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욤 아도나이. yôwm Yehôvâh) יֹום יְהוָה
욤(3117)
낮
יוֹם: 낮에
날마다
-
발음 [ yôwm ]
- 어원
-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2291회 사용
아도나이(3068)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발음 [ Yehôvâh ]
- 어원
- 1961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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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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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한글개역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란 용어가 13구절 소개됩니다.
대한성서공회 검색 사이트 사용 결과(사 13:6, 13;9, 겔 13:5, 30:3, 욜 1;15, 2:1, 11, 3:14, 암 5:18, 20, 습 1:7, 14, 슥 14:1)
1.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2.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3.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4.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5. [요엘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6.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7.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8.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9.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0.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11.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12.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3.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여호와의 날”은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 여호와의 날(사2:12,13:6, 9, 겔13:5, 30:3, 욜1:15, 2:1,11, 3:14, 슥14:1, 암5:18, 20, 습1:7,14).
여호와의 날을 스바냐는“분노의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고 말했다(습1:15).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말4:5, 욜2:31).
* 여호와의 보복의 날, 시온의 송사를 신원하시는 날(사34:8)
* 여호와께서 징벌하시는 날(사10:3)
* 괴로움과 슬픔이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이 되는 날(사13:8),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행2:20).
* 큰 날, 심판의 날(유6, 계6:17, 16:14).
* 주의 날(살전5:2, 살후2:2, 벧후3:10).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진노하게 하였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보복의 날이지만 여호와를 믿고 신뢰함으로 박해받고 그동안 고통받았던 자들에게는 주의 크고 영화운 날이며, 그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는 날이 될 것이다(암5:18).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면 하늘의 군대가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고 도와주며 옹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대언자들은 도리어 이 날을 참혹한 심판의 날로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스바냐 1:14–2:3)
본문읽기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2 장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1:14–2:3 묵상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1. 서론 –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소망
스바냐는 예언자 중에서도 유난히 “여호와의 날”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라는 경고는 단순히 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임박한 현실적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이 날은 분노와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 여호와의 날의 무서운 심판 (1:14–18)
- 심판 앞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권면 (2:1–3)
2. 본문 주해와 묵상
2.1. 여호와의 큰 날의 임박성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기서 ‘가깝다’(קָרוֹב, qarov)는 단순한 시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스바냐는 반복적으로 ‘가깝다’고 강조하며, 심판의 날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그 날은 “용사도 심히 슬피 우는 날”입니다. 즉, 가장 강한 자들도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 오늘의 적용: 우리는 종종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날을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늘 긴장된 준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2. 여호와의 날의 성격 (1:15–16)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여섯 개의 병렬된 표현(환난, 고통, 황폐, 패망, 캄캄함, 어두움)은 이 날의 파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16절)이라는 표현은 군사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었던 성읍과 망대조차 무너지며,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안전장치가 무력화됩니다.
→ 오늘의 적용: 우리 시대의 ‘견고한 성읍’은 무엇입니까?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 앞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은 무너집니다.
2.3. 범죄의 결과와 인간의 무력함 (1:17)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날의 이유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고, 그 결과 “맹인 같이 행”하게 됩니다. 영적 시력을 잃은 채, 길을 몰라 헤매는 모습입니다.
또한 “피는 티끌 같고, 살은 분토 같다”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무가치함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흙에 불과합니다.
→ 오늘의 적용: 죄는 인간을 맹인처럼 만듭니다. 방향 감각을 잃고, 결국 파멸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2.4. 은과 금의 무능력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부와 재물은 고대에도, 오늘날에도 인간이 붙드는 최후의 안전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돈이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질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빼앗는 모든 우상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 오늘의 적용: 돈과 성공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2.5. 심판 앞에서의 권면 (2:1–2)
스바냐는 놀랍게도 심판을 선포한 직후, 회개와 모임을 촉구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서 ‘모이다’(קָשַׁשׁ, qāšash)는 ‘모아 쌓다’라는 뜻으로,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라는 초청입니다.
또한 긴급성을 강조합니다.
-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 오늘의 적용: 회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기회는 짧고, 하나님의 날은 갑자기 임합니다.
2.6.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는 단순히 “심판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 겸손(עֲנָוָה, anawah):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
- 공의(מִשְׁפָּט, mishpat): 하나님의 정의로운 질서를 따라 사는 삶.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기서 ‘숨김’(סָתַר, sātar)은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즉,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가 있다는 약속입니다.
→ 오늘의 적용: 신자는 심판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과 공의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입니다.
3. 복음적 연결 – 심판에서 구원으로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무섭게 선포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 둡니다.
- 여호와의 큰 날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연결됩니다.
- 은과 금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 겸손과 공의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분노에서 우리를 숨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4. 오늘 교회를 위한 교훈
- 심판의 날은 가깝다 – 영적 긴장감을 잃지 말라.
- 하나님을 범죄한 죄를 직면하라 –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라.
- 돈과 권력은 구원하지 못한다 – 우리의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 회개는 지금이다 – 지체하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 겸손과 공의의 삶을 추구하라 – 이것이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길이다.
5. 결론 – 숨김을 얻는 길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 심판의 무서운 날: 인간의 모든 안전과 자랑이 무너지는 날.
- 그러나 동시에 숨김의 길: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보호하심을 얻는 길.
여호와의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합니다.
6.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경고 앞에서 저희의 무관심과 교만을 회개합니다. 은과 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피난처로 삼게 하옵소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숨김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선지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호라 그 날이여'(1:15) 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 또는 "구원의 날"이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사야 13:9, 요엘 2:1-2)
둘째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요엘 2:32, 스바냐 3:17)
셋째는 재림의 날(베드로후서 3:10, 데살로니가전서 5:2)
선지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오호라 그 날이여'(1:15),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이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사밧의 골짜기' 또는 '판결골짜기'에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개혁자 칼빈은 이 골짜기를 "타작 마당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 '추수의 날'이라는 것에서 유추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골짜기에는 "여호사밧 골짜기"(욜 3:2), "하은곡 골짜기"(겔 39:11), '아마겟돈 골짜기"(계 16:16)와 비교하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
구약시대 많은 예언자들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Day of Yahweh)의 도래를 경고했다.예언자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스바냐 1:14)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로다.” (스바냐 1:15)
그날은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는 날이다.
왜 하나님은 분노하시는가?
“이는 그들이(=유다 백성)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스바냐 1:17)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들을 징벌하기 위해 급히
오시는 것이다.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스바냐 1:18)
여호와의 날은 진노하신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징벌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벌하셔서 울음소리가 예루살렘을 채우고, 모든 것이 황무하게 되는 날이다.
그러면, 다가오는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 앞에서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이 스바냐서의 핵심이 된다. 유다 백성들에게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 (스바냐 2:2)
시간이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빨리 다가오지만, 아직 시간이 있고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공의를 찾으라! 겸손을 찾으라!” (스바냐 2:3)
스바냐는 ‘찾으라’는 동사를 세 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를 떠나, 찾지도 않고, 공의도 없고, 자만하고
자고(自高)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무섭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했다.
