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교제의 유익(빌레몬서 1: 4-7)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행 2:46-47).
뿐만 아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교제하며 삶을 나누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간의 교제가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었습니다(행 2:42).
이러한 말씀을 통한 삶의 나눔이 곧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의 “교제(fellowship)" 란 용어는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신앙인들이 나누는 거룩한 사귐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교제는 십자가신앙의 횡선을 만들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들은 왜
믿음의 교제를 반드시 나누어야 할까요?
첫째,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각종 은사와 축복을 자신이 보다 더 잘 알게 됩니다(6절)
만약 교제하지 않고 홀로 생활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각종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믿음의 교제를 통해 비로소 하늘의 각양 선물과 축복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알고 사모하여 받게 됩니다.
시편 133편 /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가 연합하며 동거하는 믿음의 교제 가운데 각종 은사와 축복이 주어집니다.
둘째, 믿음의 교제를 통해 성도들이 마음에 신선한 활력을 받게 된다(7a)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평안함을 얻었으니”라는 헬라어는 “쉬게 하다”, “원기를 돋우다”, “안식하다” 등을 의미합니다(요 14:27).
그런데 이러한 평강이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교제를 통해 성도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었습니다.
“교제”는
신약성경 전체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삼위하나님 사이의 코니노니아는 물론,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간의 사귐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적 공통성(relational commonality)”을 통해 제자들은 더욱 공동체가 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를 통해 성도들은 죄를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기도 하며, 변화받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신령한 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더욱 모여 믿음의 교제를 나누기에 힘써야 합니다(히브리서 10:24-25).
그리하여 보다 풍성한 신선한 활력을 주고 받으며 하늘의 평강을 서로 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지도자들이 기쁨과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7b)
...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무엇이 지도자들이 성도들로부터 받는 기쁨과 위로일까요?
여러 성도님들이 믿음 안에서 은혜받고 밝아지고 기뻐하고 변화되는 삶을 보는 것입니다.(7a)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 잘 하게 되는지 진지하게 관심갖고 대화나누는 장면을 볼 때, 지도자들은 참으로 보람을 느낍니다. 서로 간증하며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높히고 ... 우리 모두 믿음의 교제를 통해 지도자들에게도 사역의 위로와 기쁨을 선사할 수 있도록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며 빌레몬을 생각할 때 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5).
이유는 빌레몬의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소식을 듣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빌레몬처럼 믿음을 갖고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며 “믿음의 교제”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믿음의 교제”는 세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선물들과 축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아 받게 됩니다.
주위의 성도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교제를 통해 성도들의 심령을 평안케 하며 새롭고 신선하게 해
줍니다.
나아가 교회지도자들에게도 큰 유익을 끼칩니다.
사역의 노고에 대한 위로와 열매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교회의 유익
교회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부흥시키는 큰 활력소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감화감동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는 물론, 성도들과의 진정한 믿음의 교제가 더욱 있으시기를 성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때도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하는 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하는 말씀을 근거로 축복합니다.
‘교통’(코이노니아’ Koinonia)이란 말이 은혜와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쓰였습니다.
교통(코이노니아)이라는 단어는 ‘은혜’, ‘사랑’과 함께 성경의 세 가지 기본적인 말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교회라는 한문 글자도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교제는 가족과 관계됩니다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를 본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작은 오두막을 무엇에 쓰시려고 짓고 계십니까?" 그 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습니다.
"이 작은 집 안에 진실한 우정을 나눌 친구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인생이란 누군가와 오두막 속에서 함께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했습니다.
이 인생의 오두막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작은 오두막 속에 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작은 오두막 속에 정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두막 속에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로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혼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군가와 함께 믿으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우리네 신앙생활도 하나의 오두막 생활입니다.
이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더불어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생활을 잘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생활을 잘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핵 가족이 되며 가족간에 교제가 멀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핵가족 유머가 있습니다.
김정일이 죽었다 깨나도 서울에 올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1. 서울에는 총알 택시가 너무 많다.
2. 서울에는 골목마다 대포집이 있다.
3. 남자들은 폭탄주를 마신다.
4. 서울에는 비행 청소년이 너무 많다.
5. 서울은 거의가 핵가족이다.(월간 조선에 발표된 글)
핵무기로 무장된 핵가족?
무시 무시 하지요?
그래서 김정일이 미사일 발사 한다고 하 는때에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로 받는 것은 좋겠지만 핵 가족인 우리네 삶은 날로 삭막해 지고 있습니다.
가족간에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져야 힙니다.
교제는 사회와 관계됩니다
게리 스멜리(Gary Smalley)와 잔 트렌트(John Trent)가 공동으로 쓴 인간의 숨겨진 가치(The Hidden Value of a Man)라는 책에서 두 사람은 인간은 일생 동안 두 개의 칼을 휘두르며 산다고 주장한다 합니다.
첫 번째 칼은 은으로 된 칼로써 법이나 사회적 신분, 직책, 혹은 학위 등등에 기초한 힘이나 권위의 칼입니다.
두 번째 칼은 황금으로 된 칼로써 내면의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비와 사랑, 친절, 온유, 등등의 덕성의 칼입니다.
은칼과 황금의 칼이 모두 우리 인생에 필요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은칼만 무자비하게 휘두른다는데 있습니다.
은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때문에 사회적인 교제가 깨집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의 2000년 5월에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에 대해 소개한 내용이라 합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윌 헌팅이라는 청년입니다.
그가 보스턴 빈민가에서 건달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는 폭행을 일삼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반항하는 반항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학자들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고,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하버드 대학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삐딱한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메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중, 수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낸 노벨상 수상자나 풀만한 복잡한 수학 문제를 단숨에 풀어내면서 수학과 교수 램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램교수는 윌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의 거친 성격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램보 교수는 절친한 친구사이인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에게 윌을 부탁합니다.
숀 교수는 윌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윌은 따뜻하게 대하는 숀 교수의 손길을 통해 마음을 열었고, 어렸을 때에 의붓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폭행을 일삼는 건달에서 미래를 향해 달리는 청년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사회적인 교제속에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됨을 상각하게 합니다
교제는 교회와 관계 됩니다
로버트 뱅크스 부부가 쓴 "교회,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에 보면 종교개혁 시대의 한 침례교인이 노래한 가정교회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가 모이고 있는 이곳은 어떤 곳인가?
그저 하나의 집일뿐, 바닥은 흙
사람들을 보호하는 벽과 지붕
빛이 들어오는 창문, 열린문
하지만 우리 여기 모일 때
이 집은 살아있는 하나의 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아네
저 멀리서부터 오는 말씀과 떨어지는 별들
우리 안에 씨처럼 뿌려진 열정의 불꽃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부터 전해온 하나님의 이름들
그리고 꿈과 징조와 표적들
이곳에서 우리는 이미 들은 것을 또다시 기억하고 또다시 이야기한다네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그리고 그분의 식탁에서
우리는 떡을 받는다네
그 떡을 나누어 먹으며
살아있는 표적을 본다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서로가 서로에게 떡과 포도주라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전파해야 할 사람들
바로 여기 이곳에서 그 정의와 평화를 받는다네.
초대교회에서 이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 성경이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교제(코이노니아)란 사도들의 교제가 아니라 성도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간의 교제가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어서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들은 후에 그 말씀을 통해서 서로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한 삶의 나눔이 곧 교제 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교제에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준비도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가족처럼 더불어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힘썼다고 했는데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말씀을 들은 후, 음식과 함께 대화를 하며 교제를 했습니다.
아마 그 동안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기도제목을 나누었을 것이고 그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인양 생각으로 기도로 교제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는 하나님과 관계 됩니다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에 기초한 용서에서 비롯됩니다
용서라는 영어 "Forgive"를 가지고 용서하는 방법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 참으라(Forbear)
속상하다고 해서 화풀이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 있는 용서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용서는 참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잊으라(Forget)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하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과감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아들이 가더니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오느냐?"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집에서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미를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애야!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라."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증오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셋째, 영원히(Forever)
영원토록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말끔히 잊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용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다윗도 침상이 뜨도록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닭이 울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한 통곡으로 회개 하였습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천국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장이 열차 안 곳곳을 돌면서 차표에 구멍을 뚫어 표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 차례가 되었을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장은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과학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표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정직한 분인 것도 안답니다.
차표 안 보여주셔도 괜찮습니다."
몇 분이 지난 뒤 차장이 표 검사를 마치고 아인슈타인 곁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도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좌석 밑을 뒤지며 열심히 잃어버린 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안쓰럽게 생각한 차장은 다시 "아인슈타인 선생님, 차표 때문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선생님 표는 제가 검사 안해도 됩니다."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꼭 잃어버린 표를 찾아야만 한다고 고집을 세웠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차장이
"왜 꼭 차표를 찾으셔야만 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인즉,
"내가 이 표를 찾지 못하면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기차표는 잃어 버릴 수 있을 지 모르나 우리에게 주신 표는 심령에 새겨준 것이어서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신실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는 빌레몬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빌레몬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였던 것은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고 진술하며,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주인을 떠나 도망하였으므로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자신을 위해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만약 그를 살려주더라도 그 이마에 화롯불을 가지고 "F"자를 크게 새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라는 라틴말(Fugitivus)의 첫 글자입니다.
영어의 "Fugitive"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와 같이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의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를 받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성도는 빌레몬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문제를 놓고 부탁할 때 바울은 그의 순종을 확신하였는데 이는 그의 믿음으로 교제하는 신앙의 독실함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4. 내가 항상(恒常) 내 하나님께 감사(感謝)하고 기도(企圖)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聖徒)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交際)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善)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役事)하느니라.
첫째,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도했고 믿음의 교제를 언급 했다.
바울은 사랑하는 동역자(同役者. συνεργός 쉬네르고스. fellow workers. 동료일군. 함께 일하는 자) 디모데와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및 군사 된 아킵보와 빌레몬의 집 교회(敎會. ἐκκλησία 에클레시아. church. 그리스도인의 운집)에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했다(1- 2).
그는 항상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동역 자들에 대해 기도를 할 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와 그들이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들에 대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은 것이라 말했고 이로써 믿음의 교제(交際.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communion. 형제의 연합의 증거)를 하게 된 것이다(4-6).
둘째, 믿음의 교제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에무나. πίσστις 피스티스. faith. 예수를 믿는 마음)은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제자들과 교제를 통해서 그들을 마음에 영접(迎接. 카라. δέχομαι 데코마이. receive. 마음에 받아드리다)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고후 7:2-3. 빌 1:7)
빌레몬은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함께 교제하는 형제들이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선(善. 토브. ἀγαθός 아가도스. good.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예수님과 연합해 한 영(靈)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미 6:8. 고전 6:17. 몬 1:5-6)
셋째, 성도의 교제의 중심은 예수님.
성도의 실존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난 하늘에 속한 생명의 존재이고 이 사람은 거룩하며 의로운 사람으로 죄가 그쳤고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으로 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다(골 2:12. 벧전 4:1-2)
주님 뜻대로 사는 자는 자신 안에 오신 예수로 살고 이 같은 제자들과 교제를 하면 그들 가운데 계신 주의 영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하시며 이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므로 예수님 강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고전 1:8-9, 고후13:13)
넷째,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그리스도 반석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견고(堅固. 미차르. βέβαιος 베바이오스. fortification. 요새와. 반석)한 터(예쏘드. θεμέλιος 데멜리오스. foundation. 신앙의 기초 예수) 예수님은 섰으니 인(印. 호담. σφραγίς 스프라기스. signet. 하나님 소유로 도장을 침)침이 있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딤후 2:19)
인(印) 침을 받은 백성을 하나님이 아신다 하셨고 이에 너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니 그를 부르는 자마다 불의(不義. 아울라. ἀδικία 아디키아. unrighteousness. 불법. 부정. 옳지 못함)에서 떠나라 하셨으며 만일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면 선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된다(딤후 2:19-21)
다섯째, 반석이신 예수님 안에서 복음으로 행하는 것.
복음(福音. εὐαγγέλιον 위앙겔리온. gospel.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예수님 소식)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으로 이를 듣고 믿어 죄를 버리고 불의에서 떠나면 그 깨달은 첫날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하게 되며 이로 인해 너희 중에서와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빌 1:5.골 1:5-6)
교제의 결과는 너희 속에 착한(주와 동행)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고 그가 예수 강림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바울의 마음에는 빌립보교회 형제들이 있고 함께 그의 사역의 매임과 복음을 말하는 은혜에 참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하는 것을 하나님이 증인이 되셨다(빌 1:7-8)
여섯째, 종은 성도를 사모해 복음만 아니라 목숨도 주어야 한다.
주의 종 목사(牧師. ποιμήν 포이멘. pastor. 예배의 책임자. 말씀을 전하여 양을 돌보는 자)는 맡겨주신 성도들을 마음에 영접(迎接)하고 사모(思慕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육체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어야 한다(살전 2:8)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네페쉬. ψυχή 푸쉬케. life. 육신의 생명. 영혼)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또 이 세상 재물로 형제를 돕는 것 까지도 말했다(요일 3:16-17)
일곱째, 교제, 가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을 보고해야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된다 하셨지만 또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자기의 제자와 선지자와 의인과 어린아이를 영접(迎接)해야 한다 하셨고 이는 육체로 오셨던 주님이 이제 성령으로 제자들 속에 오셨기에 누구든지 제자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곧 자신을 영접한다 하셨다(마 10:40-41.요 13:20, 14:23. 롬 5:5)
바울은 로마의 사랑하는 성도 보기를 심히 원했고 자신 안에 계신 무슨 신령한 은사(영생)를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한다 말했으며 오늘날은 가상에서 말씀을 서로주고 받지만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얼굴을 보고 서로 마음으로 영접해야 거듭나는 상(賞)을 예수님께 받게 된다(마 10:40-41.막 9:37. 롬 1:10-11)
여덟째, 내 안의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로 증명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보고 들은 첫날부터 교제하는 것은 너희 속에 착한일(ἀγαθός 아가도스. good. 하나님과 연합. 동행. 선한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허물이 없이 예수 강림의 날까지 이루신다 말했고 그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에 자신의 안을 곧 예수님 안이라고 말했다(빌1:5-7, 10, 30)
나는 육신적인 신자로 삼십년 동안은 아무도 거듭나게 할 수 없었고 주께서 내게 오심으로 거듭나는 극적인 은혜를 입어 나의 가족들이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나를 마음으로 영접하였고 또 교회 개척 당시 나를 마음으로 영접한 분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들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딤후 3:17)
♦ 6월 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레몬서 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음의 교제(6절)
♦ 성구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交際)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善)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役事)하느니라.
I pray that you may be active in sharing your faith, so that you will have a full understanding of every good thing we have in Christ.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한 신원보증서와 같은 말씀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가정교회에 소속된 종으로 어느 날 그 집에서 귀한 것을 훔쳐 갖고 도주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에 수감됩니다.
빌레몬 가정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신앙교육을 받은 후에 아주 신실한 믿음의 일군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을 위하여 수종 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바울에게는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주인에게 물질적인 손실을 끼쳤을 때는 반드시 그 물질에 대해서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사역하는 일군이 아니라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이 편지를 보내며 "과거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너와 나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며 오네시모가 손해를 끼친 것은 바울이 부상해 줄 것" 이라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나를 위하여 십자가형을 받으셨고 내 죄를 값아 주신 후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을 위한 신원 보증서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신원을 보증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찬양하며 오늘도 믿음의 교제로 인하여 오네시모와 같은 쓸모없었던 인생을 유익한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자기 점검을 위한 세 가지 질문
1. 항상 기뻐하는가?
2. 끈질기게 기도하는가?
3. 모든 일에 감사하는가?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에베소서 5장 16절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George Bernard Shaw's epitaph)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칼빈 / “마귀의 손에서 시간을 찾아 나의 소유로 삼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 “세상적인 모든 방해와 향락을 내주고 사들이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8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있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또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세월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요한계시록 18장 13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은 “세월이 좀먹느냐, 모래알이 싹트느냐,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오늘 못하면 내일하지…”라고 저와 여러분에게 속삭입니다. 여기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F 실러는 ‘시간’을 세 가지 걸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 1759년 11월 10일 ~ 1805년 5월 9일)
첫째,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지 않고 서 있다고 했습니다.
