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몸이
썩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3),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요 11:25)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한 몸의 특징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과부 아들(왕상 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17-27),
야이로의 딸(막 5:22-43),
나인 성의 청년(눅 7:11-17),
나사로(요 11:17-44),
여 제자
다비다(행 9:36-43),
유두고(행 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은 아니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은 특징이 있다.16
1. 지금 몸과 다른 변화 된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 24:29-40)
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 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 20:25-27)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말하고 있다.(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또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 24:41-43)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영(靈)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 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부모님이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을 꽂아놓고 조상의 영이 와서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돌아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 가 살펴보니 밥과 국이 없어지지 않았고 그대로였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 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 20:14,1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 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 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 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변해있었다.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가지시게 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 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2)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생한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 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 15:42-44)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한 몸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닫힌 방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며(요
20:19), 동행 중에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 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가고 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 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의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 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 하는
일도,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활에 대한 실제적 증거
1.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8:31-33)
2. 예수님의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 2-6)
3.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 부활의 증거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7-39)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을 더 이 세상에 계시면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확증하셨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막 16:9)
(2) 여인들에게(마 28:9)
(3) 베드로에게(고전 15:5)
(4) 두 제자에게(눅 24:15-31)
(5) 열 제자에게(요 20:19)
(6) 도마에게(요 20:26-28)
(7) 일곱 제자에게(요 21:1-24)
(8) 열 한 제자에게(마 28:16,17)
(9) 500명에게(고전 15:6)
(10) 열 한 사도에게(행 1:2-9)
(11) 야고보에게(고전 15:7)
(12) 바울에게(행 9:1-5, 고전 15:8)
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적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부활의 증거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행
2:38-42)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장차 다시 오시리라는 그의 약속의 말씀도 분명히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의심 없이 믿는다.
도마(요한복음 20:19-31)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도마는 갈릴리 출신 어부로 ‘디두모’라고도 불렸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인데, 둘
다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도마는 쌍둥이였던 모양인데, 그가 형제 쌍둥인지 자매 쌍둥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와 쌍둥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나 불확실하다.
성경에는 그의 부모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이름만 소개된 제자였을 것이다.
공관복음(마10:3, 막3:18,
눅6:15)과 사도행전(행1:13)에는 단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
덕분이다.
도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도마는 이같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먼저 요한복음에 소개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나사로를 도우려 가자고 하신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궤계가 임박해 있고 실상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가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말렸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가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의 이러한 반응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이 용기였을까 아니면 운명론자들이 갖는 염세주의적
기질에서 나온 것일까?
만일 예수께서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으로 건너가시려 하자 스승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본다면, 도마는 단순하고 의협심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유대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자포자기의 의미를
지닌,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예수께서 가시자고 하니, 모든 것 다 운명에 맡기고 올라가자.”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각도로 해설을 해 놓았는데,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복음 14장인데,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요14:1-4 읽기)
그러자 도마는 질문을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 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그 길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마는 이미 앞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귀머거리인가? 그는 주님께서 배신을 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께서 떠나 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다른 도시에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녹음 13장에서 베드로도 질문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을 잘 믿지 못하는 깨달음이 둔한
자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알 때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었는가?
3. 세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데, ‘의심많은 제자 도마’로 우리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와 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완고하게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다.
성경은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마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믿기 전에 부활하신 자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도마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다시 보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죽지 않으셨음을 알기 원했다.
의심과 실망 가운데 있던 도마는 7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말한 것이 실제로 사실이었나를 알기 원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일주일이 지체되었다.
그동안 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른 제자들에게는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즐거운 일주일이었지만 도마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일주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느꼈으므로 그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4. 네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 갑자기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가운데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의 손을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직접 넣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도마는 무릎을 꿇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는 말씀으로 이전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데 대한 꾸지람을 하신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에게까지 찾아와 주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때로는 지체하시며, 때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인과 가정, 교회를 방문하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가치 있게 보신다. 이에 도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도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려주는 요한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도마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직업도 같았다. 또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요한은 특별히 도마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다.
도마에 대해 변함없이 묘사되고 있는 특징은 우울하고 의심 잘하는 그의 성격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경험은 예사로이 할 수 있다. 그는 결코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악한 불신의 마음”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의심과 싸웠으며 그런 의심들을 과감히 물리쳐서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으레 도마를 생각할 때면 “의심 많은 도마”라는 상념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그러하고 또한 주석가들도 “도마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것까지도 의심하는 자”라고 예사로 논평을 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도마는 성격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누구와 함께 융화되기 어려웠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보니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과 쉽게 융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기질상 쾌활하거나 명랑하기보다는 다소 우울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냉담하게 혹은 절망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질문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고 확실하게 하려는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실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난에 도전하고 정면으로 역경을 돌파하고 시련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었던 도마는 분명히 용기 있는 제자였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스승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질문이 없는 조직이나 공동체는 퇴보하거나 실패하기 쉽다. 도마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의문을 가지고 그대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올바른 지식과 인식을 얻고 전달하는 완전한 방법은 바른 질문에 있다.
도마의 오랜 의심은 드디어 강한 믿음으로 변했다. 그의 의심만큼 신앙도 깊어졌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 그리고 자신의 삶에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 이후 도마는 주님을 위해 능력 있게 사용되었다. 염세주의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제자였던 도마가 열정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이란)에 교회를 설립했고 나아가 인도에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였으며, 인도 마라폴에 묻혔다. 그곳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여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 속속 드러나고 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고 믿는 믿음도 좋으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도마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혹 이적을 한 번 체험해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기억하여, 우리 성도들은 보지 못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복된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자.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도마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된 삶을 담대하게 살았던 것처럼, 비록 우리 자신 역시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확증하고 점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은혜의 자리를 찾아라
우리에겐 언제나 익숙한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앉는 자리, 내 눈에 보여지는 자리입니다. 눈에 띄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자리도 있고, 겉으로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비교, 불만족으로 인해 내가 숨기고 싶은 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며 섬길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갈 것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고자 하는 마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겸손은 내가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주신 능력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
라파엘 메리 델 발(Rafael Merry del Val, 1865-1930) 추기경의 겸손의 기도(Litanies of Humility) 의 일부입니다.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사랑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존경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이 기도문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우리의 이런 욕구는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자리 배치였습니다. 이러한 배치 원리는 오늘날 경쟁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비행기 안에도 좌석에 따라 등급이 나눠져 있고, 영화 시사회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자리가 다르게 배치됩니다. 당시 로마의 영향을 받은 유대사회에도 식탁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존경 받는 손님이 앉을 자리를 별도로 준비하고, 삼면의 중앙자리가 가장 지위가 높은 자리였습니다.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초대 받은 바리새인들은 서로 주인의 눈에 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 속에서 말씀하신 “높은 자리”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권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자리입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낼 실력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그 자리로 가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의 삶이 바뀐 것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높은 자리나 끝자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 9-10)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곳,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까지 함께 갑시다. 서로의 약함이 조금은 불편해도 품어줄때 우리는 잔치의 은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자랑하고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 안에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해 경멸하고 박해하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나의 공로와 이름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간 훈련을 받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서로 높아지려 다투지 않았습니까?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은혜가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평가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깨우고, 주님을 닮아가도록 행동하게 합니다. 만약 은혜는 없고 율법과 형식만 의지하면, 금식과 기도, 전도와 같은 행위도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영혼이 건조해집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가 아니라 주를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 붙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한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나약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낮아지는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깊어지는 시간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서 실력 있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일상의 평범한 시간속으로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삶 전체의 자리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자리에서 마음이 지쳐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주를 찾는 마음에 진실한 믿음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주님과 만나는 자리는 새힘이 임하는 자리입니다. 사모함과 무뎌짐 사이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폴트립은 '우리의 과거의 후회와 회한을 예수님의 보혈이 완전히 덮어 가려주었다고 말하며 이제 더이상 과거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바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폴 트립의 365 아침 묵상)
일상의 시간에서 거룩함은 주님과 친해지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인간의 본성과 충돌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서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지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관계를 풀어가는 일 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힘을 그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참된 겸손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삶이 때때로 흔들리거나 불안한 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좁은 길로 걷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참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모두가 허물과 죄가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과 같았고, 병들어 걷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볼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갚을 길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갚을 능력이 없는 염려에도 눌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8-11 절 비유의 대상이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12절부터는 초청하는 자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점심으로 번역된 ‘아리스톤’은 일반적인 식사 자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즉 일상에서 크고 작은 식사를 베풀때에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과도 비슷합니다. “마 6:1 “남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일들, 이름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입니다. 14:29 여러분과는 달리 토지를 나누어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나,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상을 받게 될 그 시기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행한대로 받게 될 날입니다. 복이 될 시기는 부활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활의 때에 임할 복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게 될 것이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고통과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는 이들, 갈길이 보이지 않아 소망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초대를 망설이는 사람들, 학업과 직장, 가정의 자리에서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버티고 견뎌내지만 여전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지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식 안에 자비의 삶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 삶이 성도에게는 복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부르심 가운데 허락하실 복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선수들의 수고와 땀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사람의 넉넉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4장 본문에 이어지는 또 다른 잔치 비유에서는 주인이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구실을 대면서 거절했습니다. 밭을 샀으니 가서 밭을 보아야 하겠다며 생계와 자기 일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장가를 들었으니 해야 할 책임 때문에 갈수 없다고 거절하고, 장사를 시작했으니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잔치 자리를 거절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만 앉고 싶어 합니다. 일부러 불편한 자리로 찾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교와 직장, 가정과 교회 안에서 잘 살아가고는 있지만 여기에 삶의 책임의 무게가 더해지면 가끔은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광야의 시간을 통하여 버거웠던 눈물의 자리, 불안과 외로움의 자리가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면, 영혼을 살게하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은혜의 자리, 자비의 자리는 비교와 경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낮은 자리에서 눈물로 드리는 믿음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마음 뒤에 감추어진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혼인잔치의 진정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인정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축복에 참여하게 될 의인들의 자리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계명(Ten Commandments)
십계명(十誡命, 히브리어. עֲשֶׂרֶת הַדִּבְּרוֹת 아세레트 하디브로트, 라틴어. Decalogus 데칼로구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승영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복음의 원리이다.
주님은 고대에 모세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으며(출 20:1-17), 후일의 계시에서 그것을 다시 언급하셨다.
십계명은 복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복음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쉽게 한다.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신조
- 사도신경(복음의 7대 연합이 담겨진 내용)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의 하나로 주로 서방교회에서 기도문으로 활용한다.
'로마신조'서 유래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문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과 달리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도신경(使徒信經), 사도신조(使徒信條), 종도신경(從徒信經)
서방교회의 주요 기독교 교파가 사용하는 신앙 고백문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교의를 요약 정리하고, 초기 교부들과 공의회 등이 재확인하고 천명한 주요 교리 해석에 대해
동의하며 이에 대한 믿음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대신하여 암송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은 동방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의 고유한 전승이다.
본래 로마
지역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문에 기초하여 발전했다고 추정한다.
하느님의 전능함, 창세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죽음의 과정과 부활, 승천, 심판에 대한 예언, 성령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차례로 약속한다.
2세기 무렵부터 영지주의 및 몬타누스주의 등 이단 사상이 대두되자 기독교가 신앙을 정립하고자 정했다고 보고, 이 신조에 의거하여 이단을 구분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파문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외워 이에 대한 믿음을 선서하지 못하면 곧 이단이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효과적인 신앙 검증 도구로 기능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며, 사도의 신앙고백이라는 말을 사도적 권위의,
즉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여 권위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사도신경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방으로 선교를 위하여 흩어지기 전에 한 구절씩 붙여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도
이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십계명(Ten Commandments)
십계명(十誡命, 히브리어. עֲשֶׂרֶת הַדִּבְּרוֹת 아세레트 하디브로트, 라틴어. Decalogus 데칼로구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승영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복음의 원리이다.
주님은 고대에 모세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으며(출 20:1-17), 후일의 계시에서 그것을 다시 언급하셨다.
십계명은 복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복음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쉽게 한다.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은 기독교의 3가지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요약이며, 십계명은 우리가 행해야 하는 행동의 요약이고,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비전의 요약입니다. 즉,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십계명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며, 주기도문은 기독교 비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의 믿음을 대표하며, 십계명은 기독교인의 사랑을 대표하며, 주기도문은 기독교인의 소망을 대표합니다.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이라는 기독교의 3대 보물을 전수받고 전달해 주는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은 초대교회 때부터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내용이며, 특별히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교인들을 훈련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입니다. 루터의 유명한 대소교리문답은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치는 것이고, 칼빈의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초판도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대륙의 개혁파 교회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교리문답서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도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치는 것이며, 영미 장로교회 전통의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서도 사도신경의 확장된 교리 내용과 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우리 한국교회에도 이어져 한국교회가 공적으로 사용하는 찬송가의 표지에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인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주일 오전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주기도문을 찬송으로 만들어 부르거나, 축도를 하지 않는 예배 시간의 끝을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중요성을 잘 몰라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거나, 의미를 잘 모른 채 습관적으로 예배에 사용하는 안타까운 일들도 많이 발생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선배 기독교인들에게 전수받은 기독교의 3대 보물인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잘 사용해 우리 삶을 기독교인다운 삶으로 만들어 가야 할 뿐 아니라, 우리 후배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3대 보물을 잘 가르치고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필로그 중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입문단계에서 공부해야 하지만 사도신경의 내용을 완전히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신경에 담긴 진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한평생 공부한다 해도, 한평생 체험한다 해도 다 이해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책을 다 읽은 분은 한 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반복해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기초와 기본기가 튼튼해야 합니다. 크고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은 비단 건물을 세우는 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운동·예술 등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려면 영적 성장을 위한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바르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기독교 신앙의 알파벳·구구단·천자문 같은 것입니다.
기초적일수록 반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할수록 반복을 통해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책의 독자가 누구든지 간에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 책에 담긴 내용이 내 신앙생활에 피와 살이 될 때까지 읽고, 읽고, 또 읽어 보십시오. 읽으면서 이 책에 담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서서히 성경의 내용이 열릴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전통에서 이 기도문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일의 예배와 개인 기도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9-13과 누가복음 11: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 영어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sins as we forgive those who sin against us.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e kingdom, the power,
and the glory are yours now and for ever. Amen.
사도 신경 (The Apostles’ Creed)
사도 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요약한 신앙 고백문으로, 초대 교회에서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만들어졌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신경 영어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s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십계명 (The Ten Commandments)
십계명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도덕적 규범입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의하며, 신앙 생활의 기본이 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십계명은 총 10가지로, 앞의 네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나머지 여섯 가지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룹니다.
십계명 영어
1.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2.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3. You shall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in vain.
4. Remember the Sabbath day, to keep it holy.
5.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6. You shall not murder.
7.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8. You shall not steal.
9. You shall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your neighbor.
10. You shall not covet.
영어 암기의 팁
이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영어로 암기하는 데는 몇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
짧은 구절로 나누어 암기하기: 한 번에 전체를 외우기보다는, 구절을 짧게 나누어 반복적으로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
소리 내어 읽기: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암기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발음 연습도 함께 할 수 있어 영어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됩니다.
-
문맥과 의미 이해하기: 단순히 외우기보다는 각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미를 알고 외우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 일상 속에서 반복하기: 아침 기도 시간이나 잠들기 전 시간을 활용해 매일 반복적으로 암기해보세요. 지속적인 반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암기 방법입니다.
마무리
이제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영어로 외우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나요? 3분의 투자로 신앙의 기초를 영어로 암기할 수 있다니 정말 멋지지 않나요? 매일 반복하며 신앙과 영어 실력을 동시에 키워보세요. 당신의 영적 여정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다섯 가지 기둥
개혁주의 5대 교리 TULIP 5주 교재
교의의 필요성
첫째, 송영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의와 신앙을 별개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교의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오고 바른 사고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둘째, 복음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교의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의를 통해 복음을 논리적으로 잘 전달하고 불신자들의 질문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단 사이비들이 그들 자신의 교리를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셋째,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에는 여러 교파들이 난무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신학 그리고 번영신학 등이 교회를 잠식하여 그 폐해가 심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들도 그 어느 때보다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 가운데 바른 진리를 분별하고 그 진리가운데서 살아가려면 교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넷째, 사랑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요 14:21). 어떤 이는 교리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계명(율법)을 지켜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 가운데서 그분의 계명을 실현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고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사랑을 완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대 교리 배경
종교개혁
로마제국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했고 정치적 입장을 따라 기독교를 적극 우대하고 지지하였습니다. 이후 교회는 빠른 속도로 바른 신앙을 벗어나 세속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 중심에는 성직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 전념했으며 심지어 직분을 돈으로 주고 사는 성직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성직자만의 전유물로 전락시켰고 대신 사람들에게는 비성경적인 교리를 설파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 때 로마의 주교가 교황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사회정의구현 등에 힘을 쏟으며 교회 지도자로서 역할을 비교적 잘 감당했지만 뒤를 잇는 교황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권력과 세력을 불리는데 집중하며 교회를 타락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약 10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역사학자들은 이 기간을 중세 종교의 암흑기라 부릅니다. 이 시기에 신인협동사상, 연옥사상, 성물숭배, 성인숭배 등과 같은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사상들이 교회 문화와 성경 교리를 변질시켰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욕망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십자군 전쟁 같은 참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며 교회를 진리 위에 다시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랑스의 발도,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와 영적회복운동을 시도하였다가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6세기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입니다. 특히 이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비판하였고 성도들에게 성경적 교리를 가르쳐 교회를 바른 진리 위에 세워나갔습니다.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가장 큰 수확은 성경의 권위를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다시 일반 신자들의 손에 들려주었으며 성경이 본래 가르치는 바를 명확히 풀어 해석하여 신앙의 오류들을 바로 잡아나갔습니다. 그 가운데 신학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성경의 핵심 사상과 원리들을 올바르게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남겼습니다. 그는 제네바라는 도시의 종교개혁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사역기간 동안 여러 가지 역경과 시련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주석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겨 교회가 올바른 신학과 교리 위에 세워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칼빈이 개혁주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단지 칼빈이라는 한 개인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을 주도했던 선배들의 정신과 신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들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학문 또는 신앙을 말합니다. 아울러 개혁자들의 중요한 기본적인 정신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핵심 사상 역시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5대 교리
치열했던 종교개혁 기간이 지나고 개신교회가 유럽지역에 널리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무렵 일부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
레이던 대학의 신학교 교수였던 야코부스 알미니우스는 본래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연구해 재반박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며 자신만의 교리를 설파하고 가르쳤습니다. 비록 그는 1609년에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개혁주의 교리에 반대하는 5가지 항목을 네덜란드 정부에 항의서 형식으로 전달하였고 교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누구의 가르침이 보다 성경적인지를 분별하기 위하여 1618년
도르트에서 목사와 신학자들로 구성된 국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1618-1619). 오랜 회의 끝에 도르트 총회는 종교개혁가들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바른 교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항론파들의 다섯가지 주장을 반대하는 도르트 신조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신조에 담겨진 다섯 가지의 핵심주제를 요약해 개혁주의 5대 교리라고 하며 특별히 영문의 첫 글자를 따서
TULIP 교리라고 부릅니다.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1.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받고 자신의 의지를 오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반역하였고 그분과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2.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총명과 선하고 거룩한 성향과 능력들을 전적으로 상실하였습니다. 약간의 본성의 빛이 남아있어 상대적으로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에 이르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3. 인간은 그 마음과 생각이 부패해 선을 선택할 수 없고, 그 본성이 악으로 심히 기울어져 있어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항상 반복하여 짓습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4.
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 죄를 전가 받은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인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으며 자신들의 죄의 책임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적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5. 인간의 의지는 사망의 권세 아래 속박된 의지이며 그 자신의 악한 본성 안에서만 스스로 자유 합니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1.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목적과 기쁘신 뜻 가운데서 창세전에 모든 일을 작정(계획)하셨으며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들 역시 그분의 작정 가운데서 창세전에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은 영원한 멸망 가운데 유기할 자들도 함께 예정하셨습니다.
3.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여서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며 구원에 이를만한 능력이나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4.
하나님께서 인간의 거룩하고 의로운 행위나 믿음을 미리 아시고 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에 기초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자를 스스로 선택하시며 또한 선택하신 자들을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흠이 없이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5.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음으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겸손하며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하고 그분의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지속적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6. 우리는 도무지 구원 받지 못할 불의한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1.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죄의 대가로 생명(피)을 요구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영원히 완전하게 속량할 속죄의 피를 요구하셨는데 인간 스스로는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3.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친히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의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며 대신 예수님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됩니다.
4.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로 제한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충분치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분의 경륜을 따라 제한하신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사역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함께 작정 되었으며 예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위하여 아무런 낭비 없이 예비 되었고 또한 성취되었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1.
인간은 구원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스스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역사하사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것을 믿게 하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합니다.
2.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생명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효력 있는 구원의 은혜를 그들에게 적용하시지 않고 지나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작정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복음을 듣게 하시고 효과적으로 부르시며 그리스도의 믿음과 회개를 부여하셔서 대속의 은혜를 적용하여 주시고 마침내 중생(거듭남)에 이르게 하십니다.
4. 중생은 사람의 의지와 결심에 따라 일어나지 않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력으로 역사하신 자들만이 마침내 그리고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중생하게 합니다.
5.
하나님은 절대로 구원을 위하여 인간과 협력하거나 그들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어떠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1.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2.
본질적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음으로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사단의 유혹을 받게
되며 때로는 죄 가운데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심각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며
한동안 그 은혜의 효력을 경험할 수 없게 만듭니다.
3.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때로 죄에 걸려 넘어져도 하나님은 양자됨의 지위를 박탈하지 않으시며 한번 구원하기로 정하신 자들은 결코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4. 성령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히 돌이켜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며 회개한 자를 용서하시고 다시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5.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구원에서 탈락할 정도의 심각한 죄를 짓도록 방치하지 않으시며 시험을 주시더라고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자존성(自存性)
영원성(永遠性)
인생살이 네 가지 소중한 지혜
1. 나도 꼭 죽는다.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별로 다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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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에서 말하는 健康 10訓
첫째 : 소육다채(小肉多菜)
육식을 적게 하고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기하고 있지만 재가 불교 신자들은 가능한 한 육식을 피하고 먹는다 하더라도 적게 먹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 대신 채소를 많이 먹어서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무기질을공급할 것을 권하고 있다.
둘째 : 소식다작(小食多嚼)
가능한 적게 먹고 잘 씹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장수의 비결이 바로 적게 먹는 소식에 있다.
주역에서도 '복육분천수'라 하여 자기 식량의 6할만 먹으면 하늘이 준 수명까지 살 수 있다 했다.
이와같이 적게 먹되 그것도 소박하게 식사하라 권하고 있다.
적게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성인병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의학의 지론이다.
셋째 : 소염다혜(小鹽多醯)
염분을 적게 먹고 식초는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금은 만병에 해롭다는 현대 의학적 해석으로 염분의 섭취를 줄일 것을 권장하고 있다.
염분을 적게 쓰고도 먹을 수 있게 하려면 식초를 조금 섞으면 염분이 적어도 간이 맞는다는 말이다.
염분을 적게 먹는 방법이다.
넷째 : 소의다욕(小衣多浴)
옷은 가능한 한 적게 입고 목욕은자주 하라는 말이다.
옷을 많이 입으면 질병을 방어하는 면역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적게 입되 목욕은 자주 하여 혈액 순환을 촉진할 것을 권장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다섯째 : 소번다면(小煩多眠)
근심은 적게 하고 잠은 푹 자라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좋은 일도 많겠지만 어려운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 스트레스를 빨리 풀지 않으면 그것이 병을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근심을 빨리 잊어버 려야 한다는 충고이다. 그 대신 피로를 회복하는 데는 잠을 많이 자야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 소욕다시(小慾多施)
욕심을 적게 하고 남에게 많이 베풀라는 말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근심과 불안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건강 장수의 비결로 마음을비우라 하지 않던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어차피빈손으로 갈 길인데 먹고 살 만큼만가지면 될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가 그렇고, 예수님의사랑이 그렇다.
남에게 베풀면그것이 하늘에 닿아 복록수를 누린다는 얘기다.
일곱째 : 소당다과(所糖多果)
설탕은 적게 먹고 과일은 많이 먹어야 좋다는 말이다.
설탕은 비만 등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에 적게 먹되 과실을 많이 먹음으로써 우리에게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무기질의 섭취를 충분히 공급하라는것이다.
여덟째 : 소차다보(小車多步)
가능하면 차를 적게 타고 많이걸으라는 말이다.
유산소 운동 중에 최고가 걷기이다. 결국 차를 적게 타고 많이 움직이라는 말로서 걷기운동을 권장하고 있다.
아홉째 : 소언다행(小言多行)
가능하면 말은 적게 하고 행동으로 실행을 많이 하라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침묵은 금이라고 했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가볍다는 인상을 준다.
그 대신 말보다는 실천에 중점을 두고 생활을 하면 실수가 적고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열째 : 소분다소(小憤多笑)
화는 적게 내고 많이 웃으라는 말이다.
화를 내면 남에게도 피해를 주겠지만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경고이다.
대신 많이 웃으면 건강에도 좋고 가정도 화목하며 직장도 밝아진다.
헤르만 헤세의 기도
나로 하여금 나 자신에게 절망토록 하소서.
그러나 주님을 향해서는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방황의 탄식을 모조리 맛보게 하소서.
온갖 고뇌의 불꽃으로 나를 사르시고
나로 하여금 온갖 욕됨을 받게 하소서.
내가 자신을 유지하는 일을 돕지 않게 하시고
내가 자신을 확대하는 일을 돕지 않게 하소서.
하지만 내 자아의 모든 것이 소멸했을 때면
그것을 행하신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과
주님께서 불길과 고뇌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쁘게 멸망할 수 있고
기쁘게 죽겠으나
나는 주님의 품이 아니고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Hermann Hesse
Gebet
Laß mich verzweifeln, Gott, an mir,
Doch nicht an dir!
Laß mich des Irrens ganzen Jammer schmecken,
Laß alles Leides Flammen an mir lecken,
Laß mich erleiden alle Schmach,
Hilf nicht mich erhalten,
Hilf nicht mich entfalten!
Doch wenn mir alles Ich zerbrach,
Dann zeige mir,
Daß du es warst,
Daß du die Flammen und das Leid gebarst,
Denn gern will ich verderben,
Will gerne sterben,
Doch sterben kann ich nur in dir.
절영지회(絶纓之會)
▪남의 잘못을 탓하지 마라!
▪남의 단점을 보지도 마라!
▪나의 단점을 정당화하지 마라
▪오로지 나의 단점을 고치기에 힘쓰라!
위의 말은 경남 양산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통도사(通度寺) 경내 곳곳에 걸려 있는 검은 나무판의 경구 중 하나입니다.
춘추시대 중국 초나라 장왕의 일화에서 만들어진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纓영 : 갓끈
장왕이 나라의 큰 난을 평정한 후, 공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신하들을 아끼던 장왕은 이 연회에서자신의 후궁들이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연회가 한참 진행되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연회장의 촛불들이 일순간에 꺼졌습니다.
그 순간 한 여인의 비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여인이 앙칼진목소리로 크게 외쳤습니다.
어둠을 틈타서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고,자신이 그 자의 갓끈을 뜯어 두었으니,
장왕께서는 어서 불을 켜서 그 무엄한 자를
처벌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의 후궁을 희롱한 무례한 신하가 괘씸하고,자신의 위엄이 희롱당한 것 같은 노여운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 장왕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이 자리는 내가 아끼는 이들의 공을치하하기 위해서 만든 자리이다.
이런 일로 처벌은 온당치 않으니 이 자리의모든 신하는 내 명을 들어라!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갓의 갓끈을모두 잘라 버리도록 해라!
지금 일은 이 자유로운 자리에 후궁들을 들게 한나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이니 불문토록 하겠다.”
장왕은 먼저 후궁들의 마음을 다독여 연회장에서 내보냈고,모든 신하가 갓끈을 자른 뒤에야 연회장의 불을 켜도록 했으니
범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고,
자칫하면 연회가 깨어지고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는
상황이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왕의 여인을 희롱한 것은왕의 권위에 도전한 역모에 해당하는 불경죄로 죄인은 물론
온 가문이 능지처참을 당할 수 있는 중죄였습니다.
그렇지만 신하들의 마음을 달래는 치하의 연회 자리에서일어날 수 있는 실수로 용인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놀랍게도 그 일이 자신의 경솔함에서빚어진 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장왕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自尊感)이 충만한사람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균형 잡혀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지나치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의 상황으로 보고,더는 자의적인 확대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 해 뒤에 장왕의 초나라는 진나라와 나라의 존폐가달린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 전쟁에서 장왕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장왕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초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온 몸이 붉은 피로 물들며 흡사
지옥의 야차처럼 용맹하게 싸워서
장왕을 구하고 초나라를 승리로 이끈 장수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왕은 그 장수를 불렀고용상에서 내려와 그 손을 감싸쥐고 공로를 치하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 장수는 장왕의 손을 풀고 물러나장왕에게 공손하게 큰 절을 올립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 죄를 지은소신을 폐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소신은 새롭게 얻은 제 목숨은폐하의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고,
오늘 이 전장에서 제 목숨을 폐하를 위해서
바칠 각오로 싸웠습니다.”
“절영지회(絶纓之會)” '갓끈을 자른 연회'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우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11월 26일(수) 요한복음 20-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는 자가 되라(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Stop doubting and believe.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571)는 고전 6:6;14:22과 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피스토스. 4103)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전 15:58;골 3:15;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 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믿을 수 없는
믿음 없는
요20:27
-
Pronunciation [ apistŏs ]
- Etymology
- 1[부정불변사]과 4103에서 유래
-
1.믿을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행26:8.
-
2.믿음 없는, 믿지 않는, 마17:17, 막9:19, 눅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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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도마의 불신] 요20:27, 고전6:6, 7:1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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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마지막 심판 때의 비난] 눅12:46.
-
c.[기타] 고전7:12,14, 14:23, 고후6:14, 딤전5:8, 딛1:15, 계21:8.
-
Related Words
-
관련 성경믿음 없는(마17:17, 막9:19, 요20:27), 신실하지 아니한(눅12:46), 믿지 아니하는(고전7:12, 14:23, 계21:8).
믿을 만한
마25:21
고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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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nunciation [ pistŏs ]
- Etymology
- 3082에서 유래
-
I.[수동]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할 만한, 믿을 마음을 일으켜 주는
-
1.[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
a.[인간에 대해] 마25:21, 눅12:42, 히2:17.
-
b.[하나님에 대하여] 고전1:9, 고후1:18, 히10:23.
-
-
2.[사물에 해하여] 딤전1:15, 딤후2:11.
-
-
II.[능동] 신임하는, 신뢰하는, 믿는, 믿음을 가진, 믿음이 가득한, 믿음 있는, 갈3:9, 요20:27, 행16:15.
Related Words
-
관련 성경충성된(마24:45, 딤전1:12, 계1:5), 충성하는(마25:21, 계2:10), 진실한(눅12:42, 엡6:21), 미쁜(행13:34, 고후1:18, 살후3:3), 믿는(행16:1, 고후6:15, 딤전4:3), 신실한(엡1:1, 골1:9, 히3:2, 벧전5:12, 계22:6). [명] 충신(계19:11), 충성(고전4:2), 믿음(요20:27, 딤전4:12), 신자(행10:45).
- 도마의 의심: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을 넣어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 예수님의 재등장: 이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도마에게 "내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라 또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믿음의 축복: 이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4~29)
어떤 노부부가 평생을 자녀가 없이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너무 적적해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고아원에 가서 마땅한 아이로 골라서 입양을 했습니다. 아이가 없던 집에 아이가 오니 활력도 생기고, 생기가 나고,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좀 거칠었습니다. 좀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부부는 과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늘 먹을 과자를 탁자위에 올려놓습니다. 어느 날 과자가 자꾸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너 혹시 과자를 먹었니?” 물었습니다. “저는 먹지 않았는데요.”라고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너 혹시 어디에 치워두었니?” “전 만지지도 않았는데요.”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노부부의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노부부는 “분명히 이 녀석이 먹거나 감추어 두고는 모른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 아이를 불러놓고 호되게 꾸짖고 회유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도 솔직히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겠다. 네가 가지고 갔지! 네가 치웠지!”라고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저는 먹지 않았어요. 저는 손도 안됐어요.” 끝까지 고집을 피웠습니다. 이 노부부는 다른 것은 다 용서하지만 끝까지 고집피우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고아원에 다시 대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대려다 주고 산만해진 집안 대청소를 하다 보니 장롱 뒤에 무언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만히 보니 과자이었습니다. 과자를 옮겨 놓은 것은 그 아이가 한 일이 아니라 쥐가 한 일이었습니다. 쥐가 과자를 가져다가 이리 저리 뜯어먹고 장롱 뒤에 쌓아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달려가서 그 아이에게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다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너를 의심했단다.” 이 아이는 “저는 다시는 가지 않을거예요. 저를 믿어주지 않는 곳에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왜 의심을 할까요? 자신의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이 늘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오솔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오솔길을 산책하는데 아직은 해가 뜨지 않고 좀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뱀 한 마리가 또래를 틀고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뱀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곳에 뱀이 똑 같이 있는 것입니다. 또 피해갔습니다. 사흘째도 그 자리에 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돌아 갈 수 없어. 내가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야지.” 생각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뱀을 힘껏 내려쳤습니다. 그런데 뱀이 아니었습니다. 밧줄이 감겨져 있는 것이 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 이 철학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나를 속였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 옳은 것 같지만 눈으로 보는 것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때부터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도마의 실수담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에 빠진 도마가 믿음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제목을 붙인다면 ‘믿음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문을 잠그고 불안해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제자가 없었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아마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몹시 상심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장담했던 인물이 도마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인가 가신다고 하니 “주여 어디 가시니이까?” 질문했던 인물도 도마입니다. 도마가 나중에 돌아와 보니까 제자들이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셔서 여기에 오셨다.” 도마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손에 난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 그 옆구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일주일후에 예수님은 도마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마야! 나를 보고 확인하거라. 네 손을 가지고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아라. 내 손으로 내 옆구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도마는 무너지게 됩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 안에 큰 조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손을 들고 도마에게 보이시는 장면입니다. 도마가 이상한 눈초리로 손가락을 가지고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는 장면을 조각으로 만들었는데 도마의 인상이 아주 묘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에 넣었는지 아닌지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상처에 손을 넣어 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넣지 않아도 그가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앞에서 무너집니다. 불신의 벽이 다 무너집니다. 의심의 안개가 다 걷혀집니다. 그리고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부활이후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고백의 절정입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그 고백을 뛰어넘는 고백이 이 고백입니다. 그리고 도마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도마는 이제 의심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름을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라고 말합니다. 이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쌍둥이 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원어를 풀어 설명하기를 이 말은 ‘의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마는 실증적으로 만져 보아야하고, 눈으로 보아야 믿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는 사람이었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보고 불신앙의 벽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도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이끌림을 받아 주후 52년에 남인도로 넘어가서 교회를 세웁니다. 1500년경에 유럽의 군인들이 남인도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곳이 바로 도마교회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도마는 인도만이 아니라 중국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남인도 지역에는 성 도마 교회 소속이라고 믿는 신자가 약 150만 명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2000년 전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도마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가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교우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일예배 드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외에
저녁예배와 수요예배는 다 담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늘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피합니다. 그러니 늘 의심하게 되고 믿음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이하에 보면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다시 말하면 모이기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왜
모여야 할까요? 모여야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이라도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오늘 도마의 문제는 그 자리에 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공부할 때 수업시간에 졸고 있던 학생이 꼭
수업이 끝날 때쯤에 질문을 합니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만이 아닙니다. 도마의 잘못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못 보아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믿어야 합니다.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져보지 않으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도마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마의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믿지도 못하면서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못 믿겠으니 못 믿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은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보지 못했다고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님에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보았습니까?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이 그분이 나를 낳았다고 하고, 나를 키웠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을 내가 언제 보았습니까?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을 다 믿습니다. 내가 죽어 보았나요? 안 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죽을 것 이라고 믿게 됩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보았다면 믿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재미있는 집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노총각 한사람을 불러서 “자네 결혼하지 않아야 하나?”라고 물었습니다. “예! 결혼해야 하는데 마땅한 신부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럼 내가 한사람 소개해줄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소개해주시면 무조건 가겠습니다.” 라고 노총각은 대답했습니다. “그럼 만나보겠나?”라고 목사님이 물었을 때 노총각은 “만나긴 뭐 만나보겠습니까? 목사님이 소개해주면 그냥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또 다른 처자가 있어서 불러 “자네도 결혼해야지?” 그 처자도 “예! 목사님! 신랑감이 없어서 못하는데 신랑감만 있으면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소개해줄까?”라는 물음에 “소개해 주세요.” “내가 만나게 해줄까?” “만날 필요가 있나요? 목사님이 보셨으면 됐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신랑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처음 얼굴보고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잘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결혼을 하려면 만나 봐야 합니다. 대화해 봐야 합니다. 사귀어 봐야 합니다. 심지어는 좀 살아봐야 합니다. 살아보고 결혼해서 1년, 2년 지나고 나면 해어진다고 난리입니다. 우리가 한 달 살아보면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 달 살아보고 결혼해서 잘 맞으면 그것이 맞는 것입니까? 인간이 느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듣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을 듣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착하다 나쁘다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할 일이지 내가 판단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모르면서 남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과거를 어떻게 다 알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무엇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보고도 믿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꼭 봐야 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역사 속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올 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어달라고 했을 때 가 그냥 보내주지 않으니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서 먹을 물이 없게 했습니다. 또, 나일강에서 개구리 때가 나와서 온 집안에 개구리가 가득하게 됩니다. 독충이 날아옵니다. 파리 때가 득실거립니다. 이가 집안에 천지입니다. 몇일동안 흑암이 계속됩니다. 또, 장자가 죽습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정도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또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고,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믿음이 없었습니다. 불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기적의 역사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보다 위대한 분이 없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이끌어 내셔서 광야로 이끄신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 내가 간담이 녹는 줄 알았다.” 그는 보지 않았지만 소문만 듣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탐을 온 이스라엘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북한에서 건너온 간첩을 두 명이나 우리 집에 숨겼다가 내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보지 못했지만 소문만 듣고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은 사람이 복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때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지만은 아직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은 무덤에 계셔서 말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분이 살아계셔서 내게 능력을 주시고 내 오른손을 잡아주시는 그런 예수님을 여러분이 믿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어떤 분들은 믿는 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능력 안에 살아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삶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늘 의심합니다. 늘 흔들립니다. 늘 회계합니다. 늘 뒤돌아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확신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에 속하십니까?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면 아직도 무덤에 있는 시신의 예수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가 입학한 신학교에 성서 해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신학의 학설을 소개하다보니 어떤 신학의 학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인간의 말도 있다는 해석학을 듣고 낙심이 되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져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빌리 그래함아! 너는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선포하라.” 그래서 빌리 그래함은 다시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라고 선포합니다. 내 철학이나 내 논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할 때 그것이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새워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본적이 어디 있습니까?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절망하던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급한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고자 한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는데 그중에 절반이상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50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서 증언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도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오늘날도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죠?
윌리암 크리에거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활신학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유명한 무신론자와 공개 토론회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그것을 가지고 공개 토론을 벌였습니다. 회당에 8000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가 승리 했을까요? 이 신학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를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법학적으로 다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제시는 너무나 빈약했다고 합니다.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분명한 증거위에 서있다는 것을 인증했다고 합니다. 100개의 라디오로 그것이 중개되었고 그곳에 참석한 불신자 47명이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지성인이고 석학인 이어령 씨가 근래에 기독교에 귀화할 것을 약속하고 7월에 세례받기를 공개적으로 기자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김용옥 교수 같은 사람은 요한복음 주석이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폄하하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이어령 씨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딸이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미국에 유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고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어느 날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했는데 재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 수술을 했는데 재발을 했습니다. 직장도 못나가게 되었고, 어린 아들도 불행하게 척수 자폐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망막이 파괴되어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어령 씨가 딸이 치료받고 있을 때 딸에게 가면 딸이 아버지를 대접하려고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숟가락이나 밥그릇을 재대로 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망막을 치료하려고 한국에 왔더니 당신의 망막은 다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수술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는 어느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이어령 씨가 “우리 딸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나도 섬기겠습니다.”라고 기자와 인터뷰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은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분이 만약에 부활하지 못했다면 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살아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여러분! 믿음의 부활을
쓰레기통에 던지지 마십시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 믿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어려운 세상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가는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 도마 혼자만 그 자리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도마가 그 자리에 없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20:24)고 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다가 주님을 뵈올 수 있었으며 믿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는 자가 믿는 자로 변하다
우리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 때문에 도마를 의심하는 제라 라고 부릅니다. 도마에게 이런 별명을 붙일 때에, 도마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전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중생치 아니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것은 그 불신앙을 인하여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듣지 못해서 믿지 않았노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요3:16,17).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고 확신에 차서 도마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의심하는 반응을 나타내자 도마를 이렇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너 혼자 따로 있지 말고 우리와 함께 있어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만나보자 라고 했을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중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택자인가 보다 안믿겠다니 어쩔 수 없지 하면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배에 함께 참석하자고 권하고 안내해야 합니다. 모인 중에서 은혜 받아 믿는 자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도마처럼 의심에서 믿음으로 바뀌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확신과 관심이 도마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부활의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친히 주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도마에게 믿음의 근거로서 증거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증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육신의 귀로 주님을 음성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후에 그리스도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라고 했습니다.
