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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수)
예수의 흔적(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
흔적. στίγμα 4742
발음 / 스티그마(stigma)
어원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흔적(갈6:17).
흔적(mark)이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 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는 짐슴에게 불도장을 찍어 소유주를 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노예들에게도 이러한 방법으로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녔다고 자랑합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을까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바울은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럴때마다 바울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한 세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의 모습은 “내가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삶(요 15장)
둘째,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14절)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내가 죽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흔적을 가진 삶은 우리의 교만함과 자기고집, 혈기와 방종, 그리고 타락하는 범죄의 행동이 죽고, 매일 새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18절).
다섯째, 평강과 긍휼의 삶
그러므로 바울은 “이 표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바랍니다.”(새번역 16절)
여섯째,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
골로새서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골3:1-3)고 했습니다.
일곱째, 성령을 쫓아 살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생활
갈라디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 찌니”(갈 5: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의 삶이요, 그리스도의 삶이며 성령의 감동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 흔적을 남기는 성도의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고난의 흔적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경과 사랑의 대상자를 위하여 수고하며 고난을 겪는 것을 기쁨과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위하여 고생하고 수고합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죄악을 대속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수고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겪은 마음과 육신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가 체험한 셋째 하늘의 신비함과 영광을 자랑하기보다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고 자랑한다”(고후 11:30; 12:10)며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고난을 격은 흔적을 자랑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켜 낙타무릎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기에 그의 무릎은 낙타무릎처럼 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기도하는 수고의 흔적을 가졌던 것입니다.
발가락은 벌어져 있고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습니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에서 인상과 용상 합계 326㎏을 들어올려 세계신기록을 5번이나 경신하면서 금메달을 거머쥔 역도 선수 장미란의 손 역시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도 외모가 예쁘고, 연기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녀의 발등은 연습의 흔적인 굳은살 투성이입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뿐만 아니라 TV에 출연하는 달인들의 손과 발도 온통 굳은살과 일그러진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전하다가 고난받은 상처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가 좋아서 그분을 전하다가 매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고후 11:24∼30).
고대 카르타고에는 한니발(BC 247~183)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로마와 알프스 산을 정복했던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던 중 한쪽 눈을 잃고 말았는데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세 명의 화가를 불러들였습니다.
첫 번째 화가가 한니발의 한쪽 눈이 없는 모습을 그대로 그렸더니 “내가 이렇게 못생겼다는 말이냐?” 하고 곤장을 쳐서 내보냈습니다.
두 번째 화가는 한니발 장군의 두 눈을 정상적으로 그려 넣었더니 이번에는 “너는 왜 정직하게 그리지 않았느냐?” 하고 그를 꾸짖고 곤장을 쳐서 내보냈습니다.
이에 모두가 난감해하던 중 세 번째 화가가 찾아가서 정상적인 눈이 보이는 측면 초상화를 그렸더니 비로소 한니발 장군이 기뻐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는 예수의 흔적을 감추지 않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매 맞고,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삶과 인격에서 예수의 흔적을 가지셨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반대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말했지만 바울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변론을 했지만 바울의 학문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던 신체적 약점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적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적 약점을 감싸주었습니다(갈 4:14).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던 열병, 안질, 간질 등의 육체의 가시를 감싸주고 천사같이, 그리스도 예수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을 예수의 종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써내려 가는 책과 같습니다.
내 몸과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켈트 족의 전설 가운데는 ‘가시나무 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시나무 새는 죽을 때 가시나무의 가시를 향해 돌진해 찔리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바울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 보십시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복음의 흔적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난지 팔일이 되면 할례를 받았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그런데 그 때에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기 몸에 지울 수 없는 영적 문신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흔적이었습니다.
대속의 진리, 영생의 복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비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이 가르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모세의 율법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 하는 것이니라”(요 5:39).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4:21).
2. 고난의 흔적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 4:11-14).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인하여 부요하게 되고 높아지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어린 아이의 신앙은 영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4-27).
바울은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 곧 고난의 흔적을 지녔습니다.
3. 죽음의 흔적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1-2, 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살아있는 성자였습니다. 과연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옮긴 발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남긴 발길이었고, 그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요 그의 서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흔적을 지닌 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줄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영원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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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화)
종의 멍에(갈라디아서 5:1)
종의 멍에(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ζυγός, οῦ, ὁ 2218
발음 / 주고스(zügŏs)
어원 / ζεύγνυμι ‘연합하다’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멍에(마 11:29, 행 15:10, 딤전 6:1), 저울(계 6:5).
- 신약 성경 / 6회 사용
ἐλευθερία, ας, ἡ 1657 자유를 한자로 표기하면 자유(自由)
발음 / 에류데리아(ĕlĕuthĕria )
어원 / 1658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자유(롬 8:21, 고전 10:29, 고후 3:17, 갈 2:4).
- 신약 성경 / 11회 사용
* 1658. ἐλεύθερος, έρα, ον
발음 / 에류데로스(ĕlĕuthĕ- rŏs)
- 어원 / 2064의 대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면제된(마 17:26), 자유로운(요 8:33, 롬 6:20, 고전 7:21), [명] 자유인(고전 7:22, 9:1, 갈 3:28, 골 3:11).
- 신약 성경 / 23회 사용
* ἔρχομαι 2064
발음 / 에르코마이(ĕrchŏmai)
- 관련 성경 / 오다(마 2:2, 막 13:36, 눅 1:59), 가다(마 2:8, 막 5:38, 요 3:26), 들어가다(마 2:11,
막 1:29, 11:27), 임하다(마 3:16, 24:39,
골 3:6), 나아 오다(마 7:15, 8:2), 이르다(마 9:1, 27:33, 막 2: 20), 나오다(막 1:45, 요 7:42, 계 7:14), 내려오다(눅 6:17), 나아가다(눅 7:7), 가서 보다(눅 11:25), 돌아오다(눅 12:36), 따르다(눅 14:27), 돌이키다(눅 15:17), 강림하다(살후 1:10), 내리다(히 6:7).
- 신약 성경 / 636회 사용
자유를 한자로 표기하면 자유(自由)
자유(自由) : 스스로 자(自), 말미암을 유(由)
自자는 "스스로, 몸소, 저절로"를 의미하는 自는 본래 사람의 코를 정면에서 본 모양을 뜬 글자로서, 사람의 코를 가리키며 자기를 나타낸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由자는 "말미암을, 까닭, 행하다"등을 의미하는데 열매가 꼭지에서부터 나와 매달린 모양에서 그 뜻을 갖게 된 글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자유라는 말을 글자 풀이하면 "스스로에게 원인이 되다" 또는 "스스로 행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어떠한 것일까? 기독교인의자유에 대한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크리스찬은 가장 자유 하다. 세상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찬의 자유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서 신학자, 노예 해방론자인 호프킨즈(Samuel Hopkins)는 인간의 자유를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가 가장 자유입니다. 그러나 같은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오면 아주 부자유하게 됩니다.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인간 자신에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어야 할 곳에 장소를 얻고 있을 때, 자유로운 것으로서, 주로 자유는 인간의 심혼이 어디에 두어져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1. 히브리어 데도르
- `빨리 움직이다'라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 `자유'따라서 유출의 `자연스러움' 그러므로 `깨끗한' ; 자유, 순수한
2. 헬라어 엘류데로오
- `자유롭게 하다'즉(상징적으로)(도덕적으로 의례적으로 혹은 인간적인 책임에서) `면제되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
압해시스 - `자유', (상징적으로) `용서', 구원, 탕감
3. 한자
타인에게 구속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법률의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하는 말.
자유에 대한 성구
사람이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1. 죄에서 자유
로마서 6:18 -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22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이 되고
로마서 8:2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
로마서 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않음
2. 율법 의식에서
갈라디아서 3: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5:1 -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2:15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육체로 폐하심
3. 사탄(마귀)에게서 자유
창세기 3:15 -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임
누가복음 10:19 -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심
골로새서 1:13 -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
히브리서 2:14 -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함
요한일서 3:8 -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
4. 죽음의 형벌에서
호세아 13:14 -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
이사야 25:8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임
고린도전서 15:55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히브리서 :15 -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심
자유는 누가 주는가
이사야 61:1 - 복음이 자유케 함
요한복음 8:32 - 진리가 자유케 함
요한복음 8:36 - 그 아들 예수님께서
로마서 8:2 - 성령께서
고린도후서 3:17 - 주의 영이
자유주의와 생활
고린도전서 7:22 - 허락된 한도에서
고린도전서 8:9 - 약한 자에게 거친 것이 되지 않도록
고린도전서 10:29 - 판단을 받지 않도록
갈라디아서 5:13 -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
베드로전서 2:16 - 하나님의 종과 같이 생활하는 것
성경이 강조하는 신앙 자유에 대하여 기본 원리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다.
인종, 빈부귀천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존재이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불멸의 영과 하나님의 속성인 지혜와 진선미로 거룩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세째, 자유를 주셨다.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고 양심 위에 자유를 주셨다. 즉, 자유인은 창조함을 받았기에 자유는 사람의 기본 권리이다.
제퍼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
넷째,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
계급(階級)과 귀천(貴賎)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반된다.
이 지구상에는 같은 동족들 간에도 평등 원리를 위반하므로 계급적 차별로 갈등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도에는 4대 계급이 있는데 천민중에도 불가근, 불가견, 불가촉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병이 나도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이와 같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영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것이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여 눈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14:18-21
예수님은 6백년전의 예언이 자기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적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6)
바울은 예수를 전하다가 체포되어 빌립보에 갇혔으나 그의 영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하기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자유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의 면허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책임이 수반된 자유를 갖고 사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사랑이 뒤따르는 자가 거기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은 가장 자유하다.
세상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크리스챤의 자유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the Christian Liberty)’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서 가운데 1장부터 5장 12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본문 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하십니다.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예수님이 대속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다시금 율법주의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만들고 율법주의자들의 종이 되는 어리석은 일을 행치 말라는 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1장부터 5장 12절까지 율법주의를 비판한 사도 바울은 5장 13절부터 6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교훈을 더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13)하십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이제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 된 삶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율법주의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 자유를 남용하는 무법주의도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2절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진리 안에서 주어진 자유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방탕한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진리의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랑의 종노릇하도록 허락된 자유라는 겁니다. 이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I.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1-12)
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1).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자유하는 여자 사라의 후손이 되었으니, 다시는 율법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여종 하갈의 후손이 되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 산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예루살렘에 근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자유함을 얻은 우리가 다시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율법의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2.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 하십니다(2,3).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하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이면 반드시 받아야 했던 할례는 그가 율법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상징적인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할례를 받는 순간부터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가, 이제 다시금 율법의 종이 되겠다고 할례를 받으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사도 바울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3.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하십니다(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하십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스스로 율법의 종이 되려는 어리석은 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부정하고,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창 15:6)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부정하는 자라는 겁니다.
대속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헛된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그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하십니다(9, 10).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하십니다.
율법주의와 같은 이단적 교훈은 진리라고 하는 순수한 가루 반죽을 변질 시키는 누룩과 같습니다. 이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온 덩이에 퍼져 결국 교회 자체가 변질되게 되는 겁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랬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해 사단 마귀가 사용하는 첫 번째 수단이 바로 핍박입니다. 하지만 이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질 땐, 교회 안에 이단적 교훈을 퍼뜨려 교회 자체를 변질시키는 시도를 합니다.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는 조치를 내리기까지 교회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밀리노 칙령이 발표된 이후로 교회는 로마인들이 섬기던 이방 종교와 결합되어 로마 카톨릭이라고 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후로 중세 교회는 1517년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으로 다시금 말씀 중심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되었지만, 최근에는 또 다시 세속주의와 뉴에이지 사상이라는 누룩이 퍼져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배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기복신앙이라는 누룩,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누룩, 신사도 운동이라고 하는 누룩을 퍼뜨리는 어둠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누룩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0).
5.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하십니다(12).
율법주의라는 이단을 퍼뜨리는 자들을 ‘누룩’으로 표현한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하면서(10), 12절에서는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하십니다.
여기서 ‘베어 버리다’는 단어는 할례를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 ‘페리템토’가 아니라, ‘아포코프토’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포코프토’는 단순히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거세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헛된 육신을 자랑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생식기의 표피 뿐 아니라, 생식기 자체가 거세(아포코프토)되는 저주가 임하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하신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육신적인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이 자랑이 저주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던 압살롬이 그랬습니다. 압살롬은 평소 검고 숱이 많은 그의 머리카락이 큰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전쟁에 패한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도망을 치다 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8:9). 율법주의자들처럼 압살롬처럼 육신의 것들을 자랑하는 이들은 이것이 저주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II.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
1장부터 앞서 살핀 5장 12절까지가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러한 자유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방탕한 삶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훈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이지,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한다 하십니다(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육체의 소욕’할 때 ‘육체’에 해당되는 헬라어 ‘사르코스’는 본래 ‘고깃덩이(flesh)’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육신의 정욕(롬 7:5)과 죄악으로 달려나가는 인간의 본성(롬 7:21)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아직 우리 안에 죄의 일락을 즐기는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길 원하는 성령의 소욕과 서로 대적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하십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2.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에겐 육체의 열매가 맺혀진다 하십니다(19-21).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며 싸우는데 이 영적 싸움에서 육체의 소욕이 승리하면 결국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21).
19절부터 21절까지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육체의 열매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이를 크게 나눠보면 성적인 죄들(19)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죄들(20상)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죄들(20하, 21상)과 개인적인 죄들(21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a. 성적인 죄들 - 19절에서 열거하고 있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짓게 되는 성적인 죄들을 묘사한 말씀인데, ‘음행’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라고 해서 여기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어 단어 porn이 파생되었습니다. 음란한 영상들을 즐기고 몰래 그런 일들을 따라하는 행위가 바로 ‘음행’인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아카다르시아’라고 해서 ‘성적인 불결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동성애와 같이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닌 변태적이고 불결한 성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입니다.