왜 세월을 아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세월은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다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 세월은 세상의 어떤 귀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월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세월을 아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혹시 아무렇게나 세월을 허비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은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의 종 됐던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인생의 좋은 기회들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또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 대가 치르기를 꺼리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선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물쭈물하다 혹시 세월을 허비하는 일은 없으십니까? 시간을 낭비하는 것. 그것은 곧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을
뜻하는 헬라어 ‘카이론’은 중요한 시기 또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의미합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마귀의 손에서
시간을 찾아 나의 소유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세상적인 모든 방해와 향락을 내주고 사들이는
것이다”고 역설했습니다. 모두 시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어록들입니다.
이처럼 삶이 유한한 인간에게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은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있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또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세월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요한계시록 18장 13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은 “세월이 좀먹느냐, 모래알이 싹트느냐,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오늘 못하면 내일하지…”라고 저와 여러분에게 속삭입니다. 여기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F 실러는 ‘시간’을 세 가지 걸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지 않고 서 있다고 했습니다. 왜 세월을 아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세월은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다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 세월은 세상의 어떤 귀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월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세월을 아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혹시 아무렇게나 세월을 허비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은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의 종 됐던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좋은 기회들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또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 대가 치르기를
꺼리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선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신앙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잠 1:7; 9:10).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들이 누릴 행복한 삶이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월을 아끼다'는 것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하게 여겨 아끼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하찮게 취급하여 아까워하지 않게 된다.
'세월을
아끼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세월'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이로스'다.
곧 질적인 시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아끼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스아고라조'는
'속량하다' '구속하다'인데, 남에게 팔린 것을 도로 사 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는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끊임없는 교제를 유지하여야
한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우리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그런 삶을 살았었다.
그렇게 살았던 그때에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그릇 속에 '카이로스'가 온전히 충족된 삶이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아담이
범죄함으로, 복된 '카이로스'가 모두 상실되고 말았다.
인간은 '크로노스'의 그릇만 들고 사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명령과 함께 "때가 악하니라"가 뒤이어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는
'헤메라이'인데, '날'(day)를 의미하는 '헤메라'의 복수형이다.
그런 점에서 '때'는 어원적으로 '날들'(days) 곧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하다'는 것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악의 본질은 사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온통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탄은 우리의 '카이로스' 회복을 방해하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다.
그것이 사탄의 우선적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원인도 사탄의 적극적인 방해 공작 때문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를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사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영역이다.
사탄은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다시 소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카이로스'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가장 큰 복이며 희망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지금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계 3:20).
시간을 구속하라!
과거의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 하나님의 은혜로 묻어버려라!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미래의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 두려움을 믿음으로 맡겨라!
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다.
이 양떼들은 무리가 커지면 이상한 집단행동을 한다.
조금이라도 앞서서 풀을 뜯으려고 서로 달리기 시작한다.
한번 뛰기 시작하면 수천마리 양떼들이 풀 뜯을 시간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뛰기만 한다.
그러다 해안가에 도달하면 갑자기 설 수가 없어 모두 바다로 뛰어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다.
21세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시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정글의 법칙(The law of the jungle)을 넘어선다.
무한 경쟁이요 전 방위 경쟁이다.
이것은 결국 무한탐욕으로 이어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한국은 더 심한 것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에 ‘더 나은 삶(OECD Better Life)’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4개국 OECD회원국을 포함한 36개국 국민들이 살아가는 상태를 분야별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은 종합 27위에 머물렀다.
그 중에서도 근로시간과 여가 활동을 토대로 집계한 ‘일과 삶의 균형’ 분야에서는 최하위권인 33위였다.
주간 노동시간은 44.6 시간으로 터키를 빼고는 가장 길었다.
무슨 말인가?
그만큼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이다.
왜 이럴까?
비교의식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여기서 비껴갈 수는 없다.
대형교회를 바라보는 중소형교회의 시계(視界)는 제로이다.
앞이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역시 비교의식이 문제다.
인생도, 사업도, 가정도, 자녀도 비교의식이 문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비교의식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심기일전(心機一轉) 해보지만 안 되면 분기탱천(憤氣撑天) 한다.
굳이 ‘느림의 미학(aesthetics of slowness)’을 말하지 않더라도 호흡을 가다듬을 때이다.
지나치게 분주하지 말자.
분주함의 끝은 허탈감이요 외로움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길은 외로운데….
팡세(Penses)를 남긴 파스칼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거대한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 그 외로움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다.”
“시간을 구속하라.”는 성경말씀에 눈을 돌려 볼 때가 됐다.
개역성경에는 “세월을 아끼라.(엡5:16)”고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NIV)에는 “Redeeming the time,”이라고 되어있다.
“시간을 구속하라.”는 것이다.
구속(redemption)이란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이다.
시간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시간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후회와 나태함과 분주함에 주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오라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지 말라는 것이다. 일단 시간에 쫓기면 시간이라는 놈이 ‘갑(甲)질’을 시작한다. 그러다 방향을 잃고 달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수퍼 갑(甲)이 된다. 우리는 을(乙)이 되고…. 그 때부터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된다. 시간을 구속해야 한다. 낭비하는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빠삐용(Papilon)’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앙리 빠삐용 샤리에르(Henri Papilon Charriere)는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무기수로 한평생 감옥에서 살아간다. 주인공 빠삐용은 자유를 찾아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에서 꿈을 꾼다. 판사와 배심원들이 빠삐용에게 판결을 한다. “너는 유죄야!” 빠삐용은 반박한다. “아니야. 나는 죄가 없어!” 다시 판사가 말한다. “넌 유죄야. 너는 인생을 낭비했어.” 주인공이 소리친다. “맞아. 난 유죄야. 난 인생을 낭비했어.”
십계명 중의 8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도둑질하지 마라.”는 것이다. 이 명령이 단순히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뜻만 있을까? 아니다. 4계명은 보다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 시간만큼 부모님의 세월을 도둑질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한 것이다. 사명 운운하면서, 상급 운운하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 하지말자.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온다. 아침 일찍 먼저 고용된 자도 세 시쯤에 고용된 자도 여섯 시와 아홉 시쯤에 고용된 자도 그리고 열한 시쯤에 고용된 자도 주인에게서 모두 한 데나리온씩 같은 품삯을 받는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일만 신실하게 하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을 주신다.
성경에는 두 가지 상(賞)이 나온다. 하나는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상급(고전9:24)이 있다. 헬라어로는 ‘브라베이온(brabeion)’, 영어로는 ‘prize’라고 한다. 또 하나는 그 행위에 따라 주는 공정한 보상(고전3:8)이 있다. 헬라어로는 ‘미스도스(misthos)’, 영어로는 ‘reward’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는 상은 경쟁에 이겨서 받는 상(‘브라베이온’)이 아니라 섬김에 따라 공정하게 받는 보상(‘미스도스’)이다.
비교하고 시간에 쫓기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시간을 구속하며 살자.
시간을 구속하며 사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가? 흘러가는 시간을 되찾는 최선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만이 가장 가치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이 땅의 시간을 영원의 시간으로 만든다.
런던 타임즈에서 큰 상금을 걸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냈다. “영국 최남단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등 한 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이다.” 에녹이 한 일은 삼백년 동안 아들 딸 낳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 밖에 없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하나님은 오늘도 바쁘고 분주한 우리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함께 가자고 하신다. 동행하자고 하신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 보라,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고 사라졌도다.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이르러 멧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를 내며 연한 포도가 달린 포도나무는 좋은 향기를 풍기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아2:10~13)
무한 경쟁을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다. 분주한 것을 넘어서는 것도, 비교의식을 넘어서는 것도, 외로움을 넘어서는 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다. 남은 시간, 하나님 그 분과 동행하면 좋겠다. 그것만이 시간을 구속하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을 어찌 하리.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16, 골로새서 4:5)
웨슬리는 자신의 영적 삶을 위해서 매일 밤 기도 시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며 ‘자기 성찰’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738년 회심 후 그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고 주님의 은혜에 의지하며 “완전한 성결”로 나아가는 목표를 지속하기 위해 밤 기도와 성찰과 결단의 시간을 갖습니다.
자기 성찰의 질문
질문 : 나는 하나님보다 여자나 세상 친구를 더 사랑하는가?
결심 : 나는 기필코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잠과 세상 친구를 버린다.
질문 :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였는가?
결심 : 나는 경건한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결코 부르지 않는다.
질문 : 나에게 경건치 않은 요소가 있는가?
결심 : 나는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 가리라.
질문 : 나는 교만한가?
결심 : 나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복종하리라.
질문 : 나는 게으른가?
결심 : 하루에 6시간은 기도와 연구에 사용한다.
질문 : 나는 잠을 너무 많이 자는가?
결심 : 나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난다.
질문: 나는 불결한 생각을 하는가?
결심 : 나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킨다.
질문 : 나는 거짓말을 하는가?
결심 : 나는 하루에 두 번 마음을 살피고 진실하기로 다짐한다.
질문 : 없고(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결심을 지키는가?)
결심 : 나는 매일 한 번씩 지난 주간의 결심을 잘 지켰는지 조사한다.
웨슬리는 자기 성찰의 질문과 답을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방법과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천국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웨슬리의 9가지 자기성찰을 위한 영적 진단 질문과 답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데 좋은 방법입니다.
1. 아침 기도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정신 차리고 깨어 기도하였나?
새벽 기도회 또는 아침 개인기도 시간에 드린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보통 웨슬리는 기도문을 준비해서 시편 말씀과 함께 읽으며 기도하였고, 하루 종일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하였다).
2.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오늘 하루 일을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일했나?
직접이든 간접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없었는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하였는지?
3.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오늘 실천하며 훈련할 특별한 덕목과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리 점검한 다음에 아침 일과를 시작했나?
4. 착한 일에 대해서
오늘 내가 할 수 있었던 착한 일을 생각해보자.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지?
적극적으로 하였는지?
5. 배려와 사랑에 대해서
남을 도운 일을 생각해보자. 실제 필요보다 더 많이 해서 불편을 끼친 것은 아닌지?
6. 만남에 대해서
오늘 만남을 생각해보자.
누구를 만나기 전에 “이 만남으로 어떻게 서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지?
7. 잘못에 대해서
오늘 남의 실수나 잘못을 말한 적이 있는지?
그렇게 남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했는지?
8. 말과 행동에 대해서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으로 남을 슬프게 한 적이 있는지?
9. 성장에 대해서
어떤 일이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하였는가?
오늘 실천하기로 결심했던 덕목을 갖추는 데 나의 행동이 어떤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았는가?
자신을 점검하는 질문들
하루를 산다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기도하였는가?
한 시간마다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며 감사하였는가?
웨슬리를 따라 하루를 살아보면,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한두 달 계속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게 되고, 조금씩 더 구체적인 기도를
하게 된다.
웨슬리는 자신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 매일 점검할 질문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 목록을 매년 조금씩 고쳐 쓰면서
다듬었다.
거기에 더해서 아침에 3가지 질문, 저녁에 9가지 질문, 또한 주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에 서로 다른 주제와 질문 목록을 만들어 놓고 기도하였다.
크리스천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매일 훈련하고 실천하였고,
날마다 저녁에는 하루 생활을 돌아보며 다시 질문하고 점검하였다.
자기 관리와 기도
영어 문법책, 성경 그리스어 문법책, 성경 히브리어 문법책, 라틴어
문법책, 불어 문법책, 논리학 교재 등을 저술한 웨슬리는 언어 사용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집중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일상생활 언어였다.
쉬운 말로 바꾸어 자신에게 질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어 사용에 점점 더 신중하게
된다.
웨슬리는 자신의 말과 어투와 어법을 사용하는 일에도 늘 조심스럽게 훈련하였고,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언어 사용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언어를 쉽게 풀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 교수이며 목사였던 웨슬리는 쉬운 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려운 내용은 쉬운 말로 풀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값싼 책으로 출판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결과 200여 권의 저작과 기독교 문고가 나왔다. 그의 글에서는 단어 하나마다 그런 배려가 느껴진다.
그가 자신에게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은 그렇게 치열한 자기 관리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평생을 반복하며 기도하는 웨슬리의 질문은 나이 89세(만87세)까지 계속되었다. 80세가 되어서는 “올해가 내 생의 최고의 해가 되기를” 기도하는 웨슬리를 만날 수 있다.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러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계속하였던 기도와 질문이 도전이 되는 까닭이다.
웨슬리 건강의 비결
자신의 건강 비결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60년 이상 꾸준히 새벽에
기도하는 생활이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 생활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편지에는 말을 시작하는 어린
나이부터 주기도문을 암기해서 기도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양한 기도문을 암기하도록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여러 가지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가 암기하고 있는 기도문을 반복해서 글로 적어 보는 훈련이기도 하였다. 짧은 부호와 약어를 사용해서 적어가는 방법은 필기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쁜 생활 속에서, 분초를 다투며 기도문을 기록하는 웨슬리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기도문을 암기하려고 노력했고,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기도와 질문이 쉼 없이 반복되면서 자기 관리로 이어졌고, 규칙적이고 끊임없는 그의 기도가 평생 건강을 지켜 주었다는 것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풀어 번역한 웨슬리의 질문들
웨슬리의 질문을 번역하면서 그의 설교문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선한 청지기”는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질문하는 웨슬리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설교이다.
그의 질문이 설교와 연결되어 있고, 크리스천의 덕목과도 연결되어 깊은 묵상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편지를 쓸 때도, 일기를 쓸 때도, 같은 주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질문이 더 깊은 기도와 실천으로 안내하고 있다.
■ 매일 아침 자신에게 하는 질문
1. 나는 오늘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출발하고 있는가?
2. 어제 이후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동을 살펴보고 반성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가?
3. 오늘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다 하며,
오늘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할 결심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가?
1. 나는 아침에 드리는 개인기도, 함께 드리는 공동기도에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참여 했는가?
2.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지 않거나 하나님의 영광과는 관계없이 무슨 일을 한 것은 없는지?
3. 아침에 하려고 생각했던 덕목은 행했었는지, 무슨 계획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없는지 생각해본다.
4. 오늘 하루 내가 할 수 있었던 선한 일에 최선을 다 했는지?
5. 다른 이에게 봉사하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일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는지?
6. 내가 방문을 받고 다른 이를 방문하기 전에 어떻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7. 다른 사람의 실수를 상대방에게 꼭 도움이 될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게 지적한 적이 있는지?
8.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을 말로나 행동으로 슬프게 한 일은 없었는지?
9. 내가 오늘 하루 행한 모든 행동이 덕을 쌓았으며, 더욱 덕스러운 삶을 향한 발전적인 삶을 살았는가?
■ 하나님 사랑에 관한 질문(주일 저녁)
1. 오늘 하루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자비를 묵상하고 생각하는 경건한 시간을 가졌는지?
2.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하늘나라의 쉼과 거룩함을 맛보는 하루가 되도록 힘썼는지?
3. 기도와 묵상, 그리고 말씀을 읽는데 사용하지 않은 시간은 꼭 필요한 일과 남을 돕는 일에 사용했는지?
1.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 일들이 있었는지 양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2. 나는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고 이웃과 함께 슬퍼하는 삶을 살았는가?
3. 나는 이웃의 부족함을 보고 분노하기보다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4. 좋은 대책 없는 반대, 혹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가능성도 없으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았는가?
5.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항상 최종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가?
1. 나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칙에 기본을 두고 살고 있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나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2. 오늘 하루,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나의 죄 됨을 생각할 시간을 잠시라도 따로 가졌는가?
3.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신 일을 조금이라도 나의 공로로 돌린 적이 있는가?
4. 사람들로부터 받을 칭찬을 염두해 두고 무슨 말을 하거나 일을 한 적이 있는가?
5. 나는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갈망하고 있는가?
6.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을 즐겼는가?
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신을 칭찬하고, 상대방 면전에 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을 칭찬하였는가?
