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스바냐



가까이 다가온 여호와의 날 : 스바냐가 전하는 심판과 구원의 마지막 기회

스바냐 1:14– 2:3
가까이 다가온 여호와의 날: 스바냐가 전하는 심판과 구원의 마지막 기회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흑암의 날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가깝다”고 외쳤다. 이 날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었다. 선지자는 이 날을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파멸의 날, 어둠과 흑암의 날”로 묘사한다. 그동안 성읍의 견고함을 자랑하던 유다의 백성들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강한 용사들조차 슬피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바냐가 전한 메시지는 단순히 유다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경종을 울린다. 인간이 세운 성읍과 제도, 권력은 영원하지 않으며,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현실이며, 그 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선지자가 전하고자 한 핵심이었다. 

무너지는 성읍과 무력한 금은, 인간의 헛된 의지

스바냐는 여호와의 심판이 임할 때, 사람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고 선언했다. 백성들이 의지하던 성읍은 무너지고,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던 금과 은도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당시의 우상 숭배와 물질 숭배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자 경고였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여전히 물질과 권력, 과학과 제도를 의지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무력함이다. 스바냐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며, “여호와의 분노의 불에 온 땅이 소멸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절망 속에 외치는 선지자의 호소,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스바냐는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절망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에게 모일 것을 촉구하며 “아직 늦지 않았다”고 외쳤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해서 회개의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임을 강조했다.

이는 영적으로 눈먼 자들에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갈망을 잃은 자들에게 던지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심판이 다가오는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열려 있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남은 자의 소망,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길

스바냐는 대다수가 하나님을 떠나버린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며 겸손히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는 이들에게 더욱 힘써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촉구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남은 자들을 보시고 심판을 연기하시며, 그들을 통해 유다를 회복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전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서는 교훈을 제공한다. 대다수가 신앙을 잃고 하나님을 외면할 때라도, 겸손히 중보하며 공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로 인해 희망은 이어진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여전히 세상을 회복하실 수 있으며, 그들에게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다. 

심판의 날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은 과거의 유다만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날은 우리 앞에 있다. 인간의 힘과 물질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다.

따라서 스바냐의 예언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길로 돌아올 마지막 초대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찾을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때이다. 심판은 두렵지만,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며, 그 선택이 곧 미래를 결정한다.


존 에프 케네디의 네 가지 심판

1. 양심의 심판 / 인간의 삶에 대한 판단의 기준과 주체가 되는 개념
2. 법의 심판 / 사회적 규범에 대한 심판
3. 역사의 심판  /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와 결과에 대한 판단
3. 최후의 심판 / 전인류적인 초월적인 심판 

'양심의 심판', '법의 심판', '역사의 심판'은 인간의 삶에 대한 판단의 기준과 주체가 되는 개념이며, 
'최후의 심판'은 이러한 판단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양심의 심판은 내면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법의 심판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판단                                                                                                                                                        
역사의 심판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와 결과에 대한 판단이며, 
최후의 심판은 이 모든 행위가 신 앞에서 결정되는 전인류적이고 초월적인 심판입니다. 

1. 양심의 심판
  • 기준: 인간 내면의 도덕적 양심과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입니다.
  • 판단 주체: 개인의 양심입니다.
  • 특징: 사회적 법이나 외적 규범이 없을 때도 인간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은 심판의 날에 증거가 됩니다. 

2. 법의 심판
  • 기준: 율법, 즉 사회의 법적 규범과 계율입니다.
  • 판단 주체: 율법이 기준이 되는 사회 또는 국가입니다.
  • 특징: 유대인은 율법으로, 이방인은 양심으로 심판받는 것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법적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받습니다. 

3. 역사의 심판
  • 기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 가치, 인간 행위의 결과입니다.
  • 판단 주체: 역사 그 자체 또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 특징: 특정 사건이나 인물이 후대의 평가를 통해 그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고, 과거의 잘못된 행위가 청산되거나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는 과정입니다. 

4. 최후의 심판
  • 기준: 신(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행위와 그에 대한 신의 뜻입니다.
  • 판단 주체: 신 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특징: 세상의 마지막에 모든 인류가 신 앞에 나아가 일생을 심판받고, 이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양심의 심판', '역사의 심판', '최후의 심판'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진 개념입니다. 양심의 심판은 개인이 자신의 내면적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하고, 역사의 심판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후대의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에서 세계 종말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는 사건을 말하며, 미켈란젤로의 벽화 '최후의 심판'은 이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1. 양심의 심판 (Conscience)
  • 의미: 개인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위나 생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과정입니다.
  • 특징: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며, 죄의식을 느끼게 하거나 자기 성찰을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2. 역사의 심판 (Historical Judgment)
  • 의미: 시간이 흐른 뒤, 후대 사람들이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의 행위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과정입니다.
  • 특징: 특정 사건의 중요성, 영향, 옳고 그름 등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판단됩니다. 

3.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 
  • 의미: 기독교 종말론에서 세계가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불러 심판하여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 묘사: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근거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생명의 책을 펴고,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형벌을 내리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 미켈란젤로의 작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대형 프레스코 벽화로, 중앙의 그리스도와 성인들,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스바냐 1:14-2:3)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은 가깝고도 빠르게 임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가깝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하나님의 심판날이 아직도 오지 않았기에 멀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날이 닥치면 엄청나게 가깝고 빠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 일 년 전에 시험을 치르는 날이 예고되면 그 날이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그 날이 왜 이리 가깝고 빠르게 느껴지는지요. 
마치 그럴 것입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그 날에 수치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 백성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매번 하는 똑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무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어 나팔 소리가 울리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엎드러져 피를 쏟으며, 은금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14~18). 
그래서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 될 것입니다(1:15). 
하나님의 질투의 불로 인하여 모두가 삼켜지게 될 것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멸절될 것입니다(1:18). 

