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01 / 14 / 2023 -01 / 27 / 2023)


탈무드의 지혜 예화  
저주받은 첫날밤  

*어느 마을에 말할 수 없이 착하고 성실한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부자이면서 또한 인자하기로 유명한 토비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었고, 장사지내줄 사람이 없이 죽은 자를 만나면 관례를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러주곤 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착한 유태인들을 시기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선을 베풀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샘이 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왕에게 유태인들에 대해 모함을 했다.
"왕이시여, 유태인들을 벌하시옵소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의 묘를 파헤쳐 죽은 자의 뼈를 파내고 있습니다.
시체를 불태워 마법에 쓰이는 약가루를 구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모함인지 알지 못하는 왕은 무척 노여워하며 유태인에게 보복하는 명령을 내렸다.
"만일 유태인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말고, 성밖의 구덩이에 갖다 버리도록 해라.
만일 장례를 치른다던가 하면 교수형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다른 지역에서 살던 유태인이 이 나리에 왔다가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죽었다. 그
런데 이 나라에선 아무도 장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믿음이 깊은 토비아가 썩 나서서는 시신을 염하고, 옷을 입혀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것을 본 주민들은 토비아를 끌어다가 재판관에게 데려갔다.

"이자를 교수형에 처하십시오. 왕의 지시를 어기고 유태인을 묘지에 묻었습니다."
 
그리하여 토비아는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토비아가 사형을 당하게 된 날, 토비아는 교수대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토비아를 교수시키기 위해 교수대에 올라서는 사형집행인마다 모두 갑자기 장님이 되어 버려 토비아를 처형할 수 없게 되곤 했다.
마침내 토비아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친척과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는 자기 몸을 일어났던 주님의 은총에 대해 얘기했다.
토비아의 얘기를 듣고 난 유태인은 그 신비로움에 감탄했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하기를 기원했다.
 
한편 그 나라의 왕은 유태인인 토비아를 처형하려고 했을 때 일어났던 기적을 보고 받았다.
왕은 유태인들에 대한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온 나라에 다시 포고를 내렸다.
"유태인이 죽은 자를 정중히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한다.
유태인을 모함하거나 해를 입히는 자는 귀천에 관계없이 교수형에 처하겠다."
 
그후부터 왕은 유태인을 귀하게 여겼다.
눈이 멀었던 사형 집행인들도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토비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보
니 제비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비아는 그 모양이 신기해서 제비집 가까이 얼굴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제비의 똥이 그만 눈에 떨어졌다.
토비아의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동자에 하얀 꺼풀이 덮여버린 것이다.
졸지에 앞을 못 보는 장님이 되어버린 토비아는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불러 일렀다.
"내가 장사를 하고 다닐 적에 인도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돌아오는 길이 안전하지 못해서 그곳에 있는 내 친구 페루 하스먼에게 그때 번 돈을 맡겨 놓았다.
이제 나는 벌을 받아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아들아, 그러니 내 대신 인도로 가서 그 친구를 찾아가 보아라.
네가 나의 서명을 든 편지를 보이면 그 친구는 내가 맡긴 돈과 보물을 돌려줄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들은 인도까지 길 안내를 해줄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인도의 지리와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여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다.
"아버지, 이 사람은 인도의 거리거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토비아는 그 사람의 인사를 받고 나서 물었다.
"인도의 투바르란 거리를 아시오?"
"네, 압니다. 그 거리는 대단히 크고 번화하지요. 또 현자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하구요."
"내 아들을 그곳까지 데려다 주시오. 비용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토비아는 아들을 시켜 인도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쓰게 하고 끝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아들을 껴안고 말했다.
"잘 다녀오너라. 조상들이 너를 지켜봐 주실 것이다."
 
젊은이는 안내자와 함께 투바르로 떠났다.
안내자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젊은이는 아버지가 말했던 페루 하스먼의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어른께서 페루 하스먼이란 분이신 지요?"  
"그렇소만, 젊은이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가?"  
"저의 부친의 존함은 토비아라고 하는데, 부친께서 저보고 어른을 찾아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비아의 아들은 그렇게 말하고 부친의 말을 받아 적은 편지를 내보였다.
페루 하스먼은 그 편지와 서명을 보고,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친구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
그는 젊은이를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그리고는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대접해 주었다.
"그래, 자네 부친께서 평안하신가? 자네를 보니 정말 반갑네."
"부친께선 편안하게 잘 계십니다."
"정말 다행이구나.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테니 자네는 이제 푹 쉬게. 십여 일 내 곁에 머물면서 그 동안 자네 부친이 살아가는 얘기를 내게 들려주지 않겠나?"
 
그러나 젊은이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대단히 고마우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전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로하신 부친을 남겨두고 떠난 지라 걱정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부친께선 저밖에 자손이 없기 때문에 제가 곁에 없으면 많이 허전해  하십니다."
 
젊은이의 말을 듣고 있던 페루 하스먼은 그 효성스러운 마음에 감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토비아가 맡겨 두었던 보물을 그의 아들에게 넘겨주고, 그 이외에도 옷과 값진 선물을 따로 마련해서 젊은이에게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장정을 보내어 도중까지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고 풍악을 울려 전송을 했다.
토비아의 아들과 안내자가 길을 떠나서 해변의 모래 길을 걷고 있는데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에 휩쓸려 나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내자는 물고기를 잡아 배를 가르고 창자와 담낭을 끄집어 내고는 정작 고기는 버렸다.
"왜 고기를 가져가지 않으십니까?"
의아스럽게 생각된 젊은이가 물었다.
 
"이 창자와 담낭에는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 좋은 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이 담즙을 짜서 바르면 눈이 뜨여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창자를 태워 연기를 내면 악마가 접근을 못하게 되어 집안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합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은 젊은이는 그 창자와 담낭을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안내자는 순순히 수락을 했고, 젊은이는 그 두 가지를 소중히 간수하였다.
몇 달 후, 젊은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토비아는 무척 반가워하였다. 그는 안내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돈을 바꾸는 곳에 가서 너를 안내해 준 사람에게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례를 해드리려무나."
 
아버지의 말에 따라 젊은이는 안내자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런데 밖에 나오자마자 안내자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여기 저기를 둘러보다가 아들은 다시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들아,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그 사람을 보내셨던가 보다. 그 사람은 예언자 엘리야였던게 틀림없다. 그리고 나서 아들은 해변 모래사장에서 얻은 담즙과 창자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엘리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 두 가지 물건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토비아는 아들로부터 담즙을 받아 눈에 발랐다. 그러자 막혔던 시야가 트이면서 다시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가 보다. 너를 무사히 인도까지 갔다오게 하시고, 이렇게 내 눈까지 낫게 해 주시니...."
 
토비아와 아들은 다시 밝은 세상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비아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기 바란다. 내 여동생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아이와 네가 결혼했으면 싶다.
그 아이는 무슨 운명을 타고났는지 세 번씩이나 결혼을 했지만 그때마다 첫날밤을 지내기도 전에 남자들이 시체가 되고 마는구나."
 
"하지만 아버님, 만일 제가 그 사촌과 결혼했다가 다른 세 남자들처럼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세 남자가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히 악마가 그들의 혼을 빼앗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널 안내했던 그분의 말씀대로 물고기의 창자를 태워서 집안에 연기가 가득 차도록 해라.
하나님을 깊이 믿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악마로부터 돌봐주실 것이다."
 
젊은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윽고 결혼식이 끝나고 밤이 되었다. 젊은이는 창자를 태워 집안밖에 연기를 피웠다. 그리고 신혼 방에 들어가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늙은 아버지는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아들 내외를 지켜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모든 사람들은 불안과 근심으로 조바심을 내면서 과연 젊은이가 살아서 방문 앞으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시체가 되지는 않을런지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젊은이는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 이후, 이 부부는 아무 걱정거리 없이 많은 자손들을 거느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칼날 폭 만큼의 좁은 침대에서도 누워 잘 수 있지만, 서로가 미워하기 시작하면 폭이 10미터나 되는 침대로도 비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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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아가는 수도사가 있었다.
선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인지라 하나님도 그를 깊고 아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수도사가 강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억센 발톱 사이에서 쥐 한 마리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그 쥐가 가엾게 생각되어 수도사는 외투자락으로 감싸주었다.
그리고 집에 데려가 치료를 해주고 싶었으나 집안 식구들이 더럽다고 반대할 것 같아 여자아이로 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신앙이 깊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 쥐를 예쁜 소녀로 변신시켜 주었다.
수도사는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마치 친딸처럼 예쁘게 키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소녀가 열두 살이 되었다.

"너도 이젠 나이가 찼으니 시집을 가야지? 너는 어떤 사람을 남편으로 삼고 싶으냐?"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 내 생각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태양인 것 같다. 우리, 태양에게 결혼을 부탁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수도사는 몸을 청결히 하고 태양에게 호소했다.

"태양이시여, 만물을 자라게 하는 강한 자여!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저의 딸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하기에 , 제가 그 뜻을 전하려 합니다."

수도사의 호소를 듣고 태양이 응답하였다.

"주님께서도 그대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을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대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내가 진실을 말하겠노라. 나는 그렇게 강한 자가 못되네. 나보다 강한 자가 있다네."

"그분은 누구십니까?"

"구름의 대왕이지. 그가 구름을 피우기 시작하면 나는 그 속에 갇히게 되고 이 세상은 암흑에 되어 버린다네."

수도사는 태양이 가르쳐준 대로 구름이 생성되어 퍼지는 곳으로 가서는 구름의 대왕을 불렀다.
수도사의 이야기를 들은 구름 대왕은 대답했다.

"그대의 이야기를 잘 들었노라. 물론 나도 강하긴 하지.
하지만 나보다 강한 자가 있어 나도 그에게는 꼼짝 못한다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람이네. 바람은 나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날려보내기를 식은 죽먹기처럼 하네. 바람에게만은 맥을 못 추겠거든."

수도사는 바람을 찾아가서 구름의 대왕이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물론 나는 강한 힘을 가졌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강한 상대가 있네. 그대는 그자에게 가서 부탁해 봄이 어떤가?"

"그가 누구입니까?"

"산이네. 내가 아무리 강한 바람을 보내도 산이 가로막으면 난 힘을 못 쓰거든."

수도사는 산에게로 가서 또 딸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내가 강한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나에게도 두 손을 들게 하는 상대가 있으니 그자를 가르쳐 주겠네. 바로 쥐일세. 쥐는 내 배 가운데에 구멍을 뚫는 놈이네."

수도사는 쥐를 찾아갔다.

"당신에게 내 딸을 시집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겠소?"

"거대한 산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자는 우리 쥐들밖에 없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쥐이기 때문에 땅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과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수도사는 다시 딸에게 돌아갔다.

"내가 여태 돌아다녀 보았지만 결국 쥐가 제일 강하다는 결론이 났다. 쥐에게 시집가겠니?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주님께 부탁드려서 원래의 네 모습인 쥐가 되도록 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녀는 다시 쥐가 되었다.
수도사는 소녀 쥐를 쥐구멍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2장

1월 27일(금)

사람의 본분(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Now all has been heard; here is the conclusion of the matter: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duty of man.

본분(3605)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Pronunciation / 콜(kôl)
Etymology / 3634에서 유래
Old Testament / 5408회 사용

*3634. 카랄kâlal)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Pronunciation / 카랄(kâlal)
Bible verse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Old Testament / 2회 사용

사람의 본분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 하아담'( - )은 문자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사람의 모든 것'(the whole of the man, M.A.Eaton),
2. '모든 사람'(every man, W.J. Deane).

(1)을 취할 경우 본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행할 의무 전체(the whole duty of man, KJV, NIV, RSV)라는 뜻이 되며,
(2)를 위한 경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져야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the duty of all men, RSV난하주)라는 뜻이다.


본분(本分)

창세기 38:8, 아우의 본분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욥기 32:17,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

에스겔 45:17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찌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찌니라.
하나님은 ...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

이는 3:7;11:9의 반복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본서의 제일 끝에 언급한 것은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생이 정죄된 죄인이며(롬 5:16-2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일, 이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인 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매사를 스스로 도모하지 말고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서 의롭게 살 것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인생을 연극에 비유할 때 몇 막 몇 장이냐고 표현합니다.
제 경우 74살이므로 7막 4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연극 무대가 몇 막 몇 장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연극을 연출하는 연출가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막 몇 장의 무대 위에 올려져 있습니까?
앞으로 몇 막 몇 장이 더 올려질는지 예측하십니까?
얼마나 더 무대위에 올라야 할지 모르기에 오늘도 내게 주어진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전도서를 마감하는 12장에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3. 그런 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7.은 여전히 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3~6절은 인간의 육신이 점점 쇠약해질 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의 설명입니다.

월터 카이저 (Walter C. Kaiser Jr. 1933. 4. 11 ~ )
미국의 복음주의 구약 학자, 저술가 및 교육자
고든 콘웰 신학교 구약학자
2006년 6월 30일 은퇴하였다.
카이저는 1933년 독일침례교도인 부모님인 월터 크리스챤 카이저와 이스텔 자워스키 카이저 사이에서 펜실베니아 폴크로프트에서 태어났다.
휘튼 칼리지에서 AB ,
휘튼 대학원에서 BD
브랜다이스 대학교 MA 및 지중해 연구로 Ph.D.를 취득했다.
2006년까지 그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했다.


인생을 지혜롭게 잘 사는 길은 전도자에 의하면 죽을 날을 생각하고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다(1~2). ‘기억한다’(종종 ‘생각하다’로 번역된)는 단어는 단순히 잊었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 결정적 행동을 수반하는 적극적이고 동적인 동사다. 가령,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셨다(삼상 1:19)는 말은 한나를 잊었다가 기도를 듣고 다시 그녀를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해 일하시겠다고 결정하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은 엄청난 은혜의 표현이다. 이와 같이 전도자가 아직 죽음이나 몸이 노쇠할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넓은 의미로 대부분의 사람을 포함한다)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은 힘이 있을 때 창조자를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살아가라는 권고다. 죽음이 오기 전에,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날이 오기 전에 말이다. 2절이 이런 죽음의 날을 설명한다(2).

2. 인간의 육신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3~7). 3~6절은 인간의 육신이 점점 쇠약해질 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의 설명이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3)노년에 중풍 또는 쇠약함으로 수족이 떨린다.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3)쇠약해서 허리와 다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린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3)이가 음식을 씹을 힘을 잃는다.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3)눈의 시력을 잃고 동공의 수축 이완이 잘 되지 않는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4)입술이 이가 없으므로 입안으로 오므라든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다(4)이가 없으므로 부드러운 음식만 먹을 수 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4)아침에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깬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것이다(4)음악과 노래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쇠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다(5)그는 고공공포증에 시달리며 전에 자주 다니던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5)머리가 나이와 함께 백발로 변한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5)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것이다.
정욕이 그치리니(5)모든 성욕과 욕망을 상실한다.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말 그대로이다.
은 줄이 풀리고(6)두뇌와 척수를 연결해주는 척수가 창백해져 은빛처럼 된다.
금 그릇이 깨지고(6)그 모양과 색깔로 보건대 두뇌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6)절망한 마음, 즉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지탱해주는 모든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6)양수기처럼 끊임없이 피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정맥과 동맥의 전체계가 심장이 멈추자 중단된다.

이런 날이 불현듯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창조자를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미래는 위험하고 비참할 것이다. 결국 몸은 썩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7).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영혼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이다.

3. 그러므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8~14).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은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가! 전도자는 다시 한 번 그런 인생의 헛됨을 표현한다(8). 전도자는 자신을 3인칭으로 묘사하면서 지혜롭다고 하고 그가 참된 지식을 가르쳤고 또 그 지식을 묵상하고 연구하였다고 말한다(9). 자신 또한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였다(10).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나 쾌락주의를 부추기려고 하지 않는다. 지혜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말씀은 마치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과 같다(11). 이것은 당시 목자들이 소들을 채찍으로 움직이게 하고 텐트를 치기 위해서 못을 땅 속에 깊이 박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창조자를 위해서 살게 하고), 그들의 인생관을 확실하게 조여주는 못의 역할을 한다. 또한 진리의 말씀은 경계(충고와 훈계)의 역할을 한다(12). 많은 책과 지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경계하여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지도한다. 전도자가 주고 싶은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이다(13).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거워하고 그 삶에 주신 선물들을 즐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결국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14). 이것은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즐기고 살게 하는 힘이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염려와 슬픔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주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옵소서. 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3) - 중풍 또는 파킨스 등으로 수족이 떨린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3) - 허리와 다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린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3) - 풍치로 인하여 이가 흔들려 음식을 먹을 힘을 잃는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3) - 눈의 시력을 잃고 동공의 수축 이완이 잘 되지 않는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4) - 입술이 이가 없으므로 입안으로 오므라든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다(4) - 이가 없으므로 부드러운 음식만 먹을 수 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4) - 아침에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깬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것이다(4) - 음악과 노래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쇠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다(5) - 그는 고공공포증에 시달리며 전에 자주 다니던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5) - 머리가 나이와 함께 백발로 변한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5) -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것이다.

정욕이 그치리니(5) - 모든 성욕과 욕망을 상실한다.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 - 말 그대로이다.

은 줄이 풀리고(6) - 두뇌와 척수를 연결해주는 척수가 창백해져 은빛처럼 된다.

금 그릇이 깨지고(6) - 그 모양과 색깔로 보건대 두뇌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6) - 절망한 마음, 즉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지탱해주는 모든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6) - 양수기처럼 끊임없이 피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정맥과 동맥의 전체계가 심장이 멈추자 중단된다.

 

4.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날을 만나게 될 것인데, 이 날이 불현듯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창조자를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미래는 위험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결국 몸은 썩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7).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영혼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146,000명을 전도한 제너(Genor)

단 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로키 산맥 해발 3000m 높이에 수목 한계선이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서 있다.
이 고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과 싸우며 생존을 위해 무서운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는 나무’로 만들어진다.

낮엔 따뜻하고 밤엔 추운 날씨가 계속될 때 가장 선명한 단풍이 만들어지듯 우리 인간도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듬어진다.

성경을 보라.
연단을 받지 않고 쓰임받는 사람이 있는가?
모세도 쓰임받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훈련을 받았다.
다윗 왕도 광야의 훈련을 받고난 다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쓰임받았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었던 사람들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이다.



40년간 호주의 번화가인 George Street에서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만약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똑같은 전도방법으로 최소한 146,000명을 전도한 Genor씨는 과거 호주 전투함을 타고 있을 당시 형편없이 타락한 삶으로 인해 인생의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는데 그때 소책자를 주며 도와준 동료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해서 ‘주님, 하루에 최소한 열 명에게 이런 방법으로 전도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40년이 넘도록 전도를 했는데 간혹 몸이 아파 전도를 못한 날은 다른 날에 보충을 하면서까지 매일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시드니에서 가장 번화한 George Street 거리가 최고의 전도장소라 생각되어 그곳에서 계속 소책자를 나누어주며 전도했습니다. 40년 넘게 전도를 해 왔었지만,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 전도로 인해 주님을 영접했다고 직접 그에게 찾아와 말한 사람은 없었는데, 세계 각 곳의 수많은 목사 선교사 성도들이 Genor씨의 복음 메시지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다고 간증했다고 합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주님! 전도를 통해 천국에서 빛나는 사람 되게 하소서.
당신은 매일 몇 명에게 전도하십니까?

광야를 읽다
이진희지음

20대 30대를 살 때에는 인생을 마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인생은 확실해 보입니다.
노력하면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무엇인가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투지를 불태웁니다.
정상에 서 보겠다는 야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40대 50대가 되면 인생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생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 끝이 보일지 모르는 사막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점점 깊은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험준한 산도 넘어갑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맹수가 공격하는 수많은 삶의 위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늘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삽니다.
인생의 캄캄한 어두운 밤을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거친 풍랑이 엄습해 옵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인생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산에 오를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남이 올라가지 못한 산에 올라갈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실상 산에 오르는 것보다 광야를 지나는 것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결혼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직장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대부분은 광야를 지나는 것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산에 오를 것처럼 등산복과 등산화, 등산장비를 등에 지고 갑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광야가 더 많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빨리 오르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하려 광야에서 생존하기를 더 힘쓸 것입니다. 허탄하고 허무한 일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015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지가 바로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어느덧 한해가 화살처럼 날아갔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연로하신 분들도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볼 때마다 인생의 영화와 부귀가 한갓 봄날의 꿈과 같다는 사자성어 ‘일장춘몽’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진지하게 대면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구약성경 전도서입니다.

우리는 전도서하면 먼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나 모든 것이 헛되도다”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말은 주머니에 송곳을 집어넣어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듯이 우리 인생의 허무한 단면을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전도서는 인생에 대한 지독한 염세주의, 비관주의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진정한 목적은 이런 허무를 넘어서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허무한 인생과 하나님 있는 참 인생의 가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강력하게 말씀해 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우리 인생에 곤고한 날이 찾아옵니다. 아무 낙이 없는 때가 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가장 큰 시련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즉 청년의 때에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전도서의 결론이고 전도자가 모든 인생에게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노도질풍과 같은 시기 청년의 때가 잠간이고 어느덧 인생 황혼이 찾아옵니다. 2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 인생에 결국 맞이하게 되는 노년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입니다. 여기서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다는 것은 우리의 얼굴과 뺨, 그리고 눈이 쇠해짐을 의미합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많은 눈물을 흘린 다음에 또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라”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는 손과 팔, 그리고 다리가 떨리는 현상을 지적하고,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것’은 우리의 등과 무릎이 구부러지고 약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치는 것’은 이가 많이 빠져서 음식을 잘 씹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지는 것’은 눈이 어두워 침침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지고 맷돌 소리가 적어진다는 것’은 우리 귀가 어두워지고 입의 말수도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새의 소리를 인해 일어난다’것은 잠이 적어져 새 소리에도 쉽사리 잠을 깨는 것을 뜻합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이 다 쇠하여진다’는 것은 우리 목소리가 쇠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5절에서도 우리 인생이 쇠락해 가는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높은 곳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연로한 자들이 높은 곳에 오르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에서 놀라는 것’은 길을 걸을 때도 쉽사리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구나무가 꽃이 피는 것’은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 ‘메뚜기도 짐이 되는 것’은 기력이 없어 작은 일도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원욕(願慾)이 그치는 것’은 식욕이 없어지고 의욕이 줄어드는 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5절과 6절에서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조문객들이 방문하게 됨을 말합니다. 또 ‘은줄이 풀리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신경조직이나 근육이 약해지는 것을 말하고, ‘금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사람의 두뇌가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진다’는 것은 좌우 심방을 가진 심장과, 동맥, 정맥의 혈관이 그 기능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시 젊어질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늙어가고 있습니다. 운동하고 식단조절하고, 각종 건강식품과 성장호르몬의 투여하여 우리의 노화현상을 일시적으로 더디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노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에게 정신적, 육체적 퇴화가 찾아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노화를 정상적으로 받아드려도 인생 최후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죽음입니다.

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흙이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이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죽음이 찾아오기에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이렇게 전도자는 말합니다. 8절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경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노년에 맞이하게 될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드립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에게 찾아오게 될 허무를 담담히 진술합니다.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나우루라는 작은 섬으로 된 국가가 있습니다.
그 섬이 얼마나 작은가 하면 울릉도의 3분의 1 정도의 크기이고, 인구는 1만 3천명입니다.
산호초에 둘러싸여있는 섬인데 오랫동안 새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새가 똥을 싸면 산호충들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인광석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인광석은 화학비료를 만드는 아주 중요한 재료입니다.
나우루 섬은 식민 국가들이 통치를 하다가 1968년 정식국가로 독립했습니다.
동시에 인광석 광산이 국가소유로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농부와 어부, 아니면 외국 자본들의 공장 인부로 살던 사람들에게 돈벼락을 안겨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미 국민소득이 2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무료로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나우루 사람들은 전세기를 타고 주변 국가들을 쇼핑하고 스포츠를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광석이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어서 이내 바닥이 났습니다.
국민들 또한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해서 많은 국민들이 비만과 당뇨 등으로 심각한 건강 문제가 발생겼습니다.
나우루는 2003년 인광석이 바닥났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2005년에 국가파산을 했습니다.
돈 잔치를 시작한지 30년 만에 폭삭 망한 것입니다.

나우루 섬과 인광석 이야기를 축소하면 우리 개인의 인생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명이라는 인광석이 무궁무진하리라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기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죽어야지 하는 사람일수록 죽음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면 화를 냅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천하보다 더 귀한 자기생명을 자꾸 깎아 먹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코끝에 호흡이 멈추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나오루 섬의 인광석처럼 언젠가는 고갈됩니다. 다만 그 시기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수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대부분 살아 있을 때, 특히 젊은 시절, 건강할 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큰 시련을 겪고서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특히 죽음의 고비까지 갔던 분들은 이것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1장

1월 26일(목)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자(전도서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후에 도로 찾으리라.
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for after many days you will find it again.

식물(3899) 레헴(lechem) לֶחֶם          

1. 음식,  2. 레위기 3:11,  3. 레위기 21:8

Pronunciation / 레헴(lechem) 
Etymology / [여] 3898에서 유래
Bible verse / 먹을 것(창 3:19, 출 16:22, 삼상 9:7), 떡(창 14:18, 출 16:8, 수 9:5), 양식(창 28:20, 출 16:32, 왕하 25:3), 음식(창 37:25, 삼하 12:20, 시 102:4), 먹는 음식(창 39:6), 곡식(창 45:23, 잠 28:3, 사 28:28), 몫의 음식(레 22:13), 기념물(레 24:7), 식사(삼상20:27, 34, 왕상 21:4), 음식물(왕하 4:8), 녹(느 5:14, 18), 걸식(시 37:25), 잔치(전 10:19), 열매(렘 11:19).
[동] 먹다(창 43:25, 시 147:9, 잠 28:19), 잡수시다(삼하 12:21).
Old Testament / 297회 사용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 찾으리라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상업적인 말로서 배가 먼 항해를 마치고 그 이윤을 얻어 돌아 올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상품(물품)들을 계속 (바다에) 띄우라는 뜻이다(Hitzig, Delitzsch, Mendelssohn, Wildeboer).
2. 농업에 관한 말로서 곡식의 씨앗을 촉촉한 땅에 뿌려 추수 때에 풍요로운 결실을 얻는 것을 뜻한다(Palm, Baur, Leale).
3. '식물'을 인간 생명의 '씨앗'으로 볼때 성적으로 방종한 자에 대해 경계하는 뜻으로 볼 수 있다(Graetz).
4.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굳세게 지님으로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을 얻으라는 뜻이다(M.A.Eaton).
5. 자선 또는 구제 생활을 권면하는 말로서 남을 위해 선을 베풀고 쌓으면 이내 그것을 좋은 결과로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이다(Leupold, Lange, Ginsburg, Wright).

여러 견해 중에서 자선과 구제 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전도자는 앞에서 자연, 지혜, 인생 등의 허무를 언급한 후여기서는 사람의 사는 인생 동안 남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티브(motif)면에서는 (1)의 뜻을 빌린 것일 수도 있다.
한편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촉구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오며(신 15:10; 잠 11:24, 25; 28:27),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선행을 행할 때 때가 되면 그 결실을 얻으므로 결코 낙심하지 말 것을 언급한 바 있다(갈 6:7-10).

던지라(7971) שָׁלַח 

1. 창세기 38:17,  2. 창세기 43:8,  3. 창세기 37:13

발음 / 샬라흐(shâlach) 

요한복음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하나님은 그의 아들 생명의 떡을 세상이라는 물 위에 던져버렸습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이것을 가리켜 사람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Das Ding)라고 정의합니다.
마치 세상에 버려진 것과 같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절규하실 때 그 처참한 외침을 전능하신 하나님은 듣고 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던져버리셨을 때 다시 찾을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후에 도로 찾으리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지구상에 흩어져 있습니까?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掷性存在)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내 던져버린 아들은 마지막 절규를 이렇게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 - 1976)는 인간을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히틀러에 협조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철학자로서 논리적인 사고를 했느냐는 비판을 받는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와 존재론 및 인식론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철학자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된 것도 아니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히 어떤 시간과 공간에 내던져졌을 뿐이다.
그런데 세계에 ‘내던져진(Gewortenheit) 존재’인 인간은 ‘내던지는(Antwortenhein) 존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신을 어디로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상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니체의 철학에 맥이 닿아 있으며 이천년간 서구를 지배한 기독교와 이성중심주의에 반기를 드는 현상학적 실존주의로 분류된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정신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며 사상적으로 고립된 고아이다. 하지만 인간은 허무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신의 응답을 바라는 역설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존재이면서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 있고,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아울러 감각적으로 반응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관계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을 던져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이루어가는 현존재(Dasein)라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무엇’ 또는 ‘그 어떤’ 속성을 가진 존재로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다.
‘지금’과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 존재(existensia)이고 '무엇이나 어떤'이 본질(essentia)인 존재자다.
또한 내던져졌다는 의미에서의 현존재[Da - Sein]는 ‘거기(there) 있는(being)’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자와 존재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이처럼 내던져진 인간은 허무를 깊이 깨우치고 자신을 던져서 실현하기 때문에 실존(實存)하는 것이고 실존하기 때문에 현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다른 존재는,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자기 존재는 전적으로 자기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한편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무서운 공포감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실존을 이해하는 길이며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하여 허무가 실존으로 바뀌며 억압이 자유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무라는 이름의 죽음에 자신을 내던지면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사르트르가 실존의 개념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많은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거짓명제, 철학적 독약, 언어의 폭동, 철학의 죽음 등으로 비판한다.

전도서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라는 문구에 아라비아 숫자 1자가 난외에서 "새벽"이라고 번역합니다.

새벽이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잠언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부지런히 라는 단어에 아라비아 숫자 2자는 난외에서 "이른 아침에"

김정은, 왜 주한미군 필요하다 했나?
폼페이오 회고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면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가 중국의 변방지역이 된다는 의견을 미국 측에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24일(현지시간) 발간한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 내가 사랑하는 미국을 위한 싸움'에서 역사적인 평양 방문과 북미정상회담 등의 후일담을 자세히 기록했다.

차기 미국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면서 내놓은 국내 정치용 회고록이지만 모두 17개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1장부터 17장까지 북한 관련 내용이 곳곳에 상당량 기술돼 있다.
 
