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도(유다서 1:3) / 그 믿음
πίστις, εως, ἡ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πειθώ
발음 / 페이도(pĕithō)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 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다서 1:1-4)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신약 성경에 8명이 있는데 유다서는 예수님의 형제인 유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에는 이 편지를 쓰게 된 목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으므로 그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거짓 교사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러 가지의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거짓 교사들과 힘써
싸워 믿음을 지키라는 권면을 받는 우리들은 현 시대에 우리들의 교회 주변에서 우리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경과 대조해보고 성경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과 힘써 싸워 우리들의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의 소개(1-2)
2. 편지를 쓰는 목적(3-4)
1. 편지를 보낸 자와 받는 자의 소개(1-2)
1절에 보면 편지를 보낸 자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형제라고 하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야고보가 누구인지 다 알 정도라고 한다면 그 당시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가 소개되는데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 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나 유다가 자기의 형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야인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야고보서를 기록한 자가 되었고 유다도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며 또한 이 유다서를 기록하는 큰 일꾼이 된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구세주 되신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종이란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한 존재였는데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의 관계는 형과 동생의 관계가 아니라 죄인과 죄를 사해주는 메시야와의 관계요 주인과 종의 관계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받는 자에 대해 소개하기를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온 자들이라 했습니다. 즉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며 또한 교회 안에 슬며시 들어온 현재의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유다는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를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2. 편지를 쓰는 목적(3-4)
3절에서 편지를 쓰게 된 경위를 밝히기를 본래는 성도들이 얻은 현세의 구원과 주님 재림시에 누리게 될 영원한 구원에 대해 더 자세히 써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마음먹었던 계획을 바꾸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내용으로 써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이렇게 주제를 바꾸어 써보내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란 교회 안에 몇몇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라 한 것입니다. 모든 사단의 세력들이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런 자들은 심판을 받기로 정해진 자들인데 이들은 경건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이단 사상이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란 것이었는데 이들은 누구보다 영적으로 많이 알고 누구보다 신령하여 많이 깨달았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은혜가 크신 분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다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이 육체가 원하는 본능대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커야 은혜가 더 크다고 하여 오히려 비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조장했으며 육체적 범죄행위를 그들의 이론으로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행위는 인간의 고귀한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방종의 생활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죄악의 구렁텅이에 끌어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정결한 삶과 정 반대 되는 사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자체를 부인했으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도 믿지 않았고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로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신자였으며 오히려 신자들이 불신자가 되도록 믿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죄 값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을 얻어 구원되었으니 이 귀한 은혜를 귀히 알고 자신을 모든 죄로부터 지켜 주님 재림시까지 흠 없고 티없는 정결한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마땅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성도들을 향해 오히려 육신이 원하는 것을 자제하지 말고 본능대로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왔으니 유다는 이 일을 교회가 당하는 큰 위기로 알고 그런 이단자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성도들이 그런 이단 세력과 힘써 싸워 이미 받은 구원을 지켜나가도록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 사상을 경계하고 단번에 받은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교훈입니다. 유다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 사상의 정체를 폭로하고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이 편지를 써 보냈는데 우리들은 어떤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할까요?
첫째는 교파주의 위기
하나님의 뜻은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장과 교리를 달리하는 교파는 날로 늘어만 가고 있으며 나눠지는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파가 존재하는 사실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교파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현실이 바로 큰
위기인 것입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구원관이나 예배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 조직과 다른 이론을 가진 모든 교파주의는 단번에
받은 믿음에 큰 위기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 지에는 상관없이 각 교파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가르침을 성경을 통해 걸러보지 않고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일은 정말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한 소망 가운데 온전히 합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 믿음이 하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보내야 합니다.
둘째는 세속 주의의 위기
세속 주의란 영적인 교회를 세상적으로 몰고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목표는
죄 사함 받아 현세에도 구원받고 주님 재림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의 복보다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복을 강조하여 하늘나라의 소망보다는 세상에의 소망을 심어주는 사상이 바로 세속주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속주의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상입니다. 예배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피아노를 드려오게 하였고 요사이는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속주의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인 주의 만찬을 예배에서 빼내고
헌금은 더 많이 강조되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돈돈돈 하도록 영적 교회를 부패시킨 것입니다. 요사이는 여성 파우어가 강한 이
세상 추세에 밀려 여자들을 목사와 장로를 시키며 동성연애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목사 안수를 해주어야
하는지를 토론하고 있는 실정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예언 기도를 끌어들여 예언을 해주고 돈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병
낫도록 기도해주고 돈을 받기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 무슨 일보다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데 이런 세속 주의는 불가피하다는 본인의 판정에 따라 예배를 등한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믿게 하고 예배의 내용 자체를
열린 예배라는 명목으로 사람 중심으로 점점 세속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세속 주의는 다시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합니다.
셋째는 율법주의의 위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도 구약의 율법 사상을 끌어드리는 위기입니다. 만인 제사장이
선포된 이 때에 목사가 까운을 입고 제사장같이 계속 남아 있으면서 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다고 주장해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입니다. 또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복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위기인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내게 하기 위해 말라기서나 구약의 사상을 끌어드리는 것은 성도들이 복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를 율법의 속박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위기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율법적인 사상들이 들어와 있음에도 전연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큰 위기인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율법적인 것은 교회에서 다 추방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합니다.
교파주의의 신앙, 세속주의의 신앙, 그리고 율법주의와 힘써 싸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단번에 주신 귀한 믿음을 지켜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거짓 교사들의 패망(유다서 1:5-16)
본문은 성도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그 거짓 교사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지적하고 있는 이 거짓 교사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몸만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믿는 자들을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세력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사단의 세력에 말려든다면 결국 그도 사단의 세력 안에 들어가게 되므로 사단이 망할 때에 함께 패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하므로 패망했던 실제적인 예를 들어가며 거짓 교사들은 과거의 모든 범죄자들이 패망했던 것과 같이 패망하고 말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여 본래 받은 순수한 믿음을 지켜나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생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패망한 역사적인 세 사건의 예(5-10)
2. 패망한 역사적인 세 인물의
예(11)
3. 거짓 교사의 정체(12-16)
1. 패망한 역사적인 세 사건의 예(5-10)
유다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세
사건을 예로 들면서 범죄자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건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던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며 바위에서 물을 내셨으며 홍해 바다를 건너되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도 조금만 불편한 일이 생기면
차라리 애굽에서 그대로 종살이 한 것이 나을 뻔했다고 모세에게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했던 200만 3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고 오직 믿음이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살리셔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예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의 예입니다.
베드로 후서 2장 4절에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의본문 6절에서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나 그중 어떤 천사들은 교만해져서 자기가 맡은 책임과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떠난 천사들을 범죄한 천사들로 간주하고 그들을 심판 때까지 영원히 묶어두었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 존재가
천사일지라도 범죄한 천사는 엄하게 벌하신다는 증언인 것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의 예입니다.
세 번째의 예는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사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했는데 요사이 일반화되고 있는 동성간의 성적인 범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창 6장 4절에도 천사들이 사람인 여자들과 접촉하여 자식을 낳았다고 했는데 천사들과 사람들간에 접촉한 색도 다른
색이려니와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남자간의 색도 다른 색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육체와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무시한 소돔과 고모라가 형벌을 받은 예를 들면서 이 것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위의 세 사건을 소개하면서 거짓 교사들은 이 세 사건을 잘 알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혀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일이 잘못된 일임을 9절과 10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예로 든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니고 성경에 들어가지 못한 다른 문서인 위경(Apocrypha) 중 모세의 승천(The
Assumption of Moses)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사단은 모세가 살인자라는 이유로 모세의 시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천사장 미가엘은 분명히 사단을 비난하고 판결할 수 있는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단에 대해 비방하거나
고소를 하지 않고 오직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방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천사장 미가엘도 비방하지 않았는데 거짓 교사들은 쉽게 남을 비방하고 무엇이든지 훼방하니 거짓 교사들은
무엇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이나 자제력이 없고 오직 자기의 육적인 본능으로만 살고 있으니 이로 인해 멸망 받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 패망한 역사적인 세 인물의
예(11)
유다는 11절에서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하느니라 했습니다. 첫째의
인물은 가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제사를 드린 불순종한 자였으며 동생을 죽인 자
즉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였습니다. 두 번째의 인물 발람은 자기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했던 자였습니다. 세 번째의 인물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반역했던 자였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은
가인이나 발람이나 고라와 같은 자들이므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3. 거짓 교사의 정체(12-16)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성도들이 탄 사랑과 친교의 배를 파선시키는 암초와 같으며, 지도자라 하면서 양들을 먹여
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만 살지게 하는 목자라 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비를 뿌려주지 못하는 바람에 불려 가버리는
구름과 같이 기대했던 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맺어야할 열매를 전연 맺지 못하는 뿌리까지 뽑히고 뽑혀야할 존재들이라 했습니다. 또 거짓 교사들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면 해변에
더러운 쓰레기들을 두고 나가듯이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삶 속에 오직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들만 생산해 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갈 유리 하는 별들이라 했는데 이 내용은 역시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 에녹서(Enoch)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에녹서에서 에녹은 세상에 돌아다니다가 하늘의 일곱 별이 결박되어 불 속에 든 것을 보게 되어 천사 우리엘에게 무슨 죄로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별들로 그 죄가 다 타기까지 만 년을 매어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유리하는 별들이란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빛을 환하게 비춰주지 못하는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쓸모 없는 별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별들이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들어가야 하듯 거짓 교사들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고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도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인 에녹서를 인용한 것인데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언하기를 주님께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셔서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행한 경건치 못했던 일과 하나님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심판을 받을 그들은 원망하는 자들이며, 불만을 말하는 자들이며 정욕대로 행하는 자이며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또 아첨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심판을 받듯이 거짓 교사들도 같은 죄를 짓고 있으므로 심판을 꼭 받게 될 것을 힘주어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거짓 교사들이 지은 그런 죄를 경계하여 파멸을 면하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 내용에서 어떤 자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역사적으로 증거를 받았으며 그 누구든지 심판을 받은 자들과 똑같은 죄를 지은 다면 예외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른 제사를 드린 가인이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을 불신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천사가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별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고 다른 색으로 간음하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았으며 남에게는 어떤 해가 되든지 자기의 욕심만 채우는 발람이 패망했습니다. 또 지도자를 모함하고 배신한 고라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패망한 자들과 같은 죄를 지은 다면 패망하고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범죄한 일로 패망한 자들이 지었던 같은 죄를 우리들도 지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유다가 범죄치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들의 생각과 달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불신한 자들이라면 그들이 아주 큰 숫자인 200만 300만이라도 버리시며 그 신분이 천사일지라도 버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다 범죄하면 세상을 다 물로 아니면 불로 심판해버리시는 하나님이시지 너무 많은 숫자가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환경을 참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거짓 교사들이 저질렀던 범죄에서 우리들은 해방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라
할지라도 거짓 교사들이 지었던 같은 죄를 짓는다면 거짓 교사가 망할 때에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망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불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 자기만 아는 이기심, 불평 불만, 육의 욕심대로 사는 것, 불 경건한 삶,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 삶, 자랑이나 아첨하는 삶, 강퍅한 말을 하는 입,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삶, 이런 모든 삶은 하나님께 범죄한
삶이 되므로 주님 재림시에 심판을 면치 못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유혹하는 사단에 도전하여 이런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들에게의 권면(유다서 1:17-25)
이 지구상에 거짓 선지자나 이단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자기가 이단이라거나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양심 선언을 하는 경우는 한 건도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자자의 정체가 언제 다 들어 나게 될까요?
주님 오실 때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교파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가 정통이요 자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시에는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분명히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13:4-5절에 보니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거짓 선지자들이 선지자로 위장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입었던 털옷을 입었으나 주님
재림시에는 털옷도 입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기는 선지자가 아니라 농부라고 고백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속일 수 있지만 주님 재림시에는 속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거짓 선지자가 기승을 부릴 마지막 시기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거짓 선지자가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경계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들의 순수한
믿음을 지켜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1.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라(17-19)
2. 자신을 건축하라(20-21)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에서 끌어내라(22-23)
4. 하나님의 찬양(24-25)
1.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라(17-19)
기롱한다는 말의
뜻은 조롱한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성도들을 조롱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사도들이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유다는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들의
편지에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계하도록 미리 말한바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을 예고한 유다는 다시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은 경건은 모르고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며, 교회와 교인을 갈라놓는
당을 짓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또 그들은 교회에 들어와 있으나 성령은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도 심판도 믿지 않은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말세에 교회에 나타나게 될 것을 몇몇의 사도들이 미리 말한 바가 있는데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 자신을
건축하라(20-21)
유다는 성도들이 믿음의 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거짓 선지자와 힘써 싸워 이겨야 하므로 거짓 선지자와 힘써 싸워 이길 수 있는 네 가지 길을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믿음도 많기 때문에 그런 믿음과 구별하기 위해 거룩한 믿음이라 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을 때에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무너지듯 무너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단단하게 다져진 기초 위에 자신을 세워나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하여 자기가 가진 믿음을 말씀과 대조하고 말씀에 따라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두 번째의 길은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뜻은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기도 말고 성령을 충만하도록 채우려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킨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울타리가 되어주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 세상 아무 것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긍휼은 재림시에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실 긍휼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재림시에 주님께서 베푸실 긍휼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어 승리의 자리에 들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에서 끌어내라(22-23)
22절부터
23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유혹되었거나 유혹될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면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라고 권면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히 무장했으면 이제는 자기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구출해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의 유혹을 받아 비 진리를 진리라 믿고 오히려 진리를 의심하는
이웃들에게 냉대만 하지 말고 사랑과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유혹된 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불에 탈 때에 함께
불에 타고 말 것이기 때문에 불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불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란 비 진리에 빠져 있는
자들을 조심스럽게 접촉하여 비 진리의 삶에서 빠져 나와 진리를 다시 믿게 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낼 때에
조심스럽게 건져내지 않으면 둘이 다 빠져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미 빠져 들어간 자를 접촉할 때에 조심스럽게
두려움을 가지고 접촉하면서 구출해 내라는 권고입니다.
4. 하나님의 찬양(24-25)
유다는 거짓 선지들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주셨고 앞으로도 지켜주실 하나님께 찬양하는 말로 유다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거짓 선지자들의 위험 속에서도 성도들을 능히 보호하시어 아무런 거침이 없게 하실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 재림시에 성도들을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것이요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설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악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성도들을 흠 없게 바로 서게 하실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절인 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또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많은 천국 백성들이 천국에 입성하므로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영원히 누릴 분이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건축해나가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명에도 지식도 권세도 부귀도 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이름 있는 자들의 장례식은 오히려 더 허망한 생각이 들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졌던 아무 것도 그를 죽음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허무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례식을 아무리 화려하게 거행하고 장례식에서 죽은 자의 약력을 아무리 아름답고 꾸며주어도 그런 것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장례식을 집례하는 자가 고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죽은 자의 영혼이 주님 재림시에 천국에 입성하도록 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가졌던 본인의 바른 믿음과 바른 실행만이 자신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유다는 우리들에게 권하기를 바른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자신을 세워 나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 없게 즐거움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했나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나가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파나 어떤 유명한 신학자가 제시한 믿음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한 믿음 위에 우리들 자신을 건축해 나가야 합니다. 말씀과 대조하여 세상이 준 믿음은 하나씩 버려나가므로 거룩한 믿음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 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원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늘 충만하도록 성령의 기도로 우리들을 건축해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유다는 우리들에게 늘 하나님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늘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늘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건축해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믿음을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또 이런 믿음으로 자신을 무장한 우리 모두는 비 진리에 빠져 있는 영혼들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받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귀한 삶을 사시어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바로 살 수 있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부르심을 입은 자(유다서 1:1-2)
유다서는 67년경에 유다에 의해 쓰여진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란 이름이 여러 곳에
있지만 여기서 야고보라고 지칭한 인물은 야고보서를 기록한 주님의 형제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주님의 육신적인 형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유다는 사도 중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주의 복음을 위해 많은 사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쓴 목적은 많은 이단자들과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복음을 방종 주의와 혼돈하여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엄히 경계하고 성도들로 구원을
위해 끝까지 싸우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유다의 축복 기도
유다는 이 서신의 서두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풍성할 것을 축원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 대하여 두 가지 특권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이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그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로마서 9:10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는데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오는 부르심은 야곱의 경우처럼 에서는 미워하셨기 때문에 부르심에서 제외되고 야곱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 목적을 위해 그 무한하신 지혜와 권능으로 조금도 차질 없이 계획하셨고 또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9:29에서 이르시기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오묘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과 지혜 안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사야 55:8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그의 생각으로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 때문에 결코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30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판단에 다라 결정되어 실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늘
그 은혜 가운데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런 완벽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의 뜻은 언제나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일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얻기 위해 창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지키심에 의해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나 여러분은 지난날 고려 시대나 이조 시대에 태어났어도 좋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옆집 부자집
주인의 아들이나 앞집 권세 있는 집주인의 딸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가문의 혈통을 통해서 내 부모님에 의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날 것을
이미 예정하셨으며 그런 모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나를 지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기 이전의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지키심의 섭리에 의한 필연적인 일인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앞으로도
이같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키심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끝까지 지키심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요한삼서 1:2)
발음 / 푸쉬케(psüchē)
어원 / 559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 10: 28, 눅 12:20, 고후 12:15), 마음(마 11:29, 막 14: 34, 행 14:22), 생명(막 3:4, 요12:25, 행 20:10), 힘(막 12:33), 뜻(행 4:32), 인(행 27:37), 영(고전 15:45), 혼(살전 5:23, 히 4:12), 명(벧전 3:20), 심령(벧후 2:8), 사람(행7:14, 롬 13:1)
신약 성경 / 103회 사용
* 5594. ψύχω
발음 / 프슈코(psüchō)
관련 성경 / 식어지다(마 24:12)
신약 성경 / 1회 사용
어원/ [장소의 부사] 153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밖으로(마 21:17), 외인(막 4:11), 겉(고후 4:16), 밖(마 5:13, 막 3:31, 눅 1:10), 바깥(마 26:69, 막 1:45), 외국(행 26:11)
신약 성경 / 63회 사용
* 1537. 에크(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 2:15, 3. 요한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후패(1311). διαφθείρω
어원 / 완료수동분사 διεφθαρμένος, 제2부정과거수동태 διεφθάρην, 1225와 53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좀먹다(눅 12:33), 낡아지다(고후 4:16), 부패하다(딤전 6:5), 깨지다(계 8:9), 망하다(계 11:18), 멸망시키다(계 11:18)
신약 성경 / 6회 사용
* 1225. διαβάλλω
발음 / 디아발로(diaballō)
어원/ 제1부정과거수동태 διεβλήθην, 1223과 9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밀고되다, 들리다(눅 16: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5351. φθείρω
발음 / 프데이로(phthĕirō)
어원 / 미래 φθερῶ, 제1부정과거 ἔφθει- ρα, 완료 수동태 ἔφθαρμαι, 수동태 분사 ἐφθαρμένος, 제2부정과거 수동태 ἐφθάρην,
미래수동태 θαρήσομαι, φθήω ‘소비하다’에서 유래
멸망하다(유 1:10)
속(2081) ἔσωθεν
어원/ [장소부사] 20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에는(마 7:15), 속에서(막 7:21, 23), 안에는(마 23:25, 27, 눅 11:7), 안으로는(마 23:28), 속은(고후 4:16), 속도(눅 11:40)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2080. ἔσω
1. 안으로, 2. 내부에
발음 / 에소(ĕsō)
어원 / [장소부사] 1519에서 유래
발음 / 에이스(ĕis)
관련 성경 / 결과가 ~이다(마 2:1)
신약 성경 / 1768회 사용
새롭도다(341). ἀνακαινόω
발음 / 아나카이노오(anakainŏō)
어원 / 303과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
* 303. ἀνά
관련 성경 / 층대(행 21:35)
신약 성경 / 13회 사용
καινός, ἡ, όν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νέος, α, ον
발음 / 네오스(nĕŏs)
관련 성경 / 젊은(요 21:18, 행 5:6, 딤전 5:11). [명] 젊은이(딤전 5:1, 14), 젊은 자(눅 22:26)
신약 성경 / 24회 사용
겉 사람은 주로 외적인 기준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면 그가 입고 있는 옷, 그가 살고 있는 집, 그가 사용하는 자동차와 같은 것들이다.
반면에 속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속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는 사람이므로 영적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나는 외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외할아버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영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겉 사람을 중요시하고 겉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의 종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곧 영혼을 위한 말씀이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에서 영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는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입니다.
둘째는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대부분은 죽임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매 맞음 속에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셋째는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 많은 순교자들입니다.
첫째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셋째는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넷째는 세상에서 자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누가복음 16:15)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영혼이 잘 되려면 바른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이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하는 일에 보탬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영적 존재는 믿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겉 사람 |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
고후 4:16 |
ἔξω |
육에 끌리는 사람 |
속 사람 |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
고후 4:16 |
ἔσω |
영에 끌리는 사람 |
옛 사람 |
the old man, the old self |
엡 4:22 |
παλαιός |
중생 이전의 사람 |
새 사람 |
the new self, the new man |
엡 4:24 |
καινός |
중생 이후의 사람 |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겉 사람 |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
고후 4:16 |
ἔξω |
육에 끌리는 사람 |
속 사람 |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
고후 4:16 |
ἔσω |
영에 끌리는 사람 |
옛 사람 |
the old man, the old self |
엡 4:22 |
παλαιός |
중생 이전의 사람 |
새 사람 |
the new self, the new man |
엡 4:24 |
καινός |
중생 이후의 사람 |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그러나 제도권의 종교를 이탈한다고 해서 '신(神)' 또는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종교와 영적인 것의 구분이 선명해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미국인의 신에 대한 믿음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말할때 오늘날 그것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퓨리서치센터가 미국내 성인 4,729명에게 물었다. 신뢰도는 95%(오차범위 ±2.3%)다.
신을 믿는다는 게 곧 종교를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종교 기관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지만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미국인이 어떤 영적인 힘 또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나눠보면 응답자의 56%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반면 32%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 또는 힘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신이라는 존재도 어떤 형태의 강력한 힘도 믿지 않는다고 응답한 미국인은 10%에 불과했다.
이는 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어떤 종교 기관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한 응답자 10명 중 7명(72%)은 "하나님 또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즉, 신이라는 존재는 믿지만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 또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젊은층 보다는 노년층에게 더 강했다.
우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응답은 18~29세(43%), 30~49세(49%), 50~64세(67%), 65세 이상(65%) 등 연령이 높을수록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강력한 힘 또는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은 18~29세(39%), 30~49세(37%), 50~64세(28%), 65세 이상(26%) 등 젊을수록 반드시 종교적인 신이 아니어도 영적인 존재의 인식과 믿음은 더 강했다.
미국인의 일상은 영적인 것과 상당히 밀접한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절반(48%) 가량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신 또는 영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왜 신이나 영적인 존재를 믿을까?
10명 중 7명(77%)은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나를 보호한다"고 응답했다.
또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기 때문(67%ㆍ중복응답 가능)', '신이나 영적인 존재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하기 때문(61%)' '징벌을 하기 때문(40%)'이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만큼 인간은 신 또는 거대한 영적인 존재보다 기본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셈이다.
이번 퓨리서치센터의 보고서를 분석해보면 분명한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관심은 분명 높지만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종교사회학계서 일컫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ㆍ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SBNR 부류의 특징은 삶에 있어 영적인 생활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종교적 형식이나 신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트포드신학교 스콧 섬마 교수는 "특히 SBNR을 추구하는 부류는 밀레니얼 세대로 구성돼 있으며 종교적 테두리 안에 갇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반면 명상이나 요가 등을 통해 매우 실제적으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전했다.
최근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미국내 주요 유권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부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부류로 동성결혼, 낙태 등의 이슈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성향을 띤다는 게 특징이다.
퓨리서치센터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이 강한 만큼 기독교인만 따로 추려 질문을 던졌다.
우선 개신교인 10명 중 8명(80%)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반면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18%), "아무 존재도 믿지 않는다(1%)"는 응답도 있었다.
반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가톨릭교인은 69%에 그쳤다.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28%), "아무 존재도 믿지 않는다(2%)"는 답변은 개신교 보다 높았다.
미국내 유대교인은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영적 존재를 믿는다"(56%)는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답변은 33%에 그쳤다.
미국인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임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현상이 개신교 내에서도 점차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독교 여론조사 기관인 바나리서치그룹은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힌 응답자의 10%가 "예수를 사랑하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일명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을 일컫는 신조어)'인 셈이다. 이는 2004년 당시 조사결과(7%)와 비교했을 때 3% 포인트 증가했다.
주목이 되는 부분은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보다 오히려 더 굳건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응답은 가나안 교인(93%)이 가장 높았다.
이어 교회 출석 교인(90%), 일반인(59%) 순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대답도 가나안 교인(94%)이 교회 출석 교인(85%)보다 높았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한 존재'라는 대답 역시 가나안 교인(95%)이 교회 출석 교인(92%)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는 종교 기관에 속해 있는 것이 반드시 신앙, 믿음 또는 영적인 이해 증진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는 어디일까?
갤럽인터내셔널(Gallup International)과 WI시장조사네트워크(WI Network of Market Research)가 65개국 65,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종교 관련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응답자의 90%가 자신이 무신론자이거나 비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답해 압도적인 차이로 1위에 올랐죠. 응답자의 4분의 3이 같은 대답을 한 스웨덴, 체코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중국은 유서깊은 종교적 전통을 지닌 나라지만,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집권으로 인해 무신론적 유물론이 빠르게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스웨덴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최근 들어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은 여전히 인기있는 명절이지만, 실제로 진지하게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죠.
중국과 홍콩이 예외로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아시아는 종교적인 지역입니다.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무신론자, 또는 비종교인이라고 답한 지역은 서유럽과 오세아니아 정도입니다. 서유럽에서도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는 비종교인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현대 무신론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는 오히려 순위에서 밀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신론자, 또는 비종교적인 사람의 비율이 65%로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입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는 그 비율이 19%에 불과했지만요.
이번 조사는 국적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어떻게 종교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나이별로 살펴보니 34세 이하의 응답자들이 나이 든 응답자들보다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육 수준을 잣대로 보니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모든 교육 수준별 집단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신론자보다 많았습니다. 소득 수준 중상위 집단과 상위 집단에서는 종교적인 사람의 비율이 50% 이하였지만, 하, 중하에서는 70%였습니다. GDP가 높은 나라가 덜 종교적이라던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와 비슷한 부분입니다. 이 조사에서 예외는 중국과 미국 정도였죠.
세계 전체를 보면 여전히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6대 4 정도로 더 많습니다. 특히 신앙심이 깊은 지역은 아프리카와 중동이죠. 동유럽, 아메리카, 아시아가 그 뒤를 잇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종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종교적인 사람들의 수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갤럽 조사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는 태국으로 드러났습니다. 응답자의 94%가 종교를 갖고 있다고 답했죠. 2,3,4,5위는 아르메니아, 방글라데시, 그루지아, 모로코가 차지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사람만이 영적 존재로 창조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오직 사람만이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1:26).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닮도록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분처럼
기능하도록 그분의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 원숭이, 개코원숭이 같은 동물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입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창조의 이야기를 보면, 어떻게 모든 동물과 식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한 데 있어서는 두 가지 용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창세기 1:27에 있는
“창조하시되(create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둘째는 창세기 2:7에 나오는 “지으시고(formed)”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창조하다”와 “짓다”라는 이 두 용어가 종종 호환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둘은 다릅니다.
뜻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그분의 본래의 목적 곧 그분의 계획과 비전을 묘사하시는 데 있어서도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을 때, 누구도 창조된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영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창조된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육신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씀합니다(창 2:7, 한글킹제임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인 인간(the spirit-man)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의 육신의 몸으로 들어갔으며,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당신은 영이지, 육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의 참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통해 세워지고 말씀을 통해
유지됩니다.
베드로전서 2:2(한글킹제임스)은 말씀합니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Karl Barth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존재임을 설명합니다.좀더 설명하자면 영혼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그 영혼은 잘 되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영혼은 죽거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속사람이 잘된다함인데 속사람이 잘된다 함은 하나님과 잘 지낼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될 때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자주 찾아 만나 뵈옵고 하나님께서도 나를 찾고 만나실 때 나와 하나님 사이는 좋아지게 됩니다만 바로 이때 내 영혼이 잘 되고 있다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의 품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영혼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어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을 때 내 영혼은 잘되고 있습니다. 내가 영으로 주를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내 영혼은 현재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다른 것이 없어도 살아도 하나님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때 내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이 있다면 영혼의 못됨도 있습니다.
영혼의 못됨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거나 상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도무지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산다면 내 영혼은 황폐해지고 피폐해져서 내 영혼은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무지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여 영혼 속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문이
잠궈져 있어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그저 세상살이에 아등바등하여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긴밀한 대화와 소통을 하고 어떤 일이 있을 때에도 주님께 물어보고 말씀과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복과 은총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마음과 정성으로 봉헌하며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살 때
아울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살 때 우리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 때 바로 그 영혼은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육체도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자동적으로 잘 되고 육체도 자동적으로 잘된다함일까요?
마치 앞바퀴
돌아가면 뒤바퀴가 굴러가듯이 그런 어떤 기계적인 상호작용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될 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신과 친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는 모든 일을 범사를 잘되게 하여 주시고 육체도 강건하게 해 주신다 그
말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바로 앞에는 “사랑하는 자여!”가 먼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래서 그 영혼이 잘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전반적인 것을 다 잘되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삽니다.
사면에 팔방의 관계를 맺고 삽니다.
물질과 관계도 있습니다.
시간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과 관계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있고 자식과의
관계도 있고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서 오느냐 무슨 소유를 더 늘리는데서 오는 좁은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질 때 거기서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시어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잘 소통하게 해주십니다.
이를 보통 만사형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면 그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감격하시어 “사랑하는 자여!” 부르시면서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즉 범사가 잘 되게 하시고 몸, 육체와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게 해 주신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웰빙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사는 길이 바로 오늘 말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하여 영혼이 잘됨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이 땅에서 사면팔방으로 맺고 있는
모든 관계도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한 장로가 교회에서 악한 자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가이오를 위로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성경 구절을 좀 더 알기 쉽게 영문성경을 번역한다면
내가 네가 영적으로 잘 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모든 일이 잘 되고 건강하기를 원한다”
성경에서 영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1. 구약시대 :
선지자들 - 삶 전체가 하나님에 의함 : 사무엘, 미가야, 예례미야, 에스겔등
2. 신약시대:
사도들 :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매 맞음 속에서 예수를 증거함
순교당한 자들 : 로마시대 이후 수없이 순교 당함
개혁교회시대
1) 개혁자들 : 죽음을 하나님께서 초월시킨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
2) 전도자들 :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곳에서 전도하는 전도자들이야 말로 영혼이 잘된 사람들이 아닌가?
영혼이 잘된 사람이란 세상과 어떤 사람들인가?(1)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2)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3) 이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4) 사람들에게 자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첫째,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4)
창조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는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발음)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다.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그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들어내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아빠, 엄마부터 말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 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라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둘째, 사람을 위해 동산을 배려하신 사랑(창세기 2:5-6)
하나님은 낙원을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을 위한 준비였다.
사람이 없을 때에 동산은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
사람이 있을
때에 이런 것들은 의미가 있다.
주인공이 있어야 케익이나 꽃이 의미가 있다.
주인공 없이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이 만드신 동산으로 사람을 데려가셨다.
들의 초목이나 밭의 채소는 1장에기록된 풀과 씨
맺는 채소나 열매 맺는 과목과는 다르다.
2장의 이 말은 땅을 일구고 수고해야 먹을 수 있는 곡물이나 떨기나무, 관목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이런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간 타락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열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국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그저 다르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타락하여 무너진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가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상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천국 간증은
상상이다. 즉 거짓이다. 상상은 자신 만이 간직해야 된다.
남에게 퍼뜨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천국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고
싶다면 말씀 안에서 타락 이전의 이 에덴동산을 보고 상상해보라.
성경은 타락된 지금 세상과 조금 다른 에덴동산을 살짝 알려준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지으셨음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7)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구루터기나 다름없다.
그저 썪어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즉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 43:21)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 44:21)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이다(렘 1:5).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 하였고(시 139:16), 악인도 '야차르' 하였다(왕하 19:25).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넷째, 사람의 주거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2:8-14)
에덴동산은 '기쁨의 장소'라는 뜻이다.
즉 참기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죄 지은 이후로 에덴은 사라졌다.
이제 에덴은 지역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만 회복된다.
참기쁨은 예수 안에 있다.
15 가지
지리적인 언급 가운데 14 가지가 현재시제이다(지금 거기 있다는 뜻).
과거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거기 있는 것이다. 두
강은 지금도 있다. 따라서 에덴의 과거 위치를 일부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무너진 실락원을 지금 굳이 찾아본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 사랑임을 알리심(창세기 2:15-17)
하나님 사랑은 무절제한 사랑이 아니다. 관계된 사랑이다. 아무런 언약이 없는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15절서 8절을 반복하신 이유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선악의 구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죄라는 개념이 있다. 에덴동산에 언약의
징표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깨져버리면 생명도 깨진다. 단순 연애와 부부의
차이(무분별과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라. 쥐새끼가 고구마 훔쳐 먹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가 사람 물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는 또 문다.
