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09 / 27 /2022 - 10 / 11 / 2022)


01-26-2023(목) 전도서 강해 자료 /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전도서 11:1)

전도서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라는 문구에 아라비아 숫자 1자가 난외에서 "새벽"이라고 번역합니다.

새벽이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잠언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부지런히 라는 단어에 아라비아 숫자 2자는 난외에서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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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2022(수)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확증하라. δοκιμάζω  1381  

1. 시험하다,  2. 시험하여 증거하다,  3.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발음  / 도키마조(dŏkimazō)
어원 / 미래 δοκιμάσω, 제1부정과거 ἐδο- κίμασα, 완료수동 δεδοκίμασμαι, 1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분간하다(눅 12:56, 롬 2:18), 시험하다(눅 14:19, 고후 8:22, 히 3:9), 연단하다(벧전 1:7), 분별하다(롬 12:2, 빌 1:10),
옳다 하다(롬 14: 22), 살피다(고전 11:28, 갈 6:4), 인정하다(고전 16:3), 증명하다(고후 8:8), 감찰하다(살전 2:4), 헤아리다(살전 5:21).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시험하다. πειράζω 3985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믿음에 있는가?(5절)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신(信) - 사람 인(亻) +말씀 언(言)

πίστις, εως, ἡ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 3982. πειθώ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 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험하라’, ‘조사하라’, ‘확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조사해서 믿음이 있는 지, 믿음이 있다면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5절의 특징적인 말 중에 ‘너희 자신을’, ‘너희가 스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재귀대명사로 ‘자기 스스로’라는 강조의미입니다.
남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테스트하고, 확증하고, 스스로 알아야 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시험-조사, 점검-해야 할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자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첫 출발은 내 속에 계신 예수의 영이 정말 계시고, 그 성령님과의 교통이 있을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믿음의 증거들과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독수리의 일종인 뱀잡이수리가 있는데, 주로 공중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두더지나 뱀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낚아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뱀잡이수리가 민첩하게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고 있는데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날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뛴다고 합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짐승이 땅에서 뛰어봐야 얼마나 빨리 뛰겠습니까? 결국 얼마 못가서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무척 믿음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믿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살아계시고, 그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고, 능력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날개를 주셨는데, 삶에 적용하지 못하므로 환난의 맹수, 사단의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자 없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있는가?(7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선(善) -  양 양(羊) + 입 구(口) + 초두머리 초(䒑)


καλός, ἡ, όν  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카로스(kal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좋은(마 3:10, 막 4:8, 요 2:10), 아름다운(마 7:19), 착한(마 5:16), 마땅한(마 15:26), 나은 (마 18:8,9, 막 9:45),
선한(요 10:11, 고후 8:21, 딤전 1:8), 옳은(고전 5:6), 잘하는(딤전 3:13), 유익을 얻는(히 13:9).
신약 성경 / 101회 사용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기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선을 행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선과 악에 대해 아주 쉽게 풀이를 했습니다.

“선이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악이란 뒷맛이 나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선을 행하기는 처음은 어렵고 힘들지만, 나중에 그 결과를 보면 흐뭇합니다.
악이란 처음에는 내게 큰 쾌락이 되고, 좋은 것처럼 보여도 나중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쉬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힘들지만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 목사는 “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자신을 향해서 질문한다.
아침에는 내가 오늘 아침에 무슨 선한 일을 할까 질문하고, 점심에는 내가 정오에 무슨 선한 일을 할까 질문하고, 저녁에는 내가 오늘 무슨 선한 일을 행하였는가 질문한다”고 했습니다.

‘마천동 슈바이처’라는 불리는 서내과 원장 서대원 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냈고, 장남인 그에게 2억 원의 부채를 남기고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서울 경찰병원에서 인턴생활해서 겨우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살았는데,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 월급의 절반을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보따리를 싸면서 ‘의사한테 시집와서 호강할 줄 알았는데 고생만하는구나’하고 2살짜리 아들을 두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아내도 떠났고, 2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무작정 길을 걷다가 ‘소망의 집’이라는 지체장애인 보호시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아픈 것을 보고 들어가서 진료했습니다.
이때 서 원장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 나도 여기서 보람을 느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의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을 새출발하게 해 준 사람들이라며, 무의탁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돈을 내든지 내지 않든지 성심껏 치료해주었습니다.
‘마천동의 슈바이처’라고 소문이 나서 처음에는 돈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찾아왔었지만 지금은 진료비를 다 내는 손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선행도 하고, 존경도 받고, 또 내과에 손님들이 많아지니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면 처음에는 어려워도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십자가는 더하기의 복으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되어 가고 있는가?(9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온전(穩全)
- 편안할 온(穩), 온전할 전(全)

穩 : 안정되다, 믿음직하다, 확실하다 
벼 화(禾) + 삼갈 은(㥯) / 숨을 은(䔌), 마음 심(心)

全 : 흠이 없다, 갖추다
사람 인(Ƣ) +  임금 왕(王)

κατάρτισις, εως, ἡ  2676

1. 완전하게 됨,  2. 완성

발음 / 카타르티시스(katartisis) 

어원 / 26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전하게 되는 것(고후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 2675.  καταρτίζω 
1. 정돈하다,  2.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3. 완전하게 하다

발음  / 카타르티조(katartizō) 

어원 / 미래 καταρτίσω, 제1부정과거 κα- τήρτισα, 제1부정과거 중간태 κατηρ- τισάμην, 완료 수동태 κατήρτισμαι, 2596과 739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깁다(마 4:21, 막 1:19), 온전하게 하다(마 21:16, 살전 3:10, 벧전 5:10), 온전하게 되다 (눅 6:40, 고후 13:11), 짓다(히 11:3), 바로잡다(갈 6:1), 예비하다(히 10:5).
신약 성경 / 13회 사용

바울은 자신이 약하게 되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온전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도 안 됩니다.
온전하되 끝까지 온전해야 합니다. 봉사해도, 순종해도, 예배를 드려도, 예물을 드리더라도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생들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모든 과목마다 성적이 좋아야 합니다.
한 과목을 아무리 잘 봤어도 다른 과목을 망치면 통계점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출석, 말씀 순종, 봉사, 충성 등 모든 분야에서 온전하길 바랍니다.

현대 조각 가운데 아상블라주(Assem-blage)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이것은 폐품, 다른 사람들이 버린 빈 깡통, 고물, 철사 등을 모아서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라는 작품도 누군가 버린 고물 자전거에 망가진 쇠붙이와 고철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값어치 없이 버려진 것이었지만, 피카소가 손을 대었을 때 고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 ·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작품이 된다면 우리의 삶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만져주시도록, 삶에 개입하시도록 기도하십시다.
그럴 때에 내 인생의 작품은 계산할 수도 없는 고가가 됩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가’,
‘선을 행하고 있는가’,
‘온전하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물어봅시다.
비록 우리는 부족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하라”는 무슨 의미인가?(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어떻게 인간이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무죄한 존재이시다.
그러나 타락 이래로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엡 2:3).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마태복음 5:48에 있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두 번째 부분의 결론이다.
산상설교 전체는 마태복음 5-7장인데, 그것의 둘째 부분은 5:17-5:48이다.
이 부분의 서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서언 다음에 연속되는 여섯 개의 대조 진술(antithesis)이 뒤따라 나오는데, 예수님은 구약의 성경절이나 전해 내려오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인용한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22).

이 대조 진술들은 구약의 개념들을 거부하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 경우마다 구약의 가르침을 더 심도 있게 적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자신이 온 목적이 구약의 원칙들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옛 명령의 깊이와 더 폭넓은 적용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당신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주에 대해 빛과 축복의 중심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작은 사회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온전하신 것같이, ‘선하신 그분의 선하심을 빌어’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온전하게 될 수 있다.”(산상보훈, 77쪽).

마태복음 5:43-48에 나오는 마지막 대조 진술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의 일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를 인용하면서, 거기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진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그 유명한 원칙으로 전통적인 진술을 뒤엎는다.
계속하여 주님께서는 원수에게 이런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비가 크신 하나님의 행위와 대조하신다.
그런 사랑은 세리나 이방인 곧 성경적 종교의 범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나 진배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두 부류의 행동 방식 곧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세리나 이방인이 대조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은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라(마 5:48)는 요청이 뒤따라 나온다.

마태복음 5:48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 대조 진술의 문맥 안에서 온전[완전]은 결점이 없거나 일체의 도덕적 결함이 근절된 상태로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사이가 가장 먼 자들 곧 우리의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대조 진술의 전체 문맥 안에서 마태복음 5:48의 온전하라는 요청에는 가장 높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미움도 살인으로, 음욕의 눈길도 간음으로 재정의하고, 미움도 품지 말고 음욕도 품지 말라고 명한다.
이런 최상의 요구에 대면하여, 우리는 간단히 제자도를 포기해 버리려 하거나, AD 2세기에 한 저술가가 디다케(Didache)라는 책 6장 2절에서 마태복음 5:48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대가 주님의 온전한 멍에를 멜 수 있다면 완전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또는 예수님의 의도가 그렇지 않은데도, 완전은 불가능한 것이며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온전”[완전]의 의미 :

마태복음 5:48에서 “온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텔레이오스인데, “완전한, 결함이 없는, 온전한, 충분히 발전된, 성숙한, 목표나 목적을 달성한” 등을 의미한다.(1)

어떤 것이 다 성장하여 그것의 목표에 도달하면 텔레이오스라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가 있다.
그것은 하늘 지향적이다.
위에서 부르신 복음의 부름은 분명하다(빌 3:12-14).
하나님이 어떤 수준의 지점에서 우리를 발견하든 우리를 가납하시지만, 그 수준에 그대로 머물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성숙으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마태복음 5:48의 예수님의 명령은 그 여행의 결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여행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 안에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온전[완전]의 목표 곧 그리스도인 성숙, 다시 말해서 하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도덕적 어둠의 세계에 비치는 우리의 길라잡이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48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온전]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라는 주님의 초청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한경직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갔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예수 잘 믿으세요”

“목사님들 목회 잘 하세요”가 아니라,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러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중에 어느 목사님이 작은 소리로 말했답니다.
“아이고 목사님! 저희들 목사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목사님은, 여전히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제서야 모든 목사님들이 충격을 받고, 한 목사님의 하신 말씀을 받고, 정말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더 열심히 목회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잘하려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하지요.. 그것이 기본이지요.
그러면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뭘까요?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뭘까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버리운 자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시는 것을 확실히 시험해 봤더니 나는 확실히 주님이 계시는 것을 확증할 수 있어 그러면 ‘성공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의 ‘실패자, 낙제자, 실격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확증이 없다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의 신앙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건강도 그렇습니다.
잘 먹고 운동하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정기건강 검진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큰 병 생기는 것도 모르고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점검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에 갑자기 통증이 나면, 병원엘 갑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면, 응급조치를 한 후에 하는 일이, 통증에 대한 진단, 점검을 하는 일입니다.

진단을 잘 해야, 바른 처방이 나오고, 정확한 의료행위로 사람을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그 환자의 통증을 잘 진단하느냐 못하느냐가, 잘 점검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치료의 관건입니다.
잘못된 진단을 하면, 잘못 처방이 되고, 잘못된 처방이 나오면, 잘못 치료가 되어 치료가 불가능해집니다.
육적인 진단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진단도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입니다.

5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패자’입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어느 운동장으로 가로질러 똑바로 걸어가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바로 가지를 못하고 삐딱하게..
그런데 그래도 운동장을 웬만큼 바르게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눈을 가리고 가다가 가끔씩 멈추어 서서 내가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점검을 하면 그래도 웬만큼 똑바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성공할 이유가 있고, 실패를 하면 실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 여호수아 7장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지만 그 다음에는 아주 작은 아이 성을 정복하려다가 오히려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난 후에, ‘아이 성’은 아주 쉽게 정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면서 진단을 하니까 진단이 나왔습니다.

‘아간’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였는데, 아간이 물건을 보고 탐욕을 느낀 나머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 하나를 자기 장막에 숨긴 것이었습니다.

진단이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처방을 어떻게 했지요?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 물건을 찾아내고, 아간의 자녀들을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수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시험해서 잘 진단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 믿어지는가?’
‘주님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운전대를 붙잡고 일하고 계시는가?’
그것이 안 믿어진다는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불합격자, 낙제자’라는 것입니다.

"시험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되돌아보다’. ‘자세히 조사하다, 살펴보다’라는 뜻.
‘노력하다, 분투하다, 책임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 말씀대로, 그 믿음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혹시, 나태하지는 않았나, 혹시, 게을러지지는 않았나,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나,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시험하고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0: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그 사람은 주님과 동해하고 있는가?’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사람을 볼 때 얼마나 외모를 보나요?
가진 것 보고, 배운 것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을 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새)실격자, 공)낙제한 것, 현)불합격자, 영)실패자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를 시험하고 뒤돌아보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시험을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눈을 돌리면 내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내리지 않습니다.

5절을 읽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는가?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실패, 실격,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나의 눈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살피고 점검했다면 이제는 “나는 믿음이 있는가,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고 여러달 후에 한 분을 담임목사로 청빈 위원회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이런 흠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청빙을 해도 될까요?”

첫째, 이 분은 중년이 되엇는데도 결혼을 못했습니다.
둘째, 이 분은 목회를 하면서 가끔 사업도 하는 분입니다.
셋째, 이 분은 외모가 너무 못생겼습니다.
넷째, 이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다섯째, 이분은 말이 너무 어눌해서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여섯째, 이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개척하면서 옮겨 다니십니다.
일곱째, 이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누굴까요?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진 것 배운 것 일생 쌓아놓은 것일까요? 지위와 명예, 직분인가요?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습니까?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우리는 실패자 실격자 낙제자 불합격자입니다.  

내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성공자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진단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진단하고 바르게 검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내 영이 사는 길이요.
내 믿음이 바로 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참 신앙인과 신앙인답게 보이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참 신앙인은,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신앙의 불합격자이냐? 낙제생이냐? 실패자이냐?

성도가 언제 실패자가 되고, 언제 불합격자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예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기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찬송과 헌신과 봉사....
이런 것은 낙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대화하고 사랑하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항상 점검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여러분 건물을 잘 점검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 보셨죠?
다리를 점검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셨죠?

건강진단도 잘못 점검되어 중병에 걸리는 분들... 자동차도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시험함을 통하여 입니다.
시험하라는 명령형이며 현재형입니다.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사용된 단어는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시험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시험의 이유이자 목적인데 믿음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문맥에서 예수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구 안에 있다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항상 그 존재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영향력 아래 있으며 지배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문에서 안에 라는 말은 소유의 개념이 강합니다.
즉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의 그의 소유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의 큰 차이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며 예수님의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그분의 말씀이 우선 순위이며 그분의 말씀이 앞서는가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삶이 여전히 자신의 마음대로이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육체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예수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를 안에 있으면 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조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행동이 조심스럽습니다.
혹시 남에게 피해가 갈까, 다른 이가 나의 이러한 행동으로 오해할까 생각해서 행동하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멸시를 받고 조롱이 될까 하여 말에나 행동에나 절제합니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항상 생각이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말에 절제가 없고 행동에 절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예수를 위해 살고자 합니다.
자신이 예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그대로 살아갑니다.

두 번째의 명령으로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확증한다는 것은 입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을 통하여 입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신을 보며 무엇 보다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다스림과 주권을 인정하고 높이여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시험을 통하여 입증됩니다.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살피는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하는가? 이것을 통하여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 본다면 스스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말입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

1-2세기 당시의 교회들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
이라고 하여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신앙 교리와 고백을 갖추었는지 살피는 일정한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기간을 잘 견디지 못하고 카테키즘(Catechism: 교리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비로소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세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세례문답을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를 주며,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죄사함의 확신도 없고 믿음의 고백이나 삶이 없는데도 직분자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바른 교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음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스님이 “나는 30년 동안 좌선(坐禪)을 해왔기 때문에, 번뇌(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어지럽히고, 귀찮게 하고, 사로잡혀 방황하게 하고, 더럽히는 정신작용)가 말끔히 없어졌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어떤 큰스님이 초상집에서나 하는 조문(弔問)의 인사를 합니다.

“정말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그러자, 자기의 오랜 좌선 수련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스님은 화를 내면서 그런 조문의 인사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대듭니다.
큰스님은 대답합니다.

“번뇌가 있어야만 벗어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번뇌는 벗어나고 깨닫는 밑천입니다.
스님은 (번뇌가 없다고 하니) 그 밑천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는 사람이 죽은 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상심이 되셨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송원스님의 「알기 쉬운 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곤고(困苦)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 자신만으로는 곤고함이 있음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참고)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죄에 노출되고 죄로 인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과 생각으로 인하여서 안타까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느 크리스천들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받고 있던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험상궂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이르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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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기쁨은 밤에 잠을 자던 중 갑자기 꿈에 전해야 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이다.
1시 30분경 눈을 떠야 했다.
왜냐하면 "사탄의 사자"라는 묵상의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자성어로 생각하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즉지 자리에서 일어나 사자성어들을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천국에 대한 환상을 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국 세 가지 사자성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σκόλοψ, οπος, ὁ  4647

1. 말뚝,  2. 막대기,  3. 가시

4628과 3700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함 : 말뚝

발음  / 스코롭스(skŏlŏps)
관련 성경 / 가시(고후 12:7).
신약 성경 / 1회 사용

자고. ὑπεραίρω 5229

1. 일어나다,  2. 스스로 높아지다,  3. 의기양양하다

발음  / 후페라이로마이(hüpĕrairŏmai) 

어원 5228과 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만하다(고후 12:7), 자기를 높이다(살후 2:4).
신약 성경 / 1회 사용


10-11-2022(화)

사단의 사자(고린도후서 12:7)

안중무인(眼中無人)

눈 안,  가운데 중,  없을 무,  사람 인

-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

안하무인(眼下無人) 동병상련(同病相憐)

눈 안,  아래 하,  없을 무,  사람 인

-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

교만을 의미합니다.
천국을 경험했다는 많은 간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것이 없다.
도대체 천국은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천국 환상에 대한 자기 교만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동병상련(同病相憐)

한가지 동, 병 병, , 서로 상, 불쌍히 여길 련(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할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아픔을 주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아픔을 겪는 부모를 위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하겠다.
 
합려(闔閭)는 자객(刺客)인 전저(專諸)를 시켜 오나라(吳--)의 왕 요(僚)를 죽이고 왕위(王位)에 올랐다.
오자서(伍子胥)는 전저(專諸)를 천거(薦擧)한 공로(功勞)로 대부(大夫)가 되었고 또한 초나라(楚--)에서 망명(亡命)한 백비(伯嚭)를 천거(薦擧)하여 함께 정치(政治)를 하게 되었다.
그때 같은 대부(大夫) 피리(被離)가 「백비(伯嚭)를 한 번 보고 왜 그렇게 신용합니까?」라고 물으니 「그것은 그와 내가 같은 원한(怨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상가(河上歌)에 같은 병에는 서로 불쌍히 여겨 한 가지로 걱정하고 서로 구하네.」라고 대답(對答)했다.
결국 오자서(伍子胥)는 백비(伯嚭)를 경계(警戒)하는 피리의 충고(忠告)를 듣지 않다가 월나라(越--)에 매수된 백비(伯嚭)의 참언(讒言)으로 분사(焚死)했다.

