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결혼식 풍속
1. 차이리(彩礼) - 신부값
중국에서 "신부값"이라고 불리는 "차이리(彩礼)"는 결혼 전 남성 측이 여성 측 가족에게 주는 금전적 선물이나 지참금을 의미합니다. 이는 중국의 전통 문화에서 기인한 관습으로, 지역과 가정의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1. 지역별 차이
- 도시 지역: 대도시에서는 점차 신부값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자립한 커플들은 신부값을 아예 주고받지 않거나 상징적으로만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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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지역: 농촌이나 전통적인 지역에서는 여전히 신부값이 중요한 결혼 조건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신부값이 결혼 준비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지며, 금액이 상당히 클 수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신부값이 결혼 생활의 재정적 기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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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액
신부값의 금액은 지역마다 크게 다르며, 수만 위안에서 수십만 위안(약 1,000만 원에서 1억 원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아래는 몇 가지 예시입니다.
- 일반적으로 농촌 지역에서는 10만 위안(약 1,800만 원)에서 20만 위안(약 3,600만 원) 정도의 신부값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나 가정에서는 신부값이 50만 위안(약 9,000만 원) 이상으로 요구될 수 있습니다.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신부값이 100만 위안(약 1억 8천만 원) 이상이 될 수도 있으며, 이는 결혼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3. 현대적 변화
최근 들어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변화로 인해 젊은 세대에서는 신부값을 주고받는 전통이 줄어드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결혼이 양쪽 가정의 합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부값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낮추거나 아예 생략하는 커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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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점
중국에서 "차이리(彩礼)"(신부값) 관습은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차이리와 관련된 주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과도한 경제적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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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측의 경제적 부담: 차이리 금액이 과도하게 높아져 결혼을 원하는 남성이나 그 가족이 심각한 재정적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촌 지역에서는 신부값이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액에 달하기도 하며, 남성 가족이 빚을 내서라도 차이리를
마련해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로 인해 결혼 후에도 재정적 어려움이 이어지는 사례가 많습니다.
- 결혼 기피
현상: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젊은 남성들은 차이리 부담 때문에 결혼을 기피하거나 연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결혼 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결혼 자체를 경제적 거래로 바라보는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2) 성비 불균형에 따른 신부값 상승
- 중국은 한 자녀 정책과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성비 불균형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남성 인구가 많아 결혼 가능한 여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결혼을 원하는 남성들이 한정된 여성들과 결혼하려고 경쟁하게 되면서, 여성 측 가족은 더 높은 차이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 "결혼 난민" 문제: 성비 불균형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로, 많은 남성들이 결혼 상대를 찾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를 "결혼 난민"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결혼을 위해 막대한 차이리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물질주의와 결혼의 상업화
- 차이리 관습은 결혼을 물질적 거래로 보는 인식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혼이 사랑과 신뢰보다는 재정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결혼 제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 결혼 조건화: 일부 가정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과 결혼을 통해 재산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로 차이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결혼이 개인 간의 감정이 아닌 가족 간의 경제적 거래처럼 변질될 수 있습니다.
4) 여성의 물건화
- 차이리 관습은 결혼에서 여성이 마치 거래되는 "물건"처럼 여겨질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는 결혼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인권이 침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가족이 결혼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높은 차이리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결혼이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5) 이혼 시 재정적 갈등
- 결혼 후 이혼할 경우, 차이리 반환 문제로 가족 간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일부 법적 판례에서는 이혼 시 남성 측이 지급한 차이리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반환해야 하는 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로 법적 다툼이 자주 발생합니다.
- 이는 이혼을 결심한 부부가 재정적 문제로 인해 이혼을 주저하거나, 이혼 과정이 더 복잡해지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6) 지역 간 불균형
- 중국 내에서도 경제적 격차가 크기 때문에, 차이리의 부담은 지역별로 크게 차이가 납니다. 농촌 지역에서 차이리의 부담이 더 크며, 그로 인해 도시와 농촌 간 결혼 문화에도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도시 지역에서는 차이리를 상징적으로 주는 경우가 많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높은 금액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창시 - 신부보다 먼저 입장하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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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의미 세 가지
첫째,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
문자적 의미는 눈이 보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다.
대부분의 경우 문자적 의미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이 의미만으로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다.
문자적 의미만을 고집하는 축자주의(literalism)는 때로 근본주의 해석을 낳고 이 해석이 반인륜적 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
둘째, 문학적 의미(literary sense)
문학적 의미는 성경 저자가 본문 안에 담아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이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역사비평의 제반 방법이 유용하다.
그러나 문학적 의미에만 매달리게 되면 성경 본문을 과거의 틀에 가둘 수 있다.
또한 본문 해석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이론으로 본문
자체를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셋째, 영적 의미(spiritual sense)
영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를 넘어서 성경을 읽는 오늘의 독자에게 성령께서 선물하시는 현실적 의미다.
'옛 약속'이란 의미다.
문학 형태에서 보면 다른 고대 서아시아 문학과 같이 모세의 5서(토라)는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문서(法文書) 외에 구비(口碑)·실화(소돔과 고모라가 야훼의 징벌로 유황불에 타서 없어졌다는 이야기)·시가·통계·족보 등이다.
역사서도 롯기(記)와 에스더 등 문학적 소품과 영웅 기록(사울 이야기, 다윗 이야기, 사사 이야기 등)·시가·우화(寓話)·통계·족보·연대기 등이다.
예언서 가운데 다니엘서·스가랴서 9장 이하는 묵시문학(默示文學)에 속한다.
문학서로 욥기(記)·전도서·잠언(箴言)이 지혜문학(智慧文學)이며 시편·아가는 시가(詩歌)이다.
구약성경 내용은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걸친 1천 년 이상의 고대 이스라엘 민족 역사와 생활을 그 바탕으로 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2대 문화 발상지를 연결하는 교량적 존재였던 이스라엘 민족사를 담은 내용으로, 고금의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다.
신약성경은 코이네 그리스어로 썼다.
예수 이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해석한 복음서들인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4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한 사도들 이야기를 기록한 사도행전 1권, 바울이 목회와 관련한 질문에 답을 주려고 교회에 보낸 목회 편지(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13통, 또 바울 이외의 편지(히브리서로부터 유다서까지) 8통과, 요한이 기록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 1권, 합계 27권이다.
즉,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적(事蹟)과 교훈(복음서), 복음이 유대인이 비유대인에게 전파하였던 과정(사도행전), 복음 의미와 그리스도인
자세(서신서), 종말론적 신앙과 최후 승리(계시록/묵시록)를 집대성한 문서이다. 현재 문서는 기원후 50-150년(100년)사이에
걸쳐 형성하였다.
성경은 기독교 전통을 가진 유럽 역사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그 사회 관습과 윤리를 규정했다.
유럽 문학 고전인 단테의 신곡, 청교도 시인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는 모두 그리스·로마의 고전 정신과 히브리·기독교 정신의 갈등·공존·융합 시도이며,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약성경 번역은 성서를 성직자의 손에서 평신도 손으로 넘기는 교회 민주화와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했던 혁신적인 일이었다.
더불어 성경을 일반인 손에 전한 사건은 성경 비평을 허용하지 못하는 무오하고 거룩한 경전보다 인간 글로 이해하고 비평하는 성서비평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인 경전을 모든 기독교인에게 전달해 직접 읽고 자기의
믿음을 성찰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이 잘못 전하기도 하던 성경 이야기를 직접 읽고 신을 체험하는 큰 변화를
불러왔다.
성경 번역은 독일어와 독일 문학 기초가 되었다.
또한 영역(英譯) 성경에 대한 비판은 현실도피라는 심각한 단점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현실도피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더불어 성경은 17세기 영국 개신교 신학과 영성을 보여주는 천로역정 같은 영국의 고전들과 긴밀한 관계이다.
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메시아, 마태 수난곡, 바흐의 음악들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개신교와 천주교 전통에서 자랐던 렘브란트의 종교화·미켈란젤로의 조각(피에타, 다비드 등)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다.
근대 경제적 합리주의 정신도 이스라엘과 유태교적이며 칼뱅주의의 종교적 합리성과 깊이 관계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도 성서를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들도 있다.
예를 들어 뱀 같은 지혜(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에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라고 하신 마태복음서 이야기 참조) 의미가 있다.
성경은 대체적으로 연대 순서로 편성하였으나 일부는 연대순이 아니라 특성에 따라 배열하기도 했다.
- 예) 구약 - 예레미야 25장 예언(24번째 배열), 역대하 36장 성취(14번째 배열)
- 예) 신약 - 베드로후서 1장(22번째 배열), 요한복음 21장 베드로 사후(4번째 배열)
로마 가톨릭에서는 로마 공의회와 히포,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성경 목록이 구약 44권, 신약 27권의 총 71권이라고 거듭 결정한 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외경 부정 주장에 맞서 기존의 성경 목록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이후 예레미야 애가와 바룩서가 별도 문헌으로 독립되어 나와 구약 46권, 전체 73권으로 재분류되었다.
정교회 한국 대교구 교리문답 중 외경에 대한 부분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된 나머지 (10권의) 책들은 외경(제2경전)이라 부르며 히브리어로 된 원본을 정경(제1경전)이라고 부른다.
성 아타나시오스는 이렇게 말한다.
"구약의 경독서는 교회에 입회하기 위하여 준비 중인 예비교인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외경이라고 불렀지만 동료 교부들은 이를 '정경'으로 인정한다는 점도 밝혔다.
이른바 원경전과는 다소 권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교회에서도 제2경전을 성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제2경전에서의 교리 도출 문제를 놓고서 정교회 내적으로도 다소 엇갈린 의견이 도출되고 있다.
대부분의 정교회는 제한적 교리 도출을 인정하지만, 정교회의 중핵인 러시아 정교회는 교리 도출에 부정적이다.
개신교에서는 히브리어 원본이 있는 구약성경 총 39권, 신약성경 총 27권으로 총 66권만을 확고한 정경, 즉 성경전서로 인정한다.
종교개혁자들도 외경은 신앙적으로는 읽는 것은 유익하지만 일찍이 히에로니무스가 말한 바와 같이 교리에 근거가 되는 데는 결코 사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종교개혁 전통의 개선주의, 공교회주의 교파들은 교리에는 적용 불가하나 신앙에는 도움이 된다고 보며, 개혁주의 교파들은 약 1세기 이후 외경은 받아들이지 않는다.[3]
기독교 성경의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순서는 불가타역 성경을 따랐다.
외경 혹은 제2경전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다.
성경난제풀이/ 사랑과 긍휼
사랑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헤세드'이다. 그리고 긍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라훔'이다.
`헤세드'는 `견고함', `변하지 않음'의 문화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표적 예가 이사야 40:6에서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경우이다("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그 모든 `헤세드'는 들의 꽃과 같다"는 말씀은 그 모든 견고함이 들의 꽃과 같다, 즉 인간의 연약함은 들의 꽃처럼 바람 한 번 불 때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헤세드로 표현되는 사랑은, `신실한 사랑', `견고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함축한다.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헤세드'로 표현될 때는, `언약적인 사랑', `약속에 신실하신 사랑', `불변의 사랑'을 함축한다.
반면, `라훔'은 `자궁'에 해당하는 `레헴'에서 파생된 형용사적 명사이다. 레헴은 어머니의 태이다. 라훔은 어머니의 긍휼이다. 이것은 생명의 창조와 고통, 용서의 아픔이 표현되는 사랑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사고 이후, 새롭게 반포되는 하나님의 이름에 `라훔'이 강조되었다(출34:6). 그리고 멸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니느웨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불평하던 요나가 기억한 하나님의 성품이다(욘4:2).