남왕국 유다의 백성은 결국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그러한 참혹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심판하실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십니다(2:1~3).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은 남왕국 유다의 백성을 두 부류로 나누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먼저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2:1, 2). 

수치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니크사프”(נִכְסָֽף)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카사프”(כָּסַף)로 “수치”(shame)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리워하다”(to pine after)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도 않으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모여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촉구하십니다(2:3).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를 행하며 겸손하게 살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화(禍)를 피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3에 나오는 “혹시”라는 단어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스바냐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피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인하여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반드시 심판주(審判主)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참혹하게 진멸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온전히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 예레미야 12:7-17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7절에 언급한 말씀처럼 내 집, 내 소유, 내 마음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수에 넘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에 대한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파괴하는 자들을 허락하사 그들이 여호와의 칼이 되어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영적인 깊은 병에서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나의 삶 가운데 연단이 오고 어려움이 처할 때, 국가적으로도 민족이 어려운 현실을 맞이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육체가 평안을 잃어버리고, 수고하여도 소득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순종하지 못한 나의 삶을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한 나의 교만한 마음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내 인생길의 방향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예비 된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구약의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언서를 몇 군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엘 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라. 온 땅의 주민들이 떨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가까웠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과 짙은 흑암의 날이라...”

아모스 5:18-20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요 어둠이니...”

스바냐 1:14-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까우며 심히 빠르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 곳에는 언제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판단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환란’을 당할 거라는 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성경은 줄기차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만 말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언론/전문가 그룹에서 들려오는 2025년도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 ’12.3 내란사태’ 때문에 환율이 오르고, 증시가 급락하는 등 경제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입니다. 미국도 그리 장밋빛 전망만은 아닙니다. 트럼프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정책이 바뀌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커진 상태입니다. 각국에서는 트럼프 집권 2기에 맞서 대응 전략을 준비하기 한창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에게는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도 과연 좋을지,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코 앞에 두고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시절이 될 거라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런 전망 앞에서 ‘여호와의 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일까. 왜 고대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그날이 오면 힘들 거라고, 외쳤을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닥친 환란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종의 ‘퍼펙트 스톰’이 사회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시스템도 미비하고, 과학기술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 환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끔찍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환란을 ‘여호와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환란에 정의(justice)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한 상황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즉 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감당합니다. 

아무래도 2025년는 여러가지 정황 상,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 듯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상황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고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닥치면 겉으로 보면 환란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닥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것 있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죄악’, 바로 그것이 보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해소하지 못하면, 환란은 그치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반드시 죄악의 해결/해소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항상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고, 분단국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이라는 용어와 ‘빨갱이’라는 용어가 한국말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조성되면 내란 상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수 세력은 대개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분단국가 현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고 아픔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은 깨끗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지 괴롭혀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날이 임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더 신뢰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춥고 어두운 날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미소를 더 자주 띄워 주어요. 우리 서로의 손을 더 자주 따스하게 잡아 보아요. 우리 서로의 어깨를 더 자주 두드리며 격려해 보아요. 


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스바냐 1:7-13)

스바냐 선지자는 그 기원이 왕족입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습 1:1). 손자가 여러 명 있는데 현손은 몇 대손입니까? 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증손자이고 증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고손자이고 고손자가 아들 낳으면 현손자입니다. 즉, 현손은 4대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4대손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는데 족보가 두 종류로 갈라집니다. 히스기야의 후손 가운데 왕이 된 사람과 왕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되는데 왕이 된 사람들의 족보는 악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아몬 그리고 선한 왕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왕이 되지 않은 족보는 아마랴, 그다랴, 구시, 스바냐인 것입니다. 

스바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숨겨 놓으신 자’입니다. 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스바냐 1장 10절에 보면 그는 어문, 제이구역, 작은 산 등 정확한 지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스바냐 1장 8절을 보니까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고 귀족들과 양반들과 관리들의 의복 규정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대의 왕은 스바냐 1장 1절에 정확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유다 역사 최후의 종교 개혁가였고 구약시대의 칼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8살에 왕이 되어서 31년을 통치하다가 39살에 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20살에 시작하여 6년 동안 우상을 타파했습니다. 그리고 26살에 성전을 수리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명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시야 왕은 신명기를 읽다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어려움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베옷을 입고 온 백성들과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후 요시야 왕은 유다 역사상 가장 크고 성대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타파 둘째, 성전 수리 셋째, 언약갱신 넷째, 유월절 준수입니다. 이 네 가지가 요시야 왕 31년 통치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스바냐 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유다 백성들은 스바냐가 예언할 당시 세 가지 종류의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습 1:4-5). 

첫째, 그들은 바알을 숭배하였는데 바알은 아세라 목상과 함께 음란한 제사를 드림으로 농업의 번성을 추구하던 종교였습니다. 

