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복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에서 복에 대해 읽지만, 복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하나님의 은총일까요?
복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우리는 그것이 매우 긍정적인 것이라는 데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복의 개념을 정의하고 고정하려고 할 때 그것은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미끄러워 보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항상 복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가능성이 있을까요?
우리가 성경에서 복을 처음 접하는 것은 바로 첫 번째 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놀라운 신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래서 이것은 번영의 개념, 즉 번성과 번식에 부합합니다.
그런 다음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복을 주신 다음 아담과 이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복은 조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복에는 번성과 번식이
있지만,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허가와 권한도 있습니다.
창조 과정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창조하십니다.
유대인의 성경에서도 이것은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1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복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그렇다면
이제 이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번식하고 열매를 맺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패턴을 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는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그것은 창조 사역 후에 안식에
이르신 그분의 특별한 휴식의 날입니다.
복의 정의
훌륭한 성경 교사인 필립 리틀은 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본질적으로 복은 하나님이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그들이 하도록 계획되거나 의도된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은 땅을 채우고 번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 즉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도 수적으로 번식해야 했지만, 나머지 창조물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관해서, 하나님은 안식일이 본래 의도된 모든 것이 되도록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연결된 거룩한 휴식의 날이 되도록 말입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하시고
우리가 하도록 의도하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할 때는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모든 유대인의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바룩 앗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렉 하올람 - 우리 하나님
여호와 우주의 왕 당신은 송축 받으소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모든 복의 정당하고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가 모두 그의 권능을 인함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보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의도에 따라 성공하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 없이는 이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원함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고 우리를 위해 설계한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고,
그의 복은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권능입니다.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고, 그런 다음 그 명령에 순종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는 오직 그분뿐입니다.
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신명기 8장에서 이러한 명령과 축복의 패턴을 매우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과 축복을 주시고,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열매를 맺고 성공할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도록 한 것은 우리 자신의 노고나 좋은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곱셈의 개념이 몇 번 더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축복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항상 자라고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족, 양 떼, 가축, 소유물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봅니다. 축복에는 관계적 측면이 있지만 경제적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 전체를 축복하는 것에 대한 강조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점입니다. 우리의 복은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송축해야 합니다. 둘째 그의 권능이 우리를 가능하게 하여 그의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복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늘 의도하셨던 대로 메시아를 낳음으로써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왔습니다. 그 대가로 하나님은 나머지 세상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되돌려주는 복이 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무엇되도록 하나님은 의도하셨을까요?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한 훨씬 더 큰 부요함입니다!(롬 11:12)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데 동참하게 되어 우리는 매우 기쁩니다!
10월 2일(목) 요나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연고(1:12)
물론 이러한 원인은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는 원인이라고 하게겠습니다.
반면에 외적 원인은
그리고 모든 선원과 승객들은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외적 원인에 의한 풍랑은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동행하는 모든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이 만난 풍랑은 범죄자를 대통령 후보로 세우고 그 사람을 선택한 국민들에게 무엇이 잘못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절대적 가치와 신앙의 자유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경각심을 고취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배경 :
선원들의 질문 :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
사도행전 27:20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이유
풍랑은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한다사도행전 27:9-26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은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의 양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기에 일생을 살면서 정해진 고통은 다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고통의 정량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젊어서 어려움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만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젊어서 별다른 고생 없이 살아온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부자들은 인생의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감당해야
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이 경험하는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인생은 그 고통을 결국 감당해내야
합니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은 육교를 통해 건너가게 됩니다.
육교로 가면 올라갈 때 힘들지만, 내려갈 때는 힘이 들지 않습니다.
육교가 아닌 지하도를 선택하면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내리막이라 쉽게 갈 수 있지만, 나중에는 오르막이라 힘이 듭니다.
결국 육교로
가든 지하도로 가든 길을 건너는 데 필요한 고통의 총량은 동일합니다.
물론 육교와 지하도를 선택하지 않고 무단 횡단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무단 횡단을 가감 없이 감행하십니다. 무단 횡단을 하면 별 어려움 없이 길을 건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단 횡단을 하다 교통경찰한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무단 횡단을 하다 달려오는 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 이렇게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인생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오르막을 오를 때 너무 좋아하고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 해서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갔으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항해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배가 항해를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리면 배는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배의 방향을 잡는 것은 바로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에는 해와 달을 보고 방향을 잡기도 했습니다.
배가 바른 방향을 잡아서 항해를 한다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이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만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면 어떠한 태도를 보입니까?