행복은 믿음과 순종에서 온다!
우리를 빚으신('야차르'하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요 완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길이다. 일방적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그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맺어지려면 간단하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즐기면서
하나님과별거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요. 하나님 본체가 사랑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장 23-2장 1절/14장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의 쾌락이 달콤한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동물만도 못하다. 아니 못한게 아니라 추악하고 패역하다. 고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으로
타락한 사람은 마귀처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고릴라보다 더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 빰을 치거나 방망이로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은 극형에 처한다.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원숭이보다도 고릴라보다도 못나게 살아갈 것인가?
값진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부르셨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 주셨다.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 되는 것이다!
창조하다(바라)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창조하다(바라. bârâʼ) בָּרָא
새기다, 조각하다, 창조하다
순수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의미
짓다(야차르)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짓다(야차르, yâtsar ) יָצַר
형성하다
어떤 물체의 형태, 모양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
만들다(아사)
창세기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God made two great lights--the greater light to govern the day and the lesser light to govern the night. He also made the stars.
만들다(아사, âsâh) עָשָׂה
노동하다, 만들다, 생산하다
창조된 물질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것을 의미
만드시다(바나)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Then the LORD God made a woman from the rib he had taken out of the man, and he brought her to the man.
만들다(바나, bânâh) בָּנָה
짓다, 세우다, 쌓다
겉 사람 |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
고후 4:16 |
ἔξω |
육에 끌리는 사람 |
속 사람 |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
고후 4:16 |
ἔσω |
영에 끌리는 사람 |
옛 사람 |
the old man, the old self |
엡 4:22 |
παλαιός |
중생 이전의 사람 |
새 사람 |
the new self, the new man |
엡 4:24 |
καινός |
중생 이후의 사람 |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온전한 상(요한이서 1:8)
- 특정의 고유진동수를 지닌 물체가 그와 같은 진동수를 가진 힘을 주기적으로 받을 경우 진폭과 에너지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키며, 공진(共振)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진동은 소리, 기계적 진동과 같은 역학적 진동도 있고, 전자기파 등의 전기적 진동 등 매우 다양한데, 공명현상이 일어나면 원래 세기가 약했던 파동도 큰 힘으로 증폭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공명현상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불편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이를 이용하여 개발된 문명의 이기들도 적지 않다.
군대의 행진으로 무너진 다리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공명현상은 자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세탁기의 탈수 과정이다. 세탁물을 고속으로 탈수시킬 경우에는 세탁기가 심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탈수 과정이 끝나서 세탁통의 회전 속도가 줄어들게 되면 세탁기가 점점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크게 흔들리면서 그 후 멈추게 된다.
세탁기의 세탁통이 돌아갈 경우 회전속도에 따라 세탁기에 규칙적인 충격을 가하게 되는데, 통이 빠르게 회전할 때에는 세탁기의 고유진동수와 달라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흔들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회전 속도가 줄어들면서 세탁기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는 순간, 공명이 일어나 크게 흔들리는 것이다.
탈수과정에서의 공명은 세탁기를 크게 흔드는 정도이지만, 공명현상이 심해지면 다리가 무너지거나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공명현상으로 멀쩡하던 다리가 붕괴되는 일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있었다.
먼저 1850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앙제다리(Angers Bridge) 사고를 예로 들 수 있다. 478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발을 맞추며 앙제 다리를 걸어가다가 공명이 일어나 다리가 무너져 버렸는데, 이 사고로 226명의 군인들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그 이전인 1831년 영국 맨체스터에서도 군인들의 행진에 의해 다리가 붕괴되는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만약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발을 맞추어 행진하지 않고, 그냥 무질서하게 걸어갔더라면 공명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다리가 무너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발맞춤으로 인한 공명이 건물을 흔들리게 한 일은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는데, 서울의 한 고층건물이 갑자기 흔들리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빚어졌던 것이다.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조사 결과 그 건물의 피트니스 센터에서 실시했던 태보운동의 공진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피트니스 센터의 수강생 23명이 강사의 구령에 맞추어 태보를 하면서 발을 구르는 동작을 반복하였는데, 여기서 발생한 진동수가 건물의 고유 수직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현상이 발생하여 건물이 흔들렸던 것으로 결론 내려진 것이다.
바람에 의한 공명으로 무너진 타코마 대교
군대 등의 인위적인 발맞춤으로 공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 즉 바람에 의한 공명으로 튼튼한 다리가 갑자기 무너진 사건이 지난 1940년에 미국에서 발생하였다.
미국 워싱턴 주의 타코마 해협에 놓여있었던 타코마(Tacoma)대교는 미국의 현대적 토목기술을 동원하여 시속 190km의 태풍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설계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공 된지 석 달 만에, 시속 70km 정도의 바람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리의 붕괴 과정을 목격한 워싱턴 대학 교수의 말에 따르면, 길이 840m인 타코마 대교가 가운데부터 좌우로 비틀리기 시작하더니, 한 시간쯤 후부터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파괴되면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토목기술자들은 다리를 붕괴시킬 정도에는 턱없이 약한 바람에 다리가 무너진 사실에 경악했는데, 그 원인을 상세히 조사해본 결과, 바람에 의한 공명현상이 그 원인으로 밝혀졌다.
타코마 대교는 양쪽 교각에 연결한 케이블에 다리가 매달려 있는 현수교로서,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의 흔들림이 생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람에 의한 진동이 다리 자체의 고유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에 의하여 흔들림이 점점 커졌고, 결국은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리를 건설할 경우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런 데에 대한 보완을 철저히 하게 되었다.
위의 예들을 보면 공명현상은 교량, 건물 등을 위험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TV나 라디오의 채널 선택, 물 분자의 진동으로 음식을 데우는 전자레인지(Microwave oven), 사람 몸의 상태나
질병을 진단하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장비 등은 모두 공명현상을 이용하여 개발된 것이다.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하는 데에 사용되는 주방의 필수 가전제품인 전자레인지 역시 공명현상을 이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영어로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Microwave Oven)이라 불리는 전자레인지는, 물 분자의 고유진동수에 해당하는 마이크로파를 가해줌으로써 음식 속의 물 분자가 공명운동을 할 때 생기는 마찰열로 조리하는 것이 그 원리이다.
전자레인지의 핵심 부품인 마그네트론은 마이크로파를 만들어내는 장치인데, 여기서 발생하는 마이크로파는 전자기파의 일종으로서, 그 파장이 적외선보다는 길고 텔레비전 방송의 전파보다는 짧다.
마이크로파는 공기, 유리, 종이 등은 투과하지만 금속에는 반사되고 물에서는 흡수된다.
따라서 전자레인지에는 금속으로 된 용기를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산소원자 하나에 수소원자 두 개가 공유 결합한 물 분자는 104.5도의 각도를 이루는 형태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중성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전기적인 극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외부에서 전자기장이 가해지면 각각의 물 분자는 그 영향을 받아서 운동을 하게 되는데, 마이크로파에 의해 공명된 물 분자들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인접의 물 분자와 마찰열을 발생시킨다.
빵이나 밥, 채소, 육류 등 음식물은 대부분 물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마찰열로 손쉽게 음식물을 가열하고 조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몸의 상태나 질병 등을 진단하는 데에도 공명현상은 유용하게 활용된다.
큰 병원에서 볼 수 있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 영상장치 역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명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다만 다른 전자기기와는 달리 원자핵의 자기공명, 즉 강한 자기장에 놓인 수소 원자핵이 공명하면서 방출하는 전자기파로 영상을 만든다.
πλήρης, ες
발음 / 프래레스(plērēs)
어원 / 4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찬(마 14:20, 막 6:43), 충실한(막 4:28), 충만한(눅 4:1), 심히 많은(행 9:36), 가득한(행 13:10, 19:28), 온전한(요이 1:8)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4130. πλήθω
발음 / 프래도(plēthō)
관련 성경 /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31, 13:9)
상(3408) μισθός
μισθός, οῦ, ὁ
발음 / 미스도스(misthŏs)
관련 성경 / 상(마 5:12, 막 9:41, 계 22:12), 삯(마 20:8, 눅 10:7, 벧후 2:15), 값(벧후 2:13)
신약 성경 / 29회 사용
룻기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더우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다윗’과 동일한 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편 20:5-6
미혹하는 자(πλάνος) 4108
πλάνος, ον
발음 / 프라노스(planŏ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이는 (자)(마 27:63, 고후 6:8), 미혹하는 (자)(요이 1:7)
신약 성경 / 5회 사용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심리·상황 등을 조작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 타인의 정신을 지배·조종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가스라이팅 또는 가스등 효과는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1944년 미국의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이다.
잭이라는 남성이 자기 아내 벨라를 억압하는 이야기다.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했다.
하지만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불을 켜야 했고, 그 건물은 가스등을 쓰기 때문에 불을 켜면 가스를 나눠 쓰는 다른 전등불이 어두워지거나 깜빡여서 들킬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잭은 벨라가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그녀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가며 타박한다.
잭이 위층에서 불을 켜고 집안을 뒤질 때마다 벨라가 있는 아래층은 불이 어두워지고 인기척이 났고, 그럴 때마다 잭은 그것도 벨라가 과민반응하는 것이라고 몰아간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벨라도 이게 지속되자 자기 자신에게 의구심을 갖게 되고, 점점 무기력과 공허에 빠지게 되어서 결국 남편 잭만을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경찰인 브라이언의 등장으로 결국 잭의 범죄가 발각된다는 내용.
1944년에 '샤를르 보와이에'가 잭, 잉그리드 버그만이 벨라(영화에서는 폴라로 이름이 바뀜) 역을 맡아 영화화되었고,
한국에도 '가스등' 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잭이 벨라의 판단력이 비정상적이라고 몰아가고, 이에 벨라가 수긍하는 행태에서 본따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상대방의 자주성(自主性)을 교묘히 무너뜨리는 언행을 말한다.
주로 '상대방에 대한 간섭', '상황적 연출과 조작', '귀인 오류' 등의 행위를 벌여 피행위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가스라이팅이란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하도록 만들어서, 판단을 다른사람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며, 일종의 유행어 성격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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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통틀어 지칭하는 대한민국의 신조어이다.
MZ세대
밀레니얼 세대는 X세대와 Z세대 사이의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출생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전기 밀레니얼(1981년~1988년)과 후기 밀레니얼(1989년~1996년)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와 초기 세대의 자녀들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감소하는 시기에 태어났으며, 이전 세대들보다 더 적은 수의 자녀를 두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최초의 글로벌 세대이자 인터넷 시대에 성장한 첫 세대로 묘사되어 왔다.
이 세대는 일반적으로 인터넷,
모바일 장치 및 소셜 미디어의 사용 증가와 친숙함을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의 밀레니얼 세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상당한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많은 세대들은 대공황의 여파로 노동 시장에서
초기에 높은 수준의 청년 실업에 직면했고, 10년 후 COVID-19 대유행으로 인해 또 다른 불황을 겪었다.
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알파 세대의 사이에 있는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연구원들과 대중 매체들은 1990년대 중/후반과 2010년대 초 사이 출생자를 Z세대로 본다.
Z세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X세대의 자식들이다.
Z세대는 어릴 때부터 인터넷과 휴대용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여 성장한 최초의 사회 세대로서 디지털에 정통하지 않더라도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렸다.
또한 스크린 타임이 어린 아이들에 비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가장 뚜렷하다.
각 세대 등장 배경
M세대
이 인구통계학적 코호트의 구성원들은 밀레니엄 세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밀레니엄 세대로 바뀌기 때문이다. 작가 William Strauss와 Neil Howe가 슈트라우스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우 세대론은 밀레니얼 세대를 명명하는데 널리 인정받고 있다.
1993년 8월, 광고 시대 사설은 당시 X세대와 다르게 정의된 13-19세(1974~1980년 출생) 청소년을 묘사하기 위해 Y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했으며, 세대의 큰 규모 때문에 에코붐 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1990년 8월에 출산율이 정점을 찍었고 선진국의 소규모 가정으로의 20세기 추세가 계속되었다. 심리학자 진 트웬지는 2006년 저서 제너레이션 미(Generation Me)에서 밀레니얼 세대를 '미 세대'로 묘사했다. 제안된 이 그룹의 대체 이름에는 인터넷 세대, 9/11 세대 등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캐슬린 샤푸티스는 밀레니얼 세대를 부메랑 세대 또는 피터팬 세대로 분류했는데, 그 이유는 구성원들이 성인기로의 통과의례들을 그들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경향 때문이다. 또한, 이전 세대보다 더 오랜 기간 부모와 함께 사는 구성원들에 대한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킴벌리 파머는 높은 주거 비용과 고등 교육, 그리고 노년층의 상대적 풍요를 이러한 추세를 이끄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Z세대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밀레니얼 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다.
이 세대의 다른 이름으로는 i세대 국토안보부 세대, 인터넷 세대, 디지털 원주민, 네오디지털 세대, 인터넷 세대, 100년대,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 등이 있다. 인터넷 세대라는 용어는 인터넷의 대량 채택 이후에 탄생한 첫 세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심리학 교수이자 작가인 장 트웬지는 2006년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책의 제목으로 iGeneration(줄여서 iGe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출판사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팟과 아이맥 컴퓨터는 있었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없었다. 트웬지는 나중에 그녀의 2017년 책 iGen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이름은 2009년 인구학자 셰릴 러셀에 의해 만들어졌다.
퓨리서치센터가 2019년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구글 트렌드에 올라온 다양한 명칭을 조사한 결과 미국에서는 Z세대라는 용어가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리엄-웹스터 사전과 옥스퍼드 사전은 모두 Z세대에 대한 공식 엔트리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코호트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 이전 코호트에서 한 단계 벗어난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주로 텍스트 또는 음성으로 통신하는 반면,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비디오, 비디오 전화 및 영화를 사용한다.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PC에서 모바일로, 그리고 텍스트에서 비디오로 변화를 강조한다.
주머(Zoomer)는 아이러니하거나 유머러스하거나 조롱하는 어조로 Z세대를 지칭하는 비공식 용어이다.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는 부머라는 용어와 Z세대의 "Z"를 결합했다. 이에 앞서 2000년대에는 특히 활동적인 베이비붐 세대를 묘사하기 위해 주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2018년, Zen Z 청소년을 조롱하는 4chan 인터넷 밈에서 "Zoomer"라고 불리는 ‘Wojak' 캐리커처를 통해 사용되면서 현재의 Zoomer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Merriam-Webster의 기록에 따르면 Z세대라는 용어는 적어도 201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Z세대라는 용어는 2021년 10월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추가되었다.
구원의 증거(요한일서 5:11)
구원 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증거와 확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전적 의미를 소개합니다.
- 어떤 사실(事實)을 증명(證明)할 수 있는 근거(根據).
확신(確信) : 굳을 확(確), 믿을 신(信) / Conviction. Confident
- 굳게 믿음. 또는 그러한 믿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호주머니에 2만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습니까?
2만 불이 있다는 것은 자기 확신입니다.
2만불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신하려면 호주머니에서 2만불을 꺼내서 보여주면 됩니다.
2만불이 나의 것이라고 한다면 내 마음대로 그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 돈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내적 증거(경험과 주장)
둘째는 외적 증거(성경과 인정)
예를 들면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증거할 때 그 증거는 자기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당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므로 이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어 구원을 확신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였던 말씀입니다.
예전에 교회 재정부에서 있었던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느 사업을 하는 집사님 부부가 당시 감사헌금을 드렸는데 봉투에 그 금액이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정부에서 헌금 계수를 하던 중 봉투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을 알고 즉시 그 집사님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내가 분명히 봉투안에 수표를 넣었다고 말합니다.
재정부원 중에 누군가 그 수표를 가져간 것처럼 생각되어 모두 난처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봉투에 수표를 넣었다는 집사님이 재정부장에게 전화를 하여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수표가 식탁 위에 있습니다. "
그 전화로 인하여 재정부원들에 대한 의심도 해결되었고 그렇게 확신하던 집사님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확신이란 주관적인 것입니다.
증거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증거일까요? 아니면 확신일까요?
확신입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내 가족들이 보고 내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으로 섬긴다면 그것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증거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의 증거로 무장할 수 있을까요?
1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성경은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내가 믿는 것은 주관적인 확신입니다.
주관적인 확신이 객관적인 말씀과 일치할 때 그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부모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날 밤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노련한 어부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을 때 누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였는지 모르고 직업 정신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 순간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하게 잡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믿음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여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현재 살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만큼 희열을 느끼는 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몸은 건강하게 모든 역할을 다 하되 삶의 실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 말로 비극이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실, 죄와 멸망의 현실로 부터 구조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통찰력이며, 기쁨의 원천인 것입니다.
1.구원의 확신에 대한 잘못된 오해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노력이나 만족감을 근거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보내시는 일종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혈통,가족의 신앙, 가문,(요1:13)
2) 성경 지식(요3:10)
3) 예배 참석(요4:20)
4) 여러 활동, 사역(마 7:22)
5) 감정적인 변화, 또는 체험(행 8장의 시몬)
2.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됩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며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하며 다음과 같은 것을 내포합니다.
1)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눅18:13)-지식
2) 죄에 대한 통회(시51:1-4)- 감정
3) 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마음(요6:37)-의지
(2)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이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는 것입鎨. (사53:4-6)
3. 구원을 확신하는 길
(1) 말씀의 증거(객관적 증거)
1) 하나님의 약속(행16:31-32)- 이 구원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약속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히 9:28전반)
3) 성령의 인치심(엡1:13)- '인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 삼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삼중적 증거는 가장 확실한 확신의 길입니다.
(2) 생활의 증거 (주관적 증거)
1) 주 되심의 고백(고전12:3)-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그 분의 주인되심을 인정.
2) 우리의 관심사(롬8:5)- 세상적인 것에서부터 영적인 일로 관심이 바뀜.
3) 성품의 변화(갈 5:22-23) -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숙함을 발견하게 됨.
4. 구원의 확신에 대한 올바른 순서
구원을 받았다면 왜 기쁨이 없나?
왜 감정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있는데 왜 내겐 없는가? 등의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을때 이렇게 느꼈다. 눈물이 솟구쳤다. 뭔가 확 뜨거운 것을 받았다'등의 체험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찾아오는 표준적인 증거는 아니며,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당시의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감정의 변화는 구원받은 사실에 잇따라 생기는 법이지 '기쁨이 생긴 다음에 구원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요한복음 4:50절에서 신하가 아들의 회복을 확신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도 이와같이 사실(요 5:24,10:28)을 믿고 받아들였을 때(믿음)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심한 갈등과 괴로움을 더 많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가 있습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요한일서 4:6)
πλάνη, ης, ἡ
관련 성경 /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발음 / 알래데이아(alēthĕia)
어원/ 2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 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 227. ἀληθής
ἀληθής, ἑς
1. 진실한, 2. 참된, 3. 요한복음 4:18(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2990. λανθάνω
1. 숨어 있다, 2. 눈에 띄지 않다, 3. 마가 7:24
발음 / 란다노(lanthanō)
관련 성경 / 숨기다(막 7:24, 눅 8:47), 알지 못하다(행 26:26), 잊다(벧후 3:5, 8).
[부] 부지중에(히 13:2)
신약 성경 / 6회 사용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 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여기서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 있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먼저 그 영이 어디에 속하였는지 즉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은가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지금 말하거나 경험하고 있는 영들이나 혹은 영적 은사들이 하나님께로부토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들에게서 온 것인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의 영 곧 진리의 영인 성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다른 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은사나 영적 사실들을 볼 때 먼저 그 영(적 은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를 실재들로부터 온 영인 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은 곧 그 영이 어디로부터 온 영인지 즉 그 영의 출처, 즉 그 영의 근원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근원적 출처 곧 성령이 어디로부터 오는 영인지를 잘 말씀해 주셨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우선 우리는 이 세상에는 많은 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들을 그 특성에 따라서 크게 다음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악령(惡靈) : 미혹의 영,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영들(spirits) 곧 사탄(satan/devil).
2. 정령(精靈) :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초자연적/정신적인 실재들로서, 무속(shaman) 적인 정령(精靈), 혹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기(氣)와 같은 실재들.
3. 성령(聖靈) :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신령하고 거룩한 영 곧 진리 의 영, 즉 진리와 사랑과 평화와 지혜의 영(9가지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영, 갈 5:2-23).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1. 성령의 은사는 감정과는 상관없다
요한복음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The wind
blows wherever it pleases. You hear its sound, but you canno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과는 별개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0, 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이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서는 않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서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교훈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 ...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린도전서 14:26,33,40.
2. 은사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해야 됩니까?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All these are the work of one and the same Spirit, and he gives them to each one, just as he determines.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복음의 전파를 위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어떤 사람을 도구로서 사용하고자 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준비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기적과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나 은사의
필요성과 그것이 행하여 지는 장소와 시간과 환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달려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어야 하는 최적의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알 수 없다.
언제, 어느 때, 어떠한 환경에서 하늘 아버지의 기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시는 능력을 시기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부족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구할
때에 예수께서 하셨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3. 기적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The coming of the lawless one will be in accordance
with the work of Satan displayed in all kinds of counterfeit miracles,
signs and wonders.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구원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증거나 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않된다. 기적을 행하였고 경험하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적인 삶을 산 결과로 인하여 멸망받았던 예를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은사가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시험 기준을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7:20).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갈라디아 5:22,23). 성령의 열매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며, 불만과 낙담이 아니라 희락이고, 분냄과 근심과 스스로 지어낸 불화가 아니라 화평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자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내려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4.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나누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사용할 때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사단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9).
사단의 활동이 매우 기만적인 이유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 고 있으며,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1:13,14).
그 기만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마태복음 24:24).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나 성직자들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가?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데살로니가전서 5:21).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충고를 들어보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한일서 4:1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시험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경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성령의 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가 성경의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째, 예언은 성취되어야 한다(예레미야 29:9)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어떤 사람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그가 예언하는 바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태복음 7: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자로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하고,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며, 모든
금전 문제에 있어서 엄격한 정직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를 잘 알고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까?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가지의 다른 양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상한
혼돈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심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한 사람은 혹시 자신이 다른 영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은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준다.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위탁하였을 때에 복음 전파사업에 어떠한 혼돈과 위험이 따르게 될지를 생각해 보라.
넷째, 성육신 사건을 믿는다(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리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와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룩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14:11-12)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사도 요한 역시 앞에서 이사야가 말했던
영의 구별법에 동의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인내로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나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계시를 보면서, 사도 요한은 그들의 신분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하나님의 영의 은사라고 보아서는 않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충고는 모든 기적과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고 판단하여 유익을 얻으라는 것이다.
5. 은사 경험자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 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한다.
그러나 사단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쓴다.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각기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은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하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한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을
하였다.
B)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 들인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 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단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데살로니가후서
2:10,11.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 그것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단의 대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 요한복음 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e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영을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게 중요한 영의 분별 법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영의 분별법은 먼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은가를 불별하는 일이다. 그리면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속하지 아니한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사도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께 속한 영 곧 참된 령인 성령과 미혹의 영의 구별은 그 영이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 영과 거짓 영의 구별은 바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고 한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 곧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삶과 그리고 그의 말씀/교훈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실 때, 언제나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사셨으며, 즉 성령 충만의 삶을 사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영의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고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의 인격을 본받아야 하고, 그분의 교훈 곧 그분의 사상을 지녀야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성령 충만자는 그의 삶과 인격에서 성령/진리의 영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향기가 나야하고 그의 흔적이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광채가 비쳐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참 영과 거짓 영, 성령과 악령,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무속적인 정령들과의 구별은 바로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마음/영과 관련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그 영이 진리와 사랑과 평화와 지혜의 사람 예수 그리스시도의 마음을 갖게 하며, 또한 그분의 빛과 향기를 발하게 하느냐 못하느냐로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받지 못한 사람인가, 그리고 내가 진정 성령 충만자인가 이닌가를 어떻게 부별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마음이 있는가 없는 가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나지 않는 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참 영인 진리의 성령을 받지 못하였거나 그러지 않으면 진리의 영이 아닌, 미혹의 영이나 무속적인 정령을 받지 않았나 잘 살펴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을 입으라고 말할 때, 아무 영이나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성령, 곧 예수 그리스시의 마음 영과 동일한 참 성령을 받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는 아주 먼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우리 교회 안에, 아니 우리 속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친히 보여주신 성령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성령을 이 세상에 흔이 있는 어떤 기이한 현상의 영이나 무속적 영, 아니면 우리를 미혹케하는 거짓 영 즉 자기 만족적이고 감각적인 흥분만 조장하는 미혹의 영들과 혼동케 하거나 혹은 그런 행위를 자행하는 일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의 하나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 략질 하는 이리라.....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리라.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 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느니라.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예수님은 산상수훈 끝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아주 선한 양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속심에는 사람들의 재산을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씀하셨다(마 7:15).
또한 마태복음 24장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서 할 수 있는 대로(모든 수단을 다해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24:24).
한편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말세에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고했다.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이때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그리고 또한 그는 그들 즉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들이 말하고 보여주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참 영인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거짓 영인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요일 4:1).
위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압박하는 말씀들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 자칭 선지자/예언자, 자칭 예수, 자칭 메시야, 자칭 감람나무, 자칭 보혜사 등 수많은 위선자들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지적한 위의 말씀들은 바로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와 교계를 향해서 하신 말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참 선지자며 거짓 선지자 또는 적그리스도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열매로써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7:20).
즉 누가 참 선지자며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구별하는 표식(기준)은 바로 그들의 열매, 곧 그들의 삶과 행동을 보아서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의 삶과 행동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모범으로 보여주신 참 영적 지도자의 삶과 행동과 일치하고 있으면, 그들이 이 시대의 참 하나님의 종들 혹은 참된 영적 지도자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그리스도 즉 적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우리의 적 곧 원수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말씀하셨다(마 10:36).
그러면 오늘의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오늘의 우리 교계와 사회에서 참 선지자는 누구며 그리고 거짓 선지나 혹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오늘의 우리 교계와 사회에서 어떻게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일찍이 본회퍼 목사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가로 얻어진 지극히 소중하고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처럼 선전하고 남발하는 행위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으로서, 모든 교회가 대향해서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값싼 은혜란 오늘날 교회에서 철저한 회개 없이도 믿기만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말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 됨이 없이도 의롭게 된다고 말하며, 또한 값싼 축복을 남발하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신앙을 왜곡시키고 교회를 병들게 하며 교회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기 때문에 교회의 무서운 적으로서 적그리스도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살펴보자.
1.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의 일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 혹은 구세주 또는 보혜사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2.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왜곡되게 전하는 자,
즉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만든 복음 곧 자기복음을 전하는 자도 적그리스도 에 해당한다.
3. 교회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키며 교권싸움으로 하나님의 교회(기독교)의 신성한 명예를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 당한다.
4. 값싼 은혜를 남발하며, 물신숭배(Manmonism)와 기복신앙(Baalism을 조장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5. 금전으로 교권을 잡으며, 금전으로 학위를 사며, 금전으로 교회를 사고파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6. 충실한 영성훈련과 수준높은 신학교육을 하지 않고 신학교를 마구 세워서 저질의 하나님의 종들을 양산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7.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결한 삶을 살지 않고 비윤리적인 행위나 삶으로 하나님의 교회/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잃게 하는 자들도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내가 과연 누구며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숙고해보아야 한다.
내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참 주님의 종인가, 아니면 구약의 바알 선지자들 처럼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고 사람들의 귀에만 좋게하는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거짓 선지자는 아닌가. 오늘날 나는 과연 주님의 복음이 지닌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본래 의도와는 아주 다르게 내멋대로 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또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류에 편승하여 잘못된 일인줄 뻔히 알면서도 용기있게 항거하거나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또한 그의 신성한 명예를 실추시키는 적그리스도적 행위들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중에라도 그러한 적그리스도적 행위들에 연루되었다면 오늘 이시간부터 즉시 그 일을 중지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침체에 빠진 우리의 교회를 다시 일어서게 하며 새로운 도약과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넓게는 모든 사상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다 신앙의 활동영역입니다.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믿음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와 분석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영에 대해 분별하는 것은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사도 요한이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이 아닙니다. 만약에 영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볼 수 있습니다.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때도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영의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은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영의 문제에 대해 바르고 건전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으면 아주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이 직접 나타나거나 활동하지 않고 사람이나 지식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그 외의 여러 것들을 통해서 활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21-2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영역에 대해“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의 영인 성령의 활동 영역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활동 영역은 곧 악한 영의 활동 영역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시지만 악한 영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허물기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악한 영의 활동도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활동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을 빙자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을 이용하고 성령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을 모방하여 성도를 속이고 기만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셨기 때문에 악한 영은 거짓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교회에 투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은 목사나 장로 같이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이용하여 교회를 허무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악한 영의 방법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외부의 공격 보다는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다 악한 영의 전략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거와 가르치는 것인데 악한 영도 그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들을 이용했고 초대교회에서는 선지자나 예언자나 사도나 교사를 이용했습니다. 요즘은 두 말 할 것 없이 목사나 선교사나 장로나 그 외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나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초대교회 때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하고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선지자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진리의 영의 지배를 받는지 잘 분별해야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과 바알 중 참 신과 거짓 신을 가리기 위한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있었고 그 대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바알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cf. 왕상 18:6-12).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언제나 왕이나 백성들에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고 참 선지자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미가야에 대하여, 그는 한 번도 내게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악한 말만 하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되게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진리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하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유로 죄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싫어합니다. 경제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영적 “수요(需要)”가 그렇습니다. 진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는 수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축복, 성공, 위로, 형통, 치유, 능력, 체험 같은 메시지는 수요가 많아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진리만 전하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현설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현설 자들은 지식도 많고 수사학에도 능했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성도들이 변론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을 이길 만큼 학문과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긴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때문이고 또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을 이상한 사상과 그릇된 가르침과 일치시키려는 교묘한 악한 영이 전략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복음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생각 같은 것과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복음을 형통과 축복, 성공 지향적인 복음으로 재 설명하려고 합니다. 병 고치는 복음, 기적을 행하는 복음, 성공을 약속하는 복음, 사회개혁주의 복음, 그 외에 별의별 형태의 복음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미혹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가 들으면 흥미가 있고 구미가 당기고 관심을 끌게 하는 것들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그런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싫어하여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겼듯이 요즘 교인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맞는 성령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이상한 기적이나 체험하게 하는 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목사도 이용하고 선교사도 이용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이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 진리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흥미롭고 내 입맛에 맞으면 악한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악한 영의 결정적 증거는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전략적으로 복음을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적”또는 “말씀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철저한 것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악한 영을 분별하는 데도 결정적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악한 영은 교묘한 엘리트 의식의 교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영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악한 영도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보다 은사나 능력이나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절대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지만 악한 영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합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악한 영은 영적 교만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바로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증거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지혜의 영이시고 분별의 영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한 영을 분별하고 은혜와 진리 가운데 진실 된 사랑을 실현하여 교회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마귀의 일(요한일서 3:8)
ἔργον, ου, ὁ
발음 / 에르곤(ĕrgŏn)
관련 성경 /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 5:36), 소행(행 5:38), 사업(롬 14:20, 계 2:19), 공적(고전 3:13,14), 실천함(약 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
신약 성경 / 169회 사용
마귀의 일을 다른 말로 "마귀의 사업"이라고도 합니다.
원시 복음(창세기 3:15) Original Gospel, Prot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의 후손은 약속의 말씀대로(미 5:2. 눅 2:4. 마 2:11)
떡집이라 일컫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호 11:1. 마 2:15)
약속의 말씀대로 애급으로 피신하셨다가(마2:23)
약속의 말씀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어 하나님 대신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인해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자가 그만 구원이 필요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랑의 대상자인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특이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뱀에게 한 말입니다. 뱀은 사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으깰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도, 역대기에도,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여자의 후손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음에 가둬 두지를 못했습니다. 즉 머리를 상하게 하려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시는 부화사건을 통해, 겨우 발뒤꿈치만 상하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부활을 통해 마귀는 자신의 궁극의 무기인 죽음이라고 하는 무기가 깨지는 것 보아야 했습니다. 즉 머리가 으깨어져 버린 것이지요. 죽음으로도 어쩔 수없는 마귀는 이제 예수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의 형편없는 상태는 예수의 이름을 가진 모든 자들 앞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예수를 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 즉 남자의 몸을 빌지 않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최초의 구원 예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 할까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로 죄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의 유전은 남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남자의 몸을 타고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의 대속 제사입니다. 다른 죄없는 생명체가 대신 죽음으로써 생명을 대신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즉 죄를 없애는 방법은 바로 대속의 제사였습니다. 대속이란 죄를 ‘대신 속한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줄 제물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대속 제물의 조건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럴 수없다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히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제사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은 그저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예표라고 부릅니다. 즉,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란,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사람 제물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수 있는 구원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인간을 대표해서 죽어야 하므로 사람이어야 한다.
