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묵상 사무엘상



정치 풍자 이야기

영국정치인

​큰 일 났습니다.
영국의 한 짓궂은 젊은이가 유명 정치인 12명에게 동시에 "큰 일 났습니다. 죄가 탄로났으니 모든 것이 들통났으니 바삐 도망가십시오." 라고 전화한 후 30분 쯤 지난 후에 확인해 보니 그 유명한 정치인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가혹한 정치

​중국의 고전 [예기]라는 책을 보면 공자가 태산(泰山) 옆을 지나 갈 때라고 한다.
한 여인이 무덤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공자가 그 연유를 묻자 여인은 대답했다.
우리는 이 산골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내 남편이 그랬고, 오늘은 내 아들이 호환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공자가 그렇다면 왜 진작 다른 곳으로 이사가지 않았는가? 라고 묻자 그 여인은 대답하기를 "비록 호랑이 때문에 무서운 곳이기는 하나 가혹한 정치가 없는 곳이기에 주저앉아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일렀다.
강자로서 약자를 수탈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인 생활에 유익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약자가 살 수 없는 사회는 마침내 강자도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4월 5일(토) 사무엘상 30-3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힘입고(삼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David was greatly distressed because the men were talking of stoning him; each one was bitter in spirit because of his sons and daughters.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여호와를 힘입고(strength in the LORD his God)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과 일행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 아멜렉이 시글락을 노략한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상 30:1-3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이 전쟁을 위해 출진한 사이 아멜렉이 네겝과 시글락을 침략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이미 아멜렉을 약탈하여 원수가 됐습니다.
아멜렉은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출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시글락을 쳤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무엘상 30:4-5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높여 울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두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사로잡혔습니다. 다윗에게도 엄청난 비극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상 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까지도 자기들의 자녀들로 인해 너무나 마음이 슬퍼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게 다윗 때문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다윗은 크게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도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힘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여호와를 힘으로 삼았고 상황과 조건이나 사람을 의지하고 힘입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이든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다윗이 그동안 도피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기를 만났지만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했고 여호와에게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힘입으며 우리의 용기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윗처럼 돈이나 물질, 사람이나, 상황이나 조건, 칼과 창과 단창, 사람의 숫자를 힘입는 자들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고 힘입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무엘상 30장 7,8절을 보십시오. “7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8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여호와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했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아멜렉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상 30장 9,10절을 보십시오. “9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10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다윗은 전력으로 추격했고 힘이 빠진 자들은 브솔시내에 남겨두고 힘이 있는 자들은 전력으로 추격했습니다.

추격하던 다윗 일행은 애굽소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애굽소년이요 아멜렉의 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11-14절을 보십시오. “11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12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13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14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다윗은 애굽 소년을 앞잡이로 아멜렉 군대를 추격합니다. 사무엘상 30장 15절을 보십시오. “15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로 인도하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

다윗은 절망적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다윗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었고 가장 적절한 때에 애굽소년을 길잡이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힘이 되셨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결사적으로 추격하여 아멜렉으로부터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위기 가운데 빠지든지 그 위기를 극복하게 하며 완전한 회복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위기 앞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힘입어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위기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우리를 회복하게 하시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은혜를 깊이 새겨 날마다 주의 힘으로 승리하는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오늘의 본문은 다윗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골리앗 장군을 죽인 후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질투에 눈이 어두워져서 다윗을 틈만 나면 죽이려 합니다.

사무엘상 18:7-9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는 것은 죽이기로 마음 먹고 실행에 옮겼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경쟁 상대로 여겼습니다. 
이 경쟁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끝내는 질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과 함께 할 수 없어 도망 다닙니다. 
때로는 광야에 숨기도하고, 때로는 바위 동굴에 숨어 사울을 피하려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끝까지 죽이려는 사울을 피할 길 없자 사울은 블레셋이라는 나라로 망명하여 시글락에서 살게 됩니다.

사무엘상 27: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그런데 블레셋에 머물고 있던 다윗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왕에게 더부살이 하는 형편에서는 이 전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전쟁을 나갈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니 아기스왕이 오히려 다윗에게 사과를 하며, 다윗더러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다윗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시글락에 이르자 집은 불타고 있고, 처자식들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자신들이 블레셋과 싸우러 나간 사이에 아말렉 군대가 습격을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30:1-2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사막에 깡패와 같은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 성(城)을 침공했습니다. 
다윗과 군사들이 없는 틈을 타서 공격을 한 겁니다. 
여인과 아이들만 있는 성읍을 불사르고, 재산과 사람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이 돌아와 보니 성벽은 불타고 재물은 노략질 당했고 양떼와 소떼가 다 없어졌고 아내와 아이들도 없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두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사로잡혀갔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울다가 다윗은 부하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이 자녀와 아내 그리고 가정을 잃은 슬픔으로 인하여 말합니다. 
“이 모든 문제가 다윗 때문에 일어난 것이야. 그러니 다윗을 돌로 치자.”
원망의 화살을 사람들이 다윗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다윗에게 온 사람들입니다. 
빚지고 도망간 사람, 땅 뺏기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더 이상 이스라엘에서 살 수 없어 다윗과 여러 해 함께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함께 고생하였던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돌을 들어서 다윗을 치려고 했던 겁니다. 
이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사무엘상 30장 6절을 보십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크게 다급했다’는 말 속에서 다윗이 얼마나 곤경에 처해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죽을 수 밖에 없을 만큼 힘든 사람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생명을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결합니까? 
성경은 이 중요한 사태의 반전을 단 한 줄로 요약했어요!

"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요? 
배신감, 허무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 낙심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앙갚음을 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그런데 다윗이 이와 같이 주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다가 뜬금없이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 말입니다.
요즘 심야 기도회 시간에 기독교 전통의 여러 가지 방법의 기도를 하고 있는데요.

몇 주 전에 한 기도가 묵상기도였습니다.
침묵 가운데 내 안에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께 나의 온 맘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깊이 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우리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과거에 대하여 후회하기도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로 인해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함으로 집중을 방해합니다.

이때 우리 생각을 잡아 온전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 호흡입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들숨 날숨을 쉴 때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요. 크게 숨을 들이 쉬며 “주님이”, 날숨을 내쉬며 “내 안에” 들숨을 쉬면서 “주님이”, 날숨을 내쉬면서 “내 안에” 들숨을 쉬면서 “주님이”, 날숨을 내쉬면서 “내 안에” 이렇게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와 어려움과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가 그 다음의 행보를 어떻게 해야할지를 우리 내면에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다급하고 위급할 때 우리 안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요.
그 생각들을 침묵하게 하고 마음을 주님께 모으고,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의 공간을 형성하여 성령님이 말씀하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연약한 나를 초월하는 권능의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 속에서 그 좋으신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음을 경험하고, 자신을 맡겨버리고 모든 세상 염려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몸의 자세도 중요한데, 허리를 피고, 배꼽을 허리에 붙이고, 갈비뼈를 안으로 말아 들입니다. 
시선은 아래를 바라보면서 시간이 날 때 마다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문제와 위기 가운데 우리의 행보를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할지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다급하고 위급할 때 사람의 마음이 절망하고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이 때 우리의 생각을 감정을 침묵하고, 우리 마음을 주님께 향하여, 성령님이 나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위기의 순간, 초초함으로 인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지요. 
그리고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냅니다. 
사울의 멸망은 결국 위기의 순간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다윗은 어떻게 승리합니까?

첫째,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먼저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말합니다.

삼상 30:7 /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에봇은 본래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의복입니다. 
특별히 위기에 에봇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는데, 우림 · 둠밈과 함께 에봇으로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에봇을 앞에 두고 주께 묻기를 시작했습니다.

삼상 30:8 /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디로 가면 아말렉 사람들을 찾아서 가족과 재물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이 모습은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 경험을 비춰보면 정말 힘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약탈해 간 아말렉 군대를 쫓아가야지. 
머뭇거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있다면 빨리 쫓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장한 각오로 신속히 적을 쫓아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다윗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애쓰기 보다는 인생의 아름다운 자리로 나아갑니다.

지금 아말렉 군대가 식솔들과 모든 재산을 탈취하였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아말렉 군대를 찾기 급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 다윗의 600명 군대 중 200명은 지쳐 있는 상태였고, 나머지 400명은 힘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다윗은 아말렉 군대를 쫓기보다 브솔시내로 갑니다. 
이 브솔시내는 이스라엘 중부지역에서 지중해 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입니다. 
광야지역에서 볼 수 없는 나무와 물과 숲이 있는 곳입니다.

삼상 30:9 /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다윗은 왜 그렇게 바쁜 시간에 숲으로 들어간 것입니까? 늦게 쫓아갈수록 아말렉에게 빼앗긴 백성과 가족을 찾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적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600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브솔 시냇가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브솔 시냇가에서 안식을 취합니다.

다윗은 브솔시내에서 쉼을 얻고 난 뒤에 뒤처지는 용사 200명은 브솔 시내갓에서 기도와 쉼을 갖게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용사 400명을 데리고 아말렉을 쫓아갔습니다. 한참을 가보니 아말렉 군대는 승리의 기분에 도취하여 술 마시고 춤추다 골아 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기겠습니까?

브솔시내에서 쉬면서 기도하여 새 힘을 얻은 다윗의 군대가 이기겠습니까?

저녁내 술 먹고 춤추며, 세상 쾌락 즐기다 골아 떨어진 아말렉 군대가 이기겠습니까?  

삼상 30:18-19 /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도로 찾습니다. 그런데 이때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던 다윗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아마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4백 명의 승리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허약한 2백 명, 이들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나가서 싸워서 얻은 그 전리품을 얻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가서 싸웠는데 이들은 시냇가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었다. 그러니 소와 양과 같은 물건은 주지 말고 처자만 주어서 떠나게 하자.”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이 없으니 처자만 주어서 보내고 재물은 고생한 사람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일견 옳은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전투했던 4백 명이 전리품을 나누어갖고, 시냇가에서 쉬고 있던 허약한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공평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 요구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삼상 30:23 /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시냇가에 머물렀던 200명의 사람이나 전투하러 갔던 400명이나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가지겠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여호와께서 길을 가르쳐 주시고, 여호와께서 인도하여 주셨기에 아말렉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다 같이 나누어 갖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말렉에게 가족을 빼앗겼을 때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은혜 받을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에 서서 여호와를 힘입어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아름다운 일들을 그의 삶 속에 실현합니다.

혹시 여러분에 주변에 떨어진 사람, 낙오 한 사람 있습니까? 
같이 가세요. 안고 가세요. 힘들어도 그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능률이 떨어지더라도 비효율적이더라도 그들을 잘라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은혜 받을 자리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삶을 감당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30:1-6)

좋으신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임하여 주옵소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사에 이끌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였나이다. 그 가운데 길을 잃고 헤매고 방황하였나이다. 믿음이 없어 광야의 인생길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나이다. 주여 이 시간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긍휼하신 주님의 은혜를 채우게 하소서. 이 예배가 마친 뒤에는 새로운 믿음과 용기로 거듭나게 하소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1. 다윗의 지혜로운 처신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블레셋으로 망명해있을 때의 일이다. 블레셋의 아기스왕은 비록 다윗이 에이스1호였던 골리앗을 쓰러뜨린 적국의 장수였지만 다윗을 받아들인다. 이미 사울과의 일이나 쫓기는 신세와 얼마간의 행적을 첩보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의 재주와 능력이 아까웠을 것이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글락을 주었다. 거기서 용병장수로 적응하며 마침내 자기 사람으로 만들 심산(心算)이었다.

어느 날 아기스가 다윗을 호출한다. 이스라엘과 전쟁 때문이다. 아기스의 정치적 고려는 이것이다. 이번에 다윗을 참가시켜서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영원히 낙인이 찍히게 하고, 한편으로 그의 충성도를 시험할 수 있었다. 아무리 다윗의 사정을 고려해서 믿으려 한다고 해도 아직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윗도 바보는 아니다. 자기에 대한 감시, 불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기스와 다른 관료와 장수들을 안심시킬 만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기스가 다윗을 불렀을 때, 다윗은 한보따리 선물을 들고 왔다.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 등등, 다윗이 지내고 있는 시글락에서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었다. 집안을 거덜내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은 어디서 났을까?

아말렉을 쳐서 얻은 전리품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 접경에 있는 유다, 여라무엘, 겐 등지(等地)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아기스의 의구심을 따돌리기 위해서이다. 아기스가 본심을 숨기려 해도 반색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기 동족을 쳤으니, 이스라엘에게 반역자라고 심히 미움을 받게 될테고, 그러면 영원히 그의 부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부른 이유를 설명한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하고 있으니, 이참에 나가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른 신하와 관료들에게도 신뢰를 주어 더 자유롭고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암묵적인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다윗을 더 이상 의심없이 영원한 부하로 삼겠다고 말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X맨의 역할을 감당하랴. 난감했다.

그 사이에 성경이 전하는 다른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의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무엇을 했을까?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마음이 답답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건너편에서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다윗은 블레셋 군대 안에서 의심의 눈초리에 대한 답답함과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 가증한 신앙에 마음을 기대고 의지하려고 했는데, 다윗은 누구를 의지하고 기댔을까?

난리가 났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의 참전소식을 듣고. 검증되지 않은 자와 전쟁에 함께 나가서,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키고 대적자로 돌변하면 곧 패하고 말텐데,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라는 것이다.

아기스는 어쩔 수 없이 뜻을 접고, 헛걸음하게 만든 다윗을 돌려보낸다. 다윗이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아기스가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할리우드 액션을 한다. 자기는 전쟁에 나가고 싶은데 왜 막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홍해 앞에서 추격해오는 애굽의 군대를 뒤로하고 절망으로 울부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 대목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14:13-14)

사울은 위기 앞에 그 극복의 방편으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지만, 다윗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도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며, 살 길을 열어주신다. 우리는 사울처럼 성급해하거나 경솔해하거나 조급해해서 그릇된 길을 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1. 다윗에게 찾아온 고난의 역습과 승리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아말렉을 치고 아기스에게 들렸다가 시글락에 돌아와보니, 여기저기 가옥이 불탄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직 불씨가 남아 직전에 일어났던 일을 짐작케 했다.

시글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윗과 부대원들의 처자식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아무런 단서가 없다. 어디로 갔는지, 추격한다고 해도 잡을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잃어버린 처자식, 생사를 모른 이별은 평생의 원한이 되는 것이란 것을 이번에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않았는가? 만약 찾지 못한다면 죽는 게 나을 정도다.

다윗을 따랐던 군사들이 600명 정도다. 이들은 다윗을 얼마나 신뢰하고 목숨 다하여 따랐던가? 충성도가 굉장히 높은 이들이다. 그런데도 6절을 보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다른 것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더라도, 처자식을 이유 없이 잃게 되는 고통은 이마만큼 엄청난 것이다. 모세에 대해서 광야의 백성들이 원망한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럴 때도 돌로 치자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다윗과 병사들의 관계는 주종관계나 마찬가지다. 자기 주인을 돌로 치자 할 정도라면 그 순간 상실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4절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말한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6절 말씀을 보자.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이 한 문장 속에 뜻밖의 사건사고를 만난 다윗의 난처함, 난감함이 압축돼 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엄청난 위력일 것만 같은 태풍을 만나도 반석이 되시고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한지라 아무리 강하고 담대하다고 하더라도, 또 힘과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 마음이 녹아내릴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 중에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가나안 거주민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이스라엘이 근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만듣고도 간담이 녹아내렸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결투에서 완전 승리를 거두고도 이세벨의 협박에 마음이 무너져서, 광야로 피신하고, 거기서 말라비틀어질 뻔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군대에 겁을 먹었을 때, 엘리사가 기도하자, 그가 보지 못했던 눈이 열리며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 주위를 두르고 있음을 보았다.

예수님은 검과 몽치로 주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 검을 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명하시면 12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는 줄 모르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해지는 체험을 하길 바란다. 힘과 용기를 얻고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을 이겨내기 바란다. 다윗도 하나님 안에서 힘을 입고 용기를 얻었다. 동일하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동일한 은혜와 믿음이 있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1. 믿음으로 승리하라

다윗이 아비아달을 불러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응답을 얻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다. 지혜를 주시고 그 길을 인도하신다. 말씀으로 응답을 받고, 기도하다 응답을 받고, 찬양을 부르다가 응답을 받기도 한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때로는 그것이 긴가민가할 때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씀한다. 복음을 듣는 자들 모두가 유익하지 못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믿음으로 결부 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이루고 보이지 않는 증거들을 얻기를 주님께서 기대하신다.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일단 막연하지만 추격에 나섰다. 들에서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났다. 그가 병들어 주인이 버렸는데, 다윗이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게 했다. 알고 봤더니 그는 며칠 전 시글락에서 있었던 이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침노하였고 불사르고 약탈했다는 것이다. 그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의 제보로 아말렉을 추격했다. 그리고 결국은 아말렉에게 빼앗기고 끌려갔던 모든 물건과 사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성경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모두 찾았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과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응답을 붙드는 이에게 이와 같은 승리가 있을 줄 확신하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삶에서 지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소망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복된 약속을 주시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면서 찾아오는 낙심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중단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힘과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약탈당한 시글락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의 보호 아래 있던 다윗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기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다른 4 성읍의 방백들의 반대로 시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시글락으로 되돌아 왔는데 더 큰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간 것입니다.

아말렉이 누구입니까?

대대로 이스라엘과 원수였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혈통적으로는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자손들입니다(창 36:12).
그들은 매우 사나운 기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민 24:20).
아말렉 족속은 본래 에돔 족속에 속하였으나 모세 당시에는 에돔 족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가나안 남방 땅에 거하면서 주로 애굽의 국경 지대와 시내 반도를 배회하며 유목생활을 하고, 약탈을 일삼기도 했습니다(민 13:29).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까지 당도하자, 아말렉 족속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유하고 있는 땅과 소유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 때 처음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벌입니다.
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던 싸움입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양손을 들고 기도하게 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출 17:8-16).

그런데 아말렉의 야비함은 그들의 전쟁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과 식량의 부족과 긴 여정의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이스라엘 행렬의 후미에 처져 있는 연약한 자들을 기습 공격했습니다(신 25:18).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아말렉과의 갈등은 계속됩니다(삿 7장).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연합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이 때 부름 받아 나선 사사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용사를 세우시고 아말렉을 물리치셨습니다.

사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지시합니다(삼상 15장).

그러나 사울왕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양과 소의 좋은 것은 남깁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려 했다고 핑계도 댑니다(삼 15:15).
이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훗날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부상을 당했을 때, 그를 마지막에 죽이고 그 왕관을 다윗에게 가져온 사람도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삼하 1:7-10).

다윗도 시글락에 머무는 동안 아말렉을 쳤습니다.

사무엘상 27:8-9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이와 같이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부딪치는 원수였습니다.

이 아말렉 족속이 다윗에게 대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가, 때를 만난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앞두고 모든 병력을 북방전선에 집결하니, 자연히 남방 지역에는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아말렉이 유다의 네겝과 다윗이 거주하는 시글락으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온 도시를 다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 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윗 일행이 사흘 만에 돌아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의 가족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말렉의 공격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말렉은 누구일까?
나의 가는 길에 방해하는 원수 마귀입니다.
우리에게 아말렉은 원수 마귀 사단이며, 악한 영입니다.
사탄은 빈틈을 노립니다.
방심을 노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경고했습니다(벧전 5:8)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다

사흘 만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다윗과 일행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3-5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아내와 자녀들이 다 잡혀 간 것은 확인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성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게 울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껴지십니까?

앞서 다윗은 아말렉을 어떻게 했습니까?

삼상 27: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그들이 보복하려 했다면 다 죽였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다윗의 그의 일행들의 아내와 자식을 다 진멸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다윗의 공동체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의 공동체가 무너진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큰 차질을 빗게 되는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이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이들을 비싼 값에 노예로 팔거나, 여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행했겠지요.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극한의 상항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훗날 다윗은 여러 시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노래하였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94:17-19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우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한 가닥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다윗을 돌로 치려 함>

흥분한 그들은 다윗을 돌을 쳐서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6절).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그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모든 원인이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자신들을 이끌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한 지도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둘째, 아말렉을 약탈하여 그들을 자극한 것도 다윗입니다(27:8-9).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은 지나칩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다윗을 찾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지금까지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보호해 주었습니다.

또 다윗의 부인과 자녀들도 함께 사로 잡혀 간 상황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절대 고의성이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주변에 모인 이 아둘람 공동체는 이처럼 생각 없이 감정대로 행동하는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단순하고 거칠기가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출17:1-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마실 물이 없자 하나님을 의심하며 모세에게 모든 불만과 비난을 쏟아 내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며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시내산에 있는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 위에 있는 바위를 지팡이로 치자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와 모두가 흡족히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가면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사람들이 훗날 위대한 다윗 시대를 열어가는 훌륭한 인재들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들어 훗날 다윗의 왕조를 세워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완벽한 사람이라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실수가 많은 사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다가 죽을 뻔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들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삭도 아버지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추물의 축복, 평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또 어떻습니까? 약사빠르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속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이름을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 곧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선하게 쓰시는 하나님이 훌륭한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역시 이틀이 멀다 하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했던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의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갑자기 무리들이 다윗에게 돌을 던져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이 몹시 다급해졌습니다.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급해졌다는 것은 ‘일이 트이지 않고 막히어 몹시 급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위기가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다가 위기를 맞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위기를 맞았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한 판단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을 보고 크게 두려워한 사울을 보십시오. 다윗과 사울은 똑같이 군급한 상태, 일이 트이지 않고 막혀서 몹시 두렵고 답답한 상태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는 시도는 합니다. 그러나 평상시 하나님을 멸시하던(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학살)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려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무당)을 찾아갑니다. 다급한 통에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고 그를 힙입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어떻게 용기를 얻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 절(7-8절)에 나옵니다.

7-8절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합니다. 다윗은 그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말렉 족속을 추격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것이고, 크게 이겨서 빼앗긴 모든 것을 다 되찾아오게 될 것이다”하는 응답을 받습니다.

이 응답을 통해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처럼 아주 군급한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트이지 않고 다 막혀버려서 내 인생에 희망이란 조금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절망하지 말시고(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울기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처럼 엉뚱한 무당을 찾지 말고,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음).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반드시 피할 길을 준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은 다윗처럼, 오늘도 나와 함께 동해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새 힘으로 얻고 용기를 얻어, 날마다의 삶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월 4일(금) 사무엘상 27-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접한 여인(삼상 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Saul then said to his attendants, "Find me a woman who is a medium, so I may go and inquire of her." "There is one in Endor," they said.

신접한 여인(a woman who is a medium)

개역개정 / 신접한 여인
현대인 / 영매
공동번역, 새번역 / 무당

KJV. a woman that hath a familiar spirit,

NASB. a woman who is a medium

새한글 / 7사울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를 나를 위해 찾아 보세요. 내가 그에게 가서 물어봐야겠소.” 신하들이 그에게 말했다. “저기,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가 엔돌에 있습니다.”

신접한 여인(에쉐트 바알라트 오브)   אֵשֶׁת בַּעֲלַת־אֹוב

신(178) 오브(’ôwb) אוֹב 스트롱번호 178

1. 물병.  2. 점장이
발음 [ ’ôwb ]
어원  / 복수 אוֹבוֹת, 1과 동형에서 유래[아버지라는 말을 떠듬거리며 말한다는 점에서 유래된 것 같다]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물병[술병으로도 사용됨], 욥32:19.
  • 2. 명사, 남성 점장이[주술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내 미래의 길흉이나 의문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 삼상28:7.
  • 관련 성경
    ☞ 신접한 자(레19:31, 삼상28:3, 사29:4), 신 접자(신18:11).



접한(1172)


בַּעֲלָה 스트롱번호1172

1. 여주인.  2. 비유적으로 ‘~을 소유한’이란 뜻을 갖는다. 3. 무당
발음 [ baʽălâh ]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여주인, 왕상17:17.
    • a. 명사, 여성 [주]비유적으로 ‘~을 소유한’이란 뜻을 갖는다, 나3:4
  • 2. 명사, 여성 무당, 강신술사, 마법사, 삼상28:7.
  • 문법설명 /  1167의 여성형
    관련 성경 /  주인(왕상 17:17), 능숙한 자(나 3:4).



여인(802) 이솨( ’ishshâh) אִשָה 스트롱번호 802

1. 여자.  2. 여성   3. 연계형  נְשֵׁי
발음 [ ’ishshâh ]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관련 성경  /  여자(창2:22, 출21:28, 느8:2), 아내(창2:24, 20:7, 스2:61), 여인(창12:14, 출21:22, 욥14:1), 첩(창16:3, 삿19:1), 부인(창24:36), 시집(민 36:8), 기생(수2:1, 6:22), 과부(삼하14:5), 계집(잠2:16), 어머니(왕하8:5, 사45:10).

무당(巫堂) - 무당 무(巫), 집 당(堂)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사울과 신접한 여인(사무엘상 28:7-8)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불러낸 사무엘의 영혼

난해한 성경구절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은,  성경의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의 다양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의적이며 임의적인 해석을 무조건 옳은 답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삼상 28:6에 보면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은 다시 나타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욥기 7:9-10)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보듯이, 죽은 자는 제한된 공간에서 고통을 받으며 세상으로 다시 올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다윗은 그의 어린 아이가 죽자 오히려 금식을 풀며 이렇게 말한다(사무엘하 12:23)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3)

다윗은 장차 죽은 아들에게 갈 수 있지만, 그 아들은 다윗에게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의 요청에 의하여 신접한 여인에게 불리워진 사무엘은 무엇일까?
그는 정말로 죽은 자의 영혼인가?
아니면 여인이 정말로 영혼을 불러낸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인가?
또 이 여인은 정말로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는가? 혹은 거짓말로 초혼을 부르는 자일까?

삼상 28:6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구절로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해석이 있다.

1. 하나님께서 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실제로 사무엘의 영혼을 나타나게 하셔서, 사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이방 점성가였던 동방박사를 통하여 별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것은 정말로 사무엘의 영혼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하심이었다는 것이다.

2. 이 여인이 평소에 접하고 있던 귀신(다른 영적 존재)이 여인에게 사무엘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서의 귀신은 죽은 자의 사후영혼이 아니라, 마귀, 사탄의 부하(타락한 천사들)로서 어느 정도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무리를 말한다.

3. 이 여인 자신이 사울의 의도와 심증을 미리 파악하고, 거짓말로 사무엘의 영혼이 나타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의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각각 그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신접"(28:7)을 의미하는 "오브"라는 단어는 "친숙한 영"을 뜻하며, 이 용어는 어떤 영을 소유하거나 그 영에게 문의하는 자를 가르킨다. 즉 "신접한 자"(오브)는 어떤 영적 존재(귀신)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오브라는 용어는 아마 아브(아버지, 조상)에서 유래되었거나 아카드어인 "aptu"(구멍, 웅덩이) 에서 유래되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두 번째의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그 여인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28:13)라고 말하였는데,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엘로힘"으로서 일반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신적존재, 영적존재"를 말한다.

성경에서 "엘로힘"이란 고유명사적 의미로서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반 명사적인 단어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일반적인 신(god), 우상, 귀신, 천사에도 사용되어진다.

그것은 "엘"이라는 단어가 원래 "능력, 힘"을 의미하는 셈어에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엘로힘은 "재판장"(시편82:1, 6)이라는 의미로 사람에게 사용된 적은 있는데, 그것은 "힘, 능력"을 하나님께 위임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힘이 "죽은 사람의 영혼"에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은 없었으며, 성경에서 귀신이란 죽은 자의 사후영혼이 아니라, 사탄과 마귀의 부하, 즉 일련의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를 말한다.

사울왕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자, 여인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28:14)고 사울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28:12)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인은 어떻게 그가 사울인지 알았을까?
여인에게 이것을 알게하여 준 자는 사무엘의 영혼인가?
아니면 여인과 친밀한 다른 귀신인가?
혹은 추측으로 알았을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사울왕이 요청하였으며, 신접한 여인은 자신에게 정말로 그러한 능력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무엘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여인이 실제로 영혼을 부를 수 있는 신접자라면, 당연히 그 부르는 영혼이 왔었을 텐데, 왜 큰소리로 외치며 놀랐을까?
혹시 여태껏 거짓말로 영혼을 부르던 여인에게 실제로 사무엘이 나타나자 큰 소리로 놀라 외친 것이 아닐까?
즉 여인이 평소에 경험하였던 것 이상의 체험을 하였기에 큰 소리로 놀라 외친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인은 사울왕에게 "신(엘로힘)이 땅에서 올라옴"을 말하더니, 곧 이어 그 모양에 대해서 "겉옷을 입은 노인"이라고 설명한다.
즉 사울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여인의 보는 것을 통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며, 여인은 사울에게 사무엘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주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첫째. 사무엘이 정말로 나타났다면 땅에서 올라올리가 없다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나님 곁으로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더군다나 사무엘의 영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왕에게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설명한 것은, 정말로 죽은 사무엘이라는 것을 과장설명하기 위한 표현방식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잠언 15: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시편 9: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쉐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둘째. "신"(엘로힘: 신적존재)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였다가, 그 모양에 대해서 겉옷을 입은 노인

어떻게 여인은 겉옷을 입은 노인이 영적 존재(엘로힘)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사울왕에게 사무엘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설명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 겉옷은 히브리어로 "메일"로서 특별히 제사장의 겉옷, 도포를 가르킨다.(레 8:7)

사울이 그 모양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인에게 물었을 때에, 여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무엘이 노인이며 제사장의 겉옷을 입었다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여인이 사울에게 거짓 사무엘을 불러냈다는 증거가 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28장의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동안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되이 행한 일, 대표적으로 삼상 15장에서 아말렉 족속을 완벽하게 진멸치 않았던 것을 들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할 것을 예언한 바가 있었고, 사울도 죽게 될 것임(대상 10:13,14)을 이미 말했던 적이 있었다.

신접한 여인은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며, 사울왕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인하여 사울왕과 아들이 죽을 것을 사사롭게 예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신접한 여인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두려워 하였다. 그것은 사울왕에 의하여 신접한 자와 무당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자가 바로 그 사울왕이라는 것을 여인은 알게 되었다. 만일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면, 사울왕과 아들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

"사울과 그 아들들이 내일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28:19)고 말한 점이다. 그 말의 뜻은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 예언 그대로 사울과 아들들이 모두 죽게 되므로 사실로 입증된다는 점이다.

즉 28:16-19의 구절의 내용은 나타난 사무엘의 말이 신접한 여인의 엉터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귀신의 전적인 장난이거나 거짓이라면, 28: 17절과 같이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는 세상에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6)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사울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한 선지자 사무엘(삼상 10:7, 8)의 도착을 기다리다 못해 자기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중죄를 범했다(삼상 10:8,13:8-15).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에 대하여 사무엘은 사울 왕국(그의 1대에 한하는) 단절의 예언을선고 하였다(삼상 13:9-14).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사울을 책망하고 폐왕을 예언했다(삼상 15장).
사무엘은 사울왕을 대신할 제 2대의 왕이 될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베들레헴에 보내어졌다(삼상 16:1). 그 후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단절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또 성경에서는 신접한 자나 무당과 접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레19:31, 20:6, 27, 신18:11)

-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1)
-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1-12)

우리는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사울왕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다.
더욱이 사울왕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28:15)"라고 말하고 있다. 사무엘의 영혼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사울왕은 하나님 앞에 다시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왕을 섬기던 술객들도 모세와 비슷한 신통력을 행사하였다(출7:11)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될 것(마 24:25)이라는 사실은 모든 표적과 기적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특히 빌립보에서 바울이 핍박을 받게된 원인제공이 되었던 계기가 있었는데,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은 신통력이 있어서(행16:16) 바울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귀신(鬼神) : 프뉴마 피돈(phyton의 영)  πνευμα πυθωνος
피돈은 델피의 신전을 지키는 뱀의 명칭

그녀를 사로잡았던 귀신은 헬라어로 "프뉴마 피돈"(phyton의 영)으로 번역되어진다.
피돈은 델피의 신전을 지키는 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 누가는 거듭하여 우리에게, 기독교 복음이 싸워 나가야 했던 그리이스-로마의 미신적 배경을 상기시키고 있다(8:9; 13:6).
'귀신'(프뉴마 휘도나)의 '퓌돈'은 고린도만 북부 파르나소스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지키는 신화 속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키는데 퓌돈은 결국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퓌돈은 나중에 복화술사(腹話術師)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퓌돈의 영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졌다(Plutarch).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 여종은 점을 쳐 사람들의 앞날을 알아 맞히고 많은 돈을 벌었으나, 수입금의 대부분은 주인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이러한 주인들의 태도는 약자들의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약함을 이용하여 이윤만을 챙기려는 불의한 정치인들과 악덕 기업주 그리고 적게는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우리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바울은 그 귀신을 쫓아냈는데, 그 주인은 그 귀신이 축출당하므로서 신통력이 없어져서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귀신이 축출되기 전까지 점을 치는 능력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마귀는 언제나 축출의 대상이었지만, 마귀에 연루된 사람은 은혜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마귀를 축출하셨다.
그러나 악한 영적 존재들에게 자신을 위탁하는 것은 하나님께 중대한 범죄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울왕은 마지막까지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의 근거를 쌓았던 것이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신접한 여인의 정체

사울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지도해 주던 사무엘이 죽었고 의지할 자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크게 절망한 것 같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 때는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다.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는 때"였다.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이러한 때 일수록 하나님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하는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나눔으로 자신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삼상 28:7)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 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레 19:31).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 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1. 사울이...변장하고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 같다.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청을 거절하자,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싸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이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 신접한 술법으로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 레 19:31; 20:27).

3. 사람을 불러 올리라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참조.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신접한 여인의 행위

1)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이 견해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3) 본문의 '사무엘' 앞에 '이름'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이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

이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한편, 무녀가 유령같은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울이 그녀에게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은 것을 통해 그 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의 '신'은 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무엘 유령의 정체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특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라는 표현처럼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위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그 모양이 어떠하냐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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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물음(삼상 28:1-19)

[1-2절]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참으로]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에게 어려운 시험이 왔다. 실상 그가 블레셋으로 내려간 것이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가 어떻게 자기 민족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한 번 잘못된 길에 발을 디디면 또 다른 시험거리가 오는 것 같다.

[3-7절]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담력을 잃게 된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사울이 여호와께 간구했으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우림’은 대제사장의 에봇에 넣는 물건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신 것은 그가 범죄함으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사울이 자신이 전에 그 땅에서 추방한(9절)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울은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두려워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고 이제 또 다른 죄, 더 큰 죄를 짓고자 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귀신에게 묻는 것은 제1, 2계명을 범하는 참으로 큰 죄악이다.

[8-11절]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사울은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밤에 그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 일이 위법임을 알았고 양심적으로도 잘못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변장했고 밤에 그 신접하는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에게 신접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올리기를 요청했다. 그는 여호와로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을 하였다.

[12-14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신접술은 악령들의 활동이다. 악령도 제한적으로 신기한 일들을 행한다. 그는 악령의 감동으로 사울을 알아보았고 한 신적 존재를 불러 올렸다. ‘신’이라는 원어(엘로힘)는 ‘신들’(KJV)이라는 말로서 ‘한 영’(NIV)이나 ‘한 신적 존재’(NASB)를 가리킬 것이다.

[15-19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본문은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고 그의 말을 대언하였다고 표현한다. 본문은 ‘사무엘이 . . . 이르되,’ ‘사무엘이 가로되’라고 표현하고(15, 16절), 또 그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그 다음날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19절). 또 20절에서도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그 여인이 불러 올린 자가 진짜 사무엘인가? 본문의 표현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견해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빛 아래서 우리는 이것이 악령의 활동이었다고 본다.13)

매튜 풀은 그 이유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말한다.