죄의 결과로서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헤세드의 의로운 사랑이며, 죄의 결과이지만 형벌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은 라훔의 긍휼의 사랑이다. 아담과 하와의 거역으로 죽음을 선고하고 추방한 하나님은 헤세드의 의로운 사랑을 보여 주었고,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어도 마땅한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는 하나님은 라훔의 긍휼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헤세드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된다면 라훔은 어머니의 긍휼로 표현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긍휼이 자녀를 구원한다. 우리는 모두를 필요로 한다. 정의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헤세드와 라훔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융합되어 있다. 차별이 없을 뿐더러, 구별도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실용적인 구별은 가능하다. 한글 성경은 헤세드와 라훔의 번역에 특별한 기준과 구별이 없다. 그러나 영어 성경 중 어떤 것은 명백하게 구별한다. 헤세드는 `love'로, 라훔은 `mercy'이다. 이에 따라 한글의 기준을 세운다면, 헤세드는 `사랑'과 `인애'로, 라훔은 `긍휼'과 `자비'로 구별해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성경을 읽는 사람이 본문의 의도와 뜻을 밝히 알게 될 것이다.
히브리어 동사 헤세드의 의미와 용법
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수 세기 동안 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mercy, 친절 kindness, 사랑 love과 같은 단어들로 번역되었다.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엘레오스(자비 mercy)라는 말을 사용하며, 라틴어 역어는 미스에리코르디아(misericordia)이다. 타르굼과 시리아 역본은 자주 '톱'의 동족어를 사용한다. 이 어근은 아카디아어에서나 우가릿어에서는발견되지 않는다. BDB와 GB에 이르기까지 사전들은 비슷하게 번역한다(Liebe, Gunst, Gnade, love, goodness, grace). 그렇지만 KB는 '함께 속한 ...자들의 상호 의무'라고 정의한다.
엘보겐(I Elbogen)에 바로 뒤이어, 1927년에 넬슨 글루에크(Nelson Glueck)는 독일어판 박사 학위 논문을 고트샬크(Gottschalk)가 영어로 번역하여 「성경에서의 헤세드」(Hesed in the Bible)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에다 라루에(G. A. LaRue)가 쓴, 논의의 분수령이라는 서문을 붙여 출판하였다. 그의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짧게 말해서, 글루에크는 이스라엘이 헷족이나 다른 종족들처럼, 언약으로 신과 결속하게 되었다는, 점차 발전해가는 개념을 내세웠다. 클루에크는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는 분으로 묘사된다는 견해를 취하였다. 십계명 등은 언약의 약정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승리는 언약을 지킨데 대한 보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배교는 언약 위반이었으며 하나님의 헤세드는 기본적으로 자비가 아니라 그의 언약적 의무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이스라엘인들도 역시 이 충성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프트하우스(W. F. Lofthouse, 1933), 스나잇(N. H. Snaith, 1944), 로빈슨(H. W. Robinson, 1946), 우고 마싱(Ugo Masing, 1954)과 다른 많은 학자들은 실질적으로 그의 견해를 따랐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었다. 앗센션(F. Assension, 1949)은 그의 주장의 근거를 구약성경 본문들에 두면서, '자비' mercy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스퇴베(H. J. Stoebe, 박사 학위 논문 1951, 또한 1952, VT와 THAT에 실린 논문들)는 '호의' good heartedness, '친절' kindness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였다. 시드니 힐스(Sidney Hills)와 케더린 자켄펠트(Katherine D. Sakenfeld)는 (The Meaning of Hesed in the Hebrew Bible, a New Inquiry), 헤세드가 예언적 용법에서 '신실성' faithfulness을 포함하는, 자유로운 구조 행위나 구출 행위를 가리킨다고 총괄적으로 주장하였다(이러한 역사적 개념과 언급에 관해서는 Sakenfeld pp. 1-13[이하 Sak.으로 칭함], 또한 LaRue in the book by Glueck[이하 G.로 칭함]를 참조하라.)
필자는 십계명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어,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진실하시고 그들에게만 충성을 요구하시어 언약 법령들인지, 아니면 이 십계명이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창조에서 나온 것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이 되거나 사건을 넘어서 사랑, 자비 그리고 친절을 보여주시게 될 영원한 원리인지에 관한 신학적 차이가 고려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단어 헤세드의 의미에 대해서는, 글루에크와 사켄펠드가 행했듯이, 일반적인 용법,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다. 글루에크(Glueck)는 헤세드가 친족, 군대, 동맹자, 친구 그리고 통치자들의 윤리적 구속 관게에서 실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제적이든 암시적이든 언약적 의무에 대한충성을 가리킨다. 자켄펠트(Sakenfeld)는 똑같은 자료를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사실상 관계는 현존한다(사랑은 거의 언제나 주, 객 관계를 수반한다). 그러나 헤세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정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이다.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며, 어떤 사람은 도와주는 위치에 있으며, 도와주는 사람은 자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본문의 중심적인 특징이다'(p.45).
글루에크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의무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퇴베(Stoebe)는 THAT에서 헤세드에 대한 광범위한 취급법을 다루고 있으며(pp. 599-622) 열왕기상은 헤세드가 나오지 않는 실례라고 말한다. 벤하닷은 패하였다. 그는 어떤 의무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자비, 친절을 바랬다. 스퇴베는 야베스의 사람들도 인용한다(삼하 2:5). 사울은 패하여 죽었다. 사울의 시체를 보살핀 것은 분명히 자유로운 친절 행위였던 것이다.
라반이 리브가를 기꺼이 이삭에게 보낸 것도 언약적 의무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그렇지만 글루에크는50절에서 섭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을 인용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던 친족에 대한 친절이었다. 그는 쉽사리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룻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룻의 행동을 계약상의 의무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 내용은 손상된다. 여호와는 과부들이 모압에서 새 남편을 얻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룻 1:8-9). 룻은 순수한 사랑으로 나오미와 함께 갔다. 룻 2:11-12에서 보아스는 그녀의 행동을 선하다고 인정하였으며 룻 3:10에서 그 행동을 헤세드라고 부르고 있다. 심지어 글루에크조차도 여기에서는 '친절' kindness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라합의 행위는 친절이었다(수 2:12). 그녀의 왕과 도시에 대한 충성은 당연한 것이며 합법적인 것이다. 창 19:19에서 천사들은 롯에 대해 언약적 의무-혹은 어떤 의무도-를 거의 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창 19:16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그들의 자비였다고 언급하고 있다(참조, 사 63:9). 창 21:23에서 아비멜렉은 그가 이전에 베푼 헤세드를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더 많은 헤세드가 필요했다. 글루에크는 다윗과 요나단이 우정을 맹세했다고 기록하는 삼상 20:8, 14, 15에 대해 언급한다. 글루에크는 말하기를 이 언약이 헤세드의 근거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 점이 글루에크가 저지른 중대한 실수인 것 같다. 그는 언약이 관계의 근거 위에서 생겨난다는 점, 그리고 이 의무들이 언약보다 더 심오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삼상 20:17은 요나단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언약을 맺게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그를 위해 애곡한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을 것이지, 의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삼하 1:26). 다윗이 사울의 집에서 보인 헤세드는 요나단을 위해서이지, 법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삼하 9:1, 3, 7). 글루에크는 이것이 은총도 자비도 아니고, 언약적 충성에서 요구되는 형제애였다고 말함으로써,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특징을 무시해 버리는 것 같다. 이런 견해는 다윗의 성격의 깊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퇴베는 이것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우정어린 태도(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한 마음씨[herzlich freundlich Gesinnung])의 자연스런 증거라고 부른다. 다른 예들은 생략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들도 이와 비슷하다. 모든 학자들은 에 2:9, 17에서 이 단어가 '호의' favor, '친절' kindness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용법이 포로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해 다룰 때, 문제는 물론 하나님께서 족장들 및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헤세드는 모순없이 언약적 헤세드로 불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증거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 심판, 충성 등이 언약적 심판 등으로 불리워질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본문들이 그의 헤세드를 언약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그의 영원한 사랑에 귀속시키느냐에 달려있다. 헤세드는, 돔 소르그(Dom Sorg, 참고문헌을 보라)가 주지한 바와 같이, 실제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에 대한 구약성경적 반영이 아닌가?
초기의 지배적인 용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속성을 선언하신 곳에 나온다. 즉 출 20:6은 신 5:10 및 또한 출 34:6-7과도 병행된다. 이 구절들은 G., Sak., 그리고 스퇴뵈에 의해 중요한 문서 분류의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는, Sak.은 이 모든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헤세드의 자유를 강조한다. 그녀는 이 단어들이 출 34:6-7에 나오는 '자비' mercy를 뜻하는 단어들과 근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문서에서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이런 측면(그의 자비로서의 측면)이라고 말한다-이에 대하여 그녀는 상당히 상상력을 발휘한다-(p.119). 그렇지만 그녀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을 '언어적 문맥'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충성스런(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세드를 받을 것이며, 불충한(미워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p.131). 그녀가 이렇게 언약에 강조점을 두게된 것은 세속적인 조약들이 종주와 가신사이의 사랑, 형제애 그리고 우정에 대해 언급하므로, 따라서 이것들은 언약적인 말이며 적어도 언약이 암시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는 이전의 개념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왕이 언약적 효과를 얻으려고 사랑이란 말을 일반적인 용법에서부터 빌어왔기 때문에, 사랑이 언약적인 용어가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가신들로 하여금 형제, 친구 그리고 남편처럼 처신하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에 있어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이 그의 사랑의 표시요 표현이다. 맥카르디(McCarthy)는 더 알기 쉽게 말한다. 즉 '후대의 첨가없이 본문에 반영된 출애굽기 19-24장에 나오는 시내 이야기의 형태는 이 이야기가 언약 형태에 따르는 어떤 조직을 반영해 준다는 주장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의 견해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의식들이 '역사, 서약, 위협 그리고 약속 이상으로' 일치를 가져오도록 인도했다는 것이다(McCarthy, D. j., Treaty and Covenant, Pontif. Bib. Inst., ed. of 1963, p.163).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본문 그 자체는 단순히 자기를 사랑하는(아하브)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줄 것과 반대된다는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비록 그의 특별한 돌보심, 게다가 그의 언약이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명령들의 문맥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헤세드가 이런 언약만을 가리킬 뿐, 그것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가설이다.
출 34:6-7의 본문은 보다 더 벅차고 엄숙하다. 이 본문에서는 큰 배교 이후에 이것이 행해진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모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찬 자기 계시였다. 자케펠트(Sakenfeld)가 여기에서 포로기 이전에도 '헤세드의 신학적 용법에는 죄사함이 항상(적어도!) 잠재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옳다(p. 119). 하나님의 자비와의 관련은 배교할 경우에 대한 말씀과 문맥에 확실하게 나타나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 라훔과 '노하기를 더디하다'라는 어구와 결합되어 있는 한눈(은혜 grace)은 이것들은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그는 헤세드와 에메트에서(보다 후대의 것) 크시다. 그는 죄용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헤세드를 수 천 대까지 지키신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의 맹세를 지킨다는 사실만을 말해준다는 주장은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약은, 그 서약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애정이 깊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켜진다.
자켄펠트(Sakenfeld)는 출 34:6-7에 의존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을 능숙하게 끌어모은다. 이런 구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즉 민 14:18-19, 느 9:17, 시 86:15, 시 103:8, 시 145:8(참조, 시 145:9, 10), 욜 2:13, 욘 4:2. 이 구절들 중에서 시 86:15만이 헤세드 뒤에 에메트란 단어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여호와의 사랑에 대해 언급하며 몇몇 구절들은 그의 용서하심을 언급한다. 어느 구절들도 특별히 언약의 근거에서 헤세드를 말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헤세드와 에메트(진리 truth)란 어구를 헤세드 안에 충성이나 성실의 개념이 있음을 옹호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어구는 약 25회 나오는데, 그중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약 7회 이상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중언법이며 한 명사가 다른 명사를 묘사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신실한 사랑' faithful love이나 '참된 친절' true kindness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의미한다. 친절과 신실은 영어에서 매우 같은 뜻의 중언법이다. 이런 결합은 헤세드란 말 속에 언약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들어있음을 조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이 말 그 자체가 이미 그것을 의미했다면, 왜 '신실한' faithful이란 수식어가 첨가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헤세드만의 용법에서처럼, 반드시 충성이 뒤따라야 하는 것으로 표현된 언약은 없다. 이것은왕상 3:3에서 추정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시어 그에게 헤세드를 보여주신 것이 사실상 언약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언약의 배후에 있는 그의 사랑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 본문은 이것을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돌리지 않는다. 스퇴베(Stoebe)는 시편 89편에서, 시 89:3의 언약은 시 89:2[H4와 3]의 헤세드)에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THAT, p. 615).
