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풀러신학대 박사논문
북한에서도 진정한 종교 활동이 가능할까?
기독교의 경우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이
남한 교회들의 지원을 받아 세운 위장기관인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제외하고는 표면상 교회란 없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지하교회가 북한 내 소수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소식이 탈북민들의 증언을 통해 간간히 전해져 오긴 했지만 공신력 있는 자료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거의 없었다.
최근 미국 풀러신학대에 제출된 박사논문이 북한 지하교회에 관한 주제와 구체적 통계를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이반석 목사(모퉁이돌선교회)가 금년 5월 이 대학에서 수여할 박사학위 논문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선교학적 이해’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북한 내 교회와 목회자들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이 목사는 논문에서 1945년 해방 이후 김일성정권의
기독교 탄압이 노골화될 때부터 2006년까지 북한에서 순교한 목사들이 밝혀진 것만 354명이 되는 것으로 집계했다.
해방 전후와
6·25 전쟁 중 대부분의 북한지역 목회자들은 남하했는데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 교회를 지키기 위해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고려한다면 순교한 목회자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김일성은 1971년 한 일본 언론인(미노베 기자)을 만나 “북조선에서 모든 교회는 사라졌다”고 말한 바 있다고 한다.
북한교회의 목회자들을 철저히 색출해 모조리 처형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하지만 논문은 그 시점 이후에도 일부 목회자들이 지하교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드물기는 하지만 일부는 현재까지도 생존해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논문은 이들의 신분이 공개돼 처형당하는 일이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이들의 안전을 위해 구체적 기술은 삼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06년 사이 목회자의 신분이 밝혀져 처형된 이들은 77명에 달하며 이중 4명은 목사로 밝혀졌다.
논문을 통해 밝혀진 순교사례들하나. 2,000명 규모 지하교회 사건 이 목사의 박사논문은 또한 북한에서 발생한 기독교박해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지하교회 사건은 1957년에 발생한 이만화 목사와 교인들의 순교사건이다.
평안북도 용천군 지역에서 교인 2,000여명이 참석하는 지하교회를 이끈 이만화 목사는 10여개의 협동농장에서 500여개의 구역회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김일성정권 당국에 노출된 것은 1957년 8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이만화 목사는 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석하지 말라고 독려했고 이에 교인들은 투표장에는 갔지만 투표용지를 투표함(흑백함)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투표함에서 나온 투표용지와 유권자 숫자가 2000표가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 사회안전원들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판단해 평안북도 용천군 일대를 집중하여 수색했다. 비밀경찰 200여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여명이 용천지역을 급습하여 가택과 농장 등을 샅샅이 조사했고 때마침 주일예배를 드리던 두 가정이 사회안전원들에게 들켜 체포되자 이만화 목사가 자진 출두해 지하교회의 실상이 드러나게 됐다. 이만화 목사는 주민들을 한 사람씩 은밀히 전도해 오랜 시간에 걸쳐 교인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발각된 두 가정의 가족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지하교회의 실상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산악의 토굴과 숯가마 등을 이용해 예배를 인도하던 교회 지도자 130여명이 검거됐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이만화 목사를 비롯한 36명이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유배를 가거나 감옥으로 간 것으로 밝혀졌다.
평북 ‘카타콤’ 사건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동굴에서 생활했던 로마시대의 ‘카타콤’ 비화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북한 사회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것이 로마시대의 카타콤과 같은 고립무원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1966년 평안북도 박천군 상추리에서는 야산의 한 토굴에서 13명의 지하교인들이 발각돼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머리털과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았고 5년 동안 계속된 토굴 기도생활에 무릎이 쪼그라들어 잘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전에 김 목사라는 이를 지도자로 따랐는데 1961년 김 목사가 체포된 후 모두 행방불명됐다가 5년 만에 토굴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이들은 박천군 중남리, 청룡리, 청산리 등에 거주했으며 김 목사가 전도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김 목사가 처형된 후 그가 전도한 신자들은 대부분 체포돼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이들 가운데 13명이 남아 토굴 속에서 살며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평양 하수구 지하교인 사건
또 다른 카타콤 사례는 이듬해인 1967년에 드러났다.