이 가운데 제2장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북미정상회담을 열기로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한 2018년 3월 30일 첫 만남 당시 상황이 상세히 나와 있다.
 
해당 부분에는 '독재자와의 대화'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CIA국장으로서 평양을 방문한 폼페이오의 방문 목적을 정확히 이해한다'면서 자신은 북한을 더 자급자족하는 국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에게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면 북한의 경제가 숨통이 트이고 외국의 투자가 뒤따를 것'이라는 논리로 받아쳤다고 한다. 
 
폼페이오는 그러면서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설파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의 길을 걷는다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는 다르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
비핵화된 북한은 번영할 것이고 북한 체제도 유지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어 중국과 관련해서도 두 사람은 심도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폼페이오는 "과거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기억은 북한의 마음속에 깊이 불타오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중국은 880마일에 달하는 북한과의 국경을 따라 상당한 규모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논의하는 동안, 김 위원장은 미국이 한국과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합동 군사 훈련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나는 또한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중국이 미국 측에 말해왔다고 그(김 위원장)에게 전했다"고 서술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이 중국은 거짓말쟁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은 중국으로부터 북한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 미군이 필요하다, 중국 공산당은 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다룰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폼페이오는 이 대목에서 "정책 입안자들이 알아야 한다"면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미사일과 지상 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북한 사람들을 전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고 적었다.
 
폼페이오는 당시 김 위원장이 세 가지를 약속했다고 소개했다. 
 
핵무기가 북한 경제적 부담이면서 국제사회에도 북한을 장애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인 만큼 완전히 없애겠다,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회신을 가지고 평양을 재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어 8장에는 두 번째 평양 방문과 1, 2차 북미정상회담 뒷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돼 있다.
 
1차 싱가포르 정상회담 과정을 설명하면서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결정권한은 김 위원장에는 없고, 중국이 배후에서 행사하고 있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또 1차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간의 첫 만남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폼페이오는 당시 "존 볼턴이 회담 내내 트럼프 대통령이 가게를 통째로 내줄까 봐 조바심을 냈다"고도 회고했다.
 
폼페이오는 2차 하노이 정상회담을 소개하면서는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 합의정신을 깨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취지로 주장하며 책임을 김 위원장에 떠넘겼다.
 
협상이 깨지자 통역이 말을 옮기지는 않았지만 김 위원장이 욕설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폼페이오는 회고록의 마지막장인 제 17장에서는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열린 미국, 한국, 북한 3자 정상 간 만남이 성사된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각이 달랐던 볼턴 보좌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 역사적 만남에 참여하고 싶었다면서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폼페이오에게 여러 차례 직접 전화했다고 밝혔다.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만 만나고 싶어 한다고 문 대통령에게 설명했지만 문 대통령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폼페이오의 이번 회고록은 역사적인 북미간 정상회담의 성사, 진행, 결렬 과정과 관련된 이면의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서 꽤나 유용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회고록의 제목에서부터 읽히듯이 이 책은 악마화된 북한에 물들어있는 미국 독자들을 겨냥한 '북한팔이용'으로 기획됐다는 비판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제목의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는 표현은 2차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양보하지 않았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회고록 본문에서 사용한 문구다.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즉 '양보'가 필요한 협상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조차 부인하는 그의 비외교적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더욱이 그의 회고록에는 북한에 대한 각종 조롱과 경멸, 빈정거림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북한과의 협상을 "뉴욕의 지하철 바닥을 핥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라고 하는가 하면, 김정은에 대해서는 "피에 굶주린 두꺼비"(bloodthirsty toad),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에 대해서는 "내가 만난 가장 고약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북한과의 협상에서 그가 과연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임했는지 의심케 하는 내용들이다.



진주는 인어의 눈물, 달의 눈물  

진주는 인어의 눈물, 달의 눈물이라고 하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탄생하는 눈물의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보석은 모양과 빛깔에 따라 어울리는 곳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는 사람의 도움없이 스스로 그 찬란한 빛깔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 진주 조개가 잠간 입을 벌리고 먹이를 찾는 동안 날카로운 모래알이 조갯살로 파고 듭니다.
모래는 부드러운 조갯살을 찢게 되고 그 때마다 조개는 자기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감싸기 위해 조개의 피라고 할 수 있는 탄화칼슘을 분비시킵니다.
수천 수만번 이 이물질을 감싸는 동안 영롱한 하나의 진주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조개가 다 진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에는 103,000종류의 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진주가 생길 수 있는 조개는 15,000종류, 보석으로 가치있는 진주를 만드는 조개는 1,300종류. 약 1%정도입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아픔과 고난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고난으로 인해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새롭게 태어나 차원높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패의 순간, 고난과 고통의 시간으로 인해 나와 이웃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인격이 찌그러지고 자학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고난의 순간에, 아픔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켜서 영롱한 진주로, 보석처럼 자신의 삶을 가꾸어 살아가는 걸작품 인생들도 있습니다.
고난을 좌절로 끝맺지 말고,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으며 더 나아가 축복의 자리로 모두 나아가길...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성도들의 받은 은혜와 믿음도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시험앞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강같은 은혜인지?
늪같은 은혜인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마비 같은 은혜와 축복을 조건없이 부어 주신다.
그리고는 반드시 때가 되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험 하신다.
혹독하게 흔들어 보신다.
그 시험에 패스하지 못하면 우리는 재수, 삼수하게 된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한 후에 반듯이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의 실력이 시험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흔드심에서 우리의 영력은 들통이 나고 만다.

동굴과 터널

동굴과 터널

처음에 들어갈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두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굴과 터널입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질 뿐 아니라, 반대편으로 뚫려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다시 들어갔던 곳을 찾아 나와야만 합니다.
왔던 길을 제대로 못 찾으면,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다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일지라도 한 발 한 발 계속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반드시 출구가 보입니다.
터널을 다 나와 뒤를 돌아보면, 걸어서 넘기에는 너무 힘겨운 높고 험한 산을 터널을 통해 직통으로 지나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이러한 터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이유 없이 들어갔다가 고생만 하고 다시 나와야 하는 동굴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위를 쳐다보지 못해 터널이 왜 있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터널을 통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크고 험한 산을 지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터널을 지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갈수록 어두워질지라도 계속 나아가면 출구가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로 주후 4-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날 때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말하였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0장

1월 25일(수)

지혜자의 마음(전도서 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The heart of the wise inclines to the right, but the heart of the fool to the left.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 있느니라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오른편(쪽)'은 의, 능력, 보호 등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시 16:8; 110:5; 121:5; 사 41:13; 마 25:31-46).
그리고 '왼편'은 이와 반대로 불의, 연약함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삿 3:21; 마 25:41).

멕가이버 나이프라는 도구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주머니 칼로 여러 가지 기능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톱, 칼, 병 따개, 깡통 따개, 가위, 송곳, 바늘.....등
맥가이버는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모든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이 구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으로 현실의 불가능을 극복해 나갑니다.
이런 멕가이버와 같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전도서 10장은 지혜와 우매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참 지혜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도 합니다(9장).
하지만 죽은 파리들이 비싼 향기름을 악취 나게 만들 듯이, 우매함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는 악한 영향력이 큽니다(1).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쪽에 있다는 것은 지혜가 사람을 옳은 길로 가도록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비록 업신여김을 받아도 결국에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은 지혜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어리석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지혜는 폭군의 분노를 참아내게도 합니다(4).
정부에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한 일 중 대표적인 것이 합당하지 않은 사람(어리석은 사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6~7).

이런 현상이 세상에 많지만 지혜자는 이런 것들로 희락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명심할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살되, 그것이 우리를 분노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비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희락 자체를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8~11).
우매한 사람은 남을 넘어뜨리려고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고, (어떤 이익을 보려고) 허문 담으로 들어온 뱀에게 자기가 물리고, (자기를 위해서) 돌을 떠내다가 돌에 상하며, 나무를 쪼개다가 그것 때문에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딘 연장으로 열심히 일하니 힘만 들 뿐입니다.
뱀에게 물린 뒤에야 뱀을 다루는 사람을 부름으로써 도움을 얻지도 못합니다.
이것들이 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우매함은 언제나 사후약방문과 같아서, 합당한 시기를 놓치고 정상적인 방법을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부족한 부분을 미리 예측하여 대비합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언어생활에서도 구별됩니다(12~15).
지혜자의 말은 은혜로워서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우매자의 말은 자기를 삼키고(12)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15).
자기 말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것은, 미래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말을 앞세워 말로 자기를 들어내려는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행태가 비슷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부터 어리석고 극단적인 말을 할 뿐 아니라, 말이 많으며(13~14) 자신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말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은혜로워서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지혜와 우매는 정부의 영역에서도 나타납니다(16~20).
철부지가 왕이 되면, 대신들은 아침부터 먹고 즐기는 형국이 됩니다(16).
이런 나라는 지붕이 무너지고 집이 새는 나라입니다(18).
그들은 때를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희락을 추구하며 그들의 해결책은 언제나 돈 뿐입니다(19).
그러나 좋은 나라는 왕이 자격에 합당하고, 대신들은 먹을 때와 마실 때를 분별할 줄 알고, 왜 먹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복을 누리게 됩니다(17).
비록 세상 정부에서 부조리와 악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함부로 저주하거나 악담을 하지 않는 것도 지혜입니다(20).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고대 히브인들에게 보통 오른쪽은 의, 능력, 보호 등을 그리고 왼쪽은 불의, 연약함 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바른 쪽으로 쏠리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그릇된 쪽으로 치우친다는 뜻입니다. 보통 지혜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마음의 지, 정, 의 중에서 특히 지적인 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한다’ 라는 말은 우매한 자가 자신이 어리석다고 스스로 고백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혜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말하고 남들을 가리키려고 함으로써 그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사람 됨과 마음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함정은 악한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파는 구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은 그런 자는 스스로 자기가 넣은 덫에 걸려 위험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담을 허는 자는 건축을 하기 위해 담을 허는 것도 될 수 있지만 이어 나오는 문장으로 본다면 좋지 않은 의도로, 즉 다른 사람의 농작물이나 창고의 물건들을 도둑질하려고 벽을 허무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개 곡물들과 유실수 들은 인가에서 떨어져 있는 한가한 밭에서 재배되고 그런 곳에 창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비록 사람이 감시는 하고 있지는 않지만 담 밑에 살고 있던 뱀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것으로 인해 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을 떠내는 자’는 직업적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채석공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구약 시대 있었던 기업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일정 장소에 세워 두었던 지계석 혹은 경계석을 옮기는 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돌을 캐다가 돌에 치이는 안전사고라고 볼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하늘의 징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술을 하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술은 뱀에게 주문을 외어 마법을 거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 흔히 있었던 술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통 주술사들은 그런 술법을 행하여 뱀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해서 복채를 챙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술객이라고 하더라도 뱀에게 먼저 물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로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원래 목적과 의도로 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하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의 재난은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로, 우매한 자가 높은 자리에 부자가 낮은 곳에 앉고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걸어 다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통치자의 실수와 관련된 한 가지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매자’와 ‘부자’는 단순히 어리석은 자와 돈이 많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명하지 못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자와 그럴 자격과 실력이 되어 당연히 그런 자리에 오르리라고 기대되는 자를 말합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말은 매우 비싸고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주로 외국에서 수입해 왔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귀족들도 나귀나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 말을 종들이 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위치에 처하고 귀하게 여겨질 사람이 낮은 자리에 처한다는 것으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나라의 통치자의 하자로 기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세상이 아무리 불합리하고 거꾸로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제대로 살아야 하고 정도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께서 원래의 만들었던 세상을 곧 회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제 우리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확신합니다. 그것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본이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니까 맥 놓고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는 이 땅을 먼저 회복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교훈도 있다고 봅니다. 이미 그런 권세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재능이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재능을 잘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죄로 더럽혀진 이 세상을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원래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으로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끼가 무뎌서는 나무를 쪼갤 수 없습니다.
칼이 잘 들지 않으면 음식물을 솜씨 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도끼가 믿음직스럽더라도 칼이 유용하더라도 무디고 날카롭지 못하면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재능을 연마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라고 봅니다. 그것은 마치 타이핑을 잘 하기 위해 손톱을 다듬듯이, 잘 뛰기 위해 미리 몸을 푸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꺼이 달성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항해는 출발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우리 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항구까지 즐겁게 항해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9장

1월 24일(화)

음부(陰府)(전도서 9:10)

무릇 네 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음부(7585) שְׁאוֹל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Pronunciation / 스올(sheʼôwl)
Etymology / 7592에서 유래
Bible verse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Old Testament / 65회 사용

* 7592. שָׁאַל 
1. 문의하다,  2. 시편 2:8,  3. 사무엘상 8:10
발음 / 솨알(shâʼal)

무릇 네 손이 일을 ... 다하여 할지어다 -
이는 인생의 행복이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는 것인 바(2:24; 3:13, 22) 진정 낙을 누리고자 한다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음부에는 ... 없음이니라 -
'음부'(스올, 쉐올)란 일반적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사후의 장소로 여겨졌다(창 37:35; 시 31:17; 사 38:10).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과 땅, 땅 아래 등 우주가 세 구분으로 나뉘어졌다고 여겼는데, 이중 땅 아래를 음부로 보았다(민 16:30, 33; 겔 31:15; 암 9:2).
그리고 이들은 이 음부를 생명이 활동하는 이 세상과는 달리 어둡고 그늘진 장소(욥 10:21, 22; 시 143:3). 침묵의 장소(시 94:17; 115:17), 망각의 장소(시 88:12) 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이르러서는 음부에서도 선인과 악인이 구별된다는 사상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다시 신약에 이르러서는 음부란 이 땅에서 죽은 악인들이 최후의 백보좌 심판을 받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거하는 사후 중간 처소인 것으로 제시되어졌다(눅 16:19-31; 계 20:11-15).
한편 전도자가 여기서 이를 언급한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1세기 독일에 살았던 왕 하인리히 3세는 어느 날 왕궁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를 느껴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찾아가 수도원장에게 수도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수도사가 되려는 동기가 올바르지 않다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폐하,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규율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수도사가 되려면 폐하도 이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우리 수도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수도원 원장인 저와 이 수도원에서 지도하는 모든 스승들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거기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알겠소. 그렇게 하겠소.”

“그러면 이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폐하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셔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한 수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자리에서부터 인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면 장차 우리에게 어떠한 환경이 찾아오더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주님은 지옥에 관해 세 가지 개념을 말씀하셨다.

첫째, 지옥은 실재한다

지옥은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되는 말이지만 지옥은 실재한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단어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의 실재를 믿지 않는다. 주님의 재림을 부정하듯이 지옥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부도덕한 삶을 포기하기 싫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다.

둘째, 지옥은 고통의 장소

지옥의 특성은은 고통과 긍휼이 없는 곳이다.
그 곳은 슬픔만 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 된 곳이다. 그 곳에서 하는 기도는 어떤 내용이든 영원히 응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곳은 소망이 없는 곳이다.

셋째, 지옥 시민 

천국에 시민권이 있듯이 지옥에도 지옥시민이 있다.

누가 지옥 시민인가? 성경은 분명히 그 대답을 주고 있다. 거짓과 광신주의 종교인들이며, 거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주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사람들이다(마 7:22~23).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이다(계 21:8).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지옥의 두려움을 희석시키려 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 보다 불신자들이 지옥을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입시지옥, 교통지옥 등등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의 메시지를 애써 외면하고 증거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죽음 저편에 있는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지옥은 우리 주님께서 증거 하신 곳이기에 아무리 불편하고 매력 없는 메시지일지라도 구원의 복음과 함께 증거 되어야 할 메시지이다.

시간에 대한 놀라운 사실 28가지

1. 우리는 일평생 25년을 잔다.
2. 우리는 일평생 10.3년을 일한다.
3. 우리는 일평생 48일 동안 섹스를 한다.
4. 여자는 일평생 17년을 다이어트 한다.
5. 우리는 일평생 9.1년간 TV를 본다.
6. 우리는 일평생 2년간 광고를 본다.
7. 우리는 일평생 1.1년간 세탁을 한다.
8. 우리는 일평생 2.5년간 요리를 한다.
9. 우리는 일평생 3.66년간 밥을 먹는다.
10. 우리는 일평생 4.3년간 운전한다.
11. 우리는 일평생 3개월 동안 교통체증에 갇혀있다.
12. 우리는 일평생 1.5년을 화장실에 간다.
13.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70%를 디지털 기기 앞에서 보낸다.
14. 우리는 일평생 29만번 크게 웃는다.
15. 우리는 일평생 16만KM 를 걷는다.
16. 우리는 일생의 90%를 실내에서 보낸다.
17. 우리는 일평생 약 5천리터의 술을 마신다.
18. 우리는 일년에 2천번의 꿈을 꾼다.
19. 우리는 일평생 40만번 방귀를 뀐다.
20. 우리는 일평생 14일간 키스를 한다.
21. 우리는 일평생 1.2만잔의 커피를 마신다.
22. 여자는 일평생 1년간 옷을 고른다.
23. 남자는 일평생 1년을 여자에 한눈을 판다.
24. 여자는 일평생 8년간 쇼핑을 한다.
25. 여자는 일평생 1.5년을 머리를 하는데 쓴다.
26. 사무직 종사자는 일평생 5년을 책상앞에서 보낸다.
27. 우리는 일평생 2년을 회의에 참석한다.
28. 우리는 일평생 2백만번의 다짐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최초로 쓰기 시작한 말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란 말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후기현대주의 또는 탈현대주의를 말하는데 이는 절대가치나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다원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극도의 인본주의 이론입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그 진리인 성경을 부정하고 미래나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관심하는 세속주의나, 동성애나 근친이나 소아 및 수간까지도 인정해 달라는 도덕적 가치관의 파괴,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무엇이 내게 유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추구하는 어리석은 자아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진리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스스로 비극적 인생이 되기를 자처하는 불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음부(하데스)”라고 하는 말과 ”지옥(게헨나)”이라고 하는 말이 확연히 구별되지 않은 채, 그냥 죄인들이 죽어서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곳으로 혼용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요한계시록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 음부는 죄인들이 마지막에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라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0:28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지옥은 영혼만 가는 곳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들어가 멸망 받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부는 죄인들이 최종 심판을 받기 전까지 영으로 갇혀 있는 구치소라고 한다면, 지옥은 마지막 흰보좌 심판이 끝난 다음 부활체로 몸과 영혼이 함께 형벌을 받는 감옥소라고 할 수 있다.
게헨나라고 부르는 지옥은 천국과 반대가 되는 곳으로, 부활한 성도가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과 대비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태복음 10:28에 나오는 “지옥”의 히브리 원어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수 15:8)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곳은 불경건한 자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은 후에 가게 될 영벌(永罰)의 장소를 가리키는 예표가 되는 곳이다.

원래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약의 “게헨나(gehenna)”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말로,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구약에서는 이곳에 대해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랏나니~“(예레미야 7:31)라고 하였는데, 이 골짜기는 그 후에 재앙이 내려 살육의 골짜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사람의 시체나 죽은 짐승들을 그 곳에 버리고 유황을 뿌려 항상 불이 타게 하여 그곳은 구더기가 들끓고 냄새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골짜기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비유로 그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삼년 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실 때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하시고, 또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7~48)고 하셨는데, 이 지옥은 게헨나라고 하는 흰놈의 골짜기를 지칭하신 것이다.

음부의 권세란 무엇입니까?

음부의 권세” 또는 “지옥의 문”이라는 문구는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마태복음 16:18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

그 당시는 아직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전이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에서 파생되었으며, 이 단어는 "불러냄" 또는 "집회"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라고 부르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구절의 실제 의미에 대해 논쟁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한 더 나은 해석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 도시는 성문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전투가 벌어질 때 도시의 이런 성문은 일반적으로 적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었습니다.
이는 도시의 안전이 성문의 튼튼함이나 힘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 또는 “지옥의 문”은 음부의 힘을 의미합니다.
"지옥(하데스)"이라는 이름은 원래 죽은 자의 영역을 다스리는 신의 이름이었으며 따라서 이런 영역을 종종 "하데스의 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런 영역이 지칭하는 장소는 이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상태에 관계없이 내려가는 곳이었습니다.
신약에서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이며, 이 구절에서 하데스 또는 음부는 그 장소의 힘을 나타내는 성문이 달린 강력한 도시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시겠지만, 이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힘이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음부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워질 것이며, 이러한 권세를 이기고 교회는 번성할 것입니다.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신체는 계속 죽어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더라도, 교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세대가 또 일어나 교회를 이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8-20).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을 힘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제압하고 옥에 가둘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로마서 8:2, 사도행전 2:24).
그리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로마서 6:9), 사망은 더 이상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망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그 힘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러내신” 교회가 이기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구약의 음부 개념의 이해

히브리인들의 음부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구약에 나타난 음부(히, 스올)는 신약의 음부(헬, 하데스)는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
즉 구약의 음부는 단순히 사자(死者)의 처소로만 언급한 반면,
신약의 음부는 보다 구체적으로 악인들이 세상 끝날 최후 심판으로 지옥에 가기 전에 머무는 형벌의 중간기 처소로서, 낙원(헬, 파라다이스)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구약시대보다 신약 시대에 사후 세계에 대한 계시가 더욱 명료히 주어졌기 때문에 생긴 차이이며, 서로 상치되는 일은 아니다.

둘째 구약의 음부 개념은 일차적으로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음부 개념을 반영하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히브리인 자신들은 그 당시 고대 이방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그릇된 음부 개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구약 성경은 신약과 서로 모순되지 않은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결코 그릇된 것이 없다.

따라서 여기는 구약 성경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 음부의 개념에 대해서 다루며 신구약 중간기를 거쳐 신약 시대에 보다 확립된 음부의 개념에 대해서는 ‘사후의 중간기 처소’에서 다시 기록하기로 한다.

1. 음부의 원어적 의미

구약에서 ‘음부’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스올(쉐올)’이며 모두 65회 사용 되었다.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소 견해가 엇갈리거나 이에 대한 유력한 견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단어는 ‘묻다’(to ask)라는 의미를 가진 ‘솨알’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죽은 자가 음부에서 엄중하게 문책을 받는다는 사상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히브리어 ‘솨알’이 히브리어로 ‘요청하다’ 는 의미도 지닌 것에서 착안하여 이 명칭은 음부가 죽은 자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곳이라는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 솨알(문의하다) 7592. שָׁאַל 

1. 문의하다,  2. 시편 2:8,  3. 사무엘상 8:10
발음 / 솨알(shâʼal)


그러나 ‘음부’ 즉 ‘스올’ 이란 단어가 ‘움푹 꺼지다.’(to be hollow)라는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음부가 땅 밑의 움푹 패어진 장소에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이 단어가 영어 성경에서는 ‘움푹한 구덩이’를 의미하는 ‘pit'로 번역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음부를 ’어두침침하다‘ (make dim). ’황폐하게 하다‘(crash) 라는 뜻이 있다.
’솨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음부가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어둡고 횡폐한 곳임을 반영한다는 견해도 있다.

שָׁחַר  7835

1. 어둡다,  2. 검다, 3. 욥기 30:30
발음 / 솨하르( shâchar)
관련 성경 / 검어지다(욥 30:30)
구약 성경 / 1회 사용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모두 나름대로 구약시대 사람들의 음부에 대한 관념이 어떠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음부에 대한 구약의 묘사

구약 성경은 음부를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구분 없이 모든 죽은 자들이 가서 머무는 곳으로 본다.
그리고 그곳은 어둡고 그늘진 곳이며(욥 10:21-22, 시 143:3). 아름다움과 (시 49:14), 만족함과(잠 27:20).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없는 (사 38:18), 침묵의 장소이며(시 31:17). 오히려 고통과 (시 116:3), 잔혹스러움이 있는(아 8:6). 흑암의 장소(욥 10:22). 로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구약시대 사람들은 인간이 죽음으로 영원히 멸절하는 것이 아니라 음부라는 실존의 장소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생각 했으며, 이곳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영역으로 여겼다(욥 26:6, 시 16:10-11).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은 이러한 암울한 음부로부터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하기도 하였다(시 89:48).

3. 음부의 위치에 대한 구약의 언급

죽은 자가 거하는 처소라는 가장 소박한 음부의 개념에 의거하여 일차적으로 음부를 죽은 사람의 시체가 묻히는 무덤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시 141:7).

따라서 KJV는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스올’을 31번이나 ‘무덤’(the grave)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부의 보다 보편적인 용례는 사후(死後)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가는 이 세상과 별개의 처소를 가리킨다.

히브리인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는 하늘(天), 땅(地), 땅 아래(地下)로 나누어지며,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음부는 땅 아래 지하 세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민 16:30,33, 겔 31:17, 암 9:2) . 이곳에 있는 자는 다시 지상으로 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졌으며 (삼하 12:21, 시 26:14), 음부에 있는 자와 교통을 시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범하는 것으로 여겨져 정죄 되었다(신 18:11, 사 8:9).

또한 이곳은 태양 아래 깊은 물 가운데 있으며, 문을 가진 집단 거주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상장되기도 하였다(요일 1 :26:5, 38:17-18, 사 38:9-10).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10.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한편 구약 성경에 나온 음부에 대한 이런 표현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신약의 음부 개념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이때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보다는 사후 세계의 존재 자체를 말하는데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은유적 , 비유적인 표현들을 이용하여 음부에 대해 당대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인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4. 의 의

혹자들은 구약에 나온 음부에 대한 묘사를 고대 근동의 다른 이방 문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과 유사한 신화적 상상의 소산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한 사후의 중간기 처소로서 의로운 자가 거하는 낙원과 대치되는 음부에 대한 신약성경의 묘사와 구약에 나오는 음부의 묘사는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아직 확실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구약시대 사람들이 가진 관념을 사실 그대로 반하되 구약성경 특유의 회화적 묘사나 특히 시가서에서 발견 할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이 가미된 것이라고 모아야 한다.

따라서 그 표현상 다소 혼란을 일으키기는 하나 성경 전체의 계시와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과 근원적인 동질성을 갖는 음부에 대한 기록을 대할 때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에 따라 사는 진지한 삶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8장

1월 23일(월)

얼굴(전도서 8:1)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Who is like the wise man? Who knows the explanation of things? Wisdom brightens a man's face and changes its hard appearance.

얼굴(6440) פָּנִים  

1. 얼굴,  2. 대면 ㉠ פָּנִים אֶל פָּנִים
Pronunciation / 판님(pânîym)
Etymology / 6437에서 유래

* 6437. פָּנָה 

1. 돌다,  2. 창세기 18:22, 3. 향하게 하다
Pronunciation / 파나(pânâh) 

지혜자(2450) חָכָם 
1. 능숙한,  2. 지혜로운,  3. 신명기 4:6
발음 / 하캄(châkâm)
어원 / 2449에서 유래

* 2449. חָכַם 
1. 현명해지다,   2.  피엘형: 지혜롭게 만들다,  3. 푸알형: 지혜로워진
발음 / 하캄(châkam)

해석(6592) פֵּשֶׁר 
1. 해석, 2. 이치,  3. 전도서 8:1
발음 / 페쉐르(pêsher)
관련 성경 / 이치(전 8:1)
구약 성경 / 1회 사용

미켈란젤로가 성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Vulgate)을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제롬은 히브리어로 ‘빛나다’는 뜻의 ‘콸렌qalen’을 ‘뿔’이라는 뜻의 ‘콸란qalan’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났다’는 뜻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빛나다(7160)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 뿔이 나다
발음 / 카란(qâran)
관련 성경 / 광채가 나다(출 34:29, 30, 35). [명] 뿔(시 69:31).
구약 성경 / 4회 사용


뿔(7162) קֶרֶן  
1. 뿔,  2. 다니엘 3:5,
발음 / 케렌(qeren)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뿔(단 7:7, 20, 24)
구약 성경 /14회 사용

믿음이란 높은 뜻 관심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모두 보인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 중에 있구나!

지혜자(智慧者)
- 사리의 해석(사물의 이치)을 아는 자
* 사리(다바르. דָּבַר)
-말씀을 해석하는 자

하캄(châkâm.  חָכָם) 능숙한, 지혜로운
- 사리의 해석(사물의 이치)을 아는 자
* 사리(다바르. דָּבַר) 말씀
                * 해석(페쉐르. פֵּשֶׁר) 해석, 이치
- 말씀을 해석하는 자

격물치지(格物致知)
격식 격(格), 물건 물(物), 이를 치(致), 알 지(知)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함.


모세의 머리에 솟은 뿔은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피렌체 최고의 명문 가문인 메디치가에 속한 로렌초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 철학과 신화에 익숙했던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형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예술적 이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고대 신화에서 ‘뿔’은 대개 ‘영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모세 像에 뿔을 덧붙임으로써 모세를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 사람,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한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타난 까닭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 빛은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어떤 것일까요? 창조의 첫날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3) 했던 그 빛일까요?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춘 참 빛이었을까요? 무엇을 의미하든 빛은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진리가 마치 섬광처럼 우리 삶을 비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다보면 어떤 빛이 섬광처럼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 욕구와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빛 말입니다. 평생토록 한 번도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시 82:5)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강 하구에서 썩은 물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갈매기들은 높이 그리고 빨리 날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는 동료 갈매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인력에 끌려 하늘을 잊고 사는 이들은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유다서의 표현대로 “불만에 싸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유1:16) 길 잃고 떠도는 별들인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은 짙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조명을 자주 받아 거의 밝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 성자라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드러난 환한 빛은 하나님을 만난 이가 맛본 기쁨과 경외심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의 앞부분에는 구름에 싸여 내려오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 34:6-7)



전도서 8장의 개요

8:1 지혜자의 얼굴
8:2∼9 왕의 명령 앞에서
8:10∼15 모순된 현실 앞에서
8:16∼17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솔로몬은 지혜자를 가리켜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사리에 맞는 것만 합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모하게 처신하기 쉽습니다.

