒ꼬꼬댁ꡓ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암탉이 알을 낳고 우는 소리였습니다. 소년은 물새알 대신 이번엔 달걀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또 말없이 그것을 요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소년은 바닷가로 나가는 대신 누구네 닭이 알을 낳는지를 살폈고, 그렇게 시작된 소년의 도둑질 버릇은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대담해지고 규모가 커져 결국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린 시절 물새알이나 달걀을 가져왔을 때 저를 훈계하셨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소유하고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가증스러운 반역에 대해서는 엄중한 징계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된 우리가 불신의 세상과 함께 정죄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온갖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야겠습니다.
몇 년 전, 어떤 여자가 죽을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여자는 이웃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이런 맹세를 했습니다."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는 전혀 딴 사람이 되겠습니다. 애들을 교회에 데려가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자라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몇 개월 도안은 맹세를 잘 지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옛날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친구와 어울려 차를 몰고 가면서 술을 조금씩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커다란 교통사고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자식이 한 번 잘못했다고 해서 회초리를 들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책망을 하고 난 다음에도 자식이 그 책망을 무시하고 여전히 자행자지하면, 그때는 회초리를 들고 종아이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으십니다.
하지만 일단 깨닫고 하시고자 때리시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리시기 전에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완고하면 파멸의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반면 마음이 깨어지고 회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한 어린 소녀가 그녀의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했더니 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픈줄은 나도 알지만 손가락이 튼튼해지기도 한단다. "
그래서 소녀는 다음처럼 대답하여 옛 부터 지금까지의 교훈을 요약했습니다.
"선생님,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아픈 것 같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 중에서도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매우 사랑하시며 고통의 통로로 다가오는 귀중한 영혼을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 한 당신께서 조차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 당신께서도 과정이 없이 과정의 결과만을 이루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속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제 궤도를 운행하는 별들이 그를 위해 싸우고 부는 바람마다 그의 닻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영혼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징계의 사랑을 깨닫고 인내로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엄격한 가정교육 덕택에 지금은 가족 모두가 전도 사역에 동참하고 있읍니다)안네는 얼른 “엄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놈이 잘못하게 했어.”하고 둘러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루스 여사는 “오. 알아. 그래서 나는 그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회초리로 딸을 때렸습니다. 두 시간 뒤에 딸이 또 잘못을 저질러서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딸은 얼른
“엄마. 마귀란 놈이 벌써 내 속에서 밖으로 도망갔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루스 여사는 하는 수 없이 회초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딸은 이렇게 애교로 매를 피했지만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민수기 32:23에는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되어 있고,
잠언 28:13에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라”
얼마 전 TV에서, 최근 성장하고 있는 호주 불교의 실상을 취재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한 주지는 호주 불교의 성장을 그리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절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색적인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심신수양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불교의 교리나 가르침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기독교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절기마다 가득 찬 기도원이나 때마다 호황을 이루는 철야예배는 사업이 번창하고, 건강이 좋아지고 자식이 잘 됐으면 하는, 자기 중심적인 그릇된 신앙의 표현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기한 마술사 정도로 인식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구속의 참된 의미는 접어둔 채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자들에게서 떠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쓰여지며 천국 복음의 증거들로 제시되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도 세상작인 복과 이적만을 쫓는 믿음이 아닌지 반성할 때입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2:21)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전혀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과 어려움 없이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보나마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삶은 근본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라고 분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정도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어려움은 누구나 있습니다. 어려움이나 고난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삶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게 되면 삶이 소극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가 사라집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한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면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을 해석하는 영적 시각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성숙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의 이런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 광야의 훈련은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독의 고된 훈련을 따라갑니다. 감독이 자신을 금메달 선수로 만들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성도들의 인생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은 그 어떤 것이든 훈련 과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아니,생각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삶의 어려운 과정을 신앙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 희 정승에게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조용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주색에 빠져 학문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에 어느 날 밤 황 희 정승은 아들이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친히 문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맞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매우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어이된 일이옵니까? 의관 속대를 하시고 저를 맞아주시다니요?” 이 때 황 희 정승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네가 아비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 내 집 사람일 수 있겠느냐? 한집 사람이 아닌 나그네가 집을 찾으매 이를 맞는 주인이 인사를 정중히 차리지 않으면 어찌 예의라 이르겠느냐?” 이후 황 희 정승의 아들은 크게 뉘우치고 행실을 고쳐 학문에 정진했음은 물론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이 박힐 정도로 한 번 호되게 훈계를 들으면 정신을 차리고 말을 듣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제멋대로 어리석은 짓만 하지만 사랑으로 온전히 훈계를 한다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의 매도 필요한 것입니다.
2. 미리 징계 기준과 방법을 자녀에게 맞게 고려하여 공평하고 일관성 있게 징계하라.
3. 자녀에게 징계 받는 이유를 납득시킨 후 징계하라.
4. 손으로 직접 때리거나 얼굴이나 머리를 심하게 때림으로써 자녀에게 모욕감을 주지 말라.
5.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징계하라. 많은 사람 앞에서 받는 징계는 심각한 수치심과 모멸감(侮蔑感)을 준다.
6. 징계는 자녀가 잘못을 범한 즉시 시행하라.
7. 징계 후에는 반드시 사랑과 용납의 자세로 자녀를 위로하고 감싸주라.
8. 징계 받았던 일에 대해 자녀가 행동 수정을 했을 때 그에 따른 칭찬과 보상의 말과 행동을 잊지 말라.
그래서 더 이상 그 은행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징계의 의미로 금융연수원 파견연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밑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자기가 잘나고 능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 실패하고 연수원까지 떨어지자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교회에 나가서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신한은행 명동 지점장 자리가 나오게 되어, 그는 명동 지점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책상에 앉는 순간 먼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지점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 은행의 지점장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주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는 날마다 새벽 기도를 드린 후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뒤부터 영업 실적이 올라가서 신한은행 전체 300개 지점 중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행에 근무한지 30년 만에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은행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 만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을 가서 한번쯤 구겨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복입니다.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놓아라. 귀가시간을 엄수하라.” 바버라 여사는 이런 글이 쓰인 쪽지를 자녀들의 방에 붙여놓았다. 한번은 아들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대통령의 아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출마의사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 부시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주지사 출마를 포기했다. 세계의 명문가들은 대부분 이런 엄격한 교육을 통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최고의 교사다. 어머니의 격려와 채찍이 자녀를 건강한 인격체로 만든다. 자녀에게 무조건 칭찬만 해주어라. 그러면 그 아이는 아주 버릇 없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옛말에 '엄하게 키운 자식이 훗날에 효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며, 말로 꾸짖어서는 안되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교육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잘 교육시켜 놓으면, 훗날 자식이 장성한 후에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하나님과 부모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때로는 자녀 쪽에서 부모에게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부모에 대해 고마움과 신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개입하여 책망하고 훈계해야 할 때가 되면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러나 장황하게 설교조로 늘어 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절제하는 일입니다. 감정을 드러낸 반응은 아이들에게 거부감을 갖게 합니다. 징계의 기본 원칙과 기준은 성경입니다. 징계는 부모의 개인적인 기준이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적인 견해와 관점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부득이하게 체벌을 할 때에는 직접 손을 대지 말고 회초리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의 잘못된 행실의 옷을 벗기기 원한다면 따끔한 꾸중과 냉정한 지적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몰아부칠수록 고치려하기보다는 움추러들게 됩니다. 징계가 필요할 때마다 무엇이 진정 자녀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긴 대나무로 그것을 꾹 찔렀더니 ‘야∼옹’하는 소리가 났다. 쥐를 쫓다가 우물에 빠진 고양이었다. 임 전도사는 고양이를 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대나무 끝에 그물을 달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속 반항했다.
그대로 방치하면 죽을 것이 뻔했다. 임 전도사는 결국 막대기로 고양이를 쳐서 실신시켰다. 그리고 뜰채에 담아 구출했다. 따뜻한 방에 고양이를 눕혔더니 곧 깨어났다.
하나님은 강퍅한 죄인을 구원하실 때 이 방법을 사용하신다. “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사 1:5)
그러므로 벌은 반드시 한편으로는 애정의 표현이 따라야 한다. 벌로서 끝나 버리면 부모는 권위에 의해서 아이들을 지배하게 되고, 아이들은 그 개성을 자유롭게 나타낼 수 없게 되어 도리어 위축되어 버릴 것이다. 이래서야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될 수 가 없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면 왼손으로 안아줘라.“하는 유태의 낡은 속담은 벌에는 애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마따나 유태인은 무슨 도구를 써서 아이들을 때리는 잔인한 일을 하지 않고 흔히 손으로 두들긴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히고 세 번 절을 하였습니다. 제자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누구에게 절을 하신 것입니까?"
선비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나무에게 절 한 것이지"
"왜 나무에게 절을 하십니까?"
선비가 말했습니다.
"이상할 것 없네. 저 풀뿌레 나무는 나에게는 가장 영향력을 미친 스승이라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어렸을 때였지. 내가 망나니로 개판치며 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이 나무를 꺽어서 회초리를 만들었지. 그리고 내 종아리에 피가 나오도록 쳤어. 나는 그 때 아버지를 원망하였지만 결국 이렇게 크게 일하게 되었지. 그래서 나는 이 나무만 보면 그 생각이 나. 이 나무 때문에 내가 바로 살게 되었어
왜냐하면 황희 이후 최고의 인물이었던 김종서와, 훗날 영상까지 된 황수신 에게 만큼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혹독하게 야단을 쳤기 때문입니다. 황희의 눈에는 이 두 사람만 사람으로 보이고 나머지 중생들은 짐승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황희 정승과 같은 큰 인물이 없는 것인지, 도무지 쓴 소리를 하는 '어른'이 안보이네요. 국민을 꾸짖을 만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꾸중이나 책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국민을 개나 돼지취급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꾸지람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상전으로 앉혀놓고 비위 맞춰주기에 급급합니다. 아이들을 꾸짖지 않는 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는 짐승을 사육하는 셈이지요.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과 같이 하느니라"(잠3:11-12)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옛날에 작지만 평화로운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이웃 나라의 왕 때문에 이 평화스러운 나라에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저것 시비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평화스러운 나라의 왕은 고심 끝에 젊고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신을 보고 이웃 나라의 왕은 몹시 언짢아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에는 그다지도 인재가 없단 말이오? 수염도 나지 않은 사람을 내게 보내다니..." 젊은 사신은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수염의 길이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신다는 것을 저희 왕께서 미리 아셨다면 아마도 저 대신 염소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웃 나라의 왕은 다시는 그 나라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이와 같은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구하지 않은 많은 것까지 더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부귀와 행복의 근원이 지혜로부터 시작됨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는 지혜와 지식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도도 제자도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실은 대학에 들어가는 학원으로 전락해버리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잠을 잡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때리면 폭력이고, 학원에서 강사가 때리면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왜 이 땅이 이렇게 변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원은 물이나 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숲이나 들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마음속에 있는 지혜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 15)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옛말에 '엄하게 키운 자식이 훗날에 효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며, 말로 꾸짖어서는 안되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교육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잘 교육시켜 놓으면, 훗날 자식이 장성한 후에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히12:8)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현대의 많은 교육학자들은 자녀교육에 있어서의 체벌의 문제, 즉 매의 사용에 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은 폭력적이며 비인격적이고 비교육적이라 말하며, 오직 사랑으로 끊임없이 인내하는 가운데 자녀를 양육하면 자녀는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의 견해와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은 물론 성경 여러 곳을 통해서 자녀를 채찍으로 근실히 징계할 것을 명하십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드러가느니라"(잠20: 30)
그 사랑많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처벌을 통한 징계를 명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다만 부모들이 체벌을 가함에 있어서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현재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에게는 물론 앞으로 부모가 되실 분들을 위해 매의 필요성과 그 올바른 사용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랑의 매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귀여운 사자 새끼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재롱을 피웠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큰 동물들도 한번 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놓지 않는 그 무서운 사자의 입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새끼를 입에 물고도 상처 하나 안내고 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자의 입이 새끼를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부드럽게 감싸안으면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어루만지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나를 덮치는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이 바로 위험에서 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겁내지 마세요. 사자의 입 속에 들어갔어도 안전한 것은 사자의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그것은 사랑의 징계입니다.