또 다른 한 쌍의 명사로는 가까운 문맥들에서 어떤 다른 용례들과 함께 7회 사용된 언약(베리트)과 헤세드가 있다. 이것은 주요한 예는 신 7:9, 12로서, 왕상 8:23, 대하 6:14, 느 1:5, 느 9:32, 그리고 단 9:4에 반영되어 있다. 스퇴베는 이것을 출 34:6의 의역이라고 부른다(THAT, p. 616). 그는 신 7:8이 이미 하나님의 모든 은총의 기초를 그의 사랑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러한 한 쌍의 명사들이 '언약적 사랑' covenantal love이나 '언약과 사랑' covenant and love으로 번역된다면, 이 사랑은 언약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렘 2:2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청년기의 헤세드는 신부의 사랑에 비유된다. 신부의 사랑은 약속의 근거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헤세드가 또한 라훔(예, 시 103:4, 슥 7:9, 그리고 앞의 출 34:6-7을 참조), 헨(예, 창 19:19, 시 109:12), 탄훔(예, 시 94:18-19) 등과 같은 '자비' mercy를 뜻하는 명사들과 짝을 이루는 경우가 약 15회 된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 이 예들은 실제로 형용사적 관계에 있지 않은 한 쌍의 명사들로 나온다. 이것은 헤세드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해주는 단어들 중의 하나임을 시사해준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가 이런 관계를 헤세드로 표현하였다는 사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영원하였다(시 136의 후렴 부분을 주목하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그렇지만 에브라임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헤세드는 그렇지 않았다(호 6:4). 그렇지만 헤세드가 반드시 언약을 수반하는지 혹은 언약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스퇴베는 이것이 행위 뿐만아니라 태도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 태도는 사랑(라훔), 친절(토브) 등에 병행한다. 이런 태도는, 그 대상이 불쌍한 처지에 있을 때, '자비' mercy(한눈)를 포함하는 일종의 사랑이다. 이 단어는 종종 '하다' do, '지키다' keep 등의 행위 동사들을 취하여 사랑의 태도 뿐만 아니라 사랑의 행동도 나타낸다. KJV의 '인자' lovingkindness라는 말은 고어적이지만,이 단어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R. L. Harris.] (p. 554*).
- 바이블 렉스 10.0에서 발췌 -
‘긍휼’(헬라어 ‘엘레에모네스’ 히브리어 ‘라함’과 ‘헤세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이 오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성화론은 이러한 구절들이 나올 때마다 아주 단순하게
그것을 인간들의 행위와 결부시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데에 사용하곤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주장을 알미니언 주의라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로마서의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긍휼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달음박질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문자 그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라면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게 됩니다.
같은 성경 안에서 이런 상반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이 둘은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화해가 되는지 잘 보세요.
본문에서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엘레에모네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함’과 ‘헤세드’입니다.
그 단어들이 70인 역에서 헬라어 ‘엘레오스’로 번역이 되는데
그 단어들은 원래 ‘슬픔, 애통, 자비, 은혜’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자신이나 타자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를 하고
그 상태를 함께 슬퍼해주며 애통해 하고 자비와 은혜의 필연성을 공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엘레오스’가 하나님의 가장 요소적인 성격, essential character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구약의 여러 곳에 등장을 합니다만 한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 이니이다 시 62:12
여기에서 ‘인자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헤세드’입니다.
‘자비, 긍휼, 은혜’등의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게 70인역에서 ‘엘레오스, 긍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께 속했다고 하지요?
그 어구를 직역을 하면 ‘주님, 주님은 긍휼이십니다’입니다.
그런데 긍휼이신 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게 조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 말은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공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거기에 가입하지 않을 시에 살아날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차치하고, 긍휼은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에게서 보여 지는 자연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인간들이 생산해 내어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보여 지는 것이요,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인간이 칭찬을 받는 그런 종류의 긍휼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은 무력자로 폭로가 되는
그런 긍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자다, 그가 복 받은 자다’입니다.
인간들이 정의하고 합의한 그런 종류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성도가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고 성도가 되어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반응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잘 도우라’는 식의 도덕이나 윤리의 행함으로 보게 되면 이 구절은 다른 이들도 행할 수 있는 선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본다면 자신은 월세에 살면서 백억 가까운 돈을 기부한 어떤 가수가 가장 긍휼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러한 종류의 긍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 것이고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도 목숨을 걸고 행했던 일들입니다.
그들도 불쌍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던 사람들이니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엄청난 긍휼의 행위를 쓰레기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구제를 하고 약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긍휼을 베푼다 할지라도 예수의 사랑을 근거로 나온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긍휼’이라는 선한 행위를 독려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집중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있는데 그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라는 배우와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을 맡은 고멜이라는 창녀의 이야기입니다.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에게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호 1:6
창녀 고멜과 호세아 사이에서 딸이 출생을 하는데 그 딸 이름이 ‘로루하마’입니다. 이 단어는 ‘아니다’라는 뜻의 부정 불변사 ‘로’라는 단어와 ‘긍휼’이라는 의미의 ‘라함’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이라는 고유명사입니다. 창녀 고멜의 자손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건 곧 그 창녀의 운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그 뜻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호세아서 2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조금 더 확실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호 2:2-5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더러운 정부의 것으로 알고 있는
패역한 창녀와 그녀의 자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죽은 흙의 상태인 우리의 처음자리의 현실입니다.
도저히 선을 행할 수없는 상태, 존재일 수도 없는 상태,
당장 이혼을 하고 죽여 버려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음탕한 신부, 그게 우리의 처음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그 창녀에게 임하여 그 용서받을 수없는 창녀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거기에 부어진 것이 ‘라함, 긍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신 후 이러한 회복의 말씀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호 2:23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서의 대 주제인 것입니다.
호세아서 11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essential character로서의 긍휼이 아주 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7-8
이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평생 창녀 짓만 하던 고멜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고멜이 뭘 잘해서 예수(호세아)의 신부가 되는 게 아닙니다.
고멜은 끝까지 창녀 짓을 하다가 결국 노예 시장에 팔려 죽은 돼지고기처럼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자를 보리 한 호멜 반과 은 열다섯(은 삼십),
즉 신랑의 목숨 값을 가지고 가서 사오는 것이 긍휼인 것입니다.
하박국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2
여기에서 부흥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완전하게 살려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살아요?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만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서
그들이 부흥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들이 기특한 일을 행해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게 되는 것이 긍휼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긍휼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 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 7:18-20
여기에서 ‘인애’라고 번역이 된 단어나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전부 ‘라함, 헤세드’, ‘긍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죄를 발로 밟고 은혜로 부으시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무엇을 해서 반대급부로 부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조건으로 인간 측에서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의 행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오늘 본문의 ‘긍휼히 여기다’라는 말은 ‘긍휼을 베풀다’라는 의미보다는
‘긍휼이 있는 자, 긍휼을 아는 자’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구성이 된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여, 그대들은 긍휼을 알고 긍휼이 있는 자들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므로.’
그렇다면 긍휼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긍휼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에 관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복음에서 그대로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7-29
이 에피소드를 보시면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거기에서 ‘불쌍히 여기소서’가 오늘 본문의 ‘긍휼’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눈이 고쳐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무엇을 했나요?
어떤 긍휼을 베풀었습니까?
2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가 나옵니다. 뭡니까?
‘믿음’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하시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푸신 긍휼의 근거는 소경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5장으로 갑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1-28
22절을 보시면 이방 여자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도 오늘 본문과 똑같은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이방여인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을 가능성은 0%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긍휼을 입습니다. 그녀가 뭘 했지요?
뭘 했는데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까?
28절을 보시면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역시 ‘믿음’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은 믿음을 전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전제가 되었을 때 긍휼이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서 믿음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니까요.
결론부터 서둘러 말씀을 드리면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는 긍휼히 여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두 경우 다 그들의 믿음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입니다.
그러니 긍휼 좀 베풀어 주세요.’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라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의 가나안 여인이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긍휼을 입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이 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녀에게 긍휼이 부어집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서 발휘되어야 하는 긍휼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존재일 수 없다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겠지요?
거기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조금씩 부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삶이며 그것이 성도에게서 나와야 할 긍휼히 여김인 것입니다.
긍휼의 실체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로 잘 설명해 놓으신 곳이 있습니다.
누가 복음 10장 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3-37
37절을 보시면 ‘자비를 베풀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가 오늘 본문의 ‘긍휼히 여기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것이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어떠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처방전이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 배경이 되는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25-2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사가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이 되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하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럼 가서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그 율법사가 율법을 다 지켜 낼 수 있는 사람이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잘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지켜서 의를 챙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가서 율법을 잘 지켜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넌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할 수 있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이라는 것이 그 세목을 하나하나 다 지켜 내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로 결론이 나지 않는 성경 지식은 다 헛것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어겨야 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해야 해요? 율법을 지켜야 해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넌 그런 존재가 아니다’라는 걸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바로 강도 만난 자로 거반 죽은 자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 죽은 몸으로 누구를 사랑하거나 불쌍히 여길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나야 한다.’이게 예수님 비유의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랑’과 ‘긍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목숨 걸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께 ‘나는 율법사이니 하나님 사랑은 당연히 실천하는 자입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만 남았네요. 누가 내 이웃인지만 가르쳐 주세요. 가서 열심히 사랑해 보겠습니다.’라고 율법사가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서는 ‘누가 자비(긍휼)를 베푼 자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긍휼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 할 수도, 긍휼을 베풀 수도 없는 강도 만나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 영생에 이르게 되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반 죽은 자들이 무슨 긍휼을 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은 그렇게 ‘난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없으면 그대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진짜 긍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라함’은 원래 ‘내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에서 긍휼이나 사랑 같은 좋은 심정이 나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장부를 ‘긍휼’이라는 말로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가 ‘사랑, 인애, 자비, 긍휼’등의 좋은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로 쓰였던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장부 안에서는 좋은 것만 나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 반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 12:10
여기에서 악인의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라함’입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에서는 악인의 ‘장부, 내장’이라고 번역을 해야 뜻이 더 이해가 쉽습니다.
악인에게 긍휼이 있다는 것도 만무이지만 긍휼과 잔인은 화해가 되지 않는 단어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의 내장에서는 절대 그 안에서 생산된 긍휼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긍휼이라고 내어 놓는 것들의 실체는 실상 잔인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내장 중에서도 여자의 자궁을 가리킬 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성경이 여자의 자궁에서 뭐가 해산되어 나온다고 합니까?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시 7:14
이렇게 인간의 자궁에서는 죄만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긍휼은 잔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궁에서는 진짜 긍휼이 흘러나옵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이 되어 있지 못하면
그냥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죽은 고깃덩이를 어머니의 생명선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이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전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러한 긍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0-32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들의 긍휼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치 아니함 위에 부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순종하지 않아야 긍휼이 부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여 긍휼을 입자는 것이 오늘날 개혁주의의 주장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의 인정 위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긍휼하심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 누구를 긍휼히 여길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가 긍휼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그러한 긍휼에 대해 이렇게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약 2:12-13
이 구절을 보시면 마치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 받아 지옥 가니까
반드시 긍휼을 행하도록 하라는 그런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떠한 문맥 속에 있는 것인지를 잘 보시면
이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위 구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약 2:8-11
조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다시 요약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시지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인데,
만일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격려를 해 주어야 하는데 갑자기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자가 된다.’는 말로 초를 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최고한 법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긍휼을 베풀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것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잘 풀어야 그 다음 구절인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구절이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12절의 자유의 율법이라는 어구부터 풀어 봅니다.
율법이면 율법이지 자유의 율법은 뭡니까?
율법이 사람을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인가요?
율법은 사람을 죄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해 주는 율법은 무엇일까요?
