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Habakkuk) 포옹 08/09/2023(수) -



화 있을찐저(2:6, 9, 12, 15, 19)

화 있을찐저(1945) 호이(hôwy) הוֹי

1. 화 있을진저.
2. 이사야 5:8
3. 예레미야 48:1
발음 / 호이[ hôwy ]
관련 성경 / 오호라(왕상 13:30), 슬프다(사 1:4, 렘 22:18, 48:1), 화 있을진저(사 5:8, 렘 22:13, 합 2:6), 화 있도다(렘 50:2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곧 이르기를 화있을진저...무겁게 짐진 자여

-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일반적으로 심판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예언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었다(사 5:8,11,18, 20-22; 렘 22:13; 23:1; 암 5:18; 6:1).
여기서도 앞으로 계속될 선포가 저주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저주를 듣는 자들을 향해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라고 표현하여 그들이 당하게 될 화는 그들이 자행했던 강탈과 노략에 근거한 것임을 시사한다.




우상(偶像) - 짝 우(偶), 모양 상, 형상 상(像)
하나님에 대(對)하여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 낸 신(神)의 형상(形象ㆍ形像)이나 개념(槪念)

우상(偶像) - 짝 우(偶), 모양 상, 형상 상(像)

6459. 우상(페셀. peçel)  פֶּסֶל    

1. 새긴우상,  2. 나무로 만든 우상, 3. 주조하여 만든 우상
발음 / 페셀[ peçel ]
어원 / 645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우상(출 20:4, 삿 18:20, 사 42:17), 신상(삿 17:3, 시 97:7, 렘 10:14), 목상(왕하 21:7, 대하 33:7).
구약 성경 / 31회 사용

* 6458. 파살(pâçalפָּסַל   

1. 새기다
2. 출애굽기 34:1
3. 나무로 만든 우상의 경우] 하박국 2:18.
발음 / 파살[ pâçal ]
관련 성경 / 새기다(합 2:18), 깎다(출 34:1,4), 다듬다(신 10:1,3, 왕상 5:18).
구약 성경 / 6회 사용




묵시(默示) - 잠잠할 묵(默), 보일 시(示)

묵시(2372) - 직접적(直接的)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慇懃)히 자기(自己)의 의사(意思)를 나타내 보임 / 3회(1:1, 2:2, 3)

2372. 하자(châzâh)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 15:17, 시 58:10, 겔 12:27), 우러러보다(욥 36:25), 바라보다(시 63:2, 미 4:11), 받다(사 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 1:1), 보이다(사 30:10), 들어가다(욥 8:17), 뵙다(욥 23:9, 시 11:7), 깨닫다(욥 34:32), 보게 하다(아 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강포(强暴) - 강할 강, 사나울 폭  - 3절 / 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강포(强暴, violence) - 강하고 사납다 / 5회(1:2,  3,  9,  2:8, 17)   

2555. 하마쓰(châmâç) חָמָס

1. 포악,  2. 악업
발음 / 하마쓰[ châmâç ]
어원 / 25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학대(창 6:11, 사 53:9, 습 1:9). 모욕(창 16:5), 흉악(삼하 22:3), 포학(욥 16:17), 악(시 27:12), 포악한 자(시 74:20), 폭력(창49:5, 삼하 22:3), 포학한 일(삿 9:24), 불의함(대상 12:17), 폭행(욥 19:7), 해(잠 26:6),
[형] 거짓된(신 19:16), 강포한(잠 16:29), 포악한(암 6:3), 불의한(시 35:11), 심한(시 25:19).


경고(警告) - 깨우칠 경(警), 고할 고(告) / 1:1,
주의하라고 경계하여 알림

1:3. /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간악 - 불의
패역 - 악
겁탈 - 약탈
변론 - 다툼
분쟁 - 시비



경고(警告, ) 마싸(massâʼ)  מַשָּׂא

מַשָּׂא 스트롱번호4853
1. 실어나름,  2. 짐, 3. 고양
발음 / 마싸[ massâ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짐(출 23:5, 사46:2, 렘17:21), 누(삼하15: 33,19:35), 일(왕하9:25), 노래(대상15:22), 경책(대하24:27), 해(욥7:20), 잠언(잠30:1, 31:1),경고(사13:1, 나1:1, 슥9:11), 중벌(렘23:36),묵시(겔12:10). [동] 메다(민4:15, 대하35:3),싣다(왕하5:17, 8:9), 노래하다(대상15:27), 바치다(대하17:11), 탈취하다(대하20:25), 엄중하다(렘23:33,34,36).
구약 성경 / 66회 사용

* 5375. 나사(nâsâʼ)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 nâsâʼ ]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13:6,7), 용서하다(창18:26, 출10:17), 듣다(창19:21), 데려오다(창45:19),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18:22, 민11:17), 메다(출28:12, 왕상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20:7, 신5:11), 전파하다(출23:1), 운반하다(민1:50), 돌아보다(신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13:29), 이끌어가다(왕상18:12), 뜨다(왕하19:22), 긷다(대상11:18), 장가들다(대상23:22, 24:3), 노략하다(대하14:13), 운반하다(대하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2:12), 따르다(욥13:8), 물다(욥13:14), 노래하다(욥21:12), 보다(욥32:21, 시82:2), 내다(욥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63:4), 주다(시72:3), 기쁘게 하다(시86:3), 치다(시133:9) 건너다(사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1:16), 솟아오르다(나1:5), 쓰다(학2:12), 받아 주다(말1:8), 긍휼히 여기다(말1:9), 실리다(창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32:1), 사죄함을 받다(사33:24), 달하다(렘51:9), 사로잡다(단11:12), 돋우다(사40:4), 안기다(사66:12), 뛰어나다(사2:2), 자고하다(사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9:11), 끌어가다(암4:2), 형벌받다(레22:16), 높아지다(단11:14), 높은 체하다(잠30:32), 흥왕하다(민24:7).[부] 높이(에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08-11-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께 대한 소문(하박국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LORD, I have heard of your fame; I stand in awe of your deeds, O LORD. Renew them in our day, in our time make them known; in wrath remember mercy.

주께 대한 소문(rumors about the Lord)
NIV. your fame
NASB. the report about You
KJV. thy speech

주께 대한 소문(8088) 쉐마( shêmaʽ) שֵׁמַע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쉐마[ shêmaʽ ]
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 사 66:19), 소문(욥 28:22, 렘37:5, 합 3:2), 큰소리(시 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구약 성경 / 17회 사용

주께 대한 소문(the report about You)은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남 왕국 유다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에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들이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이미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기원전 722년).
그리고 남 왕국 유다 나라도 거센 풍랑에 의해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이 다시 부흥한다는 것은 무너진 나라가 다시 세워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시대 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강포(强暴)"라고 합니다(1:2, 6, . 2:8, 17).
'강포'라는 히브리 단어는 "하마쓰(châmâç. חָמָס)" 라고 합니다. 
'하마쓰'란 "포학" 또는 "악업" 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합니다.
강포가 소개된 하박국 1장 3절의 말씀에서 강포의 내용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강포'란 "간악(불의), 패역(악), 겁탈(약탈), 변론(다툼), 분쟁(시비)"라는 내용으로 드러났습니다.

간악(奸惡) : 간사할 간, 악할 악 / 간사(奸邪)하고 악독(惡毒)함.
패역(悖逆) : 거스를 패, 거스를 역 /
겁탈(劫奪) : 도리에 어그러져 패악하고 불순함
변론(辯論) : 말씀 변, 논할 론 /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따짐
분쟁(分爭) : 어지러울 분, 다툴 쟁 /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게 다툼



더 이상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수년 내에 주의 일이 부흥될 것이란 소식은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소망과 용기를 갖게 합니다.

과연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손을 들어주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박국서의 결론이 드러나는 3장은 2절만 기도이고, 나머지는 전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이어집니다.
아직은 주의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깃발을 흔들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절망의 자리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눈물의 골짜기에서
죽음의 문턱에서도
찬양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1.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שִׁגַּיוֹן 스트롱번호7692
1. 열광적인 시,
2. 복수 שִׁגְיוֹנוֹת : 하박국 3:1.
발음 / 식가욘[ shiggâyôwn ]
어원 / 76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식가욘(시 7편 표제), 시기오놋(합 3:1)
구약 성경 / 2회 사용

* 7686. שָׁגָה 
1. 방황하다,  2. 비틀거리다,  3. 잠언 5:14
발음 / 샤가[ shâgâh ]
관련 성경 /  허물되다(욥 6:24), 실수하다(사 28:7), 범죄하다(민 15:22, 겔 45:20), 잘못되다(삼상 26:21), 미련하다(잠 5:23), 유리되다(겔34:6), 떠나다(시 119:21, 118), 미혹되다(잠 20: 1), 길을 잃다(신 27:18), 유인하다(잠 28:10).
[명] 속이는 자(욥 12:16), 허물(레 4:13, 욥 19:4).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여러 가지 ‘정죄’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불의와 강포에 대하여, 술 취함과 우상숭배에 대하여 분명하게 심판하시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들이 하박국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심판으로, 누구에게는 구원으로?
하나님께서 “의인을 살리시기 위한 방편”으로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약속을 받은 하박국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아직은 ‘축복된 상황이 아니다’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을 받은 하박국은 맨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아직도 불법과 불의는 시정되지 않았고, 여전히 약한 자들은 지배층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감사와 찬미를 여호와께 돌리고 있습니다.

3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기에서 시기오놋이라는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19절에 나타난 ‘수금’이라는 말과 동일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악기를 가지고 찬양하는 구체적인 기도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박국의 기도’라고 되어 있지만, 2절을 제외하고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주목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말씀 전체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심판’으로 볼 것인지, ‘구원’으로 볼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이들에게는 화산폭발의 예고가 구원의 메시지가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을까요?
하박국의 말씀, 그의 노래와 기도가 지금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로 들리고 있나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죽음의 전주곡인가요?
아마도 하박국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가 오늘 본문 2절 말씀이 아닐까요?
하박국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게 되자 그의 내면에서부터 일어났던 불같은 열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이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놀람에 대한 이유는 주께 대한 ‘소문(fame)’ 때문입니다.
이 소문을 리빙 바이블(living bible)
에서는 “your report"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2장에서 계속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응답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놀랐다’ (히브리어 야레)는 말은:
1.  두려움의 감정
2. 감정적 반응에 대한 강조 없이 악에 대한 지적인 예측
3. 존경 혹은 경외,
4. 공의로운 행위 혹은 경건
5. 공식적인 종교 예배 등의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공포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이신가에 대한 경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박국의 전환이 시작되는데 그가 가지고 있었던 항의와 의문은 이제 경외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굉장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성숙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의 가슴 속에 들어오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니 그에게 찾아온 열망입니다.
“주의 일을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지금까지 하박국의 고민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 .
우리 신앙의 성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이 기도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정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핵심입니다.
우리 신앙에 사라져 버린 기쁨은 결국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있었다면 평안의 회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시작하면서 찾아오는 것이죠.
하박국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으로 바뀌자 그의 기도가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의 입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고 무섭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응답이 ‘수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부흥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하려면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희망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이 희망은 하박국 전체의 주제가 되는 2장 4절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나올 수 있는 희망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의인되었다고 하는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려 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년 내에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심판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들에게서 엔돌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역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신앙의 모습이 바뀌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고 선언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나 통치를 제한하거나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십니다.”
“인생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분의 찬란한 영광의 빛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또 하나의 사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박국이 부흥을 선포하는 계기가 된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세상이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부터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의 ‘혁신’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니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공의로우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원칙과 공의는 ‘내 맘대로’ 하지 않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교만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내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죠.
‘겸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비전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대가 생깁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흥에 대한 기대는 지금 하박국과 그 민족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고난, 고통, 불의한 일들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부흥’의 영어 단어가 ‘revival’입니다.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다 은혜를 받았던 내용을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부흥이다!

구약개관을 강의하며 ‘소유와 율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앞두고 요단강을 건너야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맥을 거두는 시기’에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인데, 그 명령에 순종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들을 부흥을
경험합니다. 물에 발을 담갔으나 물속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부흥은 아무 때나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핍에서 부흥을 경험합니다.
절실한 갈망에서 부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홍수로 범람하는 요단강에 발을 담그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부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 뜻과 내 상식이 포기되지 않는 한 우리들에게서 큰 기적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소망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시작할 때 그에게 큰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유대가 고통 중에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부흥”에 대한 비전이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큰 고통과 상식을 뛰어넘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
기를 구할 때,
“주여 수년 내에 이루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때 놀라운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부흥을 갈구하는 하박국의 기도가 참 가슴 벅차고 소망적이지 않았겠습니까?
언젠가 집회에 참석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도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된 사람이 이야기
입니다. CBS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만든 한 장로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분은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졸업논문이 논문을 “인간의 운명이 사주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주제로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서 사주를 봐 주면 정말
기가 막히게 들어맞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점 마음속에 확신이 생기기를
‘인간의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구나. . .’
그러던 어느 날, 한 다방에서 혼자 앉아있는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논문을 쓰는 학생임을 밝히고
사주팔자를 보아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어 있을 사주”가 나오더라는 것
이지요. 그래서 자신 있게 물었답니다. “남편이 없으시죠?”
그랬더니 아 아줌마가 “아니요 남편이 있는데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가지게 된 생각이 사주가 안 맞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계속해서 조사를 하다 보니까 사주팔자와 운명이 안 맞는 사람이 자꾸 나오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이 사주팔자가 안 맞는 사람들의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조사를 하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맞지를 않는가 조사하기 위해 예배를 참석하다가 2년 만에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운명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고 나서는 견딜 수 없는 burning desire가 생긴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때에 가장 놀라운 부흥의 비전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문단 분해

3:1-2. 하박국의 기도.
3:3-15. 시내, 출 애굽, 여호수아시대 등에 있어서의 과거의 하나님의 위엄을 회고하여, 신앙을 격려하다.
3:16-19. 황폐와 환난 중에 있어서의 선지자의 확신.

하박국 3장은 일종의 시로서 뛰어난 운율을 갖추고 있다.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질의 응답을 통해 모든 의문이 다 풀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 찬양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1-3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4-7절),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8-16절), 그리고 믿음의 축복에 대한 찬양(17-1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주요 핵심부이다.
무엇보다 본서는 의인이 악인에게 핍박과 고난을 받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 믿음으로 사는 삶이 바로 진정한 신앙의 삶과 길임을 가르쳐 줌과 동시에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함으로써 참된 믿음에 이르는 길을 지도하며 신앙으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을 밝히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본장은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된 현상을 보고 회의를 가졌던 하박국이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 방법.
본장에서는 하박국의 찬양을 통해 이 세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첫째,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의 임재이다.
선지자는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고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산과 하늘로 대표되는 모든 자연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적인 통치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주권에 도전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만물에 대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이다.
세상에 나타나실 하나님은 그의 노를 발하시고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므로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자신의 뜻에 의해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본장에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인간들 앞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장엄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함과 동시에 인간들 로 하여금 하나님의 초월성과 영광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만물들이 절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행한 대로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은혜를 베푸시고 만물을 구원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의 임재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할 때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신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택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본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능력이 뛰어나신 하나님으로 보여지고 있는 그것은 곧 자연을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서만이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많이 있다.
세상의 권력이나 우리에게 핍박을 가할 수 있는 물질들, 또는 육체적인 힘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결코 세상적인 이런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권력은 있다가도 사라지고 물질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육체적인 힘도 세월이 지나가면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만물이 없어지더라도 결코 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부흥케 하옵소서!

1. 부흥케 하옵소서로 번역된 말은 WhyYEj';는 의 피엘형(강조) hy:j;(하야)이다.
현대어 번역본 그대로라면 ‘부흥케 하소서!’라는 말이 아주 이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부흥사들이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많은 교회들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본서를 기록한 저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박국?
하박국? = qWQb'j} = 포응 하다, 씨름 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아야하는지를 물었었다.
유대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죄 좀 지었다고 애를 좀 먹였다고 불신자 이상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강한 불만으로 대들 듯이)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종말, 종말 하면서도 언제가 종말인가가 매 시대마다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여호와여 대가 당신의 통보의 말씀을 듣고 두려웠나이다.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년 내에 일으키실 것이며  또 수년 내(中)에 당신의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진노 중에서라도 사랑하실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전체적 의미는‘여호와여 여호와께서 하시고자하는 뜻을 이루소서!’하는 말씀이다.