"야 이놈아, 너 돈푼이나 있다고 밤낮 누워먹어? 너는 이 사회에 하루 살아야 하루 해독이요 이틀 살아야 그만큼 이 나라 이 사회에 해독인 기생충 같은 놈이야. 너 같은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사정없이 두들 긴다.
무량병자는 마누라를 부르고 자식을 부르나 종무소식(終無消息)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구나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발동하며 일어난다. "야, 이놈이 일어나누나" 하고 다시 후려갈기니 둥싯둥싯 달아나면서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일 잘하겠다고 백배 사죄를 한다.
그래서 무량병 든 놈을 때려서 살렸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참말 한국 민족이 이렇게
매를 맞고 한국 교회가 많은 매를 맞는 것은 일어나서 일하라는 것이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함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출처 : 어느 목사님 설교 중에서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가 1997년에 20세의 나이로 세계 골프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코치는 우즈의 스윙 폼이 좋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코치는 스윙 폼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2년 동안은 우승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즈는 코치의 훈계를 받아들여 당장의 우승을 생각하지 않고 스윙 폼을 고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2년 동안의 교정훈련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드디어 2년이 지난 1999년, 14개 세계 대회에서 무려 10번을 우승했습니다. 그는 코치의 훈계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심지 않고 거둠은 없습니다. 주님은 심지 않고 거두기만 바라는 자를 게으르고 악한 종이며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준 것마저 빼앗아 열심히 장사하여 갑절로 남긴 충성된 종에게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온 말씀입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힘들어도 고쳐야 합니다. 책망을 받아 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때로는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118 :18)
논산에 살고 있는 한 여집사의 간증입니다. 그 집사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날에 아이들이 서울대공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졸랐습니다. 주일에만 쉬는 남편도 함께 가기를 바랐습니다.
한 번만 남편의 부탁을 들어 주면 나중에 교회에 이끌기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만 주일성수를 접어두고 가족이 함께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입구 부근 모퉁이에서 커다란 쓰레기 수거차가 달려와 그 집사의 가족을 덮쳤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으나 그 딸은 오래도록 병원에 있어야 했고, 가족들 모두가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록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하셨지만 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눈물어린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사생아'라면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있으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잘못한 일에 대해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징계의 목적이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하고 믿음을 세워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을 던져 그의 선생에 의해 매를 맞았는데 이를 안 소년의 어머니가 체벌금
지를 주장하며 학교 당국에 상대를 고소를 했다.
그리고 2년후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는데 공립학교 교사는 부모의 반대가 있더라도 체벌은 가능하다고
했다.
단 매질은 다른견책수단에 실패했을 때 사용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
는 처벌을 미리 학생에게 통보해야하고 부모의 요구에 설명서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과 매를 듭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올 때, 그것이 해석되고 징계로 확신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정직성은 갈수록 빛을 발해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됐다.그는 대통령 재직시 ‘인기없는 지도자’로 불렸으나 지금은 ‘사랑의 지도자’로 통한다.지금도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다.
또 연장가방을 들고 전세계를 다니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집’을 지어주고 있다.이 사람이 바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 총재인 지미 카터.
어린 시절,부모의 따끔한 질책이 헌금을 훔친 이 어린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단 그 매 속에는 반드시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매를 드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나쁜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치 않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저를 좋아하시
지 않는군요."하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
라십니까 ?"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최상의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
세밀하게 간섭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에 찬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 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온량(溫良)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 니라" - 잠 15:4.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 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히 3:13.
어느 교회에서 성찬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한 소년에게 성
찬식에 쓸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너무 긴
장한 나머지 그만 포도주가 담긴 병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목사는 조심성 없는 아이라고 소년을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그 일 이
후로 그 소년은 더이상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나님에
게서 멀어졌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 교회 목사는 소년을 야단치는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
다. "네가 너무 긴장해서 포도주를 엎질렀나 보구나. 너무 당황해 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잘 아신단다.
하나님 일을 하는 데 긴장하는
걸 보니 너는 커서 훌륭한 목사가 될 것 같구나" 훗날 그 소년은 정말로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꾸중은 잘하지만 격려는 잘 못합니
다. 그러나 사람들은 꾸중 대신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격려를 하십시오.
사랑 담긴 격려는 나약한 한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탐험 대장은 30분이 지나면 의식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깨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얼마간 쉬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30분이 지나자 그들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탐험 대장은 그들을 치고 때렸습니다.
그들은 오두막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고 살아났습니다.
그들을 때린 손이 그들을 구해 낸 손이 된 것입니다.
건방지고 으스대는 사람은 징계를 받아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따라다니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가 징계 받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립니다.
한편 명철한 사람은 잘못했을 때 굳이 징계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방 깨닫고 잘못을 고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명철한 사람이라 해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은 꾸짖으면 빨리 알아듣고 바로 돌이킬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지식을 얻고 지혜로워 지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일제 치하에서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정책에 반대되는 내용의 찬송가를 삭제하고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에 우선 급하게 임시로 펴낸 찬송가에는 256장의 가사가 이러했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만신초목 욱였구나. 곳곳마다 가시덤불 굴어있는 해골 떼라. 재목 없어 집 못 짓고 살 곳 없어 방황하는,맹수 밥이 되는 영혼 주의 종아 어이 할꼬”
해방 후 나라의 피폐한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와닿지 않는 시대 지난 표현들로 금방 눈에 띕니다.
신학을 처음 공부할 때 어느 교수님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본문을 가지고 ‘돌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쓰고 있는 개역 성경이 ‘참 재미있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 늘 그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또 실감나는 표현인지 모릅니다.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22·24절).
백성이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돌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 가운데 신칙(申飭)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칙은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을 보면 21절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께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성경은, 찬송가도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게 되면 또 새롭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고쳐 옮겨야 합니다.
중세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이 묻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그 어두움을 걷어냈는데 개혁자들이 성경을 당시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여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출애굽기 19:20∼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출 19:21).
4월 8일(화) 사무엘하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개역개정)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새번역)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공동번역)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나는 앞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계속 춤을 출 것이오.
(NIV)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KJV) therefore will I play before the LORD
(NASB) therefore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 있는 실존입니다(Coram Deo)
코람 데오(coram deo) / In the presence of God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 Before men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하는데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
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인간들 앞에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이말은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리차드 밀러는 이 두 용어는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임재와 반대되게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신학사상
텍사스의 번영신학의 주창자 조엘 오스틴, 로버트 슐러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코람 데오와 반대적인 메세지이다.
인간중심적 메세지와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 앞에서 효과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
여호와의 눈을 약화시키는 신앙적 이탈로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칼뱅)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coram deo)을 먼저 보고 인간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1:2)
신앙적인 삶은 두 개의 명제 앞에서 펼쳐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Coram Deo)
둘째는 사람 앞에서(코람 호미니부스. Coram Hominibus)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
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이 춤을 추는 것과 춤추는 다윗을 업신 여기는 미갈을 볼 때 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을 인용한 판사들과 판사들의 판결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을 비교할 때 누가 더 자유민주주의에 합한 사람일까요?
다윗이 왕으로서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왕의 권위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헌법재판소의 여덟 명의 판사들이 회유와 협박과 여론몰이식의 힘으로 위협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신한다면 공의로운 판결을 회피할 수 있었을까요?
좌파 정치의 은밀한 조작에 민감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우파의 예리한 눈동자가 있었을까요?
좌파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4:4 또는 5:3으로 기각이 될 것이라고 우파의 민심을 안심시킨 후에 판결하는 날 전원 일치 탄핵으로 판결하므로 허탈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왜 인식하지 못할까요?
미갈은 은밀하게 다윗을 업신여겼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붙잡아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며 행동하는 다윗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모두가 광장에서 거리에서 골목에서 힘을 모아 외쳐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갈등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민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신앙생활의 자세를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입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코람 데오(Coram Deo)’ 라고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택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고 심지어 두 아들마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자는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그 목회자의 마음에 참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신앙생활에 은혜가 넘쳐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신앙생활을 위한 명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라고 합니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를 팔아넘길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길을
포기하고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매어 죽는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이미
가룟 유다의 선택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주와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함께 경주하는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에녹이란 이름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녹(Enoch)이란 이름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 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으로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삶이
곧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왜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질 수 있었을까요?
에녹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63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보다 훨씬 적게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보다 적게
살았다고 하면 무슨 몹쓸 질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몹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서 영원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를 살았다고 합니까?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은 없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에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969년 동안 그 성을 지켰다면 잘 지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969년 보다 더 많은 2천년 동안 성을 지킨 사람과 비교할 때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969년 동안 육체라는 성을 지키지만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에녹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둘째는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므두셀라는 이름은 므두(무투, death)와 셀라(살라크, send)가 합성한 이름으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때 심판은 노아의 홍수를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아서 주님 앞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녹과 같이 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주와 동행하다가 어느 날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게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기도합니다.
에녹과 같은 삶을 원하신다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거룩한 동행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동행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공급받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우려는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현장에서 스데반은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 돌이 방향을 바꿔 돌을 던진 사람의 이마에 맞아 마치 골리앗이 쓰러지듯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중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 죄를 깨닫지 못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
둘째, 죄를 알기에 두려움에 사롭잡혀 살아가는 사람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
셋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
해어화(解語花)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풀 해(解), 말씀 어(語), 꽃 화(花)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유래 /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던 당나라(唐--) 현종(玄宗)은 얼• 마 뒤 국가 재정(財政)의 곤란(困難)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奢侈)한 궁중(宮中) • 생활(生活) 때문에 정치(政治)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 다.