스바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멸절시키신다고 했다. (1:6) 유다 백성들이 살길은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둘째는 불의와 부정을 버리고 공의를 찾고,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고
했다. 인간의 오만과 자만(hubris)으로부터 돌이켜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이다. (잠언 15:33; 22:4)
이들
세 가지를 ‘찾는 것’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길이라고 스바냐는 선언한다.
그날, 여호와의 날(요엘 1:15-20)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마지막 심판은 불로 심판된다 했습니다.
불로 심판된다는 말은 인간은 이미 불로써 포위되었다 이 말이죠.
우리 곁에 불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불 가운데서, 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맹렬한 심판의 불, 우리를 태우고 우리의 모든 의지하는 것들을 다 태워버리는 불속에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알게 돼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안에 담긴 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됩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운반하게 되면 우리는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 우리가 하나의 탑승이 되어서 가게 되면 그 약속이라는 그 거울 앞에 나오는 앞 거울 앞에 비취는 모든 것은 불에 태워지는 광경들이 다 드러날 거예요.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저것도 불에 태워질 것이고, 아르헨티나의 그 넓은 팜파에서 나오는 그 목축도 나중에 불로 태워질 것이고, 호주라는 뉴질랜드에 있는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도 하나님께서 불로 다 태워질 것이고, 뉴욕에 있는 듀바이에 있는 상하이에 있는 그 높은 빌딩들도 불에 다 태워질 것이고, 그것이 약속 안에서, 예수 안에서 창을 통해서 바깥을 볼 때에 본래 이 세상은 불로 싸지름을 당하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운반체. 그 약속이라는 비행물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냥 구경만 하고 관람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비행물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위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이 불로 없어지는 세계, 그 세계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 놓여있는 우리는 비 진리가 되죠. 진리 안에 있는 비 진리를 그 진리에 합당하도록 결합시키는 작업이 비행접시 안에서 따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쉽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을 통해서 야곱과 에서를 쌍둥이로 낳았는데 같은 쌍둥이예요. 쌍둥이인데 야곱을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고 에서를 다루는 운명이 따로 있습니다. 에서는 운명이라는 게 없어요. 지가 지 인생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게 없는데 야곱은 운명을 느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시도하는 대로 거부를 당하고 자꾸 커트를 당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다루는 인생이 아니고 다른 쪽에서 나를 그쪽에 맞도록 다루어지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야곱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약속 안에서 언약 안에서 언약이란 비행물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야곱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와 뭣과 관련을 짓느냐 하면 그 차창 밖, 앞 유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로써 태워져야 될 그러한 아직도 다 태워지지 않고 남아있으면서 불 태워질 것을 알지 못하는 바깥 풍경과 연관 지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바깥쪽에 있는 그 멸망, 최후의 날, 심판의 날과 안쪽에 있는 자기 자신의 운명과 연결을 시키면서 언약이라는 그 비행물체를 타고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안쪽에 구원받은 사람의 운명은 바깥쪽과 어떻게 연관 되는가, 바깥쪽에서는 심판과 멸망인데 그럼 이 안쪽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그걸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게 되면 여기에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돼 있어요. 이걸 중간 것을 다 생략하면 “아담은 죽었더라“ 아담은 결국 죽게 되더라. 아무리 자식을 낳고 요란한 업적과 성과를 이뤄도 결국은 죽더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죽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텐데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은 소위 그 사람이 죽은 날, 기일을 맞이해서 죽게 하신 주님은 찬양하지 않고 그 사람이 사적으로 벌였던 일에 대해서는 극구 그렇게 찬양을 해요. 안중근 의사 기념인, 심지어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 이런 사람들의 기일이 되면 아직도 팬들이 살아있어서 난리도 아닙니다. 그날이 되면, 김 현식 기념일, 내 사랑 내 곁에 다시 한 번 듣고 그리고 유명한 가수들 죽고 나면 또 하고, 어제 육상 경기 기념식 하는데 죽은 손기정 선수 기념상 앞에 방석하나 해놓고 꽃 하나 바치는 그런 의식을 행한다 이 말이죠.
주께서 다 죽인 건데 ‘아유, 아깝다’는 거예요. 뭐가 아까운데. 아까우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전부 다 엉터리네. 그러면,ㅎ ‘차라리 죽이려면 주께서 잘 죽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진작 죽을 사람을 진짜 죽였나?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깝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비행물체 바깥을 볼 수 있는 불로 심판한다는 이것은 집단적으로 다 죽는 날을 생각 안 하고 그걸 염두에 안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휴, 잘만 하면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이래 생각하거든요.
인간이란 존재는 언약과 결부 시켜서 자기 존재를 봐야 되는데 언약도 몰라 계시도 몰라 성령도 몰라 아무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니까 자기 죽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남 죽는 걸 되게 아까워하는 거예요. ‘그 다음 니 차례야. 니. 니 언제 죽을지 몰라.’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어머니는 오시다가 장소를 못 찾아서 집에 도로 가셨어요.ㅎ 사람이 연세 많고 하면 교회 나오는 것도 자기 집 찾아가는 것도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못 오고 안 오고하는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전에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왜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안 하면 안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멸망, 쉽게 말해서 노아홍수, 전체적으로 다 죽이는 사건, 심판의 홍수 이전에 먼저 구원받을 백성에 대해서는 그 비행물체 안에서 죽음이란 의미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일을 안팎으로 약속이란 이름으로 안팎 양쪽으로 다 실시를 하게 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요엘서 같은 경우에 그날이 온다 할 때 그날이 왔을 때 그것이 요엘만 아니고 전 세계의 심판을 의미하는데 그 여호와의 날이 닥치기 전에 먼저 유다나라라는 혹은 이스라엘 나라라는 그 나라에 죽음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을 미리 앞당겨 맛보게 하는 혜택으로 오늘 본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읽었던 본문 기억하시잖아요. “멸망의 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멸망이다 이 말이죠. ‘아! 세상 더럽다. 확 부셔라.’ 이렇게 지가 원해서 멸망 온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기 당하고 난 뒤에 ‘에이고, 나만 죽나, 다 죽어라, 다 죽어.’ 이런다고 해서 갑자가 세상 당하는 게 아니에요. 그날은 자기 날이지 여호와의 날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인간도 마지막 날은 내 소원 풀어주는 내 날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면서 일방적으로 여호와께서 들이닥쳐서 일을 벌이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한테는 매일이 여호와의 날 이예요. 왜, 매일 자기 뜻대로 안 되는 날이기 때문에.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 미칠 지경 이예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루 종일이 아니고 삼백육십오일 내 뜻대로 되는 날이 없어요. 하여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말씀은 왜 그렇게 아버지께서 잘 지키시는지.ㅎ 아주 차질이 없어요. 빈틈이 없어요.
요엘을 보게 되면 유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려고 뭘 의지 했는가가 나오죠. 여기 16절에 보면 “음식물(식물)이 우리 목전에서 끊어져버리고 기쁨과 즐거움도 성전에서 끊어지고”, 교회 나와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요. 복 받을 일이 없으니까. 17절, “씨가 흙덩이에서 썩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고 곡식은 시들고”
성주군에 참외해서 1년에 3천 6백억 번다는 거예요.
