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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인 성전 역사
가시적인 성전이 다시 세워질것인가?
복음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다시금 세워져서는 안되는 것이 성전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가리켜 곧 성전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But the temple he had spoken of was his body.)
성전의 실체가 오셨기에 다시 상징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가 성전재건을 원합니다.
제1성전은 솔로몬 성전, 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 앞으로 재림을 앞둔 시점에 제3성전이 세워집니다(데살로니가후서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He will oppose and will exalt himself over everything
that is called God or is worshiped, so that he sets himself up in God's
temple, proclaiming himself to be God.)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성전건축 된다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이런 주장들로 인하여 무천년주의자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기간에 성전이 세워진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입니다.
에스겔 성전
상당수의 학자들은 에스겔 성전(겔 40-43장)이 곧 천년왕국에서 세워질 성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확고하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에스겔 성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스겔 성전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이 성전은 에스겔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바벨론 땅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단지 주신 형상대로 그림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행하게 하라(에스겔 43:11)
에스겔 성전은 그대로 지으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단지 그 형상을 보면서 예배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과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에 생각할지어다...(에스겔 40:4)
보고, 듣고 생각하고, 전하라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을 제 3 성전이나 천년왕국 때의 성전으로 설정하고 세우려는 행동은 무의미합니다.
오직 마음에 새겨서 포로기간 동안 은혜가 끊이지 않고 연결되도록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의 연속성
1. 형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에스겔 성전(겔 40:1 - 43:17)
에스겔 성전은 가시적인 성전이 끝나감을 보여줍니다.
초림으로 인한 가시적인 성전이 그 기능이 다하고 실체되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질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된 백성들에게 단지 형상과 그림으로 보고서도 성전의 기능을 다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성전이 재건 될 것을 약속한 것이 에스겔 성전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 가운데서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성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마른뼈처럼 앙상하고 볼품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2. 포로귀한과 성전재건의 약속(겔 43:18-27)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주신 소망은 단지 형상으로서 성전으로만 만족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전이 재건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당시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이런 소망은 하나님이 행하지 않고서야 가능성이 희박하게 보였습니다.
에스겔 성전이 단지 형상으로서만 존재했다면 그것이 존귀하고 의미있는 약속이란 것이 포로귀환과 함께 성전이 재건될 것에서 찾게 했습니다.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에스겔 43:18)
3. 하늘의 성전 새 예루살렘 성
형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에스겔 성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포로귀환 후의 성전재건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성전재건의 약속은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 516년에 예루살렘에 세워집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은 하늘 성전으로 연결됩니다.
하늘 성전은 새 예루살렘 성에 있습니다.
에스겔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성전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가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됩니다.
에스겔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하늘 성전으로 연결되면서
성전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합니다.
에스겔 성전 (에스겔 40-48장)
.... 그 날로부터 그 성읍의 이름이 "주께서 거기 계시다."(여호와삼마)가 될 것이라(겔 48:35)
에스겔 성전은 소망과 회복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라
제 3성전도 하나님이 멸할 것이라 봅니다.(겔 43; 5-12)(계 11;1-2)(슥 14;4) (단, 황금돔 사원 옆에 제 3성전이 설 경우),
재림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성전이 될 것입니다. (슥 1;16, 6;12-13)(겔 48;1-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또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겔43: 5-8)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가증한 거짓성전이 거룩한 성전 옆에 담하나 사이에 있게하여 예수님의 분노를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 11:1-2)
동문의 중앙선으로 부터 현 황금성전의 가장 가까운 지역까지는 6미터의 공간이 있으며 이곳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성전 밖 마당이다.여기서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방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에언하고있다.
즉, 성전 밖 마당은 황금성전이며 이것은 곧 이방인에게 준 결과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있는가?
앞으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이 세워진다면 현재의 황금사원을 폐할 필요가 없이 그 옆에 나란히 세워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곳에 이방인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 건물이 바로 황금사원이 된다는 말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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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ekiel's (Third) Temple. New Jerusalem. Beast 66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슥1;16)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슥6;12-13)
대제사장도, 대속죄일도, 희년도 나타나지 않는다.54)
에스겔서는 분명히 그러한 제사가 기념이나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속죄와 감사 등을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겔40:39, 42:13, 43:19, 43:21, 43:22, 43:25, 44:27, 44:29, 45:15, 45:19, 45:22, 46:20)
레위기 23장에 규정된 무교절, 나팔절, 속죄절, 맥추절, 오순절에 관한 규정은 없고, 오직 유월절과 장막절, 안식일과 초하루(new moon)만 나옵니다.
모세 율법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 대해 성결의식(정결례)을 행했던 것과 달리, 에스겔 서의 사독(Zadok) 계열 제사장들에 대해서는 따로 정결례가 없고 오직 그 제단에 대한 정결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43:20). 이는 십자가의 피로 이미 깨끗하게 되어 또 다른 성결의식이 필요 없는 참 신자들이 제사장들(벧전 2:9)이기 때문 아닐까요?
여기서 바울은 절기와 초하루, 안식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대속죄절을 비롯해 유교절, 무교절, 나팔절, 맥추절, 오순절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과 성령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지만, 장막절은 천년왕국에 성취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에스겔서에 오직 유월절(예수님의 초림), 장막절(예수님의 재림), 안식일과 초하루만 기록되어 있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성만찬(유월절)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장막절), 그리고 앞으로 있을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주일), 초하루(이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 10:10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심일까요? 삼상 20:5, 18, 24 등에서 다윗과 사울왕이 초하루절기를 지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4:22-23을 보면 초하루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 말씀을 배우는 듯한 암시가 나옵니다. 초하루절기의 의미는 말씀공부일까요?) 만이 있기에 에스겔서에서도 그 절기들만 나타난 것 아닐까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슥14;4)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성안에 성전은 없습니다.(계21;1-2)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Ⅲ.에스겔 40-48장의 성전구조
에스겔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그의 메시지에,사독 자손 제사장들을 이스라엘 배교 때의 신실한 제사장으로 표현했다(44:15;48:11).40-48장에
묘사된
신정정치는 제사 제도가 중심을 이룬다.새 성전은 지극히 높은 산 위에 세워진 성읍 형상의 것이며(40:2),사독의 자손 레위
제사장만이 이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에스겔도 사독 가문의 일원이자 예루살렘 제사장 중에서 요직에 있었다.40-48장에
나타난 제사제도는 신명기 법전 뿐 아니라 P문서의 그것과도 다르다.후자의 합법적 제사직이 아론 자손에 국한 된 것은 에스겔에
있어서 사독파와 레위파를 구별하는 것 같이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구별한다.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백성들에게 요구된 거룩함은
제사장직 가운데서 상징화 되고 있으며 제사장직이 계약의 중재자가 된다.41) 사독자손의 제사장에42) 집착하는 것,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향한 관심으로 에스겔은 그의 두 면모,제사장과 예언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43)
40-48장의 본문은 포로기의 삶의 자리는 그럴 수있는 처지가 비록 아닐지라도 에스겔의 성전제사를 관장할 제사장으로서의 면모와
야웨께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증언하고 있다.
41)J.P.Spencer,“Aaron,”AnchorBible dictionary,Vol.1(New York:DoubleDay,
1992),1-6.
그렇다면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의 제사장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사독계열 사제와 함께 아론 계열 사제,레위 제사장 등이 모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부류 속에 들어가고 있다.문제는 이들 제사장 등이 모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 그룹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문제는 이들 제사장 그룹들이 신앙과 신학이 서로 다르다는데 있다. 이들은 결코 하나의 색깔을 지니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사독계열 사제가 체제 유지적이라면,아론 계열 사제는 체제개혁적이다.구약성서 레위기와 민수기는 아론계열
사제를,신명기는 레위 제사장을 각각 제사장으로 인정한다.솔로몬의 성전을 관장하는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사독계열 제사장이다.왕대일,“회막,성전,회당 그리고 교제직 계승에 관한 전승과 사독계열 제사장들에 대한 전 이해를 통해 그들이 그렸던 새 성전에 관한 프로그램을 알아보고자 한다.
43)G.Fohrer,「구약성서개론(하)」,292-293.
1.사제직 계승
"누가 사제직을 수행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해 P문서는 레위지파 중 한 가문인 '아론과 그의
자손'이라고 말한다.에스겔은 '아론의 자손'을 '사독의 자손'으로 대체시킨 것 외에는 P문서의 관점과 같다.P문서나 에스겔 모두
레위인들에게 열등한 거룩함이 있음을 인정하였다.왜 에스겔은 레위 사람들을 열등한 제사장 계층으로 분류시켰을까? 에스겔은
44:40-41에서 레위인들이 외국인으로 교체됨을 이야기 한다.레위인들이 우상숭배의 못된 길로 빠진 죄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며,더 이상 제사장으로 수종을 드릴 수 없으며,부끄러움과 가증한 일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도 야웨는
그들을 성전의 종으로 삼을 것이라 중재적인 말을 던진다.이에 오직 제사장으로써 의 사독자손에 대한 언급은 44:15-16으로
이어진다.그들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레위인들처럼 타락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에스겔은 레위인들을 열등한
제사장 계층으로 분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D문서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모든 남자는 택한 곳에서 사제가 될 수 있었다.그러나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제단에 참석하지 못하는
레위인은
보통 평민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었다.44)J문서와 E문서에서도 족장들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치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사제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이는 사제와 관련된 성전이 아닌,도처에 산재해 있는 개별적인 제단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44)Menahem Haran,Temple and Temple-Service in AncientIsrael(Oxford,1978),
58-63.
사제직에 관한 한 J와 E는 D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레위 지파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당연시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자료들은 처음부터 사제직이 레위지파에게만 주어 졌다는 점에 일치한다.다만 레위 지파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기능했는가
에
대해 견해가 다른 것이다.사제계열의 학파 중 P의 경우는 아론의 자손에게만 한정되었다고 보며,에스겔의 경우에서는 사독의
자손에게만 한정 되었다고 보는 반면에,비 사제 계열에서는 레위지파 전체에게 주어졌다고 본다.다만 J와 E의 경우는 기존의 여러
성소에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반면,D는 오직 선택된 한 곳에서만 사제직이 수행될 수 있다고 보았다.그 밖에 사제가 아닌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여타 이스라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사제직에 관한 고전 이론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사제직의 시작은 왕조성립과 더불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실로의 엘리,눕의 아히멜렉으로 대표되는 왕조이전 초기의
사제직은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는 성소의 문지기로서 신상을 지키고,점치며 축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는 것이다.48)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사제직을 단지 점치고, 축하는 것뿐이었다고 볼 증거가 별로 없다.이스라엘의 사제직은 아주 고대적인 산물이며,실제로
사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49)일반적으로 사제 가문은 자신들의 선조를 모세에 소급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레위지파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50)따라서 어떻게 이른 시기부터 사제직의 특권이 레위 가문에 할당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45)Ibid.,63-65.
46)Ibid.,66-67.
레위 지파는레위지파가 사제직을 받은 것은 특히 J의 단편인 출 32:25-9의
'황금 송아지'사건과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데,그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한 자기 가족과 친척을 가차없이 죽일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신33:39).
47)Ibid.,70.
48)Ibid.,71-73.
49)Ibid.,73-76.
50)Ibid.,78-79.
야웨 종교의 최초의 전파자인 모세에게서 유래하며 이들은 이 신앙을 다른 지파에 전파하였다.따라서 모세 이후 이 지파는 사제직에 봉헌된 것으로 이미 간주 되었을 것이다.
사제직이 레위지파에만 해당된다는 원칙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첫째로 레위 지파 중 누가 실제로 사제직을 보유하는가?-아론의 자손인가, 아니면 달리 정해진 집단인가-하는
문제이고,둘째로 사제가 아닌 레위인은 제사 기능을 맡는 것이 불가능했고,기껏해야 사제에 종속된 신분일 뿐 이었는가,아니면
그들에게도 사제직이 열려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52)
P기자는 아론 자손에게 13개 성읍(유다/시므온 9개 + 베냐민 4개)을 할당하고 있으며,나머지 레위 지파에는 35개 성읍을 할당하고 있다.그런
데
아론 자손의 성읍은 유다,시므온,베냐민 지파의 영역에만 분포하고 있으며,아론 자손과 비사제 레위인이 공유하는 성읍은 하나도
없다.따라서 이 둘 사이의 경계선은 남북 지파간의 경계선에 해당하며,결국 남부 지파의 레위인은 무흠한 사제들로 인정된 반면에
북부지파의 레위인은 사제직의 권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53)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J,E,D가 말하는 아론 자손이란 남부
지파에 거주하는 레위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54)
사제가 아닌 레위인의 지위가 문제가 된 것은 북부 출신 레위인이 유다나
베냐민 지역의 성소에 왔을 경우이다.이런 점에서 볼 때,예루살렘에서 레위인의 문제가발생하게 된 것은 특히 북왕국 멸망 이후
히스기야 치세 때라고 믿을 만한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51)Ibid.,81-82.
52)Ibid.,84.
53)Ibid.,84-85.
아론 자손과 나머지 레위인 간의 긴장 관계는 P문서 안에서도 나타나 있다.바로 고라와 그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인데,고라는 고핫 자손으로서,이들은 P에 따르면 북부 왕국에 속한 에브라임,단,므낫세
반지파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54)Ibid.,87-88.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산당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산당의 사제들을 레위인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성전에서 수행하는 정식 사제들의 권리를 박탈한 것도 아니다.따라서 이
개혁은 사제와 레위인의 계급 형성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55)
예루살렘 멸망 이후 에스겔은 사제직을 사독 자손에게
한정시키고,사독 자손이 아닌 사제들은 레위인 반열로 강등 될 것을 말했는데,이것은 P 이후의 발전된 양상을 반영한다.따라서 '아론
자손'은 '사독 자손'이 발전․ 확장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56)따라서 하란은 포로후기에 레위인들이 소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레위인이 사제들보다 몇 배나 많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P자료가 포로기 후기 상황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는 통설에 동의하지
않는다.57)
그런데 에스겔이 레위인으로 강등시킨 비사독계 사제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므낫세가 도입한 우상 숭배에 고용된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제들 중 일부로서,성전 사제단의 주류가 아닌 유다 지방 사제들이거나 북부 출신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사독
자손은 성전 사제단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므낫세 치세 동안에도 정통 제사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것 같다.58)
에스라 시대에는
사제 문서는 토리의 중요 부분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레위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 시기에 레위인의 수효는
매우적어서,레위인을 거쳐서 받아야 될 십일조를 직접 수령하였다.이렇듯 P문서와 포로 후기 상황 간에는 실제적인 관련성이 결여되어
있다.59)
55)Ibid.,99-101.
56)Ibid.,102.
57)Ibid.,92-97.
58)Ibid.,103-107.
59)Ibid.,108-109.
레위인의 숫자가 이렇게 줄어들게 된 것은 포로 후시에는 사제직을 사독의 자손들에게만 제한하는 좁은 원칙이
사라지고,아론 자손들 전체가 사제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따라서 레위인으로 간주될 사람은 북왕국 출신의 사제 가문들 뿐이었다.
2.사독계열 제사장
40-48장은 레위인과 제사장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본문이다.40-48장은 새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백성 가운데 거룩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주며 미래의 신정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이 새 성전의 건설을 위해 에스겔은 특별히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의 성결을 요구한다.그 당시까지 성전에는 전쟁 포로 출신의
이방인들을 고용하여 레위인을 도와 성전의 천한 일을 시키던 관행이 있어 왔다(민수기 31:28-30,40-41;여호수아
9:23,27).에스겔은 이들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을 성전 봉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44:6-9).
그의 엄격한
성결에 관한 기준은 레위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그들의 우상을 쫓아
나(하나님)로부터 떠나갈 때 나로부터 멀리 떠나간"(44:9-14)죄를 범하였다.에스겔은 이런 죄를 범한 레위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제단에서 제사장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제사장 직에서 박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44:12-130.
그 대신 그들이 맡게 될 일은 바로 이방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천한 일- 곧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944:11).
성전에서
레위인의 지위 하락은 상대적으로 사독계 제사장들의 세력 성장을 의미한다.더구나 에스겔은 사독계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범죄할 때에 충성되게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묘사하며 앞으로의 제단 봉사는 예루살렘의 사독계 제사장들에게 제한한다고
선포하였다.60)
이렇게 에스겔서로 인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신분과 직분은 더욱 확연한 차이가 나게 된다.예컨대
40:46"북쪽을 향한 저 방은 제단 일을 맡은 제사장들의
방이다.60)R.Abba,“PriestandLevitesinDeuteronomy,”VT,Vol.27.(1977).3.
그들은 레위 자손 가운데서도 주께 가까이 나아가 섬기는 사독의 자손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43:19과
44:15에도 사독이 레위 자손이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이것은 사독계가 신명기로부터 형성된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
자손이어야 한다"는 여론에 굴복하여 내린 조치라고 여겨진다.61) 자신들을 레위 자손으로 만듦으로써 사독계는 여전히 제사장직
독점 체제를 유지하였고 레위인들은 더 하위 그룹으로 전락하였다.에스겔서에서 사독 제사장의 위치가 더욱 확고하게 다져진
것이다.62)
에스겔서의 기록대로 과연 포로기 이후의 제사장직은 사독계가 독점하였고 왕을 대신하여 절대 권력을 누림을 볼 수 있다.그러나 에스겔서가
말하는 레위인의 범죄 행각이 역사적 사실인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기록되었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분열 왕국 시대부터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유다에서 최고의 왕립 제사장직을 차지했던 자는 사독계 제사장들이다.그런데 그 시대의 역
사는
우상숭배로 인한 뚜렷한 야웨 절대주의 신앙의 쇠퇴를 보여주며 특히 부패는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적이 빈번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이러한 부패에 맞섰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왕의 우상 숭배를 방조하거나 혹은 이를 개혁하려는 왕의 의지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물론 왕립 제사장으로서의 그들의 종속된 위치가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그들은 성전 관리나 예배에 마저
소홀하였고(왕하 12),유다 말기에는 예레미야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거짓 예언 등의 죄악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렘
2:8;5:31;6:13).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레위인들의 배교와 이로 인한 실각이나 사독계 제사장들의 변함없는 충성에 관한 기술에 대한 진실성에 적잖은 타격이
된다.그리고 에스겔서가 신명기 바로 뒤에 나왔으며 제의와 제사장에 관한 진술 내용이 상반된다는 점에서 에스겔서가 신명기서를 반박할 목적으
61)A.Cody,A history ofOld TestamentPresthood (Rome:E.Pontoficio Instituto
Biblico,1969),136.
62)왕대일,“레위기의 구조,레위기의 신학,”「신학과 세계」29호 (1994년 가을),16.
-42-
로
일부 쓰여졌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즉 '오직 레위인만이 사제직을 담당할 권리가 있다'는 신명기의 주장을 '사독계 제사장은
레위 자손이며 사독계만이 충성된 길을 걸어 왔다.따라서 사독 자손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에스겔서는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뜨겁게 표면화된 레위계(아비아달계)제사장과 사독계 제사장의 세력 싸움은 곧이어 맞게된 바벨론의 유다 멸망에 의해서 일단 휴지 상
태를 맞는다.또한 바벨론 통치하에서 겪게 되는 정치적,종교적 변화는 이 들의 세력 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사독계열 제사장들의 성전구조
이스라엘 역사학자들은 통상 주전 587년부터 538년까지에 이르는 반세기를 포로기라고 부르는데,이것은 유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추방(주전
587년)당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주전 538년)하게 되는 때까지를 근거한다.추방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귀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각각 이루어졌다.그렇지만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유다 백성들에게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를 살게 하는 서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그 식민지 살이는 페르시아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거주해 살던 일단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그 땅은 유대인의 땅이 아닌,여전히 페르시아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정신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물론 폐허로 남은 예루살렘 성전의 흔
적 위에서 팔레스틴 땅의 난민들이 듣는 소리는 실의와 좌절뿐이었다(애1:1;5:14-15).정든 땅에서 추방당하거나 피난살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유다 난민들도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었다(시 137편).시온의 상실이
-43-
유대
백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하지만 이들의 좌절을 긍정적으로 읽을 때,그 속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행해지고 있었다.두 가지 질문이 그런 반성의 분위기를 야기한다.첫째,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 "마르
둑"(Marduk)에게 지고 마신 것인가?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야 말았는가?
둘째,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을 스스로 버리셨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땅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는가? 포로기에
활약했던 에스겔이 정리해 놓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들이 바로 에스겔서에 편집되어 있다.63)
에스겔서가 전하는 "하나님 이야기 "속에 잃어버린 땅의 회복과 민족의 부활이 중심 소재를 읽을 수 있다.이 시기의 디아스포라들은 성전 없
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다.안식일 준수,할례,정결예식 등의 본격적인 시행이 그런 노력의 산물들이다.회당의 성립과 발전도 성전(희생제사)없는 경건의 일종으로 태동한다.64)
에스겔은 주전 597년,예루살렘 주민의 제 1차 추방 때,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무리 중에 끼였던 인물이었다.65)예루살렘 최후의 날이 실현되
기 이전,즉 주전 587년 이전까지 그의 몸과 마음에서 터져 나온 예언은 유다의 멸망을 선고하는 일에 몰두되어 있었다(겔 1-32장).그러나 일단
나라가
없어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나자,에스겔은 철저히 쓰러진 민족의 재생을 선포하는 희망의 사신되기에 여념이
없었다(33-48장).에스겔의 시 대가 예레미야와 약간 겹치기는 하나 그는 대체로 제 2이사야와 함께 포로기의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진다.
에스겔의 예언 중에 독특한 것은 역사에서 경험할 사건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나님이 그 성전
63)왕대일,「구약성서이해」(서울:성서연구사,1993),170-171.
64)Ibid.,171.
65)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8),1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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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버리시고 떠나셨기 때문으로 본다.마찬가지로 에스겔의 환상 중에 그리고 있는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도 성전으로 귀환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전자가 하나님의 피난을 상징하고 있다면,후자는 하나님의 귀향을 상징하고 있다.66)
내가
보니,그룹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 청옥과 같은 것이 있는데,그 모양은 보좌의 형상과 비슷하였다…그 때에 주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고,성전에는 구름이 가득차고,안뜰은 주의 영광에서 나오는 광채로 가득찼다…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그룹들 위로 가서 머물렀다.그룹들이 내가 보는 데서 날개를 펴고 땅에서 떠올라 가는데,그들이 떠날
때에,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그룹들은 주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무르고,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그들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에 본 것으로,이스라엘 하나님을 떠받들고 있던 생물들이다.나는 그들이 그룹
임을 알 수 있었다…그들은 각각 곧게 나아갔다(겔 10:1,4,18-20,22)
뒤에 그가 나를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다.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땅은 그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다…그러자 주께서 영광에 싸여서,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다.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안뜰로 데리고 갔는데,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겔 43:1,4-5) 스겔의 하나님 이야기(하나님의 피난,하나님의
귀향)는 역사의 경험을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스라엘의 멸망이 야웨의 피하심(8-11장)으로 인해 왔다면
이스라엘의 재건,구원은 야웨의 임재,도래(43이하)로 시작될 것이다.그러므로 야웨의 임재,도래를 위하여 로운 성전은
필수적이다.그러나 이전의 성전으로는 안된다.부정했던 성전은 새롭게 재건되어야만 했다.67)이것이 포로기를 겪으면서 남의 땅에서
대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에스
66)왕대일,「구약성서이해」,171-172.
67)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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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의
처방이었다.이로써 에스겔은 하나님의 계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해답은 공동체적이다.하나님의 귀향의 가능성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나 이 때의 개인은
신정정체를 꿈꾸는 공동체를 형성한다.예언자 에스겔이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는 목적은 포로민들을 한사람,한 사람씩 새로운 공동체의
신뢰할 만한 구성원들로 변화시키고 훈련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집단적인 정체성과 책임을 재건 하자는 것이다.68) 성전 환상이
밝히고 있는 재건 프로그램(겔 40-48장)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참가하는 제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상,예언자 자신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는 예언자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민족 그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본문의 증언(40-48)에
귀를 기울이는 이상 그 문제의 해답은 개개인이 변화되어 이룬 공동체로 확장시켜서 찾아야만 한다.신명기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청사진이라면 에스겔의 성전 본문은 포로후기 황폐해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성전을
포기하기 보다는 새롭게 재해석한
사독계 제사장 자손들의 청사진이다.69)
68)노만 K.갓윌드,「히브리성서 2-사회․ 문화적 연구」,김 상기 역 (서울:한국신학
연구소,1994),163.
Ⅳ.예언자 에스겔의 성전신학
1.에스겔 성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에스겔 성전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표이다.이것을 보다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스겔 성전이 제 1성전 즉 솔로몬 성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된다.
1)솔로몬 성전
a.성전의 구조와 구성요소
솔로몬 성전의 구조를 말해주는 성경본문은 열왕기상 5-8장과 역대기하 2-7장이다.
솔로몬 성전의 근본적인 건축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의 상징인 법궤의 거처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에서 성전을 지은 것은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왕상 8:21)'한 것이라고 하였다.
건축할 전의 전체길이는 60규빗,너비가 20규빗,높이가 30규빗이었다(왕상6:2). 여기서 규빗(암마, 70( ה )은 미터법으로 환산할 때 약 50센티미터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성전은 크게 낭실(울람, וּא ם )과 성소(헤칼, י ל )지성소(드빌,רי )로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낭실의 크기는 길이 20규빗,너비 104규빗(왕상6:3)이고,성소는 길이가 40규빗이며 너비가 20규빗인 직사각형 구조이며, 지성소는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20규빗인 정사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특히 이곳은 백향목 널판으로 마루에서 천정까지 막아 성소와70)국영성경에서 규빗으로 번역된 길이 단위인 히브리어 '암마'는 약 45-52센티미터 정도로서, 성인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다.규빗(cubit)은 라틴어로 cubitum,즉 '팔꿈치'라는 말에서 나온 옛 영어이다.
김중은,「거룩한 길 다니리」(서울:한국성서학연구소,2001),159.-47-
성전 뜰에 있는 기구로는
첫째,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놋으로 부어만든 반구형의 '바다( ם ,왕상 7:23)'라고 불리우는 제사장들의 정결을 위한용기가 있었다. 이것의 크기는 지름이 10규빗,둘레가 30규빗,높이가 5규빗이었다. 이 바다를 열두 소가 받쳤는데 사방으로 세 마리씩 서 있었다(왕상 7:25). 열두 마리의 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한다.학자들은 이 바다가 여호와께서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시던 원시바다 혹은 대양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둘째, 성전 앞뜰의 북편에 다섯 개,남편에 다섯 개씩서 있는 희생제물을 씻을 수 있는 열 개의 물두멍( ריּוֹ )이다.
이것들은 모두 번제물로 쓰이는 희생 제물들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놋단( תח )이 있는데 길이와 너비가 각각 20규빗이고 높이가 10규빗이다(대하4:1).
넷째, 솔로몬 성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성전 앞의 두 기둥 야긴( וי)과 보아스( ז )가 있다(왕상 7:21). 이 기둥들의 높이에 대하여 열왕기는 18규빗(왕상 7:15)으로 역대기는 35규빗으로(대하 3:15)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열왕기의 기록은 기둥만의 높이를, 역대기는 기둥머리를 포함한 전체를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소내부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금단과 진설병의 금상과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 씩 두 쌍의 정금 등대(왕상 7:48-49)가 있었다.
지성소 내부에는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야웨의 언약궤'( ןוֹ ֹתי- ה ה )가 있었다. 언약궤는 그룹들 아래 지성소의 안쪽에 놓여져 있었으며 그룹들은 감람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입혀졌고(왕상 6:23ff),그 높이는 10규빗이고,날개들은 10규빗 길이로 펼쳐졌는데 지성소 길이의 반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결과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기록은 주로 성전 내부를 중심으로 묘하사고 있음을 알수 있다.
각종 기물들을 금으로 만들었다는 화려함이 특징으로 부각된다.
b.솔로몬 성전의 설계
성경의 기록들은 솔로몬 성전이 베니게 출신의 건축가와 장인들에의해 건축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왕상 7:14).
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의 구조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니게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수리아지역의 성전모형을 알아보아야 한다.
기본 설계에서는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낭실,성소 및 안방 또는 뒷방이 필수적인 구성요소들이다. 이와 같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신비하게 되어 있는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배열의 예는, 세부적인 면에서는 많은 수정과 장식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마 그리고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고학적 조사의 많은 부분은 긴 방 또는 긴 집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조의 중간부분을 가장 크게
하여 옆으로 3등분하면 솔로몬 성전의 구조와 유사한 설계도가 나온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은 긴 집에 해당하여 낭실은 넓은
방,성소는 긴 방,그리고 지성소는 정방형의 방에 해당한다.
솔로몬 시대 직후인 9세기(또는 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신전 또는 부속 예배당이 1936년에 알렙포와 안디옥 사이의 북시리아에 위치해 있는 텔 타이네트(TellTainet)에서 발견되었다.
이 신전의 규모는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작지만 세부적인 설계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에있어서도 솔로몬 성전과 아주 유사하다. 다만 텔 타이네트의 지성소는예루살렘 성전과는 달리 정방형이 아니었다.솔로몬 성전과 마찬가지로 텔타이네트의 부속 예배당도 성전과 궁정이 인접해 있는 종합 건물군의 일부였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 성전의 기본 설계는 먼 북방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주전 2천 년대에 여러 민족의 태동과 혼합이 이루어짐에 따라 히타이트,앗시리아,시리아,이집트 및 페니키아의 건축양식 요소들을 흡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의 모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4)71)"성전,예루살렘,"「기독교대백과사전」9권,(1983).
72) Encyclopaedia Judiaca(UR-Z), s.v. "Temple," Jerusalem, 1972, 948. Alfred J.
Hoerth,Archaeology &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Mich:BakerBooks,1998),
281.
2)에스겔 성전
이 성전의 구조는 건물의 높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주로 대칭적으로 나뉘어진 성전건물에 대한 측량 지수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성전의 구조로서 묘사되는데 이것이 에스겔 성전 묘사의 특징이다.
상상을 요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묘사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거한다는 것을표현하는 한 가지 점에 모든 노력이 집중되어 있다.
우선 이 성전의 위치는 이스라엘 땅 매우 높은 산 위이며 방향은 산의 남쪽이다(겔 40:2).
성전구역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40:5), 이는 거룩한것과 속된 것을 구불하기 위한 것이다(42:20). 담의 높이는 6규빗이며 전체크기는 500×500규빗이다(42:15-20). 바깥담으로 된 구역 안에 3개의 문이있다.에스겔이 처음 찾아간 곳은 동문이고 뒤이어 방문한 곳은 북문과 남문인데 크기는 세 개가 동일하다.
이 문들은 모두 성전 밖에서 바깥뜰로들어가는 문들이다.이어서 에스겔은 안뜰로 들어가는 남문,동문,북문으로 인도함을 받았다.이들 여섯 개의 문들은 군사적인 기능이라기보다는부정한 자를 거룩한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모든 문은 점차 높은 지점으로 이끄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깥문은 일곱 개의 계단을통해 올라가야했고(40:6,22), 안뜰로 들어가는 문은 여덟 개의 계단을 통해야 했다(40:34,37). 성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했다(40:49).특징적인 것은 성전삼면의 지대가 6척 높이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겔41:8).이와 같이 성전건물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73)"성전,예루살렘,"「기독교대백과사전」9권,(1983).
74)EncyclopaediaJudiaca(UR-Z),s.v."Temple,"Jerusalem,1972,944.
75)WalterEichrodt,Ezekiel,「에제키엘」,642.
76)김성익,"제 3성전의 구조와 신학에 관한 연구,"「신학리뷰」4(1996):57.
에스겔이 인도되는 곳은 주로 문이 많이 언급되는데 문 하나의 전체규모는
50×25규빗(41:8)이다. 문 중앙을 통과하는 통로 양편에는 각기 3개씩의 문지기 방이 있다.문 자체가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는데 그 크기가 성전내부 크기(20×40)보다 크며, 길이는 안뜰의 크기(100규빗)의 반이나 된다.또한 각 문마다 문지기의
방이 있다.그것들의 기능은 속된 것으로부터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다. 성전의 동,남,북쪽과는 달리 성전 서편에 문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태양을 경배하는 것(8:16-17)과 같은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성전의 바깥뜰에 대한 묘사이다.
바깥뜰 삼면에 박석으로 깔린땅이 있었다(40:17). 그곳에는 30개의 방이 있는데 예배자들의
모임이나 식사하는 장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바깥뜰의 네 구석에는 부엌설비(40×30)가 있었다(46:21-24). 안쪽
북,남문 옆에 번제물을 씻는 방과 희생물을 잡는 방과 상이 있다(40:30-43).안쪽 북,남문 가까운 곳에 제사장들을 위한 방 두
개가 있다(40:44-46).남향한 방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이 쓰고,북향한 방은 제단을 수직하는 사독자손으로 구성된 제사장을
위한 것이다. 안뜰은 크기가 100×100규빗으로 그 한 가운데에 제단이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뜰에 있어야 하는 대야 즉 물두멍이 없다는 것이다.
성소건물은 현과과 성소,지성소로 나뉘어진다.성소의
내부규모는40×20규빗이며 지성소는 20×20규빗이다(41:2-4).전 삼면을 의지한 골방이 성소의 벽사방으로써 3층으로
30개가 있다.전 전체의 크기는 100×100규빗(41:13-15)이다. 전 뒤편 서쪽 뜰에 있는 한 건물이 있는데
70×90규빗의 크기이다(겔 41:12).이 건물 양쪽 편에 두 개의 건물이 더 있는 것으로보인다(42:1-12).
그리고 나무제단이 나오는데 '여호와 앞의 상'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41:22). 77)Ibid.,58.
3)공통점과 차이점
지금까지 우리는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 각각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각기 구조가 이와 같다면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의 주요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
에스겔 성전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두 성전 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a.차이점
에스겔 성전은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과는 다른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우선 에스겔 성전에서는 휘장(출 26:33)78)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다른 제사장들도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게되었다.79)
또한 에스겔 성전에서는 제단에 대한
설명(43:13-17)이 성전의다른 어떤 것보다 자세히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매우 크게 묘사된다.번제물을 드리기
위한 제단은 안뜰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것은 성막이나 성전의 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그것이 없이는 성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속죄가 이루어지는 제단에서 만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솔로몬 성전
앞에는 번제단이 있었다는 것이 당연시 됨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서에는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에 대한 언급은 역대기하(4:1)와
에스겔서에만나온다. 에스겔 성전에서는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40:47;43:13-17).
차이점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78)김금희,"구약의 속죄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신학석사학위 논문,장로회신학대학교,
2002),32.
79)GeorgeC.M.Douglas,"EzekielTemple,"TheExpositoryTimes(1987/8):366.
첫째,대제사장이 나타나지 않는다.지성소가 제사장 모두에게 개방됨으로써 대제사장에게만 부여되었던 특별한 의무와 특권이 모든 제사장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졌다.80) 또한 화려한 제사장 의복과 우림과 둠밈에대한 언급도 없다.
대제사장이 없다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이전보다 더욱 더 완벽한 방법에서 야웨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소명을 받는다는 것을말해준다.81)
둘째,시은좌( ת ,mercy-seat)82)가 있는 언약궤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잃어버린 언약궤 대신 모든 나라들이 모여드는 곳 즉 여호와의 보좌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이 바로 언약궤를 대신한다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버려져 있는 동안 포로된 백성들이 있는 그 곳에서 여호와께서 잠시 성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11:16-20).따라서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처럼 언약궤 안에 있는 돌 판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또
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은좌로부터의 여호와의 말씀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과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셋째,대제사장의 특별의무와 특권이 없어졌고 공식적으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서 시은좌가 없으므로 이제는더 이상 속죄일이 존재하지 않는다.속죄일은 완성되었으며 지성소는 개방되었다.이처럼 에스겔의 환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의 전진을 보여준다. 속죄일의 완성은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는데 예를 들면스가랴 3장 9절이 그러하다.(참조;겔 45:23)
넷째,대제사장과 속죄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희년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이 영광스럽고 독특한 모든 것들의 해방을 알리는 신호는 속죄일에(레25:9)나팔을 크게 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지성소로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고 있는 현재,이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초자연적인 생명이 선물로 주어지고,완전히 그들 사이가 재연합되는 것을 볼 때 그 것은 이사야 61장 1-2절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85)
80)Ibid.,420.
81)C.F.KeilandF.Delitzsch,「에스겔」,송종섭 역 (서울:아가페출판사,1995),753.
82)김중은,「거룩한 길 다니리」,160.
83)GeorgeC.M.Douglas,"EzekielTemple,"420.
84)Ibid.,421.
성소가 지성소와 같은 동등성과 정체성을 갖는 것과 아울러 에스겔 성전과 그것의 봉사 직무에 있어서 몇 가지 다른 독특한 점들이 있다.
첫째,
번제단 옆에 있었던 그리고 모세 성막의 입구에 놓여 있었던 물두멍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죽지 않도록 그들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기 위한 기물이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 물두멍이 열 개의 물두멍과 놋바다라는 좀 더 정교한 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빠진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바이다.그래서에스겔 성전에서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띈다.그러나 완전한
속죄와 정화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데 왜 이것이 더 이상 있어야 하는가?
새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두멍은 계속 유지될 필요가 없다.86)
둘째, 관유( ן ה )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출 40:9-11;레 8:10-11).
이 관유는 원래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희생물에 기름을 바르는 일에 사용되던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에는 기름부음을받는 제사장들이나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다.87)
셋째, 모세 성막에는 7개,솔로몬 성전에서는 10개였던 정금등대( תוֹרוֹנ )에 대하여 에스겔 성전에서는 언급이 없다.
왜 에스겔 성전에서는 촛대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그 이유는 지성소를 가득 채우고 그곳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넷째, 특이한 점은 향단과 진설병상이 에스겔 성전에서는 하나로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41:22).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는 성소에 세 가지의 기물들이 있었다.그것들은 눈에 띄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락시킬 수 없는데 바로 등대,진설병상,향단이다.
그런데 진설병상에 대한 설명과 그 부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에스겔의 '여호와 앞의 상'이 진설명상과 향단의 두 가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남는다.에스겔이 비록 여기에 대하여 언급이 없으나 그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이것들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찼기 때문에 향과 향료 등이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의 환상은 모든 가시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기물들에 대하여 새로운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밖에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솔로몬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기둥 명이 나타나지만 에스겔 성전에는 기둥에 대한 명칭이
없다.솔로몬 성전은 직사각형 구조를 갖고 있으나 에스겔 성전은 정사각형으로서 뚜렷한 대칭 구조를 보이고 있다.이것은 성전구조의
중앙 집중적인 의미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성전의 공평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성전에 대한 묘사는 정적이다.그러나 에스겔 성전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는 동적인 측면이
부각되며 각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특히 강조하는것을 볼 수 있다.동시에 건물들에 대한 측량지수에 대해서는 마치 실제건물을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겔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과 경계표시와 측량이다.
또한 성전 건물 중 특이한 것은 성전 서편 뒤에 건물이 서 있다는 것이다(41:12).
그러나 그 건물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그 용도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건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사단의 원류인 그룹(케루빔)의 형상이 있다.
이 건물에 대하여는 차후로 살펴보겠다.