첫째로,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로,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인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로,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로,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회개에 있다. 사울에게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으나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둘째로,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죄인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럴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영적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사울이 만난 죽은 사무엘의 정체(삼상 28:8-19)에 대하여

1. 이 사건의 배경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수넴에 진을 치자(삼상 28:4) 사울은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다. 사울은 유독 블레셋 군대에 대해서만은 심리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았을 때 벌어진 첫 번째 전쟁 때문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왔었다. 처음 전쟁을 치러야 했던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막강한 위용 앞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사무엘 대신에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일로 사무엘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던 일이 있었다(삼상 13장). 이때부터 사울은 지금까지 블레셋 군대만 보면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특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오히려 사울은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의 군대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군대라는 개념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사실 사울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보다는 다윗을 뒤쫓는 일에 더 익숙해 있었다. 때문에 다시 블레셋 군대 앞에 서게 된 사울은 그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초월적인 힘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삼상 28:5).

이미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세속 국가의 왕과 같이 힘의 우위에 따른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사울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보다는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군사력을 의존하고자 했으나 사울의 군대는 블레셋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약체였다.

사울은 여호와께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여호와는 사울에게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삼상 28:6). 사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사울은 급박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추방한 신접한 자들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이 사건의 전개

마침 사울의 눈을 피해 엔돌에 피하고 있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낸 사울은 황급히 찾아가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였다. 신접한 여인은 이스라엘 왕의 준엄한 법령을 두려워하며 술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사울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신접한 여인은 그 사람이 이스라엘 왕 사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낸 후에 그가 사울임을 알게 된 것처럼 행동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이 불러 낸 사무엘의 음성을 통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일로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고 기력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사울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사울이 만난 죽은 사무엘의 정체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만난 인물이 과연 사무엘이었는지 본문은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사무엘을 불러낸 후에야 갑자기 사울의 정체를 안 것처럼 놀라워 한 것(삼상 28:12)과 이 여인이 땅에서 올라 온 신을 사무엘이라고 단정한 것은 사울이 마치 극적으로 사무엘을 만나게 된 것처럼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사울은 그의 정체뿐 아니라 그 존재조차도 전혀 볼 수 없었다. 오직 신접한 여인의 설명을 통해 그 존재가 사무엘이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죽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죽은 나사로의 비유일 것이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한 번 죽었던 사람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도 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눅 16:26).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나가 지옥의 실상을 친척들에게 알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케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는 아무리 사울이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울의 장래를 보여주기 위해 구태여 죽은 사무엘이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사울 앞에 나타날 필요성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준다.

또한 사울의 장래에 대해서는 이미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구체적으로 예언한 바 있다(삼상 13:13-14; 15:22-26). 또한 사울은 의로운 다윗을 핍박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보복하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다(삼상 24:12). 그리고 사울의 행위로 인하여 여호와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삼상 26:19). 따라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의 술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술법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고자 한 것은 블레셋 군대를 보는 사울이 극도로 나약한 심적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아니며 사무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사울은 오로지 신접한 여인의 말에만 의지하여 그 존재가 사무엘이라고만 여겼던 것이다. 사울은 이미 신체적으로 매우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신접한 여인의 묘사한 내용을 판단할 기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삼상 28:20).

그렇다면 신접한 여인이 불러내었다고 주장하는 ‘죽은 사무엘’의 정체는 결코 죽은 사무엘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 접신의 상태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울에게 한 말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울뿐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리 새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이처럼 신접한 여인뿐 아니라 귀신까지라도 사울의 종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 이 사건을 기록한 기자의 의도

이 사건에 대하여 사무엘서 기자가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사울의 반신국적인 행위와 여호와에 대한 불신앙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더불어 사무엘서 기자는 심지어 신접한 여인의 입을 빌어서라도 사울이 버림을 받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사무엘서 기자는 사울의 죽음과 더불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시점이 가까웠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결코 죽었던 사무엘이 신접한 여인의 술법을 통해 이 세상에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그 어떤 형체와 방법으로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죽은 사무엘이 정말 나타났을까?

인간은 늘 죽음 앞에서 패배한다. 현대 과학조차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조그만 실마리도 여전히 찾지를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 W. B. 예이츠는 '사람이 죽음을 창조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죽음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히 9:27)고 했다. 즉 이 심판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같은 상식을 무너뜨리는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죽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와 사울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사무엘 상 28장에 나오는 이 엔돌(Endor)의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장면은 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다. 학자들 간에도 일치된 견해가 없고 그 해석이 갈라지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난해구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사울은 하나님이 금한 강신술(降神術)을 활용하는 큰 죄를 범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강신술, 강령술, 마법사, 점쟁이, 신접한 자들의 행위에 대해 무섭게 경고한다(신 18: 9-12; 출 22: 8-18; 레 19: 21-26, 31; 20: 2, 27; 26:2; 렘 27: 9-10). 따라서 사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행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 선지자로 예언 은사를 받았다 주장하며 예수 이름으로 점치는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행위는 전혀 성경이 말하는 예언 은사가 아니다. 사울만도 못한 유사(類似) 강신 행위나 점치는 일들을 벌이는 자들일 뿐이다.

둘째 죽은 사무엘은 신접한 여자의 능력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고 자신이 스스로 놀라 큰소리를 질렀다. 신접한 여인은 설마 사무엘이 정말 나타날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놀라 큰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신접한 여인의 능력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들 앞에 나타난 사무엘은 과연 누구였을까?

먼저 이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사무엘의 모습이었다.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1) 성경은 그 모습이 분명 선지자 옷을 입은 노인처럼 겉옷을 입은 선지자 사무엘이라고 말한다(삼상 28: 12-14절).

(2) 사울도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14절).

(3) 또한 사무엘도 어찌하여 자신을 불러 올려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고 책망하는 장면이 있다(15절).

그렇다면 이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정말 참된 죽은 사무엘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강신술은 성경이 금하는 큰 죄악이다.

따라서 신접한 여인의 강신술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신술이든 유사 강신술이든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행위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일차적 경고이다.

(2) 그렇다면 사무엘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닌 이상이나 환상으로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이상이나 환상이었다면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요 허용하신 경우라 할 수 있다.

(3)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을 신접한 여자가 불러올릴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사무엘상 28장의 모든 정황은 신접한 여인과 사울이 스스로 속은 속임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사무엘의 영이 어찌 정확한 예언을 하는가?

(삼상28:8-19)

이스라엘이 초대 왕 사울은 그 통치 초기에는 사사이며 선지자인 사무엘의 도움으로 외침을 막아내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심을 드러내며 불순종하였고, 이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을 부으셨다. 이때에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삼상16:14, 18:10, 19:9)하였다. 그 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고 사울은 이때부터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삼상18:12)는 것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의 사울의 생애에는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사울에게 선지자의 목소리를 발하던 사무엘마저 죽고 말았다(삼상25:1)

그때에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 사울은 두려움에 떨림으로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라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삼상28:6)셨다. 이에 사울은 신하들과 함께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나섰다. 사실 사울은 이 일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접한 자나 박수는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과 그들을 믿고 추종하면 부정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레20:27, 레19:31). 그래서 그는 일찍이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켰었다.(삼상28:9) 그런 그가 이제 스스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신접한 여인에게 술법으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청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이때 술법으로 올라온 사무엘이 과연 누구냐이다.
만일 그가 거짓 사무엘이라면 그가 하고 있는 대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냐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여전히 여호와를 높이고 있고 또 사울의 운명에 대한 그의 예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술법으로 불려 올라온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이 군급하여 자리를 불러 올렸다는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네게 묻느냐”(삼상28:16)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사울이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은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정확하게 언급한 후에,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29:19)고 하며, 그들이 당할 운명을 정확히 예언하여 주었다.

이렇게 불려 올려진 사무엘의 말이 여호와의 주권을 여전히 높이며 사울의 이전의 행위와 미래의 운명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면 그는 진짜 사무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 사무엘은 결코 진짜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통하지 않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기별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무엘이 아무리 신령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신접한 자에게 묻고자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사8:19)고 하셨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전9:5)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대상10:13,14)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무엘은 강신술에 의해 사무엘의 탈을 쓰고 나타난 사단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울의 범죄와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범죄의 사실들을 가장 정확하게 나열할 수가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죄악의 내용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전하는 기별이 무조건 하나님의 기별일 수는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별은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이 가짜 사무엘이 전하는 기별은 사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낙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랑의 호소와 회개의 기대가 없이 정확한 내용으로 사울을 절망하게 한 것 자체가 바로 사단의 목소리란 증거가 된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1) 사무엘의 환상은 사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
2) 사무엘의 환상은 사탄이 보여 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경우였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임수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사울과 신접한 여인 (삼상 28:7-8)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삼상 28:7-8)

사울은 긴박했던 불레셋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 대한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에봇은 가버렸고 꿈과 우림과 선지자들은 침묵하였다. 이것은 다윗의 많은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삼상 22:10-13, 15; 23:2, 4; 30:8; 삼하 2:1, 5:19, 23). 절망의 상태에서 사울은 비록 그 자신이 그런 일을 금했었으며 비록 그가 요구한 죽은 자의 영은 그에게 벌을 주는 사람이었던 사무엘이었을지라도 강신술에 의해 장래를 알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그녀로 하여금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고 그의 조언을 듣게 된다. 이런 행위는 사실상 성경의 여러 곳에서 금한 것이었다. 신명기 18:9-12에서는 9개의 혐오스러운 죄의 목록 안에 이런 강신술도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조적인 것이었다. 출애굽기 22:8에서는 마술사를 살려 두지 말라 하였다. 레위기 19:21, 31 그리고 20:2, 27에서는 강하게 신접한 자나 점쟁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를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대적하시며 그런 일을 하는 자를 죽이라 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실제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릴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울의 출현은 문자적이 아니고 단지 심리적 인상의 산물이었는가? 아마도 그것은 귀신이나 사단 자신이 사무엘을 가장하였거나 전체가 사울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전통적인 주석가들은 여기 떠오른 사무엘의 환상은 사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1. 역대상 10:13-14에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라고 하였다.
2. 여기 신접한 여자가 강신술에 의해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것이 아닌 것은 사무엘의 모습을 보고 신접한 여인이 놀라 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사무엘이 나타날 줄은 기대하지 못했었다.
3. 그 모습이 선지자의 옷을 입은 분명한 사무엘이었다(14절)
4. 사울이 사무엘 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14절)
5.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15절)고 한 말은 분명 사무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는 책망이었다⑴.

이렇게 볼 때 여기 나타난 모습은 분명 사무엘 이었을 것이다. 다만 성경 본문만으로는 그 모습이 정말 몸을 가진 육신으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결론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신접한 여인이 한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신은 죽은 자의 영으로 보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다만 그것이 신접한 여자로부터 온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길을 고집 하는 왕에게 말씀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방편이었다⑵.

심리적인 인상이나 영향의 결과로 보는 해석은 신접한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란 사실과 그녀가 사무엘만 아니라 사울과 대화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동의하기 어렵다.

사탄을 통해서도 신접한 여자로 하여금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개혁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기서 사무엘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만 상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씨루스(Ephraem Syrus)에 의하면 사무엘의 모습은 귀신적 술책을 통하여 사울의 눈에 소개되었다고 보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사무엘의 유령은 전혀 역사적 배경이 없는 술사가 만들어 낸 속임수일 뿐이라고 보게 되었다⑶. 만일 본문이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경우였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임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렇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갈 때까지도 그를 깨우치시기 위해 마지막 경고를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쓰시던 자를 쉽게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하는 자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 셈이다.

이 이야기는 강령술이나 강신술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로 정죄하셨다(신 18:9-12; 출 22:18; 레 19:26, 31; 26:2, 27; 렘 27:9-10⑷.


1.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p. 164-165
2. Ibid.,
3. C.F.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II, Joshua, Judge,
I & II Samuel(Grand Rapids; Eerdmans, 1980), pp. 265-266
4. 글리슨 아쳐: 성경난제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1990), p. 245


사울이 배척당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는가?(삼상 28: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삼상 28:18)

위의 말씀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사울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울이 어긴 하나님의 명령은 물론 그가 제사장 대신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해서 제사한 것이다. 사울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은 정한 시간까지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불레셋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울의 변명이나 상황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 왕을 크게 꾸짖기를 왕이 망령되고 어리석게 행했다고 책망하고 그의 왕위가 길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면 왜 사무엘은 사울을 그렇게 크게 꾸짖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도 준엄하였는가?

우선 여기 사울이 변명하기를 그가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사무엘이 약속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시켰다. 그러나 사무엘은 약속한 기간 안에 길갈로 왔다. 그러므로 그의 항변은 잘못이다. 따라서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대신에 변명했으며, 또 자신의 실수의 책임을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다음으로 사울은 그의 제사를 드린 동기가 잘못되었다. 사울 왕이 위기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위기를 피해 보려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울은 정치와 종교적인 권위의 결합은 마침내 종교적인 관행이 단지 국사의 다른 일로 사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모른다⑴. 여하튼 그는 왕으로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종교적인 권위도 행사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단지 몰라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리석은 죄였다⑵.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계명으로 말씀했다(출 24:12). 그리고 사실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나 후에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씀을 했기 때문에 그 권위에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무엘의 명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어긴 셈이었다(참고; 시 19:8; 89:31; 112:1; 119:6, 10, 19, 60, 96, 115, 131, 166, 176).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한 사무엘의 책망이나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의 빛에서 볼 때 쉽게 이해가 되는 것으로 그는 벧세메스에서 증거의 궤를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옮기다가 심판 받은 경우와도 같았다⑶.

결국 사울의 제사 행위는 위에 언급된 세 가지 죄가 다 해당된다. 그는 불법적인 제사를 드렸으며, 신접한 여자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이 받은 심판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1. The Brodman Bible Commentary, Vol.3(Nashville: Brodman, 1970), p.43
2. Joyce G. Baldwin, 1 & 2 Samuel(Downers Grove: IVP, 1988), p.105
3. John F. Walvoord & Roy B. Zuck,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Old Testament(Victor Books
1985), p.445   revdavidsuh.com


사무엘상 28장<메튜헨리>

●블레셋이 걸어온 싸움(사무엘 상 28:1-5)

Ⅰ.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치고자 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계획이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결심하였다(1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일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따위는 남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이때쯤에서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험은 말끔히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의 모둔 군사들 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는 다윗을 그들의 편에 끌어들이자, 이러한 계획을 획책하였다.

Ⅱ. 이 싸움에서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를 도와 주기를 기대하였고 다윗은 그가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도록 아기스를 격려하였다. "너와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라고 아기스는 다윗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여 주었으니, 나는 너에게 나를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아기스는 가는 곳 마다 성공을 거둔 다윗과 같은 사람을 옆에 데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참 잘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일이 어떻게 되는가 살펴보겠읍니다. 앞으로도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2절).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나로 하여금 선택할 시간적 여유를 주시면 내가 어떤 자리에 서는 것이 왕을 가장 잘 돕는 길인가를 생각해 보겠읍니다." 이처럼 다윗은 아기스의 기대를 딱 잘라 버리지는 않으면서도 그를 꼭 돕겠다는 약속에 자신을 얽매여 놓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기스는 다윗의 말이 자기를 꼭 돕겠다는 말로 이해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의 호위대장, 보호자, 또는 나라의 재상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Ⅲ. 양쪽 군대가 광야에 마주 대하여 진을 쳤다(4절). "블레셋 사람은 수넴에 진을 쳤다." 그 곳은 잇사갈 지파에 속한 땅이며 그들의 나라로부터는 훨씬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땅은 전혀 무방비 상태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땅의 심장부까지 유유히 행진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다윗을 쫓는 동안 그의 백성들을 알몸둥이로 내버려 두었다. 사울은 그의 군사들을 길보아의 근처 산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준비는 하였지마는, "여호와의 신이 그를 떠났으므로" 싸울 마음은 전혀 없었다.

Ⅳ. 사울은 크게 두려워 떨었으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는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자신의 견해와 그리고 정탐꾼들이 가져온 보고에 따라서 그들의 수가 월등히 많고, 무장을 잘 갖추었고, 그리고 매우 용기들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 (5절). 그가 만일 하나님과 가까이 하였다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떨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시게 하였기 때문에, 그의 힘이 약해졌고, 그의 군대의 수도 감소되었으며, 보잘 것 없는 모양이 되었고, 더우기 그 자신의 마음도 심히 낙담하였고, 그의 죄에 물든 양심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떨게끔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가 살려준 아말렉 사람의 죄로 물든 피와 그가 죽인 제사장의 무죄한 피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의 죄가 눈앞에 늘어서서 그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고, 그의 생각이 혼미해지게 하고, 그의 모든 용기를 빼앗아 갔고, 그의 마음 속에 심판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낳게 하여 주었다. 재난은 불충한 자녀들에게 두려움이 된다.

이러한 근심 속에서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다" (6절). 그들이 번영할 때 하나님의 지성소와 그의 제단을 경시하였던 사람들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 하였나이다" (사 26:16). 그런데 어떤 인간이 여호와를 찾았는데 그를 만나지 못한 일이 있는가? 그렇다. 사울은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의 청원도 그리고 그의 요구도 괘념치 않으셨고, 그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지시하여 주시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조차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넣어 주시지 않으셨다. 사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겔 14:3) 그럴 수 없다. 그는 좋은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1.사울은 전혀 "묻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대상 10:14). 사울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물음에 대답지 아니 하시면 악령에게 의논하기로 은근히 뜻을 정하고, 희미하고 냉담하게 물었던 것이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묻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물었다.

2. 사울이 너무 때가 늦게서야 여호와께 물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련의 때가 이미 지나고, 그를 버리기로 결정을 내린 뒤에야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를 만날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3. 사울에게 주어졌던, 물을 수 있는 은총이 몰수된 뒤에 물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지자였던 사무엘과 다윗을 증오하고 핍박하였는데 어떻게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대답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대제사장을 죽인 그가 어떻게 우림을 통해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또 은혜의 영에게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꿈을 통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갈 6:7).

Ⅴ.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벌써 오래 전에 있었던 두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사무엘의 죽음에 관해 언급하였다. 사무엘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담대한 마음과 사울에게는 보다 두려운 마음을 주었다. 사무엘이 살아 있다면 그의 돌봄과 그의 좋은 충고와 그리고 그의 귀한 기도가 재난 중에 있는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사울은 생각했을 것이다.

2.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 내었던 포고에 관한 언급이 있다. 사울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되는" (출 22:18) "신접한 자들" 을 쫓아내는 법을 공포한 일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울이 사무엘의 영향을 받던 그의 통치 초기에 이런 법을 공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최근에 공포된 포고 모양으로 언급된 것을 보아서(9절) 그것이 최근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울은 그가 악령에 의해 시달림을 받을 때, 자기가 신들린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신접한 자들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죄로부터 어떤 해를 자기 자신이 받을 때는 열심을 내서 그 죄를 미워한다(사람들은 욕하는 자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이 욕을 먹을 때 그들을 고발하며, 술취한 자들로부터 자기가 행패를 받아야만 그 술취한 자를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거나 죄 그 자체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간 사울이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을 억제 하였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속에 있는죄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잘 보아 주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기를 돋운다. 사울은 그의 왕국으로부터 악령을 쫓아내고자 하면서도 질투와 적의심을 품은 채 자기의 마음 속에 모셔들이고 있었다.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사무엘 상 28:6-14)

Ⅰ.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7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실 때" 만일 그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회개하며,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늘을 쳐다 보아도, 그리고 땅을 굽어보아도 위로를 받을 길을 찾지 못하자(사 8:21, 22), 그는 지옥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하였으며, 누구든지 자기 편이 되어 자기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고 사울은 말했다(7절). 그리고 그의 신하들은 사울이 악을 행하는데 지나치게 그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즉시 사울의 포고를 피하여 (거기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엔돌에 숨어 있는 한 여자를 추천하였다. 사울은 그 여자에게 가서 물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잘못들을 찾아본다.

1.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고, 그를 싫어 하시는데도, 다른 피조물은 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모순된 행동을 취하였다. 그는 무당들의 죄가 극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신접한 자들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건마는 이제 그는 한때 그가 가증한 것이라고 선고한 것을 다시금 귀한 것이라고 의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이 어떤 죄에 빠질 유혹을 받지 않고 있을 때는 그 죄에 대해 무섭게 욕설을 퍼붓는데, 나중에 그들이 그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사울이 무당들을 한참 죽이고 있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가 오래지 않아 그런 무당 중의 하나에게 그 자신이 물어 볼 때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사울은 하사엘이 말한 것과 같이 "무어! 내가 개란 말이냐?" 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Ⅱ.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단 말을 듣자 사울은 즉시 그 여자에게로 갔다. 그런데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하고 다만 두 사람이 시종을 데리고 갔다. 아마 걸어 갔을 것이다(8절).

1.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가를 보라. 사울이 자기의 운명을 한갖 가련한 무당에게 물어보려고 갔을 때처럼 비참하게 보일 때는 일찌기 없었다.

2. 또 얼마나 자신의 일을 숨기게 되는가를 보라. 악한 일은 어두움의 일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며, 빛이 있는 곳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사울은 왕의 옷을 입고 무당에게 가지 않았다. 그는 보통 군인의 차림으로 갔다. 이는 그 여자가 사울을 알아보고 그를 도와주지 않거나, 또는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온 줄로 알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사울이 그런 곳에 갔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고, 싫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낯을 붉히고 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양심이다.

Ⅲ. 사울은 그녀에게 자기의 용건을 말하고 그 때문에 그녀가 결코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1. 사울이 그녀에게 원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어떤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신술이었으며, 죽은 자를 불러서 자기의 목적에 이용하여 점을 치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율법에 분명히 금한 것이며(신 18:11),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사 8:19)라는 말씀으로 금하고 있는 바이다.

사울은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8절)라고 말했다. 이 말로 보아서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사후에 여전히 영혼이 생존하고, 그리고 인가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서 끝장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한 영이 악령의 지시에 따라 올라 온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구로 쓰기에 합당치 않다고 거절한 사람이 마술적인 방법으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다.

2. 그 여자는 법이 두렵다는 뜻을 밝혔고, 또 이 사람이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온 것이 아닌가고 의심하기도 했다(9절). "네가 사울의 행한 일을 알지 않느냐?" 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울로 하여금 바로 그런 무당에게 가서 물어보는 그 시간에, 무당들을 없애라고 하였던 그 포고에 관해 이야기를 듣게 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그의 죄가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그 법이 매우 무섭다고 말한 것은 아마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여기에는 그녀에 대한 보수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마는,그 여자는 틀림없이 비싼 대우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사울의 포고 때문에 오는 위험을 깨닫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조심히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그 진노가 무섭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사울" 이 한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마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고, 그녀는 자기의 영혼보다는 육신의 생명을 노리는 올가미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로부터 받는 형벌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받는 형벌보다 더욱 무서워 한다.

3. 사울은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로써 약속하였다(10절). 그런 여자를 처벌하는 것이 왕인 그의 책임이었으며, 사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건마는 그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자기가 꼭 하여야 할 일을 자신의 맹세로써 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 양 행동하였다.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고 사울이 약속하였는데 이는 그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 것이었다. 자기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보복을 스스로도 막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Ⅳ. 사울이 영혼을 불러 올려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최근에 죽은 사무엘이었다. 그리고 무당은 마술을 써서 사울의 요청을 만족시켜 주었으며, 두 사람이 함께 있게 하여 주었다.

1. 무당이 원하는 안전의 확신을 사울이 그녀에게 주자 (다시 말해서 사울이 그를 결코 찾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만들어주자) 그녀는 마술을 쓰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가지고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라고 물었다(11절). 벌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은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 담대히 악을 행하게 하고, 그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

2. 사울은 사물엘과 말하기를 원했다. "사무엘을 내게로 불러 올리라." 사무엘은 자기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며, 전에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며, 자문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의 충고를 듣고 싶었다. 사무엘이 사울이 있는기브아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라마에 살고 었으며, 거기서 선지자의 학교를 운영하였건마는, 그가 어려움릉 당하면서도 사무엘과 의논하기 위해 거기에 찾아 갔었다는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그가 만일 찾아 갔었다면 문제가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 때 사울은 사무엘이 다윗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서, 그를 오히려 멸시하였고,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이 죽자 "오 다시 한 번 사무엘을 보았으면!" 하고 그를 애타게 부르게 되었으며, 모든 수단을 다 써서라도 "사무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 올리고자"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살았을 때는 멸시하고 박해 하다가도, 죽은 뒤에는 그런 분을 다시금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죽어서 음부에 내려간 부자는 "나사로를 내게 보내 주시고, 그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라고 외쳤다(눅 16:24-27).

3. 여기에는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고 말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이어진 말은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라고 되어 있다(12절). 거기에는 여인이 어떤 주문 같은 것을 외우는 그녀의 주술적인 작업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다거나 어떤 동작을 했다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을 자리였다. 그러나 이에 관한 성경의 깊은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깊은 곳을 알도록" (계 2:24) 허락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악의 신비성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 교회의 고해성사에 관해 기록한 책에 의하면 죄목을 나열하는 것을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악한 데 미련하기를" (롬 16:19) 바라서 죄짓는 법에 대해서는 감추고 있다.

4. 유령의 모습을 본 그 무당은 자기에게 온 사람이 사울인 줄 깨닫고 큰소리를 쳤다(12절). "왜 당신은 변장을 하고 와서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은 내가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는 사울이니이다." 이처럼 그 여자는 그가 아무리 변장을 했어도 그를 알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사울이 나중에 자기를 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 여자가 본 사람이 진정 사무엘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 여자는 악한 왕 사울보다는 선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더 두려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들의 왕이신 분의 진노보다는 땅의 왕들의 진노를 더 무서워한다.

5. (옆에 방에 떨어져 있던 것으로 짐작되는) 사울은 그 여자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서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었다(13절). 내가 한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라고 그 여자는 대답했다. 그들은 천사들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신들이라고 불렀다. 가련한 신들이 "땅에서 올라온다" 는 것이다. 그 여자는 지옥을 신성시하고 그들을 존경하는 이교도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만일 사울이 사무엘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사무엘의 시체가 있는 라마로 무당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사무엘을 불러 내게 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계획은 전적으로 그의 영혼이 육체를 닮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이런 계획에 응답해 주기 위해 사탄으로 하여금 사무엘의 형태를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셨고 거짓을 믿게" 만들어 주셨다.

사무엘의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고 말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사무엘 자신의 영혼이 아니란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혼" 더우기 의인의 영혼은" 위로 올라 가기 "때문이다(전 3:21). 그런데도 사람들이 속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속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악마가 사무엘을 가장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번 경우에 사울이 악마에게 물어봄으로 실망에 빠지게 하기 위해 악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만일 사울이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께 물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를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 땅에서 올라온다는 말을 듣자, 그 신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올라오고 있는지 묻기에 바빴다. 그는 조금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에 의해 완전히 강퍅해지고 있었다." 사울에게는 극유령의 형태를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적으로 그 여자의 말을 의지할수 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고 하였다. 사사들에게는 이런 겉옷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 사무엘도 때로 그것을 입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모습때문에 그여자가 그 유령을 보고 한 신(또는 신들 -Elohim)이라고 하였다고 본다.

6. 사울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사울이 비록 사무엘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보통 하는 대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렇게 했든지 또는 그가 듣고자 원했던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을 듣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신접한 자가 부리는 마귀의 음성은 지절거리며 속삭거리는 음성이다. 사 8:19). 그리고 사울은 속살거리는 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아마 무당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를 부리는 자의 음성은 "땅에서 나며, 말 소리가 티끌에서 지절거리기 때문이다" (사 29:4).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인다.


사울의 죽음 예언(사무엘 상 28:15-19)

여기에는 사울과 사탄과의 회담이 나왔다. 사울은 변장하고 왔다(8절). 그러나 사탄은 즉시 그 정체를 발견했다(12절). 사탄은 사무엘의 외투를 걸친 변장한 모습으로 왔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점이 "이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자" 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불리한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궤계와 책략을 잘 알지 못한다.

Ⅰ. 사무엘로 가장한 유령 또는 망령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불렀는가고 물었다(15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이 말에서 우리는 그가 사무엘을 가장한 악령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패트릭 주교가 보는 바와 같이) 무당은 의인들의 안식을 분요케 할 수 없으며 그들의 마음대로 의인들을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참 사무엘이라면 그런 마술적인 주술력에 굴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있어서는 사탄의 계략이 꼭 들어 맞았다. 사탄의 계략은 그를 꼭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Ⅱ. 사울은 가짜 사무엘을 진짜 사무엘인 줄 착각하고 그에게 자기의 한탄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의 한탄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심히 급급 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는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표만 있다면 그들을 잘 막아낼 수 있겠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읍니다."

사울은 그가 재난을 당하기 전, "블레셋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신 사실을 한탄하지 않았다. 그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을 탄식하였다. 자기들의 형편이 잘 될 때 하나님께 묻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물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며,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그들에게 응답하시지 않으시며 또 하나님 자신이 직접 대답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그의 사자들을 보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다.

사울은 참회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의로의심을 시인하지 않고, 화가 난 사람 모양으로 하나님이 불친절하고 그에게서 떠나 버렸다고 하며 달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싫어 버린 자를 선대하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죽은 선지자가 살아 있는 선지자보다 더욱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비록 사무엘의 이름을 대기는 했지마는) 실은 하나님보다는 다른 데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대적인 악마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께 왔나이다." "만일 내가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나는 지옥을 움직이겠다" - Flectere si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

Ⅲ. 사무엘의 겉옷을 걸친 악령은 사울에게 차디찬 위로를 주었으며, 사울로 하여금 절망하고 자살 하도록 이끌어 가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참된 사무엘이었다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 사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고 다윗을 다시 불러서 일을 맡김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얻도록 힘써 보라고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이와 정반대로 사울의 경우가 절대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행한 것과 똑 같이 사울에게도 대하여 주었다. 사탄은 가룟 유다를 먼저 유혹하였고, 다음에는 그를 괴롭혔다. 먼저는 가룟 유다로 하여금 그의 스승을 팔게 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목을 매달게 만들었다.

1. 그는 먼저 사울의 현재와 재난을 비난하였다(16절).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이 되셨다고 하였고,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좋은 응답을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하나님이 너의 원수가 되셨거늘, 내가 어찌 네 편이 될 수 있으며, 너를 떠나셨는데 내가 어떻게 너의 의논 상대자가 되겠는가?"

2. 그는 다윗이 나라를 이어받도록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여 사울을 비난하였다(17절). 아마 이 이상 사울의 귀에 불쾌하게 들린 소리는 또 없었을 것이다. 다윗과 화해하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윗에 대해 더욱 분격하게 하고, 더욱 불화하게 하는 말만 하였다. 한편 그 망령은 자기가 사무엘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단언하였다. 악마는 자신 있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거짓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도로 꾸미고" 그들의 용어를 흉내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주문에는 좋은 말만이 들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좋은 말 뒤에 악독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3. 그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를 비난하였다(18절). 그 죄에 대해서 사무엘이 사울을 회개시키고자 했을 때, 사탄은 사울로 하여금 그죄를 변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그 죄가 지극히 크다고 말했다.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 자가 무엇을 얻게 되는가를 보라. 사탄 자신이 비난자가 되어 그들을 모욕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꾀는 자들은 누구를 닮았는가 보라.

4. 그는 사울의 멸망이 가까왔다는 것을 예언하였다(19절).

(1)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두 번씩이나 언급되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사탄은 블레셋의 강한 힘과 엄청난 숫자를 보고, 한편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사울의 두려움 그리고 더우기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을 볼 때 능히 이런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선지자를 가장하기 위해서 이를 다시금 하나님과 결부시켜서 예언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리라."

(2)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이 싸움에서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였다. "내일" 다시 말해서 가까운 장래에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였다. 이 말은 죽는다는 말이요,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게 되리라는 말이다. 이것이 만일 진짜 사무엘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는 한 그런 일을 예언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가 악령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악령을 통해서도 예언을 하실 수 있다. 우리는 한 악령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이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그를 멸망시키는 방편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왕상 22:20 이하). 아마 그 악령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울을 파멸시켰을 것이다. 아합을 충동하였던 그 악령이 사울을 위협하였고 그 두 사람을 모두 쓰러 뜨렸을 것이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 아래 놓인 자들은 가련하고 불쌍하다. 왜냐하면 그가 "노하든지 웃든지 다툼이 그침이 없기" 때문이다(잠 29:9).


사울의 낙담(사무엘 상 28:20-25)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유령으로부터 그런 무서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볼 수 있다. 사울은 "그가 어찌할 바" 를 듣기를 원했다(15절). 그러나 그에게 들려진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방법 외에 어떤 자문이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여기에 나타난 사울처럼 실망하기가 쉽다.

Ⅰ. 사울은 무거운 짐에 억눌리게 되었다(20절). 사울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버티고 들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진영에서도 그렇고, 계속 밥을 먹지 않았다.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입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세력을 두려워하는 그의 두려움(15절)이 그의 입맛을 가시게 하였으며, 무당에게 가서 물어 보고자 마음을 정한 이후에 그를 엄습한 양심의 괴로움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보고도 욕지기가 나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무장한 군인처럼 그를 엄습해 온 새로운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의 화살이 그를 꿰뚫은 것 모양으로 사울은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졌으며", "그는 기력이 다하여" 그 침울한 소식을 그대로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사울은 이제 더 이상 무당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서 좋은 위로의 말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무서운 공포의 말씀을 주시며 그와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의 문도 아울러 열어 주신다.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은 거기서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이 있는 줄로 안다.

Ⅱ. 신하들과 무당 여인이 사울을 강권하여 떡을 먹여 기운을 차리게 함으로 사울을 자기 진영까지 돌아가게 하였다. 무당은 사울이 직접 그 유령과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도록 그 자리를 피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 사울이 넘어지며 신음하는 소리를 그 여자가 듣고, 그가 크게 괴로와 한다는 것을 알고 사울에게 달려 왔을 것이다(21절). 그리고 그 여자는 사울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고 자기 집에서 어서 떠나가게 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 만일 사울이 거기서 병이 들거나 더우기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당짓 때문에는 이미 형벌 받는 것을 피해 놓았지마는, 이 때문에 배반자라는 이름으로 벌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사울을 도와준 것은 어떤 친절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잘못된 위로를 구하려다가 더욱 비참한 꼴이 되었다.

1. 그 여자는 사울에게 기력을 차리게 하여 주기 위해 애썼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왕의 말을 청종 하였으니만큼, 왕도 이제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며 사울에게 강권했다(21,22절). 그 여자에게는 살진 송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글자 그대로 보면 그 송아지는 곡식을 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송아지를 잡으면 손해가 많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 송아지를 잡아 음식을 장만하였다(24절). 조세푸스는 그 여자의 예절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크게 칭찬하였으며,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지 못할 일에도 이 여자처럼 신속히 재난당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한바가 있다.