2. 죄도 없고 허물도 없어야 하므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3. 죽음을 이겨야 한다. 즉, 그저 대신 죽는 것으론 부족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이러한 존재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아닌 인간이 될 수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받아야 한다
2. 죄가 없기 위해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죄는 남자를 통해서 유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구원자는 우선 남자의 몸을 받지 않고 여자에게서만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야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없는 순결한 영혼이어야 했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져야 했으므로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자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원자는 완벽하게 인간이면서, 또한 완벽하게 하나님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사실, 믿음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실,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이 우리가 모시는 구원자라네”라고 하는 이야기가 당당하게 성경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대속제물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타락한 이후, 즉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뱀에게 벌주시는 종말론적 심판의 광경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심판의 선언 속에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마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여기서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다.
첫째, 우리 구원을 인간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선언을 본다. 사람의 노력의 보태기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를 본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구원도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지 나의 어떤 장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원리는 역사속에 일관하게 나타난다. 신약의 구원 역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처럼 우리 마음을 여실 때 믿게 되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의 구원은 마귀와의 단절로 이루어진다. 마귀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독을 마시듯이 자기 것이 되어버린 인생은 하나님이 마귀와 원수가 되게 하심으로서 구원이 성립되게 하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는 입장에 서있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곱 마귀의 역사를 대적해야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일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구원이란 연합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구원이란 말이다. 마귀와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신분이 오직 주님을 따르는 신분으로 바꾸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에서 건짐 받는 초보적 부분에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연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이 예언은 정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바로 이 3가지 절대적 요소를 골자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대적하는 용사로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을 안다. 이 놀라운 원시복음의 골자가 내 속에 있는지를 살피자. 정말 내가 믿는 복음이 바로 이것 향해 나가고 있는가?
박윤선 박사는
(1) 사람과 마귀(계 12:9, 20:2)가 서로 원수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2) 사람이 마귀와 원수 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것,
(3) 여자 후손과 뱀 후손이 상호적대행위를 계속한다는 것,
(4) 택한 백성구원은 그 백성이 마귀머리 상하게 함으로 성립된다는 네가지 중요 요소를 지적했다.
여자 후손은 택한 백성 대표할 메시아가 나실 것을 가리킨다(사 7:14, 마 1:23, 갈 4:4).
원시복음을 포함 에덴동산의 일을 기록한 창 1-3장은 구속사의 네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1.
창조적 은혜와 축복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 가운데, 생존환경에 적합한 지 구와 그 안에 동물·식물을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 형상에 따라 하나님 모양대로 남녀로 디자인하여, 손수 빚어 만들어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생육 번성 땅에 충만, 정복, 다스림, 이름을 짓는 명명권(命名權)을 주셔서 그것들을 누리며, 생명과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의 언약, 교제, 소통하시고, 순종과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살게하심은, 한마디로 창조적 축복의 은혜요, 감사
찬송 기쁨의 주제다(창 1:1-28, 2:15-17, 19, 23, 사 43:7, 21)
2.
창조질서를 어긴 인간 범죄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받은 정체성, 축복을 누림을 받은 사명, 하나님 축복의
약속을 잊고, 아담은 한 몸된 아내 보호 돌봄 간수하는 남편 역할을, 하와는 한 몸된 남편 돕는 내조 배필로서 협의하는 아내역할
등한하고, 하나님을 언약 어기고, 하나님과 대화보다는 다스려야 할 뱀을 대화 상대로 자기와 동격에 두어, 하나님 말씀보다 뱀말에 귀
기울임으로, 뱀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다(시 1:1-2, 엡 4:27). 결국 하와는 하나님 금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으로
먹게 해서,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범죄했다. 그 죄 결과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대표하는 온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롬 5:12).
3.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심판(창 2:17) :
인간의 죄의식, 수치심, 핑계, 하나님 원망, 노고(勞苦), 죄성(罪性),
사망의 실존적 변화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저주받은 땅 경작, 하나님 한탄하신 죄악관영(貫盈)한 생의 정황 변질로, 하나님 관계,
인간 관계, 자연 관계의 훼손, 실존과 상황이 사람과 악한 사탄마귀의 영적 전투상태 전시상황으로 바뀌었다(창 3:7-19,
22-24, 4:7, 6:5-6).
4.
무조건적 은혜 원시복음(창 3: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을 선포하셨다.
뱀 후손과 여자 후손 적대 관계는 궁극적으로 여자
후손이 승리하나, 피흘림을 통해서다.
피흘림은 수치(羞恥) 가림, 죄 씻음이다.
여자 후손 피흘림으로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
죄씻음, 죄가려줌, 궁극적 승리를 가져오게 됨을 하나님 손수 실천해 보여 주셨다(창 3:21, 레 17:11, 힙 9:22).
그러나 뱀 후손은 하나님 허락 하에 제한받는 힘으로 최후 심판때까지 여자 후손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절대의존 신앙과 그 열매인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 죄를 다스림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창 4:7, 욥
1:6-12, 마 4:1-11, 눅 22:31-32, 힙 12:4).
그래서 모이기를 힘씀,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 힙
10:25),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무장을 취하라 한다.
악한 사탄마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 두루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성령의 검 하나님말씀과 성령 안에서 함께 더불어 기도 교제로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고, 마귀 물리친 다음 하나님을 의지 가까이함이
영전의 필승전법 이다(엡 6:10-20, 힙 4:12, 약 4:7-8, 벧전 5:7-8; 신 4:7, 시73:28,
145:18).
원시복음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사 7:14)과 그 메시야의 피흘림(창 3:21, 4:4, 15:6-18, 9-14, 출 12:13, 24:1-8, 레 17:11, 사 53:4-6) 두 방면으로 예언되어 오던 것이, 신약의 때가 되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성취되었다(마 1:16, 23, 눅 1:34-35, 2:10-11, 요 4:25, 19:30, 갈 4:4, 31). 이 구원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 완성, 우리에게 적용된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인 치심으로 중생 구속(救贖) 영생을 얻고, 하나님 자녀의 영, 권세, 명분받아 하나님 아바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구속사는 에덴동산 실낙원에서 새하늘 새땅 복락원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사 나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나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내게 그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소원해야한다(요 1:12-13, 갈 4:4-7, 엡 1:4-14). 원시복음이 결국 내 구원 위함이라 믿어짐으로, 모세가 죽기전 이스라엘자손을 축복하고 불렀던 찬양을, 천국 갈 때까지 나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
원시복음’(Original Gospel)
원시복음이란 최초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4복음서가 있듯이 구약에는 원시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시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3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마귀를 멸한다는 것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사단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관계, 곧 적대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멸할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는 분명 인간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이 어떻게 영물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가? 사단을 이기려면 사단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결국 사단을 이길, 여자의 후손은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시복음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태어나 마귀를 멸하시고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또한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대로 처녀에서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이 누구인가?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 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왜 처녀가 낳아야 하는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아담의 후손, 즉 남자의 씨로 태어나면 안됩니다. 왜요? 아담의 혈통을 타고 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 아래 있고 그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구원자로 오실 분은 여자의 후손, 즉 처녀에게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인류를 대대로 묶고 있던 원죄와 상관없이 의롭고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또한 하나님은 사단에게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단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단과 크게 세 번 싸우시는데 두 번은 이미 싸우셨고 한 번은 앞으로 싸우실 것입니다.
첫 번째 사단과의 싸움은 언제였는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사단으로부터 받은 3가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다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싸움은 언제였는가?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입니다. 십자가의 수난 당하심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세 번째 싸움은 언제 있게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 때 치러질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하게 되며, 영원히 유황불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 사단이 발꿈치를 상하게 함은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창 3:15)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계략 가운데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을 뜻합니다. 실제 사단은 예수님을 상하게 하기 위해 집요하게 역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수제자 베드로에게는 예수를 부인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넣었고 거짓 증인들에게는 고소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줄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는 헤롯을 사주하여 2살 이하의 죄 없는 아기들을 학살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3.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은 부활과 속죄를 말합니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발꿈치는 신체 기능면에서 크게 중요치 않은 부분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해를 당하지만 치명적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아주 중요한 부위로써 한번 상하게 되면 거의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 말을 실감 있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사단과 그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단도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사단입니다. 우리의 사단과의 싸움은 이겨 논 싸움입니다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사단은 꼼짝 못합니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에 대한 악몽,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사단을 대적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패배요, 사단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살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다음 선포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님은 속죄의 피 흘리심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온갖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속죄를 이루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4.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원시복음은 수천 년 전의 메시아 예언의 약속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약속이 과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드디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기 ‘때가 찼다’는 것은 메시아를 보낼 적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 성경의 나머지 모든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습니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방금 전 말씀에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원시복음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악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저 사망의 음부에 당신의 아들을 사흘씩이나 가두어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 열심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요. 하나님의 열심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루십니다. 이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이런 열심으로 찾을 것입니다.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찾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사도바울에게 불붙었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과연 바울은 어떤 일에 열심이었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열심입니다. 각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써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하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열심입니다. 바울에게 불붙은 하나님의 열심은 1세기에 소아시아와 유럽 전 대륙을 십자가로 물들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피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열방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계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영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일 큰 시험은 미혹입니다.‘미혹’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라나오’이고, 히브리어로는 ‘타아’라는 단어입니다.
미혹이라는 단어에 대한 뜻은 ‘속이다’,‘꽤다’,‘유혹한다’,‘사기 치다’,그 다음에‘길을 잃게 하다’,‘방황하게 하다’,‘유리하게 하다’, 바른 길을 가지 못하도록‘옆 걸음치게 하다’, 더듬게 하다’.‘오락가락 하다’
신약 성경에 36번, 구약 성경에 19번 사용됩니다.(인터넷 다국어 성경 검색 결과)
그런데 이 미혹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곳마다 굉장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그들에게 3대 축복을 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하도록
했고,
그 다음에 모든 만물을 정복하도록 했고,
그리고 통치하며 다스리도록 했는데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까지에 보면 마귀가
하와에게 말씀으로 미혹을 하므로 그 축복을 놓치게 되고 맙니다.
첫 번째로 이 미혹에 걸려들었는데 속이는 거였습니다. 즉, 사기
쳐서 길을 잃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며 영생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미혹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 영생을 놓쳤습니다.
이것이 알파적인 역사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도 역시 말씀을 가지고 미혹하는데 그 미혹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거기에 보면 옛 뱀이라는 마귀가 무엇으로 미혹을 했냐면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할 때에 이기지 못하고 그 미혹에 걸려 발목이 잡힐 때에 영생의 길이 막혀버리고 죽음이 왕 노릇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마치겠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시작하실 때 뭐가 옆에 끼어드느냐? 마귀의 미혹이 끼어듭니다. 그와같이 마지막에도 똑같이 말씀 미혹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에 말씀으로 이기는 자가 될 때 이 몸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하는 것이 알파와 오메가 역사입니다. 첫 아담이 영생을 놓쳤는데 무엇 때문에 놓쳤느냐면 미혹 때문에 놓쳤습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 7절에 보면 ‘자녀들아’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단어가 ‘테크나’인데 이는 ‘어린 자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연세가 있고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테크나’입니다. 나이만 들었지 하나님이 볼 때는 철부지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철이 든 것 같은데 저분이 볼 때는 철부지요. 나도 저 사람의 말 들어보면 너무 철부지에요. 그래서 철부지끼리 모여 놓으니까 지지고 볶고 자기가 옳다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굽히지도 않고 하는데 늙을수록 고집이 센 것은 다 오늘날 철부지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테크나’라고 하면서‘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미혹이라고 하는 것은 영생에 방해거리가 되고 옆 걸음치게 하여 영생의 바른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길을 잃게 하는데 이것이 미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마지막시대에도 우리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말씀으로 미혹을 이겨야 영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기고 또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마지막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이겨라, 지켜라, 기다리라, 싸워라,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의의 투구를 쓰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편 강도가 전신 갑주를 입었거나 구원의 투구를 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구원은 이런 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시는 주님 앞에서는 까다롭고 조건들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영생한다고 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그저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에 ‘미혹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을 보니까 반드시 미혹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95편 10절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향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를 마시게 하였지만 그 백성들을 향하여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음이 요동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을 히브리서 3장 10절에 인용하기를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노하셔서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중 20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 광야에서 쓰러뜨려 버리고 20세 이하 어린 것들이 장성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로 가나안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에 다 눕혀진 그들이 하늘의 신령한 만나도 먹었고, 반석의 생수도 마셨으나 광야에 쓰러진 것은 미혹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미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암보다 더 무섭고 고혈압보다도 더 무섭고 당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미혹입니다.
오늘날 육체의 생명을 끊는 무서운 질병이 있다면, 오늘날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못 받게 하고 망치게 하고, 죽이는 역사가 미혹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을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가 중요한데 그 이기는 것에 대하여서는 오늘날 교인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늘날 내 자식이 공부를 좀 못하면 좋은 학교에 못 갈까 걱정을 하고 있고, 내 사업이 잘 못되어 수입이 적으면 생활에 어려움이 올까봐 걱정을 하고 있지 내 영혼이 망가뜨려져서 영생에 방해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는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사업에 미혹이 돼서 돈이 날아 가서 오는 생활의 미혹도 있습니다. 사기꾼을 만나서 돈을 날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물질의 미혹입니다. 여러분, 꽃뱀을 만나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서 젊음을 탕진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랑의 미혹이 있습니다. 그것이 더 나가면 영적인 문제까지 다치지만 육체를 망가뜨리는 미혹도 많이 있는데 제일 귀하고, 제일 무서운 것은 내 영혼을 망가뜨려서 영생에 방해되는 미혹인데 여러분 주위에도 얼마든지 그 미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세를 만난 우리 성도들에게 미혹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라고 본문 7절 상반 절에 말씀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5절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 데리고 감람산에 올라가 앉아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난리와 난리 소문, 전쟁에 대한 소문이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이 미혹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 여러분, 제가 늘 이런 얘기합니다. 보살이 목탁을 치고 와서 미혹을 하면 우리가 안 넘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내가 주의 사자라고 하고, 권사요 장로요 목사라고 하면서 성경 가지고 미혹하면, 말씀에 굳게 서지 않을 때 백발백중 흔들리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보다“미혹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가지고 와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여주면서 택한 자들이라도 미혹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봐 보십시오. 미혹은 얼마나 많은 이적기사를 가지고 광명한 천사 모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 모릅니다. 신천지가 덤벼들어도 막아내지 못하고 그냥 피하라고만 합니다. 여러분, 신천지 단체들은 전에는 감춰놓고 활동했는데 이제는 드러내놓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덤벼들 때에 쉬쉬 하고 못 가게하고 막습니다. 목사님들을 막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에 빠질 때는 어떻게 막겠습니까? 성도들에겐‘가면 안 된다’고 하면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 빠져 들어갔을 때엔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순천의 어떤 목사 아들이 갔다가 아버지가 하도 ‘야 이놈아 목사 아들이 신천지에 빠져가지고 되겠냐?’고 해서 다시 돌아왔는데 와서 딱 아버지의 설교를 들어보니 죽은 설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영생하려면 신천지에 가야 되겠다고 가버렸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번에 호남 쌀이 와서 팔아줬지요? 그 목사 사모가 신천지에 빠져서 교인을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목사가 죽을려고 그랬어요. 우리 교단입니다. 어떻게 막아내겠냐 말이에요. 그것이 미혹입니다. 넘어갈 때는 내가 확신을 가졌으니까 넘어가고 진리인 줄 아니깐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바른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가서 붙어보고 대화해보면 진리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미혹은 영생하는 길의 방해가 미혹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미혹도 물질에 손해가 있고 인격에 손해가 있지만 영생의 미혹은 말씀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오늘 여러분, 꼭 여러분은 미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럼 미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한다면 뭡니까? 말씀 밖에는 없다 이 말입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아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영생의 길을 미혹하는데에 뭘 가지고 오냐면 말씀을 가져오기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물리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도 마귀가 말씀을 가지고 시험하러 왔다니까요. 마태복음4장에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마귀를 물리쳤습니까? “성경에 기록하였으되”라고 하면서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미혹을 하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말씀을 정확하게 붙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정확한 말씀을 붙들려고 하면 정확하게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야 되고 그래야 말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씨름 선수나 레슬링 선수나 양궁 선수가 아니라 우리는 말씀의 선수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랄 일입니까? 아니 그 놈의 마귀가 예수님이 말씀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줄도 알면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성경 가지고 치고 들어오면 오락가락 안 하겠습니까? 오락가락하게 하는 것이 미혹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중요한 이 미혹에서 벗어나는 준비가 말씀 속에서 완벽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미혹을 이기면 어떻게 되느냐? 7절 하반절에 보면 ‘의롭게 되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디카이오스’ 라는 말인데 공의로움, 옳음, 진실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참으로 의로운 분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영생할 우리에게도 의로워지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동인교회 성도들이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귀가 나팔같이 열려야 되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줄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라고 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졸릴 시간이 어디 있으며, 다른 데 마음을 둘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왜냐면 말씀자체가 불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올 때 내 마음이 막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의로우신 주님께서 당신과 같이 우리도 의로워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3장 3절에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늘 이런 말씀하지요? 세탁기에 보면 액체 세제가 있고 또 분말 세제가 있는데 아무리 액체가 좋고 분말이 좋아도 그 세제는 우리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죄, 중죄, 어떤 큰 죄라도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피와 말씀으로 내가 단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의로운 자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보니까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도 깨끗하게 되어야 된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깨끗하게 되냐면 피와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요한1서 2장 28절에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가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도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설교가 주의 강림하실 때 내가 서야 될 자인 줄로 믿고 이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말씀을 붙들고 있지 못하기에 주의 강림은 그저 몇몇 기독교인들의 소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대적으로 여러분은 그의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 오실 징조들이 세계에서 자꾸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을 보면 아주 벽창호 같은 분들이 많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진리가 원하는 대로만 달려가야 되지요? 진리가 원하는 대로 내가 가야됩니다. 주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도 담대함을 얻어야 되고 그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기 때문에 미혹을 주의하도록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그의 성결하심과 같이 우리도 성결하도록 준비를 시켜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주의 강림을 중요시해야 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담대하게 서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사람 앞에 설 때에 뭔가 문제가 있으면 주저주저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히 설 수 있도록 요한일서 2장 18절을 마음에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하면서 “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했는데 이 ‘처음’이란 단어가
‘아르케’로 ‘태초’입니다.
루시퍼는 성경 어디에도 없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맞네요!’라고 하는 그룹이 있고, ‘성경을
배운대로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그룹도 있어요. 여러분, 잘못 배운 것을 고쳐주면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아주 저에게 돌질하는
목사도 있었고, 쌍수를 들어서 환영하는 목사도 있는데 언제나 둘이에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도 뭐라 했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열두 제사들에게 ‘이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압니까? 무엇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이 마귀라는 단어 자체가 ‘디아볼로스’인데 그 뜻이 뭐냐면 ‘헐뜯는다,
거짓말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에게 미혹을 가져옵니다. 여러분, 마귀의 일을 없이하려고 주님이 오셨다고 그랬는데 마귀의 일이 뭡니까? 마귀의 일이 미혹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뺏는 거예요. 영생을 뺏는데는 뭘 가져와야 돼요? 미혹을 가져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귀의 하는 일을 멸하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자꾸 미혹이 오니까 먼저 예수 십자가 피로 죄 씻음을 받게 하고 이제 마지막에는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보면 주님이“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그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의 말씀을 보면“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들리신 봐가 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죠. 첫 번째는 어디에요? 갈보리 산 언덕에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실 때가 첫 번째고, 이제 죄인을 심판하러 오실 때가 두 번째입니다. 그래서 초림의 주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고, 재림의 주님은 죄인을 죽이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이 영생하게 되는 일은 마귀의 하는 일을 없이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하는 일인 미혹이 없어지면 뭐가 없어집니까? 죽음이 없어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도를 닦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이 영생 문제만은 인간이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 세상 끝 날에 영광의 주님이 구름타고 이 땅에 오시는 날, 전 세계 인류를 미혹하던 마귀를 없이 하실 때에 그 미혹을 이긴 자들에게 안식의 복과 참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기독교 마지막 최후 최대의 역사인데 그것이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그 마귀의 일을 없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하는 일이 미혹인데 여기 ‘일’이라는 단어가 ‘엘곤’으로 마귀의 ‘사업’ 입니다.
그럼 마귀가 무슨 사업을
잘해요? 어느 시장에 찾아다니면서? 성도들이 모인 시장에 와 가지고 마귀의 사업을 하는데 그 마귀의 사업인 미혹하는 그 일을
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주님이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요한일서 2:1)
하나님의 아들/ 벤 후퍼(Ben Hooper) 1870. 10. 13. Newport, Cocke County
생부는 르무엘 후퍼 박사였고, 생모는 Sarah Wade였다.하지만 후퍼는 혼외 결혼으로 태어난 벤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의 엄마는 세 도시를 전전하며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다, 마지막 세 번째 도시 녹빌에서 엄마는 아들 벤을 감독교회가 운영하는 성 요한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그 후 9살이 되자, 벤은 자기 친부 후퍼 박사에게 합법적으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 때부터 벤은 후퍼 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부터 친부에게서 양육되었다.
후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테네시주 주지사가 되어서 2번 더 재선에 성공했으며, 상원의원으로도 2번이나 임기를 마쳤다.
미국 테네시주 어느 작은 마을에 벤 후퍼(Ben Hooper)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체구가 작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친구들은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12살이 되었을 때 젊은 목사가 교회에 부임해 왔습니다.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격려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후퍼는 교회에 몰래 몰래 가곤 했습니다.
예배당에 늦게 들어가 뒷자리에 있다가 끝나면 빨리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입니다.
후퍼가 설교의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교인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후퍼를 보고 말합니다.
"누구 아들이더라?"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말합니다.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며 빠져나가는 후퍼의 등을 향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테네시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후퍼는 주지사가 된 후에 "목사님을 만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제가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지사에 두 번씩이나 당선되는 좋은 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삶의 스타일을 알 수가 있고 교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대(繼代)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 "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 "이제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자기 입었던 옷을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 놓으면서 "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남자의 인생은 일곱 개의 단계로 나누어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한 살은 임금님, 모두 모여 왕을 섬기듯 비위를 맞추어 주고 성질을 부려도 받아준다.
2. 두살은 돼지, 진흙 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3. 열살은 어린 염소, 깔깔거리거나 떠들어대거나,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4. 열여덟 살은 말, 성장하여 자기 힘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5. 결혼하면 당나귀, 가정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6. 중년은 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7. 노인은 원숭이, 아이들과 같이 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맛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두가지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 삶의 변화
둘쨰, 신분의 변화
그런데 먼저 변화되는 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점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성장하는 것은 오래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된 신분은 놀라운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이 신분의 변화는 우리에게 축복의 삶을 약속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만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대표적인 해석은 "광명, 계시, 분리"(Calvin)
"진실, 정의"(Hutter)
"지혜, 사랑, 영광"(Bengel) 등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마치 태양의 일곱가지 색이 합하여 "빛"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일치하여 보다 넓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다양한 빛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달빛" "별빛" "등불" "횃불" 등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착함(19) ἀγαθωσύνη
ἀγαθωσύνη, ης, ἡ 19
발음 / 아가도수네(agathōsünē)
어원 / 1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함(롬 15:14), 양선(良善)(갈 5:22)
신약 성경 / 4회 사용
* 18. ἀγαθός
발음 / 아가도스(agathŏs)
관련 성경 / 선(마 5:45, 롬 2:7), 물건(눅 12:18,19), 선행(행 9:36), 양심(행 23:1).
[형] 선한(마 12:34, 19:16, 눅 6:45, 골 1:10), 좋은(마 7:11, 눅 1:53, 요 7:12), 착한(마 25:21, 고후 9:8)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의로움(1343) δικαιοσύνη
δικαιοσύνη, ης, ἡ
발음 / 디카이오수네(dikaiŏsünē)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마 3:15, 눅 1:75, 고후 3:9), 의로움(고전 1:30, 엡 5:9).
[동] 의롭다(롬 3:25, 26)
신약 성경 / 92회 사용
* 1342. δίκαιος
δίκαιος, αία, ον
발음 / 디카이오스(dikaiŏs)
어원/ 13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로운(마 1:19), 옳은(마 23:28, 27:19), 무죄한(마 27:24), 마땅한(빌 1:7), 공의로운(살후 1:5),
[명] 의로운 자(마 5:45), 의인(마 9:13, 10:41, 벧전 3:12), 공의(요 7:24), 의( 골4:1)
신약 성경 / 79회 사용
* 1349. δίκη
δίκη, ης, ἡ
발음 / 디케(dikē)
어원 /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1166. δεικνύω
1. 보이다, 2. 마태 4:8
발음 / 데이크누오(dĕiknüō)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막 1:44, 딤전 6:15), 가르치다(마 16:21), 지시하다(행 10:28)
신약 성경 / 33회 사용
ἀλήθεια, ας, ἡ
발음 / 아레데이아(alēthĕia)
어원/ 2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 227. ἀληθής
ἀληθής, ἑς
발음 / 아레데스(alēthēs)
어원/ [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2990. λανθάνω
1. 숨어 있다, 2. 눈에 띄지 않다, 3. 마가 7:24
발음 / 란다노(lanthanō)
관련 성경 / 숨기다(막 7:24, 눅 8:47), 알지 못하다(행 26:26), 잊다(벧후 3:5, 8).
[부] 부지중에(히 13:2)
신약 성경 / 6회 사용
φῶς, φωτός, τό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 11:14)
신약 성경 / 73회 사용
λύχνος, ου, ὁ
발음 / 루크노스(lüchnŏs)
어원/ 3022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불(마 5:15, 눅 11:33, 벧후 1:19, 계 21:23)
신약 성경 / 14회 사용
발음 / 류코스(lĕukŏs)
어원 / λύκη ‘빛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흰(마 5:36, 요 20:12, 계 1:14), 백마(계 19:11)
신약 성경 / 25회 사용
λαμπάς, άδος, ἡ
발음 / 람파스(lampas)
어원 / 29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등(마 25:1,4, 요 18:3), 등불(행 20:8, 계 4:5), 횃불(계 8:10)
신약 성경 / 9회 사용
* 2989. λάμπω
발음 / 람포(lampō)
관련 성경 / 비치다(마 5:15, 고후 4:6), 비치게 하다(마 5:16), 빛나다(마 17:2, 행 12:7)
신약 성경 / 7회 사용
경건한 자(베드로후서 2:9)
εὐσεβής, ές
1. 경건한, 2. 경의심이 강한, 3. 헌신적인
발음 / 유세베스(ĕusĕbēs)
어원 / 2095와 4576의 어간에서 유래
발음/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4576. 경의를 표하다, σέβομαι
1. 경의를 표하다, 2. 예배한다, 3. 숭배한다
발음 / 세보마이(sĕbŏmai)
관련 성경 / 경배하다(마 15:9, 막 7:7), 경건하다(행 13: 43, 17:4, 17), 경외하다(행 18:7, 13), 위하다(행 19:2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어원/ 1[부정불변사]과 13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불의한(마 5:45, 벧후 2:9). [명] 악인(행 24:15)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349. 형벌, 정의의 신. δίκη
어원/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신약 성경 / 3회 사용
* 1166. 보이다. δεικνύω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막 1:44, 딤전 6:15), 가르치다(마 16:21), 지시하다(행 10:28)
신약 성경 / 33회 사용
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한 보물사냥꾼 가족이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은 스페인 배에서 100만 달러(약 11억 6700만원)어치 보물을 인양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2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보물사냥꾼인 슈미트 일가는 대서양에서 1715년에 침몰한 스페인 배에서 최근 금화 51개와 12m 길이 금줄을 건져냈다. 발견된 금화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소수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양을 지휘한 브렌트 브리즈번은 보물을 찾은 장소가 300년 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스페인으로 향하던 배 11척이 플로리다 해안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침몰한 곳으로, 마이애미에서 북쪽으로 약 210km 떨어진 해안 앞바다라고 밝혔다.
침몰한
함대는 400만 달러(약 46억 6600만원) 상당의 화물을 싣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브리즈번은 말했다.
그는 또 2010년
유명한 보물사냥꾼 멜 피셔로부터 이 지점에 대한 수색권을 구매했고, 이후 슈미트 일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하청 계약을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연방법과 플로리다주 법률에 따라 플로리다주는 주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보물의 20%를 가져간다.
나머지는 계약에 따라 브리즈번의 회사와 슈미트 일가가 나눠 갖게 된다.
경건이란 성결, 기도, 예배, 봉사, 금식, 구제 등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행함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경건이란 말이 성경에서 구약에서 9, 신약에서 48 구절로 나타납니다.
(한글개역 성경 인터넷 검색 '경건')
경건은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얼마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얼마나 회개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느냐?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았느냐?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느냐?
얼마나 주를 위해 충성했느냐?
이런 내면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참된 신앙이 경건입니다.
성경은 이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복이 큽니다.
경건한 자에게 어떤 복을 주실까요?
1. 보호해 주십니다.
벧후 2:9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시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경건한 자는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시편 34:7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지키는데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하나님께서 악한 원수들과 사자굴에서도 지켜 주셨습니다.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어느 시골길을 가던 버스가 핸들고장으로 고개에서 굴렀습니다. 차는 이리 받고 저리 받고 박살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는 그렇게 평안하기만 하더랍니다. 그리고 아무 다친 곳이 없이 나오게 되엇습니다. 누가 지켜주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2. 높여주십니다.
잠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니 하나님께서 왜 높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니 하나님께서도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낮고 낮게 오셨지만 그토록 높이 되심도 하나님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본을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경건에 이르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하심은 경건한 자에게 있습니다.
눅 2:25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므온에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성령의 불이 천하각국에서 온 경건한 사람들에게 붙었습니다. 경건이 그 충만한 은혜의 기초였습니다.
4. 지도해 주십니다.
경건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경건한 마리아에게도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다가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있는 시몬을 청하라고 해서 청하여 예수 믿게 되고 예배하니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자에게 성령의 지도와 인도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지도해주십니다.
우리 입은 하나님께 묻고 우리 귀는 하나님을 향해 쫑긋해 있어야 합니다.
이 복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5. 다스려 주십니다.
백부장 고넬료를 보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행 10:7에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그랬는데 한편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티오테스'는 '군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고넬료가 자신도 가족도 하인들도 군사들도 다 이방인인데 어떻게 온 가족을 그렇게 복음화시키고 하인들과 군인들까지 그렇게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강제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기도하고 사랑함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십니다. 기도해 보세요. 가족이 따라옵니다. 부하들이 순종합니다. 하인들이 섬깁니다. 우리에게 기도와 사랑이라는 경건이 있을 때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도 가능합니다. 기도만 가지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가지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6. 범사에 유익합니다.
오늘 읽은 딤전4:8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잘 경외하면 이 땅에서도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십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경건한 아담의 후예 셋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900세 이상을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장수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경건함도 그 중요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메시아를 갈망했고 여인의 후손으로 오는 자손 낳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완전한 메시아사상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의 죄와 고난을 대신 담당하신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 주님의 고난의 복음이 놀라운 치료와 강건의 복이 됩니다. 주님이 고통당하심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는 믿음을 가지면 치료가 임합니다. 치료의 광선은 이 치료의 복음을 믿을 때 주어집니다. 진정 경건한 사람은 일반 고통이라도 주님이 주신 고통이라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주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놀라운 치료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7.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딤전 6:18-19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경건이 내세에까지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막10:30에 예수님께서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어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면 그들에게 환영을 받겠지만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속화된 종교에 매력 갖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믿음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 모두 본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참으로 경건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고 하늘과 땅의 온갖 아름다운 복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존중, 자기 사랑(Self-esteem) - 자존심(自尊心) Paide
사람들은 어려서 부터 이 셀프 이스팀이 높아야 한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self-esteem이 낮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이 너무도 커서 모든 죄악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종말이 가까와 올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회 현상들을 보십시요.
자기 사랑, 자기 존중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 2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내용들을 읽어보면 오늘날 사회현상들을 잘 묘사해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사람들 가만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상관없다!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섬김의 종으로 살아라!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반되는 가치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자기사랑에 도취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자기사랑은 결국은 자기파멸입니다.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멸망한 존재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참된 자기사랑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충만하게 고일때 참된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이 함께 실철될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없고 자기 사랑에 빠져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교회를 다닌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간혹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하나님 면전에서도 싸우고 다투고 그러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훼방하는 불량배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으면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수 없구요.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 드릴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수있다 그럽니까?
오늘 5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서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어요. 겉으로는 예배도 드리구요. 찬송도 하구요.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된다 그럽니까?
6절에 보시면, 욕심에 이끌린다 그러구요.
7절에 보시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랬구요.
8절에도 보시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럽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성품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들이 관계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삶 속에서 날마다 경건의 능력이 뭍어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리안에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 사랑이요.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신의 성품(베드로후서 1:4)
그런데 8시가 되어서야 시험관이 도착했고, 그 시험관은 아주 쉬운 문제를 내었습니다.
