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Amos) 짐, 짐을 지는 사람 07-12-2023(수) / 07-21-2023(금)



 선지자들의 연대표



최초의 문서 예언자 아모스,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예언서에서 아모스서의 위치

1. 최초의 문서 예언자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서 가운데 아모스서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건 아모스서가 ‘예언자의 이름이 곧 예언서의 이름으로 등장한 최초의 예언서’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아모스처럼 예언자의 이름이 곧 책의 이름이 된 예언서를 ‘문서 예언’(Writing Prophets)이라고 하고, 이들을 ‘문서 예언자’(Writing Prophets)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에서는 총 17권이 예언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문서 예언자들이 직접 예언서를 기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사역과 예언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수집되고 보존되었다는 의미입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55).

2. 양을 치며 농사를 지었던 아모스

예언자로 부름 받기 전, 아모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참고로 바벨론에서 예언사역을 했던 에스겔의 직업은 제사장이었고(겔 1:3), 예레미야도 제사장이었습니다(렘 1:1). 반면,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15). 아모스는 분명하게 자신을 ‘선지자도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라는 정확한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아들’이란 말은 혈연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가끔 ‘선지자 무리’ 혹은 ‘선지자 생도’란 표현이 나오는데(삼상 10:5, 20:18-24, 왕하 2:3, 4:1, 38) 이들은 한 사람을 지도적인 예언자를 모시고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선지자 무리에 속한 생도와 지도적인 예언자는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던 것이 좋은 실례입니다(왕하 2:13)(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66-67). 그런 점에서 아모스가 ‘선지자의 아들’이란 말은 그가 전문적인 예언자 무리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대신, 아모스는 자신을 ‘양을 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사꾼’으로 소개합니다. 주목할 것은 아모스가 자신을 ‘목자’라고 사용한 용어는 열왕기하 3장 4절에만 단 한번 나온다는 점입니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히브리어 ‘노케드’는 아모스가 남에게 고용된 일반 목동을 뜻하는 ‘로에’(히브리어)와는 달리, 자기의 목장을 소유하며 양을 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62). 아마도 그는 본래 생활에 별로 어려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한 재산을 가진 중산층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아마샤’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위치한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제사장이었습니다(아모스 7:10-11). 특히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왕실성전’이 있는 곳으로 북이스라엘의 ‘중앙성전’(Central Sanctuary)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이스라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평범한 제사장이 아니라 힘과 권력이 있는 제사장이었으리라 판단됩니다.

반면,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남유다’에 위치한 ‘드고아’(Tekoa) 출신의 농부였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산간벽지가 아닙니다. 참고로, 드고아는 남유다의 르호보암(주전 922-915)이 이곳에다 각종 무기와 군비를 비축하고 군대 사령관을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대하 11:6-12), 남유다가 멸망하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중요한 군사 도시로 남아 있었던 곳이었습니다(렘 6:1).(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60.)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를 북이스라엘로 보내셔서 예언하도록 하셨을까요? “이것은 당시 북쪽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에 평신도를 들어다가 북쪽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차준희, 『예언서 바로보기』,212-213.).

당시 이스라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남유다’와 이를 제외한 열지파로 이루어진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 이후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상 11-12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르호보암 2세가 통치하였고, 남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3. ‘심판 예언자’인 아모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지배계층, 일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마다 무섭게 책망했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국내의 대표적인 구약학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강성렬은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규정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어떠한가?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토라에 불순종하는 지배 계층과 일반 대중의 잘못된 신앙생활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그들의 왜곡된 삶의 양식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비판과 저항 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강성열, 『구약성서로 읽는 지혜 예언 묵시』, 119).

예언자 아모스 역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매섭게 예언했습니다(암 8:2). “아모스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종말에 대하여 선포한 예언자입니다.”(차준희, 『예언서 바로보기』, 214).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accusation)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했기에(announcement of judgement) 그를 흔히 전형적인 심판의 예언자라고 합니다(prophets of doom)(박준서, 『구약세계의 이해』, 123). 아모스의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아모스가 활동한지, 약 30년 만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도 아모스는 명석한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 북이스라엘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가장 융성할 때,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실, 아모스만이 ‘심판 예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진실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발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바른 이야기만 했기에 부패한 사회와 왕궁을 향해 거침없이 쓴 소리를 했고, 담대히 멸망을 선포해야 했기에 학자들은 이들을 ‘멸망 예언자’(doom prophets)라고 부릅니다. “소위 멸망 선지자로 불리는 참 예언자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을 선포하던 이들입니다.”(기민석, 『한국성도를 위한 예언서 강의』, 54). 반대로 왕과 백성들에게 근거없는 평화를 외치며 왕의 비위만을 맞추기에 급급했던 예언자들은 ‘구원 예언자’ 혹은 ‘평화 예언자’(salvific prophets)라고도 합니다.(기민석, 『한국 성도를 위한 예언서 강의』, 43). 이런 부류에 속한 예언자로는 예레미야 시대의 하나냐(렘 28:1-4), 북이스라엘의 아합에게 속해있던 400명의 궁정 예언자들(왕상 22:1-6)입니다. 400명의 궁정 예언자들은 참 예언자였던 미가야와는 달리 ‘아합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거짓예언을 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주변 국가들을 향해서도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아모스 1-2장은 북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인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심판 선언 이전에 이방 나라를 향해서도 심판 선언을 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을 때에 긍휼을 베풀지 않고 약한 이웃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85)입니다. 에돔은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무참히 유린당할 때 돕기는 커녕 바벨론에 동조하여 그들과 같이 남유다의 재물을 노략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을 피해 도망치는 유다 백성들을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심지어 그들을 붙잡아 바벨론에 넘기기까지 했습니다(옵 1:11-14). 이웃 나라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체, 살인하고 노략질한 에돔에 대해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언하셨듯,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도 무고히 이웃국가를 침략하여 노략질한 이방 나라들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근거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인 ‘휴머니즘’(Humanism)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이방 나라들(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지적은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에게는 보편적 정의의 잣대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이사야, “미가 6장 6-8절에 담긴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예배 비판과 사회윤리”, 115-116.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분임을 널리 알리는 것’(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85)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심판 예언은 주로 북이스라엘을 향해 집중됩니다. 아모스 2장 6절부터 9장 6절까지는 모두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아모스(AMOS) / 짐을 진 자

기록자 : 아모스
기록 시기 : 주전 760년경
성격 : 대언
이름 :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뜻한다.

대언자 아모스의 직업은 농부였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처음에 대언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남 왕국 유다의 시민이었으나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되기 전에 북 왕국을 향해 대언했다.

수신자 : 북 왕국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백성들
주제 :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 회복의 약속
목적 : 하나님과 우리를 나누는 죄들을 제거해야 그분과의 교제가 회복됨을 보여 주는 것
내용 :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백성들이 번영과 형통을 누리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방탕함과 사치와 불법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송아지 숭배와 바알 숭배가 혼합되어 이스라엘 국가의 종교가 되었다.
제사장들은 수치스런 일을 행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송아지 숭배의 근원인 벧엘로 가서 왕과 백성들에게 부정과 탐욕과 술 취함과 간음과 학대를 버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그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포로로 잡혀가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강하게 선포했다.
강하게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그는 메시아 왕국과 메시아의 약속을 주면서 경건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아모스서는 9장, 146절, 4,217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9장(이스라엘의 분산과 회복),
핵심 절 :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므로 내가 이르되, 다림줄이니이다, 하매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두고 다시는 그들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아니하리라.”(7:8),
핵심 단어 : 다림줄,
핵심 구 :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걷겠느냐?”(3:3)
아모스서의 그리스도 : 만군의 하나님(4:13),
영적 교훈 :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4:12)



아모스서의 시대적 배경

예언서는 서두에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를 명시적으로 밝혀둡니다.
그래서 예언서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와 장소를 숙지해야 합니다.
아모스 1장 1절에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남유다를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역사서와 예언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을 동시에 병기해 놓았습니다.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왕상 16:28) 남유다의 아사왕 재위 18년에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1.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 여로보암 2세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13번째 왕으로 무려 41년간을 다스렸습니다(왕하 14장 23절, 주전 786-746).
그 이름의 뜻은 “백성이 번성하게 되기를 원한다”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19명의 왕 가운데 가장 오랜기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참고로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아모스의 뒤를 이어 호세아도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참고로 “호세아는 문서 예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출생하고 활동한 예언자”(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11)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로보암 2세는 예후 왕조(Jehu Dynasty, 주전 842-815)의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예후 왕조에는 예후로 시작하여 ‘여호아하스’ -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리야’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후 왕조 이후에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6명의 왕인, 살룸(745, 1개월) - 므나헴(745-737) - 브가히야(738-737) - 베가(737-732) - 호세아(732-724)가 등장하지만 통치기간은 약 24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는 예후 왕조뿐만 아니라 전체 북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경제적·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여로보암의 2세의 영토 확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그렇다면 하맛(Hamath)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요?
여기에서 ‘아라바 바다’는 사해(死海, Dead sea)를 가리킵니다.

2. 정치· 경제적 상황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융성은 ‘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북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혔던 아람은 신흥 세력이었던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3세(Adad-Ninari, 주전 810-782)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수도였던 다메섹이 점령당하여 조공을 앗수르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람(시리아)은 그 힘이 약화되어 더 이상 북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이희학, “북왕국 멸망의 사회적 원인들과 예언자 아모스의 심판”, 『구약논단』, 22).

더하여 아닷-니라리 3세와 그의 아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 pileser)는 더 이상 시리아-팔레스틴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이안 프로반 외 2인,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547). 참고로 디글랏빌레셀 3세는 성경에서 ‘불’(Pull, 왕하 15:9, 대상 5:2)을 말합니다. 므나헴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디글랏-빌레셀 3세가 침략하려하자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줌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5:17-22).

또한 여로보암 2세 치세 하에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군사력이 강력했다는 것은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군사력의 바탕은 경제력에 기반합니다. 외세의 침략이 사그라들자, 대내외적인 경제적인 여건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육로와 해상을 통해 국제무역이 활발했으며, 농산물(포도주와 곡식)을 팔아 부자들이 출현했습니다’(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49).

열왕기하 15장 20-21절 “앗수르 왕 불(Pull, 디글랏빌레셀 3세)이 와서 그 땅을 치려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화폐단위로 은 한 달란트는 3,000세겔이었기에 므나헴 당시, 북이스라엘에서는 적어도 60,000여명의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큰 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깁보레 하일’은 본래 전쟁의 용사를 의미했지만, 본문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 즉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희학, “북왕국 멸망의 사회적 원인들과 예언자 아모스의 심판”, 『구약논단』, 32.

대지주들이 많다는 것은 그에 비해 소작농도 비례하여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모스 3장 15절에 의하면, 이들은 ‘사치스러운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소유했고 별장 안에는 값비싼 수입품이었던 상아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암 6:4). 이런 당시 부자들의 호화로운 사치 행각은 20세기 초반에 고고학을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1930년대, 영국과 미국 합동 발굴팀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궁전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궁전의 한 방에서 수많은 상아 장식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기에 이를 ‘상아 방’(ivory room)이라 명명하였습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59. 각주 3번을 보라).

당시 소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하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체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사법체계의 붕괴, 없는 자에 대한 가진 자의 갑질과 착취, 사회 안전망의 붕괴 등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상태는 어떠했을까요?

3. 북이스라엘의 신앙 상태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대외적인 정치적 안정과 활발한 국제무역으로 인해 경제가 호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상태는 매우 어두웠다고 아모스는 지적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의 고발은 아모스 3-6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아모스서 2장 4-8절은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심판을 돌이키지 않을 거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암 2:6).
바로 이어, 죄의 항목을 나열합니다.
첫째,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파는 것입니다.
둘째,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자의 길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넷째,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내용 중에서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죄’의 언급은 없습니다.
성전제사를 드리지 못했다거나, 십일조를 안했다거나, 안식을 어겼다는 지적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네 가지 사회 윤리적 죄를 고발”(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죄의 고발은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4-6).

이 두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2장 6-7절에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연약한 자”가 언급되고, 8장 4-6절에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4절), “힘없는 자”, “가난한 자”(6절)가 언급됩니다. 즉, 아모스서 2장 6-7절과 8장 4-6절은 동일한 세 집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420. 참고로, 아모스서 2장 7절의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는 ‘빈곤한 자’ 혹은 ‘빈궁한 자’를 말합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88.

이 두 본문(암 2:6-7, 8:4-6)이 보여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사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기대하셨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삶의 모습은 ‘재판을 공정하게 집행함으로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신 24:17; 27:19, 출 23:6-8, 잠 17:23, 사 10:2, 암 5:12)이었으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객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공동체였습니다(출 22:22, 신 10:18; 16:16, 욥 29:12-16, 시 41:1; 146:9, 잠 14:21; 22:22, 사 1:17, 렘 22:3). 하지만 아모스가 본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권력있는 자들이 재판을 굽게 하고 있으며, 돈이 있는 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최소한의 물질을 착취하는 세상이었습니다(암 4:1; 5:11-12).

아모스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정의를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암 5:7)로 규정합니다. 더욱이, 당시 종교지도들 역시 이러한 흐름에 합세하여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암 8:5). 이 말씀에 따르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제사와 절기가 빨리 지나가기를 고대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백성들이 바친 헌물들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기 때문이지요”(기민석, 『한국 성도들을 위한 예언서 강의』, 99). 이런 일을 누가 했을까요? 바로 당시 종교 지도자, 즉 성전에서 제사일을 관장하는 제사장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그냥 팔지 않고 저울을 속여 팔아 큰 이득을 남기려고 했다니, 참 가관입니다.”(기민석, 『한국 성도들을 위한 예언서 강의』, 99)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외형적 종교적 행위는 매우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습니다.
아모스서 4장 4-5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4-5).

본문에서 등장한 벧엘과 길갈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렸던 제의의 중심지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구약의 절기들과 제사인 월삭, 안식일, 십일조, 수은제, 낙헌제가 상시적으로 드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마다” 제사를 드리며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된 여러 제사의 종류 등은 이들이 참으로 정성스럽게 제사했음”(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457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행위가 어떤 불법적이거나 규례를 어긴 제사에 대한 책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참고로, 수은제는 ‘감사제’(레 7:13)이고,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레 7:16, 민 15:3)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신앙행위를 한 마디로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암 4:5). 아모스서 5장 21-23절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의 신앙행위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기뻐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특별히, 아모스서 5장 1절에 ‘내가 미워하고’, ‘내가 멸시하다’라는 거절을 표시하는 심한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로, 이는 하나님의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줍니다(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55).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본문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신앙행위 일체를 거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절기와 성회의 거부입니다.
둘째는 일체의 제사에 대한 거부입니다.
셋째,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를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서 드려지는 일체의 신앙행위 자체를 거부하시고 어떤 제사와 헌물도 열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모스는 8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의 여로보아 2세와 유다의 웃시야의 치세에 살았던 사람이다.

표제는 그가 대지진 직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선지자로 활동했던 것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아모스서는 북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때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였다. 이 때에 요나가 예언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 시절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으며, 거대한 부가 왕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마리아에는 강력하면서도 흥청망청할 정도로 부유한 계층이 성장하였다. 아모스의 설교의 초점이 된 것은 이러한 부유한 자들이 부와 권력과 특권을 남용한 점이다. 그러나 부와 군사적인 성공의 시기는 이스라엘 왕국의 짧고도 찬란한 일몰의 시기였다.

아모스 자신은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 오 마일 지점에 있는 드고아 지방 출신 목자였다.

이 선지자의 사회적 지위 - 얼핏 보기에 아모스는 천한 신분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사용된 목자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rsh)가 아니라 다른 용어(nqd)가 사용되었다. 이 칭호는 대규모 목축업자였거나 가축 중개인으로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아모스는 단순한 농부나 소작인이 아니라 보다 부유한 사회계층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했던 것이 된다.

어느 드고아? - 유일하게 알려진 곳은 유다 베들레헴 남쪽의 마을이다.

아모스와 기타 선지자들 - 7:14절은 아주 논란이 많은 부분중의 하나이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I not porphet; I not son of prophet)" 라는 구절을 과거로 해석하거나 현재로 해석할 경우 많은 해석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 아마샤는 아모스를 선지자로 생각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샤와 아모스 모두 그의 행동을 예언이라는 동사를 가지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와 이 책간의 관계 - 오경의 문서 비평 방법론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아모스 자신의 말들을 후대의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노력들을 기울였다. 여기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새로운 종교적 전통을 고안한 사람이 된다. 양식비평에 이르러서는 아모스서의 관심을 원래의 뼈대와 함께 원래의 설교들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조사하고, 일단 성문화된 문헌의 편집 단계를 찾는데 시간을 들였다. 이로써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단계를 고안해낸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들에 깊이 젖어 있던 자가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아모스서의 수많은 부분들이 후대의 증수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현대의 학자들이 비평학계의 방법론들이 과연 성경의 책들, 특히 아모스서와 가은 작은 책들을 잘게 쪼개는 것을 허용해 주는 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점점 더 의심을 품고 있다.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의 세 번째 단계는 문학적인 구조와 수사학적인 발전 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하는데 있다. 이들은 아모스의 저자 문제와는 별도로 아모스서가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편집자이든 아모스이든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문학적인 구조

열방들에 대한 신탁(1-2장)

아모스는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적인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심판의 신탁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일종의 지리적인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심판들은 지혜문학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X와 X+1의 숫자 패턴을 사용하고 있다(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그러나 이것들을 주로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채택된 수사학적인 기법들이다. 그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이웃 나라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들에 대한 비판들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한 비난이 자신들의 발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주변 적국들에 대한 신탁은 이스라엘에게 갑자기 튀어 오르는 덫이 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3-6장)

여기서 아모스는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사용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선지자적인 소송의 연설양식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니므이 고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배경은 재판정이다. 이런 선지자적인 소송 외에도 아모스는 또한 심판의 연설들과 저주의 신탁들을 사용한다.

이상들에 대한 기록들(7-9장)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다섯 개의 이상들에 대한 자서전적인 기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중 네 개는 서로간에 비슷하고, 마지막은 뚜렷한 차이가 난다. 처음 네 개는 분명한 연결점이 있으며, 하나의 집단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신탁들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적인 기교들을 사용하고 있다.

신학적인 주제들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북왕국의 종교적, 사회적 관행들을 거부하시고,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그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허버드는 주권적인 통치와 심판을 네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바라본다. 첫째는 개인적,신적 차원에서이다. 심판에서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둘째는 창조적 차원이다. 세상 자체가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형국이다. 셋째는 도덕적인 인과관계의 차원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저질러진 악은 본인에게 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넷째는 정치적인 역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하나니므이 주권적인 통치는 세상의 열방들을 다 포괄한다.

우상숭배와 사회적인 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상수애와 사회적인 불의라는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 숭배가 부패했으며, 외형적이고 허식적인 종교적인 사항들은 율법의 중요한 요소들을 상실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번영은 부유한 상류계층을 만들어 냈고, 여유 시간과 잉여 재산은 죄악에 사용되었다. 이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공의를 명하시며, 순종을 요구하신다.

언약과 남은 자

아모스는 급진적인 종교개혁가가 아니었다. 언약에 근거한 법정 소송의 대리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언약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오경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고 있으며, 언약적인 이념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선민, 즉 야웨와의 언약 관계 속에서 구속을 받은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이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성 때문에 이 백성의 죄를 심판으로 대응하시는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헌신 때문에 거기에는 항상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여호와의 날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그 나라가 변호를 받는 날, 용사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날로 보았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 개념은 완전히 뒤집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으며, 용사이신 하나님은 이 백성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원수들의 군대들을 자기 백성에게로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도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효력에 대해서 다른 선지자들과 같이 신념을 갖고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사회 정의 및 가난한 자들의 학대에 대한 아모스서의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아모스서는 특히 신약의 몇몇 구절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로마서 12:9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권면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국가적인 우상숭배에 대한 회상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15:16-17에 인용된 아모스 9:11-12를 들 수 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을 교회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재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잉라고 주장한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다시 일으키며, 그 틈을 수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실제적인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열방들을 모으는 것도 또한 포함하는 것이었다.


주전 8세기의 역사적 배경(히스기야)


히스기야(주전 715-685년)

이제 주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모스서, 호세아서, 이사야서, 미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 연구는 히스기야로 마감을 합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남유다 왕이었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입니다.

대체로, 히스기야는 구약성경을 조금 아는 분들이라면 익히 들어본 이름입니다. 그만큼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성군 가운데 한명으로 인정받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29장부터 32장까지 무려 4장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을 정도로 히스기야는 남유다 왕들 가운데 성군으로 평가됩니다.

먼저, 히스기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열왕기하 18장부터 20장까지이고, 역대기는 역대기하 29장부터 32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하여 3장을 할애했고, 역대기 저자는 4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스기야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3-7)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일말의 부정적인 평가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역대기 저자 역시 히스기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대하 29:2). 이렇게 히스기야는 열왕기 저자와 역대기 저자에게 모두 후한 점수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알아 봅시다. 첫째, 히스기야는 그의 부친, 아하스로 인해 16년간 방치되었던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제사를 회복합니다(대하 29:1-36). 둘째, 그 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 절기를 7일간 준행합니다(대하 30:1-27). 셋째, 남유다 성읍에 세워진 모든 우상들과 우상숭배의 진원지였던 산당과 단을 파괴함으로, 우상숭배의 뿌리를 제거합니다(대하 31:1). 이러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대해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21).

이렇게 히스기야가 남유다의 종교개혁을 시도하는 사이,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재차 침략합니다. 우리가 위에서 다루었듯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북이스라엘의 므나헴 왕 때에도(왕하 15:17-20), 베가 왕 때에도(왕하 15:27-31) 침략을 했습니다. 히스기야 재위 4년, 이때 북이스라엘은 마지막 왕, 호세아가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참고로, 이 호세아는 예언자 호세아와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에게 바쳤던 조공을 중단하고 대신 이집트의 도움을 청합니다. 이는 “당시 중동에서 유일하게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애굽의 소(So)왕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한 것”(한홍, 『왕들의 이야기 1』, 281)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했기에 북이스라엘을 도울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앗수르를 배반하고 이집트의 원조를 청한 사실을 알게 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은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합니다(왕하 17:1-5). 이러는 동안,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사르곤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사마리아를 공격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게 멸망합니다. 이때가 주전 722년입니다.

3만 명에 이르는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앗수르로 끌려갔으며, 앗수르의 도시들인 할라, 고산 하볼 하숫가, 메대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앗수르가 취한 식민통-치방식은 ‘쌍방향 강제이주정책’(two way-deportation policy)(차준희, 『역사서 바로읽기』, 229)이었습니다. 즉, 앗수르의 백성들을 식민지 국가에 이주시키고, 식민지 백성을 자기 영토에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앗수르 제국은 이렇게 쌍방향 강제이주정책을 시행했을까요? 이는 혼혈정책을 통해 신민지 국가가 앗수르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탄생한 것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종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점을 가지고 불결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까지 내려갑니다(차준희, 『역사서 바로읽기』, 230) .

