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쉬레(복된 사람)'인가
오늘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시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시편 전체의 서론이며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편과 2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복 있는 사람' 또는 '복된 사람'이라 하시는지, '복된 사람'이 행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탈무드에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5권의 율법서를 주었고 다윗은 5권의 찬양을 주었다고 하며 시편을 유대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토라(창, 출, 레, 민, 신)'에 비교합니다. 이는 시편이 내용적으로도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과 구약의 역사, 공동체 삶의 방향과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의 본문을 인용할 때 이사야(419번)와 함께 시편(414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은 총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5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권은 1편~42편, 2권은 42편~72편, 3권은 73편~89편, 4권은 90편~106편, 5권은 107편~159편입니다. 시편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찬양시, 탄식시, 감사시, 토라(말씀)시, 제왕시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그냥 마구잡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별, 편별로 그 내용이나 저자 등을 고려해 위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시편은 앞부분이 탄식의 간구에서 점점 적들과의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간구로 진행되다가, 감사 찬양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의 마지막을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마치는 것은 전능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고백과 확신과 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편'의 독특성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의 위치와 내용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그냥 우연히 150편 시편 중에 첫 번째로 배치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가 시집이나 찬양집을 발간할 때 편집자는 가장 첫 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할 것입니다. 대체로 첫 편은 그 시집이나 찬양집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나 개인이나 단체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을 넣을 것입니다. 시편 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을 편집한 사람들은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가장 먼저 넣을 시를 정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이라는 것은 시편이 성경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참작하면 시편 1편이 성경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시편 1편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 1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시편, 아니 성경 전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의 '아쉬레'
그런데 시편 1편은 시편 2편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편과 2편은 원래 하나의 시가 2개로 나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편 1편과 2편에 3편부터 붙여져 있는 특정 '표제'가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특정 단어로 두 시가 'Inclusio(수미쌍관)'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용적으로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시편 1편 1절에 있는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 또는 '얼마나 복된 지' 등의 일종의 감탄사 같은 말인 '아쉬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 1절은 "복되도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 "복되도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의 의미이며,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쉬레'가 시편 2편의 마지막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 성경에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고 한 것이 바로 '아쉬레'입니다. 즉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라고 하는 단어 사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 즉,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사람'에 대한 내용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민족과 국가에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창 12:2~3).
'아쉬레'는 '하가'하는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어떻게 받고 누리고 사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오늘 시편 1편과 2편이 설명하는 '아쉬레(복된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고 누리고 살 수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편 1편 1절은 "복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은 자"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그렇게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많은지요. 악한 자들은 우리를 밤낮으로 꾀어 함께 속이고 불법을 하는 자로 살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로 죄인의 길에 서게 함으로 '너도 똑같은 놈이야. 그러니 닥치고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보다 높아진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우리를 눌러앉게 합니다.
시편 1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만이 이런 악인, 죄인, 오만한 자에게서 벗어나 '복된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알다시피 '토라'입니다. 이것은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고 이를 지킴으로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 백성 삼겠다고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노예이고, 죽을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백성과 다르고, 가나안 족속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오경(창, 출, 레, 민, 신)이고 좁게 보면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하가1-읊조리다
이 '토라'를 밤낮으로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입니다. '하가'라는 단어에 있는 여러 가지 뜻을 살펴보면,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이미 복된 사람이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가'의 첫 번째 뜻은 '읊조리다'입니다. 단지 마음으로 음미하거나 명상하듯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음미하며 낮은 소리로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동서고금 책을 읽을 때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책 읽기)'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인데 렉시오 디비나는 뜻을 음미하며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 각 단어나 각 절, 권, 나아가 특정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뜻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경 말씀 자체에 대한 각 책의 줄거리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용도 모르는데 뜻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서 읽어 보면 그 내용과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책이 두껍고 여러 권이다 보니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다독입니다. 여러 번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서백독이면 의자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성경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좋습니다. 최소한 신앙 연수만큼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 속으로 읽다 보면 잡생각도 많이 나고 졸리기도 하니 소리 내서 읽거나 여럿이서 읽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아쉬레', '복된 사람'은 말씀을 밤낮으로 틈만 나면 읽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고 힘이 나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훈련도 힘들지만 걸핏하면 욕설과 얼차려를 주는데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지는지 온갖 짜증이 올라오고 폭력적인 본성이 드러납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입대할 때 갖고 온 신약성경과 시편이 묶인 작은 성경책을 윗주머니에 넣고 정말 틈만 나면 읽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읽었는지 그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6주 만에 신약을 1번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등병 생활 4개월도 그 못지않게 힘들었는데 이등병 생활하면서 다시 1번 읽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틈만 나면 성경을 읽으니까 정말 마음도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도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훈련소에서 함께했던 동기 중에 제가 틈만 나면 성경 읽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는 다른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제가 대대에서 군종병을 할 때 군종 집체 교육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 친구도 중대 군종병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라마나욧 성경묵상표'를 따라 읽는 성경 말씀이 저를 돌아보게 하고 제 삶에 대해, 가정에 대해, 더함공동체교회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 데 순간순간 생생한 지침이 됩니다. 성경을 밤낮으로 '읊조리는 것'은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이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가2-으르렁거리다
뜻밖에 '하가'의 두 번째 뜻은 '으르렁거리다'입니다. 이는 맹수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으르렁거리며 읽는다는 것은 전투하듯이 치열하게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처절하게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지만 읽는 태도나 자세가 마치 전쟁터에 나간 군사와 같고 먹을 것을 앞에 둔 맹수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복된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1절에 이미 등장한 것처럼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을 공격하고 함께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사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듯이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과 연결된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고…세상 군왕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는 자를 대적(시 2:1~2)"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고 부수어야(시 2:9)"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닥쳐오는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방어 무기입니다. 유일한 공격 무기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맹수가 먹이를 포획할 수 있는 강한 발톱이며 이빨입니다.
하가3-경영하다
'하가'의 세 번째 의미는 한걸음 여기서 더 나갑니다. 시편 2편 1절은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라고 하는데,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개역개정에서 '꾸민다'로 번역한 말을 예전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경영하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꾸민다, 경영한다, 이 단어가 바로 '하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내 삶과 상관없이 그저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내가 닥친 문제에 대해, 내 직장 속에서, 내가 고민하는 어떤 선택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영하고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말씀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과 관계없이 그저 무슨 경전 읽듯이, 주문 외우듯이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삶의 현실과 직결되어 길이 되고 답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묵상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며,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아쉬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형통한다는 것입니다(시 1:3). 그런 사람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시 1:6)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하는 '복된 사람(아쉬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진정한 '아쉬레'의 비결
그러나 시편 1편과 시편 2편이 하나의 시편인 것을 고려해 연속해서 읽으며 묵상해 보면 '아쉬레(복된 사람)'가 단지 개인적으로 '하가(묵상)'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시편 1편과 달리 시편 2편은 그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로, 국제적으로 확장시킵니다.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이, 그들의 군왕과 관원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대적해 그의 통치를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세운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겠다(시 2:6)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자를 '내 아들'이라 칭하고 '내가 낳았다'고 선언하십니다(시 2:7). 그리고 그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사 땅끝까지 이르게 하고, 대적자들을 철장으로 질그릇같이 부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행 13:33), 예수님이 천사보다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선언할 때(히 1:5), 예수님이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심(히 5:5) 등에 적용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위대한 통치를 성취함에 대한 선언(계 12:5, 19:15~16)에 인용됩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춤으로 순종함으로, 완전히 항복함으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고 '의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기름 부음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함으로 순종하며 그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묵상)'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의 뜻을 쫓는 진정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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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전은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잠 24:19-20절을 보면,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래”라는 말이 히브리어 ‘아하리트’인데, ‘미래’라는 뜻도 있고 ‘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악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끝이 없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전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했나? 잠 23:17-18절을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의인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끊어지지 않는 소망 안에서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이 간증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1. 말씀이 진리가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다. “복 있는 사람”의 길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에서 복이라고 할 때 대표적으로 말하는 단어가 ‘바라크’라고 했다. 바라크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과 같은 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바라크’가 아니라 ‘에쉐르’란 단어이다. 히브리어 성서로는 시편 1:1절 말씀이 ‘아쉬레 하이쉬 아쉐르’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쉬레’가 ‘에쉐르’의 복수형 단어이다. 직역하면 ‘~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혹은 ‘복들이 있도다 ~하는 사람은’이라는 뜻이다. ‘에쉐르’는 ‘바라크’와 구별되는 ‘복’이란 뜻의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을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에쉐르’는 ‘곧다, 솔직하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에쉐르’는 ‘똑바로 걸어가는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고 목표가 있다. 그 정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에쉐르’이다.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절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악한 생각을 가지고 걸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빠른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과 목표가 있는데, 거기에서 벗어난 곳에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맞은 편에 정면으로 대치해서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맞은 편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서지 않는 상태이다. 그것이 바로 ‘에쉐르’, 곧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맞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말씀의 편에” 선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말이 같은 맥락이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여기서 “오만한 자들”이란 ‘조롱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도를 조롱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않고, 성도를 조롱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이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목표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게 진짜 “복 있는 사람”인 것이다.
2. 말씀이 삶이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의 존재 상태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2절 말씀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즐거워하여”라는 단어가 ‘헤프초’인데, ‘기쁨, 소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소유격’ 표현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기쁨, 그의 소원’이란 뜻이 된다. “복 있는 사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소원, 자기의 기쁨으로 간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악인들은 세속적인 꾀를 생각하는데,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그들은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자기의 기쁨이며 소원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원으로 품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나? 기억하시나? 여러분이 마음에 어떤 소망이나 소원을 가득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나? 그 소원이 입에서 흘러 나오게 되어 있다고 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소원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의 뜻이라고 했다. 여기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흐께’의 원형이 ‘하가’라는 단어이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중얼” 이야기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본래 ‘하가’라는 단어는 의성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어떤 의성어라고 했나? “비둘기가 우는 소리”라고 했다. 우리는 비둘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 ‘구구구구’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비둘기가 우는 소리를 ‘하가하가’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들이 짓는 소리를 ‘멍멍’이라고 듣고 표현한다. 미국 사람들은 ‘바우와우’라고 듣고 표현한다. 이렇게 듣고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 히브리인들이 비둘기 우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 ‘하가’이다.
비둘기는 입만 열면 ‘구구구구’ 같은 소리만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말씀이 자기 안에서 소원이 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기쁨이 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비둘기가 입만 열면 ‘구구구’하는 것처럼, 일을 열었단 하면 ‘말씀, 말씀’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에 “하나님”밖에 없는 사람이다. 생각으로도 소원으로도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입만 열었다 하면 말씀이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말씀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하신다고 했나? 3절을 보시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놀라운 말씀이 지금 선포되고 있다. 사막과 같은 곳에 심겨진 나무도 물가에 닿아 있으면 열매를 낸다. 물가에 닿아 있으면 메마른 땅에서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약속의 길에도 고난과 시련이 있다. 고난, 시련, 배신, 실패와 같은 것이 약속의 길을 막아선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에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약속의 길을 가게 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언약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찰라흐)이라고 했다. 이렇게 형통하게 되니까 그 인생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나? 6절에 보니까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했다.
히브리어로 시편 1편을 읽으면, 알파벳 첫 글자로 시작해서 마지막 글자로 끝을 맺는다. 1편의 첫 단어가 ‘아쉬레’인데,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음인 ‘알레프’로 시작한다. 마지막 단어가 6절에 나오는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토베드’인데,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알레프로 시작해서 타우로 끝나는 시이다. 알레프는 ‘하나님’을 뜻하는 글자이고, ‘타우’는 끝을 이야기하는 단어인데, ‘완성’을 의미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언어적 유희를 가미해서 시편 1편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의미가 보여진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대목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끝”이란 그냥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이기도 하고, 소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미로 그것은 완성을 의미한다. 악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라.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않는다. 4절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다. 악인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형통함이 없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5절에 따르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의인들은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백성이 된다. 그러나 악인들은 심판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결국은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못한다. 미완의 삶, 심판과 저주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악인과 죄인의 결국이다. 반면에 의인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에는 간증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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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쉐르(אֶשֶׁר)의 복을 받게 하소서!