영어 문제로 “제빵업자(Baker)라는 단어를 써보시오.”,
수학 문제로는 “2의 두배는 얼마요?”
그는 초등학생 수준의 문제같은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이해가 안갔지만 Baker라고 쓰고, 또 2의 두배는 4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시험관은“참 잘하셨습니다.
합격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시험관은 선교위원회에서 그 선교사 지망생을 극진히 칭찬하면서 그가 선교사의 자격을 너무 잘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극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었습니다.
둘째,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셋째, 다섯시간을 기다리는 인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넷째, 어린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겸손하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선교사로서의 자격요건을 다 갖추었으므로 기꺼이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추천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사회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바보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돌아서서는 모두가 마음속 깊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이타적인 사람, 인내의 사람, 진실된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만종’은 미국인 토마스 애플턴 (Thomas G. Appleton)이 밀레에게 의뢰하여 1857년부터 1859년까지 2년간 제작된 작품이다.
그 당시 밀레 나이가 45세였다.
하지만 작품을 부탁했던 토마스는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다.
당시 너무나 궁핍했던 밀레는 이 작품을 단돈 600프랑, 지금으로 약 90유로, 한화로 약 12만원이라는 헐값에 팔고 말았다.
밀레의 ‘만종’은 그 후에 미국미술협회에 팔렸다가 프랑스의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Alfred Chauchard)가 프랑스의 자존심을 걸고 80만 프랑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들여 1891년 1월 드디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처음엔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묘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명화가 되었다.
그런데 밀레의 만종은 그림에서 보여주는 평온함과는 달리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은 매우 격동의 세월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을 산업화로 변화시키고 있었고 자본가는 더욱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노동자는 점점 더 피폐한 삶을 살게 되어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또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겪은 요동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완성된 이 작품에는 작가 밀레가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듯하다.
일반적으로 ‘밀레’라고 알려진 그의 정식이름은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란 밀레는 어릴 적 목사님으로 부터 신앙과 문학,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19살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후에 ‘바르비종파’(The Barbizon School)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 화파는 프랑스 파리의 근교 ‘바르비종’에 모여 전통적인 화풍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시골의 농부들을 그리는 화가들의 모임이다.
작품, ‘만종’(晩鍾)의 원제는 ‘랑젤뤼스(L’Angelus’)인데 카톨릭의 ‘삼종기도’ 즉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만종은 저녁에 드리는 기도로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은 가로가 55.5cm이고, 세로가 66cm 그리 크지 작품인지만 그 울림은 어떤 작품보다 크게 울려 많은 사람들에게 평온함과 위로를 전해준다.
첫째, 믿음(信)
믿음은 '신뢰, 확신, 확실성'
어떤 대상이나 사실이나 진리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이요, 나아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덕(德)
업적이나 타고난 재능, 또는 '탁월, 뛰어남'
한자로 덕은 생각이 크고 넓은 사람, 다른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크고 넓은 생각을 가져 품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지식(智識)
지식의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넷째, 절제(節制)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자기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합니다.
즉 절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상대를 고려하고, 그리고 다음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죄인들에 대하여 그때그때 하고픈 대로, 즉 하나님의 대쪽 같은 성품과 기준대로 했더라면 죄인들과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섯째, 인내(忍耐)
절제가 외적인 일이라면 인내는 내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고 또 참으시는 분입니다.
여섯째, 경건(敬虔)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성, 거룩, 구별, 신비함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곱째, 형제우애(兄弟友愛)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사랑(愛)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지요.
‘스티븐 코비` 박사가 지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왜 이 책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서론 부분에 나옵니다.
미국 독립 기념 200주년을 앞두고 스티븐 코비 박사를 비롯한 일단의 컨설턴트 그룹이 미국의 장래를 위해 이색적인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지난 200년 동안 성공을 다룬 연설, 논문, 책자, 신문보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인지를 연구했습니다.
수년에 걸친 조사와 연구 끝에 그들은 주목할 만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 이후 초기 150년 동안에는 성공과 관련해 성품윤리(Character Ethics)가 강조 되었으나, 이후 50년 동안에는 성격윤리(Personality Ethics)가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성품윤리>는 성공을 위해서는 기본 원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 원칙은 언행일치, 겸손, 충성, 절제, 용기, 정의, 인내, 근면, 소박, 수수함, 황금률과 같은 덕목들입니다.
이러한 성품윤리의 원칙에 근거해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인물이자 그의 자서전을 통하여 이것을 확실하게 남겨놓은 사람은 미국 건국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성공을 가져오는 기본 조건이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Personality Ethics)로 바뀌었습니다.
즉 내적인 성품보다는 대인관계, 대중적인 이미지, 태도와 행동, 기법과 기술, 연설법, 차림새 등이 성공에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연구 끝에 코비 박사 등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고, 후에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코비 박사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건강한 미국을 위해서는 본래의 성품윤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아버지가 아끼던 나무를 잘라놓고 그것을 하인에게 떠넘길 수도 있었으나 정직하게 잘못을 고백했다든지,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링컨이 소년 시절 빌려온 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십 리 길을 걸어가 용서를 빌었다든지 하는 얘기가 성품윤리를 대변하는 일화들인데, 코비 박사 등은 이러한 성품윤리가 회복되면 건강한 미국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윤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운 성격윤리가 활개 치는 시대에도 성품윤리 원칙에 따라 살면 성공한다는 한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바로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 1837,4,17~1913,3,31)입니다.
그는 미국과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가 활동할 당시 월스트리트는 시장이 불완전한데다가 투기꾼들의 농간으로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모건은 그 나름의 사업 윤리를 통하여 마침내 성공했을 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그의 성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성공의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경제적 신용이 아니라 성품의 신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모건은 “신용이 없는 사람과는 그가 비록 예수님 나라에서 발행한 채권을 내놓아도 거래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성품, 사람의 내면적인 가치가 성공의 열쇠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무뚝뚝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철물점 주인’같은 사람들이나 그런 지도자들보다, 멋진 옷을 빼입고 세련된 말투에 친절한 웃음을 짓는 ‘보석상’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활개치고 있지만, 진정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보이나 진실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이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라야 건강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참예한다”는 말은 오늘 본문에 코이노노스(κοινωνος)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 말은 ‘코이노스(κοινος)와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코이노스’는 형용사로서 '공통의(common)'를 의미하며, 명사로서는 '동료, 동역자, 파트너', 그리고 어떤 것의 '공유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이 상업용어로 쓰일 때는 ‘동업자, 사업 파트너’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언급할 때 이 말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앙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어서 ‘그 신과의 연합’, 나아가 ‘같은 신에게 예배하고 제사하는 사람들끼리의 연합’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3:30, 고린도전서 10:18에 나타납니다.
특히 고전 10:20에서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즉 우상 제사와 연관되는 것은 우상과 귀신들과의 친교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용어가 되어 ‘피로 맺은 혈맹’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과 성도들끼리도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이 단순히 법적인 것이나 의미상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된 자에게는 그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죄와 죄에 대한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이 땅의 것 몇 가지 얻고 만족하는데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장차 갈 천국을 보장받은 것만도 아닙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복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갈 수 있는 너무나 특별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4절에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러므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껏해야 육신의 부모를 닮는 것이 전부일 수 있는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렇게 닮는다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 아니 애초부터, 원래부터 나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나님, 바로 그 아버지를 내가 닮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놀랍고 또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수 있게 되었다니까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닮은 성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비평을 잘하면 자녀들은 부정적인 성격을 닮게 된다. 악의와 오기에 찬 부모의 모습을 자주 보며 자란 자녀는 난폭한 성품을 배운다. 그러나 자주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칭찬을 받으며 자란 자녀는 감사할 줄 아는 성품을 배운다. 자녀는 부모가 하는 대로 닮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분의 글입니다. 이 글처럼 자녀가 그 부모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똑 같은 원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여러분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믿음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전부를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믿음의 비밀과 믿음의 능력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는 받는 사람, 보증수표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덕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는 사람, 칭찬받으며 존경받는 사람, 생각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식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 등 하나님의 계획과 하시는 일에 대한 지식,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그 지식에서 나오는 이해와 사랑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절제하십시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이 말은 성적 문제에 관련된 참을성, 감각적인 충동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음식과 음주의 향락을 삼가는 것에 관한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거룩한 성령님과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지독한 괴로움과 고통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고 변치 마시기 바랍니다.
경건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성도들과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한 배에서 난 친형제자매처럼, 한 핏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대변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체험한 자로서, 희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성격윤리>와 <성품윤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의 내적인 자질, 인격, 성품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 대인관계와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대로 미국의 장래를 위하여 성품, 인격, 그 사람의 내적인 조건이 성공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즉, 그의 내적인 자질과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정도가 곧 성공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자신의 내적인 모양새가 됨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시며 이 일에 더욱 힘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5-7)
하나님이 거룩이시므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명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지금 친히 우리를 거룩케 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히 12:9-10, 살전 5:23, 히 2:11).
또한 하나님만 의이신데, 성경은 우리도 위치적으로나 성분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롬 4:25, 고후 5:21, 마 5:20, 계 19:7-8).
성품의 변화는 모든 성도에게 숙제처럼 여겨집니다.
경험과 능력이 많아도 성품이 따라주지 못하면 온전치 못합니다.
신의 성품을 닮아 가는데 유익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1.신의 성품(Divine Nature)
성도를 신의 성품에 참여토록 부르십니다(벧후1:4).
이는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게 하신다거나, 내 기질과 내 성격보다 조금 더 나은 성품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로 인해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기원을 둔 구별되고 거룩한 성품(Divine Nature)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2.신기한 능력(Divine Power)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Divine Power)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벧후 1:3).
이는 하나님을 삶에서 인격적으로 깊이 알아갈 때
주어지며(벧후 1:3,요 15: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주어집니다(엡 5:18b).
곧,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그
다스리심에 온전히 따를 때 신기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3.신령한 삶(Divine Life)
성도는 경건에 속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벧후 1:3), 신령한 집이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게 됩니다(벧전 2:5).
여기서 신령함이란 하나님의 영이 동행하시는 삶입니다.
신령한 삶을 사는 성도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를
맺으며(갈 5:22-23;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늘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잘 맺을 수
있습니다(요 15:5).
말씀 적용
1.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라
변화의 원동력은 나 자신의 경건과 훈련이 아닌 성령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
성령으로 심기를 힘써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영적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갈6:8)
3. 계속 자라가라
실패했을지라도, 더딜지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거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갈6:9).
신의 성품(Divine Nature)을 향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Fruit of Holy Spirit)다. 신기한 능력(Divine Power)으로, 신령한 삶(Divine Life)을 살아가라.
구약의 성막 구조
성막문(청색, 자색, 홍색, 흰색) - 번제단 - 물두멍 - 성소 - 지성소
구원의 문(예수) 구원의 복음 - 번제단(제물로 태운다) 회개의 복음 - 물두멍(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3)
박태준박사의 성가대 지휘자
김성섭장로님의 주일학교 부장
πρεσβύτερος, α, ον
발음 / 프레스부테로스(prĕsbütĕ- rŏs)
관련 성경 / 장로(마 15:2, 막 14:43, 벧전 5:1), 어른(요 8:9), 늙은이(행 2:17, 딤전 5:1), 늙은 여자(딤전 5:2), 선진(히 11:2)
신약 성경 / 66회 사용
“본이 되라”(투포스) 5179. τύπος, ου, ὁ
어원 / 51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국(요 20:25), 형상(행 7:43), 양식(행 7: 44), 모형(롬 5:14), 본(롬 6:17, 살후 3:9, 벧전 5:3), 본보기(고전 10:6, 11)
신약 성경 / 15회 사용
본이 되라는 투포스라는 단어로 "똑같은 모양을 나오게 하는 주물” 이란 뜻
1941년 1월 6일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4가지 자유
2. 종교의 자유(Freedom of Worship)
3.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4.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영광의 영(베드로전서 4:14)
독사(dŏxa) δόξα / 광명, 영광, 광채, 위엄
- 도케오(dŏkĕō ) δοκέω : 생각하다, 알다
마태복음 5:3-10(팔복)
3.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저희 것4. 애통하는 자 - 위로를 받을 것
5.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
7.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8.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볼 것
9.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천국이 저희 것
다른 여섯 가지 복은 모두 미래형(4절, 5절, 6절, 7절, 8절, 9절)
육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돌리기
“성령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입고 있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에서 나오는 영의 생각으로 교체해 달라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롬 8:5~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5. For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are according to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6.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NASB)
죄책감,
우울감, 소외감 등의 느낌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느낌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플 일이 아닌데 어떤 사람에게는 슬픈 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은
생각의 경향을 갖고 오는 생각의 집합(mind set)입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와 그리스도 예수에 기반한 새로운 자아 사이에 계속된 전쟁이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만 합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느낌을 결정하고, 그 느낌이 태도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울하다고 느끼면, 우울하다고 느끼게 하는 생각이 그 느낌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울감을 쫓아내고 싶다면, 이 외에도 내
생각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을 몰아내고 싶다면 감정과 싸울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그에 합당한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성 영역에 생각을 던집니다.
그 생각은 보통 육신의 갈망을 채우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하나님도 영을 통해
생각을 던집니다.
그 생각은 영의 갈망을 채우는 영감(inspiration)입니다.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으로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기 위해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마귀의 간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간계의 헬라어 원어는 “메쏘데이아”입니다.
영어 단어 method의 근원입니다.
이 메쏘데이아의 어근은 “호도스”로 “길(way, road)”을 뜻합니다.
간계의 영어 번역은 생각/계획/책략을 뜻하는
scheme인데, 이 단어는 생각의 덩어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귀 또한 사람의 잠재의식 영역 가운데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킬 생각의 덩어리를 확보하고자 애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의 덩어리는 방향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어근에서 보는 것처럼 “길(way)”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헬라어 원어는 “디아볼로스”입니다. “디아”는 “~를 통해서”란 의미이고, “볼로”는 “던지다(to throw)”란 의미입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마귀는 어떤 목표물을 향해 벌어진 틈을 통해 참소를 던지는 자입니다.
이런 원어적 의미를 갖고 “마귀의 간계”를 보면, 약한 틈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던져 고착화시켜 길을 냄으로 원활하게 사람을 조정하려는 것이 곧 마귀의 간계인 것입니다. 두려움, 슬픔, 염려, 걱정의 느낌은 모두 생각에서 옵니다. 이 감정을 이기려면 이런 감정을 생산하도록 부추기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굴복시켜야 합니다.
만일 TV를 볼 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프로그램이 나왔다면 그 프로그램에 분개하며 부정적 영향과 싸우려 하지 말고 좋은 채널로 돌리면 됩니다. 이와 동일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이 들어왔다면 그 부정적 생각과 대항하여 싸우려 하지 말고 진리에 근거한 좋은 생각으로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언급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mind set)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을 때 이 생각과 싸울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mind set)으로 돌릴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내주하시는 영을 통해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성령님은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느 누가 사망을 선택하고 싶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실은 크리스챤마저도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을 붙들며 삽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연약함을 입고 있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죄된 본성에 기반을 둔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아에서 나오는 영의 생각으로 교체해 달라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에 기반한 영의 생각으로 채널 돌리듯 돌리면 나쁘고 낡은 옛 자아의 생각은 더이상 호소하지도, 유혹하지도, 영향도 못미치는 것을 봅니다.
고후 10:3~5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육신의 생각을 교체 가능한 영의 생각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HAGAH의 시간을 갖기 전에 아래와 같은 기도를 하고 기도한 내용대로 마음을 모아 HAGAH를 하면 성령님께서 틀림없이 말씀을 통해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 생각 가운데 자유롭게 오셔서 영의 생각을 던지실 수 있도록 마음 중심으로 성령님을 초대합니다. 제 모든 생각 기관의 주인으로 성령님을 모십니다. 성령님께서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재료와 하나님의 말씀을 재료 삼아 생각 영역에 빛을 비춰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 온 마음을 성령님께 엽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암송이 아닌 HAGAH할 때 영의 생각을 던져주옵소서. 잠재의식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교체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롬 8:5~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1.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육신의 일이라고 했는데 롬 8:6에서 그로 말미암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임을 알려줍니다.
비오스, 프쉬케 모두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고, 조에 만이 무한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무한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유한한 생명, 즉 사망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 결과라 할지라도 무한할 것 같지만 그것이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면 결국 유한합니다. 이는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벧전 1:23~25>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언급한 베드로는 모든 육체(사르크스, 로마서 8장의 육신)가 풀과 같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생명이요, 영인 하나님의 말씀(요 6:63)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란 구절을 읽을 때, 악하고 나쁜 생각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HAGAH-R8 Day3 (1)에서 나눴던 것처럼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탁월한 것이라도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 육신으로 기인한, 다른 말로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으로 말미암은 것만 영원하며 하나님 나라에 보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을 볼 때 아래의 대결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영” vs. 사망의 “육신”
로마서의 “생명”은 창세기의 “생명 나무”, 로마서의 “육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난 자들은 선한 일 vs. 악한 일, 선한 생각 vs. 악한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살아갑니다.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배우는 것은 이거 하면 안돼요, 이건 잘했어요…의 선악과 패러다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법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가져 오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 “악한 생각 vs. 선한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 vs. 영의 생각”…의 패러다임으로 끌고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선하고 악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인 영으로 기인했느냐 아니냐와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은 사망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사라지지만… 주의 말씀은, 주의 영은, 주의 생명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은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니고 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남습니다.
2. 생각은 세계관과 관련있습니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NASB)
어떤 생각이 문득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휘발성처럼 사라진 생각은 내게 영향을 못미칩니다. 그런데 동일한 생각이 들어오고 또 들어와 사라지지 않고 쌓이면 그 생각은 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쌓여 내 안에 집합을 이룬 것을 mind set이라고 합니다. 휘발성 처럼 사라지는 생각이 아닌 덩어리를 이룬 생각은 특정 관점을 생성합니다. 방향성을 갖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부분이 발전하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룹니다.
롬 8:6에 나오는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프로네마”입니다. “프렌”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생각” 중에서도 반복되는 생각, 그래서 어떤 방향과 경향을 띤 생각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원어를 가장 잘 반영한 NASB는 생각을 “mind set”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리학을 처음 공부할 때 배우는 F = ma (힘을 = 질량 X 가속도)를 떠올리면 모든 질량은 힘을 갖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휘발성처럼 사라지는 생각은 내게 힘을 미치지 못하지만 쌓여져 덩어리가 된 질량이 있는 생각은 내게 힘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 쌓인 생각이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결국 사망이지만, 그 생각의 덩어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조에)이자 평안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이요,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선하고 악한 생각이란 패러다임이 아닌 육신과 영의 생각이란 기준으로 보면 결국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이 육신의 것이요 사망이기 때문에 영으로 말미암은 것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려면 결국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mind set은 견고한 진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으로 뭉쳐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은혜를 경험한다 하더라도 잠재의식 영역에 형성된 mind set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뀌질 않으면 특정 은혜로 변화를 받은 것 같지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인 전쟁은 바로 이 mind set이란 잠재의식의 땅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HAGAH란 방법을 통해 잠재의식마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려고 한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베드로전서 3:16)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어원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신약 성경 / 30회 사용
* 4894. συνείδω
1. 완전하게 보다, 2. 깨닫다, 3. 이해하다
발음 / 수네이도(sünĕidō)
어원/ 4862와 1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알다(행 5:2, 14:6), 깨닫다(행 12:12, 고전 4:4)
- 4862. σύν
관련 성경 / 함께, ~와, 더불어(마 25:27)
신약 성경 / 128회 사용
- 1492. εἴδω
관련 성경 /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양심은 한 사람의 행동과 생각, 말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따르거나, 혹은 거스를 때 반응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신약성경의 쉬네이데시스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히브리어 단어가 없습니다.
“양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는 것은 개인적이기 보다 공동체적이었던 유대인의 세계관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개인으로서가 아닌 조직적으로 관련된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인 민족 전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히브리인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좀 더 개인적이며, 세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수반합니다.
첫째, 양심은 인간이 자기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선했거나” “깨끗했던” 여러 경우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3:1, 24:16, 고린도전서 4:4).
바울은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점검하며 그것이 자신의 도덕과 가치 체계에 합당한 것인지 살폈습니다.
물론 그 도덕과 가치 체계는 하나님의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양심은 그의 마음의 온전함을 입증했습니다.
둘째, 양심이 어떤 것을 증언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비록 모세의 율법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졌음을 증언해주는 양심을 가졌다고 말합니다(로마서 2:14-15).
바울은 또한 자신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로마서 9:1)과 사람들을 다룰 때 거룩함과 신실함으로 행했다는 것(고린도후서 1:12)을 증언하며 양심에 호소합니다.
바울은 또 양심을 통해 자기 행동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모두 분명히 드러남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1).
셋째, 양심은 개인의 가치 체계의 종입니다.
미숙하거나 나약한 가치 체계는 나약한 양심을 낳는 반면, 제대로 알고 있는 가치 체계는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낳습니다.
크리스천 삶에서 성경적 진리에 대한 적절치 못한 이해로 인해 개인의 양심이 조종당하고, 직면한 문제에 대해 불균형한 죄책감 및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성숙하게 되면 양심이 강건해집니다.
이러한 양심의 마지막 기능은 바울이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가르칠 때 언급됩니다.
바울은 우상이 진짜 신은 아니므로 음식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한 신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미숙한 신자들은 양심에 잘못된 편견과 미신적 관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양심이 나약한 형제들이 제물로 바쳐진 음식 먹는 행위를 정죄한다면, 좀 더 잘 아는 자들이 자기들의 음식 먹을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의 양심이 성숙한 믿음과 이해로 말미암아 거리낌이 없다고 해서, 더 강한 양심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행사하여 나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양심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마치 뜨거운 철로 지져진 것과 같이 “화인을 맞거나” 무감각하게 된 양심에 대한 것입니다(디모데전서 4:1-2).
그러한 양심은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를 죄에 방치하며, 다른 사람들을 아무 감정 없이 무감각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마음을 늘 새롭고 부드럽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약한 자들을 크리스천의 사랑과 긍휼로 대하며 배려해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베드로전서 2:2)
순전하고 신령한
순전한 / ἄδολος
아도로스(adŏlŏs) - 순수한, 성실한, 속일 수 없는
신령한 / λογικός
로기코스(lŏgikŏs) - 영적인, 합리적인
로마서 12:1(영적)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모하라(ἐπιποθέω) : desire
에피포데오(ĕpipŏthĕō) - 간절히 사모하다
고린도후서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믿음의 결국(베드로전서 1:9)
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결국(結局) : 일의 끝장 / 맺을 결, 판 국
5056. 테로스(tĕlŏs) τέλος : 끝, 결말, 마지막
τέλος, ους, τό
어원 / 기본형 τέλλω ‘제한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끝(마 10:22, 24:6, 막 13:13, 눅 21:9), 마지막(롬 6:21,22, 고전 15:24), 결말(마 26:58, 약 5:11), 결국(고후 3:13),
관세(마 17:25, 롬 13:7),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말세(고전 10:11)
신약 성경 / 40회 사용
NIV : the goal of your faith(믿음의 목표)
KJV : the end of your faith(믿음의 마지막)
NASB : the outcome of your faith(믿음의 결과)
믿음의 기도(야고보서 5:15)
신약 성경에 믿음(faith)이란 단어가 무려 231번이나 나옵니다.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갈망하는은사 중 하나는 단연 믿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염원(念願) : 생각염(念), 원할 원(願)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
또는 그런 소원
신명에게 빎. 또는 그 의식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말씀(레마) - 4487 ῥῆμα
어원 / 44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씀(마 4:4, 눅 1:37, 행 5:20), 말(마 5:11, 행 2:14, 고후 12:4), 일(눅 2:15, 행 5:32)
신약 성경 / 68회 사용
* 4483. 헤오(ῥέω)
관련 성경 / 말하다(마 2:15, 5:21, 12:17, 24:15), 이르다(롬 9:12)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5287)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650)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후포스타시스'는 '후포'(아래, sub)와 히스테미(ἵστημι, histemi, 서게 하다, 확립하다)
* 후포(~에 의하여). 5259.
ὑπό
관련 성경 / «속격» 의하여, 말미암아(마 1:22, 눅 2:18)
«대격» 아래, 밑에(마 8:9, 행 4:12)
신약 성경 / 220회 사용
ἵστημι
관련 성경 / 서다(마 2:9, 막 9:1, 요 1:35), 세우다(마 4:5, 행 6:6, 롬 3:31), 데리고 가다(마 18:16), 서 있다(마 20:6), 두다(마 25:33),
멈추다(행 8:38), 작정하다(행 17:31), 그대로 두다(고전 7:37), 확정하다(고후 13:1), 대적하다(엡 6:13), 앉다(약 2:3), 일어서다(계 11:11)신약 성경 / 154회 사용
* 후포스타시스 - 아래에 서게하다 즉 받침대를 의미한다.
꽃을 위한 받침대, 책을 위한 받침대,
이렇게 발전하여 믿음을 위한 받침대가 곧 후포스타시스로 실상(실체)이라고 하겠다.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어원 / 16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망(딤후 3:16), 증거(히 1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651. 엘렝코(ἐλέγχω)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 18:15), 드러나다(요 3:20), 책망하다(요 16:8, 딛 1:9, 계 3:19), 책잡다(요 8: 46), 꾸짖다(딤전 5:20, 딛 1:13),
정죄하다(약 2:9), 경책하다(딤후 4:2), 꾸지람을 받다(히 12:5), 책망을 받다(눅 3:19, 엡 5:13), 가책을 느끼다(요 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1934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했다.
독실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20세 때부터는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아르헨티나의 영적갱신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믿음 교회’(Faith Tabernacle)의 목회
성공은 그를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는 1974년 스위스의 로잔 대회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제3세계의 지역을 넘어 동구권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
나가게 됐다.
오르티즈 목사는 처음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나 후에는 장로 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장로 교파를 비롯, 여러 복음주의 교파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반 사회에서까지 폭넓은 명성을 얻고 있는 종교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의 메시지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전해져 여러 저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가까이 하라(1448) 엥기조(ἐγγίζω) 믿음의 기도(야고보서 5:15)
발음 / 엥기조(ĕnggizō)
어원 / 미래 ἐγγιῶ , 제1부정과거 ἤγγισα, 완료 ἤγγικα, 14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깝다(마 3:2, 막 1:15, 행 7:17), 가까이 오다(마 21:1, 막 11:1, 눅 18:35), 가까이 하다(눅 12:33, 약 4:8),
가까이 가다(눅 24:28, 행 9:3, 히 7:19), 이르다(빌 2:30).
[부] 가까이(눅 15:1)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마태복음 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 1451. 가까운(엥구스) ἐγγύς
어원/ 비교급 ἐγγύτερον, 최상급 ἔγγισ- τα, 기본동사 ἐ. τοῦ ‘조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까이(마 24:32, 눅 21:30, 요 11:18, 엡 2:13)
신약 성경 / 31회 사용
한국의 경우
1. 이슬람화 / 한국인 이슬람 신자 약 4만명
사원 17개, 기도처(무살라) 123개
유학생 지원 : 본국에서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할 때 총각 증명서 발급
외국인 이슬람 신자 11만명
2. 중국화 / 차이나 타운 30개
유학생 수 : 7만 1천 67명
외국인 유학생의 비율 44.4%
3년 거주 후 지방 선거권 부여
3. 정치적 / 우파와 좌파의 대결
현재 50:50
현재 정부의 무분별한 인허가로 인해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중국계 조선족, 한족 등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국내 곳곳에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속속 정부의 인허가 또는 묵인 속에 건설되고 있어 향후 큰 문제로 비화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차이나타운은 다음과 같다.
자양동 차이나타운, 신길동 차이나타운, 대림동,가리봉동,구로동 차이나타운, 독산동 차이나타운, 봉천동 차이나타운, 흑석동 차이나타운, 종로구 명륜동 차이나타운, 일산 차이나타운, 연희동 차이나타운, 연남동 차이나타운, 신길동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 평택시 차이나타운, (중국인 60만명 이주 준비)
수원 팔달구 차이나타운, 안산시 원곡동 차이나타운, 시흥시 정황동 차이나타운, 강원도 정동진 차이나타운 개발중, 대구 중구 차이나타운, 대구 달서구 차이나타운, 부산시 차이나타운
전남 진도 차이나타운 (천만평 땅에 17조원 투자해 건설중) 전남 여수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전남 광양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제주도 차이나타운 (신제주 차이나타운)
서귀포 차이나타운, 한라산 자락 차이나타운, 제주도 애월읍 상가리 (34만평 건설중), 춘천에 대규모 차이나타운 공사 예정(최근 문제됨) ,경기도 포천 차이나타운 (추진중) 등이다.
중국계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가서도 현지 문화와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문화를 유지하려는 습성을 갖고 있어, 현지 국가의 각종 이권을 장악하고 수익금은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나타운
다문화 가정에게 대한 과도한 특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조선족을 포함한 다문화 가정과 국내 체류 외국인 (영주권자 포함)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가 너무나 과도한 특혜를 줬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
이미 많은 곳에서 우리나라 정부와 지자체가 이들 조선족과 다문화 가정에게 주는 혜택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조목조목 리스트를 정리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 국내 거주 외국인에 대한 말도 않되는 특혜 때문에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 구조가 왜곡되고 비뚤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어떤 특혜가 있는가?
외국인이 국내 3년 거주시 지방선거권 부여하는 점은 치명적이라는 평가다. 단지 3년을 거주한다고 투표권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 이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무원시험 다문화전형 특혜, 운전면허및 자격증 국비지원 등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취업 전선에 역차별을 주고 있다. 특히 공무원과 자치 경찰 등은 국가관과 애국심이 투철해야 하는 데,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중국계 조선족이 대거 공무원과 경찰로 편입될 경우, 결국 향후 치명적인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부동산도 문제다. 외국인에 대한 공공분양및 공공임대 우선순위, 부동산 담보 대출 무제한은 서울 경기 일대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 수년간 서울 경기 부동산이 폭등하는 이유 중 하나로 중국계 자금이 해당 지역 부동산을 싹쓸이 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과도한 금융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을 취득할 때 무제한 담보대출을 한다는 것은, 중국계 자본은 자신들의 돈이 없어도 은행 대출만으로 서울 시내 부동산을 매입한다는 것인데, 이는 고스란히 서울 수도권 부동산을 중국인들에게 내주고 가격을 폭등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인에 대한 불공정한 특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취득세 양도세 재산세 지원, 투기 관리지역 취득가능, 대출이자 특별할인, 은행 예금이자 6%이상 지급, 외화송금수수료 할인, 통신비 외료비지원, ATM 수수료 면제, 국공립 어린이집 및 병설 유치원 0순위, 보육로, 육아 도우미 비용 지원, 학습지 비용 및 학원비 지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록금 할인 및 장학금 지원, 기숙사 우선배정, 중국인들은 무료로 대학 다닐 수 있는 혜택 등 이루말할 수 없는 특혜들을 주고 있다.
이러한 법률 및 조례 등으로 현재 오히려 내국인의 역차별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노가 치솟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법안들을 대거 통과시킨 정부와 국회의원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나와 있는 조선족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70만, 비공식 (불법체류자 포함) 300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쉽게 말하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중에서 노동력을 갖고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무수히 건설되는 차이나타운에서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 성장할 경우,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와서 현지에 동화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표를 의식한 나머지 과도하게 느슨한 다문화 정책으로 사회혼란을 가중시킬 것이아니라, 앞으로 더 이상의 불법적인 이주를 금지하고, 불법 체류자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리는 등 질서를 잡는 일이 서로를 위해 합리적인 정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복수의 정치,외교 전문가들은 "국내 거주 중국계의 표를 의식했던 여권 후보가 각종 선거에서 참패하는 현상은 이미 돌아선 대한민국의 민심을 나타낸다." 라며 "정부가 감성적인 광고 등으로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비뚤어지고 무분별한 다문화 정책을 쏟아내는 방식은 앞으로 거센 국민적 저항과 직면할 것" 이라고 입을 모았다
출처 : 파이낸스투데이(http://www.fntoday.co.kr)
세계최대의 독특한 프랜차이즈 상륙?
차이나타운이 한국에 왜 이렇게 많이 생겼지? 없는 동네가 없습니다.
ㅡㅡㅡㅡㅡ
_한국엔 이미 조선족 80만명 거주..
_광진구 자양동 차이나타운
_영등포구 신길동 차이나타운
_영등포구 대림동 차이나타운
_영등포구 가리봉동/구로동 차이나타운. (중국 한족이 접수)
_금천구 독산동 차이나타운
_관악구 봉천동 차이나타운
_관악구 흑석동 차이나타운
_종로구 명륜동 차이나타운
_일산 차이나타운
_연희동 차이나타운
_연남동 차이나타운
_신길동 차이나타운
_독산동 차이나타운
_인천 차이나타운
_평택시 차이나타운...(중국인 60만명 이주)
_수원 팔달구 차이나타운
_안산시 원곡동 차이나타운
_시흥시 정황동 차이나타운
_강원도 정동진 차이나타운 개발중....