양귀비(楊貴妃)는 본디 현종(玄宗)의 제18왕자(王子)인 수왕(壽王)의 비였는데, 현종• (玄宗)이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양귀비(楊貴妃)를 보고 그 미모(美貌)와 재치(才• 致)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종(玄宗)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一族)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 (政治)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태액지(太額池)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玄宗)은 문• 득 왕비(王妃)를 가리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宮女)들에게 「연꽃의 아름다움도 어• 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耶).」라고 말했다고 함.
* 何如此解語花耶
하여차해어화야
何 - 어찌 하, 멜 하, 꾸짖을 하
1. 어찌. 2. 메다. 3. 무엇 4. 어느 5. 왜냐하면
如 - 같을 여, 말 이을 이
1. 같다 2. 같게 하다 3. 따르다 4. 조사 5. 음력 2월의 이칭
此 - 이를 차
1. 이 2. 이곳 3. 이것 4. 이에 5. 이와 같은
解 - 풀 해, 흩어질 해
1. 풀다 2. 흩어지다 3. 흩음 4. 풀리다 5. 깨닫다
어 - 말씀 어, 알릴 어
1. 말씀 2. 알리다 3. 말 4. 고함 5. 말하다
花 - 꽃 화
1. 꽃 2. 꽃이 피다 3. 꽃답다 4. 무늬 5. 흐려지다
耶 - 어조사 야, 간사할 사, 간사 사
1. 어조사 2. 간사하다 3. 아버지를 부르는 말 4. 옛 명검(名劍)의 이름
해어화(解語花)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풀 해(解), 말씀 어(語), 꽃 화(花)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유래 /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던 당나라(唐--) 현종(玄宗)은 얼마 뒤 국가 재정(財政)의 곤란(困難)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奢侈)한 궁중(宮中) 생활(生活) 때문에 정치(政治)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양귀비(楊貴妃)는 본디 현종(玄宗)의 제18왕자(王子)인 수왕(壽王)의 비였는데, 현종(玄宗)이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양귀비(楊貴妃)를 보고 그 미모(美貌)와 재치(才致)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종(玄宗)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一族)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政治)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태액지(太額池)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玄宗)은 문득 왕비(王妃)를 가리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宮女)들에게 「연꽃의 아름다움도 어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耶).」라고 말했다고 함.
4월 7일(월) 사무엘하 1장-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활 노래(삼하 1:18)
and ordered that the men of Judah be taught this lament of the bow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ar.)
활 노래(this lament of the bow)
다윗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노래를 말합니다.
1. 활. 2. 무지개
-
1. 명사, 여성 활, 사냥꾼의 활, 창 27:3, 병사의 활, 호 2:20(18), 화살이 미치는 거리, 창 21:16
-
2. 명사, 여성 [은유적으로] 무지개, 창 9:13, 겔 1:28.
- 문법설명 / 복수 קְשָׁתוֹת, 복수 연계형 ׃קַשְׁתוֹת
-
-
관련성경 / 무지개(창9:13,14, 겔1:28), 활(삼상2:4, 느4:13, 시7:12), 활 쏘는 자(삼상31:3, 렘4:29), 화살(시76:3).
활 노래라
-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즉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0:17-42).
3. 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 자들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대상
8:40;12:2).
4.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야살의 책
- 여기서 '야살'(*)은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Keil & Delitzsch,Lange).
이
책은 이곳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이다(Glodschmidt, Keil).
'케쉐트'라는 활은 성경에서 때로는 "무지개"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활"이라고 하며 다윗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우정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결코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도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정치인의 바람직한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죽어가는 사울의 간청에 의하여 사울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소년을 시켜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터 세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려할지라도 사울과 같은 마음과 행동으로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존경한 것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 돈이 무려 200억 정도라고 하며 마지막까지 모함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 정치 풍토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장제원을 모합하려고 고의적으로 흥분제를 먹이고 호텔에 투숙하여 마치 성폭행한 것처럼 고소하고 매월 돈을 받아왔다는 것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양심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 다윗이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짓다(1,17-27)
17-18, 애가를 지어 부르다 :
①다윗이 애가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고,
②‘활의 노래’라 이름 붙여 유다의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일렀다.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케쉐트', 즉 '활'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哀歌’를 ‘활’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사울이 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
둘째,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삼상 20:17-42).
셋째,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 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22절).
19-21, 이스라엘의 영광을 잃다 :
①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②이 소식을 갓과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하지 못하게 한다(20절).
③21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음을 애도하는 시적 표현이다.
22-25,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다 :
①. 22절은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②. 23절은 살았을 때는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음을 말한다.
③. 24절은 사울이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시사하고,
④. 25절은 두 용사의 죽음을 슬퍼한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惡을 행한 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격상 이 노래가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내 준다.
26-27,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다 :
①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노래한다(26절)
②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다윗은 애가를 통해 사울과 요나단을 진심으로 칭송한다.
애가 어디에도 사울의 허물과 약점은 찾아볼 후 없다.
그들은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용사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한날에 두 용사를 한꺼번에 잃은 것은국가적인 슬픔이고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은 두 용사의 죽음이 블레셋의 비방거리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담아 애도를 표현한다.
활 노래를 통해 다윗의 성숙한 인격과 마주하게 된다.
그가 애도한 두 용사의 용맹 못지않게 다윗은 성숙했다.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된다.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가(사무엘하 1:1)
본문은 다윗이 시글락을 약탈했던 아말렉 족속을 멸절시킨 뒤 다시금 시글락에 돌아와서 거주하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1. 사울의 사망소식을 접한 다윗(1-16)
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한 다윗은
② 거짓말의 결과-죽음
아말렉 소년의 죽음
③ 슬퍼하는 다윗
정적인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2. 다윗의 활노래(17-27) 애가
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슬픔(17-19, 25-27)
② 사울과 요나단의 미덕에 대한 칭찬(20-2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각하는 다윗(19-21)
원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21-24)
옛 친구에 대한 깊은 우정이 잘 나타나 있다.(256)
다윗의 애가(哀哥) "활 노래"
사무엘하 1:17 ~ 27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어 부른 애가이다.이 애가는 크게 나누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는 부분(17~21, 24~27절)과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과 미덕을 칭송하는 부분(22~23잘)으로 구분된다.
이상과 같은 다윗의 애가는 일명 '활 노래'라고도 불리우는데 내용이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구약의 애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애가를 통해 다윗은 자신을 최후의 순간까지 죽이려 했던 사울을 용서함은 물론 그의 용맹을 칭송하기까지 한다(23절).
그리고 사울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한다(20절).
또한 자신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이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고 칭송한다(26절).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신앙적이며, 민족적인 차원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울의 단점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칭송한 다윗의 인품은 조만간 신정적 왕정 체제 아래에서 신정
왕국을 이어갈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성숙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요나단 뿐 아니라
사울에 대해서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던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이 요나단에
대해서는 서로 우정을 나눈 친구란 점에서 칭찬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 대해서까지 칭찬을 하며 죽음을 애도한
것은 실로 성숙된 신앙 인격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들도 그 같은 다윗의 신앙 인격을 본받고 연마해야 함은 물론이다(잠 17:91, 빌 4:52).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면 교만을 낳는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비참을 알면 절망을 낳는다"고 하며,
슬픔과 역경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입증한 사람이 다윗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자신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산 증인으로, 항상 주를 전파해야 한다.
이렇게 행할 때에는 평화가 주어지며
슬픈 노래를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다(레 26:63).
우리 생애에는 슬픈 노래가 주어지지 않도록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다윗의 '활 노래', 야살의 책
1. 다윗이 아말렉을 물리치고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아말렉(Ama-lekites) :
아말렉으로 시작된 족속 전체를 통칭한다.
시내 반도와 네게브 사막 북동쪽의 황폐한 땅에 살았던 이들(창 14:7)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먼저 공격한 민족으로(출 17:8), 이들은 여러 번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다(삿 3:13;
6:3; 삼상 15:20; 27:8).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불순종함으로 인해 아말렉에게 패하고 말았다(민 14:43-45).
또한 사사기에서는 아말렉이 미디안과 연합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도와 북이스라엘을 공격했음을 기록하고 있다(삿 3:13; 6:3, 33).
사울 왕은 “이제 너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삼상 15:3)는 명령을 받고서 아말렉을 공격하였으나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삼상 15:18-19). 사울의 진멸을 피해(삼상 15:9) 남아 있던 아말렉인들은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다윗에 의해 다시 공격당하고 말았다(삼상 27:8-9). 아말렉인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히스기야 때 시므온 자손에 의해서(대상 4:43), 또 에스더 때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과 그 일족을 처형함으로써 성취되었다(에 7:9-10). 이는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민 24:20)라고 했던 발람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말렉, ‘여호와 닛시’를 부르게 한 족속
출애굽 때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접전할 당시 여호수아를 전방에 내보낸 모세는 산 위에서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계속 손을 들고 있음으로써 승리를 가져왔다(출 17:8-16). 이를 기념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했다. 이때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는데(신 25:19), 이는 아말렉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피곤하여 뒤떨어진 약한 사람을 쳤기 때문이었다(신 25:18).
시글락(Ziklag) :
유다 남쪽 에돔 변방의 성읍(수 15:31)으로 시므온 족속에게 분배된 곳이다(수 19:5; 대상 4:28-30).
사울 통치 기간에는 블레셋의 영토였는데 가드 왕 아기스가 이곳을 다윗에게 주어 다윗과 그의 가족,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다(삼상 27:6).
다윗이 이곳에 거주할 때 다윗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다윗에게 돌아와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었다(대상 12:1-22).
그 후 시글락에는 다윗이 1년 4개월 동안 계속 거주하였고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치는 본부 기지가
되었다(삼상 27:6-11).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이 이곳 시글락을 침입하여 불사르고 부인들과 아이들을 잡아갔을 때, 다윗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잡혀갔던 아내들과 아이들을 구출하였다(삼상 30:1-20).
다윗이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곳도
시글락이었다(삼하 1:1-2).
또한 시글락은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다 자손이 거한 곳 중 하나였다(느 11:28).
2. 기름 부은 자는 ‘그리스도(Christos) <메시아. Messiah>
‘메시아(Messiah)‘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헬라어는 ’그리스도(Christos)‘이다.
이 단어는 ‘기름 붓다’(to anoint)라는 어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the anointed)라는 뜻이다.
메시아란 유대 전통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아서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들이 민족적 역경과 고난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기대하는 구원자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대리자에 대한 상징이었다.
“여호와의 메시아”(Messiah) 같은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왕, 제사장들, 선지자들, 족장들, 이방의 왕 고레스, 민족의 구원자에게 사용되고 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삼하 1:16).
기름 부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성경에는 7,000개가 넘는 사건이 예언됐고 성취됐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데서 죄에게 응답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첫째,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가 되고 교회를 빠졌다가 말았다가 하거나 정치나 경제인 속에 기독교인이 있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인들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원주민들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귀중한 보석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사탕 한 봉지와 다이아몬드 한 봉지씩을 맞바꾸었다.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 안타깝다.
