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목사(金益斗 1874∼1950)
목사·부흥사. 황해도 안악(安岳) 출생.
청년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신천교회(信川敎會)에서 근무하였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하여 한국 최초의 부흥목사(復興牧師)가 되고 황해노회장(黃海老會長) 장로교 총회장(總會長)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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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시, 불법적으로라도 일단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요, 국민의 의무라고 핑계대며 가결했다.
개별적으로 보면 주기철 목사는 전후 5차례나 구속되고, 전후 7년간 옥중 고초를 치르다가 끝내 옥중 순교했다.
김익두 목사는 어떠했는가?
그 당시 서울 승동교회를 8년째 시무하던 때이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김형사를 보내 김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며, 협작하며, 때로는 애원까지 했으나 끝내 거절하자, 드디어 강제로 체포 연행하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몽둥이로 개패듯 두드려 때리고, 시멘트 바닥에 눕히고 구두발길로 차고 밟는 등 잔인한 방법을 계속하기를 1개월, 이제는 김목사가 빈사상태가 되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목사를 데려가라고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나 조건을 붙이기를 ‘승동교회에서 설교를 못한다.
목사직은 파면이다.
서울을 떠나라’는 조건부였다.
그러던 1941년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 김목사를 일본인 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교인도 몇 사람 함께 끌려갔다.
일본 형사들이 “고개를 숙이게 하고 최경례”라고 고함을 지르며 강제로 김목사의 머리를 눌렀으나, 김목사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하늘로 뻗치며 속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일본 형사들은 김목사와 한참동안 승강이를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본서에 돌아와서 서장에게 “김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했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으므로 그들의 기록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경찰 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다”라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
김목사가 그렇게 쉽게 굽힐 것이면 어째서 종로경찰서에서 한 달 동안 모진 고역을 당하면서 투쟁했겠는가?
기독교도연맹 총회장 문제
김익두 목사는 8.15 해방 직후,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적을 두고 있던 직전리교회를 담당했다.
또 얼마 안되어 재령 해창교회에서 청빙해 갔다.
그러자 신천서부교회에서 예전의 인연을 들고나와 자기네가 모시겠다고 나서 김 목사는 이 교회에 정착해서 목회에 전념하게 되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남북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더욱 불행하게도 북한 지역에는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여 군정을 폈다.
그리고 김성주라는 청년을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통솔하던 김일성 장군으로 사칭하여 그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공산정권이 북한을 통치하는데 제일 걸림돌이 기독교였다. 당시 북한에 기독교는 3, 4십만의 교인이 있었고, 교인들은 이미 민주주의 생활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또 단체적 행동이 수월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근거하고, 기독교는 절대 유신론이라 쉽게 공산 정체에 순응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무력으로 위협 공갈해도 불응하니, 김일성은 자기 친척 중에 목사 출신이요, 외조부 격이 되는 강양욱을 내세워 소위 ‘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이용하였다.
목사는 되었어도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빈번히 이뤄졌다.
1946년 11월 3일 북한에서는 첫 대의원 선거에 고의적으로 주일을 투표일로 정하고 강행함으로, 기독교가 전면 반대 불참하여 실패하자, 북한 오도연합노회 간부격인 지도자 목사들을 여러 가지 구실을 잡아 모조리 체포 구금함으로, 실제로 교회를 지도체계를 공백상태로 만들었다.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놓고 기독교도연맹은 자기네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고 나서서 총회를 구성했다.
여기에 총회장으로 추대된 분이 곧 김익두 목사이다.
회원들이 총회로 모여서 투표하여 당선된 것도 아니고, 또 총회장이 되었으니 취임식을 한 것도 아니다.
한 번은 강양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왔다.
강양욱과 김목사는 사제지간이라고 한다.(근거는 미상이다)
강양욱은 선천서부교회 교인들 앞에서 “김목사님은 우리 중앙 정부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시다. 그래서 이번에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라고 자랑스럽게 광고했다.
교인들도 어리둥절하고 김목사는 “총회장이란 무슨 소리냐?” 라고 따져 물었더니,
“이것은 다만 명예직이니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마시고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김목사가 계속 추궁하자, “오늘은 중앙에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 후일 다시 찾아와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뺑소니치듯 달아나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강양욱은 평양에 돌아가서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널리 선전했다.
