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행하여 기도하며 4번에 걸쳐 그들에게 편지하고 방문하여 권면하고 꾸짖으며 그들을 바로 세우려한다.
첫 번째편지 : 전해지지 않음
두 번째편지 : 고린도 전서
세 번째편지 : 전해지지 않음
네 번째편지 : 고린도후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린도
지역 지형에 위치한 최고의 상업 도시로서 로마 속령인 아가야(Achaia)의 수도이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교회의 소재를
고린도로 밝히는 서두의 글은 하나님이 지역 교회를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로마의 역사가 중 스트라보(Strabo)와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고린도 도시에 대한 유일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 내륙이 약 3.2km의 아크로 고린도 해안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수신인을 서두에 분명히 명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이 친히 세운 교회의 교인들이며
해상에서 동서가 피차 만나고 있는 까닭에 상업과 해운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육로로는 남북이 만나지는 특수 지역이므로 그리스 굴지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전에는 이곳이 로마에 대하여 항거하는 대표적 도시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는데 B.C.14년에
무미우스(L. Mummi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되기도 하였다.
상업이 번창한 까닭에 성도덕이나 윤리 수준이 형편 없는
곳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그가 개척하여 설립한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때(A.D. 50, 51)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행 18:11) 개척 설립한 교회
이 교회는 그 도시의 타락상 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윤리적, 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깊은 신앙적 통찰력으로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자애로운 언어로 교훈하고 권면했습니다.
* 사도행전 18: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
고린도 시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한 통치 구역인 아가야 도의 수부로서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행 18:12)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중심지었습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 도시는 헬라 본토(발칸 반도)와 그 남쪽에 큰 섬처럼(현재는 1893년에 완성된 고린도 운하로 완전한 섬이
됨) 매달려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지협에 위치한 도시로서 동쪽 12km 지점에는 에게해 연안의 겐그리아 항구(롬 16:1)와 서쪽 2km 지점에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레카이움 항구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남북으로 육로를
연결하고 동서로는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이 도시로 하여금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도시 국가로 번창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린도는 이들 고대 헬라의 도시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했었으나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B.C.146) 100년 후에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er)에 의하여 재건되었습니다.
20만
명의 자유인과 40만명의 노예로 구성된 이곳 주민은 대다수의 희랍인과 로마인들이 주축이었으며, 소수의 유대인들과(행 18:1-17) 지중해 연안의 각국에서 모여 든 상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헬라의 다른 도시들처렴 고린도도 다신교적 우상
숭배가 성행했고(행 17:16)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적 창녀들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음란과 방탕의 도시로서 헬라에 있어서의 '허영의 거리'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러한 타락상은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중에(A.D. 50, 51) 1년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설립한 교회입니다(행 18:1-11).
이에 앞서 전도한 아덴에서 전도 효과를 별로 얻지 못한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전력을 다해 전도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다행히 로마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같은 직업인 천막 깁는 일을 하면서 주로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전도했습니다(행 18:1-4).
그 후 실라와 디모데가 이에 합류해씁니다(행 18:5).
바울은
고린도 전도 중 유대인들에 의하여 총독에게 고발되었으나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제라 하여 재판을 기각시켜 버렸으므로
무사했습니다(행 18:14-17).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집에서 시작된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시작됐습니다(행 18:7-11).
그후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로 바울을 괴롭혔으나 바울을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이 교회를 돌보았습니다(고전 4:14,15).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상황
1. 내적 분쟁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들에게 신앙적 영향을 준 사람들을 따라 분파가 생겼습니다.
① 바울이 이 교회를 개척했으므로 고린도
교회의 주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② 아볼로파는 성경에 능통하고 웅변적이었으므로 지적인 교인들이 이를 따른 것 같고
③
게바(베드로)파는 예루살렘 등지에서 예수의 수사도인 베드로에게 감화를 받은 유대인 중심의 그룹으로 이해됩니다.
④ 그리스도파는
어느 파에도 초연한 입장을 취한 자들로,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그룹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고전 1:11, 12).
바울은
이러한 파당적 분쟁을 단호히 부정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역자는 있을지라도 분파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고전1:13-17 고전 3:4-9).
고린도
교회는 근친 상간의 음행이 있었고(행 5:1).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도덕적 무질서가 있었으며(행 6:1-8),
독신 생활자와 이혼자, 재혼자 등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매우 난잡했으므로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의
교훈과 도덕적 규범에 따라 상세히 지도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의 정결을 도모했습니다.
3. 고린도 교회의 종교적 문제
고린도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으므로 우상의 제물이 시중에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문제가 되었으며(고전 8:1-10:33),
공중 예배에 있어서 여자의 머리에 쓰는 수건의 문제(고전 11:1-16),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질서(고전 15:1-58)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도 심오하면서도 구체적인 지도를 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목회자적 정열을 보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끈기 있게 논리 정연한 필치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옹호했습니다(고후 1:15-17, 고후 10:1-13:10).
4. 고린도 교회의 긍정적 측면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으나 그들은 매우 지적으로 우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은사에도 부족이 없는 영적으로도 풍족한 은혜를 소유한 교회였습니다(고전 1:4-7).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 봉사 정신도 가지고 있었으며(고전 16:1-4), 아가야 지방에 있어서의 복음의 요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방임(행 18:1-8)
음란과 우상 숭배가 만연함(고전 5:1)
은혜가 풍성한 교회로 성장함(고전 12:9)
1. 고린도 지방
a. 아가야의 상업 도시임
㉠ 아가야의 수도(고후 1:1)
㉡ 총독 갈리오가 다스림(행 18:12)
㉢ 아가야 지방의 첫 개종자느 스데바나임(고전 16:15)
b. 바울이 교회를 세웠음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방문한 도시임(행 18:1)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도움으로 재정적 지원을 얻음(행 18:2)
㉢ 하나님의 교회를 세움(고전 1:2)
㉣ 믿는 무리를 성도라 일컬음(고전 1:2)
c. 고린도 지방의 윤리적 상황
㉠ 근친 상간이 성행함(고전 5:1)
㉡ 죄를 등한히 여기지 않음(고전 5:2)
㉢ 우상 숭배가 만연함(고전 10:7)
㉣ 부도덕함(고전 5:1-7)
㉤ 웅변과 철학이 성행함(고전 1:5)
2. 고린도 교회의 종교적 상황
a. 당시의 신앙 생활
㉠ 성령의 존재를 알지 못함(행 19:2)
㉡ 부활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음(고전 15:12)
㉢ 교우의 송사를 불의한 자들 앞에서 행함(고전 6:1)
㉣ 시기와 분쟁이 있음(고전 1:11)
㉤ 주의 성찬을 무질서하게 행함(고전 11:20-22)
㉥ 네 개의 파로 나뉨
① 바울파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이므로 추종함(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므로
추종함(행18:14)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1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4절)
② 아볼로파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하므로 추종함(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③ 게바(베드로)파
유대인 사도로서 추종함(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④ 그리스도파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만을 중요시함(고전 1:11-13)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12절)
b. 교회의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
㉠ 악한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전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주 안에서 결혼하라(고전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 교회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라(고전 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전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하나님께 얻은 대로 연보하라(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고전 12: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 고린도 교회의 발전
a. 모든 은혜가 풍성함(고후 8:7)
b. 성령이 충만함(고전 12:9)
c. 방언의 은사를 받음(고전 12:10)
d.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받음(고전 12:8)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쓴 계기
바울이 A.D.50년경(49-51년)에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창설하였다(행 18장).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복음을 전한 후에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전서 ‘이전의
편지(Previous Letter)'를 고린도에 보냈던 것 같다(고전 5:9).
바울이 어떤 계기로 그 편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편지는 탐욕과 강도와 우상숭배와 아울러 특별히 신자들 중에 성적인 부도덕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바울은 그 후에 A.D. 53-54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고린도에 보냈다(16:8).
그렇다면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을까?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1).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결혼과 독신에 대한 질문과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질문이 그 편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7:1, 8:1).
고린도 교회의 편지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한 고린도 교회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통해서 바울에게 전달된 것 같다(16:17).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룬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말로 들은 것에 대한
편지이고 어느 부분이 고린도에서 온 편지에 대한 회신인지 1-4장의 내용, 즉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들은 내용과 편지로 문의한
7-10장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어쨌건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편지로 받은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1-4), 간통 문제(5장), 세상법정 고소 문제(6장), 결혼과 독신 문제(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8-10장), 공예배와 성찬식 문제(11장), 영적인 은사 문제(12-14장), 육체적인 부활 문제(15장)등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윤리적, 교회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해결책을 고린도전서에 기록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볼
때 고린도전서는 분파문제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결함으로 시작해서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육체적인 부활을 증언하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끝나는 서신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
3. 고린도의 바울 반대자들
고린도후서 2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 교회에 ‘근심의 방문(Painful visit)'을 한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이 ’근심의 방문‘을 한 것을 통해 그
방문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 안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언급된 대로 고린도 교회에
외부인들이 침입해 들어와서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증거가 고린도전서에는 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권한을 언급하다가 12절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너희”라고 하고 바울과 바나바
등을 포함한 복음 사역자들을 “우리”라고 하면서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다른 이들”이라고 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외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자체 내에서 바울을 대적한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이
4장 18절에서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바울의 권위를 약화시키면서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15장 12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다.
바울이 분명히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15:1-4)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도전했음을 보여준다.
4장 18절과 15장 12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사도인 바울 자신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의 바울
대적자들이 고린도후서에서처럼 바울을 공개적으로 대적한 단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울에 대한 적대관계는 소수에 의해서 시작되어
점차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2; 4:3, 6, 18-20; 9:3; 10:29-30; 14:37; 15:12)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복음에 도전한 자들은 고린도의 헬라 -로마 문화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 간의 괴리 때문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를
종래와 같이 중시한 결과 십자가의 복음, 즉 세상적으로 미련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의 ‘로고스’를 경시했던 것
같다(1:18-2:9).
고린도 교회는 “모든 구변”(‘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과 “모든 은사”를 풍족하게
받았는데(1:5-7), 그것을 십자가의 복음과 통합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웅변화 지식 면에서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이 헬라적 웅변과 지혜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2:1-5).
그들이 헬라-로마 문화에서 자랑하는 지도자의 웅변과 지혜와 명예 면에서 볼 때 “만물의
찌끼”와 “세상의 구경거리”같은 십자가와 이에 걸맞는 십자가의 복음 사역자 바울은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4:6-13).
그들은
스스로 이미 성령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상태에서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4:8)(“과도실현”종말론, “영화
종말론”)바울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한 그들이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사실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와 ‘프뉴마’(성령)가 교만과 자랑의 요인과(4:6,
18; 5:2; 8:1) 고린도 교회안에 분파와 분쟁의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화한 것도 “바울을 힐문하는”, 즉
재판자리에 앉아 바울을 재판하는(9:3)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한 대적자들은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유일하신 하나님만 계시고 우상들은 없다는 ‘그노시스’(지식)에 근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전에서 제사과정 중 하나로 우상제물을 먹는 잔치 행사에 참석하여 그 음식을 먹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 같다(8-10장).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사도권이 무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신의 사도권을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누리고 행사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언급한 사도권,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할 때 어쩌면 고린도 교회의 부자 신자들의 후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부유한 신자들은 고린도 교회를 후원할 뿐 아니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 형성의 배후에도
후원자들로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라이벌 가정교회들이 따로 있고 그런 후원자들이 각 분파의 가정교회를 후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교인들을 후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후원자들이 볼 때 바울은 자신들의 후원을 거부하기 때문에(고후
11:7-11) 그들 속에 반(反) 바울적 심리가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도전한 자들은 위에서
말한대로 ‘성령’ 문제에 있어서도 자만심을 가졌던 것 같다.
바울은 14장 36-3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만이 신령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심지어 바울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렇게 교만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은 그 완성된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초래했던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고 각 신자에게 분배하신다는 것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은사의 목적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12-14장).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
1. 유대인(22절) -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 기적을 좋아하는 신앙
2. 헬라인(22절) - 지혜를 찾는 사람들 / 지식 및 지성인
3. 십자가인(24절) - 부르심을 입은 자들 /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
세 부류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신들의 독특한 눈과 시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 유대인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두번째 헬라인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세번째 십자가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 전도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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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십자가의 도( the message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The Word of the Cross)
- 호 로고스 가르 호 투스타우르
Ὁ λόγος γὰρ ὁ τοῦ σταυροῦ
The message for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道)"라는 헬라어는 "로고스(λόγος)"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λόγος, ου, ὁ 3056
발음 / 로고스(lŏgŏs)
어원 / 300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 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 2:22, 행 20:35), 고(벧전 4: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 신약 성경 / 330회 사용
* 3004. λέγω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발음
/ 레고(lĕgō)
|관련 성경 / 칭하다(마 1:16, 눅 20:37), 말씀하다(마 2:15, 눅 11:45, 요 2:22), 이르다(마 5:18),
말하다(마 6:29, 12:38, 요 8:25),
대답하다(마 13: 51, 요 9:17), 논의하다(마 16:7), 여쭙다(마 19:7,
26:22, 막 1:30), 묻다(마 22:35, 막 8:29), 일컫다(행 15:17),
고발하다(롬 11:2), 고하다(막 9:5,
행 5:25).
[명] 말(막 13:37, 14:58, 행 15: 24), 대답(롬 11:4)
신약 성경 / 2262회 사용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둘째는 십자가의 교훈(말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란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假現說)을 영어로 도우시티즘(Docetism)이라고 합니다.
도우티시즘이란 그리스어로 "보이다"라는 뜻의 '도케오'(δοκέω)가 어원으로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 7:14b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이란 강생(降生, incarnatio)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강생한 하나님 즉 하나님의 공현(Epiphany)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교훈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교훈이란 십자가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당파들이 서로 자기들이 믿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다양한 교단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지럽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며 교회도 하나뿐입니다.
어느 교회 어느 교단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의 도가 되는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난다(행 2:37~41).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아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의 약속이 본격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행 2:14~36)도,
신도 수가 삼 천이나 "더해진 것"(행 2:41, 수동태의 주체는 성령)도 성령의 능력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누가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을 세 번에 걸쳐 간략하게 서술한다(2:42~47; 4:32~35;
5:12~16).
여기에 나오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 충만(자기 비움)을 통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행
2:36)의 가치관과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행 2:42~47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공동체의 중요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
가장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도들이 지상의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요 증인이라면, 그들의 가르침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그들이 믿고 섬기는
주님의 교훈을 배우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리임은 그들을 통해 나타난 기사와 표적들이
입증해 준다(43절).
예수의 기적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가시적인 징표인 것처럼, 사도들의 기적은 그들의 선포와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런 기사와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경외심이었다(2:43; 5:5, 11;
8:13).
둘째, 사랑하는 공동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41절)가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교제'란 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번역인데 이러한 교제는 성도 간의 재산 공유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44~45절; 4:32).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에게 돈이나 권력은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한다(행
4:33~34; 행 26:29).
이러한 재산 공유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자발성이었다(4:32~35).
가진 자가
자신의 전 재산이나 그것의 일부를 내놓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따른 자발적인 헌신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매력과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셋째, 예배하는 공동체
처음 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만날 때마다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다.
"떡을 떼다"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보다는 공동식사와 함께 거행된 성만찬을 의미할 것이다(고전 11:17~34).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모범을 따라 자주 식탁공동체로 모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만찬과 함께 처음 공동체의 주요 예배 행위는
기도였다. 사도행전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1:14; 3:1; 6:4;
10:4, 31; 12:5; 16:13, 16).
이전에는 성전에서 행해지던 예배와 기도가 이제는 어떤 특정 장소나 공간을 넘어서
성령이 임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드려진다.
처음 교회가 성전에서 모이기도 했고 집에서도 모였다는 점(46절)은 오늘날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와 비공식적인 소그룹 모임 간의 바람직한 균형을 예시할 수 있다.
넷째, 전도하는 공동체
본문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도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2:47의 요약은 처음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온 백성의 칭송(47절)은
그들의 경건한 삶과 사랑의 교제가 불신자들에게 끼친 가시적인 영향을 말해준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2:46; 4:32;
5:12), 상호 사랑, 모범적인 삶의 방식이 지역사회에 매력적인 것으로 드러날 때 교회는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선교적 공동체가
된다.
사도들의 강력한 선포와 교회의 변화된 삶이 초기 교회 선교의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다.
처음 교회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의 균형을 이루었기에 부흥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참된 부흥은 이러한 초기 그리스인의 영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게는 분명 우리가 잃어버린 교회 본연의 모습이 있었다.
세상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다가 적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 같은 예수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단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저는 이슬람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학생은 코란에 예수에 관해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란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을
들어보니,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하여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
크리스챤을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보면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예수를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따릅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작 십자가의 죽음이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지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로고스”로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에 대한 말씀”을 가르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어지는 말씀 – 즉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일까요?
십가가의 복음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십자가의 도 – 곧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신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4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말씀을 하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말씀을 세상에 보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표현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활동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자체만 보아도 하나님의 초능력입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마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던지 예수 그리스도는
초능력으로 죄가 없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성경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삶만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 자체를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울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의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3-4).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시고도
제한된 세상의 삶을 사시며 죄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가 없는 삶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와 상관없이 해맑은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의 죽음도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게되면
우리는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발버둥 칠것입니다.
현대사회라면 아마도 고소하고 항소하고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숙이시고 자신의
영혼도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이적과 능력의 사건들을 아우르고 대치해 버리는 최고의 능력을 행사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나타난 것을 믿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24절).
본문에서 조금 지나 30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가 의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수천년 전에 욥기에서 빌닷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겠으며…”(욥 25:4)라는 질문의 바로 그 답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주심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돌려진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고 시간낭비입니다.
이미 2000여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꼐서 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믿음으로 빗장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거룩함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거룩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있다면 매일 매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한 안과 밖이 같은 것입니다.
감출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과 밖이 같으신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실험적으로 살아내어 밖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삶이 내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이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자(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람을 세 종류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2:14)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The natural however Man
둘째는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2:15)
ὁ δὲ πνευματικὸς
He who however Spiritual
셋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3:1) The Man of the Flesh
ὡς σαρκίνοις
as to fleshly
* worldly : 세속적, 속세의
- worldly, secular,
- the world, secular society
육(肉)에 속한 사람,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영(靈)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적 미숙아로서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쟁이 있어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교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시적인 현상만 보게 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땅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영원한 천국만을 사모하며 일합니다.
성령과의 교통 안에서 일합니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행인과 나그네의 삶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사람으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교인(敎人)과 그리스도인(基督人)
교인이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기독교인을 ‘기독교를 믿는 사람’, 성도는 ‘기독교 신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풀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과 성도에 대한 세상의 이해이며, 기독교인조차도 이러한 이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물론이고 기독교조차도 성도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여러분께 ‘당신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쁘겠지요?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인간을 육신과 영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자와 더불어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을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에베소서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신자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진노의 자녀이고 죽은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모든
일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 신분의 변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하지 않는 말입니다.
영에 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주어진 은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육신에 속한 사람에 대해 언급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고린도 교회가 죄의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성도로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정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로 인해 분쟁과 분파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모습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인정되는 교회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분파 등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이상합니까?
그런데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 지칭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의 본질은 죄에 속한 자이고 죽음의 존재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하늘에 앉힌바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육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당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영에 속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자로부터 나왔다는 것이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입니다.