이후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약 400년간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셨고, 그로 인해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심겨집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소위 이를 ‘사마리아인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한편, 약 3만여 명의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 앗수르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특히 앗수르는 피정복민의 반란을 방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반역할 가능성이 높은 지방의 주민들을 모아서 멀리 딴 곳으로 이주시켜 버리는 강제이주정책”입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킬 때, 매우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앗수르는 포로들을 앗수르로 끌어갈 때 말할 수없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포로들의 발목을 줄이나 사슬로 묶어 보폭으로 걷게 했을 뿐 아니라, 가죽 끈에 묶여진 갈고리를 혀나 턱에 꽂았다. 묶인 손이나 발에 구멍을 내어 밧줄을 엮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들이 잘 따라오지 못할 때는 이 갈고리 끈을 사정없이 잡아 당겨서 포로들에게 형언키 힘든 고통을 주었다. 앗수르의 이 잔혹한 포로 다루기는 바벨론에게도 그대로 답습된다(한홍, 『왕들의 이야기 2』, 50).

앗수르로 끌려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버렸고, 종교 역시 혼합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당시 고대근동의 맹주였던 앗수르에게 주전 722년에 멸망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 제국은 이제는 남유다를 식민지화 하려고 침략합니다. 이때가 히스기야 재위 14년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왕하 18:13). 한편,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취하고자 한지라”(대하 32:1).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습니다.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왕하 18:7). 이러한 히스기야를 앗수르의 산헤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초토화시키려고 침략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대군은 노도와 같이 몰려와서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키고 블레셋의 성읍들도 휩쓸어 버렸다. 여로보암 때부터 요새화된 요충지 라기스도 점령하고 에그론 왕을 해방시키더니, 아프리카의 강국 애굽과 에티오피아 연합군까지 격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성읍을 점령하고 20만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갔다. 무시무시한 공성 장비를 가진 앗수르 대군의 침략 앞에 유다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09).

이때, 히스기야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왕하 8:14).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엄청난 비용을 요구합니다. 즉,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더하여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줍니다(왕하 18:13-16). 하지만 앗수르의 산헤립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완전히 지배하려고 합니다(왕하 18:17-37). 이 사건은 이사야 36-38장까지 길게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앞에, 히스기야는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합니다.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궁내 대신 엘림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매”(왕하 19:1-2). 비록 이전에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두려워서 성전에 있는 금을 다 긁어모아 바쳤지만, 이제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큰 국가적 재난 앞에서 리더가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겠다는 의미”(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18)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당시, 궁중 예언자였던 이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앗수르의 침략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묻자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보낸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전달해 줍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37:6-7).

이와 같이 히스기야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 19:5-7)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역사서와 예언서가 서로 병행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사야서라는 예언서에 역사적 사건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예언은 ‘무시간적·무공간적인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특정한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37장 6-7절과 열왕기하 19장 5-7절은 약간의 기록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남유다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은 일치합니다. 실제로, 그 다음날 앗수르의 정예부대 18만 5천명의 군사들이 몰살당합니다. 산헤립 역시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의 아들들에게 살해당합니다(왕하 19:35-37). 그러면서 고대근동 지역을 호령했던 앗수르의 세력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대신 바벨론이라는 또 다른 제국이 흥기하게 됩니다.

국가적 대재난을 잘 넘겼던 히스기야에게 갑자기 죽을 병이 찾아옵니다(왕하 20:1, 사 38:1).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눈물로 통회하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왕하 20:4-6). 이렇게 히스기야는 국가적 재난으로부터 남유다를 구원했고, 개인적인 환난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이로 인해 마음이 높아지고 맙니다. 마치, 자기의 힘과 능으로 된 것처럼 착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차에 고대근동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바벨론왕, 발라단의 아들인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냅니다(왕하 20:12). “고대사회에서는 병으로 회복된 군주에게 이웃 나라 왕들이 축하 사신과 선물을 보내는 것이 외교적 관례”(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33)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남유다의 주요한 시설을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다 공개해 버립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저희가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왕하 20:12-15).

이사야는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 심판적 예언을 전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 20:17-18).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두 가지의 심판적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남유다의 모든 재물이 바벨론으로 이거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왕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 바벨론의 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남유다가 바벨론의 식민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약 100년 후에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모스와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적 배경, 이사야와 아모스가 활동하던 남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언서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예배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모스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아모스’라 불렸어요.
아모스서는 유다 문학 사상 가장 먼저 쓰여진 예언서로 중요하지요.
비록 분량이 적어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다른 예언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답니다.

아모스는 어떤 성경인가?

누가 썼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남 유다 사람으로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아모 7,14)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는 아니고 상당한 자기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변의 국제정세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국내 사정에 밝은 걸 보면, 그는 꽤 많이 배운 사람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모스는 본래 예언자 가문에 속하지도, 왕실 예언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베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한 뒤, 그는 남 유다로 추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위경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모스가 베델의 사제 아마니야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또는 남 유다의 왕 우찌야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모스는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를 크게 강조하였기에 ‘정의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6-746) 시절로서 대략 기원전 7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아모스의 예언활동이 그친 얼마 뒤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모스가 선포한 신탁들을 모우고, 또 자신이 직접 밝힌 자서전적인 내용(7,1-9; 8,1-3; 9,1-4)을 덧붙여 아모스서의 골격이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남 유다에서도 계속 살아 움직여서 유다에 관한 내용이 뒷부분에 덧붙여졌지요.
아마 최종적인 아모스서의 형태는 다른 예언서들처럼 유배기나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합니다.

왜 쓰여졌나요?

아모스가 예언자로 등장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위축된 탓에 기를 펴고 살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북 이스라엘의 부유층은 가난한 동족을 괴롭히는 불의를 자행하며, 자만과 향락 속에 빠져 안일하게 살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으므로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아무 일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환상을 지니고, 자기식의 예배행위에만 열중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태평스레 있는 백성들에게 아모스는 무서울 정도로 엄하고 가혹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심판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넘어,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실제로 계시며 그분은 정의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것을 강하게 일러준 것이죠.

 <새김과 나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때, 우리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불과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야훼를 찾아라

(아모 1-9장)

아모스서는 9장인데,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아모 1,1-2,16)

하느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신 나라는 모두 몇 나라입니까?(2,21-24)

 하느님께서 외치시면 가르멜 산마루의 푸른 초원이 말라버릴 정도로, 말씀의 힘은 살아 있고 대단합니다. 이제 그 하느님께서 다마스커스, 불레셋 등 여러 민족의 죄상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의 죄는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마구 다루고 죽인 잘못입니다. 그 누구라도 형제를 괴롭히고 생명을 짓밝는 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역시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우상을 섬겨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힌 잘못을 범했다고 고발되죠. 그들은 자신들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겨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규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에요.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아모 3,1-6,12)

아모스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두 가지 송가를 크게 읽어 보십시오(4,13; 5,9-8)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원하거나 자의 적인 판단에 따라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왕실과 부유한 세도가와 그들의 귀부인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규탄하며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형제들을 자기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아 무시하고 괴롭히며, 오직 자기 중심적으로 허영심과 자만심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도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봉헌하며 감사예물을 끊임없이 바치지만, 아모스는 이

것 역시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순종함이 없는 자기 기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느님과 떨어져 죽음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와 살 길을 찾으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시는 뿌리뽑히지 않으리라(아모 7,1-9,15)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의 내용과 뜻은 무엇입니까?(7,1-9; 8,1-3; 9,1-4)

아모스가 본 환시들은 심판의 말씀을 한층 더 생생하게보완해 줍니다.
그러나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는 그를 추방하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하죠.
하지만 먹을 양식은 넘쳐도 참된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는 처지는 외적인 불행보다 더 심한 내적인 고통이요 심판입니다.

결국 아모스가 선포하는 요점은 하느님을 무슨 안전장치 쯤으로 여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되고 결정적인 힘이신 하느님의 실재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회개하여) 하느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 때,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오리라는 선포랍니다.
누구든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모스 5: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아모스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라 정했으며, '아모스'는 '짐을 지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는 여호와를 거부하거나 아예 망각하고 있던, 당시의 남.북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어려운 사역을 수행해야 했던 아모스의 소명과 잘 어울다고 할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남유다 예루살렘 남방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드고아의 목자 출신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당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였으나,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타락이 극심했던 북이스라엘을 일차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당시 일시적 부강과 번영에 도취되어 여호와 신앙을 떠나 인본주의적. 세속적 타락에 함몰된 선민의 사회 정의의 상실을 중심으로 한 적나라한 지적과 그에 대한 철저한 심판 및 공의의 징계 이후의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한 회복 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먼저 다메섹(1:3~5), 가사(1:6~8), 두로(1:9~10), 에돔(1:11~12), 암몬(1:13~15), 모압(2:1~3), 유다(2:4~5)에 이어, 그 정점으로서 이스라엘(2:6~16)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1~2장).

그리고 이어 심판 예언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을 향해 온갖 불의와 불법을 행하고 형식적으로만 예배하는 사회 지도층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지, 그 당위성을 설교(3~6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모스서는 마지막으로 다섯개의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7~9장). 

처음 메뚜기 환상(7:1~3)과 불 환상(7:4~6)에서는 아모스의 간구로 하나님의 심판이 유예됩니다.

그리고 다림줄 환상(7:7~9)과 여름 과일 환상(8:1~3)에서는 선지자의 간구가 더이상 소용없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소 붕괴 환상(9:1~4)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음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파괴에 따른 사회 정의의 실종에 관한 내용

아모스서는 사회 정의가 붕괴된 선민 사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부패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본서에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무자비한 횡포(3:9.10; 4:1)와 수탈과 폭리(2:1; 5:11)및 상류 계층의 사치와 방종(2:8; 6:4-6) 등의 다양한 사회 악이 거듭하여 예리하게 지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불가피함이 예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본서에는 불의와 사회 정의의 실종에 대한 질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파괴에 대한 지적이 더 많은것을 볼수 있습니다(2:12; 3:4. 5;  5:18-27).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 정의의 붕괴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파괴된 데서 찾으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5:4).

그런 점에서 본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인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정의의 회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와의 바른 관계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시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서는 수평적 인간 관계의 파괴와 사회 정의 붕괴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나타난 가시적 현상임을 밝힘으로써 사회 정의의 회복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여호와 신앙의 회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파괴에 사회 정의 붕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수평적 차원의 인간 사랑과 사회 정의 구현이 가능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집중적으로 설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외적 번영에 초래된 영적 피폐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의 무대였던 북이스라엘을 보면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등, 다윗과 솔로몬 이래 최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외적 번영과 반비례하여 영적으로는 매우 피폐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순수한 신앙의 열정은 식어지고, 형식적 신앙으로 주변 나라의 우상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에는 사치와 방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부패와 압제가 횡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 번영에 심취되어 신앙과 도덕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외적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임은 분명하나 여기에만 관심을 두게 될 때, 보다 가치 있는 영적 축복의 중요함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내면적인 것보다 외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 세속적인 것에 빠진 사회는 피폐해지고 개인은 강팍하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외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이로 인하여 영적 문제에 소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외적 번영이 영적 피폐를 가져온다면, 외적 번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만들어버린 아모스 당시 선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본서는, 외적 번영에 내재된 위험에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큰 축복으로 키워나가는 영적 성숙함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회 정의 구현에 힘쓸 책무를 지닌 지도층을 향한 말씀

모든 예언서가 종교적 타락과 더불어 사회적 범죄와 도덕의 붕괴를 지적합니다.  따라서 아모스서 역시 마찬가지이나, 다른 예언서에 비하여 사회적 범죄와 도덕의 붕괴를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강력하게 질타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사회 지배 계층의 부패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4:1-5 에서는 사회 지도층이 약자를 압제하는 악행을 자행하며, 자기 만족적 종교 행위에 심취하여 있음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6:1-14에서도 안일에 빠진 지도층 사람들이, 주제 넘고 포악하며 향락적이고 불경건하다는 사실을 질타하며,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처럼 아모스가 지도층의 타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들의 범죄가 일반 사람들의 범죄보다 더 심각 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의 타락이 미치는 파급 효과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더욱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사회적으로 더 큰 기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약자들을 수탈하는 등 범죄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지도층들의 범죄는 다른 사람들을 본받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민 사회의 타락에 대하여 그들의 책임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특히 사회 지도층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바른 자각을 가지도록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넷째,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질타

아모스서에는 다른 예언서에 비하여 사회 정의의 실종에 대한 질타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모스서에는 종교적 타락과 범죄에 대한 지적 역시 적지 않습니다. 선민 사회에서 사회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범죄 중 더욱 근원적이며 고질적인 범죄는 종교적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범죄의 뿌리에서 자라나는 가지가 사회적 타락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본서에서 주로 초점을 맞추는 종교적 범죄는 형식적인 여호와 신앙과 기복적인 종교 행위였습니다. 아모스 당시 선민들은 조상들의 관행에 따라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며, 각종 절기를 지키는 등 그들 나름대로 종교 행위를 했습니다(4:4.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기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드리는 각종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5:21.22). 이는 그들의 종교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목적에 바탕을 둔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삶에 바른 신앙의 열매가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숭배하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5:26).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증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과 더불어 동반 멸망할 것을 경고하셨고(5: 26. 27),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은 벧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 활동을 악의적으로 호도하고 예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7:10-13). 제사장으로서 참된 선지자의 사역을 방해한 아마샤에게는 그의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는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7:17).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바르게 섬기지 않는 행위를 매우 가증하게 여기시며 엄격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본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종교 행위는 과거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악행만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신앙인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을 때 범하기 쉬운 죄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아모스서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형식적이거나 기복적인 신앙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깨닫게 하며 자신이 이와 같은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 보도록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것입니다.


다섯째, 절대 공의에 업각한 하나님 심판의 공정성

본서의 주된 내용은 정치, 경제, 군사 등 외적번영에 도취되어 여호와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의 길을 가는 북이스라엘의 신앙적 범죄와 사회적 타락을 지적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서에는 북이스라엘의 범죄 지적과 심판 선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람, 블레셋, 베니게, 에돔, 암몬, 모압 및 남유다에 대한 범죄 지적과 심판 선언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나라에 대해서만 심판하시거나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만 특별한 기준을 적용시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는 예외없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본서 예언의 주된 대상이 되는 북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셨고, 더 나아가 주변 6개국 등 도합 8개국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대 공의에 입각한 심판은 공간적 한계를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적 한계도 가지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모스 시대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온세상에 대한 심판자이시며 오늘날 우리들의 심판자도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과거 아모스 시대에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심판하셨듯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2700여년 전에 기록된 아모스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것도 이와 같은 불변의 진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 신앙의 회복

본서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범죄의 지적과 범죄한 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 사이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권고가 발견되어지며(5:4-9), 또한 이와 더불어 악에서 돌이키라는 회개 촉구도 나옵니다(5:10-15). 이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여호와를 찾는 데 있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돌이키라는 회개의 촉구가 나아오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찾아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외적 증거를 보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 촉구 역시 여호와를 향한 바른 신앙을 회복하라는 권면과 별개가 아닌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범죄와 불행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범죄와 불행의 근본적 치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에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것도,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어그러진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범죄한 인간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는 양자간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아모스서를 통하여 이러한 구속의 진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것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째, 변경되지 않는 선민 회복의 약속

본서에는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준엄한 책망과 범죄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여호와의 심판 집행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 거듭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의 마지막 단락인 9:11-15에는 비록 짧으나마, 선민의 회복 약속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본서는 선민의 구원이란 밝고 고무적인 내용으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실 뿐만 아니라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하시는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선포되는 약속은 선민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선민으로서 누렸던 축복들보다 더욱 큰 축복들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분의 약속은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데서 벗어나, 본토에 귀환하여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의 구속사가 완성되는 날, 신약 선민인 성도 모두가 새하늘과 새땅에서 누릴 종말론적 축복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본서는 일차적으로 B.C.8세기의 범죄로 얼룩진 암울한 영적 상황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따라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영적으로 각성된 구약 선민에게 주어진 소망의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본서는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된 어두운 현실 속에서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종말론적 소망을 갖게 하며 큰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평일에는 열심히 도박장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여기실까요? 십일조와 헌금은 꼬박꼬박 하면서도 여전히 탈세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모, 자식, 형제와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바로 아모스서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끝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는 여호와를 사자로 보는 은유법을 사용하며, 남은 자를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파멸의 상징으로 제시하는 충격 요법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의 선포의 원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의 상류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을 보여 주는 아모스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예배는 윤리로, 사랑은 공의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

사마리아인들은 침대상에 누워 헛된 구원의 신학을 지절거리며 아모스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 목자는 이제 그들의 죽음의 증거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오늘 우리의 어리석음은 아닐까요? 
번영과 축복의 신학 위에서 성공 신드롬에 걸린 우리의 모습이, 사마리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단지 염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것입니다. 
울부짖는 사자로서의 여호와의 은유를 통해 아모스 기자가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것이 바로 이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갱신하느냐, 아니면 끝이 없는 역사 자체의 심판을 받느냐하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선택은 여러분 각자의 몫 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여러분의 영원한 삶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간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의 언약 관계를 갱신하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7월 12일(수) 아모스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묵시 받은 말씀(1절)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The words of Amos, one of the shepherds of Tekoa--what he saw concerning Israel two years before the earthquake, when Uzziah was king of Judah and Jeroboam son of Jehoash was king of Israel.

묵시 받은 말씀(The words of Amos)

* 묵시(2372) 하자(châzâh)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15:17, 시58:10, 겔12:27), 우러러보다(욥36:25), 바라보다(시63:2, 미4:11), 받다(사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1:1), 보이다(사30:10), 들어가다(욥8:17), 뵙다(욥23:9, 시11:7), 깨닫다(욥34:32), 보게 하다(아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 묵시(2378) 하조투(châzôwth) חָזוֹת 

1. 이상.  2. 계시.  3. 묵시
발음 / 하조트[ châzôwth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묵시(역대하 9:29).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잇도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구약 성경 / 1회 사용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보인다(호 1:1).
당시에는 여로보암 2세가 남방 유다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시기로(왕하 14:25)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지진이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스가랴에 의해 다시 언급된것을 보면(슥 14:4, 5), 상당히 큰 지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가랴 14: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요세푸스는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했을 때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던 시기(대하 26:16-20)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어쩌면 이 지진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을지도 모른다(Feinberg).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 '드고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넓은 들판이 있었고(대하 20:20; 렘 6:1), 목양에 좋은 곳이었다(Jerome, S.R.Driver).

한편 '목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케드'(5349)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로에'(7443. 로이)와는 달리 털이 많은 양을 키우는 목자이거나(BDB), 비교적 좋은 양을 키우는 목자로 여겨진다. 이 단어가 모압 왕 메사에게 적용되기도 했는데(왕하 3:4), 그는 양을 기르고 공급하는 사람이었다(T.E.McComiskey).

7473. 목자(로이. rôʽîy) רֹעִי 

1. 목자의.  2. 목자
발음 / fhdl[ rôʽîy ]
어원 / 형 7462의 능동태 분사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목자(사 38:12, 슥 11:17).
구약 성경 / 3회 사용

5349. 목자(노케드. nôqêd) נֹקֵד

1. 양의 일종을 지키는 목자. 2. 목자
발음 [ nôqêd ]
어원 / 5348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분사형
관련 성경 / 목자(암 1:1), 양치는 자(왕하 3:4).
구약 성경 / 2회 사용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 '...가 받은 말씀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베레이'(1697)는 어록집과 같은 형태의 책들에서 자주 사용되었고(잠 30:1; 31:1; 전 1:1; 렘 1:1), 고대 히타이트의 봉신 계약 문서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전문적인 선지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모스는 당시 부패했던 선지자들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참신한 인상을 줄수 있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할 때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당시 주변 강대국의 약세를 이용하여 여로보암 2세는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번영은 종교적인 타락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에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든 여호와 심판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주변 국가들의 죄에 대해서도 심판을 선포합니다.

아모스 1장은 서론에 해당하며 이스라엘과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범죄를 고발하고 그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합니다.

특히 다메섹을 비롯한 가나안 국가들의 멸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아울러 회개를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의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종말론적인 희망을 제시합니다.

아모스는 먼저 이방 민족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이방 민족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아모스 1장의 내용 구분
1:1-2. 심판 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가
1:3-5. 다메섹에 대한 심판
1:6-8. 가사에 대한 심판
1:9-12. 두로와 에돔에 대한 심판
1:13-15. 암몬 족속에 대한 심판

하나님은 교만과 우상 숭배로 얼룩진 이방 나라의 심판을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외쳤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벌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존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자신에게 조그만 잘못을 범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도들은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가르치는 본을 보여주는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의 화신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으로 메꾸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모스는 누구인가?(아모스 1:1)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드고아에서 양 치던 목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해 받은 메시지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왕이던 시기, 곧 대지진이 있기 이 년 전에, 이 메시지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임했다.

아모스서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전반적인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고 여로보암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시기라고 합니다.
웃시야의 시대 B.C 792-740년, 여로보암 2세의 시대가 B.C 793-753
학자들은 아모스가 B.C 750년 즈음에 활동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철기시대, 우리 나라는 고조선 시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즈음입니다.

지진이 있기 이 년전'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지진이 정확하게 언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때는 남북 모두 커다란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위상도 높았구요.
그런데 그래서일까요.. 우상 숭배, 사치, 방종, 사법적 부패,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 등이 만연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계속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지만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B.C 722년, 먼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나라에게 멸망합니다.
아모스가 외친지 약 30년이 흐른 뒤의 일이지요.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드고아라는 지명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을입니다.
남유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궁정 출신이나 제사장 가문의 사람도 아닙니다.
목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겸손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 같네요.
그가 아모스서에서 보여준 언어구사능력과 역사에 대한 통찰은그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아모스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북이스라엘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번영이 오히려 영적 타락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니까요.
그 번영은 상류계층에게 집중된 것이었고, 일반 국민들은 소외감과 박탈감까지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상류층은 더욱 탐욕을 부려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면서 부정을 자행하고 있었구요.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아모스는 그 상황을 보면서 피끓는 마음으로 달려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오늘 우리들이 다시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포효(咆哮)하는 사자(아모스 1:2)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 포효(咆哮) : 고함지를 포, 성낼 효 / 사납게 외침.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포효하시고예루살렘에서 고함치신다.
청천벽력같은 그 소리에 양 치는 목자의 초장이 시들고 갈멜 산 꼭대기가 벌벌 떤다.

성경연구를 할 때나 묵상을 할 때 제일 먼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 등
하나님의 모습을 찾고 나면 전체 본문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결정되지요.