도마에게 확신을 준 것은 그 손과 옆구리에 상처를 지니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된 후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도마로 하여금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한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도마야 네 손과 눈으로 내 몸의 상처를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의 손으로 상처를 확인하지 않고 확신하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구주, 다신 사신 생명의 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도마는 상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사망을 정복하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해 그 앞에 꿇어 엎드렸던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예수님을 하나님 으로 부르지 않았는데,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도마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이 칭찬하신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16:16)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 1:1에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9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도마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의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친히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증거해준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증거하여 주시고, 우리는 그 증거에 근거하여 우리의 주시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의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 (벧후1:21)인데,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이며 복되도다 라고 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성경에 기록된 증거를 그대로 믿는 복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1:8,9).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아무런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관적인 믿음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상을 본다든지, 어떤 음성을 듣는다든지, 이적들을 본다든지,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체험들을 인해 믿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믿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행하는 믿음이 더 참된 믿음이요 위대한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복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없는 자들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효과적으로 부인하기 위해 성경을 읽다가 도마처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 고백을 하게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받는 복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믿음 또는 믿다 라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89회나 나타납니다(마가복음에서는 18회, 로마서에서는 55회만 사용되었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축복들을 제임스 보이스는(그의 요한복음 주석에 보면) 열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요1:12).
2)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3:16,36).
3) 믿음으로 심판에서 구원받습니다(요5:24).
4) 믿음으로 영적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요6:35).
5) 믿음으로 부활에 참예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요6:40, 11:25,26).
6) 믿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요7:38,39).
7)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요11:40).
8)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요12:46; 요일1:5-10).
9) 믿음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요14:21; 히11:33-35).
10)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효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요17:20; 약5: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축복을 한 마디로 구원 영생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 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굉장히 크고 많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이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아무나 이 믿음을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믿는 길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약 성경(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며, 신약 성경(사도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증거의 말씀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해준다 할지라도 믿지 않습니다(눅16:31).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든지, 어떤 환상을 본다든지, 어떤 이적과 기사를 보면 믿을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많은 이적들과 기사를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들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증거를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는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도마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뵈올 수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증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우리는 요한복음 통해서 많은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많은 표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기에 충족한 증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고,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믿는 것보다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불변의 세 가지 진리 ☆
1.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나도 꼭 죽는다' 라고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 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파한들...
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하늘. 부모. 남편. 아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막아주지 못하고
대신 가지 못하고 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하루, 촌음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외길이다.
2.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의 법칙이다.
사랑하는 사람. 애인.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영화.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간다.
인생살이가 한때의 흐름인 줄 알라.
끄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초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3.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피하고 싶은 것들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바라지 않은 일도 종종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주기적 사이클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은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나가지만 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라.
팍스 로마나(Pax Romana)란 무엇인가?
) 로마사에서 약 200년 동안 지속된 기간으로, 증가하고 지속된 로마 제국주의, 상대적인 평화와 질서, 번영하는 안정, 패권적 권력, 지역 확장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는 내전과 전쟁, 특히 로마-페르시아 전쟁을 포함한 여러 분쟁도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는 원수정을 창설한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에 즉위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이 시대의 끝은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기 180년에 사망하면서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1]
“Pax Romana”.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팍스 로마나라는 표현이 왜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일까?
고대 로마사를 접하다 보면 '팍스 로마나'라는 용어를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평화로운 시대'로만 이해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정치적·사회적 함의가 큽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단지 고대 로마의 안정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제국이 어떻게 광범위한 지역을 오랜 시간 평화롭게 통치했는지를 탐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라틴어로 '로마의 평화'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 제국의 안정된 시기를 지칭합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치적 질서의 확립, 경제적 번영, 교역로의 안전 보장 등 복합적 요소가 포함된 시대적 특성을 함께 봐야 합니다.
이러한 평화는 로마 군단의 힘과 법률 제도의 정비, 관료 체계의 효율성 등에 기반하여 유지되었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본 평화의 실상
팍스 로마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로마 도로망의 확장과 치안 유지, 지중해 전역에서의 활발한 무역 활동, 지방 행정의 체계화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로마는 통일된 법과 화폐, 공공 인프라를 통해 광대한 영토 내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러한 실질적 변화 속에서 명확해집니다.
평화는 단지 군사적 정전 상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질적 향상과도 직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가 지속될 수 있었던 정치적 전략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황제들은 군사적 승리를 통한 위신 강화와 함께 내치 안정에 주력했습니다.
특히 원로원과의 권력 균형 유지, 황제 숭배를 통한 통합적 상징성 부여, 지방 엘리트층과의 협력 체계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정치적 측면에서 분석하면, 황제권의 안정성과 행정적 유연성이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기반 위에서 평화의 시대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이루어진 문화적· 경제적 발전
팍스 로마나 시대에는 예술과 문학, 건축 등 문화적 성취도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 공공 목욕탕, 개선문 등은 당시 공공 건축의 황금기를 보여줍니다.
경제적으로도 통일된 시장과 도로망을 기반으로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농업 생산성 향상과 도시 경제 성장도 촉진되었습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문화·경제적 답변은 바로 이런 풍요와 창조적 에너지의 시대라는 데 있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교훈과 오늘날의 적용 가능성
팍스 로마나의 사례는 오늘날 국제 정치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강력한 법치와 포용적 행정,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현대에 비추어 본다면, 지속가능한 평화란 단지 군사력만이 아니라 제도적·경제적 기반 위에 구축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평화가 남긴 유산을 다시 생각하며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단순한 고대사의 호기심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로마가 남긴 평화의 유산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제도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따라 산다
17세기의 유명한 수학자이면서 철학가이자 저술가인 파스칼은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팡세」라는 글 모음집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이 글을 쓴 동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친구에게 증명하고자 해서였다.
“마호메트가 한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에 불과하다.
마호메트는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예언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도 못하는 일을 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며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행은 천사를 닮고 싶어하면서도 짐승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된다.”
파스칼은 생각하는 과학자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생각이 없는 과학자, 생각이 없는 철학자, 생각이 없는 예술가, 생각이 없는 정치가를 생각해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특히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열심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생각은 진리를 향해야 한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계속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위대한 것이 나온다.
사람은 늘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을 만들었고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잘 아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이시다.
성경은 진리를 알 때 우리가 가장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생활의 만족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의 말씀이 이 땅에 가득 차게 하소서.
영적인 무지 가운데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저를 복음의 파수꾼으로 사용하여 주소서.
파스칼은 위대한 수학자 과학자 철학가였다. 그는 16세때 투영기하학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청년 때에는 계산기 수압기 등을발명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차원 너머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1654년 11월 23일 밤성경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깨닫고 진리를 탐구, 저 유명한[팡세]를 썼다. 이 날 그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Pascal은 인생을 도박 혹은 내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무신론 쪽 가설을 택하면 그 인생은 차갑고 어둡고 허무와 절망과 죽음 밖에 없는
진리
어떤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합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야돼요.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를 터득해야 지도자가 되는 것이죠.
11월 25일(화) 요한복음 18-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가 무엇이냐(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What is truth?" Pilate asked. With this he went out again to the Jews and said, "I find no basis for a charge against him.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본인을 진리로 보기도 하며, 그 외에도 참된 이치와 도리, 인생의 옳고 바른 방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철학, 논리학, 수학: 현실이나 사실에 일치하는 것, 또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진리로 봅니다.
-
종교적 관점:
- 신학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진리로 보며,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 참된 이치와 도리: 인생을 바르고 옳게 사는 방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 일상적인 의미: 사실에 대한 평가나 신의와 관련된 진실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궁극적인 해답: 진리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제공하며, 삶의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 자유와 구원: 기독교적 관점에서 진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요?
2천여 년 전, 거짓말을 일삼던 자들에 의해 진리가 재판에 회부되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실, 진리는 하루도 채 안돼 여섯 번의 재판을 받았는데, 그 중 세 번은 종교적인 것이었으며, 나머지 세 번은 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건들에 관련되었던 사람들 중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진리는 체포된 후, 먼저 유대인들의 부패한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라는 사람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안나스는 자기 집에서 재판을 열고, 피고인에게서 자백을 유도하려 하고, 당시 아무 죄도 없는 피고인을 때리는 등, 재판 중 수많은 유대법을 어겼습니다. 아나스의 뒤를 이어 진리는 마침 안나스의 사위였던 독재적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가야바와 유대인 공회 앞에, 많은 거짓 증인들이 진리를 고발하는 발언을 하기 위해 나섰지만, 아무것도 증명될 수 없었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야바는 진리를 정죄하려다 일곱 개 이상의 법을 어겼습니다. (1) 재판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음. (2) 재판이 심야에 진행되었음. (3) 뇌물을 수반했음. (4) 피고에게 변호할 사람이 없었음. (5) 2-3명의 증인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았음. (6)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사용했음. (7) 피고에게 당일 사형을 집행했음. 이 모든 행위는 유대인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바는 진리가 자기를 육신으로 온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신성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에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진리에 대한 세 번째 재판이 열렸고, 그 결과 유대인 공회는 진리가 죽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법적 권리가 없었으므로, 진리를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빌라도는 디베료에 의해 유대의 제5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근무했습니다. 빌라도는 생사를 주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고, 유대인 공회가 선고했던 사형 선고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진리가 빌라도 앞에 서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거짓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진리의 적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들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누가복음 23:2)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내야 할 세금을 내라고 말했고 (마태복음 22:21), 가이사에게 도전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어서, 진리와 빌라도 사이에 아주 흥미로운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한복음 18:33-38).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역사 속에 남아 울려 퍼졌습니다. 그 질문은 아무도 빌라도에게 알려줄 수 없었던 것을 알고자 했던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온 욕망이었을까요, 아니면 냉소적인 모욕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짜증스럽고 무관심한 반응이었을까요?
진리 아는 것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던 세상에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에 대한 적절한 정의
진리를 정의하는 데 있어, 진리가 아닌 것을 우선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일이 된다고 해서 그저 진리는 아닙니다. 이는 실용주의 철학입니다. 즉, 결과 대 수단적 접근입니다. 현실에서, 거짓말로 “일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거짓말이며 진리가 아닙니다.
• 진리는 단순히 논리적이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모두 같은 거짓 이야기를 하기로 동의하고 거짓 덩어리에 기반하여 음모론을 형성할 수 있지만, 그러한 합의가 그들이 하는 말을 진리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 진리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나쁜 소식도 진리일 수 있습니다.
• 대다수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전체 중 51%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 진리는 포괄적인 것이 아닙니다. 장황하고, 상세한 발표도 여전히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진리는 의도한 바에 따라 정의되지 않습니다. 좋은 의도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 진리는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아느냐입니다.
• 진리는 그저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여전히 거짓말입니다.
• 공개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개인적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보물이 묻힌 위치).
“진리 (truth)”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레테이아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숨기지 않는”, 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입니다. 즉, 진리는 항상 있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고, 아무것도 숨겨지거나 가려지지 않는다는 개념을 수반합니다. “진리”의 히브리어는 에메스로, “확실성”, “일관성” 그리고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의는 영원한 물질과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암시합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정의하는 간단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진리는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2. 진리는 그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3. 진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첫째, 진리는 현실 또는 “있는 그대로”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짜입니다. 진리는 또한 자연에도 부합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그 대상과 일치하고, 지시 대상을 통해 알려집니다. 예를 들어, 교사는 학급을 향해 서서, “자, 이 교실의 문은 오른쪽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사를 바라보는 학급 학생들에게는 교실 문이 왼쪽에 있겠지만, 교사에게는 오른 쪽에 문이 있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또한 그것의 대상과 일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약이 수십 그램 필요하다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똑같은 약을 더 많게 혹은 더 적게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그 대상과 어떻게 일치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어떤 약을 부적절한 양으로 달라고 요청하거나, 혹은 특정 질병에 대해 아무 약이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요컨대, 진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다른 관점들은 틀립니다. 철학의 기본적인 원칙은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가 말한 것처럼, “분별이 철학자의 임무”입니다.
진리에 대한 도전
아퀴나스의 말은 오늘날에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분별하는 것은 상대주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유행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것은 가짜다”로 이어지지 않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는 특별히 모든 신념 체계가 진리와 관련하여 동일한 기초 위에 있어야 하는 신앙과 종교의 문제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개념에 도전하는 수많은 철학과 세계관이 있지만, 각각 비판적으로 검증해 보면, 근본적으로 자멸적인 것으로 판명됩니다.
상대주의 철학은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고, 절대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이 상대적인 진리인가, 아니면 절대적인 진리인가 물어봐야 합니다. 그 주장이 상대적인 진리라면, 정말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에 적용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그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라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게 됩니다. 나아가, 상대주의자가 절대주의자의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 상대주의자는 자기의 입장을 배반하게 됩니다. 왜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옳을 수 없겠습니까? 본질적으로 상대주의자가 “진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므로, 그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최선입니다.
회의론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저 모든 진리를 의심합니다. 그런데 회의론자는 회의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일까요? 회의론자는 자기의 진리 주장도 의심할까요? 그렇다면, 회의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까요? 회의론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즉,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그럴 경우 회의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절대적인 진리가 됩니다. 불가지론자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불가지론도 적어도 한 가지 진리, 즉,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자멸적 사고방식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제자들은 그저 특정한 진리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수호 성인, 프레드릭 니체 (Frederick Nietzsche)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이동하는 은유, 환유어, 의인화의 부대 … 진리는 환상이다 … 그림을 잃어버린 동전, 이제 동전이 아닌 그저 금속 물질일 뿐인 동전.” 아아러니컬하게도 포스트모던 주의자는 이제 “그저 금속일 뿐인” 동전을 손에 잡고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를 단언합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라는 진리입니다. 다른 세계관들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도 자멸적이며, 자기 주장 아래 설 수 없습니다.
인기 있는 세계관은 모든 진리 주장이 똑같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입니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주장, 여자가 이제 임신했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 여자가 아직 임신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다른 사람이 동시에 진리일 수 있을까요? 다원주의는 동시에 같은 맥락에서 “A” 와 “A가 아닌 것” 모두 맞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비모순 법칙 위에서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한 철학자가 변명한 것처럼, 비모순 법칙이 사실이 아니라 (그리고, 기본적으로 다원주의는 진리라)고 믿는 모든 사람은 두들겨 맞고 불태워지는 것은 두들겨 맞지 않고 불태워지지 않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두들겨 맞고 불태워져야 합니다. 또한, 다원주의는 다원주의가 사실이며, 다원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즉, 그것은 자기의 기초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다원주의 배후에 있는 정신은 관용의 열린 자세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개념과 모든 진리 주장이 동일하게 타당하다는 개념을 혼동합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은 동등할 수 있지만, 모든 진리 주장이 동등할 수는 없습니다. 다원주의는 의견과 진리의 차이점을 알지 못합니다. 몰티머 애들러 (Mortimer Adler)가 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원주의는 진리의 문제가 아닌, 오직 입맛의 문제에서만 바람직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진리의 공격성
진리의 개념이 비난받을 경우, 대개 다음 이유 중 하나 이상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종교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은, 그런 입장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은 진리가 본래 편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2 + 2가 오직 4와 같다는 믿음을 가진 수학 교사가 편협한 것일까요?
진리에 대한 또 다른 이의 제기는, 누군가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수학 예시로 돌아가서, 수학 교사가 산수 문제에 오직 하나의 정답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한 것일까요? 혹은 열쇠공이 오직 하나의 열쇠만이 잠긴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교만한 것일까요?
신앙과 종교의 문제에서 절대적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 번째 비난은, 그러한 입장이 사람들을 포용하기 보다는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항의는 진리가 본래 진리에 반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4가 아닌 모든 답은 2 + 2의 정답에서 모두 배제됩니다.
진리에 반대하는 또 다른 항의는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격적이고,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자는 대신,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입장의 문제점은 진리가 진정성과 믿음, 욕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진정으로 잘못된 열쇠가 문에 맞을 것이라고 믿든, 그 열쇠는 열쇠 구멍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문도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는 진정성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독이 든 병을 들고 레모네이드라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마신 후 독성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리는 욕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차의 연료가 바닥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겠지만, 게이지가 연료 탱크가 비었으니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표시하면, 세상의 그 어떤 욕망도 기적적으로 차를 계속해서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만, 오직 과학의 영역에서만 유효하며 신앙과 종교의 문제에서는 그러한 입장이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논리적 실증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이며, 데이비드 흄 (David Hume)과 A. J. 에이어 (A. J. Ayer)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유명해졌습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 주장이 (1) 유의어 반복 (예를 들어서, 모든 독신남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이나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 (즉, 과학을 통해 시험 가능한 것)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논리적 실증주의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 주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무력해지는 많은 진리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 과학은 수학이나 논리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수학이나 논리학 분야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 과학은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 과학은 도덕과 윤리 영역에서의 진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을 사용해 나치가 사악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과학은 해돋이의 아름다움과 같은 미적인 입장에 대한 진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과학이 객관적 진리의 유일한 근거이다”라고 주장할 때, 과학으로 시험할 수 없는 철학적인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도덕 영역에 적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 없는 아이를 고문하고 살인하는 것은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답은 “아니요.”입니다. 아니면, 좀 더 개인적으로 이야기해서, 도덕과 관련하여 상대적 진리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자기 배우자는 절대적으로 충실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리는 왜 중요한가
(신앙과 종교를 포함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진리의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분명한 것은 삶이 잘못의 결과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잘못된 양의 약을 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투자 관리사가 금전과 관련하여 잘못된 결정을 하면 한 가정을 빈곤에 빠트릴 수 있으며, 잘못된 비행기에 탑승하면 원하지 않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또 외도하는 결혼 상대자와 살다가 가정 파탄에 이르고, 잠재적으로는 질병으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옹호자 라비 자카리아스 (Ravi Zacharias)가 말하듯, “사실은, 특히 당신이 거짓말을 당하는 쪽일 때에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종교의 영역보다 진리가 더 중요한 곳은 없습니다. 영원은 잘못되기에는 무섭도록 긴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진리
During the six trials of Jesus, the contrast between the truth (righteousness) and lies (unrighteousness) was unmistakable. There stood Jesus, the Truth, being judged by those whose every action was bathed in lies. The Jewish leaders broke nearly every law designed to protect a defendant from wrongful conviction. They fervently worked to find any testimony that would incriminate Jesus, and in their frustration, they turned to false evidence brought forward by liars. But even that could not help them reach their goal. So they broke another law and forced Jesus to implicate Himself. 예수님의 여섯 번의 재판 동안, 진리 (의)와 거짓 (불의)의 대조는 자명했습니다. 그곳에는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고, 모든 행위가 거짓투성이였던 사람들에 의해 심판 받으셨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피고를 부당 재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거의 모든 법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죄로 만들 만한 모든 증언을 찾기 위해 열심이었고, 좌절 속에서 거짓말쟁이들이 제기한 거짓 증거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그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직접 유죄를 입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신성 모독 죄로 예수님께 유죄를 선고했지만, 그 구실이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가이사에 도전했으며, 군중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 하면서 로마법을 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빌라도는 즉시 그들의 얄팍한 기만을 알아채고, 그러한 혐의들을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후자가 늘 전자를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진리와 의가 하나이고, 거짓과 불의가 하나라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몇 가지 예시에 의해서 입증됩니다:
•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9-12, 강조 추가).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강조 추가).
•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로마서 2:6-8, 강조 추가).
•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5-6, 강조 추가).
결론
본디오 빌라도가 수세기 전에 던진 질문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발언은 많은 것들이 진리를 가질 수 있지만, 오직 하나만 실제로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진리는 어딘가에서부터 비롯되어야만 합니다.
자명한 사실은 2천년 전 그 날 새벽에 빌라도가 모든 진리의 근원을 직접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어 총독에게 오시기 직전에 “내가 진리요” (요한복음 14:6)라는 간단한 진술을 하셨는데, 이는 사실 놀라운 진술이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실제로 주장하셨듯, 당신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주장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면서 입증되었습니다 (로마서 1:4).
파리에 살던 사람이 시골에서 온 한 낯선 사람을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낯선 이에게 파리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루브르 박물관에 데려가 위대한 미술 작품을 보여주고, 장엄한 심포니 홀에 데려가 위대한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시골에서 온 낯선 이는 미술이나 음악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파리 사람은, “그것들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판단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심판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심판 받는 자는 그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유죄 선고를 내렸던 분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자에게 하실 것처럼, 언젠가 그들의 재판장이 되어 실제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이사랴의 역사가이자 주교였던 유세비우스 (Eusebius)는 칼리굴라 (Caligula) 황제의 통치 시기 중 빌라도가 결국 자살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는 안타까운 결말이자, 진리를 무시하면 언제나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유대인의 법적 외피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죄(요한복음 18:28-32)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은 관정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빌라도를 불러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듯하지만, 실상은 거짓 증언과 살인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8:28).
그들의 행위는 우리에게 외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죄의 본질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마음의 동기와 방향에 있습니다.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형에 넘기는 모순. 이것이 인간의 내면입니다. 사순절은 이처럼 우리의 이중성과 위선을 직면하게 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이 사람에 대하여 무슨 일로 고소하느냐?" (요한복음 18:29). 유대인들은 명확한 죄목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한복음 18:30). 이는 재판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죄 없는 자를 죽이기 위한 왜곡된 절차, 그것이 이 재판의 본질이었습니다.
정치적 계산과 하나님의 섭리 (요한복음 18:33-35)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한복음 18:33).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정치적 위협 요소를 확인하려는 계산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되묻습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말한 것이냐?" (요한복음 18:34). 이는 빌라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십니다. 빌라도는 외형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두려움과 타협의 인물임을 우리는 이후의 흐름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사람의 말에 따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울립니다. 너는 내게서 진리를 들었느냐, 아니면 세상의 말에 따라 나를 판단하느냐?
예수님의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 (요한복음 18:36-37)
예수님은 자신의 왕권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의 정치적 권세를 쥐기 위한 분이 아니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 나라의 논리, 무력과 지배, 계산과 거래로 움직이는 나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8:37).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은 진리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된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셨고, 그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며 선택을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그 진리 앞에 서 있었지만, 결국 그는 그 진리와 눈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요한복음 18:38).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떠납니다. 진리 앞에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자는 결국 진리의 외곽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군중의 선택과 죄악의 전이 (요한복음 18:38-40)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의 압력 앞에서 타협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놓을까 하여 제안하지만, 군중은 바라바를 요구합니다. 바라바는 강도였습니다(요한복음 18:40).
이 장면은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상징을 내포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죄인 바라바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대속의 모형입니다. 그분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죄인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바라바는 단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죄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살아난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았지만 두려워했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안다고 했지만 정작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 재판은 인간의 눈에는 불의였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한 의가 실행된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의로운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진리 앞에 선 자의 응답 (요한복음 18:37)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 진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진리는 세상의 권력, 정치적 계산, 종교적 위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며,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은혜입니다.
빌라도는 그 진리 앞에 서 있었지만 외면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번이나 무죄라고 선언했지만, 결국은 두려움에 굴복하고 군중의 소리에 따라 불의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진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요한복음 18:37).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는 우리 되기를 원합니다. 유다의
배신, 군중의 외침, 빌라도의 침묵, 그 모두를 넘어서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부르십니다. 진리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십시오.
주님의 고난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한 길이었고, 그 진리는 곧 우리를 살리는 복음입니다.
그 진리 앞에 선 우리 모두가 그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제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진정한 자유(로마서 8:1-6)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가끔 어떤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과 생활에서부터의 자유 그리고 더 나아가 인생의
삶으로부터의 벗어나려고하는 충동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란 신체적으로 구금되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이 육체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 독재자로부터 벗어나
민주적 자유를 누리는 것은 정치적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인생의 자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참 자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자유의 의미
히브리어에서 "자유하다"는 동사는 (하파쉬)로 표기합니다.
구약에서는 자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말합니다.
노예에서의 자유,
영적 포로 됨에서 자유,
부정적인 의미로 버려졌다는 뜻에서 자유, 즉 비보호를 의미
헬라어에서의 자유(엘류테리아)는 노예와 반대편에 선 시민들이 누리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것은 폭군들의 억압에서 해방된 인간의 자유를 말합니다.
또 이 자유는 자신의 욕망에서부터 벗어난 내면적 자유입니다.
신약에서의 자유는 사람이 악에 의해 끌려 다니는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영적 무질서와 욕신의 정욕 가운데서 방황하는 삶에서 탈출을
의미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꼭 어떤 신체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 남한에서의 적응에 실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먹을 것이 있고 육신적 자유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것이 아님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맹목적 자유는 정신적, 영적 보호와 통제에서의 이탈로 봅니다.
이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이는
길거리에서 자유분방하며 잘못된 자유를 누리는 탈선한 사람들의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 분망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유흥가와 술집으로 돌아다니며 누리는 방종적인 행동은 자유라기보다는 탈선인 것입니다.
또 그릇된 자유는 결국 사람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종국에는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삶은 곧
육에 속한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근심과 고통만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죄와 정욕의 노예 상태에서 범죄 하던 자가
나쁜 길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7C에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그 구멍은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욕으로 채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만족과 실망으로 끝납니다.
그 구멍 뚫린 빈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공허한 구멍이 크게 뚫려져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자유
본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 가지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1) 죄와 사망에서 자유
현대는 가정 위기의 시대입니다. 또 청소년 범죄의 시대입니다. 최근의 우리나라의 통계를 보면 하루에 459 가정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또 가정폭력이 난무하고, 마약사범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999년에는 마약 사범이 처음으로 1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수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 외에 각종 범죄들이 경제 수준과 학력이 점점
높아지면서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죄 문제는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에서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십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는 원리를 가리키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 것을 말합니다(롬 5:12). 이 사망에서 우리 주님은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번에 영원한 죄에서 놓임을 받게 된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을 바르고, 의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면, 우리 주위에 만연된 죄악에서 벗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2) 패배와 실망으로부터 자유
우리는 삶의 경쟁체제 속에서 피곤함과 많은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의도하는 것이 잘 되지 않고 고통과
좌절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스스로 상실된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상처받은 심령은 우리의 인생을 방황하게 만듭니다.
밤에 거리에 나가보면, 밤늦게까지 무력감과 고독 그리고 무엇인가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시내에 가득하게 차 있습니다. 밤은 마치
방황의 거리며 광란의 도시라 할 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참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비틀거리게 합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곤고했던 시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는 그 영의 뜻대로 생활함으로써 '패배'로부터 해방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도 패배하며 좌절하고 실망으로 가득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소망으로 든든하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위한 중재(仲裁)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죄로 인하여 생기는 하나님의 형벌인 것입니다. 죄는 자의적이며, 일시적 기쁨을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 넣습니다.
우리의 생활과 삶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근심하게 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때로는 불안과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참 자유 안에
머물어야 하겠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한편 현대인은 불면증과 원인모를 신경성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죄와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결과인 것입니다.
3. 진정한 자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생활은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가 참 자유를 누리며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으로 되어집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본 장에는 특별히 '성령'이란 단어가 19회나 나오는데, 진정한 자유는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과 행복도 불행도 결정되어 집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또 입력된 파일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컴퓨터가 그대로 출력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대는 초능력시대입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보다는 정보의 능력으로 현시대를 살아갑니다. 이처럼 현대는 자기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타인과 정보의 힘에 많이 의존합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생활에 언제나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심으로 성도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죄의 법은 죄가 사람의 전인격을 지배하여 악을 따르게 하며,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롬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런데 성도는 이 죄의 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을 따라 생활할 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법은 죄의 법보다 그 능력이 훨씬 더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람을 두 분류로 나누어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 많은 인간 본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의 삶의 초점과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사람은 죄 많은 인간 본성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 유일한 법으로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갑니다.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반면에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들은 인간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과 같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공기 중에서 호흡할 때 공기가 그를 채워 주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족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뜻이 자신의 유일한 법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지배되고
그리스도로 지배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이 두 종류의 삶은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죄 많은 인간 본성은 욕망과 행동으로 지배되는 삶으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고,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영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매일 매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자유인이요, 참 자유를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지금 우리 사회는 자유 분방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 자신이 '나는 참으로
자유를 누리며 질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참으로 진정한 자유인가를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방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이 고뇌의 밤이라면, 8장은 광명한 아침을 맞이하며 진전한 자유를 느끼는 장입니다. 로마서 7장 끝 부분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오는 부자유함에 대하여 깊은 고뇌의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낱말과 문장도 새롭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느낍니다. 부자유한 구속 상태에서 풀려난 해방감을 만끽하는 장면입니다.
로마서 7장은 옛 사람의 형편이고, 8장은 새 사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렇게 부자유스럽고 힘들고 노예 같았던 죄악된 삶이
변화여 의와 선으로 충만한 환희와 희열로 가득 차게 되는 자유로운 삶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 패배와 실망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더 이상 고통과 좌절에 머물지 말고, 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자유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랜 세월 주님을 믿고 섬겨왔지만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 하면서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것과
죄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요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한 것이며
이 죄적 심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종이 아니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하시며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요8:32)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죄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남이 진정한 자유이며
이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3:17)
여기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그의 영이신 성령을 동일시하여
영(성령)은 곧 예수의 영으로서
죄와 마귀의 굴레에 메어 있는 자들을
풀어 자유를 얻게 하시는 것을 가르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어 죄 사함과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도
때로 나의 약함과 죄성으로 인하여
내 안에 내주하시며 인격적으로 이끄시는 주의 영(성령)을
따르지 않는 것 때문에 일시적이라도 마음에 자유를 잃고
신앙생활의 기쁨을 빼앗기는 경우가 생기는 것인데
이러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불규칙 그라프를 그리면서
성화 성장을 이루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비결
곧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비결은
주의 영(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에게 성령 장으로 알려진 로마서 8장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성공적인 신앙생활 지침서인 것을
이 아침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받아 드립니다
"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3:17]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자녀]라 (로마서8:14)
주님!
저에게 이미 주신 자유를 잘 누리기 위하여
성공적인 신앙생활 지침서로 주신
로마서 8장을 매일 읽고 암송하면서
내가 로마서 8장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혀 주옵소서 (아멘)
11월 24일(월) 요한복음 16-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버지의 이름(17:26)
I have revealed you to those whom you gave me out of the world. They were yours; you gave them to me and they have obeyed your word.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7구절 소개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어떤 이름을 의미할까요?
하지만 하나님과 같이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신성한 존재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은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는 어버이로서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보통의 남자 어버이를 이르는 말'로, '아빠'는 낮춤말, '아버님'은 높임말에 해당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며,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지 않았습니다.
-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미: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속성을 가진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절대자로 묘사되며, 일부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 아버지말고 다른 호칭은 뭐가 있는가?
예를 들어, "전능하신 자"나 "왕"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며, "주(主)"는 주종 관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관계 측면을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을 (당시 관습에서 벗어나) 아버지라고 호칭했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가?
예수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당시 유대교적 배경과 예수의 독특한 신학적 이해가 결합된 표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로 설명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배경
1. 유대교 전통: 고대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칭하는 표현이 존재했지만, 주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돌보신다는 의미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적으로 드물었고, 경외와 존엄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주를 이뤘습니다.2. 예수의 사용 방식 : 예수는 이 전통을 개인적이고 친밀한 방식으로 확장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며, 이는 아람어로 "아빠"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아바"는 매우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혁신적인 개념이었습니다.예수가 사용한 "아바"는 오늘날의 "아빠"와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단순한 존엄의 대상이 아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와 신뢰를 강조한 것입니다.예수님 시대의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라는 호칭과 부자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일반적인 호칭 : 당시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은 '아바'(Abba)였습니다.
이는 아람어로 '아빠'와 비슷한 친근한 의미를 가집니다.
2. 가부장적 문화 : 유대 사회는 가부장제 문화였으며, 아버지는 가정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 여겨졌습니다.
3. 존경과 복종 : 자녀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강조되었습니다.
십계명에서도 부모 공경이 중요한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4. 친밀함의 정도 : 아버지와 자녀 간의 친밀도는 가정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엄격한 관계였지만, 사랑과 애정도 존재했습니다.
5. 종교적 역할 : 아버지는 가정에서 종교적 의식을 주관하고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6. 하나님 호칭으로서의 특별함 :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당시에 매우 특별하고 친밀한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의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매우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혁신적인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엄마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에 대해서는, 성경에 예수님이 요셉을 직접 어떻게 불렀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문화를 고려할 때, 예수님은 아마도 요셉을 '아버지'나 '아빠'와 같은 호칭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양부로서 그를 키우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3. 친밀한 관계, 신의가 돈독한 관계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니라 '친구'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친구"로 표현한 성경 내용은 주로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해 "친구"라고 불렸으며, 이는 그의 믿음과 신뢰를 나타냅니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4. 성경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는가?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직접적으로 "어머니"라고 부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구절이 있습니다.1.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가리키며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9:26-27).
2. 12살 때 성전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49).
여기서 "내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마리아와 요셉을 부모로 인정하는 맥락도 있습니다.3.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당시 문화에서 존경을 표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4).
비록 "어머니"라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존중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마태복음 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요한 계시록 19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네 가지로 표기가 됩니다.
첫 번째 이름 ‘충신과 진실’
두 번째 이름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세 번째 이름 ‘하나님의 말씀’
네 번째 이름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6절)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 속에서 성부 하나님의
언약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을 통해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조금
이상한 이름이 나옵니다.
그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런데 뜬금없이 그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벌써 다 말해 주고서 그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호칭의 개념이 아닌 그 존재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노아 모두 다 그 이름의 내용을 삶으로 살다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을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 이름이 비밀이다’라는 말은 그 존재의 내용이나 그 존재가 하는 일이 외부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6:3-7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 족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몰랐을까요?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미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이미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그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인 줄은 알았지만,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진 구속사 안에서의 특성, 즉 언약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이 담고 계신 내용은 출애굽기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과 함께 홍해를 건너심으로써 비로소 그들에게 경험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전까지는 ‘여호와의 이름이 비밀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여기 보시면 많은 물 위에 앉은 그 음녀의 이름이 ‘비밀’이라고 나오지요?
그렇게 비밀이라고 말해놓고 바로 그 이름을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비밀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름이 담고 있는 그 존재의 내용을 우리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한 계시록 19장에만도 이미 주님의 여러 가지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서, 이 이름들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내용으로 담고 계신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아직 비밀인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는 절대 우리 주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우주의 역사와 종말은 우리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중에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경륜해 가시는 역사의 불가해성과 은혜의 우발성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건방지게 추측하거나, 상상하거나, 보좌를 흔들 생각하지 말고 애당초 항복하고 순종하라.”라는 충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건방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짤막한 이성으로 마치 하나님을 다 이해한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인간과 비교해서 다른 것이라고는 힘만 센, 마징가 Z 같은 하나님을 그려놓고선 “이게 하나님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너무 모르니까 그분이 발하시는 죄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이시며, 그러한 분이 쏟아 놓으시는 이 역사의 내용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비밀’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 제한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밝혀 주셨습니다. 이 천지는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택해졌는지, 왜 예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분은 왜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예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인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늘의 비밀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산적해 있는 이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나, 기대나, 욕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달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시적인 역사조차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 중의 하나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입니다.
이름이 갖는 힘
이름은 가볍지 않다. 누구나 이름을 갖는다. 이름이 그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이름은 사회적 관계와 그의 삶 그리고 그가 해낸 일에 대한 평가를 지닌다. 이름값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름은 실체가 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의 하나로 여기는 건 아마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실존적 성찰이 주는 힘 때문이고 실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는 인식의 재확인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에 ‘아담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는 대목은 단순히 아담이, 사람이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음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날마다 7명의 청년들이 자살한다. OECD가입국 가운데 청년 자살률이 세계1위다.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성세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둔감하다. 청춘들의 삶의 상황과 비슷한 삶을 겪지 않았기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외면 속에 청년들이 삶을 포기한다. 고통 받는 청춘들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기성세대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다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지치고 절망한 청춘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체념하거나 삶을 포기한다. 깨었다고 여기는 기성세대들은 왜 청춘이 사회적 불의와 굴절된 체제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하지만 그건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해도 해도 개선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이미 절망하고 또 다른 절망 앞에서 벽을 느낄 뿐이다. 분노할 힘조차 없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능으로 체념한다.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이다. 이름은 단순히 어떤 현상을 지칭하는 명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만 힘든 줄 알았고 나의 능력 부족 탓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일반적 현상이고 하나의 사회적 틀이 되었다는 걸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이름들의 출현이다. 이름의 출현은 단순한 사회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 더 이상 내 나라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고사하고 넌더리 나서 떠나고 싶은 지옥이라 인식하게 만들고, 아무리 내가 노력 아니 ‘노오오력’ 해도 잘난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내게 희망도 가능성도 없다는, 완전한 절망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청춘들에게 과연 4ㆍ13총선은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선거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청춘들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달렸다. 그런데도 아무도 청춘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아예 안중에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거판이 이렇게 될 수는 없다. 그 흔한 사탕발림조차 없다. 비례대표로 청년을 당선권에 배치한 19대 선거에도 한참 못 미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가다가 얼마 가지 못해 망한다. 청춘이 멍들고 쓰러지는데 지금 남아있는 알량한 자기 이익 탐닉해야 무슨 소용인가. 기성세대는 청춘들의 고통에 공감하기는커녕 우롱했고 발뺌만 해댔다. 이제 청춘이란 이름은 희망과 설렘의 낱말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 원망과 포기의 서글픈 청동거울로 전락했다.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기억하는 기성세대 많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그 한 문장만으로 가슴 뛰던 청춘을 살았다. 그런데 이 시대의 청춘은 ‘헬조선’에서 ‘흙수저’ 물고 절망하고 있다. 이번 선거가 미래를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진흙탕 같은 선거판에서 그것이라도 건져야 한다. 곧 부활절이다. 지금 우리는 청춘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어두운 낱말을 버리고 펄펄 뛰는 꿈과 희망의 미래를 펼칠 이름을 돌려줘야 한다. 그마저도 못하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이름(名)’의 의미
‘이름(名)’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사물, 단체, 현상 등에 붙여서 부르는 기호’를 말한다. 名(이름 명)은 夕(저녁 석)과 口(입 구)가 합쳐진 글자로 저녁이 되면 깜깜하여 서로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입으로 이름을 불러서 식별했다는 점에서 ‘이름을 부르다’, ‘이름’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들은 모두 이름이 있다. 새롭게 발견된 존재들에게도 계속해서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태어나면서 부모가 붙여준 이름을 평생 사용하며 살고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떠난다.
이렇게 이름은 존재 가치다. 이름이 있어야 의미를 얻게 되고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소나무, 개나리 등과 같이 잘 알고 있는 이름의 식물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잡초처럼 이름을 모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이름을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름은 사물이나 사람 모두에게 존재 가치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사람에게 이름은 인간 생활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출생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관심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성씨 한 자에 이름 두 자를 적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 등과 같이 지배층부터 사용되었고, 백성들은 궁예(弓裔), 신검(神劒) 등과 같이 이름만 썼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와서 공신이나 투항자들에 대대적으로 성을 내려주면서 시작되었다. 고려 중기에는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도 없었던 것을 보면 지식층의 상당수도 성을 쓰지 않았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남자 대부분은 한자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에게는 간난이, 언년이 등의 아명 이외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노예도 성이 없었고 江阿之(강아지), 介也之(개야지), 揷士里(삽사리) 등의 천한 이름이 주어졌다.