오월춘추의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나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오자서가 합려를 오나라 왕으로 만들어 정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각지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는데, 그 가운데 내정의 명수 백비가 끼어있었다. 사람들은 백비가 물욕이 심하고 강직하지 못하다고 평했으나, 오자서는 백비의 가족이 초나라 왕에게 몰살당했음을 들면서 "같은() ()을 앓는 사람들은 서로() 동정하는() 법이다. 백비는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으니 나를 잘 이해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사실 그정도가 아니라, 오자서도 초평왕의 방관 속에서 비무기의 농간 때문에 집안이 멸문당해서 오나라로 도망왔고, 백비도 비무극의 차도살인으로 집안이 초토화 되어서 오나라로 도망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대로 훗날 백비는 은혜를 잊고 오자서와 대립하고 그를 모함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언유재이(言猶在耳)

言   말씀 언,  오히려 유, 在  있을 재,  耳  귀 이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천국 간증을 들으면 성경보다는 천국 간증이 더 흥미롭다.
가장 귀한 진리는 성경이다.
기준을 능가하는 간증 더구나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듣는다면 성경의 기준보다 더 그 가치를 높이므로 진리가 훼손되거나 오염 될 것이므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개인이나 국가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환난을 가리켰고,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이 가졌던 경우처럼 육체의 가시를 가리켰습니다.
누구나 가시 없는 평안한 삶을 소망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인과 국가에까지도 가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님을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고 괴로했을 것입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순간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민 20:1-13).
엘리야 선지자에게도 연약한 가시가 있었습니다(왕상 19장).
더군다나 사무엘 선지자에게도 두 명의 자식이라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8:2-3을 볼 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은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창 15-16장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약점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는 하갈이라는 이방 여자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개인뿐 아니라 어떤 조직 기관 안에서도, 국가에도 가시를 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 33:55을 보면 ‘그 땅의 백성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 남겨둔 자들이 너희 눈에 가시가 되고 너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국가적인 가시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인의 가시든 어떤 단체의 가시든 당사자에게는 매우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속의 고통도 어려운 것이지만 육체의 가시도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가시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는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를 깨닫고 그 뜻대로 합당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첫째, 겸손을 위한 것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많은 지식과 신비한 영적 체험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 있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도 40년간이나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으나 동족을 돕다가 죽이는 바람에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40년간 처가살이라는 가시에 찔리면서 겸손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시를 주셔서 하나님의 종들을 겸손하게, 낮아지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인류가 최초로 지었던 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의 문턱에서 믿음으로 이 가시를 택함으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온전하게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두로 왕은 정치에 성공한 위대한 왕으로서 모든 길에 완전한 듯 했지만 그의 교만이 파괴와 멸망을 불러왔습니다(겔 28:1-24). 그의 오만과 허욕을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두로 왕과 함께 한 시돈 나라도 두로 왕을 모방하다가 패망하게 되는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고후 12:10을 볼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시에 찔려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형제들의 미움의 가시, 애굽의 종으로 팔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가시에 찔리고 마침내 옥에 갇히는 가시에 찔리게 됐지만 이러한 가시들을 통해 그의 신앙인격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요셉은 온갖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픔과 쓰라림을 줍니다.
이 가시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주님의 가시관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작은 가시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같이 그의 곤고를 기뻐하는 믿음이 가시를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고후 12:10, 8:13).

셋째, 가시를 피하려만 하지 말고 오히려 그 가시를 정복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가시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진정으로 가시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12:7)

​내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에 있는 것입니다. 
질병을 두시거나 아니면 불편한 환경적인 요소를 두게 하심으로 상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 가시는 육체의 고통을 있게 하거나 마음이 상함으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합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권세가 허락된 범위 내에 있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런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심으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큰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하는 것은 주의 환상과 계시였습니다.

바울은 낙원이라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자랑하겠으나 절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아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영계의 세계를 보고 절제하지 못함으로 자랑하다가 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인격까지 훌륭한 덕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은사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나중에는 신이 된 것처럼 교만하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은혜는 영계의 세계를 본 것을 자랑하지 못하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2.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12:8~9)"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사도바울은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인 질병이 있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떠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절하게 구하였습니다.
내게서 질병의 병마가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기를 구하였으나 여전히 질병은 떠나지 않고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주께 구하여 응답하여 주시는 기도가 있고,
세월이 지나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있고, 
기도를 해도 들어주지 않은 기도도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을 당하는데도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계셨습니다.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중국의 목사님이 몸에 만성질병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여도 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는 앞에 큰 바위가 있어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 바위를 치워주랴 아니면 물이 바위를 넘치게 하여 건너가게 해주랴?"

목사님은 물이 바위를 넘치게 하여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위 위로 넘치게 하여 배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꿈에서 깨어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내 육체에 곧 사단의 사자가 있으나 질병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어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2. 만성질병이 내게 있어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편하고 안전한 것입니다.

소유에 있습니다.

외모에 있습니다.

자랑에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넘치는데 있습니다.

인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잠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오히려 약한데서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것도 없고

내게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기쁨은 "예수 기쁨 나의 기쁨"입니다.

약한 데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약함으로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3:17~18)"

​3.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발휘하게

부르심을 받아 쓰임받는 자들은 사람의 강함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인물들을 보면 약한 데서 하나님의 강한 것이

나옵니다.

모세는 나이 많았고 미디안의 오랜 광야생활로

애굽의 언어도 잊어 버렸으나 능력의 지팡이를 주셨고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학문이 없는 자였으나 성령을 충만하게 받음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탄없이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라도 담대한 믿음으로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마를 맞게 하여 이기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내가 강하고 능력있고 내가 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능력에 있을 때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을 결박하러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눈멀어 3일간 회심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복음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약한 것이 있어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1:26~28)"​

3.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13:4)"​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신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심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울 자리 조차 없어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말 밥통에 누이는 수치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데로 임하시는 것은 가장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심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촌동네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육체의 부친은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촌동네 사람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정말 힘이 없어 붙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늘의 하늘군대 천사들을 보내어 대적들을 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약함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조롱을 받았습니다. ​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오라 하며(마태복음27:40)"

​예수께서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 와 조롱하고 희롱하는 자들을 다 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련한 자는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님은 실명 전에 목사의 아들로 외국어에 능통하여 카츄사가 되었습니다. 

외국의 유학길이 열려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안요한은 자신을 더 의지하였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부터 눈에 이상이 옴으로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실명하였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약해진 실명으로 인하여 신학공부의 길이 열려 뉴욕의 헬렌켈러제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실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내게 약한 것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합니까?
그 약한 것이 질병,가난, 배우지 못한 것, 가정의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으로 벗어나려 하고 간구하여도 그대로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들을 붙잡아서 위로 받기 보다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한 것을 붙들어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할 그 때에 강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린도후서12:10)"







조슈아 W. 지프는 책 ‘환대와 구원’에서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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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022(월)

하나님의 열심으로(고린도후서 11:2) 

도입 이야기 /

남자가 보기에 심히 좋은 여자에게 구혼을 하고자  만날 약속을 하고 그 곳에 도착했습니다.
두군거리고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여자에게  청혼을 합니다.

남 :  '당신을 위해선 내 목숨까지 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 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요.'

여 :  '좋아요.  그럼 당신은 집이 있나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럼 당신은 BMW 차가 있나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럼 됐고요. 당신은 샐러리맨 인가요?'

남 : '아니요. 그러나...'

여 : '그러나, 그러나 하며 핑계 되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같이 무능한 사람과 결혼 할수 없어요.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떠난 후 남자는 혼자 말합니다.

나는 집은 없지만 맨숀이 여러채 있고, 자동차는 벤틀리와 람보기니, 포르쉐, 페라리등 여러 대가 있는데 왜 싸구려  BMW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난 세계 최고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데 왜 샐러리 맨이어야 하는지...' 

사람을 자신의 생각과 기준의 잣대로 평가 하거나 보지 말라는 예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과 연결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저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과 그 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채 저희의 판단과 기준과 생각 가운데 예수님을 저 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귀한 분이시고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협착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사는자의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울러 이러한 예수님이 저희의 신랑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사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그 분을 너무나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청혼을 잠시 있다 없어질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 그 부르심을 거부하므로 행복한 삶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사람들에게 찾아 나가 그들이 예수님의 청혼에 기쁨으로 응답하여 그 분의 신부가 되게 하는 중매장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검인 말씀을 읽으신 후 열심히 전도하는 저희들의 영적 전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교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중매장이가 되는‘전도’이것은 해도되고 안되는 일이 아니라 저희가 꼭 매일의 삶 속에서 억지로라도 행하여야 할 저희의 의무와 사명과 축복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중매(仲媒)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중매하다. ἁρμόζω 718 

1. 결혼시키다,  2. 결합시키다,  3. 고린도후서 11:2

발음  / 하르모조(harmŏzō)
어원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ἡρμοσάμην, 완료수동태 ἥρμοσ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ἡρμόσθην, 7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매하다(고후11:2).
신약 성경 / 1회 사용

열심.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2205

1. 열심,  2. κατὰ  ζηλός :  열심에 관한한,  3. ζηλός θεοῦ : 하나님을 향한 열심

발음  / 제로스(zē- lŏs)
어원 / 22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204.  ζέω

1. 끓는 열성으로,  2. 사도행전 18:25,  3. τῷ πνεύματι ζέοντες

발음  / 제오(zĕō)
어원 / [기본형] 분사 ζέων : 끓이다, 삶다,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관련 성경 / 열심을 내다(행 18:25, 롬 12:11).
신약 성경 / 2회 사용

중매(仲媒, 하르모조, ἁρμόζω)
남자와 여자를 소개하여 결혼하도록 돕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신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신랑이 되신 예수님께 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중매를 "거룩한 중매" 또는 "영적 중매"라고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사도 바울의 이력을 살펴보면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열정은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습니다.

‘열심’이라는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은 ‘제오’라고 합니다.
'제오'는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열심이란 ‘젤로스’를 ‘열심’ 또는 ‘열정’(熱情)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그러면 중매해서 결혼한 그 부부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 유난히 중매(仲媒)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은 희한하게도 중매를 했다하면 성공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중매를 통해 수많은 부부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매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중매에는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중매가 잘되면 뭐지요?

술이 서 말이요?
우리는 예수 믿으니까 술 서 말은 좀 그렇고, 중매 잘 하면 양복 한 벌이라도 얻어 입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못 되면 뭡니까? 뺨이 석 대지요.
그러니까 중매라는 게 잘 되면 좋은 일이지만 잘 안 되면 참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지요. 

둘째, 중매를 하려면 반드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확신이요? 양쪽에 대해 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랑 될 사람과 신부 될 사람 둘 다에게 확신이 있어야, 이 사람은 반드시 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중매를 하지 잘 모르는 사람을 중매 섰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셋째, 중매가 잘 되어서 성공해서 결혼한다 쳐도 결혼해서 오래 오래 잘 살아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중매는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매를 잘 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고 넓어서 아는 사람도 많고 그 많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 친구하고 이 친구는 틀림없이 잘 맞겠다” 싶으면, 확신이 오면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물론 100%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잘 아는 사람, 확신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게 하니 잘되는 것입니다.

내 일도 아닌데 아낌없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가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심지어 내 돈 써가며 둘을 연결시켜 주려 합니다.
이렇게까지 열심이고 헌신을 하니 중매가 잘되는 것입니다.
양복 한 벌 얻어 입으려고 중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려는 순수한 마음으로 중매를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도 바울의 중매는 한 여자를 남자에게 소개해주는 사람을 소개하는 중매가 아니라 ‘거룩한 중매’를 말합니다.
‘거룩한 중매’는 신부된 성도들을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아 만나고, 사귀고, 결혼해서 영원토록 동거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결혼과 비유해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라고 비유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아내가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외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또 교회가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녀를 총각에게 중매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성공하는 데도 얼마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헌신이 필요합니까? 시간 들어가, 돈 들어가,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을 거룩한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일을 위해 바칩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세상적인 조건이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인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주님께 중매하려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과 땀을 바치고, 인생의 성공도 포기하고 헌신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로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될 수 있었고 기독교역사 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열심을 바울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2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열심!’ 바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거룩한 중매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도 바울의 뜨거움과 열정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은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도 바울이 왜 그리 뜨거운가 했더니 바로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것이었군요.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젤로스’인데 그 어원이 ‘제오’ 즉 ‘끓이다, 뜨겁다’ 하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뜨거운 것입니다. 펄펄 끓는다는 뜻입니다. 뭐가요? 마음이지요. 그래서 이 ‘젤로스’를 우리말로 ‘열심’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열정’(熱情)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 하나님은 본디 아주 열심히 있는 분이고 열정이 있는 분입니다. 아주 뜨거운 분입니다. 펄펄 끓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냥 대충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냉랭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십니다. 그래서 스바냐 3: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하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이게 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뜨거움을 닮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처럼 내게 가장 귀한 것,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에게 중매하기 위해 다 투자한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는 그분의 성품, 그분의 행동, 그분의 모든 것을 닮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닮아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을, 그 열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성도들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교회입니까?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중매하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일 뿐입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매장에 들어서니 복도에서부터 직원들이 나와 자기 물건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시장에서나 호객을 하지 백화점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백화점도 시끌시끌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처음에는 좀 얼굴이 찡그려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손님을 붙잡으려고 기를 쓰고, 정말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안타까워하는 그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저들도 저렇게 안타까워하고, 기를 쓰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늘나라 상급을 바라고 사는 우리는 한 영혼을 어떻게 대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저 자신부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정을 닮아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 불타는 가슴을 닮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으로 믿고 뜨겁게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그 결과가 한 영혼을 향한 열심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로 해도, 아무리 뜨겁게 믿겠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다면 너는 몇 사람이나 나에게 중매했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열심’은 이렇게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올해 전도 작정을 하면서 열 사람을 작정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사람이나 작정하셨나요? 솔직히 열 사람을 써내면서 자신이 별로 없었습니다. 매년 다섯 명씩 전도 작정을 써내면서 단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기도 했습니다. “너는 담임목사잖아? 목회도 얼마나 바쁜데 어떻게 전도를 하겠어? 그리고 꼭 나가서 한 사람 데리고 오는 것만 전도가 아니라 네가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면 그게 다 전도 아니겠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핑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저는 바빠서요, 저는 숫기가 없어서요, 다른 건 다 하겠는데 전도는 정말 못하겠어요” 하고 핑계 대는 성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동안 제가 성도들보고 전도하고 하면 “목사님도 못하면서 무슨 전도?” 하고 얼마나 흉봤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올해는 꼭 전도를 하자, 올해는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자, 하면 된다, 마음먹으면 된다 하고 결심하고 지금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주 전 소개했지만 하나님이 한 가정(유장용, 이정순, 유지수 성도 가정)을 제게 붙여주셨어요. 오늘 4주째가 되어 등록을 합니다만 정말 제가 직접 전도한 것도 아닌데 성탄절 때 우리 교회 와서 우연히 저를 만났고(화장실 안내) 그 후 또 우연히 통화할 일이 생겨서 “우리 교회 오세요” 하니까 “명절(설) 지나고 남편하고 가겠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진짜 오셔서 제 이름으로 등록을 하신 겁니다. 좀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전도한 것도 아닌데 저를 인도자라고 쓰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분들을 내게 붙여주셨구나, 내가 전도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를 쓰니까 하나님이 이 분들을 내게 붙여주셔서 전도하게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분들을, 이 가정을 책임지고 정착시키라는 뜻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이 붙여주십니다. 물론 거리고 나가서 전도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문을 두르려야 하겠지만 우리가 일단 뜨거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아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경험을 꼭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 가족 덕분에 제가 용기를 얻고 올해 꼭 열 명, 전도목표 달성하자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꼭 저처럼 용기를 얻고 뜨거움을 품고 일단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뜨거우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열심’은 또한 찾아온 성도들을 중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찾아오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분들을 정착시켜야지요. 우리 교회에 발만 들여놓으면 뭐합니까? 우리가 모든 수단방법을 다 써서라도, 모든 것을 다 내주고서라도 그 분들을 예수님에게 중매해서 결혼시켜야지요. 우리가 중간에서 이런 중매자 역할을 꼭 해야지 이것을 못하면 책망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보내주었는데 다 어디 갔냐?” “그 수많은 새가족들 지금 다 어디 있냐?” “왜 중매 제대로 못해서 나와 혼인시키지 못했냐?”고 하나님께 크게 야단맞게 됩니다.

지난 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새가족이 “이교회 정말 냉랭하다”고 해서 제가 속이 상해서 며칠 몇날을 잠을 못 잤다고요. 그분 말씀이 제가 처음 왔을 때 환영도 열렬히 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꽃도 주고 해서 “야, 이 교회는 정말 사랑이 많은 교회구나. 뜨거운 교회구나” 기대했는데 그 후에 몇 달이 지나도록 선교회에서도 아무 연락이 없고, 구역방학이라지만 구역에서도 연락이 없고, 누구도 아는 척도 전화 한 통도 안 해서 실망했답니다. 이 교회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이 말 듣고도 잠이 오겠어요?

정말 많이 달라졌다지만, 정말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냉랭해도 애써 적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를 쓰고 적응해야,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은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뒷문, 옆문으로 나갑니다. 떠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떠나도 잘 모릅니다. 누가 갔는지, 왜 갔는지 말입니다. 물론 우리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그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분들을 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챙기고 책임지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 4:9을 주목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너무 시기해서 돌로 쳐 죽이고 시침을 떼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랬더니 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 내가 한가하게 아우나 지키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난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씀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내 모습 아닌가?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이 ‘내가 보낸 그 수많은 영혼들, 새가족들 다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내가 그 사람들이나 지키는 사람입니까?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하는 우리의 모습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좀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 좀 더 하나님의 열심,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지금도 뜨겁지만, 지금도 열심이지만 이 정도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새 성전 짓고 난 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의 온도는 아직 100도로 펄펄 끓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뜨거워본 적이 있습니까? 연탄재 발로 차는 사람처럼 뜨거운 사람 평가하고 판단하기 전에, “왜 저리 나서냐, 나대냐?” 하기 전에, “저 사람 왜 요즘 안 나오지?” 하기 전에,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하기 전에 우리는 일생 예수 믿으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의 열심히, 그분의 열정으로 뜨거워 본 적이 있었는지, 한 영혼을 향해 불타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내 준 적이 있었는지 정말 뜨겁게, 치열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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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 책망 및 권면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 개인들의 신앙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 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 교회나 개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서 그 성경적인 근거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A(Amen : 아멘)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니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간구하는 기도는 아멘으로 함께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B(Belief : 믿음)

성경에서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faith)이라는 단어가 26번이나 나오고 있으며 히브리서 저자인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열거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말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징계하지 않으시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말이 정녕 임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고 응답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 구절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로마서의 핵심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C(Confession : 고백)

우리의 어머니가 죄 가운데 우리를 잉태하였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있었으며(시 51:5), 모든 자연인(natural man)은 죄인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3:9-10).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다 입으로 토설하는 죄의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입어 죄문제가 해결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고 말씀하시며,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라고 우리들에게 회개(repentance)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 대해서도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일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10:10).

D(Diligence : 근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있습니다(계 2:3).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먹고산다(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라는 속담이 있듯이 세상일을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솔로몬도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세상일도 부지런해야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이겠습니까?

E(Endurance : 인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자기 이름을 인하여 인내한 것(계 2:3)과 두아디라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계 2:19, 3:10)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도 이 땅을 살아 가면서는 시험과 시련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 안에서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성도의 인격이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약 1:4),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7).

F(Faithful : 충성)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으며(고전 4:2),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통하여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G(Godliness : 경건)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대해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계 3:1).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딤후3:5) 즉, 외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란 절제된 언행, 소외계층에 대한 보살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구별된 삶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약 1:26-27).

H(Hope : 소망)

크리스천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온갖 종류의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I(Imploration : 간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또한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했으니(약 5:16)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주며 요한이 그의 사랑하는 자의 영혼과 건강을 간구했던 것처럼(요3 1:2)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는 개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J(Jesus : 예수)

우리 삶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받습니다(요 1:12). 지금까지 살아 왔던 나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예수 안에 우리가 거하고 우리 안에 예수가 거하는(요 6:56, 갈 2:20)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렸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K(Keep : 말씀을 지킴)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라고(약 4:17) 야고보가 지적하셨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15-17).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도 닮아가게 되고(聖化)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갈 5:22-23).

L(Love : 사랑)

사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필요성, 특성, 영원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13절에서는 믿음, 소망 사람 중 사랑을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14)"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행함이 있고 진실함이 있습니다(요1 3:18). 바울도 피차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되 사랑의 빚은 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롬 13:8)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간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M(Mercy : 긍휼)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 5:7).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약 2:13). 바울은 그의 서신의 인사말에서 은혜, 긍휼,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딤전 1:2, 딤후 1:2)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 대가도 치루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거져 받았으니(엡 2:8) 우리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N(New-born : 중생)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의 회원으로 정치인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요 3:1-21).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말하며(엡 4:22-24) 바울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5:17). 거듭난 사람의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엡 4:25-32, 골 3:12-17).

O(Obedience : 순종)

순종이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도록 명령을 받은 사울은 이에 순종하지 않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가져 왔을 때 사무엘로부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순종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습니다(신 28:1-14).

P(Prayer : 기도)

기도는 크리스천들의 영적 호흡이며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무기입니다. 또한 영육간의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며(눅 6:12) 성경은 항상 기도에 힘쓰고(골 4:2)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17) 말씀하고 있습니다.

Q(Quiet Time : 묵상)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수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야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죄인인 지를 깨닫기가 어렵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역할입니다(롬 3:20).

R(Resurrection : 부활)

부활은 기독교가 존재하는 근거가 됩니다. 초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 부활의 확실성과 성격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못하셨다면 복음 전파와 믿음이 헛것이며(14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거짓 증인이 될 것이고(15절), 우리가 여전히 죄중에 있을 것이고(17절), 주 안에서 죽은 자도 멸망할 것이고(18절), 그리고 믿는 자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19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1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기들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S(Sacred : 거룩함) 

거룩함(holiness)은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 1:26-27).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자연인)의 그러한 속성은 불완전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연인과 구별하여 거룩하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레 20:26). 바울은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씀하시면서(롬 6:1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의 서원 제도(민 6:1-21)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날마다 연습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T(Tolerance : 관용)

관용이란 남에게 자진해서 주는 넓은 마음입니다. 저와 우리 가족의 삶의 원칙 중의 하나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남에게는 관대하게(Strict to yourself, but generous to others)'입니다. 바울은 교회 감독의 자격으로 관용(gentle)을 들고 있으며(딤전 3:3),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관용(considerate)을 선행의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딛 3:2).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음에 대해서 칭찬을 받은 것처럼 악과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체 관용을 베풀지 말아야 하지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는 바울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U(Unafraid : 담대함)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듯이 달려드는 마귀(벧전 5:8)를 생각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굳세게 하고, 도와주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사 41:10).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V(Victory : 승리)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엡 6:10-20). 또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 5:4). 우리가 믿음을 지켜 세상을 승리하면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그 상급으로 받을 것입니다(딤후 4:7-8).