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암송해도, 다시 암송해도, 세월이 지나서 암송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 시편 150편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저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보기도 하고 시편 1편의 내용이 예레미야 17장의 내용과 같기에 예레미야가 저자라고 보기도 합니다.
[렘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17: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 누가 저자라도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고백시편이기도 합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의 고백입니다. 복福있는! 사람, 복福없는 사람이 아니라 복福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福-축복祝福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 בָּרַךְ의 축복이요
하나는 아쉐르(에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아쉐르의 축복은 영혼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단의 축복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신앙은 기복주의祈福主義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자는 아니지만 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복祈福은 정당한 기도임을 믿기에 현실의 축복을 위한 기도도 당당하게 드립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영혼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깨닫는 사람, 악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오만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깨달음이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을' 결단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עֵצָה 에차 counsels는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 바닥이 드러나는 인간적인 꾀일 뿐입니다. 맑지 않습니다. 그 악인들과 함께 걷지 않고 does not walk ! 죄인들의 길에 함께 서지 않고 does not stand , 오만한 자들과 함께 앉지 does not sit 않습니다.
[시 1:1] Blessed is the one who does not walk in step with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that sinners take or sit in the company of mockers.
누구와 함께 걸어야하는지, 어디에 서야하는지 어디에 앉으면 안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깨닫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영적인 지혜, 생각의 힘입니다.
생각의 힘이 있기 원합니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생각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항상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딤후 3:6] -어리석은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그래서 기도합니다. 생각의 힘을 주소서! 분별력과 판단력과 의지의 힘을 주소서! 생각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게 하시고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지켜나가게 하소서!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 사람인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 즐거움 חֵפֶץ 헤페츠 delight 기쁨, 즐거움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어떤 것이 가장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영적 품격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우십니까?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내 기도하는 그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세상의 즐거움도 많겠습니다.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이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晝夜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 묵상(默想)הָגָה 하가 meditate 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내 생각을 발전시키고 내 생각을 훈련시키고 내 생각을 새롭게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묵상하며 생각하며 거룩한 생각의 힘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시냇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형통(亨通)의 히브리어 צָלַח 찰라흐는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전진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꼭 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They are like chaff that the wind blows away.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마음과 생각들이 시대에 가득합니다.
어쩌면 나도 열매없는 겨와 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알곡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마지막에 알곡과 겨가 분명히 구분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그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했습니다!
[눅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오늘! 알곡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덧없이 날아가지 않기 원합니다.
알곡으로 남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내게 진리에 대한 지적 능력! 지성知性! 생각의 힘을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 주님의 말씀이 진정한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내게 주신 시간과 달란트가 열매를 맺어 알곡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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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편,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종국
시편 2편은 “제왕시”이면서 “메시아 예언시” 혹은 “찬양시”이다. 시편 1편과 더불어 작자가 미상 시이다. 1편은 복으로 시작되고 2편에서는 복으로 끝마친다. 그래서 한 쌍의 시로 보는 학자도 있다.
시편 전체를 왕궁으로 비유할 경우, 시편 1편을 그 출입구라고 한다면 시편 2편은 그 왕궁의 보좌에 앉으신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
이방 나라들이 다윗 왕국에 대한 음모와 반약으로 통치를 거절하는 것을 비웃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왕국의 우주적 통치를 예언적으로 노래하며 그 분을 경외하며 섬기기를 요청하고 있다.
본 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두 왕국의 종국을 보며 준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신분과 영적 싸움의 현장과 삶의 원칙과 우선순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A. 이방 나라들의 음모와 하나님의 비웃음(1-6절)
1. 반역한 나라들에 대한 탄식(1-3절)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표준 새 번역은 “1. 어찌하여 뭇 나라가 a) 공모하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a.70인 역에는 격노하며) 2.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꾸며 주를 거역하고,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3.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이다.
1절에 시인은 ‘어찌하여’라고 수사 의문을 통하여 놀람, 의분, 격정을 표출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어찌하여”가 일석이조(一夕二鳥, double-duty) 기법으로 1절, 2절에 각각 2번씩 총 4개의 동사에 각각 적용할 만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방 나라(뭇 나라, 열방, 민족들, 나라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됨)의 이스라엘에 왕에 대한 반역에 대한 통탄과 의문을 제기하는 말이다. ‘어찌하여’는 좌절감을 나타내는 의문사가 아니라 이방 나라들의 반역적 행위에 대해 놀라움과 조소를 나타내는 수사 의문사이다(D. Kidner).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뭇 나라들(이방 나라, 민족들, 열방들)이 그동안 예루살렘 왕의 통치를 받으며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새 왕이 등극하면서 여러 속국의 왕들이 음모와 반역을 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어찌하여’ 어리석고 허무한 짓들을 하고 있는가 하며 수사 의문으로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로저손과 맥카이(Rogerson & Mckay)는 “본문에서 언급된 열방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지배하에 있었던 이방 나라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라고 했다.
이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서로 꾀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속박으로 여기며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하며(롬 2:8),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헛될 것이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쉬야’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의미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왕들(특히, 다윗 계열의 왕들)은 대관식 때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 1:45). 이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왕직을 대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출 28:41; 3:3; 삼상 10:1; 16:3).
당시 이방 나라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통치와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반역을 꾀하였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만왕의 왕 되시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메시야에 대한 다스림을 거부하는 세상 나라의 통치자인 악한 권력자, 악한 제도, 악한 영, 악한 무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시는 일차적으로 다윗 왕가의 정통성에 대한 제왕시(royl psalm)이나 긍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영광의 왕이신 메시야 예언시(messianic psalm)이다.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말하는 제왕시이자
메시야 예언시인 시편 2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하였다(행 4:27-28).
‘기름 받은 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구약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 기름 부음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선택받음, 직책 임명, 직분 수행에 필요한 성령님의 지혜와 덧입음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로서 왕, 선지자, 제사장 등 3 중직을 수행하는 진정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대항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뭇 나라들이 하나님께 분노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 분노하여도 유익이 절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될 뿐이다.
이방, 세상 통치자들이 함께 은밀하게 도모하고 음모를 꾸민다. 바벨탑 사건 때부터 인간들은 계속해서 서로 뭉쳐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다. 그들은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
3절에 “우리가...하자”라고 스스로 격려 내지 권고하는 언급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방 왕들의 음모를 꾸미기 위한 악한 결의를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이 부과한 여호와의 율법이나 통치 체제를 “맨 것과 결박” 혹은 “족쇄”와 “사슬”로 보고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자체를 때로는 족쇄와 사슬로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전하는 자유방임적 생각이며 태도이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사는 것이 자신을 얽어매고 결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거나 은혜가 소진되어 버린 상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 인본주의, 세속주의, 향락주의가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고 성경적 윤리관을 파괴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교만의 극치인 현대 자유주의 극치는 곧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하늘에서 비웃으시는 여호와 하나님(4-6절)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표준 새 번역을 다음과 같다. “4.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5. 마침내 주께서 분을 내고,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호령하시며, 이르시기를 6. 내가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세상 나라와 민족들과 그들의 왕들과 제왕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정서적, 감정적 반응(4-5절)과 행동적, 정치적 반응(6절)을 보여주고 있다.
4절의 ‘하늘에 계신 자’는 매우 높은 분에 대한 칭호이다.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시123:1). 표준 새 번역에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 ‘공동번역에는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기타 번역에는 ‘하늘에 좌정하신 분’ 등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단순히 ‘하늘에 계신 자’(개역 개정) 혹은 ‘하늘에 앉으신 자’(RSV, NASB)가 아니라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자’(the One enthroned in heaven, NIV, NJB, NAB)이시다.
또한, 그분은 ‘주'가 되신다.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이다. 그것은 만물을 소유하신 분(8:1), 지극히 탁월하신 주, 만물 위의 주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분은 바로 우주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신다. 이 우주의 왕께서 ‘지상의 왕들’의 악한 도모와 음흉한 음모를 비웃으신다.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실 뿐 아니라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anthropomorphic)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역 음모를 결국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37:13:59:8).
이처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전 우주를 통하시는 주권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과 그분의 통치자들을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 웃으실 뿐만 아니라 가소롭게 여기시고 비웃으신다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은연중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Kraus).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음모하는 것을 보시고 웃으시고 비웃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반대를 두려워하시거나 당황하거나 멈짓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만 그들의 음모와 도모에 대하여 비웃으실 뿐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기에 웃으신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보좌에 위대한 왕으로 앉아 계신다. 그분의 우주의 통치자로 앉아 계신다. 그분은 인간들처럼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해하면서 하늘 보좌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당황하고 계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속에 세상을 통치하기에 완전한 평화와 확신 속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웃으신다. 그분의 통치 영역이 세상의 왕좌가 아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닌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하늘에 앉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보이스(Boise)는 “하나님은 떨지 아니하신다. 그는 광대한 하늘 성벽 뒤에 숨어 적의 수를 세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왕국에 대하여 상대방 적수에 맞대응하기 위하여 충분한 군사력이 있는가 계산하지 않는다. 그는 당황하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으신다. 그는 이 엄청난 지상의 바보들을 보고 그저 '웃기만 하신다’” 라고 적절히 비유적으로 말했다.
모건(Morgan)은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 이 웃음은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위로가 된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의 고난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모든 교만한 자랑과 폭력을 비웃으신다”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모든 역사의 현상에서 악인들의 대적을 비웃으실 것이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악인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도전하고 핍박해왔다. 이 적들의 모든 일은 좌절되고 무너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 예를 살펴볼 때, 기독교를 혹독하게 핍박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AD 284-305 재위)가 있었다. 그는 극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기독교의 이름이 말살된다”는 문구가 적힌 메달을 만들어 매달라고 명령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그의 제국 국경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두 개의 기념물을 세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조비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헤라클레우스 카이사르레스 아우구스티(Diocletian Jovian Maximian Herculeus Caesares Augusti)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확장하고 공화국을 파멸로 몰고 간 기독교인의 이름을 말살시킨 공로를 인정한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전 지역에 세우고 강제 숭배를 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모든 곳에서 금지시켰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죽어서 역사 페이지의 한구석에 달린 한낱 각주처럼 사라졌다. 반면에 그 악한 자가 그처럼 혹독하게 말살하고 박해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명성과 영광이 온 땅에 왕성하게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주의 왕, 역사의 왕께서 땅의 악한 왕들을 통치는 비웃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6절에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했다. 여기서 '내가'는 히브리 본문에서 강조 어법으로 사용되었다. 다윗 왕조의 왕을 세우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세상의 왕들과 메시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자신과 대조시킨다.
또 ‘나의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과 뜻에 따라 세움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왕이시다.
‘내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를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우신 그곳에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 메시아를 그곳에 세우신다는 것은 메시아께서 그곳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메시야 도래와 그분의 통치를 예고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곳에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하셨고(행 2:36),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땅에 전파될 것이며 장차 재림하심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딤후 4:1).
B.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7-12).
1. 아들의 법령(7-9절).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표준 새 번역은 “7.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c) 네 아버지가 되었다. (c. 또는 너를 낳았다) 8. 내게 청하여라. 뭇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것이 되게 하겠다. 9. 네가 그들을 d) 철퇴로 부술 때에,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d. 또는 철 홀로 다스릴 때에)”라고 되어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령(의정서, 칙령, 영令) 전한다. 이것은 어떤 인물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준하는 증빙 문서를 의미한다(Kraus). 이 법령의 다윗 언약인 삼하 7:14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윗 언약에서 다윗과 그의 후손은 여호와의 양자로 선택되었다. 양자됨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즉, 다윗 계열의 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아울러 그의 대적들을 심판할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Weiser, Briggs, Rogerson, & Mckay).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목된 시온의 왕은 신약시대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본 절은 구속 역사 관점과 언약 신약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하여질 예수의 대관식을 보여 준다.
또한, 본문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을 받는 동시에 그 증거들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것은 (1) 예수의 세례(마 3:17), (2) 변화 산상에서의 변모하심(마 17:5), 그리고 (3) 예수의 부활 등이다. 이 셋 중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만왕의 왕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충분하게 남는다(Craigie).