그렇다고 김목사가 어느 방송국에 가서 총회장이 아니라고 거부방송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는 신문지상을 통해서 해명 성명서를 낼 수 있었겠는가?
결국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강양욱과 기독교도연맹 간부들은 권위있는 총회장 김익두의 이름을 팔아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에 가맹을 강요했고, 가맹을 거부하면 목회를 못하도록 추방하거나 불법 검거에 나섰다.
그러기에 이런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김목사를 오해하여 비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
김익두 목사의 가짜 연설문제
6.25전쟁이 나던 전해 1949년 5월 1일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노동절>이다.
강양욱은 김익두 목사를 찾아가서 이번 노동절에 김일성 수상께서 특별 초청을 하니 반드시 참석하시라는 간곡한 전달을 하고 돌아갔다.
김목사는 입장이 난처했다. 가서 마음에 없는 연설을 하기도 난처하고, 그렇다고 핑계대고 불참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7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비장한 결의를 하고 당일 평양에 갔다.
김목사는 정중하게 성경을 펴더니 야고보서 5장 1~6절을 장중하게 봉독하고 “이 성경 말씀은 노동자들의 노임은 주지 않고 부자들이 떼여 먹은 그 노임이 소리 지른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북조선에 김일성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남조선의 이승만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세 하신 것입니다”라며 내가 말하려는 것을 내 앞에 여러분이 다 하였으니 지루하게 할 것 없고, 만세나 부릅시다“라고 하며 느닷없이 ”김일성 장군 만세“가 아닌 ”노동절 만세“라고 고함쳤다.
그리고 만세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김일성에게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했더니 김일성은 ”예 믿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노동절 행사는 김목사의 권위있는 행사로 끝난 줄 알았는데 노동절 행사가 끝난 2일부터 평양 방송은 김익두 목사의 연설이 며칠동안 되풀이 되어 방송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만세부분이 “노동절 만세”가 아니라 “김일성 장군 만세”가 우렁차게 흘러나왔고, 뒤이어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찬양하는 반면에 남조선의 이승만 도당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내용으로 일관해 나왔으니 어찌하랴? 내용인즉 김목사의 음성을 채취하고, 그 음성을 닮은 서우를 시켜서 김목사의 연설인양 꾸민 것이었다. 김목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방송을 할 수도 없고, 신문을 통하여 해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억울해도 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의 모든 인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난받으며 견디고 살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남한의 모든 국민들은 김목사를 의심하기도 하고 비난도 했으며, 일부에서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순교에 대한 곡해와 해명
세월이 흘러 6.25전쟁이 일어난 지도 벌써 석달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불법 남침했던 괴뢰군들이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한 달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쓰는 것 같았으나, 국군이 정비를 갖추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반격을 개시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낙동강변에서 괴뢰군 주력부대가 전멸하자, 나머지는 북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아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해 갈 무렵이었다. 때를 맞추어 북한에 잠재해 있던 반공 청년들이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북한에서도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정보에 발 맞추어 궐기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들어온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10월 13일에 너무 이르게 의거하게 되었다.
13일 하루 종일 의거한 아군과 패주하는 괴뢰 잔당들과의 전투가 종일 벌어졌다.
김목사는 반가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감격하여 14일 새벽종을 오래쳐서 교인들이 모여들어 새벽예배를 마치고,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환영회를 하자는 광고까지 마치고, 교인들은 일단 돌아가고, 김목사와 20여명이 교인들이 계속 남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패잔해가던 괴뢰군 일단이 교회당 담 밖에 숨어서 김목사의 광고 소리를 모두 듣고 교회로 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강단에서 기도하는 김목사에게 총격을 가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사격하여 현장에서 6명이 숨을 거두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고 생명을 유지했다.
김목사는 6.25전에도 월남하기를 강권했으나, “죽어도 양떼와 같이 죽어야지 목자만 살겠다고 월남하겠나?” 라며 언젠가는 순교하리하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목사의 시신은 교회 뜰에 가매장하였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치안이 유지될 때인 11월 29일 정식 장례를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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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인가?