아모스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부르짖고, 고함을 치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포효한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을 '사자(lion)'로 묘사합니다.
아마, 목자 출신인 아모스의 경험이 반영된 표현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자가 지금 이스라엘의 적을 향하여 포효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해 포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두 곳은 같은 곳을 나타냅니다. 시적 반복이지요.) 사자가 부르짖을 때,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도 말라버립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에 놓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항상 선한 목자로만 생각했고, 그들의 적을 향해서만 포효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지금  "하나님은 더 이상 너희들의 목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 앞에서 부르짖는다.
너희가 주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희를 삼키실 것이다!" 

다메섹에 대한 심판 예고(아모스 1:3-5)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5.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마스쿠스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길르앗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쇠망치, 나무망치로 무자비하게 두들겨팼다.
나는 하사엘의 왕궁에 불을 놓고, 벤하닷의 요새들을 태워버릴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성문들을 박살낼 것이며,죄의 골짜기에 사는 범죄자 왕,낙원 왕궁에서 호령하는 그 악독한 우두머리를 쫓아낼 것이다.
그 땅의 백성들은그들이 본래 살던 곳, 기르로 돌려보낼 것이다."

하나님의 포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부르짖는다는 하나님의 외침이 당시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모스가 일단 주변에 대한 심판을 먼저 선고하면서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첫번째 대상은 다메섹입니다.
다메섹시리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리아를 대표합니다.

성경에서 시리아아람이라고 하며,  다윗 왕 때부터 이스라엘과는 숙적이었습니다.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했을 때 여러번 싸웠지요.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서 피부병이 나은 나아만 장군도 아람 사람입니다.

아모스는 아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를
그들이 길르앗을 가혹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철타작기라는 표현은 아주 가혹하고 철저하게 침략했다는 표현이겠지요.
정확하게 어느 때 그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왕기하에 있는 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4절에는 하사엘과 벤하닷이 등장합니다.
둘 다 열왕기상하에 이름이 나타납니다.

벤하닷은 열왕기하 6장에서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었을 때 엘리사에게 하사엘을 사자로 보내어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물어봅니다.
그만큼 엘리사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 때 엘리사는 하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놀란 하사엘이 왜 그러시느냐고 묻자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이다"(열왕기하 8:12)

엘리사의 예언은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날 저녁 하사엘이 벤하닷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열왕기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공격하지요.
그 때 길르앗을 특히 잔인하게 침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길르앗이 그냥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표현일수도 있구요.

아모스가 예언하고 있는 지금은 그로부터 약 100년정도 흐른 때입니다.
그렇다고 100년전 잘못을 가지고 지금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그동안 계속 보여준 그들의 잔인함을 심판하는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하나님의 정의는 이처럼 비인간적인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갚으시는 응보적 정의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악행에 대해서 참지 않으시지요.
심판의 불을 보내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사엘의 집, 벤하닷의 궁궐, 다메섹의 빗장 이런 표현은 모두 아람을 의미합니다.
아람이 파괴되고, 아람 사람들, 특히 아람 왕이 죽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B.C 732년, 즉 이 예언이 있은 후 약 20년이 흐른 뒤에 다메섹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더구나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서 기르에 이른다고 했는데요,  기르지방은 아람백성이 시작되었던 지역입니다.
즉, 아람백성을 기르로 잡아간다는 의미는 그들의 역사를 처음으로 돌려놓겠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의지가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와 두로에 대한 심판경고(아모스 1:6-10)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7.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0.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의 메시지

"가사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민 전부를 몰아내서는, 그들을 에돔에 팔아 버렸다. 나는 가사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내가 범죄자 왕을 아스돗에서, 그 악독한 우두머리를 아스글론에서 쫓아낼 것이다. 내가 손을 들어 에그론을 칠 것이며,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두로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민 전부를 에돔에 넘기고, 자기 친족들과 맺은 조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는 두로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아모스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총 8개의 경고를 합니다. 
나라들은 달라지지만 심판의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두 번째 경고는 가사성으로 대표되는 블레셋 민족들에 대한 것입니다.
블레셋에 대해서는 그래도 많이 들으셨죠?  골리앗으로 대표되는 그 민족이지요.

8절에 있는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가사까지 합쳐서 5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사시대부터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다윗 왕 시대에 거의 정복되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했습니다. 

블레셋 민족들에게 심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포로들을 노예로 삼거나 팔아버리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그 사실 자체를 지적하기 보다는 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유대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구요. 그들에 대한 심판은 역시 불을 보내어 궁궐을 사르고 남은 자까지 멸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심판은 두로를 향한 것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북서쪽 해변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원래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에서 기술자를 보내기도 했고, 아합왕의 아내였던 이세벨도 두로 출신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두로에게 심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 역시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다'라는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지요.
이 또한 이스라엘과의 조약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또다시 불로 궁궐을 태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국에 대한 심판경고는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의 배후에 계시며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인류의 역사가 겉으로는 국가간의 조약이나 전쟁들에 이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이지요. 그냥 종교적인 부분만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의 드라마 속에 있다.'고 표현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의의 법칙에 따라 세계를 움직이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나 내 가정, 내 교회의 복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치하시며 이끌어가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너무 개인적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오직 '열방 복음화'에만 맞추어져 있을 때가 많지요.
물론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집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국의 하나님이시며 만유의 주이십니다. 


에돔과 암몬에 대한 심판 경고(아모스 1:11-15)

1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12.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14.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15.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에돔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형제를 사냥감 쫓듯 쫓아서 살해한다.
무자비하고 무정하다.
분을 품고서 밤낮으로 미쳐 날뛰며,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그의 수도 데만을 불태워 허물고, 보스라의 요새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

"암몬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땅을 더 차지하겠다고, 그는 임신한 길르앗의 여인들의 배를 갈랐다. 나는 그의 수도 랍바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전쟁이 고함친다! 으르렁댄다!  회오리바람과 함께 닥치는 대로 쓸어간다! 왕이 포로로 붙잡혀 갔고,  그의 제후들도 그 뒤를 따른다"

하나님의 포고

하나님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심판 경고가 떨어집니다. 
세 번째 까지는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가 없는 시리아(아람), 블레셋, 두로였는데  이제부터는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가 있는 나라들이지요.

네 번째 대상은 에돔입니다.
에돔의 기원은 이삭의 아들이며 야곱의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선 동생이었던 야곱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셨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지요.

창세기에서는 에서와 야곱이 어느 정도 화해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에돔은 계속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에돔은 매우 호전적인 민족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자비하다, 항상 화를 낸다, 끝없이 분을 품는다라는 구절들이 반복됩니다.
실제로 약 170년이 지난 후 결국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에돔은 유다의 영토였던 곳을 침략합니다.

다섯 번째 심판의 대상인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후손들입니다.
소돔에서 탈출한 뒤 산에 머물고 있던 롯의 두 딸이  롯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해서 아들들을 낳았고 큰 딸의 아들이 모압, 작은 딸의 아들이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암몬 또한 매우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침략하곤 했습니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니, 암몬 자손에 대한 묘사가 제일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호전적인 에돔과 암몬이 하나님의 불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현대에도 이러한 잔인한 일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이나, 르완다나 보스니아의 인종청소(이 얼마나 끔찍한 단어란 말입니까!), 일본의 난징 대학살 등등 인류의 잔인한 모습은 에돔과 모압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7월 13일(목) 아모스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짓 것(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For three sins of Judah, even for four, I will not turn back {my wrath}. Because they have rejected the law of the LORD and have not kept his decrees, because they have been led astray by false gods, the gods their ancestors followed,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astray by false)"

* 3577. 거짓 것( 카자브.  kâzâb) כָּזָב    

1. 거짓말.  2. 속이는 행위.  3. 시편 40:5
발음 / 카자브[ kâzâb ]
어원 / 35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짓말(삿 16:10, 잠 14:5, 단 11:27), 거짓(시 4:2), 거짓말하는 자(시 5:6, 잠 19:22), 거짓(시 40:4, 잠 21:28, 겔 22:28).
[형] 거짓되다(시 62:9, 겔 13:6,7), 간사하다(잠 23:3).
구약 성경 / 31회 사용

아모스 2장에서는 모압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 이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실 때 물질이나 형식적인 헌신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즉 그의 중심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울의 교훈과 같이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모든 인간에 대한 동일한 근거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 기준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롬 1:17).
그런데 이런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의 이행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서 1장에서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예언한 선지자는 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것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장에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구원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므로 절대적인 구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속에 존재하는 구원의 언약이 사실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교적 율법의 준수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말씀에 따른 삶에는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인 율법의 의무 이행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전삶의 형태까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의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사람이 자신의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압에 대한 심판경고(아모스 2:1-3)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3.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모압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에돔 왕의 시신을 불에 태워 모독했다. 나는 모압을 불태워 허물고, 그리욧의 요새들도 태워 버릴 것이다.
모압은 고함소리 중에, 전쟁나팔소리와 함께 망할 것이다.
내가 그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제후들도 다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여섯 번째로 모압에 대한 심판 경고.
모압 암몬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서 시작한 민족입니다.
큰 딸이 롯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낳은 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압도 암몬처럼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압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조금 이상합니다.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는 것이 심판의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옛 형벌이었던 부관참시(무덤을 파서 시체를 다시 죽이는 상징적이고 모욕적인 형벌이지요)와 비슷한 것은 알겠는데, 그 대상이 에돔 왕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돔은 어제 우리가 보았던대로 아모스의 심판 경고를 받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국이자 잔인한 민족입니다.
어떻게 보면 심판 받아 마땅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의 시체를 모독한 것이 심판의 이유라니요?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민족적 배타주의를 뛰어 넘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는 이유가 아니라 비인간적 야만 행위 그 자체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민족, 혹은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범죄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현대 사상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이로써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 경고는 끝이 났습니다.
여섯 번의 심판 경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범죄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악에 대한 우리의 시각 또한 넓어져야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이나 테러,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인종차별주의,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경제 만능주의,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양극화..
이런 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은 종교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만 모두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깨어진 세상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 온전한 샬롬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원한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들은 약자들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아모스 2:4-5)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의 메시지 

"유다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했고, 내 명령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오래된 거짓말, 그들의 조상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거짓말은 잘도 집어삼킨다. 나는 유다를 불태워 허물고, 예루살렘의 요새들을 다 태워 버릴 것이다."

아모스의 심판 경고는 일곱 번째에 접어들었습니다.
7이란 완전수가 아닙니까?
아마도 이 무시무시한 심판 설교를 듣고 있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다.
북이스라엘과 같은 핏줄이면서 가깝고도 먼 나라.
성경에 보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전쟁도 하고 교류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B.C 930년 경 나누어졌고, 지금 아모스가 설교하고 있는 때가 B.C 750년쯤 되니까 남북이 나뉜 지 180년.

유다의 죄목은 무엇입니까?

다른 이방나라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이 적용될까요?
오늘 아모스의 경고에는 남유다의 구체적인 행위들은 나타나지 않고 포괄적인 죄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죄목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짓 것에 미혹되었다."입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백성 입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할 율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율법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때 지켜야 할 것들이었지요.
각종 의식법과 더불어 시민법, 도덕법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그 후 이스라엘의 행위를 재는 기준이 되어 왔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며 살았습니다.
일단 처음에 율법을 받았던 조상들조차 광야에서 계속해서 불순종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도래했던 사사시대는 '각각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정의되었으며,  그 지혜롭던 솔로몬왕도 말년에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남북으로 나뉜 후에도 대부분의 왕이 악한 길로 갔습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면에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 안에도 그 율법을 따르지 않는 모습들이 만연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주인이 아니라 도구로 삼아서 복을 비는 대상으로 축소시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대신 스러져 없어지고 말 거짓 것들을 따라갑니다.
배금주의, 성공주의 이런 것들이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거짓 것들이지요.
심지어는 점을 치거나 궁합을 보거나 하는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도 스러져 갑니다.
내 몸을 너무나 사랑해서 열심히 다이어트와 헬스를 하고 보양식도 먹지만 이웃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에는 인색하며 내 가족은 사랑하지만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지요. 이런 모습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쩌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들에 대해 심판의 경고가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7이라는 완성의 숫자로 보아 심판 경고가 끝날 것 같으니, 하나님께서 결국 북이스라엘을 높이시겠다는 선언으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아, 이스라엘이여! (아모스 2:6-8)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이스라엘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사고판다. 그들에게 사람은 그저 물건일 뿐이다. 돈벌이 수단이다. 신발 한 켤레를 갖겠다고 가난한 사람을 팔아 버린다. 그들은 자기 할머니도 팔아 치우는 자들이다. 돈 없는 자들을 바닥에 메치고, 불운한 자들을 수렁으로 떠민다. 형이고 아우고 할 것 없이 다들 '신성한 매춘부'와 동침하며,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그들이 가난한 이들로부터 강탈한 물건이 이방 신의 산당에 수북이 쌓여 있다. 그들은 그곳에 둘러앉아 사기 쳐 빼앗은 포도주를 들이킨다."

열국에 대한 심판은 '서너 가지 죄'라고 시작했지만 사실 한두 가지만 선포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정말로 여러 가지 죄가 지적됩니다.
더구나 열국의 범죄들은 전쟁범죄가 많았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범죄는 일상에서 자행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시 북이스라엘의 죄는 어떤 것이었길래 이렇게 아모스가 피를 토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회는 먼저 돈이 우선인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의인 (여기서 의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혹은 그냥 가난한 이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을 팔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팔았습니다.
당시에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채권자의 종이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학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었고, 7년 째가 되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들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신발 한 켤레라는 얼마 안되는 돈을 위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했으며,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았으며, 그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그 길을 굽게 하여 막았지요.
또한 이스라엘 사회는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동침한 '젊은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려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성전의 창기였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 의식의 일환으로 그런 매춘이 횡행했다는 것이지요.
어떤 학자들은 그냥 집에서 일하는 하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성적 학대를 묘사한 셈이 됩니다.
어떤 의견이 맞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죄악이었지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대가로 종교 행위를 벌였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담보로 취했다가다도 저녁이면 돌려 주어야 하는 겉옷을 깔고 집회에서 누웠으며, 강탈한 포도주로 친교의 시간을 가졌지요.

아모스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도 이런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과는 경우가 다르니 종교적 타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모든 것을 생명과 인격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측정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약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을 계속 억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해서 가정이 깨어지고 밤의 문화가 성행합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일부 타락한 특권층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정도와 범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겠습니까?

열국에 비해서 훨씬 더 심하게 까발려지고 있는 그들의 상태에 대해 들으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타락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모스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지적받아야 할 범죄가 남아 있으며 그에 따른 심판 경고가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기억하라! (아모스 2:9-11)

9.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나는, 나는 언제나 너희 편이었다. 나는 너희와 맞서던 아모리 사람들을 멸했다. 큰 백향목처럼 키가 크고, 굵은 상수리나무처럼 억센 그들을 멸했다. 내가 그들을 꼭대기에서부터 뿌리 끝까지 멸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건져내고, 너희의 사십 년 광야 길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식은 죽 먹듯 차지하게 했다. 나는 너희 젊은이들 중에서 예언자들을 길러 냈고, 으뜸가는 젊은이들을 구별하여 거룩을 훈련시켰다. 그렇지 않은가, 이스라엘이여!"

다른 이방 나라들보다 오히려 더욱 무거운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 그들에 대한 심판 경고에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없었던 독특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들이 기술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먼저 아모리 족속을 멸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키가 큰 백향목과 강한 상수리나무에 비유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이 정탐하러 갔다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비하하며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 민족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후에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열매부터 뿌리까지' 멸하셨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칼과 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 출애굽사건은 예언서 전반에 걸쳐서 계속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당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이집트와 그 신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이었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강대함에 두려움을 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지요. 징계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나실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해서 병든 그들을 고치셨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꾸짖으셨으며, 방황하는 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셨으며, 나실인들을 통해서는 (나실인은 특정 기간동안 하나님께 특별한 서약을 하고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는 등의 거룩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삼손이 대표적이지요.)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지를 보여주셨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아모스가 열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각종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영적 타락은 기억상실증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범죄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2:6-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12절에는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범죄 :

돈 때문에 의인을 팔았습니다. 적은 금액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 금액을 주는 자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적은 것을 탐내어 빼앗았습니다. 바로 살겠다는 사람까지 꿰어 잘못 살게 했습니다. 믿는 자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도무지 긍휼을 베풀지 않고 욕심만 채웁니다.

도적적으로 범죄 :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드나들었습니다. 믿는 자들도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아버지가 퇴폐업소에서 여자를 불렀는데 딸이고, 어린 여학생들이 아버지 또래와 원조교제를 하고, 어린 아이들이 포르노 영상들을 보고 모든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식입니다.

종교적으로 범죄 :

성전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눕고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불의하게 얻은 것들로 성전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범죄하여 얻은 것으로 교회에 헌금하여 존경받는 것과 같습니다. 도박해서 딴 돈으로 십일조 하고 훔친 돈으로 감사헌금 하는 격입니다. 또한 나시르인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말씀대로 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드러내는 말씀은 전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말씀만 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와 권세를 이용하여 사역자들을 조종하고 자기 변호에 이용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종교의식을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하나님 말씀까지 자기들의 의도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2:13-16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을 할 때는 여로보암 2세 때로서 BC790~750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멸망한 때는 BC721년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뿐입니다. 5:6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1:2에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리처드 코치가 쓴 「80/20법칙」이 있습니다.
'80/20의 법칙'이란 집중하는 20%에서 80%가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20%에 집중하면 나머지 80%가 해결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주력상품이 회사 전체를 살립니다.
오리온 제과는 '초코파이'가 동아제약에서는 '박카스에프'가 전체 매출의 80%를 넘는다고 합니다.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우선수위를 두고 우선순위에 집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하면 나머지가 다 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덜 중요한 80%에 목숨을 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가 결혼 전에 여러 남성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나름대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어느 한 남자를 선택하면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치 기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택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A도 좋은 것이 있고 B도 좋은 것이 있고 C도 좋은 것이 있고 하는 식이라면 결국 결정을 미루다가 혼기를 놓칩니다. 뒤에 D와 결혼을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 D는 A,B,C보다 못한 사람하고 하게 됩니다. 음식점을 하려고 한다면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값, 써비스, 인테리어, 주차장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입니다. 다 갖추어도 음식맛이 없으면 안 됩니다. 병원을 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병을 잘 고쳐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다른 사역을 모두 하려고 한다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다른 사역은 저절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주를 이룹니다. 그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예배에 실패하고 예배에 실패하면 부흥이 안 되는데 교육, 구제, 선교가 잘 되겠습니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을 잘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했으면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창 25:33, 히 12:16).
반대로 중요하지 않는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는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면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가 싸울 때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삭도 아비멜렉왕이 우물을 빼앗을 때마다 싸우지 않고 양보했습니다.

누가복음10:42에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회복하는 길이고 모든 것이 잘되는 길입니다.


'경건한'(godly)과 '경건'(godliness)의 반대말은
'세속적인'(worldly)과 '속된 마음'(worldliness)입니다.
흔히 영문법에서 명사에 접미사 '-ly'가 붙으면 '~같은' 혹은 '~다운'이란 뜻의 형용사가 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서 (아모스 2:12)


12.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훈련받는 젊은이들이 탈선하게 만들고, 젊은 예언자들에게는 '예언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어제 영적 타락의 시작이 '기억상실증'일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거룩을 지켜야 할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바른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선지자들이 대중에 영합하는 설교를 하게 되지요.
지금도 그런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잊을만하면 터져나오는 목회자들의 이런저런 비리들도 문제려니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또한 축복, 성공, 비전, 부흥, 평강, 긍정의 힘 등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물론 그런 것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으며 목회자들은 그것을 선포해야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균형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성공의 척도는 부나 명예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으며,  부를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며, 우리의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 수 있으며, 보통 고난이 있어야 우리가 성장할 수 있으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말씀이 같은 무게로 선포되어야 하지요.

지도자들의 타락 또한 이스라엘의 탓이라는 것이지요.
이 또한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일부러 목회자들이 범죄하게 만드는 경우야 없겠지만, 세속적 가치에 휩쓸리지 않으며 지내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려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듣기에 좋은 말씀을 선포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는 내가 듣기에 좋은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 것은 목회자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예언하지 않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거든요.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합니다.


다른 나라를 비난하기 전에(아모스 2:13-16)

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14.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15.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16.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도저히 너희를 두고 볼 수 없다. 참을 만큼 참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용량을 초과하여 짐을 실은 마차처럼, 나는 지금 삐꺽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행동에 들어가면, 너희는 어찌할 작정이냐? 제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너희는 내게서 도망치지 못한다. 힘센 자들의 힘도 소용없다. 전사들도 소용없다. 활 잘 쏘는 자들도 소용없다. 잘 달리는 자들도 소용없다. 전차를 모는 자들도 소용없다. 너희 가운데 최고로 용감한 전사라 해도 아무 소용없다. 그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옷도 챙겨 입지 못한 채 내뺄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지도자들이 타락하며,  결국 이런저런 죄악들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이제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경고에 첫머리에 하나님을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비유를 사용한 것이겠지요.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는 어떻습니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요. 메시지는 이 소리를 하나님의 신음소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의 길을 떠나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내뱉는 탄식소리이기도 하겠지요.  또한 무거운 수레는 땅을 누릅니다.  바퀴로 부드러운 땅을 움푹 패이게 하지요.

어떤 학자들은 이 묘사가 지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1에서 아모스의 이 경고가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어쩌면 2년 후, 이스라엘은 끔찍한 지진을 겪으면서 아모스의 이 경고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닥칠 때에는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시기 때문이지요.

본문에서 활을 가진 자, 발이 빠른 자, 용사, 힘센 자...들이 모두 아무 소용없다고 짧게 짧게 언급하는 아모스의 말투는 매우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 그날은 이렇게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무서운 경고를 보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열국에 대한 심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을 이스라엘에게 떨어진 무서운 경고를 보십시오. 그 경고를 들으며 새파랗게 변했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익숙합니다. 크게 보면 북한, 일본, 또는 미국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지금 우리들에게 '다른 나라들을 비난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2)

시편 119:116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Sustain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and I will live; do not let my hopes be dashed.