_대구 중구 차이나타운
_대구 달서구 차이나타운
_부산시 차이나타운
_전남 진도 차이나타운 (천만평 땅에 17조원 투자해 건설중 )
_전남 여수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_전남 광양 차이나타운 (전략적으로 확보)
중국 자본이 제주도 접수중
_제주도 차이나타운 (신제주 차이나타운)
_서귀포 차이나타운
_한라산 자락 차이나타운
_제주도 애월읍 상가리 (34만평 건설중)
ㅡ법무장관후보 조국. 사모펀드에 중국자본 6천억 유입 의혹
조국의 임명강행은 중국의 자유진영에 대한 침략행위!
ㅡ스마트 가로등사업(몰래카메라내장)수주관여. 모니터링중... (177건 관급공사 수주)
ㅡ한국지하철 무료 Wi-Fi. 중공 화웨이 5G 설치. 도청중...
ㅡ카톡도 중국꺼.. 사용자제 요망(톡방 멤버 아니라도 엿듣기 가능)
ㅡ한국대학에서 중국유학생 성적 2.5이상 장학금 다 주고
ㅡ외국인 특혜로 마구잡이 입학허가 (우리 애들은 어릴때부터 입시를 준비해도 명문대 들어가지 못하는데...)
ㅡ4년 졸업하면 영주권 주고
ㅡ비싼 암치료 해주고
ㅡ촛불집회 동원하고
ㅡ한국국적 주고 투표권 주고....ㅠㅠ
이제 지자체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출마할 수 있는 법도 만들것임
ㅡ지난 70년간 뼈빠지게 일해서 세계 10대 무역강국 만들어
중국 시진핑에게 갖다 바치는 중.....
ㅡ반중친미
ㅡ반중친미 반중집회에 참여합시다
ㅡAnti-China (중공)
- Anti Communist (중국공산당)
7년간 무슬림 유학생들과 함께 살아온 주민들은 왜 '돌변'했을까
지혜(4678) 소피아
1. 지혜, 2. 마태복음 12:42
어원 / 46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마 11:19, 롬 11:33, 고후 1:12, 마 12:42, 눅 11:31, 골 2:23)
신약 성경 / 51회 사용
* 4680. 소포스(σοφός)
σοφός, ἡ, όν
어원 / σαφής ‘깨끗한’과 유사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 11:25, 눅 10:21, 딤전 1:17), 지혜 있는(마 23:34, 롬 1:22, 고전 3:18, 약 3:13)
신약 성경 / 20회 사용
로마 황제가 어떤 랍비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물었다.
"신은 도둑이다. 어째서 남자가 잠들고 있는 사이에 남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갈비뼈를 훔쳐 갔는가?"
랍비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의 딸이 곁에서 대화에 끼어 들었다.
"황제의 부하를 한 사람만 빌려 주십시오. 조금 곤란한 문제가 생겨, 그것을 조사 시키는데 쓰려고 합니다."
황제가 물었다.
"그건 별로 어려운일이 아니지만 도대체 그 문제란 무엇인가?"
"어젯밤 도둑이 집에 들어와서 금고 하나 훔쳐 갔습니다.
그 대신에 도둑은 금 그릇을 두고 갔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 조사해 보고 싶어서 입니다."
"그것 참 부럽구나.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어 왔으면 좋게는데!"
그러자 랍비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겁니다. 그것은 결국 아담의 몸에서 일어난 일과 똑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갈비뼈를 하나 훔쳐 갔지만, 이 세상에 한개의 갈비뼈 보다 값진 여자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로 만들지 않았던 것도 남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는 참과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인간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이해를 도운 성경의 인물을 본다면 그는 야고보 사도이다.
그는 야고보서 3장에서 '세상의 지혜와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기록했다.
세상적인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擾亂)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야고보서3:16-17)
위에 제시된 두가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지혜는
쉽게 구분한다면 어두움과 빛, 멸망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돈 많은 유대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사람이 유서를 작성했다.
아들은 타지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주는 유서를 그의 종에게 남겼다.
유서에는 두 가지 조건이 적혀있었다.
“첫째, 나는 내 아들에게 이 유서를 전하는 충실한 노예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
둘째, 내 아들에게는 내 모든 것 가운데 한 가지만을 고르게 하라.”
노예는 너무나 기뻤다.
아들이 올 때까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였다.
그리고 그 유서를 랍비에게 보이고 증인으로 삼았다.
아들이 돌아왔고 노예는 랍비와 함께 주인 아들에게 갔다.
랍비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 유서를 남겼는데 당신에게는 단 한 가지밖에 남기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이 노예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소유 중에서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젊은 아들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 노예를 갖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다시 이어받게 되었다.
아들은 유서 속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전국시대의 명의였던 편작에게 의사 지망생이 찾아왔다.
“저도 선생님처럼 유명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본 편작이 말을 이었다.
“온 천하를 다녀서 약이 될 수 없는 풀들을 뜯어 오너라”
젊은이는 산야를 헤매고 다녔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온 천하를 다녀봐도 약이 되지 않는 풀이 없군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명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를 편작이 불러 세웠다.
“그래 됐어, 하찮은 풀도 약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보니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있겠어”
편작은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 들여 의술을 가르쳤고 훗날 젊은이는 편작의 뒤를 잇는 당대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는 일화가 있다.
약(藥)이라는
한자어도 풀이라는 뜻의 ‘초두 머리’ 밑에 즐거움이라는 뜻의 ‘락’을 쓴다.
치료의 기쁨을 안겨주는 풀이 바로 약이라는 뜻이다.
들풀 하나도 유심히 살펴 쓰임새를 찾던 옛 사람들의 지혜가 아쉽다.
건강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혜가 부족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건강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할 때다.
藥 : 약 약, 뜨거울 삭, 간 맞출 략(약)
艹(초두머리 초) + 樂(노래 악)
아라곤 스페인 왕이 어느 날 10여 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민정 시찰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보석상 앞을 지나다가 진열장안을
들여다보니 좋은 보석이 많아서 왕은 신하들과 함께 보석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보석
하나를 사가지고 신하들과 함께 그 가게에서 나왔다.
그런데 얼마쯤 갔을까, 보석상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 폐하 말씀
드리기 대단히 죄송하오나 폐하께서 다녀가시고 저희 가게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고 조아리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크게 당황을 하며 신하들을 모두 데리고 보석상으로 되돌아갔다.
왕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큼직한 항아리에 소금을 절반 정도 넣어 가지고 오시오."
가게 주인은 잠시 후에 소금 항아리를 왕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차례대로 자기 주먹을 이 항아리 안에 넣고 속에 있는 소금을 잠시 휘젓다가 꺼내시오!"
신하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왕의 명령대로 실행하였습니다.
왕은 주인에게 탁자 위에 그 소금 항아리를 쏟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이아몬드가 그 소금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현명한 왕의 기지로 보석을 찾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훔쳤던 신하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
- 지혜는 행하는 능력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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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용어를 설명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는 히브리어 원전에서(잠언 2:2~3)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 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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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1. 지혜(智慧)
히. 호크(chokma), 헬. 소피아(sophia), 영. 위즈덤(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2. 명철(明哲)
히. 비나(beenah), 헬. 순네시스(sunesis), 영. 언더스텐딩(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 예레미야 9:24, 여호와를 아는 것
3. 지식(知識)
히. 다드(daath), 헬. 그론시스(gnosis), 영. 나리지(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 7:4, 9:10, 16:16; 욥 28:12, 20, 28; 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 4:7).
“호크마” - ‘지혜’
“비나” - ‘지식’
“테부나” - ‘명철’
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4102) - 피스티스(πίστις)
πίστις, εως, ἡ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 3982 - 페이도(πειθώ)
관련 성경 / 권하다(마 27:20, 행 13:43, 고후 5:11), 신뢰 하다(마 27:43, 빌 1:14, 3:4), 믿다(눅 11:22, 행 26:26, 롬 2:19),
인정하다(눅 20:6), 따르다(행 5:36,37, 롬 2:8), 옳게 여기다(행 5:40), 화목하다(행 12:20), 권면하다(행 18:4, 19:8), 권유하다(행 19:26), 순종하다(히 13:17), 확신하다(롬 8:38, 고후 2:3, 빌 2:24), 의지하다(고후 1:9, 히 2:13)
신약 성경 / 52회 사용
행함(2041) - 에르곤(ἔργον)
ἔργον, ου, ὁ관련 성경 /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 5:36), 소행(행 5:38), 사업(롬 14:20, 계 2:19), 공적(고전 3:13,14), 실천함(약 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
신약 성경 / 169회 사용
믿음(信)과 행함(行)
고린도후서 13:5a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믿음 : 그 믿음(the faith)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5287)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650)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후포스타시스'는 '후포'(아래, sub)와 히스테미(ἵστημι, histemi, 서게 하다, 확립하다)
* 후포(~에 의하여). 5259.
ὑπό
관련 성경 / «속격» 의하여, 말미암아(마 1:22, 눅 2:18)
«대격» 아래, 밑에(마 8:9, 행 4:12)
신약 성경 / 220회 사용
ἵστημι
관련 성경 / 서다(마 2:9, 막 9:1, 요 1:35), 세우다(마 4:5, 행 6:6, 롬 3:31), 데리고 가다(마 18:16), 서 있다(마 20:6), 두다(마 25:33),
멈추다(행 8:38), 작정하다(행 17:31), 그대로 두다(고전 7:37), 확정하다(고후 13:1), 대적하다(엡 6:13), 앉다(약 2:3), 일어서다(계 11:11)신약 성경 / 154회 사용
* 후포스타시스 - 아래에 서게하다 즉 받침대를 의미한다.
꽃을 위한 받침대, 책을 위한 받침대,
이렇게 발전하여 믿음을 위한 받침대가 곧 후포스타시스로 실상(실체)이라고 하겠다.
“삼위일체”에서 ‘위(位)’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후포스타시스’라는 용어의 주가를 높여놓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보통 ‘실체(實體)’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서 ‘체(體)’에 상응하는 용어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체’에 상응하는 용어는 ‘우시아’입니다.
이때 우시아는 “본질”을 의미하지요.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용어를 그대로 풀어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각각 다른 분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분이시다”
‘본질’은 무엇이고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후속 논의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사변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말고“일체”를 간단히 “통일체”로 이해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유익하다.
‘실상’이 바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다”우리나라 말이지만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은 기본 의미가 아닌, 파생적 의미에서 해법을 찾습니다.
어떤 것을 형성하고 완성하는 출발점 내지 토대라고 할까요?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는 이런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현해가는 토대와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의 하나인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왜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재료(토대)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전자는 “확신” 비슷한 의미로,
후자는 “증거” 비슷한 의미로 번역합니다.
객관성과 관련 있는 “증거”(엘렝코스)로 번역했을 때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반절이 형이상학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면 하반절은 인식론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애초 믿음에는 주관성이 강해서 객관성이 강한 ‘증거’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물학에서 세포핵을 관찰할 때 염색을 하지요. 그렇게 보이게 된 세포핵은 엄격히 말해 원래 세포핵은 아닙니다. “염색약에 물든 세포핵”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세포핵에 대한 증거가 되지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도 비슷합니다.
믿음이라는 염색약이 들어갔지만 염색약 같은 믿음도 증거의 요소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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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그것을 완벽하고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설명은
고사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보다 한없이 위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아버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모두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위격(인격)들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
주제를 공부할 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용어는 세 위격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세 위격은 같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하신 위격들로서 한 하나님을 구성하십니다.
진짜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개념은 성경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신 6:4; 고전 8:4; 갈 3:20; 딤전 2:5).
2. 삼위일체는 세 위격들로 구성됩니다(창 1:1, 26; 3:22; 11:7; 사 6:8, 48:16, 61; 마 3:16-17, 28:19; 고후 13:14).
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형의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3장 22절, 11장 7절,
그리고 이사야 6장 8절에서, 복수 인칭 대명사인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하나님들)이라는 단어나 인칭 대명사
“우리들”은 복수 형태인데,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칭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명쾌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복수적 측면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엘로힘’은 명확하게 삼위일체 개념을 허용합니다.
이사야
48장 16절과 61장 1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사야 61장1절을 누가복음 4장 14-19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시는 동안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삼위일체 내에서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3.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구별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the LORD)는 “주”(the Lord)와 구별됩니다(창 19:24; 호 1:4).
여호와 하나님은 한
아들이 가지십니다(시 2:7, 12; 잠 30:2-4).
성령님은 여호와(민 27:8)와 하나님(시 51:10-12)과
구별됩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됩니다(시 45:6-7; 히 1:8-9).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돕는 분)이신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에 대하여 아버님께 말씀드리십니다(요 14:16-17).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나 성령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모든 다른 경우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분(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다른 분이신(다른 위격이신)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세 위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요 6:27; 롬 1:7; 벧전 1:2).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요 1:1, 14; 골 2:9; 히 1:8; 요일 5:20).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행 5:3-4; 고전 3:16).
5. 삼위일체의 세 위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았으며, 성자는 성부로 부터 영원히 발생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 부터 영원히
방출하셨습니다.이것은 내부의 관계로서 삼위일체 그 어느 분의 신성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한한 우리의 마음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아들에 관한 참조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그리고 요한일서
4:14을 보십시오.
성령에 관한 참조로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십시오.
6.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다른 과업들을 갖습니다.
성부는
우주 생성의 궁극적 원천 또는 원인(고전 8:6; 계 4:11)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계 1:1), 구원(요 3:16-17),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사역들(요 5:17. 14:10)의 궁극적인 원인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성자는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실 때의 대리자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고전 8:6; 요 1:3; 골 1:16-17);
하나님의 계시(요 1:1, 16:12-15; 마 11:27; 계 1:1), 그리고 구원(고후 5:19; 마 1:21; 요
4:42). 아버지는 그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아들을 통하여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은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수행하시는 수단입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창 1:2; 욥 26:13; 시 104:30); 하나님의
계시(요 16:12-15; 엡 3:5; 벧후 1:21); 구원(요 3:6; 디도서 3:5; 벧전 1:2);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들(사 61:1; 행 10:38).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하십니다.
삼위일체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설명은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계란(또는 사과)의 예에서, 껍질, 과육, 그리고 씨앗이 사과의 부분이며 사과 자체가 아닌 것처럼, 또는 달걀의 예에서 껍질,
흰자, 그리고 노른자는 달걀의 부분이며 계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부분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 각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의 실례는 다소
나아 보이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액체, 기체, 그리고 얼음은 물의 형태들입니다.
아버님,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태들이 아닌, 각자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실례들이 삼위일체의 그림을 제공할지는 몰라도, 그
그림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한정적인 실례에 의해 온전히 묘사될 수 없으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분열을 초래하는 쟁점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핵심적 측면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지만, 몇 가지 부차적인 쟁점들은 명쾌하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성경적 교리입니다.
이
사실 외에서의 쟁점들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본질 부분은 아닙니다.
우리의 한정된 생각으로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그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며 섬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위엘체라는 개념과 기능은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삼위일체(三位一體)
1. 삼위일체의 용어와 형성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교류와 상호구별된다는 성경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 기록을 그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라는 이론이 정립되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KJV]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NIV]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RSV]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and bears the very stamp of his nature, upholding the universe by his word of power. When he had made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또한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 2:6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몰프헤”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즉 “본체, 본질, 형상”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에서 동등하다는 결론을 갖음으로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AD 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하며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선조라고 보면 맞다.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주교인 알렉산더감독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알렉산더 감독이 죽은 후에 그 서기였고 집사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상대로 힘겨운 토론을 하여 결국 승리를 갖게 된다.
결국 아타나시우스가 예수가 하나님의 동일본질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토론을 통하여 입증하고 승리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이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정립되었던 것이다.
1. 요 1:1; 마 3:16-17
삼위일체, 교인이라면 얼마나 귀에 익숙한 어휘입니까?
그런데 솔직히 얼마나
난감한 어휘인지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속한다는 것은 알지만 막상 설명하라면 말이 막히는 진리, 그것이 ‘삼위일체’란
진리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설명한다고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나 삼신론 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과
삼신론은 모두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으로서 실제로 ‘이단’인 이론들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니, 양태론이니 골치 앓을 것 없이 그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이 항상 ‘믿음의 열정(fervor of faith)’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right understanding
of truth)’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사실과 역행합니다.
이 균형은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균형입니다(요 4:24).
‘열심’이라면 이단 추종자들도, 공산주의자도 다 갖는 것인데 그들의 문제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구조’ 안에 분명한 ‘세 분’이 계시며, 그 세 분은 깊은 관계성 안에서 ‘한 분’이시라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이기에 매우 중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가를 알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1)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이며,
(2)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진리 중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정확한 일조량의 햇빛이 지구에 닿게 하셨겠습니까?
지구 위의 생명체들이 그것을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실을 계시하셨을까요?
믿는 자들이 그 진리를 통해 생명 있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는 ‘진지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대로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고집일 뿐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5:5).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는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물으면
다수의 교인이 ‘유일신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은
“단독적 주체의 신,” 그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싱글’인 신, ‘영원한 솔로’인 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영원한 솔로’로서의 유일신은 정확히 이슬람의 알라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제 알아볼 것이지만,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러한 ‘영원한 솔로’의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그저 ‘단독적 주체’로, 즉 ‘영원한 솔로’로 생각하는 교인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가장 흔한
이해가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세 면(面)’이나 하나님의 ‘세 역할(function)’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한 분 하나님’의 ‘세 면,’ 혹은 ‘세 역할’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인 것과 같다는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마치 한 남자의 ‘원맨쇼’처럼 말입니다.
혹시 주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
‘원맨쇼의 하나님’ 설명은 정확히 ‘이단’에 속하는 이론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2세기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삼위일체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이 구약에는 ‘아버지’로, 신약에는 ‘아들’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단독적 주체의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세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단순히 한 하나님의 세 면(세 양상, 세 역할)으로 본다고 해서 그의 이론을 ‘양태론(Modalism)’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부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부들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반(反) 성경적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AD 262).
우리는 진정한 삼위일체는 양태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 단독적 주체의 신이 ‘세 역할’을 하는 그런 신관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가 ‘정통’으로 유지해온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는 참으로 ‘세 분’이 계십니다.
‘세
분’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단독적 신’의 세 면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selfhood)을 가지신 분명한 ‘세
주체들(three Persons)’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 대화, 일 등을 나누시는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 안에 있는 분들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각자가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마태복음 3장 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입니다.
이 세례 장면에서 삼위일체 안의 ‘아들(Son)’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나타나십니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이 나타나시는데 하늘의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아버지(Father)’이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동시에(simultaneously)’ 나타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각 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현(顯現)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이단과 어떻게 다른지 보시는지요?
사벨리우스 말대로 ‘솔로’인 단독신이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혼자 ‘원맨쇼’를 했다면, 마태 3장에서와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각자의 신분으로 현현(顯現)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 마태 3장의 예수님 세례 장면은 그래서 양태론이 거짓인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 때문에 2세기의 현명한 교부들이 양태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것입니다.
양태론에 반(反)하는 다른 성경의 증거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존재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기도도 하시며(요 17:5),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별하시기도 합니다(눅 22:42).
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구절은 성령과 아들(예수님)을 구별하는 말씀입니다(막 1:12).
‘삼위일체’란 언어는 성경에는 없는 언어지만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내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원죄의 진리가 성경 전체에 흐르듯이 말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성육신에 대한
진리가 성경 전체에 있듯이 말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는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이 양태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미 구약에서 힌트와 암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자신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즉 삼위일체적 특징을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we, our)’라는 표현을 쓰십니다(창
1:26; 사 6:8).
또한 놀랍게도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정확히 ‘하나님들’입니다.
즉 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도 정확히 하면 “태초에 하나님들(엘로힘, Gods)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그리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말씀의 ‘창조주’는 히브리 원어에서 ‘에쓰보레카’로서
‘창조주들(Creators)’입니다.
즉 “창조주들을 기억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해 가르칩니다(신 6:4).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는 하나님의 복수적 표현인 ‘엘로힘’을 삼위일체와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구약과 신약 전체의 전후관계와 문맥 안에서 볼 때, ‘엘로힘(하나님들)’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용어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해석입니다.
요즘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많이 하는데 막상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교인은 이슬람의 알라(Allah)신과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혹스런 사실이지요. 알고 보면 삼위일체는 기독교 진리의 근본이며 근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속죄의 진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다”라는 기독론적 진리는 모두 삼위일체의 진리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과연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이며 중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본 장에서 저는 특히 양태론(Madalism)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이 참으로 서로 구별되는 분들임을 말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세분들’이 어떻게 ‘한 분’이신지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신명기 6:4, 요한복음 17:5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 참으로 ‘세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을 가르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히 ‘아니오’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 표현은 삼신론(tritheism)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삼신론이란
쉽게 말해서 서로 분리된 ‘세 신들’을 말합니다.
즉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진 세 신들이 ‘서로 따로 노는’ 식으로 존재한다는
이해의 신론입니다.
따라서 삼신론에서는 만일 한 신이 없어져도 다른 ‘두 신들’의 존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삼신론은
정확히 힌두교에서 발견되며(부라마, 비쉬누, 시바), 몰몬교에서도 볼 수 있는 신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삼신론과는 전혀 다른 신론임을 이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명한 ‘세 분’이시지만 그분들은 ‘함께’ 분명한 ‘한 분’이시기도 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3 = 1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1 = 3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 아들, 성령이 ‘분명한 세 분의
주체들’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one)’이시란 말입니까?
‘한 분’이신 분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진리는 알고 보면 다양성(diversity)과 일체성(unity)의 관계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3의
요소(threeness)’가 모여 ‘일체 됨(oneness)’을 이루는 것은, 즉 다양성(diversity)이 일하여
일체성(unity)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속에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신성(divinity)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롬 1:20).
바울의 말대로 자연은
하나님의 여러 면 - 하나님의 능력, 지혜, 아름다우심 등 -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도 많이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을 주시해 볼 때 자연 안에는 ‘3의 요소’가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인 ‘3차원
세계’는 물질, 시간, 공간이라는 ‘3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 전자기약력,
만유인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과학자들은 전자기력과 약력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으며,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로 구성돼 있습니다.
음악에서 장조의 으뜸화음은 도, 미, 솔 ‘세 음’의
화음입니다.
미술에서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육지, 바다, 대기 3 요소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이상하게’ 3의 요소를 드러내며 그 ‘3의 요소’가 함께 일하여 의미 있는 ‘일체성’을 이루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대로 자연이 하나님의 신성(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면일까요?
신학에서 자연이 드러내는 3과 1의 면들을 ‘삼위일체의 유비’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의 유비들은 결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자연 안의 유비(analogy)를 잘못 사용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곡해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물의 기체, 액체, 고체로 설명하거나, 달걀의 노른자, 흰자, 껍질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 흔히 양태론적으로 빠져 혼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유비의 위험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 안의 ‘3의
요소’와 그것이 이루는 ‘일체성’의 신비는 삼위일체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흔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이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실체를 유기체(organism)라고 합니다.
그라이더(J.
Kenneth Grider) 교수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유기적 일체성(organic unity)’으로 강조합니다.
‘유기적 일체’의 특징은 한 부분이라도 없으면 ‘전체’가 마비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 시간, 공간 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삼차원세계’ 전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육지, 바다, 대기 중 하나라도 없애면 ‘생태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구조에서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 각 분은 유기적으로 다른
분들과 관계되고 연결되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적으로(ontologically) 한 분이 안 계시면 다른 두 분도 계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functionally) 한 분의 일은 다른 두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 분’이 ‘한 분’이시라고 할 때 그 ‘한 분’은 유기적 차원에서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버지’의 일은 결코 ‘아버지 홀로’의 일이 아니며, ‘아들’의 일도 결코 ‘아들 홀로’의 일이 아닙니다.
‘한 분’의 일은
항상 ‘다른 분들’과 ‘함께’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창조도 ‘세 분’의 합동적 일이며(창 1:1-28; 요 1:3),
구원의 일도 ‘세 분’이 ‘함께’ 이루신 것입니다(요 3:16).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신학적 용어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돈다(go
round)’는 뜻의 희랍어로서 ‘상호투과,’ 혹은 ‘상호교통’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상호 교통’과 ‘상호투과’의 관계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한 예로 육지, 바다, 대기는 서로 ‘상호투과’적 관계에
있습니다.
‘육지’는 대기에서 물을 내려주어 생명을 유지하며, 대기의 물은 바다가 줍니다.
바다는 또 끊임없이 육지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진리도(창 2:24)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 되는
‘상호투과’적 진리입니다.
나무의 뿌리, 줄기, 잎에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나무’의
예는 양태론적으로 이해되기 쉬워 조심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은 ‘따로 분리된’ 분이 아니고 항상
유기적으로 다른 ‘두 분’의 본질을 나누어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분입니다.
중세의 현명한 신학자들은 그래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도형을 그렸습니다.
위의 도형에서 외곽선은 두 분 사이의 ‘구별’의 선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영어 “IS NOT"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다,” 혹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선은 ‘동일화’의 선입니다.
본질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모든 분들이 “IS," 즉 “하나님이시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도형은 한 편으로는 양태론을
피하며 다른 편으로는 삼신론을 피하는 좋은 도형입니다.
‘셰마(들으라)’라고 하는 신명기 6장 4절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모두 천명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하나님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하나님들(복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단수)”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존재구조는 이처럼 ‘분명한 3분’께서 유기적으로, 페리코레스적으로 연결되시어 ‘분명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은 ‘도’라는 단순한 단수의 하나가 아니고 ‘도’와 ‘미’와 ‘솔’이라는 다양성이
만들고 있는 ‘풍요한 하나 됨’의 한 분 되심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아노 건반에서 도, 미, 솔 ‘세 음’을
함께 쳐 화음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둘
다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지요.
(완전한 유비는 아니지만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함께 ‘풍요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진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그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삼위적 영광을 함축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하십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지금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5).”
삼위일체가 얼마나 중대한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인지 ‘감’을 좀 잡으셨는지요?
삼위일체의 진리는 기독교의 신관을 이슬람의
단독주체적 신관과 구별되게 하며, 모든 이단들의 잘못된 신관과 구별되게 하는 중대한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은 단독유일신을 주장하며, ‘지방교회’라는 이단은 양태론을
가르칩니다.
몰몬교는 삼신론적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글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 요한복음 3:16, 요한일서 4:16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머리 좋은 신학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짜낸 이론인가요?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위일체에 대한 결정적 계시자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적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암시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삼위일체의 본질), 그것의 의미를 예수께서 오셔서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예수는 삼위일체의 한 멤버이십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들(Son)’이신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멤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드러내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Father)’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아들(Son)’이심을 밝히셨고,
보혜사 성령(Holy Spirit)을 소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여야만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분’보다는 ‘세 분’에서 시작하는 이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구조에서 ‘아들 하나님(God the Son)’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일을 누가 하셨느냐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도 창조의 일을 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요 1:3).
성령께서도 자신의
몫을 하셨습니다(창 1:2).
창조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의 ‘합작’입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의 일’도
역시 삼위(三位)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구절인데 놀랍게도 삼위일체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보내시는 아버지(Sender)
독생자를 주셨으니 ------------------- 보내심을 받은 아들(The Sent)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 믿도록 돕는 성령(Helper)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진술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할 때, 그 ‘인간이 되신’ 주인공은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도 분명한 하나님이시기에(요
1:2)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술은 참인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은 역시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가 삼위일체와 직결된 중대한 진리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몰트만(Moltmann)은 하나님이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선언이 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랑이시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형인데 이 현재형은 영원성을 함축합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사랑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절대유일적 신은 본질에서 사랑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알라(Allah)같은 절대유일신은 창조 전에 ‘홀로’이기에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자기애’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단독자가 아니고 삼위일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의 본능 속에 심어져 있는 ‘사랑의 원리’는 매우 놀랍습니다. 단단한 호두껍질은 마치 ‘사랑’처럼 속 알갱이를 보호해 줍니다. 태양열은 ‘사랑’처럼 적당한 온기로 우리에게 내리쬐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긍휼의 힘’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삼위일체의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중대한 진리들의 근거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삼위일체 없이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대속(代贖)의 힘’을 가진 십자가라는 것도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십자가도 대속(代贖)의 십자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삼위일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그것은 오직 구원이 삼위일체의 합작이기에 있을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낮춤의 하나님’이시며, ‘희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모두 하나님의 신분을 가진 분이라면 어느 분에게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그라이더(J. K. Grider)교수께서 정확히 이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강의와 또 제가 그 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엄밀히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분에게 기도해도 신학적 오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중기도를 할 때는 흔히 아버지, 하나님, 주님 등의 좀 더 대표적이며 포괄적인 명칭이 적절하다고 보겠습니다. 개인적 기도에서는 이러한 명칭들 외에 ‘예수님’께 직접 기도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중보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은 드문데 실제로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할은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일이기에 성령님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실상 삼위일체 전체를 대상화하는 것이기에 성령님도 포함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분에게 기도하던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항상 ‘삼위(三位)’ 전체께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 안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분을 부르며 기도할 때 다른 분들이 섭섭하실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떤 분에게 기도를 드리던지 기독교의 기도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다른 질문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현재 복음주의의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三位)의 존재적 동등설을 주장합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지위적으로 높낮이가 전혀 없다는 관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지위의 차이’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하나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위계질서에서 ‘아버지’의 우선됨(the primacy of the Father)이 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삼위일체 안에서 으뜸이시며 지도자급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증거가 ‘위계질서의 실재’ 쪽으로 더 강하게 말하고 있다고 보는 신학자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 한 증거입니다. ‘아들’께서 역사 안에 오시어 분명하게 하신 것이 인간의 ‘불순종의 역사’를 깨고 ‘순종의 역사’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불순종의 아들들’의 자리에서 떠나 ‘순종의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우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라고 봅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 자신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그저 이론적 유희나 즐기라고 주신 지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으로 우리의 기쁨과 힘과 생명이 되도록 하나님은 이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신 것을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압니다. 이런 깨달음과 반응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삼위일체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소 길게 3차례에 걸쳐 삼위일체의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노력’은 삼위일체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저의 인식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 속에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가 새로운 이해로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또한 그 이해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더욱 마음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론 교육
- 기독교강요 1권 13장을 중심으로-
0. 들어가면서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2. 삼위에 대한 해석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b. 성자의 신성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a. 한 분 하나님
b. 삼위이신 하나님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1. 세르베투스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d. 칼빈의 반격
D. 나가면서
0. 들어가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 중요할까? 첫째는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삶의 양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는 일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도의 사고(思考)를 요구하는 삼위일체론은 그 지역 기독교인들의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 양태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 속에서 설명근거를 가져와서 설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에서 예를 가져와 설명을 시도하다가 결국 양태론에 빠졌다는 말이다. 후론하겠거니와 칼빈은 이런 시도의 위험을 간파하고 자신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거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데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작은 인간 이성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무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정의하고 심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해 보려는 자세는 요구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술신앙에 빠진 한국교인들은 이런 일에 태만히 한 것이다.
칼빈이 삼위일체를 설명한 내용으로 보면 그가 성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자체는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본받아 기독교강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형성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을, 제 2권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제 3장은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다룬다.
우리의 관심은 칼빈이 좁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했고 또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관은 기독교강요 제 1권 10장에서 13장까지 인데, 10-12장까지의 내용은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의 양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이것은 칼빈이 신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집중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I,13,1-6) 그 다음 그는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을 설명한다(I,13,7-13).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삼위일체론의 대적들을 비판하면서 다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I,13,14-29). 그가 이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성도들이 이해하기에 쉽도록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목회적인 시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과정은 그의 교육방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칼빈은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체론을 간단히 점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대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용어는 ‘하나님의 본질’, ‘삼위’, ‘위격’ 등이다. 칼빈은 이런 용어들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점거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essentia Dei)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는 그가 두 가지로 설명함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하나님은 인격(人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전한 상태로 지키시기 위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속성들로써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모두 제거하시고 또한 인간의 마음의 대담무쌍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I,13,1). 물론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이 인격이시다’라는 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여기서 하나님의 동작과 행위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인격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칼빈은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인격성은 ‘하나님의 적응성’을 설명하면서도 드러난다.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이 여기서 세속 철학의 비인격적인 범신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든 것이든, 보지 못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라고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이 세계의 모든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상상했다”
그 다음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 언급한다. 그것은 ‘무한하심’(immesitas)과 ‘영적임’(spiritualis natura)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하는 동시에 그의 편재성을 말하여 인간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분임을 지적한다. 이 설명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요컨대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가 인격이라는 것과 그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벗어난 무한하신 분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크신 분임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2. 삼위에 대한 해석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 다음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로 존재하심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한 분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삼위로) 구별되게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칼빈은 이 같은 사실을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계신다’라고도 표현한다.
그 다음 칼빈은 세 분이 구별된 분임을 설명한다. 우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됨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1:3을 인용한다. 그는 이런 표현 속에는 성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여 이 두 분은 구별됨을 지적한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칼빈은 성자 안에서 성부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비록 그가 그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아들과 구별되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위의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칼빈은 성령 역시 성부와 구별되는 분임을 지적한다.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성령과 성부의 구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체 가운데 하나임을 말한다.