그해 9월경 평양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수년간 평양의 지하 하수구에서 살아온 기독교인 집단이 발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평양 시내가 홍수로 침수되자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던 기독교인들이 지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행색을 이상히 여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당시 평양에 살던 탈북민 이민복 씨(자유북한인연합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10살 때인데 대동강이 범람해 둑이 터지면서 아파트 아래층에 잉어가 들어와 잡힐 정도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6·25전쟁 때부터 20년 가까이 하수도 속에 숨어 있던 ‘악질 반동들’이 나타났는데 햇볕을 못 봐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도 치렁치렁 길게 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지하에 살던 기독교인들로 밝혀졌고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려 달라고 당 앞에 빌 줄 알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하나같이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남 120명 처형 ‘박 목사’ 사건
1968년 6월에는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에서 세칭 ‘박 목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동네에서는 유언비어가 자주 퍼지고 김일성 초상화가 없어지는 일도 일어났다. 이에 사회안전원들이 밤낮으로 감시한 끝에 이 지역으로 강제 전출된 개성 출신 이주민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범인으로 단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가운데 박 씨라는 사람을 이주민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국은 아무 증거도 없이 그에게 반동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함경북도의 집단수용소로 보내는 조치가 취했는데 이삿짐을 꾸리는 과정에서 숨겨둔 성경책과 찬송가가 노출됐다고 한다.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책을 몰래 파내 짐 속에 넣으려다가 발각된 것이다. 보위부는 이를 단서로 고문을 가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목사이며 그의 지도 아래 적어도 10년 이상 운영되어온 비밀 지하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120여명의 성도들도 함께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처형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함흥시 지하교회 사건
탈북민 이영선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74년 10월 함흥시 만세교에서 처형된 김태용 목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 목사는 함흥시 반룡구역 용마동 지역에 해방 전부터 있었던 한 옛날 교회의 지하실에 비밀스럽게 지하교회를 꾸미고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한 사람씩 전도한 성도들이 모여 작은 교회를 형성했다. 이들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 이 지하교회 교인들은 모두 36명이었고 18세부터 78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모이던 교회건물은 전쟁 중에 폭격에 의해 파괴돼 지하실 입구가 막혀 있어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 교회가 서 있던 그 자리를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건물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 김태용 목사가 교인들을 동원해 지하실을 수리하여 교회로 꾸몄다고 한다. 이 지하교회는 20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한 대표가 서로 왕래하면서 회담을 갖게 되자 김일성이 주택지 재개발을 시작했고 그때 미처 위장을 하지 못한 지하실 교회가 탄로 난 것이다. 이때 김 목사는 돌보고 있던 36명의 성도들과 함께 모두 사회안전원에 체포됐고 얼마 뒤 함흥시 만세교 다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 사건
함경도를 중심으로 40년 이상 지하교회를 지켜온 목사도 있었다. 이름은 이윤심 목사. 함경남도 금야군 병원에 양의사로 재직하던 탈북민 최주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 목사는 만성위장염으로 치료를 받으러왔다가 나중에 의사인 자신에게도 복음을 전해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 목사의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해방 전 세워진 ‘칠골교회’에서 강량욱(1904~1983·북한 국가부주석)과 목사생활을 같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군정 당시 강량욱은 김일성과 함께 기독교를 배교하고 이 목사의 아버지를 잡아 총살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목사는 일생을 공산주의에 대한 원망을 품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도하고 지도한 지하교인들은 대부분 북한의 엘리트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40년 이상을 은밀히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1996년 10월 함경남도 금야군 용남리에서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흔히 알려진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와 영향을 미치던 교인의 숫자가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황해남도, 자강도까지 약 180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키워낸 교인들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교회의 신앙의 맥을 지켜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창범 편집위원· 북한구원운동 사무처장 cbkim47@hanmail.net
자료출처 /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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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김길성 명예교수(총신대)가 ‘신앙고백서와 총회신학정체성 연구-통합 교단의 신앙고백서 평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발제했다.