* 살게하시고(소성케 하시고)  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 5:8, 왕하 8:8), 살리다(창 20:7, 겔 37:5), 지내다(창 5:7), 보존되다(창 19:20), 생활하다(창 27:40, 왕하 4:7), 소생하다(창45:27, 삿 15:19), 거주하다(창 47:28), 살려주다(왕상 20: 32), 살아나다(왕상 17:22), 희생하다(왕하 13:21), 살려두다(민 31:15, 삿21:14), 구원하다(겔 3:18), 유전하다(창 7:3), 부흥하게 하다(합 3:2), 전하다(창 19:32), 기르다(삼하 12:3, 사 7:21), 중수하다(대상 11:8), 일으키다(느 4:2), 소생하게 하다(시 80:18, 7:12), 보전하다(겔 18:27), 풍성하다(호 14:7), 생존하게 하다(수 14:10),구원하다(창 19:19), 보존하게 하다(창 6:20), 살려주다(사 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7월 14일(금) 아모스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기의 비밀(7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Surely the Sovereign LORD does nothing without revealing his plan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자기의 비밀(revealing his plan)"
소드(סֹודֹו)

* 5475. 소드(çôwd)  סוֹד 

1. 침상.  2. 동석. 3. 예레비먀 6:11
발음 / 소드[ çôwd ]
어원 / 3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모의(창 49:6, 욥15:8), 꾀(시64:2), 간계(시83:3), 모임(시89:7, 렘15:17), 회중(시111 : 1),의논(시55:14, 잠15:22), 비밀(잠20:19, 암3:7), 회의(렘23:18, 22), 공회(겔13:9), 친밀함(시25:14), 교통함(잠3:32), 은밀한 일(잠25:9). [형] 가까운(욥19:19).
구약 성경 / 21회 사용

3:5 /
창애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에서 뛰겠느냐.

* 창애 - 미끼, 덫, trap

6341. 파흐(pach)  פַּח 

1. 그물. 2. 멸망
발음 / 파흐[ pach ]
어원/ 63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철판(민16:38), 올무(수23:13, 시119:110,사8:14), 그물(시11:6, 잠7:23, 호9:8), 덫(암3:5).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4170. 모케쉬(môwqêsh)  מֹקֵשׁ 

1. 올가미.  2. 상처의 원인.  3. 복수 ־ים
발음 / 모케쉬[ môwqêsh ]
어원 / 33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함정(출 10:7), 올무(출 23:33, 삼상 18:21, 사 8:14), 갈고리(욥 40:24), 그물(잠 12:13, 18:7, 30:25), 덫(암 3:5).
[동] 옭아매다(욥 34:30).
구약 성경 / 27회 사용

인간이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앞에 일어날 일을 하나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면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실패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계획을 성도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알려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한다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며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이며 이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 계획은 영원한 신적 계획으로서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해 나가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한 예정 속에서 완벽하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계획들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일 때에도 먼저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후에 집행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시려 할 때에도 선지자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며 임박한 심판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집행자이심과 동시에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죄악을 행하는 인간들에게 진노를 행하시기에 앞서 죄인들인 인간들이 속히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돌아와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정점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나타내셨습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접 인간의 눈과 경험으로 알 수 있게 하신 은혜의 현신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계획을 선지자에게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시대에 온 인류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3:10 /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른(6213) 일(5228)(עֲשֹׂות־נְכֹחָה) 이소트 니코하흐  

* 6213. 일(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아사[ ʽâsâh ]



* 5228. 바른(나코아흐. 
nâkôach) נָכֹחַ 

1. 바른.  2. 정직한
발음 / 나코아흐[ nâkôach ]
어원 / 522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른(삼하 15:3), 적당한(잠 24:26), 정직한(사 26:10). [명] 바른길(사 57:2).
구약 성경 / 4회 사용



말씀묵상

하루는 공자가 노나라 임금 애공에게 군주와 백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자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군주민수(君舟民水)’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백성은 임금을 띄우는 물이 되기도 하지만 성난 민심은 임금을 뒤집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맞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겸손한 임금을 세워서 그를 받들어 주는 물이 되기도 하지만 임금이 백성의 뜻에 합하게 정치하지 못했을 때 민란이 일어나고 임금을 뒤집는 성난 물결이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세상의 군주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대로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 공동체, 가정, 일터, 교회, 세속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성취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게 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지극한 짝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들은 강력한 제국도 아니었습니다.
잘난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리가 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잘난 민족과 힘센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 제국들을 제쳐놓고 히브리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나님은 그들만을 아는 사랑에 굶주린 바보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이 나를 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잘난 것도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사악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배신당하셨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실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서운 진노를 보여주심으로 또 다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이 말씀은 그 당시 집권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기 궁궐에 있는 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궁궐에서 행하는 일들은 세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판단하는 것들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작정하고 백성들을 강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판단 한 가지가 잘못되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임금이 지금 궁궐이 좁은 것 같으니 크고 넒은 궁궐을 짓자고 할 때 옆에 있는 간신들이 손뼉을 치며 그렇게 하자고 말합니다.
그 말이 결정되는 순간 백성들은 피눈물이 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임금이 자존심 상한다고 해서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자고 하면 백성들은 전쟁터에 끌려 나가야 됩니다.
한 두 사람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잃은 가정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납니다.
백성들의 시체가 온 산천을 뒤덮을 것입니다.
궁궐에서 그들이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백성들은 한숨 쉬고 고통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옛날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백성들을 괴롭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보십시오. 15절입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겨울 궁과 여름 궁이 있었습니다. 큰 궁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궁궐을 크게 지은 만큼 백성들의 삶은 그에 비례해서 힘겨워집니다. 상아로 만든 궁궐이 있었습니다. 상아는 이스라엘에서 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상아를 수입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였습니다. 그 돈으로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 만큼 백성들은 수탈당했습니다. 백성들 몫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임금 한 사람을 위한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은 힘겨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과 큰 궁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행동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큰 궁궐들을 짓고 백성들의 피를 뽑아 먹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집권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악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권자들의 죄악 이면에 있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지도자들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 1세는 벧엘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 제단은 가짜였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제단의 뿔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원래 제단의 뿔은 어떤 죄인이라도 잡으면 죽이지 못하도록 명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짜였습니다.
벧엘에 있는 제단 자체가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북이스라엘은 가짜를 섬기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짜를 섬긴 백성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기회와 시간을 주었지만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제는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은 영적 지도자들이 만든 벧엘의 제단과 제단 뿔도 함께 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짜를 섬긴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하나님의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영적 지도자들과 세상 지도자들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와 교회의 중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설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중직들과 직분 받은 자들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가짜를 섬기면 안 됩니다.
돈을 비롯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오늘 이 시대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가짜를 섬기라고 충동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을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벧엘의 금송아지 같은 가짜 위에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진짜입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도 상아 궁궐도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불면 사라지고 없어질 가짜에 목숨 걸지 마시고 진짜이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1. 지도자들이 믿음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가짜에 속지 않고 진짜이신 하나님과 말씀을 의지하겠습니다.
3. 사랑의 하나님, 가짜를 섬기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고 진짜이신 말씀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본절이 앞절과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 부분과 논리적인 연결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T.E.McComiskey).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히브리어 '키'(*)를 '그러나'(but)로 번역하고(Harper), 어떤 역본들은 '확실히'(surely)로 번역하였다(KJV, JB).
그렇지만 8절에 나오는 '사자'와 '두려움'의 개념이 4절의 '사자'와 6절의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보면, 7절만을 따로 생각할 수도 없다.

한편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는 '은밀한 협의'(SECRET COUNSEL)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밀접한 관계에 기초한 적극적인 의논(잠 15:22)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관계성을 통해 미리 알려주는 계획(plan)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으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렘 23:18, 22).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에 앞서 항상 경고가 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도 그러했고(창 6:13-2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미리 경고되었다(창 18:17-21; 19:12,13).




내가 너희를 '알았다' (아모스 3: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아, 귀 기울여 들어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문하신다. 너희 모두와, 그분이 이집트에서 건져 주신 모든 족속에게 말씀하신다. 모두, 귀 기울여 들어라!

"지상의 모든 족속 중에서 내가 특별히 너희를 골라내었다.  지금 내가 너희 모든 죄에 대해 심문하는 것은 너희가 받은 이 특별한 부름 때문이다."

이제 아모스서의 본론 부분인 3장으로 들어왔네요.
서론격이었던 1-2장에서 열국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던 아모스는 3-6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심문합니다.
그렇게 심문하기 이전에 아모스는 다시 이스라엘의 지위에 대해서 상기시킵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올리신 모든 족속'이라고 대상을 알리는 것으로 보아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해서도 외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남유다 사람이었던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 와서 이 예언을 선포하고 다시 유다로 돌아와서 책으로 쓰거든요.
지금 무시무시한 심판경고를 받을 정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민족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해방되었던 민족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았던 민족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고프지 않았던 민족입니다.
끊임 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 민족입니다.

그것을 아모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을 알았다"

이제는 많이 알려졌듯이 여기서 '알았다'는 단어는 그냥 '머리로 인식했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입니다.
남녀간의 성적인 관계를 묘사할 때도 쓰이고, 친숙하다, 인정하다, 선택하다, 사랑하다는 말로 번역되고 있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원래 이런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족속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서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자 하나님은 더욱 분노하셨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컸기에 아픔과 분노가 더욱 컸던 것이지요. 로마의 황제였던 시저가 아들같이 아꼈던 심복 부르투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부르투스, 너마저..'라고 신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에 대해 오해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은혜의 선언을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아모스의 이런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은혜로 사랑받았기 때문에 이제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값없는 은총은 우리에게 책임있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어찌 일어나겠느냐?(아모스 3:3-6)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면, 둘이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아니냐?
사자가 숲 속에서 표효하고 있으면, 먹이를 움켜쥐었다는 말이 아니냐?

젊은 사자가 만족하여 으르렁거리고 있으면, 저녁거리를 잡았다는 말이 아니냐?
새가 바닥에 떨어졌으면, 돌에 맞았다는 말이 아니냐?
덫이 탁 하고 닫혔으면, 무언가 덫에 걸렸다는 말이 아니냐?
마을에 경보가 울리면, 주민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재앙이 도성을 휩쓸고 있으면,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지요?
아모스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맞습니다!'라는 답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지요.
아모스는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 아니 우리들까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는 질문들을 5개 열거합니다.
그 질문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진술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동행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뜻이 맞기 때문이다!
사자가 수풀에서 부르짖는다면 뭔가를 움켜 잡은 것이다!
젊은 사자가 으르렁대고 있다면 뭔가를 잡은 것이다!
새가 덫에 치였다면 누군가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
덫이 튀어 올랐다면 새가 잡힌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야 당연하지'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데 아모스는 이어서 핵심진술로 들어갑니다.
성읍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인데, 그렇게 재앙이 임한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셨기 때문이다!
아..결국 아모스가 이런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겪을 재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구보니, 앞에서 아모스가 무심한 듯 열거했던 5개의 질문도 남다르게 들립니다.

두 사람의 동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동행으로 보이고,
부르짖는 사자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아, 이스라엘은 덫에 걸려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심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도 포효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혹시 우리의 귀가 어두워지지는 않았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네요. 오 주여, 우리의 귀를 열어주소서!


예언자의 역할 (아모스 3:7-8)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 당신의 예언자들에게 미리 그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시지 않고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 법이 없다.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겁먹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떤 예언자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느냐?

아마도 아모스가 이런 심판경고를 계속 토해내자,  듣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의했나 봅니다.  "너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남유다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아모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예언의 기원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기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언은 어떤 명석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며, 예언자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우신 사람입니다.  예언자가 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지요. 예언자의 권위는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또한 예언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사실 예언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왕과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기본 통로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가 심판 경고였구요. 그러므로 방자하게 그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심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시대에 따라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열정이나 기도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은데  요즈음에는 경영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저만의 생각일까요?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이런 것들은 사실 경영자의 역할이 아닐까요?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그런 것들이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왠지 점점 교회가 유기체보다는 조직에 더 가까워지고 있으며, 목회자가 영적 지도자보다는 CEO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완결된 지금,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록된 말씀을 잘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직접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저의 생각과 저의 해석이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혹시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건조한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증인 부르세요 (아모스 3:9-12)

9.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앗시리아의 요새들에게 알려라. 이집트의 요새들에게 알려라. 그들에게 전하여라. "사마리아의 산 위에 모여, 유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아라. 잔인과 공포가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를! 그들은 올바른 일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 그럴 마음도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폭력과 어둠을 쌓아 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적이 그 나라를 포위할 것이며, 너를 무력화시키고 너의 요새를 약탈할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다.  "사자에게서 어린양을 구하려던 목자가  겨우 두 다리와 귀 조각 정도나 건져 내듯이,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소수만 건짐을 받을 것이다.  겨우 낡은 의자 몇 개,  부러진 탁자다리 정도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초대장을 받는 사람들은 아스돗(어떤 사본은 앗시리아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과 애굽의 궁궐들. 초대장소는 사마리아의 산. 그리고 그들이 관객으로 모여서 관람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란과 학대와 포학과 겁탈. 아..

아,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랑했던 궁궐들이 이제 폐허가 될 것입니다. 호화스러웠던 침실이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 모습을 생생한 비유로 묘사합니다. 사자에게 물려간 어린 양을 목자가 구하려고 해봤자 다리 조각이나 귀 조각 정도나 간신히 건질 수 있듯이, 침상이나 걸상 조각 정도만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건짐을 받는다'고 표현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소수만 건짐을 받을 정도로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물론 진리의 편에 서 있지 않은 자들은 언제나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정과 부패로 인해 비난받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둡고 부패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며,  그들에게 대안사회를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그들 못지 않은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들을 증인으로 부르실 수도 있으니까요!


심판의 타겟 (아모스 3:13-15)

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 가문에 대한 고발이다. 귀 기울여 듣고 증언하여라. 이는 하나님, 곧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목하여라! 그날 나는 이스라엘이 자기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베델에 악한 제단들을 세운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뿔 달린 제단들은 뿔이 전부 잘려 나가고 산산조각 날 것이다.
내가 겨울 궁궐을 허물고, 여름 궁궐을 - 화려한 건물들을 모조리 다 - 박살낼 것이다.

증인으로 불려나온 아스돗과 애굽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증거하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벧엘은 북이스라엘을 설립한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을 대신하기 위해서 제단을 만든 곳입니다.
아마도 그 이후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벧엘로 와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네요.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타겟이 되는 곳은 겨울 궁궐, 여름 궁궐입니다.
그 궁궐들은 부유층들이 가지고 있던 별장을 의미합니다.
계절에 따라 피서 또는 피한을 즐겼던 곳들이겠지요.
더구나 그 궁궐들이 상아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아 매우 호화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아.. 이스라엘의 심판의 시작이 벧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은 성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사회적 타락이 영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지금 우리 나라의 위치는 매우 다르지만, 우리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귀에 듣기 좋은 설교들만 선포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긍정적 사고방식과 평안과 위로만 난무하지는 않습니까?
좋은 프로그램을 찾아 철새처럼 교회를 떠돌지는 않습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작은 교회들보다는 내게 필요한 대형교회로만 몰리지는 않습니까?
재정이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고 함부로 낭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구제하기 보다는 자체 건물과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강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구조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보다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심지어는 그 구조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조차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영적 타락은 사회 지도층의 부패로 이어졌습니다.
이것 또한 지금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도 동일합니다.
약자를 돌아보고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서 구조를 개혁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골몰하고 부와 사회적 위치를 세습하는 정치인들, 각종 부정과 불의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들끼리의 동맹을 맺고 있는 재벌들, 비판을 잠재우고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들과 학자들, 소위 사회적 지도층의 부패 또한 북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다음 타겟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겠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우리를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7월 15일(토) 아모스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기를 예비하라(12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Therefore this is what I will do to you,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to you,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히콘 리게라트 엘로이카(הִכֹּון לִקְרַאת־אֱלֹהֶיךָ)

* 3559. 예비하라(쿤. kûwn) כּוּן

1. 똑바로서다. 2. 필렐형.  כּוֹנֵן
3. 세우다
발음 / 쿤[ kûwn ]
관련 성경 / 견고하다(왕상2:46, 대상17:14, 잠29:14), 예비되다(잠19:29), 준비하다(대하35:4, 시9:7, 사51:13), 든든히 서다(삼상20:31), 굳게서다(대상16:30, 시102:28, 잠12:3), 완비하다(대하8:16), 갖추다(대하29:35) 구비되다(대하35:10), 준비되다(대하35:16), 견고히 하다(시89:21), 서다(시101:7), 보존되다(잠12:19), 이루다(잠16:3), 성취하다(잠20:18),정하다(창41:32, 시108:1), 분향하다(시141:2),성취하다(잠20:18), 버티다(삿16:26,29), 기다리다(욥12:5, 18:12), 옳다(욥42:7), 신실하다(시5:9), 정직하다(시51:10), 확정되다(시57:7), 세우다(출15:17, 시119:90, 신32:6), 당기다(시11:2), 건축하다(합2:12), 배우다(욥8:8), 짓다(욥31:15, 잠8:27), 건설하다(시24:2), 삼다(대상14:2), 저축하다(대상29:16),행하다(대하27:6), 정돈하다(대하35:20), 결심하다(대하30:19), 지도하다(렘10:23), 성취하다(렘33:2), 항오를 벌이다(나2:3), 향하다(삼상7:3), 살피다(삼상23:22), 방비하다(렘51:12), 닦다(신19:3), 베풀다(욥29:7), 주다(시65:9), 인도하다(잠16:9), 삼가다(잠21:29), 박히다(겔40:43).
[명] 참(신 13:14), 실상(삼상 23:23).
[부] 견고히(시 93:1, 잠 25:5, 왕상 2:45), 든든히(잠 4:26), 자세히(신 17:4), 과연(삼상 26:4).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 7125. 만남(키리아. qîrʼâh) קִרְאָה 

1. 만남. 2. 마주침.
발음 / 키리아[ qîrʼâh ]
관련 성경 / 미치다(창 42:38), 이르다(욥4:14), 당하다(신31:29), 닥치다(렘13:22), 일어나다(렘44:23), 영접하다(창14:17, 삼하19:20, 사21:14), 마주 대하다(창15:10), 마주 오다(창24:65),만나다(창32:6, 삼상15:12, 암4:12), 맞다(창33:4, 출4:27, 삿14:5), 엎다(출14:27), 막다(민20:20, 22:34, 시35:3), 치다(민21:23, 삿7:24), 쓰지 않다(민24 : 1), 마주 나오다(신1:44,삼상9:14), 대적하다(신2:32, 수11:20), 싸우다(신29:7, 수8:14), 마주 나가다(삿15:14),환영하다(삼상18:6), 대하다(삼상17:2, 삼하10:10), 만나보다(왕하23:29), 향하다(대상19:17), 방비하다(대하35:20), 달려오다(시59:4), 일어나다(출1:10), 나타나다(출5:3),내리다(렘32:23).
[부] 우연히(삼하1:6).
구약 성경 / 23회 사용


바산은 요단강 동쪽 북단에 위치한 기름진 목초지로  그곳에서 사육되는 소들은 매우 살지고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인들을 바로 이 바산의 살진 암소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근동 지방에서는 모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에서는 기름진 몸매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지도층의 부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유복한 생활을 했고, 남편들을 뒤에서 움직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장차 이 부유한 여인들은 밧줄에 묶여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앗수르 유적지에서 발견된 한 비석에 보면  앗수르 군사들이 사로잡은 포로의 코나 아랫 입술을 뚫고  거기에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가는 아주 비참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경책하며 심판을 예언하던 아모스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벧엘은 일찍이 야곱이 살기등등한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천국 사닥다리와 여호와를 꿈속에서 보고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 드보라와 사무엘은 이곳을 중심으로 선지자 사역을 행하는 등  벧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을 창건한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에 종교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곳에 자체적으로 단을 만들어 금송아지 숭배를 획책함으로써 벧엘은 북이스라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길갈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기념물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곳이며, 이곳은 벧엘과 함께 사무엘의 중심 사역지로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기 전까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러나 길갈 역시 벧엘과 마찬가지로 왕국 분열 이후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배교의 중심지가 되어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희생’이란 아침마다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4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소에 올라와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평소 드리는 십일조 외에 삼년에 한 번씩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삼년에 한번 드리는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고,  일 년에 한번 드리는 희생을 아침마다 드린다 할지라도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들은 오히려 그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행위라고 꾸짖습니다.

형식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만 형식에 치우친 제사와 예배는 결코 바람직한 제사와 예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는 예배자의 삶에서 드려지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하는 시간을 위하여 예배하는 자의 거룩하고 진실된 삶을 굳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시대가 예배자는 많이 있지만 예배자의 삶을 실천하는 예배자가 너무 적어 다양한 문제에 휘말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예배자의 삶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얼어붙은 땅으로 닫혀 있습니다.
남녘의 땅에는 예배자의 삶을 훼방하지 않는 자유가 풍성하지만 그 자유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는 거센 거짓된 문화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예배자의 삶을 사랑하고 자랑할 줄 아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징계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경고이다(T. E. McComiskey).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 (아모스 4:1-3)

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마리아 언덕에서 풀을 뜯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귀 기울여 들어라. 가난한 이들에게 비열하고 밑바닥 사람들에게 잔인한 여자들!
게을러빠지고 제멋대로인 너희는 남편에게 요구한다.
'시원한 술 한 잔 갖다 주세요!'
잘 들어라. 나 하나님이 나의 거룩을 두고 맹세한다!
조심하여라,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너희를 밧줄로 묶어 끌고 가면서, 뒤처지는 자들은 몽둥이로 다스릴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한 줄로 꿰어 훼파된 성벽들 밖으로 끌고 가서, 저승으로 던져 넣을 것이다."

오늘 선포되는 아모스의 심판 경고는 특별히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산의 암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바산은 풍부한 목초지로 목축이 성행했던 지역의 이름입니다.
즉, 바산의 암소라는 표현은 양질의 살찐 암소라는 의미이지요.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들의 죄악은 세가지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1. 그녀들은 힘 없는 자들을 학대했고
2. 가난한 자들을 압제했으며
3. 남편들에게 술을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아마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면서 향락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요즈음에도 가끔씩 언론에 드러나는 '싸모님'들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다시 '때'가 이를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바로 하나님의 날, 즉 심판의 날이지요.
하나님이 맹세하신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으니,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녀들은 물고기가 낚시에 걸리듯이, 송아지가 코뚜레에 코가 꿰어지듯이 묶여 끌려갈 것입니다.
처음에 그녀들을 '사마리아의 산에서 풀을 뜯는 바산의 암소'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머리를 풀어헤치고 더럽혀지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슬피 울며 끌려갈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신세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의지하고 있던 성벽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적들이 사방에서 뜷린 성벽을 통해 들어와 그녀들을 사로잡아 하르몬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성벽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나의 건강, 예금, 보험, 가문, 권력등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영혼을 데려가실 것도 모르고 곳간에 소출을 쌓아놓으며 미래를 계획했던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정말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수많은 간증들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사업에 실패한 후에야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이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시편 기자처럼 고백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산성 나의 방패이십니다.'