둘째, 스바냐 1장 5절 전반부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겼다고 나와있습니다. 해, 달, 별 등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신명기 4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체를 숭배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신 4:1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셋째, 스바냐 1장 5절 후반부에 보면 말감이라고도 하고 밀곰이라고도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솔로몬 왕 시대에 암몬에서 들어온 첩들이 말감이라는 신을 갖고 들어와 유다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이 우상숭배를 위해 그마림이라고 불리는 돌팔이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원래 유다의 제사장들은 레위지파 가운데 아론의 후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마림은 그런 합법성이 없는 불법적인 제사장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20살 되던 해부터 우상타파를 시작했기 때문에 스바냐 선지자는 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로 인해 요시야 왕은 자극을 받고 종교개혁과 우상타파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단어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하실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4-15).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사람들에게 환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그가 예언한지 불과 40여년 만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이같이 역사적인 실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날이 옛날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것만 의미한다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항상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차적인 의미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이뤄질 온 인류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공의로 심판할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시고 심판주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할 때 예수님께서 공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심판은 가끔 공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권력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누구의 죄가 크냐는 것보다 누구의 변호사가 더 실력이 좋으냐가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재판이 그렇지는 않지만 이처럼 공의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은 완전한 공의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지나간 유다 역사에 실현된 여호와의 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실현될 여호와의 날은 모든 사람에게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Ⅰ.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이다 

스바냐 1장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징역 10년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면 10년 동안 감옥에 있다 나오면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이렇게 형량을 채우고 나면 똑같은 죄목으로 다시 감옥에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10년 징역 선고를 받아야 할 자가 판사에게 뇌물을 줘서 무죄로 나왔거나 형량이 줄어들었다면 그것은 공의가 100% 만족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국가가 그 사람을 공의롭게 재판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결국 개인적인 복수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이가 100% 만족될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입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습 1:7-8). 

희생이라는 단어가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된 유일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희생제사가 시작됩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사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모세가 레위기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다섯 가지로 법제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희생제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특징입니다. 옛날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것이 마귀에게 죗값을 갚으려고 한 것이라는 엉터리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희생제사는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열납된다는 특징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결국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그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실현됩니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희생제사는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고 죽으시는 것이 실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만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을 위해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성령님께서는 택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사 죄 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희생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데 그날은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말이냐? 그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70년 포로생활을 해야 공의가 만족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지만 최후 심판의 날 하나님을 거역한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스바냐 1장 14절에 70년 포로생활에도 용사가 심히 애곡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절망으로 애곡합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 1:7). 

요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개’자를 붙여 욕합니다. 만약 옆집 아저씨에게 ‘개’자를 붙여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해보십시오. 아마도 몇 대는 틀림없이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욕하고 대적하면 몇 대 얻어터지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48-49). 

지옥에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형벌이 10~20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됩니다. 영원히 타는 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Ⅱ.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요엘 등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그들의 경고를 거부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다고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B.C. 587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최후 심판의 날에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습 1:12).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다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찌끼같이 가라앉아있고 바퀴벌레같이 숨어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아무도 숨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습 1:18). 

여호와의 날에는 불신자들이 멸절됩니다. 완전히 멸절시키는 도구가 베드로후서에 불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다시는 물로 망하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물보다 더 무서운 불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불로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하나님의 질투는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울 때 질투하는 것과 같은 분노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반드시 피해자가 요구하는 공의가 만족되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Ⅲ.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스바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1-3). 

스바냐 2장 1~3절은 중요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2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전’이입니다. 시행되기 전, 지나가기 전, 임하기 전, 이르기 전.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세 가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공의를 찾으라. 히브리어로 ‘쩨다카’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서 받아주실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 교만은 하나님이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둬가시면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찾고 겸손을 찾으면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거나 연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면 죄가 아무리 많아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덮어 심판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죄가 많은 죄인입니다.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왜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느냐? 그것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다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의로운 척하면 안되겠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담배를 피다가 부흥회에 참석하여 방언 받고 성령의 불을 받아 담배를 끊게 되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갑자기 담배 피는 사람들과는 신앙생활을 함께 못하겠다고 하면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정죄했다고 합니다. 은혜 받고 의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지만 그것으로 인해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는 의롭고 남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제사로 100% 만족되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십시오.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렸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숨겨주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자’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작은 스바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다 덮어주시고 우리를 피난처에 숨겨주시며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같이 놀라운 복을 받았으므로 우리 가족들 중에 영원한 형벌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까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전도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께 숨김 받은 사람이 된 것을 평생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월 8일 스바냐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분노의 날(2: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before the appointed time arrives and that day sweeps on like chaff, before the fierce anger of the LORD comes upon you, before the day of the LORD's wrath comes upon you.

여호와의 분노의 날(예레미야 12:7-17)

12:12-13 /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7절에 언급한 말씀처럼 내 집, 내 소유, 내 마음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수에 넘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에 대한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파괴하는 자들을 허락하사 그들이 여호와의 칼이 되어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영적인 깊은 병에서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나의 삶 가운데 연단이 오고 어려움이 처할 때, 국가적으로도 민족이 어려운 현실을 맞이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육체가 평안을 잃어버리고, 수고하여도 소득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순종하지 못한 나의 삶을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한 나의 교만한 마음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내 인생길의 방향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예비 된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스바냐 2:1-3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리기 전에 그리할 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찿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 왕 요시아 시대의 선지자 입니다. 스바냐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 합니다,

요시아 왕은 선정을 베풀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고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과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요시아 왕의 바른 신앙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시아의 할아버지 므낫세가 저지른 커다란 악행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결정이 되었습니다.  요시아의 바른 신앙으로도 여호와의 진노를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으며 요시아로 인하여 유다에 대한 형집행 유예를 할 수 있었을 뿐 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에 임할것을 경고합니다. 유다는 불과 50여년 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는 그들의 은과 금이 그들을 능히 건지지 못할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심판의 날이 임할 것 입니다. 그날이 우리들의 살아 생전일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모두는 여호와하나님의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은과 금을 모았을지라도 그것들이 우리를 능히 건져내지 못할 것 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권면을 합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임하기 전에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 하라는 것 입니다. 여호와를 찿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찿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분노의 날에 숨겨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혹시라고 하셨을까?

공의와 겸손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나는 공의를 지키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혹시가 아니라 분명히 라고 말씀 하셨을 것 입니다.