영에 속했다는 것을 육의 세계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부정적인 행동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성령 받음이나 성도됨에 대하여 확신이 희미해지면서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께 문제가 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애당초 성도의 존재를 성도 아닌 사람보다 나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잘못이며 그것을 성령 받음으로 이해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서 육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고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던 내용이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문제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의 내용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바울은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가면 된다’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16장까지의 긴 편지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몇 줄의 내용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바울이 분별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한 분별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참된 것은 참된 것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무엇이 육적이고 무엇이 영적인가를 아는 것을 분별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의 목적은 인간의 변화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믿음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아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육이 중심이 되어서 육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속성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일과 충돌된다는 것을 까맣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받았다면서 왜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육의 속성에서 나타나는 자신들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육에 속한 자로 살아온 습성이 있고 종교적 문화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하시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청하기
위해 욥바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이 담긴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결코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령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각 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여전히 유대교 전통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즉시로 기존의 습성과 지식과 앎의 변역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기존의 앎에 대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이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언약 밖에 있는 멸망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일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의
습성에 의한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리고 신자라 하는 우리를 향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신자의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다시금
십자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절)
십자가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이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보기에 세상의 헛됨을 아는 것이고 육신의 가치 또한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습성은 세상으로만 향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육에 속한 것임을 알기에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자라났을 때 이를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즉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구약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즉 이방인
신약성경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
예수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을 모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과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땅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이 행한 선과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3:11~14).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늘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구하며 자기만족과 자신의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큰 기쁨과 하늘의 위로를 얻지 못하며 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앎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되고, 이제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귀한 관계가 되지요.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사귐은 너무 귀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느끼며 하나님을 알고, 이제 그분을 깊이 알아 감으로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쁨과 하늘로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복과 기쁨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비결이나 신비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거듭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믿게 되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고전 12:3하).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셔 수동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엡 2:1).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육신에 속한사람 ->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행함으로 인해 신령한 사람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약 2:17)
이 때 행함이란?
1.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 생활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2.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서 큰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믿음이 크다고 꼭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아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4.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우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 행사에 열심봉사한다고 곧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5.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령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 신령한 사람인 줄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고전 12:8-10)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2.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3.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열매 15가지를 맺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갈 5:24)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 5:22-23)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열매에 비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편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레위기기 20:6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욥기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이사야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사야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사야 57: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마태복음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의 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은 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모두 금
향로나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육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하지만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석에서 해당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biblestudytools.com/dictionary/body/
1. In the Old Testament:
soma, Latin corpus:
The term “body” is not found in the Hebrew of the Old Testament in the sense in which it occurs in the Greek “The Hebrew word for `body’ is gewiyah, which is sometimes used for the `living’ body (Ezekiel 1:11), `bodies of the cherubim’ (Genesis 47:18; Nehemiah 9:37), but usually for the dead body or carcass. Properly speaking the Hebrew has no term for `body.’ The Hebrew term around which questions relating to the body must gather is flesh” (Davidson, Old Testament Theology, 188). Various terms are used in the Old Testament to indicate certain elements or component parts of the body, such as “flesh,” “bones,” “bowels,” “belly,” etc., some of which have received a new meaning in the New Testament. Thus the Old Testament “belly” (Hebrew beTen, Greek koilia), “Our soul is bowed down to the dust; our belly cleaveth unto the earth” (Psalms 44:25 the King James Version)–as the seat of carnal appetite–has its counterpart in the New Testament: “They serve …. their own belly” (Romans 16:18). So also the word translated “bowels” (meim, rachamim) in the sense of compassion, as in Jeremiah 31:20, King James Version: “Therefore my bowels are troubled for him,” is found in more than one place in the New Testament. Thus in Philippians 1:8 the King James Version, “I long after you all in the bowels (splagchna) of Christ,” and again, “if there be any bowels (splagchna) and mercies” (Philippians 2:1 the King James Version).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판단하다(ἀνακρίνω) 350
1. 자세히 조사하다, 2. 질문하다, 3. 사도행전 17:11
발음 / 아나크리노(anakrin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ἀνέκριν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νεκρίθην, 303과 291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눅 23:14), 질문하다(행 4:9), 심문하다(행 12:19, 24:8, 28:18),
상고하다(행 17:11), 분별하다(고전 2:14),
판단받다(고전 4:3), 판단하다(고전 4:3), 비판하다(고전 9: 3), 묻다(고전 10:25, 27).
[명] 판단(고전 2:15, 14:24).
- 신약 성경 /16회 사용
2:16 / 그리스도의 마음
νοῦς, νοός, νοῒ, νοῦν, ὁ 3563
발음 / 누우스(nŏus)
- 관련 성경 / 마음(롬 7:23, 고전 2:16, 딤전 6:5), 영(살후 2:2), 총명(계 13:18), 뜻(계 17:9).
- 신약 성경 / 24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성전
ναός, οῦ, ὁ 3485
1. 성전, 2. 예루살렘 성전, 3. 하늘의 성소 - santuality
발음 / 나오스(naŏs)
어원 / ναίω ‘거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전(마 23:16, 막 15:29, 눅 1:9, 고후 6:16), 성소(마 27:5, 23:45), 전(행 17:24, 고전 6:19).
- 신약 성경 / 45회 사용
-
성전
ἱερόν, οῦ, τό 2411
발음 / 히에론(hiĕrŏn)
- 신약 성경 / 71회 사용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사람의 몸은 성전 성전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건물을 성전이라 한다.
물론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전이라기보다 예배당이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자리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자리가 어디이든지 그곳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우리 몸이 바로 성전이 된다.
바로 몸 성전이다.
우리 몸이 성전이기에 성전 된 우리 몸을 소중히 지키고 가꾸어 나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너무 소홀히 한다.
몸에 해로운 담배를 피우고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
운동을 게을리 하고 음식을 가려 먹지 못한다.
성전인 우리 몸을 마구잡이로 다룬다.
이런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성전을 가꾸는 마음으로 우리 몸을 가꾸어야 한다.
우리 몸을 그렇게 가꾸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의 훈련
육체의 훈련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성이 자라고 육체의 훈련을 통하여 성전인 몸이 강건하여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성의 강화와 육체의 건강을 분리하여 생각하려든다.
성경의 가르침은 영과 몸이 분리되지 아니하고 일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경건의 훈련과 육체의 훈련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둘째, 몸의 훈련
셋째, 생활의 훈련
하나님의 성전(God’s Temple)
나오스 데우(ναός θεόῦ)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전 - 나오스(ναός) : Sanctuary / 몸된 성전 : 장소, 위치, 건물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가 있는 것
- 히에론(ἱερόν) : Temple Area / 건물 성전
영(지성소), 혼(성소), 육(성전뜰)
-
외경 토비트 2장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토비트라는 사람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욕을 하고, 얼굴을 덮지 않고 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들이 담 위로 날아가다가 뜨거운 똥을 토비트의 눈에 누고 가버려서, 토비트가 양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토비트는 그런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이방 민족의 음식을 먹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런 음식을 거절했던 사람, 즉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절개를 지키고, 자기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왕의 진미대신 채소만 먹고서도, 그 나라의 고기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몸을 유지했던 기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란,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목욕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죄와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켰던 정몽주나, 한 임금을 섬기기 위해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과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열녀나 충신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음 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터도, 곧 사람에 의해 닦여진 사상이나 업적에 의한 그 어떤 것들도, 참다운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소련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건설한 공산국가라고 했지요?
한 때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레닌의 동상은 이제 거의 모두 철거되어, 공원 한구석에 거적으로 덮여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제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나라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제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때가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은 자들은, 장차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며, 그 자신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그 어떤 다른 기초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만 세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요, 그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있는 돌로 지은 성전 한 곳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자신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거룩한 곳이어서, 이방인들은 일정한 한계를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제한적으로만 성전 접근을 허락하던 이방인들에게, 성전의 출입을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이 성전 그 자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전파하고 다니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절대로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흥분하며 티끌을 날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슨 근거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순간 성령께서 각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누구십니까?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시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도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것과 같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성도나 교회를 구약의 성전에 비유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에 비유한 것은, 교인들이 나뉘어 분쟁하는 것이 교회를 부패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중대한 죄악임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거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거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신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율법에 지시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성소를 더럽혔던 나납과 아비후를 즉시 불로 심판하셨으며,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했던 사울 왕과 웃시야 왕을 심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돌로 지어진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게조차, 엄중한 형벌을 내리도록 규정하신 하나님께서, 영적 성전인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을 멸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분쟁을 그치고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것이 곧 사도 바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간혹 자기의 이기적인 탐심을 위해, 교회를 나누고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도 자신을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각자는 스스로 죄와 불의를 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 가운데 두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중 첫 번째는 ‘순결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너무도 혼란한 이 시대에, 순수 복음 신앙을 간직한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성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에, 육체적으로도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정한 표어입니다.
3S 시대란 Science, Sports, Sex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Speed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문화와 성을 찬미하는, 소위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의 종교라고도 했습니다. 이 성의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패인’ 제단에서, 유명한 교육자들을 통하여 영화를 연구케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1500편의 영화를 검열한 후, 대부분의 영화 주제가 성문제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미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와 같은 음란한 영상물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잡지와 T. V의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화면, 컴퓨터의 사이버 포르노 등, 도처에서 성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엘톤 트루불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문명의 부패는 잘못된 성 모럴의 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시대 한 문화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성모랄 성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언제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음행이라는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와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사를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 문화와 오염된 섹스 문화는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썩고 부패한 성문화까지 정복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그들의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강대국은 부패한 성도덕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공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타락성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의 성적 타락상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향해 혼전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로 들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의 한 여대생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녀성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국내에서만도 하루 평균 500개씩의 음란 사이트가 생성되고 있다고 하며, 이 사이트들을 통해 배포되는 국내외 음란 동영상은, 하루에 1,000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음풍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청소년 문제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T. V 드라마는 불륜을 소재로 하여 안방을 침투하고, 간음을 조장하여 이 사회를 온통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불륜으로 깨어지고,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세태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러움을 간직해야 할 처녀들까지도, 야한 모습이나 옷차림을 즐기며 섹시하다면서, 옛날 같으면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전국의 모든 경치 좋은 곳에는 러브호텔이 즐비하고, 도시에도 모텔들이 교회당보다 더 많아 보이는 현실인가 하면, 사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남여가 합의해서 하는 성행위는 죄가 아니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폰팅이니 채팅이니 원조 교제니 해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치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새들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이 남편에서 저 남편으로 이 아내에게서 저 아내에게로 옮겨 다닙니다.
급기야는 ‘스와핑 클럽’이라는 것까지 생겨나서, 회원들은 모임이 있을 때 부부가 꼭 동반해서 가는데, 거기에 가서 남편과 아내를 바꾸어 쾌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온통 타락한 성문화의 범람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미 인류는 핵전쟁, 자원 고갈, 혹은 공해 같은 문제로 멸망 직전에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타락한 성도덕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듯 악한 시대에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실로 소중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도의 몸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을 모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불평으로 오염시키고,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고,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 하나가 곧 간음입니다. 성도덕이 참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 성 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 예술과 문학이 아무리 성을 예찬하고 미화시킬지라도, 인본주의자들이 아무리 간통죄의 폐지를 주장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간음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의 대부분이 은밀한 중에 행하여지기 때문에, 혹 사람의 정죄는 받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욥 31:11에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했고, 잠 6:27-29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고전 6: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고, 레 20: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간음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은 말하기를 “순간적인 쾌락을 얻고, 영원한 고통을 대신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교회와,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간직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聖殿)입니다! (고전 3:16-18)
우리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작품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생물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생각하는 존재
둘째는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있어서 자기 의사를 남에게 표현하며 의사소통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도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갖고 교류하고 삽니다만 인간과 같은 언어의 소통은 없습니다.
셋째는 영적 존재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동물과 같은 몸만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닌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속에 보내주셨고 그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곧 하나님의 영이 거하므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교회 내의 분쟁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니 하는 파당들이 생겨나
교회가 마음과 뜻이 하나되지 못하고 파당이 생겼습니다.
어떤 공동체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분열이 생기고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교회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 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다른 하나는 지혜의 문제입니다.
참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미련한 것으로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야말로 참 지혜임을 확신시키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보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이고,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0-12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이 성령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나뉘지 않고, 하나 되는 것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에 연결을 시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그 안에 계셔야 하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지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 되는 지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지혜가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지혜가 없으면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를 각 사람의 심령 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히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6:1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강조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성령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값을 주고 우리 몸을
사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순간부터 이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에 몇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중한 존재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한사람씩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4절에 서
'하나님의 눈에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 하나님이 가치 있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삶을 책임지신다고
아울러 말씀하십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혹이라도 우리 삶에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시고, 지키고, 보존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내가 고난 당할 때, 힘들어할 때, 상처받고 아파할 때,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때마다 힘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시고, 모든 시련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43:2-3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둘째는 나는 하나님의 성전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잊지 말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해 두 가지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용서 받은 죄인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죄인의식만 갖고 소극적으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하다 들켜 혼났다고 늘 죄송해하고 부모 앞에서 기죽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듯이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당당하고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프라이드를 갖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 인간이 죄 가운데 빠져
방탕할까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질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성령이 내 속에서 거한다는
성전의식(聖殿意識)을 갖게 되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좌절과 절망, 방황 속에 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요,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습니다.
셋째는 성전을 관리하는 책임
내 몸에 성전을 귀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기에, 이제 우리 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 몸을 혹사시키거나 학대하면 안 됩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살은 또 다른 살인입니다.
살인이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런 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이해가 되어도 우리의 목숨을 스스로 끊거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자살론을 말하자, 한 때 유럽은 자살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자살 신드롬이 생겨난 것입니다.
넷째는 더럽히지 말라
나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더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나, 음행이나, 부도덕, 세상의 문화로 깨끗하게
보존해야 할 몸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와 몸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5-20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몸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보존하고, 몸을 지키고,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과 세상의 문화는 다릅니다. 하늘의 것이 있고, 땅에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있고, 교회에 속한 것이 있으며, 사탄에 속한 것이 있고, 분명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화나 관습에 빠지거나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술과 담배'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이 세상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는 바로 이런 것에서 나를 보존하고,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담배는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의 몸을 헤치는 독과 같습니다. 몇 해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주일 씨의 금연광고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담배, 그거 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담배의 1급 광고 모델로 남성미를 과시했던 최고의 영화배우 '율 브리너'도 담배 때문에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1985년
죽기 전 녹화한 필름에서 그는 '나처럼 담배를 많이 피워서 폐암에 걸리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 5분 30초의 수명이 허공으로 날아간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담배의 유해성분은 발암물질과 독성 화학물질을 합쳐 무려 4,000여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해로운 3대 물질이 '타르, 일산화탄소, 니코틴'입니다.
특히 타르는 인체에 치명적입니다.
담배 연기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는 타르 속에는 약 60여종의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폐암을 일으키는 주원인입니다.
폐암 뿐 아니라 무슨 암으로 죽던지 원인의 30-40%도 담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담배는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입니다.
그렇습니다. 담배가 바로 몸을 헤치는 주범입니다.
담배가 이런 것이기에 절대적으로 멀리하라고 권합니다.
하물며 내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아는 우리가 담배로 몸을 헤치고,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안됩니다. 독을 알면서 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강조합니다.
독을 모르고, 아니 독을 알면서도, 독을 끊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술도 건강의 적이요, 독입니다.
술은 우리 몸에 위, 뇌, 특히 간에 치명적인 병을 줍니다.
성경에는 술에 대해 많은 교훈을 줍니다.
물론 술은 때로 약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술을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
술은 곧 '방탕'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술은 결코 술로 끝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술은 곧 방탕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사건이 성경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을 격파하고 성를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
천명을 초대했습니다.
벨사살 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본성과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니엘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때에'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다니엘 5: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 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술 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또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의 막내아들을
저주하는 죄를 졌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술입니다.
술은 그냥 술로 끝나지
않습니다.
방탕하게 되든지, 추태를 부리든지, 자기 몸을 내팽개치든지, 정신이 없어지던지 그렇게 이어집니다.
술에 잔뜩 취해 밤길을 비틀거리고 걷던 술꾼 한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던 할아버지와 부딪혔습니다.
순간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뒹굴고 말았습니다.
겁이 더럭 난 그는 얼른 할아버지의 뺨을 두들겨 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 봅니다.
아무 소리가
없자, 할아버지를 업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를 자신의 침대에 뉘여 놓고 찬물을 끼얹고 다리를 주무르며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다가 지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새벽녘에 눈을 뜬 그는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할아버지는 KFC의 광고용 할아버지 조형물이 누워 있는 게 아닙니까?
술에 취하면 사람인지,
인형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술은
먹되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술을 먹고 취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한잔만 먹어도
취하고, 어떤 사람은 10잔, 20잔 먹어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술 취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술이 습관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습관이 무섭고, 몸에
베이고 중독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퇴근하면 가정이 생각나야 하는데, 한잔이 생각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처음 술을 한잔부터 마시지 1병, 5병을 생각하고 마시지는 않습니다.
한잔, 두 잔을 계속하면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이 박히고, 중독이 되면 좀처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과 담배가 내 삶에 습관이나 문화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술이 아니라 성령으로
취하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몸 된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로마서 2:1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12:2의 말씀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땅엣 것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썩어질 것, 덧없는 것, 일시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 변화를 받은 마음은 다릅니다.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문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주님의 가치관으로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것을 본받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외향적인 외모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변화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 또 '변화를 받아라'라는 말은 다른 방향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믿/ 그런데 그것이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하라'는 말은 '도키마조' 시험하여 갈라놓는다는 뜻입니다. 참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 양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음에 성전 삼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윗 왕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시14-15).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엄숙하게 선언할 뿐입니다.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첫장 첫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할 여지가
없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 시인이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패한 까닭에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패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세기의 유명한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기독교가 세워 지기까지 여러 세기가 결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박멸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고 큰 소리 치면서 펜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스위스 제네바 성서공회에서 그의 집을 사서 성경 출판소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외국어 성경을 출판하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가 쓴 책은 6권 한 질에 1달러도 안 되는 90센트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러면서 천국도 지옥도 없다던 그가 죽어가면서 고통 속에 '나는 지옥으로 간다.'고 자기
입으로 고백했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소련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비행을 하고 돌아와서
'하늘에 올라 가 봐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런 그가 비행사고로 34세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l934-1968). 그러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우주비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솜씨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세상에 재물을 많이 쌓아 두면 그것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이 심으십시오!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데로 거두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 심판은 불신자들이 가는 지옥 음부에 심판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몸부림을 치며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저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며 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어리석은 자로 살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성전 삼고 살아가는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인가?(시편 15:1-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나는 바른 예배자로 살고 있는가?'를 늘 묻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시15:1).
여기서 '주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하고, '유할 자'란 '계속적으로 머물러 살 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기독교사상을 집대성한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이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로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천사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어거스틴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다가와서 어거스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철학 사상만 가득 차있어'라고 호통을 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말처럼 자신은 머리로만 예수를 믿고 있더랍니다. 다시 회개하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15:1절에서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제가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 까?'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늘 고민하면서 살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인의 덕목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시15:20)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 공의,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모습입니다.
'정직'은 '모든 참된 행위들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행위의 원리'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지 않는 것, 즉 흠 없이 완전한 것을 말합니다.
'공의'는 '무엇을 행하든지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은 '모든 언행의 근원인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정직한 것을 말합니다.
신설동 설렁탕 집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신앙이 좋은 집사님이 설렁탕
집을 권리금을 주고 모든 것을 그대로 주방장까지 인수받았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설렁탕 집을 운영하게 된 집사 님이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을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하게 하여 주세요'
다음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첫
출근을 했습니다.
주방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 종일 팔 설렁탕 국물을 큰 가마솥에다 끓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고기 국물처럼
보이게 하려고 커피 후림을 약간 타서 뽀얗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집사 님이 혼자 중얼거리기를 '예수님을 어떻게 커피
후림을 탄 설렁탕 국물로 대접 하냐?' 그리고 그 국물을 아깝지만 다 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금일은 휴업입니다!'