2. 사울은 음식 먹기를 싫어하였다. "사울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23절). 그는 명예롭게 칼에 맞아 죽기보다는 명예롭지 못하게 굶어 죽는 길을 택하고자 하였다. 만일 사울이 기력만이 부족하여 그렇게 애쓰는 것이었다면 음식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양심에 아무리 맛좋은 고기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신 김치에 초를 치는 것이나, 침울한 마음에 노래를 불러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3. 그 여자는 드디어 사울의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사울을 설복하여 기력을 차리게 하여 주었다. 그들은 억지는 아니지만, 다정스런 충고를 통해 사울을 강권하였다(23절). 이런 예의 바른 강권을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종들에게 주인이 말하기를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눅 14:23). "옳은 말은 유력한 것이어서" (욥 6:24). 사람들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사울은 그 음식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신하들이 음식을 먹고, "일어나서 그 밤으로 갔다" (25절). 그들이 그 밤으로 간 것은 가서 할 일을 빨리 하기 위한 점도 있었으나 그런 소문이 날 만한 집에 갔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세푸스는 여기서 사울의 용기와 넓은 도량에 감탄하였다. 즉 사울은 이제 곧 생명과 명예를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군대를 버리지 않고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가서 블레셋과 싸울 차비를 차린 점을 감탄하였다. 나는 오히려 그의 마음의 강퍅함에 더 놀란다. 이런 경우는 적어도 그 형벌이 잠시 유예되기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함직한데, 그는 오히려 더 멸망으로 달음질쳤다. 아마 이때 사울의 격노와 시기가 최고에 달했으며, 다윗에게 친절을 베푼 것 때문에 그가 몹시 화를 내고 있던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운명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는 자기가 죽는 다면 그의 가족이나 왕국이 그 후에 어떻게 황폐하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 VEmou/, Qano,ntoj, ga,ia, micqe,tw, puri, "내가 죽는다면 그 후에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든지 나는 상관 않겠다." - 는 태도였다. 그는 다윗처럼 "당신의 손을 내게 댈지언정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대지 마소서"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무엘상 28장 주석

성 경: [삼상28: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ꃨ 블레셋...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 여기서 `블레셋'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한 그들 모든 족속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의 연합군에 의해 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8; 29:2, 3).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벤에셀 전투)(4:1-11)이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전한 데 대하여 일대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14;52; 17:50-53; 18:6,30)

ꃨ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 이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그로서는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같은 일을 위하여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채 다윗을 자신의 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27:6, 12). 더구나 아기스는 이미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함으로써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27:10, 12)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ꃨ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 이 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다윗의 애매한 답변이다. 다윗이 이같이 애매한 답변을 한 까닭은, 그는 아기스의 요구대로 자신의 동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들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를 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 저자는 이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다윗이 극도의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ꃨ 그러면 내가...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의 애매 모호한 답변을 (1) 그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2) 그리고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머리지키는 자'는 `경호 대장' 또는 `시위 대장'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전사(戰士) 다윗이 한낱 이방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적 결과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전적 의뢰하여 조국 이스라엘 땅을 끝까지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따라서 당장 목전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윗이 우상의 나라 블레셋 땅으로 스스로 찾아든 것은,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창 12:10-20).

성 경: [삼상28: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사무엘이 죽었으므로...장사하였고 -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킨다(8절).


ꃨ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Smith).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18:10-14)인 바, 처음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신접한 자'(*, 오보트)에 대해서는 어원학상의 여러 이론(異論)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즉 (1) `오브'(`오보트'의 단수)를 비히브리어계의 단어 `아브'에서 온 것으로 보고, 어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혹은 유령이라는 해석(Hoffner), (2) `오브'를 어원학적으로 `조상' 및 `아버지'의 의미가 있는 `아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형상' 및 `도구'라는 해석(Lust), (3) `오브'를 `가죽 부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오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귀신이 들어가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화술사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Smith), (4) `오브'를 `어리석은',`공허한'이란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우브'(*)에서 온 말로 보고,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Lange)등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견해 중 첫째, 본절의 `쫓아내었더라'(*, 헤시르)란 말은 우상과 같은 유형적 형상의 제거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왕하 18;4; 23:19; 대하 17:6; 30:14; 사 3:23) 둘째7절의 `신접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오브를 다스리는 여자'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등에서 볼 때, '오브'는 (2)의 견해처럼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미신적 도구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 사후(死後)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19;31).

ꃨ 박수(*, 이드오님) - 이것은 `알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점(占) 또는 마술 등의 방법을 통하여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자, 곧 점장이나 마술사를 가리킨다(Lust, Fay).

성 경: [삼상28: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블레셋 사람이...수넴에 이르러 - 여기서 `수넴'(Shunem)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이다(Gesenius). 그 위치는 침공해 오던 블레셋 군을 및이하여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29:1; 수 19:17, 18)의 북쪽 약 5.6km 지점으로, 바로 이 지점은 `모래 언덕(창 12;6)의 남서쪽 기슭이었다. 즉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편의 소(小) 헬몬산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Conder, Robinson). 아마도이때 블레셋 군대는 `아벡'(4:1; 29:1)에서 소집되어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동녀(童女)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하다(왕하 4:8-10).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술렘'(Sulem)이다(Eusebius).

ꃨ 사울이...길보아에 진 쳤더니 - '길보아'(Gilboa)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에 있는 길이 약 12.8km, 그리고 폭 약 8km 정도의 산악 지대이다. 그곳 중 가장 높은 지대는 해발 약 565m 정도이다. 이 길보아 산악지대의 특징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다다르며, 반면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때 사울은 바로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스르엘'(Jezreel)에 진을 쳤다(29:1).

성 경: [삼상28: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 많은 군대로 인하여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ꃨ 보고(*, 라아) - 미세한 것을 들여다 보듯이 세심하게 탐색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16:6; 23:23; 25:15; 왕하 7:13).
ꃨ 두려워서(*, 야라) - 이 말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8:29).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사울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ꃨ 떨린지라(*, 하라드) - 이 단어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의 기습 공격으로 인하여,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냈던 당혹스럽고 어쩔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4:15). 바로 이같은 단어는 사울의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13:7; 사 32:11). 아무튼 사울은 과거 대(對) 블레셋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4:21-23, 31, 47; 17:53), 금번 길보아 전투를 맞이하여 `두려워 크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엘라 골짜기 전투(17:1-3)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인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Keil, Clericus).

성 경: [삼상28: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사울이...묻자오되 - 여기서 '묻자오되'(*, 솨알)는 '요구하다' 혹은 '문의(問議)하다'란 의미로서, 사울은 이때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15:26; 16:14)을 잘 알면서도, 이처럼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블레셋 군대로 인한 사울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ꃨ 여호와께서...대답지 아니하시므로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희귀는 어느 인물 또는 어느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3:1).
ꃨ 꿈으로도 - '꿈'(*, 할롬)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때,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 20:6; 민 12:6; 단 2:4).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선지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Fay),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Erdman).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ꃨ 우림으로도 - 여기의 '우림'(Urim & Thummin)의 약칭이다(출 28:30 주석 참조; 민27:21).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23:6).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또한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대제사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추측컨대, 사울은 놉(Nob)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8,19) 이후 성막을 기브온 자기 궁성(宮城)으로 옮긴 다음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Zadok)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것 같다(대상 16:3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본래의 것을 본뜬 모조(模造) '우림과 둠밈'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사후 다윗 시대의 두 명의 대제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삼하 8;17; 15:24, 29, 35; 대상 15:11; 18:16). 한편 사울의 이러한 시도는 (1) 놉 제사장 학살 사건 이후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2) 자신의 측근들로 제사직을 독점하고자 한 정치적 계산 또는 왜곡된 종교적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울의 '우림을 통한 문의'에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리 만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0-261; Smith, Fay).

ꃨ 선지자로도 - 하나님의 대선지자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3절; 25:1). 또한 그밖의 선지자들도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13:13, 14; 15:26; 16:14)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선지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저냐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만날 만한 때에', 즉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사 55:6; 고후 6:1, 2).

성 경: [삼상28: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 - , 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ꃨ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ꃨ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성 경: [삼상28: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사울이...변장하고 -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같다(Fay).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신접한 여인이 살던 엔돌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돌'이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왕상 22:30).


ꃨ 밤에...이르러 -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ꃨ 신접한 술법으로 -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 카삼)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레 19:31; 20:27).
ꃨ 사람을 불러 올리라 -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8: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ꃨ 어찌하여...올무를 놓아...죽게 하려느냐 - 이 말은 신접한 그 무녀(巫女)가 변장한 사울을 몰라봤음을 말해 준다. 즉 이때 그녀는 사울 일행을 자신과 같은 점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죽이기 위하여(출 22:18; 레 20:27; 신 18:11) 왕의 명을 받고 그곳으로 온 왕의 사신들로 알았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판단은 (1) 이전에 사울이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3절), (2) 사울 일행은 무녀의 눈에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비록 밤늦게 방문한 낯설은 사울 일행에 대해서는 그 무녀(巫女)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그당시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통한 복술을 베풀어 유명한 무녀로 통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본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사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ꃨ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처럼, 또는 여호와께서 살아 존재하시는 한 맹세한 사항이 확실이 이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 맹세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다(25:26).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삼상28:1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ꃨ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 사울이 많은 사람 중 하필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조언자 역할을 담당했었으며(10:1; 15:1), (2) 또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7:10-12),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그때 이같이 사무엘을 부름으로써, 그로부터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8:1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즉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Henry, Grotius, Patrick), (3) 본문의 '사무엘'(*, 쉐무엘) 앞에 '이름'(*,쉠)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등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네가지의 견해 중 (1)의 견해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3)의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4)의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 무녀가 본 것은, (2)의 견해대로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ꃨ 큰 소리로 외치며...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 이같은 무녀(巫女)의 언급은, 그녀가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한 인물이 사울인 줄 몰랐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비록 사울은 거구의 소유자여서(10:23) 타인의 눈에 쉽게 띄일 여지가 많았으나, 그래도 당시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8절), 무녀의 눈에 의해서 간단히 분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때 그 무녀(巫女)는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울인줄 몰랐으나, 사무엘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가 사울인 줄 깨달았을 것이다. 즉 그 무녀는, 블레셋의 침공이 격렬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사무엘의 혼을 부를 사람은 그 전쟁으로 인하여 최악의 곤궁에 빠져있을 사울 밖에는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Keil, Lange, Klein). 더구나 그녀는 사울의 큰 키를 이미 본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3, 9절) 두려움과 공포에 차서 즉각 큰 소리를 내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왕이...이르되 두려워 말라 -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3절).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그 사울에게 목격당한 그 무당 여인으로서는 큰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절).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은 그 무녀(巫女)에게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안심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卜術) 행위 조차도 서슴없이 독려하는 자아 모순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ꃨ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 이 질문은, 그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Smith).


ꃨ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 여기의 '신'(*, 엘로힘)은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Hertzberg, Klein),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삼상28:1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그 모양이 어떠하냐 -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ꃨ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 사무엘이 83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25:1 주석참조), 사단적 유령이 이같이 '노인'의 모습으로 무당에게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ꃨ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 여기서 '겉옷'(*,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긴 망토식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출 28:4; 레 8:7; 삼하 13:18; 대상 15:27), 사무엘도 생전에 선지자의 외투로서 이같은 겉옷을 입었었다(15:27).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본 형상의 주인공이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이같은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가 사무엘임을 넉넉히 느꼈을 것이다(Hertzberg).
ꃨ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절하니라 - 이것은, 그때 사울이 사무엘의 형상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은, 그 접신녀가 '노인'과 '겉옷'을 언급한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본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사울은 무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8:1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ꃨ 나로 분요케 하느냐 - '분요케 하느냐'(*, 히르가즈타니)는 '격분하다', '진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라가즈'(*)의 사역형으로서 '안식을 방해하다'(disquit, KJV; disturb, NIV)란 뜻이다(렘 50:34). 특히 이 단어는 시돈의 왕 타브닛의 비문에서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Klein). 따라서 이 단어는 무덤을 평온하게 안식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고대 중근동의 내세관과 잘 부합된다(Klein; 욥 3:13-19; 사 14:9). 아울러 이 말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지하 세계인 음부(스올)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히브리인들의 고대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ꃨ 심히 군급하니이다 - 여기서 '군급하다'(*, 차르)는 대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당하는 커다란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24:13; 욥 6:23; 7:11). 따라서 영역본들(RSV, NIV)은 '커다란 재난에 처해있다'(be in great distress)란 말로 번역했다.
ꃨ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23:17).
ꃨ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시기로 -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6절에는 언급되어 있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을 생략한 것은 '우림과 둠밈'(Urim & Thummin, 출 28:30 주석 참조)이라는 계시 수단은 다른 것과는 달리 자신의 극심한 잘못 때문에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Talmud, Berach, Xii. 2). 즉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6절 참조.
ꃨ 행할 일을 배우려고 - '행할 일'은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책(方策)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8:1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네 대적이 되셨거늘 - 이 말은 칠십역(LXX)의 번역대로 '네 이웃의 편이 되셨거늘'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15절).
ꃨ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만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묻는 행위는 가당치 않다는 뜻의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28:1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본절의 언급에 대해서는 15:27, 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28:1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는 사울이 왕이 된 후 하나님께 불순종한 여러 사건 중 '아말렉 진멸 명령'(15:3)을 어긴 사실이 가장 치명적인 사울의 범죄 행위임을 시사해 준다. 아마도 출애굽 후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여정을 최초로 그리고 비겁하게 방해하고 적대한(신 25:17-19)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회심(會心)의 복수전을 사울이 그의 사악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ꃨ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행하셨고 - 본절은 이때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이행치 않음으로써(15:9)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15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에게 왕위(王位) 박탈 선언을 했다는 점(15:26)과 연결하여, 여기서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 더이상 앉아 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작업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붙이시리니 - 여기서 '붙이시리니'(*, 나탄)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의지로 어떤 당사자나 나라에게 확실한 승리를 부여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ꃨ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무엘처럼 '죽은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뜻으로, 곧 '죽을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네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을 사울의 세 아들, 곧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가리킨다(31:2; 대상 10:2).

성 경: [삼상28:2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사울이...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쓰러져버린 것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ꃨ 종일 종야에...먹지 못하였음이라 - 사울은 전투에 앞서 금식을 하곤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14:24). 이와 유사하게 당시에도 (1) 사울은 엔돌의 이 접신녀에게 자신이 행할 바를 묻기 위하여 (2) 그리고 엔돌로 향하는 과정에서 블레셋의 수비망을 뚫고 가야한다는 어려움을 예상하여(Klein) 일부러 금식을 하였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나 이 견해와는 달리, 먼거리를 오느라고 식사를 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은(1) 당시 이스라엘의 진지인 이스르엘(29:1)에서 무당이 거주하던 엔돌까지의 거리는불과 8km 정도(Aharoni), 즉 두 시간 거리밖에 안되며 (2) 23절에서는 사울이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먹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성립되지 아니한다.

성 경: [삼상28:2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 이같은 언급은, 그 접신녀가 사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사울은 접신녀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15절) 마치 사무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로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접신녀는 자신과 사울 사이의 시계(視界)를 흐리게 할 목적으로 향을 피웠을 가능성도 있다(Smith).
ꃨ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 여기서 '고통함'(*, 바할)은 '두려워 떨다'란 뜻이다(창 45:3; 출 15:15; 삼하 4:1; 시 6:2). 그리고 '보고'(*, 라아)는 자세하게 관찰하는 행동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같은 행동 뒤에 취한 접신녀의 태도는 국도의 공포로 떨고 고통스러워 하며, 또한 육체적 탈진으로 기력이 쇠잔해 있는 사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Hertzberg, Smith).
ꃨ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 '왕의 말씀'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는 사울의 명령을 가리킨다(11절).
ꃨ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불러내라는 사울의 명령(11절)은 초혼(招魂)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 그당시 상황으로 인하여(3절), 무녀에게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으로 들렸을 것이다(9절). 그러므로 그 무녀가 그같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1) 사울로부터 목숨 보장에 대한 맹세를 이미 받았고(10절) (2) 또한 당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통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이 자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는 마당에서, 그 무녀(巫女)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결코 생명을 건 모험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라는 무녀의 말은 자신의 공을 자찬(自讚)하는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8:2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본절에 언급된 무녀의 행동은 사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접신녀의 이같은 동정도 사울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는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을 결코 제거할 수는 없었다.

성 경: [삼상28:2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 이것은 당시 만사가 귀찮은, 그리고 거의 자포 자기의 상태에 있는 사울의 탈진한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해 준다.
ꃨ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낙담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수습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따라서 사울은 지금까지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침상'(*, 밋타)은 방의 벽을 따라 길게 배열된 푹신한 긴 의자를 가리킨다(Keil, Thenius, Smith).

성 경: [삼상28:2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살진 송아지...잡고 - 이것은 사울에 대한 무녀의 정성이 극진했음을 잘 시사해 준다(창 18:7; 눅 15:23).
ꃨ 무교병 - 이것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으로, 급히 장만할 수 있는 음식이다(출12:8, 15-20). 이때 그 무녀는 보다 먹기 좋은 유교병은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성 경: [삼상28:2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그 밤에 가니라 - 날이 밝을 경우 (1) 블레셋 군대에게 발각될 위험과, (2) 그리고 블레셋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같 이급히 서두렀을 것이다(Klein). "실로 사울은 자신과 아들들과 백성들의 죽음과 패배를 괴로워하고 슬퍼하기에는 그 양심이 죄로써 너무 둔감해져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그의 강퍅한 심령을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맞으러 갔다. 즉 한때 여호와의 신이 임했으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는 축복을 누린 자 - 사울은 이처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으로 간 것이다"(O.V. Gerlach; 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9-270).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방문한 사울(사무엘상 28:1-14)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입
둘째는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방문한 것

1절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군대를 모집하면서 사울 왕이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블레셋은 엘라 골짜기 전쟁(17장)에서 이스라엘에 크게 패한 이후로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지적인 약탈만을 일삼고 있었습니다(23:27).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며 군사력을 키우다가 어느 정도 군비가 준비되자 블레셋의 모든 방백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길보아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전쟁에 참전할 것을 제의받게 됩니다.
그러자 2절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고, 아기스는 다윗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그 공로에 대한 보답과 신뢰의 표시로 평생동안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기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호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모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쫓기던 다윗’과 ‘쫓던 사울’이 동시에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아기스의 명령으로 동족과 싸워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서게 되었고, 사울은 블레셋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처한 위기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자초한 위기’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이방 왕을 의지했고,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의 대가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반면, 사울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다윗이 사울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죄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구원받고 사울은 실패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 까닭입니다,
물론, 이는 사울은 범죄하고도 끝까지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면, 다윗은 범죄한 사실을 깨달은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다윗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새벽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열심도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이 죽었으므로’라는 말은 ‘사무엘이 죽은 직후’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사무엘의 죽음으로 동요하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일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은, 겉으로 볼 때는 그의 신앙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매우 감정적이고도 정치적인 행위의 일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어지는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겔 18:23).
그리고 7절에, 사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스로 신접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수소문하여 찾아갔습니다.
만일 사울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었다면,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믿음은 그야말로 형식적이며 거짓된 믿음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의 때에,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의 믿음은 위기로 인해 더욱 빛이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거짓 믿음은 위기가 닥치면 쉽게 믿음을 저버립니다.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생각의 한계 내에서만 신뢰합니다.
자기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일 예배 때에 언급한 데마와 같은 사람이 그러합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의 박해가 점차 거세지자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딤후 4:10).

여러분,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평상시에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그 실상은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고난의 일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이든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절에,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접한 여인에게 맹세하는 또 한 가지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맹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점점 더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사울의 모습을 조명하며, 그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넘어서서 그가 자초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 20:7).

12-13절에, 신접한 여인이 사울에게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전 3:21, 눅 16:22-31).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영혼이 어찌 신접한 여인에 의해 불려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사무엘의 영은 진짜 영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악령이 사무엘 생전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사울의 눈앞에 나타나 그를 속인 것입니다.
만일, 사울에게 영적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같은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사탄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자신의 영적인 지식을 점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이 구원받고, 사울이 버림받은 것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 겸손한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식이 없으면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들 수 있음을 알아 말씀과 기도에, 그리고 선한 삶을 살기에 날마다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월 3일(목) 사무엘상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삼상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으로 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Now since the LORD has kept you, my master, from bloodshed and from avenging yourself with your own hands, as surely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live, may your enemies and all who intend to harm my master be like Nabal.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Jehovah has stopped it)

성경에서 다양한 여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 여인들 중에서 "아비가일(Abigail)"은 매우 지혜로운 여성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이란 이름은 "내 부친이 기뻐함"이라고 합니다.
아비가일은 농부였던 나발의 아내(삼상 29:14)이었으나 나발은 죽었고 그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으며(삼상 25:39-42) 헤브론에서 길르압이란 아들을 낳았습니다(삼하 3:3).

왜 아비가일을 지혜로운 여성이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다윗이 화가 나서 수종들던 용사들을 거느리고 나발의 농장을 습격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심지어 나발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비가일은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청컨대 이 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삼상 25:24b-25)

남자가 화가 났을 때 남자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더 큰 것을 생각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춘 여성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삼상 25:3)

화가 치솟아 나발의 농장을 습격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죽이려고 달려오는 다윗 앞에 아비가일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남편 나발은 그 이름대로 행동한 것이니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그까짓 어리석은 사람을 쳐서 피를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며 다윗의 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던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에게만 있는 정신과 질환의 병명은 "화(Wha Byung)"라고 합니다.
화는 속에서 불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불 火).
화가 쌓이고 쌓이면 염(炎) 즉 불꽃이 됩니다.
이 불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불꽃 염(炎)자 앞에 말씀 언(言)을 더하면 담(談)자가 됩니다.
담(談)이란 말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나를 잘 다스릴 줄 아는 것이 곧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상담(相談)을 통하여 화를 가라앉혀 속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을 해결합니다.
상담(相談)이란 서로 상(相) 이야기하는(談) 방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상담자는 내담자(來談者)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는 내 속에 솟는 화를 여호와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고 화를 가라앉힌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가정, 교회, 국가

가정과 교회와 국가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조직은 무엇일까?

조직이 만들어진 순서를 보면, 가정이 첫째이고 그 다음은 교회이고 국가이다. 그
렇다면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가장 나중에 만든 것이 더 중요할까?
쉽게 생각하면, 더 발전된 조직은 가장 늦게 등장한 국가일 것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 다음은 타락에 의해 부패하기 시작한 인간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허락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여자를 주셨다.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는 가정을 좋게 보신 것이다. 그렇게 가정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

교회의 시작은 어떠한가?

아담과 여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연합해야 했다.
하지만, 합심하여 하나님 말씀을 어겼고, 책임을 전가했고, 그들의 자녀는 미움과 살인을 저질렀다.
가정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능을 잃은 가정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회를 주셨다.

그 시초가 광야에서 주신 성막이다.
하나님께서는 친족을 이룬 지파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조치하셨다.

하나님은 교회가 가정을 대체하기 바란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정마다 부모 세대는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을 잊지 않도록 전해야 했다.
하나님 신앙을 가정 중심으로 전수되도록 하신 것이다.

성막에서는 이루어지는 예배의식은 가정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타락이 일어난 가정은 신앙의 전통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패한 세상에 쉽게 물들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가정이 올바른 신앙 위에 서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제사장들은 그 일을 위해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하나님께서 교회에 기대하시는 바는 이렇다.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는 가정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도록 교회가 돕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가정 위에 군림하거나 가정의 기능을 대신해서는 안된다. 가정이 신앙 위에서 연합하고 든든히 서도록 돕는 일 외에는 가급적 그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11:18~20)”

국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교회가 타락한 세상에 물들어 가면서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탐욕이 자리잡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더 큰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무리를 짓고 지도자를 세워 힘을 집중시켰다.

점차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조직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인간이 다스리는 왕국이 더 좋은 효율과 효과를 나타냈다.
생명나무의 과실보다 선악과 나무의 열매가 더 먹음직스럽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던 것처럼, 인간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언뜻 보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지도자의 명령체계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중구난방 돌진하기보다 전략적인 움직임이 효과적이다.

교회를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살아가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해지고 심하게 부패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왕을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 마지못해 왕이 다스리는 국가제도를 허락하셨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 8:5)”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정을 허락하시듯 즐거운 마음으로 국가 제도를 주셨나? 그렇지 않다.

가정이 타락을 경험하여 그 보완책으로 교회를 주셨는데, 이제 세상은 더욱 부패하여 국가 제도에까지 손을 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왕은 거의 하나님 같은 권세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왕이 다스리는 국가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그만큼 왕에게 막강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왕에게 맡기신 막강한 권한은 가정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위임해 준 것이다. 하지만, 가정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에서 보듯, 왕 역시 그 권력으로 억압과 착취를 행하며 타락과 부패에 빠질 위험성은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왕이 가정과 교회를 다스릴 때,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히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삼상 8:9)”

왕은 가정의 재산과 아들, 딸을 마음껏 쓸 수 있다. 가정은 국가 권력을 위해 소모품처럼 쓰이기 위해 해체될 수 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1~20)”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제사장의 독립적인 권한을 분명히 하지만, 아무래도 왕과 대립하기 어려워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삼상 22:18~19)”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왕이 될 자에 대해서도 주의사항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것을 이미 아셨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주의해야 할 점을 말씀하셨다.

왕은 반드시 유대인 형제 중에서 나와야 한다.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친족 가운데 왕이 나와야 폭압과 전횡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기 때문이다. 또한 왕이 된 자는 왕비를 여럿 두지 말고, 말이나 시종을 많이 두지 말고, 세금을 많이 거두면 안된다. 이는 가정의 분열을 막고, 가정이 연합하여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당부이다.

“…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4~17)”

하지만, 사울 왕은 실패했고,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을 할 수 없었고, 솔로몬 왕은 모세를 통해 주신 왕의 주의 사항을 어겼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 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0:14~11:3)”





4월 2일(수) 사무엘상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천천 만만(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But the servants of Achish said to him, "Isn't this David, the king of the land? Isn't he the one they sing about in their dances: " '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 his tens of thousands'?"

천천만만(thousands & tens of thousands)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요인들이 성에서 나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며 환영했습니다(18:7b).

이때 사울은 몹시 불쾌하고 심히 노하여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며 다윗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튿날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여 기회를 엿보아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면 그 마음에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몸 안의 독소를 키우는 것은 화(火)

정신의학자 엘미게이스가 감정 분석 실험 중 새롭게 발견한 이론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결을 시험관에 넣고 냉각하면 색이 있는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전물은 감정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화를 내고 있으면 밤색,
고통과 슬픔을 느낄 때는 회색,
후회의 말을 내뱉을 때는 복숭아색을 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색으로 변한 침전물을 모아 실험용 흰쥐에게 주사하면  짧은 시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화를 낼 때 우리 몸 내부에 엄청난 독소를 뿜어내고 이 독소는 의학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무서운 독극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분노는  상당히 격렬한 감정이라서 화를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에 독소가 쌓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독소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
- 로버트 그린 –

화 잘 내는 사람의 특징

화를 많이 내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실제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화가 많이 납니다.

너, 나 무시해? 너, 나 지금 우습게 보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자기가 무시 받는다고 느끼죠.

​둘째, 자신의 컴플렉스나 과거의 상처에 자극 받았을 때 방어기제가 발동합니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몹시 화를 낼 때 똑같이 화 내지 말고 생각해 주세요.
아, 저 사람 컴플렉스가 있나 봐, 내가 그걸 잠깐 자극했나 봐, 라고요. 그러면 측은지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세째, 상대에게 지나치게 큰 기대를 했을 때도 우린 화가 납니다.

내 기대보다 상대가 나를 너무 작게 여기는데 화가 날 수밖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화가 나면 아,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해서 화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하세요.
그럼 나를 좀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네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짜증을 남에게 해소하는 경우.

이게 사실 가장 나쁜 경우죠.
타인을 내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니까요.

이것도 철저히 그 사람 자체의 문제인 거지, 옆에 있는 우리의 잘못은 아닙니다.

​다섯째, 누가 나에게 욱하고 자주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이 문장을 떠올려 주세요.

자기의 간절한 요구를 알아달라는 호소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구나아, ,
그래서 화로 표출하고 있구나, 표현력이 너무 없구나…,


이런 불쌍한 마음을 가져 보시면 그와 싸우는 걸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화 내는 사람과 똑같아지지 않기 위해 고수들의 화내는 기술을 배워볼까요?
화를 무조건 참는 건 좋지 않습니다.
화를 너무 참으면 화병이 생기니까요.

​미국 정신과 의사 협회에서 나온 의학 사전을 읽다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요.
병명 중에 한국어 발음 그대로 화병(Hwa- byung)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화를 참지 못하는 분노증후군으로서 유독 한국인에게 많이 발견된다'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그럼 우리 한국사람이 유독 성질이 더러워서 그러는 걸까요?
아니에요. 전 마음이 아팠어요.
화병은 화를 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너무 참아서 생긴 겁니다.
어릴 때부터 내 감정을 억누르고, 삭이고 참을 때 어른들이 잘한다 그랬잖아요.

​우리의 감정은, 특히 부정적 감정은 반드시 비워내지 않으면 속에서 곪다가 터지게 돼 있어요.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누군가가 어느 날 '농담의 좁쌀' 하나만 탁 떨어뜨려도 폭발하고 말죠.
그럼 그날 그 사람이 다 덮어쓰는 거예요. 난 별 말 않고 농담 한 마디 했는데요….

평소에 쌓고, 쌓고, 쌓아서 폭발할 지경까지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뒀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비우는 연습을 잘 해야 해요. 화를 참지 말고 잘 내야 하는 거예요. 그럼 화를 어떻게 내느냐가 중요하겠죠?

첫째, 누군가 나에게 욱하면서 화 낼 때 가장 좋은 대응책은 '무시하기'입니다.

아까 말했던 다섯 가지 특징을 떠올리는 거예요. 아, 이 사람 자기 컴플렉스에 자극 받았구나, 아, 저 사람은 소망을 말하고 싶은데 표현 방법을 몰라서 저렇게 화 내는 방법을 택했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좀 대응하기가 쉬워지죠.

두 번째는 6초 호흡법이에요.

이건 정말 도움이 됩니다
. 누군가 말로 자극해서 욱하고 화가 날 때, 우리의 편도체는 3초만에 동물적인 반응을 한다고 해요. 그 3초가 지나버리도록 코로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셔 보세요. 그러고나서 입으로 후, 하고 3초동안 천천히 숨을 내뱉는 거죠.

그러면 우리의 편도체가 동물적인 반응을 하려는, 화가 마구 올라오려는 3초라는 시간을 이성적인 우리의 뇌로 얼른 보내버릴 수 있답니다. 화나는 감정을 이성적인 뇌하수체로 보내버리는 거죠. 그런 다음, 침착하게 심장과 허파가 조율되면서 이성적인 대응을 할 수 있게 되고요.

누군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즉각 화 내지 말고 코로 3초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3초 내뱉고…, 아셨죠? 또 하나, 화가 날 때 내가 화를 내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화를 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답니다. 더 큰 싸움이 될 뿐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예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쟤 오늘 딴 데서 기분 나빴나 보다, 그 화풀이를 나한테 하네,이렇게 측은지심을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분,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 마음도 조율하기가 힘든데 상대를 바꾸는 게 쉬울까요? 정말 어렵습니다. '너 때문에 화가 나' 라고 생각 말고, '화는 나지만 내 감정의 주인인 내가 내 감정을 조율할 거야',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곱씹으며 괴로워하지 말고 용기내서 내 감정을 말하는 거예요. 참는다고 착하게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보살피려면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잘 비워내기 위한 용기를 내야 해요. 솔직하되 친절하게 전달하면 되는 겁니다.

직장에서 선배가 '보고서 이렇게밖에 못 써?' 라고 말할 경우, 굉장히 기분이 나쁘죠? 그럴 땐 6초 호흡을 한 뒤에 말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이 저를 비난하시는 것 같아서 아까는 너무 속상했어요. 하지만 계속 다시 썼더니 제 실력이 늘고 있더라고요. 아까는 비난처럼 들려서 잠깐 속상했는데 다음엔 조금 더 좋게 말씀해 주실래요? 그래도 제가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선배님 덕분에 성장할 수 있게 돼서 고맙습니다.' 이렇게요.

이게 뭐냐면요,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할 말은 참지 말고 꼭 하되 어떤 방식으로 말하자고요? 소망으로 말하고 친절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비난의 형식을 취해서 말했는데 상대는 웃으면서 나한테 친절하게 반응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보통 아니네. 한 수 위네' 이럴걸요?" ♠


화를 습관적으로 잘 내는 사람들의 심리와 특징

주변에서 보면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갈 일을 굳이 소리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다양한 심리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행동은 종종 감정적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기인합니다. 


1. 좌절감과 통제 욕구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좌절감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는 특히 일상에서 작은 일에도 큰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주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하며, 다른 사람들이나 외부 상황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면 쉽게 좌절하고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화를 내며, 이를 통해 상황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시도합니다. 주된 내면은 들여다보면 아래의 3번에서 소개하지만 '불안'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유심히 보시면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1-1. 통제 욕구와 개인 관계

이러한 통제 욕구는 개인 관계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자신이 기대한 방식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통제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장기적으로는 신뢰와 친밀감을 해칠 수 있습니다.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2. 감정 조절의 어려움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들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화가 나는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처리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감정의 폭발로 이어지며, 감정적으로 과도한 반응을 보이게 만듭니다.

2-1. 즉각적인 감정 반응

감정 조절이 어려운 사람들은 화가 날 때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상황을 분석하거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본능적으로 화를 내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2-2. 감정 조절 능력의 부족이 초래하는 문제

감정 조절이 부족한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자주 갈등을 겪습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며,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일과 가정, 대인 관계에서 큰 문제로 이어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 조절 훈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스트레스와 불안

스트레스불안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그로 인해 작은 자극에도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감정적으로 여유를 잃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게 됩니다.

3-1. 스트레스 관리의 중요성

스트레스를 적절히 관리하지 않으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쌓이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 그 사람은 항상 긴장 상태에 있게 되며, 화가 나는 상황에서 더 쉽게 폭발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 관리 기술을 익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명상이나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휴식이 스트레스 감소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3-2. 불안과의 상관관계

불안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치는 요인입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이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안정감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이들의 화는 점점 더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4. 부정적 사고 패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종종 부정적인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부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실패해” 또는 “사람들이 나를 무시해”와 같은 부정적인 자기 대화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1. 왜곡된 인식의 영향

부정적 사고 패턴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며, 자신의 실패나 어려움에 대해 과도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쉽게 좌절하며, 그 좌절이 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4-2. 인지적 재구성의 필요성

부정적 사고 패턴을 바꾸는 것이 화를 줄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인지적 재구성을 통해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실패해”라는 생각 대신 “실패는 배움의 과정일 뿐”이라고 재해석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재구성 과정을 통해 화를 줄이고 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5. 자기 방어 기제로서의 화

자기 방어 기제로서 화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취약함이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화를 내며,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특히 강하게 반응합니다. 화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갈등과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5-1. 감정 억압과 화

이러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그 대신 화로 그것을 표출합니다. 예를 들어, 슬픔이나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화로 나타내어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이는 감정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5-2. 방어 기제의 건강한 대체 방법

건강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대화나 상담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6.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과거의 상처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더 강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작은 자극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6-1. 어린 시절의 경험과 화

어린 시절에 경험한 무력감이나 상처가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거나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때의 감정이 남아 현재의 대인 관계에서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감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의 반응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6-2. 트라우마 치료와 감정 표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현재의 감정 조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심리 치료상담을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처리하고,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함으로써, 더 건강한 방식으로 화를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7. 자존감 문제

마지막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과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쉽게 화를 냅니다.

7-1. 낮은 자존감이 미치는 영향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이를 보상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비판한다고 느낄 때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며, 화를 통해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 굉장히 무시를 당하거나 차별을 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내면화 되며 우울감으로 가거나 반대로 분노가 폭발하 역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7-2.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화를 줄이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성취를 돌아보거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마음공부를 통해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훈련이 필요하고,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긍정적인 자기해석이 필요합니다.

결론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의 심리적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감정적 반응을 더 잘 다루는 데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좌절감, 감정 조절의 어려움, 스트레스와 불안, 부정적 사고 패턴, 자기 방어 기제, 과거의 상처, 자존감 문제 등 다양한 요소가 이러한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심리적 원인을 바탕으로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고 연습함으로써, 화를 더 효과적으로 조절하고 건강한 대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만 있다는 정신적 질환의 하나 - 화병(火病) Hwa Byung

건강 / 몸이 아프면 열이 나고, 마음이 아프면 화가 난다.

1. 몸의 건강 : 운동, 보약, 취미 활동.....

(예) 몸의 건강을 체크 열(熱)이 있나 확인하는 것

2. 마음의 건강 :

(예) 마음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을 때 - 열불, 화, 우울,
       - 화가 났을 때 하는 행동이 부정적인 것이므로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 / 과격한 언어,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경우,
      -  화를 쌓았다가 터트리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므로 화가 날 때마다 화를 해결해야 한다.
      -  화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 된다. 
      -  마음에 불이 생기는 것 <화가 난다> 속이 타들어간다!