그는 메시아의 예표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 내용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메시아에 대해 세 가지를 예언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 저자를 다윗으로 본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며, 그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밝히시고, 아버지에게서 ‘난 자’로서의 그의 신분을 강조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신 증거로 인용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보다 더 뛰어나고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고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뛰어난 ‘이름’은 바로 ‘아들’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때로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른다(욥1:6).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특정한 의미에서 어떤 천사에게도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오직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 이름이 바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2위 성자, 아들 되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놀랍지 않는가?
‘오늘날’은 언제인가? 하나님께도 우리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자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늘날’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시간 세계 속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5). 성경의 풍성한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온 세상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8절에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다.
"내게 구하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20:4;21:2, 4;삼하 24:12;왕상 3:5). 하나님께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택된 왕, 그의 아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자녀인 성도들이 받은 기도의 특권이기도 하다(요16:23-24).
이어서,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선택된 왕의 아버지이신 주 하나님은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온 땅을 물려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相續者)(마 21:38;갈 4:7)가 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Krause)는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겠다’는 뜻은 그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칠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또한 페로네(Perowne)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자녀에게 '아낌없이' 무엇이든 주신다” 뜻이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한 우주적인 통치를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Craigie, Rawlinson, Briggs).
사실, 이스라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8절의 제시된 것처럼 이방 나라, 곧 열방 모두를 복속시키고 땅끝까지 다스린 적이 없다. 솔로몬 경우에도 그의 통치권이 북으로 유브라데 강변까지 남으로 애굽 하수까지 미쳤다고 할지라도 두로같은 푀니시아 지역은 복속하지 못하였다(왕상 11:14-25).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는 유브라데 강 이편에서 대해까지, 애굽 시내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할 약속의 땅이다(창15:18-21; 신1:7; 수1:4; 왕상 4:21). 이 약속은 솔로몬 당대에 잠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2장 8절의 ‘세상 끝까지’는 문자적 성취가 아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약속의 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 통치가 지역적인 가나안 약속의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친다고 선교학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시 6:1-7; 68:31-32; 72:8; 사49:6; 단 7:14; 눅2:32; 행1:8; 행13:37)등이다.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유업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하나님 하아버지께서 맡기셨다. 요한복음 5장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종말에 이르러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예언하셨다.
구약의 다윗 왕국의 확장은 신약의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세계 복음화에 대한 시편 저자의 예언으로 오늘날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9절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는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다.
철장(鐵杖, rod of iron)은 '쇠로 만든 지팡이나 막대기, 철퇴"이다. 쇠막대기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고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질그릇, 항아리에 적국들과 그들의 왕들의 이름을 적어서 박살을 내면서 그들을 통치하고 지배할 것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나타낸다. 애굽의 왕들은 대관식 때에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들의 이름을 적은 질그릇들을 깨뜨리곤 하였다(Kraus).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국이 이처럼 강력한 통치권을 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부활 역사와 재림의 온 우주 심판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굽의 왕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질그릇을 깨뜨렸지만 메시야는 '실제로' 질그릇을 깨뜨림과 같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의 통치권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나,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어떤 학자들은 ‘깨뜨린다’는 단어가 파괴적인 용어이므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라스도의 통치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Wette, Hupfeld). 그러나 이 구절은 계시록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되어 인용되었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묘사한 구절이 여러 곳에 나와있다(계 2:27;12:5;19:15). 로린손(Rawlinson)의 언급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에는 두가지 요소 즉, 평화적인 요소와 아울러 악한자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심판적인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방 나라들에 주신 법령(10-12).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표준 새 번역에는 “10. 그러므로 이제, 왕들아, 지혜를 배워라. 땅 위에 있는 통치자들아, 경고하는 이 말을 받아들여라. 11. 두려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여라.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진노하실 것이니, 너희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할 것이다. 그의 진노하심이 지체없이 너희에게 이를 것이다.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10절에서 12절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법령이다. 이 법령에는 이방인들이 행하여야 할 일들 3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 둘째,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 셋째,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10절은 세상의 악한 자들에 대한 권고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곧 메시야에 대한 도전에 대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복종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고 그의 경고를 받아들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지혜로운 행동과 경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1-12절의 내용이다.
첫째,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떨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하여 랑게(Lange)는 “첫째로, 신앙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뜻이며, 둘째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복종하면서 다윗 왕조의 속국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복하라는 권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떠는 것은 마땅히 두려할 자를 두려워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촉구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으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13:28도,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교훈하였다. 경건함과 두려움과 기쁨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생활의 올바른 덕목들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메시야에게 ‘입 맞추라’고 권한다.
입 맞추는 것은 주로 고관이 아랫사람의 겸손한 키스를 받는 복종의 키스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과의 관계에서 원하시는 애정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합당한 위치와 자세를 갖추시길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 사랑의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하나님이 세우신 왕께 입맞추지 않으면,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그 뜻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객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자기에 주어진 명에 다하여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처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왕권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메시야에게 순복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는 그 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심이라”이라고 했다. 공동번역에는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표준 새 번역에는 “자신이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신속한 심판을 일컫는 것으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시는 진노의 무서운 경고로 끝나지 않고 복된 삶을 누리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며 이방 나라들의 회심을 요청하는 것이다.
셋째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의 뜻은 문자적으로 “그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고 음모를 꾸미지 말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다.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하는 자에게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바로 알고 섬기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나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는 확실하고 분명한 도움과 보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구속 역사와 언약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이 세상 나라와 세상 권력이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를 도전하고 악한 도모를 꾸릴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승리할 것임을 선포하며 그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와 굴복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라는 뜻이다. 늘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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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믿음으로 얻은 참된 평강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론이고, 시편 3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본론이다. 시편 3편으로 시편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위기를 만나는 시편 기자인 다윗을 본다. 시편 3편은 다윗의 일생 중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에 지은 시요, 기도요, 고백이다. 본 시편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황급히 신발을 벗은 채, 통곡하며 쫓길 때 그때 지은 비탄(悲嘆) 시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고난의 인생사를 본다. 삶은 순탄하지 않고 험산준령의 인생길임을 보여준다. 시편 3편은 우리 인생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생의 삶의 현장이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참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또한,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외칠 수 있는 기도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대적의 에워싸임 속에서도 깊은 단잠에서 깨어 아침 햇살과 더불어 믿음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환경을 초월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 참된 평강과 안식을 볼 수 있다.
시편 1편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따르는 자’의 “복”을 말한다. 시편 2편은 ‘우주의 왕되신 왕이신 메시야를 섬기고 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복”을 언급한다. 시편 3편은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복”임을 가리킨다.
1편, 2편은 “복”(아쉬레)는 상대적인 복된 상태 의미한다. 시편 3편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 복(베레카)임을 강조한다. 1, 2편은 인간의 측면에서 진정으로 참된 복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변증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3편은 완전히 복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절대적 하나님을 강조한다.
시편 1편, 2편의 상대적인 복이
시편 3편에서는 절대적인 복으로
1. 대적자에 대한 다윗의 탄식(1-4절).
[개정]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새번역]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지은 시> 1.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2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1.1. 다윗의 뼈저린 아픔의 탄식(1-2절)
본 시의 표제에 본 시편의 기자와 상황을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은 삼하 15장으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쫒길 때, 기록한 시이다.
성경 여러 곳에 피하는 인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낯을 피한 경우(창3:8), 하갈이 사라의 얼굴을 피한 경우(창16:60),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한 경우(창35:1). 모세가 바로의 낮을 피한 경우(출2:15), 입다가 자기 형제들을 피한 경우(삿11:3), 다윗이 사울의 낯을 피한 경우(삼상 20:1; 21:11), 요나가 하나님을 피한 경우(욘1:3, 10) 등이 있다.
약자로 피하는 인생, 범죄자로 피하는 인생, 사명을 버린 자로서 피하는 인생이다. 다윗은 그가 범한 죄의 대가로 자산의 아들의 반란으로 쫓기고 피신하는 가운데 본 시를 기록하였다.
1.1.1. 다윗의 탄식 소리(1절).
1절에 다윗은 하나님께 탄원한다. 자신을 대적하고 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면서 탄식한다. 본 시도 이런 면에서 일종의 탄식 시이다. 다윗은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절규의 기도를 드린다.
‘어찌’(히브리어, ‘마’)라는 의문부사가 1절에 2번, 2절에 1번 연속으로 나온다. 그 만큼 ‘대적들이’(1절), ‘일어나는 자들이’(2절),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이“(3절) 엄청나게 많다고 탄식한다. ’어찌‘는 다윗이 당면한 위기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심각성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Kraus, Lange).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진 다윗은 그의 수많은 대적과 그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교차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혹자는 본 시의 상황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막 빠져나온 때, 곧 요단강을 넘지 못한 때일 것이라고 추측한다(Rawlinson). 이때가 압살롬의 반란 기간 중에서도 다윗에게 가장 어려웠던 때였다(삼하 17:1-23)고 보는 입장도 있다.
1.1.2. 대적자의 조롱 소리(2절).
2절에 대적들이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빈정된다. 그러한 조롱과 비웃음이 다윗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들의 조롱은 이미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자신의 핍절한 심정에 더욱더 다윗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 세력들의 반역으로 다급하게 왕궁과 수도 예루살렘을 피신하여 쫓겨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갈 정도로 비참했다(삼하 15:13-16:4).
다윗이 신하들과 함께 피난 길 가운데 바후림에 이르렀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에 속한 시므이가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연달아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빈정거렸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사무엘하 16:5-8) 하였다.
2절에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도움은 ‘넓히다’, ‘공간을 만들다’의 뜻으로 전쟁에서 구출, 승리를 얻는 ‘구원’을 뜻한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속죄적 의미보다 위기 속에서 구원, 구출을 의미한다.
신자에게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만큼 양심의 가책이나 불신의 생각만큼 심령의 지옥을 만드는 것이 없다. 자신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불신과 불안감은 영혼을 핍절하게 만든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도움이 없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라는 말만큼 비참한 상황이 없다.
2절에 대적자들이 다윗을 가리켜, 즉 ‘나를’은 히브리 원어로 ‘레납쉬’로, 직역(直譯)하면 ‘나의 영혼에게 대하여’이다. 원수들이 다윗의 영혼을 질타하고 있다.
맨튜 헨리(Mattew Henry)는 그들의 비아냥거림이 “다윗의 몸에 가시가 아닌, 뼈 속에 칼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그 생각 만으로라도 매우 두려워진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그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없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본인의 영적 상태를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마귀와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직감하기 때문이다.
스펄전(Spurgeon)은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모든 고난 중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신령한 교훈은, “신자의 범죄는 대적자에게 공격의 별미가 된다. 그러나 신자의 회개는 원수를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2절 말미에 ‘셀라’로 끝맺음한다. 시편 3편 2절에 처음 등장하는 셀라는 총 39편의 시편에서 68회 사용되었고, 하박국에서 3회(합 3:3, 9, 12) 등 구약 성경에만 총 71회 기록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셀라의 문자적 의미는 ‘올리라’는 뜻이고 기능적으로 음악 적 막간을 위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셀라는 ‘아멘’과 비슷한 뜻도 있다. 셀라가 나오면 ‘쉬어가라’는 노래의 기호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읽지 않아도 된다.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셀라’를 다음과 같이 의미 있게 해석했다. 셀라의 뜻은 "그것을 주목하라" 또는 "거기에서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윗의 대적자들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잠시 거기서 멈추고 이러한 것에 대해 생각하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로다! 이처럼 사악한 암시를 걷어 치루라“고 했다.
2.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는 다윗(3-6절).