식사 때가 되어 설렁탕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왜 휴업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그대로
솔직하게 다 하자, 그 주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저 설렁탕 집은 진짜 고기국물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설렁탕집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어서 최고로 잘 되는 설렁탕 집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한 가난한 농부가 알라 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돈 200파운드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본 우체국에서는 수신자가 알라 신이므로 어디로 전해 줘야 할지 몰라서 계장에게 주었고 계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국장에게, 국장은 체신부 장관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를 받은 체신부 장관은 그것을 대통령에게로 보냈습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던 '낫세르'는 그 편지를 뜯어보고는 농부의 사정을 매우 딱하고 불쌍하게 여겨 대통령 이름으로 100파운드를
우송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100파운드를 받고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알라 신은 분명히 내가 요구한 200파운드를 보내 주셨을 거야.
그런데 대통령이 중간에서 100파운드를 떼어먹고 나머지 100파운드만 내게 보낸 거야'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느 가게 주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까운 교회의 새로 부임해 온 목사님 칭찬을 하더랍니다.
특히 그분 설교를 참 잘한다고
하더랍니다.
한 번은 손님이 물었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지난주에는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주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 목사님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그 목사님 오신 후에 외상값을 잘 갚아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머리로 깨닫고 끝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음으로 결심하고 끝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을 돌봐주십니다.
욥기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자손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편 112:2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의 가정은 흥하게 됩니다.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기도하자 그의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해주셨습니다(왕하 18:3, 20:6).
언행심사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시편 15: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혀로 참소 한다.'는 말은 남을 해치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중상 모략하는 것을 말하고,
'행악'이란 온갖 나쁜 일로 괴롭히는 것을 말하며,
'훼방'은 함부로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남을 해치기 위하여 이 집 저 집을 두루 다니는 자의 혀끝에는 마귀가 붙어있고, 그 말을 잘 들어주는 자의 귀에도 마귀가 붙어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과 혀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지혜자로 살아야 합니다(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여기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라는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지혜 있다 하는 사람들을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일 뿐, 그러니 모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을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택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사람들이 보면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듯이, 떠나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내 의지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합니다.
그것을 보면 분명 인생은 우리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더디 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만물이 아무리 모두 우리의 것이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우리는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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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전(聖殿)
- 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삶이 성령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삶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나오스, ναός)와 (히에론, ἱερόν)
헬라어로 성전을 ‘나오스(ναός)’ 또는 ‘히에론(ἱερόν)’이라고 합니다.
‘나오스’는 몸된 성전
'히에론’은 건물 성전
한글성경에서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성전'이라고 번역했지만,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2)
"예수께서 성전 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 2:21)
1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건물성전 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이후의 몸 성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곧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는 성전이 대부분 건물성전 ‘히에론’을 말했습니다(마 4장, 12장, 21장, 24장, 막 12장, 요 7장, 행 2장. 행 3장, 4장, 5장, 21장, 24장, 25장).
그러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는 성전은 ‘히에론’이 아니라 ‘나오스’입니다(마 26:61, 27:40, 요 2:19-21).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는데, 그 '성소'도 ‘나오스’였습니다(마 27:51, 막 15:38). ‘나오스’의 휘장이신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비 사가랴가 분향했던 성소도 ‘나오스’입니다(눅 1:9, 21-22).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대부분 성전을 건물성전 ‘히에론’으로...,
서신서 이하에서는 대부분 성전을 몸 된 성전 ‘나오스’를 사용했습니다.
히에론은 건물성전의 외형을 가리켰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몸 된 성전은 ‘나오스’를 사용했습니다.
‘나오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언약궤가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곳으로,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나오스’입니다(고전 3:16).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하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합니다(고전 3:16-17,고후 6:16-18).
이제 더 이상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
영에 속한 사람이 됩시다!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신령한 사람이 됩시다!
분쟁, 시기(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ἔρις, ιδος, ἡ
발음 / 에리스(ĕri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분쟁(롬 1:29, 고전 1:11, 빌 1:15), 다툼(롬 13:13, 고후 12:20)
- 신약 성경 / 9회 사용
시기(2205) ζηλός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발음 / 제로스(zē- lŏs)
- 어원 / 220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 신약 성경 / 16회 사용
발음 / 제오(zĕō)
- 어원 / [기본형] 분사 ζέων: 끓이다, 삶다, ζέων τῷ πνεύματι
- 관련 성경 / 열심을 내다(행 18:25, 롬 12:11).
- 신약 성경 / 2회 사용
사역자(3:5) - διάκονος, ου, ὁ, ἡ 1249
- 어원 / 아마도 폐어가 된 διάκω ‘심부름을 가다’에서 유래[1377과 비교]
- 관련 성경 / 섬기는 자(마 20:26, 막 10:43, 요 12:26), 사환(마 22:13), 하인(요 2:5, 9),
사역자(롬 13:4, 고전 3:5), 추종자(롬 15:8),
일꾼(롬 16:1, 고후 3:6, 엡 6:21), 집사(빌 1:1, 딤전 3:12), 짓게 하는 자(갈 2:17).
- 신약 성경 / 29회 사용
동역자 συνεργός, όν 4904
발음 / 수네르고스(sünĕrgŏs)
- 어원 / 4862와 2041의 어간의 합성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돕는(고후 1:24), 함께 수고하는(빌 2:25, 요삼 1:8).
[명] 함께 역사하는 자(골 4:11), 일꾼(살전 3:2), 동역자(롬 16:3, 고전 3:9, 빌 4:3).
- 신약 성경 / 13회 사용
고린도전서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봅시다!
Let's live as God's!
그리스도의 일군(4:1) ὑπηρέτης, ου, ὁ / 맡은 자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So then, men ought to regard us as servants of Christ and as those entrusted with the secret things of God.
숨길 비(秘) - 향기로울 별
1. 숨기다, 2. 향기롭다, 3. 祕의 俗字
示(보일시) + 必(반드시필)
빽빽할 밀(密)
1. 빽빽하다, 2. 자세하다, 3. 은밀하다, 4. 숨기다, 5. 조용하다
宓(잠잠할밀) + 山(메산)
ὑπηρέτης, ου, ὁ
1. 하인, 2. 사환, 3. 조수발음 / 휘페레테스(hüpērĕtēs)
- 어원 / 5259와 ἐρέσσω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옥리(獄吏), 아랫사람(마 5:25, 막 14:54, 요 7:32), 일꾼(눅 1:2, 고전 4:1), 맡은 자(눅 4: 20), 종(요 18:36, 행 26:16),
부하(행 5:22, 26), 수행원(행 13:5).
- 신약 성경 / 20회 사용
맡은 자(3623). οἰκονόμος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3623
발음 / 오이코노모스(ŏikŏnŏmŏs)
- 어원 / 3624와 3551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청지기(눅 12:42, 갈 4:2, 딛 1:7), 재무관(롬 16:23), 일꾼(고전 4:1), 맡은 자(고전 4:2).
- 신약 성경 / 10회 사용
1. 히브리어
아만 - 기본어근 ; 아마 `세우다', 또는 `지탱하다' 부모나 유모로서 `양육하다', 상징적으로 `확고하 다', 또는 `신실하게 하다', `신뢰하다', 또는 믿다, 영구하다, 또는 조용하다, 도덕적으로 진실하다, 또는 확실하다, 한번은-따라서 확신, 믿다.
2. 헬라어
페이도 - 기본 동사 ; 확신하다, 유추적으로 `화해하다 진정시키다, 동의(내적인 확신으로) 의존하다
피스티스 - `설득' 즉 `신용', 도덕적으로(종교적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종교적 선생에 대한) 확신, 특히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를 신뢰(추상명사) 직업에서의 `꾸준함', 연루된 의미로 종교적(복음) `진리'자체의 체계, 충성(막11:22,롬3:3).
피스토스 - 대상이 `믿을만한', 주체가 신실한.
* 충성(忠誠)에 대한 성구
1. 충성의 정도(범위)
마 25:21 -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
눅 16:10 - 큰 것에도 충성
눅 16:12 - 남의 것에 충성
고전 4:2 - 맡은 바에 충성
히 2:17 - 하나님의 일에 충성
히 3:2 - 하나님의 집에 충성
2. 충성해야 할 이유
마25:28 - 가진 것까지 빼앗기기 때문에
딤전 1:12 - 더 큰 직분을 맡기니
딤후 2:2 - 전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히 3:6 - 아들이 고로
계 2:10 - 생명의 면류관을 맡기 위하여
3. 충성한 자의 결과마 25:23 -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됨
마 25:29 - 풍족하게 됨
눅 19:17 - 권세를 차지함
딤후 2:2 - 타인을 가르치게 됨
계 2:10 -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
* 이렇게 일하자
1. 성막에서 일하는 자처럼 책임감을 가지고............출 25:2
2. 느혜미야와 그를 돕는 자들처럼 기도의 음성으로.....느 4:9
3. 구스의 내시에게 간 집사 빌립처럼 민첩한 걸음으로..행 8:30
4.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한 사도들처럼 친절한 말로..행 27:34-36
5. 마술사 시몬에게 한 베드로처럼 식별함으로..........행 8:22
6. 고기잡이를 같이 돕던 제자들처럼 일하는 손으로.....눅 5:7
οὕτω 3779
발음 / 후토(hŏutō)
- 어원 / 3778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이렇게, 이와 같이, 그렇게, ~같이, ~그렇게(눅 11:30, 요 3:14, 롬 12:5, 고후 1:5), 그대로(요 4:6).
- 신약 성경 / 208회 사용
능력(能力)
δύναμις, εως, ἡ 1411
발음 / 두나미스(dünamis)
- 어원 / 141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충성에 대한 이야기
처칠 수상이 하루는 국회에 나가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손님을 맞이하다가 시간이 좀 늦었다.
그래서 운전수에게 신호를 무시해도
좋으니 속력을 내어 시간 안에 국회에 닿게 하라고 명령했다.
도중에 교통순경이 달려와 차를 세웠다.
운전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상 각하의 차요, 지금 국회에 가는 길인데 시간이 좀 늦어서 급하게 가는 중이요"
그러나 교통순경은 뒷자리에 앉아있는 처칠을 한번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수상 각하를 닮긴 했는데 영국의 수상인 처칠 경의 차가 교통위반을 할 리가 없소, 당신은 교통 위반에다 거짓말까지 했소.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까지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처칠은 교통순경의 직무를 수행하는 엄격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경시총감을 불러서 그 교통순경을 일 계급 특진시켜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경시총감은 이렇게 말하며 처칠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경찰 조직법에 그런 규정이 없어서 특진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감명을 받은 처칠은 아주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은 경찰에 두 번씩이나 당하는군."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고 있었다.
친로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었다.
나라 일이 정동 골목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이상재 선생은 참찬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어 고종을 뵈려고 러시아 공관으로 갔다.
그러한 난중에도 나인(궁녀)들은 자줏빛 보자기에 싼 것을 고종 앞에 갖다놓으니, 매관 매작하는 첩지(사령장) 보따리가 분명하였다.
선생은 아주 천연스럽게,
"임금께서 계신 방이 어찌 이리도 추운고?" 하시며 슬쩍 그 보자기를 집어 벽난로에 넣으니 사령장 보따리는 활활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대죄를 하고 고종도 선생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이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선생이
밖으로 나오다가 내시들을 향해 "이놈들아, 외국 공관에까지 와서 폐하를 욕되게 하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영국의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1857년, 런던의 하이드팍 공원에서 이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하여 한 사람씩 올라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간신히 서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뜨린 채로 뒤로 돌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 뒤로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진정한 여왕은 수천의 군인의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 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주며 사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페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하래도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찬 훈장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 폐하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과 내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는가?
그들은 하늘 아버지께 효자요 충신이요 산 순교자들이다.
사람은 달란트가 각각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해있는 [지금] [여기]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부름 받은 장소는 [지금 여기]다.
과부가 가진 엽전 두 닢,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는 중요하고 바쁜 시간 중에서 주님께 드리는 첫 시간을 주님은 원하신다.
병들고 깨진 질그릇 같은 인생이냐 깨진 항아리 소리로 찬송을 불러라. 문둥이면 어떠냐.
법주사 뜰 구석 큰 바위 꼭대기에 500년 묵은 앙상한 소나무가 있다.
던져진 곳에서 불평 없이 충성되게 삶을 지킨 그 나무같이 되고 싶다.
"자네가 한 훌륭한 일의 결과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고 싶네."
나는 이 말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는 충성하였구나.
잘하였다."고 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우리 국군병사들이 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충성과 훌륭한 행동을 축하하며 환호 갈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는
나라의 거리를 행진해 갈 때 주님께서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보답은 언제나 충성된 자에게 돌아갑니다.
뉴욕시에 어떤 사람의 청동상이 있는데 그의 팔다리가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상 밑에는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원통하다"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에게 충성합시다.
우리의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애통함이 될 것입니다.
두 머슴 중 한명은 주인이 보건 안보건 상관없이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 주인의 농사일을 거들어주었고, 또 다른 한명의 머슴은 그와는 달리 주인이 없을 때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지금까지 가장 잘 하던 것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주인은 이를 모르는 척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주인은 이들 두 머슴에게 사경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불렀다.
"이보게, 자네들. 지금까지 우리 집 일 해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일은 내가 자네들에게 사경을 줄 것이니 오늘 마지막으로 새끼를 꼬아 주겠나."
그러자 한 머슴은 아무 말 없이 짚을 가져다가 물을 추겨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주인 위해 일하는 것이니 잘
해주고 가리라 마음 먹었다.
또 한 머슴은 생각하기를 내일이면 이집을 나가는데 새끼를 꼬라고 하니 하면서 투덜거렸다 일을 하기는
싫고, 하는 둥 마는 둥 한 발정도 시작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이내 잠을 청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꼰 새끼를 가져 오라고 하더니 새끼줄 길이만큼 엽전을 꼬여서 가져가라고 했다.
항상 주인 눈치만 살피던 머슴은 한 발 정도 밖에 안 되는 새끼줄에 엽전을 가져가야 했다.
"기독교의 복음은 공산주의 철학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를 이길 수 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이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갖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나의 봉급, 나의 정력을 모두 바친다.
반면에 너희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지극히 적은 정성을 쏟고 있다.
기독교가 실제적 생활 속에서 증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높은 이상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너희 기독교인들은 손에 흙이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명령이라면 생명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보다 더욱 확고한
신념과,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세상 끝까지 따라가는 충성심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퇴임 후 그가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감리교의 감독님,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이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까?"
그 때 김 박사는 63세였으므로 감리교 헌법으로는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길이 없자 김 박사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가서 두 학기 동안 성서를 연구했습니다.
비록 목사 안수는 받지 못했지만 돌아오셔서 강원도와 충청도로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분은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자신은 첩의 딸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며 강원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려는 때 제자와 친구들이 모여 슬퍼하자,
"여러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소. 내가 죽거든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할렐루야' 코러스를 불러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면서 위대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 내 죽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는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부자가 섣달 그믐날에 종들을 불러놓고 볏짚 한 단씩 주며 새끼를 꼬라고 했습니다.새끼를 꼬되 새끼손가락보다 가늘게 꼬라고 했습니다. 종들은 투덜거렸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주인이지만 섣달 그믐날까지 이렇게 새끼를 꼬라고 할게 뭐람?
그것도 굵은 새끼가 아니라 손가락보다도 더 가늘게 꼬라고 하니 밤새도록 꼬아도 이 볏짚을 어떻게 다 꼴 수 있담?"
어느 종은 새끼를 꼬다 말다 하는가 하면, 어느 종은 손가락의 몇 배나 굵게 꼬아서 빨리 볏짚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
충성스러운 종은 아무 불평 없이 주인이 꼬라는 대로 가느다랗게 그리고 보기 좋게 꼬았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이 요리조리 요령을
부려 일찍 끝내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혼자서 밤새도록 새끼를 꼬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커다란 주머니를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모두들 들어라. 작년 한 해는 다 나를 위하여 너무나 수고가 많았다.
이제 너희들이 꼰 새끼줄로 이 엽전을 마음껏 끼워 가져가거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가도록 하라.
단 새끼줄에 끼워 가는 것에 한한다."
이 말을 들은 종들은 당황했습니다.
자기들이 꼰 새끼로는 돈을 끼워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후회가 막급하였으나 이제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하라는 대로 충직하게 밤새도록 가느다랗게 새끼를 꼰 종은 그가 충성스럽게 한만큼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 있어서 마침내 종살이를 면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가 동경 제일 고등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일본 천황의 '교육 칭호'라는 것을 거부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교육 칭호'를 읽게 되면 모두 일어서서 차렷 자세로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찌무라 선생은 천황도 사람인데, 거기에다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찌무라는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우찌무라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묻자
"나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에 관심이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더 큰 영광이외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약속한 사람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승리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의 약속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충성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한 마리에게는 사냥을 가르치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집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사냥꾼은 사냥하여 온 것 중에서 한 몫을 언제나 집지키는 개에게 주곤 하였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냥개가 집 지키는 개에게 항의를 하였다.
"내가 고생 고생하여 잡아온 것을 너는 아무 일도 안하면서 먹다니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집 지키는 개는 대답하였다.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주인한테 하렴. 나는 네 것을 먹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을 먹는 거란 말이야."
불란서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詩)로 유명합니다.이 아름다운 시 속에서 어미 새 펠리컨이 등장합니다.
어미 새 펠리컨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 새들을 해변 위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불구하고 어미 새는 단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맙니다.
여행에 지친 어미 새 펠리컨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 떼들은 어미 새에게로 몰려갑니다.
그러자 어미 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합니다.
다음 순간 어미 새는 해변 위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놓습니다.
어미 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 새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들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헌신일 것입니다.
예수는 내 삶의 주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결단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관리인, 일꾼”이라고 합니다.
‘일꾼(ὑπηρέτης)’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그 당시 로마시대 전투를 하는 배 가장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 중에 가장 천한 노예입니다.
주인의 명령,
배의 함장의 명령에 따라 일할 수 밖에 없는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이요 종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는 그러한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은 자라고 알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파벌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사람이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하나됨을 깨트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아볼로도, 베드로도, 바울인 나 자신도, 그리고 여러분 모두도 다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신분을 분명히 알려 주고자 한 것입니다. 편이 나누어져 다투고, 싸워서는 안되는 모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같은 일꾼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인이 되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맡는 관리자’라는 말은 ‘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이며 큰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 관리자, 집사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일꾼 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충성, 신실성이란
하나님이 믿을만한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구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 충성스런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잘 하기를 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기쁨이 되는 행동과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들 가운데 주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험담과 미움, 시기와 불순종으로 어렵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하나됨, 화목함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오래참음으로 마지막에 선을 이룹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 2:10절에도“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의 평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작은 일” 이라 했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단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잣대는 부정확합니다.
잘
했다고 칭찬해도 너무 으슥해하지 말고, 잘못한다고 비난해도 너무 좌절과 분노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사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스스로 착각하여 우쭐해지기도 쉽고 열등감에 빠져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고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자기 스스로의 평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그럼 진정한 평가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일상을 24시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까칠해보이고, 깍쟁이처럼 보이고, 뺀질뺀질해 보여도, 다른 곳에서는 후덕하고, 사랑이 많고,
섬기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못 보는 감추인 부분들을 다 드러내어 최종적인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 마음의 뜻이 어떠한지 중요하게 평가하십니다.
여기 “마음의 뜻”이란 마음의 동기를 말합니다.
무슨
동기로 일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동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의도를 보십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일들을 하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보기에는 의심쩍고, 겉으로만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그 마음의 동기와 속을 보시고 바르게 평가하십니다.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 앞에서 이뤄집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
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신분, 우리의 신분과 사명은 그리스도의 일꾼,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명령대로 함께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는 자임을 기억하시고 하나됨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할 자격과 능력이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의 속 마음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 드러내 심판하실 자는 심판하시고 상 주실자는 상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영혼을 살리고, 세우고,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 할 것임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스틸러(scene stealer)? 후페레테스(ὑπηρετης)?