당신의 뜻? 부흥케 하소서!?

1) 부흥케 하소서 : hy:j;(하야)
하야(hy:j;:be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살다, 살아 있다, 생명을 유지시키다, '살다, 생명을 가지다, 살아있다,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다, 소생하다'를 의미한다.

1) 여호와 : h/:hy] : YHWH의 어원 및 의미와 보다 정확한 발음은 모른다.

(1) 적절한 해석은“있다,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haya(hy:h;:하야)이다.
출3:14에 하나님은 모세에게“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hy<h.a, rv,a] hy<h.a,)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보내셨다 하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하나님 여호와(h/:hy];: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효니라.”고 말씀하셨다.
NASB, NRSV는 “I AM WHO I AM”으로 번역했다.
정확한 번역은“I am He Exists.”이다. 이 문구는 그 의미에 있어서 초시간적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였고, 이제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자, 곧 영원한 존재자'의 의미.
그 이름 에흐예(h/:hy])는 칼(Qal) 미완료 1인칭 단수로 하나님께서“나는 있다”이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대대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kuvrio"라고 불렀다.
(2) 여호와의(YHWH : h/:hy])의 변형된 번역들
이 하나님의 이름 YHWH는 마소라 본문에서 금기 때문에 여호와로 나타난다.
2) 부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다.
시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16:11 주께서 생명(!yYIj')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jx'n<)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7:15절과 시16:11이 연결되어진다.
여기서 '생명의 길'과 죽음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행2:24-29).
내세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이 매우 순수한 공식화를 확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근거는 마법적이거나, 신화적이거나, 이론적인 것도 아니며 신비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은혜 그 자체만의 개념에 의하여 의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확신이다.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영원한 생수로 오신 것이 곧 경험적인 생명이시다.
5,부흥과 영원?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가 있는(시11:4) 하늘에 거하신다는 반복되는 구약성경의 개념(신4:36, 39, 왕상8:27, 욥22:12, 시20:6, 80:14])과 시편 기자가 그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하는 것(시17:15)을 보면 증명이 된다.
계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시온산이 영원히 있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시125:1).
그 대답은 어느 경우든지 비슷하나 지상의 시온산은 하늘에 있는 것의 대응이다(시123:1)
땅에서의 왕의 부귀는 단지 그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자애의 시작이다(시16:11).
그의 진노는 순간적이나 그의 은혜는 lifetime 같은 기간이 아니라 life-eternal(!yYIj')이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에는 영원이요 불신의 세계는 영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현대어 번역은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이는 본문(하박국) 전체를 볼 때 종말론적인 사건이며 마지막 때를 아는 이라면 하박국선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바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본다면 더 확실하게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결론

1. 마귀의 소원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2. 성도의 소원
합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계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7,h/:hy](여호와) → hy:j;(존재:있다) → !yYIj’(영원 : 당신이 그것을 이루다)


감사로 인생을 바꾼다(하박국 3:16-18)

몇 해 전 러시아 항공우주국에서 경보를 발령했습니다.
어떤 지역에 집채만 한 운석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보였습니다.
해당 지역은 즉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주민들은 대피를 가고 아예 이사를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청년은 도리어 운석이 자기 집에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운석은 신비한 우주의 조각이고 그것이 자기 집에 떨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러 자기 집을 방문 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집이 우주와 지구를 이어주는 신비한 통로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인터뷰가 방송이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운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청년처럼 자기 집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소동은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멋진 해석이 상황을 반전한 것이지요.
이처럼 제대로 된 해석은 인생도 바꿀 수 있다. 

이름도 재미있는 하박국은 주전 6세기 초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신흥국가 바벨론이 느부갓네살이라는 호전적인 지도자에 의해 영토를 넓히던 시절이었습니다.
거대한 제국 앗수르도 바벨론에 점령을 당했고 이집트도 전쟁에서 대패했습니다.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던 남왕국 유다는 호시탐탐 위협을 당하는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불안한 정세라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데, 나라 안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는 패가 나뉘어 분쟁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더욱 포악해지고 온갖 죄가 난무해 정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박국서는 이런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 드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패역한 죄악을 그저 보고만 계실 겁니까?
하나님은 즉시 대답하십니다.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심판할 것이다.’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심판을 당해 망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황한 하박국은 다시 질문합니다.
‘그래도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좀 더 의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도 없는 불의한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명쾌하게 답하신다.
‘바벨론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의인은 그가 어떤 민족이든지 살 것이다.’
본문은 이 대답을 들은 하박국의 반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듣자 하박국은 두려워졌습니다. 

하박국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습니다.
뼈가 시리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환경은 황무지처럼 변해버릴 것입니다.

하박국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스라엘 사람의 주된 식물인 무화과는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없다면 신선한 음료수를 구할 길도, 겨울을 날 건포도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도 소출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밭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으며 기근으로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양도 소도 없으니 고기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박국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하박국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뼈가 흔들릴 정도로 두렵습니다.
그런데 기쁘다니.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쁘다고 했습니다.
불같은 고난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흉포한 바벨론 군대는 홍수처럼 유다를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기운을 차릴 열매 하나도 변변히 얻을 수 없는 참담한 환경이 닥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정치적 무능 때문도, 갑자기 커져버린 바벨론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십니까?
회복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벌하는 것은 더 좋은 인생이 되도록 교훈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이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심판의 두려움 보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더 컸습니다.
심판과 고난을 다시 해석하니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도 감사로 해석해내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올 해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에서 우리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교회와 믿음 생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참혹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자연재해는 끊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가슴이 서늘한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세월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를 두렵게 했던 그 사건에 하나님이 계셨을까요?
내가 실패했을 때, 홀로 남겨졌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을 때, 내가 잃어버렸을 때, 내가 힘들어 탄식을 쏟아낼 때...하나님은? --- 내 곁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왜 도와주시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아나요? -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이유도 해결의 방법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나만 그런 일을 당했을까요? 아닙니다. 심지어 주님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외침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을까요?
이것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답을 하셨나요?
하박국의 질문에 그렇게 즉시, 분명히 답하시던 하나님이 예수님의 외침에는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질문에도 침묵하곤 하십니다.
사실은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의 고난이 이루어야 할 구원을 완성하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고난.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고난. 그 중심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한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했고 경험하는 고난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이렇게 해석을 하고나면 인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Paul Brand는 세계적인 외과 의사이자 나병 전문가 입니다.
어린 시절 인도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되어 인도에서 20년 나병환자를 치료했습니다.
미국 나병 연구소로 옮겨 30년을 나병을 연구하고 치료합니다.
나병, 한센씨병은 신경계에 침입한 박테리아로 감각을 잃어버리고 결국 신체의 부분이 절단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어느 날 고단한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발에 감각이 없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수많은 나병환자를 돌보다 결국 나병에 걸린 것인가?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어떤 부분이 감각을 잃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바늘로 다시 발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때의 경험으로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씁니다. 고통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지요. 

인생의 성숙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하게 엄습한 아픔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아픔이 아니었으면 알지 못할 인생의 비밀들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을 많은 것을 우리는 아픔을 통해 알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게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내 괴로움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 성숙이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
라는 시입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지푸라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일어난 단 하나의 어떤 사건도 의미가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감사해서 뭘 얻느냐고요?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얻는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도, 돈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잃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얻어도, 곁에 사람이 가득해도 불행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지킵니까?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절망을 감사로 해석해 내면 인생이 달라진다.’ 


08-10-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짓 스승(하박국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Of what value is an idol, since a man has carved it? Or an image that teaches lies? For he who makes it trusts in his own creation; he makes idols that cannot speak.

거짓 스승(teaches lies, a teacher of falsehood, a teacher of lies)
NIV. teaches lies
NASB. a teacher of falsehood
KJV. a teacher of lies

우모레 솨케르(וּמֹורֶה שָּׁקֶר)

거짓(8267) 쉐케르(sheqer) שֶׁקֶר  

1. 예레미야 23:32.  2. 거짓말.   3. עֵד שֶׁקֶר
발음 / 쉐케르[ sheqer ]
어원 / 826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거역하다(삼하 18:13).
[형] 거짓말하는(왕상 22:22, 대하 18:22), 당치 않은(왕하 9:12), 거짓된(시 109:2, 잠 31:30), 허무한(시 119:118, 잠 11:18, 렘 16:19), 속이는(잠 20:17, 21:6).
[부] 거짓으로(시 119:78).
[명] 악(렘 23:14, 거짓말(출 5:9, 시 63:11, 잠 13:5, 슥 13:3), 거짓(레 6:5, 시 119:67, 렘 51:17), 허사(삼상 25:21, 렘 3:23), 죄악(시 7:14), 위증자(시 27:12), 헛됨(시 33:17).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스승(3384) 야라(yârâh)  יָרָה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 15:4, 욥 30:19), 뽑다(수 18:6), 쏘다(삼상 20:36, 잠 26:18), 놓다(욥 38:6), 활 쏘다(대하 35:23), 적시다(호 6:3), 가르치다(출 4:12,13, 잠 4:11), 교훈하다(왕하 12:2), 가리키다(출 15:25), 점치다(미 3:11), 윤택하다(잠 11:25), 알게 하다(잠 6:13).
[명] 선생(잠 5:13),스승(사 30:20, 합 2:18), 교훈(합 2:19, 욥 36:22), 활 쏘는 자(삼상 31:3, 대상 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문단 분해

2:1. 선지자의 대망.
2:2-4.  하나님의 응답으로써 주어진 계시.
2:5-19. 적의 멸망과 이를 노래하는 조롱의 시.
2:20. 하나님의 임재.

갈대아도 심판받을 것임 - 하박국 2장
 
하박국은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으나 하필이면 왜 바벨론이냐 하는 것이 하박국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제기한 질문은 2장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되고 온 천하는 그의 앞에서 잠잠해야 하며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왜 하필이면 바벨론인가? 하는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바벨론 역시 죄로 인해 심판받게 되지만 그 가운데 유다도 심판당하나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범죄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후에(1장)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가 된 갈대아인들도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2장).

특별히 2장에서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는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하여 단호하신 하나님은 그러나 의인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계십니다.
나아가 의인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의인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악인들의 강포에 대해서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세력은 의인을 압제하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의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악인과의 싸움에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정한 때는 반드시 존재하며 또한 그의 때는 속히 이를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그의 때가 오기까지 인내하여 기다릴 것을 하나님은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득세하고 그 공포가 심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득세는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한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강포는 강력해서 의인들이 이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련이 올 때도 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본장을 통해 계시를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의 하늘 보좌에서 좌정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며, 나아가 우상 숭배를 일삼거나 의인도 핍박하기에 열심이 있었던 저들에게 하나님은 단호한 심판을 내릴 것임을 나타내셨다.
이 사실은 의인들에겐 위로가 되며 힘이 된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악에 대해 승리할 수 없으며 죄에 대해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악인의 강포가 아무리 강력하고 드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 위에 군림하고 계신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며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악인들의 핍박에 대해서 인내하고 끝까지 견딘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과 사랑을 보여 주실 것이며 나아가 이 세상에 대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보여 주실 것이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음(5315)
נֶפֶשׁ 스트롱번호5315

1. 숨,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네패쉬[ nephesh ]
어원 /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 13:20], 53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물(창1:20, 2:19, 9:16), 생명(창1:30, 출4:19, 민35:31), 사람(창12:5, 레7:25), 목숨(창12:13, 삼하1:9, 왕상20:42), 뜻(창23:8, 왕하9:15), 마음(창27:4, 출15:9, 레26:30), 혼(창35:18, 삼하11:11), 명(창46:15), 사정(출23:9), 죽은 자(레19:28), 몸(레21:1), 시체(레21:11, 민6:6, 합2:13), 주검(민5:2), 기력(민11:6), 명(名)(민31:35), 영혼(삿5:21, 욥10:1), 죽음(삿9:17), 심정(삼상1:15, 사58:10), 왕(삼상17:55), 중심(왕하4:27, 시131:2), 홀로(에4:13), 기력(욥6:11), 탐욕(시78:18, 사56:11),소원(잠11:23, 19:2), 음식을 탐하는 자(잠23:2), 식욕(전 6:7), 욕심(사 5:14), 성욕(렘 2:24), 생기(겔 37:9), 힘(암 2:14), 욕심(합 2:5)
구약 성경 / 753회 사용



교만(6075) 아팔( ʽâphal)  עָפַל 

1. 부풀어 오르다
2. 푸알형
3. 과장되다
발음 / 아팔[ ʽâphal ]
관련 성경  / 교만하다(합 2:4), 올라가다(민 14:44).
구약 성경 / 3회 사용


의인(6662) 차디크( tsaddîyq)  צַדִיק 

1. 의로운
2. 의로움을 지닌 사람.
3. 출애굽기 9:27
발음 / 차디크[ tsaddîyq ]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인(창 6:9, 시 1:5, 사 3:10), 의로움(창 7:1), 정의(창 18:25, 시 37:30, 합 1:4), 승리자(사 49:24).
[형] 의로운(창 20:4, 왕상 8:32, 시 116:5), 공의로운(신 4:8, 느 9:33, 슥 9:9), 옳은(잠 24:24, 사 41:26), 바른(잠 18:17).
구약 성경 / 206회 사용


믿음(530) 에무나(’ĕmûwnâh) אֱמוּנָה 

1. 확고함,  2. 안전,  3. 신뢰성
발음 / 에무나[ ’ĕmûwnâh ]
관련 성경 / 성실(시 37:3, 89:5, 렘 5:3), 진리(렘 5:1), 믿음(합 2:4), 성심(대하 31:12), 직임(대하 31:15), 진실(신 32:4, 대하 19:9, 시143:1, 렘 7:28), 신실(삼상 26:23), 직분(대상 9:22, 26).
[동] 진실하다(왕하 22:7, 시 33:4, 호 2:20), 내려오지 아니하다(출 17:12), 맡다(대상 9:31), 성실하다(시 36:5, 119:90, 사 25:1), 평안하다(사 33:6).
구약 성경 / 49회 사용


하박국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은 에무나 즉 성실과 진실과 착하고 충성입니다.

실제로 에무나(hn:Wma)의 뜻이 성실(誠實)이었기 때문에 하박국 2장 4절도 성실이라고 번역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총 49회 사용되었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믿음으로 번역하지 않았았고 거의 다 성실과 진실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원관념이 히브리어였고 히브리어가 다음에 헬라어로 번역되고 헬라어가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고 라틴어에서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되고 그 다음에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되고 그 후에 한국말로 번역되면서 우리는 다른 모든 개념이 다 없어져 버렸고 오직 믿음으로 굳어 버린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義人)은 그 믿음(hn:Wma)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도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이 이러한 말씀을 듣게 된 사연도 알아야 합니다.
주전 606년 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잡아다 족치고 죽이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의 마음에 의심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신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기 때문에 악인들이 의인들을 잡다다 죽이고 하는 것을 차마 보시지 못하실 터인에 어찌하여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방관만 하시고 계시는지 따지고 물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대답은,
"보라 그 바벨론 사람들은 그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의 종말로 속히 이르게 될 것이야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기다려 봐라! 정녕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만약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고 또 정직하고 성실해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죄가 아주 없어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원죄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착하지 않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 즉 죄도 있고 허물도 있고 실수도 있고 약점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착하고 충성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그 성실(에무나)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상서 3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主)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主)의 앞에서 행(行)하므로 주(主)께서 저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저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예비(豫備)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염려하는 의인들(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의인)은 그 믿음(hn:Wma)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단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의인들 중에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에무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니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오히려 너 보다 더 아끼고 있단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란 말도 좀더 심도 있게 살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말이 추상명사로 혹은 추상동사로 된 단어지만 본래는 형용사 즉 성실한, 진실한, 정직한 등의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 이전에 존재의 성품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아래 그림을 잘 보시면 에무나(히브리어) 피스티스(헬라어)의 의미가 본래 함의하는 의미를 표시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판결문에는 행위도 행위지만 착하고 충성된 종 즉 그 사람 그 존재의 성품과 함께 충성된 행위를 두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리라

첫째, 성실(시편 37:3, 89:5, 예레미야 5:3)

시편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dwell in the land and enjoy safe pasture.