이와 연관하여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위격’ 내지 ‘본체’ 이해를 설명하면서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은 이 점에서 일치함을 지적한다. 칼빈에 의하면 라틴 교부들은 ‘위격’이라는 말에 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subsistentia(실재)이고 희랍 교부들은 ‘하나님 안에 세 얼굴이 계시다’(προσωπα in Deo esse)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고 한다(I,13,2).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이 성자를 드러낸다면, 결국 성자 뿐 아니라 성자가 반영하는 성부의 본체도 성령 안에서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용어들을 만들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특히 대적들에게 대답하려고 할 때 이런 용어들이 매우 유용함을 지적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는가?”(I,13,4). 즉 칼빈은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가 효과적으로 작용했고 사벨리우스에 대항하여 ‘위격’ 곧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일체로 계심’이라는 용어가 효과적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삼위일체’ 또는 ‘위격’이라는 용어는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I,13,5). 말하자면 이런 용어들은 진리를 인식하는데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용어 문제를 두고 고대의 수많은 교부들은 일치하지 않았음과 이들이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며 신중했음을 지적한다.(Inst I,13,5). 칼빈은 어거스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음을 지적한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이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도록 설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고대 교부들이 당시에 등장한 여러 대적자들과 싸울 때 이런 용어들이 있었더라면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음을 말하면 아리우스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벨리우스 곧 성부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벨리우스에게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케 함을 지적했다.
그 다음 그는 삼위일체론을 정리한다. “본체들의 하나됨” 그리고 “한 본질 안의 셋이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위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에 기초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칼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마지막 절에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요약 정리한다.
1)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며 세 “위격”들은 상호 관계하며 각기 비공유적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
2) 실재인 “위격”은 본질과 분리될 수 없으며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본질과 구별된다. 칼빈은 이 말을 다시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각 위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다.
b. 성자의 신성
칼빈은 요한복음 1장 첫 부분에 기록된 내용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성자의 신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그에게 고유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심으로 우주의 창조자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듯이, 이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신 이 말씀은 최고의 자리 곧 모든 예언의 원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자의 신성과 위격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칼빈은 ‘성자의 신성’을 논하면서(I,13,7)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왔음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그의 신성과 동시에 위격성을 보여준다.
칼빈은 또 “말씀의 영원성”(I,13,8)을 논하면서 성자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 속에 계신 분임을 말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는 창조 기사를 설명하면서(창 1:3)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자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요한복음 1장 1-3절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원성을 증거하여 그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와 그의 신성에 대해 요약 정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굳건히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의 처음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나셨고,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하셨다. 이로써 이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구약성경이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구절로 고개를 돌린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다음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칼빈은 또 예레미야의 발언 곧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는 구절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6)는 구절이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말한다.(I,13,9). 칼빈은 또 에스겔이 말하는 ‘여호와 삼마’(겔 48:35)라는 표현과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닛시’라는 표현 등은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I,13,9.).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I,13,10). 그는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그로부터 희생제물을 받는다는 사실에서(삿 6:11,12,20,21,22; 7:5,9), 그리고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속에서(삿 13:16,18,20,22,23),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야곱이 씨름한 그 천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호 12:5)이라는 사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창조함을 받은 천사가 아니라,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I,13,10). 칼빈은 또 스가랴서 2장에 나오는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천사’(슥 2:3)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말하며 이사야의 발언 곧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했는데 이 여호와의 천사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그 다음 칼빈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로 눈을 돌린다(I,13,11). 그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 곧 성육신 사건을 증거하는 모든 구절들이 그의 영원한 신성을 증거함을 말한다(I,13,11). 이를테면, 바울이 로마서 9:32-33에서 이사야서 8:14를 인용하며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함을 주목하고 그리스도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천명한다. 칼빈은 이사야서 45:23을 인용하는 로마서 14:10-11 내용 속에서도 그런 내용을 본다. 또 시편 68:18을 인용하는 에베소서 4:8에서, 이사야 6:1을 인용하는 요한복음 12:41에서, 시편 102:25을 인용한 히브리서 1:10에서, 시편 97: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6에서 그런 내용을 본다. 칼빈은 사도들이 구약의 이런 내용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오(시 102:13), ‘온 땅과 모든 섬들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로 본다(시 97:1).
그 외에 칼빈은 요한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내용(요 1:1,14),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라고 말한 내용,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는다는 내용(고후 5:10), 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딤전 3:16)는 내용, 그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딤전 1:17)는 내용,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 2:6-7)라는 내용,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요일 5:20)는 내용,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는 내용, 도마의 고백(요 20:28)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본다.(I,13,11).
그뿐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그의 신성을 본다(I,13,12). 그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섭리 사역은 그의 신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그의 능력의 명령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은 - 이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인데(히 1:3)- 오직 창조주만이 행하는 일인 것이다”나아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하심 속에서(사 43:25; 마 9:6), 사람의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 속에서(마 9:4; 요 2:25) 그의 신성을 본다. 또 칼빈은 예수께서 스스로 베푸신 이적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낫게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 속에서(마 10:8; 막 3:15; 6:7)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I,13,1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교회의 서고 무너짐인 것처럼 그것을 규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의 신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벤델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든지 삼위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마멸시키며 이와 더불어 기독교 신학의 모퉁이 돌을 내칠 뿐 아니라 복된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내용이 동시에 그의 인격을 보여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자의 신성과 그의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칼빈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셨다는 것과, 성자가 인격인 동시에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쉽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이성에 의해 철학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지 않고 성경 계시 중심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원리에 충실했다고 본다.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성자에 대한 내용에 비해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논하지 않는다(I,13,14-15). 그런데 그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정확하게 가르친다. 칼빈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칼빈은 성령이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음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동시에 문장 표현을 통해 그의 인격성을 암시한다. “그는(모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혹은 형체가 없는 물질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우리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우주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 덕분에 힘있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주가 그런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기 전부터 성령께서 그 혼돈 덩어리에 관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도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잘 반영한다. “성경이 성령께 속한 임무로 가르치고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느끼는 일들 - 세상에 가득하여 만물을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하늘과 땅에서 만물을 살리는 등의 일들 - 은 피조물이 행하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성령께는 한계로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입시키시고 본질과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주시는 데에서 그의 신적인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 속에서도 그의 신성과 인격성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성을 지적할 뿐 아니라 이 사역이 하나님께만 속한 기능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그것도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중생을 이루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중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영생을 베푸시는 주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은사를 분배하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적인 위치와 그의 신성을 설명한다. 끝으로 칼빈은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그 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실체가 아니시라면, 선택과 의지가 그에게 있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께 신적 권능이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며, 또한 그가 본체로 하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I,13,15).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성전’을 ‘성령의 전’과 동일시 한다는 데서(고전 3:16-17; 6:19; 고후 6:16) 그의 신성을 본다. 동시에 칼빈은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할 때 사용한 성령의 명칭에서도(행 5:3-4) 그와 같은 것을 본다. 또 칼빈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에서 인용할 때 그 분을 성령으로 표현하는 것 속에서도 그의 신성을 본다(사 6:9; 행 29:25-26; 벧후 1:21; 사 63:10). 그 외에 칼빈은 성령에 대한 범죄를 설명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임을 증거한다(I,13,15).
위의 내용은 칼빈이 성령을 증거할 때 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주목하여 그의 신성을 증명해 낸다. 여기서도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는 성자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성령의 신성에 집중한다.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성자와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각각 성경의 증거로서 규명한 다음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a. 한 분 하나님
칼빈은 하나님이 한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세례와 믿음을 설명한다. 세례는 한 분 하나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여주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 -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이 분들 안에서 알려지신다 - 가 거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믿음이 오직 한분 하나님과 관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은 우리가 한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것과 연결되어 성자와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추론해 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 이미 확실하게 세워진 원리이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시라고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b. 삼위이신 하나님
한 마디로 칼빈은 여기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구별되는 분들임을 설명한다. 칼빈은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한 분 하나님을 생각하자마자 즉시 삼위의 광채에 싸이게 되고, 삼위를 구별하여 보자마자 곧바로 다시 한 분 하나님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구별을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단어들 자체가 진정한 구별을 시사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들에 따라서 이 이름들로 다양하게 불리는 그 명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양태론과 삼신론을 동시에 경계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한 꺼 번에 세 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된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칼빈은 우선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것을 말하는 내용을 언급하여 그 구별을 규명해 낸다(슥 13:7; 요 5:32; 8:16; 1:3; 히 11:3). 특별히 성부가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언급하여 이 두 분이 구별됨을 규명한다(요 1:18; 17:5). 그 다음 칼빈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사실과(요 15:26; 14:2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신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세 분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칼빈은 다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분의 순서를 중심으로 세 분이 각기 다른 위격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제를 논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사람들의 일에서 나온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함을 지적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그 순서에 대해 말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또한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다”칼빈은 사람들이 먼저 성부를, 그 다음은 그에게서 나온 지혜인 성자를,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서 나온 성령 곧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들을 시행하는 능력을 생각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고대 교회가 가르친 삼위 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오직 성부께로부터 오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목회적인 교육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는 성도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연거푸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 셋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동시에 성부와 한 성령을 가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라고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 세 분의 관계와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기 세 분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각 본체(위격) 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마지막에서(I,13,20) 지금까지 삼위일체 교육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하고 유일하신 본질이며 그 다음 그 안에 삼위 혹은 세 본체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말은 칼빈은 각 부속품의 특성을 잘 설명한 뒤에 그 부속들이 저절로 서로 맞추어져 몸통 전체를 이루게 하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질, 세분의 위격의 특성 그리고 그 각각의 관계를 잘 설명하여 성도들의 머리속에서 저절로 삼위일체가 종합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아래 도식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서 매우 목회적인 발언을 한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이 되는 내용을 간단히 제시할 것이니, 진지함을 정말로 사랑하며 또한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만족하는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칼빈은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다음, 항목을 정해 놓고 대적들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 당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에 목회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매개로 하여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교인들에게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모든 이단의 근원이 사탄임과 이단들의 핵심 공격 내용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각 위격의 구별을 부정하는데 있음을 먼저 집고 넘어간다.그리고 칼빈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의 대적을 간헐적으로 언급한다. 이를테면 그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런 사상을 비판한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놀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양태론을 비판한다. 또 그는 성자의 신성과 관계해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유대주의를 대적으로 삼고 그들의 문제점을 논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정식으로 비판한 그의 대적들만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세르베투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먼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하고 넘어간다. 마치 칼빈은 비판의 표준을 제시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한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연장된다는 것, 그러나 반면에 성부의 고유한 속성이 성자와 다르며, 성자의 고유한 속성이 성령과 다르다는 것을”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삼위일체론만 구비되면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는 물론 고대의 잘못된 이단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I,13,22).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반삼위일체자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칼빈은 지적하기를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하면 결국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신다는 것이 되는데, 이 세 가지 연합은 하나의 상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Trinitarios”라고 부르며 이들이 무신론자들이라고 비난한 것을 주목한다.이것은 세르베투스가 고대 교부들이 창안한 위격(位格)이라는 이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또 세베르투스의 주장을 묘사하되 “그는 위(位)들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이런저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특정한 외형적인 관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초에는 말씀과 성령이 본래 동일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구별이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서 나오시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으로 나오신 후부터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었고, 그의 관념의 반영이었으며, 또한 성령은 그의 신성의 그림자였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나”라고 열거했는데, 이것은 양태론과 같은 것이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격을 무시한 것은 결국 범신론에 빠진 연고로 그렇게 되었음을 주목한다. 즉 세베르투스가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진 나머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는 마치 우리 속에도 실체로 있고, 또한 나무와 돌 속에도 있는 그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처럼, 분배의 양식에 따라서 보면, 하나님의 일부분이 성자에게나 성령에게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것이다”(Inst I,13,22).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요한복음 1:1과 요한복음 17:5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 위격이 실재함을 규명해 낸다.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는 세르베투스의 발언에 대항하여 그가 범신론적 오류에 빠진 결과 그렇게 주장함을 주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것은 성자와 성령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지 않고 완전히 뒤섞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여러 부분들의 구분이 있는데, 그 각 부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신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영원하며 본질이 동일하다고 진술하며, 다른 곳에서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에게까지도 본질적인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본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이 그가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과 혼합시켰다고 지적한 니이젤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 마디로 칼빈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가 위격의 의미를 몰랐고 동시에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여기서 괴물이라고 표현한 이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칼빈 선집(OS)의 편집자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반(反) 삼위일체론자인 발렌티눔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칼빈이 묘사한 내용을 언뜻 보아도 이 괴물은 종속론자가 아니면 아리우스의 추종자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묘사한 그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악당들이 세르베투스의 불경스러움의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거기에 단서를 붙이기를, 홀로 참되고 정당한 하나님이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신성을 전입시켰다” 칼빈은 이 괴물의 종속론적인 발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부가 유일하게 본질 수여자(essentiator)라는 점에서 성자 및 성령과는 구별된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여기에 속한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는 사실을 논지로 삼고, 이를 근거로 하여 오직 성부만이 정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본 대로,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성부의 신성을 전입(轉入) 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한 위격(位格)의 아들로 생각한다고 오해함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은 위격(位格, persona)의 의미를 모름을 통해 이런 오류에 빠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본질의 단일성’(simplex essentiae unitas)을 보지 못한 연고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결국 성자는 하나님의 지위에서 내던져지고 만다고 본다.
칼빈은 이들에게 대항하여 성경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칼빈은 구약을 인용하는 신약의 기자들이 이해한 내용을 매개로 하여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요한이 이사야서 6:1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단정하는 것이라든가(요 12:41),바울이 이사야가 말씀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내용(롬 9:33),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서 49:18과 45:23에 나오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해석한 것을 주목하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규명한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서가 시편을 인용하여 그가 창조자이심(히 1:10; 시 102:25-26)과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히 1:6; 시 97:7)임을 지적함을 통해 그가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또 칼빈은 구약 성경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성부로부터 신성이 전이(轉移)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며 이사야가 말하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는 구절은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창조자이신 성자는 자존하시며 성부로부터 신성의 본질을 전입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성경의 통일성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칼빈의 설명에서 사변적인 논리 장난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자기가 주장하는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이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 범신론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칼빈은 발렌티눔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차이점을 본질의 양의 차이로 봄을 주목한다. 칼빈은 이들이 성자가 본질(essentia)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고 여기며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소유하는 성자를 반신(反神)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 이럴 경우 하나님의 본질을 찢어놓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만일 이들이 “성부가 본질을 성자에게 주시면서도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고 그에게 신적 본질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 곧 겉모양과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성부가 성자에게 자기의 신성을 부어주면 그만큼 성부에게는 신성이 부족할 텐데 그럼에도 성부가 온전한 하나님으로 남는다면, 성자에게로 신성이 흘러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의 자가당착을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들이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나머지 위격의 구별과 각 위격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이들의 경우 성자가 신적인 본질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그것을 빼앗길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님을 주목한다. 그 결과 칼빈은 이들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성부와 성자는 모두 신적 본질을 전체로서 완전하게 공유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본질에 관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별이 없는 것이다”
d. 칼빈의 반격
칼빈은 이런 이단에 대항하여 삼위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성경을 통해 규명한다(I,23,24). 먼저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 이단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로 규명해 낸다. 그 다음 삼위 세 분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공통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I,23,24). 또 칼빈은 요한복음 4:24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구절이 성부, 성자, 성령께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말한다.
칼빈은 이들이 위격과 본질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즉 각 위(位)가 신적 본질 가운데 자기 자신의 분리된 몫을 지니고 있다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것으로 비판한다(I,13,25).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칼빈은 먼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언급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낳은 바 된 것이 아니지만, 성부께서 순서상 첫째가 되시고 또한 바로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그가 친히 그의 지혜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를 가리켜 신성 전체의 시초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서가 없는 그냥 하나님은 나신 바 되지 않으신 분이요, 또한 성부 역시 그의 위격에 관한 한 나신 바 되지 않으신 것이다”(I,13,25).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오해하여 그것을 ‘사위일체’로 비웃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세 위격과 본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우리는 위격을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 위들이 그 본질 내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I,13,25)라고 말한 다음,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위격이 본질과 분리되었자면 삼신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의 결합인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이들이 생트집을 잡는 문제들에 대항하여 대답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성부보다는 위상이 낮은 것으로 표현한 구절을 대며 종속론적인 발언을 하나 칼빈은 성경 내용에 근거하여 그들의 발언에 쐐기를 박는다(I,13,26).
그리고 칼빈은 마지막으로 이들이 교부들을 잘못 인용하는 것을 점검하고 비판한다. 먼저 이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이해하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이 요약한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레니우스의 진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는 성경에서 다른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다른 신을 상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높이시는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 곧 그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셨다고 말이다”
또 칼빈은 이레니우스의 저서(Adv. haer.) 3권 6장을 인용하여 “성경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아무런 단서 없이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분은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불려지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이레니우스의 글을 계속 인용하면서 그의 신성을 주장한다.
또 칼빈은 이 대적들이 터툴리안의 글을 잘못 이해했음을 지적하고 터툴리안의 글을 소개하며 삼위일체 속의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경륜에 따라 그의 말씀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본질의 단일성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그럼에도 그 단일성은 그들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 삼위일체로 질서를 이루신다. 세 분은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고 단계에 따라, 본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식에 따라,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위격들의 수에 따라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삼위일체를 확증함을 지적하는 동시에(이레니우스, 유스티누스, 힐라리우스, 이그나티우스, 어거스틴) 아리우스가 고대의 인정을 받는 저술가를 인용하지 못함을 지적하여 그의 가르침은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함을 암시한다.(I,13,29).
칼빈은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마무리하면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I,13,29).
D. 나가면서
1.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하나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삼위일체 교육 방법이 반영되어서 여기에는 칼빈의 목회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고대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한 다음, 그것을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도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으로는 서방교회를 따르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잇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크리소스툼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방교회 신학과 만난 것으로 판단된다.
3.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성경적이다. 매우 사변적인 내용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성도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4. 칼빈은 당시의 대적들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비판함을 통해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매우 목회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의 이런 자세는 막연하게 복음만 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사역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언의 암시를 하고 있다. 담임목사들은 자기 주위에 등장하는 이단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이다.
5. 우리는 칼빈을 통해 삼위일체론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요령을 습득하게 된다. 1) 즉 먼저 우리는 세 분이 위격 내지 인격이심을 성경구절을 통해 규명해 낸다. 2) 그 다음 세 분이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한다. 3)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그 마음속에서 이 세 분의 관계를 조립토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질’, ‘위격’, 그리고 ‘세 분의 관계’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세분의 사역 곧 창조, 섭리, 보존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런 사역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들의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성공 여부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면에서 매우 모범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가르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서적
1) 1차자료
-Joannis Calvini, OS III. Chr. Kaiser: Monachii in Aedibus, 1967.
-Johannes Calvin,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übersetzt von O.Weber, Neukirchener Verlag, 1984. 3. Aufl.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bz John T. McNeil. tr. bz Ford Lewis Battles in LCC vol. XX(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4th. printing.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by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Eerdmans, 1989.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Aix-en-France: Edition Kerygma/ Charols: Editions Exelsis, 2009.
-죤 칼빈, 『基督敎綱要』 上, 中, 下권 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공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 14쇄.
-존 칼빈, 『기독교강요』 in 세계기독교고전 44.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2) 2차 자료
-François Wendel, Calvin. Ursprung und Entwicklung seiner Theologie. 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68.
-Wi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38,
-요셉 하트이안 편저, 『칼빈의 조직신학 해석』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Ford Lewis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위의 내용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의 역사 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점검하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특이한 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여 그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경우 먼저 교부들이 전수해준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 다음, ‘경륜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전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에 대한 내용을 점검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칼빈이 여기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성자와 성령 두 분 다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둘은 서로 다른 분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시도 속에서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구체적인 해당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쉽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른 점이 인격성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무시되면 범신론에 빠져 무신론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빈이 열거한 내용 속에서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인격임과 동시에 두 분이 하나님임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칼빈은 여기서(I,13,7-13) ‘성자가 인격이다’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역 내지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인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사도들과 솔로몬의 말을 참고하면서 성자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말에 근거하여 성자가 인격임을 드러낸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칼빈은 전도서 8장에 나오는 ‘지혜’와 연관하여 성자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22)” 잠언서의 이 발언은 성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격임을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의 한 구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라는 구절도 잠언서의 ‘지혜’에 대한 내용과 연관됨을 지적하면서 성자가 인격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 외에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칼빈이 구약이 증거하는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속의 그리스도로서 인격임을 말하는가 하면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내용은 성자가 한 분의 인격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 본질과 인격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어짐에 따라 세 인격(위격, person)이라는 의미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나 성자도 한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한 휘포스타시스로써,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용어에서 처음에는 본질과 인격이라는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 인격(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인격(위격)은 동일한 한 본질(본체)을 공유한다.
실제로 고전적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본체와 본질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혼동을 일으켰다. 이 "휘포스타시스"가 셋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가게 되는데, 헬라어가 라틴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방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은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함에 있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적인 차이에서 양태론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어지는데,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극(일인다역)을 한다는 뜻에서 일인다역의 양태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서방교회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로 번역되고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자, 동방교회에서는 본질을 뜻하는 용어로 “우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동방교회에서는 "한 우시아(본질)에 세 휘포스타시스(위격)가 있다"라고 정의되었고,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 서방교회에서는 우시아라는 용어 대신에 “한 숩스탄시아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고 정의가 된다.(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영어로 person이 되고, 우시아는 essence로 번역되어지며, 숩스탄시아는 substance가 되어진다. 서방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페르소나’(헬라어 프로소폰)라고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마사람들에게는 ‘우시아’는 잘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고, 헬라인들에게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ἔλεγχος, ου, ὁ
어원 / 16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망(딤후 3:16), 증거(히 1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651. 증명하다 - 엘렝코(ἐλέγχω)
ἐλέγχω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 18:15), 드러나다(요 3:20), 책망하다(요 16:8, 딛 1:9, 계 3:19), 책잡다(요 8: 46), 꾸짖다(딤전 5:20, 딛 1:13),
정죄하다(약 2:9), 경책하다(딤후 4:2), 꾸지람을 받다(히 12:5), 책망을 받다(눅 3:19, 엡 5:13), 가책을 느끼다(요 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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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2022(토)
6. 25 72주년 기념일
6. 25는 북에서 남침한 전쟁입니다.
전교조를 중심으로 주사파들은 남에서 북으로 침략했다고 가르칩니다.
전환금지치료법 : 성전환을 한다고 주장해도 부모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
- 전환 치료(Conversion therapy)
세계 3대 악처 / 소크라테스(크산티페), 모차르트(콘스탄체), 톨스토이(소피아)
악처는 태생부터 악인인가, 아니면 누가 악처를 만드는가?
세계 3대 악처라고 하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
고전 음악의 대가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인
<크산티페>
우리에게 이렇게 전설적이고 훌륭한 위인들의 부인들이 왜 이래?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카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톨스토이 본인의 경험담일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톨스토이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질투와 유산문제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며 톨스토이의 애를 태웠다.
끝내 참다못한 톨스토이는 가출하여
<아스타포보>역에서 죽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을 내 쫒아 죽게 만든 악처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녀의 질투심과
톨스토이에 대한 협박이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한 악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피아는 남편을 도와 ‘전쟁과 평화’를 6번
씩 옮겨 적는 등, 톨스토이의 작품은 그녀의 손을 통해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대단한 악필이었지만 그녀만은
그의 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방탕한 바람둥이였지만 출산과 육아는 소피아만의 문제로 억척스레 가정을 지켜온
장본인이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도 악처로 회자되는 인물 중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악행은
매우 심한 낭비벽이었다.
남편 사후 6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라지만,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나 서책을 팔아서 생활했다.
남편이
죽고 새로운 남자 ‘닛센’과 재혼을 한 이유로 악처로 불려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콘스탄체는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인 밝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많이 남기고 있었다.
사실
당대 음악가의 아내 모두 악처라는 평을 들었고, 다만 우리에게 바하의 아내 <빌케>, 슈만의 아내
<클라라>만이 현모양처로 남아있으니 후대의 콘스탄체의 평가는 박한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
친구 좋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들 앞에서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부은 사건은 유명해서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는 명언이 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몇 개의 명언이 또한 유명하다.
“새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꼭 결혼하세요. 좋은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 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가지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잘 해내면 누구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시련 / 시험 試, 불릴 練, 익힐 練, 단련할 練
1. 겪기 어려운 시험(試驗)과 단련(鍛鍊)
3. 의지나 사람 됨을 시험하여 봄
작은 시련은 작은 믿음을 형성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것을 미리 받은 후에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 결과 작은 아들의 생활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굶주린 배룰 채우며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다.
차라리 이제부터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아들이 아닌 품군으로 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고 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와 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시련을 작은 시련이라고 한다.
큰 시련은 큰 믿음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왜 상속자가 될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시련을 큰 시련이라고 하며 튼 시련을 거친 후에 비로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믿음이 시련이란?
믿음이 진실한가 아니면 거짓인가를 검증해야만 드러나게 된다.
믿음의 시련(야고보서 1:3) 1383. 시련 - δοκίμιον, ου, τό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develops perseverance.
1383. 시련 - δοκίμιον, ου, τό
δοκίμιον, ου, τό
어원 / 1382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련(약 1:3, 벧전 1:7)
신약 성경 / 2회 사용
* 1382. 시련 - 도키매(δοκιμή)
δοκιμή, ῆς, ἡ
어원 / 1384와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단(롬 5:4, 빌 2:22), 증거(고후 2:9, 9:13, 13:3), 시련(고후 8:2)
신약 성경 / 7회 사용
* 1384. 인정된 - 도키모스(δόκιμος)
δόκιμος, ον
어원 / 138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칭찬을 받은(롬 14:18), 인정함을 받은(롬 16:10, 고전 11:19, 고후 10:18), 인정된(딤후 2:15)
신약 성경 / 7회 사용
* 1380. 생각하다 - 도케오(δοκέω)
δοκέω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도케오(dŏkĕō)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 2: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 (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신약 성경 / 63회 사용
지금 ‘광야’를 걷고 있나요?
광야는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연단과 훈련의 장소입니다
절망의 광야, 슬픔의 광야, 실패의 광야, 불안과 염려의 광야, 고통의 광야 등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는 곳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결코 고통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훈련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달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나오게 하시고 사용하십니다.
다윗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추종 세력을 피해 13년간 광야로 숨어다녔던 그에게 광야의 시간은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다윗의 대표적인 기도 시입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을 때 쓴 시입니다.
당시 사울 왕이 보낸 수색대가 곳곳에 깔려 있어 다윗은 눈에 띄기만 하면 즉결처분을 당할 수밖에 없던 때였습니다.
공포와 불안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피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시를 썼습니다.
시편 57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어둡고 좁은 동굴에서 주님의 날개 그늘에 피하겠노라고 기도하는 다윗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독수리의 날개와 같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날개‘는 영원한 안식을, ‘날개 아래 거하는 삶’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윗에게 매일의 삶은 위협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를 따르던 몇 사람과 사해 절벽에 있는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갑자기 동굴 입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등을 보이고 앉습니다.
다윗의 측근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에게 손을 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의 옷의 한 부분을 잘랐습니다.
다윗은 밖으로 나간 사울에게 “당신이 굴에 있을 때 당신을 죽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 옷자락이 그 증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57편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7, 8절)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는 ‘두 발로 흔들림 없이 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자들을 물리쳐주시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실 것을 확신한 마음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직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절망 중에 탄식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새벽을 알리겠다는 다윗의 선언입니다.
신비롭게도 다윗의 탄식은 찬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찬양하면서 영적인 눈이 열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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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
일반서신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일곱 개 서신서는 개별 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를 향해
말한다.
때문에 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로 칭한다.
이 서신서들은 또한 실질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조직 내
지도력, 근면함, 공평함, 좋은 관계, 그리고 효과적인 소통 등에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과제, 즉 어떻게 험한 세상에서
올바르게 예수를 믿고 따를 것인지를 반영한다. 초기 교회는 노예 생활, 차별, 부자와 권력자들의 학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이
서신서들은 거친 말과 대인 갈등도 다룬다.
인간적인 욕망과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 하나님께 순종할 때
발생하는 세상 권력과의 마찰에 대한 두려움도 다루었다.
대체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의 삶과
노동에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대 크리스천들도 일터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 어떤 삶의 영역보다 자기 일터에서 더욱 주님을 섬길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직장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목적, 예를 들자면 공익을 위한 섬김, 타인의 유익을 위한 봉사, 헌신적인 인간관계, 정의 확산, 인격 개발 등의 일에 부합되지 못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주님을 따르는 일과 일반 직장에서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 같은 서로 다른 역할 때문에 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의 많은 분야들이 신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지는 않았듯이, 비록 의도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직장이야 별로 없지만, 직장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여전히 도전이 될 수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신자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에,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서신서는 이와 같은 실질적인 관심사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이 서신서들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원칙 위에서 다양한 사안들을 취급한다.
1. 우리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2. 우리는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일반서신서는 이 두 가지 원칙에서 21세기 일터에도 적용 가능한 놀랍게도 실질적인
활용 지침을 도출해 낸다.
어쩌면 그리 놀랄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실 곳으로
로마제국을 선택하셨듯이, 현대 일터를 그분의 임재 장소로 선택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동(실천) 중심의 관점’을 보여 준다. 진정한 믿음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믿음은 궁핍한 자들을 돕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 관점 덕분에 야고보서가 탁월한 실용적 지침으로 돋보인다.
야고보는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성장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을 우리의 신앙 성장에 특별히 활용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일터에서의 문제와같은 “여러 가지 시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야고보는 특별히 앞서 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들이 “믿음의 시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련으로 이어지는도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다. 각자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일터에서 편견, 구직 제한, 해고,
신체적 상해, 죽음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더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정직하지 못함, 불공정
거래,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내 앞길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의 실패가 또
다른 시련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충격이 커 자칫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정리해고나 일반적인 해고를 당하고 나면
너무도 황당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모든 것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로 부르셔서 큰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분께 충실했으니 성공시켜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워주실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일과 관련된 이 모든 도전들이 믿음의 시련이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인내하라!(약 1:3-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한다(약 1:5). 위기를 넘기면 넘길수록 우리는 단단해지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쁨을 느낀다.
야고보서는 지혜를 논하면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시작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가 업무상의 결정, 기회에 대한 평가, 동료나 고객에 대한 신뢰, 자원 투자 등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심지어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라’고까지 일러 준다(약 1:6). 즉, 우리의 문제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너무 많은 도움을 기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적게 기대한다는 데 있다(약 1:8).
바로 이 점을 반드시 포착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면, 당신은 야고보가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다. 어쩌면 아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약 1:8) 것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약 1:7).
야고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광대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수신자들이 이미 겪는 시련을 너무나 잘 알았다(약 1:1-2). 그러나 그는 신자의 삶이란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서 1장 9-11절에서 야고보는 이를 경제 영역에 즉각 적용한다. 당신이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자기 능력에 의지한다면, 비록 한창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일지라도 당신은 이내 쇠진해질 것이다. 반대로 혹 당신이 가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냉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을 기대하라.
실패나 성공의 원인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다. 불경기, 기업 매각, 재배치, 흉작, 차별대우, 태풍 피해, 혹은 다른 온갖 요인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실패하도록 만드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패와 성공을 모두 다 사용하셔서 악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인내력을 기르길 바라신다. 야고보서 2장 1-8절이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에게 당부하는 구절이라면, 9-11절은 성공의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되새겨 준다.
비록 야고보가 하나님의 선과 세상의 악을 대비시키기는 해도, 우리는 천사 편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마귀 편에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
중심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그는 지금 교우들을 향해 말한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는 선하고 세상 일터는 악하다는 정의를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기 행각 따위가 벌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추문이 생기곤 한다. 이처럼 악은 양쪽 영역에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두 영역에서 모두 선을 나타낼 수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후하고 너그러우심을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모든 후하고 너그러운
베풂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NRSV). 이것은 하나님이 곧 우리를 채워
주시는 궁극적 근원이시며, 또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궁핍한 자들을 채워줄 책임이 있다는 두 가지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야고보는 ‘경청’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약 1:19)과 하나님의(약 1:22-25)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무슨 기술이라도 습득하려는 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약 1:21) 하나의 길로써 경청해야 옳다.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것까지도 자신의 악을 제거하는 한 수단임을 시사한다. 그는 남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에 잘 듣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오만과 분노를 없애 준다고 말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0-21).
달갑지 않은 말들, 곧 거슬리는 말, 비판의 말, 묵살의 말을 남들이 건네면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넘치는 일터에서 분노로 응수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입지가 더 나빠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를 믿지 못할 것이다. 화를 내거나 직설적인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입지를 지켜야 한다.