Scene Stealer란 관심을 독차지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ὑπηρέτης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은 지위와 명성에 대한 열망이 있다.
명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치다.
가끔은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으며 살고자 한다.
화려한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 주연이 못되어도 괜찮다.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조연이지만 scene stealer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발군(拔群)의 연기력이나 독특한 캐릭터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받은 조연(助演), 즉 ‘신스틸러(scene stealer)’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이신 그리스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신 스틸러’, 즉 주연 못지않은 조연 연기자가 아니다.
사실 아담은 신스털러 1호였다.
유발 하라리가 쓴 책 제목처럼 신이 된 인간, 즉 호모데오스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청지기요 조연 주제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죄를 범하였다.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이다.
David Zweig(데이비드 즈와그, 언론인이자 작가)는 그의 책 'Invisibles'에서 딴지를 건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 가치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외부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매우 뛰어난 능력이다. 묵묵히 맡은 일에 몰입하는 것이 나를 위대하게 만든다.
일꾼에 해당하는 ‘ὑπηρετης’(후페레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자인 Hermes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말하는 신으로 여기고 헤르메스라 부르는 일이 있었다(행 14:12).
휘페레테스는 제우스의 뜻을 행하는 자, 그래서 자기 배후에 제우스의 권위를 지닌 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자가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가 권위자이기에 사자도 또한 권위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비교에 의해 내려졌다.
고린도전서 4:1에서 ‘사람이 마땅히 여길지라’는 호소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식하길 원한다.
여기에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굳이 사도, 선교사, 목회자, 박사라는 군더더기를 달지 않아도 된다.
일꾼이 강조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높아져야하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를 비교하는 배경에는 더 훌륭하다, 더 좋다는 비교의식이 빼어있다.
바울은 이런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 그리고 선호하는 호칭과 대조적으로 일꾼과 맡은 자라는 실질적인 지위와 호칭을 제시한다.
‘일꾼’은 종 또는 하수인(subordinates)이다.
‘맡은 자’는 관리인(estate-manager) 혹은 청지기(steward)다.
과거 조직 리더에게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소통은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다.
선배 리더는 ‘답’을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이때 후배는 ‘선배의 명령’에 큰 신뢰를 보내고 상황 판단에 대한 권한을 선배에게 위임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선배 리더가 아니라 주인이요 왕이다.
우리는 후배 정도가 아니라 일꾼이요 종이다.
주인의 권위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휘페레테스의 자세다.
휘페레테스는 종교에서 제사를 돕는 사람을 나타낼 때 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이 용어는 친구를 위해서 무엇인가 안정되도록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복종을 받아들이고 봉사한다는 뜻이 언제나 초점이다.
영화 ‘친구’의 명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늘 한수 위인 친구 유오성에게 장동건이 불쑥 던진 말은 ‘내가 니 시다바리가’이다.
일본말 시다바리는 ‘아랫사람, 부하, 조수’가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이다.
왕의 일꾼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는 사역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와 다르다. 휘페르테스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어떤 이를 돕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군이 왕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철저하게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족하다.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는 일꾼, 선임 일꾼, 수석 일꾼 같은 사족이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화려한 수식어에 매료되고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냥 왕의 사람이면 된다. keyman, 즉 중심인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요 인사, 핵심 인물, 특정인, 오른팔, 좌청룡과 우백호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좌청룡 우백호가 있었으니, 바로 마에케나스와 아그리파였다.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일꾼들이 모세에게 아론과 훌과 같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단언한다. 이것이 일꾼의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남들이 알아주면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알아주느냐 아니냐에 목숨을 거는 자가 아니다. David Zweig는 'Invisibles'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 일꾼의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이나 기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도 좋다. 그리스도께서 알아주시면 오케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체에 성취감과 기쁨을 얻으면 만족스러운 것이다. 일꾼이 세상에서 박수 받고 상을 다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없다(마 6:1-2).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백배의 복을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30).
일꾼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이다. 영화 ‘다이하드’를 보면 주인공 John McClane은 땀과 피로 얼룩진 런닝만 걸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부단히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그 이유를 묻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이어서 고생스럽고 힘든 일은 가급적 남에게 넘기고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담도 그랬다. 맡겨진 일에 만족하고 충성하였다면 선악과에 먹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의 제안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면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영생불멸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찾아 하고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엔 '신사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최측권(最側權)에서 보좌한 자를 말하지 않는다.
일꾼은 과거에 불법과 편법으로 주군을 모시다가 증언 혹은 배신을 때리는 가신, 최측권, 집사와 다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최고의 지도자로 손꼽는 바울,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문고리 3인방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일꾼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일꾼인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비저블이다.
'인비저블(Invisibles)'은 "투명인간"을 말합니다.
투명인간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일에 조용히 매진하면서 깊은 성취감을 얻는 이들이다.
허황된 인정 욕구와 질투의 감정에 주목하면서 이런 흐름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대부분 사람은 일에 성공할 때 주목을 받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선지자 요한은 한참 인기가 절정에 이를 때 자신은 쇠하고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될 그리스도는 흥하게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 쇠하는 존재로 선언한다.
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다.
둘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일꾼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군은 해야 하는 일을 즐기는 자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기 살기로 감당하는 자다.
자신이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 분야에서 일하라는 조언은 독이 될 수 있다고 William MacAskill가 ‘냉정한 이타주의’에서 말한다.
이는 좋아하고 관심을 가진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바뀌기 까닭이다.
심리학자 Daniel Gilbert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변하기 때문에 절대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 즉 해야 할 일을 즐겁게 감당하는 종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을 보라.
해야 할 일이지만 익숙지 않고 어색하고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힘들고 짜증스럽고 종이라고 무시 받고 어려움이 많아도 이 일은 주인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기에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경영인으로 인정하고 알아 준 것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게 될 때 100%의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변명을 할 때는 좋아하지 않은 일이라, 즉 주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므로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과 함께 형벌을 받는다.
'용비어천가' 제1장에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라는 말이 나온다.
일은 ‘하늘이 주신 복된 노동’이다.
또 ‘이루다(成)’의 어근 ‘일’은 명사로서 ‘일(事)’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일의 목적은 이룸에 있고, 이룸이란 뜻하던 일의 완성에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과 일꾼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 제자가 될 수 있다.
야구선수들의 특징을 줄줄 외우고 있는 야구광이 스포스용품 가게를 내는 것과 성공하는 것은 다르다.
본인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일꾼이 되는 것과 일을 잘할 능력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잘한다는 것도 다른 문제다.
명성과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일꾼은 자질과 함께 훈련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라 자세가 중요하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실적보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즉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으로 감당하는 일꾼에게 칭찬이 있다.
판단(判斷) -
1. 다른 사람의 판단 : 눈치를 보는 것, 자기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므로 실속이 없다.
예를 들면 연예인이 인기가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자주 일어난다.
2. 자기 성찰을 위한 판단 : 너 자신을 알라!
후회 없는 삶을 위한 것
3. 주님의 판단 : 상급을 얻는다
최선을 다하였는가? 문제는 의롭다 할 수 있는가?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09-14-2022(수)
육신과 영(고린도전서 5:5)
-
육신(肉身)(4561) - σάρξ, σαρκός, ἡ
발음 / 사르크스(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 4563. σαρόω
1. 쓰다, 2. 깨끗하게 쓰다, 3. 마태복음 12:44
발음
/ 사로오(sarŏ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άρωσα, 제1부정과거수동 ἐσαρώθην, 완료수동분사 σε- σαρωμέ νος, σαίρω ‘솔질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청소되다(마 12:44, 눅 11:25), 쓸다(눅 15:8)
신약 성경 / 3회 사용
-
영(靈)(4151)
발음 / 프뉴마(pnĕnuma)
어원 / 415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성령(마 4:1, 막 1:10, 눅 2:27), 심령(마 5:3, 눅 1:17), 귀신(마 8:16, 눅 4:36,
요 16:18), 마음(마 26:41, 막 8:12),
영혼(마 27:50, 눅 23:46, 요 19:30), 중심(막 2:8), 하나님의 말씀(행 18: 5), 영(눅 24:37, 39, 엡 1:17), 빛(엡 5:9), 한마음(빌 1:27),
기운(살후 2:8), 바람(히 1:7), 생기(계 11:11, 13:15).
- 신약 성경 / 379회 사용
관련 성경 / 불다(마 7:25, 요 3:8, 계 7:1). [명] 바람(행 27:40)
신약 성경 / 7회 사용
음행(淫行)
πορνεία, ας, ἡ 4202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포르네이아(pŏrnĕia)
- 어원 / 420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 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 신약 성경 / 25회 사용
발음 / 포르네우오(pŏrnĕuō)
- 관련 성경 / 음행하다(고전 6:18, 10:8, 계 17:2, 18:9), 행음하다(계 2:14).
- 신약 성경 / 8회 사용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요한계시록 17: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의 의미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란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말합니다.
남,녀간의 성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음행의 문제를 살펴보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현대문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음행에 대해선 오늘 본문 외에도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18-19절, 그리고 갈라디아5장 19-21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의 한자(고린도전서 6:9-10)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 것(고린도전서 6:18)
고린도전서 6:9-10, 18-1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일(갈라디아서 5:19-20)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음행(淫行) : 음탕하고 난잡한 짓
음란할 음(淫)
1. 음란하다, 2. 지나치다, 3. 담그다, 4. 방탕하다, 5. 넘치다
다닐 행(行)
1. 가다, 2. 행위, 3. 줄, 4. 행실, 5. 대열(隊列)
πορνεία, ας, ἡ 4202 - 포르노(Porn)
발음 / 포르네이아(pŏrnĕia)
음행이란 단어가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구약에서 20, 신약에서 25
민수기 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성경에서 처음의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와 성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음행은 땅을 어럽게 하는 큰 음녀 즉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음행이란 육체적인 죄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일 듯이 달려든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며 율법으로 정죄하는 것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며 그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성령 훼방 죄"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31, 마가복음 3:2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성(性)범죄에 대한 성경적 고찰
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간음(姦淫)은 타인의 아내, 또는 남편과의 부정한 성(性)행위를 말하고, 음행(淫行)은 불법적 성행위를 말한다.
1. 간음(μοιχεία)
간음은 헬라어로 μοιχεία(모이케이아)며 μοιχὁς(모이코스)에서 왔다.
어근은 μἱχ(믹)으로 ‘안개’, ‘어둡다’, ‘어두침침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의 파생어는 다음과 같다.
ὀμίχλη(호밀클레) : 안개, 어둠, 구름 낀(구름). a mist, fog
μοιχὁς(모이코스) : 간음자(눅 18:11; 고전 6:9; 히 13:4; 약 4:4)
μοιχαλίς(모이칼리스) : 간음한 여자, 간부(마 12:39,16:4; 막 8:38; 롬 7:3; 약 4:4; 벧후 2:14)
μοιχάομαι(모이칼로마이) : 간음하다
μοιχεία(모이케이아) : 간음(마 15:9; 요 8:3; 막 7:21; 갈 5:19)
μοιχέυω(모이큐오) : 간음하다(마 5:27,28; 막 10:19; 눅 16:18; 요 8:4; 롬 2:22; 약 2:11; 계2:22)
2. 음행(πορνεία)
음행은 헬라어로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며 어근은 περ(펠)로 ‘팔다’를 뜻한다.
동사 περἀω(펠아오)는 물건과 같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한다.
περ(펠)에서 유래한 근의어는 다음과 같다.
περάω(폴라오) : 몸을 팔다.
πόρνη(포르네) : 창녀
πόρνος(포르노스) : 음행자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 : 음행
ἐκ πορνέομαι(엑크 포르네이오마이) : 음행하다
간음과 음행에 관련된 마태복음 5:28에 의하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 19:9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2:14에 나온 행음(πορνεία)이 영어성경에는 fornication(음행)으로 되어 있으나 간음(μοιχὁς)과 음행(πορνεία)을 혼동해 병행해서 사용된다.
행음(行淫)의 헬라어 πορνεῡσαι(포풀뉴우스아이)는, 단순과거 가정법으로 ἐδίδασχεν(에디다스켄: 가르쳐)을 설명하는 보족어로 사용되며, 이 단어의 명사형 πολνεία(폴네이아)의 어근 περ(펠)은 ‘팔다’를 뜻한다. 동사 περάω(펠아오)는 물건과 같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한다. 헬라어 περ(펠)에서 유래한 용어는 περάω(폴라오: 몸을 팔다), πόρνη(포르네: 창녀), πόρνος(포르노스: 음행자), πορνεία(포르네이아: 음행), ἐκπορνέομαι(엑크포르네이오마이: 음행하다) 등이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음행에 대하여
1. 음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전 6:9; 갈 5:19-21; 엡 5:5,6; 골 3:6; 살전 4:3-8; 히 13:4; 유 1:7; 계 2:20-22; 21:8; 22:15)고 기록하고 있다.
2. 음행을 금지한 규례를 범한 자는 죽이라고 했다.(레 18:20-30; 20:10-12, 14-15, 16,17, 20,21; 신 22:21,22, 24-25; 신 22:22-27; 요 8:5)
3.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엡 5:3)
4.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5. 음행을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질 터이요, 큰 환난에 던지고, 그의 자녀를 죽인다.(계 2:20-23)
6.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8. 음행을 영적(靈的)으로 해석하여 우상숭배로 대칭했다.(민 25:1-7; 호 2:1)
9. 이방의 동화(同化)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계 14:8; 17:2-4; 18:3; 19:2)
한글 개역 성경에서 간음과 음행으로 번역된 구절
* 간음 - 마 15:19; 막 7:22; 요 8:3.
마태복음 19:9의 ‘음행한 연고 외에’(μή ἐπί πορνεία)는 신명기 24:1 ‘수치되는 일’(ד ת, 에르와트 다바르)을 인용한 것인데, ‘몸을 수치스럽게 드러냈다’를 뜻하며 음행을 지칭한다. - 창 7:22,23; 출 20:26; 겔 16:36,37; 신 23:4,5; 레 18:20
* 음행 - 마 5:32; 19:9; 행 15:20,15:29; 21:25; 고전 5:1; 갈 5:19; 엡 5:3; 계2:21; 9:21; 14:8; 17:2, 17:4; 18:3; 19:2
⦁ 음란 : 마 15:19; 막 7:21; 요 8:41; 고전 6:13; 고후 12:21; 골 3:5; 살전 4:3
⦁ 추악 : 롬 1:29. 사악한 기질(악의)
⦁ 부정, 불법, 죄악 : 마 22:18; 막 7:22; 눅 11:39
* ‘수치되는 일’은 이혼의 조건이 되었는데 미쉬나(Mishnah)에 세 가지 학설이 있다.
Shammai 설(70인 공회 부회장) : 음행을 하지 않으면 이혼하지 말고 음행하면 이혼하라.
Hillel 설(70인 공회 회장) : 아내가 남편에게 식사를 잘못 제공하면 이혼하라.
Akiba 설(교법사로서 학문의 최고 권위자) : 자기 아내가 보기 싫을 때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가 나타나면 아내를 버리고 장가들라.
위 학설은, 예수 당시 바리새인의 이혼설로 서로 논쟁이 되곤 했다.
바리새인이 예수께 와서 시험한 것은 예수가 세 학설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지를 알아내고 상호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이 질문에 대해 인간의 창조원리를 말씀하며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마 19:4-6)
성(性)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2.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3. 네 어머니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7)
4. 네 아비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7)
5. 네 계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8)
6. 네 자매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7. 네 아비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8. 네 어미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9)
9. 네 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0)
10. 네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0)
11. 네 계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1)
12. 네 고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2)
13. 네 이모의 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2)
14. 네 아비의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4)
15. 네 자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5)
16.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6)
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라(레 18:17)
18.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7)
19.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그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라(레 18:18)
20. 여인이 경도로 불결할 동안에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 18:19)
21. 타인의 아내와 통간(通姦) 하지 말라(레 18:20)
22. 너는 여자와 교합 함과 같이 남자와 교합(交合)하지 말라(레 18:22)
23.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레 18:23)
24.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레 19:29)
25.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3)
26.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신 22:5)
27.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신 23:17,18)
28.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1)
29.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합 2:15)
30.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31.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32.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
33. 음란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34. 음행을 피하라.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35.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 7:5)
36.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엡 5:3)
37.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음행자의 멸망에 대한 성구
1. 싯딤에서 모압 여자와 음행할 때 하나님이 염병으로 쳐 이만 사천 명이 죽음(민 25:9)
2. 아내를 취한 후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임(신 22:20,21)
3.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通姦)할 경우 그 통간한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였음(신 22:22; 레 20:10)
4. 처녀가 약혼한 후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 하면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였음(신 22:23,24)
5.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할 경우 그 강간한 남자를 죽였음(신 22:25)
6.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는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50 세겔을 주어야 했음(신 22:29)
7. 음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갈 5:19-21; 고전 6:9)
8.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고 했음(엡 5:3)
9. 음란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골 3:5,6)
10.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유 1:7)
11. 간음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심(계 2:22)
12. 땅의 왕들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짐(계 18:3)
13.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함(계 19:2)
14.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일 시간에 망함(계 18:9,20)
15.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죽였음(레 20:10)
16.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한 것이므로 둘 다 죽였음(레 20:12)
17. 누구든지 자부와 동침하는 자는 둘 다 죽였음(레 20:13)
18. 여인과 교합(交合)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한 것이므로 반드시 죽임(레 20:14)
19.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범하면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살랐음(레 20:14)
20.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그 짐승도 죽였음(레 20:15)
21.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면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반드시 죽였음(레 20:16)
22.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면 민족 앞에서 끊어졌음(레 20:17)
23.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경우 죄를 당했음(레 20:20)
24. 백숙 모와 동침하면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자식 없이 죽었음(레 20:20)
25.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한 것이 되므로 자식을 얻지 못했음(레 20:21)
26. 여호람이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함으로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와 죽음(대하 21:18)
27.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면 하나님이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품(시 50:18,21)
28. 음녀로 인하여 한 조각 떡만 남게 될 것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하는 자다(잠 6:26)
29.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하나님이 심판함(겔 23:4-38)
30.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함(히 13:4)
31.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32.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음(벧후 2:6)
33.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음란하여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됨(유 1:7)
성경에 나타난 음행자
1. 소돔의 백성들이 천사와 상관(相關)하여 동성애(Sodomites)를 하려고 함(창 19:5)
2. 롯의 두 딸이 롯을 술 취하게 한 후 아비와 동침함(창 19:30-38)
3.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함(창 34:1,2)
4. 르우벤이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함(창 35:22)
5. 오난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설정한 것이 여호와의 목전에 약하였기에 그를 죽임(창 38:9)
6. 다말이 그 시부 유다와 동침함(창 38:14-18)
7.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음행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처형함(민 25:6-15)
8.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함(민 25:1)
9.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을 보고 음행함 (삿 16:1)
10.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함(삼상 2:22)
11.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함(삼하 11:4)
12.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함(삼하 13:14)
13.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함(삼하 16:22)
14. 호세아의 처 고멜이 결혼 후에도 음탕한 짓을 행함(호 1:2)
15.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탕했던 여자가 회개함(눅 7:36-39)
16.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음(요 4:18)
17. 순리를 역리로 사용한 이방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음(롬 1:26,27)
18.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께서 사해 주심(요 8:1-11)
19.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고전 5:1)
20. 이세벨의 행음(계 2:20)
음행에 대한 제 학설
King James 역은 fornication, The Emphasized New Testament는 unfaithfulness, R.S.V.는 unchastity, The New Testment: A New Translation(Olaf M.Norlie)은 adultory, New International Version은 marital unfaithfulness, Good News for Modern Man은 unfaithful로 번역했다.