그는 “합동과 통합은 1907년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채택한 12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공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공유하고 있다”며 “하지만 통합은 12신조에서 ‘최후 심판 때, 신자와 불신자의 상태’를 서술한 제12조의 ‘불신자의 정죄와 형벌’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다”고 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할 때도 1647년에 제정된 원문이 아닌, 미국 북장로교회(PCUSA)의 ‘1903년 신앙고백서’ 개정안을 채택했다. 이는 원문에 선언문 등이 추가된 것으로, 이중예정에서의 유기 교리를 포기했고 칼빈주의 5개조 중 ‘제한속죄’를 부인했다”며 “통합교단은 여성안수 허용을 위해 이를 골자로 한 대요리문답을 공식문서에서 삭제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상원 교수(총신대)는 ‘개혁주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 현대사회의 윤리적인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최근 등장한 젠더주의 성윤리는 성별을 주관적 인식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성별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서 정해주신 것으로, 인간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별은 남·여뿐이며, 다른 추가적인 성은 없다”고 했다.
이 교수는 “동성 간 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성경은 비도덕적 행위로서 명확하게 금지하고 있다”며 “수정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인간생명이 시작되기에, 수정 이후의 전 과정에서 행해지는 모든 낙태는 살인행위다. 태아의 생명권은 임부의 행복권에 절대적으로 선행하지만, 태아와 임부의 생명권이 서로 충돌할 시 임부의 생명권이 선행한다”고 했다.
이상웅 교수(총신대)는 ‘죽산 박형룡과 예장합동의 신학적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죽산 박형룡 박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1931년)로부터 서울 장로회신학교와 총신대에 이르기까지(1972년) 교수 생활을 이어오며 그를 비판했던 신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의 ‘지로적 신학’으로서의 역할을 은연중에 담당하고 있다”며 “죽산은 정통(orthodox)이란 다수의 우세한 의견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옳은 의견이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특히 “그가 저술한 ‘교의 신학’(1964-1973년)은 지금도 합동 강도사 고시 조직신학 과목의 모범 답안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죽산은 이 책에서 자신만의 새롭고 독창적인 신학 이론을 창작하지 않고,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같은 서구 정통 신학자들의 신학 사상을 잘 요약해 정리했다”고 했다.
임종구 교수(대신대)는 ‘예장합동의 신학정체성 연구-기장 제6문서의 분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임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신학과 입장을 표명한 제6문서는 서문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정신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천명했다. 이는 유색인종 해방, 농촌사회 발전, 산업시대 인간화 회복 등 이 땅에서의 샬롬 만들기에 집중하지만 죽음 이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결국 정치·사회·경제적 구조의 모순 해결에 매몰돼 예수 이름으로 얻는 죄 사함, 영혼 구원을 경시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장 제6문서는 ▲에큐메니칼 ▲사회구원 ▲칼 바르트 신학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추구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성경해석에서 자유주의 신학 등의 입장에 서 있다”며 “조선신학교의 중심이었던 김재준 박사의 성경유오설(聖經有誤說)에서 촉발된 조선장로교단의 분열 등을 미뤄볼 때 교단의 주춧돌은 성경에 대한 바른 계시관”이라고 했다.
김요섭 교수(총신대)는 ‘제네바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의 진리에 기초해 바른 신앙을 고백함으로 교회 개혁에 충실하고자 했다”며 “제네바·프랑스·스코틀랜드·벨기에·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들 모두는 첫째,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교회의 기초로 삼아 어떤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교회의 영속성을 고백하고 소망했다. 대부분 신앙고백서들은 로마 가톨릭의 박해 속에서 제정되고 채택됐다”고 했다.
김 교수는 “둘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심이라는 성경적 원리를 강조해 교회 개혁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했다. 즉 지상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종말론적 성취를 소망하며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천명했다”며 “이런 개혁을 위해선 스스로의 자격이나 공로 주장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겸손이 선행됐어야 했다. 그러면서 교회 안의 모든 인간적 요소들을 상대화했다”고 했다.
