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50장

 야곱의 이동 경로


지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가장 잘 나온지도입니다.

출처는 성서문화연구소입니다.



1. 브엘라헤로이(창25:19-34절)

 이삭이 헤브론에서 아브라함을 장사지낸 후 자신이 거주하던 브엘라헤로이로 돌아갑니다. 흉년이 들어 그랄로 이동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야곱과 에서를 낳게됩니다. 야곱과 에서 역시 부모님과 함께 브엘라헤로이에서 청년기까지 보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엘라헤로이는 위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브엘세바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위

  치하며, 브엘세바와의 거리는 약90km 정도가 됩니다.)


2. 그랄

 야곱이 그랄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이삭이 흉년으로 인해 그랄로 이주했을 때 같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후에도 계속 부모님과 같이 살았으니 중간에 독립을 했다다가 다시 합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 브엘세바(창27:1~28:4절)

 이삭이 아비멜렉과의 계약 후 브엘세바에 정착했을 때 야곱과 에서도 같이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야곱이 리브가와 짜고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4. 벧엘(창28:10~22절)

 야곱은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후 꽁지가 빠져라 벧엘까지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드디어 이삭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5. 하란(창29장~31:16절)

 하란에 있는 삼촌인 라반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곳 '하란'이라는 지역은 고대 오리엔트 왕국 중 하나였던 미탄니 왕국의 수도 였으니 야곱은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망명을 갔다고 봐야하나요? 아무튼 야곱은 이곳에서 무려 20년 동안 목축을 하며 많은 가축과 아내들과 자식들을 얻게 됩니다. 참고로 하란에 있을 때 등장하는 '밧단아람'이라는 지명은 우리나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하란은 행정구역상 밧단아람 안에 속해 있는 도시인 것입니다.


6. 길르앗 산지(창31:17-55절)

 성경에는 '길르앗 산' 이라고 등장 합니다. 야곱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라반이 부랴부랴 쫒아서 야곱과 마주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산은 어떤 특정한 산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이 일대의 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정복시대에 훗날 도피성으로 지정된 길르앗 라못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지도에도 길르앗 라못(라못 길르앗)에서 라반과 마주친 것으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라반과 언약을 맺고 떠나게 됩니다.


7. 마하나임(창32:1-21절)

 사실 마하나임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다는 것을 통해 얍복강 보다는 북쪽에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8. 브니엘(창32:22-33:15절)

 야곱이 밤에 가족들을 모두 얍복나루 건너로 보내고 자신도 건너려 할 때 하나님(의 사자)이 나타나 밤새 씨름을 하고 이긴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9. 브니엘 맞은편

 성경에 장소가 나오지는 않지만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긴 후 얍복강을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야곱보다 먼저 강을 건넜던 가족들과 함께 에서를 맞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의 명칭은 나오지 않습니다.


10. 숙곳(창33:17)

 에서와 헤어진 후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숙곳에서 잠시 머무릅니다. 위 지도의 6번 위치가 숙곳입니다. 7번은 왜 표시를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1. 세겜(창33:18-34:31절)

 드디어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 세겜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아브하람이 헤브론의 막벨라 굴을 산 이후 공식적으로 히위 족속인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이곳의 땅 일부를 사게됩니다. 하지만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야곱의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이들을 모두 죽이는 보복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들은 재차 보복을 당할 위험이 있어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12. 벧엘(창35:1-15절)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다시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쓰라는 명령을 받게됩니다.


13. 베들레헴(에브랏)(창35:16-20절)

  아마도 벧엘에 있는 동안 이삭의 임종을 듣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삭이 거주하던 헤브론(기럇 아르바)으로 가던 중 임신 중이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던 길을 멈추고 베들레헴에서 라헬의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14. 헤브론(기럇 아르바)(창35:27-29절)

 야곱은 헤브론에 도착해서 에서와 함께 이삭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곳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15. 브엘세바(창46:1-4절)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 브엘세바에 들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16. 애굽(고센)(창46:5~)

 야곱과 그의 일행이 애굽 땅에 들어가게 되고,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땅에 거주할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죽을 때 까지 이곳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후 그의 유해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의해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야곱의 여정이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 요셉은 야곱이 죽기 전에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부탁하여 맹세시킨 사실을 이제 성실히 지키려 하고 있다(47:29).

내가 파서 둔 묘실
-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막벧라굴을 언급하면서(23:20) 그것을 자기가 팠다고 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막벨라에 있는 그 굴을 확장하였거나 자기의 묘실을 미리 준비하여 놓았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는 왕의 특별한 승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장례 행렬은 그 규모가 컸으며 장지가 애굽의 국경 밖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스스로 왕의 인허를 원했다고 볼 수도 있다.

* 장사하다(6912) 카바르(qâbarקָבַר

1. 묻다
2. 니팔형 : 묻히다
3. 피엘형 : 묻다
발음 / 카바르[ qâbar ]
관련 성경 / 장사하다(창 23:19, 왕상 13:31, 호 9:6), 묻다(왕상 2:31), 장사되다(신 34:6, 삿 10:5, 왕상 15:8), 매장하다(시 79:3, 렘 16:4), 장사지내다(전 8:10), 매장되다(왕상 2:34, 렘 16:6), 묻히다(욥 27:15, 렘 8:2, 20:6)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어려서 남달리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감정이 풍부하고 부모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대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장례 준비
야곱의 장례식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치러졌습니다. 첫째 애굽의 방식과 가나안 방식 및 다른 이방인들의 방식을 모두 수용했습니다. 여기서 향료를 넣었다는 것은 시체가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 장의사의 기능은 세계 최고수준이었습니다. 한번 미라를 만들면 수천년씩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애굽에는 못 가 보았지만 영국 대영 박물관에 가보면 애굽에서 발굴해 온 미라가 사람 형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시신에 향료를 넣는 일에 며칠 걸렸다고 했습니까?(40일) 그리고 따로 애곡하는 기간으로 70일을 정해서 온 애굽 사람이 이방인 야곱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보통 왕이 죽으면 72일간 문상 기간을 가졌답니다. 야곱은 총리의 아버지였기에 70일간 애도의 기간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모든 애굽 사람의 몸에 향료를 넣었을리 없고 적어도 귀족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향료를 넣었으리라 추측할 때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 국부의 죽음에 버금 갈 정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호화로운 장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쓸쓸한 장례식보다는 얼마나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또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효도하는 모습도 되는 것이며 후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경애심과 자랑스런 긍지를 갖게 하는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장례 광경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게도 할 수 있기에 사치스럽게까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평상시 내핍을 강조했던 요셉의 정신과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모순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 절차를 갖게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애굽의 예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위치 이상의 관직을 가진자는 수준에 맞는 장례식을 치루어야 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가나안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루어 애굽인들을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면 요셉에게 은혜 입은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굳이 종교나 문화의 충돌을 피하고 현지의 관습을 무시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요셉으로서는 족장시대가 마친 것을 나타내는 의식도 은연 중 내포 되었다고 본다면 그렇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룰 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윈 그 슬픔의 와중에서도 신하로서의 예의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받들어 가나안 땅 조상의 묘실에 장사하고 오겠다고 정중한 허락을 요청했고 충분한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요셉은 실로 겸비하고 충직한 인물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아버지와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500km나 되는 장지까지 가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과 생전에 맺은 약속일지라도 분명히 지켜야 합니다.

2. 장례 행렬(창50:7-14)
7-9절에 보면 야곱의 장례 행렬에 수행한 애굽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요셉의 가족은 물론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장로들과 애굽땅의 모든 장로들까지 따랐다고 했습니다. 실로 장엄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창43:32절을 참고하면 17년전 요셉이 총리가 된지 8년이 지난 후에도 애굽인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부정하다고 식탁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 한 사람의 높은 인격으로 인하여 모든 애굽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 한사람의 신자다운 삶이 많은 불신자들을 변화시킵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게 합시다. 10-11절을 보면 요셉은 요단강을 건너자 가나안의 장례 방식을 거행했습니다. 무작정 길을 가다 한번 더 애곡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시리아인들 사이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타작마당에서 일주일동안 애곡하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런 풍습으로 미루어볼 때 요셉은 그곳에서 가나안 방식으로 한번 더 장례를 치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야곱의 장례식이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기를 원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방 예식과 서로 충돌하며 꼭 고집을 부리는 것은 평화로운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이 세상 사람과 불필요한 마찰은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철학만 확고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요셉은 원주민들과 행여나 충돌이 없기를 바라고 지중해 길이 아닌 광야 길을 멀리 돌아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길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와 일치 했습니다.

3. 애굽으로 돌아 온 요셉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장사한 후 "다시 오리이다“(5)했던 요셉은 야곱을 조상의 묘실인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고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14)고 했습니다. 요셉이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이제 족장시대가 끝났고 애굽에서 강성해진(숫자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신앙적인 윤리관을 정립해야 할 과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그 믿음을 실천해야 할 과제가 남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받은 상처들을 치유 받고 용서를 선언하며 새로운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이제 개교해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요, 공동체라는 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야곱이 죽은 후 형제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듯이 오늘 한국교회에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도 간에, 교회 간에 막힌 담이 헐어져야 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유고와 불교 및 우상종교의 잔재가 기독교 속으로 파고들거나 남아 있어서 모이면 논쟁을 하고, 서로가 상처를 주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있었으나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오늘까지도 연장되어 오며 회의만 하면 싸우고 논쟁하여 서로 갈라지고 찢어졌습니다. 야곱의 죽음으로 족장시대가 물러가고 형제문제,  민족문제로 확대되어 가는 공동체 의식이 공고해져가야 했습니다.
내가 죽고 희생하므로 전체가 살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면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져 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전환 되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을 앞에 놓고 눈물로 자신의 문제를 쏟아 놓을 수 있는 체질 개선이 한국교회에도 시급합니다. 인본주의적 자아의식을 강조했던 유교사상은 기독교적 체질 개선에 엄청난 장애를 지금도 가져오고 있습니다. 오즉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했겠습니까? 열 두 아들에게 남은 것은 용서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끝부분은 요셉이 영원히 형제들을 용서하는 선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악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나 혼자 우상 숭배와 싸우고 불의와 싸우려고 하지 맙시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어떻게 남의 연약한 부분을 채워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서로가 작은 허물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함께 기도하며 풀어야 합니다. 파벌시대는 지나가야 합니다. 내 정의(正義)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공동체를 깨뜨리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합시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성장시켰던 하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해 봅시다.

댓글목록


야곱이 애굽 고센땅에서 147세에 죽는다. 요셉은 애굽의 의사들에게 향 으로 40일이 걸려 야곱의 시신을 처리하게 하신다. 그리고 애굽사람들은 야곱을 위하여 70일간을 애곡하엿다. 그리고 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바로에게 말하여 자기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묘에 장사하고 돌아올수 있도록 부탁을 한다. 바로 왕은 요셉의 부탁을 들어주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돌라오라 하며 애굽 바로왕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함께 가나안 땅 헤브론 으로 올라갔다.

 

보통 나라의 대통령이 죽으면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룬다. 그런 국장의 규모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장례식의 규모와는 비교가 되질 못한다. 지금 야곱의 장레식은 애굽 전 나라의 국장의 규모를 넘어선다, 그것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 매장지가 외국이다. 이동수단이 좋지를 않았던 그 시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헤브론 까지 따라간 행렬 이었는지 상상이 간다. 애굽의 모든 신하들과 국가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다 수행한 장례식이다. 단순한 야곱의 허리에서 난자들의 가족장이 아니라 애굽을 넘어 가나안땅에 있는 사람들까지 애곡을 하는 국제적 장례식을 치루게 하셨다. 성경에서 나오는 장례식 가운데 이렇게 거칭힌 징례식을 치룬 인물이 없다.

 

왜 하나님 께서는 야곱의 인생을 이렇게 까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장례를 치루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가나안 혜브론 까지 따라가게 하여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식구들에게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무엇을 말씀해 주고 싶으셨는가 생각해 보게 하신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의 고센땅에 이주를 할때 브엘세바 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내려 가는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애굽 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와 함꼐 애굽으로 내려 가겠으며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것이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 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씨로 된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 지금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떠나 지만 언젠가는 반듯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고센 땅으로 요셉과 바로의 초청을 받아 내려 간것이다.

 

야곱은 죽어서 시신으로 가나안 땅 헤브론 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애굽 에서 가나안 헤브론 으로 오면서 아버지 야곱에게 전수 받은 믿음인 언젠가 애굽에서 출애굽 하는 큰 민족이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오는 장면을 지금 아버지 야곱이 죽어 장례식으로 이렇게 시청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큰 규모의 장례식 이라 어느 누구도 이런 규모의 사람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까지 이동 할 수 있다는것을 미리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야곱은 죽어서도 그의 장례식 까지 하나님 께서 남은 자식들과 수 많은 사람 들에게 "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하리라 ": 하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인생으로 하나님 께서 쓰고 계신다. "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것이로다 " 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 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을 귀히 보고 계신다 지금 야곱의 죽음은 하나님 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친히 이루시는 하늘의 메세지를 야곱의 장례식을 통해 미리 보여 주고 말씀해 주고 계시다. 이를 지켜본 요셉이 그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 유언이 아버지 야곱의 유언과 똑같은 유언을 남기며 이 화려한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꼐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척박한 가나안 땅을 그리며 사모하며 요셉의 일생도 마감하는 모습을 본다.

 

지금 나도 이 땅에서 나그네로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순례자의 길을 가고 있다. 언젠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다할때 나도 야곱 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메세지로 사용되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내가 가야할 " 새 하늘과 새 땅 " 을 늘 바라보며 사모하며 나의 삶이 다하는 그 순간 까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도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는 자가 되기를 결단하게 하신다..

야곱의 장례식(창세기 50:5-6)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 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야곱은 아들 요셉의 인도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와서 살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왔을 때에 그는 바로 왕에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창 47:9).
인생은 야곱처럼 나그네 세월을 살다 죽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죽음을 통해 교훈을 받습니다.

1. 그는 신앙적 유언을 남겼습니다(5절)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나를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애굽에 와서 죽음을 맞았지만, 자신은 고향 가나안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후손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요셉은 이 유언을 따라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모시고 가서 장사지냈습니다.

성도는 신앙적 유언을 남겨야 합니다.
죽기 전에 하늘나라를 간증하십시오.
후손 들이 예수 믿도록 강조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고 유언을 남겨야 합니다.

2. 그는 죽음을 준비했습니다(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그가 이미 묘실을 파서 준비해 놓은 것을 봅니 다. 자기 장지까지 분명히 밝혔습니다. 창세기 47장 29-30절에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 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장례를 준 비한 것입니다. 인생 누구나 결국 죽습니다. 사전에 죽음을 준비하 십시오.

3. 그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3절, 6절, 9절)

애굽인들이 그를 위해 칠십일을 울었습니다(3절).
애굽 왕이 장례를 배려했습니다(6절).
장례에 많은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장례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9절).
요셉의 지위 때문이라 짐작 되지만 야곱이 큰 인물이었기에 많은 이가 애도한 것입니다

4. 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 죽어도 고향 땅에 매장할 것을 고집한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천국이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이 아무리 좋아도 영주지는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을 소망한 것입니다.
야곱은 살아있을 때도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보였지만, 죽어서도 후손에게 가나안의 비전을 던져주고 갔습니다.
우리도 약속의 땅 천국을 바라보며 임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 야곱의 장례식(창세기 50:1-26)

하나님을 이긴 자 야곱도 그 생을 마감합니다.

야곱의 죽음(1절)

1.  인간의 보편적 죽음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 야곱도 죽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2. 죽음의 이별은 늘 슬프다

요셉은 슬픔이 복받쳤습니다.
몸을 굽혀 아버지 야곱에게 입을 맞춥니다.

야곱의 임종을 본 요셉 : 이것은 기도의 사람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아들 요셉이 야곱의 죽음의 순간을 지킬 것임을 계시한 적이 있습니다(창 46: 4).
아버지 야곱이 147세의 만수를 누렸어도 이별은 슬펐습니다.

야곱의 장례 절차(2-8절)

1. 이집트의 장례식을 따르다.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들이 몸에 40일 동안 향을 넣었고
향 재료를 넣게(2절) ;  “하나트”(히)=dorq의 유명한 미이라 제작 방식을 말함.이집트사람들은 70일 간 애곡합니다.곡하는 기한(4절) ; 고인을 추모하는 애도 기간= 애곡은 보통은 7일, 특별한 사람은 30일(신 34:8), 또는 70일 진행. 따라서 야곱의 경우 국장(國葬)급의 장례였음).


이 일을 통해 요셉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 지도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왜 이집트 장례식을 따랐을까?

(1) 요셉은 애굽 국가 지도자이므로 국가 장례 예우를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런 장례 의식은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까지 옮겨가기에 적합한 방부처리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3) 부활과 상관없는 장례 절차 : 장례 절차와 법 자체는 부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가족들과 장례 절차를 가지고 옥신각신하거나 너무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슬픔 당한 가족의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함이 중요하고 오히려 장례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4) 화장이든 매장이든 미이라로 만들든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5) 그렇기 때문에 살아생전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는 곽선희 목사와 더불어 자신들은 사후(死後) 화장할 것이라고 자주 공포하였었는데 사랑의 교회가 옥 목사 장례를 매장으로 일방적으로 처리해버린 것은 성도들과 일반인들에게 까지 아주 안 좋은 관례를 남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장례 유언조차 뒤집는 말과 행동과 앞과 뒤가 다른 자들이라는 조롱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었다고 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모시기를 원하다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히기를 소망한 것은 야곱의 뜻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에 모시기를 청합니다.
요셉이 이집트 신하들을 통해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의 가나안 장사를 간청한 일에 대해 바로는 그 일을 허락합니다.
야곱은 애굽 땅에서 17년을 더 살았습니다.
요셉은 그 이전 22년을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실로 39년 만에 이제 요셉은 고향 땅을 밟는 것입니다!

가나안 장례 행렬

바로는 많은 장례 위원들을 딸려 보냅니다. 요셉은 존경 받는 애굽 지도자였습니다.

요셉의 애굽 복귀를 위한 안전 장치
많은 장례 위원과 요셉의 가족들과 형제들과 친척들이 함께 가는 가운데 애굽의 많은 장례 위원이 함께 가나안에 동행하고 어린자녀들과 양떼와 소떼는 고센 땅에 두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요셉을 애굽으로 귀환하게 하려는 담보요 안전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장례 풍경(9-14절)

1. 규모가 대단한 장례

전차와 마병까지 동원된 지도자급의 대단히 규모가 큰 장례식이었음을 알게됩니다.

☞ 호상군(14절) : 장례를 위해 함께 온 사람들, 즉 장례를 위해 참여한 유가족과 애도객, 군사, 신하 등 참석자 전원을 말함

2. 요셉은 효자

요셉은 요단강 건너편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자 타작 마당에서 7일 동안 애곱합니다.
이를 보고 그곳 사람들은 애굽에 큰 슬픔(“아벨 미즈라임”, “애굽의 슬픔”이라는 뜻)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대로 막벨라 굴에 장사한 효자였습니다.

야곱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본 본문의 적용과 교훈

인간은 죽음의 때가 기다리고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사람은 참 미련합니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교만하게 나댑니다.
심지어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사람조차 죽음을 가볍게 여깁니다.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히  9:27). 

야곱의 장례 행렬은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표상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문명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이란 나일강 악어에게 귀걸이, 팔찌를 채워주고 성스러운 음식을 악어에게 바치며 무당들이 악어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풍습이 있을 정도로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상태였습니다.
동물 고기, 심지어 사람 고기는 먹어도 악어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입니다.(역사가 헤로도투스).
굳이 막벨라 굴로 향하는 야곱의 장례식은 이들 애굽 사람들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장례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은 누구든지 슬픈 일이기는 하나 죽음 너머 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이 우둔한 악어 신앙을 가진 애굽 사람들게 야곱의 죽음은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소망 없는 이들처럼 슬퍼하지 말 것(데살로니가전서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유다지파를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유다 지파로 오셨는가?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여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세밀한 계획을 하셨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옛 언약(구약)의 시대에서 새 언약(신약)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는 예수님의 초림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각각 주목하여 보셨을 것이다.​

열두지파의 시작이​ 되는 창세기로 가보자, 야곱의 열두 아들중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을 뻔한 상황을 맞는다.
그때 두 형 루우벤과 유다가 요셉을 구하여 생명을 지키고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려가도록 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한다.
르우벤은 맏아들로서의 책임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오랜 기근과 흉년에 식량이 떨어진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식량을 사오게 한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일을 꾸며 형들을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베냐민을 데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르우벤과 유다가 아버지에게 간청하는 부분을 보자 ​

창세기 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창세기 43:8~9

  1.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2.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를 지리이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르우벤의 모습에서는 제물에 죄를 전가하는 구약의 모습이 나타나고
유다에게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아버지 야곱은 이 일이 있은 후 유다를 형제의 대표로 삼는다.

​창세기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유다지파의 특별함은 민수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중 하나였던 갈렙이 바로 유다지파였고 출애굽 1세대에서 유일하게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보내신 이유를 조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유다지파라는 사실에 대하여 좀더 심도있게 살펴보자.
예수님은 진짜 유다지파의 후손인가? 
우리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고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요셉은 단지 법적인 아버지일뿐 아닌가....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어떤 유전자도 물려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유다지파라 할 수 있는가? ​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에서 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하나는 요셉에서 부터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예수님의 족보인데 전혀 다른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들을 살펴보면 공통으로 만나는 시점이 다윗이다.
즉 다윗의 여러 아들중 솔로몬의 줄기와 나단의 줄기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이 솔로몬의 후손으로서 법적 유다 자손인 것을 서술하였다면
누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단의 후손으로서 유전학적 유다 자손인 것을​ 증명한 것이다.

​야곱의 축복 (창세기 49장)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블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

​모세의 축복 (신명기 33장)

르우벤, 유다, 레위, 베냐민,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 스블론, 갓, 단, 납달리, 아셀

​인침을 받음 (계시록 7장)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유다자손 예수 그리스도는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안에서의  열두지파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고 계속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장자까지도 르우벤에서 유다로 바뀌었다.
나의 이름은 생명책에 견고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는가 아니면 서서히 흐려지고 있는가.....
지금 이시간....
하나님은 각 사람을 주목하여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유다지파를 선택하신 저울로써 우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합당한지 달아보고 계신다.
예수님을 아무 지파에나 보내지 아니하심같이 아무나 예수님의 신부가 될수 없다.

예수께서 왜 요셉이 아닌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을까?

먼저 창세기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4가지의 중대사건 (1-11장)
1) 창조 (1-2장)
2) 타락 (3-4장)
3) 홍수 (5-9장)
4) 바벨탑 (10-11장)
2. 4분의 위대한 믿음의 족장 (12-50장)
1) 아브라함 (12-23장)
2) 이삭 (24-26장)
3) 야곱 (27-36장)
4) 요셉 (37-50장) -- (38장만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기록함)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 요셉의 삶을 생각해 보자.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요셉은 신앙으로 모든 것을 인내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자기 형제들과 아버지를 초청해 윤택한 삶을 누리도록 배려했다. 형들에 대한 분노나 원한을 갖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자이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가장 온전하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예수의 성품을 가장 닮은 자가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고 불 수 있으며 그 후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심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유다를 생각해 보자.
유다의 기사는 창세기 3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창37-50장의 요셉의 사건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다.

1.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매사에 좋은 의도로 생각하고 제안해 일하는 자였다.

유다는 야곱의 첫째 아내인 레아를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29:35).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 시켜 들에서 양치는 형들을 찾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주동자는 둘째 시므온이었고(창42:24), 셋째 레위 역시 동조했다(창34:25, 49:6-7). 그러나 맏형 르우벤은 그는 죽이지는 말고 광야 구덩이에 넣으라(창37:21)고 명했다. 요셉은 구덩이에 빠져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외치는 상황에 놓치게 됐다. 이 때 동생 요셉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유다는 애굽으로 향해 지나가던 행상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고 요셉은 애굽에 팔리게 되었다. 형들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동생 요셉이 짐승에 잡아먹혔다고 거짓말했다. 아들 요셉이 정말 죽은 줄 알았던 야곱은 대성통곡하며 슬퍼했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팔리게 되었다.

곧 이어 창세기 38장에는 유다의 이야기로 이어가게 된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떠나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1-2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만 보면 유다의 잘못된 점들만 보이게 된다. 첫째는 그가 형제들을 떠났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이방 여인을 보고 동침했다는 사실이다(참고:창6:2). 그러나 여기서 왜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야만 했던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며 아버지 야곱에게 슬픔의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던 것이다. 왜냐면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했던 것과 구덩이에 던지자고 했던 것들은 다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유다의 제안이었던 애굽에 팔자는 제안만이 결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참고:확바#11, 도마의 사건).

2. 유다는 회개할 줄 아는 겸손한 자였으며. 같은 잘못을 다시 범치 않는 자였다.

창세기 38장의 중요 내용은 유다가 여행을 가게 되었고 창녀와 관계를 하게 됐다. 그 후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그녀를 임신케 한 사람이 자기임을 알고 “그(며느리 다말)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라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38:26)” 라고 말한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말하면서 회개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다시는 같은 죄를 범치 않겠다는 결단과 이를 실천해 나갔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게 하는 것과 비교)

예수께서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욥, 요셉,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을 통해 오시지 않으시고, 왜 죄와 허물 많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다윗을 통해 오셨을까? 그 답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런즉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라는 말씀에 있다. 큰 죄를 범한 괴수라 할지라도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3. 그후 유다는 형제(남)를 위하여 자신을 담보로 내 놓았던 자이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작정한 유다는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형제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자의 삶이었다.

야곱의 열 아들이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려 애굽에 처음 내려갔을 때 요셉은 친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기 위해 시므온을 담보로 삼아 옥에 가두고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아들들은 베냐민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요청하지만 야곱은 이를 거절한다. 이 때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베냐민)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 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43:8-9)”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베냐민과 함께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낸다. 이들이 양식을 얻어 다시 돌아가게 될 때, 요셉은 베냐민과 함께 지내기 위해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의 촛대를 숨겨 넣어 다시 잡혀오게 만든다. 이 때 유다는 총리 요셉에게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까(창44:33-34)” 라고 요청한다.

곧 요셉은 감동을 받고 자신을 형들에게 알린다.(창45:1). 분명 유다는 형제(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정신으로 살아간다. 즉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려는 위대한 헌신의 사람으로 변한다. 이로써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의 몸을 담보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예표해 준다. 이는 죄범하기 쉽고 죄범한 우리에게 더 큰 위로와 소망과 용기와 결단을 가져오게 하며 거룩한 삶으로 승화시켜 가는데 더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 임종을 앞두고 12자녀에게 장차 될 일을 예언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생의 마지막을 앞에 두며 12자녀들을 불러 예언해 준다.
이 중에서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네 혼아 그들의 모의에 참예하지 말찌어라 (5-6절)”고 경고한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라 말씀하므로 요셉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이웃 형제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씀이며,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 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24b절)” 라고 말씀해준다.

여기서 성경학자들에 따라 ‘이스라엘의 반석’이 누구인가에 대하 견해가 각각 다르다.

어떤 이들은 요셉 자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로부터 목자가 나도다 라고 했으니 요셉의 후손들로 목자의 역할을 한 여호수아, 드보라 사무엘, 기드온, 입다 등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선한 목자(The Shepherd)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며, 요셉을 통해 그리스도를 예표로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가 요셉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들 KJV, NIV, RSV에는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 즉 이스라엘의 반석의 힘을 입음이니다”라고 되어 있다.

But his bow remained steady, his strong arms stayed limber, because of the hand of the Mighty One of Jacob, 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요셉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힘으로 요셉이 능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에 대해서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

”홀(왕의 지팡이)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예수)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유다의 후손을 통해 예수가 오심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요셉은 그의 삶에서 예수의 모형으로 볼 수 있으나, 죄범한 가운데 즉시로 회개하며 결단하고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유다의 삶이 참된 성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왜 유다지파를 선택하셨을까?

실로(7886)

실로- 팔레스타인의 지명 이름

실로- 메시아, 그리스도의 별칭

실로-  행복한, 번성하다, 안전한(욥 3:26)


1. 실로=메시아(그리스도)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창 49:10)

이 구절은 대언자 야곱의 예언으로 '실로'가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줍니다. 유다 지파에서 '그리스도'가 나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십니다(계5:5). 야곱의 예언은 히브리서 7:14절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에게서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히 7:14).

2. 실로. 주의 집(성막)이 있던 곳.

실로는 주의 집(성막)이 있던 곳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로 사사 시대까지 계속해서 '주의 집'(성막)이 실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던 모든 기간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미가가 만든 그 새긴 형상을 세웠더라.”(삿 18:31)

“그때에 그들이 이르되, 보라, ... 실로에서 해마다 {주}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삿 21:19).

“{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셨으니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삼상 3:21)

실로는 주의 집이 있던 도시의 이름(지명)입니다.

그럼 대언자 예레미야는 주께서 이스라엘을 '실로같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로란 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다 압니다. 그들은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주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갔다가 블레셋에 패하면서 전리품으로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날 대제사장 엘리가 죽고,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그 날부터 '실로'에 있던 주의 집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언약궤가 없는 집은 더이상 주의 집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거기로 올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데는 무려 100년 4개월이 걸렸습니다. 블레셋에서 7개월만에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니나답의 집으로 왔고, 사무엘의 전 생애와 사울의 전 생에 동안에도 계속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윗이 이것을 옮기려다 실패(웃사의 죽음)함으로 오벳에돔의 집에 약 3개월 있다가 율법에 따라 레위 제사장들이 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예레미야 26:6,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집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이 도시를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라.”(렘 26:6)

“어찌하여 네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여 이르되, 이 집이 실로같이 되고 이 도시가 황폐하게 되어 거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온 백성이 {주}의 집에 모여 예레미야를 대적하니라.”(렘 26:9)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공으로 실로에서 언약궤를 잃고 주의 집이 황폐하게 되었듯이 이번에는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에서 주의 집이 불타 없어져 버립니다. 성전의 보물은 모두 바빌론으로 옮겨집니다. 주의 집에 있던 주의 영은 성전을 떠나버립니다(겔11:23). 주님께서 실로의 장막을 버리셨듯이 예루살렘의 성전도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실로의 성막 곧 친히 사람들 가운데 두신 장막을 버리시고”(시 78:60)

“오직 너희는 실로에 있던 내 처소 곧 내가 처음에 내 이름을 둔 곳으로 이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내가 그곳에 어떻게 행하였는지 보라.”(렘 7:12).

주께서 전에 실로에 있던 주의 집을 버리신 것같이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집을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줄로 알았지만 패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믿고 유다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다,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지만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멸망하고 성전은 불타고 황폐하게 됩니다.  그들은 법궤나 성전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한 것 같이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곧 너희가 신뢰하는 이 집과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렘 7:14)

주께서는 이전에 실로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도 똑같이 행하실 것임을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의 의미는?

왕들과 치리자들과 그리스도를 산출함
창세기 49장 10절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홀(忽)은 왕권, 혹은 왕국의 홀을 가리킨다.

시편 45편 6절은,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나라의 상징인 홀은 그리스도의 왕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10절에 있는 홀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 것은 왕권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7626. 홀(芴. ) - 규(圭) / 쉐베트( [ shêbeṭ ]  שֵׁבֶט

1. 막대기. 2. 레위기 27:32.  3. 규
발음 / 쉐베트[ shêbeṭ ]
어원 / 어미활용 שִׁבְטִי, 복수 שְׁבָטִים, 연계형 שִׁבְטֵי, ‘가지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통치자(창 49:10), 지파(창 49:28, 수 3:12, 대하 6:5), 매(출 21:20, 욥 21:9), 막대기(레 27:32, 대상 11:23), 지팡이(삿 5:14),  채찍(삼하 7:14,시 89:32), 창(삼하 18:14), 징계(욥 37:13), 철장(시 2:9), 권세(시 125:3), 몽둥이(사 14:5), 작대기(사 28:27), 규(圭)(겔21:10, 암 1:5)
구약 성경 / 190회 사용



히브리 시는 짝을 지어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치리자의 지팡이」는 「홀」과 동의어이다.
틀림없이 여기서 치리자는 그리스도이다.
이 구절에서 치리자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입법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법을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지팡이와 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왕권의 권위와 지팡이와 홀을 가진 치리자이시다.
이 구절은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발 사이」라는 말은 씨나 후손을 가리키는 시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유다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다 지파에 언제나 왕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역대상 5장 2절에 따르면 유다가 왕권을 가지며 치리자가 그의 후손으로부터 나온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99)

실로를 가짐

이 권위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실로라는 단어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훌륭한 성경 교사들은 실로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 평화의 왕으로서, 평화를 가져오는 분으로서 오실 것이다.
그때에는 온 땅에 평강이 충만할 것이다.

또한 창세기 49장 10절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백성은 나라와 동등하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모든 나라들이 그분에게 굴복하고 그분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사야 2장 1절부터 3절과 11장 10절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천년 왕국의 시작부터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기 위하여 그분에게 나아올 것이다.

평강을 가져다주는 자로 오시는 그리스도

창세기 49장 10절은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시리라고 말한다. 실로는 평강을 가져다 주는 자를 의미한다. 합당한 왕국은 평강의 영역이다. 당신에게 평강이 없다면 당신은 사실 왕국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왕은 평강을 주는 자, 평강을 가져다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왕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온 땅에 평강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실로로서 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실로로서 누리기 위해 그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를 실로로 누릴 수 있다.

가족 생활의 예를 깊이 생각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가족 생활은 소동으로 가득한 폭풍 이는 바다이다. 폭풍이 언제 올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가족 생활이라는 바다를 항해해 오고 있으며, 그것이 종종 매우 소란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폭풍 이는 바다 위에서의 제자들의 체험에 대해 읽는다(마 14:22-23).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려 하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을,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마 14:22).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풍랑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곳 산 위에서 기도하신 후 주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배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오셨다(마 14:25). 그분이 배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바람이 그쳤다(마 14:32).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가 계신 곳에는 폭풍이 전혀 있을 수 없으므로 폭풍은 멈추었다. 폭풍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늘에 속한 왕을 두려워 한다. 비록 폭풍이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그분이 파도 위를 걸으시므로 그분을 괴롭힐 수는 없다. 소란한 가족 생활의 바다 가운데서 우리는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대신 권세를 사용하여, 『주님, 당신이 바다 위를 걷고 계십니다. 당신은 왕이시요 당신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소란한 상황을 이기기 위해 당신의 권세를 사용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눈에 승리는 얻은 바 되었고 왕국은 이 땅에 있으며 평강이 여기 있다.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주목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14장 28절에서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마치, 『주님, 만일 주시라면 제게 말씀을 주시어 저를 당신에게 오게 하소서. 당신이 바다 위를 걷고 계시니 저 역시 바다 위를 걸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은, 『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가 예수께 가려고 물 위를 걸었다(마 14:29). 베드로에게는 배 밖으로 뛰어나가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경을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믿음은 사라졌으며 그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베드로의 체험은 우리의 환경을 주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서라는 교훈이다. 믿음은 그분의 말씀에 서는 것이다. 믿음은 환경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 만일 당신이 배 밖으로 뛰어나가 주님의 말씀 위에 선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당신은 구걸하는 기도들을 너무 많이 하였다. 구걸하는 대신 환경에게 명령을 발하여, 『나는 네가 나를 어지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왕이시요, 왕국은 그분의 것이며, 그분은 실로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환경에 평강을 두어야 한다.』라고 말하라.

종종 우리는 골치거리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였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이다. 간교한 자인 사탄은 당신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심리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접한다. 욥은,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했다(욥 3:25). 욥의 어려움들이 그에게 임하기도 전에 그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해 생각하였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두려울 때마다 당신은 즉시, 『사탄아, 나를 떠나라.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두려움은 사탄의 호출 카드이다. 만일 당신이 그의 호출 카드를 받아들인다면 사탄 자신이 올 것이다. 모든 두려움은 호출 카드이다. 사탄은 당신에게 실지적인 어려움을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보낸다. 사탄의 두려움의 호출 카드를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내버리라. 이것은 영적인 전쟁에 관계된 문제이다. 어떤 형제들은 그들의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이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나서 며칠 후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해고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사탄아, 나는 결코 해고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해고된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고용될 것이다. 왕국 안에 있으므로 나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를 얻으셨으며 그분의 승리의 결과는 왕국이다.

열국의 복종과 순종

창세기 49장 10절은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천년 왕국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실로로서 두 번째 오실 것이며 모든 백성들은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할 것이다.
원칙상, 그것은 오늘도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권세와 왕국이 지배하는 곳에 백성들의 복종과 순종이 있을 것이다.






https://www.sutori.com/en/story/the-12-tribes-of-israel--bNwdvQB1TCgFt6HwzmiKpPDy

The 12 Tribes of Israel


1. Rueben

Rueben's Hebrew name:

רְאוּבֵן (Re'uven)

Did you know?

Rueben was the first born, and his tribe is said to represent the powerful energy of everything that comes first

Forum

Are you the first born in your family? What are the positives and negatives about being the first-born or a younger sibling?


Ruebens Banner

The symbol for the tribe of Rueben is the Mandrake flower, pictured above.

2. Simeon

Simeon's Hebrew name:

שִׁמְעוֹן (Shim'on,)

Did you know

The Tribe of Simeon is said to be associated with aggressiveness and anger- and the lesson that we should manage our own anger appropriately.

Forum

What helps to calm you down when you are feeling angry or upset?

The symbols for the tribe of Simeon are both the sword and the castle, shown above.

3. Levi

Levi's Hebrew name:

לֵוִי (Levee)

Did you know?

The Tribe of Levi is said to be connected the idea of serving a higher calling and doing good things in the name of God. Members of this tribe beame the Priests of Israel and were not given their own land as the other Tribes did.

Forum

What are some actions that you have taken in your life that have benefited others?

The symbols for the tribe of Levi are both the water pitcher and the Priest breastplate. The water pitcher was used by the Priests to wash thier hands before or during rituals- a metal one is shown here.


The Priests wore a special breastplate that included the names and stones standing for each tribe of Israel. A drawing of what they may have looked like is shown here

4. Judah

Judah' Hebrew name:

יְהוּדָה (Yehudah)

Did you know?

The tribe of Judah is said to be connected to the importance of leadership. It's symbol, the lion, is shown below in the official emblem of Jerusalem.

Forum

What was a time in your life where you showed leadership or witnessed leadership?

5. Dan

Dan's Hebrew name:

דָּן (Dan)

Did you know?

"Dan" means "to judge" in Hebrew. The tribe of Dan is said to be connected to the importance of Justice in the world.

Forum

What do you see as an injustice in the world and what is something that you can do to help stop it?

The symbols for the tribe of Dan are the scales of justice, shown above. This means that justice should be as fair and equal as a perfectly balanced scale.

6. Naphtali

Naphtali's Hebrew name:

נַפְתָּלִי (Naftalee)

Did you know?

Naphtali is considered to be the tribe of the "free spirit." It is connected to  the importance of individuality and independance. Naphtali's symbol is the gazelle- a fast animal that runs free, pictured below.

Forum

What was the most adventurous thing you have ever done? Was it easy? Difficult? Scary? Exciting?

7. Gad

Gad's Hebrew name:

גד (Gad)

Did you know?

Gad is considered to be the "warrior" tribe. They are connected to the idea that people need to be ready to protect their freedoms and beliefs. Unsurprisingly, their symbol is a military camp, shown below.

Forum

What is something in your life that you would protect? Examples might include your family, your freedom, or the safety others.

8. Asher

Asher's Hebrew name:

אָשֵׁר (Asher)

Did you know?

Asher is connected to the feeling of happiness- of not just getting what you need, but enjoying life as a whole.


The Tribe of Asher made its fortunes from olive oil, and in fact, the symbol of the Tribe of Asher is the olive tree, pictured below.

Forum

When was a time where you went above and beyond to make someone happy? How did it make you feel?

9. Issachar

Isasachar's Hebrew name:

יִשָּׂשכָר (Yissakhar)

Did you know?