지혜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가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잠시 잠깐 후면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시고 자기를 품에 안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한 일을 맞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우매자의 특징은 마음이 급하여 성급하게 노를 발합니다(전 7:9)
그러므로 우매한 사람은 적은 일에도 쉽게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그 은혜가 지혜로운 자의 얼굴처럼 환하게 은혜롭게 광채로 빛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나운 표정은 그 모양이라도 흉내내지 마세요.
근심, 걱정, 어두운 그늘이 여러분의 얼굴에서 다 사라지고 언제나 은혜가 충만하고, 덕스럽고, 밝게 웃는 얼굴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곧이어 솔로몬은 2절 이하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왕이 옳지 못한,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인지 2∼9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모순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잘되고, 또 악인들은 잘못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형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순된 현실입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이것에 대해 10∼15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이 차이입니다.
그러니 이 작은 머리로 어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지혜로운 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16∼17절 말씀에 나옵니다.

잠언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의 한 쪽에 강하고 위엄 있고도 친절하며 존경스럽게 보이는 그 얼굴을 매일 바라보며 기뻐하는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마을에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그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그 전설에 대하여 담소하고 있을 때 드디어 어떤 사람이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입니다."
우리가 진정 누굴 닮기 원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며 바라볼 때 우리도 그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조금이라도 닮아 가는 일이 아닐까요,


믿음의 얼굴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둘기처럼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공작새처럼 과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외모를 과시하고 돈의 권력을 과시하며 명예에 굶주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얼굴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과거의 이력서요, 현재의 현황판이요, 오늘을 알리는 게시판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에 신앙이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공작새의 깃털이든, 비둘기의 눈이든 무엇인가를 닮게 마련이겠죠.
비오는 날도 아름답게, 바람 부는 날도 감사하게 항상 주를 찬양할 수 있는 힘은 참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입니다.


장래 일(전도서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Since no man knows the future, who can tell him what is to come?


돌고래를 죽인 기생충

얼마 전 미국 해안지방에 돌고래 떼가 밀려 왔다.
과학자들이 '죽음을 자초'한 이 어리석은 돌고래들의 집단이탈에 대하여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돌고래는 음파를 이용하여 물의 깊이를 재는 능력이 귀에 있는데 그만 귓속에 기생충이 생겨 청각 장애를 일으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기생충의 서식으로 물의 깊이를 잘 알지 못했던 돌고래들은 해변을 깊은 물로 착각했고 죽음을 향해 스스로 돌진했던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삶에 큰 어려움이나 시련은 아주 큰 재난으로부터 오기보다는 작은 미혹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기생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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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무나(emunah. אֱמוּנָה) 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의미는 "확고함, 안전, 신뢰성" 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예를 들어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뜻은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다.
이런 가치는 기본적으로 그 주체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내는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살아냄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신 분이다(롬 3:21-26).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믿는자들이라면, 이들 역시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

믿음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fides인데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faith)에 해당하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ef)에 행동이 더하여진 개념이고, 한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믿음(belief)이 아니라 평생 일관되게 사는 삶을 뜻한다.

믿음(faith)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어려운 점은 이 단어를 동사로 표현할 때 거기 알맞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 동사는 피스튜오(pisteuo, πιστεύω)인데 여기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말이다.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믿음을 실천하다" "믿는대로 살다"라는 뜻을 지닌 faithize가 아닐까 싶다.
영어 성경은 그리스어 동사 pisteuo를 "to believe"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 동사는 belief의 동사이지 faith의 동사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어 pisteuo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영어동사가 없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 하나는 "믿음"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표현하는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고, 특정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그친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어 pisteuo를 "believe"가 아니라 "faithize"로만 이해한다 하여도, 이러한 번역상의 위험성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물론, "faithize"조차도pisteuo의 의미를 충분히 살린 단어라고는 볼 수 없지만, pisteuo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2바울서신이나 목회서신에서 사용된 pistis나 pisteuo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faith이 아니라 belief의 의미로 사용되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용법은 분명 복음서나 바울의 진정성 있는 서신에서 사용된 용법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제2바울서신이나 목회서신에 나타난pistis는 belief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http://m.pckworld.com/article.php?aid=9655611232



성경의 큰 숲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성경 66권을 물고기 모양(익투스) 위에 7개 트랙으로 그려서 구분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던 시기에 익투스가 기독교인들을 확인하는 서로의 고백이 됐듯이, '통 7트랙'그림이 성경 전체를 역사순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면 좋겠다.

'통 7트랙'은
1. 모세5경
2. 왕정 500년
3. 페르시아 7권
4. 중간사 400년
5. 4복음서
6. 사도행전 30년
7. 공동서신 9권이다.

7개 트랙은 각각 다른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수렴된다.

첫 번째 트랙은 '모세5경'이다.

모세5경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부터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으로 제사장 나라를 삼으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모세5경을 또 다른 말로 축약한다면, 구약의 제사장 나라의 중요한 키워드인 율법과 선지자 중 '율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제사장 나라의 법'을 주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까지 1500년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준이었다.
그리고 모세5경 트랙에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까지 포함해 하나의 트랙으로 구분한다.
왜냐하면 '왕정 500년'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트랙은 '왕정 500년'이다.

왕정 500년은 사울 왕에서 시작해 시드기야 왕까지 이스라엘이 왕의 통치를 받은 약 500년을 말한다.
이 기간을 크게 세 단계로 보면,
1단계 120년은 통일왕국으로 사울, 다윗, 솔로몬이 각각 40년씩 나라를 다스린 시기이며,
2단계 200년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 두 국가가 되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된 시기이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함으로
3단계 150년 동안 남유다만 남게 되지만, 남유다도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왕정 500년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선지자를 보냈는데, 사무엘부터 예레미야 선지자까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자신의 뜻과 세계 경영을 깨닫게 했다.

세 번째 트랙은 '페르시아 7권'이다.

페르시아 7권은 구약성경 가운데 페르시아 제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책으로 다니엘, 에스라, 학개, 스가랴, 에스더, 느헤미야, 말라기다. 페르시아 7권 트랙에 에스겔을 포함하는데,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남유다 백성들을 설득해 제사장 나라를 다시 세울 '유대인'으로 훈련시키고 격려하는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 제국이 70년 만에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새로운 제국의 주인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바벨론 제국이 각 나라로부터 데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정책으로 남유다 백성들도 예루살렘으로 3차에 걸쳐 귀환하게 된다.

네 번째 트랙은 '중간사 400년'이다.

중간사 400년은 구약과 신약 사이, 즉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의 400년 역사다.
400년 동안 세계 역사는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으로 변동했다.
이 기간에 모세오경이 헬라어로 번역돼 세계화됐으며, 유대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트랙은 '4복음서'이다.

4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말한다.
성경은 요약과 압축의 책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의 행적만큼은 무려 네 명의 저자를 동원해 풍성하게 알려주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먹이고, 고치고, 가르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셨고, 때가 차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제사장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완성하셨다.

여섯 번째 트랙은 '사도행전 30년'이다.

사도행전 30년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 성전모독자, 자칭 유대인의 왕, 부활을 속이는 자'라고 주장하며 복음 전파를 방해한 산헤드린공회 세력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성전의 주인, 만왕의 왕, 부활의 첫 열매'라고 증거하는 사도들 간의 '30년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사건에서부터 로마 대화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30년은 유대교 유대인들의 지독한 복음 전파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상명령인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기간이다.

일곱 번째 트랙은 '공동서신 9권'이다.

기독교가 A.D.64년 로마 대화재 사건의 방화범으로 지목된 이후 성도들을 향한 로마 제국의 핍박과 박해가 점점 더 강해졌다.
게다가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는 일까지 더해지자 당시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복음 1세대 지도자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음 2세대에게 쓴 편지가 '공동서신 9권'인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 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이다.
이 책들은 시기적으로 보면 A.D.64년 이후에 로마와 기독교가 대결하는 가운데 주로 쓰인 책이다.
물론 야고보서는 그 이전에 쓰였지만, 내용상 '공동서신 9권'에 포함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복은 이른바 오복(五福)으로서 부귀(富貴) 장수(長壽)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주로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복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물질과 육체와 자손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창 13:14-16, 신 28:1-14).
하지만 본문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아쉬레 하이쉬'(האיש אשרי)는 직역하면 '사람의 복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가장 크고 가치있는 복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들'에 해당하는 '아쉬레'의 기본형 '에쉐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이라는 단어는 '바라크'와 '에쉐르'가 있습니다.
'바라크'(ברך)는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과 육체와 자손에 관한 육신적인 복을 말하고,
'에쉐르'(אשר)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에쉐르'(אשר)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누리는 행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과 육체와 자손이 잘되는 것도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크고 가치있는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기쁨과 행복감입니다.

1.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모두 악인에 대한 동일한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윤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신앙적인 기준에서 말한 것입니다.
성품이나 행동이 못된 나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자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자기 욕망과 방식대로 살아가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곧 불신자를 말합니다.

복은 소극적인 면에서 보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악인들의 생각을 부러워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행동하는 것마다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의 방식대로 하려 합니다. 그런 죄인들의 행동에 함께 동조하거나 동행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 말씀을 비웃고 조롱하며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 오만한 자들과 함께 패거리가 되어 함께 거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은 가치가 없고 결과가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4절에 "악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했습니다. '겨'는 곡식에서 알맹이를 제거한 쭉정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가 곡식을 거두어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떱니다. 그리고 그 떤 곡식을 바람이 불 때 공중으로 날리면 알맹이는 땅에 떨어지고 겨는 바람에 날라 갑니다. 그렇게 해서 알맹이는 거둬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을 지피는데 사용합니다. 악인은 그 인생이 참으로 무가치하고 비참합니다. 악인의 삶은 그 얻은 것으로 잠깐 기쁨을 얻기는 하지만 그 기쁨은 잠깐이고 불만족과 불평과 분노가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평생에 행복감이 없습니다. 인생이 마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 남은 것을 다른 사람이 사용합니다. 가치있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해서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죽은 후에 누구도 그의 인생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그렇게 없다고 주장했던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맙니다 (마3:12, 25:31-46, 계20:11-15, 눅16:19-31).  

 2.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복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복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말씀을 말합니다. 율법을 즐거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되새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이 어떻게 경륜하시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후3:15-17). 그 하나님 말씀을 접하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기쁨과 소망이 생깁니다. 그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되새김질을 할 때 확신과 능력이 생깁니다 (시19:10). 예) 에쉐르(אשר)-마카리오스(μακαρισμοs)-블레씽(blessing←bleed)   

  그 이유는 그 삶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이 뿌리가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잎이 마르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물을 흡수하여 잎을 푸르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서 계속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 삶 자체가 행복합니다. 삶에서 의인에게도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시34:19, 119:71, 살후1:5, 딤후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기쁨이 있고 그 말씀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 행복감은 세상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주며 고난으로 인한 고통을 뛰어 넘는 만족을 줍니다. 예) 몰핀(morphine)과 엘돌핀(endorphin)과 다이돌핀(didorphin). (욥23:10, 빌2:17-18, 4:12, 고후12:9-10, 고후6:9-10).

우리에게 복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가치있는 복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열심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과 목적 안에 들어있는 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와 간섭과 인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행복감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에 그런 행복감으로 승리하길 위해 주일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7장

1월 21일(토)

아름다운 이름(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이 출생하는 보다 나으며.
A good name is better than fine perfume, and the day of death better than the day of birth.

인도의 간디가 외쳤던 말
왜 너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느냐?

유명한 인도의 간디가 “예수의 교리도, 예수의 교훈도, 예수의 가르침도 훌륭한데 너희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고백을 했다합니다.

내가 사관학교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내가 군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의과대학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왔다고 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오늘 우리가 교회에 들락날락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는 성경을 찾아봐야 됩니다.
어떤 새 신자가 성경을 두 번 통독하고 난 다음에 먼저 믿는 신자에게 교회사 책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라고 물으니 “읽어봐야 되겠다.”고 해서 “왜 읽으려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언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서 교회사를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라고 했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칭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업이 아니라 전업이 되도록 합시다.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의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18세기에 독일에서 훌륭한 목회를 했던 진 프레드릭 오버린 목사가 모처럼 겨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고, 꼼짝없이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마차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오버린 목사를 발견하고는 마차에 태워 인근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게다가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방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버린 목사는 무척 고마워하면서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당신은 목사님이시죠?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시나요? 저는 목사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실 때까지 제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귀다툼으로 얼룩져 있는 이 시대에 한 겨울의 모닥불과 같은 사람!
당신도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며 살고 싶습니다. 저희도 이름 없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2896) 이름(8034)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 나으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어떤 살마에 대한 단순한 외적인 회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쓰였던 바,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훌륭한 '명성'을 가리킨다(Luther, M.A.Eaton, Lange, G.A.Barton, T.H. Leale).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간주했다(8:10; 욥 18:17; 잠 10:7).

그리고 '기름'이란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지경의 감람나무 열매에서 채취하는 식물성 기름을 말하는데, 이는 그 용도 면에서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  식용(출 29:2,23; 레 2:1,2,4-7),
2.  등화용(출 25:6; 27:20),
3.  의료용(사 1:6),
4. 화장품용(삼하 14:2; 시 23:5),
5. 향유용(눅 23:56) 

특히 이는 팔레스틴 지역과 같이 건조한 기후 여건 속에서는 그 몸에 기름을 발라 향기를 내는 데 유용하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룻 3:3;삼하 12:20;시 45:7,8;암 6:6 참조).
또한 본절 후반절의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란 전반절의 의미와 연관되는 듯이 보인다.
즉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좋은 명성을 쌓으며 살다가 죽는 것이 어리석고 우매한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살지도 모르는 삶의 시작이 날보다 낫다는 것이다(D.R. Glenn).
그러나 전도자는 삶보다 죽음을 더 애찬하는 염세주의자로서 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도자는 인간의 모든 삶의 축복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3:13;5:!8), 인간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2:13).
단지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명성을 얻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 7장 흐름 정리

지혜의 유익과 가치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원래 사람은 정직한 존재로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간사한 꾀를 많이 낸다(29절).
그러므로 온갖 탐욕과 죄악 가운데서 일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는 인생의 비극을 통해 진지하게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2절).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슬픈 일도 만나고 기쁜 일도 만난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들을 번갈아 겪게 하시는 것은 이러한 갖가지 일들을 통해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다(14절).
물론 이 지혜는 얄팍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얻게 되는 신령한 지혜를 가리킨다.

전도서 7장 줄거리

1. 헛된 삶을 값진 삶으로 바꾸어 놓는 아름다운 이름과
2. 금욕과
8. 인내와
11. 지혜를 갖는 것임.
23. 지혜자가 되는 어려움.


전도자는 7장에서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무엇에 유념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1-4).

아름다운 이름이 값비싼 향유보다 낫습니다.
사람의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중요합니다(1).
초상집에 가서 자기도 돌아갈 인생의 결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잔칫집에서 즐기는 것보다 낫습니다(2).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생각 없이 웃고 사는 것보다 좋습니다(3).
마음이 인생 종말의 순간에 가 있느냐 쾌락을 즐기는데 가 있느냐는 지혜와 우매를 가르는 시금석이 됩니다(4).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덧없는 세상의 값비싼 기름을 아끼느라 예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이름을 포기하고 있으며, 죽음의 날에 가장 후회할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항상 책망을 들을 귀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5-7).

어리석은 자는 칭찬의 노래 듣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솔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처럼 요란하지만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책망 듣는 것이 좋습니다.
책망은 잠시 심령을 아프게 하지만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자기를 온전케 하는 것의 기쁨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혜자가 책망 듣기를 그치고 도리어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향해 학대할 궁리를 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으로 변질 될 것이며, 또 총명한 사람이 뇌물을 받고 바른 말을 굽히게 된다면 결국은 망하는 길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시간의 길이는 그의 지혜의 길이입니다.


지혜자의 태도(1-7절)

12장으로 된 전도서는 1-6장에서는 해 아래에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한 것임에 대해서,
7-12장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 해 위를 구하는 삶에 대해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해 위를 구하는 삶의 문을 엽니다.
또 전도서의 본론 부분에는 4개의 설교(강화)가 있는데, 세 번째 것이 6:1-8:14까지입니다.
6장이 해 아래서의 삶의 허무함에 관한 한숨이었다면,
7:1-8:14은 그 한숨을 어떻게 생명의 숨인 하나님의 숨으로 바꾸어 가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본문 1-7절은 ‘지혜자의 태도’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기름’은 감람(올리브)나무에서 추출한 감람유(올리브유)입니다. 이 기름은 식용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 피부의 건조함을 막는 의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사용되었고, 잔치와 장례에도, 성전에서 불을 밝기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왕궁의 보물목록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은 ‘재산’이나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이름’과 ‘기름’이 끝 자가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첫 글자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름과 기름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기름(재산, 재능)과 이름 중 무엇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을 하면 언제나 ‘기름’ 쪽으로 천칭이 기웁니다. 종종 “이름이 밥 먹여주나?”라고 이름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갈수록, 살아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수록 ‘이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지나온 세월동안 ‘기름, 기름, 기름’하며 살았던 세월이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마음이 편하기로 하면 장례식장보다 결혼식장이 훨씬 낫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울지만, 결혼식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습니다. 무엇보다도 결혼식장에는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과거 가난한 시절에 결혼식은 평소에 먹지 못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도 음식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배불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90년 100년 동안 살며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면 그래도 낫지만, 어린 자녀들을 둔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아 있는 가족들은 삶의 궤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 부모는 돌아가시면 뒷산에 묻지만 자녀는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녀를 잃은 장례식에 조문을 가면 목회자도 마음이 눌립니다. 또한 아주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나 친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에게도 불현 듯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하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확실히 결혼보다는 죽음(장례) 앞에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7)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꾸지람이나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꾸지람과 책망을 들을 때는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대가 말하는 것이 거의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의 내용은 틀린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중심으로 듣고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탐욕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솔로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산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는 최고의 지혜가 있었지만, 국력을 더 크게 하고, 자신을 세상에 더 드러내게 하려는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지혜자였던 그는 나라를 두 동강나게 한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뇌물에게도 사람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뇌물에 오염이 되고나면, 명철은 사라지고 맙니다.


더 나은 선택(8-14절)
8-14절은 ‘더 나은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중학교 때의 성적은 고등학교에 갈 때에 필요하고,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교 갈 때에 필요합니다.
물론 대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원이나 취직할 때에 필요합니다.
지금 직장에서 은퇴할 때가 다 되었는데, 초.중.고등 시절의 성적이나 받은 상장을 자랑한다면 정말 미련한 것입니다.
독일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Ende gut, alles gut)’는 말이 있습니다.
바른 끝맺음은 이전의 삶을 아름다운 의미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은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조심해야할 1번이 교만이고, 2번도 교만이고, 3번도 교만입니다. 물론 99번도, 100번도 교만입니다.

우리에게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유익한 경우는 비록 지금 삶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위한 경우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발판삼아 현재를 새롭게 수용할 때는 유익하지만, 현재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고, 낙심과 절망에 있게 하는 것이라면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무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끊임없이 애굽에서 있었던 일, 특히 거기서 값없이 먹었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등을 떠올리며 불평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지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표준새번역. 12)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

돈과 지혜가 사람을 함께 보호하지만, 목숨을 살려내는 것은 지혜라고 합니다. 돈이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도 많은 도움을 줄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와 질문 앞에서는 결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지혜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 지혜만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직 위로부터만 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습니다.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하시기 때문이거나 우리를 외면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으로, 또 최상으로 충분히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안다면, 우리가 더 바르게, 더 신실하게,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섭리’의 ‘섭(攝)’자가 ‘당기다. 쥐다’의 뜻입니다. 그 한자에는 ‘손 수(手)’ 변에 ‘귀 이(耳)’ 자가 3개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그 듣는 것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삶으로 듣는 것이고, 과거를 듣고, 현재를 듣고, 미래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은 지혜입니다.

절제와 바른 선택(15-22절)
15-22절은 절제와 바른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15절에 있는 것처럼 의롭게 살아도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도 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장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의로운 삶과 악한 삶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지킬박사인데, 어떤 날은 하이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또 의롭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굉장히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그가 자신의 의로움을 과도하게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 악하게 사는 것만 해도 바르지 않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더 과도하게 악한 일을 행하다가 자기가 행한 악에게 무너지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또 인생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무궁함(23-29절)
23-29절은 ‘지혜의 무궁함’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전도자는 궁극적인 지혜를 찾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혜가 우리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만 영원한 지혜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자가 인생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이렇게 고백하며 오늘 본문의 막이 내립니다.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한 길-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를 범한 이후로 언제나 ‘여러 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꾀를 낸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제 3의 길, 제 4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그것이 더 낫겠다고 우기곤 합니다. 하지만 지나고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길이 더 옳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인간의 지혜 또는 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놓여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지만, 그 결과도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음으로 진정한 새해로 엮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을 더 좋아하고, 지혜보다는 재물을 선택하고, 형통할 때는 즐거워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곤고한 날에는 비관과 절망으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함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언제나 우리의 귀를 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정한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6장

1월 20일(금)

폐단(弊端, 7451)(전도서 6:1)

내가 아래서 한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I have seen another evil under the sun, and it weighs heavily on men:


폐단 폐(弊),  끝 단(端) - 단정할 단

7451. 라( raʽ)  רַע
1. 나쁜,  2. 사악한,  3. 해로운

어원 / 7489에서 유래  רָעַע

1. 깨뜨리다,  2. 악하게 되다,  3. 히필형 הֵרַע
발음 / 라아(râʽaʽ) 

큰 폐단( 라아 홀라) -
문자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악'(a sore evil, KJV; a frievous evil, RSV, NASB)이란 뜻이다.
특히 '폐단'으로 번역된 '라아'는 '상하게 하다', '해(害)하다', '악하게 행하다' 등에서 유래된 말로 '악(한)', '해(로운)' 등을 뜻한다.
본서에서 이는 ''(2:21)로도 여러번 번역되었으며 본 구절에서도 이 뜻으로 본다.

오늘 말씀은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불행한 일"이라는 말은 본래 재앙’이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만,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살아가는 일을 허무하게 하는 어떤 일, 마음이 무거워 살아갈 힘도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무리 많은 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부요함과 재물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2절). 뼈 빠지게 일하고 수고한 그 사람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반면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다 차지하고 마음대로 쓰며 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라는 말입니다. 온갖 계획과 재주와 노력과 가진 것을 다 투자하여 이루어 놓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가로채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하여 재산을 축적하여도 그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까?

전도자는 백 명의 자녀를 낳으면서 장수한다고 하여도, 평생 마음에 낙이 없이 살다가 죽고, 또 죽을 때는 제대로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면, 이런 인생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못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낫지 아니하냐고 묻습니다(3절). 자녀가 백 명이어도 그 마음에 즐거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낙태된 자는 모태에서 생겨났으나 태어나지 못하고 죽으니 그 인생이 헛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는 뼈 빠지게 일하고서도 남 좋은 일만 시킨 사람의 인생보다는, 조용하고 편한 인생을 살다가 간 것이니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6절의 말씀처럼,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엄청난 부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백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아무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말합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즐기고자 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즐기거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식욕은 결코 채워지지가 않습니다(7절).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 인생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낙이 무엇인줄 아는가?”(12절) 묻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 옳은 것,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알며, 무엇이 불행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분별하실 수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로 다른 관점을 가지도록 유도합니다. 아버지의 수고로, 아버지는 먹지 못하나 아내와 자식이 배불리 먹게 되듯이, 왕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다스림과 열심과 섬김으로 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듯이, 정작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러한 삶이 진정한 낙이며, 의미이며, 가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여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 수고하여 다른 사람을 먹이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낙”이며, “기쁨”이며, “가치”이지 않겠습니까?

1. 6:1∼2 인생의 첫번째 폐단
2. 6:3∼6 인생의 두번째 폐단
3. 6:7∼9 인생의 세번째 폐단
4. 6:10∼12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전도서 6장에서 해 아래 인생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세 가지의 대표적인 폐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들이 당하는 불행, 고통스러운 일을 말합니다.

폐단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전도서에서 4구절에 사용됩니다(5:13, 16, 6:1, 10:5)

한국인의 오복(五福)

1. 수(壽)
2. 부(富)
3. 유호덕(攸好德)
4. 강녕(康寧)
5. 고종명(考終命)

속담에도 ‘복’에 관련된 것은 많이 보여진다.
‘보고들이 온 날 문 닫는다’,
‘복 없는 놈이 가루 장사하려니까 골목 바람이 내분다’,
‘복은 쌍으로 안 오고 화는 홀로 안 온다’,
‘복 있는 과부는 앉아도 요강 꼭지에 앉는다’ 등 참으로 포복절도하고 남을 만큼 기발한 속담으로 많다.
그러나 이 뜻을 보면 그 어느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니 신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복이란 한자는 원래 ‘시(示)’와 ‘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시’는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복’의 한자 어원도 역시 복의 뜻이 가지는 두 함축, 곧 사람의 힘을 초월한 운수라는 뜻과 오붓하고 넉넉하다는 뜻의 함축을 풀이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복(福) = 보일 시(示) + 항아리 복(畐)<가득할 복>
복(福) = 보일 시(示) + 한 일(一)  + 입 구(口) + 밭 전(田)     



어리석은 부자 - 어리석은 신앙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약속한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영원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원이 아니라 땅의 것에 집착하며 땅에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가?

솔론의 명언

말이란 행위의 거울이 되게 하라
. ​
부당한 이득에는 늘 재앙이 뒤따른다.
타인의 행복을 ​시기하지 말라

어리석은 부자(푸념)

어리석은 부자의 푸념

푸념 : 마음에 품은 불평을 말하는 것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본문의 주인공은 부러움의 대상인 부자이다.
부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요즈음과 같이 경제를 우선시하는 시대에는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숨은 노력과 경영의 지혜가 있어야 하고, 운과 기회도 따라야 될 수 있다.

본문의 부자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만큼 주인공은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돋보이는 지혜가 있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경영의 지혜를 의미한다.

“더 큰 곡간을 지어 생산한 농작물을 잘 보관하였다”는 것은 관리의 지혜가 있음을 말한다.

그는 또한 쌓아 놓기만 하는 부자가 아니라 즐길 줄도 아는 소비의 지혜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셨다.
어느 민족보다 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어리석다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형제에게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다(마 5:22).
여기에서 ‘라가’는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인데, ‘속이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속이 빈 멍청한 바보라는 뜻이다.
바보같다는 비하 발언만으로도 큰 욕이 되며 지옥 불에 던져질 정도의 큰 죄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를 중요시하였음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인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로 전락하였다.

마태복음 5:22b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4469, 라카)
-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ῥακά 스트롱번호 4469

1. 욕설적인 말, 2. 아람어로 - 텅빈 사람, 3. 바보

발음 / 라카(rhaka) 
어원 / 히브리어 73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라가(마5:22).
신약 성경 /1회 사용

미련한 놈(3474,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μω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74

1.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 어리석은
2. 마 5:22
3. 막 7:13
발음 / 모로스(mōrŏs)
관련 성경 / 미련한(마 5:22), 어리석은(고전 1:25, 4:10, 딤후 2:23, 딛 3:9).
[명] 어리석은 맹인(마 23:17), 미련한 자(마 25:3), 어리석은 자(고전 3:18).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3466.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1. 비밀,  2. 신비,  3. 마태복음 13:11

발음 / 무스테리온(müstēriŏn)
어원 / μύω ‘입을 다물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밀(마 13:11, 눅 8:10, 살후 2:7).
신약 성경 / 28회 사용


왜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어리석은 실패자로 규정하셨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중심적 인물이었다.
누가복음 12:17-19 3절에는 ‘’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부자는 오직 자신만을 앞세우는 이기적 인물이었다.
이기주의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나타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현상이 있다.

첫째,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이 없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에 누구에게도 감사할 수가 없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농사지을 다른 방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부자가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고, 감사는 더더구나 있을 수 없었다.

둘째, 함께 살아갈 이웃이 없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가난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부자의 눈에는 그런 이웃이 보이지 않았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었다.
당시 농사는 노동집약적이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야 지불했겠지만, 그 외의 다른 배려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부자는 영혼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영혼과 생명에 관한 한 그는 백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였다.
물질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며 요긴한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되면, 물질은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뀐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부자의 쌓아 놓은 재산은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우상이었다.
그는 물질이 생명을 유지하거나 연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혼의 평안과 즐거움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런 물질만능주의는 갖가지 위험성을 안고있다.
곧 물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는 가치관의 도착, 이기주의, 지나친 경쟁, 관계성의 파괴, 하나님의 상실과 쾌락주의 등이다.

물질 의존적 삶의 마지막 도착지는 쾌락을 행복으로 혼동하는 향락주의이다.
행복과 쾌락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행복이 영속성을 지닌 보람으로 삶의 창조적 원동력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면, 쾌락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이며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인간을 향락의 노예로 삼는 마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실존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절대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마음 중심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이웃과 나누는 삶, 물질 우선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혼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우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삶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4무(四無)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물질적으로는 차고 넘치지만 성경의 부자처럼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에게 없었던 네 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이웃을 향한 나눔이 없었습니다.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 넓은 토지와 큰 창고와 많은 곡물은 혼자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하인들이 땀 흘리며 고생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자기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 고생한 사람들을 배려했어야 하고 또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둘째, 돈은 많았으나 지혜는 없었습니다.

돈을 버는 방법을 잘 알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상에도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없는 부자들이 많습니다.

셋째, 생명의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물질의 주인도, 생명의 주인도, 시간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물질도 거둬가시면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생명도 거둬가시면 모든 것을 다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넷째, 천국에 대한 준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부자의 마음은 오직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농토를 늘리고, 창고를 넓혔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농토에 농토를 더하고, 가옥에 가옥을 더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쌓아두는 재물이야말로 썩지 않는 재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4무 인생을 4유(四有) 인생으로 바꾸어 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땅과 육에 속하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고 하늘에 속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자가 되는 재주와 어리석은 자가 되는 재주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운도 따라야지만 특히 오늘과 같은 과학적 산업시대에서는 하나의 재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나 재산을 모을 수는 없다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재산에 대한 태도가 늘 문제시되고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내리신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를 뚫고 나가는 것이 더쉽다"(마태 19:24 : 마르 10:25)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루가 6:20)

마치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불행하고 나쁜 일인 것처럼 들리지만 복음성서의 교훈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음서에서 경고하는 부자는 탐욕스러운 부자, 돈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인생관의 소유자를 규탄한다.
그래서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고 하였고 특히 제자된 사람들은 가난의 정신으로 살 것을 권고하였다.
오늘 대목에서 바로 그 가난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써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생을 돈에 걸지 말고 하느님께 걸라는 종교적 교훈이 그 가난의 정신이다.

