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스 성구 암송 자료
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2.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4.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5. 사랑에 의한 생활(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6.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8.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본문에서 기도를 구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구하다는 헬라어는 "아이테오( aitĕō. αἰτέω)"라고 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구하다(마 5:42, 요일 3:22), 달라 하다(마 7:9, 눅 12:48), 달라다(마 14:7, 행 16:29), 청하다(행 25:3), 묻다(벧전 3:15)"라고 번역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와 "에로타오(ĕrōtaō. ἐρωτάω)"를 구별해야 합니다.
'아이테오'는 "요구하다"라는 의미로' 에로타오'는 "질문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구하라고 하였을 때의 기도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려고 구했으니 오히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갖고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내가 구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일치할 때 응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구하다
묻다
요청하다
-
발음 [ aitĕō ]
- 어원
- 명령 αἴτει, 중간태 αἰτοῦ, 미래 αἰ- τήσω, 제1부정과거 ᾔτησα, 완료 ᾔτη- κα, 요일5:15, 미완료중간태 ᾐτούμην, 제1부정과거 중간태 ᾐτησάμην, 제1부정과거명령법 αἴτησαι, 미래중간태 αἰτήσο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구하다, 묻다, 요청하다[능동태와 중간태의 구별 없이 사용됨], 마7:10, 18:19, 27:58, 막15:43, 눅23:52, 행12:20, 고전1: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구하다(마5:42, 요일3:22), 달라 하다(마7:9, 눅12:48), 달라다(마14:7, 행16:29), 청하다(행25:3), 묻다(벧전3:15).
ἐρωτάω 스트롱번호2065
묻다
요구하다
-
발음 [ ĕrōtaō ]
- 어원
- 미래 ἐρωτήσω, 제1부정과거 ἠρώ- τησα, 2046에서 유래된 듯
-
1.묻다, 질문하다, 눅22:68, 요1:25, 8:7, 9:21, 16:19,30, αὐτὸν τὰς παραβολάς: 비유에 대하여 그에게 물어보다, 막4:10, 요16:30.
-
2.요구하다, 간청하다, 마15:23, 눅14:32, 요14:16, τινὰ πε- ρί τινος: 누구에게 무엇을 간청하다, 눅4:38, 요16:26, 17:9등.
연관 단어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첫째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내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맞이하여 연결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높은 하늘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태양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 태양빛이 내게 비추이지 않습니다.
다시 손바닥을 치우면 태양빛은 나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내 손바닥이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양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크고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감추어진 작은 손바닥과 같은 죄가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빛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기도하며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라는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야고보서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Are they not the ones who are slandering the noble name of him to whom you belong?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성혈(聖血) holy blood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 19:17, 살후 1:12)
사도행전 19:17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4:16-18, 5:40-41)
사도행전 4:16-18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
사도행전 5:40-41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예수란 이름은....
예수란 이름은 신약 성경에서 935회나 나옵니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 이름을 들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그 다음으로 요셉이 꿈에서 예수란 이름을 들었습니다.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0,21).
예수란 이름의 예(JE)는 여호와(JEHOVA)의 준말입니다.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란 뜻으로 신성을
나타냅니다.
수(SUS)는 SAVIOUR의 준말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1. 예수란 이름은 구원의 근거(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among men, whereby we must be saved.
이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아야만 하리라.(직역)
MUST란 말에 주목하라.**
2. 예수란 이름은 설교의 주제(사도행전 8:35, 고린도후서 4:5)
오늘날 교회가 급속히 타락하는 것은 설교의 주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설교, 심리학적인 설교,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설교,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 하니라.](행 8:3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다 정작 예수님을 선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의 주제,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포하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한글 성경에 오역이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고후4:5).
3. 예수란 이름은 사역의 목표(사도행전 15:26)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행 15:26).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4. 예수란 이름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권위(빌립보서 2: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9-10)
5. 예수란 이름은 섬김의 동기(
[...이는 그들의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였음이라.](요삼 5-8).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역자들을 물질로 후원하는 이들을 칭찬하였습니다.
6. 예수란 이름은 기도의 힘(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7. 예수란 이름은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19:17,살후1:12).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행19:17).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12).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행4:16-18,5:40-41)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행4:16-18),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행5:40-41)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4.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9.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약2:7).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일컬음을 받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약2:7)
예화) 알렉산더 이야기- 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ways.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Lowery).
둘째는 구원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Harris, Barrett).
셋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것이다(Tasker).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를 받아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섯 가지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응답과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과 모든 죄악을 용서받았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내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
- 이 구절은 이사야 49:8의 인용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영광(榮光) -
7.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8.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9.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10.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 [빌립보서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 영광(榮光)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날 광(光)
불 화(火) + 불 활(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영화 영자는 사람이 십자가와 같은 무거운 짐 또는어려운 짐을 짊어진 후에 내가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후에 불꽃이 피어오르듯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연기가 되어 올라가듯(번제, 올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빛 광(光) = 작을 소(小) + 어진 사람인 발(儿)
* 빛이 되려면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진 사람의 흔적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사람은 욕망이 강하여 내가 무엇을 행한 후에 내가 하였다는 자기 의(義)에 도취되기 쉽습니다.
헬라어의 영광 -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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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 도케오(dŏkĕō) δοκέω
1. 생각하다.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 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발음 [ dŏkĕō ]관련 성경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 :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 헬라어의 영광이란 스쳐가는 가벼운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 즉 묵상의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다쳤는가?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그러나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은 어려운 사건과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헬라어로는 ‘독사’
세상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뜻합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신자에게 임재하실 때에 찬란한 빛이
동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lory, 한글로는 영화로운 빛(榮光)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은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추악한 것과는 단 일초도 공존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신 그분의 존전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당장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천사를 대신 보내어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 시내
산을 덮은 구름이나 이스라엘의 성막위에 머문 구름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 24:16,
40:35) 그러다 성자 하나님 예수는 사람이 직접 뵙고 만나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킬 때에 실제로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임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엄청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사 6:3)
그런 고백을 받으신 하나님은 진노의 형벌 대신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고 당신의 자녀와 종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럼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저절로 그분을 향해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은혜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완전한 의이자 탁월한 선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헬라어로 영광-‘독사’의 타동사형 ‘독사조’, 영어로
gloryfy로 번역됨)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제 곧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 모두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상 당신의 가르침, 섬기는 사역,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는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분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9-18) 사탄은 자기 종들을 충동시켜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탄의 그 모략마저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로 십자가에 드러난 그 영광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밝힌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필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온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그 진리를 잘 분별하여 자기 삶에 반영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굳이 매개체나 천사의 모습으로 신자에게 영광 가운데 임재 해주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성경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하거나 직접 임재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때와 신약시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영광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단순히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과시하려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특별히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뜻과 계획을 밝혀서 보여주기 위해서만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약성경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으니까 더 이상 가시적인 존재로는 거의 임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절감하면 바로 그분을 대면한 것이고 그분의 영광도 가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접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그분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면 사실상 그분을 대면한 것입니다. 맨 처음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가 그러합니다. 신자는 인식하지 못해도 연약한 피조물인데도 그분의 주권적 택함을 받아서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부터 그분의 영광이 강력하게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성령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자연히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에게 이런 구원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뛰어난 업적을 쌓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을 대면해도 “제게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 나를 만나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차원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므로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배 중에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부른 후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단순히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만의 탁월함과 완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빈번하게 신자에게 비춰집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닫고 소름이 끼치도록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절감하면 감격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예배, 설교, 성경공부, 찬양, 기도, 성도교제, 전도나 선교,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사회적인 선행 등등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그분이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도 지금 그분이 분명히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인식되고 그분의 뜻까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엎드리고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사는 원래 ‘무게’나 ‘중압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면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까?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의 영광이 함께 한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자의 죄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이라면 고난 자체에 그분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 자체의 부작용과 폐해가 고난으로 닥쳤고 신자로서 그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 중에도 신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그 잘못을 고쳐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고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그런 구원을 인식하고 자신의 회개마저도 당신께서 간섭해주신 은혜라고 확신하면 그분의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분께 한층 더 깊어진 감사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욥처럼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처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신자에게 연단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며 하나님께 원망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끈질기게 기도하며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해나가면서 그 연단의 의미를 깨닫고 잘 순응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가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가면 그분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그분을 만나서 영광을 보려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럼 신약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신자는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또 성자로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전부 십자가에 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핍박은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신구약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날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십자가 구속사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한 명이라도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또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일에 기여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개인의 인생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풍요를 주던 고난을 겪게 하던 당신만의 구속역사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그분의 역사가 임하면 그분의 영광도 함께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단지 현실적 축복을 받고 그에 상응한 감사헌금 혹은 교회봉사를 더 많이 한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겪게 했으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그런즉’이라고 시작하니까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시중에 파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고기가 귀해서 우상 신전의 음란한 예배에 바쳐진 후에 판매되었습니다. 신자로선 그런 고기를 사먹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에 바쳐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그 정도까지 확고하지 않는 연약한 신자나, 우상이 있다고 믿는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자기들 계명을 위반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신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좋은 일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에 방해되지 않도록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라고 말했기에 바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처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습이나 의식에 따른 경건한 행동보다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고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헌금 헌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뜨겁게 행한다고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과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주변에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신자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안 되어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진리 하나라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원망과 의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부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섯 솔라 – 오직 하나님께 영광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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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문제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행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33)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교훈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중추절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카이노스(kainŏs)"와 "네오스(nĕŏs)"라고 합니다.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온전하게 새롭게 된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네오스'는 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의 새로운 제품이 소개될 때 그 신제품을 가리켜 '네오스'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의 변화를 일컬어 '카이노스'의 변화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둘째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때
셋째는 교인들의 비신앙적인 삶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오스'의 변화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카이노스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카이노스의 변화'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크티시스. ktisis. κτίσις)
- 새로운 피조물이란 외적인 모양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2537. 카이노스 καινός, ἡ, όν
-
1. 새로운.
-
a. 쓰지 않은, 써보지 않은, 마9:17, 막2:22, 눅5:38.
-
b. [전에는 없었던 이라는 뜻으로]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놀라운, 막1:27, 요13:34, 행17:19, 계2:17.