야고보 사도가 1장에서 그 어구를 한 번 더 썼습니다. 거기로 가보지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2-25
여기에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그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가리켜 온전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완전하게 지켜져서
더 이상 참소의 근거로 쓰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누구에 의해 완전해졌습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이 말씀은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그 율법을 온전하게 하러왔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말씀은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긍휼을 못 받는다는 말씀이 당연히 아니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온전한 율법은 예수께서 완전하게 성취하신 자유의 율법,
즉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야고보서 1장으로 가겠습니다.
야고보는 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는 바로 위 구절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약 1:23-24
여기에서 ‘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로고스’입니다.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하지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금방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게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말씀에 적혀 있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폭로된 자신의 죄인 됨을 금방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을 거울을 보고 금방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나는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 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죄인중의 괴수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사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25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즉 십자가의 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신의 실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도, 즉 복음의 말씀을 실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그대로 2장과 연결을 시켜 보겠습니다.
다시 2장 12절로 갑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약 2:12-13
12절의 자유의 율법이 뭐라고 했지요?
복음입니다.
그럼 복음의 말씀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즉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 존재일 수도 없을뿐더러
심판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하며 행동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13절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엄중히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 것이 정상인데 너희는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게 되는 그런 엄격한 하늘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심판 받아 죽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긍휼을 행하지 않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어구는 그냥 ‘without mercy’입니다.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입음이 드러나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건 긍휼이라는 행위를 내어놓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로서의 반응과 자세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다 긍휼 없는 심판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표준 새 번역과 공동 번역에는 공히 ‘그러나’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다 심판받아 마땅한데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 그 심판을 이기더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야고보서 2장 1절의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에서부터 시작되는 내러티브가 매끄럽게 연결이 되지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라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2-13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와 함께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왜 죄인과 함께 밥을 먹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메시아는 자신이 병든 자임을 아는 자에게만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 의원을 찾지 않듯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 죄를 사해주는 메시아를 찾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호세아서 6장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제사라는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확인도장을 찍으십니다.
‘난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지, 자신은 긍휼을 받아야 할 자가 아니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자신의 처음자리 인식과 인정,
그리고 그러한 자신에게 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성을 아는 것이며,
그렇게 구원을 받아야 할 자신처럼 다른 이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그러한 삶의 지향성을 성도의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잖아요.
그래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부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까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 안에는 그 어떤 의의 재료나 원소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러한 죄인 됨의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 애통이요,
그래서 그 어떤 하나님의 처사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가 없으면 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자라는
인식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력한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드러내는 강화에서 갑자기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심판해 버린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게 어울립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서 어떻게 긍휼이 생산 되어 나옵니까?
그게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자가 왜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겠습니까?
아닙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긍휼은 손톱만큼도 없으므로 아버지의 긍휼이 제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도 아버지의 긍휼이 필요합니다.’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에 대한 절절한 간구가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서는 왜 이렇게 긍휼이 안 나올까?’하고 고민 하시면서 억지로 긍휼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마시고,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로 가세요.
우리는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 속에서 진짜 하늘의 긍휼을 드러내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 역사 속에서 드러내야 하는 하늘의 긍휼인 것입니다.
9월 1일(월) 예레미야애가 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4: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Moreover, our eyes failed, looking in vain for help; from our towers we watched for a nation that could not save us.
헛되이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하벨 베칲피아테누 칲피누) הָבֶל בְּצִפִּיָּתֵנוּ צִפִּינוּ
1892 6836 6822
1892 הֶבֶל 스트롱번호 1892
어원 / 189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3회 사용
6836 צְפִיָּה 스트롱번호 6836
어원 / 682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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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망대, 애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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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바라봄(애4:17).
6822 צָפָה
스트롱번호 6822
구약 성경 / 36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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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 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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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형 바라보다, 응시하다, 사21:5, [분사형으로] 망대지기, 감시원, 삼상14:16,삼하13:34, [은유적으로] 선지자, 렘6:17, 겔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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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원형 조사하다, 호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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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원형 자세히 관찰하다, 창31:49, 시66:7,잠15:3, 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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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원형 기다리다, 시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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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원형 선택하다, 욥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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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원형 피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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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원형 감시하다, 출25:24, 왕상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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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원형 바라보다, 삼상4:13, [분사형으로] 감시자, 사21:6, [은유적으로] 선지자, 애4:17, 미7:4,7, [절대형으로] 시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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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살피다(창31:49, 시66:7), 감찰하다(잠15:3), 파수하다(삼하13:34, 나2:1), 엿보다(시37:32), 보살피다(잠31:27), 기다리다(삼상4:13, 욥15:22), 바라다(시5:3, 애4:17), 바라보다(애4:17, 미7:7, 합2:1), 지키다(렘48:19). [명] 파수꾼(삼하18:25, 사21:5, 겔3:17),망대(아7:4).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
- 이는 애굽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도록 거듭 촉구한 바 있다(렘 38:17-19).
한편, 본절에서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족의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는 바, 이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예레미야 저작설을 부인케 하는 표현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참다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信仰)의 우선순위(優先順位)
우선순위란 “어떤 것을 먼저 차지하거나 사용(使用)할 수 있는 차례(次例)나 위치(位置).‘라고 합니다.
넉넉할 우(優), 먼저 선(先), 순할 순(順), 자리 위(位)
(도입 이야기)
하나님이란 영어 단어는 갓(GOD)이라고 합니다.
GOD라는 단어를 가꾸로 나열하면 DOG 즉 개라는 단어가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고 따르지 않으면 그 결과는 개와 같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 서로 앞다투어 '좋아한다', '사랑한다'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처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다.
그들이 모두 뛰기 시작했는데, 한 청년이 그 여자를 거의 따라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한 움큼 쥐어 그가 오는 길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보고는 처녀를 쫓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줍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처녀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녀를 가까이 쫓을 때 마찬가지로 돈을 떨어뜨렸다.
역시 이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처녀를 그만 놓쳐 버렸다.
그들이 계속 달리는 동안에 세 번째 청년이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따라갔다.
이때 처녀는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몽땅 뿌렸다.
그러나 이 구혼자는 돈으로 인하여 처녀를 단념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가 무엇보다도 제일 바라는 상을 위하여 뛰어갔다.
우선순위를 위하여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위하여 정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헛된 도움의 소망(예레미야애가 4:17-22)
선지자 예레미야는 깊은 슬픔에 잠겨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유대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고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많은 백성은 살상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예레미야는 할 수 있는 것은 지난날에 있었던 회한의 눈물과 탄식뿐이었습니다.
1. 허망한 기대(17-20절)
세상 권세에 대한 기대는 허망합니다.
17절에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라고 했습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라고 했습니다.
유대가 이방 나라 애굽과 앗수르의 도움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유대가 믿을 수 없는 것을 의지했고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자를 향하여 도움을 기대하였으므로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애굽이 유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환란의 때에 눈이 상하도록까지 애굽이 구원해 주기를 바랐으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세상 권세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본문 그대로 유대는 세상 귄세에 헛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면 세상 모든 권세와 권력은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력이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오직 도와줄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세상 권세에 대한 기대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유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썩어질 것을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가다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이를 해결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로서 그러한 행위는 불신앙의 죄를 범한 것과 일반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허망합니다.
20절에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콧김은 호흡을 가리키는데 호흡에
생명이 있습니다(사 2:22).
여기서 콧김은 시드기야 왕을 가리킵니다.
유대 백성이 시드기야 왕을 호흡과 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의지하고 그 그늘 아래서 형통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하던 왕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으므로 유대 백성도 절망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함정에 빠졌음이여”라고 했는데 이것은 패망하여 포로되어 간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 백성은 시드기야 왕에게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히는 불행을 겪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부패한 존재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이 땅에는 고통과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창
3:16-19).
이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고, 죄중에 잉태되고 죄악중에 출생할 뿐 아니라 죄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요 3:6, 시 51:5).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 되었고(롬
3:12-16)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을 기대하던 유대 백성들은 중국에 가서 가슴을 치고
한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장담하며 약속하였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변하고 마는 약한 존재 입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죽더라도 주님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법정에서 3번이나 부인했지 않습니까?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며 지극히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는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분입니다.
2. 시온의 위로(21-22절)
에돔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21절에 “우스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고 했습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 예고입니다.
우스땅은 에돔 민족이 거주하는 땅입니다.
“처녀 에돔아” 라는
말은 평안하게 자라나온 에돔이라는 뜻입니다. 에돔은 유대를 늘 대적하는 원수인데 그 나라가 현재에는 죄 가운데 행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혼란이 올 것을 모르고 즐거워하는
자들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경멸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재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런 재난들의 도구가 된 자들과 더불어 재난의 후원자들로서 그리고 교사자들로서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에돔의 파멸은 이 예언자가 예언하였습니다(렘 1:7).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전망을 가지고
현재의 무례하고 오만한 자들에 대하여 자신들을 고무해야 할 것입니다. 1) 그것은 치욕적인 파멸인 것입니다. “잔이 네게 이를지니
네가 취하리라.” 아주 얼이 빠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모든 계획이 흔들리고 모든 기업이 넘어지고 다음에 노아가 술 취하였을 때
같이 “네가 벌거벗으리라.”그리고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이 그것을 당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언젠가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그것은 정의로운 파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듯이 찾고 그
죄들을 벌하십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정확하게 그 목적에 부응할 것이므로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죄악을
그렇게 심판하시기 때문에 달리는 자도 그 형벌속에서 죄상을 발견할 것입니다. 조만간 죄는 징벌되고 발견됩니다. 어둠 속에 숨긴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 시온의 형벌이 끝이 올 것입니다. 22절에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처녀 시온”은 택한 백성 “유대 백성”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회개하면 환란이 끝나고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옛날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를 괴롭게 하던 에돔은 지금은 평안하면 미구에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쏟아부어 심판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환란받는 성도에게는 구원으로 갚아주시고 성도를 환란받게 하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은 큰 재난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양상이 슬프고 그들의 전망이 지금 큰 재난중에 있습니다. 악한 이웃인 에돔은 그들에게 모욕을 하는가 하면 파괴자들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제거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사 40:2에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를 더 이상 포로가 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너의 포로를 돌이킬 것이며 너를 영광스럽게 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형벌은 그들에 보내어진 목적의 일을 다 성취할 때까지만 계속되는 것임을 주의합시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를 징벌하시고 그 백성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딸의 불의는 벌을 받고 그 전쟁은 끝이나므로 그는 죄의 보상을 하였습니다. 시온의 토대가 흔들렸다고 할지라도 세계를 덮은 여호와의 주권은 계약의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계획이 완성된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은 히브리 알파벳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알파벳은 모두 22문자 입니다.
1절은 "예이카(אֵיכָה)"로 시작합니다(알렢. א ).
'예이카"는 슬프다라는 뜻입니다(1:1, 2:1, 4;1)
2절은 "베네이(בְּנֵי)"로 시작합니다(베드. ב).
"베네이"는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17절은 "오데나(צָדוּ )" 시작합니다(아인. ע).
"오데나"는 "다시, 반복하여"라는 뜻입니다.
무너지는 남 유다는 애굽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가장 강대한 나라 애굽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곧 연약한 인간들의 삶의 특징과도 비슷합니다.
먼저 찾아야 할 것과 다음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먼저 찾아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손을 펼쳐 도움을 구하려는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강한 나라이며 자유민주주의 기초위에 세워진 미국을 붙잡지 않고 503년 동안 지배했던 중국을 의지하려는 잘못된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해 대한민국의 기초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정신을 차려야 할 교회와 성도들마저 연고주의에 붙잡혀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나서야 합니다.
누가 그 사명을 감당애햐 할까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집에 불이 났는데 왜 이웃집을 기웃거립니까?
내가 먼저 내 집의 불씨를 제거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올바른 방향과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함락되어 잿더미가 되어버린 예루살렘과 거기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탄식했습니다.
그것이 본문 앞의 4:1-10절의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유다의 지도자들에 대한 타락과 부패를 기록합니다.
이는 유다가 이런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11-16절은, 우선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13절에 보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게 된 이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유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책임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길로 가고 있으면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책망하고, 바른길로 인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잘못된 길로 가도록 부추기는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 바른 말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이렇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회개하지 못하고 심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균형 있게 잘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실천하고 증거해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유다의 정치적 지도자들의 죄를 말합니다.