부자에는 세가지 종류의 부자를 들 수 있다.

1. 악한 부자 (탐욕스러운 부자)
2. 어리석은 (바보) 부자
3. 똑똑한 부자

가난뱅이에도 세가지 종류를 꼽을 수 있다

1. 악한 가난뱅이
인생을 악하게 살면서 무책임하게 방탕하는 자를 가리킨다

2. 무능한 가난뱅이
게을러서 제 밥을 찾아먹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

3. 마음으로 가난한 이
마음으로 가난한 것은 복음서의 용어이지만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 보다 더 귀중하고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마음으로 부자이다.
없어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똑똑한 부자는 아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를 놓고 말한다.
비유 이야기의 도입구로서 군중의 어떤 사람이 예수께 유산분배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서에만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위선자가 되지 말고 하느님의 섭리에 굳게 의지할 것을 제자들에게 훈시하는 대목으로 이어지다가 느닷없이 재산문제가 끼어드는 것이 좀 이상지하만 위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세상살이하는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독립적인 단화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유산분배에 관하여서는 유대아인들은 라삐들을 법적인 판결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모세율법을 해석하는 법관이나 다름없었다.
모세법에 따르면 유산분에는 형이 두몫을 가지고 남은 몫을 동생에게 주도록 되어 있었다 (신명 21:7).

예수께 호소하는 사람은 이 법을 이행하지 않는 자기 형을 타일러서 자기 몫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를 라삐라고 불렀다.
아마 유대아인들의 라삐들이 판결을 불공정하게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잔꾀였을까.

하여튼 이 세상 재물이 인생의 가치를 둘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설파하러 오신 예수께 이런 청을 하는 것은 잘못된 요청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다.

예수는 그에게 자기가 요청하는 것 이상의 것을 제공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대로 『이 사람은 세상 재산의 절반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천국의 재물전체를 제공하셨다』라는 해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단 말이야』. 예수의 이 대답은 동족끼리 싸우는 히브리인들을 책망하는 모세를 보고 그 싸움꾼이 던졌던 말과 비슷하다 (출애 2:14).

예수께서 임명받은 일은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불러 사하여 주고 (루가5, 32) 길 잃은 이를 도와주고 (루가19, 10),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마태10, 45) 이 세상에 생명을 주어(요한 6, 33) 사람들이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가지게 하려고 오셨다 (요한 10, 10).

세상 사람들은 우선 오래 살려고 애쓴다. 장수를 바라는 만큼 물질생활의 기본이 되는 재물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물은 어디까지나 살기 위한 수단이지 삶의 목적일수는 없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물욕에 빠져 들지 말라고 조심시켰다.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재물로써 제 생명을 어떻게 달리 할 수는 없다.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웬만한 지성인이면 다 알고 있는 진리이다.

『너희들이 조바심을 한다고 수명을 한 자라도 늘릴수 있느냐』(마태 6:27: 루가 12:27) .
재물뿐이랴. 사람들이 그토록 탐하는 명예, 권력, 이 모든 것은 결국 생명을 단축시킬지언정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결국 재물ㆍ명예등이 사는데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모르나 끝내주는 사항은 못된다.

전도서의 지혜는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하늘 아래서 치르는 모든 수고가 결국은 사람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 손가…보고 싶은 것 다 보아도 실컷 보지 못하고 듣고 싶은 것 다 들어도 만족이 없으니, 세상만사 속절없이 되풀이 되어 하늘아래 새것이란 있을 리 없다』



첫번째 폐단, 1∼2절

내가 아래서 한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부요와 재물과 존귀를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고생해서 먹고살 만하게 되니까 그만 병들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폐단이지요.

두번째 폐단, 3∼6절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이 많을찌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찌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이 사람은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장수했습니다.
그런데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산들 죽지 못해 억지로, 마지못해 살아간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또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자기가 죽었을 때 장사지내 줄 자식이 없다면 일백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역시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나온 줄 압니다.

세번째 폐단, 7∼9절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뛰다 보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 한이 없는 욕구를 무슨 수로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솔로몬은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인 10∼12절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무지와 무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지하기 때문에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무능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목표로 삼고 아무리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써도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6장의 줄거리입니다.
이제 한 절씩 본문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인생의 첫번째 폐단

첫번째 폐단이 1∼2절에 나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솔로몬이 본 첫번째 폐단은 해 아래 인생들에게 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폐단을 겪으면서, 이 불행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폐단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마음에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폐단입니까? 문제가 그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불행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많이 받았다 해도 그것을 누리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병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수해야 합니다.
오래 살아야 합니다. 일찍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을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 요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그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헛고생한 것입니다. 또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병폐입니까?
솔로몬의 부친이었던 다윗 왕 때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임금에게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광야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때마침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나발이라는 부자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털을 깎을 때는 으레 주인이 일꾼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기 마련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수하의 부하 열 사람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먹을 것과 쓸 것을 나누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부하들 앞에서 이런 말로, 저런 말로 다윗을 심하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윗이 전해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부하 400명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대단히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떡과 포도주와 고기를 충분히 준비해서 다윗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그것을 주면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 대신 다윗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제야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나발은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400명을 이끌고 왔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겁에 질려서 나발이 부들부들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했습니다(삼상 25:28).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었지만 너는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어. 이리와."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불러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이 가지고 있던 그 많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가 다 다윗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대신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능히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발처럼 움켜쥐고만 있으면 안됩니다. 필요할 때는 손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물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을 능히 누릴 수 있는 복도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두번째 폐단

두번째 폐단이 3∼6절에 나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이 사람은 2절에 언급된 사람이 받지 못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건강했을 것입니다. 또 장수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오래 산들 마음속에 평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공경을 받고 효도를 받아야지요. 죽었는데 그 몸 하나 제대로 거두어서 장사지내 줄 자녀가 없다면 일백 자녀를 두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솔로몬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오히려 낙태된 자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태된 자가 얼마나 불행합니까? 솔로몬은 4∼5절에서 낙태된 자의 불행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4절 말씀을 보니까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라고 했습니다. 낙태된 자가 이 세상에 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소유해보았겠습니까? 무엇을 누려보았겠습니까? 헛되이 왔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어두운 중에 가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그대로 어두운 땅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즉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번째 5절 말씀에 보니까 "햇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어야 햇빛을 볼 수 있지요. 하루라도 살았어야 햇빛을 보지요.
다섯번째,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되어 가는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5절 하반부입니다.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왜냐하면 해 아래서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폐단, 당해야 하는 불행을 낙태된 자는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태된 자가 더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솔로몬은 6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천 년의 갑절은 얼마입니까? 2천 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였습니다.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2천 년은 므두셀라가 산 것의 두 배가 넘는 기간입니다. 그처럼 오래 산다고 한들 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이 아니라 3천 년을 살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 오래 산다는 것이 고생만 실컷 더 하다가 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죄만 더 많이 짓다가 가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을 형벌만 더 쌓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장수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에 더해서 평강의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효도하고 여러분을 공경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세번째 폐단

세번째 폐단이 7∼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먹어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어야 합니다. 지혜자도 먹어야 하고, 우매자도 먹어야 합니다.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먹어야 하고, 누구나 다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식욕은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잔뜩 먹었다고 내일부터 안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내일이면 또 먹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식욕뿐이 아닙니다. 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지혜자도 먹어야 살고, 우매자도 먹어야 삽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아무리 수고해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지혜자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이 사람은 비록 가난하지만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자가 아무리 자기의 지혜를 다 짜내고 아무리 고생하고 수고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쥔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또다시 다른 욕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좀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소유해서 손에 쥐고 눈으로 보는 것이 없어서 심령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낫기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또 다른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니다. 사글세방에 사는 사람은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전세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전세방을 가지기 전에는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에 늘 마음에 전세방을 그리면서 공상을 합니다. 수고하고, 고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세방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행복합니까? 만족도 잠시입니다. 또 다시 마음에 새로운 공상이 생깁니다. "열세 평 짜리 아파트라도 좋다, 내 것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또 고생합니다. 또 수고합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행복이 없습니다. 드디어 열세 평 짜리 아파트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좀더 큰 평수, 화장실 두 개 짜리 아파트!" 그렇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낫지만 이것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은 아무리 쥐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도 아무리 애쓰고 충족하려고 해도 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떡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세요. 행복 그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예수님이 요 4:34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속에 비로소 참된 만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길이 바로 내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것입니다.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이제 우리는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겪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해 아래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것을 솔로몬이 결론 부분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칭한 바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오래 전부터, 천지가 창조된 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 날에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빛은 낮입니다. 어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이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칭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시고 난 뒤에 사람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아담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흙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흙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10절 중반부에 보면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감히 다툴 수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감히 우리가 어찌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해 아래 인생들 가운데는 어리석게도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무엇이 그리 유익하겠습니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서 생명나무 실과를 비롯해서 각종 나무의 실과를 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행복해졌습니까? 오히려 불행해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은 길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 길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행복해질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가 잘되어 창고를 새로 짓고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일시적으로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이 그에게는 가장 불행한 날이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일순간 행복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솔로몬은 인간의 생명은 헛되다고 표현했습니다. 일평생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덧없는, 잠시 잠깐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무지하고 무능한 우리 인생이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줄지 우리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장래에 대해서 누가 능히 고할 수 있겠습니까? 점쟁이가 알려주겠습니까? 역술가가 알려주겠습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치 눈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그 뜻을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18세기 초의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The grand essentials to happiness in this life are something to do, someone to love, and something to hope for."
무슨 말입니까?
인생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something to do,"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두번째로, "someone to love," 누군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고,
세번째로, "something to hope for," 뭔가 바라는, 기대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해 아래 이 세계에 집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해 위의 세계, 영원한 세계를 소망 가운데서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로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을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그러면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해집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귀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장수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잡겠다고 내가 애를 써도 행복은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자동적으로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잡으려고 하면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셔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님 안에서 복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의 평강,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로부터 효도 받고, 공경 받는 화목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5장

1월 19일(목)

우매자(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우매자(愚昧者)(3684) כְּסִיל -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

1. 바보,  2. 어리석은 사람,  3. 백치

발음 / 케실(keçîyl)
어원 / 36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무지한 자(시 49:10), 미련한 자(잠 1:22, 17:24, 26 : 1). 어리석은 자(잠 14:16, 19:29, 29:11), 우매자(전 2:14, 5:3, 10:12), 별 무리(사 13:10), [형] 미련한(잠 10:1, 17:12, 19:13).
구약 성경 / 4회 사용

* 카살(3688) כָּסַל 
1. 살찌다,  2. 강하게 하다,  3. 무기력하게 하다

발음 / 카살(kâçal) 
관련 성경 / 어리석다(렘 10:8).
구약 성경 / 1회 사용

우매(愚昧) : 어리석을 우(愚), 어두울 매(眛)

한글 개역 성경에서 우매자라는 단어가 전도서에서만 21구절에 사용됩니다.

2:14, 15, 16, 19
4:5
5:1, 3, 4
6:8
7:4
7:5, 6, 9, 17
9:17
10:2, 3, 6, 12, 14, 15,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새번역)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우매자 즉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면서 제물을 바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

그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순종한다는 뜻까지 내포하는 말이다(Lange, M.A. Eaton, G.A. Barton).
이럴 경우 본 구절의 의미는 선지자 사무엘이 말한 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라는 말씀과 유사하다(시 50:7-15; 잠 21:3; 사 1:11; 렘 7:21-23; 호6:6).
그리고 본 구절은 한편으로 형식적 신앙 생활의 무익함을 경계하는 반면 내실있는 신앙 생활, 즉 말씀에 입각하여 순종하는 신앙 생활의 복됨을 제시하고 있다.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타락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으며 형식적으로 제사드리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과 이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은 사실을 생각케 한다(사 1:10-17).
 

전도서 5:3
일이 많으면 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새번역) 걱정이 많으면 이 많아지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많아진다.

일이 많으면 ... 나타나느니라
-

원문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꿈은 많은 일로 인해 생기고 우매자의 소리는 많은 말로 인해 생기기 때문이다'(For the dream comes through much effort, and the voice of a fool through many words, NASB)의 뜻이다.

이는 '꿈'과 '우매자의 말'이 주어로 되어 많은 일과 많은 말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의 결과를 언급한 말이다.
즉 사람이 너무 많은 일에 분주할 경우 정신이 혼란스럽고 복잡하여 번민함으로 잠을 잘 때 꿈을 꾸게 되며, 말이 많을 경우에도 부주의하게 됨으로 헛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런 꿈을 '헛된 것'으로(7절), 6:9의 심령의 공상을 '무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전혀 유익하지 못하고 정신만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도서 5: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새번역) 하나님께 맹세하여서 서원한 것은 미루지 말고 지켜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너는 서원한 것을 지켜라.

서원하였거든 ... 말라 -

'서원하였거든'의 히브리어 기본형 '나다르'(5087)는 '약속하다', '맹세하다'의 뜻을 함축한다.

서원하다(5087)(나다르, nâdar) נָדַר 

1. 맹세하다,  2. 창세기 31:13,  3. 미완료형  יִדֹּר

발음 / 나다르(nâdar)

관련 성경 / 서원하다(창 31:13, 신 23:23, 삼상 1:11), 맹세하다(시 132:2).
[명] 서원(신 12:17, 23:22, 욘 2:9), 서원자(레 27:8).
구약 성경 / 31회 사용

이 서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뜻에서 또는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하여 행해졌으며(창 28:20-22; 삿 11:30-40; 삼상 1:11), 율법 규정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민 30:2; 신 23:21-23).

서원은 일반적으로 셋 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헌신하겠다는 쌍무적 서원(삿 11:30, 31)
2. 서원자가 자발적으로 무조건 헌신하겠다는 일방적 서원(시 132:2-5),
3.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시 56:12, 13, 66:13-15)
4. 신앙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각성과 절제를 위한 서원(삼상 14:24)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본절은 특히 모세의 율법 중 민 30:2; 신 23:21-23 등에 근거하여 언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문맥상 2, 3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경시하지 말며 그분을 경외하는 신신한 삶을 권고하는 내용이며 본서의 최종 목적인 하나님 경외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하겠다(12:13).


이솝 이야기에 바람과 햇님이란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어느 날 나그네가 웅크리고 길을 가고 있었지요.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나그네가 외투를 뒤집어 쓰고 길을 걷자 바람과 햇님이 누가 저 나그네의 외추투를 벗길 수 있을까?
서로 내기를 시작합니다."먼저 바람이 더 강한 바람으로 나그네를 향하여 바람을 불어대자 나그네는 더 웅크리고 외투를 감싸쥡니다.
바람이 계속하면 할 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벗을 수 없었지요.
이제 햇님이 나서서 강한 햇빛으로 나그네를 공격합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외투를 벗어들고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분위기 파악을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위기 파악을 잘 합니다.

내가 돌이켜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반론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우리가 감히 반론도, 토론도, 요구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놓치고 있습니다.

어줍지 않은 지식과 정보로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을 삼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엄정함을 알고서, 하나님께 무엇을 따지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1~2).

겸손하지 않은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대표적으로 인간의 서원을 예로 듭니다.
서원은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매수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는’ 것은 경솔한 서원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와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니, 서원할 때에는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인생의 부조리함들 속에서도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끝까지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전도자는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법정의 문제나 학대가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합니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8).”

부와 수고의 문제도 계속해서 다룹니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부로 만족할 줄 모릅니다(10).
부가 쌓이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입도 늘어나는 법입니다(11).
이것은 부의 증가가 즐거움을 보장하기보다, 도리어 근심(해)을 더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좋은 예입니다(13).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가진 부가 많지 않은 노동자는 늘 잠을 잘 잘 수 있지만,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불면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12).
재물은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14).
아무리 부자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없듯,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15).
이 본문은 디모데전서 6장의 교훈과 동일합니다(딤전 6:3~10).
결론은 같습니다(18~20).
부를 추구하지 말고(딤전 6:10) 희락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전도자가 희락을 추구하라는 말은 전도서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에피큐로스 학파가 추구하던 쾌락이 단연코 아닙니다. 이들처럼 쾌락을 추구하여 평생을 수고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이고, 결코 원하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희락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신 계획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희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과 방법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곧 영생입니다. 이것이 영원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3:1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희락을 누리며 인생을 삽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을 누립니다.

7대 죄악(七大 罪惡, Seven Deadly Sins)


​7대 죄악(七大 罪惡, Seven Deadly Sins, Capital Vices, Cardinal Sins, Seven Arc,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ia)

​성경에 나오는 7가지 죄의 씨앗을 말한다.
보통 7대 죄악, 7죄악 등으로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칠죄종(七罪宗,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es, 7가지 근원적인 죄)이다.
이 개념은 6C 교황 그레고리오 1세(Papa Gregorio I)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1. 교만(驕慢, Pride, 라틴어 superbia)

잘난 체하며 겸손하지 않고 방자히 행함.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를 최고로 자랑하는 행위.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부인하는 최고의 죄악으로 간주하고 있다(시 18:27; 잠 29:23; 렘 50:31).

2. 시기(猜忌, 질투, 嫉妬, Envy, 라틴어 invidia)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

분쟁의 원인이 되며 당파심을 야기시킨다(욥 5:2; 고전 3:3; 고후 12:20).

성경은 시기의 무서운 파괴력을 경고하여 이르기를 ‘질투는 스올(음부) 같이 잔인하다’(아 8:6) 하였고,

‘투기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잠 27:4)고 하였다.

또 시기는 뼈를 썩게 하며(잠 14:30), 분쟁을 일으키고(고전 3:5),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한다(갈 5:19-21).

3. 분노(憤怒, Wrath, 라틴어 ira)

분하여 몹시 성을 냄. 사람의 분노는 죄의 원인이 되며,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분노를 삼가고 마음을 지키도록 경고한다(잠 14:17, 29; 16:32; 27:4; 29:22).

그러나 불의를 향한 분노, 곧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의로운 분노는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출 32:19; 레 10:16; 민 31:14; 삼하 12:5; 왕하 13:19; 요 11:33, 38; 행 17:16).

4. 나태(懶怠, Sloth, 라틴어 pigritia seu acedia)

게으름, 해태(懈怠).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라고 규정했다(48장).

일해야 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법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법이다(창세 2, 15; 3, 19).

인간은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일할 기능이 주어졌다.

스스로 노력해 자신을 가꾸어야 된다.

게으름은 바로 이 일의 위협이 된다.

이러한 뜻에서 게으름은 어떤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덕행의 결여를 초래한다.

5. 탐욕(貪慾, Greed, 라틴어 avaritia)

지나치게 많은 욕심(시 119:36).

부당하게 탐하는 욕망.

예수께서는 탐욕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 가르치시고(막 7:22),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을 물리치라고 권면하셨다(눅 12:15).

나아가 성경은 빛의 자녀로서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멀리해야 하고(엡 5:5),

탐욕에 단련된 자는 저주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벧후 2:14).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의 기본 요건으로 탐욕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딤전 3:2-3; 3:8-9; 딛 1:7).

6. 식탐(食貪, Gluttony, 라틴어 gula)

탐식(貪食), 탐도(貪饕), 탐람(貪婪).

식음과 향락 수단의 무질서한 욕심.

절제, 금욕과 반대됨.

절제와 현명의 결여에서 오는 것으로 이성적인 고상한 욕구와 저질의 충동적인 욕구와의 불균형,

정신과 육체의 무질서를 초래한다.

탐도는 욕심이 본능을 이루는 동물적인 생활로 인도하는 저질의 것이다(시편 49, 21).

성서는 탐욕자를 “배를 하느님으로 삼는 자”(필립 3, 19; 로마 16, 18)라고 했고,

이교도의 표라고 했다(로마 13, 12~13; 에페 5, 18; 루까 21, 34: 대림 1주 서간).

탐욕의 결과는 낭비, 빈궁, 사음(邪淫), 정신박약, 불건전한 정신, 부정(不正),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에 흐른다.

7. 색욕(色慾, Lust, 라틴어 luxuria)

주체할 수 없이 강렬한 성적 욕망을 가리킨다(살전 4:5).

또 ‘색욕거리’(헬, 아셀게이아)란 원어로 ‘짐승 같은’이란 뜻인데,

짐승같이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성을 탐닉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유 1:4).

이는 하나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 이방인의 특징이다(살전 4:5).



성경 전도서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우매자는 돌아가신 후에 후해하고 지혜자는 살아계실 때 효도합니다.
우매자와 지혜자의 차이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혜자는 사리에 밝아 자기를 보존합니다.
상대방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고 전쟁을 했다가는 반드시 패하고 자기 생명까지도 잃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정확히 분별을 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가를 늘 점검을 해야 하고 혹시라도 내 영혼의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하고 이생의 삶보다는 내세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자기 영혼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우매자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자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우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 그 지혜로 말미암아 내세를 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는데 내가 다니는 그 교회가 우매함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을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교회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매한 자는 지혜가 없으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지혜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예수 그리스도와는 너무도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매자이고 또 그런 일은 개인에게 있어 너무도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예수와 다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매자는 모릅니다.

그리고 우매자의 특징은 남이 배를 보고 사과라고 우기면 사과에 대해서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사과라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사과인가 아닌가를 사전이나 기타 다른 자료를 찾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사과라고 믿어 버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과일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가 주는 과일을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먹겠습니까? 혹시 죽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 절대로 먹지를 않고 확실하게 안 다음에 그 과일을 먹든지 안 먹든지 결정을 할 것입니다 하나 뿐인 생명이 죽는 일과 결부되어 있다면 당연히 조심을 하고 또 확인을 하면서 그 과일을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다릅니다. 내가 지금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당장 죽지를 않으니까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알아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매자의 모습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태평합니까? 당장 내가 이 과일을 먹으면 죽을 수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주는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덥석 깨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이 과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도무지 알지 못하는데 정말 이 과일 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면 하늘을 보면서라도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 그토록 자기 육체의 생명에는 철저한 사람들이 영혼에 대해서는 독이 든 과일을 줘도 그것을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깨물어 먹고 있습니다. 당장 안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너무도 잘 살고 있는데 하물며 자기들일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자기들은 교회에 나오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설마 내가 지금 독이 든 과일을 먹고 있겠는가 안심에 안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조상들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고 또 자기들 역시 그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우매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스라엘은 절대로 우매하지도 않고 또 그들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이미 세상에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바른 행위를 하고 있는지 또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전혀 분별을 못하고 있고 사람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자기도 맹목적으로 그렇게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독이 든 과일인지 아니면 생명의 과실인지를 전혀 분별을 하지 못하고 무엇을 먹이든지 자기는 잘 모르니까 저 사람이 잘 아니까 염려할 것 없다고 덥석 깨물고 있습니다. 죽는다고 생각을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만약에 자기 육신이 당장 죽는다면 아마 성경을 보고 또 보고 그가 말하는 것이 정말 맞은가 살펴보면서 아멘으로 대답을 할 텐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아멘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고 자기 눈에 너무도 좋게 보이는 그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처음 본 것같이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기 때문에 덥석 깨물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당장 안 죽으니까 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경계의 말을 하면 오히려 교회를 비판한다고 하고 있고 또 사상이 이상하니까 무조건 비판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우매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멀리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행을 하려면 여러가지 준비를 잘해야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 할 수가 있는데, 영원한 여행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우매자는 영원한 여행을 준비하지 않고, 지혜자는 영원한 여행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우리 문턱에 다가오게 됩니다. 모쪼록 영원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지혜자가 다 되시길 바랍니다.



신학의 역사에서 행복을 주제로 삼은 이가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는 그의 고백록에서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위의 노래와 같이, 행복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 고백한다.
"행복한 생활이란 주님을 구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해 기뻐하는 일" (22, 32)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곧 다른 말로 말해 "진리를 기뻐하는 일"(23,33)이다.
"하나님, 그리고 이 기쁨은 진리이며, 나의 빛이며, 내 얼굴의 구원이며 내 하나님이신 주님께 대한 기쁨"(23, 33)이다.
그는 '행복한 삶(de beata vita)'이란 저술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답변한다.
"행복한 삶이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아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진리를 온전히 기뻐하게 될 것이다."(4, 35)

복음은 우리를 죄와 불행과 슬픔으로부터 해방이며 위로이며 기쁨의 소식인데 우리는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신학은 아름다운 학문이며 기쁨의 학문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가치관, 즉 희망과 용서와 사랑과 신뢰와 감사와 은총과 기쁨과 행복에 관한 연구는 거의 찾아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행복과 기쁨,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의 긍정적 요소들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긍정심리학의 도전 때문이기도 했다. 조직신학을 연구하는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깊은 관심을 갖고 조사한 결과, 최근 들어 영미 권에서 긍정심리학과 신학과의 대화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서 본 연구자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생겨났다. 어거스틴에게서 본대로, 행복이라는 주제가 기독교의 핵심 주제인데도 왜 신학은 왜 행복과 기쁨을 말하지 않는가,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기쁨의 종교이며 복음은 근본적으로 기쁜 소식임이 분명한데 왜 이 주제가 신학에서 소외되어 왔는가, 기쁨이라는 단어와 기뻐하라는 명령이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데 왜 현재의 신학은 이 주제들에 무관심하거나 이것 들을 신학적 논의에서 배제하였는가, 왜 기독교 신학은 기쁨과 긍정의 분위기보다는 우울한 색채를 가진 신학이 되었는가 하는 물음들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4장


1월 18일(수)

위로자(전도서 4:1)

위로자(慰勞者) comforter
5162. 나함(
nâcham) נָחַם

1. 니팔형 ׃ נִחַם
2. 슬퍼하다,  3. 불쌍히 여기다
발음 / 나함(nâcham)
관련 성경 / 한탄하다(창 6:6,7), 후회하다(삼상 15:11, 35, 렘 4:28), 위로받다(삼상 13:39, 겔 14:22, 시 77:2), 회개하다(욥 42:6), 뜻을 돌이키다(시106:45, 렘18:8, 욜2:14), 뉘우치다(렘31:19, 슥8:14), 변개하다(삼상15:29), 돌아오다(시90:13), 변하다(시110:4), 보응하다(사1:24), 위로하다(룻2:13, 사51:3, 렘16:7), 안위하다(창5:29, 슥1:17), 조상하다(삼하10:2, 대상19:2), 긍휼히 여기다(시135:14),풀다(창27:42). [명] 위로(창24:67, 겔16:54),위안(시119:76), 조객(삼하10:3), 조문사절(대상19:3), 위로자(욥 16:2, 전 4:1), 안위(사 54:11), 후회(민23:19).
구약 성경 /107회 사용

욥기 16:1-2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전도자 4장의 내용 분해

4:1∼3 학대받는 인생
4:4∼6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4:7∼12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4:13∼16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인생

전도서 1장에서는 해 아래에서는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그 수고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 아래의 수고,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위한 수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수고는 해보았자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주 안에서의 수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2장에서는 인생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쾌락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지혜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재물의 나라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뒤에 솔로몬은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에 낙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천하에 범사가 모든 일에는 다 정한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때를 정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를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괴롭히기 위해서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장래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때를 정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겨주셨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장 적합한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분복입니다. 타고난 복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즐겨야 할 복입니다.

전도서 4장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1. 학대받는 인생(4:1∼3)

학대(6217) 아슈크( ʽâshûwq) עָשׁוּק    

압박, 상해 ☞학대(욥 35:9, 전 4:1), 학대함(암 3:9).

학대를 받으며 사니까 무슨 심령에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절에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모든 학대(아슈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학대하는 지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에는 힘을 가진자가 힘이 없는 자를 학대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납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학대는 죄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가 괴롭히지 않을 때는 욕망의 시기심이 나를 짓누르며 괴롭힙니다.
2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3절에서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악은 아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고, 학대가 있고, 그에 따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십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 시기심에 사로잡힌 인생(4:4∼6)

시기(7068) 키나(qinʼâh) קִנְאָה

질투, 시기, 열심





마음속에 시기심, 다른 사람에 대한 경쟁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에 무슨 낙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첫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두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재주가 좋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조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결과로 이웃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문맥에 적합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이 시기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지요?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성공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동기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두번째 인생은 옳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사람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무리하게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한들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것도 헛되어."
하나님이 그런 성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인정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분,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아보십시오. 잡힙니까? 잡아도 잡아도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이 끝이 없습니다.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는 것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떤 삶입니까?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남과 다투기 싫다고,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바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살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도 않는데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자기 살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 잘못입니다. 언제나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사람은 그래도 한 손에는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매자처럼 손을 거두고 굶어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한 손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과도한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뼈빠지게 일하고, 스트레스 받고, 긴장이 쌓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수고하고, 사업을 하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또는 내가 이웃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이것이 늘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돼.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런 마음에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평온함이 비로소 우리 마음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될 수 있도록 늘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4:7∼12)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교만, 자아 도취의 삶에 붙잡힌 인생입니다.

예수님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길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이 1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안전합니다. 뭉치면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무슨 말입니까?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저 물질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 제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이웃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협력하면서 더불어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창고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잔뜩 쌓아놓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두지 마세요. 물질에 목적을 두었을 때, 돈을 많이 벌기는 벌어도 쓰지 않고 채워놓기만 하면 인생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지 않습니까? "됐어? 너 이리와."
하나님이 불러가십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다 산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형편이 되시는 대로 인삼도 드시고, 녹용도 드시고, 보약도 드세요. 그러나 그것보다 확실한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웃을 위해서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 일은 끝이 없습니다. 해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꾸 주십니다. 주시는 대로 값있게 쓰면 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오래 삽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모든 교우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4:13∼16)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봅니다. 우선 왼편에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왕입니다. 신분이 서로 다릅니다. 아울러 왼편에 있는 사람은 소년입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오른편에 있는 왕은 늙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살펴보면 누가 더 낫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제 3의 요소가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함을 받을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신 줄 압니다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집만 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고정되어 있어서, 분명히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그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저는"은 왼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옥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감옥에까지 갔었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지혜로 극복하고 나중에 왕이 되었습니다.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이고, 가난하지만 지혜로워서 좋았는데 왕이 되니까 지혜로웠던 소년도 또 둔해집니다.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년도 그 이전의 왕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도 제3의 또 다른 새롭게 일어난 소년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덧없지만, 인기와 명성도 다 그렇습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제3의 소년이 왕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백성들의 마음은 제4의, 제5의 소년에게로 자꾸 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권력, 인기, 명성 등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소망으로 삼고, 그 한 분만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의미 있는 삶,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전도서 4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있게 됩니다.