-
c. [옛 것이나 낡은 것의 반대] 마26:28, 막14:24, 눅22:20, 고전11:25, 고후5:17, 갈6:15, 엡4:24, 벧후3:13, 계21:1.
-
-
관련 성경 / 새(마9:17, 눅5:36, 계2:17, 마13:52, 막2:21, 고후5:17), 새로운(고후5:17, 계21:5), 새로 되는(행17:21).
카이노스 정의
-
- 형식에 관하여
- 최근에 만든, 신선한, 최근의, 사용하지 않은, 입지 않은
- 실체에 관하여
- 새로운 종류의, 전례 없는, 참신한, 흔하지 않은, 들어본 적이 없는
- 형식에 관하여
성경의 맥락에서 그리스어로 '카이노스'는 무엇을 뜻합니까?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로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Kainos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 단순히 젊거나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라는 단어와 달리 Kainos는 더 큰 영적 갱신이나 변형을 의미합니다.
νέος, α, ον
스트롱번호 3501
성경에 나오는 언어의 중요성
언어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신약의 원래 언어인 그리스어는 뉘앙스와 의미가 풍부합니다.
각 단어는
사용법, 맥락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른 측면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Kainos와 Neos와 같은 단어의 구별은 독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더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카이노스의 용법
1. 예수의 가르침 속의 카이노스
복음서에서 카이노스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에 등장하여 그의 메시지의 변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7에서 예수는 새(카이노스) 포도주를 새(카이노스) 포도주 부대에 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은유는 단순히 기존
전통에 패치할 수 없는 새로운 신앙 접근 방식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그의 언약이 모든 것을 바꾸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온다고 강조합니다.
2. 바울서신의 카이노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자주 카이노스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5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 창조물(카이노스)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카이노스)이 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완전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옛 생활 방식에서 성령으로 활기차고 능력을 받은 생활 방식으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3. 새 언약 개념과의 연결
카이노스는 또한 새 언약에 대한 논의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실 때, 그것은
카이노스 원칙을 낳습니다.
히브리서 8:13에서 저자는 옛 언약이 쓸모없게 되고 있으며, 암묵적으로 카이노스 언약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새 언약은 용서, 내적 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제공합니다.
Kainos를 다른 그리스어 용어와 비교
Kainos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다른 그리스어 단어와 비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Kainos는 신선함과 변화를 강조하는 반면, 시대나 시간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는 그 변화의 깊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Kainos가 Neos와 다른 점
Ne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 아마도 최신 자동차 모델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변형보다는 연대기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Kainos는 심오한 갱신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 Kainos가 된 사람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카이노스
요한계시록은 카이노스의 궁극적인 표현을 요약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나는 새(카이노스) 하늘과 새(카이노스)
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흥분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혁신이 아니라 창조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죄와 고통으로 점철된 옛 질서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자리를 내줍니다.
카이노스의 영적 의미
1. 갱신과 변형
성경의 카이노스 개념은 신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갱신에 대한 부름이며,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오래된 습관과 사고방식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 미래에 대한 희망
Kainos는 다가올 것에 대한 희망을 구현합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삶의 궤적이 새롭게 되고 더 나은 것을 향한 길을 따른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 희망은 시련과 고난 중에 인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3. 참여 초대
Kainos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 성경 읽기, 영적 각성을 촉진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됨으로써 성장을 기르도록 격려받습니다. 매일 Kainos 경험을 위한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을 드러내는 은혜의 순간입니다.
결론
Kainos는 성경 이야기에서 엄청난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요 성경에서 마주치는 용어로, 피상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완전한 개혁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면 신자들은 신앙의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격려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합니다.
Q. 카이노스의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며, 단순한 연대순의 새로움을 넘어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나타냅니다.
Q. 신약성서에서 카이노스는 어디에 자주 언급됩니까?
A. 카이노스는 마태복음 9:17, 고린도후서 2:5, 요한계시록 17:21 등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Q. 카이노스는 새 언약의 개념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쓸모없는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예수를 통해 확립된 새롭고 변혁적인 관계를 구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자들의 영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A. 카이노스를 이해하는 것은 신자들이 믿음과 행동을 통해 삶에서 개인적 변화와 갱신을 받아들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약에만 나오나요?
A. 카이노스는 주로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공명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학적 토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카이노스는 새로운 삶, 재생,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촉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성경적 맥락 밖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까?
A. 네, 새로운 시작과 변화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결정과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Q. Kainos는 성경의 죄 개념과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죄에 지배받던 옛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의로움으로 능력을 얻은 새로운 삶을 소개합니다.
Q. Kainos와 Neos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차이점을 이해하면 독자는 기독교 신앙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깊이를 인식하고 변화에 대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카이노스 생활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A. 신자들은 기도, 성경 공부,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반영하는 봉사 활동을 통해 Kainos의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2937. 크티시스 κτί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2937
어원 / 2936에서 유래
- 창조(막 10:6, 히 9:11, 계 3:14), 피조물(롬 1: 25, 고후 5:17), 창세(롬 1:20), 제도(벧전 2:13), 지으신 것(히 4:13), 지음을 받는 것(갈 6:15), 만민(골 1:23).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 고전 5:12, 13; 갈 3:28; 엡2:11-22; 골 3:11).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헬라어 직역 / 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니, 심판에 이르지 않고 반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ο τον λογον μου ακουων και πιστευων τω πεμψαντι με εχει ζωην αιωνιον και εις κρισιν ουκ ερχεται αλλα μεταβεβηκεν εκ του θανατου εις την ζωην.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티 호 톤 로곤 무 아쿠온 카이 피스튜온 토 펨프산티 메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에이스 크리신 우크 에르케타이 알라 메타베베켄 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듣고(아크온. ακουων) - 현재분사형
믿는(피스테우온. πιστευων) - 현재분사형
얻었고(에케이. εχει) - 현재형
옮겼느니라(메타베베켄. μεταβεβηκεν) - 현재완료형
현재완료 : 어떤 동작이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으나 그 결과가 현재에 남아있는 시상
일으켜 세움 : 듣고 믿음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십니까? 2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다면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서, 예수가 요구하시는 능동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를 위해 파견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두 동사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듣고 있는, 믿고 있는 그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듣는 것
“듣는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헬라어 ‘아쿠오’(ἀκούω)에서 번역되는 듣는 행위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은혜 안에서, 사람이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결단이며, 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다’는 것은 그냥 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귀가 듣는 그런 뉘앙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들음이며, 분별력을 가진 들음이며, 앎의 들음이며, 깨달음의 들음이며, 따라서 결단에 준거한 순종이 뒤따르는 들음입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조건 들려오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아쿠오, 알아서 식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으로 듣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과 삯꾼의 음성을 가려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깊이 내 영혼이 박혀있느냐에 따라서 들림과 그 들림에 의한 울림이 다릅니다. 잘 모르면서 들을 때에는 거역, 반역, 분쟁과 다툼만이 일어납니다.
믿는 것
또 하나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πιστεύω)는 어원적으로, 설득 당하여 믿게 되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주님을 믿도록 설득 당하여, 이제는 내가 주체적으로 믿겠다고 결단하는 자신의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당신을 설득하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와 함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믿는 능동성이 오의적(奥義的)으로 결합된 구원적 사건입니다. 하여, 그곳에는 결단코 교만이 설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인격적인 믿음 관계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죽은 자가 바르게 세워지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움(듣고/믿음)은 영생의 현재성
그런데 믿고 들음으로 세움 받은 자들을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간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사용하면서, 저자는 듣고 믿는 것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영생에 거하고 있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옮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바이노’(μεταβαίνω)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실제적 공간 이동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말하자면 소속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자신들의 소속부대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 군대가 아니라, 생명 군대로 전속 배치받은 것입니다. 소속이 바뀌면 지휘관도 바뀌도, 생활 규칙도 바뀝니다. 즉,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타바이노의 ‘메타’라는 접두어는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즉, 육적 체질에서 성령 중심의 체질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원리로 삶을 살아갑니다. 영생이란 시간적인 면보다도, 지금의 상태, 현재 소속되어 있는 어떤 상태가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말씀을 듣고 믿는 그 상태(현재분사형)가 바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미래성
더욱이 요한복음은 영생 그 자체의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미래성으로 이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지만, 이러한 현재성은 미래로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향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해석
29절에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구절은 해석의 의견들이 다양하고 주장들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부산고백교회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실로, “선을 행한다”는 글귀에는 저자의 아주 중요한 신앙적 해석과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는 단순히 뭔가를 행하다는 뜻을 넘어서, 어떤 원인이 있는 행위, 즉 창조적 행위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특히 5장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역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는가?(5장11절), 여기에 포이에오가 사용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자기를 고친(포이에오)이가 예수라로 하며, 16절 안식일에 행하는 일로 등장하며, 19절에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포이에오)을 아들도 그와 같은 일 행한다(포이에오)고 합니다.
선한 일은 분명 아버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기 때문입니다(막 10:17-8). 따라서 하나님만이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다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행하는 일은 아들만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포이에오는 아들의 포이에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으로
따라서 선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로지 이 분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포레우오마이(ἐκπορεύομαι)는 어떤 특별한 과정과 진행을 통과하여 나온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 즉 십자가라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선을 행한 자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선을 행하시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분을 믿는 우리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나오게 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생을 가진 우리에게 미래형으로 열려져 있는 축복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시고,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5:24-29 / 사망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하시는 일들이 많지마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즉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죄인들의 마음속에 거듭남으로 생명을 주시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종말의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가슴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죽어 볼품 없이 시들어 버린 육체가 관속에 뉘어 차가운 흙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망이라는 말, 즉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용되어지는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롬 6:23).
그렇다면 성경은 죄(罪)를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성경은 죄를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불신(不信) 요 16:9"
둘째는 "불선(不善) 약 4:17"
셋째는 "불의(不義) 요일 5:17"
넷째는 "불법(不法) 요일 3:4"
죄로 인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의 삶이 끝이 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죄는 세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아도취와 현실만족에 따라 더 이상 노력하기를 싫어합니다.
둘째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잘못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셋째는 영적 무지로 인하여 육체적인 삶을 선호하여 신령한 세계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죄를 회개한 후에 비록 육신에 갇혀 있는 제한적인 삶을 살아갈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날마다 노력하며 수시로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罪)
1.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로마서 14:23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2.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3.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4.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의 결과는 사망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무엇이 죽었는가?