W(Wisdom : 지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지혜의 대표적인 인물은 솔로몬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왕상 3:3-15). 그러한 솔로몬은 지혜를 얻은 자는 복이 있으며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3:13-1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고전 14:20).

X(Cross : 십자가)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믿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히 9:11-2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는 죄인들을 죽이는 형틀의 상징에서 죄인들을 죽음에서 건져낸 생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눅 9:23). 바울도 죄의 법을 섬기려는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는 영의 생각이 그의 속에서 투쟁함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롬 7:13-24).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인 육신의 소욕을 능히 감당하고 이겨내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갈 6:8).

Y(Youth : 젊음)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라는 말씀을 붙들고 유혹 많은 청년의 때를 하나님의 은혜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도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청년에 대한 권면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전 11:9-12:7).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젊은이들은 환상(vision)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2:17). 비전(vision)이 없는 청년은 무늬만 청년일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나이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비전으로 가득한 활기를 항상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Z(Zeal : 열심)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열심을 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3:15-19). 바울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하고 있으며 좋은 일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갈 4:18).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가장 뛰어났던 사람 중의 하나였던 바울이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에 보여 주셨던 그 열심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mine and test yourselves!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위와 같은 요소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요소들은 더욱 굳게 붙잡고, 가지고 있지 않은 요소들은 가지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가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질 수 있으니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큰 성장을 하다가 이제는 양적으로 감소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저는 내적(영적) 성숙이 외적 성장에 크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숫자놀음에서 벗어나 우리 개인이나 교회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날 개인이나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참된 경건을 회복해야 합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크리스천 한사람 한사람이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며 축복 받은 일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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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022(토)

주께서 주신 권세(고린도후서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권세. ἐξουσία, ας, ἡ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세상에 있는 교회

요즈음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조금 무시 혹은 배척을 당하는 느낌이 든다.
기독교를 향한 부정적인 정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세워야 할 것 같다.

흔히 이것을 기독교에 대한 핍박으로 치부할 수 있는데 종교적인 핍박과 교회를 향한 세상의 부정적인 정서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들은 과거에 교회가 종교적으로 핍박을 받은 것과는 구별이 되는 것 같다.
그때는 기독교의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핍박을 한 것이었다면 지금 교계가 겪는 것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처럼 보인다. 무언가 정확한 원인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교회가 사회 속에서 인기를 잃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언젠가 직장 내에서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이런 반응을 듣고 당황한 적이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교회는 나가고 싶지 않다.”

정말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현재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하는 만큼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교회만이 인기를 잃는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그 바람에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성장했으며 거대한 교회건물들이 세워졌지만 그것으로 사회를 향한 영향력이 커지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해서 머리되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교회가 정말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례요한의 겸손한 외침이 생각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 아필쇄미 타필흥왕(我必衰微 他必興旺)

요한이 기대한 것처럼 예수님이 흥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전략은 지금까지의 전략과는 달라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은 교회가 큰 건물을 짓든지, 그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든지 그것 때문에 교회를 인정해주거나 머리되신 예수를 알아주지 않는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일들을 해야 한다.
초대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오늘 우리 교회도 바로 이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복음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음화 이전에 먼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단계가 있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교회가 성장을 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5천만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자고 외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5천만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 속에 흩어져 사는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
불신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사는 곳에서 인정받고 칭찬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정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며 현재 한국교회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이다.



고린도후서 10장은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무너트리는 복음의 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할 주제는 "주께서 주신 권세(the authority the Lord gave us)"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서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 아래서 사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그들은 사도가 자신들에게 문전박대와 비난을 당한 뒤 돌아가서 눈물로 쓴 비통한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사도는 면전에서는 약하지만 글로 쓰는 편지로는 강한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비난을 의식하고 그것을 인정합니다(1~2, 9~11).
오히려 사도는 다음 방문에서도 그들을 대면하여 약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회개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때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권위로 벌하게 될 것입니다(6).
이것은 사도의 최후통첩입니다.
이 싸움은 육체에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3).
이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과 복음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세력을 향한 싸움입니다.
사도의 무기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4).
사도는 이 무기로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의 자기 자랑에 의해서 세워진, 자기 신뢰와 자기를 높이는 방어진을 무너뜨릴 것입니다(5). 이것이 ‘견고한 진’입니다.

두 번째 파괴 대상은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4b~5).
이것은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그들의 죄악된 정신 구조, 하나님 없는 세상 방식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세상 방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사고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인간의 지적 사고의 중심인 정신을 포로로 사로잡기까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생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5b).
싸움이 끝나 복종할 자들이 복종하게 되면, 사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벌하러 갈 것입니다(6).
그러므로 아직도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고린도사람들은 그들 눈앞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7).
만일 사도가 가짜라면 그들은 그들의 판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이 싸움의 핵심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립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린도사람들은 세상 자랑으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랑의 수준은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유치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자랑과 교만은 복음으로만 파괴됩니다.
참 복음은 인간의 헛된 자랑과 교만을 꺾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사람들을 세우려는 깨끗한 동기로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8).

모든 자랑이 다 헛되고 교만한 죄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자랑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과 비교하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13~16).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의 한계를 따라서 하는 자랑입니다(13).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자신의 한계를 지켜 소명을 이루어왔다고 말합니다(14).
사도는 결코 다른 사도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자들입니다(15).
이것은 도둑질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진실과 사도직이 그들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기대하면서(15b) 이들의 지원을 받아 로마와 스페인으로 갈 계획도 전합니다(16).

끝으로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하라고 사도는 말합니다(17).
이것은 주어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하는 모든 태도는 다 악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랑하실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7).

사도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는 확신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 당하는 싸움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와 내 생각과 내 생활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끊임없이 세상 방식의 노예로 삼으려는 죄의 유혹은 실로 엄청납니다.
내 안에 하나님 앞에서 헛된 자랑과 교만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매일, 매순간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소중히 여기고 사는 은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도권 변호(1-11절)

열세 장으로 구성된 고린도후서는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1-11이 서론이라고 한다면,
13:11-13이 결론입니다.
그 사이 1:12-13:10이 본론입니다.

이 본론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7장은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즉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께 불러주셨기 때문이고, 그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8-9장은 연보(구제)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말하면서, ‘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연보’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는 물론 드리는 사람에게도 복이 된다고 말합니다.
연보가 드리는 사람에게 복이 되는 것은 해보면 압니다.

10장-13:10인데, 고린도 교회를 흔드는 거짓 사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는 앞에서보다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새번역성경은 이 구절의 앞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을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굉장히 폄훼하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큰소리치지만, 직접 대면해서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교회를 시작하고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한때,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돌아왔고, 바울은 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관용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거짓 교사들을 대할 때는 담대하게(강경하게) 대했지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대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3-4)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갖고 있지만, 그 육신을 따라서 즉 자신의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주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모함하고, 바울을 공격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위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싸움을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함이나 세속적 가치관의 시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생명을 위해 영원을 위해 그 반대편에 있는 것과의 싸움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첫 국어 수업 때, 선생님이 칠판에다 ‘놀아라’, ‘싸워라’, ‘이겨라’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잘 놀고, 잘 싸우고, 잘 이겨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후에 그 단어들 뒤에 글자 세 자를 더 쓰셨습니다. ‘단 책과’. 바울도 놀고, 싸우고, 이기려고 했습니다. ‘단 진리와 생명으로’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싸움인 것을 잘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통로로 사용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속적인 가치관, 영원하지 않은 것과의 싸움이라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것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무기는 재물, 지식, 능력, 권력, 명예 등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으면 당장에는 이길 것 같지만, 나중에는 이런 것들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감(切感)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갖춘 것처럼 보이는데도, 깊은 한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한때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견고한 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진리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사 이래에 수많은 이론과 철학들이 왕성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논리와 가치관을 무너뜨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교만과 생각을 무너뜨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성경은 5절 상반절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라고 번역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세운 사람은 결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직면하는 순간 형편없고, 정말 보잘것없는 자신의 실상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만 보십니까? 만약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도 그런 사람들인 것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외모로 공격했고, 그것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세기의 글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고, 양 눈썹은 붙었고,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어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얼짱’이나 ‘몸짱’, ‘훈남’과 같은 말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어쩌면 거짓 교사들은 바울보다는 외모로 훨씬 나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한때 바울을 불신했던 것이었습니다.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있는 권위를 자랑했더라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더욱 건강하기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우리가 있으므로 그곳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삶이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가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이렇게 폄훼했습니다.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 말의 무게 중심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습니다. 즉 ‘바울은 글은 좀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은 형편없다’ 입니다. 바울의 말이 형편없기에, 그가 쓰는 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의 글과 말을 다 폄훼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5대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 그리고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는 수사학이 발달한 도시라, 많은 사람이 웅변술을 배웠습니다. 바울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달변가가 아니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만을 전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가치로 승화시켜 주셨습니다.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거짓 교사들은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로만 사람을 평가하지만, 바울 자신은 편지로 말하는 것과 자신이 고린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고, 거짓 교사들은 ‘말만 행함’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말하는 수준의 우리’가 우리의 실상이 아니고, ‘살아가는 것 수준의 우리’가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12-18절)]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어떤 자’는 ‘거짓 교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말밖에 없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교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자기’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삶의 표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대 표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머물게 됩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바울은 자신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자랑을 하는데, 단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한계 안에서 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은 자신을 표준 삼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금의 삶을 살도록 해주신 것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4-16)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일행과 함께 고린도까지 간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먼저 복음의 씨를 뿌린 곳에는 가지 않았고,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를 디딤돌 삼아 나중에 로마까지 갔고, 이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주님이 계시니까, 자랑을 해도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자랑하면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고 칭찬을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성경 일독하기와 요한복음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면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리지만,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세속적 가치관의 소리, 자기 욕망의 소리만 크게 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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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2022(금)

즐겨내는 자(고린도후서 9:7) 

5절.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 5. 21 - 1905. 6. 3)
영국 출신으로 중국 내지 선교회 창설자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돈이 너무 적다는 것이 아니라
성별되지 않은 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 ~ 1546.  2. 18)는 독일의 종교개혁가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것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명주와 비단을 살 돈은 가지고 있다.

헌금과 연보의 문제는 돈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하겠다.



연보. 유로기아, εὐλογία, ας, ἡ  2129

1. 찬양,  2. 아름다운 말,  3. 축복

발음 / 유로기아(ĕulŏgia)
어원 / 2127과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고전 10:16, 히 12:17), 아첨(롬 16:18), 연보(고후 9:5), 복(롬 15:29, 갈 3:14, 엡 1:3, 벧전 3:9), 찬송(계 5:12, 13, 7:12).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2127. εὐλογέω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누가복음 24:50

발음  / 유로게오(ĕulŏgĕō)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ㅋ
복을 받다(갈 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11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ἁπλότης, ητος, ἡ  572

1. 단순함,  2. 관용

발음  / 하프로테스(haplŏtēs)
어원 / 5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실함(롬 12:8, 엡 6:5, 골 3:22), 거룩함(고후 1:12), 풍성한 연보(고후 8:2), 너그러운 연보(고후 9:11), 후한 연보(고후 9:13), 진실함 (고후 11:3).
신약 성경 / 8회 사용


♦ 10월 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9: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즐겨내는 자(7절)

♦ 성구 :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장은 풍성한 나눔이 낳는 풍성한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풍성한 나눔이란 “즐겨 내는 자(a cheerful giver)”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미 일 년 전부터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연보를 준비하고 있다고 마게도냐교회 사람들에게 자랑했으며 이것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연보를 갑작스럽게 하려면 의무와 억지로 할 수 있고 이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사용한 ‘연보(율로기아, εὐλογία)’라는 단어는 ‘축복(blessing)’ 혹은 ‘풍성한(bountiful)’이란 의미로  전후 문맥에서 ‘연보(하프로테스, ἁπλότης)’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흘러가고 나누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6절).
적게 심는다는 말은 인색하게 심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헌금이 참된 헌금이 되려면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7절).
그러므로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동적이거나 강요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받는 기쁨 보다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연보가 아닐까요?
물질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라 물질을 잘 관리하며 모두가 함께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주 날 불러 이르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SUi1YQ72_O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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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2022(목)

섬기는 일(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연보(捐補) : 버릴 연(捐), 도울 보(補). λογεία
헌금(獻金) : 바칠 헌(獻), 쇠 금(金). δῶρον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려지는 예물(수직적 관계를 형성)
연보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드려지는 예물(수평적 관계를 형성)

연보(捐補, the collection) λογεία
헌금(獻金, offerings) δῶρον

연보는 성도를 섬기는 일 - 수평적 관계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 수직적 관계  

연보에 관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과 고린도후서 8장 그리고 9장에서 반복하여 소개됩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언급하는 이유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주의를 상기 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비방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연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연보한 것을 바울이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방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만약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다면 연보 이야기는 당분간 꺼내지 않은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며,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보(捐補, the collection)”와 “헌금(獻金, offerings)”을 구분해야 합니다.
연보는 사람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헌금은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감리교회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어느 날 돈에 관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최대한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러자 회중들은 모두 큰 소리로 "아멘" 하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분 돈을 많이 저축하십시오!
그러자 다시 회중들은 모두 "아멘"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여러분 많은 돈을 헌금하십시오!
그 순간 회중들은 "오늘 설교 죽 썼네!" 하며 모두 돌아갔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 / 지갑이 화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헌금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고는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뀌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미국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예수님을 알기 전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거듭난 후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더랍니다.
오히려 침묵만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숨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를 칠 여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연보에 대한 바람직한 사례를 “마게도냐교회들”에게서 살펴보겠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과 가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근으로 인해 고통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없는 형편 가운데서도 더욱 풍성한 연보를 모았습니다. 이제 이 연보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연보금을 Check를 써서 편지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신용카드 한 장 들고 가서 긁고 올 수도 없습니다. 상당한 무게와 부피를 가진 은화와 금화를 직접 등과 어깨에 매고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중간에 도둑을 만나 헌금을 몽땅 빼앗길 위험도 있고, 노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바울에게도 큰 타격이 미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도들과 하나님의 복음에 불미스러운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 막중한 임무를 자신의 동역자 디도와 두 명의 형제들에게 맡기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디도가 고린도 교회로 향하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마게도냐 성도들과 같이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는 일에 자원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마음에 이미 자발적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후서 8장 10절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1년 전부터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전해 준 것이고, 그로 인해 마게도냐 성도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도전을 받아 풍성한 연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 바울은 이제 앞서 이들보다 1년이나 먼저 연보 모을 준비를 해온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 일에 마음과 힘을 모아주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이 먼저 디도와 나머지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 입니다. “(고후 9: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돕겠노라고 약속했던 헌금을 미리 준비하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번 고린도 교회 방문 때 마게도냐인들도 함께 방문 할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4절 입니다.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풍성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은 연보의 액수가 극심한 가난과 환난을 겪고 있는 마게도냐 성도들보다 적으면 이는 마게도냐 성도들이 실망하게 될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1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다고 언급해 놓은 상태 입니다. 따라서 만일 연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셈이고,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울의 선전에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자기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편지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와 두 형제를 자기보다 앞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절 말씀을 보면 “(고후 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라고 바울이 말하며 이들이 연보를 모을 수 있는 시간적 준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6-7절에서 하나님께 헌금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헌금에 인색함의 때가 묻지 않도록 주의시켰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연보가 손 떨리는 금액의 돈이 아니라, 흔쾌하게 나누는 복의 선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인색하게 억지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7저에서 말하는 인색함이란 단어는 ‘근심’ 또는 ‘슬픔’을 가리킵니다. 이는 헌금을 내는 자가 자신의 물질을 잃어버리는 마음으로, 손해보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상실감으로 헌금을 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의 자세로 섬길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의 섬김이 복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공급하심을 언급합니다. 8절 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넉넉함을 갖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넉넉하다’는 이 말은 ‘자족’이란 뜻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이며,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 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과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러한 넉넉함 즉 자족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의 넉넉함을 통해서 부족한 형제, 자매, 이웃들을 섬기고 돕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모든 착한 일을 행하는데 사용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직접 말씀하시기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재물과 은혜를 가지고 우리 형제자매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곧 우리 주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들을 섬기는 것을 곧 자기 섬기는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은혜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을 도와주고 섬기고 세워감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

'마게도냐'는 현재의 그리이스 북쪽에 있는 발칸반도로서 서쪽으로는 아볼로냐로부터 동쪽으로는 빌립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B.C.148년 이후부터 로마의 영토였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교회를 가리킨다(행 17:10-15, Bruce).

은혜를...알게 하노니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고린도교인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유는 그 말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극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으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헌금에 관한 문제를 '은혜'(카린)의 관점에서 접근해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금을 기꺼이 그리고 분에 넘칠 정도로 한 것에 대해서(2-4절) 하나님깨 은혜를 받은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레트(Barrett)가 말하는 대로 '은혜'는 관대함을 뜻한다고볼 때, 죄인으로서 심판(審判)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무런 용서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마게도냐 교인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관대함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결국 마게도냐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하나님의 은혜이다.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시련에대해서는 빌 1:29, 30; 살전 1:6;2:14;3:3, 4; 살후 1:4-10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다만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환난과 같은 것을 마게도냐 교인들도 받았다고 언급될 뿐이다(살전 2:14). 마게도냐의교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한 것이었으며, 아마유대인 적대자들에 의해 난동꾼들로 모함을 받았거나 유대인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받았을 것으로 보인다(행 16:20;17:5, 13). 또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피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시련도 있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속에 살았다고 바울은 전해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기쁨은 마게도냐 교인들 자체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대함의 결과'라고 말한다(Schlatter). 아무튼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시련을 당할수록 오히려 넘치는 기쁨을 누렸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성숙한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마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6:10)과도 같았다.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당시에 마게도냐는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금광이나 은광, 선박용 나무를 베는 권리 등의 수입원들을 모두 로마인들에게 빼앗겨 구조적인 가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도냐는 전체적으로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극한 가난'의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Barrett).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형편을'극한 가난'으로 표현한 것은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또한번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토스'(* )는 '소박', '단순', '순수함'이라는뜻으로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는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한편 본문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남을 돕거나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함의 동기가 되서는 안됨을 말해준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마치 자신의 전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한가난한 과부처럼 극한 가난속에서도 자기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 그것은'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모습이었다(6:10).

8:3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바울이 보기에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연보를 드렸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요청이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자원(自願)해서 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오히려 물질적 원조를필요로 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들에게 재정적 협조를 요청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라고 본다(Lower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고 바울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원하여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으로 놀랍도록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고린도의 교인들은 상당히 마음의 자극을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곤경에 처한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는 일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특전'(공동 번역)이라고 보았고 그 특전을 나누어 달라고 바울에게 간청하였다. 여기서 곤경에 처한 성도들이라 함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전역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가 통치하던 때에 있었던 심한 기근으로 대단히 궁핍한 생활을 했었다(행 11:27-30). 더구나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도 종교적인탄압을 받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친밀한 형제애(兄弟愛)로 굳게 뭉쳐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 마게도냐인들이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헌신적으로 나선 것은 그들도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아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8:5
자신을 주께 드리고 -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위들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신앙적 행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단지 동정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의 소유도 필요시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Bruce).

우리에게 주었도다 - 본절의 의미는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습니다'(공동번역)이다.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신 사도로 존중하였고 따라서그를 헌신적으로 잘 섬겼다. 그들은 사도에 대한 이런 마음이 곧 주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8: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성취케 하라 - 본절은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에보낸 목적이 '눈물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모금에 고린도 교인들도 참여케 하려는 목적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린도에서의 모금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도를 재차 보내 헌금 모금을 성취케 하라고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을 내는 일에 기대에 못미쳤음을 본절이 또한 간접적으로 암시해준다. 여기서 '헌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끝내라'는 말을 '은혜를 성취케 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인들이 헌금 모금에 참여하는 것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일 수 있고, 또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즐거이 헌금을 내어줌으로써 주님께 헌신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성취하는 것처럼 고린도의교인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한편 본절의 '이러므로'는 마게도냐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헌신이 바울로 하여금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모금 사업을 완성하게 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외부적인 박해(迫害)와 내부적인 극한 가난의 상황에서도 능력 이상으로 헌신한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상대적으로박해도 받지 않고 가난에 시달리지도 않는 자신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요청받고 있다(Harris).