둘째, 누구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인가?
어느 날 이새의 집에 대제사장이 와서 “아들은 다 나와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 나온 것이냐?” 할 때 “조그마한 아이
한명이 목동으로 있다”는 것이다.
데리고 오자 성령 충만한 사무엘이 볼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
그러자 사무엘이 다윗을
불러서 “앞으로 비밀을 지키라.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지시를 하였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기다리고 참고
입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그 머리 위에다 기름을 부은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왕, 제사장, 선지자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된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셋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신분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데 번제를 받으시고 모든 소제를 기억하실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성령 충만을 말하는데 성령 충만 받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앙에 속지 말아야 한다. 특히 마귀가 유혹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마귀가 유혹하는 말에 넘어가면 신앙의 힘이 빠지게 된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관계를 잘해야 하겠다. 그리고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엔게디 광야에 굴에서 부하들하고 숨어있는데 절호의 기회가 왔다. 사울이 그 굴에 변보러 들어왔다. 다윗은 저 굴 구석에 숨어있는데 거기에 와서 창, 칼 다 내놓고 바지가랑이 다 내놓고 쪼그려 앉아서 엉엉 하고 힘을 쓰고 있다. 단칼에 목을 날릴 수 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맡겼다. 당신 손에 붙였다. 이 기회다. 그냥 똥과 함께 날려 버려라! 그때 다윗이 뭐라고 말했나?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삼상 26:11~12).
이것은 두 번째이다. 두 번째 들을 지나는데 들에 사울이 자기 군대들을 둘러싼 그 가운데서 다 깊이 잠을 자고 있다. 거기에 가서 단칼에 목을 치든지 창으로 찔러 버릴 수 있어서 군인들이 다윗에게 또 기회가 왔다. 단칼에 그냥 목을 베십시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절대 손댈 수 없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는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내가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 존중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나는 도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울의 물병하고 창만 들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산에 올라가서 왕이여 내가 왕을 죽이려 했으면 죽였겠는데 안죽였는데 왜 나를 잡으려고 따라 다닙니까? 하고 그렇게 고함친 적이 있다. 사울이 다윗의 손에 몇 번이나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을 존경하므로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왕을 삼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해서 죽이지 않겠다고 안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지원병이 아니다. 지원한다고 하나님 절대 주의 종으로 삼지 않는다. 주의 시키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원병은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징계하실 것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시편 105:15).
기름은 하나님이 부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냈으므로 그를 헤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울의 최후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죽였다. 하나님이 적군의 손을 통해서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또 사랑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다윗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아브라함도 믿고 순종한다고 말했지 사랑한다는 말 안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안했는데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왜 그렇게 겸연쩍게 못하나? 그것이 우리 한국 가정에서 가장 모자라는 것이 남편이 부인을 쉽게 사랑한다는 말 안한다. 구라파나 서양에 가면 남편들이 부인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뺨에 뽀뽀해주는 일이 많다.
다윗은 개인적인 결점이 많았으나 하나님을 절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안했는데 시편에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 많이 한 사람이 없다. 다윗은 고난을 경험한 뒤에는 탄식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응답되었을 때는 감사시를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을 때는 찬양시를 지었는데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라고 고백했고 다윗은 최초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안했다. 경외하고 존경한다고는 했지 사랑한다는 말 안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말에 감동하시고 그를 사랑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 22).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이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전쟁을 나갈 때에도,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 대해서도, 밧세바를 범한 후 회개 할 때에도 다윗은 항상 먼저 하나님을 찾았다. 그는 곤란할 때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자백하고 믿고 의지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할 때 기도로 시작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야훼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 2)라고 기도한 것이다.
절대적인 믿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계에 부닥친 후에야 비로소 인간적인 계산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절감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계산하지 말라는 것이다. 빌립은 5천명 먹일 때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때 그 먹이기 위해서는 돈이 얼마나 필요하고 음식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계산을 한 것이다. 계산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지 빌립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안드레는 주님께서 먹이라는 말을 듣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계산 안했다.
계산하는 사람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 기만명을 먹이려고 나왔으면 정신 빠진 놈이지. 그런데 계산을 안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이려고 나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은 책임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 앞에 섰을 때 2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야 되는데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벡성이 도로 돌아가서 항복하자. 도로 종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할 때 모세는 뭐라고 말했나? 너희는 오늘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우리는 군대도 없고 병거도 없고 마차도 없는데 계산은 모세는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놓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통해서 건너가게 하시고 뒤에 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다 물로써 덮어서 죽였으니 하나님 계산 바로 하셨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나님이 계산하시는 것이다. 네 일을 주께 맡겨라. 그리하면 주께서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무조건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믿는 우리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55: 22)라고 말씀하셨다.
3. 두 용사 /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 45~47).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삼하 1:27).
길보아 산(Mount Gilboa) :
이스르엘 골짜기 동쪽 끝에 있는 모레(Moreh) 언덕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높이는 해발 530m 정도 된다.
길보아
산은 요단 계곡에서 이스라엘 평야에 이르는 계곡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많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에서 세 아들과 함께 블레셋과 싸우다가 전사했다(삼상 31:1, 8).
사울과 요나단 등의 전사
소식을 접한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배했던 장소인 길보아 산을 향해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雨露)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찌어다”라고 저주(詛呪)했다(삼하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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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
독일의 철학자,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2차 대전 후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교수가 되었지만 관료주의에 반항하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7월 8일 루트비히스하펜 암 라인에서 유대인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
물리학,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 입학 후 여섯 학기밖에 지나지 않은 1908년 「리케르트와 근대 인식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탁월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루카치, 브레히트, 벤야민, 크라카우어, 아도르노 등 동시대의 지성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루카치와의 표현주의 논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으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철학, 정치 경제학, 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법철학, 예술 등 가히 백과사전적이라 할 정도로 폭넓은 분야를 섭렵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유토피아 철학
안녕하세요, 철학 애호가 여러분! 오늘은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와 그의 대표작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유토피아 철학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블로흐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마치 재능넷에서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공유하듯이, 블로흐의 철학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희망의 철학으로 가득한 여정을 시작해볼까요?
1.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철학은 희망, 유토피아,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깊은 탐구로 특징지어집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제 세계의 변화와 혁명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블로흐는 "아직-되지-않은-것(Not-Yet-Become)"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과 현재의 잠재력을 연결했습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우리 모두 내면에 "아직-되지-않은" 무언가를 품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블로흐 철학의 핵심입니다.
블로흐의 주요 저서:
-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 1954-1959)
- 유토피아의 정신 (Geist der Utopie, 1918)
-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 (Naturrecht und menschliche Würde, 1961)
블로흐의 생애와 사상은 20세기의 격동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즘의 부상과 몰락, 그리고 냉전 시대를 겪으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희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77사망
블로흐의 철학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은 실제 세계의 변화와 혁명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철학"은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블로흐의 대표작인 "희망의 원리"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블로흐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재능넷이 다양한 재능을 연결하듯이,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철학적 다리 역할을 합니다. 함께 그 의미를 탐구해볼까요?
2. "희망의 원리": 블로흐 철학의 정수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표작으로, 1954년부터 1959년
사이에 3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저작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희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원리" 주요 개념:
- 아직-되지-않은-것 (Not-Yet-Become)
-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 앞으로-향하는 꿈 (Forward-Dreaming)
- 희망의 존재론 (Ontology of Hope)
2.1 아직-되지-않은-것 (Not-Yet-Become)
"아직-되지-않은-것"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이 개념은 현재 속에 잠재된 미래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블로흐는 우리의 현실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항상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되지-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미래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 과정
2.2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블로흐는 "구체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추구했습니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현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능넷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일종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죠.
구체적 유토피아의 특징:
- 현실에 기반을 둔 이상
- 실현 가능한 목표 설정
-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
-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2.3 앞으로-향하는 꿈 (Forward-Dreaming)
블로흐는 "앞으로-향하는 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앞으로-향하는 꿈은 우리가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합니다. 이는 예술, 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과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앞으로-향하는 꿈을 통해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현 창조적 과정을 통한 미래 실현
2.4 희망의 존재론 (Ontology of Hope)
블로흐의 "희망의 존재론"은 희망을 단순한 감정이나 심리적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는 희망이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희망의 존재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항상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으며, 이 과정에서 희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희망의 존재론의 핵심 주장:
- 희망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
- 미래를 향한 개방성
-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
- 능동적인 미래 창조
"희망의 원리"에서 블로흐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단순히 철학적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이 현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 현대적 의미와 적용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20세기에 탄생했지만,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해석과 적용을 찾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1 현대 사회에서의 희망의 의미
현대 사회는 빠른 기술 발전, 글로벌화, 그리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로 인해 때로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블로흐의 희망 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블로흐의 "아직-되지-않은-것" 개념은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 계발과 성장의 동기가 될 수 있으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와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희망의 역할:
- 불확실성 속에서의 방향성 제시
-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동력
-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
-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
예를 들어,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블로흐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아직-되지-않은-것"을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구체적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3.2 기술 발전과 유토피아적 사고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현대의 기술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가상현실 등의 첨단 기술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블로흐가 말한 "앞으로-향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통한 질병 예측과 치료, 가상현실을 활용한 교육 혁신, 빅데이터를 통한 사회 문제 해결 등은 모두 유토피아적 사고와 기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신 기술과 유토피아적 사고의 상호작용
하지만 동시에 블로흐의 철학은 우리에게 기술 발전의 윤리적, 사회적 측면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합니다.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닌,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구체적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3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인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블로흐의 철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 개념은 환경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재생 에너지, 순환 경제, 생태 도시 등의 개념은 환경 보호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구체적 유토피아의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유토피아적 접근:
-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 구축
- 생태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
- 친환경 기술 혁신
- 글로벌 협력을 통한 환경 문제 해결
이러한 접근은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환경 관련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3.4 사회 정의와 유토피아적 비전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사회 정의 실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의 "희망의 원리"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희망이 아닌, 사회 전체 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집단적 희망을 강조합니다.
블로흐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유토피아는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 차별, 빈곤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유토피아적 비전:
- 경제적 불평등 해소
- 교육 기회의 평등
- 인권과 다양성 존중
-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는 과정을 통해, 교육과 기회의 격차를 줄이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3.5 개인의 삶에서의 유토피아적 사고
블로흐의 철학은 거시적인 사회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의 "아직-되지-않은-것" 개념은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꾸준히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기계발, 커리어 성장, 인간관계 개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이상적 자아 지속적인 자기 실현과 발전
예를 들어, 재능넷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개인의 유토피아적 성장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과정이 됩니다.