이풍인 교수(총신대)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앙 고백들과 총회 신학정체성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라고 번역됐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은 ‘주’ 대신 2인칭 대명사 ‘당신’이 사용됐다”며 “야훼를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다.
이는 인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부활 후의 고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단 정체성 선언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억할 점은 신앙고백이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라며 “삶의 정황이 신앙고백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 선언문도 단순한 신학적 입장이 아니어야 한다.
즉 성도들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생명력 있고 생동감 넘치는 형태로 표현돼야 한다”고 했다.
김광열 교수(총신대)는 ‘개혁신학의 성화론과 총회 신학정체성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우리 총회는 죽산 박형룡 등이 가르쳐온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역사를 강조하면서 ‘제2축복 신학’ 등 다른 복음주의 신학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사랑하는 개혁신학의 성화론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를 위해 미국 개혁신학자 존 머리(John Murry)의 결정적 성화론에 주목해야 한다.
즉 로마서 6장 2절에서 죄의 통치란 과거에 이미 무너졌고,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신자들은 미래가 아닌 현재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누릴 수 있게 됐다며 이는 교회뿐만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했다”며 “존 머리의 성화론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과 주권을 드러내, 한국교회가 성화뿐만 아니라 동성애·낙태 등 대사회적 문제에도 적극 싸울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김성태 명예교수(총신대)는 ‘예장 합동총회의 교회 연합과 협력의 성경적, 신학적 원리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예장 합동총회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정당한 분열도 있지만 교권 다툼의 원인으로 분열을 초래한 것도 있었다”며 “WEA 교류 논쟁도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려는 선제적 시도인지, 아니면 특정 신학 사조에 따른 파벌의 교권 장악 시도인지 그 진위를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근거한 환란 이전 교회의 휴거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에 심각한 도전과 왜곡을 가져다줬다.
역사적 전천년설 및 무천년설, 후천년설을 이단시 하는 신근본주의 종말신학을 경계해야 한다”며 “또한, 개혁주의 성령론에 있어서도 기사와 표적 등 기적은사의 중단론을 개혁주의 성령론의 유일무이한 정통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합동과 통합은 1907년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채택한 12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공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공유하고 있다”며 “하지만 통합은 12신조에서 ‘최후 심판 때, 신자와 불신자의 상태’를 서술한 제12조의 ‘불신자의 정죄와 형벌’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다”고 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할 때도 1647년에 제정된 원문이 아닌, 미국 북장로교회(PCUSA)의 ‘1903년 신앙고백서’ 개정안을 채택했다. 이는 원문에 선언문 등이 추가된 것으로, 이중예정에서의 유기 교리를 포기했고 칼빈주의 5개조 중 ‘제한속죄’를 부인했다”며 “통합교단은 여성안수 허용을 위해 이를 골자로 한 대요리문답을 공식문서에서 삭제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상원 교수(총신대)는 ‘개혁주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 현대사회의 윤리적인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최근 등장한 젠더주의 성윤리는 성별을 주관적 인식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성별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서 정해주신 것으로, 인간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별은 남·여뿐이며, 다른 추가적인 성은 없다”고 했다.
이 교수는 “동성 간 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성경은 비도덕적 행위로서 명확하게 금지하고 있다”며 “수정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인간생명이 시작되기에, 수정 이후의 전 과정에서 행해지는 모든 낙태는 살인행위다. 태아의 생명권은 임부의 행복권에 절대적으로 선행하지만, 태아와 임부의 생명권이 서로 충돌할 시 임부의 생명권이 선행한다”고 했다.
이상웅 교수(총신대)는 ‘죽산 박형룡과 예장합동의 신학적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죽산 박형룡 박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1931년)로부터 서울 장로회신학교와 총신대에 이르기까지(1972년) 교수 생활을 이어오며 그를 비판했던 신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의 ‘지로적 신학’으로서의 역할을 은연중에 담당하고 있다”며 “죽산은 정통(orthodox)이란 다수의 우세한 의견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옳은 의견이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특히 “그가 저술한 ‘교의 신학’(1964-1973년)은 지금도 합동 강도사 고시 조직신학 과목의 모범 답안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죽산은 이 책에서 자신만의 새롭고 독창적인 신학 이론을 창작하지 않고,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같은 서구 정통 신학자들의 신학 사상을 잘 요약해 정리했다”고 했다.