대구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자기
아버지 말 듣고 때려 치고 성주에서 참외 키우는 기술 배웁니다.
우리나라 참외 70%가 성주군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연말
되면 목돈이 1억씩 된 답니다.
어떤 사람은 비닐하우스 25~30동을 지어서 하니 한 동에서 몇 천만 원 나오는데 25동이니 돈이
3억대, 5억대가 돼요.
그런데 그 씨가 만약에 어느 날 정전된다든지 가뭄 들어서 참외밭이 망해버리면 그 사람들이 뭘
느끼겠습니까?
우주의 종말을 느끼고 그 다음에 자기의 종말을 느낄 거다 이 말이죠.
‘야! 이러다가 정말 참외밭을 폭싹
쓸어버리면 정말 이 세상이 멸망의 날, 심판의 날이 아니가, 이러다가 우리 집안 뭐 먹고 사노.’라는 걱정을 하게 되죠.
결국은
이러한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참외가 안 돼서 참외가 썩어서 수입이 없을 때 걱정한다는 자체가 사람들이 자기 날을 기다렸지, 절대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 궁금해요. 난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찾아가 보고 싶어요.
그
성주군에 있는 교회마다 목사들 외치는 것이 여호와의 날을 외치는지 아니면 추수 잘되는 목동 챙기는 그날을 챙기는지, 무슨
소리하는지 구경하고 싶어요.
구경하나 안하나 뻔하지.
그래서 성주에서는 그렇게 돈이 많아서 공공 단체도 그렇게 대우를 잘해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생축이 탄식하고” ‘우~~’ 하고 소가 운다는 거예요. 돼지가 울고, 소하고 돼지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매몰처리 하면서 얼마나 울었겠어요. 죽은 채로 하면 그것도 소의 인격을 높이는데 이건 산채로 죽이니까, 괜히 베트남에 가서 하나가 구제역 들어서 온 나라에 소, 돼지 다 잡고 또 지나면 닭도 다 잡고 또 바다의 전복도 태풍불면 다 죽을 판이고, 그러니까 평소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럼 여호와의 날을 안 좋아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여호와가 싫다는 거예요. 괜히 시어머니 옆에 얼쩡거리는 게 딱 귀찮아, 여호와를 싫어하면서 뭐라고 입을 벌려서 하는 말이 ‘여호와여, 영광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가관이라. 가관. 그렇게 여호와가 싫은데 평소에 자기 날만 좋아하면서 교회에 와서 여호와를 부르짖는 심보가 더럽잖아요.
여기 “소떼가 민망해 하니 양떼도 피곤하고” 양 떼가 피곤해서 누워있고, 그게 누가 이렇게 하느냐, 그게 비행물체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이미 마지막의 모습을 비행물체 안에 있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도 이 일을 일으키는 겁니다. 너희가 평소에 여호와의 날을 진정 좋아했던 적이 있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기 위해서 의지했던 모든 것을 전부 다~ 거두고 치워버리고 없애버리고 그야말로 이 세상을 광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가 광주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애굽에서 광야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약의 절차라면 신약에서는 그 절차를 반대로 합니다. 애굽 먼저 있고 광야 만들고 그 다음에 천국 가는데,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이 엄연히 가나안 땅이라서 지명이 나와 있지만, 신약에서는 이 땅이 애굽이고 이 땅이 광야 되게 해놓고,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이 땅에는 없어요. 골로새서 3장 1~4절 “이미 이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감춰졌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신약에서는 하늘을 쳐다봐야 되지 땅의 것에서는 어떤 승부 걸만한 게 없어요. 그래서 땅의 것이 날아가더라도 ‘아! 이건 여호와의 날이 가깝구나.’ 하고 반기고 즐거워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애굽이고, 그 다음에 광야 되고,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없고 하늘나라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을 거칠 때 태웠거든요. 예수님이 이미 그 경과를 거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쳤던 그 경과를 그대로 밟으면 그 코스가 구원코스입니다. 다른 구원코스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숨어 나오고 죽어서 천국 갔다면 그 코스대로 성령께서 그 코스대로 가라고 인도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오늘 중요한 것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특히 신약이나 구약이나 광야를 만든다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 더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일부러 다 치워버려요. 소도 탄식하고 양도 피곤하다 하고 전부 다 나자빠지고 곡식도 다 썩어버리니까 뭐 답답하죠. 강제적으로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런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살다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구나.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아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죽어야지.’ 이런 게 아니고 그런 식이 아니라면 그건 믿음이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어 죽는 것은 그건 신앙이 있고 아니고 관계없이 다 주어지는 거니까, 특별한 게 없어요.
그러나 아담에서 ‘~~죽었더라. ~~ 죽었더라.‘ 하는 것은 그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낯선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아이쿠, 이거 먹을 거 다 죽고 닭 죽고 소 죽고 할 수 없다. 하나님, 빨리 죽이세요. 죽어서 좋은데서 편히 쉬렵니다.‘ 이런 자기 편한 걸 생각하는 죽음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그냥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거 좀 생각해 볼게요. 창세기 5장 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죽음 이야기가 없어요.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여기 창세기 5장 22~25절에 보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냥 계속해서 처음부터 동행했고 끝까지 동행했고 그리고 그를 데려갔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죽음을 집어넣어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결과적으로 여러분,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죠?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동행했다고 돼 있고 히브리서에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다고 돼 있어요. 두 개 합치면 무슨 이야깁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믿는 자는 ‘죽음도 동행이지 죽음이 아니다’라고 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지금 매일같이 죽여줄 때 그걸 동행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 밥그릇을 치우고 젓가락을 치우더라도 그게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동행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집사가 매일같이 밥그릇을 치우시고 밥그릇을 깨고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얻어터지고 하다가 죽어버렸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방법인데 무슨 방법이냐, 평소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았던 동행 방식으로 우리는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그 안목을 두자로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죠?
지금 내가 알고 있는데서 주의 일을 해석하지 말고 우리가 아는데 불가능 했었었는데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살았고‘라는 입장에서 다시 어떤 분이 어떤 집사가 어렵게 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란 말이죠. 그것이 오히려 그 아픔과 그들의 고통스런 가난을 부러워하란 말 이예요. 왜, 남들은 살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살려고 하는 건더기가 없어요. 하나님이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리고, 살려고 하면 다 치워버려요.
미장원 하면 미장원 망하고 펀드 하면 펀드가 내려가고 주식하면 주식이 폭락하고 사면
샀다고 다 망하고 팔면 팔아서 망하고 여기 거치면 여기 일이 안 되고 만사가 되는 일이 없어요.
만사형통이 아니고 반대, 모든 게
불통, 형통이 안 될 때 그것은 바로 니가 땅에서 이미 죽었고 니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만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독특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되겠죠.
동행이라 하는 것은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죽어야 될 분이 나와 함께
곁에서 같이 산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집에 죽어야 될 분이 또는 우리를 이 땅에서 데려 가실 분이 함께
사신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퀴벌레와 동행하신 적 있습니까?
죽이고 싶죠. 왜, 바퀴벌레가 나를
힘들게 하니까.