기독교와 교회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시대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혹시 해당 안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 우리의 믿음을 바로 하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the fierce anger of the LORD) 

스바냐 2장 1~3절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라 경고하며,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촉구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모일지어다"라고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숨김" 즉,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은혜를 약속합니다.  

스바냐 2장의 주요 내용
  • 경고와 심판 :
    스바냐 2장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결론
스바냐 2장은 하나님이 정하신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오기 전에, 백성들이 겸손하고 공의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할 때 구원과 "숨김"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회개와 초청 :
    하나님은 진노가 임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모일지어다"라고 초청하며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촉구합니다. 

  • 숨김을 얻으리라 :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고 겸손한 자들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 "숨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이웃 국가에 대한 심판 :
    4절 이하에서는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 등 이웃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 중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주로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1. 여호와의 날의 특징

    ①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②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③ 종말론적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1.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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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바냐(습 1:14-2:3 절)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며, 그 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 날 앞에서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스바냐 1장 7절에서도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이미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을 더 강조해서, <가까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에 보면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운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 날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날인지를 증거한 것입니다.

    용사도 우는 날, 강한 자도 떨며 무너지는 날, 그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15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날은 고통의 날, 그날은 절망의 날임을 보여주고 있다면 16절은 그날이 전쟁의 날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구약성경에 나팔이 크게 울려펴지는 것은, 안식일이나 희년을 온 백성들에게 선포할 때, 국가적 경사를 백성들에에 알릴 때, 전쟁을 시작할 때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절에서의 나팔은, 전쟁의 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7절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기서 “내가 사람들에 고난을 내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17절의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하겠다는 의미는, 피할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맹인의 모습에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내리신 이유를, 이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았습니다.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말씀을 계속 보면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심판의 결말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 것이 될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나디.

    이렇게 비참하고 처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께 심각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여기서 여호와의 분노의 날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날에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이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심판의 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여부인데,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구원을 결정짓는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힘과 돈과 명예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참된 구원과 생명의 길, 영원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중반절을 보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

    즉 여호와의 날은 온 세상을 향한 심판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며,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심판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은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날에, 길은 하나뿐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단순히 착하게 사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두려운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심판이냐, 구원이냐, 그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겸손히 찾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판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얻습니다> <진노가 아니라 은혜를 받게 됩니다>

    <멸망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겸손히 주를 찾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피난처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 숨김을 얻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 1:14–2:3 묵상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1. 서론 –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소망

    스바냐는 예언자 중에서도 유난히 “여호와의 날”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라는 경고는 단순히 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임박한 현실적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이 날은 분노와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여호와의 날의 무서운 심판 (1:14–18)
    2. 심판 앞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권면 (2:1–3)

    2. 본문 주해와 묵상

    2.1. 여호와의 큰 날의 임박성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기서 ‘가깝다’(קָרוֹב, qarov)는 단순한 시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스바냐는 반복적으로 ‘가깝다’고 강조하며, 심판의 날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그 날은 “용사도 심히 슬피 우는 날”입니다. 즉, 가장 강한 자들도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는 종종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날을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늘 긴장된 준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2. 여호와의 날의 성격 (1:15–16)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여섯 개의 병렬된 표현(환난, 고통, 황폐, 패망, 캄캄함, 어두움)은 이 날의 파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16절)이라는 표현은 군사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었던 성읍과 망대조차 무너지며,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안전장치가 무력화됩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 시대의 ‘견고한 성읍’은 무엇입니까?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 앞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은 무너집니다.


    2.3. 범죄의 결과와 인간의 무력함 (1:17)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날의 이유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고, 그 결과 “맹인 같이 행”하게 됩니다. 영적 시력을 잃은 채, 길을 몰라 헤매는 모습입니다.

    또한 “피는 티끌 같고, 살은 분토 같다”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무가치함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흙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적용: 죄는 인간을 맹인처럼 만듭니다. 방향 감각을 잃고, 결국 파멸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2.4. 은과 금의 무능력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부와 재물은 고대에도, 오늘날에도 인간이 붙드는 최후의 안전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돈이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질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빼앗는 모든 우상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적용: 돈과 성공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2.5. 심판 앞에서의 권면 (2:1–2)

    스바냐는 놀랍게도 심판을 선포한 직후, 회개와 모임을 촉구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서 ‘모이다’(קָשַׁשׁ, qāšash)는 ‘모아 쌓다’라는 뜻으로,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라는 초청입니다.

    또한 긴급성을 강조합니다.

    •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오늘의 적용: 회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기회는 짧고, 하나님의 날은 갑자기 임합니다.


    2.6.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는 단순히 “심판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 겸손(עֲנָוָה, anawah):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
    • 공의(מִשְׁפָּט, mishpat): 하나님의 정의로운 질서를 따라 사는 삶.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기서 ‘숨김’(סָתַר, sātar)은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즉,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가 있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의 적용: 신자는 심판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과 공의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입니다.


    3. 복음적 연결 – 심판에서 구원으로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무섭게 선포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 둡니다.

    • 여호와의 큰 날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연결됩니다.
    • 은과 금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 겸손과 공의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분노에서 우리를 숨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4. 오늘 교회를 위한 교훈

    1. 심판의 날은 가깝다 – 영적 긴장감을 잃지 말라.
    2. 하나님을 범죄한 죄를 직면하라 –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라.
    3. 돈과 권력은 구원하지 못한다 – 우리의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4. 회개는 지금이다 – 지체하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5. 겸손과 공의의 삶을 추구하라 – 이것이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길이다.