1. 노력하는 것
- 현실만족, 자아도취
2. 느끼는 것
- 양심의 마비 / 죄와 고통에 대한 것
- 회개를 모른다
3. 생각하는 것
- 육은 죽이는 것, 영은 살리는 것
영의 생각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첫째, 노력하는 것(effort)을 중단해 버린 것
자기의 현실을 만족히 여기면서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아도취(自我陶醉)
실수와 실패는 더이상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정지하거나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느낌(feel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이 말은 죄에 대한 느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감정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고통에 대하여 무디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입니다.
슬픈 일을 보고 마음에 연민의 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감정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분명히 그 마음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심마비(良心麻痺) - 삼 마, 저릴 비
셋째, 생각(think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사람의 정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이 폐쇄되어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심한 말로 하면 정신이상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 진리, 곧 구원에 이르는 복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새로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넷째, 회개하기를(repent) 중단한 상태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그 날이 바로 영적으로 죽는 날입니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간에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 날이 바로 영적 죽음의 날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음이 패역해지고 완악해짐으로 죄악에 대한 회개가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사람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한 시대를 살아가도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두 가지 조건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또 하나는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돌부처는 인격이 없습니다.
커다란 바위나 나무, 광대한 바다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죄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에서는 평생교회에 세 번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고,
두 번째는 결혼할 때 주례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가고,
세번째는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 때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름만 신자이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므로 공포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놓으신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또는 어떠한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생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는 생명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집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도록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에게 있는 생명의 권한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가 맡기셨습니다.
일을 하시되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무덤속에 있는 자들을 모두 깨워 일으키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리의 부활이지만 인간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잠자는 우리들을 큰 소리로 깨우실 때 우리는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이 모든 심판에서 그 기준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고집, 내 방식대로만 아닙니까?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는 모든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 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 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롬 6:23).
지식을 얻기 위한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단계
둘째는 경험의 단계
셋째는 신앙의 단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단계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에 의해서 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가 경험했던 그 세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문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세계를 진실되게 알려준 사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역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祭祀)로 모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할 줄 아는 믿음을 다짐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19 요한복음 17:3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η αιωνιος ζωη) the eternal life.
영(166)
αἰώνιος, ον
스트롱번호166
어원 /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생(2222)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2222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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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믿는 것(행 16:31) + 아는 것(요 17:3) + 행하는 것(약 2:26)
Believe Know Deed
πιστεύω γινώσκω ἀκροατήριον
신(信) 지(知) 행(行)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다
- 하나님과 본체가 되셨으나 땅으로 오시려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셔야 하므로 사람의 몸을 잠시 입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은혜 언약(恩惠 言約) The Covenant of Grace
행위 언약(行爲 言約)
은혜의 언약 (The Covenant of Grace)
Soli Deo Gloria!
내가 너로 [뱀으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네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 22:17-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 18:18-1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믿음으로 모세는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히 11:24,26,28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3장 15절이라든지, 창세기 22장 17-18절, 그리고 신명시 18장 18-19절 말씀들을 읽으면서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약속 되어 있고, 또한 약속의 그 자손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5장 39절과 8장 56절과 같은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성경(특히 구약성경)의 이 중요한 약속들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이 약속의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타락 직후로부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고 간직해 온 이 중요한 약속,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자손을 보내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은혜로운 약속을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이 은혜의 언약을 믿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 은혜의 언약이 점점더 구체적으로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약속대로 오신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셨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어 나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며, 그에 대한 약속인 은혜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심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여러번 재언급하시고, 그 때 마다 조금 더 살이 붙은 표현으로 계시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맨 처음 언급은 앞서 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다. 그 다음 창세기 18장 18-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사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따라 한 나라를 건설하시고, 거기서 천하 만민이 얻을 복이 흘러 나올 것임을 밝혀주셨다. 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그 나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또한 밝히셨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칭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후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시사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심으로 첫 조상 아담이 믿었던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올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지금 나열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두 똑같은 말씀들은 아니지만, 각 약속 속에 들어 있는 뼈대가 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약속의 그 자손’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일한 언약 곧 은혜의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온다. 이집트(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 밑에서 공식적으로 하나의 나라로서 세워주시는 장면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장면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때문임을 출애굽기 2장 2425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 언약을 지키는 것임
앞서 우리는 아담 때 부터 믿어 온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여러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것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새롭게 해주셨던 그 은혜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출애굽기 2장 24-25절).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밑에 모인 이스라엘 민족을 “야곱의 집”이라고 부르셨다 (출애굽기 19장 3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으로서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켜야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해주신다고 하셨다.
- 같은 장 8절에 보면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 그런 후에 출애굽기 20장 이후에 나오는 계명들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실정법을 내리시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자체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만이 있지, 우리 보고 무엇을 하라는 내용이 없다. 즉 구원과 관련된 이 복된 약속을 우리로서는 그저 믿는 수 밖에 없지 달리 무엇을 할 것이 없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구체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언약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 예를 상기해 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마엘이다.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해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이스마엘은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났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 대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했다. 이로 보건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이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어겨서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약속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약속이 일방적인 선언이냐, 아니면 쌍방간의 의무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오면 내가 국을 끓이마”하는 식의 약속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식이 해야 할 것은 국거리를 사오는 것이 되겠지만, 부모가 “내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와서 국을 끓여주마” 하는 일방적인 약속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약속을 믿고 국을 끓여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약속을 마음 속에 지키는 것이다. 즉 ‘지킨다’는 것에는 ‘명령을 따른다’는 식의 의미도 있지만, ‘믿고 간직한다’는 의미도 있다.
시내산에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모세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하셨다는 이상한 이론도 돌아다니는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잠시 적고 넘어간다.
-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장 20절)
-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다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라디아서 3:21)
- 오히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심히 못 미친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갈라디아서 3:24)
- 과연 율법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죄 없이 함을 받으려면 나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이 말씀에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속죄의 법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다는 복음을 본다. 사람이 무엇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사람이 의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유일한 방법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가르쳤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
예레미아 31장의 ‘새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은혜의 언약을 다시 선언하시고, 때로는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것의 한 예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임을 보았다. 그런데, 예레미아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31:31-33
여기서 언급하신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은 여전히 은혜의 언약임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알 수 있다:
- 새 언약의 큰 내용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이었다 (창세기 18장 18-19절).
- 히브리서 8장에서 보듯이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졌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다.
- 이 새 언약의 수혜자인 우리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상속자라고 로마서 4장 16절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레미아 31장에 언급된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새 언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덧붙여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예전 시내산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신 말씀이 없으셨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독특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첫 조상인 아담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구원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룰 자손이 왕이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8:18-19, 삼하 7:12-16, 시 110: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약속된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39, 8:56). 성경 역시 수차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약속된 그 자손이라고 증거한다 (누가복음 1:72; 마태복음 1:1,21; 히 10:12-18). 특히 예수께서는 마지만 만찬의 자리,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 분의 피로 그 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죄를 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은혜의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선언하셨다 (고린도전서 11:25).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유일한 구원의 언약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영원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새 시대를 여셨다. 그로써 그림자 역할을 하던 모세적 제도, 다시 말 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언약공동체에게 주셨던 여러가지 실정법과 제도에 종료를 고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 오신 이후 새롭게 된 언약공동체 곧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와는 전혀 다른 언약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교회는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한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한 백성, 한 몸이다 (로마서 4:16; 11:17-18; 갈라디아서 3:7).
행위언약이란 무엇인가? The covenant of Works
창세기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대부분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구속 언약,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으로 칭하였습니다.
구속 언약(팍툼 살루티스, pactum salutis, covenant of redemption, covenant of salvation)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맺어진 협약입니다. 구속 언약에서 성부는 택자들의 구속자가 되도록 성자를 주시고 성자에게 택자들의 구속을 위한 조건들을 요구하시며, 성자께서는 기꺼이 이 조건들을 이루시는 데 동의하시고, 성령께서는 기꺼이 성자의 구속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기로 협약하셨습니다. 이 구속 언약은 창세 전(시간 전) 곧 영원에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이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의’(intratrinitarian) 언약입니다.
행위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첫 사람이자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2항에서 행위 언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처음 맺은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서는 완전하고(perfect) 인격적(개인적, 전인적, personal)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또한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언약의 조건이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위 언약의 원리는 ‘행하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 언약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에서는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행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 내용에 약속이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에 따르는 조건이 있습니다. 넷째는 조건을 어기고 파기한 데 대한 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을 성립하는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은 나타납니다. 언약의 당사자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첫 사람이자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입니다. 언약의 내용으로 약속된 것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약속과 관련된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순종입니다. 이 조건을 어길 경우에는 사망의 벌이 선포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어 언약 관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복되고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는 종종 혼인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파트너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말씀합니다(에스겔 16장; 호세아 2-3장).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3:19).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말해 줍니다. 2장에서는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에 관하여 말하고, 3항에서는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에 앞서 1항에서는 이 언약들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비록 이성 있는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심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어(voluntary condescension) 주시지 않으면,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복과 상급으로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은 언약의 방식으로(by way of covenant) 나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은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주시지 않으면 이 언약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낮추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 선하심)이 언약 관계의 배경에 있음을 잘 이해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언약뿐만 아니라 행위 언약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based on) 기초하고(grounded on) 있습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맺은 언약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언약을 행위 언약(foedus operum)이라고 일컫는 데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행위라는 이름을 붙이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또는 사랑)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함으로 이 언약을 순전히 율법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순종 행위를 약속된 생명을 얻는 공로로 오해하기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는 2항에서 말하는 행위 언약과 3항에서 말하는 은혜 언약은 둘 다 하나님 편에서 그분 자신의 자발적인 낮추심(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에 근거(기초)된 것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위 언약을 “생명의 언약”(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으로, 사랑의 언약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그의 모든 후손인 인류와)과 맺은 첫 언약을 일반적으로는 ‘행위 언약’으로 일컫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을 아담과의 언약, 율법 언약, 생명 언약, 자연 언약, 창조 언약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아담과의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하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함만 강조한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인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은 ‘은혜’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곧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는 ‘은혜’라는 말 대신에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은혜’라는 말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타락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곧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구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은혜 언약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하나님의 자발적 낮추심(voluntary condescension)에 근거한 것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 강조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피조물 관계(creator-creature relationship)에 더하여 언약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를 가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란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인데, 완전하고 전인적인 순종에는 영원한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첫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례(성찬과 세례)는 인류의 대표인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여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구원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하신 구속을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언약(행위언약, 구속언약, 은혜언약)
Ⅰ. 서 론
성경은
언약(言約)의 책이다. 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구약과 신약을 말한다. 이 구분을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면, 구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신약은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성취의 말씀이다. 그리고 다시 신약은 재림(再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며, 초대교회 이래로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교회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성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과 성취의 역사로 해석할 수 없다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래로 종교개혁시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해석의 관심은 언약이 항상 그 중심을 이루어왔다.