8:7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되었고(고전 12:9;13:2, 13), 말과 지식이 풍부했으며(고전 1:5), 바울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다(7:7).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사도 앞에서는 바르게 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 사랑을 '은혜'(* , 카로티)로 표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고자 함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제공하도록 요청한 것은그들에게 어려운 짐지워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더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8:8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있었고(10:8;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8:9
부요하신 자로서...가난하게 되심은 - 앞에서 구제 헌금의 동기를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模範)으로 유발시켰던 바울은(1-7절) 보다 더 차원 높은 연보의 동기 및 근본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 즉 성육신하심(incarnation)과 만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들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희생의 최고 모범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해야만 하는 신학적 당위성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빌 2:6)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선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어 머리 둘 곳조차 없을만큼 희생적인 고난의 삶을 사셨고(마 8:20; 눅 9:58)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것은 절대적 가난의 한 모습이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 루터(Luther)는 본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난한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늘에서 부요하게 하시며, 당신의 사랑하는 천사들과 같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같은 은혜를 주신 것은 그은혜를 받은 자도 그분이 하신 일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부요함을 포기하여 가난한성도들을 유익하게 해야만 했다.

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 바울은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 명령할 수있을 만큼 당위성이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령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그는 '...이 좋겠습니다'(공동번역)라는 말로 정중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보여주는 목회자로서의 모범인 바,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대의 명분이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명령이나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오직 행하는 자 스스로의 온전한결단에 의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유익함이라 - 이 말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이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결단에 의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왕에 시작한 일인만큼 끝까지완수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두가지가 다 해당될 수도 있다.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적어도 1년 전에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과, 그 일이 지지부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는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이제는 속히 완성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 (2) 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한지가 1년이나 되었지만 그들의 헌금은 그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시련과 극한 가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보다도 미흡했기 때문이다(3절). (3) 적어도 그것이 선한일이라면 빨리 끝을 맺는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하다. 그렇지 않고 중도에 그만둔다면 그것은 진실한 신앙이 아니며(8절) 앞으로도 승리하는 생활이 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4) 구제 헌금을 빨리 완성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속히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Harris).

8:11
행하기를 성취할지니...있는 대로 하라 - 고린도 교인들은 말과 지식이 풍부하고마음의 열정도 넉넉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대로' 즉 '소유하고 있는 대로', '드릴 수 있는대로' 성의(誠意)만 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해 빈궁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보다 많은 구제 헌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8:12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 여기서 '받으실 터이요'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고린도교인들의 구제 헌금이 가시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할 때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을해서는 안 되며 다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실 때 드려진 것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며 또한 드려진 헌금과 드리는 자의 소유의 관계에서 평가하신다는 것이다(막 12:41-44). 그러므로 많이 소유한 자가많이 드리는 것과 적게 소유한 자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한 것 사이에는 어떠한 가치의차이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8:13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구제 헌금에 대하여 말하기를 '남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자기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고 불평한 이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Bruce). 그러나바울은 있는 자의 재물을 거두어 그를 가난하게 하고 그에게서 거둔 재물로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중요한 것은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도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제도 물리적알력도 배제된다. 다만 넉넉한 자가 자원(自願)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여 가난한 자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다.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참여하도록하기 위해 전개하는 논리는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의 논리이며(14절) 이것은 로마서에서 사용한 논리와는 다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로부터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 관한 한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성도들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롬 15:27). 한편 혹자는 본절에 "너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사치품을 제공하기 위해 너희를 가난하게하려는 친유대인적 경향이 나에게 있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

8:14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본절을 통해 예루살렘과 고린도의 상황이 뒤바뀔 것을 예견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런 뒤바뀐 상황이 도래한다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기꺼이 자기들의 소유를 나누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미 평균하게 사는 방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행 2:44, 45).

8:15
기록한 것 같이 -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평균의 원리에 더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기위하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출 16:13-3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실 때 많이 거두어 들인 자나 적게 거두어 들인 자나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많이거두어 들인 자의 남은 것은 썩어서 저축될 수 없었다는 점과 적게 거두어 들인 자는모자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광야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될수 있는 경제의 원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과거 광야에서 직접 개입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되 남은 것의 축적(蓄積)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간의 경제적 평균을 이루게 하셨다. 이제 지금은 직접 개입하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원리를 지켜 서로 풍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즉 물질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그물질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알고자기가 쓰고 남은 여분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본절은 "내가 여러분에게 기울이는 것과 같은 열성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이 신뢰하는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그 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고린도에 가서 구제 헌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수 있는 인물을 찾던 바울에게는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디도의 열정을 상기시킴으로써(7:13-15), 고린도 교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주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유익을위함이지 헌금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10절).

8:17
저가 권함을 받고...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 바울이 처음에 디도에게 고린도교인들의 구제 헌금을 성취케 하기 위해 이 일을 권한 것은 사실이다(6절). 그러나 디도는 권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깊은 열정 때문에(7:15) 자원하여나섰다. 본문에 대해, 혹자는 디도가 종종 바울의 전도와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일했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지만(Harris) 이는 타당치 않다.

8:18
복음으로서...칭찬을 받는 자요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 외에 두 사람을 더 보냈다(22절). 본문에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는 자'(공동번역에는'복음을 전하는데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 되어 있다)라고 소개된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누가'나 '디도의 형제'일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없다.다만 우리는 이 사람이 바울의 신뢰를 받았고 여러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자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8:19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 본문은 방금 바울이 소개한 사람이 바울에 의해 선택된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이 선택의 방법은 교회들에 의한 공식적 투표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이로토네데이스'(* )는 '거수(擧手)로써 투표하여 선택한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선택된 사람이 공신력있는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이 사람이 마게도냐의 교인들로부터 뽑힌 대표자일 것이라고 보는데(Barrett), 이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왜냐하면 이미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모금은 끝이 난 상태였으므로 모금된 돈을 디도와 함께 운반하고 보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8:20
이것을 조심함은 - 바울이 구제금을 모금하고 관리하기 위한 실무자를 그의 측근인디도 한 사람으로 국한하지 않고 두 명을 더 참여시킨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려깊은 행위였다. 거액의 연보로...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거액의 연보'에 해당한는 헬라어'하드로테티'(* )는 '살진', '큰', '부유한'의 뜻을 가진 '하드로스'(*  )에서 파생된 말로 단지 '심정적(心情的)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실제로 '많은 액수의 헌금'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훼방하지 못하게'가 뜻하는 바는그 모금된 돈을 도둑질 당하거나 분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액의 연보가바울과 관계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길 수 있는 의혹이나 인간적인 의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훼방하지 못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메 모메세타이'(* -   )가 문자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다'를 뜻하는데서 알 수 있다(be no accusations, JB). 당시 복음 전도자들이 대개 받았던 비난처럼 바울도 자신의이익을 위해 선교활동을 한다는 비난을 예견한 만큼, 바울은 오직 주의 영광과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한 것이(4:12), 도리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켜 선교하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의 이런 세심한 주의에도불구하고 악의에 찬 오해를 면할 수는 없었다(12:16-21).

8:21
주 앞에서만 아니라 -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 깨끗하다 인정받는 것이다(고전 4:4). 그러므로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 않은 평판이 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6:3;고전 9:12;10:32). 한편 본절은 바울이 70인역 잠 3:4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있다(Barrett, Harris).

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너희를크게 믿은 고로 -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동반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 사람은 여러차례에 걸친 시험에서 증명될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였으므로 이번 일에 동행하게 하였던 것이다.학자들은 이 사람이 아볼로나 두기고일 수있다고 추측하나(Farrar, Robertson) 확실하지는 않다.한편 바울이 디도와 함께 보낸 두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디도가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서 읽을 때 그들을 소개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두 사람의 대표자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에 의해 선출된 자로서 이미 고린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arris).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동역자요 - 고린도에서 보내진 디도 일행에 대한 신임장(信任狀)이 서술되고 있다. 디도는 다른 두 사람과 구별될 만큼 다소 특별한 존재였다. 여기서 '동무'라는 표현은 바울과 디도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주며 '동역자'라는 표현은 디도가 복음 전파의 사역에 한 주체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말해준다.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여기서 '여러 교회'는 19절에서의 주석처럼 '마게도냐의 교회들'을 지칭하고, '사자들'(* , 아포스톨로이)은 '사신' 또는 '사절'을 뜻한다. 이 형제들은 바울이나 디도처럼 사역자로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번의 구제금 사업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선택된 사람들로사도에 준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구제금 모금 사업의 재정적인 면을 담당하는 지역교회들의 대리인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이러한 구별이 바울이나 디도와, 여러 교회들에서 선택된 '사절'들 사이에 지위의 차별을 암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나 후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점에서 동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디도를 비롯하여 두 형제들은 바울이 인정하고 신임하는 자들이었으며, 다른 교회들로부터도 신임받는 사람들이었다.

8:24
여러 교회 앞에서...보이라 - 공동번역은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여 우리가 여러분을 자랑한 점이 사실이라는 것을모든 교회에 드러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보내는 사절단을 따뜻하게 환대(歡待)할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대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자랑한 것을 확증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의 요구는 고린도교인들이 참으로 성숙하고 훌륭한 성도임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을 드린 이유가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하도록 연보하였다고 합니다.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에 환난이나 시련이 없어서 즉 삶이 형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넉넉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감사할만한 이유가 생겼을 때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처럼, 감사할 조건이 생겨서 감사로 헌금을 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감사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풍성한 기쁨이 있었기에 드릴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은 어디로부터 온 기쁨이겠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감사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솟아난 기쁨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기쁨이 아닐 것입니다(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요하신 분이었습니다.
둘째,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셋째, 그로 인하여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부요한 분이시지만, 가장 절망적인 가난에 처하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동물의 여물통에 뉘였습니다. 가장 부요하신 분이 왜 가장 가난하게 되셨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부요하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마케도냐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에게도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처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풍성한 연보를 드린 마게도냐교회들처럼 나도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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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2022(수)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10)  

근심. λύπη, ης, ἡ  3077  

1. 슬픔,  2. 아픔,  3. 심뇌

발음 / 루패(lüpē)
관련 성경 / 슬픔(눅 22:45, 벧전 2:19), 근심(요 16:20, 고후 2:1, 빌 2:27).
신약 성경 / 16회 사용

1. 히브리어
카아브 - 아픔을 느끼다, 슬퍼하다, 상하다, 아프다.

2. 헬라어
루페 - 슬픔, 한숨, (싫은 것을 억지로) 근심, 서러움.

3. 한문
괴롭고 애를 쓰는 마음

4. 한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다섯 가지 감옥

영국의 작가 G. 엘리오트는 나름대로 인간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다섯 가지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른다는 데 있다.
알 때도 있지마는 모를 때가 더 많다. 철장이 없는 감옥, 쇠사슬에 매인 것도 아닌데 더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감옥, 그 감옥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자유해야만 인간이 바로 설 수 있고 자기 성취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이기적인 '자기 사랑의 감옥'

가만히 보면 남을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특별히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삶의 연장일 뿐이다.
이웃을 위하고 누구를 돕는다 하더라도 결국을 보면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이 자기 사랑의 감옥에서 출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어째든 이기심, 자기 사랑, 이것이 큰 감옥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전에는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

둘째, '근심이라고 하는 감옥'

근심이야말로 쓸데없는 것 아닌가?
걱정해서 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걱정을 하고 보면 내 마음 상하고 남의 마음 해치고 주변 분위기까지 다 못쓰게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가지고 있는 능력, 지혜마저 다 사라져 버린다.
창의력은 상상조차 못한다.
근심하는 자는 그야말로 가장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걱정은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감옥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셋째, 과거를 생각하는 '향수의 감옥'

과거를 생각한다.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 본다.
그 당시에는 그 때가 제일 어려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는 그 때가 좋았다 한다.
특별히 잘못되기 쉬운게 뭐냐 하면 과거에 대해서 가정법을 쓴다.
그 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 때 좀더 열심히 공부할 것, 뭘 할 걸...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다.
이거야말로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이 과거지향적인,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련, 이것도 하나의 감옥이다.
여기에 붙들려 절대로 미래로 향해 나갈 수가 없다.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비행기를 보라. 옛날에는 프로펠러 비행기였는데 앞에 있는 공기를 잡아당기면서 앞으로 추진되었다.
그래서 그때 엔진은 비행기의 앞에, 머리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제트엔진은 뒤로 밀치면서 나간다.
그래서 엔진이 전부 뒤에 있다.
어떤 것은 아주 꼬리에 붙어 있다.
모름지기 과거를 밀쳐 버려야, 떨쳐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훨씬 더 강하게 나아갈 수 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마치 연의 줄처럼 그 한계에 딱 멈춰버리고 더 못 올라간다.
현재와 미래를 다 망치게 된다.

넷째, 남의 것만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

내 것이 왜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나 남의 것만 좋게 보인다. 남의 남편이 더 좋아 보이고, 남의 아이들이 더 잘하는 것만 같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선망하는 것이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여기에 빠져들면 자기에게 주신 소중한 은사도 다 망각하게 된다.
남의 것은 남의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
이걸 분명해 해야 된다.

다섯째, '증오라는 감옥'

어느 사이에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직 이만큼이라도 살아 있으면 고마운 줄 알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오래도록 한을 품는가?
찬 몸서리가 난다. 이걸 풀지 못하고 한을 그대로 뭉쳐 가지고 죽어버린다.
이 증오, 이 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증오는 사람들의 뼈를 말린다.






100여 년 전(前), 미국에 '헨리 콤스톡(Henry Comstock)'이란 땅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856년(年)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콤스톡 광산(Comstock Mine)'을 소유하고 있었던 광산업자이기도 했는데, '네바다'주(州) '버지니아 시티'에 있던 나무와 엉겅퀴가 무성한 척박한 산을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1만 1천 달러의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는 손에 지폐 다발을 들고 기뻐했습니다.
몇 년 후, 그 산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척박해 보이기만 하던 산(山)에서 미국(美國) 최대(最大) 규모(規模)의 금광(金鑛)이 발견된 것입니다.
매장량(埋藏量)이 무려 5억 달러에 상회했습니다.
'콤스톡(Comstock)'은 땅을 치며 후회(後悔)했습니다.
그는 자신(自身)의 잘못된 선택(選擇)을 한탄(恨歎)하며 술로 세월(歲月)을 보내다가 한 달 만인 1885년 10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1914년(年), 한 발명가(發明家)의 집과 연구실이 전소되는 대화재(大火災)가 발생(發生)했습니다.
200만 달러가 넘는 전(全) 재산(財産)을 날린 그의 인생(人生)은 잿더미처럼 공허(空虛)했습니다.
이 발명가(發明家)의 나이는 67세, 사람들은 재기(再起)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는 그를 찾아와 위로(慰勞)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위대(偉大)한 발명가(發明家)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낡은 건물(建物)과 시설(施設)에 연연(戀戀)하는 내 좁은 소견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청소(淸掃)를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새 것을 주시기 위한 방법(方法)이랍니다."

이 사람은 발명왕(發明王)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입니다.
그는 화재(火災)를 딛고 일어나서 이전(以前)보다 더욱 훌륭한 연구실(硏究室)을 지었고 이전(以前)보다 더욱 의욕적(意慾的)인 활동(活動)을 펼쳤습니다.

'콤스톡(Comstock)'과 '에디슨(Edison)'은 절망(絶望) 앞에서 상반(相反)된 선택(選擇)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고난(苦難)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自殺)을 선택한 '실패(失敗)한 인생(人生)'이었고, 다른 사람은 한 번의 고난(苦難)을 오히려 새 출발(出發)의 기회(機會)로 삼은 '도약(跳躍)의 인생(人生)'이었습니다.

'에디슨(Edison)'에게는 시련(試鍊)이 곧 새로운 출발(出發)의 시그널(signal)이었습니다.
절망(絶望)을 대(對)하는 엇갈린 태도(態度)가 인생(人生)의 운명(運命)을 판이(判異)하게 가르는 법입니다.
결국 문제(問題)는 절망(絶望)이 아닌 그것을 대(對)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Christian)들에게는 문제(問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祈禱) 제목(題目)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 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염려는 무엇인가?

worry라는 영어 단어는 메림나오(merimnao. μεριμνάω)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생겼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누스라는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μεριμνάω  3309

1. 염려하다,  2. 돌보다

발음 / 메림나오(mĕrimnaō) 

어원 / 미래형 μεριμν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ερίμνησα, 33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염려하다(마 6:27, 눅 12:26, 고전 7:33), 돌보다(고전 12:25), 생각하다(빌 2:20).
신약 성경 / 19회 사용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8)

염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분열된 사람이다.
염려는 죄악이다.
염려한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비난하는 것이다. 롬 8:28, 히 13:5...
염려는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신체에도 해롭기 때문에 죄이다.

의학 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음을 한 곳에 쏟는 사람보다 염려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염려의 치료 :

1. 기도하기를 힘쓰라. 눅18:1
2. 기뻐하기를 힘쓰라. 빌4:4
3. 신뢰하기를 힘쓰라. 마6:25-34
4. 일하기를 힘쓰라. 시37
5. 당신의 축복을 세어보기를 힘쓰라.
6.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빌2:4


*인간의 세 고민

실존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고민 중 첫째는 물질에 대한 것, 둘째는 사람에
대한 것, 그리고 세째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 즉 돈을
벌려 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하여 고민을 느끼게 된다.

첫째의 고민을 누구나 노력하면 풀수 있다.
둘째의 고민을 푸는 자는 드물다.
세번째의 고민은 아무도 풀지 못한다."
이 세째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해결할수 있는 것이다.







“근심하게 한 것”
(8절)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원형 ‘루페오(λυπέω)’ ‘성가시 게 하다’, ‘슬프게 하다’, ‘비통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 인 근심이나 걱정을 뜻하기도 하지만, 죄로 인해 겪는 징벌과 관련된 고 난들을 뜻하기도 한다.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딱 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 근심이 믿음을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첫째, 상처가 되더라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충고를 담은 편 지를 보내고 잠시 후회했습니다. 자신 의 말이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 도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정직하게 인정함으로 바 울에게 결국 기쁨을 주었습니다. 

둘째, 유익이 되는 근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 로 인해 분명한 마음에 찔림을 경험했 고 이윽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들 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여 그런 결 과를 얻었고 더욱 참되고 경건한 그리 스도인의 삶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질 때 반드시 근심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회복되는 열정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더욱 진지하 고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런 노력 을 기울이고 있다고 칭찬했으며 그들을 더욱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사랑으로 권면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만 서로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바른 충고나 권면은 사 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합니 다. 비록 당장은 말하거나 듣기 불편하 더라도 권면이 낳는 절대적인 영적 유 익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서 로 권면하고 함께 회개하는 교회가 가 장 건강한 교회입니다.

회개의 실제성

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일입니다.
아무도 죄 안에 살고 있으면서 죄를 미워한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악함을 보게 하되 이론적으 로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 로도 보게 합니다.
마치 불에 덴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듯 그렇게 죄를 무서워하 게 됩니다.
마치 최근에 강도를 만나 곤 욕을 치른 사람이 고속도로 위에서 다 시 강도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듯 그렇게 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 서 죄를 피하되 모든 점에서 죄를 피하 려 듭니다. (찰스 스펄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분열되어 분쟁하며 음행과 자기자랑으로 더럽혀져 있을 때에 바울은 그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편지를 써서 보냈고, 편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자 55년경에는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함하며 몰아 세웠고 성도들은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 또는 방임하며 바울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진보는 없이 마음의 상처만 안고 돌아온 바울은 56년 봄, 한 통의 편지를 더 써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로 불리우는 편지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눈물의 편지 역시 사랑의 편지였지만,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고통을 준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어조가 너무나도 강렬하여 보내는 바울도 눈물로 썼지만, 읽는 성도들도 눈물로 읽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너무 과격하여 성도들이 근심할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은 일시적으로 근심했을 뿐 이내 회개하고 돌이키는 최상의 반응을 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은 회개로 전환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의 후회는 기쁨으로 전환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은 편지가 가진 설득력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 근심을 회개로, 후회를 기쁨으로 전환한 것이지요.

두 가지의 근심

성도에게는 두 가지의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 행위가 죄는 아닐까,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등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성결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근심’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근심이란 세상 사람들도 동일하게 하는 근심, 세상 것들에 대한 근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좌절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 등을 낳습니다.
이러한 근심이 자기를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고 소극적으로는 자기 정당화로 이어집니다.
지나친 자기 정죄로 인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옹색한 변명들을 늘어 놓다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상대방을 향하면, 적극적으로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험담하게 되고, 소극적으로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 근심은 성도와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단절시키게 되며, 결국 영적 사망으로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근심을 영적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의 결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회개로 이어지고, 회개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맺은  7가지 회개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1. 간절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죄를 교정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성결하게 만들고자 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해졌습니다.