예수님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을 우리 쪽에서 보면 예수 믿기 힘든 게 아니고 불가능하고 짜증나요.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에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사도바울의 구원받은 자의 성령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동행 안 했으면 참 큰일 날 뻔 했어요. 동행 안 했으면 돈 좀 벌었다고 과시할 것이고 자랑할 것이고 이 땅에서 조금 성공한 것도 부풀려서 큰 성공 한 것처럼 으스댈 것이고 사법고시 누구 아들 합격했다고 붙일 것이고 누구 하나 성공 했다고 할 것이고 27살 때 대학병원 병원장 했다고 알려질 것이고 누구는 의사도 증권도 잘 하고 의사도 잘하고 시골 의사인데 뭐 그리 똑똑한지, 그런 것들을 자랑할 때 그 사람이 죽을 맘이 나겠습니까? 더 살고 싶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일하게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나의 날, 내가 성공한 날, 내가 출세한 날, 내가 대우받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날은 이것은 우리가 싫든 좋든 엄연한 현실인 것을 우리에게만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수시로 그것을 이해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3. 종말론적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월 26일(금) 요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날(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Alas for that day! Fo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it will come like destruction from the Almighty.
여호와의 날(13구절)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요엘 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여호와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 중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주로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
1.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3. 종말론적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
이사야 26:4너희는 여호와를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사도행전 2:20-21
여호와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셨음이니라.
로마서 10:1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요한일서 5:5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아니냐?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니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요한계시록 1:7-8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실로 그러하리라. 아멘.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나중이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자라.
여호와의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심판의 날
구원의 날
선지자들은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기록했고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이 오기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도 구원자, 예수도 구원자이신 것이고 여호와는 뿌리, 예수는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재림도 한 분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한 아들로 오시면서 예수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시고 영존하신 아버지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전능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누구시라는 것을 어떻게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대주재시고 심판주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만 하시고 아들에게 다 맡기신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친히 사람되어 오셔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날(요엘 2:1-11)
왜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메뚜기 재앙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재앙으로 일상생활이 중단되고 예배생활이 중단되는 엄청난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런 엄청난 위기를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메뚜기 재앙을 몇 번 만났습니까?
네 번 만났습니다.
똑 같은 메뚜기 같지만 조금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르고 피해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왜 네 번이나 만났습니까?
한 번 재앙을 만났는데 그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재앙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재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이나 재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 재앙이 일어났던 것은 네 번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말씀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어떤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어떤 도구로 심판을 하시는지,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우리의 삶이 어떤 비극적인 삶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 여호와의 날은 결코 시시한 날이 아니며 엄청난 심판의 날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 (1-3절)
● 욜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오늘 본문은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합니다. 또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지르라고 말씀합니다. 시온과 나의 거룩한 산은 같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요새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낮은 산이 시온인데, 여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어서 나의 거룩한 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교회 사람들을 향해 먼저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고의 말씀을 주변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부터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소리를 들어야 할 일차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에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가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나팔은 “쇼파르(양각나팔)”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 나팔은 종교적인 큰 모임이 있을 때, 새로운 왕이 세워질 때, 전쟁이 시작될 때 불었습니다. 지금은 왜 불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을 경고하기 위해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팔은 누가 불어야 합니까? 히브리어 원문은 2인칭 복수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앞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선지자는 특별한 때에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으로 깨우는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평소에 백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씀으로 도전하고 양육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평소에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전했던 그 말씀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강력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격렬하게 진동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경고의 말씀을 듣고 말씀 앞에 떠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 완악한 사람이 아닌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고 도전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임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은 요엘 선지자가 가장 먼저 했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여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날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항상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되며,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날인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겐 구원의 날, 소망의 날, 승리의 날이 될 것이며, 죄에 빠져 살아간 사람에겐 심판의 날, 절망의 날, 멸망의 날이 되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 같은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분명히 이 날은 하나님이 인류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했던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에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심판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되는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을 때, 롯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바로 이런 날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죄에 빠져 살아간 사람에겐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 여호와의 날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 날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죄에 빠져 살면서도, 세상 쾌락에 젖어 살면서도 나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합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구원에 대한 자신감은 있는데 아무 근거가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신 좀 차려야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깨어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 앞에 벌벌 떠는 사람은 그 날에 떨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 앞에 떨지 않는 사람은 그 날에 심판 앞에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고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회개하면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욜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를 말씀합니다.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는 표현은 출 10:22에 애굽에 내린 9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에서 사용된 말씀입니다. 애굽 땅을 심판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새벽이 시작될 때 붉은 빛이 순식간에 산꼭대기에 덮여버리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모든 땅에 확 덮여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세상은 이처럼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암담한 현실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정말 빠르고 신속하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하시면 어디를 보아도 빛을 볼 수 없고, 아무리 보아도 소망이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날이 오게 될까요?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메뚜기 떼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4절 이하에 보시면 전쟁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엄청난 군대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초토화시키는 상황을 말씀한 것입니다.
● 욜 2: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니 그 땅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운다고 말씀합니다. 불이 한 쪽에만 붙은 것이 아니라, 앞에도 붙었고 뒤에도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는 엄청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지만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덴동산은 저주받지 않은 가장 복된 땅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땅이 에덴동산과 같았다는 말씀은 정말 완벽한 조건을 갖춘 땅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던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황폐한 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들이라는 말은 “광야,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절대 살 수 없는 사막과 같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까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풍성했던 땅이, 황폐한 사막처럼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창 13:10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기 전에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동산이라는 말은 에덴동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바다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그 자리입니다. 에덴동산과도 같았던 땅이 이제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에덴동산 같던 곳도 황폐한 땅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덴동산과 같은 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게 죄 때문에 깨어져 있다면 여기도 얼마든지 황폐한 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것을 피한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고,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피한 자가 없을까요? 사실은 피한 자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피한 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에도 롯의 가족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성전에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경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경고하여, 모든 주민들이 미리 깨닫고, 정신 차리고,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고, 그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말씀을 듣고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간다면, 그 날은 절대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니라 회복의 날, 구원의 날, 소망의 날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이 기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면 위기에서 벗어나 소망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영적 잠에서 깨어나면, 지금 은혜와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만났다면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경고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 때문에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고, 황폐하던 땅이 에덴동산과 같은 복된 땅으로 회복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여호와의 날의 심판 도구 (4-9절)
● 욜 2:4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 욜 2:5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군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메뚜기 심판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침입할 이방나라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나라 군대가 침입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것이 무엇과도 같다는 표현입니다. 말과 같고, 달리는 기병 같고,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고,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두 이스라엘을 공격할 군대가 얼마나 강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군대인가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먼저 그의 모양은 말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말이라는 짐승이 나온 것은 메뚜기의 머리를 자세히 보면 말의 머리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리는 것은 기병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뚜기 떼가 기병들이 돌진하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힘 있게 달려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뛰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것은 껑충껑충 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올 때 기뻐서 춤을 출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병거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워낙 엄청난 군대가 한꺼번에 뛰니까 이 소리가 병거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 소리는 마른 장작 이 탈 때 탁탁 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메뚜기의 날개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워낙 많은 메뚜기의 날개소리가 한꺼번에 들리다보니 이게 마치 마른 장작들이 불에 탈 때 나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들리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줄을 벌이고 싸운다는 것은 잘 훈련된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한 줄로 서서 전진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군대는 절대 오합지졸이 아니라 잘 훈련된 최정예 부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욜 2:6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이런 군대를 보는 순간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다고 말씀합니다. 질린다는 말은 본래 몸을 비틀면서 비비꼰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이렇게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낯빛이 하얘졌다는 말씀은 본래 잿빛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낯빛이 어둡게 변해버렸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던 인간이라도,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처럼 겁에 질려버리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니엘 5장에 보시면 바벨론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의 얼굴빛이 변하고, 넓적다리가 녹는 듯 힘이 풀리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며 대적하던 인간도 여호와의 날이 되면 얼굴빛이 변하고 다리에 힘을 잃고 질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되면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습니다.