8. 나에게 해 준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 있는가?
9.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말을 했는가?
10. 나의 책임과 의무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냉담과 조소를 받았을 때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받았는가?
11.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살았는지?
12.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첫째로, 내 자신이 실족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둘째로,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
셋째로, 이런 일을 통하여 나의 교만함이 치유되고 더 겸손에 이르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는가?
13. 선한 일이나 선한 의도 없이 화를 낸 적이 있는가?
■ 금욕에 관한 질문(수요일 저녁)
1. 단순히 즐기는 목적만으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가?
2. 나의 감정이 나를 유혹할 때 감정에 치우쳐 생활하였는가? 혹은 감정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할 수 있었는가?
3.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정된 은혜와 금욕의 수단들이 불편하도라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경건의 연습을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4. 자기 자신을 부정(Self Denial) 경건의 연습을 피하기 위해서 특별한 핑계를 만들어 낸 적이 있는가?
5.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았는가?
6.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 한에서 나의 의사를 반대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본 적이 있는가?
7. 그리스도의 고난과 나의 죄를 보다 실감 있게 묵상하고 느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하지 않으며 나의 죄 된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시간을 가졌는가?
1.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는가?
2.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든 지혜의 근본이시며 선하신 하나님께서나를 위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했는가?
3.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하신 일들을 마친 후에, 미래에 관한 한 모든 일을 완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겼는가?
하나님이 어 떤 길로 인도하시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는가?
4. 이미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나의 몸, 영혼, 친구, 명예, 그리고 재산을 드린 내가 다시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도하고 있는가?
5. 나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을 즐겁게 하고, 온유하며, 예의 바르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6. 나의 화난 모습, 친절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 특히 하나님의 세계에 관해 말을 할 때 그렇게 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1. 단순히 즐기는 목적만으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가?
2. 나의 감정이 나를 유혹할 때 감정에 치우쳐 생활하였는가? 혹은 감정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도할 수 있었는가?
3.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정된 은혜와 금욕의 수단들이 불편하도라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경건의 연습을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4. 자기 자신을 부정(Self Denial) 경건의 연습을 피하기 위해서 특별한 핑계를 만들어 낸 적이 있는가?
5.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았는가?
6.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 한에서 나의 의사를 반대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본 적이 있는가?
7. 그리스도의 고난과 나의 죄를 보다 실감 있게 묵상하고 느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하지 않으며 나의 죄 된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시간을 가졌는가?
■ 감사에 관한 질문(토요일 저녁)
1. 지난 한 주간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에 대해 감사할 시간을 가졌는가?
2. 하나님의 축복에 보다 민감하게 느끼며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신중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감 사하는 시간을 가졌는가?
3.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에 빚진 자로서 더 큰 의무가 있음을 깨닫고좀 더 거룩한 삶으로 부 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1.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기
2.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우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분께 하루의 첫 열매를 드릴 것
3.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기
4. 옷을 입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하루를 30분 정도 새벽기도를 함으로써 시작한다.
5. 옷 입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옷은 깨끗하고 정숙하게 입을 것
6. 아침에는 영성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고 그 읽은 내용을 묵상하고 하루 종일 되새기며 생활한다.
7. 성경은 매일 정기적으로 순서대로 읽고 묵상한다.
8. 오후에는 일하거나 방문하는데 시간을 쓰며 잠시라도 기도하고 말씀의 묵상을 다시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9. 밤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 지며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 매일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했습니다.
1.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2. 너는 매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3.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범사에 감사하는가?
4. 너는 욕심내는 것이 없는가?
5. 너는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가?
6. 너는 네 중심에서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7. 무슨 말이나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위의 것을 찾으라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밖에서만 찾고 만나려고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미 거미가 명주처럼 보드라운 실로 자기 새끼들을 자기 곁에 두듯이 우리를 밀접하게 이끄십니다.
하늘을 보지 말라!
Dont look up!
하늘을 보지 말라!
Dont look up!
무관심 한 인간들이란 결국 목자 없는 양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4무(無)병’
1. 무목적
2. 무감동
3. 무책임
4. 무관심
제일 악한 것은 무관심입니다.
무관심 중에 제일 악한 무관심은 영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돈 룩업(Don't Look Up)"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혜성 충돌이 임박했음에도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대통령, 지구종말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업가,
그리고 음모론에 휩싸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대중들의 모습이 영화에 나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계, 언론, 미디어, SNS, 테크기업 등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돈 룩업(Dont look up)"이란 "위를 보지마! 혜성이 오는걸 보지마! 진실을 보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그 반대는 "저스트 룩업(Just look up)" "하늘을 올려보라!" 거기에 진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삶은 죽음이 있고 결산이 있고,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하늘을 보지 말고, 오직 땅만 바라보는 넝마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카르페 디엠(현실을 즐겨라)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속에서 나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누가복음 21:34)
♦ 6월 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위엣 것을 찾으라(1절)
♦ 성구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右便)에 앉아 계시느니라.
Since, then,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set your hearts on things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축복합니다(빌 3:14).
성도들이 왜 위엣 것을 찾아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죽음이란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롬 6:6, 11)
죽음이란 율법에 대한 죽음입니다(롬 7:4)
죽음이란 세상에 대하여 죽음입니다(갈 6:14)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치는 땅의 것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땅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지만 위의 것은 영원합니다.
비록 우리들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들의 가치는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옛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은 새 날을 위한 새 삶의 기회를 약속받은 날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날에는 새 몸과 새 생각과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 고대가”를 소개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 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 찬양 /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겡글리뉴로파디(ganglineuropathy)
더욱 치명적이고 위험한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감각증'이라는 병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 병에 걸린 자들을 가리켜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라고 진단하였다(딤전 4:2)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 가겠습니까?"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1: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복음의 소망(23절)
♦ 성구 : 만일(萬一) 너희가 믿음에 거(居)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福音)의 소망(所望)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福音)은 천하 만민(天下 萬民)에게 전파(傳播)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福音)의 일군이 되었노라.
바울의 옥중서신은 “에베소서”는 교회론,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 “골로새서”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복음의 소망”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위엄”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의 근거는 구속 곧 죄 사함입니다(14절)
복음의 소망은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8절)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22절)
복음의 능력은 어느 날 내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마침내 나를 변화시켜,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나도 거룩한 자로, 그가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것처럼 그분을 닮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주 앞에 온전히 세워 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온전하게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중보 기도(3절)
둘째는 복음만을 들어라(5절)
셋째는 들은 것을 깨달으라(6절)
넷째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라(10절)
다섯째는 서로 화목하라(20절)
여섯째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라(29절)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주 안에서 복음의 열매 맺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J - Jesus(예수님)
O - Others(다른 사람들)
Y - Yourself(당신 자신)
항상 기뻐하라(always rejoice)
왜냐하면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환경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려면 좋은 성품을 유지하라!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 한다.
나무를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좋은 나무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지만 나쁜 사람은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남편을 일찍 잃고 어렵게 딸을 키우며 산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유일한 어머니의 희망이었던 이 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이 딸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엄마!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제가 들어줄게요.”
그러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교회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딸은 기꺼이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회에 간 첫날 좋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서로 험담하는 여자들, 불의한 청탁을 하는 장로님, 식당에서 서로 먹겠다고 다투는 사람들 등등.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딸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다음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을래.”
그러면서 자신이 교회에서 보았던 많은 일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는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얼굴 밖에는 보지 않았는데, 너는 하루 동안에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성숙한 성품은 좋은 것만 보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미성숙한 성품은 나쁜 것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평과 불만이 될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 나로 하여금 좋은 성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나쁜 성품이 되기도 합니다.
엄청난 기쁨
어느 날 한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우리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혼자 살면서 어린아이 다섯을 키우니라 무척 어렵게 삽니다. 남의 집 빨래를 하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이 주일날이 되면 꼭꼭 5센트의 헌금을 합니다.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그 여집사님한테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장로님은 매주일 2불씩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센트의 2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장로님의 권면인즉 그 집사님의 몫까지 자기가 대신할 테니 그 집사님을 불러서 헌금하지 말라고 애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집사님을 불러 "장로님이 당신의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줄 알고 매주 헌금하는 것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 안하셔도 괜찮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여집사님은 앉은 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십니까?" 하고 목사님이 묻자 여집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남의 집 빨래를 해가며 고생스럽게 살지만 하나님께 5센트씩 바칠 때에는 더할 수 없이 기쁘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결국 장로님도, 목사님도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에 바치는 일 자체가 엄청난 기쁨입니다.
이것을 바침으로써 복받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나 헌금은 그행위 자체에서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웃음은 내면의 조깅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어른들이 믿었던 웃음의 미덕과 그 위상은 거의 불로장생의 명약쯤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웃음은 즐거운 마음에서 비롯될 진데, 마음의 힘과 기(氣)의 흐름, 그 불가시한 세계의 초월적 힘을 동경했던 이들로선 즐거운 마음이 곧 건강한 몸을 만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의학적으로 입증된 웃음의 효과
스탠퍼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William Fry) 는 웃음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한번 크게 웃을 때면
평상시 움직이지 않던 근육 중 230개 이상이 움직인다. 이로 인해 혈액순환이 활발해져 산소와 영양분이 피부 곳곳에 전달돼
피부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
웃음을 이용한 의학적 치료의 권위자로
통한다.
그에 따르면 15초 동안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면 100m를 전력 질주한 운동 효과와 맞먹는다고 한다.
또 크게 한번
웃으면 윗몸 일으키기를 25번 하는 효과와 3분 동안 노를 힘껏 젓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순환을 촉진시키고,
근육을 자극하며, 폐와 호흡기 계통을 강화시키는 한편, 엔돌핀을 촉진시킴으로서 에어로빅 운동에 버금가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 외의 다른 많은 연구에서, 웃음은 통증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발생하며, 하루15초 더 웃는 사람은 이틀을 더 살게 된다고
하고, 또한 면역계 세포의 증식을 도와 면역력을 높인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이 1분 동안 마음껏 웃으면 10분 동안 에어로빅, 조깅, 자전거를 탈 때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인 긍정적 변화를 몸 안에 일으키게 된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4: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항상 기뻐하라(4절)
♦ 성구 : 주(主) 안에서 항상(恒常)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기뻐할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 유지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려면 항상 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옥중서신(獄中書信)으로 분류되는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와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유행하는 어긋난 세상은 화인 맞은 양심의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는 사도 바울과 같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서 불 일어나듯 뜨겁게 타 오를 것입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어떤 환경”이 아니라 “주 안에서” 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는 어떤 환경이든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3절)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기 때문입니다(8절)
자족할 수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11절)
자족(아우카르케스. αὐτάρκης)이란 채워지지 않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족이란 "만족한" "자기 만족의" 라는 뜻입니다.
만족(아우타르케이아. αὐτάρκεια)이란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졌을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족이란 "충분함"이란 뜻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무장하는 자족하는 신앙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게로 와서 쉬어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부름의 상(the goal to win the prize)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Beware of the dogs, beware of the evil workers, beware of the false circumcision;
개 / 진리를 거역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
예수님께서는 1.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마 7:6)
2. 이방인(마 15:26-27)
본문에서는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 자들(Michal)
손할례당 / 인간의 의식적 노력을 강조하는 사람들
반대 : 할례당 1. 성령으로 봉사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
3.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
유치부 어린이들의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어 경주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어머님들은 자기 아이들을 응원하려고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출발선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일열로 달리기 준비를 하고 있었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 모든 아이들은 앞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갑자기 자기 엄마가 손을 마구 흔들자 엄마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모두 웃고 말았습니다.
어린이는 엄마가 빨리 달리라고 손짓하는 것을 마치 자기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렸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목표가 잘못 되었습니다.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부름의 상(14절)
♦ 성구 : 푯대를 향(向)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爲)하여 좇아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그리스도인들이 달려야 할 목표는 “부름의 상” 입니다.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것은 부르심의 뜻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 받은 것, 베냐민 지파,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생 이라는 학자” 라는 신분을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위해 달려가겠다고 고백합니다.
성취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가치 중심적인 삶을 결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름의 상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베드로전서 5:10)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린도전서 9:24)
부름의 상을 위하여 믿음의 사람이 갖춰야 할 신앙적인 자세를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3절)
둘째,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라(3절)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3절)
넷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갖추라(8절)
다섯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소속 의식을 잊지 말라(20절)
오늘도 부름의 상을 위하여 신앙의 진보를 완성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를 앙모하는 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신격 외에는 다른 존재 방식을 갖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존귀한 그리스도께서 한갓 피조물의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
신적 존재 방식을 피조물의 존재 방식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것도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러셨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예수님의 본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에서 누리다가 포기한 특권이 무엇이었는지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역시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을 비우셨는지’보다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네 가지 변화
첫째, 그리스도는 본래 율법의 제정자요 수여자였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율법의 판단을 받는 자리로 가셨다.
둘째, 그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충족하시는 분이었으나 우리에게 참된 부요를 주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
셋째, 성부 하나님과 누리던 영화를 포기하셨다.
넷째, 독자적으로 행할 권리마저 포기하셨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며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 죽기까지 복종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11).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그분을 본받아 그분의 마음을 품고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지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설혹 고난을 당하더라도 이처럼 ‘높여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다.
또한 모든 무릎, 모든 입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라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결론을 알고 있기에 어떤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다.
‘나와 너’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걸고 섬겨주신 자들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어느 지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섬기게 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에 반응하며 진정한 복음을 살아내는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박종홍교수
우리나라 철학자 가운데 한국의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박종흥 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계시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적 자문을 해 주시던 박학다식했던 분입니다.
특히 진리를 사랑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이분이 국민교육헌장을 만드셨습니다.
1976년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는데, 임종이 가까워졌습니다.
하루는 제자가 찾아와 위로 합니다.
“선생님, 극락세계에서 영생하셔야지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극락이 보이질 않아. 앞이 캄캄할 뿐이야.”
제자는 난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천국가야 할텐데,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눈 앞이 캄캄하다고 하니 어떻합니까?
“선생님, 그러면 예수 믿어 보십시오.”
이 말에 그분이 예수믿기로 작정하고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님을 모셔다가 요한복음3:16을 읽고 예수믿고 세례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유언이 기독교식으로 장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지식과 뛰어난 인격과 성실한 그의 인품이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가지고 천국 갈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8)
(예화)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OM, 1840. 6. 2 ~1928. 1. 11), 환상을 쫓는 여인
<환상을 좇는 여인>은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가 189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19세기 영국의 여자들은 경제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기에 결혼해야만 안정적인 미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주인공 엘라는 체구가 작고 우아했으며, 영혼이 드러나 보이는 밝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 또한 어머니에게서 여자에게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에, 키가 크고 긴 얼굴에 갈색 수염을 기른 적당한 남편감이었던
‘마치밀’과 결혼한다.
신혼이 지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엘라와 마치밀은 서로 다른 점들을
발견한다.
가난한 시인의 딸인 엘라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시를 좋아했지만, 총기 제조업을 하는 마치밀은 무기가 필수품이라고 생각하며
무기가 필요한 세상에 매우 만족했다.
마치밀은 엘라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지만 늘 고지식하게 말했다.
엘라는 그런 남편을 천박하고
세속적이라고 생각했고, 마치밀은 아내가 감상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에 몰두하며 산다.
부부는 여름휴가를 맞아 세 아이들과 함께 휴양지인 솔렌트로 가고, 운명의
장난인지 엘라가 좋아하는 시인 ‘로버트 트리위’의 빈 집에 머문다.
엘라는 답답한 일상에서 좋아하는 시를 쓰는 것으로 삶의
생기를 유지하며 지냈다.
예전에 자신이 쓴 시를 ‘존 아이비’란 필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신문에 트리위와 자신의 시가
함께 실리면서 그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잠시 다른 곳에 간 트리위의 집에 머물게 된 엘라는 관광도 하지 않고
요트도 타지 않고 거의 집에서만 지낸다.
