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포로 시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자면,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소명, 출애굽, 다윗왕조의 흥왕(興旺)과 몰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그 귀환 등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의미에 관하여 잘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이해와 성경이해 더 나아가 역사이해를 위해서 귀중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해나 평가가 단순치 않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관한 자료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확하게 70년으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수차례 언급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혹은 그것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70년으로 수용하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심도있게 다루면서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스라엘의 포로시기를 살펴보려면, 그 역사의 전후를 조사하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 후(B.C.722년)로부터 남왕조 유다가 멸망당할 즈음의 역사1)가 간단치 않으며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 외에도 여러 선지서자들의 글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와 함께 그 정황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앗수르의
바니팔(오스납발, B.C 668-632, 역대하 33:11-13; 에스라 4:10) 왕이 죽은 이후, 앗수르에서는 온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가는 큰 혁명이 일어났다(B.C 627-624). 그리고 이 혁명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의 파멸을 초래하였으며 당시의
바벨론은 이러한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되찾았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무너진 지 110년이 지난 후 유브라데스 강변의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결국 메데제국을 몰락시키고 세계 정세에 있어서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2)
그 후 바벨론은 B.C. 612년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키면서3) 결국 구약성경의 중심 배경이 되는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 지역은 애굽과 바벨론의 세력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4) 즉 고대로부터 계속이어져 오던 근동지역의 패자인 애굽의 세력과 신흥 바벨론의 힘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당시 국제정세를 흔드는 두 축이 되었다.
비록 예전의 최고 강국이었던 앗수르가 신흥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으나(B.C 612), 아직도 앗수르 지역에는 앗수르의 잔류군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도 아직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 틈을 타서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강국인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회복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로 알아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을 치려하였다. 그러자 앗수르의 남은 백성들은 하란으로 모여서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애굽과 대항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거점을 확복하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항거하며 하란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 때 바벨론의 바포폴리살 왕은 이를 감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들을 쳤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마저 격퇴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패권(覇權)의 윤곽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서 남왕조 유다의 요시야 왕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갔다가 전사하고 만다(B.C.609).5) 이러한 상황은 B.C. 605년까지 계속이어 오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Carchemisch) 전쟁에서 애굽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가고 애굽의 하수까지 남하하였다(왕하 24:7). 따라서 이 전쟁을 계기로 바벨론은 명실공히 고대 근동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갈그미스 전쟁 중에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1차 포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B.C.605년)6). 성경에서는 분명히 유다가 완전한 멸망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징조들을 보이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B.C.605년의 제1차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고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이라 하셨다.7)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활동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의 세력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애굽왕 바로느고의 봉신이었던 여호야김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B.C. 601년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왕하 24;1), 이로 인하여 B.C. 598년 12월에 다시금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왔다. 그 결과 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죽고, 이어서 18세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계승한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B.C. 597년), 시드기야(B.C. 597-587년)8)를 왕으로 세운다. 시드기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하여 바벨론에 항거하였는데, 결국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온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각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 역사를 정리해보자면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바벨론은 유다를 치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를 잡아갔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상류층의 인사들이 함께 끌려간 것으로 보는데(단 1:1-6) 이것이 이스라엘의 제1차 바벨론포로가 된다. 제2차 바벨론포로는 B.C. 597년에 일어났는데, 이 당시에 끌려간 유대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에스겔 선지자를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말과 관계되는 제3차 바벨론 포로는 B.C. 586년에 이루어졌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짓밟히게 되고 또한 예루살렘성전은 시드기야 9년에 포위되어 결국 시드기야 11년(B.C. 586년 7월)에 완전히 함락되고 만다. 이 때 시드기야 왕은 몰래 도망을 치다가 잡혀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으며, 자신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을 뽑히고 또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400여년 전통을 이어온 솔로몬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때부터 디아스포라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한 기한이 차게 되어, 그들이 포로 잡혀간 지 약70년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허가를 받았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 세 차례(B.C.605, 597, 586)에 걸쳐 진행되었듯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의 귀환하는 것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제1차 귀환은 B.C.538년에 왕통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그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49,897명이 귀환하였다(1:5-2:70)9).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제2차 포로귀환은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B.C. 457년(아닥사스다왕 7년)에 일어났는데, 에스라의 인도 하에 1,754명이 귀환하였다(스 8:1-14)10). 그리고 제3차 귀환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하였다.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그 귀환에 관하여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9:1-2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11)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12) 하신 것이니라”