변절자에 대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인가?
북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천지역에서의 은밀한 반공우익 행적을 보인 김익두 목사를 제거한 것은 자신들의 활동무대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기독교 측에 몽땅 넘겨주었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좌익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 동안 자신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충성했던 김익두 목사를 과감히 처단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조기련 총회장으로 사역한 경력 때문에 사후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좌경인물로 낙인 받아 왔으며 반면 북에서는 그곳대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힌 불운한 인물이 되었다.
마치 박헌영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듯한 처지가 되어 보였다.
인생 말년의 김익두가 신천 지역에서 은밀히 행했던 친미 반공행각은 북측 입장에서 볼 때는 단죄할 수밖에 없는 변절자이며 배신자에 해당됐다.
그의 인생은 ‘역사의 악’과 ‘개인사의 불행’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한 구조를 지니며 좌우의 이념 대립을 떠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시 사회와 교회를 구원한 걸출한 시대적 인물이었다고 본다.
역사의 정량론(定量論)으로 보아서 김익두 목사만이 그 시대에 좋은 것을 모두 다 갖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교회에서는 김 목사를 순교자로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가 과연 순교자로서 적합한 자격을 지녔는가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북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맹가입에 한사코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상당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던 김응순 목사와 함께 이북교회 목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를 살리는 길은 연맹에 가입하는 길뿐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목사들을 연맹에 가입시켰으며 거부하는 목사들에게는 협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 목사나 이성휘 목사, 산정현교회의 방계성 전도사, 이기선 목사 등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처럼 김 목사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가운데 굳이 한국교회가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직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김 목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과정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신천 반공무력 사태에 대한 북측과 좌익계열의 보복 살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이 반공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반공 그 자체로는 순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한 과학적 자료와 김일성 정부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철저한 고증과 절차를 거친 후, 객관적 평가를 통해 순교자 규정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북측의 주장대로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게 협력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은밀히 미군과 국군 그리고 남한 정부와 내통했을 뿐 아니라 신천지역 기독교 청년들을 한데 묶어 반공연대세력을 꾀했던 김익두 목사는 중국 길림에서 선교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 목회를 시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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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에 대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인가?
북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천지역에서의 은밀한 반공우익 행적을 보인 김익두 목사를 제거한 것은 자신들의 활동무대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기독교 측에 몽땅 넘겨주었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좌익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 동안 자신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충성했던 김익두 목사를 과감히 처단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조기련 총회장으로 사역한 경력 때문에 사후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좌경인물로 낙인 받아 왔으며 반면 북에서는 그곳대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힌 불운한 인물이 되었다.
마치 박헌영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듯한 처지가 되어 보였다.
인생 말년의 김익두가 신천 지역에서 은밀히 행했던 친미 반공행각은 북측 입장에서 볼 때는 단죄할 수밖에 없는 변절자이며 배신자에 해당됐다.
그의 인생은 ‘역사의 악’과 ‘개인사의 불행’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한 구조를 지니며 좌우의 이념 대립을 떠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시 사회와 교회를 구원한 걸출한 시대적 인물이었다고 본다.