국민 누구나 이름(성과 명)을 가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 일제의 통치와 함께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새로운 관명을 짓게 되면서 여자들도 성과 이름을 갖게 되었고 남자의 이름에는 족보와 항렬이 있는 전통적인 작명법이 확립되었다. 여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영자(英子)’·‘춘자(春子)’·‘옥자(玉子)’ 등 ‘자’자 이름이 많은 것은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고 ‘자(子)’에서 벗어나 뜻이나 음이 아름다운 글자를 찾아 썼다. 특히 ‘희(姬)’, ‘숙(淑)’, ‘옥(玉)’, ‘정(貞)’, ‘순(順)’, ‘미(美)’, ‘연(娟)’, ‘주(珠)’, ‘혜(惠)’ 등 곱고 아름다운 글자들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최근에는 남자의 이름도 항렬에서 벗어나 더 아름다운 이름들이 쓰이고 여자 이름은 ‘고아라’, ‘진달래’ 등의 더 이쁜 이름들이 쓰인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이름의 종류가 다양하다. 정식 이름인 관명 이외에도 아명(兒名), 별명(別名), 자(字), 호(號), 별호(別號), 시호(諡號), 법명(法名), 예명(藝名), 가명(假名), 당호(堂號) 등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명(胎名)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이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또한 시기마다 부르는 이름에는 건강, 장수 등의 염원이 담겨 있다. 또한 정식 이름인 관명, 곧 호적 이름은 평생을 두고 소중한 것으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입신양명(立身揚名), 과거장에서 이름이 드날려 출세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옛날 시집온 여자들에게 시집오기 전 살아온 마을 이름을 따서 ‘~~댁’, 남편들에게는 ‘~~양반’ 등으로 부르기 좋도록 지어주는 이름을 택호(宅號)라 한다. 여자에게는 ~~에서 시집온 여자라는 뜻이 되고, 남자에게는 ~~로 장가든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성인남녀에게 택호는 평생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명예가 되는 동시에 구속이 된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남자의 이름에 항렬(行列)자를 쓰는데, 혈족의 방계(傍系)에 대한 대수(代數) 관계를 표시하는 말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혈족끼리도 족친으로서의 우의(友誼)를 다지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혈연 관념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증이다. 하지만 세 글자의 성명 중에서 이미 두 글자(성과 항렬자)가 정해져 있고, 나머지 한 글자로 이름을 변별하고자 하니 남자들은 같은 씨족들 사이에 동명이인이 많게 된다. 여자의 이름은 항렬에서 벗어나므로 다양하다.
그러면 좋은 이름의 조건은 무엇인가? 음성학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리가 부드럽고 분명하여 부르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최고의 이름이다. 요즘 너무 별난 이름이 많은데 어른이 되면 괜찮지만 어려서 놀림 받기 쉬워 이름으로 상처받을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 문화에서 이름은 입신양명(立身揚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효도를 궁극적 가치로 보고 자신과 부모, 가문의 이름을 지키고 널리 날리는 데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의 부귀영화보다 빛나는 이름을 길이 후세에 남기기를 바랐던 것이다. 호랑이가 죽어서 좋은 가죽을 남기듯이 훌륭한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생애 최고의 이상이었다. 죽은 후 산소에 관직과 이름이 새겨진 빗돌을 세우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그만큼 이름을 소중히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보다도 가문의 이름과 함께 태어나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다가 이름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중년의 여성들이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의 경우 더욱 그렇다. 누구의 남편으로, 누구의 엄마로 살면서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모르면 삶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밖의 세상이 두려워진다. 진정한 자신의 참모습을 되찾고 세상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기 위한 시작이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중년의 여성들이 이름을 잊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기 쉬운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 자식과 남편, 그리고 타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 밖으로 향한 시선을 내 안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에게 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 실천을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서 불러보고 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의식 속에 자신의 의식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서 불러보자.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라.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남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겠다는 말이다. 김춘수의 꽃 중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하지 않던가. 다른 사람의 꽃이 되기 전에 내가 나를 먼저 꽃으로 만들어 주는 일, 바로 내 이름을 다소곳이 불러주는 일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나를 세상에 참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하는 시작이며, 스스로 ‘꽃’이 되는 일이다. 이름을 잊어버린 중년 여성들이여~! 남의 숨은 꽃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세월로 충분합니다. 앞으로 이름을 되찾아 나의 꽃으로 살아가시길~!
오래전 백화점에서 중년 부부가 쇼핑하면서 남편이 ‘○○야, 이것이 좋은데~’, ‘○○야, 다른 곳에 가보자’ 등 애틋하게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인간적으로 그 남자가 멋있고 질투가 났지만, 정말 보기 좋고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남편들은 부인의 호칭을 ‘이름’으로 바꿔 불렀으면 하는 소망과 함께.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이름을 크게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은 아직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 내 이름도 누군가가 크게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특히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들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잊힌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한편 이름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떳떳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할 행동을 할 때 그런 경우다.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중대 범죄를 제외하고 죄인들까지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름을 숨긴다는 것은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것 아닌가. 요즘 말로 익명성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서 행해지는 수많은 자유로움을 빙자한 비수와 같은 비난과 몰상식적인 행위들은 우선으로 척결해야 할 사회악이다. 그들의 비수에 찔려 목숨을 끊은 뉴스를 볼 때마다 확인되지 않은 악의적인 많은 정보(가짜뉴스)에 대한 책임을 지울 묘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건전한 사이버 공간의 예절을 차지하고~
‘豹死留皮 人死留名(표사유피 인사유명)’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훌륭하고 행복한 삶이 아니다. 훌륭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후가 아니라 오늘의 삶에 있다. 겉으로는 이름이 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남는 것은 그 이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오늘 보낸 삶의 내용이다. 이름을 남기는 것은 삶의 이유나 목적이 아니라 삶의 결과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무엇인가를 남기면 원하든 원치 않든 저절로 이름이 남는다.
예전에 시골 동네 입구에 고시 합격이나 S대 입학 등의 현수막을 걸어 축하하던 시대가 있었다. 아직도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가끔 그런 현수막을 볼 수 있는데, 자식의 이름이 올라 부모의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개인 정보 보호’도 모르는구먼. 빛나지 않아도 부르지 못하는 이름, 품지 못하는 이름이 아니기를, 늘 함께하는 이름이 되길 바랄 뿐이다.
사람이 진짜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좋은 이름으로 기억되어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자꾸 붙잡아 두는 것이다. 얼굴이 먼저 떠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이고,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한다.
יהוה (여호와, Yahweh)
1. 어원 분석
히브리어 יהוה (YHWH)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신성하고 독특한 단어로, 여호와 혹은 야훼로 발음됩니다.
이 이름은 4개의 히브리어 자음인 י (요드), ה (헤), ו (바브), ה (헤)로 구성되어 있으며,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이라고도 불립니다.
4를 의미하는 태트라
문자를 의미하는 그람마
어원 분석을 보면, יהוה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 (היה)”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존재하다” 또는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존하는 존재임을 나타내며, 성경에서 하야 (Strong’s #H1961)라는 단어는 “I AM”으로 번역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계시하셨는데, 이는 “I AM WHO I AM” 또는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에흐예 (אהיה, Strong’s #H1961)는 히브리어로 “I AM”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존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변함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야와 에흐예는 같은 어원을 공유하고 있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יהוה라는 이름을 너무 거룩하게 여겨 직접 발음하는 것을 피하였으며, 아도나이 (Adonai, Strong’s #H136)라는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LORD라는 표기법으로 표현되어 약 6,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의 권능을 강조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2. 구약 성경 속 용례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나타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구절을 통해 יהוה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출애굽기 3:14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에흐예 (אהיה)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존적 존재임을 나타내며, 그분의 이름 יהוה가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우리 삶의 기초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2) 창세기 2:4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구절에서, יהוה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단순히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주권적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3)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구절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위치와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신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나타냅니다.
4)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여호와는 인간의 삶에 친밀하게 개입하시는 목자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보호하시는 돌보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을 강조합니다.
5)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라 이는 내 이름이라”라는 구절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으로서 다른 신과 구별되는 독특하고 거룩한 이름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그분의 영광과 거룩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전능한 분임을 선언합니다.
3. 영적 의미와 교훈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상징하며, 그분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 담긴 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존성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다른 어떠한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의 본질을 가진 분으로서 우리 삶의 절대적 의지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분의 이름은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2) 영원한 임재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며, 시간 속에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가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완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3)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그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약속을 이루시며, 이를 통해 신실함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할 때 변함없는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4) 인격적 관계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멀리 계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시며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초대하십니다.
4. 여호와의 이름을 통해 배우는 교훈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명칭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성품과 관계를 이해하는 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경외와 존경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고 존귀하기에,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며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긴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것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변치 않는 신실한 분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변치 않는 신실함은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확고한 기초가 됩니다.
3)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삶을 맡길 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개인적인 관계와 신앙의 성숙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 :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와 중요성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단순한 신적인 존재가 아닌, 영원히 살아 계시고, 자존하며, 우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신실함을 깨닫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상기시키며, 우리가 그분을 더욱 경배하고 신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각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첫째, 창세기 서두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으로 나타난다.
1) 엘(El): 엘은 하나님을 지시하신 단순한 명칭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고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大主宰)가 되신다. 강한 능력을 가진(Almighty)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데 주로 복합어로 사용된다.
2) 엘로힘(Elohim): 엘로힘의 하나님은 강하고 유력한 자, 즉 자기를 경외의 유일한 대상으로 가르치고 세계의 창조주와 통치주로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으로 그의 일반적인 면을 지시한다. 하나님이 자기 창조, 권능, 능력을 나타내실 때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창조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게 하셨다.
3) 엘 엘리욘(El-Elyon): 엘 엘리욘이라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이라고 표현했다(시 9:2, 민 24:16, 사 14:14).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분은 피조물 된 인간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대상이시다.
4) 엘 샤다이(El-Shadai): 엘 샤다이라고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 3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 하였고'라고 말씀하셨다. '엘 샤다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축복과 위로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5) 엘 올람(El-Olam): 엘 올람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창세기 21장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God)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기록되었다. '엘 올람'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명칭의 표현의 다양성은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는 기도를 더욱 풍부하게 하며 생활에 적용을 준다.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게 하신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가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살아 드려야 함을 확인케 하신다.
엘(El) 혹은 엘로힘(Elohim)의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 능력,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 창조적인 삶, 죄악에서 승리하여 날마다 능력 있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하신다.
엘 엘리욘(El-Elyou)의 하나님은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경배의 대상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순간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지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의 연속을 원하신다.
엘 샤다이(El-Shadai)의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과 위로와 안위의 근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만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고난 많은 땅에서 그분의 위로를 기다리며 사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원하신다.
엘 올람(El-Olam)의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 영원한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에 현주소를 두고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둘째, 구약성경에는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여호와'라는 명칭이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라는 명칭과 교차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란 명칭처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필자는 시편 23편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삶 속에 구체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적 7대 명칭 (Compound Jehovah Title)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여호와 라하(Jehovah-Raah): 여호와 라하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The Lord is my shepherd)라고 기록한다. 「여호와」는 우리 삶의 나그네 인생길에 목자가 되신다. 「목자」는 양의 삶을 돌보아 주듯 목자 되신 여호와는 우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돌보아 주신다.
2)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여호와 이레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는 말씀은 창세기 22장 14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대신 한 마리 양을 예비하셔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시므로 「여호와 이레」의 여호와로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 이레」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 삶에서 그의 백성이 믿음의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 주심의 은혜로운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체험하게 한다.
3) 여호와 샬롬(Jehovah-Shalom): 여호와 샬롬이라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2절에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신다'라고 평화의 주이신 여호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사사기 6장 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여호와 샬롬」이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쌓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삶에 평안을 영위할 수 있다. 「평화」는 화평(peace)이라는 말로 신약성경 산상수훈에서 팔복 중에 하나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Children)'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화평을 구하는 자에게 자녀로서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이 있게 하신다.
4) 여호와 라파(Jehovah-Rapha): 여호와 라파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치료자」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He restoreth my soul)라고 영혼을 치료하시어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면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는 병 고침의 근원자이신 여호와이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때문에 「여호와」를 부를 때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죄악과 질병에서 고침받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된다.
5) 여호와 지드케누(Jehovah-Tsedegenu): 여호와 지드케누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義)」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2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우리의 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 23장 6절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불의한 죄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의(義)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의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의의 자녀로서 거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하신다.
6) 여호와 삼마(Jehovah-Sammah): 여호와 삼마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거기 계시는 분」 「같이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4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여호와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겔 48장 35절에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라 하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여호와와 함께 거한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같이 거하시기 위해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대로 「임마누엘」(God with us)로 오셨고,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삶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그 나라 천국에 거할 때까지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한다.
7)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여호와 닛시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승리, 깃발」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5절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말씀처럼 원수 마귀와 영적 싸움에서 승리케 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신다. 출애굽기 17장 15절 말씀에는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라고 기록한다. 적군 아말렉과 싸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가 되셨던 여호와는 오늘 세상의 많은 원수 마귀가 적군 아말렉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압제하고, 어려움과 고통을 줄 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의 깃발」 되시는 여호와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원수 마귀와 싸워 날마다 승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아야 한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이 자체로만 본다면 ---물론 얼핏 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똑 같은 이름을 지어 주셨구나....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하여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외적으로는 그리 생각을 할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내적으로 깊게 깃들어 있는 내부의 속뜻은 분명히 더 깊고 넓고 포괄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나라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상대의 나라에 보냄을 받았다고 한다면 한 개인의 일로 가는 것입니까?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상대의 나라에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 개인의 이름을 내세우기에 앞서 ‘대한민국’에서 -----라는 식의 소개가 먼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 기업의 회장이 자녀에게 거래처에 중대사를 해결하도록 보내진다면 누구의 이름으로 가는 것입니까?
그 기업과 회장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아 간 것입니다.
여태까지 신학을 연구한 많은 신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마치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반증을 꾀하려 드는 자체는 매우 반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는 또는 이단으로 낙인이 찍힐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이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이름‘ 그 이름을 가지고 예수가 태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난 즉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고, 다시 말하면----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본래 이름은 예수님이시며,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이름‘ 즉 ’ 아버지의 이름을 내게 주신’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태어날 아기 아들에게 내 이름(아버지)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예수이므로...그런고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으니....아들도 예수요, 그 아버지의 이름도 당연히 예수님이 아니겠느냐----그런 주장론을 내세우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들이 성경 구절에 많이 여러가지로 기록되어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로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니라 ’스스로 있는자‘등등....이 눈에 익고 귀에 익어서인지----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제부터’예수님‘으로도 호칭이 새롭게 불러져야 한다면.....낯선 거리에 갑자기 떨쳐져서 어리둥절하고 헤매게 될 때의 그러한 상황과 같은 그런 기분의 느낌....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한글로 된 즉, 성경에 쓰여진 말 그 자체를 순수히 받아들여라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그러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고‘ 이 말의 뜻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한글로 표기된 대로 해석을 한다면......
그런고로 .....그 말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또는 품고 있는 의미의 뜻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말이 그 말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봄은 어떨까요?
그러므로’내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그 자체는 오류가 있다는 것으로 의문을 풀어 보면서 이해를 구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간판을 걸고 =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광고를 하시려)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나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누가복음 1:59~63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을 순수히 성경 말씀 그 글 그대로 받아들인 순수한 믿음인가?
자꾸 의미가 증폭된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요한복음 17:11)
하나님은 명예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고(겔 36:21)
그는 자기의 이름을 최고의 자산으로 여기시는 분이시다.(겔 44:28)
신앙은 그 이름을 영접하고 소중히 여김이요 신앙생활은 위대한 유산 곧 그 이름으로 성공하는 생활이다.
어떤 자는 가문의 명성(名聲)때문에 덕을 보기도 하고 어떤 자는 선조의 오명(汚名)때문에 피해를 받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자녀에게 자기 이름을 유산으로 주시는 바 다른 자 곧 천사에게는(히1:5)
그 이름의 영광도, 찬양도 주지 아니하심이라.(사42:8)
그런데 아담은 교만하여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창3:4-6, 24)
그가 일컫는 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결정될 뿐더러(창2:19)
하늘에서 교만하여 하나님같이 되려다 음부 곧 우주에 갇힌(사14:12-15)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 곧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같이 되려 선악과를 먹었음이라.
그 후 인류의 유혹은 자기이름을 내는 것이라(창11:1-9)
홍수심판 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어기고
하늘 꼭대기에 닿도록 성과 대를 쌓으려 하였음이다.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던 바(창12:2)
하나님이 그를 아브라함이라 명칭 하셨으니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라.(창17:5)
그 후손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성민(聖民)된 것은(신26:19)
이스라엘은 천사와 씨름 끝에 얻어낸 이름이요(창32:24-28)
이스라엘은 천사가 전해 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앎이다.(출3:2-4, 6:3)
율법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명시하는 바(출20:7)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집 곧 성소에서(대하20:5-8)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제사와 섬김이 두려움 가운데 계속되고 있던 중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가 나타나사
이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하심은(요2:19)
‘여호와’란 이름을 폐하고 ‘예수’란 이름을 세우려 함이었으니(히10:9)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요17:11, 히1:4)
공생애 중 귀신 쫓고, 병 고치는 등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으나(요10:24-25)
여호와 이름을 존중한 유대인들은 그를 참람히 여겨 죽이게 되었다.
그는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19:30)
①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려던 가장 뛰어난 이름을 완전히 받으심(빌2:6-11)
② 하나님과 같이 비기려던 천사 곧 마귀를 심판하심(요일3:8)
③ 그 피를 뿌려 사람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받을 토양을 만드심이다.(히9:22)
그는 부활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으니 예수 이름을 주려 하심이다.(요16:7, 20-24)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요3:18)
그 이름으로 구원 죄 사함 자녀의 권세 생명 신유 능력...을 받고
그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얻는지라(요14:13)
예수 이름이 자기 영혼에 있음을 성령으로 아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자산을 받았음을 아니
항상 기뻐하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 자신이 있다.
오! 주여,
만일 내게서 ‘예수’이름을 빼 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약함 추함 천함 늙음 못남 불안 절망 좌절 허무 고민 죄 지옥............
오! 아버지여, 내게 예수 이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 하나 만으로! 나는 세계를 다 가졌습니다. 아멘.
아버지의 이름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고 오직 제자들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은 한편 매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 즉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생각에 반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단언하십니다(9). 제자들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셨고 선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 목적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미 그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10). 이런 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본문 6절부터 10절까지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제자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 존재들이라는 설명입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나타냈는가하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곧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에게도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신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의깊게 17장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말을 몇 차례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외에, 11~12절을 보십시오.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은 제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위대한 기도의 마지막 절인 2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이미 알게 하였으나 계속해서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에게 있고 주님 자신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결코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라 신자의 삶을 규정하고 신자의 삶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실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그토록 신자의 삶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또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신자의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름은 속성과 성품을 의미한다(잠 18:10; 창 32:22~32).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한다는 이 개념은 잠언의 한 구절을 기억하게 합니다. 잠언 18:10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이름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 속성 또는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들과 구절들이 있지만 야곱이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씨름을 한 후에 날이 밝을 때 야곱이 천사를 놓아주지 않고 “내게 축복하라”고 했을 때, 천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천사는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정체성, 지금까지 야곱이 짊어지고 살아왔던 야곱의 문제의 핵심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고 자기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될 때 까지는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까지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는 사깃군이요, 거짓말쟁이요, 남의 발뒷꿈치를 잡는 자였습니다. 그는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인 자입니다. 이때 천사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명령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그에게 주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야곱이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지 이름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밤새 싸운 이분의 정체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서 물은 것입니다. 이름은 단지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정체성, 속성, 성품 그리고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천사가 자기 이름을 가르쳐준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의미하는 브니엘이라고 했다고 함으로써 그가 씨름한 분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하였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여서 그리로 달려가는 자는 안전함을 얻는다는 말씀도 이런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과 환경으로부터 절망과 낙심의 포로가 되는 대신, 우리는 모든 고난 속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견고히 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들을 얼마나 또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 곧 신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이미 구약 성경에 명확하게 계시된 이름들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일곱 개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A. 여호와(출 3:14)
제일 먼저 우리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이 80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셨던 때,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힘이 다 빠진 노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고,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믿고 살았던 40년 전의 모세가 아닙니다. 인생의 낙오자, 실패자인 모세에게 이 하나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시되 인생의 실패자인 모세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구원해내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의 유무에 의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
B. 여호와 이레(창 22:14): 공급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는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드릴 때,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수양을 준비해주신 일을 기념하여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역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구약 성경에 허다합니다. 아브라함에게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가 아니십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하나님의 이름은 신자들이 자신의 삶의 모든 국면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일관성있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존재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여러분은 자기 힘으로, 자기만을 믿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삶의 모든 국면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신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일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모든 신자가 다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물질의 궁핍함을 안고 살아가고, 어떤 경우에는 일평생 그런 삶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일 수 있습니다. 아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는 신자인 것입니다.
C. 여호와 라파(출 15:26):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홍해를 건넌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여 기진맥진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한 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나무를 모세가 그 물에 던져넣자 쓴 물이 달게 변하였고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서 당신 자신을 ‘여호와 라파’로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쓴 것을 변하여 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홍해의 기적만을 체험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많은 쓴 물들을 만나고 광야를 만납니다. 우리 인생에는 쓴 기억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쓴 기억들을 고치셔서 선하게 바꾸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라파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쓰디 쓴 경험들을 하게 될 때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D. 여호와 닛시(출 17:15): 여호와는 나의 깃발
우리는 또 여호와 닛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첫번째 전쟁을 한 것이 아말렉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의 군사들이 나가서 싸우는 동안, 모세는 아론, 훌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어 기도하였고 이 전쟁의 승패는 기도의 손이 들어올려진 것에 따라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은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하였습니다. 모세는 거기에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깃발이 승리를 상징하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승리가 되시고,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하는 고백이 됩니다. 성도의 인생은 싸움과 전투에 비유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더불어, 세상과 더불어,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자입니다. 이 전쟁은 성도의 죽음이 오기까지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패배의 쓴 맛을 경험합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성도는 거기로 피하여 안전함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분이심을 그는 신뢰하고 그분께로 피하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요한계시록에 반복적으로 표현된대로 ‘이기는 자’인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E. 여호와 치드케누(렘 23:6): 여호와는 우리의 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하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이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먼 날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계시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의로와서 그들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심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에 관한 약속이 담겨진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우리들, 불의한 우리들에게 구원의 근거가 될 의로움이 친히 되어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실패할 때마다, 좌절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고, 여러분이 받은 그 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게 해줄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F. 여호와 로에(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
여호와 로에라는 말은 다소 생소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다윗의 고백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인생에서 길을 잃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확신이 없이 의심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게 되는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생의 인도자가 아님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도자는 바로 여호와 로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따라가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로에로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어떤 길이 자기에게 이익이며 손해인지에 의한 기준을 따라서 길을 걸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애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길을 헤매다가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G. 여호와 삼마(겔 48:35):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종말의 성전 환상을 본 후에 고백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우주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기념하여 이 이름에 담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어느 곳으로 가셔도 하나님의 임재를 떠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국을 떠나 미국 땅으로 이민을 오셨지만, 오히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모래 위에 발자국’이라는 시를 생각해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걸어온 여정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정작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는 없는 것을 발견하고 주님께 묻자 주님은 “그때에는 내가 너를 엎고 걸었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 없는 거야,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란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던 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혼자라고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순간에 기억해야 할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입니다.
4. 기도하기 전에 묵상하라.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의 풍성한 의미에 대해서 단지 일곱 가지만 살펴보았지만, 여러분은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계시하셨고 그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였다고 말씀하시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으셨기를 바랍니다. 이 풍성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자를 어찌 아들이라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저는 오늘 단지 성경퀴즈에 나올만한 단어들을 공부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이름들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아시는지를 도전하는 것입니다. 아니, 여기서 언급한 것들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것이 머리에 넣어둔 지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순간 순간 의지하고 그 이름에 나아가 안전함을 얻는 성루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지식입니까?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기도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분에게 나아가 기도하십니까?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여러분이 나아가실 때, 여러분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이제 나아가려고 하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은 그분의 이름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절박한 필요와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루,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가 거기서 안전함과 평강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위대한 기도에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신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
5.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깨닫는 일에 삶을 드려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어떤 일에 쏟아야 합당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시간을 어딘가에 사용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물질과는 달리 모두에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가신다면,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배워야 할 것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들을 배우시든지간에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계시하여주신 아버자의 이름을 배우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때론 여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돈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여러분이 풍성하고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은혜와 풍성함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여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깨달아가는 일에 열심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시간을 들이십시오. 새벽예배에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서, 금요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주일 예배와 모든 성경공부와 개인적인 성경읽기를 통해서 여러분이 시간과 열심을 쏟으시라고 권면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영적 무지는 우리를 영적 빈곤의 비참함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또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한복음 17:6)
이 구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 중의 한 구절입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면서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전 생애를 통하여 행하신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우리는 예수를 믿던 날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세 분의 인격체(three persons)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요일 5: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반면 양태론자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한 분(한 인격체)인데, 그 하나의 존재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모습만 바꾸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상온에서 액체 상태인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되고, 가열하면 기화되어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동일한 존재가 양태만 바뀔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직장에서는 "과장님"으로 불리다가 집에 오면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 앞에서는 "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그분이 하늘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 예수님, 성도들 안에 들어가면 성령님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왕좌가 텅 비어 있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 성경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성부)과 그분의 영(성령)께서 처음부터 계신 그리스도(성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은밀한 가운데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던 때부터 내가 거기 있노라. 이제 주 하나님과 그분의 영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은 물속에서 올라오셨고, 성령님께서는 위로부터 내려오고 계셨고,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하여 증언해 주셨습니다. 만약 양태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성령님은 실체가 아니라 허구가 되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수님이 복화술로 말씀하셨거나 때를 맞추어서 천사들이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마 3:16-17)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막 14:36)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동일한 존재라면 바로 여기에서 성경에도 없는 "성부고난설"과 "성부사망설"이라는 거짓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성경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태론자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부 하나님도 같이 사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죽은 하나님을 다시 살릴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행 3:15)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러나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니라.
베뢰아 측의 김기동 목사는 개역 성경의 요한복음 17장 11절을 들어서 이것이 양태론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요 17:11, 개역)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위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번역대로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자기 이름(아버지의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본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이름도 예수가 되어 버립니다. 아들도 예수, 아버지도 예수이니,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한 존재인데, 어떤 때는 아버지 배역을 하다가, 다른 때에는 아들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역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 역본들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엉터리 오번역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양태론 교리를 퍼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입니다.
(요 17:11, 킹흠정)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KJV)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에게 "자기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주셨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요한복음 17장의 다른 구절들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6절.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9절.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12절.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지켰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의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니이다.
24절. 아버지여, 원하건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세상의 창건 이전에 나를 사랑하셨으므로 친히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옵소서.
따라서 "성부 하나님도 예수이고, 아들 하나님도 예수이니 이는 둘이 아니라 한 존재가 그 때마다 모습만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양태론자들의 주장은 거짓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교리를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교리가 나옵니다.
바른 성경에서는 바른 교리가 나오고, 잘못된 성경에서는 잘못된 교리가 나옵니다. 바른 성경을 통해서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믿음에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과 호칭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약 200개의 이름과 호칭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좀 더 중요한 이름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지위, 그리고 우리를 위한 지상 사역과 관련한 세 부문으로 나누어 살펴본 것입니다.
모퉁이돌(에베소서 2:20)
– 예수님은 교회의 모퉁이돌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연령의 성도들을 끈끈하게 연결시키시고, 당신을 믿는 믿음 위에 하나의 구조물로 세워지게 하시며, 그 안에서
모두가 하나되게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로새서 1:15)
– 16절에서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나신 이의 지위와 출중함을 지니고 계시며, 우주에게 가장 높은 지위를 견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다른 것들보다 뛰어나시며, 만물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1:22; 4:15; 5:23)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이자,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들의 모임, 즉 교회의 최고 통치자는 왕도 교황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한] 이(사도행전 3:14; 시편 16:10)
–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간성 모두에서 거룩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위한 거룩함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사도행전 10:42; 디모데후서 4:8)
– 주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고 영원의 보상을 분배해주시는 재판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디모데전서 6:15; 요한계시록 19:16)
– 예수님은 지상의 모든 권세, 모든
왕들과 통치자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시며 아무도 그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지휘하십니다.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
– 예수님은 죄로 어두워진 세상 가운데에 오셔서 당신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고 빛 가운데 행합니다.
평강의 왕: (이사야 9:6) – 예수님은 세상에 전쟁이 없는 상태와 같은 평강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강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누가복음 1:35; 요한복음 1:49) –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14). 신약성경에서 42번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시합니다.
사람의 아들(인자): (요한복음 5:27) – “하나님의 아들” 과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이 이름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존재하는 인간성을 명시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1; 요한1서 5:7-8) –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두 번째 인격으로서 그가 말씀하시니 그것이 이루어졌으며, 태초에 말씀으로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창세 때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계시록 19:12-13) – 이 이름은 그리스도께 주어진 이름으로 그리스도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거룩한 인격의 신비를 나타냅니다.
생명의 말씀: (요한1서 1:1) –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영생으로 이끄는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생의 기쁨과 충만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의 지위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1:8; 22:13) –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만물의 시작과 끝이라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진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영원성과 관련한 이러한 진술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이사야 9:6; 마태복음 1:23) – 문자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와 마태는 모두 베들레헴에서 나실 그리스도가 사람의 형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지상에 오시는 하나님 당신일 것이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내가 있느니라: (I Am; 출애굽기 3:14과 함께, 요한복음 8:58) – 예수님께서 당신을 이러한 호칭으로 묘사하셨을 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며 돌로 치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를 영원하신 하나님, 구약성경에 나오는 변함 없으신 여호와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유의 주: (사도행전 10:36) – 예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과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참 하나님: (요한1서 5:20) – 이 호칭은 참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단지 신성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 바로 그 자체이심을 직접적으로 주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고 가르치므로, 이 호칭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 포함되는 예수님의 본성을 묘사합니다.
지상 사역과 관련하여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 (히브리서 12:2) –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에베소서 2:8-9),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자 끝이 되십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근원이시며 붙잡아 주시는 이이십니다.
생명의 떡: (요한복음 6:35; 6:48) – 물질적 의미에서 떡이 생명을 유지시켜 주듯이,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고 유지시켜 주시는 떡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먹이기 위해 만나를 내려주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몸소 떡이 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랑: (마태복음 9:15) –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그의 신부로 묘사하는 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서로 깨질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 매여 있습니다.
구원자: (로마서 11:26)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되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 14) – 성경에 나오는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포식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목숨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기르시며, 먹이십니다.
대제사장: (히브리서 2:17) –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한 속죄 행위를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 – 하나님의 율법은 속죄 제물로서 티 없고, 흠 없는 어린 양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참으며 죽음의 준비를 마친 모습으로 온순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중보자: (디모데전서 2:5) – 중보자는 두 편의 당사자 사이에 들어가 화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분이며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기는 것이므로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석: (고린도전서 10:4) – 모세가 광야에서 친 바위에서 생명수가 나오듯이, 예수님은 영생의 생수를 흘려 보내시는 반석이십니다. 예수님은 반석이시고 우리는 그 반석 위에 영적 집을 짓습니다. 그 위에 지은 집은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이요 생명: (요한복음 11:25) – 예수님 안에 내재된 상징은 당신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죄인들을 영생으로 부활시키시는 수단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 다시 살리심을 받습니다.
구주: (마태복음 1:21; 누가복음 2:11) –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백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백성들이 영적 원수들을 이겨내도록 도우심으로써, 시험과 죽음에서 백성을 지켜주심으로써, 마지막 날에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참포도나무: (요한복음 15:1) – 참포도나무는 가지들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즉 구원의 생명수와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6) –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거짓 세상 속의 오직 하나뿐인 진리이시며, 영생의 유일한 참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현세적, 영원적 의미 모두에서 이 세 가지를 구현하십니다.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아빠’(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아빠”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였다.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는 ‘아빠’(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희미하게나마 구약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호칭 ‘아버지’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아람어로는 abba)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첫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둘째,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셋째,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단순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넷째,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우리의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의 목적이 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색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의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그것은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 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예수의 영 안에서 정립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 안에서만 정립되고 그 안에서 드러난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신약 속 예수의 이름과 호칭
신약 속 예수의 이름과 호칭(新約 - 呼稱, 영어: names and titles of Jesus in the New Testament)는 신약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1] 기독교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지칭하는 두 이름 예수와 임마누엘이 구원의 속성을 갖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초대교회는 단순히 그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선포하며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예수님을 이해하고 선포하는 과정의 한 요소는 그에게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초기 교회에서 점진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신약성경에 등장한 칭호 중 일부는 그 시대의 유대적 맥락에서 채택된 반면, 다른 칭호는 예수의 메시지, 사명, 가르침을 언급하고 강조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칭호 중 일부는 중요한 기독론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거룩한 이름에 신학적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 청원에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요한복음 16:23에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강조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주시리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단순히 신분을 식별하는 상징의 나열이 아니라 본질적인 신성한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115가지 이름과 칭호
시편의 저자는 우리에게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시편 29:2) 이야기한다.
러셀 엠 넬슨 회장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다양한 명칭과 직위가 여러분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모든 것을 공부하십시오. 예를 들어,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여러분을 진정으로 대변하시는 변호자이십니다.”1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 나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분의 이름과 칭호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발전한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많은 역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거룩한 경전에 나열된 그분의 많은 이름과 칭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모든 이름과 칭호는 그분의 위대함, 힘, 권능, 주권을 나타낸다. 그분의 이름은 또한 그분의 부드러움, 자비, 은혜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과 보호와 생명과 위안의 근원이시다.
칠십인 정원회의 조너선 에스 슈미트 장로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칭호를 아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분의 여러 이름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또한 더욱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즉, 우리 삶에 기쁨과 목적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보려 노력하면서, 경전 공부의 힘에 대한 나의 간증은 한층 더 성장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찾지 않으면 그분의 많은 이름과 칭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제 나는 우리가 구하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에 접근할 때 하나님께서는 경전을 통해 답을 계시해 주신다.
경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많은 이름과 칭호가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그 이름과 칭호들은 500개가 넘는다. 경전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그분의 칭호와 이름을 신회 구성원, 천사, 제자 등 그 이름을 부른 사람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이름을 공부하거나 기록하는 다양한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지금까지 작성한 목록에는 경전에 나오는 이름만 포함되어 있지만, 후기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이름으로도 비슷한 목록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신회 구성원들이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115개를 아래에 나오는 것과 같이 나열해 보았다. 나는 이 목록이 우리가 경전을 읽어 나가면서 그분의 다양한 칭호를 발견하는 일에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이 목록에서 비슷한 이름이나 칭호가 두 번 이상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는 의도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한복음 20:17)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을 구별하여 사용하신 것은 그분과 그분 아버지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맺을 수 있는 ‘개인적이고 신성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나 “나의 구속주”와 같은 칭호를 비슷한 칭호인 “주 하나님”과 “구속주”와 별개로 나열하기로 했다.
이 글에서 내가 찾은 500개 이상의 이름을 나열할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나는 넬슨 회장의 독려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와 이름을 직접 찾고 연구해 볼 것을 여러분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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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대한 … 변호자”(교리와 성약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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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요한계시록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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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요한계시록 1:8, 교리와 성약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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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교리와 성약 19:1, 모세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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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한계시록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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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요한계시록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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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스가랴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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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요한복음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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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마가복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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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한 새벽 별”(요한계시록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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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주”(교리와 성약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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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과 영원”(모세서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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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되고 참된 증인”(요한계시록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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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들의 아버지”(교리와 성약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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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아버지”(예레미야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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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며 마지막”(요한계시록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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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교리와 성약 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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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근원”(예레미야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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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모세서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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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출애굽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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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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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육체의 하나님”(예레미야 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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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의 하나님”(창세기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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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사야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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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하나님”(이사야 29:23, 제3니파이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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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하나님”(출애굽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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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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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하나님”(제3니파이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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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상의 하나님”(출애굽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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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요한복음 10:11, 교리와 성약 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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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자존자”(교리와 성약 29:1,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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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임금”(말라기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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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누가복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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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거하[는 이]”(교리와 성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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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독생자”(모세서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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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요한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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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사야 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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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거룩한 이”(이사야 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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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있는 자”(출애굽기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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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출애굽기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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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교리와 성약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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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교리와 성약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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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네 구속주”(교리와 성약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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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사도행전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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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왕”(앨마서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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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왕”(앨마서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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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왕”(모세서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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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요한복음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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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생명과 빛”(교리와 성약 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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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세상에 [온 이]”(요한복음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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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이요 생명”(제3니파이 11:11, 교리와 성약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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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요한복음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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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듣는 자들에게 영원토록 빛이 될 [이]”(니파이후서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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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숨기울 수 없는 빛”(교리와 성약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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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비치는 빛”(교리와 성약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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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치켜 들 빛”(제3니파이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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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에스겔 24:27, 교리와 성약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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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주인”(마태복음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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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창세기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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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출애굽기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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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출애굽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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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조상의 하나님”(출애굽기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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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의 주재”(마태복음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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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주”(힐라맨서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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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하는 주인”(누가복음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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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오스의 주”(교리와 성약 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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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누가복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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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출애굽기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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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예레미야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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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네 하나님”(이사야 43:3, 누가복음 4:8, 니파이후서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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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출애굽기 6:7, 교리와 성약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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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모세서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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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모세서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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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라 또는 주”(요한복음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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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약의 사자”(제3니파이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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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니파이후서 25:19, 모세서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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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생자”(모세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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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전능한 자”(교리와 성약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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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아들”(누가복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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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자”(니파이후서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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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독생자”(요한복음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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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크시고 참되신 하나님”(힐라맨서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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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구속주”(교리와 성약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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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요한복음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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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재판관”(모세서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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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반석”(모세서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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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뿌리요 자손”(요한계시록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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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구주”(교리와 성약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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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아만”(교리와 성약 7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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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앨마서 5:50, 교리와 성약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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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모세서 6:57, 마태복음 9:6,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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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아들”(제3니파이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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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교리와 성약 14:9,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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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니파이전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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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누가복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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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반석”(교리와 성약 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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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운 해”(말라기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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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사야 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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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사야 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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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지극히 큰 상급”(창세기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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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구속자”(이사야 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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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구원자”(이사야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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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방패”(창세기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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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요한복음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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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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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대한 너희의 변호자”(교리와 성약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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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거룩한 이”(이사야 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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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왕”(교리와 성약 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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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요 네 하나님”(교리와 성약 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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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또는 선생”(요한복음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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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선생”(마태복음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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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구속자”(이사야 43:14, 교리와 성약 78:20)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라
이 귀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 중의 한 귀절이다.
이 짧은 귀절 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면서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전 생애를
통하여 행하신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우리는 예수를
믿던 날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왔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부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주기도문을 수없이 외우고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러 왔으니...”
찬송을 수없이 부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많은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가 아쉬워서 부르고 내가 필요해서 부르고, 내 요구를 들어달라고 부른 것 외에 달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가 있는가?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셨다.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또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르셨는데,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도록 부르고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도 예수님은 자기 요구를 들어 달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왜 요구가 없었겠는가?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가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예수님의 요구를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이름만이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인격이다.
인간에게서도 이름은 사람을 식별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의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 석 자를 부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성격과 특징과 인격을 생각한다.
메시야의
예언이라고 불리우는 시편 22편 22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리이다”라는 귀절은 메시야의 홀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포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나타내었나이다”라는 말 “에파로오사”는 “뚜렷하게 나타낸다”는 뜻과 함께
“눈에 보이도록 증명한다”는 뜻이 있다.
눈에 보이도록 증명하려면 “말”로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행동이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어떠한 분이신가를
내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가 있었나이다.”
이 말씀은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과도 같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했다(마 6:13-14).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 93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법정, 감옥영화
1993년 영국영화
감독 : 짐 쉐리단
각본 : 짐 쉐리단, 테리 조지
원작 : 제리 콘론
제작 : 짐 쉐리단, 테리 조지, 가브리엘 번 외
출연 : 다니엘 데이 루이스, 피트 포슬스웨이트, 엠마 톰슨, 존 린치, 돈 베이커, 안소니 브로디, 브리타 스미스, 비티 에드니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대상) 수상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1974년에 발생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길포드 지역 레스토랑의 폭발테러 사건으로 연루된 4인의 억울한 누명과 옥살이 그리고 석방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1989년 '나의 왼발'에서 함께 했던 짐 쉐리단 감독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다시 의기투합해서 4년만에 함께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로 짐 쉐리단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고 곧바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를 비롯하여 7개 부문에 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993년에 발표된 영화들이 각축을 벌인 1994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후보작들이 굉장히 치열했는데 베를린 영화제 대상 수상작(아버지의 이름으로), 칸 영화제 대상 수상작(피아노) 들이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베니스 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숏컷'이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 3대 영화제의 대상 수상작들끼리 나란히 후보에 오르며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혼신의 야심작 '쉰들러 리스트'의 바람이 거세서 다른 영화들이 강력한 들러리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쉰들러 리스트의 7개부문 수상으로 끝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7개부문 중 한 개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필라델피아'의 톰 행크스도 치열한 각축을 벌였지만 이미 4년전 수상을 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보다 첫 수상을 노린 톰 행크스의 도전이 더 강력해서 결국 남우주연상도 톰 행크스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후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링컨'으로 두 차례 더 수상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역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좋은 연기를 보인 대표작 중 한 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영국 배우로 정말 대단한 연기파로 알려졌는데 6번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3번 수상했고 영국 아카데미상도 4회 수상했을 정도였습니다. 워낙 연기에 집중하는 메소드 배우다 보니 한 편 한 편 신중히 작품을 오르는 배우이며 그래서인지 평생 영화 출연작품 숫자가 불과 20여편에 불과했습니다. 그 정도 숫자의 영화에 출연하고 아카데미 상을 3회나 수상하고 6회나 후보에 오른 건 대단하죠.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일랜드인 망나니 청년으로 출연합니다. 20대 청년인 제리(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별 직업도 없이 한량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교사인 아버지(피트 포슬스웨이트)와도 다소 소원한 관계죠. 그는 히피 청년인 폴(존 린치)과 어울리며 영국에 가서 히피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이 시기에 길포드 한 식당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제리가 어울리던 히피 여성과의 관계를 질투하던 동료 청년의 고발로 제리와 폴은 무고하게 식당 테러범으로 몰려 구속되고 제리의 아버지와 영국에 있는 숙모 등도 모두 공범으로 연루되어 함께 재판을 받게 됩니다. 제리와 폴은 강압적인 수사의 희생양이 되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종신형을 받고 수감됩니다. 이렇게 제리의 억울한 감옥생활이 시작됩니다.