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는 에스라서13)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1-2)14)
여기에 등장하는 고레스15)는 B.C.559-53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 B.C.538년에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포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B.C.605-538년이므로 67년이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제2차 혹은 제3차 바벨론 포로로부터 바벨론포로 기한을 규정한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란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간과하고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향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고 지나간다. 첫째, 실제로 67년이지만 마치 70년으로 생각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67년이나 70년 별 차이가 없고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작업인 듯이 보일지 몰라도, 이 부분을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과 풀리지 않는 다른 많은 문제들 속에 파묻혀 슬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벨론 포로의 70년이란 것은 상징적인 수로 인식하며 그 해석을 첨부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자면, 매 7년이면 안식년이고 또 이런 안식년의 10번(완전수)을 곱하는 것(7X10=70)으로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충분한 안식을 취한 후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 번째의 설명으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만큼 안식을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와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고 발전시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심판 중에 가장 혹독한 심판으로 철저한 징벌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서 뽑혀 이방의 땅으로 그리고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권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사상과 관계된다. 두 번째 입장은 이것에 더 나아가 대하 36:21에서처럼 ‘안식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생활 70년은 심판의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의 자리에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고 회복시키는 분명한 소망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 심판을 통하여 정화되고 정결케되어 새로운 시대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며 소망을 가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동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67년을 70년으로 주장하기에는 그 마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을 다음 단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의 사명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학개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학개’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나 혹 그곳에서부터의 포로귀환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학개서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다만 제2성전건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16) 그러나 이 성경을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먼저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포로이후의 역사에 관하여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B.C.539년에 고레스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였고, 그 이듬해에 모든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도록 선포하였다. 당시에 약 5만 가량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열정과 의욕을 가지고 황폐한 땅에 돌아와 정착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성읍들도 다 재건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만들고 또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먼저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렸고(에스라 3장) B.C.536년에 이르러서는 성전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의 기초만 공사하고(B.C.534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17)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흘러 B.C.520년이 되었다. 다리오가 왕으로 등극한 그 다음 해인 당시까지도 제2성전 공사에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부호들은 안락한 대궐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하지만 성전은 돌보지 않았고(학 1:4), 일반 백성들은 또한 여러 재해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공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학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재난과 농사일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며(학 1:10-11) 이것이이 주의 성전 건축을 게을리 한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바빴다(학 1:9). 이 때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로 성전 건축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결국 학개와 스가랴의 권고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성전재건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며 결국 B.C.516년에 제2예루살렘 성전이 완공하게 된다. 새롭게 완성된 성전이 비록 예전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위용이나 웅장함이 없으나18) 더 영광스러울 것을 말씀19)하시며 이 부분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와 은혜와 감격의 말씀으로 부어주신다.20)
물론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이 B.C. 520년 이전이나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21)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1-2)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권면하는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우리의 사고를 더 확대해보자.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이라고 하였으나, 그 년수가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너지고 성전이 재건되기까지의 기간을 따져보면 공교롭게도 70년이 된다(B.C.586-516). 만일 이 문제를 우연에 의한 70년으로 보지 않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전이 훼파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이 기간이 70년이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남은 자 사상”이기에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전 혹은 이후의 역사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혈연적 이스라엘이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역적으로 혹은 혈연적으로 한정되는 그룹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많은 본문을 볼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질과 관계된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한 범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선포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더 나아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등장하는 것을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나라의 백성으로 예배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이스라엘은 아니다. 물론 혈연과 지연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는 없지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70년이 가지는 의미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 문제가 이스라엘의 본질과도 밀접한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즉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그분의 간섭과 인도와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절망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간은 성전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영적인 방황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이 바로 70년이다.