트리위가 적어놓은 메모를 보고 그리움에 젖고, 트리위의 옷을 입고 ‘그의 영감이 내려서
멋진 시를 쓰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엘라는 트리위가 쓴 시를 다시 읽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진정한 내 모습과 더 가까워.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진정한 내 모습과 더 친밀하다고.”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자신과 너무 다른 마치밀을 보며 마음이 남편에게서 점점 멀어진 엘라는, 만난 적은 없지만 자신과 닮은 트리위에게 마음이 갔다.
트리위를 한 번 만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엘라는 트리위의 시를 읽고, 필명으로 그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아는 화가를 통해서 트리위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려고도 했지만 무산된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어긋나자 엘라는 더욱 애가 탄다.
한편 트리위는 새 시집을 출간해 언론의 주목을 받지만 그것도 한순간, 그는 자신의 시에 대한 혹평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엘라는 트리위의 묘를 찾아가 비통해하고, 하숙집 주인에게 부탁해서
트리위의 머리카락과 사진을 받아 간직한다.
엘라는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슬픔에 빠져 몸이 점점 약해져 갔고, 결국 아이를
낳고 죽는다.
마치밀은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트리위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갓 태어난 넷째가 트리위와 닮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소리친다.
“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 상관없는 놈이다!”
엘라의 고독한 삶, 그 삶의 황량함에 대해
이 소설을 처음 읽고,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빠져 살 때 인간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을 사실과 다르게 어둡게만 치부할 때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문득 ‘엘라가 환상에 빠지지 않고 현실에 맞추어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비극적으로 마치지는 않았겠지만 행복했을 거라고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고독한 삶이 환상에 끌릴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엘라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가깝든 환상에 가깝든,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려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꿈꾸며 산다.
엘라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고, 자신을 꼭 닮은 시인 트리위를 만나고 싶었다.
트리위는 자신이 쓴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기를 바랐다.
우리 인생이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듯 소설 속 인물들도 그랬다.
트리위는 자신이 쓴 시들에
혹평이 쏟아지자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했고, 엘라는 트리위를 만나고 싶다는 꿈이 사라져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 죽고
말았다.
꿈이 깨질 때 사람은 휘청거리고, 심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각기 모양과 방법은 다르지만 행복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것이 무너져내릴 때 좌절한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사업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좌절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어떤 때에는
죽음과 바꿀 만큼 강한 슬픔과 고통을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행복을 향한 우리의 여행은
대부분 고독하다.
엘라나 트리위처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죽어버릴 만큼 외롭다.
거꾸로 생각하면, 외롭고 고독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행복을 스스로 얻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행복을 얻기 위한 여정을 외롭게 이어갔다.
나를 향하던 햇볕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따스한 햇볕을 무수히 받으며 산다. 잘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는 햇볕 같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 따스함을 느끼고 알 때, 우리는 넘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따뜻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살아간다. 살다가 ‘이젠 정말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슬픔과 고통과 좌절을 느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조금만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자.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자. 그들과 연결될 때, 우리는 인생의 고독한 여행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아무 조건 없이도 마음에 잔잔히 흐르는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엘라나 트리위가 이제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다며 절망 속으로 끌려들어갈 때에도 그들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
여자 주인공 "엘라"는 필명으로 "존 아이비"를 사용하여 시를 발표하며 즐거움을 누렸다. '엘라'가 존경하는 유명한 시인 "로버트 트리위"를 마음에 담고 여름 휴가철에 그의 빈 집에 머물며 그의 모든 것을 느끼는 즐거움을 좋아하였다. 넷째 아들을 임신하였을 때 너무나 '로버트 트리위'를 흠모 하였으며 심지어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유품으로 머리카락과 사진을 갖게 된다. '엘라'가 넷째를 낳을 때 죽었으며 태어난 아들을 본 남편 '마치밀'은 아들이 시인 '로버트 트리위'를 닮았다는 이유로 “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 상관없는 놈이다!” 라고 소리친다. 한 여인이 흠모했던 시인의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의 교훈에서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닮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일생토록 노력하고 훈련해야 할 과정이라고 하겠다. |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2: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5절)
♦ 성구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간단하게 표현한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12b),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소개됩니다(15b).
교리를 강조하면 삶이 흐려진다.
삶을 강조하면 교리가 가리워진다.
교리와 삶을 조회롭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적 존재 방식'에서 '피조물의 존재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죽음을 통하여 세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
둘째,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영적 죽음
셋째, 죄에 대한 최종 심판으로서의 형벌인 둘째 사망(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이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아들이 다 이룬 의를 아버지가 기뻐하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에게 영화가 됩니다.
아들의 영화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그분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 아들을 속죄의 값으로 내주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영화는 그와 함께 자녀가 된 우리의 영화의 첫 열매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우리가 그와 함께 높임을 받게 되는 길이 열립니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고 언어로 표현되지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고린도전서 11:1)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를 점검해 봅시다.
나의 자녀들에게 "너희는 나처럼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너희는 나처럼 예수를 믿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밖에 없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말을 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복음의 진보(進步) - 복음의 퇴보(退步)
그런데 문을 닫았어요.
어제가 미국의 현충일 공휴일이지만 관공서가 대부분 휴일이지만 일반인들은 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확인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갔더니 휴업입니다.
다시 돌아오면서 다니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다니엘아,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는데 약국에 갔는데 휴업이라 되돌아 가야 하는데 무엇이 감사할까?"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나는 더운 오후에 몸이 나른한 시간이지만 이렇게 걷게 하여 감사하다"
"나는 내일 다시 약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감사하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매임
7절 /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12절 /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절 /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절 /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1:27a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
내가 주인이 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께 나가는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있다면 예배하라고 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하라고 해서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 5월 3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1: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복음의 진보(12절)
♦ 성구 : 형제(兄弟)들아 나의 당(當)한 일이 도리어 복음(福音)의 진보(進步)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Now I want you to know, brothers, that what has happened to me has really served to advance the gospel.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으로 분류합니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며 각 장의 기쁨을 살펴보겠습니다.
1장은 삶의 기쁨
2장은 봉사의 기쁨
3장은 친교의 기쁨
4장은 상급의 기쁨
“복음의 진보(advance the gospel)”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에서 출발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세상은 거친 풍랑이 솟구치는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거친 바다에서 기쁨을 누리려면 오직 예수 복음의 진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보는 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기쁨을 유지하려면 날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한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한 영양분이 되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립보서 1:2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디모데전서 4:15)
매일 함께 읽어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 복음의 진보가 내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생명의 복음이 부흥하는 역사를 삶에서 경험하므로 승리의 기쁨을 날마다 확신하며 즐기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6: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령의 검(17절)
♦ 성구 : 구원(救援)의 투구와 성령(聖靈)의 검(劍)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성령의 검(the sword of the Spirit)”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때문입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서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전투를 위한 무기를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구분한다면 방패는 방어용이지만 ‘성령의 검’은 공격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이끌려 영적 전투에 임하셨을 때 성령의 검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매순간마다 예수님은 사탄을 공격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고(신 8:3, 6:13, 6:16) 마침내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눅 4:13).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그 고통을 이기셨고 끝까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로 죽임당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으므로 “가상칠언(架上七言)”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에도 “메시아 시편(22:1∼31:5)”을 인용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편 31:5)
극심한 고통과 사람들의 조롱, 사랑했던 제자들의 배반과 배신, 사탄의 비웃음,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는 아픔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자신을 공격하는 나쁜 감정과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검은 믿음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 무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암송하고 마음에 새김으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코리텐붐 여사(Corrie ten Boom)는 “암송한 성경 말씀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Nobody can take away from you those texts from the Bible which you have learned by heart.)”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셨던 것처럼 성령의 검 즉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며 선포하여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매번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검은 결코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암기하고, 순종할 때 사탄을 이기고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 찬양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빛을 보고 부딛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한참을 가는데 어떤 사람과 그만 "탁!"하고 부딛치고 말았다.
맹인은 화를 내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나 부딪친 사람이 손으로 맹인이 손에 등불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네."
등불을 들고는 있지만 이미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닌다.
꺼진 것을 모르고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
불공평한 사회의 한 단면을 고발하는 말입니다.
히브리 속담에는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고아를 웃기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함께 웃을 것이다"
가장 힘 없고 불행한 사람인 고아가 웃는다면 하늘과 땅, 온 세상이 웃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힘 없고 불행한 사람까지도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는 어느덧 행복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밝게 만들려 하여도 밝아질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 어두워질 뿐입니다.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빛입니다.
세상에는 빛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이 비추어질 때 사회의 어두운 부분인 불의, 불공평, 잔인함, 착취 등이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하나님이십니다.
♦ 5월 2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5: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안에서 빛이라(8절)
♦ 성구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For you were once 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Live as children of light.
에베소서 5장은 영적 생활의 원리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을 위한 기본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빛’의 삶을 잘 하려면 먼저 “주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직접 빛이 될 수 있는 발광체(發光體, Luminator)가 있는가 하면 빛이 될 수 없는 비발광체(非發光體, Non luminous)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발광체라고 하며 반면에 달은 비발광체라고 합니다.
진노의 자녀로서 인간은 이미 빛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빛을 발하려면 먼저 태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빛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을 본받아라(1절)
2. 사랑가운데서 행하라(2절)
3. 감사하는 말을 하라(4절)
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5. 세월을 아끼라(16절)
6. 주의 뜻을 이해하라(17절)
7.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절)
빛의 자녀가 된 믿음의 동지들이여
내 손에 들려 있는 등불이 빛을 발하고 있었는지 점검합시다.
그리고 꺼진 등은 먼저 불을 밝힌 후에 세상에 나가 작은 불꽃이 되어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 산위의 등대와 같이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빛의 사자들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hX_MlJmBIr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경북대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던 중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스님으로 일을 하면서 불교계의 비리를 알게 되어 불교대학을 설립하려고 공사를 진행 중 사기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어느 날 불경책을 달라고 하였는데 간수가 성경책을 가져왔다고 한다.
오늘은 불경책이 모두 대출되어 없으니 성경이라도 읽어보라고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데 누가복음 7장을 읽는데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는 말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사례가 불교에서도 전해오는데 석가모니는 어느 과붕의 아들이 죽었을 때 저 아래 마을에 내려가서 한 번도 죽음이 없었던 집에서 쌀 한줌을 얻어와 끓여먹으면 살릴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을에 가서 쌀 한줌을 얻으려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안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석가모니를 찾아왔더니 사람은 생자필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년아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였는데 그 청년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을 공부한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독방에서 아침, 저녁 염불과 참선 불경공부로써 하루의 일과를 보내게 되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불경도 보지만 때로는 교도소 도서관의 불경인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원각경 등을 빌려 보게 되었다.
도서 대출은 군복무를 마치려고 교도소에 배치되어 있는 경비교도대 대원이 업무를 맡아 보고 있다.
한 두어 번은 불경을 잘 대출해 주다가 하루는 느닷없이 대출 신청한 불경은 가지고 오지 않고 기드온 협회 발행의 “신약성서”를 갖다 주는 것이다.
“불경은 어떻게 하고 대출 신청도 하지 않은 기독교 책을 가지고 왔소?”
“불경은 대출되고 없어서 심심하실 것 같아서 기독교 책을 가지고 왔으니 스님 한번 읽어 보십시오.”
“거짓말 하지 마시오. 그 어려운 불경은 볼 사람이 없는데 5권이나 신청했는데 한 권도 없이 다 대출되었소?”
“스님! 저는 대학 재학생입니다. 스님께서는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 하는데 제자가 스승님께 꾸중을 들어도 당연하지요. 그러나 스님! 기독교도 수억의 인구가 믿고 있으니 여기도 진리가 있을 것이니 한번 읽어 보십시오.
저는 내일 제대합니다. 스님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횡 가버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얄밉고 괘씸한 생각이 드는지 그러면서도 참 기독교인들이 지독하다고 생각되었다.
비록 독방에 수감되었으나 골수 불교승려에게 전도하는 열의가 한편 부러웠다.
불교는 소극적이며 전도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아서 “나무아비타불”을 여러 수 천 번 외우고 참선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책을 이튿날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복음을 처음 접할 때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았다.
평소에 그렇게 염원하던 생사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럴 수가 있나?
갈등에 몸부림쳤다.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를 단 한 가지만 비교하자.
옛날 인도의 구시라 성의 시다림(林)이란 한가한 숲속을 석가모니는 제자들과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 숲속에서 한 젊은 과부가 애통하니 울고 있었다.
외아들이 죽어서 너무나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젊은 여인을 보고 울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하였으나 그 여인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석가모니에게 “부처님이시여 내 외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다.
이에 할 수 없어서 석가모니는 “자매여 일어나서 마을에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먹이면 너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젊은 과부는 기뻐서 마을로 힘 있게 걸어갔다.
그런데 저녁에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그 젊은 과부는 빈손으로 힘없이 돌아왔다.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한 톨의 쌀도 못 얻고 빈손으로 왔습니다.”
“자매여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석가모니는 이 한마디의 위로의 말을 주려고 젊은 과부를 하루 종일 걷게 만들어 놓고 허탈상태에서 기진맥진하였을 때 가장 인간적인 척하여 얄미울 정도의 지혜를 짜내어 위로의 말을 한 것뿐이다.
여기서 기독교적인 입장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의 애통한 장례행렬을 보고 자비로써 그 외아들을 살리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과부와 외아들의 죽음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 주었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삶의 기쁨을 맛보았다.
바로 여기에 부활이고 생명인 참 진리가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근본적인 생사문제에 있어서 문제만 제시하였으나 그 해답의 열쇠는 주지 못했다.
예수님은 문제뿐만 아니라 해답의 열쇠를 주셨다.
참 진리를 발견하였는데 차마 개종의 길로 돌아설 수 없었다.
수십만의 불교신도들과 수백의 승려가 따르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구나 부모님을 배반하는 것 같아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나는 8개월 가까이 고뇌에 몸부림쳤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생명성(生命聲)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편 썼다.
“아침에 열리지 않은 한가한 옥창을 바라보지 못할 이름 모를 들새 하늘 가까이 날아와서 울어 울고 있네, 삼독(탐심, 성냄, 어리석음)에 크게 취해서 깨닫지 못하는 중이 있다기에 비록 새지만 날아와서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오.”
나는 84년 8월20일 교도소를 나와서 거처하던 경북 달성군 옥포면에 있는 장수사에 들러서 6일간 몸에 안정을 취했다.
복음을 접하고 난 뒤에 더욱 번뇌와 고뇌에 몸부림쳤다.
내가 불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마음이 흔들린다고 생각하고 순천 송광사의 선원(禪院)에 가서 많은 수행을 쌓으면 번뇌를 잊을 것으로 생각하여 84년 8월 27일 순천을 향해 가다가 진주에 내려서 내가 교사생활 할 때 친구인 삼천포공업고등학교의 은두기 선생을 찾아가서 하루 저녁 쉬면서 나의 괴로운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은두기 선생은 아무런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불신자이다.
은선생은 나에게 좋은 충고를 하는 것이다.
“혜경스님은 송광사 사원에 가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당신 머리 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으니까 말이오. 돌아서려거든 한 나이라도 젊을 때 개종하시오. 예수교사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도에 한번 물든 사람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고 들었소.”
친구의 간절한 충고로써 막연히 부산에 와서 평소 교도소에 복음 전하는 단체의 전화번호를 알기에 전화를 걸어, 오늘에 이르렀다.
84년 8월 29일 수요일 처음 교회 나가서 찬송가를 듣고 느낀 바 있어서 한 편의 글을 써 보았다.
“問眞行客心不閑, 尋道歸僧尋明鏡, 深深山寺不覺道, 敎會讚頌到耳岸 : 진리 물어가는 나그네 마음이 바쁘고 도 찾아 돌아서 가는 저 중 마음이 밝은 거울 같은데 깊고 깊은 산골 절에서 도를 깨닫지 못했는데 교회 찬송 소리가 귓가에 닿네.”