역사의 정량론(定量論)으로 보아서 김익두 목사만이 그 시대에 좋은 것을 모두 다 갖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교회에서는 김 목사를 순교자로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가 과연 순교자로서 적합한 자격을 지녔는가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북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맹가입에 한사코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상당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던 김응순 목사와 함께 이북교회 목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를 살리는 길은 연맹에 가입하는 길뿐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목사들을 연맹에 가입시켰으며 거부하는 목사들에게는 협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 목사나 이성휘 목사, 산정현교회의 방계성 전도사, 이기선 목사 등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처럼 김 목사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가운데 굳이 한국교회가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직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김 목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과정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신천 반공무력 사태에 대한 북측과 좌익계열의 보복 살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이 반공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반공 그 자체로는 순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한 과학적 자료와 김일성 정부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철저한 고증과 절차를 거친 후, 객관적 평가를 통해 순교자 규정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북측의 주장대로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게 협력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은밀히 미군과 국군 그리고 남한 정부와 내통했을 뿐 아니라 신천지역 기독교 청년들을 한데 묶어 반공연대세력을 꾀했던 김익두 목사는 중국 길림에서 선교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 목회를 시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13일의 금요일’에 반공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김익두
강양욱 목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을 협력하던 김익두 목사는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과오와 행적에 대한 뉘우침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해 왔고 교단의 황해노회장과 장로교 총회장를 역임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해방 전에는 순수한 부흥목회에만 주력했는데 해방이후 이북의 교회가 사회주의 교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자신이 그 일에 주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해도 남아 있던 500명 정도의 신자들을 거느리며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김 목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남쪽소식을 접하거나 날이 갈수록 우익 세력들과의 접촉을 갖는다. 특히 남북을 오가며 우익 지하운동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이북에서도 가장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지역이다 보니 반면에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맞춰 반격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진격한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너무 서둘러 10월 13일이라는 날짜에 반격을 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됐고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연합군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당황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서울 점령 사흘 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고 뒤 이어 미군과 UN군도 북진에 가세했다.
UN군이 38선을 돌파해서 북진을 하니까 그 소문이 재령과 신천지역에 퍼지면서 김익두 목사의 주변에는 아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당시 신천지역에는 남과 북을 오고가며 음성적으로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백색테러로 유명한 한독당 당원, 백의사, 서북청년단 요원을 비롯해 김구 노선에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우익 조직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승만 정부에서 파견된 권총을 소지한 첩자들도 남북을 오가며 몰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익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신천 서부교회 청년들과 읍내에 소재한 교회 청년조직들을 규합하여 국군과 UN군의 전황을 알려주며 반공궐기와 반격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국군과 UN군의 북진 소식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은밀한 거사가 계획됐다. 구월산에서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거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의 반공 우익청년들의 계획은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켜서 미리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관해 온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 그날은 이른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날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10월 13일 저녁 5시경이 되자 드디어 우익들의 반공 봉기가 일어났고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체 치안대원들 한 사람이 아카보총을 대 여섯 정씩 메고 나타났다. “대한민국만세!. 국군만세!” 하면서 신천읍과 각 마을에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나타나서 흥분한 상태로 좌익들을 체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신천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은 대대적인 좌익 색출에 돌입했고 끔찍한 학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모든 사건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에 도화선이 되어 터진 것이다. 마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좌익계열 청년들이 우익반공계열 수백 명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하에서 우익반공 조직 운동을 하고 있던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온천교회, 구당교회, 석당교회, 간성리교회, 은천교회, 지봉교회 등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학생들 수백 명이 반발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13일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와 관공서를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닷새간의 전투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북진하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강양욱 목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을 협력하던 김익두 목사는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과오와 행적에 대한 뉘우침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해 왔고 교단의 황해노회장과 장로교 총회장를 역임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해방 전에는 순수한 부흥목회에만 주력했는데 해방이후 이북의 교회가 사회주의 교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자신이 그 일에 주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해도 남아 있던 500명 정도의 신자들을 거느리며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김 목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남쪽소식을 접하거나 날이 갈수록 우익 세력들과의 접촉을 갖는다. 특히 남북을 오가며 우익 지하운동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이북에서도 가장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지역이다 보니 반면에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맞춰 반격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진격한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너무 서둘러 10월 13일이라는 날짜에 반격을 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됐고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연합군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당황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서울 점령 사흘 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고 뒤 이어 미군과 UN군도 북진에 가세했다.