실제로 제리 콘론은 14년을 억울하게 수감했고 수감도중 아버지 주세페 콘론은 사망했습니다. 14년의 긴 세월이었는데 영화에서는 감옥생활을 비교적 빠른 템포로 전개합니다.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어 힘든 삶을 보내고 있었는데 감옥에서 실제 테러범을 만나게 됩니다. 제리는 그에게 이용당하며 간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고 테러범의 조직과 어울리며 마약도 하는 등 처음에는 망나니같은 수감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그 테러범이 간수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이감되면서 제리는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와도 화해하며 변호사(엠마 톰슨)와도 진솔하게 대화를 합니다. 제리의 변호사는 열심히 구명운동도 하고 석방 여론도 조성하면서 제리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병이 악화된 제리의 아버지는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고 제리의 변호사는 포기하지 않고 제리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다시 재판이 열리고 결국 제리와 폴 등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무죄가 선고되지 제리는 당당하게 법정 중앙 통로를 통하여 밖으로 나가면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예회복과 진실을 위해 싸우겠다'
이 사건은 오래도록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등이 원인이 되었고 마음에 안드는 아일랜드인에게 누명을 씌워 폭탄테러의 나쁜 여론을 빨리 잠재우고 사건을 졸속으로 해결하려고 한 검찰, 법원 과의 사악한 결탁에 의해서 한 가족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잘못된 정치적 희생재판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고 이른바 길포드 4인 이라는 대표적 희생양을 낳았습니다. 영국정부에서 결국 이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제리가 누명을 벗고 풀려난 직후에 만들었으며 그런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의 평단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고 강력한 아카데미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연기파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엠마 톰슨의 열연도 있었고 '나의 왼발'이라는 휴먼 드라마를 감독했떤 짐 쉐리단의 연출도 주목받았습니다. 영화 개봉 당시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밀히 말하여 이 영화가 같이 경쟁한 '쉰들러 리스트' 급은 아니라고 보고 법정영화나 감옥영화 중에서 워낙 걸작이 많아서 특별히 두드러진 작품이라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짐 쉐리단 감독의 연출은 생각보다 평범했고 이 기가막힌 소재의 내용을 '아버지와 아들'을 엮는 픽션을 섞어 드라마틱한 부분이 있었지만 다소 평이한 전개였습니다. 감옥에서의 14년은 설명이 없으면 그만큼 길고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지지 못했고요. 그래도 막판에 엠마 톰슨의 열연으로 법정씬이 짜릿하긴 했지만 영화는 좀 밋밋한 느낌이었습니다. 다소 과대평가된 면이 있는 영화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나 아버지로 나온 피트 포스슬루웨이트의 연기는 모두 좋았습니다.
실제로 짐 쉐리단은 극적 효과를 위해 픽션을 많이 가미했습니다. 영화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방에서 수감된 것도 아니고 같은 감옥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엠마 톰슨이 연기한 변호사는 실제 법정에서 진술한 것도 아니었다고 하고. 사실 실제 사건의 처리가 많이 아쉬워서 영화적 통쾌감이 높을 수는 없었습니다. 14년만에 무죄로 밝혀진 이후 어떤 경찰, 검찰, 법관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제리 콘론 본인의 자전적 책을 토대로 만들었고 짐 쉐리단은 직접 각본에도 참여했습니다. IRA의 테러로 인하여 엉뚱하게 희생양이 된 청년의 안타까운 실화지요.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2.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3.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4.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5.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6.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7.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8.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9.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다락방 강화(the Upper Room Discourse)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께서 인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다락방 강화의 목적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 숭천을 목전에 두신 상황에서 이제 자신의 부재시에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랑(Loving
one another)’, ‘위안과 평강(Comfort and Peace)’, ‘예수 안에 거함(Abiding in J
esus)’, ‘세상에 대한 승리의 확신(Conviction of Victory against the World) 등이 강화의 주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락방 강화의 내용 구조는 크게 세 부분, 즉 13장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도, 14-16장의 주님의 고별 설교, 그리고 17장의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로 구성되었다.
이 중 17장은 강화의 완결(Consummation) 부분으로서 다락방 강화의 일부에 속하지만 그 내용의 특성상 독립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13-16장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1-20절),
가룟 유다의 배반과 이탈(21-30절),
예수의 부활 승천에 대한
암시적 예고와 사랑의 새 계명 수여(31-35 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36-38절) 등 최후의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중 가룟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둥 공관복음서들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보도함에 있어서 신약의 중요한 2대 성례 중 하나인 성만찬(聖曉餐) 제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성만찬 제정 부분을 모두 생략하고 대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속해서 ‘사랑의 새 계명’을 수여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뚜렷한 차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기사로서, 이후에 이어지는 긴 강화와 별개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몸으로 보이신 설교’라고 할 만큼 이후의 강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었다.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저녁, 예수님의 마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 먼저 한 가지 행동을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각인(刻印)시키신 것이다.
그 메시지란 우선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1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다. 장차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을 아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인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셨다는 것은 무조건적이고도 변함없는 그분의 초월적 사랑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회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눅 22:24을 참조해 볼 때, 사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곧 예수께서 이루리라고 생각한 정치적 메시야 왕국에서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신약 공동체의 모델이 되어야 할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순간에까지 여전히 시기와 경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기보다는 몸으로 그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친히 모범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교훈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와 스승’이신 분으로서 제자들의 발 씻기시기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새 계명(New Commandment)’ 을 주신다(31-35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로운’ 계명이란 시간적인 차원에서 옛것에 비해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질적인 면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미 구약의 율법에 주어졌으며(레 19:18), 또 구약 율법의 요약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눅 10:27). 따라서 여기서 새로움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즉, 옛계명이 이웃 사랑의 기준을 인간의 자기 사랑에 두고 있는 데 비해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과 더 나아가 신약의 교회 공동체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완전하고도 신적인 사랑을 모델(Model)로 삼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새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지 말고 예수께서 몽소 보이신 대로 무조건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14-16장은 예수께서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그 자리에서 주신 고별 설교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 중 14장에서는 이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세상이 주는 각종 핍박을 감수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과 나아가 전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는 주님의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예수께서 자신이 곧 떠나시지만 그 떠나시는 목적이 곧 아버지 집에 제자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는 데 있음을 언급하시며 다시 오셔서 그들을 자신이 계신 곳에 영접하여 인도할 것임을 약속하신다. 또한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the Way, the Truth, the Life)이라는 자기 선언을 하시며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밝히신다(1-7절). 이어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벌립의 요청에 대해 자신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으며 또 아버지는 자신 안에 계시다고 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라고 하는 단일성(Oneness)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자신이 그것을 시행하실 것이며 이로써 성부께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히신다(8-15절).
이어 14:16-31에서는 예수께서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the Counselor)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과 또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끼치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또 다른 보혜사’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시다(롬 8:9 ; 고전 12:3 ; 갈 4: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곧 예수께서 그의 영으로써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바로 깨닫는다면, 남겨진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가 있을 수 없다. 비록 예수께서 ‘몸으로는’ 제자들을 떠나시게 되지만,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셈인 것이다.
다음 15:1-11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 안에 거하는 것(Abiding in J esus)에 관해 교훈하신다. 즉 제자들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하듯이 그렇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이 곧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10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어서 15: 12-17 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준수를 재차 언급하며 촉구하신다.
이어 15:18~16:33의 네 문단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며 세상에 대한 숭리의 확신을 가질 것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와 성령이 오셔서 행하실 사역에 대해서 예언과 교훈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예고하신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회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것이다(16:2). 사실 핍박을 당해도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견디고 이겨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핍박하는 자가 오히려 의의 편에 선 듯한 상황이 되면 핍박을 받는 제자들은 두려울 뿐 아니라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죄(罪), 의(義), 심판(審判)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곧 죄,의,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보혜사의 이러한 사역은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역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으로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성부와 성자께 속한 모든 영광의 비밀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6:13-15).
13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긴 강화의 결미 부분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드디어 예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임박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승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해 주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강화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에 있다고 그 목적을 밝히신 후 세상에 대해 승리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16:33).
물론 예수님의 이같은 심오한 강화를 제자들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 내일 새벽이 되면 예수님은 체포되실 것이고, 제자들은 평소의 충성의 장담(마 26:35)과는 달리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말 것 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치 않으셨으며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자신의 지상 사역의 종결(終結)이 곧 보혜사 성령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의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작(始作)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결코 주님과 떨어져 있지 않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상황을 초월하여 세상이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지도 못하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을 바르게 깨닫고 상기하게 되며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보혜사가 오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떠나심이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진정 유익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16: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장과 1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는 시점에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그분의 원수들을 이끌어 그분을 체포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십니다.
이 지시들은 매우 중요하므로 우리는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부터 시작해 보자.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많은 사람들이 계명에 대해 들으면 불쾌해합니다.
이는 은혜와 계명이 상반된다는 왜곡된 하나님의 은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어떤 계명도 지킬 필요가 없거나, 기껏해야 그러한 계명들은 좋지만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애쓰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믿음은 마음의 상태, 즉 내가 믿는 바일 뿐, 내가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할 절대적인 필요성은 없다고 보인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동은 필수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주님께서 오셔서 이런 모든 정신적 구조물을 무너뜨리신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방금 읽은 내용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깊은 의미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46-49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46-49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 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분이 말씀하신 것, 곧 그분의 아버지의 뜻과 계명을 행해야 합니다.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그분의 계명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읽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싶을 때만 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필수적이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참 제자의 표징이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이 아닌 좁은 문을 선택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자. 좁은 문을 통과하여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인 어려운 길을 걸어가자. 넓은 길, 대다수가 따르는 길, 십자가가 필요 없는 쉬운 길, 모든 것이 쉽고 회개 없이 세상처럼 살 수 있는 길은 멸망으로 이끈다. 오직 어려운 길만이 생명으로 이끈다.
그러나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그 마지막 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자:
요한복음 14:21
“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분을 사랑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는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진실한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단지 말뿐인 “사랑”일 뿐입니다. 실패하더라도 진정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거처가 되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육신을 따라 행해서는 안 되며, 세상의 넓은 길로 걸어서는 안 되고 좁은 문을 통해 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참된 교제의 “비밀”을 찾습니다. 많은 설교자들도 주님과의 참된 교제를 비밀이 있는 것처럼 제시하며, 마치 자신들이 그 열쇠를 알고 있으니 그들의 방법을 따라야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비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핵심은 주님의 계명, 곧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지키는 자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아버지와 아들에게 사랑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 안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토록 단순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예수님께서 이 점을 분명히 하신 후, 포도나무 비유를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9
“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내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 것이라. 그러므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은 이 놀라운 구절에서 이전에 말씀하신 내용을 이어가십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요, 아버지는 포도원지기이십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포도나무 안에 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안에 거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시들어 버릴 것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른 가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아져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거하는 것,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따르는 것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니며, 모든 신자에게 보장된 것도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행할지 말지의 결정이 매일의 선택인 것처럼, 이는 매일의 결단입니다.
이쯤 되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는 네 종류의 마음 중 세 종류에 떨어졌을 때 싹이 텄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종류의 마음에서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나머지 두 종류에서는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 세 부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8:13-15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처음 두 부류는 말씀을 듣고 믿었으나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중 첫 번째 부류는 “잠시 믿다가 시험에 들면 떨어져 나가는 자”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들었을 때 나가서 삶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입니다. 오직 세 번째 부류만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른 두 부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기쁨으로 밝게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일이나 박해로 인해 마음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 그들은 한때 믿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부류 중 첫 번째에 대해 그들이 잠시 믿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신실했으나, 잠시뿐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잠시만 신실한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영원히 신실하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섬기는 열매 없는 '믿는 자'가 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그분의 말씀은 따르지 않는 자들처럼. 오히려 우리는 열매 맺는 자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을 섬기는 일에 힘쓰고자 합니다. 매일매일, 끝까지.
요한복음 15장을 계속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5:10-1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마지막 말씀에서, 체포되기 몇 시간 또는 몇 분 전에도 주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이 명하신 대로 행하면 우리는 그분의 친구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며, 우리 마음을 선하게 돌보고 지키면 우리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말씀의 씨앗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바라시는 대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매”와 “계명”이라는 말을 듣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우리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행하면 좋고, 안 해도 별 문제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명령을 거역하고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주님을 알지 못할 것이며,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이는 결코 우리가 넘어지거나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달리며, 비록 매일 넘어질지라도 일어나 계속 나아가며 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히브리서 12:1-2
“...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 가장 중요한 계명
이제 주님의 계명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계명이 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12절에서 읽은 대로:
요한복음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값싼 사랑, 말뿐인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요한이 첫 번째 편지에서 말한 대로: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몇 절 앞서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요한일서 3:14-18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울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 중 누구라도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살인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우리가 거하는 것, 즉 죽음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리 곁에 있는 형제가 궁핍한데도 외면하기로 선택한다면?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며, 우리도 그분 안에,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진실성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옳은 말만 하는 것—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4-46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34-46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 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명 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며 또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야고보가 말한 대로:
야고보서 1:22-27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아 주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그것이니라”
결론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 용서할 것이며, 악한 것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를 헐뜯지 않을 것이며, 서로를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정의를 기억합시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으며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면 그분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아닙니다! 그 명령들은 쉽습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쓰자. 포도나무 안에 거하고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 위해 힘쓰자. 그 임재는 오직 그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날마다 이렇게 행하자.
예수님의 고별기도(요한복음 17:1-16)
(새번역)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요 7:11,14,15)
오늘 본문은 주님이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셔야 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에 이르는 내용은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 녹아있는 고별설교입니다. 고별설교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이렇게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시는 말씀으로 고별설교를 마친 예수님은, 이제 그 온전히 승리하게 될 사역의 감격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심으로 세상을 유린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패퇴시켜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던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길은, 이제 십자가를 지는 길, 수난의 때가 남았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이 땅에 구원의 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자신만이 이 길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있기에, 사람들이 마구 뱉어낼 희롱의 언어들과, 저주를 퍼붓는 온갖 행동들과, 살점이 튀어나오도록 휘두르는 채찍과, 십자가 형틀에다 손과 발을 못 박으며, 함부로 할 그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모든 것들을, 참아내며 받아내기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 건너야 함을 아셨습니다. 짐승처럼 형틀에 매달린 채, 갈증과 고통과 수치감과 격리감에 시달려야 할 그 시간의 어두운 공포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번 다짐하셨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늘 보좌를 떠나 내가 이곳으로 내려왔지.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뜻이었고 계획이었지.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시고 파송하신 아버지의 분명한 뜻이었지. 이게 바로 내가 이 땅을 찾아와 완수해야 할 내 사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2) 주님이 그 어렵고 힘든 십자가를 친히 지심으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나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비밀을 기도 가운데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람치고 영원토록 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영생을 얻기 위한 길을 찾아내려 다양하게 애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 백년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너무 허무하니까요. 그래서 많은 종교가 당연히 생기게 되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제대로 찾은 듯하면서도, 이단 사교의 늪에까지 빠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선포가 영생을 향한 절대적 선포임을 깨닫는 사람은 행운아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묵상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 영생의 길에 접어드는 일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만 충성스럽게 다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세월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하신 말씀들, 베푸신 놀라운 치유와 섬김 가운데 나타난 기적들, 그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을 남겨두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순식간에 깨뜨리고 이 권세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내는 출애굽과 같은 역사, 즉 십자가 수난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신 지 사흘 후 부활하심으로, 이 십자가 죽음이 단순한 한 인간의 불쌍한 죽음, 어쩔 수 없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된 수순이요, 의도적으로 통과하는 심판의 사건임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쾌거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렇게 미리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17:4). 그 당시 이 기도를 듣고 있는 제자들은 그 놀랍고 깊고 웅대한 의미를 다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오늘 우리들은 이 기도의 의미를 너무나 선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한 대단하고 위대한 인간일 뿐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귀에 주님은 오늘 이 기도의 내용을 들으라고 들려주시는 줄 압니다. 창세 전에 창조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아들 하나님, 이제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십자가, 부활, 승천의 과정을 통해 원래의 하늘 보좌로 복귀해 가시기를 염원하는 이 기도가 너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믿는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이들을 예수께 주신 것이라고, 그런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리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라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 즉 출생, 말씀, 기적, 본향 등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요 17:6-8). 저들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깨달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곧 아버지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며, 예수님이 이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요 17:9,10)
이제 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제자들과 헤어지게 되면서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 집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요 17:11a) 그리고는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한 기도를 올리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1b) 예수님이 인간인 제자들을 보기에, 아직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일정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에서는, 저들의 생각이나 견해가 나뉠 수 있고, 이에 따라 서로 간에 분열과 갈등이 생길 것을 염려하시고 하시는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의 간구 수준이 대단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인 것 같은 수준의 하나 됨. 그런 놀랍고 깊고 풍성한 하나 됨으로서의 제자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하며 축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세력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분열과 헤어짐, 서로를 향한 반목과 갈등을 부추깁니다. 깨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할은 제자 공동체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요 17:12). 가룟 유다의 배신과 멸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하나 됨이요, 결속과 안전과 평화입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13). 남겨진 제자들을 향해 세상이 주는 박해와 환난이 만만치 않을 것임도 주님은 아시기에, 그로 인해 절망과 좌절, 주님 안 계신 슬픔과 외로움에 시달릴 제자들이 마음에 얹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와 악한 세력이 저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할 때, 저들이 과연 하늘 백성으로서의 담대함을 무사히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걱정이 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잠시 남겨두고 떠나는 제자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보호 요청 기도가 그래서 진행됩니다. 제자 공동체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소속된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묵상하고 삶 속에 실천하며 빛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공동체인데, 빛을 싫어하는 세상은 이 제자 공동체를 미워할 것이기에, 이런 악한 세상으로부터 제자공동체를 지켜 달라고 주님은 지금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요 17:14-1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중보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부활의 몸으로 살아계셔서,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제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중보자로서의 권세와 영광과 사랑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롬 8:34). 그러기에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더욱 깊이 알아감으로 영생의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소속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주께 날마다 영광을 올려 드리는 우리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주 안에서 주의 뜻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됩시다.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악한 세상과 구별되는 오히려 악한 권세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대적하고 물리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제자 공동체로 택하시고 불러 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변함없이 기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 흘리신 고난의 은혜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겨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참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는 지식과 믿음과 체험에서 더욱 자라가게 하옵소서. 주님 하신 일 본받아 우리도 받은 사명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 늘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시고, 악한 세상 대적하며 이기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주간도 주님의 고난 묵상하며 주의 은혜에 잠기는 한주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정교회를 통하여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아가는 건강하고 행복한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요한복음 13:31~16:33)
제자들과의 유월절 만찬이 마칠 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남기십니다. 이 고별설교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유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먼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장 당부하고 싶었던 말씀이었을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것이 내 제자됨의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떠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말씀하시며 왜 안심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가면 진리의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며, 또 내가 곧 다시 너희를 볼 것이요, 너희가 아버지의 거처에서 아버지와 함께 할 것이라 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너희들에게는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유언으로서 남기시는 말씀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보혜사 성령의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떠나가고 나면 너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인데 그것은 너희가 나를 따랐기 때문이라. 너희는 내가 택하여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속한 자로 옮기어졌으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기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죄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그의 우편에 앉히신 것이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죄를 지음으로써 세상의 통치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믿고, 너희도 담대하게 나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보혜사라는 단어가 예수님의 고별설교에서 4번이 나옵니다. 그만큼 보헤사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뒤부터는 보혜사 성령이 예수님의 역할을 맡게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인이셨지만, 영으로 오실 성령님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갈 때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권면해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나와 함께 있어 내가 아버지께 구했지만, 이제는 너희가 직접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유언을 남기는 것도 너희가 나중에라도 내 말을 이해하고 이로 인해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니, 비록 나 떠난 후에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더라도 담대하라 당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는 담대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메시지를 남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이 끝날 즈음 유다가 자기를 팔러 나갔을 때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아시고 사전에 제자들에게 이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이 유언의 내용이 제자들에게는 낯설기만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늘 실천해오시면서 가르치신 것이라 마음속에 명심할 만한 당부였겠지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의 내용이 좀 이상합니다. 내가 가고 나면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게 웬 말입니까? 그동안 메시아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면 다들 한자리 차지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비록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측면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을 능히 다 물리치신 예수님이신데, 그 분의 제자들인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니?
그리고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난 이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니 과연 그 분이 누구실까 궁금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은 진리의 영이요, 세상은 그를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너희들은 그를 알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올 것이라 하시면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는데, 통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유언을 듣고 있으면서도 눈만 멀뚱멀뚱 굴리고 있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지? 어쨌든 누군지는 모르지만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을 심판하고 진리를 증거하신다니 대단한 분이심은 틀림없을거라 생각했겠지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담대하라고 당부하신 말씀도 쉽게 그러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문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실 때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모두가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그렇게 제자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의 유언이 실현이 되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하신 예수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이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하늘로부터 능력의 입히움을 받았습니다. 나쁜 일도 일어났지요. 너희가 나로 인해 박해를 받을 것인데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신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알 수 없는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이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유언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예수님의 당부말씀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제자들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미 이기신 것을.....그리고 이제는 그들도 세상의 환란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가오는 세상에서 예수의 증인이 되어 자기들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2천여년 기독교의 역사를 일으키는 씨앗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언을 다시 묵상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말씀이 우리의 일상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담대하여 환란을 이기고, 진리를 전하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1월 22일(토) 요한복음 14-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성령(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의 진리를 증언하고,
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성령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며 위로하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 증언 :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진리를 증언하시며, 믿는 자들 또한 그 진리를 증언하게 하십니다.
- 인도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성령의 뜻대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 가르침 :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믿게 하십니다.
- 내주 및 위로 :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며 위로하고,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 보혜사 성령 : '옆에서 늘 같이 있는 분'이라는 뜻으로, 성도를 돕고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 성령세례 :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는 경험입니다.
그 세 가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더 많.
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의 말씀인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
둘째 진리의 말씀인 성령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
씀해 주십니다.
셋째 진리의 말씀인 성령님께서 오시면 과거나 현재만 알게 하시는 게 아니라 장래에 일, ,
어날 일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다음에 그 보혜사를 설명하는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는 겁니다. 진리는 참된 것입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탈(脫)은폐의 성격이 있습니다.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계시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당연히 진리를, 즉 참된 것을 따라야만 합니다. 남이 말하기 전에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다섯 가지 진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다시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 같아 이 구절에 대한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여기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이 단어는 원래 법률 용어로 변호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넓은 맥락에서는 위로, 보호, 권고, 인도하심을 말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님을 보혜사로 말씀하셨고,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셨다(요 14:17; 16:13).
이 보혜사의 정체성에 대해 조금 윤색하여 간단히 말해보려 한다.
1. 성령님은 유일무이한 인격(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첫째, 성령님은 어떤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인격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님을 가리킬 때는
“그것(it)”이 아니라 “그분(he)”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교회 회중을 포함한 사람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어볼 때, 성령님을 중성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혹시나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려고 할 땐 즉시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격체이신 성령은 근심하시고(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의 뜻을 행사하는 면에서 소멸할 수
있으며(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성령을 거스를 수도 있다(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2. 성령은 성자와 성부와 하나(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신학적 용어로 함께 동등(co-equal)하시며, 함께
영원(co-eternal)하시다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 전체를 읽어보면 성령을 보내신 분은 성부와 성자이시다(요
14:16; 16:7).
말하자면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를 위해 오셨고, 일하신다.
따라서 성경에서 보여지는 성령님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분리되거나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분리된 적이 없다.
성령님을 성경에서 분리하거나 신비적으로
보려는 모든 노력은, 우리를 온갖 종류의 샛길로 빠지게 하여 결국 막다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3. 성령님은 창조주(창세기 1:1-2)
성경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창조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여기서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호흡”이란 의미도 있다.
루아흐 엘로힘(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숨결”은 곧 창조주이시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성령님의 비물질성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과 에너지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에너지가 피조물에 불어넣어져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고, 우주에 별이 생긴 것이다.
이사야 40장 26절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는 질문의 답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성령님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학 학자들은 구약 성경에서 성령 하나님의 구별된 인격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다시 말해 구약
성경만을 가지고 성령님의 위격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창세기 1장 2절 말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후에 계시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삼위일체 성령의 위격에 대해 분명히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의 저서 『성령(The Holy Spirit)』에서는 우리가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인식한다면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퍼거슨은 이것이
창세기 1장 1~2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성경을 거꾸로 읽어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성경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어 나간다면
어거스틴이 말한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으로 계시된다”는 고전적 해석 원리의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앞 부분에 있는 가르침과 사건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4. 성령님은 거듭나게 하신다(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을 만드신다.
바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물론 이 진리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도 해당된다.
5.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디모데후서 3:16-17)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헬라어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뜻이다.
성령님은 에너지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구속 역사에서도 성경의 기록을 우리에게 주시는 신성한 사역을 보게 된다.
영감
교리는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를 단언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발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로봇처럼 받아 적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 실제 유전자를 가진, 실제
사람들로서 역사적 배경과 성격에 따라 성경을 기록했다.
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둘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레미야와 하나님, 둘 다 저자인 것이다.
사실 예레미야의 경우 하나님은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인격을 존중하셨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은 성령님의 숨결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존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보혜사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은 무한히 늘어놓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다 밝히기보다는 선별적으로 설명해야한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이 그분의 정체성이다.
“또 다른”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헤터로스(heteros)가 아니라 알로스(allos)이다.
예수님과 다른 종류가 아닌 같은 종류의 보혜사를 약속하신 것이다.
성령님은 파라클레토스, 즉 옆에 계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의 사역은 영구적이며 인격적이다.
삼위일체 성경구절
삼위일체라는 말은 2세기 교부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면서 점차 교리화 된 주제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난해한 교리이긴 하지만 이단을 구별하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경 속에서 삼위일체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고, 설명을 붙였습니다.
삼위일체과 관련된 성경구절
성경에서 삼위일체의 개념을 추론하거나 암시하는 구절은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이들 구절은 삼위일체 교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세 인격이 동시에 존재하며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개정개역판에서 삼위일체를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절들입니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구절은 세례의 형식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을 명확히 언급합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명확한 예로 많이 인용됩니다.
마태복음 3:18-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위일체의 강력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축복의 말로,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명확히 언급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삼위일체 사상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앙 안에 스며들어 있었지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18-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십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 표현이 사용되며, 이는 하나님의 복수적 존재를 암시한다고 해석됩니다. 유일신 사상 안에는 유일안에 삼위가 이미 존재했음을 가장 초기의 성경에 창세기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 구절 역시 "우리 중 하나"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복수적 존재를 암시합니다.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이 구절에서 "우리가"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며, 이는 하나님의 복수적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사야 48:18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는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여기서 "주 여호와"와 "그의 영"이 함께 언급되며, 성부와 성령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주 여호와의 영"이 언급되며, 성령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잠언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손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여기서 "그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를 암시합니다.
학자들의 주장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서 명확히 기술되지 않지만, 여러 구절에서 암시됩니다. 다양한 학자들이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구절들을 통해 이 교리를 도출해내려 했습니다.
마태복음 28:19의 경우, 학자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명령한 것을 삼위일체 교리의 강력한 증거로 봅니다. 이 구절은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을 반영한다고 해석됩니다.
고린도후서 13:13은 바울이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동일한 축복 안에서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역할과 연합을 나타냅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의 협력과 상호작용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3:18-17에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삼위일체의 가장 명확한 묘사 중 하나로, 성부의 목소리, 성자의 세례, 성령의 강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 인격이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로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4:18-17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는 구절도 삼위일체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됩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삼위일체의 내부 관계와 기능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결론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명확히 설명하는 구절은 없지만, 여러 구절들이 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존재하며,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의 중요한 신앙 고백으로, 이러한 성경 구절들에 기초하여 발전되어 왔습니다.
삼위일체란? -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요한일서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the Spirit,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three are in agreement.
기독교에서 **삼위일체(Trinity)**는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세 위격(Person)으로 존재하신다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란 무엇이며,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또한, 우리는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야 할까요?
1. 삼위일체란?
📖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 두 말씀을 보면,
-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신 6:4).
- 하지만,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즉,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입니다.
💡 삼위일체란?
👉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2.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1) 성부 하나님 (God the Father)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 성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2) 성자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God the Son, Jesus Christ)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1,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 (God the Holy Spirit)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믿음의 삶을 살도록 도우십니다.
📖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3.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비유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성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교리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예를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물(H₂O) – 액체, 고체, 기체
- 물은 액체(물), 고체(얼음), 기체(수증기)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본질적으로 같은 물입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지만 본질적으로 한 분이십니다.
2) 태양 – 태양, 빛, 열
- 태양은 하나지만, 태양 자체, 태양에서 나오는 빛, 태양의 열이 있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 어떤 비유도 삼위일체를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4. 삼위일체의 중요성 – 왜 믿어야 할까?
✅ 삼위일체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다.
✅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 요한일서 5:7
“하늘에 증거하는 이가 세 분이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라.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5.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자
✅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태복음 28:19)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12개 성경 구절, 해석 및 적용
서론 :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며 하나의 본질을 가지신다는 개념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암시되며,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이 각 위격에 걸쳐 나타난다. 성경 구절들과 개혁 신학자들의 해석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해석: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동등한 중요성을 나타낸다.
*어거스틴(Augustine):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할 진리라고 강조했다.
*적용: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2.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해석: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교통하심을 언급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사역을 강조한다.
*칼빈(John Calvin):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심을 나타내며, 구원의 모든 과정에 각 위격이 함께 일하심을 보여준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 성령의 교제를 통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
3. 요한복음 14장 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해석: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구하심은 삼위 하나님의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독립적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교리를 이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적용: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4.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해석: 하나님께서 복수의 표현을 사용하여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한다.
*존 오웬(John Owen):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 창조의 과정에서도 드러나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적용: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특별한 존재로서,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5. 요한복음 1장 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해석: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말씀으로,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나타낸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본문으로,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주권과 신성을 인정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6. 사도행전 5장 3-4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해석: 성령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는 말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존 파이퍼(John Piper):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하며,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신다고 해석한다.
*적용: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로 대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7. 마태복음 3장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해석: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동시에 등장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거스틴(Augustine): 이 사건은 삼위일체의 구체적 현현으로, 삼위가 각각 역할을 가지지만 하나의 본질을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8. 고린도전서 12장 4-6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해석: 은사와 사역에서 성령,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삼위일체적 역할이 나타난다.
*칼 바르트(Karl Barth): 이 구절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서로 조화롭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섬겨야 한다.
9. 에베소서 2장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해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을 강조한다.
*R.C. 스프로울(R.C. Sproul):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조화로운 사역을 통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설명했다.
*적용: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0.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해석: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역할을 맡으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작용을 나타낸다.
*존 오웬(John Owen):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고,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적용: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분임을 기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11. 베드로전서 1장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해석: 성부의 예정,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강조한다.
*찰스핫지(CharlesHodge):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그 역할을 분명히 설명했다.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신뢰하며, 그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해야 한다.
12. 요한일서 5장 7절: “증언하는 이는 세분이시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세가지는 합하여 하나이니라.”
* 해석: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와 그들의 조화를 강조한다.
* B.B.워필드(B.B.Warfield): 삼위일체 하나님의 조화와 일치를 강조하며, 그들의 공동사역을 설명했다.
*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를 믿고,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며 살아가야 한다.
기도 :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 두렵고 떨림으로 경배드립니다.우리 삶의 모든 순간, 성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이루며 살게 하소서서, 모든 일에 매순간 주님의 거룩한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와 권능을 항상 기억하게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한 존재이지만, 성경을 통해 그분의 속성과 사역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고별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사랑’인데 또 하나의 반복적인 주제는 ‘성령’이다. 14장부터 16장 사이에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이 다섯 차례나 나온다(14:16-18, 14:26-27, 15:26-27, 16:1-11, 16:13-15). 사랑과 성령, 둘 다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룬 주제들이다.
예수님은 박해가 있어도 당신의 사랑이 끝없는 사랑임을 세족식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고, 또 서로 사랑하라고, 이게 꼭 지켜야 할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떠나더라도 그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을 거듭 말씀하신다. 십자가도 사랑이고, 처소를 예비하는 것도 사랑, 이 사랑이 근심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이 볼 때 사랑은 진리였다.
성령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사랑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 14장에서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비적 계시가 성령께서 오신 궁극적 목적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을 잘 지켜 제자들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에 쌓인 제자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근심할 이유가 없다며 주신 말씀이다. 그 가운데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절)고 하셨는데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어떤 일이라고 하셨나?
세상을 책망하실 것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실 성령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셨다(14:26). 이는 요한의 독특한 표현이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곁에서’라는 뜻의 ‘파라’(παρά)와 ‘말하다’라는 뜻의 ‘클레토스’(κλητος)의 합성어,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인데 영어 번역본들은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lor)”라 번역했다. 법정용어라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위로자의 의미보다는 변호사의 의미라 했다. 우리말 성경의 보혜사(保惠師)는 ‘보살피고 은혜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말, 아마 보혜사가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성령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것 같다.
예수님은 보내실 성령이 하실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먼저 죄와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정죄당하겠지만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 세상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죄짓고도 뻔뻔하고, 자신있게 불신앙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무시하고 배척한 죄는 반드시 심판받게 될 것이다.
의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도 의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성향에 따라 의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른 시대, 자기편이면 무조건 의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체해도 그런 의는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립되는 의, 구원이 되는 의다.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한 것, 그런데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시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대속의 죽음과 그것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의가 됨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이 제자들을 심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심으로써 이미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세상 임금이 제자들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세상 임금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주의 제자들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출교시키고 죽일 것이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책망하실 것,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거다.
이 일은 교회에 위임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예언이든 설교든,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이 일을 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인데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고 하셨다. 교회가 오직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한다는 말씀으로 보면 좋겠다. 이 말씀은 교회의 결정이 하늘의 결정과 직결된다는 말씀, 교회에서 파문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엄청난 말씀이다. 또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하셨다. 용서나 심판과 관련된 말씀, 교회에 위임된 권한이 이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좀 더 당당할 필요가 있다. 비록 세상이 교회를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여길지라도 우리는 교회에 부여된 권위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보다 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시대적으로 죄와 의에 대한 판단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무대 위에 떨어지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성을 갖는다는 것인데 웃기는 소리다. 그건 그들의 신학이 잘못된 것, 성경이 그 정도라면 그들에게 성경은 이미 성경이 아니다. 성경은 누가 뭐래도 종국적이고 완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어떤 목회자가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목회자들을 엉뚱한 소리하는 이상한 목사 취급하며, 동성애를 성경이 죄라고 한다고 해서 지금도 죄로 규정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크리스천 국회의원이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목사들 때문에 창피해 죽겠다고 말하는 것도 봤다. 시대에 뒤떨어진 창피한 목사라고 비난당해도 결코 성경을 시대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는 똑똑한 척하는 목사가 되면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척하는 목사들이 성경 안에 나오는 정결법이나 음식 규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폐기된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성경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한 것처럼 동성애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무식한 논리요 억지다. 동성애의 문제는 율법의 문제가 아니고, 직분 문제도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동성애가 여러 과학적 논의나 증언들이 그 선천성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호기심 또는 성적 타락이나 방종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교회나 교단이 결정하면 된다고 하지만 아니다. 창조 질서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다양성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포용해야 할 것인지를 교회가 결정하면 된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오버다. 하나님은 그런 결정권을 교회에 위임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를 죄라고 하고, 잘못된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을 위임하셨다. 그들은 성경이 반대하기 때문에 나도 반대하는 태도는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 자신의 게으름이나 욕구를 정당화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하는데 위임사항과 위임사항이 아닌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가 답답할 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때 보름즈 의회에서 “내가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다면 나는 단지 교황이나 교회회의만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반복적잘못과 모순 때문”이라 했다. 어느 목사의 주장이든 어떤 교단의 결정이든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한다. 루터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시대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한다는 자세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시대에 따라 성경을 재해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개혁 교단의 어떤 목회자는 개혁교회의 핵심 슬로건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며 성경도 루터의 말도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지만 성경은 결코 개혁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며 자기 독단적으로 교리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단되기 때문이다. 자기 착각을 성령의 감동이라 하는 것처럼 곤란한 게 없다. 기억하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
예수님은 성령이 세상을 상대로 행하실 일에서 말을 돌려 이제는 성도들에게 행하실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다. 아직 일러줄 말이 많다는 예수님, 지금은 감당치 못할 것이지만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거라고 하신다(13절). 이게 성령의 핵심적 기능이라는 거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 시대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을 봐야 하는데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성령이 교회에 함께 한 역사 즉 성령 행전이다. 그 성령 행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장이 ‘Acts 29’ 사도행전 29장부터는 우리가 쓴다는 자세여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성령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다.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 부분을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성령께서 도우심과 같이 앞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실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장래 일’을 종말 사건으로 보나 임박한 미래를 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거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14절).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성령을 통해 전하고 싶으신 것을 계속 말씀하신다. 이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15:28), 예루살렘 회의 후에 만든 사도칙령의 시작 부분인데 ‘성령과 우리’라고 표현했다. 성령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이런 사역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윤선 주석에 보면 그들은 사도 이후 시대의 신자들도 사도들과 같은 수준으로 계시받는다고 주장했다. 2세기 몬타누스(Montanus)가 그랬다. 그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새 운동을 일으켰는데 보혜사가 임한 시대는 몬타누스 자신으로부터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요 말씀이요 보혜사”라며 ‘새 예루살렘이 임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부리기아의 페푸자(Pepuza of Phrygia)’라 했다. 그의 제자 맥시밀라(Maximila)라는 여자도 “내가 말씀이요, 영이요, 능력”이라는 둥 자신을 최후의 선지자라며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했다. 망동, 성령의 일이 아니라 마귀 짓이었다. 문제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이런 일을 신천지 같은 데서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상당수의 성도들이 그 이단들에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무지한 게 너무 안타깝다.
우리는 13절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단의 꼬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
성령이 증거하는 죄, 의, 심판, 가르침, 장래일… 죄다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3-14절),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오직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업을 설명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떠난 독창적인 진리는 취급하시지 않는다. 오셔서 하실 증언의 핵심은 딱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다. 자신을 주목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주목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세 가지 양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3중적 형태로 분류하는데 우리도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계시 그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고,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며, 설교는 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렇다면 해석의 중심도 당연히 그리스도여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거룩함,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 그리스도의 진리 되심이 모든 계시의 중심임을 드러낸다. 오직 그리스도였다는 말이다.
죄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데서 기원하고, 의는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성령이 증거한 핵심인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바로 그 자체로 심판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담겨 있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가 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알게 된 이 사실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령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의 4가지 사역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한복음 16장 13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현재 빛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더 밝은 빛으로 인도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의 큰
역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성령)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요한복음 16장 13절)
성령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한뜻으로 역사하시고 한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장 13절)
성령은 우리에게 장래 일, 즉 예언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장래 일을 알려주는 예언에 무지하고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후서 1장 21절).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은 성령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고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어야만 예언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모든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기능과 역할과 활동을
행하십니다.
첫째, 그분은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도록” (요한복음 16:7-11)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하든 않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공정하고 충분한 논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여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그 확신에 응답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면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에 거주하시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증거하기 위해 인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이 구절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함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롬 8:9; 고전 6:19-20; 고전 12:13).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만일 우리와 개인적으로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에게 행하셨을 일 들을 수행하도록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진리는 드러내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배와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알려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궁극적인 인도자이시며, 앞서 가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자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오류에 쉽게 빠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요
15:26; 고전 12:3).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메시아 되심,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승귀하심 ,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역할에 대해 우리에게 확신시켜줍니다(요 16:14).
성령의 역할 중 또 다른 역할은 은사를 주는 역할 입니다. 고린도전서 12 장은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은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크든 작든 성령께서 주신 은사 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니다(갈 5:22-23). 이것들은 우리의 육체의 일들이
아닌데, 이는 육체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거하시며 이러한 모든 기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의 원인이 됩니다. 이 소중한 선물, 곧 우리의 삶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그분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Farewell Discourse)
요14:1-11
1. 4복음서의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
▶ 예수님의 유언 (The Great Commission)
- 예수님의 위대한 지상(최고의) 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 예수님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
- 예수님의 지상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22:37-38).