몇 가지 학설
1) H. Baltensweiler 설 : 레위기 18:6-23에 금지된 죄, 하체에 대한 범죄를 말함(Baltensweiler, Die Ehe im Neuen Testament, 1967, p. 93;
J.A. Fitzmyer, “The Malthean Divorce Texts and some New Palestinian Evidence”, Theological Studies, 37, 1976, pp. 208-211).
2) Mark Geldard 설 : 혼인 전 성 행위를 말함(Geldard, “Jesus Teaching on Divorce”, Charchman 926, 1978, 134-143).
3) T. V. Fleming 설: 간음(Fleming, “Christ and Divorce”. Theological Studies, 24, 1963, p.109), 이 학설은 예레미야 3:8,9에 의함.
4) Joseph Jensen 설 : 넓은 의미의 제반 성적범죄를 말함(Jensen, Does Mean Fornication? pp. 161-184; William Hendriksen, The Gosple of Matthew, pp. 716-717).
5) R. K. Harrison 설 : 자진해서 갖는 남녀의 성행위를 말하며, 간음은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인과 정욕적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함(Harrison, Encyclopedia of Biblical and Christian Ethics, p. 158).
간음하지 말지니라
예수는 음행에 대해 가르치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 5:28)고 했고, 음란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마 15:20; 막 7:21) 음행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눅 16:18)고 했다. ‘간음하지 말라’고 강조했고(마 19:18; 막 10:19; 눅 18:20), 음행하는 사마리아 여자를 회개시켰으며(요 4:3-26)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될 음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살려 주었다.(요 8:4-11)
사도 바울은 결혼 전, 부정한 성행위를 금했다.
고린도전서 7:1, 2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다. 바울은 음행을 말할 때, 혼전 성관계(고전 6:18; 7:1-2), 불의의 성관계(고전 5:1), 동성 관계(롬 1:26-27), 포욕(살전 4:6) 등도 언급했다.
고린도전서 6:9-10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 10인이 나열되었다.
① 음란하는 자
② 우상숭배 하는 자
③ 간음하는 자
④ 탐색하는 자
⑤ 남색 하는 자
⑥ 도적질 하는 자
⑦ 탐람 하는 자
⑧ 술 취하는 자
⑨ 후욕 하는 자
⑩ 토색 하는 자
동성애 성(性) 행위가 창궐한 이때, 죄를 증오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도록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간음과 음행에 대한 해결책
1. 정욕적인 눈빛이나 접촉을 근절시켜야 한다.(잠 10:31; 마 5:27-30; 롬 6:6; 8:13; 골 2:11; 3:11)
2. 지체에 대한 자아 부인이 요구된다.(눅 9:23; 롬 6:13; 벧후 3:17; 잠언 1:10; 4:14)
3. 회개함으로 지옥에 던지게 되는 것에서 돌아서게 한다.(삼하 12:13)
* 위의 글은 이상찬 박사 저. 아시아 일곱교회(도서출판 두레마을, 1989년)와 목회자를 위한 산상수훈(도서출판 두레마을, 1990년)을 토대로 발췌, 정리했다.
* 형법 제 32장 강간(强姦)과 추행(醜行)의 죄
제297조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제298조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99조 【준 간강, 준 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전 2조의 예에 의한다.
제300조 【미수범】 전3조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제301조 【강간 등 상해. 치상】 제297조 내지 제300조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상해하거나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301조의 2 【강간 등 살인. 치사】 제297조 내지 제300조의 죄를 범한 자가 사람을 살해한 때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302조 【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 자에 대하여 위계(僞計) 또는 위력(威力)으로써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303조 【업무상 위계 등에 의한 간음】 ①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부녀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4조 【혼인빙자 등에 의한 간음】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僞計)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5조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13세 미만의 부녀를 간음하거나 13세 미만의 사람에게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301조 또는 301조의 2의 예에 의한다.
제305조의 2 【상습범】 상습으로 제297조부터 제300조까지, 제302조, 제303조 또는 제305조의 죄를 범한 자는 그 죄에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제306조 【고소】 제297조 내지 제300조와 제302조 내지 제305조의 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음행이란 단어는 헬라어 포르네이아(πορνεια)를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말합니다.
B F 웨스트 콧은 음행을 ‘불법적 성관계’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와 동성결혼 등은 이전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최근엔 합법화되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법적 차원보다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질서에 근거해 음행을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에 관해 하나님이 정한 질서는 이렇습니다.
창세기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여섯째 날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서로 다른 성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남녀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결혼을 의미합니다.
결혼은 남녀의 성적 관계를 허용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혼으로 연합된 남녀 두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녀의 출산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혼하고 부부가 된 두 남녀 사이에만 성적 관계를 허용해주셨습니다.
부부의 성적 관계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 한 몸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
둘째는 자녀를 얻는 기쁨
만일 성적 관계가 공부나 일처럼 하기 싫고 힘들기만 하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적 나눔에 쾌감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쾌감을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맛을 느끼지 못하면 먹는 게 지루하고 고통스런 일이 될 겁니다.
그러면 안 먹으려고 할 겁니다.
아이들이 채소를 잘 안 먹는데 아직 그 맛이 좋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크면서 맛을 알면 잘 먹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쾌감을 느끼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자 성적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처의 부부만 성관계를 허용하셨는데, 타락한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육신의 쾌감을 느끼는 수단으로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음행입니다.
예를 들면, 비 혼인관계에 있는 남녀의 성관계인 간음,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인 간통, 돈을 주고 관계를 맺는 매춘, 여러 사람이 관계하는 혼음, 동성애, 스와핑 등 이런 게 모두 음행입니다.
범죄로 인간의 심성이 부패해진 후 남녀의 성관계는 가장 오용되고 오염된 것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펼쳐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동안 괜찮다고 존경받던 인사들인 유명 방송사의 메인 앵커, 국회의원, 주지사,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성추문에 연루된 사람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시긴 했지만, 우선 여기선 행동으로 옮긴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 합시다.
음행은 어떤 고린도교인이 “그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나이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젊은 계모만 남았습니다.
아들에게 친 어머니가 아니고 자기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적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다윗 왕이 늙고 병들어 주로 침실에 누워있을 때 신하들이 왕의 침실 시중을 들라고 처녀 아비삭을 궁에 들였습니다(왕상 1:2).
생전에 다윗왕은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죽은 후,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가 아비삭을 자기 아내 삼고 싶다며 솔로몬에게 허락을 받아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2:17).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구나이카(γυναικα)는 여자, 아내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경엔 아내로 번역되어 있는데, 아비삭처럼 정식 부인이라기보다 그냥 아버지의 여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 그 여자를 취한 걸 보면, 여자로서 매력 있는 미인이거나 혹시 돈 많은 과부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운데도 아버지의 여자를 취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다 범했더라도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들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어떤 요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이 교인 중에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한탄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걸 보면, 이 일은 교인 사이에도 이미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염려한 것은 이렇게 되면 다른 교인들까지 음행의 유혹에 빠져 교회가 문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6절의 누룩 이야기는 바로 그 뜻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죄를 다루는 목적은 교인들이 죄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교회에 죄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물리치라고 한 것은 죄를 부인하며 은폐하지 말고 회개하고 용서받아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걸 알지만 서로 한 교인으로 지내며 교제하던 사람인데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때까지 교제를 단절하겠다거나 교회에 나오는 걸 금하겠다고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자기 가족 중에 누가 잘못해서 교회의 징계를 받게 되면 다른 사람의 없는 죄까지 들추며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교회가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권징은 당사자나 교회 모두 유익하도록 기도와 지혜로 잘 시행해야 합니다.
음행의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성적으로 개방된 문화 속에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맺을 유혹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서 죄를 방치해서 다른 교인까지 그래도 괜찮다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문제가 발행했을 때는 가능한 빨리 회개하고 회복되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모두 협력해야 합니다.
셋째로 음행은 신앙생활은 물론 인생을 망친다는 걸 유념합시다.
최근 미투 운동에서 보듯 어렵게 올라간 자리에서 수치를 당하며 내려와야 하고 가정도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음행도 용서받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걸 은폐하려고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여 용서받게 해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음행의 죄가 있으면 지금 당장, 아니면 이번 한 주 동안 진심으로 회개하며 용서받고 새 출발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경우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경우로 다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내가 그 해당사회의 법을 따르고 도덕을 지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도 아니고 양심의
문제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속한 사회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의 선과 악의 섭리를 통하여 움직여지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나의 경기장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이 속한 사회는 모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다른 가치관에 따라 어느 나라는 마약을 해도 되고 어느 나라는 안 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는 간통이 죄고 어느 나라는 죄가 되지 않는 이러한 각 사람이 처하고 있는 상황 윤리적 환경은
각각 하나님이 택하신 그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함을 향해가는, 혹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을 합니다.
악이
있을 때에만 선이 분별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므로 그 각 사람이 속한
사회의 법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의 가치관이 변하면 법도 변하고 전에는 지켰던 것을 법이 변하면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인생들의 가치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법은 그렇게 나그네가 어떤 동네에 들어가서 그
동네의 규칙을 따라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는 없습니다.
영적인 질서 상에서 아비란 먼저 된 자, 즉 전도자를 말합니다.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전도를 하게 되면 전도의 열매로 처음 맺은 피 전도자는 전도자의 선택받음을 증명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이 그 전도자에게 함께 했다는 표시가 바로 처음 전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전도된
사람은 그 전도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돕는 자'를 '아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솔로몬이 '처와 첩을 많이 두었다'라는 표현은 '직접 돕는 자와 간접적으로 돕는 자를 많이 두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 개인을 돕는 성령도 그에게 있어서 아내로 표현 되며 피 전도자도 아내로 표현 됩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젊어서(전도자의 상태에서) 얻은 아내를 기뻐하라." 혹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집 내실에 있는 아내"라는 말에서 '집'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지은 내 마음 안에 지어진 집이고,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해야 하며,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의 내실에 있는
아내는 성령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음행은 이러한 질서 안에서 남의 아내, 즉 남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전도자에게 돕는 자로 주신 사람이므로 그를 데려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파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파가 일고 서로 사람 빼앗기 경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이런 음행은 이방인들도 안 한다"고 한 것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는 이들도 육신적으로 그와 같이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 음행에 관한 규례를 굳이 들여다보고 참고할 필요도 없이 각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육적인 가계도 안에서의 육체의 성적인 질서를 영적인 질서에 적용을 하면 바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육체적인 도덕적 양심이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규를 하나님의 진리와 혼합하여 사고하며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섞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법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 살므로 가이사의 법을 따르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사회에 살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했을 때 집총거부니, 병역거부니, 탈세니 하는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몸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서 가이사의 것을 사용하고 있으니 가이사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가이사의 것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유물' 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데 어찌 하나님이 당신의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을
빌미로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달라고 하셨지 돈을 가져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의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육에 속한 것을 가져오게 한 것이
헌금입니다.
영적인 나라에 어찌 육적인 규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행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함께 폐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율법을 세웠는데 행위의 율법을 다시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음행인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오늘날 ‘기독교’가 행하고 있는 음행에 관하여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낙태’, ‘수혈’등에 대한 교계의
‘의사표명’입니다.
낙태를 하는 것에 찬성을 하는 것이 옳은가, 반대를 하는 것이 옳은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에 대하여 성경의
이름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음행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재산 나누는 자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산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이 살지 못하면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습니까?
당신의 부모의 육적인 욕구를 발현한 행위의 결과로 당신이 나온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도 흙이며 당신도
흙입니다.
흙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바르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의 기준과 육신들이 만들어 놓은 윤리적 선의 기준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의 법과 육체의
법이 어떻게 섞일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
아이를 배고 낳았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제 영이 사는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와중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되지
못하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그냥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의 윤리적 선에 대한 의견을 교계가 표명한 것이며, 그 표명의 근본에는 ‘세상에 속하려는 마음’이 그 지도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의 사회적 윤리란 하나님의 선을 따라가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그에 대하여 의견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이렇게 의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마치, 사람이 동물세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대하여 인생들의 윤리적 선을 적용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에 대하여 형법을 적용하여 ‘살충 죄’를 적용하고 도덕과 관습법을
적용하여 ‘친고죄’ 나 ‘배은망덕’ 이라는 도덕적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는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낙태를 하든지 말든지, 수혈을 받든지 말든지, 군대를 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단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속하여 사는 흙으로 돌아갈 인생들의 일이지 결코 영에 속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부정한 인생들의 윤리 책으로 변질시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면책이라는 단어 ‘토카하트’는 훈계와 징계를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큰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계속 덮어주었을 때 결국 그 허물로 인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게 분명하다면 사랑의 용기를 가지고 그 잘못을 훈계하고 징계하여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오히려 그냥 덮어주고 뒤에서 챙겨주는 사랑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스승을 넘어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음을 이야기하며 마치 부모가 그 사랑하는 자녀를 훈계하며 매질하듯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5장부터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심각한 음행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특히 그 음행은 하나님의 법도를 모르는 이방인들 가운에서도 없는 음행이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여 들인 사건입니다.
여기서 계모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어머니를 취하였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모라고 해도 아버지의 아내로서 자신에게 어머니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통한히’라는 단어는 ‘펜데오’라는 단어로 ‘슬퍼하다’, ‘애통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음행의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그 사실에 슬퍼하거나 애통함이 없이 여전히 자신들은 신령한 공동체라 자부하는 교만함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그런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쫒아내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무런 치리의 조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는 성적타락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제자삼지 못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혹은 그 사람이 참 회개의 열매 없이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가능성은 그들이 구원에 있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은혜를 오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4장에 고린도교회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이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없지만 5장 서두의 문제들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쾌락주의적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활보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 사상적 뿌리들이 초대교회에 나타나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물질은 악하고 영적인 것만 선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물질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는 더 악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더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잘못된 교리적 주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죄악된 길로 미혹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에 극단적 자유방임 혹은 도덕 폐기론자들이 생겨서 교회의 일원이 된 뒤에 어떤 죄를 짓더라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도 그중에 속한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에도 어떤 이단들은 영지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한 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회개를 하거나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굉장히 달콤하게 들리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칭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성화의 삶을 살며 우리가 받은 구원을 완성해가고 또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삶으로 증거 해가는 치열한 자기부인의 현장입니다.
이런 성화의 삶을 부정하는 구원론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욕보이는 인간의 욕심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과 이유를 따라 때론 넘어질지라도 일어나 계속해서 그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자이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면죄부처럼 여기며 자기 정욕을 따라 죄악된 길을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원받았다하고 정욕을 따라 방종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런 문제가 있을 당시 고린도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서도 아비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이 문제가 생겼을 때 통한히 여기며 슬퍼하고 돌이키지 않았지만 도리어 멀리 떨어져 있던 바울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3절에 몸은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이야기는 바울이 고린도에 육신으로 함께 있지는 않지만 그 모든 상황들을 알고 함께 있는 자 이상으로 마음을 쏟고 이 일을 숙고하였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여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본문 2절에 ‘너희 중에서 쫒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는 표현이나 맥락을 살펴보면 ‘출교’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도 짓지 않는 음행을 저지르고 또한 아무런 회개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교회에서 내보내는 최고의 권징 곧 ‘출교’시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교는 단순히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출교를 함으로써 먼저 교회가 어떤 공동체임을 나타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음행하는 자가 회개하지 않고 뻔뻔히 죄악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그런 자를 내어 쫒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성적으로 방탕하고 타락한 공동체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권징을 통해 교회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잃지 않음으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정체성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출교를 당하는 자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회개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치 않는 다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그가 원래 회개하지 않고 단순히 종교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으로 출석만 하고 있던 자이거나
두 번째는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지만 죄에 미혹되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출교가 그에게 어떻게 작용하게 됩니까?
일반적인 치료에서는 쓰이지 않지만 환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심장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를 깨우기 위해 고강도 전기충격을 가하는 제세동기를 사용하듯이 출교는 곧 그의 죽어있는 혹은 잠들어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자기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요 신앙이 있음에도 유혹에 미혹되어 잠들어 있었다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놓고 깊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출교를 통해 그를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끊어버렸지만 그 일을 통해 회개하고 돌이켜 육신의 정욕에 속한 죄악을 멸하고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다시금 구원의 자리로 나아오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쉬운성경에 보면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그 사람의 죄의 본성은 멸망당하더라도 영혼은 우리 주님의 날에 구원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놓지만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의 구원과 회개를 위해 누구보다 더 뜨겁게 가슴아파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마치 매를 맞는 아이보다 매질을 하는 아비의 마음이 더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라면 우리는 서로를 향한 칭찬과 감사의 말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위하여 사랑에서 우러나온 권면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면이 나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몸에 좋은 한약임을 알고 기꺼이 받아들여 마실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순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숙함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출애굽기 12장 15절에는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무교절 지키는 규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함께 이어지는 무교절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안에 누룩을 미리 제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음행으로 인해 악행을 저지른 자를 누룩에 비유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여 진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누룩 없는 덩어리라 부릅니다.
이 말은 만약 이 사람을 출교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누룩이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듯 곧 그의 음행은 교회공동체의 도덕적 기준들을 무너뜨리고 세상 같은 아니 세상보다 더 도덕적 기준이 낮은 악한 공동체로 변질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먹고 이어지는 무교절 기간 누룩을 제거하듯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의 희생으로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면 우리도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누룩 같은 죄악을 방치하지 말고 권징을 통해 제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는 권징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에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죄는 확산성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심각한 죄악을 근실히 징계하고 바로 잡아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때에 8절 말씀처럼 순전함과 진실함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순전함이란 도덕적 순결함을 의미하며 진실함이란 ‘알레데이아’ 곧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히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결과 진리의 공동체로 거룩하여져서 결혼식 단장한 신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발견되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내 삶에 더러운 죄악과 날마다 싸워야 하고 또한 우리 공동체가 직면하는 악함의 누룩을 기꺼이 제거하려는 거룩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보내었던 서신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 말을 오해한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지역은 성적 타락이 극심하였기에 만약 부부의 순결을 깨끗하게 지키는 자와만 사업을 하거나 교제를 한다면 그들의 사회적 입지는 너무나 제한적으로 축소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0절에 그런 자들과 만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쓴 것이겠습니까?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바울이 사귀지 말라고 한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라고 하면서 음행과 탐욕과 우상 숭배와 모욕 그리고 술 취함과 속여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삶을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스스로 누룩을 자처하며 교회를 병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죄악의 자리로 이끌어가는 미혹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내쫒아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해준 말씀을 통해 세상 속 교회의 위치와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상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과 같지 않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촉매(觸媒. catalyst)’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그 자신은 변하지 않지만 다른 물질의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같아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키는 존재로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그 삶이 바로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것이며 영과 진리로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으 소금과 빛으로 촉매 역활을 바르게 감당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다 구원받든가 둘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
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주와 합하는 자(고린도전서 6:17)
* 송사하고 : 2919. κρίνω
발음 / 크리노(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 5:40, 고전 6:6), 비판하다(마 7:1), 심판하다(마 19:28, 눅 19:22, 요 3:17,
계 18:8), 정죄받다(눅 6:37),
판단하다(요 8:16, 롬 2:1), 다스리다(눅 22:30), 심판받다(요 3:18, 벧전 4:6, 계 20:12), 재판하다(요 18:31), 결의하다(행 3:13, 21:25),
작정하다(행 20:16, 고전 2:2, 딛 3:12), 심문받다(행 23:6, 24:21, 25:20), 판단받다(롬 3:4, 고전 11:32), 정죄하다(롬 14:22),
결심하다(고후 2:1).
