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舊迎新禮拜 / a New Year's Eve Worship
송구영신'이라는 말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의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했는데, 중국 관가(官家)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는 '신구관 이취임식'에 사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음력 섣달그믐 밤에 묵은 해를 보내고 신년의 운수대통을 기원하던 무속적인 민속 행사에 사용되었다.
한국 개신교에서의 '송구영신예배'의 유래는 1887년 12월 31일 새문안교회와 정동감리교회가 연합예배를 드린 것이 그 유래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언약갱신예배' 혹은 '언약예배'로 불렸다고 한다.
또 장로교회에서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셀러에 의해 '송구영신예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구영신예배(送舊迎新禮拜) 또는 신년예배, 신년감사예배는 대한민국 개신교에서 매년 12월 31일 심야나 1월 1일 자정 두 날의 경계에 가까운 시각에 새해를 맞이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1월 1일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송구영신예배는 따로 진행하지 않고 신정 당일에 주일예배를 겸한 신년감사예배를 대신 진행하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23:30분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신년 카운트다운을 하고 00:30분에 종료하는 형태가 많으나, 송구예배와 영신예배를 나누어서
23:00~00:00까지 송구예배를 진행하고 카운트다운 후, 영신예배를 새로 시작하여 01:00까지 진행하는 케이스도 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시편 107:4-9)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광야(廣野) : 넓을 광(廣), 들 야(野)
미드바르
다바르
광야 사막 길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방황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광야 사막에는 어마 어마한 모래 폭풍이 불어와서 길들이 묻혀버리고 완전히 생소한 지형으로 바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늘 다니던 중요한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공위성에서 지형을 정확하게 오차 없이 판독하는 GPS가
있지만 옛날에는 자연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때 였기 때문에 그 같이 황당한 일들이 벌어져 여행자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야 사막"이 바로 그런 배경이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말이나 나귀나 낙타를 타고 머나 먼 광야 사막길을 몇 주간 또는 한 달 이상 통과하는 여행을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다.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식품과 음료수가 떨어져(민 21:5) 쓰러져 죽는가 하면,
뱀이나
굶주린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았다(신 8:15, 신 32:10, 사 13:20-21).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에 시달리고(렘 4:11),
밤에는 안식처가 없이 들판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모래 폭풍(사 21:1, 렘 4:11-13)과 강도의 위험(렘 3:2,
애 4:19)을 만나 생사가 오락 가락하는 때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크고 두려운 광야"(신 1:19)를 통과하는 인생의 고달픔 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광야 사막과 같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모든 환경은 우리를 건조하고 메마르게 하며 목마르고 굶주리고
피곤하게 한다.
육신이 지치고 마음이 내려 앉으며 영혼이 피곤하다.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막막하여 빠져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사막 한
복판 가운데 홀로 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놀란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일들이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인생은 마치 광야 사막길을 통과하는 것 같은데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 좌왕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광야
길의 인생을 확인한다.
광야 사막과 같은 세상을 마음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잃어버린 바 된 인생은 자신의 지혜와 노력과 힘으로는 방황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1. 인생은 광야같은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이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4-5절)
애굽왕 바로가 야곱에게
"네 연세가 얼마뇨?" 라고 물었을 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창 47:8-9).
여기서 야곱은 인생 전체를 "나그네길" 걷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그 기간을 "험한 세월"로 표현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인생을 광야 사막을 통과하는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광야같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참 평안과 안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염려와 불안과 고난의 연속으로 이어지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렇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인생을 고백하였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욥14:1)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7:9)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5:7)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하는 나그네요,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니이다" (창39:12-kjv)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명령들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시119:19-kjv)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3)
2. 광야같은 세상에서 바랄 것은 하나님 뿐이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기 때문에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는 메말라 가고,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사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며, 말세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천재지변의 재난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공포의
불랙홀로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대가 되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절망감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소망을 걸고 부르짖을 수 있는 대상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6절에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라고 하였다.
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며, 오직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것을 실감하면서
" (이 때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 (시 39:7)라고 하였다.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어성경 앞 부분에는 "이제부터는" 또는 "이 때에" 라는 접속사 "아타()"가 있는데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다.
다윗은 주위 사람들이 "헛된 일에 분요" 하며 삶의 가치관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 때에" 오직 참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겠다고 다짐하였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 속에 사로잡히는 "이 때에" 우리들도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오직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라본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카와()"인데 "간절히 바란다", "인내로 기다린다"는 뜻이 있어서 한글 성경에는 두 가지를 다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그 동안 우리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감을 느꼈을지라도 우리는 "이 때에", 또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과거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고 인내로 기다렸는가?