교부(敎父)
시대에 터툴리안(Turtulian)이 신약(Novum Testament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로 성경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확증되었고, 오늘에도 성경의 이름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니 그 증거는 더욱 확실하다.
그런데
성경의 틀을 이루는 언약 중에서도 창세기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언약인 행위언약과 구속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은 이후의 모든
언약의 원형(原形)이며 근거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언약은 장차 오실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로서, 오늘의 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열조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히 11:13)
이러한 지식은
단순히 상상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알려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언약관계로서의 신(神)-인(人) 관계 안에서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지고 선명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계는 구원과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를 이해함에 있어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은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구속 역사(구속사)에 있어서 중심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소고(小考)는 이 세 가지의 언약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언약의 개념과 함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언약은 구속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어주는 연결체이다. 언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을 통해서 그 자신과 그의 구원과 관계된 그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1. 언약의 개념(槪念)
1) 구약에서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
“언약”은
히브리어로는 베리트(????)인데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통상적으로는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에 의거하면 창 15:17에 기록된 의식이 언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 부과하는 약정(約定)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령을 인간에게 부과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5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약(testament)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언약(covenant)이라고 함이 좋을 것이다. 즉 언약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신 약속인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상거래(商去來)에 많이 쓰는 계약이란 말로 쓰면
신학적 사상이 사실상 약해지기 때문이다.
2) 신약에서
70인역(LXX)에서
“베리트”는 신 9:15(μαρτυριον)과 왕상 11:11(εντολη)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디아데케(διαθ?κη)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일반적인 헬라어 용법에서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약정 양도 계약서를
가리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언(遺言) 또는 유언장을 가리킬 뿐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용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Ibid. p. 446
그러나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두 집단 가운데 한 집단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그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러한 두 집단 사이의 협정에 이 말이 쓰인 예가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신약에 쓰인 “디아데케(διαθ?κη)”는 구약에
쓰인 “베리트(????)”보다 훨씬 더 특수한 뜻을 가지며, 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한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기되고,
다른 한 집단은 그저 순응할 뿐 거절할 수 없는 협약 또는 협정(agreement)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여 디아데케(διαθ?κη)라는 단어는 많은 다른 단어들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다.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어 왔지만 이 단어는 유언보다는 언약으로 번역되었다.
3) 태초 - 언약의 원형(原形)으로서 아담과의 언약
언약의
개념은 계시를 통해서 이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이미 역사에서 발전 되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초의 에덴에서 맺은 아담 언약(창 1:28)의 발전이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서 죄로 분열된 세상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관계로 제시할 때 그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약의 개념이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자신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빌려다 쓰셨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원형의 희미한
모형(模型)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와 같은 언약 관계의 삶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언약 개념은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기둥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언약 관계가 이미 발전된 이상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이 관계를 자신과 인간과의
실존하는 관계의 표현으로 소개하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의 공식적인 계약 이전 곧 태초의 아담부터 존재
했었다.
4) 언약의 당사자(當事者)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언약의
당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어떤 학자들은 언약의 당사자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죄인”, “선민(選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붙을 때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성부 하나님과 선민(選民)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를 언약의 당사자라고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들은 두 개의 언약을
말한다. 곧 성부와 성자 사이에 채결된 구속 언약(Pactum Salutis)과 이 언약에 근거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선민 또는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을 구분한다.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언약의 당사자를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보는 것보다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은 더 적합한 사실이다. 이 표현은 롬
5:12-21과 고전 15:21-22, 47-49의 지지(支持)를 받고 있으며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을 구분하는 이 같은 생각이 성경의 지원(支援)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에 대립되는 두
개의 별개의 독립된 언약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은혜 언약과 구속 언약은 하나의 복음적인 긍휼의 언약의 두 양상(樣相)으로서의
메시야 언약인 것이다.
2. 행위(行爲) 언약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즉 선악과를 금지한 것에 관련된 언약을 16세기 말에 이르러 행위계약 또는 생명의 언약 혹은 법적
언약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 행위 계약 교리의 역사적 연대기(年代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위 계약 교리가 언약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8
그리고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일정 기간 동안의 순종을 조건으로 미래를 완전하고 복되게 만드셨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0-161
1절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사 은총의 계약을 인간과 맺으심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비록 이성과 의지와 양심을 지닌 인간이 창조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보상을 받는 것은 이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계약이 순종을
가져온다.(사40:13-17, 욥9:32-33, 삼상 2:25, 시100:2-3,113:5-6, 욥22:2-3, 35:7, 눅
17:10, 행 17:24-25)
2절 - 인간과 맺어진 첫 번째 계약은 행위의 계약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에 의하여 생명을 약속받았다.(갈 3:12, 호 6:7, 창 2:16-17)
2) 행위 언약의 성경적 근거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기에, 일부 학자들은 행위 언약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언약의 개념은 성경 전반(全般)에 걸쳐서 표현되어 있다.
①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먼저
계약을 체결하는 양측(兩側), 즉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 그리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순종의
조건이다. 그리고 약속,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17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창 3:24)은 언약을 범한 자가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시(敎示)하는 것이다.
② 로마서 5:12-21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對比)하여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한 것 같이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죽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 한 사람이 순종했다면 영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을 것이다. Ibid. p. 117
그러므로
죄의 전가(轉嫁)와 다른 한편으로는 의(義)의 전가를 관련지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내용은 아담이 그리스도처럼 언약의
머리였다고 생각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의를 공유(共有)하고 있다면,
우리가 같은 이유에서 아담의 죄책(罪責)을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③ 호세아 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행위언약이 맺어졌고, 아담이 이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인류의 죽음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행위 언약은 타락 후에도 유효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미니안주의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고,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지정(指定)된 수단으로서 폐기된 것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문화사, 2004. p. 56 - 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알미니안주의자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하여 계약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 계약은 완전히 폐기되었으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그 계약을 지킬 능력도 없지만 지킬
의무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행위 언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창조의 질서 “본래
교의신학(조직신학) 아래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행위언약(타락 전)과 은혜언약(타락 후)으로 나누어 성경의 언약을
이해해 왔다. 그러다가 성경신학의 발전과 함께 타락 전 창조 당시에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창조언약으로, 타락 후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을 구속언약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p. 93 - 에
속한다.
언약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언약을 범한 후부터 어떤 인간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13-114
4) 행위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다.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폐기된 것이다. 아담 이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영생을 얻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진정한 순종으로서의 금식령(禁食令)(창 1:17)을 성취하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창 3:5)
그러나
둘째 아담은 광야에서 부딪친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마 4:1-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이렇게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금식을 온전한
“자기 비움”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또한 장차 언약대로 오셔서 성취하실 그 분 즉 메시야에
대한 언약인 것이다.
3. 구속(救贖) 언약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5-166
3절
-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계약에 의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번째 계약을 맺으신
바 보통 우리는 이것은 은혜의 계약이라고 부른다.(갈 3:21, 롬 3:20-21, 8:3, 창 3:15, 사 42:6) 이
은혜의 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막 16:15-16, 요 3:16, 롬 10:6-9, 갈
3:11)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겔 36:26-27, 요 6:44-45, 5:37) 성령을 주시고 믿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4절
- 이 은혜의 계약은 성경에서 종종 유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언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을
효과 있게 하였으니, 그는 그의 유언대로 영원한 기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상속해주셨다.(히9:15-17,7:22, 눅22:20,
고전11:25)
2) 구속 언약의 필요성 - 은혜 언약의 토대(土臺) 위에서
인간이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종전처럼 인간과의
직접적인 언약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 언약을 맺기에 앞서서 구속의 언약을 맺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은혜 언약은 구속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2-133 편집
3) 구속 언약의 성경적 근거
성자께서는 자발적으로 범죄 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성부께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구속의 축복을 성자를 통하여 택한 자에게 주며 더불어 성자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겠다는 성경적 근거이다.
① 구속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원 전부터 있었다.(엡1:4, 3:11, 살후 2:13)
② 그 계획은 언약의 성격을 지녔다.(요5:30, 17:4-6)
③ 메시야 예언 가운데는 언약의 요소들인 당사자(시2:7-8)와 조건(시40:7-8)과 약속(요 17:5, 24)이 들어 있다.(삼하 7:12-13, 시 89:3-4)
④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8
언약
개념을 메시야와 직접 연결하는 구절로서 여호와의 종에 관해서 말하는 시편 89:3과 이사야 42:6이 있는데, 이 연결은
여호와의 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더욱이 메시야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절들이 있는데, 이것은
언약적 용어이다.(시 22:1-2, 시 40:8)
4) 구속 언약의 당사자 - 메시야
성자(聖子)는 구속함을 받도록 영원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엡 1:4)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직후 은혜의 언약을(창 3:15) 아담에게 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계승시켜 왔다. 그리고 이 구속
언약은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마 1:1)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 모두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인 것이다.
5) 보증인으로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선택함을 받은 자를 대표하여 성부와 언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히 7:2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범죄 한 인간의 신분으로 낮아지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의 언약은 속죄함을 받은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근원이 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행위 언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희생의 제물로 받으시는 것은 “공의(公儀)”의 속성 때문이다. 죄가 있음에도 아무 근거가 없이 죄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참으로 구속의 언약은 은혜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5-136 -
이처럼 성부 하나님과 구원 받을 자의 대표인 성자 사이에 설정(設定)된 인간 구원을 위한 언약이 구속 언약이다.