- 신약 성경 / 115회 사용
영광(榮光) : 불 화(火) + 덮을 멱(冖 ) + 열 십(十)
"예배"란 뜻과 마음과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가치를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배에 대해 생각할 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이는 예배의 참의미를 아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제한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아침식사이든 피자헛에서의 식사이든 혹은 오전 간식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성경은
모든 먹는 행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것들입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실제적이고 인간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성행위를 예로 들어 봅시다.
바울은 음행에 대한 대안은 예배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죽음을 예로 들어 봅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몸의 마지막 행동입니다.
몸은 작별을 고합니다.
이러한 몸의
마지막 행동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더합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유익한 것이라고 여김으로써 죽을 때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여러분에게는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의 전 안에 있습니다.
식사(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죽음(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성행위(고린도전서 6:18-20)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돌이켜 회개하고 전에 옛 사람의 목숨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그 마음에 주님의 성령을 받아 모시고 하나 된 상태를 한
영(靈)이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6:17).
이는 주님의 성령과 나의 영혼이 연합된 것을 말합니다.
기름부음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직분을 위임하고 성령으로인(印)을 치며 죄악에서 완전히 떠난 것을 인준하는 것을 말합니다(출28:41-43. 엡 1:13. 요일 2:27).
또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신(神)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예수께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요 10:34).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떡으로 피를 언약의 피로 제시하시고 이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의 생명을 소유한자이며 이를 먹는 자속에
예수께서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靈)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4, 56, 63).
예수께서 이르는 말씀이 주님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영(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또 주는 영(靈)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은 자유가 있다고 말하여 주님과 성령께서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일체라는
말씀으로 증거 했습니다(요 6:63. 고후 3:17).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성경의 율법의 증언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神)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5).
시편에 아삽의 시(詩) 가운데서도 여호와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말하기를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82:6).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성령을 받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이신 성령과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의 영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에 성령님이 함께하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요 6:63).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과 육신에 있고 세상에 있고 죄악을 행하며 마귀에게 잡혀 그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의 말씀으로 다가오고 생명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 아닙니다(사 14:17, 42:7. 유 1:18, 19).
이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고 그 눈과 귀를 율법의 수건으로 덮어 놓아 주님의 말씀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사 6:9, 10, 29:10-14. 마 13:14, 15. 고후 3:14).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율법의 기능을 몽학 선생이라 후견인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율법으로 자신의 죄악 된 정체성 파악을 하여
죄인된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과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악에서 떠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갈 4:1-4).
그 후에
하나님의 때가 차면 예수님께 나와 구속의 은총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세상에 속한 육적인 목숨과 불의한
죄악과 어둠의 영들과 세상의 우상들을 다 십자가에 드리고 구속을 받아 성령으로 새 생명을 받고 새롭게 되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이
태도가 바뀌는데” 이제는 성령과 하나 된 자들에게는 시편에서 다윗은 주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로 지혜롭게 하며 그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에 정죄하고 어둠가운데 있는 것을
알게 하던 율법이 이제는 오히려 성령님과 함께 생명을 소성케 하며 보호해주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열어 밝히보게 해주는 우리
영(靈)의 생명의 양식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습니다(시 19:7, 8. 요 6:63).
이는
우리가 주님과 그 영 안에 있게 되어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그 율법의 말씀들이 태도가 싹 바뀌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 되어 그 영(靈)이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 연합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일을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고전 2:14, 6:17).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 것을 우리로 알게
하셨습니다(요 14:16-20, 26).
또
우리에게 오신 그 영께서 우리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슥 4:6. 벧전 4:6. 빌 4:13).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셨으며 또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하셨습니다(요일 4:12, 13).
그 결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롬 8:9).
이와 같은 자들은 비록 몸이 있어도 전(前)에
육신의 정욕에 있던 것과 같이 육신의 소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갈 5:16, 17).
이들에게는 그 몸속의 죄에 법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 멸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옛 사람의 죄에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롬 6:7, 14, 7:23)
이제는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 그 영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우리의 몸이 성령님의 전이되어 이제는
우리의 몸이라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죽음을 맞이하셔서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6:19, 20. 갈2:20)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일 뿐입니다(롬 14:7, 8).
이와 같은 자들은 주의 영과 합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어 주와 일치되는 삶을 살게 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마 5:48. 벧전 4:6)
이제
우리는 성령님과 하나 되어 신령한 영혼과 몸으로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또 주님의 말씀인 그
영(靈)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며 산제사 드리는 예배 자가
되었습니다(롬 12:2. 고전 6:20. 벧전 2:5).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사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동반자로 지내야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을 벗어나서 사귀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바울사도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와 불법이
또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사단이 어찌 조화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이고 우리의 신분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17:16. 고후 6:14-18).
우리의
신분은 성령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사랑하여 주님에게서 돌아서면 영적인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합한 자들로 한영인데 주안에는 의롭고 성결하며 거룩한 자들로서 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죄를 범하면 몸
밖에 있던 죄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우리가 다시 옛 사람으로 전락하여 타락한 자가 됩니다(고전 6:18).
그러므로
조심해야하며 우리의 신분이 이제는 주님의 영과 합하여 한영이 되었기 때문에 오직 우리 영혼과 몸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신 사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주님만 위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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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2022(금)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린도전서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위한 대답으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교회 안의 분쟁에 대한 말씀 : 1-4장
음행 : 5장
소송 : 6장
결혼 : 7장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절제(節制) / ἀκρασία, ας, ἡ 192
발음 / 아크라시아(akrasia)
- 어원 / 19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방탕(마 23:25), 절제 못함(고전 7:5).
-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마태복음 23:35 - 방탕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세 가지 제도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라고 합니다.
가정을 위한 제도는 결혼으로 시작합니다.
결혼은 법률행위로서, 일종의 계약을 말합니다.
혼인에 합의한 당사자가 혼인신고를 하면서 법률혼은 시작합니다.
이로써 부부, 남편,
아내 등으로 일컬어지는 계약관계가 형성되며 인척도 발생합니다.
혼인에는 여러 가지 법에서 정한 의무가 있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정조의 의무는 여러 인간관계 중 부부관계에만 유일하게 적용하는 법적 의무입니다.
연애감정이 결혼의 전제조건은 아니며 쌍방간의 합의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 결혼이고, 연령 역시 서로 비슷한 나이대의
연령끼리만 결혼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이성 결혼과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동성 결혼도 자주 언급되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풍속과 성경의 진리를 혼돈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의 가치로 전환하려는 잘못된 방향과 시도를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법으로 이러한 시도를 금지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욕망 때문에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 바뀌때마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성생활 적령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기초를 쌓는 것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마다 성적 관심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혼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깨우칩니다.
그러나 욕망이 불타올라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을 때는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뜻이 맞아야 하고 성향이 같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체질과 성향 때문에 요즈음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공항에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가진 본질적 문제인 교회의 분쟁과 음행과 같은 도덕적 무질서에 대해 책망
하였습니다.
7장에서는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과 결혼의 문제를 다룹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단란은 1-24절까지이며, 이곳에서 바울은 결혼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몇 가지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둘째 단락은 25-40절까지로 아직 결혼하지 않는 처녀나 홀로 있는 여성들에게 조언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7장을 이해할 때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라는 항구도시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했던 도시의 특성이 고린도 전서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보다는 좀더 극단적이고 강력한 방향으로 조언을 했습니다.
25-40절 홀로 있는 이들에게
결혼의 의미 :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라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녀는 결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결혼했다면 남녀는 서로에게 의미를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부 생활에 중요한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하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정신이 물든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어색해 보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절제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부부생활에도 적용하여 자신의 몸이라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고려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원리는 결혼은 인간이 가진 육신적 본성을 충족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음행을 피하고, 절제 못함으로 인해’분방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이 마치 육신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적 사고를 육신을 열등하거나 악하게 보지만, 구약 성경에 뿌리는 둔 히브리즘은 몸을 악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로 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 배고픔과 갈증, 성욕 등은 당연한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이혼의 문제
과부들에게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말로 홀로 지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만약 지금 결혼했다면 서로 갈라서지 말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에 대한 것입니다.
한쪽만 신자일 경우 상대편의 영혼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얽매이게 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은 사람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음행을 피해야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지므로 거룩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과도한 종속이나 짐으로 다가온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좋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더욱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현대의 교회가 그대로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극도로 타락했던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너무나 문란했던 고린도에서 결혼은 어떤 면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동시에 잘못되면 사람에게 얽매일 수
있는 길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임박한 환난’이 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29-31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결혼하여 세상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32-34절은 결혼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말합니다.
결혼하면 가정에 충실해야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합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든 선한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 그 기준을 이미 상실했으며,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의 아내들은 남편의 소유물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가정에서 여성들의 힘은 약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얼마 동안의 분방은 부부가 서로 합의하여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다시 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에게 말합니다.
바울은 결혼이 자유 아래 있다고 가르쳤지만, 이를 오해하여 결혼과 이혼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국가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며 2020년 9월 기준으로 한 달에 9,536건이나
발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혼인율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지만, 이혼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 혼인신고에 대비하여 절반인
50%에 가까운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 국가에서도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1위입니다.
지금도 하루에는 수많은 가정들이 여러 이유들로 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많은 가정이 이혼과 별거, 싸움과 갈등으로 서로가 멀리하게 되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고 상대방이 지켜야할 책임만을 강조한다면 관계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서로를 바꾸고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 되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이 세우신 가정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른 경우의 사람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이미 결혼을 한 상태라면 배우자가 신앙이 없어도 결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자가 지금은
믿음이 없어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는 다른 배우자를 통해 믿음을 갖고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녀들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부부가 갈라서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현재 믿지 않는 배우자로 인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음이
없었지만, 믿음의 배우자로 인해 그 남편이나 아내, 온 가족이 신앙을 갖게된 경우들도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복이 흘러넘친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영과 진리로 아브라함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의 가족들이 변화되리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지치고 힘든 과정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영과 진리로 잘 감당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는 자신의 상태나 신분을 바꾸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있으라고 권합니다.
할례자는 할례의 표지를 제거하기 위해 육체적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도
할례가 절대적인 성도의 표지라도 되는 것처럼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외적인 상태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불러 주신 지금 현재의 상황 속에서 마음을 다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홀로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결코
녹록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살아가야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고 영과 진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도 바른 작심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목적삼고 살아가며,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제도를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맡겨주신 역할과 책임을 끝까지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서로가 다른 욕망 때문에 갈등하며 원망하기보다는 서로 이해하며 받아주므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더욱 굳건하게 천국 가정 이루도록 역사하여주시옵소서.
가정(家政)과 교회(敎會) 그리고 국가(國家)는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내려주신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가정은 결혼하므로서 시작합니다.
결혼(結婚)이란 하나님이 맺어 주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지속할 연합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연합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제정하신 성스러운 결합입니다.
하나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의 목적 세 가지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여자는 마음의 친밀감을 원하고 남자는 육체적 친밀감을 원합니다.
서로 다른 친밀감을 함께 해결하며 온전한 하나로 세워가야 합니다.
온전한 하나가 되는 친밀감을 영적인 친밀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자녀를 생산하는 것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서로 돕기 위한 것
사람은 처음부터 교제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랑의 교제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5:31-3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결혼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넷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한 것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런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다. 결혼은 음행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다. 잠언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한다.
근자에는 결혼하는 만큼 이혼도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반쪽이 되는 것입니다.
반쪽이 된 상태에서 또 다른 반쪽을 찾는 것이므로 재혼이 결혼보다 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결혼을 크게 기뻐하신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기적을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정부의 권위를 앞서며 초월하는 성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으로 한 몸을 이룰 때 그들의 연합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를 위해 만드셨으며 각자를 당신의 형상을 본떠 지으시되 서로가 없이는 불완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녀의 연합을 다른 관계들과 달리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특별한 관계로 의도하셨습니다.
진정한 결혼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는 임신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반길 것입니다.
이는 각자의 상황 때문에 임신과 출산이 어렵거나 불가능해 보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결혼의 신비를 깊이 존중하시며 순결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성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서 동떨어질 때 영혼을 더럽히며, 결혼 밖에서 이루어질 때는 죄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혼전이나 혼외 관계에서 금욕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조차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혼은 창조의 뜻에 따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연합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성적인 사랑을 오직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나누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절대로 동성애 관계를,
그것이 법이나 사회적 용어로 정의되어 있더라도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적 끌림을 가진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모든 제자를 이 좁은 길로 계속 가라고 부르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들여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의지가 있는 이들을 환영합니다.
결혼은 아주 고귀한 선이지만, 최고선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가 항상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미혼인 사람은 결혼하려는 마음보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 대한 헌신보다 그리스도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멤버는 교회 공동체의 축복이 있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의 신앙에 기초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헌신되어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절대 그릇된 일에 서로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순종을 서로의 결합보다 우선으로 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세워져 있는 기초를 보호합니다.
결혼의 목적 세 가지
러브(Love)와 로바(Lobha)
로바는 불교에서 말하는 악(惡)의 3가지 뿌리인 3업 즉 탐(貪, lobha)/탐욕, 진(瞋, dosa)/노여움, 치(癡, moha)/어리석음 중에서 탐욕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탐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은 우연일 수 있으나, 한 편으로는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는 연금술과 같은 신비한 과정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탐욕이 부드럽게 풀어져 사랑이 된다고 하여 로바(lobha), 그것은 탐욕이었으나 녹아 내리면 사랑이 된다고 할 뿐 아니라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이며 탐욕은 쌓아 두는 것이다.
탐욕은 결코 나눠주려 하지 않고 사랑은 오로지 주려고 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나눔이기에 로바(lobha) 라는 단어가 영어의 러브(Love)가 되기까지는 마법처럼 신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내면의 연금술이 적용하지 않는 한 로바는 사랑이 되지 않으므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복음의 무지로 멋대로 판단하여 선생이 될 뿐 아니라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으로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감성을 탐욕으로 착각하여 불의와 불법으로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미혹한 후 탐욕의 유사어 갈애(taṅha), 욕망(rāga), 감각적 욕망(kāma) 등을 통하여 탐욕은 바라고 원하는 것과, 물질적 세속적 이익을 얻으려고 집착하는 것을 비롯하여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미묘한 형태의 탐욕으로 정의하고 또 탐욕의 기능은 대상을 붙잡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대상을 얻지 못하면 쉽게 분노(dosa)로 변하므로 결국 탐욕은 모든 해로 업의 원인이 된다.
불교의 기초교리에서도 탐욕은 바램, 소원, 소망, 바램, 꿈, 희망, 욕망, 욕구, 등의 나쁜 마음으로 표현하여 결국 탐욕이 없으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종교는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발악임을 바로 알 수 있고 또 바라고 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탐욕에 해당하지만, 열반을 원하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원하거나,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기 위해 돈을 원하는 것이나, 종교 단체에 헌금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편의나 유익을 따라 멋대로 좋은 탐욕과 나쁜 탐욕으로 억지 분별을 할 뿐 아니라 이런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스스로 분별한 좋은 탐욕을 열의라고 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아비담마에서 탐욕을 원숭이는 끈끈이에 한 손이 붙으면 다른 한 손으로 떼어내려다가 두 손 모두 끈끈이에 달라붙고, 입으로 물어 떼어내려다 입마저 달라붙고, 두 발로 밀쳐내려다 두 발마저 달라붙는다고 한다. 이렇게 머리로는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달라붙는 끈끈이처럼 탐욕은
대상이 다가오면 강하게 붙잡으려고 하고 또 달구어진 냄비에 고기가 달라붙듯이 대상에 달라붙으며 옷에 기름이 묻으면 깨끗이
제거하기 어렵듯이 대상에 한 번 집착하면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탐욕의 견해가 잘못되어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엉터리 주장을 할뿐 아니라 빨리어에도 탐욕과 관련된 뻬마(pema), 탄하(tanha), 라가(raga), 까마(kama) 등의 용어가 있는데 뻬마는 가족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애욕 또는 애정을 말하고 애정이나 애욕은 족쇄가 되기도 하여 한 번 엮이면 벗어나기 힘들게 상대방을 속박한다고 하고 배고픔, 갈증과 같이 좀 강한 욕구를 갈애(딴하, tanha)라고 하며 원초적 욕망 중에 가장 강하고 질긴 것이 성욕으로 성욕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욕망(라가, raga)이라고 부르며 라가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탐욕은 크던 작던 간에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탐욕이 크면 괴로움도 크고, 탐욕이 작으면 괴로움도 작으며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고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할 뿐 아니라 탐욕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은 송아지가 자라면 뿔도 자라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탐욕도 점점 커지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탐욕이 뭔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유욕과 집착이 커져간다고 피조물의 자유의지인 감성을 모르는 참으로 참담한 헛소리를
용감하게 하며 소금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고 충족하면 할수록 탐욕이 더 심해져 가기에 결국 탐욕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윤회 속을 헤어나지 못한다고 복음에 무지로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똥칠을 할 뿐 아니라 아무리 작은 조약돌이라도 물에 던지면 가라앉듯이, 아무리 작은 탐욕이라도 악처에 태어나는 원인이 될 수 있기에 (법구경 240번 가사에 대한 집착으로 이가 된 띳사 장로 이야기 참조) 배우자, 자식,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아귀(불행한 귀신)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탐욕이 많더라도 공덕이 있으면 선처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복음에 무지한 참담한 똥칠을 마치 바위를 강물에 던지면 바로 가라앉지만 배 위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고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거와 같다고 미혹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 세상의 배가 유한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배로 표현된 공덕도 온전하고 완벽하지 못함을 바로 안다면 플라톤이 <향연>이란 책에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축복 받은 본성을 알기 위하여 사랑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다”는 말은 복음에 무지한 플라톤이 자신이 가진 대단한 이성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복음을 외모로 분별한 것으로 만약
플라톤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을 바로 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렇게 갈망하던 이데아가 되었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며 감동할
것이지 생각하며 더 열심히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가 받은 복을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 신실함과 사랑으로 일관된 자세입니다.
드물게 별거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어느 멤버도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전 배우자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이혼한 멤버도 재혼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부르심은 다르지만 똑같이 소중합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남편은 가족의 머리이며 아내는 돕는 배필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절대 지배해서는 안 되며 아끼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 남편은 아내를 언제나 존중하고 존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만약 남편이 이를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부하실 수도 있다는 사도 베드로의 경고를 결혼식에서 새겨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는 선한 일에 언제나 남편을 지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받은 사명은 서로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신랑과 신부의 연합을 성스러운 신비이며 그리스도가 당신의 교회에 보여 주신 사랑의 증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랑의 통치를 상징하는 심오한 뜻을 결혼에서 어렴풋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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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2022(토)
우상의 제물(고린도전서 8:7)
지식 / γνῶσις, εως, ἡ 1108
발음 / 그노시스(gnōsis)
- 어원 / 1097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지식(눅 11:52, 행 11:33, 롬 2:20), 아는 것(고후 10:5), 아는 지식(빌 3:8), 알게 함(눅 1:77),
[동] 알다(고후 2:14, 4:6).
- 신약 성경 / 29회 사용
1. 알다, 2. 신비를 알다, 3. 하나님을 알다
발음 / 기노스코(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 신약 성경 / 222회 사용
사랑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26
발음 / 아가패(agapē)
- 어원 / 2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사랑(마 24:12, 고후 2:4, 갈 5:6), 애찬( 유1:12)
- 신약 성경 / 116회 사용
발음 / 아가파오(agapaō)
- 어원 / 미완료 ἠγάπων, 미래 ἀγαπήσω, 제1부정과거 ἠγάπησα, 완료 ἠγάπη- κα, 완료분사 ἠγαπηκώς, 완료수동분사 ἠγαπημένος, 미래수동태 ἀγαπη- θήσομαι, ἄγα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사랑하다(마 5:43, 막 10:21, 눅 6:27, 요 3:16, 롬 9:13), 기뻐하다(눅 11:43), 사모하다(딤후 4:8), 아끼다(계 12:11).