이러한 성전의 문제는 구약으로 끝나지 않고 신약에서도 중요한 논쟁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되심을 말씀하는 것과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그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구약시대의 사고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며 또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 개념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회막을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진중에 있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회막은 평상시에는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사상) 또 그들을 다스리는 상징이기에,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회막은 이스라엘의 이동시에는 온 백성보다 앞장서서 나가기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아가는, 즉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통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학 1:5-7)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교회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지 약 100여년 후에 바벨론의 침입이 있었고 또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는 견고하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훼파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며 거룩하고 장엄하고 찬란하게 여기던 성전,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온 천하가 다 무너져도 살아계신 이 하나님이 계신 이 성전은 결코 무너지거나 패함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하며,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치며 확신하며 보증하며 보장했던 그 성전(렘 7:1-10)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되던 그릇과 모든 것들은 이제 이방신들을 섬기는데 이용되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왕은 눈이 뽑히고 목배임을 당하였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 이스라엘과 왕족들은 또 노예처럼 이방 땅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사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며 이방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인식하며 대하였는데, 이제는 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힘든 포로 생활을 끝내고,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그 기간 역시 여전히 힘든 기간이며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어 그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이끌던 성전이 없어진 지 오래며 또 그 성전을 재건하자니 방해도 있고 또한 각자의 일들이 많아 그 일은 더욱 외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또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스가랴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의 회복 곧 성전의 재건을 무엇보다 먼저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22)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학개의 등장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일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수차례 경고로 주신 어려움 가운데서 그 어려움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더욱 성전 건축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진척 또한 시키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시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 즉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곧 그들이 성전이 없이 지내야만 하는 70년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 성전재건의 일을 담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것을 일깨우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제2성전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결국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학개 2:9에서의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라는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23) 그러나 이 일은 옛 조상 다윗이 많은 돈으로 준비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국가적인 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스스로를 자각하며 또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백향목이나 은금과 같은 호사스러운 재료가 아니라24) 주위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학 1:8a). 즉 그들이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즉시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외형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으로 은혜를 더하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 1:8b),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
이 성전의 재건이란 단순하게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무너진 옛 다윗 왕권의 회복이나 그 영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간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솔로몬 성전과 같거나 비슷한 재료로 짓도록 명령하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스가랴서나 신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에 대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5) 즉 다시 세워진 성전 곧 회복된 시온과 예루살렘에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이 찾아오시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26)
적용 : 한국교회사에서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교회사를
정리하다 보면 여러 사건에 대하여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포로는 아니지만, 이런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3세기 말부터 세속권력에 의하여
교황이 로마에 있지 못하고 프랑스에 체류한 ‘교황의 바벨론 유수’를 들 수 있겠다.27)
또 다른 유명한 예가 바로 루터에게서 발견된다.
루터는 1520년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와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편의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등장하는 제목이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카톨릭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세 가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벨론 포로’ 상태28)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문맥을 같이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자. 현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북한” 혹은 “북한교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은 첨예한 주제여서 논자가 감히 화두를 던지기가 쉽지 않으나, 역사를 전공하는 자로서 역사이해에 관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북한의 실정을 여러 통로를 통하여 듣고 또 북한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고통을 안다. 이런 상황도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는가?
만약 이렇게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명명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그 원인 분석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쉽게 북한의 공산당을 큰 원인의 하나로 설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타당성을 가지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이 ‘교회(敎會)’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다시금 짚어보고자 한다.
오늘의
논지와 관련하여 논자는 1938년 9월9일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삼엄한 경비 곧 193명의 총대들 틈에서 약 100명의 경찰들이 그 총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가운데 각본대로
진행된 총회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으로 가결하고 말았다.29)
물론 일제시대에 일본의 핍박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 있다.
주기철 추모사업 등 여러 행사들이 있었음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에 대하여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물론 나중에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당의 억압과 핍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라는 영적인 단체를 고려한다면,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곧 교회의 교회됨을
스스로 무너뜨린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문밖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지 벌써 83년이 지났습니다(2021년 기준).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문제 통일문제 등에 관하여
고려해야할 시기이며 또 여전히 북한을 위하여 여러 가지 물질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돕고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생각하면서 현재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를 넘어서 마치 학개서에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처럼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라”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모습과 과거사를 추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학개 1:5, 7).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고, 먼저 한국교회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가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평양에 대하여 “동방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그 명성과 영화보다 더 큰 영광과 위로와 은혜로 한국교회 위에 부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기다린다.
주
1) 바벨론왕: 느부갓네살(B.C.605-562);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예루살렘 성전파괴,
페르시아(바사)왕: 고레스(Cyrus, B.C.558-530); 제1차 포로귀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다리오1세(Darius, B.C.522-4860); 제2성전 완공. 아하수에로(Xerxes, B.C.485-465); 에스더와
모르드개. 아닥사스다1세(Artaxerxes, Iongimanus, B.C.464-424); 에스라와 느헤미야.
2) 나보플라사르(Nabopolassar) 역대기를 참조하라.
3) 이 사건에 관하여서는 구약 성경의 ‘나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4)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i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15.
5) 왕하23:29-30과 대하35:20-27. 두 성경 본문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요시야 왕이 죽은 곳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6) 이 부분에 관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 시대적 배경은 여호야김은 아버지(요시야)와 동생(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 18대 왕으로 등극한다. 요시야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애굽에 의해 폐위되어 잡혀가고 형인 여호야김이 왕이 된다. 여호야김은 애굽과 앗수르의 남은 군사들이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통하여 바벨론을 배반했고(왕하24:1) 애굽편을 들었으나, 갈그미스 전쟁이 바벨론의 승리로 끝나자 결국 유다는 바벨론의 노여움을 샀으며 예루살렘은 점령되고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하여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하기 때문이다. 왕하 24:1절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올라오매....."에서 보듯이 예루살렘에 대한 느브갓네살의 정복은 열왕기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왕하24:1, 대하36:6,7 B.C. 605년). 그런데 이것을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렘25:1).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유다와 바벨론의 연대기 산출방식의 차이로 인정하며 B.C. 605년으로 인정한다.