풍랑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생각지 못한 풍랑을 만났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랑을 만났을 때, 생각을 좀 달리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다면,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풍랑 앞에서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다
바울이 타고 가는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 광풍으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살 소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게 가고 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향해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고 있다면, 풍랑을 안 만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평탄하게 순항하도록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주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생을 항해하는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려는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한다 해서, 꼭 시간상으로 빨리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풍랑을 감당해내야
합니다.
나폴레옹에게 가난은 풍랑이었다
코르시카 귀족이었던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을 귀족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곳 학생들은 가난한 나폴레옹을 조롱하며 놀림거리로 삼았습니다.
참다 못한 나폴레옹은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만,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돈은 없지만 너는 반드시 그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의 단호함 앞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 후로 나폴레옹은 5년의 시간을 참고 버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나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간 나폴레옹은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있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홀로 도서관을 지키며 자신과 싸웠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스스로 그리던 미래를 준비하고 자신의 재능을 온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금세 상관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훈련장을 책임지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다른 성과를 올리며 새로운 기회를 얻었고, 권력을 잡을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자 예전에 그를 멸시하고 조롱했던 자들이 모두 몰려와 다시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나폴레옹이 인생의 큰 성공을 맛볼 수 있었던 계기는 그의 불우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은 그의 인생에 풍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철없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더 뛰어난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약점을 극복해 끝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가난이라는 풍랑 때문에 자신의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총리가 된 요셉
요셉이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은 요셉의 인생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풍랑입니다.
이 풍랑으로 인해, 요셉의 인생의 배는 자초하는 것 같았습니다.
요셉은 한 순간에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으로 그 인생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노예 생활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인해, 보디발 장군의 가정 총무가 됩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30살의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30세 젊은이가 애굽이라는
대제국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상상되십니까?
그것도 자국민이 아닌 히브리 민족의 종 출신이요,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혔던 죄수가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요셉은 17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와 10년간 노예생활을 하고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뭄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가족들뿐 아니라 애굽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구원해 냅니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 형들에게 시기를 받고 애굽으로 팔려가는 풍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30세 나이에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런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려운 우환이 있을 때는 살지만, 생활이 안락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역경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노력하게
하지만, 지나치게 편안한 환경은 의지가 꺾이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안락함과 평안함 누리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찬송가 373장 2절 가사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시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이 곡 작사자는 큰 물결이 일어나는 풍랑으로 인해 힘들고 때로 쉬지 못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풍랑으로 인해 빨리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만날 때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
어렸을 때 연을 만들어서 날려 본 적이 있습니다.
연을 언제 날려야 높이 날아오릅니까? 바람이 불 때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아무리 연줄을 잡고 힘껏 달려가도 잠시 올라가는가 싶다가 추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날은
연줄을 잡고 달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을 잘 이용해서 연줄을 잘 조절하기만 하면, 연은 높이 높이 날아갑니다.
연은 바람을
만날 때 더 높이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새는 ‘알바트로스’입니다.
‘알바트로스’는 ‘바보새’라 불리우는 새입니다.
날개가 너무 크고 움직임이 둔해서, ‘바보새’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날이면 알바트로스는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새로 변합니다.
그 이유는 큰 날개를 펼치고 그 폭풍우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알바트로스가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는 것은 폭풍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풍랑을 만나신 분이 계십니까?
그 풍랑으로 인해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우십니까? 하지만 더 풍랑으로 인해 우리의 목적지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나면,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났다고, 그 풍랑이 모든 사람들을 목적지로 빨리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풍랑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한다
첫째,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
바울이 탄 배가 만난 ‘유라굴라’라는 광풍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광풍 앞에서, 배에 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광풍이 하루 이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 도 별 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광풍이 얼마나 심했는지, 여러 날이 지나도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어둠만 계속됐다고 말씀합니다.
배에 탄 사람은 아예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이 풍랑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서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이런 응답을 받은 바울이 이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풍랑가운데 어떻게 구원하실지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광풍 앞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심한지,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심한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경험을 하였기에,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그 풍랑가운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풍랑가운데 은혜를 주셨습니다.
믿음을 더 견고케 하셨습니다.
그
풍랑으로 인하여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해 주셨습니다.
풍랑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라비안 교도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도중, 웨슬리가 타고 있는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돛이 산산 조각나고, 배에 물이 들어와 웨슬레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배 한 켠에서 모리비안 교도 25명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안한 것을 웨슬레는 보았습니다.
평안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라웠고,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아니요 참으로 감사할 일이죠.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인들과 어린애들은 무서울 게 아니겠습니까?”
