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새벽 묵상 자료








1월 10일(토) 요한일서 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망을 가진 자(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Everyone who has this hope in him purifies himself, just as he is pure.


소망을 가진 자”는 성경, 특별히 요한일서 3장 3절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에 대한 확실한 바라봄입니다.

요한일서 문맥에서의 소망은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3:1)
2. 장차 주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아질 것이라는 약속 (3:2) 
3. 그분을 그대로 뵙게 될 미래에 대한 확신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화(榮化)에 대한 소망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 (현재형 삶)

요한은 “소망을 가진 자”를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으로 정의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음 
    회개 없는 신앙에 안주하지 않음 
    반복적이지만 진실한 회개 속에 삶   

    소망은 거룩을 낳는 동력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 자기 기준 ❌

  • 세상 기준 ❌

  • 그리스도의 성품이 기준 ⭕

미래가 현재를 다스린다

  • 장차 될 영광이

  • 지금의 선택과 태도를 결정함

 종말 신앙이 윤리적 삶으로 이어짐 

요한일서 전체 흐름에서 본 ‘소망을 가진 자’

구분 설명
거짓 소망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
참된 소망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미워함
결과                  담대함, 확신, 거룩한 삶

“소망은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주를 다시 뵐 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요한일서–요한계시록의 소망 흐름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요한일서–요한계시록은 서로 떨어진 책이 아니라,
👉 **‘소망의 점진적 계시’**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야 정확해집니다.  

요한복음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소망의 흐름” 한눈에 보기

        소망의 초점            핵심 질문
요한복음                 영생의 시작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요한일서            영생의 확신과 검증                  “내가 정말 그 생명 안에 있는가?”
요한계시록          영생의 완성과 성취                      “그 생명은 어디로 완성되는가?”  


요한복음 : 소망의 시작

영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1.  영생 = 죽어서 가는 천국 ❌
2.  영생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오는 생명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소망의 출발점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생명을 받음

요한복음의 핵심 소망
1.  
“지금” 생명을 소유함
2.  빛 안으로 나아옴
3.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짐 (요 5:24)

소망은 선물로 주어진다

요한일서 : 소망의 

영생은 “확인되고 증명되는 삶”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영생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


요한일서 소망의 특징 
1. 빛 가운데 행함 
2.죄를 미워하고 회개함
3. 형제를 사랑함  

끝까지 거함(μένειν)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소망은 윤리적· 관계적 증거를 낳음  

요한일서의 긴장

  • 이미 영생을 가졌으나

  •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음

📖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요일 3:2)

👉 이것이 ‘이미–아직’의 소망 

3️⃣ 요한계시록 : 소망의 완성

🔹 감추어진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계 22:12)

  • 더 이상 믿음으로만 아는 하나님 ❌

  • 눈으로 뵈는 하나님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계 22:4) 


🔹 요한계시록의 소망

 눈물, 사망, 고통의 종결 (계 21:4)

어린양과의 혼인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과의 영원한 동거 

소망은 역사의 결말이자 영생의 완성


   세 권을 관통하는 소망의 문장

요한복음 : “생명을 얻었다”
요한일서 : “그 생명 안에 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 “그 생명이 완전히 드러난다”

신학적 한 문장 요약

“요한의 소망은 도피적 내세관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하고 끝을 확실하게 하는 생명의 소망이다.”


설교 구조로 압축하면
1. 받은 생명 (요한복음) 
2. 확인되는 생명 (요한일서)
3. 완성되는 생명 (요한계시록)



1월 9일(금) 요한일서 2:24-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원한 생명(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생명이니라.
And this is what he promised us--even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완성된 영원한 생명이 아니므로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적 관계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때 안다는 것(기노스코)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를 통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룰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그의 예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요일 2:4-5).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따라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삶
    둘째는 사랑 가운데 행하는삶
    셋째는 죄를 미워하는 삶
    넷째는 진리 가운데 거하는 삶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과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증거합니다.
    동행한다는(할라크)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주와 동행하려는 믿음으로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때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아시고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온갖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주와 동행하는 즐거움만 생각하고 누려봅시다.


    그를 안다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요일 2:4-5)

    👉 앎 = 삶의 변화

    • 빛 가운데 행함

    • 사랑 가운데 거함

    • 죄를 미워함

    • 진리에 머묾

    이것이 인격적 앎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
    하나님을 정보나 개념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살아 계신 분으로 관계 맺으며 아는 것을 뜻합니다. 

    1️⃣ 지식적 앎 vs 인격적 앎

    📘 지식적 앎

    •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앎

    • 성경 지식, 교리, 신학적 정보

    • 머리로 아는 믿음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 참되지만 구원과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음


    ❤️ 인격적 앎

    • 하나님을 ‘그분 자신’으로 아는 것

    •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앎

    • 사랑·신뢰·순종·교제가 포함됨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 기노스코)는
    👉 경험적·관계적 앎을 의미합니다.


    2️⃣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특징

    ① 하나님과 대화가 있다

    •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교제

    •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요 10:27)


    ②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간다

    • 무엇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지 점점 분별

    •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으로 순종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③ 죄에 대해 민감해진다

    •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관계의 아픔으로 느낌

    • 회개는 형벌 회피가 아니라 관계 회복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시 51:4)


    ④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향이 바뀐다

    • 문제보다 하나님을 먼저 찾음

    • 계산보다 신뢰가 앞섬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라” (잠 3:5)


    ⑤ 사랑이 삶으로 드러난다

    •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으로 연결

    • 신앙이 ‘형식’이 아니라 ‘삶의 열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1)


    3️⃣ 요한일서 관점에서 본 인격적 앎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를 안다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요일 2:4)

    👉 앎 = 삶의 변화

    • 빛 가운데 행함

    • 사랑 가운데 거함

    • 죄를 미워함

    • 진리에 머묾

    이것이 인격적 앎의 증거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신뢰하며 동행하는 ‘주님’으로 아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의 삶 속에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특히 요한일서의 흐름에서 매우 분명한 의미를 가집니다.

    핵심 성경(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요일 3:1)

    •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 (요일 3:2)

    •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요일 5:13)

    👉 즉, 장차 될 영광스러운 상태에 대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

    🔹 ① 현재의 삶이 달라진다

    소망은 미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음 
      회개 없는 신앙에 머물지 않음 
      빛 가운데 행하려는 실제적 삶 (요일 1:7)

    🔹 ② 죄와 타협하지 않는다

    소망은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거룩의 동력입니다.
    “어차피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 “주를 뵐 날이 있기에 지금을 정결하게 산다”

    🔹 ③ 인내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고난을 견디는 힘입니다.

    •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요일 3:1)

    • 당장 결과가 없어 보여도
      👉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걷는 태도

    소망이 없는 상태와의 대비

    소망을 가진 자       소망이 없는 신앙
       거룩을 추구함             죄에 둔감함
      회개가 지속됨            자기합리화
     주의 재림을 의식함              현세 중심
      정체성이 분명함          신앙이 형식화됨

    한 문장 요약

    소망을 가진 자란, 장차 주를 뵐 것을 믿기에 오늘의 삶을 정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 신학)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 =

    • 무한한 시간 ❌

    • 천국 티켓 ❌

    • 하나님을 ‘아는’ 관계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는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언약적 교제를 뜻합니다.

    언제 시작되는가?

     요한일서 5:13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믿는 자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생명입니다.

    • 이미 시작됨 → 현재적 영생

    • 완성될 것 → 미래적 영생

    영원한 생명의 근원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핵심 :  영생은 행위의 보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거룩한 삶의 관계

    요한일서는 영생을 가진 자의 특징을 분명히 말합니다.

    요일 3: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영생은윤리적 열매를 반드시 낳습니다. 

    • 사랑

    • 빛 가운데 행함

    • 죄를 미워함

    • 회개하는 삶

    ⚠️ 영생 ≠ 방종의 면허 

     “속히 오리라”와 영원한 생명 (연결)

    예수께서 “속히 오리라” 하신 이유는
    영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일 3:2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은 영생을 소유함
    👉 그날에는 영생을 완전히 드러냄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시작되어
    재림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적 관계입니다.







    **영원한 생명(永遠한 生命)**은 성경에서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1️⃣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의 관점)

    📖 요한복음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생명
    (지식이 아니라 교제·연합)


    2️⃣ 언제 시작되는가?

    ❌ 죽은 후에만 시작되는 것 아님
    지금 이미 시작됨

    📖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일서 5:13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소망 + 현재의 소유


    3️⃣ 영원한 생명은 ‘누가’ 가지는가?

    📖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4️⃣ 영원한 생명의 특징

    ✨ 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생명

    📖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가운데 거하지 않음


    ✨ ② 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회개 없는 완전함 ❌
    → 회개하는 삶 ⭕


    ✨ ③ 사랑으로 증명되는 생명

    📖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

    → 영원한 생명은 열매로 드러남


    5️⃣ 흔한 오해 정리

    오해 성경적 진리
    영원한 생명 = 천국 입장권
    영원한 생명 = 관계적 생명
    죽고 나서 시작
    지금부터 누림
    믿는다 말만 하면 됨
    빛·사랑·진리로 나타남

    6️⃣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이며, 빛과 사랑과 진리로 증명되는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永遠한 生命)**은 성경에서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1️⃣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의 관점)

    📖 요한복음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생명
    (지식이 아니라 교제·연합)


    2️⃣ 언제 시작되는가?

    ❌ 죽은 후에만 시작되는 것 아님
    지금 이미 시작됨

    📖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일서 5:13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소망 + 현재의 소유


    3️⃣ 영원한 생명은 ‘누가’ 가지는가?

    📖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4️⃣ 영원한 생명의 특징

    ✨ 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생명

    📖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가운데 거하지 않음


    ✨ ② 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회개 없는 완전함 ❌
    → 회개하는 삶 ⭕


    ✨ ③ 사랑으로 증명되는 생명

    📖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

    → 영원한 생명은 열매로 드러남


    5️⃣ 흔한 오해 정리

    오해 성경적 진리
    영원한 생명 = 천국 입장권
    영원한 생명 = 관계적 생명
    죽고 나서 시작
    지금부터 누림
    믿는다 말만 하면 됨
    빛·사랑·진리로 나타남

    6️⃣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이며, 빛과 사랑과 진리로 증명되는 생명이다.

    원하시면
    👉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생명 vs 천국”
    같은 주제로 더 깊이 이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생명 vs 천국”

    아주 중요한 세 주제입니다. 요한일서의 흐름에 맞춰 하나씩, 그러나 서로 연결되도록 정리해 드릴게요.


    1️⃣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핵심 명제

    영원한 생명은 ‘느낌’이 아니라 ‘근거’ 위에 있는 확신이다.

    📖 요한일서 5:13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요한은 성도들이
    막연히 기대하도록 쓴 것이 아니라
    👉 ‘알게 하려’ 기록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의 3가지 성경적 근거 (요한일서)

    객관적 근거: 예수 그리스도

    📖 요일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 확신의 중심 = 내 믿음의 강도 ❌ / 예수의 실재 ⭕


    내적 증거: 성령의 증언

    📖 요일 3:24

    “그의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 성령은

    • 죄를 미워하게 하고

    • 진리를 사랑하게 하며

    •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


    외적 열매: 삶의 변화

    📖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순종은 구원의 조건 ❌
    ✔️ 구원의 증거 ⭕


    ⚠️ 주의

    • 의심이 있다고 구원 없음 ❌

    • 회개 없는 안일함은 위험 ⭕


    2️⃣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결론부터 말하면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는 그것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은 신앙 고백은 드러난다.


    📖 요한일서의 결정적 구절

    📖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떠남의 이유는
    잃어버림 ❌ / 본래 소유하지 않음 ⭕


    왜 영원한 생명은 잃지 않는가?

    ① 생명의 성질 때문

    📖 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라”

    → 영원한 생명 =
    ❌ 조건부 생명
    하나님의 선물


    ② 생명의 근원이 ‘그리스도’이기 때문

    📖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내가 붙잡는 생명 ❌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 ⭕


    ⚠️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모습 성경적 판단
    죄 가운데 계속 거함 영생의 증거 없음
    회개 없이 안주 자기 기만
    떠났으나 끝까지 빛을 거부 처음부터 거듭나지 않음

    📖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안에 거하지 않음)


    3️⃣ 영원한 생명 vs 천국

    ❗ 매우 중요한 구분

    구분 영원한 생명 천국
    본질 생명 장소/나라
    시작 지금 죽음 이후 완성
    성격 관계 상태
    중심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의 통치

    📖 성경의 관점

    ✔️ 영원한 생명

    📖 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관계의 생명


    ✔️ 천국

    📖 마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


    중요한 진리

    천국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지,
    천국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다.

    • 영원한 생명 = 자격

    • 천국 = 완성


    🧭 전체 요약 한 눈에

    ✔️ 영원한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생명
    ✔️ 구원의 확신은 예수·성령·열매 위에 세워짐
    ✔️ 참된 영생은 잃지 않으나, 거짓 신앙은 드러남
    ✔️ 천국은 영생의 결과이지 근원은 아님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신학적 연결

    요한계시록은 요한일서의 종말적 완성
    요한일서는 요한계시록의 현재적 적용

    핵심 주제 연결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신학 연결

    하나님은 빛

       어린양의 영광

            빛은 인격이며 심판 기준

    하나님은 사랑

        어린양의 피   

             사랑은 십자가에서 정의로 드러남

    적그리스도

    짐승·거짓선지자

              영의 미혹 → 제국적 체계

    세상과 구별

    바벨론 심판

              세상 사랑의 종말

    이기는 자

    이기는 자의 상급

                  믿음 = 승리

    담대함

    인 맞은 성도

                 심판 앞에서의 담대함

    적그리스도 개념의 확장

    • 요한일서
    • →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다”
    • (교리·영적 미혹)

    • 요한계시록
    • → 그 영이 정치·경제·종교 체계로 구체화됨
    • (짐승,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영’으로 오고, 나중에 ‘체계’로 완성된다.

    Ⅳ.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

    •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일곱 교회→ “교회는 종말을 기다리며 지금 심판받는다”

    • 요한 신학→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진리는 거짓이고,
    • 진리 안에 서지 않는 사랑은 미혹이다”



    1월 8일(목) 요한일서 2:18-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적그리스도(2: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Who is the liar? It is the man who denies that Jesus is the Christ. Such a man is the antichrist--he denies the Father and the Son. 


    적그리스도(敵基督, Antichrist)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며,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거짓 세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이를 한 인물로만 한정하지 않고, 영(정신)· 사상· 운동· 체계까지 포함해 다층적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

    👉 ‘적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는 요한서신에만 직접 등장합니다.

    • 요한일서 2:18 /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요한일서 2:22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 요한일서 4:3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 요한이서 1:7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적그리스도라”

    핵심 요지

    • 예수의 성육신, 메시아 되심, 주권을 부인

    • 교회 안에서 일어나 성도를 미혹함 

    적그리스도의 핵심 특징 (성경 종합)

    구분 내용
         정체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인
        방식    거짓 가르침, 미혹, 대체
       위치    종종 교회 안에서 활동
       본질    “적(反)”이자 “대신(代)”
     시대성         말세 전반에 지속적으로 존재

    ※ ‘anti’는 반대 + 대신하다 두 의미를 모두 가짐 

    적그리스도 vs 관련 종말 개념

    성경은 여러 표현으로 같은 실체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표현 성경 강조점
    적그리스도    요한서신      그리스도 부인
    불법의 사람    살후 2장      하나님 대적, 자기를 신격화
    작은 뿔    다니엘 7장      권세·박해
    짐승    계시록 13장      정치·종교적 체계
    거짓 선지자    계 13, 19장      기적을 통한 미혹

    👉 서로 다른 인물이라기보다, 같은 악의 세력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성경적 균형은 둘 다입니다.

    • ✔️ 현재적:
      → 이미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

    • ✔️ 종말적:
      → 마지막 때 집약적으로 드러날 대표적 인물/체계

    📖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오늘 교회에 주는 분별 기준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미래 추측 대상이 아니라 현재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분별 질문

    1.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가?
    2. 십자가와 성육신을 왜곡하지 않는가? 
    3. 복음보다 다른 대안적 구원을 말하지 않는가?
    4. 은혜 없이 권력·성공·체험을 절대화하지 않는가?

    적그리스도의 핵심 전략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다른 것을 중심에 두는 것” 

    요약 한 문장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체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말세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용어의 의미

    •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 anti = “대적하여”, “대신하여”

      •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자 또는

    • 단순히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거짓 영적 권세를 포함합니다. 

    요한일서의 핵심 가르침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단수 인물보다 현재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는 영적 실재로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적그리스도는 이미 왔고, 여럿입니다.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

     핵심 기준 :

    • 예수 =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부인 

    적그리스도의 특징 - 요한서신 중심

    1. 교회 안에서 나옴

      •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일 2:19)

    2. 정통 신앙의 언어를 사용함

      • 겉모습은 경건, 내용은 왜곡

    3.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을 훼손

      • 참 하나님·참 인간이심을 부인

    4. 성도를 미혹함

      • 특별한 지식, 새 계시, 다른 복음 주장 

    단수 적그리스도 vs 복수 적그리스도

    구분 설명
    복수 지금도 활동 중인 거짓 교사·영
    단수 종말에 나타날 최종적 대적자 (계 13장, 살후 2장)

    ➡ 요한은 현재적 분별에 초점을 둡니다.
    “언젠가 올 인물”보다 지금 속이고 있는 영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요한일서의 흐름에 따르면:

    1. 기름 부음(성령)을 의지함 (요일 2:20, 27)

    2.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거함

    3. 사랑과 진리로 행함

    4.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방식은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함입니다. 

    한 문장 요약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신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이미 세상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적그리스도’의 관계

    동일 개념
    이라기보다 기능적으로 연결된 종말론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 흐름에 가장 정확합니다. 

    기본 결론 한 줄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종말론적·정치적 구현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집약된 형태이다. 

    성경 용어 비교

    구분            적그리스도     짐승
    주요 본문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초점           영·가르침      권세·체제
    성격       미혹하는 영      핍박하는 권력
               많음      주로 단수
    활동 영역         교회 안      세상 권력

    ➡ 요한은 서신에서는 교리적 미혹,
    계시록에서는 제도·권력의 박해를 보여줍니다. 

    두 짐승의 구조(계 13장)

    ① 바다에서 나온 짐승

    • 정치·군사·경제 권력

    • 사단에게서 권세를 받음

    • 온 세상을 다스림

    • 성도를 핍박함

    적그리스도의 ‘왕적(王的) 모습’ 

    ② 땅에서 나온 짐승 (거짓 선지자)

    • 종교적·영적 미혹 담당

    •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함

    • 표적과 기사를 행함

    • 짐승의 표를 강요

    적그리스도의 ‘선지자적 모습’

    📌 요한일서의 “거짓 교사” 개념과 직접 연결됨 

    사탄의 모조 삼위일체

    참 하나님 사탄의 모조
    성부 용(사탄)
    성자 바다 짐승
    성령 땅 짐승(거짓 선지자)

    ➡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모방입니다.
    대적이라기보다 대체하려는 존재입니다. 

    ‘666’과 적그리스도

    • 불완전의 극치 (7에 미치지 못함)

    • 하나님의 인을 모방한 가짜 표

    • 신앙과 경제·삶을 결합한 통제 수단

    단순한 숫자 암호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인간 권세를 절대화하는 체제”의 상징  

    요한일서와의 신학적 연결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예수의 성육신 부인            짐승 숭배
    거짓 가르침            거짓 기적
    교회 안 미혹           세상 통치
    성령의 기름 부음          하나님의 인

    같은 영, 다른 무대 

    성도에게 주는 경고

    1. 충성의 대상이 분명한가?