공무를 집행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죄를 지어서 검찰 포토라인에 설 때가 있습니다. 혹은 그들이 청문회 자리에 나와서 사실관계를 설명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잘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제 가족들이 한 일입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알고도 발뺌한다면 뻔뻔하고 사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몰랐다면 고위 공직자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몰랐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따져 물으시는 것도 몰랐다고 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몰랐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고위 공직자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잘나가는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압제한 죄를 묻고 계십니다. 정말 이 여인들이 힘없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압제했을까요? 그들을 세워놓고 채찍질을 했겠습니까? 발길질을 했겠습니까? 그들의 돈을 빼앗았겠습니까? 여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들이고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인들의 죄를 왜 힘없고 가난한 자와 연관시켜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인들은 벧엘과 길갈을 자주 순례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과 길갈은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그들은 자주 벧엘에 가서 예배드리고 길갈에 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의 영적 고향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중에 큰 부자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벧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례하고 예배드릴 영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로보암 1세부터 내려오던 금송아지 제단도 역시 벧엘에 있었습니다.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만났던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에서 그들은 할례를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뜻으로 길갈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기념으로 각 지파마다 큰 돌을 하나씩 가져다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과 길갈을 영적 고향으로 삼았고 성지순례 명소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고위 공직자들의 아내들은 몰려 다니면서 벧엘과 길갈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삼일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화목제를 드립니다. 수은제와 낙헌제라 불리는 그것은 감사의 화목제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감사 제목으로 예배드렸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을 이번에도 승진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오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가족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이 혜택을 자손만대에 누리게 해 주십시오. 더 많은 물질을 벌게 해 주시고 명예가 쌓이도록 도와주시며 남편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남편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들은 시마다 때마다 많은 물질을 드리며 하나님께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완벽했습니다. 헌금도 많이 가지고 나왔고 예배드리면서 자기들끼리 친목도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죄가 될까요? 이것이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압제하는 죄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 생활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힘없고 가난한 자를 살피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의 잔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것은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백성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격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올바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의 귀족의 여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있어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눌 제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죄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이 나라에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하는 것만큼 큰 죄가 없습니다. 돌아봐야 됩니다. 살펴야 됩니다. 주변 이웃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합니다. 몰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해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종교 생활하는 여인들의 종교생활을 중독이라고 표현하십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술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마치 술에 중독된 것처럼 벧엘과 길갈에 가서 사흘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리고 수은제와 낙헌제로 감사의 화목제를 드리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생활이고 돈 잔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이들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갈고리로 끌어가고 낚시로 낚아서 끌고 가며 하르몬에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이들이 하나님께 애원할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몰랐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에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를 살피고 돌아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중독처럼 종교 생활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거룩한 옷을 입고 아름답게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종교 생활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배부른 바산의 암소가 되지 않고 이웃들을 살피고 돌아보는 부지런함과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실천다짐

1) 배부른 바산의 암소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습니다.

2) 이웃을 돌아보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겠습니다.

3. 한줄기도

바산의 암소와 같이 육적인 것에만 풍성하고 영적인 것에 메마른 신앙생활에 중독된 저희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으로 날마다 천국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종교(宗敎) : religion
라틴어 - relegare / 다시(re) + 연결하다(legare)

자연종교 : 수행(修行) - 불교
계시종교 : 은혜(恩惠) - 기독교



7월 17일(월) 아모스 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를 찾으라6절)

* 찾으라(1875) 다라쉬(dârash) דָּרַשׁ
너희는 찾으라

דָּרַשׁ 스트롱번호1875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다라쉬[ dârash ]
관련 성경 / 찾다(레 10:16, 시 77:2, 신 22:2), 묻다(신 13:14, 왕상 14:5, 겔 14:3), 조사하다(신 19:18), 구하다(대하 16:12, 미 6:8, 대상26:31), 거두다(대하 24:6), 구걸하다(시 109:10), 청하다(대상 10:13), 간구하다(대하 20:3, 렘21:2), 연구하다(스 7:10, 시 111:2, 전 1:13), 조사하다(스 10:16), 용납하다(겔 14:3), 힘쓰다(렘 29:7), 탐구하다(신 12:30), 받다(신 18:19), 요구하다(신 23:21, 겔 20:40), 알아보다(삼하 11:3), 나아가다(대하 1:5), 신원하다(대하 24:22), 감찰하다(시 10:4,13), 도모하다(에 10:3), 심문하다(시 9:12), 돌보다(시 142:4),
[부] 자세히(사 34:16), 청하건대(왕상 22:5).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 살리라(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 5:8, 왕하 8:8), 살리다(창 20:7, 겔 37:5), 지내다(창 5:7), 보존되다(창 19:20), 생활하다(창 27:40, 왕하 4:7), 소생하다(창45:27, 삿 15:19), 거주하다(창 47:28), 살려주다(왕상 20: 32), 살아나다(왕상 17:22), 희생하다(왕하 13:21), 살려두다(민 31:15, 삿21:14), 구원하다(겔 3:18), 유전하다(창 7:3), 부흥하게 하다(합 3:2), 전하다(창 19:32), 기르다(삼하 12:3, 사 7:21), 중수하다(대상 11:8), 일으키다(느 4:2), 소생하게 하다(시 80:18, 7:12), 보전하다(겔 18:27), 풍성하다(호 14:7), 생존하게 하다(수 14:10), 구원하다(창 19:19), 보존하게 하다(창 6:20), 살려주다(사 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여호와를 찾으라

1. 찾다(시편 77:2)
나의 환난 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2. 묻다(신명기 13: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3. 조사하다(신명기 19: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4. 구하다(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앞에서(4절)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주체였고, 이번에는 아모스가 그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청중에게 던진다.
이로써 아모스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게 한다.

염려컨대...없을까 하노라
- '염려컨대...없을까 하노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펜'(*)은 백성들로 하여금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요청한다.
그 선택은 바로 여호와를 찾아서 그로 말미암는 모든 은혜를 누리든지 아니면 심판을 당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요청이다(T.E.McComiskey).
한편, '내리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첼라흐'(*)의 기본적인 의미는 '돌진하다'(rush)는 의미와 가까운 것으로(BDB) 전후 문맥에 따라 독특한 뉘앙스를 준다.
이 단어는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시는 모습을 그리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삿 14:6,19;15:14;삼상 10:6;11:6;16:13), 반면에 악령이 강하게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였다(삼상 18:10).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하시는 여호와의 강력한 행위를 묘사한다(J.Niehaus).

5:4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 '이스라엘 족속에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베이트 이스라엘'(*)은 앞 구절의 '이스라엘 중에서'와 같은 용어로 본 구절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앞 문장과 대구를 이룬다.
이스라엘이 장차 쇠퇴하겠지만, 소수나마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복합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를 권고하신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구절이 단지 두 단어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나를 찾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르슈니'()는 여호와께 사용될 때, '그분께로 돌아와 다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라'는 의미이다(시 9:10; 24:6; 77:2; 사 65:10; 호 10:12; 습 1:6).

그리고 '살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위흐유'(*)는 때때로 영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T.E.McComiskey).
또한 이 두 명령형 동사가 접속사 '와우'(*, 그리고, 그리하면)로 연결되어 있어서 앞의 명령은 전제로 제시되었고, 뒤의 명령은 그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를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화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제시한다(Calvin).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경제 정책과 방향에 따라서 나라의 경제동향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어떤 정부는 친기업적인 경제정책을 펼치고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고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이유는 기업에 모인 돈을 가계에 흘려보내 원활한 경제흐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낙수론을 펼쳤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돈도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야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경제정책입니다.

하지만 이 정책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업의 투명함과 높은 윤리의식입니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어서 돈이 모였으나 기업이 가지고 돈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업이 이윤을 연구 개발에 재투자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낙수효과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의 고위 공직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에게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절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돈이 모였습니다.
무역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투명함과 윤리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들어온 돈을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백성들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부는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를 언급하십니다. 벧엘과 길갈은 4장에서 나왔던 지명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필수적으로 순례해야 할 성지였습니다. 벧엘은 야곱과 관련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던 길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때부터 벧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고향이 되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강을 건너서 만났던 첫 번째 장소가 길갈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기념으로 열두 돌을 세웠던 곳이 길갈이었고 할례언약을 시행하여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한 곳이었습니다. 벧엘과 길갈은 북이스라엘 지경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 지경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을 먹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고위직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유다 영토를 지나 멀리까지 갈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누구와 관련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이삭을 낳고 그곳에 정책해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이삭도 아버지가 떠난 후 브엘세바에서 머물렀습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습니다. ‘브엘세바’라는 이름의 뜻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벧엘과 길갈을 자주 드나들었고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 남유다 브엘세바까지 순례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낙헌제와 수은제를 드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들은 성지는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하나님을 찾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찾으나 하나님은 찾을 생각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고 헌금도 열심히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모스 본문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정의와 공의를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정의와 공의는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덕목이었습니다. 정의는 미슈파트, 공의는 체다카입니다. 미슈파트는 자기중심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정의를 말합니다. 체다카는 관계에 바탕을 둔 공의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들을 섬기며 사랑해야 함을 체다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권세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는 없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율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과 같은 것이고 공의도 역시 흘러내려 마르지 않는 강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부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서 이웃들에게 넘치는 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길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졌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랐던 곳, 십자가 고난 받으신 곳을 오르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했던 곳을 답사하며 다닙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 밧모 섬에도 들어가 봅니다. 종교 개혁지를 갈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지는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는 행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웃들에게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흘러내리기를 바랍니다. 도움의 손길, 사랑의 손길이 머물러야 하는 그곳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나눔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시면서 살아가시는 복된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천다짐

1.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합니다.
2. 정의와 공의를 마음에 두고 살겠습니다.
3.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진실한 마음으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세우다(3322) 야차그(yâtsag)
יָצַג 스트롱번호3322

1. 히필형 הִצִּיג : 서게 하다.
2. 놓다
3. 창 43:9
발음 / 야차그[ yâtsag ]
관련 성경 / 두다(창 43:9, 삿 8:27), 세우다(창 30:38, 암 5:15), 머물다(창 33:15), 밟다(신 28:56), 보이다(창 47:2), 머물러 두다(출 10:24).구약 성경 / 16회 사용

미워하다(8130) 사네(sânêʼ)  שָׂנֵא 

1. 미완료형   יִשְׂנָא
2. 분사형 שׂוֹנֵא 증오자
3. 니팔형 : 잠14:17.
발음  사네[ sânêʼ ]
관련 성경 / 미워하다(창 26:27, 삿 11:7, 시 50:17), 가증히 여기다(신 12:31), 싫어하다( 잠5:12, 사 1:14, 암 6:8).
[명] 미움(삼하 13:15, 잠 19:7), 원수(창 24:60, 잠 25:21), 대적(출 1:10), 원한(신 4:42, 19:4,6).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굴리다 / 가랄(1556)(gâla) גָּלַל

1.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 가랄[ gâlal ]
관련 성경  / 옮기다(창 29:3,8), 떠나가다(수 5:9), 의탁하다(시 22:8), 굴리다(수 10:18, 삼상 14:33, 렘 51:25), 맡기다(시 37:5, 잠 16:3), 떠나게 하다(시 119:22), 말리다(사 34:4), 흘리다(암 5:24), 묻다(사 9:5), 끌려들다(창 43:18), 달려들다(욥 30:1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7월 18일(화) 아모스 6장 - 지도자들이 받을 심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환난(6절)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You drink wine by the bowlful and use the finest lotions, but you do not grieve over the ruin of Joseph.

* 환난(7667) 쉐베르(sheber) שֶׁבֶר 

1. 깨뜨림.  2. 해몽. 3. 파멸
발음 / 쉐베르[ sheber ]
어원 / 76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 [형] 부러짐(레 21:19), 틈(시 60:2), 패망(사 1:28, 애 2:11), 무너짐(사 30:13), 무너지는 소리(습 1:10), 깨뜨림(사 30:14), 상함(렘 8:21), 파괴됨(애 2:13), 상처(레 24:20), 파괴(잠 17:19), 멸망(잠18:12, 렘 4:6), 파멸(렘 50:22), 상함(사 65:14), 상처(렘 6:14, 나3:19), 환난(암 6:6).
구약 성경 / 44회 사용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 '대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즈레케이'(*)는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사용하는 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출 38:3; 민 4:14; 대하4:8) 제물그릇(sacrificial bowls)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NASB). 이는 그들이 매우 무분별하게 방탕한 태도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 귀한 기름은 향품을 섞은 기름(왕상 10:10; 겔 27:22)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지도자들이 누리던 방탕한 풍요를 묘사한다.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 '요셉의 환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 요세프'라는 구문이 여기에만 등장하지만, '쉐베르'는 민족적인 파멸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된다(사 30:12, 15; 애 2:13; 나 3:19).
아모스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의 지도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근심없이 지낸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은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사야 30: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애가 2:13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나훔 3: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아모스 6:1.
1945. 화 있을찐저 - 호이(hôwy) הוֹי 

1. 화 있을진저.  2. 사 5:8.  3. 렘 48:1.
발음 / 호이[ hôwy ]
관련 성경 / 오호라(왕상 13:30), 슬프다(사 1:4, 렘 22:18, 48:1), 화 있을진저(사 5:8, 렘 22:13, 합 2:6), 화 있도다(렘 50:2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슬픔과 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로(사 1:4, 24; 29:1) 일반적으로 심판이 선포될 때 사용된다(5:18).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이 아니라.




아모스 6장에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원에서 그들의 종교적 삶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깊은 괴리를 꾸짖는 말씀이라면 6장은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육적으로는 많은 쾌락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6:1-7, 향락에 빠져버린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에 대한 경고
6:8-14, 하나님의 심판 통해 멸망당할 것을 예언

아모스 선지자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의 주도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풍요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형식에 있어서는 거의 솔로몬 시대와 같이 많은 절기 제사와 각종 종교 행사들을 거행하였고 각종 제물과 십일조, 찬양  등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자신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종교적 영역에서의 신으로만 제한시켜 버린 것입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적나라하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외친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원론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열심이 강했으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의무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행사나 제사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상실한 채 형식적인 태도에만 집착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참된 제사는 자신들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죄하심에 참여치 못하고 형식에만 치우쳐 버린 제사는 그 드리는 횟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며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성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면 그가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인지를 언제나 돌아보며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가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 4. 21 ~ 1932. 11. 17)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가운데 한 사람인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었습니다.
그분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로 부터 국권을 침탈당하고 국권을 넘기게 된 경술국치를 당하고 난 후에 가족들을 모아 회의를 합니다. 회의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이때까지 우리 가문은 나라의 녹을 받으며 편안하게 잘 살았는데 이제 나라가 일제에 넘어갔으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과 전답과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회의 끝에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집과 땅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그 가문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현재 서울 명동 땅 대부분이 이회영 선생 일가가 가지고 있었던 땅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헐값으로 처분하고 만주로 떠납니다.
만주에 가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을 길러서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을 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거기서 길러낸 군사들을 기반으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더구나 이회영 선생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금까지 누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결단하는데 하나님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슨 뜻이냐고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뜻

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 noblesse oblige, 영어.  nobility obliges)란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식량이 고갈되어, 끝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파격적인 항복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겠다.”

칼레의 갑부인 ‘외수타슈 생피에르’ 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했습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 왕의 앞으로 나왔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가 처형을 만류했습니다. 이들을 죽이면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습니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 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 탄생된 배경입니다. 단 6명의 지도자가 칼레를 구한 것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아주 작은 불빛에서 시작됩니다. 희생과 나눔을 의무로 여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 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 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를 바로잡자 :  6명의 시민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일단 여기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속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칼레의 시민 이야기. 어딘가 불편하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좋지만 사실상 감성팔이 수준이다.

그렇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예라 손꼽히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단 칼레의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문건은 영국과 플랑드르, 프랑스, 부르고뉴,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교황청의 기록까지 합하여 약 20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당시 기록에는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나 영국 여왕의 간청 따위는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1년 정도 공성전을 벌인 후 결국 필리프 6세가 먼저 철수하고, 영국이 칼레를 점령한 후, 시민들을 소거했다”라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시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플랑드르 지방의 문헌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좀 더 관대하게(칼레를 떠나는 시민들에게 노잣돈을 나눠줬다라고 나옴)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의 공식 기록들은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살려달라는 간청을 에드워드 3세가 무시해서 약 500명 정도가 굶어죽었다라는 식으로 악랄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 후로, 사실 칼레 공성전이나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쳐 민족주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백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 프랑스 본토에서도 “마녀” 혹은 “어리석은 자의 상징”으로 통하던 잔 다르크를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하고(볼테르나 루소의 시대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얼빠진 광신도”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로 통했다), 칼레의 시민들을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은 애국자”들로 둔갑시킨 건 당대의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들을 빨아대던 작가들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갑부로 둔갑한 외수타슈 생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는 갑부가 아니라 당시 필리프 6세에게 칼레 방어의 명을 받은 칼레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시장이나 마을의 치안을 담당한 자가 자기 목에 밧줄을 메고 항복하는 건 에드워드 3세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14세기의 유럽 도시들이 적에게 항복할 때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혹은 관례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칼레의 시민 동상을 제작한 오귀스트 로뎅은 이 이야기의 모순을 간파하고 그들을 영웅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조각하였다가 당시 언론에 “뭐 이리 불쌍한 표정들로 만들었음?” 하며 대차게 까이기도 한다.

이렇게 불쌍하게 표현하는 것도 재능이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어원: 닭벼슬도, 노른자도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진 자가 먼저 베풀고 먼저 행동하고 먼저 희생하고.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의무지워진 것이기도 하다.

멀리 가자면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에서 참된 왕가의 인물이라면 병사들 앞에 나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트로이의 왕자가 등장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집정관을 선출할 시에는 군단 경험은 물론, 호민관이나 법무관 등의 중간 관리직도 풍부하게 경험한 사람들을 선호한 로마 공화정과 제정의 역사가 있고, 우리에게는 의병대를 조직해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독립운동에 가세했던 양반들과 지식인들이 있다. 지붕이 시퍼런색으로 도색되어 있는 저택에서 수첩이나 뒤적거리시는 어떤 분과 참 대조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Noblesse가 닭의 벼슬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하는 시점에서 이미 오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Noblesse는 중세 프랑스어 단어인 Noblece가 근대를 거치면서 변화한 것이고, 그 어원은 라틴어에서 “고귀함”, 혹은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있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가문”을 뜻하는 Nobilis(복수: Nobiles.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자는 Nobilitas)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Oblige는 중세 영어인 obligen(혹은 중세 프랑스어 단어 obligier)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시 그 어원은 라틴어에서 “속박”, 혹은 “의무”를 나타내는 Obligare에서 비롯되었다. 닭벼슬은 도대체 어디서 갑툭튀한 건지.

  Noblesse Oblige라는 표현 자체가 등장하게 된 건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실주의를 상징하는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희곡,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ée)”에서 처음 등장한다. 미안하지만 그 이전에는 이런 표현 자체가 없었다.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점에는 3,800% 정도 찬성하지만, 출처도 불분명하고 자기 감정에 앞서 배경 설명을 얼렁뚱땅 한다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강조하는 것은 그닥 좋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꼰대라서 이런 걸 따지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런 이야기.

참고 : 실제 칼레 공성전의 전말

백년 전쟁 초기에 벌어진 전투 중에 하나인 제 1차 칼레 공성전(1346)은 크레시 전투에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Valois)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프랑스 본토로 진군하는 에드워드 3세와 영국군을 저지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영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 역시 필리프 6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칼레를 확보하여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완벽 차단하고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로를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1346년 9월 4일부터 공성전이 시작된다. 칼레 공성전은 1347년 8월 3일까지 이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수 차례에 걸쳐 필리프 6세에 의한 파상적인 공격이 계속 이루어진다.

단, 필리프 6세는 크레 시에서 약 3만여 명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군에 대한 공격은 주로 영국의 보급 저지를 위주로 이루어졌다. 물론 단 한 번도 성공을 하지 못하지만(반대로 영국군 역시 필리프 6세의 군대를 괴멸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칼레 공성전에 임해야 했다).

당시 칼레에는 약 7,000-8,000명 정도의 시민이 있었는데, 필리프 6세에 의한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시민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칼레는 당시 요새화되었기에 쉽사리 점령할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주변을 약탈하고 프랑스 군의 보급을 막는 작전으로 칼레를 고립시키는 전술을 택하였다. 실질적으론 공성전이 펼쳐진지 6개월 만인 1347년 2월에 이르러 칼레를 완전 포위한다.

1347년 8월 1일, 1년 남짓한 저항에 지친 칼레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의사를 타전한다. 8월 3일에 에드워드 3세와 그의 군대가 칼레에 입성하게 되고, 머지 않아 칼레 시민들은 모두 영국-플랑드르 연합군 병사들에 의하여 강제 소거 당한다. 이후 1558년 프랑스군에 의하여 탈환되기까지, 칼레는 약 2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기득권 세력들을 책망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많이 누리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부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책망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상아는 북이스라엘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량 수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입한 상아로 상을 만들어서 누워있습니다.
상아로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납니다.
그들이 상아 상을 만들어서 술 마시고 즐기는 동안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상아 상이 늘어나는 만큼 백성들은 굶주리고 고통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먹는 고기는 최상급 고기였습니다.
어린 양과 송아지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그들은 노래도 열심히 불렀습니다. 시를 짓고 곡을 붙여서 다윗 흉내를 냅니다. 그들은 다윗과 닮지 않았습니다. 행실과 내면은 다윗과 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를 짓고 노래 부르던 다윗의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겉모습은 흉내 내지만 내면은 엉망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신다는 표현은 술에 중독된 그들의 모습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술에 중독되어 있고 기름진 삶을 자랑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시절에 부를 많이 축적했습니다. 그들의 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백성들에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그 돈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치장하기 바빴습니다. 백성들은 그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하나님은 그들이 사로잡히는 자 중에서 앞서 사로잡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려고 호세아, 아모스, 요나 선지자를 집중적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북방에서 한 민족이 내려올 것인데 그들이 내려오면 사로잡힐 백성들을 먼저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기득권 세력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은 사로 잡히는 자 중에서 앞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치에 합당한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들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앞서 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명예를 백성들에게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조차 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앞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아닙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은 대부분 시대적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는 서민들입니다. 하지만 앞서 사로잡히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타인보다 앞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서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돈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은혜는 먼저 받은 백성들입니다. 먼저 은혜 받은 백성으로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 아직까지 믿지 않는 자녀들에게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하는 그 의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우리가 먼저 믿었다면 먼저 믿은 값을 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말씀을 전하고 선포해야 됩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 근심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부여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근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환난 날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앗시리아 군대가 일어나서 북이스라엘 전역을 칠 것입니다.
먼저 된 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 큽니다.
우리도 나라의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은혜 받은 자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2.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3. 은혜 받은 자들이 앞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오니 드리는 기도를 받아 주시옵소서.


7월 19일(수) 아모스 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림줄(7절)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This is what he showed me: The Lord was standing by a wall that had been built true to plumb, with a plumb line in his hand.