▶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
-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 (마태복음 5장-7장).
▶ 대제사장의 기도
- (요한복음 17장)
▶ 예수님의 고별 설교
-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말씀. (요한복음 14장).
2.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면서 고난 주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왕으로 오시는 이여"라며 예수님을 맞이한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그들은 의식한 것이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내내 예언되어진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백성들은 알아차린 것이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물 위를 걸으셨고, 귀신을 제어하셨고, 병자를 고치셨다. 소경이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셨다. 또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오병이어(←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심)의 기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곁에서 지켜보고 구약성경을 잘 아는 제자들은 구약 곳곳에 있는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모든 억압과 눌림과 슬픔과 억울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서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열국 위에 뛰어나게 해주시고,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다스리실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들어가시는 줄 알았다.
수천 년 동안 자신들과 조상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들을 보여주시고, 이제 그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흥분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13:1), 사랑하는 열 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다.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를 놓고 다투었다 (눅22:24). 그런데 제자들의 흥분과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내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내가 모욕과 고초를 받을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고 떠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6-37)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이 대답의 요한복음 14장에 나온다.
3. 예수님의 고별 설교
1)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하기 시작하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요14:1-2)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천사를 움직여서 천국을 건설하시고, 전체를 감독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인 본향을 예비하고 계신다. 인간은 영생한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본향)에서의 영생이 주어진다.
천국을 짓는 재료는 땅에 있는 우리를 통해서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과 재능과 시간과 돈을 주신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고 맡기신 것이다. 이것의 중요함을 예수님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눅16:1-14)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 청지기의 행위는 나쁘지만, 지혜로운 자는 궁극적인 목표를 끝까지 바라보고 나아간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초점이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몸과 물질과 은사와 여러 사람과 많은 것들을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풀 때 우리가 가진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고, 우리의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불쌍한 영혼을 도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이웃들과 나누면서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결산해야 한다.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 (마25:14-30)에서 처럼 우리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상으로 갚아주신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3).
2)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현대인들은 고독하다. 자기밖에 없다. 주위에 시달릴 정도로 사람들이 넘쳐나고, 우리의 몸을 자극시키는 것이 너무도 많은(텔레비전, 컴퓨터 게임, 술, 오락...) 세상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군중 속에서 고독하다. 그런데 고독을 느끼는 이가 지혜로운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마귀에게 속아 정신없이 인생을 소비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고독해져야 한다.
현대인은 고독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고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그치지 말고, 교회 속 소그룹(셀-목장교회)에 들어가 삶의 깊은 것들을 나누고 성령으로 하나 되는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망할 수밖에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내가 죽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내가 살아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을 때, 완전히 물 속(←예수님의 죽음을 상징)에 들어갔다가 물 밖(←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으로 나온다. 물속으로 들어갈 때는 내 멋대로 살던 나, 고독하던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물 밖으로 나올 때는 예수님의 몸 안으로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고독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은 머리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부활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고, 피를 같이 나눈 지체들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하지 않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른 지체들과 성령님(←예수님의 영)을 통해 연결 되어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간접적이어야 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직접적이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부도, 부모와 자녀도, 성령님을 통해서 상대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인간관계는 성령님을 통해서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직접 서로 연결되는 데에서 비롯한다. 사랑의 트라이앵글 정점에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연결되면 서로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각각 성령님께로 가까이 갈수록 둘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진다.
사랑의 주님, 거룩하신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불순물(악함, 탐욕, 시기, 질투, 열등감...)이 다 빠져나가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사심이 없으시다. 오로지 우리만 생각하신다 (←아가페 사랑).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요14:18), 보혜사 성령을 주사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리라 (요14: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주님 안에서 우리가 거듭나게 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가장 소망하는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3) 내 말을 믿으라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이 왜 만들어졌는지,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모르게 되고 더 길을 잃어버린다. 나를 찾기에 지치고 좌절하고 포기했을 때, 예수님만을 열심히 믿고 성경을 열심히 보는 것을 통해서 답이 선명해진다. 그 의미들을 저절로 알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에게 주기 위해서 창세 전에 내가 너를 자녀로 택하였다. 너를 위해 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을 만큼 너는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성경 말씀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인생을 왜 주셨는지,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나를 찾으려면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이 자기 눈을 볼 수 없다. 숲 속에서 숲을 볼 수 없다. 숲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숲이 볼 수 있다. 인간을 제대로 알려면 인간의 차원으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나를 찾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아야 원하는 답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제자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고, 그중에서도 가롯 유다를 뽑아서 돈궤(재정)를 맡게 하셨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똑똑한 제자로 인정받고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모셨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 지나치게 똑똑했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자기 생각과 욕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차리질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헌신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예 : 다단계, 주식 투기).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고 하늘나라의 법칙이다. 또한 자연의 질서이고 인간 세상의 질서이다. 기도하며 충성되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 내 생각, 내 욕심으로 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30배, 60배, 100배의 큰 축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중요한 것은 축복을 받고 난 후이다.
축복을 받고 난 후에 자기 생각과 욕심에 빠져서 축복을 저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가롯 유다는 사도로 불림을 받았고, 사도 중에서도 제일 귀한 자리를 맡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에 축복이 저주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집시처럼 방랑하는 무리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귀한 이스라엘 나라로 축복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축복을 관리하지 못하고 방탕하다가 멸망했다. 내 힘으로 축복을 이루면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을 관리하게 되어 더 귀한 축복이 오게 된다. 이중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축복은 진짜 축복이 아니다. 축복을 받은 후에 그것을 갖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오는 축복이 진짜 축복이다.
4.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살고 있는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 인생은 가장 값진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부활 주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근심하지 말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신 고별 설교를 마음 깊이 간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따를 때, 그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받고 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고, 그들은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송도산성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의 생각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자.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복되고 의미 있게 된다. 부활의 권능과 부활의 축복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이다.
예수의 고별 설교는 산상 설교(마 5-7장)와 더불어 2대(二大) 설교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4-16장의 고별 설교는 다른 복음서들에는 평행본문이 없는 요한의 특수 본문으로, 복음서의 신학적 정점 혹은 복음서 신학의 핵심이라고 불린다. 14장은 위로의 말씀, 15장은 교훈의 말씀, 16장은 확증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많은 주해(주석)에서 나타난 각기 성취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기술하며 고별 설교를 해설하고자 했다.
요한복음 13장~16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심각하게 들립니다. 결국 사랑에 대한 설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라는데 의미를 둔 구체적인 설교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16장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여자의 해산의 고통과 출산의 기쁨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저들을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에 잠겨있게 됩니다. 6절에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하셨습니다. 하지만 20절에서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하시고, 설명하시기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1~22)
16장에서는 예수님이 고난과 영광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히 여자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낳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근심걱정에 쌓이는 거지요. 그러나 아기를 낳게 되면 아기 낳은 기쁨으로 고난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아이입니까? 엄마 손만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이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엄마가 안 보이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장성하게 되면 본인의 존재와 엄마가 어떤 분인가를 알고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관계로 살아갑니다.
해산이란 표현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죄를 범한 인류 최초의 여자 하와에게 선언되는 형벌의 내용인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는 저주와 관련을 갖고, 근심이란 용어 역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수고하고’와 의미가 통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해산의 아픔으로 인한 근심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죄로 인한 사망이라는 인류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1절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아기를 낳는 순간에 기쁨으로 바뀌듯이 제자들이 겪는 내면적 고통도 조금만 있으면 기쁨으로 전환된다는 것이 본 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때에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그들의 근심은 도리어 큰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인데, 그들의 지각은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신다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약속된 기쁨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비롯되는 기쁨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라는 표현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 이후로 승천하셔서 이제 더 이상 육체로는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하지만 성령을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임마누엘 하신다는 것입니다.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은 세상이 주는 기쁨은 순간적이고 또 없어지기도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그리스도에게 근원을 둔 것이어서 영원하며 아무도 이 기쁨을 빼앗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믿지 않는 자 보다 복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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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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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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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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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진리의 성령(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Pronunciation [ pnĕnuma ]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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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기,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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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바람, 요3:8, 히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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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숨 내쉬기, 숨, 살후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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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27:50, 눅8:55, 행7:59, 히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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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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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후 7:1, 골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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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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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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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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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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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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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유령, 눅24: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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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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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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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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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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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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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진리(알레데이아. 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Storng number 225
Pronunciation [ alēthĕia ]
- Etymology / 227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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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상과 행위에 있어서] 진실성, 믿음성, 올바름, 롬3:7, 15:8, 고전5:8, 고후7:14, 엡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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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실.《반》ψεῦδ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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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반적 진리, 막5:33, 행26:25, 롬2:20, 9:1, 고후6:7, 12:6, 엡4:25, 딤전2:7, 약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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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절대적 진리[특히 기독교의 내용을 가리킴], 요4:23이하, 14:17, 15:26, 16:13, 고후4:2, 갈2:5, 엡4:21, 골1:5, 살후2:12, 딤전2:4, 딤후2:15, 25, 3:8, 히10:26, 약1:18, 딛1:1, 요일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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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겉모양과 반대되는] 실재.《반》πρό- φασις, 빌1:18. ㉠ κατὰ ἀλήθειαν: 진리대로, 롬2:2. ㉡ ἐν ἀληθείᾳ: 진실로, 실제로, 마22:16, 요17:19, 골1:6, 요이1:1. ㉢ ἐπ᾿ ἀληθείας: 참으로써, 진실로써, 진리에 부응하여, 막12:14, 눅 20:2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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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참(마22:16), 사실(막5:33), 진리(요1:14, 4:24, 롬2:2), 실상(요16:7), 과연(행4:27), 참 됨(행26:25), 진실하심(롬15:8), [동] 진실 하다(롬15:8), 참되다(롬3:7).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허나 대신 그 죄에서 자기가 해방되어 감을 아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다.
밤이 없다면 우리는 햇빛을 주는 기쁨을 모를 것이다.
죄가 없다면 인간은 정의의 기쁨을 모를 것이다.”
“남에게 대한 죄와 자기에게 대한 죄가 있다.
남에게 대한 죄는 남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에게 대한 죄는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죄를 범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
* 자료출처 / 세계를 움직인 명언. p. 157 톨스토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내가 그(성령)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7절, 8절).
여기서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과거에 범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것을 호소하시고, 현재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양심의 자각을 주시며, 미래에 받게 될 심판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들이 구원의 경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성령께서는 의의 음성을 양심 속에서 들려주십니다. “이 길이 정로니 이 길로 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유혹을 물리치라고 호소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주시기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죄악과 더러움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께 나가 부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과
사랑에 의지해서 죄를 용서받고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거룩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큰 역사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도우셨던 방법 그대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예수께서는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예수님을 대신할 또 하나의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영어로 “Comforter”입니다.
“Comforter”라는 단어의 뜻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조력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Comforter”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서 위로하며 길을 인도해 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항상 제자들 곁에 계셔서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고 해야 할 일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도 그와
동일한 역할을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보혜사(Comforter)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인도하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친숙해져야만 합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6:12~15)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 사이에 보면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이 다섯 차례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언급을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다 확실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성령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이 가까웠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었습니다(요11:53, 57).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도 박해할 것이고(15:20) 그들을 출교할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요16:1-2).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연달아 나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을 우리는 14:16-18에서 만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성령이 예수님 즉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분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과 성령께서 동격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셋째로, 성령께서는 신적 본성에 있어서 아들과 동격이실 뿐 아니라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연장선상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16절 하반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하신 말씀이나 17절 하반절에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신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처럼 제자들과 함께하실 분이심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또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신 것은 비록 아들은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시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면 그것은 그들이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 둔 바 되지 않는 것이며 아들 자신이 다시 오셔서 함께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사이의 본질적 동질성을 보게 됩니다.
넷째로,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심을 배웁니다. 다섯째로,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자이심을 깨닫습니다. 17절 상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이 세상과 대치관계에 두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거짓에 속해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며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거짓된 세상은 성령을 거부하며 배척할 것이고 그러기에 성령께서 함께하실 주의 제자들에게도 적대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는 버려진 고아와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뒤이어 듣는 성령에 관한 말씀은 14:26-27에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에 따르면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즉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 하신 것은 일단 앞선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아들이 구하였기에 보내신다는 뜻이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란 뜻은 성령이 아들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은 자는 그 보낸 이의 뜻을 행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한 사역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다른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아들을 대체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계승하시며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성령은 진리의 영이심이 재확인됩니다.
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는 성령을 거짓된 세상에 맞서는 진리의 영으로 언급하셨지만, 여기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모든 진리의 말씀을 제자들로 하여금 바르게 깨닫게 하는 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계승하시는 분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처 가르치지 못하신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모든 진리를 바르게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도 성령은 위로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진리를 성령에 의해 깨닫는 것만이 거짓되고 적대적인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또 그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 그렇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참 위로자이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요15:26-27에서 찾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로서 당신 자신을 강조하셨지만 곧 이어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덧붙이심으로써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로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의 균형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성령을 “진리의 성령”으로 재확인해주셨습니다.
또한 “진리의 성령”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증언하신다는 뜻으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증언할 뿐 아니라 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드러난 진리를 증언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하신 다음에 이어서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증언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동역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요15:26-27의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23-25절에 이어서 읽어야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살아날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상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했던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아들을 미워하며 따라서 그의 제자들 또한 미워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요15:25) 세상을 향해 그를 증언한다는 일은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강하게 증언하실 이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부터 함께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깨닫는다 해도 두려워서 증언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진리의 참된 깨달음도 그 진리와 깨달음의 증언도 할 수 없는 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깨닫게 하실 것이고, 그의 증언은 너무나 강력하고 확실하여 제자들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 그 증언대로 증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힘 있는 증언자이시며 힘 있게 증언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심을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을 바로 앞서는 요16:1-11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그중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족하기 쉬운 때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출교를 당할 뿐 아니라 죽음까지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하신 것은 주의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죽이는 자들이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이렇게 무지한 자들에 의해 부당한 심판을 받아야 할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이에게로 가시겠다고 하심으로 제자들은 근심에 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근심하지 말 것은 성령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기에 무지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세상은 주의 제자들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출교시키고 죽일 것이나 진리의 성령께서 그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참된 심판자이신 그 성령 때문에 주의 제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비로소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될 것이 앞선 말씀에서 이미 다 언급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진리의 영이시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진리가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리라.”(13절 하반절)고 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을 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고 가르치신 진리에로 주의 제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아직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오시기만 하면 다 깨달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본문 12-1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거짓되고 무지하며 적대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진리에 목말라하며 위로와 용기를 절실히 찾는 때입니다. 이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듯이,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영원히 그들과 더불어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거짓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듯이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알건 모르건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숨 쉬고 거동하며 사는 것도 다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의 놀라운 사역과 은혜를 힘입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그 능력의 역사를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 안다면 우리는 더욱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이 거짓되고 적대적인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악하고 반역적인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는 이 시련의 때에 성령의 함께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진리의 삶과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진리의 성령이 하실 일 세 가지(요한복음 16:8-11)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8-11절은 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는 말은 ‘책망하다’는 뜻도 있지만, ’드러내다, 유죄선고를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피고인이 기소되면 검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피고를 압박하는 추궁이 있고 이에 피고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이 최종적으로 유죄 판정을 합니다. 그러나 “책망하다”는 말은 유죄 판정을 해서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고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로 이끈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시고 이를 깨닫고 인정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예수님은 9-11절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세 개의 절은 “…에 대해서 책망하시는데 그 이유는 … 때문이다 (concerning … because …)”라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드러내시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 그 내용에 대한 이유가 명시되었다는 뜻입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첫째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법을 위반한 행동만을 특정해서 죄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범죄 기록에 남지 않으면 그는 법적으로 죄인이 아닙니다. 또한 도덕적인 죄도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이런 법적, 도덕적, 양심적 죄를 뛰어넘어 더 근본적인 차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 죄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계명의 말씀을 어김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조금의 죄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변명하고 서로에게 자기 잘못의 원인을 전가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도 파괴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그 죄의 대가로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짐승의 피를 흘려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과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시고 우리를 죄를 사해주시고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을 비추었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11). 예수님은 수많은 보화와 같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완악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들의 이런 완악한 마음이 죄라는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책망하다”는 말은 호되게 꾸짖어 그들의 죄를 인정하도록 압박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구원의 길을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완악한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호되게 꾸짖은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죄를 깨닫게 될까요?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의 제자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20).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아버지가 계셨고 그들은 집 나간 탕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 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몰랐을 때 그들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다가 심판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소위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 자신이 죄인임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믿는 부모 때문에 자기들은 어디 도망가지 못하고 속박 가운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부모를 거역할 수 없어 몸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마음껏 죄를 짓고 살고 싶지만 분위기상 그렇지 못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살고 있다고 치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다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복음이 죄인이라고 할 때 그것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마음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마음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전제는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17). 스스로 “나는 건강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반면 병자임을 알고 고침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의사를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는 구주가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한 자만이 죄 사함을 주시는 구주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죄인으로서의 자아 발견은 죄 사함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제자들은 다시 그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는 죄 없음과 거룩함과 관련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린 자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을 꾀는 유혹자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취급받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로 사회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라는 비아냥을 들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고 이방인에 의해 내란죄로 사형판결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본래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며 거짓 소문을 퍼뜨렸지만 그어떤 사람도 그를 다시 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그가 죄 없이 무고하게 죽으셨음을 입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은 그가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만왕의 왕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구원자요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의 부활과 승천은 주님의 무죄함과 거룩함이 드러내었고 그는 장차 다시 오셔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셔서 각 사람의 행한대로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반면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기대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자기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를 부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행위로 구원을 얻기에 실패했고 그럴 능력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죄악의 실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그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을 받을 존재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싸잡아서 죄의 낭떠러지로 몰아갔습니다. 인간의 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는 문이 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 후 극적인 전환을 하여 하나님의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여기서 “이제는”는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뜻으로 분위기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급전환을 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3:22).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자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롬 3:24-26).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구원의 가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의를 첨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100% 하나님의 의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자기의 공로와 행위를 내세우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는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데에는 우리의 선한 의지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사랑과 은혜와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우리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또한 인간의 의의 무력함과 인간의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구원받고 거듭난 자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오로지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선물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의를 내세우고 의지하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인데 이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셔서 “심판”에 대해 깨우쳐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은 악을 없애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 임금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어지럽히는 자로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를 심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에 죽으실 때 온 세상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때 선이 패배하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만 없으면 혼란이 없고 모든 것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한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대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계획은 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탄의 최종 권세인 죽음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사탄에 대해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셨음을 확증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골 2:15).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셨습니다(행 10:42).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날 것이고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날 것입니다(계 12:20). 그리고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계 12:15). 성령께서는 이미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16:33).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유혹과 권세에 한없이 약하여 패배하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해 탄식하고 절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세상 임금이 세상을 장악하고 그 권세를 떨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는 자가 박해를 받고 불이익을 받을 때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위협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해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심판은 마귀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선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으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음을 알게 하십니다(요3:18). 우리는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심으로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많은 말씀을 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시는 말씀도 제자들에게는 버거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핵심점인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계획에 관한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이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중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그 의미까지 분명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씨앗을 뿌린 것에 불과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나중에 제자들의 마음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여러 가지 논란이 되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할례의 문제, 먹는 것의 문제, 율법을 지키는 것의 문제, 요한의 세례와 성령 세례, 이방인을 교회에 들이는 문제 등 이로 인해 많은 갈등을 겪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유대주의의 붕괴와 성전의 가치와 모세의 율법의 무효화와 같은 과정은 불가피했습니다. 처음에 유대인인 제자들이 이를 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차근차근 교리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성령님은 이처럼 친절한 안내자가 되십니다.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
- 인도 교육자 케리여사
1.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
2.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3.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
마틴 루터의 변화
마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마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 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비단뱀 샐리
미국의 한 가정에서 애완용으로 재미 삼아 미얀마산 비단뱀을 한 마리 샀다.
맨 처음 그 집에 왔을 때 약 30cm 정도였던 그
애완용 비단뱀은 그 집에서 8년 동안 335cm의 길이와 36kg의 무게로 자라났다.
그런데 어느 날 샐리라는 예쁜 이름의 그
애완용 비단뱀은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 집의 15세 난 아들 데렉을 공격해 목을 조여 질식케 해 죽게 하였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뱀은 "상당히 공격적이고, 쉭쉭 소리를 내며, 반항적이었다"고 했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나쁜 생각도 바로 그 뱀과 같다.
우리 삶 속에 처음 들어 올 때 우리는 그것이 해롭지 않을 뿐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쁜 생각은 곧 행동으로 자라나고 금새 습관으로 굳어지고 만다.
처음에는 다스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생각과 행동이 나중에는 못된 습관이 되어 오히려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마약으로 나중에 심각한
중독에 시달려 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종종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처럼 우리 삶에 있어서 인간의 고귀한 자유
의지를 훼손시키려는 유혹은 우리 주위에 너무 가까이 그리고 너무 많다.
그런데 그에 대처할 만한 건강한 의식의 청소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그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죄
2.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죄
3.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7.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8.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9.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0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1. 한국인이 일본인의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2.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죄
13. 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작년 범죄 18초마다 1건꼴 발생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살인은 9시간18분, 강도는 1시간36분, 강간은 1시간17분에 한 건씩 일어났다. 또 폭력은 1분35초, 절도 3분, 재산범죄 2분42초 등의 간격으로 한 건씩 발생했다.
이는 23일 경찰청이 지난 한 해 동안의 전국 범죄발생 평균빈도를 분석해 발표한 '2000년 범죄시계ꡑ에서 나타났다.
우리보다 인구가 3배 가량 많은 일본의 범죄시계는 99년 기준으로 살인(6시간56분)과 절도(17초)는 우리보다 발생빈도가 높았지만 강도 폭력 강간 재산범죄 등은 우리보다 발생빈도가 낮았다. 특히 강간범죄의 경우 일본은 4시간43분만에 한 건씩 발생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1시간17분마다 한 건씩 발생, 3.7배나 높은 발생빈도를 보였다.
우리보다 인구가 5배 가량 많은 미국의 범죄시계는 99년 기준으로 살인 34분, 강도 1분, 강간 6분, 절도 5초, 폭력 22초, 재산범죄 3초 등으로 모든 범죄의 발생빈도가 우리와 일본보다 높았다.
한편 총범죄 발생건수를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 범죄시계는 70년 1분32초마다 한 건씩에서 80년 51초, 90년 27초로 빨라져 지난해에는 18초마다 한 건씩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07/23(월) 동아일보
적용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다 보니 자연히 그 속에서는 함께 공존하지 못하고 남을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무리들이 나오게 되어있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율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늘어난다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이버상의 게임은 실제로 현실 세계 속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실제와 가상의 공간을 거의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사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한탕주의와 불로소득을 노리는 잘못된 인간 심리가 자리잡고 이기주의와 자신만의 만족감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통념 앞에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잡으려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행동임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느낀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 동맹주역들의 최후 (주제 - 죄)
인류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은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체결로 한층 가속화 되었다. 이 삼국동맹의 결과로 평화로운 지구 곳곳은 온통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화했다. 그러나 결국 정의로운 연합군의 승리로 삼국동맹의 주역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먼저 유태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는 연합군이 한참 독일로 전진해 오던 45년 그의 지휘벙커에서 애인 엠마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극악한 파시스트인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45년 연합군에 패전후 국경밖으로 도망하려다 암살됐다. 일본의 동조천황은 전쟁기에 국민들로부터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미지를 모두 상실한 채 89년 한 인간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죽었다. 전쟁의 악령에 사로잡혔던 세 사람은 결국 그 악령의 조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 선행이 덮을 수 없는 죄의 흔적
켄터키 주에서 헤이즐 패리스가 그의 어린 아들 렉싱턴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한 방안을 세웠다. 아들이 잘못을 했을 적마다 그를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다 못 한 개씩을 박았다. 얼마 못가서 그 문설주에는 못이 총총 박혔다.
그 다음 패리스는 그 아들에게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못 하나씩을 빼주겠다고 약속했다. 얼마가 지나서 그 문설주에 박힌 못은 다 빠졌다.
선행으로 못을 다 빠졌지만 그러나 못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 가운데도 흉터 없애는 이적은 하나도 없었다. 상처는 떠났으나 흉터는 남아 있는 법이다.
11월 21일(금) 요한복음 12-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고 행하라(13:17)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you will be blessed if you do them.
인도의 교육자 "케리 여사"는 현대인의 세 자기 정신적 죄악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죄
예수님께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If you know and act, you will be blessed.)"
알고 행하라는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너희들도 섬김의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알고 행하라는 교훈은 "섬김"이라고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알아야 할 10가지 중요한 원칙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지 말고 바르게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잘 한다는 것에는 이미 세속적인 가치관이 스며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누구나 역사적인 전통의 문화가 온 몸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의 영향 - 입신출세, 무병장수, 만사형통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바탕으로 크리스천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10가지 원칙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신다면,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신앙이 깊어질 것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상 속에서 하나님보다 직장, 가족, 인간관계, 취미 등을 더 우선순위에 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려움을 겪을 때, 기뻐할 때도 하나님을 먼저 찾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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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 방법
✔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며 하나님께 하루를 맡겨 보세요.
✔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먼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 보세요.
2.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랑보다 경쟁과 미움이 익숙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작은 친절과 배려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 어려운 이웃, 심지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 실천 방법
✔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작은 친절을 실천해 보세요.
✔ 용서가 어려울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3. 기도하는 삶을 살기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크리스천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신앙의 기본입니다. 성경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고민과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생활화하면 마음의 평안과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실천 방법
✔ 하루에 최소 10분 이상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 기도할 때 감사의 마음을 먼저 표현해 보세요.
4.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기
하나님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을 인도하는나침반과 같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삶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성경은 단순한 고전 문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 실천 방법
✔ 하루 한 장씩 성경을 읽는 습관을 길러 보세요.
✔ 마음에 와닿는 성경 구절을 필사하며 묵상해 보세요.
5. 거룩한 삶을 살기
크리스천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5)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이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신앙을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단순히 도덕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 실천 방법
✔ 죄를 멀리하고, 경건한 습관을 길러 보세요.
✔ 신앙 공동체와 함께하며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세워 보세요.
6. 용서하고 화해하기
용서는 크리스천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리라”(마태복음 6: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단순히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 실천 방법
✔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 직접 용서가 어렵다면,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해 보세요.
7.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기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가복음 10:45)라는 말씀처럼, 크리스천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남을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에서도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실천 방법
✔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 작은 일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자세를 가지세요.
8.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가기
감사는 크리스천이 항상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감사보다는 불평이 먼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면 우리의 마음과 삶이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며, 어떤 순간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실천 방법
✔ 하루에 감사한 일 3가지를 적어보세요.
✔ 힘든 일이 생길 때, 하나님께 감사를 먼저 고백해 보세요.
9. 전도와 선교에 힘쓰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태복음 2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전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곤 합니다. 전도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삶이 곧 전도가 됩니다.
✅ 실천 방법
✔ 믿지 않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며 자연스럽게 신앙을 나눠 보세요.
✔ 작은 선행과 친절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보세요.
10.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
신앙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지켜야 하는 여정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인내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움과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때때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실천 방법
✔ 신앙을 함께 지킬 수 있는 좋은 믿음의 공동체를 찾으세요.
✔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훈련을 해 보세요.
크리스천이 지켜야 할 10가지 원칙 정리
| 번호 | 원칙 | 성경구절 |
|---|---|---|
| 1 |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기 | 마태복음 22:37-38 |
| 2 | 이웃 사랑하기 | 마태복음 22:39 |
| 3 | 기도하는 삶 살기 | 데살로니가전서 5:17 |
| 4 | 말씀을 묵상하기 | 시편 119:105 |
| 5 | 거룩한 삶 살기 | 베드로전서 1:15 |
| 6 | 용서하고 화해하기 | 마태복음 6:14 |
| 7 | 겸손하게 섬기기 | 마가복음 10:45 |
| 8 | 감사하는 삶 살기 | 데살로니가전서 5:18 |
| 9 | 전도와 선교하기 | 마태복음 28:19 |
| 10 | 끝까지 신앙 지키기 | 마태복음 24:13 |
마무리하며…
크리스천의 삶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위의 10가지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의 삶에서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갈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하나씩 실천해 보시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4가지 기능과, 3가지 표지
교회의 네 가지 기능
첫째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며,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롬 12:1). 이것이 교회의 1차적인 역할이다. 예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 예배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시며 우리의 좋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계 4:11). 예배의 방법으로는 찬양(음악), 말씀 선포, 기도, 성례, 그리고 헌금 등이 있다.
둘째는 전도
교회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 흩어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이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 70인을 세우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각지로 파송하셨다.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 하나님의 죄의 용서와 의롭게 됨을 얻게 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다. 이 전도는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사도들이 힘써 하신 일로서,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일이기도 하다(마 28:19-20; 행 1:8). 복음전도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교회밖에 있는 이웃들을 섬겨 명실상부한 영적 공동체로 확대되어 간다.
셋째는 친교(코이노니아)
예배를 통해서 주님과의 내적 친교(코이노니아)를 나누고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 됨을 느끼게 된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과의 사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신앙을 배울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성도들이 주 안에서 서로 사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서로 받은 여러 가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이 교회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서로 섬겨 덕을 세우게 하는데 있다(엡 4:12). 건덕(edification)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사귐(fellowship)과 섬김(service)이다 (롬 12:10, 13).
넷째는 봉사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사람들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가 행하는 구제, 자선사업 등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기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귀신들린 자, 죄를 지은 자, 해를 입은 자들의 친구와 치유 자가 되시어 그들의 아픔과 고난과 슬픔을 함께 나누셨다(마 8:16-17). 이와 관련하여 교회는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우는 일에, 또 악한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일에도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첫 번째 표지는 말씀 선포
말씀 선포가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행 6:4).
두 번째 표지는 성례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고(마 28:19),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최후의 만찬에서 친히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면서 재림할 때가지 기념하라고 명하셨다(마 26:26-29; ). 이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이 교회의 표지이다.
세 번째 표지는 권징
권징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권세와 관련이 있다. 교회에 권징이 필요한 것은 범죄한 성도들을 바로잡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이 그 같은 유사한 범죄를 범하지 않도록 미리 막기 위함이다(행 5:1-11).
교회의 네 가지 특징
1. 교회의 사도성
- 신약적 의미에서의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증거 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다. 이후
사도바울의 선교에 의해서 교회가 소아시아와 로마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마 16:16)는 신앙고백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것의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엡 2:20).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apostolicity, 마
16:18). 사도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아 복음의 말씀을 따라 적극적으로 섬겨 빛과 소금 노릇을 하도록
하셨다(마 5:13-16).
2. 교회의 통일성
-포도나무 가지가 각기 여러 방향으로 벋어있지만 그 모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 이 하나 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몸의 지체로, 한 형제이고 자매이다. 교회의 머리이자 주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엡 1:22; 골 1:18).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의 피로 샀기 때문이요(행 20:28), 자기의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통일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엡 2:22).
3, 교회의 거룩성
-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이며 이것을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하셨다(고전 3:17).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자신은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분의 거룩한
특성을 나타내도록 계획하였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로 거룩한 삶을 살며 그분의 특성과 길을 나타내도록 사람들을 부르셨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세웠고, 성령이 내주하시어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는(고전
3:16-17) 성령의 전이다. 교회는 성령의 전으로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세워진 거룩한 백성이기에 성령으로 거룩해질 뿐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전 6:11).
4. 교회의 보편성
-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다(엡 2:13-19; 롬 9:24-26). 이 하나님의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간에 차별이 없다(갈
4:28). 교회 안에는 계급, 인종, 빈부,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단지 죄인 된 모든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누구나 다 교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이 있다.
1)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2)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3)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케리 여사, 인도이 교육자)
- - 안병옥 - (좌우명 365일 P . 121)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요한복음 13:12-20)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아셨습니다.이 세상에서 자신의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을 보면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의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배신할 가룟 유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자신이 예수를 넘겨줄 것을 제안하며 은 30냥을 받은 사람 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나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뒤에서 욕하고. 미워하고 끝내는 배신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배신자 가룟 유다는 성찬식도, 세족식도 다 참여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게획을 다 아시고도 그 제자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세상의 미움까지도 사랑으로 품어내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그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자신의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매우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집안의 가장 천하고 낮은 하인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천하고 낮은 일을 하시다니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제 발도 씻겨 주려 하십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발을 씻으면 씻겼지, 어찌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을 수 있는가?’하고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자원하여 제자들의 종이 되신 것이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훗날에는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베드로는 강력하게 거부하며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주님. 제 발을 주님께 맡겨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13장 8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씻겨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자 또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여,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10절 말씀 입니다. “베드로,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발 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신 십자가의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세족식 자체가 죄를 씻는 과정은 아닙니다. 세족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는 속죄를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섬김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이 그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예수님 자신과 베드로가 아무런 상관없는 관계가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씻음 바 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됩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목욕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를 가리키고, 발을 씻는 것은 예수를 믿은 후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짓는 죄들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그들의 영혼의 허물까지 안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들의 모든 연약함을 품어 주셨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밤에 발을 씻어 주신 제자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 어느 누구 하나 이 세상 기준으로 특별나게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일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면, 역사 속에서 사라질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중 마태는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직업인 세리 출신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결핍되어 있는 이와 같은 제자들을 품어 주시고,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허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함이 드러나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시고, 친히 품고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교회가 가져야 할 사랑의 태도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앉으시고 12절에 이렇게 질문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세족식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 13:13)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요 13:14) 이처럼 너희의 주님이며 선생님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는 15절에 있습니다.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을 섬기심으로, 자신의 제자들도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세족식은 제자들을 위한 ‘본보기’였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분명 세상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고 가난한 자가 부자를 섬기고, 어린 자가 나이 많은 자를 섬기고, 직원이 자신의 고용주를 섬깁니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분명 이 세상의 원리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제자들이 오히려 힘 없고, 연약하고, 천한 자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자신의 삶을 나눠주고 헌신하는 삶이 복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리더 혹은 지도자나 직분자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 열심히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의 위치에 서서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 입니다. 섬김 받고 높임 받으려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 친히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더 겸손히 종의 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일 때,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섬김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은 먼저 행동으로 본을 보이신 후에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섬김의 모습을 본받아 더 많은 이들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리더의 덕목, 자기 성찰의 미학, 운명과 자유 의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리더의 덕목, 자기 성찰의 미학, 운명과 자유 의지를 내용으로 구성해서 그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어떻게 현저하게 관련성이 있는지 볼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리더의 덕목
첫 시작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여준 진정한 리더의 덕목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철학자는 통솔자의 역할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과 덕을 바탕으로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 모범적인 선도자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전염병, 무력 갈등, 정치적 불안 등 끊임없는 혼란 속에서도 정의, 지혜, 용기를 기반으로 한 지도력을 일관되게 유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통솔력의 기초부터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통솔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는 영도력이 봉사의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잘 섬기기 위한 핵심은 공정함과 존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명상록에서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공정하게 행동하고,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상기시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정책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법률문제나 통치에서 공정성을 보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현대의 지도자들에게 이 철인의 예시는 윤리적 통솔력이란 외부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의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상업적, 정치적 결정이 자주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그는 진정한 선도자는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복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지혜는 감정이나 충동이 아닌, 이성적이고 이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덕목입니다. 황제이자 철인인 그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상황을 명확하게 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성과 신중한 숙고에 대한 헌신은 그가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명확하게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통솔자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 철학가의 지혜 철학은 현대의 지도자들에게 멈추고, 숙고하며, 자신의 선택이 장기적으로 미칠 영향을 고려하라고 권장합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사고방식을 기르며, 선도자들은 단기적인 도전에 충동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명확하고 목적 있는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용기는 두려움이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철인은 타국가의 침입, 경제적 어려움, 안토닌 역병에 직면했을 때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역할은 결과가 불확실하더라도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외부의 사건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이 현인의 용기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선도자들은 그의 예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앞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현대 세계에서 문제는 종종 예상치 못하게 발생합니다. 이에 지도자들은 용기와 지혜를 균형 있게 유지하며 원칙에 대한 헌신을 잃지 않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자기 성찰의 미학
다음으로 그의 일기에서 배운 자기 성찰의 미학과 더불어 마음 챙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철학자의 명상록은 황제의 마음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그의 일상적인 자성에 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 일기 쓰기 습관은 단순한 습관을 넘어서, 그가 자신의 스토아 철학적 원칙을 지키며 자신을 책임지기 위한
마음 챙김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 현인에게 자신에 대한 자각은 영혼을 다듬고 진정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학적
실천이었습니다.
이 철인은 매일 반성하는 것을 자신의 기반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명상록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이 아니라, 그의 생각, 행동, 그리고 동기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을 위해 쓴 기록이었습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가치에 맞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규칙적인 자각
습관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혼란 속에서도 그가 명료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오늘날, 마음 챙김과 자신에 대한 반성은
개인 발전과 심리적 건강에 필수적인 도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기를 쓰거나 명상 혹은 조용한 숙고를 통해 매일 반성하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통솔자나 개인들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 패턴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이 실천은 감정 조절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는 동시에 더 나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이 철학자가 했던 것처럼
시간을 내어 자각하는 것은 마음과 영혼을 다잡고 목적과 방향성을 제공해 줍니다. 스토아 철학의 중심 원칙 중 하나는 감정
조절입니다. 이 현인은 마음 챙김을 통해 이를 실천했습니다. 그는 외부 사건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온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는 점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가 쓴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이 통제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입니다. 그는 시종일관 역경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분노를 억누르며 인내로 행동할 것을 상기했습니다. 현대의 마음 챙김
실천도 이와 같은 스토아 철학적 원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반응에 대한 인식을 기르면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더 깊이 생각하고 신중한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통솔력을 가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정 조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닌 차분하고 집중된 문제 해결 방식을 촉진합니다. 개인적인 환경과 직업적 환경
모두에서, 이 철학가가 실천한 마음 챙김은 더 큰 회복력과 감정적 강인함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인식은 개인
성장을 위한 핵심 요소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명상록에는 자신의 동기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의 결함을 살피며, 자신을 개선하려 했던 한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연민을 잃지 않고 성장을 갈망했습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인식은 그가 겸손하게 영도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었으며, 지도력은 완벽함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신의 개선이라는 점을 인지하게 했습니다. 개인적 또는 직업적 발전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본인의 인식은 중요한 기초입니다. 자신의 행동, 생각, 그리고 감정을 규칙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영역을
파악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도력에서는 이러한 자각이 공감, 겸손, 그리고 실수로부터
배우려는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황제이자 학자인 그가 실천한 본인의 반성과 자각은 개인 성장의 여정이 평생 지속되며, 그 여정은
내면을 바라보는 용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운명과 자유 의지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의 운명과 자유 의지에 대한 가르침은 그의 기록에서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인생의 불가피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한 스토아 철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초자연적인 힘의 영향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려는 마음에 대한 그의 고찰은 영도력, 적응력, 그리고 개인적 책임에 대해 깊은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철학자는 종종 스토아 철학의 실천인 아모르파티(amor fati)에 대해 자각했습니다. 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 우주의 자연적 질서의 일부이며, 이를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삶이 제시하는 도전들을 저항하는 대신, 그는 이를 성장의 기회로 삼아 우아하게 받아들이라고 스스로에게 조언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매우 귀중한 기술입니다. 이러한 수용을 실천하는 지도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침착함과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아모르파티 원칙을 받아들임으로써, 현대의 선도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자신의 행동과 반응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이 자신의 성품을 형성하는 데 있어 내적자유를 지닌다고 믿었습니다. 외부 상황은 종종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지만, 우리는 내적인 반응과 인생에서 내리는 선택에 대해 완전한 주체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외부의 압박에 의해 압도된다고 느낄 수 있는 현대의 통솔자들에게 특히 힘을 실어줍니다. 이 철학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력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있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내적자유를 덕성과 진정성으로 행사함으로써, 선도자는 자신의 성품뿐만 아니라 조직과 공동체의 방향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현인은 끊임없이 삶의 이분법, 즉 자연적 질서 내에서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의 압박, 외부 사건과 내부 반응 간의 균형을 다뤄왔습니다. 그의 자각은 우리가 이러한 복잡함을 지혜로 헤쳐 나가도록 격려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항상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할지는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영도력과 특별한 삶에서 이 지혜는 대단히 귀중합니다. 이 철학자는 삶이 자주 역설적이고 변덕스럽지만, 우리는 이를 우아함과 명료함으로 헤쳐 나갈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마음을 통해 우리의 반응을 형성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과 타인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4가지 방법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에 두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모두 씨름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맞추어 있는지 알려주심을 확신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의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풀과 같이 짧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우리가 한 번 뿐인 인생을 사는데, 왜 이를 계수하지 않겠는가?
즉, 우리는 삶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알고 그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기 쉽다.