      • 편리·안전·번영 vs 어린양

    2. 경배의 방향은 어디인가?

      • 성공·권력·체제 vs 하나님

    3. 표를 선택하는 삶인가, 인을 지킨 삶인가?

    👉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싸움은 정보 전쟁이 아니라 예배 전쟁입니다.  

    한 문장 종합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정치·종교 권세로 집약된 종말의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경배의 대상’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탄의 모조 왕국이다.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성경, 특히 요한일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용어의 의미  
      ἀντί(안티) : ‘반대하여’뿐 아니라 ‘대신하여’라는 뜻도 포함   
       →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 자리를 대신하려는 존재 

    요한일서의 가르침 (핵심 본문)

    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단수 + 복수 모두 사용

    • 말세에 나타날 최종적 적그리스도

    • 동시에 이미 활동 중인 많은 적그리스도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그가 적그리스도니…” 

     정의가 분명함
       
    예수 =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핵심을 부정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부인

    요한일서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만이 아니라 ‘영(spirit)’으로 역사 

    적그리스도의 본질 (요한 신학 관점)

    구분 내용
         출처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요일 2:19)
        특징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가르침
     핵심 문제                                       그리스도론 왜곡
        상태                  빛이 아닌 어둠, 진리가 아닌 거짓

     즉, 적그리스도는 노골적 무신론자보다,
    예수를 말하지만 참 예수를 왜곡하는 자로 나타남  

    바울· 요한계시록과의 연결 
      살후 2장 :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계 13장 : 짐승(권세·숭배·기적)

     요한일서 : 현재적·영적 분별 강조
     계시록/바울 : 종말적·권세적 실체 강조
      - 서로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 

     신앙적 적용 (요한일서 맥락)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 논의는 항상 이것과 연결됩니다. 
      빛 vs 어둠 
      진리 vs 거짓 
      사랑 vs 미움 
      아이–청년–아비의 영적 성숙

     결론 :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기름부음을 받아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1월 7일(수)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The world and its desires pass away, but the man who does the will of God lives forever.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6에 나오는 말씀으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속한 삶의 본질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1. 육신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ῆς σαρκὸς)

    • 타락한 육체가 원하는 욕망  

    • 하나님을 배제한 채 쾌락·본능·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구

    내용 예

    • 음란, 방탕, 탐식, 중독

    • “하고 싶다”, “느끼고 싶다”가 기준이 되는 삶

    특징

    • 감각 중심

    • 즉각적 만족을 추구

    • 성령의 다스림과 반대됨(갈 5:16–17)  

    2. 안목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ῶν ὀφθαλμῶν)

    • 눈으로 보고 소유하려는 욕망

    • 외형·비교·소유에 집착하는 마음

    내용 예

    • 재물, 명품, 성공, 외적 조건

    • 남과 비교하며 생기는 탐심·시기

    특징

    • “보는 것”이 가치 판단 기준

    • 소유가 곧 행복이라는 착각

    • 믿음이 아닌 시야(보이는 것)으로 사는 삶(고후 5:7과 대조) 

    3. 이생의 자랑 (ἡ ἀλαζονεία τοῦ βίου)

    • 현재의 삶(지위·능력·성취)을 자랑하는 교만

    •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기 확신

    내용 예

    • 학벌, 권력, 업적, 영적 교만

    • “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괜찮아”

    특징

    • 자기중심성

    • 의존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나’

    • 바리새인의 태도와 연결(눅 18:11–12) 

    세 가지의 공통점

    공통 특징 설명
    출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
    방향 하나님이 아닌 자기 중심
    결과 영적 생명 약화, 하나님 사랑과 충돌
    종말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감”(요일 2:17) 

    창세기·예수님의 시험과의 연결

    이 세 가지는 성경 전체에 반복되는 유혹의 구조입니다.

    • 하와의 타락 (창 3:6)

      • 먹음직 → 육신의 정욕

      • 보암직 → 안목의 정욕

      •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 이생의 자랑

    • 예수님의 시험 (마 4장)

      • 돌로 떡 만들라

      • 세상 영광 보여줌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 예수님은 말씀으로 모두 이기심 

    요한의 결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이는 세상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 삶의 기준과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 세상에 살되

    • 세상에 속하지 않고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살라
      (요일 2: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성경에서 단순한 종교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이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 핵심 성경 구절

    •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신앙의 고백(말)보다 **순종(행함)**이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 마태복음 12:50 /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와의 참된 가족 관계에 들어갑니다.

    •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영원성과 연결됩니다.

    2.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추상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① 구원의 뜻

    • 요한복음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믿음이 하나님의 뜻의 출발점

    ② 거룩함의 뜻

    •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삶의 방향과 성품의 변화

    ③ 사랑과 순종의 뜻

    •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계명 준수 = 사랑의 표현

    3. ‘말하는 자’ vs ‘행하는 자’

    구분 말만 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신앙 고백 중심 순종 중심
    기준 자기 확신 말씀
    열매 외적 행위 삶의 변화
    결과 주님이 “모른다” 하심 주님과의 참된 관계

    (마 7:22–23 참조)

    4. 영적 성숙 단계와의 연결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구조와 연결하면)

    • 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단계

    • 청년: 하나님의 뜻을 싸우며 행하는 단계

    • 아비: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된 단계
      →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은 성숙의 결과이지 단번의 행위가 아닙니다.

    5. 한 문장 요약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믿음을 말로 증명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으로 드러내는 자이며,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열매가 나타난다.”


    핵심 본문 정리

    📖 고린도전서

    • 육신에 속한 사람 (σάρκινος / σαρκικός)

      • 고전 2:14, 3:1–3

    • 신령한 사람 (πνευματικός)

      • 고전 2:15, 3:16

    📖 요한일서

    • 아이 – 청년 – 아비

      • 요일 2:12–14

    👉 두 서신은 같은 성령의 관점에서,  구원 이후, 사람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가를 설명함 

    통합 구조 한눈에 보기

    육신적 신자 → 싸우는 신자 → 신령한 성숙자 

     단계별 통합 비교표 (핵심)

    통합 단계 고린도전서       요한일서 영적 특징         핵심 문제 / 열매
    ① 미성숙 단계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아이 구원받았으나 육의 지배 큼        분쟁·시기·사람 자랑
    ② 성장 단계 신령함을 배워감 (고전 2:12)        청년 말씀으로 육을 이김           영적 전투와 승리
    ③ 성숙 단계 신령한 자 (고전 2:15)        아비 성령의 분별과 안정           하나님을 깊이 앎

     본질적 연결 설명

    🔹 ① 육신에 속한 자 = 요한일서의 ‘아이’

    고전 3:1–3

    “내가 너희를 신령한 자로 말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말하노라”

    • 아이의 특징

      • 젖을 먹음 (기본 진리만 반복)

      • 사람 중심: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 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으나 육의 논리로 판단

    👉 요한일서의 아이 = 고린도전서의 육신적 신자 

    🔹 ② 싸우는 단계 = 요한일서의 ‘청년’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 청년의 핵심:

      • 말씀이 안에 거함

      • 악한 자와의 실제 전투

    • 고린도전서에서는:

      • 하나님의 영을 받음

      • 세상 지혜를 분별하기 시작

    👉 육에서 성령으로 이동하는 전환 구간 

    🔹 ③ 신령한 자 = 요한일서의 ‘아비’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아비의 특징: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

      • 흔들리지 않는 중심

    • 신령한 자의 특징:

      • 성령의 분별

      • 십자가의 지혜로 판단

    👉 사역이나 감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증거 

     신학적으로 중요한 균형

    ❗ 오해하면 안 되는 점

    • 육신에 속한 자 ≠ 불신자

    •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으나 육신적

    • 요한일서의 아이도 죄 사함을 받은 자

    👉 문제는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고린도전서는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를 묻고,
    요한일서는 ‘그 지배 아래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준다.

    7️⃣ 자기 점검 질문

    • 내 판단 기준은 사람·감정·환경인가?

    • 말씀과 성령이 내 안에 거하고 있는가?

    • 나는 여전히 논쟁하는 신자인가, 분별하는 성숙자인가?







    1️⃣ 큰 구조 한눈에 보기

    육에 속한 상태 → 영적 성장 → 성령에 속한 성숙

    요한일서의 세 단계는
    👉 육을 벗어나는 과정,
    👉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 단계별 연결 설명

    🔹 ① 아이 (τεκνία / παιδία) — 구원은 있으나 미성숙

    (육의 영향이 강한 단계)

    본문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특징

    • 죄 사함의 은혜는 분명함 (구원의 확신)

    • 그러나 여전히:

      • 감정 중심

      • 환경에 쉽게 흔들림

      • 말씀보다 경험·사람에 의존

    • 고린도전서의 **‘육신에 속한 신자’**와 유사 (고전 3:1–3)

    연결
    👉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에 속한 영향’ 아래 있는 상태
    👉 신앙의 기준이 “느낌·사람·상황”

    🔹 ② 청년 (νεανίσκοι) — 영적 전쟁과 승리의 단계

    (육을 이기기 시작하는 단계)

    본문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심이요”(요일 2:13–14)

    특징

    • 말씀이 안에 거함 (암송·순종·적용)

    • 시험과 유혹이 있으나 싸워서 이김

    • 신앙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

    •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 vs 육의 실제 전투 경험

    연결
    👉 육에 속한 삶에서 벗어나, 성령을 따라 살기 시작
    👉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단계”

    🔹 ③ 아비 (πατέρες) — 하나님을 아는 깊은 성숙

    (육을 초월한 성령의 성숙 단계)

    본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요일 2:13–14)

    특징

    •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

    • 상황·사역·감정에 흔들리지 않음

    • 말씀, 능력, 체험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앎

    • 로마서 8장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

    연결
    👉 더 이상 육이 중심이 아님
    👉 존재 자체가 성령의 열매가 됨


    3️⃣ 핵심 비교 표

    단계 영적 상태 육과의 관계 중심 특징
    아이 구원받음 육의 영향 큼 죄 사함의 기쁨
    청년 성장 중 육과 싸워 이김 말씀과 전투
    아비 성숙 육을 초월 하나님을 앎

    4️⃣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

    • 아이 단계 ≠ 정죄 대상
      출발점

    • 문제는 아이에 머무르는 것

    •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말함: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성령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5️⃣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나는 지금 아이의 안정, 청년의 싸움, 아비의 깊이 중 어디에 있는가?

    • 내 신앙의 중심은
      👉 *‘죄 사함’*인가,
      👉 *‘말씀의 능력’*인가,
      👉 *‘하나님 자신’*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 아닌 ‘육(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 의미

    • 육(σάρξ, sarx): 단순한 몸이 아니라
      👉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 본성,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상태

    •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
      👉 성령의 인도 없이, 인간적 욕망·이성·세상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2️⃣ 핵심 성경 구절

    •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유다서 1:19

      “육에 속한 자요 성령이 없는 자라”

    3️⃣ 특징 정리

    •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판단과 감정을 우선함

    • 영적인 진리를 어리석게 여기거나 이해하지 못함

    • 신앙이 있어 보여도 능력은 부인함 (형식적 신앙)

    • 갈라디아서 5장의 육체의 일이 드러남
      (시기, 분쟁, 분노, 탐심 등)

    4️⃣ 대비 개념

    구분 육에 속한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
    지배 원리 육, 자아 성령
    판단 기준 세상 지혜 하나님의 지혜
    열매 혼란, 분열 사랑, 화평
    영적 상태 미성숙 성장·성숙

    5️⃣ 신앙적 적용

    • 육에 속한 사람불신자만을 말하지 않음
      👉 고린도교회처럼 구원은 받았으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신자도 포함

    • 핵심 질문:

      “나는 지금 육을 따라 반응하는가,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가?”

    원하시면
    👉 ‘육에 속한 신자 vs 영에 속한 신자’,
    👉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단계와의 연결,
    👉 설교용 요약으로도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교인의 종류는 크게
    교적 상태에 따른 분류(원입교인, 유아세례교인, 세례교인), 신앙생활 참여도/태도에 따른 분류(감투교인, 인력거교인, 오락교인 등), 교단 내 직분에 따른 분류(장로, 집사, 권사 등), 그리고 신앙적 성숙도에 따른 분류(영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등)로 나눌 수 있으며, 이는 교파나 교회마다 다르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1. 교적 상태에 따른 분류 (일반적 구분)
    • 원입교인: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
    • 유아세례교인: 유아기에 세례를 받고 성장하는 교인.
    • 세례교인 (입교인):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 

    2. 신앙생활 태도 및 참여에 따른 분류 (유머/비유적 표현)
    • 감투교인: 직책(감투)을 받아야만 교회에 나오는 교인.
    • 인력거교인: 심방을 가야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
    • 오락교인: 친목회, 야유회 등 행사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교인.
    • 벙어리교인: 오래 신앙생활해도 기도생활이 없는 교인.
    • 종이교인: 비 오면 안 나오는 등 출석이 잦지 않은 교인. 

    3. 교단 내 직분에 따른 분류 (한국 개신교 일반적)
    • 항존직: 장로, 집사, 권사 등 직분이 유지되는 직분.
    • 임시직: 전도사, 서리집사 등 임기가 있는 직분. 

    4. 신앙적 성숙도에 따른 분류 (성경적 표현)
    • 영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신실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세상적이고 육체적 정욕을 끊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
    • 불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으로도 표현). 

    5. 교파에 따른 분류
    •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 교리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며, 각 교파 안에도 다양한 교단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8월호>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But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unto him: neither can he know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한글개역성경>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심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자연인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며, 둘째, 육신적인 사람은 구원은 받았어도 성경적 기준대로 살지 않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며, 셋째로 영적인 사람은 구원받고 난 후 자기 기준을 버리고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사람을 구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자연인들도 교회에 다닐 수 있고 새벽 기도에 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에서는 그들이 사회적 지위나 돈 많이 내는 일이나 교회 일에 쏟는 열성들을 고려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제직을 맡기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초, 중, 고, 대학부, 청년부 교사로도 임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각 부서장으로도 임명하여 써먹고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자연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때 그에게는 성령의 열매도 없고 구령의 열매도 없으며 십 년, 이십 년 교회 생활을 했다 해도 귀로 얻어들은 것 외에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지도 못하며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보다는 육신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자신이 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로는 회의적이며 믿음보다는 기분이 앞서 있어 자기의 감정의 고저에 따라 믿음의 생활이 달라지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먼저 영적 배고픔을 느낀다. 자기 안에 새로이 태어난 속 사람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겉 사람처럼 물질적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겉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세 끼 이상을 먹는다. 속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분량을 먹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구약성경부터 읽지 말고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이렇게 읽어 가는 것이 좋으며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분량을 읽지 말고 3장 정도만 읽고 그 안에 어떤 주제가 있었는가를 음미하는 것이 좋다. 말씀을 읽을 때는 의심하지 말고 기록된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롬 10:17). 말씀 외에 기도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숨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다. 구원받은 것만을 알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육신 안에 있는 속 사람이 고사(枯死)해 버리지 않았겠는가?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말라져 버린 것이다. 핏덩어리를 낳았으면 물로 씻기고 젖을 먹여야 자라지 않겠는가?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났으면 말씀의 물로 씻고(엡 5:26) 순수한 젖을 먹어야 한다(벧전 2:2).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개역성경 삭제]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1,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지 않은 어린 아기라고 한다(고전 3:1-4). 어린 아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나라 교단 교회들에서는 많은 아기들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다. 그들이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수 있겠는가? 마귀는 그런 어린 아기들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건드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아기들은 영적 전쟁이란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어린 아기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성령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마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영적 아기들과 교제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시킬 수도 없기에 맡기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들은 쓸데없는 일들에 관여하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일로 가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이다. 당신의 교회는 한 달에 몇 명의 혼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가? 아직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끝까지 견뎌야 알 수 있는데 아직도 날짜가 다 차지 않았는가? 그런 엉터리 교리가 성경 어디에 있던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 아닌가!(막 12:24) 또 한 가지 일은 혼들을 구령했으면 그 혼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시켜야 한다. 이때 썩은 음식인 틀린 성경이나 성경적 교리가 아닌 교단 교리로 양육하게 되면 머리가 혼미해져 방언이나 하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거리로 산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런 자들 중 상당수가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각종 회의, 성결서약, 효 운동, 구제, 반정부데모, 심지어 기독교 정당까지 만들고 있겠는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육신적인 사람들이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란 쓰레기통에 페인트 칠하지 않은 것과 페인트 칠한 것의 차이일 뿐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그렇게 불리지 않도록 처신을 고쳐, 자기 기준에서 성경 기준으로 확실히 돌이켜야 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고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자기의 은사대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구령의 열매는 물론이요 성령의 열매를 내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세워 주고 교회의 기둥으로서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산다. 무엇보다도 진리로 오류를 판단하며 죄들을 질책하고 다가올 심판과 지옥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가 성경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판단하지 않게 된다(고전 2:15).

    <한글개역성경>에는 자연인(Natural man)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했고 육신적인 사람(Carnal man)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했다. 이렇게 된 성서를 가지고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개역성경>을 가지고 교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을 이제야 알 것 같은가? 성경은 진리인데 진리를 말해야 할 자들이 오류를 말하면서 진리인 체했을 때 거기에 무엇이 살아남아 있겠는가? 이것은 <개역성경>이 몸, 혼, 영(갈 5:23)을 몸과 영혼이라고 써서 성경의 진리를 플라톤의 철학으로 바꿔치기한 어거스틴과 존 칼빈의 신학과 같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신학교 교수, 교단 교회 목사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들(Spiritual man)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Natural man)이거나 아니면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나 영적 양식으로 먹고 마시며 숨쉬지 않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즉 아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젖 외에 꿀, 사과, 빵,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체질인데도 청장년 행세를 하며 겉멋을 부리고 강단에 올라서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돈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기에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있다(마 15:14). 성경 순서도 모르는 목사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제직들, 성경이 필요 없는 교인들이 5만 개의 교회를 점유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BB





    1월 6일(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들(2:12) 

  •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on account of his name.
  •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 have known the Father.
  •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the word of God lives in you, and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 사도바울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3) - 시기 분쟁과 같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사람 
    신령한 사람(고전 2:15)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

    사도 요한 

    하나님의 자녀(요일 2:12) -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은 사람
    아비들(요일 2:13a)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
    청년들(요일 2:13b) - 악한 자를 이긴 사람
    아이들(요일 2:14) - 아버지를 아는 사람 





  • 용서(forgiven)와 승리(overcome)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아비들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겨야 합니다.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주하여 강한 자가 된 것입니다.
  •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영적 분류로, 신앙의 연령·성숙 단계를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1️⃣ 아이들 (τεκνία / παιδία)

    • 의미 : 영적으로 거듭난 자, 믿음의 시작 단계

    • 특징

      •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앎

      •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관계의 출발

      •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시기

    • 핵심 말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

    👉 신앙의 출발점: 관계와 은혜 중심 

    2️⃣ 청년들 (νεανίσκοι)

    • 의미: 영적으로 성장하고 싸우는 단계

    • 특징

      • 말씀으로 강건함

      • 악한 자(사탄)를 이김

      • 영적 전쟁과 사명에 적극적

    • 핵심 말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신앙의 실천기: 말씀과 싸움 

    3️⃣ 아비들 (πατέρες)

    • 의미: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

    • 특징

      • “태초부터 계신 이”(그리스도)를 깊이 앎

      • 경험과 분별, 영적 권위

      • 가르치고 세우는 역할

    • 핵심 말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

    👉 신앙의 완숙기: 인격적·관계적 깊이 

    ✨ 정리 한눈에

    구분 중심 초점 핵심 특징
    아이들 관계 죄 사함, 아버지를 앎
    청년들 싸움 말씀, 승리
    아비들 깊이 그리스도를 앎

    이 분류는 나이가 아니라 영적 성숙도를 말합니다. 
    한 교회 안에 이 세 단계가 모두 건강하게 존재할 때 공동체가 균형을 이룹니다.