2.  변증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지만, 자신들의 진심에 대해서는 적극 변증을 했습니다.
그들은 변명한 것이 아닙니다.
변명은 죄로 인해 오는 결과를 모면하려고 늘어놓는 것일 때가 많은 반면, 변증은 자신들의 진심은 보이는 것과 다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에 그에 넘어가 동조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바울을 옹호하는 대신 침묵하거나 방조했습니다.
이는 바울로 하여금 대부분의 성도들이 등을 돌렸다는 극도의 외로움과 복음의 진리가 퇴색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낳게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의 진심은 바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표현했던 것 갖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음을 변증했을 것입니다.

3. 분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진심을 변증하는 한편 바울을 모함하고 비방했던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했습니다.
가슴아픈 방문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4. 두렵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바울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했고, 또한 하나님 진노가 임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5. 사모하게 함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일그러진 바울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열망했습니다.

6. 열심있게 함

성도들은 성결한 삶에 대하여 그리고 바울 일행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7. 벌하게 함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서 성결을 위한 열정을 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을 공의대로 처벌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침묵과 방임은 죄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냈습니다.
깨끗함을 나타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적대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들이 침묵하거나 방조했을 뿐 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제 회개하고 돌이켰으니 깨끗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모독하고 비방할 때에 고린도 성도들은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방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의 마음을 찢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더라도, 죄에 동조하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죄를 침묵하거나 방임하는 것도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악한 자에게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악한 자를 묵인하거나 방임해도 안됩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행위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 묵과하지 말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비방자와 적대자에 대한 용납은 사랑이 아니라, 무고한 자에 대한 배반이요, 죄에 대한 동참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눈물의 편지의 목적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불의를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음행이라는 불의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음행자의 배우자는 불의를 당한 것이 됩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바울은 불의를 당한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편을 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최대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보낸 이유는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진심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막힘없이 설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바울의 의도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바울 일행에 대한 그들의 진심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디도를 통해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특히 디도가 안전하게 돌아왔고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바울을 더욱 기쁘게 하였습니다. 눈물의 편지를 들고 고린도로 파송을 받을 때만 해도 디도의 마음은 무거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환대했고,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

바울은 회개하고 돌이킨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기뻤습니다. 성도들이 회개한 자체도 기뻤지만, 자신이 성도들에 대해 디도에게 했던 자랑이 증명되었기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비록 죄에 대한 동조와 침묵과 방임을 통해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어도 그들 안에 있는 진심과 가능성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비록 죄를 짓고 있어도 그들 안에 심겨진 복음으로 인해 결국 돌이키게 될 것을 믿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강점들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로 향하는 디도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자랑했습니다. 겉으로는 자랑스러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바울은 여전히 그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태도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가슴 아프게 하고, 미흡하고, 죄 가운데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 있는 장점을 보며 그들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디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디도를 대할 때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했으며, 디도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종했습니다. 디도는 어린 사람이었고 12 사도 중 한 명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떨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도들은 그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자세는 순종의 행위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하며 그 말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위대하고 잘 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마음도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 디도의 마음이 깊어지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회복은 회개의 아들

바울은 죄에 빠진 채 자신을 대적하는 고린도 성도들로 인해 마음이 아파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자랑하기는 했으나 성도들을 향한 온전한 신뢰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죄를 청산했으며, 악한 자들을 축출했기에, 그들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습니다.
회개는 회복을 낳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나 회복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성도와 성도 사이에,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그리고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회복이 있게 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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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2022(화)

은혜 받을 만한 때(고린도후서 6:12)

헛되이. κενός, ἡ, όν  2756

1. 빈,  2. 내용이 없는,  3. 마가복음 12:3

발음 / 케노스(kĕnŏs)
관련 성경 /  헛된(고전 15:10, 엡 5:6, 살전 2:1), 헛되게 하는(살전 3:5), 허탄한(약 2:20).
[명] 빈 손 (눅 1:53), 허사(행 4:25), 헛것(고전 15:14).
신약 성경 / 18회 사용
은혜란 무엇인가?

1. 값없이 받는 사랑
2.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든 환경과 사건

‘오스카 와일드’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가 있습니다.
19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단편집으로 ‘행복한 왕자’가 있습니다.
여러 단편 중에 한 편인 ‘행복한 왕자’는 아마도 제 기억에는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 같습니다.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을 떼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려는 왕자의 동상(銅像)과 그 왕자 동상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추운 겨울이 와도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돕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제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대 민중들의 척박한 삶의 상황과 그들에 대한 연민이 짧은 소설 가운데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시대의식이 있었고, 재미있고 풍자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지옥의 단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예수님이 한 때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까요?

소설에서 예수님은 먼저 한 술주정뱅이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한 때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반갑게, 또한 안타깝게 물으셨습니다.
“당신,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찾아와 걷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괜찮은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고, 도무지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술이나 마시며 삽니다.” 차라리 절름발이였을 때는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사지 멀쩡하여 아무런 배운 것도,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신세한탄이나 하며 폐인이 되어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었는데도 말입니다.

한 창녀를 만납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창녀의 삶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주셨지요. 그런데 내가 손을 씻은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세상은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조롱했고, 나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 수가 없었어요. 나는 결국 다시 이 생활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세상이 자신의 변화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결국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말입니다. 

한 깡패를 만납니다.
역시 이전에 예수님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청년, 저를 아시지 않소.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이렇게 싸우며 살고 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 모두가 나를 신경질 나게 하고 화나게 만드는데 말입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날마다 세상과 싸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예수를 만났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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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22(월)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교회를 드나들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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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란 영어 단어의 약자
Environmental(친환경)
Social(사회적 책임)
Governance(공공경영)

현재 기업들은 ESG 경영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ESG가 세상적인 단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의 나타난 정신이며 이미 교회가 추구해왔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친환경과 관련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하는 것이 창조세계의 보존이며, 생태적인 삶입니다.

사회적 책임은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에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공공경영과 관련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만 인정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특정 유대인이나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행복한 새티스파이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최대 만족을 추구하는 맥시마이저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새티스파이스다.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맥시마이저는 항상 더 많이,더 높이를 추구하기에 성취도가 높아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는 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맥시마이저는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반면 새티스파이스는 이 정도면 됐잖아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티스파이스는 현실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에 변화나 상승 의지에 약해 상대 평가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산다.
중요한 것은 맥시마이저는 내적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만 새티스파이스는 내적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끊임없이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삶이다.

하나님의 형상(צֶלֶם , 첼렘)과 모양(דמות,드무트), 평행어법

하나님의 ‘형상’(ֶלֶצם 첼렘, image)과 ‘모양’(דמות 드무트, likeness)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원인은 구약성경 최초의 번역서인 칠십인 역(LXX) 때문이기도 하다.

LXX역은 창세기 2장 26절에 나오는 구절을 ‘우리의 형상과(and) 모양을 따라’로 번역했다.
형상과 모양 사이에 ‘and’를 넣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형상과 모양이 마치 서로 다른 의미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에서 표현된 형상과 모양에는 차이점이 없다.
문법적으로 동격이기 때문에 사실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단어의 모양은 다르지만, 사실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르지 않는 성경 해석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이 두 단어가 교차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 /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창 5:3)’

만약 두 단어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면 이렇게 교차되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문맥을 조사해 볼 때 강조점을 향해 흘러가는 방향성은 있지만, 의미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째,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병행어법이다.

이것은 평행어법(Parallelism)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을 기록한 문학적인 기법과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가 서로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에 함께 있다는 원리이다.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내용과 의미, 그리고 사상이 같이 간다.
두 단어는 구분이 불가능한 단어의 쌍(word-pair)으로 존재 한다.
가끔 예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단어의 쌍이 올 때에는 뒤에 오는 단어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는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리이다.
예를 들어 A와 B라고 하는 두 단어가 쌍으로 있다 하자.
그럴 때 해석은 이렇게 된다.

B는 A 그 이상이다(B is more than A).
A와 B라고 하는 두 단어가 올 때 앞 단어 A보다 뒤 따라오는 B에 훨씬 큰 의미가 있다.
의미의 무게 중심이 B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성경 해석을 창세기 1장 26절에 적용한다면 두 단어 중 어디에 강조점이 놓여 있겠는가?
A=형상, B=모양이다.
강조점은 B, 즉 모양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숨겨진 카드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rodemnamusho&logNo=220452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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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022(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가장 완벽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는 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삶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우리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먼저 집을 찾습니다.
집이 있어야 복잡한 도시에서 편안하게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온유하면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면 짓 밟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겸손과 온유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미 세상의 질서가 너무 많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 따기 라는 말이 아주 쉽고 간단하게 더구나 무책임하게 남용됩니다.
사랑을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으시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늘의 별을 따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셨던 것에서 두 가지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는 삶을 통한 형상의 회복

어렵더라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을 받는 것과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섬기며 더 낮은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을 통한 형상 회복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신 은총을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났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고쳐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찾아봅시다.
내 믿음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해야 할 기도와 적용해야 할 말씀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찾아낸 것을 내 마음 판에 새기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함께 달려봅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주님께서 주시는 건강을
지금보다 더 좋게 하려고 몸부림 칠 것이 아니라 지금 상태만이라도 유지하면서 오늘을 살아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조물임과, 인간이 본래는 하나님과 닮은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상을 상실했다면 회복해야 한다는 엄숙한 제시가 있음을 본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한 형상과 모양에 대한 히브리어는 쩰렘(צלם)과 데무트(דמּות)이다.
쩰렘은 영어로 Form 혹은 Image로, 데무트는 Likness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쩰렘은 '자르다'의 어근으로 추정되고, 데무트는 '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쩰렘과 데무트가 외형적으로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 낯빛을 변하고(단 3:19)"의 '빛(첼렘)'은 마음의 속 상태를 보여 주는 외적인 모습이다.

열왕기하 16장 10절에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거기 있을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에 쓰인 '식양(데무트)'은 타브니트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의미로 쓰였다.

신명기 4장 16절의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에서는 형상(타브니트)과 우상(테무나)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양과 물질적인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형상에 대하여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모르페(형상), 호모이오마(형체), 스케마(모양)의 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외형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형상이 없는 영적 형상의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 4: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유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 무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유형의 형상이 없으니 무형의 형상이라 함이 자연스럽다.
아래 성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골로새서 3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형상은 하나님의 의(시 99:4), 거룩(출 15:11, 시 22:3, 사 5:15, 57:15), 선(막 10:18), 사랑(신 7:9, 요3:16)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은 존재론적으로는(영적 형상)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형상이요, 의미론적으로는(속성적 형상) 의와 거룩과 선과 사랑이시다.

이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타락하여 이 영적 형상을 상실해 버렸다.
육체까지 영생의 존재가 육체에 사망이 왔고 거룩해야 할 존재가 죄악 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죽지 않는 영혼마저 지옥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짊어지시고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죗값으로 사망한 육신이 부활하게 되고 불행한 영혼이 행복한 영생과 거룩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요 점진적 성화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첫째는 믿음을 통한 칭의적 회복
둘째는 삶을 통한 행함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첼램)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첼램 H6754) 우리의 모양대로(데무쓰 H1823)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아담 H120)

창조하시되 남자와(자칼 H2145) 여자를(네케바 H5347) 창조하시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첼렘 H6754) - ‘자르다, 베다’동사에서 유래

* 우리의 모양대로(데무쓰 H1823) - ‘무엇 무엇과 비슷하다’에서 나옴
자르고 베고 갂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토브 H2896)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처음에는 순결했으며 죄가 없었으며 거룩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존재하는 대표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구분합니다.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 구조적 측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게하며 하나님의 소명에 반응해서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
인간의 이성적,합리적 능력들을 하나님의 이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교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결정 능력을 조금이나마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적감각 역시 절묘하고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미적 감각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있는 재능도 역시 노래를 부르시며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덕택입니다.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 기능적측면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 참된 지식,의로움,거룩함”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네오스 G3501-새로운) 입었으니(엔뒤오 G1746)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에이콘 είκών G1504) 좇아 지식에(에피그노시스 ἐπίγνωσις G1921) 까지 - 명확한 지식,인식- 에피기노스코ἐπίγινώσκω에서유래;알다,인식하다
에피 ἐπί G1909-위에 + 기노스코 γινώσκω G1097;알다,알게되다
- 일관되게 구약과신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의 해위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지식’을 의미(바이블렉스)
새롭게 하심을 받는(아나카이노오G341) 자니라.
아나ἀνάG303-위로+카이노스καινόςG2537- 새로운
- 도적적 갱신(바이블렉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선물로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 때문.
(고후4:16)에서는 바울로 하여금 외적압력들을 초월하게 하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되고 힘을 얻는 것을 가리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디카이오쉬네G1343)와진리(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G225)의
거룩함(호시오테스G3742)으로;경건,거룩
-호시오스ἅσιοςG3741에서유래 ‘올바른’
-‘하나님께 바쳐진’(경건한,신성한,분명한)거룩한,자비,될지어다
지으심을 받은(크티조κτίζω2936)-만들어내다,창조하다
새(카이노스G2537) 사람을(안드로포스G444) 입으라.(엔뒤오G1746)
* 입으라(ενδύω)- 옷을‘입다’;옷속에 ‘스며들다’라는 의미에서 유래
-입다,입히다,붙이다의 뜻포함
엔ένG1722-안에;정지에의미 + 뒤노δύνω또는뒤미δυμι G1416
;(duo-가라앉다의 연장형)-내려가다,해가지다
* 사람(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G444) -‘인간의 얼굴을 가진’인간
아네르άνήρG435-사람,남편 + ops(안색,옵타노마이 όπτάνομαιG3700에서유래)
-응시하다;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는 것을 향한 것처럼)
:헬라어에서 짐승이나 신과 반대되는 ‘인간’을 의미
경멸적인 의미로‘노예’를 의미.비난및 노예를 부를 때 사용.
죄의종,율법적인 인간을 의미합니다.(바이블렉스참조)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독수리는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난다는 것은 좁은 의미 즉 기능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고,
날기 위해서
필요한 구조적인 것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 이 세상 신(ὁ θεὸς τού αἰώνος τούτου, ‘이 세대의 신’)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 마음을 혼미케 하여의 혼미케 하여는 에튀플로센(ἐτύφλωσεν)으로서 ‘소경이 되게 하다’, ‘어둡게 하다’, ‘헛갈리고 흐리멍덩하게 하다’ 등을 의미한다(롬 1:21).

사람이 믿지 않는 것과 사단이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사람이 믿지 않으니까 사단이 그 마음을 혼미케 할 수 있고, 또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해 인간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는 불신자의 마음의 눈을 감기게 하는 사단의 목적이자 결과이다.
즉, 사단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음이 발하는 광채(시 44:3, 78:14)가 비취지 못하도록 불신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εἰκὼν τού θεού)

그리스도가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표현은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나 현재의 영광스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에 국한시켜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고, 또한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요 17:5).
그분의 성육신이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성육신의 과정을 통해 그분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 형상이 되신 것이다”(Nicholson, p. 75).②}(저자의 골 1:15의 주석)

“형상”이란 에이콘(εἰκὼν)

단순한 유사함이나 모방이 아니라, ‘원형적 대표’를 의미한다(T. K. Abott, G. G. Findlay).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그 본질로 삼는 것이다(黑崎幸吉). 이것은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와 같은 의미이다.

“이 낱말은 ‘현시’(manifestation)를 의미하기도 한다”(J. B. Lightfoot,③ C. Vaughan).
즉,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사랑, 의, 선, 지혜, 능력 등)과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볼 때,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J. B. Lightfoot,④ C. Vaughan).

스튜와트(J. S. Stewart) 역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⑤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저자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과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7:5) 등의 말씀으로도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가지고 있으며, 성도들이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주님의 영으로 인해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분(창 1:26-)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F. W. Beare).

특히, 형상이란 고대 세계에서는 주권 또는 왕권을 표시하는 개념이었으며, 더 나아가 왕들은 현현신(現顯神)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애굽의 바로, 로마의 가이사, 중국의 천자 등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우주적 주권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저자의 골 1:15의 주석)

주석(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참조: 골 1:15, 히 1:3.
2) in C. Vaughan.
3) in 이상근.
4) 상동.
5) J. S. Stewart, op. cit., p. 303.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이 글은 영국 런던의 금융가(더 시티)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옛 증권거래소가 있다.
그 건물 전면에 라틴어로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한 말은 곧 보증수표’라는 뜻이라고 한다.

철저한 신용과 단단한 신의가 금융의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된 것은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때문만도 아니고 시차 때문에 24시간 국제영업이 가능한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신뢰 때문이다.
정부 정책도 금융 못지않게 신뢰가 중요하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기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한 역사나, 미국이 패권국으로 도약한 역사는 신뢰받는 정부의 역할을 빼놓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최근 우리 정부의 신뢰수준은 바닥에 떨어졌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빈번히 쏟아 냈지만 국민은 집값·전셋값 급등과 극심한 희망고문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경험했다.
탈원전 정책은 과학적 분석과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결정되었다.
코로나 방역과 관련해선 ‘조금만 참으면 정상화될 것’이란 말을 정부가 수없이 반복했지만, 그런 호언장담을 믿는 국민은 이제 아무도 없다.
소상공인들은 빚더미에 짓눌려 생사의 기로로 내몰리는데도, 정부는 코로나 피해의 효율적·효과적 보상을 위한 선택과 집중은커녕 재난지원 대상을 전 국민에게로 확대하지 못해 안달이다.
피해가 크든 작든, 피해를 입었든 안 입었든 모든 국민이 똑같이 획일적으로 위로받아야 한다는 선거용 정치논리인가. 심각한 위험에 빠진 국민을 최우선으로 구하기 위해 정부가 진정성 있게 다가서지 않는다면 누가 정부를 신뢰하겠는가. 소수의 국민은 영원히 속일 수 있다.
많은 국민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신뢰 받아야 국가가 성장
부동산·방역 등 정책 잇따른 실패
사과하고 잘못된 것 빨리 고쳐야
동반성장을 사회 작동원리 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라도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부가 그간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주변의 다른 사람이 대신 사과해 봐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또 고칠 수 있는 것은 빨리 고쳐야 한다.
사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정직과 투명성이 중요하다.
그것은 정부가 지금껏 해온 것과는 다른 새로운 대응을 뜻한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뉴딜정책은 배울 게 많다.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그때 미국이나 지금 한국이나 위기인 건 마찬가지다.
미국의 뉴딜은 구호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과감하고 꾸준한 실천으로 성공했다.
성공의 뒤에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신뢰를 얻기 위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그는 당시 라디오 ‘노변정담’에서 특유의 유머, 과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국민을 감동시키고 주요 정책을 국민에게 쉬운 말로 허심탄회하게 전달했다.
임기가 7개월밖에 안 남았지만 우리 대통령도 해야할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
‘대장동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의 공명정대한 처리는 대통령에게 그동안의 실책을 적잖게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대장동 사건을 신속히 그리고 철저히 조사토록 지시하고 그 진상을 세상에 밝힐 것을 촉구한다.

신뢰의 추락도 걱정이지만 한국경제의 앞날도 만만치 않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기술혁신만큼 더 중요한 것도 없다.
그러나 미래가 불확실한 때일수록 원리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나는 이 참에 동반성장을 우리 사회의 작동원리로 삼기를 제안한다.
있는 사람 것을 빼앗아 없는 이에게 나누어주자는 것이 동반성장인가?
그렇지 않다. 동반성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정한 기회, 불편부당한 규칙, 그리고 공정한 분배를 통해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멀리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A Smith)『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수립한 자본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중상주의, 고전적 자본주의, 케인스주의, 신자유주의를 이어갈 새로운 사회작동의 원리요, 철학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 동반성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오늘날 동반성장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CSV(공유가치창출), 포용성장, 기업시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운동 등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동반성장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통해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의식주가 넉넉할 때 변하지 않는 도덕심이 함양된다(恒産恒心).
우리 사회가 양극화를 해소하고 성장의 가치를 공유하여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을 때, 건강한 공동체가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국민 각자가 서로 배려하고 관용하며 스스로 앞장서 건강한 공동체를 일궈가는 사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동반성장 사회다. 물론 신뢰받는 정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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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2022(금)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2)  만족. ἱκανότης, ητος, ἡ  2426

편지. ἐπιστολή, ῆς, ἡ 1992

1. 편지,  2. 서신,  3. 고린도후서 7:8

발음 / 에피스토래(ĕpistŏlē)
어원 / 1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공문(행 9:2, 22:5), 편지(행 15:30, 롬 16: 22, 고전 5:9, 고후 3:3), 추천서(고후 3:1).
신약 성경 / 24회 사용

* 1989. ἐπιστέλλω

1. 편지로 알리다,  2. 단순하게 편지를 쓰다, 3. 사도행전 15:20

발음 / 에피스텔로(ĕpistĕll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στειλα, 1909와 47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편지하다(행 15:20, 21:25), 쓰다(히 13:22).
신약 성경 / 3회 사용

만족. ἱκανότης, ητος, ἡ  2426

1. 알맞음,  2. 능력,  3. 자격

발음 / 히카노테스(hikanŏtēs) 

어원 / 242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만족(고후 3:5).
신약 성경 / 1회 사용

* 2435.  ἱλαστήριον, ου, τό 

1. 속죄하는 것,  2. 속죄의 장소

발음 / 히라스테리온(hilastēriŏn) 

어원 / 2433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화목제물(롬 3:25), 속죄소(히 9:5).
신약 성경 / 2회 사용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보셨습니까?
눈, 얼굴, 옷, 말투.........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능력이나 학벌이나 직장, 배경 등을 보면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오늘날 사람을 평가 할 때 그 사람의 중심이 어떤지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외모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외모는 단지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능력과 조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려면 자신이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자녀를 결혼시킬 때에 보면 압니다.
외적인 조건은 좋은데 믿음이 없는 사람과 외적인 조건은 별로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사는지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결혼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택을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바로 이런 문제에 부닥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에 어떤 선생이라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왔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서를 들고 왔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었다는 사람들이 와서는 바울은 사도도 아니며 추천서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말을 듣지 말고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끌리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흔들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 추천서인가를 말합니다.  