The tribe of Issachar is known as the scholary tribe. Stufying and learning provide wisdom, clarity and direction.


Their symbol is a banner of the sun, moon, and stars, shown below.

Forum

What was something that you had difficulty learning at first, but were eventually able to understand by studying and practice?

10. Zebulun

Zebulun's Hebrew name:

זְבוּלֻן (Zevulun)

Did you know?

The Tribe of Zebulun is known as the Tribe of the businessperson. It is said that his role is to find God in the everyday physical objects around us.


Since the tribe of Zebulun derived its money from its ports and access to the sea, it's symbol is a ship., pictured below.

Forum

What is something you own that is important to you? What kinds of special memories do you have that you think of when you see it?

11. Joseph (Ephraim/ Menasheh)

Joeph's Hebrew Name:

יוסף (Yosef)

Ephraim's Hebrew name:

אפרים (Ephraim)

Menasseh's Hebrew name:

מנשה (Menasheh)

Did you know?

Joseph was Jacob's favorite son. There is a whole story about his brother's jealousy and the dangers of playing favorites.


Joseph went through such difficult times in his life but was able to overcome them and succeed. Therefore. His tribe is known as one that reminds us that life can have hard times but we can have the strength to keep going.


Joseph's Tribe is unique since it is made up of two "half tribes" descended from his sons, Ephraim and Menasheh.

Forum

When was a time in your life where you faced a lot of difficulty but were able to keep going? What helped you to make it throught the hard times?

The Tribe of Joseph is symbolized by wheat stalks, shown above. This is because of the wheat in Joseph's dream that helped him save the people of Egypt from famine.

12. Benjamin

Benjamin's Hebrew name:

בִּנְיָמִֽן (Binyamin)

Did you know?

The Tribe of Benjamin is known as the "hungry ones." They are said to look for more and more spiritually uplifting activities.


Their symbol is the wolf, an animal that goes after its prey as the Tribe of Benjamin would seek out God in everything.

Forum

What is something that you have never done before that you think would make for a special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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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을 건너다 :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

“죽기 직전의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의 전이와 인지 전환을 경험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자아뿐만 아니라 자명했던 지각, 주체적이고 자신과 연관돼 있던 지각 능력도 후퇴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후퇴한 자아 역시 우리가 반응하고 본능에 충실한 것처럼 어떤 것에 반응하는 패턴을 보인다. 또 다른 세계, 다른 의식 상태, 다른 의미 경험, 그리고 다른 경험 방식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세계관이나 신앙과는 무관하다. 인지 전환은 존재, 관계, 존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변하게 한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_본문 30쪽에서

흔히들 죽음 하면 ‘생물학적으로 숨이 끊기는 순간’ 정도로만 생각하지 죽음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죽음은 육체가 소멸되는 것 그 이상의 사건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죽음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수시로 넘나들다가 종국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는 ‘변혁’의 과정이다. 여기서 변혁이란 지각과 사고의 주체이자 본능을 조절하는 중심체로서 ‘자아’가 자신에게 속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지각 차원으로 침잠해 가장 본질적인 정신적 과정인 ‘포괄적 존재’로 편입되는 불가피한 변화로, 현존재가 자아로서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에 맞이하는 사건이다. 자기중심적 주체로 구체화되었던 육체가 죽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아에 내재하는 인지 능력뿐만 아니라 자아로서 겪었던 모든 경험이 상실된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이 변화되는 이 마지막 변혁의 순간(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이후)에 비로소 서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죽음의 과정에서는 ‘육체의 죽음’의 앞서 ‘자아의 죽음’이 시작되는데, 자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환자가 넘나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경험을 저자는 ‘내적 임종’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어떤 거대한 존재에 흡수되거나 삼켜질 것 같은 소멸의 불안(불안의 근원, 원초적 불안)을 보이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전율적인 공포(누미노제)에 압도당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몸이 떨어져나갈 듯한 통증과 오한을 느낄 수도 있다. 이때에도 환자는 여전히 들을 수 있고, 외부의 자극이나 소리에 민감하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혹은 비언어적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환자의 내적 과정에 동행한다는 취지에서 저자는 죽어가는 이들의 불안 경험이나 상징적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반응들을 선별해내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그들의 낯선 몸짓과 조각난 언어, 불편한 외침 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유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임종 과정은 힘들고, 낯설고, 이질적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나 배움이 없다면 환자 못지않게 가족의 불안과 두려움도 커질 수밖에 없다. 임종 환자의 깊은 반半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현실을 함께하고자 노력한다면, 죽음의 순간이 단지 고통으로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사례 1
황혼에 접어든 암스튜츠 부인은 밤이면 항상 경기를 일으키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죽어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둠에 집어삼켜져 소멸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 특별히 어둠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그녀는 다시 진정되었고, 켜놓았던 수면등을 꺼버렸다. 5일이 지나자 부인에게는 수면등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고, 그녀는 분명 죽음이 더 가까이 다가옴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평온을 유지했다. 그녀의 인지 능력은 분명히 더 이상 자아와 연결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자아로부터 부정적인 것이 더 이상 표출되지도 않았다. _본문 86쪽에서

사례 2
50대 중반의 츠바이펠은 죽기 이틀 전에 이미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눈을 부릅뜬 채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토록 벽만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수 없었던 가족은 큰 혼란에 빠졌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른다. 그와 똑같은 자세로 그가 응시하는 벽을 바라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회색 벽이 눈에 띈다. 회색 벽 안에서는 모든 윤곽들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고,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든다. 나는 계속해서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벽을 쳐다본다. 츠바이펠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나? 그에게 말을 건다.
“츠바이펠 씨, 당신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뭔가에 ‘붙들린’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소름 끼치게 하는 거대한 무엇에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뼈에 사무치는 신음소리에 입을 닫고 만다. 침묵이 이어지고 다만 배 속에서 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마침내 그의 신음소리가 사라진다.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한다.
“츠바이펠 씨, 당신이 바라보는 대상은 우리에게는 좀 혐오스럽지만 당신에게는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보는 벽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애정이 넘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는, 신성한 이름을 가진 신이 아닐까 싶은데요.” “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츠바이펠의 입에서 새로운 신음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인다. 그 눈물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다시금 확신한다. 그는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그는 평온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죽기 바로 직전에 다시 한번 눈을 떴는데, 뭔가를 두려워하거나 응시하는 눈길이 아닌
행복감에 젖은 눈길이었다고 한다. 전혀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응시하는 눈길이었다고 한다. 난 그를 인도했다고 확신한
다. 그는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경련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_본문 87~89쪽에서

고통 속에서의 존엄
존엄한 삶의 마무리란 무엇인가

요즘 전 세계에서는 ‘죽을 권리’를 찾아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로 ‘임종 원정’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올해 초 스위스 내 안락사 주선 비영리기관인 디그니타스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96개국의 7,764명이 안락사를 신청했고, 이 중 한국인 신청자는 모두 18명이라 한다. 아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다. 현재 스위스를 비롯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캐나다 등 6개 국가에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올해 미국의 뉴욕 주가 안락사를 합법화하고 영국도 이를 추진하겠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안락사로 상징되는 죽을 권리를 향한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 법안이 2018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말기환자가 연명의료 대신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선택해 임종 과정에 겪게 될 여러 고통을 적절히 조절하며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관련 인프라 구축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환자의 정신적 안녕과 삶의 마무리에 대한 준비는 미흡하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환자 육체의 병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의 희망, 절망, 가치관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들이 좇는 영성까지 수용해야 존엄한 삶의 마무리가 완성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더불어 저자는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존엄’의 문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죽음은 ‘선택’의 문제에 앞서 ‘수용’의 문제”이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죽음, 삶이 자신의 것이었듯 삶의 마지막에 있는 죽음 또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삶의 마지막 존엄이 완성된다. 존엄한 죽음은 성숙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인간다운 죽음’ 즉 존엄사는 인간의 마지막 존엄에 대한 문제를 은폐하는 모토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엄이 자아의 기능성과 자유로운 결정 능력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기능 중심적 자아가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자아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 가운데 좋은 죽음이 증명된다면 그 또한 어떻게 될까?
오직 자아 안에 자율과 기력이 남아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존엄과 한 인간의 본질 안에 있는 존엄 간의 실제적인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단지 개념적으로 구분할 뿐이다. 후자, 즉 인간의 본질로서 존엄은 삶에서 겪는 고통과 죽음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말하자면 후자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존재한다. 이와 달리 존엄사 대부분은 환자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와 요구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자아 안에 있는 존엄과 자기 결정은 인권과 의무 요구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것이다. _본문 220~221쪽에서

▣ 작가 소개

저자 : 모니카 렌츠
스위스 장크트갈렌 종합병원 정신종양학 의사이자 FSP스위스심리학자연맹 소속 심리치료사. 취리히대학교에서 정신병리학, 신학,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7년간 임종을 앞둔 환자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 불안 같은 심리적 증상을 진단, 치료, 관리하는 의사로 일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특히 그녀를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었던 사고의 경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존엄과 정신성이 무엇인지, 죽음 앞에 놓인 개인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했다.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 그녀는 〈원초적 불안과 원초적 신뢰 사이Zwischen Urangst und Urvertrauen〉〈죽어가는 자들의 증언Zeugnisse Sterbender〉〈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존재Der Mensch-ein Wesen der Sehnsucht〉등 수십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며 전 세계 학술 세미나와 워크숍들로부터 많은 초청을 받고 있다. 현재에도 존엄한 죽음과 성숙한 임종 문화를 위한 호스피스 및 고통완화 의학 연구에 매진 중이다.

역자 : 전진만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빌레펠트 베텔신학대에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며, 독일 트리어대학교에서 철학?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독일어 강의를 하고 있으며, 출판기획자 및 번역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교황입니다』『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갈까』 등을 옮겼다.


▣ 주요 목차

서문

1장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일어나는 일들

2장 죽음의 문턱을 건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이전
죽음의 문턱에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통과 이후
통합 통증이 아니라 통합 평온
죽어가는 사람 모두가 평온을 경험하는가

3장 존재를 뒤흔드는 불안의 경험
원초적 불안이란
우리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아가 없으면 불안도 없다
원초적 불안이 드러나는 순간
불안의 흔적들로부터의 자유

4장 죽어가는 사람은 듣고 있다

5장 죽어가는 자의 언어
상징적 체험들
상징의 해석들

6장 무엇이 죽음을 가로막고 인도하는가
불안
대결
운명의 거부와 수용
가족과의 화해
마지막 성숙
죽음 앞에서의 겸손

7장 존엄한 죽음과 그에 동반한 문제들
임종 과정에서의 지각 변화
현세와의 이별
임종 준비의 방향성
“그렇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의 인간 존엄
존엄한 죽음, 무엇이 위협인가
비밀과 최후에 대한 질문들

부록 6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 전이〉 연구 조사
주 / 참고문헌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50장 /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My father made me swear an oath and said, "I am about to die; bury me in the tomb I dug for myself in the land of Canaan." Now let me go up and bury my father; then I will return.' "


야곱의 장례식과 요셉의 죽음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구성된 원역사(1-11장)와 구속사 즉 족장의 역사(12-50장)를 소개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는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정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여주신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후에 3장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야기를 시작으로 그 후손들의 가정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 이야기로 시작된 창세기는 야곱의 가정 이야기로 막을 내립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깨어졌다면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본문의 말씀은 깨진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야곱에게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자신의 인생길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애급 왕 바로 앞에서 말했습니다.
야곱의 험악한 인생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노예로 팔려 수 십년을 고생한 요셉에 의해 평탄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깨진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역사를 통해 가능했음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연약하고 끊임없이 범죄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미련함을 지혜롭게 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범죄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죄사함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50:1~14. 야곱의 장례식
50:15~21. 요셉과 형제간의 화목한 이야기
50:22~26. 요셉의 유언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의 전통적 관례에 준하여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요셉의 명에 따라 장례준비만 40일이나 걸렸으며, 장례는 70일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더운 열대 지방에서 70일간 장례가 진행되었지만 그 시신이 상하지 않은 것은 고도로 발달된 미라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일찍부터 왕족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 시신이 썩지 않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40일간의 장례준비와 70일 동안 국장으로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룬 것을 보면, 당시 요셉이 애굽땅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70일이 지나 야곱의 출관일이 다가오자 요셉은 애굽의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의 장지가 이집트 애굽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나안 땅임을 알리고 허락을 구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요셉은 사람을 시켜 바로에게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바로의 허락을 받은 요셉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데, 그때 장례행렬이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의 원로들 뿐만아니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까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가나안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로왕은 애굽의 총리로서의 요셉의 명예를 존중해 주기 위해 병거와 기병까지 동원시켜 장례를 더욱 성대하게 치루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왕과 원로들과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와 존경을 얻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 요셉의 형들은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죄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을 때에 한 말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17절입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죄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의 고센땅으로 옮겨 산지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17년 동안 요셉의 형들은 이전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불안과 걱정,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옛말에 ‘때린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를 뻗고 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잠도 편히 못 잔다는 말입니다. 허나 이 말도 말 그대로 옛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때린 놈이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죄책감은커녕 자신을 변호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범죄자들의 ‘인권’을 운운하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두 번 죽이는 일조차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한마디면 아무리 흉악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가볍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흉흉하고 각박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17년 동안 톡톡히 치루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의 댓가를 자신이 갚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처벌하지 않은 것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인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엇이 내 감정을 다스려 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유언으로 남긴 요셉의 말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갈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이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보장해 준 땅이었지만, 자신의 시신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이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 넘어 영원한 세상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처럼 영원한 약속의 땅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아름답게 결실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 또한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할 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내가 살고 나의 가족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용개요]
구속사의 서곡과 같은 한 시대를 살았던 족장들의 시대는 야곱과 요셉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더욱 웅장하고 드라마틱 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본장은 세계의 시작을 알리며 시작한 창세기를 족장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며 끝맺고 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은 그를 가나안 막벨라 굴에 매장한다(1-14절). 이때 아버지가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다시 한번 사랑으로 용서한다(15-21절). 이윽고 마지막 족장 요셉도 후일 후손들이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을 아버지와 같이 조상의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침으로(22-26절) 창세기를 마감하고 있다. 이는 족장 시대의 마감이자 출애굽으로의 새 전환점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  해]
본장은 창세기에 대한 대단원입니다. 즉 본장에는 야곱의 장례식과 그의 사후 발생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 그리고 요셉의 죽음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의 시작이라는 웅장한 주제로 시작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슬픈 죽음의 사건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야곱이 위대한 신앙의 선진이었고 요셉 또한 탁월한 제상이었지만, 이들 역시 유한한 인간으로의 인생 마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한낱 풀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50장은 야곱과 요셉의 훌륭한 신앙과 그들의 생애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족장 중 아브라함과 이삭은 가나안 땅에서 죽고 야곱과 요셉은 타향인 애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이는 야곱과 요셉의 강력한 유언 때문이었다.
특히 요셉은 후일 후손들의 출애굽을 예견하고 그때 자신의 유해를 함께 가지고 가라고 유언했다.
족장들의 이 같은 가나안 땅에 대한 집착은 그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이란 오직 가나안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약속의 땅 사상으로 오늘날에는 종말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고 있다.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 소망과 목표는 지상 유토피아가 아니라, 종말의 심판과 하나님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 생의 마감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의미의 새 삶의 시작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난은 새 세계를 향한 전진의 과정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창조 기사와 함께 시작했던 창세기는 본장에서 야곱와 요셉의 죽음이라는 슬픈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역사가 실패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야곱과 요셉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번창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새로운 탄생을 향한 1막의 끝일 뿐이다. 이처럼 성도들의 삶에 닥치는 불행과 고통은 끝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향한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은 역사하심이 펼쳐지는 곳임을 교훈하고 있다. 이것은 고난받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교훈이다. 즉 암울하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현실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새로운 계획을 진행하여 나가고 계시다는 말이다.


축복(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바라크[ bârak ]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 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9장 / 후일에 당할 일(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Then Jacob called for his sons and said: "Gather around so I can tell you what will happen to you in days to come.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하며 예언하는 말씀으로 ‘후일에 당할 일(what will happen to you in days to come)’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언한 것을 암시합니다. 

창세기 49장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49:1-27.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 대한 예언적 미래에 관한 말씀
49:28-33. 예언을 마친 야곱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애굽 땅이 아니라 조상이 묻힌 가나안 막벨라 굴에 장사지낼 것을 부탁하는 말씀

예언적 암시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이 운명론적으로 조상의 어떤 행위가 후손에게 저주로 흘러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미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내다볼 뿐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열두 아들은 순서대로 언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레아의 여섯 아들이 나오고, 라헬의 하녀(빌하)의 아들(단), 레아의 하녀(실바)의 두 아들(갓, 아셀), 라헬의 하녀가 낳은 다른 아들 납달리, 마지막으로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소개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 그리고 요셉에 대한 예언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야곱은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열두 아들에 대한 미래를 언급하므로 이제까지 족장들을 이끄심과 같이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 또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주권적 섭리로 인도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로 알았던 자신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흉년에 곡식을 사러 애굽에 갔던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130세의 야곱은 거의 20년 만에 아들 요셉과 재회의 기쁨을 누린 이후부터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창 47:28, 창 37:2; 창 42:46; 창 45:6; 창 41:53-54). 애굽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낸 야곱은 이 세상에서 생을 마칠 즈음에 12명의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이자 그의 아들들에게 내린 축복의 말입니다.
야곱이 유언은 단순한 유언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

야곱은 1절에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말했습니다. 후일에 당할 일에 관한 예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10절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무 가지, 지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막대기나 지팡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통치자에게 어울리는 막대기라면 왕의 손에 들고 있는 금홀을 연상하게 합니다.
10절은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내린 축복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예수님 역시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하셨는데 이를 통해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의 말씀 가운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 시대를 맞이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훗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단계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야곱이 죽기 전 그의 축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축복을 통해 장차 유다 지파로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축복이자 예언으로써 결코 무의식중에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야곱의 아들들의 삶을 반영한 미래에 있을 축복이었습니다.


28절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되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누리는 인간의 복은 나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달렸음을 보여줍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자는 의의 결실을 보게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악행에 따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이렇듯이 죽은 후에도 우리는 각자의 행위에 따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셈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야곱의 유언에는 축복만 있지 않습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에게 했던 야곱의 예언의 내용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입니다.
아무리 그가 능력이 있고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패륜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3절).
4절에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란 아버지 야곱의 아내 라헬이 죽자, 라헬의 여종으로서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한 것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35장 22절 이후를 보면, 르우벤의 패륜범죄를 야곱이 들었지만 성경에는 야곱의 어떤 반응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율법이 제정된 이후였다면 르우벤은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레 18:18, 29; 레 20:11; 신 21:18-21).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르우벤에게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며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처럼 야곱 생전에 야곱을 매우 힘들게 했던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에게도 야곱은 축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2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아버지를 괴롭게 했던 사건은 창세기 34장 그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일에 대한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잔인한 피의 보복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 야곱의 형 에서로부터 받았던 위협이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겪었던 고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가족과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시므온와 레위가 주축이 되어 벌어진 피의 사건이었기에 야곱은 유언에서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6절)라고 했으며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 것과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야곱의 이 예언대로 시므온은 민수기 26장 14절을 보면 지파 인구조사에서 가장 적은 22,200명으로 집계 되었는데 이는 12지파 합계 약 60만 명에 각 지파 평균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이후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 몇 성읍밖에 할당받지 못했으며 훗날에 그마저도 유다지파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이후 아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으며 여러 지파의 땅에서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각자가 현재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의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아버지 야곱에게 큰 누를 끼쳤기에 자연스럽게 넷째 아들 유다가 장자의 권리를 계승한 것입니다.

13절 스불론부터 21절 납달리까지 야곱의 축복의 특징은 아들들의 출생 순서가 아니며, 레아로부터 태어난 아들들 2명, 레아와 라헬의 여종으로서 각각 야곱의 첩이 된 실바와 빌하로부터 태어난 아들들로 축복이 이어집니다. 나귀, 뱀, 암사슴처럼 동물들을 비유한 야곱의 축복이 있으며 섬김, 통치(심판), 우위(추격), 명예(왕의 수라사 담당) 등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말대로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한 것입니다.

22절부터 27절까지는 야곱이 라헬로부터 얻었던 아들 두 명에 대한 축복입니다. 막내 베냐민에게는 다른 아들들처럼 분량대로 짧게 축복한 반면에 요셉에게는 유다처럼 다섯 절의 분량으로 많은 축복을 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에는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으로 번성의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로써 비가 오지 않더라도 안정적으로 수분을 공급받아 담을 넘어갈 정도로 번성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뿐더러 형들조차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현실의 어려움만을 보지 않았고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전능자의 손을 입음이라고 축복합니다. 24절에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손’ 명사가 전능자 옆에 배열이 되어 전능자의 수식을 받고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은 곧 하나님의 손이며 그 손은 짧지 않은 손임을 요셉이 몸소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25절에서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이 짧지 않음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한없는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복이라는 단어를 5번이나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라고 야곱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야곱이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처럼 누구로부터 축복을 받든지 우리 각자 분량대로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분량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에 복을 받는다면 현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현재에 소외된 이웃과 고통 속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아끼고 살피면, 미래에 주님께서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가정에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것처럼 나의 가정에 방문하셔서 내가 어려울 때 그 문제를 기적처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셈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현재에 제쳐둘 것들을 제쳐두는 절제의 삶,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야곱이 육체적 죽음을 앞두고 했던 마지막 고백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라"(29절)처럼 이 땅에서 평안하게 육체적 죽음을 맞지 않겠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축복

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자신의 열두 아들을 향해 축복하면서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이스라엘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예언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이 운명론적으로 조상의 어떤 행위가 후손에게 저주로 흘러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야곱은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미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내다볼 뿐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열두 아들은 순서대로 언급되는 것은 아니고, 레아의 여섯 아들이 먼저 나오고, 라헬의 하녀(빌하)의 아들(단), 레아의 하녀(실바)의 두 아들(갓, 아셀), 라헬의 하녀가 낳은 다른 아들 납달리, 마지막으로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나옵니다.
여기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그리고 요셉에 대한 예언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나머지는 매우 단순합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상속(장자의 몫)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힘으로써 장자의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창 35:22).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의 잔인한 복수극으로 인하여 마찬가지로 장자의 권리를 넘겨주게 됩니다(창 34).

지도자의 자리는 유다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레아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으로 지었지만, 야곱은 여기서 그의 이름이 형제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하고 있습니다(8).
그리고 유다의 모습은 강한 사자와 같은 모습입니다(9).
홀은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고 유다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며 그것은 실로(메시아를 가리킬 것이다)가 오시기까지 그럴 것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종말론적인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장차 메시아의 시대는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치는 여유로움이 있을 것입니다(11~12).

스불론은 해상 무역을 통해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야곱은 예언합니다.
잇사갈은 풍요로움과 사치를 좋아해서 자신의 자유를 삶에 필요한 물질적인 것과 기꺼이 바꿀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이 부족은 전쟁 포로 같이 강제 노역에 붙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잇사갈이 자기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고 가나안 족속을 위해 일하고 음식과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단은 비록 제일 작은 지파가 되겠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정의를 베풀 줄 아는 지파가 될 것입니다.
단 지파에 대한 예언에 속할 수도 있지만, 야곱이 자손 지파들에 대한 예언을 하다가 하나님께 감동되어서 나온 구원에 대한 외침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 지파에 대한 예언이라면 그들이 거두게 될 큰 승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갓은 약탈자들로부터 습격을 받지만 용감하게 싸워 물리칠 것입니다. 국경을 둘러싼 전쟁이 갓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아셀은 비옥하고 많은 것을 생산하여 왕에게 기쁨이 되는 진상품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납달리는 자유로운 산악 백성이 될 텐데,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가 되리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놓인 암사슴’은 특별히 전쟁터에서 신속함과 민첩함을 의미합니다(21).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셉보다 베냐민을 먼저 다룬다면, 베냐민은 큰 성공을 거두어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사자 새끼에 비유되었다면, 베냐민은 이리(늑대)에 비유되는데(27), 이것은 사자만큼이나 탐욕스러운 동물이지만, 보통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동물을 죽입니다.
베냐민은 이렇게 풍족하게 땅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독특하고 깁니다.
요셉은 샘(우물) 곁에 심긴 포도나무에 비유되는데 그 가지가 번성해서 담을 넘어갈 만큼 되었습니다.
그의 번성은 대적들로부터의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이지만(23), 요셉은 전능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자요,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견딜 것입니다(24).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온다’라는 표현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반석이고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나온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땅보다 더 좋을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미움과 적대를 이겨냈듯이 그의 후손들도 그럴 것입니다. 사실상 야곱은 앞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적함으로써 요셉에게 두 몫을 주게 되는데 이것은 비록 유다가 지도자의 명분을 얻었으나 요셉이 실질적으로 르우벤이 빼앗긴 장자의 상속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자손은 결국 아브라함의 언약을 추진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이 복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예언을 마친 야곱은 이제 다시 자기의 자식들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 또 자신의 아내인 레아가 묻힌 약속의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임종을 맞습니다.

야곱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향한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하실 일과 언약을 성취하실 신실함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완숙함에 이르게 되어 마지막을 맞게 되는 성도는 참으로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임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죽음에 당당히 맞서는 바람직한 임종


근대 호스피스의 창시자인 시슬리 사운더스는“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으며 가족의 죽어가는 모습은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임종환자 관리 전문가들은 내 어머니의 임종 관리는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무지에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대부분의 환자가 임종을 맞이하는 모습은 변한
것이 없다.

의학적인 기구의 사용이나 처치로 흔히 통증과 불편 속에서 생명이 연장되고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작별 인사말을 나눌 기회조차 박탈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물두살 된 데이브 풀커슨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여자친구와 같이 조깅을 하는 도중에 승용차에 사고를 당했다.
중환자실에서 가족들은 그를 세 시간 동안이나 만날 수가 없었다.
가족을 만날 때까지 그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면회가 2시간마다 한사람씩 단 5분간만 허락되었다.

결국 실망한 여자친구는 집으로 가고 대기실에서 잠이 들었던 부모들은 나중에 간호사가 깨워서 사망하였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2002년 5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전문가 및 작가가 미국 간호학회지에 임종관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건강관리팀과 병원직원, 풀커슨의 가족
들 사이에 의사교류가 없어서 가족의 사망에 따른 고통이
더 컸음을 아쉽게 생각하였다. 의사소통이 불충분하면 어
떤 환자는 숨을 거둘 때까지 과잉진료를 받거나 불충분한
치료로 통증에 시달리며 사망한다고 하고, 어떤 경우는 의
사나 간호사의 상반되는 지시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임종
을 준비하지도 못한다고 기술하였다.
산소마스크보다 아편유사제가 더 효과적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 줄고 수명이 증가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연장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임종 마지막 주, 마지막 날, 마지
막 시간의 생명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또 어떻게 하면 편
안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임종을 맞게 할 수 있는지 이해
하려는 욕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미국의 노인병학회에서는
1996년에 30개 이상의 건강관리 단체로부터의 보고를 기
초로 하여 임종관리에 있어서 아홉 가지 원칙을 만들었는
데 이는 1) 신체 및 정신적 징후의 완화 2) 환자의 존엄성 유
지 3) 환자가 원하는 처치 4) 부적절한 과잉진료 피하기 5)
환자와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 제공 6) 환자에게 가장 질 높
은 삶의 제공 7) 가족의 재정부담 경감 8) 환자에게 보험 급
여 범위 알리기 9) 사별가족 보살피기 등이다.
지난 7월에 발간된 간호에 관한 다른 글을 보면 클리블랜
드에서 호스피스 책임자로 일하는 엘리자베스 포드 피토락
은 사망이 임박해서 일어나는 변화와 치료에서 증세의 완
화를 목표로 하는 시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사망, 즉
모든 주요 장기의 기능부전은 10~14일에 걸쳐서 오며 빠르
면 24시간 이내에도 발생할 수 있다고 피토락 여사는 쓰고
있다.“보통 죽어가는 환자는 탈수상태가 되며 음식물을 삼
키기가 어렵고, 말초순환이 감소하며, 피부에 땀이 나서 차
고 끈적끈적하게 되며 만지면 차게 느껴진다. 그러나 차다
고 담요를 덮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임종환자는 팔다리의 어느 부위에 아주 작은 무게라도 더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그녀는 기술하고 있다.

폐에 물이 차게 되면 환자는 즉시 숨을 헐떡이게 된다.
그러나 산소를 투여한다고 산소부족을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피토락 여사는 말한다.
오히려 창문을 열고 부채나 선풍기로 환기를 시키고, 침대 주위의 공간을 확보하여 주며 아편유사제를 투여하여 환자의 숨찬 느낌이나
불안을 제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키는 것이 어려워서 먹거나 마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튜브영양법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환자는 보통 배고픈 줄을 모른다.
그리고 수액이나 영양 공급의 중단은 혈중에 키톤체가 쌓여서 무통성 다행감(analgesic euphoria)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소량이라도 포도당을 정주하면 이런 다행감을 길항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죽어가는 환자에게 경구로 음식물을 투여하는 것은 구토나 흡인 등을 유발하여 더욱 힘든 임종을 맞게 된다.
피토락 여사는 탈수로 섬망에 빠진 환자는 수액 정주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죽어가는 환자에게는 부종, 오심, 통증 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편유사제 투여시 신부전으로 배출이 안 되어 혼돈, 근경축, 경련 등이 발생하면 수액을 투여하거나 약물투여를 중단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임종전 6시간, 8%만 의식 유지

누군가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여명이 삼 개월 정도가 남았더라도 내향적으로 되고 대화가 줄게 된다.
이런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죽어가는 사람이 외부의 세계를 떠나서 내부 명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은 환자가족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일부러 기다렸다가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100명의 암으로 인한 임종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56명은 사망 일주일 전에 의식이 있었고, 44명은 졸린상태였으며 혼수상태는 없었다.
최후의 6시간 동안에는 8%만이 의식이 있었고, 42%는 졸린 상태였고, 나머지 50%는 혼수상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사망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입주위의 근육은 이완되고, 분비물이 고여서 목이나 가슴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죽음의 그르렁거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흡인을 시도하는 것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불편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환자를 모로 눕히거나 머리쪽의 침대를 높게 해주거나 필요시에는 분비물을 줄여주는 약물을 투여할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는 신음하듯이 숨을 쉴 수도 있으나 이것이 통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적절한 진통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래야 의사소통을 효과적으로 하고, 평화롭게 임종할 수가 있다.
그리고 진통제가 사망시간을 앞당긴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였다.
환자들이 자신이 죽을 것인가를 물으면 성실하게 답변하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일이 단순히 “이제는 죽어도 된다”고 하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환자가 소리나 빛에 더 이상 반응할 수 없을 지라도 듣는 감각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임종하는 환자가 듣기를 원하지 않는 말은 환자 가까이에서 하여서는 안 된다.
환자가족들은 흔히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어떠한 조치도 이를 되돌릴 수 없을 때 의사가 환자를 방치하였다고 불평을 자주 하는데, 환자 가족들은 의사들도 환자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3년전 미국 내과 학회지에는 완화의료(palliative medicine)의 대가인 뉴욕 마운트 사이나이 메디컬 센터의 마이어와 모리슨 박사 그리고 워싱턴 의대 벡 박사는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가 좋아지지 않을 때 의사는 죄책감, 불안감, 좌절감, 부적절감 등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의사들은 이러한 감정을 표시하기보다는 환자로부터 철수하게 된다고 하였다.
어떤 의사들은 살 수 있는 환자를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낫다고 합리화하기도 한다고 마이어 박사는 말한다.
피토락 여사는“환자가 사망하게 되면 남은 가족을 포기하지 말고, 방을 떠날 때는 반드시 가족을 위로하는 말을 잊지 말며, 환자 가족들이 원하는 만큼 시간을 준 후에 다른 곳으로 운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마무리, 웰다잉(Well-Dying)을 위해

죽음을 준비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가장 중요한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때론 혐오하는 태도마저 보이곤 합니다. 그 때문에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현실'로서의 '죽음'을 끝까지 미루다 갑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핵가족 단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당황과 고통에 휩싸여 허둥대다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임종자는 존엄하게 생을 마치고, 가족이나 의료진은 그 임종자가 편안하게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 또한 우리의 삶의 한 과정이며, 죽음이 있기에 유한한 우리 삶은 더욱 소중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평생 성장합니다. 죽음은 그 마지막 성장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평상시 외면했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가? 신은 정말 있는가? 있다면 어떤 분인가? 등의 질문을 쏟아냅니다. 죽음을 앞두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기에 죽음을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깊게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

•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조용히 떠올려봅니다.

• 자신이 떠난 다음 남은 가족에게 누가 안 되도록 주변을 잘 정리합니다.

•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무리가 안 된 인간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과 화해합니다.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면 자신의 마음속에서라도 그 사람과 맺힌 마음을 풀고 털어냅니다. 

• 종교가 있다면 신앙생활에 더 충실하게 임합니다. 

• 유언장을 작성하고, 원하는 장례방법을 가족들과 상의합니다.

•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사후의 삶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준비합니다. 

• 아직 남은 능력으로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실천에 옮겨봅니다. 

•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집착하지 않으며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둡니다.

 

임종 48시간 전에 나타나는 증상

• 숨을 가쁘고 깊게 몰아쉬며, 숨을 불규칙하게 쉽니다.

• 가래가 끓다가 점차적으로 깊게 천천히 쉽니다.

• 체온이 점차 떨어지며 손발이 차가와 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점차 피부색이 퍼렇게 변합니다.

• 맥박이 약해지고 혈압이 떨어집니다.

• 대소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항문이 열려 대소변을 봅니다.

• 의식이 점차 흐려져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 눈으로 보일 정도로 나날이 쇠약해져 갑니다.

• 음식에 대해 관심을 잃고 묽은 음식조차 삼키기 어려워집니다.  

 

임종 시 돌봄

1. 임종이 다가오는 증상을 알아두고 임종 때 가족에게 알리고 함께 합니다.

• 미리 누구에게 누가 연락할지를 명단과 전화번호를 준비해 둡니다.

• 청각은 가장 마지막까지 지속되는 감각임으로 경박한 말은 삼가도록 합니다.

•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도록 하며, 하고 싶은 말을 환자에게 합니다.(감사의 말, 용서를 비는 말, 환자의 대신하여 더 열심히 잘 살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 마지막 인사의 말 등) 

 

2. 환자가 가능한 말씀을 하실 수 있도록 돕습니다.

• 임종 전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 적개심이 있는 사람과는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합니다.

•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표현하도록 합니다.

• 유언을 안 했다면 의식이 저하되기 전에 유언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3. 환자를 계속적으로 돌봅니다.

• 의사와 함께 현재 투여중인 약물을 변경해야 할지 상의합니다.

• 이 시기에는 의료진과 상의하여 기본적인 약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단합니다.

• 환자를 깨끗하게 합니다.

•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체위를 2시간에 한번 씩 변경해 드리고, 등맛사지를 해줍니다.

• 드실 수 있으면 식사를 제공하지만 사래가 들리면, 호흡곤란이나 폐렴에 걸릴 수 있으니 무리해서 드리지 않습니다. 사래가 들리면 물보다는 걸쭉한 죽이나, 순두부, 젤리가 좋습니다.

• 환자에게 편안하고 위엄 있게 있을 수 있도록 환자 주변과 집안을 청결하게 정돈합니다.

 

4. 환자의 종교에 맞게 영적인 돌봄을 제공합니다.

• 종교적 상징물이나 성물(십자가, 염주 등)을 환자가 보거나 손에 지니게 합니다.

• 환자가 원하는 성가나 불경 테이프(연도테이프), 명상 음악 등을 조용하게 틀어놓습니다. 단, 1시간이상 틀어놓지 말고, 중간 중간 휴식시간을 둡니다.

• 환자가 원하는 기도나 종교예식을 실시합니다.

 

5. 임종 후에 가족의 할 일과 준비물에 대해서 미리 준비합니다.

• 임종한 후에는 환자가 특별한 감염성 질환이 없다면 임종 후 가족들이 시신 옆에 머무르면서 충분하게 작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 물수건으로 고인의 몸을 닦아주고 배설물이 나오면 처리해서 가능한 한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 환자복을 벗기고 준비한 옷(평소에 환자가 좋아하던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 머리를 빗기고 턱받이를 해줍니다.

• 고인의 자세가 뒤틀리지 않게 바르게 해줍니다.

• 마지막 인사 혹은 추억을 갖는 시간을 갖거나 종교 의례를 행합니다.

• 정해놓은 장례식장에 전화해서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운구하게 합니다.

  

사별 후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즉 고인이 사망한 후 남은 이들은 크나큰 상실의 슬픔, 슬픔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질 뿐 아니라 고인을 대신해서 해야 할 역할변화에 당황스러워하며 힘겨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별의 고통은 사회적 지지와 자신의 노력으로 부정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자칫 치명적인 건강악화로 빠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예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슬픔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나 겪는 정상적인 것입니다. 슬픔은 건강하지 못함도 질병도 아닙니다. 약하다거나 무능하다는 표시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따라서 슬퍼할 만큼 슬퍼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 슬픔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아주 좋은 어떤 것을 가졌었다는 표시입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잃기도 하지만 얻기도 합니다. 슬픔은 고통스럽지만 또 다른 삶의 세계로 적응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집니다.

• 슬픔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슬퍼할지는 사람의 얼굴만큼 다릅니다. 그때까지 자신에게 온유하게 대해주고 스스로를 잘 보살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 슬픔은 전 존재가 치유 받아야 할 상처입니다.

삶이 산산조각 났다고 느낄 때, 전존재가 치유 받아야 합니다. 몸이 아프고, 우울하며, 사람들을 만나기 싫고, 두렵거나 불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슬픔은 진정한 공감, 울음, 장례 등의 애도 행사 등으로 표현될 때 치유 받습니다.

고인의 가치를 충분하게 인지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아픔을 아무런 판단 없이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런 친구나 사별전문가, 상담자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일기쓰기나 글쓰기를 통해서 아픔을 토해내셔야 상처가 치유됩니다.




아름다운 임종

최근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편안하고 아름다운 임종 분위기 형성이 미흡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울의대가 월드리서치센터인에 의뢰해 일반인 1241명, 환자 1001명, 환자가족 1008명, 의료진 928명을 대상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고 답한 평균 점수는 58.3점으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는 한국의 임종 현황에 대한 인식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국가 정책에 대한 동의 여부, 지원활동 참여의향에 대한 부분 등 다양한 주제를 포함했다.
 
'누구나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다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임종하는 사회'를 100점, '모두가 불행하고 무의미하게 살다가 괴롭고 비참하게 임종하는 사회'를 0점이라고 가정해 점수를 산출한 결과 58.3점의 평균이 도출됐으며, 일반인은 65점, 환자 59.9점, 환자가족 58.1점, 의사 47.7점의 평균이 나왔다.
 
일반인과 환자는 평균 점수보다 높았지만 환자가족과 의사는 평균보다 낮은 점수가 도출됐다.
 
이와 함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중요한 요인으로 일반인(22.4%)과 환자(22.7%)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주지 않음'을 1위로 꼽았지만, 환자가족(25.9%)과 의사(31.9%)는 '가족이나 의미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1위로 답했다.
 

현명한 장례를 위한 고려 사항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당한다.
가족이 오래 병을 앓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해도 죽음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잠든 새, 간병 중, 짧은 순간에 닥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아득한 단절감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떠난 후 우리는 장례식이라는 열차에 올라탄다.
별일 없다면 대개 3일 동안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그동안 정신을 차려야 고인과 제대로 이별하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다.

그 방법을 알아보자.

【임종 전】
사전상담을 받아놓는 것이 좋다.
가족이 장례 전 과정을 소상히 알고 직접 실행할 것이 아니라면 전문 장례지도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생전에 상조회사를 정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고, 그동안의 이력을 볼 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사전상담을 통해 매장이나 화장 여부, 봉안당이나 장지, 전국 장례식장 현황과 사용료, 조문객 식음료대, 제단 꽃장식, 제사 음식 등을 알아보고 정해야 한다.