6) 선택으로 인한 구속의 제한(制限)
구속의
언약이 선택의 작정과 혼동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둘은 동일하지 않다. 선택의 작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후사(後嗣)들이 될 사람들의 수(數)를 결정하는 반면에, 구속의 언약은 은혜와 영광이 죄인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길을 나타낸다.
논리적으로는 선택이 구속의 의논(議論)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만
제한적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적 속죄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들만이 구원을
획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 대신에 당하신 형벌에 대한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에 부가해서 자기와 그들을 연합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셨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위해서 돌아가신 모든 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며 그러므로 해서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신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p. 20 - 으로
구원하신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9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7) 구속 언약의 성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예언
그러므로
언약의 당사자인 성부께서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3:16), 성자로 하여금 언약의 조건에 따라
세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셨고(롬3:26), 언약의 약속에 따라 부활케 하시고 승천(昇天)케 하여 성부 우편에
앉히시고(벧전3:22),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교훈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다가(요14:26) 마침내 성자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성자와 택한 자를 영화롭게 함으로써(엡5:6,12)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다.
과연
이로 보건대 구속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오직 죄 밖에는 지은 일이 없는 우리가 오직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저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택(擇)함과 불택(不擇)함”이라는 “이중 예정” “이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43 편집 - 의 일이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작정과 예정의 섭리(엡 1:3-14)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없는 감사와 소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4. 은혜(恩惠) 언약
은혜
언약의 사상은 종교 개혁 당시부터 거듭 강조되어졌다. 아담의 범죄 직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재천명(再闡明)되어 왔고, 마침내 새 언약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이하)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 에서 완전한 실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블링거”는 이를 “유일하고 영원한 계약” 또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중의 언약”이라 불렀다. 또한 칼빈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 관계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의 성취가 새 언약을 이룬다고 하였다.「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9
1) 은혜 언약의 특징
은혜
언약은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운 언약이며, 구원의 계획과 성취와 적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모두
동원된 언약이다.(엡1:3-5, 요 19:30, 요 16:7-8) 또한 시간이 흘러도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며(창
17:9, 삼하 23:5),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언약이다. 그리고 신앙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지만,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며(엡2:8), 계약 당사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好意)로 성립된 편무(片務)계약이다(히6:17).
또한 은혜 언약은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주어졌으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약속의 내용(창17:7, 출19:5-6, 렘31:33)과
약속의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창15:6, 롬4:9-11) 그리고 중보자가 언제나
동일하다는(딤전2:5,갈3:19-20,히13:8) 일치점을 갖는다.
2) 은혜 언약의 계약 당사자「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분화사, 2004. p. 65제
1 당사자는 하나님으로서 제 2 당사자인 인간이 당신에게 대해 가지실 관계를 솔선하여 은혜롭게 결정하시는 당사자이다. 인간은
목적 자체(생명의 교통의 언약)로 볼 때는 피택자이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수단(합법적 관계의 언약)으로서 넓은 의미의 언약에서는
객관적 협약(協約)이므로 언약의 생명을 받지 못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구원의 실현이라는 수단적 의미에서는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은혜 언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
언약의 약속으로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참된 관계 회복, 영적 상징으로서의 현세적 축복의 약속, 죄의 사유(赦宥)와 양자(養子),
칭의(稱義)의 약속, 최종적 영광의 약속(영생) 등이 있다. 또한 은혜 언약에는 믿음과 순종의 요구가 있다. 믿음으로 언약과 그
약속들을 받아 언약의 생명에 들어가고,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순종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Ibid. p. 65
그러나
이 요구는 약속 이행(移行)의 조건으로서가 아니고 약속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의 원리에 따라서 힘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며 헌신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엡 1:8)
4) 은혜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중보자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介在)하셔서 중재(仲裁)만 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증인과 율법의 완성자로서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정상(正常) 관계를 갖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말로써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지불해야 할 죄책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신 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따라서 생활함으로써 구원을 완전하게 하도록 인도하며 촉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바울의 직책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환이요, 증인으로서의 직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p. 213 - 을 세워서
봉사하게 하심으로 이 일을 계속하신다.(고후 5:20)
5) 언약 안에 있는 회원(會員)
① 성인(成人)
성인은 신앙과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언약에 들어갈 수 있다. 신앙은 유일한 방법이다.
② 신자의 자녀들
신자의 자녀들은 합법적 관계로서 언약에 들어간다. 그 자체가 생명의 교통으로서의 언약관계가 아니고 조만간 현실이 되리라는 합법적인 관계이다.
③ 비중생자(非重生者)
합법적
협약으로서 언약에 참여된 비중생자는 회개하고 신앙을 가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약의 파기자(破棄者)로서 심판 받게 된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66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회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법적인 협정으로서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실현되는
언약과를 구별하는 것이다. 저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 못되고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할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거나 언약에 수반(隨伴)하는 책임을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언약을 파기한 자로
간주(看做)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나 교회 안에 끝까지 중생하지 않다가 언약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무조건적 선택 -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심은 다만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일 뿐이다. 특정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 회개 등과 같은 이런 예지(預知)된 반응이나 그들 편에 대한 순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덕성(德性)이나 예지된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주권적으로 택하신 자들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심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원인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19 -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약속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6) 여러 경륜(經綸) 시대의 언약
은혜언약은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시되었다. 그 형태를 크게 나누면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71-172
5절
- 이 계약이 맺어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서로 다르다.(고3:6-9)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계약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및 다른 유형들과 제정들에 의해서 특징 지워졌으니,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서(히 8-10장, 롬 4:11, 골 2;11-12, 고전 5:7)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피택자(被擇者)들에게 약속된 메시야(고전 10:1-4, 히 11:13, 요 8:56)를 신앙하도록 교훈하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
당시로는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 약속된 메시야에 의하여 충분한 속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으니, 이 계약을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6절 -
신약에는 구약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는데, 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제도에 의하여 맺어지게 되었다.(갈 2:17, 골 2:17, 마 28:19-20, 고전 11:23-25, 고후
3:7-11) 이 제도는 수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적고 외견상으로 구약에서보다 덜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보다 충만히, 보다 명백히,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틀림없다.(마 28:19, 엡 2:15-19, 히 12:22-28, 렘 31:33-34) 우리는 이 계약을 신약이라
부른다.(눅 22:20, 히 8:7-9) 그러므로 본체(本體)가 다른 두 은혜의 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지닌 은혜의 계약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집행되는 방법에 있어서만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다.
② 아담과의 원시(原始) 언약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꺾을 것이라는 원(源)복음(창 3:15).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하셨다.(창 1:28) 이 언약의 주로서 하나님은 전능자의 자리에서 아담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주(the Lord)가 되시고
여호와가 되셨다. 바로 이 사람의 하나님 되시고 언약의 주가 되심을 표시시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명(記名)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첫 언약 체결 후에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이 여호와 이름으로 일하셨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결말(結末)하셨다.(출 3장
이하)「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pp. 25-26
③ 노아와의 이중(二重) 언약
홍수 이전에 택한 자의 구원에 대한 암시가 깃들인 언약을 맺으셨고(창 6:18), 홍수 후에 다시 땅을 침몰시키는 홍수가 없으며(창 9:8-10) 일반 은총적인 언약을 주셨다. Ibid. pp. 28-29이는
첫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 그 목표였음이,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갱신된 언약 체결에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 진리는 노아에게
주신 말씀과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났다.(창 9:1) 노아와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 회복되는 역사의
끝에까지 지속(持續)되고 유효할 것이다.
④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나안에
대한 현세적(現世的) 축복과 메시야에 대한 영적 축복을 받았으며(창 15:4-5),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졌다(창 15:6).
이는 신약의 성도들도 창대(蒼大)하여지며 영적 가나안, 즉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롬 4:12). Ibid.
pp. 30아브라함과의 언약체결은 낙원에서의 첫 언약체결의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언약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임이 분명하고 확실함을 나타낸다.
⑤ 시내산 언약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 의식적, 국가적 율법을 주었다(출 20장 이하). 이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롬 3:20, 4:15, 5:13, 갈3:19)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다(갈 3:24).
⑥ 신약시대의 언약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서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인데 반(反)하여 이는 모든 국가, 모든 백성에게 확대되는 보편성과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한 충만을 지닌다.
7) 은혜 언약의 완성자로서의 메시야「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278아담
이후로 이스라엘이 비록 계약적 책임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한 위대한 백성을 일으켜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위대한 나라를 이룩하는 그의 목적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타락한 인간 가운데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멸망을 뛰어넘는 이런 희망어린 기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예언자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복귀, 받아들여질 예배로의 회복, 메시야적 왕의 혈통의 재생 등에 대하여 가장 빈번히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계약적 약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한데 모으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마지막 하나님 계약은 “완성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이전(以前) 계약 사역들을 대신한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역사를 통해 경험했던 다양한 계약들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실현하게 된다. 완성은 이 마지막 계약의 내용을 특징 지운다.
이
완성하는 실현의 중심은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약속들(행위, 구속, 은혜)의 성취자로서 그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라는 계약 원칙의 핵심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는 언약을 완성하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수 있다.
Ⅲ. 결 론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노아를 거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계승(繼承)된 언약들은 모세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언약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신학자들에 의해)그 이름들을 달리 했지만, 결국 본질은 모두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언약은 사실 인간이 행함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약을 하신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내실 언약이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인 것이다. 또한 이 언약은 택자들에게서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내실, 인간이 조금이라도
기여(寄與) “불가항력적 은총 -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구원을 위한 외적 소명에 부가해서 성령은 택자들을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특별한 내적 소명을 계속하신다.