에스겔 성전이 이전의 솔로몬 성전과 확연히 다른 점은 우선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성과 속이 구별된다는 점이다.그리고 외형의 규모도 더 크고 지대도 더 높다.윈워드(Winward)는 새 성전이 옛 성전에 비해 궁궐과 떨어져 있고 지대가 높고 짜임새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숭고성,완전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에스겔 성전은 문과 담이 나옴으로써 성전의 안과 밖의 구역을 명확히 구별하고 있지만 솔로몬 성전은 외곽경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것은 에스겔 성전의 거룩성과 분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또한 솔로몬 성전 내부의 많은 부분이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나 에스겔 성전에 대한 묘사에서는 '금'이라는 낱말이 나오지 않는다.이것은 성전이 회막처럼 검소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화려하기가 극치를 이루는데,그 동안 광야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지내왔던 회막(성막)과는 완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b.공통점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과의 전형적인 공통점은 성전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두 성전 모두 기둥을 갖고 있는 점이 유사하다. 에스겔성전이 동향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도 해뜨는 방향을 향하고있다.
에스겔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크기는 열왕기서와 정확히 일치한다.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에는 곁방이 모두 같이 묘사된다. 성전내부와 장식 및 비품들은 열왕기에 나오는 목록들과 같다(40-41장).
성전의 낭실,성소,지성소 등의 기본구조는 같다.
이외에 벽들을 치장한 장식 소재들은 솔로몬 성전에서와 같다(왕6:29-30).
나무로 되어있건 혹은 놋으로 되어 있건 제단 또는 상이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그리고 솔로몬 왕조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해왔던 사도계급이 에스겔 성전에서도 계속 그 직위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막에 임재하셨던 야웨의 영광(출40:34-35)이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성전에서도 임재하셨던 점이 일치한다.
이것은 성소의 중심에는 야웨의 영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8),156-157에서 재인용.
영광이 임재하셔야만 그 성소의 정체성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것은 에스겔 성전이 전혀 새로운 형태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갖고 있었던 사건들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더구나 성전의 추이는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대하3:1).
이것은 출애굽 당시 광야시대의 성막 전승과 가나안 정착 후 실로 전승과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제 1성전 전승과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성전의 핵심부분이라 할 수 있는 지성소,성소,낭실 구조는 두 성전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본질적인 성전의 정체성의 연속성도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막,제1성전,에스겔 성전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라는 신학에 있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2.불연속적 측면에 대한 신학적 의미 분석
에스겔 환상 성전은 인간의 손길이 관여한 바가 없는 야웨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편 과거 솔로몬 성전의 구조들은 이 새로운 시대에 적용될 수 없었다.90) 에스겔 성전은 암묵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비판하는 측면이 있다.
그
성전은 약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어긋난다. 하나님의 회막은 얼마나 검소한가! 본래 이동식 성막이던 것이 정착식
성전으로 변하면서 성소 본래의 모습이 변질된다.왜 성전의 부속건물에 대하여 길게 서술하는 것일까? 솔로몬 성전 당시 거룩해야 할
성전과 그 부속 건물이 세속에 물듦으로 인해 그 거룩성이 훼손되었다.그 성전은 바깥뜰이 직접 그지역의 속된 땅과 직접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따라서 백성의 죄로 인해 생긴 그 땅의 오염이 직접 뜰의 거룩한 곳에 침투할 수 있었다.
90)WalterEichrodt,Ezekiel,658.
그러나 새 성전은 바깥문과 안뜰 문이라는 이중 통과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막을 조치가 마련되었다.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 건물,그 부속 건물들,문과 뜰에 대한 매우 상세한 설명은 새 성전이 모든 면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에 부합되고 또한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배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과의 불연속적 측면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세속과의 분리를 통한 거룩성의 확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제 2성전과의 관계
에스겔 성전과 제 2성전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에스겔 예언활동이 끝난지 약 50년 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제 2성전을 건축한다.
이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들었을까? 그렇다면 학개가 에스겔의 프로그램을 취하고 선포함으로써 당대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91)그것은 스가랴에 의해 선포되어지고 있는 예언자 에스겔의 본래적인 계획이다.헨슨(P.Hanson)은 학개와
스가랴를 에스겔 전승
의 담지자로 본다.그가 보기에 회복된 공동체의 구조는 에스겔에 의하여
상세하게 그려진 것들이다.92) 에스겔의 프로그램에 대한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활동의 의존성은 새 성전에 대한 건축계획에서도
자명하다.93)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에스겔의 계획을 스룹바벨 성전에 관한 연구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에스겔의 성전계획과 포로기 이후 성전 재건계획의 일치는 너무 포괄적이다.즉 새 성전은 에스겔 43장 11절에 나타난
계획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이다.
91)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이무용,김지은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228-229.
92)Ibid.,229.
93)김지은,"학개의 성전 재건선포에 대한 역사적 연구,"「구약논단」(2000):85."94)
왕대일도 학개,스가랴를 에스겔 전승의 담지자로 본다.95) 학개의 신탁은 스가랴와 함께 성전제사의 회복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있다.이 점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에스겔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96) 에스겔은 이 환상의 말씀을 포로기 공동체에게 주었다(겔 43:10-12).에스겔은 포로기 이전의 성전예배와 연속성을 가지며 특별한 제도적 상술과 구체적인 역사적 수행자들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바라 보는 회복 프로그램의 윤곽을 그려주는 환상을 보았다.97)본 논문에서는스룹바벨 성전에서 에스겔의 프로그램이 일부 성취되었다고 본다.
성전의 전체적인 규모는 일치하지 않지만 그 정신은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스겔
성전은 포로기를 정점으로 포로기 이전 성전 신학과 포로기 이후 성전 신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또한 과거의 성전과
결별하는 불연속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따라서 선지자 학개,스가랴를 통해 에스겔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이어진 것이다.98)
성전의 재건축 준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성전 환상이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99)학개,스가랴 선지자가 성전에 대한 전승적 근거 없이 성전 재건의 말씀을 선포하기는 어렵다.바로
여기에서 에스겔 성전 환상이 큰 역할을 하였다. 제 2성전기는 포로후기시대 유대 사회의 암울함과 초조함을 그 배경으로 한다.이
시기는 무너진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성전을 재검함으로써 흐트러진 유대사회의 분위기를 변혁시켜 나가려던 학개와 스가랴의 회복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되었던 성전 재건 계획(40-48장)을 역사 속에 구체화시킨 노력이었다.그렇기에 학개와 스가랴의 메시지는
사독계열 제사장이 주도하는 성직계급사회를 표방 하였다.100)
94) 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258.
95)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서울:감신대 제 9회 성서학연구소 심포지
움/제3회 고고학회 연례학술대회):4.
96)왕대일,「구약성서이해」(서울:성서연구사,1993),177-178.
97)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236.
98)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283.
99)WalterEichrodt,Ezekiel,643.
에스겔 성전은 제 2성전 신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작음의 포로공동체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동체의 정체성이다.그들은 무엇으로 그 것을 입증할 것인가? 다윗 왕조의 정통적 왕위 계승을 그 문제가 해결될수 있는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성전'에서 발견하였다.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 그들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야웨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었던 '성막'을 기억하였다.
하나님의 성막이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그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는 야웨의 백성'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전승 속에서 포로 공동체는 자신들이 귀환할 경우 제일 먼저 할 일이 성전건축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101)그들은 포로로 있을 동안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에스겔의 성전환상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에스겔의 성전 예언은 포로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를 성전 재건으로 해결하려는 선지자 학개,스가랴로 이어지면서 제 2성전
건축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4.신약과의 관련성
주전 587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신학적으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제 2성전 마저도 제 1성전 못지않게 타락했는가? 왜 예수는 성전이 허물어지리라는 예언을
하는가(눅19:41-44)? 마치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리라는 예언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에스겔과 예수는 50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예루살렘 성전
에 대하여 엄청난 예언을 선포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히 두 사건의 신학적 연관성에 관심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00)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4.
101)김지은,"바벨론 유다 포로민들의 삶,"「구약논단」7집 (1999.10):122-123.
성전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비판은 예수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예루살렘 성전체제는 소수 집권층인 제사장 계층이 주도하는 성전 중심의 경제 체제이기도
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희생제물과 성전 주변에 형성된 은행,숙박,건물 건축자,제물 판매업자,환전상인 등 모두 그들의
경제권과 생산력을 성전 체제에 걸고 있었다.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 당시 예루살렘 인구의 상당수가 성전에 생계를 걸고 있었고
그곳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102)로마제국 또한 성전을 책임지던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을 비
호해주는
댓가로 팔레스틴의 노동력과 생산력을 착취하였다.복음서의 예수가 직면했던 최대의 적은 바로 갈릴리의 바리새인과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었다. 마치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렘 7:1-11)에서처럼,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도둑들이 꿰차고 앉아서 온갖
악을 저지르는 온상으로 보았다. 이것을 에스겔의 성전과 비교해보면 성전의 타락상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예수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0)에서 온갖 악행이 저질러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더렵혀지는 성전에서는 야웨 하나님께서 도저히 계실 수 없었기에 에스겔은 성전 심판 환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이것은 주후 70년의 성전 파괴와 주전 587년의 성전 파괴는 서로 신학적인 상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짐을 인하여
모든 사람이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사건을 구약의 제사장적 법에 근거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신약에서 에스겔서가 직접,간접적으로 인용된 경우는 총 65번인데 그 중에서 48번이 요한 계시록에서
인용되었다.103)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에스겔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102)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7.
103)W.S.Lasor,D.A.Hubbard,andF.W.Bush,「구약개관」,박철현 역 (고양:크
리스챤다이제스트,2003),705-706.
에스겔의 성전구도는 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구도(계 21:1-22:5)에 그 영향을 미치며 에스겔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새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이(겔47:3-12)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생명의 강이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높은 산 위에 데려가 성읍 형상을 보여준 것(겔 40:20)처럼 요한 계시록에서도 성령이 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준다(계 21:10). 이 때 요한은 성안에서 성전을 보려하였으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계 21:22)을 목격한다.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사라짐을 보여준다.이처럼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줌으로써 에스겔이 마치 성전 환상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종말론적인 성전 환상을 매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게 보여주고 있다.
5.에스겔의 성전 신학
1)거룩
에스겔 성전은 '거룩'의 신학을 담고 있다.토에바(겔 16:2;20:4)는 거룩한 것을 침범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의 주위를 재난으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다름 없다.104)에스겔은 거룩하신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더러워지고 있음을 고발한다(겔 8-11장). 인간의 악행은
성소를 더럽히는 범죄와 관련
될 경우 가장 큰 징벌을 받게 된다.왜냐하면 그것은 야웨 고유의 거룩하고 신비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5) 에스겔서가 보여주는 것은 제사장적 환상 즉 성전의 역할에 대한 해석이다.
104)KlausKoch,「예언자들」,강성열 역 (고양: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1),164.
105)Ibid.,146.
이는 성전자체가 희생 제물이 되어 창조물을 정화하고 더 나아가 재구성하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조와 관계되는 것이다.106) 성전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기존의 예루살렘성전이 더렵혀졌다는 것이다.
제사장의 관점에서 이러한 부정은 정화되어야만 한다.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의 부정함을 제거하고 이전의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 성전 제의는 창조물의 성결과 안정을 유지,회복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이 부정한 장소가 되어버렸다면 성전과 예루살렘 자체가 상징적으로 제물이 되어 정화와 회복을 가져와야 했던
것이다.107)벵겔(Bengel)은 '드러난 거룩'으로서의 영광에 대해 말했는데, 에스겔 40-48장에서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는 광경은 거룩이 베일을 벗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에스겔은 영광이 거룩한 산으로 돌아올 때 종교적 공동체에게 필요한 제의적, 공동체 요구사항들을 말하고 있다(겔 43:1-12).108)
2)소망
에스겔 성전은 미래를 보게 한다.
이 성전은 에스겔 예언 선포 당시 이루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듣는 청중에게는 미래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성전환상을 통해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갈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은 현재의
포로기를 야웨 신앙으로 극복할 것을 구체적인 성전 환상을 통해 선언하신다. 이것은 야웨께서 포로민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인 성막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에스겔 예언자의 성전신학을 소망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환상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목표를 제시한다.포로시대의 사람들에게 에스겔은 커다란 희망이 메시지를 전해주었다.에스겔 성전이 약속의 땅 팔레스틴에 다시 지어지기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재의 포로기를 인내하며 기다린다.
106)MarvinSweeney,“사독계열 제사장,포로기의 환상 예언자 에스겔,”왕대일역,「구
약성서,읽기와 해석하기」(서울:감신대성서학 연구소,2001),38.
107)Ibid.,47-48.
108)JohnG.Gammie,holinessonIsrael,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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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복
에스겔 성전은 성전 중심의 구도를 보여주는데 이는 회막(성막)을 중심으로 한 민수기 2장의 구도와 유사하다.
한 방향에 세 지파씩 네 방향으로 지파 진영들에 의해 둘러싸여 모든 진의 중앙에 있는 광야의 회막성소(민 2:17)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정체성과 실질을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끌어오는 거룩한 준거점 둘레에 포진한 다양하면서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109) 이것은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래 바라셨던 그런 구도이다.이런 면에서 에스겔 환상 성전은 야웨 중심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야웨 하나님은 열왕기상(9:6-9)에서 의거 즉 신명기 신학에 따라 성전을 떠나시고 열왕기상(9:4-5)에 따라 성전으로 되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은 시온의 회복과 깨어진 야웨와의 계약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그 초점이 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향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겔 36:26-27)."
회복을 의미하는 세 가지 환상 기사가 있다.
첫째,37장의 마른뼈가 살아나는 환상이다.
둘째,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 환상이다.
셋째,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야웨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시는 성전
환상이다.전체적으로 에스겔 40-48장은 33장부터 계속되어온 구원 메시지의 종결편이다. 에스겔은 성전 환상을 통해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받아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야웨의 거룩한 영광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공동체에게 선포한다.
109)JosephBlenkinsopp,「에스겔」,박문재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200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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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결론
1.요약
에스겔 성전은 오늘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방향에서 토론을 전개해왔다.광야시대의 성막으로부터 시작해서 실로 성소를 거쳐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공동체는 삶의 중심에 항상 성소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눈에 보이던 성전이 사리진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근거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겠다고 한 성전이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신학적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에스겔 환상예언을 통해 포로공동체는 약속의 땅에서 행했던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힌 역사였다.
구약성경에 대하여 행해져 왔던 여러 역사 비평적 방법은 예언서를 일종의 역사적인 시대의 산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에스겔서 본문 가운데 에스겔 예언자의 직접적인 증언은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에스겔
학파라는 예언자 제자그룹이 편집한 작품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공시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예언서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본문을 읽는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해석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에스겔 예언자의
예언을 해석할 것인가?본 논문에서는 성경 본문을 정경을 수용하는 해석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스라엘 성전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특정 모델을 결정적인 형태로 볼 수 없다.이 성전은 고대 중동지역에 자리한 만큼 그 지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성전내부를 이루는 3분한 구조는 유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광야시대의 성막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바
그것은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모세라는 선지자를 통해 설계도(출 25:9)가 계시됨으로써 건축된 것이다.이것은
일종의 노천신전으로서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차원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을 가진 준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에스겔 성전은 솔로몬 성전을 넘어서서 광야시대의 성막(회막)전승을 따라가고 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배치된 열두 지파의 구조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배치구조와 흡사하다(민 2장;겔 48장). 따라서 에스겔 성전은 성막의 확대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의 성소가 성막이라면 출바벨론의 성소는 에스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성막은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셔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전능하신 하나님이 회막이라는 노천성막에서 자기백성과 같이 하시겠다는 것은 여타 가나안 신전이 추구하는 정치 신학과 정반대이다.다른 고대 중동성전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성전도 정치적,종교적,경제적 기능을 갖고 있는데 그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정치적인에 따라 성전은 종교혼합주의의 온상으로 비화한다. 바알신앙과 야웨 신앙이 동시에 진행되는데,에스겔 8-9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형적인 타락상을 보여준다.
솔로몬
성전은 고고학적 발견에서 보는 것처럼 가나안 신전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하지만 이 성전의 특수성도 간고할 수 없는데 그것 또한
성막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도한 성전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양식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성전 봉헌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다.그 대신 조건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킬 때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제 1성전을 직접 건축한 솔로몬이 먼저 성전을 이방적인 것으로 더럽혔다.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성전의 거룩성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주전 587년 성전파괴라는 대파국을 초래하였다.
바로
이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공동체에게 에스겔이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성전 환상예언을 통해 포로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선언하기에 이른다.그 것은 포로공동체 가운데 당신이 계시겠다는 놀라운 선언이다(겔 37:26-28).예언자는 포로민들에게 야웨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성전환상을 보여준다.더렵혀진 성전을 떠났던 야웨의 영광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저질렀던 악행들을 회상한다.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야웨 하나님의 고발을 받아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음이 밝혀진다. 본문 43장 1-12절에 관한 주석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야웨의 영광과 거룩'이라는 성전신학을 발견하게된다.
신앙 공동체는 각각의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성전 환상본문을 다르게 받아들인다.환상을
문자적이나 혹은 상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땅에 세워질 역사적 지상성전,지상성전의 원형으로서의 하늘성전,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성전으로 보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본문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입장이 미묘하게 틀려지는데 본문 속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 있다.환상으로 보여진 에스겔 성전은 과연 경험할 수 있는가? 정중호는 가상현실비평 방법을 통해 가상성경을
통한 에스겔성전 측량장면을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마치 입체영화를 보는 것처럼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에스겔 성전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성전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답변을 시도해본다.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과의 비교를 통해 양
성전간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으며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말하는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다윗이 받은 계시대로 지어졌다고 하나 성막의 건립정신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은 핵심부분에서는 거의 모든
부분이 일치한다.그러나 에스겔 성전은 전반적으로 솔로몬 성전의 전체 틀거리를 변경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솔로몬 성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성전의 모습이 드러난다.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성전의 거룩성이다.특히 성전 담을 측량하는 장면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그리고 성전의 우두머리라고 할수 있는 대제사장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해서 이 성전은 보다 더 높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보인다.과연 이 성전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성전인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본문 말씀을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포로기 신앙공동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성전 환상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는 이 환상성전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현재 처한 삶의 자리이다.그들은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상태이다.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환상성전은 그 당시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이다.
지금 그들의 당면 과제는 포로상태에서 과연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이다.이 때 예언자는 그들에게 소망과 회복의 말씀을
선포한다. 성전에다시 나타나신 야웨의 영광을 보았다면 그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자기들 가운데 야웨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성전은 종말론적 이다. 제 2성전이 에스겔 성전의 역사적 성취라고 보아도 무망한 것은
아직도 그들에게 보이는 성전 개념이 중요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로기 직후 학개,스가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이 성전재건이라고 외쳤다.시대정황으로 올 때 예언자 신분을 가진 그들은 이스라엘의 고대 성전전승을 다 알고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그렇다면 그들에게 에스겔 예언이 전해졌다고 보아야 한다.바벨론 포로 공동체가 귀환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재건이었다.이것은 포로 귀환민들에게 있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음을
보여준다.
이제 제 2성전기가 시작되었다. 이 성전은 과연 야웨의 거룩성에 합당한 제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에스겔 예언자가 누누이 강조한 것은 야웨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다. 만일 이 기준에 부적합하다면 다시 이 성전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시 실패한다.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더미가 되면서 이제 보이는 성전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수포화되었는가? 에스겔은 이스라엘 고대의 야웨 전승과 후대의 유대종교를 이어줄 수 있는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으며 이 같은 점들의 연결은 이스라엘 종교역사를 형성함 이 역사는 그리스도를 낳게 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된다. 유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는 여기서 각 공동체의 입장에 따라 노선을 정하였다. 유대 공동체는 다시금 율법 공동체로 방향을 잡았다.이에 대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종말론적인 에스겔 성전이 완성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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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40:1-49
성전 측량
40~48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수립될 것인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상징으로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고 (40-43장), 그 곳에 새로운 의식이 확립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44-46장),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새롭게 분배하게 될 것을 제시합니다 (47-48장). 그 중에 본장인 40장은 앞선 39:21-29에 나온 이스라엘의 회복에 따른 성전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환상의 배경(1-4절), 성전 바깥뜰 측량(5-27절), 성전 안뜰 측량(28-46절), 성소 입구 측량(47-4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계시 환상의 배경 (1-4절)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이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상 중에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리고 가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1-2절).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는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온지 25년째를 말합니다. 유다 예루살렘을 바벨론 군대로부터 3번에 걸쳐 함락되었고 유다 사람들을 3번에 걸쳐 사로잡혀왔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2번째 함락되었을 때 사로잡혀온 선지자입니다. 예루살렘이 2번째 함락되어 유다 백성이 사로잡혀간 때는 B.C.597년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로부터 25년째 되는 해는 B.C.573이 되는 해입니다.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는 예루살렘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함락된 때로부터 14년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성이 완전히 함락된 때는 바벨론 군대가 3번째 공격을 했을 때인데 그 때는 B.C.586년입니다. 그 때로부터 14년이 되는 해는 B.C.573이 되는 해입니다. 그 해 1월 10일에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이상 중에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았습니다. ‘매우 높은 산’은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시온 산(Mt. Zion)은 예루살렘 동남쪽 구릉지대를 말하는데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오른 봉우리), 다윗성으로 불리기도 했고 (왕상8:1, 대하5:2), 후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10:24). 시온 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었다고 했는데 ‘성읍 형상 같은 것’은 성(城)같은 모양을 한 성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남쪽에 보이던 성읍같이 생긴 성전으로 데리고 가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이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보이는 것을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보이려고 데리고 왔으니 본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3-4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은 하나님이나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하나님의 사역을 대행하는 천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놋은 견고함을 상징하는바 천사의 초자연적인 특성을 암시합니다.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는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삼줄은 비교적 긴 거리를 재는 도구로서 주로 땅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됩니다. 장대는 비교적 짧은 길이를 재는 도구로서 주로 건축물의 높이를 잴 때 많이 사용됩니다. ‘문에 서 있더니’는 에스겔이 남쪽을 향해 성전을 보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천사가 북문에 서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천사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동문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천사로부터 환상으로 본 계시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세하게 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성전의 실재성을 눈으로 보고 천사가 성전 구조에 대해 해설한 내용을 귀로 듣고 성전의 전제적인 구조와 윤곽을 마음으로 그려보고 그것을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2. 성전 바깥뜰 측량 (5-27절)
5절 중간에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를 더한 여섯 척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길이 측정 단위는 규빗(cubit)입니다. 일반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가지의 길이로서 45.6cm로 환산합니다. 그런데 왕실 규빗은 일반 규빗에 손바닥 너비만큼을 더한 길이로서 53.2cm(45.6+7.6cm)로 환산합니다. 본문의 ‘척’(尺)은 왕실 규빗을 말합니다 (5절, 43:13). 과거 성막과 솔로몬 성전은 일반 규빗에 의해 측정하여 지어졌는데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새 성전은 왕실 규빗으로 측정을 한 것입니다. 천사가 들고 있는 장대는 여섯 척이라고 했습니다. ‘여섯 척’은 왕실 규빗으로 6규빗이라는 말로서, 왕실 규빗의 1규빗이 53.2cm이므로 6규빗은 319.2cm로서 약 3.2m에 해당합니다. 곧 천사가 들고 있는 장대의 길이가 왕실 규빗으로 6규빗으로서 약 3.2m였던 것입니다.
① 사면 담
5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3:5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11:45, 19:2, 20:26).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훼손되고 무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과 이름과 영예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법궤를 빼앗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법궤를 두는 곳마다 재앙을 내렸습니다. 다곤 신상을 훼파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으로 죽게 하고 농작물에 쥐들로 해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스스로 법궤를 유다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삼상6:1-12).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두껑을 열어보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무엘상6:19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만)칠십 인'은 주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오만)’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괄호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받은 전체의 수가 50,000이고 실제로 죽은 사람의 수가 70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0,00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벧세메스는 전 인구를 합쳐도 50,000명이 안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Keil, Smith, Fay).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는 '(오만)'이라는 말이 없고 '칠십'인만 있습니다. 혹 있는 사본은 숫자로 쓰인 히브리어 알파벳 70에 해당하는 '아인‘(ע)을 50(+1,000)에 해당하는 눈(נ) 으로 잘못 필사(筆寫)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Kennicott). 70인역(LXX)에도 '(오만)'이 없고 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도 '칠십'인이 맞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과 같은 성도도 지키십니다. 고린도전서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고전6:16). 하나님의 이름과 목적과 영광이 있는 성도를 지키십니다. 시편37:28에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도의 모든 소유를 지키십니다. 시편16:5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성도의 기업을 사방으로 지켜주십니다. 스가랴2:5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② 동쪽 문간
6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길이가 한 장대요 그 문 안쪽 통로의 길이도 한 장대며
7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요 각방 사이 벽이 다섯 척이며 안쪽 문 통로의 길이가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 문이 있으며
8 그가 또 안 문의 현관을 측량하니 한 장대며
9 안 문의 현관을 또 측량하니 여덟 척이요 그 문 벽은 두 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
10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왼쪽에 셋이 있고 오른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같은 크기요 그 좌우편 벽도 다 같은 크기며
11 또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너비가 열 척이요 길이가 열세 척이며
12 방 앞에 간막이 벽이 있는데 이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요 저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며 그 방은 이쪽도 여섯 척이요 저쪽도 여섯 척이며
13 그가 그 문간을 측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너비가 스물다섯 척인데 방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14 그가 또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 척이요 현관 사방에 뜰이 있으며
15 바깥 문 통로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쉰 척이며
16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고 그 창은 안 좌우편으로 벌여 있으며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에스겔이 본 성전에는 문간이 모두 6개가 있었습니다. 바깥뜰 동쪽과 남쪽과 북쪽에 3개, 안뜰 동쪽과 남쪽과 북쪽에 3개였습니다. 그 모든 문간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바깥뜰 문간들을 측량했습니다. 6-16절에는 바깥뜰 동쪽 문간을 측량했고 20-27절에는 바깥뜰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본문은 바깥뜰 동쪽 문간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은 바깥뜰 동쪽 문간으로 들어가면서 동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그 구조는 층계를 올라 문과 문의 통로가 있고 좌우에 문지기 방들이 3개씩 있고 현관이 있고 안문이 있었습니다. 문간의 전체 제원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25×50×60척(13×27×32m)였습니다. 13-15절에 “그가 그 문간을 측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너비가 스물다섯 척인데 방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그가 또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 척이요 현관 사방에 뜰이 있으며, 바깥 문 통로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쉰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14절에서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척이요’라고 했는데 ‘현관’에 해당하는 ‘예일’(איל)은 ‘기둥들’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너비가 스무척’에 해당하는 ‘쉬쉼’(ששים)은 ‘60’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문간의 높이가 60척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문간에는 문간을 오르는 층계(계단)가 있었습니다. 6절에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동쪽 문간에서는 층계의 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북쪽 문간이나 남쪽 문간을 말할 때 층계의 수를 7계단이라고 했습니다. 22절에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라고 했고, 26절에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바깥뜰의 동쪽 문간의 구조가 다른 문간들의 구조와 다 같다는 점에서 동쪽 문간의 층계도 7계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 위 문간 입구의 벽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16절에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라고 했습니다. 종려나무는 번성과 풍요와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시92:12, 요12:13, 계7:9).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입구에는 여닫는 문과 문 통로가 있었습니다. 문 통로의 크기는 너비와 길이(높이)가 각각 10×13척(5×7m)이었습니다. 11절에 “또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너비가 열 척이요 길이가 열세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길이’에 해당하는 ‘오레크’(ארך)가 길이 뿐 아니라 높이를 가리키기도 하는 단어로 보아 길이를 높이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좌우의 문지기 방들을 지나면 안쪽 문 통로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현관이었습니다. 현관은 길이가 8척(4.3m)이었고 벽 두께는 2척(1.1m)이었습니다. 9절에 “안 문의 현관을 또 측량하니 여덟 척이요 그 문 벽은 두 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관을 지나 나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문 통로 좌우로 문지기 방들이 있었습니다. 문지기 방은 모두 6개였습니다. 좌우로 3개씩이었습니다. 10절에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왼쪽에 셋이 있고 오른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같은 크기요 그 좌우편 벽도 다 같은 크기며”라고 했습니다. 보통 문지기 방은 좌우에 1개씩 있기 마련인데 성전 문지기는 좌우로 3개씩 있었습니다. 좌우로 3개씩 있는 경우는 최고의 존귀한 분을 지켜야 할 경우입니다. 그 방의 크기는 너비와 길이가 각각 1장대씩이었습니다. 6척×6척(3.2×3.2m)의 정방형이었습니다. 7절에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앞부분은 간막이 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2절에 “방 앞에 간막이 벽이 있는데 이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요 저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간에는 창문들이 있었습니다. 창문은 현관에도 있었고 문지기방 사이의 벽들에도 있었고 각 문지기 방들에도 있었습니다. 창문들의 두께는 벽들의 두께와 같았습니다. 현관의 창문 두께는 1.5척(0.8m)였고, 문지기방 사이의 벽들에 있는 창문의 두께는 7.5척(4m)였고, 각 문지기 방들에 있는 창문의 두께는 1.5척(0.8m)이었습니다. 창문들의 구조는 ‘닫힌 창’이었습니다. 16절에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 창은 여닫을 수 있는 창이 아니라 고정되어 있는 창이었습니다. 이 창문은 격자 형태의 창문이었습니다. 창틀에 여러 개의 나무를 X자 형태로 가로질러놓은 창살로 되어 있는 창문이었습니다. 이 창문의 기능은 외부의 침입을 막고, 환기가 이루어지고, 빛이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전에는 문지기 방이 필요하고 문지기들이 필요합니다. ‘문지기’는 성전을 경비하는 레위인들로서 그들은 성전으로 접근하는 모든 사람의 접근을 통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대하12:11). 그들은 성전을 경비하기 위해 헌신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직접 제사 사역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에 비하면 무시당할 수도 있는 직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있어야 성전과 예배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성전과 예배를 위해 작은 부분이라도 헌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시편84:10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유지하게 하는 일, 하나님의 예배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에 대해 표현한 구절입니다.
③ 박석 깔린 땅과 4개의 부엌들과 30개의 방들
17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서른이며
18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너비가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
19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간 앞까지 측량하니 그 너비가 백 척이며 동쪽과 북쪽이 같더라
스겔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 바깥뜰(마당)로 들어갔습니다. 바깥뜰 끝자락으로 돌아가면서 박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 박석은 안뜰에도 동일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바깥뜰에 깔린 박석을 아래 박석 깔린 땅이라 하고 안뜰에 깔린 박석을 위 박석 깔린 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아래 박석 깔린 땅에 대한 내용입니다. 17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박석’(רצפה)은 바닥 장식용으로 바닥에 까는 돌을 말하는데 주로 얇고 넓은 형태의 돌입니다. 현대에 바닥에 까는 대리석이나 타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박석은 솔로몬 성전에도 깔려 있었습니다 (대하7:3). 이 박석은 바깥뜰 끝 3면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림에서 까만 바탕 부분). 북쪽을 제외한 (사실 서쪽에도 건물이 없는 지역에는 깔려 있지만) 동 남 북쪽 3면으로 돌아가면서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3면에 있는 문간들은 제외하고 깔려 있었습니다. 그 폭은 50척(27m)이었습니다. 18절에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너비가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석이 깔리지 않은 부분의 폭은 100척(53m)이었습니다. 19절에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간 앞까지 측량하니 그 너비가 백 척이며 동쪽과 북쪽이 같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 박석 깔린 4모퉁이에 부엌들이 있었습니다. 모퉁이마다 1개의 부엌이 있었습니다. 4모퉁이에 각각 1개씩 있었으니 모두 4개인 것입니다. 46:21-22에 “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를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뜰의 네 구석 안에는 집이 있으니 길이는 마흔 척이요 너비는 서른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같은 크기며”라고 했습니다. 바깥뜰 4모퉁이에 있는 부엌 모두 다 너비와 길이가 각각 30×40규빗(16×21m)이었습니다. 그 부엌에는 삶는 기구가 설비되어 있었고 그곳은 백성의 제물을 삶는 곳이었습니다. 46:23-24에 “그 작은 네 뜰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방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 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수종 드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백성의 제물을 삶는 곳이었습니다. 제물 가운데 화목제(감사제, 서원제, 자원제)의 경우에는 물려 나온 제물을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이 함께 먹을 수 있었는데 그 같은 제물을 삶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깥뜰 끝자락 3면으로 돌아가면서 30개의 방들이 있었습니다. 17절에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서른이며”라고 했습니다. 바깥뜰 끝자락 3면 모퉁이의 부엌과 3면 중앙 문간 사이들에 여러 방들이 있었는데 그 수는 3면 문간 좌우로 5개씩 모두 30개였습니다. 그 방들의 용도는 제사 드리는 데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제사 후에 물려 나온 제물들을 먹는 장소였습니다. 화목제(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같은 경우엔 희생 제물을 태워 드리는 부분이 있고 그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백성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돌아오는 부분들은 4모퉁이의 부엌에서 삶아 이 30개의 방들에서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영적 양식을 먹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4: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신명기8:3의 말씀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사람은 영(靈)이 있는 존재로서 영이 사는 것이 중요하고 영이 살기 위해 영적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간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17:11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그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시119:131, 42:1). 하나님 말씀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자기 인격과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시19:10, 119:72, 24, 요5:39). 하나님 말씀이 배에서는 쓰지만 날마다 먹고 소화하여 인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0:10에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먹는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이해한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입에서는 달다’는 말은 내용을 지적 능력으로 이해했을 때는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는 표현입니다. ‘배에서는 쓰다’는 말은 이해한 내용을 인격에 내면화시킬 때는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해서 말씀대로 되지 못한 것을 쳐 복종시키고 인격이 말씀대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을 반복해야 영적 만족과 성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고 했습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 ‘마음의 생각과 뜻’은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전체에 대한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④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
20 그가 바깥뜰 북쪽을 향한 문간의 길이와 너비를 측량하니
21 길이는 쉰 척이요 너비는 스물다섯 척이며 문지기 방이 이쪽에도 셋이요 저쪽에도 셋이요 그 벽과 그 현관도 먼저 측량한 문간과 같으며
22 그 창과 현관의 길이와 너비와 종려나무가 다 동쪽을 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23 안뜰에도 북쪽 문간과 동쪽 문간과 마주 대한 문간들이 있는데 그가 이 문간에서 맞은쪽 문간까지 측량하니 백 척이더라
24 그가 또 나를 이끌고 남으로 간즉 남쪽을 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 벽과 현관을 측량하니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25 그 문간과 현관 좌우에 있는 창도 먼저 말한 창과 같더라 그 문간의 길이는 쉰 척이요 너비는 스물다섯 척이며
26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쪽 저쪽 문 벽 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27 안뜰에도 남쪽을 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가 남쪽을 향한 그 문간에서 맞은쪽 문간까지 측량하니 백 척이더라
에스겔이 본 것은 첫 번째는 성전 사면의 담이었고, 두 번째는 바깥뜰 동쪽 문간이었고, 세 번째는 박석 깔린 땅과 30개의 방들이었고, 네 번째는 바깥뜰 북쪽 문간이었고, 다섯 번째는 바깥뜰 남쪽 문간이었습니다. 본문은 바깥뜰에 있는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6-16절에서 보았던 동쪽 문간과 크기나 구조나 기능이 모두 같습니다.
3. 성전 안뜰 측량 (28-49절)
에스겔은 바깥뜰 동쪽 문간에서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뜰로 들어가 남쪽 문간을 보았습니다. 안뜰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100척×100척으로 네모반듯했습니다 (47절). 약 53m×53m로 정방형이었던 것입니다. 47절에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① 주랑
28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남문을 통하여 안뜰에 들어가서 그 남문의 너비를 측량하니 크기는
29 길이가 쉰 척이요 너비가 스물다섯 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도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30 그 사방 현관의 길이는 스물다섯 척이요 너비는 다섯 척이며
31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2 그가 나를 데리고 안뜰 동쪽으로 가서 그 문간을 측량하니 크기는
33 길이가 쉰 척이요 너비가 스물다섯 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34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이쪽, 저쪽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5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에 이르러 측량하니 크기는
36 길이가 쉰 척이요 너비가 스물다섯 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다 그러하여 그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37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이쪽, 저쪽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에스겔이 바깥뜰 동쪽 문간과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을 측량했었습니다. 그리고 안뜰 남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문간은 바깥뜰에 3개 안뜰에 3개가 있었습니다. 이 6개의 문간들은 구조와 크기가 다 같았습니다. 다만 이 안 문간들이 바깥문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바깥문간들이 성소를 향하고 있는 반면에 안문간들은 바깥문간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 문간들의 층계는 7계단이었으나 (22,26절), 안뜰 문간들의 층계는 8계단이었다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이쪽, 저쪽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안뜰 문간들은 바깥뜰 문간들과 현관 방향이나 계단 수만 다를 뿐 나머지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미 6-16절(20-27절)에서 바깥뜰 문간들에 대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안뜰 문간들에 대해서는 해석을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뜰의 남쪽 문간을 설명하면서 현관에 대해 강조한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30절에 “그 사방 현관의 길이는 스물다섯 척이요 너비는 다섯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현관은 지금까지 각 문간들에서 있었던 현관이 아닙니다. 그 현관들은 길이가 22척 너비가 8척이었지만 여기의 현관은 25척과 5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현관’에 해당하는 ‘에이람’(אילם)은 ‘기둥 공간’의 뜻으로서 주랑을 말합니다. 주랑(柱廊)은 낭실(廊室)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를 말합니다 (왕상6:3, 7:6). 그래서 여기에서 현관으로 번역된 것은 주랑(낭실)을 말하며, 이 주랑은 문간 좌우편 곧 안뜰 끝자락의 3면으로 박석 깔린 위에 있는 주랑을 가리킵니다. 그 주랑의 규격은 길이가 25척, 너비가 5척이라고 했습니다 (30절). 길이가 25척이라는 말은 주랑 전체의 길이가 아니라 주랑의 기둥 길이로서 주랑의 높이가 25척이라는 말이고, 너비가 5척이라는 것은 주랑의 기둥과 기둥의 사이가 5척이라는 말입니다. 기둥은 아마도 솔로몬 성전을 참고해 보면 4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왕상7:2). 기둥의 전체 수는 박석 깔린 면적들과 기둥 간격들을 참고하여 유추해보면 약 1,000개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000’은 최고의 만수입니다 (출20:6, 신1:11, 계20:4). 하나님 나라는 수많은 기둥들로 이루어집니다 (갈2:9).
② 제물용 방과 상들
38 그 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
39 그 문의 현관 이쪽에 상 둘이 있고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그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게 한 것이며
40 그 북문 바깥 곧 입구로 올라가는 곳 이쪽에 상 둘이 있고 문의 현관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41 문 곁 이쪽에 상이 넷이 있고 저쪽에 상이 넷이 있어 상이 모두 여덟 개라 그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았더라
42 또 다듬은 돌로 만들어 번제에 쓰는 상 넷이 있는데 그 길이는 한 척 반이요 너비는 한 척 반이요 높이는 한 척이라 번제의 희생제물을 잡을 때에 쓰는 기구가 그 위에 놓였으며
43 현관 안에는 길이가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혔으며 상들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더라
에스겔은 안뜰 남쪽 문간에서 동쪽 문간을 지나 북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안뜰 북쪽 문간 앞쪽에는 번제물을 씻는 방이 있었습니다. 38절에 “그 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고 했습니다. ‘그 문 벽 곁에’에서 ‘문’은 북쪽 문간을 가리키고, ‘벽 곁’에 해당하는 ‘뻬에일림’(באילים)은 문간의 벽기둥 앞을 가리킵니다. 번제물을 씻는 방은 북문 앞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의 용도는 희생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레위기1:9에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레1:13).