     *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 염(炎) 불꽃 염 - 담(談) / 화가 났을 때는 말로 풀어야 한다. 말로 해라! 왜 답답하게 말을 하지 않는가?
                              - 상담(相談) / 화가난 것을 서로 말로 풀어주는 것
                              - 염장(炎瘴)을 지른다!

단어·성어 뜻풀이 부수·모양자 학습정보

보통 크게 가장 크게
炎瘴(염장) 불꽃 염, 장기 장
  • 더운 지방(地方)의 개펄에서 나는 독한 기운(氣運).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예수


    기묘자, 모사(謀士) / 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보혜사(保惠師) / 파라클래토스(파라 + 칼래오)

삭개오(누가복음 19:2. 5. 8) - 사회적 지위(세리장), 부자, 왕따(삭개오야!, 이름을 불러주는 것)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불만인데 다른 사람이 옆에서 그 일에 대한 이야기로 화를 돋우는 경우를 말한다.
유사한 말로 "불난 집에 기름 뿌린다", "상처에 소금 뿌린다"가 있다.
주로 '염장질', '염장 지르다' 식으로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는 커플솔로에게 연애 관련 염장을 지르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
스킨십 같은 신체 접촉 외에도 깨가 쏟아지고 닭살이 돋는 서로 귀여운 척하는 염장질도 있다.
최근엔 SNS에서 서로를 태그하며 예의 닭살돋는 멘트를 치는 경우도 많다.

2. 어원[편집]

어원 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소금과 간장을 의미하는 '염장()'이란 단어에 뿌린다는 뜻을 가진 '지르다' 가 붙어 "생선이나 고기 등을 소금으로 절이는 행위" 를 의미하던 것이 죄인을 심문할 때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고문법으로서의 의미가 더해져 오늘날의 의미로 확대되었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염장이 "염통(심장)" 의 "염"에 내장을 의미하는 한자 '장()'이 합성되어 심장이라는 설이다. '지르다'는 팔다리나 막대기 따위로 대상을 때리거나 찌르는 행위[1]를 일컫는 의미이므로 결국 '염장 지르다'는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마음을 아프게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3. 반응



     *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것은 평소에 그 속에 화가 쌓인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화를 빨리 해결해주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관 속에 들어가도 막은 말라.
말이
많다는 것을 경계하고 아끼라.
개 풀뜯어 먹는 소리를 한다.
이치에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
거짓말이 외삼촌보다 낫다.
거짓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처세에 이롭다.
남에게 해를 입히려고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 남보다 먼저 해를 입게 된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
말을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


[말 속담] 말(言)에 관한 속담

말에 관한 속담 모음

말에 관한 속담

1.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남에게 말이나 행동을 좋게 해야 남도 자기에게 좋게 한다.)

2.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길어지면 시비,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비슷한 말이라도 말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4. 개입에서 개말 나온다.

(나쁜 사람 입에서는 좋은 말이 나올 수 없다.)

5. 계집의 말은 오뉴월 서리가 싸다.

(여자가 독하게 내뱉는 말은 매섭다.)

6. 광부의 말도 성인이 가려 쓴다.

(어떤 사람이라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7. 글 속에도 글 있고, 말 속에도 말 있다.

(말이나 글에 담겨 있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8. 길이 아니거든 가지 말고 말이 아니거든 듣지 마라.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잘못된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마라.)

9. 남의 말 다 들으면 목에 칼 벗을 날 없다.

(남의 말을 다 듣지 말고 필요한 말만 가려 들어라.)

10.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말 속담 1

11.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은 언제든지 새어 나갈 수 있으니 항상 말조심하라.)

12. 내 말은 남이 하고 남 말은 내가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13. 내 할 말을 사돈이 한다.

(내가 해야 할 말을 남이 한다.)

14. 눈 먼 장님은 서울을 가도 말 못하는 벙어리는 서울 못 간다.

(안 보이는 것이 말을 못하는 것보다 낫다.)

15. 들은 말 들은 데 버리고 본 말 본 데 버려라.

(다른 사람의 삶을 화제거리로 삼지 마라.)

16. 말 귀에 염불

(계속 말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17. 말 뒤에 말이 있다.

(말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뜻이 담겨 있다.)

18. 말로는 못할 말이 없다.

(책임이나 행동이 필요없다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

19. 말로 온 공을 갚는다.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가린다.)

20. 말로 온 동네를 다 겪는다.

(말로만 남을 대접하는 척한다.)

말 속담 2

21. 말로는 못할 말이 없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22. 말만 귀양 보낸다.

(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없어서 소용이 없다.)

23.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가린다.

(말을 잘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

24.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잔말이 많아지면 집안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25. 말 속에 뜻이 있고 뼈가 있다.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26. 말 속에 말 들었다.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27. 말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속 시원하게 말을 하라.)

28. 말은 바른대로 하고 큰 고기는 내 앞에 놓아라.

(속일 생각을 하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놓아라.)

29. 말은 적을수록 좋다.

(말이 많으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어 결과가 좋지 않다.)

30. 말은 청산유수다.

(막힘없이 말을 잘한다.)

말 속담 3

31. 말은 할 탓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것에 달렸다.)

32.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

(필요한 말은 마땅히 해야 한다.)

33.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질수록 쓸 말이 없어진다.)

34. 말이 말을 만든다.

(여러 사람을 거치며 말의 내용이 과장되거나 바뀐다.)

35. 말이 말을 물다.

(말이 연이어 계속 퍼져 나간다.)

36. 말이 씨가 된다.

(무심코 한 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37. 말이 앞서지 일이 앞서는 사람 본 일 없다.

(말만 하기보다 실천을 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38.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을 잘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

39.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린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다.)

40. 머리는 끝부터 가르고 말은 밑부터 한다.

(말을 할 때는 처음부터 요령 있게 하라.)

말 속담 4

41.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소문은 빨리 퍼지므로 말조심하라.)

42. 부모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43.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말조심하라.)

44. 성인도 하루에 죽을 말을 세 번 한다.

(훌륭한 사람도 실수할 수 있다.)

45. 숨은 내쉬고 말은 내 하지 말라.

(말을 할 때는 함부로 내 뱉지 말고 신중히 하라.)

46. 실없는 말이 송사 간다.

(무심코 한 말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부를 수 있다.)

47.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

48. 아이 말 듣고 배 딴다.

(무지한 사람의 말만 듣고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다.)

49.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어른이 하라는 대로 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50. 어린아이 말도 귀담아 들어라.

(어린아이의 말도 쓸모가 있을 수 있다.)

말 속담 5

51. 온 몸이 입이라도 말 못하겠다.

(잘못한 것이 명백하여 변명할 수 없다.)

52. 웃으라고 한 말에 초상난다.

(심한 농담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53. 음식은 갈수록 줄고 말은 갈수록 는다.

(말은 갈수록 사람들이 보태면서 과장되기 마련이다.)

54. 많이 아는 사람은 말이 적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아는 척하지 않는다.)

55. 일 잘하는 아들 낳지 말고 말 잘하는 아들 낳아라.

(말을 잘하면 세상을 사는데 유리하다.)

56.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상황이 좋지 않아도 진실을 밝혀라.)

57.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잘못이 확실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다.)

58. 입이 열둘이라도 말 못한다.

(잘못이 확실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다.)

59. 제 처 말 안 듣는 사람 없다.

(아내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60.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변명이 있다.)

말 속담 6

61. 콩밭에 소 풀어 놓고도 할 말이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62. 한 입으로 두 말하기

(한 가지 일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한다.)

63. 한편 말만 듣고 송사 못한다.

(한쪽 말만 들어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64. 혀 밑에 죽을 말 있다.

(말을 잘못하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65. 혀 아래 도끼 들었다.

(말을 잘못하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66.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자리에 없다고 해서 함부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면 안 된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1-30)

사무엘상 18장 설교말씀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말하면서 백성이 다윗을 칭송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백성이 다윗을 사울보다 칭찬했습니다.
사울왕은 이런 다윗에게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이 원해서 세운 왕이기에 시기가 많습니다.
자기보다 칭찬을 받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원해서 세운 왕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1-3)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다.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의 백성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고 싸움에 나아가 원수 골리앗을 쳐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요나단은 자기가 하지 못하던 그 일을 다윗이 해 주었으니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존귀히 여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다윗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패하고 모두 블레셋 사람의 종이 될 뻔하였다.
요나단은 모든 것을 바로 보고 판단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워 준 다윗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자기의 생명과 같이 귀히 여기고 사랑한 것이다.

다윗이 군장이 됨(4-5)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과 같이 사랑하므로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수가 다 빼앗아 갈 뻔하였는데 다윗으로 인하여 빼앗기지 않았으니 다윗에게 그것들을 다 준다고 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건져 준 까닭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여 자기의 겉옷, 군복, 칼, 활, 띠를 다 벗어 다윗에게 주었다.

새 것으로 만들어 주어도 될 것인데 왜 자기의 것을 주었을까?
요나단이 자기의 군복, 칼, 활, 띠를 벗어서 다윗에게 준 것은 자기의 지위와 직무를 다윗에게 물려주는 의미가 있다.
다윗이 나타나기 전에는 요나단이 사울왕 다음의 지위를 가졌었다.
이스라엘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서 한 군대는 사울이 거느렸고 한 군대는 요나단이 거느렸었다(13:2).

요나단은 실제로 군대 장관으로 큰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다(14:1-15).
요나단이 지금 왕의 다음 가는 자리에 있고 자기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가 왕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귀중한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한 것은 요나단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자기의 지위나 영광보다 이스라엘 나라가 잘되기만 바라고 자기가 하는 것보다 다윗이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면 아까운 생각 없이 자기 자리를 다윗에게 물려주려는 신앙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번에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이 자기보다 유능한 것을 확실히 깨달은 요나단은 자기의 지위, 직무, 권한을 다윗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양심적이고 원리 원칙에 맞는 일이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능력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자기의 명예와 유익을 위하여 기어코 자기가 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나라는 잘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세와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남을 비방하며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여러 가지 죄악이 판을 친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일이야 잘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
자기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높은 직분을 맡겠다고 하며,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이 나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맡아 가지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앉아 있으려고 하므로 정작 일을 할 사람이 일을 못하고 전체(국가, 교회, 단체)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자기보다 나은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에게 자기의 자리를 내어 주는 요나단의 행동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하다.
다윗이 맡아서 하나님의 일만 잘되면 자기도 축복에 참여할 줄 아는 요나단이야말로 참으로 지혜 있는 자요 참으로 자기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요나단의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자기 개인보다 전체를 위하는 마음, 자기의 권세나 명예, 영광보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열매인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지혜롭게 행동하고 믿음으로 하므로 모든 것이 성공되어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되었고 사울은 이러한 다원에게 귀한 직분(군대의 장)을 맡겼다.
온 백성과 신하들도 그것을 합당하게 생각하였다. 사울이 다윗에게 요직(要職)을 맡긴 것은 잘한 일이다.
사울왕이 끝까지 다윗을 잘 사용했다면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나 사울 자신을 위하여 크게 유익했을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6-19)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 각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환영하며 기뻐서 춤도 추고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하였다.
여인들의 노래 내용이 좋지 않았다.
똑같이 “만만이로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사울은 천천이라고 하여 사울을 시험에 들게 하였다.
자기에게는 천천을,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니까 사울왕이 온 백성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나라가 다윗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시험에 든 것이다.

여인들이 너무 경솔하게 노래를 하였다.
마음속으로는 다윗을 사울보다 더 좋게 여길지라도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
또 아무리 다윗의 공로가 크지만 왕보다 더 높이는 것은 왕으로서 불쾌한 일이다.
여자들이 경솔하여 왕과 다윗에게 큰 손해를 주었다.
여인들이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참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윗 위에 왕이 있으니 왕을 존경하고 나서 다윗을 존경해야 한다.

누가 무엇 하나 잘해 놓으면 다른 사람이 시기 할만큼 칭찬하고 높여 주는 것은 도리어 시험거리가 된다.
사람을 자주 칭찬하고 높여 주면 그것이 마귀의 역사인 줄 알아야 한다(눅 6:26).
가정에서도 아이가 둘이 있다면 둘 다 잘한다고 해야지 한 아이만 잘한다고 하면, 한 아이는 마귀의 시험에 들어 마음속에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시기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큰 죄를 짓게 될 수 있다.

• 18:10-11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성경에서 천사가 '만만이요 천천'의 의미는? -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그 보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kjv)(개역)(계5;11)


사단의 지상군대(아마겟돈)

"기병대의 수는 이억이니 내가 그들의 숫자를 들었노라."(kjv)(계9;16)(이만만; 개역) 

예수님의 지상 재림시,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1;14)


“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kjv; 수백만, 수천만)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시68;17)(kjv;병거 이만,천사 수천)

 "내가 그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리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삼가 그리하지 말라. 나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네 형제들과 같은 동료 종이니,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는 예수의 증거가 예언의 영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계19;10)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들을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4)

저가 내게 말하가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된 종이니(KJV.  나도 선지자들인 네 형제들과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너희 동료 종이니 )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22;9)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으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또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34-36)

참조;

"그때 여인들이 뛰놀며 서로 화답하여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라.” 한지라."(kjv) (삼상18;7)(천천,만만;개역)

시종하는 자 천천(1,000,000명)이요,  시위하는 자 만만(1,00,000,000명)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음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렸다. 사울이 본격적으로 마귀에게 걸려들었다. 사울이 집 가운데서 날뛰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수금을 타는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지므로 다윗이 두 번 피하였다. 이것은 사울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으며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또 자기의 지위를 지키는데만 급급하고 그것만을 귀중히 여기므로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 번민하게 하고 야료하게(소리지르고 떠들게) 만든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볼 때 자꾸 미운 생각이 들고 마침내는 죽여야겠다고 결심하여 단창을 던진 것이다. 다윗을 자기보다 잘했다고 칭찬하더라도 그런 것에 마음 쓰지 말고 다윗을 잘 이용했더라면 이스라엘 나라가 잘될 것이고 사울에게도 아주 유익하였을 것인데 어리석게도 다윗을 이용하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다.

사울이 자기의 왕위를 빼앗길까 보아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사울이 왕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윗이 아무리 잘해도 자기에게 일생동안 수종만 들었을 것이고 또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여도 죽이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손해를 볼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사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였고, 하늘 나라(이스라엘)가 잘되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어떻게 해야 자기가 왕 노릇을 오래 하겠느냐에 목표를 두었다. 목표 설정을 잘못하였으므로 일은 비뚤어지게 되어 있다.

• 18:12-19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사울이 두려워하여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아서 멀리 보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 앞에 출입하며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족속이 다윗을 사랑하였다.

사울은 자기의 맏딸 메랍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어 왕에게 충성하게 하고 그 충성심을 이용하여 전쟁터에 내어 보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나 자기의 가문을 볼 때 왕의 사위가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여기에서도 다윗이 겸손하고 자신을 바로 보는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줌(20-30)

• 18:20-25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여차여차히 말하더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였고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그것을 말해 주었다. 사울은 그것을 좋게 여겨 다윗에게 미갈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것을 올무로 삼아 블레셋 사람과 싸우게 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다원을 죽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신하를 시켜 왕이 자기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니 왕의 사위가 되라고 다윗에게 권하게 하였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자기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겠느냐고 말하였다. 이에 사울 왕이 다시 신하를 시켜 왕은 아무 폐백도 원치 않으시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고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한 것이다.

• 18:26-27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겨 그 종자와 함께 나아가서 원수를 이백 명이나 죽여 양피를 베어 수(數)대로 왕에게 주니 왕은 자기 딸 미갈을 주어 다윗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일 동안에 전사할 줄 알았는데 이백 명이나 죽이고도 죽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딸을 주어 차차로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사울의 딸이 아주 불쌍하다. 사울이 자기 중심으로 나아가면서 자기 딸의 앞길도 생각하지 않고, 딸은 불행하게 되든 말든 자기의 목적만 달성하려고 하였다. 권력에 욕심이 끌리면 자기 자녀도 돌보지 않는 법이다. 자기 아들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 인류 역사에 많이 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은 부자간 부부간도 없다. 세상 권세는 이렇게 악하고 추잡한 것이다.

사울이 이렇게 악하고 더러운 죄악 가운데 빠졌으니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운 다윗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절대로 막지 못한다. 아무리 수단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하여도 막을 수가 없고 자기만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는 자는 다 이렇게 어리석은 가운데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협력하고 나아가는 자가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게 만들어야겠다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고, 자기중심에 빠져서 자기가 잘 되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울왕과 같이 비참한 가운데 빠진다. 성도는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게 하고 하나님의 의만 이루어 가려고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면 자기는 낮아져도, 멸시를 받아도, 환난과 궁핍을 당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요 복을 받는 길이다.

• 18:28-30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사울이 보고 알았으며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므로 사울의 인간적인 모든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이 더욱 다윗을 두려워하였고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면서 사울이 다윗의 대적이 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나오면 그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다윗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가기만 하였다.




여호와의 구원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사무엘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열왕기하 13:17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예레미야애가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4월 1일(화) 사무엘상 17-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All those gathered here will know that it is not by sword or spear that the LORD saves; for the battle is the LORD's, and he will give all of you into our hands."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the battle is the LORD's)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무저항 ․ 비폭력입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는 왜 이렇게 전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까지 말씀하시지 않느냐. 
신약과 구약은 다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느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이 하나님은 다르시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신 것이냐. 

우리는 어떤 것을 믿어야 되느냐. 
이것은 이 시대에 아주 신학적인 질문이고 제가 거기에 대한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다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단계적으로 계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 똑같은 수학이라도 초등학생을 위한 수학과 대학생을 위한 수학이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옛날에 초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하여 다 계시하실 수도 없었던 것이고 다 계시하실 필요도 없었던 것이고 또 다 계시하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같은 성품과 같은 의도와 같은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가장 최근의 명령이 그 이전의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면 가장 최근 것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장 최근이고 가장 최우선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의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최근의 계시요 가장 최종적인 계시요 예수님 이후에는 더 이상의 선지자나 더 이상의 계시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알 것은 구약성경은 여러모로 신약성경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됩니다. 구약에서의 가나안땅은 천국에 대한 모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저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라고 찬송을 부를 때 이스라엘 땅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찬송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기업이라 하면 영적인 것이고 또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고 성령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과 많은 말씀과 인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을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야 면장이라도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멸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바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야 신앙을 대적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답변을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지식이 넘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정보가 넘칩니다. 

그런데도 오로지 기독교인들만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은혜라는 명목으로 또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명목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이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91편에 ‘하나님이 천사로 너를 받쳐서 상하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백성을 넘어뜨리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귀보다도 더 성경을 잘 알아야 되고 성경의 신학적인 안목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성경을 그릇된 목적으로 왜곡된 목적으로 잘못 이용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있을 때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감사기도를 드렸지요. 
그것을 보고 어떤 지성인이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공격했습니다.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느냐.’ 
그 성경구절을 인용한 사람이 평소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한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성경구절은 인용한 목적은 자기가 평소에 골방에서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고 누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기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인기를 얻을까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누가 대한민국을 욕하고 대한민국을 흉보고 업신여길 때 당연히 우리 마음속에 울분을 느끼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왜 누가 기독교 신앙을 욕하고 교회를 흉볼 때 우리는 동일한 울분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왜 누가 신앙에 실족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또 죄를 짓고 또 멀어질 때 왜 우리가 마음속에 염려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속에 어떤 번민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내가 예수님 편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소속감과 충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믿던 사람이 실족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는 히브리백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충성이 있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충동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결국 나의 소속이 불확실한 것입니다. 

소속이 불확실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대한민국을 욕해도 우리가 울분을 느끼는데 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의로운 분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나는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할까?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서 화가 났기 때문에 나가서 싸운 것입니다. 
골리앗이 싸움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champion이라고 했는데 챔피언이라는 말이 원래는 싸움을 돋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니고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가 나와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군대여 너희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나와 싸우게 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도전에 응하지 않고 다 두려워하고 다 위축되고 다 숨기 바빴습니다. 
유일하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속에 울분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 할례 없는 자가 누구관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느냐’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과 마찬가지에요. 

골리앗이 물리적인 전쟁을 하기 이전에 심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위축시키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려고 할 때 먼저 우리의 신앙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우리 내면에 의심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축소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시험에 굴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이 넘어지고 마음속에 절망하고 이렇게 되면 결국은 마귀가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환란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이것은 그 아내의 입을 통하여 마귀가 욥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말대로 욥이 이 환란 중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다면 욥은 패배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물질적으로 사업적으로 건강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패배하는 것이 모든 패배의 근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패배하지 않았어요. 
우리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험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직접 나가서 물맷돌을 던져 이기기 이전에 먼저 자기의 마음의 차원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골리앗을 내게 넘겨주실 것이다. 

오늘 블레셋 군대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신 것을 온 땅이 알게 할 것이다.’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믿음으로 하면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면 안됩니다. 두려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흥분해서 움직인다든가 미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그러면 패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행할 때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입으로 그 믿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말에 당당히 맞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예절 또 겸손의 명분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우리를 낮추려고 합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잘 지내느냐’고 물어보면 ‘죽지 못해서 삽니다.’ 이러고 ‘장사는 잘됩니까.’ 그러면 ‘겨우 먹고 삽니다,’ 그러고. 그게 예절인줄 알아요. 그게 겸손인줄 알아요. 그러다보니까 우리의 입술로 믿음을 부정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두려움을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패배를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의심을 말합니다. 그래서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지기 전에 입으로 그의 믿음을 풀어놓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마음으로 믿지요. 그러나 입으로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오늘 하나님이 너를 나에게 넘겨주어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하여금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리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다윗은 싸움을 잘해서 영웅이 된 게 아니고 영적인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 신앙이 위축되고 다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을 잃어버린 그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이김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영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면 하소연하는 줄로 압니다. 넋두리 하는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풀어놓음으로써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할 수 있는 영력이 생기고 영감이 오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을 던져야죠.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은 물맷돌을 던져야 됩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사람이 그냥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만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둘 다 함께 역사합니다. 수소와 산소가 합해서 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의 믿음의 실천이 합해서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이 자기 할 일을 할 때 약속하신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요. 
물맷돌을 던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물맷돌을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유도무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스마트 무기입니다. 
사람이 던졌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유도해서 유일하게 노출된 부분이 골리앗의 이마에요. 
다윗이 십대 소년이었을 때 이와 같은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어른을 쓰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남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유대인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성직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버거운데 그러나 다윗은 당당하게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그렇게 됐어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블레셋도 블레셋 군대도 ‘와, 하나님이 저 소년과 함께 하는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구나!’ 온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나와 내 집뿐만이 아니고 온 땅이, 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던 자들마저도 과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쟁적승패재우야화화(战争的胜败在于耶和华)

战争的胜败在于耶和华。他必把你们交在我们手中!”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함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외치기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다가올 때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오는데, 이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고 했습니다(창 3:10).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인생의 “골리앗”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과거의 상처, 실패했던 경험이 “골리앗”이 되어서 다가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때 문제의 골리앗을 바라보지 말고, 골리앗보다 크신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외치는 다윗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면서도 하나님께 말씀하신 사무엘상 15장에서의 아말렉을 진멸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에 전쟁이 찾아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 군대가 대치하게 됩니다.
이 때에 골리앗이 나와서 조석으로 40일 간 싸움을 걸어옵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키가 여섯 규빗 한뼘 이라고 했는데 한 규빗이 약 45센치이므로 키가 약 2미터 90센치미터 정도 됩니다.

골리앗의 신장(키) - 6규빗 한 뼘 / 1규빗은 45cm
45 X 6 = 2m 90cm

또 사무엘상 17장 5~6절에 또 보면, 얼마나 이 골리앗 장군이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장군은 놋 투구를 썼고 물고기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무게가 오천 세겔 57킬로그램 정도 나갔으며 두 어깨에는 짧은 단창을 메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인이 40일 간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모욕하며 싸움을 청하니 어떻게 누가 나서겠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나가서 맞붙지를 못합니다.

영화 트로이나 그리스 로마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로 보듯이, 예전엔 각 군대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쓸데없는 희생을 막기 위해 싸워서 이긴 쪽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도 싸워서 이길 용기가 없었고 일대일로 싸워서 지게 되면 자기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군 전체가 지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 이새의 명령으로 소년 다윗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세 명의 형들을 면회 옵니다.
볶은 곡식과 떡 열 덩이 치즈 열 덩이를 가지고 와서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에 의분을 느끼고 사울에게로 가서 자신이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죽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는 골리앗이고, 골리앗은 갑옷과 놋 투구와 창과 단창과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가진 무기로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길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십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물매와 막대기와 지팡이를 지녔는데, 물매는 가죽천에 두 개의 줄을 연결해서 돌을 넣어서 빙글빙글 돌린 후에 한쪽 줄을 놓아서 짐승이나 적을 공격하는 무기였는데 다윗이 물맷돌 무기에 상당히 익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물맷돌 전담 병사가 있었는데 열 번 던지면 열 번을 모두 맞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막대기는 70센티 정도의 길이에 앞에 뾰족한 쇠붙이나 칼날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90센치 정도 길이에 앞부분이 둥글게 굽어서 양들이 웅덩이나 절벽에 떨어지면 털에 걸거나 목에 걸어서 구해내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당당히 말합니다. 45~47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지 그대로 나옵니다.

첫째, 그런데도 믿는 신앙(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골리앗의 몸이 크고 힘이 장사라고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나올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고 도저히 나아 보이지 않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믿음의 눈으로 보여주시는 그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넉넉히 이기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느냐의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즉 내가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이 결정됩니다. 골리앗이 너무 크기에 이길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향해 충고하였습니다. '골리앗은 너무 크고 강하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몸집이 너무 커서 돌팔매가 빗나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골리앗의 큰 몸집에 겁을 먹었지만 다윗은 큰 체구가 오히려 좋은 타겟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과연 다윗의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는 주의 이름을 앞세우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리하므로의 신앙
역경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위기이기도 했고 민족의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양칠 때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칼과 단창 앞에 어리디 어린 소년이 설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신뢰가 승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외치며 당당히 승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신뢰를 선택함이 곧 승리였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신뢰의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순간이라도 믿고 살아가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66권에 흐르는 모든 내용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라”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구약에도 신약에도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승리하였습니다.

우리도 수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다윗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당당히 이겨내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미래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
무엇이라고 다윗이 말하고 있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참으로 안좋은 상황입니다. 블레셋 군대는 아주 강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금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금 군사를 급히 모아서 이스라엘 군대들이 왔기는 했는데, 준비도 안되었고, 마음적으로도 당당히 준비가 잘되어 나온 블레셋군대가 두렵기만합니다. 전략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지게 되어있습니다. 40일동안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생긴 골리앗 장군을 통해서, 심리전을 벌이는데, 이런 식으로 했다가 싸움이라도 붙으면, 이스라엘 군대는 다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은 네가 조롱하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가 이긴다!”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48~49절에 보면,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했습니다. 돌이 이마에 박힌다는 것은 놋 투구를 벗었다는 이야기입니다. 40일 동안 한 번도 벗지 않았던 그 놋 투구를 하나님께서 벗기셨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물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의 머리를 깨는 것인데 투구를 쓰고 있다면 그것마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조금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골리앗의 투구를 머리에서 벗기신 것입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우리가 일을 계획하고 능력을 기르고 힘을 길러도 이기게 하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한 고난과 역경에서 “왜?”라고 묻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커다란 문제인, ”골리앗”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역경과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다윗과 같은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서 있는 무시무시한 골리앗과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고비고비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을 펼치셔서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때 크신 능력을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주 안에서 늘 승리하게 하옵시고,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큰 축복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역대하 20장은 모압, 암몬, 미온 사람들이(사해 남쪽에 위치한 '마안'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 '암몬인'이라고도 함.)
유다 왕 여호사밧을 치러할 때에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전 앞에서 온 백성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매우 즉각적인 기도 응답 내용이다.

여호사밧의 통치를 보면

1.  대하 17:3-4 그는 바알을 버리고 다윗왕처럼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왕이었다.
2.  왕상 22:43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3.  왕상 22:5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다.
4.  대하 17:7-9 방백과 레위인과 제사장을 유다 성읍에 보내어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의 승패는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 이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출애굽기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서서'는 '놓다', '두다', '확고하게 서다', '당당히 자리를 고수하다' 는 뜻이다.
즉, 상황이 위급하다고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라는 뜻이다.

'구원'은 '해방하다', '돕다', '승리하게 하다'는 뜻. 도움, 안전, 구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홍해에 섰을 때 앞에는 홍해 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뒤쫓아오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다.

10가지 재앙 앞에서 애굽과 싸우시는 모습을 본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뒤쫓아오는 애굽군대가 더 크게 보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은 원망과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외친다.

믿음의 확신에 찬 지도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을 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에 내미니 바다 가운데 육지가 생겨 이스라엘이 건너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투 자체보다는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신앙과 불신앙을 통한 일화 속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왕의 군대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온 다윗의 무기는 물매와 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다윗에겐 너무 무모한 싸움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데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승리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지도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모진 풍파와 거센 파도에 휩싸인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어떠한 위협도 하나님으로부터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며, 역사의 주역으로 자리 잡는다.

여호수아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기브온을 공격하는 아모리 동맹군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참전하게 되며 전쟁이 구체화된다.

8절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고 가라 하시고 그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을 보내신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큰 우박을 내려 그들을 죽이시니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많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니라' 하니 그대로 되었고 야살의 책(성경에 나오지 않는 성경 속 이야기)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 내려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확신에 서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싸우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확실한 기도의 응답에 감동되어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찬양하였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로 해결하여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선한 방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성도에게는 가장 하나님께 나아가는 값진 길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47절b,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본문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씀이다. 본문에 기록된 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뒤안길에는 하나님의 영적인 개입이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고 해석해야 한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싸우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와 ‘하나님이 싸우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워주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 하나님은 전쟁, 기근, 전염병을 이용해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셨다(출17장).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절)라고 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철기문명이 발달한 블레셋을 이길 수 없었다. 또한 블레셋은 훈련된 군사들이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승리하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이시다.

전쟁에서 무기가 전부가 아니다.

47절a,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 골리앗은 철저하게 무장하고 나아왔다. 그는 방패를 든 사람을 앞세우고 있었다(41절). 그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아왔다(45절). 그러나 다윗은 오직 막대기와 돌 다섯 개와 물매를 준비하고 여호와의 이름 곧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45절). 무기가 전부가 아니다.

*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33:3)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33:15)라고 간청하여 동행을 약속받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셔서 승리하였음을 선포하였다(수23:3).

* 아람의 왕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가 엘리사가 기거하고 있던 성읍을 에워쌌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 또한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쌌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왕하6장 참조).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맹을 맺으라.

45절b,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다윗은 갑옷도 입지 않았고 창이나 칼도 들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의 힘이었다. 사무엘이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신 이후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삼상16:13).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를 온전히 의지하고 나아갔다.

*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와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라는 언약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언약이나 동맹은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성립한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 동맹관계는 가치를 공유함으로 유지된다. 하나님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라고 하셨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온전히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공의와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적을 만든다.

49절,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골리앗을 대항했던 다윗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다윗이 물매로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추어 쓰러뜨렸다. 이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이었다. 다윗이 이런 큰일을 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적을 만들었다.

* 하나님은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치게 하셨다. 보리떡 한 덩어리와 같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장막을 무너뜨렸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도 훌륭하지만 그들을 사용하여 대군을 물리치신 하나님은 더욱 위대한 분이시다(삿7장 참조).

* 하나님과의 연합이 관건이다. 강한 경제력에 따른 튼튼한 국방력이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무기가 전부는 아니다. 나이 많은 갈렙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서 ‘헤브론’을 얻었다. 헤브론은 ‘연합’(헤베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갈렙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헤브론은 쟁취했던 것이다.

아셀트선교사 이야기

아셀트 선교사는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선교사를 잡아먹으려고 여러 번 밤마다 아셀트 선교사의 집을 침입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선교사 집의 대문 앞에는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수차례 목격한 후 식인종들은 이상히 여기며 낮에 선교사에게 찾아가 물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 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가 대답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었는데,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때 아셀트 선교사에게 번쩍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이런 오지에서 나를 지켜주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마가복음 3:13~15)

카자흐스탄은 우리 나라보다 큰 데 인구는 몇 백만에 불과하였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에서 50도까지 내려 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입니다.
그 벌판을 달릴 때 빨리 가려고 혼자 자동차를 몰아 달립니다. 
아직 미개발국이라 자동차 생산이 없습니다. 
모두 중고차입니다. 
만일 빨리 가려고 혼자 가다가 벌판에서 자동차가 고장나면 거의 다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가 겨울마다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멀리 가려면 두 세 대가 모여서 같이 가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썬 다씽 이야기입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어느 날 썬다씽은 전도하기 위허여 험악한 산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 넘어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썬다씽의 발걸음은 사명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때 산 길에서 마침 모르는 이를 만나 친구삼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의지가 되었습니다. 
가다보니 한 사람이 눈길을 걷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썬다씽이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업고 가십시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 몸 하나 가기도 힘든 데 이 사람을 업고 가다가는 같이 죽어요.> 
그리고 거절하였습니다. 
썬다씽은 그가 거절한다고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자 양심에 죽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같이 죽더라도 업고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등에 업었습니다.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온 몸에 진 땀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지쳐서 같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힌 사람은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였습니다. 
썬다쌍의 몸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다 쉬고, 쉬다가 갔습니다. 
드디어 등에 업히지 않고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한 사람이 길거리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치고 보니 빨리 가겠다며 혼자 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얼어 죽어 있어 있었습니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12 명 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12 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지 못 할 줄 아느냐?>
12영은 12만명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천사 군사도 동원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때 배가 없어도 건너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길리 바다를 걸서어 건너녔습니다. 
어느 관광객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요금을 물으니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관광객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걸어서 건너셨구나!>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없이도 하시고 싶으신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명 제자를 부르셔서 같이 일하셨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2.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3. 귀신을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12명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같이 일하자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우리끼리 같이 가라고 명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 같이 있어줄 테니 예수님과 같이 일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처음에 제자들은 둘씩 둘씩 짝지어 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후에는 12명 제자들이 모두 한 명씩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멀리 갔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을 염색하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 제목을 다시 외치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주님과 같이 가면 됩니다.

주님같이 가면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습니다.

1.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철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만들면 6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면 1톤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같이 끌면 5톤을 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을 쫓으면 두 사람이 같이 쫓으면 20명을 아니라 1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같이 걸으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들과 같이 일하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빨리 가려 하지 않으시고 멀리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2000년을 달려 왔습니다. 온 세계로 달려 갔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과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그 어느 누구와 같이 가는 것보다 큽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같이 있자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시너지 효과가 큽니다.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설교 도중 문뜩 떠올랐습니다.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아셀트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아셀트 선교사는 생명을 걸고 식인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는 말씀 하나 확실하게 믿고 선교에 임하였습니다.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밤마다 기웃거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창칼을 들고 무서운 눈초리로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곤 하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낮에는 없는 데 밤이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무누입니까?>
아셀트 선교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식인종들이 말했습니다.
<거짓말 마시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두 명이 본 적이 아닙니디. 우리가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지요. 그러나 무섭게 지키고 있는 그 때문에 접근하지 못 하고 돌아 
그 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 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같이 가십시오. 나는 설교 하러 강대상에 올라 올 때도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 같이 올라가시지요.>
TV 녹화를 할 때에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어 외칩니다. 
<주님 같이 녹화하시지요.> 지금 설교 준비하면서도 외칩니다.
<주님 옆에 같이 계셔 주세요.>

지난 주간 시카코 중북부 목사님 수련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정반대 시차였습니다. 그러나 가서 내리자 말자 첫 시간을 일도하고, 마지막 시간을 딸리 끈내고 비행기륽 탔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4일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주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1분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2. 같이 가면 격려가 됩니다.