【1일 차】
의료기관에서 임종할 경우 병원 원무과에서 사망진단서를 7부 정도 발급받는다.
자택에서 임종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검사지휘서를 수령해야 한다.
장례업체 콜센터에 연락해 안내받을 수도 있다.

조치를 취한 후 장례지도사와의 상담을 통해 장례식장을 정하고 운구 차량으로 고인을 이송한다.
화장, 매장 등 장법에 따라 장지를 결정하는데, 화장 시 화장 예약을, 매장 시 장지 예약을 한다.
그 후 장례 일정(입관 및 발인 시간 등)을 정하고 견적을 확인한다.
또 빈소에 차릴 영정사진, 제단, 제사상 등을 결정하고 가족, 친지, 지인에게 부고 문자를 발송한다.

【2일 차】
장례지도사 및 장례관리사(도우미)와 협의해 음식을 정한 후 조문객을 맞이한다.
입관식은 고인의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고 수의를 입힌 후 관에 모시는 절차다.
입관실에서 진행되며 보통 1시간 정도 걸린다.
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입관식이 끝나면 제사를 지낸다.
종교의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차량, 운구 인원, 발인제 지낼 장소 등 장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사항을 점검한다.

【3일 차】
발인 전 장례식장 비용을 정산한다.
미사용 물품은 반납하고 상조회사 비용도 정산한다.
개인 물품을 챙기고 빈소를 정돈하며 개인 짐을 정리한다.
발인은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이다. 발인 전 제사상을 차려 추모의식을 갖는다.
종교마다 발인식과 함께 종교 예식을 진행하거나, 영결식장으로 이동해 별도로 진행하기도 한다. 발인식을 마치면 관을 운구하여 장의차량에 모신다. 유족의 규모에 따라 버스와 리무진을 다 쓰거나 버스 혹은 리무진만 쓸 수도 있다. 장지에 따라 화장장 또는 묘소로 이동한다.

화장하는 경우 예약 시간 30분 전까지 화장장에 도착해 접수 절차를 마쳐야 한다.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 검사지휘서, 고인의 주민등록등본을 각 1부씩 준비한다. 화장이 시작되면 유족대기실에서 대기한다.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인데, 이때 종교별 추모의식을 지내기도 한다. 화장이 끝나면 유골을 한지로 감싸 준비한 유골함에 모신다. 그 후 유골 안치를 위해 이동한다. 안치 방법은 봉안당, 봉안담, 봉안묘, 수목장, 해양장 등이 있다.

매장하는 경우 관을 장지로 운구한다. 공원묘지 등을 이용할 경우 서류 접수 후 직원의 안내를 받는다. 정해진 묘역으로 이동해 미리 파놓은 묘지 광중(구덩이)에 관을 모신다. 광중과 관 사이를 흙으로 채워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도록 한다. 그 후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다. 평토제, 성분제 같은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봉분 조성 후 종교별로 추모의식을 진행한다. 매장의 경우 봉분묘, 평장묘, 문중묘, 공원묘원 등에 고인을 모신다.

【장례 후】
자택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를 치른다.
사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사망자의 주소지와 관할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신고한다.
개인묘를 설치할 경우 30일 이내에 사후 신고해야 한다. 가족묘, 문중묘, 법인묘는 설치 전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망자의 상속 재산은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를 신청하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록이나 SNS 등을 확인한 후 조문이나 위로를 전한 분들에게 답례 문자를 발송하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경우에 따라 전문 청소업체를 쓰기도 한다.

장례와 행정 절차를 마쳤다고 해서 고인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조차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인은 마음속에 있다.
사랑의 기억은 남기고 나쁜 기억은 털어버린다.
슬픔을 살아갈 힘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남은 이의 몫이다.

아름다운 임종(원제:Romantic Death)

제1부 죽음, 제2부 달(月), 제3부 장(葬)으로 나누어진 본서는 단순히 장례란 영업차원이 아닌 죽음후의 세계를 향한 꿈과 소망을 담아 성실하게 설파해 나간 본 책자는 아름다운 임종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당위성을 그만이 가진 특유의 철학과 사색을 통해 비단실처럼 엮어 냈다.

“나는 죽음에 관해서는 미화론자이다.
인간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는 존재이면서 점점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불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행한 인생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불행한 사건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불행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욱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실은 죽음 그 자체의 슬픔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인 것이다.
죽음 그 자체의 슬픔과 이별의 슬픔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앞으로의 장례식은 이별의 슬픔과 함께 아름다운 죽음, 행복한 죽음의 이미지도 연출될 것이다.”

“나는 죽음을 미화하고 싶다.
그러기 위한 수단인 장례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연구해 왔다.“

”죽음을 미화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때 비로소 아름다운 삶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인류의 영원한 친구 달을 떠올렸다.
고대인들이 달을 사후의 혼이 가는곳이라고 생각했다.
달은 혼이 재생되는 중계점이라고 생각해 온것이다.
이어서 달을 본거지로 하는 그의 거대한 구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바로 "Moon Heartopia"의 탄생이다.

그리고 장례식장의 디자인 문제에 이르러 “도시속의 장례식장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쉬우므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는 예술적인 디자인을 해야 할 것이다. 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 보다는 장엄한 쪽이 바람직할 것이다.“라고 소신을 밝힌다.
그는 나아가 현장에서 일하는 장례지도사들이 고인의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례식을 어떻게 연출하여야 할 것인가를 설파하기도 한다.

어쨌든 본서는 장례업무에 정통하면서 인간의 죽음을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저자의 꿈인 동시에 오늘날 장례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의미있는 장례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야할 당위성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요목차

죽는 순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우주비행사들의 큰변화
자살자가 본 사후세계
탄생과 죽음을 초월한 무한의 인생
달을 노래한 시인들
달빛은 혼의 연금술사
사후의 혼이 찾아 가는 길
인류의 문화는 묘지에서 시작되었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
죽음의 이미지 트레이닝
하토피아의 프레젠테이션
장례식장의 디자인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8장 / 나도 안다(19절)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But his father refused and said, "I know, my son, I know. He too will become a people, and he too will become great. Nevertheless, his younger brother will be greater than he, and his descendants will become a group of nations."

창세기 47장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은 자신이 죽게 되면 어떻게 장례를 치뤄야 할 지에 대해 요셉에게 당부합니다.
자신을 애급에 묻지 말고 고향 땅 이스라엘 땅에 묻도록 부탁하자 요셉은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47장이 막을 내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은 야곱이 병환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의 임종이 가까와졌다는 사실을 안 요셉은 그가 애굽에서 낳은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을 찾아갑니다.
이때 야곱은 온 힘을 다하여 침상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유언을 남기기 전에 야곱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에브라임 앞에서 꼭 남겨야 할 말을 합니다(48:3-4).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남긴 말이 무엇입니까?
루스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루스라는 지명은 벧엘의 옛 지명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루스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 꿈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꿈에서 깬 야곱은 그 곳의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루스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 야곱의 삶 가운데 하나씩 성취되어졌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약속의 말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이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야곱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과 자신의 손자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이라면 요셉이 야곱보다 더 많고, 가축이라면 온 가축이 요셉의 소유가 되었으며 온 땅과 사람들이 다 요셉의 땅이요, 요셉의 종이 되었는데 그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요셉에게 유산으로 남겨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유산으로 남겨준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식에게 남겨준다는 것은 마치 구약이나 신약의 말씀중에 자녀에게 큰 축복을 가져다주는 구절을 한 구절 선택해서 그 구절을 새로 산 성경책 앞에 쓰고 '사랑하는 아빠가' 라고 쓰는 것처럼 느끼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요셉은 읽을 성경책이 없었습니다.
구약이 책으로 존재하기도 전에 야곱과 요셉은 살았습니다. 야곱의 손에는 들고 읽을 성경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로지 입으로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이삭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전해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삭이 직접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해져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제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벧엘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해 요셉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유언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5,16절입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입으로 이삭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또한 이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야곱에게 입으로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들은 야곱은 그 자신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삭에게 주신, 그리고 야곱에게 주신 말씀은 이제 요셉과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왜 성경이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직접 듣지 못했어도, 이삭의 생전에 그에게서 듣지 못했어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손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그들이 말씀안에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아브라함,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알아도 그 말씀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는 것은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을 구전으로 전해주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입으로 전해줄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이 있습니까? 성경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자녀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려면 그것을 벧엘에서 친히 경험하고 입으로 직접 들려줄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자신이 전해받은 말씀, 스스로 받아 평생토록 간직해온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4절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했는데, 실제로 야곱에 벧엘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한가지 말씀이 더 있었습니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마 야곱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벧엘이 있는 가나안 땅인데 이제 나는 이곳 애굽에서 죽게 되는구나. 나를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은 성취되지 않는 것인가?'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야곱이 의도적으로 그 구절을 이곳에서 생략한 것이겠습니까? 혹시라도 야곱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는 약속의 말씀은 야곱에게서 성취되지 않았을 지라도 그 약속은 이제 요셉과 그의 후손에게 유효한 약속임을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입을 빌려 하나님은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나는 죽으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까?
그것이 성취되지 않음에 실망하고 있습니까?
나와 나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으로 도저히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늘 그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소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곳에 서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요셉이 종살이 할 그 때에 그 누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 믿었겠습니까?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이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 땅으로 가게 된 때에 누가 가나안땅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로 신음에 지쳐있을 때 누가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약속과는 다르게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우리의 처한 환경이나 우리가 직면한 절망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주의 약속을 붙잡는 소망의 하루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7장 / 고센 땅(1절)

고센(Goshen) : 접근함

'고센((Gôshen.  גֹּשֶׁן) '이란 '접근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데, 하나님께 가까이함 즉 접근함이란 신앙의 염원을 담고 있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이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한 켠에, 양식 찾아 먹고 살기위해 온 이민자의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복되게 하셨다.

야곱의 70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것과 고센 땅에 거하게 된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적 경륜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고센’ 땅에 거하게 됩니다.
요셉은 자기 가족들이 살 곳으로 살기 좋고 편리한 애굽의 유명 도시가 아닌 ‘고센’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 가운데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 왕을 만나도록 하였는데, 이 때 형제들은 바로 왕에게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창 47:4)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우거’는 한자로 붙어살 우(寓), 살 거(居)로 ‘남의 집에 임시로 사는 것’, 또는 ‘타향에서 임시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구르’인데, 마찬가지로 ‘임시로 잠시 머무는 것’이란 뜻입니다(창 12:10, 35:27).
즉 애굽은 그들이 영원히 거주할 장소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온 것은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창 15:13)라는 횃불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온 것이었지만, 언젠가는 횃불 언약에 따라 다시 애굽에서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임시 거주할 땅으로서 ‘고센’을 선택하였을까요?

1.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

고센 땅은 애굽 본토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우상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고센으로 가지 않고 애굽의 편리한 도시로 갔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쉽사리 애굽 문화에 물들고 다신론적 우상 종교들로 인하여 신앙의 순수성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아비의 권속들에게 만약 바로가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대답하라고 미리 말해두었습니다(창 46:33-34).
그 이유는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창 46:34下)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증히’는 히브리어로 ‘토에바(tôwʽêbâh. תּוֹעֵבַה)’로서 ‘구역질나다, 혐오하다, 몹시 싫어하다’는 뜻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목축에 대한 강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던 이스라엘은 상대하기 싫은 천박한 민족으로 알려져, 애굽 사람들은 그들과의 혼인을 아주 꺼리고, 고센 지역과 왕래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히 고센 땅에만 거하는 고립된 상태가 되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8441. 가증히(토에바. tôwʽêbâh)  תּוֹעֵבַה 
1. 질색.  2. 창세기 43:32. 3. 열왕기상14:24
발음 / 토에바[ tôwʽêbâh ]
어원 / 85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증히 여김(창46:34), 꺼리는 일(신12:31), 싫어하는 바[것], 미워함(출8:26, 잠6:16, 20:10), 싫어함(잠13:19), 부정(창43:32), 미움(잠24:9, 29:27), 미운 물건(렘16:18).[형] 가증한(레18:30, 겔6:11, 말2:11)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 8581. תָּעַב 
1. 피엘형 ׃תִּעֵב
2. 몹시 싫어하다
3. 몹시 싫어하게 되다
발음 / 타아브[ tâʽab ]
관련 성경 / 마땅치 않게 여기다(대상21:6), 가증하다(신7:26, 욥15:16, 겔16:52), 싫어하다(욥9:31,시5:6, 암5:10), 미워하다(욥19:19, 신23:7, 미3:9), 미움을 받다(사49:7).
구약 성경 / 22회 사용

1657. 고센(Gôshen) גֹּשֶׁן 
1.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2.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발음 / 고센[ Gôshen ]
어원 / 애굽어에서 유
관련 성경 / 고센(창45:10, 46:28,34, 47:27, 50:8, 출9:26, 수10:41, 11:16, 15:51).
구약 성경 / 15회 사용


세상 속 아름답고 복된 ‘고센’ - 이민의 땅, 믿음의 관점, 섭리적 은혜 -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늘 함께 하신다. 애굽에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고, 고센으로 이주해간 야곱의 자손들과도 함께 하셨으며, 훗날 출애굽의 여정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광야길에도 함께 하셨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그곳은 복 받는 땅이 된다. 비록 거친 사막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은 거룩한 땅이 된다. 마치 모세의 훈련장이었던 미디안의 거친 땅 떨기나무아래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거룩한 땅이 되지 않았는가? 

이민의 땅 애굽에서 서슬 퍼런 바로왕의 권세와 모진 핍박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고센 땅에는 하나님의 구별된 은혜가 넘쳐났다. 애굽이라는 세상한복판에서 작고 초라해 보이는 이민자들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 고센은 축복의 땅이었다. 고센 땅은 요셉과 관계가 있다.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을 이집트로 초청하여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 바로 왕으로부터 그들의 거주지를 나일강의 마지막 부분인 비옥한 델타지역 즉 고센 땅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고센'이란 '접근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데, 하나님께 가까이함 즉 접근함이란 신앙의 염원을 담고 있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이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한 켠에, 양식 찾아 먹고 살기위해 온 이민자의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복되게 하셨다. 낯선 타국의 이민자로서 살아가지만, 저들은 고센을 믿음으로 아름다운 땅,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섭리안에서 꿈을 해석하라

 

고센은 요셉의 꿈이 실현된 곳이다. 요셉은 형들과 부모 앞에서 자신이 꾼 꿈을 당당히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 줄 확신하였고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 것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 두 가지 꿈을 꾸었는데 고센에서 모두 성취가 되었다.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형제들의 단이 요셉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그에게 절하더라는 꿈이다. 

요셉의 꿈으로 인해 형들은 시기가 나서 흥분했지만,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 요셉은 이처럼 자신이 꾸는 꿈으로 인하여 그는 형들로부터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는 아주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 조롱하는 질투가 그를 형제들로부터 죽음 같은 배신과 고통의 길을 가게 만들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임으로, 자기들의 손으로 하나님의 꿈을 무효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결국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리게 하였고, 오히려 꿈의 성취를 이루는 섭리의 과정이 되게 하셨다.

인생의 복잡한 일들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꿈은 음모로 깨어지지 않는다. 이집트 땅 고센에서 하나님의 그 꿈은 아름답게 실현되었던 것이다. 요셉이 22년 만에 형들이 자기 발아래 엎드렸을 때, 그는 17살 때 꾸었던 꿈을 기억해 냈다. 그 꿈에 대한 기억들은 그의 지나온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게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놀랍고 틀림없는 분이시다. 인간은 잊어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경솔히 여겨도 하나님께서는 귀중히 여기신다. 광야 같은 이민의 땅에서도, 꿈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을 때, 고난조차도 꿈의 성취를 위한 아름다운 간증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센 땅에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실 때 제일 눈에 번쩍한 말씀이 바로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이었다. 75세된 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명받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자녀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구에 동의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는데, 하나님은 이를 의로 여기셨다. 믿음의 사람은 의인이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별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주신 후손임을 보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든 가나안에서 400년을 지났더라도 장정만 60만 대군이 되는 약 300만 백성이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4대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고, 집안에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대부분 집안에 1000명 넘기가 힘들 것이다. 이에 비해 야곱의 4대손은 고센 땅에서 장정만 60만 대군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옥한 땅 고센으로 이들을 불러들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70명 야곱의 가족이 이민을 오듯이, 우리자신들도 비록 작고 초라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며 땅을 쳐다보고 낙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는 반드시 우리를 부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예비하시는 은혜를 기대하라

 

고센은 요셉을 선발대로 미리 보내시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을 지낼 땅을 미리 준비토록 하셨다. 요셉은 형들을 22년 만에 만나 자신이 요셉이라 밝히고 방성대곡하였다. 요셉은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간증한다. 그들이 자신을 이곳에 팔았으나, 근심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신 것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었다. 

요셉자신도 알지 못했던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할 때도, 또 옥중에 있을 때도, 또 총리로 있으면서 7년 풍년에 곡식을 넉넉히 사들인 후 7년 흉년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자기 삶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모든 크레딧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어도, 섭리적 은혜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삶의 승리를 가져온다. 섭리적 은혜(Providential Grace)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가 그치지 않는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한 믿음과 은혜가 고센을 중심해서 이스라엘을 발흥케 한 것이다. 그냥 두었으면, 복수의 칼날과 핏빛이 난무했을 고센 땅이 은혜의 땅이 된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약속의 땅, 천국의 소망 

 

고센은 야곱이 생의 마지막 17년간을 지낼 수 있었던 땅이었다. 요셉이 17세 될 때까지 함께 지냈던 야곱은 그의 생애 마지막(130-147세) 17년을 사랑하는 아들과 고센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야곱은 제일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 일국의 총리로 있는 모습만 보아도 행복했을 것이다. 두 손자를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했을 것이다. 바로왕 앞에서 그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던 야곱이, 양식이 없어 구걸하듯 찾아왔던 야곱이 이제 더 이상 먹는 걱정, 입는 걱정, 사는 걱정이 필요 없게 된 곳이 고센이다. 그곳에서 야곱의 말년은 그야말로 안식의 연수였다. 참으로 마음고생, 육체고생을 많이 했으나 고센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야곱은 평안히 노후를 안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 두 아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들을 축복하며 임종하며 그의 시신을 조상들이 있는 헤브론 막벨라 동굴에 안장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비록 고센 땅의 평안을 누리고 있지만, 결코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믿음의 땅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야곱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여생을 평안히 지난 비결이 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누려도, 약속의 땅 천국의 소망을 품을 때, 진정한 안식과 평안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나의 삶의 지경인 고센이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용서와 관용, 용납

 

마지막으로 고센은 용서의 땅이었다.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을 인정하면서도, 아버지 사후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형들을 온전히 용서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께서 이를 사용하신 것임을 형제들에게 확정한 것이다. 사단마귀는 요셉의 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꿈’을 이루지 못하도록 온갖 음모를 꾸몄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음모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이다.

오래전 아미쉬 마을의 학교에 어떤 사람이 총을 들고 난사하여 어린아이들과 여러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아미쉬 형제들은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사는 평화주의자들이었다. 

 

모든 이들이 아미쉬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 주시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희생당한 아이들을 묻으면서 "이들은 천국에 갔다"고 서로 위안하며,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한 찰스 로버츠 4세를 용서했다. 특히, 살인자 로버츠의 장례에 참석했던 75명 중 절반이 아미쉬 마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저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모습을 보고, 장례를 집전하던 목사님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지 열흘 만에 그 사고 현장의 학교건물을 다 철거하고 밭으로 만들었다.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좋지 않은 미움의 기억들이 생길까봐 다른 곳에 건물을 짓기로 하고 철거하였다. 

용서를 통해 고센 땅은 비록 애굽의 작은 지역에 불과했지만, 열두 형제의 가족들이 무럭무럭 먹고 자라며 하나님의 날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장소가 되었다. 이민사회에서 가족 간에도 용납과 관용이 어려운 환경들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용서하고 용납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자신의 영혼이 살고, 가정과 가문이 살고, 교회가 살고 지역이 사는 길이다.

애굽의 고센 땅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한켠 땅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잘사는 길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들이 고센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세월이 흘러도, 태평양을 건너던 그 꿈을 잊지 말자. 고난도 섭리 안에서 해석하자. 어렵고 힘이 들어도 땅을 보지말고, 머리를 들고 하늘의 뭇별들을 바라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지 않음을 믿음으로 구하라. 이땅이 아무리 좋아도 야곱처럼 돌아갈 곳, 천국을 잊지 말라. 마지막으로 이민의 삶은 척박하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다. 그러나 용서와 용납과 관용이 모두를 살리는 길임을 기억하며 힘써 용서하라. 하나님께서 고센처럼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었다가, 훗날 천국에서의 영화(Glorification)에 드는 복도 부족함 없이 누리게 하시리라.

고센 땅과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아들 이삭까지 내려놓는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요셉을 통해 야곱 일가를 이집트 고센 땅에 정착시키셨다. 이 땅은 이집트 왕 파라오가 판단할 때 이집트 땅 중에서 노른자위 땅이었다(창 47:6). 가나안 땅 뿐 아니라, 나일 강 덕분에 곡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까지도 기근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야곱 일가는 요셉을 통해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그 시기에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급하신 이집트 땅에서 그 백성은 이집트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야 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그들의 직업이 목축업이라고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하라고 시켰다.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기” 때문에 고센 땅에서 구별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창 46:34).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창 48:21) 하신다고 축복한다. 이 때 성경본문은 야곱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표기한다. 요셉도 죽을 때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고 말한다. 이는 이집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머무를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들에게는 가야 할 약속의 땅이 따로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 9:7)는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에게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28:3-4)는 복을 빌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다(창 47:27).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창 48:3-4)는 약속을 주셨음을 요셉에게 기억시킨다. 이는 이집트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님을 뜻한다. 이집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한 수단에 불과하다.

요셉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출 1:7)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런데 고센 땅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 사는 동안 고센 땅의 풍요를 맛보면서 점점 더 이집트에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들은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출 1:8). 그의 판단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대제국 이집트 백성보다 더 많고 강한 백성이 되었다(출 1:9).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자신을 이집트 백성과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집트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백성’이라고 부르며 이집트 백성을 ‘우리’라고 부름으로써 둘을 서로 구분한다. 그는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10)고 두려워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적으로 여겼기에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였다(출 1:11). 이는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 15:13)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코브라가 왕관에 있는 파라오가 뱀의 후손으로서 여자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이다(창 3: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센 땅을 선물로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뱀의 후손이라는 이집트 백성의 정체를 깨닫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파라오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이로 바꾸어 사람들과 짐승들을 괴롭히실 때 이스라엘 백성도 동일한 고통을 겪었다. 이 재앙을 통해 그들은 그들이 의지했던 옥토가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시작하신다.



06-01-2023(목)

난해 성경절 / 이스라엘은 애굽에 430년 동안 거주했는가?

갈라디아서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의 시발점이 아브라함 때부터인가 애굽에 거주하기 시작한 때부터인가의 문제다.
만일 아브라함 때부터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훨씬 짧아지게 된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두 종류의 성경 절들이 존재한다.
창세기 15:13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삽십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7:6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이 40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이런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 즉 종노릇한 기간이 400-430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한 편의 기록들을 보면 아브라함 시절부터 출애굽까지를 포함한 것이 430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3:15-18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이야기이다.
따라서 430년의 시작도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5:13
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디까지가 이방인가?
그 당시는 가나안도 애굽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가나안 생활도 애굽생활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창세기 15:16
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그 4대 란 출애굽기 6:16에 보면 레위 - 고핫 - 아므람 -모세를 말하며 대략 5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치더라도 2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이렇게 계산하 면 애굽에 실제 거주했던 기간은 200-230년 정 도가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처음 애굽에 내려올 때 70여 명에 불과하던 야곱의 후손들이 4대 215년 만에 어떻게 200여 만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430년의 기간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전자는 아브라함부터 출애굽까지를 430년으로 보는 견해
후자는 순수한 애굽 체류기간만 430년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의 문맥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도 어느 한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산점이 언제이든지간에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는 430년 동안의 이스라엘의 유랑생활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6장 / 칠십 명(27절)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With the two sons who had been born to Joseph in Egypt, the members of Jacob's family, which went to Egypt, were seventy in all.

애급에 거주한 야곱의 자손들은 모두 칠십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가족들이 애급에서 430년 동안 지내며 무려 장정만 60만 명이 되어 애급에서 나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기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46장은 족장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중심으로 구속사의 새로운 역사를 펼쳐가는 모습을 소개하기 위하여 언약의 후손들이 큰 민족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애급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애급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으며 하나님은 벧엘의 축복을 다시 언약하셨습니다.(1-7절).
이때 함께 애급으로 이주한 식구는 총 70명이었습니다(8-28절).
야곱이 고센에 도착한 후 요셉이 올라와 20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하고 야곱의 일족이 고센 땅에 정착할 준비를 합니다다(29-34절).

야곱을 따라 애급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족보를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이주한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26절에는 66명으로 야곱 자신과 며느리들을 뺀 숫자이며 27절과 출애굽기1:5에는 70명으로 야곱 자신과 요셉, 요셉의 두 아들을 포함시킨 숫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7:14에는 7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27절에 기록된 70명 외에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요셉의 다섯 명의 후손을(창 50:23) 더 한 숫자로 추정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70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70이란 '하나님, 승리, 안식'을 뜻하는 7과 10이라는 '완전'수가 합쳐진 숫자입니다.
따라서 본문 통해서 저자는 야곱의 가족들이 애급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주도 아래 이스라엘을 번성시키시기 위함임을 암시하려고 합니다.

과거 이방 땅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야곱은 다시 애급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희생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하시고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의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애급과 같이 낯설고 어려운 곳으로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 곳은 축복과 번영의 땅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 또한 역경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시며 한 백성들의 총회가 야곱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35:11).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꿈만 같은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인생이었으나 그의 꿈은 언제나 신기루 같아서 손에 잡힐 듯하면 이내 멀어져 다시 치열하게 그 꿈을 좇아 수고하는 험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자신의 꿈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좇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었기에 허황된 꿈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될 꿈이라고 믿었겠지만, 수십 명에 불과한 야곱의 가정이 어떻게 큰 민족이 되고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은 도무지 야곱의 머릿속에서는 그려지지 않는 꿈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이제부터는 믿고 확신함으로 인생의 남은 여정을 새로운 기대를 갖고 매일의 삶이 주 안에서 즐겁고 복된 행복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숫자 칠(7)의 상징: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숫자

사람들은 '행운' 하면 제일 먼저 숫자 7을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데는 일곱 단계의 시간 단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일 단위로 모두 일곱 번 제사를 지냈다.

7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수였다.
아폴로가 세상에 나온 날은 7일이었다.
로마인들에게 7은 길한 수였고 행운의 수여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에서 많이 쓰였다.
또한 중국에서 7은 여자의 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인은 칠삭둥이는 살 수 있어도 팔삭둥이는 살지 못한다고 믿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의식을 치를 때 피를 일곱 번 뿌렸다.
결혼식도 7일, 추모기간이나 큰 축제도 7일간이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7년 동안 구도의 고행을 했으며, 명상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보리수 나무를 일곱 바퀴 돌았다.
극락은 일곱 천계로 돼 있으며, 현세에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종교적 품행이 요구됐다.

유다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1주일 중에 7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또한 7년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고 묵혀 쉬게 한다.
그리고 49년째 되는 해는 대단히 경사스런 해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짐승들이 들어간 7일 후 홍수가 땅을 덮었으며, 노아는 땅에 물이 걷히고 나서도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창세기 8:10).

그러나 7이 반드시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숫자 7이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 22).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숫자 7은 완전수이다.
예를 들면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설명에서 7이란 숫자가 자주 나온다(레위기 23:6-8).
또한 7이란 숫자는 순결한 신앙(로마서 11:4)이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히브리서  4:4).

칠 년째 되는 해는 땅에 안식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을 위한 안식의 해, 곧 주님의 안식년이다.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레위기 25:4).
따라서 칠 년마다 농사짓던 밭을 묵히는 규칙이 있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요한묵시록에는 거의 각 장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칠은과 7성사 등 일곱은 매우 중요한 숫자로 돼 있다. 이처럼 일곱은 '완성'을 나타낸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곧 교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이란 숫자의 의미

6은 통상 인간의 수, 사단의 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과 뱀은 모두 6번째 날에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완전수 (특히 영적인) 7에서 하나가 부족한 불완전수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6에 대해 성경에서 찾다 보면 이런 해석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제6번째 인물은 다름 아닌 뱀입니다-삼위일체 하나님(3), 아담(4), 이브(5), 뱀(6). 요한계시록에 뱀은 사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계 12:9, 20:2).
욥기에서 욥의 이름이 6번째로 등장하는 장면 또한 사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에게 6일간 수고하며 일할 것과 7일째 되는 날엔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며 모든 수고에서 안식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범죄인 ‘살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가인의 자손들은 창세기 4장에 6대손까지 열거됩니다.

남 왕국에서 왕의 자손들을 모두 죽이고 통치했던 아달랴는 6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여호야다는 7년째 되던 해에 아달랴를 제거하고 자신이 숨겨준 왕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요아스를 왕위에 올립니다. 

이렇게 가인이나 아달랴처럼 마귀나 적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6이란 숫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브가넷살의 금으로 만든 신상은 높이가 6 규빗, 넓이가 6규빗이었습니다(단 3:1).
다윗이 맞섰던 골리앗은 키가 6 규빗에 한 뼘이었다고 나오며(삼상 17:4), 6개의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놋 투구, 비늘 놋 갑옷, 놋 각반, 놋 단창, 창, 방패(삼상 17:5-8).
이중 창 날은 철 600세겔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의 수는 666입니다.

바로는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을 추격할 때 선별된 병거 600대와 함께 쫓아갑니다(출 14:7).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불평하는데 모두 6가지의 음식을 열거합니다.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민 11:5).
이에 비해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에 대한 약속은 7가지가 열거됩니다.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꿀(신 8:8).

말년에 우상숭배를 한 솔로몬이 한 해에 거둬들인 세금은 금 666달란트였고(왕상 10:14), 금으로 만든 큰 방패 200개에는 각각 600세겔의 금이 들어갔으며(왕상 10:16), 왕의 보좌로 향하는 계단은 6개였다고 나옵니다(왕상 10:19).   

신약에서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고 모함당한 기록은 모두 7번 나오는데 요한복음 8장에 연이어 2번 나온 것을 고려하면 모두 6번의 독립된 기록이 나옵니다(마12:24; 막 3:22; 눅 11:15; 요 7:20; 요 8:48, 52; 요 10:20).
이처럼 6과 7은 교묘하게 서로 얽혀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성향은 온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도 두드러지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과 예수님을 합치면 13으로 6 + 7입니다(13은 통상 배반, 배신을 의미하지만 하나님과 관련된 수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적은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 복음서는 마태와 누가입니다.
통상적으로 마태는 ‘왕’이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관점으로 쓰인 책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왕’과 ‘사람’에겐 족보가 있지만 ‘종’과 ‘하나님’에겐 족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에 적혀있는 족보의 기록을 살펴보게 되면 여러 면에서 참 흥미롭습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총 42세대라고 서술하는데(마 1:17), 42는 7 x 6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수가 합쳐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온전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탄생이기에 6과 7의 조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족보에 총 77명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끝나는 족보에 ‘77’이란 수보다 더 적합한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떠오르게 하시네요.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 받은 코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여호와의 7절기에 대한 글은 절기마다 시리즈로 올렸는데 서론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5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그때 받았던 조명을 2018년에 적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7. 8. 9의 성경 숫자의 개념

◎ 7 수론(數論)

7을 나타내는 말에는 일곱을 의미하는 기수 쉐바(שבע)와 일곱째를 의미하는 서수 쉐비이(שבי)가 있다.
더불어 이것을 어근(語根)으로 하는 단어로는 충만하다는 뜻의 사바(שבע) 맹세하다는 뜻의 샤바( שבע)를 들 수 있다.
7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제타(ζ)’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일곱은 성취된 기간 또는 완전히 완성된 기간의 상징이다.

바벨론인에게 있어 7은 충만과 전체의 뜻이다. 
7이라는 값을 가지는 일곱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무기’(weapon, Arms)를 상징하는 자인(ז)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제타(ζ) 이다.
7은 하늘의 상징수인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3과 땅의 상징수인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를 합한 수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창 2:2-3, 8:6, 15:1).

구약시대의 7은 매우 신성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의 완성을 인하여 우주창조 후 7일째 안식하였으며(창 2:1-2), 이를 기념하여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특별하게 성별했다(출 20:10, 신 5:14).
또한 성별된 기간으로 무교절은 칠일동안 지키도록 되어 있다(레 23:6-8).
완전한 속죄의 상징으로 제물의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리기도 했다. (레 16:14, 19).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도 일곱이라고 되어 있다. (슥 4:10). 신약 성경에서 7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순결한 신앙(롬 11:14), 완전한 안식(히 4:4), 온전한 믿음(히 11:30) 등을 의미한다. 또한 완전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1:4, 1:16, 2:1, 5:1, 6, 6:8-11장, 15:1).

참고로 70이란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섯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눈’(eye)을 상징하는 ע‘아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ο‘오미크론’이다. 성경에서 70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회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숫자 70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엘림에 있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들과 칠십 문도와 상징적인 관련을 갖는다.(출 15:27, 마 10:1-2, 눅 10:1). 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70년 만에 회복되었다. (대하 36:21, 렘 25:11-12, 렘 29:10, 단 9:2). 또 하나님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서 ‘칠십 이레의 기한 동안에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원히 속하여진다.’ 고 예언하시기도 했다. (단 9:24).

성경에 <7> 또는 <일곱>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 작업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쳤다.” (창 2: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 배나 받는다.” (창 4:15)

“노아의 방주(方舟)에 나오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이었다.” (창 7:2)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에게 봉사하였고” (창 29:20)

“바로가 본 하수에서 올라온 살찐 암소가 <7>마리였고” (창 41:2)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날 때 절을 <7>번 하였으며” (창 33:3)

“애굽의 흉, 풍년이 각각 <7>년씩이고” (창 41:47-54)

“무교절과 장막절은 각각 <7>일간씩 지키고” (출 12:16-18)

“병가(病家)에서 새 두 마리의 피를 <7>번씩 뿌려 정결케 했고” (레 14:48-51)

“여리고 성이 제<7>일에 <일곱>번 도니 무너졌고” (수 6:12-16)

“삼손의 머리털 <7> 가닥을 깎으니 힘이 없어지고” (삿 16:13-19)

“엘리야의 하인이 <7>번 기상을 예보했으며” (왕상 18:43-44)

“땅에 <7>년 기근이 오고” (왕하 8:1-3)

“나아만이 요단강 가에서 <7>번 목욕하니 병이 나았으며” (왕하 1:10-14)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싫어하시는 것이 육 <7>가지니 곧” (잠 6:16)

“앗수르 사람이 우리 궁전을 밟으면 <7> 목자(牧者)로 치겠다 하고” (미 5:5)

“그 날에 <일곱> 여인이 한 남자를 붙들고 당신 이름으로 수치를 면하고자 하고” (사 4:1)있다.

스가랴서와 다니엘서는 <7>이라는 숫자가 강조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장 2-3절에는 계약(契約)의 <7> 부분이, 그리고 출애굽기 6장 6-8절에는 이스라엘의 <7>중(重) 약속이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7>수의 공통의는 ‘신적충만(神的充滿 : divine fullness)’과 ‘만족(滿足 : satisfaction)’ 그리고 ‘완성(完成 : perfection)’과 ‘완전(完全 : completion)’이다.

◎ 8 수론(數論)

8을 나타내는 말에는 여덟을 뜻하는 기수 שמנה‘쉐모네’와 여덟째를 뜻하는 서수 שמיני‘쉐미니’가 있다. 숫자 8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η‘에타’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식 표기가 ‘octa’이다. 참고로 8각형은 ‘octagon’이며, 피아노의 5도 음정을 ‘octave’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4의 배수인 8은 중복과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방팔방(四方八方), 사고팔고(四苦八苦), 사통팔달(四通八達)등이 그 예다. 바벨론에서 8은 천국의 수로 인식돼 있다. 왜냐하면 바벨론 신은 탑 모양으로 세워진 신전의 8층에 기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8을 행운을 불러오는 특별한 수라고 여겼다. 8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의미와 7이 준비하고 성취한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8은 신적인 완전수 3과 은혜의 수 5의 합으로 부활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 신학자들은 예수의 헬라식 표기인 Ιησούς‘이예수스’( 10+8+200+70+400+200)가 888이라는 값을 가지기 때문에 성스러운 수로 인식하기도 했다.

8이라는 수의 값을 가진 히브리어의 여덟 번째 알파벳은 ‘담’(wall, partition}, ‘울타리’(fence)라는 의미를 가진 ח‘헤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η‘에타’다. 또 ח‘헤트’는 ‘죄에서 다시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과 재창조를 의미하는 8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와도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성경에서 8은 구세주를 통한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노아의 가족 8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았다. (창 6:1-7:8, 벧전 3:20).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는 할례는 범죄 함으로 더러워진 피를 뽑아내어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을 상징한다. (창 17:10-14, 23-27, 레 12:3, 눅 2:21).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은 7일째 안식일이 지난 첫날 부활하셨다. (마 28:1-6, 막 16:1-6, 눅 24:1-8). 때문에 숫자 8은 안식 후 첫날인 새 안식일,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인 주일이 됐다. (요 20:1-10). 참고로 8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열일곱 번째 알파벳은 ‘입’(mouth)을 상징하는 פ‘페’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π‘피’이다. 성경에서 <8> 또는 <여덟>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여덟> 명이었다.” (벧전 3:20)

“남자는 난지 <8>일 만에 할례(割禮)를 받았다.” (창 17:12)

“제 <8>년에 다시 파종(播種)할 수 있었다.” (레 25:22)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자가 된지 <8>년에” (삿 12:14)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 동안 섬겼다.” (삿 3:8)

“여호람이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통치했다.” (대하 21:20)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잡혀 갈 때는 바벨론왕 <8>년이었다.” (왕하 24:12)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8>수는 ‘부활’과 ‘새 시작’ 즉 ‘새로운 질서(秩序)’를 뜻한다.

◎ 9 수론(數論)

9를 나타내는 말에는 아홉을 뜻하는 기수 תשע‘테샤’ 또는 תישיע‘티쉬아’와 아홉 번째를 뜻하는 서수 תשיעי‘테쉬이’ 가 있다. 헬라어로는 έννέα‘엔네아’와 아홉 번째를 의미하는 έννατος‘엔나토스’를 들 수 있다. 9는 8에 1을 더한 수로, 천상의 완전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통과 수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9라는 수가 완전한 수로 여겨지는 10에서 1이 모자라기 때문에 불길한 수라고 여기기도 했다. 또한 성스러운 수인 3이 강화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완성의 수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숫자 9는 조화와 완벽의 상징으로 여기는 3을 3배한 수로,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가장 완전한 수이며, 가장 큰 수로 여겨진다. 완벽한 수는 아니지만 아직도 채워야할 것이 있다는 여유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숫자다. 예를 들어 9는 더없이 높은 지고의 수이다. 아주 큰 키를 구척장신(九尺長身)이라 하고, 매우 먼 하늘을 ‘하늘 구만리’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많음을 뜻하는 구사일생(九死一生)과 깊음을 뜻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 : 깊은 궁궐)등도 9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9는 3의 3곱으로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 나오며, 심판과 종국, 완성을 의미한다.

9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아홉 번째 알파벳은 뱀을 상징하는 ט‘테이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θ‘데타’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아홉 또는 아홉과 관련된 개념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곧 아홉이라는 개념은 잃어버린 하나가 돌아 올 때까지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 18:12-13, 눅 15:4, 7). 잃어버린 자, 곧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시간도 이스라엘 시간으로는 제 구 시다. (막 15:34, 마 27:45-46). 또한 숫자 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아홉 가지 열매를 나타내기도 한다. (갈 5:22). 참고로 9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덟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낚시바늘(fish-hook) 또는 물고기를 낚는 갈고리(fishing hook)를 상징하는 צ‘짜디’이다.