이런 조언은 모든 유형의 일과 일터에 적용된다. 경청은 비즈니스 서적에서도 중요한 리더십 기술 가운데 하나다.[1]
사업체들은 고객, 직원, 투자자, 공동체, 주주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려면, 조직체는
자신들이 채워 주길 바라는 그 필요 대상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옳다. 이 사실은 마치 로마제국이 그랬듯, 곤경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옥토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위의 진리는 충성된 일의 두 번째 원칙, 곧 궁핍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루게 해 준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것은 첫 번째 원칙, 곧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남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유롭게 일하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궁핍한 이웃을 돕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신앙은 신뢰를 뜻하며, 신뢰는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여러 소외계층에게 직접 실천해 보이신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야고보는 하나님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특별한 자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약 2:5;
눅6:20)을, 보물을 “땅에 쌓아” 썩혀 버림에 대한 경고(약 5:1-5; 마 6:19)와 결부시킨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하면 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공적인
일터의 으뜸가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 일터가 기업이든, 교육의 장이든, 건강 관리든, 행정 공무든, 전문직이든, 비영리직 또는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성공적인 조직체는 그 소비자, 직원, 투자자, 시민, 학생, 고객 또는 다른 주주들의 필요를 채우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이 야고보의 중점 사안은 아니다. 그는 빈민과 약자들의 필요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되, 그럼에도 여전히
실용적이다.한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이다.
야고보는 두려움을 계속 직시하고 믿음의 시련을 직접 맞닥뜨리라고 요청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련에 직면한다면,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당신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약 1:22).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궁핍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야고보는 풀이한다. 그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이리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다. 혹은 야고보가 말하듯,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특별히 다양한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 돌보신 것을) 경험했기에 이런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친 사실(약 2:5; 눅 6:20)이며, 아울러 “이 땅”의 썩어질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약 5:1-5; 마 6:19)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야고보의 암시를 발견할 수있다.
이것은 성공적인 조직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우리 일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다.
성공적인 조직은 손님, 고용인, 주주, 주민, 학생, 고객과 다른 주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야고보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그래도 이 원칙은 적용할 만하다. 어떤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줄 때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기업의 고객 서비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기업에게 고객 대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오히려 더 큰 창조력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손길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떤 크리스천 그룹이 베트남에서 사회 ·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곳에 가구 공장을 설립했다. 그 공장을 통해 하나님은 가구가 필요한 해외 고객들과 전에 실직자였던 지역 노동자들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 주셨다.[2]
이와 비슷한 사례로, 글로리아 닐런드(Gloria Nelund)가 이끄는 트릴링크 글로벌(TriLinc Global)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도상국 내 창업을 돕는 투자회사다.[3]
크리스천들의 의무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
구조와 정치 · 경제적 시스템은 빈민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천들도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우리에게는 빈궁한 사람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필요도 채워 줄 책임이 있다.
야고보는 또 앞서 말한 두 가지 기본 원칙을 부자 및 권력자 선호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한다. 그는 둘째 원칙, 곧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를 갖고 2장을 시작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말하자면, 우리가 부자와 권력자들을 선호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일부를 우리에게 뿌려 줄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빈민들은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필요한 것들만 잔뜩 내보인다. 야고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유하고 옷 잘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특별 대우를 받는 반면, 가난하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은 멸시받기 십상이라는 실례를 든다. 그러니까 교회 출석이라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환영의 인사말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다. 반면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부자들은 아쉬울 게 없다.
야고보는 또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구를 들어, 부자들은 반기고 챙겨 주면서 빈민은 깔보고 얕보는 행위는 살인이나 간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반율법적 행동이라고
지적한다(약 2:8-12).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을 섬기지 않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이웃으로조차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교회 모임을 언급한 것이었지만, 여기에도 직장에 적용할 부분이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를 도울 사람들, 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다. 건강한 일터라면 이것은 단순히 강조점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서로 치고받는 역기능적인 직장에서는 약한 사람 편에 서 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정
계층선호주의를 배격하다 보면, 특히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편파주의, 곧 인종차별, 성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종교적 편견 등에
부딪칠 경우 더군다나 위험하다.
야고보가 시사하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원칙 적용에는 은연중 하나님 신뢰의 원리가
결부된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공급 능력을 확대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빌붙고 싶은 유혹을
그다지 받지 않을 터이다. 또 일터나 학교에서 비주류 사람들과 어울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선행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민들 자신이 날마다 이 진리를 살아 낸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이것은 산상수훈이나 평지 설교 (마 5:3; 눅 6:2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빗댄 것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어서 그들은 하나님 의존하기를 더 잘 배워 왔다고 할 수 있다.
참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약2:14-26)
목차로 돌아가기야고보는 2장에서 일이라는 주제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다. 그는 예외 없이 “일”(헬라어로 ergon; ‘행함’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주)이라는 단수형보다는 “일들”(erga)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야고보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쓰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ergon[에르곤]’과 ‘erga[에르가]’는 단지 같은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일 뿐이다.[4]
[5] 야고보는 이 단어를 써서 누군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온정의 일들부터, 벼논의 수확을 꾸준히 늘리는 등의 일선 업무까지 그려 낸다. 그가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크리스천의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보여 준다. 일(행위)에 중점을 둔 야고보 서신의 논조는 큰 논란을 불러오곤 했다. 루터는 야고보서 2장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말씀을 읽고서,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과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해, 야고보를 싫어하게 된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개혁가들은 루터의 견해를 공유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루터의 이의 제기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6]
[7] 여기서 루터의 야고보서 논쟁을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야고보가 주장하는 일(행함)이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약 2:21, 24-25)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질문해 볼 수는 있다.
야고보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야고보서 2장 14절은 틀림없이 논쟁 중심부에
있으므로, 본서의 2장 1-13절에 앞서 이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의 이 질문에 직설적으로 자답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리고 ‘죽은 믿음’에 관해 신중하게 고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 이웃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도 없는데
평안히 잘 가라는 빈말을 해 주는 경우를 언급한다(약 2:15-16). 야고보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하나님을 신뢰하는자)는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날마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생긴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고객을 간단히 도와줄 수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 요청하기를 겁내는 신참 동료를 찾아내는 경우처럼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이런 연약한 자들, 혹은 소외된 자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으니, 일터에서 그런 대상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연습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야고보는 일(행함)과 믿음이 상충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믿음(신뢰)이 없다면 선한 행위도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야고보의 말은, 일들(행함)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행함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그건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크리스천들을 향한 야고보의 명령은, 주님께 대한 신앙 대신 다른 궁핍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덧붙여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한 결과로써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대한다.[8]
크리스천의 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은, 일터 현장에서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영적인 것이 곧 실천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야고보는 2장 22절에서 말한다.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함(일)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라고 말한 것은, 매일 활동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행동으로 이루어 내야 할 과제를 던진것이다.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기본적인 두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예를 보여 준다. 야고보서 2장 14-26절에 대한 이 같은 우리의 평가를 전제로, 이런 적용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완성이라는 관점, 야고보 시대에 유효했고 우리 시대에도 큰 교훈을 주는 이 관점을 유지하고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혀를 길들이라(약3:1-12)
목차로 돌아가기야고보는 ‘듣기’에 대한 실천 지침을(약 1:19-21) ‘말하기’에도 적용한다. 야고보서 3장 1-12절에서 그는 자못 맹렬한 단어를 사용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 8). 또 구약 잠언 말씀에서 혀가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며(그 예로 잠 12:18 -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혀가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잘 알았다.
교회에서 가혹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주의하지 않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부주의를 범하지는 않는가?(약 3:9; 창 1:26-27) 직장 내 정수기 옆에 모여서 나누는 수다, 뒷담화, 희롱, 경쟁자에 대한 경멸과 같은 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상처를 안 입혀 본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이기적 욕망을 해결하는 길(약3:13-4:12)
목차로 돌아가기야고보서 3장 14절 -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원칙과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원칙을 기술한다. 늘 그렇듯이 야고보는 순서를 바꾸어서 섬김을 먼저 논하고, 신뢰는 나중에 다루었다. 여기서 야고보는 먼저 이기적 욕망(selfish ambition)을 꾸짖는 것으로 시작해, 뒤이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권고한다.
이기적 욕망
목차로 돌아가기이기적 욕망은 화평하게 하는 일을 가로막는다(약3:16-4:11). 이기적 욕망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반대 개념이다. 야고보서 3장 16절 말씀에 그것을 적절하게 요약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야고보는 이런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는 실질적 방안으로 화평하게 하는 일(peacemaking)을 강조한다.[9]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 전형적인 방법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경우를 들어 강조하면서 일터를 암시하고, 몇 가지 화평하게 하는 일들을 나열한다.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약 4:9), 스스로 낮아지는 것(약 4:10), 비방과 기소와 판단을 자제하는 것(약 4:11), 그리고 자비와 진실(약 3:17)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일터에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이기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약4:2-5). 이기적 욕망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과 싸움을 일으킨다. 야고보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원칙을 완전한 하나로 묶는다. 야고보는 하나님 없이 부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유혹을 ‘세상과의 간음’이라는 말로 비유한다(약 4:4-5).[10]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자하라 (약4:1-12)
목차로 돌아가기간음의 비유를 쓰기는 했지만, 야고보는 전반적으로 이기적 욕망에 관해 말한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디딤돌로 쓰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동료나 부하 직원의 실적을 가로챌 때, 승진을 위해 경쟁 직원에게 정보를 숨길 때,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미처 방어할 수 없는 사람한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킬 때,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기회로 이용할 때, 우리에게는 이기적 욕망의 죄책이 있다. 야고보는 이것이 다툼의 한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기적 욕망은 성공을 촉진시키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킨다.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성공을 위해 남들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다. 일이란 게 부하 직원들한테 떠맡길 만큼 간단할 수도 있고, 국제팀에서 조정해야 할 만큼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앞서려고 남들을 밟고 간다는 평판이라도 나돈다면, 누가 당신의 리더십을 믿고 따르겠는가?
자기 형상대로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창 1:27), 모든 사람을 위해 죽도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고후 5:14)께 복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 자신에 앞서 남들을 섬기는 데까지 야망을 낮출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당신의 권위와 전문성이 더 높아지길 원하는가? 좋다. 다른 동료들의 권위와 장점을 추켜올리며 돕기 시작해 보라. 성공하고 싶은가? 좋다. 주변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투자하라. 역설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투자는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가 될 수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의 마이클 놀턴, 이 두 경제학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한다.[11]
크리스천이라고 앞날을 다 통제할 수 없다(약4:13-17)
목차로 돌아가기이제 야고보는 두 원칙들의 새로운 적용의 하나로 옮겨 가면서 사업상의 예측에 대한 경고를 다룬다.[12]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원칙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말로 시작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마치 단기 사업계획에 선고를 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전계획이 그가 우려하는 관심사는 아니다. 앞날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다음 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려는 진짜 포인트를 엿볼 수 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문제는 계획 자체가 아니라, 미래가 우리 손안에 있는 양 계획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 능력, 관계, 시간 등을 지혜롭게 활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더라도, 그 결과는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대다수의 사업가들이 잘 안다. 어떤 주식회사의 연간보고서든 10-20쪽에 달하는 지면 가득 회사에 닥칠 위험요소로 가득하다. “우리 주식 가격은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특정 요인 때문에 크게 변동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일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명확히 밝힌다. 그럼 어째서 야고보는 세상의 일반 사업체들이 그토록 잘 아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까? 아마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면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일에 대해서도 면역력을 얻을 거라고 때때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야고보는 크리스천들이야말로 더욱 지속적으로 재평가하고, 적응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계획은 조정 가능해야 하고 상황 변화에 맞추어 실행해야 한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히 사업 실행의 좋은 예다. 그렇지만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단순히 시장 조건에 대응하는 필요를 떠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의 훈계를 다시금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계획과 조치에 강제로 따르도록
하기보다,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부당한 권력 남용과 노동 착취 (약5:1-6)
목차로 돌아가기여기서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섬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간다. 야고보서 5장을 시작하는 그의 말은 준엄하다.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금고 안에 빛나는 금은보화와 옷장 안의 화려한 옷들은 언제나 빛날 것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재물이 이미 썩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만큼 심판이 임박했음을 확신한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그들의 사치하고 허랑방탕한 삶은 오직 도살의 날을 위해 ‘살찌는’ 데까지만 이어질 뿐이다(약 5:5).
이들 부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부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부를 획득하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파멸당할 운명이다. 야고보가 불의한 사업 관행을 강하게 꾸짖는 것을 보노라니 구약 성경의 교훈이 떠오른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레19:13).[13] 일꾼의 손에 있어야 할 돈이 사업주의 금고 안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를 비축했고 주변의 필요한 자들을 외면했다(약 5:3).
사업주는 특별히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데 바지런해야 한다. 공평한 임금 지불에 대한
분석 연구는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야고보가 ‘사기 쳐서 남기는 임금’(약 5:4, NRSV)이라고
한것은 이 특정 지주들의 권력 남용을 꾸짖는 것이다(개역개정에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으로 번역했다 - 옮긴이 주).
일꾼들이 마땅히 삯을 받아야 하는데도 권세 있는 부자는 법적 처벌을 용케 피해 가면서 지불하지 않을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부자는 흔히 사법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갖고 있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당한 권력을 남용하기가 너무나 쉽다.
부자들의 권력 남용에는 직원들을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로 잘못 분류하거나 미숙련자로 분류해 낮은 임금을 지급하게 만드는 부정확한 업무 배치, 같은 일이지만 여자 혹은 소수민족을 고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 지급하기, 어른들도 꺼리는 위험한 일을 어린이들에게 시키는 아동 노동학대 등등이다. 권력 남용은 소위 표준관행이라는 이유로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자들을 단죄한다(약5: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좀 복잡하지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이 대목에서 야고보의 주된 관심은
빈민들이 잘 사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가장 적절한 물음은 이런 것일 터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아니면 더 가난하게 하는가? 나의 돈 씀씀이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돕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빈곤 속에
머물게 하는가?”
추수의 날을 기다리며(약5:7-20)
목차로 돌아가기야고보는 인내, 정직, 기도, 죄 고백, 병 고침에 대한 다양한 권면으로써 서신을 끝맺는다. 늘 그랬듯이 이런 것들은 진실한 행함(일들)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원칙 또는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원칙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모두에 호소한다. 그리고 여태 해 왔듯이 야고보는 이를 일터에 직접 적용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하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일터로 비유하면서 5장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그러고는 위의 말에 메아리치는 경구로 마무리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일터에서의 인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형태인데, 매우 힘든 일이다. 일은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일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일을 하지 않고서도 결과를 움켜쥐려는 유혹은 항상있다. 만약
내가 돈을 투자한다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천천히되고 싶어 하겠는가? 내부자 거래, 폰지 사기(Ponzi scheme),
슬롯머신에 생활비를 날리는 도박 등은 그런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약 승진하고자 한다면 상사의 눈에 들도록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중상모략, 신용 위조, 험담, 팀 와해로 이어진다. ‘만약 내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엉성하게 빨리 해치워서 생산라인의 다음 사람한테 문제를 전가시키면 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직원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뿐더러 제품의 질도 나빠지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만을 말하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상상해 보라. 단순히 거짓말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실 그대로 가장 정확히 이해한 것을 듣고 말한다면? 맹세와 서약도 필요 없고, 소급 해명이 없어도 되고, 허위
진술과 사기에 대한 별도의 계약 조항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판매자가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항상 제공한다고 상상해 보라. 또
계약서 내용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늘 명료하게 전달되고, 사장과 상사들은 수하 직원들에게 돌릴 공을 명확하게 돌린다고 상상해
보라. 업무 관련 정보를 교묘히 감추기보다 언제나 명확한 대답을 하여 그림처럼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상상해 보라. 현재의 직장에서
성공하겠는가? 만일 모두가 최대한 정직해진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의 정의가 바뀌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구하라, 하나님께
야고보는 기도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 의존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아뢰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하나님, 저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이 실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릅니다. 상사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마다 우리가 기대한 그대로 응답하겠노라 보장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필요를 능히 채워 주실 수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상하게도 매일 직장에서 부대끼는 특정 이슈들, 상황, 사람들, 필요, 두려움과 의문에 관해 마지못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심지어 특정 결과를 위해 간구하라는 야고보의 권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실제로 응답하시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서로 죄를 고백하라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유를 받도록 하라고 권고한다(약5:16). 일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말은 ‘서로’다. 여기서의 전제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일터에서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매일 생산과 업무 수행의 압박, 시간의 제약을 받고, 종종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행동하고,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불공정하게 경쟁하며, 자원을 독차지하고, 귀찮은 정리를 옆 사람에게 떠넘기고, 내 욕구불만을 동료들 탓으로 돌리곤 한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동료의 성과를 부정확하게 비판함으로써 그가 승진에서 제외되었다면, 단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 죄를 피해자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 손상을 정말 바로잡기 원한다면, 해당 부서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동기로 죄 고백과 병 고침을 원하는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섬길 수 있다. “너희가 알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 것임이라”(약 5:20). 사망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아주 깊고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 역시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사망에서 구원받도록 다른 누군가도 지금 우리를 돕고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와 일
목차로 돌아가기베드로전서는 예수님께 충성했기 때문에 비방을 받고, 거짓 고소를 당하고, 신체적으로 학대받는 사람에게 쓴 서신으로(벧전 2:12, 18-20; 3:13-17;4:4, 14, 19), 여기서 베드로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자신의 고난을 세상을 위한 섬김으로 바꾸어 살도록 부름받았는지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낯선 이곳에 머무는 나그네이며, 여기는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벧전 1:6).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가져오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벧전 2:5). 크리스천의 일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을 축복하는 일이다.
나그네요, 제사장으로 세상을 섬기다 (벧전1:1-2:12)
목차로 돌아가기서신 서두에서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쓰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 새번역)이라는 본 구절은 베드로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주된 메시지의 전조로 보인다. 이 구절은 ‘나그네들’과 ‘선택받은’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이라면, 당신은 나그네다. 당신을 둘러싼 현재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외세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진정한 왕국 시민권은 ‘하늘에 간직돼’ 있다(벧전 1:4). 어떤 나라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들처럼, 당신도 당신이 사는 땅의
통치자들의 총애를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스스로 오셨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벧전 2:4) 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 왕국의 모든 시민들도 같은 대우, 곧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는 상황을 예상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동안 이 낯선 땅에 머물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벧전 1:15-17).
정치적 은유로 말하고는 있으나, 베드로는 일터의 용어를 들고 있다. “행위”(벧전
1:17), “은이나 금”(벧전 1:18), “불로 연단”(벧전 1:7),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등등. 베드로가 일터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우리가 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변 노동세계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따를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나그네’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뒤, 베드로는 또 다른 용어 ‘선택받은’(벧전 1:1)을
사용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다. 당신이 임시로 거주하는 이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제사장의 타이틀 또는 ‘왕 같은 제사장직’은 거듭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드렸고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더 나아가기 전에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게 무엇을 뜻했는지 알아야 한다. 제사장에게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이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제사장적 축복 선언이었다.[14]
[15]제사장들은 희생제사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소나 성전의 내실로 들어가야 했고, 대제사장의 경우 매년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대리적 축복 선언을 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 당신을 대신하여 말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하려면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불순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용납될 수 없기에 결국 각별한 정결 또는 성결은 필수적이었다.[16]
그러면서도 제사장들은 순번제로 돌아가며 자기 차례에 섬겼고(눅1:8) 주된 생계 수단으로 일반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될 수도 없었지만,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정결을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제사장이다.
베드로가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 2:5)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다고 한 것은 모든 신자가 자신을 전임 목회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무슨 일로 생계를 유지하든, 크리스천들은 그 가운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수있다.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려 함이라”(벧전 2:11-12).
물론 크리스천들이 유대인 제사장들과 똑같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죽여 바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님이 앞서하신 것과 같은 희생제사를 드린다.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자기 희생이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 희생’(벧전 2:5)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선한
청지기로 드리는 것을 뜻한다(벧전4:10).
우리는 날마다 일터에서 크든 작든 이런 자기희생의 기회를 만난다. 이는 베드로전서 1장
3절-2장 10절을 요약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왜 ‘선택받은 나그네들’(NRSV)이라고 불렀는지 내력을 알 수
있다. ‘나그네들’이라는 용어에는, 우리가 본향이 아닌 낯선 땅,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살아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택받은’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왕 같은 제사장들’은 특별히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에 복이
되는 제사장의 소명을 지녔음을 확인시켜 준다.
세상 권세자들 아래서의 고난 (벧전2:13-4:19)
목차로 돌아가기크리스천의 노동 환경에서 나그네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베드로는 이것을 외국인과 종인 수신자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지침으로 말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우리에게 ‘자유인’(벧전 2:16)으로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 주지만, 땅의 외국인들로서의 우리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어디든 그곳의 모든 시민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벧전 2:13-14). 비록 베드로가 어떤 부류의 일꾼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수신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종들’에게 자신이 받는 대우가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떤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예견된 일(벧전 4:12)이며,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 고난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벧전 2:21).
주의할 것은 여기서 베드로는 부당한 수난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무능, 오만, 무지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정당한 형벌이라면 순복하는 맘으로 받아야 한다. 사실 당신은 위의 권위에 불복할 자유가 없다.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해도 그렇다. 당신이 승진, 임금 인상, 창이 있는 사무실, 수준급의 의료보험 제도 혜택을 받을 만한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고용주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시간 외 근무를 강요하고, 상사의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워 징계를 가할 수도 있다.
반면 당신 또한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가를 내고, 개인 물품을 사면서 회사에 전가시키고, 회사 사무용품을 슬쩍 챙기거나 업무 시간에 빈둥거리는 것 같은 일로 고용주가 당신을 속인 것만큼 그렇게 윤리적으로 회사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하나님은 뺏기는 만큼 도로 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당신이 속은 만큼 남을 속인다고 해서 당신의 행위가 덜 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적대적인 업무 환경일지라도 오직 선을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벧전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벧전 3:9).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심지어 불의하고 부당한 권위도 존중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듯이(벧전 2:21-25), 우리는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지, 우리 자신을 옹호하도록 부름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권위에 도전하시고 권세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복음의
전체 개요를 다시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예언서와 같은 다른 성경의 경우, 억압적이고 불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저항하라고 하나님이
강조하셨다.
항복이 항상 순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공연하게 불순종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권위에 복종할 수도 있다. 이 대목과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 베드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모범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지도자들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지침들(벧전5장)
목차로 돌아가기베드로는 이제 ‘장로들’(elders;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영어식 표현 ‘presbyters’나 ‘bishops’가 익숙하다)이라고 칭한 교회 리더들에게 지침을 준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터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훌륭한 조언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자원함으로 하며”(벧전 5:2). 돈에 대한 탐심을 품지 말라(벧전5: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을 보이라(벧전 5:3).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니,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고 겸손을 권유한다. 이것이 유독 베드로전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확대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단지 오늘날 일터에서 널리 활용하는 종의 리더십 개념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탁월한 종의 리더십이 전수될 수 있었겠는가?(벧전 4:1-2, 6)
베드로후서와 일
목차로 돌아가기베드로후서는 거룩한 삶과 고난을 견디는 인내의 필요성에 관해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보았던 여러 주제들을 강화한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반복해서 다루지 않고, 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현재의 하늘과 땅은 심판 날에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불로 멸망시키기 위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벧후 3:7, 현대인의성경)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일은 그 가치가 무엇인가? 대럴 코스덴(Darrell Cosden)의 중요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살펴본다면, 이 땅에서의 노동은 하늘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17]
이 땅의 끝, 영원의 시작(벧후3:1-18)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까?[18] 대럴 코스덴은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의 논쟁의 핵심인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1) 물질 세상의 선함을 확인시켜 주고, (2) 지금 세상과 새 창조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19](3)
아직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표징이다. 우리의 노동은 궁극적인 가치가 있다. 구속받고 성화된 우리의
수고의 열매는 하늘을 그 본향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장은, 코스던의 일의 신학에서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면모들 즉
(1) 창조물의 타고난 선, 그리고 (2) 지금의 세상과 다가올 창조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려 주는 것 같다.
베드로는 여기서 악을 심판하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불법자들에게 맞선다(벧후 3:3-4). 그러면서 현재 세계와 미래 세계의 연속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우주의 종말 또는 소멸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벧후 3:11).
-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눈에 보이듯 너무나 가깝다고 속단하지는 말라.[20] 베드로가 사용하는 종말의 이미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는 구약 성경의 예언적 계시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과 제2성전 시대 유대 문학은 모든 의인의 정화와 악인의 멸망을 언급할 때 불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사용했다.[21]
[22]
베드로후서 2장 7절, 10절과 3장 12절을 종말묵시문학의 관행적 흐름안에서 읽어 보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 버리는 이미지를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과정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3]
이것은 베드로가 첫 번째 서신에서 불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준다. 즉 수신자인 성도들도 역시 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은 시련을 거칠 터인데, 이 불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과 영예를 얻으리라는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다(벧전 1:5-7). 이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소멸될 것을 강조한다기보다 모든 악이 궁극적으로 단절될 것임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녹아 버리다’, ‘불에 풀어지다’, ‘심판’, ‘예비된 불’ 같은 용어로 세상을 변화와 시험의 면에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더글러스 무(Douglas Moo)는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에서 사용된 ‘불에 녹아 버리다’는 헬라어 ‘lu?[루오]’가 멸절의 의미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뜻한다고 해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undone’(풀린 상태의 또는 미완의 - 옮긴이 주)이라는 번역을 제안한다.[24]
베드로는 노아 시대를 언급하면서(벧후 3:5-6) ‘물의 넘침’을 완전한 멸절로 풀이하는 해석을 경계한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 자체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정화하는 의미였다. 노아와 가족, 소유와 방주 속 동물에 국한된 인간의 선은 보존되었고, 생명도 물리적 지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끝으로, 궁극적 미래에 대한 베드로의 긍정적인 비전을 물질계 질서의 쇄신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것은 보잘것없고 육체를 벗어난 저세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포함한 새로운 우주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드러난다고 했지 파괴된다고 하지 않았다. 불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일들’이 남아있으리라는 뜻이다. 이상은 본
베드로후서가 현재 일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신학의 주된 근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본 서신이 그런 신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상세하지는 않지만, 베드로후서는 현재 땅에서 하는 일과 미래에 경험할 일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 모든 악은 결국 소멸되지만, 모든 의로운 것들은 영원한 본향에서 새 창조를 맞이할 것이다. 불은 소멸하면서 더불어 정화시킨다. 풀어짐(용해됨)은 일의 끝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참된 결말을 이끌어 낸다.
요한일서와 일
목차로 돌아가기비록 야고보서와는 무척 다른 상황에서 기록되기는 했지만, 요한일서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행위인 ‘행함’이 없는, 그런 믿음이 가능한지 도전한다.[25] 요한일서 2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안다는 것은 성화된 인격과 행동,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명백히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요한일서는 재차 야고보서와 보조를 같이하면서 궁핍한 자를 돌보는것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간주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일서는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를(요한의 용어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한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요일 2:8-11),
하나님께 사랑받게 되는 것(요일 3:16; 4:7-10, 16, 19-20),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것(요일
2:29; 3:1-2, 8-9),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요일 3:14)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전의 우리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순종이 가져오는 결과까지 설명해 준다. 요한에 의하면, 올바른 삶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7-10).
요한은 이런 과정의 결과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1:7)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단지 이따금 한 번씩 빛을 켜 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써 계속 빛 가운데 걷는 사람들이다. 이로써 직장 윤리에서도 직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사상 및 생활에서 오랫동안 경시해 오다가 최근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하나가 ‘덕 윤리학’(virtue
ethics)이다.[26]
덕 윤리학은 규율을 정하고 즉각적인 결정의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장기적인 도덕성 함양에 중점을 둔다. 규율과 명령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즉, 좀 오래 걸린다 해도 도덕성을 먼저 형성해 두어야 그런 규율들을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긴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겠지만, 요한의 ‘빛 가운데 걸어가기’라는 개념은 덕성으로 접근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일)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됨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윤리’ 부분을 보라.
빛의 은유에서 우리가 특별히 적용할 한 가지는, 우리의 직장생활이 열려 있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동을 빛으로부터 감추려 하기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 행하자는 얘기다. 빛 가운데 행하면서 투자자를 속이지 않고, 품질 기록을 허위로 조작하지 않으며, 동료를 험담하지 않고, 뇌물을 갈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일서 1장 7절은 요한복음 3장 20-21절 말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의 되풀이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 시리즈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4장 부분을 보라.
롭 스미스(Rob Smith)는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에서 사용할 배를 만드는 비즈니스 선교사역체를 이끌고 있다. 그는 지역 관리들로부터 자주 뇌물을 요구받는다고 한다. 그런 요청은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그런 지불에는 영수증도 없고 거래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스미스는 이런 요청들을 빛 가운데로 가져가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20-21절을 사용해 왔다. 그는 뇌물을 요구하는 관리들에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저는 이런 식의 지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에 대한 문서 작성을 위해 대사님이나 경영책임자를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그는 이런 전략이 뇌물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물이 비윤리적이기는 해도 시장 및 이익 확장의 도구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지만,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조지 세라핌(George Serafeim)의 연구에 따르면, 뇌물 증여는 사실 장기적으로 회사 수익을 감소시킨다.[27]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역설한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소위 ‘영적’ 사역이라고 불리는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 월급을 받지는 않지만,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로써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3:18-19, 24). 그런 모든 행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며, 따라서 매우 영적이고 의미가 깊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하는 일이 아닌데도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전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곳인 데다 선교기금으로 쓸 수 있는 임금을 받는 곳일뿐더러 주변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교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터가 이웃 사랑의 가장 실천적인 수단인 까닭은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물자와 봉사를 창출해 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의 영적 소명이다.
이런 의미로, 요한일서는 우리를 다시금 야고보서로 이끌어 간다. 두 책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서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어떻게 일의 신학에서 하나의 요인으로 포함되는지 보여 준다. 일터에서든,
어디에서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주셨던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이다.
요한이서와 일
목차로 돌아가기요한이서는 일반서신서들의 전반적인 틀과 들어맞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과 삶에 관한 자체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 짧은 서신이지만 실천적 지침들로 가득하다.
진실함으로 대하라(요한이서 1-11)
목차로 돌아가기진실함이 빠진 사랑의 위험성(요한이서 1-6)
요한의 각 서신서는 “진리”(truth; 진실)와 “사랑”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게 특징이다(요일 3:18; 요이 1, 3절; 요삼 3절). 이 개념이 가장 확장되고 발전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요한이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 3-5절).
요한에 의하면, 사랑에 진리를 더하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진실이 빠진 사랑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추구한다. 일터에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불편한 진실은 가리거나 숨긴다. 혹은 진실을 말하면 평강이나 은혜보다 악감정이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딴에는 긍휼을 베푼다고 생각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로 오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구현이시다. 말하자면, 사물 본연의 모습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지식을 사랑으로 감싸
그분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허위와 회피 혹은 거짓말이아닌
진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노라면 충돌을 일으키거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어지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현실과 맞닥뜨리고 어려움의 수고를 거쳐 진정한 해결점에 다다를 때에 절실하게 다가온다.
제너럴 일렉트릭사 CEO 잭 웰치는 직원들의 업무 성과에 대해 진실하면서도 노골적인 평가를
내리는 그의 관행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매월 회사가 기대하는 바를 직원들이 얼마나 충족시켰는지 본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그들이 최고의 성과를 올렸는지, 아니면 이런저런 부문에서 개선이 필요한 중간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지, 혹은 해고의 위험에 처한 최하위 성과를 보였는지도 말해 주었다.[28]이런 관행을 가혹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웰치는 그것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봤다.
거짓 친절을 베푸는 관리자야말로 가장 나쁜 관리자다. 나는 (나긋나긋하게 잘해 주기만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친절한 관리자이니 훌륭한 관리자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지는 않겠죠. 안 그래요? 승진을 하든지 은퇴하겠죠. 그리고 당신 후임으로 새 관리자가 와서 당신 부하였던 직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할 거요. “이런, 경력에 비해 실력이 너무 부족하군요.” 그런데 이제 그 직원이 쉰 살도 넘고, 삶의 다른 선택지도 별로 없다고 합시다. 그럼, 당신은 그 직원한테 뭐라고 할 건가요? 이젠 집에 가서 쉬라고 할 건가요? 그게 어떻게 친절인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가장 잔혹한 관리자가 되는 겁니다.”[29]
진실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요이7-11)
요한은 우리에게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요이 7절)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진실을 말하다가는 속임수로 이득을 챙기는 자들과 충돌할 것이다. 이런 난관에서도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속이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 만일 속이는 편을 택한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정직한 사람들이 아님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3장의 “출 20:16” 부분과 6장의 “신 5:20” 부분을 보라.
미국의 전 조폐국장 에드 모이(Ed Moy)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회사 차량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경우와 공적으로 사용한 경우의 유지비 보고서를 늘 구별해서 기록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는 집에서 직장으로 갈 때만 개인 용도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심지어 개인적 여행일지라도) 회사 공용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가 이렇게 사적 용도를 정직하게 구분하자 그의 상사는 마치 그를 해고할 듯이 나무랐다. “우린 보수도
시원찮고,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수입을 올리는 길일세. 자네 보고서는 동료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그러자 에드는
이렇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저를 해고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부하로 있길
원하십니까? 그 부하의 영향력이 올라간다면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에드는 그 직장을 계속 다녔다.[30]
속이는 자들이나 거짓 교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드의 예에서 우리는 그런 계약을 파기시키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 자리를 피하기보다 계약을 유지하며 진실을 말함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거짓을 일삼는 모든 사람들과 계약을 파기한다면, 누가 남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말이다.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가(요이12-13)
목차로 돌아가기요한은 대면하여 계속 대화하고 싶다는 말로 본 서신을 마무리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하려 함이라”(요이 12절).