1). 우리는 광야같은 세상에서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24:16)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37:24)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34:19)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카와" = )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 . . . ” (사40:31)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카와" = )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카와" = )" (시27:14)
2).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진리로 지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카와" = )” (시25: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카와" = ) (원어는 이중으로 강조되어 있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니, 곧 내 영혼이 기다리니")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130:5)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43:3)
“저가 그 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광야같은 세상에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진리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건져내신다(시 107:20).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눈으로 보고 느끼는 육신의 삶에만 위험이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위험한 영적 위험이 우리를 덮쳐오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때 말씀 진리의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영적 위기는 미혹의 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외에 다른 것으로는 영적
위기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럴듯 하게 변개하고 사람들을
속여서 멸망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 그 위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 진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며,
또한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3).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간다.
“여호와를 바라고("카와" = ) 그 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찾이하게 하실 것이라 . . . ." (시37:34)
도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와 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어다("카와" = 인애공의)" (호12:6)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카와" = ), 기다렸더니("카와" = )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 . " (시40:1-2)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곧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불순종한 사람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지금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
3.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7절)
옛적에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견고한 성(castle)이었다.
나그네처럼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생들도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는 곳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죄악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놀라운
곳이 현실로 눈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계 21:2).
사실 우리의 현재의 삶은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세계로 연장되어 영원히 계속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7절) 라는 말씀은 비유이면서도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영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그 곳에 도착하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른 길로 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37:5).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시 78:52)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 . . . "(사30:2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25:12)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25:4)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49:10)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바른 길" 밖에 없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4:6).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여지는 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만 발견되는 소망의 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다.
성경의 신.구약(66권)의 말씀은 모두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는 영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성경의 신.구약(66권)은 우리가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길을 잃지 않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교훈들로 채워져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사탄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도 미혹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가도록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일으켜서(마 24:24)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삭제하거나, 보태거나,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한다.
<또는 "속임수로 다룬다">(고후 2:17, 4:2).
광명한 천사처럼 보여지고, 의의 일군들로 보여진다(고후 11:14,15).
그래서 거기에 속아 미혹받은 자들은 "다른 복음"(고후 11:4, 갈 1:8)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신자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하여 확정된 신.구약 성경(66권)을 깊이 깨닫고 분별하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영적 분별력은 신기한 것을 보며 감동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때떄로 사탄이 사용하는 미혹의 도구이다.
영적 분별력은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데서부터 온다(히브리서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기록된 말씀 속에 있는 그 바른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광야 사막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방황하지 않으려면 그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은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 내면서 새 물결, 새 바람을 일으키고 전통적인 진리와 교리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매장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을
오늘날 그것이 기독교의 대세(trend)라고 본다.
마지막 때에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마치 광야 사막 길에 나타나는 살인 더위, 불 뱀, 굶주린 야생동물, 살인 강도, 모래 폭풍들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광야의 위험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보호하시고(시61:7),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인도하신다(시78:52).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8-9절)
광야같은 세상에서(마태복음 4:1-11)
우리는 기독교 신자들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죄인인 나를 살리셨다. 그래서 저와 여러 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영원한 것이다. 나를 살리신 주님은 구원자이시며 승리자이시다. 주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분들은 주안에서 즐거워 하라!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지시길 바란다.성도 여러 분! 주일 아침에 여러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러 분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평화롭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 주님을 따를 때 세상의 그 어떤 소란한 장소보다 더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를 때 내가 이기든지 아니면 패하든지 할 수 밖에 없는 싸움터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여러 분이 기쁨과 평강을 유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여러 분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긴장하는 것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다. 긴장하면 몸이 굳어진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곧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긴장의 상태이다. 여러 분이 긴장해야만 여러 분의 신앙이 성장한다. 여러 분의 가정이 튼튼해진다. 그리고 여러 분의 교회가 은혜롭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분이 항상 경건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여러 분이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여러 분은 모든 일에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 분이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여러 분은 항상 즐겁지 않을 것이다. 궁핍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분은 수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다.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신 일에 대해 여러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또한 그 분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 임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시험이 닥쳐오면 미리 체념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주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는데...'. 이러한 말은 주님도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이 약하고 부족하셔서 시험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하실 백성들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주님은 공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을 마귀의 시험으로 시작하셔서 시험으로 마치셨다.