7) 렘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하되”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8) 요시야의 아들이며 바로 앞 대의 왕인 여호야긴의 숙부.
9) “유다의 목백(왕자)”라고 하는 세스바살에 의해 42,360명, 노비 7,337명 그리고 노래하는 자 200명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슬바살과 스룹바벨과의 관계도 논의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본 논고에서는 다루지 않음.
10) 남자 1,496명, 레위인 38명 ,수종자 220명.
11) 다니엘 6:1에 나오는 다리오와 동일 인물로 보이며, 그가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Astyages왕)을 이어서 왕이 되었다고 하며 이를 원년(元年)이라고 규정하는데, 다리오가 부친을 계승하여 매데의 왕으로 취임한 것으로 보지 않고 대신에 고레스가 물려받은 뒤이며 여기의 다리오는 바벨론의 한 지역인 갈대아 지방의 왕으로 취임한 것으로 간주한다.
12) 렘 25:11-13과 29:10의 내용을 가리키며 실제로는 70년이 아니라 아무리 많이 잡아도 67년이다.
13) 에스라서에 기록된 것은 연대적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성전 건축 때의 일과 성벽 건축 때의 일이 겹쳐서 등장하며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00여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성경이 일반 역사의 기록을 따르지 않고 구속사라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역사 기록이라고 한다.
14) 비교. 대하 36:22-23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15) 참고. 이사야 44:28-45:4. 페르시아(바사)왕인 고레스(Cyrus)는 B.C. 558-530년 동안 왕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 스5:13에서는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더 특이한 것은 스6:22에서는 “앗수르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표면적인 역사 이해로 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역사적인 오기(誤記)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각주에서 언급하였듯이 독특한 구속사적인 안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분명한 역사적인 오기처럼 보여도 그 문맥에 있어서 더 타당성을 지닌다. 왕하 17장에 나타나는 “앗수르 왕”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을 들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심판하고 천지 사방으로 흩으시는데, 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을 새로운 언약공동체로 회복시키는 것이기에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고레스는 비록 페르시아 왕이지만 앗수르 왕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라5장에 나타나는 “바벨론 왕”이란 표현은 그 문맥에서 본다면 성전파괴와 관련된 표현으로 “바벨론 왕”을 언급하고 있다. 즉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기구가 옮겨졌는데, 고레스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실패와 징벌에서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기에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진 역사기록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6) B.C.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p.464.
17) 참고 W.E. Hogg, 제2성전의 기초, 윤영탁 역 in: 구약신학논문집(5) (합동신학교 출판부, 1988) p.219-228.
18) 학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19) 학 2:6-9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이 시기를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다리오 왕(Danus Hystapes, B.C.522-485) 2년 6월 1일에 있었다. 그리고 공사는 1:15절에 나타나듯이 24일에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달력에 의하면 유월은 1년 중에 가장 바쁜 계절인 추수기에 해당한다. 결국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지막 추수에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인데, 성전 공사를 재개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전건축은 육체의 생명과 관계되는 추수보다 더 중요하며 근본적인 것이기에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2) C. Hassell Bullck,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rophetic Books, 류근상 역, 크리스챤출판사 2001, p.419-430.
23) 이 사실에 대한 더욱 분명한 증거는 학개의 동역자이며 동시대의 선지자로 부름받았던 스가랴에 의해서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슥 6:12-13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돌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참고 T.V. Moore, 스가랴주석, 윤영탁 역 (서울: 엠마오 1983). p.96-102.
24) 왕하 6:11-7:51
25) 윤영탁, 학개 2:18과 제2성전 재건, in: 구약신앙과 신학, (엠마오, 1991), p.156.
26)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와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와 비슷한 구절로는 사 2:1-2을 고려해 볼 수 있다.
27) 프랑스 왕인 필립 4세 세속 권력이 신장하자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싸워 아나니 사건(1303)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1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인 클레민스 5세를 강력하게 간섭하여 로마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우르바누스 5세 때 일시적으로 로마에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여전히 아비뇽에 잔류하였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교황청이 본격적으로 로마의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28)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금하는 것과 화체설 그리고 미사가 희생제물이라는 것에 대하여.
29) 총회 60년사, 1973, p. 30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追)히 국민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항국 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