* 다림줄 :  '납, 측연 추'를 뜻하는데 다림줄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건물을 허물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 594. 아나크(’ănâk) אֲנָךְ 

1. 납.  2. 다림줄
발음 / 아나크[ ’ănâk ]
어원 / ‘좁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사용되지 않음]
관련 성경 /  다림줄(암 7:7, 8).
구약 성경 / 4회 사용

아모스가 본 환상들

아모스가 본 세 가지 환상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아모스는 이제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피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서 본장부터는 죄악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 즉 앗수르의 침략에 대해 환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본장부터는 아모스의 예언 사역이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였던 전장까지와는 달리 백성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역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아모스 개인 사역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7:1-9. 황충과 불과 다림줄 환상을 통한 경고
7:10-17. 제사장이었던 아마샤와의 논쟁

아모스는 3장에서 6장까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9장까지 다섯 개의 환상을 언급하게 되는데, 본장에서는 세 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들은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들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앗수르의 공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 편 이 같은 아모스의 환상을 듣고서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방해하고자 하는 제사장 아마샤의 공격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모스의 사역은 선지자의 사역이 하나님의 예언의 대변자임과 동시에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중보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구약 성경을 보면 여러 형태의 중보사역이 등장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놓고 조카 롯을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중보사역(참조, 창18:22-23), 우상 앞에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중보 기도(참조, 출32:30-32),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슬퍼하며 기도하는 사무엘의 중보 사역(참조, 삼상12:23) 등에서 중보 사역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중보 사역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중보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고 죽으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 사함에 관한 중보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행하고 계 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여전히 사단의 세력이 성도들을 위협하는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이런 중보 기도의 필요성이 매우 크게 대두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성도들의 중보 사역이 무엇보다 크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부패한 상황 속에서도 영적으로 깨어 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권고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이처럼 시대 속에 깨어 있는 선지자야말로 시대를 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대 속의 선지자인 성도들도 영적으로 깨어 갈수록 타락되어 가는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영꺽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날마다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유익과 축복만을 위해 간구하는 자가 아니라 시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의 기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도자가 분명한 원칙과 지도력, 타협하지 않는 소신을 가지고 공동체를 인도하면 질서는 확실하게 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적인 불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지도자 때문에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원칙 없이 행동한다면 혜택을 입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아우성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지도자는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는 분명한 소신과 지도력을 가져야 하고 비본질에 있어서는 넓은 아량과 마음을 가지고 통큰 결단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에게 통하는 것이 있고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절대로 양보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통하는 것도 있습니다.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임계점에 도달하고 나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봅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여로보암 2세 시절 그들은 부유했지만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 가지 환상을 통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마지막 환상은 돌이키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예고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메뚜기가 풀을 다 먹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의 풀은 곡식을 말합니다. 메뚜기 떼가 곡식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 시절 물질의 부를 누렸다 할지라도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 떼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곡식을 다 먹어버리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환상을 본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미약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이들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심판을 되돌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선지자의 간구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메뚜기 심판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심판에 대한 환상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불이 바다와 육지를 삼키고 태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바다와 땅에 임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절은 해상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배를 띄워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이 먼 바다까지 오가는 배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북이스라엘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불이 육지를 삼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금자탑을 높이 쌓아 올린들 소용없습니다. 제 아무리 경제적 평화와 부를 누리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일으켜서 전쟁이 일어나게 하시면 쌓아둔 재산은 불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 또한 무서운 재앙입니다.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 울며 엎드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선지자는 야곱이 미약하다는 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도 철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이신 세 번째 환상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다림줄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다림줄이 무엇입니까? 건축현장에서 수직을 맞추는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땅 바닥으로부터 시작해서 높다랗게 벽을 쌓아올립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제 아무리 좋은 눈썰미를 가지고 벽돌을 쌓아 올린다 하더라도 삐뚤삐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은 다림줄을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립니다. 다림줄에 맞추어서 벽돌을 쌓아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반듯한 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메뚜기 재앙도 철회하셨고 불 재앙도 철회하시는데 다림줄은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림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두고 말씀대로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 지켜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이 인생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재앙을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을 위에서 늘어뜨려 보면 인생의 벽돌이 삐죽삐죽 튀어 나와서 보기 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씀의 다림줄을 너희들 인생에 보내노니 튀어나온 벽돌이 있다면 다시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쌓아 올려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원점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점부터 시작하기 싫어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은 말씀이 아니라 다른 나라이며 믿지 않는 백성들의 세상 풍조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로 삼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선지자는 메뚜기 심판이나 불 심판을 예고하신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다림줄 심판 예고에는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습니다. 매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기준에서는 타협이 없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이 오늘 우리 인생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사태를 겪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바이러스 하나가 교회를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가운데에도 교회는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도 비교 대상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의 다림줄 앞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 인생도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아까워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은혜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인생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절대 기준인 말씀을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3. 말씀의 다림줄이 우리 인생에 있음을 기억하고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하나님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암 7:7~8)

‘다림줄’이란 건축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다. 쌓아 올린 구조물이 수직으로 바로 서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것일까? 아모스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함2세의 부국강병책으로 부강하고 경제적 호황을 누렸지만, 사회 윤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곳곳에 사회적 약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는 주변사회의 풍요를 상징하는 우상숭배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명하였다. 아모스는 ‘정의를 하수 같이, 공법을 물 같이’ 흐르는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시각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에 베풀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의 첫 번째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의 손에 이 다림줄을 들게 하셨다(슥4:10). 이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백성의 지도자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기뻐하신다. 이는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기준 감각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작건 크건 관계없이 위험에 처한다. 리더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이다.

오늘날 나의 손에는 다림줄이 들려 있는가? 하나님의 판단력을 닮고 시행하고 있는가? 이 다림줄이 올바로 서지 못하면 나의 공동체는 흔들린다. 잘못된 건물을 세우게 된다. 진리의 잣대가 흔들리면 공동체는 진리에 벗어난 집을 짓게 된다. 죽은 전통과 잘못된 관습, 상황의 잣대로 공동체를 세우면, 하나님의 다림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자신과 내가 섬기는 공동체,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해 다림줄을 베푸신다면 어떻게 될까? 올바로 쌓아올리지 못한 나의 모습이 전체 구조물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겠는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준엄하신 심판을 내리시겠는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나와 내가 세운 집들을 다시 재어보자.

영어로 다림줄은 plumb line입니다.
라틴어 ‘플룸붐’(납)에서 온 plumb은 다림줄 끝에 매다는 다림추(plumb bob, plummet)를 뜻하기도 합니다.
로마 시대에 납으로 수도관을 만든 것이 plumbing(수도 시설, 배관 공사), plumber(배관공) 같은 단어에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 경고를 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 곁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데 손에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님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삭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는 파괴될 것이다. 내가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암 7:7~9, 새번역) 그리고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춰 중심을 잘 잡고 바르게 서 있는지 돌아봅니다.

다림줄



인류 역사의 끝은 사상전쟁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인류 종말을 가르친 다림줄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그어놓은 어떤 국경선이나 민족적 분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교파를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지되 먼저, 하나님을 대적하는

666의 무리가 반드시 파멸당할 것이 작정되어 있습니다(사 7:15, 사 2:4, 미 4:3, 사 32:16~19). 그러므로 누구든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몽땅 없애버린다는 것이 6000년 선악 싸움의 최후의 결전을 짓는 아마겟돈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경기와 게임이 그렇듯이, 어짜피 이 땅의 영적 전쟁도 이긴 자가 차지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인간 자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한 자들이 바로 최후의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과 사상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하나된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한 것이 사 66:18절 이하의 예언이 됩니다. 

암 7:7절에 "다림줄"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이 다림줄을 베풀고는 다시는 용서치 않는다고 하신 것을 볼 때 다림줄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공법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원래 '다림줄'이라는 것은 성전을 곧게 쌓을 때 필요한 기구로서 실에 추를 달아 늘어뜨려 중력방향의 수직을 맞추는 도구입니다. '척량줄'이라고도 합니다. 육적 세계의 건물도 보이지 않는 수직(중력)방향을 잡아주는 다림줄과 어긋날 때에는 어김없이 무너지고야 말듯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영적 성전도 다림줄 역할을 하는 심판의 잣대(계 11:1), 척량줄(슥 2:1~), 먹줄(겔 9:3), 다림보던 추(왕하 21:13)에 맞지 않을 때에는 여지 없이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최고의 목수'이십니다. 고로 예수님이 들고 계신 다림줄은 부패한 성전을 심판하는 진리의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아려주는 율법시대에 누구든지 율법을 범하면 저주를 받았고(신 27:26), 영혼을 구원하는 은혜시기에도 역시 누구든지 '천국복음'을 떠나면 영적인 저주를 입고 지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갈 1:7~8). 종말에도 '영원한 복음'이라는 다림줄(계 14:16)이 등장하여 심팜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한 번도 인용됨이 없으니, 종말론의 예언 안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바로 종말의 영적 성전 건축 사명자인 스룹바벨에 의해서 고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슥 4:10)과, 머릿돌(슥 4:7)과, 하나님의 印(계 7:3, 학 2:23)을 맡겨 당신의 종으로 쓰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고로 모든 혼란한 것을 뒤집어엎는 심판기에는 '다림줄'을 외치고 나오는 '스룹바벨'의 사명자가 혼란한 종말 교회에 성경대로 재등장합니다. 이 다림줄의 사명은 영적 성전(기독교)에 부패가 있으리라는 계시록의 말씀 곧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좌에 앉으신 성부께로 받은(계 5장) 작은 책과 함께 시작되며, 인봉된 심판의 책이 열려져 그 해석을 알게 하는 일 없이는 절대로 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슥 4:9~10 스룹바벨의 손으로 성전건축(144,000명 인 치는 역사)이 마쳐지는 데는 "그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하셨습니다.

전술한 바, 주께서는 쌓은 담을 재어보는 줄을 다림줄이라 칭하셨고(암 7:7~), 예루살렘을 척량하는 것을 척량줄이라 명하셨으며(슥 2:1~5), 성전을 척량할 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사용하는 모습을 묵시로 주셨습니다(계 11:1~2). 이 모든 단어는 같은 내용을 지칭하니 곧 진리의 기준이 어떤 대표자에게 위탁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외에는 다 가짜라는 뜻이 아니고, 전 세계의 흩어져 있는 알곡 곧 진리의 용사들을 불러모으는 사명은 '영원한 복음'을 들고 나오는 동방 해 돋는 곳은 '다른 천사'의 사명 곧 '우리'라고 지칭된(계 7:3) 말세 선구자적인 무리들이 리드할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다림추가 중력방향으로만 작용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향한 자들이며, 그 이외의 사상에는 결코 타협치 아니하는 신앙의 용사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사명은 수직이 아닌 모든 것들의 정체르 다림줄 앞에서 만천하에 공개되도록 하는 명료성과 독일무이성에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고는 부족한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사명입니다(슥 4:6).

사단의 왜곡된 진리가 난립하는 이 시대, 곧 성전건축의 대역사인 기독교의 大공사판에, 다림줄을 모르고서도 공사에 동참해보겠다고 날뛰는 거짓무리들이 다시 등장할 것입니다(에스라 4:2). 그들은 세상 명예를 바라는 자들이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사단의 권위를 빌어서 주님의 일을 기꺼이 훼방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에스라 4:4~6).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성전재건'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나쁜 무화과입니다(렘 24장).

구약 성민의 모든 역사가 종말의 기독교 안에서 재연될 때에, 이스라엘 성소(종말의 기독교)에 다림줄을 베풀고(설교하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여지 없이 실행될 것입니다. 이를 외쳐 고하는 사명이 '다림줄'을 위탁받은 스룹바벨의 사명이며, 이 사명을 깨달아 한마음 된 자들이 계시록 7:3절의 '우리'라는 단체를 이루어 계 10:11절처럼 '다시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림줄, 다림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혼란의 줄" "공허의 추"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 34:11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12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이들은 환란 날의 불택자들로서 에돔 사상(시기, 질투, 미움, 무신론, 황금만능, 종교협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사 34:5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34:6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초장=교회)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륙을 행하심이라"에돔은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7머리 10뿔 국가들이요, 종교적으로는 환란시대의 불택자들 곧 성전 밖마당 교파(협상교회)들입니다.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아모스 7:7~8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왕하 21: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다림줄을 깨닫게 되면 성전 밖마당과 안 마당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전 밖마당에 있는 자들은 이방인(잔인한 군주=사 19:4 / 한 왕=단 8:23~, 9:26~)의 손에 붙여져 짓밟힐 때까지 결코 다림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각 집을 짓는 자들인데, 집을 지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자와 사단의 꾀임을 받은 자가 섞여 있다가 다림줄 말씀(암 7:7~9)이 등장될 때(다시 예언될 때 - 계 10:11) 확연히 갈라지게 됩니다. 마치 곡식 밭에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하다가 타작마당에서는 확연히 갈라지는 이치와 같습니다(고로 다림줄은 사 41:15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와 같은 뜻이 됩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 똑같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었으나, 다림줄 말씀이 외쳐질 때는 제 본 모습(영적 현주소)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홍수에 빠져 죽고, 핵에 타 죽는 것이 일반인들이 말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더 무섭고도 근원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바로 다림줄 말씀이 지나갈 때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불에 해를 당하는 심판보다도 더 원천적인 심판인 것입니다. 홍수나 불은 다림줄 밖에 있는 사람을 훑고 지나가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재앙이 됨을 미리 깨닫고 각성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5절 말씀에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이란, 중생받은 자가 헛된 삶을 살다가 공력이 불탈 때 육체는 소멸되고, 영혼만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노아 때 죽은 자들이 육체는 죽었으나 예수님이 옥에 내려가셔서 전파하실 때 그 영혼이 살리움 받은 이치와 꼭 같습니다(벧전 3:18~). 영혼구원은 예수 피 권세에 있으나, 환란날에 재앙을 면하고 새 시대의 백성이 되는 육체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산 말씀 권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피로 산 말씀 권세! 이것이 바로 다림줄의 권세, 머릿돌의 권세, 하나님의 인(印)의 권세입니다.

고로 다림줄이란

계시록과 계시록을 통하여서만 들어갈 수 있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뜻합니다. 이것을 말할 줄 아는 교회가 종말의 촛대교회요, '해를 입은 한 여자'가 되는 것이니 ① 광야교회(율법), ② 피로 산 교회(은혜), ③ 촛대교회(심판과 새 시대)로 이어지는 구원노정의 순서를 알고 때를 따라 양식을 먹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보배롭고 귀한 일이 될 것입니다(마 24:45).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의 피로 산 백성이라면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의 다림줄에 절대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혼란의 줄(기독교 협상주의, 무신론, 과학만능, 황금만능)로부터 벗어나 다림줄만을 꼭 붙들어 주님이 용서 없는 심판을 행하실 때 심판을 이기고 새 시대의 거룩한 백성 또는 왕권자가 되어 주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데 이 한 몸 다 바칩시다.


다림줄이 필요하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빌드-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터를 잘 닦아야 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폭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목수답게 튼튼한 반석이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무엇인가? 교회이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말씀)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건축자가 수직으로 벽돌을 쌓는 과정은 마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기초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군데군데 벽돌을 빼먹고 쌓으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기본기, 기초가 올바르지 않을 때에 우리 앞에 놓인 삶에서도 하나님보다 자신이 갖고 있고 보이는 것에 얽매여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은 상대적으로, 수치적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삼상16:7)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중심’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준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다림줄’은 무엇을 제시하였을까? 하나님의 다림줄은 그분의 말씀이었다.

성경에서의 다림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영과 육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기준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리웠다. 바르지 않은 건물은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 하듯이 바르지 않은 나라는 허물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당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은 삶의 기초요 바른 길을 제시하는 절대적 규범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 다림줄을 드리워야 한다. 나의 삶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중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온전하고 올바르게 빌드-업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수평을 붙들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40년, 180년을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은 곧 은혜이다. 우리 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고, 중심을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7월 20일(목) 아모스 8장 - 여름 실과의 환상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무엇을 보느냐?(2절)


예레미야 24:1-8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예언

  1. 바벨론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2.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미가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What do you see, Amos?" he asked. "A basket of ripe fruit," I answered. Then the LORD said to me, "The time is ripe for my people Israel; I will spare them no longer.

아모스서 전체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환상 중 네 번째 환상을 소개합니다.
7장에서는 세 가지 환상 중에서 다림줄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8장에서는 '여름 실과 광주리 환상'을 통한 이스라엘 종교의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과 종교적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8:1-13. 여름 실과 광주리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8:4-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삶의 이익만 추구했다는 아모스의 마지막 설교

아모스는 네번째의 환상, 곧 여름 실과의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곧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표하는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여름 실과(카이츠)'란 단어와 '끝(케츠)'이란 히브리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가 본 네 번째 환상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또다시 이스라엘을 향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사회적인 불의와 신앙적인 타락상을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의 파국적인 멸망이 필연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적으로 기근 상태에 빠진 처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 8장을 통하여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질 때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 말씀의 기갈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인정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7093) 겟츠(qêts) קֵץ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겟츠[ qêts ]
어원 / 7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지남, 끝(창 8:6, 전 12:12), 끝남(출 12:41, 민 13:25, 대하 8:1, 겔 7:2, 단 11:27), 끝(창 6:13, 신 31:10, 왕하 19:23), 마지막(욥6:11, 애 4:18, 단 11:40), 종말(시 39:4, 합 2:3), 끝날(단 12:13).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여름실과(7019) 카이츠(qayits) קַיִץ 

1. 추수. 2. 여름
발음 / 카이츠[ qayits ]
어원 / 69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름(창 8:22, 시 32:4, 렘 8:20), 여름과일(삼하 16:1, 렘 40:10, 미 7:1), 과일(삼하 16:2).
구약 성경 / 22회 사용


음펨바 효과란 같은 냉각 조건에서 높은 온도의 물이 낮은 온도의 물보다 빨리 어는 현상을 지칭한다.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는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이 저온의 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1][2]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3] 1963년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B. Mpemba)가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3]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이 50년간 풀리지 않다가 2013년 11월 싱가포르 연구진에 의해 물의 수소결합과 공유결합의 에너지 상관관계에 의한 현상임이 밝혀졌다.[4]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인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섭취해야 한다. 모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말씀과 선지자를 공급하셨다. 이 말씀도 곧 율법으로 가시화 되었고 인간 세상의 삶의 영적 기준이 되었다. 아울러 선지자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계속 유지시키셨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선민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죽음에 처한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구원 계획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와 아울러 끊임없이 죄를 범하여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까지 초래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우선 영적 양식인 말씀을 끊어 버리는 영적 기갈부터 초래했으며 더 나아가 최종적 심판을 통한 육체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는 특권은 절대적인 구원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공된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율법을 어길 때 오히려 율법은 심판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심판의 형태는 비단 선택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여호와의 날인 최후의 심판 날에는 인간들의 모든 공동체 영역 속에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이 포괄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본장을 통하여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질 때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 말씀의 기갈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운 삶을 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고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면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가장 무서운 심판, 임박한 진노의 심판이 하나님이 입을 닫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들과 말 할 일이 없다. 지금까지 말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행실이 그 모양이라면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침묵은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호세아,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말씀들 끝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계속해서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7장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 환상과 바다와 육지에 불이 임하는 환상, 다림줄 환상이었습니다. 이제 네 번째 환상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뜻을 여러 번 돌이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를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 주십니다. 때가 무르익어서 여름 과일을 사람들의 식탁에 올릴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임박한 심판이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름의 끝이 와서 과일을 따야 하는 것처럼, 과일이 사람들의 식탁에 놓일 때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특히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본문 다르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죄가 심각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돌보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월삭과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단순히 육체를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쉬는 날입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 있는 자들은 월삭과 안식일에 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문을 열기만 하면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직하게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속이는 저울로 장사했습니다. 에바를 속이고 저울을 속였습니다. 세겔을 속여서 팔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이 행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달아주는 밀도 좋은 밀이 아니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사람들을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는 자들, 좋지 않은 밀을 팔아서 폭리를 취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여름 과일 광주리처럼 해치워 버리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눈에 띄는 것은 독자의 죽음이라는 대목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가 죽으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희망이 사라집니다. 독자는 그 가정의 희망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끊어지게 할 것이라는 선언은 예사로운 심판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 바로를 심판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북이스라엘의 희망의 싹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11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화 되어 명확히 드러납니다.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곧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모두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입맛이 없다는 것은 몸에 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생명이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먹어야 됩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연환경으로, 주변 상황으로, 때로는 백성들의 양심을 찔러가며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자 하나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름과일이 광주리에 담겨 식탁에 올라가는 것처럼 임박한 심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시고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갖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생명수 같은 말씀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환경으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설교를 들어도 졸리기만 하고 징조를 보아도 마음에 가책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할 것이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북이스라엘 북단 단에서부터 남유다 남단 브엘세바까지 하나님께서는 영적 기갈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자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크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작게 말씀하십니다. 때마다 시마다 아버지의 말씀에 영혼을 열고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힘써 지키겠습니다.
2.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말씀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3.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들려 주시니 그 말씀으로 힘을 얻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옵소서.

7144. 대머리(코르아흐. qorchâh) קָרְחָה 

1. 벗겨짐.  2. 머리의 정수리.  3. 머리의 앞부분
발음 [ qorchâ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머리(레 21:5, 겔 7:18, 미 1:16). [동] 대머리가 되다(렘 47:5, 48:37), 털을 밀다(신 14:1), 머리털을 밀다(겔 27:31)
구약 성경 / 11회 사용

7월 21일(금) 아모스 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범죄한 나라(8절)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Surely the eyes of the Sovereign LORD are on the sinful kingdom. I will destroy it from the face of the earth-- yet I will not totally destroy the house of Jacob," declares the LORD.

범죄한 나라(밤마믈라카 하핱타아.  בַּמַּמְלָכָה הַחַטָּאָה

2403. 범죄한(하타트. 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 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 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4467. 나라(맘라카. mamlâkâh) מַמְלָכָה 

1. 왕국.   2. 지배권. 3. 통치권
발음 / [ mamlâkâh ]
어원 / 4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라(창 10:10, 민 32:33, 삼상 10:18, 암 6:2), 왕위(신 17:20, 대하 20:29), 만국(왕하 19:15, 스 1:2), 왕(왕하 11:1, 대하 22:10, 암 7:13), 왕국(시 46:6), 열방(사 23:11), 국왕(시 135:11), 국가(렘 18:7, 51:20).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아모스 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 319. 남은 자( 아하리트.  ’achărîyth) אַחֲרִית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 ’achărîyth ]
어원/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 (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아모스 9:12
저희로 에돔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7611. 쉐에리트(sheʼêrîyth)  שְׁאֵרִית 

1. 나머지.  2. 남은 자.  3. 후손
발음 / 쉐에리트[ sheʼêrîyth ]
어원 / 7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겨둔 것(렘40:11), 남은 자(렘44:7, 50:26,왕하21:14, 사15:9, 암5:15), 나머지(느7:72, 사44:17), 기타(렘39:3). [형] 남아 있는(삼하14:7, 렘8:3, 겔36:5), 남은(스9:14, 겔36:3, 습2:9).
구약 성경 / 66회 사용


'에돔의 남은 자'란 1:11,12에서 심판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그 심판에서 구원받고 보존된 자들을 가리킨다.
아마 이들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란 말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 즉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F. Keil).
그리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도 역시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품에 돌아온 자들, 곧 구원받은 무리들을 지칭하는 듯함.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λοιπος, remnant) 사상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실현과 사탄의 방해라는 줄거리 로 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에는 항상 ‘남은 자’가 있습니다.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아르’(שאר)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레임마’(λειμμα) 혹은 ‘로이포스’(λοιπος)라고 하고, 영어로는 ‘렘넌트’(remnant)라고 합니다.
‘남은 것’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 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 6:6-8, 눅 17:26-27, 벧전 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창 19:29, 눅 17:28-29).