성경에서 <9> 또는 <아홉>이란 수사(修士)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호세아 제<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을 사로 잡아갔고” (왕하 17:6)

“히스기야 제<9>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왕하 25:1)

“시드기야 제<9>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렘 39:1)

“에스겔은 제<9>년에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다.” (겔 24:1)

이러한 <9>는 <3>의 3곱이며, 그리고 구약성경에 단 <7>번만 나오고 있다. 구약성경의 <9>수는 ‘심판(審判:judgment)’ ‘종국(終局:finality)’ 완성(完成:completion)을 의미한다.





창세기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 울고(1058) 바카( bâkâh) בָּכָה 

1. 울다. 2. 민수기 10:1.  3. 에스라 10:1
발음 / 바카[ bâkâh]
관련 성경/ 울다(창 45:14, 민 11:4, 삼하 3:32), 애곡하다(신 21:13, 애 1:2, 시 78:64), 통곡하다(삼하 13:36, 스 10:1, 왕하 20:3), 애통하다(창 23:2),곡하다(창 50:3, 민 14:1), 슬퍼하다(레 10:6), [명] 애곡(욥 30:31)
구약 성경 / 114회 사용

창세기 43:30-31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 울고(1058)

창세기 45:1-2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 방성대곡(放聲大哭) - 코로 비베키

방성(6963) 콜(qôwl)  קוֹל 

1. 목소리 욥기4:10.  2. 소리를 발하다  3. 소리를 내서 ~을 말하다
발음 / 콜[ qôwl ]
어원 / 복수 קוֹלוֹת, ‘부르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성(신4:33, 욘2:2), 소리(창3:10, 신1:45, 렘2:15), 말(창3:17, 신21:18, 렘35:8), 소문(창45:16), 표징(출4:8), 우렛소리(출9:23, 삼하22:14), 우레(출20:18, 삼상7:10, 12:18), 목소리(출23:21, 삼상12:14, 사7:23), 말소리(신1:34,5:28), 말씀(신13:18, 28:1, 삼상15:1), 공포(대하36:22, 스1:1), 울음소리(시6:8), 함성(렘4:29), 소동(렘11:16), 명령(습3:2). [동] 소리(내어 울다)(창21:16, 45:2), 소리내다(창29:11, 시142:1), 소리지르다(창39:15,18, 왕하18:28), 지껄이다(삿5:11, 겔23:42), (큰) 소리(로 울다) (삿21:2, 삼하15:23, 스3:12), 불다(대상15:28), 공포하다(스10:7, 느8:15, 대하24:9, 30:5), 노래하다(욥21:12), 소리치다(시98:6), 울다(나2:7), 떠들다(애2:7), 외치다(미6:9).
  • 구약 성경 /  505회 사용

  • 대곡(8085) 샤마( shâmaʽ) שָׁמַע 

    1. 듣다.  2. 창세기 3:10.  3. 창세기 37:17
    발음 / 샤마[ shâmaʽ ]
    관련 성경 / 듣다(창 3:10, 신 5:23, 슥 8:9), 준행하다(창 22:18, 렘 35:10), 순종하다(창 26:5, 신 30:2, 사 1:19), 들어가다(삼하 19:3), 청종하다(신 4:30, 수1:17), 받다(잠13:8), 들어보다(렘18:13,19), 들리다(왕상1:45, 시26:7, 렘51:46), 예언하다(렘23:25, 29:8), 비방하다(애3:61), 분간하다(삼하14:17), 차지하다(왕상21:16), 복종하다(렘42:13), 따르다(창27:8), 알다(신28:49), 용납하다(느13:27), 깨닫다(렘5:15), 드리다(미7:7), 부르다(삼상3:10), 반포되다(에2:8), 소집하다(삼상15:4), 불러모으다(삼상23:8), 알리다(사45:21), 소리지르다(겔27:30), 소리를 내다(대하5:13), 공포하다(렘4:5, 50:2), 전파하다(렘31:7), 모이다(암3:9),소리내다(암4:5), 찬송하다(대상16:42, 느12:42), 이르다(사42:9), 증인(삿11:10, 잠21:28), 소문(느6:6).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1905. 11. 20 황성신문 논설
    장지연

    지난번 伊藤(이등)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鼎足(정족)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 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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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聖意(성의)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大臣(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000만 生靈(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朴齊純(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參政(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否(부)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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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淸陰(김청음)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鄭桐溪(정동계)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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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檀箕(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히브리서 5:7-10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노라면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슬픔에도, 기쁨에도 외로움에도 억울함에도 안타까워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며 그리고 동정의 눈물과 답답함의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눈물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눈물을 분석하면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약한 알칼리성의 액체인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눈물속에는 과학으로 발견할 수 없는 수  많은 종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버리우즈라고 하는 사람은 눈물은 강철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알칼리성분의 액체에 지나지 않지만 무쇠 같은 마음을 움직이고 녹이는 데는 이 눈물을 능가할 힘이 별로 없는 것같습니다.

    테니슨은 '신부'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대의 숨길 수 없는 눈물 때문에 그대를 사랑했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눈물이 에로스적인 애정의 의미를 담았을 때에는 무한한 애정의 웅변이 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눈물은 인류역사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의 각종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강한 것으로 이용되어 불완전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단연 예수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하신 분이였던 예수님도 눈물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과연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을 까요?
    흘리셨다면 몇 번이나 흘리셨을까요?
    그것에 대한 해답은 그분의 일생을 따라 다녀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복음서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복음서를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일생을 사시는 동안에 세번 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요한복음 11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사랑했던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연민의 정에서 나오는 동정의 눈물입니다.

    두번째는 누가복음 19장 14절에 있는데 죄의 값으로 멸망당해야 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민족을 향한 동족애의 눈물이었습니다.

    세번째는 히브리서 5장 7절에 나오는 대로 겟세마네 에서의 고난 앞에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일생을 통하여 세번의 눈물을 보이셨는데 그렇다면 성도 된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눈물이 있어야 할까요?

    성도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눈물을 쏟을 수는 없습니다.
    흘려야 할 눈물이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1. 참회의 눈물

    시편 6장6절에 다윗의 참회가 눈물 속에는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이 눈물은 다윗이 아차  실수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난 뒤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난 뒤 하나님께 통회하며 자복하는 참회의 눈물을 이야기합니다.
    밤마다 침상을 띠우며 요를 적셔내니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겠습니까?
    이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어 그의 왕위가 더욱 견고해졌고 가문은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이 흘린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그들은 귀환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강력한 복음의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순간순간 짓는 죄에 대해 참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한 밤중의 침상에서 때로는 기도하는 골방에서, 때로는 새벽의 성전에서라도 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시인인 무어의 작품 '낙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선녀가 낙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땅위에서 가장 용감하고 유명했던 한 애국전사의 마지막 피 한방울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낙원의 입구에서 그것으로는 안된다고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구한 운명으로  생애를 마치는 한 여인의 마지막 한 숨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역시 거절당하고 맙니다.
    선녀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의 참회의 회개의 눈물을 가지고  갑니다.
    이때 비로소 낙원의 문은 열렸습니다.
    나라를 위한 피흘림이나 이웃의 동정이나 희생으로 열 수 없었떤 낙원의 문이 참회의 눈물로 인해 열렸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마른 눈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No comming to heaven with dry eyes) 라고 하였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며 인간의 죄를  열거해 놓았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는 속이믈 베풀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발은 피흘리는데 빠르고, 눈에
    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하나 죄에 연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하나 죄에 연계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참회의 눈물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과 온몸으로  지어 버린 죄에 대하여 참회개의 눈물을 흘려 보지도 못한 채 오늘까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오시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믿음의 맛으
    모르고 기독교를 가진 것이며 천국의 기쁨없이 천국의 길에 서 있는 것이며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2. 감사의 눈물 

    시편 기자는 103편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니"라고 성도가 길이 기억하여야 할 은혜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에 옥합향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이라고 하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집에 초대합니다.
    그때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흐르는 눈물과 자신의 고귀한 머리칼로 먼 길을 걸어오신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그렇게 아끼던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어 드립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자신의 삶에 구원이라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예수님께서  대한 뜨거운 감사가 있었기에 눈물이 있었으며, 헌신이 있을 수가 있었으며 귀한 물질이라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겐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눈물은 아무에게나  있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감격의 은헤로 가진 자만이 감사의 눈물을 가질 수 있으니 그 첫째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나의 모습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멸망과 저주를 지고 살며 영벌과 지옥의 길에 있던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리스도를  만나 후의 나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사람이 구원의 사람으로 되었으며 멸망과 지옥의 사람이 영생과 천국의 사람이 되었으며 썩어질 몸이 부활의 권세를 입으며 말세심판에 따라 환란의 고통에 가야 할 내가 공중에서 주님과 혼인잔치를 치루는 신부가 되었으며 천하디 천한 내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실패와 고통이 나날들이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성공과 평강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엇이관대 나를 사랑하셔서 이런 축복을 주시는지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라도 단 한번 사람을 통하여  입은 은혜일망정 은혜를 잊는 사람처럼 못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받은 은혜가 없는 것처럼 사는 우리는 아니었습니까?

    감사는 모든 축복과 은혜의 근본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라스테오'라고 하는데 이 말 안에는 축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 축은 감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요,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감사하는 신앙에 이를 때 참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은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감사는 은헤가 임할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가 넘치면 하염없는  눈물이 나도 모르는 새에 흐르는 것입니다.
    이 맛을 모르고는 주를 위해 충성도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눈물이 마르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3. 동정의 눈물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 자리에서 주님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은 참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요 사랑하는 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정의 눈물이었던 것이빈다.
    세상의 사람들도 이웃의 슬픔에 함께 슬퍼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동정의 눈물은 필수의 눈물입니다.
    현재의 눈물을 함께 나누어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헤디슨 테일러는 영혼을 사랑할 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눈물이 강물되어 흐를 때 하나님의 응답은 속히 실현된다고 눈물의 위력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126편에는 울며 씨를 뿌린지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웃의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흘리는 눈물을 반드시 하나님께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의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에 무정하며 감사도 없고 교만하여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정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물이, 동정의 눈물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저주와 멸망에 있어도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그 육체의 삶에 곤고를 당해도 자비의 눈물조차 말라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그들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를 따라 살지 말고 참회의 눈물로 구원의 반열에 굳게 서서 하루하루의 생활에 감사하며 감격의 눈물로 찬송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나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동정의 눈물을 가지고 천국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  눈물의 힘

    중국 난징에는 마음놓고 울 수 있는 '눈물 방'이 등장하여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시내 한 호텔에 문을 연 '쿠바'에는 하루 평균 10명의 손님이 찾아와 속상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울고 간다고 합니다. 요금은 1시간에 50 위안(약 7500원)으로 고춧가루와 마늘 등 눈물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최루 촉진제와 울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손님들이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유리잔이나 인형 등도 비치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눈물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액체입니다. 사람을 눈물 흘리게 만드는 감정에는 17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눈물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에서 흘러내리는 마음의 이슬이며 감정의 샘물이고 양심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며, 분을 이기지 못해 울고, 상대방의 공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도 울고,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서도 웁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의 표현이 울음이고, 자기의 생을 다 마치고 떠날 때 눈물을 흘리게 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떠납니다.
    눈물은 인간의 존재 양식이며 알게 모르게 항상 눈물을 흘리면서 삽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정서적 눈물'을 흘리고, 마늘이나 양파의 냄새를 맡으면 '자극적 눈물'이 나며, 하품을 할 때처럼 ‘자연발생적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감정이 결핍된 ‘하얀 눈물’을 흘리며 삽니다.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눈물에 대한 표현은 다양합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체(涕),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설(洩), 갈라져 흐르는 눈물을 사(泗), 눈물이 방울져 흘렀을 때 환, 콧물과 더불어 흘리는 눈물을 이, 펑펑 쏟는 눈물을 누(淚), 눈물을 눈 가장자리에 고여두고 흘리지 말아야 하는 눈물을 루라 했습니다. 실험실에서 사람의 눈물을 분석한 결과 물이 90%, 소금이7%, 단백질이 2%, 점액소가 1%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눈물이라도 어떤 경우에 흘리느냐에 따라 그 화학적 성분이 다르다고 합니다. 마늘 냄새를 맡고 흘린 눈물보다 슬플 때 흘린 눈물에 단백질이 많고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중 어느 쪽이 흥분하느냐에 따라 눈물의 성분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화를 내 교감신경의 흥분으로 눈물을 흘리면 수분이 적고 나트륨이 많게 되며, 슬프거나 기쁠 때 부교감신경의 흥분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면 수분의 양만 많아진다고 합니다.

    어떤 눈물이든 눈물에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정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눈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정서 순화를 뜻하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습니다. 비극(悲劇)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면 불안. 긴장감 따위가 해소돼 정서가 순화되며 마음의 정화(淨化)가 일어납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현대인이 마음의 병에 걸리면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도 말합니다. 눈물에는 감정 냉각 효과가 있습니다. ‘비누로 몸을 씻고 눈물로 마음을 씻는다’는 말처럼 눈물을 많이 흘리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울고 나면 가뭄에 기다리던 비가 내린 것같이 마음이 촉촉히 젖고 희망이 움트고 삶의 윤기가 넘쳐흐릅니다. 눈물은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세정제와 같습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뇌에 더 많은 산소가 공급되어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합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력은 총과 칼, 번뜩이는 예지와 분별력보다 눈물입니다. 눈물은 흡인력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 세계적인 견문과 탁월한 지휘 능력, 순수한 열정과 복잡한 업무 처리 능력보다 더 강한 의지와 힘이 눈물 속에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롱한 새벽이슬과 같아서 얼은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고,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으며, 메마른 가슴에 긍휼과 사랑, 인애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는 탕자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눈물은 인간의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18세기말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눈물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분석을 시도한 이래 과학자들은 눈물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세인트폴램지'의료원의 '윌리엄 프레이'박사는 눈물은 체내의 독성을 제거,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미테소타'대학 연구팀의 연구는 눈물에 있는 로이신인케팔린은 인체 내에서 자연적인 진통효과를 내는 호르몬인 엔도르핀과 같은 것으로 이 물질은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물리적인 눈물에는 없고 슬프거나 기쁠 때 나오는 감정적 눈물에만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의대의 요시노 신이치 명예교수는 "운다는 것은 웃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울면 '내추럴 키라'(NK) 세포가 활성화되어 면역기능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장수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자보다 눈물을 덜 흘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은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눈물은 종종 천국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순수한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흘렸던 다윗의 눈물(시 6:6),
    고난 속에서 흘렸던 욥의 눈물(욥 16:20),
    죽음의 절망속에서 흘렸던 히스기야 왕의 눈물(사 38:5),
    고난 당하는 민족의 아픔 때문에 흘렸던 예레미아 선지자의 눈물(애 1:2),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눈물(히 5:7) 등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어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용서와 치유, 회복,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이 세상에는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 아픔의 눈물, 반가움의 눈물, 환희의 눈물, 참회의 눈물, 억울한 눈물, 남몰래 흘리는 눈물, 승리의 눈물, 생리적인 눈물 등이 있습니다. 이런 많은 눈물 가운데 가장 값진 눈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모든 눈물은 그 자체로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값지고, 값 싼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눈물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자기를 위해서 우는 눈물이요, 또 하나는 남을 위해서 우는 눈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우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도 아무리 매를 맞아도,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울지 아니하셨고,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예수님은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우셨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더 고통을 받는 사람, 더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슬픈 사람을 위해서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크게 두 번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울지 아니하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동네에서 전도하고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지 못하셨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데 그때서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르다와 마리아와 많은 조문객들도 웁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묻혀 있는 돌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실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어 냄새나는 몸을 이끌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 < 예화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바로 약한 자, 슬퍼하는 자, 병든 자, 죽음을 앞에 놓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심을 의미합니다. 이 긍휼이라는 것은 동정심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긍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 긍휼은 고난당한 자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한 상황 속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슴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 그게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서 누군가가 생명이 관계된 일로 울면 주님의 마음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들의 슬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의 딸이 병들어서 죽어갈 때, 예수님 앞에 달려와서 고쳐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후 집으로 들어가 죽은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시며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니 금방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내용이 있습니다. 죽은 아들의 상여를 뒤따라가며 통곡하는 과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우는 모습을 보더니 가까이 가셔서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달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며, 관속에 누워있는 시신을 향하여, “청년아 내게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그래서 눈물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나의 눈물의 기도에 사무엘을 주셨고 다윗의 눈물의 기도에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하셨고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에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하셨고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에 부활 후 제일 먼저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 즉 남편과 아내 자녀를 위해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가족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은 이십에 노예상인들에게 팔리고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계시의 지혜를 얻어서 7년 풍년동안 양식을 저장했다가 7년 흉년을 대비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지혜로운 요셉 덕에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양식이 떨어져 양식을 위해 애굽에 온 자기의 형들을 보고 골방에 들어가서 막 울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이전의 사람이지만 그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끌어안고 울었고 다른 열 명의 형들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용서가 되었고,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마음에도 평안이 왔고, 불안에 떨었던 열 명의 형들이 다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이 있는 곳에 화해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실컷 울더니 원수가 친구로, 형제로 바꾸어졌습니다. 눈물은 이처럼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과 은혜는 정비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 많은 사람에게 눈물이 많습니다. 찬송만 불러도 눈물, 성경만 읽어도 눈물, 설교만 들어도 눈물, 기도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사람은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우는 날이 많았습니다.(히5:7) 십자가를 지고 만민의 죄를 사하는 희생제물이 되시려 눈물 흘려 기도했습니다. 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그리고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우셨던 주님, 멸망해 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그들을 회개코자 보냈던 선지자들을 외면하고 돌로 쳐 죽이고 직접 오신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후 하나님의 진노로 이 성이 다 멸망하리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위기로 인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한 갈등의 최고조에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슬픔을 당한 우리 이웃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예수님처럼 우리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셨던 것처럼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내 이웃의 마음에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슬픔을 나눔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능력이 되고, 고통을 나눔으로 영광을 회복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시편126:5-6) 내 죄를 통회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내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 거룩한 눈물에는 절대로 거저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 예화 / 탈무드 :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다이아몬드를, 두 번째 천사는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가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는데 세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화 / 일본 승려 양관화상

    일본에 양관화상이란 저명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집 불량한 아들을 데리고 3개월간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3개월이 지나도록 꾸중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 아들도 조금의 뉘우치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맡긴 아버지도 스님의 무관심과 침묵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3개월이 지나고 스님이 절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 아들이 스님을 전송하러 나왔습니다.
    스님이 신발 끈을 메다 말고 그 집의 아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허리를 구부려 신발 끈을 메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등이 뜨거웠습니다.
    스님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그 집의 아들은 스님에게 감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될 수없는 강퍅한 인간일지라도 눈물이 있는 곳에는 변화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눈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길이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해 흘리신 눈물입니다.
    우리 주님의 눈물을 본받아 우리 자신과 가정을 위해, 우리의 이웃을 위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 흘려 기도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눈물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시카고 지역에서 거리의 깡패들을 전도하기로 유명한 분이 있다.
    그의 이릉은 클로넬 클라크(Colonel Clark of Chicago)다.
    그런데 그에게 붙여진 불명이 있는 데, 눈물의 사람이라는 별명이다.
    그만큼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깡패. 술주정뱅이. 쓰리꾼 이런 사람들을 5-600명씩 모아 전도를 했는데, 말은 산만하고 어리숙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시카고 지역에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유명한 목사님들이 와서 설교해도 별 감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클라크씨가 와서 말씀을 전하면 항상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클라크는 감화력이 있는 말씀으로 다가갔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그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말은 어둔하였지만 진심에서 나오는 눈물이 빗나간 저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눈물이 많기 때문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결심대로 눈물이 멈추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는 감화와 은혜로움이 사라졌다.
    결국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눈물을 되돌려 달라고 강청해서 다시 눈물을 회복했다고 한다.

    사실 눈물을 양이나 물리적 가치를 따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눈물은 미소한 액체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 향한 눈물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위대한 힘이 있다.

    어떤 분은 “눈물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도둑에게 돈 가방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눈물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메마르고 강팍하기 쉽다는 뜻이다.

    반대로 눈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도 부드럽게 한다.
    눈물이 있는 온정이 있다.
    그 마음이 감성적이다.
    타인이나 상황에 대하여 선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막힌 담을 헐고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되게 한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 이상 기록되어 있다.
    특별이 예수님은 겟세마네에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라고. 간절한 기도에 뜨거운 눈물이 있었던 분이셨다는 뜻이다.
    물론 예수님의 웃음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웃음이 없으셔서 그렇게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이 부드럽고 감성적이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절)”라고.
    눈물이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같이 우는 것의 즐거움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것은 없다. - 루소
    그대에게 눈물이 있다면 지금 그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라. - 셰익스피어
    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이다. 한 얼굴은 웃고 다른 얼굴은 울고 있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남자가 온갖 말을 다하여도 여자가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당하지 못한다. - 볼테르
    눈물 속에서는 갈 길을 못 본다. -  W. 베넘
    눈물도 역시 유용(有用)하다. 눈물로써 강철을 녹일 수 있다. - 오비디우스
    눈물에도 그만한 쾌감은 있다. - 오비디우스
    눈물은 눈의 고상한 언어이다. - 로버트 헤리크
    눈물은 성수(聖水)이다. - 셰익스피어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언어이다. - 볼테르
    눈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흘러내린다. 또한 흘러내림으로써 영혼을 진정시킨다. - 세네카
    눈물은 인생을 살리고 땀은 가난을 구한다. - 서양 속담
    눈물은 천만 단어의 말보다 힘있는 웅변이다. - 워싱턴 어빙
    눈물을 흘린 일이 없는 젊은이는 멋이 없는 자이며, 웃음이 없는 노인은 어리석은 자이다.
    눈물이 많은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눈물은 말라버린다. - 세네카
    사실 우는 것은 괜찮다. 울음으로써 우리는 분노를 해소하고, 눈물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우리 가슴을 씻어낸다. - 오비디우스
    숙녀의 눈물은 무언(無言)의 웅변이다. - 버몬트와 플레처
    아내는 세 가지의 눈물을 가지고 있다. 괴로움의 눈물, 초조의 눈물, 거짓의 눈물. - 네덜란드 속담
    여자의 눈물보다 더 빨리 마르는 것은 없다. - 토마스 풀러
    여자의 눈물에 감동하지 말라. 여자들은 눈이 울도록 가르쳤다. - 오비디우스
    우는 것도 일종의 쾌락이다. -  몽테뉴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거만한 자를 경멸하라. -  에드워드 영
    우리는 우니까 슬퍼지고, 도망가니까 무서워지고, 웃으니까 즐거워지는 것이다. - 제임스 랑게
    웃어라, 그러면 이 세상도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 울게 되리라. - 윌콕스
    웃음과 눈물은 똑같은 감각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바람의 힘이요, 후자는 물의 힘이다. - 올리버 웬델 홈즈
    웃음도 눈물도 그렇게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랑도 욕망도 미움도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마음속에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어네스트 도슨
    인간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세상의 죄악을 씻어낸다. - 도스토예프스키
    일하는 물은 눈물뿐이다.
    젊었을 때 울지 않는 자는 야만인이요, 늙어서 웃지 않는 자는 얼간이다. - 산타야나
    젊음엔 눈물이 있으나 슬픔이 없고, 노년엔 슬픔이 있으나 눈물이 없다. - 룩스
    하나님은 인간들이 눈물이 없는 보이지 않는 땅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눈물로써 그들의 눈을 씻기신다.
    함께 우는 것만큼 사랑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것은 없다.  - 루소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 아일랜드 속담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날 때부터 아주 작은 체구였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였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그런 벤 후퍼와 어울려 노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했다.
    그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꼭 한 번 교회에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번 사람들을 의식해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가 슬그머니 뒷자리에 앉았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다시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에 젖어 눈을 감고 말씀을 되새기고 있는데, 벌써 그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12살 된 어린 소년 벤 후퍼를 보고 미소를 짓더니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물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모두들 숨을 죽이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 하며 목사님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다시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가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벤 후퍼의 등에 대고 목사님은 말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 벤 후퍼가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취임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벤 후퍼는 1870.10.13. Newport, Cocke County에서 태어났다.
    생부는 르무엘 후퍼 박사였고 생모는 Sarah Wade였다.
    혼외 결혼으로 태어난 벤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고 주위의 눈총도 따가웠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엄마는 세 도시를 전전하며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다닌다.
    세 번째 도시 녹빌에서 엄마는 아들 벤을 감독교회가 운영하는 성 요한 고아원에 맡긴다.
    그 후 9살이 되자, 벤은 자기 친부 후퍼 박사에게 합법적으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 때부터 벤은 후퍼 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부터 친부에게서 양육되었다.
    후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테네시주 주지사가 되어서 2번 더 재선에 성공했으며 상원의원으로도 2번이나 임기를 마쳤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권면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4:11)”

    하나님 닮기를 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 자신을 안다는 것

    누군가 헬라 철학의 대가 탈레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남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더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무책임합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디언 슈익스라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주일은 걸어다녀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좀 더 진실하게 나를 드러낸다면 다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이요,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는 없으나 이런 깨달음이 너무 늦게야 찾아오는 것이 인생의 아쉬움입니다.

    ▣ 나를 상징하는 한 단어는?

    개나리는 희망, 과꽃은 추억, 국화는 명복, 금낭화는 수줍음, 금잔화는 겸손, 나팔꽃은 허무한사랑, 상사화는 순결, 도라지꽃은 성실, 동백꽃은 신중, 라일락은 첫사랑, 루드베키아는 영원한 행복, 맨드라미는 열정, 모란은 부귀, 목련은 우아, 무궁화는 일편단심, 물망초는 나를 잊지마세요, 백일홍은 꿈, 백합은 순결, 사르비아는 정열, 상사화는 이별, 수련은 신비, 아카시아는 우정, 안개꽃은 약속, 옥잠화는 추억, 장미는 사랑, 접시꽃은 풍요, 채송화는 순진, 코스모스는 순정, 포인세티아는 축복, 프리지아는 순결, 해바라기는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꽃마다 그 꽃이 상징하는 꽃말이 있답니다.

    그래서 꽃말에 맞게 장례식장엔 국화, 어머니날엔 카네이션, 성탄절엔 포인세티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장미, 부활절엔 백합꽃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태어난 나를 상징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나를 상징하는 말을 만들어 갑시다.


    ▣  너는 누구냐?

    어느 날 14세의 소녀 소피가 이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에는 짤막하게 "너는 누구냐?"라고만 적혀 있었다.
    소피는 거울을 들여다 보며 "너는 누구?"라고 자문해 본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니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는다.
    '게다가 자기 얼굴인데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한다니 그럴 수 있어?
    친구는 내가 고를 수 있는데 내 얼굴은 내가 고르지 못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 끝에 소피는 〈인간이란 뭣인가?〉하는 의문을 처음으로 품게 된다.

    다음날 그녀는 또 한장의 괴상한 편지를 받는다.
    이번에는 그냥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런 걸 누구든 알턱이 없지 않나 하고 웃어넘기려다 문득 생각한다.
    세계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물어보지도 않는 채로 산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고.
    그런지 며칠 후에 그 이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긴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굶주린 사람에게 묻는다면 먹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
    다.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은 따스함이라 대답할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벗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조건이 모두 충족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람들에게 절실한게 있을까?
    그렇다. 사람은 모두 먹어야 하고, 사랑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밖에도 절실한 게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는 절실한 욕구를 우리는 갖고 있다…."

    〈철학자로부터의 이상한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소피의 세계] 는 이렇게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작가 요스타인 골델이 쓴 이 책은 미국에서는 대학의 철학 부독본으로까지 채용되고, 일본에서는 7백페이지 가까이나되는 두꺼운 책인데도 60만부나 팔렸다.

    그것은 고대신화로부터 칸트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거쳐 현대의 우주론에 이르는 철학의 역사에 관한 얘기책이다.
    그게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마치 14세 소녀를 위한 미스터리 소설처럼 알기 쉽고도 흥미롭게 엮어진 때문에서만이 아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사고의 원점에 돌아가서 "당신은 누구인가?"하는 기본문제를 풀도록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에 대해 당장에 나오는 해답은 "나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누구냐?"고 재차 물을 때 여기 만족스럽게 해답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라는 의문사다.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주는 것도 [왜]라는 의문이다.
    그런 [무엇]과 [왜]라는 의문을 티끌만치도 품지 않은 채 우리는 마냥  달리고 있다.

    그나마 앞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않고 있다. 고
    대 희랍의 철학자 탈레스가 어느 날 우주의 신비로움을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보며 걷다 발을 헛디디고 물에 빠졌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발 밑에 있는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을  안다는 것이냐?"며 비웃었다.

    우리는 지금 발 밑에만 정신이 팔려서 먼 산에서 무슨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빛을 보기 위해서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가 있다.
    그리고 생각을 하기 위해 사람에게는 머리가 있고 마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머리를 쓰지 않고 있다.
    모두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방향감각을 잃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도 잃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물론이요, 내일의 인류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 한국인뿐인 것만  같다.

    한마디로 우리는 생각하는 버릇을 잊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철학을 멀리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과학 또는 과학적 기술만이 행복에 이르는 우리의 길을 비춰주는 유일한 등불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분명 과학은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의 기둥이 된다.
    그것은 세계화를  서두르는 우리의 추진력이 되어준다.
    그러나 과연 고도성장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인지, 또는 이른바 세계화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하고 의문을 품어보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21세기를 향해 잘 달리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21세기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엉뚱하게 다를지도 모른다.
    여기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철학자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또 [소피의 세계]가 우리나라에서 번역된다 해도 과연 몇부나 팔릴지  의심스럽다.
    우리가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이런 데 있다.

    우리는 지금 걸음을 멈추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제 길을 걷고 있는가?]고 한번쯤만이라도 돌이켜 생각해 보아
    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05-31-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5장 / 나는 요셉이라(3절)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Joseph said to his brothers, "I am Joseph! Is my father still living?" But his brothers were not able to answer him, because they were terrified at his presence.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요셉이라(I am Joseph!)"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 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을 물러 가라고 한 후에 큰 소리로 울었는데 그 울음 소리가 바로의 궁중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열 일곱 살에 애급의 노예로 팔려와서 설흔 살에 애급의 총리가 되었고 칠 년의 대풍을 맞이하여 대기근을 준비한 후 이제 기근의 때가 이 년이 지났을 무렵입니다.
    아직도 기근의 때가 오 년이 남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하니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요셉은 형들에게 "가까이 오소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며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애굽이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1-5절). 

    유다의 간곡한 호소는 그동안 형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아버지와 베냐민까지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는지 애급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고 바로의 궁정에도 들렸다고 합니다.
    그동안 가족과 떨어져 타국에서 홀로 지내며 가졌을 그리움도 힘든 세월을 보낸 아픔도 다 녹아져 내리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죽었다고만 생각한 요셉이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살아있었다고 하니 형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애급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고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장면은 보는 우리들도 감격스럽지만 가장 우리의 마음이 녹아져 내리는 것은 요셉이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우리들도 살아 오면서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가지고 살아서 우리들의 마음에 씻어질 것 같지 않은 상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이 다 해결되고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치유되고 맺혔던 것들이 풀어 지는 것은 그 모든 일을 나에게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믿고 확신할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요셉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애급에 먼저 보내셨다고 그 모든 일을 해석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그 일들을 허락하신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런 뜻이 계시기 때문이였다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해석할 때에 우리의 모든 상처는 씻어지고 회복될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렌즈는 현미경과 망원경입니다.
    나를 바라볼 때는 현미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살펴보고 세상을 바라볼 때는 저 멀이 있는 것까지도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크신 섭리안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생각하고 감사하므로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요셉은 "이 땅에 이 년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앞으로 오 년동안 추수를 못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보내셔서 애굽의 통치자로 삼았으니 속히 가서 아버지에게 요셉이 애굽의 주가 되었으니 지체말고 오셔서 나와 가까운 고센 땅에 계시면 앞으로 오 년 흉년동안 내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을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고 합니다(6-11절).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한 사람 요셉으로 인해 그 형제들도 자기들에게 죄책감을 주던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면서 얼마나 감사와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깨달은 사람은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어둡게 하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세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얽매임을 당하고 살게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깨어 있기 위해 기도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알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요셉은 이제 당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다 아버지에게 전하고 속히 모시고 오라고 하며 베냐민을 안고 울고 베냐민도 웁니다. 요셉이 형들을 입맞추고 우니 그제야 형제들이 요셉과 말을 합니다(12-15절).

    하나님은 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족하기만 했던 이 가정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상처들을 회복시키시고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로마서 8:28). 

    우리들도 이 은혜를 우리의 삶속에서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오던 요셉은 더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혔습니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에는 그동안의 서러움, 그리움, 감사함, 감격 등 모든 감정이 다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 울음소리는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형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지, 아니면 지은 죄로 인해 두려워서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놀라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형들에게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는 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형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형들은 자신들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두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애굽에 팔려간 당사자인 요셉임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죄를 추궁하고자 이 일을 얘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5~8절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추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가장 두려워할 자들은 바로 요셉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애굽의 총리자리면 복수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힘을 가진 자리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살아있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이젠 죽었구나!’ 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정체를 밝히면 형들은 분명히 이 일로 큰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 안심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는 말로 안심을 시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과 일일이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요셉은 과거 형들의 잘못을 용서했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일후에 형들은 드디어 요셉의 본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이 “그제서야 형들이 요셉과 말을 시작했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중요한 한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은 바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애굽의 총리자리에 서게 해 주신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뒤이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는데, 7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물론 결과가 좋다고 형들의 죄가 합리화될 수는 없겠지만, 요셉의 말의 핵심은 형들의 그 죄를 포함한 그 어떤 악도 하나님의 섭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비록 형들의 악한 목적과 부당한 행동을 통해 인생의 절박한 위기를 경험했지만, 어느 때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믿어왔다는 것을 본인의 지나온 삶과 또 고백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요셉은 아무리 이해 못할 극한 어려움에 부닥쳐도 요셉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가실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인생을 결코 무관심속에 방치하지 않으시고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을 같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요셉이 걸어왔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부당함이 인생을 덮는 것 같고,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벽이 되어 인생을 막막함으로 끌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힘겨운 상황을 마주하며 마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멈춘 것 같고, 내 인생을 수수방관하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낄 때도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무관심 속에 관망만 하시는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을 통해 구원의 역사의 그림을 그리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섭리 가운데 구원의 역사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럼에도 부당함 속에서도 인생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계시고 또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셈하시고 상주시는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의와 절제의 삶을 구현해가고 또 눈물 속에서도 뿌려야 할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 요셉의 고백처럼 ‘이 자리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라는 것을 선명히 보고 고백할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리가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내진 자리임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하루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5-30-2023(화)



    마태복음 1:1-3a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서 장사는 "르우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족보에는 장자 '르우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이 소개되었습니다.
    유다가 장자의 서열에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12지파의 선봉이 된 유다 지파 

    12지파의 캠프(진)에서 선봉은 유다지파.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민수기 1장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장자 르우벤 지파부터 실시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2장에서 진배치를 할 때는 유다 지파부터 먼저 합니다. 

    민수기 2:3
    동방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성막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는데 유다지파는 동쪽 해 돋는 편에 진을 치게 합니다.
    이 ‘동쪽’은 해 돋는 쪽으로 12지파 중 가장 중요한 자리를 의미합니다.

    민수기 2:9
    유다 진영에 속한 군대로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팔만 육천사백 명이라 그들은 제일대로 행진할지니라.

    진이 행진을 할 때도, 동쪽 유다 진영이 가장 선봉에 서서 행진합니다.

    제일 앞장 서서 갔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 신앙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따라가더라도 멀찍이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앞장 서는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장자적인 복을 누리는 자의 특징은 항상 주의 일에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16
    르우벤 진영에 속하여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천사백오십 명이라 그들은 제이대로 행진할지니라.

    두번째로 행진하는 지파는 르우벤입니다.

    다른 형제들이 머뭇머뭇 거릴 때, 두 번 모두 유다가 앞장서서 몸을 던진 이후, 그의 자손들인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앞장서서 가는 선봉부대가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5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유다 지파가 장자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지파가 탈락한 이유 

    요한계시록 7장에 천상에 가보니 단지파가 빠졌습니다.
    왜 단 지파가 천상교회에서 빠졌을까요?

    창세기 49: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 진영(단, 납달리, 아셀)은 출발하면 제일 뒤에 가서 붙습니다(민수기 2:31).

    의 진영에 속하여 계수함을 받은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칠천육백 명이라 그들은 기를 따라 후대로 행진할지니라 하시니라.             

    뒤에 따라오는 사람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항상 부정적이 되어 앞서 가는 사람 뒤통수를 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교회에서 떠나고 없어요.
    따라서 단지파는 요한계시록 7장 천상교회에서 빠졌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항상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앞장서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같은 장자적 복을 주실 것입니다.

    유다가 누린 장자적인 복이 어떤 복입니까?

    첫째, 찬송이 되는 복(창세기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송"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물이란 뜻이지만 다른 형제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칭송을 받는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누군가 장자처럼 책임과 희생을 다한다면 그는 그 가문의 영예요, 형제들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자기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예수 믿고 장자적인 신앙에 눈을 떠서 가문을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권세를 갖는 복(창세기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사자는 권세를 말합니다.
    능력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예수님을 가리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라고 했는데 유다 지파 사자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은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드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자는 권세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형제들에게 본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 이야기) 쌀가마니 질수록 더 잘 진다.
    우리가 무거운 것 짐이라고 들지 아니하면 힘이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점점 힘이 없어집니다.
    반대로 무거운 것 지다 보면 힘이 더 생기고 더 무거운 것도 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큰 책임을 지는 직분자일수록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다스리는 권세(창세기 49:10)

    규(왕의 지휘봉)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규(홀. 笏)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유다 지파에서 왕이 이어지겠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과 그 자손들이 왕통을 잇게 됩니다.

    그러나 풀핏 주석에 이 규(홀)는 이 땅의 왕권 이상으로 하나님의 성역에 참여할 수 있는 권세라고 합니다.

    * 홀(笏) : 홀 홀
    * 규(圭) : 홀 규

    옥으로 만든 홀().
    위 끝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졌다.
    옛날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제후를 봉하거나 신을 모실 때에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임금이 국가 제사 때 사용했다. ​殿下冕服【九章 永樂元年欽賜之制】 圭圭以靑玉...

    누가복음 19: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므나의 비유"에서 한 므나 받아서 열 므나 남긴 종은, 열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합니다.
    므나의 비유는 오늘날 ‘직분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직분 즉 '성역 참여권'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책임을 지느냐에 따라 거기에는 그 만한 특권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10고을, 5고을 다스리는 왕권이 주어집니다.

    넷째, 유다가 받은 가장 큰 복(창세기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가 무엇일까요?

    1. ‘실로’는 평화와 안식을 의미합니다.
    실로는 살렘(salem)이란 말과 같은 어근으로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말은 달리 말하면 ‘평화롭게 하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안식을 주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2. '실로’의 또 다른 의미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3. '실로'는 아들을 의미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달리 말하면 '아들이 오시기까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다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실로’란 애칭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에 이 대목이 없다면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게 고생해서 고작 기근을 피해 고향산천을 떠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과 연단의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자기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했다면 “야곱의 생애는 일생 고생만 하고, 불행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순간 그리스도 예언을 위해, 그의 평생에 연단하신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 예수가 드러나지 않는 생애는...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깨어지고 부서졌더라도 예수를 말하고 증거하는 생애라야 성공한 생애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가정이 명문 가정이 될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예수 비전’을 가문의 장자적 사명을 이어갈 유다에게서 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꿈과 야망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면자기의 그 꿈과 야망이 이뤄질 수록 삶은 더 허무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비전이 있다면 그 비전은 바로 축복 중에 축복이요.
    내 생애에 가장 큰 비전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12지파는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실로를 기다림’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며 전부였습니다.