본문 17-20절 까지의 내용입니다.
17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랐다',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았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보다 애굽을 더 의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우리의 걸음을 엿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벨론 제국이 애굽을 계속 의지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해 오자, 왕과 지도자들은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선포했습니다.
또한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원래 바벨론제국도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애굽을 의지하는 모습에, 결국 나라를 아예 멸망시켜 버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바벨론에 항복했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7절, 18절은 정치적 지도자들의 이러한 잘못을 말합니다.
애굽을 의지했는데 막상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쳐들오자, 애굽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바벨론 제국이 3번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함락했는데 애굽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애굽만 의지하다가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정치적 지도자들의 결정은 백성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지난 우리나라 역사를 뒤돌아보더라도 왕과 대통령을 비롯해 지도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보는지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바르게만 선다면, 나라의 위기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정치, 경제, 사회 각 영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리더십을 가지고 공적인 일들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또 종교적 지도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도록,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건강한 교회와 지도자들로 세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지막에 더 중요한 교훈과 가르침을 줍니다.
22절,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4장의 내용은 전부 어둡고 고통스러운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 희망적인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에 대반전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도자는 모두 실패했으나, 참된 지도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듣고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구원하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가진 한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거나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조건적인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잘하면 나중에 회복시켜 줄께'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인 회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도자들의 중요성과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 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기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돌이키고 회복하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이웃과 자녀들을 도우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우리 민족, 우리 사회, 우리 교회와 가정, 우리 개인을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예레미야애가 4:11 ~ 22)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인 지도자들의 잘못을 다룬 것으로, 그것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미련하게도 열방을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를 쏟으시니 시온의 터가 살라지고 대적이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유다는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다가 종말을 맞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파괴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 헛된 바람, 유다 왕들과 에돔의 종말 등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전쟁이 일어나 예루살렘에 불이 났는데, 그 터마저 불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보통 지상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에 불이 나면 지붕이나 벽 등이 불로 인하여 소각됩니다, 하지만 기초공사를 한 토대까지 불로 태워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만큼 여호와의 진노가 맹렬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에 기인된 것이라는 규명입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 이는 한 마디로, 모든 일이 유대 왕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를 말합니다. 그는 본 절 내용으로 봐서 ‘자신과 함께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탈출도중 그 자신이 적군들에게 먼저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이면에는 인간 왕을 의지했던 과거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 쓸데없는 도움을 바라다가 눈이 쇠약해졌으니 유다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은 영안이 아니고 육안입니다 그 눈이 상한 것은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을 거의 2년 동안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성안에는 식량난이 심각해져 아사자가 속출합니다. 유다는 동맹국인 애굽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애굽 군대는 체면치레로 한 번 출전하고 곧장 귀환합니다.
바벨론의 세력이 너무 커서 그래서 남 왕국 유대가 방패막이를 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속은 따로 있었지 결코 유대를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던 중 정말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맙니다. 그리곤 찬란한 성 예루살렘은 불타 버리고, 유대의 최고 책임자 시드기야 왕은 도망가다 그만 적군에게 생포됩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은 무참하게 살육되고, 그는 두 눈이 뽑혀집니다. 그리곤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쇠사슬로 묶여져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랐으므로 유다를 대표할 수 있는 왕의 눈이 정말 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지만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당장 닥친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헛되이 도움을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세상을 의지합니다. 또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동원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고 우리 의지대도 한 것이라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자기 정당화이고 합리화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때에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유대가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바벨론에게 항복했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패잔국의 불명예는 남았겠지만 나라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그들을 잊지 않아서 70년 후 구해주셔서 망정이지, 그 때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과 물질 등을 의지하면 영적 간음이라고 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으로 안다면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고 계시는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유익하더라도 사람 의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대로 우리의 눈이 상할까 두렵습니다.
기근으로 임한 하나님의 진노
예레미야애가 4장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기근으로 임했던 것을 묘사했습니다.
기근이 임한 이유는 택함을 입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
28:58).
우리 믿는 자들이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Alef | Gimel | Dalet | Zayin | Chet | Tet | Yod | Ka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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א | ב | ג | ד | ה | ו | ז | ח | ט | י | כ |
ך | ||||||||||
Lamed | Mem | Samech | Ayin | Tsadi | Qof | Resh | Tav | |||
ל | מ | נ | ס | ע | פ | צ | ק | ר | ש | ת |
불로 임한 하나님의 진노
11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11절의 히브리어 알파켓 시작 글자는 카프입니다. 11절은 킬라(כִּלָּ֤ה)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그가 성취하셨다"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당신님의 분노를 이루셨다고 합니다. 11절에는 동사가 네 개 나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동사는 이루다, 완성하다입니다. 그 다음 동사는 "쏟아붓다"입니다. 그 다음 동사는 "(불을) 붙이다"입니다. 그 다음 동사는 "먹다, 삼키다"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분을 이루셔서 진노를 쏟으시고 시온에 불을 지르셔서 그 터를 다 삼키게 하셨습니다. 시온이 불에 탄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함락
12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12절의 시작 글자는 라메드입니다. 12절은 로(לֹ֤א)로 시작합니다. 로는 아니다(not)라는 뜻입니다. 땅의 모든 왕들과 세계의 모든 거주민들이 믿지 못했다(לֹ֤א)라고 합니다. 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93쪽).
이방 민족들이 전연 몰랐다고 하니, 그것은 유다의 재앙이 그처럼 뜻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지세(自然之勢)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예상 밖에 임하는 재앙은 주로 하나님의 징벌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이 함락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강력한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이 성을 지키셨습니다. 게다가 그 성은 자연 요새로 함락시키기 굉장히 어려운 성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셔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
13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3절의 시작 글자는 멤입니다. 13절은 메하토트(מֵֽחַטֹּ֣את)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죄들 때문에"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것은 외적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고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을 따라 시드기야를 위시한 지도자들은 끝까지 항전했고 온 성에 엄청난 기근이 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사장들은 사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이나 우상의 제단을 놓는 일을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지만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율법과는 반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특별히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그 땅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실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14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아무도 만질 수 없도다
14절의 시작 글자는 눈입니다. 14절은 나후(נָע֤וּ)입니다. 그 뜻은 "그들이 요동쳤다(떨었다)"입니다. 14절은 맹인들이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다니는 모양을 묘사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맹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려고 하지 않고 거역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가려졌습니다. 그들은 어둠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의 옷은 피에 더려워져서 가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가증했습니다. 여기서 옷은 그들의 행실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행실이 죄로 크게 더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꺼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부정한 자처럼, 나병환자처럼 된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행실이 죄로 물들면 그들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 일반 사람들은 그 사람을 꺼리게 됩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게 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꺼려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해졌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예루살렘 성에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저리 가라
15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5절의 시작 글자는 싸멕입니다. 15절은 수루(ס֣וּרוּ)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저리 가라"입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게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우리를 만지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이 그렇게 부정한 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저리 가라"가 세 번 연거푸 등장합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은 그들을 부정하고 가증하게 여겼습니다.
지도자는 큰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하는 지도자는 그 책임이 더 큽니다. 제대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말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오히려 악을 이루었습니다. 말씀이 금하는 일을 행했습니다. 의인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부정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그들이 다시는 여기 살지 못하리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땅입니다. 거기에는 부정한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거룩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방인들이 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가장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을 흩으시고
16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16절의 시작 글자는 페입니다. 16절은 프네(פְּנֵ֤י)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16절에는 "얼굴"이 두 번 나옵니다. 두 번의 얼굴은 여호와의 얼굴과 제사장의 얼굴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은총을 베푸시는 통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당신님의 얼굴 앞에서 흩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은총을 내리지 않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들을 흩으시고 그들을 보시려고(לְהַבִּיטָ֑ם) 더하시지(יוֹסִ֖יף) 않으실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서 흩어진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제사장을 높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제사장은 더이상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존경을 받을 수도 없고 대접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17절의 시작 글자는 아인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아인이 페보다 먼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17절은 우데나(עודינה)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여전히"입니다.
우리의 눈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여전히" 실패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선지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라고 합니다.
바라본다는 말이 두 번 연거푸
나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도움을 바란 것입니다.
이 나라는 애굽입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애굽은 도움을
바라는 자들을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 말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 백성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
- 이는 애굽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도록 거듭 촉구한 바 있다(렘 38:17-19). 한편, 본절에서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족의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는 바, 이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예레미야 저작설을 부인케 하는 표현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참다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냥을 당함
18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18절의 시작 글자는 짜데입니다. 18절은 차두(צָד֣וּ)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사냥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의 발자국을 뒤쫓는 것처럼 그들이 우리의 발자국을 추적하여 뒤따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로 다닐 수 없고 숨어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숨어다녔지만 막다른 길에 도달했습니다. 곧 잡혀서 죽게 된 것입니다. 길이 끝났고 우리의 날들도 끝났습니다. 끝이 왔기 때문입니다. 18절에는 끝이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길의 끝을 묘사하면서 다른 한 번은 끝이 왔다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길이 없습니다. 다 막다른 길입니다. 그러다가 종말이 갑자기 임합니다. 믿는 우리는 이런 것에 주의하는 사람들입니다.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19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19절의 시작 글자는 코프입니다. 19절은 칼림(קַלִּ֤י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빠른, 신속한"이란 뜻입니다.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이 독수리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산 꼭대기로 도망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광야로 도망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름 부으신 자가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20절의 시작 글자는 레쉬입니다. 20절은 루아흐(ר֤וּחַ)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숨결,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우리가 코로 쉬는 숨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호흡과도 같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부정하여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왕이 추격하는 자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함정에 빠진 사람은 시드기야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보호를 백성들에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 나라가 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잘 재판해서 나라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인애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왕이 나라를 잘 다르시면 백성들은 그의 그늘 아라에서 평안히 살게 됩니다. 그런데 왕은 하나님의 통치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인애로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잃거나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안전합니다.
에돔아
21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21절의 시작 글자는 신입니다. 21절은 시시(שִׂ֤ישִׂי)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너는 기뻐하라"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딸 애돔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반어법입니다. 기뻐하라는 이유가 "잔이 네게도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돔도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에돔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은 에돔이 예루살렘 성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니 네가 망할 때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그런데 "원수 사랑"은 가능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 내가 나의 자아와 나의 힘과 나의 성품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언제나 실패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듯이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용서 받지 못할 죄인으로 알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에돔은 유다를 원수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망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기뻐하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게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죄인인 만큼 에돔도 죄인입니다. 누구든지 죄로 인해서 심판을 당할 때에는 자기도 죄인일 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슬퍼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돔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그러한 행동을 그대로 갚아주셨습니다.
딸 시온아 딸 에돔아
22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22절의 시작 글자는 타우입니다. 22절은 탐(תַּ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성취되었다(마쳤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딸 시온을 위로합니다.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 누가 그것을 보고 비웃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는 너무 억울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징계가 이제 곧 끝나겠구나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시온이 망하는 것을 보고 에돔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것으로 볼 때 시온에 대한 형벌은 이제 마쳤구나 이렇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제 에돔에 형벌이 가해지겠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피난 가는 다윗을 보면서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라고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대로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선으로 갚아주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원수에게 원통한 마음을 품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으로 나에게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8월 30일(토) 예레미야애가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침마다 새로우니(3:22-23)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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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용사, 남성 새로운.
-
a. 형용사, 남성 [손수레] 삼상6:7, 사4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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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형용사, 남성 [집] 신20: 5, 22:8.
-
c. 형용사, 남성 [아내] 신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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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형용사, 남성 [왕] 출1:8.
-
e. 형용사, 남성 [노래] 시33:3, 40:4(3).
-
f. 형용사, 남성 [이름] 사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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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여성형 חֲדָשָׁה
-
관련 성경 / 새(레 23:16, 삼하 6:3, 사 65:17, 42:9, 43:19, 렘 31:22), 새로워진(욥 29:20), 새로운(애 3:23).