1~3절의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살다보면 우리도 종종 사람을 소개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소개받을 때는 아무래도 서로 대면하여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소개받는 경우도 있고 제삼자를 통해서 소개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신이나 전화상으로 소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잘 아는 사람끼리는 소개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개서를 쓰라든지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무례한 요구이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그런데 보면, 사도 바울에게 추천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경우가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개척을 누구 때문에 했습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추천서가 필요없습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낳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에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서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추천서가 필요하였다하더라도 사도 바울에게 이런 관례를 들어 추천서를 요구하는 것은 바울을 아주 모욕하는 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천서를 요구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는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글씨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가 성도들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바울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쓰여졌습니다.(3절)

우편으로 편지를 받았을 때 봉투 위에 찍힌 스탬프와 우편소인을 봅니다.
그 우편소인이 뚜렷하게 보일 때도 있으며 너무 희미하여 그 편지가 어디에서 우송되어 왔는지 알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희미하여도, 그 편지가 거기에 도착하였고 그것을 뜯어보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희미하여도 도장 찍힌 것이요, 우체국에서 찍은 스탬프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도 희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인침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매우 강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추천서는 거짓 사도들의 추천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며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 빛날 면류관이요 상급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야 말로 바울의 직분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4~5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이 참으로 그런 점에서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확신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생각하여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는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이 세상에 세워진 교회는 이런 식으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정확하게 깨닫게 하고 그 영혼들이 천국 사람으로 확실하게 변화하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사람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이 되게 하는 일, 그저 모든 사람들이 자기 교회를 다니게 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는 성공적인 전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크게 근심시키는 일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서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쳤으나 우리가 전도하고 가르친 사람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면 그런 일이 큰 손해가 되겠지만 천국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든지 천국 사람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변화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고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과 상을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의 만족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복음전도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써주신 추천서,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의 사도권은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의 전도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복음이 성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의 은혜 잊지 말고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가지 종류의 편지


1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당시에도 추천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느 분을 어느 지역으로 파송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와 당신 사이에 이런 추천서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린도 교우와 사도바울의 일행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는 표현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우들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읽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고린도 교우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 이들은 마음이 뿌듯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교우들이 뿌듯한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줄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연쩍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처럼 두세 번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도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그룹과 인정하지 않는 두 그룹이 늘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도를 통해 보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죠. 고린도 전서 13장, 곧 사랑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여튼 겸연쩍어 하던 뿌듯해 하던 사도바울은 세 번째 종류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며 보았을지 모릅니다. 특히 사도바울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편지 곧 ‘우리의 편지’라는 말도 그렇게나 좋았는데 아니 미안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늘 내분이 심하고 싸움이 심한 자기들의 교회를 향해서 최고의 찬사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3절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구약을 좀 아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돌판에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이라고 하면 당연히 구약을 아시는 분이면 모세의 십계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편지를 모세의 돌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돌판 곧 십계명을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근거 없이 뒤집어엎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7, 8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모세의 십계명은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들은 영의 직분을 소유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묵직한 십계명의 돌판은 정죄의 도구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편지는 도리어 살리는 도구가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편지를 소유한 자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빛은 사라지는 빛이지만 고린도 교우들은 영원에 이르는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우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Justin Wren이라는 한 때 두 차례 프로 레슬링 챔피언이었던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제는 콩고의 Pygmy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당하였는데 선생님과 의사에게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슬링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의 모든 frustration을 풀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레슬링에 빠지게 됩니다. 생각 보다 잘하게 되자 부모님이 후원을 해 줘서 레슬링을 자기의 career로 삼게 됩니다.

레슬링으로 성공도 하지만 레슬링을 하다가 부상을 입습니다. 그런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결국 선수와 코치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하도 마약에 빠져서 가장 친한 친구 결혼식에도 참석치 못합니다. 자기가 best man인데도….
이처럼 가장 어려울 때 친한 친구에게서 이메일이 옵니다. 60번 계속 보냈지만 Justin은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정죄의 편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60번의 이메일을 한번쯤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메일의 제목은 ‘Game Plan for Victory’였습니다. 레슬링 매치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기록된 것인지 하고 열어보니 친구가 수양회로 초대를 한다는 이메일이었습니다. 한편 더 반가운 소식은 본인이 다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막상 아무데도 갈 데가 없었는데 친구의 요청으로 수양회에 참가합니다. 결국 그의 삶을 뒤집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긴 말씀 다 못 드립니다. 다시 레슬링으로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자기를 위한 선수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레슬러가 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 잠시 레슬링을 접고 아프리카로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콩고의 피그미족들이 노예로 사는 모습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약에 찌든 레슬러를 선교사가 되게 했던 사건은 바로 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정죄의 편지가 아니라 곧 십계명의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가 한 사람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제 콩고에서 노예 생활로 죽어 가던 수많은 피그미 족들을 구원하게 하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주는 가슴 아픈 교훈이 있습니다. Justin이 왜 60개의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천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져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가뜩이나 괴로운데 크리스천에게서 또 다른 돌을 맞기가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러면 왜 Justin 은 기독교인들은 정죄의 돌을 손에 쥔 자로 생각하고 있었나요?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보일 수 있나요?

그러나 그것은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우리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Justin의 친구처럼.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가 되는 방법’을 5절 말씀을 통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곧 하나님으로 초점을 돌릴 때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돌리며 살 때 우리의 전 삶은 아름다운 편지가 되어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괄은 비빌 괄(刮)인데,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한다는 뜻입니다.
삼국시대 초엽 오나라 왕 손권의 부하 중에 여몽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손권이 여몽을 불러 말합니다.
“자네가 좀 더 훌륭한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여몽은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힘썼습니다.
몇 년 후 재상 노숙이 여몽을 찾아왔습니다.
여몽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노숙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졌음에 매우 놀랐습니다.
노숙이 여몽의 학문적 깊이를 칭찬하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니겠나?”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비들이 아닙니까?
사흘만 하나님 앞에서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정도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삼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4. 3. 6~ 1564. 2. 18)
14살 때 베르톨도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 1420년 이후, Poggio a Caiano – 1491. 12. 28, 플로렌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그를 찾아 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본 조반니가 물었습니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먼저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그곳의 조각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바라느냐?”

미켈란젤로는 대답합니다.

“저는 제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안에 있는 영광스런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밝게 빛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으로 나갑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세상을 밝게 만들어 갑니다.
이 땅 위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고백을 함께 나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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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2022(목)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

향기(香氣) /  εὐωδία, ας, ἡ 2175

1. 향기,  2. 향내,  3. 에베소서 5:2

발음 / 유오디아(ĕuōdia)
어원 / 2095의 합성어와 3605의 어간의 합성 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향기로운 제물(엡 5:2, 빌 4:18), 향기(고후 2:15).
신약 성경 / 3회 사용

* 2095. 유(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605. 오조(ὄζω)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빌립보서 4:18
[주] Χριστοῦ εὐ. ἐσμὲν τῷ θεῷ :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악취(惡臭) / ὄζω 3605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3. 요한복음 11:39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이기게 하시고(2358) θριαμβεύω 

1. 개선행진에서 누군가를 무엇을 끌고 가다,  2. 개선하게 하다,  3. 공개적인 행진에 나타내 보이다.

발음 /  드리암뷰오(thriambĕu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θριάμβευσα, 2360의 어간과 680의 파생어의 연장된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기게 하다(고후 2:14), 이기다(골 2:15).
신약 성경 / 2회 사용

* 개선장군이 행진을 할 때 끌고온 노예들을 군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행진에 세워주는 것.

페로몬(pheromone)같은 종의 동물끼리의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화학적 신호를 말한다.
체외분비성 물질이며, 경보 페로몬, 음식 운반 페로몬, 성적 페로몬 등 행동과 생리를 조절하는 여러 종류의 페로몬이 존재한다.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배출해 의사소통하거나 길을 안내합니다.
개미 한 마리가 페로몬을 분비하면 다른 개미는 더듬이로 냄새를 맡아 방향을 알게 되는 식입니다.
또 다른 개미들도 이런 방법으로 앞선 개미를 따라갑니다.

이 흔적을 따라 먹이를 찾고 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기독교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배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건 교회가 사분오열돼 사랑이 식고 용서가 사라져 복음이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이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주인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설립했고 깊은 애정이 있는 교회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중심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바울의 바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고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참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참 냄새는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로마 황제나 장군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를 끌고 오면서 시민들에게 전쟁에서 이긴 걸 알렸습니다.
이때 개선 행렬 안에 향을 피웠습니다.
개선 행렬은 사실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차 위에 향로를 피워 향기로 피비린내를 덮었던 겁니다.
피어나는 연기로 개선 행진을 만방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지요.
개선행렬에 참여한 군인과 시민에게 마차에서 나오는 향냄새는 기쁨과 축제를 느끼게 하는 승리의 향기입니다.
하지만 끌려오는 포로에게는 죽음의 냄새이기도 하죠. 한 냄새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셈이죠.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 안이나 밖에서 모두 생명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유오디아, εὐωδία)를 말합니다.

창세기 8장 20-21절a에서 노아는 제사를 지냅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

여기서 나오는 ‘그 향기를 받으시고’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희생 제사로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도록 제물을 태웠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셨습니다.
이는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머무는 자리에서 승리의 향기를 배출해야 합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또한 주변에 승리의 기쁨과 축제의 즐거움을 전하는 교회로 만들어 갑시다.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하면서 나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시다.
봉사의 자리에서도 내 이름 대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시다.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즉 생명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내보내는 향기를 따라 기쁨과 축제 그리고 승리의 자리로 찾아 오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길 원하고 추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길 바라자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여기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돼 생명의 냄새를 배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은혜의 향기이자 선행의 향기이며 사랑의 향기를 배출하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에 사랑을 전하고 사망에 이르는 이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어느 날 순례자가 한 덩이의 진흙을 발견했는데, 그 진흙에서 놀라운 향기가 났습니다.
순례자는 그 이유를 찾아내었습니다.
이 진흙은 백합과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진흙 속에 배어 있는 백합의 향기, 어쩌면 이런 향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냄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유명한 대학에 소아마비로 큰 불편을 겪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할 뿐 아니라, 항상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 비밀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지는 멀쩡한데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자기만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 까지 피해와 상처를 줍니다.
썩은 오물이 풍기는 악취는 바람 불고 씻으면 없어지지만, 인격이 풍기는 악취는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괴롭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서 나오는 냄새는 어떤가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멀리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을 가져다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백향목이란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도 향단이 있었고,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귀한 세 가지 예물을 드렸는데 그 중에 유향과 몰약은 향기를 내게 하는 향품입니다.

또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좋은 옥합을 깨뜨려서 그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향기는 거룩한 것, 사랑, 충성과 정성, 믿음의 상징으로 생각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기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도와 헌금 그리고 성도의 기도 역시 향기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는 특성상 퍼져 나가게 됩니다.
더구나 냄새는 그 본체를 미루어 알게 합니다.

일제 말기에 어떤 장로님이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찾아와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니까 참다못한 장로님은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고 썩었기에 이렇게 똥파리들이 달라붙느냐”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아주 더럽고 나쁜 유혹을 해온다면 나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향기가 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러운 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더운 여름철에는 여기저기에서 많은 냄새가 나는 계절입니다.
더구나 요즘 들판에 나가보면 수많은 꽃들이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는 향기가 되고,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고, 평화와 즐거움을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고, 감사와 찬양을 넘치게 하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냄새를 풍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함과 거룩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나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꼭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공동번역)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냄새(3744) ὀσμή, ῆς, ἡ 

1. 향기,  2. 좋은 냄새,  3. 좋지 않은 냄새

발음 / 오스메(ŏsmē)
어원 / 36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냄새(고후 2:14, 16). 향기(엡 5:2, 빌 4:18).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605. ὄζω 

1. 악취를 풍기다,  2. 냄새를 풍기다

발음 / 오조(ŏzō)
관련 성경 / 냄새가 나다(요 11:39).
신약 성경 / 1회 사용

시바 여왕과 솔로몬의 지혜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할 때에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아름다운 꽃을 심은 화분 둘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꽃들은 똑같은데 실상은 하나는 진짜 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만든 조화였습니다.
시바 여왕이 화분 둘을 멀리 갖다 놓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화분이 참꽃이냐고 물었을 때 솔로몬 왕은 조금 생각하더니 신하에게 “동산에 나가서 벌과 나비 몇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여 신하가 벌과 나비를 잡아 왔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벌과 나비를 방안에 놓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벌과 나비들은 그  방에서 조금 날더니 금방 화분 있는 대로 날아가더니만 한쪽 화분에 가서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 왕은 웃으면서 “저 벌과 나비가 앉은 화분이 진짜 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짜 화분의 꽃에는 향기가 있었기 때문에 벌과 나비는 향기 있는 화분을 찾아 날았던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습니다.
모양은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으면 이미 그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식당에 가면 음식 냄새가 납니다.
병원에서는 소독 냄새가 납니다.
생선 가게에 가면 비린내가 납니다.
화장품 가게에 가면 화장품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쓰레기 하치장에 가면 썩은 악취로 호흡이 곤란함을 겪습니다.
그것은 온갖 채소, 과일, 생선, 음식물들이 뒤범벅되어 썩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나 음식물들이 처음부터 악취를 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방치되고 돌보지 않아 부패되면서 부터 악취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예수님을 모신 감격과 기쁨으로 살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나 혼자만 지닐 수 없어서 그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지금 혹시 마치 쓰레기 하치장의 썩은 악취를 내듯 나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세속적 비도덕, 비윤리, 비신앙적 삶을 통하여 악취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진솔한 대답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15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여기의 “향기”는 헬라어에서 ‘유오디아’(ευωδια)라는 말인데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창 8:21, 출29:18, 레 1:9, 민 15:3).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복음 증거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희생적인 제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 5: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이스 오스멘 유오디아스’(εις οσμην ευωδιας)는 70인 역에서 희생 제사와 관련된 문맥에 많이 나타나는데(창 8:21, 출 29:18, 레 1:9, 민 15:3),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향기로운 제물임을 시사하고 성도들도 그와 같은 희생적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에서도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동일한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빌립보 교회의 바울의 필요를 체우고도 남았다는 “풍부한지라”(περισσεύω, 페릿슈오)로 연결되는데, 즉 바울의 복음 선교 사역을 돕는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도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을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놀라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됨은 바로 예수의 복은 선교 사역에서 표현되어지는 지고한 축복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지는 거룩한 성도의 희생적 삶에서 표현되어지는 아름다움입니다.

향기 가운데서도 고급 향기로 살아갈 것인가 싸구려 향기로 살아갈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컨대 ‘샤넬 넘버 5’(Chanel Number Five)는 전세계의 여성들에게 사랑 받는 대표적인 향수입니다.
이 향수는 장미 꽃잎 45Kg을 가지고 향수액 28g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 1.600배로 농축을 한 것입니다.
장미 꽃잎 45Kg은 대단한 양입니다.
장미 꽃잎이 그 정도 무게를 가지려면 트럭으로 몇 대는 족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향수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인삼에서 뽑은 향기가 인삼향이고, 국화향, 모과향, 오렌지향 등도 나름대로 각각의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향기, 봉사의 향기, 전도의 향기,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의 향기 등 각자의 독특한 향기를 나타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싸구려 향기는 다른 사람의 속을 매쓰겁게 하고 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악취를 내는 성도의 생활을 하면서 헐뜯고, 흉보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파당을 짓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악취가 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싸구려 향기인 것입니다.

향수 가운데서도 고급 향수가 있고 싸구려 향수가 있듯이 성도 가운데서도 고급 신자가 있고 싸구려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체는 3일 동안 그대로 두면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서 세상을 한번 바라봅시다.
가혹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걸어다니는 시체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육체가 살았다고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이 죽어서 온갖 악취가 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두 가지 냄새(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 얻는 자에게 생명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멸망하는”의 헬라어 ‘아폴뤼메노이스’(απολλυμενοις)
구원 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σωζομενοις)'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적으로 일어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향기의 실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인데 곧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성도들에게는 집 모통이의 요긴한 돌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며(마 21:42, 행 4:11),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냄새가 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똑같은 하나의 냄새지만 어떤 사람은 그 냄새로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맡으면 죽어 버리고 맙니다.
마치 여름에 모기향을 피울 때 그 향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지만 모기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꿀벌은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준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독침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만 멸망할 사람들에는 이 냄새가 역겨워 맡기도 싫은,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똑같은 포장이지만 비누를 쌌던 포장지는 향내가 배어 잇고 굴비를 쌌던 포장지는 비린내가 배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들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모습에서 풍겨 나는 냄새는 맡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냄새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겨나야함은 두말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향기로서 우리는 기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금 대접에 담긴 향기라고 했습니다(계 5:8, 8:3).

독일의 화가 '앨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
이 그림의 배경을 아시나요?

“하나님, 내 친구로 하여금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제가 이렇게 일을 해가면서 친구의 학비를 담당하였는데 이제 제 손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사오니 내 친구에게 하나님 은총을 내려 주셔서 제 소원까지도 이룰 수 있도록 유명한 화가로 만들어 주소서”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입니다(히 11:5).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우리들은 순종의 냄새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제사보다 나은 것은 순종입니다(삼상 15:22).
그리고 헌신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우리는 또 감사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향기도 발해야 합니다.

향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성도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εν κυριω, 엔 퀴리오)는 성도의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할 수 있는 향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에서 굉장한 향기가 발산되었습니다. 나그네는 진흙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아니오”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아니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그저 한 덩이 진흙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 “나는 백합화와 함께 오래 살았습니다.”

하찮은 진흙 한 줌도 백합화와 오랫동안 함께 했을 때 사람의 이목을 끄는 굉장한 물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1년? 10년? 아니면 30년?
그런 세월을 예수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예수 냄새와 성령 냄새가 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입으로는 예수와 함께 했지만 실제로는 물질과, 세상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흔드는 골치 아픈 악취를 발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매장에 손님이 다시 가고 싶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교회가 되면 사람들은 그 교회에 서로 오고 싶어할 것입니다.
교회가 싸움 냄새를 풍기면 구경꾼밖에 더 몰려들겠습니까?
교회가 원망과 불평의 독기를 발산한다면 교인들은 저절로 멀리 멀리 피하여 달아나게 하는 훼방꾼밖에 더 되겠습니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감사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찬양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 했는데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불평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아름다운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아 2:2).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내게서 소중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깨뜨릴 수 있을 때 향유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듯 하나님의 교회가 나의 희생과 헌신과 봉사와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전도를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프란시스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복음을 선포할 줄 알았는데 프란시스는 밭에서 땀 흘리면서 김을 매는 사람에게 가서 함께 김을 매어 주고, 힘겹게 짐을 진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주고,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으시오”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해서 묻자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 인격과 삶에서 예수의 향기가 충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는 것이고 그 향기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구약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사를 받으실 때에 번제를 받으셨다.
성서에 언급된 첫 번째 번제(燔祭)는 노아의 홍수 이후이다.

“노아는 야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한 들짐승과 정한 새 가운데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 바쳤다. 야훼께서 그 향긋한 냄새를 받으시고 속으로 다짐하셨다.” (창세 8:20-21)

하느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에 관한 규례를 주시면서 분향단에서 향(Franklincense, 또는 incense)을 피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향긋한 냄새를 통하여 당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출애굽 30:8, 40:27, 레위기 2;1, 2;15)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엔 향기로운 향을 피웠다.
그 뿐만 아니라 요한 묵시록에 보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예배 중에서도 향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나처럼 향긋한 냄새를 좋아 하셨나 보다.

속죄의 제사

분향단, 또는 향에 대하여 개신교 목사들이 쓴 책에는 향의 기능을 단순히 성도들의 기도라고 해석을 하였는데 이를 향의 성능과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쓴 것이다.
물론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는 면이 있다.
그 외에 향은 몇 가지 기능이 더 있다.