그리고 안뜰 북쪽 문간 입구에는 제물을 잡는 상 8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39-41절에 “그 문의 현관 이쪽에 상 둘이 있고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그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게 한 것이며, 그 북문 바깥 곧 입구로 올라가는 곳 이쪽에 상 둘이 있고 문의 현관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문 곁 이쪽에 상이 넷이 있고 저쪽에 상이 넷이 있어 상이 모두 여덟 개라 그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았더라”고 했습니다. 문간 입구에는 제물 잡는 상이 모두 8개 있었는데 문간의 현관 앞(밖)에 좌우로 2개씩 4개, 문간 현관 안에 좌우로 2개씩 4개, 모두 8개가 있었습니다. 그 용도는 당연히 희생 제물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듬은 돌로 만든 상이 4개가 있었습니다. 42절에 “또 다듬은 돌로 만들어 번제에 쓰는 상 넷이 있는데 그 길이는 한 척 반이요 너비는 한 척 반이요 높이는 한 척이라 번제의 희생제물을 잡을 때에 쓰는 기구가 그 위에 놓였으며”고 했습니다. 현관 앞(밖)에 좌우로 1개씩 2개, 현관 안에 좌우로 1개씩 2개, 모두 4개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앞에 언급한 제물 잡는 상 사이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크기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5×1.5×1척이었습니다. 그리고 현관 사면에는 갈고리들이 있었습니다. 43절에 “현관 안에는 길이가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혔으며 상들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들이 현관 사면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용도는 잡은 희생 제물을 씻어서 걸어 놓는 곳입니다.
③ 노래하는 자들의 방들
44 안문 밖에 있는 안뜰에는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쪽으로 향하였더라
45 그가 내게 이르되 남쪽을 향한 이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46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 하고
에스겔은 안뜰 북쪽 문간을 지나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북쪽 문간 곁에 있었고 하나는 남쪽 문간 곁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북쪽 문간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했고 남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은 북쪽을 향했다고 했습니다. 44절에 “안문 밖에 있는 안뜰에는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쪽으로 향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의 방이 하나는 북문 곁에 있고 하나는 남문 곁에 있다고 했는데, ‘남문’으로 번역된 ‘솨아르 하파딤’(שער הקדים)은 동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the east gate –KJV,NASV, the south gate –NIV). 노래하는 자들의 방이 하나는 북쪽 문간 곁에 있었고 하나는 동쪽 문간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의 문은 남으로 향했고 동쪽 문간 곁에 있던 방의 문은 북으로 행해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의 용도는 하나는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었고 하나는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었다고 했습니다. 45-46절에 “~남쪽을 향한 이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레위지파 후손 중 사독의 자손들에 속해 있는 제사장들이 성전과 제단을 지키는 일을 맡았는데 (44:9-16), 북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사용하고 동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이었습니다. ‘성전’에 해당하는 ‘빠이트’(בית)는 ‘집’(건물)을 가리키는바 성소를 말합니다. ‘지키는’으로 번역한 ‘쉬오메레이 미쉬메레트’(שמרי משמרת)는 ‘솨마르’(שמר)라는 동사와 ‘미쉬메레트’(משמרת)라는 명사로 된 것인데, ‘솨마르’(שמר)는 ‘지키다’ ‘관리하다’ ‘시중들다’ 등의 뜻이 있고, ‘미쉬메레트’(משמרת)는 ‘파수’ ‘보존’ ‘직무’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키는’과 ‘제단을 지키는’은 성소와 제단에서 제의적인 사역을 하는 자들을 가리는데 그들이 성전과 제단을 관리하고 지키는 일까지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곧 그 방들은 성소와 제단에서 사역을 하는 제사장들이 성소와 제단을 지킬 때 사용하는 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하는 자들의 방의 용도를 성소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으로 언급된 것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노래하는 자의 방 둘’(לשכום שרים)은 직역하면 ‘노래하는 자들의 방들’인데 ‘노래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솨림’(שרים)이 ‘둘’을 뜻을 가진 ‘쉐나임’(שנים)에 대한 필사상의 오류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 둘’이란 뜻으로 수정합니다 (C.F.Keil). 반면에 원전상의 해석을 그대로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새 성전의 예배에 있어서 노래하는 자의 위상이 특별하게 규정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들이 제사장들과 함께 언급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Hengstenberg, Schroder).
오늘날 우리들도 영적으로 제사장 위치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맡은 직분과 사역을 충성되게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1:12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골4:17). 또한 새 노래를 해야 합니다. 시편149:1에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고 했고 (33:3, 40:3, 96:1, 98:1, 엡5:19). 요한계시록5:9에도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던 4생물들과 24장로들이 부른 새 노래를 말합니다. ‘새 노래’는 기존의 노래와 전혀 다른 새로운 노래를 말합니다. '새 노래'에 해당하는 ‘오덴 카이넨’(ωδην καινην)에서 '새'(new)에 해당하는 ‘카이넨’(καινην)은 질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시간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가리키는 단어 ‘네오스’(νεος)와는 구분되는 단어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5:9-14에서 부른 '새 노래'는 4생물들과 24장로들이 불렀는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4:3에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좌에서 천사들이 새 노래를 하는데 144,000밖에는 그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144,000’은 구원받는 모든 성도의 총 수를 의미하는 상징수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찬양하는 새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신 것을 찬양하고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신 일들을 찬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4. 성소 입구 측량 (47-49절)
47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
48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측량하니 너비는 이쪽도 다섯 척이요 저쪽도 다섯 척이며 두께는 문 이쪽도 세 척이요 문 저쪽도 세 척이며
49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 있더라
성전 앞에 제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7절에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제단이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성전 앞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성전’에 해당하는 ‘빠이트’(בית)는 ‘집’(건물)을 가리키는바 성소를 말합니다. 제단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은 43:13-17에 있습니다. 아마 성소의 높이는 60규빗(32m)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6:3에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①현관
성소 앞에는 현관이 있었습니다. 현관의 너비와 길이가 각각 20×11규빗(11×6m)이라고 했습니다. 49절上에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그 현관 입구에는 양 옆으로 벽이 있었습니다. 그 두 벽이 모두 너비와 두께가 각각 5×3규빗(2.7×1.6m)이었습니다. 48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측량하니 너비는 이쪽도 다섯 척이요 저쪽도 다섯 척이며 두께는 문 이쪽도 세 척이요 문 저쪽도 세 척이며”하고 했습니다.
② 계단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49절에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70인역(LXX)에는 10계단(δεκα)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알게 해 줍니다. 첫째, 성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 수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성전 밖에서 바깥뜰 문간으로 오르는 계단이 7계단이었습니다. 22절에 “그 창과 현관의 길이와 너비와 종려나무가 다 동쪽을 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40:26). 안뜰 문간으로 오르는 계단은 8계단이었습니다. 31절에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40:34,37). 성소 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10계단이었습니다. 49절에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고 했습니다 (70인역 δεκα=10). 바깔뜰 문간의 계단이 7층계, 안뜰 문간 계단이 8층계, 성소의 계단이 10층계였습니다. 모두 합하면 25층계인 것입니다. 둘째, 성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의 높이가 높았습니다. 성전 지대의 높이를 보면 담 밖 평지에서 바깥뜰을 포함하여 안뜰까지의 높이가 6척(3.2m)이었고, 안뜰에서 성소바닥까지의 높이도 6척(3.2m)이었습니다. 8절에 “내가 보니 성전 삼면의 지대 곧 모든 골방 밑 지대의 높이는 한 장대 곧 큰 자로 여섯 척인데”고 했습니다. 그리고 담 밖 평지에서 바깥뜰을 포함하여 안뜰까지의 계단(바깥뜰 문간 계단과 안뜰 문간 계단)은 모두 15개(7+8개)였고, 안뜰에서 성소바닥까지의 계단(성소 문간 계단)은 10개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바깥뜰 문간 계단과 안뜰 문간 계단 15개는 1계단의 높이가 21cm(320÷15cm)였고, 성소 문간 계단 10개는 1계단의 높이가 32cm(320÷10cm)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소로 올라갈수록 계단의 높이도 더 높았던 것입니다.
성소는 올라갈수록 올라가기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점점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막8:34, 눅9:23, 14:27).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신 길을 가려는 것 곧 예수님이 사신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 길을 가려면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사형집행 방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자신이 형틀을 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으며 그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는 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장 처절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살았던 당시 유대인들은 당시 독립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의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곧 고난의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맞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십자가란 자기에게 오는 고난을 말하는데 인생으로서 누구나 경험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다가 필연적으로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요18:11, 마26:39, 빌2:8, 딤후3:12).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맡긴 구속사적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고난과 죽음이 올 것인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의 죽음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4:22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자신이 전도여행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당한 것을 배경으로 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예수를 믿는 자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의도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려 하면 고난을 많이 겪게 될 것을 알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는 자는 당연히 고난이 있게 됩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성화를 이루고 사명을 감당하려면 마땅히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③ 기둥
현관 벽들 옆에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성소 앞에 현관이 있었고 그 현관에 2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현관에는 2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49절下에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기둥은 놋으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열왕기상7:15에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기둥은 몸통과 머리로 나뉘었는데 그 기둥의 머리 높이는 5규빗이었을 것입니다 (왕상7:16, 대하3:15, 렘52:22). 그 기둥의 둘레는 12규빗이었고, 그 기둥의 속은 텅 비어있었고, 그 기둥의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4지폭=7.6cm)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52:21에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라고 했습니다 (왕상7:15). 그리고 기둥의 높이는 18규빗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7:15에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높이는 각각 십팔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렘52:21). 그런데 역대하에는 35규빗이라고 했습니다. 역대하3:15에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라고 했습니다. 기둥의 실제 높이는 아마 18규빗이 맞을 것입니다. 역대기 기자가 열왕기를 참고할 때 높이 18규빗에 둘레 12규빗을 합쳐서 30규빗으로 생각하고 머리 부분이 5규빗이었으니 합쳐서 35규빗으로 기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둥의 실제 높이는 18규빗이고 머리 부분 5규빗까지 합치면 23규빗(12m)이었을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도 성소 주랑(현관) 앞에 2개의 원형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 기둥들의 이름은 야긴과 보아스였습니다. 열왕기상7:21에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대하3:17). ‘야긴’(יכין)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는 뜻이고, ‘보아스’(בעז)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두 이름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전체 성전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주권적으로 세워 가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 가십니다. 전체 성전 사역인 하나님의 구원사역도 하나님이 친히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요한계시록1:8에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스가랴4:6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개인 성전인 성도의 구원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어가며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루어가십니다 (빌2:2, 벧후3:18, 엡4:13).
<結言>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2:9에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둥 역할을 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골로새서1:29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사역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성전
에스겔 성전이 주목받는 이유
에스겔
성전은 종말에 세워지며 성도들이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들어가는지,
어떻게 들어가는지, 성전의 식양이 가리키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인봉한 책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예수님 이후로 지금까지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히브리 원문에 근거하여 완벽하게 밝혀낸 사람이나 저서는 없다.
구속사 시리즈 제11권에서는 에스겔
성전을 인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이 소개될 예정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 계시를 보여준 시기
BC
573년 정월 10일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으로 잡혀온 지 25년째 되는 해에 성전의 계시를 받는다(에스겔 40:1).
에스겔 선지자는 제2차 바벨론 포로(BC 597년)로 잡혀왔다.
제1차 바벨론 포로(BC 605년)로 왔던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포로생활 33년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소망의 등불이 꺼졌던 때이다.
에스겔 성전이 세워질 장소
지극히 높은 산, 거룩한 곳, 세상의 중앙이라고 에스겔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산으로 데리고 와서 마지막 성전 지을 장소를 보여 주셨다(에스겔
40:1-2).
이는 말일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세워질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으며, 큰 임금의 성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마태복음 5:35).
에스겔 성전의 계시를 보여준 목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거룩한 성전 제도와 설계도, 출입하는 것, 모든 규례와 법도를 알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은 죄를 부끄럽게 하여 회개시키는 목적이다(에스겔 43:10-11).
에스겔 성전은 죄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극히 높고
거룩한 곳에 세워진다.
마지막 날에 죄를 회개한 거룩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에스겔 성전을 쉽게 이해하려면
담(혹은
벽), 문, 방, 창, 현관을 잘 구분해야 한다.
에스겔 성전은 전체가 담과 문과 방, 창과 현관으로 가득 차 있다.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완전히 구분한다(에스겔 42:20).
문은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하는 일을 철저히 통제한다.
방은 맡은바
사명 완수를 위한 거룩한 장소이다.
‘창’은 환기, 빛을 받기 위한 곳,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통로이다.
또한 안과 밖의 차단 역할을 한다(닫힌 창, 에스겔 40:16).
현관은
원어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현관(에스겔 40:7-8)이나 기둥들로 이루어진 지붕 덮힌
회랑(에스겔 40:30), 혹은 기둥 자체를 가리킨다.
에스겔 40장 14절에서 히브리 원문은 ‘기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관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20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쉿심 암마’는 ‘60척’(KJV)이다.
그런데 현관 너비가
60척(31.92미터)이나 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20척’(10.64미터)이라고 인위적으로 고치고 ‘광이(너비)’를 삽입했다.
에스겔 성전의 담은 속된 것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회개 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각 방의 역할과 각 문의 역할과 각 방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역은 뚜렷하게 성소와 지성소에 집중되어 있다.
에스겔서의 구조
에스겔서는 1장 1절부터 48장 35절까지 1,273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에스겔서는 1,273구절 가운데 한 마디라도 빠지면, 전체가 무너질 만큼 매우 완벽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순간 하늘이 열렸다.
이때가 BC 593년 에스겔 선지자 30세 때다.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암울한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말씀이다.
다 망해 버린 민족을 일으켜서
다시 시작하신다는 놀라운 섭리를 나타낸 것이다.
성경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큰 징조로서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있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열렸으며, 특히 때가 찬 경륜을 따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새 성전에 들어갈 종말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인간의 생각으로 절망과 낙담 속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하늘 문을 열어 주실 때, 보잘것없는 우리
자신을 다시 들어 새로운 시작을 하신다는 교훈을 준다.
하늘의 개폐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에 달렸으며(열왕기상 17:1),
하나님은 하늘의 역사를 붙잡고 계시는 주권자이다.
주님 말씀과도 같이,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10).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성도에게 큰 소망의 빛줄기요,
유일한 기쁨의 통로요, 하나뿐인 위로자요, 생명 양식이 된다.
※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는 순간
이스라엘의 죄악과 에스겔 성전을 통한 회복의 역사
1)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의 북향(北向)한 문에 우상을 세우는 악을 행했다(에스겔 8장).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안(에스겔 10:4) → 성전 문지방(10:18) → 동문(10:19) → 동편 산(11:23)으로 점점 떠나가게 된다. 우상 숭배의 죄가 하나님이 떠나는 것을 자초했고,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했다.
2) 에스겔 성전을 통한 회복의 역사
하지만 회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회복됨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동편(에스겔 43:2) → 동문(43:4) → 마침내 성전에 가득하게 된다(43:5). 성읍 동편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 성전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역사다. 에스겔 선지자는 새 성전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고 소망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성전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예배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종말에 에스겔 성전에 들어갈 자격자가 된다.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에스겔 성전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 땅에 한 번도 지어진 적이 없다.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은 주님이 재림할 때 변화되는 사람, 거듭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네모 반듯한 에스겔 성전
1) 동서남북 사방이 완전히 똑같은 정방형(正方形)의 구조로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히브리서 13장 8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2) 예수님께서 만인간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속죄 사역이 모든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구속의 섭리를 가르쳐 준다. 인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높은 사람과 천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차별하고 서로 다르게 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도 하나님처럼 네모 반듯해져야 한다. 차별하지 말고, 눈 흘기지 말고, 길고 짧은 것이 없어야 한다.
3) 에스겔 성전은 악하거나 속된 것이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는 완전 보호의 성전이다.
※ 네모 반듯한 에스겔 성전의 치수(길이×너비)가 동일하여 정방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
※
에스겔 성전을 척량한 단위인 ‘장대’는 히브리어 ‘카네’로 갈대, 지팡이를 뜻한다.
영어성경에서는 rod(지팡이)나
reed(갈대)로 번역됐다. 히브리어 ‘카네’는 헬라어(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로는 ‘카논’인데 ‘자, 표준, 규례, 경계’의
의미이다. 즉, 측량의 도구는 성도의 규례와 법도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단어들은 현대 영어로도 그대로 이어져
‘canon’은 ‘규범, 계율, 성경의 정전(正典)’을 뜻하며 ‘cane’은 ‘지팡이’라는 뜻이다.
거룩하게 드릴 땅을 나누는 역사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지는 거룩한 땅의 장과 광이 모두 25,000척이고, 이 땅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땅을 받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공통점은 성전에서 수종 드는 일이었다.
에스겔 성전 ‘척량’의 의미는?
에스겔
성전의 척량은 곳곳마다 치수가 정확하다.
에스겔 성전에 나오는 독특한 단어가 ‘척량(尺量)’이다.
‘척량’은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로서 종말적 심판과 연관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성전과 성막 역사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척량하고 죄를 깨달아 부끄러워하고 회개할 때 그 사람에게만 말씀을 주라는 것이다.
말씀을 주어도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행동이 없는 자들,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하는 자는 마지막 때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에스겔 성전도 볼 수
없다.
우리도 속사람과 겉사람이 모자람이 없이 하나님의 척량에 합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에스겔
성전은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vision)을 통해 속속들이 모습을 보이시고 곳곳의 치수를 직접 척량하여 그 정확한
치수를 세밀하게 알려 주셨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에게 처음 이상을 보여 주실 때부터 ‘지으라’는 말씀은 없었으며, 잘 듣고 보고
‘백성들에게 모두 고하라’는 명령만 있었다(에스겔 40:4).
이처럼 실제로 지어진 적이 없는 성전이어서 ‘이 땅에 주소 없는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에스겔의 생애와 성전
‘메소드 연기’라는 말이 있다. 배우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실제 인물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각본을 뛰어넘어 극중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때로는 성경에도 ‘메소드 읽기’가 필요하다. 복잡한 현실을 글로 요약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데, 다시 번역까지 하면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기 더 어려워진다. 이럴 때 성경의 저자가 느꼈던 현실 상황에 몰입해 보면, 저자가 어떤 심정과 상황에서 말씀을 증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에스겔서는 ‘메소드 읽기’가 가장 어려운 책일 것이다. 저자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며,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다. 에스겔서의 히브리어 문체는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며, 번역도 쉽지 않다. 이 모든 난제들의 해석은 에스겔이 살아갔던 삶의 배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에스겔 20세, 성전 봉사를 꿈꾸며 훈련을 받다
에스겔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다(겔 1:3). 만약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그는 자연스레 제사장이 되었을 것이다. 에스겔 1:1의 ‘제삼십 년’은 에스겔의 나이이다. 에스겔이 하늘이 열리며 이상을 보았던 때가 30세라는 뜻이다. 이때는 주전 593년으로,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주전 597년에서 5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약 26세의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갔으며, 사로잡혀간 지 5년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본래 레위 지파는 25세부터 회막 봉사를 시작해 5년간 훈련을 받고 30세부터 본격적인 직분을 수행했다(민 4:3, 23, 30, 35, 39, 43, 47, 8:24). 다윗은 훈련 기간을 늘려 10년간 제사장 직분을 훈련하게 했다(대상 23:27-32).
그러므로 에스겔이 성전에서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20세인 주전 603년경이었을 것이다. 주전 605년 제1차 바벨론 포로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기였다. 당시 바벨론은 성전의 기구들을 빼앗아갔다(왕하 24:1, 대하 36:6-7). 아마도 청년 에스겔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성전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가지고 제사장 직분을 준비했을 것이다.
에스겔 26세, 꿈이 좌절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다
주전 597년, 제2차 바벨론 포로로 다시 한 번 성전의 보물과 금기명이 약탈당했고, 에스겔 자신도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왕하 24:10-13, 대하 36:10). 당시 26세로 한창 성전의 직무를 배워가던 에스겔에게는 소명의 길이 끊어지는 좌절의 순간이었다. 올림픽 출전의 부푼 꿈을 안고 운동에 전념하다가, 대회를 눈앞에 두고 출전하지 못하게 된 선수의 마음을 생각해보라. 시편 137편에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슬피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악기를 나무에 걸고 노래하는 재주조차 잊어버리기를 바랄 정도로 고통을 호소했다(시 137:1-6). 삶의 중심을 예루살렘과 그 중앙의 성전에 두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그곳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제사장의 소망을 가지고 청년 시절을 보내던 에스겔에게는 더 큰 아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에스겔 30세, 선지자로 세움받다
사로잡힌 지 5년째, 에스겔은 30세가 되었다. 만약 그가 사로잡히지 않고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다면 제사장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이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꿈을 곱씹으며 괴로워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해 4월 5일,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하늘을 여시고 여호와의 권능으로 임재하셨다(겔 40:1). 소명과 비전을 모조리 상실했던 에스겔이 한순간에 하나님의 사명자로 거듭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제사장 대신 선지자로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선지자 에스겔의 사역은 가시밭길이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충격적이게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입이 열리지만, 평소에는 입이 닫혀 사람들에게 온갖 오해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부정한 것을 먹으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함락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어야만 했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모든 명령에 오직 아멘으로 순종하며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 나갔다.
에스겔 50세, 새 성전의 이상(異象)을 보다.
이런 배경에서 에스겔의 사역 말기에 주어진 새 성전의 이상을 다시 생각해 보자.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일은 극도의 절망이었다. 37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는 성전이 파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예언이 이뤄진 것이지만, 비통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로잡힌 지 25년이자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14년째, 에스겔에게 새 성전의 이상을 보여주셨다(겔 40:1). 이스라엘의 범죄로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성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다! 예루살렘은 우뚝 솟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고, 광야 한복판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나와 좌우에 과실을 맺는 나무가 가득하였다. 에스겔의 마음에 바라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이상 속에서 펼쳐진 것이다. 당시 에스겔의 나이는 50세이다. 그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면 사명을 다하고 마무리하는 해이다. 에스겔은 그 후 2년 뒤까지 선지자 사역을 계속했지만(겔 29:17), 에스겔서의 결론이 ‘새 성전 계시’라는 사실은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정점임을 보여준다.
에스겔이 전하는 소망의 메시지
성경의
저자들도 오늘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행 14:15, 약 5:17).
에스겔이 선지자라고 해서 무감각하게, 혹은 손쉽게
사역에 순종했던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인생의 굴곡을 맛보며 깊은 심적 고통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에스겔 사역의 전체가 고통은 아니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은 거대한 소망과 벅찬 감동으로 가득하다.
메마른 광야 높이 솟은 산,
그곳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물은 발목과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고, 마침내 헤엄쳐야만 할
정도로 사람을 덮는 거대한 강물이 되었다.
발목과 무릎 높이의 물은 인간의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벽을 세워 막을 수 있다.
허리
높이의 물도 힘은 조금 들겠지만 충분히 거스를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정수리를 삼키는 거대한 강물은 사람을 강 흐르는 대로
몰아쳐간다.
비록 에스겔이 보았던 이스라엘의 과거가 계속하여 생명수 강물을 거스르고 벽으로 막아버리는 악한 행위로 가득했다고
해도, 마침내 생명수 강가가 이스라엘과 온 열방을 덮어버리고 가는 곳마다 죽은 바다가 살아나는 강권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놀라운 소망의 역사이다.
에스겔 46장 예배드리는 방법
바벨론에서 고생하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보고 성전의 크기를 측량하고
구석구석 돌아봅니다.
성전을 이렇게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미래가 설계되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청사진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내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안식일(1- 5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뜰의 동쪽 중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 잠가 두었다가 안식일에 열고, 또 매달 초하루에도 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안식일과 초하루에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됩니다.
정해진 절기에 해야합니다.
왕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왕은 바깥 마당에서 동쪽 중문의 현관으로
들어와서, 문설주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그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는 동안에는, 왕은 그 대문의 문지방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소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웃시야 왕은 성전에 들어와 제사드리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
문은 저녁때까지 닫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백성도 안식일과 매월 초하루에는 이 문 어귀에서 주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왕과 백성이 동일합니다.
왕이 안식일에 주께 바쳐야 할 번제물은, 흠 없는 어린 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입니다.
최상으로 드려야 합니다.
곡식제물은, 숫양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여 바칩니다.
어린
숫양에는 밀가루를 원하는 만큼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서 해야합니다.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힘과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초하루(6-8절)
월삭이란 매월 초하루를 말합니다.
새로운 달을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달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매달 초하루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어린 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또 곡식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어린 양에는, 그가 원하는 만큼 곁들여 바칠 것입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왕이 성전에 들어올 때에는, 중문의 현관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에도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의 출입방법(9-10절)
그러나 이 땅의 백성이 성회 때에 주 앞에 나아올 경우에는, 북쪽 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한 사람은 남쪽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남쪽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쪽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들어온 문으로 되돌아 나가서는 안 되며,
반드시 똑바로 앞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백성이 들어올 때에, 왕도 그들과 함께 들어왔다가, 그들이 나갈 때에 왕도 나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신분의 고하가 없습니다.
성전문을 가로질러 제단을 거쳐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가까이서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부모님에 왔는데 신발장에 섰다가 삐끔이 보고 가서는 안됩니다.
깊이 만나야합니다.
등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전쪽으로 와서는 성전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예전에 임금에게 올 때도 뒷걸음질하여 나갔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해야합니다.
명절 소제의 규례(11-12절)
모든 절기와 성회 때에 바칠 곡식제물은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이고,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입니다.
어린 숫양에는 원하는 만큼 힘대로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왕이 스스로 하고 싶어서 번제물이나 화목제물을 주에게 바치려고 하면, 그에게 동쪽으로 난 대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하여야 합니다.
그는 안식일에 자신의 번제물이나 감제제물을 바친 것과 같이 하고, 밖으로 나간
다음에는 그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13-15절)
에스겔은 매일 주에게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를 번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에스겔은 아침마다 그것을 바쳐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일상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바치는 번제물에는 밀가루 육분의 일 에바와 그것을 반죽할 기름 삼분의 일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바치는 곡식제물로서 영원히 지킬 규례입니다.
이렇게 제사장들은, 아침마다 어린 양과 곡식제물과 기름을 준비하여,
정규적으로 드리는 번제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예배를 일상화해야합니다. 항상 드러야 합니다.
군주와 그의 기업(16-18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왕이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 어떤 아들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아들의 재산이 됩니다.
이런 것은 유산으로서 아들의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왕이 어떤 신하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희년까지만 그 신하의 소유가 됩니다. 희년이 지나면 왕에게로 되돌아 갑니다. 왕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의 것으로서, 오직
그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종이 죽으면 이제 다시 왕에게 주어야합니다. 종은 관리권만 있는 것이지 상속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임대합니다.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관리권만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백성의 유산을 빼앗고 그들을 폭력으로 내쫓아서, 그들의 유산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백성에게 준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권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용한 사람은
노동력을 산것이지 사람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이라도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는 못합니다. 왕은 자신의 재산만을 떼어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백성
가운데서는 아무도, 자신의 재산을 잃고 멀리 흩어져 다니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성전 부엌]
“19.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 곁 통행구를 통하여 북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쪽에 한 처소가
있더라 20.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제물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21. 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를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22. 뜰의 네 구석 안에는 집이 있으니 길이는 마흔 척이요 너비는 서른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같은 크기며 23. 그 작은 네 뜰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방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24.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그런 다음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중문 곁에 있는 통로로, 북쪽에 있는 제사장들의 거룩한 방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보았습니다. 그 거룩한 방들의
뒤편 서쪽에 빈 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여기가 제사장들이 속건제물과 속죄제물을 삶으며,
곡식제물을 굽는 부엌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 제물을 바깥 뜰로 들고 나갔다가 그 거룩한 제물에 백성이 해를 입게 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물을 만드는 것도 거룩해야합니다. 또 그가 에스겔을 바깥 뜰로 데리고 나가서, 그 뜰의 네 구석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는데, 보니, 구석마다 뜰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뜰의 네 구석에는 담으로 둘린 작은 뜰들이 있었고, 그
길이는 마흔 자요 너비는 서른 자였다. 이렇게 네 뜰의 크기가 같았습니다. 그 작은 네 뜰에는 돌담이 둘러쳐 있었고, 그 돌담
밑으로 돌아가며, 고기를 삶는 솥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다. "이 곳은 성전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백성의
희생제물을 삶는 부엌이라“ 고 하십니다.
46장: 예배의 방식
[1-8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6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매월 초하루)에도 열고 왕은 바깥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벽(메주자)[문기둥](gate-post)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미프탄)[아마 ‘문 복도’](threshold)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페사크)[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양 여섯과 흠 없는 숫양 하나라. 그 소제는 숫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약 4리터]씩이니라. 월삭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양 여섯과 숫양 하나를 드리되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할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숫양에도 밀가루 한 에바며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요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왕이 올 때에는 이 문(바깥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왕은 안식일과 월삭에 성전의 안뜰 동쪽 문 복도에서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또 백성들은 그 문 입구에서 경배해야 했다고 보인다.
10-30-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땅을 나누어(에스겔 45: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When you allot the land as an inheritance,
you are to present to the LORD a portion of the land as a sacred
district, 25,000 cubits long and 20,000 cubits wide; the entire area
will be holy.
현대인의 성경 / 너희가 땅을 분배할 때에는 한 구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그 땅은 길이가 13.1킬로미터이며 폭이 10.5킬로미터이다. 그 구역 전체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땅을 나누라(divide the land)
우베핲피레켐 엩 하아레츠(וּבְהַפִּילְכֶם אֶת־הָאָרֶץ)
땅(776) 에레츠
[ ’erets ] אֶרֶץ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אַרְצִי, ‘확고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땅(창 1:2, 레 26:20, 대상 16:14), 들(창 2:5, 겔 29:5), 세상(창6:5, 출9:29, 신4:32), 지방(창 10:31, 레20:2, 수9:9), 지면(출16:14, 욥28:5, 아2:12), 접경(출16:35), 고향(민10:30, 렘50: 16), 세계(출19:5, 민14:21, 신28:1), 나라(창 42:6, 출23:26, 왕상10:6), 천지(출31:17, 시 69:34, 사37:16), 육지(레11:2), 이방(창15: 13, 스9:11), 천하(창18:18, 왕상4:34, 사25:8), 본토(왕하18:32, 단11:28), 토지(창41:47, 레23: 39, 삿6:4), 사방(창47:13, 민34:2), 전국(레 19:29), 소유지(수22:4,19), 밭(삿9:37, 시141:7), 백성(삿18:30), 본국(왕상10:13, 왕하19:7), 고국(왕상11:21, 왕하3:27), 본향(왕상22:36), 위치(왕하2:19), 성읍(대하6:28), 토산(대하7:13), 열국(사34:1), 열방(느9:30, 겔1:21), 고토(욥 30:8, 사37:7), 흙(시12:6, 렘17:13), 진토(시 22:29), 여러 나라(시106:27), 지상(사18:3), 길바닥(애2:21), 뭍(겔32:4), 각국(겔36:19), 평원(겔38:11).
구약 성경 / 2504회 사용
나누어(5307) 나팔
[ nâphal ]
נָפַל
관련 성경 / 변하다(창 4:5, 6), 거주하다(창 25:18), 죽다(출19:21, 삼하3:38), 눕다(출21:18, 삼상19:24), 빠지다(출21:33), 떨어지다(레11:38,5:2, 삿15:18), 엎드러지다(레26:7, 삿5:27),망하다(민14:43, 왕하14:10), 무너져 내리다(수6:5), 남다(수21:45), 틀리다(수23:14), 어기다(수23:14), 쓰러지다(삿7:13, 삼하2:16),얻다(삿18 :1), 자다(삼상26:12), 미치다(시69:9), 항복하다(왕하25:11, 렘21:9), 돌아오다(대상12:19), 죽임을 당하다(왕하5:22), 엎드리다(창17:3, 대하20:18), 넘어지다(시10:10, 렘51:8), 무너지다(사9:10, 렘50:15), 떠들다(사16:9), 함락되다(사21:9), 이르다(렘48:35), 뽑다(겔24:6), 꺾어지다(겔31:12),임하다(삼상11:7, 단10:7), 망명하다(삼상29:3), 굴욕을 당하다(에6:13), 잠들다(욥4:13), 엎드러뜨리다(렘51:49), 내리다(창24:64, 삼하17:12), 어긋맞기다(창33:4), 안다(창45:14),구푸리다(창50 :1), 습격하다(수11:7), 돌아가다(수17:5, 대상12:19), 흐르다(삼상26:20), 쳐죽이다(대상5:10), 당첨되다(대상26:14),낙담하다(느6:16), 패망하다(잠11:28, 사54:15), 베임을 당하다(사10:34), 출산하다(사26:18), 드리다(렘36:7), 받다(렘37:20), 떨어뜨리다(겔30:25), 부딪치다(욜2:8), 치이다(암3:5), 당하다(욘1:7), 사로잡아가다(왕하25:11), 못하다(욥12:3), 제비뽑다(수 23:4, 겔 45:1), 그치다(삿2:19), 던지다(시73:18, 렘22:7), 헐다(삼하20:15), 분배하다(수13:6),빠뜨리다(출21:27), 베다(왕하3:19), 뽑히다(대상24:31, 26:13), 무색하다(욥29:24), 내놓다(사26:19), 향하다(렘3:12), 멸하다(신9:25, 겔32:12), 간구하다(렘38:26, 단9:20),의지하다(단9:18), 끌려들다(창43:18).
구약 성경 / 434회 사용
אֵת 에트 [ ’êth ] 853.
관련 성경 / 자신, 동등(수 7:15, 왕하 6:5), 이것, 그것 자체(겔 43:7), 그 일 자체, 그 일
구약 성경 / 11059회 사용
유대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땅을 분배하여 회복하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달합니다.
포로가 된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갇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환상의 계시는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막막한 현실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나누어 분배하되 한 구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치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땅의 규모는 길이가 25000척(13.1km), 폭은 10000척(10.5km)으로 구역 전체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떡이라는 속담처럼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고향 땅을 나눠준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무맹랑한 이야기처러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분배하라는 명령에서 땅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은 인간의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공간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창 2:7, 3:19).
따라서 인간에게 땅은 생계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기업(땅)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땅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몸 전체를 거룩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갈 것이라 고백합니다(로마서 14:8).
나의 영원하신 기업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에스겔서 40장부터 48장은 새 성전과 새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40장-43장은 새 성전에 관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다고 합니다.
44장부터 46장은 새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44장에서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위하여 동문을 폐쇄하라고 합니다.
45장은 새 땅의 통치와 절기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5장 1절부터 8절은 새 땅은 거룩한 곳이라고 증거합니다.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1절).
본장은 하나님의 땅과 백성들의 지도자의 땅의 구분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전장이 주로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고 있다면, 본장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즉 전장에서 밝히고 있는 레위인과 사독 가문의 제사장들의 성결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성한 목적의 맥락 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의 내용이 주로 성전의 척량과 성전 내부에 대한 식양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면, 본장은 성전 외부인 땅에 초점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성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성별된 구역에 대한 언급(1-8절), 치리자에 대한 권면(9-12절), 왕에게 바칠 예물(13-17절), 절기들에 관한 규례(18-25절)로 구성되어 있다.
앞장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하며 그것을 충실히 수행할 때 어떤 상급을 받게 되는가 하는 내용이
다루어졌습니다. 이어지는 본장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은 그의 소유물과 성의와 시간과 정성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께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본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위한 땅
땅은 인간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창 2:7, 3:19).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땅은 가장 중요한 필요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땅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드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몸 전체를 거룩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중앙에 세워질 성소(에스겔 48:10)
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북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서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동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남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성전 되신 하나님(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제사장을 위한 땅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위해서 운만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수고하는 제사장을 위해서도 땅을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그의 온 능력과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으므로, 그의 제사 수직
활동과 생계를 위해 그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도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경성합니다.
따라서 양들은
그들이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땅(여호수아 21:41)
레위 사람의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얻은 성읍이 모두 사십 팔 성읍이요 또 그 들이라.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땅(에스겔 48:11)
이 땅으로 사독의 자손 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찌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 때에 레위 사람의 그릇한 것처럼 그릇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왕을 위한 땅
왕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이양받아 백성의 안녕과 평강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따라서 백성 된 자들은 그러한
수고를 하는 왕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재물을 바쳐야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세금을 거짓 없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왕이 세금을 공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백성 된 자는 일단 세금 내는 일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왕에게 주어질 땅(에스겔 48:21)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왕에게 돌릴찌니 곧 거룩히 구별할 땅의
동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과 서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이라 다른 분깃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왕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히 구별할 땅과 전의 성소가 그 중간에 있으리라.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유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나누어서 각 지파의 기업으로 삼을 때, 그 방법은 ‘제비를 뽑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땅을 나눌 때도 ‘제비를 뽑는 방법’으로 했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각 지파의 능력대로 땅을 차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비뽑기가 아니라 능력대로 했다면, 영향력이 큰 지파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을 것이고, 영향력이 작고 인구수도 미미한 지파는 산간 지방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비를 뽑으면 어느 지파에게 어떤 땅이 떨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가장 연약한 지파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의 중요성은 그 땅이 자신들이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비뽑기만이 성경적이다’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제비뽑기는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뽑은 맛디아가 마지막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뽑을 때, 제비를 뽑지 않고, 성령님께서 따로 세우라고 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업으로 제비 뽑은 땅 중에서 한 구역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그 땅의 길이가 25,000척(13km)이고, 너비가 10,000척(5.2km)입니다. 면적으로 하면 67.6㎢(2,045만 평)입니다. 이 면적은 서울시의 10분의 1이 좀 넘고, 우리 교회가 있는 마포구의 약 3배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제비뽑은 땅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구별하여 드린 땅 뿐만 아니라 모든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일예배시에 인도자가 봉헌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중에 일부를 예물로 올려드립니다.”와 같이 고백하는데, 그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2)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길이가 오백 척이요 너비가 오백 척이니 네모가 반듯하며 그 외에 사방 쉰 척으로 전원이 되게 하되
제비 뽑은 땅 중에서 하나님께 드릴 부분을 먼저 정했는데,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을 가장 먼저 구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로와 세로)가 각각 500척(260m), 성소 외부의 길이와 너비 50척을 더하면, 성소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550척(286m)입니다. 면적으로 하면 약 81,800㎡(24,743평)입니다.