  •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요한일서 2:12-14)

  •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가 신앙 생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와 인근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이들은 모두 초대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이단의 도전과 외부 압박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다양한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성도들이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1. 자녀들아,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12절)

    사도 요한은 먼저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신앙의 첫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할 때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가 확신해야 할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아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13절)

    그 다음,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비들’은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하나님을 의미하며,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깊이 추구하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합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이러한 성숙한 신자들은 교회의 리더가 되기도 하며, 다른 신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신앙의 아비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은 젊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길잡이가 되어주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3. 청년들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13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청년들’은 신앙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영적인 전투와 시험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청년들은 신앙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신앙의 힘을 성장시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마주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청년들과 같은 불굴의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4. 영적 성숙의 단계와 그 중요성 (14절)

    요한일서 2장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영적 성숙의 각 단계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은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라.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반복해서 각 단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앙생활에서 이 단계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킵니다. 신앙의 시작에서부터 성숙까지, 우리는 각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신앙 상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말씀을 통해 성장하며,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들처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힘을 기르고,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의 시작 단계인 자녀들, 신앙의 중간 단계인 청년들, 그리고 신앙의 성숙한 단계인 아비들 각각의 특징을 이해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떤 단계에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은 자들이며,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강해지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영적인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기도문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처럼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시고, 청년들처럼 강한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아비들처럼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각자가 신앙의 단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각자의 신앙 단계를 인정하고, 그 단계에 맞는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쓰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임 (12절)
  • 아비들에게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함 (13절)
  • 청년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임 (13절)
  •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임 (14절)
  • 아비들에게는 다시 한 번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함 (14절)
  • 청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함 (14절)
  • 나는 지금 신앙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 자녀, 청년, 아비 중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신앙의 성숙을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봅시다.
  •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자녀 아비 청년(요한일서 2:12-14)

    성경에서 ‘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내가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어긋나게 하는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여길 때 감히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러한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여기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험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냥 십자가에 죽으셔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분이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다만 나의 죄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실천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죄인이야’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들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을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대해야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좋은 일을 하며 산 사람이 살인을 하고 악한 짓만 일삼은 죄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기가 쉽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다만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정을 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고 정작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임을 인식함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깨달았을 때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임을 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이나 인격, 감정 등을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가 형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신자를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는 세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을 두고 신자의 신앙 수준을 세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에 자녀와 같은 신앙, 아비와 같은 신앙, 청년과 같은 신앙이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신앙의 높고 낮음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신앙의 세 단계를 의도한 말씀이라면 ‘아비들아’ 다음에 ‘청년들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청년의 호칭 다음에 아비의 호칭이 오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세 호칭이 신앙의 수준 차이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내용 사이에 본문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본문은 사랑과 연관이 있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르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리 자세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가르친들 배우고 듣고 기억한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의 문제가 정작 우리에게 짐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것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의 말씀을 함으로써 사랑이란 짐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사함을 얻는 것과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 중 어느 것이 수준 높은 신앙입니까? 분명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신앙의 수준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호칭은 신앙의 수준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호칭을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자녀, 아비, 청년이란 호칭은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녀, 청년, 아비는 하나의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죄사함을 얻은 것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로 표현한 것이고,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비로 표현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이기는 것을 청년으로 표현한 것은 청년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그리스도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악한 자를 이기는 자로 살지 못한다면 형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자로서 사랑하게 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를 용서 안에 있게 한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면 우린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의 용서함으로 형제를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짐을 지워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실천 여부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별의식이 있다면 결국 형제에 대해서도 차별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자입니다. 어떤 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천 여부를 보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몫이나 지키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이, 청년, 아비(요한일서 2:12-14)


  •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 관해 세 가지 주요 견해가 있다. 먼저 세 호칭은 세 개의 각각 다른 그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세 호칭은 육체적 혹은 영적인 연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 세 호칭 중에 ‘자녀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고, ‘아비들’과 ‘청년들’은 수신자 전체 안에 있는 두 개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셋째, 세 호칭 모두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 다수 학자는 두 번째 견해를 주장하지만,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의 특징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어느 특정 그룹이 아니라 수신자 전체의 특징을 가리킨다. 전체 수신자들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또한, 요한의 글쓰기 특징이 하나의 그룹을 지지한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는 서로 다른 단어가 같은 뜻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표현을 다르게 하여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의 특징은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그런데 이 세 요소는 종말에 새 언약의 백성이 누릴 복으로서 모든 자가 구분 없이 함께 누릴 복이다. (렘 31:33-34)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 사이에 어떤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수신자들이 사랑받는 자녀, 성숙한 아비, 승리한 청년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이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도록 격려한다.

    1. 시작하는 말

    요한일서에는 단순한 헬라어 문장이나 분명한 표현 뒤에 해석하기 까다로운 난제들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일서 2:12-14이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13)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14)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저자는 2:12-13에서 ‘자녀들’(tekn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차례대로 언급한 후 2:14에서도 ‘아이들’(paid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언급한다. ‘자녀들’(teknia)에서 ‘아이들’(paidia)로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저자는 왜 세 호칭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동안 제기되었던 주장들을 검토해 보고 좀 더 설득력 있는 주장과 근거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학자들의 견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다. 
    세 호칭을 각각의 구분된 세 그룹으로 보기도 하고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한 그룹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 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두 그룹으로 보기도 한다.

    가. 세 그룹

    세 호칭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육체적인 혹은 영적인 연령대의 청중으로 보는 것이다. 육체적인 연령대로 본다는 것은 교회 안에 어린이와 청년과 아버지와 같은 연령대의 구성원들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면서 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각각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 이것을 영적인 연령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로 불린다는 것이다. 자녀는 믿음이 어린 초기 단계의 신앙인을 가리킨다.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은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단계이다. 청년들은 그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이를 가리키는데, 잘못된 가르침과 싸워 이긴 성숙한 사람이다. 아비는 가장 성숙한 사람인데,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전체 성도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해 반박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저자는 수신자들을 ‘자녀들아’ 혹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편지 전체에 걸쳐 권면하고 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요 13:33; 21:5) 저자 요한은 이제 예수의 마음으로 그의 성도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용례는 ‘자녀들’/‘아이들’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어느 특정 연령이나 단계를 대변한다는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더욱이 스몰리(Smalley)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저자가 왜 자녀들-청년들-아비들이라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순서를 취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를 포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 두 그룹

    다수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 이 주장은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성도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학자들은 ‘자녀들’/‘아이들’과 달리 ‘아비들’과 ‘청년들’은 특정 그룹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신약 성경에서도 교회 안의 장년 그룹과 청년 그룹을 가리키는 각각의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며 교회 구성원을 늙은이와 젊은이로 나눈다. (딤전 5:1) 베드로도 또한 한편으로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하고(벧전 5:1),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고 한다. (벧전 5:5) 따라서 요한이 수신자들을 아비들과 청년들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다른 한편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두 그룹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다. 트레빌코(Trebilco)는 ‘아비들’과 ‘청년들’이 남자만 가리킨다고 한다. 하울던(Houlden)은 ‘아비들’과 ‘청년들’은 교회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한다. 크루즈(Kruse)는 육체적 연령에 따라 아비들과 청년들로 나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신약 본문에서도 정확하게 ‘아비들’과 ‘청년들’이라는 두 그룹으로 나뉜 용례는 없다. 늙은이와 젊은이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어떤 용례에도 ‘아비들아’라는 호칭은 찾아보기 힘들다. 브라운(Brown)은 ‘아비들아’라는 호칭이 장로를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로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공동체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이 스스로에게는 장로라 부르면서(요이 1; 요삼 1) 왜 다른 장로들에게는 장로 대신에 아비라 부르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그런 용례도 찾기 힘들다.

    또한, 제일 앞에 나오는 ‘자녀들’/‘아이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고 같은 가족 코드의 단어인 ‘아비들’과 ‘청년들’은 바로 앞의 ‘자녀들’/‘아이들’과 다른 성격으로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그룹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문에 직면할 수도 있다. 각 특정 그룹이 과연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적 특성이 있었을까? 청년들만 악한 자와 싸워 이긴 것일까? 아비들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것일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청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몰랐을까? 아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기지 않았을까?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다. 한 그룹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에 대한 각기 다른 호칭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다드(Dodd)가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마샬(Marshall)도 이 주장을 따른다. 다드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성부 하나님으로 보고 결국 2:14에서 아이들의 특징과 아비들의 특징이 같기 때문에 세 호칭은 모두 한 그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이 잘 지적했듯이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태초부터 계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마샬은 다드가 수사적 표현에 근거해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으로 본 것을 받아들이며, 모든 수신자가 용서를 받은 자녀의 특성,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아비의 특성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의 특성이 있다고 한다.

    왓슨(Watson)은 두 그룹 견해를 지지하며, 한 그룹 견해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아비들’이나 ‘청년들’이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용어로 쓰인 예가 다른 신약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비들’이나 ‘청년들’을 ‘자녀들’과 같은 레벨의 호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 견해는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 2천 년 동안 어떤 견해도 100% 만족할 만한 답변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학자들은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스몰리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양면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두 그룹과 한 그룹의 가능성을 모두 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핵심은 요한의 수신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정통 교훈에 확실하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 자체라고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가 좀 더 유력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일서 문맥

    자녀들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요한일서 수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성도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비들과 청년들에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가장 뚜렷한 이유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의 특징은 서로 구분되지 않고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문맥이 한 그룹 해석을 지지한다.

    가. 앞서 자녀들은 요한일서에서 성도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의 수신자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 부르면서 권면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은 죄 용서를 받은 것이고(요일 2:13), 아버지를 안 것이다. (요일 2:14) 그런데 자녀들의 이 두 특징은 요한일서 다른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한 화목제물이심을 알고 믿는 자가 죄 용서를 받는다. (요일 2:2)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요일 1:7) 이러한 죄 용서의 은혜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요일 1:9) 따라서 자녀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를 받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녀들의 특징은 아비들의 특징과 다르지 않다. 잠시 후 밝히겠지만,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자녀들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비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다른 본문들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들과의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을 계속 보여준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 아버지도 계신다 (요일 2:23) 자녀들의 특징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국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함께 있다. 따라서 자녀들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사귐이다. (요일 1:3) 적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다. (요일 2:22) 결국,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과 아들을 아는 ‘아비들’의 차이는 없다. 다른 한편 ‘자녀들’/‘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연결된다. 자녀들의 특징은 아버지를 아는 것인데,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버지와 함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핵심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일 3: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요 3:16)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이것은 곧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이고 아비들의 특징이다.

    나.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 아버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스토트(Stott)는 ‘태초부터 계신 이’가 로고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한다. 브루스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으로 본다. 그러나 ‘태초부터 계신 이’는 1:1에 비춰봤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은 편지를 시작하며 ‘태초부터 계신 이’를 보고 듣고 만졌다고 한다. (요일 1:1) 그리고 이어서 ‘태초부터 계신 이’가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요일 1:1-2) 물론, ‘태초부터 계신 이’(o] h=n avp V avrch/j)에는 중성 관계대명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남성 관사가 쓰인 ‘태초부터 계신 이’(o` a vpV avrch/j)와 다르다. 그런데도 중성 관계대명사는 이 편지가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브라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과 사역을 포괄한다고 보고, 스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message)로 본다. 따라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아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자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런 내용이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전반적으로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이다. (요일 5:13) 그런데 2:13-14은 이런 자들을 아비들이라 부르지만, 요한일서 다른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요일 5:1)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요한이 ‘자녀들’이라 부르는 자이다. (요일 4:4) 따라서 아비들은 자녀들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신앙 햇수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은 자녀요, 아비다. 사도는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는 ‘아비’라고 칭찬한다. ‘아비’라는 호칭을 통해 그들의 성숙한 신앙을 격려하고 있다.

    다.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겼다. (요일 2:13) ‘악한 자’(o`ponhroj)는 남성 관사와 형용사가 사용되어 마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어둠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를 주관한다. 요한복음 17:15에서는 남성일 수도 있고, 중성일 수도 있게 쓰여서 ‘악한 자’를 뜻할 수도 있고, ‘악’을 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남성임이 분명히 드러나 마귀를 가리킨다. 물론, 스몰리가 적절하게 밝혔듯이 남성과 중성, 즉 ‘악한 자’와 ‘악’ 사이에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다. 요한은 사탄 혹은 마귀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속 ‘악한 자’를 사용한다. (요일 5:18-19)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긴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어떤 이들은 그들의 회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그들이 악한 자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해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셨다. (요 16:33) 이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긴 자이다.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자를 이긴 자다. 다른 한편 청년들의 이김을 거짓 교사를 물리친 것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악한 자는 적그리스도, 즉 거짓 교사를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 공동체에 들어와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믿음을 지켰다. (요일 4:1-4; 5:4-5) 그리고 마침내 거짓 교사들은 공동체를 떠났다. (요일 2:18-19) 이에 사도는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며, 청년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두 종류의 이김은 사실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그를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때 잘못된 가르침을 옳게 분별하여 거짓을 배격하고 참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전체에서 수신자들은 ‘이긴 자’ 혹은 ‘이기는 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때 수신자들은 ‘자녀들’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자의 조종을 받는 거짓 교사들을 이긴 자이다. (요일 4:4)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역이며, 마귀의 통치 아래 있는 영역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세상을 이겼고 지금도 이기고 있다. (요일 5:4) 따라서 이기는 것은 청년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자녀의 특징이다. 다른 한편 아비의 특징으로 나온 기독론적 지식과 세상을 이기는 것이 연결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 (요일 5:5) 결국, 자녀와 아비와 청년은 악한 자를 이기고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측면에서 같은 사람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다.

    2:14에서 청년들의 또 다른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는 자의 특징이 죄 고백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10) 이런 측면에서 청년들의 특징은 자녀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또한, 죄를 짓는 자는 악한 자, 마귀에게 속한 자다. (요일 3:8)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이다. (요일 3:9) 하나님의 씨의 정체에 대해서는 해석학적 논란이 있다. 다만 말씀을 가리킬 확률이 좀처럼 배제되지 않는다. 이처럼 청년들의 특징은 곧 수신자들의 특징이고 자녀들의 특징이다. 요한은 사람의 연령이나 체력에 상관없이 악한 자를 이긴 사람을 청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악한 자를 이긴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라. 소결론

    요컨대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각각 요한일서 모든 수신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이들 각각의 특징은 요한일서에서 수신자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녀와 아비와 청년이라 칭찬하면서 수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기 원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정체성에 기초해서 사도의 권면을 받으라고 한다.

    두 그룹이나 세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다. 자녀들의 특징은 기초적인 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청년들이나 아비들의 특징은 더욱 성숙한 신앙의 특징을 말한다고 본다. 그러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기초적이며, 태초부터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좀 더 성숙한 신앙 특징일까? 아들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기는 청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의 신앙특징보다 덜 성숙한 모습일까? 과연 요한은 여기서 신앙의 단계 혹은 차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신자들의 신앙의 모습을 확인해 주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 공동체는 모두 죄 용서를 받고 아버지를 아는 사랑 받는 자녀들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숙한 자들이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이긴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다.

    4. 저자의 표현 기법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근거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글쓰기 특징이다. 요한은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자주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가. 요한복음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쓰는 예는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등장한다. 요한은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라는 세 동사를 번갈아 사용하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 1:10-12) 이러한 특징은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기록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도 등장한다. ‘어린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라는 단어가 번갈아 가며 사용된다. (요 21:15-17) 각각의 단어는 원래 조금씩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내용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혹자는 avgapa,w/file,w를 구분하여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담긴 함의를 주장한다. avgapa,w는 신적인 차원의 사랑을, file,w는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요한복음의 글쓰기 특징에 대한 오해다. 요한복음은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f ile,w로 나타내기도 하고(요 5:20; 16:27),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 것도 avgapaw로 말하기도 한다. (요 3:19; 12:43)

    나. 요한일서 전체

    이러한 요한 문헌의 글쓰기 특징은 요한일서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1:1-4에서 요한은 그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 (gra,fw)라는 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특징은 편지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죄’(amartia)와 ‘불의’(avdikia)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도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물론, 시인하는 것은 공개적인 고백을 의미하고 믿는 것은 내면적 변화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장에서 두 단어를 바꾸어 써도 두 구절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또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타이틀도 서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요일 5:1, 5)

    다. 요한일서 2:12-14

    요한의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심지어 2:12-14안에도 나타난다. 요한은 tekni,a와 paidi,a를 바꿔가며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gra,fw의 시상을 바꿔가며 같은 표현을 반복한다. 2:12-13은 현재형인 grafw를 사용하고 2:14은 아오리스트형인 egraya를 사용한다. gra,fw와 e;graya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영어권의 대표적인 번역 성경들이 각각 서로 다르게 번역한다. ESV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단순 현재형(I write)으로 번역한다. 이와 달리 NASB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현재 완료형(I have written)으로 번역한다. NIV는 모두 동일하게 단순 현재형으로 번역한다. (I write) 한글 성경도 서로 다르다. 개역개정은 단순 현재(‘쓰는 것은’)와 과거(‘쓴 것은’)로 번역한다. 새번역은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쓰는 까닭은’) 공동번역도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씁니다’)

    다른 한편 혹자는 현재형은 저자가 지금 쓰고 있는 요한일서를 가리키지만, 아오리스트형은 그가 이미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이서 아니면 다른 잃어버린 문서를 가리킬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요한삼서 9절에 나오는 e;graya는 저자가 이미 쓴 문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Egraya ti th/| evkklhsia |\ avllVo filoprwteu,wn auvtw/n Diotre,fhj ouvk evpide,cetai h`ma/jÅ /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 9) 그러나 브라운이 잘 반박하였는데 만약 요한일서 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형이 어떤 앞선 문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아오리스트형을 현재형보다 뒤에 썼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미 쓴 것을 먼저 언급하고 지금 쓰고 있는 것을 나중에 언급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는 gra,fw와 e;graya는 문체의 변형(stylistic variant)일 뿐 의미상으로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고 한다. 만약 있다면 아오리스트형 e;graya는 좀 더 강조 반복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두 동사는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해리스(Harris)는 반복의 특성상 gra,fw는 좀 더 현재 쓰고 있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고, e;gra ya는 상대적으로 저자가 이미 쓴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 리우는 grafw를 ‘I am writing’으로 e;graya를 ‘I have written’으로 각각 번역하면서 서신서로서 요한일서 문체의 특징을 언급한다. gra,fw는 저자의 관점에서 현재 쓰고 있다는 말이고, e;graya는 독자의 관점에서 이미 쓴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종의 서신적 아오리스트(epistolary aorist) 라는 말이다. 그러나 포터(Porter)는 현재 행동을 위해 사용되는 아오리스트(aorist for present action)의 신약 용례를 조사하며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터에 따르면 서신을 쓸 때 저자는 자신과 독자의 관점을 시제를 사용하여 복잡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간 관점에서 적절한 시상(verbal aspects)을 가지고 표현한다. 이때 서신적 아오리스트는 전체 포괄적 글쓰기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2:12-14에 나오는 grafw와 egra ya 둘 다 전체 서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gra,fw에 대한 설명은 해리스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현재 동사의 진행적 성격은 요한일서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요한은 현재 동사 a`marta,nw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요일 3:6)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도무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은 동사의 현재형을 사용하여 이 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 e;graya에 대한 설명은 포터의 설명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요한은 편지의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아오리스트 egra ya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요일 2:21, 26; 5:13) 이때 요한은 자신의 편지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gra,fw는 현재 글 쓰는 과정을, e;graya는 전체 글쓰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해리스의 견해든지 리우의 견해든지 포터의 견해든지 본 연구의 논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즉, graf w와 e;graya가 요한일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변함이 없고, 저자의 반복 강조 의도가 드러나는 것도 분명하다.