시편 89: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The heavens praise your wonders, O LORD, your faithfulness too, in the assembly of the holy ones.

예레미야 5: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O LORD, do not your eyes look for truth? You struck them, but they felt no pain; you crushed them, but they refused correction. They made their faces harder than stone and refused to repent.


성실(誠實)이 재능을 이긴다

반짝이는 재능도 꾸준한 성실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인생에 있어서 바른 방향은 중요하다.
방향이 올바르면 성실하게 가기만 하면 승리한다.
그러나 방향은 맞는데 당장 열매가 없으면 우리는 낙심하곤 한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낙심의 해로움은 무엇인가?
중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실은 중단 없이 계속 가게 만든다.

다윗은 성실성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다.

사무엘이 왕을 택할 때 첫째부터 일곱째아들은 모두 집에 있었다. 유독 막내 다윗만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다. 다윗은 현장을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전쟁터에 있는 세 아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다윗을 보낸다. 이 심부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럼 왜 이새는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켰는가. 아버지 이새가 보건대 막내 다윗이 가장 성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맡길 때는 성실성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다윗의 성실성이 심부름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심부름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성실성은 항상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힘이 되곤 한다. 시편 78편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부른 이유가 그의 성실성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시 78:70∼72) 성실하면 기회가 온다. 성실하면 쓰임 받는다.

요셉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역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게 된다. 원래 형들은 세겜에 있었다. 그런데 세겜은 기분 나쁜 곳이다. 과거에 하몰의 일족을 몰살시켰던 장소다. 언제 보복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셉이 도착했을 때 형들은 세겜에 없었다. 요셉은 성실하게 수소문해서 형들이 도단으로 간 것을 알았다. 요셉은 성실하게 물어서 형들이 있는 도단으로 가게 된다. 도단에 도착하자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외치며 그를 노예로 팔아버린다. 요셉에게 성실성이 없었다면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실성을 귀중히 보시고 장차 애굽의 총리로 쓰임 받을 준비를 시키신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항상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실은 길을 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승리로 이끈다. 재능은 부족해도 좋다. 그러나 성실성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서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세계적인 교육학자인 존 듀이 교수는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욕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몹시 가난하지만 신앙을 지키며 말씀대로 살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성실과 신념이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으며 가난과 싸워 나갔습니다.
그 결과 30세에 점심을 배달하는 ‘모빌 런치 서비스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이어 세계적인 도너츠 상표를 개발하였습니다.
던킨도너츠(Dunkin’ Donuts) 창업주 윌리엄 로젠버그(William Rosenberg)입니다.
72세 생일축하 파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과 교육 부재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제 짐을 맡아 주셨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성공은 지식에 있지 않고 태도에 있다고 믿습니다.”

로젠버그는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적극적인 태도로 살았기에 형통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잡으려고 온 힘을 다하여 달려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을 잡았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벌써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고 난 후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학의 교과서
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2011년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자 기자들은 “당신은 성공학의 전문가인데 왜 파산하게 되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코비는 “나는 내가 쓴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답했습니다.
성공학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예라고 하겠습니다.
돈 따라, 명예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진리를 따르는 것(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단 한 사람을 찾는다.
그 사람은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설교자의 함정: 명사 예화

설교의 예화에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세상 명사들을 몇 명만 꼽아 보자. 

설교자들은 이들을 대체로 모범적이고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내세우고 있음이 거의 기본 전제와도 같다. 

조지 워싱턴 : 미국 연방 초대 대통령. 정직하고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추수감사절을 최초로 국가적 행사로 선언하여 지키기도 했다. 특히 밸리 포지 전투 중 추운 날씨 속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환상의 계시'를 받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 실체: 그는 각국 메이슨들이 열렬히 존숭해온 대표적인 고위급 프리메이슨 명사()였다. 종교적으로는 참 크리스천이 아닌 이신교도(deist)였다. 그는 기독교와 동시에 프리메이슨리에 늘 호의적이었고 적극 참여했다. 연방의사당 정초식 때도 메이슨 앞치마 등 예복 정장을 갖춰 입고 손수 메이슨 예식을 거행했다. 수많은 관련 초상화와 그림들이 남아 있다. 

수도 워싱턴DC는 메이슨인 그를 기념하여 만든 도시로 메이슨 상징물을 조합하여 엮어 넣었고(음모론이 아니다!), 한 가운데 세워진 워싱턴 기념탑도 프리메이슨들이 신성시하는 (남근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이다. 또한 별도의 조지 워싱턴 메이슨 기념탑도 따로 있으며, 워싱턴을 가히 건국신으로 신격화하여 전체 건국 스토리를 신화화 하다시피 한 곳이다. 오늘날도 워싱턴의 메이슨 앞치마 등 유물이 남아 있다. ] 


에이브러햄 링컨 : 그 역시 하나의 "경건한 기독교인"으로서 암살로 마치 순교나 한 듯 떠받들려 왔다.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 선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며,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해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에 거듭난 참 크리스천이었던 흔적이 전혀 없다. 어릴 적 아버지 때문에 잠시 형식적인 침례교인이었을 뿐.   

[ 실체 : 링컨은 암살로 죽기 얼마 전, 프리메이슨 가입신청을 한 기록이 현재도 남아 있다. 그 역시 일종의 이신교도였다. ]


더글러스 매카터('맥아더') : 인천 상륙 작전의 영웅인 유엔군 사령관. 특히 '매카터의 (아들을 위한) 기도'로 유명하다. 

[ 실체 : 프리메이슨 SR(스카티쉬 라잍)계 32단을 거쳐 최고위인 33단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그의 '기도'는 성경의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가 아니었다. ]


존 워너메이커 : 미국 백화점 왕. 필라델피아 YMCA 총무, 연방 우정국장 등 역임. "경건한 장로교인"으로서 베터니 주일학교(BSS)를 창설하기도 했다. 

[ 실체 : 역시 고위급 프리메이슨이었다. 1898년 62세로 윌리엄 켈리의 호의로 즉석 메이슨이 됐다가 1900년 펜실베이니어 젠킨타운 프렌드슆 라지 제400호 정식 단원이 되었다. 훗날 상임 워든(메이슨 신전의 직위), 이듬해 워시풀 매스터가 됐다. 훗날 SR 33단에 오름. 그밖에도 여러 메이슨 직위를 거쳤고, 자기 재산을 들여 1만 여 권의 메이슨 관련 도서와 서신, 7,400여 점의 예술품 등을 수집/기증한 적극적인 프리메이슨이었다. 그의 워너메이커 백화점에도 메이슨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나 있었다. 펜주 그랜드라지는 1993년 좐 워너메이커 메이슨 박애주의 메달(JWMHM)을 제정했다. 이 메달은 비 메이슨으로 메이슨 정신을 지지하는 인사들에게 주어진다.] 


루 월리스 :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성(준장). 영화 '벤 허'의 원작인 소설 '벤 허'의 작가. 성경을 거부하여 전국 도서실을 두루 다니며 반대의 글을 쓰려다 오히려 성경을 지지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 실체 : 그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프리메이슨이었다! 성경을 이용한 셈이다.]


좐 D. 롸커펠러(록펠러) : 석유재벌, 문화자선사업가. 현재의 데이비드 롸커펠러까지 롸커펠러 가문 대대로 롸커펠러 재단 등을 운영해 왔다. 유대계 '크리스천'으로 다양한 자선기부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나름 십계명과 십일조 생활로 이름이 높다. 뉴욬시 맨해튼에 있는 리버사이드교회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세계 최대급 카리용(종 세트)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또 부흥강사 무디의 말년, 무디 재단에 거액의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실체 : 롸커펠러 후손들은 유렆 중심의 롵촤일드 가문과 쌍벽을 이루면서, 일루미나티 등 다양한 비밀집단의 거두로 지내온, 대표적인 문제명사 집안이다. 유엔 건물의 터를 기증하는 등 세계 NWO 운동에 기여해 왔다. 롸커펠러가 주동이 되어 미국 언론을 장악해 오다 비밀집단들을 양성화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즈(영예 대령) :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창업주. 자선사업가. 안식일교 가정 출신. "경건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으며, 죽기 전 미하나님의성회(AG)에 유산 일부를 남겼다. 

실체 : 프리메이슨(입증됨) 33단. 묘비에 메이슨리/슈라이너/SR 로고가 새겨져 있다( > )  

노먼 빈슨트 필 : 미국 개혁교단(RCA)에 속한 뉴욬시 칼리지에잍 마블즈 교회의 목회자로 기독교적(?)이고도 세속적, 뉴에이지적 매거진인 '가이드포스트'를 발행했다(현재도 발행됨). 베스트셀러인 저서 '적극적 사고 방식의 힘'으로 20세기 긍정철학의 거두가 되었다. 그의 뉴에이지적인 긍정철학은 롸벑 슐러, 조용기, 김선도, 조울 오스틴 등 수많은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실체 : 그는 프리메이슨 거물급 인사로, SR 33단에다 또 다른 비밀단체 회원인 '슈라이너'였으며, 심지어 메이슨 신전의 대표적인 그랜드 채플린이기도 했다. ]


지미 카터(본명: 제임즈 얼 카터 2세) : 미국 제 39대 대통령. 특히 평생 주일학교 교사를 해 왔고 집 지어주기 등의 '선행'으로 알려져 있다. 또 평화사절 겸 문제해결사로 자임해온 인사이다. 

[ 실체 : 진보적인 사회주의자. 비밀단체의 일종인 '3변위원회'(TC) 창설멤버의 하나로 데이비드 롸커펠러에게 초청받았다. 역시 비밀단체인 '빌더버그' 그룹의 지원을 받아왔고, 해외관계위원회(CFR)의 위원이었으며, (극비의 숲 속에서 각국 저명인사들이 모여 부엉이신에게 '걱정' 제물을 살라바치는) '보히미언클럽(BC)'의 입증된 회원이다. 동성애 적극 지지자로, 동성혼까지 옹호하면서 보수적인 남침례회(SBC)를 탈퇴했다. 이런 사람은 성경에 비춰볼 때 엉터리/거짓 크리스천이며 그의 이른 바 선행도 성경적으로는 무의미한 쇼에 불과하다. 사랑은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


'성화'를 보고 "거듭난" 친첸도르프

성도 개인의 삶에서 거듭남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 순간 단순한 교인으로부터 신자로서의 삶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교인의 성경대로 거듭남의 여부가 확실치 않다면, 그의 삶이라면 몰라도 신앙에 대하여는 더 깊이 논할 수가 없다. 별 의미가 없어서이다. 모든 신자가 마찬가지다. 이렇기에 한 사람의 신앙을 논하려면, 그의 참된 거듭남 여부를 먼저 관찰해야 바른 수순일 것이다. 

교회 역사상 명사의 한 명이었던 모라비아 교회 최고의 지도자, 친첸도르프(기타 표기 : 진젠도르프, 진젠돌프)의 거듭남은 분명하지가 않다. 과연 그는 성경대로 말씀 진리와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났을까? 마침, 친첸도르프의 거듭남인 듯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한 중세 '성화(聖畵)'와의 조우였다. 이 사건을 함께 깊이 검토해 보도록 한다.

지난 2009년 좐 파이퍼 목사는 목회자 설교 사이트, sermonaudio.com에 올린 '하나님 자신의 피값으로'(At the Price of God's Own Blood)라는 제목의 오디오 파일1에서 친첸도르프에 관한 언질로 화두를 열면서, 친첸도르프가 여행 중 뒤셀도르프에서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i,2 1589-1623)의 Ecce Homo('에케 호모')3라는 그림을 본 사건을 설명했다. 그 그림의 맨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라는 라틴어 문구가 들어있었다. 파이퍼는 그 사건이 친첸도르프의 삶을 "바꿔 놓았다"면서, 그 때부터 친첸도르프는 자신을 자기 것으로 볼 수 없었고,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가 필요했는지, 무엇을 위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서 친첸도르프를 값을 치르고 사셔야 했는지를 자문하면서 온전히 그 분께 헌신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파이퍼는 친첸도르프 예찬론자의 한 명인 문제 명사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미술 비평 사이트인 '이코니아'의 블로거, 메나헴 웨커는 페티의 이 그림이 비슷하거나 동일한 주제를 다룬 티티안, 틴토레토, 메믈링, 렘브란트, 뒤러, 보쉬 등의 그림보다 예술적으로 "더 낫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이 작품의 "종교적 유용성에 관해 왈가왈부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자, 그런데 과연 성경 말씀도 아닌 페티의 미술 작품이 교인의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사건인 거듭남을 일으킬 정도로 거룩하고 성령의 권능이 넘치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친첸도르프는 물론 파이퍼의 믿음인 것 같기에 하는 소리다. 만약 한 미술품이 그런 영적인 파워를 지녔다면, 그것을 그린 화가 역시 영적으로 거룩하고 탁월한 신자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대언자나 전도자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페티의 이 그림이 친첸도르프를 거듭나게 해 주었다기 때문이다. 아니면 친첸도르프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 그림 속의 '이 사람'-크리스토가 마치 살아있는 듯 튀어나와서 친첸도르프의 영에 접근해 강력한 도전을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하든지. 

과연 하나님이 한 미술 작품 그것도 중세의 '성화'를 통해 그런 역사를 하시는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물음이다. 그림이나 영화, 음악 등의 시청각적 매체를 통하여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기도 하다. 

거듭나게 해 주는 대작의 힘?

친첸도르프는 이른 바 '봔더야르'(Wanderjahr)4 때, 젊은 귀족들의 '통과의례' 격이던 그랜드 투어를 한 지 약 1주 째인 1719년 5월 20일, 뒤셀도르프의 한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다. 그랜드 투어 중 5번째로 방문한 미술관이었다. 중세에 발달한 명 화가의 그림을 전시한 당대의 미술관이나 화랑은 귀족들의 문화 사교 중심지의 하나였다. 문지기가 깊숙이 절을 하자 친첸도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는 자신의 새 가정교사 리더러 및 이복형 프레데맄과 함께였다. 벽마다 둘러 보며 딴 그림들은 여타 미술관과 별 다름없다고 느끼던 그는 문득 이 작품 앞에 멈춰서서 유다른 인상과 감흥을 느끼며 묵묵히 바라보다가, 심오한 감동과 함께 위 문구의 말이 마치 크리스토님 자신이 그의 심정에게 한 말로 들리는 듯한 "거의 신비적인" 체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그 날 그는 속으로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 속에 한가로운 여행 따위로 시간을 보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프레데맄이 다가와 "나머지도 보지 않을래?"라고 물으며 "넌 여기서 15분동안 황홀경에 빠져 있어"라고 일러 주자 친첸도르프는 "그래야겠지"하고 비로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그 날로 크리스토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서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깊은 감동을 받은 것과 초자연적인 거듭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지 W. 부쉬가 빌리 그래엄의 교훈을 받아서, 그래엄을 통해 술을 끊게 되고 예수를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새롭게 보게 됐기에 결국 그래엄을 통해 "거듭났다"는 식의 '나름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참 거듭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스토리에는 몇몇 버전들이 있다. 페티의 그림 자체가 '에케 호모'를 비롯해 작품마다 다양한 버전들이 있어, 당초 친첸도르프가 감상한 실제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예를 들어 피렌체의 갈레리아 데글리 우피지에는 동일한 화가의, 동일한 제목의 딴 그림이 있다. 그러나 친첸도르프가 본 작품은 현재 뮌헨의 바이예르쉐 슈타츠무제움(바바리아 주립미술관)에 있는 것(윗 사진)이라는 설이 최종적으로 유력하다.
이 작품의 맨 아래 붉은 난간 부분에, 전술한 문구가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Ego pro te haec passus sum (에고 프로 테 해크 파수스 숨)

   Tu vero quid fecisti pro me (투 베로 퀴드 풰키스티 프로 메)


이 그림을 유심히 보면, 우선 대다수의 중세 성화처럼 역시 백인에 가까운 귀족적인 면모와 차림새의 '예수'가 가시관을 썼는데도 핏방울은 모두 얼굴 정면을 비켜 가고 있다. 되도록 환한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슬프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기보다 온화하고 힘 없는 표정이다. 손가락은 비참한 정황에 비해 너무나 섬세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거의 여성적이기까지 하다. 비록 수염이 나긴 했지만, 이 인물의 전체 분위기가 남성적인 듯 하면서도 여성적이다. 