3.6 글로벌 차원의 유토피아적 비전
21세기의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국제적 협력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후 변화, 팬데믹, 경제 불평등 등 전 지구적 문제들은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 개념은 이러한 글로벌 문제에 대한 실천적이고 협력적인 접근을 요구합니다.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글로벌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글로벌 유토피아를 위한 과제:
- 국제적 협력 체계 강화
- 문화적 다양성 존중과 상호 이해 증진
-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
-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s) 실현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글로벌 차원의 지식과 재능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국경을 초월한 협력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희망의 철학, 미래를 향한 나침반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단순한 이론적 논의를 넘어,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원리"는 불확실성과 도전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방향성과 용기를
제공합니다.
블로흐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한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직-되지-않은-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 사회의 발전, 그리고 글로벌 차원의 협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우리에게 희망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동의 원천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체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실현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블로흐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재능과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아직-되지-않은-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꿈꾸고, 함께 성장하며,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의
원리"의 실천이 아닐까요?
사람은 빵보다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다.
1885년 독일 남서쪽에서 유대인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63살에 처음 교수가 되기 전까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재야 학자로 살았다.
1917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위스 망명을 한 후 1933년부터는 나치를 피해 방랑한 15년간 유럽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뛰어난 여성들과 세번이나 결혼을 하고, 베버나 지멜, 루카치, 베냐민, 브레히트, 아도르노를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석학이나
예술가들과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치열한 토론을 했다.
30년이
넘는 최악의 망명 상황에서도 그 수많은 책을 썼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스위스에 망명한 이듬해에 낸 <유토피아의
정신>, 나치에 쫓긴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 낸 <이 시대의 유산>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의 순간을 살면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절망했기에 희망을 더욱 절실히 추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에서 환갑이 지나 처음으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공산주의 정권과 마찰을 일으켜 10년 만에
1957년에 퇴직당했다.
74살 때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희망의 원리>를 20년 만에 완성했다.
<희망의
원리>는 사실 반세기에 걸친 블로흐 사상의 결산이었다.
그는 76살 되던 1961년 서독으로 이주하여 1977년 숨을
거두었다.
<희망의 원리>는 철학이나 문학 또는 역사 등 인문사회과학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예술분야와
기술, 과학, 의학 등까지도 아우르는 책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를 ‘희망’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뚫는 사상서라는 점에서
‘희망의 백과사전’이다.
블로흐는
이 책에서 희망에 대해서 다섯가지로 정의를 했다.
첫째,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둘째,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셋째, 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넷째,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다섯째, 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준다.
철학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읽고 나서 희망의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그리스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누리고 바로 이 희망을 전도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는 한 인생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삽니다.
절망은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고, 희망은 인간을 살리는 명약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시편 146:1~5)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직역하면 ‘희망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밥을 안 먹고도 여러 날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희망이란 말보다 소망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희망 이란 말 대신 소망이란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반대로 소망이 없으면 금세
죽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첫번째 이야기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하도 더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 지하실에 큰 냉동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잘
됐다 싶어 땀이나 식힐 심산으로 냉동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악을 써봤지만 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청년은 상상을 합니다.
“내 몸이 점점 얼어간다. 몇 시간 후면 죽겠구나.”
이틀 후 사람들이 냉동 창고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가동되지 않았고 기온이 섭씨 15도에
불과했습니다.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그 청년을 죽인 것은 살인적인 냉기가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인생찬가>로 유명한 시인 롱펠로는 지독한 고통 속에 인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두 번이나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두번째 부인은 끔찍한 화재로 사별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을
예찬하는 시를 많이 썼습니다.
말년에 기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극한 고난 가운데 인생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정원의 늙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늙은 나무지만 언제나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죠.”
그는 고목나무에서 인생의 소망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이나 조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환경이나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에 소망을 상실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동일한 악조건 하에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 보니까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살자가 무려 8천 명이
넘었고, 지난 10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놀랄 일입니다. 얼마 전엔 재벌 총수가 자살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빚 때문에 혹은 가정불화 때문에, 실직해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직이 안돼서, 청소년들 중에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 다양한 이유로 자기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럴까 이해는 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살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이란 살라(生)는 하나님의 명령(命)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이유들보다 사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엄습한 절망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소망이
있으면 ‘자살’이 아니라 ‘살자!’가 되는 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비유하면 소망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질식하는 것처럼 소망이 없으면 인생은 질식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소망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이지만 얼마든지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붙드는 소망 중에는 헛된 소망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소망은 당장은, 잠시 동안은 살아갈 용기를 주고, 삶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헛된 것으로 밝혀지면 더 큰 절망의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는 모든 게 무너지게 됩니다.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갖되 참된 소망,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헛된 소망과 참된 소망을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참된 소망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후회 없는 인생, 영원히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헛된 소망 : 우리가 포기할 것
헛된 소망도 소망이기에 어느 정도는 삶에 의욕을 줍니다. 그러나 언젠가 실망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사람은 당장은 행복해 보여도 ‘잠재적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 헛된 소망이란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막연한 소망이요, 또 하나는 ‘세속적인 소망’입니다.
막연한 소망:
근거도 없고, 불확실한데 그냥 기대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후일 기대에 어긋나면
크게 실망하고 비관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박장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입니다.
옛날에는 금광(노다지)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대박이 터질 것 같은 막연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 그러다가 오히려 그 소망이 좌절되고 쪽박을 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소망 :
세상의 재물, 권세, 건강, 향락 등에 관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소망과 기대가 있기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게 사실입니다. 만일 이런 것조차 없다면 사람들이 노력도 안하고, 세상은 정지될지도 모릅니다. 그 런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소망은 이루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실망하고, 이룬다 해도 언젠가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종내는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전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성경은 곳곳에서 이를 경계합니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잠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세상 권세에도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권세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풀의 꽃과 같은 겁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닙니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죠. 그런데 요즘에 이 말의 새로운 버전이 나왔습니다. 권불오년(權不五年)이랍니다. 정권만 바뀌면 권력의 실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인생이 바로 저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야보고 선생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 안개라고 표현합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합시다. 재물이든 권세든 영원한 가치,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얻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고, 후회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일 뿐 우리 인생의 목적도 아니고, 소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3절~4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참된 소망 : 우리가 붙들 것
시편 기자는 이제 헛된 소망을 버리고 참된 소망을 붙들 것을 말씀합니다. 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것도 언젠가 나를 실망시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 동안에도,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러실만한 분입니다.
시편 146:6 말씀대로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이요 전능자이십니다.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진실한 분입니다.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시편 146:7~9 말씀대로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불쌍히 여기시기에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도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한번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배신했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십니다.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토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이 닥쳐와도 피할 길을 열어보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와도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잠14:32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기에 죽음이 닥쳐와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천국과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구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라서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친한 친구라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지냅니다.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별 볼일 없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못 만나면 못 만나고 ...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대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유용한 도구이고 서로 사랑하면 살 존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만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까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그런데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그때의 절망 상태를 행27:20~21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 살 소망조차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객들의 한 가운데 당당하게 나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행27:22~25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얼마나 통쾌합니까? 선주도, 선원들도, 로마 군인들도 벌벌 떨고 있을 때 당당하게 외치는 바울의 모습!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 소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 결과 276명이 살아납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어디에 참된 소망이 있는지 ...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짜 소망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한결 같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것들뿐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성도들마저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립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언젠가 세상 모든 줄이 끊어질 날이 옵니다.
재물의 줄, 명예의 줄, 권세의 줄, 인맥의 줄, ...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소망의 줄이 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줄입니다.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이 없어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망의 증인들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입니다.
참된
소망으로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고, 이웃에게 소망의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삼하2장
다윗 장군 요압, 사울 장군 아브넬
다윗은 요압이 죽인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불렀다.
▶아사헬(Asahel): 다윗 왕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로 들노루처럼 빨리 달리는 특기가 있었다(삼하 2:18). 또한 그는 요압과 아비새의 친동생이다(대상 2:16). 다윗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사울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는데 이때 요압측 군세가 우세하여 아브넬이 도망가자 이를 붙잡기 위해 뒤를 좇다가 아브넬에게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삼하 2:18-23).
▶아브넬(Abner): 사울의 군사령관으로 사울의 삼촌이었던 넬의 아들이다(삼상 14:50).
그는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을 도왔지만(삼상 26:5) 다윗과 몇 사람들이 사울의 진에 몰래 들어가서 머리 옆에 창을 꽂아두고 돌아올 정도로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다윗으로부터 사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들었다(삼상 26:13-16).
또한 그는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으며(삼하 2:8-10), 다윗의 군사들과 기브온 근처에서 후퇴하던 중 자신을 추격해온 아사헬을 죽였다(삼하 2:12-32).
그때 아브넬은 사울과 다윗이 전쟁하는 동안 권세를 잡았고 사울의 첩을 통간하기까지 했다(삼하 3:6-7). 이로 인해 이스보셋의 책망을 들은 그는 다윗과 결탁하였지만(삼하 3:8-21), 요압의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요압에 의해 살해당하였다(삼하 3:22-27). 다윗은 이런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애석하게 여겨 애가(哀歌)를 지어 불렀으며, 백성들도 슬퍼했다(삼하 3:31-39).
아브넬의 죽음을 위해 부른 노래
다윗은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지었다(삼하 3:33). 애가는 ‘키나’(Kinah)라고 하는데, ‘슬픈 노래’ 또는 ‘조가’(弔歌)로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이다. 이외에도 사울을 위한 애가(삼하 1:19-27), 예레미야가 부른 요시야를 위한 애가(대하 35:25) 등이 있다.
아브넬은 요압에 의해 죽임 당했는데, 당시 요압은 다윗과 아브넬과의 회담이 국사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속여서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항의하며(삼하 3:23-25), 아브넬을 뒤쫓아가서 죽였다(삼하 3:27). 하지만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실제 이유는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였다(삼하 3:27, 30).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말하며(삼하 3:28), 백성들에게 아브넬을 위해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애가를 지어 불렀다(삼하 3: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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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보셋(Ishbosheth): 사울 왕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는 사울이 죽은 후 약 2년 동안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을 다스렸다. ‘자랑, 힘’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된 그의 이름은 아마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대상 8:33; 9:39).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일생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사울이 도망가다가 길보아에서 죽었으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전사하자(삼상 31:2) 사울의 사촌이자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요단강 건너편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추대했다(삼하 2:8-9). 이후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게 된 아브넬(삼하 3:6)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스보셋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삼하 3:7-8). 아브넬은 북쪽 지파들을 다윗에게로 돌아서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삼하 3:12-19) 요압이 다윗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 죽임으로써 무산되었다(삼하 3:26-27). 이스보셋의 실제적인 후견자가 없어지자 그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한 밤중에 쉬고 있는 동안에 그를 암살했다(삼하 2-4장). 이스보셋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사울의 집안으로부터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다윗 왕의 아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삼하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삼하5:13~16).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1.바알레유다(Baalah of Judah): ‘유다의 바알레’라는 뜻으로(삼하 6:2), 이는 기럇여아림(‘숲의 성읍’)의 옛 명칭이다(삼상 7:1-2). 원래 기브온 사람들이 이곳을 ‘바알라’(Baalah)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유다에 속하게 되면서 ‘유다의 바알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브온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법궤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삼하 6:2).