    라. 소결론

    요컨대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전체 혹은 요한일서 2:12-14 자체에 나타난 요한 문헌의 글쓰기 예들을 볼 때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도 또한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상의 특징을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한 요한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자녀도 되고, 아비도 되고, 청년도 된다. 그들은 자녀로서 죄 용서 받고,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며, 아비로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며, 청년으로서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자들이다.

    5. 새 언약적 요소

    세 호칭의 특징들은 모두 새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는 요한일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일서에는 새 언약적 요소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2:12-14도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는데, 결국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모두 새 언약 백성으로 묘사된다. 새 언약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모두에게 구분 없이 새 언약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단계나 차등을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먼저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자.

    가. 새 언약의 세 가지 요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의 약속을 주셨다. 새 언약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해진다. 셋째 우주적인 죄 용서가 일어난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등이 새 언약의 내용이다.

    “(33)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34)

    하나님의 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참고 겔 36:27) 옛 언약에서는 의무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새 언약 하에서 모든 이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진다. 이러한 종말론적 약속은 이사야도 언급한다.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다만 예레미야는 이러한 신지식이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죄 용서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호와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 즉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새겨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게 된다.

    나.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

    카슨(Carson)은 요한일서 2:20, 27이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먼저 요한일서가 얼마나 구약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직접적인 구약 인용은 없지만, 요한일서는 구약 본문을 군데군데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화목제물이나 계명에 순종하는 개념 등은 구약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또한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요한의 권면을 새 언약 관점에서 해석한다. (요일 2:20, 27)

    옛 언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과 같은 중보적 교사(intermediary teachers)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제 그러한 교사가 필요 없고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 하신다. (렘 31:34) 요한은 바로 이러한 새 언약의 배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영지주의적 교사가 필요 없다고 한다.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들 안에 있어 사도들이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태는 요한일서 2:12-14을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속죄(atonement) 개념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다음 2:12에 나오는 죄 사함이 예레미야 31:34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은 새 언약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2:14에 나오는 아버지를 아는 것도 예레미야 31:34의 성취, 즉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여호와를 알게 되는 새 언약의 성취로 해석한다.

    그런데 김진태보다 앞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에 주목한 대표적인 이는 말라테스타(Malatesta)이다. 그는 먼저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요한일서에 빈번하게 나오는 ei=nai evn와 me ,nein evn의 용례를 분석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이루어지는 신앙의 내면화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내면화는 곧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의 약속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새 언약 백성은 바로 이러한 교제와 내면화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죄 사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가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 언약의 요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물론, 예레미야 31:33-34(70인 경, 렘 38:33-34)과 요한일서 2:12-14 사이에 언어적 유사성이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70인 경 예레미야 38:33은 말씀의 내재화를 위해 dwswno,mouj mou eivj thn dia,noian auvtw/n라고 하지만, 요한일서 2:14은 o logoj tou/qeou/ evn u`mi/n me,nei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oida를 사용하는 반면에 요한일서 2:13-14은 ginw,skw를 쓴다.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i[lewj e;somai tai/j avdiki aij auvtw/n kai . t w/n a `ma rt i w/n a uvt w/n o uv mhmnhsqw/ eti라고 하는데, 요한일서 2:12은 avfewntai u`mi/n ai ama rtiai dia to onoma auvtou라고 한다.

    그러나 주제적 유비는 분명하다. 앞서 다른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2:12-14에는 죄 용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라는 새 언약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의 다른 본문에도 새 언약 개념이 등장한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요일 2:20, 27) 그들에게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언제든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요일 2:2) 또한,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며 죄짓지 않도록 한다. (요일 3:9) 이처럼 요한일서와 예레미야의 유비에 근거해서 2:12-14을 새 언약의 성취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차등이나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새 언약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새 언약의 복을 동일하게 함께 누린다.

    다. 반론과 재반론

    그런데 새 언약적 배경을 주장하며 본 연구의 논지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톰슨(Thompson)은 예레미야 31:34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가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로 치환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말라테스타도 예레미야 31:34에 비춰봤을 때 청년들과 아비들은 자녀들 안에 있는 하위 단위의 두 그룹을 나타낸다고 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는 모두를 포괄하는 말인데, 이것이 요한일서에서 청년들과 아비들로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청년들과 아비들은 공동체 안의 청년과 노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결국 언약적 복을 누림에 있어 차이가 없다. 작은 자나 큰 자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충만하다. 그러나 소위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은 육체적 혹은 영적 성숙에 있어 구별된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고, 청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이들은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모두 차별 없이 공통된 복을 누린다. 결국, 한 그룹 견해를 지지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구원의 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이 ‘작은 자’와 ‘큰 자’를 각각 가리킨다면 청년들과 아비들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요한일서는 아비들을 먼저 언급한 후 청년들을 언급한다. 이것도 예레미야 34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서상으로도 자연스럽지 않다.

    라. 소결론

    따라서 자녀들과 청년들과 아비들은 새 언약의 복을 공동으로 누리는 새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이들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모두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이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들이다.

    6. 왜 세 호칭일까?

    지금까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서로 다른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요한 문헌에서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성도를 묘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특별히 영적 가족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다. 예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엮어 주신다. (요 19:26-27)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형제’라 불림을 받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고 소개받는다. (요 20:17) 이러한 제자들의 정체성은 이미 서문에서 밝혀진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te,kna qeou/)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이서에도 가족 용어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의 수신자들을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 한다. (요이 1) ‘부녀’로 번역된 “kuria”는 특정 개인 수신자라기보다 교회공동체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앞에 관사가 없을 뿐 아니라 요한이서의 내용이 특정 개인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교회공동체의 문제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한이서의 특징은 마지막 절에도 나타난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요이 13) 요한은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묘사하며 끝인사를 한다. ‘네 자매’(h` avdelfh/j sou)는 저자가 속한 교회를 일컬으며, ‘자녀들’(tatekna)은 그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서 가족 용어인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을 사용하여 교회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은 요한 문헌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수신자들을 이러한 호칭으로 부른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격려일 것이다.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칭찬하고 확신시켜서 그들의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문맥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2:12-14의 내용은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격려하는 내용이고 이어지는 2:15-17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의 삶에 대한 권면을 말한다.

    2:12-14이 격려의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슈나켄버그(Schnackenburg)는 2:12-17을 앞 단락과 구분되는 하나의 단락으로 보면서 2:12-14은 2:15-17에 나오는 명령을 준비하는 격려로 본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수신자들의 구원을 먼저 확신시킨 후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톰슨은 아예 2:12-14의 단락 제목을 “Encouragement to the Faithful”이라고 하며 2:15-17에 나오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와 연결된다고 한다. 리우는 2:12-17에 대한 제목을 “Encouragement to Persevere”라 하면서 격려의 기능으로서 2:12-14을 강조한다. 마샬은 신자가 새로운 신분으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2:12-17의 주제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2:12-14에서 신자의 신분을 확신시킨 다음에 신자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호칭도 이러한 격려의 문맥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저자는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아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라고 칭찬한다. 또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 성숙한 자, 곧 아비들이라고 칭찬한다.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패기를 칭찬하며 그들을 청년들이라 부른다. 이러한 칭찬을 기초로 이어지는 문맥에서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요일 2:15-17)

    7. 결론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의 대상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이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한일서 문맥, 저자의 표현 기법, 새 언약적 요소.

    첫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요한일서 수신자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르게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 안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 따라서 마치 세 그룹 혹은 두 그룹 사이에 어떤 육체적, 영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구분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둘째, 요한 문헌은 자주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표현을 풍성하게 한다. 

    요한복음에서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는 믿음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이다. (요 1:10-12) ‘어린 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도 모두 각각 번갈아 가며 같은 뜻을 나타낸다. (요 21:15-17) 요한일서 안에서도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grafw, 요일 1:1-4), ‘죄’(a`martia)와 ‘불의’(avdikia,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 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가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심지어 2:12-14 안에서도 “gra,f w”와 “e;graya”는 그 뜻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서 반복 강조하는 표현으로 나온다. 이처럼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단어는 다르지만, 모두 요한일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다른 표현을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의 특성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예레미야 31:33-34에 약속된 새 언약의 복이다. 

    새 언약의 복은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구분 없이 누릴 종말론적 복이다. 다시 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자녀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아비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청년들이 누릴 복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구분 없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며 말씀의 내주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각각 어느 특정 그룹을 가리킨다기보다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사랑받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또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성숙한 자라 격려한다. 그리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통해 악한 자를 이겼다고 칭찬해 준다. 이런 칭찬을 기초로 2:15부터 나오는 권면을 받아들이게 한다. 곧,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가족을 비유해서 3가지 호칭으로 구분해서 불렀습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죄 용서를 강조할 때는 “자녀들아”라고 불렀고,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들아”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을 강조할 때는 “아비들아”라고 불렀고, 흉악한 자를 이겼다는 것을 강조할 때는 “청년들아”라고 불렀습니다.

    1) 아이들

    요한일서 2장 12절에 “자녀들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테크니아’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갓 태어난 아이를 빗대어 영적으로 갓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순간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는 것은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린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의 말은, 너희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속하게 되었다는 표현으로 “자녀들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문 14절에서 “아이들아”라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이들은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일생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 될 때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아비들

    여러분~!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비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장하는 자녀들의 인생관도 가장인 아비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아비들”이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들이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어야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도 요한 당시에 잘못된 가르침을 강조하는 이단 세력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번 믿었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요일 1:8, 10). 또한 계명을 무시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요일 2:4, 11).

    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가면 결국, 구원에 이른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이단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단에 꼬임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비들”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분 아니라, 신앙의 가족들을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했습니다.

    “아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경험적으로 아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요즘은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아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적으로 성숙한 “아비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보존되고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영적인 아비들과 목회자를 존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목회자가 아닐지라도 성경, 기도, 예배, 교제, 전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한 “아비”의 단계에 이르게 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지금까지 올바른 신앙이 전수되었습니다.

    3) 청년들

    “청년들”은 “아비들”로부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잘 배워서 제법 성장한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청년들”의 특징을 “악한 자”를 이긴 것으로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도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힘만으로는 악하고, 흉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어둠의 권세인 사탄을 완전히 짓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청년들”도 악하고 흉악한 사탄을 이길 수 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서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했다”는 것은 평소에 영적 건강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도 생활도 많이 했고,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깊은 신앙의 교제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무기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서 공격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에베소서 6장에서 권면 했습니다(엡 6:11-17). 그러니까 “아이들”의 단계에서 “청년들”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뒀을 때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청년들”이야말로 영적 싸움에서 맨 앞에 선봉에 서서 적군인 사탄과의 혈투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영적 군사였습니다.

    그런 “청년들”이 없다면 하나님의 가족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됩니다. 영적 최전방에서 과감하게 사탄과 그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주의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의 신앙에서 “청년들”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악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을 계속해서 물리치면서 결국 “아비”의 단계로 성숙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굳건하게 지키고, “아이들”과 “청년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영적 “아비들”로 견고하게 세워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게헨나(지옥)  γέεννα, ης, ἡ Storng number 1067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Pronunciation  [ gĕĕnna ]  
    Etymology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5:29,30, 10:28, 18:9, 23:15,33, 막9:43,47, 눅12:5, 불의 지옥, 마5:22, 18:9. [상징적으로] 약3:6.
    • 관련 성경  /  지옥 불(마 5:22, 18:9, 약 3:6), 지옥(마 5:29, 막 9:45, 눅 12:5).

    1516. 가이(골짜기) גַּי Storng number 1516

    1. 협곡.  2. 계곡.  3. 평평한 곳  
    Pronunciation  [ gayʼ ]   
    Etymology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Old Testament  /  30회 사용
    •  1. Noun 협곡, 계곡, 평평한 곳, 저지대, 왕하2:16, 겔6:3, 35:8.
    • 관련 성경  / 골짜기(민21:20, 삼상13:18, 겔39:11), 가이(삼상17:52), (소금) 골짜기(왕하14:7, 시60편표제).

    2011. 희놈(Hinnôm) הִנֹּם  Storng number 2011  
    Pronunciation  [ Hinnôm ]

    Old Testament  /  2회 사용
    •  1. 고유명사, 남성 여부스 족 사람으로 보임 ‘힌놈’.
    • 관련 성경  / 힌놈(수 15:8, 18:16).


    천국(天國)  παράδεισος

    1월 5일(월)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Yet I am writing you a new command; its truth is seen in him and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

    새 계명(엔토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옛 계명(old command) εντολην παλαιαν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 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 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 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 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왜 ‘새’ 계명인가?

    • 구약에도 “이웃 사랑”은 있었습니다(레 19:18).

    •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기준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즉, 십자가의 희생적· 무조건적 사랑이 기준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 특징

    1. 기준의 새로움 :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2. 관계의 초점 : 율법 준수보다 서로를 향한 삶의 태도

    3. 증거의 역할 : 사랑이 곧 제자됨의 표지 

    옛 계명과의 관계

    • 새 계명은 옛 계명을 폐기하지 않음

    • 오히려 율법의 완성(마 22:37–40, 롬 13:10) 

    오늘의 적용

    •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섬기기

    • 교회 안팎에서 그리스도의 성품 드러내기

    새 계명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 가르침을 말해요.

    • 내용 :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 의미 : 이전의 율법을 폐기한다기보다, **예수님의 사랑(희생·용서·섬김)**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강조한 거예요.

    • 핵심 포인트 :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조건 없는 사랑

      • 그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됨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렇게 전해져요(짧게 인용):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원하면 이 계명이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학교, 친구 관계 등)도 예로 설명해 줄게요.


    옛 계명(옛 계명, Old Commandment)은 성경에서 주로 이미 주어졌고 처음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의 계명
    특히 율법과 사랑의 계명을 가리킵니다.

    1.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쓰노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라”

    2. 의미 정리

    • 처음부터 주어진 계명
      → 하나님의 뜻은 새롭게 바뀐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선포됨

    • 율법의 핵심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신 6:5, 레 19:18)

    • 말씀으로 이미 들은 계명
      → 새로 창안된 규칙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다시 확인된 진리

    3. 옛 계명과 사랑

    옛 계명의 핵심도 결국 사랑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웃을 사랑하라

    즉, 내용은 옛 것이지만,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짐

    4. 새 계명과의 관계

    구분              옛 계명 새 계명
    시점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용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기준            율법             십자가의 사랑
    성격            명령            본을 따른 삶

    5. 핵심 요약

    • 옛 계명 : 처음부터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

    • 새 계명 :  그 사랑이 예수 안에서 구체적 삶으로 드러난 것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적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왜 ‘새’ 계명인가?

    구약에도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계명은 기준과 깊이에서 새롭습니다.

    구분              기존 계명 새 계명
    사랑의 기준              나 자신        예수님의 사랑
    사랑의 범위           이웃 중심       제자 공동체 → 모든 사람
    사랑의 방식         윤리적 요구       십자가적 자기희생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새로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

    • 자기희생적 사랑 :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심

    • 무조건적 사랑 : 배신할 제자들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신앙적 의미

    1. 제자의 표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2. 교회의 본질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3. 성령 안에서 가능한 계명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롬 5:5).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요한서신에서 본 ‘새 계명’의 확장

    “옛 계명이며 새 계명” (요일 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해석 포인트

    • 옛 계명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핵심(예수님의 가르침)

    • 새 계명 :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됨

      • 성령 안에서 현재적으로 살아 움직임

    👉 새로움은 내용이 아니라 실체와 능력에 있음 

    빛과 어둠의 기준 :  형제 사랑 (요일 2:9–11)

    상태 기준
    빛 가운데 있음             형제를 사랑함
    어둠 가운데 있음            형제를 미워함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요한의 논리

    • 신앙 고백 ≠ 참 신앙의 증거

    • 사랑의 실천 = 빛 가운데 거함의 증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드러냄 

    계명의 요약과 완성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 신학의 핵심 구조
    믿음 → 사랑 → 순종

    •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반드시

    • 형제 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남 

    설교용 정리 (3대지 구조)

    제목 예시

    「새 계명, 빛 가운데 사는 삶의 기준」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이다 (요일 2:7)

    • 새 계명은 갑작스러운 윤리가 아니다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본질

    📌 적용

    우리는 더 새로운 가르침을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대지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이다 (요일 2:8)

    •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됨

    • 성령 안에서 지금도 역사함

    📌 적용

    사랑은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이다 

    대지 3. 새 계명은 신앙의 ‘판별 기준’이다 (요일 2:9–11, 3:23)

    • 빛과 어둠은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분됨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 신앙

    📌 적용

    “나는 옳은가?”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라 

    Ⅲ. 묵상용 요약 (개인·소그룹)

    묵상 질문

    1. 나는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2. 나의 신앙은 말에 머무는가, 삶으로 증명되는가?

    3.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방식이 내 사랑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묵상 기도문

    주님,
    말로만 빛에 있다 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빛 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한 줄 묵상

    “새 계명은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라는 부르심이다.”


    새 계명, 말이 아니라 삶이다(요한일서 2:7–11, 3:23)

    Ⅰ. 들어가는 말 (도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말은 신앙적인데 마음은 차가워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정통입니다.”
    “나는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은 식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빛 가운데 있느냐, 어둠 가운데 있느냐?”

    그 기준은 사랑입니다.

    Ⅱ. 본문 해설과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입니다 (요일 2:7)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옛 계명이라”

    사랑은 새로운 유행이 아닙니다.
    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본질입니다.

    🔔 예화 ①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부부
    결혼 초에는 작은 일에도 고맙다 말하던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연해져 버린 것입니다.