22절에서 언급한 여호와의 자비와 여호와의 긍휼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자비와 여호와의 긍휼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자비(慈悲)라는 히브리 단어
자비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벌을 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귀중하게 여기는 값비싼 도자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치듯 건들기만 해도 아버지에게 혼이 납니다.
어느 날 그 집 어린 아들이 집에서 놀다가 실수로 그만 도자기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아들은 평상시 아버지께서 도자기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기에 아버지에게 혼 줄이 날 줄 알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이 집에서 못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떻게 깨진 도자기와 비슷한 거라고 구해 볼 방법이 없을까?”
불안해 하며 떨고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 되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깨진 도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안그래도 평상시에도 엄한 아버지이신데 이제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꽉 안아주며 물어봤습니다.
“너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너무나도 비싼 도자기이기에 다른 사람이 깨뜨렸으면 그 값을 물어 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벌을 면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 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헤세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지만 헤세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면해 주셨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망했어도 진작 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오늘 날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죄를 짓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수많은 죄들을 헤세드로 용서해 주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동] 영화롭게 하다(잠 14:34), 선대하다(수 2:12, 삿 1:24, 룻 1:8), 은혜를 베풀다(룻 2:20), 인자하다(대상 16:34, 대하 7:3,시 59:10),
자비하다(대상 16:41, 대하 5:13), 선하다(대하 32:32, 느 13:14), 긍휼히 여기다(스 9:9, 시 59:17), 불쌍히 여기다(욥 6:14).
긍휼(矜恤)이라는 히브리 단어 - 라함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레헴’ 입니다.
이 단어는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마치 어머니가 그 품 안에 몸 안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기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십 억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되는 평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다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런 존재 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켐, 긍휼 입니다.
하나님의 바로 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그대로만 바라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듯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레켐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 4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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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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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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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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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רְחֹ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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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사랑하다(시 18:1), 긍휼히 여기다(신 13:17, 왕하 13:23, 사 49:10), 자비하다(시 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 8:50, 시103:13, 사 27:11).
[명] 자비(렘 6:23, 애 3:32), 긍휼(겔 39:25, 합 3:2), 로루하마(호 1:8), 루하마(호 2:1).
구절 해석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 →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 →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지탱하며 끝내 멸망하지 않게 합니다.
- “아침마다 새로우니” → 하나님의 은혜는 매일 새롭고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고 변치 않음을 고백합니다.
묵상 포인트
- 하나님의 긍휼은 끝이 없다.
- 어제의 실패와 절망도 새 아침의 은혜로 덮으신다.
- 매일의 삶은 주님의 성실하심에 의해 지탱된다.
삶에 적용하기
- 하루를 시작할 때 이 말씀을 고백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세요.
-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붙드세요.
- 주변 사람에게도 새 은혜와 소망을 전해보세요.
짧은 기도
“무궁한 긍휼과 사랑으로 저를 붙드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로운 은혜로 저를 채우시고, 주님의 성실하심을 경험하게 하소서.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멘.”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예레미야애가 3:19-33)
한 아버지가 매를 들고 유치원생 어린 아들을 혼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매 맞은 두 종아리가 너무 아파 또르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들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아빠는 날 미워하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매로 날 혼낼리가 없어…” 아들은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가 어떠한 마음으로 자기를 혼내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이 자라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제는 그가 매를 듭니다. 그제서야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를 들고 훈계하는 것은 아버지도 꺼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를 듭니다. 자녀의 몸에 고통을 주려는 목적으로 매를 드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매 맞은 몸이 아프겠지만, 그로 인해 더 좋은 사람, 더 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이 매를 드는 부모의 마음 입니다.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범한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치 냉정한 심판자처럼 오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징벌 하시는 이유는 징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징계를 통해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죄를 뉘우치므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매를 든 아버지가 여전히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이듯이, 심판을 베푸는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러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분명 지금 그가 직면하고 있는 눈 앞에 현실은 고난과 괴로움, 쓰라림과 고통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전쟁의 패배로 인해 사방에 시신이 뒹굴고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저미도록 아픕니다. 여기저기서 신음과 탄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고, 아무런 꿈과 소망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암울한 현실만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야를 돌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자 그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심을 그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가 3:22-23) 저는 이 2구절을 꼭 암송하시라고 권면 해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즉 복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에는 아주 중요한 단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자비(慈悲) - 헤세드
자비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벌을 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귀중하게 여기는 값비싼 도자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치듯 건들기만 해도 아버지에게 혼이
납니다. 어느 날 그 집 어린 아들이 집에서 놀다가 실수로 그만 도자기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아들은 평상시 아버지께서 도자기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기에 아버지에게 혼 줄이 날 줄 알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이 집에서 못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떻게 깨진 도자기와 비슷한 거라고 구해 볼 방법이 없을까?” 불안해 하며 떨고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 되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깨진 도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안그래도 평상시에도 엄한 아버지이신데 이제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꽉 안아주며 물어봤습니다. “너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너무나도 비싼 도자기이기에 다른
사람이 깨뜨렸으면 그 값을 물어 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벌을 면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 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헤세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지만 헤세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면해 주셨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망했어도 진작 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오늘 날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죄를 짓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수많은 죄들을 헤세드로 용서해 주고 계십니다.
둘째, 긍휼(矜恤) - 라함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레헴’
입니다. 이 단어는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마치 어머니가 그 품 안에 몸 안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기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십 억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되는 평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다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런 존재 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켐, 긍휼 입니다.
하나님의 바로 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그대로만 바라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듯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레켐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여호와의 자비(헤세드)와 긍휼(레켐)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다함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죄를 짓고 산 사람도 오늘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바로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크레파스를 가지고 온 통 하얀 벽지 위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립니다. 엄마가 고이 접어 둔 옷을 옷장에서 마구마구 꺼냅니다. 쌀통을 엎어서 온 바닥에 쌀이 뒹굽니다. 아이 키우는 어머니들은 자신의 집을 보고 ‘전쟁터’라고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죠. 그래도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또 다시 그 엉망인 집을 치우고 정리하며 아이를 키웁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국민하교 시절 참 많은 말썽을 부렸습니다. 집 앞 논가에 가서 친구들과 올챙이, 개구리, 물방개 잡으려고 한참을 놀다보면 운동화, 운동화 속 양발, 바지 다 진흙투성이가 됩니다. 어리니까 더러워진다는 것을 몰라서 그 채로 집에 들어갑니다. 그럼 집안 여기저기 흙 천지가 됩니다. 또 돋보기를 가지고 태양열을 모아서 검은 봉지 태우는게 너무 재미 있어서 장난 치다가 집안 장판도 태워 먹었습니다. 정말 말썽 많이 부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 번도 우리 아버지가 한 번도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나가라. 너는 더 이상 김영목이 아니다. 너는 오늘부터 최영목으로 살아라, 이영목이 되던지 박영목이 되던지 해라”하고 저를 내쫓으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사고를 쳐도 부모님은 저를 그 때에만 혼내실 뿐, 여전히 저를 아들로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동일 하십니다. 주님은 절대로 택하신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고아와 같이 홀로 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날마다 우리 삶 속에 부어지는 이 다함 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인해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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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명사 욕구, 바람, 열정, 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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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사 열의, 열심, 열정, 사랑,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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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명사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 창21:23, 24:49, 39:21,47:29, 수2:14, 삼상10:8, 삼하3:8,9:1,7, 10:2, 스7:28, 욥6:14, 슥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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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명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 사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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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명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창24:12, 출20:6, 신5:10, 삼하2:6, 15:20, 시5:8(7),36:6(5), 4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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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명사 [주]복수 חֲסָדִים: [하나님의] 자비, 은총, 시89:2(1),50(49), 107:43, 사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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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사 질투, 시기, 시샘, 비난, 질책, 잠14:34, 레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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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 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1. 자궁. 2. 처녀
발음 [ racham ]
- 어원 / 7355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6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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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자궁, 창49:25, 사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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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처녀, 여자, 삿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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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은혜(창 43:14), 사랑하는 마음(창 43:30),위하는 마음(왕상3:26), 긍휼(신13:17, 느9:27,28, 시51:1), 불쌍히 여김(왕상8:50, 슥1:16), 자비(대하30:9), 긍휼하심(시25:6), 은혜(느1:11), 태(창49:25, 잠30:16, 사46:3), 처녀(삿5:30).
창시(投喜)
'창시'란 결혼식은 복이 가득한 곳으로 신부가 입장하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입장(지나가므로)하여 복을 가로채는 행위라고 합니다.
아침마다
1. [출애굽기 16:21]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 [출애굽기 30: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찌며
3. [출애굽기 36: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 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 오는 고로
4. [레위기 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찌며
5. [역대상 9:27]
저희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전 사면에 유하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있었더라
6. [욥기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7. [시편 73: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8. [시편 101:8]
아침마다 내가 이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9. [이사야 28:19]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10. [이사야 33: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11. [이사야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12. [예레미야 2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13. [예레미야애가 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14. [에스겔 46:13]
아침마다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15. [에스겔 46:14]
또 아침마다 그것과 함께 드릴 소제를 갖추되 곧 밀가루 에바 육분지 일과 기름 힌 삼분지 일을 섞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규례를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릴 소제
16. [에스겔 46:15]
이와 같이 아침마다 그 어린 양과 밀가루와 기름을 갖추어 항상 드리는 번제를 삼을찌니라
17. [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18. [스바냐 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주의 성실
1. [시편 36: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2. [시편 40:10]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3. [시편 54:5]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4. [시편 71: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시편 88: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6. [시편 89: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7. [시편 89: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8. [시편 89: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9. [시편 89: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10. [시편 89: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11. [시편 92:1-3]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12. [시편 119: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13. [예레미야애가 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발음 [ ’ĕmûwnâh ]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1. 아침. 2. בַּבִּקֶר בַּבֹּקֶר
어원 / 12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4회 사용
어원 / 여성형 יַבָּה, 복수 רַבִּים, 7231에서 유래한 압축형
구약 성경 / 413회 사용
예레미야애가 3:22-23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신실함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부터 23절을 읽을 때마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선포되는 특별한 희망의 메시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책은 예레미야가
경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에 따른 극심한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 그대로 ‘애가(哀歌)’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애가의 중심에는 단지 슬픔만 자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그리고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존재합니다. 다음은 개역개정판 성경의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부터 23절 본문입니다.“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 말씀을 천천히 살펴보면, 예레미야가 어떤 배경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흩어지며, 눈앞에는 참담함이 가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그 모든 처절한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있었기에, 마음 깊은 곳까지 큰 상실과 슬픔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기록한 예레미야애가 3장에는 특별한 대조가 드러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한없이 무너지고 부서진 현실이 펼쳐져 있지만, 예레미야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자와 긍휼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핵심 중 하나가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라는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덕분에 아직 ‘끝’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인자”는 때로는 ‘변치 않는 사랑’ 또는 ‘헤세드(חֶסֶד)’라는 히브리어로 표현되곤 합니다. 이는 조건 없는 사랑이자 한결같은 은혜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인자가 언제까지나 무궁하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긍휼”이라는 말은 극진한 자비와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받는 고통과 비참함을 보시고도 외면하지 않으시며, 여전히 붙드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습니다.
바로 이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기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멸된 가운데서도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미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극심한 파멸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예레미야의 영적 시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여전히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붙들고 있었고, 그것을 애곡의 중심에서 노래하듯 풀어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는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절망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새롭고 풍성한 자비가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처한 고난이 제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는 그 고난의 크기를 초월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만 머물러 있는 은혜가 아니라, 새로운 날이 밝을 때마다 다시금 체험할 수 있는 은혜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백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에는,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는 선언이 놓여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현실은 바뀔 기미가 전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예레미야가 붙든 한 가지 사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예레미야와 그 백성들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한결같은 분이시다’는 진리로 귀결됩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무너진 도성, 그 가운데서 울부짖는 백성들의 모습은 진정 참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참혹함 한가운데에서 예레미야는 부서질 듯한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감히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없었다면, 그가 보는 세상은 이미 의미도 희망도 모두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 희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선언합니다.