나는 내 인생의 적어도 2/3를 달려가다가 개종으로 돌아서는 데는 죽음을 각오한 아픔이 있었다. 이것은 내 자신의 양심의 해방이고 양심적 자유를 찾은 선언이자 결심인 것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의 사랑 편에 보면 “古文學者必有師 師者傳道受業解惑 : 옛날부터 배우는 사람은 스승이 있었나니 스승 된 자는 반드시 바른 도를 전하고 바른 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바른 도를 전하지 못하고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거짓 도를 전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첫째는 비록 모르고 했더라도 하나님께 지은 죄를 속죄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요 생명의 도인 예수님께 돌아오기 바람이다.
극락은 설화(說話)
많은 세상 사람들은 “불교나 기독교나 같고 극락이나 천국이나 같은 것이니까 마음 바로 쓰고 죄짓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 것이나 믿으면 되지 불교 기독교 가릴 것이 무엇이냐?”하는 식으로 주관적이고 안이하게 자기 자신의 근본문제를 포기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야 말로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장미 밭에 가 보라. 같은 종류의 장미는 많아도 엄밀히 따지면 같은 장미는 하나도 없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어떠한 사물치고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위대한 섭리다. 여러분, 어떻게 극락과 천국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극락은... 석가모니의 설화적(說話的)인 이야기이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극락과 원각경에서 말하는 극락과는 서로 다른 것이다. 같은 불교경전이라도 이렇게 서로 틀리고 모순이 된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소설적인 사실로써 만들어진 극락이니까 서로 모순이 제기 되는 것이다...
극락은 심청전과 같은 설화인데 심청의 이야기는 설화소설로 돌리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유독 극락만은 설화소설이 되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불교적인 문화권에서 생활함으로써 굳어진 사고(思考)의 결과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허황되고 설화같은 극락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어리석은 생활에서 돌이키라는 것이다.
천국에 대하여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한 천국을 올바르게 증거하시기 바란다. 부활은 신화가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로마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운명을 확인하였고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할 때 무덤을 지키던 로마병정이 도망하여 증거하였다. 제자들이 듣고 만져보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500명이나 보았다.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불교의 극락은 Fiction(소설)이고 기독교의 천국은 Non-Fiction(실제적인 사실)이다.
여러분!
심청전 같은 허황된 소설인 극락을 믿으시겠는가?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인 예수님의 천국을 믿으시겠는가?
여러분 스스로 양심적인 판단을 하시기 바란다.
자료출처: 김성화지음. ⌜극락의 불나비(증보판)⌟. (서울: 성광문화사)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 신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을 벗어 버리고 주의 뜻대로 행하는 옷을 입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느끼고 깨달음이 올 때 성령님을 통한 가책으로 회개하고 굴복하고 버린 다음에 주님의 진리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옷을 입고 삽니다.
왜 옷을 입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이지요.
옷을 입지를 않고는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을 입는 이유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옷을 입음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나타내고 또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명한 명품 옷을 사서 입으려고 애를 씁니다.
인류의 첫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는 옷을 입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 따먹고 범죄함으로 그들은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자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게 되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그들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부끄러운 죄를 가려 주심을 예표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롬 13:14)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통해 우리의 죄의 수치를 가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어 우리 몸에 부끄러움을 가렸다면,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속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은밀한 죄들을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멋있게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다니면, 벌거벗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의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죄는 결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른다고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계 3:17)
주님은 우리의 우리의 마음에 깊이 감추어진 모든 은밀한 것도 익히 아십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시 139:1~4)
아무도 모르게 지은 은밀한 죄, 그러나 하나님도 알고 마귀도 아는 그 죄가 어찌 드러나지 않을까요?
그 죄가 드러날 때 얼마나 수치스러울까요?
이것이 바로 벌거벗은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지은 은밀한 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그런 죄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내 마음에 생각으로 지은 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도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죄를 이대로 품고 사실 겁니까?
그리고 이 모습 이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실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이제 그 부끄러움 그대로 우리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으십시다.
이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사도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말씀합니다.(갈 3:27)
사도가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 의미는, 나는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음을 믿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만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예복을 입고 가는 곳이지, 내가 만든 의의 옷을 입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예복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만든 의의 옷입니다.
내가 성수주일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십일조와 전도와 봉사와 선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지킨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옷은 인간의 신분, 즉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분 등을 나타내 준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즉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뜻,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옷의 기능이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약함을 외부로부터 보호한다.
여기서 외부라는 것은 유혹, 사단에서 비롯되는 죄성을 말한다.
둘째로, 예수그리스도는 약함과 수치심을 의미하는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신다.
변화된 모습으로 증거하는 신앙
"그래 자네, 그리스도인이 됐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이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삼위일체라는 말은 무엇인가? 설명을 좀 해보게."
"글쎄, 잘 모르겠는걸."
"그리스도는 설교를 몇 번이나 했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은 어떻게 된 거지?"
"글쎄, 나도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잘 모르겠는걸."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이 없잖아!"
"자네 말이 맞아. 아닌게 아니라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네.
부끄러워.
하지만 이 사실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지.
3년 전,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때는 난 주정뱅이였고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되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에 오는 것일 무서워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참으로 화목해 졌지.
저녁마다 아이들은 목이 빠져라 나를 기다리고 있게 되었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가 나에게 이루어주신 것일세.
또한 나는 지독한 죄인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신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지."
자기의 변화가 우선이다!
유명한 안소니 멜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70세가 된 오늘은 나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 문제에 너무 관심이 많다.
세계 문제에 너무 민감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라.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활방식과 생각, 마음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게 된다.
변화되지 않는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본래의 목적인 빛의 역할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의 변화, 인류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가 당시 러시아 기독교의 무력함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가 진정한 변화의 출발점이며 원동력이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변해야 이웃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변함없는 인생은 고인 물과 같다.
그곳에는 악취가 풍긴다.
기도는 영혼을 정화시키는 묘약이다.
나부터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1931-1987)는 평생토록 영성 지도, 영성지도자 양성으로 헌신하며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앙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드멜로 신부가 쓴 이 짤막한 단상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성실히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죠.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들음’과 ‘올바른 들음’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은, 우리가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이미 자신이 생각한 것을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싶으면 가슴이 시원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싶으면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들음’이다.
‘올바른 들음’은 단순히 남의 말에 찬성과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무슨 말이듣지 '듣겠다'는 겸허한 자세로) 즉 '개방된 태도,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이고 '그렇게 듣고서, 내게서 배움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을 때’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한 수도자가 밤에 창문을 열고 명상 기도를 드리는데 바깥 개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제발 조용해!”
화가 치민 수도자의 마음에 즉시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너도 기도하고 있고, 저 개구리들도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데 너는 왜...?’
개구리들이 소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후부터 수도자에게 개구리들은 도리어 ‘기도의 동반자’가 되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바다로 간 소금인형」에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네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은, 정작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몰아붙여보아도, 힘만 더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수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느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라는 친구의 말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안에서 바다 찾기
“실례합니다.” 라면서 어린 바닷물고기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바다라...?”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인 것 같으냐?”
“아, 여기 말이에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바다.”
실망한 어린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다시 헤엄쳐 나갔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
옛날에 매우 믿음이 깊은 성자가 있었는데, 천사들도 그를 늘 주목했다.
그는 대단히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늘 보통 사람으로서 순진무구하게 살았다.
진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인지 몰랐다.
(신발이 발에 맞을 때는 발을 의식하지 않는다. 옷이 허리에 맞을 때는 옷이나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실제로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면이 있다. 매사에 신경을 써서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그런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아직 성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리라!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직접 치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무수히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일은 주님의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덕행의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주님만 관심의 초점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정 그러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겠습니다.
자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성자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 곳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즉 그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마른 땅에 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 성자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자기가 지나간 후에 항상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그 그림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성인은 잊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성자는 교만으로 넘어지지도 않았고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그 성자의 소원도 충분히 성취되어졌다.
보석보다 더 귀한 것
어떤 수도사가 여행 중에, 우연히 빛나는 보석을 하나 발견해서는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는 한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수도사가 음식을 나누기 위해 자기 등짐을 풀자, 거기에 빛나는 보석이 보였다.
그 동행한 여행자는, 보석을 보고는, 그 보석을 자기에게 달라고.. 수도사에게 부탁했다.
수도사는 기꺼이 선뜻 그 보석을 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각자 자기 길을 갔다.
보석을 얻은 여행자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평생 부와 안락을 보장해 줄, 값비싼 보석을 얻은 행운에 기뻐 뛰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수소문 끝에, 보석을 들고 이 수도사를 다시 찾아왔다.
그는 수도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에게 이 보석보다 더 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것을 나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었습니까?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목마른 내 영혼」The Unknown God에 나오는 앤소니 드 멜로의 글
소문
1946년 여름, 기근이 휩쓸 것이라는 소문이 남아프리카 대륙을 휩쓸었다.
사실 곡식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날씨도 추수하기에 정말 좋은 기후였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놀란 2만 명이나 되는 소작농들이 농토를 버리고 모두 도시로 도망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고 남아있던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졸지에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근이 든다는 소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안토니 드멜로, <입 큰 개구리의 하품> 중에서
드 멜로 신부는 ‘반대자들의 갖은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고 하였다.
우리 인생의 여행이 이와 같습니다.
한 무리 관광객들이 봄 소풍을 떠났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을 버스의 상석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 앉힐 것인가?’
‘누구를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바깥에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할 것이다.
앤소니 드 멜로, ‘행복한 삶에로의 초대’에서
진리를 파는 가게
간판을 보고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 각종 진리 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전체 진리’를 찾으세요?”
“전체 진리, 그럼요. 전체 진리를 보여 주시오.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아닌, (가짜 상품이 아닌) 쉽고도 명료한 전체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거요.”
아가씨는 가게 안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그쪽이 ‘전체 진리’를 파는 곳이란다.
그곳 판매원은 걱정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가격표를 가리켰다.
“값이 몹시 비싼데요, 선생님.”
값이야 얼마든, '전체 진리'를 얻고야 말리라는 마음으로, 나는 물었다.
“얼마요?”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싼 값으로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을 줄로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도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기는커녕 걸핏하면 평온과 안일을 갈구하고 있고, 아직도 나 자신을 두둔하고 합리화하여, 조금씩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으며, 아직도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한 나의 믿음들’이라는 은신처를 찾고 있다.
(주/ 대가 치름 없이 얻는 진리, 그러나 내가 ‘전체 진리’라고 확신함. ‘내 믿음’도 그런 범주)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대가를 치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전체 진리’를 얻고 나면.. 그 치른 대가에 비교할 수 없는 큰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종교 박람회’ 중에서
어떤 성자가 시장에 가니까, 시장 분위기가 교회(성스러운 곳)로 바뀌는데
어떤 사기꾼이 교회에 오니까, 교회 분위기가 시장(시끄러운 곳)으로 바뀌었다는 옛말이 있다.
성자는 시장에 가서도... 진리에 귀 기울였다는 뜻이고
사기꾼은 교회에 와서도... 사기 칠 일에 귀 기울였다는 뜻이다.
♦ 5월 2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4: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새 사람을 입으라(24절)
♦ 성구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새 사람을 입으라(put on the new self)
새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옛 사람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다른 말로 “이방인” 이라고 합니다.
에베소 지역의 첫번째 특징은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과 아데미 여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은 종교혼합주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에베소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우 부유한 도시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가서는 돈 자랑을 하지 말라!"
이런 말이 널리 알려졌던 도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도시에 사도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가 에베소교회이었습니다.
화려한 도시생활에서 참된 것을 찾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에베소교회입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르치고 강조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교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하였으며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떻게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라(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둘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셋째, 심령을 새롭게 하라(에베소서 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이 되려면 분명히 옛 사람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새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에스겔 37: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날마다 새 마음을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을 구하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
여 새 사람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과 '동성애'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 가치관과 가족 봉괴, 생명경시, 동성애 합법화 등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이 이른바 '반기독교 세력', 나아가 '적그리스도 세력'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특히 동성애는 이 전략의 핵심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 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받아쓰도록 구술한 세 마리의 주신급(主神級) 영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염안섭 원장은 "약 140년 전에 출생한 앨리스 베일리(Alice A. Bailey)라는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지도자였던 영매(靈媒),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이라 소개하면서 "이 여성이 주신급(主神級)의 세 마리의 마귀들의 계시를 받아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전략 10가지'를 받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염 원장은 "반기독교를 넘어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무너뜨리겠다고 획책하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의 이 10가지 지침이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베일리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10가지 전략'을 살펴보면, 오늘날 각국 의회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과 꼭 같음을 알 수 있다. 앨리스가 수립한 이 전략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추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말살하고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며 음란과 퇴폐의 영을 퍼뜨려서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앨리스 베일리가 전파한 '가정과 교회, 국가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교육시스템으로부터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커리큘럼을 변경시켜서 기독교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켜라.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목적은 인생을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고 아동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거기에 우월적 가치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아동들은 인생을 직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 아동들은 진급하는 데 있어서 학교당국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하나님에 관하여는 그저 부가적인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2.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사소통을 끊어라. 부모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기독교적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전통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아래는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아동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둘째, 체벌을 폐지하라
셋째, 교사들은 '10가지 전략'의 실행 요원이다.
3. 기독교 가정 구조 또는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를 파괴하라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의 억압은 견딜 수 없다. 가정이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때 만일 가정을 깨트린다면 국가를 깨트리는 것이다. 이런 감금상태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이를 위해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성 문란을 조장하라
둘째, 광고 산업, 미디어-TV,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섹스 하는 쾌락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부추겨라(선전전략).
4. '프리섹스'(Free Sex) 사회를 만들라 -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하기 쉽게 만들라
낙태 병원을 세워라. 학교 안에도 진료소를 만들라.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섹스가 훼방 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낙태 금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관해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고통 없이 가능한 용이하게 그 임신을 지워버릴 자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5. 이혼하기 쉽게 만들고 이혼을 합법화하라 - 평생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사랑은 '사랑결합'이라는 신비로운 연결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난소로부터 발생하는 난자와 같아서 당신이라는 시스템을 경유하면서 당신 안에서 사랑의 호의를 클릭하는데, 세상에는 당신의 그 '사랑결합'에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클릭하게 되며 이때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이다.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놓치면 그 사랑결합 사이클이 지나갈 때까지 수 년 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행복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어라. 그 남자(또는 여자)를 기혼자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인 그(또는 그녀)를 붙잡으라. 그(또는 그녀)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그리고 만일 일정 기간 함께 살다가 그 사랑이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가치 같은 속박에 얽매이지 말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이혼할 수 있는 방법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랑결합의 생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난자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결합이 생성되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즐기게 될 것이다.
6. 동성(연)애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섹스'하는 쾌락이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어서 누구도 이런 즐거움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도 그 즐기는 방법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동성(연)애든지 근친상간이든지 수간(獸姦)이든지 아무튼 쌍방이 합의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태의 섹스도 허용되어야 한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트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이야말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장려하라. 왜냐하면 예술은 영의 언어로서 당신은 안에 있는 그것을 회화, 음악, 드라마 등의 형태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類)의 예술과 음악과 영화들이 표현하고 있는 품격과 영성과 메시지를 살펴보라.
8.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최대의 경로는 미디어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를 이용하라. 미디어만이 아니라 광고회사, 옥외 광고판, 잡지 등을 통하라.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
다른 종교들을 장려하여 기독교와 동등이 되도록 하라. 자신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분쇄하라. 그리함으로써 기독교는 격하될 것이고 여타 종교들이 신장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라(인본주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라.
10. 각국 정부로 하여금 위의 모든 사항들을 법제화 하도록 하고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추인하도록 하라 (동성애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뜻함)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수용하도록 결국 교리를 변경시켜야 하며, 사람(성도)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사탄적·세속적 구조와 체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염안섭 원장은 "이 이른바 '마귀의 십계명'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 거대한 마귀의 영성의 결과가 100여 년이 지난 현대사회에 지금 나타나고 있다"며 "이 동성애 문제는 단순히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를 무너뜨리겠다는 적그리스도 세력의 핵심전락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집의 주인은 예수님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민심을 헤아리곤 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하루는 신실한 과부의 집에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부의 신실한 믿음을 익히 알고 있던 여왕은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부는 망설임 없이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가난한 과부는 이제까지 이 집을 찾아왔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바로 여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왕이 기대했던 대답은 여왕이 아니라 예수님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과부의 집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바로 주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까?