‘호색’은 ‘아셀게이아’라고 해서 본래는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지나치게 성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호색’인 것입니다.
b. 영적인 죄들 - 20절에서 열거하고 있는 “우상숭배와 술수”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죄들입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이 만든 형상과 그림을 숭배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믿고 신뢰하는 것 모두를 모두 우상숭배라 할 수 있는데, 현대인들이 숭배하는 가장 큰 우상은 ‘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형통신학, 축복신학이라는 미명하에 맘모니즘이 퍼지고 있는데,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하나님이 아닌 물질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술수’는 헬라어로 ‘파르마케이아’라고 해서 점을 보고 주문을 거는 등 각종 ‘마술적 행위’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witchcraft(KJV)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최근 술수, 다시 말해 마법을 소재로 한 해리포터의 소설과 영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해리포터 분장을 하고 마녀들의 축제인 할로윈 데이를 기념하는 교회까지 생겨나고 있는데,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사탄이 교회라 해야 합니다. 술수를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셨기 때문입니다(21).
c.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20,21)는 공동체, 특별히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교회 안에서 거짓 교훈을 전파하는 이단들을 물리치고, 시기와 분쟁과 다툼을 버림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d. “술 취함과 방탕함”(21)은 개인적인 죄입니다. 매일 술에 취해 탕자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하십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e.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하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스스로 구원받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자신이 맺는 열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열매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3.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하십니다(22, 23).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죄악된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22절과 23절에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가 소개되고 있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그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은 헬라어로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라고 되어 있고, 기쁨을 의미하는 ‘희락’은 ‘카라’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에이레네’라고 번역된 ‘화평’은 히브리어 ‘살렘’에 해당되는 열매입니다. 영육 간에 부족함이 없이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래 참음’은 헬라어로 ‘마크로뒤미아’라고 해서 어떠한 시련도 견디어내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자비’는 ‘크레스토테스’라고 해서 관용을 베푸는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양선’은 ‘아가도쉬네’라고 해서 ‘자비’라는 단어의 의미와 비슷하긴 하지만,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뿐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충성’은 ‘피스티스’라고 해서 영어로는 faithfulness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맡은 일, 특별히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온유’는 ‘프라위테스’라고 해서 ‘이웃을 향한 윤리적인 관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지막으로 ‘절제’는 ‘엥크라테이아’라고 해서 육체적인 소욕을 이겨낼 줄 아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9가지 열매 가운데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인 ‘사랑’이 그 첫 번째로 열매로 소개되고 있고, 육신의 소욕을 이겨내는 영적 도덕적 능력인 ‘절제’가 마지막 열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9가지 열매 가운데서도 이 두 가지 열매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우리 모두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으로 행하라 하십니다(24, 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십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하십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 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죄에서 마귀에서 저주에서 구원하고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1.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 원죄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잉태될 때 모태에서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태어날 때도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 ' '예수 안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법 없이 살 사람이라도 아담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죄의 사슬에 묶여 태어났으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그대로 살면 영원한 멸망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착하고 선해도 육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2) 고범죄 (시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우리가 예수 믿으며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리라 하면서도 죄악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같이 맹세하고 다짐해 봐도 역시 죄 가운데 삽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군자 되라하지 아니하시고 예수 안에 거하라 하십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예수 믿는다하며 계속 범죄하며 사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말합니다.
(요일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났음에도 계속 죄 가운데 있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신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 시키십니다.
(롬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3) 용서받지 못할 죄
(요일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히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마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2. 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요8:33-36)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1) 죄를 지면 죄의 종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무리에게 바울은
(롬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11-13)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2) 마귀 따르면 마귀 종
마귀 따르면 마지막은 마귀가 가는 지옥에 갈수밖에 없습니다.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의 종이 된다는 것은
①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을 말합니다. 이단사설
(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②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자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③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는 행위
(계16:10-11)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욥기에 마귀는 욥을 참소(헐뜯다)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를 참소합니다.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자가 쫓겨났고
3) 회개하고 마귀 쫓아내고 예수님께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어야합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신앙이란 순종이요 믿음도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가 가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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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월)
해산하는 수고(갈라디아서 4:19) ὠδίνω 5605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My dear children, for whom I am again in the pains of childbirth until Christ is formed in you.
ὠδίνω 5605
발음 / 오디노(ōdinō)
- 어원 / 560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해산하다(갈 4:19), 산고(産苦)를 겪다(갈 4:27).
- 신약 성경 / 3회 사용
* 5604. ὠδίν, ῖνος, ἡ
발음 / 오딘(ōdin)
- 관련 성경 / 재난(마 24:8, 막 13:8), 고통(행 2:24, 살전 5:3).
- 신약 성경 / 4회 사용
μορφόω 3445
발음 / 모르포오(mŏrph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ορφώθην, 3449와 동일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형상을 이루다(갈 4:19).
- 신약 성경 / 1회 사용
- * 3449. μόχθος, ου, ὁ
발음 / 모크도스(mŏchthŏs)
어원 / 3425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애씀(고후 11:27, 살전 2:9, 살후 3:8).
- 신약 성경 / 3회 사용
- * 3425. μόγις
발음 / 모기스(mŏgis)
어원 / 기본형 μόγος ‘고동’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몹시(눅 9:39).
- 신약 성경 / 2회 사용
해산하는 수고( the pains of childbirth)
첫째, 산모의 마음(요한복음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산고(産苦)라고 합니다.
그토록 힘든 고통을 경험한 산모가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또 다시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을 얻는 기쁨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모정(母情)
아이를 낳는 것이 힘든가? 아니면 낳은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더 힘든가? 라는 질문에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아이 낳는 것보다 낳은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합니다.
셋째, 스승의 마음(전도서 12:11)
사부(師父)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잘 배워서 사회에 나가 필요한 일군이 되는 것에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넷째, 아버지의 마음(고린도전서 2:16)
부정(父情)
유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품군으로 살며 바이나 실컷 먹겎다고 다짐하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는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라며 아들을 품군이 아니라 상속자로 받아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1절에서는 사람 난 기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해산의 수고라는 과정을 통하여 복음으로 무장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에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자세를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얼마 후 바울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아드리고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하여 의심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으면 그들을 다시 품고 해산의 수고를 하듯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을 결단을 하겠습니까?
가르침을 배신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들을 가슴에 품었을까요?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풍토가 익숙한 현실에서 아직도 생명을 사랑하는 바울과 같은 믿음과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복음의 참된 일군만이 갖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뜻이 다르기 때문에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는 조급한 세대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온전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산고의 고통까지도 감당하려는 바울의 믿음을 생각하며 너무 쉽게 생명을 포기했던 지난 날의 실수와 잘못을 뉘우치며 생명을 사랑하는 수고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에 열심히 하던 어떤 집사님이 공장을 세 개나 짓더니 사업에 바빠 교회와 멀어졌으므로 심방하셨던 목사님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김집사님이 너무 바빠서 주일예배에도 참석 못합니다.
신앙생활에 불편함 없도록 공장 두 개는 불태워 주옵소서!”
깜짝 놀란 집사님!
두 손을 가로젓던 그 집사님이 다음 주일예배에 참석했음은 물론입니다.
하나님보다 공장에 불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속으로는 내가 왜 그 교회에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후회도 하고, 마음으로 얼마나 그 목사가 꼴 보기 싫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과거를 회상합니다(13-14절)
바울에게는 육체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안질, 간질병, 말라리아의 후유증, 담석 등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본인도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시험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제병도 못 고치면서....사도가 뭐 저래!
복음이 믿을만 한가?
외모도 그렇게 출중하지 못해!
말도 잘 못해!
바울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말에는 졸하나......’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달변가도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 시험들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대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눈이라도 빼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도, 종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사도도 성도들도 얼마나 행복했을까?
영적인 행복감은 목회자와 성도가 일치감을 갖게 될 때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연약한 육체 안에서 빛나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았고 또 자기들의 존귀함을 되찾게 해준 이 복음 전도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떠난 이후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의 관계가 대단히 악화된 상태에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그저 좋은 관계였을텐데 바울이 그들을 염려해서 무슨 말을 한 것이 그들의 심사를 틀어지게 해서 아주 나쁜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날 공과공부 제목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여러분, 내가 만일 집을 팔아 몽땅 교회에 헌금한다면 천당에 갈 수 있겠죠?”라고 묻자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선생님은 “그러면 내가 매일 교회 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는다면 천당에 갈 수 있겠죠?”라고 하자 이번에도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섯 살 먹은 사내 녀석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선생님이 죽어야 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죽어야 되는 일이 많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바울이 양보하고, 이해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에 관한 일입니다.
신앙의 원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처음 느꼈던 아름다운 감사가 왜 없어졌습니까?
복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유치한 복음의 영역이 아닌 현대감각에 맞는 믿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평생 예수 믿어 교회에서 헌신함으로 큰 교회에서 장로가 된지도 13년이 되었는데, 그분이 고백하는 말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잘 몰랐다!’는 겁니다.
그냥 어려서부터 착하고 살고, 정직하고, 교회 열심히 잘 나가니까 그것이 신앙인줄 알았는데 또 그런 나를 참 훌륭한 신앙이라며 장로로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 예수의 보혈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수십 년 예수 믿으면서도 착하게 살기만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신앙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일년에 한명 전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정말 감당해야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에는 주일에는 돈을 사용하는 것을 죄악시 했습니다.
아직도 이런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 믿는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교훈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교훈입니다.
이단이라고 할 만큼 본질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질환에 "둔주" 라는 질병은 내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나를 모른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 둔주는 도망쳐 달아남을 뜻한다.
* 둔주는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여기저기를 배회함을 뜻한다
* 해리장애의 일종으로 기억상실과 동반되어 일어나는 장애로서,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identity)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회상하지 못하며 일부 혹은 완전히 새로운 주체성을 갖는 상태.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신이라면 인정하기가 쉽겠는데 동정녀 탄생을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빼놓고 믿으려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면 이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이 둘을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신적인 모습을 믿지 못하면 안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보혈의 대속이 없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영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재림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유보적이고 일부분만 인정하면 이단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이고, 복음의 근본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들었던 계시의 말씀을 한번도 본적이 없고 통성명한 적도 없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를 만나보니 다 같은 말씀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성이라고 합니다.
사도성이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일 예배가 다 연결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고향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전혀 다릅니까?
어느 교회가든지 같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사도성이란 복음의 동질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서만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특별한 말을 들었다면 가짜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비 진리에 미혹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왔기에 신앙의 동질성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원수가 된 겁니다.
신앙이 달라지면 같이 할 수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에 아무리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열심을 낸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돌이키라!
믿음으로 이전에 가졌던 관계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질에서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바울에게 간절합니다.
성도여러분!
지금은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이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야 할 때입니다.
오늘 바울은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성숙해집니다.
교제가 없는 사랑의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제가 멀어지면 관계는 소원해지고 결국에는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복음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의 채널이 다르니까.
아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원합니다.
정서적인 안정감을 갖기를 원합니다.
부모된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게 될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부모의 눈길을 피하려하는 아이는 이미 정서적으로 걱정스러운 상태입니다.
사랑의 기본은 마주 보는 것입니다.
눈동자를 마주쳐야 합니다.
눈길은 교제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눈길이 쌓여질 때 행복한 아이로 자라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 눈길을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왜 자꾸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십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십니까?
왜 들으려 하지 않으시지요?
성도의 신앙 성장단계는 다섯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는 말씀만 받아먹는 단계
전적으로 목사에게 의존하는 단계이므로 양육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는 단계입니다.
주는 말씀만 받아먹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단계
입니다. 목사의 가르침을 의존하면서도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주는 말씀도 받아먹고 자신도 말씀을 먹는 단계
목사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의지하면서 영적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QT도 노력해 봅니다.
자신이 말씀을 먹는 단계
목사에게 배운 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만드는 단계입니다.
성경읽기와 묵상을 통해서 영적 필요의 대부분을 채우며,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책임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압니다.
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먹이는 단계
이제는 교사로서, 사역자로서 누군가의 격려자 역할을 하는 단계입니다.
스스로 신앙을 정리하고 개혁하며,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단계입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이 때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장성하여서 평신도 동역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 자라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역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더 배워야 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법을 더 익혀야 합니다.
자기 기분에 이끌리는 헌신은 본인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결코 좋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새로워지며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D 업종 :
1. 더럽고 (dirty)
2. 어렵고 (difficult)
3. 위험한 (dangerous) 분야의 일을 통칭.
예를 들면 제조업, 광업, 건축업 등이 있음.
오랫동안 3D업종은 꺼리는 직업으로 여겨졌다.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하대하는’ 사회적 시선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온 말로, 원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어렵고 힘들어서 구직 희망자를 구하기 어려운 직업을 이르는 용어로 쓰였다.
그랬던 것이 3D업종인데도 보수가 적은 일감이 나오고 있고, 이러한 직종은 임금이 적어서 구직자가 몰려오지 않는다는 편견 및 고정관념으로 인해 뼈 빠지게 일해도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연봉이 적은 직업 전반을 이르는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대체로 이러한 직종은 열정페이에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들어오는 수익은 적고, 그렇다고 직원을 무보수로 굴릴 수는 없으니, 형식적으로나마 월급을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로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인권 등을 앞세워야 돈을 못 벌면 본인네가 망할 뿐이다.
다만 이경우는 전자의 3D업종과 의미가 겹치지 않는다.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이래 현재 시점으로 '3D 업종'으로 흔히 부른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고강도 저보수의 업무와 직업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느정도 지양 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3D의 요건을 충족하나 그만큼 고임금과 복지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
10년 전 미국의 PayScale은 3D업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3D를 'Decent(수익이 좋은)', 'Dangerless(위험하지 않은)' 그러나 'Dirty(지저분한)' 직업으로 분류했습니다.
즉, 조금 힘든 점을 감내한다면 수입도 높고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 직업인 것이죠.