● 욜 2:7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 욜 2:8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이제 그 군대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사 같이 달리며” 힘들게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하게 돌진한다는 것입니다. “무사 같이 성을 기어오르며” 무사라는 말은 본래 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 머리가 깨어진다 해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깨어져 죽는다고 해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면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전투의 상황에도 전혀 흐트러지지도 않습니다. 한 명도 그 줄을 이탈하지 않고, 서로 부딪히는 일도 없고, 각기 자기의 길로 전진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무기는 던지는 무기나 화살을 의미합니다. 성을 기어오르면 방어하는 쪽에서도 절대 가만있지 않습니다. 고대전쟁 영화를 보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고, 창을 던지고, 심지어 끓는 기름을 쏟아 부으면서 강력하게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하게 저항해도 결국 그 성이 함락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을 돌파하고 나아갈 때입니다. 여기에 돌파한다는 뜻은 원문의 뜻은 “나팔(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져 죽는다는 뜻입니다. 성 안에서 날아오는 무기에 맞아 떨어져서 죽는 군인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들이 떨어져서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계속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오고, 돌이 떨어지고, 뜨거운 기름이 쏟아져도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동료들이 죽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성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막아도 끝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끊임없이 올라오는 적군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한 무기를 들고 막아도 절대 막을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욜 2: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이제 대적들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침입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뛰어 들어가며, 달리며, 기어오르며, 창문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중에서 뛰어 들어가고 있고, 성 위에도 있고, 집에도 기어오르고, 창으로도 넘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턴 더 이상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창문은 그나마 가장 구석진 곳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넘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소가 다 열려버린 것입니다. 대적들이 들어오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성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포위했다가 포기하고 돌아갔고, 바벨론 군대는 3년 동안 포위해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던 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이 뚫려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정말 견고한 성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 무시무시한 심판이며, 내 힘으로 절대 막을 수 없는 심판이며, 아무리 안전한 곳에 들어가 숨어 있어도 결국 모든 것이 다 뚫리고 무너져서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이 사용하실 심판의 도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메뚜기는 그렇게 강한 심판의 도구가 아닙니다. 메뚜기 한 마리가 달려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니까 정말 강력한 심판의 도구로 변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군대를 바벨론 군대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바벨론도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선택하시니까 갑자기 전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최고로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를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없는 곳은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 난공불락의 요새 예루살렘 성에 숨어 있어도, 하나님이 심판을 시작하시면 대적들이 마음껏 들어와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울며, 금식하며, 부르짖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경고의 나팔을 불며 경고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습니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재앙 때문에 죽지 말고, 이 재앙을 피하고 살아나야 한다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런 위기를 만나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메뚜기 재앙이 몇 번 일어났습니까? 네 번 일어났습니다. 왜 네 번이나 일어났습니까? 한 번 재앙이 일어났는데 정신을 안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더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재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이나 재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안 듣는다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말씀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뚜기 재앙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위기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시련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위기는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기를 만났다면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회복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위기는 절대 위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위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난 이 코로나 시대도 분명히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면 이 위기는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여호와의 날의 심판 결과 (10-11절)
● 욜 2: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이렇게 엄청난 군대가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떨고, 해와 달도 캄캄하고, 별들이 빛을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 군대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비유적인 해석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이처럼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리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런 급격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불지옥으로 변하면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우리의 삶은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벌벌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욜 2:11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여기서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변 강대국이 자기 스스로 침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이렇게 침입해 들어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이 없다면 어떤 대적들도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변에서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알아서 자기만의 생각으로 이렇게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죄도 없다면 나를 연단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고, 나에게 죄가 있다면 자를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시작된 시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대적하는 그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절대 나의 원수도 아니고, 나의 대적도 아니고, 내가 싸울 대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줘야 합니다. 그들은 진짜 대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대적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나의 대적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의 군대”와 “그의 진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침입하는 이방나라 군대는 더 이상 세상의 군대가 아니라 그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대적들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실까요? 그의 군대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과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싸우는 것은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원수는 진짜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갈 때 자기를 쫓아오며 저주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근거 없는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며 마음껏 저주하는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특히 아비새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가 가서 저 인간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사실 시므이는 일반 평민이었고 아비새는 전쟁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인간입니다. 보통 이렇게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잘 까붑니다.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지금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침착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침착함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잘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대적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축복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이 세상에 없다는 뜻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면 아무리 약했던 존재라도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와 정면충돌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고 말씀합니다. 1절에 나온 여호와의 날이 여기에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고, 신경도 안 쓰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더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더 죄에 빠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은 반드시 죄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더 깨끗하고, 더 거룩하고, 더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락에는 여호와의 날의 심판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고, 해와 달도 캄캄하고, 별들이 빛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 편이 되지 않고 대적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가 만난 시련이 아무리 심각해도 이 시련만 바라보지 말고 종말에 임할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심판은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받는 최후 심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때리시고 징계하고 계십니까? 왜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메뚜기 재앙을 만나게 하십니까? 이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완전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지금 그들을 때려서라도 그들을 바로잡고 회복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이 다음 1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무슨 뜻입니까?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울며, 금식하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얼마든지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시지만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시련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때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그때는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기회는 오직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미련하여 죄악 된 삶을 고집하다 지금 엄청난 시련을 만난 중에 있더라도,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마음을 다해 부르짖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더욱 간절한 기도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눈물이 회복되고, 기도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되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고 우리 때문에 이 진해 땅이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어나지 않으면 반드시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에덴동산 같던 땅이 황폐한 사막처럼 죽음의 땅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만났다면 더욱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군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얼마나 강한 존재로 변신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막아도 절대 막을 수 없고, 아무리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도 절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날의 심판 결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모든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더욱 강한 여호와의 날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달라지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경고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황폐하던 땅이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회복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면 그땐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에덴동산과 같은 복된 삶을 회복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C. S. 루이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변증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는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하고 설명하는 책으로, 원래는 BBC에서 방송된 강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기독교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변호하며, 신앙이 합리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요 변증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도덕법을 통한 신 존재 증명
루이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도덕법(Moral Law)**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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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덕법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개인적인 본능 이상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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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즉, 하나님)가 이를 부여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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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주에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2. 그리스도론 – 예수는 누구인가? (Liar, Lunatic, or Lord 논증)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유명한 **"삼중 논법(Trilemma)"**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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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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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Liar): 예수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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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Lunatic): 예수가 자신을 신이라 착각한 정신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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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Lord):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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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거짓말쟁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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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증은 예수를 단순한 도덕 교사로 보는 관점을 배격하고, 그의 신성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합니다.