은혜를 주신 이유(8절)
기쁜 소식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려는 것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믿음이란(12절)
담대함과 확신을 갖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가는 것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환난에 대한 자세(13절)
고난 후에 영광이 찾아올 것
♦ 5월 2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정하신 뜻(11절)
♦ 성구 :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According to his eternal purpose which he accomplished in Christ Jesus our Lord.
“예정하신 뜻(eternal purpose)”이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갖는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죄인이었던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하나의 ‘의’며 그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예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한 사람(a man)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the Christ) 라는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진열된 사과는 모두 사과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할지 말지에 대하여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처음부터 먹지말라고 하지 않은 것도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은 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시계방에는 수 많은 시계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주인이 결정되지 않았기 떄문에 시계가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줄 수 없습니다.
만일 시계의 주인이 결정되면 그때부터 그 시계는 주인의 손에 의해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시계로 사용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그때부터 예정하신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므로 누릴 수 있는 은총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 찬양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https://www.youtube.com/watch?v=lIhIrsSsbV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금은방에 있는 시계가 멈춰 있지만 주인에 의하여 선택이 되어 시각을 맞추면 그 때부터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인이 정해지기 전에는 시계로서 온전하나 아직 존재의 목적으로 볼 때는 죽은 것이다가 주인이 정해지면서 그 목적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목적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기능을 발휘하는 그 기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주신 삶의 기간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 곧 인생의 목적을 자기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정하신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서 그가 보이신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드리고 사용하고 소비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의미 있는 이들 사이에선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추행이나 범죄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 그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사랑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 또 그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예정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거룩함이라고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니 목적대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삶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에 흠이 없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 생명 있는 자로 보는 사람이 거룩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곧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예정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된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구분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시려고 지은 그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우리 인생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게 되는 영광과 감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 5월 2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2: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선물(8절)
♦ 성구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성경에 소개된 ‘하나님의 선물’의 내용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구원”과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선물”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은 것” 즉 “공짜로 얻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에베소서 2:8).
죄인이 자유를 얻으려면 반드시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나를 위하여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은 선물입니다(요한복음 1:1).
하나님의 말씀은 선물입니다.
말씀(케리그마)에는 육체로 계시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이신 성경 그리고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으로 구분합니다.
매주일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성도들이 한 주간 동안 세상에 나가 영적 싸움을 할 때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막중한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주일마다 듣는 그 말씀을 위하여 기도하며 협력할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마음에 각인되며 각인된 그 말씀이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중요한 결정을 바르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되기를 소망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예수 크신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xO0X1Qv51-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다!
미국 미주리(Missouri)주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에 그날따라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손님들마다 하나같이 삭발을 요청했습니다.
미용사는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이들은 그 마을의 50여명이 출석하는 어느 작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처음엔 이상한 ‘광신도’들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여자 중학생이 있었는데 암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쳤지만 교회를 나오지 않자 목사님과 몇몇 성도가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머리를 짧게 밀어 삭발을 해서 부끄러워서 외출을 못 한다는 소녀의 사정을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에 돌아와 성도들과 의논한 결과 끝에 교인들이 모두 삭발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방송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여학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의견을 모으고 이와 같은 작은 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작은 사랑의 이벤트의 내용이 그 소녀의 엄마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주일날, 그 소녀의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방송국에서 취재차 나온 한 기자가 미리 교회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교회에 나온 그 여학생은 교회 문을 연 순간, 50여명의 까까머리 교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모자를 벗어야 되나 하고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결국 모자를 벗었습니다.
중계하던 기자가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교회를 나간다면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습니다.”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도 감동의 눈물을 닦았습니다.
불신자인 리포터가 “교회에 나간다면 이런 교회에 나가고 싶다”라고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감동을 받습니까?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을 다 내려놓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세상의 탐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서로를 돕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럴 때에 교회가 살 뿐 아니라, “나도 저 교회에 가고 싶다”라는 감동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감동의 꽃을 피웁니다.
감동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감동은 바위 같은 마음도 녹이는 활활 타는
용광로가 되고 빙산 같은 마음도 녹이는 따스한 봄바람이 됩니다.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에 이런 사랑과 감동이 그립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를 이런 교회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감동하는 사랑이 있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내가 먼저 머리를 깎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좋은 소문이 난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로 소문이 날 수 있습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소문, 돈이 많은 교회라는 소문, 유명한 사람이 많은 교회라는 소문, 성전이 큰 교회라는 소문
등등,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문은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소문일 것입니다.
믿음 보다 더 좋은 소문은 없는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다 좋아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구동성으로 “나도 이런 교회 에
다니고 싶다”는 고백이 나오는 그런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위기로 인하여 이미 세상은 위기의 위험 수위가 더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소리로만 들립니까?
아닙니다.
이미 세상은 무너져 버렸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교회인데 교회마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예수의 차이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
1. 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그 충성을 보고,
2. 가까이 두고 써서 그 공경을 보며,
3. 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재능을 보고,
4. 뜻밖의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보며,
5. 급한 약속을 하여 그 신용을 보고,
6. 재물을 맡겨 그 어짐을 보며,
7.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절도를 보며,
8. 위급한 일을 알리어 그 절개를 보고,
9. 남녀를 섞어 있게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보는 것이다.
이 아홉가지 결과를 종합해 놓고 보면 사람을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게 우리는 공자님 밑에서 일하긴 다 틀렸어요.
그러나 다혈질과 배신자 베드로를 부르시고,
자신을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바울을 부르신 주님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희망이 있지 않나요?
링컨의 유머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는 Abraham Lincoln은 또한 가장 조크를 잘하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다. 링컨은 정적을 공격할 때도 조크를 했다.
링컨이 젊은 시절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다.
정견발표회에서 그의 라이벌 후보는 링컨이 신앙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나서 청중을 향해
(여러분, 천당에 가고싶은 분들은 손을 들어보세요)라고 소리쳤다.
물론 모두들 높히 손을 들었으나 링컨만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 후보는 링컨을 향해
(미스터 링컨, 당신은 손을 들지 않았는데, 그럼 지옥으로 가고싶다는 말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링컨 후보는 빙긋이 웃으며 (천만에요. 나는 지금 천당도, 지옥도 가고싶지 않소. 나는 국회로 가고싶소!)라고 응수해서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1.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입니다.
2.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 할 것입니다.
3.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것입니다.
4.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 할 것입니다.
5.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입니다.
6.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입니다.
7.나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그분께만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8.나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습니다.
9.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입니다.
10.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 할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점차 대형화되고 있는 현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물의 크기와 화려함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일부 대형화된 교회들은 자기들 위주의 공동체 모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꺼려합니다.
교회가 너무 깨끗하고 화려해서 남루한 옷차림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모습을 입으면서까지 낮아지셨던 주님의 사랑을 돌이켜보면서, 화려한 교회 건물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려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교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이발사로 일을 하던 사람이 복권에 당첨이 되어 화려하고 큰 도시로 이사하여 더 큰 이발소를 차렸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교회에 출석하던 사람이 그 마을을 떠나므로 환송회를 열고 축복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작은 시골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도대체 왜 시골 마을로 돌아왔을까?
마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여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도시는 크고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큰 교회가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안에서는 더 좋은 직장과 직업과 학식을 갖춘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하였다.
나와 같은 이발사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사귐이 있는 시골의 작은 교회가 그리워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왜 교회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일까?
교회 안에 들어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에펠탑을 건립하려고 할 때 많은 지성인들이 에펠탑 건립을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파리 시내의 철구조물이 경관을 해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에펠탑이 건립된 후에 많은 지성인들이 에펠탑 카페에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글을 쓰고 있었다.
한번은 어느 기자가 반대를 주도하던 지성인에게 "그렇게 건립을 반대하였는데 지금은 그 탑에 들어와서 즐기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지성인은 "이 탑안에 들어오면 탑이 보이지 않는다!"
교회의 부정적인 것만 보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베소서를 읽어가며 교회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굳건하게 유지하기를 소망합니다.
♦ 5월 2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1: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신령한 복(3절)
♦ 성구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in the heavenly realm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Christ.
“신령한 복(spiritual blessing)”
신령한이란 헬라어는 "프뉴마티코스(pnĕumati-kŏs. πνευματικός)"라고 합니다.
'프뉴마티코스'란 "
신령한(롬 1:11, 벧전 2:5)" "영적인(고전 2:13, 엡 6:12)" 이란 뜻입니다.
복이란 헬라어는 "유로기아(ĕulŏgia. εὐλογία)"
'유로기아'는 "찬양" "아름다운 말" "축복" 이란 뜻으로 성경에서는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15:29, 갈 3:14, 엡 1:3, 벧전 3:9), 찬송(계 5:12,13, 7:12)"이란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를 “교회론”에 관한 말씀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1장에서는 영적 소유(1:3)
2장에서는 영적 위치(2:5∼6)
3장에서는 영적 공동체(3:10)
4장에서는 영적 교제(4:3)
5장에서는 영적 생활(5:18)
6장에서는 영적 승리(6:13)
사람들이 갈망하는 복은 대부분 육신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는 복은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를 현실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알리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적은 지식으로 추측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한 만큼 우리의 필요를 들어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교회를 찾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무지한 심리를 이용하여 축복이란 말을 내세워 사람들의 혼을 휘어잡고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아는 매우 중요한 지식입니다.
‘신령한 복’이란 곧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1. 예정과 선택(4절)
2. 하나님의 양자됨(5절)
3. 용서와 구속(7절)
4. 지혜와 총명(8절)
5. 그리스도와의 연합(9∼10절)
6. 하나님의 기업(11∼12절)
7. 성령의 인 치심(13∼14절)
신령한 복을 누리려면 성령의 간섭이 끊임없이 따라와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선봉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https://www.youtube.com/watch?v=OLzMCrEgl0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동양의 고전 『서경(書經)』은 정치학 교과서에 해당되는 책이다.
『서경』 「홍범」편에
인간이 향유하는 다섯가지 복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였다.
오복(五福) 중
첫번째는 장수하는 것(壽)이고, 두번째는 재산이 넉넉한 것(富), 다음으로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편안히 돌아가는 것(考終命)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치아가
양호한 것은 들어있지 않다.
위 다섯 가지는 오행학설에 의하면 차례로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에
해당한다.
동양의 옛 글 가운데 서경(書經)은 정치학 교과서에 해당되는 책이다.
서경 「홍범」편에 인간이 향유하는 오복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다섯 가지 복(福)을 말하는데 오복(五福)중에 장수하는 것(壽)을 첫 번째로 들고 있다.
이어서 재산이 넉넉한 것(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편안히 돌아가는
것(考終命)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치아가 양호한 것은 들어있지 않다.
위 다섯 가지는 오행학설에 의하면 차례로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에 해당한다.
수(壽)는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거쳐야 하는 생애주기를 보장받는 것으로 첫 번째 복이다.
일찍 요절하거나 횡사하게 되면 예비 되어 있는 많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어진 자는 수(壽)를 누린다고 하였다.
두
번째 부(富)는 부유함으로 아무리 수명이 길어도 가난한 삶은 자신이 원하는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특히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재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데 사용되는 재화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복이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강녕(康寧)인데 한마디로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아무리 장수하고 돈이 많아도 집안에 자꾸 사고가 생기게 되면 그 또한 고달픈 인생이다.
네 번째는 유호덕(攸好德)으로 덕을 갖추어야 복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정립되었으면 남도 생각해서 덕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이다.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사람이 후임자에게 일을 물려주고 퇴임사를 하듯이 총정리를 하고 갈길 가는 것을 복이라고 하였다.
흔히
한국사람들을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기복(祈福)적이라고 자기비하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복은 좋은 것이며, 누구든 복을
소원한다.
『서경』에서는 이 오복을 선량한 백성들이 향유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오복을 한 문장으로 서술하면
"눈에 보이는 자량인 부와 보이지 않는 자량인 덕을 갖추고 몸 건강히 맘 편히 오래오래 살다가 천명대로 가고 싶다."일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욕구의 표현이다.
현대에서 사용하는 복지(福祉)도 '복 복(福)'에 '복 지(祉)'자가 결합된
글자로, 복지사회란 모든 인간들이 위에서 말한 오복을 누리는 사회이다.
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복지사회건설이란 인간들이 오복을
향유할 수 있는 제반 여건과 마음씨를 확산하는 일이 아닐까?
신령한 복
(에베소서1:3) 신령한 복 일곱가지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나는 오늘 이 메시지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신령한 복'이 임할 것을 기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사도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 '신령한 복'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I. 신령한 복이란?
먼저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가 마치 현실의 삶에 나타나는 물질적인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이방의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알리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복음이 들어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적은 지식으로 새대가리를 가지고
우주만물을 추측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한 만큼 우리의 필요를 들어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교회를 찾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무지한 심리를 이용하여 축복이란 말을 내세워 사람들의 혼을 휘어잡고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신령한'이란 단어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서
'은사'라는 말을 해석하기에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충하여 넣은 단어입니다.
'은사'(카리스마)는 그 어원이
'은혜'(카리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신령한 매력'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였고 이것은 '너희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역설합니다(벧후1:4).
따라서 '신령한 복'이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시 인간을 지으실 때 복주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본디 인간은 신의 성품대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배반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 육체의 속성을 따라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신령한 복 일곱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예정과 선택(4절)
바울은 4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하심'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불과 2000년 전인데 창세전에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셨다는 말씀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만, 예수님은 창조자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라고 할 때 우리의 택하심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예정된 사실이야 말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택하심이 누구의 간섭이나 어떤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기쁜 뜻과 예정에 의한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요1:13)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 그 첫번째입니다.
(1) 거룩하게 하심그러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기오스)라는 말은 하늘에 속한 언어로서 하나님의 신성과 위엄을 나타내는 말입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으므로 거룩함은 그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된 권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거룩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자 그의 아들이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흠없이 하심
또 바울은 '흠 없이함'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인된 인간의 모습, 허물과 범죄를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하였으며, 베드로 사도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하였습니다. 이 허물들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온 것이니 이 허물을 없이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흠없는 어린양의 피로 우리의 허물을 사함 받았다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양자됨(5절)
신령한 복 두번째는 하나님의 양자됨입니다. 바울 사도는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정하시고 택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하나님의 양자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여목사님들이 하나님 어머니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만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밑에서 영혼을 갈취당하는 성도들이야 말로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이 땅에 아버지 없는 자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인류의 질서이고 가정의 시작입니다. 어느 인류학자는 무능하고 범죄자 아버지라도 함께 사는 자녀는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 삶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양자의 지식은 아무라도 갖을 수 없고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하였습니다. 그로므로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됨을 언급한 것입니다.
(1) 로마의 양자 법로마에는 양자가 되는 법이 있어서 양자를 들이기 위해서는 팔고 사는 형식의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먼저 친 아버지는 두번에 걸쳐 그 아들을 팔고 다시 사야하며, 세번째에는 그를 팔고 사지 않습니다. 그때 앙자를 맞이할 사람이 법정에서 댓가를 지불하고 양자 등록을 합니다.
이렇게 법정 등록이 끝나면 먼저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과거는 무효가 되고 그는 새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아들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양자로 등록된 것입니다.
3. 용서와 구속(7절)
신령한 복의 세번째는 [용서와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7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된 신분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하여 '정녕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은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속은 그의 은혜의 풍성함으로 비롯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속함을 받아 죄없이 함을 입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우리의 행위의 공로나 신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선물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없는 어린양의 피의 제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4. 지혜와 총명(8절)
신령한 복의 네번째는 [지혜와 총명]입니다, 바울은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8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지혜(sophia)는 오직 하나님의 영에 속한 지혜로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을 알게 하고 또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 총명(phronesis)이란 사물을 판단하는 지식과 능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기 위해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평안한 삶을 영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시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요16:33) 하셨습니다.
5. 그리스도와의 연합(9-10절)
다섯번째의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바울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9-10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과 도킹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서로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1) 비밀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비밀'은 전혀 알 수 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도록 봉해져 있다가 예정된 날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위대한 사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것과 땅에 속한 것의 통합입니다.