홀로가다가 절망하면 누가 위로하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가다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줍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를 싸매 줍니다.
그렇기에 혼자가지 않고 같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신학교 동창 목사님 중에 한 명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 필리핀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뇨가 심하였던 친구인 데 혼자 가서 갑자기 저혈당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는 이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누가 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죽었습니다.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서 연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한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안 죽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중에 윤 용일이라는 친구가 카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배재 동창회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끈끈한 동문의식으로 늘 서로 도와주며 외국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친구 사업체에 불이 났습니다. 배재인들이 돈을 모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민생활이 끝난 줄로 알았는 데 동창들의 도움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런 동문들 은혜를 갚기 위하여서라도 죽을 힘을 다 하여 일 하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슈퍼를 개업하였는 데 얼마나 잘 되는 지 마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 들렀더니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가지고 가라”라고 시원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면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그리고 격려가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주님의 격려는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인생길읅 걸어가다 보면 정말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구애게 말할 수 없어서 혼자 고민할 때 나는 주님의 사진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을 물끄러미 쳐보 봅니다. 그리고 애절하게 불러 봅니다.
<주님!>
주님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대신 대답합니다.
<오냐!> 나는 또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종 강 문호 가 왔어요.>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면 좋은 데 아무 말 없으십니다. 내 입으로 내가 말합니다.
<그래. 왔구나! 너 무슨 문제로 고통당하는 지 내가 알지.> 그리고 내 입으로 주님이 해답을 막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가 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입술을 주장하여 주십니다. 놀라운 지혜가 나옵니다.. 주님의 격려가 나옵니다.
<강 문호야! 내가 세상을 이긴 것같이 너도 세상을 넉넉히 이실 수 있느니라.>
나는 이 글을 시카코에서 돌아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음성을 얼마나 세밀하게 들었는 지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강 문호야! 내가 네 진심을 알아. 내가 네 중심을 알아. 네가 얼마나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지 알고 있지. 전기 한 등을 얼마나 아끼고, 종이 하나 아끼려고 편지지 이면지까지 사용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갈보리 교회를 만명 교회로 이룰 려고 발버둥치는 네 심정을 내가 알지. 내가 같이 할 거야. 누가 몰라 주는 것같아도 알아 주는 이가 있단다.>
혼자 가면 빨리가요. 그러나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포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 시켰습니다. 세 가지 별명을 불렀습니다.
<촌놈! 가난뱅이, 땅딸보.>나폴레옹은 너무나 괴로워서 학교를 포기하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답장은 이런것이었습니다.
<내 아들 나폴레옹아! 비굴해지지 말아라. 좋은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한 적이 없다. 네게 무서운 적이 있다. 바로 허영과 사치다. 가장 귀한 친구는 독서다. 책을 읽거라. 나는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 너를 믿는다. 내가 함께 하마.>

나폴레옹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장군의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지금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에게 외치는 말씀을 나는 확싫히 들었습니다.
<가롭리 성도들아! 용기를 내라. 나와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어떤 문제에도 해답이 있다. 어떤 강에도 다리가 있다. 어떤 장글에도 길이 있다. 헤쳐 나가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3. 같이 가면 공격당하지도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같이 가면 격려가 되고 누가 감히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가끔 봅니다.
사슴은 연약합니다.
사슴과 호랑이가 싸우면 백번 싸워도 백번 다 사슴이 이깁니다. 
그런데 호랑이 사슴을 잡아 먹으려고 할 때 숲속에 숨어 한 마리를 노립니다. 
같이 있는 사슴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같이 있는 사슴에게 대들면 다른 사슴들이 한꺼번에 공격하면 아무리 호랑이라도 도망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마귀들이 공격하지 못 합니다. 

큰 구렁이가 병아리를 잡아 먹으려고 따라갑니다. 잡히면 한 입에 들어갑니다. 병아리라 도망치다가 엄마 품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구렁이는 감히 덤벼 들지 못 합니다. 어미 닭은 새끼를 보호하려고 생명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덤빕니다. 무섭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그 어떤 적도 벌벌 떨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떨어지면 사고가 납니다.
주님과 같이 걸어가는 길은 멀리 가는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한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여수행 기차를 탔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였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옆 노인에게 전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문을 연 후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 예수쟁이로구만. 내가 뭐가 답답해서 예수를 믿어>
그래도 전도를 게속하자 노인은 순찰중인 안내원을 불렀습니다.
<이봐요. 내 돈 내고 편히 가려고 일등칸에 탔는 데 이 예수쟁이가 날 보고 자꾸만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하니 더는 못 참겠소. 차비를 물어주든지 이 예수쟁이 입을 막아 주든지 하시오>
창피를 당한 목사님이 얼굴을 숙이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주를 사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미안했소. 소주나 한 잔씩 하며 이야기 하십시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할아버님. 그렇게 술만 좋아하시면 지옥 갑니다>
그러나 노인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흘렀습니다. 
얼마 전 호통을 치던 안내원이 목사님께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습니다.
<아까 그 노인을 아시나요?>
<아니요 모르는 분인데 그냥 전도를 했지요?>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술에 취해서 화장실로 갔어요. 승강구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고 하다가 비틀거리더니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십시오. 
그러나 멀리 가려면 우리 같이 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려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격려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 났던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네 명이 에레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서 그 속에서 67시간을 갖혀 있었습니다. 
4명은 잠바 두 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그래서 꼭 끼어 안고 잠바를 덮고 추위를 견디고 살았습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서로 어울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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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하나님과 큰 하나님

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하나님의 눈

고대 그리스에 키소이테스파라시우스라는 두 화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두 화가의 우열을 시험했다.
먼저 키소이테스가 포도 그림을 나무에 걸어놓았다.
그러자 새가 날아와 그것을 쪼았다.
다음은 파라시우스가 엷은 커튼 그림을 창문에 걸고 키소이테스를 초청했다.
진짜 커튼으로 안 키소이테스가 걷으려고 손을 댔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속인 파라시우스가 새의 눈을 속인 키소이테스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유명한 설교가인 존 허프먼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12년 동안 목회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목사직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실시하는 목사 연수 교육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존경하던 노교수 로버트 윌슨 박사를 만났습니다.

제자의 상담을 받은 노교수는 "자네는 12년간 작은 하나님을 믿었군. 큰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게."라고 충고을 했다고 합니다.
노교수의 표현인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와 "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란 나의 지식과 나의 요구에 하나님을 맞추어 하나님을 나 정도로 작게 만드는 신자입니다.
반면에 큰 하나님을 믿는 자란 하나님의 권능과 요구에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로 크게 만드는 신자입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은 민수기 13장에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스라엘과 여호수아 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을 돌던 이스라엘을 대조하여 볼 때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민수기 13장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 6장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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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성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하이든은 창세기와 죤 밀턴이 쓴 『실락원』을 근거로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곡을 작곡했습니다. 비엔나에서 『천지창조』 공연이 있던 날, 그는 갑자기 몸이 아파 객석에 앉아 자신의 곡이 연주되는 것을 구경해야 했습니다. 이윽고 곡이 연주되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올랐습니다. 마침내 곡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공연장을 뒤흔들었습니다. 이때 지휘자는 객석에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는 "저 분이 바로 이 위대한 곡을 작곡하신 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때 하이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당신의 초점은 당신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보다 지상에서 더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심보다 당신이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으로 신앙이 성장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돌린 그에게 한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할렐루야! 아멘'은 그냥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 쓴 감사의 편지화요일 / 시 92:1 / 찬송가 82장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결코 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 벳세다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렸던 한 소년' 이들은 평상시에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에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드린 것 뿐입니다. 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작은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껏 드린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려면...수요일 / 마 28:18-20 / 찬송가 337장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아셀트 선교사 집을 밤에 침입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에만 오면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고 또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도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는 퍼뜩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놀고 있을 때에는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피부로 느끼려면 당장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십시오. 베드로는 성령충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았지만 실은 그가 전도하였을 때에 자기의 손길로 기적이 일어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천사의 손길로 구출받게 되었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7-10절에서 종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자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목요일 / 시편 138:13 / 찬송가 40장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000억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신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그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000억×1,000억 개라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 하는 말은 얼마나 큰 거짓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찬송가 40장을 자기 신앙의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양수에 감싸여 있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충격이 와도 물이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태아를 보호하고 또 아이가 계속 성장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물속에 있어야 운동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열 달이 되면 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나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꼽을 통해서 먹고, 배꼽을 통해서 배설하고, 배꼽을 통해서 숨을 쉬던 수중 아기가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서 입으로 먹고, 코로 숨쉬고, 밑으로 배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어느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죠."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8:13)⊙ 이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섭리하심을 모른다고 하거나 부인한다면 그는 무엇인가 모자란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속에서 분명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셨고 오늘 날에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여러 가지 징조로 보이십니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내가 믿는 하나님금요일 / 민수기 13-14장 / 찬송가 382장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습니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기도하세요. 지금..."토요일 / 마 7:7-11 / 복음성가 "기도하세요 지금..."전기가 지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와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어둠은 물러가지 않고 불빛은 밝혀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이와같이 항상 우리의 생활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은 막이 생겨서 어려운 현실에 접하게 됩니다. 만일 어두운 방에 앉아서 스위치를 누를 생각을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하고, 나에게만 이 어두움이 유독히 기습한다고 실의에 빠져 남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얼마나 우매한 일이 되겠습니까?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미쳤고 스위치만 누르면 빛이 방안에 가득히 비치도록 구조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운명으로 체념해버리는 것은 그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전기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지금도 풍성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영향력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기도'라고 하는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문을 열게 되고,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이끌어 오게 되며,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소관으로 넘겨드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우리 생활 속에 광명이 있게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그냥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9-11절을 더 말씀하신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구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답답해 하시면서, 예수님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식인종에게 복음을 전하던 아셀트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식인종들이 아셀트를 잡아먹으려고 밤에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 밤에는 그 사람이 칼을 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식인종들은 무서워 떨다가 가고, 다음에도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밤이면 누군가 칼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아셀트 선교사가 대답합니다. 우리 집에 나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식인종들은 ”아니다 우리가 너를 잡으려고 여러 번 왔는데 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분명히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불신앙을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회개하였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일하시니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님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20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님들아 내 말을 들을 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자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찬송할 자들을 택하여 찬송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찬송을 들으시고 복병을 세워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쳐 패하게 하시며 또한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찬송할 때에 암몬과 모압이 합세하여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기드온의 300용사를 볼찌라도 미디안을 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수를 다 걸러내고 300명을 통하여 전쟁을 하게 만드십니다.

삿7:16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하니라

22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답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여 그들을 쳐부셔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미디안을 칠 때 많은 수를 원치 안으시고 개같은 기드온 용사 300명으로 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 준 갑옷을 벗어버리고 삼상17:40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43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본문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우리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b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耶和華卻對撒母耳說、不要看他的外貌和他身材高大、我不揀選他、因為耶和華不像人看人、人是看外貌、耶和華是看內心。



인시간외모(人是看外貌)
야화화시간내심(耶和華是看內心)


3월 31일(월) 사무엘상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구원(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Jonathan said to his young armor-bearer, "Come, let's go over to the outpost of those uncircumcised fellows. Perhaps the LORD will act in our behalf. Nothing can hinder the LORD from saving, whether by many or by few."

새한글 / 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들고 따르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자, 할례받지 않은 이 사람들의 초소로 건너가자. 아마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나서 주실 거야. 그 어떤 것도 여호와를 막을 수 없어. 병사의 수가 많든 적든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여호와의 구원(Jehovah's Salvation)

인위무논인다인소(因为无论人多人少)
인할 인(因), 할 위(爲), 없을 무(無),  논의할 논(論), 사람 인(人), 많을 다(多), 적을 소(少)
인위무논인다인소(因爲無論人多人少)

십요야불능조애야화화증구(什么也不能阻碍耶和华施行拯救)

什幺也不能阻碍也화화증구
열사람 십, 작을 요, 어조사 야, 아닐 부,  능할 능, 험할 조, 거리낄 애, 어조사 야, 빛날 화, 꽃 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서로 진을 치고 대적하고 있을 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의 부하에게 우리가 블레셋으로 건너가자고 하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며 만일 블레셋 사람이 우리가 너희에게 가기를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것이며 만일 브레셋 우리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브레셋 사람이 요나단에게 올라오라고 하므로 요나단과 그의 부하는 반나절 동안 20여명을 죽였습니다.
배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이 블레셋 진영을 살펴본즉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흩어지는 것을 보고 군사를 점고한 즉 요나단과 그의 부하가 나갔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으로 총공격을 시도하여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요나단의 용기에 의해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면 요나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블레셋과 싸우기 위하여 나서지 않았을 때 요나다는 당당하게 그의 부하와 함께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쪽 베냐민 게바 : 블레셋은 북쪽 믹마스


이스라엘과 블레셋 군대가 서로 대치했던 상황에서 펼쳐진 사건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쪽 베냐민 게바에 진치고 있었고, 블레셋 군사들은 북쪽 믹마스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한데 블레셋의 군사력은 병거가 삼만 명이었고, 마병이 육천 명이었으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처음에 3,000명의 결사대가 모였지만, 그나마 다 도망가고, 600명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36,000명대 600명, 6대 1의 상황입니다.
이보다도 한심 한 것은, 그 6백 명 중에 칼이나 창을 가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이나 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가 말도 안되는 싸움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모두가 죽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어지십니까?
마치 중학생 한명이 맨손으로, 칼을 든 조직폭력배 6명과 싸워 이긴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면,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요나단의 고백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어 10절과, 1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신고로-, 하나님께서 매사 간섭하시고, 마침내 승리케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느냐?’ 에 따라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절망이 오고,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우리들도 능히 승리하게 되고,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까지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기적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원동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누구이며,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의 주역(主役) 임금 주(主), 부역 역, 부릴 역(役) - 주된 역할

믿음의 주인공(主人公)
임금 주(主), 사람 인(人), 공평할 공(公) - 중심이 되는 인물

요나단(Jonathan) / 요나단((Jonathan) - 여호와가 주심

사울왕은 수만의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오고,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기가 드렸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는 자기를 떠났고, 남은 군사는 600명이고, 무기는 두개뿐인 상태였습니다.
그냥 블레셋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 분연히 일어난 것입니다.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본문 6절이하를 보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하며, 함께 적진으로 공격하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단 둘이서 블레셋 군대의 진영을 몰래 습격을 해서, 적진을 혼돈에 빠트리게 하였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용기를 얻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요나단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시고, 승리케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단은 주위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왕은 36,000명이라는 대군의 블레셋을 보았다가 실패하였지만-, 지금 요나단은 사람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을 하시면, 단 두 명만으로도 능히 그들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요나단이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환경은 어떠합니까? 마치 블레셋 대군에게 둘려 싸인 것같이, 답답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까? 자녀문제, 남편문제, 결혼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여러분을 둘러싸여, 숨도 쉴 수없을 정도에 처해 있습니까? 이때, 요나단의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요나단은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눈이 없어서 못 본 것이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그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 하나님만을 의지

두 번째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게 붙이셨음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몰래 자기 병기든 소년과 둘이서, 적진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원래 기습공격이란 상대방이 모르도록, 몰래 숨어서 가는 법인데, 요나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11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면서, 정면으로 쳐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은 무식한 방법이요, 미친 사람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그들을 붙이셨음을 믿고, 담대히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상황과 같은 일을 요즘 저희가 하고 있습니다. 조전도사와 함께 새 성전 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여력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었기에, 믿음으로 성전자리를 보려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성도 20명인데, 6-70평 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전할 비용이 없는데도, 이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600명밖에 없는 초라한 형편이요, 상대방은 36,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적군이 버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고-, 환경을 보지 않고, 나아갔듯이-, 저희들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분명히 6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신 것처럼-, 우리 제자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대로 되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고, 교회를 위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협력자(協力者)

병기든 소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말하자, 이 소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7절에,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하였습니다. 36,000명의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 왔기에, 3,000명이나 있던 군사들이 다 도망가고, 겨우 600명만이 남아 있는 형편입니다. 그나마도 그들과 맞서 싸울 무기도 없어, 저들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기껏 한다는 짓이-, 어린 소년에게 단 둘이서 수만의 대군이 있는 적진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철부지 같은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 어이없는 제안에 놀랍게도, 이 소년은 순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단의 말이 끝나자, 병기든 자가 요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병기든 소년은 요나단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행하소서. 내가 따르니이다”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대한 조력자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에서 병기든 소년의 후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에게는 600명의 군사보다-, 이 한사람의 협조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특정인 한사람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아론과 홀이 있었기에-,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도 디모데와 바나바와 실라, 브리스길라, 아굴라같은 동역자가 있었기에-, 로마를 비롯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날 성원해준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세상 살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됩니다. 요즘 교회 개척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성공률이 1%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제자교회가 세워지고, 날로 든든히 되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 혼자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목회자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목회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병기든 소년이, “당신의 마음대로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니이다” 하였던 것처럼-, 지금껏 여러분이 이 소년이 고백한 대로, 목회자를 믿어주고, 따라와 주고, 같이 협력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헌신 하였듯이-, 앞으로도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주의 종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훌륭한 동역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비젼을 가지고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요나단은 자기의 계획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 알리지 않았고, 최후까지 남은 6백 명의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울에게 말했으면,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백성들도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 무모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요나단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을 것입니다. 단 둘이 가서는 안되고, 600명을 2편으로 나눠서, 어쩌니 저쩌니, 군사전략을 짜라고,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그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버지에게도 자기의 비젼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은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니, 안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이전도 그러합니다. 앞으로 선교센터를 건축하고, 세계선교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일을 행하시면-, 능치 못한 것이 없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서산에 충성교회라고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교회라, 우리교회가 후원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월세는 고사하고, 교회 보증금도 낼 수 없는 형편이라 무대뽀로 눌러있는 형편이었는데,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면, 이 목사님이 매일 근처 산에 가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교회이전과 부흥을 위해서 말입니다. 산 속에 아예 정자를 만들어 놓고, 힘써 기도한지 만 1년이 되자-, 교회가 그냥 공짜로 생긴 것입니다. 그 산 속의 교회 겸 기도원 하는 목사님이, 이 목사님이 매일같이 와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 교회를 이 목사님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돈 한푼 받지 않고, 그냥 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어찌 이 기적이 이 충성교회에만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우리 제자교회에도 일어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려면,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으려면,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나하나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교회 크게 잘 짓고 많은 성도가 있는 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물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비젼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위대한 동역자가 되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고, 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최후까지 남은 6백 명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훌륭한 사람들은 요나단과 또한 그와 함께 하였던 무기를 든 소년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제 2의 요나단과 병기를 든 소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고, 이 나라가 더욱 든든케 되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요나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환경을 보고 좌절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보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병기든 소년처럼, 믿음으로 가지고, 따르는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단이 있었더라도, 병기를 든 소년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자 해도, 함께 일할 사람이 없다면-,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제2의 병기 든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함께 주의 일을 하자”고-,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때, 소년이 대답한 것처럼,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대답하며,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여러분 하는 일위에, 기적이 일으키는 위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홍배 목사)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사무엘상 14:1~23)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우리의 능력에 좌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악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아무리 우세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패배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단 둘이서 블레셋의 진영으로 넘어가 20여 명의 블레셋 병사들을 죽입니다(13절, 14절).
14절에 나오는 반나절 갈이 땅이란 약 2㎢의 면적을 의미하며, 무기를 든 병사란 왕이나 장수 휘하에서 부관(副官)이나 비서처럼 수행하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요나단과 요나단의 무기를 든 병사가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블레셋 진영을 휘젓고 다닌 것입니다.

사울은 약 600명의 병사들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2절)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으로 담대히 진격한 것입니다.
블레셋 진영은 매우 험준한 지역이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험한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고, 요나단이 손발로 기어 올라가야 할 정도로(13절) 험악한 지형이었지만 요나단은 그러한 지형적인 난관과 블레셋의 강력한 군사력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말은 확신에 차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의 번역처럼 “주께서 도와 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는 표현입니다. 군사력이나 상황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 10절의 말씀을 보면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싸울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에 대한 것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Sign)에 의해 하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요나단의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반면 사울 왕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사울의 진영에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인 아히야가 제사장으로 함께하면서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3절).
그리고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18절),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왔다가 낭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사울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라기보다는 종교적 힘을 빌리려는 얄팍한 술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절은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에 대해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였지만, 블레셋 진영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는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이용했다가, 거두었다가 하는 모습입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20절~23절).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21절), 즉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블레셋 병사에 소속되어 이스라엘과 싸우던 히브리 사람들이 돌이켜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 시작했고, 블레셋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숨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와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블레셋 군사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23절)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매우 열악한 이스라엘 군대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라는 요나단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은 상황이나 주어진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상황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오늘도 승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3월 29일(토) 사무엘상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Then Samuel said to the people, "Come, let us go to Gilgal and there reaffirm the kingship.

나라를 새롭게하자를 NIV 영어 성경에서 "왕권을 재확인하다(reaffirm the kingship)" 라고 번역합니다.
KJV. NASB / 왕국을 새롭게 하다(renew the kingdom there).

현대인, 새번역 / 사울이 우리 왕이라는 것을 새롭게 선포하자
공동번역 / 즉위식을 몰리자
새한글 / 왕국을 새롭게 합시다

자유대한민국을 새롭게 세우자!
전환점(轉換點) / 구를 전(轉), 바꿀 환(換), 점 점(點)
어떤 시기(時期)나 상태(狀態)로부터 다른 시기(時期)나 상태(狀態)로 전환(轉換)하는 계기(契機)나 시점(時點).

전환점을 영어로 turning point. watershed

확실히 아는 것과 바라는 것

영적 생활에 대한 안내자로 존경받는 존 카바나가 오래 전에 캘커타에서 3개월 동안 봉사 활동을 하러 갔었다.
그는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착한 첫 날 아침에 그는 테레사 수녀를 만났다.
테레사 수녀가 물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존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수녀가 되물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은 대답했다.
"확실하게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대답을 듣고 놀란 존을 보고 수녀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수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에게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세 가지 길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난 100년만 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통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여러 가지 위험이 나라 안팎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불린 사람이 둘 나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나라를 지켜준 국방력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켰습니까?

이들은 모두 위대한 예언자였지만 사역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나라의 왕을 꾸짖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왕과 백성에게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야는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바른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도 아합과 이세벨을 꾸짖으며 바른 삶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믿고 바르게 사는 나라를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백성의 믿음을 지켜주고 바르게 살도록 해준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킨 일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왕과 백성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아람 군대가 어디로 쳐들어올지 미리 왕에게 알려줘서 방비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기적으로 어려운 백성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해줌으로써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라를 지키는 두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방법 

이 방법은 나라를 바른 믿음과 정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잘못할 때는 비판합니다.
사회의 부정부패를 꾸짖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회를 바로 세우면 하나님이 나라를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엘리사의 방법

이 방법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백성을 돕는 것입니다.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정부의 사업에 협조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백성이 잘 살게 해줍니다.
그러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보존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롭게 살아가는 방법

소돔성이 왜 망했습니까?
백성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에 의롭게 사는 사람이 10명만 있었어도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의인이 1명만 있었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을 보십시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한 사람이 바르게 사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바른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 혼자만이라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거짓과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이웃을 도우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 한 사람 때문에라도 나라를 지켜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른 믿음과 바른 삶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나라를 지키는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사무엘상 11:1-15)

사사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게 있어서 정말 '만만하기' 짝이 없는 상대로서 그야말로 그들의 '밥'이고 '동네 북'이었습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이스라엘의 외곽 지역에 있는 지파들을 침략하여 소중한 추수양식을 비롯하여 온갖 재물을 약탈해 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없고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무정부 상태의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맞기만 하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때려누이기까지 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리더십 덕분에 이스라엘은 실로 오랜만에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은 바로 그런 상승무드를 놓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길갈에 모아서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전환기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산독재자가 이처럼 우리를 '만만한' 상대로 깔보고 걸핏하면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도발'을 일으켜 와도, 우리나라는 계속 당하기만 하는 '약골'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벌벌 떠는 '겁쟁이'들로 변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대체 이런 창피하고 무력한 꼴을 언제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더 '발전'하고 전 민족이 함께 '우리나라 만세'를 외칠 수 있게 되기를 진정 원한다면, 북한 공산주의자들 따위에게 이렇게 농락당하는 처지부터 속히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저 악한 북한 공산독재자의 도발 앞에 당하기만 하는 약골처럼 되어 가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을 과연 어떻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당당한 나라'로 새롭게 세울 수 있을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원수의 위협' 앞에 떠는 대신에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11장 1절로 8절에 기록하기를 "1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2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4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5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가로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로 고하니라 6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7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이더라"고 했습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살던 민족으로서 서쪽에 있던 블레셋과 함께 수시로 이스라엘을 좌우에서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 암몬의 왕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또다시 침공해 왔는데, 당시 요단강 동쪽 경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성읍 "길르앗 야베스"가 제일 먼저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야베스의 거민들은 암몬 왕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어 주시면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일종의 '조건부 항복'을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나하스는 "내가 너희들 모두의 오른쪽 눈을 다 빼버리고 나서 너희와 조약이고 뭐고 맺겠다."라고 위협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해 왔습니다. 

더욱 난감해진 야베스 사람들은 "우리에게 칠일 간의 시간을 주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고 그래도 아무 도리가 없으면 두 손 들고 당신에게 나가겠습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는 그들에게 칠일의 여유를 주더라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아무런 군사적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까닭에 그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전령들이 기브아로 와서 그 소식을 전해 주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가 당장 울음바다에 빠졌습니다.
나라가 외적의 침략을 당했는데도 무슨 국가적인 대책을 세운다든지 전쟁 준비를 한다든지 할 엄두도 내지 않고 그저 대성통곡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암몬 왕 나아스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때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면서 그 자리를 지나가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자 다른 백성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는" 즉 '성령께서 밀어붙이는 강력한 충동'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 노가 크게 일어난" 것 즉 의로운 분노가 솟구쳐 오른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이 '의분'을 느낄 줄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래야만 악한 일에 대항할 큰 힘과 단호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처럼 울기만 하는 약한 백성들을 정신 번쩍 들게 하기 위하여 일종의 극약 처방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몰고 오던 "소 한 겨리" 즉 소 두 마리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토막들을 내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에 보내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출전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 집의 소도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해 주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 기상천외의 '소집영장'을 받았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몬 사람을 겁내는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던 울보요 겁쟁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보다 더 겁나는 두려움,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일깨워 주자, 그들은 당장 사람이 싹 바뀌어 일사각오로 전투대열에 모여들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33만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부산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하여 이모 씨와 박모 씨 사이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탈북자인 이 씨가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게 매번 쌀만 퍼주고 너무 어리석다. 북한과 전쟁하면 반드시 남한이 이긴다."라고 말하자, 박 씨가 "북한과 전쟁하면 모두 죽는다."라고 반박하면서 이 씨를 '간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말에 격분한 이 씨가 박 씨를 따라가서 주먹을 휘두른 바람에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것입니다.
물론 그 탈북자가 폭행을 가한 것은 정말 잘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진짜 '간첩'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북한 공산주의 사회를 싫어해서 탈북한 사람을 두고 '간첩'이라고 비웃는 바람에 그만 울분이 폭발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 - 이것이야말로 '겁쟁이'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그 소리야말로 북한이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공갈협박이 아닙니까?
원래 '공포'란 것은 정말 순식간에 확산되는 최악의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못난 백성들은 원수의 위협만 듣고도 벌벌 떠는 '졸장부'요 '울보'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뭐가 약하고 모자라서 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겁내는 것입니까?
군사력, 경제력, 국민의 애국심, 세계적인 우방의 지원 등 그 무엇을 보더라도 우리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계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원수의 위협에 떨기만 하는 울보와 졸장부에게는 끝내 패배자와 종이 될 일밖에 남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백성은 담대한 용기와 새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는 완벽한 안전보장을 받을 수 있음을 꼭 깨닫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비류들의 비난'에 개의치 말고 '국가안보를 위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장 9절 이하 15절 말씀에 "9무리가 온 사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라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가로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을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2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0장 25절로 27절의 기록에 보면,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공식적으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한 후에 "나라의 제도" 즉 이스라엘을 어떻게 '신정국가'로 세워야 할지를 책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그때부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어떤 비류"들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왕이 되겠는가?"라고 사울을 "멸시"하면서, 새로 선출된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예물을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처럼 자기를 정면으로 비난하는 화살에 대하여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암몬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으며, 바로 그때 앞서 11장 5절 이하에서 보았던 대로 사울이 나서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모든 국력을 한데 모아 적군을 맞서 싸우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군사 모집이 이루어지자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다음날 원병이 도착할 것이라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있던 그 반가운 구원 소식에 야베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암몬 왕 나하스에게는 "내일 우리가 항복하러 가겠다."라고 약속하여 시간을 벌어 두었습니다.
그러고 바로 그날 밤에 사울은 자기 군대를 "삼 대"로 나누어 적군을 포위하면서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는" 기습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다음날 낮이 될 무렵에는 암몬 군사들을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탕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전쟁에 승리하자 백성들 중에서 나온 첫 마디가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냐? 당장 끌어내어 죽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에게 항상 당하기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의 단호한 대처와 지도력 때문에 통쾌한 승리의 맛을 보게 되자 '사울 이 사람, 그렇게 볼 사람이 아니었구나.'라고, 한순간에 그의 열렬한 옹호자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정치보복 행위를 금지시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무엘과 함께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새 출발의 의미로서 정식 대관식을 올리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의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실로 유종의 미를 장식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비류들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어 왔을 때에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마디의 말 대신에 위기상황을 대처하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백분 발휘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억측의 여론을 잠재우고 분열되었던 국론을 통일시켰습니다.
그처럼 사울은 조국 이스라엘의 영토와 백성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냄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을 본격적인 왕정국가로 출발시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을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류'들의 망언은 여지없이 튀어나왔습니다.
모 정당의 대표는 "연평도에서 군인이 사망하고 주민들이 불길 속에 두려움에 떨었다"면서 "북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후에 이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결과를 정부는 똑똑히 봐야 한다"며 "대결로 생겨나는 것은 비극뿐"이라고 모든 비난의 화살을 현정부에 쏟아 부었습니다.
정말 입에서 나오면 다 말입니까?
그렇다면 민간인 거주 지역에까지 대포를 쏘아댄 쪽은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그랬다는 소리입니까? 

"정부는 즉시 단절된 핫라인을 복구하여 평화적 조처를 해야 할 것"이라고요?
좌파들이 정권을 잡고 온갖 '평화적' 노력이라는 것을 다 기울였을 때에는 북한이 얌전했습니까?
1차 및 2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금강산의 관광객을 사살하고 원자폭탄까지 실험한 것은 '도발'이 아니고 무슨 '애 장난'이었다는 말입니까?

지금 그처럼 저 공산독재자가 행하는 모든 악한 짓들에 대하여 철저히 변호해 주고 그 대신에 자국 정부를 비난하는 그런 정치인들이야말로 김정일로 하여금 더욱 기고만장하게 악랄한 도발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저질적인 '비류'들을 국회의원석에 버젓이 앉혀 두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국민들은 도대체 왜 이런 '매국노'들에게 혈세의 세비를 꼬박꼬박 갖다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소위 '중도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좌파가 이렇게 설치고 있으면 우파가 그것을 견제해야 어떻게 '중도'라도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우파가 집권을 해도 그저 '중도'로만 나간다고 하니 전체적으로는 '중도좌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좌파가 집권하면 우파는 아예 '쪽을 못 쓰고' 온통 '좌파 천국'이 되고 마는 현실인 것입니다.

   좌파 정권 10년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절대다수의 표를 모아 선출해 주었으면 좀 그 뜻을 반영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무슨 정치 보복을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 대한민국의 국시 자체를 부인하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정치꾼'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어디까지나 '반공 민주주의의 법치(法治)'를 좀 더 철저히 수행해 달라는 바람인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위정자들이 이런 매국적인 '비류'들의 권모술수와 선동에 끌려 다니지 말고 진정 국가안보와 국민복지를 위한 리더십을 책임 있게 발휘할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 전 '서울 G20 정상회담' 기간 중에 그것을 홍보하는 공익광고 가운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패러디한 것이 나왔었습니다.
예쁘장한 외국인 소녀가 한국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처음 보는 아주머니도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이웃끼리 다정하고, 국가적인 경제위기 중에도 서로 격려하고 협동하는' '참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그 광고에서 '이상하다'는 말은 '경탄스럽다(wonderful)'는 뜻입니다.
실로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 등등 각 분야에서 이미 세계 정상급에 도달해 있는 정말 '놀라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정치에서만은 아직까지 '민주주의 초보'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나라는 정말 '이상한', 아주 '괴상한(ridiculous)' 나라인 것입니다.

일전에 '천안함 격침 사태' 이후에도 개성공단의 북측 관계자들은 우리 기업주들에게 '개성공단은 절대로 폐쇄시키지 않을 터이니 제발 나가지 말라.'고 사정했었습니다.
북한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 바로 다음날에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그 두 곳을 자진철거하기는커녕 이처럼 자국민을 총과 대포로 쏘아 죽이는 나라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나라' 아닙니까?

자국 함선이 침몰당하고 자국 영토가 포격을 당하고 자국 병사가 적군의 조준사격에 쓰러지고 자국 국민들까지 사상자가 생기는 판이면, 이것은 비록 국지전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4대강 사업'하는 곳곳에는 그렇게도 농성 데모 잘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 흔한 '촛불 시위' 하나도 할 줄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 자국 대통령까지 욕할 정도로 흥분 잘하는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북한을 향해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라고 무슨 '애 타이르는' 듯한 한 마디로 끝내고 그 대신에 국회를 현정부를 비난하는 규탄대회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게 이상한 나라', 아니 정말 '기똥찬 나라'입니다.

이번 '연평도 포격'은 김정은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하는 김정일이 '남조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한번 실전 시범을 보여 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봐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무력도발을 일으키면 저 겁쟁이 남조선 국민들은 더 벌벌 떨고 남조선의 정치가들은 저희들끼리 나누어져 서로 싸우지? 게다가 그 남조선 안에 우리 북조선을 찬양하고 동조하는 세력들까지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김정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김정은을 교육시키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저는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제발 '안보 불감증'에서 좀 깨어나세요.
'연평도'는 여러분하고는 별 상관없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까?
그 곳은 여러분의 주거지와 똑같이 '대한민국'으로 시작되는 주소가 있는 우리의 영토입니다.
그 주민들은 여러분과 똑같이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우리 국민들입니다.
그 섬에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처자식들과 같이 먹고 자는 집이 있으며, 여러분의 밥상에 조기를 올려 주기 위하여 고기잡이를 하는 생계 활동이 있으며, 여러분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해병대원들이 불철주야 경계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집 지붕'에 떨어진 포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집 아이들이 있는 학교와 놀이터'에 갑자기 수십 수백 발의 포탄이 터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해도 여러분은 '북한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태연자약하고 '왜 대북관계를 좀 더 평화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나?'하고 우리나라 정부를 비난하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심하게 나와야 이들이 우리의 '주적'이며 이들의 행패가 '적대적인 공격'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우리 국민들은 북한과 좌파 정치가들에 의하여 세뇌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앞으로 북한공산군이 진짜로 '2차 한국전쟁'을 도발하고 휴전선 일대를 포격해 와도 '국군의 사격훈련에 대하여 반발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저들이 위협한 그대로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들 포탄들을 쏟아 부어도 이 나라의 좌파 정치꾼들은 '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식선언부터 먼저 발표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식으로 북한공산군의 '동네북'이 되고 우리 5천만 국민이 독재자 김정일의 '밥'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정말이지 우리는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국운동에 앞장 설 사람은 바로 조국의 '파수꾼'인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의인 십인'인 기독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 '암몬 족속'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써 용기와 새 힘을 얻고, 매국적인 '비류'의 비난과 간계를 타파하고 오직 '국가안보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위정자들이 되도록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조국 대한민국을 진정 '새롭게 세우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와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
개인주의를 벗어나야 하는 것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한 것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로마서 13:1~7)

독일의 한국 대사관 문화홍보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www.Koreaheute.de)에 쉬테판 뮐러라는 독일 사람이 기고한 글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사진 한 장 때문에 한국, 아니 한민족에 얽힌 엄청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두 명의 일본인이 1등과 3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두 일본인의 표정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다.
왜 두 사람은 슬픈 표정으로 시상대에 서있는 것일까?