(4) 그 곳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수종드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땅이니 그들이 집을 지을 땅이며 성소를 위한 거룩한 곳이라
길이 25,000척, 너비 10,000척의 광활한 땅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물로 드리라고 한 이유는, 제사장들의 주거지와 성소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이 제사장의 기업(유산)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기업(유산)도 주지 말고, 산업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과 산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44:28). 이 땅은 제사장들의 주거공간으로만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주거공간을 확보해 준다는 것은 그들이 더욱 자신들의 기본 사역인 온전한 예배(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 새 땅의 가장 중요한 의미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 또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너비는 만 척을 측량하여 성전에서 수종드는 레위 사람에게 돌려 그들의 거주지를 삼아 마을 스물을 세우게 하고
또 다른, 길이 25,000척, 너비 10,000척의 땅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마을 20개를 세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면적은 마포구의 3배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마포구에는 16개의 동이 있습니다. 그러니 굉장히 큰 20개의 마을을 세울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 역시 성전에서 예배(제사)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새 땅에서의 예배가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6) 구별한 거룩한 구역 옆에 너비는 오천 척을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측량하여 성읍의 기지로 삼아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돌리고
레위 사람들의 20개의 마을 옆에 그 땅의 절반에 해당하는 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곳에 ‘여호와삼마_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라고 불리게 될 성읍이 만들어질 곳입니다.
(7-8) 드린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쪽으로 향하여 서쪽 국경까지와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국경까지니 그 길이가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지니라 이 땅을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업으로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줄지니라
왕의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1-8절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정사각형이 가로세로 각각 5개씩 25개의 칸으로 된 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째 줄과 둘째 줄, 10개 칸은 ‘레위 사람들의
거주지_20개 마을’입니다. 그리고 셋째 줄과 넷째 줄 10칸은 제사장들의 거주지인데, 셋째 줄 중간에 성전이 있습니다. 전체의
중심에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째줄 5칸은 경작지입니다.
그리고 25칸 위와 아래가 이스라엘 지파가 살게 될 땅이고, 25칸 오른쪽과 왼쪽이 왕의 소유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왕이 다시는
백성을 압제하지 않고(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처럼), 보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통치자들의 통치 법칙(9-17절)
9-17절은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함과 통치자들이 백성에게 받은 것을 다시 예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규정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통치자가 버려야 하는 것은 ‘포악’과 ‘겁탈’이고, 행해야 하는 것은 ‘정의’와 ‘공의’라고 합니다.
‘포악’은 법을 어기거나 무시하고 짓누르는 것이고, ‘겁탈’은 포악의 결과로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정의(미슈파트)’는 올바르게
재판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고, ‘공의(체데크)’는 이웃을 긍휼히 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행하는
것입니다.
10절부터는 다양한 무게 단위가 나옵니다.
- 에바(고체 부피) = 밧(액체 부피) ⇒ 약 22ℓ
- 호멜(낙타 한 마리가 질 수 있는 무게) = 고르 = 10에바 또는 10밧 ⇒ 약 220ℓ(108-162kg)
- 세겔(4일치 임금, 11.5g) = 20게라 / 5게라 = 1일치 임금
- 마네(신약의 므나) = 60세겔(240일치 임금)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 신실한 사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른 저울을 사용하고, 속이지 않는 것, 즉 모두가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출발하고 완성이 됩니다.
(13-15) 너희가 마땅히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 밀 한 호멜에서는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고 보리 한 호멜에서도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며 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십분의 일 밧을 드릴지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또 이스라엘의 윤택한 초장의 가축 떼 이백 마리에서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드릴 것이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로 삼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밀이나 보리를 1호멜(10에바) 수확하면 ⅙에바를 드리고 합니다. 즉 수확량의 60분의 1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름을
1고르(1호멜, 10밧) 수확하면 ⅒밧을 드리라고 합니다. 즉 수확량의 100분의 1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축 떼 중에서는
200마리를 목축하면 1마리를 드리라고 합니다. 즉 키운 것의 200분의 1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설명이 좀 더
붙어 있습니다. ‘윤택한 초장’에서 키운 것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물이 넉넉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초가 풍성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물이 잘 흐르는 곳에서 좋은 목초를 먹고 짐승들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땅에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16-17)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을 이스라엘의 군주에게 드리고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그런데 새 땅에서 예물을 드릴 때에 제사장에게 직접 드리지 않고, 군주를 통해서 드리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바쳐야 한다는 것과 그 땅에서는 군주(왕)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전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드리지 않았고, 왕도 군림하기만 했고, 우상숭배를 조장했기 때문에 그런 삶에서 떠나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18-25절)
18-25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와 그 때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첫째 달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하되
(20)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과실범과 모르고 범죄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성전을 속죄할지니라
정월 초하루와 7일에 흠 없는 수송아지 1마리를 드려서, 그 피를 성전 문설주, 제단 아래 네 모퉁이, 안뜰 문설주에 바르라고 합니다. 새 땅에서 새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속죄 제물이 숫염소였는데, 수송아지로 이것은 더 많이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후의 삶이 이전의 삶보다 훨씬 더 풍성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1)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유월절을 칠 일 동안 명절로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25)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칠 일 동안 명절을 지켜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유월절과 초막절(장막절)을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을 떠난 것을,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상징합니다. 새 땅에서 살게 되더라도, 처음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전도 없었고, 자기 명의로 된 땅 한 평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새 땅에 들어가거든 을 갖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비 뽑은 땅에 제사장들의 주거지와 성전을
짓고, 레위 사람들이 살 마을을 만들며, 정직한 저울을 사용하고,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회복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지금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야 할 길을 신실하게 걸을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않아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삼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을 신실하게 걷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지 25년이나 지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 지도 14년이나 지나, 더 이상 돌아갈
소망이 없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께선 제비로 뽑은 땅에 성소와 제사장들의 거처를 지을 것과 레위 사람들의 마을들을 세울 것을
명하시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땅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심으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울을 바르게 사용할 것과 절기들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전에 저울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으며, 여러 절기들을 신앙의 명절로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누릴만한 능력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비 뽑아 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않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절기를 바르게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걷는 ‘믿음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제비 뽑아 나누어 주는 땅은 거룩한 곳이며, 성소를 위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당신의 삶의 영역에 구별된 곳은 어디입니까? 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정직한 행함은 저울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바른 저울(원칙)을 사용함으로 얻은 유익과 바르지 못한 저울(원칙)을 사용함으로 겪은 낭패는 무엇이었습니까?
3. 하나님께서는 새 땅에서도 유월절(무교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등을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얻은 구원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있습니까?
4. 삶의 자리를 거룩되게(구별되게) 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걸으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에스겔 45장 이스라엘의 중심인 성전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지금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돌아가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미 지어진 성전을 보여줍니다.
확실하게 측량까지 하게 하십니다.
조감도를 보고 성전
모형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땅에다 옮겨놓습니다.
오늘 말씀은 땅을 회복할 때 이렇게 땅을 분배하라고 합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데 그것이 이루어질 때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44장에는 제사장들의 임무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주실 복이
나옵니다.
45장은 땅의 분배와 그들이 드릴 예물을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구역(1절)
이스라엘 사람은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어 유산을 삼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주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자요, 너비는 이만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역 전체는 사방으로 어디나 거룩합니다.
먼저 성전을 지을 땅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얻을 땅 중에 성전을 먼저
정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땅을 분배한 것을 무효화합니다.
이제 다시 분배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통일되어 북한에 가면 그곳에는 그
소유권은 정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땅문서를 가지고 가면 그 땅과 집이 내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지금까지 소유권은
무효화하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망한 것으로 모든 소유권은 무효입니다.
나의 모든 소유권은 깨끗이 버리고 예수님 믿은 후
다시 시작합니다.
가치관도 새로 시작해야합니다.
예전의 것은 다 없어지고오늘 받는 것은 다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가졌던 모든 것은 다 무효입니다.
예수님 믿고 지어지는 것만이 새롭게 받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치의식입니다.
그때 먼저 성전을 정하라고 합니다.
미국을 개척한 청교들이 먼저 지은 것이 교회입니다.
다음에 학교를 지었습니다.
다음에 집을 지었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다음에 자녀들입니다.
다음이 나 자신입니다
죠이 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Joy Mission).
죠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제이(J)는 예수(Jesus)
둘째, 오(O)는 다른 사람들(Others)
셋째, 와이(Y)는 네 자신(Yourself)라고 강조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순서는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이웃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위하라는 교훈입니다.
성경적인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성소의 땅과 레위인의 땅(2-6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그 한가운데를 성소로 배정합니다.
그 땅은, 길이가 오백 자요
너비도 오백 자로서, 사방으로 네모 반듯 하여야 합니다.
그 둘레에는 사방으로 너비가 쉰 자인 빈 터를 두어야 합니다.
그들이
재어 놓은 전체 구역의 한가운데를 성소로 삼습니다.
그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 되는 땅을 재어 놓고, 그 한가운데를
성소, 곧 가장 거룩한 곳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곳은 그 땅에서 거룩한 구역입니다.
이 땅은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직무를 수행하려고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은 그들이 집 지을 자리와
성소를 앉힐 거룩한 구역이 될 것입니다.
이런 땅의 분배는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땅의 분배입니다.
그 땅중에 가운데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땅으로 드러야합니다.
그 가운데를 제사장에게 주고 성소를 지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고 살아야하므로 항상 제사장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을 대신 삼아서 자신을 대신하여 드리게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일반성도들이 책임져야합니다.
일반평신도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십분의 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드립니다.
그것은 전임사역자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므로 성도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그것도 예배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건강도 주시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평일날 일하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길이가 이만 오천 자에 너비가 만 자 되는 나머지 땅을, 성전에서 시중드는
레위 사람들에게 재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 안에 레위인이 성읍을 세우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린 구역 옆에, 너비가 오천 자요 길이가 이만 오천 자인 땅을, 그 성읍의 재산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사람
전체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차지합니다.
그들은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제사장의 땅-레위인의
땅- 성전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의 땅을 분배하여 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사람들이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농사짓는 곳입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땅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주인입니다.
우리에게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헤로 주신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표시로 가운데는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레위사람들을 위해서도 구별하여 드러야 합니다.
나머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 살게 해야합니다.
열두지파에서 착출되어 성전이나 성읍을 위해서 하는 일을 합니다.
서로 돌아가며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대청소를 할 때 서로 돌아가며 일을 합니다.
그들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들도 주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왕의 땅(7-8절)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린 땅과 그 성읍의 소유지의 양쪽으로 펼쳐진 구역은, 왕의 몫입니다.
이 구역은 서쪽으로
서쪽의 해안선까지이고, 동쪽으로 동쪽의 국경선에 이르기까지입니다.
그 길이는, 서쪽의 경계선에서 동쪽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들의
구역과 같아야 합니다.
이 땅이, 이스라엘에서 왕이 차지할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세운 왕들이 더 이상 땅 때문에
내 백성을 탄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도 그들의 각 지파에 따라서 땅을 차지하게 할 것입니다.
왕에게 주는 땅이
넓습니다.
전국토의 삼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땅이 왕의 땅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정한 지역만을 가져야합니다.
그는 치안 국방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잘 유지되려면 치안 국방을
섬겨야합니다.
이들은 정부이고 공공 기관들입니다.
이 공공기관들이 잘 운영되는 대로 서포트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서
세금을냅니다.
세금을 내는 것도 예배입니다.
교회가 예배드리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공공기관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일반 백성들이
해야합니다.
왕에게 바치는 것도 세상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세금을 포탈하여 하나님께 십일조내는 것은 안 됩니다.
왕에게 돌릴 것은 왕에게 돌려야 합니다.
왕이 더 이상의 욕심이 내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왕은 왕대로 일반백성은 백성대로 살게
해야합니다.
공평한 통치(9-12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이제는 폭행과
탄압을 그만해야 합니다.
그들은 만족해야합니다.
그들은 폭행과 탄압을 그치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받았다고 하십니다.
왕이 가난하면 백성을
괴롭힙니다. 배고픈 사람을 정치가 만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 땅으로 족하게 해야합니다. 백성들을 빼앗아 먹지 말게
해야합니다. 충분한 땅을 주어 백성을 괴롭히지 말아야합니다. 말단 경찰들이 매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월급이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부정의 대상이 됩니다. 왕과 공무원도 정직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들은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에바와 정확한 밧을 써야 합니다. 에바와 밧은 용량이 같아야 합니다. 한 밧은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고, 한
에바도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도록 하여야 합니다. 호멜을 표준으로 삼고, 에바와 밧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한 세겔이
이십 게라가 되게 하고, 이십 세겔 짜리와 이십오 세겔 짜리와 십오 세겔 짜리를 합하여 한 마네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울이나
자가 정확해야합니다. 공의가 나라를 평안하게 합니다. 의를 떠나면 아무도 권력자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밖에서 하는 일도 다 주의 일입니다. 우리 주위를 다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합니다.
마땅히 드릴 예물(13-15절)
이스라엘 사람이 마땅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칠
제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은 한 호멜 수확에 육분의 일 에바를 바치고, 보리도 한 호멜 수확에 육분의 일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기름에 대한 규례를 말하면, 기름은 한 고르 수확에 십분의 일 밧을 바쳐야 합니다.
한 고르가 한 호멜 또는 열 밧과
같은 것은, 열 밧이 한 호멜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세금을 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물이 넉넉한 초장에서, 양 떼의 수가 이백
마리가 될 때마다, 백성은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바쳐서, 그들을 속죄하는 곡식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삼도록 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이 드려야할 예물(16-17절)
왕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따라서 예물을 다 드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 앞에서 다 예배자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이 제물은 이스라엘의 백성 전체가 이스라엘 왕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왕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성회 때마다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부어 드리는 제물을, 공급할 책임을 집니다.
그는 속죄제물과 곡식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공급하여, 이스라엘 족속이 속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유월절(18-22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첫째 달 초하루에는 언제나 소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성전의 문설주들과 제단 아래층의 네 모서리와 안뜰
문의 문설주에 발라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달 초이렛날에도, 고의가 아닌 사람이나, 알지 못해서 범죄한 사람을 속죄할 때에, 그와
같이 하여야합니다.
이렇게 성전을 속죄해야 합니다.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이 절기에는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합니다.
그 날 왕은 자기 자신과 이 땅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유월절 예배(23-24절)
그는 이 절기를 지내는 이레 동안 주님께 드릴 번제물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레 동안 날마다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한 마리를 날마다 속죄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곡식제물을 함께 갖추어서 바쳐야 하는데,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이고,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이고, 또 밀가루 한 에바마다 기름 한 힌씩을 바쳐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초막절(25절)
그는 일곱째 달 보름에
시작되는 초막절에도 이레 동안 똑같이 하여, 속죄제물과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기름을 바쳐야 합니다.
그들은 사십년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계획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에스겔 44장요약
에스겔 44장은 하나님이 들어오신 동편 문에 대한 출입제한으로 시작합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와 바벨탑사건처럼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속도제한이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 곧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실존을 아는 것은 에덴의 조건, 곧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이었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 달려있다.
제사장에게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가 바로 예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에게 본래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을 밝히며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제사장은 목회로 돈 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예배자는 제사장이 고유에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마땅히 힘써야 한다.
1.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리
➀ (1절~3절)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 문을 통해 성소에 임재하신 후에 문은 폐쇄 되고 ‘아무 사람도’ 출입하지 못하게 제한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곧 인간의 한계를 증거 한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선악과 사건(창3:5)과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려했던’ 바벨탑 사건(창11:4)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 노릇하려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한 실낙원의 근본원인을 고발한다. 속도제한의 목적이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있는 것처럼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는 지혜가 행복한 삶의 조건임을 증거 한다. 3절 ‘왕인 까닭에’는 왕에 대한 예외규정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세자조차도 하나님의 문으로는 출입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➁ (4절~5절)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가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고’
▶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제사장이며 대언자인 에스겔조차 출입제한 규정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이 취할 마땅한 자세다. ‘전심으로 주목하여 전심으로 주의하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배자인 인간의 관계 곧 에스겔 성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참고사항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목해야만 하는 생사가 달린 필수사항임을 경계한다.
2. 레위인의 패역
➀ (6절~9절)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이었고 예배의 타락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타락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서 범한 추악하고 역겨운 짓을 세 가지로 기록한다. (7절)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소에 들인 것, (8절)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한 것, (9절)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한 것 등이다. (막11: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누구나 성소에 들어갈 길이 열려있지만 아무나 성소의 일을 감당할 순 없다. 자기부인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무자격자들에 의해 예배가 타락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다. 온전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➁ (10절~11절)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 (출32:1~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의 우상은 백성들의 강요로 시작되었다. (출32:21~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아론은 우상숭배의 원인을 백성들의 완악함으로 돌려 책임을 전가하려 했지만 백성의 타락은 지도자인 제사장의 과실에 있었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와 성장주의는 타락한 제사장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대로 지도자들을 길들이는 타락한 백성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책임은 백성들을 무분별하게 추종했던 타락한 제사장들에게 있다.
③ (12절~14절)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내 성물 곧 지성물을 가까이 못하게 하리니...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 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 레위인들은 본래 성물과 지성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백성들을 견인하지 못한 우상숭배에 대한 모든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본래적인 역할은 박탈되고 역할이 강등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지만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하면 그 책임과 죄과를 면할 수 없다.
3. 제사장의 자격
➀ (15절)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 고위공직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되는 이유와 제사장의 철저한 자격을 강조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공정한 국가를 위해 공정한 관리의 등용이 요구되는 것처럼 거룩한 성전의 회복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출현에 달려있다. 제사장의 자격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는 ‘예배’다. 예배의 회복은 제사장들에게서 시작된다. 사람(제사장)이 아니라 역할(예배)의 중요성이다. 제사장은 세속적인 권위나 특권이 아니라 고유한 역할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막중한 권한과 지위를 행사하는 고위공직자(공무원)에 대한 철저하고 엄격한 규제와 자격이 요구되는 것처럼 거룩하고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필수다.
➁ (16절~19절)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이니...그들이 바깥뜰 백성들에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 제사장은 값 비싸고 사치스러운 의복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세마포 에봇을 입는 청빈함과 백의종군하는 겸비한 태도가 요구된다. 제사장의 예복에 대한 환복의 규례는 성전 안에서 예배의 목적으로만 써야지 자기자랑이나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스톨과 클러지셔츠)
③ (20절~27절)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 단순히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단정함, 절제(포도주), 결혼, 가르치며, 규례대로, 절기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솔선수범은 모든 지도자의 기본 자질이다. 제사장은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삶으로 전하는 것만 남는다. 직분이 아니라 직분에 합당한 삶 곧 인격(도덕성)과 역량(자질), 기준(자격)을 요구한다. 겉만 번듯한 함량미달의 거짓선지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열매(삶)로 나무를 알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삶을 보면 숨은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4. 제사장의 생업 – “목사로 돈 벌 생각 하지 마라”
➀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나는 그 산업이 되리라’
기업이나 산업은 ‘생업’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만 전무하는 제사장의 생계수단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겠다는 약속이다.
앞서 제사장으로써의 지엄한 책무와 더불어 그에 따른 제사장에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증거하고
있다.
(고전 9:7~14)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사도바울은 사역자들의 의무(헌신)만 강요하고
권리(생활)를 보장하지 않는 야박하고 이기적인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전임사역자의 생존권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인 예배(제사장), 곧 영혼의 문제는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역자는 필요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고 자족해야 하고
공동체는 필요를 채워서 본연의 역할에 전무할 수 있는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전임사역자의 사례는 교육공무원(교사) 수준이
적절하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말고 신앙생활에 초점을 두게 하고 교인들은 영혼의 교사인 목회자의 중요성을
알고 처지와 형편을 자신의 삶처럼 돌아보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➁ (29절~30절)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하라’
제사장과의 관계에서 복이 온다는 말은 제사장의 특권이 아니라 예배(제사장)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성공은 삶의 성공으로 연결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두라는 데 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리라’는 말씀은 마음(영혼)에서 참된 삶이 나온다는 말이다. 제사장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본뜻은 여기에 있다. 학교생활의 원칙은 교사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배움이 있고 유익이 있다. 수업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어야 학습능률도 오른다. 제자훈련의 제1원칙 ‘지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교사가 학습의 통로인 것처럼 목사와의 관계가 풍성한 신앙생활의 열쇠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10:1~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고위공직자(공권력)의 권위가 본래적인 직무에만 국한 되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는 오직 보내신 분의 뜻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자기 생각과 판단, 사리사욕 내세우면 안 된다. 이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은 메신저의 말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말로 경청해야 한다.
③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박사의 조카 유승흠 이사장(한국의료지원재단)은 <유일한 정신의 행로> 라는 책을
소개하며 ‘의사로 돈 벌 생각마라’는 백부의 말씀을 늘 새겼다고 말한다.
재개발지역 건물매입으로 인한 청와대 대변인 사퇴는
일반인과의 구별되는 고위공직자의 엄중한 책무를 보여준다.
정치(공직)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본문이 전하는
제사장에 관한 모든 규례는 한마디로 ‘목회로 돈 벌 생각 말라’는 뜻이다.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존의 본능이자
생존의 원칙이다.
목회자는 구별하여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 믿음의 헌신으로 드려진 예물로 자족해야 한다.
사리사욕을 버리고
자존감을 지키고 눈앞에 이익보다 자부심을 지켜내야 한다.
오늘날 목회현장의 비극은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 있는 제사장들이 판을 치는 까닭에 존중과 신뢰할 만한 목회자를 찾기 힘든
현실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예배)는 뒷전에 두고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와 같은
신앙인들, 본래적인 사명을 망각한 세상일에만 빠져 있는 교인들이 더 많은 현실이다.
사도바울과 데살로니가교인들의 관계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을 하나님 앞에 결산할 대상처럼 섬기고, 교인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동행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천사, 그룹, 스랍의 차이
1. 천사들(angels)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과 같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도와 천국의 것을 이 땅에 전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천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악한 세력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마태복음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는 본질적으로 육신을 갖고 있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헬라어 <앙겔로스>로 남성명사로 쓰여진 것과 같이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 주로 남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성경에서는 천사의 수가 무수히 많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수는 무수히 많지만 그룹이나 스랍과 같은 천사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 그룹(cherub), 그룹들(체루빔-cherubim)
그룹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에 근접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화염검과 그룹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룹'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케루브>인데 이곳에 남성 복수형 어머인 <임>이 붙어 <케루빔>으로 불려집니다.
그래서 <케루빔>이라고 하면 '그룹들'이란 복수형태가 됩니다.
그룹은
성경에 자주 언급이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지성소의 그룹들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Ark of Covenant)가 있고 언약궤의 뚜껑을 시은좌(mercy seat) 혹 속죄소라고 부르는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붙어 있습니다.
두 그룹이 속죄소와 함께 정금으로 만들어져서 마치 언약궤를 감싸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그룹은
하나님을 보좌하였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함께 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호위군사와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삼상 4:4)"
또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삼하 6:2),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왕하 19:15),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사 37:16)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삼하 22:11),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시
18:1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확연하게 운행하는 그룹들을 보았는데 그룹들은 모두 네 날개와 네 얼굴을 지닌 생물(living creatures)이었습니다.
에스겔
1:5-10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에스겔이 본 그룹은 에스겔 10장에서도
다시한번 보게 됩니다.
에스겔이 본 그룹은 네 생물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사람, 소, 사자, 독수리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각 생물에 네 개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도요한이 바라본 네 생물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바라본 네 생물 역시 사람, 소, 사자, 독수리의 모양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생물마다 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이 본 그룹은 네 개의 날개가 있는 반면에 사도요한이 보았던 네 생물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스랍(Seraphs)
스랍(Seraphs)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사라프>로서 '불뱀(fiery serpent)' 또는 '스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랍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천사로서 언제나 주님의 보좌에 함께 합니다.
만일 스랍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뱀'이 되고 맙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새벽별'이라 불리울 정도로 천사들 중에 매우 뛰어난 존재였지만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으로 그는 '불뱀'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처럼
스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스랍은 '불뱀'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경배하지 않을 때 우리 역시 '불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물어 죽임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스랍은
그룹과 상당히 비슷한 천사계급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룹이 하나님의 호위 군사라고 한다면 스랍은 성가대원과
같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지만 스랍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그룹'의 임무와 '스랍'의 임무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6장에 언급되고 있는 스랍은 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였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정결케 하였다.
이사야 6:2-3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도요한은
열린 하늘 문으로 이끌리어 그곳에 계신 주님을 보았으며 보좌에 함께 하고 있는 네 생물을 보았습니다.
네 생물을 보았다고 해서 그
네 생물이 에스겔이 보았던 네 생물과 같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그룹이었지만 사도요한이 본
네 생물은 스랍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사도요한이 본 네 생물이 그룹이 아닌 스랍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6-8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사도 요한이
바라 본 네 생물은 이사야가 바라 본 스랍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스랍은 그룹과 달리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공중에 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발을 가린 것은 존귀하시고 고귀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스랍처럼 주님께 나아갈 때 존경심과 두려움과 함께 겸손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城)의 8개 문
성경에 미문, 양문, 동문 등 예루살렘 성의 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곳이 있다.예루살렘의 8개 성문을 동쪽에 있는 사자문에서 시작해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마지막 동문까지 돌아본다.
지금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중 7개의 문은 현재까지 사람이 드나들고 있다.
사자문은 성경에서는 양문(Sheep Gate)으로 나오며. 스데반문(St. Stephen's Gate) 등의 이름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의 시작점이다.
이 문을 사자문이라 하는 것은 문 꼭대기 좌우에 각각 두 마리씩 전부 4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자문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자문은 스데반문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예수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이 이 문밖으로 끌려 나와서 청년 사울(바울)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행 7:54-60).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문(사자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던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신 기록이 나온다(요 5:1-11). 이 베데스다 연못이 양문 바로 옆에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 5:-11
오늘날의 베데스다 연못이다. 연못 물은 말랐지만 연못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사자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가셨던 길인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시작점이다. 사자문 바로 안에 그 당시의 빌라도 법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빌라도 법정 터는 지금은 초등학교(Umariya Elementary School)가 세워져 있다.
이스라엘 성(城) 북쪽에 있는 이 문을 헤롯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처에 예수님 당시 유대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집과 집무실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 문의 히브리 이름은 꽃문(Flowers Gate)이다.
유대인의 고소로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에게 보내는데(눅23:1-7) 그때 헤롯의 집무실이 이 문 근처에 있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다메섹(다마스쿠스) 문은 수리아(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을 통해서 세겜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 세겜문(Shechem Gate)이라고 부른다.
사도행전 9장에 예수를 믿는 자를 잡아 가두던 일에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의 영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사울이 통과한 길이 현재 다메섹 문이 있는 길이다.
새문은 1889년 건축된 것으로 예루살렘 성문 중 가장 최근에 생긴 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 외부의 기독교인들이 당시 술탄에게 예수님 무덤이 있는 기독교인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해서 만들어진 문이다.
영어식 발음은 자파 게이트가 맞는데, 성경에서 욥바로 번역해서 욥바문으로 적는다. 욥바는 지중해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떠난 항구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내륙의 니느웨(Nineveh, 당시 앗수르 제국의 수도, 현재 이라크 지역)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지중해를 건너 다시스(Tarshish, 현재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근처)로 가려고 항구도시인 욥바로 가서 배를 탄다.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에 있는 문이 욥바문이다.
예루살렘 성이 시온산에 지어졌는데, 시온산의 정상은 시온문 앞에 있다. 시온산 정상 앞에 있는 문이 어서 시온문이라고 한다. 현재 시온문과 옆의 성벽을 보면 총탄 자국이 많은데, 이는 1967년 발발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때의 탄흔이다. 1967년 이전에는 예루살렘 성이 요르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문을 분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2세 경 이곳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 내의 오물(분뇨, Dung)을 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으로 지금은 성전산이나 통곡의 벽으로 갈 때 대부분 이 문을 통과한다.
동문은 성경에서 황금문(Golden Gate), 수산문(Shushan Gate), 미문(Beautiful Gate) 등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문은 예루살렘 성 외부에서 예루살렘(솔로몬)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데, 지금은 예루살렘 8개 문 중 유일하게 폐쇄된 문이다. 동문 바로 앞에는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건너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이 있다.
하나님 영광이 들어가는 문
동문은 성경에서 의미가 매우 깊은 문이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43장을 보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동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임하는 문이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에스겔 43:1-5
닫혔으나 열린 문
그런데 에스겔 44장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동문을 닫아 두어라고 말씀하셨다(겔 44:1-2). 하지만 이어서 44장 3절에는 왕은 이 문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왕은 영어 성경에서는 왕자(Prince)로 번역되어 있는데. 반즈 주석(Barnes Note)에서는 이 왕자가 메시아(Messiah)이며, 메튜헨리주석(Mattew Henry's Commentary)에서는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할 그리스도(Christ)임에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 성전의 문은 죄인에게는 닫힌 문이지만 메시아, 그리스도가 여실 문이라는 말이다. 메시아,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 천국 문(동문)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고, 우리는 그의 은혜로에 힘입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입성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성취되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에스겔 44:1-3
천국으로 가는 황금문
그래서 동문을 천국으로 가는 황금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80장(천국에서 만나보자)은 영어 찬송가 The Eastern Gate(동문)를 번역한 것이다.
찬송가 1절 첫 부분 가사가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인데, 영어 찬송가 가사는 'I will meet you in the morning. Just inside the Eastern Gate.'로 되어 있다.
번역한 우리 찬송가에서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영어 찬송가 원문에는 '동문 안에서 만나자.'로 되어 있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문
또한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는데, 그때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셨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것이다(막 11:15).
예수님의 동문을 통한 입성은 에스겔 43과 44장의 환상이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담대히 천국 성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미문
동문은 미문(Beautiful Gate)으로도 불리는데,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다 미문에 앉아 있는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미문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에 미문에서 구걸을 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 3:6-10
폐쇄된 문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문인 황금문, 동문, 미문이 지금은 굳게 폐쇄되어 있다. 문이 잠긴 게 아니라 아예 돌로 막아서 성벽처럼 되어 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은 메시아가 오면 성전 동문을 통해 온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810년에 무슬림에 의해서 이 문이 폐쇄되었다. 그러다 십자군 전쟁 때 1102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문이 열렸는데 1187년 무슬림에 의해 다시 폐쇄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무슬림들은
성문 폐쇄에 더해서 동문 앞을 완전히 공동묘지로 만들었다.
유대인의 메시아는 부정한 시체를 넘어오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동문은 완전 성벽이 되어 있고 그 앞은 무슬림들의 공동묘지가 감람산 게세마네 동산 앞까지와 기드론 계곡 전체를 덮고
있다.
10-28-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에스겔 44:10)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The Levites who went far from me when Israel went
astray and who wandered from me after their idols must 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웨나세우 아오남 (וְנָשְׂאוּ עֲוֹנָם)
에스겔 44장부터 46장은 새 성전에서 새 예배에 관한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44장은 에스겔을 인도한 여호와의 권능이 굳게 닫힌 동문을 보여줍니다.
동문은 여호와께서 들어오신 문으로 어느 누구도 그 문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영광(카보드 아도나이)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였으므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전의 모든 규례와 율례를귀로 들어라!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라!
패역한 백성들에게는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심지어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려와 전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지난 날의 잘못은 반드시 깨닫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서는 백성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모든 법도 율례를 지켜야 합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 친족의 경우 즉 부모,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않은 누이는 예외라고 하였으나 반드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낸 후 안 뜰과 성소로 들어갈 때는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제사장의 직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거듭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담당하다(5375) 나사[ nâsâʼ ] נָשָׂא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 13:6,7), 용서하다(창 18:26, 출 10:17), 듣다(창 19:21), 데려오다(창 45:19), 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 18:22, 민 11:17), 메다(출 28:12, 왕상 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 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 20:7, 신 5:11), 전파하다(출 23:1), 운반하다(민 1:50), 돌아보다(신 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 13:29), 이끌어가다(왕상 18:12), 뜨다(왕하 19:22), 긷다(대상 11:18), 장가들다(대상 23:22, 24:3), 노략하다(대하 14:13), 운반하다(대하 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 2:12), 따르다(욥 13:8), 물다(욥 13:14), 노래하다(욥 21:12), 보다(욥 32:21, 시 82:2), 내다(욥 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 63:4), 주다(시 72:3), 기쁘게 하다(시 86:3), 치다(시 133:9) 건너다(사 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 1:16), 솟아오르다(나 1:5), 쓰다(학 2:12), 받아 주다(말 1:8), 긍휼히 여기다(말 1:9), 실리다(창 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 32:1), 사죄함을 받다(사 33:24), 달하다(렘 51:9), 사로잡다(단 11:12), 돋우다(사 40:4), 안기다(사 66:12), 뛰어나다(사 2:2), 자고하다(사 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 9:11), 끌어가다(암 4:2), 형벌받다(레 22:16), 높아지다(단 11:14), 높은 체하다(잠 30:32), 흥왕하다(민 24:7).
[부] 높이(에 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죄악(5771) 아본[ ʽâvôn ] עָוֹן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벌(창 4:13), 죄악(창 15:16, 삼상 3:13, 겔 4:6), 죄(출 20:5, 민 30:15, 애 4:6), 죄책(출 28:38), 악(출 34:7, 신 19:15, 잠 5:22), 허물(레 5:1, 삼하 3:8, 욥 7:21), 불의(레 16:21, 욥 33:9, 사 27:9), 형벌(레 26:41, 느 19:29), 벌(삼상 28:10, 왕하 7:9), 범죄(시 89:32, 겔 4:5), 죄짐(사 43:24), 불의함(호 14:1)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나사)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발)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나가)
하나님에게 맞으며(나카)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아나)
지고(5375)
당하였거늘(5445)
סָבַל
스트롱번호5445
지다
슬픔이나 죄 등을 지다
푸알형 분사:새끼를 밴
-
발음 [ çâbal ]
- 관련 성경
- ☞당하다(사53:4), 담당하다(사53:11, 애5:7),메다(창49:15), 품다(사46:4), 들다(사46:7),싣다(시144:14). [명] 짐(전12:5).
- 구약 성경
- 9회 사용
당한다(6031)
עָנָה 스트롱번호6031
어떤 것에 노력을 가하다
괴롭혀지다
니팔형
-
발음 [ ʽânâh ]
- 관련 성경
- ☞애쓰다(전3:10), 수고하다(전1:13), 곤란하다(시119:67), 고난당하다(시119:71, 사53:4,슥10:2), 겸비하다(출10:3, 스8:21), 굴복하다(사31:4), 괴롭다(사53:7), 괴로워하다(사58:10), 욕보이다(신21:14, 삿20:5), 굴복하게 하다(삿16:5, 시90:15), 쇠약하다(시102:23), 상하다(시105:18), 고생하다(애3:33), 관계하다(겔22:10,11), 해롭다(출22:23), 노래하다(출32:18), 낮추다(신8:2,16), 학대하다(창16:6), 박대하다(창31:50), 학대받다(출1:12), 굽히다(욥37:23), 괴로움 받다(시64:12), 근심하다(시132 : 1), 벌받다(왕상8:35, 대하6:26), 복종하다(창16:9). [명] 곤란(시116:10), 고난(시119:107), 온유함(삼하22:36),
- 구약 성경
- 80회 사용
נָגַע 스트롱번호5060
닿다
범하다
여자와 동침하기 위하여 만지다
-
발음 [ nâgaʽ ]
- 관련 성경
- ☞닿다(창3:3, 레5:3, 6:11, 11:24이하, 민4:15사6:7, 단8:5, 학2:12), 모이다(스3:1, 느7:73),때리다(창32:26,33, 삼상6:9, 욥19:21), 부딪히다(겔17:10).
- 구약 성경
- 150회 사용
נָכָה 스트롱번호5221
치다
니팔형: 매맞은
피엘형: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נַכֶּה
-
발음 [ nâkâh ]
- 관련 성경
- ☞맞아 죽다(삼하11:15), 상하다(창37:21, 출9:31), 치다(창32:8, 대상18:9, 말4:6), 죽이다(창34:30, 신19:6), 때리다(민22:28, 신25:3), 쳐죽이다(민35:16), 찔러 넣다(삼상2:14), 살육하다(수10:20, 삼상14:14), 맞다(왕하8:29, 대하22:6), 패하다(렘46:2), 공격을 받다(렘49:28), 멸하다(창8:21), 쳐부수다(창14:17),채찍질하다(민22:23,25), 녹이다(삿20:31), 취하다(렘40:14), 격파하다(수11:8), 죽임을 당하다(민25:14, 삼상4:2), 이기다(삼상17:50), 박다(삼상18:11, 19:10), 찔리다(삼상24:5, 26:8), 찌르다(삼하2:23, 4:6), 자책하다(삼하24:10), 쏘다(왕하9:24, 대하18:33), 박수하다(왕하11:12), 쬐다(욘4:8), 살인하다(민35:11,15, 사66:3), 암살하다(신27:24), (실수로)죽이다(수20:3), 함락되다(겔33:21, 40 : 1),내어주다(렘18:21). [명] 죽임(창4:15), 태형(신25:2), 상처(슥13:6).
-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αἴρω 스트롱번호142
들어올리다
돌을 올리다
뱀을 집어 올리다
-
발음 [ airō ]
- 관련 성경
- 받들다(마4:6), 가지다(마20:14, 막2:11), 당기다(마9:16), 메다(마11:29), 빼앗다(마25:29), 가져가다(마14:12), 거두다(마15:37, 막8:8), 지다(마16:24, 요1:29), 던지다(막11:23), 깨닫다(마24:39), 뽑다(막15:24), 집다(막16:18), 높이다(눅17:13), 취하다(눅19: 21), 없이하다(눅23:18, 요19:15), 들다(요5:9), 끌어올리다(행27:17), 옮겨놓다(요11: 39), 제하다(요15:2), 데려가다(요17:15), 치우다(요19:31).
- 신약 성경
- 101회 사용
새 성전에서의 레위인들의 직무가 그들의 이전 행위에 대한 책망과 함께 기술된다.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 레위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앞장섰던 죄악(렘 2:8)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 직분을 박탈당하고 대신 더 천한 봉사직으로 격하되었다(11, 13, 14절).
예레미야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15. 어린 사자들이 너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날려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네 성읍들은 불타서 거민이 없게 되었으며.
한편 여기서 책망 대상이 된 레위인은 성전의 모든 잡일을 처리하는 일반 레위인이 아니라 제사 수행의 직책을 맡았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는 그 제사 직분이 사독의 자손에게 이임된 사실에서 입증된다(15절; 43:19).
43:1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에스겔 43:10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에스겔 43:11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10절에서 언급된 그 죄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본절은 문장 초두의 '그러나'가 암시하듯 레위인들의 범죄 결과가 그들의
완전한 파멸이 아닌 직분의 격하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준다(딤전
1:12 비교).
디모데전서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 이러한 직무는 민 16:9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일반 레위인들의
직무였다(대상 23:2-5, 24-32;26:20-28;대하 29:34).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는 새 성전, 새 예배, 새 땅 등에 관한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성전의
평면도를 그려볼 수 있는 40장부터 43장에서 성소와 지성소, 출입문, 골방과 제사장의 방, 뜰 등의 위치와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40장부터 43장까지는 새 성전의 구조(성소, 지성소, 출입문, 골방, 제사장의 방, 뜰...)
44장부터 46장까지는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릴 새 예배의 규례가 나옵니다.
다시 열지 못할지니(1-3절)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그’는 천사이며, ‘나’는 에스겔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천사가 에스겔 선지자를 성소의 동문 밖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동문을 보니 닫혔다고 합니다.