2.아비나답(Abinadab): 기럇여아림 사람으로, 블레셋에서 돌아온 여호와의 궤를 자기 집에 두고 20년 동안 아들 엘리아살에게 지키도록 했던 사람이다(삼상 7:1-2).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여호와의 궤 (20년+40년+10년=70년간)
다윗은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이나 아비나답 집에 보관되어 있던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도록 했다(대상 13:5).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올 때, 웃사와 아히오(아효)가 궤를 실은 수레를 몰고 있었다(대상 13:7). 그런데 수레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자 갑자기 소들이 뛰놀았고, 웃사는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궤를 붙들었다(대상 13:9). 이에 대해 하나님은 노하셨고 그 자리에서 웃사를 치셨다. 그 뒤부터 그곳을 ‘베레스 웃사’(‘웃사를 쳤다‘는 뜻)라고 불렀고, 그후 여호와의 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되었다(대상 13:6-14).
아효(Ahio): 아비나답의 아들로 웃사와 형제 사이이다(삼하 6:3).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올 때 앞에서 지휘했다(삼하 6:4).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聖物)은 만지지 말라(촉수금지)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4:15). 수레에 싣는 일은 이방인의 관습이었다.
3.오벧에돔(Obededom): 가드 사람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그의 집에 석 달 간 머물러 있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도중에 웃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삼하 6:10-12).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오벧에돔은 부자가 되었다. 대대로 성전의 귀한 문지기로 지냈다.
4.다윗 성(city of David): 다윗이 공격해서 얻었던 예루살렘(삼하 5:6-8)과 다윗의 출신지(눅 2:4; 요 7:42)를 말한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의 소유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시온 산성’이라 불리던 것을 ‘다윗 성’이라고 이름했다(삼하 5:6-8).
다윗 성은 높은 지대로 남, 동, 서쪽을 30-40m나 되는 깊은 골짜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다윗은 이곳을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는데, 통일왕국의 첫 수도가 된 다윗 성은 인구가 3,500- 5,000명 정도 되는 곳으로 성장했다. 다윗 성에는 실로암 수로, 히스기야 수로, 워렌의 수구(the Canal of Warren) 등을 통해 물이 공급되었으며, 다윗의 군대가 여부스를 공격할 때도 이 수구를 통해 성내에 침입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삼하 5:8). 이런 수로들은 BC 2세기경부터 AD 1세기 경까지 사용되었다.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이곳으로 옮겼으며(삼하 6:12, 16),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면서 법궤를 가져갔던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해 법궤를 다윗 성으로 돌려보냈다(삼하 15:24-29).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취하여 다윗 성에 두기도 했다(왕상 3:1; 9:24).
한편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축하면서 다윗 성에 있던 샘문(느 2:14; 12:37), 다윗 성의 층계(느 3:15; 12:37), 다윗의 묘실(느 3:16), 다윗의 궁(느 12:37), 용사의 집(느 3:16), 수문(느 3:26) 등을 언급했다. 이 다윗 성은 성전 남쪽 오벨 언덕을 중심으로 한 ‘옛 예루살렘’ 지역이었다고 추측된다.
또 다른 다윗 성은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베들레헴이다(눅 2:4, 11). 다윗은 이곳에서 양을 쳤고(삼상 17:12, 15)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 16:13, 4; 룻 4:11). 신약에서 ‘다윗의 동네’라고 알려진(눅 2:4, 11; 요 7:42) 곳은 다윗뿐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다윗 성은 메시아 탄생과 성취의 장소였던 것이다(미 5:2; 마 2:6).
▶하닷에셀(Hadadezer): 아람의 소바 왕으로 르홉의 아들이다(삼하 8:3; 대상 18:3). 그는 유브라데 강 유역의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출정하였는데 다윗에게 패배하고 말았다(삼하 8:3-4; 대상 18:3). 이때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그를 도우러 왔지만 다윗에게 다시 패배하고 아람도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고 말았다(삼하 8:5-6; 대상 18:5-6).
그후 하닷에셀은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군대장관 소박을 보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였지만 다윗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대상 19:16-19).
하닷에셀로부터 빼앗은 놋 : 하닷에셀은 디브핫과 군에 많은 놋을 다윗에게 빼았겼는데 이 놋은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을 만드는 데 쓰여졌다(대상 18:8)
▶므비보셋(Mephi-bosheth): 요나단의 아들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모가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되었다(삼하 4:4).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과의 우정과 약속을 기억해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불러 친아들처럼 대우했다(삼하 9:3-11). 압살롬의 반역 때 시바의 모함으로 인해 다윗이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시바에게 주기도 했으나(삼하 16:1-4), 반역이 진압되어 다윗이 다시 왕이 되었을 때는 므비보셋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다시 그의 소유를 되돌려 주게 했다(삼하 19:24-30). 므비보셋의 아들 미가를 통해 태어난 자손들 중에서는 이름난 용사들이 나왔다(대상 8:34-40; 9:40-44).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므립바알이다(대상 8:34; 9:40).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삼하9:8, 12).
▶아비새(Abishai):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용맹스러운 용사이다(삼하 23:18-19,삼상 26:7; 삼하 21:7). 어머니는 스루야이며, 형은 요압, 동생은 아사헬이다(삼하 23:18, 24). 그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 십 광야 동굴에서 자고 있던 사울(삼상 26:6-9)과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삼하 16:5-8)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윗의 반대로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죽여 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였고(삼하 2:18-23; 3:22-27, 30),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였다(삼하 20:6-22). 또한 그는 암몬과 아람 족속과의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삼하 10:9-10)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죽이려는 블레셋 장수 이스비브놉을 죽여 다윗의 생명을 구했다(삼하 21:15-17).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삼하11:14~17).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8~9).
▶밧세바(Bathsheba):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손녀이며(삼하 16:23; 23:34) 엘리암의 딸이다(삼하 11:3-4). 암미엘의 딸로도 기록되었다(대상 3:5).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삼하 11:3-4; 12:24). 다윗과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았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아이를 잃게 되었고(삼하 12:15-23) 후에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을 낳았다(대상 3:5).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찬탈을 꾀할 때 나단과 함께 다윗에게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삼을 것이라는 약속을 회상시켜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하였다(왕상 1:11-40).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아도니야의 부탁을 솔로몬에게 청했으나 오히려 이 일로 아도니야는 처형당하게 되었다(왕상 2:13-25). 밧세바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다(마 1:6).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13:38~39).
▶그술(Geshur): 모세의 지휘 하에 정복한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로 바산 왕 옥의 영토였다(수 12:5).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취하였으나(신 3:14) 그 주민은 몰아내지 못했다(수 13:13).
압살롬 모친의 출신지 :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았는데(삼하 3:3; 대상 3:2) 압살롬은 동생 다말을 강간한 이복 형 암몬을 죽이고 외조부가 있는 그술로 피신하였다(삼하 13:38; 15:8). 그때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기울어 있는 것을 알고 압살롬을 귀환시키기 위해 계책을 꾸몄고(삼하 14:1-3), 결국 압살롬이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삼하 14:4-24).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삼하15:6,10~12,22).
▶아히도벨(Ahithophel): 길로 출신 다윗의 자문관이다(삼하 15:12).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이 피신하자 압살롬은 아히도벨을 초청했는데 이때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랐다(삼하 15:12; 대상 27:33). 아비도벨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압살롬에게 군대를 요청하자 다윗은 전략적으로 압살롬 진영에 들여보낸 후새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책략을 좌절시켰다(삼하 17:1-14). 아히도벨은 자기 제안이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 자살했고, 아비의 묘에 장사되었다(삼하 17:23).
▶후새(Hushai): 아렉 사람으로,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망치던 다윗을 기드론 시내를 건너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서 맞이했던 사람이다(삼하 15:32-37). 또한 그는 거짓으로 압살롬의 편이 되어(삼하 16:15-18),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책략이 아닌 자신의 책략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이것이 결국은 다윗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삼하 17:5-16).
▶아히마아스(Ahimaaz):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으로 사독의 아들이며 아사랴의 아버지이다(대상 6:8, 9, 53). 그는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압살롬의 궁정에서 다윗에게 비밀정보를 전달했다(삼하 15:27, 36). 압살롬이 죽자 요압이 구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게 하자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 다윗에게 달려갔으나 소식을 먼저 전하지는 않았다(삼하 19:29-32). 나중에 그는 솔로몬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고 납달리 땅을 다스리는 관장이 되었다(왕상 4:15).
▶왕의 골짜기(King’s Vally, Vally of Shaveh):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만났던 넓은 계곡(창 14:17)으로 압살롬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삼하 18:18). 이 계곡은 사웨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다. 압살롬의 기념비(삼하18:18).
▶아마사(Amasa): 다윗 정권에 반기를 든 압살롬이 요압 대신 세운 군대 장관으로 이드라의 아들이다(삼하 17:25). 요압이 압살롬을 암살하면서 반란이 평정되자 다윗에 의해 다윗 군대의 군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요압에 의해 살해 당했다(삼하 20:10).
▶브나야(Benaiah):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대상 27:5, 삼하24:20) 다윗 왕 시대 열두 군대사령관 중의 한 명으로 시위대 장관이다(대상 11:22-25). 3인의 용사 중 하나로 그는 함정에 빠진 사자 한 마리와 장대한 애굽 사람 한 명과 모압인 두 명을 죽였다(대상 11:22-23; 27:5; 왕상 1:38).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형했으며(왕상 2:25-34), 요압을 대신하여 솔로몬 왕의 군대장관이 되었다(왕상 2:35; 4:4).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라
“나의 반석(磐石)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黙想)이 주님 앞에 열납(悅納)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반석(Rock): 넓고 펀펀하게 된 큰 돌로 ‘안전하고 견고함’을 뜻한다.
팔레스타인에는 산악지역이 많아서인지 성경에는 반석(바위)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지를 말한다. 문자적인 뜻으로 쓰인 곳도 있지만(출 17:6; 33:21; 민 20:8; 삿 6:21; 13:19; 마 7:24) 대개는 힘, 확고부동, 안전한 장소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신 32:4; 삼상 2:2; 삼하 22:32; 시 18:2; 28:1; 61:2; 71:3; 합 1:12). 하나님은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하셨다(출 17:6; 민 20:8).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며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반석에 비유하고 있다(고전 10:4).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마 7:24).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다(마 16:16).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작은 돌멩이, 페트로스;petro)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petra)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마 16:18). 여기서 ‘반석’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는 이 말이 이사야 28:16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신약의 다른 구절에서도(롬 9:33; 고전 10:4)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본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 전후 상으로 볼 때 이 해석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반석이란 별명을 가진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이 해석에 기초하여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참 권위자이며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는 남성이지만 반석이란 단어는(페트라) 여성명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신앙고백 바로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는 점이다(마 16:33). 또한 다른 성경 본문에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자(고전 3:11) 간접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임을 말씀하고 계신다(엡 2:20).