    5. 결론 – 숨김을 얻는 길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 심판의 무서운 날: 인간의 모든 안전과 자랑이 무너지는 날.
    • 그러나 동시에 숨김의 길: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보호하심을 얻는 길.

    여호와의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합니다.


    6.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경고 앞에서 저희의 무관심과 교만을 회개합니다. 은과 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피난처로 삼게 하옵소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숨김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여호와의 날(스바냐 1:14 ~ 2:3)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관입니다. 그것을 위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은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분노, 환난, 고통의 날이고 황폐와 패망의 날입니다. 다음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공의와 정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심판의 날에 재앙을 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징계의 와중에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른 바 ‘남은 자’ 사상의 기초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의 큰 날, 환난과 고통의 날, 징계하시는 이유, 구해야 할 공의와 겸손 등입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 ‘그 날은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로,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이다’라는 말입니다.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나타나는 이 용어들은 여호와의 분노에 대한 상징으로, 땅과 하늘에 있는 자연계가 심판 주로 오시는 여호와의 강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계의 현상을 묘사하여 여호와의 날을 설명한 것으로, 곧 닥칠 유다의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질 수 없다."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 주님의 불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없애실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악인이 의지하는 물질이 심판 날에 어떤 효과가 있는가를 진단하는 말로, 그것들은 여호와의 징계 앞에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세상과 물질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고 의와 겸손을 추구하라. 어쩌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분노하시는 날에 형벌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선지자가 권면한 것으로, 비록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는 것은 기정사실일지라도, 겸손을 다하여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으며 올바로 살도록 힘쓰면 행여 화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에 소망을 거는 스바냐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지 사람을 미워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본문의 여호와의 날은 예루살렘 심판의 날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시대 여호와의 날은 마지막 종말의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이 있듯이, 이 세상도 끝날이 있는데 바로 그날을 말합니다. 애석하게도 그날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주님도 그날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날은 도적같이 이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날이 닥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급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실패로 남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며 그 분의 길이 우리 길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잠언에 있는 것과 같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당혹함은 그지없을 것이며, 낭패로 인하여 우리 심령이 천길만길 꺼져갈 것 같을 것입니다.

    어떤 곳을 찾으려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네비를 보면 전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업그레이드 한 것이라면. 그것이 인도하는 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사고가 보다 객관적이고, 완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여기 이 땅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오늘 구해야 합니다. 저기 하늘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고, 막상 심판대 앞에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늦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호와를 찾고 의와 겸손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에 대한 보험과 같습니다.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분에 대한 공부가 아닙니다. 신학이 아닙니다. 그분입니다. 우리의 실수와 오해를 그리고 착각을 용서해줄 당사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 이 말씀을 믿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진정 겸손한 자입니다.





    스바냐 서론

    저자와 제목

    (1) 제목

    이 말씀의 창시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여호와’)이었지만, 이 말씀을 유다에 전한 예언적 중재자는 스바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스바냐의 이름을 따서 ‘스바냐’라고 명명되었습니다.

    (2) 저자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숨기셨다/보호하셨다’를 뜻입니다. 
    그의 부모의 경건함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1의 계보는 스바냐가 두 악한 왕이 왕좌에 오르기 전에 경건한 유다의 통치자였던 히스기야의 후손임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저작 연대

    이 예언은 중요한 남유다의 왕인 요시야(BC 640~609년)가 다스리던 시대에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에 이미 멸망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언급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남은 부분, 즉 남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남유다 16대 왕 요시야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 시대 이래로 폐지되어 버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의식을 재확립하려 노력한 종교개혁 군주였습니다.

    주제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스바냐가 더 일관되게 선포했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1:7 등). 이 다가오는 날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국면과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복의 국면이라는 두 가지 국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형벌에 있어서나 자신의 공평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배경, 특징

    (1) 배경

    당시는 악한 왕 아몬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개혁을 이룬 요시야 왕의 통치 초기였다. 그러나 국외적으로 앗수르가 근동 최강국의 위치를 굳혀 유다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2) 특징 

    ⓵ ‘여호와의 날’ 사상 – 여호와의 알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 성격을 자세히 부각시키고 있다.

    ⓶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 – 수식어를 거의 사용치 않고 운율성을 강조하지 않은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제를 채택하고 있다.

    (3) 내용

            ① 하나님은 온 땅과 유다와 유다의 이웃 이방 나라들을 똑같이 심판하실 것이다.

            ②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분으로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되돌아오면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③ 하나님은 복과 은혜를 모든 민족과 나라에 베풀기를 원하신다.

            ④ 심판과 복은 가까운 미래에 선지자와 선지자의 청중에게 발생하며 또한 먼 미래에도 발생한다.

           ⑤ 2세대 하나님의 자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앞 세대의 믿음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해야 한다.

    문예적 특징

    스바냐서는 이른바 ‘소선지서’ 가운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축소판 ‘대선지서’처럼 보인다. 스바냐서에는 심판 신탁(1:1~18), 이방에 대한 신탁(2:4~15), 소망의 신탁(3:8~20) (암 2:4 이후의 아모스서와 매우 비슷하게 관심사가 나라 밖에서 나라 안으로 바뀌는) 2:1~3과 3:1~7은 예루살렘에 예리하게 적용되는 ‘전환적’ 신탁의 역할을 한다.

    스바냐서의 문예적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 다가올 심판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시라는 방편을 사용하는 것, 회개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하나님의 복의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에 대한 마지막 신탁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 지위와 재물이 있는 이들을 고발하는 동시에 백성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특히 습 2:3. 이 둘은 3:11~13에 압축되어 있다).