주님이 당하신 마지막 시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본문에서 주님이 시험을 당하심으로 해서 우리는 무엇을 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도가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 세상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분은 마귀가 주님에게 시험하신 세 가지의 내용을 잘 생각해보라! 마귀는 두 번에 걸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대하여 의심한 것이 아니다.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능력도 의심한 것이 아니다. 마귀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마귀는 주님이 잘못된 방법으로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것은 오직 주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이제 마귀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뜨림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속을 좌절시키려는 것이다.
마귀는 이 시험에 엄청난 내기를 걸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시험에 넘어가기만 한다면 인류를 영원토록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마귀는 주님에게 시험을 통해 신적인 능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귀가 하는 짓이 얼마나 유치하고 가소로운 것인가? 마귀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마술사나 무협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주님은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러면 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패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유치한 시험 거리를 가지고 와서 자신 만만하게 성자 하나님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가? 그 이유는 주님께서 곧 새롭게 변화 될 인류의 대표가 되시기 때문이다.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욕망들이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전체를 향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시험을 물리치셨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시험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단은 처음에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다. 마귀는 마치 영적인 양식을 주는 것처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왜 유혹에 넘어갔는가? 패배자인 하와는 사단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이것이 이유이다.
두 번째로 마귀는 주님에게 육신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여러 분! 이것이 신자가 승리하는 비결이다. 우리는 하와와 같은 자세를 취하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 하와가 사단과
나눈 대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미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는 인간의 지혜를 잣대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재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물질의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돌 밖에 없는 광야에 서 있다면 누구든지 저 돌들로도 떡을 만들 수 있다면..하는 바램을 가질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의나 철학적인 사고는 오히려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 직면하게 될 때에 스스로의 지혜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만큼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으로 모면하는 것을 찾고 탈출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회복이며 해결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여기에 주님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사단에게 말씀하실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다. 주님은 신명기8:3절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여러 분이 바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 신자들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두 번째 시험은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시편91편 11절을 인용하면서 뛰어 내리라고 명령을 하였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공생애 시작부터 마귀에게 치욕을 당하고 계신다. 감히 마귀가 또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에게 명령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논쟁을 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셨다.
여러 분! 주님이 올라가셨던 성전 꼭대기는 120미터나 되는 높이이다. 오늘도 여전히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 놓고 시험을 한다.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실적을 쌓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을 통해 보람을 갖고 성취감을 갖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여진다. 경쟁을 해야만 하는 구조가 모든 낭만적인 것들을 빼앗아 갔다.
세상은 한결같이 마귀가 주님에게 했던 것같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만일 네가 사장이거든, 네가 실력이 있으면, 네가 경력이 있으면, 네가 정말 이 회사의 직원이 &47580;다면, 이 정도는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매일 전쟁을 치루며 산다. 우리는 자주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이유가 더 많다. 여러 분이 이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면 성경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기 바란다. 에베소서 6:16절은 말씀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주님께서 두 번째 유혹을 당할 때 신명기 6:16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여러 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받을 때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고 행동할 때 이미 실패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여러 분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든 일에 첫 번째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실패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세상이 내게 능력 발휘하기를 요구할 때 자신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잠언3:7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라고 했다. 그 지혜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언2:7)라고 하였다.
또한 이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잠언2:20)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욥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 주신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40:9). 그러므로 일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다.
여러 분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분명하게 모시기를 바란다. 마귀는 주님에게 세 번째의 유혹을 한다.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마귀가 주님께 보여 준 영광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예루살렘성의 왕좌였을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낮고 천한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것이 권력과 물질이었다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부나 세리들이 아니였을 것이다. 인기나 명예였다면 예수님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마귀는 아마도 마지막 유혹을 할 때 숨겨 둔 비장의 카드를 제시했을 것이다. 마귀는 주님에게 골고다로 향하는 언덕 길을 보여 주지 않았다.
십자가의 비참한 모습과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려 주지 않았다. 마귀는 주님께서 가셔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세상의 영광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마귀는 은근히 주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버릴 것을 유혹한 것이다. 굳이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마귀가 대신 영화롭게 해주겠다고 하는 약속이다.
성자 하나님의 사명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었다. 마귀가 하는 말은 무엇 때문에 인간 같은 것들을 위해 비참하게 대속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죄는 그대로
놔두고 예수 너는 영광만 받으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마귀의 수중에 그대로 남겨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네가 신자라고 해서 꼭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되느냐
라고 물어오고 있다. 마귀가 주님에게 십자가를 포기하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남을 위해 희생도 하지말고 손해도 보지 말라고
유혹한다.