그렇다면, 해외 취업에 유리한 3D업종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오늘 준비한 주제는 '해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3D업종'입니다.
이에는 어떤 직종이 있으며 어떤 기술을 획득하는 것이 좋을까요?
폐기물 관리 연구원
배관공
전형적인 블루칼라 직업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수익이 좋은 대표적인 3D업종으로 분류되는 배관공. 이는 도시화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력이 곧 수입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일단 현장에서 일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직업이기에 이 직업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다만 국내와 국외의 환경 자체가 달라서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제법 인지도가 높은 직업입니다. 배관공의 평균 연봉은 5만 2천 달러에서 6만 8천 달러로 한화 약 6천 2백만 원에서 8천 2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석유 시추 작업가
치위생사
한국에 온 외국인이 경악하는 것 중 하나가 '공공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외국에서는 타인의 입속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는 간단하게 가글로 끝낸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와 다르게 외국에서 치위생사는 3D업종에 속한다고 합니다. 치위생사의 역할은 치아관리 및 치료에 있으며, 전문적인 자격증 또는 학위가 필요합니다. 치위생사의 평균 연봉은 6만 9천 달러로 한화 약 8천 2백만원에 해당됩니다. 이외에도 해외에서 유망한 3D업종에는 장의사, 광부, 화장실 청소부, 범죄현장 청소부 등이 있는데요.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3D직종이 사전적인 의미의 3D(Difficult, Dirty, Dangerous)만 옳은 표현이며,
연봉이 적은 직종이라는 의미의 3D는 틀렸다는 의견도 있는데,
대부분의 대중들 사이에서 후자의 의미로 쓰이는 3D가 널리 통용된다면 이 의미도 표준어는 아니더라도 은어 정도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이 의미가 틀렸다며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몇몇 사이에서 표준어 제일주의에 입각한 훈장질로 비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과거에는 자국민을 그대로 투입했지만 임금 수준이 올라가면서 일부는 외국으로 이전했고, 일부는 '고용허가제'라는 이름하에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다 쓰면서 상당수의 영세 3D업종의 실무 기술자들이 외국인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주로 외국인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경력이 필요한 장기 경력자나 아니면 대개 임금은 적지만 노동 강도도 상대적으로 낮은 직종(주로 비정규직)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단 영세하지 않고 봉급이 어느 정도 나오는 3D업종은 한국인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현재 문제가 되는 중소기업의 열정페이는 중소기업 고용주의 인건비 절감 꼼수로 인해 나오면서 3D의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다만 이 쪽은 3D보다는 블랙기업에 더 가깝다.
요즘은 3D라도 급여만 충분히 높으면 기피하지 않으며 차츰 3L(Long time(장시간 근무), Low pay(저임금), Low holiday(낮은 휴일, 즉 비상상황 대비로 인해 휴일이 없는)) 업무가 기피하는 업종이 되고 있다.
공무원도 점차 갈수록 3D 업종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응? 공무원처럼 즐겁고 재미있고 편안하게 일을 하면서 안 짤리고 월급&연봉이 따박따박 칼같이 오르는 유토피아 직장인 공무원이 무슨 3D 업종?"이라며 강력히 반문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사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공무원들의 잔혹한 현실이 많이 까발려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의원면직률과 주 5일 근무제 및 주 52시간 근무제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공무원 특성상 격무를 넘어선 폭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과로사로 인해 요절을 한다든지 자살을 한다거나 분노한 민원인들에 의해 타살까지 당하는 등 그야말로 추악한 현실을 제대로 보여준 탓에 20~30대 취준생들의 공무원 선호도가 점차 떨어지게 된 것이다. 설령 공무원이 되더라도 매우 기뻐하기보다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매우 슬퍼하는 경우도 상당히 늘어났다. 괜히 2022년 이후 공무원 경쟁률이 대폭 하락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공무원이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한 직장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셈.
어느 사회든지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쉽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질자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려운 일자리는 제3세계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한다고 합니다.
놀았으면 놀았지 수고가 많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고가 많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중소기업들은 우리보다 경제생활이 못한 외국인 근로자를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수입해다가 그 자리를 보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병리적인 현상은 산업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신세대들은 결혼하고서도 해산하는 수고가 싫고, 자녀 기르는 수고가 싫다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경우가 20%에 육박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수고 기피 현상이 성도의 신앙생활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수고스러운 일은 서로 맡아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게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 좋은 목회자가 어떤 목회자냐 하면 수고할 것이 전혀 없는 교회, 그리고 성도를 수고롭게 하지 않는 그런 목회자가 좋다는 것입니다.
안일무사가 최고의 가치처럼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를 찾아왔는데 교회마져 이것 저것 머리 아프게 하고 수고롭게만 하는 것엔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세상적인 수고를 해야 사람노릇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교회적으로 영적인 수고를 해야 교인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 없이는 기쁨도 없고 보상도 없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을 보면 옆에서 보고 듣기가 민망할 만큼 고통스러워합니다.
어떤 경우는 사경을 헤메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고통이 있는 순간에는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그 고통을 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해산의 고통이 크지만 자기를 빼닮은 자식을 품에 안은 여인의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수고는 해볼만한 수고 입니다.
영적인 산고 역시 해볼만한 해산의 수고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수고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수고 없이 응답받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는 수고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즐거움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직고하는 공통이 없이는 용서 받는 감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고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네기 공대라고 하면 명문중의 명문입니다.
그렇다면 카네기 출신에게는 100% 성공이 보장된 것일까요?
답은 '아니올시다'였습니다.
물론 후광효과는 얻겠지만 학교가 출세까지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집단에게도 그러하듯 그들 중에도 성공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실패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카네기 출신 중 성공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공비결'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전문 지식이나 기술은 성공하는 데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머지 85%는 좋은 사람들에게서 얻는 힘에 있었다."
뜻밖의 보고에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특히 그들은 '세 가지 방문'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입의 방문', '손의 방문' 그리고 '발의 방문'입니다.
'입의 방문'은 칭찬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며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진솔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었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찾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입품'과 '손품' 그리고 '발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명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갈라디아 교인을 위한 수고를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의 수고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갈라디아교인들을 위하여 영적인 산고를 겪은바 있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로 인하여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떠난 후에 유대인들이 와서 유혹하는 바람에 그만 믿음에서 흔들이게 되었습니다.
바울 당시는 목회자 정착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회전도목회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놓고 다른 곳으로 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태어나게 한 그 교회가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데 있어서 수고 했던 것과 같이 이제는 다시 갈라디아교인들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영적산고를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산하는 수고는 처음 출생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이미 출생했던 생명을 품에 품고 성장시키기 위한 고통의 수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육을 위한 수고이며, 성장을 위한 수고이며, 성화를 위한 수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수고하는 중에 오는 즐거움이요 또한 그 수고가 지나간 후에 오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어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단회적이고 일회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화를 이루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기 자신에 의한 고통의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재적으로 여러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그것은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지 얼마 되지 않는 초보의 신앙인이 십수년 동안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여류작가가 자신의 저서에 써 놓은 무디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무디 선생은 크리스챤이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성경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 말씀에 빨리 순종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디 선생의 생활이 일부 믿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성장은 여러해 동안 구원을 받았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주안에서 성장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주 교회에서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체험들을 교인들과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이 무디 선생의 모범된 생활에 자신들의 체면이 손상 되는 것을 느끼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의 삼촌을 찾아가 조카를 잠잠케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의 영적인 풍성함과 끊임 없는 열정이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의 어린애처럼 엄지 손가락을 빨고 있을 때 무디 선생은 이미 그런 시절을 넘겼고 그들이 좌우로 기웃거릴 때 무디 선생은 그들이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성장했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류작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미 손가락만 빨고 어린양 하며, 좌우로 기웃거리고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과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합니다.
죽어가는 영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믿음의 자녀를 낳는 행위는 영적인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해산하는 수고 없이 되려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즉 산통을 느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죽어가는 영혼 즉 믿지 않는 영혼을 보면 산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 중에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들을 위해서 산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병든식구들, 어려움당한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산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산통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하나 다른 이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데 있어서 그 신앙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입니다.
사람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마음, 그 인격, 그 영혼, 그 삶속에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계속해서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조금 했다고 멈추면 안됩니다.
주님을 날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도 주님처럼 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일을 수고 없이 해치우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차츰 수고 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도 덜하고 감격도 그렇게 크질 못합니다.
심프슨 목사에 대한 일화 :
어느날 아침 심프슨 목사님 댁에 머물러 있던 한 손님이 서재쪽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그를 깊이 감동시킨 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프슨 목사님이 세계지도가 그려진 지구본을 양팔로 껴안은 채 책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양볼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그는 죄악속에서 방황하는 세상사람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죄악 많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고통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산고를 통하여 인류를 다시 낳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 전도한 형제를 위하여 다시 한번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맙시다.
이 고통 이 수고야 말로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요, 최고의 사랑이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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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토)
몽학선생(蒙學先生, 파이다고고스. παιδαγωγός)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란 예전에 한국에서는 양반들의 자녀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부모님에 대한 예절 교육을 맡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직접 자기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이렇게 인사하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몽학훈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몽학선생이란 몽학훈장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고대 로마와 희랍에서는 몽학선생을 "파이다고고스(蒙學先生, παιδαγωγός)"라고 합니다.
'파이다고고스'는 "파이스(어린이)"와 "호대고스(인도자)"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파이도스' 라는 말은 철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않고 마구 뜯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고고스' 라는 말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다고고스라는 뜻은 어린이를 인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παῖς, παιδός, ὁ or ἡ 3816
발음 / 파이스(pais)
- 어원 / 3817에 유래한 듯
- 관련 성경 / 사내아이(마 2:16), 하인(마 8:6, 8, 13), 종(마 12:18, 눅 1:69, 행 4:30), 신하(마 14:2), 아이 (마 17:18, 눅 8:51).
- 신약 성경 / 24회 사용
* 3817. παίω
발음 / 파이오(paiō)
- 관련 성경 / 치다(마 26:68, 눅 22:64, 요 18:10), 쏘다(계 9:5).
- 신약 성경 / 5회 사용
발음 / 아고(agō)
- 관련 성경 / 끌려가다(마 10:18), 끌고 오다(마 21:2, 눅 19:30), 이끌리다(눅 4:1), 이끌다(눅 4:9,
히 2:10), 이끌다(눅 4:29),
데리다(요 19:4, 행 17: 15), 끌어가다(행 9:21), 잡아오다(요 7:45, 행 5:21), 인도하다(요 10:16, 롬 2:4), 붙들다(행 17:19),
데려가다(행 21:34), 데려오다(행 25: 6), 들어가다(행 23:10).
- 신약 성경 / 67회 사용
발음 / 호데고스(hŏdēgŏs)
- 어원/ 3598과 223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인도하는 자(마 15:14, 롬 2:19), 인도자(마 23:16, 24), 길잡이(행 1:16).
- 신약 성경 / 5회 사용
몽학선생(paidagōgos)은 노예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돕는 일종의 가정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초등학문을 가르쳤으며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으며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했고 그들을 훈련시킬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분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노예였고 그들의 기능은 주인집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만 필요하다는 한시적인 관계였습니다.
파이다고고스는 여러 노예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인정된 사람을 선택하여 아이들이 통학하는 길에 보호자 겸 안학교에 가는 길에 보호자로 인도자 역할을 합니다.
또한 기초 문자와 글을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러한 일은 아지가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하여 대략 열 여섯 살이 되면 그 역할이 끝맺습니다.
파이다고고스의 역할이 끝나면 다시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고 하였을까?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율법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것은 믿음이었다(로마서 4:3, 갈라디아서 3:6, 야고보서 2:23)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의 왼손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오른손은 은혜라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가 사도 바울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여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을 말한다.
헬라어로 아이(파이스. pais)의 인도자(아고고스. agogos)란 뜻을 지닌 이들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6-16세의 어린아이의 가정교사
“몽학선생(蒙學先生, 파이다고고스. παιδαγωγός)”이란 "어린아이의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을 말합니다.
특히 헬라 시대의 몽학선생은 가르치는 교사라기보다는 아이들을 돌보고 감시하는 충실한 노예를 지칭합니다.
몽학선생은 누구인가?
몽학선생(paidagōgos)은 노예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돕는 일종의 가정교사였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초등학문을 가르쳤으며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으며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했고 그들을 훈련시킬 권리도 주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분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노예였고 그들의 기능은 주인집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만 필요하다는 한시적인 관계였다.
왜 바울은 율법을 이런 몽학선생에다 비유했을까?
율법의 역할이 과연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주는 것인가?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 그의 책임을 다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면 율법은 그 준재 가치를 상실하는가?
어떤 학자들은 몽학선생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라고 주장한다.
율법은 계속 존재하지만 율법의 정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울이 말한 몽학선생이 율법의 정죄라고 하기에는 문맥상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몽학선생을 율법이라고 할 때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 되는가?
율법에는 의식법(ceremonial law), 건강법(health law), 시민법(civil law), 도덕법(moral law) 등이 있다.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는 구약의 모든 의식법(儀式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을 때 모두 폐지되었다(히 9:26).
원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형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에게만 해당되는 많은 관습법이나 시민법 등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 벼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돌비에 친히 써서 주신 십계명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지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십자가로 오히려 더 완전케 된 법어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은 십자가에서 끝나고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다고 말하여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며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율법과 몽학선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유를 가지고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완벽하지 못하다.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훈련도 시키며 보호하여 안전하게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도록 우리를 돕는다(3:24).
이런 관점에서 율법이 몽학선생에 비유되었다.
그러므로 몽학선생이나 율법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몽학선생 아래” 있는 것이다(3:25).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아들인 것을 잊어버리고 몽학선생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구원받으려 하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의 죄됨을 드러내어 구주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하는 것인데 그 율법을 의지하여 구원을 논하려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학교에 도착한 다음에도 몽학선생은 존재해 있지만 학생은 이제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고 교사 아래 있다.