그들은 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코리아의 ‘손’과 ‘남’이라는 젊은이었다.
시상대에 오른 그들의 가슴에는 일장기의 붉은 원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일본 국기가 게양되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슬픈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가 저렇게 고개를 숙여야 하며,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까?
이 사진 한 장은 우리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나라는 마치 울타리와 같습니다.
양이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나라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중국에만도 57개나 되는 민족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채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표적으로 티벳족, 만주족, 회족, 위글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 놓고 자기들의 뜻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채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마저도 자기들 뜻대로 지켜갈 수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양들처럼 불안한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출세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가정과 가문의 번창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기업의 부흥과 발전 역시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나라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슈테판 뮐러는 이어서 또 다른 사진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이어갑니다.

52년 후 88서울 올림픽.
개회식 세레모니에서 백발이 성성한 손기정씨가 세 살배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손에 성화를 들고 달린다.
그 당시 모든 한국인들은 이 노인에게 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손기정 옹이 올림픽 성화를 들고 달리면서 그렇게 춤을 추었을까요?
이 사진은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중국선교 여행을 하면서 우리 국력 신장을 실감합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우리는 계속 중국의 지배를 받거나 중국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복음도 저 중국 땅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번역 성경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도 중국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합니다. 신학교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국력이 과거와 달리 신장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중국에 선교를 하려면 우리 국력이 중국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방글라데시나 저 아프리카 콩고 같은 나라에서 선교한다고 선교사가 왔다면 우리가 그 선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 세계에 선교하려면 우리 국력이 선진국으로 더욱 발돋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선교나 개인의 삶을 위한 후견인입니다. 후견인이 든든하면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가 힘이 있어야 우리가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의 한 앙케이트 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선우’라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이민 가능여부를 내 건 사람이 무려 56%나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 이민 의향을 내 비친 사람이 무려 71%나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을 가 보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일제 하에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떠나 저 만주로 하와이로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외국으로 나가 나라를 되찾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나라를 되찾고 나면 반드시 돌아오리라 굳게 마음  먹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젊은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민 길에 오릅니다. 나라가 자기들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자기 삶에 거추장스럽고 걸림돌이 된다고 나라를 버리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나라사랑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사랑할 것입니까?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나라를 버린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지킬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라 사랑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위정자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해서 따를 수 없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며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선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대외적으로 북한의 핵문제로 안보상황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상황도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10년 째 성장을 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때 대내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망국적인 지역 갈등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세대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386세대라는 새로운 세대가 참여의 정부에 들어와 힘을 얻으면서 이런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 노와 사의 갈등 온통 나라 안이 대립과 갈등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국가 리더십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하고 있고,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안정적인 리더십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대통령의 리더십을 흔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우나 고우나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를 믿고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누구 탓으로 돌리고, 그를 비방하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면 일단 속은 후련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만 더욱 키우게 됩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청와대가 언론에 대해, 코드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언론도 국민도 청와대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이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보다 차분하게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여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는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 없이 애굽에 종살이하던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던졌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보장된 희망찬 미래를 나라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출 32:32을 보면 심지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을 보면 바울도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목숨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롬 9장을 보면 이방인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9:3에 보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고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저가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이 박혀서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받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좀 더 깊이 째 보십시오. 내 가슴 속 깊이 조국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 깊이 새겨진 한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국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슴 속에 조국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아! 대한민국” 이 소중한 이름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79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시

1.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8.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11.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79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시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이 나라와이 민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독재자 로이 14세 장례식 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황금으로 만든 관에 누워 대성당 중앙 앞에 안치되었습니다.
대성당 내부의 등불은 다 꺼진 채 오직 한 자루의 큰 초만이 황금관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야 말로 가장 위대한 왕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의 각국에서 왕들과 귀족들이 모여들었고 장례 의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돌연 집례 하던 사제가 그 초를 끄고는 이렇게 외쳤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에 빛나는 위대한 왕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길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 열강들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위정자들 지도자들 저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잠시 쓰일 뿐입니다.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79:9을 보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시지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1980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셨던 일가 김용기 장로님이 책 한권을 출판하여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어려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입니다.

막사이사이 공공 봉사 상
라몬 막사이사이필리핀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 공헌 등 업적을 남긴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된다.
정식 명칭은 '라몬 막사이사이상'이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막사이사이상'으로 수록되었다.

1963년 김활란
1966년 김용기

이 책의 제목은 실제로 김용기 장로님께서 자기 기도실에 친필로 써 붙였던 휘호였습니다.
이 분은 매일 나라를 위해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분은 자기가 나라의 파숫군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애국인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대통령을 욕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욕하고, 우리 현실을 원망하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라를 위해 한 평생 헌신하셨던 김구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 일을 찾는 백성은 흥하고, 원망할 것을 찾는 백성은 망한다”

우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말보다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위해 앞장 서야하겠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제 3차 중동전쟁을 ‘7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300만이었고, 이집트는 1억이 넘는 대국입니다.
놀랍게도 300만의 이스라엘이 1억의 이집트를 불과 7일 만에 항복을 시키고 만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전과였습니다.

한번은 이집트의 대공포가 이스라엘의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추락한 비행기에 가보니 놀랍게도 조종사가 만삭된 임산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인과 어린 아이만을 제외하고는 만삭된 임산부까지도 전투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이런 임산부들이 필요합니다.
개딸 부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딸'"개혁의 딸" 의 줄임말로 정치인 이재명의 극단적 여성 지지자들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냥아들' "양심의 아들"을 줄임말로 이재명을 지지하는 남성 지지층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2022년 중반까지만 해도 둘을 합쳐서 "개딸. 냥아들"이라고 지칭하는 효현이 유행되었으나 현재는 "개딸"외에는 전부 사장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4. 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라 없이 진정한 나 개인의 성공도 행복도 없습니다.
나라 없이 가문의 번창도 영광도 없습니다.
특별히 나라 없이 교회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어버리자 교회도 문을 닫았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나라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3월 28일(금) 사무엘상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왕의 만세(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Samuel said to all the people, "Do you see the man the LORD has chosen? There is no one like him among all the people." Then the people shouted, "Long live the king!"

왕의 만세(예히 함 메렉) 예히 함메렠 <יְחִי הַמֶּלֶךְ׃ ף>
God save the King


"택하다"(בָּחַר, bachar, 바하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며, 사울의 외형은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도어맨 조셉 조렌티니의 행복한 53년의 비결

조셉 조렌티니는 그는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도어맨으로 53년 동안 근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53년 동안 3일만 결근한 정말 충성스런 직원이었다.
그가 78세로 은퇴를 하게 되자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다.
“당신은 그런 단순한 일을 어떻게 53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호텔 도어맨은 날마다 새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듯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텔 현관은 53년 동안 제게 천국이었습니다.”



왕의 만세(Long live the King)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 되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기브아로 내려가 이전에 했던 소를 몰며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던 중 길르앗 야베스에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암몬이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 올라와 이스라엘을 모욕한 것이다.
아베스 사람들이 항복을 하려 하지만 암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빼지 않으면 그들의 백기를 절대 받아 드릴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다급해진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 하고 있던 그때 소를 몰던 사울이 도착한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자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가 몰던 소를 잡아 열두 조각을 낸후 각 지파에 보내며 소집을 명령한다.
만약 이 소집에 응하지 않는 지파는 조각난 소처럼 그들의 가축을 이렇게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울을 두려워 하여 소집 명령에 응한다.
사울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야베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암몬 사람들에게 내일 그들의 요구대로 하겠다고 기만한다.
사울 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암몬 사람을 쳤다.
두려움에 흩어진 암몬 사람들은 둘 이상 짝을 이루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위기에서 왕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모두 기쁨의 잔치를 즐기는 그때 백성들이 “사울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있느냐고 떠들던 자들이 누구냐” 외치며 그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한다.
사울은 기쁨의 날에 이런 살육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는 왕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쁨의 날에 확신을 갖게 된 사무엘은 길갈로 가사 사울을 다시 새롭게 할 왕으로 선포하고 모든 백성이 이를 즐거워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위기에서 빛나는 사울의 리더십을 보게 된다.

왕의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는 나라가 위기일 때 잘 대처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평안 할때 보다 위기에 처했을 때 신앙의 진 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의 리더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울은 자신을 배척한 사람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하는 백성들을 말리며 오히려 용서하는 덕목을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
사무엘은 이때다 싶어 길갈로 가서 사울을 다시 왕으로 새롭게 새운다.

​사울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을 가질 수 있었는가?

그것은 사울 자신에게서 찾으면 안된다.
6절에 보면 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새번역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니까? 사울 안에 있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고통 당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담대해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자신을 배척했던 사람들을 용서 할 수 있었다.
오늘 사울이 보여준 모든 리더십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린것에서 찾을 수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 충만이다.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이다.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이다.
사울을 다시 일으킨 원동력은 단 하나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임한 결과이다.

이 땅에 교회들이 언제부턴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기도가 사라졌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보며 다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1~7장 / 사사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
사무엘상
8~15장 / 사울왕의 재위기 
사무엘상 15~31장 / 다윗의 이야기 

사무엘상은 사무엘 – 사울왕 – 다윗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0장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신정체제에서 왕정체제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1, 6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자 세 가지 징표를 예언하고 그 징표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암나귀를 찾게 되고, 세사람에게 떡 두덩이와 문안인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대로 사울에게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들으면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삶 속에 체험하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이러한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나타난 현상이 바로 6절 말씀입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것은 오순절 강림 사건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여호와의 영, 성령님께서 활동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님도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은 성령님이 크게 임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게 되면, 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자신감이 생겨나고, 겁 많은 사람이 담대해지게 됩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말한 것이 긴가 민가 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작은 지파 베냐민 지파출신이라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가능할 줄 믿습니다. 우리 한국도 줄이 중요하고, 배경이 중요합니다. 출신과 학력이 좌지우지합니다. 지연, 학연, 혈연으로 다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성령님이 붙잡아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도들을 보십시오. 다 엘리트고, 잘 배운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니까 능력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붙들리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어디서든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소년이 내민 오병이어를 통해 수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전건축도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줄 믿습니다.

2. 왕으로 뽑힌 사울(17~24절)

이제 사무엘이 왕을 뽑기 위해 지파별로 천명씩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령합니다.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가 뽑힙니다.
지파의 가족들 중에서 마드리의 가족이 뽑힙니다.
가족 내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힙니다.
지파가 열두지파니까 12지파 곱하기 1000명 하면 몇 명이에요?
12000명, 그 중에 사울이 뽑힌 것입니다.
1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불러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께서 짐보따리 사이에 숨었다고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가서 그를 데리고 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이 자신의 뜻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왕의 대관식에 끌려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은 안되지만,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앉혀주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사울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의 교만과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때 아무리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앉혀주시더라도 우리는 수치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 안에 교만이 머리를 들려고할 때 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며 납작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총알이 빗발칠 때 머리를 들면 죽습니다. 그러나 납작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3.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자들과 불량배...(26, 27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꼭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자.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울을 대놓고 멸시하는 불량배가 등장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불량배같은 방해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말로 설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비웃고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고, 능력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 속에 성령으로 변화된 모습,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 절망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모습, 남들과 구별된 모습..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변화될 줄 믿습니다.


성경 : 66권

예수님 이전 (기원전, BC, Before Christ)에 기록된 구약성경
예수님 이후 (기원후, AD, Anno Domini)에 기록된 신약성경
구약성경은 39권이고, 신약성경은 27권이다.


유대인들의 성경 구분

토라(모세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느비임(선지서) /
 전 선지서 -  여호수아, 사사기(+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후 선지서 -  이사야 예레이먀(+애가) 에스겔, 12 선지서

케투빔
(성문서)  / 시가서, 오축, 역사서
 시가서 - 시편, 욥기, 잠언
 오축 - 아가서, 전도서, 에스서(+룻기)
 역사서 -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성경의 구조

성경의 구조,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총 66권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약 40명이며,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후 96년경까지 약 1600년에 걸쳐 기록됐다.
구약(Old Testament)은 하나님의 옛 언약(약속)이 담겨 있으며 당시 백성들은 옛 언약을 지켰을 때 축복을 받았다.
신약(New Testament)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 기록돼 있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을 지켜야 축복을 받는다(누가복음 22:20, 고린도전서 11:25, 히브리서 8:13, 9:15, 12:24).

성경의 구조 – 구약성경

언어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극히 일부는 바벨론에서 사용하던 아람어(갈대아어)로 기록되었다(에스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그 이유는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3, 4세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방에서는 거의 히브리어가 쓰이지 않게 되자 당시의 국제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번역에 참여한 70여 명의 사람 수를 따서 이 번역본을 ‘70인역’이라 부르고 있다.

※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셈족의 언어로서 어형 변화는 다르지만 글자 모양은 같다.

배열

① 모세 5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역사서(歷史書)→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③ 시가서(詩歌書)→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④ 예언서(豫言書)→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 성경은 연대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고 특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예를 들면, 예언서인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 직전과 포로 시기에 기록된 글로서 예언서 그룹에 편성되어 있는데,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후에 기록된 ‘역대하’는 역사서이므로 앞부분에 배열되어 있다(예레미야 25:11, 역대하 36:21 비교). 또 다른 예언서인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약 100년 전에 기록된 글이지만 예언서 그룹인 23번째에 편성되어 있고,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온 이후에 기록된 ‘에스라’는 역사서로 분류되어 15번째 배열되어 있다(이사야 45:1, 에스라 1:1 비교).

성경의 구조 – 신약성경

언어

신약성경은 기록될 당시부터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헬라어는 로마 이전 헬라제국 시대에 지중해 일대의 여러 나라에 전파된 언어로서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통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천 년 전 초대교회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한 이유는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배열

① 4복음서(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 마태, 마가, 누가의 3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20~30년 뒤에 기록되었다.
② 역사서(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 사도행전
③ 편지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 전도여행서신(바울이 전도여행하면서 보낸 편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 목회서신(바울이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 옥중서신(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보낸 편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④ 일반서신(특정한 수신자가 정해지지 않은 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2서, 유다서
⑤ 예언서→ 요한계시록

※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연대순서가 아닌, 특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후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22번째 배열되어 있지만 네 번째 배열된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책이다(베드로후서 1:14, 요한복음 21:19 비교).

장절의 구분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장절(章節)을 구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성경에 장(Chapter)을 표시해 읽은 사람은 11세기 랑 프랑(Lan franc)이었으며, 그의 구분법을 받아들여 현재의 형태처럼 장을 분할해 완성시킨 사람은 영국교회의 주교이자 소르본대학 교수였던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Verse)의 구분은 15세기 말경 도미니크수도회의 수사가 구약성경에 절을 표시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종교개혁의 열기가 한창 뜨겁던 1551년에 프랑스의 인쇄기술자였던 로베르 에티엔느(Robert Estienne)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장절이 구분된 성경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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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9장에서 베냐민 지파의 기스가 아들인 사울과 사환을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보내고, 그 과정에서 사울이 라마의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극적인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울의 이름은 ‘구하다’인데, 이스라엘 자손이 구했던 왕의 이름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 보내기 전에 “너는 이제 잠간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삼상 9:27)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사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1.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하나님께서는 이틀 전에 사무엘에게 한 사람을 보내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삼상 9:16).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무엘은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암나귀를 찾으러 왔던 무명의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비록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부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 기업이라고 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는 소중한 소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부르신 후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되었던 것에서 구해내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기업이라고 한 것은 비록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그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유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열방의 나라들은 왕이 그 나라를 소유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분의 자녀와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전에는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그 분의 자녀가 되게 하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부르신 세 가지의 징조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에게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의 징조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사울에게 일어날 세 가지의 징조는 사무엘의 말이 단지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을 확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징조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오늘 나를 더나가다가 베냐민 경계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삼상 10:2).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에서 하나님이 주신 징조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헬은 야곱의 두 번째 아내이며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야곱이 낳은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민족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라헬은 베냐민의 어머니로서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기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 35:9-12).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많은 국민이 나올 뿐만 아니라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야곱의 둘째 부인인 라헬에게서 태어난 베냐민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울에게 그들이 찾된 암나귀들은 찾았고, 도리어 사울의 아비인 기스가 암나귀들 보다는 아들을 더 염려하고 있음을 알려줄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보여줄 첫 번째 징조였습니다.

두 번째 징조는 다볼 상수리 나무에서 세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삼상 10:3).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음식을 모두 소진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양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다볼의 상수리 나무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염소 새끼 셋과 떡 세 덩이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에게 떡 두덩이를 줄 것입니다.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삼상 10:4).

세 사람이 염소새끼 세 마리와 떡 세 덩이와 포도주 가죽부대를 가지고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제사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사울에게 떡 두 덩이를 주는 것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로서의 거룩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자는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거룩한 떡을 사울에게 준 것은 사울의 특별한 부르심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벧엘은 야곱과 무척이나 관계된 지명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게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곳에서 사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은 것은 무척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어디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 또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곳,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새롭게 된 곳,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에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삼상 10:5).

사울은 라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고, 벧엘로 올라가는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은 히브리어로 기브아 엘로힘으로서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를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이 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라 블레셋 군대의 요새라는 의미입니다.
그 만큼 사울의 시대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울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그곳에서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삶이 되리라.”(삼상 10:6).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가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여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신 후에 하나님의 신을 크게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후에 삼손은 변하여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고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담대하게 블레셋 사람이었던 골리앗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행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징조가 임하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사울과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
사울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징조를 보게 되면 이제 용기를 내어 기회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셔서 능력을 주셨고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울은 더 이상 평범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것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7-49).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을 먼저 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면 그들은 기회를 얻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구원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회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기회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보다 길갈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앞으로 행할 것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칠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처음으로 진을 친 곳으로 광야의 생활을 마친 장소가 되었고,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어떻게 행할지를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첫 번째 직무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하여 새사람이 되다.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고 그날 징조도 다 응하였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삼상 10:9).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언급한 세 가지의 징조도 그 날에 다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자 사울도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예언을 하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삼상 10:11).

 

사울을 알던 자들이 사울이 선지자들 중에서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사울의 숙부가 사울에게 찾아와 어디로 갔다 왔냐고 묻자,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다가 얻지 못하여 사무엘에게 갔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숙부가 사무엘이 한 말을 고하라고 하자,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한 말만을 전하고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통하여 사울을 기브아에서 부르셔서 라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새로운 마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기회를 따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일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 부으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기에 사울은 기회를 따라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울의 부르심은 블레셋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산이 있는 곳에는 블레셋의 영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에 삼손과 같이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다면 사울은 더욱 크게 하나님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 대하여 숙부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사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자신이 없거나 확신이 없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회를 따라 행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더욱 큰 은혜와 능력을 따라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는다.

기름부음이란 옛사람과의 단절을 뜻한다.
이제 사울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는 왕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 왕이되었다는 표징 세 가지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첫번째 표징은 사울이 찾지 못했던 아버지의 암나귀 셋을 찾은 것이다.
두번째 표징은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봬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사람, 염소새끼 셋과 떡 세덩이, 포도주 한가죽부대를 가진 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세번째 표징은 그들이 사울에게 떡을 두덩이 주는 것이다.

암나귀 셋을 다른사람이 찾았다는 것은 사울이 왕이된 것이 결코 스스로의 힘에 의한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써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 통치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세사람에게서 떡을 받는것은 하나님께 드릴 떡을 대신 받는 것으로,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추대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표징을 통해 사울이 변화되어 예언하며 새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사무엘상 10:1~16)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여호와께서 그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로 세우셨으며,
이 일을 위하여 그날에 사울에게 보이시는 세 가지 징조가 있을 것임을 알립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로 내려가 7일간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합니다.
사무엘이 알려준 대로 그날에 사울에게 세 가지 징조가 다 일어났고,
그 징조대로 사울에게도 성령이 크게 임하여 사울도 춤을 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


[25-27절]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 . . .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 곧 성소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베네 카일), 즉 용사들은 그와 함께 갔지만, 어떤 ‘비류들’(베네 벨리야알), 즉 ‘벨리알의 아들들’(KJV) 혹은 ‘무가치한 자들’(NASB)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그를 멸시하며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일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일꾼을 준비시키시며 세우셨다. 그는 선지자를 보내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징조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확신케 하셨고, 성령을 허락하셔서 새 마음을 주셨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시고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신 일꾼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봉사자들을 선택하려 할 때 회중 전체의 뜻과 합법적인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백성 중에서 합법적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회중이 모여 그를 선택하였다. 물론 교회의 봉사 후보자들은 회중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감독들을 세우려 할 때 우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할 것을 분명히 교훈하였다(딤전 3:2).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인격적 온전함을 내포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불평하고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즐거이 협력하는 자가 되자.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자들은 그와 함께 갔으나, 어떤 자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하나님의 일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멸시하고 불평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한 마음, 한 뜻, 한 사랑으로 협력하는 자가 되자.


3월 27일(목) 사무엘상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벤에셀(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Then Samuel took a stone and set it up between Mizpah and Shen. He named it Ebenezer, saying, "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

에벤에셀(Ebenezer)
뜻 : 돕는 돌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곳에서 첫번째 전투에서 4,000명의 목숨을 잃었고 두번째 전투에서 30,000 명의 목숨을 잃었다.
두번째 전투에서 블레셋 인들은 언약궤를 탈취해 갔다(삼상 4:1-11).
나중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이긴 기념으로 사무엘 선지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비석인데 후에 지명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블레셋은 사물엘이 생존중 다시 침범치 못하였다 (삼상 7:12-13).

단순한 방법과 복잡한 방법

소련과 미국이 서로 우주개발경쟁을 한참 하던 때였다.
미국 나사에서는 비밀 프로젝트 하나를 개발 중이었다.
그것은 우주에 가서도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의 개발이었다.
볼펜의 잉크는 중력 때문에 아래로 내려와 글이 쓰여지는 데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는 볼펜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주인들에게는 볼펜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주에서도 중력 없이도 쓸 수 있는 볼펜 개발을 위해서 수백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려서 드디어 나왔다.
우주 펜(혹은 우주 볼펜, Space pen)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폴 피셔(Paul C. Fisher)가 발명하였다.
무중력 펜이라고도 하는데 이 펜에는 압축질소가 들어있는 잉크카트리지가 장착되어 있으며, 무중력 상태에서는 물론 위쪽으로도 쓸 수 있고, 어떠한 각도에서도 잉크가 공급되며 심지어 물속은 물론 극한 온도환경(섭씨 -35 ~ +120 도)에서도 사용가능하고 젖은 종이에도 쓸 수 있다.

이렇게 미국 쪽은 수십억을 들여서 볼펜을 개발했지만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던 소련은 더 좋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그냥 연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쪽은 수십억을 들여서 고민할 때 한쪽은 단순하게 연필 한 자루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명료하다.




1. 에벤에셀의 의미

에벤에셀(Ebenezer)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두 단어의 결합으로, "에벤"은 돌을 의미하고, "에젤"은 도움을 의미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기념비로 세워진 돌을 의미합니다.

돌(에벤. ’eben) אֶבֶן 스트롱번호 68

1. 돌.  2. 하나의 돌
발음 [ ’eben ]
어원  / [중성과 여성이 혼용됨]. 어미활용 אַבְנוֹ, 복수 אֲבָנִים, 복수 연계형 אַבְנוֹ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관련 성경  /  호마노(창2:12, 출35:9,27), 돌(창11:3, 수 4:3, 슥12:3), 반석(창49:24), 돌판(출24:12, 34:1), 보석(출28:10, 삼하12:30, 단11:38), 목석(신4:28), 추(신25:13,15, 잠11:1), 덩이(수 10:11), 석수(삼하5:11), 에벤(에셀)(삼상7:12), 바위(삼상20:19, 삼하20:8), 저울(삼하14:26), 물매(대상12:2), 성벽(느4:3), 광석(욥28:3), 저울추(잠16:11), 우박(사30:30), 에바(슥5:8).

도움(에젤. ʽêzer) עֵזֶר 스트롱번호 5828

1. 원조.  2. 여성 조력자
발음 [ ʽêzer ]
어원  / 5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원조, 도움, 원조자, 조력자, 시33:20, 70:6(5), 115:9.
    • a. 명사, 남성 [주]여성 조력자, 창2:18,20.
  • 관련 성경  /  돕는 배필(창2:18, 사30:5), 도움(시20:2,33:20, 115:9, 호13:9), 호위하는 자(겔12:14).

2. 에벤에셀의 역사적 배경

에벤에셀은 주로 사무엘상 4장과 7장에서 언급됩니다.

사무엘상 4장

에벤에셀은 처음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장소로 언급됩니다.
이 전투에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아갔습니다.

사무엘상 4:1-3: "이스라엘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들이 싸움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이스라엘의 큰 살육이 있었으니, 거기서 이스라엘 군사가 엎드러진 자가 사만 명가량이라."

사무엘상 7장

이후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그들이 다시 블레셋과 싸워 승리한 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기념하여 에벤에셀이라 불리는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7:10-12: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밑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3. 기독교적 의미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우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도우신다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회개와 구원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인도 아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기억과 감사

에벤에셀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기념물로 세워졌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상기시켜주고, 현재와 미래의 도우심을 신뢰하도록 합니다.


4. 현대 기독교에서의 적용

에벤에셀의 의미는 현대 기독교 신앙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념의 중요성
: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믿음을 강화하고 감사의 마음을 유지하게 합니다.

회개와 순종
: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와 순종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독려합니다.

믿음의 증거
: 에벤에셀과 같은 기념물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념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신앙 생활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 회개와 순종의 삶을 강조하는 에벤에셀의 의미는 모든 신앙인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에벤에셀 :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

‘에벤에셀’은 성경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돕는 역할을 하셨음을 상기시키는 고백으로 사용됩니다. 본 글에서는 ‘에벤에셀’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 그리고 신앙 생활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에벤에셀’의 어원과 해석

‘에벤에셀’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에벤’은 ‘돌’을, ‘에셀’은 ‘도움’이나 ‘도움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합쳐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 또는 ‘하나님이 도우신 곳’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기념물로, 하나님의 구속과 도움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념하는 의미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순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는 신앙적 고백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고백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그 백성을 도우셨음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표현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믿음직한 성품과 약속의 신뢰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성경에서의 에벤에셀 등장

사무엘상에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성경에서 사무엘상 7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위기에 처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셔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를 기념하며 사무엘은 그곳에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신 사실을 기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와 기념물로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의 기념물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을 때, 사무엘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웠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기념물로,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에벤에셀’이 의미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에벤에셀’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승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에벤에셀’ 돌을 세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적 의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는 고백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도우신 순간을 기억하는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셔서 구원과 보호를 주셨는지 되새깁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함으로써, 신자들은 현재와 미래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신앙의 기념물로서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신앙의 기념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자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고백할 때, 그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신앙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구속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적 상징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

‘에벤에셀’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도우셨음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를 의지하고 신뢰할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는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며, 하나님을 삶의 모든 순간에서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고백입니다.

에벤에셀과 기독교 예배

예배 중 ‘에벤에셀’의 의미

기독교 예배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신 순간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배 중 ‘에벤에셀’을 고백하며, 신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고, 그 도우심을 기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며, 예배를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에벤에셀’과 찬양

‘에벤에셀’은 찬양에서도 중요한 고백으로 사용됩니다. 예배 중 찬양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념하며, 그 도우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에벤에셀’이 포함된 찬양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되새기게 하며,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고백

예배에서 ‘에벤에셀’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깊이 묵상하고 기념하는 시간이 됩니다.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서 행하신 기적과 도우심을 감사하고, 그 도우심을 기념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에벤에셀의 현대적 의미

개인 신앙에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개인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겪은 삶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이를 ‘에벤에셀’이라는 고백으로 표현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되새기며, 신자들은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합니다.

‘에벤에셀’을 통한 공동체 신앙의 강화

‘에벤에셀’은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을 넘어서, 공동체 신앙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에벤에셀’을 함께 고백하며,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동체를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념합니다. 이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함께 고백하고, 공동의 신뢰를 다지게 됩니다.

‘에벤에셀’을 통한 감사와 소망

‘에벤에셀’은 감사와 소망의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신 모든 순간을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이 고백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결론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도우신 것을 기념하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그 분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다집니다.
‘에벤에셀’은 신앙의 기념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며, 그 도우심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오늘날에도 ‘에벤에셀’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고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벤에셀 뜻
- 도움의 돌 의미, 지명

에벤에셀 유래

사무엘상 7장 12절은 사무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기념하기 위해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에벤에셀은 종교,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정치에서는 국민을 도와주었던 위대한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사회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단체나 기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에벤에셀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성경 이야기에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 영향력은 종교적 문헌의 영역을 넘어 확장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그것은 그것의 중요성과 지속적인 유산을 더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문학적 작품들로 길을 찾았다.

1843년 출간된 이 소설은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영혼을 만나 변화를 겪는 구두쇠이자 냉혹한 인물인 에벤에셀 스크루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디킨스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구원과 개인적 성장의 가능성을 상징하기 위해 "에벤에셀"라는 이름을 교묘하게 선택했다.

디킨스가 에벤저 스크루지를 연민과 관대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을 재발견하는 인물로 묘사한 것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에벤저"라는 이름은 긍정적인 변화의 동의어가 되었고, 개인들에게 사랑, 친절, 그리고 공감의 변화하는 힘을 상기시켰다.

문학 이외에도, 에벤에셀는 지리적 위치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전 세계의 수많은 마을, 교회, 랜드마크들은 "에벤에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 용어의 지속적인 유산과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

에벤에셀의 기독교적 의미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기독교 신학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히브리어, 특히 성경의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다. 사무엘 1장 7절 12절에 "사무엘이 돌을 가져다가 미스바와 심 사이에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베네셀이라 하였더라 그가 말하기를 주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에벤에셀'라는 단어 자체가 히브리어의 합성어로, '돌'이나 '바위'를 의미하는 '에벤'과 '도와준다' 또는 '도와준다'를 의미하는 '에제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번역될 때, 에벤에셀는 "도움의 돌" 또는 "도움의 돌"로 이해될 수 있다."

성경적인 맥락에서 예언자 사무엘이 에베네셀 돌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인도하는 데 신의 개입과 도움을 기념했다. 그러므로, 에벤에셀는 주님의 변함없는 지지에 대한 감사와 감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제공과 인도, 도움을 인정하고 인정하는 개념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것은 받은 축복에 감사를 표하고 도전과 역경의 시기에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의 에벤에셀의 중요성

현대 담론에서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종교적, 세속적 맥락 모두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감사와 신뢰에 대한 호소의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들은 종종 이 용어를 예배에 포함시켜 신자들의 영적인 여행에 영감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 사용한다.

게다가, 에벤에셀라는 이름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이 용어와 관련된 지속적인 호소력과 긍정적인 의미를 반영한다.
그것은 감사와 믿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 높은 권력으로부터 받은 지지를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에벤저"라는 용어는 심오한 의미와 풍부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의미에서부터 문학과 문화에 대한 영향까지, 에벤에셀는 감사, 신의 도움, 그리고 개인적 변화의 가능성의 상징으로 서 있다. 우리가 이 용어의 깊이를 탐구할 때, 감사의 힘, 믿음,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받는 지지를 인정하는 것의 지속적인 영향을 상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돌을 취하여...세워
- 구약 성경에서 '돌을 취하여 세우는 일'은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창 31: 44-47; 수 4:6-7).

미스바와 센 사이
- '미스바'(Mizpah, '망대' 또는 '파수대'란 뜻)는 예루살렘 북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땅이다.
7: 5 주석 참조. 한편 '센'(*,Shen)은 '치아'(齒牙)란 뜻으로서, 그 지역이 불쑥 불쑥 날카롭게 튀어 나온 바위들이 많은 험준한 곳이었음을 시사해 준다(Fay, Keil).
한편 이곳은 미스바 북동쪽 약 13km지점의 '여사나'(대하 13:19)와 동일한 지역으로 주장되기도 한다(Reed).
그러나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주하였을 것이므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Klein).
사무엘과 이스라엘은 패주 하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미스바의 서쪽으로 향했고, 그리고 그들이 진격해 간 곳 근처 어디에 돌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이 세워진 곳은 '벧갈'(11절)과 가까운 곳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우리를 도우셨다
-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1)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 (2)계속적인 은혜 공급의 간절한 요청, (3)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계속 머물겠다는 전적인 헌신의 각오 등이다.

여기까지
- '여기'(*, 헨나)는 구체적으로 그때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추격해 갔던 서쪽 한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 근 40년간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던(삿 13: 1) 이스라엘이 싸움에 이겼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영역권인 가나안 서쪽까지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면서 쫓아갈 수 있었던 것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란 뜻)은 미스바 전투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오고오는 세대에 증거하기 위해 세운 기념석(記念石)으로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해간 장소에 세워졌다.
한편, 그런데 여기 '에벤에셀'(Ebenezer)은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1) 그 위치에 있어서 다르며<4:1 주석 참조>
(2)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인 반면, 여기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에벤에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동안 (삼상 7:1-11)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을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삼상 7: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 앞에 물을 길어 붓고 종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앞에 패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놓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벤”(돌)이라는 말과, “하에쩰(그 도움)이란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을 물리치고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창 31: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수 4:1)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수 4:2)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수 4:3)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수 4: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수 4: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役事)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블레셋을 굴복시키셨습니다(13).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비를 세운 후 그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하나님의 역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이 굴복했다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 편에서는 블레셋에게 승리했다고 하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압제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블레셋만큼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입니다.

블레셋은 전쟁을 아주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

잊을 만하면 쳐들어오고 또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무엘상 4장)을 보시면 이미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사 4,000명가량이 죽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블레셋에게 패한 진짜 중요한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번에는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두 번째 전쟁에서는 더 큰 패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무려 30,000명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가지고 나갔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같은 본문을 여러 번 설교했는데,

이번에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벤에셀"이 본문(7:12)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삼상 4:1)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첫 번째 전쟁과 두 번째 전쟁에서 패전한 곳이 바로 “에벤에셀”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본문(삼상 7:12)의 “에벤에셀”은 (삼상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①그 위치가 다르며(4:1 주석 참조)

②(삼상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이지만, 본문(삼상 7:12)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이 왜 유독 첫 번째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했던 곳(에벤에셀)의 이름을 따서 기념비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을까 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삼상 4:1)의 “에벤에셀”은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수치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물을 길어 하나님께 부으며, 종일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할 때,

그 수치스러웠던 “에벤에셀”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세상을 살다 보면 수치스러운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물을 쏟아부으며, 종일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하고,

온전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수치를 변하여 승리가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 때문에 그들을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비는 글자 그대로 기념비에 불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돌비).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주셨습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2. 빼앗겼던 성읍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14上).

이어지는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벤에셀에 기념비를 세우고 감사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동안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성읍을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전쟁에서 졌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 것을 의미합니다.

(벧후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그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땅을 빼앗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물질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것을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오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회복에 관한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욥에 대한 말씀입니다.

(욥기 1장)에서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0남매를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욥을 도와주셨습니다.

욥기 마지막 장인 (욥기 42장)을 보시면 하나님은 욥에게 그 전보다 더 좋은 열 남매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정확히 욥기 1장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창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에덴동산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천국을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나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쏟아붓고,

종일 금식하며 회개했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회개하며,

온전한 번제(온전한 예배)를 다시 드리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한국교회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지(그것이 물질이든지, 혹 자녀의 문제이든지, 혹 건강의 문제이든지, 혹 가장 중요한 영적인 것이든지)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14下).

이제 (14절 下)을 계속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평화” שָׁלוֹם (샬롬 shalom)=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등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계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들의 삶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으로 잃었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한 것도 하루아침에 다 빼앗겨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은 날마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우상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평화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블레셋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모리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생겼습니다.