[개정]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 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의 방패,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 나를 떳떳하게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니, ) 4.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2.1. 방패와 영광되시며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3절)
개역 성경에는 이 호칭 앞에 '그러나'라는 용어(웨)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란 말은 기도의 노래에서 흔히 시인이 절박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사이다(Kraus). 이 신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결코 인간을 의지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을 공격하는 ‘수많은 대적”과 매우 대조적으로 “그러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위기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현실적 상황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이런 분이시길 때문이다. 다윗은 언약의 말씀을 확고히 붙잡고 부르짖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다윗은 밤새 기도드린다. 아무리 원수들의 공격이 맹렬하다고 할지라도 다윗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돌보신다는 철저한 믿음의 고백을 한다. 2절에 대적자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처럼 비양거린다. 3절에 “그러나” 다윗은 그에 반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3가지로 반격하며 선포한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대적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하여 당연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행위로 인한 위기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그분의 신실한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회복과 구원을 간구한다. 여기서 믿음은 연약한 자신, 범죄한 자신, 그리로 인한 고난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불안한 현실, 불확실한 미래, 이성주의과 인본주의의 물결이 온 세상에 가득 찬 시대에 다윗처럼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고백하는 다윗처럼 주님의 구원을 앙망하며 기도하며 여전히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는 신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주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1.1. 방패가 되시는 주님(3절).
‘나의 방패’는 나를 온 사방의 공격에서 철저히 방어해 주는 ‘나를 두르는 방패’(a Shield aroud me, NIV)을 일컫는다. ‘방패’라는 히브리어 단어(마겐)는 시편 84:9,11; 89:18 등에서는 ‘주권자’라고 번역했다. 주님은 다윗 자신을 온 사방을 둘러막아 주시는 ‘방패’이면서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주관하신 ‘주권자’이심이라는 뜻이다.
또한 시편 76:3; 91:4에는 ‘병기’로 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를 공격하는 어떤 원수와 세력을 막아주시는 방패요, 병기이시며, 이러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가 되시기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는 미래적 소망을 표현하는 고백이다.
궁겔((Gunkel)은 "방패는 단지 한 면만을 막아 주지만 여호와는 모든 면을 다 막아 주신다"고 해석했다.
2.1.2. 영광이 되시는 주님(3절).
주님이 다윗 자신의 영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영광은 명예와 평판을 뜻한다. 표준 새 번역에서 주님은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의역하였다. 다윗은 왕적 권위를 도전하고고, 반역과 음모와 함께 조롱을 당하였다. 이처럼 그의 명예는 땅바닥까지 추락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들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영광은 하나님의 찬란하고 위엄찬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이 다윗의 영광이 된다는 뜻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위엄과 존엄을 뜻하기도 한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날 때, 자신에게 임한 명예와 평판이 떠나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잃어버리고 떠나 버렸던 명예와 평판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
또한 다윗은 반란으로 왕관을 벗은 채, 맨발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모든 왕적 권위의 영광이 추락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땅의 왕으로서 자신의 영예가 추락 되어버렸지만, 천상의 왕, 우주의 왕되신 주님의 영광을 믿고 바라보는 다윗의 신앙고백을 볼 수 있다. 마치,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 모든 것이 살아져 버린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듯이, 위기일발의 도망자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왕적 권위와 위엄을 상실해버렸을지라도 주님만은 빼앗을 수 없고 주님만은 자신의 영원한 영광이 되심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주는 내 유업과 내 잔의 분깃이시니, 주께서 나의 몫을 지키시나이다.”(시 16:5, 한글 킹 제임스 역본)라는 말씀과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들은 명예, 권력, 소유물 등에 자신의 영광을 찾는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 안에서 그 영광을 찾았다.
메이어(Meyer)는 “오 내 영혼아, 너는 하나님을 너의 영광으로 삼았느냐? 다른 이들은 부, 아름다움, 지위, 성취를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다. 너는 그들이 이것들에서 발견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있는가?”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2.2.3.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3절).
머리를 들게 하신 것은 법적 용어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고가 재판장에 의해 죄가 없다는 것을 판결하고 인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슈미트(H. Schmidt)는 “‘머리를 드는 자’란 판사가 법정에서 부복하고 있는 피고의 머리를 세우면서 ‘당신은 무죄요’ 라고 선언하는 장면과 연관된다”고 하였다.
델리취(Delitzsch)는 “하나님께서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수그러진 다윗의 머리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 올리게 하시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다.
요즈음 정치인들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단식에 돌입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 사법적 혐의가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재판이란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무죄가 입증되어야 한다. 피고에 대하여 무죄로 판정될 때, 억울한 누명을 벗고 추락된 명예와 평판이 회복된다. 그때 숙여졌던 머리를 당당하게 들게 된다.
다윗은 원수들의 대적과 공격, 고소와 참소의 혐의를 벗고 머리를 들게 된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감람산에서 수치로 뒤덮혔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원수로터 승리를 주시고, 상실한 영예를 회복주시고, 뿐만 아니라 억울한 혐의를 벗게 하신다.
2.2.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4절).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 되시고,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위기 속에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내가 부르짓고, 주님은 응답하신다”는 문장 패턴이다.
성경에서 ‘부르짖다’ 또는 ‘소리 내어 기도하다’라는 성경 구절 다음에는 대부분 ‘응답하겠다’혹은 ‘응답 되었다’라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마치 세트처럼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어로 ‘부르짖다’가 ‘쯔아흐’인데 마치 ‘으악’ 하면서 소리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살려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주겠다고 하시는 ‘샤마’가 나온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쯔아흐’ 하면 하나님은 ‘샤마’ 해주신다는 기도의 신비이며 기도의 역사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고난의 풍파 속에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한 자이다.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기로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최고의 선택은 부르짖는 기도였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맨발로 기도의 자리에 뛰어들어 힘써 부르짖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결과 자기 마음속의 가득 찼던 두려움 먹구름이 사라지고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만나는 엄청난 고통의 상황 속에서 낙심되어 계속 적으로 심적 괴로움과 정서적 불안이 몰려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짖는 행위이다. 기도는 심혈을 기울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부르짖는 것은 단순히 악을 쓰고, 열정을 내는 것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전적 신뢰할 때, 매달리는 영적 간절함을 뜻한다.
성경에 부르짖는 기도의 예가 많이 나온다. 성경에는 다윗은 물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위기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역전승의 역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수없이 증거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위기를 만났을 때, 부르짖는 기도를 드린 자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부르짖는 기도의 훈장을 받은 자들이다.
원수들의 포위망 속에서 다윗이 전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뿐 아니라, 실제로 죽음의 수렁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깊은 영적 체험과 더불어 기적을 체험하고 되었다. 우리가 영적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우리가 무시로 깨어 있지 않으면 작은 문제 앞에서 자신이 비참하게 초라해지고 문제 앞에 굴복당하고 만다. 그러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영혼이 깨어나 힘을 얻고 근심, 걱정,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성산에서 응답하신다(4절)고 했다. 성산(聖山)은 시편 2:6에서 언급된 ’거룩한 산’이다.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곳을 일컫는다. 다윗은 거룩한 산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분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법괘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과 성전이 위치했던 시온 산을 가리킨다(시15:1; 43:3; 렘31:23; 단9:16, 20). 시온 산을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보았기에 성산이라고 불렀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성산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
출애굽 시에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재하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가나안에 정착 이후 다윗 왕국 시대가 열리면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의 처소를 시온 산으로 옮기셨다(시68:8, 17).
다윗은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가져다가 시온에 두었다. 그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다(삼하 15:25).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고 명했다(삼하 15:25). 그 이유는 피난 속에서 법궤를 이동하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다윗의 언약 사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도 응답은 상징적 의미에서 시온 산에 있는 언약궤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그 실제적으로 언약의 약속의 주 곧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진 왕(2:6)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건축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 그곳에서 혹은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관습이 생겼다. 다윗은 여기서 개관식을 거행했었다(시2:6). 다윗 왕을 성산에서 세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임재하신 곳에서 다윗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시편 여러 곳에서 기도의 응답이 시온 산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시14:7; 20:2). 우리가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임재하신 곳에서 응답하신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은 지역이라는 시온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짖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1-13)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교훈하시는 것처럼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2.3. 단잠을 자게 하시는 주님(5절)
개정 성경에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또한 새번역 성경에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 단잠을 잘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 길은 무엇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어떤 상황에서 밀려오는 염려, 근심, 걱정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평강을 주시며 깊은 단잠을 잘 수 있다. 소망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부르짖는 기도는 성산에서 떠오르는 밝은 아침 햇살을 보게 될 것이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기도의 불씨가 되고 기도의 불길이 두려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평강의 새벽을 맞게 된다.
2.4. 두렵지 않게 하시는 주님(6절).
개역 개정 성경의 본문 6절에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새번역 성경 본문의 6절에는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을 포위한 자들은 ‘천만 사람’이 아니라 ‘천만 군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천만도 구체적인 숫자라기보다 ‘수많은’ 군대를 의미한다.
‘에워싸 진 친다’는 말을 군사적 용어로 ‘진을 치고 막 공격하려 한다’는 긴박한 상황을 의미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깊은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의 역사이다.
수많은 대적자의 군대가 사방에서 진을 치고 죽음의 위협으로 더욱 두렵고 무서운 밤을 깊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샘솟는 평안과 확신이 가득차 있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신 1:29, 3:22, 7:18, 20:1. 수 10:8).
위기를 당하고 온갖 두려운 생각으로 몰려올 때, 아무리 몸부림치고 별수단을 다 동원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고 확신하니 별 어려움 없이 단잠을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분(시 127:2)이시고 대적자들이 온 사방 둘러싸고 언제 공격해 올 줄 다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떠한 해도 받지 않는다 확신이다.
사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장기가 작동하여 생명이 유지된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방어 기재와 능력이 없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러나 잠자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에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인생 문제들이 수없이 산적해 있다. 그 문제 속에 우리 자신이 침몰당하고 만다. 동서남북 사방에 이 문제, 저 문제 낙망과 좌절의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이때, 우리가 낙심하여 스스로 벼랑 끝으로 추락하느냐 아니면 벼량 끝에서 곧바로 하늘을 향하여 날 수 있느냐 그것은 믿음에 달려있다. 믿음은 날개이다. 소용돌이, 둘러싸인 현안 문제들을 제치고 창공을 나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다. 믿음은 절망의 절벽에서 하늘을 향해 나는 날개이다.
3. 구원과 복을 주시길 간구하는 다윗(7-8절).
[개정]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새번역] 7.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 아, 주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러뜨리셨습니다. 8 구원은 주께만 있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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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고난 속에 믿음으로 얻는 기쁨과 평안
시편 3, 4, 5편은 모두 다윗이 쓴 비탄시이다. 다윗이 그와 맺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탄원시, 신뢰시이다. 시편 3편, 4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반역으로 급박하게 쫓기는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긴급한 구원을 간구한다.
시편 3편을 아침의 기도이며, 시편 4편은 저녁의 기도로 한 쌍을 이룬다. 5편은 압살롬 반역이 터지기 직전에 다윗이 닥쳐올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간구하는 시이다.
본 시편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는 두려움이 몰아치는 밤조차도 평안히 맞이할 수 있음을 노래하는 ‘저녁 찬송시’이다. 본 시는 탄식과 애가로 시작되지만(1-2절), 신뢰의 찬양(7-8절)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본 시를 비탄의 시, 애가의 시, 신뢰의 시라고 불리운다.
본 시의 표제에 ‘다윗의 시, 인도자(메낫체아크, 찬양대장, 지휘자, 혹은 파트장)를 따라 현악기(네기노스)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다.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며 진정한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고난의 현재의 실존에서 오직 참 구원과 참 소망되신 주님을 전적 신뢰하는 가운데 누리게 될 기쁨과 평안을 찬양드리는 시다.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형형색색으로 끊임없이 침노하는 각종 고난과 시련 속에 위로를 받고 또한 각자의 시편 4편을 노래해야 할 것이다.
1. 탄식: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1절)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새번역]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곤란을 당한 다윗이 자신의 의가 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여 기도드리고 있다. 막다른 길목, 곤란의 상황에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시길 확신하며 부르짖고 있다.
1.1. 의의 하나님(1절)
1절에 ‘내 의의 하나님(개정)’ 혹은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새번역)’은 히브리 원문에 ‘엘로헤 티데키’로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라기보다 ‘나의 하나님 곧 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을 주관하는 재판관처럼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자신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곧,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판단하셔서 오해와 누명을 벗기신다는 뜻이다(Rawlinson).