돌이켜 보면, 예레미야애가의 배경 자체가 어두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지만, 이 두 구절은 밝은 빛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빛은 예레미야가 상황을 “좋게 해석”하거나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언약과 사랑을 통해 약속하신 바를 다시금 되새기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결코 단순한 감상이나 바람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은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붙잡을 수 있었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이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베푸시는 무궁한 인자와 긍휼의 존재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부터 23절은 애통과 황폐의 상황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만듭니다. 또한, 그 사랑이 매일 아침 새로워진다는 표현은 고통이 반복되는 환경조차도 넘어서게 하는 특별한 힘을 전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접할 때, 예레미야애가 특유의 슬픔과 탄식을 넘어, 고난 중에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하는 고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예레미야가 슬픔의 무게를 끌어안은 채로 이 고백을 기록했다는 점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멸망의 시기에 쓰인 애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노래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구절의 감동과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든, 예레미야가 고백했던 구절에서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끝없이 이어지며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절망의 언어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하나님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결코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로서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다가오는 인자와 긍휼
아직 어둠에 잠긴 마음을 열면
밤새 흐른 눈물 자국 위로
부드러운 빛이 찾아옵니다
한결같은 인자와 긍휼이
고요히 깨어나는 새벽 공기를 타고
내 안에 스며듭니다
찬란한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그 신실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끝나지 않는 은혜를 헤아리며
오늘도 잠시 머물러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 : 자비와 긍휼과 인자
성경에 ‘자비’와 ‘인자’와 ‘긍휼’과 ‘은혜’와 같은 단어들이 자주 나온다.
이러한 단어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성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묘사하는 용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이
중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헤세드>와 <렉헴>과 <한눈>이다.
출애굽기
34장 6절은 야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서술한다.
출애굽기 34장의 문맥을 살펴보자.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을 때 불과 한 달여 전에 이스라엘은 십계명과 계약법(출20:1~23:33)을 준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굳게 서약하였다(출24:1~11).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약을 맺은 지 4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우상을 섬기고
말았다(출32:1~6). 그 때 야훼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진멸하려고 하셨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간절히 중재하자 이윽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여 주신다(출33:12~14). 야훼 하나님께서는 다시 계약을 체결하시려고 모세더러 돌판
둘을 다시 만들어 산 위로 올라오라고 명하셨다(출 34:1~4). 모세가 산정에 섰을 때 야훼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면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반포하셨다. 새 언약을 맺으시는 용서의 하나님을 출34:6은 선포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 34:6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락훔> 은혜롭고<한눈>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의 사랑 - 은혜(2587. 하눈), 자비(7349. 라훔), 인자(2617. 헤세드), 진실(571. 에메트)
은혜(하눈. channûwn) חַנּוּן
스트롱번호 2587
발음 [ chan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
1. 형용사, 남성 은혜로운, 자비로운, 온화한, 친절한, 시111:4, 112:4.
-
관련 성경☞자비한(출22:27), 은혜로운(출34:6, 대하30:9, 시103:8).
긍휼(라훔. rachûwm) רַחוּם 스트롱번호 7349
발음 [ rachûwm ]
어원 / 7355에서 유래
- 1. 형용사, 남성 인정 많은, 동정심이 많은[하나님께만 사용됨], 신4:31, 시86:15.
-
관련 성경☞ 자비로운(출 34:6, 시 103:8, 욘 4:2), 자비한(신 4:31, 시 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 9:17).
[부] 긍휼히(느 9:31).
[명] 자비(대하 30:9), 진실(시 86:15).
자비(헤세드. chêçêd) חֵסֵד 스트롱번호 2617
발음 [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
I. 명사 욕구, 바람, 열정, 열의
-
1. 명사 열의, 열심, 열정, 사랑, 친절.
-
a. 명사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 창21:23, 24:49, 39:21,47:29, 수2:14, 삼상10:8, 삼하3:8,9:1,7, 10:2, 스7:28, 욥6:14, 슥7:9.
-
b. 명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 사57:1.
-
c. 명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창24:12, 출20:6, 신5:10, 삼하2:6, 15:20, 시5:8(7),36:6(5), 4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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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명사 [주]복수 חֲסָדִים: [하나님의] 자비, 은총, 시89:2(1),50(49), 107:43, 사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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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질투, 시기, 시샘, 비난, 질책, 잠14:34, 레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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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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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진실(에메트. ’emeth) אֶמֶת 스트롱번호 571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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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사 확고함, 안전성, 영원성, 사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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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사 안전성, 수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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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사 성실성, 충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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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명사 [백성에 대해 쓰임], 사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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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명사 [왕에 대해 쓰임], 시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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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명사 [하나님에 대해 쓰임], 사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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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사 정직성[양심에 대해 쓰임], 출18:21, 느7:2, 삿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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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사 진리[거짓에 반되는 말], 창42:16, 신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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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אֲמֵנֶת의 압축형, 어미활용 אֲמִתּוֹ,אֲמִיֹ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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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바름(창24:48), 진실함(출18:21, 렘42:5), 확실함(신17:4, 잠11:18), 참됨(신22:20, 단 10:1), 충성됨(대하32:1), 진정함(느9: 13), 성실함(시54:5), 충실함(사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43:9). [부] 분명히(렘32:41), 참으로(삿9:15), 진실히(삼상12:24, 왕상2:4, 겔18:8), 성실히(시132:11, 잠29:14). [명] 성실(창24:27, 왕상3:6, 시71:22), 진실(왕하20: 3, 시111:7), 진리(창32:10), 시57:3, 단10: 21), 성실함(창47:29), 참(신13:14, 대하15:3, 렘 10:10), 진실함(수24:14).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에 대한 성경적 해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긍휼’과 ‘자비’와 ‘은혜’는 비슷한 의미의 말같이 보인다.
그러나 ‘긍휼’에 대한 진리의 도리가 있고, ‘자비’에 대한 진리의 도리가 있고, ‘은혜’에 대한 진리의 도리가 각각 있다.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 은혜’에 대한 해설을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다.
구원은 독생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 독생자를 보내심이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심이다.
죄인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 사람을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께서 죄악을 사하심이다.
죄악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죄악 행위를 사하심이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심이다.
값없이는 성령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성령을 주심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 사람을 부르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는 죄악 행위를 사하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성령을 주심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사람에 대한 것이며, ‘자비’는 행위에 대한 것이며, ‘은혜’는 성령에 대한 것이다.
자비를 가지다
막5:19
자비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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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 ĕlĕĕō ]
- 어원
- 미래 ἐλεήσω, 제1부정과거 ἠλ έη- σα, 미완료 ἐλέησον,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εήθην, 미래수동태 ἐλεηθή- σομαι, 완료수동태분사 ἠλεημ ένος, 1656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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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누구에 대하여] 자비를 가지다, 연민을 가지다, 불쌍히 여기다, 마18:33, 동정심을 느끼다, 자비롭게 되다, 자비를 보이다, 도움을 주다, 마9:27, 15:22, 17:15, 20:30,31, 막10:47,48, 눅16:24, 17:13, 18:38,39, 자비의 행위를 하다, 롬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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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막5:19, 롬9:15, 16,18, 11:32, 빌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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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수동] 자비를 발견하다, 자비를 보다, 마5:7, 롬11:30,31, 딤전1:13,16, 벧전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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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교회에 대하여] 고전7:25, [참조] 고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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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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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긍휼히 여기다(마5:7, 눅16:24, 롬9:15), 불쌍히 여기다(마9:27, 막5:19, 눅18:39), 자비 하심을 받다(고전7:25), 긍휼을 입다(롬11:30, 벧전2:10).
누가복음 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He called out, "Jesus,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
다윗의 자손 예수
- 마태는 이 칭호를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마 9:27; 12:23; 15:22; 21:9).
이 칭호는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데 기독교 이전의 문헌 가운데서는 솔로몬의 시편 17:21(위경)에서만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사 11:1).
그런데 예수께서 이 칭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이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군중들에게 드러내며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시 4:1; 6:2; 25:16; 31:9; 51:1; 86:16등에서 멸시와 고통을 당한자,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고하는 외침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는 13절에서의 세리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주님의 인자하심
성경: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품이 될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오늘도 인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긍휼히 여기는 자
성경 :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만족감은
받는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데서 옵니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근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습니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행복하게 합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 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기도 : 자비로운신 하나님! 오늘도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긍휼히 여기라
성경: 시편 102 장 13 절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102:13)
사일러스라는
어린 소년이 어머니에게 7센트의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일러스, 그 중에서 1센트나 2센트는 아주머니 댁에 있는
선교헌금함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일러스는 아주머니 댁으로 가면서 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넣을지 고민했습니다.
한참 만에 사일러스는 2센트를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양심의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배를
채우는 데는 5센트를 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겨우 2센트를 내겠다고?’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군것질에 4센트, 헌금에 3센트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헌금함에 다다른 사일러스는 눈을 딱 감고 용돈으로 받은
7센트 전부를 털어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일러스는 허기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경위를 듣고 난 후 접시에 빵과
우유를 가득 담아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5:7).
하나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힘은 긍휼을 베푸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힘 닿는 대로 도와 줌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하루를 살아갑시다.
* 기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 자비로운 모습
영국 브라이튼 프레드릭 로버트슨이라는 전설적인 선교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상점에 가서 로버트슨의 이야기를 꺼내자 상점 주인이 방에 데리고 가서 로버트슨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부정한 행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도저히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녀는 로버트슨의 초상화에서 그의 자비스러운 눈과 잠깐 부딪친 후 눈물을 흘리며 더욱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자비롭게 부르신다.
▣ 참지혜
옛날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있었다.
하루는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정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오냐, 그러나 조건이
있다. 돌아올 때 큰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오고, 작은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너라. 알겠느냐?” 두 며느리는 그저
허락이 내린 것만 기뻐하며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며칠 후 돌아갈 날짜가 되었다. 두
며느리는 보따리를 한 아름씩 이고 각각 친정을 나섰다. 시집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났다. 두 며느리는 마을 어귀에서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내린 명령이 두 사람의 가슴을 눌렀기 때문이다. 불과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두 사람 모두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며느리는 너무 속이 타서 한탄을 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며느리들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르쳐주었다. “바람을 종이에 싸는 건
종이로 만든 부채를 이르는 것이요, 불을 종이에 싸라는 건 종이로 만든 초롱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 ‘종이 부채’와 ‘종이
초롱’을 구해 가지고 들어가시오.”이것이 지혜이다. 세상의 지혜도 귀하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낡아질 수도 있고,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참된 지혜, 최고의 지혜, 영원한 지혜는 무엇인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최고의 지혜,
참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 가시나무에게도 자비를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 치유의 원천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박사를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다. 신발을 훔쳐 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선생님은 신발을 훔친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을 훔친 것은 나쁜 일이다. 돌려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세상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자비를 베풀고 품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덮고, 품어 주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붙들어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 방종에 빠져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삼하22: 26)
▣ 징계 속에 감춰진 사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보면 도로시, 겁 많은 사자, 허수아비, 양철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마법사가 있는 곳에 다가가자 ‘펑’ 하고 불꽃이 튀면서 거대한 녹색 연기가 치솟는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자 위협적인 모습의 머리가 나타나 각자의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전지한 마법사는 사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두뇌를 갖고 싶다는 허수아비에게 “소의 여물이나 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놈이 두뇌를 요구하다니 뻔뻔스럽구나”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분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나 자비가 전혀 없는, 불꽃과 연기에 둘러싸인 두려운 존재라고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다.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자녀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징계를 가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징계해야 할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자녀를
징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상의 부모들과는 달리 징계의
목적과 범위는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징계는 완전하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23)
▣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인자와
긍휼로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원하여 쉬지 않고 중보하는 지체들 위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시며 주께 돌아오는 자들이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형제를 사람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 용서를 받을 줄 아는 인간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용서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소녀의 호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길을 지나갈 때 한 소녀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소서"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나폴레옹이 묻자 소녀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 했다.
"법을 어겼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소녀가 흐느끼며 호소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이 말했다.