아합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이 아합왕과 이세벨의 학정으로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롬 11:2-5).

포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가운데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사 6:13, 10:20, 11:10-12, 렘 23:1-4, 31:7-8, 단 1:8-9).

하나님은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심판을 하면서도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 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욜 2:28-32, 행 2:1-21).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롬 9:27, 29).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계 6:6).

구약시대에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참 생명력을 가진 ‘여자의 남은 후손들’ 곧 ‘남은 자’와 더불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입니다. ‘바다 모래 위’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기 위해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게 할 짐승을 부르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1-10절에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이 나오고 11-18절에는 땅에서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용이 그 두 짐승을 이용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합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하고, ‘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땅에서 올라온 두 뿔 가진 짐승은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하고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자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구원역사에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앞세워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남은 자‘들은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미혹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킵니다.

   남은 자들은 증거를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이른바 ‘남은 자손’은 어떤 성격을 가진 자들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분인 것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며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양보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이 이용하는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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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에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11:3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11:5-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영광을 누립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14:12).

   지금 신약 복음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로마서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남은 자는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고 원하시는 때에 영적 권세를 주어 사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남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목적 하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있는 남은 자들<쉐아르- שְׁאָר‎>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사 10:21)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롬 11:4)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31)

“남은 자”를 히브리어로 <쉐아르- שְׁאָר‎>라고 합니다.
영어로 <렘넌트- Remnant> 라고 합니다.
“남다, 남겨지다”의 <샤아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보호 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믿음이 있는 자를 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실 때, 롯과 두 딸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시대 때, 홍수로 심판 하실 때,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 고센 땅에 머물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바알과 아세라 신상에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칠천명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구별 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영혼이 남은 자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그 “남은 자”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함께 하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은 자' 사상에 대하여

[라이프성경사전]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 심판받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죄악 된 세상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역경을 견디며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소수의 의로운 자들을 남겨 두시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구원에 목적이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의로운 자들을 통해 당신의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대표적 실례를 살펴보면,

1. 대홍수 가운데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창 6:5-8).
2. 바로의 남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모세(출 2장).
3. 출애굽 1세대로서 광야에서 살아남은 여호수아와 갈렙(민 14:29-30).
4. 아합의 여호와 신앙 말살 정책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의 성도(왕상 19:18).
5.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사 10:20; 미 2:12-13) 등이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로마서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교회용어사전]

고통과 재난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레 26:36; 민 24:19). 특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에 멸망치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사 10:20; 렘 31:7).

이사야 10:20-21 / 남은 자야곱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이런 자들은 고난 중에도 죄악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남겨 두신 일차적인 목적은 이들의 구원에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창 6:5-8; 출 2장; 민 14:29-30; 왕상 19:18; 사 10:20-22; 미 2:12-13).
참고로,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남은 자'로 정의했다.(로마서 9:27)

[두산백과사전]

남은 자 사상 요약 :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는데, 그 중에서도 소수자를 남겨 구원과 축복의 담당자로 함을 자각하고 있는 자.
헤브라이어로는 아하리스, 예세르, 펠레타(피한 자) 등이다.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혜로서 심판을 면케 하고 심판에 제한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정치적, 군사적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을 일컫는다.

《여호수아서》 13장 12절에 “곧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도읍하였던 바산 왕

옥의 온 나라라 모세가 이 땅의 사람들을 쳐서 쫓아내었어도”로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남은 족속을 이야기한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싹이 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허락한 것이다.
《이사야》 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고 하여 하나님이 남은 자를 허락하였음을 나타낸다.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구약성서 《이사야》 10장에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여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은 자를 모으고, 남은 자는 회개하게 된다.
《예레미야》 31장 9절에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향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남은 자는 여호와를 의탁하여 보호받게 된다.

남은 자는 순결한 자들이 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남은 자가 받는 축복은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예레미야 32:38~39)”로 나타나 있다. 스바냐에 따르면 남은 자는 겸비하여 주를 찾는 자이고 남은 자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약성서의 이 개념은 바울로의 구원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Holynet]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어리트’(tyrav)입니다.
‘남다’, ‘뒤에 남겨지다’라는 뜻의 ‘솨아르’(rav)에서 파생된 ‘쉐어리트’는 ‘잔류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솨아르’는 벌목 후에 남아 있는 나무나 그 나무의 그루터기(사 6:13; 10:19)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에 의해 심판을 받고 남은 자, 혹은 남은 민족, 남은 땅을 비유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사 15:9; 렘 47:4,5; 겔 25:16).

‘쉐어리트’는 하나님 심판의 엄중함을 표현하며, 심판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은 ‘오직 남은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을 절대로 멸하시지 않는다는 소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 하실 때에 그 중에서 몇명을 남겨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데, 그것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지는 ‘남은 자’에는 광야 생활에서 살아 남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 앗수르의 강제 이송에서 탈출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대하 30:6; 34:9),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유다로 되돌아 온 자들(학 1:12; 슥  8:6  참조; 느 1:2-3), 이방 여러 나라들로부터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 오게 된 자들(사 11:11; 미 2:12)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면케 하시거나, 심판을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남은 자를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심판 중에서도 회복을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서 9장은 다섯 번째 문설주 환상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씀의 기근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 심판이 임할 것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 회복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계속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의 흐름 속에서도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9:1-6. 성전 파괴에 대한 환상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
9:7-10.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 심판에 대한 예언
9:11-15. 다윗의 무너진 천막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 

아모스는 다섯번째의 환상인 부서지는 문설주를 보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멸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베풀어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 그날에 무너진 이스라엘의 장막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는 곧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가 그러했듯이 아모스 선지자도 줄곧 심판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실 것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통하여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상은 결국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남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그루터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남은 자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미에서 살아 남은 자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은 자들이란 이스라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자들입니다.
또한 이들조차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남은 자가 아니라 심판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더불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깨닫게 합니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와 백성 위에 뛰어나며 이 땅 위에 주의 백성과 함께 임재하심으로써 주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자는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가고 온갖 죄의 유혹이 밀려오는 세상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욱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풍요에서도 성도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때때로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닌 자들을 남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죄악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결을 지킨 성도들에게 마지막 심판을 통해 승리의 기쁨과 영원한 구원의 면류관을 주시기 때문이다. 바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두사 omni- 는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무소부재하다고 간주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세분화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모든 결마다 스며있지는(범신론) 않으시지만, 어디에서 항상 계십니다.

비록 어디에서든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는 당신의 존재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방법으로 한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고(시편 46:1; 이사야 57:15) 상황에 따라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시편 33:13-14).

하나님께서는 시공의 모든 영역에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만 지협적으로 제한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또 매순간의 현재마다 계십니다.
어떤 분자와 원자 입자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존재하시기에 너무 작다 할 수 없으며, 어떤 은하계도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기에는 너무 광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창조물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능성들까지도 알고 계시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물의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모든 방법, 모든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십니다(이사야 40:12; 나훔 1:3).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건의 안내자로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십니다(시편 48:7, 2; 역대하 20:37; 다니엘 5:5-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간청하는 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시편 46:1).
더할 나위 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된 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며(골로새서 2:19), 지상을 덮고 있으며 지옥 문이 이기지 못할 온 교회들 안에 신비롭게 존재하십니다.

인간 정신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듯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설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인이 가는 곳으로, 악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끝없는 분노 아래 고통 받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장소라고 주장합니다(마태복음 25:41).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분리된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4:10이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악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있는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견뎌야 합니다.
악인을 따로 떼어 놓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니 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존재로 채우시며(골로새서 1:17)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에(히브리서 1:3), 위의 역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되 반드시 축복해야 할 곳에만 존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과 떨어져 계신 것처럼(이사야 52:9), 악인을 멀리 하시고(잠언 15:29) 마지막 때에는 어둠에 매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지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고통 당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들이 자신들이 처한 영원한 상태로 인해 괴로워하고,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 즉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모든 축복으로부터 깊은 단절을 만든 그 죄를 끊임 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자로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항상 존재하시지만, 진노 외에 어떤 속성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국에도 존재하시며, 우리가 여기서는 감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모든 축복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가지 모양의 축복, 여러 가지 모양의 사랑, 여러 가지 모양의 친절, 그야말로 진노 외에 그 모든 것을 보이시며 천국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시편 139:11-12),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이사야 57:16).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시 139:7-18)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본문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편 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1.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편 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편 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유대인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랍비에게 갔습니다. 랍비는 그 아이를 보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니? 어디에 계신지 대답하면 이 은전 하나를 주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제 질문에 답하신다면 제가 선생님께 은전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아이의 당돌한 말에 랍비는 무슨 질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랍비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며 행복의 요인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특히 이 시는 모든 시 가운데 걸작에 속하는 시로 ‘시편 중 왕관’이라고 불리어질 뿐만 아니라 신앙적 감정의 깊이와 사상의 탁월성, 표현의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첫째, 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하고 있는가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가?


  


본문 7절에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하며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피할 곳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며 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축복이신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고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1)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에 나타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때에는 천진난만한 시대였기에 그들은 벗었으나 부끄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무화과 잎을 엮어 그들의 몸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만나시기 위해 저녁 무렵 에덴동산에 임하셔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환영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던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달려 나오질 못하고 숨었습니까? 그들이 죄인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죄성이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스며들어 본성이 되고, 그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1-5)라고 하며 환상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죄인인 자신을 깨닫게 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제단 숯불을 그 입에 가져다 대어 그 죄를 사함 받았으며 참으로 많은 세월 가운데에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아무 상관없는 고기 잡는 일과 죄를 통해 자신의 앞에 계신 거룩한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스스로가 한없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죄를 사함 받고자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죄를 감추고 숨기려고 하는 사람은 계속 어둠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21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자아 너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봇이나 기계처럼 입력한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 아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그 섭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인간은 도리어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치고 죄를 지으며 그것을 감추기까지 합니다. 즉,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일에 사용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말씀하신 대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한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을 때 참된 자유를 얻은 듯 했지만 그 자유로 인해 오히려 노예가 되었고, 빈곤하게 되었으며,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땅에 떨어져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아가 깨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옴으로 참된 자유와 평안, 그리고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유 의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 떠나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지 우리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낫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옳은 것이며,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우리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옳고 나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생각보다 우리의 생각이 더 지혜롭습니까?


이사야서 55장 8-9절에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따라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깨닫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결국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을 회개케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켜 그를 고래 뱃속에서 회개하도록 하셨고 결국 삼일 만에 고래 뱃속에서 나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킴으로 그 성을 구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하려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다가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런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 사람입니다.


  


2.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 한마디로 ‘없다.’가 답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이 세상에 편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습니다. 시편 94편 9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지으시고,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고 보지 아니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숨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요사이 과학의 발달로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 적외선을 이용한 망원경은 밤중에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어 아주 유용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적외선을 발견한 시점부터 그 빛을 사용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이 빛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만드신 하나님께서 보질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적외선이 없어도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 행동, 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앉고 서는 것도, 생각도, 행위도, 말도 모두 알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과 같이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모든 일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18절에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하며 우리는 주의 편만한 속에 들어있음을 말하고 있고, 에베소서 1장 3-6절에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며 이것을 알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음을 말씀했습니다.


지난 21일 미 육군 브래들리 매닝 일병은 미국의 국방 비밀을 폭로한 죄로 군사 재판에서 35년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국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공개한 죄로 CIA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스노든을 잡으려 했지만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도망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비밀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심에도 비밀을 절대 폭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국 유사에 기록된 이야기 중 신라 48대 경륜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륜왕은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이상하게도 귀가 조금씩 자라나더니 시간이 지나자 당나귀 귀처럼 커졌습니다. 그래서 새 관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불렀습니다. 관을 만들기 위해 왕을 찾아온 그 사람은 왕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면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말하지 못하고 답답함에 속앓이를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뒤 죽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죽은 뒤 그 대나무 밭에 바람이 불 때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창피한 왕은 그 밭에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화를 심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고 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점이나 비밀을 모두 알고 계신다는 말에 기분 나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까지도 알고 계심에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프란시스 톰슨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셨으며 신앙이 깊은 분으로 아들이 목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톰슨을 신학교를 보냈지만 그는 학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교육 의지가 높았던 톰슨의 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술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그를 다시 의과대학에 보내었지만 톰슨은 또 학업을 그만두고 집을 나왔습니다. 집을 나온 톰슨은 먹고 쓸 것이 없어 신문을 팔아 겨우 먹고 살게 되었고, 노숙자나 거지처럼 얻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약까지 하게 되어 거의 폐인이 되었습니다. 톰슨은 그런 상황에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을 시로 적었는데, 우연히 그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게 된 출판사 사장인 월프래드 메이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고 돌보아주며 결국 그를 문학가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쓴 시집 중 아주 유명한 ‘천국의 추적’이라는 시집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사냥감인 우리는 사냥꾼인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지만 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적하고 잡아 변화시킴으로 새사람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사냥감인 자신이 잡히지 않기 위해 끝까지 도망쳤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잡아 새 사람이 되게 하셨음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간증하기를 “내가 변화되고,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끊임없이 나에게 임하셨기에 내가 이처럼 변화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잊을 부모가 어디 있으며, 모른다고 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손바닥에 우리 이름을 새기시고 늘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시기에 하나님의 손에서 떠날 자 그 눈에서 숨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곳, 더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2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으며, 시편 33장 15절에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죄성에 가득 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고 살피신다니 더욱 도망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피고 지켜보시는 이유는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먹는 것, 자는 것, 생활하는 것을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잘못된 길로 가면 교훈하고 충고하고 권면하여 옳은 길로 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이 땅에서 승리하고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1)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죄의 길에 빠지고 멸망의 길에 들어선다고 한다면 우리의 부모되신 하나님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하면 권고하고 채찍질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1-4)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양인 우리를 불러 돌아오게 하시며, 만약 오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돌아오게 하십니다. 즉, 택함 받은 백성인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곁길에 서서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몰아주시기 위해 늘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4-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모든 고난과 슬픔 가운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늘 살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하셨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들으셔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슬픔, 환난 당함을 모른다고 하신다면 우리는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아람 왕 벤하닷이 쳐들어와 하나님을 모욕하였을 때 히스기야 왕은 그들을 징벌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일곱 길로 도망갈 것을 말씀하셨고, 결국 그들은 패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 보면 환난과 어려움을 당한 그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된 하갈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샘을 얻었고(창21:14-19), 아들이 없는 슬픔을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부르짖은 한나는 아들을 얻게 되었으며(삼상1:10-11), 가난한 자는 부르짖어 양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열 명의 문둥병자를 모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으며,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처럼 곤고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지 못하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생각을 해야 하며 자꾸 우리의 생각을 고쳐서 하나님의 생각에 접근하도록 해야 합니다.


2000년 4월 7일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동해안 지역을 8일간이나 태우고 진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군부대와 전 도민이 동원되어 불을 끄려고 했지만 바람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더 커져갔고, 불을 진압하던 군장병 몇몇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뉴스를 보던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갑자기 급하게 교회로 뛰어왔습니다. 바로 그 불길 속에 군 복무 중이던 집사님의 둘째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사님은 불길가운데서 아들을 구해달라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 하며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지 날이 새고 새벽녘이 되었는데 그 때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이 꺼지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곧 큰 아들이 달려와 비가 내려 불이 진압되어 아들이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소식에 기뻐하며 정신 차리고 보니 얼마나 땅을 치며 기도했는지 집사님의 손바닥이 터져 손이며 바닥이며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무소부재하시고 편만하시기에 우리가 기도하면 어디서든지 역사하셔서 우리를 고통가운데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선하심과 축복하심을 받아 누려야지 잘못한 것만 생각하고 도망치려고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3) 공의의 심판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의인이 악인이 되고 악인이 의인이 되는 이 세상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만약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악인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평가하심으로 바른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하심으로 바른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그를 하늘나라에 가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하였기에 시편139편 23-2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하며 저자는 자신의 악한 생각을 사로잡아서 선한 생각을 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을 하나님께서 모른 척하셨다면 가인은 아마도 같은 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을 아시고 네 아우의 피가 나에게 소리친다고 말씀하셨으며, 요한계시록 6장 10-11절에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닌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상 주시기 위함이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여 매일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굽어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잘 섬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되 그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은혜 베푸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십니다.  
그분이 궁극적 희망이 되시는 이유는 죽음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두렵고 절망적이며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넉넉히 이겨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긴 이후로 예수의 십자가 그늘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이기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진 자는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넘어져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항상 희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 그 대상은 주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 때문에 이 땅에 소망이 끊어졌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북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아모스 9장 말씀에는 궁극적인 소망이 되시는 그 한 분을 계시하십니다. 궁극적인 소망은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날 왕이 아닙니다. 남유다의 왕도 아닙니다. 그 분은 왕 중의 왕이며 궁극적이고 멸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 되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온전한 소망,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제단이 무너져서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이다. 혹시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멸할 것이다.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제단이 어디입니까? 이 제단은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 제단입니다. 여로보암 1세부터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까지는 약 20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0년 동안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제거하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음란한 제사를 드려도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납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금송아지가 하나님인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용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제 기다림의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단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함께 망할 것입니다. 혹시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따라가서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우상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상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사람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돈으로 쌓은 탑이 무너지고 권력이 무너져 내려 우리가 그 아래 함께 깔려 죽을 것입니다.
재난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완전한 심판을 말씀하셨지만 희망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범죄한 자를 주목하시고 멸할 것이지만 야곱의 집은 완전히 멸하지는 않을 것이며 남은 자를 둘 것이고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마지막에 희망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는 대목에서 우리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다윗 왕조를 말하는 것일까요? 북이스라엘은 유다 백성들과 다른 길을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으로 갈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따라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다윗의 장막이라면 남유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도 아니고 남유다의 왕들 중 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윗의 장막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회복될 것이니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나 정치지도자들에게 희망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760여년 이후에 그리스도를 보낼 것이니 그 분이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세우고 벌어진 틈을 메울 것이며 궁극적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시면 일어날 일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에돔에 남은 자들을 일으키고 만국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 말씀하셨습니다.
에돔이 어떤 자들입니까?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집을 나가 갈라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면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진 것, 야곱과 에서가 갈라진 분열 상태로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만국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 아래 함께 모여 찬양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의 노래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 한 분이 궁극적 희망입니다.
세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것 같고 지역 국회의원이 바뀌면 지역이 바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에 돈이 많아지면 행복해 질 것 같지만 그것도 허상입니다.
세상에 악은 여전히 관영하고 불평등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 아래에서야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죽음의 권세도 부활로 회복될 것입니다.
예수님 아래에 있으면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나눠지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뽑혀 나갑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뽑혀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다윗의 장막에 거하게 되면 영원히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 우리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마지막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궁극적 소망은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신다는 사실, 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여도 예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아래 거하면 우리는 영원히 다시 뽑히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1.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2. 궁극적 희망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3. 사랑의 하나님, 소망 없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영원히 주님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모스 9:2-4
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찌라도 내 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3.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남은 자(이사야 10:20, 22)(미가 5:3. 7-8)

7605. 쉐아르(
sheʼâr) שְׁאָר 

1. 나머지
2. 여분
3. 이사야 10:20
발음 / 쉐아르[ sheʼâr ]
어원 / 7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머지(대상 11:8, 느 10:28, 사 10:19), 충만(말 2:15), 기타(스 4:3), 남은 자(사 10:20, 14:22). [형] 다른(스 3:8, 에 9:12).
구약 성경 / 26회 사용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이다(9:6).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 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한다.


아모스 9:1 /  남은 자(319. 아하리탐)

- 이는 흔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서 말해지는 바,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환난을 피하고 보존되어진 자들(사 10:20, 22; 미 5:3,7,8)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아직 환난을 받지 않은 자(곧 받게 될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4:2).

319. 남은 자(아하리트.  ’achărîyth)  אַחֲרִית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 ’achărîyth ]
어원 /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 (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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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남 유다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아모스 7:14-15)

아모스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4. 별명 / 정의의 선지자

5. 주제 성구 /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정의(正義)


1.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2. 정의의 사도(使徒)
3.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구성원의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하는 일.
4. 바른 의의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公義)


1. 공정한 도의(道義).
2.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3. 가톨릭 / 선악의 제재(制裁)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 품성(積極稟性)의 하나.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에는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로마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인(Christianum)의 존재가 유대교인과 구별되었다.

기원후 2세기 초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비서로 활동했던 로마 역사가 Suetonius는 De vita Caesarum(황제들의 생애)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주후 41-54년) 주후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반포했음을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잠깐 서술하였다.

“글라우디오는 그리스도(Chrestus)의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난동을 일으켜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 유대인들의 추방사건이 그리스도라는 인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이 분쟁과 불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로마인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유대인들의 존재가 기독교인들 사이의 불화로 문제를 일으키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반유대적 시민들의 호소에 편승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도왔던 부부 아길라와 브리스길라는 이때 로마로부터 추방당하여 건너온 로마 교인이었다(행 18:2). 수에토니우스는 세속 역사가였지만, 기독교인이 믿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 불렀다. 이 명칭은 헬라어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의 라틴어 음역이었다. 그런데 라틴어로 제대로 음역한다면 Christus(크리스투스)라고 해야 하고, 실제로 라틴어 성경번역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2세기 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Christus가 아닌 Chrestus 라고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음역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말은 헬라어 χρίω (크리오)에서 왔다.
이 동사는 ‘기름 붓다’(anoint), 혹은 ‘기름 바르다’(smea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레코 로만 세계의 사람들은 헤브라이즘의 메시아(그리스도),
즉 anointed one (기름부음 받은, 기름칠한 자)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Christus의 철자보다는 비슷한 철자이지만, 뜻이 통하고 발음이 비슷한 Chrestus로 음역했을 것이다.
이 음역은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를 즉시 연상시킨다.
이 단어는 대체적으로 탁월한(excellent), 유용한(useful), 도움이 되는(helpful), 좋은(good), 친절한(kind), 온화한(mild) 등의 뜻을 가지며, 고전 헬라어뿐만 아니라, 셉투아진트, 신약성경에서 고루 사용되었다.