몽학선생의 비유는 십자가 이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쉬우나 율법은 십계명으로 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몽학선생의 비유는 몽학선생의 존재나 기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몽학선생을 의지해 그 아래서 구원받으려 하는 인간의 시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자녀 됨이 분명해졌으므로 다시는 “몽학선생 아래”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 관습을 예로 들어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합니다(갈 3:23~25).
몽학선생이라는 단어가 개역성경에서는 두 번 나오며, 개역경에서는 몽학선생을 초등교사로 소개합니다.
몽학선생은 몽학훈장(蒙學訓長)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몽학훈장이란
첫째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훈장,
둘째는 겨우 어린아이나 가르칠 정도의 훈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정식 훈장이라기 보다는 보조교사 혹은 초보교사라고 하겠습니다.
혹은 어린아이들을 정식교사에게 데려다 주는 보모정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학선생의 ‘몽(蒙)’은 어리석을 몽, 혹은 우매할 몽입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에 대하여 설명하며, 율법은 우리를 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정도의 몽학선생(초등교사)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역할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로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그 이유는 율법이 정하는 온전한 행위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과 은혜는 우리를 의의 이르게 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합니다.
몽학선생에 목매달지 말고 진정한 스승이며 완전한 교사이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몽골족속들을 무시하여 그들을 몽고고족(蒙古族)이라 비하 하였으며,
지금도 몽골리아(Mongolia)를 몽고(蒙古)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원래 몽골리아는 몽족이 중심(골, ГОЛ)이 되어 세운 나라라는 뜻입니다.
몽골리아는 자신들이 몽고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몽학선생이란 영어 성경에서 튜터(tutor. 가정교사), 트레이너(trainer. 훈련자), 카스토우디언(custodian. 후견인, 관리인)으로 표현되는 등 여러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왼손으로는 율법을 오른손으로는 은혜로 세상을 다스린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왼손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오른손은 은혜라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것은 믿음이었다(로마서 4:3, 갈라디아서 3:6, 야고보서 2:23)
후견인, 곧 몽학선생은 옛날 우리 나라의 양반 가정에서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학선생이라는 말 자체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개념이 성립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전하고자하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 앞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였느냐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그것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을 전개함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믿고 지켜온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동안은 오직 율법이라는 교리와 자세로 지내왔는데 오늘에 와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었으니 자연 양자의 관계성을 논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주의를 은혜로써 극복하는 교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계단 더 나아가 그 은혜를 법적 관계에서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율법의 논리에 의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아도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수준과 논리적인 전개는 20세기의 오늘에 와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로 높은 경지의 변증적인 이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첩경이 되는 것은 그가 설명하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일입니다.
이는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간에는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교육학적으로 풀이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과 은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교육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적당히 때리고 적당히 칭찬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것의 균형을 잃고 너무 자주 매질을 하거나 많이 때리면 의지가 죽어버리게 되어 의기 소침한 아이가 되고 맙니다.
반면에 너무 위해 주기만 하면 영영 버릇 나쁜 아이가 되어 방종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왼손으로 때리면 오른손으로는 어루만져 주는 이러한 균형이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잘 잡히지 않으면 그 자식은 버리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의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교육학적으로도 중요한 원리가 될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대표자인 아브라함과를 대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모세와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모세를 어떻게 균형 있게 바로 이해하느냐하는 것에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첩경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충분히 이해할 정도가 되어야 믿어야할 바의 신앙이 굳게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신학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성숙되는 단계에서는 반드시 이해해야할 기본적 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보는 교리의 핵심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여 주심으로 구원을 얻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모세 이전, 즉 율법이 모세를 통해 가르쳐지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가 율법에 앞서 있어왔던 것이며, 그것은 비록 시간적인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근본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버리거나 결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과 은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율법을 폐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율법 자체를 은혜 중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풀이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의미를 근본 의미인 은혜로 돌아가서 풀이하고 있다는 데에 바울의 천재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율법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오늘본문에 기록한 대로 율법을 가리켜 "몽학선생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비유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가 선포된다면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모세, 곧 율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일단, 율법에 매여 그 율법 안에서 양육되어진다고 하는 이러한 관계를 몽학선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득불 어렸을 때에는 어느 기간 동안 몽학선생 하에 있게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그 어원을 한번 풀이해 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헬라 원어로는 '파아이다고고스'라고 하는데, '파이도스' 라는 말은 철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에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말썽만 부리는 것이어서 교육학에서도 말하기를 그런 나이에는 자연도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이든 꽃이든 가라지 않고 마구 뜯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기간의 어린아이를 가리켜 파이도스라고 하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고고스' 라는 말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다고고스라는 원어의 뜻은 어린이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대 헬라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파이다고고스가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의 연령은 여섯 살에서부터 열 여섯 살 까지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 여섯 살이라고 하면 상당히 자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 때가 더욱 어려운 기간입니다. 아무튼 여섯 살 때부터 열 여섯 살까지의 기간을 몽학선생 아래에 둔다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특별히 귀족의 가정이나, 경제적인 여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자 할 때 이 기간 동안을 몽학선생에게 맡겨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몽학선생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 하는 바가 여러 가지로 많겠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몽학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쉬운 천자문을 가르치고 예법을 가르치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비롯하여 앉고 서는 언행의 일체를 간섭하며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부모님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모님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나한테 절을 하라."고 한다면 그대로 잘 통하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몽학선생이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버릇을 가르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와 히브리의 몽학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학교를 오고 갈 때에도 동행을 하면서 그 출입의 전부를 간섭합니다.
그러니까 한 어린아이에게 전적으로 한 사람이 달려서 열 여섯 살까지 간다는 것이며, 열 여섯 살이 지나야 후견인이 떨어지고 비로소 자유롭게 혼자 왕래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거기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못됩니다.
특별히 개들이 많고 도적도 많으며, 아이들을 유괴해 가기가 쉽고도 많은 때에 돈 많은 귀족의 자녀가 혼자서 밖을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반드시 후견인이 따라다녀야 했던 것인데, 이 후견인으로는 물론 일반인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힘이 세면서도 성품이 좋고 믿을 만한 노예들을 세워서 돌보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 일은 그만 두고 내 아이만을 맡아서 단정하고 훌륭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줄 것을 부탁 받은 이것이 바로 파이다고고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왕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어린아이인 이상 이파이다고고스 밑에 있어야만 합니다.
어린아이란 왕자이든 아니든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이 맞고 때리며 욕하기 마련이요, 불의와는 상관없이 도둑질까지도 재미로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이들이란 분별력도 없거니와 스스로 자기 조정이 안 되는 유치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후견인이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 결과 4장 1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후견인 밑에서 종과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중생한 사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는 마음으로는 예수를 믿으나 아직도 버리지 못한 좋지 않은 버릇들이 남아 있어서 아차 하면 그대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면 매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것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고 몸에 익은 분들은 의례히 그날이 되고 시간이 되면 교회에 나갈 줄을 알지만,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기도가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3년은 걸려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만사가 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매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치한 시절을 지나 성숙해지면 그 때에는 자유인이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며 거의 매사를 저지하다가도 자랄 만큼 자라고 나면 마음 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는 어렸을 때에는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야단을 맞고 벌을 받아야 하던 것이 어느 나이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밤을 새고 들어온다 하여도 상관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순간까지는 엄한 간섭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굳이 오른 손으로 수저를 잡는 것이나 걸음을 걷는 일까지도 쉽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동작 하나 하나는 상당한 후견인의 강한 간섭을 받은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을 보면 열 가지 계명 중 "하라"는 것은 둘 뿐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여덟이나 됩니다.
그러니 만큼 어느 수준까지는 율법에 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하지 말라"에 매여있습니까? 아니면 "하라"는 계명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한한 자유를 느끼면서 아무런 구속함이 없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이대로인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지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
닙니까? 바로 안 된다고 하는 여기에 율법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 아는바 대
로 옛날 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졸리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머리맡에 바늘
이나 송곳 같은 것을 매달아 놓아 꾸뻑하고 졸게되면 거기에 찔려서 잠을 깨게 했다는 것인
데 이것이 다 율법인 것입니다. 아직도 다듬어지지가 않고 세워지지가 않은 유치한 때에는
이와 같은 강한 율법의 제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시민법으로서의 율법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은 하나의 민법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갈라디아서 3:19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곳에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범죄함이 있고 계속 죄에 대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지은 결과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그 형벌까지도 가르쳐 줍니다.
율법에 기록된 형벌들을 보면 "돌로 쳐죽여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등 참으로 무서운
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엄한 벌들이 있기에 죄의 길을 가지 않도록 몽학선
생 밑에서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비록 굴뚝을 청소하고 나온 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얼굴에 새까맣게 묻은 그을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을 봄으로 간음, 도적질, 살인 같은 것들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율법이 없어도 되는 충분한 양심의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롬 2:14-14).
그러나 범죄하여 죄에 익숙한 존재가 되므로 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고 둔해져서 이제는 죄인지 의인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와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율법을 주어서 바른 죄의식을 갖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몽학선생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변증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말은 간접적으로는 율법이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와서 영생의 길을 묻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마 19:16-22, 눅 18:18-23)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이 때에 그 사람은 율법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심히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면서 기다리신 대답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선생님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
습니까? 아무리 지키려고 하여도 저로서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만이 구원을
얻는다면 저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만하고 건방져서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하므로 정말 지켰
나 안 지켰나를 어디 시험해 보자시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
시니 여기에서 넘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을 바르게 지켜보겠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오직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 받을 길은 없습니다.
율법적으로 죄의 문제를 자꾸만 깊이 생각하고 보면, 요즈음 같이 어려운 때에는 살아있는 것까지도 죄가 됩니다.
"베풀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이 있는데 이는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한 베푼다면 어디까지 베풀어야 도적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율법을 놓고는 아무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인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다 지켜보았으나, 그것으로서는 안되겠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도리를 질문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실해 보겠다며 애쓴 사람은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정말 지키려고 했던 사람은 그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킨다고 해보았자, 지키지 않는 것과 오십 보 백 보일 뿐 그게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율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의를 행했다는 말을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나 저러나 다 죄인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하는 것, 그 무엇이고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오직 은혜와 오직 긍휼로 구원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그 무서운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율법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지켜야하는 중요한 생활윤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을 대하는 것은 벌을 면하고자 하거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형벌이 무서워서도 아니며, 이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으니까?'하는 생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을 지키는 것도 '이것 지키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쉬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이제는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의 때가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몽학선
생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로부터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감사와 기쁨
에 가득찬 감격 속에서 그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은 안되고, 저것은 못한다며 벌벌 떠는가하면 감기만 걸려도 내가 또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은데 언제까지 꼭 이래야만 되겠습니까?
그러자니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아직도 몽학선생 밑에
있음으로 매를 맞을까 염려하여 두려워 떨고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기억할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한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을 말합니다.
이는 아직도 몽학선생에 매여 있어야하는 유치한 단계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성숙된 자녀로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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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금)
그리스도와 함께(갈라디아서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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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종(갈라디아서 1:10)
종. δοῦλος, ου, ὁ 1401
발음 / 두로스(dŏulŏs)
- 어원 / 121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종, 노예(마 8:9, 막 10:44, 눅 2:29).
- 신약 성경 / 124회 사용
반대어 ἐλεύθερος. 1658
발음 / 엘유데로스(ĕlĕuthĕ- rŏs)
- 어원 / 2064의 대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면제된(마 17:26), 자유로운(요 8:33, 롬 6:20, 고전 7:21),
[명] 자유인(고전 7:22, 9:1, 갈 3:28, 골 3:11).
- 신약 성경 / 23회 사용
- 다른(6절) 헤테로스 ἕτερος, α, ον 2087
발음 / 헤테로스(hĕtĕ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다른, 또[다른] 하나의, 다른 몇의, 그 밖의.
- 신약 성경 / 99회 사용
- 다른(7절) 알로스 ἄλλος, η, ο 243
발음 / 알로스(allŏs)
- 관련 성경 / 다른(막 15:31), 더러는(마 13:5), 왼편(마 5: 39), 남(눅 23:35), 다른 이(막 12:32), 하나(마 21:33), 어떤 이(막 6:15),
다른 사람(요 4:38).
- 신약 성경 / 155회 사용
그리스도의 종(고린도전서 7:22)
바울은 여기서 "주"라는 단어와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위치를 제 예상과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해방과 예수님의 우리 주인되심을 연관짓고 있습니다("주께 속한 자유인").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노예됨과
예수님의 우리 메시아되심을 연관짓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종").
그러나 사실 메시아는 그의 백성을 압제자에게서 구하기 위해
오셨고, 반면 주인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바울 사도는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두 단어의 바뀐 위치는 우리의 새로운 해방에 두 가지,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노예됨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를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는 우리의 새로운 자유를 확실하고 안전하게 하고 제한합니다.
1. 그의 주되심(lordship)은 다른 모든 주인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해방은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안전합니다.
2. 그러나, 다른 모든 주인들로부터는 자유하지만, 그에게서 자유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자비롭게 제한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노예됨을 느슨하게 해 주며 달콤하게 합니다.
- 메시아는 그의 백성들을 감금의 제한에서 해방시켜 평강의 트인 공간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그의 백성들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이사야 9:7).
-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기 위해 그들을 그의 소유로 삼으십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편 81:16). 이 반석은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1:1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종
고린도전서 7:22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종
갈라디아서 1:10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종
에베소서 6:6 /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종
귀를 뚫는 종(출애굽기 21:1-17) 종에 관한 법
[히브리 남자 노예의 권리네가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법령은 다음과 같다.
2) 너희가 히브리 남자를 노예로 샀을 경우에는 최대한 6년 동안만 일을 시킬 수 있다. 7년째가 되는 해에는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그를 풀어 주어야 한다.