향은 우선 아름다운 냄새를 준다.
아름다운 냄새를 통하여 좋지 않은 냄새를 멀리하고 아름다움으로 채운다.
그래서 유향은 정화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어졌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리면 분향으로서 그것을 정화하려 했으며(민수기), 분향은 살육과 희생의 장소를 깨끗하게 해 준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분향제는 하느님 앞에서 속죄를 드리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제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때에 속죄와 정화의 의미로 유향의 사용에 대하여 나온다.
대제사장은 향기가 자욱한 가운데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일곱 번 뿌리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다(레위 16:11-19).

“야훼 앞 제단에서 숯불을 향로에 담고 향기 좋은 향가루를 두 손으로 가득 떠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 향을 야훼 앞에서 숯불에 피우고 향기로 증거궤 위에 있는 속죄판을 가리워야 한다. 그래야 죽지 아니할 것이다.” (레위16:12-13)

“아론은 분향단 뿔에다가 해마다 한 번씩 속죄예식을 행해야 한다.
해마다 한 번씩 속죄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발라 분향단을 정하게 하여라.
너희는 대대로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야훼께 바치는 것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다.”(출애30:10)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향단의 뿔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으며, 7월 10일 대속죄일 하루만은 향로가 옮겨져 지성소에 들어갔다(히브리 9:4).
그러므로 향을 피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속죄의 예식으로서 장례예식

전통적인 교회(동방정교회, 천주교, 성공회)에서는 장례예식에서 죽은 이에게까지 분향을 한다.
비록 유한한 육신은 죽었지만 하느님의 성전이었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희망과 부활을 믿으면서 하느님께 이 죽은 사람을 맡기는 행위, 당신의 거룩함으로 받아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를 구하는 기도의 청원인 것이다.

외경 집회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를 뽑아 주님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셨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향기롭고 감미로운 분향으로 기념 제사를 드리게 하셨다.“(집회서45:16)

야곱(창세 50:2-3)과 요셉(창세 50:26)의 시체는 향료를 사용하여 미이라로 만들었을 것이고, 아사왕의 장사에는 향료와 향유가 그의 관에 뿌려졌으며(역대하 16:14), 왕가의 화장(火葬)에도 향료가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니고데모(Nicodemus)는 몰약과 침향 섞은 기름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무덤으로 가져갔다.(요한 19:39-40)

그러므로 우리들은 장례예식에서 죽은 이에게 분향을 하는 것, 또는 향료를 사용한 것은 속죄를 위한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화의 상징으로

집 안에서도 안 좋은 냄새가 날 땐 좋은 냄새로서 냄새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보통 향이 있는 초를 피워서 냄새를 제거한다.
한 번은 교우 중에 한 분이 집에서 사골 국을 끓이다가 그것을 잊고 태웠다.
사골 타는 냄새가 온 집안에 베게 되었다.
냄새를 어떻게 없애면 좋겠느냐고 나의 집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교우에게 교회에서 쓰는 유향을 드렸고 유향으로 냄새를 제거하라고 말씀드렸다.
아름다운 향은 냄새로서 안 좋은 냄새를 제거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냄새로서 그곳을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킨다.
아름다운 향은 그 속성으로 그 장소를 깨끗하고 정한 곳으로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향을 피우면 벌레들이 도망을 가고 모이지 않는다.
벌레들이 향의 냄새를 통해서 죽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정화의 기능이며 깨끗케 하는 의도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특히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향을 통하여 공간을 정화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향기 있는 냄새를 피워서 하느님을 예배드리는 것, 그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속성이며, 인간은 향기 있는 냄새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인 기운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악취가 나는 곳에서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우리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자주 악취를 경험하고 그 악취의 영향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질맨(D. Zillman) 교수는 담배냄새를 가지고 사람들의 생리반응을 실험하였다.

담배냄새가 가득한 방과 냄새가 나지 않는 방을 준비해 놓고 각각 사람들의 반응을 조사하였다.
이 실험에서 실험자는 실험 참가자에게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의 생리반응을 조사한다고 말하고, 참가자의 팔에 여러 가지 기계를 연결하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이 실험의 본래 참가자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터라 참가자가 팔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실험자는 이런 식으로 화를 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자꾸 움직이면 정확한 테이터를 뽑을 수가 없어요.
왜 지시사항에 따르지 않는 거죠?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실험결과, 참가자가 화를 내는 정도는 냄새가 나지 않는 방보다 담배연기로 가득찬 방에서 2.8배나 더 많이 나타났다.
담배연기는 화를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기시설이 좋지 않은 가게, 선술집 등에서는 손님들이 난폭하게 구는 경우가 많다.
공기기 나쁘기 때문이다.
냄새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바로 향은 아름다운 냄새를 통하여 그 공간을 새로운 정화의 장소로,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새로운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장소로 변화시킨다.
향긋한 향을 받으시는 하느님, 우리들의 어둡고 더러운 것을 태워서 아름답고 향긋한 향기로 변화시키기를 기도한다.

출애굽기 29:18
그 수양의 전부를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 만드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출애굽기 30:34-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어... 향을 만들되...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그런데 이 향품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만 만들고 인간들을 위해서는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향품의 냄새를 맡으려고 개인적으로 만드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출 30:38) 즉 죽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향품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만 전용으로 쓰는 향품이므로 인간이 그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이 전매특허를 낸 향품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냄새에 상당히 민감하고 조예가 깊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꿀을 그냥은 드리되 불에 살라서 화제로는 드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꿀을 불로 태우면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입니다.(레2:11-12) 신약 성경에서도 보면 예수님과 냄새 즉 향기의 관계를 불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예수님도 향기를 좋아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탄생할 때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쓰디쓴 몰약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삶을 상징하는 향기로운 유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라는 유명인사가 예수님의 시체 썩는 냄새를 방지하려고 많은 향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여인들도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하는 여인이고(누가복음 7장) 또 한 여인은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특히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여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탄생 때 동방박사가 가지고 온 유향의 냄새를 맡으셨고, 죽으실 때에는 베다니 마리아의 나드 향유의 냄새를 맡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과연 어떤 향기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자기 엄마와 아빠를 보고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으- 아빠 냄새! 오- 엄마 냄새!” 저도 옛날 어렸을 때 추억을 더듬으면 아빠는 밖에서 술 드시고, 담배 피우시고, 안주 드시고... 뭐 그런 것들이 어울어진 비리비리한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엄마는 날마다 화장을 하니까 늘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아빠가 들어와서 내 얼굴을 비비면 저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합니다. “으- 아빠 냄새!” 그러나 엄마가 가까이 와서 껴안으면 코를 벌렁거리고 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게 말합니다. “오- 엄마 냄새!“

그런데 예수님의 냄새는 참 특이한 냄새입니다. 두 종류의 정반대의 냄새가 납니다. 하나는 사망의 냄새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냄새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냄새를 가장 싫어합니다. 마귀는 예수님 냄새를 맡으면 기겁을 합니다. 그러니 마귀는 예수님이 나타났다 하면 그 냄새를 맡고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냄새는 향기로운 엄마 냄새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냄새를 맡으면 우리들은 기분이 좋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향기보다 예수님의 향기가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향기를 뿜고 나타나면 사망의 세력, 질병의 세력, 저주의 세력, 미움의 세력이 사라집니다.

저희 집에는 자주자주 향초를 피웁니다. 특히 김치 냉장고를 몇 번 열고나면 냄새가 집안에 진동합니다. 이때 얼마간 향초를 피우면 좋지 못한 냄새는 제거되고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금요일에 보면 우리 교회에 렌트하는 알코올 그룹이 가끔 식당에서 양초를 피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익숙해서 잘 모르지만 아마 그들에게는 마늘 냄새, 김치 냄새가 아주 역겨울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서양 사람들을 가까이 대하면 그들에게서 노린내가 납니다. 꼬리꼬리한 치즈 냄새입니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냄새가 나고,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냄새가 납니다.

오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냄새가 납니까? 만약 마귀가 여러분의 냄새를 맡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어- 이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 냄새, 담배 냄새, 마약 냄새, 불신 냄새, 불순종 냄새, 음란 냄새, 교만 냄새가 아닌가?” 하고 마치 똥파리가 똥냄새를 맡고 모이듯이 여러분에게 덤벼듭니까?

아니면 “어- 이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예수님 냄새네! 에이- 저 냄새 오래 맡다간 죽겠다. 도망가자.” 하고 일곱 길로 도망갑니까? 여러분! 우리는 마귀를 예수님의 향기로 쫓아내야 합니다. 마치 스컹크가 고약한 냄새로 적을 물리치듯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건 뭐 아주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납니다. 향수에다가 똥물을 섞으면 무슨 냄새가 날까요? 시간이 있고 궁금하신 분은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요즘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요상 야릇한 냄새를 풍깁니다. 말로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데 행동으로는 악취 나는 마귀의 냄새를 풍깁니다.

여러분! 주일날 우리 교회 처음 들어오면 무슨 냄새가 납니까? 일단 식사 당번이 국을 끓이는 냄새가 날겁니다. 그리고 주일날 같이 식사하고 교회에서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집에 가서 속옷을 벗고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속옷까지 음식 냄새가 날것입니다. 머리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냄새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의 코로 맡는 냄새도 있지만 우리의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영의 냄새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갔다 오면 마귀는 그 냄새를 알아차리고 싫어합니다. “으- 교회 냄새! 으- 찬송 냄새! 으- 기도 냄새! 으- 감사 냄새! 으- 예수 냄새!” 하며 그 집에서 더 있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즉 사도 바울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각처에서 예수님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아- 향기 좋다!” 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는 생명을 얻는 것이요, “어- 이게 무슨 악취냐!” 하고 예수님을 거절하면 그들은 사망과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냄새를 맡고 좋다고 느끼는 분들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냄새는 우리를 생명과 축복으로 이끌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어떤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세상 악취가 납니까? 아니면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까? 만약 악취가 나거나 요상 야릇한 냄새가 나면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회개의 기도로 씻어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향수를 날마다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향기

첫째는 복음의 향기
둘째는 생명의 향기


온갖 냄새 중에 좋은 냄새를 향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향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져 왔지요. 사람들이 선호하는 향이라면 아마도 꽃에서 나는 냄새 즉 ‘꽃향기’일 것입니다. 향기가 나는 꽃 곁에는 항상 벌과 나비 등 곤충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꽃은 향수의 주원료가 됩니다.

사람에게도 풍기는 각자의 냄새가 있지만, 인품이 훌륭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좋은 향기가 있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면 더 가까이하고 싶고 자주 만나고 싶어지게 됩니다. ​

본문 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하여 '냄새'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냄새를 내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란 어떤 것인지 함께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복음의 향기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는 즉 복음의 향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교회들에 대한 걱정, 동역자의 안부에 대한 염려 등, 골치 아픈 일들로 많은 고심꺼리가 있었겠지만,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기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을 당시 로마 군대의 개선식에 참여한 군인에 견주어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의 기쁜 일들이 있지만, 전쟁을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이나 용사의 기쁨에 견줄만한 것이 또 있을까요?

개선장군과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해서 나라를 지켰고 국민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 한 자긍심과 함께, 전리품과 포로들을 앞세우고 로마로 개선합니다. 그 개선 군을 환영하는 로마시민들은 온 거리에 향을 피웠습니다. 승리의 기쁨을 그 향냄새와 함께 온 도시 구석구석에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과 함께 퍼지는 향기와 같이, 성도들이 어디를 가나 풍기는 냄새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해 주는 향기입니다. 즉 성도는 어디를 가든지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즉 복음의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향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은 항상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의 현장은 전쟁터였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심으로 복음은 전해졌으며 영혼 구원의 열매가 열렸던 것입니다. 성도가 풍기는 냄새 역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여야 하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이 향기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요, 전도자의 사명이며 보람이고 또한 복음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바로 그런 기쁨이 늘 가득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의 눈에는 고생을 사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매사에 이기는 재미가 있음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이기는 재미에 산다는 것을 모든 성도는 각자가 먼저 체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향기를 풍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 향수를 먼저 발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향기의 근원이 될 만한 것이 자기 몸에 먼저 배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개선장군이신 그리스도와 늘 동행한다면,

-예수 안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보람을 가지고,

-겉으로는 그저 고생만 하는 것 같고, 좁은 길로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승리의 길을 가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젖어 그리스도의 향기, 복음의 향기를 많이 풍기는 성도가 되어 있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합니다.

향기란 것은, 원래 한 가지 냄새만 풍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같은 향기일지라도 그 맡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느껴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선식에서 피운 향 역시 그것을 맡는 개선군과 로마시민들의 코에는, 하나같이 승리에 도취된 기쁨의 향기이겠지만, 패잔병인 포로들에게는, 치욕과 고통을 더해주는 역겨운 죽음의 냄새일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라 함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향기를 전하는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막3:14). 그리고 복음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마28;19,20).

그리스도께서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성도의 언행을 통해 전달되는 복음의 향기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영생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그 향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지옥의 심판을 불러오는 죽음의 냄새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요3:36절로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증거하시기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누가 맡아도 다 향기로운 향기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기를 그저 아무에게나 무조건 좋은 냄새만 나도록 만들려고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천국을 언급하면서도 지옥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 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목사 들입니다.

-신명기 28장은 68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고 3절에서 14절까지 11개절로 말씀하시 지만, 만일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 이 15절로 68절까지 임으로 54개의 절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복 주신다는 11개절만 설교의 주 메뉴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類)의 설교는 불신자들이 들어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는 말, 망하는 자들이 들어도 조금도 ‘사망의 냄새’가 나지 않는 말,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 어느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냄새만 풍겨 주는 그런 말들이 정말 향기로운 복음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로써 사실상 교인들의 영성을 말리는 것임을 우리는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 맡는 사람에 따라서, 천국 영생의 향기와 지옥 영벌의 냄새로 다르게 느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복음의 향기가 가진 본질이요 특성인 것입니다.

비유로 한 가지 들자면,

청국장의 냄새를 맡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냄새가 그리운 고향의 아련한 향기요, 어머니의 냄새 같은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이지만,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이나 이방인들에게는,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악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국장이 가진 특성인 것입니다.

이런 청국장을 모든 사람이 먹기 좋게 만든다고 그 고유의 냄새를 없애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청국장 고유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든 사람이 조금 맛을 보게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청국장의 원 맛을 알고 애용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청국장이 아니므로 변질된 맛에 실망한 나머지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고 욕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조금도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천국 영생을 느끼게 해 줄 이 지극히 좋은 향기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먼저 체험한 그리스도를 간증하고 늘 부지런히 자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를 풍기는 성도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생명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그 향기를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복음의 향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냄새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냄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증거하는 복음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곧 심판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는 생명과 사망,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누가 이런 사명을 수행할만한 자격이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진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천국 구원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지옥 영벌을 경고하는 이 진짜 복음 전파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17절에 그 적격자와 부적격자를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 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명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자격 미달자들이 사도 바울 시대에 “수다하게”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진리 그 자체에는 아무 관심 없고 다만 젯밥에만 마음이 있는 자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요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거짓 교사들은, 마치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이 포도주에 물을 섞어 팔듯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물들을 첨가시킨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을 성경 말씀에 섞어 넣음으로써 복음의 진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전파한다고 바울 사도는 밝힙니다.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욕심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순전한 복음의 향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7절 말미에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 확신에 찬 표현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영적으로 연합한 상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품 향수는 가격이 비싸지만 다른 보다 저렴한 향수에 비해서 향기가 훨씬 더 좋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뿌려도 좋은 향기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입니다. 만일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가 양을 늘리기 위해 다른 액체를 넣어 희석시켜 만든 짝퉁향수라면 그 향기와 효능은 확실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순수한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받아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목적인 것이지 이 땅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불신자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방법이 바로 성도가 자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이 최고급 향수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뿌려 놓고 그래서 자연히 각처에서‘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다른 교인들에게서 나는 냄새와는 다르구나!!!’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향기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향기입니다.

성도도 이 향기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향기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해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죽은 영혼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치며, 낙심한 영혼이 소망을 얻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어서, 싸구려로 파는 삯군들이 설치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조해 놓으신 이 고귀한 복음을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100퍼센트 순수하게 지키면서, 자신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만을 풍기는 여러분 모두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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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2022(수)

성령의 보증(고린도후서 1:22)

보증(아르라본) ἀῤῥαβών
ἀῤῥαβών, ῶνος, ὁ  728

1. 첫 분납금,  2. 보증금,  3. 공탁금

발음 / 아르라본(arrhabōn)
어원 / 히브리어 66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증(고후 1:22, 5:5,  엡1:14).
신약 성경 / 3회 사용

명사 - 첫 분납금, 보증금, 공탁금(물건에 대한 권리나 계약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리 가격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으로도 사용됨) , 고후 1:22, 5:5, 엡 1:14.

* 662. ἀποτολμάω 

1. 담대히 ~하다,  2. 감히 ~하다,  3. 로마서 10:20

발음 / 아포톨마오(apŏtōlmaō)
어원 / 575와 51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롬 10:20)
신약 성경 / 1회 사용

* 575. ἀπό 

1. ~으로부터,  2. ἀπάγεσθαι,  3. 마태복음 27:24

발음 / 아포(apŏ)
관련 성경 / ~부터(마 1:17).
신약 성경 / 646회 사용

* 5111. τολμάω

1. 감히 ~하다,  2. 할 마음이 들다,  3. 용기가 있다

발음 / 톨마오(tŏlma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τόλμησα, τόλμα ‘담함’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고후 11:21), 감히~하다(마 22:46, 막 12:34, 유 1:9), 당돌히~하다(막 15:43), 용감히~하다(롬 5:7),
담대히~하다(고후 10:2, 빌 1:14).
신약 성경 / 16회 사용

위로. παράκλησις, εως, ἡ 3874

위로. παράκλησις, εως, ἡ 3874

1. 격려,  2. 간청,  3. 위로

발음 / 파라크래시스(paraklē- sis)
어원 /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로(눅 2:25, 행 9:31, 롬 15:4, 5, 고후 1:3, 행 4:36), 권면(빌 2:1, 살전 2:3, 히 13:22).
[동] 권하다(행 13:15, 딤전 4:13, 히 12:5), 위로하다(행 15:31, 고후 1:4, 롬 12:8), 권면하다(고전 14:3).
신약 성경 / 29회 사용

의뢰하다. πειθώ  3982  

의뢰하다. πειθώ  3982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페이도(pĕithō)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20:6), 따르다(행 5:36, 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거룩함. ἁπλότης, ητος, ἡ  572   

1. 단순함,  2. 관용,

발음 / 하프로테스(haplŏtēs)
어원 / 5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실함(롬 12:8, 엡 6:5, 골 3:22), 거룩함(고후 1:12), 풍성한 연보(고후 8:2), 너그러운 연보(고후 9:11), 후한 연보(고후 9:13), 진실함(고후 11:3).
신약 성경 / 8회 사용

명사 단순함, 순진, 소박, 성실, 정직, 솔직, 고후 1:12, 11:3, 엡 6:5, 골 3:22.
          관용, 관대, 롬 12:8, 고후 8:2, 9:11,13, 11:13


진실함. εἰλικρίνεια, ας, ἡ  1505  

1. 순수,  2. 순전,  3. 고전 5:8

발음 / 에이리크리네이아(ĕilikrinĕia)
어원 / 15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전함(고전 5:8, 고후 2:17), 진실함(고후 1:12).
신약 성경 / 3회 사용

은혜. χάρις, ιτος, ἡ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 (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의 보증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보증금(保證金) Deposit

중요한 상거래를 할 때에 상대방이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보증금을 걸거나 보증인을 세웁니다.

예를 들면 집을 구할 때 그냥 “이 집 사겠습니다” 하고 말로만 한다고 계약이 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증금을 걸고 말을 해야 계약이 유효해지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보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모두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아 변화가 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게 되면 성령께서 그에 따른 보증을 해주십니다.
우리 모든 삶을 붙들어주시고 책임지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보증을 어디에다가 주실까요?
마음 안에 주십니다(고후 1:22).
성령의 보증의 역사가 우리의 내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아무리 돈이 많거나 환경이 풍요해도 마음이 슬프면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있고 환경이 어려워도 내 마음이 기쁘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게 되는 것은 미움이나 분노 그리고 나쁜 생각 악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보증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 마음에 .매였던 결박들이 다 끊어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강을 보증해 주십니다.