세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네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여생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행복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월 18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전도서 4:1∼16
묵상을 위한 주제 : 위로자(1절)
성구 :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위로자(慰勞者, nâcham. נָחַם)”
전도서 4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위로자가 없기 때문
그리스도인의 위로자는 보혜사 성령님입니다(요 14:16, 26).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려운 일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심으로 위로자가 되십니다.

둘째, 시기심에 붙잡혔기 때문
믿음의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롬 14:8).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항상 마음에 자리를 잡기 때문에 수시로 시기심에서 벗어나도록 자극하십니다.

셋째, 물질 제일주의 때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론 세상살이를 위해서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넷째,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기 때문
세상 사람들은 세상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므로 세상 것에 집착할 수 없습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동행 365 제18일 읽어야 할 말씀
창세기 43∼45장, 마태복음 12:24∼50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3장


1월 17일(화)

기한(전도서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천하의 만사가 다 때가 있다.

나 아(我) = 손 수(手) + 창 과(戈)
手(수)와 창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음.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창을 들고 있는 나를 다른 사람이 만난다면 힘이 들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 강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1. 나, 2. 우리, 3. 외고집(固執 :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4. 나의, 5. 아집을 부리다, 6. 굶주리다

기한(2165) זְמָן 정해진 시간 

1. 때,  2. 정한 때,  3. 느헤미야 2:6

발음 / 제만(zemân)
어원 / 21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한(느 2:6, 에 9:31, 전 3:1), 정해 놓은 때(에 9:27).
구약 성경 / 4회 사용

* 2163. זָמַן 

1. 임명하다,

발음 / 자만(zâman) 
관련 성경 / 정하다(느 10:34, 13:31). [명] 기한(스 10:14).
구약 성경 / 3회 사용

때(6256) עֵת 어떤 시간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에트(ʽêth) 
어원 /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57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창 21:22, 욥 39:1, 렘 3:17), 철(레 26:4), 당시(왕하 16:6), 시세(대상 12:32), 역사(대상 29:30), 기한(스 10:14, 느 10:34, 렘27:7), 전례(에 1:13), 시대(사 33:6), 기회(시 32:6), 날(사 17:14), 낮(렘 27:7).
[부] 아무 때나(레 16: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스 8:34), 항상(시 106:3, 잠 5:19, 전 9:8).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 5703(아드, ʽad)  עַד

1. 지나감,  2. 진행,  3. 지속

발음 / 아드(ʽad)
어원 / 5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무궁(출 15:18, 시 10:16, 111:8), 영원히(대상 28:9, 시 22:26, 사 26:4, 욥 19:24, 시 48:14, 사 64:9), 예로부터(욥 20:4), 영원토록(시 21:6), 항상(암 1:11, 미 7:18), 영원(단 12:3), 영구하게(시 89:29), 영원한(시 21:4, 45:6), 영원히(사 45:17, 합3:6).
구약 성경 / 1269회 사용

* 5710(아다, ʽâdâh)  עָדָה

1. 지나다가,  2. 잔인하게 공격하다,  3. 가로 건너가게 하다

발음  / 아다(ʽâdâh) 
관련 성경 / 지나가다(욥 28:8), 단장하다(겔 23:40, 사 61:10, 렘 4:30, 욥 40:10), 장식하다(렘 31:4, 겔 16:13, 호 2:13), 채우다(겔 16:11), 벗다(잠 25:20).
구약 성경 / 9회 사용

전도서 3~5장은 전도서의 두 번째 내용에 해당됩니다.
이 부분은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에 합당하게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지배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사람은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능력과 노력에 대해 교만할 수 없으며, 오히려 겸손하게 현재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합당하며 지혜라고 말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말씀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커다란 계획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두 번째 단락의 결론을 보여줍니다(1).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은 그저 자기 자신만 알고 이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하기에, 그 계획을 알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때(구원받아 거듭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11).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1~15).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기한(때)을 두셨습니다(1).
이것을 2~8절에서 14쌍의 대구법으로 표현하여, 모두 28번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수 3, 땅의 수 4
3+4=7, 3X4=12 - 완전 수(7, 12)
14개의 긍정과 부정의 때란 무한한 때가 있을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시간의 두 개념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의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크로노스)
누이 레아롸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낳은다
크로노스의 두려움은 자식 가운데 누가 반란을 일으켜 크로노스의 권력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
아이를 잡아 먹는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삼킨다는 것은 시간의 폭력성을 강조한 것이다.

카이로스(2540) καιρός, οῦ , ὁ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Pronunciation / 카이로스(kairŏs)

크로노스(5550)  χρόνος, ου, ὁ 

1. 시간, 2. 유예

Pronunciation / 크로노스(chrŏnŏs)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 더욱 짧아진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출생, 죽음                               - 식물을 위한 것, 인간은 파종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추수하는 존재
                                                     * 불화를 심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 미움을 심어
   * 태어나는 순간 죽을 만큼 충분하게 늙었다!
   * 태어남은 되돌아감의 시작이다!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체르노빌 원전 사고                            - 집을 짓기 위한 것
   * 가축을 데리고 갈 수 없어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죽여버린다.
   * 전쟁 상황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회개, 성령의 은사                    -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 밭을 일굴 때, 우물에 돌을 던져 넣는다(전쟁시)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사람, 물건 이외에 주님께 돌아오는 것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 회개와 다짐, 상처는 봉합해야 한다,  - 침묵하여 현명한 사람과 수다를 떨어 무지한 사람

8. 사랑
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영원(5769) 올람(ʽôwlâm) עוֹלָם 

1. 영원,  2. 오랜 시간이 지남,  3. 일생동안

Pronunciation / 올람(ʽôwlâm)

선물(4991) מַתָּת 

1. 선물,  2. 잠언 25:14,  3. 전도서 3:13

Pronunciation / 마타(mattâth)

Bible verse / 예물(왕상 13:7) 선물(전 3:13, 5:19). [동] 선물하다(잠 25:14).
Old Testament / 6회 사용
하나님의 선물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은 무조건 좋은 것만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나쁜 것도 선물로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나쁜 것을 먼저 주심으로 미리 깨닫고 돌아서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때로는 나쁜 것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욥의 고백에서 찾아봅니다.

욥기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다니엘 3:16-18
사드락
메삭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섭리(攝理)
다스릴 섭. 다스릴

1. 신(神)이나 정령(精靈)이 인간(人間)을 위(爲)하여 세상(世上)을 다스리는 일.
2. 자연계(自然界)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이법(理法).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모으다」의 뜻( ☞ 聚(취))을 나타내는 글자 聶(섭)으로 이루어짐. 손으로 옷자락을 「걷어 올려 잡다」의 뜻. 널리 한 손으로 휘몰아 일을 처리하다(處理--) ☞ 「잡다」 ☞ 「겸하다」의 뜻을 나타냄.

攝자는 ‘당기다’나 ‘거느리다’,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攝자는 手(손 수)자와 聶(소곤거릴 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聶자는 귀를 중복해서 그린 것으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소곤거리는 소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기에 여기에 手자를 결합한 攝자는 잘 들리지 않아 손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귓속말은 옳지 못한 일로 누군가를 꾀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攝자는 ‘꾀어내어 끌어들이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섭,접
소곤거릴 섭, 칠 접
聶 소곤거릴 섭(聶)
칠 접(聶)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아름답게 하셨다 - 보기에 좋은 모양이 아니라 적절하게 하셨다.

아름답게(3303) 야페(yâpheh) יָפֶה 

1. 아름다운,  2. 창세기 12:14,  3. 창세기 41:2

발음 / 야페(yâpheh) 
어원 / 33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리땁다(창 12:11, 왕상 1:3, 욥 42:15), 아름답다(삼상 16:12, 잠 11:22, 암 8:13), 곱다(에 2:7), 어여쁘다(아 1:15, 4:1, 6:4). [명] 어여쁜자(아 1:8, 2:10, 5:9), 아름다움(전 5:18)
구약 성경 / 42회 사용


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시간에 대한 어거스틴의 명언

과거의 현재는 기억,
현재의 현재는 목격,
미래의 현재는 기대(소망), 근심


인간은 나면서 죽기까지 모든 삶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2a).
심고 뽑는 것이나(2b) 헐고 세우는 것은(3b) 나라와 민족의 흥망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입니다(렘 18:7; 습 2:4).
물론 정부가 하나님의 형상인 생명의 존엄을 위하여 사형을 집행할 때도 있고, 사람을 치유하여 살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3).
나면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쉼 없이 슬픔과 기쁨을 경험하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입니다(4).

또 조건과 시기에 따라서 귀중했던 것이 무가치하게 될 때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5).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우쭐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사람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옷의 앞부분을 찢었고(삼하 13:31), 슬픔이 해결되면 다시 옷을 꿰매곤 했는데, 7절은 그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기 2~8절에서 열거되는 때들은 나면서 죽기까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슬픔과 기쁨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 기한이 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관하신다면,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인하여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9)

전도자는 다시 1:3절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인생에게 노고를 주셨습니다(10).
하지만 우리는 단지 그것만을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1).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런 역사의 수수께끼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것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역사의 수수께끼는 영원 속에서만 깨달아질 것이다)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관점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현재의 시간에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인생과 인생의 선한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13~15).
고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사람만 삶의 모든 것을 자족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14).
하나님의 이런 선한 계획과 의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노고를 주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4).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15).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과거)을 다시 찾아 미래의 평가에 관련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만만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제시하는 첫 번째 반론은 정의가 시행되어야 할 법정에조차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16).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이 모든 판결들까지도 심판하실 것입니다(17).

죽음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의심하게 만드는 불평거리입니다(19).
죽음이란 짐승에게나 사람에게나 차이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18~21).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지만 인간의 혼은 위로 올라갑니다(20).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는 인생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만사에 하나님의 때와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굽어진 것 같고, 돌아가는 것 같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 있는 곳에서 순종하고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주옵소서.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함으로, 오늘 하루를 두려움으로 살지 않게 우리를 지켜주옵소서.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는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의 간증입니다.
그는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스가랴서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이라는 구절을 읽다가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죽음 교육이 가져다 주는 유익 

일반적으로 죽음, 그러면 벌써 재수 없다는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생각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눈길을 끕니다.

먼저 미주리대의 심리학자인 케네스 베일의 주장이다.
그는 ‘죽음이 삶에 유익할 때(When Death is Good for Life)’라는 논문 (월간 ‘인성과 사회심리학 평론’ 온라인 판(2012년 4월 5일) 을 통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죽음에 대해 숙고하면 오히려 공격적인 행동을 삼가게 되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등 건강을 더 돌보게 되며,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길 뿐만 아니라 흡연율과 이혼율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하나의 글은 컬럼비아 칼리지의 심리학자인 마이클 위더맨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마인드’ 7·8월 호에 기고한 에세이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면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고, 그런 사람일수록 죽음의 공포를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다. 지진 발생 지역-수천 명이 죽거나 다친-병원 직원들에게 몇 가지 인생 목표의 중요성을 평가하도록 요청한 결과 지진으로 생명의 위협을 생생하게 느낀 사람일수록 돈이나 감투 따위의 세속적 성공보다 가정의 화목이나 이타적인 사회활동 같은 정신적 가치를 훨씬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경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라면 죽음교육을 통해 인문학적 성찰로 거듭나야 한다'는 저의 외로운 외침, 이제는 힘을 받게 되지 않았나요?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정해진 때 안에서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솔로몬이 오늘 전도서 3장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천하 모든 일에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거역하지 말고 때에 순응하면서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을 누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편의상 전도서 3장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1∼10절

천하에 모든 일이 정해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14가지의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완전수가 무엇입니까? 7입니다. 14가지니까 완전수 7의 두 배가 되는 숫자입니다.
그러니 이것만 보아도 천하의 모든 일이 예외 없이 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이 충분하게 입증이 되지 않습니까?

둘째, 11∼15절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때를 정하셨겠습니까?
인생들을 괴롭히려고, 골탕먹이려고 때를 정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되 아름답게 정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모든 발걸음을 맡기고 하루하루 매일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16∼22절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삶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전도서 3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한 절씩 읽어 가면서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음

3:1 말씀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그리고 일이 지향하는 목적도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하고 애쓴다 해도 그 목적이 아무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야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런지 솔로몬은 2절 이하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솔로몬은 우리의 삶 자체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는 때와 죽는 때는 우리 인생 스스로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이 되었는데도, 여기가 편안하고 좋으니까 여기에 그냥 있겠다고 하면서 안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때 열 달이 되면 나오기 싫어도 나와야 합니다.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좋으니까 나는 한 300년 정도 살겠다고 한다고 사람이 300년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예컨대 농부가 봄이나 여름철이 되면 밭에 나가서 배추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가을철이 되어서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그것을 뽑아 냅니다. 농부는 이미 정해진 계절에 따라서 행동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절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이 다 그렇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합니다. 적군이 살고 있는 성읍을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부상자들을 찾아서 다 치료해야 합니다. 그리고 허물어진 성읍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은 정해진 때에 따라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인간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감정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초상집에 가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슬퍼지지 않습니까?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반대로 흥겨운 잔칫집에 가면 마음이 즐거워서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어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감정도 정해진 때에 따라서 순응하면서 나올 뿐입니다.
부부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남편이 아내를 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잠자리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돌을 던진다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보면 여인은 한 달에 한 번씩 부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안는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 수가 없습니다. 돌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부부 생활도 모든 것이 다 정해진 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골곤다 광산을 예를 들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까 전혀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억지로 찾고자 하니까 오히려 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에 땅을 가진 사람이 제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큰 빌딩을 마구잡이로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IMF 사태가 터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즘은 빌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머리가 아픕니까?

이와 같이 물질도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정해진 때에 따라서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인간의 언어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옛날 사람들은 슬픈 일을 당하면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욥이 곤경을 당했을 때 멀리서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각각 자기들의 겉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욥과 더불어서 7일 동안 땅바닥에 앉아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슬픈 일이 다 끝났습니다. 그때는 옷을 찢은 것을 다시금 꿰매야 하겠지요? 다시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물었던 입을 열어서 다시금 말을 하게 되겠지요.
개인의 일뿐만이 아니라 나라 사이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로 미워하고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습니다. 그러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면서, 도와가면서 살게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천하에 모든 일이 다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정해진 때에 따라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의문입니까?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모든 것이 정해진 때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면 해 아래서 인생이 아무리 수고해 보았자 그 결과가 뻔할 텐데, 구태여 그러면 수고해 보았자 무슨 유익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이 태어날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애쓰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노고를 주셨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때부터 인생들은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노고 가운데 애쓰면서 살아가도록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은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음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솔로몬이 두번째 대지인 11∼15절에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인생에게 베푸신 은혜
우선 솔로몬은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푸신 세 가지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푸셨는지 11절 말씀을 보세요.

첫번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때를 정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식으로 정하셨다는 것입니까? 인생들을 골탕먹이시려고, 괴롭게 하시려고 정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번째 베푸신 은혜는 무엇입니까?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이 땅에 애쓰면서 노고 가운데 살아가지만, 우리는 해 아래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해 위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번째 베푸신 은혜는 무엇입니까?
11절 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셨지만 인생들로 하여금 그 정하신 때를 측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컨대 사람이 자기가 죽을 때를 정확하게 미리 안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복된 삶이겠습니까? 죽을 때가 되면 자기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불안에 떨면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해진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잠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2) 솔로몬의 깨달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신 세 가지 은혜에 기초해서 자기가 깨달은 것을 12절 이하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첫번째 베푸신 은혜가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 12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하나님께서 모든 때를 적절하게 아름답게 정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다 맡기고 불안에 떨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아울러 하나님이 아름답게 때를 정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의 낙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1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없는 것을 따지면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윌리암 생스터(William Sangster)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갑자기 이분에게 근육이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 보았습니다. 결과는 불치병이라고 했습니다.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생스터 목사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네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자기가 결심한 그 네 가지를 반드시 지켰다고 합니다.

첫번째, "I will never complain." 결코 불평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I will keep the home bright." 가정을 밝게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우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가정의 분위기를 밝고 명랑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세번째, "I will count my blessings." 내게 없는 것 따지면서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들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세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내가 당하고 있는 시련이 내게 유익이 될 수 있게 바꾸는 노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오늘 본문 13절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준 삶의 스타일일 것입니다.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불평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의 낙을 누리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베푸신 은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솔로몬이 깨닫게 된 것이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측량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측량해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설칠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생들이 모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금까지 한 말을 15절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해 아래 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태아는 열 달이 되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그 정한 때는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매일매일 기쁘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생의 삶을 심판하심

이제 마지막 세번째 대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때를 정하셨다고 했는데, 그런 후에 하나님은 그저 인생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그대로 방관하고 내버려두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삶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재판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공의가 세워져야 할 곳입니다. 공의를 가지고 의인과 악인을 바르게 구분하는 곳이 바로 재판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공의로워야 할 재판하는 장소에서조차도 악이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의인이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당하기고 하고, 악인이 또 반대로 부당하게 의인 대접을 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솔로몬이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진리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인간의 법정에서는 공의가 땅에 떨어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공의를 다시금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의인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또 악인이 일시적으로는 창성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제 심판하십니까? 17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날 것입니다.
솔로몬이 두번째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하나님이 인생에 악이 있는 그 일을 통해서 인생을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이 시험을 치릅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자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서 인생의 수준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우리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그러나 악을 가까이 하고 죄악의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그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까지 떨어집니까? 18절 하반부입니다.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 인생이 짐승과 같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짐승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먼저 솔로몬은 인생과 짐승의 같은 점을 19∼20절에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생이나 짐승이나 그 코에서 호흡이 떠나면 똑같이 죽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면 다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것도 똑같습니다.

20절입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사람도 짐승도 죽으면 원점인 흙으로 다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21절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만큼은 그것을 잊지 말고 꼭 알아야 합니다.
짐승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죽으면 그 혼도, 그 몸도 땅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생명, 곧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위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우리의 육신을 떠날 때 우리의 혼이 위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서 아래로, 음부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생길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솔로몬은 오늘 말씀의 결론을 22절에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에서 맡은 일도 있고, 가정에서 하는 일도 있고, 또 사회에서 맡은 일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을 억지로 하지 말고, 부득이한 마음으로 하지 맙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그 일을 하도록 합시다.
바로 그것이 최고이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그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타고난 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경륜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몸 신(身)자, 뒤 후(後)자, 일 사(事)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 끝입니다. 다시 되돌아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 최초의 날이라 생각하며 살고, 아울러서 오늘이 내 인생 최후의 날이라 생각하면서 살아라." 하루하루 매순간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좀더 애착을 가지고 잘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적절하게 때를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우리의 발걸음을 다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섭리 속에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2장


1월 16일(월)

분복(分福)(전도서 2: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여피(yuppie, ˈjʌpi)는 "젊은 도시 전문직(young urban professional)"의 약자로서, 대도시 또는 그 인근을 거주 및 직장으로 삼으면서 대학 수준의 학력을 갖추고 고소득 직업에 종사하는 젊은 성인으로 정의된다. 대략 그들의 나이가 2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 사이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시 문화에 익숙하지만 일상생활이 권태롭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에 쾌락을 느끼며 살아가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스와핑(Swapping)"이라는 것이 은밀하게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스와핑(Swapping)이란 교환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중고품 교환 장터에서 사용하던 용어이었으나 근자에는 성적 파트너를 서로 바꾸어 즐기는 사회악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은밀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도시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쾌락주의(Hedonism, 快樂主義)는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 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원리(道德原理)로 삼는 윤리설이다.

고대 그리스어 "헤도네(ἡδονή)(만족)"에 주의, 사상을 뜻하는 접미어 "-ism"이 붙은 단어이다.


11절.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신앙적 좌절이란 세속적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그 정상에 올라갔으나 그 위에서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심각한 고민과 갈등에 빠져 허덕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적인 좌절은 노력하였으나 실패한 때를 말합니다.


12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16절. 죽음은 동일하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있다? 없다? - 없다!

이름을 남기려는 죄인의 본성이 강하기 때문에 유명 관광지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8절. 르호보암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려 할 때 깨달은 것
내가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26절.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남아프리카에 가면 골곤다라고 하는 세계 제일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습니다.
영국의 왕실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왕이나 왕비가 쓰는 왕관에는 어김없이 여기에서 나온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골곤다 광산이 어떻게 개발이 되었는지 그 배경에는 기막힌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골곤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 되기 전에는 목장 지대였다고 합니다.
목장 주인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영국 사람이 들어와서 갑자기 다이아몬드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벼락부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장 주인의 마음속에 급한 생각이 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꾸물거리다가는 자기만 손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자꾸 가난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장 주인도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그는 다이아몬드가 어떠한 곳에서 나오는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해답이 간단하게 나왔습니다.
지형적으로 주변이 산으로 빙 둘러 있고, 그 가운데는 시내가 흐르고, 그리고 시내에 의해서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확률적으로 다이아몬드가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 목장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누비면서 그런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지형이 나오면 무조건 닥치는 대로 다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찾기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수중에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깊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자기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은 바로 그 사람에게서 목장을 산 사람이 어느날 자기 목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검은 색이 나는 이상한 돌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을 집어들고 호기심을 가지고 깨뜨려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는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습니다.
얼른 그 주변을 파 보았습니다.
손으로 파기만 해도 그 속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곳이 바로 세계 제일의 다이아몬드 광산인 골곤다입니다.
원래의 목장 주인은 행복의 파랑새가 바로 자기 곁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괜히 멀리서 찾다가 결국은 찾지도 못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급한 마음 가지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분복, 타고난 복,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가 원하던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그때를 만들려고 하니까 때를 만들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복을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창 황금 노다지 골드러시(Gold rush)가 일고 있었던 때, 당시 영국령 남 아프리카(지금의 남아 공화국)의 골곤다라는 마을에는 큰 농장을 경영하는 알리 하베트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영국식민지에는 신부님들이 부족하여 신부 한명이 여러 마을을 돌면서 미사를 집전하고는 했는데 언젠가 이 골곤다 마을에 오던 신부님이 그만 길을 잃었다.
그래서 며칠을 정글에서 헤맨 끝에 겨우 농장을 찾아온 신부님, 농장 주인 하베트는 “얼마나 고생하셨냐?”고 위로하고 신부님은 “이래 저래 헤맸다”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신부님이 생각이 난듯 주머니에서 돌멩이 둘을 꺼내 보였다.
오던길 어디 쯤에서 토인들 마을을 지나는데 그곳 이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반짝이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얻어 왔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 돌맹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다이아몬드 원석이 분명했다.
“그 토인 마을이 어디쯤 됩니까?”
주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한 사나흘 길 거리인데, 거기에는 높은 산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헤매다 와서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부님은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신부님이 돌아간 후 농장 주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 남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여기 저기 발견되던 시절이다.
광산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루 아침에 천문학적인 부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비록 큰 부농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니 그야말로 새발의 피 밖에 안되는 것이다.
“내가 이까짓 농장을 백날 해 봐야 무슨 발전이 있겟는가?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 제대로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운명이 바뀌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어느날 아예 자기 농장을 팔아 치우고 다이아몬드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섰다.

인근 산이라는 산은 다 오르고 골짜기 마다 다 뒤지고 토인들 마을 마다 다 찾아가서 수소문하였으나 다이아몬드가 있는 곳은 알 수 없었다.
그간 풍문에 어디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되고 또 어디서는 금광이 터졌다고 하는데 자기는 온 나라를 다 훝고 심지어 다른 나라까지 가서 찾아 헤매어도 노다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달이 가고 해가 가더니 그렇게 찾아 헤맨지 5년이 가고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아내와 자식들은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농장을 판 돈도 다 없어졌다.
남은 것은 굵게 패인 얼굴의 주름, 험하게 갈라진 손과 발, 그리고 몸에 걸친 남루한 누더기.
그는 어느듯 망망대해가 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도 없고 더 갈 곳도 없구나!” 깊이 절망한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지 얼마후, 알리 하베트에게서 농장을 산 러셀이라는 새 농장주가 말에 물을 먹이려고 농장을 가로 지르는 시냇물에 다가 섰을 때, 물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 골곤다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골곤다 농장 바로 그 땅이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는데 전 주인이었던 알리 하베트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 먼 곳에서만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매며 고생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재물의 축복인 ‘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수백가지 축복 중에 하나 일 뿐이고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사용되어야 할 한 수단일 뿐,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야할 목적은 절대 아님을 나는 살 수록 깨닫는다. 어떤 사람에게 엄청 큰 부(富)를 안겨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골곤다 농장주 알리 하베트는 그냥 농장만 갖고 있었어도 부자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더 큰 재물을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신세 망치고 목숨까지 버린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인생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생각한다.
인생의 소중한 보물은 꼭 재물 뿐이 아니다.
보물은 산 높고 물 좋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다로 닿을 가까운 곳에 있는데 우리의 눈과 귀가 욕심에 사로 잡혀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빛깔을 보지 못할 뿐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 가족 그리고 일상 보고 만나는 내 이웃과 친구들이고 나에게 소중한 물건은 내가 매일 가까운 곳에 두고 쓰는 일용품일 뿐이다.

누구나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성경을 어떤 눈으로 읽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최대의 다이아몬드 골곤다 광산의 원주인 "알리 하베트"는 목장을 팔아버리고 광산을 찾아 헤매고 다녔으나 새 농장주가 된 "러셀"은 우연히 시냇물 속에서 반짝이는 돌을 찾아내어 그것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하여 최고의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도서 1장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 헛됨(헤벨)의 사례들을 나열합니다.
전도자(코헬렛)는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온갖 쾌락을 즐겨보았고 술로 흥을 돋워보기도 했으며 큰 사업을 일으켜 그 누구보다 더한 부귀를 누려보았다고 합니다(1~11절).
하지만 그런 것들이 허무한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우매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허무할 뿐이라고 합니다(12~17절).
그래서 얻은 결론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24~25절).

"분복(分福)"이란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댓가" 라고 하였고, 새번역과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몫"이라고 하였으며, 공동번역에서는 "보람"이라고 번역합니다.

분복에 대한 시편 기자의 고백은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라고 합니다(시편 128:2)

사람이 수고한대로 그 댓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삶의 시작입니다.
그러자 저소득 국가에서는 아무리 수고하여도 수고한 것만큼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일주일 동안 부지런히 일을 해여 겨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와 주 5일만 근무하면서도 의식주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는 분명히 다른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줄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어떤 선한 것들 속에서도 인생의 목적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소위 건강, 부, 소유, 지위, 감각적 쾌락, 명예, 명성 같은 것들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제대로’ 즐기고 그것들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들을 제대로 즐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유용하고 유익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유익을 누리며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따라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믿음으로 매일의 삶이 계속될 수 있는 변함이 없는 마음과 믿음을 주옵소서.

주 안에서의 즐거운 삶을 누리므로 세상의 즐거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일깨워 자유로운 은혜의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걸림돌과 디딤돌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 토마스 카알라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 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데요
그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도 장애의 요소와 같은 돌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런 돌들은 생활에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깔려있는 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뒤쳐지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더욱 큰 소망이 있고,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겠지요.


특히 2:24~26은 1, 2장의 소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데서(외부적인 것들) 즐거움을 얻게 되는데, 이 조차도 하나님의 손에서 주어지는 선물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24).

하나님을 떠나서는 즐거움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지만,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서 쌓아놓은 것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십니다(26).
인간은 나름대로 스스로 인생을 즐긴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희락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락은 다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는 자에게 선물로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십니다.  

예전에 전도자는 이런 지혜와 지식과 희락이 그 자체로 인생의 의미와 만족을 주는 줄 알았었고(1:16~17; 2:1)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바람을 잡는 일’(1:17)이고 ‘헛된 것’(2:1)이 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 가운데 거하면 결국 이 모든 것(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다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재산 축적과 사업과 건축 계획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신이 인생에 낙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거의 다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는 전혀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전도자가 얻은 결론은 이렇듯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죽음에는 차이가 없습니다(15).
죽으면 다 잊혀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16). 그렇다면 인생 자체는 신기루나 망상이 아닐까요?(17)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얻으려고 수고를 해도, 결국에는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자식에게 축적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요?(18~21) 그렇게 애써 모아 물려준 재산이 지혜롭게 사용될지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열심히 수고하여 얻은 소득도 유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22).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사우디 아라비아는 유목민족이었다.

그들은 양을 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양들이 샘물을 먹고 다 죽었다.
그 주인은 자신의 생계유지 수단인 양들이 다 죽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우리 이제 굶어 죽었구나!'하는 생각에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그는 양을 살려낼 능력도 없었고 또 다른 양들을 살 수 있는 돈도 없었다 그는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 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의 양들을 죽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 샘물을 떠다 연구소에 의뢰하였다.
바로 그 샘물에서 나온 걸죽한 액체는 석유의 원료였다.
살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는 살길을 찾았다.
살 길을 찾은 정도가 아니라, 그 액체 원료로 인해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다.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축복의 살 길이다 .

나는 살았는가?

오클라호마市의 위대한 흑인 목사 페리 박사(Dr. E. W. Perry)는 부활을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큰 뱀이 물 속을 헤엄쳐 다니다가 아직 살아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날카로운 지느러미가 달린 좀 더 큰 물고기를 집어삼켰습니다.
뱀의 밥통 속에서 큰 물고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밖으로 나가야겠어..'
물고기는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사용해서 뱀의 배를 가르고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배가 갈라진 뱀은 죽었고, 큰 물고기가 밖으로 헤엄쳐 나가자 다른 물고기들도 큰 물고기를 따라 헤엄쳐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뱀은 괴물이요 사망입니다.
대대로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삼켜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음은 예수님을 삼켰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나는 이렇게 어두운 곳은 싫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생으로 나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은 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영생에 참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 것입니다.

아름답습니다!