우리의 삶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길이 있다. 이 영역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다면 이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우리 삶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잘못된 마음의 자세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니다" (시편 115:3)
우주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부르심, 우리의 안수, 우리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재능, 기술, 심지어 우리의 꿈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분명히 우리의 영광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틀을 깨고, 우리의 삶이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심으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편 115:1)
2.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뜻을 찾으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아닌 그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반적인 뜻을 갖고 계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3. 당신의 역할을 알라
그렇다면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뜻을 두셨는가? 당신을 부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에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당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당신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있는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있는가?
여기에 한 가지라도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회개하고 순종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 바로 가서 행하라!
만약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면, 염려하지 말라. 이를 계속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4. 기도하라.
너무 당연하게 들리지만, 너무 중요한 것이다. 매일, 매주, 매년, 하나님께 당신의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조금씩 일들이 연결되고, 문이 열리거나 닫히며,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떠한 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매일 매일의 결정에 대하여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주는 좋은 척도이다. 만약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한 평안이 느껴지지 않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알 수 없다면, 매우 단순하다. 하지 않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은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부르시고, 당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듣고, 그분을 따르라. 그분에 대해 아는 것보다 그분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요한복음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되 노예(종)와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를 행하심으로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놀라운 상징으로 주님은 그들의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헤어짐에 앞서 주님은 제자들 앞에 앉으시고 몸소 보여주신 의미심장한 섬김의 모습에서 이중(二重)적인 사랑의 역사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은 육체와 영혼에 있어서 그분의 삶 자체이자 축복된 그분의 사역이 어떠하셨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이 일 후에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시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본 것과 경험한 모든 것이 제자들 삶 가운데 규칙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복되신 구세주로서 그분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주께서 자신의 죄를 씻어 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러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몸을 버리시려는 그분은 명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를 감동케 하시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가 그의 행하심을 본 그대로 행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 행하셨고, 또한 지금도 행하고 계신 바 그대로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 남을 용서하심과 구원해주시는 사랑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우리 각자도 우리의 선생님이신 그분을 그대로 본받고 그분의 형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즉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 내가 왜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못하였던가! 이와 같이 살 수 있었는데 어찌 미처 알지 못하였던가!’
그럼에도 그분은 여전히 나의 주님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그분을 사랑합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처럼 살라 하시니, 더 이상 달리 살아갈 궁리를 해서는 아니 되겠나이다.
나는 그분의 말씀에 나의 마음을 열어야만 하며, 나의 눈이 그분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것에만 고정시켜야 하겠나이다. 결국, 거룩한 능력이 내게 임하고 그 능력은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이끌어 나로 울부짖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행하신 것을 저도 행하겠나이다
어떤 본(本)이 능력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주로 두 가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것의 매력적인 모습이 있어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친히 몸소 본을 보여주시는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그분의 영향력인 것입니다. 이 두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우리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모습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께서 보이신 본(本)이 정말로 여러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까?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주의 제자들의 행위로 판단해 보건대,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여시사 독생자를 닮는 삶의 그 천국적인 아름다움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원래 영광스러움과 완전함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십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 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에 관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하늘에 속한 온갖 아름다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완전한 것이, 마치 이 땅에서의 보여지는 삶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계시됩니다.
만일 우리가 천국에서 귀하고 영광스럽게 보시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참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주목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추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이러한 천국적인 아름다움은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간절히 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의 궁정 안에서의 삶의 모습과 방식은 그가 통치하고 있는 나라의 생활양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귀족이나 상류 계층에 속한 자들이라면 모방하려 들 것입니다.
육체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사 우리 가운데 친히 거하여 주신 천국의 왕이신 그분이 오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처럼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주의하여 보라고 하심인데, 그의 제자라고 하는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모습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모습과 가장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의 자세와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희생하심으로 나타내신 그의 사랑은, 천국의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이보다 더 크고 이보다 더 찬란한, 다른 그 어떤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로 하여금 그 본(本)을 따르도록 하심은 억지가 아니라, 매력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끌리게 되었고 참으로 이것은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를 얻고자 하신 의도이셨던 것입니다.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줄기를 타고 물위로 올라간 수많은 자기의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은 탈바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애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는 성도의 영적 변화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중생의 감격과 기쁨에 살게 되면 근심하고 염려하고 애벌레같던 옛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에서 잠자리처럼 훨훨 날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헬라어 단어 ἀνάστασις (Anastasis)는 성경에서 ‘부활, 일어남’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단순한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자의 부활 소망을 핵심적으로 나타냅니다.
- 헬라어 원어 : ἀνάστασις
- 발음 : Anástasis (아나스타시스)
- 뜻 : 부활, 일어남, 다시 살아남
📖 성경 구절 예시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ἀνάστασις)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여기서 아나스타시스는 단순한 사건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부활 그 자체’임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ἀνάστασις)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 교회의 사역 중심에는 항상 예수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 묵상 포인트 /
‘아나스타시스’는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죽음을 이기는 절정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확증이자, 믿는 자들에게는 장차 올 부활 생명의 보증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은 옛 자아로부터 날마다 일어나는 영적 부활을 경험하며, 최종적으로는 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십자가에서 못 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일' 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죽음에서의 부활을 믿으며 소망하는 소위 부활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
'부활'로 번역된 '아나스타시스'가 유래된 동사형인 '아니스테미'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스테미'의 뜻은 '다시 일어나다, 똑바로 서다, 죽음에서 일으키다, 나아가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들어올리다'인데,
'한가운데로, 중앙에, ...의 복판에, 사이에'의 뜻을 가진 '아나'
'서다, 이룩하다, 두다, 세우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의 뜻을 가진 '히스테미'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Pronunciation [ anistēmi ]
- Etymology
- 미래 ἀναστήσω, 제1부정과거 ἀ- νέστησα, 제2부정과거 ἀνέστην, 제2부정과거명령 ἀνάστηθι와 ἀνάστα, 제2부정과거분사 ἀναστάς, 미래중간태 ἀναστήσομαι, 303과 2476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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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타동사; 미래와 제1부정과거능동태] 일으키다, 세우다, 곧게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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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문자적인 뜻] 누운 자를 일으키다, 특히 죽은 자를 살리다, 요6:39,44, 54, 행2:24,32, 3:26, 9:41, 13:33, 3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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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상징적인 뜻; 나타나게 하다, 태어나게 하다는 의미에서] 일으켜 세우다, 마22:24, 행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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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건물을 짓다, 세우다, 막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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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동사; 제2부정과거와 중간태] 일어나다,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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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문자적인 뜻] 앉거나 누워있는 자가 말하기 위해 일어나다, 마26:62, 막5:42, 9:27, 14:60, 눅4:16, 11:7,8, 22:45, 행26:30, 고전10:7. [주] 특히 죽은 자에게 자주 사용됨, 요11: 23,24, 고전15:51, 살전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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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일어나다[나타나다 혹은 오다의 의미], 막3:26, 눅10:25, 행7:18, 히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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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일반적인 뜻; 동작의 시작을 나타냄] 일어나다, 떠나다, 준비하다, 차비를 차리다, 마9:9, 막2:14, 7:24, 10:1, 눅1:39, 5:28, 15:20, 행8:26, 9: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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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건물이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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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9:9, 행10:13, 살전4:16), 살아나다(마17:9, 눅16:31), 세우다(마22:24, 행3:22,26), 일어서다(마26:62, 막14:60, 행10: 26), 서다(눅4:16), 살리다(요6:39, 11:23, 행2:32), 살다(요11:24, 행17:3), 오르다(행7:18), 일으키다(행9:41, 13:33), 다시 살아나다(눅 24:7), 다시 살리다(요6:39), 다시 살다(요11:24).
Pronunciation [ ana ]
Pronunciation [ histēmi ]
' 부활'(아나스타시스)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통하여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인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으로 똑바로 사는 것,
선악의 주체가 되어 두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영원한 죽음의 삶에서 한마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말씀)을 통하여 진리(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라는 고백은 '나는 말씀이다'(에고 에이미 호 로고스)라는 고백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말씀)을 가진 자이며(롬 8:9),
하나님의 성령(말씀)이 거하는 성전이고(고전3:16)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해 주신 성전, 예수, 성경, 십자가, 세상을 통하여 그 안에 내용으로써 숨겨진 말씀을 깨달아 땅적 존재에서 하늘적 존재로 살아가는 진정으로 날마다 부활(아나스타시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이다.
성경에서 부활을 알려주는 성경구절 모음
‘부활’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테쿰’(תְּקוּמָה),
헬라어로는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문자적으로는 ‘일어섬’ 혹은 ‘다시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부활(復活)
테쿰(תְקוּמָה)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Pronunciation [ châyâh ]
- Old Testament
- 283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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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 살다, 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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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형 생존하다, 안전하다, 건강하게 살아있다, 창12:13, 19:19, 민14:38, 수6:17, 사55:3, 렘38: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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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형 다시 살다, 소생하다, 부활하다, 겔37:5, 왕상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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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형 건강을 회복하다, 고침을 받다, 상쾌해지다, 창20:7, 45:27, 수5:8, 삿15:19, 왕하1:2,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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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원형 피엘형 חִיָ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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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원형 살게 하다, 살아나게 하다, 생명을 주다, 잘 되게 하다, 번영케 하다, 욥33:4, 시1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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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원형 살아남다, 살아있다, 창12:12, 출1:17, 왕상20:31, 욥36:6, 시22:30(29),41:3(2),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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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원형 생명을 되찾다, 생기를 회복하다, 기운을 얻다, 복수하다, 신32:39, 삼상2:6, 대상11:8, 느3:34, 시30:4(3), 71:20,8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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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원형 히필형 הֶחֱיָ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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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원형 살아남다, 살려주다, 창6:19, 20, 수6:25, 14:10, 삼하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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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원형 생기를 되찾다, 왕하5:7,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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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부정사 절대형 חָיֹה, 겔18:9 חָיוֹ, 겔3:21, 18:28, 연계형과 인칭 어미활용 חֲיוֹתָם, 수5:8, 접두어가 붙을 경우 לִחְיוֹת, 겔33:12, 접속사 붙은 명령형[단수] וֶחְיֵה, 창20:7, [복수] וִתְיוּ, 창42:18, 미완료형 יִחְיֶ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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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보존하다(창12:13, 민4:19, 렘38:20), 생존하다(민14:38, 슥10:9), 삶(느9:29), 살다(에4:11), 살게 하다(겔37:14, 시119:17), 낫다(수5:8, 왕하8:8), 살리다(창20:7, 겔37:5), 지내다(창5:7), 보존되다(창19:20), 생활하다(창27:40, 왕하4:7), 소생하다(창45:27, 삿15:19), 거주하다(창47:28), 살려주다(왕상20: 32), 살아나다(왕상17:22), 희생하다(왕하13:21), 살려두다(민31:15, 삿21:14), 구원하다(겔3:18), 유전하다(창7:3), 부흥하게 하다(합3:2), 전하다(창19:32), 기르다(삼하12:3, 사7:21), 중수하다(대상11:8), 일으키다(느4:2), 소생하게 하다(시80:18, 7:12), 보전하다(겔18:27), 풍성하다(호14:7), 생존하게 하다(수14:10),구원하다(창19:19), 보존하게 하다(창6:20), 살려주다(사38:16), [명] 만세(삼상10:24, 왕하11:12), 생명(전7:12), [부] 정녕(겔3:21, 왕상8:10).
성경에서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정점이며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소망이 됩니다.
부활은 단지 미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삶 속에서도 능력으로
역사하는 진리입니다.
상징적으로 부활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죽음을 이긴 승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사건이며, 믿는 자에게 부활 생명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가복음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누가복음 24:6-7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 부활은 믿는 자의 소망
성경은 부활을 단지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고, 믿는 자의 미래 소망으로 제시합니다. 이 소망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고린도전서 15:52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호련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3. 부활의 능력
부활은 단지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승리의 권능이며, 그 능력은 지금도 성도들의 삶에 역사하여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에베소서 1:19-20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사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베드로전서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고린도전서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4. 부활과 새 생명
부활은 단순히 죽음을 이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부활 생명은 의롭고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하며, 성령과 함께 새 피조물로 살아가게 합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요한일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5. 마지막 날의 부활
마지막 날의 부활은 심판과 영생, 영벌을 갈라놓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나고,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완성이며 영원한 소망입니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6. 부활과 승리
부활은 죽음과 죄, 사망의 권세를 이긴 승리의 상징입니다. 믿는 자는 이 승리에 동참하여 두려움 없이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로 여겨집니다.
고린도전서 15:54-55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고린도후서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의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7. 부활과 성도의 영광
성도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변화이며, 부패할 몸에서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최종 단계입니다.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린도전서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골로새서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8. 상징적 부활 (비유적 표현)
부활은 문자적 사건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회복을 상징합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이며, 일상의 성화 과정에서도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에스겔 37:5-6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해 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시편 71:20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호세아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사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놓으리라
성경에서 ‘부활’의 신학적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한 인물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중심을 이루는 구속사의 정점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능력이며, 믿는 자 모두의 영생과 구원을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부활은 교회, 성도의 정체성과 삶, 종말론적인 소망까지 포괄하는 주제로서, 다양한 신학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1. 구속사의 완성으로서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이자, 인류 구속의 완성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죄에 대한 대속을 상징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그 실체가 성취되었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절정이며,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십자가의 죽음 또한 무의미해집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아성의 확증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선지자나 도덕 교사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1:4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사역의 신적 권위를 확실히 증명하며, 십자가의 치욕을 영광으로 뒤바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구세주임을 세상에 공표하는 사건입니다.
3. 성도의 칭의와 부활의 관계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의 칭의(義)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4:25은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칭의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작용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근거가 됩니다.
4. 부활과 성도의 새로운 삶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삶에 즉각적이고 현재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성도가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상징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전환을 뜻하며, 부활은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성화된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생명으로 날마다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살아갑니다.
5.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보증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헛된 것이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는 단지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죽음을 초월한 생명력을 살아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육체적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로 삼아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6. 종말론적 소망으로서의 부활
부활은 종말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며, 그 부활을 통해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5:28-29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구분하며, 다니엘 12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은 마지막 부활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성도에게 이 종말의 부활은 심판의 두려움이 아닌 구원의 영광이며, 이 땅의 고난과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날입니다.
7. 부활과 교회의 정체성
교회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은 초기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며 그 생명 안에 참여한 공동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상징하며, 성찬은 부활 생명의 영적 양식을 경험하게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은 부활을 기초로 하며, 부활이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8. 성령과 부활의 관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동일한 능력으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며, 부활의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로마서 8:11은 “예수를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며,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성령의 현재적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이끄시며, 매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근원이 되십니다.
9. 부활과 승리의 신학
부활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결정적 승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57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무력함 대신 능력을 부여합니다. 부활 신앙은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며, 현재의 권세와 악에 굴복하지 않게 합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소망의 빛을 비추게 하는 영적 동력입니다.
결론
성경에서 부활은 단지 예수님께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전 우주적이며 구속사적인 대전환점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정체성과 소망, 능력과 목적을 부여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이를 믿고 따르는 자는 이미 죽음을 이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며, 그 생명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통한 구원의 의미를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이는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을 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희망을 포함합니다.
기독교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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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었으며, 부활은 죄와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가 하나님임을 보여주며,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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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자 생명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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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생명의 상징 :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든 것으로 비유하며, 부활과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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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 성경에 따르면, 심판의 날에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며,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행위에 따라 부활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 역사적 의미 :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은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큰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을 이른바 ‘에고 에이미’라고 하는데요.
이는 ‘나는 무엇무엇이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7가지로 소개하십니다.
첫째, 나는 생명의 떡이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이다.
셋째, 나는 양의 문이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이다.
다섯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여섯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써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앞선 이야기들의 기억이 희미해졌겠지만, 또 다른 기회가 되면 다시 좀더 다듬어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하고요.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얘기나누려 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실 이것의 참 의미는 예수님 밖에 모르는 것이지만요.
바로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나사로에게 바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경건한 유대인들 혹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혐의를 씌워서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물던 곳에 며칠 계시다가 나사로에게 가려고 하자, 제자들이 만류하기도 했고 도마는 같이 죽으러 가자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이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특별하고 신비한 분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예수님께 혹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다스리를 수 없고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생명에 관해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는 것과 죽는 것에 관해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날을 정할 수 없고, 죽는 날도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 잘 믿는다고 더 오래 살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고 우리가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우리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선택은 하나님께 붙들려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간 부자는 어리석다고 평가받았는데요.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에 죽음이 언제 어느 때 닥칠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은 여러 하나님의 대체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곤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가장 확실하게 우리의 두려움을 잠재워 줄 것처럼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많은 돈이 우리의 삶을 보다 안락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어리석은 부자 역시 자신에게 닥칠 죽음 앞서 그의 재산은 참으로 무기력 하였음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분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에 승리하신 것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시기에 우리가 속할 것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오는 것이나 우리가 정체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에게서 어떤 불안감을 느낍니다.
아마 지금과 같은 모습과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삶의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하고 두려움이 있는 것에서는 자기만을 위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안전이 최우선이고 나중심의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이 제거된 상태에서 우리는 기꺼이 사랑할 수 있고 이타적인 삶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식의 삶이 틀렸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랐던 삶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많이 다름을 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살리는 삶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르고 사랑실천하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이 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가 이에 믿음으로 응답한다면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으로 믿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살고 있습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께서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믿고 있을까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힘써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11월 20일(목) 요한복음 10-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Pronunciation [ anastasis ]
- Etymology / 450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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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름, 오르기, 눅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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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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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1: 22, 2:31, 4:33, 17:18, 롬1:4, 6:5, 빌3:10, 히11:35, 벧전1:3,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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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14:14, 20:35,36, 요11:24, 23:6,8, 24:15, 고전15:12이하, 히6:2, 계20:15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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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사두개파의 부인] 마22:23,28,30, 막12:18,23, 눅20:27,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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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에피쿠레오학파의 부인] 행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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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부활(마 22:23, 막 12:23, 행 23:6), 흥함(눅 2:34), 다시 살아남(행 26:23).
Pronunciation [ anistēmi ]
- Etymology / 미래 ἀναστήσω, 제1부정과거 ἀ- νέστησα, 제2부정과거 ἀνέστην, 제2부정과거명령 ἀνάστηθι와 ἀνάστα, 제2부정과거분사 ἀναστάς, 미래중간태 ἀναστήσομαι, 303과 2476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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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동사; 미래와 제1부정과거능동태] 일으키다, 세우다, 곧게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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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인 뜻] 누운 자를 일으키다, 특히 죽은 자를 살리다, 요6:39,44, 54, 행2:24,32, 3:26, 9:41, 13:33, 3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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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징적인 뜻; 나타나게 하다, 태어나게 하다는 의미에서] 일으켜 세우다, 마22:24, 행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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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건물을 짓다, 세우다, 막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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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동사; 제2부정과거와 중간태] 일어나다,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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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인 뜻] 앉거나 누워있는 자가 말하기 위해 일어나다, 마26:62, 막5:42, 9:27, 14:60, 눅4:16, 11:7,8, 22:45, 행26:30, 고전10:7. [주] 특히 죽은 자에게 자주 사용됨, 요11: 23,24, 고전15:51, 살전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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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일어나다[나타나다 혹은 오다의 의미], 막3:26, 눅10:25, 행7:18, 히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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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일반적인 뜻; 동작의 시작을 나타냄] 일어나다, 떠나다, 준비하다, 차비를 차리다, 마9:9, 막2:14, 7:24, 10:1, 눅1:39, 5:28, 15:20, 행8:26, 9: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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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건물이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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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9:9, 행10:13, 살전4:16), 살아나다(마17:9, 눅16:31), 세우다(마22:24, 행3:22,26), 일어서다(마26:62, 막14:60, 행10: 26), 서다(눅4:16), 살리다(요6:39, 11:23, 행2:32), 살다(요11:24, 행17:3), 오르다(행7:18), 일으키다(행9:41, 13:33), 다시 살아나다(눅 24:7), 다시 살리다(요6:39), 다시 살다(요11:24).
Pronunciation [ zōē ]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Pronunciation [ za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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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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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에 반대되는 육체적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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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반적으로] 롬7:1-3, 14:8, 고전7:39. ㉠ ψυχὴ ζῶ - σα: 살아있는 목숨, 고전15:45. ㉡ ὥσ- τε ἐξαπορηθῆναι ἡμᾶς καὶ τοῦζῆν: 살 소망까지 끊어지다, 고후1:8. ㉢ διὰ παντὸς τοῦ ζῆν: 일생동안, 히2:15. ㉣ ἔτι ζῶν: 그가 살아있는 동안, 마27:63. ㉤ ἡμεῖς οἱ ζῶντες: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고후4:11, 살전4:15, 17. ㉥ ζῶντες καὶ νεκροί: 삶과 죽음, 행10:42, 롬14:9, 딤후4:1, 벧전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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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에 대하여] 다시 살게 되다, 마9:18, 행9:41, 20:12, 계20:4,5, [예수에 대하여] 눅24:5,23, 행1:3, 롬14:9, 고후13:4, 계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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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병든 사람에 대하여] 건강을 되찾다, 낫다, 막5:23, 요4:50, 51,53, 근심이 물러가는 것, 살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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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건강한 사람에 대하여] 살아가다, 살아남아 있다, 행25:24, 28:4, 약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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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죽지 않을 존재에 대하여] ㉠ [멜기세덱에 대하여] 히7:8. ㉡ [하나님에 대하여] 마16:16, 26:63, 행14:15, 롬9:26, 고후3:3, 6:16, 살전1:9, 딤전3:15, 4:10, 히3:12, 9:14, 10:31, 12:22, 계7:2, ὁ ζῶνπατήρ, 요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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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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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ζ. ἐν σαρκί [육체 안에], 갈2:20, 빌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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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ἐν κόσμῳ: 세상에 산다, 골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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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ζ. ἐν θεῷ : 하나님 안에 산다, 행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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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을 의지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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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ἐπίτινι: 무엇인가에 의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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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ζ. ἐπ᾿ ἄρτῳ: 빵으로 산다, 마4:4, 눅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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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ζ. ἔκ τινος: 무엇엔가로부터 먹고 산다, 고전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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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하나님의 자녀의 초자연적인 삶을 나타낼 때]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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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에서] 요5:25, 6:57, 롬7:9, 6:11,13, 고후13:4, 갈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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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세의 영광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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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독립적으로] 눅10:28, 요11:25, 14:19, 롬8:13, 히12:9, ἐμοὶ τ. ζῆμ Χριστός: 나에게서 삶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서만 가능하다, 빌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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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보다 특별하게] ㉠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요6:51,58. ㉡ ἅμα σὺν αὐτῷ (i. e. Χριστῷ) zζ.: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살전5:10. ㉢ ζ. κατὰ θεὸν πνεύματι: 하나님처럼 영으로 산다, 벧전4:6. ㉣ ὁ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롬1:17, 갈3:11, 히10:38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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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삶의 향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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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사나 그 밖의 수식어를 동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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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ἀσώτως, 눅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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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ἐθνικῶς, 행26:5, 롬6:2, 갈2:14등, 골3:7, 딤후3:12, 딛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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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ζ. με- τὰ ἀνδρός: 남편과 함께 산다, 눅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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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을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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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ζ. τῷ θεῷ, 눅20:38, 롬6:10,11, 갈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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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τῷ κυ- ριῳ, 롬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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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분사는 사물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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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여있는 물과 대조적인 생수에 대하여] ὕ- δωρ ζῶν, 요4:10,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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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졌거나 그것을 가져오는 모든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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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λόγια ζῶντα: 생명의 말씀, 행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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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λό- γος ζῶν θεοῦ, 벧전1:23, 히4:12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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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λίθος ζῶν, 벧전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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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θυσία ζῶ - σα: 산 제물, 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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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λίθοι ζῶντες, 벧전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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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기본형] 단축형 ζῶ , 미완료 ἔζων, 미래 ζήσω, ζ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ἔ- ζησ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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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살다(마 4:4, 눅 2:36, 롬 7:1), 살아 계시다(마 16:16, 26:63, 요 4:57), 살리다(요 6:58, 롬 1:17, 고전 9:14), 살아나다(행20:12).
[명] 살아있는 말씀(행 7: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트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로마서 4:16 참조.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 3. 나는 문이다.(10:7,9)
-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생명의 떡과 광야의 만나가 갖는 의미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언은 출애굽기 16장에 나타난 '만나' 사건과 깊은 구속사적 연관을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굶주림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출 16:4).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임시적 양식으로, 매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으로 선포하며, 만나를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더 이상 반복적으로 공급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생명의 공급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은 모든 인간의 영적 굶주림과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계획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떡'으로서의 예수는 광야에서의 만나가 지닌 임시적이고 물리적 양식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구속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영원히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는 참된 만족과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3. 나는 문이다.(10:7,9)
-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롬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딤전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딤전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 딤전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 롬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 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한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의미를 묵상해 보면,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이다. 새로운 시작은 인류의 대표로서의 예수님이 전제된다. 모든 인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이들은 옛사람이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고, 예수님의 생명의 시작이 되신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 길'은 유일무이한 진리이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유일한 생명이고,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진리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고, 진리도 없다. 오직 예수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에 대한 해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 중에서 7가지만을 골라 소개하고있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과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표시로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이적은 창조주로서의 기사를, 네번째 이적은 재-출애굽의 의미를 마지막 일곱번째는 다시 살아남의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새롭게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표지로 이적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 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4: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 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 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4) 5,000명을 먹이심(6:1-14)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5) 물 위를 걸으심(6:16-21)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 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 나고, 넷째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 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로내 에덴 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6) 소경을 고치심(9:1-7)
소경을 보게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너머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하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 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부활은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한다.
생명은 쇠락을 피하지 않는다.
생명은 쇠락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을 선언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선언은 단순한 위로도, 종교적 감정도 아니다.
존재의 근본을 가르는 말씀이며, 죽음에 사로잡힌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 대답이다.
인간은 죽음 아래 살아간다.
생명은 시간에 갇히고, 사랑은 이별을 향해 흐르고, 존재는 점점 가벼워진다.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덮고 있는 운명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 흐름 속에서 생명은 언젠가 소멸될 약속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흐름을 거슬러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생명은 소멸을 향하지 않는다. 생명은 부활을 향해 있다. 생명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생명은 죽음을 깨뜨린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믿음은 죽음 너머의 생명을 기다리는 소극적 희망이 아니다. 믿음은 이미 오늘, 이 존재 안에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부활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다. 부활은 존재의 전환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듯한 세계 안에서, 죽음을 삼키는 생명이 시작된다.
믿음은 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 사랑하고, 절망을 넘어 걷는 일이다. 믿음은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증명하거나 논증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부활 자체가 되셨다. 부활은 이론이 아니다. 부활은 인격이다. 죽음은 더 이상 인간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의 중심에 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으나, 살아난 존재다. 죽음을 통과한 생명, 부활의 생명으로 걷는 존재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신앙은 죽음을 모르는 척하는 낙관도 아니다. 신앙은 죽음을 직면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생명의 힘이다. 눈물 속에서도, 상실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맥박을 느낀다.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숨결을 듣는다.
죽음은 우리를 덮칠 수 없다. 죽음은 우리를 해체할 수 없다. 죽음은 더 이상 최종 선언이 아니다. 생명이 모든 것을 품고, 새로 시작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한 마디가 모든 존재론을 뚫는다. 인간은 자신을 생명으로 지탱할 수 없다. 오직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필연이다. 부활과 생명은 신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우리는 생명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의해 붙들린다. 우리는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존재한다.
죽음은 더 이상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이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고난 앞에서도, 이별 앞에서도, 쇠락 앞에서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을 살아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은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다. 믿음은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사는 것이다. 생명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부활과 생명을 품고 숨 쉬고 걷는다. 끝나지 않는 생명, 소멸되지 않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소망하며, 깨어진 세계 안에서도 생명의 힘으로 걸어간다. 우리는 부활을 안다. 우리는 생명을 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1:25)
본문 배경과 의미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도착하셨고, 이에 마르다는 오라비의 부재를 슬퍼하며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고, 마르다는 이를 마지막 날의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미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자기 자신임을 선언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라는 표현은 강조적인 어순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는 요한복음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는 ~이다" 선언 중 하나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밝히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신약에서 "ἐγώ εἰμι"는 헬라어로 번역된 이 표현을 반영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계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부활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분이 아니라, 부활 자체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신성과도 직결되며, 단순한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부활과 생명의 현재성과 영원성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히 미래에 있을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단 12:2). 마르다 역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자신과 연합하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단순히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 속에서 영적으로 죽어 있던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부활과 생명은 단순히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적용되는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육체적으로는 죽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단순한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존재이십니다(요 1:1-3).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부활과 생명의 능력과 신성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선언은 그분의 신적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부활을 선포하시는 선지자가 아니라, 부활의 원천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는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요 11:43-44).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으며,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듯이(창 2:7),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자신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시는 가장 큰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원한 생명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영원성과 직접 연결되며,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과 생명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이며,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보장된 영원한 생명의 약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며, 현재의 삶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부활과 생명의 약속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의 '부활'의 의미
서론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에서의 회복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구원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중요한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이 어떻게 전개되며, 이 개념이 예수님의 사역과 신적 정체성,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개념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이며 영원한 생명의 실현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최후의 날에 있을 부활을 믿었으나(요 11:24),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 안에서 실현되는 현재적이고 본질적인 사건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영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선언(요 11:1-44)
요한복음 11장은 요한복음에서 부활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성과 연결되며,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 부활을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표적이었으며, 이것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부활은 일시적인 생명의 회복이었으며, 결국 그는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승리이며,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의 모델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의 부활과 영생
요한복음은 '부활'을 단순한 육체적 생명의 연장으로 보지 않고, 영생과 깊이 연결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5:24-29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시며, 부활과 영생이 현재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라고 하셔서, 모든 인간이 부활을 경험할 것이지만, 믿음 안에서의 부활은 영생을 보장받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신적 정체성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19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전이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며, 그의 부활이 곧 새로운 성전의 시작임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표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는 전환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확장되는 기점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활을 통한 신자들의 새 생명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궁극적인 의미는 신자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과 관련됩니다. 요한복음 14:19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개념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승리가 주어질 것임을 보장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삶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영원한 생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결론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실현된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보이셨고, 자신의 부활을 통해 이 능력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은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의미는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통한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부활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망이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4151
Pronunciation [ pnĕnuma ]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Pronunciation [ hülē ]
- Etymology / 3586의 유사형
- 1. 수풀, 화목, 재목, 땔감, 장작더미, 약 3:5. 2. 재료, 물건.
- 관련 성경 / 나무(약 3:5).
참된 신 & 거짓 신(데미우르고스)
숙련공
직공
제조자
-
Pronunciation [ dēmiŏurgŏs ]
- Etymology
- 1218과 2041에서 유래
-
1.숙련공, 직공, 제조자, 창조자, 히11:10.
Related Words
-
관련 성경건설자, 지으실 자(히11:10).
영생은 참 하나님을 아는 것(요한복음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인데,
그 증거를 잘 받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야 영생을 얻습니다.
그 진리 지식을 가지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계십니까?
피조물인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아주 하찮은 지식이라도 그것을 먼저 아는 자가 우리에게 알려주어야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언제부터 계시는지,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을 하시는지, 스스로 터득해서 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영적 소경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아무도 온전하게 알아낼 자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계시(啓示)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부터 여러 족장들과 모세를 위시하여 여러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찾아오셔서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히 1:1), 그들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인간은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만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아야 참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여기에서 참된 믿음이 생겨나며, 이 믿음으로만 사람은 구원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 지식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성경을 들고만 다닌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되 읽는 것을 이해하고 깨달아 바른 이해와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그 지식은 참된 믿음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얼마나 귀히 여기며, 이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성품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관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관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그 뜻에 관하여 잘 알고, 바로 알고 계십니까? 그의 영원하심과 광대하심, 그의 자존하시며 무소부재하심, 그의 능력과
권세, 그의 사랑과 자비, 그의 거룩과 공의, 그의 지혜와 진실하심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잘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과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의 일과 섭리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의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지혜와 전능의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문).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권으로 다스리시고 섭리로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인데, 구원은 순전히 우리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주권적 뜻과 작정과 은혜로 값없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죄를 전혀 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그리고 완전히 치러 주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우리를 또한 의롭게 하시고, 성령과 진리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새 성품과 새 소원을 넣어주시고, 이제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거룩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친히 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우리가 구원의 길로 들어가 영생에 이르게 되며,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할대로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모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도리,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다 가졌다고 하더라도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자가 없다고 하셨고(요 14:6),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4:12).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영생을 가졌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온 세상을 그의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11). 장차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9: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히 9:27). 장차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감사하고 있으며,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신앙의 기초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그의 구속, 성령 하나님과 그의 성화에 대해서 그 내용 하나하나를 알아야 하고, 그래야 믿는 것이고, 믿어야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모르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고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다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모르는 사람이요, 인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요, 구원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요,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장차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도, 그 영원한 운명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신뢰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그가 주시는 영생이 있습니까? 아무리 이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아무리 충만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러한 세상 지혜와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떤 놀라운 과학지식, 의학지식, 인문, 언어와 철학지식으로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그것으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운동감각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는 자기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고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귀히 여기고 읽고 배우며,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1월 19일(수) 요한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아는 것(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He replied, "Whether he is a sinner or not, I don't know.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아는 것(그노시스. ) γνῶ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1108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지식의 열쇠
율법에 있는 지식의 규모
-
Pronunciation [ gnōsis ]
- Etymology
- 1097에서 유래
-
1.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롬11:33. 사람의 속성인 지식, 고전8: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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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지식의 열쇠, 눅11:52.
-
b.율법에 있는 지식의 규모, 롬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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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것, 눅1:77, 고전1:5, 고후2:14, 4:6, 6:6, 10:5, 11:6, 골2:3, 벧전3:7, 벧후1:5,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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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단적인 그노시스[그노시스주의=영지 주의], 딤전6:20.
Related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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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지식(눅11:52, 행11:33, 롬2:20), 아는 것(고후10:5), 아는 지식(빌3:8), 알게 함(눅1:77), [동] 알다(고후2:14, 4:6).
γνῶσις, εως, ἡ 1108 [gnōsis]
-
1.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것, 눅1:77, 고전1:5, 고후2:14, 4:6, 6:6, 10:5, 11:6, 골2:3, 벧전3:7, 벧후1:5, 3:18.
-
2.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롬11:33. 사람의 속성인 지식, 고전8: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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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식의 열쇠, 눅11:52.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믿음(피스티스)
믿음
신실성
엄숙한 약속
-
Pronunciation [ pistis ]
- Etymology
- 3982에서 유래
Pronunciation [ ĕidō ]
-
1. [문자적으로] 보다, 인식하다.
-
a. [τι- νά, τὶ와 함께] ㉠ 별을 보다, 마2:2. ㉡ 아이를 보다, 마2:11. ㉢ 하나님의 성령을 보다, 마3:16. ㉣ 빛을 보다, 마4:16.
-
b. [ἀκούειν과 함께] 눅7:22, 고전2:9, 빌1:27,30, 4:9, 약5:11, [πιστεύειν과 대조해서] 요20:29. ㉠ 누군가를 쳐다보다, 막8:33, 요21: 21. ㉡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보다, 눅14:18. ㉢ [환상을] 행10:17, 11:5, 16:10, 계4:1.
-
c. [목적격과 함께 또는 목적격 없이 쓰이는 분사형은 흔히 이야기의 계속을 의미한다] 마2:10, 5:1, 8:34, 막5:22, 9:20, 눅2:48. [주] [목적격이 보충되어야 할 곳] 마9:8,11, 21:20, 막10:14, 눅1:12, 2:20, 행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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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목적격 및 분사와 함께] 마3:7, 8:14, 9:9, 16:28, 행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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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간접의문문과 함께] 눅19:3, 막5:14, 갈6:11.
-
f. [ὅτι와 함께] 막2:16, 9:25, 요6:24, 11:31, 계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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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ἔρχου καὶ ἴδε ‘와서 보라'의 형식] 요1:46, 11:34, ὑπάγετε ἴδετε, 막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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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떤 종류의 감각을] 느끼다, 의식하다, 마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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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반적으로]보다, 인지하다, 주목하다, 눅9:47, 롬11:2. [ὄτι와 함께] 마27:3, 24, 행12:3, 갈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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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접의문문과 함께 무엇인가를] 고려 하다, 요일3:1, 행15:6.
-
5. 무엇인가를 보다=경험하다, 요3:3, 눅2:20, 히11:5, 계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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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문하다, 눅8:20, 행16:40, 고전16:7, 살전2:17, 3:10. 누군가를 알게 되다, 눅9:9, 23:8, 요12:21, 롬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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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보다(마2:2, 막1:10, 요1:39), 알다(마2:16, 막10:42, 요9:25), 뵙다(마28:17), 보이다(막12:15), 당하다(행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2:15), 의논하다(행15:6).

앎에서 믿음으로(요한복음 9:24-41)
본문은 맹인과 바리새인들 간의 대화, 또 맹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맹인이 한 고백입니다.
맹인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안다’
맹인의 말을 통하여 요한은 ‘안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실제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절)
맹인은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말에 사실 반박을 합니다.
“그건 아는 게 아닙니다.”
요한은 맹인의 입을 통하여 그런 앎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진짜 아는 게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앎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그렇다면 믿음은 또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초점으로 본문 말씀을 읽어야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캐치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앎은 믿음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즉 믿음은 진정한 앎에서 와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앎과 믿음에 관한 요한의 메시지를 통해서 스스로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정말 올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가?’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갑자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맥락을 볼 때 참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인까?
지금까지 우리가 본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실 이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계속 말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맥락상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말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종의 당시 숙어처럼 쓰인 말입니다.
“똑바로 얘기해.”
“진실을 얘기해.”
이런 뜻입니다.
표현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들립니다.
그래서 이 말이 당시 숙어처럼 쓰인다는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고 들립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지금 퇴색되었습니까?
내 진실을 확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차용해 쓰는 것으로 퇴색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음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증거로 대는 것.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용되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사용한다면,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도구로 삼는다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가 되어야지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도구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맹인이었던 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고친 예수가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나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분명히 압니다.”
이 때 ‘안다’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즉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지식으로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하고 만나고 내가 체험한 것은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앎은 책을 통해서 배워 아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 교회 다니고 설교를 들어서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지금 이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 자기의 어둠을 밝혀주신 예수님, 내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인 줄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아무리 많이 성경을 읽고 배우고,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질병의 치유가 교회에만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다른 종교, 무속신앙 등 기독교 밖에 있는 다른 곳에서도 그들이 믿는 신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것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이 너무 뚜렷하고 확실하니까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그곳은 진리라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참 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거기에서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믿는 신이 제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체험이 가지고 있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앎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자세히 봐야 합니다.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지식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많이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설교도 잘 들어야 합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에 체험 신앙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반면 말씀이 약했습니다.
체험은 굉장히 강한 데 반해 말씀은 너무 약하니까 한국교회의 기반이 약한 것입니다.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 불었던 열풍이 바로 제자 훈련입니다.
그런데 제자 훈련 강해지면서 이제는 다시 체험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지금은 예전처럼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제자 훈련을 할 때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니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어떤 체험을 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 같은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한다고 체험할 수 있습니까? 교회 모든 성도들이 원한다고 영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극소수만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체험을 한 사람들은 신앙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흡사 교만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든요.
그런 분위기에서 교회 안에 제자 훈련이 밀물처럼 들어오니까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제자 훈련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본인이 열심히만 하기만 하면 정해진 제자 훈련 과정을 마치고 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의 모든 과정을 수료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객관적인 표시가 교회 안에서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자 훈련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자 훈련과정을 다 이수하면 교회에서는 사역을 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직자로 올라갈수록 제자훈련 과정의 요구가 더 강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려운 제자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중직까지 맡게 되니까 굉장히 믿음이 좋다고 하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체험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체험들이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의 상황은 어떤지 아십니까?
체험도 없고 지식도 없습니다. 둘 다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신앙이 위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체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지식도 없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을 보면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서 체험하고 경험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말씀 알기를 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지적 호기심인 측면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더 헌신하고 싶은데 확신이 없어서 배우고자 하는 교인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내가 이렇게 시간을 쓰면 안 되지.’
‘내가 물질을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이것이 두려우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물으실 것입니다.
“너 왜 시간 그렇게 썼어?”
분명합니다.
저도 주님 앞에 서면 굉장히 후회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주님을 더 알지 못한다면 분명히 후회할 것입니다.
분명히 저는 많은 시간들을 낭비했을 것이고, 많은 돈을 낭비했을 것이고, 많은 힘들을 낭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헛된 일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을 그분 앞에 설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압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조급한 것입니다. 시간을 제대로 써야 되고, 물질도 제대로 써야 되고, 생명을 추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내 몸에 새겨진 죄의 DNA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과 싸워야 되는데 그것과 싸우려면 그리스도를 더 알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 알아야 되고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경험해야 하고 그 경험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지금의 앎과 경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경험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하고, 그리스도를 더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제가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한 쪽 얇은 옷자락 살짝 만진 정도입니다. 지나가시는 그분의 옷자락에 살짝 스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부딪힌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자기 옷을 만진 그 여자를 만나려고 찾으셨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능력 있는 자야.”
