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용어 정리 09-02-2024(월)



09-02-2024 창세기 1:1-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태초에(1절)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성경에서 "태초"라는 용어가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만물의 시작

만물의 시작은 곧 시간의 시작과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태초를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둘째는 영원의 시작

영원의 시작이란 만물이 생기기 전부터 시간이 시작되기 그 이전부터 최초의 출발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태초를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 중 ‘태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로고스의 신격을 논함에 있어서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en arche en ho Logos) 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로고스가 계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다는 데 있다.
즉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영원성(永遠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태초’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초’(太初)라는 말은 우리말의 문자 그대로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이나, 결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칠십인 역본(LXX) 창 1:1에서도 요한복음 1:1의 arche 를 쓰고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지 않다.
창 1:1에서는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시기를 ‘태초’라고 하여 시간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요 1:1에서는 천지창조 이전까지의 영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 1:1의 arche (아르케, 태초)는 aion (아이온, 영원) 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사실 태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트만은 이것을 단순히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선사성’(Vorgeschitiliche) 즉 영어의 pre-historical existence 로 표현하나, 로고스의 존재성에서의 그 개념은 오히려 영어의 atemporal(無時性) 또는 nontemporal 또는 비시성(非時性)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있어서 그는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agnnetos = ingenerate), 그는 무시간적(無時間的, timeless)이며, 불가시적(不可視的, invisible)이며, 무형적(無形的, impalpable)이며, 무감각적(無感覺的, impassible)인 분이었으나 우리를 위하여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이고 감각적인 분이 되셨다.

요 1:1의 ‘태초’에 대한 원어를 보면 창 1:1의 히브리어 bereshith 나, 그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본의 두 arche 나 신약 요 1:1의 arche 나 모두 문자적으로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처음에’를 뜻하는 점에 똑 같다.

그러나 그 어휘가 요 1:1에서는 창 1:1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해석적인 번역을 시도한 것이 몇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중국어역 성경 중 소위 ‘구어역’(1962년 홍콩성경공회 ‘神版’)에서는 창 1:1의 ebreshith 를 요 1:1의 ‘太初’와는 달리 ‘起初’ 로 하고 있다.
이것은 요 1:1의 로고스의 영원성=무시간성(無時間性)과 창 1:1의 창조 역사(役事)의 시간성을 구별하고자 한 시도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1:1의 ‘太初’에 ‘초’(初) 자가 있는 한 창 1:1의 ‘起初’와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성을 나타내지 못 한다.
중국어역 성경 문리역본(1854년 역)에서는 요 1:1과 요일 1:1의 ‘태초’를 ‘元始’로 번역하고, 창 1:1에서는 ‘太初’로 번역하고 있어, ‘元始’가 ‘太初’보다 이전임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 ‘元始’의 ‘始,’자에도 ‘始作’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으므로 로고스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 ‘初’ 즉 ‘처음’이라는 말도 그 자체가 벌써 시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거기에 ‘太’(‘가장’ 또는 ‘아주 크게’라는 뜻)라는 한정사가 붙을지라도 그 개념을 변경시키지 못 한다.
왜냐하면 ‘처음’이나 ‘크다’라는 개념은 거기에 아무리 그 정도가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한성(有限性)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영어의 ‘in the beginning,’ 독일어의 ‘Am Anfang,’ Au commencement,’ 일어의 ‘はじめに’(한자 표기로는 ‘始’ 또는 ‘太初’) 등 모두에서 같다.