    👉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 진리를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입니다 (요일 2:8)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사랑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후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 예화 ② – 말로만 하는 신앙
    어떤 성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성격이 원래 이래서 사랑 표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격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3️⃣ 새 계명은 신앙의 진짜 기준입니다 (요일 2:9–11, 3:23)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있다 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니라”

    요한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
    “어둠에 있다”

    🔔 예화 ③ – 교회 안의 어둠
    교회 안에서
    말씀과 봉사는 열심인데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며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 사랑 없는 신앙은
    방향을 잃은 신앙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요한일서 3:23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요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 오늘의 적용

    1. 오늘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십시오

    2. 마음으로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3. 말이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Ⅳ. 맺는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어둠의 마음을 품고 살았음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새 계명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줄 결론

    “새 계명은 설교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두 번 인용하셨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자비 부족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복음서를 읽은 우리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계층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점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비(혹은 그 결여)라는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주님께서 호세아의 그 구절을 처음 사용하신 것은 당시 세리였으며 후에 사도이자 복음사가가 된 마태를 부르실 때였습니다. 마태 자신이 그 장면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9:9-13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그들은 죄인들이다”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과 먹고 마시리라. 내가 그들을 찾아 회개하도록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우리 자신도 죄인이 아닌 양 “죄인”들을 피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스스로를 “죄 없는 자”로 분류하게 했고, 그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 이는 구약에서 인용된 구절로 신약에서 두 번 인용되었습니다(잠언 3:34, 칠십인역(참고: 칠십인역은 구약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신약에 나오는 구약 본문 약 2/3가 이 번역본에서 유래함)):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겸손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리새인과 그들과 같은 자들이 부족했던 것이며, 우리 역시 종종 부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예는 누가복음 18:9-1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강탈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멸하시느니라.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보지 않으시느니라. 우리가 한 일이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아무 가치도 없느니라.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나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를 무시했고, 우리도 자비 없는 종교적 행위를 추구하며 종종 이를 외면한다.
        주님께서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두 번째 장면은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2:1-8
    “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陳設餅)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죄 하지 않았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글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율법의 글자에 따르면, 그들은 옳았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고린도후서 3:5-6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누군가 영 없이 글자만 고집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글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요구할 때는, 예를 들어 안식일에 누군가 치유받기 위해서라면, 이 계명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자비는  어떤 계명보다도 컸고 지금도 큽니다왜냐하면 가장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이 말하듯: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일서 4:20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진정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식일 계명이나 다른 모든 계명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하위였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만 알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날짜와 계절과 양에 관한 요구사항까지.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는 정통했으나, 율법의 정신, 즉 겸손과 자비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위선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내는 데는 첫째였으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에는 막내였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이 율법의 핵심이자 더 중하고 더 중요한 사항이다. 이 또한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로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마음의 종류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십일조를 내거나 다른 어떤 희생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우리가 바리새인인지 하나님의 참된 종인지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서로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입니다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풉니다반면 바리새인들은 자비 없이 희생만 합니다. 바리새인과 그와 같은 자들에게는 종종 외적인 것,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만과 이기심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1-7, 13-14이 말하듯이: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바리새적 행위의 주요 특징은 위선이다. 바리새인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마음은 불경건하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은 그 짐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길고 끝없는 기도를 드리면서도 동시에 과부의 집을 삼켜 버린다. 겉으로는 경건하고 신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비심 하나 없이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정도만큼 우리도 바리새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짓 종교가 종종 행하는 바이다: 바리새적 즉 위선적이고, 부담스럽고, 무자비하며, 교만한 것이다. 반면 참된 종교는 야고보서 1:27이 정의하는 바와 같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앞에 참되고 흠 없는 경건은 완벽한 교리나 수많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비와 사랑의 경건입니다.
        바리새인들로 돌아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을 흉내 내는 자들을 예수님의 행동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고치려 하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셨거나 치유받은 자들에게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르치신 대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1-6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가 가르치신 바가 이러하니 그가 행하신 바도 이러하니라 그러므로 그가 기적을 행하신 후에 숨어 계셨느니라
     
        결론하자면: 정의, 자비, 믿음, 그리고 서로 사랑함이 중요합니다.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무엇이라도 바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종교적 축제나 규칙은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그분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의 사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이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시대에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13-16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에는 여전히 빛, 우리의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을 지키고, 주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비추어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도록 합시다. 죽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며, 우리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행합시다. 미가 6:8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듯이: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보혜사, 대언자(파라클레토스.  )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중보자(메시테스.  mĕsitēs ) μεσίτης, ου, ὁ Storng number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Pronunciation [ mĕsitēs ]  
    Etymology  /  3319에서 유래
    •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대언자 · 중보자 · 보혜사 비교 표

    구분 대언자 (Advocate) 중보자 (Mediator) 보혜사 (Paraclete)
    기본 의미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두 관계 사이를 잇는 자    위로자, 돕는 자, 변호자
    성경 원어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μεσίτης (메시테스)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주요 대상 하나님 앞에서 성도        하나님 ↔ 인간    성도
    사역의 방향    위로 (하늘을 향함)     양방향 (하나님과 인간 사이)    내적 (성도 안에서)
    주된 역할 죄인을 변호함          관계를 화목케 함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함
    대표 성경 요일 2:1           딤전 2:5      요 14:16
    담당 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사역 근거 십자가의 의        속죄와 언약     예수의 말씀
    지속성 영원함     단회적·완전함     성도 안에 항상 거하심
    신자의 경험 담대함, 용서의 확신      하나님과의 화평      위로, 인도, 능력

     핵심 차이 요약

    • 대언자 : 법정적 이미지
      →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내 피로 의롭다”고 말씀하심

    • 중보자 : 관계적·언약적 이미지
      → 끊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

    • 보혜사 : 목회적·내적 이미지
      → 성도 안에 거하시며 가르치고 위로하심 

    한 문장 통합 정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자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땅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이시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며 변호하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표현.

    1. 대언자(代言者)의 의미

    • 대언자는 말 그대로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중보자를 뜻합니다.

    • 헬라어 성경에서는 주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표현되며,
      변호인, 위로자, 중재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히브리서 7:25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3. 예수 그리스도는 왜 대언자이신가

    1. 완전한 의로우심
      → 죄 없으신 분만이 죄인을 변호할 수 있음

    2. 속죄의 근거를 가지심
      →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하심

    3. 하나님 우편에서 사역하심
      →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심

    4. 구약의 중보와의 차이

    • 구약의 제사장: 반복적 제사, 불완전한 중보

    • 예수 그리스도:
      단번의 제사 + 영원한 대언자
      (히브리서 9:12)

    5. 신앙적 의미

    • 우리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음

    •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함

    •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언에 근거함

    •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간구하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십니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죄 지은 인류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변호하고 중재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예수님의 중요한 역할을 의미하며, 특히 요한일서 2:1절에서 강조되듯,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화목하게 하시는 구원자이자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Advocate / Paraclete) :

     '파라클레토스(Paracletos)'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으며, '위로자', '돕는 자', '변호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변호하고 긍휼을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 죄 사함의 길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죄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구원자 :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 둘이 합쳐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즉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성경적 근거 :
    • 요한일서 2:1 (요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예수님의 가르침 : 요한복음 14:16, 26 등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보혜사 성령도 넓은 의미에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론적으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며,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십니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죄를 사하게 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는 주로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하며, '파라클레토스'(위로자, 변호자)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자이자 화목제물이 되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 및 변호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입니다.
    • 죄 사함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 성령과의 관계: '파라클레토스'(대언자/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오셨으며(요한일서 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가 대언자라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변호자'이자 '중보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주로 기독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음역하여 번역한 단어이며 '곁에 부름을 받아 돕는 자', 즉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승천 후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신자들 곁에 머물며 죄를 깨닫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주요 의미 및 역할
    • 어원: '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 부름 받은 자'를 의미하며, 고대 법정에서 변호사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
    • 성령님의 사역:
      • 죄와 의에 대해 세상과 사람을 책망하고 깨우치심 (요한복음 16:8-11).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심 (요한복음 14:26).
      • 연약함을 도우시고 친히 간구하심 (로마서 8:26).
      • 사단의 세력에 맞설 힘과 용기를 주심.
    • 번역어 논란: 한자어 '보혜사'(保護, 惠, 師)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스승'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원어적 의미와 성경적 맥락을 고려하면 '조력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에 더 중점을 둡니다. 

    요약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신자들의 곁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돕는 인격적인 조력자입니다


    1. 보혜사의 뜻

    • 헬라어 :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의미 :

      • 곁에서 돕는 자 
        위로자
        변호자
        중보자
        돕는 분(Helper)

    👉 법정 용어로는 변호인, 삶의 현장에서는 동행하는 돕는 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약속

    •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

    • 요한복음 16:7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3. “또 다른 보혜사”의 의미

    • “또 다른” = 알로스(ἄλλος)
      본질과 성격이 동일한 또 다른 분

    •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첫 번째 보혜사

    • 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본질의 또 다른 보혜사

    👉 그래서

    • 예수님: 하늘에서 대언자

    •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4. 보혜사의 사역

    1. 가르치심 – 진리로 인도 (요 14:26)

    2. 생각나게 하심 – 말씀을 기억나게 함

    3. 위로하심 – 환난 중에 동행

    4. 책망하심 – 죄·의·심판에 대해 깨닫게 함 (요 16:8)

    5. 증언하심 –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6. 능력 주심 – 증인의 삶을 살게 함 (행 1:8) 

    5.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 성령(보혜사)
    하늘에서 중보 우리 안에 내주
    아버지 앞에서 대언 성도를 도우며 인도
    단번의 속죄 그 구원을 적용 

    한 문장 요약

    보혜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지금도 성도와 함께 하시며,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변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Parakletos)
    는 '곁에 부름받은 자'라는 뜻으로 위로자, 조력자, 변호사, 대언자 등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주로 성령님을 가리키고,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자'로 예언자를 뜻하지만, 넓게는 성령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보혜사의 역할 중 하나(대언)를 포함합니다. 즉, 보혜사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위로, 인도, 보호, 대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대언자는 그 사역 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에 초점을 둔 명칭입니다. 

    보혜사 (Parakletos)
    • 그리스어 의미: 곁에 불러 도움을 주는 자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
    • 성경적 의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님을 지칭하며 신자들과 함께 거하며 인도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분.
    • 한자 의미: '보호할 보(保)', '은혜 혜(惠)'로 '은혜로 보호하고 돕는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 
    대언자 (Prophetes, 예언자)
    • 의미: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맡아 대신 전하는 자.
    • 역할: 미래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역할. 
    • 포괄성: 보혜사는 성령님의 모든 사역을 담는 더 넓은 개념이고, 대언자는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여러 일 중 '말씀을 선포하는' 특정 사역에 집중된 명칭.
    • 일치: 보혜사 성령님이 바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시므로, 성령님을 대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결론: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며, 그 보혜사로서 '대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와 대언자의 차이

    1. 공통점

    • 둘 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서 나온 말

    • 뜻: 변호자, 중보자, 돕는 자

    •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곁에 서서” 일하신다는 의미 

    2. 차이점 핵심 정리

    구분 대언자 보혜사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어디서 일하시는가 하나님 아버지 앞(하늘) 성도 안과 곁(땅)
    주된 사역 죄에 대한 변호와 중보 삶 속에서의 도움과 인도
    근거 십자가의 피와 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
    초점 구원의 확보 구원의 적용

    3. 성경 근거

    • 대언자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4. 한 문장 요약

    대언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보혜사는 땅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5. 신앙적 적용

    • 실패했을 때 → 대언자는 “이미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고

    • 낙심했을 때 → 보혜사는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붙드십니다.




    1월 3일(토)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3875)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s 상반절의 '하마르테테'('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빛의 성질 

    빛은 직진, 반사, 굴절, 분산의 기본 성질을 가지며,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갖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빛이 똑바로 나아가는 직진
    표면에서 튕기는 반사
    다른 매질에서 꺾이는 굴절
    파장에 따라 색이 나뉘는 분산이 대표적이며, 
    이는 빛이 파동(전자기파)이면서 동시에 입자(광자)의 성질을 모두 갖기 때문입니다. 
    빛의 기본 성질을 설명하는 이 영상은 빛의 직진, 반사, 굴절, 분산 현상에 대해 설명합니다:

    주요 빛의 성질
    • 직진(Rectilinear Propagation) : 
      빛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으면 항상 곧게 나아가는 성질로,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가 이에 해당합니다.

    • 반사(Reflection) 
      빛이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현상으로, 거울에 상이 맺히는 이유입니다.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 굴절(Refraction)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물 등)의 경계면을 통과할 때 진행 방향이 꺾이는 현상으로, 물속의 물체가 실제보다 떠 보이는 이유입니다.

    • 분산(Dispersion) 
      굴절 시 빛의 파장(색깔)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달라져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현상으로, 프리즘을 통과하며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입니다.

    • 회절(Diffraction) : 파동인 빛이 장애물의 모서리나 좁은 틈을 지날 때 휘어 퍼져나가는 현상입니다.

    • 간섭(Interference) & 회절(Diffraction)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빛이 파동처럼 중첩되거나 휘어지는 현상입니다.

    • 산란(Scattering) 
      빛이 불규칙한 입자나 표면에 부딪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현상으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레일리 산란)입니다. 
    빛의 이중성 (입자성 & 파동성)
    • 파동성 :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수직으로 진동하며 진행하는 '전자기파'임이 밝혀졌습니다. 굴절, 간섭, 회절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됩니다.

    • 입자성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자(photon)'라는 에너지 덩어리(입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광전효과와 같은 현상은 빛의 입자성을 보여주며, 반사 현상도 입자처럼 튕겨 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성질은 물리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이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파동성과 입자성 (이중성)

    • 빛은 파동처럼 간섭·회절 현상을 보이면서도

    • 동시에 **입자(광자)**처럼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 작용합니다.
      →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합니다. 

    2. 직진성

    • 균일한 매질에서는 빛이 직선으로 진행합니다.

    •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반사

    • 빛이 물체 표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현상입니다.

    • 거울에서 “입사각 = 반사각”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4. 굴절

    •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 물 등)을 통과할 때 속도 변화로 방향이 꺾이는 현상입니다.

    • 렌즈, 안경, 현미경의 원리입니다. 

    5. 분산

    • 빛은 파장에 따라 굴절 정도가 달라져 여러 색으로 나뉩니다.

    • 프리즘에서 무지개색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6. 간섭과 회절

    • 간섭: 두 빛이 겹칠 때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현상

    • 회절: 좁은 틈이나 가장자리를 지날 때 빛이 퍼지는 현상
      → 빛의 파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7. 편광

    • 빛의 진동 방향이 한쪽으로 정렬된 상태입니다.

    • 선글라스, LCD 화면에 활용됩니다. 

    8. 속도

    • 진공에서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km로, 자연계에서 가장 빠릅니다.  

    9. 에너지와 파장

    •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크고(자외선, X선),

    • 파장이 길수록 에너지가 작습니다(적외선, 라디오파).


    빛의 3대 성질 

    1. 굴절 : 렌즈, 간이 사진기
    2. 반사 : 거울
    3. 직진 : 그림자, 일식, 월식, 바늘구멍 사진기, 엑스선

    -물체를 본다=빛을 감지한다=광원(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의 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거나, 광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눈에 들어옴.(망막에는 뒤집힌 형태로 상 맺히지만, 뇌는 똑바로 인식)

     

    -달은 광원 X > 달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임.

    -달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을 육지(대륙, 달의 바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운석구덩이가 많이 분포되어 있음.(달이 공기가 없어서 풍화작용, 기상작용 없고 운석 구덩이가 그대로 존재)
    -수성도 대기 없어서 바람 안 불고, 온도차 크며 운석구덩이 있음.
    -금성은 이산화탄소 대기로 뒤덮여서 더움.
    -지구는 공기가 있어서 하늘이 파랗게 보임.(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멀리가지 못하지만 많이 산란됨.)

    -태양과 물체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물체의 위치와 상관없이 그림자의 크기는 거의 변하지 않음.
    -일식(태양-달-지구)은 달그림자가 생기는 좁은 범위에 있는 지역에서만 관찰되지만 월식(태양-지구-달)달이 뜨는 모든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음.

     

    -속력이 느린 매질에서는 굴절각이 더 작음.(입사각, 반사각, 굴절각은 각각 수직선(법선)을 기준으로 함)
    -빛을 통과시키면 투명하고,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흡수 또는 반사하면 불투명함.(불투명할 때 색깔은 반사된 빛의 색임)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빛이 모두 섞여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가 갖는 의미와 상징

    1. 서론

    빛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단계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는 단순히 물리적 빛의 창조를 넘어,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담고 있다. 

    빛의 창조가 성경 전체에서 갖는 의미와 상징을 성경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과 실천적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2. 빛의 창조 : 성경적 배경과 맥락

    1) 창조 이야기에서 빛의 첫 번째 위치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로 묘사된다. 
    이는 빛이 혼돈과 흑암(창 1:2)을 물리치고 창조 질서를 확립하는 시작임을 보여준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기초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

    2) 빛과 어둠의 구분

    창세기 1:4는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빛과 어둠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한다. 
    이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혼돈을 물리치고 조화와 구조를 부여하시는 창조적 능력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의 구분은 성경 전체에서 선과 악, 구속과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이어진다.

    3. 빛의 신학적 의미

    1)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함,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본질을 나타냄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드러낸다.

    2) 생명과 소망의 상징

    빛은 생명과 소망의 상징으로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1:4-5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빛을 강조한다. 
    빛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생명을 제공하고, 죄로 인해 어둠에 갇힌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성경 전체에서 빛의 상징적 의미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빛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을 보여준다. 말씀은 성도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공한다.

    2) 구속사적 빛 :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빛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며,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제공하신다. 이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연결하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사 9:2, 마 4:16).

    3)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
    빛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출애굽기 13:21에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이 빛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3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의 빛이 된다고 묘사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5. 빛과 인간의 역할

    1) 성도의 빛된 삶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16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도들이 어둠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2) 복음 전파의 빛
    사도행전 13:47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세웠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예언한다. 빛은 복음의 전달과 구원의 확장을 상징하며, 성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6. 빛과 어둠의 대조: 종말론적 의미

    1) 심판과 구원의 상징
    빛과 어둠은 종말론적 문맥에서도 중요한 대조를 이룬다. 데살로니가전서 5:5은 성도들을 “빛의 자녀”로 부르며, 심판 날에 구원받을 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반면, 어둠은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마 8:12).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때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빛
    요한계시록 22:5에서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빛이 종말론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는 창조에서 시작된 빛의 의미가 종말에 완성됨을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한다.

    7. 결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빛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생명과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상징으로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성도의 삶과 복음 전파에 있어서 빛의 역할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천적 도전을 제공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그리고 새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준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빛의 창조가 단순한 우주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 계획의 서막임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이 짧은 문장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자 시작이야.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고, ‘천지’는 공간과 모든 존재를 뜻해.
    즉, 시간과 공간, 우주 전체가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된 거야. 

    ✨ 6일 동안의 창조 과정 요약

    하나님은 총 6일 동안 창조 활동을 하시고, 7일째는 쉬셨어

    ☀️ 제1일 – 빛의 창조

    “빛이 있으라!” - 오르 / 동사형 - 드러내다 

    • 혼돈과 흑암뿐이었던 세상에 빛이 생김
    • 빛과 어둠이 구분됨 → 낮과 밤의 개념 등장
    • 아직 해, 달, 별은 없음! 이건 ‘빛’ 그 자체야 (하나님의 임재나 질서의 상징)

    📝 포인트: 빛은 모든 창조의 시작, 어둠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첫 걸음!

    אוֹר Storng number 216

    1. 빛.  2. 아침빛.  3. 태양빛 혹은 태양 자체  
    Pronunciation [ ’ôwr ]  
    Etymology  / 21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22회 사용 

    🌊 제2일 – 하늘의 창조

    • 물을 나눔: 위의 물(구름, 하늘)과 아래의 물(바다, 지면의 물)로
    • 이 사이를 궁창(하늘)이라 부르심

    📝 포인트: 공간 창조! 혼돈의 물에서 하늘을 분리해 내셨다는 점이 중요. 

    🌱 제3일 – 땅과 식물의 창조

    • 바닷물을 한곳에 모으고, 육지와 바다 구분
    •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등장

    📝 포인트: 땅이 처음 등장하고, 식물부터 자라기 시작해! 생명체의 시작! 

    🌞 제4일 – 해, 달, 별의 창조 / 광명체 - 마오르

    • 낮을 주관할 해, 밤을 주관할 달, 계절과 시간 측정할 별 창조
    • “징조와 사시와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포인트: 빛 자체(1일)와 광명체(4일)는 다름!
    시계와 달력이 생긴 날이기도 해.