대성리 강변 새터 호반에서 고등부 동계 수련회를 가졌다.
교사들과 약속을 하였다.
이번 수련회 때에는 자기를 위한 기도는 한 마디도 하지말고, 오직 학생들만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열심으로 기도하자고 다짐하였다.
한 시간 한 시간 지나가면서 남학생, 여학생, 교사들 모두 기쁨이 충만하였다.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심을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대표 기도를 드리는 여학생의 진실되고 깨끗한 기도 속에서 성령님은 역사하셨다.
말씀에 부딪친 후 자신은 부족함을 고백하는 형제의 겸손함 속에서 성령님은 뜨겁게 역사하셨다.
강줄기 같이 흐르는 찬양 속에서 성령님은 기뻐하셨으며, 나보다 학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교사들의 중보기도 속에 성령님은 강하게 역사하셨다.
너무나도 은혜가 충만해지자 설교자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고 하였다.
실로 10대의 젊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모습은 티가 없이 맑고 풍성하였다.
그 이후에 우리들의 입에서는 "아름답습니다"가 인사말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서도 "형제님, 아름답습니다. 자매님, 아름답습니다. 선생님, 아름답습니다." 공부에 찌들있던 학생들, 숨막히는 생활의 틀을 벗어나서 예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잃어버린 기도의 줄을 회복하였을 때, 그들은 잃어버렸던 생명력을 찾을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 돌아와서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성도님 , 아름답습니다. 집사님 , 아름답습니다. 권사님, 장로님, 아름답습니다 목사님 ,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교회 전체가 "아름답습니다"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결국 교회전체를 아름다운 천국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는 교회 구석구석 어두웠던 부분들도, 어두운 얼굴을 지었던 성도들도,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강도사 시절에 어느 부흥사가 이 교회는 교역자가 금요일마다 철야하면 부흥한다는 소리에 사실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엉성했다.
그런 사람이 매주 철야기도를 해야만 부흥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꼭 철야기도를 해야만 부흥한다는 말 자체를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쁜 사회에서 철야보다는 잠을 푹 자고 다음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내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일이라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백도 달라졌다 .
"주님을 사랑하기에,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집집마다 전도도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형제의 문제를 위해 금식도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십자가를 피해가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기쁨으로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전과 후의 고백에 차이가 생겼다

돌아온 탕자 젊은 처녀가 교회에 찾아 왔다.

다음 주에 교회 등록할 테니까 자기 집에 심방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집에 가보니까 그녀의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집에 들어서자 집안 공기가 냉하였다. 오래 전에 기쁨과 소망이 사라진 집안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완전히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그는 반가워 하며 어렵게 어렵게 눈물을 흘리며 한마디씩 하였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청했습니다. 죽기 전에 저의 가족을 목사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저의 형님은 장로님이고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돈 좀 벌려고 서울 나갔다가 이렇게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재산도 수술 두 번에 모두 다 잃어 버렸습니다. 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조그만 가게 하나와 다 죽게 된 몸뚱이뿐입니다. 이제 저희 식구 모두를 신앙 안에서 책임 맡아 주십시오." 그는 마치 죽기 전에 하나님께 최후의 고백을 하는 것과도 같이 진지했다. 그는 그 말을 한 후에 너무도 기뻐하였다. 이제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았다. 심방대원들은 찬송을 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합심하여 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그 후 2주일정도 후에 하나님께로 갔다. 나는 이제까지 많은 성도들이나 학생들에게서 고백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암 환자가 마지막 죽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떠나지 말고 신앙으로 살아가라는 고백과 목사에게 자기 가족을 맡아 달라고 했던 돌아온 탕자의 눈물과 고백은 평생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못내 아쉬워 한마디 해 본다. '그 고백을 10년만 일찍 했더라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무헌신 무상급 일생동안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현재 퇴임한 한 그리스도인이 한 늙은 목사와 관련된 전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이 전설에 따르면, 한 늙은 목사가 천사를 만났는데, 그 천사는 창고에서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로 휘황찬란한, 비교할 수도 없이 아름다운 면류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당신이 젊었을 때, 당신을 위해 만든 면류관이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을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 면류관은 이제 당신 것이 아니오." 천사는 되돌아가서 여전히 아름답지만 보석이 조금 밖에 없는 다른 면류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당신이 중년일 때 만든 면류관이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 일부를 세상적인 추구에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을 받을 수 없게 되었어" 다시 한번 그 천사는 창고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보석이 하나도 없는 개털모자를 가지고 왔다. "이것이 당신의 노년 때 면류관이오 영원히 당신 것이오"라고 천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헌금 한 선교사가 뉴 헤브라이즈 군도(New Hebride지에서 몇몇 원주민들이 돼지들을 잡는 것을 보았니다. 이 원주민들은 돼지의 꼬리를 잘라내서 그것들을 쌓아 놓았습니다. 그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고기는 우리를 위한 것이고 이 꼬리들은 우리의 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꼭 그와 같은 어리석고 죄스러운 짓을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을 위해 먼저 취하고 혹,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찌꺼기를 하나님께 들입다. 이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스럽고 사악한 불순종이요.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한 교인에게 교회에 헌금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는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저에게는 귀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애는 매우 귀한 자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애에게 옷, 신발 책 등 수많은 것들을 사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는 불행하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내 아들은 저에게 한 푼의 돈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살아있는 한, 교회가 건재하면서 세상을 축복하는 한, 교회는 움직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가 죽고 나면 여러분의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 있어서 여러분들과 제가 교회의 유지를 도울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헷셀포드의 (헌신) 강해에서

의사 입장에서 볼 때 의사 입장에서 볼 때,

기분 나쁜 환자와 기분 좋은 환자가 있다.
기분 나쁜 환자는 아는 척하는 사람, 의사를 믿지 못하는 사람, 이 병원 갔다 저 병원 갔다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치료 효과가 약하고, 돈과 시간을 이중적으로 소비하고, 정신적 고통까지 가중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기분 좋은 환자는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기고 하라는 대로 순하는 사람이다.
특히, 틀니를 해 넣을 경우 같은 때에도 입 속에서 쇠가 왔다 갔다 해도 의사를 믿고 가만히 있는 환자는 치료가 잘 된다.
그런 사람은 돈, 시간, 정신적 고통 등도 절감된다.
당신은 예수님 앞에 어떤 환자인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가만히 있는 환자인가? 왜 당신의 삶 속에 열매가 맺히지 못했었는가?

**어머니의 신앙 22세 청년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병명도 모른 채 하루하루 지나갔다. 너무나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 동네에 유명한 무당이 있었다. 무슨 병이든 그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면 다 나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 청년 어머니에게 그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 집사였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집사로서 굿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친척들이 그러다가 아들 죽이겠다고 하면서 그 무당을 권했다. 역시 이번에도 그 어머니 집사는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남편이 그 무당을 권했다." 여보, 신앙도 좋지만 아들 먼저 살려놓고 봅시다. 당신 고집 때문에 아들 죽이겠소." 그 남편의 마지막 권면에도 그 어머니 집사는 요동하지 않았다. 아, 그런데 이제는 방에 누워있던 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크게 쳤다. "어머니, 그 무당 좀 데려다 굿 좀 하세요. 그러면 내가 나을 것 같아요." 그 어머니 집사는 당황하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얘야,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한다면 너하고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과는 영원히 끝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잃어도 하나님은 잃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어떻게 굿을 할 수 있니?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뒷동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붙들고 울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는 무당을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보시고 내 아들 좀 고쳐 주시옵소서" 그 순간 집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병석에 누워있던 아들의 입을 통해 사탄이 소리를 지르면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아이고, 신앙도 꺾지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억울하다. 억울하다 " 그녀는 집에 돌아와 아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바로 그 어머니 집사의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으로 인하여 그 아들을 포함해서 4명의 아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가 되어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영혼을 목양하고 있다. **오병이어 예수님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덩어리 5개를 놓고 감사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감사하며, 살이 찢기고, 물과 피를 다 쏟으면서 감사하셨다. 고전 11:24에 성찬시 자기 몸을 상징하는 떡을 때어주면서 감사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는 억지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분명코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으셨던 것이다. 죽으면서도 감사하는 예수님의 감사정신이 사도 바울을 평생 감사 충만한 전도자로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감사하고, 그들 가운데 조그만 신앙이 있어도 그것을 칭찬하여 감사하였고, 또, 목숨까지도 바치는 동역자들의 사랑을 감사하였고, 죽음을 맛보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였고, 3번씩 기도한 병(病)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에도 감사했다. 나는 지금 감사가 충만한가?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감사하고 있는가? **감사의 기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사 기도해야 기도가 응답된다는 설교를 들은 어느 女집사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매일 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 고래형이었기 때문이다. 그 女집사는 나도 남편문제로 인해 감사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 날도 인사불성이 되어 집 앞에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다. 그 부인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고 하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여 하나님께 기구한 자기의 팔자타령만 하였다.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하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러는 중에 감사 기도해야 응답이 온다는 목사님 설교가 떠올랐다. 그러나 감사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감사조건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감사조건 없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고 기도하였다. 그래도 계속 감사조건을 찾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있기는 있었다. 옆에서 코 골며 자는 남편을 쳐다보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술에 취했어도 다른 데 안가고 집을 찾아오니 감사하고, 토요일은 술을 더 많이 마셔서, 주일 날 집 지켜줘서 감사하고, 주일 날 계속 자니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하고...그 부인은 계속해서 기쁨으로 감사하였다. 갈증을 느낀 남편이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남편은 "여보, 한밤 중에 잠은 안자고 미친 사람처럼 뭐 하는 거야.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싱글 웃는 거야?" "여보,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부인은 이제껏 자기가 기도했던 감사조건을 남편에게 모두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에게서 기적이 일어났다. "여보, 내가 예수 믿는 게 그렇게 소원이면, 오늘부터 예수 믿어 줄께" 10년 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 졌다..그래서 女집사는 더 기쁜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오래 참는 사랑이며 온유한 사랑이며 자랑하지 않는 사랑이며 교만하지 않는 사랑이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며 성내지 않는 사랑이며 악한 것을 생각치 않는 사랑이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며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이며 모든 것을 소망하는 사랑이다 나의 말 속에 아가페가 있는가? 나의 삶 속에 아가페가 있는가?

로마 40병사의 순교

주후 32년경 어느 겨울.. 로마 황제가 군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공무원에게 이교 신전에서 제사 드리지 않으면 그 직분을 잃게 되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300년 동안 무적의 사단이었던 12사단의 대장은 모여 있는 군사들에게 그 칙령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12사단 군사들이여, 여러분은 여러 전투에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황제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제국의 가이사에게 충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시다. 내일 우리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겁니다." 나중에, 두 명의 군인이 장군의 천막에 와서 말하기를, 이 사단에는 40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그들은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장군은 화를 내며 대답하였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만약 제사에 참여하면 괜찮거니와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무기를 압수 당하고 그 직책에서 쫓겨날 것이며, 큰 고통을 당할 것이오, 깊이 생각하고 좋은 쪽을 선택하라고 하시오" 그날 밤 진영에서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다음 날 아침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그들을 처형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팔과 목이 묶인 채 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 근처로 끌려갔다. 그리고 해가 지자 그들은 벌거벗긴 채 호수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이들의 훌륭한 전과(戰果)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주장을 철회할 기회가 주어졌다. 호수 옆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제사를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을 위해 따뜻한 목욕탕이 준비되었다. 어둠 속에서 이들이 호수 가운데로 끌려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불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호숫가에서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이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에서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자 찬송소리가 약해졌다. 그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얼거리는 기도소리 위로 천사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천사의 찬송소리가 바뀌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명, 순교자 39명,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때, 그 보초병은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이 따뜻한 목욕탕이 있는 호숫가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즉시 그 보초병은 무기를 놓은 채 소리 질렀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그 보초병은 자기 옷을 벗고, 벗은 채로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 뛰어갔다. 뛰어가면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다음날 아침 장군은 죄수들을 끌어내라고 하였다. 얼어 죽은 시체들이 호수 한가운데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는 보초병의 시체도 있었다. 그가 주님을 안 것은 그 짧은 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깊이 사랑하여, 주님의 품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최고, 최선의 것을 항상 끌어 내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행복과 미덕은 서로 보충합니다. 최선의 사람이 반드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보통 성공자로서 생활상의 기술에 있어서 최선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최고,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진리와 미를 가지고 표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 속에는 무서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이 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때 행복은 당신을 찾아옵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모든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오늘 행복을 택한다. 나는 오늘 성공을 택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의를 택한다. 나는 오늘 평화를 택한다." 이 긍정적인 말에 믿음으로 행할 때 행복은 스스로 얻게 될 것입니다. **가 정 유명한 불란서의 농민 화가였던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원래 70달러밖에 되지 않는 물감과 종이를 들여서 그린 것인데, 나중에 어느 미국인이 12만 5천달러에 사 갔습니다. 얼마 후에 불란서 사람들이 이 명화를 다시 본국으로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15만 달러를 주고 사다가 르부르 미술관에 걸어 놓았습니다. 밀레의 "만종"은 어느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다가 멀리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려 올 때에, 괭이와 삽을 놓고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명화 속에 세 가지 신성함이 있는데 첫째는, 가정의 신성함이요, 둘째는, 노동의 신성함이요, 셋째는, 종교의 신성함이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도덕 이슬람교에서는 법적으로 5명~7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일곱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매일 한 아내씩 돌아가면서 한 주일에 한번 꼴로 집에 와서 살게 됩니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한 500불 정도의 위자료를 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부자는 73년을 세상에 살면서 25번 결혼을 했고, 그 자녀가 83명이었으며, 세상을 떠나기까지 결혼한 부인은 13명이었습니다. 이슬람교의 사회가 이러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 감을 보러 갔다가 마음에 들면 자기가 결혼해 버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는 언니를 부인으로 맞고, 아들은 그 집 동생을 부인으로 맞는 생활을 합니다. 완전히 도덕의 질서가 무너진 사회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사회입니다. **비극적인 삶 미국의 한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몹시 거친 여자로서 세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마누라에게 매 맞기가 싫다며 헤어지고 세 번째 결혼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돌보지 못했고,아이는 사랑다운 사랑을 못받고 자랐습니다. 13세 때 지도교사는 "이 소년은 사랑이란 말조차 모르는 아이와 같다"는 심한 평을 학생카드에 남겼습니다. 소년시절 여학생과는 사귀지 못하고 남학생과는 자주 싸웠습니다. I.Q가 상당히 높았으나 성적은 낙제점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들어갔는데 여기서도 쫓겨났습니다. 절망에 빠진 청년은 외국에 가서 살며 사생아인 어느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돌아와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도 남편이 싫어져 집에서 내쫓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으나, 청년의 고약한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여자는 끝내 함께 살 것을 거절했습니다. 오기에 찬 청년은 돈 벌 결심을 하고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가지 않았습니다. 1963년 11월22일 평화스럽게 행진하던 케네디 대통령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오즈왈드(L.H.Oswald)의 비극적인 24년간의 생애입니다. **가짜 시장이나 가게 앞을 지나다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를 종종 보곤 합니다. "정말, 순, 진짜 참기름..." 참기름이란 상품명 위에 형용하는 말이 셋이나 붙어 있었습니다. "정말, 순, 진짜" 오죽 가짜가 많이 나와 돌면 이런 말이 생겼겠습니까? 우리 사회에 가짜가 섞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습니다. 가짜 식품, 가짜 화장품, 가짜 청심환, 가짜 공무원, 가짜 경찰, 가짜 스님...가짜 전도사도 있다고 들립니다.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더라도 미국 사람은 "돈을 얼마나 내야 그 물건을 살 수 있느냐?" 영국 사람은 "그 물건이 얼마나 질기냐?" 프랑스 사람은 "최신 유행이냐, 아니냐" 일본 사람은 "이 물건 갖다 팔면 얼마의 이익이 남느냐" 한국 사람은 "이 물건 진짜냐, 가짜냐"를 먼저 묻고 난 다음 물건의 값을 흥정한다고 하는 웃기는 일화까지 있다고 합니다.

"래리 에르진"이란 배가 해상에서 파선되어 가라앉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마다 날 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으나 모든 사람들은 자기 하나 살기에 바빠 그들을 도외시하였습니다.
그때 "스펜서"라는 젊은 학생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건져내어 모두 17명을 구출하였다고 합니다.
스펜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님은 해상사고에서 17명을 건졌다지요, 선생님에게 몇 사람이 찾아와 감사하다고 했는지요?"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침통하게 대답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대재벌 하이네

하이네라는 사람은 미국 10대 재벌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한때 사업이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기고만장하여 높아만 가던 그에게 어려운 시련이 몰아치니까 사업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년 내에 완전히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돈 천만원을 갖고 있다가 자기가 감옥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잠시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숨겨 두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갈 날이 가까워오자 하나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불 같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서 성전 들어가 지난 날 축복해 주셨을 때 감사하지 않은 것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숨겨놓은 돈 천만원을 가족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헌금으로 바쳤습니다.
하이네가 실패한 사실은 온 세상이 알고 교회가 알고 있는데 돈 천만원을 헌금한 것을 보고 당회가 열렸습니다.
그를 불러서 사연을 물으니까 울면서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당회에서는 그를 살려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빚쟁이들의 명단을 써 달라고 해서 그들을 만나 시간을 연장해 주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갚아줄테니, 감옥에 들어가게 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정 이야기를 다 듣고 요구를 다 들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하이네는 뜨거운 성금으로 모여진 돈을 가지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사업이 아니라 주님의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와 감격에 넘쳐 피땀을 흘려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대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감사의 차이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망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쳐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삶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겸 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 라비스 박사가 그 대학 강당에서 박사의 교육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많은 손님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게 되었다. 그때 라비스 박사는 답사를 하러 강단에 올라서 보니 학생들이 앉은 자리에 로앙가니 프랑스 대통령이 학생들과 함께 앉은 것을 보고 너무 황송히 생각되어 단상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대통령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께 배운 제자로서, 오늘 이 영광스러운 식전에 대통령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제자의 자격으로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라비스 박사는 다시 말하기를 "우리가 이렇게 겸손하신 대통령을 모시었으니 앞으로 우리나라는 크게 부강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머리를 숙이시오 어느 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웃집에 갔었는데, 방문이 끝난 후 그 이웃 사람이 집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쪽에는 나즈막한 들보 하나가 중간에 있었습니다. 주인은 "머리를 숙이세요"라고 외쳤지만 너무 늦어서 프랭클린은 그만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머리를 자주 숙이면 숙일수록 그 만큼 부딪히는 일이 없을 걸세" 이 말은 프랭클린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항상 이 말을 기억하고 머리 숙일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만식 장로님 주기철 목사님의 스승이고, 주기철 목사님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시던 조만식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조 장로님은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을 때, 주 목사님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주일...조 장로님이 예배 시간이 다 되도록 손님과 이야기 하다가 예배에 조금 늦게 들어왔습니다. 주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냥 나가든가, 의자에 앉아서 목사에게 욕을 하며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 장로님은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주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는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하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한 죄를 용서하옵소서... ... 주의 종의 마음을 상하게 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과 서서 예배를 드린 장로님을 본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회개하는 기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겸손한 장로님의 신앙을 우리는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자존심과 인격의 손상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기도와 순종으로 극복했을 때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타이타닉의 교훈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은 "타이타닉"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배로 "가라앉지 않는 차"를 만들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이 배가 미국을 향해서 갈 때 유럽의 많은 귀족들, 장관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이 밤새도록 무회를 열었습니다. 그 배가 대서양 한 복판에 도착했을 때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침몰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말미암아 1972년에 1516명이 바다에 장사되었습니다. 도저히 침몰하지 않을 것 같이 아름다운 배가 킨스다운을 출항한지 3일 후에 항로에 빙산이 있다는 경고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무선사는 이 전문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 배는 침몰할 수 없는 배라는 말을 항상 들어왔던 입니다. 즉 고정관념이 철저히 배여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두 번째 경고신호가 꼭 같은 전문으로 어 왔습니다. 무선사는 그 전문을 받았으나 그것을 메모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전문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무선사가 그 전문을 메모해서 선장에게 전달했습니다. 선장은 전문을 읽고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화이트 스트라인 회사의 전무에게 전했고 그는 그것을 읽고 휴지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한 시간 후에 4번째 경고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도 선장은 이게 말했습니다. "빙산이 나타나는지 잘 살펴보라고 말하라" 모두 그것뿐이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어둠 속을 22노트의 전속력으로 항진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 경고신호가 그 날 저녁 9시 30분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배의 속력을 줄이지 않고 22노트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밤 11시 10분에 다른 배의 부서지는 소리가 무선실에 들어왔습니다. "여보세요 여기는 캘리포니안 입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빙산지대에 갇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때 타이타닉호의 무선사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입 닥쳐, 우리 항로에 혼선을 일으키지 말아" 그리고는 그와의 연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10분후 파수꾼이 소리쳤습니다. "빙산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배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에게 이런 경고의 메시지는 항상 날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해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지옥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닫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818년 12월 23일오스트리아의 조그만 마을 오베른 도르프에 있는 한 예배당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쥐 한 마리의 장난이었다.
생쥐는 예배당에 있는 풍금에 달려들어 바람통을 갉아 먹은 것이다.
때마침 성탄절 성가를 찬미하러 12명의 성가대원들이 모였는데 반주자가 풍금을 타려 하였으나 생쥐에게 바람통을 뚫린 풍금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어서 반주자 구르버 선생은 모르 목사님의 성시 한 구절을 임시변통으로 작곡하여 기타에 맞추어 이튿날 성탄 축하 찬양을 가까스로 하게 되었다.
그 찬양이 바로 유명한 109장 찬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그런데 이 성탄 노래는 한 장의 휴지로 사라질 뻔하였는데, 얼마 후 풍금을 고치러 왔던 악기 수리사 마우리처에 의해 재평가되어 다시 애창되고, 이 동네 저 동네, 성가 애창곡이 되고, 또 국경을 넘어 다시 독일 사람들이 애창하여 오늘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많이 불려지는 성탄 명곡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명한 성탄 찬송을..한 마리의 생쥐 장난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애창곡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밀레니엄 전쟁준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피해를 보면 히로시마의 시민이 55만으로, 그 자리에서 죽은 자의 수가 10만이며, 54년이 지난 지금에도 원자병 환자가 2만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폭심을 준비한 반경 2km는 그대로 보존하여 그 당시 죽은 10만명의 시체를 그대로 묻어 놓고 "푸른 평화의 공원"이라 명명해 놓았습니다.
물론 폭심지대를 제외하고 다른 데는 다 복구했습니다.
그리고 8월 6일에서 15일 사이에 세계평화대회라는 대회는 모두 그곳에서 합니다.
그 공원 입구에 모자상이 있는데 어머니 품안에 안겨있던 애기가 그 당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원자박물관, 원자기념관이 있는데 그 곳에는 너무 비참한 장면을 다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원자탄인데, 핵을 융합해서 만든 수소 폭탄은 그보다 몇 만 배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소폭탄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을 비교하면 원자폭탄은 딱총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보유한 핵분열성 물질의 총량이 1.3비치로서1비치는 TNT(다이나마이트) 3조 톤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세계 인구를 50억으로 치면 1인당 TNT 1,000톤씩 할당되는 숫자로서 한 사람당 트럭 200대 분의 탄약이 돌아간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만큼의 폭탄을 세계인구가 짊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아대학의 토머스 스탠리(Thomas Stanley) 교수는 베스트셀러 《백만장자 마인드(The Millionaire Mind)》에서 20년에 걸쳐 미국의 '알짜 부자'를 연구한 흥미로운 통계자료를 보여준다.

그는 미국의 백만장자 733명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와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가 이 조사를 진행한 1990년대 중반에는 미국 가정의 약 4.9%만이 1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백만장자들에게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일을 골랐는지 물었는데 무려 81%가 적성과 능력, 즉 흥미와 재능에 부합하는 일을 선택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흥미와 재능에 맞는 일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흥미롭게도 소위 '유망 직종'을 선택해 성공했다고 답한 이들은 단 5%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우연히' 천직을 발견했다는 응답이 29%에 달했고, 27%는 '시행착오'를 거쳐서 천직을 찾았다고 답했다.
이전 직업과의 관련성을 통해서 천직을 발견한 사람은 12%를 차지했다.
흔히 성공하려면 자신이 좋아하고(흥미), 잘할 수 있는(재능)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의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일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인지, 다시 말해 자신의 천직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도서 12: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장

1월 14일(토)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절. 사람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빌 허(虛) - 虛虛虛虛虛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핫되도다!

사람 인(人) - 人人人人人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헛됨(헤벨) : 유익(有益, 이트론)


6953. 전도자(코헬렛. qôheleth) קֹהֶלֶת

1. 소집자,  2. 전도자
어원 / 6950에서 유래한 능동태 분사 여성형
관련 성경 / 전도자(전 1:1, 2, 12, 7:27, 12:8, 9, 10, 행 21:8, 딤후 4:5).
구약 성경 / 7회 사용

* 6950. 함께 모으다 /  카할(qâhal)  קָהַל
1. 함께 모으다,  2. 히필형 : 모으다
  • 관련 성경 / 모이다(레 8:4, 대하 20:26, 에 9:18), 함께모이다(에 8:11), 모여들다(렘 26:9), 모으다(민 1:18, 신 4:10, 대상 13:5), 모아놓다(민 16:19), 소집하다(왕상 8:1, 대상 28:1, 대하 5:2),잡아 가두다(욥 11:10).

  • 구약 성경 / 39회 사용

    1892. 헛되다(헤벨. hebel) הֶבֶל

    1. 숨,  2. 입으로 하는 호흡,  3. 이사야 57:13
    어원 / 18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허무한 것(신 32:21, 왕하 17:15, 렘 14:22), 헛된 것(왕상 16:13, 전 1:2, 애 4:17), 무익한 사람(욥 27:12, 시 31:6, 슥 10:2), 망령됨(잠 13:11), 기운(사 57:13), 안개(잠 21:6), 헛것(욥 7:16,시 144:4, 렘 10:15).
    구약 성경 / 73회 사용

    * 1891.  하발(hâbal) הָבַל
    1. 숨을 내쉬다,  2. 행하다,  3. 히필형 : 허영에 빠지도록 유혹하다. 숨을 내쉬다, 호흡하다, 증발하다

    관련 성경 / 허망하다(왕하 17:15, 시 62:10), 무익하다(욥 27:12), 헛되다(렘 2:5, 23:16).
    구약 성경 / 5회 사용

    3504. 유익(이트론. yithrôwn) יִתְרוֹן

    1. 소득,  2. 탁월함

    발음 / 이트론(yithrôwn)

    어원 / 34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익(전 1:3, 5:16, 10:10), 뛰어남(전 2:13), 소용(전 10:11), 이익(전 3:9, 5:9).

    구약 성경 / 1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소득, 이익, 수당, 보수, 전 1:3, 2:11, 3:9, 5:8(9),15(16), 10:10
    • 2. 명사, 남성 탁월함, 걸출함, 뛰어남, 전 2:13.

     

    헛되고 헛되며 ... 헛되도다 -

    '
    헛되고'의 히브리어 '헤벧'(헤벨. hebel) הֶבֶל)은 '숨', '증기', '공허함', '속이 텅빔' 등을 뜻한다.
    그리고 '하벧 하벧림'(헛되고 헛되며, )은 문자적으로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다.
    이것은 '헛됨'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적인 표현이다.

    이와 같은 관용구적인 표현은 이외에도 '지성소'(the holy of holies, 출 26:33), '아가'(song of songs, 아 1:1), '만왕의 왕'(King of kings, 계 19:16), '만주의 주'(Lord of lords, 계 19:16) 등이 있다.

    한편 본절에서 솔로몬과 같이 지혜롭고(1:16) 부유하며(2:4-8), 수많은 첩들을 둔 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한 것은 그가 한때 이방 여인과 연락(宴樂)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낀 자로서 이를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שְׁלֹמֹה Solomon. 평화)"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서 인생을 사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여기 헛됨과 유익(남는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헛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사라져버리는 숨' 또는 '바람’인데 로마서 8:29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허무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아무 것도 남는 것(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익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을 때 사용한 '유익'과 같은 개념입니다(막 8:36).

    전도자는 먼저 자연계의 네 가지인 땅, 해, 바람 그리고 강들에 관심을 보입니다.
    인간은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지만, 땅도 그대로 있고 해와 바람과 강들도 그 존재가 유지됩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자신의 의미에 대한 어떤 증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무상함)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자연계에 있는 만물의 존재는 영원하고 그 진로는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일정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새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기억력이 약해서 이전의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정말 그러하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수고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전도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일반적 묘사뒤에 상세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자기의 지혜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연구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일이 한낱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정확한 묘사입니다.
    또 세상이 제시할 수 있는 선이나 유익이 있다면, 그것도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죄와 함께 타락하여 허무함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을 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얻은 결론을 더욱 확증하기 위하여, 자신이 얻은 지혜와 지식을 언급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오지 않는 지혜는 유익과 평안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만 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세상에 사는 타락한 인간이 가진 지혜의 한계와 본질입니다.

    전도자의 관찰과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무의미함과 유익 없음이 우리 인생에 피곤과 근심을 더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타락한 인생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주실 때에만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의미와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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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금)

    사람의 본분(전도서 12:13)


    죽음이 당신을 덮치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라

    인생을 지혜롭게 잘 사는 길은, 죽을 날을 생각하고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1~2). ‘기억한다.’(종종 ‘생각하다’로 번역된)는 단어는 단순히 잊었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 결정적 행동을 수반하는 적극적이고 동적인 동사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셨다(삼상 1:19)는 말은 한나를 잊었다가 기도를 듣고 다시 그녀를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해 일하시겠다고 결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은 엄청난 은혜의 표현인 것입니다.

    전도자가 아직 죽음이나 몸이 노쇠할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넓은 의미로 대부분의 사람을 포함한다)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은 힘이 있을 때 창조자를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살아가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죽음이 오기 전에,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날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2절이 이런 죽음의 날을 설명합니다(2).

    인간의 육신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3~7). 3~6절은 인간의 육신이 점점 쇠약해질 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의 설명입니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3)- 노년에 중풍 또는 쇠약함으로 수족이 떨린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3)- 쇠약해서 허리와 다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린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3)- 이가 음식을 먹을 힘을 잃는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3)- 눈의 시력을 잃고 동공의 수축 이완이 잘 되지 않는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4)- 입술이 이가 없으므로 입안으로 오므라든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다(4)- 이가 없으므로 부드러운 음식만 먹을 수 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4)- 아침에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깬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것이다(4)- 음악과 노래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쇠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다(5)- 그는 고공공포증에 시달리며 전에 자주 다니던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5)- 머리가 나이와 함께 백발로 변한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5)-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것이다.