3) 그가 홀몸으로 들어왔으면 홀몸으로 풀어 주고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그의 아내도 같이 풀어 주어라.
4) 그런데 주인이 그 노예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자식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그 아내와 자식들은 주인의 소유인 까닭에 노예만 홀몸으로 나가야 한다.
5) 그렇지만 그 노예가 분명하게 `나는 주인님과 나의 처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혼자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한다면
6) 주인은 그 노예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문짝이나 문설주에 바짝 세워 놓고 귓바퀴를 송곳으로 뚫어라. 그러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주인의 노예가 된다.
7) [히브리 여자 노예 보호 법령]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노예로 팔았을 경우에는 남자 노예들처럼 7년째 되는 해에도 자유로운 몸이 되지 못한다.
8) 그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고 사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몸값을 받고 내보내라.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 여인을 속인 것이므로 이방인에게 여인을 팔 수는 없다.
9) 만일 그 여인을 며느리로 삼으려고 할 경우에는 자기 딸과 똑같이 대우해 주어야 한다.
10) 또한 그 주인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더라도 먼저 여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대주어야 하며 잠자리를 같이하는 일도 그쳐서는 안 된다.
11) 이 세 가지 의무를 주인이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그 여인에게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풀어 주어야 한다.
모세를 통해 고대 근동 사회에 일반적이었던 노예 제도 속에 적용되어야 할 율법이 먼저 제시되고 있습니다.
백성 앞에 세울 법규
(1)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택하신 백성들의 구별된 삶을 위한 지침이 됩니다. 따라서 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보여주며, 이방인과 구별된 삶이 되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남자 종에 관한 법(2-6)
사람은 빈부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각 개인의 생존권과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노예에게도 이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가난하여 빚을 갚지 못할 때(레 25:35, 39), 또는 훔친 물건을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출 22:3) 종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종이 되었다고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종은 6년 동안
주인을 위해 생활하다 일곱째 해에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2).
몇 가지 조건에 따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자유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3-4). 만일 종이 가정을 보존하고 생계유지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는 영구적으로 종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종이 “내가 내 주인과 아내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다”라고 하면 주인은 그를 현관으로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
대고 종의 귀를 뚫음으로써 그 종은 영구적으로 주인에게 속하게 됩니다.
여자 종에 관한 법(7-11)
경제적 압박을 겪는 부모는 딸이 미성년자일 때 결혼을 전제로 딸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건은 딸을 사는 사람이 직접
아내를 맞이하거나 그의 아들에게 주기 위한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남자가 아내로 맞이하기를 포기한다면, 적절한 보상을 한
후에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약속을 깬 것이기에 속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합당한 배상이 이루어집니다. 만일 남자가
여자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서 샀다면, 딸처럼 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또 다른 여자를 아내로 삼을 경우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10),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남자는 여자를 조건 없이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여자 종에
대한 법규에는 여자 종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과 자존감,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 종은 남자 종처럼 6년이
지나면 자유롭게 한다는 규정이 없는데, 이것은 사회에서 경제권이 거의 없고, 사회적 약자였던 혼자된 여자들에 대한 보호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용 : 율법은 경제적·사회적·약자들에 대해 이방 사회와는 달리 인간적 존엄성과 자존감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약자들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연약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현재의 왜곡됨 또는 연약함으로부터 더 이상 부패하지 말고 전심으로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뿌리라는
영화에 보면 흑인들을 팔고 사는 노예의 제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예 시장에서는 흑인들을 사람인데 사람 취급을 하지
아니하고 물건처럼 다룹니다. 그래서 노예를 팔 때 노예 상은 이 사람은 치아가 튼튼해서 일을 잘 할 수 있고, 이 사람은 건강한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종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예를 소개하고 값을 부르면 필요한 사람들이
흑인들을 종으로 사가는 시장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권이 완전히 다 무시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생각할 때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판 노예 시장도 있어요. 요즘도 사람들을 돈 몇 푼에 잡아 철창 속에
가둬 놓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이러한 노예 제도에 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노예제도를 허용하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종제도는 현대인들이 만들었던 노예제도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런 종 제도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느냐 하나님께서 종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이혼하는 법을 허용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켜서 가정을 만들었을 때 절대 헤어지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너희가 나누면 안된다. 그래서 한번 결혼하면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도 이혼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두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하는 추세에 우리가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에서나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혼하려고 하면 이혼 증서를 여자에게 써 주고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종 제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노예제도를 거의 폐지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율법을 적용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노예가 종살이했다가 도망치잖아요. 그러면 붙잡아 갖고 억지로 되돌려 보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대판 노예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도망간 종은 붙잡아 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을 보면 붙잡아 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규정을 볼 때 그러면 누가 종살이 하겠느냐. 종살이 하다가 도망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종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정 반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종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빚을 못 갚았을 때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갚으라고 해서 못 갚잖아요. 그러면 그 빚만큼 사람이 가서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둘째는 옛날에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집도 제공 받으니까 그냥 종이 되겠다고 가서 나를 종으로 삼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이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져서 종이 되는 사람이거나 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문제는 6년까지만 종을 부리고 7년째는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년째 되는 해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집에서 가고 싶으면 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됐는데 나는 계속 종하겠다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종이 나갈 자유가 있지만 나가고 않고 계속 주인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겼을 경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을 데리고 재판장 앞에 가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주인의 평생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의사를 밝힌 다음에 종이 되겠다는 그 종을 데리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귀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면 귀 뚫은 종이 되어서 그 주인의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이 귀를 많이 뚫잖아요. 가끔 남자들도 귀를 뚫는 분이 있는데 귀 뚫는 의미를 알고 귀를 뚫으시기 바랍니다. 왜 여자들이 자꾸 귀를 뚫으려고 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제일 먼저 따먹은 사람이 하와잖아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다가 양심이 껄려 목에 그 씨가 걸렸는데 여자는 거리낌도 없이 싹 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최초로 불순종했던 사람이 하와거든요. 그러니까 하와의 후손들인 여자들이 귀를 뚫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는 이제 평생 귀 뚫은 종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를 다 뚫는 것입니다. 종이 귀를 뚫는 것은 7년째는 나가서 자유할 수 있지만 계속적으로 이 주인집에 남아 평생 종이 된다고 할 때 귀를 뚫습니다. 이렇게 귀를 뚫은 종은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귀를 뚫은 그 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주인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주인과 더불어 평생 살다가 죽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귀를 뚫은 종은 왜 귀를 뚫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5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다” 주인을 사랑해서 귀를 뚫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귀를 뚫는 것은 평생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 강제로 종을 억압 해 뚫는 것이 아닙니다. 귀 뚫은 종이 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자원해서 귀를 뚫고 주인의 평생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7년째 자유인이 되고 나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귀를 뚫어서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귀 뚫는 것은 억지로 뚫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할 때 억지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예배, 자원하는 봉사, 자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고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사람이 있어요. 본인은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남이 갖다가 자기에게 십자가를 져주니까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도대체 내가 왜 예루살렘까지 와서 십자가를 지려고 왔나하면서 원망 불평하면서 갈보리 산을 올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이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시몬처럼 억지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드리는 것은 기뻐하지 않아요. 가령, 새벽 기도를 쉽게 하는 분도 있구요. 어렵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렵게 하는 분들은 왜 어렵게 하는지 아세요?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하려고 그러니까 어렵습니다. 목사님 눈치 봐서 하고 또 무슨 일 때문에 하고, 어떤 형편 때문에 하려고 하니까 지옥같은 것입니다.
세상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여하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행처럼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찻간에서도 하고 기찻간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합니다. 명절 때가 이제 곧 돌아올텐데 성도 여러분들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그것을 좋아하는지 노는 문화도 없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어쨌든 정신을 못 차려요. 불신자건 믿는자든 동양화 나오는 그림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려요. 그리고 날 밤을 새는지도 몰라요. 밤이 2시가 돼도 3시가 돼도 그냥 눈이 벌개 가지고 밤새도록 합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밤새도록 해 봐야 남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 해 가지고 돈 많이 버는 줄 아세요? 떼 돈 버는 것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해 봐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남는 것도 없고, 그냥 허리만 아프고 온 몸이 쑤시는데도 열심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면 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열심히 하면 다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울 때에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사랑이 다릅니다. 집에서 부부가 자식을 생산해서 낳잖아요. 그러면 아이가 어렸을 때는 칭얼거리기도 하고 낮 밤이 뒤 바뀌어서 울기도 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끌어안아요. 남편이 먼저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울지마 울지마 하며 달래 봅니다. 아기가 울지마 한다고 말 귀를 알아듣습니까? 그래서 계속 울잖아요. 한참 울다 보면 에이 신경질 난다고 아이를 팽개칩니다. 남자들은 아이가 보채면 계속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엄마는 그렇게 안해요. 애가 울잖아요. 울고 보채는 아이를 끌어 않고 밤새도록 씨름하며 잠을 설칩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아이 달래 주고 기저귀도 갈아줍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다 해 본 일이에요. 남편과 아내가 왜 다른지 아세요. 남편은 자기 뱃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둘이 협조해서 만들었는데도 자기가 열 달 동안 고생해서 낳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가 밤새도록 보채면 명분이야 좋습니다. 내일 직장도 나가야 되고 해야 될 일도 많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똑같이 고생해서 만들어 놓고 부인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끌어안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를 하고 우리를 낳았어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지면 깨달아 질수록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평생 예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귀를 뚫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귀를 뚫고 평생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은혜 받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 이 종이 그 주인을 위해서 귀를 뚫겠습니까? 이 주인과 평생 살겠다고 귀를 뚫겠어요. 절대 귀를 뚫을 리가 없어요. 귀를 뚫었다고 하는 것은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그 주인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주인과 살면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귀를 뚫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십시오. "큰 은혜를 받아야 귀를 뚫는다." 그래서 6년 지나 7년째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평생 종이 되겠다고 귀를 뚫은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은혜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에 사도 바울은 귀 뚫지 않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느냐 하면 다메섹으로 올라가는데 큰 빛이 바울에게 비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팍 꼬꾸라졌어요. 이때 바울이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주여 뉘시오니이까” 당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이전까지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인물인 줄 몰랐어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님은 안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핍박하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은혜가 무엇일까? 그 은혜는 자기가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었는데도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첫번째 은혜입니다. 나 같이 못된 인간을 주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은혜에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 제발로 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아니하면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10분의 1밖에 안됩니다. 나 같이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고 탕자같은 자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잘 나서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하나님이 불러 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불러 준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은혜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셔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여러분들 부르면 쉽지만 여러분 대통령 만나러 가 보세요. 만날 수 있나. 여러분이 어떻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까? 면회도 안돼요. 청와대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들어갈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시고 오라 하셔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셔야 됩니다. 만나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사해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 주셨어요.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은혜에 바울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바울을 불러 주시고 일감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장관 자리 주면서 부르면 여기 있는 분들 아마 다 달려갈 거예요. 일감 주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교육부 장관하라고 하십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외무부 장관을 하라고 하십니까? 난 그런 것 못합니다. 여러분,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감격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를 부르시다니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주님의 일꾼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지난날의 잘못했던 모두 용서해 주시고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면 네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고 일감을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베드로를 다시 써 주셨어요. 베드로처럼 받은 바 은혜가 크다고 생각할 때에 귀를 뚫게 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그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늘 생각하셔야 되요. 십자가를 통해 받은바 은혜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위해 귀 뚫은 종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3. 주인과 동거하기 위함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주인과 평생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 뚫은 종은 사단의 모든 결박에서 놓임 받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자유한 가운데 주님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뚫지 않았을 때에는 마귀도 섬길 수 있고, 세상도 섬길 수 있고 우상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귀를 뚫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이제 평생 이 주인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이제 내 것이 필요 없게 됩니다. 주인 것이 다 내것이요 내 것이 다 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과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귀 뚫은 후로는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떠날 수도 없지만 떠나지도 않는 종이 바로 귀 뚫은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과 귀를 뚫지 않은 종입니다. 하나님은 귀 뚫은 종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1)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 뚫은 종에게는 이전의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귀 뚫은 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귀 뚫지 않았을 때는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 뚫은 종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말 해 줍니다.
(2) 주인과 더불어서 식탁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은혜를 나누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3) 주인의 모든 것을 맡는 자가 됩니다. 주인이 모든 것을 맡아 감당하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혜가 크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그 하나님과 우리가 평생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귀를 뚫은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21~23장은 ‘언약의 서’(Book of the Covenant)라고 합니다.