    מָאֹר Storng number 3974

    1. 빛.  2. 등잔  
    Pronunciation  [ mâʼôwr ]  
    Etymology  / 복수אוֹר,מְאֹרֹות,מְאֹרִים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9회 사용 

    🐟 제5일 – 물고기와 새 창조

    • 바다엔 물고기, 하늘엔 가 가득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처음 등장

    📝 포인트: 바다와 하늘 생물이 드디어 생겨남. 축복의 첫 언급!  

    🐘 제6일 – 동물과 사람 창조

    • 육지 동물 창조 (짐승, 기는 것들 등)
    • 가장 마지막에 사람 창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
    • 사람에게 식물 먹을 것을 주심

    📝 포인트: 인간은 창조의 하이라이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능력의 상징  

    🛏️ 제7일 – 안식

    •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심
    •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포인트: 안식일(Sabbath)의 기원이 이 날!
    우리 삶에도 쉼과 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줘.  

    📌 정리 요약표

     일     창조 내용                              포인트 요약

    1일       빛           질서의 시작, 낮과 밤 구분
    2일    궁창 (하늘)              위와 아래 공간 분리
    3일  육지, 바다,  식물           생명이 뿌리내릴 공간
    4일   해, 달, 별              계절과 시간의 질서
    5일  물고기, 새             생물의 시작과 축복
    6일  육지 동물, 인간     창조의 완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7일     안식            쉼과 거룩함, 균형의 시작 

     창세기 천지창조의 메시지

    • 혼돈 → 질서 :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함
    • 빈 곳 → 채움 : 공간을 만든 후, 그 공간에 생명을 채움
    • 축복과 안식 : 창조된 세계는 축복받았고,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가르침


    1월 2일(금)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1세기 말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 가르침에 대응하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장 5절은 이 서신의 핵심 선언 중 하나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로 번역된 '호 테오스 포스 에스틴'(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로 번역된 '스코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우데미아'(σκοτία ἐν αὐτῷ οὐκ ἔστιν οὐδεμία)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중 부정('우크... 우데미아')의 사용으로, 이는 '전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질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떠한 형태의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순수성, 진실성,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명하시고, 그분 안에는 어떠한 속임이나 악도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4:7과 깊이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이 있으리로다."
     
    스가랴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요한은 그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선언합니다. 
    두 구절 모두 빛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영적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명확성이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진리"와 "나의 진리"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는 이러한 모호함이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으십니다.

    현대 기독교 작가이자 신학자인 팀 켈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완전히 진실하시고, 완전히 선하시며, 완전히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 안에는 숨겨진 의제나 어두운 비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켈러의 이 통찰은 요한일서 1:5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빛 되심은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어두운 데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빛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현대적 예로,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활동가인 코넬 웨스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빛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웨스트는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그분 안에 어둠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에 맞서 담대히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과 활동은 요한일서 1:5의 진리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는 진리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진리 안에서 걷기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진실하게 살며, 어둠의 행위를 피합니다.

    지속적인 정화 추구하기 :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지속적인 정화와 성화를 추구합니다.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시편 139:11-12는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어둠이 어둡지 아니하며 밤이 낮과 같이 밝으리니 어둠과 빛이 주에게는 같으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빛은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도전은 우리가 이 빛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성경(요한일서 1:5)의 선언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며 죄가 없으시고,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둠(악, 죄)과 대비되며, 믿는 자는 그 빛을 따라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빛을 경험하고 따르게 됩니다. 
    주요 의미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 새빛교회 홈페이지
      • 거룩함과 완전함: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며, 이는 죄나 악이 없으심을 의미합니다.
      • 진리와 계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보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 생명의 근원: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12).
    • 믿는 자의 삶: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이는 진리를 이해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뜻합니다.
    • 죄와 어둠의 대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지으면 거짓말하는 것이며, 빛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 1:5-7). 

    요약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 본성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며,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근원이심을 선포하는 성경의 핵심 진리입니다.




    서론 │ Introduction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 
    ‘소통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범주화할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 본문과 개혁신학의 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1. 비소통 속성 │ Incommunicable Attributes

    1.1 자존성 (Ase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עַצְמוּת’가 직접적 사용은 없으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에서 자존성이 드러남 (출애굽기 3:14)임.
    • 성경 배경: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심을 계시하심.
    • 개혁신학 정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CF) 제4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달리 지으신 이 없이 스스로 계시는 분임.”

    1.2 불변성 (Immutabil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לֹא תִמּוֹט’(창조 이전부터 변함 없음) 개념이 잠언 10:29 등에서 간접 언급됨.
    • 성경 배경: 말라기 3:6 “내가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함”으로 확증됨.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질·지식·의지·언약에서 영원히 변함없음(WCF 제2장).

    1.3 전지성 (Omniscience)

    • 원어 분석: 헬라어 ‘παντογνῶσις’(파롭시 사용 없으나 ‘πᾶν’(모든) + ‘γινώσκειν’(알다) 어근) 개념이 시편 139편에 나타남.
    • 성경 배경: 시편 139:1–4, “주의 알지 못하심이 없나이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과거·미래에 걸쳐 완전하고 즉각적으로 아심(WCF 제2장 해설).

    1.4 전능성 (Omnipot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דַּי’(전능하신 자, Shaddai) 어원은 ‘산의 하나님’ 또는 ‘전능하신 분’ 의미가 논의됨.
    • 성경 배경: 창세기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 무한한 능력으로 제한받지 않음(WCF 제2장).

    1.5 편재성 (어디에나 계심, Omnipres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מַיִם וּשְׁאוֹל’(시편 139:8) 언어에서 모든 공간에 함께 하심을 표현함.
    • 성경 배경: 시편 139:7–10, “주의 영이 가는 곳마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물리적·영적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만유에 충만하심(WCF 제2장 해설)

    1.6 영원성 (Eternity)

    • 성경 근거: 시편 90:2, 이사야 57:15
    •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심.

    2. 소통 속성 │ Communicable Attributes

    2.1 거룩 (Holiness)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קֹדֶשׁ’(קָדַשׁ, ‘구별하다’) 
    • 성경 배경: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죄와 더럽힘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구별됨(WCF 제2장).

    2.2 사랑 (Love)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γάπη’(아가페)와 히브리어 ‘אַהֲבָה’(아하바)에서 ‘호의’와 ‘헌신’의 의미가 결합됨.
    • 성경 배경: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성상 사랑이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심(WCF 제2장 해설).

    2.3 은혜 (Grace)

    • 원어 분석: 헬라어 ‘χάρις’(카리스), ‘은총·호의’ 의미.
    • 성경 배경: 에베소서 2:8–9,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거룩과 정의에 반해 긍휼을 베푸시는 속성임(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호의).

    2.4 긍휼 (Merc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רַחֲמִים’(라하밈), ‘자애·연민’ 강조.
    • 성경 배경: 출애굽기 34:6,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동정과 자비를 간절히 나타내심.

    2.5 정의 (Justi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צֶדֶק’(쎄덱), ‘올바름·공정함’.
    • 성경 배경: 시편 89:14, “정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법에 따라 모든 피조물에게 올바른 보응을 행하심.

    2.6 진리 (Truth)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감추어짐에서 벗어난 실재’.
    • 성경 배경: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말씀에 있어서 오류가 없으심.

    2.7 지혜 (Wisdom)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חָכְמָה’(호크마), ‘분별·조화’.
    • 성경 배경: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풍성한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알맞은 방식을 아심.

    2.8 주권 (Sovereignty)

    • 원어 분석: 특별한 단어 대신, ‘통치’(מַלְכוּת, 말쿠트) 개념으로 표현됨.
    • 성경 배경: 다니엘 4:35, “하늘의 군대를 다스리는 이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인이며, 그의 뜻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짐.

    Conclusion

    하나님의 속성은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뉘며, 각각 성경이 계시하는 바와 개혁신학의 정의가 일치함을 알 수 있음.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통해 깊이를 더했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신뢰할 수 있음.

    Introduction 

    The attributes of God can be broadly categorized into two groups: Incommunicable Attributes and Communicable Attributes. Each of these attributes is clearly revealed in Scripture and defined in depth by Reformed theology. In the following main section, we will organize these attributes systematically, providing their biblical backgrounds and etymological analysis in the original biblical languages (Hebrew and Greek).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눌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에서 명확히 계시되며, 개혁신학에서 깊이 있게 정의됨. 다음 본론에서는 이 속성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성경적 배경 및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함께 제시함.


    1. Incommunicable Attributes │ 비소통 속성

    1.1 Aseity (자존성)

    • Etymology: While the Hebrew word עַצְמוּת (self-existence) does not appear directly in Scripture, the concept is clearly revealed in Exodus 3:14: “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
    • Biblical Background: God declares His self-existence and independence from all created things.
    • Reformed Theolog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4 – God is not created but exists of Himself eternally and independently.

    1.2 Immutability (불변성)

    • Etymology: Hebrew concept לֹא תִמּוֹט (not to be moved or changed) conveys the immutability of God's being, as in Proverbs 10:30.
    • Biblical Background: Malachi 3:6 – “For I the Lord do not change.”
    • Reformed Theology: God is eternally unchanging in His being, will, knowledge, and promises (WCF Chapter 2).

    1.3 Omniscience (전지성)

    • Etymology: Greek term παντογνῶσις (pan–all + gnosis–knowledge) reflects God's infinite knowledge, although not used directly in Scriptu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1–4 – “You have searched me, Lord, and you know me…”
    • Reformed Theology: God perfectly and eternally knows all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1.4 Omnipotence (전능성)

    • Etymology: The Hebrew word שַׁדַּי (Shaddai) is commonly translated “Almighty,” possibly derived from “mountain” or “all-powerful.”
    • Biblical Background: Genesis 17:1 – “I am God Almighty…”
    • Reformed Theology: God is all-powerful and nothing can prevent Him from accomplishing His sovereign will.

    1.5 Omnipresence (편재성)

    • Etymology: Expressions like שָׁמַיִם וּשְׁאוֹל (heaven and Sheol) in Psalm 139:8 convey that God is present everywhe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7–10 – “Where shall I flee from your presence?”
    • Reformed Theology: God is fully present in all place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2. Communicable Attributes │ 소통 속성

    2.1 Holiness (거룩)

    • Etymology: Hebrew קֹדֶשׁ (qodesh) from root קָדַשׁ (qadash), meaning “to set apart.”
    • Biblical Background: Isaiah 6:3 – “Holy, holy, holy is the Lord of hosts…”
    • Reformed Theology: God is completely and absolutely separate from all sin and impurity.

    2.2 Love (사랑)

    • Etymology: Greek ἀγάπη (agapē) and Hebrew אַהֲבָה (ahavah) both reflect deep, sacrificial, covenantal love.
    • Biblical Background: 1 John 4:8 – “God is love.”
    • Reformed Theology: God is by nature love and pours out this love particularly on His elect.

    2.3 Grace (은혜)

    • Etymology: Greek χάρις (charis), meaning unmerited favor or kindness.
    • Biblical Background: Ephesians 2:8–9 –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Reformed Theology: God shows unearned favor to undeserving sinners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 Mercy (긍휼)

    • Etymology: Hebrew רַחֲמִים (rachamim), meaning compassion or tender affection.
    • Biblical Background: Exodus 34:6 – “A God merciful and gracious…”
    • Reformed Theology: God demonstrates pity and compassion especially toward the miserable and sinful.

    2.5 Justice (정의)

    • Etymology: Hebrew צֶדֶק (tsedeq), meaning righteousness or fairness.
    • Biblical Background: Psalm 89:14 –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your throne…”
    • Reformed Theology: God rewards and punishes all in accordance with His holy law and perfect judgment.

    2.6 Truth (진리)

    • Etymology: Greek ἀλήθεια (alētheia), meaning that which is unconcealed, real, or trustworthy.
    • Biblical Background: John 14:6 –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 Reformed Theology: God is utterly reliable in all His words and revelations—without error or deceit.

    2.7 Wisdom (지혜)

    • Etymology: Hebrew חָכְמָה (chokhmah), meaning discernment and applied knowledge.
    • Biblical Background: Romans 11:33 – “Oh, the depth of the riches both of the wisdom and knowledge of God!”
    • Reformed Theology: God always chooses the best means to achieve His perfect ends.

    2.8 Sovereignty (주권)

    • Etymology: Expressed biblically through concepts like מַלְכוּת (malkuth), meaning kingship or rule.
    • Biblical Background: Daniel 4:35 – “He does according to his will among the host of heaven…”
    • Reformed Theology: God governs all things according to His eternal decree, accomplishing His perfect will.

    Conclusion │ 결론

    God’s attributes are rightly categorized into incommunicable and communicable types, both of which are thoroughly rooted in Scripture and explained in Reformed theology. Through the study of biblical languages, deeper insight is gained into the nature of God. This study leads believers to deeper reverence, worship, and trust in the triune God.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에 나오는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1. 빛 = 하나님의 성품

    성경에서 빛은 주로 다음을 의미합니다.

    • 거룩함 :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

    • 진리 : 거짓과 속임이 없으신 분

    • 순결과 의로움 : 도덕적·영적 완전성

    • 계시 :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는 분

    그래서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 하나님 안에는 죄, 거짓, 불의, 혼합됨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라는 부르심

    이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요구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일 1:7)

    •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드러남

    • 죄를 숨기는 삶 = 어둠

    •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진리 안에 사는 삶 = 빛 가운데 행함

    3. 예수 그리스도와 빛

    요한복음에서는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안에서 완전히 보여주심

    • 빛이 어둠 속에 오셨으나, 어둠이 이기지 못함 (요 1:5)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 나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는 어둠은 없는가

    • 진리보다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가

    👉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드러내어 치유하시고 살리기 위해 빛을 비추십니다.


    Front Cover
    생명의 말씀사, May 15, 2004 - Religion - 279 pages
    영어권에서만 100만 부 이상, 20여 개 언어로 출판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령 충만한 삶으로 인도한 장기 스테디셀러다.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본서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기질'이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각 기질에는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다. 이를 알고 성령 안에서 약점을 극복하여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

    성령과 기질

    팀 라헤이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네 가지 기질의 장단점

    1. 다혈질의 장점

    단점

    2. 담즙질의 장점

    단점

    3. 우울질의 장점

    단점

    4. 점액질의 장점

    단점

    기질TEST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기질TEST

    약점을 극복하려면

    극복하여야 한다.

    어떻게?

    I.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타고난 기질만큼 묘한 것도 없다. 눈송이의 모양이 천태만상을 이루듯이 인간은 이 기질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고 그 사람 나름의 특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하는 근원으로서 잘 훈련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그의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인품까지 비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기질에는 강하고 약한 면이 있다. 누구나 강한 면만 생각하고 싶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강한 면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 기질(氣質:temperament) : 타고난 성품의 결합체, 유전학적으로 국민성, 인종, 성별, 그외 어떤 유전 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

    • 성격(性格:character) : 앞에 말한 기질 + 어렸을 때의 훈련, 교육, 근본적 태도, 신앙, 원칙등이 가미되어 형성. 곧 닦이고 훈련된 기질

    • 인격(人格:personality)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면에 나타나는 태도.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체내에 있는 네 가지 체액 - 혈액, 황색담즙, 흑색담즙, 가래 - 에 비유하여 네 가지 기질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기질이 어떤 형태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과 약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기질에 대해 발표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칫하면 위험한 공부가 된다. 친구들에 대해 분석적인 태도로 나아가려 하고 "그 아이는 어떤 타입의 아이지?" 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되겠다.

    II. 네 가지 기질과 장단점

    1. 다혈질

    1) 장점

    다혈질보다 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기 주위 사물에 대해서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항상 품고 있으며, 환경으로 인한 감정이 예민하여 불쾌했던 일도 환경이 바뀌면서 곧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기가 없거나 발랄하지 못할 때가 극히 드물며 웬만한 환경에선 항상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권태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먼 단어이고 권태를 느끼기 전에 그는 이미 재미있는 일로 돌아서곤 한다.

    그는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려 과거에 골치 아프고 복잡했던 문제들을 머리 속에 남겨두는 법이 없다. 또한 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다가 올 곤경에 대해서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질 않는다. 그저 현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낙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희열을 느낀다. 그는 쉽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의 풍부한 정열은 때로 다른 사람까지도 그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곤 한다. 그는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동정심이 많은 것은 다혈질의 훌륭한 재산중의 한가지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혈질보다 더 순수하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쁜 기분을 함께 나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명령을 그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성품이다. 특히 의사인 경우 그는 훌륭한 태도로 환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혈질 사람의 엄숙한 태도는 가끔 타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다혈질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은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쾌활하고 반응이 빠른 사람들로 인해 재미있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훈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2) 약점

    다혈질의 끝없는 활동은 사실 자세히 보면 휴식 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 실제적이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그의 감정은 쉽게 그를 흥분시켜서 일의 전체를 심각히 분석해보기도 전에 그릇된 방향으로 이미 일을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침착치 못한 성격 때문에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그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퍽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활동상태가 일생동안 계속될 때 그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때로 그의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끝내 열매 없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다혈질은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태도가 때론 그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가 약한 점과 세련된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은 곧잘 시작하면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 맺는 위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의 반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을 때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예"이다. 자신의 시간문제, 능력, 그 외의 여러가지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다. 자기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몇몇 사람의 앞잡이로 훌륭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그룹의 일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의 약속과 결실과 책임들을 쉽게 잊는다.

    그에게서는 정확한 시간약속 이행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의 약한 의지가 가장 위험한 결과로 나타날 때는 그의 도덕관이 주위의 환경과 동료들에 의해 변할 때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결실하는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쾌활한 성격과 대인관계로 인해 동료들 가운데 일찍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앉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의 타고난 개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혼자 떠들게 되고, 남들도 모두 다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다가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일쑤다.

    다혈질은 감정적 불안정성 때문에 쉽게 용기를 얻는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해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고 한번 폭발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다. 곧 사과도 잘한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는 자신은 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다혈질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 여러 번 후회하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보겠다. 다혈질처럼 육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 유혹에 더 많은 생각을 쏟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령께 간구해야 할 것은 "절제"와 "자제력"이다. 다른 세 가지 천성과 마찬가지로 다혈질도 가장 긴급하고 큰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2. 담즙질

    1) 장점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며 투쟁력 이 강하다. 항상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계획은 다혈질의 계획과 달리 조직적이고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번 시도했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번엔 이 한가지 일만 해 봐야지"하는 식으로 일에 골몰한다. 복잡한 게획 대신 단순한 계획하에서 그는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의 성공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훌륭한 계획보다도 『결단력』 과 『일에 대한 집착력』때문이다.

    담즙질의 기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물은 실리성(實利性)을 기준으로 다루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단체적인 일에 대해선 무척 호감을 갖고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무적인 일에서는 실증을 느낀다.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 순간 순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해 내는 능력도 있다. 담즙질의 소유자가 의사라면 특별히 긴급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직감에 의한 경우가 많다. 담즙질은 원래 "지도자적인 자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그의 의지는 그룹을 이끌기에 충분하고 모든 사람들의 훌륭한 판단자가 되며, 긴급 사태에는 빠르고 대담한 태도로 일을 처리한다. 지도자로 임명되면 곧 이를 수락하거니와 때로는 자진해서 일을 맡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으로 불리운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협조할 것이다.