벤게메런(vanGemeren)은 ‘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아버지-자식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확고하게 서 있는 ‘의’ 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의 자만이나 교만한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의로운 관계 때문에 갖게 되는 자신감 혹은 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브릭스(Briggs)는 “하나님은 다윗의 송사를 원수를 대항하여 신원해 주시며, 그의 권리를 세워주시는 분”으로 해석하고, 비텐비져(Buttenwieser)는 ‘억울함을 보상해 주시는 분”으로 해석하였다.
‘의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에 에게게 구원을 베푸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내 구원의 하나님’(시18:47)이시며 또한 내 인자함의 하나님(시59:11, 18)으로서 ‘구원과 인자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잘 판결하셔서 우리가 의롭다고 판정해 주시는 분이시다. 인생사에서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로 가슴에 멍이든 우리의 현실을 온전하게 억울함 없이 판단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의의 하나님뿐이시다.
1.2.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1절)
시편 여러 곳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시3:5; 17:6; 27:7; 55:17; 86:6,7; 91:15; 99:6; 102:3; 118:5; 119:145, 146; 120:1; 138:3). 예레미야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응답의 확신을 갖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무용지물이다. 기도드릴 때,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교훈하는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마태복음 7장 7~8절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마태복음 18장 19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요한복음 15장 7절-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요한복음 16장 23~24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요한일서 5장 14~15절-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3. 곤란에서 해결해 주시길 간구(1절)
‘곤란’(챠르)은 히브리에 동사 “챠라르”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묶다’, ‘제한되다’, ‘괴롭히다’, ‘좁은’, ‘부족한’ 등이다. ‘너그럽게 하다’는 ‘자리를 넓게 만들다’, ‘마음을 크게 갖는다’는 뜻이다. 문자적으로 ‘곤란 중 너그럽게 하셨다’는 것은 ‘협곡에 포위된 군대가 포위를 뚫고 넓고 광활 지역으로 빠져 나오는 해방과 승리’를 의미한다.
다윗이 위기를 당했을 때는 포위망에 갇혀있는 곤란 중에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넓고 위험이 전혀 없는 지역(너그럽게 된 지역)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간구하고 있다.
젠거(Zenger)는 “위기에서의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협곡(곤란)에서 구속을 받는 (너그럽게 되는 것)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오늘 당면한 제 인생의 협곡, 곤란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방과 평안, 곧 너그러움을 주옵소서”
다윗은 과거에 이미 구원받은 신앙체험을 근거하여, 또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 하면서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린다.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곧 이미 지난날에도 너그럽게 해주신바 있으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신앙생활에서 지난 날 체험과 간증을 현재와 미래에 당면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역사를 기대하고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큰 힘이 된다.
1. 4. 은혜 베푸시길 간구(1절)
주님의 은혜을 간구하는 것은 절박한 문제에 부딪칠 때, 나타나는 기도 내용이며 마땅한 자세이다. 주님은 부르짖을 때,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어려움을 당하면 기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곤란을 만나면 기도하는 신호이다. 곤란은 기도 시작으로 곤란을 끝을 내어야 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다윗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간구한다. 다윗이 자신이 가진 의(義)는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얻은 것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윗은 자신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곤란 즉 환란과 위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촉구: 인생들아 주님을 위로하라(2-5절).
[개정]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새번역] 2.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 (셀라) 3.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는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 주신다. 4.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셀라) 5.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여라.
위기 속에서도 전적 하나님을 신뢰한 다윗은 승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였다. 다윗은 용기백배하여 대적자들에게 헛된 일을 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경외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2.1. 헛된 일, 거짓을 그만 두라(2절)
‘인생들’은 원문에 ‘인간의 아이들아’로 되어 있다. 다윗에게 반역한 그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삼하15:1-12). 그들에게 인간(이쉬)이라고 한 것은 유한성을 가리킨다. 다윗 자신에게 반역하고 대항하는 그들의 행위와 노력이 결국 헛되고 허사로 돌아갈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생들’이 지닌 뉘앙스가 ‘부자들’, ‘권세가’들로 이해하고 새번역에서는 “높은 자들’로 현대어 번역에서는 “권력 잡아 힘깨나 쓴다는 자들’로 번역했다. 이것은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위치와 신상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부, 권력, 영화도 순간일 뿐이다.
‘어느 때 까지’ 혹은 ‘언제까지”는 견디기 힘들 것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탄식시에서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삶의 긴 터널을 지나갈 때, 탄식하며 주님, 어느 때까지 이런 고난의 밤을 지내야 합니까? 하며 울부짖을 때가 있지 않는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는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국의 왕권에 도전하고 탈취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의 ‘헛된 일’은 ‘허사’(리크)로 ‘어떤 일을 망치고 방해하는 악한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고 찬탈하려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역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부질없는 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행위가 ‘거짓(카찹:궤휼, 잘못된 것, 거짓된 것)을 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압살롬의 반역은 그의 계획 시초부터 거짓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거짓으로 마쳤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권위, 제도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불응하고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그 일은 헛된 결과를 가져오며 거짓 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압살롬의 거짓 행위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압살롬의 생애는 안타깝게도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이복동생 다말을 겁탈한 동생 암논을 살해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거짓으로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부왕 다윗이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4년 동안 거짓으로 민심을 도적질 하였다(삼하 15:1-6).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무리들을 헤브론으로 군집시킬 때에도 제사드리고 간다고 부왕 다윗을 속였다(삼하 15:7-12). 병석에 누워있는 다윗 왕을 문병한 것도 다윗의 상황을 면밀히 확인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으로 한 짓이다(시41:5-9).
압살롬은 늘 다윗의 왕권을 빼앗기 위해 거짓말만 즐겨하고 그의 입은 다윗을 축복하나 그의 속마음은 저주를 품는 간사스럽고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구나( 셀라 )(시62:4).
결국 압살롬은 그처럼 자랑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리고 심장이 창에 찔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그의 생애는 간사와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거짓으로 시작된 그의 반역이 허사로 끝나버린 사울 왕과 마찬가지로 가련한 인생이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게 살며 공의를 따라 살아가야 하겠다. 요즈음 거짓이 활기 치는 시대이다.
수원수구(誰怨誰咎: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없음)의 세상이다. 정계, 언론계, 교육계, 군 당국, 교계 등 어느 한 분야에 정직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도 하나니”(딤후 3:13). 종말의 징조 중 하나임을 지적한 바울의 교훈이 예사롭지 않다. 거짓없는 정직한 영성을 주옵시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기에 썩어지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 아멘.
2.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알라(3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워 그에게 왕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심을 여러 성경에서 언급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대적자들에게 선포하여 그들의 반역행위가 철저히 잘못된 것으로 다윗에게 범하는 죄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범하는 죄악상임을 밝히고 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로 고백하고 있다. 이 뜻은 ‘거룩한 자’, ‘신실한 자’, ‘자비한 자’, ‘성도’ 등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전적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적 자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택하다’는 뜻은 ‘구분하다’, ‘특별히 취급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선민사상을 강조한다(Brueggemann & Bellinger).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구분하신다”(set apart, KJV, NIV, RSV, NASB) 혹은 “경건한 자를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다”(performs wondersNJB, NAB) 등으로 번역하였다.
경건한 자는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여 경건한 사람으로 세우시고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우셨기에 경건한 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성경에 수없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심에 대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 이유 중 언약 신학과 사상에서 볼 때, 다윗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적 인물,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
2절에 언급된 ‘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는 자’들에게 3-5절에 7가지 명령문으로 권면을 한다. ‘알아라’, ‘두려워마라’, ‘죄를 짓지 말라’, ‘잠자리에 누워 말하라’(깊이 반성하라), ‘잠잠하라’(눈물을 흘리라), ‘제사를 드리라’, ‘의지하라’ 등이다. 이는 더 이상 범죄하지 말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적 권면이다.
크레이기(Craigie)는 7개 명령문이 점진성을 띤 명령문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너희는 화와 분노로 가득해 떨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라! 너희 마음속이 악한 말로 가득할 수 있다. 그러나 밖으로 표현하지는 말아라! 조용히 침대에 누워라, 그곳에서는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했다.
2.3. 떨며 범죄하지 말라(4절)
‘떨다’(라가즈)는 ‘분노하다’, ‘두려워 떨다’는 뜻이다. 크레이기Craigie)는 “분노함으로 떨 수는 있으나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 범죄하지는 말라”고 해석했다. 다윗은 압살롬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잘못과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두려워 떨면서 분하게 여기고 더 이상 죄짓지 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고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수많은 밤을 기도로 새워본 다윗(시16:7; 17:3; 22:2; 57:8; 108:2)은 그들에게 잠자리에 누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자들이 범한 행동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권면한다.
새번역에는 마음 깊이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며 각성하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다. 다윗에 대한 압살롬과 그 무리들의 반역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범죄이기에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2.4. 하나님을 의지하라(5절)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3-4절에서 7개 명령문으로 ‘이런 짓들을 하지 말라’로 부정적 명령을 한 후, 두 가지 긍정적 명령을 한다. ‘의의 제사를 드리라’(5절). 여호와를 의지하라(5절) 등이다.
첫째로 다윗은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압살롬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자신들의 반역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거짓된 제사를 드렸다(삼하 15:7-12). 다윗은 그러한 불의한 제사가 아닌 의의 제사, 형식적 제사가 아닌 진정성 있는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의의 제사는 마음을 찢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진실하게 드리는 제사를 일컫는다(시51:17; 욜2:13).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품고 회개하지 아니한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시66:18).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는 미워하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는 기뻐 받으신다(잠15:8).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시51:19).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희생제물을 기뻐하신다(시51:19). 하나님은 스스로 마음의 가죽을 베는 자를 찾으신다(렘4:4).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욜2:3). 하나님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신다(사1: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심히 경계하신다(렘7:4). 하나님은 삶에서는 죄악을 짓고 하나님 전에서는 제사 드리는 거짓을 책망하신다(렘7:8-10).
두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전적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McCann).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교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행위자의 신실성, 곧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을 원하신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거슬려 살다가, 예배자리에 와서는 진실한 자기 성찰, 회개와 각성도 없이 형식적 예배와 감정적 열정에 몰입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두렵고 떨리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상한 마음으로 의의 제사를 드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앙망하며 사모하며 의지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
3. 기쁨과 평안: 주의 얼굴을 비취소서(6-8절)
[개정]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새번역] 6.수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7.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재확인한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다윗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땅의 복을 구하나 자신은 하나님의 얼굴, 즉 하나님 자체를 구한다고 확신에 넘치는 고백과 간구를 하고 있다.
3.1. 하나님 얼굴을 바람(6절)
6절의 ‘여러 사람’, ‘수많은 사람’은 2절의 교만한 대적자와 달리 6절에는 소심한 회의론자, 낙심한 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좋은 일을 보여줄 자가 어디에 있는가”하며 내뱉는 불신앙적 불평과 불만, 의심과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선’(토브)은 추수절 수확물 혹은 수확물을 얻게 하는 비를 가리킨다고 하나 일반적으로 땅에서 얻는 물질적 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불경기, 물가 상승, 이자율 급등, 직장 퇴출, 사업장 폐업으로 고통당하는 상황에서 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까 의심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연약한 성도들을 보게 되는 안타까움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땅의 것에 대한 관심, 육적인 일에 대한 집중으로 영적이고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윗은 땅의 물질적인 풍요만을 구하는 수많은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웃으시는 얼굴을 구하고 있다(6절). 대적자들의 입에서 뿜어내는 불 신앙적 회의와 불평에 대하여 다윗은 아론의 축복 기도문(민6:25-26)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
‘하나님 얼굴’은 구약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언약적 축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 땅에 어떤 물질적인 복과 비교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복 중의 복이요 복 그 자체이다. 또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 임재 안에 있다는 그 자체보다 더 큰 은혜와 더 큰 복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윗은 1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기도하였으나 여기서는 ‘여호와’(야웨)로 기도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것이 중요하며 그 하나님의 성품, 능력, 약속을 바라보고 언약을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3.2. 하나님이 주신 기쁨(7절)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체험한 다윗은 그에게 임한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한 수확보다 더 큰 만족감을 고백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예배나 예식, 또한 거대한 종교 축제나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위기 풍성한 수확의 햇곡식과 가득 찬 새 포도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 안식, 위로,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
추수의 기쁨은 수고와 땀, 노동과 인내의 열매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람으로 얻는 기쁨이다. 그러나 다윗의 심령 속에 흘러넘치는 영적 만족과 기쁨은 물질적 풍성함으로 오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보이는 물질의 풍요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러나 여호와로 말미암는 기쁨은 영원하신 주님 그 자체이기에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생과 천국의 소망이 아닐까?