    다섯째, 유다가 받은 세상적인 복(창세기 49:11-12)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과수원 주인이 소를 사과나무에 매지 않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가지’에 더더욱 매지 않습니다.
    농부는 자식만큼이나 나무를 아끼는데, 어떻게 맬 수 있습니까?
    이 말은 그만큼 물질적인 복이, 아끼지 않을 정도로 풍족하겠다는 뜻입니다.

    포도 농사 얼마나 잘 되었으면 옷을 포도주에 빨겠습니까?
    우유를 얼마나 마셨으면 이빨이 희겠습니까?
    그만큼 풍족한 물질적인 복을 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 될 줄 믿습니다.


    왕권의 축복을 받은 유다(창세기 49:8~12)

    유다는 히브리어 예후다의 헬라어 표기로 뜻은 '칭송 받는다'이며, 유대인들이 흔히 쓰는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에서도 많은 유다를 볼 수 있다.
    갈릴리 사람 유다 (행 5:77), 주님의 형제 유다(마 13:55; 막 6:3), 야고보의 아들 유다(눅 6:16; 행 1:13), 다메색의 유다(행 9:11,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소경 되어 다메섹 성읍에 끌려가 머문 집),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인 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 가운데도 유다가 있었다(눅 3:30).

    유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 말기의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로 요셉을 제치고 메시아의 조상으로 약속 받은 자였다.
    흔히 신앙의 계보는 신앙적인 인물로 계승되었는데 본문의 유다의 경우는 예외라 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유다는 비열한 면도 있었으나 야곱이 죽기 전에 12 아들을 위해 축복 기도한 예언대로 주권을 이어받은 후사가 되었다.

    첫째,  다윗의 조상 유다

    1. 야곱의 아들 유다(창 29:31~35)

    야곱은 네 명의 여인에게서 1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내인 레아에게서 여섯 아들과 한 딸, 레아의 몸종 빌하에게서 두 아들, 라헬의 몸종 실바에게서 두 아들, 둘째 아내인 라헬에게서 두 아들 모두 12명이었다. 서열로 보아 장남은 분명히 르우벤인데 서모였던 빌하와의 통간으로 장자의 명분이 무효가 된 것이다.
    야곱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공모하여 세겜에서 대학살 극을 벌인 주역이므로 자격 상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니 왕권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 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야곱은 12남 1녀를 낳았으므로 유다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문제도 많았었다. 야곱이 나이 늙어서 12자녀들에게 축복을 빌 때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실제적인 장자의 권위가 주어졌다.
    오늘 본문 중에서 두 가지 면의 왕권에 대한 예언인데, 창 49:8~12 중 8절을 보면, 첫째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라고 했다. 둘째로 9절에서 "유다는 사자 새끼로라"에서 볼 것은 장차 올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지파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2. 다윗의 조상 유다(룻 4:18~22)

    유다가 다윗의 조상이 되는 과정은 신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과정을 거친다. 유다의 맏아들 엘이 죽음으로 며느리인 다말은 당시 풍습에 따라 시동생인 오난을 통해 대를 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난이 이에 불응하므로 죽음을 당하자, 유다는 막내 아들도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다말을 멀리하게 했다. 이에 그녀는 딤나에서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맺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그 중에 베레스가 다윗의 9대 조상이 되었다.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조상도 되었다는 뜻인데 어찌 이런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에 있으며, 기독교 윤리관에도 합당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교훈으로 제시되는가?
    흔히 메시아의 가계는 가장 고결한 신앙의 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시아가 죄악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역사 속에 오심으로 모든 인간적인 것까지도 포용하시는 크신 뜻을 수용하는 면을 보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비천한 자, 죄악에 찌든 인간도 때로는 높이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볼 수 있다. 우리도 역시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았으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유다를 보아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물론 문제도 있고 부족함이 많지만 보다 나은 지도력을 발휘했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인정되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 없는 것 받으시는 분 아니라 있는 그대로, 겸손한 태도로 순종하는 자 찾으시고 일을 내게로 일하게 하신다.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둘째, 예수의 조상 유다

    1. 메시아 탄생이 예언됨(창 49:10)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홀이나 치리자의 지팡이는 왕권이나 통치권을 상징하는 휴대용 작은 막대기를 말한다. 또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태어날 다윗의 왕가에서 영원한 왕권이 계승된 것을 말하고 이러한 축복이 유다 지파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시기에 대해서는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했는데 실로는 지명일 수는 없다. 실로(안전을 주시는 자, 중보자)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의 후손으로 오셔서(마 1:1~16) 유다 왕족을 견고케 하셨다(계 5:5).
    뿐만 아니라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왕족이 건설될 때에는 다른 주변의 나라들도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다윗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룩하는 하나님 나라 왕국에 대해 온 세상 사람들이 복종하게 된다.

    2. 유다의 성품과 신앙

    동생 요셉은 인격, 신앙, 윤리 도덕면에서 거의 온전 성을 지녔으나, 그의 형 유다는 어린 동생 요셉을 애급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의했던 매정한 자였고 그의 며느리 다말과의 약속을 어기고자 했던 비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도 있을 수도 없고 이해도 안가는 면이 많은 자이므로 단점이 많은 그가 사실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만큼의 성품이나 신앙의 소유자는 못 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실은 어린 동생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죽이고자 할 때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게 하므로 생명을 구한 셈이 되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해 다른 형제들과 애급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의 책략에 의해 베냐민을 붙잡아 두고자 할 때에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청하므로 희생정신을 발휘했다. 어쨌든 유다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강한 지도력을 가지고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유다에게는 다른 형제들에게서 볼 수 없는 지도력과 책임감뿐만 아니라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과거의 동생 요셉에게 행한 일을 회개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거둔 자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야곱의 넷째 아들이면서 장자의 명분은 물론 이요 지도자요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한 이유였다.
    후에 유다는 야곱과 함께 애급에 정착하여 평안히 살았는데 야곱은 유다를 축복할 때 그를 사나운 사자로 비유하면서(창 49:9) 그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리라는 축복의 예언을 하였는데, 결국 유다는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 왕 이후에 위기를 당할 삔 했으나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계승한 남 유다 왕족을 건설하여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는 귀한 사명을 감당했다.

    하나님은 교활했던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용하셨듯이 문제가 많았던 유다이지만 지도력과 희생적인, 책임감을 인정해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는 중요 인물로 쓰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었다.
    오늘 우리 자신 약점도 많고 문제도 많지만 신앙적인 바른 자세로 헌신하고자 하면 하나님 나라 사역에 귀히 쓰임 받는 귀한 일꾼들이 될 수 있습니다.

    역대상 5장 2절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느니라.'


    성경은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있다고 하는데 여러 서적에서는 유다에게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예수님의 관계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이 또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1. 유다와 요셉의 관계는 보다 넓게 보셔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 나라의 계통을 점령하고 복 받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혈통적 장남은 르우벤입니다.
    대상 5:1에서도 이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출생 순서로만 본다면 르우벤은 장남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첫 출생이었으나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받지 못했고 에서도 장자였기 때문에 통째로 굴러오는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일없이 받을 줄 알았다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뺏기는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장자의 명분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복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자로 내려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삭과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시고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변경시켜 주실 수도 있으며, 에서와 같이 장자의 명분을 망령되게 여기는 경우 다른 아들에게 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 그의 신앙행적은 과연 열두 아들 중 실질적으로 장남이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높이 들어쓰려고 꿈으로 두번이나 계시해 주셨으니 이미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가도록 되어 있었고 또한 그 예언대로 요셉이 17세 이후 아버지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갔고 이후 애굽을 구한 다음 야곱의 집 전체를 구하는 순서로 걸어가게 됩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요셉은 야곱시대에 야곱의 12아들 중에 '그 역할과 기능'으로 본다면 뚜렷히 장자를 감당했으며 이 공로를 그대로 인정하신 것이 바로 12지파 중에서 요셉은 분깃도 2배를 주어 요셉의 두 아들이 그 삼촌들과 같은 서열에서 12지파 중 2지파를 차지하였고 야곱의 원래 12아들 전체 중에서도 장자의 명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요셉과 달리 이스라엘의 앞날을 두고는 영원한 구원의 지파가 될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당대만으로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장차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두고는 요셉과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야곱 시대만으로 볼 때 유다는 요셉과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형제와 약간 표가 날 몇몇 장점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12아들 중에 하나였고 요셉은 12아들 중에 단연 하나밖에 없는 대표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당대에 외부적으로 표시가 나는 면으로는 그러했지만 유다에게는 장차 예수님의 구원계통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정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장자가 될 수 있는 움싹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야곱 당대만 본다면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의 사람이었으나 요셉의 신앙은 '자손으로 이어지며 자라가는' 신앙의 성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요셉 한 사람이 자기 당대에 신앙의 사람으로는 성경역사 전체를 통해 어느 인물보다도 성자의 모든 요소를 다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는데 그 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이 후손으로 이어지며 점점 자라가는 신앙의 면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늘 나타난 것과 함께 그 나타날 앞날의 움싹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오늘로 예를 든다면, 손양원목사님이나 김현봉목사님과 같은 분은 그분들 자신의 단독 성화와 경건면을 본다면 참으로 기독교 역사상 한 세대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고 끝이났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복음역사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사람은 아주 대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도 신앙이지만 그의 신앙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지는 계통적 은혜가 있어 그의 신앙 후손으로 세계교회를 옳고 바르게 잡고 나올 수 있었던 역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유다가 어떤 면에서 역사로 이어지면서 가면 갈수록 그 신앙의 실상이 크게 나타나게 되고 다윗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까지 구원의 유다지파라는 이름으로 늘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다른 기회에 크게 연구해 볼 제목일 것입니다.

    야곱의 장자권이 유다에게 이어진 이유

    하나님이 항상 장남이 아니고 차자만 축복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장남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는 아담이 장남 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속에서 탕자도 차남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을때 아버지가 인장반지(가락지)를 끼워 주므로 유산을 차자에게 주신다는 암시를 하게됩니다.
    중동지방은 반지를 건너주는 것이 상속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의 쌍둥이형인 "에서"는 분명히 장자의 지위로서 아버지 이삭의 유산을 받을 위치에 있었으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업수히 여기다가 야곱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가 사냥갔다가 집에 돌아와 배가 고프니깐 집에서 여자이이 처럼 팥죽을 끓여먹는 야곱더러 그 팥죽 좀 달라고 하니까,장자의 신분이 너무나도 크고 부러운 야곱은 그 명분을 내게 팔면 팥죽을 주겠노라고 하니까 형 에서는 "그까짓꺼 장자의 명분을 주어도 괜찮다고 장난 처럼 여기고 또 그렇게 말했다고 장자가 바뀌겠느냐 하며 그렇게하자고 하여 우습게 보고 그랬다가 졸지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이삭이 늙어 눈이 어두어 에서에게 사냥한 별미를 달라하고 그리하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하나님의 약속 받은 복을 안수 하겠다고 하니까 에서가 사냥하러 간사이에 야곱의 아내 아이들 어미 리브가가 야곱을 더 사랑하므로 야곱더러 에서로 분장하여 염소고기를 아버지에게 드려 하나님의 주신 복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부터 내려오는 것을 안수 받으라 하매 야곱이 그렇게 하여 복을 받아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형 에서는 다시는 그 복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또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계모를 범하여 장자의 명분을 놓쳤습니다.
    열두 아들의 장자인데 정욕을 못다스려 계모를 범하므로 아비 야곱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처럼 장자의 명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에서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장자 민족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구세주가 나타나자 복음을 배척하므로서 졸지에 천국 먼저 들어가는 장자의 기득권을 이방민족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응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면 그 직임을 소흘히 여기면 안됩니다.
    항상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으로서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아들을 보내어 피흘려 죽게하시고 그 피값으로 산 영혼이므로 소흘히 여겼다가는 큰일입니다.
    항상 자기를 거룩히 구별하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고통의 핏값으로 산 영혼을 핍박하였다가는 그 받는 저주를 다 감당 해야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작은 것 부터 큰것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비밀이 있어 누구든지 예수께 순종하면 그 과거나 미래나 장래를 알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 인류 역사나 장래나 현재일을 능히 분별하여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훤히 바라다 볼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이치는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성경 구약은 예수를 위해 비유로 기록된 글이지만 또한 사실 있었던 일로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야곱의 형 에서나 복음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우습게 여기다가 그렇게 된 결과입니다.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범죄로 인하여 장자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며,여동생 디나의 강간당한 복수를 시므온과 레위도 역시 세겜족속을 불시에 습격하여 남자들을 멸망시키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이후에 요셉과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을 베냐민의 대신으로 내어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야곱에게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살필 수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
    그리고 그들의 생을 옆에서 지켜보고 평가를 내린 것이 야곱의 마지막 축복속에 나타납니다.
    그 속에서 유다가 장자권 구원의 줄기로 나타날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예언속에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의 결격사유가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유다를 들어서 구원계통으로 삼아 내려가는 것이니 사실 앞의 여러가지 실수들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구원계통을 이어가는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여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장자권은 세 가지 요소
    1. 두 배의 몫의 땅
    2. 제사장의 직분
    3. 왕의 직분

    르우벤이 첫째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더럽혀짐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어 버렸습니다(창 49:3-4, 대상 5:1)
    그래서 두 배의 몫의 땅은 요셉에게로 갔습니다.
    이것은 그의 순결함으로 인한 것입니다(창 39:7-20).
    그런 이유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각각 땅의 분깃을 받았습니다(여호수아 16장과 17장).
    자기의 두 아들을 통하여 요셉은 좋은 땅의 두 몫을 상속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장자권의 제사장 직분의 몫은 레위에게로 갔습니다(신 33:8-10).

    출애굽기를 보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6)고 했을 때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직분의 몫을 받을수 있었던거죠.

    장자권의 또 다른 몫인 왕의 직분은 유다에게 주어졌습니다(창 49:10, 대상 5:2).
    유다가 왕의 직분의 분깃을 받을수 있었던 이유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모의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유다는 그를 돌보았습니다.(창 37:26).
    그는 또한 어려운 때에 베냐민을 돌보았습니다(창 43:8-9, 44:14-34).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왕의 직분이 유다에게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유다의 뜻은 찬양이며 주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함을 통하여 나셨습니다.

    르우벤은 자신을 더럽힘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어버렸구요.
    요셉은 순결함으로 인하여 두 배의 몫의 땅을 상속 받았고
    레위는 자신을 주님께 절대적으로 분별함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얻었으며
    유다는 자기의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아봄으로써 왕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주 예수님이 요셉 아닌 유다로부터 나신 것은 마태복음1장 2 ,3절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그로소 메시아인 예수그리스도 가 찬송 하리로다..유다 에게 탄생하셨습니다.




    ♦ 5월 30일(화) 주와 동행 365 / 제150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4: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 성구 :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합니다.
    가나안을 향해 떠났던 형제들을 뒤쫓아 온 요셉의 청지기는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냅니다.
    형제들은 성으로 돌아와 우리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며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악을 적발하신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지난 이십 년 간 쌓여 왔던 형제들과의 관계를 풀기 위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 진행됩니다. 
    요셉은 마지막 시험을 통해 형제들간의 우애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두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요셉은 돌아가는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넣었고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보낸 후에 도둑으로 몰린 베냐민을 억류시키려고 합니다(1-17절).
    둘째는 이때 유다가 나서 베냐민과 베냐민을 잃은 후 얻게 될 아버지의 슬픔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노라고 나섰습니다(18-34절).

    베냐민을 둘러싼 형제들의 우애는 마침내 요셉을 감동시켰으며 궁지에 빠진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탄원은 요셉을 감동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와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유다의 이 탄원이야말로 구약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웅변이라고 지지합니다.

    훗날 유다가 실제적인 야곱 가문의 장자가 되었고,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것은 결코 이 사건과 깊은 연관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형제들과 요셉 사이의 불화를 씻고 화해를 도모하고자 한 것과 그 화해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려는 희생 행위는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과 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로 구속사의 한 정점에 서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자는 오히려 자신까지도 살게 됩니다. 
    거룩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동안 세상의 재물과 권세만을 아까워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희생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오늘도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와 동행 365(제150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0∼12장
    요한복음 11:30∼57

    ♪ 찬양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4장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What can we say to my lord?" Judah replied. "What can we say? How can we prove our innocence? God has uncovered your servants' guilt. We are now my lord's slaves--we ourselves and the one who was found to have the cup."

    지난 이십 년 간 쌓여 왔던 형제들과의 모든 은원 관계를 풀기 위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요셉은 이 마지막 시험을 통해 형제들간의 우애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요셉은 돌아가는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넣어,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보낸 후, 도둑으로 몰린 베냐민을 억류시키려 한다(1-17절).
    이때 유다가 나서 베냐민과 베냐민을 잃은 후 얻게 될 아버지의 슬픔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노라고 나선다(18-34절).
    베냐민을 둘러싼 형제들의 우애는 마침내 요셉을 감동시키게 된다.

    궁지에 빠진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탄원은 요셉을 감동 시켰다.
    거기에는 참된 회개와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유다의 이 탄원이야말로 구약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웅변이라고 주장한다.
    뒤에 유다가 실제적인 야곱 가문의 장자가 되었고,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것은 결코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죄지은 형제들과 요셉 사이의 불화를 씻고 화해를 도모하고자 한 것과 그 화해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고자 한 희생 행위는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과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로 구속사의 한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누명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형제들을 살린 것은 유다의 희생 정신이었다.
    만일 모두들 자신의 목숨이 두려워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요셉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자는 오히려 자신까지도 살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세상의 재물과 권세만을 아까워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희생하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Whoever tries to keep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will preserve it.

    요셉은 자신이 꾸민 전략대로 형제들의 진실성을 다시 시험해 봅니다.
    그는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했습니다(2절).
    베냐민은 요셉과 마찬가지로 한 어머니 라헬에게서 태어났고 요셉이 떠난 후에 야곱의 총애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형들의 시기심, 우애, 책임감등을 시험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결백을 증명하려는 형들 

       청지기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4절)라고 문책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9절)라고 하면서 그들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이 애매하게 죄인 취급을 당하고도 변명할 여지조차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작은 돈 몇 푼에 자기들의 생명과 자유를 쉽게 포기하고 노예의 자리를 택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자신의 생명이나 자유를 포기해 가면서까지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결과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애매하게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가게 하시려고 종종 시험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시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돈(은잔)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밝혔습니다(43:23).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 가운데서도 피할 길을 주시며 은밀한 중에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고전 10:13).


    (2) 형제애(창 44:11-17)   

       베냐민의 자루에서 잔이 발견되었을 때(12절) 형제들이 보여준 태도와 반응에서 우리는 그들이 요셉에게 살의를 가지고 그를 팔 때와는 전혀 다른 뜨거운 형제애를 가지고 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옷을 찢는 형제들(13절) 

       요셉의 형제들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여 몹시 놀라며 슬퍼하였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그 당시 근동 지방에서 자신의 극한 슬픔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37:34, 왕상 21:27). 그들이 베냐민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이처럼 절망적인 비통감에 사로 잡힌 것은 그들이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 돌아오는 형제들(13절) 

       요셉의 형제들은 옷을 찢는 감정적 비통에만 그치지 않고 모두 다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의 제안(10절)에 따라 베냐민만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루에서는 잔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책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베냐민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꾀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짐을 꾸려 베냐민을 위하여 돌아옴으로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입니다(고후 2:8, 8:8, 요일 3:1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고린도후서 8:8, 개역개정 성경)

    3) 연대 책임을 말하는 유다(16절) 

       유다는 재차 애굽을 방문할 때 형제들의 인솔자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험을 위해 꾸며진 일이지만 베냐민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직을 주장하면서도 과거에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죄를 드러내면서 베냐민을 살리는 대신 그들이 모두 종이 되겠다고 하여 형제애를 입증하였습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창 44:14-34)   

       본문에서 유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변명과 술수로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지 않고 자신과 형제들의 현재까지의 상황을 회고하며 자기들의 과거에 범한 죄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솔직하게 고백함(16절) 

       유다는 자기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를 적발하셨다는 유다의 고백은 과거 그들이 지은 죄를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42:21, 22, 28). 어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였느냐의 여부는 그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입술의 고백이 있느냐, 없느냐로 증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2) 아버지를 염려함(18-31절) 

       유다와 형제들은 베냐민의 죽음으로 인해서 아버지 야곱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서 심히 염려하였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탄원 속에서 아버지의 형편에 대해 애절한 모습으로 실감 있게 묘사하면서(22, 31절)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효도를 보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과거의 죄를 회개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신의 희생을 제안함(32-34절) 

       유다는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33절). 자신이 죄의 대가를 감당하고 베냐민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의 행동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참된 회개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회개는 슬퍼하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참으로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4) 유다의 탄원(창 44:18-34)   

       유다는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서 요셉에게 격조 높은 탄원을 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훌륭한 간청으로서 성경 역사상 그 의의가 빛나고 있습니다. 

    1) 지극히 겸손한 것이었다(18절) 

       유다는 요셉은 '내 주여'라고 칭하면서 자신은 종의 위치에서 상전에게 말할 때처럼 겸허한 자세로 간청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보다도 더 예의 바르고 겸손한 말을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모든 말이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기에 요셉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듣는 사람이 전혀 화를 낼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2) 거짓이 없이 진실하였다(19-26절) 

       유다의 탄원은 변명이나 꾸밈이 없는 솔직하고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궤변적인 방법이나 논쟁적인 설득을 하려 들지 않고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였습니다. 거짓 없는 진실한 말은 어떤 논리적이고 수사적인 말 보다도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 비통함을 표시하였다(27-32절) 

       유다는 베냐민을 그 아비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베냐민의 어미가 죽었고 그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아니하면 그 아비가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유다의 애끓는 심정이 매우 감동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4) 자기희생을 보여주었다(33, 34절) 

       유다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종신토록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탄원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익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부친과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자기희생적인 간청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형인 것입니다. 

    3. 나가면서   

       유다의 희생적인 사랑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한 그의 결정은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사랑이 결국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는 말씀처럼, 우리의 희생적 사랑 역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극복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를 기억 하며 우리가 함께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때 여전히 이 땅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43:30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눈물(5869) 아인(ʽayin) עַיִן

    1. 흐르다.  2. 분사 עוֹיֵן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발음 / 아인[ ʽayin ]
    관련 성경 / 눈(창 3:5, 출 5:21, 삼상 2:33), 우물(창 24:13), 시력(창 29:17), 목전(창 38:7, 출 8:26, 사 66:4), 샘(창 49:22, 아 1:15), 미간(출13:9, 신11:18),물(출15:27), 빛(레13:55, 겔1:4), 분천(噴泉)(신8:7), 소견(신12:8, 삿21:25), 외모(삼상16:7), 처분(삼하19:27), 백주(삼하12:11), 근원(대하32:3), 자기(잠26:16), 의견(렘18:4),모양(겔1:16, 슥5:6). [동] 보암직하다(창3:6), 눈짓하다(창39:7), 보다(출 15:26, 신13:8), 보이다(민 11:6, 삼상 29:7), 대면하다(민 14:14), 여기다(삼하 10:3, 대상 13:4), 원통하다(삼하 16:12), 주목하다(왕상 1:20), 바라보다(대하 20:12), 겸손하다(욥 22:29), 번쩍이다(잠 23: 31), 같다(겔 10:9).
    [부] 부지중(민 15:24), 스스로(삼하 6:22, 잠 30:12), 뜻대로(에 8:8)
    구약 성경 / 868회 사용

    창세기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7356. 라함(racham)  רַחַם 

    1. 자궁.  2. 처녀
    발음 / 라함[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창 43:14), 사랑하는 마음(창 43:30), 위하는 마음(왕상 3:26), 긍휼(신 13:17, 느 9:27, 28, 시 51:1), 불쌍히 여김(왕상8:50, 슥 1:16), 자비(대하 30:9), 긍휼하심(시 25:6), 은혜(느 1:11), 태(창 49:25, 잠 30:16, 사 46:3), 처녀(삿5:30)
    구약 성경 / 6회 사용

    창세기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라함)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세기 43:30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라함)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 7355. רָחַם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라함 [ râcham ]
    관련 성경 / 사랑하다(시 18:1), 긍휼히 여기다(신 13:17, 왕하 13:23, 사 49:10), 자비하다(시 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 8:50, 시 103:13, 사 27:11). [명] 자비(렘 6:23, 애 3:32), 긍휼(겔 39:25, 합 3:2), 로루하마(호 1:8), 루하마(호 2:1)
    구약 성경 / 47회 사용


    요셉의 형통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과 많이 닮아 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은 흠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알렸던 노아의 실수,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를 누이로 속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했던 시도, 야곱의 속임수, 그리고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오점, 성경의 인물들에게 나타난 잘못을 숨기지 않음으로 모든 인간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자로 그리고 있다.
    그렇게 인간은 죄에서 자신을 구원할 구속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킨다.
    그러나 한 인물 요셉은 다르다.
    성경은 요셉에게 있어서만큼은 잘못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있다면 형들의 행위를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하는 정도다.
    왜 요셉만큼은 예외적으로 다루는가?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과 많이 닮아 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지만 결국 가족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자가 된다. 어떻게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가?

    청지기로의 삶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삶에 있어서 언제나 2인자로서 살아갔다는 점이다.
    한번도 일인자로 살지 않았다.
    아버지 야곱의 아들로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편애와 요셉의 꿈으로 인해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자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의 보디발 집안의 종이 된다.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은 요셉은 보디발 집안의 총무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으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간수들의 인정을 받아 감옥 안에서는 자유로운 자가 되어 감옥 안에서 간수를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된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고 꿈을 해몽하는 자이기도 했다.
    당시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의 꿈을 해몽하였는데 그대로 되고, 애굽의 통치자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일약 애굽의 이인자 총리가 된다.

    바로의 꿈은 7년간의 풍년과 7년간의 훙년에 관한 것이었다.
    요셉은 앞으로 주어질 일들을 관리하는 자로 바로로부터 총리 임명을 받는다.

    이러한 요셉의 생애를 보면 한번도 주인으로서 산 적이 없었고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삶을 산 것으로 등장한다.
    성경은 요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함을 받았으나 인간은 청지기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의 삶을 살고자 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를 통해 창조시 주어진 인간 본연의 삶 곧 청지기의 삶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바로 다스리며 사는 삶에 대한 기도가 주기도문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밝히고 마침내 자신이 아닌 아버지가 원하던 일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다.

    형통한 자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오해되고 있는 용어가 형통이란 용어이다.
    물론 형통이란 용어를 사전적 의미로 보면 잘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용어를 내가 잘 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형통이란 용어가 요셉의 삶 속에 등장한다.
    그것도 요셉의 가장 고통스런 삶 속에서 등장한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총무로 일할 때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을 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형통이란 용어는 요셉의 자유로운 삶과 연관이 있다.
    그 자유는 주인 보디발이 허용아래 주어진 것이였고, 감옥 안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눈과 감옥의 간수들의 눈에 들어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자유였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게 되었을 때 요셉은 단호하게 그것은 허용된 일이 아니라고 거절함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가게 된다.

    형통이란 용어는 다스리는 삶과도 연관된다.
    요셉에게는 언제나 다스리는 일이 주어진다.
    보디발 집안을 다스리는 총무로, 감옥에서 간수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여 처리하는 자로,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의 왕 바로의 일을 대신하여 애굽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

    다스리는 자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느끼며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할 수 있는 다스리는 자의 형통함을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형통이란 용어가 복이란 의미와 만났을 때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은 남을 복되게 하는 자가 형통의 의미라고 푼다. 보디발 집안이 요셉 때문에 복을 받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언제나 자신이 자유롭게 행하던(다스리는) 일들을 통해 요셉의 유일한 윗 사람 주인(일인자)를 복되게 하는 자로 등장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보디발 집안을 복되게, 그리고 감옥의 간수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의 영역을 넓혀주게 된다. 마침내 요셉으로 인하여 아버지 야곱의 집안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남을 복되게 하는 형통한 자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함으로 죄인된 인간을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게 하신 최대의 형통한 자 구원자인 것이다.  

    구원자 요셉  

    흉년이란 환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죽게 될 상황에서 구원한 자가 되었다.
    그 과정은 형제들로부터 은 20에 팔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되는 일은 가롯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 30에 판 일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닮아 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요셉의 실패였고 예수님의 실패였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을 구원하는 자가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자가 된다.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왔다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난다.
    형들은 이제는 죽는구나 했을 때 요셉으로부터 놀라은 말을 듣는다.
    “당신들은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세기 45:5-7)

    이러한 일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인간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뉘우치는 말을 듣고 용서한 것이 아니라 형들을 이미 용서한 가운데 형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들은 요셉의 이러한 용서를 불안해 하다가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자 다시 요셉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구걸한다.
    그러자 요셉을 울면서 이미 그것은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임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인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간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부활하셨다.
    이제부터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예수님의 모형으로 닮아있는 자는 없다.


    메시아 모형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첫 글자인 ‘여’와 ‘구원하다’는 뜻을 가진 ‘야솨’가 합쳐진 글자로 “하나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정탐꾼으로 본래 이름은 ‘구원’이란 뜻의 ‘호세아’였는데,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더하여 여호수아라고 불렀다.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민 13:16)”

    마태복음 1장 25절에 요셉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Jesus)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이지만, 여호수아는 유다 지파 사람이 아니고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다. 에브라임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 갔던 요셉이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후 이집트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다. 요셉이 나중에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다시 만난 후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고자 하였다.

    요셉은 장남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편에, 차남인 에브라임은 왼편에 세웠는데,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오른손을 펴서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 축복을 하였다(창 48:15). 요셉이 야곱의 손을 들어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야곱은 “그의 아우가 더 큰 자가 되리라(창 48:19)”고 하면서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차남이었지만,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의 10대손이다(대하 7:20-27 참고). 에브라임이 이집트에 태어난 이스라엘의 1세대라면 10세대인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점령하여 12지파에게 분배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사람이다.

    대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고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이다. 대홍수 이후에 바벨탑을 쌓음으로 언어가 혼란케 되고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의 구원으로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선택된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 셈의 10대손이다.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 도구로 죄악의 물결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와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이때 모세는 산에 올라가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운 용사였다(출 17:8-16).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정탐꾼으로 유다 지파의 갈렙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보고를 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한 여호수아는 왕도 제사장도 아니었지만, 왕적 능력과 특권을 갖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으며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함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였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메시아적 대리자로서 왕적 직무를 탁월하게 수행하였다.


    성경 전체를 보여주는 요셉 스토리

    모세는 다른 캐릭터보다 요셉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창세기를 기록했다. 이는 아담이나 노아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족장들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에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창세기 이후로 성경 전체에서 요셉이 그리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

    그렇다면 요셉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왜 그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그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일까?

    많은 크리스천들은 요셉 이야기가 어떻게 창세기의 서사라든가 전체 구속사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흔히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예증하기 위해 요셉 이야기를 활용하곤 한다. 주로 창세기 50장 20절 본문에 집중해서 말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요셉의 인생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긴 본문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요셉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5:1-9).

    하지만 요셉 이야기를 예컨대 양립주의(compatibilism)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스토리로만 축소시켜 읽는다면, 그의 인생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 얼마나 풍성하게 기여하는지를 놓치게 된다(참고로 양립주의란,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이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언약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섭리를 독자한테 보여 주기 원하셔서 자신의 주권이 요셉 이야기 전반에 나타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떻게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요셉이 어떻게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갈등의 해결을 드러내는 이야기

    창세기는 언약 백성의 생존과 순결을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계속해서 소개한다. 곧 37장에서 50장에 이르는 내용을 읽어 보면, 야곱과 그 자녀에게 온갖 종류의 시련이 들이닥치며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가족 간의 분열과 다툼이 다시금 언약 백성의 생존을 위협한다(창 37장; 참고 4장).

    2. 이방 민족과 통혼하여 드러나게 된 불의가 언약 백성의 순결을 위협한다(창 38장; 참고 12:10-20).

    3. 세계적인 기근이 발생하여 언약 백성이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창 42:1-2; 참고 3:17-19; 12:10; 26:1).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가문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갈등을 해결하신다.

    1. 요셉은 형제들에게 받은 대로 복수하기보다 관대한 용서를 베풂으로써 그들과 화해하고 가족 간의 연합을 이룬다(창 45:1-15).

    2. 요셉은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켜 이방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애굽인의 미움을 받지 않게 된 가족은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않고 그 땅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창 46:33-34).

    3.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가족의 생명을 지킨다(창 41:25-35; 47:13-26).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언약 백성을 위협하는 문제를 역전시키신다. 곧 용서를 통해 다툼을, 의를 통해 불의를, 그리고 지혜를 통해 기근을 해결하신다.

    약속의 성취를 나타내는 이야기

    더 나아가 창세기 37-50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준다(창 12:1-3).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열방에 은혜를 베푸신다.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집을 그에게 다 맡긴다. 이에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다(창 39:4-5). 그리고 요셉은 또다시 바로의 집에서도 총리가 된다(창 41:40). 그 결과 열방에 복이 미친다. 요셉이 심각한 기근 중에도 애굽인과 각국 백성에게 양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창 41:56-57).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으로 번성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요셉을 통해 성취하신다. 일단 요셉이 그의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키고 나자, 아브라함 자손은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창 47:27). 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전체에 걸쳐 등장하지만, 지금 이 경우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그 백성에게 명령하거나(창 1:28; 9:1, 7; 35:11) 그와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지만(창 16:10; 17:2, 6; 22:17; 26:4, 24), 이번에는 처음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동일한 표현이 여기서는 직설법으로 서술되었다. 요셉의 리더십 하에 아브라함 자손이 실제로 번성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왕에 대한 약속도 요셉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다. 창세기 37장에 소개된 요셉의 꿈은 장차 그가 수행할 통치자의 직분을 예견한다. 곧 애굽의 궁정에서 요셉이 차지하게 될 위치를 암시한다. 더군다나 그가 입었던 ‘채색옷’은 왕가의 의복을 상징한다(삼하 13:18). 따라서 이 장에 앞서 예언되고 모형론적으로 제시되었을 뿐 아니라 언약의 약속으로 언급된 통치자(창 17:6, 16; 35:11), 즉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나타나리라고 기록된 왕의 도래를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는 창세기 37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장에서부터 소개되는 요셉이 그 예견을 더욱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요셉을 보며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후 왕궁에서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된 요셉 이야기는 단지 하나님이 그의 결백을 입증해 주셨다는 내용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인간의 통치가 회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그분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한 나라를 이루고 그로부터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요셉은 바로 그 통치자를 보여 주는 첫 번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열방에 전해 주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드러낸다. 곧 사랑받는 아들이자, 섬기는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섭리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비록 모세는 창세기 37-50장 이야기의 중심 무대에 요셉을 세웠지만, 사실상 그 무대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요셉이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버림받은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지키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약의 성취 여부는 인간의 악한 행동마저도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주권자의 손에 달려 있다(창 50:20).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모든 위협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이와 같은 요셉 이야기는 단지 창세기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보다도 창세기의 전체 스토리가 안고 있는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는 형제를 미워하는 사건으로부터 형제에 대한 용서로, 그리고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근으로부터 가족이 재회하여 잔치를 벌이는 축제로 독자들의 걸음을 인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야기

    이러한 관찰은 요셉이 과연 장차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모형’(type)인지, 즉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시적인 인물이 맞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교회사에서 수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 맞다고 설명해 왔다.
    요셉과 그리스도 간에 존재하는 명백한 유사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셉도 사랑받는 아들로서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과정을 통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과 예수님의 상관성을 드러내는 유사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고 죄인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무효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창세기는 야곱이 유다를 위해 축복한 내용이 이미 요셉의 삶에서 모형론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

    이 축복에서 야곱은 유다의 후손으로 장차 오실 왕을 묘사하는데, 그 이미지가 요셉의 인생에 펼쳐진 장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여기서 유다의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게 된다고 언급되는데, 이처럼 절을 한다는 표현은 요셉의 꿈에서 형제들이 그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이미 세 번 사용되었고(창 37:7, 9, 10), 또한 그들이 애굽의 궁정에서 실제로 요셉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기술하기 위해서도 세 번 사용되었다(창 42:4; 43:26, 28). 이처럼 창세기 49장 8절에서 열한 명의 형제들이 한 사람 앞에 절을 하는 이미지는 지금까지 들려준 요셉 이야기를 요약하는 한 편의 그림과 같다. 이런 유사점은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은 바로 이 야곱의 축복에서 힌트를 얻게 된다. 곧 메시아가 요셉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게 되리라는 답변을 얻는 것이다.

    이처럼 요셉과 유다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이 구절만이 아니다. 사실 모세는 요셉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 인물을 자주 병행시켜 놓았다. 예를 들어 가장 결정적인 세 차례의 대목을 살펴보면 그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곧 서론 부분에서(창 38-39장), 절정 부분에서(창 44-45장), 그리고 야곱의 예언 부분에서(창 49장) 그렇게 등장하는데, 이 단락들은 요셉 이야기만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 스토리의 백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요셉과 유다는 서로 엮여 있다. 따라서 야곱의 예언에서도 두 사람은 장차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함께 예시한다.

    이처럼 모세는 요셉이라는 모형론적 인물을 통해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미래의 왕을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될 이스라엘 역사의 거시적인 스토리 안에 요셉 이야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그의 이야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는 모세가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왕적 인물로서 요셉을 바라보도록 뚜렷한 장치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셉 이야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미래의 소망을 제시하는 이야기

    창세기 37-50장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여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를 역전시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모든 게 불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자기 가족에 의해 노예로 팔려 나간 한 사람을 들어 자신의 권능을 펼쳐 보이신다.

    아마도 모세는 자기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보잘것없는 한 인생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자 요셉 이야기에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죄인에게 임할 저주를 완전히 역전시키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미래의 진짜 요셉(a coming Joseph)을 기대하도록 그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성경의 전체 스토리를 보여 준다. 즉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비하를 통해 승리로 나아가는 스토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3장 / 요셉의 앞에 서니라(15절)


    어느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자가 반가워서 뜯어 보았더니 "사람,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 이라고 사람이라는 말만 5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석하려고 하여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족장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3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1-2a).
    야곱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야곱의 약전이란 야곱의 계보 즉 족보를 말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37장부터는 야곱이 주인공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어보면 마치 야곱 보다는 요셉이 주인공처럼 나타납니다.
      야곱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창세기 43장은 요셉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을 믿음의 사람들에 비유한다면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앞에 서는 것은 곧 주님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의 앞에 서기 위해서 야곱은 아주 중요한 것을 결단합니다.
      그것은 베민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창세기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베냐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었는데 요셉을 오래 전에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생 베냐민이 남았습니다.
      시므온은 애급에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만일 이번에 아들들이 식량을 구하려고 애급으로 갔다가 베냐민을 잃는다면 남은 생애가 마치 음부에 떠러진 것과 같은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게 되므로 하는 수 없이 포기합니다.