“천만에요. 비록 아녀자라도 죽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죽으면 천국 가게 될 것인데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웨슬레는 이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풍랑을 맞이하지만, 그 풍랑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만 하고 있는 사람은 그 풍랑 때문에 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고통 가운데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풍랑 앞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풍랑으로 인해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랑은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하게 한다
둘째, 풍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기 때문
풍랑이 깊어질수록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나자 사공들이 어떻게 합니까? 짐을 바다에 풀어버립니다. 풍랑이 점점 더 심해지니까 이제는 배의 기구들을 내버립니다. 나중에는 먹어야 할 밀까지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풍랑이 더 거세어질 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무엇보다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공들이 자기들만 도망가려고 구명선을 내려놓을 때,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을 설득해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공들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백부장과 군사들은 바울의 말대로 구명선의 줄을 끓어버립니다.
우리는 풍랑이 오기 전까지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옆에 있을 줄 알았던 가족을 잃어버리고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아내가 감상선 수술을 해서, 제가 아내의 빈자리를 메꾼 적이 있습니다.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했습니다. 아내의 빈자리를 지키면서 아내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자리는 당연한 자리가 아니라, 나의 삶에 너무나도 귀한 자리였습니다. 또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고 나서야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풍랑으로 인해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풍랑을 만났을 때 육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함을 깨달아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입니다.
1845년 영국의 한 탐험대가 북극해를 건너는 바닷길을 발견하기 위해 대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철저한 훈련으로 준비된 탐험 대원들은 필요한 물품을 배에 가득 싣고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광활한 북극해에 도달했을 때, 대원들은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원들이 배의 창고를 확인해 보니 그 안에는 연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의 물건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1,200여권의 장서와 사기로 된 접시, 크리스탈 컵과 장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은식기 등 온갖 사치품들만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배를 지휘하던 프랭클린이라는 장교가 새 항로를 개척해 다른 나라에 도착하면 사절품으로 사용하려고 가져온 사치품이었습니다.
탐험대원들은 연료가 바닥난 배가 곧 가라앉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썰매를 이용해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교는 썰매 위에 은식기를 하나라도 더 실으려고 몸부림치다, 결국 은식기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영생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육신의 생명은 어떤 귀한 것보다 소중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지만 육신의 생명하고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영생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다 누리고 살았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가장 귀한 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할지라도 영생을 얻었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풍랑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목적지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일을 줄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며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하는 일마다 틀어지게 한다. 이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잘못을 해야 고칠 수 있으며 마음속에 고민과 걱정이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맹자도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 일을 줄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수고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풍랑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로 더 빨리 인도해 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풍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생을,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 풍랑이 오는가?(마태복음 8:23-27)
갈릴리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큰 광풍이 휘몰아쳐 올 때가 많답니다.
이유는 바다가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0미터 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헬몬산에서 요르단 계곡 쪽으로 이상 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이 바람이 광풍으로 변한답니다.
성경에는 바다를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길을 '인생항로'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 바다에도 역시 큰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풍랑이 있습니다. 이 민족 위에도 6.25의 풍랑이 있었습니다.
기근과 재난의 풍랑이 있었습니다. 5-6십 년대에는 수없이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습니다. 질병의 풍랑이 있고, 파산의 풍랑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여러 가지 풍랑이 지나가고 또 휘몰아 쳐옵니다.
성경 속에 많은 인물들이 어려운 풍랑을 만난 기록이
있습니다. 욥의 가정이 뜻하지 않은 큰 풍랑이 찾아왔습니다. 열 자식이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했고,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약탈당했고, 건강한 몸에 악 창이 생겨 잿더미 속에서 신음하게 된 사건입니다.