우리 마음 속에 꼭 그렇게 손해 볼 필요가 있느냐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선택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세 번째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게 다가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혹을 받으면서도 행복해 한다. 곧 그렇게 되리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유혹이 있을 때 그렇게 될 것 같은 길이 훤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번째의 시험이 올 때는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단아 물러가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단은 우리를 이 세 번째의 유혹을 계속하고 있다. 물질적인 것, 성적인 것, 권력으로 우리를 속이면서 세상을 다 주겠다고 꼬드기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짧으니 모든 것을 즐기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단이 하자는 대로 하면 우리는 그 대가로 우리의 영혼을 팔아야 한다. 만약에 여러 분의 마음 속에서 세상의 방법대로 끌려가고 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기 전에 예수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물리쳐야 한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할 때 '만일 내게 경배하면'이라고 했다. 우리가 심각하게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마귀는 이미 두 번의 유혹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내게 경배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마귀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은 나도 알지만 그러나 만일 내 방법대로 하면 내가 성공의 지름길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번째의 유혹에서 많이 넘어지고 만다.
이 세 가지의 유혹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조건 성공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순서와 과정이 올바른지를 생각지 않는 풍조이다. 그래서 잘못된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 뉴스의 내용이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늘 무엇인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크든 작든 그것을 해결하려면 세상적인 방법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경험을 따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할 때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 '당신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예수님은 이런 말을 들으시고도 결코 범죄치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을 들 때 더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말 때문에 더 싸움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그리스도인이 겪는 시험과 연단과 영적 전쟁을 치룰 때는 무조건 이기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딱 세 마디로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단의 온갖 달콤한 제안을 물러가라고 큰 소리로 외친 후에 오직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무기를 항상 사용하길 바라신다.
이제 우리를 위해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성경 구절들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은 신명기 6:13절의 말씀이다. 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6:16절의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는 말씀은 신명기 8:3절에 있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신명기의 말씀만 사용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번 시험에서 실패했던 내용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사실을 사단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새로운 의지를 강하게 보여 주시고 계신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실패 했지만 예수님께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태어날 피조물들은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도 여러 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광야와 같은 곳이다. 여러 분도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실패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그 모든 실패하였다. 마귀가 유혹한 것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이 욕망을 품을 때 마귀는 신자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방법을 가지고 가까이 온다. 주님은 승리하셨다. 주님이 승리하신 장소가 어디인가? 그 곳이 광야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승리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광야와 같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승리한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주님은 광야로 성령에 이끌려 가셨다. 우리도 성령으로 인도함 받지 않고는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여러 분이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 주님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단을 이기셨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신적인 능력을 과시해서 사단을 이기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사단을 이기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길 밖에는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사단에게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절대로 우리의
인격을 내세워서, 높은 도덕적인 자질과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떠난 것은
말씀의 능력 앞에서 물러 갔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 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인정하라!
그 다음에 여러
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라!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적인 자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될지
생각해 보라! 그 답을 주님이 광야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얻기 바란다. 마지막 절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신다.
오늘은 성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주일이다.
성도 여러 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되시길
바란다.
하나님 만을 믿고 의지하며 유혹과 시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물리쳐서 항상 승리하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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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잘 믿으세요!
대문을 열고 한 젊은이가 나왔다.
그 젊은이에게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복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예, 저희 할아버지는 장로님이셨거, 저희 아버님도 장로님이시며, 저희 어머님은 권사님입니다.
제 동생은 대학부 회장을 맡고 있으며 나는 현게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합니다."
전도자는 다시 그 젊은이에게 질문합니다.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가? 라는 질문입니다.
전도자의 질문을 바로 나에게 적용해 봅시다.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쯤 되었을 무렵 갑자기 제자들에게 두 사람씩 짝을 지워 세상으로 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후에 각 마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제자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마을을 다니면서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쳐주었다며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남자 장정들만 오 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들에게 배부르게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여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엘리야, 세례 요한,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오시면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정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독립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유대인들이 오래동안 고대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 가문의 신앙적인 전통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 집안에 계신가? 하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내가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으며 무슨 일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직분이나 무슨 일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두 가지 생명을 갖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생명(비오스. βίος)
둘째는 영원한 생명(조에. ζωή)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7:3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 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 5:26, 12:50, 요일 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 1:4, 5:26, 행 3:15등, 요일 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뜻풀이부
1. [기본형] : 생명, 삶.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 8:14, 딤전 2:2, 벧전 4:3.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 12:44, 눅 8:43, 15:12,30, 21:4, 요일 2:16,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