외적 소명(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은 거부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내적 소명(택자에게만 하시는)은
거부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회개를 초대한다. 이러한 특별한 소명에 의하여 성령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사역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며 또한 성공을 인간의 협동에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은헤스럽게도 택한 죄인을 협동하게 하시며, 믿게 하시며, 회개시키시며, 자유롭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미쳐지는 사람들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21 - 할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서 내적(內的)인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율법으로(바울의 표현대로 “몽학선생”) 그림자적인 역할을 수행해낸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견고하고
화려한 왕국의 성취도 은혜 언약의 결과였지만,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형에 불과했다. 이렇게 구약의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이루어지고 통치가 이루어지는 외적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속사람
혹은 생각과 마음)안에 내적 모습으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혜
언약 안에 행위 언약과 구속 언약이 있는 것이고, 이들 언약 모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몫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영원천국의 맛들을 보고 있는 현세천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와 능력을 손톱만큼이라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약을 통하여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되었다. 이 성취 아래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성도의 견인 -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Ibid. pp. 21-22영원천국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쉬지 않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
1.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2.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3.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4.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5.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6.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7.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8.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9. 「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10.「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출처 : 블로그 >반석위에기쁨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거한다(Lenski).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ἐκτ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1618
어원 / 16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절한(행 12:5), 뜨거운(벧전 4:8).
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2572
관련 성경 / 덮이다(마 8:24), 숨다(마 10:26), 덮다(눅 8:16, 약 5:20, 벧전 4:18), 가리다(고후 4:3).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 1618)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패(ἀγάπη), 필리아(φιλία), 에로스(Έρως), 스토르게" 사용합니다.
사랑의 종류 4가지: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1. 에로스(Eros)
Eros is the god of love and lust whose other name is Cupid. 에로스는 큐피드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정욕의 신이다.
Eros, the sex drive, and Thanatos, the death instinct. 에로스는 성적 본능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이다.
EROS was the mischievous god of love, a minion and constant companion of the goddess Aphrodite.
The poet Hesiod first represents him as a cosmic who emerged self-born at the beginning of time to spur procreation. (See the Protogenos Eros and Phanes, for more information.) The same poet later describes two love-gods, Eros and Himeros (Desire), accompanying Aphrodite at her birth from the sea-foam. Some classical authors interpreted this to mean they were born of the goddess at her birth, or alongside her in the sea-foam. The scene was particular popular in art, where the pair flutter around the goddess seated in her floating conch-shell.
Eventually Eros was multiplied by ancient poets and artists into a host of Erotes or Cupids, as they are commonly called in English. The one Eros, however, remained distinct in myth. It was he who lighted the flame of love in the hearts of the gods and men, armed either with a bow and arrows or else a flaming torch. He was also the object of cult. Eros was often portrayed as a child, the disobedient, but fiercely loyal, son of Aphrodite.
In ancient vase painting Eros is depicted as either a handsome youth or as a child. His attributes were varied: from the usual bow and arrows, to the gifts of a lover--a hare, a sash, or a flower. Sculptors preferred the image of the bow-armed boy, whereas mosaic artists favored the figure of a winged putto (plump baby).
2. 스토르게(Storge)
스토르게는 혈족애(血族愛)를 말한다.
부모 자식 사이의 피로 얽힌 사랑이다.
피는 물보다도 짙고 호르몬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부모 자식간의 혈족애(血族愛)는 어느 사랑보다도 강(强)하다.
친자(親子)간(間)의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륜(人倫)을 넘어서 천륜(天倫)이다. 우정이나 애정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매력(魅力) 때문에 생긴다.
만일 장점(長點)이나 매력(魅力)이 없어지면 사랑은 소멸(消滅)하거나 약화(弱化)된다.
아름답던 애인(愛人)이 추악(醜惡)한 불구자(不具者)가 되면 그 애정(愛情)은 고갈(枯渴)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자식이 불구자가 되어도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자식을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 강(强)해진다.
자식이 불명예와 죄과(罪過)를 범하여도 부모의 사랑은 변(變)하지 않고 한결같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고 이기적(利己的) 욕망을 떠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사랑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3. 필리아(Philia)
-philia: (명사에서) (특히 섹스와 관련하여 비정상적으로) …에 대해 갖는 이상 성욕[성애] <참고 -phobia> paedophilia: 소아성애.
Philia: Brotherly love, closer than that based on principles, denotes affection, close friend or family.
'PHILIA'는 그리스어로 친구간의 우정 혹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 어원에서 출발하는 는 특히 사춘기 시절의 열정과 불안,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친구관계, 그리고 그 관게에서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기억을 떠올린다.
4. 아가페(Agape)
아가페(그리스어: αγάπη)은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그리스어 낱말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 왔지만, 보통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아가페라는 용어는 고대 사본에서는 드물에 쓰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부르고 있다. 또, 아가페는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서술해왔다. 아가페(agape)는 쉽게 말해 '절대적인 사랑 '을 뜻한다.
1. 에로스(Er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 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와 아모르에 해당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출처>
- 열정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2. 플라토닉(Platonic love)
- 플라톤의 '대화'<향연> 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즉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란 마음과 영혼을 고무시키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위키백과 출처>
- 순수하고 강한 형태의 비성적(非性的)인 사랑을 말한다.
3. 아가페(Agape)
-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두 단어 중 대표적인 말.
-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라는 말, 성격적인 의미가 있다 보니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글을 더 적어볼게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는,
에로스 - 남녀 간의 육정적이고 성적인 사랑. ‘열정’이 내포되어 있는 단어.
필리아 - 친구 간의 사랑. 우정이나 우애(약 4:4).
스트로게 - 가족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다함없는 사랑.
아가페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롬 5: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아가페 [Agape] (라이프 성경사전) 출처>
4. 루두스(Ludus)
루두스는 라틴어 사전에 찾아보면 장난, 경기, 대단치 않은 일로 검색이 됩니다.
그래서 루두스에 사랑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연인보단 친구 같은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관계를 뜻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5. 스토르지(Storge)
- 형제자매 사이나 친구 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 고대 그리스어 Storgay(스토르게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 스토르게 사랑은 우정이나 연민을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사랑은 아니지만 서서히 진행되고 깊고 오래가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 마니아(Mania)
Mania를 사전적 검색을 해보면 1. 열광 2. 조병, 조광증이라고 검색이 됩니다.
풀어져 있는 정의를 정리하자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 및 소유욕을 가진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거 같습니다.
보통 마니아층이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가볍게는 마니아, 마니아층이라고 표현할 수 도있지만
마니아 사랑의 찾아보면서 마니아의 타입의 사랑을 하시는 분들은
의존성이 강하고 불안해하는 일이 잦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리한 글도 보이네요
<출처 : 연애의 과학 >
7. 프라그마(Pragma)
pragma의 사전적인 검색을 해보면 나라마다 조금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인, 실용적인 등의 사전적 의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하게 되면서 마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을 하시는 분들을 표현하게 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습니다.
- 현실적인, 합리적인, 가슴보단 머리로 가 먼저 생각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네요
이 사랑의 유형을 찾아보다가 너무 잘 보게 된 블로그가 하나 있어 블로그 작성자분께
허락을 맡고 글을 조금 더 끄적여봅니다-♡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는 일차적인 사랑
마니아, 프라그마, 아가페는 이차적인 사랑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마니아의 사랑은 에로스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프라그마는 스토르게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아가페는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합쳐진 사랑
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17 마태복음 16:24
참조 /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참된 제자의 조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순종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 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 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 ἀπαρνέομαι
스트롱번호 533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지다(아이로) αἴρω
스트롱번호 142
좇을 것이니라(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한 까닭은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겸손"을 권면했습니다.(3절)
그리고 그와 같은 실제적인 증거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라고 하는데 '프로네오'의 의미는 "생각하다"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생각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예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생각의 전환은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할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생각의 전환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어려운 상황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이것은 도전적이지만 극복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자신감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 자기를 비우는 마음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자기를 낮추는 마음
8절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3.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8절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마음을 품으라(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12:16, 빌3:16, 골3:2.
3.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2:5.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8:5, 빌1:7, 골3:2), 여기다(롬14:6), 뜻이 같게 하다(롬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12:16, 빌2:2,5), [명] 사상(행28:22).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합니다.
의(義)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디카이오수네)
평강(平康)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을 말합니다(에이레네)
희락(喜樂)은 의와 평강을 이 세상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희락' 또는 '기쁨'(*,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현대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새번역)
구원을 위해 힘쓰십시오(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것을 유지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확산시키라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에 만족하지 말고 개인 구원을 공동체 구원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공동체 구원을 사회 구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개인 구원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공동체 구원 즉 가족 구원, 친족 구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원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세상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 구원이란 의미가 사회를 향한 투쟁으로 반복되어 마치 정부를 향한 쓴소리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사회 구원이란 개인 구원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이루라(카테르가조마이) work out
κατεργάζομαι
스트롱번호2716
뜻풀이부
2. 가져오다, 이루다, 산출하다, 창조하다, 롬4:15, 5:3, 7:8, 고후4:17, 7:10,11, 9:11, 빌2:12, 약1:3.
3. 억누르다, 압도하다, 정복하다, 엡6:13.
관련 성경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일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선교의 짧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급성한 나라
둘째, 피선교국가에서 선고국가로 발돋움한 나라
셋째,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선진대국으로 발전한 나라
넷째, 자유민주의가 아름답게 꽃을 피운 나라
다섯째,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배출된 나라(이승만대통령, 박정의대통령)
여섯째, 한류의 바람을 일으킨 나라
그런데 이런 자랑스런 나라가 붕괴되려고 한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 김일성주의 체재로........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급작스런 변화는 공법과 정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선지자 아모스와 같은 외침을 강조해야 한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까닭은 교회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자리를 버리고 영광과 축복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라도 의식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루터기를 만들어야 솟아날 수 있는 자리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 본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공법과 정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공법'과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10:22),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7,15절. 6:12).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흘릴지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이갈'(*)은 '굴리다'(roll)는 뜻의 '갈랄'(*)에서 온 나팔형 동사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이다(BDB).
또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끊임없는'(perpetual)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탄'(*)이라는 형용사가 있어서 그 강도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있고 가치있음을 보여준다.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욥기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정의(正義) 6666 여성명사 체다카 [ tsedâqâh ] צְדָקָה 스트롱번호 6666
어원 / 66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 6:25, 24:13,
사 5:7), 공의(신 33:21, 왕상 3:6, 사 10:22), 권리(느 2:20), 정의(암 5:7, 6:12, 슥 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잠언 11:5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신의 성품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성품은 타고난 성격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존재하는 다양성과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는 신비한 현상은 마치 다양한 성격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또한 다양한 지체들로 각자의 맡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유한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성품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드러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성령화되지 못한 나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목숨의 소중함(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 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 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5590. 프쉬케)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5590
뜻풀이부 / I. 영혼, 목숨, 생명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 왕상 18:21; 히 11:25).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카이 엔뒤사스다이 톤 카이논 안드로폰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엔두오 호 카이난 안드로포스
입으라 (1746) 엔두오 [ ĕndüō ] ἐνδύω 스트롱번호 1746
입다(마 6:25, 막 1:6, 계 1:13), 입히다(마 27: 31, 막 15:17, 눅 12:22), 붙이다(엡 6:14, 살전 5:8).