줄여서 ‘언약서’라고도 하는데, 출애굽기 24장
7절에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서는 이스라엘의 ‘시민법’(Civil Law)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민사, 형사, 종교법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21장 1절부터 22장 15절까지는 노예제도와 사형제도, 그리고 손해배상제도와 같은 민•형사상의 범죄들과 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로 22장 16절부터 23장 19절까지는 영육을 문란케 하는 죄, 약자 보호, 또는 종교적인 의무 소송과 절기에 관한 법, 여러 가지 특정 분야에 대한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종교에 대한 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23장 20절부터 33절까지로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격려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고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법에 이것을 잘 지키면 복을 주겠다고 격려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고 이렇게 격려해 주십니다. 그래서 언약서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서의 내용은 한 마디로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이 인간 사회 생활 가운데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서의 내용이 인간 사회 속에 일어나는 모든 민사, 형사, 종교적인 문제를 다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모든 것을 다루었다면 아마 출애굽기 21장만해도 분량이 큰 법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경우를 선택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이 인류 사회에 어떻게 적용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도덕법이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원리와 그 원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신정통치’(Theocracy)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직접 다스리시고, 온 국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등장한 모든 정치적인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 영국, 한국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신정통치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 신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지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통치 국가가 없습니다. 신약시대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스라엘’(Israel of God)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시민법에 나타난 법의 정신은 현대 국가에 적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법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신은 시민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의’(Justice)와 ‘긍휼’(Mercy)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동시에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서에 기록된 노예제도와 사형제도를 보면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Ⅰ.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성경에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구절이 있다고 하며 매우 악한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19세기의 흑인들을 사고팔았던 무자비한 노예제도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의 노예제도는 제국주의자들이 약한 나라를 침공해서 식민지로 삼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여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채 사고 팔았던 아주 악한 제도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은 누가 붙잡아서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종이 되겠습니까? 굶어 죽을 형편이 되니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굶어 죽는 것이 좋습니까? 머슴살이라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저 같으면 차라리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은 가난 때문에 스스로 부자 집의 종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종이 되는 것이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빚을 지고 갚지 못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 이후에 그의 부자 친척이 종으로 팔린 그를 위해 팔려갈 때 지불했던 돈을 다시 갚아주면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해방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돈을 대신 물어주는 부자친척을 ‘기업 무를 자’라고 했고, 이처럼 종에서 해방시켜 주는 제도를 ‘구속’(Redemptio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구속의 은혜를 구약성경은 이처럼 그림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예는 구속해 줄 부자 친척이 없는 경우라도 6년을 일했다면 7년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종으로 들어올 때에 단신으로 들어왔으면 단신으로 나가고, 아내와 자식들이 있으면 처자식과 함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되기 전 이스라엘에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이 왔을 경우, 꼭 6년을 채우지 않아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종은 첫째로 자발성이 그 동기이고, 둘째로 기한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6년이 그 기한이었고, 7년째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종은 사실상 ‘연한을 계약하고 노동하는 근로자’(Indentured Servant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가난으로 죽을 형편의 동족을 살려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인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라고 해도 국가가 모든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있는 경우 굶어 죽지 않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상당히 발전된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서에 기록된 시민법을 보면 종에 관한 제도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약한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약자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BC 18세기에 바벨론의 함무라비라는 왕이 법전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그 법전의 조항들을 살펴보았는데, 총 282개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조항이 어디쯤 위치하는 지 알고 계십니까?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내용은 맨 마지막 5개 조항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282번째 조항은 “노예가 주인에게 ‘당신은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노예의 귀를 잘라 버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노예는 귀를 보면 그 종이 주인에게 몇 번이나 대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바벨론의 법은 노예제도를 맨 마지막에 두었고, 하나님의 법은 종과 관련된 제도를 가장 앞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종들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계셨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시내 산에서 법을 주셨는데,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종이 될 때에 ‘그가 단신으로 들어왔는지’, ‘결혼을 하고 들어왔는지’, ‘종이 된 이후 아내를 얻게 되었는지’와 같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세세하게 관심을 갖고 돌보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또 하나님은 종이 7년째 자유를 얻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게 되더라도 또 다시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15장 13~14절에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퇴직금 제도까지 생각해주셨습니다. 6년을 일하고 7년째가 되어 나가게 될 때에는 후히 주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신명기 15장 18절에도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6년을 일했지만 일을 굉장히 잘했으니 더 하면 좋겠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7년째가 되면 자유롭게 해 주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권리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주인의 권리도 합리적으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4~6절에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남종이 6년 동안 일하면서 주인으로부터 한 여종을 얻어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고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면 그 종의 아내와 그 자식들은 여전히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7년째가 되었을 때, 그 남종이 혼자 자유를 얻기보다 처자식과 함께 주인을 섬기고자 하면 주인은 그 남종을 데리고 재판장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재판장은 문설주에다 그 종의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어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영영히 주인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영히 주인의 종이 된다고 해도 그 주인의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종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주인이 죽으면 해방이 되는 것이고, 또 희년이 오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가족을 갈라놓는 악한 제도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종의 주인의 권리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도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그 종에게 준 여종은 주인의 소유 아닙니까? 그러니까 종에게 인격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또 아울러 주인의 소유권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자유를 얻겠다고 나가는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붙여줘 봐야 먹여 살리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에게는 차라리 처자식을 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 주인이 데려다 먹여 살리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법들은 결코 반인륜적이거나 잔인한 법이 아닙니다. 모두 은혜롭고 자비로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여성이 종이 된 경우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과 아이들은 가장 학대를 많이 당한,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도 일반적인 종인 경우에는 6년을 일하고 7년째가 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15장 12절에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1장 7절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왜 출애굽기에서는 나오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 여종이 주인의 첩이 된 경우입니다. 여종이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주인의 첩이 된 경우, 주인이 남편이기 때문에 자유를 얻지 말고 남편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여종이 주인의 첩이 된 경우에는 주인의 첩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모두 누리게 하였습니다. 당시 첩이 된 여종에게는 세 가지 권리가 있었습니다. 21장 10절에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를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첩에게 의복을 사 줘야 하고, 음식을 공급해야 하며, 동침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첩으로서 모든 권리를 다 인정해 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 권리를 주지 않으려면 첩이 된 여종에게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주인이 첩을 삼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그 모습과 전혀 다를 경우 이방인에게 팔지 말고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팔면 7년째 해방될 수도 없고, 첩으로 삼을 수도 없으니 이방인에게 팔지 말고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팔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종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여종을 첩으로 삼고자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린 경우 아들에게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장가를 가서 여종을 아내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종을 아들에게 준 경우에는 그 여종을 딸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8~11절에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 아니하여 상관치 아니하면 그를 속신케 할 것이나 그 여자를 속임이 되었으니 타국인에게 팔지 못할 것이요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접할 것이요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를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전이 살다 보니까 아내 외에 여종을 첩으로 얻었는데 또 하나를 더 얻고 싶을 때, 원래 첩에게 공급해 주던 세 가지 권리는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시내 산에 모세를 불러 말씀하고 계시는 중인데, 이토록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제도에는 이런 자비로운 내용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인의 남아가 태어나거든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성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고 학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애굽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노예제도와 이스라엘의 종 제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노예제도에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노예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공의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성품입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와 돌봐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옷을 주었고,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 35절에도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첫째가 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방법은 끝에 있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서 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첫째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노예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Ⅱ. 사형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이스라엘 국가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할 네 가지 범죄 제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고의적으로 살인을 범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2절에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부모를 때리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유괴한 자(사람을 수하에 둔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괴는 살인죄와 똑같이 취급되었습니다. 16절에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 국가에서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종교시설로 들어가 몸을 피하면 국가권력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살아남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법에는 이렇게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이 설사 하나님을 섬기는 단으로 피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끌어내어 사형에 처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피해 살아갈 수 있도록 처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도피성은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세 곳과 서편에 세 곳이 있었습니다. 이 곳에 피해 있는 사람들은 국가권력이나 피해자의 가족들도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공의가 시행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고의적인 살인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형을 하라고 엄명을 하셨을까요?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의적인 살인죄에 대해서 사형을 부과하신 이유는 살인한 자가 그 사람을 죽일 때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은 특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만의 법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노아에게 주신 법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의 배경은 노아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은 노아의 후손인 온 인류에게 주신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형법 250조 1항에도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살인한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하는 자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유괴사건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어두운 골목을 혼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필리핀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유괴를 당해 행방을 알 수 없는 비극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특히 서울에서도 유괴범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유괴하는 이유는 장기를 적출해서 팔려고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극악무도한 자들입니다.
사람을 살해한 자에게 사형을 부과해야 하는 것은 노아에게 주신 법이고, 이스라엘 국가의 법이며,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만의 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형시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제도의 근본목적은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존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타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통로가 되는 부모님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자는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이 법을 우리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저주한 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겠습니까? 이 법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해야 마땅하다는 정신은 성도들이나 혹은 불신자들이나 인간사회에서 마땅히 강조되어야 할 정신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땅에서 잘 될 수 없고 단명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저주하고 때리는 자를 절대로 잘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언 3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은 까마귀와 독수리가 많이 날아다니는 동네에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것들이 눈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만큼 부모를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만큼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면서도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그림처럼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갚아주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죗값을 다 물으셨고, 하나님의 공의는 완벽히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모든 법률들을 오늘날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런 정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때, 우리 성도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부모를 존중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주의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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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전도 여행
https://biblical-charts.tistory.com/27
* 종(두로스)은 한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이제까지는 율법의 종으로 살아왔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에는 율법의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았다.
철저한 무신론주의자인 포이엘 바하는 자신이 쓴 “기독교 본질”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왜 소외감을 느끼고, 공허감을 느끼며 사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원래 왕인데 그 왕좌의 자리를 예수에게 내어주고 우리 인간이 지금 예수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허전하고 자유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의 왕이다. 예수를 쫓아내고 네가 그 자리에 앉으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라고 말하며, 인간 해방을 주장했습니다.
혹시 포이엘 바하의 이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 보지 않았나요?
창세기 3장에서 마귀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마귀는 하와에게 “선악과 먹어도 괜찮아 너 안 죽어 하나님이 괜히 그러시는거야, 선악과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 너도 왕이 될 수 있어” 한, 마귀의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나의 주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신앙의 본질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에 왕이심을 믿는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직 내 인생에 왕이 아니시라면, 그 믿음은 진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우리는 그의 종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내가 그분의 종이 되면, 우리는 진짜로 존귀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 AD 47-48
사도행전 13-14장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영적 속박을 가져오는 모세 율법의 힘든 “멍에”와 영적 자유를 가져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간의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했다.
갈라디아(Galatia) : 젖과 같이 희다
소아시아 중앙의 고원에 있는 도시.
1. 바울이 1, 2, 3차 전도여행에 매번 들려 전도한 곳(행 14:1, 16:1, 18:23)
2. 베드로도 이곳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벧전 1:1)
갈라디아 지방은 옛지명으로 아시아 지역과 갑바도기아 지역사이에 위치하던 지역으로 터키 중부 지방을 말한다.
갈라디아 지방은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에게 유대주의의 거짓 교사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거하라는 내용의 갈라디아서를 보낸곳이기도 하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중앙 터키에 해당하는 하나의 큰 주였다.
이 주에는 산맥과 넓고 높은 평지들과 호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그들의 제1차 전도여행시 해안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도중에 에그레디르 호수(Lake Egredir)를 지났을 것이다.
바울은 교회 내부에서 '유대당'이 잘못 가르치는 것에 도전하는 편지를 썼다.
유대적 영향력을 강했다.
'갈라디아'에서 회당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주후 초기에 지어진 이 회당 유적은 북부
이스라엘 바람(Baram)에 있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사도바울이 제2차, 3차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의 씨를 뿌렸다.
성경에 앙고라로 나와있는 앙카라는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한 도시로서
이스탄불에서 450km 떨어져 있다.
터키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1923년 케말파샤가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주전 12세기까지 히타이트 제국에 속해 있다가 그후 프리기아 왕조의 지배를 받고 알렉산더의 지배를 거쳐 갈라디아인들인 켈트(Celts)족에 의해 갈라디아로 불려지게 되었다.
주전 25년에 로마의속주가 되었다가 1360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정복당한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영적
속박을 가져오는 모세 율법의 힘든 “멍에”와 영적 자유를 가져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간의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했다.
독자들은 이
서한을 공부함으로써 영의 영향력을 받는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더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추론은 다소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설명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을 어떻게 받는
것인가?
복음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의롭게 되는 것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갈라디아서는 누가 기록했는가?
갈라디아서는 이 서한의 작성자가 사도 바울임을 밝히는 내용으로 시작되며(갈 1:1).
기독교에서 내려오는 전통과 신약전서 학자들의 의견들 역시 그를 이 서한의 저자로 인정한다.
다른 서한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서기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서한 끝부분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추신을 직접 적어 넣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바울이 여러 서기를 부린 것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로마서 16:22 주해를 참조한다.
갈라디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은 제2차 및 제3차 선교 여행 때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행 16:1, 18:23).
바울은 주후
57년 무렵 제3차 선교 여행 동안 마게도냐를 두루 다니면서 갈라디아서를 썼을 것이다.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 동안에 작성된 또
다른 서한으로는 로마서가 있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내용, 구성, 문체 면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이 두 서한이 같은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여긴다.
한편, 일부 경전 학자들은 갈라디아서 2:1-10에 기록된 사건들이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에 개최됨, 행 15장) 전에 일어났다고 여기며, 갈라디아서 작성 시기를 주후 48년 또는 49년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갈라디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북부 중앙에 있는 지역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서유럽(현대의 프랑스)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이곳에서 그들은
갈리아인으로 알려졌다.
바울은 제2차 및 제3차 선교 여행 때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수신인을 제 2, 3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의 성도들로 보기도 하고, 혹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 등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의 성도들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고니온을 제외한 이 도시들은 갈라디아 로마
속주에 속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비시디아 또는 루가오니아에 속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님에게서 벗어나 “복음을 변하게”(갈 1:6-7) 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른 일로 크게 걱정하며 이 서한을 썼다.
서한의 세부 내용을 보면 이 사람들이 유대인 기독교도들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신약전서 해설자들은 때로 이들을 유대주의자라는 명칭으로 지칭한다.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의 의식 요건을 준수해야 한다는 그릇된 교리를 이방인 기독교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갈 6:12, 행 15:1, 행 15:105, 행 15:1, 24).
몇몇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 사람들의 가르침을 신봉했다(갈 4:10).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을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한다.
2.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은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음을 가르친다.
3. 하나님의 계획에서 모세 율법이 하는 역할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4.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맺으신 옛 성약과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새 성약을 구별한다.
5. 성도들에게 영에 따라 살라고 요청한다.
갈라디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가장 간절하게 열변을 토한 편지로 유명하다.
그는 이 서한에서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교회 회원들과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날카롭게 꾸짖었다.
바울은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고자 자신의 개종 이야기를 전하고, 아브라함의
본을 설명하고, 구약전서에 나오는 다른 관련 성구들을 인용했다.
갈라디아서는 문서상으로 바울이 의롭게 됨에 관한 교리, 즉 우리는
모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관한 교리를 가르친 가장 초기의 기록이다.
바울은 이
서한에서 의롭게 된(justified)이라는 동사를 20번 이상 사용했다.