해당 시간의 정황과 과정을 묘사한 성경의 수난 내레이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성경의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시각은 필라투스(빌라도) 총독의 프레토리움5에서 이미 채찍 형벌을 받고 난 뒤였다. 사형인 십자가형의 도입 격인 채찍 형은 널리 알려진 대로, 긴 가죽 조각 끝에 방울 모양의 납 덩이 등 금속 조각과 뼈/생선가시 등이 달려 있는 플라겔룸(flagellum)으로 병사가 반복해서 맹타하면 죄수의 살점이 쩍쩍 묻어나면서 등살 등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갈기갈기 찢기다시피 하는 극형이었다. 때로는 죄수의 등뼈가 드러나기까지 하면서 심한 출혈과 탈진으로 집행 도중 또는 집행 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죄수의 경우도 타격 회수만 남성보다 10회 정도 더 적었을 뿐 대동소이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극형을 견뎌낸 것은 다년간 목수 일로 다져진 신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동안 이내 쓰러지셨다.  


기원전 195-123년에 집필된 '렉스 포르키아'와 '렉스 셈프로니아' 등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이런 채찍 형을 비 시민 사형수에 해당하는 형벌로 유보해 두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의 로마 서정시인, 호라티우스6가 이 '공포의 채찍'에 관하여 언급한 바에 따르면, 최소 2명에서 6명까지의 집행자(lictor/맄토르라고 불렸다)는 죄수의 벌거벗은 몸을 키가 낮은 기둥에 엎드리게 하거나 세운 기둥에 똑 바로 묶어 둔 채, 맨 어깨부터 발바닥까지 온몸을 교대로 채찍질했다. 때로는 몸을 뒤집어 놓고 가슴을 치기도 했는데, 물론 그만큼 치명성이 가중되었다. 채찍의 타격 회수는 맄토르 자신들이 결정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님이 채찍형을 받은 뒤의 피투성이 형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페티의 그림 속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멜 깁슨 식의 '리얼' 기법을 통한 참혹한 묘사를 구태여 필요로 하지 않는다.7 공상도 상상도 아닌 그냥 생각과 묵상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친첸도르프는 이 비현실적인 '예수'의 모습에 "거듭날" 정도로 크게 감동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페티의 '에케 호모'속 '예수'의 왼손 손가락들은 무슨 상징에 가까운 수상쩍은 '포즈'를 하고 있으며, 목에는 두 손목에 연결된 밧줄이 늘어져 그 끝은 난간 한 가운데 마치 교수형에 쓰이는 올가미8의 작은 모형처럼 의미심장하게 늘어져 있다. 왜 하필 올가미인가? 올가미는 흔히 비밀집단 가입의식 때의 맹약에 쓰이는, 널리 알려진 중요한 오컬트 상징물의 하나이다9. 페티는 혹시 당대의 수많은 화가/조각가/건축가 등 전문인들처럼, 메이슨리와 유사한 공인/장인들의 비밀단체에 가입 또는 개입해 있던 것일까? 아니면 오컬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림 속 '예수'를 통해 비밀집단을 간접홍보하려던 것은 아닐까? 이 '크리스토'가 그림 감상자에게 묻는 은밀한 물음은 "그대 역시 맹약의 올가미를 목에 걸칠 의사는 없는가?"라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친첸도르프가 받은 감동과 그의 이 '거듭남'과 '헌신'이란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일 수 있다. 필시 당대의 다양한 오컬트와 비밀집단에 대한 선지식을 갖고 '겨자씨회'라는 문제집단을 몸소 만들다시피 한 그가 이 오컬트적(?) 그림의 '암호'를 발견하고 반가워(?), 화가와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깊은 속뜻을 누가 알랴.

"너도 나처럼 채찍형을..."?

이 문구의 물음에 그런 암시적 의미가 전혀 담겨있지 않고 순수하다면, 아직 십자가 형을 받기도 전인 그림 속의 '예수'가 감상자에게 질문/요구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채찍 형에 준한 벌을 자진해서 받으라는 뜻일까? 구태여 이렇게 묻는 이유는, 실제로 중세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율법적인 금욕이나 모종의 계율을 위하여 자신을 채찍질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채찍 형벌'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이교적인 근거가 있다! 

고대 로마의 루페르칼리아(Lupercalia) 축제기간인 2월 13-15일에 악령을 내쫓고 도시를 정화하여 다산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인 동물(februa)10의 엉덩이(hide)에서 벗겨낸 가죽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치고 다녔다. 여성과 소녀들은 장사진을 치고 늘어서서 이 가죽채찍을 맞았는데, 불임 방지, 다산 촉진, 산통 절감을 위해서였단다. 적어도 낙태를 위해 채찍을 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로마 때의 사가, 플루타르크는 이 축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루페르칼리아는 많은 사람이 관련 글을 써온 대로, 고대 목자들이 즐기곤 하던 절기로, 아르카디아의 뤼케아(Lycaea)와도 모종의 연계가 있다. 이 시즌에 수많은 귀족 청년들과 시민 청소년들이 벌거벗고 시내를 두루 누비는가 하면, 스포츠와 웃음을 터뜨리며 털이 달린 가죽끈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후려치곤 한다. 귀족 여성들도 일부러 그 앞에 나서서 어린이들처럼 손을 내밀어 일부로 채찍을 맞곤 한다. 임신과 출산을 쉽게 하고, 불임을 다산으로 바꾸기 위해서이다."

호라티우스도 그의 서시 'Ode III'에서 루페르칼리아를 묘사한 바 있다. 사실 '늑대 축제'라는 뜻인 루페르칼리아는 로마의 건국자로 알려진, 암늑대 '루파'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고아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과도 연계돼 있다. "지난 계절을 속죄하고 새 봄을 정화하기 위한" 이 축제는 전통적인 건국 지점인 로마 중앙 언덕, 팔란티네 위의 루페르칼 동굴 인근에서 관련 행사가 치러지곤 했다. 기원전 44년 기록만 해도 축제가 지속되다가 동굴이 회복되기 어렵게 파손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때에 와서야 복원된 뒤 축제가 재개됐다. 지난 2007년 아우구스투스 궁의 유적지 지하 15m 지점에서 발굴된 동굴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학설이 있다. 

축제는 루페르키(Luperci)11에 의해 진행됐는데, 이들은 반신반수의 음란한 목신(牧神), 파우누스(Faunus, 그리스의 Pan. 참조 그림 링크 >)의 사케르도테스(사제)이기도 하다. 루페르키들은 퀸크틸리아12 족 출신의 '퀸크틸리아니'13와 파비아 출신의 '파비아니' 등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고, 이 그뤂 위에 감독관14이 있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15를 기리는 제3의 그뤂인 '율리'가 추가되었고, 이 세 그뤂 위에 최초로 감독관이 된 사람이 바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그는 축제기간중 카이사르에게 관을 헌정했는데, 카이사르가 조만간 왕이 되리라는 표징으로 해석되었다.16 루페르키는 축제 때 맨 몸에다 옷 아닌 염소가죽만 걸치고 진행했고, 황제시대엔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이 축제는 루페르키 또는 유피테르(주피터)신의 사제들인 '플라멘 디알리스'가 늑대 신에게 숫염소 두 마리와 개 한 마리를 바치는 제사로 시작됐다. 그 다음으로는 두 명의 젊은 귀족 루페르키가 안내를 받아 제단에 이르면, 이마 위에다 제물의 피를 붓고, 제물의 피로 난자한 칼을 우유에 적신 털로 닦아 내고는 미소와 웃음을 웃었다. 제사가 끝나면 루페르키가 희생동물(페브루아)의 가죽으로부터 끈을 만들어 들고 제물로 바친 염소의 가죽을 걸쳐 루페르쿠스의 모습을 꾸미고는, 돌로 표시해 놓은 선을 따라 팔란티네 성의 벽을 돌며 두 떼로 나누어 군중들 특히 다산과 임신을 바라는 소녀들과 여성들을 가죽끈으로 후려치곤 했다(참조 링크: >). 

대상과 개념이 이렇다 보니, 이들 사이에는 학대성/피학대성 성욕(마조히즘/사디즘)과 주물숭배 감정이 교차했을 테고, 실로 문자 그대로 양탈을 쓴 늑대들인 셈이었다. 오늘날 검정 가죽옷을 입고 가죽 채찍을 든 파트너가 파트너를 때리고 맞으면서 서로 학대/피학대 성욕을 돋운다는 변태적이고 가히 악마적인 페티쉬즘(fetishism) 행습은 파우누스 신도 연계된 바로 이 음란한 축제에서 비롯된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 자신을 채찍질하는 중세 고행자들

그 후 5세기 말엽에 천주교황 겔라시우스 1세의 치하 때 이 관행은 "수치스런" 것으로 여겨져 폐지되는 듯 했으나, 어이없게도 천주교 속에 은연중 침투하여 자기금욕과 고행의 도구로 둔갑했다. 어떤 학자들은 겔라시우스가 이것을 양성화하여 '복된 정녀 마리아의 정화 축제'로 대체했다고 한다.17 

 아무튼 기독교에 없던 자기 채찍 형벌이 천주교에 생긴 것은 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이교적 연원임을 필경 알아채 수 있다는 것이다.(참고 링크: >)


흥미롭게도 이런 자학적인 자기 채찍질은 회교 등 이교에서도 흔히 발견된다.(링크: > ) 사실 우리의 생각에 선뜻 떠오르는 광경은 고대 카르멜(갈멜)산 정상에서 엘리야와 겨룬 바알과 아쉐라 사제/'예언자'들이 하늘에서 바알의 불이 내려오지를 않자, 자기네 몸을 학대하며 피를 뿌리던 진풍경이다(왕들A=열왕상 18'26~28).  

이 문구가 만약 "내가 받은 고난과 십자가형을 본받아 그대도 나름대로 십자가를 지고 받으라"는 주님의 교훈에 근거한 순수한 의미였다고 가정한다면, 프레토리움에서의 그 분이 아닌 십자가 위의 그 분이 하신 말일 때 비로소 제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채찍형은 단지 수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응보적 대가를 요구하는...?

"나는 널 위해 이것을 했노라.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오해하지 마라! 이 라틴어 문구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경엔 이런 되바라진 보상의식적인 개념이 없다. 자칫 비슷해 뵈는 개념은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음은 성경대로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아무 것도 할 생각을 않느냐"는 식의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가? 주님은 결국 인류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인가? 과연 우리 자신의 십자가로 주님의 대속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나 있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까지 거저 주신 것은 무조건적인 아가페 곧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페티의 '에케 호모'의 문구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주님이 채찍형과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은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정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지, 인류 각 사람에게서 대가를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바라신 것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지, 죄과에 해당하는 속전을 물어 내라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그 분이 무한한 사랑으로 치르신 그 고귀한 희생에 응하여 구주이신 그 분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이다. 또한 제자가 되려면, 각자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름으로써 그 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주님이 명하신 바이다. 

"내가 대가를 치렀으니 너 또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라"-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이 아니다. 주님은, 무엇인가 주어졌으니 무엇인가 받게 되리라는 'Do ut des(도 우트 데스)'의 원리에 의하여 우리에게서 뭔가를 기대하신 것이 아니다.  



'성화'는 계명 위배


그보다도 이런 그림을 제작하는 행위가 십계명의 제 2 계명(플러스 제1계명)을 어겼다는 더 큰 문제가 있다. 혹 우상숭배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상 제조/구매 혐의가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중년에 미국에서 성령의 은총을 입고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지만, 신/구/정교계를 막론한 예술품인 모든 '성화'나 조각상 따위는 우상숭배의 대상이기가 쉽다. 따라서 교회당 안이나 신앙단체의 건물 내부, 올바른 신자의 생활공간에 '성화'나 종교영화 장면 속 주인공 같은 '성경인물'의 사진 따위가 있어선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미술품들이 모종의 외경이나 '숭경심'을 자아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천주교당 주변의 모든 '성상'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이것을 제거할 때는 율법적인 단죄를 삼가고 어진 충고로 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딴 글에서 비쳤듯, 예수회 사제회원이었던 관상가 헨리 나웬은 정교의 성화상을 앞에 놓고 하는 관상기도에 관한 책을 쓸 정도로 성화상 숭경에 몰입했다.( > ) 이 모두가 제 2 계명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독자에게 권하건대, 당장 집안의 모든 '성화'들을 제거하라. 교회에서도 역시 지도자들이 그런 단행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부드럽게 권유조로 해 나가길 바란다. 신자가 이런 '성화'를 가까이 할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속 또는 조각상의 인물이 실제 성경 인물일 가능성도 없거니와 실제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의 제작은 성경이 권하는 바가 아니다. 이 모두가 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섬기는 천주교/정교에서 온 관행이다.    




페티의 다른 작품, '멜랑콜리'(옆 사진)에서는 등장인물이 해골을 끌어안다시피 한 채 묵상/고심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 ). 

또 다른 중세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신화 속 주제를 다루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베르툼누스와 포모나'(Vertumnus et Pomona)이다( > ). 신화 작가 오비드의 '메타모르포시스' 제 14장에 따르면, 베르툼누스는 '계절의 신'으로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이용, 늙은 여인으로 위장해 아름다운 요정 포모나의 과수원에 침투하여 다양한 이야기로 유혹하다가 강간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본래 에트루리아에서 왔다는 베르툼누스 신 숭배 관행은 기원전 약 300년에 로마에 입수되어, 에트루리아의 볼시니18가 함락되던 해인 264년, 고대 로마 근교의 7개 언덕의 하나인 아벤티네 언덕에 그 신전이 세워져 매년 8월 13일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페티의 작품 '헤로와 레안데르'(Hero et Leander) 역시 신화적 소재를 다루었다. 

그밖에도 중세 천주교도인 그로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비성경적인 성모 '무염시태'도 있고, 정체 미상의 해골을 든 채 '회개'를 하고 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소재들을 갖고 미술 활동을 한 페티가 성령의 영감이나 권능을 지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는 당대의 수많은 카톨맄 화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사였다. 


참고로, 페티는 1589년쯤 로마에서 태어나 루도비코 치골리 문하에서 미술 수업을 한 뒤, 1613-1622년 만투아의 추기경이었다가 훗날 기회를 틈타 '성직'을 버리고 공작이 된 페르디난도 빈첸조 곤자가 1세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특히 신약성경의 비유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1622년 9월쯤 그는 만투아의 명사들과 서로 다투던 끝에 베니치아로 옮겨 잠시 작품생활을 계속하다, 1623년에 죽었다.19 

이러한 페티의 삶 속에서 남을 거듭나게 할 만큼 "신적이고 위대한" 영감의 작품을 그렸을 여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밖에도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스토리엔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슈테른부르크' 또는 슈텐베르크라는 화가가 어린 짚시 소녀에 질문에 감화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는 근거 없는 일화가 그 하나이다. 




또 다른 '감동' 간증

이 그림을 갖고 각별한 '체험'을 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우리네 찬송가 '네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20의 작시자인 영국의 여성 시인/찬송작가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걸(Francis Ridley Havergal, 1836-1879) 양이다.
8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해버걸은 '나의 생명 드리니', '복을 세어 보아라' 등 수많은 명찬송시를 쓰면서 독신으로 지냈다. 