이렇게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그런 욕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주님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 때문입니다.
그 여인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옷자락을 스쳐서 병이 낫는 것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에서 더 나가야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은 주님의 옷자락 스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변화될 만큼 주님은 강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주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처음에는 주님이 능력 있는 분으로만 알고 와서 목숨을 걸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사실 혈우병 걸린 여인은 부정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가 들키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로 나와서 주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진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어떻게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까?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와서 자기가 혈류병 걸렸는데 고쳐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뒤에서 몰래 만지면서 스쳤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서 그가 알고 있는 주님, 그가 경험한 주님 그 이상의 주님을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분이 단지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자를 멀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부정한 자를 접촉하셔서 오히려 더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구나.’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앎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이 여인을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스쳐서 만나는 그 만남으로는 안 됩니다.
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더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만나야 합니다.
주님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을 더 발견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낭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낭비하며 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대로는 많은 시간도 드리고 많은 물질도 드리고 많은 사역도 하지만 솔직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다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그렇게 했던 것이 정말 아까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그 시간을 내가 그렇게 쓰면 안 되었던 것인데.’
‘그때 그 돈을 그렇게 쓰면 안 되었는데.’
‘그때 그 힘을 그렇게 쓰면 안 되었는데.’
‘그 기회를 그렇게 낭비하면 안 되었는데.’
그때 더 잘 써야 되는데 괜히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더 알고 더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경험할수록 더 주님을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합니다.
경험을 강조한다고 해서 지식이 경험보다 못하는 뜻은 아닙니다.
뒤에 보면 이 맹인이었던 자의 믿음이 달라집니다.
아는 자에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때 지식이 반드시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당신들은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 물어봅니까?”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사실은 이 말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감히 누가 바리새인들을 깔보고 모욕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의 앎이 강력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다 껍데기라는 것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바리새인들이 굉장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들만큼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바리새인들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 구걸하던 거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절)
죄 가운데 태어났으면서 감히 우리들을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기분 나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리새인들을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이런 말입니다.
“당신들도 예수 제자 되려고 해서 그렇게 궁금해 자꾸 물어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모르면 무시당합니다.
그리스도를 진짜 만나지 못하면 무시당합니다.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 수십 년 다녔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얼마 다니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깊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쁩니까?
그렇다면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창피한 것을 모릅니다.
자기의 신앙 경력과 신앙 이력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앙 이력과 경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사람한테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주님 앞에서 큰일 납니다.
이 사람들이 막 발끈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8절)
그들은 예수님을 얕보고 모세가 더 크다고 생각하고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모세의 제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모세를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진짜 모세의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제자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조차도 모르고 있고 그러니 모세의 제자도 안 된 사람들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절)
이 맹인이었던 자의 논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다 안다고 합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32절)
성경에 맹인이 눈 떴다는 것을 당신들이 읽은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것이고, 저 예수가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라면 어떻게 내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상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절)
그렇게 말한 후 이 맹인이었던 자는 출교를 당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출교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는 출교를 당해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종교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 종교 시스템 안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쫓아내지 않아도 이미 종교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니까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경험하고 만났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체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서로 부부가 되어 아내가 남편을 알고 남편이 아내를 안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앎이 지식으로 아는 것입니까?
연애할 때는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연애한 후 결혼을 해도 결혼을 하고 나니 배우자를 모르겠습니다.
결혼하고 나니까 진짜 알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연애할 때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아무리 오래 만났어도, 그래서 잘 안다고 확신하여 결혼했지만 한 집에서 살게 되면 다른 여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때 비로소 ‘안다’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단어가 바로 그 ‘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진짜 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부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연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연애하는 수준입니다.
결혼하고 나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 완전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통해 배우자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자세히, 실제로 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결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살아갑니다.
불완전하지만 신랑과 신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잘 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면 주님이 이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인자를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아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그 앎은 반드시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
이런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인자가 누구십니까? 제가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앎에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37절은 9장 전체 핵심이 되는 이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미 봤다고 하십니다.
이미 봤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미 만난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인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진짜 눈은 언제 떠졌습니까?
요한은 묻습니다.
“진짜 눈 떠지는 게 무엇이냐?”
보이지 않던 육신의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이 눈이 떠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즉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그 때 우리의 눈이 떠졌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의 진짜 눈이 떠진 것은 언제입니까?
“내가 그다!”
“내가 인자다!”
“내가 그리스도다!”
이것을 듣고 믿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이 사람의 눈이 진짜 떠졌습니다.
그동안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예수를 봤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실로암 못에서 씻은 후 눈을 뜨게 되었고 그 때 예수를 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맹인이 아니니까 다 예수를 봤습니다.
다 봤지만 그가 인자인 줄을 몰랐습니다.
다 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39, 40절)
바리새인들이 묻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맞습니다.
맹인입니다.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보고도 하나님인 줄 모르는 자들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영적인 맹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 읽을 때에도 예수님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진짜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내게 오신 하나님인 줄 진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신 줄을 믿고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영적인 맹인입니다.
한 번에 보지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한 번에 떠지지만 영적인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맹인을 치유할 때 일입니다.
“뭐가 보느냐?”
“희미하게 나무 같은 게 보입니다.”
더 물어보십니다.
그렇게 그 맹인의 시력이 점점 회복되고 선명하게 보이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영적인 시력도 한 번에 떠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열립니다.
희미하게 보이다가 점점 자세하게 보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하고, 더 보기를 원하고, 더 만나길 원하고, 그리스도를 더 체험하기 원해야 합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분명한 지식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체험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체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도 같이 가야 합니다.
영적인 지식과 영적인 체험은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 읽어야 되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읽지 마십시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목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증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합니다.’
그렇게 계속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필요하면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바탕이 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 착각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영적 체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봐도 영적 체험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의 기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 하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서 더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맹인이었던 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더 들어가서 모든 삶이 조금도 낭비되지 않고 하늘에 쌓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더 열어주셔서 주님을 선명하게, 말씀을 선명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아직은 세상이 더 잘 보이고 하나님 나라는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많은 것들이 낭비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보지 못하면 계속 낭비할 수밖에 없사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세상은 더 어두워지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더 선명하게 보이는 믿음에 이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결코 낭비되지 않고 주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되고 쓰임 받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놀라운 천국의 상급을 많이 받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가지 아는 것(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한 가지 아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가 알거니와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말씀은 로마서가 반지라면, 로마서 8장은 반지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너무나
귀한 진리가 담겨 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저의 짧은 입으로 너무나 깊고 풍요로운 진리의 말씀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만큼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믿거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지 모르고, 죄인을 영원한 지옥의 불길 가운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셔서 큰 구원을 이루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만 있다면 누구나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이 크다면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크다면 역시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이나 감정을 통해서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들에게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 6:39)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한 만큼 주님에 대한 많은 증언들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멸망케 하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랑과 열정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식을 따르지 않은 열정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열심을 다해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지식과 사랑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8장 28절에서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면서 지식과 사랑을 동시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교만하고 또 이기적이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이용하면서 살아왔고 날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 짓기를 숨쉬듯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돈과 쾌락과 안락한 삶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그분을 대적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십자가에 처형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러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찾아와 주셨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크게든 작게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목적에 따라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목적에 따라 부르셨습니다. 저도 전에 삼겹살 집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저를 많이 불렀습니다. "여기요" 그 때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 주문하고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아무 이유 없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믿음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큰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새 생명의 시작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출발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부끄럽고 자신 없는 고백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두려운 심판을 우리 대신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9절과 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정하사
29절과 30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우리들을 미리 아시는 가운데 우리가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엡 1:4,5).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칼빈주의 예정론"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거나, 어차피 택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예정하심을 말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자유의지와 순종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5살짜리 아이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형상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가운데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셔서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랑하며 교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사람의 대표가
되어 죽게 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감당하시고 완전히 깨끗케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이 주어지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과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되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4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지막 아담입니다. 이것은 첫 사람을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와 사망을 사람의 대표로서 완전히 종결시키시고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47절에 나온 것처럼 "둘째 사람"이 되십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주님이
"둘째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아담에게 속한 죄인의 형상과
사망을 끝내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둘째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제 4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9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
우리가
로마서에서 읽은 말씀과 같이 여기서도 우리가 하늘에 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내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지만,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읽은 이 말씀에서도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하고 미래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지니게 되는 그 날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우리에게는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육신 가운데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는 그 날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대로 표현해 보자면,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썩어질 아담의 형상이
썩지 아니할 주님의 형상에 의해 삼켜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23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25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너무나 놀라운 것은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나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휴거의 소망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썩음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세상과 육신과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바로 더럽고 추한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멸망 받고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많은 형제들로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들을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나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의롭다고 선언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고, 예수님의 형제들로 삼으신 것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을 상속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다같이 이사야 42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주니 그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내 찬양을 새긴 형상들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또한 48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그것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게 자신을 높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였을 때 바빌론을 통한 심판을 말씀하셨고,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였을 때 7년 동안 짐승과 같이 살아가게 하셨으며, 헤롯이 사람들에게서 신처럼 추앙을 받을 때 즉시 그를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영광을 구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영광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더러운 우리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고, 의롭다 하신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다같이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31절은 "그런즉"이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죄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광까지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38절과 39절도 보시겠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벅차고 감동스러운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되고 죄인되었던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로마서를 받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피의 네로라고
불리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도시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유대교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35절부터 37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아니라.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들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어질 형상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완전하게 입을 휴거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영광을 상속받을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경과 어려움은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속도 좁고, 한 저
자신을 보면서 늘 낙망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말할 것처럼 저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었고,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비천하고 눈멀고 헐벗은 자였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문제 많고 구제불능인지 몰랐는데, 하나님은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을까 하면서 주저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미리 아신 자들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저를 부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미리 아시고 저를 부르셨기 때문에 변함 없이
저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날마다 감격하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11월 18일(화) 요한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이요 생명이라(6:63)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본질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인데, 이는 성령의 역사가 가장 중요하며 육체적 행위는 상대적으로 무익하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영적인 생명 :
성령께서 죄를 이기고 선을 택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을 주시므로, 성령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존재입니다.
육은 무익하니라 :
여기서 '육'은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이 인간의 힘으로만 하는 행위나 노력을 의미하며, 이는 영적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복음이 성령을 통해 영과 생명이 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 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생명력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 율법 조문(의문)은 죽이는 것 :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할 때, 인간은 죄를 깨닫고 정죄받게 되며, 이는 죽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 영은 살리는 것 :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새 언약의 일꾼 :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율법 조문이 아닌 성령으로 사역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순종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 결론 : '영은 살리는 것'은 율법의 의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통해 성령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 반대 개념 : 율법 조문은 겉으로는 지키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가는 '죽이는 것'입니다.
- 결과 :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살리는 것(2227) 조오포이에오(zōŏpŏiĕō) ζωοποιέω Storng number 2227ζ
Pronunciation [ zōŏpŏiĕō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1. 살려주다. 2. 딤전 6:13. 3. 요 5:21
Pronunciation [ sarx ]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Etymology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무익(3756, 5623) 우 호페레오
1. 아니오. 2. ~아니다. 3. 마 7:21
Pronunciation [ ŏu ]
관련 성경 / 아니, 아닌, 아니요, 결코~아니다, 아무도.
Pronunciation [ ōphĕlĕō ]
유익이 있다(갈 5:2).
말(4487) 레마(rhēma) ῥῆμα Storng number 4487
Pronunciation [ rhēma ]
Etymology / 4483에서 유래
Pronunciation [ zō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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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육은 무익하니라(the flesh counts for nothi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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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육은 무익하다고 하셨는가? 첫째, 흙을 생령(창세기 2:7)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절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전도서 3:21 기자는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여기서는 사후(死後)의 차이점을 언급한다. 히브리서 9:27
4151. 프뉴마() πνεῦμα, ατος, τό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Pronunciation [ pnĕnuma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 비교(고후 3:6~18).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추천서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옛 상속언약(old Testament)의 일꾼들이 아니라 새 상속언약의 일꾼 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주셨음을 말한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얻는 옛 상속 언약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새 상속 언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과 그 일행을 비난하며 대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 의를 얻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바울이 전하는 새 상속언약을 부인했다. 새 상속언약”은 New testament이다. Testament는 그냥 언약이 아니다.Testament와 Covenant에 해당하는 원어는 동일한“디아테케”인데 Covenant는 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는 특별 약속(계약)을 뜻한다. 반면에 Testament는‘증언하다’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일차적 의미는 ‘증거로 주는 언약’이란 뜻이며 신약성경에만 총 14차례 기록된 독특한 말이다.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언약(first covenant) 아래 있던 범죄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상속 언약(Testament)이 있는 곳에는 또한 반드시 상속 언약하는 자(Testator)의 죽음이 필이 있어야 하나니 상속 언약은 사람이 죽은 뒤에라야 효력이 있고 상속 언약하는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힘이 없느니라”(히9:15-17)이다.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구약시대 성도들의 죄가 구속되고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출34:7). 완전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의 완전하신 단번 속죄로 말미암아 신구약 성도들의 죄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고 이때에 그분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상속의 언약을 주셨으므로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다. 여기서 Testament를 상속 언약으로 번역해야 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히9:16, 17절이 이를 확증해 준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상속 언약하는 자의 죽음이 있어야 상속 언약이 유효함을 보여 주므로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 즉 새 상속 언약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는 새 상속 언약이 유효하지 않다. Testament와 Testator는 바로 이런 점을 설명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신약시대를 여신 분이다.“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참조 갈4:4).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순간부터 신약시대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가 신약시대이다. 개역개정 성경은 Testament를 유언으로 번역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유언이 아니다. 유언은“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말”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며 또 언약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상속 언약시대 즉 신약시대를 여셨으나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다. 그분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며(계13:8) 그래서 아직 피를 흘리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가 이미 흘려졌다고 말씀 하신다(눅22:20). “일꾼”은 헬라어로“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심부름 가다에서 유래하였다. 남성을 말하며 종, 협조자, 조수, 동역 자, 집사, 사역자”를 말한다.성경에는 일꾼, 종, 또는 노예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두 단어가 있다‘둘로스’와 ‘디아코노스’이다. 이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둘로스’는 강제로 종이 된 사람이고,‘디아코노스’는 종이 되지 않아도 될 사람인데, 자발적으로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주님이 바울을 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 즉 사역자로 삼으셨다. 이것은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의 직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직무는 사람을 살리는 것임을 강조 한다. “율법조문(개역한글성경은 의문)”은 헬라어로“그람마 gramma”를 번역한 것인데 “새기다, 쓰다, 기록하다”을 뜻하는“그라포grapho"에서 유래한 것으로“ 글자, 문자, 문서, 기록한 조각, 편지, 서신, 증서, 글, 패” 등 다양하게 쓰인다. 이 말을 새 번역에서는“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을 말하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율법의 종이 아니라 성령님의 종이 되게 하였다”고 번역 되었으며, 흠정역에서는“글자의 사역자가 아니라 영의 사역자”라고 번역했다. 즉 바울은 돌판이나 먹으로 쓴 글자로 기록한 옛 상속언약의 일꾼(사역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영으로 새긴 새 상속언약의 일꾼(사역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란 무엇인가? “율법 조문”또는“율법의 법조문”을 개역한글 성경에는 단순이“의문”이라고 번역되어 있었고 율법 이라는 말씀이 빠져 있었다.그러나 개역개정은“율법 조문”으로 바르게 개정되어 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롬7:6)(개역 한글 성경)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7, 29)(개역한글 성경)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고후3:6, 7 개역성경) 참조구절(엡2:15, 골2:14, 20) 그러므로 이런 아래와 같은 엉터리 이단 교리가 생겼다.“율법 조문, 은“율법”을 말하는데 윗트니스리는 (본명 이 상수)이를“성경”이라고 해석 하는 이단 교리가 발생한다. 윗트니스리가 주장하는 “그리스도 대(對) 종교”란 무엇인가? 여기서 언급된「의문」이라는 단어가 기록된“성경”임을 알고 있다. 종교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종교적인 것은 건전하고, 성경적이며, 원칙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구절「의문」이 기록된 성경을 가리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더 이상 논쟁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종교와 반대된다. 그리스도는 기록된 법전과 반대되신다. 우리는 고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법전을 옳게 인용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놓칠 수 있다.우리는 기록된 법전만 너무 주의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놓칠 가능성이 아주 많다. 안전한 길은 오직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것이다. ‘영’은 ‘생명’을 줍니다(the Spirit gives life)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사망이 대조를 이루고 (성)영과 죄가 대조를 이룹니다. ‘법’의
헬라어 원어는 노모스인데, 이 단어의 가장 근원적 의미는 어떤 ‘형체를 갖는 것’입니다.
νόμος, ου, ὁ
Storng number 3551
1. 율법. 2. 롬 3:27. 3. 규칙 Pronunciation [ nŏmŏs ] Etymology / 기본형 νέμω ‘분배하다’에서 유래
고후
3:6은 ‘율법 조문(the letter)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육신은 본질로서의 죄(SIN)가 거하는 장소로도 여겨집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6-11 일군 천국을 주신 것은 분명히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 따라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 일을 안 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가 된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너무도 큰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나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물을 먼저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선물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반드시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억지가 되고 어떤 정해진 법에 의해서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선물을 받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그 마음에서 자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9:6 하나님과 언약을 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자기들이 다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피로서 언약을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이 맡은 직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했지만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의문의 직분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을 모릅니다. 아니 이 시대도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직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분을 주셨지만 제사장 나라가 되기보다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문에 열심을 가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직분을 모르면 안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도 역시 자기 직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모르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직분은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이 되는 직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 백성만 사람이고 이방은 개로 취급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문의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만이 이성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이방인은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게는 역시 그런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선물을 주시고 난 후에 우리에게 일을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거의 모든 비유가 바로 복음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 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물의 값이 아니라 선물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왜 일군을 만드십니까? 그 이유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성도를 통해서 그들이 전도를 해서 또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는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성도를 통해서 전도를 할 수 있게 은사를 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전도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습니다. 왜 사람이 죽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을 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일을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일을 잘 하지 못해서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런 일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죄의 일꾼으로 일을 했지 제사장으로서는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의문에 쓴 율법을 가지고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의문에 쓴 율법으로 자기들이 망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강요가 아니라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피로 맺어서 그 일을 해야 했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먼저 거저 주시고 난 후에 이 세상에 구원할 자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9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탁을 받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선물에 어떤 조건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부탁에 대해서까지 거절을 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니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은 일만달란트를 빚진 자입니다 그 일만 달란트는 예를 들어서 비유로 한 말씀이지만 사실 우리 생명은 일만 달란트보다 더 값이 나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만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환산을 해도 20조가 넘는 금액입니다 천국은 설령 20조가 있다 해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도리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10억의 빚이 있는데 누군가 그것을 거저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내가 좀 바쁘니까 은행에 직접 가지고 가서 갚으라고 했다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빚을 진 사람은 그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 부탁을 했다고 해서 빚 갚아 주면서 나를 심부름 시킨다고 한다면 그는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 빚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아니 그것으로도 살 수 없는 우리 생명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탁 좀 하겠다고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기 다른 사람이 또 빚이 있는데 그 사람의 빚도 좀 대신 가서 갚아 주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싫다고 한다면 그는 정말로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 빚은 선물로 거저 갚아 주었는데 저기 가면 아직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빚도 내 대신 해서 갚아 주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부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상할까봐 부탁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한 성도를 일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부탁을 안 들어 준다 해서 그가 빚을 진 일만 달란트를 안 갚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진 빚을 알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아는 성도라면 그 정도의 부탁은 누구나 들어 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안 합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인데도 하나님과 언약을 생각하면서 그 일에 아주 열심을 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복음주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작은 부탁도 들어주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육체의 것을 조금이라도 헌신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반감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빼앗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면서 언제는 선물이라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고 그 부탁을 들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복음을 전하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은 선물을 안다면 내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옛 언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 언약에 대해서 일꾼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신 언약의 피 입니다. 그 언약에 대해서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은 옛 언약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는 옛 언약을 폐하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에게 그 새 연약의 일꾼이 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도리로 생각을 해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거절을 한다는 것은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맺은 옛 언약의 일꾼이 아니라 이제 우리 성도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꾼은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영으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글로 써서 기록해 놓은 것을 의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율법은 돌에 쓰여 있든지 아니면 글로 써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의문의 일꾼으로 일을 했지만 이제 우리 영적인 이스라엘인 성도는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영으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의문으로 하면 안 됩니까?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율법에 대해서 늘 강조를 하지만 성경이 이렇게 까지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도 역시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보다는 의문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기능은 살리고 죽이는 것인데 율법으로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이는 것을 이 시대 너무도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일꾼이 무엇으로 하고 있습니까? 영으로 하는 일꾼은 거의 없고 다 의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고 있는 의문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의문으로 일하지 않는 교회가 있으면 한번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의문으로 일하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교회가 아니 아직 만나지 못한 교회가 있을지 몰라도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교회는 다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율법주의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의문을 하고 있다면 그는 의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유기체라서 어느 것이라도 단 한 가지를 살리는 순간에 모두가 다 살아나서 그 기능도 함께 살아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능이 살아나는 순간에 율법은 죽이는 것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의문으로 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영과 의문이 섞여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의문과 영이 아주 적절하게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의문으로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문은 하나라도 내가 하고 있다면 반드시 죽이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 일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죽이는 일꾼이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한 가지라도 의문이 남아 있다면 반드시 그 의문은 죽이려 할 것입니다. 에덴에서 하와가 단 한 가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으로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것을 범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단 한가지의 의문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문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반드시 의문은 버려야 합니다. 내게서 한 가지라도 의문이 남아 있다면 나는 반드시 죽습니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복음의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는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의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10절을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잊지 말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순간 율법주의에 빠져서 의문의 일꾼이 되어서 결국 죽이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의문을 지키게 하려고 얼마나 강조를 하고 있습니까? 생명을 살립니까? 절대 아닙니다. 의문으로 하는 순간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너무도 쉽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의문으로 인하여 자기도 죽고 또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 죽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6:63절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의문은 육에 속한 것입니다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영으로 해야 합니다. 이 영은 바로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의문은 내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고 영은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직무를 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의문으로 쓴 것을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안에 새 생명을 탄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해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살려 주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외식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으로 하는 외식을 보고 그것이 영의 일이라고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실정입니다. 영은 말씀 그대로 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영으로 합니다. 반드시 영으로 해야 그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성도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그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아는 성도는 그 일에 자기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이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그들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데 살리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나태하게 있다면 그것은 자기 직무가 어떤 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이 시대 복음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적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 복음의 직무를 행할 때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반대입니다 죽이는 직분을 가지 자들이 더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살리는 영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자기가 어떤 직무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무는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그것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살리는 일꾼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세상에서 육체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도 자부심이 대단한데 하물며 영의 생명을 살리는 성도의 직무는 어떻겠습니까? 의사는 결국 사람을 죽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일꾼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일도 이 일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고 매여 있다고는 하지만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시고 또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의문의 직분입니다 그 직분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는 없어질 그 영광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직분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교회 안에는 이 옛 언약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직무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폐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려면 모두를 폐해야지 자기들이 편한 것만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폐한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다 문어가 있습니다. 그 다리를 하나 잘랐다고 죽습니까? 아니 낙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토막을 내서 다 잘라 버려도 꿈틀 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의문은 어느 한 가지를 잘라 낸다고 해서 그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 나중에는 죽이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문 영광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의해서 예배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 안에서 예배에 참석을 한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이 있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고 있는 그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영광이 있는지 그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것 같이 그 영광에 흠뻑 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이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눈으로 보는 영광은 잠시 후에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 영광의 빛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일은 어떻습니까? 우리 눈으로 영광이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의 직분이 얼마나 귀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안 보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드려지는 예배는 그 영광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니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그 영광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영광이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의 직분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꾸 의문의 직분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생들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의 직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고 있지 않으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이는 보이는 그 직분도 영광이 넘치는데 하물며 생명을 살리는 영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이 넘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눈에 보이지가 않으니까 자꾸 의문의 직분을 더 좋아하고 그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육체의 정과 욕심이 자꾸 의문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것에 대해서 어쩌면 너무도 바라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생의 의지로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도 마차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율법의 영광을 보고 그곳으로 다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영의 직분과 육의 직분이 어떤 가를 비교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영의 직분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의문의 직분에 비해서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지만 우리는 살리는 일을 하고 있고 의문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하는 영의 직무가 이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자부심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답답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때로는 회의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저 역시도 그럴 진데 하물며 일반 성도들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리는 직분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또 이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영광의 직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죽이는 것도 영광이 있습니다. 아니 이 영광은 실제 우리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을 폐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가 그 일을 해 본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정죄의 직분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죽이는 직분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에는 그것이 너무 좋게 보일지라도 의문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또 의문을 따라하는 사람도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의 직분으로 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영광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이 의의 직분을 담대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문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는 당연히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영광을 바라는 사람은 결국 이 땅이 망할 때 같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바라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낙심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는 너무도 외롭고 때로는 버림을 받은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문에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를 선택하셔서 이 직분을 주셨습니다. 더구나 생명을 살리는 그 귀한 일의 직분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직분을 맡은 자들도 자부심을 가지고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천국을 바라보고 있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비천에 처할지라도 주님께서 영광중에 영접해 주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묵묵히 잘 감당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의문의 영광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에 눈에 그렇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도 그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의문의 일꾼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눈에는 그리고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그것이 너무도 대단한 영광으로 보여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지금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것을 보고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의문의 일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문의 영광이고 그 영광은 반드시 죽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그 영광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 보아도 그 영광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있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의문의 직분은 죽이는 일이라고 말씀을 학 있습니다. 그것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지 반드시 사라지고 그 직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천하 보다 더 귀한 영혼을 살리는 일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영광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이 일에 더욱 힘써 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상이 큽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상이 예비 되어 있고 또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상입니다 영의 일이라 때로는 이 세상에서 아무 빛도 없이 또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그래도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은혜에 감사해서 더욱 힘써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영광은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길이 빛이 날 영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지식이 있는 성도라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영광이 빛이 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육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 ||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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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생명력을 지닌 '영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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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12 요한복음 1:1-4 마태복음 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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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생명을 주는 영과 말씀 |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셨다.
그러면 살리는 것은 영은 무엇이며 육은 무익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이 영이라는 말씀은 무엇이며 생명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1.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갈라디아서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하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첫째, 그리스도의 구속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 2:1)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둘째,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보혜사: 요 14:16-17, 요 14:26, 요 15:26)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육신의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는 생기 있는 자가 되게),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의인이 되게),
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 성령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하셨다.
이것이 믿는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살리는 성령을 받는 것이며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은 무엇인가?
(마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말씀에 보면 청년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셨다. 즉 롬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 곧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무엇인가?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육신의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는 생기 있는 자가 되게), ②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에게 하나님께 말씀을 순종하는 의인이 되게), ③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 성령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하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성령을 받는 말씀이며 생명을 얻는 말씀이다.
1)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성령을 받는 말씀은 무엇인가?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보혜사: 요14:16-17, 요14:26, 요15:26)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 보혜사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2) 생명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을 받는 말씀은 무엇인가?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교 한다고 가정하자.
(1) 인간의 사후 육과 영의 상태와 부활 이후 상태를 설명한다.
(2) 창조 때 인간은 몸과 영(혼)이 통일된 존재임을 언급.
(3) 하나님은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설명.
(5) 인간은 하나님의 기대에 반하는 삶으로 죄를 지었고, 죽음에 넘겨짐.
(6) 인간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난다(눅 23:46, 요 19:30, 행 7:59).
(7) 몸으로부터 떠난 영(혼)의 종착점은 낙원(파라데이소스)이다(눅 23:43).
(8) 불신자의 영(혼)은 그의 아비와 졸개인 더러운 귀신의 처소로 감.
(9)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롬 12:1-3).
등등을 심도있게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하자.
이렇게 설명한 사람이 있다.
그 말을 좋다고 호응한 사람이 많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요한복음 6:63을 가지고 영을 주제로 논리를 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가?
문제는 없는 것인가?
이 내용은 요한복음 6:63 한절의 앞부분 절반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NIV]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뒷부분 절반인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를 함께 의미가 있도록 설명해야만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까지 함께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명백한 성경 문맥의 무시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하시고 이어서 다음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데…
잠깐, 스톱, 예수님 거기서 잠깐만요 하고 예수님 말씀을 중간에 탁 끊고서
장황하게 자기 이론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그러면 듣는 어린 교인들은 아! 이렇게 심오한 진리도 있어?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것이 문맥 무시이다.
어떻게 한 구절을 반을 딱 끊어서 줄줄 설명을 할 수있을까?
책을 읽을 줄 모르거나,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제 말만 하는 사람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까지 이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은 “어 왜 성경의 한 문장을 중간에 짤라?”라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런 설교, 설명, 주장 비록 그 말이 중간 중간 멋있다 하더라도
모두 거짓 주장이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는 설명을 반대하며 배격한다.
물론 그 다음에는 그런 사람의 말 듣지 말아야 한다.
누가 말을 하는 중간에, 잠깐만 스톱, 그 말은 어쩌고저쩌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런 몰상식한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을 반대한다.
이런 분, 아마 자기 말을 중간에 끊어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어떻게 문단도 아니고 한 문장을 반으로 끊어서 문맥과 관계없는 장광설을 펼치는가?
말하는 분이나 좋다고 듣는 분이나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이분의 설명이 웃기는 또 다른 점은 영어 성경을 읽어 보면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라고 되어 있어서
“영”은 주어이지 목적어가 아니다 그런데 이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 라는 말을 ”살리심을 받는 것은 ‘영혼’이다” 로 해석했다.
이 쉬운 영어를 모를 리 없을 텐 데 영문 성경을 전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기 선입관에 의한 지독한 오류이다.
국어도 모르고 영어도 모르는 격이 되었다.
이런 분이 신학교 교수다.
(
인터넷, SNS, Facebook, Youtube에 이런 비논리적이고 말도 아닌 주장 많습니다.
읽고 보는 분이 주의해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물론 나의 글도 인터넷 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혹시 제가 그런 말을 한다면 꼭 지적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이 말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이야기와 생명의 양식 이야기의 중간에 나오는 구절이므로
요한복음 6장 전체와 문맥상 모순이 없어야 한다.
요한복음 6:63
첫째는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이 영이다
셋째는 예수님의 말이 생명을 준다
넷째는 성경 말씀이 영생을 준다
이런 이야기인데 …
요한복음 6장과도 문맥상 조화가 되고 요한복음 전체와도 조화가 된다.
주님 그 말씀을, 사도 베드로도 알아 들으셨다.
[요헌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NIV]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영생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 생명을 주는 말씀, 살리는 말씀이므로
주님을 떠나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노라고… 주님께 대답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사람에게 육신을 입혀놓은 것은, 육신 안에 거하는 영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영과 육을 분리하여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은 한결같이 영생하는 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육신 안에 거하는 영의 비밀은 [창세기]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과 2장 7절 말씀에, 사람의 육신 안에 거하는 영의 비밀을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천사들을 형상을 보았다.(사 6장, 겔 1장, 계 4장) 그러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에스겔, 사도 요한 등,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람의 모습과 동일한 하나님을 만났고, 이를 증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천사들은 육신이 아니라, 영체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볼 수 있는 영체의 형상을, 육으로 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은 볼 수가 없다. 이는 죄 때문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은 태초 전 죄를 범한, 타락 천사들이기 때문이다.(에녹 3서, 엡 2:1~5)
태초 타락 천사의 영이, 흙으로 빚은 육체에 거하게 된 자는 아담이다. 즉 흙으로 빚은 육체에 천사의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이다.(창 2:7)
여호와께서는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전에는 타락 천사로 태어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셨다.
왜냐면, 저들의 죄를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저들의 죄를 깨우치려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심어놓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육신을 입었기에, 육신의 소욕에 이끌리어 뱀(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그 후로는 에덴동산 주변에 그룹들(Cherubim)과 화염검으로 그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지키게 된 것이다.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룹들(Cherubim)은 천사들이다.
이때부터 타락 천사들을 하늘나라를 볼 수 없었다.(창 3:22~24) 창세기 3장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면, 태초 천국에서 쫓겨난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벗고 천사가 되면, 태초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에덴동산에 돌아가 영생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된다.(계 2:7)요한계시록 2장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결론,
육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뜻은, 삶의 목적을 육신에 두지 말고 영생하는 영에 두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아 다시 천사로 돌아오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이 비밀을 밝혀주는 성경은 [에녹 3서]이다.[에녹 3서]
11. 인류 탄생
그러자 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물론 지금 지옥(땅)에 있는 타락 천사들은 죄를 짓고 인간이 될 운명에 처해 있지만 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다시 한번 천사가 될 기회를 주려 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내가 선택하여 지옥(땅)으로 내려보내노라.
윤회의 틀을 돌고 돌아 인간으로 태어나면 너희들은 나의 말을 듣고 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예수께서는 성령 안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보았고, 사람이 죽어서 천사가 되는 비밀을 알고 계셨다.(마 22:30, 눅 20:34~36)
그러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말씀하시는 것이다.(요 6:27)
요한복음 6장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란,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먹지 말고, 영생하는 생명을 위해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썩지 않는 양식은, 예수를 믿는 천국 복음이다.
그리고 예수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인치신 자이다.
하나님의 인치심이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증거를, 성령으로 증거한다는 말씀이다. 즉 성령으로 도장을
성령에 이끌리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도 바울도, 하늘나라에 거하는 천사들을 보았다. 즉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Cherubim)을 보았다.(히 9:5)
그룹들(Cherubim)은 에덴동산을 지키는 천사들과 같은 천사들이다.
그러나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은 천사의 신분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와 인자로 사역한 선지자와 사도들이다.(계 5:6, 계 1:20)
인자로 사역한 여호와의 사자들은 죄 없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입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자됨을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사도 바울도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 중 하나이다. 즉 첫 열매들로 사역한 천사이다. 천사가 되는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육신을 따르는 자가 되지 말고 영을 따르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롬 8:5~6)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9:8
우리 의지로 주 앞에 나오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 하시는 오늘 말씀은 의미가 크다. 믿음이 자의적이지 않고 신앙이 자기의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 예수님은 일깨우신다.
곧 오늘 내가 여기 주 앞에 있는 것, 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섬기는 일은 ‘오게 하여 주심으로, 그리하게 하신 이의 뜻’에 따른 것이다. 한데 우리의 가장 큰 오해이면서 그릇된 신앙은 표적을 구하고 먹고 사는 일에 연연하여 주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2절,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이는 사는 데 따른 절박한 것으로 연약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인간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이에 주 앞에 왔다 주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도 있으나 더러는 그것으로만 시들하여서,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곧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바라고 주님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시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사람들이 떠나갔다. 주님은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와 같은 질의응답에서 우린 어떤 답을 드릴까? (67, 68).
예수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그래서 주님은 가르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하실 때 우리에게 현재 ‘좁은 문’은 어떤 것일까?
기도할 게 없어서 나는 끝나고 바로 나와! 하는 친구의 말에 놀랍고도 신기하였다. 그럼에도 무슨 마음으로 새벽예배를 나가고 성경을 읽으며 제자반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기도할 게 없다고 하였고, 나는 저에게 기도할 제목 다섯 가지를 적어주었다. 기도제목: 1) 나의 심령에도 성령을 부어주시길. 2) 돌이켜 나의 죄악을 주 앞에 회개할 수 있는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길. 3) 새벽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날마다 부여하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4)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분별하는 영을 더하시길. 5) 주의 부르심에 나의 남은 날 동안에 주가 맡기시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길.
나는 저의 순수하고 어린신앙이 귀하였다. 그리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요즘 나의 친구를 보면서 저의 경우가 우리의 보편적인 신앙의 수준이란 생각을 한다. 저는 가리지 않고 순수하고 우린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노련하게 자신도 속이는 것뿐이다. 실은 자신이 구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영생의 문제는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로 예수께 나온다. 심지어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 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 우리의 속셈은 너무 뻔하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 오늘을 사는 데 따른 필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따른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를 알면서도 함께 하심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즉 ‘내게 주는 자, 내게로 올 것’을 알고 참고 기다리시는 거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주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의 뜻을 이루려하심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 그 단 하나의 이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이 의미를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곧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곧 성경의 주제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영생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아니다. 여기서의 어떤 결과나 목표가 목적이 아닌데, 저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지나치게’ 이 땅에서의 삶에 뜻을 다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취향과 선택과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주를 따르고자 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피해 산으로 가신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허기, 삶의 필요에 따른 요구를 아심으로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질의응답 형식으로 하는 친구와의 성경공부 통화가 내게도 유익이다. 어제는 저에게 네 개의 밭을 비유로 말씀하신 데 따른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비로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음인데, 앞서 좋은 땅을 얻기란 무던히 개간하고 갈아엎어 땅 속의 돌들과 땅위의 가시떨기를 걷어내야 한다. 땅 속의 돌들은 우리 안의 염려와 근심으로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땅 위의 가시떨기는 온갖 상황과 여건과 환경에 짓눌려 그 신앙이 자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길가밭이다. 길가는 온갖 사람이 드나들고, 밟고 다녀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이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아스팔트를 깔고 대리석을 까는 꼴이라, 말씀의 씨앗이 심겨질 수 없고 은혜의 단비도 스며들지 못하고 오히려 얼룩져 볼썽사납다.
나는 저의 마음이 어떠한가 물었고, 주 앞에서 자신을 직고하며 대면하여 덮어두고 숨겨진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는 것들로 우리 영혼은 굳어졌고 막혀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 앞에 여전히 나올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어떠한 형태나 모양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지에 대하여는 주의 뜻이라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 나의 오늘, 이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이 귀하였다.
나의 저의 안에 두시는 오늘의 열심과 그 마음의 소망을 위해 기도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저에게 일상의 소소한 소원을 구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회개의 영이 저의 굳어진 마음 밭을 갈아엎으시기를 구하였다. 그럼에도 저의 오늘이 귀한 것은 신앙의 수준이나 정도를 운운함이 아니라, 우리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으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이 안타까운 상황은 앞서 다 아시는,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 그리하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곧 ‘처음 사랑’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 누구와의 통화에서도 저의 근황을 듣고 그 마음에 선교사로 평생을 주의 일에 헌신하다 귀국하여 오갈 데 없는 이에게 처소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귀히 보았다. 하나 주의 일에 있어 그 사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권한인 것을 알려주었다. 순수함으로 저의 안착을 돕는 일은 좋으나 그 이상의 책임을 가지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마음을 주시는 것에 나는 놀라웠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곧 우리 안의 어떤 강박 같은 주의 일에 대한 부채감은 사탄이 더하는 마음이다. ‘광명의 천사’ 같이 그러한 마음과 일을 더하고 추진하게 하지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우린 의외로 신앙이 자랄 때 가라지도 같이 자라는데,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 할 때이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순수하게는 자신들의 필요를 가지고 주 앞에 왔고 이를 높여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다. 스스로 어떤 순수함으로 그 마음을 포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에는 무의식적으로 주께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욕구가 인다. 사람의 이치와 도덕적인 가치로는 유익한 듯하나 그것이 아무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결국은 아니다.
오늘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시고(27),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고, 다른 영혼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기까지 되갚아 헌신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그럼 그 ‘믿는 것’ 이는 더러 수동적이고 매우 소극적인 일 같이 보인다. ‘가라’ 하시는 말씀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나고’, 또는 ‘지으라’ 하셨을 때 그게 언제까지인지 얼마나 소요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120년을 단조롭고 무료하게 구원의 방주를 짓는 일과 같다.
그러느니 당장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것으로 주의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신앙은 의외로 단순하고 단조롭다. 주를 사랑함은 세상을 미워하는 일이고, 한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하고 되묻는다(30). 그러면서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1).”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를 갈구하는 데 있어 주가 필요하다. 그러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하시는 엉뚱한 말씀(?)으로, 하나둘 떠나갔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48).”
어떤 일, 무슨 위대한 주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를 먹는 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이것으로 우리는 영육간에 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이것이 오늘 우리의 꼬인 문제를 해결하고, 닥친 현실을 해소해줄 리 없다. 들고 나온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 하시는 말씀 앞에 누가 굴복할 수 있겠나? 내 안에 주의 영이 하지 않으시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오직 주의 관심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오늘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그 생활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살림살이는 좀 폈는지 하는 따위로가 아니다. 결국 그런 가운데서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64).” 심지어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70-71).”
오늘 내 안의 ‘가룟인 유다’는 어떤 것인가?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1).” 결코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두렵다. 어떤 어려움이 혹은 육신의 질병으로 나는 언제든지 ‘유다’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드린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 99:1).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과연 내 안에 주의 뜻만이 온전한가? 되묻게 된다. 결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하면,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3, 5).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8-9). 아멘.