    스바냐 개요

    1. 심판의 예언(1:1-3:8)

        (1) 유다의 심판(1장)

        (2) 열방의 심판(2장)

            ① 서론(1-3)

            ② 블레셋의 심판(4-7)

            ③ 모압과 암몬의 심판(8-11)

            ④ 구스의 심판(12)

            ⑤ 앗수르의 심판(13-15)

    (3) 예루살렘의 심판(3:1-8)

    2. 구원의 예언(3:9-20)

            (1) 이방인의 구원(9-10)

            (2) 이스라엘의 구원(11-20)





    스바냐서 개관

    스바냐(צְפַנְיָה, 츠파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셨다/감추어 보존하신다”는 뜻이란다. 이름만 들어도 이 책의 심장이 들리지? 배경은 요시야 왕 시대 초입, 개혁의 불씨가 막 피어오르기 전이었단다. 겉으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었지만, 마음은 우상과 안일에 젖어 있었지. 그때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세워 엄중한 말과 다정한 위로를 함께 전하게 하셨어. 스바냐의 메시지는 처음엔 폭풍 같지만, 끝자락은 꼭 품처럼 따뜻하단다.


    스바냐는 하박국 예레미야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역자였다. 스바냐(츠파냐후)라는 뜻은 ‘여호와는 숨겨주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히스기야의 현손, 즉 왕족이었던 스바냐는 우주적인 심판을 예언하였다. 스바냐서는 성경에서 제일 무서운 책이기 때문에 설교하시는 분이 거의 없다.

    스바냐의 예언은 먼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선언에서 시작되어 점차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고 멸절하실 날이 온다고 했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이기를 힘쓰는 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겸손과 공의를 구하는 자를 숨겨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폭풍에서 품으로, 스바냐의 흐름

    1장–2장 초반: 여호와의 날, 가짜를 쓸어내는 바람
    책은 낯설도록 단호하게 시작해.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이 말은 멸망의 선언이 아니라, 가짜를 허물어 진짜를 남기려는 하나님의 정화(淨化)야. 스바냐는 예루살렘 골목을 돌며 말하지. “향이 아무리 진해도, 마음이 우상을 향하면 주께서 아신다.” 그러고는 속삭여. “땅의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혹 그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여호와의 날은 도망칠 날이 아니라 숨을 날이란다—그분의 품에.


    ◈ 진멸

    •하나님의 날에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주께서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시다.

    •하나님께 죄지은 자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2장 후반: 둘러싼 나라들, 모두 주의 법정에
    불레셋, 모압과 암몬, 구스, 그리고 니느웨(앗수르)까지—하나님은 이웃 민족도 당신의 법정으로 부르신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의 주이시기 때문이야. 교만은 민족을 막론하고 무너지고, 겸손은 국경을 넘어 살려내지.


    ◈ 주변국에 대한 진멸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사람들은 모일지어다.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도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3장: 예루살렘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완강한 사랑
    초반(3:1–7)은 예루살렘의 고집을 눈물로 고발해. 재판관은 늑대처럼, 제사장은 거룩을 더럽히고, 선지자는 경솔하단다. 그런데 3:8을 지나면, 하늘의 톤이 바뀌어. 하나님이 입술을 정결케 하여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나아오게 하시겠대(3:9). 그리고 마침내, 스바냐의 가장 고운 구절에 도착하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3:17)
    심판의 폭풍은 지나가고, 남은 자—상한 자, 밀려난 자—를 모아 노래하시는 하나님이 서 계시단다(3:19–20).


    ◈ 죄와 구원

    •예루살렘 성이 죄악이 있어서 주의 분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겸손한 백성을 위해 주께서 새날을 준비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할 것이다.



    1. 표제
     다른 소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서도 단순히 그 저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진다. 히브리어로 스바냐(Sephanyah)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혹은 “여호와께서 간수하셨다”라는 뜻이다. 구약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몇 사람이 있다(대상 6:36; 렘 21:1; 슥 6:10, 14).
     2. 저자
     우리는 스바냐가 자기 책에서 자기에 대해 말한 것 이외에는 이 선지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습 1:1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 가문의 출신인 것이 확실한 것같다. 그가 그의 조상을 히스기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밝힌 사실은 그 이름을 가졌던 유다의 왕에 관하여 언급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그가 왕족의 혈통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선지자는 자기가 예언한 시기(습 1:1)가 유다왕 요시야의 시대라고 알려준다(B.C. 640-609). 스바냐가 B.C. 612년에 있었던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으므로(습 2:13) 아마도 그는 요시아 통치 초기에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하박국과 동시대 사람인 것같다.

     4. 주제
     스바냐서는 요엘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한 의미는 사 2:12에 나와 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 임박한 심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 임할 징벌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스바냐가 그의 가혹한 심판들을 말하며 경고하는 것은 단지 백성들이 회개하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습 2:3)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5. 개요
    Ⅰ. 유다의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 1:1-18
         1. 표제 1:1
         2. 심판의 엄격함과 범위 1:2-18


    Ⅱ. 은혜의 시기 동안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호소 2:1-3

    Ⅲ.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들 2:4-15
         1. 블레셋 2:4-7
         2. 모압과 암몬 2:8-11
         3. 구스 2:12
         4. 앗수르 2:13-15

    Ⅳ. 예루살렘이 죄 때문에 견책받음 3:1-7

    Ⅴ. 모든 민족들이 받게 될 심판 3:8

    Ⅵ. 회복의 약속들 3:9-20


    숨겨 주시는 하나님, 숨는 법을 배우는 우리

    스바냐서는 우리에게 숨는 법을 가르쳐 준단다. 세상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숨는 법 말이야. 교만은 크고 화려함에 숨으려 하고, 겸손은 하나님 품에 숨는다. 여호와의 날은 두렵지만, 그분의 품에 숨는 자에게는 피난처가 된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가짜를 걷어 내시고, 사랑으로 진짜를 지켜 내신다. 그러니 오늘도 조용히 이렇게 기도하렴.
    “주님, 제 이름이 사람 앞에 빛나기보다, 주의 마음에 숨겨지게 하소서.”