3.3. 하나님이 주신 평안(8절)
추적자들에 의해 쫓기는 정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다윗에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평안히 잘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직 주님만이 진정하고 온전한 보호자가 됨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 욕심과 죄책감 속에 두려움과 불안 속에 평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생과는 차별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볼 수 있다.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 원어에는 ‘눕고’ 앞에 ‘함께’, 혹은 ‘한번에’라는 단어가 있다.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다. 게세니우스(Gesenius)에는 “be united” 또는 “make one”으로 번역했다. 또한 포세트(Fausset)에는 “at once”로 해석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를 잘 살린 해석으로 “눕고 자는 것이 동시에 바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눕자마자 잠들었다”는 뜻이다. 대적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기 속에서 눕자마자 잠들었다는 것은 상상 밖의 모습니다. 추적자의 쫓기는 자로서 피곤하여 바로 쓰러져 잠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이 오직 여호와 곧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잠, 안식의 잠, 평강의 잠이다.
현대인들이 제일 많이 복용하고 있는 약 중에 하나가 수면제이다. 현대 사회를 불면증 사회라고 불명예로운 이름이 부쳐져 있다. 최근 뉴스 보도에 따르면, “국민 3명 중1명, 한번 쯤 겪는다는 불면증..건강한 삶을 위한 첫 걸음은 '숙면’이라고 서울대 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이유진 교수의 글이 소개된 것을 보면 쉽기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또한 불면증이 가져 오는 합병증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우울증을 동반하고 자살까지 이르는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어떤 약물, 민간, 운동 요법도 근본 치료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처방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무리 위험한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모신 자는 어디서나 환경을 초월하여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시편 40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 78편 52-55절에 “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계시면 대적자의 공격, 험산준령, 검푸른 바다, 삭막한 광야, 뜨거운 태양 빛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에는 ‘안전히’, ‘평안히’ 인도하실 것이다.
모세도 요단강 동편에서 이스라엘 12지파를 축복하면서, 신명기 33장 27-28절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평화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물리적 힘, 패권자의 힘으로서 평화(Pax) 있고 심령에 솟아나는 내면에 솟구치는 평화Shalom)가 있다. 다윗은 패권자의 힘을 상실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평강이 있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우리의 가장 우선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가 모든 조건과 상황에서 평안을 쟁취하는(Peace Making) 능력을 얻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서 어떤 환경,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마누엘로 안전하게 하시니 두려움과 불안 초조감 없이 눕자마자 평강의 잠을 곧 바로 잘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참된 안식과 평강의 잠을 주시는 주님의 큰 은총이요 은혜요 선물이요 축복이다.
결론
본 시의 저자인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그는 위기 속에 자신이 그 상황을 다급하게 모면하거나 급박하게 탈출하기 위하며 하나님께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으로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 대하여 그 심각한 현상과 문제들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현장에 분명코 개입하셔서 전화위복의 상황으로 급전시키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고 노래를 드렸다.
대적자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두려운 마음과 걱정스런 생각을 바꾸게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처한 상황을 변화시키기보다 기도하는 자신을 기쁨과 평강으로 이끌어 준다.
기도를 통하여 상황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전적 도우심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
험악한 인생길에 수많은 시험이 복병처럼 호시탐탐 밀려올 때에도 항상 주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며 참된 위로자가 되시면 진정한 문제 해결자가 되어 주시길 때문이다.
우리는 호라티오 스페포드(Horatio Spafford(1828-1888)가 작시한 "내 영혼 평안해 (It is well with my soul)"라는 찬송시 속에 4명의 자녀들의 생명을 동시에 빼앗아간 참람한 아픔의 심연 속에 주님이 주신 평화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찬송시를 썼던 호라티오 스페포드(Horatio Spafford(1828-1888)는 당시 시카고에서 성공한 변호사이자 부동산 투자자였다. 그와 그의 아내 에나(Anna)는 1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고 교회에서 자선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며, 신실하게 그리고 유복한 삶을 영위했던 가정이었다.
1871년 그들 가족의 불행이 다가왔다. 그 해에 성홍열(Pneumonia)로 네 살 된 아들을 잃었습니다. 몇 달 후 시카고 대 화재(Great Chicago Fire)로 인해 소유 재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873년 다시 큰 비극이 설상가상으로 닥쳤다.
인생사에 지친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려 온 가족이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가장인 호라디오 스페포드는 가족과 함께 할 계획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사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카고에 머물고 아내와 자녀들을 먼저 보내게 되었다.
1873년 11월 21일, 프랑스 정기 여객선인 ‘빌 뒤 아브르’(SS Ville du Harve) 호에 호라티오의 부인 에나와 네 딸을 포함, 31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항하여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출항을 한지 약 4일 만에 대서양 바다 한가운데서 ‘빌 뒤 아브르’ 호는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철제 선박인 락크 에론(Loch Earn)과 충돌했다. 갑자기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에나는 서둘러 네 자녀를 갑판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그곳에서 네 자녀(Annie, Maggie, Bessie, Tanetta)와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를 살려주시거나,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잘 견디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약 12분 이내에 이 선박은 4명의 호라티오 자녀들을 포함하여 226명의 승객을 대서양의 어두운 바다 아래로 수장시켜 버렸다.
배가 침몰한 지점에서 구조작업을 하던 선원이 잔해 위에 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아직 살아 있는 에나였다. 그는 그녀를 배에 태웠고 그들은 9일 후 웨일즈 카디프에 상륙한 또 다른 큰 배에 실렸다. 거기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혼자 살아남았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Saved alone, what shall I do?)"라는 문구가 적힌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전보를 남편 호라티오 에게 보냈다.
혼자 살아남아 보낸 그의 아내의 전보를 보고 그는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네 딸들을 잃고 정신없이 헤메고 있을 그의 아내를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부인을 만나기 위해 사고 선박회사에서 제공하는 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선장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배는 당신의 딸들이 잠긴 물 위를 지나고 있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던 그의 마음에 또 다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푸르고 깊은 차디찬 바다 속에 잠들어 있을 딸들의 얼굴이 떠올라 너무나 괴로웠다. 그는 눈물로 통곡하며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주님,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저에게 어찌하여 이토록 큰 시련을 주십니까?”
죽은 아이들의 얼굴이 밤새 자기 눈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 아닌 씨름을 하던 중 그에게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안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을 고백하였다.
“It is well with my soul.” (내 영혼 평안해)의 시를 적었다. 시카고로 돌아온 그는 필립 폴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에게 자신의 아픈 사연과 고백을 들려주었다.
작곡자 필립 폴 블리스는 미국의 복음 성가 작곡자로서 가장 이름이 높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스페포드의 고백과 시에 감동을 받은 블리스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곡조를 붙였고, 이런 계기로 우리 말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하든지>이다.
위와 같은 비극적이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좌절과 낙심 속에서도 주님의 위로와 평강을 체험한 후 위대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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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편: 인도와 보호를 위한 아침 기도
본 시편은 애가 시편으로 분류된다. 간청의 시, 무죄 천명의 시, 보호의 시, 확신의 시, 피고소인의 기도 시 등으로 불린다.
본 시는 표제어에 나온 것처럼 다윗 왕의 시로서 다윗이 악인들의 횡포로 괴로워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시이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있기 직전 자신에 대한 반역의 음모가 원수들에 의해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드린 기도이다.
이 시는 아침 희생 제사 전에 제사장들에 의해 낭독되었거나 개인 예배자들이 예배 시 입례 송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구조는 아침에 드린 기도 내용들(1-3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생들(4-6절),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들(7-8절), 악인이 받는 벌(9-10절), 의인 받는 복(11-12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아침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들(1-3절)
[개역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표준새번역] <지휘자를 따라 관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주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하소연을 살펴 주십시오. 2.이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 나의 임금님,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니, 3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사정을 아뢸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지는 시로서 인도자 혹은 지휘자를 따라 관악기(참고, 오늘날 NIV를 비롯하여 많은 번역본에서는 ‘플룻’으로 번역) 에 맞춘 노래이다. 다윗은 대적자들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 상황 속에서도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기다렸다. 다윗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외치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왕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기도였고, 하루가 시작되는 첫 시간에 온 마음을 다해 드린 기도였다.
1.1.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1절)
다윗은 1, 2절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헤아려 주소서’, ‘들어주소서’ 등 세 개의 강조형 명령문을 사용하여 다급한 상황에 마치 황급히 주님이 계신 방을 노크하듯이 주님께 아뢰고 있다. 또한 다윗 기도의 긴박성은 물론 간절성, 끈기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거듭해서 3번씩이나 명령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긴박한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서 속히 개입하셔서 문제 해결을 해 주실 것에 대한 강렬한 요청이다. 특별히, 자신이 간구하는 ‘말들’(에메르), ‘심정’(하기그, 신음소리), ‘부르짖음(콜 쉐바, 부르짖는 외침) 등을 기울여 주시고, 헤아려 달라고 점점 더 간절하고 간곡하게 기도드리고 있다.
여호와, 즉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을 믿고, 그의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말, 더 나아가 그의 마음아리하는 속 심정, 더 강렬하게 울부짖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탄원하며 기도드리고 있다.
다윗의 기도에서 기도 원리를 배울 수 있다. 기도 대상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인격자 되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는 점진적으로 더 강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탄식과 신음, 그리고 울부짖음으로 기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 진다. 기도의 시간은 언제나 드릴 수 있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고요하고, 정숙한 이른 아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1.2.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2절)
1절에 ‘여호와’께로 부르짖는 기도가 2절에서는 ‘나의 왕’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주 왕이시요,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자신이 왕으로 세우신 분이 진정한 통치자가 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억울한 상황, 다급한 문제를 친히 재판관이 되셔서 올바르게 판단, 판결을 내려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시44:4; 47:6,7; 68:24; 74:12; 84:3; 95:3, 145:1 참조)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당시 최종 재판과 판결에게 있기에 다윗은 왕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진정한 왕이시고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판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잘못된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수십 년 후에 새로운 증거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허다하다. 이처럼 세상의 법과 세상의 재판으로 진실이 가려져 억울한 누명을 쓸 때도 많이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진정한 재판관, 온전한 재판관, 정의의 재판관은 오직 우리의 왕 되신 주님뿐이시다.
1.3. 아침의 기도를 들어주소서(3절)
3절에 ‘아침’이 두 번 나온다. 아침은 동녘이 밝아오는 시간, 곧 새벽을 가리킨다. 아침 혹은 새벽은 아침 제사 시간과 기도 시간과 연관이 있다(왕하3:20; 16:15; 암4:4).
구약에서 아침 시간은 주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시간으로 본다(시46:5). 아침에 큰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였다(출14:24; 사37:36). 아침에 번제를 드렸다(겔46:13,14,15). 아침에 모세가 율법을 받았다(출19:16; 34:2). 아침에 제사를 드렸다(출29:38-42; 민 28:2-8). 아침에 여리고 성을 돌았고 아침에 무너졌다(수 6:12, 15).
맥케이(McKay)는 “새벽 시간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위해 오시는 시간, 하나님 자신께서 그의 사랑을 계시하는 시간,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시간이다”(시90:14; 애3:23; 습4:5 참조)라고 하였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떠오르는 태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았다. 그들은 빛을 통하여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을 악, 죽음, 두려움, 공포가 물러가고 선, 생명, 기쁨, 평화가 임하는 것으로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아침에 주님께 기도드리고 아침에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로 번역된 ‘아라크’는 ‘제사를 준비하다’. ‘제물을 차리다’(레1:8-9; 12) 뜻이다. 그것은 기도가 곧 제사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아라크’는 ‘말을 내다’, ‘진술하다’, ‘사정을 아뢰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고(혹은 제사드리고, 혹은 사정을 아뢰고), ‘바란다’ 혹은 ‘기다린다”고 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 혹은 제사 열납, 혹은 의로운 판단, 재판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구약을 살펴볼 때, 아침 일찍이 행하였고(삼하15:2; 렘21:12; 시101:8)고 아침에 판결을 기다렸기에(삼하15:2), 다윗은 아침에 주님께서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기다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생들(4-6절)
[개역 개정]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표준새번역] 4. 주께서는 죄악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죄악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5. 교만한 자들 또한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모두 미워하시고, 6.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을 멸망시키시고, 피를 흘리는 것과 속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몹시도 싫어하십니다.