처음부터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분열된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신비의 사상을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박히시기전에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6-57)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이 신비의 비밀은 계시록 19장에서 끝이납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때를 향한 긴 여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게 됩니다. 그날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2) 경륜
바울은 10절에서 때가 찬 경륜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륜"(dispensation)으로 번역된 말은 '오이코노미아'(oikonomia)로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만 세 번을 사용하였으며 신약에서 19번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1장10절에서 '때가 찬 경륜'을 말하였고 3장2절에서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말하였으며, 3장9절에서는 '비밀의 경륜'(kjv- fellowship)을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경륜'이란 말은 '청지기'('steward' 눅 12:42; 16:11; 3:8; 고전 4:1,2; 딛 1:7; 벧전 4:10)와 '청지기의 직분'(stewardship/눅 16:2,3,4)로 해석되었으며. 또한 나눔과 분배의 직무를 나타내는 '직분'(dispensation/고전 9:17; 엡 1:10; 3:2; 골 1:25)과 '친교' (fellowship/엡 3:9)그리고 '교훈'(edifying/딤전 1:4)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륜"의 핵심적인 개념은 주인의 집을 관리하고 꾸려나가는 합당한 직무와 그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따라서 '경륜'은 어떤 의미로는 인간이 특별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가에 대한 시험의 때를 의미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륜은 청지기의 직분이지 일정한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륜'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의 기업(11-12절)
여섯번째의 신령한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은자를 말한 것으로 상속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상속자이십니다. 주께서는 부르신 자들로 하여금 그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기업의 아름다움을 말하여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다"(히1:4)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피로 산제사를 드린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녀이면 또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8:1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7. 성령의 인치심(13-14절)
마지막으로 일곱번째의 신령한 복은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여기서 구원의 순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의 말씀 복음의 [들음]과 [믿음]과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여기서 인(印)이란 하나님의 것으로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도장을 찍은 것은 이미 선불금이 치루어지고 소유권 이전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귀한 물품이 로마로 들어 가는 항구였습니다.
그곳에는 로마 선주들로부터 전권대사를 맡은 하인이 와서 주인이 필요로하는 물건을 사서 돈을 치루고 주인을 상징하는 큰 도장을 찍게 됩니다. 배가 로마에 도착하면 그곳에 나와 있는 하인들은 주인의 인장을 확인하고 물건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의 피로 댓가를 치루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으로 '인'을 친 사람들입니다.
II.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
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주신 신령한 복 일곱 가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산제사로 드리시면서까지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시고 양자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신 구속하신 은혜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또 바울은 12절에서 우리를 기업이 되게 하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하심이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자'들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을 말한 것으로 물러나지 않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14절에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신 이유를 말하여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를 예정하시고 구속하시고 양자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며 하나님의 영광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미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사람과 영광을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위엄이며 오직 찬송받으실 자 거룩하신 자 하나님만의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깊이 살펴보면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온 그 인생은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재산이 남보다 좀 더 있으면 행복해 하고,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지위가 높으면 남보다 성공했다고 하고,
지위가 낮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을 지나고 난 후에 뒤돌아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람을 잡은 것처럼 헛되고
헛될 뿐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땅에 속한 모든 복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욕심이 생기고, 사람이 추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누리게 될
복, 영적인 복, 하늘의 신령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령한 복” “하늘에
속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땅에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참으로 소중한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복은 땅에 속한 육신의 축복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복, 세상의 복은 바닷물 같아서 잠시 시원함을 느끼지만 조금 있으면 더욱 심한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그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환란이나 핍박도 빼앗아갈 수 없고, 환경을 초월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솟아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의 주역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까지도 누리는
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입니까? 지금 바울이 처한 상태가 어떤 환경입니까?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1차로 투옥되었던 AD62년 경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써 보낸 서신입니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사도 바울의 대표적인 옥중서신입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상태입니다. 편히 쉬며, 자유를 누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온 몸이 병들고, 늙어서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찬송하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그의 옥중서신 첫 마디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하리로다”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을 가둘 수 있는 감옥은 없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이처럼 힘차게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크고, 놀랍고, 신비롭고, 환상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감옥의 고통과 절망, 그에게 다가오는 각종 환란과 핍박도 바울을 더 이상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만들 수가 없었고, 가슴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리로다고 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엡1:3-14절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찬송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는 것이 찬송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4-14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헬라어 “카도스”라는 단어는 “즉” 다시 말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특히 헬라어 “에이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원받기로 예정하시고 그의 아들로 삼으신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범죄하였을 때에, 연약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거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왜 찬송하라고 외쳤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내용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교회를 향하여 왜 찬송하리로다는 외칩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찬송하리로다고 외치고 있습니까?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가 주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이 땅의 왕이나 권세자가 줄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물질로 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입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구원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은 예수 믿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고, 더욱 더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것은 본래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신령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모든 신령한 복” 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말합니다. “모든” 이란 온전하고 완전한의 의미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는 복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엡1:3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에 속한 복이 아니라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를 때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서 탐욕과 정욕에 빠져서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얻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알지 못하면 사막을 헤메는 이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입니다. 성도들이 누려야 할 참된 축복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렸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예수의 종이 되길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이 종으로 충실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고난, 시련과 역경, 죽음의 위기도 마다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 때문에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알고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부르시며, 우리의 수고와 노고를 인정해 주는 복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속량 곧 죄사함을 받는 복입니다. 4절에 보면 “이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죄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마치 암세포와 같습니다. 암에 걸리면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를 하면 온 몸이 망가지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함 받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죄로 인한 영원한 사형선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면할 길이 없습니다. 속량 곧 죄사함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믿을 때에 받는 신령한 복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는 반드시 영원한 사망을 가져옵니다. 죄 사함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피를 흘려 우리의 죄악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래 죄가 없어서, 의로워서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피의 대가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치심”(sealing)의 의미는 무엇보다 소유권(ownership)을 뜻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장을 찍으셨다, 혹은 친필 서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이사야의 말씀처럼 “너는 내 것이라”(사43:1)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증(earnest)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후사로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오리조"(미리 결정하다,예정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프로(전에, 앞에)+호리조(결정하다, 지정하다, 정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한글성경은 "예정"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이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런 크로노스적인 차원과 관련이 없는 예정인 것입니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창세전에 미리 택하여 정하여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절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한글성경이 자주 "양자"라고 번역한 단어인 "휘오데시아" 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아들삼기, 양자삼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의 핵심은 “나의 것이 되었다” “아들로 세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휘오데시아"(아들로 세우다)는 휘오스(아들)+티데미(두다, 세우다)의 합성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는 아들로 세움을 받았고, 그와 한 몸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되었고, 그의 가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100% 똑같아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만드실때 자신의 형상과 형체대로 사람의 모습을 만드셨고 그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과 비슷한 양심이라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신약에서 아들이 된 예수님은 아버지와 생명이 같고, 피가 같고, 형체가 같고, 속성이 같고, 본질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예수님과 같이 생명, 피, 형체, 속성, 본질이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창조 목적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생명관계가 기독교의 핵심 복음입니다. 롬8: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무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우리도 아버지의 생명을 예수와 똑같이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 아버지가 되려고 하면 입술로만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을 실제 받아야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를 죄에서 부르신 목적이 로마서 8장30절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 전에 미리 뽑아 택정하시고 부르셔서 그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형제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셨으며 그들을 의롭다 여기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속에 들어가 있던 그 아버지의 생명이 그대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니까 우리도 100% 예수님과 똑같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넷째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영원한 기업이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업이 되는 복”은 영원한 상속을 말합니다.(11절) 재벌들이 자녀들에게 많은 재산 물려주어도 잠깐입니다. 질병이나 고난을 면하게 해주지도 못합니다. 영원한 기쁨이나 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속받은 영원한 하늘나라는 근심도 없고, 눈물도 없고, 이별도 없고, 아픈 것도, 죽음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업’ 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모든 축복을 망라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 영원한 천국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상속을 받을 곳입니다.(요14:3) 이와 같이 놀라운 축복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이 땅의 복이란 모두가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없어지고, 부패하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영원합니다. 이 신령한 복은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구속 적용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복은 땅에 속한 복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이 구원의 복은 창세 전에 계획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역사 가운데서 성취되고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복은 영원 과거와 현재와 영원 미래와 관련된 영원한 복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누릴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이 신령한 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의 복이기 때문에 신령한 복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바르게 인식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그의 은혜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내용적으로는 ‘은혜의 영광’이란 번역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3-6절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먼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의 전반절에 보면 그 은혜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일반적인 것을 넘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반적 은혜를 넘어 “우리”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주어져서 이제 우리도 ‘사랑하시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특별한 은혜가 바로 ‘영광스러운 은혜’이며 이 은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설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 내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엇을 찬양해야 합니까? 첫째, 성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환란과 풍파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창세전부터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성자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늘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피흘려주신 대가로 얻은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로 누리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13절)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인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얻을 기업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일을 왜 하십니까? 역시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14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그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 받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욕망이나 욕심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거룩하게 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을 보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보혈 가운데 거하면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많은 서신들은 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에베소서는 교회론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교회론이고(엡 1:-3:), 두 번째 부분은 바른 교회관에 입각한 실천 생활(엡 4:-6:)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1절과 2절은 서신을 시작하는 인사이고, 3절-6절은 성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신령한 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신령한 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신령한 복이 교회의 기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오늘 확실하게 마음에 담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복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신령이란 낱말의 어원은 헬라어로 인데 이 말은 성령 혹은 영이란 뜻입니다. 이 낱말에서 "신령한"이란 말 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복이란 근본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영에 주시는 영적인 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축복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구약의 복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의 복도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늘의 기업의 복이지만 근본은 현세적인 복입니다. 신약의 복은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으로써 이것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부활의 소망, 혹은 천국에서 누리는 기업, 영원불멸의 약속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구약의 복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인 반면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하늘에서 누리는 심령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꼭 하늘에서만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누리는 것도 있습니다. 완악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드리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죄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과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은 현세에서 성도가 누리는 신령한 복입니다. 이런 평안과 자유함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누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정의 출발점
우리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은 타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던지, 안수집사가 되었던지, 권사가 되었던지 아니면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오셨던지 과거를 묻지 않고 모두 새 가정 모임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강의되는 것은 구원언약입니다. 이 구원언약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고 예정하셨습니다. 이 예정과 선택은 칼빈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학사상인데, 예정과 선택을 근간으로 삼는 기초는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 되시려면 그는 절대주권자이어야 하고 그런 분은 전지 전능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은 당연히 미래를 설계하실 수 있는데 그의 설계가 바로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과 선택의 출발입니다.
예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완전하심을 전제하지만 또 하나의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타락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완전 타락하여 절대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무능이란 문명을 발달시켜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활동이 무능해 졌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무능해 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욱이 절대적인 선 곧 하나님 앞에서까지 선하여 자신을 당당하게 구원하게 하는 선을 행하기에 부적절한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고백하는 행위는 나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행위입니다.
이 예정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어거스틴인데 그도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 이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기를 바랬으나 그 속에 자신이 요구하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려고 마니교에 입교하였으나 역시 실패합니다. 그는 방탕과 육신의 향락을 통하여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허무한 것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 되면서 말씀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는 바울과 같은 신앙 고백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이것은 내가 잘하고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결국 그는 사도 바울의 신앙에 동의하면서 예정과 선택을 체계화하게 된 것입니다.
예정이 왜 복인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 말씀에는 예정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시기인데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다윗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시고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찬송할 수밖에 없는 크나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복이 되는 이유 두 번째는 선택의 목적인데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장로교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얻는 것이고 삶은 관계가 없으니 흐트러진 생활을 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감리교인이나 천주교인들보다도 오히려 더 못한 삶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장로교인들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거룩과 성화의 삶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알고 이에 부합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택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다. 그리고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예정의 주체입니다. 우리를 예정하셨는데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5)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 안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창 6:5-6)하셨다고 하였고,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삼상 15:35)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 만든 것을 한탄도 하시고, 사울을 왕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유독 여러분과 나를 선택하신 일에는 후회가 없으실 뿐 아니라 만족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이 복이고 감사입니다. 성경 말씀을 한 곳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후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족해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아멘으로 받고 감사와 찬송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예정이 복이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엡 1:5) 하시려고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정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기업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저주와 고통을 받아야 할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늘의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복입니다.
다섯 번째로 예정과 선택이 복이 되는 이유는 이런 모든 은혜를 거저 주시기 때문입니다(엡 1:6).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대가를 요구하셨다면 어느 누가 그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선한 행위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 대가를 계산한다면 92년 대선 자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드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나라의 영광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대가를 요구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다"(딛 3:5)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시킨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아무런 값을 요구하지도 않고 거저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의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둘째는 이런 예정과 선택을 믿었으면 이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에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것과 일반적인 삶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시어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그분의 작정이 어찌 구원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도 그의 작정은 적용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예정과 선택으로 되었습니까? 부부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친구의 만남, 직장과의 만남,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우연이겠습니까? 더욱이 교회와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와 목사와의 만남이나 성도 상호간의 만남은 모두 우연이겠습니까? 불신자와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런 모든 만남이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아십니까?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할 때입니다.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옆자리에 앉은 성도를 만나게 하셨구나 생각한다면 어찌 인사하는 것이 그리도 희미하고 소극적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의 섭리 안에서 여러분 모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물
오래전 2005년 3월 11일자 국민일보 겨자씨 란에 아름다운 희생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여기자 ‘줄리아나 스그레나’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종군 기자였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자는 단신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 취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장단체에 의해서 납치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탈리아 정부는 비밀요원을 보내 이라크
무장단체와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이 여기자는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출 이후, 비밀요원과 여기자가 바그다드 공항으로
오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미군들이 오인하여 여기자가 탄 차에 총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비밀요원 한 명이 죽고, 두 명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줄리아나 스그레나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비밀요원이 그 여인을 감싸 안았기 때문입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질 때, 비밀요원 ‘리콜라 칼리파리’는 조국의
언론을 자기 가슴에 얼싸안았습니다.
총알은 그의 등에 박혔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고, 여기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이 여기자는 귀국한 후 기자 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울먹였습니다.
“나는 그의 거룩한 죽음을
내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구나.’
‘이 죽음으로 나를 살렸구나.’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 느낌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겠어요?
1.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믿음의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1.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잘 합니다.
“너 이번 시험에 학급에서
1등하면 선물로 자전거 사줄게.”
그래서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급에서 1등을
했습니다.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엄밀한 의미에서 자전거가 선물일까요 아니면 노력한
대가일까요?
선물이 아니지요.
그것은 자식이 밤잠 안자고 노력한 대가일
뿐입니다.
선물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공로도 없지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바로 그런 선물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 무슨 공로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감사하게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왜 구원이 선물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은 나의 의로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의’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인해 구원받기 때문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그 의미는 물건 값을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세금 고지서를 받았다면 세금을 다 지불했다는 것이고, 빚을 진 것이
있다면 그 빚을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다면 받을 형벌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불이 완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지불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셨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그렇게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몇몇의 사건들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 때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무엇을 보시면 넘어가신다고 했습니까?
‘문 인방과 설주의 피를
보시면’
문 인방과 설주에 피가 있는 집 안에 강도가 있었으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구원받았지요!
문 인방과 설주에 피가 있는 집 안에 살인자가 있었으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구원받았지요!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은 집안에 있는 사람의 의 때문이 아니라 피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 바깥에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선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못 받았지요!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양의 피였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어제나 이제나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대충 말로 때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죄는 생명을 바쳐야 해결되는 엄중한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어린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어린 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모형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다는 예를 들어보지요.
1941년도 6월 31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히틀러는 폴란드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해 놓고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때 유태인만 죽인 것이 아니고 폴란드 사람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탈출했습니다.
탈출이 계속되자 포로수용소에는 규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탈출했을 때 그 캠프에 남아 있는 사람 열 명을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서로 감시해서 탈출을 못하도록 한 규칙이지요.
어느 날, 요란스럽게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이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 열 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일 열로 세웠습니다.