    그래서 스바냐서는

    여호와의 날의 엄중함 속에 숨겨 주시는 은혜를 드러내어, 교만을 허물고 겸손한 자를 품에 숨기시는 하나님을 심판과 노래, 경고와 위로로 함께 증언하는 책이다.

    이러한 스바냐서를 3문장으로 요약하면,

    1. 스바냐서는 여호와의 날에 가짜 신앙을 쓸어내고, 겸손과 공의로 하나님께 숨으라 부른다.
    2. 하나님은 열방과 예루살렘 모두를 심판하시되, 남은 자를 모으고 입술을 정결케 하여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3. 결말은 심판이 아니라 노래—“여호와가 너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선언으로, 숨겨진 자들에게 회복의 춤을 허락하신다.





    스바냐 개론

    [제목]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선지자 '스바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세판냐'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에 의해 감추어 졌다'이다. 70인역(Lxx)에서는 '소포니아스'라 하였다.

    [저자]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1:1에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저자는 자신을 특별히 히스기야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건대 스바냐는 신실한 왕 히스기야의 왕통을 이은 유일한 선지자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요시아 왕의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했으며 국내사정은 물론 국제 사회에 대해서도 비교적 식견이 넓었을 것이다.

    [기록연대]
    본 서의 저자인 스바냐가 어느 시대에 예언을 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시기를 결정할 만한 내적 증거가 습1:4~6에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므낫세 왕때 유행했던 이방신에 대한 제사와 바알 숭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은 주전 62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예언의 시기가 요시야의 종교 개혁 시대 이전이냐 이후이냐가 초점이 된다.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B.C.622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본 서의 기록 연대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주전 640~622년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배경]
    므낫세와 암몬의 사악한 통치가 끝나고 요시아 왕이 즉위했으나 근 50년 가량 만연해 있던 배교의 상황에는 어떤 도전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그의 나라 백성들에게는 물론, 인근 나라 백성들을 향해서도 강력히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B.C. 722년의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전능과 공의를 상기시키는 엄숙한 사건이었다.

    [특징]
    본서는 유다와 그 주변 열국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되 심지어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는데 이것 또한 그의 사랑의 발로이다.

    [목적]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요엘이나 아모스와 같이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본 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을 상징한다. 일반 민중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민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관념에서 생각하고 있으나 선지자들의 이날에 대한 관념은 두려운 심판의 날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본 서는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 남은 자(습3:13)들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로 다가오나 그 처절한 심판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간직한 자들인 남은 자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구조]
    스바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주의 날에 있을 심판(1장~3:8)과 주의 날에 있을 구원(3:9~20)이다. 전자는 진노의 날이고 후자는 기쁨의 날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신약에서 가르쳐 주는 최후 심판의 날과 동일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신약의 최후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뒤이은 최종적 심판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서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나 회복 등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과 동시에 최종적인 심판을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양면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짧은 본서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그 여호와의 날에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다.

    [내용]
    모든 세대에 있어서 오직 소수의 비교적 신실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따릅니다. 그렇지만 몇몇은 항상 믿음의 선에서 살아 있다.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되기 직전에 스바냐는 남은 자들이 구속받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시는 비와 햇빛이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똑같이 떨어지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향하여 있다. 비록 유다가 곧 심판받게 되었지만 그들 중 남은 자들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었다. 스바냐의 말(습3:17)은 70년간의 포로 생활 기간 중 계속 외쳐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셨다. 하나님은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확고히 하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셨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본서는 유다와 열방에게 그들의 죄 때문에 닥칠 임박한 환난에 관하여 경고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 교리적인 교훈:본서는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심판의 목적은 정화적인 차원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 기독론적인 교훈:본서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는 의로우신 주님으로(3:5), 열국을 대항하는 증인으로(3:8) 이스라엘의 '왕과 주'(3:15)로 나타나 있다.



    ·저 자 : 스바냐(하나님이 보호하심/여호와께서 숨기시다)

    ·기록한 때 : 주전 630년경

    ·내 용 :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고 은혜받기 위함

    ·제 목 : 네 손을 늘어 뜨리지 말라(3:16).

    1. 본서의 대지

    1) 여호와의 날의 형벌 ------------------------------------------------- 1장/2장

    2) 이스라엘의 장래 ---------------------------------------------------- 3장

    2. 본서의 대략적인 줄거리

    스바냐는 유다왕 히스기야의 5대 손자요 요시야의 혈통인 왕족이었다(1:1). 그는 왕족 으로 귀족들의 죄를 책망하였다. 그는 요시아 왕 집정시 예언하기 시작했다(이때는 나훔

    이 예언하지 50년 경과 후 였다/요시야는 스바냐가 원동력이 되어 대변혁을 일으켰다/

    대하34장 참조).

    그는 주변 국가들의 멸망을 예언했고(블레셋/모압/암몬/에디오피아) 당시 최강국인

    앗수르의 멸망도 예언했다(2:13/B.C 612년/성취되었음).

    특히 죄로인한 유다의 심판을 예언했고 그날은 환난/고통/황폐/폐허의 날이요, 캄캄하

    고 어두운 날로 그 비참함이 심각하게 드러날 것을 예언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충성된 남은 자는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라 했으며, 이방인들도 회개

    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것, 언젠가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 을 예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임(습2:11).