    담즙질 역시 천성적인 자기 신뢰로 인해 항상 『낙관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한 환경까지도 기꺼이 떠날 만큼『모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남보다 앞장 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앞서간다. 어떤 일의 상황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도중의 함정과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을 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에만 중점을 둔다.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못하고 그는 도리어 역경을 통해 그 일을 꼭 완수해야겠다는 욕망을 더욱 갖게 된다.

    2) 단점

    담즙질에게도 큰 약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그의 "딱딱함과 화를 잘 내는 것과 성급하고 오만"한 점이다. 담즙질은 감정적으로 너무 무딘 사람이다. 그는 동정심 같은 것에 대해 감상적인 쓸데없는 짓이라고 멸시하기도 하며, 그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다. 그는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곧잘 화를 내며, 한번 화를 낸 후에는 그가 불쾌하게 느꼈던 일에 대해『계속 원한을 품는』버릇이 있다. 심한 복수심 때문에 실제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다시 보복하기를 꺼리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분개하는 성질은 그의 생활을 편안치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육체적인 병으로는 40세 이전에 궤양으로 고생하게 되는 수가 많고, 영적인 병으로는 분노와 화를 내는 일로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 많다. 담즙질에는 묘한 "잔인성"이 있어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권리를 무단히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강한 도덕적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한 성공을 위해서는 법률을 어기거나 어떤 교활한 방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몰염치한 죄수들과 독재자들이 이 담즙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담즙질의 강한 결단력은 또한 너무 강렬할 때가 있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 또는 나중에 그가 후회할 과격한 문제에 그를 몰아 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장을 보고 만다. 그가 사과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 인정이 없고 퉁명스럽고 또 냉소적인 말을 냉정하게 내뱉는다. 남에게 동의하는 것도 그에겐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혼할 때 그의 배우자가 갖는 가장 큰 문제거리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기 아내를 때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룰 것이다.(폭력이 아닌)

    담즙질의 강한 독립심과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거만한" 사람이 되게 한다. 어떤 일에 좀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매우 거만하고 그 일에 대해 세도를 부려 드디어는 불쾌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이러한 불쾌한 성품은 그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나쁜 행동보다도 성공 그 자체를 더 좋은 일로 보고 거기에만 중점을 둔다.

    그는 어린 나이가 아니면 어른이 된 이후 신앙을 가지기 힘들며,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곧잘 그날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꽉 차고 그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해 보지 못하는 한 규칙적인 예배시간은 쓸데없고 시간낭비인 것처럼 생각 될 것이다.

    3. 우울질

    1) 장점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질에서보다 더 많이 그리고 깊숙이 감상하며, 또한 예술에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나 다혈질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우울질의 소유자는 창작적인 추리에도 능란하여 한창 상상력이 활발할 때는 가치 있고 건전한 창작물을 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완전주의자』로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훌륭함"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포용력은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과 결정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만약 기회가 새로이 주어진다면 좀더 훌륭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질의 "분석력"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인 성품과 합성되어 일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능력이 있게 하였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획이 제안되면 우울질은 그것을 즉시 분석하여 그들이 부딪치게 될 여러가지 숨은 문제들을 골라내곤 한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분석해서 나온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을 반대할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들이라는게 그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다.

    그의 분석적인 능력과 태도로 보아 그에게는 수학, 이론과학, 의학, 건축학, 철학, 창작문학, 그 외 면밀한 것을 요하는 일이 적합하다. 다행스럽게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스러워지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그 기질 자체가 "충성스럽기"때문이다. 우울질은 다혈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려 들진 않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문자그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정도로 그 친구들을 포용한다. 어떤 일을 주어진 시간에 끝까지 이끌고 나가서 완성시켜 놓은 일에서는 그를 언제나 신임해도 좋다.

    우울질은 앞에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지극히 희생적인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자기동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를 잘 알아서 자기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진해서 발표하려하지 않고 덮어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며, 다혈질처럼 함부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는 데에는 꽤 야무지다.

    2) 단점

    우울질은『자기중심적』이다. 할레스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어떤 타입의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기 중심적이다. 항상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하는 형인데 그의 이런 성품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정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과 자기의 정신적인 상황을 해부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을 한층 두층 계속 벗겨 마침내는 그의 생활에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오로지『영구한 자기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은 이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우울질은 병적인 정신상태에 빠져 들어갈 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접하는 문제마다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울질은 유난히 쉽게 우울증환자가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그의 예민한 성격과 합해져서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가끔 저지르게 한다. 그는 기분을 자주 변동하는 자로 문자 그대로 "감정을 항상 팔에 걸고 다닌다." 때로는 곧잘 남을 의심하여 좋지 못한 방면으로 계속 상상한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소근소근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는 대뜸 그들이 자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단정한다. 이런 생각은 심한 경우엔 남을 변태적으로 냉대하고 박대하는 컴플렉스를 나타낸다. 우울질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이고 분석적인 성품 때문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목적을 내다 보기도 하지만 도중에 생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관적이기 때문에 우울질은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면에선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다. 많은 완전주의자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9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파괴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그의 완전주의자라는 안경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는 "많은 좋은 점을 보는 대신에 나쁜 점을 과장해서 보게" 마련이다. 결혼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할 때가 있다.

    멀리서 여자를 보고 이상화시켜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을지라도 역시 단점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바로 그 단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주저한다. 기분의 변화에 있어서도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고조된 감상에 빠져 있곤 한다.

    또한 우울질의 변덕스러움은 때로 좋지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땐 그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우울질을 피하게 되고 우울질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우울하게된다. 이 한가지 사실은 능히 우울질의 전 일생을 망치고도 남음이 있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울하고 감정이 쉽게 변하는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위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기자신보다 남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좋은 목적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우울질의 특성을 들자면 그의 "보복심"이다. 그에겐 모욕을 용서해 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조용하고 평온해 뵈지만 마음속으로 격렬한 증오심과 불길같은 적의가 있다.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진 않겠지만 수년간을 이런 증오심과 보복감을 품은 채 지낸다. 이렇게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성품과 보복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때로 그의 훌륭한 자질을 지배하여 자질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편견에 근거를 둔 결정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우울질의 장. 단점을 모두 보아왔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즉 매우 훌륭한 장점과 잠재능력이 있는 천성에는 또한 가장 큰 단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평범한 우울질』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울질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료들보다 우수한 위치에 서던가, 그렇지 않으면 약점으로 인해 신경질과 수심에 뒤덮히고, 자신을 즐기지도 못하고 남을 즐겁게도 못하는 우울증환자가 되어 동료들보다 열등한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뛰어난 인물들이 심한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울질의 소유자들은 큰 위안을 받아야겠다. 그러나 성경의 그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애를 보낼 수 있게 한다.

    4. 점액질

    1) 장점

    점액질의 거침없는 "유모어"는 그가 어떤 일을 신중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치미를 떼고 하는 그의 거칠은 듯한 유모어가 다른 사람들을 곧잘 웃기는 것을 보면 그는 유모어와 상상력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기질은 "카운셀러"가 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오랫동안 앉아 듣지 못하는 반면에 느리고 태평스러우면서 유연한 점액질의 태도는 그로 하여금 남의 얘기를 다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과 고민을 말하는 사람과 늘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는다. 그리고는 충고의 말을 불쑥 쏟아 내놓는 게 아니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눈다.

    점액질의 경우, 그의 명랑하고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책임감과 시간적 계획을 잘 지키는 면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우울질처럼 이 사람은 퍽 충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에게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불충실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점액질도 역시 실제적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고하는 데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므로 그 결과 어떤 일의 상황을 잘 분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닌 반면에 적은 노력을 들여 일을 완수할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일을 잘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 할 환경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의 결과는 항상 훌륭하고 깨끗한 결과가 된다. 비록 완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꽤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니고 있다. 항상 바쁘고 크나큰 일을 하면서도 그의 책상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능동적이고 소란스런 성품의 사람들은 항상 놀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점액질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놓고 일하면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돈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단점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가끔『발을 질질 끄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며 가능한 한 느리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목적 없는 그의 생활은 "방관자"의 생활이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성품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고 있고 또 능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에겐 모든 일이 오로지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혈질의 불안정성과 담즙질의 활동은 그를 때로 괴롭힌다. 점액질은 그들이 그를 자극시켜 일을 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점액질은 또한 "이기심"이라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자기자신을 옹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어떤 일을 변경하려고 "심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그 일에 너무 휩쓸려 들어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에너지를 아끼는 면에서 보수적이기를 원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더욱 고집이 많아지지만 그의 태평스런 유모어로 자기의 완고한 점을 감출 수 있게 된다. 주위사람들의 계획과 활동에 가담하기를 강요받을 때마다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더욱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런 완고성은 결코 그를 "인색하고 이기적인"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얼마의 비용이 들까?" 혹은 "이것은 내게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점액질에 있어 정말 큰 문제 거리다.

    점액질에겐 해가 갈수록 더 결단력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늘 동요한다. 그의 결단력 없는 태도는 곧 뿌리깊은 습관이 되어 그의 장점 즉 실용적인 태도를 능가해 버리기까지 한다. 그의 실제적인 관점과 조용하고 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어떤 일에 대한 더 좋은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지만, 그가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쯤에는 이미 다른 활동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그룹을 조직하여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점액질은 마음속에 자기계획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가담하려 한다.

    5. 네 기질에 대한 정리

    위의 네 가지 기질의 여러가지 변화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고 있다. 어느 것도 다른 성품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그것대로의 장점을 갖고있어 사회에 도움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각 기질이 지닌 장점은 그 기질을 매력적으로 만들며 우리도 모두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장점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지닌 약점도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분석 해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보완되어야 하고 개선되어야 한다.

    III. 기질테스트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앞의 내용에서 우리는 각 기질의 장. 단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는 "나는 다혈질이야""나는 담즙질이군"라고 자신을 평가하곤 하는데, 사실상 우리는 100%다혈질, 혹은 100%우울질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기질은 이 네 가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혈질20% + 담즙질50% + 우울질10%+점액질20% 식으로 말이다. 자신의 기질상의 특성들을 잘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단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래의『기질테스트』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원한다. 이 단어 연상 테스트는 플로렌스 리타우어와 프레드 리타우어가 발전시켜 그들이 개최한 『인격플러스(Personality Plus)』세미나에 참가한 수많은 이들에게 시행한 바 있는 테스트이다.

    2. 기질 테스트

    1) 각 열의 네 단어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단어 하나 앞에 V표를 하라. 때로는 정확히 자신에게 들어맞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가장 근사한 단어 앞에 V표를 하도록 하라.

    1

    2

    3

    4

    5

    6

    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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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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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7

    18

    19

    20

    ( )활발함,

    ( )의지강함,

    ( )복종적,

    ( )사려깊음,

    ( )새로운생각,

    ( )만족해함,

    ( )계획가,

    ( )자신에참,

    ( )질서정연,

    ( )친절함,

    ( )과감함,

    ( )괘활함,

    ( )이상적,

    ( )과시적,

    ( )중재자,

    ( )신중함,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완전주의자

    ( )활기참

    ( )모험적,

    ( )쾌활함,

    ( )자기희생적,

    ( )자기통제적,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인내심강함,

    ( )충독적,

    ( )자상함,

    ( )신실함,

    ( )유쾌함,

    ( )일관적,

    ( )독립적,

    ( )결단력,

    ( )음악적,

    ( )끈질김,

    ( )충직함,

    ( )우두머리

    ( )허용적,

    ( )과감함,

    ( )분석적,

    ( )설득력있음,

    ( )사교적,

    ( )경쟁력,

    ( )수줍어함,

    ( )자기신뢰,

    ( )적극적임,

    ( )계획적,

    ( )솔직함,

    ( )익살스러움,

    ( )싹싹함,

    ( )점잖음,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의견제안잘함,

    ( )말을많이함,

    ( )지도자타입,

    ( )도표잘그림,

    ( )생산적,

    ( )행동적,

    ( )융통성없음 .

    ( )조용함.

    ( )자기의지강함

    ( )설득력있음.

    ( )꽤많음

    ( )활발함

    ( )주동적

    ( )부끄러워함.

    ( )낙천적.

    ( )강력함.

    ( )세심함.

    ( )확신에참.

    ( )고무적.

    ( )심오함.

    ( )쉽게어울림

    ( )관용적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균형잡힘

    21

    22

    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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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뻔뻔스러움.

    ( )절제못함,

    ( )마지못해함

    ( )까다로움,

    ( )참을성없음,

    ( )인기없음,

    ( )완고함,

    ( )평범함,

    ( )쉽게성냄,

    ( )순진함,

    ( )근심많음,

    ( )지나치게예민,

    ( )결단력약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느림,

    ( )고독즐김,

    ( )행동이느림

    ( )복수심이강함,

    ( )타협적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성잘냄,

    ( )두려움많음,

    ( )불안정,

    ( )끼어들기싫음,

    ( )되는대로의성격,

    ( )비관적,

    ( )목표없음,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무뚝뚝함,

    ( )무질서함,

    ( )편협함,

    ( )침울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 섬,

    ( )의심많음,

    ( )불안함,

    ( )비판적,

    ( )수줍음,

    ( )열정없음,

    ( )반항적,

    ( )잘잊음,

    ( )우유부단,

    ( )예상못하는성격,

    ( )즐겁게해주기힘듬

    ( )교만 힘든성격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소심함,

    ( )지배적,

    ( )비관용적,

    ( )불평잘함,

    ( )과시적,

    ( )게으름,

    ( )성미급함,

    ( )억지로함,

    ( )교활함,

    ( )맥없음

    ( )용서안함

    ( )장황함

    ( )솔직함

    ( )끼어들기잘함

    ( )사랑없음

    ( )주저함

    ( )허용적

    ( )외톨이

    ( )냉담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낙심잘함

    ( )무관심

    ( )남이용잘함

    ( )회의적

    ( )목소리큼

    ( )침착못함

    ( )신중치못함

    ( )변화무쌍

    2) 이제, 위에 표시한 대로 아래의 페이지에 다시 표시하고, 장단점의 합계를 내어 보라.

    ◆ 장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활발함,

    ( )쾌할함,

    ( )사교적,

    ( )설득력있음,

    ( )새로운생각,

    ( )활발함,

    ( )주동적

    ( )충동적,

    ( )낙천적,

    ( )익살스러움

    ( )유쾌함,

    ( )괘활함,

    ( )고무적,

    ( )과시적,

    ( )쉽게어울림

    ( )말많이함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활기참,

    ( )모험적,

    ( )설득력,

    ( )자기의지강함,

    ( )경쟁적임

    ( )꾀많음,

    ( )자기신뢰

    ( )적극적

    ( )자신감

    ( )솔직함,

    ( )강력함,

    ( )과감함,

    ( )확신에참

    ( )독립적,

    ( )결단력,

    ( )의견제안잘함,

    ( )끈질김,

    ( )지도자타입

    ( )우두머리

    ( )생산적,

    ( )과감함,

    ( )분석적,

    ( )의지강함,

    ( )자기희생적,

    ( )사려깊음,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계획가,

    ( )계획가,

    ( )질서정연,

    ( )신실함,

    ( )세심함,

    ( )점잖음,

    ( )애상주의적,

    ( )심오함,

    ( )음악적,

    ( )신중함,

    ( )충직함,

    ( )도표잘그림,

    ( )완전주의자,

    ( )행동적,

    ( )융통성

    ( )조용함.

    ( )복종적

    ( )자기통제적

    ( )수줍어함

    ( )만족해함

    ( )인내심많음

    ( )부끄러워함

    ( )자상함

    ( )친절함.

    ( )싹싹함.

    ( )일관적.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중재자

    ( )관용적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허용적

    ( )균형잡힘





    ◆ 단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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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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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35

    36

    37

    38

    39

    40

    ( )뻔뻔스러움

    ( )무절제함

    ( )장황함

    ( )잘잊음

    ( )끼어들기

    ( )예측불허

    ( )되는대로성격

    ( )허용적

    ( )쉽게성냄

    ( )순진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무질서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과시적

    ( )목소리가큼

    ( )침착치못함

    ( )불안함

    ( )변화무쌍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반항적

    ( )솔직함

    ( )참을성없음

    ( )사랑없음

    ( )완고함

    ( )교만함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무뚝뚝함

    ( )지배적임

    ( )편협함

    ( )남이용잘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섬

    ( )성미급함

    ( )신중치못함

    ( )교활함

    ( )수줍어함

    ( )용서안함

    ( )성잘냄

    ( )까다로움

    ( )불안정

    ( )인기없음

    ( )즐겁게해주기힘듬

    ( )비관적

    ( )외톨이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지나치게예민

    ( )낙심잘함

    ( )비관용적

    ( )침울함

    ( )회의적

    ( )고독즐김

    ( )의심많음

    ( )복수심강함

    ( )비판적

    ( )맥없음

    ( )열정없음

    ( )마지못해함

    ( )두려워함

    ( )우유부단함

    ( )끼어들기

    ( )주저

    ( )평범함

    ( )목표없음

    ( )냉담함

    ( )근심많음

    ( )소심함

    ( )결단력약함

    ( )무관심

    ( )불평잘함

    ( )느림

    ( )게으름

    ( )행동느림

    ( )억지로함

    ( )타협적





    전체 합계

    장점합계

    ( )개

    단점합계

    ( )개

    다혈질

    ( )개

    담즙질

    ( )개

    우울질

    ( )개

    점액질

    ( )개

    IV. 결론

    1. 약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질에 대해 공부하는 근본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함이다. 헨리 브란트 박사는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 있고,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수 년전, 혹은 수 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여전히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고집과 내키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이어서 어떤 장점과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점들은 개선되어져야 한다. 당신의 천성이 꼭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살아있는 채 당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신의 약점을 세심히 솔직하게 연구하면 자신의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쉽게 지적해 낼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의 계획하에 인간을 그의"영광을 위해"창조하셨다.(계4:11)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기질 전체를 뜯어 고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본래의 성품을 십분 활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리는 결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것인가?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약점을 죄로 여겨야 한다.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 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 이기심, 자만, 성급, 잔인,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 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약점의 근원: 이기심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의지의 박약

    불안

    자아중심

    감정적 불안정

    자기만족

    성급함

    잔인성

    격한 성격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적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분 노



    공 포












    이 기 심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 증오, 폭동, 시기, 공격, 험담, 야유, 앙심, 비통, 악의, 불평, 질투, 후회, 편협, 비난, 원한

    • 공포의 여러가지 표현 : 근심, 의심, 소심, 우유부단, 미신, 움추림, 고집, 시비, 걱정, 열등감, 비겁, 혐의, 주저, 실망, 교만, 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 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심령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 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이란 자기 본위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말한다. 이기심이란, 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 내게 있는 것을 잃게될까, 내가 손해보게될까, 내가 인정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이며 열등감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죄악이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고 적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것.. 이것이 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 하고 두렵게 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 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셨던 축복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 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적)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 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제안)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2)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귀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귀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하였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장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6: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께 간구만 하면 그의 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있고 또 인정해야 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한다. 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4)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 들일 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의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 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막13:11)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 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어떤 체험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충만』은 우리 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그리이스어를 보면 이 귀절은 "당신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 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 Lord)으로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되어 로보트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 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교통표지판이나 이정표를 따라 자동차 연료의 힘을 입어 우리가 성루로 간다고 해서 우리는 교통표지판이나 휘발유, 자동차의 노예인가? 교통법의 꼭두각시인가?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하는 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방법(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충만이란 우리 인생 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엡5:20)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 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 시기. 험담. 야유. 앙심. 비통. 불평. 질투. 후회. 비난/근심. 의심. 우유부단. 움츠림. 소심. 고집. 열등감. 비겁. 주저. 실망. 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 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 희락, 곧 기쁨(joy),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 화평(peace),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 오래참음(long suffering:인내), 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마음에서 나온 사려깊고 예의 바르고 젊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 충성(faith)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도, 신뢰성,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 온유(meekness),악을 악으로 갚지않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 절제(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 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삶의 한부분 한부분에 개입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 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

    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 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버려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칙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나거라. 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 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이고 고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V. 결론

    물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가도 또 여전히 옛 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실망하지 아니하고,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 습관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되돌아 보았을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울질과 다혈질이 혼합된, 극도의 소심함과 신경질적인 포악함의 사람이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심, 예민한 성격등으로 인해 언제나 소극적이고 박약한 모습으로 지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선 너무나 많은 부분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기질상의 약점 때문에 이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자학에 빠지곤 하는, 여전히 변함없는 우울질과 다혈질의 사람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몇 년 전과 비교만 해보아도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깍이고 다듬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 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 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원본 : 생명의 말씀사 / 팀 라헤이 “성령과 기질”, 기질TEST는 책과 무관.