그 평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모든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대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평화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돌"을 의미하는 "에벤"과 "도움" 또는 "도우미"를 의미하는 "에제르"입니다. 따라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로 번역됩니다. 이 용어는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섭리와 도움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사무엘상 7장 12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신성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돌을 세우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출된 후 사무엘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과 실제 돌은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개입하신 것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움을 표시하기 위해 돌을 세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우리를 도우셨던 순간을 인정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여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도움은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약:

  • "에벤에셀"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을 상징합니다.
  • 이 용어는 사무엘상 7장 12절에 특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이 개념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인식하고 감사하도록 격려합니다.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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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맥락은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과 쇄신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무엘상 7장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강력한 적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위해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벤에셀이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블레셋의 손에 처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언약궤가 탈취당하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깊은 절망의 순간으로, 군사력과 정신적 안정을 모두 잃은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7장에서 우리는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며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는 동안 블레셋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주님께 번제를 드리고 신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주님은 극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강력한 소리로 천둥을 쳐 블레셋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칠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승리의 여파로 사무엘은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이름 짓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의 은총과 새로운 신실함의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은 이스라엘의 영적 여정에도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는 것은 한 번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절망과 패배의 장소에서 희망과 신성한 확신의 장소로 옮겨갔습니다. 에벤에셀 돌은 하나님의 개입과 집단적 회개와 기도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적 표식으로 서 있습니다.

요약:

  •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 처음에 에벤에셀은 이스라엘에게 패배와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 하나님은 블레셋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에벤에셀 돌을 기념비로 세우게 하십니다.
  • 이 행사는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회개와 신의 개입의 힘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신학적, 문화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을 뜻하는 "에벤"(אבן)과 "도움" 또는 "도우미"를 뜻하는 "에제르"(עזר)가 그것입니다. "도움의 돌"이라는 이 조합은 단순한 명칭을 넘어 하나님의 신실한 도움과 보호에 대한 심오한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기념물로 돌을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 문화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입니다. 돌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행동하신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본 환상을 기념하기 위해 벧엘에 돌기둥을 세웁니다(창세기 28:18).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길갈에 열두 개의 돌을 세웁니다(수 4:20-24).

"에제르"라는 용어는 의미가 풍부하며 성경의 다른 중요한 문맥에도 등장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돕는 배필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ezer 그에게 적합하다"는 뜻으로, 아담과의 관계에서 이브의 역할을 가리킵니다. 가장 심오하게는 시편 121:1-2에서 "내가 눈을 들어 언덕을 바라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와 같이 '에제르'는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에게서 오나이다."

따라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신학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와 도움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모든 '에벤에셀'에는 신의 도움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 즉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는 깊은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요약:

  •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은 "에벤"(돌)과 "에제르"(도움)를 결합한 단어입니다.
  • 이 용어는 신성한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돌을 사용하는 관습을 반영합니다.
  • '에제르'는 조력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어 이 용어의 신학적 깊이를 강조합니다.
  •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을 상징합니다.
  • 이는 신의 도움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인정합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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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린 이야기는 회개, 신의 개입, 감사에 대한 강력한 내러티브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중요한 순간을 강조합니다.

블레셋의 손에 큰 패배를 당하고 언약궤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슬픔과 반성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무엘의 영적 지도력 아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새롭게 헌신했습니다.

미스바에 모여 있는 동안 블레셋은 취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이 임박한 위협에 대응하여 사무엘은 젖먹이 어린 양을 잡아 통째로 주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신의 개입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극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강력한 우레와 함께 블레셋을 치셨고, 블레셋은 당황하여 흩어졌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의 분명한 표징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신성한 도움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해 미스바와 쉔 사이에 돌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12)라고 말하며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베푸신 구원을 물리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리는 것은 희망과 쇄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개와 기도의 힘을 보여 주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향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도움의 이정표를 인식하고 축하하도록 격려하며,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와 지원을 신뢰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요약:

  • 사무엘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레와 같은 소리로 개입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이 사건을 신의 개입으로 기록했습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기념하기 위해 에벤에셀 돌을 세웠습니다.
  • 이 이야기는 회개와 기도의 힘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에벤에셀"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발전해 왔나요?

'에벤에셀'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 신학에서 발전하여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과 도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뿌리는 구약성서의 특정 역사적 사건에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해석: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돌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신실함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종종 구약 성경의 이야기와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찾았습니다. 신이 개입한 순간을 상징하는 에벤에셀 돌은 인류를 위한 궁극적인 '도움의 돌'이신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중세와 종교개혁 사상:

중세 시대에는 에벤에셀 돌의 상징성이 설교와 신학 저술에서 자주 사용되어 신자들이 하나님의 과거 신실하심을 기억하여 미래의 공급에 대한 신뢰의 기초로 삼도록 독려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에서도 에벤에셀 돌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일관된 도움과 그분을 지속적으로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최신 애플리케이션:

현대 기독교 사상에서 '에벤에셀'은 개인적 맥락과 공동체적 맥락 모두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는 은유가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찬송가와 노래에 이 용어가 포함되어 있어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가장 유명한 찬송가 중 하나는 "모든 축복의 근원 오소서"로, "여기 내 에벤에셀을 일으키니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여기 왔나이다"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에 로버트 로빈슨이 작곡한 이 찬송가는 기독교 신앙의 집단 의식에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를 살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신학적 성찰:

신학적으로 '에벤에셀'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실천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간증으로 문자적이든 은유적이든 자신만의 '도움의 돌'을 세우도록 독려합니다. 이러한 기념물은 특히 시련이 닥쳤을 때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관점: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대화에서 '에벤에셀'의 개념은 성경적 기원을 넘어 희망과 신성한 도움의 보편적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순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신앙 전통 간의 일체감과 상호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도록 초대합니다.

요약:

  •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돌을 하나님의 섭리의 상징이자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 여겼습니다.
  • 중세와 종교개혁 사상가들은 과거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하나님의 미래 공급에 대한 신뢰를 장려하기 위해 이를 사용했습니다.
  • 현대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 신학적으로는 시련의 시기에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관행을 장려합니다.
  • 이 용어는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맥락에서 신의 도움과 희망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단마다 '에벤에셀'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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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의 중요성은 다양한 기독교 교단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각 교단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신학적, 전례적 관행에 통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가톨릭 교회는 '에벤에셀'을 하느님의 섭리와 신실함을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으로 여깁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서 이 용어는 역사에 개입하신 하느님을 기념하는 추모라는 개념을 구체화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기념'으로서 성사와 전례를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납니다. '에벤에셀'의 개념은 제단, 성상, 성지 등 신성한 행위를 기념하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을 신뢰하도록 격려하는 물리적 기념물을 설치하는 가톨릭의 관습과도 일치합니다.

개신교 교회:

개신교 전통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기억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와 찬송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이 용어는 종종 신자의 삶에서 영적 이정표 또는 표식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에벤에셀'을 심오한 영적 쇄신이나 신적 개입의 순간을 의미하기 위해 호출하여 신자들이 미래의 신뢰와 희망의 기초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돌아보도록 독려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 전통:

개인 경건과 공동체 예배를 강조하는 감리교인들은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비유할 때 종종 "에벤에셀"을 사용합니다. 감리교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찬송가 '모든 축복의 샘이여'에는 에벤에셀을 키우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영적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오순절 및 카리스마주의 교단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과 지속적인 인도를 이야기하고 기념하기 위해 간증과 예배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파는 종종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에벤에셀'을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합니다.

동방 정교회:

동방정교회는 '에벤에셀'을 하나님의 행동과 임재를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아이콘과 유물의 광범위한 전통 안에서 바라봅니다. 일반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벤에셀'의 원리는 중요한 신의 개입과 기적을 기념하는 성물과 장소를 숭배하는 정교회 관습과 공명합니다.

요약:

  • 가톨릭 교회: '에벤에셀'을 성례전 및 전례 관행에 반영된 하나님의 개입을 기념하는 기념의 상징으로 간주합니다.
  • 개신교 교회: "에벤에셀"을 사용하여 영적 이정표를 표시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도록 격려하세요.
  • 감리교 전통: 찬송가와 개인 경건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하여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합니다.
  •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간증과 예배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적극적인 임재를 찬양합니다.
  • 동방 정교회: 신성한 개입을 상기시키는 아이콘과 유물을 숭배함으로써 '에벤에셀'의 원리와 공명합니다.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어떻게 현대 크리스천의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1장에서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상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허락하신 후, 사무엘 선지자는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을 붙인 돌비를 세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은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12)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행위는 우리의 영적 삶에서 감사와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섭리를 상기시키는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세우기 위해 잠시 멈추나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매일 우리를 지탱하고 인도하시는 수많은 방법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감사일기를 쓰면서 매일의 크고 작은 축복을 기록해 보세요. 또는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으로 집 안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보세요. 이러한 실천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신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에벤에셀은 우리에게 신앙의 공동체적 본질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 돌을 세웠습니다.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신자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거나 소그룹으로 모일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방식에 대해 간증하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마지막으로 에벤에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우리를 도우셨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용기를 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주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용기 있게 나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에벤에셀'을 키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분이 반드시 우리를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희망으로 전진합시다.



에벤에셀 이야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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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교회는 에벤에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봅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존재와 존재감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매 순간마다 그들을 붙드시고 지탱해 주십니다."(CCC 301항). 에벤에셀은 이러한 지속적 존재의 증거로 서 있습니다.

또한, 기념비를 세우는 행위는 성례와 유사하며 교회의 중보기도를 통해 얻은 영적 효과를 나타내는 성스러운 표징인 성사물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과도 일치합니다. 성찬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성수, 축복받은 메달 또는 벽에 걸린 간단한 십자가와 같은 성찬은 사무엘의 돌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그분께 의존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는 또한 에벤에셀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선물하는 전례 축하의 풍부한 전통을 반영합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벤에셀의 공동체적 측면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도 일치합니다. 사무엘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해 이 돌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에벤에셀에게서 하느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에 대한 희망과 신뢰에 대한 소명을 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할 때 고백하는 진리, 즉 우리의 도움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에벤에셀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 봅시다. 사무엘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기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 모두가 에벤에셀을 계속 키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벤에셀 이야기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리는 행위는 심리학자들이 "인지적 재구성"이라고 부르는 강력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사건이나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사무엘은 돌의 이름을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로 명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실패나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바라보도록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재구성은 정신적, 정서적 웰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방식에 집중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으며, 심리학자들은 이를 행복감 증가, 우울증 감소, 스트레스에 대한 더 나은 대처와 연관시킵니다. 따라서 에벤에셀 이야기는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인정하는 관행에 대한 성경적 선례를 제시합니다.

또한 이 행위의 공동체적 특성은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있어 사회적 지지와 공유된 내러티브의 중요성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사무엘은 공개적으로 돌을 들어 올리고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정체성과 희망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심리적 안녕을 지원하는 데 있어 신앙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줍니다.

에벤에셀 돌은 심리학자들이 '외부 단서' 또는 '환경적 트리거'라고 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특정 생각이나 행동을 유발하는 물리적 사물이나 환경적 요인을 말합니다. 이 경우, 이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돌을 보거나 생각할 때마다 안정감, 감사, 희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돌을 물리적으로 세우는 행위는 기분과 전망을 개선하기 위해 긍정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치료 기법인 '행동 활성화'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기념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에서 기억하고 기념하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달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에벤에셀에서 공유된 이야기와 상징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집단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보여주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돌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전수할 수 있는 교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러한 심리적 통찰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에벤에셀의 진정한 힘은 어떤 정신적 기술이 아니라 그것이 기념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실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을 찾고, 그러한 기억이 영적 성장과 심리적 안녕을 모두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교부들은 에벤에셀의 이야기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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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the Ebenezer account is not one of the most extensively commented upon passages by the Fathers, several did offer meaningful reflections on its significance. St. Augustine, in his work “On Christian Doctrine”, uses the story of Ebenezer as an example of how physical objects can serve as signs pointing to spiritual realities. He writes, “Things are perceived by the bodily sense, and transferred to the intellect… Thus Samuel, when he had anointed Saul king, set up the stone of which we read, and called its name Ebenezer, saying, ‘Hitherto hath the Lord helped us.’”

어거스틴의 해석은 보이지 않는 은총의 가시적 표징인 에벤에셀 돌의 성사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사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와 물질적 실재가 영적 진리를 매개할 수 있다는 신앙의 성육신적 본질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성 제롬은 그의 "이사야 주석"에서 에벤에셀 돌과 그리스도 자신을 비유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에벤에셀이시며, 교회가 세워지는 도움의 돌이십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유형학적 독서는 에벤에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과 구원이 되시는 우리 신앙의 초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동방의 위대한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무엘상 강론에서 에벤에셀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는 사무엘이 이 돌을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치는 데 어떻게 사용했는지 언급하며, "그[사무엘]가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 그 기억을 항상 새롭게 유지하도록 돌보는지 보라"고 썼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행동에서 모든 시대의 영적 지도자의 모델,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도우심을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오리겐은 전형적인 우화적 스타일로 에벤에셀을 영적 진보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도 영적 여정의 각 단계마다 에벤에셀을 세워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멀리 인도하셨는지 표시하고, 주님께서 다음에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소망으로 기대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이 글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성장의 지점을 표시하는 일련의 '에벤에셀'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교부들의 이러한 통찰은 단순해 보이는 성경 이야기에도 풍부한 깊이가 담겨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교부들은 에벤에셀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서 살아 있는 현실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무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키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거스틴처럼 우리도 이러한 알림에서 더 깊은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제롬처럼 우리도 에벤에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볼 수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처럼 우리는 이러한 알림을 사용하여 서로를 가르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겐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우리의 영적 진보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사대

제사장 - 엘리
              엘리의 두 아들 / 홉비, 비느하스 - 불량자 < 제사를 무시>



3월 26일(수) 사무엘상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식의 하나님(삼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Do not keep talking so proudly or let your mouth speak such arrogance, for the LORD is a God who knows, and by him deeds are weighed.

지식의 하나님(the Lord is a God who knows)

엘 데오트(אֵל דֵּעֹות)

엘(410)(’êl) אֵל     

1. 강한.  2. 힘.  3. 신.
발음 [ ’êl ]
구약 성경  / 235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강한[형용사], 영웅.
  • 2. 명사, 남성 힘, 능력, 창 31:39.
  • 3. 명사, 남성 신.
    • a. 명사, 남성 [항상 어떤 종속어가 수반됨], 창33:20.
    • b. 명사, 남성 [종속어가 쓰이지 않는 경우: 시어로 자주 쓰이는데 이 때는 종속어가 쓰이지 않음], 시18:3(2).
    • c. 명사, 남성 [1인칭 접미어가 붙는 경우], 시18:3.
    • d. 명사, 남성 [일반적인 신을 나타내는 경우: 우상도 포함], 사44:10.
    • e. 명사, 남성 복수 אֵלִים:
    • f. 명사, 남성 영웅들, 강한 자들.
    • g. 명사, 남성 신들, 출15:11.
  • 관련 성경 /  하나님(창14:18, 삼하22:31, 사45:14), 능력 (창31:29), 엘엘로헤이스라엘(창33:20), 신 (출15:11, 34:14, 신3:24), 힘(신28:32, 느5: 5, 잠3:27), 권능자(시29:1), 임마누엘(사7: 14, 8:8), 강한 자(겔32:21), 벧엘(렘48:13, 슥 7:2). [형] 능하다(겔31:11).



데오트(1844)
데아(
dêʽâh)  דֵּעָה   

1. 지식.  2. 앎.  3. 욥 36:4
발음 [ dêʽâh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복수 דֵּעוֹת, 1843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지식(삼상2:3, 시73:11, 렘3:15).


하나님의 속성에서 전지(全知), 전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 전재(全在)

전지의 하나님 - 엘 데오트(삼상 2:3)
전능의 하나님 - 엘 샤다이(창 17:1)
무소부재의 하나님 -

교만한 말...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한나의 대적 브난나가 그랬듯이(1:6),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나 섭리를 무시한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또한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마음이 슬픈자의 마음을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심령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말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한편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동의어인데, 여기서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이시라
- '지식의 하나님'(*, 엘 데오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 이말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변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Klein).
사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다<1:6, 7>.
또한 브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브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도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 16:2; 21:2; 24:1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시편 139:7-18)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이죠.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전지성(Omniscience)
전능성(Omnipotence)
무소부재성(Omnipresence)  / Ubiquity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①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렘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지난 주간 끔찍한 사건이 있었죠. 
경찰 간부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그랬다는데,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감시 카메라는 의식했는지, 헬멧을 쓰고 범행을 했습니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마구 욕했습니다. 한참 욕을 해대고 있는데,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두사 omni- 는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무소부재하다고 간주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세분화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모든 결마다 스며있지는(범신론) 않으시지만, 어디에서 항상 계십니다.

비록 어디에서든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는 당신의 존재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방법으로 한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고(시편 46:1; 이사야 57:15) 상황에 따라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시편 33:13-14). 하나님께서는 시공의 모든 영역에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만 지협적으로 제한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또 매순간의 현재마다 계십니다. 어떤 분자와 원자 입자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존재하시기에 너무 작다 할 수 없으며, 어떤 은하계도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기에는 너무 광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창조물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능성들까지도 알고 계시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물의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모든 방법, 모든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십니다 (이사야 40:12; 나훔 1:3).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건의 안내자로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시편 48:7, 2; 역대하 20:37; 다니엘 5:5-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간청하는 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 (시편 46:1). 더할 나위 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된 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며 (골로새서 2:19), 지상을 덮고 있으며 지옥 문이 이기지 못할 온 교회들 안에 신비롭게 존재하십니다.

인간 정신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듯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설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인이 가는 곳으로, 악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끝없는 분노 아래 고통 받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 25:41).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분리된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4:10이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악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있는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견뎌야 합니다. 악인을 따로 떼어 놓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니 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존재로 채우시며 (골로새서 1:17)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1:3), 위의 역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되 반드시 축복해야 할 곳에만 존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과 떨어져 계신 것처럼 (이사야 52:9), 악인을 멀리 하시고 (잠언 15:29) 마지막 때에는 어둠에 매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지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고통 당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들이 자신들이 처한 영원한 상태로 인해 괴로워하고,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 즉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모든 축복으로부터 깊은 단절을 만든 그 죄를 끊임 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자로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항상 존재하시지만, 진노 외에 어떤 속성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국에도 존재하시며, 우리가 여기서는 감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모든 축복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가지 모양의 축복, 여러 가지 모양의 사랑, 여러 가지 모양의 친절, 그야말로 진노 외에 그 모든 것을 보이시며 천국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 (시편 139:11-12),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사야 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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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

1.  거룩하신 하나님
2.  영원하신 하나님
3.  전능하신 하나님
4.  전지 하신 하나님
5.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6.  의로우신 하나님
7.  사랑의 하나님
8.  영원하신 하나님
9.  진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0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1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 -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다(카도쉬)

 '거룩'이라고 하는 개념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분리, 즉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신적인 세력들이나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숭배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 세계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는 불가침의 존재이며, 분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의 거룩성은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본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거룩성은 정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힘으로서 심판과, 사랑의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에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45;레19:2;레20:7;레20:26;민15:40)

거룩하신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개시한 주전 739년 경의 유다 왕국은 그야말로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시되고 이방의 우상 숭배 풍조가 횡횡하고(참조; 사2:6-8), 정치가들은 하나님 대신 이방의 군사력을 의뢰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관원들과 결탁하여 '악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참조; 사1:23). 이에 선지자 이사야는 비분 강개하여 성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은 유다 민족의 부정과 불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큰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참조; 사6:5).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의 불의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신 '거룩하신'분으로 성경은 증언을 합니다.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룩의 뜻

'거룩'에 대해 구약에서는 '카도슈', 신약에서는 <하기오스> 말로 표현되었는데 이에 대한 원뜻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된 상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첫째, 죄와는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윤리,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 적극적인 의미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신의 속성'을 지니신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 하나님도(참조; 레11:44, 45; 요17:11) 성자 예수님도(참조; 막1:24; 요6:69)또 성경 하나님도(참조; 마3:11; 눅3:22)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인간(성도)도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참조; 출26:33; 레1, 8장; 고전1:2).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

 그렇다면 '거룩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어떤 관계로 계시는가?

1) 존재적으로 구별되신 분이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위엄스러우신 분'(출15:11)이 누가 있겠느냐고 모세는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인 만물과 인생들과 '구별'된 '창조주'요 '섭리주'로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인간'과 '곤충'과는 엄연히 '존재적'으로 구별되듯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한 '신'으로서 우리 인생들과 구별된 분이심을 뜻합니다.

2) 완전 무흠하신 분이심
'거룩…거룩…거룩'(사6:36)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 무흠'하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아무리 의로운 인생일지라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삶에서 도덕적으로 '흠집'이 없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민족의 불의와 부정에 비분 강개한 '이사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달리 존재적으로는 '신'이시요 윤리 도덕적으로는 '완전 무흠'하신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인간과 인간 세계와는 '분리되신'분으로 계심을 인식합시다.

3. 거룩하신 하나님의 특성

1) 죄악을 행치 않으심
'그러므로…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며'(욥34:10). 하나님은 인생들이나 창조하신 만물들에게 결코 '악이나 불의'를 행치 않으십니다. '죄악'을 불인정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사59:1,2 ;합1:13).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시험받을 때에…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약1:13)고 원망 불평하지 말 것을 주의 시켰습니다.

2) 거룩하심을 요구하심
 소극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악을 원치 않으시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인생들의 '거룩한 행위'를 기뻐하십니다(참조; 20:26; 잠15:9).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 '거룩함에 이르라'고 요구하십니다(참조; 레11:44,4; 히12:14; 벧전1:15,16).

3) 거룩한 희생을 치루심
 그런데 이 하나님의 '거룩성'이 온전히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이요, 십자가의 대속 사건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적극적인 거룩적 행동'이 하나님께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지어 낸 신화적인 신과 다를 바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요 또 인생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분으로만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거룩을 행하셨으니 바로 불의한 인생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인생들의 죄값을 몸소 담당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인생들의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4.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1)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힘입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요구를 반영해 줍니다. 그 율법안에서 인생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참조; 롬7:12-15). 그러므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힘입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참조; 롬3:21,22; 히4:16).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되는 셈입니다(참조; 롬3:25-27).

2) 겸손함과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함
 성도들은,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 거룩자요 우리는 항상 상대적 불완전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허'한 자의식을 지니고, 늘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구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악에서 떠나 계시다는 의미임(히7:26)
 b. 하나님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심(레11:45)

1.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

a.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심
 스스로 거룩하다 선언하심(렘11:45),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이 없으심(고후7:1), 영광을 지니시며 위엄을 지니심(출15:11), 사람이 가미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심(삼상6:20), 마땅히 경배의 대상이 되심(시99:9)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사6:3), 만국에 의로운 일을 펼치심(계15:4), 강포와 궤사가 없으심(사53:9), 악이 없고 흠이 없으심(히7:26)

b.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함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사랑하심(민12:8),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심(대하20:7)
믿음이 돈독한 자를 사랑하심(약2:23)

c.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거룩함
 성도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심(레11:45), 어린이와 같은 심령 상태를 요구하심(마18:3), 더러운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심(눅13:2,3), 영혼의 의로움을 요구하심(마5:20), 신령한 제사를 요구하심(요4:24) 신실한 믿음을 요구하심(요8:24)

d. 하나님이 성도에게 거룩한 목표가 되심
 성도는 더욱 큰 은사를 목표로 함(고전12:31),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상을 목표로 함(빌3:13,14)  세상을 이김(고전9:24)
e.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심
 우상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레26:1), 사탄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마4:9), 피조물에 대한 경배는 잘못됨(롬1:25), 오직 하나님께서 경배해야함(사6:1-5)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역

a. 거룩한 약속을 주심

 ㉠ 믿음의 사역자에 대해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한 자는 별과 같이 비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심(단12:3), 구제하는 자에게 큰 상을 약속하심(막9:41),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평강을 약속하심(롬2:10), 율법을 실행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심(약1:25)

㉡ 회개하는 자에 대해
 회개를 기뻐하심(눅15:7),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으심(욜2:13), 성령을 주심(행2:38), 구원하심(시34:18)

㉢ 고난 중에 있는 자에 대해
 밝은 날을 주심(시30:5), 구출하심(시34:19,20), 보호하심(시41:3), 위로를 주심(사43:2), 평안한 길을 예비하심(요14:1,2), 슬픔과 고통에서 구원하심(계21:4)

㉣ 시험받는 자에 대해
 능력을 주심(눅10:19), 안전함을 주심(눅22:31,32),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롬16:20), 피할 곳을 주심(고전10:13), 시험을 받을 때에 도우심(히2:18), 최후에 승리하게 하심(약4:7)

㉤ 모든 성도에 대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심(시37:3), 축복을 주심(막9:23), 기도의 응답을 주심(막11:24), 영원한 생명을 주심(요3:14,15), 영적인 은혜를 주심(요6:35), 구월을 주심(롬1:16)

b. 거룩한 부르심
㉠ 거룩한 음성으로 부르심(사30:30)
㉡ 하나님이 성도를 세우기 위해 부르심(롬8:29)
㉢ 거룩케 하시려고 부르심(살전4:7)
㉣ 사랑을 통해 부르심(롬12:1,2)


하나님의 속성 2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엘로헤-올람 예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은 먼저 그가 만물과 모든 생명이 있기전에 계셨고 또한 행동하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분은 세계가 있기 전에 계셨으며, 모든 피조물이 없어진 후에도 계실 분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 곧 이 세상, 이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초월해 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물처럼 시간을 한계로 삼고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벧후3:8).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하여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의 인간의 삶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참조;시103:15). 기독교 신앙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은 피조물로서 시간의 한계에 지배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확실성 속애서 하나님을 향한 의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존재의 궁극적인 한계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젊은'(시103:5)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아래 복종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기독교 신앙은 잊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다'(시90:2)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 그의 영원성을 드러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시간의 연결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영원한 하나님에 대하여 상고해 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영원하다는 말의 뜻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문제인데, 이 속성이란 말의 뜻은 어떤 사물의 성질 혹은 어떤 것의 유일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고 영원하시다라는 사실을 성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참조; 요8:58; 딤전1:17;딤전6:16;히1:12;히13:8;계1:4).

1)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욥36:26). 욥은 광대무변하신 하나님께 대해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계22:13). 또한 요한은 주님은 시작과 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반드시 마지막이 있는 법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여 있는 재료에서 물건을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해 있지 않은 재료에서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항상 완전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말은 시간과 관계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즉 시작과 종말이 없는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이 되십니다(참조; 요1:3;벧후3:8). 다시 말하면 모든 창조물 안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모든 만물을 영원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시간은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한하에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한정된 지식 혹은 지성을 갖고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볼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영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물질적인 외형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본질이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거울 속에 나타나 있는 자기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이난 속성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

 하나님은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십니다(참조; 출3:14). 성경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창21:33),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지존 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신다'(사57:15)라고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데(딤전6:16)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신적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영원하신 하나님

1) 성경의 증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성서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시93:2에 보면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6:34; 시106:1) '자비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41; 역대하5:13)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2) 교회사적인 증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시점인 사도 후 시대를 살펴보면 네로 황제 이후, 이백오십년에 걸친 박해 속에서 폴리갑, 키프리안 같은 교부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들은 살아 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행7:59,60).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교했던 많은 순교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원은 '하나의 현재'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참조; 시2:7;시90:4;벧후3:8). 하나님께서 현재를 살피시고 계시듯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과거와 미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참조; 행5:5;행6:10,11). 에녹과 동행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축복받는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참조; 창5:22;고후13:13).


하나님의 속성 3 -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파라…데오 판타 뒤나타 에스티)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관한 교훈 중에 한 부분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재물에 집착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난처한 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재물은 일상적인 생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이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기의 생명의 근거, 삶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데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이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신을 찾고 의지하는 요인 중 가장 비중이 큰 이유가 있다면 그 신의 '전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도 인간의 구원 문제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계시해 주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참조; 창28:3;겔1:24;계4:8). 그 '전지성'이 있기에 그 사랑도, 그 공의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으시며, 인생들을 죄와 죽음과 허무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전능성의 특징

1) 모든 속성들과 조화를 이룸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결코 그분의 거룩한 소성들과 상치되는 일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악'은 행하실 수 없으시며(참조; 약1:13),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결코 '거짓'도 행치 못하십니다(참조; 히6: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은 항상 그분의 영원, 사랑, 거룩 공의의 속성들 안에서만 발휘됩니다. 만일 악과 거짓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그분은 결코 '전능자'라고 볼 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결여 된 존재이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결여 된 '신'이 되시기에 참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그 진리 되신 속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2)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룸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시되 물질은 물질의 고유한 성품대로, 영적 세계는 영적 세계의 성품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피조물'로서의 제한성을 지니도록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과 계속 교제를 해야만이 생존, 발전, 번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창조적 원리에 모순 되는 일까지는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 거룩하신 속성과 또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는 인생들만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불신하면서도 전능하신 축복을 누리기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고 요구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1) 천지를 창조하셨음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렘32:17).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무에서 유'를 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을 통치하심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요한 사도가 이 고백을 할 때에는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였고 교회도 역시 '로마'로부터 모진 핍박과 환란을 당할 때였습니다(참조; 계1:9). 한마디로 불의의 권세가 난무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교회는 '풍전 등화'격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때에도 요한 사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역사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께서 '전능자'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상과 교회를 그 거룩하신 뜻대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인생들을 구원하심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36). 이 대답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내용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실존적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죄인 된 인생을 죄와 사망과 형벌에서 구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자신의 의에 대한 무능과 연약함과 모순성에 실망과 좌절을 하기도 합니다(참조; 롬7:24). 그러나 신앙이란 '나'를 바라보는 신념을 초월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나 같은 죄인 까지도 능히 구원하실 수가 있음을 감사합시다(참조; 눅3:8)

3.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자세

1) 성경 말씀을 신뢰해야 함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의 뜻을 오류 없이 종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정하는 첩경이 됩니다(살전2:13).

2)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함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음과 악도 주관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선한 일, 평탄한 길에서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게 악하고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3) 하나님의 권세를 의뢰해야 함
 현세에는 얼핏보면 사탄과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장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불의한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참조; 시43:13; 계6:15-17) 성도들은 의의 보상을 누릴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권세를 의뢰하고 악한 세대 속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합시다.

a 전능함은 인간의 힘이 큰 것을 나타냄(왕상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b. 전능함은 위대한 것을 나타냄(사28: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 물의 창일함같이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1.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a. 하나님의 이름 -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창17:1)
 b. 천지 창조 - 모든 것을 다 이루심(사44:24)
 c. 자연 만물을 제어하시는 역사(암4:13)
 d. 인류 열방을 통제하심(암1:1,2:3)
 e. 만물 질서를 통제하심(시115:3)
 f. 죽은 자를 살리심(롬4:17,24)
 g.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심(사40:28)
 h.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심(창18:14)
 i. 그리스도의 전능하심
     질병을 치유하심(마8:3), 귀신을 내어쫓으심(막1:23-27), 사탄과의 시험에서 승리하심(마4:1-
     11), 죽음의 권세를 이기심(요10:17,18), 심판의 권세를 이기심(마25:31-33)
 j. 성령의 전능하심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심(사11:2), 복음 위에 역사하심(롬15:18,19)

2. 하나님의 전능성의 본질

 의로움(욥8:3). 멸시함이 없음(욥36:5). 큰 권능임(욥37:23). 공의임(계16:7). 힘이 큼(욥24:22). 완전함(고후6:18)

3.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창조하심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심(히11:3), 모든 만물을 창조하심(엡3:9), 질서를 창조하심(창1:2-
     19), 헛되게 창조하지 않으심(사45:18),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창조하심(시19:1),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심(행17:25)
 b. 통치하심
     영원히 통치하심(출15:18), 의롭게 통치하심(삿5:11), 만유를 통치하심(시103:19),
      인간 나라를 통치하심(단4:17), 이방 국가를 통치하심(대하20:6)
 c. 복 주심
     현세에 복 주심(창24:35), 병을 없게 하심(출23:25), 백성 위에 임하심(신23:5), 다양한 은사로
     축복하심(마25:15),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대적하는 자를 치심(시18:32), 큰 구원을 주심(시18:49, 50), 총명을 주심(욥32:8),
      생명을 주심(욥33:4)
 d. 경책하심
     ㉠ 때에 따라 경책하심(시103:9)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죽기까지는 하지 않으심(시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 하나님을 떠난 자를 괴롭게 하심(룻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
             게 하셨느니라…
       ㉣ 사람의 경책은 아첨보다 귀함(잠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 전도자는 말씀을 전파할 때 경책하기를 힘씀(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컬은 실례

      축복 기도 때에(창28:3), 사람의 맹세에(욥27:2), 하나님을 찬양한 때(계4:8
     

하나님의 속성 4 - 전지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기노스케이 판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는 무엇일까? 이 말 속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예지만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앞으로 되어 질 모든 일들(특히 신앙과 구원에 관련된)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측면만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전지 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유 중 핵심은 그런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만사를 내다보되 남김없이 똑똑히 내다보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어질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까지 보시는 분이시다(참조; 요2:25).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어둠 자체도 그 앞에서는 이미 어둠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앞에서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 일은 모두 실패하고만다. 이것이 바로 전지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5,6).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언급하였는데(삼상2:3;욥12:13등), 우리 인간들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해하려는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지적 속성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고자 했던 자들에게 많은 오해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전지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믿음에 굳게 서는 신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1.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정되어서 과거의 한 부분과 현재의 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전 우주 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전체 지식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이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와 양이 너무 적으며, 인간의 기억력은 너무 약하며,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처럼 이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과거가 있다면, 그 과거는 하나님의 지배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하나님에게는 생소한 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하나님은 알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현재만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즉 시간의 양과 질 모두를 자신의 지식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대해서도 모두 아시는 동시에, 창조된 시간이 그 때부터 그 시간이 계속될 영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결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 현재적인 결단이며 그 믿음은 모두 동일하게 귀한 것들입니다.

2.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공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인간은 현재 자기 주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지구 반대 편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몸 안에서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통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바울은 롬8:22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우리가 아나니'. 바울의 이같은 고백은 바울이 자신의 지식만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전지하신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바울은 각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간에 의해서 제약받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던 간에 모두 아시는 '전진하신 하나님'입니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심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지식의 대상인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참조; 롬8:22).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털의 수를 아실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참조; 마10:30),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전지하신 신적 속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게 된 것도 죄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단지 아는 것으로만 끝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살피시며 그들이 완전히 회복될 날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을 받은 피조 된 인간 이성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혜를 사용하여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한 피조 된 세게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곡된 인간 이성을 의지하기보다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오류 없이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의 역사를 알고 진행하심(행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극히 작은 것도 아심(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1. 전지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은 별의 수효까지 세심(시147:4,5)
 b. 하나님은 음부와 유명도 아심(잠15:11)
 c. 인간의마음과 행사를 아심(시33:13-15)
 d. 인간의 계획과 걸음을 아심(욥14:16)
 e. 인간의 머리털까지도 세심(마10:30)
 f. 미래의 일을 아심(사44:28)
 g. 영원 전부터 아심(렘1:5)
 h. 심령을 감찰하심(잠21:2)
  i. 사람의 의식주를 아심(마6:8)
 j. 최후의 날과 때를 아심(마24:36)
 k.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을 가지심(골2:2,3)

2.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시간을 초월하심

 ㉠ 시간을 만드심(창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 과거의 역사를 주관해 오심(행14:15-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 인생의 미래는 불확실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심
① 하나님의 역사가 영원함(전3: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② 하나님의 미쁘심이 영원함(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③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함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공간을 초월하심

 ㉠ 하나님은 성도의 가까이에 계심(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 천지에 충만하심(렘23:24)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 성도 가운데 계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성도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시139:7-12)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
      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a. 모든 인생을 돌보심(시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b.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을 감찰하심(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c. 만물을 새롭게 하심(계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의 속성 5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웨로 엘로헤이 메라 호크)

본문의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으로 긍정을 강조하고 있다. 먼 데 하나님임을 주지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셔서 그의 피조물들의 행위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이 지역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일찍부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 왔다. 이 '무소 부재'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편재한다는 범신론적인 개념을 뜻하지 않는다. '무소 부재'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공간의 제한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어디서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능력에 대하여 그 어디에도 닫혀진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소 부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즉 환경, 시간, 공간에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초월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혹은 '편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와 같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그 사실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큰 힘이 되어 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들

 하나님께서 어느 곳, 어디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성경의 증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릇된 신관을 지적해 줍니다.