해버걸은 뒤셀도르프에서 유학을 하느라고 유렆 대륙에 머물던 시절, 독일 목회자의 서재에서 머물던 1858년 1월 10일, 페티의 이 그림과 문구를 처음 대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스르르 온몸의 힘을 잃는 듯 이 그림 앞에 주저앉았단다. '구주님'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무는 듯 했단다.21 해버걸이 문구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흐르듯 떠오르는 찬송시를 종이에다 연필로 써 나아갔다. 바로 '나 너를 위하여 내 생명 주었단다'(I Gave My Life For Thee)였다. 그러나 시를 다시 살펴보면서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에 난로불에 던져 넣느라고 했더니, 그냥 바닥에 떨어졌단다. 1859년 이 시는 소책자에 실렸다가 이듬해 '좋은 말씀'(Good Words)에 실려 출판됐으며, 1869년에는 아버지가 붙인 가락(곡명 'Baca')과 함께 처음 선을 보였다. 해버걸이 이 시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느낌을 말하자 아버지는 잘 간직해 두라고 일러주고는 이 시를 위한 가락(곡명 Baca/'바카')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같은 시에다 미국 작곡가 P. P. 블리스가 붙인 곡(곡명 'Kenosis')으로 더 널리 불려진다. 그래서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태어났다.( > )

 

해버걸이 같은 그림의 선배 감상자인 셈인 친첸도르프의 일화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영국의 모라비안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친첸도르프 역시 상당한 경력의 찬송가 작가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에 얽힌 이런 짧은 감동 문구에서 큰 영감을 얻는 모양이다. 

작가들이 쓴 이런저런 찬송시들은 성경과 같은 격의 계시적 영감을 받고 쓴 것일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비성경적인 부분을 지닌 다수의 찬송시가 이 물음에 의혹을 던져 준다. 또 중세 천주교의 '성화'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이런 찬송시를 썼다면,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전술했듯, '에케 호모' 속 의문의 밧줄 '올가미'와 실상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문구 등이 우리에게 의문을 던져 준다.



친첸도르프와 해버걸이 페티의 '에케 호모'로부터 어떤 감동을 받았든지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 어렵다. "성령께서 하찮아 뵈는 재료로도 그런 역사(役事)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독자가 있을지 몰라도, 천만에다. 필자가 아는 한, 성경의 성령님은 십계명에 직접 위배되는 그런 '성화'를 통해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이런저런 요소를 적당히 활용하셔서 진리를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한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바로 그래서 '에케 호모'를 보고 "거듭났다"는 친첸도르프 및 모라비안들과 좐 파이퍼 등 여타 인사들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라는 결론이다. 


또 화가 페티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 모를 문구를 갖고 큰 감동을 받아 썼다는 해버걸의 찬송시도 성령의 영감으로 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냥 명언에 의한 해버걸의 문학정서적 감동의 소산이라고 하면 모를까. 



친첸도르프는 중세 유렆의 수많은 화가들에 의하여 판 치던 이런 미술품 중심의 시각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퍽 감성적 성향이었던 그는 만년인 훗날에 미술 정서에 치우친 나머지, 흔히 '성화'에 보이곤 하는 '예수' 옆구리의 창자국을 '옆구리 구멍(Seitenhölgen)'이라고 부르며, 이 '구멍'에 대한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 영적이 아니라 센슈얼하다 못해 섹슈얼하기까지 한 기묘막측한 "성적(性的) 신학"을 만들어 낸다. 같은 시대에, '나를 위해 틈새가 난 영원한 바위(만세반석), 나를 숨겨 주소서(Rock of Ages, cleft for me)'라고 읊은 영국 개혁주의 시인, 어거스터스 토플래디의 찬송시도 이와 과히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차회에서 논하겠다.


'모라비아'라고 하면, 흔히들 감리교 창시자인 존과 촬즈 웨즐리 형제를 연상할 것이다. 

1736년 1월 하순, 미 대륙으로 향하던 배 위에서 웨즐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 속에도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는 모라비아 형제회 교도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최근 모라비아교(Moravian Church) 관련 뉴스들이 심심치 않게 뜨곤 한다. 이 교파는 웨즐리 형제에게까지 영향을 준 경건주의(Pietism)로 유명하지만, 그들의 경건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경건을 추구한다기보다 그들 나름의 경건주의라고 판단된다. 까닭은 여러가지이지만, 이들은 특히 20세기였던 지난 1974년대에 이미 동성애자들을 "완전한 교인들"로 포용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2002년 북부지방대회(NPS)는 당분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있다가 올해 드디어 동성애자들의 안수례를 허용키로 NPS가 표결했고, 심지어 북미주 동성애자들의 '결합예식서'를 작성, 발표했다. 다만 여타 지방회는 아직 이렇다할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라비아교가 에큐메니즘을 지향해온 때문일 것이다. 예부터 '경건'을 자랑해온 모라비안들치고는 참 놀라운 일이다. 결국 옛 파리새(바리새인)와 다름없는 경건이려나. 

  

가장 근래엔, 신자는 모름지기 매일 24시간 기도를 해야 한다며 '연쇄기도'를 강조하는 소위 '24/7 기도운동'을 해온 마이크 비클의 아이핲(아이합, IHOP)이 모라비아교와 연계되어 부각돼 왔다. 원래 이 기도운동의 뿌리가 친첸도르프와 그의 모라비아교 집단인 헤른후트이기 때문이다. 나중 언급할 테지만, 아이핲과 모라비아교의 연계는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 또 비클과 무관하지 않은 사이인 맄 조이너1 역시 모라비아교와 연계가 있다. 


모라비아교 경건주의의 선구자였던 독일의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영어: '니콜러스 루이스 진젠돌프')는 지금까지 경건주의자의 모델로 늘 떠받들어져 왔다. 모르긴 해도,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는 아마 웨즐리와 감리교에 준 영향으로 톡톡한 점수를 따 왔을 것이다. 아울러 웨즐리 형제와 친첸도르프는 모두 미국 대륙을 방문한 일로 미국인들에게도 호감을 사 왔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모국인 독일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교인들은 세계 크리스천들의 상찬을 받아 마땅할 만큼 경건하고 훌륭한 신자였을까? 수많은 설교가, 교회사가들이 경건의 모범적 사례로 들 만큼 유명한 그가 가르친 경건주의는 정말 성경적이었을까? 

정작 살펴 보면 의혹스런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에, 이를 따져 보기 위해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교에 관한 시리즈를 모두 3회에 걸쳐 마련해 본다.



모라비아란?

친첸도르프 백작은 독일 귀족으로, 본래는 놀랍게도 모라비아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 점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모라비아는 중앙 유럽에 있는 지역으로 체코(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의 동부 대부분을 차지하며, 역사적으로는 보헤미아, 체코 실레지아와 함께 체코 동쪽에 있던 나라의 하나였다. 모라비아라는 이름은 이 지역 북서부에 있는 모라바(Morava, 독일어 '마르히')강에서 유래했다. 

모라비아 교의 유래


마르틴 루터의 개혁 이전에 존재했던 사상 최초의 신교 교파인 모라비아교는 처음에는 14세기 말 체코-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Jan Huss 영어 존 허스)의 사상을, 훗날에는 독일의 슈페너와 프랑케의 루터교 경건주의 등 두 줄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후스는 로마 천주교에 반대하여, 라틴어가 아닌 비잔틴 초기 시대에 영향을 받은 모국어(체코) 사용, 빵과 포도주를 모두 사용하는 성찬, 사제혼인제 등으로 복귀하기를 원했고, 면죄부와 연옥설을 거부했다. 후스와 모라비아교는 보헤미아 왕실의 지지를 얻었으나, 그는 콘스탄체 공의회에서 이단 단죄를 받아 1415년 7월 6일 화형 당했다. 이로 인해 1419~1437년 '후스 전쟁'이 일어났는데, 처음엔 천주교도인 지배자와 후스 파(Husité, 영어 Hussites) 사이에, 나중엔 후스파 사람들끼리 벌어졌다. 온건주의 후스파였던 '울트라퀴스트'들은 천주교와 손잡고 다른 후스파와 맞서 싸우다, 1434년 리파니 전쟁에서 상대 후스파가 패전한 뒤, 1436년 7월 5일 바젤 조약을 맺었다. 


1457년, 후스의 제자들 일부가 독립적으로 보헤미아 형제회(Čeští bratři) 또는 형제연합(Jednota bratrská 라틴어 Unitas Fratrum)을 보헤미아의 쿤발드에 설립했다. 

[ 이것은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게 왕의 사유지에서 피신처를 얻었기 때문이다. 왕 자신 후스파 지도자인 휘네크 프타체크가 죽은 뒤 후스당의 주요 지도자가 된 데 이어, 1458년 보헤미아 왕위에 올라, 신구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이 되어 다스렸다. 그후 친교황측 귀족들과 적대 관계가 되자, 1465년 젤레나 호라(그뤼네베르크)에서 열린 친 교황측 회의 후 이듬해 12월 23일, 천주교황에 의해 출교된다. 이를 틈탄 프레데맄 3세 황제와 헝가리의 마티아스 왕이 그를 적대해, 결국 1469년 5월 3일 모라비아 수도인 올로무츠에서 마티아스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게오르게 왕은 마티아스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추종자들의 뜻과는 달리 1470년 화해조약을 체결한 이듬해 죽었다. ]


16세기 중반까지 체코 왕정 지역 인구의 90%와 귀족들 대다수가 신교인들이었다. 또한 모라비아 교회가 세운 신교계 학교와 출판사 등이 번창했다. 후스파의 특징은 귀족화된 천주교와는 달리 일반 교인들을 위한 보편적 교육을 시행한 점이었다. 급기야 체코 땅에는 신교 학교가 없는 도시가 단 한 군데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주요 도시인 질라바에는 6개나 설립됐다. 수도에 있는 프라하 대학교도 신교인들이 주도하여, 천주교는 교육에 관한 한 맥을 못추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천주교는 합스부르크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예수회 회원들이 체코 땅으로 진입하여 수도 올무츠(1566년)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천주교 교육기관을 세우게 된다. 마티아스 신성로마황제는 카톨맄 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들자, 이미 2개의 신교 교회를 강폐 당한 뒤인 1618년, 보헤미아 신교 귀족들이 이에 반발하여 '보헤미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 후 프라하 근교의 빌라 호라(하얀 산이란 뜻)에서 벌어진 백산전쟁(Bitva na Bílé hoře)에서 패전했다. 이 전쟁은 '30년 전쟁'으로 발전한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계 천주교도들로 바뀌고 신교 귀족들은 처형/축출됐으며, 전쟁과 역병, 기타 악영향으로 인구 300여만이 80만으로 급감했다. 또 예수회의 공작에 의하여 1622년까지 신교 학교들은 모두 폐쇄된다. 예수회에 의해 모국어로 된 책들은 불태워지고 모든 신교 출판물은 '이단서적'으로 단죄됐다. 


이에 따라 형제회 사람들은 지하활동을 하다가 결국 북부 유럽 저지대 등으로 흩어졌는데, 체코 모라비아 교회 최후의 감독인 얀 아모스 코멘스키(코메니우스) 감독 등이 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형제회 최대 그룹은 폴란드 레스노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코멘스키가 선조의 복음주의 신앙을 보존하기를 바랐던 '숨겨진 씨앗'이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722년 6월 17일쯤, 모라비아 북부에서 지하생활을 하던 보헤미아 형제회 '숨겨진 씨앗'의 일부가 박해를 피해, 니콜라우스 루드빅 폰 친첸도르프의 소유인 베르텔스도르프 영지에 도착한다. 그들의 지도자인 순회 목수(木手, 일설엔 도공), 크리스티안 다뷔드가 친첸도르프를 만나 친교를 나눈 결과였다. 그들은 친첸도르프의 호의로 루사티아 북부(현재 독일 동부의 작센 지방, 오벌라우지츠)에 정착하도록 허락받는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새 마을인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지켜 돌보심'이라는 뜻)가 세워졌다. 



친첸도르프의 생애와 경건주의

모라비아 교의 지도자이자 찬송가 작가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 백작(1700~1760)은 1700년 5월 26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대 유렆에서 가장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 북동부 귀족층으로, 개혁시대 때 루터교인이 되었다. 친첸도르프 선조들 가운데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있다. 루드비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막시밀리안 폰 친첸도르프는 천주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재산을 팔아 독일 프랑켄('프랑코니아')으로 이주했다. 

루드비히는 생후 6주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할머니 헨리에테 카타리나 폰 게르스도르프와 이모가 사는 그로스헤너스도르프의 성에 보내졌고, 4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주로 할머니의 손 아래 자랐다. 당초 루드비히의 부모는 경건주의에 심취하여, 경건주의 학자 필맆 야콥 슈페너를 루드비히의 대부로 모셨다. 

루드비히가 평생 경건주의 영향 아래 살게 된 내력의 일부가 그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깊은 루터교 신앙을 지녀, 8살 때 예수님께 '사랑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2. 청소년기에 들어서자 그는 자연히 미래 사역자로서, 그리고 귀족(백작)으로서의 할 일도 생각해야 했다. 친첸도르프는 그가 숭모하던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감정의 사람이었고, 자주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에 쉽사리 좌우되곤 했다. 

'겨자씨회' 결성

1715년, 당대 경건주의의 온상인 할레 아카데미에 다니던 친첸도르프는 4명의 귀족 친구들과 함께 기도와 책임성을 모토로 하는 하나의 비밀모임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훗날 공식 명칭인 '겨자씨회'(Senfkornorden 젠프코른오르덴)로 발전한다. "영적인 비밀 기사단"이라는 개념으로였다. 현재도 있는,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위한 순정적/관계적/선교적 삶을 살려는 목적"을 지녔다는 OMS(영어 겨자씨회의 줄임말)라는 그뤂의 시조이다. 20세기 모라비아교 감독, 허버트 스포그는 OMS의 헌신 내용을 1. 크리스토님께 신실하기, 2.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기, 3. 세계에 복음 전하기로 요약한 바 있다. 겨자씨회에 관해서는 잠시 후 재론하겠다. 

그후 루드비히는 귀족으로서 걸맞은 외교관 경력을 쌓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러 1716년 뷔텐베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3년 후 그는 유렆 여행을 떠나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의 다양한 지역들을 다니면서 신/구교 명사들을 만났다. 돌아오던 길에는 자신의 친척이 거주하는 뉘른베르크 근교 오버뷔르크와 카스텔을 방문했다가 카스텔에서 사촌누이 조피 테오도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어머니인 과부 백작부인이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통에, 테오도라는 (루드비히의 친구이자) 로이스의 영주인 하인리히 29세 백작과 결혼해 버렸고, 루드비히는 당일 결혼식장에서 만난 신부의 동생, 에르트무테 도로테아와 일년 후인 1721년에 결혼하게 된다. [ 그래서 친첸도르프의 교회를 본뜬 모라비아교회가 하인리히의 영지인 에버스도르프에도 세워진다. 이 교회는 귀족과 평민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지냈다. ]  

소명? 

어릴 적부터 귀족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별로 없었던 젊은 친첸도르프가 뜻밖에 첫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 첫 '실망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느끼게 된 동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는 과거 외교관이 되어 주길 바라던 가족의 소원에 따르려던 나머지, 칸슈타인 남작 대신 할레 고아원을 맡아 달라던 경건주의 학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초청을 거절한 적이 있다. 이 부담감을 덜려고 루드비히는 그냥 농장주로서 자신의 차지인(借地人)들을 위한 삶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할머니에게서 베르텔스도르프를 매입한 뒤, 요한 안드레아스 로테를 영지목사로, 요한 게오르크 하이츠를 대리인으로 불러들이고, 자신의 집부터 짓는다.  