UN군이 38선을 돌파해서 북진을 하니까 그 소문이 재령과 신천지역에 퍼지면서 김익두 목사의 주변에는 아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당시 신천지역에는 남과 북을 오고가며 음성적으로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백색테러로 유명한 한독당 당원, 백의사, 서북청년단 요원을 비롯해 김구 노선에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우익 조직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승만 정부에서 파견된 권총을 소지한 첩자들도 남북을 오가며 몰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익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신천 서부교회 청년들과 읍내에 소재한 교회 청년조직들을 규합하여 국군과 UN군의 전황을 알려주며 반공궐기와 반격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국군과 UN군의 북진 소식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은밀한 거사가 계획됐다. 구월산에서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거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의 반공 우익청년들의 계획은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켜서 미리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관해 온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 그날은 이른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날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10월 13일 저녁 5시경이 되자 드디어 우익들의 반공 봉기가 일어났고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체 치안대원들 한 사람이 아카보총을 대 여섯 정씩 메고 나타났다. “대한민국만세!. 국군만세!” 하면서 신천읍과 각 마을에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나타나서 흥분한 상태로 좌익들을 체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신천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은 대대적인 좌익 색출에 돌입했고 끔찍한 학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모든 사건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에 도화선이 되어 터진 것이다. 마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좌익계열 청년들이 우익반공계열 수백 명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하에서 우익반공 조직 운동을 하고 있던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온천교회, 구당교회, 석당교회, 간성리교회, 은천교회, 지봉교회 등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학생들 수백 명이 반발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13일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와 관공서를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닷새간의 전투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북진하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에 총격을 당한 김익두 목사
광란의 살육전이 계속되던 13일 밤이 지나고 어느덧 14일 새벽 4시가 되었다.
이제 신천지역은 우익 반공세력과 미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전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익두 목사는 교회의 종탑으로 가서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새벽종을 치고 교인들에게 새벽예배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시기였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이 여기저기서 50명 정도가 모였다.
김 목사와 교인들은 긴장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라고 선언하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를 모두 마치고 이윽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서너 가지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내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어 우리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넷째는 신앙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릅시다.”
김 목사는 광고시간을 이용해 교인들과 함께 신앙적인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했다.
그는 이어서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우리 교회가 환영회를 개최하자’는 말로 모든 광고를 마치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를 끝내자 참석한 신자들의 절반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김 목사와 함께 예배당에 계속 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강대상 옆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도 예배당 밖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반공세력이 밤이 맞도록 서로 쫒고 쫒기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던 살벌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전세가 불리해진 좌익세력들이 간혹 교회 뒷산 길목을 이용하여 간간히 도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김익두 목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좌익과 인민위원회 대원들은 김 목사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당 담 밖에 몰래 숨어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마치자 어둑어둑한 예배당 안에 구둣발로 진입한 그들은 강단 위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말리려던 교인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어서 총구는 김 목사를 향하여 발사되어 현장에서 모두 6명이 즉사를 하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채 장로와 임성근, 김채호 전도사, 그리고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청년 두 명, 이렇게 모두 6명이 절명했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던 21살의 처녀 이순일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도망치다가 죽창에 뒷 어깨가 찔려 실신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광란의 살육전이 계속되던 13일 밤이 지나고 어느덧 14일 새벽 4시가 되었다.
이제 신천지역은 우익 반공세력과 미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전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익두 목사는 교회의 종탑으로 가서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새벽종을 치고 교인들에게 새벽예배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시기였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이 여기저기서 50명 정도가 모였다.
김 목사와 교인들은 긴장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라고 선언하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를 모두 마치고 이윽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서너 가지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내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어 우리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넷째는 신앙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릅시다.”
김 목사는 광고시간을 이용해 교인들과 함께 신앙적인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했다.
그는 이어서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우리 교회가 환영회를 개최하자’는 말로 모든 광고를 마치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를 끝내자 참석한 신자들의 절반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김 목사와 함께 예배당에 계속 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강대상 옆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도 예배당 밖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반공세력이 밤이 맞도록 서로 쫒고 쫒기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던 살벌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전세가 불리해진 좌익세력들이 간혹 교회 뒷산 길목을 이용하여 간간히 도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김익두 목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좌익과 인민위원회 대원들은 김 목사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당 담 밖에 몰래 숨어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마치자 어둑어둑한 예배당 안에 구둣발로 진입한 그들은 강단 위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말리려던 교인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어서 총구는 김 목사를 향하여 발사되어 현장에서 모두 6명이 즉사를 하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채 장로와 임성근, 김채호 전도사, 그리고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청년 두 명, 이렇게 모두 6명이 절명했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던 21살의 처녀 이순일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도망치다가 죽창에 뒷 어깨가 찔려 실신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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