로마서 8장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부 하나님은 사시는 living 하나님이십니다(렘 10:10). 나아가 성자 예수님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a life-giving spirit (고전 15:45). 당연히 성령님은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The Spirit of life (롬 8:2).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신앙인들은 생명을 누리며 살아 가는 존재들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보다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 내[예수님]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할렐루야!
그럼에도 우리들은 진정으로 현재를 힘있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2024년 새해를 밝은 소망으로 맞이했음에도 혹시 하루하루 마지못해 그럭저럭 보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또는 열심히 고생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할 지라도 혹시 헛된 인생을 지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과연 진정으로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또한 우리 인생들을 진실로 힘차게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인간의 실상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복을 주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 1:27-28).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living being 또는 living spirit) 살게 만드셨습니다(2:7). 그런데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궤계로 말미암아 범죄한 이후 그들의 영은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상태로 마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2:17).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3).
즉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육신의 숨을 쉬며 살아 가고 있지만, 이는 목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이지, 영혼은 죽어 있어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장례를 치루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한 제자에게 “...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마 8:21-22)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을 지내는 비신자들은, 과거 우리가 은혜받지 못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모습처럼, 진실은 살았다 하나 하나님과 끊어져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꽃병이나 화환에 장식된 꽃들을 생화라 부르나 사실은 이미 죽은 꽃들 아닙니까? 마치 이미 죽었으나 걸어다닌다는 좀비 (Zombie)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죽은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2.어떻게 죽었던 사람의 영혼이 살게 됩니까?
바울의 편지 내용처럼 하나님 말씀이 영혼이 죽어 있는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그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10절).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말씀을 믿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요 20:31). 베드로도 신앙인의 거듭남이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밝혔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고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성령님]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성령님]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성령님인데 주님이 이르는 말씀에 성령과 생명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The Spirit gives life ...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they are full of the Spirit and life.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고) 이 구절을 어떤 분들은 한글 번역을 오해하여 영지주의자처럼 잘못 해석을 하곤 합니다. 영을 성령님이 아닌 사람의 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이 살리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지 육체는 아무 쓸모없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은 귀하고 선한 것이고 반면에 육체는 천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절대로 사람의 죽은 영혼을 진정으로 살릴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육은 무익하니라”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이미 죽은 영혼을 돈이 살립니까? 권력이 살립니까? 세상지혜가 살립니까? 직장이 살립니까? 영주권이 살립니까? 어차피 한번 죽을 육체를, 생활을 편하게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영혼을 살리며 진정한 인생의 삶과 축복엔 근원적인 유익을 전혀 주진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때로는 훼방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른 뼈들에도 생기가 들어가 본래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겔 37:1-10).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죽었던 영혼이 살아 나는 역사가 있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3.마지막으로 말씀은 어떠한 처지에서든 신앙인들을 살리고 보다 생기있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시119:105). 말씀은 또한 영적인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모든 유혹을 신명기 6-8장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마4:1-1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합니다 (히4:12). 말씀을 받을수록 성령 충만하여 신앙인은 더욱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고후3:18). 또한 말씀은 질병을 치유케 합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나아가 우리 몸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말씀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 4:23).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심령의 양식으로 먹으며 진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4).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중단없이 접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사십시다. 그리함으로 우리 모두 이 마귀세상을 이기며 살고, 이 세상 모든 염려와 걱정 근심, 불안 초조, 공포, 질병에서 자유하며 진정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특히 새해를 시작하는 “성경읽기의 달” 1월을 맞이하여 말씀 읽기에 힘쓰며 상고하시길 당부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립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나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며 진정으로 살도록 풍성한 생명을 공급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진실로 하루하루 풍성히 살아 가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 하이데거 언어철학의 정수
"인간은 말한다(spricht). 우리는 깨어 있을 때도 말하고, 꿈속에서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우리가 아무 말도 소리 내지 않고 경청하거나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말하며, 심지어 특별히 경청하거나 읽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에 몰두하거나 한가로이 여가를 즐길 때에도 우리는 말한다."('언어'중에서) 언어라는 인간의 특질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가 일생을 파고든 주제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그의 후기 언어철학의 명저 '언어로의 도상에서'가 번역 출간됐다. 1950년부터 59년까지 이뤄진 여섯 개의 강연 '언어' '시에서의 언어'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언어의 본질' '말' '언어에 이르는 길'을 담은 책. 1959년 초판된 이 책은 수많은 난문과 그리스어, 라틴어 등이 암초처럼 곳곳에 퍼져 있어 그의 대표작 중 유일하게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역자는 고(故) 신상희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동일성과 차이' '이정표' '숲길' 등 수많은 하이데거의 저작을 번역해오다 2년 전 타계한 국내 독보적인 하이데거 연구자의 유작으로 2주기를 즈음해 출간됐다.
700개가 넘는 각주와 주해는 험난한 번역의 흔적을 보여준다.
옮긴이의 말에서 신 교수는 "이 작품은 나에게 마치 히말라야의 험준한 거봉 안나푸르나와도 같은 존재였다.
비밀의 문을
허락해주는 것은 여신의 뜻에 달린 것일 뿐,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작품을 꼭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존재의 시원에 이르는 사유의 등반 루트를 개척해 놓고자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고 감회를 밝혔다.
책의 첫 장인 '언어'는 "말하는 자로서 인간은 존재한다"는 선언으로 열린다.
하이데거는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말 없는 소리, 혹은 은은한 울림을 내며 이 언어가 인간에게 다가온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말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존재가 말 없이 들려주는 언어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책의 전반에 걸쳐 릴케, 트라클, 게오르게
같은 시인의 시를 통해 자신의 명제를 증명해낸다.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게오르게의 시 '말'의 마지막 시행이다.
'언어의 본질'에서 그는 이 시의 분석을 통해 언어는 사물에 고유한 존재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설득해낸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형성하며, 언어는 그 안에 사는 존재의 고유한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 존재의 틀 : 언어는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 존재의 표현 : 언어는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언어 없이는 인간의 고유한 존재가 드러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 세계와의 관계 : 하이데거는 우리가 말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언어에 속해 있으며, 말은 우리가 속한 세계를 드러내는 근원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 문화의 저장소 : 언어는 그 나라의 역사, 가치관, 풍습 등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 문화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Pronunciation [ sheʼôwl ]
Etymology / 7592에서 유래
Old Testament / 65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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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un 무덤, 지옥, 구덩이, 창 37:35, 민 16:30, 욥 21:13, 26:6, 시 6:6(5), 잠 9:18, 사 5:14, 14:9, 38:10, 겔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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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예수님은 창조주이신가?
요한복음 1장 1-5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니라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서론 :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다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때때로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말 누구신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윤리 교사, 혹은 특별한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요한복음은 훨씬 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창조주이신가?”라는 직접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그 진리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인 적용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요한복음 1장의 명확한 증언: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질문에 대한 답부터 명확히 하자면, “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 태초부터 계신 말씀 (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로고스)이라고 칭하며, 그분이 시간의 시작점인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피조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구별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이 쓰일 당시,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거나 그분을 단지 영적인 존재 중 하나로 격하시키려 했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를 말씀하셨습니다.
- 만물의 창조자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이 구절은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핵심 구절입니다. 우주 만물,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 그분은 창조 사역의 단순한 도구나 통로가 아니라, 창조의 주체이시며 근원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실행하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며 완성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인 것입니다.
2. 예수님, 생명과 빛으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시는지를 ‘생명’과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 설명합니다.
- 생명의 근원 (4절 상반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창조주이신 예수님 안에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숨 쉬고 활동하는 육체적 생명을 넘어,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조에, ζωή)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 어둠을 밝히는 빛 (4절 하반절 – 5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예수님의 생명은 죄와 무지라는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유일한 ‘빛’이 됩니다. 빛은 길을 보여주고(요 14:6), 진리를 드러내며(요 8:12),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어둠은 스스로 빛을 깨닫거나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본문 해설에서 지적하듯이, 우리는 빛이 비치면 당연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였기 때문에 스스로는 빛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3장 10-11절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는 것이 우리의 본래 상태였습니다.
-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른 채 태어나 죄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의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와 같았습니다.
3. 적용 : 창조주 예수님이 내 삶에 주는 의미
그렇다면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다”라는 사실과 그분이 “생명이요 빛”이라는 진리는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 적용 1 : 나의 가치와 목적을 창조주 안에서 발견하십시오.
- 만약 예수님이 나를 포함한 만물의 창조주라면, 나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성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 자체로 나는 존귀합니다.
- 나를 만드신 분이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장 잘 아십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헛된 목표를 좇는 대신, 나를 향한 창조주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데서 참된 만족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질문 : 나는 나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창조주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적용 2 : 삶의 문제 앞에서 창조주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능력이라면, 내 삶의 어떤 문제나 어려움인들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 있을까요? 질병, 관계의 어려움, 재정적인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앞에서 창조주 예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의지하십시오.
- 그분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망가진 삶, 깨어진 마음도 새롭게 창조하고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질문 :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 앞에서 창조주 예수님의 능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 적용 3 : 내 안의 어둠을 인식하고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거나 무감각했던 죄에 대해 이제는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 안에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어둠(죄)을 인식하는 것은 빛(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 넘어지고 실패할 때 좌절하거나 숨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어둠)이었음을 인정하고, 즉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질문 :
최근 나의 죄나 연약함 때문에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갔거나, 나아갈 수 있을까요?
- 적용 4 : 내 삶에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를 목격하고 감사하십시오.
- 예수님은 첫 창조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새로운 창조의 증거입니다.
- 자신의 변화된 모습, 혹은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영역을 보며 창조주 예수님의 신실하신 역사를 기대하고 감사하십시오.
질문 :
예수님을 믿고 내 삶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새로운 창조)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어떤 영역에서 더 변화되기를 소망합니까?결론 : 창조주, 그 이상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요한복음 1장 1-5절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닌,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분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어둠을 밝히시는 유일한 빛이십니다.
이 진리는 단지 교리적인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생명이시며, ‘나의’ 빛이심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해야 합니다.오늘, 창조주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참된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고, 그분의 능력과 빛을 의지하며, 당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목격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론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언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장엄하고도 심오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한 구절은 우리를 시간의 시작, 아니 그
이전의 영원으로 초대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씀’, 헬라어로는 ‘로고스(Λόγος)’는 단순한 음성이나 기록된 글자를 넘어,
살아있는 인격,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 1절은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며 시작할까요?
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신지, 오늘 본문(요한복음 1:1-5)과 묵상 내용을 바탕으로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1.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 예수님의 신성(神性)
본문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저자 요한은 독자들이
‘말씀’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으로 바꾸어 읽기를 권합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
이는 예수님이 어느 시점에 신성을 부여받거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임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토록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당시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며 그분을 피조물 중 하나로 격하하려 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 예수님이야말로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를 누리셨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심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태초’라는 단어는 그분의 영원성을, ‘하나님과 함께’라는 표현은 아버지와의 구별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은 그분의 완전한 신성을 보여줍니다.
2. 말씀은 창조주시다 : 만물의 근원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언합니다.
우주 만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피조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그분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깨어짐, 필요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실 능력 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이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 즉 죄로부터의 구원과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3.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시다 : 어둠을 밝히는 구원자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서
‘생명'(조에, ζωή)은 단순한 육체적 생존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죄와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유일한 ‘빛’으로 다가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실체를 드러내며 길을 비춥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유일한 길(요 14:6)을
보여주시고, 우리 안에 숨겨진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에 이르게 하며, 영적인 무지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거나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왜일까요?
본문 해설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을 잊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스스로 빛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는 전적인 무능력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롬 3:10-11).
마치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 깊은 흑암처럼, 인간의 마음은 죄로 가득한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결론 :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 것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선언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얻습니다.
Θεότητα, Δημιουργία, Ζωή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1140 [daimŏniŏn]
-
1.
신성, 신성한 것, 행17:18.
-
2.
마귀, 악령, 귀신[사람과 신 사이의 중간에 있는 독립적인 존재, 그는 사람에게 들어가 병, 특히 정신병을 일으킨다], 눅8:30, δ. ἔχειν, 마11:18, 눅7: 33, 8:27, 요7:20, 8:48,49, 10:20.
-
3.
[주]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신성, τὸ πλήρω- μα τῆς θ.: 신성의 충만함, 골 2: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신성, 신적인 속성, 롬 1:20.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신성이나 거기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
2.
[명사] τό θεῖον: 신적인 것, 신성, 행17:29.
-
3.
[신성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경건, 신성, 종교, 행3:12, 딤전2:2, 4:7, 6:5,11, 벧후1:3, [하나님을 믿는 믿음] 딤전6:3, 딛1:1, [복수로] 경건한 행위, 벧후3:11.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κτίσις, εως, ἡ 2937 [ktisis]
- 1. 창조.
- 2. 창조하는 동작, 롬 1:20.
- 3. 창조된 것, 피조물, 롬 8:39, 고후 5:17, 갈 6:15, 골 1:15, 히 4:13, 창조, 세계, 막 13:19, 롬 1:25, 히 9:11, 벧후 3:4.
ζωή, ῆς, ἡ 2222 [zōē]
- 1. 생명.
- 2.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3.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 17:2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영혼, 목숨, 생명:
-
2.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
3.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기본형]: 생명, 삶.
-
2.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8:14, 딤전2:2, 벧전4:3.
-
3.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12:44, 눅8:43, 15:12,30, 21:4, 요일2:16, 3:17.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27:50, 눅8:55, 행7:59, 히12:23.
-
2.
불기, 숨.
-
3.
바람, 요3:8, 히1:7.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생명
Gattaca | 2023-01-24
신성(神性)
-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자신이며(신성)
θεότης, ητος, ἡ
2320
[thĕŏtsē]
-
신성, τὸ πλήρω- μα τῆς θ.: 신성의 충만함, 골2:9.
창조(創造)
-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창조)
κτίσις, εως, ἡ
2937
[ktisis]
창조.
창조하는 동작, 롬1:20.
창조된 것, 피조물, 롬8:39, 고후5:17, 갈6:15, 골1:15, 히4:13, 창조, 세계, 막13:19, 롬1:25, 히9:11, 벧후
생명(生命)
-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진리의 길을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구원).
생명.
θάνατος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
Pronunciation [ zōē ]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이 빛을 깨달을 수 없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적인 상태에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새로운 창조, 즉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죄를 깨닫고 아파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의 해답이시고, 우리 영혼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오늘, 태초의 그 ‘말씀’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빛
가운데 거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실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과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말하는 존재’이다.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말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통점이긴
하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말로 끝나고, 말이 행동과 삶으로 열매를 맺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 곧 일하는 것이다.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내용대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를 나타내 주는 히브리어가 1)다바르이다.
‘말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아마르’는 일반적인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이의 명사형 ‘이므라’ 역시 ‘말, 말씀’ 등의 뜻을 갖는다.
둘째
‘다바르’도 말을 하는 행위를 가리킴에 있어서 ‘아마르’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이므라’에 비해
‘다바르’가 ‘성취’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곧 ‘빛’이 생겨나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다(창 1:4).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빛’이라는 실체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체이다.
이사야
55:10-11
“비나 눈이 하늘에서 내려 빈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적시어 싹이 나게 하고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다바르)은 결코 헛되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게” 된다.
사람의 말은 공허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은 뜻을 ‘이루는’
능력이 있다.
한번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며, 그 말씀을 기록한 것(규례)는 반드시 사람이 지켜 행해야할 의무이기도 하다.
2)아마르는 말하는 것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라면, ‘
다바르’는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말의 내용을 성취하는 행위와 열매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다바르
Pronunciation [ dâbâr ]
Etymology / 1696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442회 사용
아마르
אָמַר Storng number 559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Pronunciation
[ ’âmar ]
Old Testament / 5298회 사용
1. 말하다. 2. 단 2:25. 3. 단 7:2.
Pronunciation [ ’ămar]
Etymology / 아람어
Old Testament / 71회 사용
아뢰다(단 6:12), 말하다(단 6:15)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 복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1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히 손으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사 45:12
오직 성경적으로 목회를 한다는 유명한 미국 목사님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 너무나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이 지은바 되었습니다.
내가 예전 같으면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하면서 맞다 맞다 그랬을거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리고 나에게 그 복음을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어찌 이런일이 일어난거야…하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
사탄의 작전이 성공한 듯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을 소경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미 망한 존재다.
그 어떤 이들은 소경에서 눈을 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이미 말씀하셨다.
구원자가 “나”라고, 창조주가 “나”라고,
“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대로 따라가면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사람되어 오셨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 어떤 목사님이 힘차게 외치는 그 말씀은 완전 틀린 설교다.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신을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창조주는 한 분이다.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분이 스스로 사람되어 오신 분을 하나님의 그 아들이라 부른다.
그분은 자신이 한 아들로 갈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그 예언을 성취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이번 주말에 교제의 자리, 말씀암송, 설교 등을 통해 내게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주제는 '나의 현주소는 하나님의 열심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일까.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검열하고, 성찰하고, 반성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책잡힐만한 것이 없는 삶으로 다듬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때로는 예의, 도리, 윤리, 교양, 책임감, 성향 또는 기질,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작업을 부단히 지속한다. 성숙한 사람으로 무르익어가는 과정 가운데 이러한 시간이 필요함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무한 도돌이표를 찍을 때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력을 상실하고, 삶의 활력이 사라지는 데 있다.
과거에 확신 가운데 내린 결정, 믿음으로 내린 결단, 사명감으로 결심한 것들을 현재 당면한 문제 앞에서 모두 소환해 내어 뚜렷한 목적 없이 복기해 본다. 그때의 선택이 감정에 휘둘려 객기를 부린 것은 아니었는지, 인생을 덜 살아봤던 철부지로서 너무 순진했던 것은 아닌지 등 과거를 비뚤게 바라보고, 마치 그때의 결정이 실수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원망할 대상을 찾고자 하는 내 죄성이 발동된 탓인 듯하다.
감사하게도 아내와 지인들의 입을 통해, 설교말씀을 통해, 딸 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선악과를 먹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려는 것으로의 방향전환을 하게 하시는 듯하다. 그동안 집중해왔던 나의 어떠함, 즉 나의 실수 또는 완벽함, 나의 최선 또는 미흡함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집중하게 하신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먼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되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이 하나님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하게 대하고 계시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선하고 신실하고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음, 선하심,
신실하심,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성품과 능력이 현재의 나를 정의한다.
만약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내
모습이 어떠함과 관계없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동행해오고 계시기에 당신의 성품과 능력에 의지하여 안심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내린 과거의 결정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며, 현재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어 왔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머리로는 알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때까지는 이것이 내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닌 행동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지 여부를 확신할 손에
잡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행하심'을 어떤 일의 결과(해결 또는 성패)를 통해 귀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면 평생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불연속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말씀이시다. 내가 말씀과 동행하고 있다면 결과의 양상, 내 감정, 당면한 현실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내 의지와 행동으로 동행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다.
과거에는 말씀을 암송하는 것이 단순히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데 유익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고 문자 그대로 말씀과 함께 거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내
상태에 집중하는 대신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고, 머리로 아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대신 말씀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집중해 보려 한다.
내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그리고 내 삶이 말씀이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면,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작업이 보다 수월하고 가볍고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신 주께서 지각을 주셔서 참된 자, 곧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증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동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 자신에게 집중해왔음을 돌아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믿지
못하는 문제가 제 행동의 문제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태전부터 저를 아시고, 이름으로 부르시고, 지금까지 함께 해오신
주님을 제가 인식하고 믿지 못하는 문제를 막연하게 때가 되면 해결해 주실 것이라 기대하며 기약 없이 미뤄두기보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제 안에 적극적으로 모시고 그 말씀과 동행하며 말씀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하나님 당신과 당신의 섭리를 더 선명하게
보고, 확신하고,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 되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여정을
지속할 힘을 주시고,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해주세요. 경험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가정 안에서, 그리고 제
삶의 주변에 증언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의 힘
대통령의
말, 회사에서 과장이나 부장 등 상사의 말은 힘이 있다. 그 힘을 ‘권한’, 또는 ‘권위’라 한다. 이러한 권한이나 권위는
어떻게 해서 주어지는가? 왜 대통령의 말이 힘이 있고, 상급자의 지시가 권위가 있는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 없이 힘이 있다. 이 힘을 우리는 ‘위임된 권위(권한)’라 한다.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위임을 받아 ‘대통령의 직’에 걸맞는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직위가 높을수록, 특별히 행정의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말에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 이 모든 힘은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 힘은 5년의 직을 마치고 물러나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 전제왕권 시대에는 투표를 통해 공식적인 위임을 절차를 거치지 않았지만, 왕족이 국민들을 통치한다는 합의된 관습이 있었고, 그 관습이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관습적 위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위임받은 권한은 제약이 있다.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위임받은 자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행하면 그 위임을 철회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곧바로
물러나게 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설립하고, 조직을 정하면 그 직책에 맞는 한계와 권한이 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힘은 그 직급에 비례한 힘을 갖게 된다.
여기서 아마르와 다바르의 차이점이 있다. 아마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과정, 입에서 나와 공표되는 내용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다바르는 단순히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책에 맞는 권한과 힘을 통해
말로 지시하고, 지시를 받은 상대가 이를 수행하여 어떤 ‘결과물’을 이루어 내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결과물’(일)은 ‘말’을
통해 지시할 때 이를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이 경우 ‘다바르’는 말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 말로 인해 실행되고 열매를 맺는
일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지칭하게 된다. 이렇게 [말 = 결과]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말이 곧 일이고, 일은 말 혹은 지시를
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속성
하나님의
권위는 위임된 권위가 아니다. 누구의 위임이나 추인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합의된 권한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그 말씀의 내용이 성취가 된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1) 선포된 말씀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다바르’가 여호와와 결합되어 사용된 3)데바르 아도나이,
곧 ‘여호와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 259회나 사용되었다. 이는 주로 선지서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의 ‘공식’처럼 사용한 말이다. 즉, 선지자가 전하는 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호 1:1, 욜 1:1, 욘 1:1, 암 1:1, 미 1:1, 습 1:1, 학 1:1,
말 1:1).
시편 119: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주의 말씀’(다바르)은 “열어서 우둔한 자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다. 주의 말씀을 연다는 것은 ‘언어/말’ 속에 포장된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꺼내어 증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 말씀의 형태로 계시하시는 분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명, 능력, 지혜, 창조 등의 모든 속성은 ‘말’이라는 언어의 보자기에 싸여서 전달되기에 극히 일부만 그
실체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우둔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와
생명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입을 ‘열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한번 그
말씀의 보자기를 벗겨내고, 껍질을 벗겨내어 이면의 뜻을 깨닫게 해주신다(롬 2:29). 언어의 형태로 포장된 말씀의 실체를 열 때
그것은 마치 빛이 비취는 것과 같아 우둔한 자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기록된 말씀 - ‘글’, ‘행적’, ‘사적’
‘다바르’는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일 뿐 아니라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하여 대대로 지켜야할 규범으로 정하셨다.
① 역대상 29:29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다윗 왕의 시종 행적(다바르)”이 ‘기록된 말씀’이다. 그런데 이 ‘기록된 말씀’이 생겨나게 된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다윗 왕의 ‘명령’(말)이 있고, 그 명령(말)을 받아 신하들이 정책을 실행하는 실천이 있게 되고, 실행한 그 일을 기록할 때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여러 사람의 글에 실리게 된다. 따라서 성취된 모든 ‘일’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다바르)이 있고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성취된 ‘일’(다바르)이 있게 되고, 그 이후에 그 내용을 책에 기록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이 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단어가 히브리어 ‘다바르’이다.
② 역대하 13:22 “아비야의 남은 사적(다바르)과 그 행위와 그 말은(다바르)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에 기록되니라”
위 구절에서 ‘사적’과 ‘말’이 모두 히브리어 ‘다바르’이다.
아비야가 선포한 ‘말’(다바르)과 ‘행적’(다바르)이 잇도의 주석책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도록 보존한 것이다. 역대하 9:29
에서 “솔로몬의 행적(다바르)은 ... 선지자 나단의 글(다바르)과...”라고 함으로서 ‘행적’과 ‘글’이 둘 다 ‘다바르’로
쓰였다.
③ 열왕기상 14:29 에서도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다바르)과 무릇 그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다바르')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다.
3) 성취된 말씀 - ‘일’, ‘기사’
① 창세기 20:8에서 아비멜렉은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다바르)을 다 ‘말하여’(다바르)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 하였더라”고 하였다.
아비멜렉이
신복들을 불러 말한 ‘그 일’은 창세기 20:6-7에서 하나님이 꿈에 그에게 이르신 ‘말씀’(다바르)이다. 그 말씀의 내용은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다바르’는 말하는 것과 말한 것의 성취를 뜻하는
‘일’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아직 아비멜렉의 가족을 죽이는 ‘일’(다바르)을 행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다바르)하신 것 자체(선포)가 이미 말씀의 ‘성취’(다바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신복들이
심히 두려워 한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어 ‘다바르’는 단순히 입에서 선포된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취’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② 출애굽기 4:28에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여 4)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5)명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고하니라”라는 말씀에서도 ‘다바르’는 ‘말씀과 이적’이라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준다.
이 구절의 특이한 점은 ‘말씀’(다바르)을 보내고, ‘이적’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말씀’을 ‘명하고’, ‘이적’을 ‘보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서로 바꿔서 표현한 것은 이 둘이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곧 ‘이적’이기에 말씀을
‘보낸’ 것은 곧 이적을 보낸 것과 같다. 따라서 ‘말씀’과 ‘이적’은 사실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이적이고, 이적은 곧 하나님의 명령(말씀)하신 바대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선포되면 그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여서 삶 속에서 ‘열매’(다바르)를 맺어야 한다.
③ 시편 119:9에 나오는 ‘청년’은 이와같은 삶을 살아가는 참 성도를 가리킨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다바르)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이 구절에서 주의 ‘말씀’이 ‘다바르’이다. 영어성경(NIV)에는 “By living according to your word”(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서)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였다. 주의 ‘말씀’(다바르)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행실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성육신 하신 말씀
이는 말씀이 선포나 기록된 언어의 형태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삶 자체로 체화되어 임하신 가장 강력한 형태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경우는 단 한 번의 유일무이한 말씀의 형태, 가장 강력한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의 모든 언어과정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권위가 있으며, 힘이 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분의 말씀은 성경을 인용하거나 설교할 때만 말씀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그분의 입을 통해 발화(發話)된 모든 언어는 곧 말씀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역시 누구에게 위임된 권한이 아니라 스스로의 권위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능력, 치유의 능력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볼 때,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단어이다. 말만 많고 행함과 열매가 없는 사람의 말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반드시 성취가 되기 때문에 말씀이 곧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을 받은 성도들 또한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하면 곧 성취되는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11월 17일(월) 요한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씀은 곧 하나님(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사막에 숲이 있다.
사막을 숲으로 만든 여인 ‘인위쩐’ 이야기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매서운 모래폭풍이 부는 곳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 한 명도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을 온 여자는 통곡을 하다가 일주일 만에 한마디를 꺼내게 됩니다.
“여기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막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고,
채소도 살 수 있으면 사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동안 꿈 없이 현실에 순응하며 살던 남편도 그녀와 함께 모래바람과 싸우며 나무를 심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한 그루...
20년간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한 그루들이 모여 숲이 되었습니다.
중국 마오우쑤 사막을 숲으로 만든 '인위쩐'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그 기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을 피해 돌아가서는 숲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었더니, 그것이 숲으로 가는 길이 됐지요.”
‘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있다면 ‘할 수 없는 걸림돌’만 쌓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면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놓입니다.
* 로고스 / 신과 인간과 세상을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신과 인간과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연결 되느냐? 하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과 인간과 세상은 로고스로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인간의 로고스는 언어
하나님의 로고스는 생각 즉 말씀
로고스는 무슨 뜻일까요?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발음 [ lĕgō ]
로고스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단어인데,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면 '말씀', '이성', '논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로고스는 이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로고스의 여러 가지 의미를 하나씩 살펴볼까요?
1. 말씀 또는 언어 :
로고스는 가장 기본적으로 '말'을 의미해요. 우리가 생각을 표현하고 서로 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를 뜻하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2. 이성 또는 사고 :
로고스는 또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해요.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사용하는 그 능력 말이에요. 마치 퍼즐을 풀 때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해요.
3. 우주의 질서나 원리 :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나 법칙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우리 몸 안에 있는 DNA처럼, 모든 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기본 설계도 같은 거예요.
4. 신의 말씀 :
종교에서는 로고스를 신의 말씀이나 계시로 해석하기도 해요.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때 '말씀'이 바로 로고스를 뜻해요.
5. 논리나 추론 :
로고스는 또 논리적인 사고나 추론을 의미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수학 문제를 풀 때 우리는 로고스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하나 차근차근 생각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로고스와 관련이 있답니다.
6. 의미나 뜻 :
어떤 말이나 행동이 가진 깊은 의미를 로고스라고 부르기도 해요. 마치 동화 속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 같은 거예요.
로고스의 개념은 왜 중요할까요?
로고스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볼게요:
1. 학교에서 공부할 때 :
여러분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를 푸는 것, 이 모든 게 로고스와 관련이 있어요.
2. 친구들과 대화할 때 :
우리가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도 로고스를 사용하는 거예요.
3. 새로운 것을 발명할 때 :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예술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도 로고스를 사용해요.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모두 로고스와 관련이 있답니다.
4. 세상을 이해할 때 :
우리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도 로고스를 사용해요. 예를 들어, 왜 비가 오는지, 왜 계절이 바뀌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말이에요.
고스는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있어요. 여러분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로고스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여러분이 꿈을 꾸고 상상할 때도 로고스가 작용하고 있답니다.
로고스를 잘 이해하고 사용하면, 우리는 더 깊이 있게 생각하고, 더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더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작가들이 로고스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말씀”은 항상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혼”의 존재를 “죽은 자”로 말씀하십니다(마 8:22)
그러므로 “죽은 자”는 살아있는 “말씀”을 먹을 때 반드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말씀”이 내 몸 안에 있을 때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의 말씀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씨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생명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기 때문에 “씨”라는 것은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고, 낳고 종족을 이어가는 것이 “씨”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씨”라는 것은 땅에다 심으면 “진리의 씨”와 “거짓의 씨”는 추수 때가 되어야 분별하지 자랄 때는 똑 같이 자라기 때문에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오늘날 기독교 목회자들이 자신이 소유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씨”(혈통)로 그 종족을 보존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것이지 목회자의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같이 “씨”로 낳은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8~40
예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왜 아브라함의 말을 못 알아듣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하나님께 속
한자라면 어찌하여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하나님의 속 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지 못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전해도 “씨”가 있는 예수가 전하면 진리요, “씨”가 없는 기독교 목회자가 전하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오늘날 신학교에서 배운 목사들의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는 “씨”가 없는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씨”가 없는 목사들의 말씀 가지고는 백날 설교말씀을 들어도 단 1%도 죽어있는 영혼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로 낳고 낳으면서 “계시”를 받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를 받는 것이지 “신학”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육적인 씨를 받고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씨”를
받고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목회자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모두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영성은 오늘날 목회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께 속 한자라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요 8:44) 그러므로 어떤 “영”이 역사하는지는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6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낳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다면 하나님의 “씨”로 낳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예전이나 오늘날에도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이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어떻게 다른 “신”을 섬기냐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내 마음속에 섬기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에게 기도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씨”가 있는 말씀을 소유해야만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어두움이 되는 것이요, “말씀”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못하면 생명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으며,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9:11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말씀의 배경에는 반드시 말씀을 깨달아서 예수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라고 하시는 말씀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심으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헌금 충성 봉사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알기를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하고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날마다 자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이오안넨’으로 되어 있다. 이는 ‘요한에 의한’이란 뜻으로 이에 근거하여 오늘날 모든 성경은 본서의 제목을 '요한복음'이라고 부른다.
-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다른 복음서와 같이 누가 기록했는지 그 이름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을 사건의 목격자(1:14, 19:35, 21:24-25)로 진술할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 때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예수를 팔자가 누구인지를 질문한 정도로 가까우며,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13:23, 19:26, 20:2, 21:7, 20)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의 제자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교부들 대부분이 이책의 저자를 요한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도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요한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이다.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매이다(마 27:56, 막 15:40).
요한이라고 하면 흔히 ‘사랑의 사도’라는 별칭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사실 사랑을 논하기에 너무나 성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변화되었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글에는 사랑이 곧 주제가 되었으며 그는 사랑을 강조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생전에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요 21:7, 20) 그는 주님의 핵심 일꾼으로서 남다른 훈련과 영적인 체험을 가졌다(마 17:1, 요 5:37).
요한은 주님의 공생애 삼년 동안 사랑받는 제자로서 훈련되어 갔다. 그는 실로 사랑받는 제자로서 훈련을 받았다. 요한은 12제자 중 유일하게 십자가 형장까지 쫒아간 제자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보았고, 만났으며 또 교제하였다(요 20:20). 그래서 그는 확신이 있었고 또한 능동적인 전도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교회가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질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머물렀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계시록을 후대에 남겼다. 그의 글에는 믿음과 사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마리아(예수님의 모친)를 봉양하였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계 1:9).
2) 기록연대
이 책이 기록된 시기는 아마도 A.D.85-90년 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이 기록한 책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듯하다.
21:18-19에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 인용된 것을 볼 때 이미 베드로는 순교한 다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박해을 받아 밧모섬으로 유배 보내진 시점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교회는 A.D.70년의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파들이 더욱 유대주의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핍박과 박해가 거세졌을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의 침투로 인한 교회내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영지주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속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였으며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써 기독교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육체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참된 복음을 강조하여 전할 필요가 있었다(요 3:16).
- 기록 목적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너희로 에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요 20:31).” 그렇게 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양한 표적과 강론을 통해 예수님께서 유대의 메시아, 구약을 성취하신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며, 아버지와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 주제
1)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중심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한 마디로 ‘아들-메시아’로서 예수에 대한 계시(선포)이다. 특히 예수는 성경적이며 유대적인 기대 속에 성취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히브리어인 메시아(Messiah)란 단어가 그대로 사용함으로(1:41; 4:25). 로고스이신 메시아가 육신으로 오셨음을 선언하며 이야기를 풀어 간다.
또한 서두(1:1-18)에서 진술되고 있는 말씀(logos)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은혜와 진리와 영광을 드러내신다. 무엇보다도 성육하신 로고스이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성육신 하신 말씀’을 통한 구속사역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로고스의 이러한 모습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상징인 빛(fw/j)과 생명(zwh,)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2) 믿음의 중요성
‘믿는다’(pisteuo)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 98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공관복음(마가복음 11번; 마태복음 14번; 누가복음 9번)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독특하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 즉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요 3:15-16, 36; 5:24; 6:40, 47)로서 빛 가운데 행하며(12:46),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받는 사람들(3:18; 12:48)로서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 확실히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이슈로 제시된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의 중심된 메시지는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로 요약할 수 있다.
- 특징
1)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ego eimi, I am)란 말이 일곱 번이나 나온다.
예컨대 나는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말씀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란 말씀과 같은 표현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란 뜻이다.
2) 하나님의 아들 – 신성의 강조
마태가 왕의 관점, 마가가 종의 관점, 누가가 인자(사람의 아들)이란 관점으로 쓰였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요한복음의 주제에 맞춰 나오기도 한다. 나다나엘(1:45-51), 니고데모(2:23-3:21), 사마리아 여인(4:1-42), 음행한 여인(7:53-8:11)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신성들이 잘 드러난다.
3) 기적이 아닌 표적
또 요한복음에는 이적이나 기적이란 말보다는 표적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표적이 단순히 남을 놀라게 하고 병을 고치고 도와주는 초자연적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행적의 의미에 대하여 기술을 함으로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는 계시성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의 표적이 나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에서부터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것,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 5천 명을 먹이시고, 물위로 걸으신 것,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시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곱 가지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 표적의 목적은 20장 31절에 잘 나와 있다.)
4) 예수님께서 기도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원어로 ‘기도하다’를 의미하는 ‘proseuchomai(프로슈코마히)’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대신 ‘구하다, 묻다, 말하다’란 뜻의 ‘erōtō(에로토)’가 몇 번 나올 뿐이다.
5) 시간과 장소의 독특성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가 갈릴리로 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지방에서의 사역이 강조되고 있다. 시간상으로도 차이점이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시간 계산의 표준이 되는 유월절이 한 번만 기록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세 번 나온다.
6) 단순한 헬라어 표현
헬라어를 배울 때 요한복음을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이 네 복음서 중에서 단어가 가장 쉽고 간결한 표현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신학적인 통찰력은 대단히 무게가 있고 심오하다. 즉, 영원하신 주님, 곧 로고스(말씀)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분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다(1:3)는 것을 잘 밝혀주고 있다.
7) 나오지 않는 표현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내용이 빠져 있는데, 먼저 요한복음엔 족보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시작과 끝이며(계1:8, 21:6, 22:13) 영원하신(창 21:33; 신 33:37; 사 9:6; 40:28)분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상황에 대한 묘사도 없고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도 없다. 죄와 용서에 대한 회개의 외침도 없으며,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자세한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사탄에게 40일간 시험받으신 부분도 없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12제자들을 택하시거나 70명을 내보내시는 기록이나 변화산의 변화에 대한 기록조차도 없다.
- 내용과 구조
요한복음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주된 내용의 전개에 따라 나누면 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2) 하나님 아들의 증거와 유대인들의 배척, 3) 하나님 아들의 가르침, 4) 하나님 아들의 수난과 영광으로 표현할 수 있고, 주된 목적에 따라 나누면 1)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표적, 2) 그분이 어떠한 사역을 통해 영광을 이루셨는지로 나눌 수 있다.
1) 표적의 책(1-12장)
① 출생 : 성육신과 세례(1:1-34)
② 공생애 : 그리스도 사역(1:35-12장)
2) 영광의 책(13-21장)
(1) 수난
① 다락방 강화(13-16장)
② 체포에서 십자가까지(17-19장)
(2)) 부활 : 부활과 이후 행적(20-21장)
참된 예배_요 4:21-26
윤효배 목사
■ 들어가며
6월은 ‘선교’라는 주제 아래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말씀을 읽게 된다. 사랑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요한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들을 잘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고 또한 받은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전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말씀일기 본문인 요한복음 4장의 내용 중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어떠한 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 말씀과 함께
- 본문의 배경 :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1) 대화의 주요 내용
-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가신 예수님(3-6)
예수님 :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하심(7)
여 자 :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물음(9)
예수님 :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내게 생수를 구하지 않았다고 말함(10)
여 자 : 우물이 깊어 생수를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야곱보다 큰 자인지를 물음(11-12)
예수님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 말함(14)
여 자 : 내게 그런 물을 달라고 함(15)
예수님 :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함(16)
여 자 : 남편이 없다고 함(17)
예수님 :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고 말하심(18)
여 자 :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배할 곳이 어디인지 물음(19-20)
예수님 :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24)
여 자 :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라(25)
예수님 : 내가 그리스도라 하심(26)
2) 특징적인 표현과 그 의미 : (한 영혼의 구원의 서정과 유사)
①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3) : 먼저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찾으신 예수님(9) -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있으심
②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함(14) :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시는 예수님 - 영적인 존재로서 구원을 허락해 주시는 분이심을 표현
③ 네 남편을 불러오라(16) : 죄에 대한 깨달음과 치유 - 자기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의 회복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함
④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22) : 장소가 아닌 대상 -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배하는 대상이 중요함
⑤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 거짓되게 (아무렇게 또는 자의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
1)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① 하나님은 영이시니(pneu'ma oJ qeov", 24a) : 예배 대상(하나님의 존재)의 바른 인식
→ 어느 장소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여 어떤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며 예배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이심으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특별히 어떠한 형상이나 모양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 2계명)
② 영과 진리로(24b) : 예배 방법 - 성령(pneuvmati, 프뉴마티)과 진리(ajlhqeiva/, 알레세이아)로!
-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 :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6-27)
- 진리 되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 구약의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폐기 완성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방법이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께서 주신 방법대로 예배해야 한다.
③ 예배할 지니라(24c) : 예배 자세 - (proskunevw - 부복하다. 꿇어 엎드려 존경을 표하다.)
→ 예배는 먼저 내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내 자신이 은혜 받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다. 삶속에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존전 앞에서 겸손히 낮아져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2)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
① 의식과 형식적인 예배 보다는 말씀의 순종의 모습이 더 중요함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②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함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③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주님을 모시는 것임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야 하며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삶으로서의 예배가 있어야 한다.
3) 하나님께 드려질 천상예배(계 4-5장) :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
① 네 생물 :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함(계 4:8)
② 이십사 장로들 :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림(계 4:10-11)
맺음말
예배는 삶에서 시작한다.
참된 예배는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님을 가장 높이려고 하되,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과 호흡하며 감사 찬송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