그는 슈페너의 루터교 경건주의 이상을 보다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일종의 개혁에 나섰다. 그래서 로테 목사, 괴를리츠의 멜키오르 쇄퍼 목사, 어릴 적 친구인 프리드리히 폰 봐테빌레 등과 '4 형제팀'을 이뤄 크리스토님과의 개인적인 신뢰의 정감을 보존하는 종교를 일으키고자 했다. 에버스도르프(현 튀링엔)에 있는 그들의 전속 출판사는 값싼 성경과 교리문답, 찬송가와 기타 신앙서적들을 대량으로 펴냈다.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의 불어판도 여기서 발행했다. 

루드비히는 당대의 건조한 루터교 정통 교리를 싫어하여 교리를 공격하는 이성주의 경향에 어느 정도 동조했지만, 양쪽의 문제점을 모두 파악하고 역사적인 크리스토와 초대교회의 관행 및 영성을 추구했다. 바로 이 국면이 그를 보헤미아 형제회로 눈길을 돌리게 했다. 

1722년, 루드비히는 천주교 예수회의 박해를 피하여 온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출신의 신자들을 맞아 그들의 피신처로서 베르텔스도르프의 한 구석을 제공하여, 헤른후트 마을을 조성하게 했다. 헤른후트가 커지고 '종교자유의 처소'로 알려지면서 '슈벵크펠더'회 등 다양한 피박해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그뤂들이 한데 엉겨 있다보니 서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터교 목사인 로테와 영지 관리인인 하이츠의 신앙부터가 서로 다른 데다 요한 지기스문트 크뤼거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더욱 종교적 긴장을 부추겨 마을이 온통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갔다. 

마을 설립자인 크리스티안 다뷔드를 포함한 일부는 종말론에 빠져 심지어 친첸도르프를 (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의 짐승', 로테 목사를 '거짓 대언자'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결국 친첸도르프는 드레스덴 궁중 임무를 무기한 쉬기로 하고, 저택으로 돌아와 마을의 화해/중재에 나섰다. 그는 집마다 방문하며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마침내 마을 사람 전체를 불러 집중 성경공부에 들어갔다. 핵심과제는 성경이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 이 공부와 집중기도를 통해, 마을 사람들 다수는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고 자신들이 겪어온 갈등은 성경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믿게 된다. 이것이 헤른후트의 '초기개혁'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연계

헤른후트 공동체가 점점 성장할 동안, 친첸도르프는 초기 보헤미아 연합체의 교회질서 규범인 '라티오 디스키플리나'(Ratio Disciplina) 한 권을 얻은 뒤, 보헤미아 역사를 공부하면서 초기의 우니타스 프라트룸과 헤른후트의 신학 사이의 "파워풀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와 헤른후트 사람들은 모라비아교회 감독 요한 아모스 코멘스키의 저술물에 깊은 공감을 느껴 과거의 많은 개념들을 도입해 답습하게 된다. 그러나 친첸도르프는 분리된 교단보다는 모든 교파를 규합한 단합의 불꽃으로 보았다. 그는 또 머리(head)의 종교보다는 심정(heart)의 종교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후기 모라비아 교회의 특징을 이룬다. 

이리하여 헤른후트의 정신적 헤게머니를 쥐게 된 친첸도르프는 마을 사람들을 수도원 영성에 근거한 중세 십자군이 아닌 '가족생활'에 근거한 크리스토의 군사들로 조직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맘에 둔 '가족'은 전통적인 핵가족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가족의 울타리를 깨고 연령과 혼인, 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인 가족 개념이었다. 또한 '반덴'(banden/소그뤂)은 나이와 결혼 여부, 성에 바탕을 둔 '코르'(성가대라는 뜻)로 조직되었다. 친첸도르프는 나름의 신학에 따라, 인생의 각 단계별로 다른 영적인 욕구와 주님과의 다른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모델에 의하여 세워진 모라비안 공동체는 훗날 미국의 베틀레엄, 펜설베이니어, 세일럼, 놅캐럴라이나 등에도 생긴다. (미국)베틀레엄에서는 미 원주민과 귀족들이 한 장소를 나눠 쓰고, 세일럼에서는 흑인노예들이 교회의 공식 일원이 되어 교회 지도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친첸도르프는 1737년 5월 20일, 베를린에서 다뷔드 니취만과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 두 감독에 의하여 감독 안수를 받는다. 

친첸도르프는 흔히 여러 교파 사람들이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을 선호하고 옹호했다. 1742년, 그는 에프라타 수도원 등에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독일어권 사람들이 토요안식일 준수에 존중을 표함으로써, 최초로 이틀간의 주말을 지키는 관행을 증진한 셈이 되었다. 그는 또 주일을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겨자씨회의 실체

'겨자씨회' 회원들은 겨자나무 그림이 새겨진 상징 브로취를 달고, '우리 중 아무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롬 14'7)는 그리스어 문구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겨자씨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은 겨자씨처럼 처음엔 작게 보여도 큰 나무처럼 된다는 예수님의 교훈에 근거했다(마태 13'31, 32, 마가 4'30~32, 누가 13'18,19).
아울러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바다에 던져지게 명령할 수 있다고 하셨다(마 17:20, 눅 17:6).     

친첸도르프는 그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겨자씨 회원을 포섭해 나갔는데, 그 가운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루이-앙트와느 드 노와유 대주교(천주교 파리 대교구)  

   존 포터(영국 국교회 캔터베리 대주교) 

   크리스티안 6세(덴마르크/노르웨이 국왕) 

   제임즈 에드워드 오글톮(조지아 식민지 개척자/총독, 영국 장군, 국회의원, 자선가) 

   토모치치(미 원주민 크리크 족 추장) 

   얼스킨(영국국회 스코틀런드계 의원)  

위의 사람들이 혹 친첸도르프의 고상해 뵈는 이상(理想)에 맞는지는 몰라도, 과연 크리스토님의 교훈에 걸맞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러진 못했다!  

포터 대주교는 자신의 저서에서 성매매의 '유용성'을 지지/방어하기도 했고, 왕정복고적 국교회를 지향하였다.

독일 출신의 덴마르크 왕 크리스티안 6세는 수줍은 군주여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했지만, 조용한 커튼 뒤에서 절대 전제주의에 의한 독재와 압제,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청교도적' 경건주의를 함께 추구한, 소극적이고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큰 근심거리였던 일부다처를 자행한 아버지 프레데맄 4세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버지가 납치해 강제 결혼한 계모, 안나 조피 왕후를 폐위시켜 그녀의 어릴 때 집으로 보내버렸다.

또 사촌인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백작을 왕의 고문 역으로 불러들여 거의 섭정을 맡기다시피 해서, 왕후 전속 조리사까지 교체하는 등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하게 만들었다.

왕은 또 농민의 타주여행권을 박탈하여 한 고장에 "말뚝 박게" 했다. 그가 죽자, 덴마르크에서 경건주의가 힘을 잃고 만다. 물론 그의 장점도 없지는 않았다. 

오글톮 장군/총독은 미국 조지아주에다 영국 식민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미 대륙을 방문한 웨즐리 형제를 돕기도 한 인물이다. 박애정신 등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그는 프리메이슨이었다! 

결국 친첸도르프의 겨자씨회는 고상한 목적과는 달리,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기독교' 지상왕국을 확장하는 데 급급한 주권주의/지배주의 단체가 되었고, 교파를 초월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 건립에 동참한다는 공동 목표 아래 (중세 개혁 이후) 최초의 에큐메니즘을 구현했다. 

셋째, 내려오지 않는 신앙

출애굽기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08-09-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납고 성급한 백성(하박국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I am raising up the Babylonians, that ruthless and impetuous people, who sweep across the whole earth to seize dwelling places not their own.

문단 분해

1:1-4.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께 호소한 하박국의 의문.
1:5-11. 이스라엘의 징치로써 갈대아인의 내습에 관한 하나님의 응답.
1:512-17.  이상의 하나님의 응답에 관한 보다 큰 의문의 제출.


"사납고 성급한 백성(ruthless and impetuous people)" 이란 "무자비하고 성급한 백성"을 말합니다.

학고이 함마르 웨한니므하르(הַגֹּוי הַמַּר וְהַנִּמְהָר)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갈대아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세딤'은 앗수르 서판에 의하면 '칼두'(Kaldu)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두는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옆에 페르시아만과 바벨론 남단 중간에 위치한 나라였고, 도시가 거의 없었다.
그곳 거민들은 소규모의 농축업과 수렵으로 생활했으며, 앗수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R.L.Smith).
그러다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B.C.625년에 니느웨를 점령하여 갈대아 왕조를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바벨론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IDB).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갈대아인들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훌의 아들 게셋의 후손이었다(창 22:22).

사납고(4751) 마르(mar) מַר 

1. 명사 : 방울,   2. 형용사,   3. 비유 용법 :
발음 / 마르[ mar ]
어원 / 484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소리내어 울다(창 27:34), 쓰다(출 15:23, 민 5:24, 잠 5:4), 괴롭다(삼상 1:10, 욥 10:1), 환난 당하다(삼상 22:2), 참혹하다(삼하2:26),격분하다(삼하 17:8), 대성통곡하다(에 4:1), 고통하다(욥 21:25), 독하다(시 64:3, 전 7:26), 근심하다(잠 31:6, 겔 3:14), 크다(겔27:30), 곤고하다(암 8:10).
[명] 괴로움(삼상 15:32, 욥 7:11), 고통(사 38:15, 17, 렘 2:19).
구약 성경 / 38회 사용

* 4843.  마라르(mârar)   מָרַר  

1. 흐르다,   2. 모질다,  3. 쓰다
발음 / 마라르[ mârar ]
관련 성경 / 아프다(룻 1:13), 슬프다(삼상 30:6), 쓰다(사 24:9), 학대하다(창 49:23, 욥 27:2), 통곡하다(슥 12:10), 노엽게 하다(출 23:21), 성내다(단 8:7), 노하다(단 11:11).
[명] 괴로움(왕하 4:27), 고통(사 38:17), 곤고(애 1:4).
구약 성경 / 14회 사용



성급한(4116) 마하르(mâhar)  מָהַר  

1. 피엘형 מִהַר. .서두르다,   3. 민첩하다
발음 / 마하르[ mâhar ]
관련 성경 / 드리다(시 16:4), 민첩하다(사 32:4), 성급하다(합 1:6), 빠르다(대상 12:8, 잠 1:16), 도망하다(삼하 15:14).
[부] 얼른(왕상 20:33), 속히(창 27:20, 사 49:17), 빨리(삼상 4:14, 잠 7:23), 급히(삼상 25:34, 에 5:5), 갑자기(삼상 28:20),속속히(사 5:19).구약 성경 / 64회 사용

백성(1471) 고우이(gôwy)  גּוֹי   

1. 국민,  2. 이스라엘 사람들,  3. 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
발음 / 고우이[ gôwy ]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 10:5, 민 14:12, 시 83:4), 여러 나라(민 14:15), 민족(창 12:2, 신 4:34, 수 23:13), 고임(창 14:1), 만민(창 18:18), 백성(창 20:4, 수 3:17, 사 60:12), 국민(출 34:10), 족속(창 48:19, 출 33:13), 이방나라들(출 34:24, 레 26:33, 45), 주민(레 18:28, 합 2:8), 이방인(레  25:44, 느 5:8), 나라 사람(신 4:6), 무리(왕하 6:18), 이방 사람(왕하 17:8), 만국(대상 16:35), 만방(사 2:2), 대적(사 18:2), 조상(겔2:3), 이방 신(말 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강포(强暴) - 강할 강, 사나울 폭  - 3절 / 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강포(强暴, violence) - 강하고 사납다 / 5회(1:2,  3,  9,  2:8, 17)

2555. 하마쓰(châmâç) חָמָס

1. 포악,  2. 악업
발음 / 하마쓰[ châmâç ]
어원 / 25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학대(창 6:11, 사 53:9, 습 1:9). 모욕(창 16:5), 흉악(삼하 22:3), 포학(욥 16:17), 악(시 27:12), 포악한 자(시 74:20), 폭력(창49:5, 삼하 22:3), 포학한 일(삿 9:24), 불의함(대상 12:17), 폭행(욥 19:7), 해(잠 26:6),
[형] 거짓된(신 19:16), 강포한(잠 16:29), 포악한(암 6:3), 불의한(시 35:11), 심한(시 25:19).
구약 성경 / 60회 사용

해이하고(6313) 푸그(pûwg)  פּוּג

1. 차가워지다,  2. 니팔형 : 마비되다
발음 / 푸그[ pûwg ]
관련 성경 / 어리둥절하다(창 45:26), 거두다(시 77:2), 해이하다(합 1:4), 피곤하다(시 38:8).
구약 성경 / 4회 사용

선지자 하박국의 세 가지 질문

1. 왜 악인은 형통하는가?
2. 왜 기도는 응답도지 않는가?
3.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욥기의 말씀은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한다면 하박국의 말씀은 "어찌하여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함을 누립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욥과 하박국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세상의 주권은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계시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는 부조리한 현상이 자주 반복되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가 타락하여 온갖 불의가 행해지고 오히려 의인이 악인에게 핍박받고 불의한 자가 공의한 자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하박국 1장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정리해 봅니다.

1:1-4. 선지자가 생각하는 공의가 하나님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1:5-11.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악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심판하시며 선지자의 항의 이전에 이미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심판의 도구로 갈대아를 준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1:12-17. 선지자는 계속해서 항의하기를 죄악을 심판하시지만 어떻게 더 큰 죄로 물들어 있는 이방 족속인 갈대아를 사용하시는지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을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형태를 계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의 패역함과 악인들의 득세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을 들어 유다의 죄악을 징벌하실 것임을 예언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박국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께 항의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유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바벨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악인이 의인을 삼킴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선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보다 악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더 성공하고, 남을 속이고 타인을 짓밟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을 자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없어서 악인을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때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카이로스의 때 즉 하나님의 때).

그때가 되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리던 쾌락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금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라도 마지막 심판의 때를 바라보며 선하고 공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

 하박국 1장1절은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껴안는 자, 매달리는 자’라고 합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만으로도 이 묵시의 내용이 ‘껴안고 매달리는 자가 받은 묵시’란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묵시는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선지자가 직면한 그 시대는, 신실한 하나님의 예언자라면, 당연히 그 시대를 끌어안고 간절히 씨름해야 할 참으로 암담한 시대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대의 멸망이 가까운 기원전 610년경부터 600년경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하박국1장 6절에서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곧 ‘바벨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박국서의 내용으로 볼 때, 아직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전이었기에, 바벨론의 침공이 바짝 다가온 기원전 600년대 초반이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 1장 4절에서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율법은 해이해 질대로 해이해졌고, 정의가 그 땅에서 사라졌으며, 악인들이 의인을 에워싸 정의가 완전히 꺾여 버린 세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해이해졌다고 말씀하는 ‘해이하고’는, ‘타푸그’ 란 말인데, 그 원형인 ‘푸그’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이 완전히 무시되고, 마비되었다는 뚯 입니다. 해이한 정도가 아니라, 말씀의 마비, 말씀의 무시가 그 시대의 풍조였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들의 정신과 영혼, 양심이 마비 상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고 호소합니다.

그 시대가 너무 타락하여서,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간절하게 호소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3절에서는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라고 호소 하며 그 시대의 불의와 타락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거합니다.

이 시기 유대의 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609년부터 598년까지 통치하였는데, 여호야김왕은 예레미야선지자를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를 박해하고 핍박한 극악한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 그리고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야김 왕의 악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말씀을 불태워버릴 만큼 패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자비한 방법으로 세금을 짜내었으며, 그렇게 짜낸 세금을 바로에게 바쳤습니다.

참으로 암담하고 참담한 시대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공의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기에,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대해 오래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하박국선지자가 1장 2절의 앞부분과 같이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느 때까지 이렇게 침묵하시고, 못 본 척 하시겠습니까? 라고 한탄하며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합니다.
공의란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응 하는 것을 말하니다.

시편 28: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엄중하게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시편 73:1-3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새번역으로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믿음을 저버리고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3절을 보면,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잘 되고, 4절부터 6절까지 보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이 악인들의 교만과 악인들이 강포한 세상이 오늘의 현실이란 것입니다.