그(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스트롱번호3588
새(2537) κα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537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사람(444)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444
- 어원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새 사람(the New Self)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입는다는 동사는 주로 옷을 입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마치 무슨 탈을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경제공항 때에 경제적인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므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동물원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때에 동물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에 많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살리고 동물원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관계자들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하루 종일 우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 우리에는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지내고 있었고 그 옆에 호랑이 우리에서는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 흉내를 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의 관리인은 탈을 쓴 사람들에게 절대로 다른 우리로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한 번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재롱을 부리다가 그만 호랑이 우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원숭이 곁으로 다가옵니다.
절대로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라는 관리인의 주의사항을 기억한 원숭이는 다가오는 호랑이를 두렵게 바라봅니다.
이때 호랑이가 원숭이 곁에 와서 속삭이더랍니다.
"너도 나처럼 하루종일 원숭이 탈을 쓰고 고생하는구나!" 하며 원숭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예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은 예수처럼 성자와 같은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의 탈을 쓰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예수의 생각과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무장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론으로 예수님의 대답은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 단어는 팔링게네시아()라고 합니다.
팔링게네시아는 "거듭남" 이란 명사형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다시 시작하라
새 출발이란 의미는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다가 각자 헤어진 후에 살아보니 그래도 예전에 함깨 하였던 사람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혼자서 지내던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기로 약속하면서 함께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새 출발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례이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후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지냈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말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출발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혼자사 쓸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 이전의 사람을 위하여 잘 살아야 한다고 중보기도도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먼저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이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더 높은 것을 생각하라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삶은 육체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붙잡혔다는 증거가 육신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반차 투정, 신발 투정, 옷 투정, 자동차 투정......
그러나 육신의 가치가 아니라 보더 한차원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해 봅니다.
반찬이 싱겁구나 내가 소금을 더 먹어야지
옷이 더럽구나 내가 손으로 직접 빨아어 입어야지
왜 나는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될 때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월남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맨 앞줄이에 앉은 두 사병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왼손이 없습니다.
다른 장병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두 사람은 서로 완손과 오른손을 마주치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παλιγγενε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824
뜻풀이부
1. 중생, 재생, 거듭남.
a. [세계에 대해서] 마 19:28.
b. [구속받은 사람의 재생에 대해서] 딛 3: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중생(딛 3:5), 새롭게 됨(마 19:28).
* 3825. πάλιν
스트롱번호 3825
어원 / 3823과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
뜻풀이부
1. 다시, 돌아, 도로.
a. [가다, 보내다, 돌아서다, 부르다 등의 동사와 함께] 돌아가다, 막11:3, 요6:15, 11:7, 갈2:1.
b. [전에 있던 상태로 다시 떨어지거나 전에 하던 동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요4:13, 고전7:5, 갈2:18.
2. [이미 한 일을 반복하거나 어떤 일이 전에 생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생긴다 든가, 어떤 존재 상태가 전과 같이 다시 일어날 때] 다시, 또 한 번, 또 다시, 새로, 막2:13, 눅23:20, 요1:35.
3. 그 위에, 더욱이, 더군다나, 거기서, 마5:33, 13:45, 19:24, 눅13:20, 롬15:10-12, 고전3:20.
4. 반면에, 차례로, 마4:7, 요12:22, 고전12:21, 고후10: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또(행 10:15), 다시(갈 1:9), 또한(고전 12:21).
* 1078. 게네시스 γένε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078
뜻풀이부
2. 존재, 약 1:23.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창 2:4, 5:1에서 온 것이다. 기원의 역사, 족보, 역사의 책.
4. ὁ τροχὸς τῆς γενέσεως : 인간 기원의 수레 바퀴, 인생 여정, 약 3: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계보(마 1:1), 출생(생긴)(약 1:23), 삶(약 3:6).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상고(詳考)라는 헬라 단어는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라고 하여 사도행전 17:11에서 소개한 "상고(아나크리노. anakrinō) ἀνακρίνω)"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나크리노'는 "탐색하다, 조사하다, 체로 쳐서 골라내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에류나오'는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상고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것에서부터 찾아내고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고하는 방법은 말씀을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 연결되는 37-38절을 읽어봅시다(개역 개정판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친히 증언하신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이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預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成就) 및 응답(應答)을 말합니다.
상고하다(에류나오. ĕrĕunaō) ἐρευνάω
스트롱번호 2045
뜻풀이부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 5:39, 7:52, 롬 8: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각하다(요 5:39), 상고하다(벧전 1:11), 살피다(롬 8:27), 통달하다(고전 2:10).
* 2046. ἐρέω
스트롱번호 2046
뜻풀이부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말하다(마 7:4, 눅 23:29, 롬 3:5), 명하다(마 17:20), 묻다(마 21:24, 눅 19:31), 이르다(막 11:29, 고후 12:9, 계 17:7), 말씀하다(눅 2:24, 요12:50, 행 2:16).
* 4483.
ῥέω
스트롱번호4483
뜻풀이부
1. 말하다, 마 3:3, 5:21.
2. 지시하다, 명하다.
참고 정보/ 문법설명 / 미래 ῥεύσω, 4482와 유사
관련 성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미메타이 무 기네스데 카도스 카고 크리스투
μιμηται μου γινεσθε καθως καγω χριστου.
본 받는자(3402) 미메테스(mimētēs) μι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402
발음 [ mimētēs ]
어원 / 3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 3401.
μιμέομαι
스트롱번호 3401
-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오늘 본문에서 ‘본’이라는 말이 영어 단어로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example’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patter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아니 단순히 선생이 아닌 “주님”인데 말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이 관례였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pattern’입니다.
모든 경기에는 rule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새로운 룰이 적용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본’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는 관념도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유별나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남들이 뭐라고 해도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성경을 묵상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느냐? 아니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느냐? 하는 것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점점 더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본”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생활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교인들과 선교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선교팀들이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식당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에 관한 한 열정적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좀
“유별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제가 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개인 기도를 하고 먹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식사 기도하는 것이 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식사를 방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터기에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극장에 갔을 때, 얼마나 울림이 좋은지 화음을 넣어서
성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손뼉을 칩니다. 그래서 자꾸 노래를 더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소리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가이드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합니다. 가이드 소리에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찬양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때가 언제냐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바로 죽음을 앞에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본문을 가리켜 “때를 가리지 않는 섬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돈을 벌고 권력을 잡아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가진 것 없어서, 지위가 없어서, 가진 것이 많아서
그 모든 이유가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데,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진지한 모습이 드러나는 때가 극한 상황이라고 하지요.
제가 조금 무모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광야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설교 준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애급에서부터 출발해서 시내 광야를 머물며 광야 체험을 하고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누는데, 누가 함께 가야 할까? 추운 밤, 더운 낮 물도 없이 지나야 하는데, 건강한 남자들로 팀을 모으고,
12 지파의 모습들을 성경을 보면서 철저하게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여자들도 데려가서 정말 현실감 있게 불평하는 모습도 담아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여행사를 하시는 권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광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코스에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장한 강도들에 의해 납치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끌고 다니다가 호텔에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그 과정 중에 리얼하게 사람들의 본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일들이 결국은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이 위대한 것은 섬김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마음에 감춘 가롯 유다 앞에도
수건을 들고 대야를 놓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늘 자기편과 반대편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나뉨이 존재합니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향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죠. 나눠진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주석가는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할 필요가
없는 시간에 겸손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 다시 한 번 집중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따라 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우리가 상황에 관계없이 대상에 관계없이 섬기기를 시작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또 다른 가치관을 누군가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읽게 된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딱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장에서, 그것도 석탄 연기 가득한 빈민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 두꺼운 고무 깔창을 댄 운동화에 양말을 발목까지 접어내리고, 등에는 큰 장비를 지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정말 바보 같은 모습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 모습임에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소웨토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발을 내놓았고, 그 중 한
명이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의 스토리 기적의 이야기가 그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샛길에서 만나 그들의 발을 씻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찾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자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턴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세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애들러라는 의사는 자기를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처방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서 2주일 동안 매일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한번 실천해 보세요. 2주일 동안만 그렇게 살면 당신 병은 깨끗이 낫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 있다면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그런 삶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본받기를 원하고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볼 때입니다. 평상시의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평상시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은데 위기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상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성경을 읽거나 전도하는 우리의 모습보다, 불합리하게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 부당하게 꾸지람을 듣거나, 누가 봐도 힘들게 하는 못된 상사를 만났을 때 처신하는 우리의 모습, 모두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신앙인의 의연한 모습과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습 말입니다.
자녀의 진로문제를 놓고 안달하고, 입시의 당락을 가지고 일희일비할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기도하는 모습, 군대에서 진급 철이 되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진급 발표가 나면 사람들이 쫙 빠져나가고
기뻐하거나 실망할 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진급되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는 모습과 반대로 내가 실패했을 때에,
선한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잘 된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내가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인데, 예수를 잘 믿는데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를 주목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임은미 선교사가 쓴 [최고의 날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 잘 믿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
하나님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친하게 여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고통을 저와 함께 나누기로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품는다.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당신도 이런 마음으로 감사하며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참 쉬운 일들 같은데 이런 모습이 세상이 바라는 모습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축복보다, 의인이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는 사람, 시험 가운데 견디는 사람, 죄 가운데서 용서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볼만한 묘기 가운데 하나는 공중그네 타기입니다. 우리는 숨을 죽여가면서 곡예사들이 한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막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묘기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조마조마합니다. 한 번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공연을 할 수 있습니까? 한 번도 떨어지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떨어집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공연마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눈치를 못 채시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졌을 때 어떻게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거든요. 우리는 떨어졌을 때 재빨리 다시 뛰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도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밑에다 그물을 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 안전하다는 신뢰감이 모든 일을 성공하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교회가 본이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믿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고,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일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싸우시는 하나님, 정죄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거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조바심내고 안달하며 자기 것을 차지하려는, 섬기는 본이 아니라,
죽어도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교회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운동을 하며 기독교 TV를 보다가 포항중앙교회 서임중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부메랑”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 담임목사님이 재임 당시 쓰러지셨을 때, 교회당회원들의 사랑과 배려는 온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1988년에 ○○○ 목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3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몸은 절반만 사용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명적으로 기억과 모든 의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뒤틀려서 의사도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진단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 한데, 그 교회 장로님들은 포기하지 않고, 3년 동안 목사님을 병원에
눕혀놓고, 매일 24시간 기도하면서 조를 짜서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은 그 목사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시면 저하고 손잡고 한 번이라도 일어섰다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강권하여 담임목사를 운동시키는 조를 짜서 3년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을 회복시킬까?’ 이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번은 제주도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만장굴 앞에 세워놓고 이쪽으로 걸어와 보라고 합니다.