    본서의 특징은 "여호와의 날"이란 말이 7번 나오고 "질투"란 말을 하나님께서 사용하

    셨다.

    3. 스뱌나의 배경과 구성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히스기야 →므낫세→ 아 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29년 55년 2년 8세에 왕위에 3개월 11년 3개월 11년

    대하29:1 대하33:1 대하33:21 대하34:1-3 대하36:1 왕하23:36 왕하24:6 왕하24:18

    1장

    2장

    3장

    유다에 대한 진노

    열방에 대한 보복

    남은자의 회복

    오염된 신앙

    교만한 거역

    평화로운 귀환

    리라.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리리라.

    14-18절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다. 용사가 슬피 울 것이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다. 나팔을 불고 견고한 성읍을 치리라.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맹렬히 내리리라.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건지지 못하리라.


    스바냐 2장 요약

    1-3절 회개하라.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은 모이라.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겸손히 여호와를 찾으라.

    4-7절 블레셋 멸하리라. 가사는 버림을 당하고,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글론을 뽑히리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으리라. 그 지경이 유대의 남은 자들에게 돌아가리라.

    9-11절 모압과 암몬에 대한 경고. 모압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조롱했다. 이제 모압은 소담 같고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다.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교만했음이라.

    12절 구스도 내 칼에 죽으리라.

    13-15절 앗수르에 대한 경고.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니느웨를 황폐하게하고 사막처럼 마르게 하리라. 적막하고 황폐하여 들짐승이 거하리라.


    스바냐 3장 요약

    1-8절 유다를 심판하리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심. 패역하고 더러운 성읍은 화 있으리라. 여호와의 명령을 받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일어나 벌할 때까지 기다리라. 나의 분과 진노를 쏟으려 여러 나라를 소집하라.

    9-20절 남은 자의 회복과 소망. 하지만 그때에 입술이 깨끗하여 나를 섬기는 이들이 있으리라. 그들의 교만을 제하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남겨 두리라. 시온의 딸은 노래하라. 예루살렘의 딸은 즐거워하라. 시온에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내가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라. 내가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키리라. 그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스바냐는 어떤 책인가?

    하나님의 그루터기를 희망한 스바냐는 유다의 가장 유명한 왕 중의 한 사람인 히스기야의 증손자입니다. 
    그의 혈관에는 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전하는 자였습니다.

    • 스바냐서의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숨기심”, 또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란 뜻입니다. 이는 스바냐서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라고 하였는데(1:1), 그렇다면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 활동을 했으며, 우상 숭배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활동했던 기간은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되었던 영적인 암흑기를 깨트리고 요사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스바냐서의 배경

    스바냐는 경건한 왕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에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이 때는 신앙의 큰 “부흥“이 일던 시대였습니다(왕하 22-23장). 요시야는 8세에 보좌에 올랐으며 16세에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하였슶다. 20세 때에는 그 땅에 큰 개혁을 시작하였으며 우상을 헐고 거짓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심판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성전을 재건하여 그 민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크게 지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외관상으로 나타난 일들로 보아서는 신앙적인 관심과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표면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열성이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혁은 얄팍한 것이었으므로, 백성은 가정에서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불순종하였으며 예루살렘성은 온갖 사악함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스바냐서의 개요

    스바냐서의 개관도표

    1)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1:2-3:8)
    -모든 생물에 대한 심판(1:2-3)
    -유다의 심판과 회개에의 권고(1:4-2:3)
    -이방 열국들에 대한 심판(2:4-15)
    -예루살렘의 범죄를 책망함(3:1-8)

     2) 회복에 대한 약속(3:9-20)
    -열국의 회복(3:9)
    -유다의 회복(3:10-20)

     • 스바냐서의 메시지

    스바냐의 멧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은 심판을 다루며 한 부분은 자비를 다룹니다.

     1.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다(1:1-2:3)
    그들의 죄 때문인데 특히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4-6절). 이 선지자는 세 종류의 죄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버린 사람들과 우상만을 섬기는 사람들(4-5상반절)과, 여호와와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5하반절), 또한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그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6절)입니다.

    장차 임할 심판은 7-1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스바냐는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지역적으로는 과거에 유다와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또한 예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퍼부으실 장차 임할 심판(계 6-19장 참조)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주전 606년의 바벨론의 침략과 주전 586년의 성읍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이 될 것입니다.

    2장 1-3절에서 스바냐서의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하여 백성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칙령이 통과되기 전에 시간이 아직 있을 때, 여호와를 향하여 자비를 요청하라.“ 그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그러나 슬프게도 이 민족은 “종교적인“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이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다(2:4-3:7)
    선지자는 유다 주위에 있는 여러 이방 나라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들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임을 알립니다. 블레셋(4-7절), 애굽(12절),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는 완전하게 파괴되어 그들의 땅은 황야가 될 것입니다(13-15절).

     스바냐는 자기의 백성에게 다시금 호소함으로 그의 메시지를 끝맺고 있습다(3:1-7).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심판하실 것인가? 그는 예루살렘이 음란하고 오염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으시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반역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다(3:8-20)
    스바냐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멧세지를 끝맺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모을 것이며 이방 나라들을 벌하실 것이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기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스바냐는 3장 8절은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이게 될 마지막 때입니다(계 19:11-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이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시 모을 것이며, 그들의 죄에서 정결케 하실 것이고, 그의 의로운 왕국을 창설하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슥 12-13장 참조).

     • 스바냐서의 남은 자 신앙


    스바냐는 “남은 자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7/2:9/3:13)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적은 무리의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남은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유대인이 주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은 신앙인들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끝이 나면 그는 이 민족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괴롭힌 자들을 괴롭힐 것이며(3:19)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시온의 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