    요약 : 낮, 해, 밤, 달 의 발췌문을 재 편집하여 인용함.



    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책은 원명은 [Act of Marriage] 
    미국의 1976년과 1977년 종교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결혼 행위]또는 [부부의 사랑 행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나 우리에게는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 [아름다운 애정생활]로 했다. 
    결혼 적령기에 미달되는 모든 미성년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성신 부부들과 내일의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는 분은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여러분의 인생을 즐겁게 해줄 것이며 더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팀 라하이 박사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그를 통해 파탄지경에 이른 많은 가정들이 다시 모여 행복을 찾았으며 불행을 되씹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아름다운 애정생활은 당신의 생활에 무한의 가능성을 안겨다 줄 것이다

    저자소개

    [행복한 결혼생활], [성경공부의 비결]등 수많은 저서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팀 라헤이 박사는 스콧드 메모리얼 침례고회의 목사님이며 미국 샌 디아고에 소재한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총장이다

    "나는 모든 부부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과 알 필요가 있는 사실들을 저들로 하여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 아내 비벌리의 도움으로 본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아내로, 세미나의 강사로 그리고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사무주임인 아내의 광범위한 상담경험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많은 부부들과 상담한 결과 우리 둘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정해 주신 모든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많은 부부들이 저들의 성관계를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년 간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가지 교수원칙을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카운슬러와 목사님들의 요구를 받고, 이와 동일한 원칙을 책으로 발간하는 경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교회가 참 좋다 
    혼인전 목사님께서 과제를 준다. 
    하나는 화남금여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이었다. 
    화남금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실제적인 애정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지만, 세속적인 책과 달리 통속적이지 않고 성경적 가치관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옛날에는 표현이 안되었지만 갈수록 성문제는 가정 행복과 부부행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20대에서 40대 부부들에 대한 갤럽 조사에 의하면 성적인 불만을 가진 부부가 74퍼센트에이르는 반면 부부생활에 만족하는 부부는 10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한다. "

    더욱 심각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부부들 중에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 부부가 56퍼센트나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혼사유의 90퍼센트가 솔직하게 알고보면 성적 부조화와 불만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고 있다.

    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 종족 보존
    둘째, 사랑의 표현
    셋째, 인생의 환희와 즐거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룰 때에 행복하게 살 수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기도시간 외에는 절대로 분방하지 말고 성생활을 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언  5장 15절에서 20절은 가정에서 부부간의 성적 즐거움의 샘물을 가정 밖으로 넘치게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구약의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메시지로 담고 있지만 성생활에 적극적인 테크닉도 가르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성공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우자와 성에 대한 자세와 실제 성생활을 위한 테크닉의 개발이 필요하다. 우선 부부생활에 대한 자세는 성경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몸을 자신이 주장하지 못하고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섹스를 요구할 때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적 자세다. 거절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성적으로 아내보다 더 충동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가급적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남편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내로부터 충족받기를 원하는 필수조건의 제1위는 '성적인 만족감'이라는 연구조사가 나와 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인욕구와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남편은 다른 방면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편의 성적 요구에 아내가 단호하게 거절할 때 남편들은 아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거절당했을 때의 남편들의 심정을 모아본 자료를 소개한다

    "심한 모멸감을 맛보았다. 다시는 내가 요구하나봐라 하는 심정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미워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내가 보기 싫었고, 다른 여자를 사귀고 싶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두고보자라는 복수심이 불탔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의 성적 특성을 이해하여 아내가 만족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관계는 평등한 것이며 서로 보답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의 만족을 위하여 성교를 시도하며 애무하고 성행위에 참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 권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자를 백열전구에 여자는 전기다리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경우에는 충동보다도 분위기와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더 의지하고, 남자보다 더 여유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부부는 잠자리에서 열정적이고 적극적이 되도록 노력하고 변화를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다양한 기교와 테크닉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협력한다.

    한국 교회가 성생활에 대한 언급을 터부시하고 있지만, 건전한 성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배우고 훈련받아 세속적인 성문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생활에 성공하라

    관심있는 분은 팀 라하이 목사가 지은 <아름다운 애정생활>이라 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성생활의 성공은 행복한 부부의 아름다운 특징이다. 


    팀 라헤이(Tim LaHaye, 1926년 4월 27일 ~ 2016년 7월 25일) 
    기독교 목사, 소설가로, 제리 B. 젱킨스와 함께 쓴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알려져 있다.

    종말론적 소설인 <레프트 비하인드>의 저자 팀 라헤이가 지난 7월 25일 별세했다(2016. 7. 25).
    7월 25일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 목회자이자 저자, 라디오 진행자인 팀 라헤이가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가 설립한 사역 단체에서는 라헤이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며칠 후에 숨졌다고 발표했다.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는 1995년부터 16권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를 출간했다.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다루는 이 시리즈는 6천5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라헤이는 소설을 쓰기 전 목회자로 왕성히 활동했다. 그는 샌 디에고 크리스천 칼리지와 십여 개의 기독교 초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목회자들을 조직해 조지 W. 부시 등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보수 단체인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을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 비벌리와 함께 라디오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타임> 지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와 <레프트 비하인드>를 공동 저술한 젠킨스는 성명서를 통해 라헤이가 “영적 거인”이었다고 발표했다.
    젠킨스 “내가 아는 팀 라헤이는 목회자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을 나누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나이와 성, 사회적 지위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염려를 함께 나눴다.”라고 말했다.


    1월 1일(목)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 

    투 로구 테스 조에스(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호 로고스 호 조에(ὁ λόγος ὁ ζωή)

    설교 제목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핵심 본문 / 히브리서 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1️⃣ 서론 : 왜 어떤 말씀은 지나가고, 어떤 말씀은 나를 바꾸는가

    • 우리는 말씀을 자주 듣지만, 삶이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 말씀이 정보로 끝날 때 vs 살아 역사할 때의 차이

    • 질문: 오늘 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인가, ‘경험하는 사람’인가? 

    2️⃣ 본론 ① 말씀이 살아 있다는 뜻

    •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글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 마음을 찌르고

      • 생각을 드러내며

      • 방향을 바꾼다

    • 👉 말씀이 우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다룬다 

    3️⃣ 본론 ②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

    • 마음이 닫혀 있을 때

    •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말씀을 들을 때

    • 순종 없는 듣기만 반복할 때

    • 👉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 앞에 서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4️⃣ 본론 ③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일어나는 변화

    1. 생각이 변한다 –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 기준으로

    2. 마음이 깨어난다 – 무감각에서 회개와 소망으로

    3. 삶이 움직인다 – 결단과 순종이 생긴다

    말씀은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결정을 낳는다

    5️⃣ 결론 : 오늘 말씀이 역사하게 하라

    • 작은 순종 하나가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 “이 말씀을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붙잡자

    • 기도 :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 한 줄 정리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사람은 변하고 삶은 새로워진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그분!
    말씀: 요한일서 1장 1절(맥체인 성경읽기, 12월 2일, 화)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거대한 신학 체계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경험을 말한다.

    요한일서 1: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청각              시각                                                    촉각 

    복음은 이렇게 감각의 언어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세 개의 동사로 압축해 낸다. 
    듣다(청각), 보다(시각), 만지다(촉각)

    사람의 다섯 감각 기관 : 청각(聽覺) 2%, 시각(視覺) 5%, 후각(嗅覺) 35%, 촉각(觸覺) 1%, 미각(味覺) 15%

    들었다 :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 사건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선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 계시 사건이다. 
    우리의 ‘들음’은 하나님의 먼저 말씀하셨다는 증거다. 
    듣는 신앙은 '순종하는 귀'를 가진 신앙이다. 
    여기서 듣기는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의 개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적 소환장이다.
    오늘 우리는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진 시대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세상 소음에 대한 영적 저항이다. 
    복음의 첫 문은 언제나 경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보았다 : 눈이 열릴 때 시작되는 신앙

    요한은 두 개의 '보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적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관찰과 응시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을 넘어 계시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 행위이다.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외모가 빛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곧 사랑, 진리, 은혜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분의 키, 얼굴형, 피부색, 머리색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그 얼굴은 어느 특정 문화와 인종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그 길을 거부한다. 
    보지 못함으로 진정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의 참된 얼굴은 종교적 초상이 아니라 갈보리의 사랑, 즉 자기 비움의 영광이다. 
    보는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신앙이다. 
    고난 속에서 열리는 인식, 눈물이 마른 자리에 드러나는 새로운 시각,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말하는 ‘보았다’의 세계다.

    만졌다 : 촉각을 가능하게 한 성육신의 신비

    ‘만졌다’는 동사는 요한 신학의 정점이다. 
    당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 Docetism). 
    요한은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
    촉각은 실재의 가장 강한 증거다. 
    귀는 속고, 눈은 착시를 경험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물질 세계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선언이다. 
    먹고 마시고 피곤해하며,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실제의 몸으로 오셨다는 증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외모에는 침묵하지만, 몸의 실재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현실적 영성’을 꿈꾸는 종교가 아니다. 
    몸으로 오시고, 몸으로 사랑하시고, 몸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무엇보다 성찬은 이 ‘만짐의 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식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몸을 만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 그 자체가 깊은 신앙 행위다. 
    사랑은 언제나 몸을 가지고 온다.

    생명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다.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그분…" 그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는 정보의 종교가 아니라 관계의 종교, 데이터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요한은 선언한다.
    “우리는 들었고, 우리는 보았고, 우리는 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동사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이 오늘도 가슴 벅찬 이유이다.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우리 눈을 밝히사 당신 몸의 흔적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손으로 당신을 만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 삶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옵소서. 아멘.


    λόγος, ου, ὁ Storng number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Pronunciation [ lŏgŏs ]  
    Etymology / 3004에서 유래


    λέγω Storng number 3004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Pronunciation [ lĕgō ]

    ζωή, ῆς, ἡ Storng number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Pronunciation [ zōē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ζάω Storng number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Pronunciation [ zaō ]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Ενσάρκωση) 

    성육신(Incarnation) Incarnatio. Ενσάρκωση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고난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먼저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라는 /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요 1:1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 2:20)이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요3:36)인 것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는 창조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표현은 성육신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음을 말합니다. 그의 은혜와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성육신이야말로 그 영광의 최고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이고도 신비로운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은 성육신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7:14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인류 역사 속에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 즉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결합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성육신이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은혜의 표현이며,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세주로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의 목적과 의의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먼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정해진 시점에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지만, 그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며 그의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순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는 구절은 성육신의 구속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인간을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되었으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의 놀라운 표현입니다.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이 집약된 신비로운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5.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믄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6.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하사."

    8. 요한일서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9.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0.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니라."

    11.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2.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은혜로 주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 1:18-2:23과 눅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 막 9:2-8; 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 같이', '...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 9:38; 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 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 갈 3:26)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3:18; 5:18; 10:30; 17:5, 24)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 빌 2:6, 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 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 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 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유앙게리온. 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Pronunciation [ ĕuanggĕ- liŏn ]
    Etymology  /  2095와 32에서 유래

    εὖ Storng number2095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Pronunciation [ ĕu ]  
    1. 잘, 좋게,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친절을 보이다, 막14:7, 잘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마25:21,23, 눅19:17, 엡6:3.

    ἄγγελος, ου, ὁ Storng number 32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메시아의 예고자
    Pronunciation [ anggĕlŏs ]
    Etymology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1:20, 행5:19, 약2:25), 천사 (마13:39, 히1:4, 계1:1).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
    둘째는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

    생명이란 조에스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들은 바'(아케코아멘)와 '본 바'(헤오라카멘)는 문법적으로 완료시제라고 합니다.
    완료시제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히 1:1,2).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

    생명의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근거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려면 먼저 내가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증거를 가져야만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경험하였다고 고백합니다.

    2026년 병오년을 출발하며 내가 만났던 예수님을 날마다 삶의 터전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속사람을 살립니다.



    군주적 유일신론과 삼위일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반삼위일체론자들(Antrinitariers)은 이 교리를 비성경적, 비이성적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신앙의 최고 권위로 믿어져 온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결코 공교회의 정통교리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형이상학적 일신론과 논쟁하면서 성경적 신론을 확고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유일신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시인들의 노래와 희극을 통해 전달되는 신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당시 시인들의 노래나 연극에 등장하는 인간동형론적 다신 신론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자들의 기원 또는 궁극적 원리인 일자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안에서 신은 초시간적, 초역사적 실재인 유일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 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50-270)의 일자(一者, the One)개념이 그렇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 100-165 )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150-215)와 같은 고대 교회의 변증가들은 기독교적 유일신신앙을 다신론적 신화에 대항하는 철학적 단일신론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일신론은 양자론(또는 종속론)과 양태론이라는 기독교 삼위일체 신론의 가장 큰 두가지 이단들의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종속론적 또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narchianism)의 두가지 오류들

    삼위일체 신론은 단일신성과 삼위의 개별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설명가능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다신론적 종교와 신화가 유행하던 이방세계에서 기독교는 그 본래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rnarchianism)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최고통치권자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권자는 오직 성부 한 분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성부만이 영원 불변한 신성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 능력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하는(Justin Martyr, First Apologia, 13) 이러한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은 그리스의 전제 군주적 유일신론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단일신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양자론(Adoptionism; 역동적 군주신론, Dynamic Mornarchianism)이라고 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만, 개별적 실체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양태론적 군주신론(Modalistic Mornarchianism)이라 합니다.
    양자론과 양태론은 모두 신의 단일성 및 군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위의 다양성을 반대한 대표적인 삼위일체 이단사상들입니다.

    【양자론(Adoptionism) 및 역동적 군주신론】(dynamic mornarchianism)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신론은 고대의 에비온파(Ebionites), 170년경 소아시아의 알로그파,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로마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Rome), 아리우스(Arius) 등에 의해 주장된 단일신론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론”이라고 부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알로그파(헬라어로 “정신없는 자들”)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로고스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복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투스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교한 일에 대해 변명하며 “나는 인간을 부인한 적은 있어도 하나님은 부인한 일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로마의 휘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170-235)에 의하면, 테오도투스는 하나님의 능력(듀나미스)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나타나기 전에는 그의 안에서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Refutation of All Heresies, 7, 23). 휘폴리투스는 그를 알로그파의 “부스러기”라고 비난합니다.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테오도투스를 위시한 양자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례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더욱 세련된 아리우스주의로 발전한 양자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피조물로 여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양태론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rnachianism)
    고대의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사벨리우스(Sabellius) 등으로 대변되는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아버지와 구별된 개별적 실체성은 부정합니다.
    노에투스는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양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으로 보지만, 노에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자론자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한 것과 달리, 노에투스는 성육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을 성자가 아닌 성부 자신의 성육신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는 성부와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현현 형태(modus)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성자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성부)께서 가시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고, 낳음을 받지 않으신 분이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낳음을 받으신 분이 되신 것이죠(Hy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9,5). 이런 이유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도 불립니다.
    위와 같은 역동적 군주신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동방교회에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서방교회에서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개별성으로부터 신적 단일성을 사유하려 했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신의 단일성으로부터 개별성을 설명하려 하였기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양자론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더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가지 잘못된 삼위일체 이단사상의 배후에는 바로 그리스 군주적 단일신론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공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된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신론에 대한 성경적 신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년에 출간된 심리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근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진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심리학을 다루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제임스는 심리학을 단순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심리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심리학의 원리』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고, 제임스의 심리학이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1. 의식과 경험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윌리엄 제임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것이나 분리된 단위로 보지 않았으며,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이 흐름은 각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감각, 감정, 생각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제임스는 이를 통해 의식이 단순히 사건들의 집합이 아닌,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인간의 경험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임스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 고정된 개념이나 단일한 사고 패턴을 따르기보다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사고 흐름을 따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제임스의 주장입니다.

    이 개념은 후일 문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제임스의 방식은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가 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2.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

    제임스는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한 번에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정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처리합니다. 
    주의는 우리의 의식이 특정 대상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임스는 주의가 단순한 감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주의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욕구, 필요, 목표에 따라 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나 목표에 따라 어떤 정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을 무시하는 선택적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주의의 이론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보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주의 집중 능력에 대한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택적 지각은 인지심리학, 학습 이론, 심리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감정 이론 (James-Lange 이론)

    제임스는 심리학에서 중요한 기여 중 하나로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반응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 of Emot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자극에 대해 신체적으로 먼저 반응하고, 그 신체 반응을 인식한 후에 감정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반응을 경험하고, 그 신체적 변화를 인식한 후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는 "우리는 슬퍼서 울지 않고, 울기 때문에 슬프다"고 주장하며, 감정이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이론은 이후 감정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심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임스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체와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4. 습관(Habit)의 형성과 역할

    제임스는 인간의 행동에 있어 습관(Habit)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습관이 삶의 전반적인 흐름을 결정하며, 의식적인 사고나 결정 없이도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주요 기제라고 보았습니다.습관은 행동을 자동화시키고,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인류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제임스는 특히 어린 시절의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습관이 한번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반복적인 습관의 총합"이라고 말할 정도로 습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대한 연구는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 행동이 단순히 외부 자극에 의한 반응뿐만 아니라, 습관이라는 내면적 기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후의 행동 심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라는 구절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William James / 1842. 1. 11-1910. 8. 26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습관의 형성과 역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So an action and you reap a habit
    So a habit and and you reap a character
    So a character and you reap a destiny.


    5. 자아(self)와 정체성

    제임스는 인간의 자아(self)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경험하는 자아(Subjective Self)로, 이는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는 객관적인 자아(Objective Self)로, 내가 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제임스는 이 두 가지 자아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자아를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아를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 사회적 자아(social self), 그리고 정신적 자아(spiritual self)로 나누었으며, 이 각각의 자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적 자아는 우리의 신체나 소유물, 
    사회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 자아, 
    정신적 자아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자아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제임스의 개념은 오늘날의 자아 심리학과 정체성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인간의 자아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6. 의지(Will)와 자유의지

    제임스는 의지(will)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제임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는 반복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그는 "행동하지 않으면 의지가 약해지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지가 강해진다"고 말하며, 의지가 훈련을 통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임을 강조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지가 결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의 영향을 넘어서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심리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현대 심리학의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의식의 흐름, 감정 이론, 주의, 습관, 자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심리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가 강조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이후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임스는 철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그의 심리학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려는 심리학자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감정의 생리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주의 이론은 인지심리학 연구의 기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자아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에서도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결론 : 인간 심리의 복합성과 통찰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저작으로,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 습관, 자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대 심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1.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 [빌립보서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3.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