동문이 닫힌 이유를 하나님께서 2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하나님께서 동문을 의도적으로 닫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문을 통해 성소에 들어오셨는데 그 동문을 닫게 하신 이유는 앞으로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만드셨고 그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은혜를 받아 큰 기쁨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그렇기에 동문을 닫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막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
밖으로 나가시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동문이 아닌 성전의 다른 문을 이용해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성전에서 택한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며 다시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영원히 함께 하심을 예표하시는 것입니다.
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이는 왕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닫으신 동문으로 들어올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왕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와야 합니다. 왕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함으로 세상의 높은 권력과 지위를 가지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전심으로, 주목하여, 귀로 듣고(4-8절)
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천사가 동문 밖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 성전 안뜰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기에 에스겔 선지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같은 공간에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를 다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바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고
하나님께서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지킬 것을 강조하십니다. 5절에서 “전심으로”가 2회, “주목하여”가 2회, “귀로 듣고”가 1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에서 지켜야할 규례와 율례가 있는데 이 모든 법을 마음을 다하여 눈으로 주목하고 귀로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의 표준새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준새번역) 5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주의 성전에 대한 모든 규례와 그 모든 율례를 너는 명심하고, 네 눈으로 확인하고, 귀담아 들어라.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어귀와 성소의 모든 출구들을 명심하여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서 지켜야할 모든 법을 ‘마음’과 ‘눈’과 ‘귀’로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5절 끝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출입이 금지된 문과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문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로서 지켜야할 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어떻습니까? 에스겔 선지자 환상은 구약 성전 개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 집회, 모임 등에 확대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시간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고 한다면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도 모를 정도의 무분별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6절의 “반역하는 자”, “가증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거룩한 곳에서 과거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는 과거로 충분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가증한 일을 행하는 반역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증한 일의 구체적인 내용이 7절에 있습니다.
7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온 것 자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회중에 이방인이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지만 이스라엘 회중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은 유월절의 떡을 먹을 수 있고 제사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부분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성전출입과 제사를 위한 성소출입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할례도 형식적인 육체적 할례만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할례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마음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형식을 갖추더라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형식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형식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수종들게 되리라(9-14절)
9절부터 14절의 말씀을 보면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의 '그릇 행함'에 대해서 나옵니다.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이 자신의 지켜야할 사명을 어이없게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이로 인해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이 자신의 일을 부적격한 사람에게 맡긴 '그릇 행함' 이외에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악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2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우상을 위해 수종을 들어 자신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죄악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는데 그 죄악도 그들이 담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을 범한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박탈하시겠다고 합니다. 13절입니다.
13 그들이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레위 사람들 중에 제사장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할 것인데 10절과 14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전에서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와 관련된 일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 일에 귀천이 없겠으나 제사장이 죄악으로 인해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수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사장이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겠지만 영구히 성전 밖으로 쫓겨나지 않고 성전에 남아 수종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손 놓지 않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귀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실 것입니다.
직분을 지켰은즉(15-31절)
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절의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죄악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 중 사독의 자손은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민25:1-13, 왕상1:38-53, 왕상2:26-27) 이들은 성소의 직분을 지켰습니다. 사독 계열은 엘르아살 계열입니다. 제사장 사독과 달리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 아비아달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에 섰다가 솔로몬 왕으로부터 파면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을 통해서 성소의 직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레위 사람들 중 이다말 계열 제사장들에게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다양한 봉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모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중심의 봉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처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는 안뜰에서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19절에서는 바깥뜰로 나갈 때에는 거룩한 옷인 베옷을 벗고, 들어오기 전에 입고 들어왔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으라고 하십니다. 20절에서는 머리털을 밀지도 말고 길게 자라게도 말고 적절한 길이로 이발하라고 하십니다. 21절에서는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22절에서는 처녀나 제사장의 과부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솔선수범할 때에 백성들에게 바른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다.
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제사장이 먼저 구별되어 거룩해질 때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24절) 목회자가 바로 서야 교우들이 바로 설 수 있고, 선생님이 바로 서야 학생들이 바로 설 수 있고, 부모가 바로 서야 자녀들이 바로 설 수 있고,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공무원 언론인이 바로 서야 국민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교회 안팎에서 평화의 연결고리, 평화의 경작자가 될 수 있습니다.
28.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
2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새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생활 지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자들의 생계는 제사의
제물과 각종 처음 익은 열매로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물질적 지원보다 더 중요한 말씀은 “내가 곧 그 기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업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제 활동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생계를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시다.
본 구절은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복의 수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을 기부한 사람에게 제사장은
복을 빌 뿐입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성전 맡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듯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직분을 잘 감당하심으로 교우, 가족, 이웃과 함께 지어져 가시길 바랍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새 성전과 새 예배의 환상을 통해 신약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죄인을 영벌에
처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처럼 이
시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하시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기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하시옵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1. 하나님께서 동문을 닫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전심으로”, “귀로 듣고”, “주목하여”할 모든 법을 오늘날 예배에 적용해 본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4.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 레위 사람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함께 잘 지어져 가기 위하여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봉사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에스겔 44장 성전에서 제사장이 섬기는 법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랑합니다.
에스겔에게 앞으로 지어질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들어가보고 측량하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단순한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에스겔에게 큰 감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면 이스라엘은
튼튼합니다.
이스라엘은 국방력으로 튼튼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심으로 강건합니다.
이제 제사장이 성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예배를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일반적인 집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계십니다.
그곳에 출입하는 제사장은 거룩해야합니다.
성전 동쪽 문은 닫아 두라(1-3)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에스겔을 동쪽으로 난 성소의 바깥 문으로 다시 데리고 가셨는데, 그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과거에 주님이
떠났던 문입니다.
이제는 주님이 들어간 문이십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
문은 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문으로 들어왔으므로,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다시는 나가지 않고 영원히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십니다.
왕은 인간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도 동문으로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왕은, 그가 왕이므로,
남문으로 들어와서 주 앞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 이 문 안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입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입니다.
왕은 문 현관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성전 안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은 족하다(4-5)
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으로
들어가서, 성전 앞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에스겔이 보니, 주의 영광이 주의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에스겔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옆드려 경배해야합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일러주는 주의 성전에 대한 모든 규례와 그 모든 율례를 에스겔은 명심하라고
하십니다.
성전을 섬기는 법을 마음으로 명심해야합니다.
그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어귀와 성소의 모든 출구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규례를 따라서 바른 예배를 드러야합니다.
에스겔은 저
반역하는 자들,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지금까지 역겨운 일을 해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은 그만해도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역겨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전 섬기는 일을 이방인에게 맡긴 제사장들(7-8)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의 음식과 기름과 피를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여호와 성소 안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여호와 성전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여호와와 세운 언약을
위반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곤충의 모양을 성전에 그려놓았습니다.
애굽의 우상을 그리기 위해서 우상숭배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물건들을 맡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방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성소에서 이스라엘 대신에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성전에는 할레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궂은 일을 자신들이 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돈 몇푼 주고 하게 하였습니다.
그 일을 아무나 하게 하였습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를
하지 않은 자는 성전에서 수종들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벌기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는 어떤
일이든지 전부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은 사람이 해야합니다.
청소도
믿는 사람이 믿는 마음으로 거룩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이 고용되어 일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을 그런 이유로 했습니다.
이들은 우상숭배하는 자입니다.
이방인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경건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으면 성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궂은 일이라고
아무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레위인만이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을 거룩히
구별해야 복을 받습니다.
어떤 분이 성전 건축과 정치 경제적인 안정을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당을 지을 때 정치 경제가 발전합니다.
예배당이 망하면 나라도 망합니다.
러시아와 동구권을 보면 영광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배당을 미술관으로 술집으로 쓰니 망하였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그들이 복을 받습니다.
레위인이 성전에서 거룩하게
섬겨야 복을 받습니다.
선교사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사로서 선교하러 갔습니다.
어느날 먼 데서 환자하나가 치료하러
왔습니다.
그의 집이 하루를 걸어도 올 수 없는 길입니다.
새벽이 출발하여 저녁에 왔습니다.
그 중간에 병원이 있는데 여기까지
왔느냐고 합니다.
약은 같지만 의사가 다르다고 합니다.
약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 왔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치료해주어야 낳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직분으로 봉사를 하든지 항상 경건함과 정성과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없이
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해야합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는 발을 삼가야합니다.
이 경건이
중요합니다.
레위 사람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거하시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통해서 세상일을 하듯이 성전을 섬기게
합니다
레위 제사장들이 타락함(9-11)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여호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할례는 나의 생식기가 없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 과거의 죄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식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사는 이방 사람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서, 우상들을 따라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제사장들도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갔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막아야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레위 제사장들도 우상을 섬깁니다. 이방인이 레위인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하는데,
레위인이 그들의 물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타락해도 레위인은 타락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인이 바로 서야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나라에 핵심이 성전에 있고 성전의 핵심은 레위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성전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야합니다. 그래서 레위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잃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제사장이 아니라 여호와 성소에서 성전 문지기가 되고,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이 바치는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잡고, 백성 앞에서 시중을 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회복시킬 가능성을 두십니다.
레위 제사장들을 다시 세우심(12-14)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전에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 앞에서 시중을 들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죄를 범하게 하였으므로, 이제 여호와가 손을 들어 그들을 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게 하십니다.
레위제사장들은, 이제,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거룩한 물건에도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과, 자기들이 저지른 그 역겨운 일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여호와는 그들에게, 성전 안에서 해야
할 모든 일들, 곧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들을 맡아 보게 할 것입니다.
선택된 자라도 합당하지 않으면 직분을 박탈합니다.
그러나
박탈하는 목적은 그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독 제사장들(15)
다시 지어질 성전에서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이제 끝났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멀리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고 측량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이므로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을 선택해야합니다.
레위인은 첫째 경건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합니다.
마당을 쓸든지 피를 닦든지 모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제사
지낼뿐 아니라 부속된 일도 거룩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든 규례와 율례를 지켜야합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므로 거룩해야합니다.
제사장들은 죄를 지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도, 레위 지파 가운데서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성소에서 맡은 직분을 지켰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데도 사독의 자손은 거룩함을 지켰습니다.
제사장에는 아히멜렉의 계열과
사독의 계열이 있습니다.
아히멜렉은 반역자 압살롬 편에 서고 아도니야 편에 섰습니다.
솔로몬은 아히멜렉을 수종들지 못하게 하고
아나돗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사독은 반역을 들 때마다 항상 다윗 편에 섰습니다.
사독 계열은 계속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자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은 사독계열에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사독제사장들은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와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고,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에게 기름과 피를 바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에 사두개인이 사독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사독이라는 제사장이 많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거룩을 지켜서 직무를 다 하였습니다.
제사장 중에 목숨을 걸고 직분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후손이 만든 무리가 사두개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의미는 퇴색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바리새교인도 처음에는 구별된 자입니다.
남보다 달리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퇴색하고 교만해진 자들입니다.
사독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제사장 직분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의가
전부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선하였습니다.
그는 이 성은 망한다는 역사의식이 있었습니다.
천사를 어떻게
하든지 대접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의가 소돔고모라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롯도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는 자신 하나만 구원합니다.
사독은 롯처럼 예루살렘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맡겨진 직분을 생명을 다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후손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구별된 옷(16-19)
사독의 후손들이 여호와 성소에 들어올
수가 있으며, 그들이 여호와 상에 가까이 와서 여호와를 섬길 수가 있으며, 또 여호와가 맡긴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안뜰 문으로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 안에서나, 성전 안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양털로 만든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모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할 때는 땀이 많이 흐릅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일반적인 털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머리에도 모시로 만든 관을 써야 하고, 모시 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허리에도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띠를 동여서는 안 됩니다.
정결하고 깨끗하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바깥 뜰에 있는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여호와 앞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 입은 옷을 벗어서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백성이 제사장의 거룩한
예복에 닿아 해를 입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와 세상으로 갈 때는 구별된 모습을 가져야합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목욕도 해야하고 돈도 깨끗한 것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구별된 삶(20-22)
제사장들은 머리카락을 바싹 밀어서도 안 되고, 머리카락을 길게 자라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잘 깎아야 합니다.
어떤 제사장이든지,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일반 과부나 이혼한 여자와는 결혼을 할 수가 없고, 다만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에 속하는 처녀나, 또는 제사장의 아내였다가 과부가 된 여자와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내
백성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백성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과부와
하지 말고 처녀와 결혼해야 합니다.
혹시 제사장의 과부는 괜찮습니다.
제사장 직분을 결혼보다 더 중시해야합니다.
제사장이 온전한
마음으로 성전에서 섬겨야합니다.
그의 전임으로 성전을 섬겨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이 있는데 가정을 섬기는 부인도 한평생
제사장과 함께 해야합니다.
같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제사장은 사적인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해야합니다.
부인이 목사 직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어지러워집니다.
교회를 섬기는데는 같은 마음으로 섬겨야합니다.
외국에는
교역자들이 이혼하는 경우가 40프로나 됩니다 .
부인이 교역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사를 계속하면 이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가정보다 교회를 선택하여 이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를 섬길 사람을 구하여 결혼합니다.
가정보다는 교회를 우선시해야합니다.
가정생활이 중요한 것이 뭉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사명(23)
제사장은 항상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거룩하게 해야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도 했습니다.
문둥병의
진단은 제사장이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칩니다.
안식일에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가르쳐야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들을 수 있는 물건의 무게, 걷는 거리를 가르칩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제사장에게 물어야합니다.
직장을 해야하는지 옷을
입는 것도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제사장이 이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생각과 생활을 가르쳐야합니다.
제사장의 정결(24-27)
제사장은 소송이 제기되면, 그들이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가 정하여 준 법대로 재판하여야 합니다.
또 내 모든 성회를 지킬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법도와 율례를 지켜야 하고, 여호와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죽은 사람에게 접근하여 제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형제나 시집 가지 않은 누이가 죽었을 경우에는, 제사장들도 제 몸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제사장인 제
몸을 정하게 한 다음에도, 이레를 지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려고 안뜰에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몫으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장도 먼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합니다.
주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사장의 기업(28-31)
제사장들에게도 유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기업을 주십니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유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들에게 아무 산업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산업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야합니다.
그들은 곡식제사와 속죄제와 속건제로 바친 제물을 먹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구별하여 바친 모든 예물이 제사장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첫 열매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과, 그들이 받들어 바친 온갖 제물은 다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
또 그들은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서,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너희 집안에 복을 내리게 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직업이 없습니다.
그의 산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제물로
먹게 합니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제사장이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제사장 굶어죽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복이 임합니다.
제사장들은 새나 짐승들 가운데서 저절로 죽었거나
찢겨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10-27-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영광(에스겔 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not to become easily unsettled or alarmed by some
prophecy, report or letter supposed to have come from us, saying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already come.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작을 소(小) + 우뚝할 올(兀)
영광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작은 불이 타오를 때 그것을 덮으면 빛이 된다고 합니다.
작은 불이란 사람이 어렵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진 후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감당하도록 도와주셨다는 고백이 덮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榮光)
우케보드 아도나이(וּכְבֹוד יְהוָה)
영광(3519) 카보드[ kâbôwd ] כָּבוֹד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3068. 여호와[ Yehôvâh ] יְהֹוָה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의 영광(케보드 엘로헤) כְּבֹוד אֱלֹהֵי
영광(3519) 카보드[ kâbôwd ] כָּבוֹד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하나님(430) 엘로힘 [ ’ĕlôhîym ] אֱלֹהִים
관련 성경 / 하나님(창 1:1, 시 109:1, 욘 4:6), 엘엘로헤 이스라엘(창 33:20),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출 7:1, 신 4:34, 삼상17:43), 재판 장(출 21:6), 여호와(레 21:7), 여신(왕상 11:5)
구약 성경 / 2603회 사용
1:28. 무지개와 같으니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보좌(寶座) : 왕, 위엄, 통치, 주관자
1:26, 10:1, 26:16, 43:7
43:7a.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 : 어린 양 - 구원, 심판
9:2, 3. 11
10:2, 6, 7
10:2.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그룹 : 천사
9:3
10:1, 2, 3, 4, 5, 6, 7, 8, 9, 11, 12, 14, 15, 16, 18, 19, 20
11:22
28:14, 16
41:18, 20, 25
10:1.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10:3-4.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성전의 외적인 양식들을 척량하고 그 용도를 설명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준비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전 작업을 마치고 드디어 에스겔 43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야만 성전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게 임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성전 건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성전을 짓는 재료와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전제되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성령의 전이되었으므로 날마다 믿음으로 온전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한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때에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몸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지라도 근본의 죄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의 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자유케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에 아멘하십니까?
만일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거나 아멘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임재가 임할 수 있는 죄인은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내 삶의 자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소금과 빛의 기능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복된 자리로 다듬어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 43장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성전을 보여주시며 성전에서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43장은 미래에 들어설 성전에 들어가 측량하고 번제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오시고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시도록 제사를 가르쳐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다(1-3)
그 뒤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습니다.
10장 19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동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땅은 그의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습니다.
그 모습이, 에스겔이 본 환상, 곧 주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멸하러 오셨을 때에 본
모습과 같았습니다.
또 에스겔이 그발 강 가에서 본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죄사함을 받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시는 은혜가 먼저이고 회개하는 것이 나중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4-5)
그러자 주께서 영광에 싸여서,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갔는데, 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성전은 주님이 계셔야 성전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성전을 깨끗게(6-9)
그 사람이 에스겔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인 에스겔에게 이 곳 성전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발을 딛는 곳, 여호와가 여기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영원히 살 곳이라고 하십니다.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바벨론 왕궁에 비하여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전에 함께 하셔서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에스겔 8장 6절부터 에스겔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전에는
천사와 종려나무를 그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10절에는 각양 곤충과 짐승과 우상을 사면에 그렸습니다.
하나님은 견딜수
없어서 이들을 떠나십니다.
이제 여호와가 다시 오셨습니다.
여호와가 오신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다시는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백성이나 왕들이 음란을 피우거나, 죽은 왕들의 시체를 성소 근처에 묻어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전 근처에서 왕들이 높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만이 높아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건물이나 목사나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만이 주목 받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왕궁의
문지방을 여호와의 성전의 문지방과 나란히 만들었습니다.
왕궁의 문설주를 여호와 성전의 문설주와 나란히 세워 놓았습니다.
여호와와
왕들 사이에는 벽 하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왕을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역겨운 일들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에, 여호와가 당신의 분노로 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음란한 행실을 멀리하고,
시체들을 여호와 앞에서 치워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그들 한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죄악을 회개하는 자에게 보이시는 성전(10-11)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해야합니다.
그들이
그 영광을 보며 지금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에스겔은 이 성전의 설계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전의 법(12)
성전의 법은 이러합니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사장이 기도하고 옷 갈아 입는 곳 제사하는 곳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마누엘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성전도 제사도 쓸데 없습니다. 많은 희생만 있을 뿐입니다.
번제단의 모양과 크기(13-17)
자로 잰 제단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에다 손바닥 너비만큼 더한 것입니다.)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자이고,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도 한 자입니다. 그 가에는 빙 돌아가며, 높이가 한 뼘 되는 턱이 있는데, 이것이 제단의
밑받침입니다. 이 땅바닥에 있는 밑받침의 표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자요, 너비는 한 자입니다. 이 아래층의 표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넉 자요, 너비는 한 자입니다 그 제단 화덕의 높이는 넉 자요, 화덕의 네 모서리에는 뿔이 네 개 솟아 있습니다. 그 제단
화덕은 길이가 열두 자요, 너비도 열두 자여서, 사면으로 네모가 반듯합니다. 그 화덕의 받침인 아래층의 길이와 너비는 열넉
자로서, 사면으로 네모가 반듯합니다. 그 받침을 빙 두른 턱의 너비는 반 자이고,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자입니다. 제단의
계단들은 동쪽으로 나 있습니다.
번제단의 봉헌(18-26)
그가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사람인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번제물을
바치고 피를 뿌릴 제단을 만들 때에 지킬 번제단의 규례는 이러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사독의 자손
가운데서, 여호와를 섬기려고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오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서, 속죄제물로 삼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의 네 귀퉁이와 사방의 가장자리에 발라서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합니다.
또 속죄제물로 바친 수송아지를 가지고 가서, 성소 바깥, 성전의 지정된 곳에서 그것을 태워야 합니다.
이튿날에는 에스겔이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서, 수송아지의 제물로 제단을 정결하게 한 것처럼,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다음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양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바쳐야 합니다.
제사장이 그것들을 주 앞에 바칠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짐승들 위에 소금을 뿌려서, 여호와 주에게 번제물로
바치게 해야합니다.
에스겔은 이레 동안 매일 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마련하여 놓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양 떼 가운데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마련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레 동안 제단의 부정을 벗기는 속죄제를 드려서, 제단을 정결하게
하며 봉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전의 중요한 것은 제사입니다.
제사는 죄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제사법 민법
도덕법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법은 제사법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값을 받아야합니다.
그냥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값을 치러야합니다.
내가 치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치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치르는 것은
대속법(代贖法) 입니다.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내
죄대신 벌을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이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 사람이
죽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성전의 목적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대신 희생하는 것입니다.
죄없는 소와 양이 죽어 타오릅니다.
이것을 보면서 내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어서 오래 고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희생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산간벽지에서 조용히 산다고 죄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사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야 우리는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을 보고 확증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요 십자가입니다.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라(27)
이
모든 날이 다 찬 뒤에는, 여드렛날 이후부터는 제사장들이 그 제단 위에 너희의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너희를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경건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도 제물도 성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제물을 받으시기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십니다.
성전이 지었다고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이 받으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해야합니다.
제사장이 있고 벽 하나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캄캄한 지성소에 벌건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교회와 나라는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성전이 망하고 나라가 망합니다.
하나님의 속죄 긍휼이 함께 해야 생명이고 구원이고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받으시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지어질 교회를 예표로
보여주십니다.
가증한 것을 씻으시고 새로 시작합니다.
더러운 성전을 깨끗이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다시 지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깨끗이 씻으면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나와 함께 하심이 성전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10-26-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스겔 42:20)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So he measured the area on all four sides. It had a
wall around it, five hundred cubits long and five hundred cubits wide,
to separate the holy from the common.
거룩한 것과 속된 것(the Holy & the unclean)
the sanctuary and the profane
the holy and the profane.
거룩한것(6944) 코데쉬 [ qôdesh ] קֹדֶשׁ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회(출12:16, 레23:35, 민28:18), 성소(출26:33, 레20:3, 민8:19), 지성소(출26:33, 레16:16, 왕상6:16), 성결(출28:36, 말2:11), 성물(출28:38, 레22:12, 민6:20), 거룩한 패(출29:6), 성의(출29:29, 레16:32), 거룩한 산(시43:3), 성산(겔28:14), 지성물(레21:22, 민4:4), 거룩한 날(출31:14), 성일(사58:13), 성소(레4:6), 성호(대상16:35, 시105:3, 145:21), 예물(대하31:12), 성전(시5:7, 138:2, 욘2:4), 거룩한 곳(렘31:40), 성도(단12:7). [형] 거룩한(출3:5, 레2:3, 시2:6), 성결한(출15:13, 삼상21:5).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속된 것(2455) 홀[ chôl ] חֹל
어원 / 24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된(레 10:10, 겔 22:26, 48:15), 보통의(삼상 21:4, 5).
구약 성경 / 7회 사용
거룩해야 할 것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 자체를 복되게 하셨다는 것은 이 날의 안식을 통해 피조물들에게
복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즉, 안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차 인간에게 주어질 안식일
제도가 인간을 위한(막 2:27) 복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거룩하다'(카다쉬. 6942. קַדֵּש)는 '깨끗케
하다'(삼하 11:4), '구별하다'(출 27:26), '드리다'(대상 18:11)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안식하신 날을 거룩한 목적으로 특별히 구별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날을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날로 삼아야 한다.
6942. קָדַשׁ 카다쉬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에스겔 42:13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남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 그 방의 첫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지성물'(코드쉐 하카다쉼)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아니하였던 소제물(레 2:3, 10;6:14-18; 10:12)과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해 바쳐진 속죄물을 제외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그리고 전 밖에서 태울 제물들의 거룩한 부분들을 가리킨다(레 6:19-23; 7:6).
곧 이러한 제물들은 여자를 포함한 그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었던 '거제'나 '요제'의 제물(레 10:14)과는 달리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Delitzsch).
한편 이전 성전에 있어서 제사장들은 그 제사 음식을 성소, 그것도 안뜰의 제단 곁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레 10: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에서 제사장들에게 이러한 방이 주어진 것은 그들의 편의를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 그 방의 두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5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중 3가지만이 언급된 것은 이 3가지 제사의 제물만이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분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곳이라
- 이 방들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에서의 절대적인 성결(거룩) 유지를 위하여 주어졌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여기서의 '거룩'(코데쉬)은 신적 거룩에 부합되는 철저하고도 절대적인 '거룩'을 의미한다(Shroder).
에스겔 42:14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 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 제사장들이 제사시의 예복과 평상복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함을 지시하는 구절로, 그들의 직무의 거룩성을 보여준다.
제사장은 평상복을 입고 제사를 드릴 수 없듯이 제사 예복을 입고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제사 직분을 마친 후 이 '거룩한 방'에서 이 예복을 벗어 보관시키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바깥 뜰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성소에 들어갔다가'의 '들어갔다가'(베보암)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 제단이나 성소에 오는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성경에서 ‘거룩’이란 무슨 뜻인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가 거룩하지 못할 때 어떻게 열방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지 못한데 교회가 거룩할 수 있겠나?
먼저 내가 거룩해져야 한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구별된 무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거룩한가?
우리는 여전히 죄가 있고, 거룩하지 못하고 부정한 존재들이다.
사실 우리가 죄가 하나도 없어서 성도가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죄 없는 것을 봐주시기 때문에 성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아들 예수님처럼 보시기 때문에 예쁘고 거룩하게 봐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는 더욱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거룩해지고 성숙해져야 한다.
한 가지는 영성이고, 다른 한 가지는 도덕성이다.
기독교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배와 삶이 같이 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도와 실천이 함께 있어야 한다.
신앙과 도덕성이 같이 가야 한다.
누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인가?
우리는 흔히 예배에 안 빠지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교인들 중에 괴팍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이 기도 안한다고 남들을 정죄하고 그럴 때 무섭기조차 하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는 데, 도덕성이 낮은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을 쉽게 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돈밖에 모르고 이기심에 가득차있다.
최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중에 교회 목사나 장로나 신실한 중직자들이 많다.
수년간 고등학생을 성폭행한 선교단체 대표, 방산비리의 중심에 있던 전 참모총장, 교회에 밀실을 만들어 놓고 돈세탁을 했던 무기중개상 그룹회장, 그리고 자원외교 비리의 수사대상이었던 기업회장이 다 교회 목사요 장로요 기독실업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영성은 있는 것 같았으나 도덕성이란 기둥이 빈약하니까 결과적으로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영성과 실천적인 도덕성이 함께 견고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기독교의 지붕은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이 견고한 두 기둥에 세워진 신앙만이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다운 삶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그럴 때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이루어지게 된다.
도덕성이 결여된 영성은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으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꾸민다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도덕성에 있어서는 상식 이하 일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중도덕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세상사람들의 눈이 더 무섭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질타를 받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잘 가르쳐준다.
1. 먼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vv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무엇보다 우선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는 말씀에 집중하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모세를 통해 성막(회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길을 가면서 구름기둥의 이동에 따라 행진하기도 하고 진을 치고 자리잡기를 반복했다. 이 때 이동을 멈추고 진을 칠 때, 성막을 둘러서 레위인들이 진을 치고, 그 밖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동서남북 각각 3지파씩 진을 치게 했다. 이 성막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이 거룩해야만 했던 것이다.
성막은 왕정시대가 되자 더 이상 이동하지 않는 솔로몬 성전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막,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회교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성전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이제 더 이상 성막이나 성전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신약 시대에 성전은 무엇인가?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니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 성전이다.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뿐만 아니라 그런 성도가 모인 가정과 목장과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영적인 성전이다.
요한사도는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면서 하늘나라를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계속 성전을 묘사하고 얘기하다가 사도는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왜 그렇다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전이 따로 필요없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왕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한 인간은 인간들은 누구나 다 그 속성이 ‘왕이 되기’를 추구한다. 여러분, 대통령만 왕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여건만 주어지면 욕심과 탐욕과 약육강식을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주인이 되어 결정하며 산다. 가정에서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고, 목장과 교회에서도 왕노릇하느라 삐걱거린다.
누군가 재미있게 말하길, 사람들은 모두 ‘왕’ 되기를 추구하며 사물이나 동물에도 ‘왕’자를 붙이는 걸 좋아한단다.
“왕거미, 왕벌, 왕파리, 왕새우, 왕오징어, 왕문어, 왕밤, 왕바위, 왕모래, 왕소금, 왕방울, 왕고집, 왕눈이, 왕초, 왕뚜껑, 왕만두, 왕갈비, 왕순대, 왕족발, 심지어 왕따까지.”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왕노릇하신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우리 가정과 목장과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진영이다.
이 하나님 나라가 점점 세상 속으로 확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진영 가운데 계시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우리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면 당연히 부정한 것들과 죄악들이 다 물러나야 한다.
빛이 밝혀지면 어둠은 자동적으로 물러난다.
우리 안에 삼위 하나님이 계시다.
2. 부정(不淨)한 것들을 진영 밖으로 몰아내라.
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나병이나 유출병(피나 고름이 계속 나오는 병)이나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들을 다 진영 밖으로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같은 지침은 매우 가혹해보인다.
하지만 위생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당연한 조치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은 위생적으로 깨끗하지만, 당시 광야를 이동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광야에는 먹을 물도 변변히 없었으니 잘 씻기를 했겠나?
위생이 엉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만약에 나병환자나 유출병 환자를 방치하면 금새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는 것이다.
온 진영의 백성들이 감염될 위험이 농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진영 밖으로 분리해놓도록 하셨다.
싸스 시신을 만진 사람과 가까이 있어서 부정해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조치했다.
전염이나 감염은 공기를 타고, 침분비물을 타고,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이나 주검으로 부정해진 사람들을 진영 밖으로 분리조치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은 不淨(uncleanliness)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생적인 이유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나병과 유출병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병으로 여겼다.
부정함과 거룩함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 안에 거하시기에 그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도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율법에 따르면 정결한 짐슴과 부정한 짐승을 나눴다.
소고기는 정결하지만, 돼지고기는 부정한 짐슴이었기에 먹지 못하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정결한 양과 소로 제사를 지내야지, 상하거나 부정한 양과 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성막에 들어갈 때 제사장은 수족을 씻도록 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도록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부정도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훗날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와 부정함의 치유자로 오셨다.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시고,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씻어주셨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부정과 죄를 씻김 받은 성도와 교회 공동체는 늘 영적 정결함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진영밖으로 몰아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과 몸과 영혼을 감염시킬 위험요소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을 진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꼭 지켜내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정결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정결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쉽사리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나 한사람부터 부정한 문화와 습관을 끊고 죄와 단절해야 한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누룩은 금새 퍼진다.
여기 누룩은 잘못되고 왜곡된 교훈을 뜻한다.
오늘로 하면 이단의 거짓 교훈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걸 조심해야 한다.
진영 밖으로 격리조치해야 한다.
이단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까지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거짓복음을 믿기에 불쌍하지만, 그 거짓교훈은 정말 경계해야 한다.
혹해서 듣고 있지 말고 경계해라.
2. 기복신앙, 탐심도 우리 시대에 전염병과 같다.
기복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예수 믿어서 내가 잘 되겠다는 생각이다.
예수 믿어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자녀들 축복받고 거기에다가 천국도 가겠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 복음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것, 이런 건 관심도 없다.
비신자가 오는 걸 싫어하는 교회 이런 기복신앙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헌금을 하는 것도 구원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보다는 항상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한다.
이게 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 탐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빙자한 탐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신앙을 경고한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b)
3. 관행이라고 불리는 부정한 것들이 있다.
부패 부조리 불공정, 금수저 흙수저 논쟁이나 외모 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나 성문화 등 사회가 관행으로 여기는 것들 중에 분명히 사회를 좀먹고 감염시키는 악한 생각이나 가치관 등이 있다.
술문화, 특히 신입생 MT 같은 데서 억지로 술을 먹이는 이런 문화는 정말 배격해야 한다.
4. 극도로 태만하고 게으른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게으른 게 뭐 죄냐? 습성일 뿐이지.”
그러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게으름뿐만 아니라 무슨 죄든지 다 마귀가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게으름의 마귀야, 물러가라!” 그렇게 쫓아내기만 한다.
혹은 게으름을 놓고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게으릅니다. 용서해주세요.” 기도만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게으름이 해결되나?
성경은 뭐라고 하시나?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개미가 하는 걸 보고 지혜를 얻어서 네 의지를 발동해 게으름과 싸우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신다.
은혜도 강조하지만, 인간의 책임도 강조하고 계신다.
5.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담배 같은 것이나 마약이나 포르노 등이 다 포함된다.
어떤 모양의 악이라도 추호도 용납하지 마라.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것들을 내 속에서 몰아내고 가정과 목장과 교회 밖으로 몰아내라! 내가 진영밖으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3.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6-7a,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여기서 사람들이 범하는 죄는 이웃들에게 범하는 죄, 특별히 금전적인 손해를 주는 죄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웃에게 범하는 죄는 곧 하나님에게 범하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부 간에 서로 싸우고 이혼 얘기나 하고 그러면 부부끼리만 죄를 짓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고 그게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한 가정을 통해서 vip를 구원할 힘이 나온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에게만 죄를 짓는 것인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십계명 중 5~10계명은 사람에게 대한 계명이다. 그것을 범하면 곧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새번역 성경이 vv6-7a을 잘 번역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남에게 어떤 잘못이든지 저질러서 그 일로 주를 배신하였을 때에, 그런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남에게 잘못한 일이 곧 주를 배신하는 것이 된단 얘기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The Nessage’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의역했다. “남자든 여자든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끊은 것이므로 유죄다. 그는 반드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이런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1. 자복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공개적이고 진실하게 죄과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게 속죄제의 수양을 드림으로써 회개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2. 죄 값을 지불하고 보상해야 한다.
vv7b-8,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훔친 원금이나 파손한 물건 뿐아니라 그것의 20%를 더한 값을 갚아서 물질적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신다. 만약 피해 당사자가 죽었다면, 피해자를 대신할 친척에게 갚고, 친척조차 없을 경우에라도 보상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때에는 그 죄값을 하나님에게 거제로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다. 이렇게 구별되어 제사장에게 주어진 물건은 제사장의 몫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이웃에게 손해 끼친 것이 곧 하나님에게 손해끼친 거란 의미다.
이 내용은 한 마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얘기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구하면 당사자가 용서가 되는가? 어떤 사람에게 간음죄를 짓거나, 도적질하거나, 살인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죄를 짓고는 하나님께 “잘못 했습니다.” 죄를 자백했다고 끝나나? 아니다. 당사자에게도 역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사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매듭이 풀려진다. 당사자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뭐라고 했나? 자신이 부정하게 남의 재산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다. 신앙과 삶이 일치할 때 우리의 복음은 힘을 얻는 것이다.
10여년 전에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이다.
기사 제목은 ‘25년 만에 돌아온 훔친 공구 값 3만원’, 어느 점심시간에 대전시 건설관리본부 사무실로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찾아와 A4용지 크기의 편지지 한 장을 직원들에게 건네주고 사라졌다.
‘잠깐의 한국 방문을 위해서 온 이’라는 발신인 명의로 된 접혀진 편지지 속에는 현금 3만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가슴 따뜻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수년 만에 돌아보는 한국 땅의 정겨움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초등학교 2~3학년이던 25년 전 한 도로 공사장에서 펜치 하나를 몰래 가져온 아픈 과거를 용서받고 싶다. 마음 속에 행한 악함을 얼마 전에야 겨우 기억하고 이를 갚으려고 이제야 찾아왔다. 절차는 모르지만, 시와 저 자신에게 용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내 조국과 이 땅이 정직한 삶으로 행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저는 부끄럽게 살아왔던 것 같다. 분실됐던 펜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제 자신의 양심도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다.”며 용서를 빌었다.
‘양심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고백하고 배상하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진짜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책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분 안 계신가? 작은 것이라도 보상하고 갚으라!
혹시 ‘나 하나 쯤 뭐 좀 더럽고 죄 짓는다고 교회 공동체에 무슨 영향을 끼칠까?’ 생각하는가?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은 크고 강한 성읍이었던 여리고는 아주 가볍게 정복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 옆에 있던 작은 아이성 점령에서 패배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바로 한 사람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을 떠나셨고, 그들은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하게 된 자들을 진영 밖으로 쫓아버려야 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더욱 거룩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여긴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순종이나 책임이나 희생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세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되어서,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조차 “회개하라!”는 책망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현상을 ‘본 회퍼’란 독일 신학자는 ‘값싼 은혜’라고 비판했다.
물론 은혜란 말은 ‘무조건적인 크신 사랑’을 의미하니까, 어떤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위해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라는 고귀한 희생이 지불되었다. 그러니 ‘값싼 은혜’가 아니라 사실상 ‘값진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주고 나같은 죄인을 사셨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면, 과연 우리가 그 은혜를 값 싼 싸구려 취급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소중하고 값비싼 십자가 사랑,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게 마땅한가?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거룩한 삶, 부정과 죄와 싸우며 사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진영 밖으로 내 보내야 한다. 여전히 미련을 두고 남겨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을 청산하고 끊어버리자.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보상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자. 거룩한 나,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자!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the Holy & the unclean)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으로 본 성전의 특징은 성전 둘레의 담의 장과 광이 오백척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규모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사방을 다 측량하였는데 그 둘레에는 사면에 담이 있었으며 그 길이와 폭이 다 같이 262.5미터였고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새 성전의 둘레에 담을 세웠는데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담의 기능은 담장 안에 있는 백성들을 보호하며 지켜주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거룩함의 비결을 오직 기도와 말씀이라고 강조합니다(딤전 4:5).
거룩이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려면 하나님을 닮은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 모델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예수님께서 이 새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던 것처럼 먼저 내 안을 주의 영으로 채워야 합니다.
주의 영으로 채워지려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채움과 인도하심을 받아 거룩한 길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40-48장은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읽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여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고,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어서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에스겔 40:4)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여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설계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라.”(에스겔 43:10)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1)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본 성전에 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설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 설계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전 환상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마른 뼈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곧 구원(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이 그 약속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환상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요,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은 에스겔이 제사장으로 평생 섬길 꿈에도 그리던 직장 아닙니까? 에스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이라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과 성전 환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영원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전 환상 영원한 성전/새 예루살렘(40-48) 에스겔 42:1-14절은 제사장들의 방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스겔 42:1-14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 |
42:1-9 북쪽 뜰에 있는 두 방
42:10-12 |
남쪽 뜰에 있는 두 방 |
42:13,14 |
제사장들의 방의 용도 |
에스겔 42:1-9절은 북쪽 뜰에 있는 제사장들의 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북쪽으로 길이 난 바깥 뜰로 나가서, 두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방 하나는 성전 뜰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북쪽 건물을 보고 있었다. 북쪽을 향한 그 방을 재니, 길이가 백 자이고, 너비가 쉰 자였다. 스무 자 되는 안뜰의 맞은쪽과 돌을 깔아 놓은 바깥 뜰의 맞은쪽에는, 삼 층으로 된 다락이 있었다.”