3. 기독교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하지만 결코 피상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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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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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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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본성과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4.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루이스는 왜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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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으며, 이는 사랑과 도덕적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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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유의지는 잘못 사용될 수도 있으며, 인간이 이를 남용할 때 악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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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악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불가피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합니다.
5. 기독교 신앙과 성화 (Christian Life & Trans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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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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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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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의 합리성과 초월성
**"순전한 기독교"**는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기독교가 논리적이며 실질적인 삶에 영향을 주는 신앙임을 변증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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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감성적인 접근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와 실생활의 경험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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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참된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이 책은 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신앙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변증이 됩니다.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신앙의 인물 7인
서론: 회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
기독교 역사 속에서 회심(回心)은 단순한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심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다. 여기서는 근현대 인물들 중에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7인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1931-2012) – 권력의 탐욕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기 직전, 친구를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강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교도소 사역에 헌신하여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을 설립하고, 전 세계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모했다.
2. 이반 모이스예예프 (Ivan Moiseyev, 1952-1972) – 무신론 교육을 받았던 군인이 순교자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이반 모이스예예프는 강한 무신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강한 성령 체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끔찍한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는 순교했지만, 그의 신앙과 용기는 소련 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니 에릭슨 타다 (Joni Eareckson Tada, 1949-) –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다
17세의 나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조니는 처음에는 극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빠졌다. 하지만 깊은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고,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4. 리 스트로벨 (Lee Strobel, 1952-) – 무신론에서 신앙의 변증가로
리 스트로벨은 무신론자로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기자였다. 그의 아내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이후 『예수는 역사다(The Case for Christ)』 등의 책을 저술하며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다.
5. 로시어 스프롤 (R.C. Sproul, 1939-2017) – 냉담한 종교에서 살아 있는 신앙으로
R.C. 스프롤은 젊은 시절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대학 시절 밤늦게 도서관에서 강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회심했다. 그는 개혁신학을 연구하며 기독교 신앙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하여 전 세계 수많은 신자들에게 신학적 교육을 제공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6. 프랜시스 콜린스 (Francis Collins, 1950-) – 과학에서 신앙으로
세계적인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의학을 공부하며 인간 유전자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면서 신의 존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며 회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앙과 과학이 조화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신앙을 지닌 과학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7. 안네 반 데르 비엘 (Anne van der Bijl, 1928-2022) – 무신앙에서 성경 밀반입자로
네덜란드 출신인 안네 반 데르 비엘(브라더 앤드류, Brother Andrew)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없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군 복무 중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경험한 후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는 이후 ‘하나님의 밀수꾼’으로 불리며, 공산권 국가들에 몰래 성경을 배달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결론: 회심은 삶을 바꾸는 능력이다
이들 모두는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만나고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어떤 이는 권력과 부를 쫓다가, 어떤 이는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학문을 탐구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단순한 감정적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고 있으며, 회심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신앙의 인물 7인
서론 : 회심,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 기독교 역사 속에서 회심(回心)은 단순한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방황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심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했고, 어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다.
여기서는 근현대 인물들 중에서 강력한 회심을
경험한 7인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찰스 콜슨 (Charles
Colson, 1931-2012) – 권력의 탐욕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기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기 직전, 친구를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강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교도소 사역에 헌신하여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을
설립하고, 전 세계 수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모했다.
2. 이반 모이스예예프 (Ivan Moiseyev,
1952-1972) – 무신론 교육을 받았던 군인이 순교자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이반 모이스예예프는 강한 무신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 복무 중 강한 성령 체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끔찍한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는 순교했지만, 그의 신앙과 용기는 소련 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니 에릭슨 타다 (Joni Eareckson Tada, 1949-) –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다 17세의 나이에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조니는 처음에는 극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빠졌다. 하지만 깊은 회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고, 이후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더욱 강한 신앙을
갖...
요엘
저자: 요엘서는 그 책의 저자가 선지자 요엘(욜 1:1)이라고 언급합니다.
저작 연대: 요엘서는 주전 835-8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 목적: 이 책의 배경인 유다는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에 의해 황폐화됩니다. 메뚜기 떼의 침략은 곡물, 포도밭, 정원 및 나무 등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요엘은 메뚜기를 통해 행군하는 인간 군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 모든 파괴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요 사건을 조명하여 줍니다. 하나는 메뚜기의 침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이 책에 대한 초기의 성취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것처럼 오순절날에 발생한 사건과 연관됩니다.
핵심 구절: 요엘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약: 메뚜기의 끔찍한 재앙 뒤에는 그 땅 전체에 임하는 심각한 기근이 뒤따릅니다. 요엘은 이러한 일들을 촉매제로 사용하여 유다에게 경고의 말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고 온전하게 회개하지 않는 한, 적군은 메뚜기처럼 땅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요엘은 모든 백성과 그 땅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금식하며 겸허해질 것을 호소합니다. 그들이 반응한다면, 그 나라에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새롭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열방이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와 비교할 때 끔찍한 메뚜기 떼들은 고작 하루살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인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노와 능력과 거룩의 속성을 계시하시는 날이며,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주의 날은 역사적으로 그 땅에 임하는 메뚜기의 재앙으로 체험됩니다. 2장 1-17절은 요엘이 메뚜기 재앙과 가뭄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여 회개에 대한 부름을 새롭게하는 과도기 장입니다. 2장 18절-3장 21절은 종말론적인 용어로 주의 날을 묘사하고, 회개에 대해서는 육체의 회복(2:21-27)과 영적인 회복(2:28-32), 그리고 국가적인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답변합니다(3:1-21).
예표: 구약이 개인적인 죄이든 국가적인 죄이든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예표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를 했을지라도 그들의 회개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행함에 제한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전 제물은 십자가에 달려 단번에 영원히 바쳐질 궁극적인 희생의 그림자였습니다(히 10:10). 요엘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욜 2:11)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는 그런 순간을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심판 날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적용: 회개가 없다면 심판은 가혹하고 철저하며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뢰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연, 슬픔 또는 다른 일반적인 사건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확고한 계획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와 그분의 완전한 의를 교환해 주셨습니다(고후 5:21).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밤의 도적같이 신속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붙들어야 우리는 주의 날에 있을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요엘서는 구약 성경 39권 중 29번째 책으로 12권의 소선지서 중 하나입니다.
요엘은 유다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유다에 닥친 메뚜기 때와 가뭄의 재앙을 여호와의 날의 전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며 마지막 때의 구원의 소망을 전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사도행전 2:17-21)에서 요엘서 2:28-32[1]을 인용합니다.