- 신약 성경 / 143회 사용
교만하게하다 φυσιόω 5448
발음 / 푸시오오(phüsiŏō)
- 어원 / 완료 수동태 분사 πεφυσιωμένος, 제1 부정과거 수동태 ἐφυσώθην, 544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교만한 마음을 가지다, 교만하여지다, 교만하다(고전 4:6, 5:2, 13:4), 과장하다(골 2:18).
- 신약 성경 / 7회 사용
덕을 세우다 οἰκοδομέω 3618
발음 / 오이코도메오(ŏikŏdŏmĕō)
- 어원 / 미완료 ῷκοδόμουν, 미래 οἰκοδο- μήσω, 제1부정과거 ῷκοδόμησα, 미완료수동태 3인칭단수형 ῷκοδομεῖτο, 완료수동부정사 ῷκοδομέσθαι, 완료수동분사 οἰκοδομημένος, 과거완료수동태 3인단수 ῷκοδόμ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ῷκοδομήθην, 미래 수동태 οἰκοδομηθήσομα ι, 3619와 동일어에서 유래더보기
- 관련 성경 / 짓다(마 7:26, 눅 6:48, 행 7:49), 세우다(마 16:18, 눅 14:28, 살전 5:11),
만들다(마 23:29, 눅 11:48), 건설되다(눅 4:29),
서다(행 9:31), 건축하다(롬 15:20), 세워지다(벧전 2:5).
- 신약 성경 / 40회 사용
마태복음 16: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당시 고린도는 물건들이 장터에 나오기 전에 우상에게 바쳐져서 나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면 대부분의 물건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입니다.
이것을 "먹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분리시킵니다.
우상숭배의 경우에는 명백한 계명위반입니다(고전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세 가지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8장).
첫째는 믿음과 양심의 원리
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양심의 원리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믿음이 강한 자(바울을 포함, 혹은 지식이 있는 자로 표현됨)로서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졌다 하더라도 그 우상은 거짓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또 그 음식은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입니다(고전 8:3-6).
그런데 또 한 부류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우상숭배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결국 그 우상숭배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으로 믿음의 양심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고전 8:7).
그러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양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롬 12:3).
즉 먹느냐, 먹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믿음에 따른 양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사람은 먹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각 개인의 고유한 믿음과 양심의 자유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죄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먹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속이고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죄가 아니고, 그가 자신의 믿음을 버린 것이 죄가 됩니다(고전 8:10-12).
둘째는 서로 정죄(비판)하지 말라
이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양심만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것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정죄한다면, 그들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8:12, 롬 14:1-12).
셋째는 공동체적 사랑의 원리
고린도 교회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이 바울과 같은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함에 대해서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하는 말은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양심이 중요하고, 지식이 중요하지만 형제들에게 상처가 된다면 우상의 제물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고전 8:13).
즉 믿음도 중요하고 양심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8:1, 2).
이것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확실하게 성경에서 계명으로 규정하지 않은(윤리적으로 절대화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다루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사의 문제가 아디아포라의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제사가 전통적인(무속적인) 의미에서 지켜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사의 문제는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아니고, 절대적 계명준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사의 문제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없이 습관적 관행으로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모임이라면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문제는 절대적인 문제를 상대화시키며, 상대화할 문제를 절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아디아포라(adiaphora, ἀδιάφορα, 무관심한 것)
스토아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 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신약 성서에서도 이용되어 기독교의 개념으로도 논의되게 되었다.
아디아포라는 희랍어 '아디아폴론'의 복수형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디아포라의 문제였다.
그러나 아디아포라의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취했다.
루터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구속력이 있고, 따라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명(命)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모든 전통이나 관습들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원리는 교리적인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교회관이나 교회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디아포라(diaphora) & 아디아포라(adiaphora)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디아포라(diaphora)라고 하고 반대로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몇 시에 예배드릴 것인가, 예배 시에 어떤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인가, 예배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여기 속한다.
자유는 칭의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차원의 자유는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이다.
두 번째 차원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세 번째 차원의 자유가 아디아포라(adiaphora)로부터의 자유 즉 비본질적인 문제들로부터의 자유이다.
칼빈은 일상가운데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성례에서 어떤 포도주를 쓸 것인지, 물을 한번 뿌릴 것인지 세 번 뿌릴 것인지와 같은 것들은 각 지 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얽매여서 신앙 양심의 거리낌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이다.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는 교회 정체 체제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교회 정치체제는 구원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제도 뿐 아니라 감독정치도 가능하다고 칼빈은 주장했다.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는 칼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 부분을 몰라서 너무 편협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칼빈학자들 간의 일부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칼빈이 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를 중요시 여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여서 갈등을 만들고 거기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칼빈이 밝혔듯이 우리의 자유를 방종과 남용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의했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와 형편을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데 유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는 신앙 양심의 자유이다.
양심이라는 말은 con+scientia (하나님과 공유한 지식)이다.
따라서 양심의 문제는 Coram Deo의 문제이고 우리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이다.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하여 말씀의 본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09-19-2022(월)
복음을 위하여(고린도전서 9:23) for the gospel, for the sake of the gospel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언행일치(言行一致)
위하여 διά 1223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2098
발음 / 디아(dia)
관련 성경 / «속격»통하여, 항상,«대격»~ 때문에, ~을 위하여, 말미암아(요 1:3), 후에(막 2:1), 인하여(마 10:22), 까닭이니라(마 17:20), 이러므로(마 18:23), ~에게는(마 26:24), 가운데로(막 9:30), 안으로(막 11:16), ~이므로 (눅 2:4), 새도록(눅 5:5), ~하니(눅 18:5).
- 신약 성경 / 668회 사용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 신약 성경 / 76회 사용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 신약 성경 / 6회 사용
발음 / 앙게로스(anggĕlŏs)
- 어원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 (마 13:39, 히 1:4, 계 1:1)
-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652 * 649. ἀποστέλλω
발음 / 아포스토로스(apŏstŏlŏs)
- 어원 / 64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 신약 성경 / 80회 사용
* 649. ἀποστέλλω
발음 / 아포스텔로(apŏstĕllō)
- 어원 / 미래 ἀοστελῶ, 제1부정과거 ἀ- πές τειλα, ἀποστείλω, 행7:34, 현재완료 ἀπέσταλκα, 현재완료수동태 ἀ- πέσταλμαι,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ε- στάλην, 575와 472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보내다(마 2:16, 막 12:2, 요 5:33), 통지하다 (마 14:35), 파송하다(마 23:37, 눅 13:34), 대다(막 4:29), 보내심을 입다(눅 1:19), 보내심을 받다(눅 1:26).
- 신약 성경 / 132회 사용
사도란 누구인가?
1.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
3. 부활을 목격한 자 - 사울이 사도로 주장하는 근거(행 22:6-
4.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자
* 사도의 신분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단 사도의 신앙과 정신은 반드시 계승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를 세웠던 것은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되심을 이미 드러내셨기 때문에 사도직이 단회적이라고 한다.
* 바울도 유대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죽으러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더구나 저주스런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를 바울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잘못된 메시아 신앙이 수정되는 사건이었다.
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진다면 전한 복음도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권(權) ἐξουσία, ας, ἡ 849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리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리
고린도전서 9:4-7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첫째, 먹고 마실 권리
목회자의 생활을 교회가 책임져야 할 권리
둘째, 가족 부양의 권리
셋째, 일을 하지 않을 권리
세상의 직업을 갖지 않을 권리
바울의 사도권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도 이러한 권리가 있지만 나는 이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
* 비지니스 미니스티리(Business Ministry)
그러므로 목회자에 대한 이중직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8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12사도만 사도인가?
12사도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으며 바울의 경우 그 후에 사도로 임명되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이 심각하였다.
고린도전서 15:8-10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행동 강령
고(故) 주선애교수의 어느 특강에서 들었던 교육학에서 정의하는 죄첫째,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둘째,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
셋째,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첫째, 지식(智識)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신이 없다.
그러므로 우상은 있을 수 없으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
둘째, 사랑(愛)
사랑이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는 이웃을 실망하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먹을 수 있으나 사랑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
양심이란 "수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라고 한다.
그 "서로를 아는 것( knowing together with)"
영어 conscience의 유래가 되는 고대 그리스어 συνείδησις(쉬네이데시스)나 라틴어 conscientia는 어원적으로 '함께 앎'이라는 뜻이다.
양심’이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인간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내가 서로 교제하게 도와주는 수단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의 통로다.
그래서 다윗은 “양심이 밤마다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하였다.
비로소 사도 바울이 왜 하나님을 양심으로 섬긴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된 동시에 이 둘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전혀 무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육체적 훈련이 영적 훈련일 수
없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사 기독교인들이 경건한 자들을 혼란시키고 있고, 사회도 어지럽히고 있다.
이와는
달리 영이 잘되면 육도 건강하고 복을 받는다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과거 율법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무리들을 위해 가시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시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오실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았다.
심지어 가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육과 영은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독교강요> 1권 5장 5항).
그 영에는 양심이 자리잡고 있다.
어떤 때는 영을 대표하는 것을 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양심이란 그릇에 믿음이 담겨 있다고 성경은 표현한다(딤전 3:9).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12항). 또 양심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기에 누구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1권 3장 2항).
누구든 종교성을 가진 것을 보아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연과 양심에 새겨진 그분에 대한 인식으로 심판을 누구든 받게 된다(롬 2:15).
양심이란
무엇일까?
칼빈은 양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4권 10장 3항).
“마음과 지성을 가진 자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할 때
그들은 안다고 한다. 양심이란 말은 지식이란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양심이란 영어로
‘칸션스(conscience)’이다. 칸션스라는 영어는 라틴어 ‘콘슈엔티아(conscienti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두
단어의 복합어로 ‘콘(con)’과 ‘슈엔티아(scientia)’이다.
‘콘’이란 뜻은 ‘함께’라는 의미고, ‘슈엔티아’는
‘안다’라는 의미다. 즉, ‘~와 함께 안다’는 의미다.
또 라틴어 슈엔티아는 영어 사이언스(science)로 표기되어 과학이란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결국 칼빈이 양심의 정의를 ‘아는 것’이라고 내린 것은 정확한 것이다.
다른 양심
문자적으로
양심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지식에 따라 양심이 다를 수 있다.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정도는
달라진다.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양심의 척도는 다르다.
누가 아느냐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문화와 시대에 따라 습득한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같은 문화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도
양심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시대마다 어디든 생기는 것은 그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학식에 따라, 가정 문화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 따라 양심은 다르다.
누구든 자신의 지식과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누구에게는 이것이 옳은 것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바른 지식이 갖춰지면 바른 양심을 가질 수 있다고
사회학에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궁극적으로 그 양심은 바꿔지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양심
기독교는
사회와 다른 양심의 기준을 갖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은 안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양심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진다.
개인과 문화에 따른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 양심을 갖고 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하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창 39:9).
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은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3권 2장 6항).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은 믿음이 양심이란 그릇에 담겨 있다고
말한 것이다(딤전 3:9).
믿음도, 양심도 모두 지식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양심도 동일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중생된 자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요 6:45).
주님께 오는 자는 배우는 자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마 11:29).
배워야 하는 이유는
호기심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양심의 가책
감람산으로
가려 하실 때 예수님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다(요 8:3).
이들은 신명기 22장
23~24절과 레위기 20장 10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의도했다.
이것을 파악한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6).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또 알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7).
그리고 다시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요 8:8).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요 8:9).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간곡한 부탁에도 요압은 듣지 않고 그를 죽였다.
그러자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삼하 19:3).
유사한 현상이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일어났다.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에 그들의 고소하는
악행과 악한 의도를 멈추도록 하셨다.
땅에 무엇인가 쓰인 것이 그들의 양심을 찌른 것일까?
우리가 말씀을 쓰신 것을 모른다는 것은
말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암시한다.
양심적 행위
하나님은
영이시다.
인간의 영, 즉 심정 또는 양심을 살핀다.
내면을 살핀다.
영의 상태와 기능들을 살핀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저울질하신다(3장 23장 10항).
이와는 달리 인간은 외형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인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에
따라 판단한다.
인간의 양심은 인격의 대변이요, 내면의 세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 지식인 믿음은 참된 성도로 하여금 실천을 행하도록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 말씀하기 때문이다.
행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이 없다는 것이고,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양심은 더해지고 행함으로 드러난다.
신앙경력은 오래되었는데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양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식은 갖추고 있는지 몰라도 삶을 통해 얻어진 참된 믿음을 갖추질 못했다.
그 참된 지식이 없기에 양심적 행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가르치려고만 하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롬
2:1~5).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결국 믿는 자가 아닌 셈이다.
믿는 척할 뿐이다.
그 안에는 성령도 거하지 않는다(요일
3:24).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에 말씀을 통한 역사도 없다.
그 역사가 없기에 말씀의 순종도 없는 것이다.
결국 양심적 행위가
있을 수 없다.
구원을 이루어 가라(빌립보서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영원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만세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하나님의 비밀 이였지만 이 비밀이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인류에게 알려진 복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예수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모든 허물과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이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을 들은자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바울과 같은 사람
둘째는 부겔로와 허모니게 같은 사람
셋째는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
1. 바울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적은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치욕스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감옥에 투옥되며 매맞으며 배고프며 헐벗으며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알고 내가 의탁한 자기의 생명을 변함없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디모데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복음에 두고 살았던 바울 복음 때문에 감옥도 피하지 않았던 바울 매 맞는것도 피하지 않고, 배고픈 것, 헐 벗은 것도 참으며 주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바울 믿음과 사랑으로 본을 보인 바울 주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신앙되게 하옵소서.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옵소서.
2.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
바울이 두번째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 바울을 떠나갔던 소아시아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당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했는데 박해가 두려워서 믿음을 지키지 못한 자의 대표일 것이다.
주여 나로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3. 오네시보로 같은 믿음의 사람
바울이 감옥에 갖혀있을 때 사슬에 매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을 때에도 부지런히 심방하여 찾아 만나고 로마에서 뿐만이 아니라 에베소에서도 얼마나 바울을 잘 섬겼는지 네가 잘 안다고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의 숨은 봉사를 언급한다.
당시의 그 심한 박해를 피하지 않고 감옥에 까지 심방하고 유쾌하게 하고 에베소에서도 로마에서도 변함없는 섬기는자, 봉사자 오네시보로 오네시보로의 이름의 뜻이 '유익을 가져다 주는 자' 라고 합니다.
나도 이런 유익을 주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
핍박과 박해가 왔을 때 돌아서서 떠나는 자가 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자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칭찬하는 자가 있음을 봅니다.
주여 나로 믿음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순종하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8).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져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방법으로 복을 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으시면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저버리시거나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요한일서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구했더니 다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다 받은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
마가복음 10: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백 배나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전부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과 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눈이 어두워져서 얼마나 많은 우상을 가지고 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전부 우상입니다.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아주 귀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상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2:16~18).
여러분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삽니다.
세계 최대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는 중년의 나이에 회사와 직원이 아주 많아서 사업에 쏟는 스트레스로 인해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에 시달리며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죽음을 준비하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밤낮 돈 버는 것, 세상의 일에만 골몰하다보니, 돈은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고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과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선교 사업에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물질을 사용하자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 무려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4,928개의 교회와 24개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복지센터를 설립했고, 자선사업에도 7억 5천만 불, 약 9천억 원을 기부해 지금까지 사회사업에 투자한 금액으로는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123만 원을 2천 년 동안 매일 지급한 것과 같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록펠러 재단에서는 매년 1만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그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 중에 무려 60여 명의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물질에 잡히고, 욕심과 탐욕에 잡혔을 때에는 생명을 잃게 되었지만,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 건강, 축복과 행복까지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알고,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동석 집사님은 호텔에서 30년간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호텔의 이사까지 했는데, 그 호텔이 계속 적자가 나더니 결국에는 부도가 나서 토지공사에 매각되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집사님은 실업급여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개월 후에 토지 공사 측에서 그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호텔 지분의 절반을 주는 대신, 다른 어떤 후원도 없는 조건으로 파산한 호텔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년 적자에 후원도 없는 호텔을 경영할 자신이 없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호텔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종으로 경영할 테니 이 호텔을 맡아도 괜찮습니까?”
그때 주님이 마음속에 “맡아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2개월 동안 문을 닫았던 호텔에 가서 매일 청소하고,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을 만들어 직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호텔 경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단하고 매일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소나무 숲에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오전 11시 30분에 전 종업원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이 호텔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주말에는 빈 객실이 없고, 매출이 늘면서 적자경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업도 많이 하고,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일을 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업하시고, 직장생활을 하십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고,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밤낮 달라는 기도만 합니다.
건강하게 해주시고,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사업이 잘되고, 시집을 잘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미신을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회사를 경영해도 자기가 사장이고, 하나님은 돕는 자가 되어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은 자기 비서 노릇만 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될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자기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 회사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주시면,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의 일을 하시고, 모든 일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시고, 신실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수나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일을 해주시고, 우리를 책임져주시면,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밭, 부모 형제나 자녀를 버리면 백배의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집이나 땅이나 부모 형제,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그 아들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이 되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헌신은 자기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것은 그 아들을 자기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37~39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을 위해 버리고 포기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땅 끝까지 주님과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주님은 이 말씀대로 사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힘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대로 성취됩니다.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실패할 것 같아도 성공합니다. 안 될 것 같아도 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6: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가장 열심히 전하는 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고, 가장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영국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들을 많이 보낼 때가 제일 강대국이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죄 짓는 사람도 있지만, 복음 전하는 주의 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논쟁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논의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음식 나눔으로 인한 교회의 시험이 주요 주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입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우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자유자로서 당시 주변 환경과 풍속과 음식등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제의에 참석은 하지만 문화의 하나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신앙 양심에 거칠 것이 못되고,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들이 시장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접할 때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세례와 성만찬을 매번 하기 때문에 구원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가 이방 신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은지, 혹 남의 초대를 받고서도 눈 앞에 차려진 음식들과 고기들을 보고 혹시나 이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시장에 가서도 그들 앞에 놓인 고기가 신전 제의에 사용된 것이었는지 늘 물어보며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이런 믿음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주변 세상 문화에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각각이고 그 태도에서 누리는 자유함의 강도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뚜렷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 지식에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지식의 종이 되어 교만과 방종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국은 구원의 패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약과 연결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세례와 매 모임마다 함께 하는 성만찬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면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음식과 고기들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음식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 속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어도 여전히 애굽의 이방 풍속을 그리워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고 하나님을 구원을 의심하며 원망했듯이 그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직업을 따라 참여했던 아프로디테와 각종 이방 신들에 대한 제의가 더 이상 우상숭배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러워했고 선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 중에 신전 창기들과 간음을 행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례 받았으니까, 우리는 성만찬을 하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그들의 현세적 삶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데 이만큼 타협한다고 뭐 어때? 세상을 살면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때론 예수님도 이렇게 했잖아.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잖아?’
우리들도 역시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지식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믿음의 지식으로 굳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겸손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들을 판단과 우리 삶의 정당화의 잣대로 들이 내밀지 마시고. 오히려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지 우리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또 10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덕을 세우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우리가 누릴 자유는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전도와 믿음의 덕을 세울 줄 아는 사랑의 매임이 필요합니다. 사실 자원하여 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매칠년 안식년 때에 해방된 종들이 주인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고마워 자발적인 종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뚦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하대하거나 막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종이지만 그들 아들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호이해가 성립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서른 셋 나이로 200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감동을 남겨주고 떠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형제입니다.
2000년도에 한국에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병원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다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와서 진찰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세는 파업이었습니다.