“또 그 방들 앞에는,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그 너비가 열 자요, 그 길이가 백 자였다. 그 문들은 북쪽으로 나 있었다. 삼 층의 방들은 가장 좁았는데,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삼 층에는 다락들이 자리를 더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이 방들은 삼 층이어서, 바깥 마당의 현관에 있는 기둥과 같은 기둥이 없었으므로, 삼 층은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더 좁게 물려서 지었다. 이 방들 가운데 한 방의 바깥 담, 곧 바깥 뜰 쪽으로 이 방들과 나란히 길이 쉰 자가 되는 바깥 담이 있었다. 바깥 뜰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쉰 자였고, 성전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백 자(53m)였다. 이 방들 아래층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바깥 뜰에서 그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에스겔 42:10-12절은 남쪽 뜰에 있는 제자장들의 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뜰을 둘러 싼 벽이 바깥 뜰에서 시작되었다. 건물 앞 공터 남쪽으로도 방들이 있었다. 이 방들 앞에도 통로가 있는데, 그 모양이 북쪽에 있는 방들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너비도 같고, 출입구 모양과 구조도 같고, 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남쪽에 있는 방들 아래, 안뜰 담이 시작하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다. 동쪽에서 들어오면, 빈 터와 건물 앞에 이 출입구가 있었다.”
에스겔 42:13,14절은 제사장들의 방의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빈 터 맞은쪽에 있는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로서,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 곳이다. 그 방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은 가장 거룩한 제물과, 제물로 바친 모든 음식과,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을, 모두 그 곳에 두어야 한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 거룩한 곳에서 직접 바깥 뜰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에 입은 옷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자기들의 예복을 벗어 놓고 다른 옷을 입은 다음에, 백성이 모여 있는 바깥 뜰로 나가야 한다.”
에스겔 42:15-20절은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한 내용입니다.
“그 사람이 성전의 내부 측량을 마친 다음에, 나를 데리고 바깥 동쪽 문으로 나와서, 사면의 담을 측량하였다.”
“그가 장대로 동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재어서 오백 자(265m)였다. 북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남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그가 서쪽으로 와서 서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그가 이렇게 성전의 사방을 재니, 사방으로 담이 있어서, 길이가 각각 오백 자였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갈라놓았다.”
에스겔 42장 강해 에스겔에게 보여준 제사장 방
에스겔서의 마지막에는 환상을 봅니다. 그에게 특별한 계시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습니다.
이 계시는 그림을 보고 구경하고 그 크기를 측량합니다. 방에 들어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지금 없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성전입니다. 성전은 무너져서 다시 세워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의 성전을 구경시켜주시고 안방 뒷방을 다
구경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미래의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설계하고 조감도를 보여주십니다. 들어가보고
측량하게 하십니다. 이런 집에 들어가 제사장으로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설게도가
먼저고 모델하우스가 나옵니다. 설계사의 마음 속에 집이 지어지고 현실에 지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의 집을 에스겔의 마음에
옮겨놓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간은 점이 모여서 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예민한 사람이 시계
앞에서 시계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용할 때 집중하여 들으면 딱딱 소리가 납니다. 그는 시계소리를 듣다가 굳어져 죽었습니다. 이
시간이 어디로 가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옷을 세탁소에 맡깁니다. 어떤 때는 나이가 들면 이것도
싫어졌습니다. 이제는 옷을 해 입을 생각이 없어집니다. 춥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집도 떠나야합니다. 현재에서 우리는
멀어지고 미래를 향합니다. 미래는 미지수고 불확실합니다. 하나님께는 확실한 미래를 보여줍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 오늘 이루어집니다. 드라마에서 왕건이 감옥에 들어갑니다. 왕건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안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앞에 있는 결정적인 설계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충만히 사느냐 허무하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음으로 삽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급하게 그곳에 가
있습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미워하고 한이 맺히고 후회합니다. 그때 그 남자를 만나지 말고
결혼하지 말아야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허무입니다. 그렇게 해야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향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생활하는 에스겔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측량합니다.
기도하는 방(1-12)
그 사람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으로 길이 난 바깥 뜰로 나갔습니다.
두 방으로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방 하나는 성전 뜰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북쪽 건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북쪽을 향한 그 방을 재니, 길이가
백 자이고, 너비가 쉰 자였습니다.
스무 자 되는 안뜰의 맞은쪽과 돌을 깔아 놓은 바깥 뜰의 맞은쪽에는, 삼 층으로 된 다락이
있었습니다.
또 그 방들 앞에는,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그 너비가 열 자요, 그 길이가 백 자였다.
그 문들은 북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삼 층의 방들은 가장 좁았는데,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삼 층에는 다락들이 자리를 더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방들은 삼 층이어서, 바깥 마당의 현관에 있는 기둥과 같은 기둥이 없었으므로, 삼 층은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더 좁게
물려서 지었습니다.
이 방들 가운데 한 방의 바깥 담, 곧 바깥 뜰 쪽으로 이 방들과 나란히 길이 쉰 자가 되는 바깥 담이
있었습니다.
바깥 뜰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쉰 자였고, 성전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백 자였습니다.
이 방들 아래층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바깥 뜰에서 그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뜰을 둘러 싼 벽이 바깥 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건물 앞 공터 남쪽으로도 방들이 있었습니다.
이 방들 앞에도 통로가 있는데, 그 모양이 북쪽에 있는 방들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너비도 같고, 출입구 모양과 구조도 같고, 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남쪽에 있는 방들 아래, 안뜰 담이
시작하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동쪽에서 들어오면, 빈 터와 건물 앞에 이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백성들이
기도하는 방을 보여줍니다.
제사지내기 전에 회개부터 먼저 합니다.
제사드리고 나서 이 방에 모여서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 후에는 제사장들만을 위해서 만든 방입니다.
문제는 성전에서
제사의식이 이루어지지만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깨우치고 명상해야합니다.
몸은 성전에 왔지만 마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성전의 것을 가득채워야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득채워야합니다.
우리의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저기에 있습니다.
앞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을 미리 준비하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명상 속에서 미래를 수용합니다.
제사장의 방(13-14)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빈 터 맞은쪽에 있는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로서,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은 가장 거룩한
제물과, 제물로 바친 모든 음식과,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을, 모두 그 곳에 두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 거룩한 곳에서 직접 바깥 뜰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에 입은 옷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자기들의 예복을 벗어 놓고 다른 옷을 입은 다음에, 백성이 모여 있는 바깥 뜰로 나가야 합니다.
에스겔이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거룩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것을 생각하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드린 음식만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룩한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입을 옷은
특별한 옷입니다.
그 옷을 입고 백성에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 옷에서 피비린 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거룩한 옷입니다.
백성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합니다.
장소도 시간도 마음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어떠해야하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생각도 마음도 뜻도 하나님만 섬겨야합니다.
백성에게 가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할 때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목사는 강단에 올라갈 때 신는 구두를 따로 둘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 나가 때는 신도 갈아신습니다.
구별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구별해야합니다.
옷도 구별해야합니다.
옛날 어른 들은 주일 날 오는 옷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어짜피 구별될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훈련해야합니다.
제사장은 바로 바깥뜰로 가지 말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라고 합니다.
거룩이 옷을 입는데 표현되는 것입니다.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하다(15-20)
그 사람이 성전의 내부 측량을 마친 다음에,
에스겔을 데리고 바깥 동쪽 문으로 나와서, 사면의 담을 측량하였습니다.
그가 장대로 동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재어서 오백
자였습니다.
북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남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그가 서쪽으로 와서
서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전의 사방을 재니, 사방으로 담이 있어서, 길이가 각각 오백
자였습니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갈라 놓았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충만함으로 살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성도를 만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푯대로 살았습니다.
현세는 지나가고
과거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밝은 미래를 지향하며 하나님의 설계도를 세기며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10-25-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소를 척량하라(에스겔 41:2)
그 문통의 광이 십척이요 문통 이편 벽의 광이 오척이요 저편 벽의 광이 오척이며 그가 성소를 척량하니 그 장이 사십척이요 그 광이 이십척이며.
The entrance was ten cubits wide, and the projecting
walls on each side of it were five cubits wide. He also measured the
outer sanctuary; it was forty cubits long and twenty cubits wide.
성소를 측량하라(Do measure the sanctuary)
성소(1964) (헤이칼. hêykâl ) הֵיכָל / 내전(41:23)
어원 / 혼성. 복수 וֹת ,ים[1회만 사용], 호 8:14, 3201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너비’의 뜻에서]
관련 성경 / 전(殿)(삼상1:9, 왕상7:21, 슥6:12), 성소(왕상 6:17, 겔 41:1, 왕상 21:1), 왕궁(왕하 20:18, 잠 30:28, 단 1:4), 내전(대하4:7,22), 신당(대하36:7), 성전(사6:1, 44:28, 렘50:28), 신전(욜3:5).
구약 성경 / 80회 사용
측량하다(4058) (마다드. mâdad)
1. 내뻗다. 2. 측정하다.
발음
[ mâdad ]
관련 성경 / 측량하다(민 35:5, 겔 43:10, 호 1:10), 재다(신 21:2, 삼하 8:2), 헤아리다(사 40:12), 되다(출 16:18), 지워주다(룻 3:15), 진동하다(합 3:6)
구약 성경 / 53회 사용
외전(6944) 코데쉬[ qôdesh ] קֹדֶשׁ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회(출 12:16, 레 23:35, 민 28:18), 성소(출 26:33, 레 20:3, 민 8:19), 지성소(출 26:33, 레 16:16, 왕상 6:16), 성결(출 28:36, 말 2:11), 성물(출 28:38, 레 22:12, 민 6:20), 거룩한 패(출 29:6), 성의(출 29:29, 레 16:32), 거룩한 산(시 43:3), 성산(겔 28:14), 지성물(레21:22, 민 4:4), 거룩한 날(출 31:14), 성일(사 58:13), 성소(레 4:6), 성호(대상 16:35, 시 105:3, 145:21), 예물(대하 31:12), 성전(시 5:7, 138:2, 욘2:4), 거룩한 곳(렘31:40), 성도(단12:7).
[형] 거룩한(출 3:5, 레 2:3, 시 2:6), 성결한(출 15:13, 삼상 21:5)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골방(6763) 첼라 [ tsêlâʽ ] צֵלָע
어원 / 676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갈빗대(창 2:21, 22), 양쪽(출 25:14), 비탈(삼하 16:13), 골방(왕상 6:5, 겔 41:5, 26), 널판(왕상 6:15), 짝(왕상 6:34)
구약 성경 / 40회 사용
1. 바깥
어원 / ‘에워싸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깥(출26:35, 레6:11, 왕하23:6), 다른 곳(레18:9), 거리(수2:19, 시18:42, 나2:4), 밖(삿12:9), 외면(왕상7:9), 길(시31:11), 밭(욥5:10), 길거리(잠1:20, 사10:6), 들(시144:13, 잠8:26), 길바닥(애2:21), 외전(外殿)(겔41:17), 광장(암5:16). [동] 나가다(창39:12,15,18), 내다(삿19:25, 삼하13:17).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에스겔 40장부터 48장은 성전을 회복하시는 은혜로운 계시의 말씀입니다.
흔히 성전을 말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건물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의 성전은 지구상에 건축되지 않았던 것으로 장차 완성될 성전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울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그러므로 성전은 또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몸을 가리켜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깨우쳤습니다(고전 6:19).
에스겔은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갑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를 상징하며,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하고,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41장에는 에스겔이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성소(헤이칼. hêykâl. הֵיכָל )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 에스겔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야긴(3199) [ Yâkîyn ] יָכִין
어원 / 35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야긴(창 46:10, 왕상 7: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보아스(1162) [ Bôʽaz ] בֹּעַז
발음 [ Bôʽaz ]
어원 / 불확실한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아스(룻 2:1, 왕상 7:21, 대하 3:17).
구약 성경 / 3회 사용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과거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환난풍파, 우환질고, 생노병사......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3-4.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는 두 척이요 문 통로가 여섯 척이요 문 통로의 벽의 너비는 각기 일곱 척이며 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성전을 측량하는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했다고 합니다.
즉 ‘그가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여기서 내전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원래 40장에서부터 그 천사가 계속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외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측량했습니다.
그러나 3절부터는 에스겔을 성소에 머물게 하고, 천사 혼자서 측량하며 그 내용을 에스겔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변경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었고, 대제사장일지라도 레위기 1:1-17에 기록된 대로
대속죄일만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제사장 신분이지만 지성소에 출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희생 제사를 드려도 주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구약에는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에 ‘사이’가 있었고, 하나님과 인간에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오염됨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를 구별해주는 것이 ‘성전의 휘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휘장은
두께가 얇은 천이 아닙니다.
휘장은 두께가 약
20cm이었다고 합니다.
어른 손바닥 너비 만큼의 두께가 찢어졌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그 두꺼운 휘장을 찢어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적이며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이며, 그 몸의 찢어짐으로 인하여 우리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5-6. 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 골방은 삼 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서른이라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
이어서 성전 벽 삼면의 골방들과 건물 후면의 독립 건물에 대한 측량을 보도합니다.
여기서 총 90개의 크기가 다른 골방들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골방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은 성도의 능력과 위치, 은사 등에
다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골방들이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교회의 중심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성전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또한
골방들은 성전뿐만 아니라 다른 골방들과도 상, 하, 좌, 우로 연결되어 결국 하나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합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어찌 보면 하나가 되는 것보다, 하나 됨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 되는 비결은, 우리에게 화평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14:19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방해하는 것은 내 이기심과 욕심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것은, 결국 내 자아가 크고 내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2:3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히브리어 ‘아나브’는
‘대답하다’는 뜻인데, 당시 고대 근동에서 대답하는 사람은 오직 종입니다.
주인만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은 종에게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의 습관을 가질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 됨을 깨는 자가 아니라, 하나 됨을 이루어 나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13.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또 서쪽 뜰과 그 건물과 그 벽을 합하여 길이는 백 척이요
13-15절은 성전 본체와 뒤뜰에 있는 부속건물의 총 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절에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은 성전의 모든 부분을 측량합니다.
측량하는 사람, 즉 천사를 대부분의 신학자는 하나님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을 친히 측량하여 그 어떠한지를 에스겔에게 보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서아시아 일곱 교회를 측량하셔서 칭찬하시기도 하고,
때론 책망하시거나, 징벌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를 측량하며 그들의 어떠함을 보십니다.
측량의 목적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교회를 측량하신다는 것은 그 지체인 성도들의 삶도 측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으로, 내 삶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재건해야 합니다.
번성하게 만드는 장식(16-26절)
16절 21절까지는 성전의 내부 장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신기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솔로몬 성전에는 없던, 종려나무가 새 성전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 땅에서부터 문 통로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먼저 본문에 나오는 새 성전이란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지어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적
계시입니다.
그리하여 새 성전에 그룹들 외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종려나무(8561) 티모르[ timmôr ] תִּמֹּר
발음
[ timmôr ]
어원 / 32, 35, 겔 41:18,19, 8558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종려(왕상 6:29, 32), 종려나무(왕상 7:36, 대하 3:5, 겔 41:18)
구약 성경 / 6회 사용
에스겔 7:6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최후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차 경험할 영원한 승리,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23. 내전과 외전에 각기 문이 있는데
22-26절은 성전에 있는 두 개의 문, 내전문과 외전문에 관한 설명입니다.
내전문은 지성소문이며, 외전문은 성소문입니다.
이는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성소문과 지성소문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양들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허황되고 죄된 것을
보고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종려나무’입니다. 18절부터 마지막 절에 이르기까지 성전벽과 성문에 유독 종려나무가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는데, 그 종려상이
바로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타마르’라고 하며, ‘꿀처럼 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
말씀을 꿀보다 더 단 것이라고 여기며, 말씀의 달콤함을
얘기합니다.
성전의 곳곳에 종려나무를 새긴 것은, 불사조 피닉스라는 별칭을 가진 종려나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은 승리와 영광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함으로써, 인생에 넘치는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혹여나 쓴 맛 혹은 매운 맛이 입안에 가득 찰 때, 이를 잠재우는 것은 그보다 더 강한 단 맛을 머금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길에서 근심과 슬픔의 쓴맛과 매운맛을 덮는 것은 꿀보다 더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새겨주셨듯이, 우리의 심령 속에 새겨 놓으신 종려나무를 생각해봅시다.
그 종려나무 열매 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듯이 번성해야 합니다.
그 열매가 말씀의
열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취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바른길을 걸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볼 에스겔 40-48장은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읽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여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고,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어서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 40:4; 43:10,11절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에스겔 40:4)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여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설계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라.”(에스겔 43:10)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1)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본 성전에 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설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 설계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전 환상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마른 뼈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곧 구원(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이 그 약속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환상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요,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은 에스겔이 제사장으로 평생 섬길 꿈에도 그리던 직장 아닙니까? 에스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이라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과 성전 환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영원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 / 새 예루살렘(40-48) | |
40장 |
환상 중에 본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
41장 |
새 성전의 구조 |
에스겔 41장은 새 성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에스겔 41:1-4절은 성소와 지성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벽을 재니, 그 벽 두께가 양쪽이 각각 여섯 자(3.18m)였다.
그 문의 통로는 너비가 열 자이고, 그 문의 통로 옆의 벽 너비는 양쪽이 각각 다섯 자였다.
그가 성소를 재니, 길이가 사십 자(21.2m)요, 너비가 스무 자(10.6m)였다.”
“또 그가 지성소로 들어가서 문 통로의 벽을 재니, 그 두께가 두 자였다. 그 문의 통로는 너비가 여섯 자이고, 그 벽의 너비는 양쪽이 각각 일곱 자였다. 그가 지성소의 내부를 재니, 길이가 스무 자(10.6m)이고, 너비도 스무 자(10.6m)였다. 그가 나에게 "이 곳이 지성소다!" 하고 일러주었다.”
에스겔 41:5-11절은 성소와 지성소의 골방들(곁방)에 대한 설명
“또 사람이 성전의 벽을 재니, 두께가 여섯 자였다. 성전에는 삼면으로 돌아가며 방들이 있는데, 너비가 각각 넉 자였다. 그 곁방들은 방 위에 방이 있어서 삼 층을 이루고 있으며, 층마다 방이 서른 개씩 있었다. 그런데 그 곁방들은 성전을 돌아가면서 성전의 벽에 부착되어 있어서, 성전의 벽 자체를 파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둘러 있는 곁방들은, 그 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졌다. 이 곁방의 건물이 성전의 주위로 올라가며 위층까지 건축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아래층에서 중간층을 거쳐 맨 위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내가 또 보니, 성전의 둘레에 지대가 더 높이 솟아 있었는데, 곧 곁방들의 기초의 높이였다. 그 높이는 한 장대인 여섯 자였다.”
“곁방들의 외부에도 담이 있었는데, 그 두께가 다섯 자였다. 또 성전의 곁방들 밖에는 빈 터가 있는데, 그 너비는 스무 자이며, 성전을 빙 돌아가는 뜰이었다. 그 곁방 건물의 문이 이 공간쪽으로 났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났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났다. 둘러 있는 이 빈 터의 너비는 다섯 자였다.”
에스겔 41:1-11 /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골방들을 설명
에스겔 41:12-26 / 성전의 외부 시설과 문들에 관해 설명
성전의 서쪽 건물과 성전 측량(12-14)
“또 성전의 서쪽 뜰 뒤로 건물이 있는데, 그 너비가 일흔 자였다. 그 건물의 벽은 사방으로 두께가 다섯 자였다. 그 건물 자체의 길이는 아흔 자였다. 그가 성전을 재는데, 그 길이가 백 자이고, 서쪽 뜰과 건물과 그 양쪽 벽까지 합해서 또 길이가 백 자였다. 성전의 정면 너비와 동쪽 뜰의 너비도 각각 백 자였다.”
성전 뒤뜰 너머 건물과 성전 지성소와 성전 뜰 현관과 벽과 창문과 다락(15-20)
“그가 이어서 성전 뒤뜰 너머 있는 건물을 그 양편의 다락까지 함께 재니, 그 길이도 백 자였다. 성전 지성소와 성전 뜰 현관과 문 통로의 벽과 창문과 삼면에 둘러 있는 다락에는, 바닥에서 창문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며 나무 판자를 대 놓았다. 그러나 창문은 틀만 있는 것이었다.”
“문 통로의 위와 성전 내부와 외부의 벽까지 재어 본 곳에는, 다 판자를 대 놓았다.
그 판자에는 그룹과 종려나무들을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가 하나씩 있고, 그룹마다 두 얼굴이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이쪽에 있는 종려나무를 바라보고, 사자의 얼굴은 저쪽에 있는 종려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전 벽 전체가 이와 같았다. 성전 바닥에서 문의 통로의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벽에 그룹과 종려나무들을 새겨 두었다.”
판자(널 판자)에 새겨 넣은 그룹들과 종려나무에 대해 설명을 드립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룹들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는 많은 열매와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해 성경에서 ‘아름다움과 번성’을 상징합니다(시 92:12,13; 아 7:7,8).
그래서 종려나무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룹들과 종려나무는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41:21-26 / 제단과 성전에 있는 문들에 대한 설명
성전 본당의 문 통로는 네모가 나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 앞에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것이 있었다.
나무로 만든 제단이 있는데, 그 높이는 석 자요, 그 길이는 두 자였다.
그 모퉁이와 그 받침대와 옆 부분도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것이 주님 앞에 차려 놓는 상이다.””
“성전 본당과 지성소 사이에는 문을 두 번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겹문이 있었다.
문마다 좌우로 문짝이 둘이 있고, 각 문짝에는 아래 위로 두 개의 돌쩌귀가 붙어 있었다.
네 개의 문짝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이 새겨져 있어서, 성전의 모든 벽에 새겨진 모습과 같았다.
성전 바깥의 정면에는 나무 디딤판이 있었다.
또 현관의 양쪽 벽에는 곳곳에 틀만 있는 창과 종려나무의 그림이 있고, 성전의 곁방과 디딤판에도 모두 같은 장식이 되어 있었다.”
10-24-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척량하는 장대(에스겔 40: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He took me there, and I saw a man whose appearance was like bronze; he was standing in the gateway with a linen cord and a measuring rod in his hand.
척량하는 장대(a measuring rod)
우케네 함믿다( וּקְנֵה הַמִּדָּה)
장대(7070) 카네(qâneh) קָנֶה
발음 [ qâneh ]
관련 성경 / 줄기(창 41:5, 출 25:31, 욥 40:21), 가지(출 25:32, 37:18,21), 갈대(왕상14:15, 왕하18:21,사42:3), 창포(아4:14, 겔27:19), 향품(사43:24, 렘6:20), 저울(사46:6), 장대(겔40:3,7, 42:16), 팔뼈(욥31:22), 갈밭(시68:30).
구약 성경 / 61회 사용
척량(4060) 미다(middâh) מִדָּה
관련 성경 / 크기(겔 46:22), 자(대상 23:29), 부분(느 3:11, 21, 3:30), 세금(느 5:4), 분량(욥28:25), 옷깃(시133:2), 장대(사45:14), 측량줄(렘31:39), 길이와 너비(겔 40:22), 측량(슥2:1), 장단(출36:9),
[형] 큰(렘 22:14).
[동] 측량하다(겔 40:5, 21, 42:15)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의상으로 보여진(계시된 성전(천년시대).
1-4 에스겔이 이상중에 성읍 같은 것을 보다.
5-27 바깥 뜰과 문 입구.
28-47 그 안뜰과 문 입구.
48-49 성전의 현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에스겔 40장은 바벨론으로 처음 유수되어 갔을 때로부터 25년이 지났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째 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에스겔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셔서 대단히 높은 산 위에 두셨습니다.
마치 이것은 율법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간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한 인물도 모세와 에스겔 뿐입니다.
그 산 위에서 에스겔은 천사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스겔에게 성전으로 안내합니다.
에스겔이 성전을 안내받으며 둘러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의 가증한 것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결국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새 성전에 돌아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회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난 줄 알았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숨기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 이후에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나의 죄로 인해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를 죄의 구덩이에 밀어넣고, 성령이 아닌 세상의 쾌락을 좇은 것이 나에게 화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반드시 건져내십니다.
주께서 택한 자를 잊지 않고 찾아올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께서 나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신 것인지 나의 죄로 인한 것인지를 점검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회복시켜 주실 날을 기대하는 이 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곳은 바로 담입니다.
성전 지역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을 말하는 것이죠.
본문에 나오는 담은 아주 큰 담이었습니다.
두께와 높이가 6척이었습니다.
약 3.2m 정도 되는 것이죠.
아주 크고 두꺼운 담이었습니다.
담이 무엇입니까?
담은 공간을 통제하고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밖과 성전의 속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단절하는 것입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것이죠.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까 스몰웨딩 등의 새로운 결혼문화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도 보이는 것에 힘을 많이 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건물을 갖지 않는 것 아닙니까?
화려하게 장식한 건물에 투자하지 않고 그것으로 나누고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죠.
그러나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담을 높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 등으로 우리의 화려함을 드러내고, 우리의 규모를 자랑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외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외적인 것을 지나치게 파기하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공예배를 드립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딱딱하기도 하고,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형식을 많이 간소화 시킨 예배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왜 존재합니까?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형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설교 전의 순서는 마치 오프닝 무대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사도신경을 통해 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우리의 마음을 모아 대표자가 나와 기도를 하는 시간을 마치 다음 프로그램 중간에 방영되는 TV 광고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형식만 있는 예배는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식만 강조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담이 무너지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바른 방법이 아니죠.
율법에 얽매여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얽매이지 않겠다며 담을 무너뜨려 아무런 경계없이 살아가는 모습도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의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참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모습에 담이 있습니까?
에스겔 40~48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환상을 담고 있습니다.
‘심판과 회복’이라는 패러다임은 모든 선지서들이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에스겔은 다른 선지서에 비해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부터
제시되는 에스겔 성전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위에 있어 더욱더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환상의 시작과 바깥 뜰과 그 문들(1-27)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지막 날짜 관용구인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달 열째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이 시작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의 공의롭고 날카로운 칼이
심판과 파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 이후, 구원과 회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40장을 시작하면서 기대해보게 됩니다.
40~42장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회복될 것임을 새성전의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인 40장에서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 즉, 한 천상적인 존재가 에스겔을 성전의 경내와 그 주위로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바깥뜰의 문과 방들, 안뜰의
문과 방들, 성전문 현관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는 천상적인 존재는 그를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 매우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 성읍의 형상 같은 것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환상을 보여주기에 앞서, ‘보고’, ‘들으며’, ‘생각할지어다’, ‘전할지어다’라는 네가지 동사를 통해 에스겔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끊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보여줄 환상을
통해 지금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게 되면, 다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회복의 소망을 주시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은 철저하고 섬세했습니다.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삼줄은 큰 공간을, 장대는 작은 공간을 측정하는 기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상적인 존재는 기존 건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완성된 성전 공간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것을 측정하고 있으며, 이 성전의 건축자 하나님을 성전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아무런 도구 없이도 한치의 오차가 없는 성읍을 지으실 수 있는 능력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눈대중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줄과 막대기로 정확하게 계측해서 지은 완벽한 성읍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측량하는 막대기의 길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길이는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척'에 이른다고 합니다.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는 ‘1규빗’으로 불립니다.
보통 1규빗은 45.6cm를 의미하는데
에스겔이 사용하는 자는 1규빗에 한 손바닥의 너비를 더한 것임으로 52cm 정도로 계산합니다.
개역개정은 이 단위를 규빗과
구분하기 위해 '척'이라고 하고 새번역은 '자'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여섯 척에 이르는 이 측량하는 장대는 3.1m정도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도구로 계측하는 이 도구에서도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질 에스겔성전에 대해 기대해보게 됩니다.
에스겔과 함께한 천상적인 존재는 이 도구들을 가지고 먼저, 담의 두께와 높이를 측량합니다.
그 두께와 높이는 한
장대(3.1m)였습니다.
담 아래로부터 동쪽을 향한 문 앞까지는 일곱개의 계단이 있었고, 이 계단을 올라가게 되면 문이 나오게
되는데, 그 문의 통로는 한 장대(3.1m)의 크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 안쪽으로는 한 장대(3.1m) 크기의 문지기들의 방이
좌우양쪽으로 각각 3개씩 있었으며, 각 방 사이에는 5척( 2.6m) 크기의 벽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문지기들의 방 끝에는 안 쪽 문의 현관, 즉 성전으로 향하는 문의 현관의 크기도 역시, 한 장대(3.1m)였습니다. 그리고
현관의 크기를 8척(4.2m)이었습니다. 그 현관 앞에는 곁기둥이 있는데 2척(1m)의 두께를 가지고 있는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10척(5.2m)였고, 통로의 길이는 13척(6.8m)가량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 방 앞에는 높이와 폭이 1척(52cm)되는 난간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동문의 문간의 크기, 곧 왼쪽 문지기 방의 지붕 끝과 오른쪽 문기방의 지붕끝의 폭을 측량하게 되면 25척(13m)가
되었습니다.
성전 뜰을 향하는 현관 폭은 20척(10.4m)가량 되었습니다.
또한 그 문의 길이는 50척(26m)가량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관과 모든 문지기 방의 벽과 그 방들 사이에 있는 벽에는 창이 있었고 현관 양쪽 기둥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동문을 자세하게 측량하면서 봤던 에스겔은 동문 통과하면 펼쳐지는 바깥뜰로 인도를 받습니다.
바깥뜰의 삼면이 모두 박석, 곧
넓적한 돌로 포장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 포장은 동문의 폭과 같은 폭으로 깔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들 위에는 30개에
이르는 방이 있었고 양쪽 그 중앙에는 동문과 같은 형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문을 북쪽을 향한 문과 남쪽을 향한
문이라 지칭합니다. 바깥뜰 문을 마주하고 안뜰 문이 있었는데, 그 사이의 거리는 100척(52m)이었습니다.
바깥뜰을 살펴본 에스겔은 이제 다시 북쪽을 향한 문과 남쪽을 향한 문의 순서로 인도를 받았으며, 그 크기와 구조에 있어 동문과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성전 안 뜰의 문과 방들(28-49)
바깥뜰의 남쪽을 향한 문에 대한 환상을 마치고 이제 안뜰의 남쪽문을 보게 됩니다.
안쪽 문의 크기도 바깥 문의 크기와 동일합니다.
길이기 50척(26m)이고, 너비가 25척(13m)입니다. 내부의 구조 또한 바깥문과 동일합니다.
같은 형태의 두문, 바깥 문과
안쪽 문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는 100척(52m)의 거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문이 있는 위치상의
높이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바깥뜰과 안 뜰의 경계로 존재하는 8개의 계단을 올라야 안뜰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안뜰 남쪽 문을 본 에스겔은 이제 같은 형태의 동쪽 문과 북쪽 문을 살펴보게 되며, 이후 안뜰 북쪽 문의 부속 건물들과 물건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문 곁에는 문이 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그 방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의 현관, 즉 안쪽에는 양쪽에 각각
상이 2개씩 있었습니다.
이 상은 번제와 속죄제,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기 위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형태의 상이 문 밖에
양쪽에도 2개 씩 있었습니다.
이 또한 희생제물을 잡기 위한 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총 8개의 상이 이쪽과 저쪽에 4개씩, 안쪽과
바깥쪽에 4개씩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8개의 상은 다듬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1척
반(78cm)이었고, 높이는 1척(52cm)이었습니다. 잘 다듬어진 돌 상 위에는 희생제물을 잡는 도구들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문의 현관 안에는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혀 있었으며, 상 위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뜰 문 옆에는
번제물을 씻는 방 외에 노래하는 자의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북쪽에 있는 방은 남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에 있는 방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방들은 문이 안뜰을 바라보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 대해서 천상적인 존재가
말합니다. “남쪽을 향한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안 뜰을 측량했습니다. 그 뜰은 그 길이와 너비가 모두 100척(52m)의 정사각형의 형태였으며, 성전의 앞 뜰 안에는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성전 문의 현관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벽을 재어보니 너비는
5척(2.6m)이고 그 폭은 3척(1.6m)이었으며, 총 현관의 너비는 20척(10.4m)이고 폭은 11척(5.7m)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뜰에서 성전문으로 가는데에는 또 한번 계단을 올라야 했고, 계단 위에는 문 벽 곁에 두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40장에는 새롭게 지어질 에스겔성전의 외관을 중심으로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성막, 솔로몬성전,
스룹바벨성전, 헤롯성전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지만, 에스겔성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에스겔성전을 미래에 완성될 성전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또한 에스겔성전에는 다른 성전들과 특별한 차이점이 있는데, 동문만 있는 다른 성전들과 달리, 에스겔성전은 성전으로 가는 문이
동문, 남문,북문, 3개가 있습니다.
이는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제 에스겔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표하고 있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전의 개방성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개방된 성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온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바로 성전이며, 우리 안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지어지지 않았던 이 에스겔성전이 있습니다.
에스겔성전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안에서 한치의 오차없이 설계되고 완공되어졌던 것과 같이, 완전하게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세워져 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된 우리의 본분을 잊은채,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심의 삶이라는 것을 망각한채 우리의 삶을 제멋대로 지어가는 것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고백하는 삶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전된 본분을 잊지 않고,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고 함께
지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며,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하게 세워져
나가게 되어, 참된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비록 환상 가운데였지만, 에스겔성전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시고 완벽하게 완공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완공된 이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며, 이제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말하라 말씀하신 은혜를 되뇌어봅니다.
아버지, 우리와 우리의 삶이 이 에스겔성전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만방이 아버지를 깨닫고, 우리를 통해 아버지께로 열방이 나아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답지 못한 우리의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성전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낼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겔성전의 모습을 상상하며 천천히 본문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2. 바깥뜰 문 밖에서 안뜰 문 앞까지 걸어오르는 계단과 100척의 거리에 희생제물을 끌고오는 사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회개할 죄가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3. 에스겔성전 앞에 선 천상적인 존재의 손에 들려 있는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은 치밀한 계획하심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4. 에스겔성전된 나의 삷을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에스겔 40:1
이스라엘 땅(삼마)
שָׁם
스트롱번호8033
샴부 거기
창2:8
שָׁם־שָׁם 여기
-
발음 [ shâm ]
- 구약 성경
- 831회 사용
에스겔 40:1
여호와의 권능(애드, 손)
יָד 스트롱번호3027
사람의 손.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בְּיָדִי.㉠ 내 손에
-
발음 [ yâd ]
- 관련 성경
- ☞손(창3:22, 출6:1), 수중(창16:6, 신33:3), 범사(창39:3), 팔(창48:14, 출17:12), 일(출14:31), 수하(출21:16, 민4:33), 힘(레5:7, 민6:21), 위치(민2:17), 해변(민24:24), 권능(민33:3, 신34:12, 시78:42), 능력(신3:24, 왕상18:46), 손목(신6:8, 11:18), 채주(신15:2), 변소(신23:12), 수단(신32:27), 강 가(삿11:26), 기념비(삼상15:12, 삼하18:18), 발톱(삼상17:37), 권세(삼하8:3, 대상18:3, 욥5:20), 밭(삼하14:30), 축(왕상7:32), 버팀대(왕상7:35,36), 규례(왕상10:13), 팔걸이(왕상10:19, 대하9:18), 지계(대상7:29), 명령(대상25:2), 배(단1:20), 재앙(욥23:2), 세력(시22:20, 63:10), 기념물(사56:5), 처소(렘6:3), 길(겔21:19), 손뼉(겔25:6), 어귀(겔48:1), [부] 말미암아(학1:1), 수고로이(창5:29), 담대히(출14:8), 고의로(민15:30). [동] 용납하다(창34:21), 행하다(출29:35), 안수하다(레1:4, 민27:18, 신34:9),맡기다(레16:21), 계수하다(민31:49), 복종하다(대상29:24), 항복하다(렘50:15), 통하다(호12:10).
- 구약 성경
- 1617회 사용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지막 때에는 성전 밖을 척량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경고의 말씀입니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알곡과 같은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는가?
아니면 가라지와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는가?
로리 베스 존스(Laurie Beth Jones) | 최고경영자(CEO)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성공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목말라 있는데 성공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그분의 뜻을 이룸으로서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신명기 29: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대적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그분이 도와주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대적을 철저히 물리쳐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들로 뒤덮일 수 있었던 기적의 경영!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이자 반전의 전문가,
예수가 실천한 경영자적 삶과 경영 철학을 만나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들로 뒤덮일 수 있었던 기적과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지저스 씨이오>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인류 역사상 최고의 리더들로 키워낸 예수의 경영자적 삶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경영 철학을 깊이 있게
풀이하고 있다. 예수가 불과 3년 만에 이뤄낸 기적의 사역을 자아 극복, 행동, 인간관계 형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 강점을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기술함으로써 CEO와 리더,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자들에게 최고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스프링클러
바로 주변에 있는 잔디들만 누렇게 말라버린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스프링클러는 강력한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먼 구석까지 물을
뿌리지만, 정작 가까운 곳에는 물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물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잔디들이 말라 죽어버리는 것이다. …
예수는 자신의 사람들을 먼저 교육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다. ‘파문형 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최고 경영자 예수>의 저자 로리베스 존스의 기적의 사명선언문
당신이 사는 이유, 당신에게 꼭 맞는 사명을 찾아라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미래가 불안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면 사명선언문을 작성하라!
"이것이 바로 나다"라는 확고 부동한 사명선언문을 갖게 되면 직작을 잃거나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말끔히 사라진다. 진정한 사명을 따른 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사명이 있는 삶은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쉽고 빨라지며 놀랄 만큼 강한 추진력이 생긴다. 성공적인 삶,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먼저 나에게 꼭 맞는 사명을 찾아내고, 그것을 선언하라! 내가 누구이며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선포하는 순간 당신의 인생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에스겔 39장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
39:1-7, 곡과 마곡에 임한 형벌.
| ||
하나님의 심판(1-24장) - 하나님의 영광 상실 | ||
소명 (1-3장) |
하나님 보좌의 환상(1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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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의 부르심(2,3장) | ||
유다에 대한 심판 (4-24장) |
유다의 심판에 관한 상징적 행동(4-7장) |
|
성전 환상(1)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심(8-11장) | ||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와 이유(12-24장) | ||
하나님의 회복(25-48장) - 하나님의 영광 회복 | ||
열방에 대한 심판 (25-32장) |
두로와 열국에 대한 심판 (25-28장) |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25장) |
두로에 대한 심판(26장) | ||
두로를 위한 애가(27장) | ||
두로와 시돈이 받을 심판(28장) | ||
애굽에 대한 심판 (29-32장) |
애굽이 받을 심판(29,30장) |
|
애굽의 영광과 교만이 폐함(31,32장) | ||
이스라엘 회복 (33-48장) |
회복의 소망 (33-39장) |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의 함락(33장) |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34장) | ||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35장) | ||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36장) | ||
이스라엘의 회복과 통일에 대한 환상(37장) & 마른 뼈 환상 | ||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38,39장) | ||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새 성전) (40-48장) |
이상 중에 본 성읍의 형상(40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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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성전의 구조(41,42장) | ||
성전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43장) | ||
제사장의 직분(44장) | ||
거룩한 구역과 지킬 절기, 제사(45,46장) | ||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47장) | ||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48장) |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회복의 소망(33-39장) | |
33장 |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함락 |
34장 |
거짓 목자(이스라엘 목자)와 참 목자(하나님) |
35장 |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 |
36장 |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 |
37장 |
이스라엘 회복과 통일에 관한 환상 & 마른 뼈 환상 |
38장 |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1) |
39장 |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2) |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게 하오브림 키드마트 하얌)
- 혹자는 '게 하오브림'을 문자적 유사성에 근거해 민수기 27:12; 신명기 32:49에 언급된 '아바림 산'으로 해석하기도 하며(Michaelis),
본절의 심판적 의미를 강조해 욜 3:2에 언급된 '여호사밧 골짜기'로 보기도 한다(Kliefoth, Havernick).