그러므로 베드로란 인격을 교회의 기초로 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할 때의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의 이름은 페트로스(베드로)라 그리고 네가 고백한 진리는 페트라(반석)라. 내가 그(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로 해석할 수 있다.
묵상(Meditation) :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의 어원은 원래 라틴어 ‘메디켈루스’라는 말로서 ‘약’(Medicine)이란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약이 몸 안에 들어와 온 몸에 퍼져 약효를 내듯이 묵상이란 어떤 한 생각이나 사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律法)을 주야로 묵상하고 지켜 행하면 평탄과 형통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수 1:8).
또한 시편(詩篇)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의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시 1:1-2).
‘열납(悅納)’은
‘제단에 올려진 제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이 받아드려지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이 열납해 주시기 원하는 두 가지는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黙想)이 하나님 앞에 올려져 주님이 받으시길 원한다.
죄(罪)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입과 혀로 실수(失手)하고 죄짓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다루는데 혀는 다룰 수가 없다고 한다. 묵상한
것이 입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惡)이요 죽이는 독(毒)이 가득한 것이라”(약3:5~8).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貪慾)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聖徒)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戱弄)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感謝)하는 말을 하라”(엡5:3~4). 혀는 그대로 두면 안된다. 말과 마음의 묵상은 연결되어 있다. 말로 표현(表現)되지 않은 것까지도 하나님은 관심(觀心)을 갖고, 우리의 마음에 둔 것까지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祭物)이 될 수 있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자연스런 교제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면 기도와 찬양의 예배가 가능하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난 첫 번째 반응은 죄를 가볍게 여긴 것까지 회개(悔改)가 나온다. 죄를 깨닫는 것이 은혜(恩惠)다. 자기 의(義)로 무장한 ‘바리새인’들이 남의 죄(罪)를 지적할 줄은 알았지만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종교적 열심뿐이었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活力)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劍)보다도 예리하여 혼(魂)과 영(靈)과 및 관절(關節)과 골수(骨髓)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判斷)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萬物)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知慧)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勸勉)하고 시(詩)와 찬송(讚頌)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讚揚)하고”(골3:16).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惡人)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罪人)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傲慢)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律法)을 주야로 묵상(黙想)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亨通)하리로다”(시1:1~3).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
“내 이름을 멸시(蔑視)하는 제사장(祭司長)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恭敬)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恭敬)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主人)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蔑視)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輕蔑)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總督)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恩惠)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焚香)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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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 IQ는 0.3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한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한다.
그리고 또 끌려가는
동료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입질을 계속한다.
IQ가 0.3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치인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이라고 한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을 넘지 못한다.
그러기에 지난 날의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옆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복받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가 가져야 할 5감
1. 치고 빠질 줄 아는 박진감
2.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이질감
3. 선거에서 졌을 때 아는 패배감
4. 선거에서 이기고 공약 까먹는 건망감
5. 지고 또 나오는 뻔뻔감
왜 비싼 돈 쓰면서
진실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에게서는 좋은 기운이 풍겨 나온다.
반대로 거짓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쁜 기운을 뿜는다.
어쩔수 없는
일이다.
꽃에서는 향기가, 똥에서는 악취가 나게 마련이니까.
거짓말에 험담에 욕설까지도 서슴지 않는 이 나라 정치인들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봐도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들 비싼 돈 쓰면서 그런 장면을 화면에 담고 또 그 화면에
눈길을 모으는지 모르겠다.
위가 바르면 아래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
'위에 있는 사람이 바른 도리로써 아랫사람을 거느리면, 아랫사람은 자연히 바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이 말은 <논어> "안연"에 있는 공자의 말이다.
계강자라는 노나라 실권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치라는 것은 바른 것이다. 그대가 거느리기를 바른 것으로 하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 자체가 바르지 못한 일을 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뜻이다.
* 참조 : 삼하 23: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왕상 9:4-5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동네 대표 뽑는 날
오늘은 동네 대표를 뽑는 날이다. 그런데 이웃들이 선거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월드컵을 핑계삼지만 더 큰 문제는 정치 불신과 동네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탓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 정치인과 후보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정치인들은 정책 대결보다 다른 후보 약점 잡기에 더 열들을 올리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또 월드컵 대회 기간을 피해 지방선거날을 잡았어야 했다. 동네에 함께 살지만 동네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잦은 이사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부동산 가격 폭등에 쾌재를 부르며 서민들의 어려움은 애써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사를 가더라도 그때까지 우리 동네는 우리가 살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동네 대표는 의로운 사람을 뽑아야 한다. 선거의 불참은 자기의 가정을 거짓 대리인에게 위탁하는 꼴이다.
성경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동네 대표를 뽑는 선거에 좋은 후보가 없다면 차선의 후보를 잘 골라 투표해야 한다. 이것이 대의정치의 바른 길이며 살기좋은 동네를 가꾸는 자세일 것이다.
7. 논어의 정치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 자공이 스승되는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승 되는 공자는 아주 간단하게 명료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식량이 넉넉하고 군비가 충실하고 그리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말은 함축성 있게 표현됩니다. 족식족병 민신지의(足食足兵 民信之矣)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세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가 빠져야 한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군비를 빼야지" 했습니다. 여기서 군비란 국방문제를 말하고, 식량이란 경제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는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둘 중에 또 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식량을 빼야지" 국방문제 아무리 중요하지만 경제문제가 우선이요, 국방보다 경제요.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게 신의(信義)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를 달았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번 죽는 거야. 다 아무리 경제가 좋아도 언젠가는 다 죽는 거니까 중요한 것은, 사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믿음을 잃어버리면 국가와 정치는 무너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서글프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백성들이 믿으려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것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안 믿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8. 그리스도인과 선거
얼마 안 있으면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집니다. 시민단체들이 공천 부적격자들을 발표하고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정당 창당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이번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도 그 향방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누구를,어느 정당을 선택할 것인지를 잘 몰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국민이 정치에 등을 돌린 이유는 그동안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실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들이 우리를 실망시켰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은 입법활동 등을 통해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한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국회의원들이 선출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를 모으는 것은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보십시오.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전 선배들이 이룬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입니다. 국제적 감각은 있는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십시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십시오. 교회에 다니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가 그 지위를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입니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 정치 지도자로 세우기에는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명수(밝은교회 목사)
9. 신앙과 정치
어떤 신학자는 “모든 것은 정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치적 관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렇다고 정치가 다는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자신의 유익보다는 이웃들의 잘됨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유례없는 정치적 난세를 맞이한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바를 나누는 실천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눔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권력과 재화를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눔을 구체화하기 위해 발달된 학문이 정치학과 경제학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구체적인 나눔을 위해 우리는 신앙과 전문성을 겸비한 사역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신도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 우리의 2세들을 폭넓게 양육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임성빈 목사(장신대 교수)
10. 아직 봄이 이른가 봅니다
봄!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내가 좋아하는 말이 ‘조춘’(早春)이라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춘궁’(春窮)이다…” 이른 봄이라는 의미의 ‘조춘’은 좋으나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않아 겪는 봄철 보릿고개의 궁핍을 말하는 ‘춘궁’은 싫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만물이 소생하고 연한 새순의 싱그러움이 있는 봄,희망찬 봄에 가난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봄의 예찬자 피천득님의 글입니다. 춘궁을 싫어하기는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왠지 오늘 우리의 정치적 현실을 보노라면 희망의 조춘이 아니라 춘궁이 느껴집니다. 승자들도 없는 싸움들을 보노라면 아직 우리에게는 봄이 이른가 봅니다. 온기가 살아나고 소망의 움이 돋아나는,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가득한 진정한 이 나라의 봄을 소망합니다.
/최병남 목사(대전중앙교회)
11. 선거철이 되면
종교를 한낱 성취를 위한 목적의 도구 정도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그럴 듯하게 신심을 흉내내면서 덕을 보려는 가련한 현상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천주교인인 모 야당 대표가 취임 첫날을 ‘고해와 참회의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먼저 명동성당에 들러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불교의 대표적 사찰인 조계사에 들러 108배를 했고 이어서 영락교회에 들러 회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성당에 들른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가 불교와 개신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종교의 속성을 본질적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됩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찾고 바른 길을 세우기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일에 익숙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참신앙인은 하나님을 자기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주머니속의 도구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계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뜻으로 삶 전체를 채웁니다.
12.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소?
링컨이 하원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경쟁자로 목사가 입후보한 적이 있었습니다. 합동유세 중에 주일이 되자 링컨이 다른 당에서 입후보한 경쟁자가 설교를 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상대 정당의 후보가 설교하면서 “천국 가고 싶으신 분 손 드시오”하니까 전 성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그가 “지옥 가고 싶은 사람 손 드시오”하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링컨이 강대상 뒤 의자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조느라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잡은 그 후보는 링컨에게 망신을 줄 요량으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링컨씨!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소?” 그러자 링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재치있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할 수 있다면 국회에 가고 싶습니다!”
다음달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링컨 같은 인물이 선출되도록 우리 기도합시다.
13. 공휴일과 정치
1939년 미국에서는 공휴일인 추수감사절이 11월 마지막 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상인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당겨 달라는 로비를 맹렬히 벌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대목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결국 경기침체를 걱정하던 대통령은 8월 중순에 이번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당길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틀린 달력을 만든 업자들은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어떤 주는 그 결정을 따랐고 다른 주는 전통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엄청난 혼란에 당황한 대통령은 다음 해에는 원래대로 되돌리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의회는 다시는 대통령 마음대로 추수감사절 날짜를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마저 제정하였답니다. 추수감사절을 상업적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던 유혹이 결국 큰 혼란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공휴일을 재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4. 마음을 낮추어라
성경: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필리핀이 아름답고, 명랑한 나라가 되려면 공무원의 부패와 부정을 근절해야 한다고 외침으로써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던 막사이사이는,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루손도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는 일이 없이 자라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고 겪고 느끼는 필리핀 민족의 슬픔과 불행을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야 하겠다는 높은 생각과 거짓 없고 올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자동차 운전수 노릇을 하는 동안에도 옳지 않은 동료들에게 물들지 않게 했습니다. 착실하고, 근면하며, 성실한 그는 인정되어 양코 버스 회사의 지배인이 되고, 제2차대전후는 국방 장관, 마침내는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연령은 겨우 46세, 그러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지만, 나의 마음은 이 나라의 한 병사이다"이것은 곧 막사이사이가 늘 품고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늘 백성들과 같은 처지에서 살고, 같은 곳에 있었으며, 같은 생활을 하고, 또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그가 골똘히 생각한 것은 이 나라의 백성들이 고생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공무원들이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권세를 쓰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폐단을 없이 하기 위해 그는 공무원들의 재산을 모조리 등록하게 하여, 부정한 뇌물을 받아 부해지는 일이 없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대단히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첫째 공무원들로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정부를 믿게 되어, 말 할 수 없이 부패했던 정치가 맑고 깨끗한 정치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한 때, 필리핀 뿐 아니라, 전세계 인민이 그의 조난을 슬퍼했습니다. 오늘도 겸손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 기독교인의 국가관
본문: 로마서 13:1-7 * 찬송: 259장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하라"
이 말씀은 우리 기독신자에게 국가와 권세와 정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준 말씀입니다. 주권의 근본은 다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미국 헌법에 '감사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관헌을 택하는 권을 주셨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그 권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주권 정치가 잘 되며 축복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그 권세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일군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 책임을 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옮기시기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가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신 것처럼 완전 분리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훈에도 적합하며 교회는 영적 범위 안에서 완전 자유이고 간접적으로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줄 알아 영광을 돌리는 경건한 명령에 순복하고, 공의에 기초하여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국가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직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 모든 나라의 정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수 있게 하옵소서.