또한 이 서한에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대조를 이루며 제시되었다(갈 5:16-25).
개요
갈라디아서 1-2장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님에게서 벗어나 거짓 가르침을 신봉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에게 이 서한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바울은 교회를
반대하다 개종하게 된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음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은 사도들의 승인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성역을 베풀었다고 해명함으로써 사도로서의 자신의 부름을 변론했다.
그는 이방인 성도들에 관해 베드로와 의견이
달랐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은 모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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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4장
바울이 복음 메시지를 옹호했다.
바울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쳤다.
아브라함은 모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본보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인류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다.
모세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성도들은 신앙과 침례를 통해 속죄의 축복을 받고, 복음 성약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이제 더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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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6장
바울이 성도들에게 복음 성약의 영과 자유 안에서 살도록 요청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바울이 성신을 지닌 사람의 특성과 반대되는, 즉 육욕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의 특성을 기술했다.
성도들은 서로의 짐을 져야 하고 선행을 하는 일에서 지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 -
10월 13일(목)
그리스도의 종(갈라디아서 1:10) a servant of Christ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일까요?
첫째,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히브리서 11:6)
지금 시대는 불신앙의 시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성경지식과 신학 지식은 있는데 신앙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옛 우리 선배 목사님과 성도들은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적 학문도 짧았으나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유가 저는 믿음, 곧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영혼 사랑과 구령을 위한 열정을 회복하라(마태복음 18:12)
사도 바울 또한 영혼 사랑으로 복음의 열정을 갖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6절에 복음 전파를 통해 주님께 기쁨을 드렸던 바울처럼 최후의 시간까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라(요한복음 4:18)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남편이 6명이었던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어 23절에서는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하며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님이 창조하셨고 지금도 주님께서 이 우주를 운영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불가능한 일 앞에서 우리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예배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날 도와주시고, 현재에도 동일하게 도와주시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도와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모든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는 예배의 성공자와 예배의 실패자로 나눕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혼 사랑을 실천했던 바울 사도와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가 되고,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바른 믿음의 고백과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위하여 순종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규모는 중국 송나라 시대나 19세기 초 영국 런던이나 일본 에도에 와서야 다시 도달하는 엄청난 수준이다.
반면 중세가 되면 로마라는 도시의 규모는 인구 3~4만 정도로 대폭 줄어든다.
로마 제국 안에 도시의 수가 2,500여 개에 달했다.
이탈리아에만 400개가 넘었다.
Mary R. Beard는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이라는 책에서 폼페이 도시를 조명한다.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비운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폼페이의 인구를 1만 2000명의 절반이 노예였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B.C.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가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할 당시 바빌론 사회의 5%는 자유인, 65%는 소작농, 나머지 30%는 노예였다.
아카드어로 ‘와드둠(wardum)’이라 불렀다.
제국 로마의 수도 로마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다.
실제 유사한 규모의 저택을 가진 가문은 500여 개에 달했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문제는 비록 부모는 귀족이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교육할 만하나 지적 역량을 지닌 로마인이 아니었다.
인문학을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연구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라틴어 동화책조차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문화의 선진국인 그리스의 텍스트를 받아들여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어를 알고 가르칠 수 있는 개인교사를 모셔야 했다.
그리스인들을 노예가 아닌 가정교사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로마서를 그리스로 읽을 수 있는 로마인들은 대체로 그리스 노예였거나 저축을 통해 로마시민권을 취득한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종(servant)에 해당하는 ‘δουλος’(둘로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칭호는 그의 신분을 역시 암시한다.
사실 노예(slave)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둘로스라는 용어는 ‘에베드 야훼’의 구약 용법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이 용어의 초점은 구약의 탁월한 인물처럼 특권을 받은 직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도적인 사역을 하는 것에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기 앞서 둘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사용하는 권위가 종에게 위임된 권위임을 강조한다.
노예(slave)는 내키지 않아 마지못해 하는 복종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요즘 직장인 사이에 창궐하는 ‘넵병’의 차원에서 종인지 노예인지 주인의 메신저에 도착한 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넵!’과 ‘뉍’이다.
누가 종인가, 노예인가.
전자는 ‘당연하죠! 가능합니다’, 후자는 ‘절대적으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어령은 ‘기업과 문화의 충격’에서 노예와 자유인을 이렇게 구분한다.
전자는 기개를 잃은 사람, 명예도 위신도 실리를 위해서는 모두 다 내던지고 무릎을 꿇는 사람이다.
후자는 편안한 잠과 배부른 삶에 얽매이지 않고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 한다.
Gustave Boulanger's painting The Slave Market
바울은 로마서 포문을 열면서 첫 두 단어 가운데 둘로스를 사용한 까닭은 특별히 구약구절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구약에는 모세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서 스스로를 야훼(הוהי)의 종 혹은 노예라고 불렀던 존경할만한 이스라엘인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116:16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이전에는 결박에 묶여 있는 노예였는데 이제 주의 종이 되었음을 노래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로마 교인들 가운데 유대인들은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첫 네 마디를 읽었을 때 이사야 49:5-6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종을 생각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역사·인물·소설 전문 작가로 꼽히는 Max Gallo는 ‘장편 소설’에서 로마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진단한다.
노예로 삼지 않을 포로는 가차없이 죽였던 로마인은 후회 없이 두려움 없이 타인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로스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비록 전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경멸이나 멸시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신약은 헬라 세계와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종들의 사회적, 제의적 및 윤리적 지위를 낮게 보고, 종들이 오로지 그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종이라는 말을 심히 모욕적이 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유대교와도 다르다.
헬라인들은 둘로스가 자기 자신의 자율을 파기하고 주인의 뜻에 자기 뜻을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노예의 지위에 대하여 오직 반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종이라는 개념은 로마의 노예제도가 아닌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스라엘의 확신으로부터 그 의미를 끌어온 것이다.
둘로스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 복종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받은 명예를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보다 상관에게 말할 때 자기를 비하시키는 셈족의 언어 윤리를 반영한 것인 듯하다(왕상 1:26, 27 참조).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오직 야훼(הוהי)께 속했다는 의미다.
모세와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언약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그런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로 영예를 얻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론적 도입 가운데 오직 빌립보서 1:1에서만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유대적인 유산에 의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바울의 명함과 다를 바 없다.
명함이 자신을 소개하는 주요한 방편이다 보니 처음 인사를 할 때면 으레 명함을 주고받는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명함을 드리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 윗사람이 그 명함을 살펴본 뒤 자신의 명함을 주는 것이 명함 교환의 일반적인 예법이다.
바울은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과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윗사람은 한 분 뿐임을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MBC TV 탤런트 한인수씨의 명함에 적힌 글귀이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잃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라는 글귀를 명함에 새겼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나는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다.’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왕이신 예수님의 종이다라는 표현이다.
배부름을 잠재워주는 밥보다도, 갈증을 풀어주는 물보다도 인간은 가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바울이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가장 먼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 시작한다.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바울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편지를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하고 바울은 대답한다. ‘나는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시로 노래한다면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는 누구인가’란 시가 가사가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바울은 사람의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로마서 문을 연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종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였을까?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처럼 자신이 오로지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의존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특성을 시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종은 영예가 아닌 헌신에 한 표시로서 표현한 것이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신약에서 ‘주’에 해당하는 ‘κυρος’(퀴리오스)라는 칭호가 야훼(הוהי)를 나타내는 것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주님의 종은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주님의 종, 즉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로마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
또한 주인을 도와 사업의 비서·회계·대리인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자들이 노예들이었다.
종은 노예와 다르다.
노예는 기본적으로 열심히 일할 유인이 전혀 없는 생산요소다.
따라서 노예를 부리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당근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의 주인은 노예에게 의도적으로 사유재산을 허용한 것이다. 이런 유인체계에 의해 노예가 열심히 일하게 되면 그것은 주인에게도 좋고 사회적으로도 좋다. 로마의 노예는 저축을 통해 해방의 비용을 지불한 뒤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달리 말해 로마 사회는 노예에게도 급격한 신분 상승이 가능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 둘로스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에게 사용되고 있다(빌 2:7).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그들이 자유민이지만 그들 자신을 왕의 종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자신을 종으로 서두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독자와 같은 수준으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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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종교(일반종교) : 사람이 신앙의 틀과 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계시종교(계시종교) : 위로부터 드러내어 알려주신 신앙
오직 믿음으로
1. 갈라디아서
자유의 대헌장
개혁자 루터 : 갈라디아서는 나의 신부이다.
2. 로마서
3. 히브리서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5-36절 / 자유롭게 하는 이는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13장 -
1절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최초로 유대인 개종자들이 설립한 교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가장 중요한 인물 - 바나바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인물 - 마나엔
및 사울이라 - 사울은 아직도 의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인물을 나열 할 때 가장 중요한 사람부터 소개하기 때문이다.
2, 3절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서 처음으로 파송하는 선교사가 바나바와 사울이 선택되었다.
메시지
1. 교회(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교회는 주님이 운영하신다.
2. 사람들의 관점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던 사울을 선택한 이유는 선교도 주님이 하신다.
- 성경 전체에서 일관된 하나님의 주권(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사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르셨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사울이 선교사로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의문이 있었다.)
* 일을 할 때 돈이 더 들어가는가? 아니면 쉴 때 돈이 더 많이 필요한가?
- 일을 할 때는 돈을 쓸 여유가 없지만 쉴 때는 돈이 더 많이 소요된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바울에 대한 비난
1.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
- 재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한다.|-
- 대머리, 시력도 않좋다, 외모도 볼 품이 없다, 키도 작다, 목소리도 별로다,
* 사이비(似而非)
* 이단(異端)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
첫째, 사도행전 15:1-21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 행위구원 할례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 모교회 예루살렘에서 확인을 받자
다른 복음에서 바른 복음으로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6.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7.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8.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19.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0.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21.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진리인가? 아니면 덕인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 문화를 인정해도 된다.
이중적인가? 파라독스인가?
- 할례의 문제를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말라
둘째,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되는 때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
안식후 첫 날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게 된다.
예배의 날을 안식일에서 다른 날로 정하므로 독립적인 교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였다.
아직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셋째,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다
유대교는 하라! 하지 말라!
유대교는 도덕적인 윤리적 측면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 밖에 없다.
갈라디아서 1:1
사울은 갈라디아교회에서 사도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사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 교회에서는 사도로 이미 인정받았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오늘의 위기는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
1. 교회는 물량주의에 의해서 선택되는 경향
2. 가짜 박사 학위 선호하는 분위기
3. 사이즈에 의한 기준
복음 :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 영적인 사건을 육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 6절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변절자가 된 상태)
* 속히(ταχέως) - 타케오스 / quickly
* 다른 복음(different gospel)
* 이단의 속성(거짓 교사들의 특성, 순회 교사) - 수사학, 논리학의 발전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영지주의 : 구원은 앎에 의해서, 영으로만 구원
고린도전서 15:12-1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마가복음 3:13-15
예수님은 이렇게 훌륭하고 대단한 제자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선택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 선택의 기준은 얼마나 높았던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제자들은 선택될 만한 이유보다 선택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허물투성이였던 제자들은 온 인생을 하얗게 불태워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완벽히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기준에 의해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성경에 정확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고 말씀하십니다.(막 3:13) 예수님의 제자 선택 기준은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원함과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밝아지자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눅 6:12~13)
예수님이 밤새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셨을지 궁금합니다. 밤을 새워 기도해야 할 정도로 제자들과의 사역이 부담스럽고 답답한 마음이었을지, 아니면 그들과 함께할 사역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흥분된 마음이었을지….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이름을 품고 산으로 올라 기쁨과 설렘으로 밤새 기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함으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함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변화될 제자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한없이 밤을 지새우며 기뻐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원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심의 근거를 나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의 부르심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 줘서도 안 됩니다. 나의 정체성과 부르심은 예수님 안에서만 계속 확인받아야 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사,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함과 바람으로 우리는 다 채워지고 세워질 것입니다.(막 3:14)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자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분명한데 나는 항상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항상 괜찮지 않습니다. 나를 원하시는 예수님은 2000년 전 산에서 밤을 맞도록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밤이 맞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제자로서 부족한 부르심과 정체성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방황을 하며 손해 본 순간들이 많습니까. 모든 것을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말 버려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원함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더 방황하거나 시간을 손해 보지 않고 주님의 부름에 분명히 응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 내 구주!
우리가 살아 가면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언제 일까요? 생각대로 일이 안됐을 때 혹은 사업에 실패 했을 때 입니까? 이런 모든 것이 다 절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잃었을 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은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큰 절망을 경험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가장 큰 위기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어제 본문 중에서 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바울은 그 동안의 수고가 모두 헛것이 될 것 같은 순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해 마치 구원은 율법의 행위도 필요한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율법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변질 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하고 절기를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위기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 동안 수고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느껴질 때, 한 사람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쏟았지만 변화 되지 않았을 때 절망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과 사도 바울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에게 육체의 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할 때 14절 끝부분에 나오는 말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처럼 바울을 대했습니다. 15절 끝 부분에서도 이렇게 표현 합니다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눈 까지도 빼어 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했습니다. 과거에 너무나 좋았던 관계, 서로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가 가르치는 사도바울을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제 원수처럼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망의 순간이 있습니까? 오늘 그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한 사람, 한 영혼에 대해서 포기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도바울의 반응 입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왜 ‘해산의 수고’ 라는 단어를 사용 했는지에 관심이 갑니다. 사랑의 수고, 눈물의 수고 등 많은 단어가 있는데 하필이면 왜 해산의 수고 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궁금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랍니다. 잘 자라줄 줄 알았던 아이가 망가집니다. 이럴 때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치 아직 해산 하지 않고 태 속에 아이가 있어서 해산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수고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 하겠다는 의미 입니다. 아직 낳지 않은 아이로 생각하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을 각오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요즘은 해산할 때 죽음의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해산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낳으면 살고 내가 못 낳으면 죽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한 영혼을 낳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 라는 단어를 사용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걸겠다는 겁니다.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에게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 당시 갈라디아 근처에는 고린도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포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 하지 않아도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얘기 합니다. “내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해 수고하겠다.”