또한 어떤 학자는 이를 '게 하아바임'으로 읽어 슥 14:4에 언급된 골짜기와 연관시킨다(Hitzig).
그러나 이는 이 매장지가 하반절에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를 뜻하는 '하몬곡의 골짜기'로 새롭게 명명된 사실에 비추어 원전 그대로 당시 애굽과 갈대아 사이의 무역로가 위치한 사해 앞쪽의 요단 골짜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Delitzsch).
이 지역은 길르앗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 골짜기의 지형이 넓어서 많은 곡 군대의 시체를 매장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진다.
실로 본 구절은 그토록 중요한 무역로가 곡 군대의 매장지로 막혀버릴 것이란 예고를 통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권능을 재삼 주지시키고 있다.
"하몬곡 골짜기(the Valley of Hamon Gog)"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곡 왕과 그를 추종하던 많은 무리들이 장사되는 곳을 말합니다(11절).
'하몬곡 골짜기'는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 라는 뜻입니다.
곡(Gog)은 메섹과 두발을 통치한 마곡의 왕입니다(겔 38:2).
곡은 에스겔 38, 39장과 요한계시록 20:8-10절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북방으로부터 내려보내셨지만(겔 38:15),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인물입니다(겔 39:2-6).
곡(Gog)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600여 년경에 살았던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리디아의 ‘기게스’, 라스샴라 문헌에 나오는 이방인 ‘가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악명높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알렉산더 대왕’ 등 다양한 인물이 거론되는데, 다수가 리디아 왕 ‘기게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곡이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보다 곡이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곡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악한 적대 세력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39장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9:1-6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곡을 대적하여 친히 싸우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너 사람아,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이끌어 내겠다. 너를 북쪽 끝에서 이끌어 내서 이스라엘의 산야를 침략하게 하겠다. 그렇게 해 놓고서, 나는 네 왼손에서는 활을 쳐서 떨어뜨리고, 네 오른손에서는 네 화살을 떨어뜨리겠다.”
“너는 네 전군과, 너와 함께 한 연합군과 함께 이스라엘의 산야 위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는 날개 돋친 온갖 종류의 사나운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너를 넘겨 주어서, 뜯어 먹게 하겠다. 내가 말하였으니, 너는 틀림없이 들판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또 마곡과 여러 섬에서 평안히 사는 사람들에게 불을 보내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에스겔 39:7,8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알려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내 거룩한 이름을 알려 주어서, 내 거룩한 이름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뭇 민족이, 내가 주인 줄, 곧 이스라엘에서 거룩한 하나님인 줄 알 것이다. 그대로 되어 가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날이 바로 내가 예고한 날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9,10절은 곡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완전히 진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이기는 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친히 곡과 싸워 승리를 얻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적군이 버린 무기들을 땔감으로 그것도 무려 7년 동안 넉넉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승리하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서 성읍마다 주민이 바깥으로 나가서, 버려진 무기들을 땔감으로 주울 것이다. 큰 방패와 작은 방패, 활과 화살, 몽둥이와 창을 모아 땔감으로 쓰면, 일곱 해 동안은 넉넉히 쓸 것이다.”
“그 무기들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들에 나가서 나무를 주워 오지 않아도 될 것이며, 숲에서 나무를 베어 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또 전에 자기들에게서 약탈해 간 사람들을 약탈하고, 노략질해 간 사람들을 노략질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11-16절은 전쟁에서 죽은 곡의 군대 매장지 – 하몬곡 골짜기(곡의 무리가 묻힌 골짜기) - 에 관한 설명입니다.
곡의 군대가 전멸해서 묻힌 매장지가 있는 그 마을의 이름을 ‘하모나’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땅, 사해의 동쪽, ‘아바림 골짜기’에 곡의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곡과 그의 모든 군대를 거기에 묻으면, 여행자들이 그리로는 못 다니게 될 것이고, 그 곳 이름은 ‘하몬곡 골짜기’라고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시체를 다 거두어다 묻어서 땅을 깨끗하게 하는 데는, 일곱 달이 걸릴 것이다.”
“그 땅 온 백성이 모두 나서서 시체를 묻을 것이며, 내가 승리하는 날에는 그들이 매장한 일로 영예를 떨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일곱 달이 지난 다음에도, 백성은 시체를 찾아 묻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뽑아서, 그 땅을 늘 돌아다니게 할 것이며, 그들은 시체를 묻는 사람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들을 샅샅이 찾아 묻어서, 그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을 돌아다니다가, 누구라도 사람의 뼈를 발견하여 그 곁에 표시를 해 두면, 시체를 묻는 사람들이 그 표시를 보고 시체를 찾아, 그것을 가져다가 ‘하몬곡 골짜기’에 묻을 것이다. 그 부근에는 ‘하몬곡 골짜기’라는 이름을 딴 ‘하모나’라는 성읍이 생길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그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에스겔 39:17-20절은 하나님께서 새와 들짐승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모여 오너라. 내가, 너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아서, 큰 잔치를 준비할 터이니, 너희가 사방에서 몰려와서, 고기도 먹고 피도 마셔라. 너희는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왕들의 피를 마셔라. 바산에서 살지게 기른 가축들, 곧 숫양과 어린 양과 염소와 수송아지들을 먹듯이 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려고 준비한 잔치의 제물 가운데서 기름진 것을 배부르도록 먹고,피도 취하도록 마셔라. 또 너희는 내가 마련한 잔칫상에서 군마와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인을 배부르게 뜯어 먹어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21-24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기 전에, 여러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예루살렘이 죄를 지은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여러 민족 가운데 내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내가 어떻게 심판을 집행하며,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내 권능을 나타내는지, 여러 민족이 직접 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족속이,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임을 그 날로부터 영영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모른 체 하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어, 모두 칼에 쓰러지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온갖 범죄에 따라서 그들을 벌하였고, 그들을 외면하였다.”
에스겔 39:25-29절은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이제는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자손을 돌아오게 하고, 이스라엘 온 족속을 불쌍히 여기며, 내 거룩한 이름을 열심을 내어 지키겠다.”
“이스라엘이 고국 땅으로 돌아와서 평안히 살고, 그들을 위협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그들은 수치스러웠던 일들과 나를 배반한 모든 행위를 부끄러워하며 뉘우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만민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고,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모아 데리고 나올 때에,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나타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뭇 민족이 나 주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 가게 하였으나, 그들을 고국 땅으로 다시 모으고,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도 다른 나라에 남아 있지 않게 한 줄을 알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내 영을 부어 주었으니, 내가 그들을 다시는 외면하지 않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0-23-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몬곡 골짜기(에스겔 39:11)
그 날에 내가 곡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통행하던 것이 막힐 것이라 사람이 거기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장사하고 그 이름을 하몬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
'On that day I will give Gog a burial place in Israel, in the valley of those who travel east toward the Sea. It will block the way of travelers, because Gog and all his hordes will be buried there. So it will be called the Valley of Hamon Gog.
"하몬곡 골짜기(the Valley of Hamon Gog)"
게 하몬 고그(גֵּיא הֲמֹון גֹּוג)
골짜기(1516) 가이(gayʼ) גַּי
어원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관련 성경 / 골짜기(민 21:20, 삼상 13:18, 겔 39:11), 가이(삼상 17:52), (소금) 골짜기(왕하 14:7, 시 60편 표제).
구약 성경 / 30회 사용
1. 소음 시끄러운 소리. 2. 왕상 18:41. 3. 겔 26:13
발음
[ hâmôwn ]
어원 / [여성으로 쓰이는 경우는 단 한 번 있음, 욥 31:34]. 199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러 (민족)(창 17:4,5), 무리(삿 4:7, 시 42:4, 단 10:6), 소동(삼상 14:19),
군대(왕상 20: 28, 겔 31:18, 단 11:10), 대군(단11:13), 소요(騷擾)(시 65:7), 풍요(전 5:10),
인구(사 32:14), 열성(사 63:15), 소리(렘 47:3, 겔 26:13, 암 5:23), 떠드는 소리(삼상4:14), 모든
물건(대상 29:16), 많이 쌓임(대하 31:10), 지껄이는 소리(욥 39:7), 요란함(겔 5:7, 사 33:3), 떠듦(사31:4,
렘3:2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곡(1463) 고그(Gôwg ) גּוֹג
1. 마곡 땅 뿐 아니라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인 ‘곡’. 2. 한 이스라엘 사람 ‘곡’
발음 [ Gôwg ]
관련 성경 / 곡(겔 38:2, 3, 14, 16, 18, 39:1,11, 대상 5:4)
구약 성경 / 12회 사용
겔38장은 곡이 북방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진군하나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그에 이어 곡이 멸망할 것과 그 멸망의 참상이 어떠한지를 노래 형태로 예언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는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장은 전장에 이어 마곡에 대한 심판을 연속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본장의 예언은 전장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전장에서 밝힌
마곡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다른 각도에서 전망하고 있으며, 곡의 완전한 멸망을 선언한다. 이러한 본장은 곡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는 전반부(1-8절), 멸망 이후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중반부(9-20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예언하고 있는
후반부(21-29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에는 마곡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동시에 발생하게 됨을 알려 주는데, 이러한
사실은 마곡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촉진케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마곡에 대한 심판의 목적.
하나님께서 마곡의 연합군을 멸망시키시는 목적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즉,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통하여 이방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부정적인 의미로 주어진다기보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선포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보다 더욱 여호와만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열방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온 세계에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하여 밝히기 이전에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잘못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간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도 자신의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에스겔 38장은 최후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면 39장은 마지막 악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악에 대한 심판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승리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곡"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대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심판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활을 왼손에서, 살을 오른손에서 떨어트리겠다고 하셨습니다(3절).
하나님은 그들을 무장해제를 시켜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위협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 곡을 무장해제 시킨 것은 하나님의 백성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7절).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은혜의 회복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에 그 앞에 설 수 없는 죄악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십니다.
은혜의 회복!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때, 즉 오늘 우리의 예배속에서 은혜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열방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 은혜의 회복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면.
9절부터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모든 무기를 다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모든 무기를 하나님께서 불태우는데,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이 세상은 많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무기가 필요했을까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기 때문에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은혜가 회복되면, 이 땅에 더이상 무기가 필요없어지는 것입니다. 왜요?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 어떤 시대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세대간의 심한 갈등을 보게 됩니다. 젊은 세대는 어른 세대를 꼰대라고 하며 무시하고, 어른 세대는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몰라.. 라고 하면서 나무랍니다. 진보와 보수는 함께 밥도 못먹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어진 시대속에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은혜의 회복, 그것만이 세대간의 갈등과, 진영의 갈등..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일터에 있는 모든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우리 가정안에, 교회안에, 사회안에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그렇기 위해.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그 은혜가 우리안에 회복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회복되어질 때, 우리를 통해 열방이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무기가 사라짐 뿐만 아니라, 11-16절을 통해 우리는 보게 됩니다. 무엇을요? 악의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 정결함의 회복을 말입니다. 바다동편 사람이 통행하는 골짜기는 왕의 대로를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을 품고 걸어가던 그 길.. 왕의 대로는 그 시대 가장 활발했던 무역로이자 전쟁을 위한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떻게요? 곡의 무리의 매장지가 됩니다. 시체가 쌓여서 더 이상 사람들이 오고가지 않습니다. 7달동안 그 길에서 뼈들이 발견될때마다 그것을 모두 매장하고 장사지냅니다. 모든 부정한 것들을 철저하게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으로 버무려진 그 왕의 대로를 막으시고, 시온의 대로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욕망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으로 살아가게 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에스겔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욕망과 욕심이 사로잡힌 인간의 참다운 회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길, 그 길을 따라 걸어갈때 만이 우리는 그 노예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삶으로, 그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무기를 불태워지고, 정결함을 회복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25절은 “하나님께서 열심을 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바로 회복의 근거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열심으로 우리로 포로된 삶에서 끌어내실 것이고, 우리로 참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9절..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요 회복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자신을 전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 우리속에 성취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도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할 그 하나님의 나라. 모든 무기가 사라져, 가정이 회복되고, 이 세상의 모든 갈등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하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서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서게하시는 은혜를 회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 우리안에 있던 무기들을 다 불태우고, 화평의 사람으로 세우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나와 다른 이들까지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 우리의 욕심과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소명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 되게하여주시옵소서.
- 이땅에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지는데 있어, 우리가 주의 손과 발이 되게하시고, 이 땅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구약관통 1] 블레셋 평야 | 성서지리(1) | 역사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목사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의 고백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
그는 히틀러의 나치정권
하에서 목사들과 긴급동맹을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그는 무고한
유대인들의 학살에 대해 항거하다 체포당해 8년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치러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니묄러 목사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다!”는 내용입니다.
니뮐러 목사는 감옥에서 같은 꿈을 무려 7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님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은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은 채 자꾸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며 항거했을
뿐,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거나 그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느냐? 네가 히틀러에게 전도했더라면 그가 무서운
폭군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목사님을 향해 질책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은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뮐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책임
고백서’를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잘못된 일들의 책임을 남에게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는 더 큰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기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몫을 제대로 다 했는지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구원의 소식을 남에게 전하지 않아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밥 걱정 - 마경덕(1954년 전남 여수 출생)
묵직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
우리집 건너 건너 반지하방 외눈박이 할머니
주워온 폐지를 접으며
응, 이제 일나가는구먼
잘 댕겨와유
골목 어귀 어물전 맞은편
전봇대에 기대앉은 좌판 노인도 도라지를 까다 말고 아는 체를 한다
뭐 하러 댕기시오
공장에 일 나가는 거요?
단골 신발가게 아줌마도 지나가는 나에게 말을 붙인다
밥벌이는 좀 되나요?
24시 순댓국집에 밤일 나가는 아래층 다솜이 엄마도
내가 시인이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시는 써서 뭐한대요
요즘 누가 그런 걸 읽어요?
다들 살기 어렵다고 내 밥을 걱정해 주는
착한 이웃들이다.
10-21-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스로 예비하라(에스겔 38:7)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찌어다.
Get ready; be prepared, you and all the hordes gathered about you, and take command of them.
에스겔 38장과 39장은 매우 독특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두 장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어느 때에 곡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의해 침략을 당하나 승리할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회복 예언에 의하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함으로 징계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말세에 일어날
악의 세력의 교회 핍박과 교회의 최후 승리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10: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 유대인들은 "마곡"을 "마게도니아"라고 한다.
역대상 5:4
요엘의 아들은 스마야요 그 아들은 곡이요 그 아들은 시므이요.
70인역에서는 "곡"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사용한다.
-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
건강 백세라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은 올해 104세이신데
열심히 강의하고 신문 칼럼을 쓰신다.
몇 달 전 강사로 모셨는데
강의 내용이 좋아서 큰 박수를 받았다.
강의가 끝나고 서울역으로 가신다기에
이유를 물어봤다.
“내일 아침 포항에서 조찬 강의가 있어
KTX를 타러 가야 합니다.”
100세가 넘으신 분이
서울에서 저녁 강의를 하고
곧바로 열차로 포항에 가서 잠깐 주무시고
조찬 강의를 하신다니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한달 전
이길녀 가천대학교 총장을 찾아뵈었다.
지난해 말에 ‘길을 묻다’ 라는
자전적 책을 내셨는데 큰 화제가 됐다.
시골 소녀가 큰 뜻을 품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가고
미국 유학 후 귀국해 길병원을 열어
의술을 펼친 이야기부터
가천대를 명문대로 키우기까지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총장의 인생철학은 ‘박애’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박애를 실천하려면
먼저 스스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장은 남들보다 수십 배 더 노력하며
역량과 성과를 쌓아온 분이다.
도전과 열정의 화신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총장실로 찾아뵈었더니
특유의 밝고 시원시원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날 한시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놀라운 것은 비단 열정만이 아니었다.
대화 내용의 70% 이상이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새로운 인재 교육의 방향,
새롭게 펼쳐지는 바이오산업과
우주산업,
대학의 미래상 등을 말씀하시고
끝없이 질문하신다.
올해 92세이시다.
나이가 80, 90, 100세가 되어도
청년처럼 사는 분이 늘어난다.
나는 이런 분을 ‘청어’ 라고 이름 붙였다.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 을 줄인 말이다.
넓고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등푸른생선 청어(靑魚)가 저절로 떠오른다.
청년처럼 사시는 어르신 ‘청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오고 힘이 솟는다.
내 주위에는 어떤 분이 청어일까 꼽아봤다.
한국의 ‘탑건’이라는 영화
‘빨간마후라’의 주인공
신영균 선생님,
국민 건강을 위해
세로토닌 문화를 이끄시는
이시형 박사님,
6·25전쟁 때
이미 100회 출격의 대기록을 세운
호국 영웅 김두만 총장님,
활기찬 목소리로
가요무대를 진행하시는
김동건 아나운서님,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시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상희 가수님,
베스트셀러 ‘식객’에 이어
요즘은 TV프로그램 ‘백반기행’으로
전국을 누비시는 허영만 화백님 등이
모두 청어로 부를 만한 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청어 DNA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봤더니
몇가지가 나왔다.
첫째, 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
둘째, 공익적이고 이타심이 크다.
셋째, 긍정적이고 잘 웃는다.
나이 들었다고
과거 전성기 추억을 먹고살면
청어가 아니다.
자기 혼자 잘되겠다고
열심히 살아도 청어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열정이 식으면
더 이상 청어가 아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청바지를 입는다고
청어가 되는 게 아니다.
청어가 되려면
젊은 시절부터 몸과 마음에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한다.
이게 내가 찾아낸
‘청어로 사는 방법’이다.
매력적인 시니어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세상을 위해
활기차게 활동하는 분이 많으면
이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나도 청어로 살고 싶다.
끝없이 다가오는
미래라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헤엄치고 싶다.
요즘 내 마음속에는
청어 떼가 뛰놀고 있다.◇
☆ 사람은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도 싫지 않으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잠깐 걸어도 실증이 난다.
인생 행로도 이것과 마찬가지니
언제나 명랑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라.
- 세익스피어
이세상에서 열정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
오늘도 즐겁고 건강하게
웃으면서 보내요.
늘 감사합니다.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회복의 소망(33-39장) | |
33장 |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함락 |
34장 |
거짓 목자(이스라엘 목자)와 참 목자(하나님) |
35장 |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 |
36장 |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 |
37장 |
이스라엘 회복과 통일에 관한 환상 & 마른 뼈 환상 |
38장 |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1) |
곡(Gog)은 메섹과 두발을 통치한 마곡의 왕입니다(겔 38:2).
곡은 에스겔서 38, 39장과 요한계시록 20:8-10절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북방으로부터 내려보내셨지만(겔 38:15),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인물입니다(겔 39:2-6).
곡(Gog)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600여 년경에 살았던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리디아의 ‘기게스’, 라스샴라 문헌에 나오는 이방인 ‘가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악명높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알렉산더 대왕’ 등 다양한 인물이 거론되는데, 다수가 리디아 왕 ‘기게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곡이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보다 곡이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곡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악한 적대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상 곡에 대한 내용은 비전 성경사전(두란노) p. 45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8:1-6절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곡과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곡과 함께 여러 나라를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아, 너는 마곡 땅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너는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와 네 모든 군대, 곧 군마와 기마병과, 곧 완전무장을 한 군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들고 칼을 잡은 대 병력을, 내가 끌어내겠다. 방패와 투구로 무장을 한 페르시아와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를 끌어내고, 고멜과 그의 전군과, 북쪽 끝에 있는 도갈마 족속과 그의 전군과, 수많은 백성을 너와 함께 끌어내겠다.”
에스겔 38:7-9절은 여러 날 후 말년에 곡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거라는 내용입니다.
“너는 네게로 집결된 온 군대와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들을 잘 지휘하여라. 네가 공격 명령을 받기까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때가 되면, 너는, 오래 걸려 전쟁의 상처를 다 씻은 한 나라를 침략하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살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이스라엘의 산야에 다시 세운 나라다. 그 나라 백성은 타국 백성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온 뒤에, 그 때쯤에는 아주 안전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쳐올라갈 것이며, 너와 네 모든 군대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나라의 연합군이 폭풍처럼 몰려들고, 구름처럼 그 땅을 덮을 것이다.”
에스겔 38:10-13절은 하나님께서 곡이 그날에, 평안한 백성을 노략하고 겁탈하겠다는 악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을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네 마음 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라, 네가 흉악한 생각을 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혼자 속으로, 성벽이 없이 사는 마을로 쳐올라가겠다고, 평안히 살고 있는 저 평화로운 사람들에게로 쳐들어가겠다고, 성벽도 없고 성문도 없고 문빗장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덮쳐서 물건을 약탈하며 노략하겠다고 하는 악한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다가 돌아와서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땅에 다시 정착하여 가축과 재산을 늘려 가며 살고 있는 백성을, 손을 들어 칠 때에, 스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들과 젊은 용사들이 너를 비난할 것이다.”
“네가 노략질이나 하려고 가는 것이냐고, 네가 강탈이나 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느냐고, 은과 금을 탈취해 가려고, 가축과 재산을 빼앗아 가려고, 엄청난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원정길에 나섰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에스겔 38:14-16절은 하나님께서 허락 하에 그날이 되면, 곡이 이스라엘을 치러올 거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람아, 너는 예언하여 곡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사는 그 날을 네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그 때가 되면, 너는 네 나라 북쪽 끝에서 원정길에 나설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대군을 이끌고 떠날 것이다. 놀라운 규모를 지닌 기마대와 많은 보병을 이끌고 정복길에 오를 것이다.”
“마치 구름이 땅을 덮는 것같이,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곡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내 땅을 치게 하겠다. 뭇 민족은,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려고 너를 이렇게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에스겔 38:17-23절은 하나님께서 곡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거라는 내용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곡아, 내가 옛날에 내 종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하여 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너다. 예언자들이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이스라엘을 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곡이 이스라엘 땅을 쳐들어오는 그 날에는, 내가 분노와 격분과 울화를 참지 못할 것이다. 불 같이 격노하면서, 그 때에 내가 선언하여 이스라엘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나게 할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과,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산이 무너지고, 절벽이 무너지고, 모든 성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곡을 칠 칼을 내 모든 산으로 불러들이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칼을 든 자가 저희끼리 죽일 것이다. 내가 전염병과 피비린내 나는 일로 그를 심판하겠다. 또 내가, 억수 같은 소나기와 돌덩이 같은 우박과 불과 유황을, 곡과 그의 전군과 그와 함께 한 많은 연합군 위에 퍼붓겠다. 내가 이렇게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 위엄을 떨치고 나서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10-20-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가 살리라(에스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너희가 살리라(You will come to life)
위흐이템(וִחְיִיתֶם)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 '생기'(루아흐)는 인간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어 넣으셨던 '생기'(네솨마, 창 2:7)와 동일한 의미로 생명의 동인이 되는 '숨', '호흡'등을(Breath, KJV, NIV, LB) 가리키는 말이다(창 6:17;7: 17).
이는 본 사건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해준다.
한편 성령이 창세로부터 모든 생명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과(창 1:26) 36:27과의 내용적 연결상 본절의 '생기'는 '성령'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Havernick, Schroder).
너희가 살리라(2421) 하야(châyâh) חָיָה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4:11), 살게 하다(겔37:14, 시119:17), 낫다(수5:8, 왕하8:8), 살리다(창20:7, 겔37:5), 지내다(창5:7), 보존되다(창19:20), 생활하다(창27:40, 왕하4:7), 소생하다(창45:27, 삿15:19), 거주하다(창47:28), 살려주다(왕상20: 32), 살아나다(왕상17:22), 희생하다(왕하13:21), 살려두다(민31:15, 삿21:14), 구원하다(겔3:18), 유전하다(창7:3), 부흥하게 하다(합3:2), 전하다(창19:32), 기르다(삼하12:3, 사7:21), 중수하다(대상11:8), 일으키다(느4:2), 소생하게 하다(시80:18, 7:12), 보전하다(겔18:27), 풍성하다(호14:7), 생존하게 하다(수14:10),구원하다(창19:19), 보존하게 하다(창6:20), 살려주다(사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생기(7307) rûwach רוּחַ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 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 77:3, 잠 16:2), 폭풍(시 55:8, 사 27:8), 성품(잠17:27), 생기(렘 10:14, 겔37:9), 분(전 10:4), 사면(렘 52:23), 사방(겔 5:10, 17:21, 단 11:4), 바람이 불 때(창 3:8), 헐떡거림(렘 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1. 부글부글 끓게 하다. 2. 니팔형 נִבָּא
관련 성경 / 예언하다(삼상 10:11, 대하 18:11, 렘 14:14), 신령한 노래를 하다(대상 25:2,3), 대언하다(겔 37:7,10, 38:14), 장래 일을 말하다(욜 2:28), 정신없이 떠들어대다(삼상 18:10), 미친듯이 떠들다(왕상 18:29), 선지자 노릇을 하다(렘 29:26, 27).
구약 성경 / 115회 사용
생기(5397) 네솨마(neshâmâh) נְשָׁמָה
어원 / 53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기(창 2:7), 호흡(신 20:16, 사 2:22, 단 10:17), 호흡이 있는 자(수 11:11,14, 시 150:6), 콧김(삼하22:16, 시18:15), 생명(왕상15:29), 숨(왕상17:17), 기운(욥4:9, 33:4, 37:10), 정신(욥26:4), 영혼(잠20:27), 혼(사57:16).
구약 성경 / 24회 사용
"생기","생령"이란 무엇인가? - 창조1 - 천사가해석한성경
"생기","생령"이란 무엇인가?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새번역 :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공동 :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사람의 창조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신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번역상의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를 불어 넣으시니
사림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두 부분이다.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어구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언뜻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넣어져 사람이 영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령이 아니라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 즉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모든 성경
연구가들이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사람이"생령"
되었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 하면 사람이 마치 살아 있는 "영"이 된 것이라는 말로 곡해 할수 있고 더 나아가 진리에서 빗나간
교리로 발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곡해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령" 이란
말은 "생명, 기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다, 생존하다라는 "하야"와 결합한 말로 "네페쉬 하야" "살아 있는
존재가 되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새 번역에서는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로 번역 되었고, 공동 번역 에서는 사람이 "숨을 쉬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인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전인적인 생명체라 함은 사람 안에 "영 이나, 혼 같은 구별된 존재가 사람안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인적인 사람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한다.
즉 영과 혼과 몸이 구분되어 별개로 존재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 3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먼저 사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회복되려면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회복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그 땅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때 사람도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을 기대해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두 가지 내용으로 회복을 말씀합니다.
첫번째는 마른 뺘들이 살아나는 상징적 환상입니다(1-14절)
두번째는 두 막대기가 하나로 함쳐지는 상징적 환상입니다(24-28절).
이와 같은 상징적 환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전개 방향과 그 방법 그리고 하나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상징적 환상은 성경 전체에 대한 안목과 신약 시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지평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죽어 버린 마른 뼈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도 철저하게 부패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라야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이 참된 통치자가 되심을 믿고 따를 때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 후에 이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므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마른 뼈들은 마치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른 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살아나는 생명이 되는 것처럼 지금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으나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그 날에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탈바꿈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언제 회복되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부활의 신령한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시고 약속한 보혜사 성령께서 임재하여 초대교회의 시대가 펼쳐질 때 비로써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신비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날마다 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여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19-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영 새 마음(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새 영, 새 마음(New Spirit, New Heart)
에스겔서는 전반부에서는(1-32장) 유대와 이방 족속의 멸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후반부에서는(33-48장) 회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국가를 회복시키는 방법은 먼저 지도자를 바르게 세운 후에 그 영토(땅)를 회복시키며 더불어 백성들을 회복시켜 갑니다.
에스겔서 36장은 회복의 방법으로 새 영과 새 마음을 강조합니다.
새 영(루하흐 하다쉬) רוּחַ חֲדָשָׁה
새 마음(레브 하다쉬) לֵב הָאֶבֶן
새로운 - 하다쉬(2319)
[ châdâsh ] חָדָשׁ
관련 성경 / 새(레 23:16, 삼하 6:3, 사 65:17, 42:9, 43:19, 렘 31:22), 새로워진(욥29:20), 새로운(애3:23).
구약 성경 / 53회 사용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마음 - 레브(3820) [ lêb ] לֵב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 61:2), 심중(신 29:19, 에 7:5), 숨(출 8:15), 콧김(출 15:8), 가슴(출 28:29), 감동(출 35:34), 간담(수14:8), 결심,생각(삿5:15, 시33:11), 진심(삿16:17), 기력(삿19:5), 관념(삼상4:20), 인심(삼하15:13),심장(삼하18:14, 시38:10), 염통(왕하9: 24, 시45:5), 한마음(대상12:38, 시83:5), 성심(대상29:9), 전심(대하17:6, 시119:10, 겔44:5), 뜻(대하24:4), 충심(시34:18), 총명(욥12:24), 지혜(욥36:5, 잠10:8, 전1:17), 지식(잠10:21), 의사(잠18:2), 생각(잠24:32), 명철(전7:7), 지각(렘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42:28), 간곡하다(창50:21), 낙심하다(민32:7),염려하다(삼상9:20), 개의하다(삼상25:25),낙담하다(삼상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7:27, 애3:33), 상심하다(삼하13:33), 깨닫다(왕상8:47), 감동시키다(대하30:12), 위로하다(대하30:22), 주의하다(욥1:8, 전7:2), 담대하다(시27:14), 살피다(시48:13), 무지하다(잠6:32), 간교하다(잠7:10), 착심하다(잠23:12), 진술하다(사41:22), 기억하다(사46:8), 낙심하다(렘4:9).
[부] 다정하게(삿19:3), 뜻대로(삼하7:21, 대상17:19), 담대히(렘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1. 제한된 것. 2. 과업. 3. 경계
발음 [ chôq ]
어원 / 2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녹(창 47:22), 법(창 47:26), 규례(출 12:24, 레 6:22), 수효(출 5:14), 법도(출 15:25, 왕상 3:14), 율례(출18:16, 민30:16, 수24:25), 소득(레6:18, 레10:13), 몫의 음식(민18:8), 명령(레10:15, 잠8:29, 습2:2), 경계(욥26:10), 한계(욥38:10, 잠8:29, 렘5:22), 명령(시2:7, 148:6), 일(잠31:15), 한량(사5:14), 일용할 양식(겔16:27), 지경(미7:11).
[동] 작정하다(욥23:14). [형] 정하다(욥23:12), 필요하다(잠30:8).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규례(미쉬파트) [ mishpâṭ ]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위기 19:15. 3. 욥기 9:32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의(창 18:19), 법(렘 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판결(출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19:35, 신1:17), 법(레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25. 정결케 하여(2891) 타헤르[ ṭâhêr ] טָהֵר 스트롱번호 2891
관련 성경 / 정하다(레 11:32, 14:7, 겔 24:13), 깨끗하다(레 12:7, 민 31:23, 왕하 5:10), 정결하다(레 12:8, 16:30), 정결하게 하다(민 19:12, 대하 34:5, 겔 37:23), 순전하다(시 51:4), 정결함을 얻다(겔 22:24).
구약 성경 / 94회 사용
새 마음이란 예전의 삶을 주도하던 습관적인 마음을 새 영의 지배를 받아 새로운 결단의 삶을 말합니다.
새 영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삶은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이라고 강조합니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은 "위하는 대상"이 바뀐 것에서 출발합니다(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새로운 피조물은 예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에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신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변화된 것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위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위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은 삶의 중심의 축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 사람은 삶의 중심의 축이 "나" 라고 하는 개인주의적인 삶이었다면 새 사람의 삶의 중심의 축은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은 "오직 예수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려면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고전 15:31).
이스라엘 회복의 의의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 회복 사역은 단순히 귀환과 죄사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갱신까지 이르는 완전한 것임을 시사한다.
새 영...새 마음
- 성경의 용례상 '영'(루아흐)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행위를 제어하는 내적 본질(살전 5:23)
'마음'(레브)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인성의 좌소.
이 두 단어는 인간의 전인격을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단어 앞에 '새'라는 형용사가 첨가된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온전한 영적 갱신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 언약 백성의 반열에 들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앞장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소원하다가 멸망을 보자 기뻐하고 조롱한 이방에 대한 멸망을 에돔의 멸망으로 대표화시켜
언급했습니다.
본장에서는 그처럼 이방의 시기와 조롱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받은 뒤 새 언약하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 것과, 다시는 옛 언약하에서와 같은 범죄-멸망-수욕의 과정이 없을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서 34장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은 본장에 와서 땅과 백성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은 지도자, 땅, 백성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밝힌다. 본장의 내용이 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회복의 주체가 누군가에 대한 묘사도 다른 장보다 많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는 열 번씩이나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표현은 회복의 주체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본장은 새롭게 회복될 땅과 백성(1-15절), 하나님의 성호를 위하여(16-21절), 이스라엘 회복의 의의(22-38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을 통해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나타내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 땅이 에돔과 이방 국가들의 침략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땅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본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회복의 약속은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신약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본문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된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사실 성도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본토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경작자가 없어서 황무한 곳으로 버림받았던 땅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령의 기경함을 입은 것이다. 죄악의 밭이 갈아 일구어지고 천국 복음이 뿌려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육체의 정욕과 죄악을 토해 내던 우리 삶이 성령의 열매를 내는 것으로 변화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양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갖는 의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갖는 의의는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 때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들의 회복은 백성들의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주권적인 행위에 의거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한 백성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함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여호와의 완전한 내적 임재를 통해
가능함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의 내적 임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회복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회복인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은 총체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저자는 이스라엘 땅과
백성의 회복에 대하여 묘사하고 나서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진다. 특히 '너희를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이
건축될 것' (33절)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총체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날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에덴 동산같이'라고 묘사함으로써 회복의 상태가 총체적이며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일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0-18-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악의 끝(에스겔 35:5)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끝 때에 칼의 권능에 그들을 붙였도다.
Because you harbored an ancient hostility and
delivered the Israelites over to the sword at the time of their
calamity, the time their punishment reached its climax.
에스겔 35장은 에돔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33장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파수꾼"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34장에서는 "목자(라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자의 본보기는 곧 다윗과 같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없고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파수꾼처럼' 그리고 '목자처럼' 세상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회복할 때 비로서 세상을 흔들고 주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에돔과 같은 세력들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에돔은 비옥한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항상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거기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에돔의 모습처럼 항상 성도들을 자신의 통치권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항상 세상 속에서 곤경에 빠질 위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곤경에
처할지라도 우리 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하지만 또한 세상을 향해 담대히 하나님의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끝은 죽음이며 멸망이고 영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룩한 성도들의 삶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성공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에돔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지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주권적인 능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실 에돔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하는 가시적 증거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관계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야곱과 에서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갈등을 가져왔다.
또한 에서의 후손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적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 왕조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갈등 관계는 유지되었으나 이스라엘의 멸망의 시기에는 결정적으로 나타나게
외었다.
결국 에돔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었다.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동일하게 피 흘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장에는 에돔의 '세일 산'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표현하고, 피를 흘리는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거민들을 죽여 여러
곳에 흩어 놓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살육을 당할 것이며, 성읍을 훼파하였기 때문에 성읍이 파괴당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심판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응하는 당시의 관행과 모세 율법의 정신(참조, 신19:21)에 따라 보응한
것이다. 또한 궁극즉으로 선과 악에 대해 정확하게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본장은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전장이 '선한 목자'라는 은유적 기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희망적인 미래상에 대해
묘사한 반면 본장은 에돔의 심판이 역사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기술하고 있다.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땅을 황무케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땅의 황무함에 대한 선언적인 진술(1-4절), 옛적부터 있었던 에돔의 적대감에 대한 심판의 예언(5-9절), 이스라엘
땅을 소유하려는 에돔의 의도(10-13절), 온 땅이 즐거워할 때 소외되어 고통을 당할 에돔 족속에 대한 언급(14-15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에돔의 심판이 필연적이며, 결과적으로 참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에돔의 잘못은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과, 다른 국가들과 공모하여 이스라엘의 멸망에 협력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으므로 그들이 심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와 하나님에 대한 적대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겔2-24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멸망 예언을, 25-32장까지는 이방의 죄악과 멸망 예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33-39장까지는
멸망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에돔의 죄악과 멸망 예언을 말하고 있는 본장은 겔25-32장에
속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이 이스라엘 회복을 말하고 있는 부분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방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시키기 위함입니다.
10-17-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목자들아 들을찌어다(에스겔 34:7)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Therefore, you shepherds, hear the word of the LORD :
목자(라아. râʽâh ) רָעָה
스트롱번호 7462
관련 성경 / 먹다(사5:17, 렘50:19, 겔34:3), 치다(창36:24, 출3:1, 사61:5), 양육하다(렘3:15), 먹이다(삼하7:7, 아1:8, 겔34:8), 기르다(욥24: 2,시78:71, 렘23:4), 뜯어먹다(창41:2), 양치다(창4:2, 37:16), 방황하다(민14:33), 지키다(삼상16:11, 17:34, 25:16), 박대하다(욥24:21),사귀다(잠13:20, 22:24).
[명] 목자(창 13: 8, 겔 34:2, 미 5:6), 먹을거리(시 37:3), 목자장(삼상 21:7), 사귀는 자(잠 29:3), 관리(렘 2:8), 인도자(렘 25:34, 35,36),
친구(삿 14:20).
구약 성경 / 319회 사용
미국의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 1914-2009)
공간과 거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공간학(proximics)의 대가이다.
그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공간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밝혀냈다.
첫째로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45cm 이내의 거리이다.
상대방의 숨결을 느껴질 정도의 거리로 애인이나 엄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로 사적 거리(personal distance)
45~120cm정도의 팔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친구와 가까운 지인끼리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120~360cm 정도인데 보통목소리로 말할 때 들을 수 있는 거리이다.
사무적인 대화로 정중한 격식과 예의가 요구되는 업무나 일로 맺어진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넷째로 공적 거리(public distance)
360cm 이상의 거리이다.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들을 수 있는 거리인데 공연장의 가수와 청중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16-2-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대신하여 경고하라(에스겔 33:7)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Son of man, I have made you a watchman for the house of Israel; so hear the word I speak and give them warning from me.
나를 대신하여 경고하라( I speak and give them warning from me)
파수꾼(6822) 차파[ tsâphâh ] צָפָה
관련 성경 / 살피다(창 31:49, 시 66:7), 감찰하다(잠15:3), 파수하다(삼하13:34, 나2:1), 엿보다(시37:32), 보살피다(잠31:27), 기다리다(삼상4:13, 욥15:22), 바라다(시5:3, 애4:17), 바라보다(애4:17, 미7:7, 합2:1), 지키다(렘48:19).
[명] 파수꾼(삼하 18:25, 사 21:5, 겔 3:17), 망대(아 7:4).
구약 성경 / 36회 사용
에스겔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파수꾼의 사명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하는 것.