특별히 위계질서가 엄한 병원에서 개인행동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안암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였던 안수현 형제는 홀로 남아서 끼니를 걸러가며 밤을 새우며 환자들을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의 명분이 많이 있었지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소신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으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때 사람들 중에 드러내놓고 혼자 튄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 논리에 밀려 위로 받지 못하고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병원에서 도움이 될 길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면서 병원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고대병원 내과 R2 스티그마 안수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10:29)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로버스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의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리지만 그 풍성한 지식에는 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절제함과 담대함이 드러나 사랑에 매인 종이 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09-20-2022(화)
남의 유익(고린도전서 10:24)
Nobody should seek his own good, but the good of others.
유익한 것. συμφέρω 4851
3. 마태복음 18: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발음 / 쉼페로(sümphĕrō)
- 어원 / 미완료 συνέφερον, 제1부정과거 συνήνεγκα, 제1부정과거분사 συνε- νέγκας, 4862와 534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유익하다(마 5:29, 요 11:50, 고전 6:12), 낫다(마 18:6), 좋다(마 19:10), 유익하게 하다(고전 12:7).
[명] 유익(요 16:7,고전 7:35, 히 12:10).
- 신약 성경 / 15회 사용
남의 유익(the good of others)을 구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이며 삶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여유가 사라졌고 오직 자기만을 위하는 공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위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5장은 음행에 대한 답변
6장은 성도 간의 소송 문제에 대한 답변
7장은 결혼에 대한 답변
8-10장은 우상 제물에 대한 답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백 년 동안 노예살이했던 애굽에서 자유하는 은총을 입었음에도 그 자유를 남용하고, 패역한 삶을 삶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교훈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자세
둘째는 적극족인 자세
소극적인 자세는 나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도 남을 돕지 않는 자기 중심적이 삶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는 내가 먼저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우리 안에는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잊게 하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게 하는 자기 중심적인 죄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슬하(膝下)’가 ‘무릎 아래’입니다.
그래서 ‘구름 아래’는 ‘하나님
슬하’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얼마나 많이 보호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무릎 아래’ 정도가 아니라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셔서, 그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름 기둥 아래에 있다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세례 예식을 행하고, 서약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사건은 정말 세례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애굽이 죄와 사망의 상징이라면, 가나안을 향하는 길은 복과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헤엄을 쳐서 스스로 가나안 땅에 닿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크고 작은 배를 타고서 힘을 써서 배를 조종했거나 노를 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시고, 그 땅바닥을 마르게 해 주셨기 때문에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너고 나자 홍해는 다시 닫혔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는데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홍해가 열리고 길이 났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 교인이 된 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지혜,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세례 교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가나안을 향하는 길만 있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믿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하나님을 목적 삼고 걷는 길만 있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 가리킵니다.
만나는 몸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럼에서 ‘육체의 양식’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신령한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나가 땅에서 솟아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주워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를 하루분씩만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리고 다 먹지 못할 정도로 거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삶이 썩고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을 거두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에도 만나는 괜찮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몸을 위한 음식이 신령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우리의 먹는 모든 음식은 신령한 음식이 됩니다.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쳤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야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즉 그 물이 터지게 해주신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터진 반석’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신령한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심에도 그들을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를 건넘과 불기둥과 구름기둥, 반석에서 터진 물, 만나로 대표되는 은혜 베푸심을 수없이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특히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10명은 “우리는 그들 앞의 메뚜기와 같다”라고 보고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심히 아름다운 땅이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10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의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는 매해가 약속의 땅이 됩니다.
물론 이 땅에서 그 약속의 땅을 마지막으로 받으면,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본보기(튀포스)’는 ‘맞아서 생긴 자국’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믿는 자가 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국’과 ‘본보기’가 같은 말입니다.
혹 몸에 수술 자국이나 불에 덴 흉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해서 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순종을 우리 몸에 있는 상처 자국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더욱더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싯딤에서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숭배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우상숭배하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마음이 상해서, 만나도 지겹고,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불뱀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아, 그것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원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진면교사(眞面敎師)’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와 같습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진면교사를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미워하면서 닮는다’라는 말처럼, 반면교사의 삶이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런즉’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서 있지 못하면서 서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성숙하지 못했음에도 성숙하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다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람을 잘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4가지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았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요구받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세속적인 욕망 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이고,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주일예배, 수요 성서여행, 새벽 묵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진정한 교인으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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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수)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본 받다. μιμητής, οῦ, ὁ 3402
고린도전서 4:16
발음
/ 미메테스(mimētēs)
- 어원 / 3401에서 유래
신약 성경 / 6회 사용
발음 / 미메오마이(mimĕŏmai)
-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본받다(살후 3:7, 히 13:7, 요삼 1:11).
- 신약 성경 / 4회 사용
-
11:2. (이제)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이제) - 데(δέ) 1161
발음 / 데(dĕ)
어원 / 헬라어
- 신약 성경 / 2801회 사용
발음 / 케팔레(kĕphalē)
-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머리(마 5:36, 행 18:6, 계 1:14), 머릿돌(마 21:42, 막 12:10, 벧전 2:7).
- 신약 성경 / 75회 사용
- *케팔라 : 통치하다, 권위가 있다, 기원이 된다, 출처가 된다, 지휘한다, 결정권이 있다.
벤치마킹(Benchmarking)
벤치마킹이란 어느 분야에서건 그 분야에서 모범이 될만한 인물을 선정하고 그를 본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벤치마킹하라고 권면합니다.
본 받는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통해 누군가를 흉내내고, 모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배우고 듣고 본 바를 그대로
행하는 것은 그 사람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본받으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닮으라는
것이고, 모방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자신의 삶에 웬만큼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타인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성실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이 하고 있습니다.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고 있는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를 같이 본받아 가자는 권면입니다.
그래야 10장 31절 말씀처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요,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리스도처럼 변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이 바로 참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주 만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매일 만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만나다보면 서로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바울의 삶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변하여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져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본받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의 모든 것을 갖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웠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본받을 수 없고, 닮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닮아갈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대단한 이기주의의 시대요, 나 중심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게 요구하시는 것이 생길 때 우리는 아주 불편해 집니다.
사실 우리의 내적 자아는 하나님께 푹 빠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이 바로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청소년들을 보면 대중스타를 닮아 갑니다.
대중스타들이 하는 목걸이, 머리 스타일, 입는 옷 등 흉내를 내고 다닙니다.
왜 입니까?
청소년들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사모하고 존경하면 닮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만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인격까지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했기에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들도 사도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야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사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다면, 즉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 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의 믿음이 좀 더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입술로만 겉모습만 닮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내면의 인격으로부터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09-22-2022(수)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린도전서 12:31)
은사(恩賜)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은사란 말의 뜻
Ⅲ. 은사의 종류
Ⅳ. 은사의 용도(목적)
Ⅴ. 은사의 구분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4-8
Ⅰ. 이끄는 말
종교개혁 이후, 지금처럼 교회가 성경에서 이탈되어진 경우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 교회들은 물론, 한국 교회 역시 성경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기형적(畸形的)인 교회들이 너무도 많아지고 있다는 데서 위기의식(危機意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이 되어지기까지는 여러가지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인 미숙은 물론, 성경교육에 대한 미온적 태도, 또는 사회적 환경, 신자들의 의식구조 등 다양한 원인들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학적인 미숙과 성경교육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근거한 구체적인 신학적 이론을 무시하고 소위 성령 운동을 통한 체험 위주(爲主)의 신앙을 우선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기형적인 교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론이 무시된 체험은 자기 최면(催眠)일 수 있다.
자기 최면 상태가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체험 일변도의 신앙생활은 자연히 은사면(恩賜面)에 치우치게 된다. 허다한 교회들이 소위 성령의 은사에 관심을 가지는 원인도 체험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이다. 아니, 대수술을 받아야 할 중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다. 아무리 큰 수술이라도 한국 교회는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수술을 하기전에 먼저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병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질병의 원인도 파악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중병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이다. 전통적으로 무속신앙에 잘 길들여진 한국 교회 신자들은 철저하게 무속적인 행위들을 '성령의 은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이론적 체계의 결여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사'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본 논고에서 제시함으로써 대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중환 치료에 적게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Ⅱ. 은사(Gifts)란 말의 뜻
국어사전에서는 은사라는 뜻을 '임금께서 내려 줌', 또는 '임금께서 내려주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퓨뉴마티카( )'인데, 그 뜻은 영에 속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또는 '카리스마타'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은혜의 현현(顯現), 거저 주어진 선물들이라는 말이다. 이상의 언어들을 종합적으로 의역(意譯)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은사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으나, 구약성경에서는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은사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 신약성경 못지 않게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일이나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잉태케 해서 이삭을 낳게 하신 일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야곱으로 하여금 거부가 되게 하신 일
(창30:37-43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로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르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요셉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일
(창41:37-43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를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또는 모세로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신 일
(출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여호수아를 세워 모세의 뒤를 잇게 하신 일
(수1:1-2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사사들을 세우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일
(삼상16:6-13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듬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담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레위 지파로 제사장을 삼고 선지자들을 기름부어 세우신 일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사건들이 모두가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들임을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가 아주 넓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전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 되어지고 있다.
신약성경에 있어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넓은 의미로서의 은사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가 잉태된 사실이나
(눅1:26-38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일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곳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신 일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등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베푸신 은사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신ㆍ구약성경에 있어서의 은사(Gifts)란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나 재능, 그리고 임무나 능력 등이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Ⅲ. 은사의 종류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의 종류는 매우 많고 다양하다. 신ㆍ구약성경에서 그 종류를 다 찾아 열거(列擧) 한다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은사의 종류는, 주로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은사들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의 목적이 현재 은사 중심의 신앙으로 인한 교회들의 폐단(弊端)을 시정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넓은 의미의 은사에 관하여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나 신약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몇몇 종류의 은사들에 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구체적인 은사의 종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밝혀준 내용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을 따라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11)"고 밝혀 주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고 했다. 이들 말씀의 내용들은 모두가 은사의 종류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은사의 종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통역 등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들 은사보다 더욱 큰 은사가 있음을 말한다. 그 은사는 사랑이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은,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와 같은 은사들은 교회에 세운 직임과 함께 주어진다. 즉 은사를 받은 자는 받은 은사에 따라 직임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 직임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언급한 사도, 선지자, 교사 등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며,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이라고 했다.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Ⅳ. 은사의 용도(목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무슨 용도로 주시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은사의 용도(목적)는 성령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사역이 은사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첫째로 사도들로 하여금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함이며
(계22:17-19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케 해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은사를 주어 받은 자들로 하여금 은사 따라 사용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은사는 성령의 사역을 이루는 데 도구로 쓰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먼저,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시키는 데 사용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복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되어진 사실이 없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직접 귀로 듣고 배운 바는 있으나 기록으로 전해진 바는 없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의 내용을 제자들이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베드로에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13:7)"고 하신 말씀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제자들이 복음진리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말씀 하셨고,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야 진리를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가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행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진리를 깨달아 신약계시를 완성 시키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사들 중에는 복음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는 은사들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은사는 진리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된다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의 몸이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은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받게 하시고, 복음을 깨닫게 해서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므로 예수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교회를 세우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물었을 때, 베드로가 합당한 고백을 하니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었다.
이 약속대로 예수께서는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어 주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을 받게 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고, 그 결과로 예루살렘과 이방 땅 여러 곳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게 하셨다. 이것이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하신 또 하나의 일이었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받은 바 은사 따라 직분을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고 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신데 온 몸이 서로 상합(相合)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세운다고 했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은사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는 데 사용하시기 위해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Ⅴ. 은사의 구분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령을 통하여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은사들은 몇 가지로 구분이 된다. 먼저는 일시적(一時的)인 은사이고, 다음은 지속적(持續的)인 은사이며, 그 다음은 영원적인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전 작정하신 섭리 따라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된 진리 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영원한 천국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그 때마다 필요한 은사들을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사이지만 용도에 따라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성령의 은사를 아무런 구분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가르치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신앙에 많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인 정립(定立)은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일시적인 은사이다
일시적인 은사는 성령께서 어떤 특정한 기간에만 필요로 해서 주신 것으로 그 기간이 지나면 폐해 버리시는 은사를 말한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지상에서 사역하게 하시는 기간 중에 특정한 기간이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하나인 신약계시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부터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으로 신약계시 기록을 끝마칠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앞 장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는 제자들이 진리에 대하여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기록을 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이 성경 이외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성령께서 신약계시를 기록하게 하신 계시시대에는 복음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은사로서 방언, 예언, 지식 등과 같은 일시적 은사를 주셨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베드로가 방언으로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전했다.
(행2:1-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담니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즉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하신 것이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예언의 은사 역시 복음의 내용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다.
(고전14:6, 24-25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마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지식의 은사는 복음진리의 기초지식으로서 복음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서의 은사이다.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즉 복음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구약적 지식의 은사를 말한다.
(히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 등의 은사들은 신약계시 기록이 완성된 이후에는 다 폐해진 일시적인 은사들이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고 했다.
즉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지식의 은사가 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예수 재림하실 때라고 해서 지금도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완전한 계시가 주어질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계시가 주어지는 시대(사도시대, 주후100여년까지)에는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지식 등의 은사를 통하여 부분적인 신약계시가 주어졌으나 완전한 신약계시가 주어진 후에는 이들 은사들은 모두 폐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은사들은 모두가 일시적인 은사들이다.
다음은 지속적인 은사이다
지속적(持續的)인 은사는 성령께서 신약계시가 완성된 후에도 교회를 세워 견고히 자라게 하기 위하여 과거는 물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예수 재림때까지 지속적으로 주시는 은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 예수 재림시까지를 교회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지상 교회에게 지속적인 은사를 주어 교회를 자라게 하고 견고히 하여 유익하게 하신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은 지속적인 은사는 신약계시 기록을 위한 일시적인 은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은사들이다. 즉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등의 은사들인데
(고전12:8-10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성령께서 이같은 은사들을 주어 교회에 목사나 교사, 복음 전하는 자,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봉사자, 다스리는 자 등을 세워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 이 외에도 사도나 선지자 직임이 더 있으나 이들 직임들은 사도시대 즉 신약계시 시대에만 국한된 일시적인 직임들이다. 따라서 현재 교회에는 사도나 선지자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인 은사라고 해서 성령께서 신약교회 성도 모두에게 분별 없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 교회 중의 몇을 세워 직임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고전12:28-3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따라서, 지속적인 은사는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이들 은사들은 모두가 성령을 따라 주어지는데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을 가능하게 하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은 믿음을 가능하게 하며, 지혜와 지식의 말씀에 의한 믿음은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 중에 가장 머리되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인 것이다. 은사 중에 '지혜의 말씀'은 하늘로서 오신 참 지혜
(고전1:24-25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2:6-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즉 복음진리에 대한 말씀을 뜻하며 진리의 영이 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말씀을 통하여 배워서 아는 말씀을 말한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 없이 지식의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은사가 아니다.
이러한 말씀의 은사 없이는 믿음의 은사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 말씀을 통하여 깨달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된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숙된 믿음 없이는 병 고침과 능력 등의 은사 역시 불가능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들은 모두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분량 따라 역사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리라)
그 다음은 영원적인 은사이다
영원적인 은사는 현세 즉 교회시대에는 물론, 예수 재림 후 영원한 천국에 가서까지 영원토록 주어지는 은사를 말한다. 이 은사는 모든 은사들의 처음이며 나중이고 또한 가장 큰 은사이며 제일 좋은 은사이다.
(고전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페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은사는 곧 사랑인데, 이 은사를 기초하지 아니한 모든 은사들의 사역은 모두가 무가치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이유는 모든 은사들의 사역 목적이 사랑의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들은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고 했다. 이같은 사랑은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이다.
사랑의 은사는 지상교회에서는 완전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 다만 교회의 성숙 과정의 농도에 따라 비례적(比例的)으로 실현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은사가 완전하게 실현이 되는 곳은 바로 영원한 천국이다.
천국은 사랑의 은사가 영원토록 실현되는 곳이다. 지상의 교회는 사랑의 은사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목표를 향해 점진적(漸進的)으로 성숙되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로 혼란을 빚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말했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3:13∼14:1)"고 한 것이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사랑의 은사는 일시적이나, 지속적인 모든 은사들의 목적이 되는 은사이며, 가장 크고 제일이 되는 영원적인 은사이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주신 일시적인 은사와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은사,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까지 영속되는 영원적인 은사로 구분이 된다. 이들 은사들은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주어진 직임따라 사역을 하게 된다. 일시적인 은사는 신약계시를 완성해 놓은 후 폐하게 되고, 지속적인 은사는 완성된 계시진리 토대 위에 교회를 세워 자라게 한 다음 폐하게 되며, 영원적인 사랑의 은사는 자라난 교회가 천국으로 인도된 후에 영속적으로 실현이 되는 은사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8)
<십자가의 전달자>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
온 세상 채울 때까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고린도의 시대적 배경과 고린도 교회의 문제
고린도는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시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습니다.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인구 3만명의 시골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인구 60만
명의 부와 방탕의 도시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고린도와 코린토스는 같은 말이예요.
그리스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지협 남단에 잇으며 겐그리아 항구와 로마의레기온 항구를 연결하고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묘한 지형으로 상업과 물 질적인 변영을 누린 도시요 잡다한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어 동서 문화 와 종교의 혼잡을 이루었다. 고린도의 종교중에 여사 프로디트라는 우상이 있어 600피트나 되는 산상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있고 이로 인하여 고린도인들은 음탕한 풍습에 젖어 고린도라하면 음행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1) 바울이 2년을 선교하여 교회를 설림(행 18:1-8).
(2) 교인 전체의 수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예상된다(고전 1:26).
(3) 바울의 동역자 그리스보 (행 18:8)가이로 에라스도(롬 16:23)스데바나 (고전 1:16)등으리 거주지다.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 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 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집필했고, 57년 경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후서를 써 보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은 교우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기 위해 쓰여졌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린도 신자들 중에는 의붓 어머니와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방관만 하고 있었고 (고린도전서 5:1-13), 어떤 교우는 자유를 구실 삼아 창녀와 관계를 맺었고 (고린도전서 6:12-20), 또 성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죄악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고린도 전서 7:1-1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고린도전서 6:1-1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고린도전서 8:1-11), 성찬의 전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고 (고린도전서 11:17-34), 그 외에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고린도전서 14장),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고린도전서 15:12) 사례를 그리스도 부활의 근거로 삼아 주장하며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간의 분쟁과 파벌 의식 이엇다. 신자들 간에는 바울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조성 되었다. 이러한 파벌 의식이 만연되었다는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이 서간에서 그들이 전해 듣고 받아들인 복음을 상기 시키면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둘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첫째 편지를 발송한 다음에 고린도에 거짓 선교사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
바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베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이다. (고린도후서 2:4).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간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지도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에게 순종하고 모든 적들을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고린도후서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활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자신의 약함 안에서 힘차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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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Corinthia) 0|고린도전서(1Corinthia)
1. 배경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지리적 위치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다.헬라 본토에서 페로폰네소스반도로 나가는 바로 길목에 있어서 육로와 수로로 상업상 교통이 빈번한 곳이다.
고린도에는 잡다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곳에서 모여온 우상도 많았고 생활은 사치 하였으며 윤리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이러한 곳에 바울은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바울은 글로에의 집안 식구들이 고린도에 다녀와서 전도하는 말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파당의 문제 계모와 같이 사는 부 도덕한 생활 문제, 또 신자들 끼리 관청에 소송하는 문제등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생활과 전도 사업을 위협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또한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 교회에 발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의견을 묻는 편지도 보내왔던 것같다.그러므로 바울은 이 여러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해답과 교훈을 주기로 하고 이 편지를 썼다.바울은 3차 여행을 하는 중에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고전16:8), 57년 이 편지를 썼다 신약 성서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한 서신이 둘 밖에 없다.그러나 실상은 적어도 네번은 하였으리라는 사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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