시편73편은 12-1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13.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오늘의 세태를 그대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정말 세상에 이렇게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심히 사는 사라들,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현실을 보면 마음이 낙망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시편73편15-18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16.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라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했을 것이고,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내가 풀기엔 어려운 문제인데, 그런데 마침내,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게 되니까,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떨 것인지,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고, 거기서 넘어져 멸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73편은 27절, 28절에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라는 말씀으로 73편을 끝맺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선지자에게 5절부터 11절까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리고 그들이 일어나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운 군마를 타고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와 같이 날아와, 9절을 보면,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며, 11절은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들 바벨론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강포한 자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그들 또한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들 또한 곧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비록 지금 지는 것 같고, 비록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피해 보는 것 같고, 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그 성소에서 판가름 납니다. 누가 이기는가? 하나님의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박국1장의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편73편17-18절입니다. [17.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것과 시인 아삽이 품었던 의문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의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아삽은 다윗 왕 때 예배 음악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레위인으로(대상 6:39) 놋 제금을 치는 악장이다(대상 16:5; 15:19).

시편 73편 / 아삽의 시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1)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2)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아삽 (Asaph)

아삽 (Asaph. "모으는 자", "여호와께서 자신을 위해 모으셨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왔을 때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레위인이다(역대상 6:39;15:19).
또한 그는 언약궤가 적절한 처소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도록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16:4-6). 그는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 50편과 73-83편을 지은 저자로 믿어진다.
대하29:30에 나오는 선견자 아삽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참조. 느12:46).

다윗의 통치 때에 아삽의 아들들은 음악을 통해 예언을 하였으며(대상25:1`2), 후에 그 자손들은 요시야 왕 아래에서 노래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대하35:15).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참조. 스2:41;느7:44)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노래를 부르는 자로 또는 연주자로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스3:10). 그들은 후에 여호와의 전에서 레위인들을 감독하고(느11:22), 성벽을 낙헌할 때에는 나팔을 부는 직무를 맡았다(12:35). 아삽은 게르손 자손으로 베레갸의 아들이었다(대상6:39). - 『아가페 성경사전』발췌

출생과 역사적 배경

1. 아삽은 게르손 자손이며 베레갸의 아들이다.

계보는 다음과 같다.
야곱(이스라엘) - 레위 - 게르손 - 야핫 - 시므이 - 심마 - 에단 - 아다야 - 세라 - 에드니 - 말기야 - 바아세야 - 미가엘 - 시므아 - 베레갸 - 아삽 (역대상 6:39~43)

2. 게르손은 레위의 맏아들로(출6:16), 게르손 자손은 광야 시절부터 회막의 휘장들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다 (민4:21~28).

활동 - [참조] '헤만', '에단'

1.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노래하는 자(musician,singer)'로 평가 받고 있다. 아삽 역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기는 역사적인 순간에 등장하게 된다. 레위 사람의 '어른들'은 노래하는 자로 헤만, 아삽, 에단을 다윗에게 천거했다. (대상15:16~17)

2.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찬양대를 이끄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상 15:19; 참조. 느 12:46)

3. 언약궤를 성막으로 들인 후, 다윗은 그 앞에서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 찬양을 하도록 했는데 아삽은 그 때 두목으로 발탁되었다. 아삽은 제금으로 찬양대를 인도하였는데, 그 찬양대의 구성은 비파와 수금이 합쳐서 9대, 나팔 2대 규모였다. 그 찬송하는 일은 날마다 계속되었다. (대상 16:4~6,37)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 (대상 16:7)

4.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아삽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가운데 위치한 헤만의 우편에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대상 6:31~32,39)

5.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다윗의 수하에서 왕을 돕던 '선견자'였다. (대상25:6;대하29:30)

6.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언약궤를 들여놓던 때까지도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다. 그 때의 찬양대 규모는 제금, 비파, 수금, 나팔 등의 악기가 동원된 120명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였다. (대하5:12)

7).아삽은 악기뿐만 아니라 작시의 소질이 뛰어났던 것 같다. 시편에는 그의 시가 12편이 수록되어 있다(시 50, 73~83편). 아삽의 이러한 소질이 다윗의 신임을 받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대상16:7~36),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시'는 다윗의 시와 함께 여호와께 부르는 찬송으로 널리 권해졌다(대하29:30). 

그가 지은 시편에는 '마스길', '알다스헷', '영장', '현악', '여두둔의 법칙', '셀라', 소산님에돗', '깃딧' 등의 음악용어가 풍부하게 나타나있다.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 (대하29:30)

후손들과 역사적 평가

1.  아삽의 아들들 중 삭굴, 요셉, 느다냐, 아사렐라 네 사람은 헤만, 에단의 자손들과 함께 그 아비들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직분을 맡았다. 그 중 요셉은 첫째로 제비뽑혀 직임을 얻었다. (대상25:1~2,6,9)

2. 성경에서는 특히 아삽의 자손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일컫는다. (대하35:15;스2:41;3:10;느7:44)

3. 여호사밧 왕의 때에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압장섰던 레위 사람 야하시엘은 아삽의 자손이었다. 야하시엘은 무력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대하20:14~30)

4. 히스기야 왕의 성전 중건을 돕던 레위 사람들 중에는 아삽의 자손 스가랴와 맛다냐가 있다(대하29:13).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대하29:30).

5.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1차 명단에는 '노래하는' 아삽 자손이 128명이라고 한다. (스2:41;느7:44)

6. 아삽의 자손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양식을 정하여 주는 일을 맡았다. (느11:22~23)

7. 아삽의 6대손 스가랴는 재건된 예루살렘 성의 낙성식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에스라의 인도를 따라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였다. (느12:35~36)

※ 느헤미야 11:17과 12:8에 언급되는 아삽의 증손 맛다냐는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었고, 그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 시점이 바벨론 귀환 이후(다윗 약 500년 후)인 것을 감안하면, 맛다냐의 증조부 아삽은 '노래하는' 아삽과는 다른 인물이다. (참조. 11:22)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 (시81:1~2)

헤만 (Heman; "진실한")
요엘의 아들이자 사무엘의 손자이다
.
다윗 시대에 성전에서 노래하였으며, 놋제금(Cymbals)을 연주한 그핫 계열의 한 레위인이다(대상6:33;15:19). 그는 성전 찬양대의 지도자였으며(대하35:15), 그의 무리는 기브온의 성막과 번제단을 모시는 일에 참여하였다(대상16:39-42). 그의 아들 열 네 명은 모두 그의 지도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성전에서 봉사하였다(25:4-6). 헤만은 또한 솔로몬 성전 봉헌식에도 참여하였다(대하5:12). 역대상 25:5에서 그는 "왕의 선견자"로도 불리고 있다(참조. 대하35:15). - 『아가페 성경사전』발췌

1. 출생과 역사적 배경

1) 그핫 자손 요엘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사무엘이다. 계보는 다음과 같다.

야곱(이스라엘) - 레위 - 그핫 - 이스할 - 고라 - 에비아삽 - 앗실 - 다핫 - 스바냐 - 아사랴 - 요엘 - 엘가나 - 숩 - 도아 - 엘리엘 - 여로함 - 엘가나 - 사무엘 - 요엘 - 헤만 (대상6:33~38)

2) 그핫(고핫)은 레위의 둘째 아들로(출6:16), 그핫 자손은 광야 시절부터 회막 내의 모든 기물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다(민4:1~20).

3) 아론과 모세는 아므람의 아들들로 그핫의 손자이다(출6:18,20). 아므람은 그핫의 장자이고(이스할은 아므람의 둘째 아들, 출6:18),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계보가 되었고(출29:9),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장자 엘르아살의 아들들이 대제사장의 계보를 이었다(민20:26).

4) 레위의 증손 (그핫의 손자)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리는 반역을 주도했었다. 고라의 무리들은 제사장 직분을 요구했던 것 같은데,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고라와 그 가족들은 산 채로 갈라진 땅이 삼키게 되었고, 원망하던 백성들에게는 염병이 임했다. (민16:1~50)
※ 고라 자손은 레위 사람들 중 찬송하는 일에 있어서 '아삽 자손' 못지 않은 신분이었다(대하20:19). 시편에서 '고라 자손의 시'라고 명시된 시는 모두 11편이다(시42, 44-49, 84, 85, 87, 88편).

5) 헤만의 조부 사무엘은 초기 이스라엘 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던 영적 지도자였다(삼상3:19~21). 사울과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10:1;16:13). 사무엘의 죽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도하였다(삼상25:1;28:3).

6) 헤만의 부친 요엘은 동생 아비야와 함께 브엘세바에서 사사(Judge)로 지냈지만, 그들은 사무엘과는 달리 자기 이익을 위해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삼상8:1~5)

2. 활동 - [참조] 아삽, 에단

1) 역대기 저자는 헤만을 가리켜 '찬송하는 자(musician,대상6:33)', '노래하는 자(singer,대상15:19)'라고 칭했고, '찬송하는 일(the service of song/ministry with music,대상6:31,32)'을 맡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문 찬양사역자', 혹은 '음악목사' 정도로 부를 수 있을라나... (대상 6:31~33)

2) 다윗 당시 찬양 사역의 '3총사'라고 할 수 있는 헤만과 아삽, 에단 세 사람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드디어 역사의 중앙에 서게 된다. 다윗은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노래하는 자들을 세우라고 명했고, 그리하여 그 세 사람이 가장 먼저 추천되었다. (대상15:16~17)

3) 헤만을 비롯하여 아삽, 에단 세 사람은 '노래하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놋제금(the bronze cymbals)을 크게 치는 자'였다. 그 당시 제금은 악장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대상16:5), 세 사람은 찬양대를 이끄는 지휘자나 악장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대상15:19;참조. 느12:46)

노래하는 자 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요 (대상15:19)

4) 헤만은 '노래하는 자'임과 동시에 악기를 연주하는 자였다. 찬양대를 지휘하기 위해 제금을 쳤을 뿐만 아니라,나팔 등의 여러 가지 악기 역시 연주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상16:42)

5) '3총사' 세 사람의 이름이 함께 거명되는 부분이 많은데, 언약궤가 입성한 후로는 오히려 헤만보다 아삽이 더 비중있게 보여지고 있다(대상16:5,7,37;25:1..). 그런데 다윗은 성막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길 때에 헤만을 가운데에 세우고 그 좌우에 각각 에단과 아삽을 세웠다. (대상6:33,39,44)

6)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the king's seer)'였다. 선견자는 선지자의 옛말인데(삼상9:9), 이런 명칭은 헤만뿐만 아니라 아삽과 에단에게도 붙여졌다(대하29:30;35:15). 항상 왕의 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하는 책임이 당시 '찬송하는 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대하33:18).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대상25:5)

7) 헤만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아삽, 에단과 함께 왕의 수하에 속하여 성막 앞에서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다. (대상6:32;25:6;대하5:12)


3. 아삽의 후손들

1) 아삽의 아들들 중 삭굴, 요셉, 느다냐, 아사렐라 네 사람은 헤만, 에단의 자손들과 함께 그 아비들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직분을 맡았다. 그 중 요셉은 첫째로 제비뽑혀 직임을 얻었다. (대상25:1~2,6,9)

2) 성경에서는 특히 아삽의 자손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일컫는다. (대하35:15;스2:41;3:10;느7:44)

3) 여호사밧 왕의 때에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압장섰던 레위 사람 야하시엘은 아삽의 자손이었다. 야하시엘은 무력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대하20:14~30)

4) 히스기야 왕의 성전 중건을 돕던 레위 사람들 중에는 아삽의 자손 스가랴와 맛다냐가 있다(대하29:13).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대하29:30).

5)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1차 명단에는 '노래하는' 아삽 자손이 128명이라고 한다. (스2:41;느7:44)

6) 아삽의 자손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양식을 정하여 주는 일을 맡았다. (느11:22~23)

7) 아삽의 6대손 스가랴는 재건된 예루살렘 성의 낙성식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에스라의 인도를 따라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였다. (느12:35~36)

※ 느헤미야 11:17과 12:8에 언급되는 아삽의 증손 맛다냐는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었고, 그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 시점이 바벨론 귀환 이후(다윗 약 500년 후)인 것을 감안하면, 맛다냐의 증조부 아삽은 '노래하는' 아삽과는 다른 인물이다. (참조. 11:22)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 (시81:1~2)​ 

 

4. 헤만의 후손

1) 헤만은 14명의 아들과 3명의 딸들을 낳았다. 그 아들들 중 구별된 자들은 역시 헤만과 함께 성전에서 악기로 찬송하며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북기야, 맛다냐, 웃시엘, 스브엘, 여리못, 하나냐, 하나니, 엘리아다, 깃달디, 로암디에셀, 요스브가사, 말로디, 호딜, 마하시옷 14명인데, 나팔을 불었다. 그 당시 찬송하는 자 중에 제비뽑혀 직임을 얻었던 24인 중 헤만의 아들들이 14명이었다. (대상25:1,4~6,8~31)

2) 히스기야의 성전 중건을 돕던 레위 사람들 중에는 헤만의 자손 여후엘과 시므이가 있다. (대하29:14)

3) 다윗과 헤만을 비롯한 '3총사'들이 세운 찬양의 규례들은 유다가 망할 무렵까지도 성전의 찬양사역자들에게 전해 내려졌다. (대하35:15)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88:9) 

5. 에단의 후손

역대상 6: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말리와 무시 그 조상에 따라 레위의 종족은 이러하니

6 : 41.  말기야는 에드니의 아들이요 에드니는 세라의 아들이요 세라는 아다야의 아들이요

6 : 44.  그들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의 왼쪽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 에단은 기시의 아들이요 기시는 압디의 아들이요 압디는 말룩의 아들이요

6 : 47. 세멜은 말리의 아들이요 말리는 무시의 아들이요 무시는 므라리의 아들이요 므라리는 레위의 아들이며


역대상 15장

16.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형제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
17.  레위 사람이 요엘의 아들 헤만과 그의 형제 중 베레야의 아들 아삽과 그의 형제 므라리 자손 중에 구사야의 아들 에단을 세우고


1)레위의 아들로(창 46:11), 마홀리와 무시를 낳았으며(출 6:19) 므라리 가족의 조상이 되었다(민 26:57). 

2) 시편 중에는 헤만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찬송시가 하나있다. 시편 88편의 저자 '고라 자손의 에스라인 헤만'이 '3총사' 헤만과 동일인이라면, 시편 89편의 저자 '에스라인 에단' 역시 '3총사' 에단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럴 경우에 '에스라인'이 성전의 어떤 음악사역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명칭일지도 모르겠다. 시편 89편에는 '마스길', '영장', '마할랏르안놋', '셀라' 등의 음악용어가 사용되었다.

3) 왕정 시대 때 므라리 자손들은 찬송을 맡아서 봉사했으며(대상 6:29, 44, 47), 히스기야 왕(대하 29:12), 요시야 왕(대하 34:12) 때의 성전 청결 작업에 동참했다.​


므라리(Merari)
레위의 아들로(창 46:11), 마홀리와 무시를 낳았으며(출 6:19) 므라리 가족의 조상이 되었다(민 26:57). 

광야 생활에서의 므라리 가족은 6,200명이었으며, 수리엘이 이들의 족장이었다(민 3:34-35). 이들은 장막의 북편에 진을 쳤으며 성막의 널판, 띠, 기둥, 받침, 뜰 사면 기둥과 그 받침, 말뚝, 줄 등을 맡아서 관리하는 일을 했다(민 3:36-37). 가나안 땅에서는 제비뽑기로 스불론, 르우벤, 갓 지파로부터 각각 네 성읍을 받아 열두 개의 성읍을 차지했다(수 21:7, 34-40; 대상 6:63). 

왕정 시대 때 므라리 자손들은 찬송을 맡아서 봉사했으며(대상 6:29, 44, 47), 히스기야 왕(대하 29:12), 요시야 왕(대하 34:12) 때의 성전 청결 작업에 동참했다.