1) 이상주의적 신관.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은 오직 '하늘 보좌'에만 계시는 지고하신 분으로만 여기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 신관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비인격적'이며 '비윤리적'인 '우상'으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즉 오직 '자기 세계'에만 머무는 하나님, 그래서 인간의 세계와 그 문제에는 냉담하며, 인간들이 울부짖어도 일언 반구의 대답도 없는 하나님, 바로 '모리아' 산에서의 '바알' 신과 같은 하나님입니다(참조; 왕상18:26-28). 또 '하늘 세계'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는 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 세계'는 '악'이요, '하나님 세계'는 '선'이기에 선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세계와 직접 연관을 가질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참조; 요일4:1-3). 그러나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사랑'의 인격자로서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 세계의 문제에도 동참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참조; 창28:15; 신20:1;마28:20)

2) 범신론 주의적 신관.
즉 이상주의적 신관과는 아주 반대의 생각으로서, 하나님께서 '무소 부재'하신다면 모든 사물이나 사람 속에도 천래적으로 임재해 계시다는 신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무나 바위 속에도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깊은 영혼 속에도 '신'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심', 혹은 철학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순수이성'도 이 범신론의 신관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상주의적 신관 및 범신론주의적 신관은 성경의 '무소 부재' 하신 하나님과는 배치되는 극단적 신관임을 기억합시다.

2.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

 그렇다면 성경의 '무소 부재'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떤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유한성'과는 달리 '전능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 시간, 공간을 초월하심을 강조한 말입니다.

1) 환경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욥11:7-10; 시145:3).
인간은 환경에 따라 제약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세력이나 환경에도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2) 시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시90:2;시102:12).
인간은 '시간'에 제한받는 존재이기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적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자'이시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시간에 제약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3) 공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왕상8:27;사66:1;렘17:27,28).
이와 같은 무한성을 '편재성'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보좌'에서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고수'하시면서도,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고전 15:28)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또한 '신비'에 속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인간 편에서 볼 때나 신비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과 인생들

1)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하신 섭리주요 심판주가 되심
'하늘, 음부, 바다 끝, 흑암'(시139:8,9)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밖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롬1:20)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소 부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예입니다. 그리스도는 환경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셔서 만유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의 '실체'요 '증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정하신 사람으로…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고 했습니다. 이 때 인생들은 '불가지론'이나 '범신론'을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2) 성도들에게는 보혜사가 되어 주심
 하나님께서는 '네가 물 가운데…불 가운데'(슥2:10) 지날 때도 함께 하사 보호해 주신다고 하셨으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마18:20) 곳에도 함께 계실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마28:20) 곁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고집쟁이 '야곱'처럼 '루스 광야'에서 고난의 '돌베게'를 베고 공포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바로 그 환경과 장소마저도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전'(창28:17)임을 고백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편재하심(시139:7-12)
 * 하나님은 성도 가까이 계심(렘23:23)
 
1. 하나님이 계시는 곳

a. 높고 거룩한 곳에(시57:15)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b. 음란과 더러운 것이 없는 곳에(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c. 시온에(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d. 성전에(삼하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e. 성도가 어디 있든지(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f. 하늘과 땅에(시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성도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

a. 성도의 우편에 계심(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b.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c. 먼데 계시지 않음(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d.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히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e. 하나님은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음(행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f.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가까이 하심(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g. 성도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음(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언제나 임재하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b. 하나님의 눈이 어디나 있음(잠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c. 하나님의 성령이 어디나 있음(고전2:10-13)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d. 사람은 하나님이 경자를 벗어날수 없음(시139:9-12)

하나님의 속성 6 - 의로우신 하나님

주는 의로우시며(차띠크아타)

본문에서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형용사는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이다. 의로운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에게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람들에 대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해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규범과 판단들은 의로우며, 그 의는 영원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님의 사람을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적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환난 속에서 승리를 확신케 해주신다. 또한 그 '의로우심'으로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참조; 시97:1,2). 하나님은 모든 행사와 그가 만드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자체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그의 '의'의 개념과 종류를 살펴봄으로써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의(義)'의 개념

1) 구약의 개념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느9:8). 구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참조; 스9:15; 렘12:1; 단9:14). 이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카혹은 '체데크'로 이 단어의 뜻은 표준, 방정(方正), 정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본질적 의'이며,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행동적 의'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용어로 사용될 때 전자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미하며, 후자는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2) 신약에서의 개념
 신약에서 '의'를 나타내는 헬라어는(디카이오스)와 (디카니오수네)이며 이 단어는 '어떤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신약 시대 당시에는 주로 사회에 있어서나 하나님 앞에 있어서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윤리적 개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단어였으며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구약 성경 속에서의 '의'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의'가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두 종류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두 종류의 '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주임을 의미하는 '주재적(主宰的)의'와 심판주임을 의미하는 '분배적(分培的)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주재적 의
'주재적 의'는 그 명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자로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차별이나 불의하게 판단하시지 않고 그의 신적인 속성에 따라 모든 것을 공평하게 결정하십니다. 시7:11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때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의혹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8:3)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판단하시고 집행하심에 있어서 언제든지 공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써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2) 분재적 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이 '분재적 의'는 하나님이 현세에 있어서나 최후 심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영생 또는 영벌로 결정하실 때 매우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 '분배적 의'에 대한 설명은 성경 마25:31-46에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 보면 마지막 날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앉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세상에서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도와 주었으니 내 상을 받아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설명을 들은 후 그들은 임금의 판단이 옳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은 그의 '의'에 기초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비참해지고,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은 자들이 더욱 부요해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은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살피시며, 자신의 의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지시지 않으시는 분으로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단지 심판이 잠시 지체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함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일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의는 사람의 온전한 상태임(욥22:3)
 *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롬3:24,26)
 * 하나님의 의는 재판 과정에서의 공정함임(사11:4)

1. 의의 개념

a. 구약 시대의 의

㉠ 개인의 상태에
① 성결함(욥4:17)  ② 행위의 온전함(욥22:3) ③ 판단이 공정함(사11:4) ④ 정직함(렘4:2) ⑤ 진실됨(시15:2-4) ⑥ 평강(시72:7) ⑦ 화평(시85:10) ⑧ 고아를 도움(욥29:12-15) ⑨ 소경과 과부의 어려움을 대신함(욥31:16-19) ⑩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잠29:7)
㉡ 사회적 상태에서
① 공동사회의 화목을 유지하는 힘(시15:2-5), 바른말을 함(사59:4), 사회 관계의 요구를 다함(창38:26)
㉢ 법적 관계에서
① 재판을 공정하게 함(신16:18) ②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베푸는 공의(시82:3) ③ 억울한 일이 없게 함(사29:21) ④ 고아나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음(렘22:3)

b. 신약 시대의 의

㉠ 윤리적인 의
       ① 인간적인 욕망을 이겨냄(롬1:26-32)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 영적인 의
①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인간의 상태(롬3:24,26)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③ 율법에서 풀려난 상태(롬2:27)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상태(롬:22) ⑤ 하나님을 경외함(행10:22) ⑥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얻어짐(롬6:13) ⑦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쳐야 할 단계임(마6:33)

2. 하나님의 두 가지 의

a. 세상을 통치하시는 의

㉠ 그 백성을 인도하심(시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심(시65: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 의로 소성케 하심(시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피난처가 되어 주심(시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 유일한 구원주이심(사45:21)
너희는 고하여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b. 세상을 심판하시는 의

 ㉠ 만민을 심판하심(사51:5)
㉡ 공의로 심판하심(사11:4)
㉢ 행위대로 심판하심(왕상8:32)
㉣ 악인에 대해 분노하심(시7:11-13)

c. 성도의 의

㉠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자
① 하나님을 믿는 자(롬4:2,3) ②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시103:11) ③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시37:39,40) ④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롬6:18,19)

㉡ 성도가 의롭게 되지 못하는 이유
①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사48:18) ② 범죄함으로(겔33:12) ③ 자기의 의만을 세움으로(롬10:3) ④ 화평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약3:18)

㉢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축복
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시17:15) ② 몸은 죽으나 영혼이 삶(롬8:10) ③ 구원을 얻음(잠11:6)

하나님의 속성 7 -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이사랑은 다른 여러가지 속성중의 하나로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향하신 모든것을 충분하고도 궁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포괄적 개념인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 백성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나타나고, 표현되고, 계시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인 것이다. 또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 말할때, 이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하나의 정의(定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을 뒤집어서 '사랑이 하나님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즉 인간을 향한 그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을 인식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영이시며(요4:24), '사랑이시다'(요일4:7,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소유와 사랑'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주요 부분이 아니라 장식품에 불과하며 돈과 권력과 명예와 더불어 인간의 이기적인 소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느 누구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줄 모르겠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지혜로운 자를, 힘 있는 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를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수백 년 된 나무와 돌을 경외하여 하나의 영으로 믿는 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관계로부터 우리는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된다 함은 자녀 될 자가 자신의 수태 시기, 성의 구분, 부모에 대한 선택 등을 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성령의 증거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된 그 자리를 차지할 자녀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아무 공로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참조; 롬8:16).

2) 우리는 하나님을 따릅니다.
가장 훌륭한 교육은 부모나 스승이 몸소 바른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자녀나 제자들이 그들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이나 선에 대해서 도무지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존재입니다. 때로 우리 신앙의 양심은 너무도 무디어져서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의 상처가 악화되어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은 강팍하게 되어 마비된 양심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며(참조; 롬8:14), 이로써 우리의 무디어진 양심은 치료를 받고 생명을 건질수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희생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은 조건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소돔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헤아리는 아브라함의 노력이 나타나 있으며, 요나서에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요나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수많은 불법을 보면서도 진노보다는 용서를 하려 하시는 그의 참으심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으로 완전한 뜻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참으심을 진노와 멸망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내어 보내 주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만물을 다 그의 손에 두시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셨으며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요3:35,36).

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는 바로 우리의 사랑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참조; 요4:11) 성경에는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내 놓은 그 생명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의리를 위해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순간적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게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남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진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그것은 참음이 없는 사랑이요, 희생이 없는 사랑이요, 행함이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꾸준히 참고 더 나은 안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엄숙히 경종을 울려 주십니다.

사랑의 어원적 의미
 ㉠ 즐거워하고 만족하게 여김(잠5:18,19) ㉡ 특별한 대상을 소중히 여김(신33:3) ㉢ 은혜를 베풂(출3:21) ㉣ 악을 행치 않음(롬13:10) ㉤ 벗이 되어 친함(약4:4) ㉥ 아끼고 사랑함(요12:25)

사랑의 성경적 정의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마22:40) ㉡ 형제를 근심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롬14:15) ㉢ 수고와 인내로 봉사하는 것(살전1:3) ㉣ 죽음과 같이 강한 것(아8:6) ㉤ 두려움을 이기는 것(요일4:18) ㉥ 허물을 가려 주는 것(잠10:12) ㉦ 거짓됨이 없는 것(롬12:9) ㉧ 마음을 같이하는 것(빌2:2)
사랑의 표준이 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심(엡5:1) ㉡ 그리스도의 성도를 사랑하심(엡5:2) ㉢ 성령의 돌보시는 사랑(롬8:26)

사랑이 초월하는 것
 ㉠ 거짓(롬12:9) ㉡ 율법(롬13:8) ㉢ 방언이나 예언(고전13:1,2) ㉣ 믿음이나 소망(고전13:13) ㉤ 죄(벧전4:8) ㉥ 시간의 한계(고전13:8)

1.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이유
 ㉠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요일4:10) ㉡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 사역을 실행하시기 위하여(요3:16)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요5:20)

b.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 그리스도를 사랑하심
①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요17:23,24) ②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임(요5:20) ③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아들에게 보이셨음(요5:20) ④ 만물을 아들의 손에 붙이셨음(요3:35)

㉡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심
① 특별히 기뻐하시고 택하셨음(신7:7) ② 친히 애굽의 손에서 인도해 내심(신4:37) ③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신7:13) ④ 기업과 자손을 복으로 주심(신7:13) ⑤ 이스라엘을 잠잠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심(습3:17) ⑥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임(사63:9)

㉢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사랑하심
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심(잠8:17) ② 고아와 나그네를 더욱 사랑하심(신10:18)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사랑하심(시103:13,14)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녀된 자를 사랑하심(요일3:1) ⑤ 의인을 사랑하심(시146:8) ⑥ 부르신 성도들을 사랑하심(유1,2)
c.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
 ㉠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심(신7:9) ㉡ 위험에서 건지시고 높이심(시91:14) ㉢ 멸망에서 건지심(사38:17) ㉣ 하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심(말3:17) ㉤ 인생을 평안케 하심(시119:165) ㉥ 영원한 위로를 주심(살후2:16)

2.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a. 희생적인 사랑의 내용
 ㉠ 당신의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마20:28)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사람과의 화목함을 회복하심(롬5:10,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갈3:13)

b.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도의 자세

 ㉠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마22:37) ㉡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함(마10:37) ㉢ 목숨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함(요13:37,38)
우리는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본분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행하는 자녀의 모습을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20)고 외쳤던 야고보의 교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행함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더 많은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8  영원하신 하나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아니 예호와 로 솨 니티)

원문에서 '변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솨나)이다. 이 동사는 성격이나 방법의 변경, 또는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해 주는 동사로 쓰여 지난날 야곱의 자손을 향해 지녔던 그 모든 것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가 말씀하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완고함이나 틀에 꽉 짜인 상태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될 경우 하나님은 역사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뜻의 요동치 않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러시아 속담에 '변치 않는 친구를 구하려거든 무덤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혹은 이웃에게 실망을 느끼는 점 중에 한 이유가 있다면 '변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변덕은 사회에 '불신, 위선' 풍조를 만드는 제 일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과 사상과 의지에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약1:17) 없으신 '불변의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미쁘시며 신실하신 분'(고전1:9; 살전5:24)으로 증언하며, 인생들의 영원한 '의지자'로 권하고 있습니다. 함께 그와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이유

1) 절대자이시기 때문임
 불변한다는 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변동'은 그 스스로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가령 인간의 변덕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 자신의 내적인 강박성, 혹은 외부의 압력 등을 다 수용하는 '허약성'에서 기인되기도 하며, 더 중요한 원인은 자기 스스로 어떤 일에 흥미를 잃는 데서 '변덕'이 생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 '변동'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할 때 '변혁'이라 하고, 무지와 이기심에서 기인한 것은 '변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하며 '상대적인 존재'이기에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 이십니다. 창조주요, 절대자요, 자존자이시기에 어떤 외적인 요인과 영향력에도 전혀 자유로우시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2) 완전자이시기 때문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인생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본질적으로 변화와 변혁은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성장, 발전해 나가는 데는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그 변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수시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가치관, 시대의 풍조도 사람의 변화에 따라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시행 착오도 속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히13:8)하신 '완전자'이시기에 본질적으로 '변화'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그 사상과 의지도 그러하며 그 행사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 그리고 뜻 중에 '변화'가 있는 듯이 보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들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맞추신 것이지 그 궁극적인 뜻과 행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변치 않으시는 내용들

1) 본질과 성품
 하나님은 '신'으로서의 본질, 그 능력과 거룩하신 성품들이 변치 않으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이 땅에서 육신과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들의 죄악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품위와 능력과 성품에는 조금도 흐트러 짐도, 또 침해도 당하지 않으시고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롬1:4) 하심으로써 그 '신성'이 재확인되셨으며, 그 인생 구원의 의지도 불변하심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도 그럴진대, 성부, 성령 하나님이야 그 무엇에 의해 변함을 받으시겠습니까?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니'(말3:6).

2) 사상과 뜻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하나님의 사상은 그 '창조 사역'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영생, 번영, 행복'을 제공하시기 위해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신 것으로(참조; 창2:9,16,28), 이 사상은 인간의 타락, 죄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창세기에 언약하셨던 그 창조 원리가 모두 인생과 만물에 적용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상을 고수하기 위하여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정하시고(참조; 창3:15)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참조; 엡1:10,11). 오늘도 그 뜻 역시 변치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코 '다른 구세주'(참조; 행4:12), 다른 '구원의 방법'(참조; 갈1:7-9)을 제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 '원의'에 대해 '후회'(참조; 삼상15:11,35) 하시며 '한탄'(창6:6)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도 있지만 그 '후회와 한탄'은 '창조 원의'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변심과 타락'에 대한 창조주의 동정심과 긍휼심을 묘사한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실수와 실패에 대한 어버이의 걱정과도 같은 것이니, 결코 자녀에 대한 어버이의 뜻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만 이러한 하나님께서도 그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의 회개'일 것입니다(참조; 욘1:2; 욘3:4,10). 그 '자비의 변화'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구속원의'의 변치 않는 언약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참조; 사14:24).

3. 하나님과 인생

1) 하나님의 공의가 불변함을 유념합시다.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그것에게 밟힘을 당하리라'(사28:18). 이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피조물' 들을 '신'으로 삼은 죄에는 필경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자에게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신 맹세는 세상 끝날 '백보좌 대심판'에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참조; 계20:11-15).

2) 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함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큰 안위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와 '왕'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언약하신 '영생'은 기필코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추호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참조; 롬8:37-39).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6,27)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1.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a. 스스로 계신 분이심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출3:14)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자이심(요8:58)
㉢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이심(계1:18)

b. 결코 후회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으심(롬11:29)
㉡ 하나님의 통찰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약속하신 뜻이 후회없으심(히6:17)

c. 변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꾀하시는 일이 영원함(시33:10)
㉡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함(대상16:41)
㉢ 항상 동일하심(시102:25-27)
㉣ 변역함이 없으심(말3:6)
㉤ 거짓 됨이 없으심(딛1:2)
㉥ 변동이나 변화가 없으심(약1:17)
㉦ 알파와 오메가이심(계1:8-18)

d. 유일하심
 ㉠ 참하나님이심(요17:3,22)
㉡ 구원의 유일한 주관자이심(요14:6)

2. 하나님의 변치 않는 것들

a. 뜻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뜻은 광대하므로(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됨(엡1:9,1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b. 하나님의 말씀이 변치 않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임(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합치됨(행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성도에게는 신앙의 원동력이 됨(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c.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음

모두 성취됨(눅1:32,33)
저가 큰 자가 되도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정한 때에 성취됨(행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약속이 폐하지 않음(사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고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d.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인자는 영원함(시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하늘과 땅에 충만함(시108: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성도의 삶의 근거가 됨(애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인자는 죄를 사유함(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속성 9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에메트-레올람)

본문에는 구약성서에서 아주 핵심적인 두 개의 명사가 나온다. 그 하나가(헤쎄드)이고, 다른 하나가(에메트)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시는 내용이다.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하여 하신 약속에 근거한 사랑, 그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 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그의 사랑의 진실함은 영원하다. 원문에서 '진실'이란 뜻으로 사용된(에메트)의 어근이 되는 (아만)의 기본 개념에는 '지지하다, 버티다, 지탱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에메트)라는 말 속에는 변치않고 지속되는 확실성, 신뢰성이라는 기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품성의 한 특징으로서 하나님께 자주 적용된다. 출34:6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구성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에메트)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가운데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서적 의미의 진실. 즉 참된 진실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하나님에게만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구약은 '에메트', 신약은 '알레데이아'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뜻은 대략 '진실, 참, 진리, 정말'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진실'이라는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관계된 사물'에 국한시켜 사용되었는데, 성경상의 '미쁘신 하나님'(참조; 시3:5; 살전5:24; 벧전4:19)에 대한 뜻이 바로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도(참조; 딤전1:12) 성경도(참조; 계19:9) 진실이요, 진리요, 미쁜 것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우리 인생들이 의지하고 헌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과 '인생'의 '교제의 기반'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근거

1) 참된 '신(神)'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하심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참된 살아계신 '신'이라는 의미에서 진실하십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 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주가 있으나…우리에게는 한 하나님…께서 계시니'(고전8:5,6)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진실하신 '신(神)'이 십니다. 인간들이 만든 '우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로 구체적으로 인생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요일1: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신적 능력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 권세와 의로우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들과 신화의 인물 중에 어느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진실성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2) 참된 능력으로 입증하심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신 내용과 '일치'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행사하시기에 '진실'하십니다. '내 입에서나가는 말도 헛되이…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형통하리라'(사55:11).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진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하신 '성경'을 그 신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오시고 있기에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그리스도는 온갖 방해와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시고 속죄 사역을 단행하시며, 끝내는 부활하심으로써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조작해 낸 목석의 우상, 사상의 우상, 정치의 우상, 희망의 우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우상들의 법과 교리, 이데올로기, 그리고 언약들이 거짓과 기만과 시행 착오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2. 진리이신 하나님의 특징

1) 거짓을 미워하심
 이처럼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신32:4)은 절대적으로 '거짓'을 미워하시고 대적하십니다. 이와 같은 성품의 특징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데 그 일례로 십계명을 살펴보십시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거짓을 버리고 진실로 행하라'는 것이 십계명의 의의입니다(참조; 출20:16). 특히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경배하고 섬기는 것'(롬1:25)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는 진리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본주의적 삶이 '죄'요 '거짓'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인정하고 불신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거짓된 존재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하에 있는 불행한 존재들입니다.

2) 거짓을 이기심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거짓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롬3:4). 일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해 보십시오. 그 사건은 진실이 거짓을 제압한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이 악마와 세상의 거짓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진실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엔 사탄의 거짓 권세가 못박힌 결과가 되었습니다(참조; 골2:14,15). 진실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언제나 세상의 거짓을 제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환경, 어느 처지에 있든지 '진리의 복음'을 의뢰하고 그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진실의 '결정체'이기에 그 진리안에서 행하는 자는 항상 악과 불의에 대해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참조; 고전15:55-58).

3. 진실하신 하나님과 인생

1) 진실을 사랑해야 함
 하나님의 '진실성'을 온전히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증거'(롬5:8)요, 참된 '인생 구원의 방법'(요14:6; 롬3:21-26)이요, 인생의 참된 '시금석'(눅2:34,35)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거짓'된 상태로부터 구출받는 것이됨을 기억합시다(참조; 벧전1:22)

2) 진실 안에서 행해야 함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3). 즉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교훈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고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진실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3) 그 진실성을 의뢰해야 함
'에메트'라는 말의 원뜻은 '든든한 기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앙의 기반'입니다(참조; 히11:1,2,6).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히16:18)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실성이 '영혼의 닻'(히6:19)이 되어 줍니다. 세상의 거짓, 불의의 풍랑이 드세게 휘몰아치는 때에도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 안에 삶의 닻을 드리운 인생은 복됩니다.

☆ 진실의 의미
 견고함(시12;2) 신실함(민12:7) 믿을 만함(사49:7) 틀림없음(호5:9) 신임할 만함(욥4:18) 참됨(욥9:2; 사37:18) 영구적임(수2:12) 말과 행동이 순수함(습3:9) 깨끗케 함(사52:11) 진리임(단4:34)
단순함(골3:22) 너그러움(롬12:8; 고후8:2)
☆ 진실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신32:4)
☆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심(시146:6)

1.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증거

진리의 근원들이 증거함
 하나님의 법임(시119:142-160) 그리스도의 진리임(요14:6) 성령이 진리의 영임(요14:17) 복음이 진리임(갈2:5,14) 하나님의 교회가 진실됨(딤전3:15) 하나님이 진실의 근원이심(시57:3)

참되신 하나님이 증거함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신이심(요17: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참되게 하심(요8:13-18) 사람에 의해 증거함(요10:41) 사람이 핑게치 못함(롬1:20)

2.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함은 하나님의 속성임
 진실이 많으심(출34:6) 거짓이 없으심(딤1:2) 성실하심(시100:5) 하나님의 길이 참됨(계15:3)
하나님의 행사가 진실함(시33:4)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함(요17:17)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에서 나타남(미7:20) 하나님의 구원이 진실함(시57:3) 하나님의 심판이 참됨(계16:7) 진실로 성도를 보호하심(시61:7) 왕위를 보호하고 견고케 하심(잠20:28) 진리로 공의를 베푸심(사42:3) 진실로써 판단하심(롬2:2)

거짓을 미워하심

거짓말
 사탄이 유혹하는 말(창3:4,5) 책임을 미루는 말(창3:12,13) 자기 죄를 부인하는 말(창4:9)
불순종하는 말(마21:29)
거짓의 이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사57:11) 사람이 자기의 정욕대로 행함(롬1:24,25) 양심에 화인맞았음(딤전4:2) 미혹의 영과 사탄의 지시임(딤전4:1)
거짓된 자를 치시는 하나님
 거짓 증인을 패망케 하심(잠19:9) 거짓말하는 자는 형벌을 당케 하심(행5:4,5) 하늘나라에 들이지 않으심(계21:27)

3. 진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진실해야 함
 말씀을 진실로 사모함(벧전2:2)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가짐(딤전1:5) 성도를 진실로 사랑함(고후8:8,24) 진실로 예배를 드림(요4:23,24) 말씀을 전파함(고후2:17) 생활을 진실하게 삶(롬9:12) 거짓말을 하지 않음(롬9:1) 간사한 생각을 품지 않음(요1:47) 참된 말을 함(고후7:14) 주의 일을 진실하게 함(엡6:21) 성도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해 줌(빌2:19,20) 참된 증거를 함(요삼12) 신실함(벧전5:12)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함
 사람이 의뢰해서는 안 되는 것
 무기(시44:6) 물질(시49:6,7) 사람(렘17:5) 자기의 의로움(겔33:13) 사람의 능력(렘48:7)
사람이 의뢰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시33:2) 하나님의 말씀(시119:42) 하나님의 약속(시31:19)
하나님의 의뢰하는 자의 복
 기쁨을 얻음(시5:11) 승리함(시22:4,5)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잠3:5,6) 기업을 받음(사57:13)
요동치 않음(시125:1) 평안함(사26:3) 구속받음(시34:22) 안전함(잠29:25)


하나님의 속성 10  자비로우신 하나님

1) 큰 긍휼로(우베라하밈 께돌림)

본문에서 '긍휼'로 번역된 단어(라하밈)은 '자궁'이라는 뜻의 명사(레헴)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때에 그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보호하여 출산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하였다(참조; 욥31: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임신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참조; 사46:3). 따라서 하나님(라하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거져 주시는 그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믿게한다.

2) 영원한 자비로(우베헤세드 올람)
오랫동안(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친절,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문헌에 대한 활발한 연구의 결과로 그 단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히타이트의 계약들이난 다른 계약 문서들에서처럼, 이스라엘은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헤세드)는 '자비'가 아니라, '계약 의무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의 하나님에게 보여야 하는 충성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음란한 아내 '고멜'을 용서해 주는 호세아의 사랑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한 이스라엘을 찾아서 사유하시고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참조; 호2:19;호11:8), 또한 제사보다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참조; 마9:13).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축복의 권면에는 반드시 자비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참조; 딤전 1:2;요이1:3). 이제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자비'의 성서적인 고찰

1) 자비하심의 본질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영원 무궁하시며(참조; 시103:17), 한량없이 땅에 충만하며(참조; 시108:4;시119:64), 배역한 자식들을 돌아오게 만들어 생명을 연장시키며(참조; 애3:22-23), 죄를 회개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며(참조; 욜2:13)죄를 용서하여 주시며(참조; 눅1:50),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십니다(참조; 딛3:5)

2) 자비하심의 약속
 구약성경은 특히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출34:7;시89:28;렘3:12)

3) 자비하심의 권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비를 베풀 것을 분부하십니다. 눅10:30-37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도한테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았고 레위인도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기어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주막으로 데려가다 치료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조; 마5:7;눅6:36).

2. 하나님의 자비

1) 인간의 창조 사역에서 나타남
 창1:26,27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려고 계획을 세우셨을 때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함께 참여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즉 '우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나타남
 마3:13-17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3) 선교의 현장에서 나타남
 마28:19,20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역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심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자비의 종류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백성을 언제나 사랑하사 그들이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또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고(참조; 합3:2) 택한 백성에 대하여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혜는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하시면서 시편 기자를 통하여 주님의 자비를 선포케 하십니다. 이제 무궁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세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만한 자비하심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로 사망과 고통을 주는 대신에 자비와 많은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게 해주시고 잃어 버린 영혼들에게 건강과 위로와 참된 기쁨들을 주십니다(참조; 시103:8)

2) 영원한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유한한 인간들에게 영원토록 무한하게 임하시는 자비입니다. 창8:21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내렸던 홍수를 다시는 내리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 계십니다.

3) 측량할 수 없는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의 자비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히 높고 깊고 넓어서 측량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회개한 죄인이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돌아올 때 그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주님의 자비 앞에 맡길 뿐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는데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51:1)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임하였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의 십자가는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죄함을 받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성도의 죄에 대해 자비를 베푸심(사54:7,8)
 ☆ 자비는 도움과 위로를 이웃에게 베푸는 행위임(잠14:21)
 ☆ 자비의 대상은 대적하는 자까지도 포함됨(눅6:34,35)

  1. 자비의 성서적인 의미
 
하나님의 속성임
 패역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느9:17)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사64:7,8) 사람을 사랑하심(딛3:4)
성령의 열매로 주어짐(갈5:22,23)
빈곤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임
 과부를 도움(왕상17:9,10) 가난한 성도를 도움(잠14:21) 어려움을 당하는 자를 도움(눅10:30-37) 여인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잠31:20)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고후6:6)
정직한 자의 성품임(시112:5)
이웃에 대한 사랑임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임(롬13:8-10) 원수도 사랑해야 함(마5:44)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함(히13:1)
자비를 베푼 성서 속의 사람
 모세를 건져 내어 기른 바로 왕의 딸(출2:6-10) 정탐꾼을 영접한 기생 라합(수2:1-3) 요나단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푼 다윗 왕(삼하9:1-3) 압살롬을 도운 요압(삼하14:1-24) 수넵 여인을 도운 엘리사(왕하8:1)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한 여호사브앗(대하22:11) 에스더를 양육한 모르드개(에2:7) 예레미야를 선대한 느부갓네살(렘39:11,12) 마리아를 참아 준 요셉(마1:19) 예수의 어머니를 선대한 사도요한(요19:27) 바울을 도운 총독 벨릭스(행24:24) 바울을 도운 오네시보로(딤후1:16-18)

2.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심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허물을 없이하셨음(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자비가 나타남(엡2:7,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차별 없는 자비를 베푸심(눅6:35,36)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35절)
영원한 자비를 베푸심(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크신 자비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욘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성도의 의무로서의 자비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
 고아 된 사람(욥29:12), 궁핍한 형제(요일3:17) 약점을 가진 사람(롬15:1)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롬12:14,15) 시험에 처한 사람(갈6:1,2) 타국인(레19:34) 신앙을 같이하는 성도(엡4:32) 모든 사람(눅6:34,35)
자비를 권면한 사람
 모세가 종에 대해 자비를 베풀 것을 권면함(신15:12,13) 지혜자의 권면임(잠25:21)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임(사58:7) 그리스도의 권면임(마5:42) 바울 사도의 권면임(롬12:13)
자비를 베푸는 방법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음(빌4:1-3)
         내가 유오디아을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비판을 금함(마7:1-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2절)
고통을 서로 나눔(가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용서하고 위로함(고후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하나님의 속성 11 - 여호와의 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키-토브 예호와)

성서는 선의 본질이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이 선은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본질상 다른 어떤 개념이나 실재와 더불어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며, 이 선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뜻한 바가 곧 선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다만 찬양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선하다. '우리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선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의 집약인 동시에 성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부르면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 질문의 대답에 앞서 먼저 그 청년의 '선'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참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선하게 다스리시는 '선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이 바라보아야 할 '최고 선'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145:9,16).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자선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모든 생물들에 대하여 가지시는 애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선은 자연의 전구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더 많은 하나님의 자선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관심에 따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의 선이 인간들을 향해서 베풀어 질 때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인간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이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은 자들은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참조; 요16:27). 또한 현재 회개치 않은 죄인일지라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완전히 철회하시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선하신 속성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성경에서 '은혜'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총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참조; 창33:8; 룻2:2). 그러므로 보통 은혜는 '청구권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줌'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로 쓰일 때는 그 의미가 좀더 강화됩니다. 즉 이 때 은혜는 '사랑을 상실했거나 또는 본래부터 정죄의 선고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 또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 행복의 원천인 것입니다(참조; 엡1:6,7; 딛2:11). 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었으며(참조; 롬3:24),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었고(참조; 행14:3),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으며(참조; 롬4:16; 딛3:7),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참조; 엡2:8).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로 주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물입니다.

4.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은 다른 말로 '불쌍히 여김' 혹은 '민망히 여김'으로 표현되는 선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한 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가 지은 피조물들의 고난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구원을 계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에서는 크고 영구한 것으로(참조; 시57:10;대하7:6;스3:11),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언급되었으며, 특히 서신서의 인사말에서 많이 나타납니다(참조; 딤전1:2;딛1:4).

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그의 '선함'의 또 다른 방편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으로 하나님은 구약 여러 곳에서 죄인들의 악을 당장 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참조; 욘4:2;욜2:13). 그리고 이 오래 참으심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참조; 딤전1:16).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도 당장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수식어는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며, 죄로 물든 존재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단지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 긍휼,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구원받을 때 비로소 선해질 수 있으며, 선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은 인간에게 항상 풍성히 임함(시31:19)
 ☆ 하나님의 선은 죄사함에서 나타남(시86:5)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선

하나님의 선
 사람에게 만족스러움(시65:4,5) 자비와 은혜로 인간에게 베푸심(출3:46,7) 세상 모든 것을 선대하심(시145:9) 인간에게 크게 임하심(시31:19) 항상 있음(시52:1)
하나님의 선이 나타난 증거
 인간에게 결실하게 하심(행14:17) 영적인 은혜로 나타냄(시31:19) 죄를 사하심(시86:5)
하나님의 선에 대한 성도의 태도
 기뻐함(출18:9) 찬양함(시145:7) 하나님의 은혜를 만족함(렘31:14)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그리스도인(살후2:16)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요3:35)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증거
 이스라엘을 무궁한 사랑으로 인도해 내심(렘31:3)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심(요8:42)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심(롬5:8) 하나님의 역사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남(요5:20) 성도를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심(롬5:6)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신7:9)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함(신19:9)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도를 행함(신10:12)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축복함(신30;20)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신6:5) 교회와 성도 간에 덕을 세움(고전8:1)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 내리는 축복
 천대까지 은혜를 입음(신7:9) 위험에서 건짐을 받음(시91:4)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됨(사56:6,7)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8:28)

3.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신자에게(빌4:19) 불신자에게(행14:15)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성도의 결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3:24)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음(롬3:24) 하나님의 일꾼이 됨(엡3:7) 즐겨 구제함(고후9:8)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게 됨(딛2:13)

4. 하나님의 긍휼

긍휼에 대한 성경의 묘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애3:22) 멸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긍휼이 크심(느9:31) 긍휼이 사랑으로 나타났음(엡2:4) 선민에 대한 긍휼이 불붙듯하심(호11:8) 영원부터 있는 긍휼임(시25:6)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시72:13) 포로된 자(렘33:26)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자(롬9:15-18) 고아된 자(호14:3)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잠28:13)

5. 하나님의 인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유 - 멸망에 이르는 자를 적게 하시려고(벧후3:9) 사람을 사랑하시므로(고전13:4) 능력을 보이시려고(롬9:22)
오래 참으시는 때
 진노를 오래 참으심(롬9:22) 구원의 때를 기다리심(벧전3:20) 성도의 회개를 기다리심(롬2:4)
성도의 인내
 성령의 열매로써 가능함(갈5:22) 그리스도인의 미덕임(엡4:2)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함(고후6:4-6)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을 받기 위해 필요함(히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