아마도 전달하려는 의사를 편지로 써서 간접적으로 전하는 경우에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이것은 비록 거리 때문에 서로 대면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대면하여 직접 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세심한 의사소통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21세기 일터는 개인 의사소통에서 훨씬 더 복잡한 도전이 기다린다. 오늘날 원거리 소통에는 화상회의, 전화, 문자 메시지, 편지, 이메일, 소셜 미디어 등등의 다양한 옵션이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소통은 여전히 메시지의 성격에 적합한 미디어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서 이메일은 주문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업무평가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더 복잡하고 더 감성적인 메시지일수록, 더 직접적이고 사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인텔 상무였던 팻 겔싱어(Pat Gelsinger)의 말을 들어 보자.
내게는 나만의 규칙이 있다. 만일 한 가지 주제로 네다섯 번쯤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면, 나는 더 이상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전화를 사용하거나 직접 만난다. 어떤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한쪽은 냉정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신이 가장 직설적으로 말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무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의사전달 수단 때문일 수 있다. 이것은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31]
잘못된 소통 수단은 쉽게 오해를 살 수 있고, 진실 전달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뿐인가, 잘못된 수단은 사랑을 전하는 데도 실패할 수있다. 그래서 바른 소통 수단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 동료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사랑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다. 힘든 대화라도 존경과 온정으로 소통해야 하며, 달갑지 않은 사람과 소통할 때는 특히 그렇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쾌할 때라도 얼굴을 맞대야 한다.
험담은 이제 그만(요삼1-12)
목차로 돌아가기요한은 가이오라는 이름의 ‘동역자’(요이 8절)에게 이 서신을 보냈다. 요한은 서신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접근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절).
그는 동역자의 육체(강건)와 영혼에 관심을 나타낸다. 동료를 단지 일꾼으로서만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본다는 그 자체로, 이것은 일터에서 중요한 교훈이다. 그런 다음 요한은 일한 것에 맞게 대우받지 못하는 예로 자기 자신을 든다. 회중의 일원 가운데 디오드레베를 거론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한다’고 요한은 말한다(요삼10절). 세 서신서 모두에서 요한은 주로 진리와 사랑에 함께 관심을 둔다 (요삼 1절). 그런데 디오드레베는 이와는 정반대로 증오 가운데 거짓 언행을 일삼았다. 다음 번역에서 요한의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가면, 그가 하는 일들을 들추어내겠습니다. 그는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있습니다”(요삼 10절, 새번역).
디오드레베가 신자라는 사실은 고통을 가중시킨다. 여기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완전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거짓 비방이라고 인식하는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알려 주어 그들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일터에서 의견을 내놓으면서 자신이나 남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끼친 적이 있는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남들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말할때
그가 한 방에 같이 있더라도 똑같이 말할 자신이 있는가?’ 만일 여기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면, 우리는 당사자에 대한 거짓
인상을 심어 줄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방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편지가 교회에서 회람될 것을 잘 알았고, 디오드레베가 자신의 불평을 듣고 반응할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반대자에게 기회를 주어서 자신의 불평에 대응하도록 한 것은 요한이 진실과 사랑을 하나로 묶은 본질적 요소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요한의 불만을 전한 것은 반대자에게 설명이나 자기변호의 기회를 마련해 준것이다. 오늘날 같은 강도로 반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대중 매체에 의해서 퍼져 가고, 수많은 공인들이 자행하는 ‘언론재판’과는 어떻게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원칙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한 개인을
비방하는 것보다 행여 더 나쁘지는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나쁘다. 사실 일터에서 생기는 온갖 종류의 불공정한 대우는 그들을 열등한
혹은 위험한 그룹으로 낙인찍으면서 시작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곧 특정 상황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쪽에
서서 편견과 연대 죄에 대한 거부 발언을 할 기회가 왔다는 신호다.
요한이 칭찬하는 데메드리오는 이 편지를 전달하는 형제로, 그 또한 흥미롭다. 요한은
데메드리오를 가이오와 그의 교회 앞에 높임으로써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요한은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삶과 교회의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칭찬한다. 일터에서 리더들은 (설사 표면상으로 복음이 승인받지 못할 때도)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진실,
정의, 사랑, 그리고 긍휼이라는 목표를 향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소통을 잘하려면(요삼13-15)
목차로 돌아가기본 서신도 요한이서와 동일한 생각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에게는 지금 펜과 먹으로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법한 소통 내용이 있다(요삼 13-14절). 그러나 요한삼서는 우리 일상을 약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바로 마지막에 요한이 이렇게 덧붙인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사람의 이름을 거들며 말하는 것이 소통상 필요하다는 점과 그런 소통이 개인적인 터치를 증대시킨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다수는 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면한다. 복도를 지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는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 가며 인사할 정도로 잘 아는 대상은 몇 명일까? 당신은
상사의 바로 위 상사, 그 위 상사, 또 그 위 상사의 이름을 아는가? 아마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 일터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의 이름은? 당신과 의견 충돌이 있는 사람의 이름도 부르며 인사하는가? 어떤 시점에 필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를 회사
신참 직원들의 이름은 익혔는가? 이름을 모르는 데다 익히는 것도 귀찮아 하면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존경과 온정의 수위가 여실히
드러날 터이다. 요한은 각 사람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충분한 배려심이 있다.
유다서와 일
목차로 돌아가기유다의 이 짤막한 서신서는 바로 역기능적인 한 일터, 즉,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 탓에 엉망이 된 교회를 그린 놀라운 그림으로 시작한다. 교회마다 고유의 문제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유 4절)과 이단(‘고라의 반란’ - 유 8절) 등과 같은 이슈들이다. 다른 문제들은 권위 부정, 중상모략(유 8절), 폭력(‘가인의 길’), 탐욕(발람의 실수, 유 8절) 등등, 세속적인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32]
최악의 권력 남용은 자기 양 떼를 희생시켜 가며 자기 배를 채우는 지도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들은 겁 없이 너희와 함께 먹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 기르는 목자다”(유 12절, NRSV). 유다는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가 자신을 위해서 교회 재정을 유용하는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탐욕스런 경영진이 보고이익과 자신들의 상여금을 유지하려고 회사 연금 기금을 횡령하는 것, 혹은 사무실 직원이 업무 시간에 웹 서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악한 일에 관해 유다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도 놀라운 명령을 하고 있으니, 바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22-23절).
유다는 악한 일에 강하게 대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이나 두려움이나 더럽혀진 육체 같은 이미지 표현을 볼 때, 유다의 긍휼은 유약함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긍휼은 엄격하다. 그 긍휼의 소망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 엄격한 긍휼은 직장 상황에 따라 필요해진다. 누군가 사기를 치거나, 동료를 괴롭히거나,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수없는 문제다. 더 큰 악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설욕하여
대갚음하는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어느 누구도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경건한 지도자는 각 개인을
존중하고, 어떤 징계로써 그를 다시 일원으로 맞아들일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일반서신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일반서신은 두 가지 원칙에서 시작했다.
1.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2.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이 두 가지 원칙은 믿음의 삶에서 일터를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과 일터를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지침의 기저를 이룬다(특히 야고보서에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우리는 이 두 원칙을 믿고 있는가?
2. 우리는 실제로 이 원칙들을 직장생활 속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일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상황을 겪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과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믿을 수 있을지 의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거나 장담한다.
하나님을 신뢰해 온 듯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예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직업, 집, 은퇴 자금, 심지어 삶 자체를 상실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결코 기대하지 못했던, 혹은 전혀 가져 보지 못했던 좋은 것을 얻기도 한다.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작은
노력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투자한 일이 잘되기도하고, 낯선 사람이 내 필요를 채워 주기도 한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리라고 믿는 게 옳은가?
일반서신은 이 심오한 질문에 확고한 답을 얻기까지 씨름하게 만든다.
이 씨름은 아마
일생 동안 계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부정하는 것보다 씨름하는게 더 낫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일한다”라는 경제의 기본 원리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팽배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라’라는 태도와도 충돌한다.
우리는 (만약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우리가 제대로 보수를 받고 있는지 증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유익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증명하려 하는가?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혹시 우리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지식을 비축하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안전감을 주는 고액의 퇴직금 혹은 고용계약서를 요구하는가? 날
마다 해고의 두려움을 안고 출근하는가?
가족과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며 일하는가?
다른 여지가 없다는 불안 탓에 굴욕, 분노, 업무 미숙과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엄격한 원칙은 없으며, 이런 행동 중 (강박 상태를 제외하고) 일부 혹은 전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현명하고
적절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지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신뢰하는지를 읽어 내는 가장 탁월한 지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돕는가?
혹 그가 나보다 앞서갈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리하는가?
내 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동료들, 고객들,
납품업자들, 그리고 힘없고 어려운 자들을 지원하러 나서는가?
선택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의 유익보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편인가?
유다서가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적 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육신적 결과의 문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함이다.
일반서신은 일의 개념을 재정립할 과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를
재정립하는 과제도 준다.
만일 우리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 남을 섬기게 된다.
남을 섬길 때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면서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의 일을 통해 세상에 들인 하나님의 복은, 세계가 우리의 참된 집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다음 발걸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일한다(벧후 3:13) .
서신서(書信書) The Epistles
1. 명칭
‘서신서’(書信書,
the Epistles)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 공동체 또는 특정 개인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해 써 보낸 편지들 중, 성령께서 초대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게
하시고자 특별히 영감하신 편지들로서, 훗날 신약 정경(正經, Canon)으로 채택된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의 21권의 책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27권의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A.D.50-100년 어간이나 이것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397년의 칼타고 공회(Councils of Cartago)에서였습니다. 또한 이 27권의 신약정경 중 21권의 책이
서신서로 불리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A.D.346-420)에 의해서입니다.
제롬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헬라어를 모르는 자들을 위하여 신약성경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벌게이트역’(Vulgate譯)입니다. 이 ‘벌게이트역’ 성경에서 제롬은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를 한 부류로 묶어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곧 서신서였습니다. 그리하여 A.D.150년경의 순교자 저스틴이 명명한 ‘복음서’(the Gospel)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란 명칭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서신서는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원리와 지침들을 제공해 주는 책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 전반을 다른 성경의 어떤 부분들보다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큽니다. 한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라면, 서신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성도의 삶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은 저자별로 분류하는 것인데, 서신서 중 바울이 기록한 13편의 서신을 ‘바울서신’이라고
부르며 그 이외의 저자들이 기록한 8편의 서신들은 통칭하여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서신은 수신자 또는
수신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의 제목이 지어진 반면, 공동서신은 수신자를 반영한 이름인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책의
기록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그밖에 각 서신이 지니는 내용과 용도 및 기록 배경상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면 아래의 도표와 같습니다.
* 서신서의 분류(저자별) *
구분 |
책명 |
저자 |
수신자 |
바울 |
로마서 |
바울 |
로마교회 |
고린도전서 |
〃 |
고린도교회 |
|
고린도후서 |
〃 |
〃 |
|
갈라디아서 |
〃 |
갈라디아교회 |
|
에베소서 |
〃 |
에베소교회 |
|
빌립보서 |
〃 |
빌립보교회 |
|
골로새서 |
〃 |
골로새교회 |
|
데살로니가전서 |
〃 |
데살로니가교회 |
|
데살로니가후서 |
〃 |
〃 |
|
디모데전서 |
〃 |
디모데 |
|
디모데후서 |
〃 |
〃 |
|
디도서 |
〃 |
디도 |
|
빌레몬서 |
〃 |
빌레몬 |
구분 |
책명 |
저자 |
수신자 |
공동 서신 (일반 |
히브리서 |
미상 |
유대인성도들 |
야고보서 |
야고보 |
유대인성도들 |
|
베드로전서 |
베드로 |
유대인성도들 |
|
베드로후서 |
〃 |
유대인성도들 |
|
요한일서 |
요한 |
전체교회성도들 |
|
요한이서 |
〃 |
전체교회성도들 |
|
요한삼서 |
〃 |
가이오 |
|
유다서 |
유다 |
유대인성도들 |
* 서신서의 분류(특징별) *
구분 |
서신 종류 |
기준 |
교리서신 |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
기독교의 구원론,기독론,교회론 등의 주요교리들을 집중적으로 다룸 |
재림서신 |
데살로니가전.후서 |
종말론, 재림 집중적으로 다룸 |
옥중서신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기록함 |
교회서신 |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 |
목회서신 |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
에베소와 그레데교회 목회자에게 보낸 서신 |
회람서신 |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 |
추천서신 |
빌레몬서, 요한삼서 |
편지를 전한 사람을 소개하거나 보증하기 위해 작성한 서신 |
답변서신 |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
어떤 문제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 |
3. 기록의 요소들
* 발신인
히브리서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서신들은 본문 서두에 발신인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 중에는 바울과 함께 한두 명의 발신인이 더 언급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바울과 함께 동역한 자들로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안부를 전했거나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대필했거나 협조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수신인과 전달경로
고대의
서신에서는 대개 수신인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 서신들이 오늘날처럼 공공 우편기관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전달자를 통하여 수신인에게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몰론 당시 로마제국은 공식적인 우편업무를 보았지만
사적 교신은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이들은 이 일을 위한 노예를 거느렸으며, 사도들은 자신의 동역자나 여행하는
성도의 편에 편지를 부쳤던 것입니다.
로마서는 여집사 뵈뵈에 의해 전달되었으며, 빌립보서는 에바드로디도에 의해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대필자
오늘날과
같이 종이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는 대필자라는 전문직업인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나 파피루스 위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전문적인 숙련이 요구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글을 모르는 문맹인들이나 좀더
세련된 글을 쓰기 위해서도 전문적으로 편지를 받아쓰는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서신서 중에도 대필자에 의해 기록된 서신들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단순한 전문 직업인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일꾼들이 대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실라)에 의해 대필되었으며(벧전 5:12), 바울 역시 대필자를 시켜 기록하게 했습니다(롬 16: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약 27권 중
21권이 서신으로 분류된다.
즉 신약의 3/4이 서신이다.
가장 이른 서신 (아마도 갈라디아서- 49년)은 가장 이른 복음서
(아마 마가복음- 59년) 보다 10년은 더 빠른 것으로 보인다.
서신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각 지역 교회에
전파되었으며, 그 후 개체 교회는 어떻게 특별하면서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이다.
따라서 서신서는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그 핵심 주제로 한다.
1. 서신서의 장르
서신서는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 혹은 무명의 성도의 신학을 집대성한 논문(theological treatise-compendum)으로 우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먼저 1세기 특정한 수신자에게 특정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설득, 경고, 책망, 권면, 영적인 목회적 가르침을 위한 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정황을 연구하는 것은 서신서 이해의 기초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쓰여진 상황문서들(occasional documents)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한된 자료와 정보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특정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신약 서신 저자들의 신학적인 사상을 우리는 충분히 찾고 체계화 할 수 있고 해야만 하기에 바울 신학, 요한 신학, 베드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별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것에 대한 반대 견해는 오래 전에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성경 저자들을 결코 신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신학은 신학보다 앞서 형성된 교리(dogmas)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교리는(제도적인) 교회 생활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는 신학이 아니며 신학에 기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계시의 도구로서 바울의 신학적 사고의 틀이 사용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말은 성경의 인간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반대로 인간이 계시 전달의 도구화되었음을 강조하기에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주도적이고 특별해 진다(참고. 게핀, 1992:29, 31).
서신은 상황적이되 신학적이다. 서신서 연구는 과제신학적(task theology)이다. 즉 어떤 과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의 신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바울이 현대의 신학박사보다 못한 영성과 지적인 능력을 가졌겠는가? 바울은 다른 성경 저자보다 더 조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확증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은 것이라기보다는 구속 사역을 해석하는데 더 관심을 쏟은 것이다.
환언하면 바울의 관심은 구속역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을 믿고 그 구속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계시 전달에 있어서 바울의 교육적 배경과 성격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기독교 자료를 조직적으로 다룬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참고. 박형용, 1992:6. In 리차드 게핀. '부활과 구속' 추천문. 엠마오). 편지는 시간을 두고 문제를 파악한 후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논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좋은 매체였다. 따라서 저자의 논리와 신학을 우리는 체계화 할 수 있다.
1.1. 용어 : 서신인가 아니면 편지인가?
"Light from the Ancient East"(1927, 1965)에서 Gustav Adolf Deissmann은 많은 파피루스를 연구한 후에 서신(epistle)과 편지(letter)를 철저히 구분하여 그 중 하나를 선호하나(물론 이 구분에 타당한 지적이 있다) 우리는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Deissmann에 의하면(참, 사적인) 편지(real letter)는 비문학적인 것으로 일반 회중이나 후대 사람들을 상대로 쓴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직접 받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쓴 것이다.
반면에(공적) 서신(epistle)은 일반 회중을 대상으로 한 예술적인 문학형태, 또는 문학의 한 종류이다. Deissmann은 모든 바울 서신을 letter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 서신과 비교하면 벧후, 요일은 훨씬 더(회람용, encyclical) 서신에 가깝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epistle이란 용어 안에는 편지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한 형태나 요소가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1.2. 주후 1세기의 서신:
1세기에 학생들은 초등교육을(혹은 12-15살) 받을 때부터 편지를 쓰는 교육을 받았다. 전문 편지 작성자를 위한 지침서도 있었다. 1세기에는 상업, 법률, 군사, 행정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서신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시대의 아들인 바울-베드로-요한 역시 그 당시의 서신의 형태(특히 personal-private letter)와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신서 역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을 배제한 서신서 분석은 무의미하다.
신약 서신서와 그레코-로마(Greco-Roman)의 서신들 간의 유사점을 연구하며 설득의 기술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물론 신약 기자들이 그 형식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를 주며 서신의 주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삼아 초대 교회에 전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형식과 틀을 빌려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기독론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이다.
2. 서신의 형식
일반적인 헬라의 서신은 인사말, 감사말, 본론, 마지막 인사말로 구성된다. 신약 서신에는 그 당시의 다양한 문학적인 전통들을 수용했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수사학 양식들, 설득 양식 등을 사용했다. 바울-베드로-요한 서신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다: 서신이면서도 서신의 형태를 벗어나는 책도 있다. 히브리서, 특히 히 1-10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그리스도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설교 양식이다(히 13:22, '권면의 말'). 그리고 요한일서와 계시록도 다르다.
서론(Preamble)- 송신자, 수신자, 인사말(빌레몬서 1-3)
Formula valetudinis(수신자의 행복과 관련된 말): 건강을 기원하고 감사의 말을 함 (4-7)
주요 논의를 소개함(Body-opening) (8-11)
본론적 논의(Main argument or body) (12-20)
논의의 결론(Body-closing) (21-22)
결론: 인사, 때로는 특정한 말의 첨가, 결론적인 고별 인사(23-25)
신약 서신은 고전 수사학적 형식을 일부 따른다(참고. 정태현, 1996:124-127):
(1) 서론(exordium 혹은 prooemium): 청중의 주의를 끌어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연설의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짧은 말.
(2) 연설 가운데 부분은 목적 제안(propositio)과 이성적 추론(rationes)으로 이루어진다.
1. 목적 제안(propositio): 연설이 얻고자 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기능. 목적 제안은 두 가지 요소로 세분화 될 수 있다:
1.1. 세부설명(partitio):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을 자세히 설명함.
1.2. 사건 개진(narratio): 목적 제안에 맞춰 사건의 흐름을 진행함.
2. 논증(argumentatio): 여러 가지 증명을 끌어내는 기능. 반증(refutatio)은 반 대자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논증.
(3)
귀결(peroratio): 결론(conclusio)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논증에서 제시된 증명들이 이제 분명히 옳다는 것을
천명하는 짧은 끝맺음이다. 연설자는 여기서 청중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판단을 내려 주기를 요청한다. 귀결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가) 목적 제안과 결론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나) 논증의 요지를 간추려 반복(recapitulatio)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서론(1:6-10), 사건 개진(1:10-2:14), 목적 제안(2:15-21), 논증 혹은 증명(3:1-4:31), 그리고 마지막 부분(5:1-6:10)은 권고문(paraenesis)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인사말(1:1-5)과 추신(6:11-18)이 앞뒤를 장식한다. 물론 모든 서신에 이런 형태가 정확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실로 서신의 형식이 거의 없고 히브리서도 진짜 편지 형식에 분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공공 설교인지 논란이 된다.
3. 서신이 읽혀진 방식
빌레몬서 그리고 요 2-3서와 같은 몇몇 개인적인 서신을 제외하고는 서신들은 주로 예배 중에 크게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의 부재 중 서신이 그 사도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그 당시는 기록된 문서의 시대라기보다는 구전의 시대였기에 하나의 편지(책값은 비싸고 인쇄술이 발전되지 못함)로 여러 사람이 듣고 말로 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수단이 편지이다. 따라서 서신이 낭독될 때 청중이 잘 그리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예. 헬라어 표현의 중복 등).
4. 서신서의 수사학적인 기교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가 거짓에 의해 가리지 않도록 말을 잘해야 한다는 동기에서 정의하기를 "화자가 청자를 위해 설득을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고전수사학자들은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청중에게 보여주는 신뢰도(ethos), 그리고 청중의 감정에 대한 호소 (pathos), 또한 논리 정연한 주장 (logos)을 잘 조화시켜서 전하려는 진리를 잘 배열하고, 완전히 외운 다음에, 적절한 언어를 구사해서, 잘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사용한 고전 수사학이 1세기에 유행했는데 주로 4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서론(exordium)→ 사실 진술(narratio)→ 논증(probatio)→결론(peroratio) (참고. H.D. 베츠의 '갈라디아서 주석'. 한국신학연구소의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고전 수사학의 3가지 종류:(Kennedy, G.A. 1984.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2. The art of rhetoric. Princeton University Press; Vernon K. Robbins. 1996. Exploring the texture of texts. Trinity Press International; Burton Mack. 수사학과 신약성서- 나단출판사 한국 저자의 책으로는 수사학적 성경해석의 이론과 실제- 현경식/이성호 공저- 성서연구사를 참고하라).
a. 법률적이고 변증적인 수사학- judicial-forensic: 법정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변론과 판단을 청중에게 설득하는 것.
b. 정치적이고 심의적-의도적인 수사학-deliberative: 공공집회나 정치적인 변론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을 미래에 취하도록 설득함.
c. 의식적-제의적 수사학-ceremonial-epideictic: 공공예배나 의식에서 어떤 인물 (덕)이나 사건을 칭송하거나 책망하여 청중들에게 현재의 어떤 견해와 전망을 갖도록 설득하는 것.
서신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함이 균형잡힌 해석을 위해 중요하나 먼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서신, 하나님의 설득으로서의 서신(NT epistles as God's divine persuasion)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현대 수사학(modern rhetoric)은 이런 법정적, 정치적, 의식적인 범주를 너머 모든 인간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행동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소설, 시, 연극, 영화, 광고, 신문 기사, 음악, 사회 현상 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 속에는 그 주장하는 바의 이념적인 동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야기에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화자의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기에. 또한 화자가 청자를 설득하는 기술로 보지 않고 더 나아가 화자와 청자가 불확실한 그 무엇에서 확실한 것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해결해 나가도록 돕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청중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의 참여자이다.
따라서 수사학은 인간의 의사소통에 사용된 모든 수단들을 묘사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화자의 의도, 내용의 분석, 본문의 구조와 문학적 기교를 분석, 화자와 청자의 사회-역사적 배경, 그리고 설득을 통한 화자의 결정과 실행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사회수사학은 개혁주의 서신 해석에 유용한 기여를 한다.
수사학적 해석을 문학적인 해석 혹은 자유주의적 해석 방법으로 여기고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종들이 인간의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한 것이기에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는 수사학적 비평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이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1세기 서신서의 수신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그 영향력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수사학을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의 서신서의 해석 경향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 비평 방법만으로 연구하던 전성기는 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비평의 주요 관심은, 예를 들어, 이것이 바울의 것인가? 이 편지는 이전에 어떤 자료들을(기독교의 찬송, 케리그마, 교리문답 등) 모집한 것인가? 구전자료 혹은 주변의 다른 나라의 서신과의 종교사학파적 비교 등.
5. 로마제국 안에서 서신을 통한 복음의 전파의 용이성
통일된 로마제국은 발달된 교통망(예. 리챠드 보컴 등: holy internet)을 갖추어서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는 코이네 헬라어가(비교: 고전 헬라어는 좀 더 학적이고 고급)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서 언어적인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 어느 시대보다 1세기 로마 제국은 복음이 효율적으로 증거되는 기반이 조성된 시기였다. 여기서 1세기의 여행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 제국 시대에 하루 도보 여행길은 보통 32km 정도였고 급사(急使)들은 80km까지 여행 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현대인과 똑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행했다. 사업과 정부의 공무, 제의적인 순례, 순전히 관광적인 차원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육상여행은 고대에서 가장 자연스럽지만 안락하지 못한 여행의 형태였다. 하지만 1세기의 육로 여행은 어느 시대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으로 평가된다. 네로 시대에 런던에서 로마까지 육로로 가는데 28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도로가 건설되었다. 로마의 도로망은 2차 세계대전 후 주간(州間) 간선도로가 발전되기 전까지는 견줄만한 것이 없었던 독보적인 것이었다. 빗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가운데 부분이 약간 더 높았으며, 도로 양끝에는 도랑과 연석을 놓았다. 로마의 도로는 폭이 최소 8피트였고 평지에는 대개 10-12피트의 폭이 일반적이었고, 대도시로 진입하는 도로의 폭은 30-40피트였다.
여행을 위해 통행증이 발급되었는데, 특히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한되었다. 여행을 위한 숙박시설로 여관이 잘 발달되었지만, 대개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집을 숙박 장소로 이용했다. 여행 날씨는 5-10월 사이가 선호되었다. 그리스인과는 달리 로마인과 유대인은 해상여행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배로 여행하는데 9-27일이 소요되었는데, 바람과 일기에 따라 결정되었다(참고. 앨버트 벨, 2001:469-481). 참고로 holy internet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복음서를 특정 공동체로 한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헬라어가 사용되는 모든 지역에로 전달되는 그 범위가 수신자의 범위로 본다. 하지만 특정 수신자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 주장이 설득력 없이 보인다.
6. 서신의 특성
a. 성격상 인격적(personal)이나 사적(private)인 것이 아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아주 사적인 것도 있기는 하다. 공적인 헬라시대의 사업서신(business letters)은 아니지만 교회에 주어 보내어진 것이기에 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경우 그의 동역자들을 공동 송신자로 언급함으로 공적인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고전 1:2; 고후 1:1; 갈 1:1; 참고. 크리스챤 베커, 1998:43).
b. 대화와 현존 (먼저 편지로 만나고 조속한 시기에 실제적 방문-현존- 롬 15:22; 빌레몬서 21절): 마치 송신자가 독자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을 택한다. Koskenniemi가 주후 400년까지의 헬라 편지를 연구하여 이 두 요소를 강조했다. 대화적 특성이 있지만 더 나아가 문학적인 기교와 세련됨으로 정제된 대화이기에 일상 대화 보다 더 문학적이다.
c. 설교체: 강한 감정과 애정, 목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d.
계획적이지만 형식주의적이지 않다: 보통 헬라편지의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은 전형적이고 비인격체적인 특성이다. 심지어 가장 친근한
가족과 친구간의 서신에서도 의식적이고 상투적인 틀을 유지했다. 반대로, 신약 서신에서는 건조하고 의미 없는 형식을 제거해 버린
것을 새로운(기독론적인) 내용으로 본다.
7. 서신서 해석의 원칙
(1) 사회-문화-정치-종교-역사적 상황을 본문과 보조 자료를 사용하여 재구축하라. 주로 저자와 수신자(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와의 친분관계, 그리고 수신자가 처한 사회문화적-교회적 형편에 주목하라. 이때 성경 사전이나 주석, 그리고 신약 서론 책을 참조할 수 있다(특히 유용한 것은 Martin, R.P. 1997.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IVP와 Hawthorne, G.F. 1993. Dictionary of the later New Testament and its developments. IVP).
(2) 기초적인
역사적 배경을 숙지한 후 편지를 전체로 읽는 것 즉 쉬지 말고 두 번 정도 완독하여 전체의 감과 맥을 잡아야 한다.
indicative(예. 롬 1-11장 상황 진술, 권면, 책망 등)→ imperative(예. 롬 12장)→ promise(롬
16:25-26)를 고려하라.
(3) 논리의 흐름을 따라 사고의 시작과 마감이 분명한 좀 더 세부적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라.
(4) 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즉 핵심단어와 반복되는 용어,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을 중심으로 연구하라.
(5)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구약의 인용을 통한 계시사의 전진, 그리고 기독론적인 은유 혹은 그레코-로마의 문화에 반하는 기독교적 강조 등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6) 유비를 통한 적용을 해석(hermeneutics가 아니라 interpretation)의 마지막 단계로 해야 한다. 서신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영감된 말씀이기에 모든 시대의 교회에 그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6) 단계와 연관하여 서신서 메시지의 현대로의 적용의 원칙을 살펴보자- what it meant에서 what it means로 넘어오는 다리: 실제로 학자들이 1세기의 의미를 연구하는데서 그치고 그 현대적 적용에 대해서 소홀히 했기에 교회 안에서 서신서를 통해서 제기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모호함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적용은 더 어렵고 기도를 요하는 작업일 수 있다.
이 작업을 윤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겨 둘 수 있는가? 오히려 적용이 성경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오지 않고, 교회-교단의(신학적) 색깔-전통 혹은 한국적인 유교적 관습 등에 지배받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진리와 규범이지만 문화적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으로 인해서 1세기 서신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21세기에 적용할 때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아래의 두 예를 보아도 적용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안다:
(1) 딤전 5:23: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것을 음주를 허용하는 본문으로 볼 수 있는가?
(2) 고전 14:34-35/ 딤전 2:9-15: 지금도 여성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 혹은 여성 안수를 금지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적용을 위한 몇 원칙들을 살펴보자:
(1) 1세기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 속에 우리가 산다면 그 본문의 신학적 내용과 윤리적인 명령들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예. 고난 중에서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서신서에서 일관되게 죄로 규정하는 것(음란, 동성애, 방탕…)은 여전히 늘 죄이다. 하지만 지나친 확대 적용은 금물이다. 고전 6:1-11에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것을 두 크리스천의 사업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2) 유사성이 아주
약하거나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갈 5:2-6에서처럼 성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한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이
말씀은 21세기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때는 what it meant에 근거하여 적용의 구체적인 유비가 아니라 성도의
삶에 주는 원리를 도출해야 한다.
이 원리는 지역,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무차별적으로 이 원리를 아무 상황에 적용할 수 없고, 그래도 유사한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바울이 이방 신전의 축제에 참여하거나 거기에 바쳐진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은 귀신과 사귀는 것이기에, 21세기에는 한국 교인들의 삶 중에서 점성술, 사술, 사주팔자, 심령술 등에 적용할 수 있다.
사실은 여기서도
유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와 장소에 규범적인 문화를 주시지 않아서 이런 적용은 아주 애매할 때가
많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낙태나 인터넷 범죄를 위해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 있나?
이때 우리는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완성이라는 성경적인 세계관 혹은 교리의 도움을 받아서 전체적인 성경에서 먼저 보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는 지혜도 필요하다.
참고할 책
Du Toit, A.B. 1985. Guide to the New Testament V. Pretoria : NGKB.
Malherbe, A.J. 1988 Ancient epistolary theorists.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Malina, B.J. & Pilch, J.J. 2006.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letters of Paul. Minneapolis : Fortress Press.
골든 피 & 드글라스 스튜어트. 2001.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J. 크리스챤 베커. 1998. 사도바울. 한국신학연구소.
앨버트 벨. 2001.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성경 시대의 마지막 시대는 사도들이 주님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한 초대 교회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30년경부터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때인 100년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나서 30년부터 50년까지 약 20년동안 구전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였으며, 그는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50-64년 동안 바울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가 기록되었으며,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바울서신중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는 매우 비슷한 시기인 AD53년과 AD55년에 각각 기록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며 약 1달동안 머물면서 설립했다는 점(행17:1-10)과
바울이 또 세번(1,2,3차)의 선교여행을 통해서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디모데와 함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행16:6)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들중 기록연대로 볼 때 가장 먼저인 서신은 2, 3차선교여행과정과 전후상황들을 모두 고려하여 볼 때,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한 후에 바로 이어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70년부터 90년 사이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으며,
90년 후부터 100년 사이에 요한 서신과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30년부터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100년까지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약성경의 4복음서가 기록된 연대를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성경기록연대 순서대로 나열된 것이 아닌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4복음서중에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은 마가복음이면, 바울서신서들중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서로는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이며, 그중 바울의 선교여행의 정황상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갈라디아서를 앞선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