요셉의 일생에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 없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죄 없이 감옥에 갔습니다. 다윗 역시 뜻하지 않게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죽음을 당할 뻔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풍랑을 만나본 사람들은 풍파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본 사람,
건강의 귀중함을 압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 큰 풍랑을 겪으며 온갖 처절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귀한지
압니다. 가정에 안정, 사업의 안정, 경제적인 안정, 나아가서 정치적인 안정, 세계적인 안정을 바라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렇게 평안할 곳이 못됩니다. 모세는 시90편에서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칼봇제라는 시인은 '저 산 넘어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임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바다에 풍랑이 그칠 날이 없는 것같이 이 세상에도 환난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참다운 평안을 누릴 수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요14:27절에서 우리 주님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공급자이십니다. /할/
본문은 막4:35-45에서도 기록된 사건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몰려온 군중들을 피하여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쉬시고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시는 중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타신 배는 오늘날과 같은 요트나 유람선이 아니라 겨우 열댓 명 정도 탈 수 있는 고기 잡는 작은 어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뱃노래를 부르면서 기분 좋게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더니 물결이 높이 치솟아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인 제자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해서 그 풍랑과 싸워봤지만 더 이상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배가
물 속에 가라앉은 절대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된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급히 깨웠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구원하소서!' 이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즉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바다에도 풍랑이 일어나면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여기서
배는 교회를 상징한 것이고, 그 배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오늘 이 자리가 주님이 계시는 자리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교회는 물 속에 좌초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이 그 큰 풍랑을 만났으나 우리 주님이 살려주셨습니다.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 당시 제자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겉만 보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니 멋있습니다.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고 예수님 앞에서 귀신들이 거품을 물고 떠났습니다. 병자들이 일순간에 낫습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한꺼번에 먹이십니다.
이분만 왕으로 삼으면 정치, 경제, 사회가 해결될 것으로 굳게 믿고,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십자가를 지러왔다.'고 하시자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는 분이심을 믿으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신분과 체면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인줄 알면서도 따르지를 안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남도, 천국도, 영생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속으로만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 위에 일했던 부류들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장사된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입니다.
그
무덤은 자기가 죽으면 묻히려고 사 놓은 새 무덤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무덤까지도 내어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기의 신분이 노출되기를 꺼려 예수님을 직접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12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고생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 가롯유다는 자기 스승을 은30냥에 팔아 십자가에 넘겨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처음부터 완전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십자가 처형 때 모두 도망을 갔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인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결국에는 순교하면서까지 끝까지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제자들이 바로
12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12제자들 같이 끝까지 주님을 따라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본문에서는 '큰 놀이 일어났다.'고 했고, 막4:37절에는 '큰 광풍'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광풍은 일명 '돌개바람'이라고 하며, 행27장에 나오는 유라굴로 태풍과 맞먹는 그런 풍랑입니다.
▶성경에는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요나가 만난 풍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일부러 니느웨 성으로 가서 저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라고 하였으나,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풍랑은 요나 자신이 '나로 인한 풍랑'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사실(욘1:12)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만난 풍랑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도 이런 풍랑을 종종 만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반역의 길로 행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이유 있는 풍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불순종하거나 반역의 길로 행할 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풍랑을 일으켜 흔들어놓아서 결국 회개시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만난 풍랑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 심한 풍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행27장에 보면, 14일간이나 풍랑에 휘말려
바다 위에 떠돌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이 거의 다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어 살 소망이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풍랑을 만난 이유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믿고 가다가 만난 풍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의 말보다 세상 말을 더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다 백성이 만난 풍랑도 있습니다.
겔13:13-14절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뜨리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선민 유다가 세상으로, 죄악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당한 풍랑입니다.
본문에서는 왜 이런 풍랑이 일어났는가?
막4:3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주님이 가지고 명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건너가다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요나 같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건너편으로 함께 가자'는 말씀에 따랐는데 시련이 왔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 인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데 시련이 오고, 실패가 옵니까? 왜 고통과 슬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불교는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원인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고난과 시련은
묵묵히 감대하고 참노라면 먼 훗날 다시 환생할 때 보다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대답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대답합니다. 시련과 고통, 실패의 쓰라림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니, 숙명이니 팔자소관으로 받아드리고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과 실패와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을 발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기도로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왜 시련이 오고 풍랑이 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각 개인의 형편과 믿음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메튜헨리는
'하나님의 전통에는 여러 가지 화살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깨닫게 하기 위하여, 때로는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그릇된 길을 막아 주시기 위해, 때로는 잘못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신앙이 자라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나타내십니다.
그 뜻을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신앙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119:67절을 보세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고,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욥42:5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그 배 안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가고 있었는데도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순종했는데 풍랑을 만난 것보다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는데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입니다.