      여러분, 내가 포기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더 심한 고통을 겪지 말고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야곱은 포기하기 전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모두 사용하려고 합니다.
      본문 11절에서 13절입니다.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찐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찌니 곧 유향 조금과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너희 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 약전(8435) 톨레다(tôwledâh) תּוֹלְדָה 

      1. 세대. 2. ׃ לְתוֹלְדֹחָם 종족을 따라. 3. ׃ מֵפֶר תּוֹלְדֹת 족보
      발음 / [ tôwledâh ]
      어원 / 32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내력(창 2:4, 36:1), 계보(창 5:1), 족보(창 6:9,10:1, 25:19), 자손(창 10:32, 대상 26:31), 세대(창 25:13), 종족(민 1:20, 대상 5:7, 7:4)
      구약 성경 / 39회 사용

      * 3205.  야라드(yâlad)  יָלַד 

      1. 낳다. 2. 분사 여성형 יוֹלֶדֶת 어머니.  3. 보다
      발음 / 야라드[ yâlad ]
      관련 성경 / 낳다(창 4:18, 출 21:4, 호 1:3), 해산하다(출1:19, 왕상3:18, 미5:3), 배다(민11:12), 나다(민26:59), 출산하다(삿13:2,3), 순산하다(사66:8), 새끼낳다(겔31:6), 해산하게 되다(창35:16), 산고를 겪다(렘13:21), 시행되다(습2:2),출생하다(전7:1, 욥11:12), 해산을 돕다(출1:16), 양육하다(창50:23), 아이를 갖도록 하다(사66:9). [명] 계통(민1:18), 출산(창16:2,30:9), 산기(사26:17), 어미(잠17:25), 아들(왕상3:26, 대상14:4), 산파(창35:17, 출1:15)
      구약 성경 / 468회 사용


      "요셉 앞에 서니라" 라는 말씀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예수 앞에 서니라"




      창세기 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기근(7458) 라아브(râʽâb)  רָעָב 

      1. 배고픔.  2. 굶주림. 3. 기근
      발음 / 라아브[ râʽâb ]
      어원 / 74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근(창 12:10, 대하 6:28, 사 14:30), 흉년(창 26:1, 왕하 4:38, 느 5:3). [형] 주린(출 16:3, 왕하 6:25, 느 9:15)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 7456. 라에브(râʽêb) רָעֵב 

      1. 굶주리다.  2. 히필형 : 굶주리게 하다
      발음 / 라에브[ râʽêb ]
      관련 성경 / 주리다(창 41:55, 시 34:10, 잠 10:3). [명] 궁핍(렘 42:14)
      구약 성경 / 21회 사용


      רָעָב 7458 [râʽâb]

      • 남성형 명사 배고픔, 굶주림, 기근, 창12:10, 14:30, 애5:10.

      כָּפָן 3720 [kâphân] 
      • 남성형 명사 굶주림, 기근, 빈곤, 빈궁 욥 5:22, 30:3.

      • כָּפָן 스트롱번호3720

        1. 굶주림.   2. 기근.  3. 빈곤
        발음 [ kâphân ]

        어원 / 371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기근(욥 5:22, 30:3)
      • 구약 성경 / 2회 사용


      7459
      רְעָבוֹן  [reʽâbôwn] 
      7459 [reʽâbôwn]
      • 남성형 명사 기근, 굶주림, 창42:19, 시37:19.

      יֶשַׁח 3445 [yeshach]
      • 남성형 명사 배고픔, 공복, 굶주림, 기근, 갈망, 미6:14.

      תַּחֲלוּא 8463 [tachălûwʼ]
      • 1. 남성형 명사 [주]׃תַּחֲלוּאֵי־ 기근으로 병든 자, 렘14:18.
      • 2. 남성형 명사 질병, 신29:21(22), 시103:3, 렘16:4.





      창세기 41:54-57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쌔 애굽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기근(7458)


      ♦ 5월 29일(월) 주와 동행 365 / 제149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3: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요셉의 앞에 서니라(15절)
      ♦ 성구 :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급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So the men took the gifts and double the amount of silver, and Benjamin also. They hurried down to Egypt and presented themselves to Joseph.    

      “요셉의 앞에 서니라(Stood before Joseph)”
      우리는 언제인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욥기 2장 1절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족장 시대에 욥은 동방 우스 땅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 정말일까 하며 사탄은 하나님을 찾아와 욥을 테스트하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모든 것으로 테스트 하라고 허락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서 그의 꿈을 테스트받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애급으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원망과 불평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는 요셉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드디어 요셉의 형제들은 애급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예전에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단에 절을 하였다는 꿈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그 때를 회상하며 요셉은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흘린 후에 다시 형제들 앞에서 내가 요셉이라고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기근이 더욱 심해지고 애급에서 가져 온 양식이 다 떨어진 형제들은 야곱에게 간곡히 사정하고 유다가 자기의 목숨으로 책임 지겠다고 함으로 간신히 베냐민을 데리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1-13절).

      형제들을 다시 만난 요셉은 반가워하며 그들을 환대하고 야곱의 안부를 묻다가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감격에 겨워 혼자 통곡합니다(14-30절).

      베냐민은 모친 라헬에게서 난 유일한 혈육이며 막내이기 때문이었으며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형제들 앞에 나타난 요셉이 그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자 형제들은 서로 이상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31-34절).

      가나안 땅에 기근이 계속되어 앞서 사온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의 가족들은 다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리인 요셉의 제안대로 베냐민을 동반하지 않고는 애굽에 내려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주저하는 야곱을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갔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호의에 힘입어 국빈 대접을 받게 됩니다.

      요셉은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총리 대신이었고 형제들은 이국 땅 가나안에서 온 초라한 나그네였습니다.
      따라서 총리인 요셉이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환대하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열두 형제가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은 구속사의 대줄기인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열두 형제의 모임은 애급과 가나안까지, 더 나아가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의 공동체까지 이어지는 택함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만이 공동체 형성의 유일한 중심임을 드러내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로 확산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기근 속에서 양식이 다 떨어진 형제들은 다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급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베냐민을 못 데려가게 하는 야곱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유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야곱에게 호소함으로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겼던 사례를 생각하면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제안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무력이나 간계가 아니라 자신을 던지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과거에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요셉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지 못하도록 죽이고자 하였으나,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노여움과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바치려는 유다의 태도는 모든 가족을 살렸습니다.

      인간 적인 무력과 간교한 거짓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실패를 볼 것이지만, 올바른 방법과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지금의 내 모습이 훗날 주님 앞에 설 모습입니다.
      지금을 벗어난 미래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훗날 나의 모습을 기대하기 전에 지금 나의 모습을 거룩한 말씀 앞에 세워 놓고 예리한 성령의 눈으로 점검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기도합시다.                                                                                 

      * 주와 동행 365(제149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7∼9장
      요한복음 11:1∼29

      ♪ 찬양 /날마다 주와 버성겨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 먹고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
      "저요 ?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같은 형제들일지라도 요셉과 같은 인물이 있고 전혀 다른 기질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셉입니까?
      가룟 유다입니까?
      욥과 같은 사람입니까?
      오늘의 삶이 나를 결정합니다.


      ♦ 5월 30일(화) 주와 동행 365 / 제150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4: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50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0∼12장
      요한복음 11:30∼57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31일(수) 주와 동행 365 / 제151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5: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는 요셉이라(3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51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3∼14장
      요한복음 12:1∼26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일(목) 주와 동행 365 / 제152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6: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1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52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5∼16장
      요한복음 12:27∼50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2일(금) 주와 동행 365 / 제153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7: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고센 땅(1절)
      ♦ 성구 :

      본문에는 “고센 땅”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1절, 4절, 6절, 27절).
      그리고 라암세라는 좋은 땅도 소개됩니다(11절).

              


                                                                              

      * 주와 동행 365(제149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17∼18장
      요한복음 13:1∼20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3일(토) 주와 동행 365 / 제154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창세기 48: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도 안다(19절)
      ♦ 성구 :


              


                                                                              

      * 주와 동행 365(제149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역대하 7∼9장
      요한복음 11:1∼29

      ♪ 찬양 /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48

      5

      28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149

      5

      29

      월 

      창세기 43:1∼34

      요셉의 앞에 서니라(15절)

      150

      5

      30

       창세기 44:1∼34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16절)

      151

      5

      31

       창세기 45:1∼28

      나는 요셉이라(3절)

      152

      6

      1

        창세기 46:1∼34

      칠십 명(27절)

      153

      6

      2

       창세기 47:1∼31

      고센 땅(1절)

      154

      6

      3

        창세기 48:1∼22

      나도 안다(19절)

      정탐군 / 라갈(7270) râgal. רָגַל         

      1. 걷다.   2. 옷을 빨기 위해서 밟다.  3. 피엘형 : 비방하며 돌아다니다
      발음 / 라갈[ râgal ]
      관련 성경 / 모함하다(삼하 19:27), 허물하다(시 15:3), 정탐하다(삿 18:2, 대상 19:3, 신 1:24, 수 7:2).
      [명] 정탐(창 42:9, 수 2:1)
      구약 성경 / 26회 사용

      살고 / 하야(2421)  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5:8, 왕하8:8), 살리다(창20:7, 겔37:5), 지내다(창5:7), 보존되다(창19:20), 생활하다(창27:40, 왕하4:7), 소생하다(창45:27, 삿15:19), 거주하다(창47:28), 살려주다(왕상20: 32), 살아나다(왕상17:22), 희생하다(왕하13:21), 살려두다(민31:15, 삿21:14), 구원하다(겔3:18), 유전하다(창7:3), 부흥하게 하다(합3:2), 전하다(창19:32), 기르다(삼하12:3, 사7:21), 중수하다(대상11:8), 일으키다(느4:2), 소생하게 하다(시80:18, 7:12), 보전하다(겔18:27), 풍성하다(호14:7), 생존하게 하다(수14:10),구원하다(창19:19), 보존하게 하다(창6:20), 살려주다(사38:16), [명] 만세(삼상10:24, 왕하11:12), 생명(전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죽고 /  무트(4191) mûwth   מוּת

      1.  죽다.   2. 출애굽기 11:5.  3. 창세기 5:8
      발음 무트[ mûwth ]
      관련 성경 / 죽다(창 7:22, 수 1:2, 삼하 21:9), 죽이다(출 21:28, 삼상 19:15, 왕하 11:8), 죽임을 당하다(신 18:20, 삿 6:31, 대하 22:11), 사망하다(신 2:16, 룻 2:20), 쳐죽이다(민 35:17), 낙담하다(삼상 25:37), 망하다(호 13:1), 멸하다(욥 33:22), 살해하다(시 37:32).
      [명] 죽음(레 10:6, 민 16:29, 겔 28:8), 사망(레 8:35, 합 1:12), 죽은자(창 23:6, 민 21:6, 삼하 1:4), 시체(창 23:3, 출 6:6, 14:30), 송장(왕하19:35), 죽은 자(시 88:5), 죽임(삼상 5:11)
      구약 성경 / 780회 사용

      독실한 자(케님 아나흐누)(3651, 587)

      독실한 자(케님 아나흐누)(3651, 587)

      독실한(3651) 켄(kên) כֵּן

      1. 똑바로 선.   2. 올바로  3. 복수형  כֵּנִים
      발음 / 켄[ kên ]
      어원 / 3559에서 유래한 불변사
      관련 성경  / 옳다(출 10:29, 민 27:7), 명령하다(출 39:43), 올라가다(삼상 9:13), 알다(대하 32:31), 같다(겔 42:11), 보다(삿 6:22), 아니하다(느 2:16), 나아가다(에 4:16), 되다(전 8:10).
      [부] 어떻게(민 10:31), 마땅히(삼하 13:12).
      [명] 후(창 6:4, 41:31, 삼상 9:13)
      구약 성경 / 565회 사용

      * 3559. 쿤(kûwn)  כּוּן

      1. 똑바로서다.  2. 세우다.  3. 필렐형 כּוֹנֵן
      발음 / 쿤[ kûwn ]
      관련 성경 / 견고하다(왕상 2:46, 대상 17:14, 잠 29:14), 예비되다(잠 19:29), 준비하다(대하 35:4, 시 9:7, 사 51:13), 든든히 서다(삼상20:31), 굳게서다(대상16:30, 시102:28, 잠12:3), 완비하다(대하8:16), 갖추다(대하29:35) 구비되다(대하35:10), 준비되다(대하35:16), 견고히 하다(시89:21), 서다(시101:7), 보존되다(잠12:19), 이루다(잠16:3), 성취하다(잠20:18),정하다(창41:32, 시108:1), 분향하다(시141:2),성취하다(잠20:18), 버티다(삿16:26,29), 기다리다(욥12:5, 18:12), 옳다(욥42:7), 신실하다(시5:9), 정직하다(시51:10), 확정되다(시57:7), 세우다(출15:17, 시119:90, 신32:6), 당기다(시11:2), 건축하다(합2:12), 배우다(욥8:8), 짓다(욥31:15, 잠8:27), 건설하다(시24:2), 삼다(대상14:2), 저축하다(대상29:16),행하다(대하27:6), 정돈하다(대하35:20), 결심하다(대하30:19), 지도하다(렘10:23), 성취하다(렘33:2), 항오를 벌이다(나2:3), 향하다(삼상7:3), 살피다(삼상23:22), 방비하다(렘51:12), 닦다(신19:3), 베풀다(욥29:7), 주다(시65:9), 인도하다(잠16:9), 삼가다(잠21:29), 박히다(겔40:43). [명] 참(신13:14),실상(삼상23:23). [부] 견고히(시93:1, 잠25:5, 왕상2:45), 든든히(잠4:26), 자세히(신17:4), 과연(삼상26:4)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사람(자) 587. אֲנַחְנוּ 아나흐눈( ’ănachnûw)  

      1. 우리.  2. 우리 자신
      발음 / 아나흐눈[ ’ănachnûw ]
      어원/ 5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0회 사용

      * 595. 아노키( ’ânôkîy)  אָנֹכִי  
      1. 출애굽기 20:2.   2. 호세아 1:9.  3. 호세아 2:10
      발음 / 아노키[ ’ânôkîy ]
      구약 성경 / 359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2장 / 너희는 정탐들이라(9절)

      애굽으로 간 요셉의 형들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오라고 부탁하는데, 애굽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기근을 만나 피난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기근을 만나자 그의 아들들에게 애굽에 내려가 곡식을 얻어오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애굽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말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실제로는 항상 우물을 찾아 이동해야 하고 또 우물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어야 하는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었습니다(26:17-25).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히 내리지 않으면 살기가 쉽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메마르고 척박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차라리 풍요의 땅 애굽이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온 땅을 촉촉이 적셔주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다면 훨씬 납득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택한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만한 능력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땅이라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척박한 가나안 땅을 자기 백성들의 기업으로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은 어떤 곳이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참된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로 오염되어 부패한 이 세상은 아무리 지상 낙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설령 안식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은 너무 자주 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땅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며 소망해야 할 땅은 이 지상에 있는 땅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나라'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 누구도 이 땅을 자신의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이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야만 하는 외인이요 나그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히 11:13).
      그분들이 진정으로 찾았던 안식처 곧 본향은 언제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히 11:16).

      여러분, 이 땅 어디에도 '진정한 안식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야만 하는 나그네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오직 하늘에만 있습니다(빌 3:20).

      .
      6절에 요셉의 형들은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와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는 요셉이 소년 때에 꾼 꿈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37:6-9).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야기했을 당시에는 그 꿈이 허황되고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였었지만, 지금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는 형들의 모습은 바로 요셉의 꿈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반드시 성취시키심으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 가운데 성취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사 못 이루실 것이 없고 또한 신실하셔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종말론적 사건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같은 예언들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더욱 견고하게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
      9절에 요셉은 형제들에 대하여 꾼 꿈을 생각했다고 말씀하는데,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꿈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형들이 자신 앞에 엎드리는 모습 속에서 그 꿈이 바로 이때를 보이신 것임을 바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고난 가운데에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꿈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때가 되자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그러한 마음을 가졌었기에 형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이기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삶으로써 믿음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고난을 당할 때, 악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낙망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약속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
      25절에 요셉은 형제들에게 받은 돈을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면서 돈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요셉의 이러한 행동에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참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육체를 살리는 육의 양식을 값없이 거저 주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값없이 거저 믿게 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 값을 요구하셨다면, 이 세상의 누가 그 값을 지불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만 남에게 무엇을 주지만, 그러나 성도는 값없이 받았으므로 값없이 주는 은혜의 원리를 따라 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28절에 요셉의 형들은 곡식 자루에 돈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혼이나서 떨며', 곧 얼이 빠진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하며 탄식합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형들을 위하여 돈을 받지 않고 양식을 주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에, 그들은 애굽 총리가 자신들을 해하려고 일부러 그와 같은 일을 꾸몄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기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기뻐하여야 할 일을 도리어 두려워하게 됩니다.
      형들이 애굽 총리가 요셉이고 그래서 양식을 거저 준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일 가운데 은혜를 베푸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일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 상황 속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1장 / 하나님이 그 하실 일(25절)

      요셉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Then Joseph said to Pharaoh, "The dreams of Pharaoh are one and the same. God has revealed to Pharaoh what he is about to do.

      "하나님이 그 하실 일(What God will do)"이란 꿈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셉이 마침내 애급의 총리가 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애급 왕 바로가 꿈을 꾸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고 마침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1-13절).
      바로 앞에 불려 나온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바로에게 그 꿈이 온 땅에 닥칠 칠 년의 풍년과 칠 년의 흉년을 예고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14-36절).
      바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요셉을 총리로 임명합니다(37-45절).
      총리가 된 요셉은 현명한 방법으로 7년 대흉년으로부터 온 땅의 백성들을 구합니다(46-57절).

      대기근으로 부터 많은 백성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요셉을 바로 앞에 서게 하셨으며 가나안의 기근으로 파탄에 빠질 야곱 즉 장차이스라엘이 될 자들을 구하시려는 계획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바로의 꿈을 정확히 해석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흉년을 대비할 방법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바로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임을 깨닫고 그를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총리 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준 인장 반지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최종 결재권을 상징하는 반지라고 합니다.
      또한 바로가 요셉에게 입힌 세마포와 금 사슬은 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를 버금 수레에 태운 것은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명실 공히 애급 땅에서 바로 다음 가는 막대한 권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요셉의 이와 같은 영광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대표하는 것이며, 특히 고난과 죽음 뒤에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얻게 되며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얻게 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표합니다(히 2:8).

      형제들에 의해 애급으로 팔려갔던 요셉, 그리고 애급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총리로 부상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리스도의 화육, 자기 비하, 고난,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라는 과정의 한 예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은 만 이 년이 지난 후에 바로의 꿈으로 인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복직된 후에 곧 풀려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각대로 풀려난 것이 아니라 이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므로 술 맡은 관원장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년이란 시간은 요셉이 극적으로 애급의 총리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으며 가장 적합한 시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듣지 않거나 이루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때를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도 포함되는 것임을 요셉의 고난과 영광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가 마침내 구원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교훈합니다.


      1절에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지 만 2년이 지났다는 뜻입니다.

      이때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온 지 13년이나 지난 때로, 이제는 요셉도 자신이 꾸었던 꿈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만큼 시간도 지났고, 처지도 절망적이었습니다.
      30세가 된 요셉에게는 그 꿈이 성취될 수 있는 어떠한 여지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한낱, 노예의 신분에 감옥에 갇힌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요셉이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그 순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는 가장 적절한 시기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취됩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 흘러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앞에서 살펴본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백세가 되어 전혀 소망이 없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칭찬을 받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실은 사울왕에게 쫓겨 광야와 타국을 전전하다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을 것처럼 암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그는 유다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1-5).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어떠한 순간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당할 수 없는 극한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크고 놀라운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요 절차인 것입니다.

      .
      8절에 애굽 왕 바로가 마음이 번민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바로는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꾸었고, 그는 그것이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한 몽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심히 근심했습니다.

      여러분, 바로는 거대한 제국 애굽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애굽인들에게 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권력을 가진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짤막한 꿈 앞에서 심히 근심하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왕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도,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는 자라도, 아무리 탁월한 지혜를 소유한 자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4:26).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으로서 이전 세대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고전 2:9.10).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기에 힘써야 하는 자들임을 항상 기억하고, 요셉처럼 어떤 시험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믿음의 사명, 곧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15절에 바로는 일단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는 말로 요셉을 인정하며 높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요셉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만일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의나 능력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16절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지금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대행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요셉이 철저하게 '하나님 대행 사상'을 소유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님 대행 사상은 오늘 본문의 요셉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 대행 사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과의 싸움에서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자신은 지금 도구로만 쓰여지고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대행 사상입니다.

      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들의 한결된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예언의 말씀을 전하지만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자신들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그들에게 전하는 대행자로 서 있을 뿐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대행 사상은 하나님의 종들의 일치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내 지식으로, 내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적으로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고 있다는 의식을 철저하게 가져야만 합니다.

      사도베드로는 이것에 관해 베드로전서 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 대행 사상을 갖고 그렇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
      51, 52절에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중 장자의 이름은 므낫세이고 차자의 이름은 에브라임으로 모두 히브리식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45절에 바로로 부터 ‘사브넷바네아’ 라는 애굽식 이름을 얻고, 또 애굽 출신 아내를 얻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만큼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비록 우상 숭배의 중심부인 애굽 궁궐에서 생활하며 바로 다음의 높은 직위를 얻었을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런 점이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속적인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된 성도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이 바로 교만입니다.
      마치 그 모든 성공이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된 것처럼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성공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쉽게 패망하는 이유입니다.
      교만하여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이 없이는 더 이상 그 성공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시오 축복의 근원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해석(6623) 피트로운(pithrôwn) פִּתְרוֹן 

      1. 꿈의 해몽,  2. 해석, 3. 창세기 40:5
      발음 / 피트론[ pithrôwn ]
      어원 / 662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꿈의) 내용(창 40:5), 해석(창 40:8, 12, 18), (꿈의) 뜻(창 41:11)
      구약 성경 /  5회 사용

      * 6622. 파타르(pâthar)  פָּתַר 

      1. 미완료형 יִפְתֹּר  .2. 해석하다,  3. 설명하다
      발음 / 파타르[ pâthar ]
      관련 성경 / 해석하다(창 40:22, 41:12,15). [명] 해석(창 40:16)
      구약 성경 / 9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40장 / 해석은 하나님께(8절)

      요셉이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요셉을 위해 이제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길을 예비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0장은 꿈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된 요셉이 꿈을 통하여 애급 왕 바로에게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은 함께 갇힌 두 전직 관원장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1-4절).
      어느날 그들이 동시에 꿈을 꾸었으나 무슨 뜻인지 몰라 고민하는 그들을 위해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줍니다(5-19절).
      요셉의 해몽은 그대로 이루어졌고(20-23절), 훗날 요셉이 바로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의 시작과 끝이 시종 일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과 두 관원장들의 꿈과 요셉의 꿈 해석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란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역사하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실 목적으로 드러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의 종류에는 그 방법에 따라 자연 계시와 초자연 계시가 있고 내용에 따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합니다.

      인간의 구조와 자연 현상을 통해 전달되는 계시를 자연 계시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에 개입하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하시는 것을 초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꿈은 자연 계시에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꿈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계시하신 사례가 성경에 자주 소개됩니다.

      일반 계시는 자연 법칙, 인간 정신, 역사 등 일반적인 방편을 통해 계시하는 것이며,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로 불충족한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특별 계시는 구속사의 시작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중에 가장 정수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이해하는 유일한 표준은 오직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꿈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요셉은 본문에서 꿈을 계기로 애급 왕 바로에게 나아가는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전에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하였다가 애급으로 팔려 오는 신세가 되었던 요셉에게 다시 다른 이의 꿈 사건과 관련하여 전화위복의 전기를 맞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생각지 못한 상황과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간직하는 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성공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주저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어나서 주 예수를 영접하고 믿을 때 가졌던 마음과 계획을 지워버리지 말고 다시 드러내어 그것이 열매가 될 때까지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먼저 1-4절에 요셉이 옥에 있을 때, 애굽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두 관원장이 어떤 연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고, 친위대장의 명령으로 요셉이 그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하나 순서에 따라 계획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형들을 통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하셨고, 그중에서도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부도덕한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요셉을 옥에 갇히게 하셨고, 거기서 간수장의 신임을 얻어 옥을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이번에는 때를 맞춰, 애굽 왕을 가장 측근에서 섬기는 두 관원장을 옥에 보내시어 요셉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 왕인 바로 곁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 수많은 역경을 주시고, 그를 통해 연단시키시고, 그 자격이 되었을 때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과정과 순서를 통해 점차적으로 그를 사명에 합당한 자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때와 순서를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마음이 조급하여,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는 그것이 곧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하여, 심지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위해 이미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고 축복이 임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인내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참고 인내하며 스스로의 믿음을 키워 나갈 때,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은 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조급해하지 말고, 이미 응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믿고 기다리는 참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8절에 요셉과 함께 옥에 갇혀 있던 두 관원장이 근심한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꿈'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는데(욥7:14; 단 2:1-13), 어느 날 두 관원장은 이상한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들이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될지 모르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근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두 관원장의 근심에서 '모든 인간들이 겪고 있는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당이나 점술가 등에게 가서 점을 치기도 하고 우상을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관원장에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없었듯이, 세상 가운데에는 어디에도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관원장에게 꿈을 꾸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듯이, 사람의 내일을 결정하시는 분도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고 한 요셉의 고백과 같이 사람의 미래를 아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대상 29:12)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 또는 점술가나 우상, 철학자나 과학자에게 가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궁금함을 풀어주시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죽음 이후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인생의 발걸음을 바른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줄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얻지 못해 답답할 때나, 자신의 미래로 인해 근심이 될 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불안과 근심이 서서히 걷히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얻게 될 줄 저는 확신 합니다.
      .

      이어지는 9~19절에,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서슴없이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후에 전직이 회복되어 다시 바로 앞에 나가게 되고, 떡굽는 관원장은 사흘 후에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자세하게 꿈을 해석해 줍니다.
      물론 후에 요셉의 꿈 해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았습니다.(20-23절)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요셉이 어려서부터 남달리 지혜가 뛰어났다거나 학식이 높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또 꿈 해석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도대체 어디서 그러한 지혜를 얻어서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는 관원장들의 꿈을 그렇게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요?

      그 유일한 해답은,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암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또 잠 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관원장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요셉과 같은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면, 요셉과 같이 모든 고난을 슬기롭게 대비하여 이겨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슬픔과 불행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 알게 하시고 대비하게 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고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거나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바른 믿음으로 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를 허락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모든 일을 슬기롭고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해석할 자가 없도다
      - 당시 애굽에는 신탁(神託)임무와 꿈 해석 등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와 술객 등이 있었다(41:8).
      그러나 지금은 갇힌 몸이라 그들을 면회할 길이 없다는 두 관원장의 하소연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 일찍이 하나님이 주신 꿈(37:5-9)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한 초자연적 성격의 꿈이라는 것을 신앙의 내적 확신을 통해 분명히 믿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다신론자인 애굽인들에게도 꿈을 주관하는 어떤 신을 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 당시 애굽에서 꿈 해석은 고도의 학문적 기술을 요하는 난해한 분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일개 비천한 이방인 종의 입에서 이처럼 확신에 찬 질문이 나왔다는 사실은 화려한 경력과 학식을 가졌을 관원장들에게 분명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주체철학의 신학적 접근과 북한선교 이해'

      개회예배에서 '만물의 주 예수 그리스도' 제하의 말씀을 전한 최태협 목사는 "김일성 주체사상은 한마디로 철저한 인본주의"라며 "우리의 신앙을 바탕으로 세뇌되어 있는 북한 주민들의 주체사상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먼저 이 땅에 와 있는 탈북민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를 고민하며, 더 나아가 어떻게 북한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주체철학의 신학적 접근과 북한선교 이해 -몰트만 신학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한 이춘영 박사(장신대)는 "주체사상의 '주체'는 인간의 '주체'는 빼고, '수령'의 주체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운명 문제에 대한 해답을 수령의 사회정치적 생명의 부여를 통한 영생에 귀결시켰다"며 "주체철학의 주체성은 인민대중의 수뇌부인 수령의 유일무이한 통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압적 기능을 갖기에 그 안에 영속하는 생명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몰트만의 신학에 대해서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주체성은 그 속에 영생하는 생명력이 있다"며 "주체철학이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영속성을 넘어 무한한 영속 존재를 전제한 수령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무신론적 희망 안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면, 몰트만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유토피아를 향해 자신의 상황을 추월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종말론적 기독교의 희망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 시간에 '북한사회의 종교성과 선교'를 주제로 발표한 박광일 목사(아름다운꿈의교회)는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종교적 논리와 수령의 위대한 영도력, 인민적 풍모를 중심으로 한 우상화교육과 이를 실천하기 위해 충성하는 충성분자로 세뇌시키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역은 과거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자랑스러운 곳이며 지금도 그 이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남아 있을 것을 기대하며 평양의 대부흥운동을 회복시킬 사명을 위해 충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다음 단계'를 주제로 발표한 정형신 목사(뉴코리아교회)는 "국내 입국한 3만 탈북민 중 40%에 달하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며, 그중 2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목회자이거나 신학생이다.

      탈북민교회만도 80개 이상이 세워졌다"며 "그러나 1만 명 탈북 기독교인들 중 가나안 성도의 비율은 60% 이상이며, 탈북 사역자들의 50%가 현장을 떠났으며, 탈북민교회 중 25%가 없어졌다"고 탈북민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 밝혔다.

      정 목사는
      △탈북민교회 목회자 가정 살리기 운동
      △탈북민교회 및 목회자들을 선교의 범주에서 볼 것
      △탈북민교회 개척운동
      △탈북민교회와 한국교회의 동역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윤영 의원의 대표기도(일동 기립하여)

      - 제헌국회 의원 198명 참석 -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 꺼내 보임)하신 것으로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자료 출처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속기록



      시편 136편에 나타난 감사의 내용을 보면 감사 고백의 원리가 우리의 일반적인 감사고백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표현이 26번 반복된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창조 사건, 출애굽 사건, 광야 사건, 가나안 전쟁 사건 등을 나열하면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한다.
      감사 내용이 기적의 사건이나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관자요 섭리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조건적인 감사를 한다.
      예컨대,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을 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건과 결과에 대한 감사를 할 때가 많다.
      물론 이런 감사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감사고백은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감사, 사건과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고백하는 감사일 수 있다.

      그런데 시편 136편에 나타난 감사는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와 같이, 사건과 결과에 대한 감사가 아닌, 그 사건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감사이다.

      감사는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마이'이다.
      이 단어는 '말과 행동, 습관에 동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조건적으로만 고백하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진정한 감사는 사건과 결과와 상관없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고백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감사 기도할 때, 기도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로 감사기도 내용의 핵심이 하나님이 해주신 '그것'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시편 136편에는 "~을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로 표현되어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분명히 다르다.
      감사의 방향을 문제해결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방향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감사는 문제해결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방향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고난 중에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




      형통(6743) 차라흐(tsâlach) צָלַח 

      1. 돌진하다,  2. 침범하다, 3. 잘되어가다
      발음 / 차라쉬[ tsâlach ]
      관련 성경 / 임하다(삿 14:19, 15:14, 삼상 10:6), 건너다(삼하 19:17), 건너가다(삼하 19:18), 형통하다(대하 20:20, 렘 12:1, 겔 17:15, 대하20:20), 감동되다(삿 14:6, 삼상 11:6, 16:13), 힘있다(삼상 18:10), 성취하다(사 53:10), 쓸데없다(렘 13:10), 번성하다(겔 17:9,10), 평탄하다(창 24:21, 40), 행하다(단 11:36), 윤택하다(렘 5:28), 승리하다(렘 32:5), [명] 소용(겔 15: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요셉의 형통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여호와께서
      - 이후 애굽에서의 요셉의 성공은 족장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15:13-16; 26:4; 28:14)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언약의 신을 강조하는 여호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Quarry).

      형통한 자(이쉬 마츠리아흐)
      -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찰레아흐'의 사역형 분사가 합쳐져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셉과 함께 하는 어떤 신적 축복과 가호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케 했다.

      창세기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의 범사에
      - 문자적으로 '그가 하는 모든 일에'란 뜻.
      이는 요셉이 모든 일에 신실하였음과 그 위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따랐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는 어디서든, 또한 어떤 형편에 처하든 진실된 삶을 통해(골 3:22; 23; 딤전 6:1) 이방인의 빛과 소금이 되어 그들로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한다(마 5:13-16; 롬 14:18; 벧전 2:12).

      창세기 39:23
      전옥은 그의 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전옥은...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자가 사람의 신뢰와 인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께서...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 성도가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보호 역시 더 깊고 세밀한 곳까지 임하신다.
      따라서 성도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결국 선을 이룬다(롬 8:29).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가난을 묵상할 때,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형통함입니다.
      과연 어떤 것을 형통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신앙을 통해, 혹은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참 자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택하는 길은 합리화라는 방어기재를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다들 그렇지 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지적하면 불 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이럴 때는 꼬리를 내리고 자신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게', 만일 그런 분들이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오히려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부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은혜의 순간을 저버리고, 죄의 법을 계속해서 따르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생각하는 형통함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했음에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이 일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여정에 들어가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형통함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의 의미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어린 시절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당시로서는 문제라 여겼던 상황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쉬운 예로, 무서운 개가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그 개가 그다지 두렵지 않습니다.
      평소 자신을 못살게 굴던 아이가 있어도 아버지와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오히려 그 아이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 역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난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동행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주님과 동행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는 주님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극한 가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 대책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전심으로 그분을 붙잡고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형통함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통함

      그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성서의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또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다른 아들들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유복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정도로 천진무구한 아이였지만, 형들에게 그의 꿈 이야기는 그가 입고 있는 채색옷과 더불어 단순한 시샘을 넘어 살의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불공평한 처사였습니다. 결국 이방 사람들의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서를 읽는 이들은 그 당시 요셉이 받았을 충격과 실의를 간과하며 요셉의 이야기를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시기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정말 사심이 없었습니다. 형들을 무시하려는 의도 역시 없었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특혜를 의식할 정도로 성숙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형들을 사랑했고, 형들을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토록 믿고 사랑하던 형들은 요셉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에 상처 입고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승냥이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은 아픈 상처를 남기고,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분노는 때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요셉도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소년에게 노예의 삶은 녹녹치 않았을 것입니다. 폭력과 굶주림이 주조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족장의 아들이었던 그의 자존심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모멸감이야말로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함과 모멸감은 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힘든 일상을 타개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가 의지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신실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그를 배신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의 상태에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극한 가난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와 달리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하나님이라는 희망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희망을 붙잡은 그 순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

      어릴 적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이 탐관오리를 만나 위기에 처합니다. 옥에 갇히고 마침내 목숨이 날아갈 위험에 처합니다. 망나니가 칼을 내리치려는 바로 그 순간 "암행어사 출두요!"라는 외침과 함께 암행어사가 나타나 주인공을 구합니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암행어사 출두"라는 외침을 듣는 순간 함께 박수를 쳤습니다. 그 박수 소리가 새삼스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그리스도인들이 관객들처럼 박수를 쳐야 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형통함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순간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성서적인 형통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변함없이 인생의 높은 파고가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더 이상 인생의 높은 파고를 아랑곳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형통함과 신실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일(범사)이 형통해집니다.
      범사에 형통함은 곧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범사에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우리의 삶이 코람데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죄의 법에 사로잡힌 욕망의 존재인 인간에게 코람데오의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기사에서 괄목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사건입니다.
      보디발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아내 역시 당대 최고의 미녀였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를 유혹합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주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여인의 유혹을 이기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일은 아무리 초인적인 인간이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불가능한 일을 해냅니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불륜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인간의 편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신실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과제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극한 가난 속에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편에서 할 일은 신실한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적 형통함과 신실한 인간의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도 아니고, 어느 것이 나중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전과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오늘날 범죄한 목사들이 이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통함과 가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형통함이 가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성서적 형통함의 관문으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형통과 함께 갑니다.
      요셉의 기사에서 '형통'이라는 단어가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이후에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통이 사용되었을 때 요셉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때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요셉이 하나님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자가 된 요셉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습니다.
      범사를 능히 자기 손으로 담당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제아무리 훈련된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요셉의 기사를 읽어 내려가지만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혼인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야곱의 기사에서 야곱이 아내를 얻고자 먼 곳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까지 가야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해집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았던 에서의 선택이 잘못된 일임을 성서 기자는 감추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은 흉년과 기근이라는 자연재해를 이용해 많은 땅을 바로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권력자의 편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다 해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형통함이 가난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통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형통함으로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부자들은 형통함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견해입니다(딤전 6:9 참조).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찬송가의 가사처럼 만사형통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텐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하려 들고, 조금만 어려움에 부딪혀도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게 아닌가, 의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형통함을 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일관됩니다. 하지만 헛된 형통을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 형통함은 가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통함의 관문으로서, 그리고 형통함을 지속하는 방편으로서 가난은 그야말로 필수불가결합니다. 결론적으로 성서적 의미에서 가난과 관련 없이 이루어지는 형통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 없는 형통함을 구하는 마음이 바로 부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기꺼이 가난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통한 삶

      형통한 삶 우리는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무엇을 하든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원하는 바를 이루길 원합니다.
      ‘형통’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감’입니다. 만사형통은 만사 즉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는 것을 말하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성공이고 번영이며 소위 잘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세상 살다 보면 어떻게 만사가 자기 뜻대로 잘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바램일 뿐 그렇게 평생 살아가면서 매사 모든 일이 다 형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만사형통을 바랍니다. 그래서 온갖 종교를 만들고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신을 찾고 윗사람과 연결고리를 찾아 줄을 대려 하고 형통을 방해하는지 점을 보고 예언을 받고자 하며 대책을 간구합니다.
      하물며 교회에 나와서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소원을 빌며 기도하고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다릅니다. 요셉을 보면 ‘형통’이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기대하며 살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 가 종살이를 하는 요셉을 두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니 형통하다’ 라고 말합니다. 당시 요셉은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로 사랑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고…. 그런데 현실은 형들의 시기, 질투로 노예로 팔려 갑니다. 누가 이를 형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요셉은 자신이 팔려 간 집의 주인이자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자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려다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까지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성경은 ‘하나님이 감옥에 있는 요셉과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하다’ 고 합니다. 이처럼 요셉의 삶의 모든 이야기를 알 때 이해가 되지만 사건 하나하나 일어날 때마다 너무나 힘들고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사건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게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이 그분의 뜻에 순종되어지고 그분만을 끝까지 신뢰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형통
      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형통은 내 삶이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적 가치관도 기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것이 그 기준입니다.
      순간순간의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졸지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고 계시며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함께 하시는 순간순간들이 모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믿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삶이 어려울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충성하여 형통케 되어지는 우리 모든 교우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환경 따라 반응 않고 주님의 주권 인정하는 것이 형통한 삶


      우리는 형통을 좋아한다.
      보편적으로 형통함이란 모든 일이 뜻대로 잘돼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성경적인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함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성경에서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했지만, 그의 인생은 배신과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환경은 그러했지만, 요셉은 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환경에 따라 반응하지 않았고 환경이 그를 주장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다.

      환경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주님께 반응하는 삶,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따라가며 요동하지 않는 삶, 이것이 형통한 삶이며 주님의 신부가 되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과 같은 곳에 시선을 둔다.
      세상의 복과 형통의 개념을 그대로 신앙생활에 적용함으로써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세상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질타의 대상이 된다.
      세상에서의 복의 개념은 소유, 편안함, 높음 등 외적 능력에 있지만, 성경적 복은 ‘하나님과의 친밀의 정도’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세속적 관점을 가진 채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혼돈에 빠진다.

      소유의 개념에서 존재의 개념으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생활에서 여러 오해와 불신으로 성장과 성숙이 어렵다.
      미혹과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막 2:22)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인은 초막도 궁궐이나 천국이 된다.
      신앙인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환경을 초월한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자는 아직 어린 자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자가 돼야 한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야 한다.
      이것이 형통이다.

      신앙인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환경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다스림이란 누림을 말한다.
      어떠할 때라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한다.
      그래서 물 가운데 지날 때 물이 침몰치 못하고, 불 가운데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사르지 못함을 고백하게 된다(사 43:2). 가난하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고 부하다 해서 교만하지 않으며 질병 중에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산다.
      심지어 사람을 환경, 즉 소유로 판단한다.
      외적으로 초라해도 주님 모시고 사는 자는 천국이 그의 마음에 있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도 주님 없는 사람은 지옥이다.
      형통한 자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다.

      주님과 함께하는 형통한 삶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바꿔야 하는 것은 가치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의 나라에 합당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천국의 가치관은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생명과 사랑이다.

      신앙인은 살아가는 법이 다르고 목적이 달라야 한다.
      신앙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그 이상의 것이다.
      유한한 이 땅 삶의 어떠함에 목적을 두지 않고 더 높은 영원을 향해 가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되고서도 여전히 이 땅의 가치관을 따라 살며 예전의 것(명예, 물질, 권력, 편함)을 구함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고서도 오이와 참외, 부추, 파, 마늘, 고기 등 먹은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형통함을 누리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은 ‘감사’다.
      주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알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함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의 가치관이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항상 최상의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신이 기쁘고 좋은 일에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불편해한다.
      감사는 만족스러운 조건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존재의 정결, 즉 형상 회복에 있다. 하지만 물질계에 사는 우리는 존재보다 소유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해 오해가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 맡기고 의지함으로써 시작된다.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최상의 가치로 여겨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존재함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 가치를 두고 존재함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신앙인의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내면이 주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것이 내면의 회복, 즉 형상 회복이다.