    정욕이 그치리니(5)- 모든 성욕과 욕망을 상실한다.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 말 그대로이다.

    은 줄이 풀리고(6)- 두뇌와 척수를 연결해주는 척수가 창백해져 은빛처럼 된다.

    금 그릇이 깨지고(6)- 그 모양과 색깔로 보건대 두뇌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6)- 절망한 마음, 즉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지탱해주는 모든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6)- 양수기처럼 끊임없이 피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정맥과 동맥의 전체계가 심장이 멈추자 중단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날을 만나게 될 것인데, 이 날이 불현듯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창조자를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미래는 위험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결국 몸은 썩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7).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영혼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8~14).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은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인생입니까! 그리고 전도자는 다시 한 번 그런 인생의 헛됨을 표현합니다(8). 전도자는 자신을 3인칭으로 묘사하면서 지혜롭다고 하고 그가 참된 지식을 가르쳤고 또 그 지식을 묵상하고 연구하였다고 말합니다(9). 자신 또한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였습니다(10).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나 쾌락주의를 부추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말씀은 마치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과 같습니다(11). 이것은 당시 목자들이 소들을 채찍으로 움직이게 하고 텐트를 치기 위해서 못을 땅 속에 깊이 박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창조자를 위해서 살게 하고), 그들의 인생관을 확실하게 조이는 못의 역할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경계(충고와 훈계)의 역할을 합니다(12). 많은 책과 지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경계하여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주고 싶은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입니다(13).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거워하고, 그 삶에 주신 작은 선물이라도 즐거워하며,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을 알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14). 이것은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즐기며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저희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염려와 슬픔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주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옵소서. 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비록 고통 가운데, 시험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거리지 않도록 영원토록 은혜로 지켜주옵소서.




    1월 26일(목)

    청년의 때(전도서 11:10)

    청년의 때에 아라비아 숫자 1자의 난외 주석을 참조하면 "새벽" 이라고 합니다.
    청년의 때는 다른 말로 새벽이라고 하겠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현재를 기쁨으로 사는 것.

    ‘먹을 것을 물 위에 던지라’고 말합니다(1절).
    먹을 것을 물에 던졌으니, 마땅히 그것을 되돌려 받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함에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푸는 인생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2절).이 말씀은 지금 당장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닐지라도,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라는 권면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 대한 인식과 신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기억하십시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잠 19:1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4~6절은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과 확실한 결과나 조건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비구름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파종조차 하지 못하는 농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만사를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자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은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파종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아있지 않으며,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실패와 성공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날마다 씨를 뿌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낙심하여 주저앉아있습니까?

    빛이 있고 해가 있다는 것, 햇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7). 우리는 경이로운 빛 아래서, 현재를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캄캄한 날들, 즉 우리가 무덤에 들어갈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8). 그 때 우리는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 모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은 젊은 시절을 즐거워하고 원하는 대로 행함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도 함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9).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 것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즐거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서가 가르치는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를 즐거워하면서(희락을 누리면서)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도,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여기에는 노동의 즐거움도 포함되어 있다)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가 당신의 현재의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불확실성은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 염려를 강화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되 미래를 바라보고 사십시오(7~10). 믿음으로 말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늘을 염려와 걱정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안개와 같이 불투명한 상황 중에도, 밝은 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비추면 그 안개가 걷히게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오늘도 미리 기뻐하고, 미리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많이 웃고 행복한 날 되게 하옵소서.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11장에서 전도서에서 얻는 교훈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12:13).

    2.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 경외하라, 예배하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기도할 때 말을 삼가라(5:1-7).

    3. 선을 행하라(3:12).

    4. 하나님이 언젠가 당신을 심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은밀한 중에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부끄러울 일은 삼가라(11:9; 12:14).

    5. 현재에 살며, 그것을 철저히 즐겨라(7:14; 9:7-10; 11:9-10).
    현재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전도자는 경박함은 비난하지만(7:4-6) 교만하거나 너무 경건해서 웃거나 흥겨워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들을 또한 싫어한다.

    6. 인생의 문제들은 하나님께 일임하라.
    하나님께서 그 궁극적 가치를 판단하시게 하라. 당신이 할 일은 주어진 분별력과 진취성을 이용해 앞에 놓여있는 기회들을 이용하는 것이다(11:1-6).

    7. 이것이 지혜의 길이다.
    또한 믿음의 삶의 한 측면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비록 지금 당장은 자신의 손을 감추고 계시다 해도 자신이 하고 계시는 것을 알며, ‘매사를 잘 처리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1월 25일(수)

    지혜자의 마음(전도서 10:1)

    지혜와 우매의 큰 차이.

    참 지혜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도 합니다(9장). 하지만 죽은 파리들이 비싼 향기름을 악취 나게 만들 듯이, 우매함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는 악한 영향력이 큽니다(1). 2절의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쪽에 있다는 말씀은 지혜가 사람을 옳은 길로 가도록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의미입니다(2). 지혜가 비록 업신여김을 받아도 결국에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은 지혜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어리석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3).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지혜는 폭군의 분노를 참아내게도 합니다(4). 정부에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한 일 중 대표적인 것이 합당하지 않은 사람(어리석은 사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6~7).

    이런 현상이 세상에 많지만 지혜자는 이런 것들로 희락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명심할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살되, 그것이 우리를 분노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비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희락 자체를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8~11). 우매한 사람은 남을 넘어뜨리려고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고, (어떤 이익을 보려고) 허문 담으로 들어온 뱀에게 자기가 물리고, (자기를 위해서) 돌을 떠내다가 돌에 상하며, 나무를 쪼개다가 그것 때문에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딘 연장으로 열심히 일하니 힘만 들 뿐입니다. 뱀에게 물린 뒤에야 뱀을 다루는 사람을 부름으로써 도움을 얻지도 못합니다. 이것들이 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우매함은 언제나 사후약방문과 같아서, 합당한 시기를 놓치고 정상적인 방법을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부족한 부분을 미리 예측하여 대비합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언어생활에서도 구별됩니다(12~15). 지혜자의 말은 은혜로워서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우매자의 말은 자기를 삼키고(12)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15). 자기 말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것은, 미래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말을 앞세워 말로 자기를 들어내려는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행태가 비슷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부터 어리석고 극단적인 말을 할 뿐 아니라, 말이 많으며(13~14) 자신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말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은혜로워서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지혜와 우매는 정부의 영역에서도 나타납니다(16~20). 철부지가 왕이 되면, 대신들은 아침부터 먹고 즐기는 형국이 됩니다(16). 이런 나라는 지붕이 무너지고 집이 새는 나라입니다(18). 그들은 때를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희락을 추구하며 그들의 해결책은 언제나 돈 뿐입니다(19). 그러나 좋은 나라는 왕이 자격에 합당하고, 대신들은 먹을 때와 마실 때를 분별할 줄 알고, 왜 먹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복을 누리게 됩니다(17). 비록 세상 정부에서 부조리와 악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함부로 저주하거나 악담을 하지 않는 것도 지혜입니다(20).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게 하옵소서. 못 사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늘 하루를 열정으로 사는 이유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서도,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지혜대로 살게 하옵소서. 하늘의 지혜로 인해 오늘도 복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1월 24일(화)

    하나님의 손(전도서 9:1)

    세상이 멸시하는 지혜를 귀히 여기라

    사람의 외적인 형편과 모습을 가지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지, 미움의 대상인지를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1),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6장). 욥의 세 친구들이 고통 받는 욥을 보고 욥이 하나님과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 옳지 않았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객관적이고 외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일반’이라고 말합니다. 선인에게 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해가 비추이고, 비가 내리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엄청난 모순일 수 있지만, 또 한편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선인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파편들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기회이겠습니까? 생명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있다는 차원에서 소중하다는 것이 전도자의 논지입니다(4~6). 비록 지금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놀라운 기회의 연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1~6절에 말하는, 고난 속의 소망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무가치하게 여기시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안식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을까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 식물과 포도주이며, 좋은 의복과 머리에 바르는 향이고, 아내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7~9).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여야 합니다(10~12). 성공은 사람이 가진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빠른 경주자, 용사, 지혜자, 명철자, 그리고 지식인은 모두 자기 능력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그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에는 각기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고 좋지 않은 사건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시기와 기회(11)는 장래의 성공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장래에 일어날 결과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은 능력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홀연히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지혜가 중요합니다(13~18). 전도자는 힘 있는 왕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 한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그 성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비록 가난한 지혜자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지혜는 결코 무익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는, 세상에서 존경과 인정보다, 멸시와 업신여김을 받겠지만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소리크고 영향이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지혜자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17). 지혜를 무시하면 많은 선이 무너집니다(18). 지혜를 더욱 사모하고 귀히 여기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무시하고,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를 멸시한다고 해도, 저희는 중심을 분명히 잡고, 허망한 것을 쫓아 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시고, 지혜를 추구하며, 지혜를 쌓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미국에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라는 목사님이 오레곤에 있을 때, 어느 날, 한 교인이 암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캠폴로 목사님은 그의 치유를 위해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에 목사님은 그분의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목사님이 저번에 제 남편의 암을 위해 기도해주셨지요?”

    암이 나은 얘기인가 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그녀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었어요!”

    목사님은 그 여자가 따지려고 한 전화인 줄 알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계속 말했습니다.


    “목사님!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때 제 남편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자녀와 손자들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58세에 죽을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하다고 가끔 하나님을 저주했어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주위 사람들도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해준 후에 제 남편에게 평화와 기쁨이 생겼어요. 목사님! 지난 3일 동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노래했고, 웃었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했어요. 저는 목사님이 남편을 위해 기도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려고 전화했어요.”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목사에게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치료되지는 않았지만 치유되었어요.”(He was not cured, but he was healed).


    1월 23일(월)

    얼굴(전도서 8:1)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라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의의 대행자입니다(2~5). 전도자는 신약의 가르침과 같이, 사람은 왕과 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롬 13:1~7; 딛 3:1; 벧전 2:13~18). 왕이 존재하는 목적은 공의의 시행입니다. 비록 인간이 주어진 권세와 지위를 남용해서 악을 행하는 일도 일어나지만(9) 그것이 불복종의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은 역사가운데서 성취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와 판단을 분별하고(5), 하나님의 때를 헤아리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기한에 대한 무지는 인간의 불행을 증가시킵니다(6~8). 비록 세상에는 권력의 남용과(9), 악한 자가 영예로운 장례식을 치르고(10) 악한 일에 대한 공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11) 부조리가 있지만(혹은 넘쳐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 분명합니다(12). 이런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먹고 마시고 즐거운 일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러한 희락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15절).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는 해결할 수 없는 신비들이 존재합니다.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17). 욥도 그 지혜를 추구하고 알고자 했지만(욥 28:13) 오직 하나님만이 그 길을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욥 28:23). 그러므로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인 것입니다(욥 28:28).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타나는 부조리함의 모든 이유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그런 부조리와 인간의 악함 속에서도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복을 누리는 것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입니다.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많이 분노하고 괴로워합니다. 불의하고 탐욕스러운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서 심판자처럼 교만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많은 부조리함 속에서도 주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누릴 줄 아는 지혜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1월 21일(토)

    아름다운 이름(전도서 7:1)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

     

    전도자는 이제 불행이나 재난이 반드시 나쁜 것, 즉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증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1~15). 오히려 불행이 번영보다 더 나은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명예)을 지키는 것이 보배로운 기름, 곧 부유함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의 날 보다 낫습니다(1). 죽는 날에 사람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남길 수 있지만, 이제 태어나는 사람의 삶이야 어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2)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3).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5). 뇌물로 재판관의 마음을 자기 원대로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7).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는 마음이 초조해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8~9). 좋았던 과거를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그리워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10). 지혜는 유산이나 돈 보다 유익합니다(11~12). 언제나 순간적인 것들 보다 영구적인 것이 나은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본격적인 내용은 고통조차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13~14).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이란 고통과 역경의 상황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궁극적으로 이렇게 굽게 하신 일들이나 고통조차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의존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번영과 선한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역경과 고난의 때에도 절망하고 낙심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돌아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 안에서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16~17절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이는 경건의 이름으로 조금만 다르면 과도히 판단하고 비판하는 자기 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입니다(16). 물론 그 반대로 가는 것도 위험합니다(17). 전도자는 거짓 경건에 대하여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거짓 경건과 거짓 지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말과 행실에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20~22).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을 지나치게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21~22).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타락하여 자기 꾀를 좇아 행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29). 전도자는 자신이 지혜를 간절히 구하였으나, 그 지혜는 이를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음을 알았습니다(23~25). 26절에 언급된 ‘여인’은 잠언에 묘사된 음녀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인생 중에는 늘 이런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고,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돌아보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의 내용이며, 이 신앙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신자의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절망 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끝없는 자비하심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되, 선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실 주님을 기대하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1월 20일(금)

    폐단(전도서 6:1)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신자의 삶

     

    오늘 말씀은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불행한 일"이라는 말은 본래 재앙’이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만,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살아가는 일을 허무하게 하는 어떤 일, 마음이 무거워 살아갈 힘도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무리 많은 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부요함과 재물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2절). 뼈 빠지게 일하고 수고한 그 사람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반면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다 차지하고 마음대로 쓰며 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라는 말입니다. 온갖 계획과 재주와 노력과 가진 것을 다 투자하여 이루어 놓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가로채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하여 재산을 축적하여도 그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까?

     

    전도자는 백 명의 자녀를 낳으면서 장수한다고 하여도, 평생 마음에 낙이 없이 살다가 죽고, 또 죽을 때는 제대로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면, 이런 인생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못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낫지 아니하냐고 묻습니다(3절). 자녀가 백 명이어도 그 마음에 즐거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낙태된 자는 모태에서 생겨났으나 태어나지 못하고 죽으니 그 인생이 헛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는 뼈 빠지게 일하고서도 남 좋은 일만 시킨 사람의 인생보다는, 조용하고 편한 인생을 살다가 간 것이니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6절의 말씀처럼,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엄청난 부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백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아무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말합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즐기고자 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즐기거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식욕은 결코 채워지지가 않습니다(7절).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 인생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낙이 무엇인줄 아는가?”(12절) 묻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 옳은 것,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알며, 무엇이 불행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분별하실 수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로 다른 관점을 가지도록 유도합니다. 아버지의 수고로, 아버지는 먹지 못하나 아내와 자식이 배불리 먹게 되듯이, 왕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다스림과 열심과 섬김으로 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듯이, 정작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러한 삶이 진정한 낙이며, 의미이며, 가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여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 수고하여 다른 사람을 먹이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낙”이며, “기쁨”이며, “가치”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오늘 수고하여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배워서 남에게 주는 인생, 땀 흘려 가족을 섬기는 사랑으로 오늘도 살게 하옵소서.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세상에서,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핀잔을 받더라도, 받는 것보다 베풀고 주는 삶을 살기를 선택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1월 19일(목)

    우매자(전도서 5:1)


    겸손한 자만이 희락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반론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3:16~4:16). 그러나 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우리가 감히 반론도, 토론도, 요구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놓치고 있습니다. 어줍지 않은 지식과 정보로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을 삼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엄정함을 알고서, 하나님께 무엇을 따지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1~2).

    겸손하지 않은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대표적으로 인간의 서원을 예로 듭니다. 서원은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매수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4~6). 아마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는’ 것은 경솔한 서원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2). 하나님 앞에서 맹세와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니, 서원할 때에는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인생의 부조리함들 속에서도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끝까지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전도자는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법정의 문제나 학대가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합니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8).”

    그리고 부와 수고의 문제도 계속해서 다룹니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부로 만족할 줄 모릅니다(10). 부가 쌓이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입도 늘어나는 법입니다(11). 이것은 부의 증가가 즐거움을 보장하기보다, 도리어 근심(해)을 더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좋은 예입니다(13).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가진 부가 많지 않은 노동자는 늘 잠을 잘 잘 수 있지만,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불면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12). 재물은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14). 아무리 부자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없듯,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15). 이 본문은 디모데전서 6장의 교훈과 동일합니다(딤전 6:3~10). 결론은 같습니다(18~20). 부를 추구하지 말고(딤전 6:10) 희락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전도자가 희락을 추구하라는 말은 전도서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에피큐로스 학파가 추구하던 쾌락이 단연코 아닙니다. 이들처럼 쾌락을 추구하여 평생을 수고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이고, 결코 원하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희락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신 계획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희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과 방법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곧 영생입니다. 이것이 영원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3:1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희락을 누리며 인생을 삽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거나 불평하는 입술을 가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저희가 되게 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더 많이 쌓는 것에 마음과 시간을 쏟기보다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기쁨을 더 많이 누리게 하옵소서.





    1월 18일(수)

    위로자(전도서 4:1)

    인생의 허무함 앞에서, 홀로가 아닌 함께.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지금까지의 역사와 사회 속에 있어왔던 수많은 학대의 현실입니다(1~3).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권세자들만 있지, 위로자가 없습니다. 위로자 없이 학대를 받는 것은 죽음만도 못하다고, 학대를 받는 인생보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합니다(2~3).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고 그 가진 권위로 누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됨으로 인하여 위로하고 격려하여 함께 울고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다만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참 위로와 격려를 누리게 되고, 은혜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시 73:17).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경쟁함으로써 서로에게 잔인해지며 시기를 경험하고는 합니다(4). 이런 현실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치명적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다만 그것이 게으르게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5).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족함을 배워야 합니다(6; 딤전 6:6; 잠 15:16~17; 16:8).

    경쟁 사회에서 도피하여 산으로 피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닙니다(7~12). 왜냐하면 사람을 피해 산으로 갔어도, 이제는 외로움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으면, 그는 자기가 땀 흘리고 수고해야 할 대상을 찾을 수 없어서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9) 고독보다 관계가 낫고, 독신보다 결혼이 낫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여기에 도움과(10) 위로와(11) 대응책이(12)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13)”라는 말씀은 잠언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무상함이 있습니다. 왕이지만 늙고 둔하여 정신이 혼미해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13), 가난하게 태어났고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왕이 되기도 합니다(14). 사람들은 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수많은 백성이 그를 떠받들다가도, 시대가 바뀌면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16).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거나 경험하는 명예나 권력은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많은 부조리를 열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시험하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달한 결론처럼 무신론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5장에서 그 대답을 줄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 삶의 경쟁과 치열함에, 도망가서 홀로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인생의 전쟁터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울 수 있는 믿음의 동지를 단 몇 사람이라도 허락해 주옵소서. 귀한 믿음의 친구들을 허락하셔서 세 겹의 단단한 줄을 묶이게 하시며, 끊어지지 않는 신앙의 연대를 이루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나 또한 누군가의 동역자로 함께 서서, 서로를 세우고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복된 연합을 이루게 하옵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교회사역자가 도자기 공장 지대에 사는 한 사람을 방문하였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는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도사는 그 집에 도착하여 유리 상자 속에 든 두 개의 좋은 꽃병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야! 참 멋있군요. 아주 귀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전도사에게 말했다.
    "이 세상 돈을 다 준다 해도 저 두 개의 꽃병은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몇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말하자면 마귀에게 영혼을 맡겨 놓고 다녔던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 한 무더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쓸 데가 없어서 버린 것이었지요. 나는 그걸 집에 가져와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워 보았습니다. 결국 나는 쓸모 없던 흙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었습니다. 그 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길 바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쓰레기장의 흙 무덤 같은 나를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

    "Vanitas vanitatum, dixit Ecclesiastes,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傳道書), 코헬렛. קהלת, Ἐκκλησιαστής, Ecclesiastes)

    코헬렛의 어원은 카알(모으다)이다.
    동사인 ‘카알’의 분사형태가 ‘코헬렛’이다.
    직역하면 ‘모으는, 소집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으고 소집하는 것일까?
    문맥으로 보아 코헬렛의 목적이 되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청중’이다.
    이렇게 코헬렛은 차츰 ‘모으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임에서 말하는 자’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히브리어 성경 이름이 ‘코헬렛’으로 정착된 것도 그런 이유다.
    성경의 내용을 ‘코헬렛의 설교’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전도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인 것.

    그리스어 성경인 70인역에서는 ‘에끌레시아스테스(Ekklēsiastēs)’라 했다.
    직역하면 ‘불러 모으는’이란 형용사다.
    원형은 에끌레시아(ekklēsia)로 ‘소집된 모임’이란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는 민중들의 모임인 ‘민회’를 ‘에끌레시아’라 했고 민회가 열린 장소를 ‘아고라(agora)’로 불렀다.
    후대에는 장소 뿐 아니라 모임 자체도 그렇게 불렀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 역시 엑끌레시아의 번역이다.
    ‘부름받고 나온 이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원어, 그리스어, 한자, 그리고 코헬렛의 각종 해석을 합치면 "섭리를 전달하는 현자(지혜자)가 청중을 에클레시아로 불러 모으는 책"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코헬렛을 전도자, 전파자, 조언자, 현자, 도인, 설교자, 발언자 등 무엇으로 해석하든 절대 "포교자"라는 뜻은 나오지 않는데, 전도라는 말이 사실상 포교와 동일어로 쓰이는 상황이라 전도서를 종종 포교서(...)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전도서의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뿌리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섭리 전달의 시작과 같은 내용이지만, 이 책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조언할 뿐,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종교"를 믿으라 포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구약 성경의 책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인 전도자(코헬렛)라 밝히고 있으며 책의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전도서는 삶의 허무함과 삶의 최선의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전도서는 노년의 솔로몬이 쓴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온 외래어와 아람어가 사용되기 때문에 기원전 450년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보며,
    기원전 180년경에 작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스어 제목인 '에클레시아스테스(Ἐκκλησιαστής)'는 히브리어로 된 미상의 저자 '코헬렛(קהלת)'에 대한 70인역의 번역어다.
    코헬렛의 어근인 '카알(קהל)'은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코헬렛은 모으는 사람, 특히 단어의 문법적 구성에 의해 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맥상으로 코헬렛이 모으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회중이 될 수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코헬렛을 '회중 앞에서 말하는 자'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개약한글판에서는 코헬렛을 전도자로 번역하여 이 책의 제목은 전도서로 붙여졌다.
    이를 따라 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책의 제목은 전도서로, 저자는 전도자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 성경과 쉬운 성경에서는 책의 제목은 마찬가지로 전도서로 번역하며, 저자는 "설교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 역시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천주교 새번역 성경에서는, 원어를 음역하여 제목과 저자 모두 "코헬렛"으로 번역하고 있다.

    저자

    전도서 1장 1절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이라 밝히고 있으며, 1장 12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던 솔로몬 왕의 후손들은 유다만을 통치하였으므로, 이는 솔로몬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따라서 히스기야와 휘하의 학자들이 이사야, 잠언, 아가, 전도서를 서술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이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전도서의 저자를 노년의 솔로몬왕으로 여겼다.

    그러나 과거부터 이 책이 바빌론 유수 이전에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여럿 있어왔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 책의 저자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솔로몬왕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다른 솔로몬일 것으로 보았다.
    디디모스는 반면 단일 저자가 아니라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았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 책이 바벨론 유수기에 저술되었다고 본다.
    특히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온 외래어와 아람어가 대놓고 사용되기 때문에 기원전 450년 이후로 보는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때 유다와 이스라엘의 언어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어휘를 여럿 갖게 되었는데, 전도서에서 사용된 페르시아계 단어는 다음과 같다.

    • 낙원(파르데스 : פַּרְדֵּס pardēs)
    • 소식(피트감 : פִּתְגָם pitgām)

    기원전 180년에 집회서의 저자인 헬레니즘 유대인 벤 시라가 전도서를 인용했기 때문에 늦어도 기원전 180년 이전에는 서술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논란의 중심이 되는 부분은 이 책이 아케메네스 제국 통치기에 서술되었는지, 혹은 헬레니즘 제국 통치기에 서술되었는지 여부이다. 아케메네스 통치기(450~330 BC)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도서에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  헬레니즘 통치기(330~180 BC)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리스 사상과 사회상이 전도서에 녹아있다고 본다.헬레니즘 통치기에 기록되었다고 할 때 예루살렘이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가 과연 1장에 등장하는 인물인 전도자와 동일인물인지도 확실치 않다.
    전도서에는 전도자의 말을 제3자의 것처럼 인용하는 부분이 있는 한편, 본인의 말처럼 1인칭 화법을 사용하는 부분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말을 제3자가 수집하여 엮었으며, 이후 새로운 저서에 유명한 현자의 이름을 붙여 저서에 무게를 싣는 당시의 풍습을 전도서의 저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런 관점에서 12장 8~14절의 내용은 전도자가 아닌 저자가 별도로 서술한 것으로 본다.

    전도서의 저자에 대하여

    전도서(Ecclesiastes)는 잠언, 욥기, 시편과 같은 성경에 수록된 지혜 문학 중의 하나입니다. 히브리어의 원제는 코헬렛(koheleth) 즉 ‘설교자’라는 뜻인데, 우리 성경에서 도를 전하는 책이라는 뜻으로 전도서(傳道書)라고 이름을 붙인 듯합니다.  

         

     

    이 책의 저자로 등장하는 설교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 즉 솔로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기록한 언어를 살펴보면,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언어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로부터 다시 귀환한 이후에 쓰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BC 3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솔로몬 왕(BC 970-931)이 BC 10세기의 왕이었으니,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 왕이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중동에서 지혜 문학은 중요하고 인기가 많은 장르였고, 왕과 귀족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서들을 기록한 다양한 익명의 저자들은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책의 저자를 지혜로운 왕의 대명사인 솔로몬 왕에게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전도서에 저자가 자신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지혜서의 저자를 솔로몬 왕에게 돌리는 고대의 일반적인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지, 솔로몬이 직접 썼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고 추정합니다.  

    전도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염세주의적인 시각으로 유명한데, 이는 성경의 다른 지혜서들과는 상충되는 시각이라고 합니다.
    염세주의와 함께 그 날을 즐기는 것을 권하는 쾌락주의적 요소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서들,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및 에피쿠로스 철학과의 영향 관계를 추정하게 합니다.
    시기적으로 BC 4세기에서 BC 3세기에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제국이 각각 유대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 같은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학자들은 전도서가 구약성경의 정경에 포함된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약성경의 공통 주제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인데, 전도서에는 이런 주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극단적인 염세적인 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그 선하심을 부정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구약의 정경으로 포함될 수 있었다고 추측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학자들은 전도서가 정경에 포함된 분명한 이유와 그 경위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전도서가 정경으로 들어감으로서 구약 성경은 더욱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졌다는 사실도 확실합니다.

    구성

    전도서의 일부 구절들은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전도서 안에서도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탈무드는 이러한 까닭에 전도서를 다룰 때는 조심해야하고 만일 자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읽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적는다.

    상기했듯 전도서 속에서는 자기모순적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보다 낫다(4:2) 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 하는 부분도 있다.
    근심이 웃음보다 낫다(7:3) 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근심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생긴다(7:9) 하는 부분도 있다.
    이와 같은 각 구절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였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모제스 멘델스존과 페르디난트 히치히가 도입하고 레비와 고르디스가 발전시킨 이론인 인용 이론이 있다.
    여기서는 전도서의 모든 내용이 전도자의 주장이 아니라, 비정통적인 주장에 대한 전도자의 반박으로 구성되었다는 해석을 제기한다. 즉 마치 욥기처럼 여러 명의 이야기가 인용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욥기에서는 각 주장이 누구의 것인지 명시한 반면 전도서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디들렘 미헬(Diethelm Michel), 노르베르트 로흐핑크(Norbert Lohfink), R. N. 화이브레이가 이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들은 이러한 모순을 긴장 관계로 보고 전도자가 염세주의적이고 비정통적인 부분을 반박하는 구조로 작성되었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해석 이론 역시 제기되었다.
    이 이론에서는 전도자가 정말 존재했던 어떤 반대자의 의견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반대파를 설정하고 이에 반박하는 형식인 디아트리베의 양식을 따른다고 본다.
    이와 같은 양식비평적 접근은, 왜 전도서에서 각 주장을 하는 인물을 명시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한다.
    디아트리베 형식은 주로 학교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하나의 중심 사상이 서두에서 제기되고 후에 본격적으로 이를 설파하는데, 전도서의 구조를 이에 맞춰 해석하기도 한다.

    주제

    인간은 자기 성취를 위해 줄기차게 달려가지만 결국 공허함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종 쾌락주의의 역설이라고 일컬어 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자아에 대해 죽을 경우만이며, 우리가 참된 즐거움을 알게 되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을 향해 인간의 눈을 들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전도서의 주제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개중에는 이 책이 긍정적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본다고 하는 학자도 있는 반면, 비관적으로 바라본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주제가 일관적인지 비일관적인지, 정통적인지 급진적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며, 심지어 전도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전도자가 범한 오류를 지적하는 글인지에 대한 시각도 다르다.

    어느 정도 통용되는 전도서의 주제를 말하자면 세상에 만연한 왜곡과 불평등, 인간 야망의 무용성, 세속적 지혜와 정의의 한계를 관찰하고 명상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과 좌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해 아래(개역개정)"라는 문구는 이러한 내용과 함께 총 29번 사용된다.
    이는 주권자인 신의 힘과 공의,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도서가 지식과 논리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고 생각하며 읽을 것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도서의 결말은 11-12장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전도자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결론으로 전달하는 것 보다도 개개인의 성찰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 처럼 보인다.

    코헬렛(전도자)의 일성(一聲)은 ‘헤벨’(הֶבֶל)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헤벨’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전도서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말과 외국어 번역 성경들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이 ‘헤벨’을 번역합니다.

    1.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안 되는” :

    영어의 “absurd”는 불합리와 부조리를 뜻하는 말로,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우리말 번역 중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아 번역한 성경은 없어 보입니다.

    2. “쓸 데 없는, 소용 없는” :

    “useless”나 “futility”라는 번역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현대인의성경의 “무가치하며”와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구나”라는 번역이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3. “공허한, 텅 빈 > 무의미한” :

    대다수의 번역 성경이 이 해석을 따릅니다.
    개역과 공동번역, 새번역, 쉬운성경 등이 “헛되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가톨릭성경과 우리말성경은 “허무”라고 번역합니다.
    영어 번역의 “vanity”와 “meaningless”가 이에 상응하는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합리적 설명을 강조하는 이성주의(理性主義)와 효용가치를 강조하는 실용주의 및 근대 회의주의(懷疑主義)사상을 모두 겪은 서양인들에게는 위의 세 가지 번역이 다 드러나는 반면, 불교의 공(空)사상에 익숙한 우리는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허(虛)”와 “무(無)”라는 번역이 압도적입니다.