주님이
멀리 계셨다면 별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그것도 조그마한 공간 안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이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셨다.'는 단순한 행동자체 보다는 '어떻게 모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신앙자체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방안에 누워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고, 같은 버스 같은
좌석에 앉아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서울에 있고,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어도 그리워 견딜 수가 없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고, 상사병이 나고 하루에도 두 번씩 편지를 쓰고 그래도 모자라서 국제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쪽이 참된 만남의 관계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남에는 피상적인 만남이 있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피상적인 만남은 서로 인사 정도 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10년을 만나도 감정도 정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만남은 주고 싶고, 보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늘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이런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져야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생명까지도 십자가 위해서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위해 주어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정성도, 뜻도 드려야 합니다. 이런 모심이 진정한 모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 안에 모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았기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대문 밖에 모실 수도 있고, 현관에 모실 수도 있고, 안방에 모셔 놓고 푸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심은 제자들과 같이 풍랑을 만날 수밖에 없는 모심입니다. /믿/ 그러나 제일 좋은 자리는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마7:21절을 보세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할/
풍랑 중에도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막4:38절을 보면 이 풍랑 중에서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풍랑 속에도 천하태평이십니다. 평화롭게 잠을 자고 계십니다. 이런 평안이 어디서 옵니까? 주님 자신이 평안의 안식처입니다. 이 평안은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며 친히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너희는 근심도 말고 두려워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가정적으로, 사업적으로, 세상 적으로, 풍랑을 만나 절망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조용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안식처요 피난처가 되십니다. /아멘!/
▶우리는 본문의 갈릴리 바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①향해하는 인생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치 갈릴리 바다와 같고, 모든 인생은 일엽편주와 같은 배를 타고 고해와 같은 세상을 행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항해에도 순풍에 돛을 달 때도 있지만 때로는 풍랑을 만나는 때도 있습니다. 인생을 향해하고 갈 때는 기뻐 희희낙락할 때도 있으나 한숨과 눈물과 슬픔이 앞을 가릴 때도 많습니다.
②풍랑을 만나도 이길 수 있는 항해를 배워야 합니다. 가정도 풍랑이 올 때가 있고, 교회도 풍랑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할/
③풍랑은 누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줄
압니다. 잔잔한 인생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다 옵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 삶 속에
풍랑이 올 때는 사정없이 옵니다.
시10:1절에서 다윗도 이렇게 절규를 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또 시44:22절에서도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잊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셨나이까?'
인생의 풍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때로 풍랑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풍랑이란 만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풍랑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풍랑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 이것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성숙하느냐?
이것을 내가 어떤 방식으로 대항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풍랑이 내게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인생살이입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풍랑이 자기 인생에게 있음을 압니다. 대신 그 풍랑을 '어떻게 극복할까? 이 풍랑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줄까?'를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풍랑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 풍랑이 올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절망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니면 인생을 저주하겠습니까?
'벤쟈민
프랭크린'은 '고통은 교훈을 준다'고 했습니다. 풍랑 속에 교훈이 있고 풍랑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풍랑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풍랑과 고통 가운데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할/
신32: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아멘!/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애굽의 궁궐이 아닙니다. 풍랑과 광풍이 몰아치는 광야였습니다. 모세는 40이 될 때까지 애굽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문과 리더십을 터득했습니다.
행7:22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더라'고 증거 합니다. 그는 명성을 떨쳤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올 때마다
그의 이름은 애굽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탁월하고 유능할 때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광야 40년 동안 고난과 고통의 길, 풍랑의 길을 걷게 하신 후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광야와 풍랑을 지난
후 모세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기적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기도로 아말렉을 무찌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나타난
축복입니다. /믿/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편안함보다 성장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십니다. 고난은 반듯이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어느 권사님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건달들이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권사님을 놀려주려고 보자기에 떡을 싸서 집안에 던졌습니다. 기도하다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마당에 무슨 보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보니까 속에 떡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권사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떡보자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기하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밖에서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달들이 권사님 앞에 나타나서 '그 떡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던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마들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도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섭리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만선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고 불행하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마저 잃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배가 파선되어 삼부자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뱃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때 갑자기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커져서 불기둥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그들은
불기둥이 보이는 곳이 바로 육지라는 판단 아래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울먹이며 집이 몽땅 불타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이들 삼부자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육지를 찾지 못해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이 왜 감사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성장을 위해 슬픔이
필요할 때 기쁨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눈물이 필요할 때 환희를 보내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 필요할 때 편안함이 아니라 고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산이 높을 수록 골짜기는 깊습니다. 여러분들이 큰 축복의 산에 오르도록 하나님의 깊은 골짜기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을 때입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려는데 원주민들이 큰돌을 선교사님 가슴에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기도 하고 가슴에 안기도 하면서 강을 건넜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무거운
돌을 안고 강 중간쯤에 왔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있었습니다.