수용소 소장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죽을 사람을 지적했습니다.
“너, 너, 너, 너, 너, 너, …….”
그러다 소장이 ‘프란시스 게요니첵’이란 사람을 가리키며 “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 이제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에, 동그란 안경을 쓴, 키가 작달만한 사람이 한걸음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신부입니다. 저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습니다. 제가 저 사람 대신 죽겠으니 대신 끌어가십시오. 저가 죽으면 한 사람이 죽는 것이지만 저 사람이 죽으면 일곱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소장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맥시밀란 콜베’라는 신부였고, 결국 그는 사십칠 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이 지난 후인 1982년 10월 12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 신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 십오만 명이 모여서 성대한 장례식을 가졌는데, 그 장례식에는 프란시스 게요니첵의 아내와 아이들, 손자와 손녀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 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어요?
지금 우리는 똑같은 고백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의 참소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공격해옵니다.
“아무개 장로야, 권사야, 집사야, 너 기독교인 맞니? 너 그 따위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니? 너 거짓말했잖아? 너 기도도 안했잖아? 너 미워했잖아? 그렇지?
이 때 내 자신의 의로 사탄에 대항해서는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다고.......감히 전도를 해.......”
이럴 때 사탄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즉시 우리의 관심을 나 자신과 내 죄로부터 십자가로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너 이런 죄 지었지?”하면서 공격하면, “그래, 그게 사실이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라고 대답하십시오.
영어 문장에서 But(그러나)이 나오면 그 이후의 이야기가 진짜입니다.
“But(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으므로 나는 더 이상 그 죄와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마귀는 슬그머니 물러가게 됩니다.
내 의를 내세우면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해오지만 십자가를 내세우면 사탄이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의로 막아야 합니다.
D.L. 무디에게 한 청년이 와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지은 죄를 다 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죄가 잊어지지 않고 계속 기억나서 괴롭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무디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 믿는 사람 맞는가?”
“네 맞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자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믿는가?”
“예, 믿지요.”
그 때 무디가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잊으신 죄를 왜 자네가 기억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데 왜 용서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태도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십자가의 보혈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제야 청년은 그 호통을 듣고 “정말 그러네요.”하고 돌아갔습니다.
복음성가- 갈보리 십자가
2.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왜 믿음의 고백이 중요합니까?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
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합니까?
여러분, 대답해보세요.
결혼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흰 드레스? 예물? 수많은 하객?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은 없어도 됩니다.
결혼식의 핵심은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바로 그 고백이 결혼식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핵심이 아니라면 그 결혼은 잘못된 결혼입니다.
고백하는 순간은 짧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효과는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그 고백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효과는 영원합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너, 그때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지.......” “너 그때에 나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지.......”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실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늦게 믿은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앓아누운 지 오래지 않아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그렇고 가족들이 보기에도 할머니가 믿는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흙빛이었습니다.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게 분명했습니다.
건강했다고 죽을 때 얼굴이 환한 것은 아닙니다.
병약했다고 죽을 때 얼굴이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귀에다 입을 갔다대고 따라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가 끝나는 순간 기적을 보았습니다.
흙빛이었던 할머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게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확신이 생겨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고백하고 나면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함께 고백합시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따라하시고, 오랫동안 믿는 우리 교우들도 따라하세요.
10년, 20년을 신앙생활 했지만 대충 믿었을 뿐 제대로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선물을 이미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옵니다.
특히 전도서 3장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13절에서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보편적 선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다. 여인은 “어찌 유태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영원한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날마다 그분으로부터 지혜와 능력을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축복을 이웃에게 베풀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주신, 예수님 다음으로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종교개혁, 청교도, 일제시대 등을 돌아보면 참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암송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경건한 삶,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의 70%가 1주일에 단 한 장도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35%는 아예 성경의 한 글자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인 성경을 통해 정말 특별한 선물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필자는 매일 성경 읽기 운동을 벌이는 국제선교단체 ‘원바디’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매일 성경을 읽어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삶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예정하신 뜻
바울
사도는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예정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것”(엡 1:4)이라고 말씀한 것에서부터 에베소서 1장의 말씀들에서 더 확정이 됩니다.
물론 이 확정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서 온전한 유일신으로 섬길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는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하나의 ‘의’며 그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예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a man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the Christ라는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라는 공간적 울타리에 있다거나 아니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집에 있는 사과나
마트에 진열된 사과나 모두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할지 말지에 대하여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아예 먹지 못하게 만드시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은 자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된다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지만 성경 말씀을 듣고
사고할 수 있는 육신은 살아 있는 상태인 것은 오직 그 육신의 기능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두신 것입니다.
금은방에 있는 시계가 멈춰 있지만 주인에 의하여 선택이 되어 시각을 맞추면 그 때부터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인이 정해지기 전에는 시계로서 온전하나 아직 존재의 목적으로 볼 때는 죽은 것이다가 주인이 정해지면서 그 목적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목적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육신이 살아서 기능을 발휘하는 그 기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주신 삶의 기간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서 그가 보이신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드리고 사용하고 소비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인생의 온전한 의미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의미 있는 이들 사이에선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추행이나
범죄가 되기도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 그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사랑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랑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 또 그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예정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니 목적대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먼지도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도 형식이나 육신의 삶의 행위가 어떠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에 흠이 없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는 자로 보는 사람이 거룩한 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시려고 지은 그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우리 인생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게 되는 영광과 감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설교>
11절을 보면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예정하셨다는 말은 이미 1:5,9,11절에서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모든 것 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심으로 되어진 일임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이미 작정되었다면 예정되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결국 구원될 수 없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고, 반면에 예정된 사람은 신앙생활의 여부와 상관없이 어쨌든 구원을 받게 된다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예정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이 방종으로 흘러갈 위험이 크다는 것도 예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는 인간의 책임과 열심 등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정에 대한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달린 문제라면 인간은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영원한 어둠의 끔찍한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선언처럼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으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중심에서 자신에게 유익되는 것으로 향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기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스스로 선택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여부를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시고 의로우신 계획에 의해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방법으로 행하시는 것보다 크고 확실한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우리의 공로는 개입될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의 영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결정된 구원이고 어떤 경우에도 번복되지 않는 확실한 구원이니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여전히 자기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정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결코 그러한 생각으로 흘러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여실히 증거되었습니다. 신자는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정으로 인해 신자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놓으시고 평생을 감사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고 찬송하게 하심으로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이 예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이해하는 것은 예정의 참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정에 대한 또 하나의 잘못된 이해는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까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학 입학, 취업, 결혼 등등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된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입학할 대학까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셨고 취업할 회사나 결혼할 대상까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상태에서 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섭리와 예정은 다릅니다. 예정이 이미 작정되어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면 섭리는 그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세우신 예정 안에서 허락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주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십니다. 하지만 그 예정의 뜻은 우리의 구원을 향해 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정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심령이 되어 그 어떤 말씀으로도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인간을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부르시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높이는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영광이 찬송이 되게 하는 방향으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기어코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부름 받은 신자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것은 나 같은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은혜에 눈이 열리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굴복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행하심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를 보고 깨닫게 하시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은혜임을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교회는 우리의 구원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자기 구원과 복에만 집중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실천과 열심을 통해서 구원을 확인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헛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인간의 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초점을 맞추면 신앙의 방종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방종은 무엇일까요? 교회 일을 등한시하고 십일조를 하지 않고 기도와 성경읽기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그러한 것이 신앙의 방종이라면 사도들이 방종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그러한 실천에 열심을 낼 것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러한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방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내 인생에 도움 되는 실용적인 신앙을 추구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자기 뜻과 욕구 충족을 위해 기도하고, 신앙을 자신의 복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신앙의 방종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질적으로 인간은 늘 방종으로 흘러갑니다. 방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위해 뭘 하고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의 관계에 붙들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을 저주에 밀어 넣으실 만큼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백번 천번 생각해도 지옥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무엇으로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신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 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을 깨닫게 된 신자는 사랑에 의해 살게 됩니다. 자신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사랑이 능력이 되어 신자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관계로 모이는 성도를 사랑하게 되고 타인의 허물에서 나의 허물을 보면서 비판보다는 용서와 사랑에 의한 권면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욕망까지 다스려지면서 주의 소유가 되어 주의 영광을 높이는 신자 됨에 뜻을 두고 주를 찾고 그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고 예정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은 신자입니다.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8장 29-30절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과 11절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성경에 부합하는 교리입니다. 핵심은 예정론이 성경적으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성경에서 “예정되었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말 (프르리조)는 “사전에 결정하다”, “미리 명하다”, “미리 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미리 정하셨을 까요? 로마서 8장 29-30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개인들이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미리 정하십니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미리 택함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24:22, 31; 막 13:20, 27; 롬 8:33, 9:11, 11:5-7, 28; 엡 1:11; 골 3:12; 살전 1:4; 딤전 5:21; 딤후 2:10; 딛 1:1; 벧전 1:1-2, 2:9; 벧후 1:10). 예정론은 하나님이 그분의 주권으로 어떤 개인들을 구원받도록 택하신다는 성경적 교리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선택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아무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롬 3:23), 모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롬 6:23).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하셔도 이는 완벽하게 공의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중에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십니다. 이때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처우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분이 되실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따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20명의 군중 속에서 다섯 명에게 무작위로 돈을 거저 준다고 합시다. 돈을 받지 못한 15명의 사람들이 화를 낼까요? 아마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화를 낼 권리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을 거저 준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몇몇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기로 결정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택하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요 3:16; 롬 10:9-10). 성경은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그 누구라도 거부하시거나 그분을 찾는 그 어느 누구라도 외면하시는 일이 없다고 언급합니다(신 4:29). 어떻게든, 예정론은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지고(요 6:44) 구원받기 위해 믿는(롬 1:16) 사람들과 밀접하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시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사실은 동등한 진리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옥중 서신이란 무엇인가?
에베소서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문제.
옥중에서 쓴 것처럼 보이는 바울의 편지는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어떤 순서로 기록되었는가?
해석.
1. 바울은 10년 동안에 걸친 제 1차, 2차, 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편견과 핍박과 투옥이었다.
성전에서 폭도들에게 붙잡힌 바울은 천부장 루이사와 로마 군인들의 출동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다.
사도행전 22장에서, 피투성이의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그를 죽이려하는 백성들에게 간증적인 설교를 한다.
23장에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불려가서 자기를 변명한다.
24장은 총독 빌릭스 앞에서, 25장은 총독 베스도 앞에서, 26장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서전적 간증을 한다.
그러나 2년이나 기다려도 석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울은 로마 시민의 마지막 권리를 사용하여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결심한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서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출발한다.
그가 평소에 늘 복음 전파를 위해 가고 싶어 하던 것을 죄수의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 일행은 바울과, 누가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였으며,
총 276명의 죄수와 군인들 그리고 선원들이 승선한 (27:37)아드라뭇데노 배는 순풍에 돚을 달고 로마로 출발하였다. 율리오는 바울 일행에게 천절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에게 호감을 가졌던 베스도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큰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배를 버리고 상륙한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후 드리어 평생을 가고 싶어 하던 로마에 도착한다.
환호성 속에 영접 받는 사도로서가 아니라 감시받는 죄수로서 로마에 도착했다.
압비오와 삼관까지 마중 나온 형제들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셋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면서 2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면서 4권의 서신,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다.
이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중서신이라고 부른다.
2. 옥중서신 중 바울이 제일 먼저 쓴 편지는 골로새서이다.
골로새서는 이단 문제에 시달린 골로새와 그 주변교회가 그들의 지도자인 에바브라를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파견하여 그의 지도를 구하자 바울이 써서 보낸 편지이다.
골로새 교인들을 괴롭힌 이단 문제는 주로 그리스도론에 관한문제이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40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가 많고 번화한 도시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간접 설립자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온 아시아에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각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행19:10).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로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고 골로새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풀리스 등 근방 교회의 개척에 선구자였다.
골로새 교인들을 괴롭힌 이단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영지주의자, 혹은 이교의 철학자들,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인들, 에세네의 금욕주의자들 등이 추측할 수 있는 이단들이지만 확실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초등학문”(2:8)을 가르치고 천사를 숭배하며(2:18), 금욕주의자(2:21)인 것을 보아 당시 교회들을 괴롭힌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의 일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의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적은 골로새서를 두기고 에게 주면서 동시에 소아시아의 모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교회론을 적은 편지와
자기에게 피신해 있는 골로새 교회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를 받아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도 같이 보낸다.
3. 골로새 교회의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쓴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써서 골로새서와 함께 보낸다.
그때 마침 골로새의 빌레몬 장로 집에서 도망쳐 온 한 노예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을 시중들고 있었다.
바울은 이 노예 오네시모를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여 주기를 탄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빌레몬서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한 노예를 위한 바울의 탄원을 담은 극히 개인적인 서신이다.
웅대한 신학을 담은 그의 다른 서신과 좋은 대조를 이루지만 빌레몬서는 바울의 교리와 신학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과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도망친 일개 노예를 형제로 대접하면서 그가 용서받도록 하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간곡히 허락을 구하는 바울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비천한 노예 문제를 다루는 이 서신에서 우리는 고귀한 인간 정신의 승리와 인간 바울의 참 모습을 본다.
4. 에베소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세 번째로 쓴 책일 것이다.
로마로 바울을 찾아온 골로새 교회의 장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을 바울에게 고하였고
골로새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이 쓴 편지를 두기고가 가지고 아시아로 가는 길에 빌레몬서와 에베소서도 전달하도록 에베소서를 기록하였다.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이나 머물면서 눈물로 목양한 교회이다(행20:17~35).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론이다(행20:17~35).
에베소는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의 중심이었고 어머니 교회였다.
따라서 에베소 교인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교회 관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장엄한 찬송과 명상으로 시작하는 에베소서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며 기독교 교회관의 내용들과 새로운 의미를 제시했다.
기록 연대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의 에바브라가 찾아와 골로새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을 상의하고 바울의 지도를 구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권면하는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보내면서 에베소와 빌레몬서도 같이 기록하여 보냈다.
물론 빌레몬의 종 오내시모도 이때 주인에게 돌려보내졌다. AD 61~63년경 바울이 오마의 감옥에 있을 때였다.
문제를 가지고 바울에게 의논하러 왔던 에바브라는 오네시모 대신 바울을 돕느라고 골로새로 돌아가지 못했다.
5.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중 제일 나중에 쓰여진 편지서이다(AD61~63).
복음이 온 시위대 안에 전파되었다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1:13).
옥중서신 중 다른 편지서들(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은 두기고가 가지고 소아시아에 가서 전달했으나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파견한 에바브로디도가 직접 전달하였다(빌2:25).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이 들었고 그의 병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근심하게 하였으나(빌2:26).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병이 나아 빌립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유럽의 첫 성이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회집시켰으며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거기서 만난 간수를 구원하였다.(사도행전 16장을 자세히 읽을 것).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의 쓸 것들을 공급하고 감옥에 있을 때는 그의 옥바라지를 도맡았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그런 정성을 감사히 여겨 그의 편지에서 여러 번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후11:9,빌4:16).
빌립보서의 특징
첫째로 기쁨과 감사의 편지라는 것이다(1:3,4,18,25; 2:17,18; 3:1; 4:4,10,18).
성경의 어느책, 바울 편지서의 어떤 책보다도 기쁨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감옥에서 쓰여진 편지가 기쁨과 감사에 넘친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교리적인 데 비하여 빌립보서는 실천적이고 간증 적이다.
물론 빌립보서에도 교리적인 부분이 있지만(빌2:6~11) 일반적으로 권면과 간증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따라서 일견 비조직적인 글로 보이기도 하지만 빌립보 교회와 그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따뜻한 감사가 절절히 배어 있는 편지서이다.
요약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종서신이라 부른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의 장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로 바울을 찾아왔다.
바울은 즉시로 펜을 들어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아울러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그의 종을 용서하라는 편지도 썼다.
편지를 가지고 가는 두기고가 분명히 에베소 항구에 들를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3년 동안이나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도 같이 써서,
빌립보에서 파견되어 바울을 돕다가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이제 완쾌되어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