에단(Ethan)
1.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예스라 사람이다(왕상 4:31). 

시편 89편은 ‘예스라인 에단의 마스길’이라고 제목을 적고 있다. 

2. 레위 사람 아다야의 아버지이며 아삽의 선조 중의 한 사람이다(대상 6:39, 42). 

3. 레위 사람 기시의 아들로(대상 6:44) 다윗 시대에 놋제금을 쳤다(대상 15:17, 19). 

4. 유다가 다말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라의 아들이며 아사랴의 아버지이다(대상 2:6, 8).


헤만(Heman)
1. 유다 지파 마홀의 아들로 지혜로웠던 사람이다(왕상 4:31).

2. 요엘의 아들로 다윗 시대에 제사장 사독을 도와 찬송과 놋제금 연주로 봉사한 사람이다(대상 6:33).


베레야(Berekiah)
다윗 시대에 회막에서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사람으로 아삽의 부친이며 시므아의 조부이다(대상 15:17). 역대상 6:39에는 베레갸로 되어 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대상 15:23)와 동일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요엘(Joel)
소선지서의 두 번째 책인 요엘서를 기록한 선지자이다. 브두엘의 아들로‘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졌다(욜 1:1). 브두엘이‘하나님의 설득자’, 또는‘하나님의 성실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이 경건한 가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브두엘은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요엘은 다른 구약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회개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욜 2:12-14). 요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장 지금”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고 외치면서 “그때에 여호와께서 … 그 백성을 긍휼이 여기실 것이다”(욜 2:18)라고 선언하였다. 

성경 속의 또 다른 요엘들 : 1. 사무엘의 아들로 악한 사사이다(삼상 8:2; 대상 6:33). 

2. 레위 자손으로 선지자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의 선조이다(대상 6:36; 삼상 1:1). 

3. 르우벤의 자손으로 스마야의 아버지이다(대상 5:4-8). 

4. 시므온의 자손으로 그 지파의 족장이다(대상 4:35). 

5. 바산에 살던 갓 자손의 족장이다(대상 5:12). 

6. 잇사갈의 자손이며 족장이다(대상 7:3). 

7. 다윗의 용사 중 나단의 형제이다(대상 11:38). 사무엘하 23:36에는 이갈로 되어 있다. 

8. 브다야의 아들로 다윗 시대 므낫세 반 지파의 관장이다(대상 27:20). 

9. 히스기야 왕을 도와 성전을 청소한 사람으로 레위인이며 그핫 자손이다(대하 29:12).

10. 에스라 시대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자이다(스 10:43). 

11. 느헤미야 시대에 베냐민 지파의 감독이다(느 11:9). 

12. 게르솜의 자손으로 족장이며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기념식에 형제 130명과 참석하였다(대상 15:7-11).
신명기의 언약과 요엘서 요엘은 그의 메시지의 기본적인 초점을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언약)에 의존하고 있다.
언약의 저주는 민족의 불순종의 결과로 생긴다.
응징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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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개론

1. 표제

이 책의 표제는 다른 소선지서들과 같이 단순히 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박국이란 히브리어 (Chabaqquk)는 “포옹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카바크(chabaq)에서 왔다.
어떤 학자들은 이 이름을 향기높은 한 정원의 식물인 아카드어(Akkadian) “함바크크”(hambaququ)의 이름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구약 중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선지자 '하박국'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하박쿡'이며 그 이름의 뜻은 '품다''포옹하다''꼭붙잡다'이다. 70인역(Lxx)에서는 '암바쿡'이라 하였다.

2. 저자

하박국에 대해서는 그의 책에 나타난 것 이외에 더 알 길이 없다.
하박국이 아모스처럼 어떤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암 7:14) 혹은 선지자 학교에서 부르심을 위하여 특별한 훈련을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박국이란 이름은 '포옹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제롬은 그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과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포옹하는 자'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에 대해 알려진 부분은 아무 것도 없다.

유명한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 사본 중에 하박국서를 취급한 사본이 하나 있었다.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은 고대의 미드라쉬(midrash) 즉 성경 주석 책으로 판명되었는데 하박국서에서 짧은 귀절들을 인용하고 저자의 해석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 기록은 잘 보존되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많은 공백들과 빠진 문장들이 있었다.
그 주석은 13줄의 기록인데 단지 하박국서 첫 두장만 포함하고 있다.
그 사본은 두개의 이사야서 사본들의 연대와 비슷한 B.C. 100년 경의 것이다.
그 하박국 주석책은 더욱 완전한 이사야 사본들과 함께 현대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같은 본문들을 수록하여 밀라 버로우(Millar Burrows)에 의해 복사판으로 출판되었다(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사본, 제1권, New Haven: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1950).

성서학에 있어서 그 하박국 주석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주석도 중요하긴 하지만 주석에 있지 않고 성경 본문에 있다.
그 당시의 어떤 종파(아마도 에세네파)에 의해 필사된 이 본문은 마소라 성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 보다 거의 천년이나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박국서의 어떤 본문을 연구하는 데에도 대단히 가치있는 것이다(합 1:4; 2:1, 4, 5, 15, 16).

3. 역사적 배경

이 책은 심각한 배교의 시대, 즉 므낫세 통치 후기나 아몬의 통치 기간, 혹은 요시아 통치 초기에 기록된 듯하다.
하박국의 봉사는 선지자 나훔의 봉사에 바로 뒤따라서 있었던 것같다.
이 견해는 히브리어와 희랍어 정경에 나타난 그 책의 순서 배열을 통하여 지지를 받는다.
하박국이 자기 백성에게 돌리고 있는 일반적인 죄악들, 그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죄악들이 역시 같은 시대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박국은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이 곧 쳐들어오는 위기가 닥칠 것이고 그 위기가 마침내 유다를 포로로 만들 것을 잘 알았다.
하박국은 이 위기를 유다에게 미리 경고했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의 원수이며 우상 숭배에 빠지고 불의한 바벨론에 대하여 하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다.

본 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본문(합1:6~11)에 나타나는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갈대아인들이 유다인들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이 침공은 주전 605년에 있었던 갈그미스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심증은 앗수르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완전히 패하게 된 전쟁을 말한다. 길대아인들은 주전 625~530년 사이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본 서는 주전 625년 이전에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 서의 저작 시기는 주전 605~508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저작 시기에 대해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주전 625년 이전에 그리고 주전 605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한편 본 서의 마지막 장인 3장이 시편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본 서의 저작 시기를 주전 539년 이후로 보고 있다.


4. 주제

하박국은 유다의 죄를 한탄하고 자기 백성이 벌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들이 당해야 할 고통에 대해 염려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 즉 계속적인 번영으로 축복받은 것처럼 보이는 갈대아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회의(懷疑)에 차있는 당신의 종의 마음에 해답을 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징벌은 그들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것이지만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악인들의 세상적 번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사라질 것임을 하박국에게 보여 주신다.
하박국 3장에 기록된 기도는 불경건한 자의 운명과 의인의 승리로 얻는 보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대조를 통해서 의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반면에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갈대아인들의 의기양양한 교만심이 그들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가는가를 하박국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성결과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박국은 이사야와 함께 복음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다.

욥기서가 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 것처럼 하박국서는 왜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번영하도록 허락하시는가하는 문제에 해답을 준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인들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지만, 왜 하나님께서 유다의 범죄와 배교를 벌하시거나 간섭하지 않으시고 표면상 묵과하시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합 1:1-4; 렘 12:1).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악한 길들을 그치게 하시고 징벌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갈대아인들을 도구로 쓰실 것임을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다(합 1:5-11; 사 10:5-16).

이 설명은 하박국의 마음에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를 사용하실 수 있으실까?
그런 계획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합 1:12-17)

조급하기는 하지만 순수하고 진지하게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요청한다(합 2:1).
잠간동안 하박국의 조급한 요청을 묵과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유다에 대한 당신의 목적이 확실함을 보증하신다(합 2:2, 3).
그리고 하박국에게 겸비와 믿음이 필요함을 지적하신다(합 2:4).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죄악들을 열거하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패역과 사악함을 다 알고 계시며 당신께서 여전히 세상 만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하박국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따라서 하박국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잠잠하여야 할 것이었다(합 2:20).
즉 그분이 지혜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감히 도전함으로서 예의의 한계선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하박국은 겸손히 통회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선택된 도구로서의 유다에 대한 그의 진실하고도 깊은 염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자비로 말미암아 완화되기를 탄원한다(합 3:1, 2).

이 기도에 이어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의 구원과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계시가 뒤따른다(합 3:3-16).
그리하여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계획의 지혜로우심과 종국적인 성공에 대한 하박국의 신념을 확인함으로써 끝마친다(합 3:17-19).

5. 개요

Ⅰ. 문제 : 유다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1:1-17
     1.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 1:1-4
     2. 유다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1:5-11
     3.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하박국의 항의 1:12-17

Ⅱ. 해결 : 하나님의 계획의 지혜와 성공에 대한 확신 2:1-20
     1. 하박국이 대답을 구함 2:1
     2.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의 지혜와 성공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권하심 2:2-4, 20
     3.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국가적 죄들을 열거하심 2:5-19

Ⅲ. 하박국의 응답 3:1-19
     1. 하나님의 행동과 자비를 위한 중재 3:1, 2
     2.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상 3:3-16
     3. 하나님께 대한 하박국의 신앙 고백 3:17-19


[특징]
본서는 일종의 신앙변증서라고 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신학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즉 본서는 일반성도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데 이것이 믿음 안에서 해결받고 승리한다는 것이다. 본서만큼 진지하고 힘있게 증거하고 있는 책은 구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목적]
하박국이 본 서를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상대국들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유대인들이 어떠한 삶(합2:4)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일러주기 위함이다. 하박국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피하기보다는 믿음으로 극복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현실 ~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는 하박국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재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살 때 의인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악함을 보시고 결코 방관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정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
하박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즉 하박국의 질문(1,2장)과 하박국의 찬양(3장)이다. 전자에는 시험받는 신앙, 후자에는 승리하는 신앙을 밝혀 주고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하박국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다. 때문에 우리는 본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 운영의 원리를 깨달아 흔들리지 말고"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마침내 의인은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을 것을 가리키며, 간접적으로는 의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원칙대로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내용]
하박국은 유다에 죄가 창궐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 이를 불평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유다의 심판을 위해 바벨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셨을 때 하박국은 더 큰 의문이 생겼다.'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거룩치 못한 것을 쓰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길 침입자들은 적절한 때에 자기 자신들의 죄로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쓰신다고 이것이 유다 민족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거나 핑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쓰실 수 있고 또 쓰실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래도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의문에 대해서 답하셨다. 하박국은 결코 이 때문에 책망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 스스로 정하신 후에 하나님이 바꾸실 수는 없다'하고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품성을 범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무엇이든 하십니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악한 갈대아인을 심판하시고 그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으로서 유다의 신실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 교리적인 교훈: 악은 그 스스로 자멸을 가져온다는 사실과 반대로 의로운 자의 고통은 하나님의 훈련의 한 방법이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특히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신약시대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기독론적인 교훈: 본서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한 자'(1:12), 믿음에 의하여 의인을 의롭다 하시는 자(2:4),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충만케 하실 자(2:14)로 증거되어 있다.





1. 구약 역사서의 구조 및 연대별 정리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분열왕국 시대을 이해하기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 이유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열왕기서와 역대서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며, 열왕기서에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이 번갈아가면서 소개되는 순서는 왕이 등극한 순서이며 완전히 역사적 순서로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들(3개 대선지서, 9개 선지서, 별도 선지서가 없는 여러 명; 아래 참조)이 또한 남유다/북이스라엘의 어떤 왕들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복잡하게 되어 있는 구약의 역사서 부분을 여러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분열왕국 시대와 연관이 있는 3개 대선지서 : 이사야, 예레미야/예레미야애가 (에스겔과 다니엘은 포로시대 선지서로 분류)
 9개 소선지서 : 호욜암 옵욘미 나합습 (12개 소선지서 중 마지막 학슥말 3개는 포로귀환 시대 선지서로 분류)
 별도 선지서로 구분되지 않는 선지자 : 엘리야, 엘리사를 포함한 여러 명의 선지자들이 열왕기서에 언급되고 있음

    역사서의 성경적 구조

    선지자들 중에서도 열왕기서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은 별도의 성경을 통해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나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해서는 열왕기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위 표에서 12명이라고 언급된 선지자는 별도의 선지서로 언급되는 선지자들의 목록과는 다른 12명이다.

    역사서의 시대적 구분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열왕기서에만 언급되고 역대상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남유다 왕과 관계가 있는 일부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가 나오긴 함). 역대기는 이스라엘 포로 귀환 후에 쓰였는데,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왕조에 대한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이다. 성경의 분열왕국 시대를 읽을 때 두 역사서를 함께 대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성경에는 소제목들이 붙어 있는데, 가령 열왕기상 14장 21절부터에는 "유다 왕 르호보암 (대하 11:5-12:15)"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소제목을 참고하면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대조하며 읽을 수 있다.

    역사서의 주요 내용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은 나라를 분열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 일을 계획적으로 행하셨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10지파를 여로보암에게 붙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왕조를 견고히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은 시작부터 금송아지를 만들고 산당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다. 우상을 숭배하고 끊임 없이 악을 행해 온 북이스라엘에서는 끊임 없는 반역으로 왕권이 계속 교체되었으며, 나라가 평안할 날이 없었다. 남유다에서 한 왕조의 12명의 왕이 다스리는 기간(르호보암 ~ 아하스) 동안 북이스라엘에서는 9왕조에서 19왕이 출현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에게 넘겨주셨으며, 북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남유다 또한 첫 왕인 르호보암부터 우상숭배를 하며 악한 길을 걸었으나 남유다에는 우상을 파하며 하나님이 말씀 앞에 바로 서고자 나라를 개혁하고자 한 8명의 선한 왕이 있었다. 남유다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만 계속 왕위가 계승될 수 있었으며(한 왕조 유지), 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왕조는 곧바로 멸망되지 않았다. 다윗 가문 19대 왕이었던 여호와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바벨론에서 왕의 대접을 받으며 다윗의 계보를 지킬 수 있었고(보통, 당시 나라가 빼앗기면 왕의 일가 친척을 몰살당함), 이 계보에서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에 대한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연대표

    열왕기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이 번갈아가면서 소개되는데 이 순서는 왕이 등극한 순서이다.
    하지만 완전히 역사적 순서로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래 연대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시각적인 시간 순서를 참고하지 않고는 성경을 보는 것만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노란색으로 된 부분은 선자자들이 살았던 시기이다.


    아래는 위 연대표에서 여호사밧(4대)에서 아달랴(7대)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위 도표에서 좌우 화살표로 표시).


    오므리 왕조 이야기(열왕기상 16장 후반 ~ 열왕기하 11장)

    남유다의 여호사밧(4대)은 선한 왕이었으나 북이스라엘과 화평하기 위하여 북이스라엘의 매우 악한 왕 아합(왕비 이사벨)과 사돈을 맺는 일을 저질렀다.
    아합의 딸 아달랴(7대)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5대)과 결혼하며 북이스라엘의 악한 행실을 남유다로 들여온다.
    아사(3대)와 여호사밧(4대) 왕은 선한 왕이었으나, 여호사밧 이후의 왕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한편 북이스라엘에서는 악한 왕 아합 가문을 몰아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예후는 아합의 모든 집안을 멸절하여 스스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유다의 아하시야(6대) 왕을 포함한 여호람(5대)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예후에게 죽게 된다. 
    이를 기회로 삼아 남유다의 왕권을 잡은 아달랴(7대)는 아합의 후예를 일으키고자 다윗 가문의 씨를 모조리 죽이려는 악행을 시도하였다.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나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사단의 계략이 배후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람(5대)의 딸이자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세바가 아기였던 조카 요아스를 숨겨주었고, 요아스는 다윗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6년 후, 제사장 여호야다는 반역을 일으켜 아달랴를 몰아내며 7살인 요아스(8대)를 왕위에 앉혔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나라가 부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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