2.1.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4절)
다윗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들의 특성을 밝히고 하나님께 그들의 행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4절에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5절에 미워하시고, 멸망시키시고, 6절에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성경은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다만, 죄인이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 이유는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죄악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표준 새번역). 여기서 머물다, 유한다는 뜻은 ‘-의 손님이 된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주인이 손님을 극진히 환대하고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창18:1-8; 19:1-11).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런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그런 손님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악인이 비록 명예와 부와 권세를 다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악인은 주님의 손님으로 주님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시편 15편에 보면,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가?고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5장 4절 본문에는 “악인은 주와 함께 유하지, 거하지 못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인, 악인은 어떤 자인가? 5-6절에서 사중적으로 밝히고 있다.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 ‘살인자(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자)’, ‘속이는 자’로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레11:44; 19:2; 20:26; 벧전 1:16)으로 조그만 죄악도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그런데 어찌 악이 가득 찬 죄인과 함께 거하시고 그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지체할 수 가 있겠는가?
다윗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자들이 자신에게 악행을 행하고 있기에 그러한 죄악을 범하는 자들을 싫어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2.2. 오만한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5절)
다윗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오만한 자, 교만한 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하고 기도드리고 있다. 오만한 자, 거만한 자, 교만한 자들로 번역되어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자들’이다(시75:4; 롬 1:30; 고전 13:3; 고후11:17)이다. 브릭스(Briggs)는 ‘자랑쟁이’라고 번역하였고, 크리우스(Kraus)는 ‘자랑하는 자’, ‘어리석은 자’, ‘미친 자’(시83:3; 75:4 참조)로 번역하였다.
자신의 자랑거리 자체를 감사거리로 겸손히 여겨야 한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자랑거리를 주신 주님을 자랑하거나 주안에서 자랑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성공과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은 오만과 교만의 자태로 죄악의 근본이 된다.
오만한 자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한다. 주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머무를 수 없다. 오만한 자도 외형적인 종교적 의식에 동참할 수 있으나 근본 주님 앞에서 설수 없고 설령 선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와 함께 머무르시지 않고 역겨워하신다.
5절 하반절에 그런 자를 ‘악행자’로 칭하고 있다. 행악자는 ‘허망한 자’(사 58:9; 암5:5) 혹은 ‘궤사한 자’(잠17:4)로 하나님은 이런 모든 악을 행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케일과 델리츠(Kei & Delitzch)는 “오만한 자들에게는 어떤 고상함, 진실함, 순결함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했다.
2.3. 거짓과 살인을 싫어하시는 하나님(6절)
다윗은 대적자들의 거짓말과 거짓 행동으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몹시 실어하시길 때문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한 행동을 하는 그들이 다윗을 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속성에 반한 악행을 하는 그들을 막아주시고 그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피 흘리는 죄를 지은 자’, ‘피에 주린 자’, ‘피 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자’ 로 번역된다. 곧 ‘살인자’이다(삼하 16:7,8; 시 139:19). 특히,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극도로 악한 거짓말과 더불어 거짓말을 하는 자를 일컫는다.
살인은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와 함께 의로운 자, 무흠자를 모함해서 죽이려는 의도와 행동, 그리고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는 모든 죄악을 일컫는다(요한일서 3:15).
거짓의 근원은 사탄이다(창3:4; 요8:44).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거짓이다(잠16:17,17,19; 11:1, 20:10; 슥 8:17). 거짓말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계21:8), 영원한 형벌인 유황불에 던짐을 받게 된다(계21:8).
하나님은 누구를 죽이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몹시 싫어하신다. 크레이기(Craige)는 시편의 악인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원형”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두 길이 펼쳐져 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의인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난 악인의 삶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기도한 다윗, 하나님의 속성에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주님께 있다. 하나님 속성에 따라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의 확실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자 자신도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합당한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약 2:21-24).
3.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들(7-8절)
[개역 개정]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표준새번역] 7. 그러므로 나는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의 집으로 왔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 바라보며, 주께 엎드립니다. 8.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
다윗의 간절 두 가지 소원(6절)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면서 그분의 인자하심을 얻는 것이고 주님을 예배하며 살길를 원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원수들로 인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있다(7절).
3.1.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는 소원(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의 집으로 왔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 바라보며, 주께 엎드립니다.
7절에 ‘그러나’가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다. 앞 절에 하나님께 거하지 못하는 악인과 달리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과 은혜로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은혜’, ‘자비’,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서 근거한다. 시편 136편에서는 절절마다 2번씩 헤세드를 노래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1-9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10-22절), 삶의 현실에서(23-35)에 반복에서 헤세드가 펼쳐진다.
그는 육신의 것이나 땅의 부와 풍요를 원하지 않고,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며, 주님께 예배하며 그 분과 더불어 살기를 원했다. ‘사랑’은 곧 주의 인자하심이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이다.
다윗은 수많은 대적자들의 악랄한 음모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의지할 것 밖에 없음을 깨닫고 거기에 매어 달렸다.
다윗은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 집’은 솔로몬 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 곧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 그곳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처소로 ‘성전’이라고 불렸다(삼하 1:9; 3:3; 삼하 12:20).
다윗은 주님의 전에 들어가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주님의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3.2. 길을 인도하시고 환히 열어주시길 간구(8절)
다윗은 하나님의 ‘헤세드’(사랑, 은혜, 자비)를 체험하였기에 주님께 담대하게 “주의 공의로 인도해 주소서’, ‘ 내 앞에 주의 길을 환히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헤세드 악인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놀라운 길로 활짝 열어주시길 확신하고 간구하였다.
‘주의 의’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가리키는 의이다(롬 1:17). ‘주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시 25:4, 5, 12, 27:11, 32:8; 86:11)이요 응답이다. 다윗은 평생도록 자기의 길을 자기 스스로 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와 지도를 받았다.
시편 27:11 “11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86: 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등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에 인간의 길에 대하여 여러 교훈이 있다. 인간의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렘 10:23). 인간의 길이 하나님께 있다(잠 5:21). 주께서 친히 길이 되신다(요14:6). 인간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37:5). 인간이 보기 좋은 길도 결국 사망이다(잠 14:12). 주님의 말씀은 인생길의 빛이다(시 119:105)등을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하나님께 의의 길로 인도하시길 날마다 간구하여야 하겠다.
종교개혁을 앞두고 마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갈 길 나 모르나 누가 나를 이끄시는지 내 확실히 아노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I do not know what my future will hold, but I do know who is leading me. Whom shall I fear?” 라고 자신의 가는 길을 주님께 맡기고 담대히 개혁의 불을 지폈다.
4. 악인이 받는 벌(9-10절)
[개역 개정]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표준새번역] 9. 그들의 입은 믿을 만한 말을 담는 법이 없고, 마음은 썩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혀는 언제나 아첨만 일삼습니다.10. 하나님, 그들을 정죄하셔서 제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들이 저지른 많고 많은 허물을 보시고서, 그들을 주 앞에서 쫓아내십시오. 그들은 주님을 거역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악인의 특징과 악인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악인의 특징 네 가지를 밝히고 있다. ‘신실함이 없는 자’, ‘심중이 심히 악한 자’,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은 자’, ‘아첨하는 자들’ 등이다. 악인에 대한 기도는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들을 쫓아내소서’ 등이다.
4.1. 악인의 특징
다윗은 주님께 원수에 대한 악한 특징을 고발하고 그들을 주님의 공의로운 판결이 임하길 기도하고 있다. 악인의 4가지 특징을 요약하면 거짓말, 중상, 비방 등이다.
4.1.1. 말에 신실함이 없는 자.
다윗의 원수들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 비방으로 끊임없이 퍼붓고 있었고,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 증거로 다윗을 심히 괴롭히고 있었다. 악인의 입에는 신실함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그들의 한 말은 하나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입은 믿을 만한 말을 담는 법이 없다”. “그들 말에는 성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식언이비(食言而肥: 말을 먹고 살이 찐다는 뜻으로 늘 거짓말로 살아가는 사람), 자식기언(自食其言: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먹어 버린다는 뜻으로 약속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사람), 이와전와(以訛傳訛:거짓말에 또 거짓말이 섞여 말한다는 뜻으로 거짓말에 더 거짓말을 보태는 사람) 등의 고사성어를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 명언을 기억하고 말, 언어에 신실성을 가져야 하겠다.
플리톤은 “거짓말 그 자체가 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정신까지 더럽힌다.” 아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동안 속일 수는 있다. 몇 사람을 늘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거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체호프는 “거짓말은 그 말한 사람의 눈빛을 비천하게 한다.”
거짓말을 삼가하고 말에 신실성과 정직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살펴본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언12:19).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12:22).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9:1).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5:3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야고보서1:26)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시록 21:27)
하나님 말씀은 나의 거짓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 소위 정치, 교계 지도자, 심지어 직장인, 학생, 어린이, 젊은이, 평신도의 거짓들도 드러나게 하신다. 정치인, 기업인, 사업인, 공무원,교사, 목회자, 농부, 어부, 의사, 법조인, 언론인, 스포츠맨 총망라해서 “정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교회, 교계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면서 부정직함으로 포장된 것이 많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정직하게 사는 목회자, 선교사, 평신도들이 많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인 온 지면에 이름이 부각된 자들 가운데 스스로 경건과 정직의 가면을 쓰고, 부정직의 탐익과 권세욕에 빠진 자들을 많이 본다. 그래서 이 시대가 어둡고, 살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기보다 지탄을 받는다. 세상이 교회를 탓하고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어떤 이의 말에는 전혀 믿지 않고 냉소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하여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는 지, 얼마나 나의 말에 대하여 신뢰감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거짓말에 관한 시가 많이 있다. 그 중에 두 편을 소개해 본다.
[거짓말] 김형출 작
“사람은 하루에 거짓말을 몇 번씩 하고 있다.
나도 오늘 거짓말을 한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나를 과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양심에 가책 없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밥 먹듯이 거짓말 하는 잘 난 사람이 있다.
바로 나 바로 당신 오늘 또 거짓말을 한다.
바로 나 바로 당신.”
「문예사조」2003년 12월호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먹다 보면
껍질만 남는 것이 석류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빨간 껍질만 쌓이는,
사랑하고부터 거짓말도 늘었다.
생각만 해도 신트림 끄윽 괴는
그 새콤달콤한 말 들키지 않으려
석류처럼 석류꽃처럼
내 입술도 반지르르 붉어졌다.
익다 보면 제풀에 단내 쩌억 풍기는
벗기다 보면 겉과 속이 한통속인
석류 한 통 다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석류보다 더 많은 껍질이 쌓였다.