임종구 교수(대신대)는 ‘예장합동의 신학정체성 연구-기장 제6문서의 분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임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신학과 입장을 표명한 제6문서는 서문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정신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천명했다. 이는 유색인종 해방, 농촌사회 발전, 산업시대 인간화 회복 등 이 땅에서의 샬롬 만들기에 집중하지만 죽음 이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결국 정치·사회·경제적 구조의 모순 해결에 매몰돼 예수 이름으로 얻는 죄 사함, 영혼 구원을 경시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장 제6문서는 ▲에큐메니칼 ▲사회구원 ▲칼 바르트 신학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추구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성경해석에서 자유주의 신학 등의 입장에 서 있다”며 “조선신학교의 중심이었던 김재준 박사의 성경유오설(聖經有誤說)에서 촉발된 조선장로교단의 분열 등을 미뤄볼 때 교단의 주춧돌은 성경에 대한 바른 계시관”이라고 했다.
김요섭 교수(총신대)는 ‘제네바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의 진리에 기초해 바른 신앙을 고백함으로 교회 개혁에 충실하고자 했다”며 “제네바·프랑스·스코틀랜드·벨기에·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들 모두는 첫째,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교회의 기초로 삼아 어떤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교회의 영속성을 고백하고 소망했다. 대부분 신앙고백서들은 로마 가톨릭의 박해 속에서 제정되고 채택됐다”고 했다.
김 교수는 “둘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심이라는 성경적 원리를 강조해 교회 개혁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했다. 즉 지상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종말론적 성취를 소망하며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천명했다”며 “이런 개혁을 위해선 스스로의 자격이나 공로 주장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겸손이 선행됐어야 했다. 그러면서 교회 안의 모든 인간적 요소들을 상대화했다”고 했다.
이풍인 교수(총신대)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앙 고백들과 총회 신학정체성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라고 번역됐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은 ‘주’ 대신 2인칭 대명사 ‘당신’이 사용됐다”며 “야훼를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다.
이는 인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부활 후의 고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단 정체성 선언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억할 점은 신앙고백이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라며 “삶의 정황이 신앙고백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 선언문도 단순한 신학적 입장이 아니어야 한다.
즉 성도들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생명력 있고 생동감 넘치는 형태로 표현돼야 한다”고 했다.
김광열 교수(총신대)는 ‘개혁신학의 성화론과 총회 신학정체성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우리 총회는 죽산 박형룡 등이 가르쳐온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역사를 강조하면서 ‘제2축복 신학’ 등 다른 복음주의 신학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사랑하는 개혁신학의 성화론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를 위해 미국 개혁신학자 존 머리(John Murry)의 결정적 성화론에 주목해야 한다.
즉 로마서 6장 2절에서 죄의 통치란 과거에 이미 무너졌고,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신자들은 미래가 아닌 현재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누릴 수 있게 됐다며 이는 교회뿐만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했다”며 “존 머리의 성화론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과 주권을 드러내, 한국교회가 성화뿐만 아니라 동성애·낙태 등 대사회적 문제에도 적극 싸울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김성태 명예교수(총신대)는 ‘예장 합동총회의 교회 연합과 협력의 성경적, 신학적 원리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예장 합동총회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정당한 분열도 있지만 교권 다툼의 원인으로 분열을 초래한 것도 있었다”며 “WEA 교류 논쟁도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려는 선제적 시도인지, 아니면 특정 신학 사조에 따른 파벌의 교권 장악 시도인지 그 진위를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근거한 환란 이전 교회의 휴거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에 심각한 도전과 왜곡을 가져다줬다.
역사적 전천년설 및 무천년설, 후천년설을 이단시 하는 신근본주의 종말신학을 경계해야 한다”며 “또한, 개혁주의 성령론에 있어서도 기사와 표적 등 기적은사의 중단론을 개혁주의 성령론의 유일무이한 정통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