16. 권력중독증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클라크(James Clarke)는 정치인을 정치가(statesman)와 정치꾼으로 불려지는 정략가(politician)로 나누었습니다.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 선거를 생각합니다. 말로는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하는 국민의 복리증진,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자신과 다른 집단이 권력을 잡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와 '끌어당기기 (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 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술 중독에 걸리면 음주가 생활을 위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리듯 권력 중독에 걸리면 모든 것을 권력 회득에 초점을 맞춥니다.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순수를 잃어버리고 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합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회에 사는 정치 소비자들은 늘 정치 중독자들을 욕하면서도 정치 게임을 즐기며 자신도 모르게 정치 논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인은 권력 중독으로 신앙의 양심을 마비시켜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라고 말씀했습니다.
17. 글래드스턴의 독서열
영국의 정치가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와 더불러 19세기의 영국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 업한 후 1833년에하원의원이 되었고, 59세 때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네 차례나 내각을 조직했다. 대단한 독서가기도 했던 그는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나는 뜻밖에 생기는 1분을 그냥 흘려 버리지 않기 위해 항상 소책자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가 읽은 책은 정치, 경제, 외교 분야의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를 비롯해 소설 등의 문학서를 애독했다. 그 이유에 대해 글래드스턴은 "소설을 읽고 시를 음미하는 것은 심신을 달 래는 데 매우 유익하기때문이다."라고 피력하였다. 그는 또 40대 후반에 고대 헬라의 시인인 호머에 관해 연구한 것을 전 3권으로 펴냈다. 이는 그의 꾸준한 독서가 밑받침되었 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높은 이상주의와 평화주위를 견지한 대정치가로 알려진 그의 정치이념도 그의 독서에 의해 배양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정치인은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18. 정치는 솔선수범
자로가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솔선해서 행하며 백성의 수고를 위로하라."
자로가 자세한 설명을 청하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솔선해서 행하고 백성을 위로함을 게을리 하지 마라."
* 참조: 잠12:24, 삼하23:3
19. 정치란 예술이다.
"정치란 여러 교수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학문이 아니고 예술이다."
이 정치규정론은 비스마르크가 1884년 3월 15일 의회에서 행한 유명한 말이다. 정치는 그만큼 생명력과 변화가 많다는 말이다.
* 참조: 엡1:21, 6:12
20. 정치에서 버리는 순서
자공이 정사를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케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며 백성이 위정자를 믿게 하여야 한다." 고 대답했다.
자공이 "부득이하여 버릴진대 삼자 중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비를 버려라."
자공이 또 "부득이하여 버릴진대 남은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식량을 버려라. 자고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있거니와 백성이 신의가 없으면 천지 사이에 몸 둘 곳이 없는 것이다.
* 참조: 사1:4, 삼상30:13, 겔26:16
21. 정치의 기본은 인재등용
중궁이 계씨의 재상이 되어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부하 관리를 먼저 단속하고 작은 허물은 용서하며 현자와 인재를 등용하라."
중궁이 공자에게 "현자와 인재를 어떻게 알아서 등용합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에 공자가 대답해 주었다.
"네가 아는 현자와 인재를 먼저 등용하면 네가 모르는 현자와 인재는 다른 사람이 버리지 아니하고 추천할 게 아니냐?"
* 참조: 왕상4:21, 대하7:18
22. 정치의 다섯 가지 미덕과 네 가지 악덕
자장이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정치를 해야 옳으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다섯 가지 아름다운 것을 높이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면 정치를 좋게 하리라."
자장이 "무엇을 다섯 가지 아름다운 것이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은혜를 되풀되 낭비하지 않으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되 원망을 사지 않으며, 하고자 원하는 바가 있으되 탐하지 않으며, 편안하되 교만치 않으며, 엄하되 사납지 않은 것이니라."
자장이 "무엇이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해 주었다.
"백성의 의로움을 따라서 이롭게 함이 또한 은혜를 베플되 낭비치 않음이 아닌가? 수고롭게 할 만한 것을 가려서 수고를 끼치면 또 누가 원망하랴? 어질고자 원하면 인(仁)을 얻으니 어찌 탐욕이라 말하랴? 군자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없으며 사물의 작고 큰 것이 없으며, 감히 거만치 않으니 이 또한 태연하되 교만치 않음이 아니가?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며 눈짓을 존중하여 몸가짐이 엄연하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면 이 또한 위엄 있되 사납지 않음이 아닌가?"
자장이 "네 가지 악덕은 무엇을 말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가르쳐 보지 않고 죽임을 학살이라 하고, 일을 시켜 보지 않고 이루어진 일을 책망함을 난폭이라 하고, 명령을 태만히 하고 기한을 재촉함을 도둑이라 하고, 이왕 주어야 할 상여물을 주는데 출납에 인색함을 유사라 하니라."
23. 그리스도인과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최근에 자신의 의정활동을 알리고 지지기반을 확충하는 방법으로 홈페이지를 활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바 있다. 어느 의원의 경우 홈페이지의 방문객 수가 230만명을 넘는다고 하니 이제 정치활동도 시대에 따라 다변화, 다각화되지 않고는 정치한다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네티즌들의 기호와 취향을 쫓아만 가는 자칫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 ‘포퓰리즘’ 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어 단순히 번역을 통해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원칙과 일관성 없이 편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자세로 대중의 인기 몰이에 급급한 ‘대중영합주의’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민의를 수렴하여 대중의 뜻을 존중한다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포퓰리즘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을 가리켜 ‘대중영합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전적 개념에 따르기 보다는 역사 속의 실례를 반영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그의 추종자들이 대중영합적인 방식을 통해 나름대로의 독재체제를 구축했으며, 1890년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당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농민과 노조를 대상으로 경제적 합리성을 도외시한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던 사례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여하튼 한국의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데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의 정치가 그리 환영받을 만한 입장에 서있지 못함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은 다만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말은 아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포퓰리즘과 관련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포퓰리즘에는 하나님보다는 인생으로부터 위로와 칭송을 얻고자 하는 심리적 정서가 깔려 있다. 시편 146편 3절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면서 보다 원천적인 차원에서 포퓰리즘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방백도 인생도 아닌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에 영향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신약시대의 빌라도 이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난 후 예수님에게서 무슨 악한 일을 하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5장 15절을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라는 말이다. 이 말은 빌라도가 총독으로서의 원칙과 소신없이 ‘대중영합적’ 자세를 취하고 말았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통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새해에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잘 보임으로써 더 밝고 희망찬 내일을 만드는 주역이 되도록 하자.
/배현성 목사(한세대학교 교수)
24. 정치인 자질
고대 아테네의회 진행 중에 한 의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독수리에게 쫓기던 작은 새 하나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안긴 것이다. 그런데 그 의원은 새를 바닥에 팽개쳤다.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의원들이 일제히 그를 규탄했다.
"위기에 몰린 새를 보호하지 못하는 의원이 어찌 불쌍한 서민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긍휼한 마음이 없는 이런 정치가에게 아테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결국 그 의원은 만장일치로 의회에서 쫓겨났다.
25. 정치인
한강에 다섯 명의 사람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119에 신고해서 구조대원들이 그들을 건져냈는 데 4명만 구했다는 것이다. 책임자가 왜 한 명은 구하지 않았느냐고 질책을 했더니 그 사람이 바로 정치인(어떨 때는 국회의원이라고도 함)이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책임자가 1천200만 명이 마시는 한강물을 오염시킬 수 없다고 그를 빨리 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태들은 국민을 실망시킬 뿐만 아니라 아예 무관심하거나 포기를 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민을 위하여"라는 말을 부끄럼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인들처럼 한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양심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꾼이 되자.
26. 정치가들과 게
한 무리의 정치인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적을 제거할 계략을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게를 잡고 있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는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구니에는 뚜껑이 없었습니다. 한 정치인이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바구니에 뚜껑이 없군요. 그러면 게들이 다 도망칠 텐데요.“
그러자 어부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아무 염려 없습니다. 이 게들은 정치인들과 비슷한 놈들이라서 한 마리가 기어오르면 다른 놈들이 곧 끌어내립니다. 다른 놈들이 올라가는 꼴을 보지 못하거든요.“
오늘날 정치판을 보면 이 게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 정치자금 문제로 각 정당이 서로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정치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 나라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말입니다.
사무엘하는 24장으로 구성된 책
다윗의 통치와 그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다윗 왕조의 확립과 죄와 회개 그리고 가족 간의 비극,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말씀합니다.
사무엘하 요약 사무엘하는 다윗왕의 등극으로 시작하여 인구조사에 대한 징계로 끝을 맺고 있다. 본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어떻게 국가를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전체 왕이 아닌 유다 지파의 왕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과도기 국가의 체제였고, 북쪽의 이스보셋왕과 남쪽의 다윗왕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남북 전쟁이 있었으며 북쪽 지파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공의로 다스렸던 훌륭한 왕이었다. 또한,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죄를 지었던 인간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겸손함도 보여주었다. 그는 아들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도피생활을 했지만 신하들의 대처로 부자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반란을 평정하고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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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개요와 내용 파악하기사무엘하는 다윗의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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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개요와 내용 파악하기사무엘하의 내용은 다윗 왕의 역사이다. 1-10장. 다윗의 승리적 통치 1장 /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 2장 /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다윗이 30세 때이며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은 지 약 10년 후. 3장 / 아브넬의 죽음. 4장 / 이스보셋의 죽음. 5장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6장 /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 다윗은 바알레유다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려하였다(2절). 7장 / 다윗에게 주신 약속. 8장 / 다윗의 승전들. 9장 / 므비보셋을 선대함. 10장 / 암몬 왕 하눈의 실수. 11-24장, 다윗의 범죄와 고난 11장 / 다윗의 범죄(간음과 살인). 12장 / 나단을 통한 책망. 13장 / 강간과 살해. 14장 / 압살롬이 돌아옴. 15장 / 압살롬의 반역. 16장 /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함. 17장 / 후새의 모략. 18장 / 압살롬의 죽음. 19장 /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 세바의 반란. 21장 /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4장 / 인구 조사의 죄(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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