      성도는 이를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신앙인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흔들려선 안 된다. 존재함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


      형통은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사람에게 기적적인 은혜 없이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일반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일깨워주신 은혜가 바로 그 은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신 삶이 풍족하고 건강하고 평안한 삶이 아니라 불치의 병을 안고 사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없었으면 좋은 불치의 병을 주님께서 족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 개인의 체험만이 아니고 진정한 참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 백성의 체험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된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50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창 38장에 유다의 이야기가 끼어 있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생애를 다루다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로 흐름을 바꿉니다. 성경이 구속의 역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렇게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마치 요셉을 약속의 계승자로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약속의 계승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아닙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조상은 아닙니다. 요셉과 유다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일생을 산 인물이고, 유다는 창 38장에 의하면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에게서는 많은 교훈을 받지만 유다에게는 별로 교훈을 받지 못합니다. 이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적인 일생을 살았고, 유다는 제멋대로 살았는데도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메시지를 줍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과 애굽과 세계 많은 사람을 구하였는데, 유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꿈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는 태마의 주인공으로 요셉을 제시합니다. 요셉이 꾼 꿈을 그의 비전으로 취급하며 긍정적인 꿈을 가지고 위대한 미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꿈을 품고 그 꿈이 성취되도록 노력할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긍정적인 꿈을 꾼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한 것은 그의 형들이 요셉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한 말입니다.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 적도 없고 비전을 가슴에 품은 적도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메시지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메시지도 역시 임마누엘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려 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로 그렇게 되면 복이 되지만, 자기에게 화가 되고 저주가 될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어떤 여자는 매우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미워서 팔아버렸는데 그 요셉이 자기들의 생명을 구원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은혜의 차원에서 보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으므로 그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형들을 용서한 요셉의 관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보존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 보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보존하시고 그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꺾어보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고 오히려 결국 인간의 고집과 뜻이 꺾이고 맙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장차 이 세상에 모든 성경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장담하였지만 그가 죽고 난 다음 그의 집이 성경을 출판하는 성서공회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생각할 때 결과를 보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에 의해서 팔렸고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형통은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신분으로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형통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폭력범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성경은 요셉이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했다고 합니다. 노예의 신분이나 죄수의 신분으로 지내면서 형통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요셉의 형통을 이야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면에서 요셉의 형통을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일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요셉의 역할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딜발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도 하나님을 드러냈고, 간수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도 그리고 애굽의 모든 술객과 바로의 신하들과 보좌관들에게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를 팔았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왔을 때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요셉이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드러냈으니 요셉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를 거꾸로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요셉이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드러내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의 행동에서 요셉의 위대함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사건에서 그의 주위에 등장하는 가족에서부터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나 간수나 두 장관이나 바로나 그의 신하들은 요셉의 뛰어난 점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형통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39장 / 형통한 자(2절)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형통(674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and he lived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창세기 39장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요셉의 삶의 특징을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형통한 자(a prosperous man)'란 요셉이 형통하기를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도록 이끄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고 기도하여 형통한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형통은 내가 노력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형통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차라흐(tsâlach. צָלַח)"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잘 되어가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는 일마다 자연스럽게 잘 되거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그 결과 감옥에서 풀려나와 애급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극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범사에 승리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도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열일곱의 나이에 형제들에 의해서 낯선 머나먼 타국 땅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종의 신분은 열일곱이란 나이에 그것도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라난 요셉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감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형제들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형편에 놓여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를 봐도 요셉이 절망하고 삶을 포기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집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보통 사람들과 달리 절망적인 순간에도 체념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요셉의 자세야말로 나중에 애굽의 총리라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질병, 실패, 무기력 때문일까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야말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 사라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도 능히 극복하고 마침내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 모든 어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영광의 날을 맞이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절망을 극복하고 마침내는 형통한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요셉이 믿고 의지했던 그 하나님은 또한 지금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요셉과 같이 모든 고난과 역경도 능히 극복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의지하여 내게 닥쳐온 모든 역경과 고난과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이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극복하는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3절에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보디발이 요셉으로 인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 돌렸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진실되고 성실하게 살아야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진실되고 성실하게 살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멸시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도, 또한 가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매사에 진실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7절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보디발의 처의 유혹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욕정에 사로잡힌 부도덕한 여인의 성적 유혹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요셉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역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셉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입니다.
      그 시점은 요셉이 형통할 때였습니다.

      당시 요셉은 더 이상 노예의 신분이라고 볼 수 없는 자리에 올라 있었습니다.
      애굽 최고의 권력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친위대장의 집에서, 9절에 나타난 것 같이 요셉이 가장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탄은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요셉을 유혹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유혹은 주로 성도가 형통할 때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형통할 때 신앙의 경계를 소홀하기 쉬우므로 유혹하기도 그만큼 쉽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시기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며 형통한 삶을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 다윗이 간계로 자신의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처로 삼았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유다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고 그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성도가 주로 형통할 때 찾아와 성도를 유혹하여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형통하게 될 때 자고해서는 안 되며 더욱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사탄의 유혹이 찾아와 신앙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앗아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도는 그 모든 유혹을 이기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확고한 믿음과 깨끗한 양심을 항상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7절과 10절, 그리고 12절을 보면 요셉에 대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이 얼마나 집요하고도 끈질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은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 고 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유혹은 자신의 욕구를 관철시키려고 강도도 갈수록 점점 더 강력해 졌습니다.

      7절에 그녀는 처음에는 눈짓을 하다가 12절에 요셉의 옷을 잡고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도에 대한 사단의 유혹도 이렇듯 집요하고 끈질깁니다.
      성도가 아무리 단호하게 그 유혹을 뿌리쳐도 사탄은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한 유혹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한두 번 뿌리쳤다고 해서 결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넘어뜨려 멸망으로 인도하기까지 10번 아니라 100번이라도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성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유혹이 계속되다보면 아무리 신실한 자라 할지라도 그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사탄의 유혹에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서로 힘을 모아 주 안에서 교제하며 의지하며 이 모든 유혹들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도 합니다.
      어찌하든지 합력하여 믿음을 지키고 선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계대결혼(繼代結婚) / 이스라엘의 계대결혼법(Lex Leviratus)

      정의(定義)

      신명기 25:5-10에는 형제 중한 사람이 무자한 후 죽은 경우,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그 가문의 대를 잇게 해 주는 규례가 나온다.
      이를 가리켜 소위 계대결혼(繼代結婚, Levirate Marriage)이라 하는데 ‘리비르’(Levir, '남편의 형제‘)란 말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이를 우리는 ’수혼‘(嫂婚 ) 형사취수제도(兄死取嫂制度)라고도 일컫는다.

      역사적 배경(歷史的 背景)

      계대결혼 풍습은 고대 앗수르와 힛타이트 그리고 가나안족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성경에는 유다와 다말 기사에서 최초로 언급되어 있는데(창 38:1-11) 그것이 가나안 족속들의 영향을 받았는것인지에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계대결혼이 성문화 된것은 모세의 율법에서이다.
      이후 이러한 울법을 좇아 계대 결혼이 행해진 대표적인 경우로는 롯과 보아스의 결혼을 둘 수 있다(룻 4:1-17)

      목적(目的)

      계대 결혼의 근본 복적은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아 줌으로서 죽은 자의 이름이 끊기지 않고 또한 기업을 보전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으니 곧 남편과 사별한 후 의지 할 곳 없는 미망인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뿐아니라 이는 이스라엘 여인이 이스라엘 가운데 안주하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이방 남자를 만나 몸을 의탁하게 되는 불행도 방지해 주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보존하고 타락한 이방 문화에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족외혼(族外婚)을 금지하였는데 (창24:1-9, 출 34:16, 신 7: 3-4) 계대결혼 제도는 이에 일조하였던 것이다.
      어떻든 계대결혼의 근본 목적은 모든 사회생활이 혈연공동체 단위로 유지되던 고대에 형제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혈통과 가문을 보호해 주려는데 있었다.

      시대적 변천(時代的 變遷)

      계대결혼제도는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 형태가 되었다.
      먼저 유다와 다말 기사에서는 무조건 시행해야 하는 의무 조항처럼 표현되어 있으나(창 38:8) 신명기 율법에서는 본인이 원치 아니할 경우 거부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때 두 사람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성읍 장로들의 인준을 받아야 했으며, 형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한 모욕도 함께 당하였다(신 25:7-10).

      이를 가리켜 소위 ‘할리차(Halitzah)의식’이라 했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형제의 가문과 기업을 보전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 보아스와 룻의 경우에서 우리는 계대결혼 범위가 죽은 자의 형제뿐만이 아니라 그 친족에게까지도 확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룻 2:20, 3:12, 13: 1-12).

      이상에서 보듯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띄기는 하지만 계대결혼의 근간은 형제 사랑과 공동체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체 계대결혼을 부도덕한 제도로 공박하거나 이로 인해 여호와의 거룩성을 부인하려 드는 자들에게 진정한 이해의 길을 제시해 준다.

      영적 의의(靈的 意義)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계대결혼제도를 허용하신 데에는 일찍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이 관련되어 있다.
      즉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창 13:16) ‘ 라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중에는 후사가 없이 대(代)가 끊어지는 가문이 생긴다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과는 상치되는 일이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계대결혼을 통해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게 하신 것이다.

      한편 유다와 다말, 룻과 보아스의 계대결혼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어진 다윗의 혈통에서 훗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놀라운 여호와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마 1:1-16).
      이처럼 그 옛날 계대 결혼을 통하여 명맥이 유지되는 혈통에서 전 인류의 구속자이신 예수님이 나신 것으로 영적으로 죄로 인해 마땅히 끊어져야 할 전 인류의 생명의 계승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영원히 계승 될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이혼 못 한 진짜 이유

      고대사회에는 형사취수(兄死娶嫂)의 풍습이 실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고구려를 비롯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동,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형사취수의 관습이 있었다. 

      고대 유대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형제의 아내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레위기 18:16).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형사취수가 허용된다.

      신명기 25:5-6
      형제 가운데 누군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형제의 아내는 시집을 떠나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그 여성이 재혼관계에서 얻은 큰아들은, 이미 죽은 형제의 아들로 삼아야 한다. 이로써 죽은 형제의 혈통이 대대로 보존되게 할 일이다.

      알고 보면 히브리 사회에서 형사취수의 전통은 뿌리가 매우 깊다.
      창세기 38:8절에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은 형의 혈맥을 이어주기 위해 미망인이 된 형수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형사취수 제도의 경제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큰아이는 사망한 혈통상의 아버지가 가졌던 세습 권리를 물려받았다.
      정확히 말해, 망자(亡子)가 큰아들이었을 경우에 그 아이의 상속분은 망자가 받을 몫의 두 배로 오히려 확대된다.
      이로써 망자의 가문이 별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망자의 부인 역시 시동생과 재혼함으로써 여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형사취수 제도가 강제 결혼은 아니었다.
      형수든 시동생이든 어느 한쪽이 그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 ‘할리차(halitzah)’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형수에 대한 부양 의무를 포기할 수 있다.

      일종의 ‘사회보장’ 제도

      유대 사회도 그렇지만, 형사취수 제도는 족내혼의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성행했다.
      그런데 유대 사회와는 달리 대개의 경우 망자의 부인이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서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누구든 망자의 부인의 점지를 받으면 반드시 그녀와 결혼해야 했다. 

      이 점에서 2세기말, 고구려 왕실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주목된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당장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잡음이 크게 일어났다.
      ‘삼국사기’는 그 책임을 왕비 우씨에게 전가한다.
      우씨는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긴 채 야밤에 시동생 발기와 연우의 처소를 차례로 방문했다.
      자신의 재혼 상대자를 스스로 물색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씨의 이러한 처사를 맹비난한다.
      발기의 입을 빌려, 우씨는 남녀 간의 예절도 모르고, 왕위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이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발기는 우씨의 결혼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왕좌를 놓치고 만다. 

      우씨의 처사를 유교적 도덕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우씨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그녀의 심야 방문은 왕비족 전체의 정치적 명운이 달린, 그야말로 막중한 협상이다.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 연우(산상왕· 재위 197~227)는 옥좌에 오르면서 우씨를 왕비로 선택했다.
      말 그대로 형사취수한 것이다. 

      권력 싸움에 진 발기는 형수의 패륜을 탓하며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한다.
      그는 적국 한나라로 망명해 재기를 노리지만, 그것 역시 실패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씨앗이 우씨라는 여성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그것은 당사자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한·중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경제 주체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일찍 사망했고, 설상가상으로 단 한 명의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면, 여간 큰 타격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형사취수 제도는 망자의 부인을 위한 든든한 사회보장제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형사취수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은 망자의 가계를 계승했다.
      그는 망자의 상속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생부(生父)의 재산에 대해서는 상속권이 없었다.
      예외는 있다.
      만약 생부가 별도의 재산을 그 아들에게 주기를 원할 경우 사회가 이를 허가했다. 

      형사취수 제도는 일차적으로 혈손이 끊어진 형제의 가문을 지속시키려는 사회적 장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뜻밖에 경제적 위기로 내몰린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면, 여성의 결혼지참금에 관한 사회적 합의이기도 하다.
      신부가 결혼 당시 가져온 지참금이 끝까지 신랑 집안의 재산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혼은 쉽지 않았다.
      이혼은 공공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부 중 일방이 ‘순결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점이 명백할 때만 이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늘이 맺은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
      이런 기독교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이혼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 요인은 신부가 결혼식 때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이었다.
      누구도 그 재산을 선뜻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헨리 8세가 이혼하려던 까닭

      영국 헨리 8세(재위 1509∼1547)의 말썽 많았던 이혼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의 왕비 캐서린은 본래 헨리 8세의 형 아서 왕자의 아내였다.
      그런데 아서가 결혼한 지 20주 만에 병으로 죽었다.
      부왕 헨리 7세(재위 1485~1509)캐서린이 모국 스페인에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황금 20만 두카트를 반환하기 싫었다.
      황금에 눈먼 부왕 때문에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합은 교회법상 근친상간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들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왕비 캐서린의 소생은 메리 공주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캐서린은 나이가 들어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헨리 8세와 측근들의 고뇌가 깊어졌다.
      만일 메리 공주를 유럽의 다른 왕가에 시집보내면 장차 영국의 왕위 계승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헨리 8세가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영국은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가 필요했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서둘렀으나,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첫째, 전임 교황이 예외적으로 그들의 혼인을 허락했는데, 이를 번복하자니 교황청의 체통이 손상된다.
      둘째, 캐서린의 친정 조카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다.
      그가 이혼에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정치적으로 부담을 느꼈다. 

      애당초 헨리 8세는 교황파로 분류됐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자 이에 강력히 반발한 이가 헨리 8세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헨리 8세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 ‘신앙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이혼 문제로 사정이 달라졌다.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원하는 일부 성직자 및 귀족들의 지지에 기대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선포했다. 이에 일부 귀족들이 반발했다. 대법관으로서 신교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 주교가 대표적이었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작가다. 성난 헨리 8세는 모어 등을 처형했다. 크게 실망한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헨리 8세를 파문했다. 

      영국 왕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가톨릭 수도원을 해산했다. 국토의 6분의 1을 차지했던 수도원의 토지가 한순간에 교황의 통제를 벗어나 국왕에게 귀속됐다. 교황청과 왕권의 대립은 극한에 도달했다. 

      사실 헨리 8세의 종교적 성향은 무난했다. 그는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유사했다. 교리상으로는 교황청과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청과 대립하다 ‘영국국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앤 불린(재위 1533~1536)과 재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헨리 8세는 전후 6명의 왕비를 맞이해 둘은 참수하고 둘은 추방하는 등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왕자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열 명의 왕자보다 믿음직한 한 명의 공주가 있었다.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다. 그녀가 통치한 45년 동안 영국은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여성의 ‘이혼권’ 보장한 이슬람

      헨리 8세 때부터 세력이 점차 커진 청교도는 이혼을 용인했다.
      청교도 가문 출신으로 17세기 영국 문단을 빛낸 존 밀턴도 이혼을 인간의 당연한 권리로 보았다.
      그는 배우자 간의 성격, 기질의 차이도 이혼 사유로 간주했다. 

      1670년 영국 의회는 존 매너즈 경과 앤 피에르퐁 부인의 이혼을 인정했다.
      1752년 프러시아(독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결혼을 사적인 계약이라 못 박았고, 이혼을 허락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프랑스에서도 대혁명 이후에는 이혼이 합법화됐다.
      1809년, 나폴레옹 황제(재위 1804~1815)는 황후 조세핀과 이혼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이혼소송비가 200파운드였다.
      평범한 시민들로서는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이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여성들은 법적, 경제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법률은 배우자의 간음, 유기 행위, 또는 잔인함을 이유로 이혼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로서는 법의 혜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슬람문화는 달랐다. 그들은 중세부터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를 인정했다. 여성도 얼마든지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코란’이 보장하는 떳떳한 권한이었다. 여성은 이혼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배우자인 남성이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오지 않거나, 성적으로 나태할 경우에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성적 나태한 경우’란 부부 사이에 4개월 이상 성관계가 없을 때를 말한다. 이 밖에도 남편이 아내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거나 남편이 다른 여성과 결혼을 원하는 것이 분명할 때도 아내는 이혼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성법’(샤리아)은 이혼의 범주를 다양하게 정의했다. 의절을 비롯해 협의 이혼, 재판상이혼, 또는 서약으로 세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혼이 법률적 효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3개월의 숙려 기간을 설정하기도 했다. 이슬람 문화에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점들이 있다.

      지참금을 지켜라

      생각해보면 영국 왕실은 스페인 공주 캐서린이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탐냈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그녀를 헨리 8세와 결혼시킨 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부의 지참금은 여성의 이혼 및 재혼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치였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다양한 형태의 지참금을 지급했다.
      지참금은 토지, 보석, 현금, 의복, 바느질 도구, 생활용품 등 매우 다양했다.
      지참금은 딸에게 주는 일종의 상속이었다.
      지참금을 지급하고 남은 재산은 아들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거나, 그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게 했다. 

      중국 여성들은 지참금으로 가져온 재물을 처분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시집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매각해 집안을 도왔다.
      가져온 지참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높았다.
      조선 시대에도 이와 같은 풍속이 있었다. 

      사정은 유럽도 비슷했다.
      각국의 왕실과 명문 귀족들은 딸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줬다.
      1661년 포르투갈 왕실은 캐서린 공주를 영국의 찰스2세(1660~1685)에게 시집보내면서 지참금으로 인도와 모로코의 2개 도시를 주었다.
      수녀원에 딸을 들여보낼 때도 지참금을 들려 보냈다.
      또 집안을 계승할 아들이 없으면 사위에게 집안의 토지를 몽땅 물려주면서 대신에 처가의 성(姓)을 쓰도록 요구했다. 

      시집갈 딸에게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약혼이 취소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슬픈 리어왕’에도 당시의 그런 풍습이 반영돼 있다.
      극중 리어 왕이 막내딸 코딜리어에게 의절을 선언하자 공주에게 청혼했던 버건디 공작은 지참금 없는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노라고 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은 지참금이란 딸에게 미리 재산을 상속하는 것쯤으로 이해했다.
      미처 지참금을 받지 못한 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아버지가 사망하면 영지를 상속할 수 있었다.
      만약 결혼한 부부가 자손을 낳지 못했을 경우, 아내의 지참금은 그들의 사후에 친정에 귀속됐다.
      이 점은 조선 시대의 풍습과 일치한다. 

      흥미롭게도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유명한 니콜라스 성인은 본래 양말에 황금을 넣어줌으로써 가난한 여성이 결혼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니콜라스는 터키가 아직은 기독교 사회였을 당시 자선 행위로 이름난 가톨릭교회의 주교다.

      산업혁명이 풀어준 ‘족쇄’

      일찍이 맹자는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有恒産 有恒心)’고 말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꿋꿋한 지조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과연 물질적 안정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생산성이 낮은 사회일수록 재산 상속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이 꾸준히 개선되고 소득이 대폭 증가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로 인해 인권의식이 강화돼 우리는 과거의 족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되었으니 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38장 / 여호와 목전(7절)

      유다의 장자 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But Er, Judah's firstborn, was wicked in the LORD's sight; so the LORD put him to death.


      유다(Judah) 역대상 4:1-43

      유다 + 본처(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 엘, 오난, 셀라
      유다 + 다말(유다의며느리) = 베레스, 세라

      유다 ⇨ 베레스(유다가 며느리 다말 사이에 난 아들) ⇨ 헤스론(헤스론가족의 시조) ⇨ 람⇨ 암미나답(아미나답 : 모세의형 아론의 장인,딸 엘리세바) ⇨ 나손 ⇨ 살몬 ⇨ 보아스(아내 룻) ⇨ 오벳 ⇨ 이새 ⇨ 다윗 ... ⇰  예수 그리스도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자식이며 유다 지파의 시조이다(창 29:35).
      아내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엘, 오난, 셀라 등 세 아들을 낳았다(창 38:1-5).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창 38장).
      그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마 1:1-16. 눅 3:23-33).
      그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들의 제안을 바꿔 상인들에게 팔도록 설득한 사람이며(창 37:26-27), 애굽에 곡식을 사러갈 때도 아버지 이스라엘을 설득하여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갈 수 있었고(창 43:1-10) 또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 후에도 형들을 대변하는 대변자 역할을 했다(창 44:18-34).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야곱으로부터 들었는데(창 49:8-12) 그것은 마침내 성취되었다(마 1:2; 눅 3:33; 히 8:7-13; 계 5:5; 22:16).

       

      다말(Tamar)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이다(창 38:6). 엘이 죽은 후 계대결혼 풍습을 따라 시동생이던

      오난의 아내가 되었다(창 38:8). 하지만 오난은 형수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땅에 설정했고 결국 이를 악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창 38:9-10). 그 후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자신을 그에게 아내로

      주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가장하여 유다에게 나아갔다(창 38:14-18). 그리고 유다를

      통해서 결국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의 어머니가 되었다(창 38:29-30). 그녀의 이름은

      유다 지파의 계보와 그리스도의 족보 중에 실려 있다(룻 4:12; 대상 2:4; 마 1:3).

       

      * 엘(Er) :  엘은 유다의 맏아들로 다말과 결혼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악함을 보시고 그를 죽이셨다(창 38:7).

      * 오난(Onan) : 유다의 둘째아들. 그의 맏형인 엘(Er)이 죽자 오난은 당시의 관습과 아버지의 뜻에 의해 형의 아내인 다말과 동침하였다(창 38:7-8). 죽은 남자의 형제가 미망인을 수태시켜서 후손을 잇게 하고, 태어난 아이에게 그의 형제의 이름(그의 유산의 몫)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으며, 이 제도는 후에 모세로 말미암아 성문화되었다(신 25:5-10; 참고, 룻 4장).

      (오난의 죄)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그가 자기 아들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창 38:9, 표준새번역).
      이와 같은 오난의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는 아마도 자신이 장차 받게 될 유산의 몫이 줄어들 것에 대한 염려와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오난을 하나님께서는 죽이셨다(창 38:8-10).

      * 셀라(Shelah) : 셀라는 유다가 가나안 여인 수아에게서 낳은 셋째 아들이다(창 38:5-26).                          
      이로부터 셀라 가족이 나왔다(민 26:20).

      * 베레스(Perez) : 베레스는 유다(시아버지)와 다말(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중  하나이다(창 38:29).
      베레스의 계보에서 다윗 왕이 나왔고 메시아가 나왔다(마 1:3 ; 눅 3:33).
      룻과 보아스는 장로들과 백성들로부터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의 말을 들었다       (룻 4:12).

      * 세라(Zerah) : 세라는 다말이 유다에게 낳은 쌍둥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창 38:30; 46:12; 대상 2:4).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인 베레스의 형제이다(마 1:3).
      유다 지파 ‘세라 가족’은 그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고(민 26:20; 수 7:17; 대상 27:11, 13)                          
      여리고 성의 정복 과정에서 범죄하여 돌에 맞아 죽은 아간도 세라 족속이었다(수 7:16-26).

      유다 가문의 부끄러운 이야기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어울리지 않게 잘못 편집된 듯하게 끼어져 있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혈통을 잇는 계보를 보여 주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도덕적 타락상에 물들어 가는 모습을 통해 애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당시 유다는 헤브론에 살고 있는 형제들과 따로 떨어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둘람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통해 여기서 유다의 집안에 닥친 불행의 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자기 부모형제에게서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경건했던 아버지 야곱과 비록 요셉을 팔아버릴 정도로 완악했지만 그래도 지극히 부패하고 타락했던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과 함께 있었다면 신앙적으로 그렇게 나태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와 형제들이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다면 그에게 불행이 닥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같은 신앙을 가진 부모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나태해져도, 그가 잘못된 결혼을 해도, 잘못을 일깨우고 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 결과 불행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유다의 모습을 통해, 성도는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거할 때에 죄의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른 믿음을 지닐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아 의롭게 된 성도들이 다시 죄악된 삶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의지함으로써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중심으로 자주 모여야 합니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배우며 찬송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다못해, 같이 모여 차 한 잔을 마시며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까지도 성도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성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독불 장군이 없듯이 신앙에도 독불 장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임을 소중하게 여기고,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7절에 유다 집안에 찾아온 첫 번째 불행은 장자였던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자녀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엘이 어떤 악을 행했는지 자세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0절에 비추어 볼 때 성적인 범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사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15절 이하에서 엘의 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녀와 동침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유다는 평소에도 창녀와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유다와 장자인 엘의 성적인 타락,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유다의 성적인 범죄가 그것을 보고 자란 장자 엘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줍니다.

      교육학에서 '어린이의 최초의 학교는 가정이며 최초의 교사는 부모'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녀는 그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보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삶의 교과서는 부모의  '말과 행동' 그 자체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중에는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리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 어릴 때 어머니가 맞는 것을 보며 자란 사람은 커서 아내를 때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배우며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자의 가정에서 범죄자가 많이 나오고, 선한 자의 가정에서 선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녀를 바른 신앙의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부모가 주일에 교회 빠지고 놀러 가고, 거짓말과 음란한 행동을 하는데 자녀가 제대로 자랄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매일 말씀과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고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는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녀들은 저절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신앙적인 나태함이 찾아올 때나,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자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장차 자신의 자녀들이 그대로 답습할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서서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녀들의 좋은 신앙적 스승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절에 엘이 죽자 그의 동생 오난이 그의 형수인 다말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는 고대에는 형이 자식이 없는 상태로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이름으로 상속시키는, 공인된 관습으로 계대법, 또는 수혼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에는 말도 안 되는 법으로 보여 지지만 이 법은 모세 때 율법으로 성문화되었습니다.
      신명기 25:5-6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러한 법이 생겨난 가장 큰 이유는 유산의 상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유산이 며느리가 다른 사람과 재혼함으로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그의 형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형수인 다말과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형수인 다말과 결혼한 오난은 자신을 통해 낳게 될 자녀가 엘의 기업을 받을 것임을 알고 이기적인 마음에 계대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한 오난 또한 죽음으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11절에서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에 가서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말은 변명과 구실에 불과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과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통하여 그의 마지막 아들인 셀라도 죽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어찌할 수 없이 유다의 말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말은 시어머니가 죽고, 또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자기를 셀라의 아내로 주지 않자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였습니다.

      다말이 이렇게 한 이유는 성인이 된 셀라를 유다가 자신의 남편으로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궁여지책으로 유다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을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이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찌되었던 다말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는 그녀를 창녀로 알고 그와 동침하고 맙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속인 다말은 자신과 동침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동침한 대가로 나중에 염소 새끼를 주기로 하고 그 담보물로 도장과 그것에 달린 끈과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뒷날 대가를 지불하고 담보물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친구를 통해 담보물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임신에 성공한 것을 안 다말이 잠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담보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석 달쯤 후에 다말이 음행으로 인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는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끌려 나온 다말을 통해 그녀와 동침한 남자가 다름 아닌 유다 자신임을 알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를 통해 다말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부끄러운 역사인 동시에 메시야의 족보로서 중대한 뜻을 지닙니다.

      우리는 간혹 성경을 통해서도 충격적인 내용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세기 38장입니다.

      그것도 메시야의 조상인 유다에게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열망은 정당한가?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5명의 여자중에 하나이다.
      그녀는 야곱의 12아들중 네째 아들인 유다의 큰 며느리이다.
      유다에게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엘과 오난과 셀라이다. ​

      ​다말은 엘의 아내로 유다가문에 시집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 보면 다말의 출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말(תָּמָר 타마르 to be erect  )이란 이름의 뜻은 종려나무(palm-tree) 라는 뜻이며 "똑바로 선" 이란 뜻도 있다.
      다말은 레위의 딸이라는 설이 있고 또한 가나안여자라는 설이 있는데 가나안 여자라는 설이 맞을 것이다.

      다말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여자중에 하나이다.
      다말은 가나안 여자이며 라합은 여리고성의 여자이고 룻은 모압여자이며 우리야의 아내와 마리아이다.

      그런데 다말에 대해 이야기하기전에 먼저 유다를 살펴봐야하겠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속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유다의 결혼이었다.
      유다는 수아라고 하는 가나안 이방여자를 취하여 애를 낳았다.
      이것은 정식결혼이 아니라 정욕적인 불장난으로 이방여자와 놀다가 그만 임신을 하게 되자 그냥 살림을 차린 격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아둘람에 가나안 이방사람 히라라는 친구에게 놀러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동침하여 아이를 배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유다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그 여자를 버리지 않고 아내로 삼고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유다는 자신의 결혼을 아버지 야곱과 의논하지 않고 그만 이방친구와의 불장난으로 결정해버린 것이다.
      불신앙적인 결혼은 가정의 고통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근본도 없는 무질서한 가정에 다말이 시집을 오게 된 것이었다.

      ​유다의 장자의 이름은 엘( עֵר )이다.
      그 이름의 뜻은 awake, watchful이다.
      하나님을 뜻하는 el(  אֱלֹ)이 아니라 er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큰 아들 엘을 통해 유다에게 이방의 풍습에 빠지지 말고 정신차리고 깨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유다의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오시게 할 작정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도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이방 가나안의 죄된 풍습에 젖어 방탕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죄악을 아들이 닮는다.
      엘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죽이셔야만 할 정도록 엘은 부도덕하고 악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했다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세상에서 악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자가 세상의 온갖 악을 행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체험한 자가 세상의 죄악을 행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런데 엘의 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요나단의 탈굼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엘은 그의 아내의 아름다움이 혹시 아기를 낳으면서 해쳐질까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라비아 문서에 보면 엘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부적절한 관계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 남색을 즐겼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색은 그저 어긋난 성적방탕을 너머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의 번성을 막아서는 사단의 악행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엘이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보다 더한 죄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이셨다.

      ​​고린도교회에서 음행하는 자들에 있는데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넘겨줘서 육신은 멸하고 영혼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얻게하실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즉시 육신을 멸하신다.
      대신 그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다말은 유다가문에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다.
      그 당시 풍습에 따라 계대결혼을 했다.
      즉 엘의 동생 오난이 자기 형수인 다말에게 장가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난은 자기 자손을 위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형의 씨를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불만이 되어서 그만  땅에다가 설정을 하게 된다.

      ​​오난(  אוֹנָן Onan)이라는 이름의 뜻은 strong onan 이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오난은 매우 정력적인 남자였던 것같다.
      그래서 충분히 형을 위해 자손을 잇게 해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고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려고  땅에 정자를 쏟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후에 그의 이름인 오난을 따서 오나니즘( onanism 자위) 즉 자위라는 단어가 생겼다.
      오난은 형 에르와 반대로 매우 남성적이며 진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약한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씨받이의 역할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억울해 했던 것같다.
      자신의 여자를 갖고 싶었고 자신의 가문을 세우고 깊었던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 당시 믿음의 계보를 세워나간다는 의미에서 볼 때 오난은 하늘의 장자권보다 세상의 가문을 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앞선 것이다.

      ​​야곱은 하늘의 장자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유랑길을 떠났는데 오난은 자신에게 찾아 온 장자축복을 세상의 가문을 세우는 것보다 못하게 여긴 것이다.

      ​오난은 에서와 같이 여호와의 장자권을 발로 차버린 망령된 자였던 것이다.
      이것은 가문의 자손을 이어주어야 하는 신성한 의무에 대한 반역이었다.
      ​더구나 하나님은 유다의 가문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시지 않았는가?
      오난은 자신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열지 않고 막아버린 사단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다. 
      결국 오난의 이기적이고 무모한 행동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대적하는 죄악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소유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지금은 부적합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는 풍습이었고 하나님의 자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비록 인간적으로 부당하다고 느껴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난의 이러한 이기적인 행동에 노하셔서 그를 죽이셨다.

      ​* 셀라(Shelah) : 요청, 간구

      ​창세기 38: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셀라(  שֵׁלָה request  )의 이름의 뜻은 요청 간구라는 뜻이 있다.
      어쩌면 다말은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며 유다의 집안에 대를 이어주려고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셀라는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가서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내심은 여자가 집안에 잘못 들어와서 세명의 아들이 다 죽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모든 불행과 사건들이 잊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유다는 그의 아내 수아가 죽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 가나안친구인 아둘람 사람 히라를 찾아가 욕망을 풀어보려 했다.
      유다는 아직도 과거의  못된 버릇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  있는 창녀를 찾아간 것이다.
      ​그 때 친정에 있던 다말은 그의 시부인 유다가 딤나에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과부의 옷을 벗고 창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을 가리고 시부 유다를 만나러 간 것이다.

      ​​다말은 그의 시부가 세째 아들인 셀라를 자신에게 주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의 씨를 받아 유다가문에 자손을 보려고 작정을 했던 것이다.

      용감한 것일까?
      무모한 것일까? 

      다말의 속임수에 시부인 유다는 넘어갔다.
      다말이 창녀인줄 알고 화대를 주고 동침을 한 것이다.
      동침을 한 후에 다말은 유다에게 화대를 받을 때까지 약조물을 요구했다.
      그 약조물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다.
      이것은 다말이 화를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말은 이 약조물로 인해 화를 면하고 명실공히 유다의 자손을 얻게 되었고 자손을 낳게 되었다.
      비로소 다말은 유다가문에 들어가서 여자로서 자손을 이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유다는 나중에 자신과 동침한 창녀가 바로 며느리 다말인 것을 알고 이렇게 고백하며 결국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된다

      창세기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 후에 유다는 큰 충격을 받고 다시 그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돌아오게 되며 야곱의 장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나보다 옳도다(  צָֽדְקָ֣ה מִמֶּ֔נִּי 짜드카 미메니 She is more righteous than I )
      여기서 옳다(צָדַק 짜다크 righteous)는 의롭다는 뜻이다.
      윤리적으로는 근친상간이지만 하나님앞에서는 옳다 의롭다는 뜻이다.

      실상 유다는 하나님의 계보에서 후손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씻지 못할 죄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셀라가 죽을까봐 두려움으로 다말을 쫓아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유다는 그의 아버지 야곱과 네 명의 여자들사이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제들간의 알력과 시기질투와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매우 실망해서 막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후사를 목숨을 걸고 내려했던  다말사건을 통해 충격을 받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에게도 돌아갔고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했을 때 죽이지 못하도록 했고 애굽의 기근시에도 장자로써 앞장서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유다는 자신보다 다말의 열정이 하나님앞에 더욱 의롭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유다의 육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온 고백이며 자백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륜을 저지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이러한 경우는 그 당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되어진 것이고 절대 일반화 할 수 없는 사건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왜냐면 이단교주들이 종종 이러한 비인륜적인 방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짓말하며 그들의 부도덕과 불합리를 신성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말이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베레스와 세라이다.

      베레스(פֶּרֶץ breach )는  위반, 침해, 파손 결함 이라는 뜻이 있고 세라( זֶרַח rising)기상, 소생, 부활의 뜻이 있다.
      다말은 불의한 유다가문에 들어와서 메시야의 계보를 잇기 위해 인간의 도리를 위반했지만 꺼져가고 망해가는 유다집안을 다시 소생시키고 메시야의 혈통을 예비한 여인이었다. 

      다말의 열성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칠거지악을 면하려는동양적인 사명감을 가진 여인네의 객기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의 법칙을 깨시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잉태케 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
      ​오직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다말의 이름의 뜻인 종려나무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의 손에 들려 수없이 흔들지는 종려나무 가지를 연상할 수 있다.
      다말은 작은 종려나무이며 그녀는 연약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종려나무이며 그 길을 예비하도록 하나님은 다말에게 올곧은 정조와 유다가문을 위한 여인의 지조를 주셨다.

      하나님이 다말에게 주신 유다 가문의 대를 잇고자 하는 열정과 뚝심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요 순수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광스럽게도 마태복음 첫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적 조상으로 여성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2472. 꿈(하롬. chălôm)  חֲלֹם

      1. 꿈,  2. 복수형으로 쓰일 경우: 하찮은 일.
      발음 / 하롬[ chălôm ]
      어원 / 2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꿈(창 37:9, 삼상 28:6, 욜 2:28), 꿈꾼 것(렘 23:27, 32), 꿈꾸는 자(렘 27:9). [동] 현몽하다(창 20:3, 31:2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 2492. חָלַם 

      1. 살찌다,  2. 강건해지다, 3. 꿈을 꾸다,  4. 회복하다,  5. 세우다
      발음 / 하람[ châlam ]
      관련 성경 / (꿈을) 꾸다(창 37:6, 단 2:1, 렘 29:8), 꿈을 꾸다(창 41:5, 욜 2:28), 강하여지다(욥 39:4), 치료하다(사 38:16),
      [명] 꿈꾸는 자(신 13:1, 3, 5)
      구약 성경 / 29회 사용

      채색옷(케토넷 파심)

      - '긴 웃옷'을 뜻하는 '케토넷'과 '손' 혹은 '발' 을 뜻하는 '파스'의 복수형으로서 '손이나 발까지 내려오는 겉옷'(삼하 13:18, 19)을 의미하는 '파심'이 합쳐져 '소매 달린 긴 겉옷'을 나타낸다.
      대체로 이 옷은 아마포로 만들었는데 제사장들이 입던 옷(출 28:4; 레 8:7; 스 2:69)과 흡사했던 것 같다.

      * 히브리인의 전통에 의하면 채색옷을 입는 경우는 아버지의 상속권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따라서 토라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37장 / 요셉의 꿈(5절)

      요셉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Joseph had a dream, and when he told it to his brothers, they hated him all the more.