"네 말에 아버지를 용서하니 돌아가라"
▣ 사토라레
'사토라레’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사토라레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비행기 잔해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사토라레는 단지
마음속으로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구조대원들의 귀에 그 외침이 들립니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귀에 음성으로 들리게 돼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후 의사가 된 사토라레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특히 환자들을 향한 긍휼과 애정이 낱낱이 드러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생각을 숨길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사토라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드러나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나 우리는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 음란과 탐욕, 천박한 생각들이 들통나는 슬픈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덮어주시는 용서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자비
자비는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신 자비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은 관용과 친절이 내포된 마음입니다. 인간의
자비하는 마음은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할 때 그 자비는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매우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신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입니다.
셋째,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입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가 될 때 세상은 밝아지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인 자비가 없는 세상은
인류의 큰 고통입니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실수하기도 하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올바로 깨끗하게 살려고 힘써도 부지중에 잘못하고 주님의 뜻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돌보아 주십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회개할 때 즉시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에 파우스트가 자살하려다가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젊을
때는 충실히 신앙 생활했던 파우스트가 그의 학문이 진보하자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사회에서는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칠 때 낙심하고 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독배를 들고 그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찰나, 먼 곳에서 부활절의 교회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교회다닐 때의 일과 교회를 떠난 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됩니다. 결국 그는 독배를 내던지고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고 회개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아무리 타락한 사람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온갖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져진 믿음으로 삶을 살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시며 주님 주신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자비(긍휼)에 관한 성경말씀
0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25:6)
0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25: 16)
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 10)
0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 13)
0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103: 17)
0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145:8)
0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0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0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 18)
0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0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애3:22,23)
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0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0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0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13)
이 문장에 번역된 ‘자비롭고’의 원어는 <락훔>, ‘은혜롭고’의 원어는 <한눈>, ‘인자’의 원어는 <헤세드>이다. 이 세 가지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자.
<락훔 רַחוּם>은 형용사이며 명사는 <렉헴 רֱחֶם>이다. <렉헴>에서 파생한 동사 <락함 רַחַם>은 ‘깊이 사랑하다/ 불쌍히 여기다’란 뜻이다. 명사 <렉헴>은 ‘어머니의 자궁/모태/womb’을 가리킨다. 사49:15에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란 말씀이 나오는데 동사 <락함 רַחַם>을 ‘긍휼히 여기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태/자궁’을 가리키는 다른 명사 <베텐>이 나란히 병기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는 어머니의 자궁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품는 마음은 어머니가 배 속의 아기에 대하여 품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본들은 <락훔>을 compassionate, pitiful, merciful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신다(시103:13). 어머니가 자식을 대할 때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푸신다(출33:19).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애타게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락훔>으로 표현된다(신13:17). 그래서인지 형용사 <락훔>은 오로지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만 사용하는 전용 단어가 되었다. 이것을 개역 출34:6에서는 ‘자비롭고’라고 옮긴 것이다.
<한눈 חַנּוּן>도 형용사이며 동사는 <하난 חָנָן>이고 명사는 <헨 חֵן>이다. <헨>은 영어로 yes에 해당한다. '어여삐 보아주신다면’이라고 청원할 때 이 명사를 사용하여 <마차티 헨 버에니네이 ~>란 상투어를 사용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의 눈에 <헨>을 발견하다’가 된다. 영어로 favor라고 옮긴다. 형용사 <하난>이 성경에 가장 먼저 나오는 구절은 출22:27인데 다음과 같다.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כִּי־חַנּוּן אָנִי >.
위의 밑줄 친 구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라는 아시리아의 왕 에살핫돈 비문에도 나온다. 본디 종주국의 왕과 봉신들 사이에 맺은 충성맹세 계약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봉신이 충성을 보여주면, 종주국의 왕은 그 봉신을 보호하고 많은 선물을 베푼다. 종주국의 왕이 봉신들에게 베푸는 혜택을 가리켜서 <한눈>이라고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천하 만국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 이 용어로써 표현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충성을 다하는 백성에게 야훼께서는 <한눈>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것을 개역 출34:5에서는 ‘은혜롭고’라고 옮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세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명사 <헤세드 חֶסֶד>는 종래의 영역본들에서는 mercy, kindness, love 따위로 번역되었다. 헬라어역은 <엘레오스 ἔλεος>라고 옮겼고 라틴어역은 misericordia라고 옮겼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찬트의 가사에 등장하는 단어가 ‘퀴리에 엘레에손 메’이다. 20세기 초엽에 학자들은 <헤세드>가 종주권 조약에 사용된 용례를 들어서 계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근년에는 <헤세드>의 개념을 굳이 계약사상에만 한정하지 않고 본디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품고 지내는 마음결로 간주한다. 어떤 사람이 약자를 도우려고 작정할 때 그 약한 상대에 대하여 품는 마음결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보자. 라반이 이삭과 어떠한 계약도 맺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여동생 리브가를 기꺼이 보내준다. 이때 <헤세드>란 용어를 사용했다(창24:49). 라반이 보여준 <헤세드>는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늘 보여주시는 <헤세드>였다(창24:14,27). 야곱이 하나님의 계약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많은 가축 떼를 이루게 하셨다(창32:11).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애곡하면서 보여준 <헤세드>도 어떠한 계약의 의무가 아니라 요나단을 무작정 사랑했던 우정이었다(삼하1:26).
하나님의 <헤세드>는 자기와 계약을 맺은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의무가 아니다. 하나님은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4:8, 16), 그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의인이나 악인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마5:45).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도 <헤세드>는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본성을 묘사한다. 파생어로서 <하시드 חָסִיד>가 있는데 영어로는 holy one, godly, saint 이라고 옮긴다. 신33:8에 이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는데 개역은 ‘경건한 자’라고 옮겼다. 이 명사가 히필 모양을 띠고 있기에 사역의 뜻으로 보아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은 자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글역본들은 <락훔>과 <한눈>과 <헤세드>를 옮길 때 번역어의 통일성을 기해주지 못하고 있다. ‘자비’, ‘은혜’, ‘사랑’, ‘긍휼’, ‘인자’, 따위로 세 가지 원어들을 경우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역본을 보아서는 그 용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이 세 가지 용어들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락훔>은 자궁에 아기를 밴 어머니의 모성애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며, <한눈>은 봉신이 종주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때 받는 혜택에 견주어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한 자기 백성에게 베푸는 은사를 가리키고,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에게 베푸는 사랑으로서 본성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나타낸다. 이 세 가지 품성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예레미야애가 1장
구조와 흐름
1-11절 : 예루살렘의 황폐함과 그로 인한 외로움, 또 주변 민족들에게 버림받은 슬픈 상태를 묘사합니다.
친구와 동맹국들이 떠나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결과임을 인정합니다.
12-22절 : 고난을 직접적으로 탄식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더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의 고통을 보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호소하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탄원합니다.
중심 메시지
예레미야애가 1장은
고난과 심판이 우연이 아님을, 인간의 잘못과 죄로부터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의 단초 역시 담고 있습니다.
이 장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회복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신앙을 보여줍니다.
묵상포인트
내 삶의 어려움이나 슬픔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까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복을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봅시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실패나 슬픔의 순간에 내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가 필요함을 배웁니다.
상실과 고통의 경험도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다시 소망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깊은 슬픔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애통을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그리고 그 안에 살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예언자의 시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현실을 자세히 그려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의 회개 필요성도 함께 서술하고 있습니다.
구조 와 흐름
1-10절 :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실상(성전과 성벽 파괴, 백성의 고통 등)이 묘사됩니다.
11-19절 : 예언자의 개인적 슬픔과 예루살렘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눈물과 애통이 이어집니다.
어린이들과 백성의 고통, 도움을 구할 데가 없음이 강조됩니다.
20-22절 : 하나님께 직접 탄원하며 고통의 이유와 처참함, 절박한 상황을 호소합니다.
전체적인 의미
이
장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로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 그로 인한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고통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은 절망 속
소망의 실마리를 남깁니다.
묵상포인트
우리 삶의 고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청종하는 자세를 성찰해봅니다.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정직하게 감정을 토로하고 도움을 구하는 용기를 배워봅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적용질문 | |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노력이 있습니까? |
실천방법 | |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내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뢰어봅니다. | |
성경 말씀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며, 회개와 순종의 자세를 갖추려 노력합니다. |
주요 내용과 흐름
고난의 고백(1-18절) : 화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며 평안과 기쁨을 상실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토로합니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과 그 여파로 인한 민중의 절망을 상징합니다.
소망의 회복(19-39절) : 고통의 기억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회상하며,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다"(22절)는 말씀처럼 다시 희망을 되새깁니다. 이 구간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및 간구(40-66절) : 백성에게 자기 성찰과 회개를 촉구하고, 억울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회복을 간구합니다.
이 부분은 심판의 이유를 되새기면서도, 회복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은 깊은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잊지 않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위기는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소망을 붙드는 일의 중요성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2-23절의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는 말씀은 역경 중에도
소망을 선택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적용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단지 현실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움,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는가를 점검합니다.
고난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성찰하고 회개하여, 신앙의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자기 성찰과 기도를 이어가봅니다.
인생의 무거운 순간마다, 아침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집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예레미야애가 4장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의 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을 깊이 있게 묘사하는 장입니다. 시인은 아름답고 존귀했던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이
처참한 고통과 수치를 겪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나타냅니다. 전체적으로는 시적인 연가(애가)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슬픔과 절망,
그리고 반성의 정서가 가득 차 있습니다.
핵심 흐름과 주요 내용
1~10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이전 영광과 현재의 황폐함을 비교합니다. 백성들의 존귀함이 먼지에 떨어지고,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생생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11~16절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강조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반복되는 불의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7~20절에서는 도움을 구하던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 피난처를 찾지 못하는 절망감, 그리고 지도자(왕)의 안타까운 상황을 언급합니다.
마지막 21~22절에서는 에돔을 비롯한 주변 민족에 대한 경고와,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문학적 표현과 상징성
- 은과 금, 보석에 빗대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함과, 지금의 천대당함이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 어머니가 아이를 먹일 수 없는 극심한 기근, 한때 존귀했던 지도자들이 굶주림에 쓰러지는 모습 등 극단적인 표현들이 예루살렘의 고통을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 가장 귀한 것들이 하찮아지고, 사람들이 돌처럼 무정해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려집니다.
신학적·역사적 의미
예레미야애가 4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실재, 그리고 그 심판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회복의 소망을 함께 보여줍니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무너진 공동체가 결국 스스로의 죄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음을 시인은 반복해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에 대한 여지를 남김으로써, 인간의 절망 속에도 희망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묵상포인트
- 우리는 번영과 영광의 시기를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 고통의 원인에 대해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절망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신뢰할지 묵상해 보세요.
나에게 적용해보기
- 내 삶과 공동체에서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태도를 회복해봅니다.
- 현재의 어려움이 나의 선택과 생활, 공동체의 모습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가능성을 붙잡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예레미야애가 5장
예레미야애가 5장은 유다 백성의 깊은 고통과 슬픔을 담아내는 마지막 장입니다. 본장은 공동체의 탄식과 하나님께 드리는 절실한 탄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앞선 장들과 달리 비교적 짧고, 외형적으로는 비슷한 길이의 시구들이 반복적으로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 장은 예루살렘 멸망이 가져온 구체적인 아픔과 상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자비와 회복을 간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구조와 흐름
- 1~18절: 유다 백성의 다양한 고통―재산, 가정, 사회적 지위, 그리고 신앙적 정체성까지 모두 잃은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과부와 고아, 젊은이와 노인, 지도자와 평민 모두가 슬픔과 수치, 억눌림을 경험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 19~22절: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간구―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심과 그분께로 돌아감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끝부분에서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라는 절절한 기도가 반복되며, 현실의 고난을 넘어서 회복과 소망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전체적인 의미
예레미야애가 5장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더불어, 그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시사합니다. 시인은 백성의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회복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모든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묵상포인트
- 절망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정직함
- 고난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신앙의 태도
- 공동체 전체의 아픔을 함께 품고 드리는 중보의 기도
나에게 적용해보기
- 내 삶의 어려움이나 상처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을 용기가 있는지 돌아보기
- 나와 가족,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소망을 붙잡는 마음 키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