* 깨우치다(2094) 자하르(zâhar) זָהַר
발음 / [ zâhar ]
관련 성경 / 경고하다(전 4:13, 겔 33:6,7,9), 가르치다(출 18:20), 경계하다(왕하 6:10, 대하 19:10), 깨우치다(겔 3:17, 19, 21), 이르다(겔3:18), 빛나다(단 12:3), 경계를 받다(전 12:12), 경고를 받다(시 19:11).
구약 성경 / 22회 사용
현대인을 속박하는 4가지 M이 있다.
첫째, Machine
머쉰(machine, 기계)
기계가 삶을 편리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기계화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둘째, Mass
매스(mass, 대량)
크기와 숫자의 신에 농락당하면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모두 큰 손해를 입는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다수에 휩쓸린 자신의 의미가 지극히 왜소해졌음을 깨닫지만 그렇게 깨달을 때는 대개 늦는다.
셋째, Might
마잇(might, 힘)
사람들은 힘을 숭상한다.
힘으로 세운 것은 결국 힘으로 무너진다.
넷째, Money
머니(money, 돈)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가 돈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평가 기준과 성공 기준이 다 돈이다.
강력한 돈에 속박되면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줄 안다.
그래서 돈 때문에 도리와 윤리와 의리를 팽개치지만 돈으로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돈이 자유를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욕망과 쾌락의 자유를 주면서 참된 자유를 빼앗는다.
돈은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강한 마력이 있다.
에스겔 4장부터 32장까지는
하나님께 범죄한 모든 족속과 나라와 왕들이 받을 심판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내용을 대언할 에스겔에게 주신
파수꾼 사명이 에스겔 3장에 이어 33장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언은 33장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새로운 예언 곧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할 파수군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첫째, 파수꾼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의 비유를 통하여 선지자의 위치와 책임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은 공동체의 생사가 걸려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파수꾼은 악인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표면적으로는 예언의 대상이 '의인과 악인'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의 회개를 강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악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선언적인 언급과 아울러 회개의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셋째,
파수꾼은 설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백성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자세로 깨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인격적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갇혀 있으면서도 환상 가운데서 계시하신 말씀으로 먼저 위로를 받은 후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을 것" 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보는 눈과 실천하는 몸과 마음으로 새 날을 기다리는 승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의 문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33:1-9. 파수꾼의 임무
33:10-20. 회개의 촉구
33:21-29. 본토에 남은 자들에 대한 심판
33:30-33.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행치 않는 백성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33장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에스겔서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선지자의 책임과 그 말씀을 듣는 자의 책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자와 바벨론에 있는 자의 책임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파수꾼을 세우는 이유(1-3절)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그의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호와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건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위기의 때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전쟁이 나기 전에 회개하였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가정합니다. 온 군인이 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잠을 자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정신이 몽롱하면 그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눈만 감으면 잘 잡니다. 눈만
뜨면 말짱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잠을 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쟁의 최일선에서도 잠을 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자고 먹어야합니다. 적이 쳐들어와도 자고 행진하면서도 잠을 잡니다. 자면서 걷습니다. 잠이라는 것은 참 신비한 것입니다.
잠을 잘자야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을 재웁니다. 무덤가에서도 잡니다. 다 자게 하고 파수꾼을 세웁니다. 파수꾼이
보초병입니다. 몇사람은 깨어있어야합니다. 파수꾼이 잠을 자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깨어 있습니다.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경고를 받지 않은 자의 책임(4-5절)
어떤 사람이 파수꾼의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경고를 무시한 자기 탓입니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입니다.
파수꾼이 경고를 했을 때는 그 경고를 듣느냐
무시하느냐에 따라서 생사가 갈립니다.
다 자도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깨어 있어야합니다.
선지자는 깨어 있는
대표입니다.
그는 결정적인 위기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최후통첩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게 됩니다.
주변 나라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쟁 앞에서 나오는 경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파수꾼의 책임(6절)
그러나 파수꾼이 잠을 잤습니다.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았습니다.
그 파수꾼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여호와가 파수꾼에게 물으십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깨어나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에게서 피값을 찾으십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다면 깨는 사람이 있었을텐데 그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해야하는 이유는 구원받을 자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잠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니 외치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해서 그들이 믿지 않았으면 내 책임은 다하였습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예수 믿고 파티를 합니다.
교인을
모아서 점심을 냅니다.
삭개오와 같이 잔치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 가운데 예수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온 사람은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라고 만날 때마다 얘기하였다고 합니다.
예의 상 한번
교회에 나왔는데 그때 예수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전의
친구들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우리는 관상보고 예수 믿을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전도하면 내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파수꾼 에스겔과 듣는 자의 책임(7-8절)
하나님은 사람인
에스겔 자신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여호와가 하는 말을 듣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여호와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그 악인에게 말하여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도록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악인은 자신의 죄가 있어서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파수꾼은 신실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합니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내가 해야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독일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기도 중에 간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본 회퍼는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다.
이 때 같은 감옥에 있던 한 영국장교가 본 회퍼 목사님을 향해 말했다.
"목사님,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본 회퍼 목사는 미소를 머금고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감방에 있던 동지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방을 떠나는 그에게서 평안과 기쁨이 흘러넘쳐 감옥 속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이 흘러넘쳤다.
경고하였으면 파수꾼은 책임이 없다(9절)
에스겔이 악인에게, 그의 길에서 떠나서 거기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인 에스겔은 목숨을 보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길(10-11절)
그러므로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헤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살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죽으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의 중요성(12-16절)
사람인 에스겔은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전해야합니다. 의인이라고 해도 죄를 짓는
날에는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죄악에서 떠나 돌이키는 날에는 과거의 악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한다고 전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의인도 범죄하는 날에는 과거에 의로웠다는 것 때문에 살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 하였어도, 그가 자신의 의를 믿고 악한 일을 하면, 그가 행한 모든 의로운 행위를 여호와가 전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범한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조들의 죄 때문에
끌려왔다고 생각하고 선조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를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가 자기의 죄에서 떠나 돌이켜서,
법과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전당물을 돌려 주고, 탈취한 물건을 보상하여 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규정들을 따라 살아, 악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여호와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법과 의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17절)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주께서는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평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공의와 은혜적인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행위를
따라서 생각합니다. 얼마나 의롭게 진실하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따라서 사회적인 정의를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사는 공의가 있습니다. 이런 공의는 행위적인 공의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복을 받고 준행하지 못함으로 저주를 받습니다. 이런 공의를 따라서 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둘째
은혜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자기 보기에 의롭다고하는 것이지만 하나님보시기에 깨끗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상숭배하고
간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합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망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마지막 말씀을 들었습니다. 니느웨 성이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것과 같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불평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그래서 내가 오지 않을려고 했다고 합니다. 왜 안 망했느냐고 대듭니다. 그가
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인 공의입니다. 마지막 회개할 때 의로 보고 구원해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적인 공의입니다. 의인은
망하고 악인은 망하지 않아서 공평치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조금 나은 것이 무슨 의가 되겠느냐고 합니다.
현재의 의가 중요하다(18-20절)
의인이
의로운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서 악한 일을 하면, 그것 때문에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 법과 의를 따라서 살면, 그것 때문에 그는 살 것입니다. 과거에 의를 행했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죄가 많아도 의롭게 살았으면 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해야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인정해야합니다. 다시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는 은혜적인 공의를 이해해야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적인 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적인 의는 십자가의 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아를 돌아보아 양자를 삼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를 삼습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데 엄청난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인이었지만 탕자처럼 영접합니다. 여기서 나는 죄인아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적인 공의를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회개했느냐 하지 않느냐를
보고 싶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적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혜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멘!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21-22절)
에스겔과 이스라엘 사람이 포로로 잡혀 온 지 십이년째가 되는 해의 열째 달 오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온 사람이 에스겔에게로 와서, 그 성읍이 6개월 쯤 전에 함락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왕궁과 집들과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와서 소식을 전함으로
에스겔이 예루살렘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이 에스겔에게 오기 전날 저녁에, 주의 권능이
에스겔을 사로잡아서, 에스겔의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아침에 에스겔에게로 올 즈음에는 에스겔 입이 열려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더 이상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낙관주의(23-24절)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땅의 저 폐허 더미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음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 학자들에 의하면 이만명 정도가 남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개인인데도 이 땅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하시고 기업을 주셨습니다. 나라도 군사도 없는데 보호해주셨습니다. 한평생 나그네로 살지만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물며
수가 많은 우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합니다. 우리는 수가 많음으로 기업을 넉넉히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자기들의 소유로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땅까지 차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악한 무화과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은 남은 자라는 영적인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 하지 못하는 이유(25-26절)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온갖 우상에게 눈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하는 악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칼을 의지하였고, 역겨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웃 사람의 아내를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 하나가 소중합니다. 악인은 수가 많은 것이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정치력 경제력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믿음으로 사는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때 많은 사람을 쓸어버립니다. 인간이 육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많아서 설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지금도
지식도 돈도 있지만 심성이 없습니다. 범죄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좋고 능력 있습니다. 인간 속에 영혼이 타락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사는 아브라함 한 사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 속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시는 하나님(27-29절)
에스겔은
그들에게 또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폐허 더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칼에 쓰러질 것입니다. 들판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가 들짐승들에게 잡혀 먹도록 하십니다. 산성과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하십니다. 여호와가 예루살렘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거만하던 권세도 끝장이 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산은 메말라서, 사람이 얼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망하여 죽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여호와가 그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여호와가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백성들(30-31절)
여기서부터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자신의 민족의 자손 모두가 담 밑이나 집 문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서 가서, 주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고 합니다.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에스겔에게 찾아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보다 말씀을 따라서 움직여야합니다. 손해가 나도 말씀이면 행하고 이익이 되어도
말씀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때가 되면 선지자를 알게 됨(32-33절)
에스겔을 찾아온 사람들은 에스겔을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의 종을 배우나 가수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관람객 입장에 있습니다.
그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은 배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시켜서 한 그 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자
살륙 당하는 자
할레받지 못한 자(알렐림) : 복수형
아렐( ʽârêl) עָרֵל 스트롱번호 6189
어원 / 연계형 עֶרֶל 겔44:9, עֲרַל 출6:12,6188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할례 받지 아니한(창17:14, 사52:1, 겔32:21), 할례 받지 못한(출12:48, 삼하1:20, 렘6:10), 할례 없는(삼상14:6, 31:4).
- 구약 성경 / 35회 사용
살륙 당하는 자
חָלָל
스트롱번호2491
- 어원 / 249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중상 당한(겔21:29), 부정한(레21:7), 더러운(레21:14), 죽은(민19:16), 죽임을 당한(민19:18, 왕상11:15, 사22:2), 피살된(신21:2,3), 살륙하는(수13:22), 상한(삿9:40, 잠7:26), 죽임을 당한(겔6:4, 35:8), 죽이는(겔21:14), 엎드러져 죽은(단11:26). [명] 시체(창34:27, 겔9:7), 죽임을 당한 사체(민31:19), 피살자(신32:42), 죽은 자(삼상31:8, 삼하1:22, 렘14:18).
- 구약 성경
- 94회 사용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륙당한 자 중에 누우리라
'할례받지 못한 자' (아렐림)는 경건치 않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
'살륙당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죽어간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할례받지 못하고 살륙당한 자'는 곧 이미 멸망한 앗수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적인 힘에만 의지한 채 자고했던 모든 교만한 이방 세력들을 가리킨다.
또한 '누우리라'(솨카브)는 '내던지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극히 무관심하게 내던저져 나뒹구는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이는 그 교만한 이방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을 재삼 주지시켜 주고 있다.
한편, 혹자는 할례의 기원이 애굽이라는 고대 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빌어 본 구절을 할례받은 애굽 왕조차 그들의 교만으로 할례받지 못한 자와 함께 눕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Schroder, Hitzig).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본절의 '할례받지 못한 자'가 교만한 이방 세력을 지시하며 또한 애굽의 통상적으로 그러한 세력을 대표하는 상징 중의 하나라는 점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다.
교만(驕慢) : 교만할 교, 거만할 만
1347. 가온(gâʼôwn) גָּאוֹן
발음 / [ gâʼôwn ]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엄(출 15:7, 욥 37:4, 미 5:4), 교만(레 26:19, 잠 16:18, 겔 7:20), 영화(시 47:4, 사 14:11), 거만(잠 8:13), 오만(사 13:11), 영광(사1 3:19, 암 6:8, 나 2:2), 아름다움(사 60:15), 자고(렘 48:29)
구약 성경 / 49회 사용
* 1342. 가아(gâʼâh) גָּאָה
관련 성경 / 높다(출 15:1), 가득하다(겔 47:5), 영화롭다(출 15:1)
구약 성경 / 7회 사용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라(7121) 카라[ qârâʼ ] קָרָא
발음 [ qârâʼ ]
관련 성경 / 부르다(창 16:14, 삼상 3:6, 사 41:9, 호 11:7), 선포하다(출33:19, 애1:21), 청하다(출34:15,삿14:15, 삼상9:24), 공포하다(레23:21, 삿21:13), 읽다(신17:19, 왕하22:16), 호소하다(신15:9), 선언하다(신20:10, 렘34:8), 낭독하다(수8:34, 렘36:6), 외치다(삼상26:14, 왕상13:32), 불러가다(왕하5:11), 전하다(왕하23:16,17), 일컫다(대상11:7, 대하20:26, 사30:7), 부르짖다(시34:6, 렘3:4), 간구하다(시138:3), 부르다(사6:3,4), 기도하다(시116:2, 렘10:25),여기다(애1:15, 사1:13), 선전하다(느6:7), 전파하다(사61 : 1), 유명하다(룻4:11, 겔23:23), 불러오다(왕하4:12, 렘9:17), 읽어보다(사34:16), 불다(욜2:15), 널리 선포하다(욜3:9, 암4:5), 구하다(욘1:6), 주다(창2:20), 소리지르다(창39:14), 이르다(창49:1, 출19:3), 소집하다(신29:2), 아뢰다(삼상12:17, 대상4:10), 기록하다(대상6:65), 자랑하다(잠20:6), 명령하다(사22:12, 암7:4), 펴놓다(사37:14), 베풀다(렘36:18), 부름을 받다(욜2:32), 초대하다(슥3:10), 불러내다(사41:4), 일컬음을 받다(잠16:21, 렘7:10), 묻다(삼상9:9), 기록되다(대상23:14)
구약 성경 / 755회 사용
응답하겠고(6030) 아나[ ʽânâh ] עָנָה 스트롱번호6030
발음 [ ʽânâh ]
관련 성경 / 판명되다(신19:18), 이르다(신25:9), 아뢰다(신26:5), 응답하다(신27:14, 대상21:28, 시34:4), 징벌하다(룻1:21), 증언하다(삼하1:16,사3:9), 대답하다(왕상2:30, 스10:12), 응답하다(시22:21), 부르짖다(출32:18, 사13:22),응대하다(호2:15), 높이다(렘51:14), 노래하다(민21:17), 찬양하다(시147:7), 말씀하다(창18:27), 화답하다(출15:21, 스3:11), 회답하다(신20:11), 노래하다(삼상18:7), 명령하다(왕상1:28), 들으심을 입다(욥12:4), 듣다(시55:19, 슥10:6), 이용되다(전10:19), 낮추다(사25:5), 응하다(호2:21, 슥1:12), 외치다(렘25:30), 묻다(슥4:4).
구약 성경 / 316회 사용
1. 앞에 두다. 2. 히필형 הִגִּיד
관련 성경 / 보이다(창 41:25, 시 111:6, 미 6:8), 묻다(민17:9), 이르다(삿13:6), 토하다(삿16:18), 나타내다(삼상24:18, 삼하19:6), 고발하다(에6:2), 선포하다(시97:6, 렘50:28), 전하다(신5:5, 왕하9:15), 예언하다(사48:14), 풀다(삿14:14), 전파하다(사66:19), 공포하다(왕상1:20), 밝히다(스2:59, 느7:61), 가르치다(삼상9:18), 일러주다(삼상23:11), 대답하다(왕상10:3, 대하9:2), 보고하다(왕상20:17), 비난하다(욥17:5).
구약 성경 / 369회 사용
애급
애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미츠라임"입니다.미츠라임은 함의 아들이며 그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미스라임(창 10:6) 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미츠라임은 <미 + 챠르 + 임>
1. 미는 명사형을 나타내는 접두어
2. '좁다'는 뜻의 동사 챠라르에서 온 '챠르'는 본디 좁은 곳, 협곡을 가리키는데, 그 뜻이 발전하여 원수, 적대자, 시련 등을 뜻합니다.
3. 임은 복수(plural)을 표시하는 어미
아주 작은(좁은)땅에 사는 히브리인이 아주 큰(넓은) 영토를 가진 이집트를 '좁은 곳'이라 부르는 뜻은?
미츠라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의도적'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미스라임은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성경에는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등 미스라임 후손들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 가슬루힘은 블레셋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팔레스틴(창 10:14)
애급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미츠라임은 "묶다, 포위하다, 제한하다, 대적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검은 땅"이라는 뜻인 "케메트" 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고대에는 검은색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나타나는 비옥한 땅이 검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풍요로운 이미지라고 합니다.
"가나안" 역시 함의 아들입니다.
가나안의 히브리어는 "카난"으로 "겸손하다, 낮아지다, 아래에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역시 "검다"라는 뜻을 지니고도 있습니다.
이렇듯 미츠라임이나 가나안이나 두 곳 모두 함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치는 다르지만 동일한 본질에 속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구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란 존재 자체가 가나안 땅이자 애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현재 광야를 살고 있죠.
우리는 보이는 세상인 애굽을 나와 광야를 지나도 본질은 애굽이라는 실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애굽 그 자체이지만 그 약속, 언약, 그 진리를 가지게 되면 그 언약을 가진 것 자체가 바로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보이는 어떤 곳으로 인식하여 젓과 꿀을 꿈꾸며 가나안 땅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고자 하는 그 열정은 그
가나안 땅도 다시 애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한 열정과 수고는 믿음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행위에 불과한 것
뿐이죠.
많은 이들이 착각합니다.
천국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나를 위해 그 나라에 가고 싶은 것 뿐입니다.
인간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자신을 포장하며 자신이 믿었던 믿음도 자신을 위해 눈감아버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신다구요?
어떤 하나님 나라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고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꿈꾸십니까?
그곳에 가기위해 자신을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투신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십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것에 함몰되어 은혜로 믿는 것 뿐입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기위한 보증수표라는 어처구니 없는 협박에 교회는 놀아난 것 뿐입니다.
거기서
자신은 구원받았다며 은혜를 말하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춥니다. 자신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은혜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 시키기 위해 포장하기에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을 하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담고 있는 자들은 진리로 인해 괴롭고,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자신을 보며 괴롭고, 세상에 부적응하는 것이 힘든 자 들입니다.
그 괴로움속에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에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광야에서 되어졌으면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 땅 자체인 내가 빵만으로 살지않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완성의 말씀"으로 현재 살고 있으면 그것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게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는 마음의 상태의 문제를 그토록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 것 같습니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애굽 역시 가나안이고 가나안이 애굽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가나안이요, 애굽 입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써서 무엇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자신을 여호수아의 양날검인 말씀으로 도륙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2장
10-14-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급을 위한 애가(에스겔 32: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물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Son of man, take up a lament concerning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to him: " 'You are like a lion among the nations; you are like a monster in the seas thrashing about in your streams, churning the water with your feet and muddying the streams.
애급을 위한 애가(Lament for Egypt)
키나 알 미스라임(קינה על מצרים)
애가(7015) 키나[ qîynâh ]
קִינָה
1. 애가. 2. 비가. 3. 예레미애 7:29
어원 / 69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슬픈 노래(삼하 1:17), 통곡(렘 7:29), 슬퍼함(렘 9:10), 슬피 부름(겔 32:16).
[부] 슬피(대하 35:25)
[명] 슬픈 노래(렘 9:20, 겔 2:10, 암 5 : 1), 애통(암 8:10)
구약 성경 / 18회 사용
1. 애굽. 2. 애굽 땅 3. 창세기 45:20
관련 성경 / 애굽(창 45:20, 46:34, 47:6,13, 50:11)
구약 성경 / 680회 사용
1. 옷을 입은. 2. 사무엘하 4:7
발음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1-16 애굽왕 바로 위한 애가.
2-10 멸망된 악어의 비유.
11-16 그 설명. 애굽은 바벨론 왕에게 멸망되다.
17-32 바로와 애굽의 군중을 슬퍼하기 위한 만가(장송곡; 다른 나라의 용사들과 함께 받는 음부의 고초).
에스겔 29-31장에서는 애급과 애급 백성들이 지은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해 받게 될 진노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애급의 심판에 서 진노를 받아야할 세 부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애급, 애급 백성, 애급 왕).
이제까지는 애급과 애급 백성에 대한 심판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32장에서는 애급 왕에 대한 심판 내용을 말씀합니다.
특히 에스겔 32장은 애급을 비롯한 및 이방 심판 예언의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32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심판의 대상을 왕과 백성으로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이전의 내용에서는 애급의 심판의 원인을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32장에서는 심판의 책임을 더욱 개인화, 세분화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심판의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담당한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는 다른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과는 달리 애급의 최종적 상태를 이 세상 질서를 벗어난 스올의 상태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들의 최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애굽 백성을 향한 애가
애굽 백성들의 최종적 상태를 지하세계 즉 스올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심판의 강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에스겔은
애굽과 열방에 대한 심판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데에 있음을 밝힌다.
곧 12절에서는 애굽의 심판 원인을
'교만'으로 밝히고 있고, 19절에서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자의 상태는 반드시 교만으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로서, 칼에 살육당한 자,
생존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한 자, 지하에 내려간 자 등과 동일시되고 있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자는 결코 형통할 수
없으며, 비록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실패를 맛볼 뿐이다. 그때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치 않는
자들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덩이 지하, 음부,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 단어들은 구약에
있어서 지옥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선지자는 이와 같은 지옥의 실제성을 선포함으로써 이방 세력의 회개와 돌이킴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애굽 백성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있다가 결국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본장에 기록된
에스겔의 애가를 통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세상 왕들의 교만을 심판하신 것처럼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 4:6).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유도하므로 온 죄악이기 때문이다(잠 16:18).
성도들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있음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빌 2:12).
성경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인 것이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의 방법으로 성공하려
한다면 비록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실패한 삶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가로 결정되어지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삶만이 성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1-16절)
애굽에 대한 심판이 29장부터 시작해서 32장으로 끝이 납니다. 29장부터 시작된 애굽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섯 번 각각 다른 날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29장에 두 번째 순서로 기록된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제외하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했던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2장에는 두 번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시각이 연월일 표기로 되어 있습니다. 년도의 기준은 이전 본문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바 있듯이 남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힌 해입니다. 32장 1절에서 16절은 애굽의 패망을 악어의 죽음으로 비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애굽이 죽어서 가는 곳, 죽음의 세계 안의 상황을 묘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하나님께서 2년 전 에스겔 선지자에게 애굽 왕을 큰 악어로 비유하시며 애굽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겔29:3)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이 애굽의 강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애굽 왕의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도 애굽 왕의 교만을 책망하시는데 애굽 왕이 스스로 ‘의인’이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여러 나라들이 애굽 왕을 사자로 생각했다고 한 것은 애굽 왕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과시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애굽에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스핑크스라는 석상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그 길이가 약 70미터, 높이가 약 20미터가 될 정도로 거대하며, 그 형상은 머리가 사람이고 몸은 사자입니다. 애굽 왕이 만들었던 스핑크스 석상을 보더라도 애굽 왕은 자신을 ‘의인’이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강물을 더럽히는 큰 악어에 지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강물을 더럽혔다는 것은 애굽이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면서 주변 나라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악행을 일삼았던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4 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5 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에 두며 네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울 것임이여 6 네 피로 네 헤엄치는 땅에 물 대듯 하여 산에 미치게 하며 그 모든 개천을 채우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을 상징하는 큰 악어를 그물로 잡을 것이고 물 밖으로 끌어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이 악어를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악어의 살점들을 골짜기에 두어, 모든 땅이 물대듯 피로 물들 것이라고 합니다. 한 때 애굽이 나일 강물을 공급받아 어떤 나무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백향목과 같았지만, 심판의 날에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해 더 이상 백향목이 살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할 때 애굽의 첫 번째 재앙,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7,8절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 역시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임했던 9번째 재앙인 어두움을 연상하게 합니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은 죽음의 세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해와 달과 하늘에 빛나는 별 등 빛을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차단된 어둠이 임하면 사람은 잠시 동안 생존할 수는 있을지언정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것입니다. 왜 죽음의 세계를 어둠의 세계라고 말하겠습니까? 어둠은 곧 죽음이나 매한가지입니다.
9 내가 네 패망의 소문이 여러 나라 곧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 이르게 할 때에 많은 백성의 마음을 번뇌하게 할 것임이여 10 내가 그 많은 백성을 너로 말미암아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내 칼이 그들의 왕 앞에서 춤추게 할 때에 그 왕이 너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할 것이며 네가 엎드러지는 날에 그들이 각각 자기 생명을 위하여 무시로 떨리로다
애굽의 패망 소문이 여러 나라를 두렵게 하는 이유는 애굽이 패망한 것처럼 자기 나라에도 화가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패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 애굽이 비참하게 패망한다면 애굽보다 약한 나라들이 어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애굽과 같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를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와 협력하여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개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과 잘 어울려 그것을 의지하여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그 사람이 영원한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투자하고 협력한 기업이나 기관, 그리고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이 심란하고 번뇌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할 도구로 바벨론을 정하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애굽이 패망할 것인데 그 이유가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12절) 애굽의 교만은 자신의 부강함이 자신으로부터 기인하였다는 생각입니다. 큰 악어가 자신의 영역인 물에서는 괴력을 발휘하겠지만 하나님의 그물에 잡혀 물 밖으로 나오게 되면 더 이상 물을 흐리지 못합니다.(3절,13절) 악어가 물을 흐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악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악어가 사라지면 물이 탁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14절에 물이 맑아지고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애굽에 의해 억압받는 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회복이라는 좋은 뜻이지만 애굽의 입장에서는 큰 악어로 비유된 애굽 왕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애굽의 권력자가 죽고 애굽이 패망하게 되었으니 애굽 땅은 황폐하게 되어 사막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애굽의 패망을 슬피 노래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16절)
함께 누울지어다(18-32절)
17 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애굽 심판에 대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 말씀처럼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한 시각이 같은 해,
열두째 해에 있었습니다.
‘어느 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기록된 애굽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다섯 번째 심판의 말씀 이후 불과 14일 만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이때까지 여러 나라들의 심판의 예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후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18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 그와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하나님께서 2절 말씀처럼 에스겔 선지자에게 슬퍼하라고 합니다.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이란 애굽과 운명을 같이해 온 나라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애굽처럼 심판을 받을 정도의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누구와 친하게 지내느냐에 따라 빛의 세계로 갈
수도 있고 어둠의 세계로도 갈 수 있습니다. 누구와 친밀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강하다고 하는 것, 최고라고 하는 것,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애굽이 빠졌던 구덩이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 빠지면 죽음의 길로 갑니다.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32장 후반부 말씀은 죽음의 세계를 알려주고 있는데 반복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덩이”, “무덤”, “스올”
이는 어둠의 세계, 곧 죽은 자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 뛰어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지 못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굽처럼 구덩이에 내려간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학식이 많고 아무리 명예가 높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단순히 남성 생식기의 포피를 베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구원받은 자의 표징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며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덩이”, “무덤”, “스올”,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졌던 애굽이 갈 곳은 할례 받지 아니한 자 옆입니다.
셋째는 “죽임을 당한 자”
죽임을 당한 자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해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 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칼입니다. 애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22절에 앗수르,
24절에 엘람, 26절에 메섹과 두발, 29절에 에돔, 30절에 시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죽음의 세계에 있었다는 것은 모든 불의한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보면, 불의한 나라와 불의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칠 정도까지 그들을 증오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불의한
나라와 불의한 사람들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나라가 불의한 나라가 되지 않으며 나 자신이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눕다”
애굽이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서 함께 누울 자들이 누구입니까?
할례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애굽처럼 악한
자들이며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두렵게 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두렵게 했지만 죽음의
세계에서는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끼리 같이 누워있게 됩니다. 32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군사대국과 경제대국의 통치자들의 권력을 누가 주셨겠습니까?
그들이 애굽처럼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약소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라들과 사람들이 애굽이 갔던 “구덩이”, “무덤”, “스올”, “할례 받지 아니한 자”의 세계, “죽임을 당한 자”의
세계에 눕게 되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영원한 강대국이 없으며 일평생 권력을 가진 사람도 없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내리셨던 애굽의 멸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옵소서.
이 시대에 애굽과 같이 부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친하게 지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애굽과 같은 나라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자가 되어 구덩이에 빠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31장
10-13-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에스겔 31: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Son of man, say to Pharaoh king of Egypt and to his hordes: " 'Who can be compared with you in majesty?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Who can be compared with you in majesty?)
엘 미 다미타 베가들레카 ( אֶל־מִי דָּמִיתָ בְגָדְלֶךָ׃ )
엘(413)
[ ’el ] אֵל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 30:40, 삼상3:12, 렘22:11), 때문에(삼상4:21), [부] 서로(렘36:16).
- 구약 성경
- 5464회 사용
구약 성경 / 423회 사용
위엄(威嚴) : 위엄 위, 위엄스러울 복
- 위세가 있어 의젓하고 엄숙한 태도나 기세
위엄(1433) 고델[ gôdel ] גֹּדֶל
어원 / 14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광대함(민 14:19, 시 150:2, 겔 31:18), 큼(신 3:24, 시 79:11, 겔 31:7), 완악함(사 9:9, 10:12), 위엄(신 5:24, 32:3, 겔31:2)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신명기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비하랴(1819) 다마[ dâmâh ] דָּמָה
관련 성경 / 비(比)하다(겔 31:2, 아 1:9), 생각하다(민 33:56, 시 48:9, 50:21), 모해(謀害)하다(삼하 21:5), 비교하다(사 40:25, 46:5, 애2:13), 비유를 베풀다(호 12:10), 생각하다(에 4:13)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때로부터 제십일년 삼개월이 되는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에스겔에게 또 다시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
말씀은 레바논 백향목과 같이 크고 평화로웠던 앗수르와 같은 애급이 그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영광과 몰락을 애급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애급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패망을 예견하라고 경고 합니다.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세와 풍요로 열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그로 인해 교만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게 됩니다.
에스겔은
이러한 앗수르의 흥망을 통하여 애급의 왕 바로에게 경고하며 애급 멸망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앗수르의 영광과
파멸을 통해 애급을 경고하면서, 인간의 권세가 아무리 높아도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죽은 자의 거처에 대한 고대 근동인들의 견해와 비슷합니다.
첫째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욥 10:21-22, 시 143:3)
둘째는 침묵의 장소(시 94:17, 시 115:17)
셋째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자들의 장소(시 6:5, 시 88:10-12)
넷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는 장소(욥 14:21, 전 9:5-10)
이와 같은 음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은 다른 고대 이방 민족과는 달리 독특한 음부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부란 멸절의 장소가 아니라
계속되는 실존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힘이 미치는 곳이라고 합니다(욥 26:6, 시 139:8).
한편 죽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없는 초기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 지대에 이르러서부터 점차 선인과 악인 사이를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구약 중간 지대의 묵시 문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외경 에녹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음부 개념은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임의로 대기하는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처럼 실제한다고 단정 짓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앗수르처럼 더없이 좋은 여건과 환경을 부여받았으나 결국 멸망의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흥왕했으나 그 결국이 쇠잔한 자들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교만의 죄를 지은 자들의 결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악인의 결말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그와 같은 악인들의 유혹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기에,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자세를 잠시라도 놓치면 그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멸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항상 단속해야 한다.
이는 애급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애급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될 수 있었던 못자리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전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의 왕실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일개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어쩌면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한 이집트였기에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주변의 여느 민족들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29장에서 시작된
이집트의 메시지는 모두 일곱 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단락들은 단지 이집트의 죄상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낱낱이 언급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 않습니다.
31장에서는 특별히 바벨론 제국 이전에 세계를 제패했던 앗수르를 이집트의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에스겔 31장 강해 에덴의 나무와 애굽의 나무들 비교
에스겔 31 장 에스겔 31장 18
요절 에스겔 31장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에덴의 나무들은 애굽의 나무들에 비하여 부족하였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레바논백향목)
“1 열한째 해 셋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누구에게 비하랴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5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에스겔이 잡혀온지 제 십일년 셋째 달 초하루에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일개월전입니다 숨넘어가기 바로 직전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애굽같았으면 안 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애굽은 망한다고 합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이집트 왕 바로와 그의 무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위엄찬 모습을 앗수르와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이 앗수르같이 위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전 605년에 앗수르가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 거대 제국의 멸망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앗시리아는 한 때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그 가지가 아름답고, 그 그늘도 숲의 그늘과 같았습니다. 그 나무의 키가 크고, 그 꼭대기는 구름 속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진 나라였습니다. 강대한나라였고 영향력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유라테스 티그리스강 옆에서 성장한 비옥한 나라합니다. 앗수르는 물을 넉넉히 먹고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깊은 물줄기에서 물을 빨며 크게 자랐습니다. 백향목은 25미터 정도 자란다고 합니다. 앗수르가 서 있는 사방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개울물이 흘러, 들의 모든 나무가 물을 마셨습니다. 앗수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잘 자랐습니다. 앗수르는 들의 모든 나무보다 더 높게 자랐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넉넉하여 굵은 가지도 무수하게 많아지고, 가는 가지도 길게 뻗어 나갔습니다. 앗수르의 큰 가지 속에서는 공중의 모든 새가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가는 가지 밑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새끼를 낳고, 그 나무의 그늘 밑에 모든 큰 민족이 자리잡았습니다. 새들이 그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하나님 동산의 백향목)
“7 그 뿌리가 큰 물 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앗수르가 크게 자라서 아름다워지고, 그 가지들이 길게 자라 뻗친 것은, 앗수르가 물이 많은 유브라데스 티그리스 강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백향목들도 앗수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은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가나안땅의 잣나무들도 앗수르의 굵은 가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단풍나무들도 앗수르의 가는 가지들만 못합니다. 가나안이 있는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앗수르처럼 아름답지는 못하였습니다 여호와가 앗수르의 가지들을 많게 하고, 그를 아름답게 키웠더니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가나안의 나무들이 모두 앗수르를 시기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유다에 사는 사람들이 앗수르의 사람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예수 믿는 부자와 미인과 믿지 않는 부자와 미인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상사람들이 더 부자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다양한 나무가 있습니다 백향목 나무 단풍나무 잣나무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름없는 아무 나무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각자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결코 잘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십니다. 병든 자를 부르러오십니다. 연약한 자를 부르러 오십니다. 교회는 죄인 병자 연약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문제가 항상 있습니다. 교회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비교하면 속이 상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투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것에 대해서 긍지를 가져야합니다. 동산 밖의 나무는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동산 안의 나무는 이름없는 아무 나무라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한 가지 종류이지만 하나님의 동산에는 여러 나무가 있습니다.
(앗수르 나무의 파멸)
“1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11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12 여러 나라의 포악한 다른 민족이 그를 찍어 버렸으므로 그 가는 가지가 산과 모든 골짜기에 떨어졌고 그 굵은 가지가 그 땅 모든 물 가에 꺾어졌으며 세상 모든 백성이 그를 버리고 그 그늘 아래에서 떠나매 13 공중의 모든 새가 그 넘어진 나무에 거주하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지에 있으리니 14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앗수르나무와 에덴의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수르 나무의 키가 커지고,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뻗치면서, 키가 커졌습니다. 앗수르 나무는 자라면서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 나무를 민족들의 통치자에게 넘겨 주고, 앗수르는 그 나무가 저지른 악에 맞는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확실히 파괴합니다. 여호와는 앗스르 나무를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뭇 민족 가운데서 잔인한 다른 백성들이 그 나무를 베어서 버렸습니다. 앗수르는 잔인한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그 가는 가지들은 산과 모든 골짜기에 쓰러져 있습니다. 굵은 가지들은 그 땅의 모든 시냇물 가에 부러져 있고, 세상의 모든 백성이 그 나무의 그늘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그 나무를 떠나 버렸습니다. 앗수르를 의지하던 나라가 앗수르를 떠납니다. 그 쓰러진 나무 위에 공중의 모든 새가 살고, 그 나무의 가지 사이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삽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신 이유는 물가의 나무들이 다시는 자란 키 때문에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치솟아 오르지도 못하게 하며, 물을 빨아들이는 모든 나무가 자신의 교만에 머물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죽음에게 넘겨 주어, 지하로 내려가고,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 속에 들어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파멸의 슬픔)
“1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가 스올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깊은 바다를 덮으며 모든 강을 쉬게 하며 큰 물을 그치게 하고 레바논이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들의 모든 나무를 그로 말미암아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16 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의 그 나무가 스올로 내려갈 때에, 여호와가 지하수를 말리고, 강물을 막고, 흐르는 큰 물을 모두 멈추게 하십니다. 앗수르를 성장하게 하던 물근원을 없이하십니다. 또 여호와가 레바논 산으로는 그 산에 자란 앗수르 나무를 애도하여 통곡하게 하십니다. 앗수를 의지하였던 온 누리의 모든 나라의 나무는 그 나무를 애도하고 물이 없어 시들어 죽게 됩니다. 여호와가 앗수르의 나무를 스올로 내려 보낼 때에는,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나무를 그리로 보낼 것입니다. 앗수르의 나무가 스올로 떨어지는 큰소리를 듣고서, 뭇 민족이 벌벌 떨 것입니다. 이미 스올에 가 있는 에덴의 모든 나무와, 물을 흠뻑 먹으며 자란 레바논 산의 가장 좋은 나무들이, 앗수르 나무가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는, 스올에서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앗수르도 망하자 이미 망한 나라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앗수르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살아갈 때 대통령이나 회장인 사람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무덤에 가보면 무덤이 대단하고 크지만 결국은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결국은 시체입니다. 시체는 잠언에 보면 산개만도 못한 것입니다. 산 개가 시체보다 낫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난다 긴다해도 구덩이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모르고 높아지고 가지려고 합니다. 죽으면 소유나 명예나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승에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느냐 벌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인생 살다가 그 따위로 왔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자는 하나님이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애굽도 가야하는 스올
에덴과 레바논의 나무들도 앗수르의 나무와 함께 스올로 내려갑니다.
이미 거기에 먼저 와 있던 나무들, 곧 칼에 찔려서
살해된 자들, 살아 생전에 그 나무의 그늘 밑에서 살다가 스올로 들어온 자들에게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죽는다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여호와는 지금까지 앗수르를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앗수르에서 애굽으로 돌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앗수르를 너는 애굽을 의미합니다.
에덴의 나무들 가운데서 어떤 나무가 애굽처럼 화려하고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이제는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스올로 끌려가서,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섞여,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과 함께 누울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백성 모두가 이렇게 앗수르처럼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애굽의 나무도 하나님의 동산의 나무와 같이
저승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나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은 안 망할 줄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휠씬 잘났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망합니다. 애굽을 부러워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애굽이 지금은 찬란하지만 그들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그들이 별 것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입니다.
이 시대에서는 냉대 받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부요함은 부자와 같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고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