구약 헬라어 성경(LXX)에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여러 히브리어 동사에서 번역한 단어이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선한’이라는 טוֹב(토브)를 번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렘 24:2; 단 2:32).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로서 주로 관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목적에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질적 선함(essential goodness)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relational), 혹은 목적에 도움이 되는(serviceable) 선함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선함(moral goodness)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가 7번 사용되었고,
명사 χρηστότης (크레스토테스)는 10번 사용되었고,
동사 χρηστεύομαι(크레스튜오마이)는 단 한 번 사용되었다(고전 13: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담화에서 예수는 “묵은 것이 좋다”(χρηστεύομαι)라는 격언을 소개한다(눅 5:39).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엉뚱한 격언이 첨부되었기에,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지만 묵은 포도주가 미각과 후각에 더 좋은 것이기에 포도주를 마시는 목적에 맞는다는 의미로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를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고 다른 주장을 하는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친다”(새번역성경, 고전 15:33) 고 고전 희극작가 Menander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좋은 습성'(에토스 크레스토스, ἦθος χρηστός)은 도덕적 선함을 뜻하는 말인데, 부활을 믿지  않는 거짓 교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선한 삶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경계하는 바울의 염려를 담고 있다.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는 핵심단어이다.
선하고 착하게 사는 모습, 관용과 인자, 친절을 베푸는 모습, 겸손과 온유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이다.
제자 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습을 인자한(χρηστός)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삶으로 표현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어떤 인간이라도 인자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인자하시다"( χρηστὸς ὁ κύριος) 라는 진리(벧전 2:3)를 맛보았기에, 이제 세상에서 사는 모습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χρηστοί),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로마의 역사가나 관리들,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움, 온유함, 사랑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종교적 오해와 선입관이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친절함(크레스토테스 χρηστότης)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Christus)를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불렀다. 예수는 친절한 분(Chrestus)이다.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도덕적 선함을 말하고, 인간관계에서 선하고 친절한 삶을 사는 것이고, 세상을 향한 섬김의 목적에 유용한 덕목이다. 이 덕목을 실천하는 사는 사람들이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이다.


6월 19일(토) 드고아 목자 아모스


드고아(Tekoa, 나팔소리)는 유다 광야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남으로 약 15km  베들레헴의 남으로 약 10km의 위치에 있는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고지이다.
예언자 아모스의 출신지였으며 예루살렘 방어의 언덕이었던 이곳에는 오늘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계곡의 낮은 지대에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고, 또한 한때의 무성했던 산재한 식물의 부식토가 있다.
이곳에서 감람열매와 시카모어열매(암 7:14)라고 불리는 과일이 재배되었다.


아모스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호세아 1:1b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 왕 웃시야(10대) /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13대) /

아모스와 호세아는 동 시대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다만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였으나
아모스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으나 말씀을 갖고 왕래하며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과 북한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한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의 분열은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목자(牧者) shepherds                                  

1. 로이(rôʽîy) רֹעִי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여호와 로이) 

2. 노케드(nôqêd) נֹקֵד (아모스 1:1)
   (털이 많은 양, 비교적 좋은 양)


서너 가지 죄(1:3, 6, 9, 11, 13, 2:1, 4, 6)

1. 수적인 격언
numerical proverb

2. 완전 수 3 + 1=4(아주 많은 죄)
Luther, Calvin, Keil, Drive

3. 3+4=7(죄로 가득한 상태) 
W. R. Harper


다메섹의 죄(3절) - 아람(수리아)의 수도
철타작기로 길르앗을 압박

가사의 죄(6절)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두로의 죄(9절)
형제의 계약을 무시하고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에돔의 죄(11절)
칼로 형제를 추격하며 긍휼을 버리고 항상 분을 품다 


암몬의 죄(13절)
자기 지경을 넓히려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
(비인도적인 만행)


아모스(Amos. ʽÂmôwç) עָמוֹס                         짐, 무거운 짐을 진자,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자                            

    묵시 / 하조트(châzôwth) חָזוֹת

평범한 가문의 아모스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을 선포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무거운 짐을 맡았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약 3%)

로마 정부 기독교를 국교 / 9%의 기독교인들

어느 임금의 세 딸 / 금, 보석, 소금


오늘의 기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자

희생, 헌신, 자기 포기, 자기 비하


6월 21일(월)

아모스(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

1. 남 유다 출신(웃시야 왕)

2. 북 이스라엘을 향한 활동(여로보암 2세)

3. 목자(노케드, 보케르)

4.  서너가지 죄(수적인 격언)
X + 1 =  점차 증가하는 죄악

잠언 6:6 /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5. 이웃 나라들의 죄를 심판
율법을 받은 백성들의 죄악이 더 심각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호세아 2: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 거짓것 / (현대인, 공동, 새번역) 거짓 신
    (NIV) false gods
    카자브(kâzab) כָּזַב 헛것, 거짓말쟁이, 거짓말

유다의 죄(4절)

1.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

2.  율례를 지키지 않는 것

3. 거짓 것에 미혹된 것(우상 숭배)
* 난외의 주 1 참조(우상)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이스라엘의 죄(6-8절)


1.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부당한 재판)

2.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불의한 뇌물)

3.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물질적 탐욕)

4.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부정과 부패)

5.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음란)

6.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무정함)

7.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신성모독)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역대하 19:6(여호사밧 왕)
너희의 재판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아모스 5:24
오직 공법(מִשְׁפָּט)을 물 같이,정의(צְדָקָה)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7절.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공의란?
판결의 의를 말하는 것으로 공평한 재판이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정의란?
사회적 의를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질서가 모두에게 바르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오늘의 기도

믿음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자

 임직자들을 세울 때
(믿음? 사회적 지위와 신분?)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신일교회는 창립76주년을 맞아 ‘신일교회 7무(無) 임직식’이라는 특별한 임직예식을 가졌다.
1. 임직자 직분에 따른 임직헌금 無
2. 축하를 위한 축의금 꽃다발 無
3. 임직증서를 수여하고 화려한 임직패 無
4. 가슴에 다는 꽃과 흰 장갑 無
5. 임직을 위한 의상(양복, 한복) 구매 착용 無
6. 임직자들이 돈을 모아 교회에 드리는 기념품 無
7. 교역자에게 선물 및 사례비 無 등

7무(無) 예식을 진행하며 코로나19 시대에 솔선하여 검소한 예식을 실천했다.



6월 22일(화) 자기의 비밀(아모스 3:7)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 4장과 5. 6장은 구약에서 공통적인 표현법으로서, 시의 효과를 위해 둘 혹은 그 이상의 행이 다른 낱말이 갖는 사상과 관련되어 표현되는 것을 병행구 또는 병행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1. 동의적 병행법
가장 일반적인 것은 시편 1:1과 같이 시의 행이 그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2. 반의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5과 같이 두 행이 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3. 종합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20과 같이 둘째 행이 첫째 행의 의미에다 무엇을 더하는 것이다.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아모스 3: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 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아모스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너희만(레크, rêyq. רֵיק)

(공동번역)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새번역)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 친밀한 관계

1.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출 19:5, 말 3:17)

2. 제사장 나라(출 19:6)

3. 여호와의 백성(삿 5:11, 삼하 14:13)

4. 거룩한 백성(신 7:6, 14:2, 21)

아모스 3: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을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기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자!

어두운 죄악 가운데서 불러 내어 구원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은혜를 전하는 사명


6월 23일(수) 예비하라(아모스 4:12)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 바산의 암소들(부유한 여인들)

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 벧엘(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난 곳)
* 길갈(단을 쌓은 곳, 12지파의 기념비, 국가의 시작 선포)
*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상번제)

벧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시작된 곳

길갈은 가나안 땅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은 곳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선포한 곳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했다’(4절)는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습니다.

아모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수은제(thank offering) 토다(tôwdâh) תּוֹדָה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감사)
* 낙헌제(freewill offering) 네다바(nedâbâh)   נְדָבָה

  자원하는 제사 (아낌없이 주는 마음)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6-11절)
내가……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6b, 8b, 9b, 10b, 11b)


7가지 재앙
1. 기근(6),
2. 가뭄(7-8), 
3. 곡물재해(9a), 
4. 황충(9b),
5. 전염병(10a), 
6. 칼(전쟁)(10b), 
7. 지진(11)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잠언 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의 기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예배와 삶을 회복하자!

내가 만족하는 예배와 예물
영적인 예민함

찰스 엠 셀돈(Charles M  Sheldon. 1857-1946)
In his Step(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yskekq&logNo=220799757881


하나님께서 재난을 내리시는 목적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증거 한다.

첫째,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고 재앙에는 메시지가 있다.

빨리 지나가고 회복되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과 메시지를 깨달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도다’

인간의 오만을 꺾으신다.
재난은 오만불손한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한줌의 재로 돌아갈 존재다.
재난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셋째,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왕 노릇하던 헛된 우상들을 무너뜨리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우상은 이단 신천지의 교주만이 아니다. 물질과 건강, 명예와 권세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코로나19의 재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부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고, 오만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6월 24일(목) 여호와를 찾으라(아모스 5:6)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돌아오라!
슈브(shûwb) שׁוּב                                                                                                    

5:2, 처녀 이스라엘  
5:4, 벧엘, 길갈, 브엘세바                                     

찾으라!
다라쉬(dârash)  דָּרַשׁ                                                                

* 인간의 어리석음 : 매를 맞아야 깨닫는 존재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7-8

공법(공의)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북두칠성)과 삼성(오리온좌)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의 기도

시대적 본분과 사명을 깨닫자!

길을 보여주는 삶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가?)



6월 25일(금) 공법을 쓸개로(아모스 6:12)


아모스 6:12-13a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말이 바위 위를 달릴 수 없고 소가 바위를 개간할 수 없듯이(공동번역 / 바다를 개간 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해서는 알 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금기로 간주되는 일,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이스라엘이 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자 순리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를 쓸개와 쓴 쑥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쓸개와 쓴 쑥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쓸개’와 ‘쓴 쑥’으로 번역한 단어는 성경 다른 구절에서는 ‘독’과 ‘독약’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허무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자랑하는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로다바르, 지명으로 뜻은 없는 것, nothing)
언어의 묘미를 살려 없는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뿔(카르나임)이란 것도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명으로 여로보암 2세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은 땅으로 이런 것들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정복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하는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를 일으켜 치겠다’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 국경 최북단이며
아라바 시내는 이스라엘 국경 최남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외세에 의해 짓밟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는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영의 시기에 교만해졌습니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능력이 있고 지도자들이 지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이 백성들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자들은 안중에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신 발 한 짝에 팔아넘길 정도로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었고, 축적된 부로 사치와 향락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보면, 양과 염소의 무리 중에 염소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주님이라고 여겼다면 과연 태도가 달랐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것이 주님께 대하는 것임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하루 사회적 약자를 주님을 대접하듯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주님을 대하듯이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모스의 경고의 화살은 아무래도 지도자들, 상류층을 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수도인 시온산,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산에 거주하면서 으스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갈레, 하맛, 가드를 상기시켜주지요.
그곳들은 이전에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었지만 아모스 당시에는 쇠락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더욱 심판받을 것인데, 그들의 죄목은 교만과 안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아모스의 고발은 참 생생합니다.

상아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고, 양과 송아지를 잡아서 파티를 열고, 자기가 마치 다윗인 것처럼 악기를 만들어서 노래부르고, 술에 빠져 있으면서 열심히 외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흉한 날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환난, 즉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힘들어 부르짖는 서민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이지 않았구요.

자신들이 쌓아놓은 자기들만의 성 안에서 흥청망청 지낼 뿐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치와 부패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로마 제국 말기의 귀족들이 그랬고,
유럽 봉건 시대의 왕과 영주들이 그랬고,
일제 치하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그랬고,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그랬고,
미군정 아래에서 지주들이 그랬지요.
미국에서 2008년 금융위기로 600만 명이 집을 잃었을 때도 은행의 임원들은 수십억원의 연봉잔치를 누렸고,
북한에서는 수백 만의 인민들은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당 간부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주사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히는 일에 열중하는 것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나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이득에만 관심이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그런 지도자들에게 그날이 오면 그들이 맨 앞에서 끌려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1절에서 그들을 가리켜 '백성들의 머리'라고 했는데 7절에서는 사로잡혀갈 때도 머리가 될 것이라고 빈정대고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기지개 켜는 소리와 흥얼대던 노래소리도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돌려야겠지요.



6월 26일(토) 다림줄(아모스 7:7)

7: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7:1, 4. 8:1)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보이신 것(라아. רָאָה)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

1. 듣는 것(경청)
2. 보는 것(환상)
3. 전하는 것(신탁)             
    * 하나님의 마음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다림줄(아나크, ’ănâk. אֲנָךְ ) / 주석(칼)
다림줄은 위에서부터 줄을 내려야 한다.
기준은 위에서 시작                   

* 쌓은 담(견고한 성, 사마리아 성,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아모스 7:2, 5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아모스 7:3, 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7: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시간(시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
사회가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남 유다 출신의 선지자 아모스

아모스 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 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 BC 722년 앗수르에 의한 멸망

오늘의 기도

말씀을 분별하는 믿음을 주소서!

가정 제단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일어나라.

진리 편에 가담하라. 

6월 28일(월) 기근과 기갈(아모스 8:11)


기근(飢饉· 饑饉)

1.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는 것. 순화어는 `굶주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2. 필요한 물자가 몹시 부족한

기갈(飢渴)

1.배고픔과 목마름.

"기갈이 심하다"

* 기갈이 감식(甘食)
- 굶주리고 목마르면 무엇이나 맛있다는 말.

* 기갈든 놈은 돌담조차도 부순다
- 사람이 몹시 굶주리면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도 저지른다.

* 기갈이 들다
- 몹시 굶주려서 간절히 음식을 탐내다. 순화어는 `(굶)주리다'.

아모스가 본 환상

1. 황충(7:1-3)
2. 불(7:4-6)
3. 다림줄(7:7-9)
4. 여름과일 한 광주리(8:1-3)
5. 단 곁에 서신 주님(9:1-4)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기근과 기갈이란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없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대형교회는 있습니다.
대형 예수님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드러나야 합니다.
얼마전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하여 담당 의사를 만났습니다.
은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므로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은혜가 주는 것인가?"
성경에도 "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사도행전 20:35)

그동안 신앙교육은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것을 받는 것이 은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은혜는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형교회는 주는 은혜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고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한 것은 많지만 주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부흥과 성장을 자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예수님이 있을까요?
부흥과 성장하는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무르익어야 합니다.

아모스 8:12-13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교회마다 시집 가야 할 아가씨들은 넘쳐나는데 장가갈 청년들이 없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피곤하다는 것은 물론 짝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 8: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우상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탐욕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아모스 8:1-2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카이츠)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케츠)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첫째, 언어의 이중적 의미로 표현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살구나무(샤켓. Shaqed)
지킨다(쇼켓. Shoqed)

둘째, 무르익은 과일은 곧 썩을 수밖에 없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고 이곳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으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1:11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샤켓. Shaqed)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쇼켓. Shoqed)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8247. 살구나무(샤켓. shâqêd) 솨케드  שָׁקֵד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발음 [ shâqêd ]
어원 / 8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43:11), 살구 열매(민17:8), 살구나무(전12:5, 렘1:11).
구약 성경 / 4회 사용

* 8245. 지키다(솨카드. shâqad ) שָׁקַד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shâqad ]
관련 성경 / 새우다(시102:7), 깨어있다(시127:1, 렘31:28, 44:27), 기다리다(잠8:34), 지키다(스8:29), 엿보다(사29:20, 렘5:6), 보다(렘1:2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아모스 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 여호와의 말씀(예수) / 은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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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
2. 웃시아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지자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마태복음 9:13, 로마서 9:25, 베드로전서 3:10-12)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는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 활동 : 아모스, 요나, 호세아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이다. (2) 웃시아 왕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 지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그의 저서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 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 (마 9:13,롬9:25, 벧전 3:10-12).


아모스의 소명(1-2절)
오늘부터 아모스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아모스’의 이름의 뜻은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끊임없이 죄를 짓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언하라는 말씀의 짐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선지서가 12권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6권(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말라기)이 있고, 밝히는 것이 6권 있습니다. 밝히는 것 중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모두 무너지고 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리고 미가와 스바냐는 남유다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남유다의 왕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와 아모스에는 남유다의 왕과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을 하고 있고,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임에도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에서 ‘말씀이라’가 맨 뒤에 나오지만, 히브리어성경에는 맨 앞에 나옵니다. 다른 선지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아모스 선지자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은, 10대 임금 ‘웃시야(791-739)’였습니다. 그는 무려 52년 동안이나 통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 므낫세(55년 통치)를 이어 두 번째로 긴 기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중요 도시 중에 하나인 아스돗을 점령했고, 에돔의 ‘구르바알’도 차지했습니다. 구르바알을 에돔의 수도 ‘페트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13대 임금 ‘여로보암2세(793-753)’였습니다. 그는 41년을 통치했는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서는 므낫세와 웃시야에 이어서 세 번째이었고, 북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긴 기간 통했습니다. 그는 신흥 제국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까지, 남쪽으로는 염해(사해)까지 확장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즉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때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강성해 있을 때는 이 때가 거의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사회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세금제도로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착취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핵심구절이 5:24절인데,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그 땅에는 정의(하나님의 바르게 행하심을 받아들여, 공평하고 공정한 원칙)도 없었고, 공의(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돕는 긍휼)도 없는 불의와 우상숭배만이 팽배했던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의 출신지와 직업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드고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말씀은 남유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이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목자들을 뜻하는 보편적인 말은 ‘로에’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노케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모압왕 메사’를 지칭하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가난한 목자일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즉, 목자라기보다 목축업자에 가깝습니다. 또한 7장에서 아모스는 자신이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제사장 집안의 아들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신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삿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터,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터전이 됩니다. 삶의 자리를 떠난 부르심은 없습니다.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시고,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신다고 선언합니다. ‘부르짖다’는 성경에서 주로 사자가 포효할 때에, 특히 먹잇감을 공격하거나, 싸울 상대 앞에서 으르렁거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소리를 내다’는 ‘천둥번개가 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시고, 소리를 내신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목자의 초장에서 갈멜산 꼭대기까지’ 마른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말 ‘한라에서 백두까지’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심각하게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주변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3-15절)
3-2:16까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그리고 주변 6개국 등 8개의 나라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예언입니다. 그 중에서 3-15절은 5개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8개 나라를 심판하는 내용은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며 심판의 주체가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②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며 심판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③ “불을 보내리니... 사르리라”라며 심판의 형태를 밝힙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④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며 심판을 선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 네 가지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3-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메섹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고대의 상업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서너 가지 죄만 지어도 한 도시나 한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분이신가?” 그러나 ‘서너 가지’는 ‘3이나 4’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아주 많음’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3과 4를 더하면 7인데, 7은 완전수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을 심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이 길르앗을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시리아)이 보병 일만 명과 마병과 병거(탱크)를 몰고 와 침략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서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블레셋은 도시들이 연합하며 만든 국가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도시인,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에 대한 심판 선언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에서 가장 교통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편리한 교통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서 잡은 사람들을 인신매매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사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인신매매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파는 일은 고대에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에돔에 고의로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사에 불을 보내어서 궁궐을 사르겠다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패전하여서 궁궐이 불에 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전쟁포로를 무자비하게 잡아 넘겼으니, 전쟁으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두로는 발달한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교만한 두로왕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참칭하기도 하고, 자신의 지혜가 가장 뛰어나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은 서로 혈맹관계, 형제의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로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내 형제여”라고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인접한 도시 시돈 출신의 여인 이세벨은 아합왕과 결혼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여 두로로 이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묵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1-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들이 만든 나라입니다.
사실 에돔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더 많이 당했습니다. 사울왕에 에돔에서 승리를 한 적이 있었고, 다윗왕도 소금골짜기(염곡)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물리친 적도 있었습니다. 후에 유다가 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무너질 때에 에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유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에돔에 대한 심판은 미래의 시점에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둘째 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벤암미)의 후손이 세운 나라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길르앗의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이런 만행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없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이유가 자기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른 암몬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핀 다섯 나라, 아람(다메섹), 블레셋(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베니게(두로), 에돔, 암몬이 심판을 받는 이유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만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박해를 받는 상황을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가 이 말씀을 받은 것이 ‘지진 2년 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국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했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이런 심판을 예언하는 것은 당돌하고 미친 짓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물론 그 결과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의 기도자리, 겟세마네를 갖는 것은 미래를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가장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속적 가치관이 난무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무릎을 꿇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모스 장별 요약 및 강해


1. 아모스 개요


아모스는 1:1에서 시기를 분명히 고지하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
시대적 배경은 유다 왕 웃시야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때 선지자로 활동했다.

2. 아모스 장별 요약

아모스 1장 요약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다메섹을 벌하리라.
에돔과 두로와 암몬을 벌하리라.
그들이 이스라엘이 망할 때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모스 2장 요약

여호와께서 모압을 벌할 것이다.
유다를 벌할 것이다.
그들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벌할 것이다.
그들의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혔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멸하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너희는 나실인으로 포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모스 3장 요약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으로 예언한다. 
사마리아는 포학과 겁탈이 쌓였다. 
내가 이스라엘의 죄를 보응할 때 벧엘의 단들을 벌하고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버릴 것이다.

아모스 4장 요약

바산의 암소들아 너희는 힘없는 자들을 학대한다. 너희를 갈고리로 끌며, 낚시로 너희 남은 자들을 끌고 가리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한다.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나 나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 이스라엘아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여호와는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다.

아모스 5장 요약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 졌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불 같이 임하리라. 너희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겁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여는 자여 그날은 어둠이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고 멸시한다. 너희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절)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라라.

아모스 6장 요약

교만하고 방탕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리라.
그들은 상아 상에 눕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 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다.
환난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는다.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궁궐들을 미워한다. 
말은 달리지 못하고 소는 밭갈지 못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길 한 나라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리라.

아모스 7장 요약

풀이 움돋기 시작할 때 메뚜기를 땅의 풀을 먹을 것이다. 
간구하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다. 
이번에 불로 징벌하지만 다시 돌이키신다. 
다림질로 측량하여 다시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여로보암에게 아모스가 왕을 배반했다고 고소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하신다.

아모스 8장 요약

여름 과일 광주리를 보라.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다. 
가난한 자를 삼키고 땅의 힘없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할 기갈이라.(11절)

아모스 9장 요약

이스라엘이 한 명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다. 
모든 자가 칼에 죽을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가 땅을 만져 녹게 하고 땅이 강의 넘침같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방 민족들을 불러오리라. 
화가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죄인들은 칼에 죽으리라.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울 것이다.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삼을 것이다. 내가 들을 다시 땅에 심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