둘째는 선불(先佛) prepayment

선불이란 “미리 지불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인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미리 맛보게 해주십니다.
선불은 이미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나머지 돈은 나중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성도의 교제와 다양한 섬김을 통하여 하늘의 기쁨과 축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풍성한 기업과 유산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주님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성도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과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보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보증이 우리 마음에 있게 되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부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보증하기 시작하셨고 이 보증하심은 매일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마다, 성령의 보증하심은 우리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내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성령의 보증하심은 나에게 매일 새로운 용기를 부어줍니다.
내가 믿음이 식어지고 떨어지려고 할 때 성령께서는 새로운 믿음을 보증해 주십니다.
내가 사랑이 없어 답답해할 때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주셔서 나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보증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어떤 힘든 상황에도 낙심 절망하지 말고 성령의 보증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갖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의 보증 세 가지

첫째, 보증금(保證金)(고린도후서 1:21-22)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1 ὁ δὲ (And the one) βεβαιῶν (confirming) ἡμᾶς (you) σὺν (with) ὑμῖν (us) εἰς (in) Χριστὸν (Christ) καὶ (and) χρίσας (having) ἡμᾶς (us) Θεός ([is] God.)

22 ὁ (And the one) καὶ σφραγισάμενος (sealing) ἡμᾶς (us) καὶ (also) δοὺς (giving) τὸν (the) ἀρραβῶνα (pledge-money) τοῦ (of the) Πνεύματος (Spirit) ἐν (in) ταῖς (the) καρδίαις (hearts) ἡμῶν (of us.)

헬라어 원문은 네 가지 분사가 사용되고 있다.
‘굳건하게 하시고’ - 베바이온(βεβαιῶν) 
‘기름을 부으시고’ -  크리사스(χρίσας)
‘인치시고’ -  스프라기사메노스(σφραγισάμενος)
‘주시고’ -  두스(δοὺς)

분사들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이 굳건하게 하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기름을 부어 인치신다.

도장을 찍는 목적이 무엇인가?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옛날에는 말이나 소 같은 가축에 도장을 찍어 자기의 소유를 나타내었다.
물론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에게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거기다가 성령을 보증금 ἀρραβῶνα(pledge-money)[알라보나] τοῦ(of the) Πνεύματος(Spirit)으로 주셨다.

보증금(알라보나, ἀρραβῶνα. pledge-money)은 페니키아의 상업용어로서 이것이 βεβαιῶν(confirming)와 함께 쓰여 구속력이 있는 법적 용어로 사용된다.
보증이라는 법적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만 아니라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14. ὅ (which) ἐστιν (is) ἀρραβὼν (an earnest) τῆς (of the) κληρονομίας (inheritance) ἡμῶν (of us) εἰς (in) ἀπολύτρωσιν (the redemption) τῆς (of the) περιποιήσεως (possessing) εἰς (into) ἔπαινον (the praise) τῆς (of the) δόξης (glory) αὐτοῦ (of him.)

보증(금)은 미래에 온전히 받을 것에 대한 일부를 현재에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앞으로 온전히 받게 될 구원과 기업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하신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험악한 세상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둘째,  양자(養子)(로마서 8:15) adopted son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5. οὐ γὰρ (For not) ἐλάβετε (you received) πνεῦμα (a spirit) δουλείας (of slavery) πάλιν (again) εἰς (to) φόβον (fear,) ἀλλὰ (but) ἐλάβετε (your received) πνεῦμα (a spirit) υἱοθεσίας (of sonship) ἐν (in) ᾧ (which) κράζομεν (we cry out) Ἀββᾶ (Abba) ὁ Πατήρ (Father.).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자녀, 요한은 양자라는 단어보다 어린 자녀, 테크니온(τεκνίον)이란 단어를 사용)가 된 것이다.
양자라는 단어는 5번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특권이었다(출 4:22).
그런데 성령은 양자 됨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영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좋아하셨고, 예수님에게 부여된 어떤 호칭보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조차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자’ μονογενής[모노게네스] (우리 성경에는 독생자로 번역)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
당시 법으로 양자는 친자와 차별 없이 자식의 권리가 주어졌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뜻이 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εἰ δὲ (And if) τέκνα (sons) καὶ (and) κληρονόμοι (heirs,) κληρονόμοι (heirs) μὲν Θεοῦ (of God,) συνκληρονόμοι δὲ (and joint heirs) Χριστοῦ (with Christ) εἴπερ (if indeed) συμπάσχομεν (we suffer together) ἵνα (then) καὶ (also) συνδοξασθῶμεν (we be glorified together.)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συνκληρονόμοι(joint heirs) Χριστοῦ(with Christ)’가 된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나?
그것은 바울 신학의 특징인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와의 일체 一體 의미하는것)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계 21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상속자가 된 것이 더 영광스럽다.

셋째,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0) first fruit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Νυνὶ δὲ (But now) Χριστὸς (Christ) ἐγήγερται (has arisen) ἐκ (out) νεκρῶν (of the dead.) ἀπαρχὴ (The first fruits) τῶν (of those) κεκοιμημένων (having fallen asleep.)

‘첫 열매’ 아파르케(ἀπαρχὴ) 출 23장이나 신 26장을 근거를 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앞으로 추수할 소출을 대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대표하는, 보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우리에게 같은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이것을 성령께서 보증하신다.

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은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롬 1:4).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일으키신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보증,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됨, 그리고 부활을 보증하신다.

성령의 보증을 받은 성도의 삶

타인의 보증을 잘못 서 주어 엄청난 재산상 피해와 정신적 패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부자간, 친척 간, 동료가 어쩔 수 없는 인정이나 관계 때문에 보증을 섰다가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인간이 인간의 보증을 선다는 인간 세계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침을 받은 택한 백성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고린도후서 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 후서 5: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가 성도를 보증해 주시는가?
성도들은 과연 어떤 보증을 받는 것인가?
누가 보증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의 보증을 받은 자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보증자 되신 성령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첫째, 성령의 인침과 보증의 의미

성령의 인침은 성령님 즉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자라는 표식이다.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는 자라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가 함께 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뒤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성령의 보증이란 이러한 인침을 받은 자에 대한 구속의 날 까지 성령께서 책임을 져 주신다는 의미이다.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보증의 근거가 되고, 뒤집어 말하면 성령의 보증이 성령의 인침의 결과라는 말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과거 내지 현재적 사실이라면 성령의 보증은 하나님 앞에서의 미래적 사실에 대한 보장이다.

우리가 예전에 양복점에 가서 옷감을 고르고 몸의 치수를 재고 선금을 얼마만큼 지불한다.
그러면 영수증에는 중간에 마름질한 옷을 대충 꿰매서 입어 보는 날짜를 적고 선금과 잔금의 액수가 기록되며, 그 날 선택한 양복이 바로 이런 계통이라는 뜻으로 양복지 일부를 잘라 붙인다.
바로 이 양복지 중 일부를 잘라 붙인 영수증이 최종적으로 입고 다니게 될 양복에 대한 보증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현재적 인치심은 바로 미래에 이루어질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성령님의 보증이 되신다는 말이다.
성령의 보증을 이미 받은 성도들이기에 구원과 축복과 상급과 부활이 확실한 것이다.

둘째, 누가 성도를 보증하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에게 인을 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미래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확실하고도 든든한 보증이다.

우리가 토지를 매입할 경우에 거래가 성사되면 그 땅을 앞으로 완전하게 소유하게 된다는 보증으로 그 땅에서 가장 좋은 흙을 떠 주었다던 옛 선진들의 거래가 의미가 있다. 또한 어떤 작농 중에 있는 밭을 살 경우에도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 밭에 있는 제일 좋은 곡식이나 열매의 일부를 보증으로 주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또한 미래에 우리가 누리고 받을 영광과 축복에 대한 보증과 증거가 되신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성령안에 있다는 것만큼 보장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보증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영원불변 하신 분이시다. 영원토록 그 신실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셔서 대대로 통치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시다.

셋째, 성도들은 어떤 보증을 받는가?

 1. 영원한 구원의 보증(히브리서 5:9)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성령님을 통한 인침을 받고 새생명을 얻은 성도는
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얻는다(살후 1:8~9).
② 눈물과 고통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1:3~4)
③ 영원한 지옥불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0:6).
④ 악한 마귀에서부터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계 20:10).

2.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보증(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지만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후사가 될 것을 보증하신다.

3. 썩지 않을 부활의 보증(고린도전서 15:42~44)

성령은 주를 믿는 사람은 주님처럼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보증해 주신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 영원한 안식처를 보증(고린도후서 5: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 하나님이 지으신 집에 거하는 보증을 얻는다.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우리를 흙집이라고 한다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은 대리석 집이 될 만큼 엄청난 차이를 갖는다.
이 놀랍고도 영원한 천국 집에 거하는 보증으로 하나님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

요한계시록 21:1~7에 보면 성도는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천국을 얻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신 집이요 영원히 새로운 집이요 영광의 집이다. 또 주님과 함께 사는 집이며 거기 에서는 오직 기쁨과 감사만이 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집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절대 사망이 없고 밤이 없으며 애통이 없는 집이다. 예루살렘 성과 같이 빛나고 수정같이 맑으며 금으로 된 성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장식되고 성의 기초석은 열두 보석으로 되어 있다.

좌우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의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두가지 실과를 맺는다. 생명과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성이다. 눈물, 애통, 죽음이 없고 죄와 악과 고통, 그리고 어둠이 없다. 태양 빛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영원한 낮의 세계로 성도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님이 보증해 주신다.

5. 영광스런 상급을 보증

천국에 가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
그것은 주를 위해 이 땅위에서 수고한 자에게 보상되는 면류관과 영광이다.
① 의의 면류관이 있다(딤후 4:7~8).
② 영광의 면류관이 있다(벧전 5:4)
③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계 2:10)
④ 영광의 상급이 있다(고전 15:40~41)

넷째, 누가 하나님의 보증을 받을 수 있나?

1.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인침을 받은 자가 보증을 받는다(엡 1:13)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을 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말씀을 전하는 일과 그 말씀을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에는 중생케 하는 힘이 있다. 말씀이 성령님과 함께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살리는 도구이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다.

2. 복음을 믿는 자가 바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인침을 받은 자가 바로 보증을 받는다(엡 1:1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을 믿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말씀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을 믿으면 말씀은 살아서 역사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거듭날 것이다. 거듭나는 역사는 바로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지기 때문이다(요 3: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바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요 또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인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즉,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는 그 증거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로 부르게 된다. 로마서 8장 15~16 절에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라고 밝히고 있다.

다섯째, 보증을 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령님은 어떤 사람도 또한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자신을 받기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는 불신자들에게 구원을 받도록 강요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또한 신자들에게도 굳이 성화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성도가 죄를 범할 때 성령님은 크게 슬퍼하신다.
성도가 죄를 지을 때 그는 역사하지 않으시며 괴로워하신다.
성도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잘못 대하거나 상처를 주고 그 앞에서 교만하며 세상과 타협할 때, 그의 감동하심을 거부할 때 그는 깊은 근심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자신들의 생각대로 스스로의 고집대로 제 감정대로 나아갈 때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신다. 우리가 성령님을 거절할 때도 그는 우리를 너무나 돕고 싶어하신다.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에베소서 4:30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적, 도덕적 수준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전에 설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시는 은혜의 보혜사 이시다.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할 성령님의 목표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높이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시고 견인하시는 역사는 일시적으로 중지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① 성령님은 영광의 영이시다(벧전 1:14)
그러므로 우리가 높아지려고 교만하고 우리가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성령님은 근심하게 되신다.

②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연약해지고 영적인 성장이 중지되고 옛성품에 따라 살 때 성령님은 슬퍼하신다.

③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그러므로 어떤 거짓, 사기, 비판은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④ 성령은 믿음의 영이시다(고후 4:13)
그러므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⑤ 성령님은 은혜의 영이시다(히 10:29)
그러므로 냉랭하고, 비참하고, 인색하고, 용서치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⑥ 성령님은 성결의 영이시다(롬 1:4)
그러므로 불결하고, 음란하고, 비열한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만드는 것이다. 죄로부터 분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로의 회귀를 원하신다.

⑦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시다(사 11:2, 출 28:3)
그러므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은 자들과 동행하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새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인치심을 받고 영광과 구속과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옛 구습을 쫓고 육신의 소욕대로 산다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근심케 하고 괴롭혀 드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긴 여정 속에서 그처럼 수없이 범죄 했지만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고 그의 성막을 옮기지도 않으셨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므로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교제하지 않으시고 교통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을 슬프게 해드리면 우리는 기쁨이 사라지고 삶에 생기가 없어지며 슬픔과 어두움과 무기력과 무의미가 우리를 압도하게 된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 자유를 죄를 짓는데 사용한다면 성령님은 매우 마음 아파하시고 그 분이 주신 자유의 의미를 가치 없이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성령 안에서 주신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옛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양심과 사탄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가 오히려 죄, 죽음, 옛 속박, 사탄을 위한 자유가 된다면 이 얼마나 주님의 구속 사역에 배치되는 일이 될 것인가? 어떤 자라도 계속적으로 범죄하며 산다면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결과를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몸의 죽은 행실을 죽이게 된다면 영적인 생명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여섯째, 보증자 되신 성령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1. 우리가 범죄로 성령님을 근심케 해 드릴 때, 지체 말고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고요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토설하면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와 긍휼과 인애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고 회복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성령님을 다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는 길이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죄를 자백하라, 회개하라는 설교를 제일 싫어한다. 목회자들도 그런 설교에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을 의식한 나머지 거짓 축복과 평안만을 빌기를 좋아한다. 그리되면 주님은 매우 슬퍼하시고 마귀는 너무나 좋아할 것이다. 실지로 우리 한국 교회 내부적인 상황이 그런 사실들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많이 빌어 온 우리들의 평안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쌓을 곳이 없도록 내려진 축복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때이다. 그것도 너무나 시급히 행해져야 할 과제들이다. 좌우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회복의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성령님과의 원활한 교제를 이루고 성령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백하는 길밖에 없다. 자백을 힘들어하는 것은 그만큼 죄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자백을 싫어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교만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치 않는 다면 그는 그만큼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 다 무신론자가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서는 자기 자신만을 신앙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결국 영적 싸움이기에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더욱 힘들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라. 우리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려 할 때 결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2.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철저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혹여시 연약해서 범죄할 경우는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근심하시고 계신다. 이 때, 범죄한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대충 회개하거나 적당히 회개하거나 미루어서는 안된다. 죄는 하나님과 단절, 자신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물질과의 단절을 가져 온다. 죄는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을 막아버린다. 아름답게 자라던 꽃나무에 비치는 햋볕은 차단하면 서서히 말라 죽는다. 죄는 하나님과의 은혜의 빛을 차단한다. 영혼의 시들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생명의 빛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보증을 받은 성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철저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자백하면 그 순간 성령님은 더 이상 근심하지 않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사하여 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회복되어 지고 새로운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된다.

4.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들이고 성령님과 교제가 회복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최선의 방책은 계속해서 성령님의 충만과 지배를 받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성령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구체적 의미가 무엇일까? 디모데전서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영적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쉽게 표현하자면 영적인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영적 양식을 계속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골로새서 3장에서는 말씀이 지배하는 삶을 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정기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올바른 비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뭇상하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 고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성도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매일 매 순간 마다 우리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 속에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활발해지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힘과 기쁨이 넘치며 소망을 가지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는 안정과 확신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참다운 내적 안식과 위로와 평화와 감격이 넘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가 죄를 범하게 될 때 사랑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근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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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저자 :
고린도후서 1장 1절은 고린도후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그리고 아마 디모데와 함께 그 서신을 쓴 것으로 알려줍니다.

저작 연대 :
고린도후서는 주후 55-57년경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록 목적 :
고린도 교회는 주후 52년에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을 하면서 거기에 방문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그곳에서 1년 반을 머물렀는데 그가 원하던 곳에서 그렇게 오래 머문 것은 처음입니다.
이 방문과 교회 설립에 관한 기록은 사도행전 18장 1-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엄중한’ 편지(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를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안도와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 편지는 교회를 분리시키는 문제들, 또한 바울의 성품을 비난하고 신자들 사이에 불화를 심고, 거짓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찬하는 (거짓) 사도들의 출현(고후 11:13)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진실성(고후 1:15-17)과 언변(고후 10:10, 11:6), 그리고 그가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고후 11:7-9; 12:13)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듯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방탕한 삶을 회개하지 않은 몇몇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고후 12:20-2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엄중한’ 편지를 잘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긍정적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의 대다수가 바울을 대적한 일에 대하여 회개한 것을 디도를 통해 알고는 매우 기뻐하였습니다(고후 2:12-13; 7:5-9). 이에 바울 사도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고후 7:3-16). 바울은 또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그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였습니다(고후 13:3).

핵심 구절 :

고린도후서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요약 :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 왜 그가 원래 계획대로 그들을 방문하지 못하였는지를 설명한 다음(고후 1:3-2:2) 바울은 그의 사역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와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은 교회에 대한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습니다(고후 2:14-17).
그는 그리스도 의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율법의 “정죄의 직분”(고후 3:9)과 비교하면서 강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타당성을 선언합니다(고후 4:8-18).
5장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 곧 신자의 새로운 본성(고후 5:17)과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죄의 교환을 요약합니다(고후 5:21).

6장과 7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 및 사역을 옹호하고,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확신시켜 주면서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권고합니다.
8장과 9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마게도니아에 있는 형제들의 본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베풀라고 권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로운 연보의 원리와 보상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그의 권위를 다시 언급하면서 서신을 마칩니다(10장).
그는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거짓 사도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함을 보여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는 부득불 자신의 사도 자격과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을 자랑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11장).
그는 자신이 체험한 천국의 환상과 겸손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를 언급함으로 서신을 마칩니다(12장).
마지막 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진짜인지 확인하도록 권한 후 그들에게 사랑과 평강의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서신을 마칩니다.

연결 :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자주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및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위대함과 비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4-11 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과 은혜의 새 언약을 대조하면서 성령은 생명을 주는 반면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율법은 단지 죄와 그 심판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직분”(고후 3:7; 출 24:12)일 뿐입니다.
율법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성령의 사역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율법의 사역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적용 :

이 서신은 바울 서신서 중에서 가장 전기적이며 가장 교리가 적습니다.
이 서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사도인 바울이 사역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몇 가지를 끄집어 내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청지기 정신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들은 관대하게 연보했을뿐만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고후 8:5).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께 바쳐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청지기 정신 및 하나님께 바치는 연보는 단지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칠 때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100 %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아버지를 섬기며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월급을 받은 후 연보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분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친 후, 그 다음에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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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는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 서한은 고난 가운데서도 위안을, (바울 자신이 본보기가 되었듯이) 약한 것들 가운데서도 힘을, 거짓 교사들 사이에서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것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바울의 모범과 가르침은 여러분이 마주한 상황이나 결과에 관계없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영원한 성약에 참되고 충실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다.

누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는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서한을 썼다(고린도후서 1:1).

고린도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직후에 에베소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소동이 일어났으며(행 19:23-41), 그는 마게도냐로 떠났다(행 20:1, 고후 2:13, 7:5).
그가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에 고린도후서를 쓴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략 주후 55년에서 57년으로 추정된다.

고린도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고린도후서로 실리게 된 이 서한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하던 시기에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 디도는 바울이 앞서 보낸 서한을 고린도 성도들이 잘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후 7:6-13).
고린도의 교회 지부는 발전하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를 부패시키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한 이후에, 아마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고후 1:15-16) 성도들 중 일부를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후 2:1, 12:21).
예루살렘 지역 출신이었던 그 일부 설교자들은 고린도로 와서 그곳 성도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린도후서의 많은 부분이 이 거짓 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들을 다루는 내용이다.

바울의 서한은 그의 말씀을 더 듣고자 했던 사람들과(고후 1-9장),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던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록되었다(고후 10-13장).
대체로 고린도후서에는 이 서한의 몇 가지 목적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이전에 보낸 서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그들을 강화한다.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리를 부패시킨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신의 성품과 권세에 대해 변론한다(고후 10-13장)
고린도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후한 헌금을 하도록 권한다(고후 8-9장) \

고린도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바울의 서한 중 다수가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이 서한에서는 대체로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과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염려를 강조한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굳건하게 맞섰지만, 한편으로 그는 성도들의 행복과 안녕을 염려하는 애정 어린 신권 지도자였음이 고린도후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상세한 내용을 자전적으로 서술했으며, 자신이 지닌 “육체[의] 가시”에 대해 썼다(고후 12:7).

고린도후서 12:2-4에  나오는 성스러운 경험에 대해 기록하면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시현은 앞서 그가 부활체마다 영광의 차이가 있다고 했던 교리적 언급과 더불어 볼 수 있다(고전 15:35-44)

개요

고린도후서 1-5장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신다고 간증한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당부한다.
복음과 주님의 영이 하는 일은 모세 율법의 조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역경을 겪는 독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영원함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함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고린도후서 6-13장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비난과 반대에 맞서서 주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론하고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분리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대하여 가르친다(고후 7:10).
고린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한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후하게 헌금할 것을 권고한다.
“거짓 사도들”에게 강력히 반박한다(고후 11:13).
주님 안에서 자랑하며, 자신이 겪은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자전적으로 상세히 전한다.
셋째 하늘에 대한 시현을 기록하고,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살피고 자신의 충실함을 증명하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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