우리말 성경에서 요 1:1을 보면, 개역(1938년), 새번역 신약전서(1967년), 표준새번역(1993년), 개역 개정판(1998년) 등에서는 다 ‘태초에’라 하고 있으나, 예수셩교젼셔(1887년, 로스 역 신약전서)에서는 ‘처음에,’ 공동번역(1971년)에서는 ‘한 처음에,’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경(1992년)에서는 ‘맨 처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쉬운 번역 또는 풀이역의 경향이 일어나,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번역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966년의 ‘Good News For Modern Man'(소위 Today's English Version; 후의 Good News Bible) 초판에서는 "From the very beginning" 로, 제2판에서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로 번역하였고, 독일어 번역 'Die Gute Nachricht'(1971년)에서는 “Am Anfang, bevor die Welt geschaffen”(처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으로 번역되어 있고, 香港聖經公會 발행의 現代中文譯本(1975년)에서는 ‘宇宙被造以前’으로, 當代聖經(1985년)에서는 ‘萬有之先’으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인의 성경(1985년)에서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등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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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과 ‘하느님’은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神)의 이름에 대한 표기가 ‘하나님’이 옳으냐?
아니면 ‘하느님’이 옳으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이란 말의 어원을 따져 보면 ‘하’ (天) 에 ‘님’ 이란 존칭접미사를 더한 것인데,
처음 표기 중의 아래 아 (.) 자가 새로운 한글맞춤법의 채택으로 없어지면서,
서북지방에서는 ‘ㅏ’ 모음으로 바뀌어 ‘하나님’ 이 되고,
서울 이남에서는 ‘ㅡ’ 모음으로 바뀌어 ‘하느님’ 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의 ‘하나’ 이든지, ‘하느님’ 의 ‘하느’ 이든지 간에 그 어원은 다같이 ‘하늘’ 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문법에서는 대개의 경우 ‘ㄴ’ 받침 위에 있는 ‘ㄹ’ 받침은 떨어진다.
예컨대, ‘아들’ 과 ‘딸’ 에 ‘님’을 붙이면 ‘아드님’이 되고 ‘따님’ 이 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달님’ ‘별님’ 과 같은 예외도 있다).

우리말 성경 최초의 번역인 1882년의 누가복음에서는 ‘하느님’ 으로 표기하였으나,
바로 그 다음 해에는 ‘하나님’으로 표기하여, 이 표기가 1971년의 공동번역까지 기독교의 신명 (神名)으로 정착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명이 ‘하나님’으로 정착되게 된 것은 ‘하나님’ 의 ‘하나’ 가 수 (數) 의 ‘하나’ 와 발음상 일치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늘’ 이란 어원적 의미와는 달리 유일신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는 ‘하나님’ 과 ‘하느님’ 을 다른 어휘로 구별하여 ‘하느님’ 은 우리 민족이 재래적으로 가졌던 범신론적인 신이라 하고, ‘하나님’ 은 기도교인들이 믿는 유일신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는 그 최초의 어원에 맞게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을 쓰게 되어, 성경상 신에 대한 표기가 ‘하나님’ 과 ‘하느님’ 의 두 가지가 다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 이 두 가지의 다른 어휘를 국어학적인 면에서 고찰해 보면, ‘하느님’ 은 어원적으로는 맞으나 오랫동안 기독교의 ‘하나님’ 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쓰여 왔고, 아직도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과는 다른 개념으로 (예컨대, 애국가의 ‘하느님’) 이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에서는 1965년 이후 ‘천주’ 를 ‘하느님’ 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이란 어휘는 국어학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바른 쓰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에서 ‘하나’ 를 수의 ‘하나’ (one) 로 본다면, ‘님’ 은 존칭접미사가 아니고 명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면 ‘님’ 은 ‘임’ 의 잘못된 표기이다), 그렇다면 명사 앞에 붙는 관형사로서의 ‘하나’ 는 ‘하나’ 그대로가 아니고 ‘한’ 이 되어 (예컨대, ‘한 사람’ 이나 책 ‘한 권’ 의 경우와 같이) 결국 ‘하나님’ 이 아니고 ‘한 님’ 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6)

일본 교토(京都)에 가면 도시샤(同志社) 대학이 있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니이지마 조(新島襄)가 설립한 대학입니다. 
대학에는 설립자이며 초대 총장이었던 니이지마 조의 정신을 기리는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부러진 벚꽃나무 막대기입니다. 
한 번은 대학에 심각한 분규가 일어났습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나뉘어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때 총장 니이지마 조는 깊이 기도를 한 뒤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그 앞에서 총장은 분규 책임자를 찾아내어 엄벌에 처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총장은 벚꽃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걷어 올리고는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막대기는 부러지고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총장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학교는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지사 학교는 기독교 명문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벚꽃 막대기를 학교 유물로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 
화평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본래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회복되면서 화평이 생겼습니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샬롬을 많이 사용합니다. 
만날 때 샬롬으로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샬롬으로 헤어집니다. 
샬롬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샬롬이 없다면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샬롬이 있으면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샬롬의 어원을 아십니까?
샬롬 - 셀렘(화목제물) - 실렘(댓가를 지불하다)