단물 쏙 빠진 알맹이까지 시금털털 껍질로 남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사랑에 온통 정신 팔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얼룩만 남긴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석류보다 석류꽃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
4.1.2. 심중이 심히 악한 자
심중(心中)은 마음 중심을 일컫는다. 심중이 악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항상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이 더러운 것으로 푹 썩었다.” “마음으로 흉계만 꾸미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 속은 파멸이다.” 혹은 “그들의 속에서 쏟아내는 것은 멸망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했다. 성경에서 전적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7:9-10 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마태복음 12장 34-35절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가복음 7장 21-23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6세기 청교도 목사 피터 모펫(Peter Moffat)는 “여러분의 샘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에, 여러분의 양떼를 먹이기보다 여러분 자신을 먹이는 것에. 여러분의 집을 지키는 것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는 데 주의를 더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l) 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이성, 의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존 오웬(John Owen, 1616년-1683)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존 오웬은 ‘마음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는 “마음은 우리 책임 영역의 중심에 있으며, 마음을 개선하고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마음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마음을 지키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일치가 될 것이며, 우리 삶의 목적은 그를 따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 지상에서는 순종을, 이후에는 영광을 잃어버린 생활이 될 것이다.”하라고 마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한 농촌 교회 목사님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도문]을 소개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에 저희로 말씀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잇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살다가 보면 저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로 이 세상의 유혹에 사정없이 흔들릴 때도 많습니다. 저희로 세상의 유혹이 주는 쾌락에 대책 없이 저희의 마음이 끌려갈 때도 많습니다.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마음을 주님께서 주장하여 주옵시고 저희의 마음을 주의 뜻대로 다스려 주옵소서! 저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옵시고 평안한 마음 잔잔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주님의 은총의 손을 얹어 주시어 너른 마음을 주시옵소서! 남의 허물을 너그러이 가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시고 더 덜 오해하게 하옵시고 더 더 이해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을 주장하사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다스려 주옵시고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실로 인해 저희의 이웃이 캄캄함을 경험하거나 지옥을 경험하지 않게 하옵시고 따뜻함을 주고 시원함을 주고 하늘나라를 경험케 하옵소서!
주님 저희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로 가슴이 열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삶이 이웃에게 유익을 줄지언정 해를 끼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로 따뜻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4.1.3.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은 자
목구멍은 소리를 내고 음식물을 삼키는 기관이다. ‘열린 무덤’은 시체가 보전되는 것으로 부패하는 시신으로 썩는 악취가 난다. 무덤을 파헤쳐 놓으면 무엇이 나오는가? 죽은 시체가 나온다. 이 세상의 냄새 중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가 시체 썩은 냄새라고 한다. 사람의 목구멍을 통하여 나온 것이 바로 열린 무덤에서와 같이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이다.
악인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다는 것은 악한 악담을 내뱉고 악독한 말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이기기 까지 한다는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사도바울은 전적 부패한 인간의 죄성을 논하면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라고 언급하였다.
예수님께서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악한 본성이 남아 있어 날마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통제와 훈련, 절제가 요청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엡 4:31).
랠프 왈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하는 말에 의해서 자기의 초상을 그려 놓게 된다"이처럼 말(언어)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삶이요, 열매요, 미래요, 결과이다. 말(언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한다. 자신의 언어 관리가 자신의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옛 언어생활을 벗고 새 언어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는 바로 언어생활의 승리와 직결된다. 향기 나는 언어생활, 즉 영혼을 치유하고 살리는 말은 성화된 인격, 성숙한 인격의 열매이다.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의 향기는 미국의 보타닉 정원의 예쁜 꽃 보다, 덴버 워싱톤 공원이 장미 꽃 향기처럼 향기로워야 한다. 로키산맥의 아름다운 딜론의 호수가에 핀 야생화보다 더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를 발하여야 한다.
4.1.4. 아첨하는 자들
아첨하다의 원어의 뜻은 ‘미끄럽다’이다. 아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과장되고 마음에 없는 거짓 칭찬을 하거나 호의를 표시하는 것을 일컫는다. 아첨하는 혀는 우선 보기에는 매우 미끄러워 보이는 그 혀 밑에는 독이 가득 차 있다.
압살롬은 아침 일찍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을 가로채 그들에게 입을 맞추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삼하 15장 2-6절 참조). 성경에는 많은 곳에 아첨하는 자들의 언어적 특성과 그들의 종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편 12:2-3에,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시편 55편 21절에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했다.
잠언 5:5-5절에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했다.
4. 2. 악인에 대한 심판 기도(10절)
다윗은 하나님께 행악자들에 대한 세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첫째, 그들을 정죄하시하고 둘째, 자신들의 꾀에 빠지게 해달고 셋째, 그들을 쫓아내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다윗이 복수심에 가득 찬 분노의 기도나 저주의 기도가 아니다. 죄와 죄인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이다. 10절 하반절에 “그들이 주를 배역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4.2.1. 악인을 정죄하소서(10절)
다윗은 앞에서 악인들의 간악성을 지적한 후 하나님께 저희들에게 정죄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정죄하다’의 원문의 뜻은 ‘죄책이 있다’이다.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에게 죄가 있다고 선포하소서’(NIV, NAB)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과 죄를 담당케 하소서’(RSV, NASB, NJB)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을 멸망시키소서”(REN)라고 되어 있다.
악인에 대한 정죄 기도는 원수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라는 구약 성도의 간절한 표현이다. 또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정국가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악한 자의 도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 위한 기도이다.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약 시대의 저주시나 기도가 가능한가? 문제가 야기된다. 예수님 혹은 스데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되지 않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저주해야할 대상은 그들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한 저주이다. 그들 자체가 죽어지는 저주라기보다 그들이 악한 일에서 떠나고 그들의 추구하는 헛된 도모가 패망하도록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력과 영에 대하여 망하게 해 달고 저주 기도를 할 수 있으나 그 대상을 사람에게 악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4.2.2.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10절)
다윗은 앞서 악인을 정죄한 결과로 그들이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길 간구하고 있다. 다윗은 원수를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벌은 공의롭고 철저하며 사람의 보복보다 훨씬 더 무섭기 때문이다.
‘빠진다’는 ‘떨어진다’. ‘파멸되다’(시 20:8; 27:2; 36:12)는 뜻이다. 이 뜻은 ‘자가들의 꾀가 자신들의 패망을 가져 오게 하소서’ 라는 뜻이다. 악인들이 악을 심었으니 그들 자신들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원수들이 악한 꾀로 하나님의 세우신 자를 괴롭게 하였으니 자신들의 꾀에 스스로 빠져서 멸망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의 장면은 마치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세운 하만이 오히려 그 장대에 자신이 걸려 죽게 되는 것을 연상케 한다(에 5:14; 7:10).
다니엘서에 보면, 악한 자들은 선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죽이려고 한 법령을 제정케 하였으나 그들과 그 처자들을 거기에 던졌다(단 6:7, 24).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스스로 자기 꾀에 빠져, 자기가 행한 대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이라 하였고”(고전 3: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31:19-20).
4.2.3. 그들을 쫓아내소서(10절)
다윗은 그들을 ‘쫒아 내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쫓아내다’는 것은 ‘추방하다’. ‘흩어 버리다’. ‘몰아내다’ 등으로 해석된다. 그들의 허물 때문이다. 허물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행위이다. 다윗은 이미 5절에 악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단언하고 선포하였다.
하나님께 주권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와 세우심을 받은 자에 대한 반역은 곧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이름에 대한 악한 도전 행위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서 그들이 감당했던 직책 등을 상실케 해달라고 기도했다.
신약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이 일들이다. 교회와 주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에 대한 핍박, 역행, 도전 등이 바로 그들의 세우신 주님의 이름과 주권에 대한 도전과 반역임을 알 수 있다.
5. 의인이 받는 복(9-10절)
[개역 개정]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표준새번역] 11. 그러나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12. 주님, 주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
의인은 주께 피하는 사람,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5가지 복을 언급하고 있다.
5.1. 기쁨을 얻는 복(11절)
다윗은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위기를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의인이다(시64:1). 의인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서 기쁨을 찾고(시16:11),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업(시16:5)이며 소망이며 전부(시17:15: 73:25)가 되기 때문이다.
의인을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다. 주님과 친밀한 언약관계를 맺는 자들이다. 주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시편에 나타나는 평행구절이다. 이름은 속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속성인 그분의 거룩, 의, 자비, 긍휼 등을 알고 체험한 자를 의인으로 통칭한다.
주께 피하는 사람,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곧 의인은 주님께서 특별하게 보호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다 기뻐하며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5.2. 보호를 얻는 복(11절)
여기에 사용된 ‘보호’는 언약궤 덮개인 속죄소를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서 ‘덮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출25:20; 37:9; 왕상 8:7; 대상 28:18). 그룹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속죄소를 날개를 펴서 보호하듯이 의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이 보호는 완벽하며 그 어떤 원수도 상황도 헤칠 수 없다(요 10:28; 롬8:31-39: 시 118:6-7).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가려짐’(출 40:3, 시 140:7), ‘덮어줌’(왕상 8:7; 욥40:22), ‘둘러쌈’(욥3:23), ‘막아줌’(욥38:8; 나2:5) 등을 뜻한다.
다윗은 또한 그 보호하심을 "돌로 높은 성벽을 만들어 요새화 시킨 견고한 성(城)"으로 비유 하였다. 그 성(城)은 어떠한 적의 공격 앞에서도 난공불락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사람들에게는 많은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詩)를 지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6-17).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사무엘하 22:4~7).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보호하심의 근거는 바로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5.3. 즐거움을 얻는 복(11절)
이것은 한나가 기도 응답을 받은 후, 그녀의 마음이 즐거워했을 때(삼상2:1)에 같은 의미이다. 흑암 속에 광명한 아침의 빛을 얻을 때 솟아나는 기쁨처럼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 안전과 평화를 얻게 될 때, 깊은 영혼의 내면 속에 피어오르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세상의 것에 즐거워하기보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자이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주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채찍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당하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했던 사실을 볼 수 있다(행5:41). 주님을 사랑하는 일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기에 주를 위한 사랑의 수고가 아무리 고되고 괴로워도 즐거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평강과 놀라운 즐거움을 주시길 때문이다.
5.4. 복을 얻는 복(12절)
원문에는 “여호와여, 의인을 축복하는 분을 바로 주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살아가는 다윗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과 시련의 상황 속에서도 의인에게는 늘 주께서 함께 하시는 복이 있다.
여기에 사용된 ‘복’(히, 바렉)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영과 육에 은혜가 충만케 하셔서 삶의 활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사용된 복이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시, 그리고 신명기 28장에 언급된 복과 같은 단어임에 주목할 수 있다.
‘의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주께 피하는 자들’, ‘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 등이다. 의인의 반역에 선 자들은 언제나 주님께 피하는 자들이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다.
의인 하박국은 모든 소출이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했다(합3”16-18-19). 그가 바로 의인이요 그가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놀라운 로마서 1:16-17 단서를 제공하였다.
5.5. 방패로 호위를 얻는 복(12절)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 방패(shield)는 히브리어의 ‘마겐’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몸의 앞뒤와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원통형 방패와 머리만을 가릴 수 있는 작은 방패가 있음)를 가리킨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편 35:1-2)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편 3:3).
여기에 언급된 방패는 온몸을 막기기 충분한 방패를 일컫는다. 주님의 은혜로 호위해 주시고 주님의 날개로 보호해 주시고, 주님의 방패 전신을 감싸주신다고 철저한 보호를 확신하고 있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다윗은 원수들의 무차별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난 속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여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체험하는 아침에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특히, 의인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 보호, 은총, 승리를 체험함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시때때로 당면한 억울한 일, 고통스런 일, 난공불락의 문제들을 만날 때, 의인 다윗처럼 주님께 피하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으로 부르짖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승리와 보호, 은총과 기쁨을 체험하는 삶이되길 간구한다.
[시편 5편으로 드리는 영한 기도문]
주님, 저의 신음 소리를 들으소서
주님, 저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왕 되신 주님, 아침에 드리는 기도를 응답하소서
Lord, hear my groaning
Lord, listen to my groaning
Lord, my King, answer my prayer in the morning.
저의 억울한 사정을 주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주님은 악인을 미워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판단하십니다.
May the Lord judge my unfair situation.
The Lord hates the wicked and judges their sins.
주께서 원수들의 입, 마음, 목구멍, 혀를 질책하여 주소서
주님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꾀에 빠지게 하소서
Lord, rebuke the mouth, heart, throat, and tongue of my enemies.
Lord, let them fall into their schemes.
주님, 저는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님께 피합니다.
주님의 원수의 목전에서 저를 감싸주시고 큰 방패로 막아주셔서
기뻐하며 찬양하며 즐거움을 더해지는 은혜를 주소서, 아멘
Lord, I love your name and take refuge in you.
Lord, protect me from the sight of my enemies and keep safe me with a great shield.
Give us the grace to rejoice, praise, and increase our jo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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