-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개요와 구조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 1:4)
- 저자: 선지자 요엘 [2];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 저작 시기: BC 830년 (명확치 않음)
- 목적: 남유다에 닥칠 심판 경고, 회개 촉구, 그리고 소망
- 주제: 주의 날
- 지리적 배경: 유다
- 책 이름 약자: 욜[3] , Joel[4]
구조와 특징
요엘서는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메뚜기떼의 공격 (1장)
- 여호와의 날 (2장)
- 유다의 영광스러운 미래 (3장)
특징
- 언제 쓰여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 저자 요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메뚜기떼의 공격 (1장)
요엘 당시에 메뚜기 떼로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망친 사람들은 애곡 하였습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제사장들에게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소집하여 장로들과 모든 주민이 회개와 기도 할 것을 촉구합니다.
- (1: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제사장들은 자신들부터 시작하여 국가적 굴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그들에게 중요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께 바칠 희생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5]
- (1: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선지자는 요엘 1:13-14의 권고에 대한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는 현재의 재앙을 다가올 훨씬 더 심각한 재앙, 심지어 위대한 “여호와의 날” 자체의 전조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이 일으키는 경각심을 표현합니다.[6]
여호와의 날 (2장)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으며 그의 군대는 크고 강하여 심히 두렵고 당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여기서 새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동사 Shachar에서 파생되었는데, 한 가지 의미는 “검게 되거나 검게 되다”이고, 두 번째 의미는 “빛으로 터져 나오다”입니다. 이 후자의 의미에서 아침을 의미하는 단어인 새벽이 파생되었고, 전자에서 “검은색”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 단어는 나일 강의 이름을 시호르(이사야 23:3)로 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를 검은색과 관련하여 받아들이고, 흘러서 산 꼭대기에 쌓인 두껍고 어두운 구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 맥락과 더 잘 맞는 듯합니다. 다음 설명은 자연적 메뚜기떼와 정치적 메뚜기떼를 모두 포괄합니다.[5]
주께로 돌아올지어다 (2:12-17)
-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2:18-27)
그러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주셔서 땅을 회복시키시고 풍족케 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 관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2:28-32)
그 후에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줄 것이고 여호와의 날에 이르러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 약속은 성령이 부어진 오순절 날 성취되기 시작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부여된 회개의 은혜와 기적적인 은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날의 심판보다 앞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 그분에 대한 믿음, 그분을 향한 열망, 그분에 대한 의존,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진실성의 증거로서 그분께 대한 양심적인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큰 날에 구원받을 자는 오직 죄에서 하나님께로, 자아에서 그리스도께로, 아래의 것에서 위의 것으로 효과적으로 부름받은 사람들뿐입니다.[7]
유다의 영광스러운 미래 (3장)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의 구원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을 보았습니다. 이제 3장 전체는 그 약속에 대한 설명으로, 그 구원이 무엇이며, 교회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교회의 영원한 안식과 기쁨 속에서 어떻게 완전해질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그 후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 교회를 위해 행해진 구원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를 위해 행해진 위대한 구원과 우리의 영적 적들과 그들의 모든 대리인들의 멸망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을 가지고 있으며, 큰 날의 심판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이룰 것입니다.[7]
여호와의 날에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것이나 그의 백성에게는 피난처, 산성이 되셔서 심판과 구속을 완성하시고 시온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시다 (3:1-13)
- (3:12)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이들이 모이는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최종 결정이 내려질 장소를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했던 모든 나라들,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의 적대적인 나라들, 특히 더 가까운 이웃의 적대국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주된 대상입니다. 이 구절의 "일어나서(stir up: ESV)“라는 표현은 9절의 "격려하고(stir up)”에 상응합니다. “올라올지어다”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1) 여호사밧 골짜기에 도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2) 전진 또는 행진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을 "올라오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관으로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의 결정을 하십니다.[8]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다 (3:14-21)
- (3:1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강한 폭풍 속에서 다가오시니, 하늘과 땅이 그분 앞에서 진동합니다. 그분의 심판은 오직 그분의 적들에게만 내리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은 요새와 방패가 되십니다.[6]
관련 자료
관련 문서
검색: 분류: 요엘
검색: 성경인물:: 요엘
바이블프로젝트 요엘 개요
참고한 자료
- Zondervan NIV Study Bible (based on NIV 1984)
- John MacArthur Study Bible
- 구약성경개론 (Survey of the Old Testament - 폴 N. 벤웨어)
-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Readpage.php (대한성서공회)
- https://www.esv.org/Joel+1/
- https://en.wikipedia.org/wiki/Book_of_Joel
- Agape Big Letter Study Bible (2005)
각주
- ↑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 ↑ (욜 1: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_shortword01.php
- ↑ https://www.logos.com/bible-book-abbreviations
- ↑ 이동: 5.0 5.1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
- ↑ 이동: 6.0 6.1 Cambridge Bible for Schools and Colleges
- ↑ 이동: 7.0 7.1 Matthew Henry’s Concise Commentary
- ↑ Pulpit Commentary
요엘
요엘서를 기록한 선지자는 브두엘의 아들 요엘입니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요엘에 대한 정보는 그 이상 없어 요엘서의 기록 시기도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①여호사밧왕(남 유다 4대 왕)이 에돔과
동맹군을 물리친 여호사밧 골짜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므로 여호사밧 시대 이후이거나 ②블레셋, 애굽, 에돔이 심판받을 적대국으로
나오고,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보아 요아스왕(남 유다 8대 왕) 때 기록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요엘서에 제사장에 대한 언급만 있고 왕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어린 요아스를 대신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했던 때 요엘서가
기록됐다고 봅니다.
내용
메뚜기가 곡식을 다 갉아 먹는 재앙이 이스라엘에 닥쳤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조차 없을 정도로 곡식이 없어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고통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닥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재앙을
거두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셔서 다시 풍요롭게 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구원의 약속도 전했습니다.
요엘 전체 해석 요약 정리
여호와의 날 앞에서 회개와 회복의 부르심
본문 요약
요엘서는 메뚜기 떼로 인한 자연재해를 시작으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더 큰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서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며, 장차 임할 구원의 시대를 내다봅니다. 요엘서는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조
- 재앙과 회개의 촉구 (1:1~2:17)
- 회복과 성령 강림의 약속 (2:18~2:32)
- 열방 심판과 최종 회복의 선언 (3:1~3:21)
재앙과 회개의 촉구 (1:1~2:17)
요엘서는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시작됩니다. 메뚜기 떼가 모든 농작물을 삼켜버리고, 곡식과 포도주가 끊기며, 사람뿐만 아니라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로 보이지만, 요엘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봐야 하며, 장로들과 제사장은 이 사건을 후손에게 전하며 기억하게 하라고 명령받습니다. 경제와 종교, 일상과 예배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선지자는 금식과 슬픔을 명하고,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울며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호소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은 단지 물리적인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빛으로 변하며,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날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며, 그의 본심은 인애와 긍휼,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뜻을 돌이키시는 분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단호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회개는 공동체 전체의 일입니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신랑과 신부까지도 회개에 참여해야 하며,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가 단지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 온 마음과 삶을 동반한 진실한 변화여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 첫 번째 부분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일깨워줍니다.