שָׁלוֹם 스트롱번호 7965

1. 온전한.  2. 창 43:27. 3. 렘 13:19.
발음 [ shâlôwm ]
어원  / 79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37회 사용

שֶׁלֶם 스트롱번호 8002

1. 응보.   2. 희생. 3. 복수로 שְׁלָמִים : 레 7:20
발음 [ shelem ]
어원 / 79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87회 사용


שִׁלֵּם 스트롱번호 8006

1. 납달리의 아들 ‘실렘’.  2. 대상 7:13에서는 שַׁלּוּם이라고 불림.  3. 복수로 : 사 34:8.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발음 [ Shillêm ]
구약 성경 / 5회 사용

샬롬의 모음이 변해 셀렘이 되면 화목제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실렘으로 변하면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동사가 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셀렘(화목제물)으로 오셔서 실렘(대속)으로 죽으셨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하나님과 화평인 샬롬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얻어지는 선물이 화평입니다. 
여기의 ‘누리라’ 는 단어는 “아폴라우시스" (Apolausis)입니다. 
그 뜻은 ‘즐기다’ 입니다. 

* 누리다(2192) ἔχω 스트롱번호 2192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
발음 [ ĕchō ]


화평은 마음에 품고 있거나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행복일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겨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첫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18세기 유럽에 퀘이커(Quakers) 기독교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퀘이커란 ‘떤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을 벌주시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퀘이커란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보다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던 예루살렘 총독관저를 옮겨다가 지은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루터는 의롭게 되기 원하여 무릎으로 힘들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힘들게 기어 올라가던 중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기 때문에 내가 의로워진 것이지 이렇게 걸어간다고 나의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루터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는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의 화평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화평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친구 됨이 곧 화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림은 하나님 나라를 세움에 동행하는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세워 나감으로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은혜로 말미암아

손경미 사모의 ‘당신에게 힘이 될게요(WITH YOU)’ 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그녀가 어느 날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여섯 번의 암 수술을 하였고 머릿속에 콩알만 한 뇌종양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 않고 2008년 ‘아시안 암 환우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자신처럼 암을 선고받고 투병 중인 환우와 환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처음엔 원망과 충격과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내가 작아지는 순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단지 암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암 환자에게 다가가 진실된 소통을 하며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커튼 뒤에 행복을 숨겨두셨습니다.” 그녀는 은혜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궁극적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의 ‘은혜의 들어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었으나 즐거움으로 서 있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서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잠깐 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에 들어감은 생명과 의가 왕 노릇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은혜입니다. 이런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모진 고난을 당했지만 즐거울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시는 화평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해도 더 은혜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치 마십시오. 은혜야말로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회요, 화평을 가져오는 통로인 것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시골에 살던 두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와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골 교회의 따뜻한 분위기 대신에 도시 교회의 많은 사람들 속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일 년 가까이 출석했지만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두 사람은 다음 주일에는 결판을 내자고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 나가서 그에게 이야기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만 두겠다는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는 자신이 먼저 누구에게든지 말을 걸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자 즉시 교회를 떠났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 교회에 정착했습니다. 그가 바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목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면 상대방의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붓기에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기에 화평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도 아니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으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증되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모쪼록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 시내를 여행 중이던 변호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교통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예배드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교회가 있습니까?” 경찰이 상세하게 일러 주는 대로 가보니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곳에 교회가 많던데 하필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하였습니까?” 그러자 경찰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배드리러 가는 교인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 교회로 드나드는 교인들의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모름지기 화평을 누리는 자의 얼굴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맺고 화평을 누리는 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은혜로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성령이 부으시는 사랑으로 화평을 누리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소유하심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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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어란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또는 종교적 소산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어법에 맞지 않는 경우에도 오랜 전통으로 정착이 될 때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금지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대다수 언중의 관용이 문법까지도 바꾼 사례를 1989년의 맞춤법 개정에서 모음조화의 법칙을 깬 것 (예: ‘괴로와’ 를 ‘괴로워’ 로 한 것 등) 으로도 알 수가 있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볼 때, 한국 기독교인이 문법상 어원저으로 잘못된 ‘하나님’ 을 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동시에, 이미 성경상의 어휘가 된 ‘하느님’ 을 쓰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1971년의 공동번역이 우리의 성경인 이상 우리는 현재 ‘하나님’ 과 ‘하느님’ 두 가지 신명 (神名)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