비실비실하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여 장로님 앞으로 오게 될 때, 장로님들은
“우리 목사님 만세!” 하면서 울고 또 울며 그렇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감동스토리가 되었습니다.
노회는 교회가 강단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설교 목사를 파송하려고 결의합니다. 그때 ○○○○교회 장로님들은 “누구도 우리
교회에 오지 못한다. 만약 노회가 설교 목사를 파송하면 우리는 ○○○○교회는 노회를 탈퇴한다고, 우리 목사님이 회복되어서 이
강단에 설 때까지는 누구도 ○○○○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라고 노회를 향하여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노회도 이 장로님들의 행위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 지키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목사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눌하지만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사에서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말이 빠르면서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러나 병중의 설교는 알아듣기도 어렵고 어눌한
말이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은 행복해했습니다.
뇌출혈 당시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 보니까 “태초”라는 말이 뭔지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맨
처음”이라고 되어 있었답니다. 창조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몰랐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런 식으로 새롭게
어린아이같이 글을 익혀가는 가운데 너무 속이 터져서 “이게 사는 길이냐고, 죽자고” 포기를 하려고 했답니다. 그때 하나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가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가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고” 거기서 목사님이 깨어집니다.
어눌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두 주일에 성경을 한 번씩 읽어내니까 1년에 25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읽는 어느 날,
갑자기 뇌 경이 마치 전기 스파크가 팍! 팍! 일어나듯이 온 뇌를 흔들더니만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언어가
회복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옛날에 암송해 두었던 성경구절이 다 회복이 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교인들은
행복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쓰러질 때 교인 수가 1,500명이었는데, 3년 동안 교인 수가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이 3년 동안 교회가 침체되었으니 오늘부터 하나님, 3년 만에 교회가 배가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정말로 출석교인 3,000명으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예배당 좌석 수가 600석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설교를 다섯 번, 여섯 번 하니 장로님들이 목사님 설교 한 번만 하시라고 했더니 목사가 설교를 해야지 하면서 계속하니까 장로님들이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 살리려면 여섯 번 설교할 것이 아니라 한번만 설교하게 하자. 그러려면 3,0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자.”
그렇게 해서 세운 성전이 지금 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설교 한 번 하게 하기 위하여 시작한 성전이 잘 지어져 3,000석 좌석의 예배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2월 13일, 미국 남가주 안디옥 교회에서 집회 인도하시다가 마지막 부분에 성도들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는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마지막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2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어느 잘된 교회의 이야기, 쓰러진 목사님께 잘해라! 이런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이제는 싸우는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훈훈한 교회의 이야기가 들려야 합니다. 교회가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서로 섬기게 하여 줍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을 보아야 배우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본을 보여줘야 세상이 배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배운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Nachfolge”라는 독일어의 단어입니다. ‘제자’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았기에 우리도 섬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쓴 폴 브랜드는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나병환자를 위해 살아온 분이었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가 된 것이죠.
그는 사람들에게 나병환자와 접촉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득했고, 많은 사람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한쪽 발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폴 브랜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늘을 가지고 찔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다가 나병 환자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늘로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으로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잠시 마비현상이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 브랜드가 감사했던 것은 나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왜 자신들의 신체 일부분을 뜨거운 불에 넣는지, 신체 일부를 칼로 자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폴 브랜드는 일평생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잘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섬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이런 섬김의 본이 경험되고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한 영향력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악에게 지지 말고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 악(256)
* 선(18)
* 이기라(3528)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him for the things done whil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ad.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의 헬라어 '소데나이'(*)가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마 16:17;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빈주의(Calvinism)의 비교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는 예정론, 자유 의지, 하나님 주권의 본질과 같은 교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개신교 내의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빈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이자 개혁가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신학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Jacobus Arminius)의 신학사상에 기초하여 17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운동입니다.
칼빈과 알미니우스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둘 사이의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정론과 선택론
칼빈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위해 특정한 개인을 선택하셨으며, 이는 그들이 행할 어떤 일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근거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조건부 선택을 고수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누가 자유롭게 그분을 믿기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에 응답할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2. 속죄의 범위
칼빈주의는 제한 속죄를 가르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희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 속죄를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구원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자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서 먼저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사상을 지지하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4. 성도의 인내
칼빈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도 알려진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선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은 믿음을 견지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배도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신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상은 단순화된 설명이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알미니안주의 : 칼빈주의
God elects on basis of foreseen faith.
Christ died for all.
Man can resist God.
Believer may lose.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에 기초하여 선택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잃을 수도 있습니다.
God elects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Christ died for elect.
Irresistible election.
Elect can never lose.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된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
선택된 사람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질문 /
칼빈주의 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견해가 옳은가?
답변 /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코뷔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두 체계는 다섯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에 오염되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 오염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 진영 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부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칼뱅주의의 “전적 타락”과 매우 유사한 견해를 고수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체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의해 구원을 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지 미리 아심으로 그 예지에 근거해서 구원 받을 사람을 택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속죄를 제한적이라고 보지만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봅니다.
이 점이 다섯 가지 쟁점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무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분의 죽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거부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칼뱅주의는 성도의 견인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는 개념을 말합니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따라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인 구원”을 부인하고 그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 안에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혼합된
온갖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다섯 가지 칼뱅주의 핵심을 전부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있고 다섯
가지 알미니안주의를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도 있고 두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두 견해가 혼합된 유형에 동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은 두 체계
모두가 각각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결정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두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습니다.
Calvinism vs. Arminianism - which view is correct?
Calvinism and Arminianism are two systems of theology that attempt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s sovereignty and man’s responsibility in the matter of salvation. Calvinism is named for John Calvin, a Fren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09-1564. Arminianism is named for Jacobus Arminius, a Dut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60-1609.
Both systems can be summarized with five points. Calvinism holds to the total depravity of man while Arminianism holds to partial depravity. Calvinism’s doctrine of tot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corrupted by sin; therefore, human beings are unable to come to God on their own accord. Parti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tainted by sin, but not to the extent that human beings are unable to place faith in God of their own accord. Note: classical Arminianism rejects “partial depravity” and holds a view very close to Calvinistic “total depravity” (although the extent and meaning of that depravity are debated in Arminian circles). In general, Arminians believe there is an “intermediate” state between total depravity and salvation. In this state, made possible by prevenient grace, the sinner is being drawn to Christ and has the God-given ability to choose salvation.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election is unconditional, while Arminianism believes in conditional election. Unconditional election is the view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entirely on His will, not on anything inherently worthy in the individual or on any act performed by the individual. Conditional election states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on His foreknowledge of who will believe in Christ unto salvation, thereby on the condition that the individual chooses God.
Calvinism sees the atonement as limited, while Arminianism sees it as unlimited. This is likely the most controversial of the five points. 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only died for the elect. Un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died for all, but that His death is not effectual until a person receives Him by faith.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God’s grace is irresistible, while Arminianism says that an individual can resist the grace of God. Irresistible grace argues that when God calls a person to salvation, that person will inevitably come to salvation. Resistible grace states that God calls all to salvation, but that many people resist and reject this call.
Calvinism holds to perseverance of the saints while Arminianism holds to conditional salvation. Perseverance of the saints refers to the concept that a person who is elected by God will persevere in faith and will not permanently deny Christ or turn away from Him. Conditional salvation is the view that a believer in Christ can, of his/her own free will, turn away from Christ and thereby lose salvation. Note: many Arminians deny "conditional salvation" and instead hold to "eternal security."
So, in the Calvinism vs. Arminianism debate, who is correct? It is interesting that in the diversity of the body of Christ, there are all sorts of mixtures of Calvinism and Arminianism. There are five-point Calvinists and five-point Arminians and three-point Calvinists and two-point Arminians. Many believers arrive at some sort of mixture of the two views. Ultimately, it is our opinion that both systems fail in that they attempt to explain the unexplainable. Human beings are incapable of fully grasping a concept such as this. Yes, God is absolutely sovereign and knows all. Yes, human beings are called to make a genuine decision to place faith in Christ unto salvation. These two facts seem contradictory to us, but in the mind of God they make perfect sense.
조직신학 -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
알미나안주의의 탄생 배경은 네덜란드 정부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쿠른헤르트(Coornhert)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를 시켜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을 반론하라 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르 사이에 신학논쟁이 있었는데, 논쟁의 내용은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이었습니다.
1608년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여 발전시켰고 마침내 40여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네덜란드의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의 요구에 따라 Remonstrance(항의서)라 불리는 신앙성명을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도르트회의(1619년)의 신학적 응답이 바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그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인성 전적 타락 자유의지 인정
예정 무조건 예정 예지하여 예정
속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은총 불가항적 은총 가항적 은총
성도 성도의 견인(보호) 성도 보호 불확실
결국 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9일까지 도르트회의가 열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승리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영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니테리언주의와 침례교,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은 5세기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17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신학 논쟁의 하나였습니다.
2024년 주일 설교 / 암송 성구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1월 14일(주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빌립보서 4:13)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chose for his inheritance.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고린도전서 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후서 13:13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신명기 7:6-7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For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The LORD your God has chosen you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o be his people, his treasured possession.
The LORD did not set his affection on you and choose you because you were more numerous than other peoples, for you were the fewest of all peop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