바울은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해산의 수고’ 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달았던 사람 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까지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를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사람들에게 ‘해산의 수고’를 감당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너를 낳았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단순한 혈통의 해산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 하신 방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시고 ‘해산의 수고’에 참여 하셨습니다. ‘해산의 수고’ 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통해 하신 일은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 안고, 그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 주는 것, 대신 피를 흘려 주는 것, 이것이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해산의 수고’였습니다. 이러한 ‘해산의 수고’ 때문에 인간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해산의 수고는 변화 되지 않고 포기할 수 밖에 없던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해산의 고통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
우리는 오늘 무엇 때문에 좌절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포기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매달려도 변화 되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떠한 인생의 절망의 순간이 다가와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포기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망 앞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끌어 안으시고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붙잡아 주시고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 시키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 앞에서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그 순간에도, 과거의 친구가 원수가 되어버린 순간에도, 포기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그들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포기 하는 것 입니다.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우리는 쉽게 다 포기 합니다. 조금 하다 안되면 포기 합니다. 갈아 치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절대로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포기 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해산의 수고’에 동참 하고 있습니까?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산의 수고로 끌어 안을 때 결과는 반드시 ‘변화’ 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산의 수고 없이는 변화도 없습니다. 기적도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해산의 수고를 붙잡고 나갈 때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까지 다가 오시고 원수에게까지도 다가 가십니다. 그 어떤 절망의 순간도, 내 자녀, 가족, 친구, 배우자, 원수까지도 반드시 변화됩니다.
“우리를 구원 하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견뎌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면서, 은혜에 힘입어 포기 하지 않고 해산의 수고를 각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해산이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과 동시에 가장 의미 있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 많은 고통들이 해산의 수고와 같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 고통을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해산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 때문에 고통이 있는 순간에는 다시는 안 낳겠다는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 뒤에도 둘, 셋을 계속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해산의 고통은 최대의 고통이요, 최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보상이 큼 고통이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고생을 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거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해산의 수고란 처음 태어나는 그 출생을 위해서 수고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낳는 것은 복음으로서 이미 낳았습니다.
즉, 말하자면 이미 중생은 되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이란 원래 단회적인 것이요,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에서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진 유일회적이면서도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출생된 생명이 성장을 하는 데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단회적인 역사로 중생된 생명이 성장해 나가는, 즉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 되어 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수고가 또 다시 해산의 수고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해산의 고통은 처음 생명을 출산하는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중생한 심령이 자라가야 하는 과정에 필요한 고통의 수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성장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그리스도의 역사요 복음과 성령의 역사이면서 전도자의 수고가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생명이 태어나게 하고 자라가게 하는 데에는 전도자의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고통 하여 낳은 다음 자라게 하는 데에도 그에 못지 않은 어머니의 수고가 뒤따라야 함을 가리켜서 해산의 수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수고를 하는 성장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할 때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 그 인격, 그 영혼, 그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와 같은 그런 수고가 계속되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생리적으로 아이를 낳았으니 어머니가 되는 것까지는 그렇게 대단한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낳게 마련이고, 그렇게되면 어머니는 자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어머니는 쉽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어서 아는 대로 가장 어려운 것은 낳은 자식을 키우는 일입니다.
이를 두고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 보아도 낳은 어머니야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얼마든지 고아원에 내다 버리는 것이고 보면 낳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낳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나가자면 그 어려움이 참으로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훌륭하게 자식을 키워놓은 어머니들께 낳을 때의 수고와 키울 때의 수고 중 어느 편이 더 어려웠던가를 한번 물어 보십시오. 낳는 일이야 비록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몇 시간동안만 꼬박 고생하면 되지만, 키우는 일은 이 십 년 삼 십 년을 키우면서 계속 마음 졸이며 고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수고, 곧 계속적인 해산의 수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장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입니다.
에베소서 4:13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누구만큼, 혹은 어느 목사, 장로만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라야되는 모교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인 만큼 누구보다 조금 낫고 못하고를 가지고 평가하거나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놓고 생각해 볼 때 갓 태어난 상태, 그러니까 중생 하자 마자의 단계는 역시 유치한 단계입니다.
이 유치한 단계를 에베소서 4:14 말씀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순진하고 깨끗한 것까지는 좋으나 아무래도 판단력이 없고 어리석기 때문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 믿어 연조가 깊이 못한 사람은 이 말 저 말에 흔들리기가 쉽고 특별히 이단 사설에 유혹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없는 가운데 신앙 체험도 갖지 않은 상태라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옳은 것 같아서 계속 요동하게 됩니다.
제가 가끔 교역자로서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이상한 교단이나 교리에 대한 책을 읽고서는 "목사님 그것도 그럴듯하던데요."하고 말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저의 대답은 "그럴듯하니까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이겠고, 예수 믿은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당신의 눈에는 그럴듯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단계, 이 유치한 단계는 이와 같이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스스로 먹지를 못합니다.
그 때문에 입에다 먹여주어야 됩니다. 먹
여줄 뿐만 아니라 부드럽게 씹어서 먹여 주어야 됩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마는 어떤 때 시골에서 보면 치아도 좋지 않은 할머니들이 밤 같은 것을 까서 씹었다가 꺼내서는 손자의 입에 넣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며느리들은 비위생적이라며 군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알고 보며 가장 위생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 중에는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서 먹이는 짐승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 씹었고 침도 섞였으니 위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소화가 되게 되어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이빨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넣어주는 대로 꿀꺽하고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게 되느냐하면 그것은 유치한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성경 읽는 것을 싫어하고 또 읽어봐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서 꼭 설교만 좋아하는가 하면 그것도 주로 부흥사들의 설교를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끔 부흥회를 인도하려 가거나 하면 우리 교인으로서 그 자리에 와서 듣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분이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본 교회에서 말씀하실 때보다 여기에서 하시는 것이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25분 설교하던 것을 거기 가서는 대상이 다르니 만큼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필요에 따라 긴 설명을 하고 보니 그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섞여 있는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순도가 낮은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직접 대하는 것은 100%의 순도라고 한다면, 설명을 붙여서 받아들이게 될 때에는 이해가 잘되는 것까지는 좋으나 순도에 있어서는 그 수치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흔히 우리는 부흥회를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은혜가 많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럴 때에 은혜가 어떻더냐하고 물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 때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습니다."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가 있다는 것과 은혜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재미있는 것으로 보아지는 이유는 바로 유치한데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저 부흥회만 한다면 보따리 싸들고 어디이고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주워 먹고는 결국은 소화불량이 걸려서 또 고생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나머지 세상 풍조에 밀려서 이리 저리로 흔들리며 스스로 먹지도 못하고 서지고 못하며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그 맥락을 생각해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유대인들이 와서 유혹하기를 예수를 믿고 비록 그리스도교가 진실한 종교라 하더라도 율법을 엄수하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가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십자가의 구속을 반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하며 그렇다면 할례를 받아야 되나보다 하고 할례를 또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요동하는 무리가 되어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에게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이방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자인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일어나 가버리는 것을 보고 비록 베드로가 선배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하려느냐?"며 크게 책망을 합니다.
이는 이방 사람과 앉아서 식사를 했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할례를 받은 유대 사람들이 들어온다 하여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여 일어나서 나가느냐?
왜 이렇게 흔들흔들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다 같은 것 같아도 교리적으로 바른 이해를 하고 믿는 것과 그와 같은 아무런 지식이 없이 믿는 것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치한 신앙이란 신학적으로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유혹적인 다른 말이 들어오면 그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게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성서적으로나 신학적 혹은 교리적으로 체계 있는 이해를 하고 나면, 그 뒤에는 그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유치한 단계와 성숙한 단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를 하면 유치한 신앙의 단계란 기초가 약하므로 유혹에 빠지기가 쉽고, 다시금 세상 풍조에 끌려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다져지는 신앙보다는 형식적인 것, 곧 율법주의로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의 정도를 아이들에게서 생각해 본다면, 아이들이란 항상 사랑을 베풀어도 질과 양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질보다는 양적인 것이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로서 짧은 시간에 아주 귀중한 사랑을 베풀었다하더라도 아이들로서는 그 깊은 사랑을 알 리가 없는 것이며, 좋던 나쁘던 간에 어머니가 오랫동안 같이 있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란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란 누구이든지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과자나 사탕을 주면서 하자는 대로 다 해주며, 어머니 아버지도 상관치 않고 어디든지 따라가고 마는 지극히 물질적인 영향하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때리는 것이 사랑이고 책망하는 것이 사랑일 수가 있습니다 만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한 대만 때려도 아예 때리지 않는 집으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 아이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란 질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는 반면에 양적인 사랑, 불량적인 사랑에만 기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의 주위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성숙한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을 때에 오히려 시련을 통한 굳은 믿음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겸손하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자세로 나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리고 약한 사람은 사업이 조금 잘 되면 복 받았다며 좋아하다가 조금 잘못되면 저주받았다며 울고불고 하는데, 이것이 다 유치한데서 비롯되는 소치이며 지극히 물량적인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에서는 세속주의의 풍조에 밀리고 율법주의에 빠지며 변덕이 심합니다.
아이들을 보노라면 그 얼마나 변덕을 잘 부립니까?
방금 웃다가, 방금 울다가 뿐만 아니라 울다가 방금 웃으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체면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또 웃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시간에도 몇 번씩 하면서 변덕을 부리는 것인데, 그것은 모두 유치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믿는다하고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예수 믿기 시작하여 처음 나온 그날부터 오늘까지 7시 30분 예배에 3년 동안 개근을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들쑹 날쏭 변덕이 심하여 어떤 때에는 열심히 나오다가 어느 때에 보면 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유치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 결과 변덕이 심하고 내가 남을 도와주며 친절히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친절과 도움만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몇 살이든, 몇 십 년을 믿었던 간에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한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옛날 어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탕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여!"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교회가 더 친절한가하여 기웃거리며 다니고 있는데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곧 교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가 친절을 베풀어야 내게도 베푸는 사람이 있는 것이거늘 베풀 사람이 따로 있고,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더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본디 성장한 신앙이란 내가 누구를 도울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친절하게 할까하는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이지 사탕만 준다고 하면 아무에게나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누가 나에게 친절히 해주느냐하는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숙해 가는 데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어서 젖을 먹을 때가 있는가하면 밥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곳에서 세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들이란 수준이 낮기 마련이며, 그 낮은 수준에 대해서는 거기에 따라 부득이 낮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를 놓고 당장에 어른이 되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유치하다고 나무랄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정과 통제, 율법과 은혜가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제임스 더불류 파울러(James, W Fowler)가 6단계로 구분한 신앙의 발달 단계에 의하면 유치한 단계인 맨 첫 단계를 직관적이고 투사적인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모습도 사람의 모습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든 것을 보이는 것 안에서 생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장의 과정에는 유치한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위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용이란 어린아이에 대한 문제는 어른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 교회가 유치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말로 책망도 해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유치하기 때문에 이제는 부득불 그 책임을 내가져야 되겠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가 잘못했다하여 거기에다 책임을 물어 감옥에 보낼 수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 부모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 시기는 2살 이후에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미리부터 왜 못가리냐며 매질을 하고 겁을 주게되면 그 아이는 그 일로 인해 의기 소침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조금 크면은 말더듬이가 된다고 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을 놓고 성숙하라고 한다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고 보면, 부득불 그 책임은 교육하는 이쪽에서 져야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부득불 내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들의 신앙이 유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수고했던 사도 바울이 이제는 성장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지불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해서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면은 그 이후에는 그대로 내어 버려 둔 채 성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를 시작했으면 이제는 신앙이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도록 적어도 3년, 아니면 세례를 받을 때까지 계속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그 유치한 단계를 놓고 본인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떠 먹이기도 하고 일일이 가르치기도 하며 본을 보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전도자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성장은 그를 전도해준 사람의 신앙만큼 자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전도를 한 사람이 낮 예배, 저녁 예배, 새벽 기도 다 나오는 사람이면 전도를 받은 사람도 예수 믿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형성이 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나를 전도한 사람이 주일 낮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라면 나 또한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인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 만큼 그 책임도 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를 낳는 수고와 같은 의미가 있는 수고인 동시에 그만큼 고통스러운 수고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이 수고, 이 고통을 내가 계속적으로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최고의 고통, 최고의 사랑, 최고의 가치가 있음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 입니까?
여러분!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잘못했다하여 책망하며 매질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가 어린아이인 동안 매질도 안 하거니와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어린것이 발버둥치며 운다고 하여 저 녀석이 아무래도 성격이 나쁜가 보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많이 우는 아이를 두고는 "커서 음악가가 될려는가 보다"라거나, 한참 울고 돌아가면 "고집이 있는 것을 보니 큰 사람이 되겠는데."라며 되도록 좋은 해석을 하는 것이 바로 어른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유치함을 놓고 어떻게 평가를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 해산의 수고를 하는 전도자의 기본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 입니다 만은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박해를 피하여 로마에서 빠져 나와 도망을 가려고 성밖을 나서게 됩니다.
로마를 향하여 걸어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에 깜짝 놀란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에 너 대신 가기 위하여 내가 지금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아닙니다.
내가 가겠습니다."하고 돌아서서 다시 로마로 들어가 훗날 거꾸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전설로 전해지고 잇는 이야기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배신하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도망가는 배신자들을 위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소유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늘 또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한 심령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데에는 이처럼 많은, 실로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그 누군가 그를 위해서 대단한 수고를 하지 않고는 그가 자랄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감화하며, 그리고 전도자, 교역자, 친구, 이웃할 것 없이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온갖 방탕한 일을 다 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해산의 수고를 하므로 마침내 성 어거스틴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