      1절. 야곱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개역 개정) 야곱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우거하던(4033) 마구르(mâgûwr)  מָגוּר 
      1.  방랑,   2.  우거하는 땅,  3.  머무는 곳
      발음 / 마구르[ mâgûwr ]
      어원 / 14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류하는 땅(창 17:8, 출 6:4, 겔 20:38), 거하는 곳(욥 18:19), 거처(시 55:15), 나그네(창 47:9, 시 119:54)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1481. גּוּר 
      1. 길에서 벗어나다,  2. 창세기 12:10, 3. 출애굽기 6:4
      발음 / 구르[ gûwr ]
      관련 성경 / 머물다(창 21:23), 거류하다(출 6:4, 왕하8:2, 왕상17:20), 살다(사11:6, 렘43:2, 신18:6), 모이다(사54:15, 시56:7(6), 호7:14), 두려워하다(욥19:29, 시22:23, 민22:3), 지내다(창21:34), 두렵다(신1:17, 18:22), 경외하다(시33:8), 살다(욥28:4), 버려지다(사5:17), 나그네가 되다(시105:23, 대상16:19), 걱정하다(신32:27)
      구약 성경 / 81회 사용



      거하였으니(3427)  יָשַׁב  
      1. 앉다,  2. 창세기 21:16,  3. 창세기 19:1
      발음 / 야삽[ yâshab ]
      관련 성경 / 머물다(창13:12, 삼하10:5, 왕상17:5), 거주하다(출12:40, 창34:21, 수9:22), 앉다(삿5:16,왕상1:35), 살다(왕상2:36, 겔28:26), 좌정하다(시29:10, 사14:13), 두다(시122:5), 살리다(사44:26), 서다(슥14:11), 동거하다(출2:21), 오르다(신17:18, 왕상16:11), 나가다(신23:13), 들어가다(삼상7:2), 쉬다(룻2:7), 계시다(왕상8:30), 앉히다(대상28:5, 왕상21:12), 즉위하다(에1:2), 눕다(시127:2), 숨다(렘49:8), 기다리다(출24:14, 삼상1:23), 거류하다(창20:1),머물러 있다(민25:1), 이르다(삿20:47), 지내다(삼하13:20, 왕상22:1), 거처하다(왕상7:8, 렘35:7), 엎드리다(욥38:40, 시17:12), 매복시키다(삿16:9), 매복하다(삿16:12), 조용하다(슥1:11), 진치다(겔25:4), 장가들다(스10:14), 맞이하다(스10:17, 느13:27), 앉게 하다(삼상2:8), 세우다(시113:8), 삼다(스10:10).[명] 원주민(대상11:5), 주민(겔36:35), 처소(출15:17, 렘9:6), 자리(암6:3), 사람(창34:30), 백성(수 2:9, 애 4:12)
      구약 성경 / 815회 사용


      36:8에서 서로의 소유가 많아지자, 에서는 스스로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대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는 장자인 에서가 가나안에 거하여야 할 것인데, 그는 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갔고, 타국을 떠돌아다니던 야곱은 결국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은 가나안이 살기 좋은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약속의 땅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 에서는 제 욕심대로 갔고, 야곱은 탕자였으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지만 그것을 떠나서도, 스스로 자신의 복을 포기한 것입니다.
      37장에서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죽고, 에서가 세일 산으로 떠나가고, 명실공히 그의 시대가 되어 그가 상속자가 되고, 지배자가 되며, 그의 시대가 시작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야곱의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오늘 본문 2절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글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야곱의 족보를 말하면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후의 일이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지만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요셉의 모든 행적을 야곱의 역사로 취급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이룬 모든 역사 가운데 그의 아버지 야곱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50장까지에는 네 명의 족장이야기로 이루어졌지만 족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보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고백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인 37장부터 마지막 장인 50장까지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집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이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과 17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의 꿈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고 결국에는 애굽으로 팔려 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자녀들보다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히는 등 편애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한 것은 그 형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결국 이러한 요셉의 행위와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요셉을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미움은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요셉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요셉의 언사를 불편해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하여 다른 형제들의 곡식 단들이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을 꾼 요셉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눈치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제들에게 질투의 대상인데 자신이 형들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하니 그 형들이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습니까?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주신 계시였지만, 지혜롭지 못해서 이 꿈으로 인해 오히려 형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불러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보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 도착한 요셉은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다가 형들이 도단으로 목초지를 옮긴 것을 알고 그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도착한 도단에는 요셉을 해하기 위한 형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를 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는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도착하기 전에 형제들이 꾸민 잔인한 음모는 제일 맏형인 르우벤에 의해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르우벤은 그래도 한 핏줄인데 어떻게 죽일 수 있냐면서 다른 형제들에게 죽이지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는 요셉이 밉기도 했지만 제일 맏형으로서 또한 동생 요셉을 보호해야하는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붙들어 채색 옷을 벗기고 들에 있는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마침 도단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은 20개에 팔았습니다.
      당시 노예의 평균값은 은 30개 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러한 평균적인 값도 못 받고 팔려갔단 것은 실제로 그가 아직 소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 평균값에도 못 팔려 간자가 결국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자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동생 요셉의 생명을 구원할 마음은 있었지만 요셉이 팔려 갈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간 후에 돌아온 르우벤은 요셉이 없어진 것을 몹시 괴로워하면서 옷을 찢고 울부짖었습니다.
      르우벤의 이러한 울부짖음에는 장자로서 동생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슬픔을 생각하며 큰 죄책감을 느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 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야곱에게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야곱은 옷을 찢고 굵은베로 허리를 묶고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요셉이 죽은 것으로 믿게 하려는 아들들의 계략에 속아 고통당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그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챘을 때 에서가 슬퍼하며 울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그 죗값으로 그의 일생을 통해 속임을 당하는 자로 살아갔습니다.
      외삼촌에게 당했고 이제는 그 자식들에게 당합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이삭의 편애로 자신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아픔이 있었음에도 그는 또 다른 편애하는 아버지가 되어 그 가정을 깨어지게 만들고 십수년간 또 아픔과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
      말씀을 마칩니다.
      매사에 성실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던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와 그 마음은 어떠했던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것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미움을 받는 데는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시면서 까지 화평을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


      우리가 경험하는 꿈은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일반적 꿈이든 특별한 꿈이든 아무런 이유 없이 꿈이 생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꿈도 지친 육체나 마음의 치유나 회복의 관점에서 그 작용을 이해할 수 있듯이, 특별한 꿈도 무언가 특별한 꿈이 주는 의미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꿈은 반드시 해석의 단계를 거쳐야만 그 사명을 다 한다고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간밤의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도 않는데 그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일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여러 날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꿈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 꿈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또 꿈으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받으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꿈의 해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심리학적 접근

      꿈에 대한 해석이라 하면 누구든지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Karl G. Jüng)이 끼친 학문적 공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히 의식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인간의 의식을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고 무의식 세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꿈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꿈과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인간의 꿈은 성욕과 생활력의 근원으로서의 리비도(libido)의 작용에 기인한다는 점을 세상에 발표하였습니다.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은 프로이드가 주로 성적인 리비도에 관련시켜 꿈을 해석한 것과는 달리, 꿈에는 인간 심층 내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Karl G. Jüng, The Practical Uses of Dreams Analysis in Collective Works, Vol. 16).또 그는 인간 무의식 속의 깊은 영역에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의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개인과 관계되는 집단의 공동 의식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융은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마침내 인간 정신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인격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위와 같은 학문적 전통에 서있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식과 만나고 또 이를 돕기 원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올바른 해석을 통해 현재의식에 적용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또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강력한 내적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예언과 꿈과 환상 등의 직감적인 기능들을 통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있어서도 꿈 해석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직접적인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예언 활동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주후 200년경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지요. 그리고 3-4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대교회는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교권제도의 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성례전적 영성이 개인적 영성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롬(Jerome)은 이단사설을 억제하고 교권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가르치기를, 개인적인 꿈과 환상보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도심과 형식적인 교회 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영교(靈交)를 추구하기 원하는 자들이 사막과 산 속에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중세교회는 오랜 동안 프라토-어거스틴(Plato-Augustine) 유형의 실재론적인 영성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다시 도입하게 되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학문적으로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스콜라철학의 후기의 경향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힘입어 유명론(Nominalism)이 크게 부상하게 되자 신앙과 이성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그러자 신비롭고 반이성적으로만 여겨지던 꿈에 대한 해석 문제는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정통적 신앙의 권위로 인정하던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은 자연히 꿈에 대한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7세기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교리 논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때마침 불어 닥친 계몽주의의 소용돌이는 교회와 전통적 신앙을 합리주의적 비판으로 거의 질식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꿈과 같은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제는 신학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인해,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접근

      그러면 과연 꿈에 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은 신학적으로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쉴라이엘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이라고 풀어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구분은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함이 비교되어 죄(罪)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겠죠.

      마찬가지로 융의 심리학적 표현에 의하면, 죄성이란 무의식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분리된 현재의식이라고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현재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그에게 있어서 그 영역은 인간 정신의 신적(神的)인 핵이며 신성(神性)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래적(生來的)인 지각으로서의 신성(神性)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꿈에 나타나는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기독교 성화론(聖化論)의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배본철, 「52주 성령학교」, 190). 실제로 필자가 만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꿈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되고, 또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의 영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특별한 꿈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이타적인 목적의 꿈, 특히 복음전파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목적의 꿈이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 속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와 같은 목적의 꿈이 오늘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필요나 영적인 상황을 알려주시곤 합니다. 이럴 때 그들은 꿈에 나타난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또는 직접 물질로 돕곤 합니다. 또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복음 전할 대상자들을 꿈속에서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언제 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지시하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고백들이 진정 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꿈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신학의 인간론 내지는 성령론의 범주에 삽입될 필요를 요청 받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운동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 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이 복음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가온다고 보는데, 이를 통하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꿈 해석의 전통은 고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 정죄와 교권제도 발생 이후 현재까지 교회사 속에서 줄곧 외면을 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보주의 신학계에서는 꿈 해석에 관한 융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왔으며, 현대의 치유사역과 영성운동에서도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융의 이론은 마치 신학계의 진보와 보수 사이를 갈라놓은 격이 되어서, 진보 측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반면 보수 측에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과 질문은 현대의 기독교가 꿈 해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어도 책임성 있는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만 할 때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의 세속화 -  요셉의 꿈


      요셉의 꿈의 이야기는 믿음을 꿈과 동일시하면서​, 요셉처럼 큰 꿈을 꾸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설교하는 주제의 메인 메뉴이다.  요셉의 꿈은 번영신학과 맞물려 적극적 사고, 긍정적 사고를 믿음으로 동질화하면서 인기있는 단골 주제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의 꿈의 이야기와 현대의 성공의 개념에서 말하는 요셉의 꿈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자기계발 이론을 요셉의 꿈 이야기에 대충 끼워맞춰, 요셉처럼 큰 믿음을 가지고 큰 꿈을 꾸면 성공한다는 교훈은 성경의 본래적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자기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켰다.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사람의 계명)하여 가르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지금 이단들이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요셉의 꿈의 이야기를 성경이 말하는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멋대로 해석하면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   

      막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요셉의 꿈의 배경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의 타락한 우상숭배지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자손이 번성하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면서 한가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신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창세기의 400년은 정확한 기간은 430년이지만(출 12:40, 41;갈 3:17) '사 대'(16절)란 말과 맥을 맞추기 위해 대략적으로 사용된 예언적 숫자이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창 15: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보내셔야 했는가?​  그냥 가나안 땅에 계속 살면 안되었는가?

      당시의 가나안 땅은 여러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전쟁이 잦았으며, 성적인 타락, 우상숭배와 인신제사 등의 악한 풍습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철저히 가나안의 부족들과 종교, 문화, 풍습들과 분리되어야만 했다.

      창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창 24:3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창 28: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여호와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단련시키고 훈련시키고자 애굽을 임시 거주 장소로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여호와의 군대로 만들어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 심판의 도구로 쓰면서 그 땅을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가나안 족속은 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을 멸절하며, 그들의 종교와 문화와 풍습을 멀리해야 했다.

      고대에 있어서 가나안 사람의 풍산(豊産)의 제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상스럽고 비열하였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강한 유일신 신앙도 항상 부도덕한 우상신, 불결한 여신, 뱀, 비둘기, 황소의 우상, 기타 더러운 자연물 숭배에 오염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판테온의 주신(主神) 엘은 탐욕,비천,난폭,범죄의 영웅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폭군이며 부친의 왕위를 빼앗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또 딸의 목을 베었다. 이와 같은 폭행에도 불구하고 엘은 `해(年)의 아버지'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제신의 조상으로 되었다. 가나안 사람이 일반적으로 숭배한 바알은 엘의 아들인데, 가나안 사람의 판테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뇌신(雷神)인데, 그 목소리는 폭풍우 때 천지에 반향하였다. 바알. 아나스, 아스다롯, 아세라의 세 여신은 모두 성욕과 전쟁의 파트론(Patron)이며, 동시에 매춘부의 우상이기도 하였다.  모두 부도덕하고 부패와 더러움이 심한 것이며, 그 우상은 신자의 생활을 파괴로 몰고 갈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전멸시켜야만 했었다. 그것은하나님의 명령이었다(신 7:2-4). 하나님은 그것으로 가나안 사람의 사악을 벌하고(창 15:16,레 18:25,신 9:3,4,18:12),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더럽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출 23:31-33,34:12-16).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공의의 그릇이었다

      출 23: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레 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이며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이 태어나고 성장하자 그 예언의 성취가 임박하게 되었다.

      출 23: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출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요셉의 꿈과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

      요셉이 태어나고 청년으로 성장하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예언은 성취를 이루고자 기지개를 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 요셉을 택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신다.  요셉을 택한 이유는 요셉의 믿음이 특별히 좋아서도 아니고, 요셉이 뭔가 특별해서도 아니다.   요셉이 야곱의 특별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이 그가 선택받은 요인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요셉이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적 의지이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작정을 이루시고자 요셉에게 꿈으로 힌트를 주신다.  앞으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힌트가 꿈으로 나타나 역사의 중심부에 서게 될 것을 암시하였다.   하지만 요셉은 그 꿈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깨닫지는 못한다.   요셉은 솔직한 탓인지, 형들의 과실을 부친에게 일러바치곤 하였기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다. 그는 총명하고 영리했기 때문에 형제들을 멸시하는 버릇도 있었다.  오히려 그 꿈을 함부로 형제들에게 말하여서, 오히려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된다.  

      ​창 37: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 꿈을 꾸기 이전부터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던 요셉은 당연히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겠지만, 꿈을 통해서 그 미움이 더욱 커졌을 것이고, 이렇게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게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이루는데 도구가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종으로 팔았고, 그 결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기 때문이다.

      요셉의 꿈의 의미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자기가 미래를 준비하고자 큰 뜻을 품으며, 크게 성공하고자, 큰 믿음을 가지고​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에 본질이 있다.   요셉의 꿈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약속이 이제 성취할 때가 되었다는 힌트이고,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 요셉이 선택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성취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의미에서 꿈으로 알려주신 것이지, 요셉이 원대한 포부와 희망을 가지고 크게 성공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에 핵심이 있다.

      그러나 요셉 자신은 정작 그 꿈의 의미를 잘 모른 것 같다.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한다는 형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왜 이러한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야 되는지, 앞으로 큰 민족을 이룰 이스라엘의 운명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본질적인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많은 고생을 하면서​ 정차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애굽왕 바로가 꿈을 꾸고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 꿈을 해석하고, 실제적으로 바로 왕의 꿈들이 실제 현실적으로 성취되어가며, 풍년과 앞으로 닥칠 엄청난 기근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온 것을 보면서 점차 하나님이 보여 주신 꿈의 의미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형제들의 미움과 자신이 애굽에 팔린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큰 섭리와 작정이 있음을 알린다.   10대 후반에 가족을 떠나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수많은 고생과 어려움을 겪으며 마침내 3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요셉을 애굽의 아버지, 주, 통치자로 삼으셔서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애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선발대로 보내신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아픔을 통과해야만 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을 때 얼마나 형제들을 미워하고 원망했을까?   꿈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얼마나 저주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을 앞두고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탄식했을까?  우리도 하는 일마다 안될 때 그렇게 하지 않은가?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나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인가요?    하나님이 나를 버린것 아닌가요?>   우리는 요셉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잘 모른다.

      이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역사의 중심 인물로 우뚝 섰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해석하는 능력과 탁월한 행정능력을 주시어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셨다.  

      요셉은 자신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귀한 선물임을 깨닫고 다시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선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관여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요셉의 마음은 형제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을 묻어버리고, 점점 여유로워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굳건히 선다.    모든 위기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자신을 이끌어가심을 체험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과 뜻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형제들을 만났을 때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의 큰 틀안에서 자신의 인생과 형제들의 운명을 너그러이 바라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애굽에 정착하는 야곱과 자녀들​

      ​애굽에서 곡식과 선물을 가지고 돌아온 아들들이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전하자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한다.  과거에 아브라함은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낭패를 당할 뻔하였던 곳이었고 애굽은 우상숭배지였으며, 혹시 모르는 위험한 일들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주저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애굽에 내려가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으며, 다시 애굽을 나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가지고 계셨던 작정과 계획이었다.​

      창 46: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46: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드디어 야곱은 모든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정착한다.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요셉과 야곱을 통해 성취되었다.

      창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창 47: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창 47: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요셉의 꿈의 결론

      ​요셉은 그가 섬긴 바로의 집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의 신앙은 애굽 사람에게 동화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가 준 온 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얻었다.
      장남은 므낫세(잊어버림)라 하여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둘째 아들은 에브라임(창성함)이라 하여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라고 했다(창 41:51, 52). 
      그는 이방에 있으면서 홀로 자기 신앙의 순결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부친의 전 종족을 고센의 격리된 땅에 정착시키므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종교적 순결을 지켰다.
      역경에서 불평하지 않고  조급하게 굴지 않고, 유혹에서 의를 지키고 항상 그 놓여진 지위에서 직무에 충실했고, 주인의 유익에 충성했고, 자기를 학대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화평을 이루었다.

      요셉의 꿈은 현대의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것처럼 큰 뜻과 큰 믿음과 큰 꿈을 꾸면 크게 성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큰 야망, 큰 꿈, 큰 환상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이지,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주시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나의 야망과 나의 꿈과 나의 환상 나의 성공에 하나님을 맞추어고자 하는 발상은 자기계발 모델과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요셉의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뜻에 나의 생각과 뜻을 맞추어,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요셉은 아브라함 때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되었으며,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과 뜻을 보여주시고자 했다.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았지만, 그 의미를 깨닫을 때까지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고비와 역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적 뜻이 고통과 어려움과 함께 올 때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복종하였다. 
      요셉은 고통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화시켰다. 
      요셉은 자신에게 오는 고통을 통해 더욱 인격적으로 성숙해졌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성장했다.  
      이것이 요셉의 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우리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적 뜻이 고통과 어려움과 함께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자신에게 고통과 역경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니이다> 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라고 할 것인가?  
      그대들의 믿음은 달면 하나님을 찾고, 쓰면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의 경지에 있는가?  
      입술로는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찾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이 고통과 함께 나에게 찾아올 때 <할렐루야 아멘> 할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요셉의 꿈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 고통과 함께 주어질 때 거부하지 않고 나를 통해 이루어지니이다>라는 진정성이 있는 신앙고백에 있다.​

      나이순으로 정리해 본 요셉의 일대기

      1세 : 야곱나이 92~93세경에 요셉낳음
      10세 : 이때 동생 베냐민을 얻게됨(야곱나이 103세. 라헬죽음)
      10세-17세 : 아버지야곱의 편애적 사랑으로 나서기 좋아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함.
                         야곱은 요셉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앙의 계보를 잇기위해 고운자색옷을 입힘
      17세 : 형들의 모함에 애굽으로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노예로 팔려나감(이때 야곱나이 110세)
      17세-30세 : 이때에 형들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되새겨보며 그의 성품의 전환적 계기를 갖게되어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인내함
      25-7세 : 보디발 장군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힘
      28세 : 감옥에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줌
      30세 : 왕의 꿈을 해석해주어서 이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됨(창세기 41:46)
      31-37세 : 7년 풍년 기간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통해 므낫세 에브라임을 낳음
      38세(?) : 흉년이 찾아옴.
       (첫해 흉년에 야곱 아들들이 애굽에 1차 방문?(첫해 흉년)
       (형들이 다시 찾아오게 되고 결국 요셉이 자신을 밝히면서 흉년이 다섯해가 남았다고 말함. 그러나 사실상 형들의 첫 방문과 두번째 방문 사이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흘렀는지는 확실치 않음. 39세 되는 해 1월에 방문해서 12월경에 다시 찾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에.)
      39세 : 야곱형제들의 2차 애굽방문 2년째 흉년(창세기 45:6)
      39세 : 아버지와의 해후(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신의 나이를 130세라고 밝히고 있음(창 47:9),
      이사실은 야곱의 나이 92(93?)세경에 요셉을 낳았음을 의미)
      45세 : 7년 흉년이 끝남(38~44세까지 7년 흉년 지속)
      56세 : 요셉의 두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147세인 야곱이 팔을 어긋하여 축복함.
      그 이후 야곱의 12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루지만, 레위지파가 하나님의 성전에 관련된 직무를 맡는 특별 임무를 맡으면서 다른 지파들에서 성별되었고,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두 지파를 형성하게 됨.
      아버지 야곱은 147세로 죽음(창 47:28)(애굽에서 17년간 살았음)
      110세 : 요셉 죽음

      성경인물 / 요셉(Joseph) 그는 더하실 것

      성경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수히 등장하지만, 누구나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하여 거의 결함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요셉이다. 그래서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창세기 37장 이후 후반부는 요셉의 이야기로 길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해하기 쉽게 어린시절, 청년시절, 총리시절,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 어린시절

      야곱이 하란 외삼촌의 집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야곱의 12 아들 중 11번째 아들이다. 라헬은 결혼 후에 오래도록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녀를 생각하시고 태를 여셔서 요셉을 낳는다.

      라헬은 이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하고, 또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면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다.

      ‘요셉’은 히브리말로, ‘씻다(없애다)’라는 뜻과 ‘더하다’는 뜻의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요셉은 야곱이 늘그막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유달리 사랑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흔히 말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편애는 다른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가장 못마땅한 것은 차별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의, 식, 주로 인해 차별받게 되면, 사람은 참으로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요셉은 형들과 구별되게 채색옷을 입고 다녔다. 양치기를 하는 다른 형들의 의복과 얼마나 구별이 되었겠는가? 차별대우를 받게 되면,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사랑을 독차지하는 형제에 대해 미움과 증오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미 가인과 아벨에게서도 확인했듯이, 사랑받는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저 놈만 없으면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텐데...”

      피해의식을 가진 자녀들은 자신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원인을 대개 자신 밖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처럼 아비의 사랑받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성경은 야곱의 아들들의 행적에 대해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가나안땅에 정착한 후 얼마되지 않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게 된다.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황 중에 야곱이 상심하고 있을 때, 맏이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빌하가 누구인가? 죽은 라헬의 몸종으로서, 야곱의 첩이 되었는데, 단, 납달 리가 그에게서 태어났다. 서모와 통간하는 장자의 이같은 행실을 전해들은 아버지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세겜 땅에서 디나의 일로 세겜 일족을 잔인하게 학살하여 그 아비의 마음을 심히 근심시켰다. 그때 장성한 다른 아들들도 함께 그 성을 약탈했다. 요셉이 열일곱일 때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는데, 이복형제인 이들이 나쁜 일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이들의 과실을 요셉은 숨김없이 솔직하게 아비에게 알렸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은 솔직담백한 성품을 가진 아이였으며, 다른 형제들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대해 깊은 배려를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또 다른 형제들의 잘못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죄로 물들지 않은 깨끗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장성한 아들들이 이러니 야곱은 더더욱 요셉을 편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아마 꿈 때문인 것 같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숨김없이 부모형제에게 다 말했다. 인간의 불행은 뜻하지 않은 말 한마디에서 비롯될 때도 많다. 요셉이 별 생각없이 자랑스럽게 한 말 한 마디 때문에 형제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녀들은 쉽게 동질감을 갖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한번은 다른 지방에서 형제들이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명으로 요셉이 파견되었다. 형제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요셉이 형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 멀리서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자, 형들은 질투심에 불타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결국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 처넣은 다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개를 받고 노예로 팔아 넘긴다.

      이처럼 요셉의 어린 시절은 아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동시에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방인에게 팔려가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

      ● 청년시절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치고 순탄한 생애를 보낸 사람은 없다. 비교적 순탄하게 일생을 마친 이삭도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 했다. 요셉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환난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성품을 고쳐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한 사랑의 채찍이었다면, 요셉에게는 징계해야 할 점이 크게 없었는데도 엄청난 인생 세파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아마도 큰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셨던 모양이다.

      요셉이 미디안 상인에 의해 애굽에서 팔려간 곳은 바로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이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귀한 아들에서 낯선 이국땅의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종살이를 하면서도 신실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아름다운 청년 요셉을 주인은 늘 흡족하게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요셉은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보디발은 그런 요셉을 심복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이런 요셉에게 흑심을 품고 유혹을 했다. 매력 있는 청년 요셉에 대해 유부녀인 보디발의 아내는 빗나간 사랑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이 높은 직책에 있었던 보디발의 아내는 분명히 고독했을 것이다.

      보통 자신의 일에 성공한 사람들이 일과 가정, 모두에 충실한 경우는 드물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화려하게 보이는 삶도 내적으로는 허전하고 고독할 수 있다. 보디발과 그 아내는 분명히 금실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을 갖고 있는 부부가 다른 이성에게 실제적으로 유혹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은 적다. 보디발의 아내는 성공한 남편과 풍족한 재산을 지니고 다른 이의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사는 여인이었으나, 사실 행복은 조건보다 마음 상태가 중요하다. 그녀는 자신의 허전한 마음과 권태로움을 채워줄 상대로 요셉을 택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러번 요셉을 유혹했다. 그런데도 요셉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젊고 활기 넘치는 요셉이 유혹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보디발의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남녀관계는 도망치면 더 따라가는 심리가 있는 모양이다. 어느날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요셉의 옷을 붙잡고 침실로 가자고 꾀었다. 그러자 요셉은 황급히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그만 그녀의 손에 요셉의 옷이 벗겨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의 사랑은 순간 미움과 증오로 돌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보통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보디발의 아내는 결국 요셉에게 복수를 했다. 결국 그 소동으로 요셉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보디발은 아내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은 것 같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애굽법으로 당장 처형되어야 하는데,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만 가두었다. 아내의 보고에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또 요셉이 평상시 주인의 총애와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에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요셉은 열일곱에 종으로 팔려와서 서른이 될 때까지 13년간을 보디발 집안의 종노릇과 감옥살이 등 시련의 기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기간 요셉은 불평하지 않는다. 결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생애에 죄의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 감옥살이 가운데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였고, 감옥살이 중에도 그 절망의 장소에서 최선을 다해, 옥중 죄수의 제반 사항을 담당 처리한 성실한 삶의 태도를 보인다. 연단을 통해 요셉은 자신을 정금과 같이 빛난 존재로 성숙시켜나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정결한 그릇으로, 축복의 통로로 자신을 준비시켜 나갔던 것이다.

      ● 총리시절

      드디어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13년간의 연단을 통해 요셉이 준비되었을 때,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 감옥에서 이끌어 내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애굽왕 바로가 꿈을 꾸게 하신다.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꿈이었다. 앞으로 칠년간 엄청난 풍년이 들 것과, 7년이 지난 후 7년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지독한 흉년이 들 꿈이었다. 그러나 애굽의 어떤 술객도 박사도 그 꿈을 해몽할 수 없었다. 감옥에 있을 때 꿈 해몽을 해 주어 복직되었던 술맡은 관원장의 추천으로 드디어 요셉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로왕을 비롯, 애굽의 모든 술객, 박사, 대신들 앞에선 요셉은 빛나는 존재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의 지혜를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겨우 서른의 나이에 요셉은 당시 세계 최강국의 하나였던 애굽 전체를 다스리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7년 풍년 기간동안 잘 준비하여, 7년 대기근 때 중동 전체를 살려내게 된다.

      요셉의 이 놀라운 역량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는 모세처럼 애굽의 학문을 수학하지도 않았으며, 다니엘처럼 갈대아의 문학을 배우지도 않았다. 요셉의 지혜는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것이었다. 역경의 연속 속에서도 성실함과 신실함을 잃지 않은 이 청년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사용하신 것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지혜는 무한하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여러분이 배운 세상 지식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신실하고 성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란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열일곱에 애굽으로 팔려 갔다. 사랑받던 아비와 작별 한마디 없이 팔려왔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파란곡절을 겪은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자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하여,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리게 하다)라고 불렀다.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아버지가 그리웠으면 자식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는가! 둘째 에브라임의 뜻은 ‘창성하게 하다’는 뜻이다. 요셉은 외로움과 고초와 번민으로 시작했던 애굽 생활을 변화시켜, 창성함으로 갚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심정으로 둘째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이름을 통해 애굽은 자신의 영구한 도성이 아니라 단지 ‘수고의 땅’에 불과하며,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 주어져 있음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풍요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이 땅은 단지 ‘수고의 땅’에 불과하다.

      우여곡절 끝에 요셉의 부친 야곱과 그 자녀들, 온 가족 70명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애굽에서 산 지 1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한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형제들은 17년 동안이나 극진한 대접을 받아왔는데도, 여전히 요셉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저지른 죄의 결과를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하나님과 요셉 앞에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확실히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을 베풀어도 그 마음을 믿어주지 않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이와 같이 자기를 믿지 못하는 형제에 대해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말년에 자신의 굴곡많은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무슨 생각을 가졌을까? 그는 죄지은 형들을 당연히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그것은 요셉이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치 나 자신이 하나님인양 처신할 때가 많다. 타인의 죄에 대해서도 내 판단의 잣대로 마음대로 단죄하려고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이를 단죄할 수 없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요셉은 그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와 은혜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맞으며 일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했다. “나는 이제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를 찾아오시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한 땅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니 잘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는 날 내 뼈를 가지고 가거라.”

      요셉은 죽음 안에서도 희망과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것은 그가 평생을 가지고 있던 굳건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요셉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믿음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께신 가나안 땅에 묻힐 것을 소원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다. 우리가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면 가족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기겠는가? 삶의 끝을 접어야 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소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삶이 끝나는 날이 있음을, 그리고 내가 묻힐 땅과 마지막 옷이 입혀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죄와 심판이지만, 영원한 이별 역시 인간의 마음을 애통하게 한다. 그러나 죄와 심판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안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재회의 기쁨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요셉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신앙에서 비롯된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히브리서 11장 22절에 이렇게 쓰여 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해 명하였으며.” 요셉이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성자의 반열에 그 불후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그가 독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승리의 생애를 마치게 된 원동력은 신앙에 있었다. 그가 역경을 헤치고 나아간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려운 불화살을 막을 수 있게 된 것도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덕적 용기, 아량, 예지 재능은 모드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야 하는 고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윽고 그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고, 지기 뼈를 운반해 갈 것을 지시했다. 그의 뼈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고 각 부족이 각각 분깃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자 세겜 땅에 안장되었다.

      요셉은 인간적 온유함과 성실, 그리고 여호와 제일주의의 신앙으로 언제 어디서나 만인에게 인정받는 인생을 살았다. 우리도 주위로부터 인정받을만한 삶을 살아서 결과적으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36장 / 에서의 대략(1절)



      에서의 후손들
      에서에돔대략이 이러하니라.
      This is the account of Esau (that is, Edom).

      (현대인의 성경) 에돔이라고도 하는 에서와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새번역) 에서에돔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공동번역) 에돔이라고도 불리는 에사오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두라의 소생과 이스마엘의 족보가 소개된 것처럼(창 25:1-18), 오늘 본문은 야곱의 시대가 끝나고 요셉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에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9절에는 세일 산에 거주한 에서의 후손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20-30절에는 호리 족속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1-43절 부분에는 고대 왕국 시대에 통치한 에서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처럼 이방 족속의 계보를 기록한 이유는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임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에서가 세일 땅에 정착한 후 번성하여 한 민족을 이룬 사실이 족보의 형태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25:23에서 말씀하신 대로 리브가의 태중에 '두 민족'이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성취되어 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야곱의 후손도 중요했지만, 더 넓은 의미로 에서의 후손 역시 두 민족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2-5절까지를 살펴보면 에서는 세명의 아내에게서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만큼은 못한 수였지만 후일 그들 후손의 수는 야곱의 후손의 수와 거의 비슷해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후손의 수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제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부터 성경 속의 주요 인물, 역사 사건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실 때 야곱같은 사람도 선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생애를 살펴볼 때 결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로마서 9:13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에서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어려서부터 믿음이 없었고 그의 생활자체가 당연히 선택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창세기 본문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살펴보면
      1) 25:34에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고
      2) 26:34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은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게다가 그들을 하나님의 신앙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에 젖어 삶으로써 부모를 근심하게 한 불효를 행했습니다.
      3) 36:6에 더욱이 물질이 많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갔던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도 그 행위가 선했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에서를 버리신 것도 그 행위가 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억울하게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 원칙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도 나의 공로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선한 사람을 버리신 억울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신앙의 사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은커녕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가문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손들에게 내리신 축복은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 기록된 에서의 족보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자손을 번성케 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이스마엘의 경우도 비록 서자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번성케 하셨던 것처럼 에서의 자손도 크게 번성케 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물질적으로도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이삭을 모시는 동안 에서와도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야곱의 육축만 많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거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더 나아가 왕국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거쳐 오랜 후에 가나안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지만 에서의 자손은 오늘 본문 31절에 보시면 일찍이 왕국을 이루었고 그것은 마침내 에돔이라는 강대국으로 이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난날, 에서에게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당연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에서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행스럽게만 일생을 보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에 동참하게 하신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배금주의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보다 육신의 삶에 있어서 에서의 가문처럼 잘살게도 번성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때로 많은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73편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찌하든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고 더 큰 믿음위에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절에 야곱과 에서는 그들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모든 가족들과 재물과 짐승들을 이끌고 세일 산에 거했습니다.
      이곳의 현 위치는 예루살렘의 서쪽 약 14km 지점으로 가나안을 벗어난 사해 남쪽의 아라바 산악 지대입니다.
      이후부터 세일은 하나님 백성들의 성인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이방 땅의 성으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에서는 세일 산에 정착하고 그의 후손들 대대로 삶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31절에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에 이미 에돔 땅에는 왕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에돔 족속은 독립된 나라를 이루면서 정치 경제 모든 부분에서 이스라엘보다 발전된 상태에 있었고 외형적인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32절 이하에 나오는 왕들은 에돔의 기틀을 닦은 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에돔왕국을 훌륭히 발전시킨 왕들 입니다.
      39절의 바알하난과 하달 시대에 와서야 이스라엘에 첫 번째 왕인 사울이 등극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40절 이하에는 에돔의 왕들에 이어 족장들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업적이나 신상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인물들이 족장이었는가에 대한 소개만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시작되는 야곱의 후손들을 중심한 구속사의 전개를 위해 한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후예에 대해서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마지막 이방 족보로서 장차 일어날 이방 민족들의 침략에 대한 그 배경적인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모든 부분에서 야곱보다 나은 조건을 타고 났지만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38장 / 여호와 목전(7절)

      유다의 장자 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But Er, Judah's firstborn, was wicked in the LORD's sight; so the LORD put him to death.

      여호와의 목전(in the sight of the Lord)"
      유다 가문의 부끄러운 이야기

      창세기 38장은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근친 상간이란 이야기가 마치 잘못 편집된 듯하게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측면에서 본문은 메시야의 혈통을 잇는 계보를 보여 주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도덕적 타락상에 물들어 가는 모습을 통해 애굽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주기 때문에 의도적인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의 집안에 찾아온 첫 번째 불행은 장자였던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자녀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엘이 어떤 악을 행했는지 자세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0절에 비추어 볼 때 성적인 범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엘의 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녀와 동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유다와 장자인 엘의 성적인 타락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유다의 성적인 범죄가 그것을 보고 자란 장자 엘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사회제도는 형제 중에서 결혼을 하였으나 후사가 없이 남편이 죽게 되면 그 동생이 형수와 동침한 후 후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계대결혼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 있었습니다.
      장자 엘의 부인은 다말이었는데 엘이 죽은 후에 동생 오난이 형수 다말과 동침한 후에 후사를 잇지 못하도록 땅에 설정하므로 이것이 여호와의 목전(in the sight of the Lord)에 악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보내지 않고 오히려 다말을 친정에 가서 셀라가 더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셀라마저 죽을 것이 두려워서 이렇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얼마후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라는 곳으로 양털을 깎기 위하여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은 얼굴을 가리고 마치 몸을 파는 여자처럼 길가에 앉아있다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이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약조물을 받았습니다.
      다말이 잉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유다는 다말을 불살라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말은 내가 잉태한 것은 이 약조물의 주인 때문이라고 말하므로 유다는 다말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아들 셀라를 그에게 주지 않은 탓이라며 더 이상 다말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성경에 이와같은 근친상간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소개되었을까요?

      아무리 계대 결혼의 권리가 있다 할지라도 간계로 시아버지와 간음한 다말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범죄라고 하겠습니다.
      다말이 서슴지 않고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은 당시 성 도덕이 문란한 가나안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와 다말의 근친 상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나타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신 것이 노예 생활을 하도록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타락한 삶으로부터 선민의 순수성을 보존하시기 위한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인간의 죄를 무한히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와 가치가 붕괴되는 오늘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의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육학에서 '어린이의 최초의 학교는 가정이며 최초의 교사는 부모'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녀는 그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보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삶의 교과서는 부모의  '말과 행동' 그 자체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중에는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리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 어릴 때 어머니가 맞는 것을 보며 자란 사람은 커서 아내를 때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배우며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자의 가정에서 범죄자가 많이 나오고, 선한 자의 가정에서 선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녀를 바른 신앙의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부모가 주일에 교회 빠지고 놀러 가고, 거짓말과 음란한 행동을 하는데 자녀가 제대로 자랄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매일 말씀과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고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는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자녀들은 저절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신앙적인 나태함이 찾아올 때나,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자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장차 자신의 자녀들이 그대로 답습할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서서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녀들의 좋은 신앙적 스승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절에 엘이 죽자 그의 동생 오난이 그의 형수인 다말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는 고대에는 형이 자식이 없는 상태로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형의 이름으로 상속시키는, 공인된 관습으로 계대법, 또는 수혼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에는 말도 안 되는 법으로 보여 지지만 이 법은 모세 때 율법으로 성문화되었습니다.
      신명기 25:5-6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러한 법이 생겨난 가장 큰 이유는 유산의 상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유산이 며느리가 다른 사람과 재혼함으로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그의 형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형수인 다말과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형수인 다말과 결혼한 오난은 자신을 통해 낳게 될 자녀가 엘의 기업을 받을 것임을 알고 이기적인 마음에 계대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한 오난 또한 죽음으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11절에서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에 가서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말은 변명과 구실에 불과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과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통하여 그의 마지막 아들인 셀라도 죽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어찌할 수 없이 유다의 말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말은 시어머니가 죽고, 또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자기를 셀라의 아내로 주지 않자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였습니다.

      다말이 이렇게 한 이유는 성인이 된 셀라를 유다가 자신의 남편으로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궁여지책으로 유다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을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이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찌되었던 다말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는 그녀를 창녀로 알고 그와 동침하고 맙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속인 다말은 자신과 동침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동침한 대가로 나중에 염소 새끼를 주기로 하고 그 담보물로 도장과 그것에 달린 끈과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뒷날 대가를 지불하고 담보물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친구를 통해 담보물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임신에 성공한 것을 안 다말이 잠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담보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석 달쯤 후에 다말이 음행으로 인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는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끌려 나온 다말을 통해 그녀와 동침한 남자가 다름 아닌 유다 자신임을 알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를 통해 다말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부끄러운 역사인 동시에 메시야의 족보로서 중대한 뜻을 지닙니다.

       

      우리는 간혹 성경을 통해서도 충격적인 내용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 38장입니다.
      그것도 메시야의 조상인 유다에게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갑자기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근친 상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유다는 계대 결혼에 대한 의무를 이행치 않았기 때문에 며느라 다말은 친정에 머물면서 시아버지가 딤나에 양털을 깎으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가리고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이때 다말은 시아버지에게 약조물을 요구하여 "도장과 끈,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엄하게 말했지만 다말이 제시한 약조물이 유다의 것임을 알고 그가 옳다. 내가 셀라를 그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대 결혼이란 가문의 혈통을 중요시했던 고대 근동에서 후사 없이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기 위하여 형제나 친족 중의 하나가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이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오난이 죽은 것도 이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때문이었으며, 막내 아들 셀라가 오난처럼 죽을까 두려워하여 다말에게 주지 않은 것도 유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대 결혼의 권리가 있다 할지라도 간계로 시아버지와 간음한 다말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범죄라고 하겠습니다.
      다말이 서슴지 않고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은 당시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가나안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다말의 근친 상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나타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신 것이 그들로 노예 생활을 하도록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타락한 삶으로부터 선민와 순수성을 보존하시기 위한 배려입니다.

      둘째로 불륜 관계에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인간의 죄를 무한히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