만약 큰돌이 무게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벼운 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편안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가 무거운 짐이 있고, 고통스러운 풍랑을 만나고, 눈물을 골짜기를 지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고통과 풍랑 가운데에서 여러분을 성숙시키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풍랑이 몰아닥칠 때 두려워 말고 더욱 소망 중에 주님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같음 배경을 다룬 막4:3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출신입니다. 노를 짓는 일도 아주 배트랑 급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가 그다지 겁나는 곳이 아닌
자들입니다. 그런데 풍랑은 만났습니다. 저들이 주름잡고 저들이 지배하던 바다 앞에 결국 풍랑을 만나 그들의 모든 수단, 방법,
경험을 살려보았지만 별 볼일이 없습니다. 결국 두 손 바짝 들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도 자기 수단, 방법,
경험을 믿고 내세우다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도 그리 믿을 것이 못됩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할/ 여기서 주님을 깨웠다는 것은 그들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풍랑이 심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죽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종교적 제일 본능입니다.
제자들의
기도는 생명을 내어 건 기도입니다. 어떤 기도가 위력이 있고, 어떤 기도가 역사가 나타납니까? 하나님께 생명 걸고 하는
기도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생명 걸고 기도하다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았고 모세가 하나님께 생명 걸고 기도했더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됐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기도는 땀을 짜며, 눈물을 짜며, 또 피를 짜며 생명을 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 앞에, 풍랑 앞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어떤 문제라도 믿음으로 담대히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구하고 맡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하나는 문제 앞에 기도는커녕 낙심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믿음이 역사가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그 바닷물 속에 원수들이 수장되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상황 판단을 잘할 것
같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이 절박한 외침 앞에 예수님이 깨어나셨습니다. 깨어나셔서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첫 번째 주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폭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환경에 대하여 전혀 문제를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의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잠을 깨웠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무서워한다는 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지금 주님의 책망은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날 때 믿음이 없으면 환경이 두려워지고 사람이 무서워집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이웃에서든지 초조하고 쫓기고 불안하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제자들은
폭풍이 두려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다의 풍랑이 아닙니다. 오직 제자들의 믿음만이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음을 보시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없고,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없다.'는 뜻은 '네가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예수님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주 그분이 배 안에 계신 것은 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은 '바다와 폭풍을 꾸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의 능력으로 꾸짖은 것입니다. 아무나 꾸짖을 수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그분만이 자연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실 때 바다와 풍랑이 어떻게 됐습니까?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믿/
주님이 우리 문제를 꾸짖으시면 해결될 줄 믿습니다. 문제는 반듯이 해결됩니다. 폭풍도 지나가고 파도도 지나갑니다. /할/ 주님은 궁극적으로 반듯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는 풍랑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⑴환난은 주님이 계셔도 찾아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에게 환난이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시34: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할/
⑵자신을 바로 알고 겸손하라는 교훈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제자들도 풍랑쯤이야 자신들의 힘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감당을 못하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환란을 통하여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⑶환난은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은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부르짖는 마지막 기대였습니다. 환난을 만난 제자들에게 기도야말로 풍랑을
이기고 승리하는 절대적 무기였습니다. 시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아멘!/
⑷환난은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것은 곧 기도의 결과입니다. 기도의 응답입니다.
⑸환난은 신앙을 검증하는 통로입니다. 요셉은 17세의 청소년 때에, 형들의 시기질투로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하여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큰 시험이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축복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으며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성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감옥에서도 형통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약5:13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할/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이는 '깨어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귀한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7절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제자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기이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도,
바다도, 순종하는 고' 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연만물을 초월하신 예수님의 그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길의 풍랑도 잔잔케 하는 비결은 예수님을 우리 배에 모셔야 합니다. 배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⑴예배가 하나님을 모시는 현장입니다.
⑵기도가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개입시키는 통로입니다.
⑶순종이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방편입니다.
⑷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믿음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 꾸짖는다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꾸짖으실 때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으셨는데 그 단어가 귀신을 향하여 꾸짖으셨을 때 사용한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명하십시오, '내 가정아! 고요하고 잠잠할 지어다. 내 사업아 고요하고 잠잠할 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 속에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주님의 명령 한마디로 잠잠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세상 바다에도 잠잠해지고, 고요해지고 평안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은 주님께 생명을 걸고 기도하므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 받고 기이하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로에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들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문제, 그 환경 앞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성도들의 문제들을 향하여 '잔잔 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의심의 풍랑, 불안의 파도, 걱정의 공포, 또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가 다 고요하고 잠잠해져서 기이한 체험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이깁시다.
어떤 조건도 환경도 이깁시다.
그 비결은 오직 믿음입니다. 요일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