회복과 성령 강림의 약속 (2:18~2:32)
백성의 진심 어린 회개 앞에서 하나님의 반응은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며, 북쪽에서 온 군대를 쫓아내실 것이라 하십니다. 메뚜기 떼로 상징된 군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징계였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물리치시고 땅을 회복시키십니다. 들판에는 푸른 초장이 회복되고, 나무는 열매를 맺으며, 백성은 다시 기뻐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한 백성을 어떻게 은혜로 다시 세우시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크신 일을 행하셨고, 그들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회복하십니다. 이는 단지 육적인 풍요의 회복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성은 이제 다시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다른 이가 없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회복은 단지 현실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시며,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십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요엘은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언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그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시며,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합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환상을 보게 되며,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성령이 부어지는 이 약속은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직접 인용하며 성취된 말씀으로 언급됩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시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이자 복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열방 심판과 최종 회복의 선언 (3:1~3:21)
요엘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그리고 최종적인 회복에 대한 선언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흩뜨리고 고통을 준 열방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열방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해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행된다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열방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팔아 이방 땅으로 넘기고, 하나님의 기업을 욕되게 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기억하고 갚으시며,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높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내부의 회복만이 아니라 외부의 악에 대해서도 반드시 판단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무력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모든 민족 위에 계신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시온 산에는 피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온에 거하시며,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이방인은 다시는 그리로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땅은 다시 풍요로워지고, 산에는 단 포도주가 흐르며, 시내는 물이 가득하며, 하나님의 성소에서는 샘이 흘러나와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는 영원한 왕으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며, 회개한 자들에게는 풍성한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결론
요엘서는 짧지만 심오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재해와 민족적 위기를 통해 말씀하시고, 백성의 죄를 깨우쳐 회개로 이끄십니다. 심판은 두려운 것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는 진실한 회개를 원하시며, 그 회개 위에 회복과 성령의 부으심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자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메뚜기 떼 같은 위기와 흔들리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옷을 찢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돌이키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요엘서를 통해 우리는 회개의 능력, 하나님의 긍휼, 성령의 약속, 그리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온에 거하시며, 그분을 경외하는 자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자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호와의 날과 회개의 촉구
요엘 1장
메뚜기 재앙이 이스라엘을 덮쳐 땅이 황폐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이 재앙을 통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제사장과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요엘 2장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며, 이는 더욱 큰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회복의 약속을 주신다. 또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실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 선포된다.
요엘 3장
하나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그들을 괴롭혔던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축복을 누리게 되며,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이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결론
요엘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회개하는 자들에게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신다.
요엘 ―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요 엘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1. 인적 사항
(1)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
(2) 예루살렘 출신으로 추정. 남유다 선지자.
(3) 브두엘의 아들로서 12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욜1:1).
2. 시대적 배경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 요엘은 유다의 유약한 제9대 왕 요아스의 재위 기간인 B.C.835-796년까지 사역한 선지자이다. 이 때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왕국 시대의 중반기로서, 국제적으로는 강대국간의 패권 다툼이 별로 없던 다소 평온한 시기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커다란 변혁의 회오리가 스치고 지나갔던 때였다. 남유다의 제7대 왕이 된 아합의 딸 아달랴를 몰아내고 7세밖에 안된 어린 요아스를 왕위에 옹립하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이 있었다(왕하 11:4-12).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섭정인으로서 아달랴의 바알 숭배로 인해 훼손된 성전을 수리하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에 대한 언약을 맺게 하는 등 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유다 왕 요아스는 심한 동요와 죄악에 빠져 이교의 우상 숭배를 허용하는 등 부패하게 되었다(대하 24:18). 이것은 비단 요아스 개인만의 부패가 아니었다. 이에 편승한 유다 백성들 역시 패역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이 때에 대 메뚜기 재앙이 닥치게 되어 백성들은 기근과 가난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선지자 요엘은 홀연히 일어서서 유다 백성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파한 것이다.
3. 주요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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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명 이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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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회개의 촉구 |
B.C.835-796 |
요엘1,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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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약속 선포 |
〃 |
요엘 2:18-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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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 기록 |
B.C.830년경 |
요엘 1: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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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 |
― |
4. 성품
(1)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과 비교되는 인물로, 시대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품의 소유자.
(2)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애끓는 심정으로 민족의 회개를 외친 것으로 보아 사랑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많은 선지자(욜 2:12-14).
5. 구속사적 지위
(1) 메뚜기 재앙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선지자(욜2;31,32).
(2) 여호와의 날 심판 경고와 회개 촉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간의 화목을 도모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한 자(욜2:13). 이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 절대한 중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6. 평가 및 교훈
(1) 유다 백성이 패역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인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시고 경고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종들을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한 메시지를 들을 때에 우리는 책망은 책망대로, 권면은 권면대로 순순히 받고 그것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해야할 것이다(욜2:12-17).
(2) 요엘은 백성들을 향해 메뚜기의 재앙을 선포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욜2:32)이라고 전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능력의 주님의 이름을 우리는 얼마나 힘써 진실 되게 부르고 있는가?
요엘 ( Joel )
요엘(Joel)은 구약 성경의 소선지서 중 하나인 요엘서의 저자이자 예언자로, 그의 예언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그리고 성령의 강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엘은 예언서 중에서도 특별히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에 대한 메시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신학에서 그의 예언은 종말론적 사건과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요엘의 배경과 역사적 맥락
요엘서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정보는 비교적 제한적입니다. 요엘서에서 특정한 왕이나 역사적 사건이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활동 시기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9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추정됩니다. 요엘은 주로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여겨지며, 그의 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엘서의 주요 배경은 심각한 메뚜기 재앙입니다. 메뚜기의 대규모 침략은 이스라엘의 농업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요엘은 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동시에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제시합니다.
요엘의 메시지: 심판과 회개, 그리고 회복
1. 메뚜기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이 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요엘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메뚜기 재앙은 "여호와의 날"의 전조로 간주되며, 다가올 더 큰 심판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메뚜기 재앙을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보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엘서 1:15에서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나니"라는 표현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2. 여호와의 날 (Day of the Lord)
"여호와의 날"은 요엘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을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신약에서는 이 날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며, 의인과 악인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 베드로후서 3:10).
3. 회개와 하나님의 자비
요엘은 심판의 경고와 더불어 회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요엘 2:12-13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그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엘은 단순한 형식적 회개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상징합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엘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연결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예표합니다.
4. 회복과 구원의 약속
요엘은 심판과 회개에 이어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신 후,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풍성한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요엘 2:25에서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팟종이와 느치와 황충이 먹은 해 수를 너희에게 갚아주리니"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회복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구속사와 연결 지어 해석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며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 회복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 영적 회복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성령의 강림: 요엘서 2:28-29의 예언
요엘서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 중 하나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요엘 2:28-29에서 하나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 연결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16-21에서 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 바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의 부어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예언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보편적인 구원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요엘은 성령이 특정한 계층이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가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종말론적 의미
요엘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입니다. 요엘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만국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 종말론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날로 이해되며,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으로 해석됩니다. 요엘은 그날이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임을 강조하며,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요엘서의 기독교적 의의
회개의 중요성: 요엘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은 기독교 신앙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성령의 약속: 요엘의 성령 강림 예언은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요엘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사도행전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