    ‘헤벨’의 원어적 의미

    “이해할 수 없고, 쓸모 없고, 무의미하다”는 번역은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원에서 파생된 의미들입니다.
    ‘헤벨’은 원래 입김이나 수증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시편 62편 9절의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에서 “입김”으로 번역한 단어가 ‘헤벨’입니다.
    추운 날 숨을 내쉬면 하얗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혹은 새벽녘 풀잎에 잠시 맺혔다가 없어지는 아침 이슬이나,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이라는 속성입니다.
    “태고”나 “영원” 등 아주 오랜 시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의 반대 개념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는 구절은 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헤벨’의 속성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헤벨’은 성경 인물의 이름이기도 한데, 과연 누구일까요?
    아벨입니다.

    잠깐 이 땅에 생존해 있다가 형 가인에 의해 죽음을 맞는 그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이름대로 된 것이죠.

    ‘헤벨’을 “이해할 수 없고 쓸모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느냐(value judgment), 아니면 단순히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냐(descriptive)의 차이입니다.
    물론 잠깐 존재했다 없어지는 것을 “덧없다”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현상에 대해 가치(value)를 부여한 것입니다.
    잠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이슬과 안개, 수증기와 입김은 잠깐 눈에 보였다가 사라지지만,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라는 말과 “모든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의미의 차원이 전혀 다른 진술입니다.
    전도서를 이해하기 위해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이 ‘헤벨’을 현상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 ‘헤벨’을 “헛됨”으로 번역해야 할지, 아니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으로 이해할지, 어느 해석이 더 나은 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은 전도서 9장 9절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서 히브리어 ‘헤벨’이 들어간 자리만 공란으로 놓고 보면,

    네 [ 헤벨의 ]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 헤벨의 ]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이 괄호 안에 1) “헛된”과 2) “잠깐 있다 사라지는”이라는 두 개의 형용어 중에 어떤 것을 대입할 때 더 적절한 의미가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헛된 날”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잠시 머물다 갈 이 세상의 짧은 삶 동안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이라고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적절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쓸모 없다면 대체 왜 전도자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토록 길게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다 소용 없고 헛된 것일 뿐일 텐데요.
    헤벨을 “헛되다”로 번역하는 순간, 전도서 전체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전도서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듯 합니다.

    전도서는 이 땅의 삶의 ‘헛됨’을 말하는 지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올람, עוֹלָם)'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은 마치 바람이 스쳐가는 것처럼 아주 짧다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하여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것이며(전 7:2),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우매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는 것입니다(7:4).
    자신의 생명이 언제 끝날 지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미래에 가치를 두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결코 삶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사형대로 끌려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순간 바라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소중히 눈에 담고 싶어했던 것처럼,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모든 찰나의 순간(‘헤벨’)에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순간을 살아라(carpe diem)"라는 전도서의 ‘긍정의 신학’은 바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전 9:9).
    이 지혜는 크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자각하는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를 요청합니다.

    정경성

    구약 성경의 정경 목록에 전도서가 들어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예전부터 제기되어왔다.
    책의 저자인 전도자가 노년에 신앙을 잃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이러한 주장은 힘을 잃지 않고 계속 제기되어올 수 있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 총의를 모으는 것이 얌니야 회의 등 초대 교회의 핵심 주제 중 하나였다. 당시에 찬성측에서 사용한 논거 중 하나는 전도자로 추정되는 솔로몬의 저작이기 때문에 정경으로 둘 권위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논거로는 책의 결말부에서 '신을 두려워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라'는 교훈이 주어지기 때문에 충분히 유익하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정경성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힘을 잃었다.

    위치

    전도서는 캐투빔 중 다섯 메길롯으로 분류된다.
    유대교에서 메길롯간 배열 순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히브리력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아가 - 룻기 - 애가 - 전도서 - 에스더

    중세 시대에 상정한 형성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룻기 - 아가 - 전도서 - 애가 - 에스더

    그러나 고대에는 케투빔에 대한 다른 분류법이 있어서, 전도서는 잠언과 아가 사이에 위치했었다.
    이후 70인역이 번역될 때 이 전통을 따랐고, 현대 기독교의 정경도 이 순서로 배열한다.
    이를 두고 전도서가 잠언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며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고대에 이러한 순서로 배열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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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는 잠언과 이어지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전도서를 기록한 자를 전도자라고 하는데, 전도자란 깨달은 자 또는 지혜자 라고 이해하면 된다.

    잠언은 지혜가 줄 영광을 말하고 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와 명예와 생명을 얻는다(잠언 22:4).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원수와도 평화를 누린다(잠언 16:7).

    그러나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며, 지혜도 헛되고, 지혜가 가져올 영광도 헛되다고 말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 1:18)
    이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하다.
    아는 게 많을 수록 마음이 복잡해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갈 길을 잃고 생동감과 실천력이 약해짐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어른이 될수록 아는 게 많아지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이 알수록 단순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허허실실을 말한 것도 그래서이다.

    서양의 철학자 베르그송단순함(simplicity)을 중시했는데, 그가 말한 단순성은 아무 것도 몰라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면서도 단순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 단순함으로 많은 걸 포용할 수 있다.

    전도서는 지혜도 헛되다고 말하고, 그 지혜가 가져올 영광도 헛되다고 본다.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행복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에게 주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2:26)

    전도자가 모든 것을 헛되게 보는 이유는 누구나 결국 죽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지혜자도 어리석은 자처럼 오래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훗날에는 모두 잊혀지리라.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죽어 없어질 것이니 말이다.”(2:16)

    “인생은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노라. 바람이 불매 모두 사라지고 그 있던 자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노라.”(시편)

    그러나 허무한 중에서도 전도자는 인생의 기쁨과 의미를 찾는다.
    3장 11절부터 13절까지이다.
    13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11절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도달한 의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13절.  먹고 마시고 열심히 일해 이룬 것에서 만족감을 갖는 것. 이것은 일상의 일반적인 기쁨인데, 전도자는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맛있게 잘 먹고 일하고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인생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12절에 나온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없는 줄 알았다.”
    13절이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 또는 자기성취와 관련된 것이라면 12절은 도덕적인 것 곧 남들에게 잘 하고 세상에 유익을 미치는 일이다.

    도덕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차원은 종교이니 11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 수 없게 하셨느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알고 아름답게 된다.
    모든 것이 때가 있으니 때를 잘 맞추어 자기 자리를 지키면 아름답게 된다.
    전도자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때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가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의미는 영원에서 나온다.
    그 영원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뜻인 것 같다.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14) 얼마 전에 예수회 신부가 요즘 예배에 경외심이 없어졌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것은 단지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문제일 것이다.

    경외심은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 위한 전제이니, 그래서 공자도 “신을 경외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고 햇던 것 같다.
    신을 멀리하라는 것은 동양 인문주의의 아버지인 공자의 모습이고, 그러면서도 어떤 우주적 도에 대한 경외심을 지켜야 인간이 자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 같다.
    한대 이후 유학의 수양방법에는 성誠 외에도 경敬이 중시되었고, 주자와 퇴계는 누구보다도 경을 진리도달의 핵심으로 삼았다.

    성서의 전도자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도덕과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먹고 마시고 자기 일에서 만족함을 얻는 일상사가 충만해진다.
    그래서 그런 일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것이다.(2:13).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자기 뿐 아니라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대로로 갈 수 있다.
    살면서 기쁘게 선을 행한다는 말(3:12)이 그 뜻이다.
    자기와 모두를 유익하게 할 줄 아는 게 지혜이니,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지혜를 얻는 길이다.
    그 점에서 전도서는 잠언과 연속성을 갖는다.

    지혜가 많을 수록 근심도 많아진다는 것(1:18)도 지혜를 소유하려고 할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3:7)고 말한다.
    소유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지혜는 근심을 늘리지 않는다.

    1. 표제

    책명은 히브리어로 코헬렛(Qoheleth)인데 전도자란 뜻이다.
    전도서의 논술자는 1:12에서 이 제목을 자기에게 적용시켰다.
    코헬렛은 대개 모임의 “소집자” 또는 그런 모임에서의 공식적인 “연설자,” “설교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코헬렛이란 단어의 여성형과 7:27에서 여성 동사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전도자란 솔로몬과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한 지혜자를 지칭하는 것 같다.
    상징적으로 지혜가 백성들에게 말한다고도 했다(잠 1:20).
    이와같이 코헬렛은 거룩한 지혜와 교통하는 대리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지혜를 의인화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다”(전 12:11)고 말했다.
    12:9에는 “전도자가 지혜로우므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쳤다”고 했다.
    열왕기상 4:32, 33에는 “말했다”(spake)라는 단어가 세번 반복되어 있다.
    이는 기록된 문장이 아니고 모인 무리 앞에서 말씀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의 교훈은 전 시대와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 즉 “큰 회중”(great congregation)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시 22:25; 49:1-4).

    헬라어나 라틴어 제목은 코헬렛을 “전도서”(Ecclesiastes)라고 번역했다.
    그 뜻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코헬렛(Qoheleth)은 히브리어 카할(qahal) - “회중을 모으다”-에서 온 단어인데, 그것의 명사형은 “모임,” 또는 “회중”의 뜻이다.
    헬라어의 경우 “회중”은 “부르다”의 뜻인 동사형 칼레오(kaleo)에서 나온 것이고, “교회”는 명사형인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같이 영어 단어 “성직자”(ecclesiastic) 또는 “성회의”(ecclesiastical)는 에클레시아로부터 따온 단어들이다.

    2. 저자

    오래 전부터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 왕이라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예루살렘왕 다윗의 아들”(전 1:1)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솔로몬의 저자설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틴 루터가 비공식적인 담화 중에 처음으로 솔로몬의 저자설에 관해 의심을 던졌다.

    고대로부터 마틴 루터 시대까지 전도서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저자는 동일인이라는 의견이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문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지적되었다.
    그렇지만, 전도서를 잠언과 아가서와 비교해 볼 때 문체의 차이가 있는 것은 솔로몬의 생애의 말년에 사물에 대한 주제의 차이와 사고 방식의 성숙함으로 인한 차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솔로몬의 첫사랑의 시기에, 잠언은 후기에, 전도서는 그의 노년에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도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현대의 모든 연구가들이 그런 것처럼 솔로몬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어떤 그럴듯한 견해를 가지고도 다른 인물을 저자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견해로 볼 때 전 1:1의 “전도자”는 솔로몬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라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임에 틀림없다.

    전도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B.C. 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B.C. 931-930년에 사망했는데, 만일 그가 저자라고 한다면 기록시기는 그의 사망 직전이 될 것이다.

    히브리 경전의 배열에 있어서 전도서의 위치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경우처럼, 이 책이 경전에 삽입된 연대를 추측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전도서는 “메길롯”(Megilloth)이라는 5권의 기타 “두루마리”에 포함되는데, 아가, 룻,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더의 순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로, 전도서는 히브리 경전이 형성될 때 마지막 5권의 책 중 하나인데, 이들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서등이다.

    이 두 경우에서 전도서는 에스더 바로 앞에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즉, 이 두 책이 거의 동시대에 경전으로 된 것 같다.
    전도서가 경전이 되기 수년 전, 심지어는 수세기 전에 이미 기록되어 읽혀졌을 가능성이 짙다.

    3. 역사적 배경

    전도서의 배경은 이 책 자체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처음 열 한절의 서론 부분 다음에 솔로몬 자신의 간명한 언급이 나오는데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전 1:12)라고 했다.
    히브리어 동사 “나는 되었다”는 완료 시제인데, 솔로몬이 그의 노년에 회중 앞에서 말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바로 그 형태이다.
    그는 왕으로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청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보다는 행복에 관해 자기 자신이 연구한 바를 더 많이 언급했다.

    4. 주제

    솔로몬은 히브리 나라의 다른 왕들에 비해 지혜와 재산이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영구적이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는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하므로,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거룩한 목적을 깨달아야 한다.

    전도자는 인생 행복의 무상함을 생각할 때, 세상에 편만한 불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혜자”는 사회적인 불공평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재난으로 꽉찬 이 세상이 어떤 종류의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
    이 전도자는 자기의 말씀을 끝맺으면서 일련의 실제적인 제안을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들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복종함으로 마지막 심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전도서는 깊은 인생 철학과 인간의 존재 목적, 인생의 임무와 운명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솔로몬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말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불법과 실망, 그리고 세상에 편만한 포학을 하나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의 날은 무시될 수도 없고 무제한으로 연기될 수도 없다.
    비록 불공평한 일들이 잠시동안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본래 징계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분과 궁극적인 행복은 기회를 포착하고 이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활용하기 위해 결심하는 생애,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 것은 선민의 개념이 아니고 코헬렛(전도자)의 지도력 아래 함께 모인 회중의 한 개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중 가운데 있는 논쟁은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따라서 전도서는 혈통적인 이스라엘로부터 영적인 이스라엘로 옮겨가는 적절한 과도기를 마련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그 이름의 뜻은 “평화”이지만 그가 고령이 되기까지는 자기 자신의 생애에서 평화를 찾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마지막 부분, 즉 고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취급하신 방법을 통해서 예시하신 인생 철학의 절정이 기록된 이 부분에, 솔로몬의 설교를 상당히 포함시켰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영광과 능력의 근원을 잃어 버렸을 때 본래의 성향이 이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거룩한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는 저절로 무너지고 자기 신뢰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이성이 점점 더 기분에 지배되므로, 솔로몬의 도덕적인 감수성은 둔해지고, 그의 양심은 마비되고, 그의 판단은 왜곡되었다.
    무신론적 회의와 불신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도덕적인 원칙을 약화시키고 그의 생애를 타락시켜서 결과적으로 완전한 배교에 이르게 되었다.
    수년 동안 그는 파멸로 이끌어 갈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돌이키려는 노력이 헛되므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끝나려고 할 때 드디어 양심은 소생되어 솔로몬은 참된 빛으로 어리석은 행위를 보기 시작하고,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전 4:13)이라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시는 것처럼 자기를 보게 되었다.
    그가 죽을 시간이 가까이 올 때, 자기의 낭비한 생애를 반성하면서 기쁨을 찾을 수가 없었다(전 12:1).
    방종의 결과로 그의 마음과 몸은 이미 쇠약해졌다(전 12:2-5).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멋대로 행한 과거의 발자취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영혼을 순화시키고, 지치고 목이 갈한 그는 세상의 깨어진 물통에서 돌이켜 다시 한번 생명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자 했다.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오랫동안 낭비한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을 기적적으로 되찾지는 못했다.
    “죄로 인해 인간의 모든 기관은 교란되고, 정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패했다”(치료 451).
    그리고 솔로몬의 뉘우침이 “자기가 뿌린 악의 결실을 막지 못했다”(교육 49).
    “그는 죄의 무서운 결과로부터 피할 것이라고 결코 기대할 수 없었다”(부조 78).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자기가 어리석은 행위를 추구함으로 그렇게도 무모하게 내버린 지혜를 어느 정도 회복했었다.
    경험을 통해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한 생애가 허무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선지 76).
    점차적으로 그는 자기 생애의 악함을 깨닫고 자기가 거쳐온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경고의 음성을 높이 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가 낭비한 수년 동안의 역사를 후세대에게 경고의 교훈으로 기록했다.
    전도서는 “그의 어리석음과 회개에 대한 기록”(선지 85)이며,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들을 무가치한 것을 위해 낭비하도록 만든 잘못”(선지 80)에 관한 묘사이다. 그것은 “경고로 가득차 있”고(선지 82), 따라야 할 모본을 영감적으로 기록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엄숙한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가 쾌락과 인기, 재물과 권력을 추구한 사실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하려는 비뚤어진 사고 방식에 대한 솔로몬 자신의 분석이 슬픈 이야기들을 묶는 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반역한 수년 동안의 경험과 논증을 기술한 이 부분들을 성령의 목적과 뜻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말씀들은 그때 그가 실제로 생각하고 행한 것에 대한 영감적인 기록이며, 그 기록은 잘못된 생각과 행위에 대한 진정한 경고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2:17과 4:2과 7:1, 28에 묘사된 인생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본이 되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전 1:17; 2:1, 3, 12). 이와같은 성경절들은 그 문맥에서 억지로 떼내어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기 위해 의도하시지 않은 상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솔로몬이 말하는 교활하고 비뚤어진 논리와 그의 회개에서 나오는 명석한 통찰력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맥을 보면 솔로몬이 그전 생애의 잘못된 논리를 전개하는지, 아니면 그의 회개의 날 동안에 순화된 사상을 피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전 생애의 비뚤어진 사상과 태도의 묘사는 가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즉 “나는 보았다,” “나는 말했다,” “나는 궁구했다,” “나는 만들었다,” “나는 마음을 썼다”등이다(전 1:13-2:26). 반면에 생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결론들은 가끔 “나는 안다” 또는 “내가 보았노라”등으로 소개되었다(전 3:10-14; 5:13, 18 참조). 또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기록은 그전 생애의 사상으로 구분한다(전 1:18; 2:11, 14-20; 4:2, 3; 6:12; 7:1-3, 27, 28; 9:11). 반면에 인생 말년에 사려깊은 판단이 반영된 결론들은 그 논조가 적극적이며(전 5:1, 10; 9:11; 11:1; 12:1) 언급된 원칙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증되었다(전 5:10, 13; 6:7; 8:11; 11:9; 12:7, 13, 14).

    솔로몬은 “지혜”라는 단어를 세상적인 지혜와(전 1:18; 7:12), 참된 지혜(전 7:19; 8:1; 10:1) 양쪽에 모두 사용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쾌락과 어리석은 일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죄악적인 모든 쾌락도 즐기고 동시에 자기의 지혜와 건전한 판단력도 손상시키지 않고 유지하려고 작정했다(전 2:3). 어리석게도 자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했으나(전 2:9) 여러 해가 지나갈 때까지 이 치명적인 자기 기만을 깨닫지 못했으며, 탕자처럼(눅 15:17) 더욱 슬프고 더욱 지혜로운 사람으로 의식을 회복했다(전 7:23). 마치 하와가 자기의 원통함과 비통한 실망을 깨달은 것처럼 죄의 기만성은 그와 같은 것이다(창 3:5-7참조).

    5. 개요

    Ⅰ. 서론: 인생의 헛됨 1:1-11
         1. 세대가 오고 가는 것이 헛되게 보임 1:1-4
         2. 자연의 순환이 끝이 없고 무의미하게 보임 1:5-8
         3. 무슨 “새로운 것”이 있으며 생존에 어떤 위대한 목적이 있는가? 1:9-11

    Ⅱ. 솔로몬의 행복에 대한 질문 1:12-2:26
         1. 지식이 더할수록 실망이 커짐 1:12-18
         2. 쾌락, 환락, 물질적 소유의 헛됨 2:1-11
         3. 죽으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같음 2:12-17
         4. 지혜로운 자는 자기 노력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음 2:18-23
         5. 만족은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2:24-26

    Ⅲ 범사가 기한이 있음 3:1-4:8
         1. 여러가지 인간 활동을 위한 때 3:1-15
         2. 거룩한 심판을 위해 3:16-22
         3. 인간의 불의가 허용된 때 4:1-8

    Ⅳ. 네가지 이상 4:9-5:9
         1. 우정의 가치 4:9-12
         2. 지혜의 가치 4:13-16
         3. 경건의 가치 5:1-7
         4. 공의의 가치 5:8, 9

    Ⅴ. 인생의 헛됨 5:10-6:12
         1. 물질주의의 헛됨 5:10-12
         2.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음 5:13-17
         3. 수고의 헛됨 5:18-6:12

    Ⅵ 생애를 위해 가치있는 것들 7:1-22
         1. 신망과 품성의 형성 7:1-10
         2.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지혜 7:11-14
         3.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 7:15-18
         4. 완전한 것은 없음 7:19-22

    Ⅶ. 지혜를 탐구함 7:23-12:7
         1. 지혜가 주는 실망 7:23-29
         2. 지혜의 모순을 해결함 8:1-15
         3.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8:16-9:6
         4. 생애의 변화 가운데서 만족함 9:7-10:6
         5. 모든 행위와 마땅한 보상 10:7-11:10
         6. 생애의 마지막 12:1-7

    Ⅷ 결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1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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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 1:1-2
    다윗
    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는 무엇이 행복인가, 우리가 사는 인생 가운데 행복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질문하고 답하는 책입니다.
    전통적인 철학적 지혜는 사람의 행복과 성공이 그 사람의 행동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살면, 바르게 살면, 힘을 얻으면,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지식과 지혜도, 부와 권세도, 향락도 모두 누려도 행복하지 않으며, 심지어 바르게 열심히 살아도, 현실에서는 모두 잘되지도 바르게 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 잠깐 행복을 느낄 수 있으나 해 아래 어떤 사람도 지속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죽어서야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합니다. 죽음만이 공평하다고 합니다.

    '전도서'는 앞에만 보면 이게 무슨 성경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허무주의, 염세주의 철학책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인생은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역설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서'는 끝까지 읽어 봐야 그 주제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이 뒤에 있습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며 이루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참가치가 있는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그러면…

    '전도서'의 책 제목은 '디브레 코헬렛'으로 우리말로는 '사람을 불러 모아 말하는 사람', '회중의 스승(12:11)'이란 뜻입니다. 사람을 모아 인생을 가르치고, 참가치를 가르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책 제목을 '전도서' 그러면 너무 딱딱하고 의미도 잘 전달이 안 되니 '솔로몬의 인생론' 정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1장 1절은 이 글의 저자, 또는 배경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며 시작합니다. 다윗의 아들이고, 예루살렘의 왕의 말씀이니 거창하고 희망차고 대단한 말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런데 1장 2절은 뜻밖의 말로 시작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얼마나 헛되면 이 짧은 말에 헛되다는 말을 5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나, 무슨 행복이 있나 오히려 절망감을 줍니다.

    솔로몬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솔로몬은 "무엇이든지 내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고(2:10)" 희락도 즐길 만큼 즐겨 보고, 술도 먹을 만큼 먹고, 사업도 크게 하고, 남녀 종들이나, 각종 금은보화로 부귀도 누리고, 처첩도 많이 두었는데 해 보니 별거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세대는 오가지만 땅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해도 떴다 지고, 바람도 불었던 곳으로 돌아가고, 강물도 바다도 그저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1:8)." 사람의 욕심과 만족은 끝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부강한 때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가장 지혜로운 왕이라는 솔로몬의 고백이니 흘려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듣고 있다 보면 그럼 도대체 희망도, 행복도 없는 인생을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열심히 공부해 지식을 쌓고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지혜롭게 무언가를 세우는 것도 결국 뒤에 사람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 하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두 죽는 것은 매일반이라 냉소합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생은 '고통'이고 그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모든 일상, 속세를 떠나 면벽수도라도 해야 하나 그런 허탈감이 생깁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행복

    그러나 '전도서'는 곳곳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주어진 가정에 감사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가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9)."

    인생을 40살 이상 살다 보면,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목표를 향해, 정의롭게, 성실하게, 꿈을 키우며, 세상이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살아왔지만, 실상 세상 속에 나란 존재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내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요.

    둘째,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중략)…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3:11~12)."

    뭐 거창하고 큰 것 아닙니다. 내 가족, 내 이웃, 내가 늘 만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작은 도움을 주고, 내게 주신 재물과 작은 권력을 통해 작은 선을 나누며 사는 것. 그것에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4:9~10)."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외로울 때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동무, 말동무가 되어 주고, 삶을 조금 거들어 주는 동무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에 조금씩 지지대가 되어 주고, 한 겹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12)."

    넷째,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3:14)."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전도자가 말합니다. 청년이 어리다고 젊다고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이 모든 것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11:9),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12:14)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년의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낙도 없다고 하기 전에 소망도 희망도 없이 절망 가운데 빠져 살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1)"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라(12:13)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누려 본 왕이 '해 아래' 이 땅의 모든 삶에 새것이 없고 헛되지만, '해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삶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기, 권력, 명예 등에 인생을 팔지 말고 인간의 참된 본분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겉으로 볼 때 너무나 평범하고 뻔한 것 같은 삶이지만,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삶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써니'가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 말한다면, 전도서는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그의 심판이 있음을 생각하고, 그의 말씀과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하며 사는 삶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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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아래 인생 - 헛되고 헛되니(1: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왕이 젊은 시절에 아가서를 기록하였고, 장년기에 잠언서를, 그리고 젊은 시절 많은 여인들과 결혼하며 우상숭배를 하였던 죄를 회개하고서 노년기에 전도서를 기록하였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잠언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잠언이라 .

    아가서 1:1
    솔로몬의 아가라.

    전도서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서는 처음부터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우리 인생사용설명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허무함을 읊조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는 전도서에는 인생의 깊은 회의 끝에 하나님을 꼭 붙든 전도자에 대해서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마치 전도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태어난 아주 총명한 자녀가 하나님 없이도 인생의 업적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아도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쓰는 참회록과 같습니다.

    전도서는 모두 12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6장은 ‘해 아래에서의 삶’에 대해 증거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난 삶이고, 그 결과는 허무함인 것을 강조합니다.
    7-12장은 ‘해 위를 구하는 삶’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본문 1-11절은 전도서 전체의 서론입니다.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는 자신을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던 다윗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성 있는 신정왕국의 통치자인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기록한 책이 잠언, 전도서, 아가서인데, 그 중에 잠언과 아가서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솔로몬임을 밝히는 반면에 전도서에서는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에도, 많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고, 우상숭배를 한 지난 삶에 대한 참회의 기록이기 때문에,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의 삶을 아주 적절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직역하면 이러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되, 헛된 것들 중에 헛되구나, 헛된 것들 중에 헛되구나, 모든 것이 헛되구나”입니다. ‘헛된 것들 중에 헛되다’는 ‘헛되다’의 최상급 표현입니다. ‘바보들 중에 바보’가 가장 바보인 것과 비슷합니다.
    이 한 절에 ‘헛되다’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헛되다’는 ‘숨’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약 손등에다 ‘후-’하고 바람을 불면 뭔가 느낌이 잠깐 있었는데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헛됨’은 ‘짧음’과 ‘의미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의 ‘숨’은 언제나 ‘한숨’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살리면 네 번의 한숨을 쉬고, 마지막은 숨을 모아서 다시 크게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은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자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숨과 인간의 숨의 차이입니다.

    또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하나님 없이 하는 수고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150편 중에 솔로몬의 시가 딱 2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27편입니다. 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파수꾼이 성을 최선을 다해서 지킵니다. 자신의 지킴에 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 모두는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 이른 시각부터 늦은 시각까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인생을 열심히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는 인생은 헛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면 살수록, 또 인생을 오래 살면 살수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저절로 고백하게 됩니다.

    (5-8)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자연 현상, 그 중에서도 태양과 바람과 강물의 헛됨을 말합니다. 태양이 새벽에 수평선이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굉장히 웅장한 것 같아도, 이내 저녁이 되면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다음날 아침 또 웅장한 것 같아도 저녁이 되면 또 사라지고 하여, 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이니 그것이 헛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또 바람이 불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고, 특히 세찬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다 날릴 것 같아도 그렇지 못하고,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도 불고, 오늘 불었던 바람이 내일도 불 것이기에 헛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있는 많은 강들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가보지만, 정작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그 엄청나게 넓은 바다 앞에서 강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강물에 입장에서 보면 헛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사람 역시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처음에는 특별한 것이 있는가 생각이 되지만, 나중에 남는 것은 피곤함 밖에 없어 헛되다는 것입니다.

    (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반복됩니다. 인간의 출생과 성장, 성숙, 노화,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동일한 길을 갔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의 사람도, 1000년 후의 사람도, 10000년 후의 사람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동일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해 아래 인생-허무한 인간의 지혜(12-18절)
    12-18절은 허무한 인간의 지혜에 대한 전도자의 설교입니다.
    (13-14)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서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의 수효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들의 재판을 정성을 다해서 감당해야 했기에,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것을 열왕기상 3:12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솔로몬 이전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 지혜가 그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의 백합화 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미천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솔로몬이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그 지혜가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6-18)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그것으로 여러 사람들과 지혜대결을 벌여 진 적이 없었습니다.
    또 그 지혜로 똑똑한 것과 어리석은 것, 지혜로운 것과 얼빠진 것을 구별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는 것 같았고, 그 지혜는 기쁨과 감사보다, 번뇌와 걱정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지혜를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인생은 헛되게 여겨집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가 솔로몬 때였습니다.
    주변국가에서 조공을 바치고, 경제 사정이 얼마나 좋았으면 사람들이 은을 돌처럼 여길 정도였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이 그렇게 목말라하는 시대입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또 직장인들이 모두 가족들이 충분히 사용할 만큼의 봉급을 받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만든 물건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절을 백성들에게 제공했던 사람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며 한 숨을 쉬고 있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왕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세계최고의 부자가 “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진 돈의 무게만큼이나 그 돈으로부터 짓눌림을 당합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그 말은 그 다음날 바로 신문기사화 되고,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부자인줄로만 알았더니 겸손하기까지 하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진 돈의 무게만큼이나 그 돈으로부터 짓눌림을 당합니다”라고 동일하게 말을 하고, 제 옆에 신문기자가 있었다해도 신문에 나는 일을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네가 많은 돈을 가져보기는 했어? 돈이 없으면 말을 하지도 말어”라고 면박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말을 할지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전도서를 통해서 호소하는 사람이 최고의 지혜자이자, 최고의 왕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에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또한 전도서가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우리 역시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힙입지 않고, 세속적 가치관을 힘입어서 떠나서 뭔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태어나서 한 번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 있다면, 또 세상의 것에는 전혀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가 가진 성경에서 전도서를 빼도 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전도서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시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으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힙입지 않고, 세속적 가치관을 힘입으려고 하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헛되고, 한숨이 깊이 쉬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힘입는 것만큼 더 나은 삶이 없다는 것을 중심으로 수용하게 되면, 우리 인생의 전도서는 “의미있고 의미있으며, 의미있고, 의미있으니 모든 것이 의미있도다”로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 매일은 대림절을 넘어 성탄의 빛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